세부 일정: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①코카서스(Caucasus)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캅카스(Kavkaz)’라 부른다.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뻔한 코스와 일정,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아르메니아(Armenia) :인구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구소련의 해체로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③에치미아진(Etchmiadzin) :예레반에서 서쪽으로2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종교도시.공식 지명은 파르티아 제국의 바가르시1세(117-140)가 붙여준‘바가르샤파트(Vagharshapat)’라고 한다.예레반이 아르메니아의 행정 수도라면,에치미아진은 아르메니아의 종교적 수도로 알려진다.아르메니아정교회의 총본산인 에치미아진 성당을 비롯해 성 흐립시메(St. Hripsime)·성 가야네(St. Gayane)·쇼하카트(Shoghakat)교회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성당이4개나 이곳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근처의 기둥만 남은 즈바르노츠(Zvartnots)성당(유적)도 문화유산에 함께 등재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에치미아진 대성당’.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는 뜻을 지닌 도시 에치미아진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학자들 사이에서 이곳을 아르메니아 왕국에서 지은 첫 번째 대성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으로 여기기 때문이다.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 병사의 사모창과 노아의 방주에서 떼어 왔다는 돌판 위의 십자가도 소장돼 있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세반호수(세반 수도원),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2001년에 만들었다는 정문의 위,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두 인물이 손을 내밀고 있다.아르메니아의 수호성인인 계몽자 성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이하‘그레고르’)가 기독교를 공인한 티리다테스3세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이라고 한다.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이가‘성 그리고르’이며,이를 공인한 국왕이‘티리다테스3세’이다.
▼뒤돌아 본 정문.뒷면에도 부조가 되어 있었다.햇빛을 등지고 있는 탓에 잘 타나나지 않지만 두 사람이 창과 칼을 각각 들고 있다. 1세기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하다 순교한 타데우스(창)와 바르톨로메우스(칼)라고 한다.
▼정문의 성화.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님이 뭔가를 축복해주는 모양새이다.성모님의 손이 향하는 곳에‘아라라트 산’과‘에치미아진 대성당’을 위시한 성당들,포도,경전 등을 배치해놓은 것으로 보아, ‘아르메니아’를 싸잡아 축복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똑바로 길이 나있다.그 끝에 높다란 돔이 우뚝한 성당 건물이 나타난다.가는 길 왼쪽으로는 최근에 세워진 필사본 도서관이 있고,오른쪽으로는1874년에 세워진 고보르키안(Govorkian)신학대학이 있다.그리고 길가로 하츠카르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다.
▼성당으로 가는 길.왼쪽 저 멀리 담장 너머로 또 다른 교회가 얼굴을 내민다.에치미아진 성당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3개의 교회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에치미아진은 일종의 교회‘콤플렉스’다.주교좌인‘성모교회’를 위시해‘세례 요한교회’,대주교관,사제관,출판인쇄소,필사본도서관,신학대학 등 다양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성모교회)은301년에서303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했다.티리다테스3세의 명을 받은 성 그레고르가 당시 왕궁 인근에 있던 조로아스터교 신전 위에 세웠단다.하지만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던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성당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483년부터 다음 해까지 현재와 비슷한 사각형으로 재건되었다고 전해진다.중앙의 돔을 가운데 두고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모양새이다.
▼돔은12각 원당형으로 올라가다 원뿔형 꼭지점으로 수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그리고12각 하단부에는 창문을 내고,상단부에는 원 안에12사도(또는 성인)로 추정되는 조각을 새겨 넣었다.북쪽 벽에는4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도 바울과 성녀 테클라(Thekla)의 부조도 있다고 하나,확인해보지는 못했다.
▼정면에서 바라본 성당.종탑에 가려 돔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사각의 성당은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했다.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로마네스크 양식도 찾아볼 수 있단다.
▼종탑.십자가를 든 예수 그리스도상이 있다.십자가의 모양으로 봐서1500년대 나타난 로랭(Lorraine)의 십자가로 여겨진단다.
▼성당의 파사드(facade).내부 수리중이라서 안은 들어가 볼 수 없었다.대신 파사드의 장식과 부조를 살펴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한다.그런데 이슬람 사원을 보는 듯한 이 느낌은 대체 뭘까?아라베스크 문양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꽃과 새,당초문과 격자문 문양도 보인다.
▼이슬람 사원이 아니라는 것은 저 문양이 확인해준다.사람의 얼굴이 들어간...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같은 콤플렉스 안에 있는 다른 성당에서 찾아보기로 했다.마침맞게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작은 성당이 위치하고 있었다.하나 더.탑처럼 생긴 저 하치카르는 무슬림에 의해 제노사이드로 희생당한 아르메니아 인을 추모하기 위해1965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일종의 추모비인 셈인데, ‘R. Israelyan’이 현무암으로 만들었단다.
▼주교관의 문이 열리면서 긴 행렬이 나타났다.깃발을 앞세우고50명도 더 되는 수도사들이 줄지어 걸어 나오는데,그중에는 총주교로 보이는 인물도 들어있었다.이들은 정문 밖으로 나가 어딘가로 향했는데,뭔가 중요한 의식이라도 있었나 보다.
▼박물관의 내부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미리 예약한 사람들만 입장이 가능하다는데,여행사 일정에 내부관람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에치미아진 대성당의 백미는 대성당 및 박물관의 내부 관람이라고 했다.그런데도 둘 모두를 보여 주지 않으려면 구태여 이곳까지 찾아올 이유가 있었을까?여행사의 마땅찮은 일정에 아쉬움을 토로해본다.
▼입구에(롱기누스)창 등 유물과 성화들이 그려져 있었다.이들을 담은 앨범과 기념품을 팔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중요 유물 몇 점은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게시해본다.박물관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왕관,채색된 책(illuminated manuscripts),행렬용 십자가 등 눈이 휘둥그레지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했다.그중에서도 관람객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집중시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있을 때,옆구리를 찌른 창이라고 한다.금박 상자에 보관된 이 성스러운 창(Holy Lance)은‘게하르트 수도원’에서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란다.코카서스가 기독교의 성지라는 걸 알려주는 퍼포먼스라고나 할까?조지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입고 있던 옷자락을,반면에 이곳 아르메니아는 당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노아의 방주에서 떼어온 돌판(나뭇조각 화석)위에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십자가를 덧씌웠다고 한다.여기서 전설 하나. 4세기 경,아르메니아의 수도사 한 사람이 아라라트 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한다.그때 한 천사가 나타나 말하기를‘잠에서 깨어나시오.당신의 손 위에 나뭇조각이 있을 것이요.이것은 노아의 방주에서 떼어낸 것이라오.’라고 했다.수도사가 잠에서 깨어보니 진짜로 나뭇조각(화석)이 놓여 있더라나?
▼아르메니아가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게 했던‘성 그레고르’의 손 부분이 보관되어 있는‘성물함’이란다.손가락 모양이 특이한데,엄지와 약지를 마주하게 하여 원을 그린다.동방정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이때 나머지 펴진 세 개의 손가락은 삼위일체(성부·성자·성령)를 나타낸단다.
▼이곳에서도 다양한‘하츠카르(Khachkar)’를 만날 수 있었다.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각각 다르다.이렇듯 하츠카르는 사람들의 기도를 실질적으로 가시화시켜 놓은 징표가 될 수도 있고,마을의 이정표나 기념비가 되기도 한다.
▼하츠카르의 역사는1천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하지만 이렇게 최근에 세워진 것들도 심심찮게 만난다.참고로 하치카르가 처음 아르메니아에 등장한 것은9세기경이라고 했다.외세에 시달리는 나라가 평안해지기를 기원하며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정을 쪼아가며 기도하듯 만들었단다.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879년에 만든 하치카르가 가장 오래되었고,현재 전국에 약4만여 개의 하치카르가 있으며,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단다.
▼하츠카르는 돌을 십자가 모양으로 깎아 만든다.십자가 모양이 새겨진 비석이나 기념비로 사용되기도 한다.요것은 분수 노릇까지 겸하고 있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을 처삼촌 벌초하듯이 둘러본 다음, 3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즈바르츠노츠(Zvartnots)’로 왔다.이곳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에치미아진의 교회와 성당,즈바르트노츠의 고고 유적지(Cathedral and Churches of Echmiatsin and the Archaeological Site of Zvartnots)’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즈바르노츠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길.길섶에 여러 종류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었다.즈바르노츠 유적(Zvartnots Historical-cultural monument)에 대한 설명과 사원단지의 복원공사(Restorative works of Zvartnots Temple complex)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그중에서도 북경(중국)천단공원의‘기년전(祈年殿)’을 연상시키는 성당 조감도가 가장 눈길을 끈다.
▼성당은 현재 폐허가 된 채 기둥만 남아있다.하지만 이곳은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인 성스러운 장소로 전해진다. 301년 티리다테스3세가 성 그레고르와 만나 기독교를 공인한 장소라는 것이다.그게 즐거운 역사였다면서 아르메니아어로 기쁨(Joyfulness)또는 환희의 장소라는 뜻의‘즈바르트노츠(Zvartnots)’라 이름 지었다.
▼그런 성스러운 장소에650년에서659년 사이,네르세스(Nerses) 3세 주교에 의해 성당이 만들어진다.하지만10세기에 이르러 지진(또는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고 한다.그러다1900년대 초에서야 발굴이 시작되었고, 1905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기둥과 벽 일부만 남은 유적은 성당이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없애버린다.둥그렇게 늘어선 기둥들이 오히려 그리스 신전 같은 느낌을 준다.기둥의 양식이 이오니아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성당 내부는 동서남북 사방에 반원형의 경당을 만들고,안쪽으로 사각형의 예배와 기도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그 중 북쪽 경당 앞쪽으로 제단을 만들어 주벽으로 삼았을 것이다.
▼성당 주변은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벽에 새겼던 일부 조각들도 확인된다.석류,포도와 포도잎,독수리,사람과 동물 부조가 눈에 띈다.
▼벽면만 남은 건물지도 보인다.사제관 등 성당의 부속건물들일 것이다.
▼독립된 돌로 만들어진 해시계도 눈에 띈다.네모난 돌 하단에는 눈금과12개의 동심원이,상단에는 아르메니아어 표기가 있다.
▼기둥머리(柱頭)에 새겨진 독수리 문양.이들은 두 개가 약간의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다.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데,머리 모양으로 봐서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도록 만들어놓았지 않았을까 싶다.
▼성당 터를 지나면 길은 자연스럽게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1990년대 초 이곳에서 발굴된 자료를 보관하는 장소로 처음 만들어졌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기 위해 전시물의 보완이 있었고, 2012년 역사문화박물관 겸 유물창고로 확장되었다.
▼박물관은 고고학 전시실,역사전시실,성당 건축전시실 등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내부의 전시 상황은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추려서 옮겨본다.
▼고고학 전시실은 성당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도기와 자기 그리고 청동기와 철기 등이 보인다.도기로는 크베브리와 흑갈색 토기가 눈에 띈다.백색과 흑색이 섞인 도기도 보인다.청동검과 철제 마구로 여겨지는 물건도 있다.
▼읽기 삼매경인 아르메니아 정교회 사제. ‘즈바르노츠 사적지’가 품은 역사가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역사전시실은 패널을 활용하고 있었다.아르메니아 성당의 역사를 사진 중심으로 설명해준다.
▼성당의 역사와 건축을 보여주는 전시실이 가장 중요하고 내용도 풍성한 편이다.
▼원래 모습을 가상해 만들어 놓은 성당 미니어처.원형으로 되어 있어 바실리카 양식이 보통인 성당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3층의 원통형 건물로 되어 있고 위로 올라가면서 지름이 줄어드는 형태를 취한다.
▼미니어처는 내부를 볼 수 있게 가운데를 잘라 양쪽으로 떼어 놓았다.이를 통해 원통형으로 보이지만,정확히32면으로 이루어진 원당형임을 알 수 있다. 1층은 벽을 하단과 상단으로 구분해,하단에는32개의 아치형 창을,상단에는 원형의 광창(光窓)을 만들었다.출입문은 모두8개로 되어 있다. 1층 원당의 지름은37.75m라고 한다.
♧ 아르메니아 여행을 마치면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아르메니아를 위험지역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2020년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이 있었고,최근에도 두 나라간의 다툼이 심심찮게 기사로 뜨기 때문이다.물론 두 나라는 전쟁이 끝난 지금도 앙숙이다.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와도 사이가 나쁘다.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제국이 터키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을 사막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100만 명 이상 희생됐기 때문이다.하지만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크게 걱정할 게 없다.다만 두 나라를 직접 왕래할 수는 없고,조지아라는 제3국을 경유해야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세부 일정: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①코카서스(Caucasus)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캅카스(Kavkaz)’라 부른다.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뻔한 코스와 일정,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아르메니아(Armenia) :인구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구소련의 해체로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③예레반(Yerevan) :아르메니아의 수도로 인간이 살아온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하지만 러시아 건축가‘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yan)’이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 지배하에 있을 때 설계한 계획도시이기도 하다.포인트는‘공화국 광장’에서‘자유 광장’을 거쳐‘캐스케이드’에 이르는 구간으로,거리 전체가 신고전주의풍 건물들로 장식되어 있어 마치 파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여행객들이 잃어버린 예레반을 낭만을 되찾아줄 것만 같은 분홍색 빛을 띤 도시라며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캐스케이드에서 바라본 예레반 시가지.시가지 너머로‘아라라트 산’의 위용이 선명하다.아르메니아인들이 자신들의 태생과 역사가 시작했다고 믿는 민족의 성산으로,아라라트가 자리 잡은 아나톨리아 평원의 동쪽은 오랫동안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하지만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던 저 영산은1920년 튀르키예의 영토로 변했고,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한창이던1993년 터키가 경제봉쇄와 함께 국경까지 폐쇄한 후 더욱 멀어졌다.(날씨 탓인지 아라라트 산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아, ‘나무위키’에서 사진을 빌려왔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세반호수(세반 수도원),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예레반은 격자형 가로망을 원형 순환로가 감싸는 형태의 계획도시다.그래선지 눈요깃거리들은 예레반 중심부에 모두 몰려있다.
▼차에서 내리니 낯선 문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뜻은 고사하고 읽기조차 불가능한.다른 낯선 나라에 발을 디뎠음을 눈이 가장먼저 알아차린 셈이다.담벼락을 장식하고 있는 저 문자들은‘아르메니아 알파벳’이라고 했다.하지만 이방인이 인식하기에는 너무 낯설다.아래 오른쪽에 러시아어와 영어로 발음이 적혀 있는 것 같은데,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다.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창제 문자를 가진 뿌리 깊은 문화국가라고 했다.문자가 만들어진 것은405년,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성직자‘마슈토츠(Mesrop Mashtots)’에 의해서다.브람샤푸(Vramshapuh)왕과 사학(Sahak)대주교의 지원을 받아36자의 아르메니아 알파벳을 만들어냈는데,이는 아르메니아 문학의 시작을 의미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또한 언어를 통한 민족 통합과 종교적 일체감을 갖는 일이 가능해졌다.
▼어찌 보면‘한글을 닮은 것 같기도 한데...아무튼‘마슈토츠’가 최초로 옮겼다는 솔로몬의‘잠언서’첫 문장은 대충 이렇다. <이것은 지혜와 가르침을 인식하도록 하고 위대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을 알게 한다(Ճանաչել զիմաստութիւն եւ զխրատ,իմանալ զբանս հանճարոյ)>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고문서박물관(Matena daran)’을 찾아보라고 했다(하지만 시간이 없어 다녀오지는 못하고,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게시한다).안에는1만7천여 점의 필사본과10만권이 넘는 고문서가 보존·전시되어 있다고 한다.아르메니아 고대·중세 시대의 필사본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필사본도 있단다.그중 가장 큰 필사본은‘무슈의 설교집’으로 크기가 가로55.3cm에 세로가70.5cm나 되며 무게는27.5kg이라고 한다.필사본 중 가장 작은 것은1434년도에 제작된 교회 달력으로 가로3cm에 세로가4cm인데,무게는19g에 불과하단다.
▼캐스케이드로 가는 길.해외 유명 브랜드숍과 유럽풍 분위기의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이다.예레반은 이런 길들이 광장과 광장을 연결해준다.
▼벽에 붙은 명패가 눈길을 끌기에 사진부터 찍고 본다.귀국해서 알아보니‘아라 사르그샨(Ara Sargsyan, 1902-1969)’이었다.아르메니아 출신의 걸출한 조각가로.라피크 카차트리안(1937-1993)과 같은 수많은 아르메니아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데,그의 생가(명패에는‘1945-1959’로 적혀있다)였던 모양이다.이사하키안 거리에 있는 그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개조해놓았다니 말이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예레반 관광의 하이라이트인‘캐스케이드(Cascade Complex)’에 이른다.예레반의 북쪽 언덕과 도심을 연결시키고 했던‘알렉산더 타마니안’이 구상한 계단형 구조물이다.하지만 착공되지 못하고 설계도로만 남아 있던 것을1970년대 말 예레반의 도시계획위원회 위원장‘짐 토로스얀’이 부활시켰다.타마니안의 원안을 기초로 내부에 공간들을 만들어 연결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으며 전면에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예술품들로 치장한 정원이 추가되었다.그러나1988년 대지진과1991년 독립,전쟁 등으로 중단되었고, 2002년에야 아르메니아 출신 디아스포라의 후손이자 미국의 사업가인‘카페스지안’이 재산을 출연해2009년 미술관으로 마침내 문을 열었다.
▼‘캐스케이드’의 초입.캐스케이드를 설계한‘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ian, 1878-1936)’이 예레반의 도면을 살펴보고 있다.러시아 출신인 그는 러시아에서 건축가로서의 명성이 정점을 향하던 마흔다섯에 아르메니아로 이주해 이후 반생을 보냈고 또 예레반에서 숨을 거두어 아르메니아의 건축가로 남았다.그는 예레반의 오페라하우스,공화국 광장과 주변의 건물 등을 설계하는 등 아르메니아의 건축사와 도시사에 일획을 그었다.
▼캐스케이드는 외부의 카페지안 조각공원과 내부의 미술관(art gallery)으로 이루어져 있다.둘 모두 예술작품들로 꾸며졌는데,조각공원에 조금 더 큰 조각품들이50m폭의 녹지와 보행로를 따라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콜롬비아 작가‘보테로(Fernando Botero)’가 만들었다는 둥글둥글 오동통통한 여인이 인상적이다.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것이 담배를 피우는 여인에 대한 뭔가를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바로 위에 게시된‘로마 전사(Roman warrior)’도 보테로의 작품이라고 한다.
▼영국작가‘구하(Saraj Guha)’는 도약하는 임팔라를 만들었다.한 마리의 임팔라가 도약하는 모습을 네 개 장면으로 보여준다.
▼한국 예술가‘지용호’가 만든 정크아트 사자도 전시되어 있었다.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으로 역동성과 용맹성이 두드러진다. 2008년 작품으로 스텐레스와 타이어를 활용해 만들었다.
▼그밖에도 포르투갈 출신의‘바스콘셀로스(Joana Basconcelos)’,중국작가 위민준(Yue Minjun),미국 작가 워이툭(Peter Woytuk)등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출품한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 작품들을 눈에 담다보면 어느덧‘캐스케이드’앞에 이르게 된다.언덕을 향해 놓인 계단식 정원으로, 572개의 대리석 계단을6개 층으로 나누고 각 층마다 물이 흐르는 수직적 정원을 들어앉혔다.작고 아름다운 분수(폭포)와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음은 물론이다.캐스케이드를 둘러보는 방법은 두 가지다.밖에 놓인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기본,그게 힘들다면 내부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면 된다.이 또한5개 층으로 나뉘어져 있으니 층이 바뀔 때마다 밖으로 나가 야외정원을 살펴보면 된다.
▼내부는5개 층의 테라스 공간을 만들고 에스컬레이터로 각층을 연결했다.여기에 기부자의 이름 딴‘카페스지안 아트센터’를 들어앉혔다.경사면과 각층의 평면에 흙·유리·금속·목재·폴리우레탄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공예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영국작가‘크리스티(Maylee Christie)’가 만든 거대한 저 난(蘭)은 유리와 도자기로 만들었다고 한다.그런데도 천처럼 느껴지는 것은 색상과 문양이 동양적이어서가 아닐까 싶다.이곳에서는 유리로 만든 보라색 초롱꽃과 쇠로 만든 나비와 꽃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목공예품 의자도 보이는데,예술이라기보다는 생활용품에 가깝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자동차도 한 대 놓여 있었다.
▼‘Khanjyan Hall’은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다기에 입구의 그림만 찍어왔다. ‘Gregor Khanjyan(1926-2000)’가 그렸다는데,아르메니아인들의 삶,투쟁,역사를 담았다고 한다.그림에는 아르메니아의 역사적 인물들 얼굴이 수십 명 그려져 있다고 했다.
▼밖으로 나오면 작은 공원을 만난다.벽면에서 물이 떨어지는 인공폭포(분수로 볼 수도 있겠다)와 마름모꼴의 연못으로 이루어진 앙증맞은 공간은 각종 조각품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예레반 시가지를 눈에 담아보는 즐거움은 덤이다. 1층과2층에서는 조각공원과 오페라하우스를 눈앞까지 끌어당겨 볼 수 있다.
▼야외 공원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안성맞춤인 모양이다.
▼예레반 풍경은 층마다 다르게 나타난다.고도를 높인 만큼 시야도 역시 넓어지기 때문이다.
▼5층 분수대에는‘마틴(David Martin)’의 다이버들이 놀고 있었다.이들은 물에 뛰어들기 직전 몸의 균형을 잡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참! 2층에서는 영국작가‘브로이어-웨일(David Breuer-Weil)’의 방문객(visitor)도 만날 수 있었다.물속에 잠겨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청동으로 표현했다.
▼에스컬레이터는5층까지만 운행한다.그러므로 맨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그렇게6층으로 올라서자‘소비에트 아르메니아50주년 전승기념탑’이 반긴다.아르메니아의 소비에트 시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아르메니아는 주변국인 터어키와 아제르바이잔과는 적대관계이고,러시아와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나라이다.그래선지1991년 소련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했지만,저런 조형물까지 세워가며 우호를 과시하고 있다. 1945년에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했으니50주년이면1995년이 된다.이 탑이 가지는 의미와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6층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 그 자체다.예레반 시가지가 가장 넓어진 모습으로 펼쳐지는가 하면,저 멀리 아라라트 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운이라도 좋으면 신기루처럼 다가온‘아라라트 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단다.
▼캐스케이드는 현재진행형인 모양이다.맨 위쪽(6층)뒤에 철근을 드러낸 채로 멈춰있는 공사장이 눈에 띈다.맞다.캐스케이드를 조금 더 확대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했다.하지만 경제적인 문제와 예술작품 수집·기증에 어려움이 있어 사업이 진척되지 않고 있단다.
▼전승기념탑으로 가려면 공사장을 에둘러 내놓은 통로를 따라가야 한다.이어서 경사진 도로를 한참이나 더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이쯤에서 캐스케이드를 내려가기로 한 이유다.그보다는 예레반 시가지를 조금 더 걸어보는 게 낫지 않겠는가.
▼자유 시간을 이용해 시내 중심가를 걸어보기로 했다.예레반은 격자형 가로망을 원형 순환로가 감싸는 형태의 계획도시라고 했다.그래선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직각의 널찍한 도로가 인상적이다.이 도시계획은‘알렉산더 타마니안’이 담당했다고 한다.러시아 출신이나 아르메니아에 귀화한 그는 정부청사와 오페라하우스 등을 설계해 국민 건축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첫 만남은‘놀이동산’.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다양한 놀이기구들을 갖췄다.하지만주인인 어린이들 대신 데이트 중인 어른들만 눈에 띌 따름이다.
▼옆에는 인공호수도 만들어놓았다.오리배도 여러 척 띄어놓았으나 움직임은 없었다.그저 어른들 몇 무리가 맥주잔을 앞에 놓고 담소를 즐기고 있을 따름이다.근처 레스토랑에서 호숫가를 라운지로 삼은 모양이다.
▼거리 곳곳에 고급스런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길거리에 의자를 내어놓은 야외카페가 있는가하면 실내를 개방해서 카페로 꾸민 곳도 많았다.
▼예레반도 교통체증이 심한가 보다.신호를 기다리는 차량들이 끝없이 늘어섰는데,그 뒤에서‘아르메니아 어머니상’이 얼굴을 내민다.원래 저곳에는 스탈린의 동상이 있었는데,아르메니아 병사들에 의해 파괴되고 그 자리에 받침대 포함52m의 거대한 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어머니상까지 다녀오지는 못하고,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올려본다.어머니상은 칼집에서 칼을 빼는 듯 넣는 듯 거대한 칼을 들고 도시 너머 터키국경을 노려보고 있다.터키와의 아픈 역사로 지금은 평화시기이지만 언제라도 칼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시가지 풍경.건물들 대부분이 약간 어두운 핑크빛을 띤다. ‘알렉산더 타마니안’이 설계한 건물들은 저보다 더 확실한 핑크빛을 띠고 있었다.대부분이 응회암(凝灰巖)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이 석재는 화산이 분출할 때 재와 모래가 엉겨서 굳어진 돌로 연한 분홍색이다.그래서 사람들은 예레반을 가리켜‘핑크도시’라고 부른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백조의 호수(Swan Lake)’라는 인공호수가 잠시 쉬었다가란다.자그마한 호수인데 깨끗하게 물관리가 되어있고,물가에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의‘아르노 바바자니얀(Arno Babajanyan)’의 동상까지 세워놓았다.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호수 앞 도로를 건너면 보행자 전용 거리인‘Tashir Street’로 연결된다.하지만 이즈음 우린 방향을 잃어버렸고,우여곡절 끝에‘Grand Hotel’을 찾아냈다.중세 유럽풍의 외관을 지닌 이 호텔은‘골든 튜립상’을 여러 번 받았을 정도로 명성이 높단다.호텔 앞에 있는 근린공원풍의‘샤를 아즈나부르 광장(Charles Aznavour Square)’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작은 분수에 조형물들까지 설치해 놓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광장의 분수였다.쉽게 볼 수 없는‘Zodiac Sign’을 형상화 한 조형물들을 빙 둘러 세워놓았기 때문이다.참고로 우리나라의 띠처럼 서양 사람들은12가지의 별자리(양자리,황소자리,쌍둥이자리 등)에 생일을 대비해 운세를 본다.
▼분수쇼가 펼쳐진다는‘공화국 광장’으로 간다.주민들에게 물어물어 가는데,하나같이 친절하게 가르쳐줘서 별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요 삼부자도 그 친절한 시민들 중 하나다.이렇듯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방인을 위해 기꺼이 손길을 내민다.국민소득이 낮은 국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문화적 품격이 돋보인다고 할까?무엇을 흉내 낸 가벼움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만의 자연스러움과 자존감이 스며있다.그래서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에 다시 가고 싶어 하고,예레반을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공화국 광장’에 이르니 식수대가 반긴다.맑은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데 지나다니는 시민들이 스스럼없이 물을 마신다.맞다. ‘아자트 계곡 주상절리’에서도 얘기했듯이 아르메니아에서는 마음 놓고 물을 마셔도 된다고 했다.
▼예레반 투어의 귀결은‘공화국 광장’.이곳에 광장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1920년대‘알렉산더 타마니안’에 의해서다. 1940년부터 레닌광장으로 불렸고, 1942년 광장 주변에 정부청사가 들어서기 시작해, 1950년대에는 네오클래식 건물들이 사방을 꽉 채우게 된다.광장 북쪽으로 국립미술관 및 역사박물관,북동쪽 방향으로는 국토관리부와 정부청사,남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중앙우체국,북서쪽으로는 외무성 건물과 에너지 및 천연자원 공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1990년 레닌광장에서 공화국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1년 아르메니아공화국 설립 후 행정부 건물에 대한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공화국광장은 무엇보다 주변의 붉은빛 건물이 인상적이다.정열적인 붉은빛이 아니고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붉은빛이다.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이 건물들은 모두 현무암으로 된 기반 위에 다공질 탄산석회의 침전물인 붉은빛의 아르메니아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국립미술관과 역사박물관이라고 했다.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아르메니아 미술품4만 점을 보유하고 있으며,그중 가치 있는 것들을56개 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단다.또한 아르메니아 최대 국립박물관인 역사박물관은 고고학,인류학,화폐,현대사 관련 유물들을 보유 전시하고 있다.
▼광장의 자랑거리는‘음악분수’이다.야간에 조명을 하고 클래식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춘다.우리 부부 역시 이 쇼를 보려고 찾아왔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밤9시부터 펼쳐지는 분수쇼를 보기 위해 예레반 시민들과 관광객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분수쇼는 유럽의 클래식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추는 형식으로 진행된다.프랑스 국제수상쇼(Aquatique Show International)회사의 제작으로2007년부터 운영되고 있는데,기계·전기·수리 공학적 토대 위에 물 분사,빛 발사,음악연주가 결합된 멀티미디어 분수이다.
▼음악성,예술성,오락성을 갖춘 분수로도 유명하다.현재는 컴퓨터 공학을 활용해 물과 빛 그리고 음악과 춤이 자동으로 결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단다.
▼시간이 없어 가보지는 못했으나,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하는 곳으로 꼽히는2곳은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게시해본다.먼저‘아르메니아 대학살 기념탑’이다.이왕에 왔으니 이 나라의 아픈 상처도 한번쯤은 보듬어봐야 하지 않겠는가.터키인들이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이 사건은,제1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했다. 1915년4월24일, 250여 명의 아르메니아인 지도자를 체포하여앙카라로 연행한 후사형을 집행하였다.이를 필두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진행되었는데,이때 희생된 희생자 수가최소80만 명에서150만 명으로 추산된단다. 이 참화는1973년 유엔에 의해‘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규정됐다.제노사이드 때 학살을 피한 난민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교포)를 형성했다.현재 해외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80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 인구보다 많다.
▼다른 하나는‘아라라트사’에서 운영하는 꼬냑박물관이다.꼬냑은 프랑스 꼬냑(Cognac)지방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증류하여 만든 브랜디의 일종으로 꼬냑 지역에서 생산된 술에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하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다.바로 아르메니아‘아라라트 꼬냑’이다. 199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브랜디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고,워낙 맛이 뛰어나 프랑스 꼬냑협회의 승인을 받아 유일하게‘꼬냑’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고 한다.그러니 한번쯤 들러 맛이라도 봐야지 않겠는가.하지만 이를 시행에 옮기지 못한 난 면세점에 들러 선물용으로 세 병을 챙겨왔다.이중 한 병은 여행 중 마셨음은 물론이다.
▼아르메니아 여행 중 머물렀던‘Ani Central Inn’.근처에 지하철역과 대형 쇼핑센터 타시르(Tashir)가 있고 예레반의 중심인 공화국 광장까지 걸어서10분이 채 안될 정도로 시내 중심에 있는 호텔이다.덕분에 저녁 식사 후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이른 새벽,아침 입맛도 돋울 겸해서 근처 시가지를 둘러봤다.이른 아침부터 활기에 넘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편의점조차도 문이 닫혀있어 전체적으로 한적한 풍경을 보여준다.빵집이 유일하게 문을 열고 있었다고나 할까?참!아르메니아의 빵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으니 여기서는 음식 전반에 대해 살펴보자.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음식에서도 라이벌이다.사실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은 조지아다. KBS음식 다큐멘터리‘요리 인류’에서도 소개된바 있다.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아르메니아 음식이 조지아 음식보다 더 입에 맞는 편이다.특히 간이 한국인 입맛에 맞는다.고기를 익힐 때도 그렇다.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모두 샤슬릭 스타일의 돼지고기 꼬치구이가 유명한데 조지아식은 살코기 위주라 좀 퍽퍽하다.반면 아르메니아는 꼬들꼬들한 식감을 살리고 비계 부위를 중시해 한국인에게 친숙하다.
특징:밀양시에서 조성한 둘레길로 행정안전부의‘친환경 걷는 녹색 길 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아2013년 조성됐다.밀양 도심과 인근에 산재한 역사문화 유적지가 하나로 연결돼 있어,밀양의 옛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걸을 수 있는 도심 속 친환경 산책로이다.
▼트레킹 들머리는 밀양역(경남 밀양시 가곡동)
중앙고속도로 남밀양IC에서 내려와25번 국도(밀양대로)를 타고 밀양시내로3km쯤 들어오면‘예림교’를 건너게 되고,곧이어‘밀양역’에 이르게 된다.
▼순환에 가까운 별개의3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1코스(6.2km :읍성-삼문송림-영남루), 2코스(4.2km :향교-시립박물관-추화산성), 3코스(5.6km :용두목-금시당-월연정)를 따로따로 돌 수도 있고,아래 지도처럼‘용두교’에서 시작해 연결해가며 걸어볼 수도 있다.
▼밀양트레일 도보여행을 위해‘밀양역’부터 들른다.밀양역 앞‘밀양종합관광안내소’에서 스탬프 북을 받아7개 포스트에 비치된 도장을 찍어 제출하면 완주 메달과 인증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증이벤트 참여도 가능하단다.코스 내 스탬프보관함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필수 해시태그와 함께SNS에 게시 후 네이버 폼을 작성하면,추첨을 통해 매달50여 명에게‘아라리쌀’등2만원 상당의 상품을 지급한다.단,밀양시민은 완주하더라도 선거법 제112조에 따라 메달과 인증서 등 기념품을 받을 수 없고, SNS인증이벤트에 당첨돼도 상품을 받을 수 없다.
▼실제 출발지인‘용두교유원지’.가곡동과 삼문동을 잇는‘용두교’아래 화장실까지 갖춘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11 : 40. ‘밀양강’둔치를 따라 동진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밀양아리랑길의3개 코스 중에서‘3코스’에서 시작한다고 보면 되겠다.
▼참!길을 나서기 전에 안내도부터 살펴보도록 하자.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하나라도 더 많이 가슴에 담고 싶다면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11 : 45 :첫 만남은‘징검다리’.밀양강에 놓인 저 징검다리(상판을 덮었으니‘잠수교’로 분류하는 게 옳을 것이다)를 건너면1코스로 연결된다.
▼계속해서3코스를 따르기로 했다. ‘스탬프 북’에 적힌7개의 포인트 가운데 두 번째 포스트(첫 번째 도장은 밀양역의 관광안내소에 있다)인‘용두보’가3코스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도장을 찍을 칸도3코스→2코스→1코스 순으로 배열해 놓았다. 1코스부터 시작할 경우 자칫 길이 헷갈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11 : 47.밀양강철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간다.밀양강철교는‘개량공사’가 한창이었다.두 개의 철교(경부선 상하선인 듯)사이에 새로운 다리를 놓는데,공사가 끝나면 옛 다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참고로1904년 일본 강점기 때 만든 저 다리에는 아픈 사연이 서려있다.교각을 지을 때 사용된 석축이 다름 아닌 조선시대 밀양읍성을 허물어서 나온 돌이었기 때문이다.
▼11 : 49.강기슭이 가파르게 변하는가 싶더니 길이 잔도(棧道)로 변해버린다.바위벼랑에 선반을 달아매듯 계단을 놓았다.그것도 왔다갔다‘갈 지(之)’자를 써가며 위로 올라간다.하나 더.얼마 뒤에는 위로 오르지 않고도 이 구간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벼랑을 따라 다리 모양의 길은 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11 : 53.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천경사’가 반긴다.대숲 사이로 노란 벽이 인상적인 사찰이다.탐방로는 이 절간을 오른쪽에 끼고 빙 에둘러간다.
▼천경사 일주문.절벽에 걸터앉은 절간답게 벼랑을 기둥삼아 누각 모양으로 지었다.절간은‘붓다나라 연수원’을 겸하는가 보다.하지만1970년대 국제적 무술배우로 활동했던‘왕호’씨가 직접 지도한다는‘왕호영화예술학교’는 찾아볼 수 없었다.영화 말고도 미술,음악,방송 등 각 분야의 전문 교수진들도 초빙한다고 했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천경사(天鏡寺)’는 용두산 자락의 절벽에 자리한 작은 절이다.아니 터는 좁지만 크고 작은 전각들이 빼곡히 들어찬 실속 있는 사찰이다.하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단다. 1988년,소실되어 이름만 전하던 작은 암자 터에 수원 스님이 중창했다고 한다.
▼절간은 밀양강 강변의 비탈진 벼랑에 매달리듯 의지하고 있다.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크게 활처럼 휜 밀양강과 그 너머 볕 좋은 들녘‘암새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밀양강을 가로막고 있는‘용두보’도 눈에 들어온다.강을‘한 일(一)’자로 가로막아 물을 모은 다음 수로를 통해 농경지(상남벌)쪽으로 흘려보내는 거대한 물막이(수리시설)다.
▼천경사의 주요 볼거리인‘석굴법당’은 찾아보지 못했다.대웅전 아래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지만,갈 길 바쁜 나그네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대신 명심보감(明心寶鑑)용 법어(法語)들을 가슴에 새기며 절간을 나선다. ‘다 잘 될거야.당신이니까’등등...
▼산성산 등산로안내도. ‘용두산(龍頭山, 116m)’은 산성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자씨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의 형세가 흡사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설화에 따르면,이무기가 하늘의 복숭아가 담긴 바구니를 몰래 훔쳐 나오다 용두목의 용에게 들켜 싸움이 났다.그때 엎어진 바구니가 용두산이 되고,용이 이무기를 치면서 쏟아 부은 물이 밀양강이 됐다고 한다.
▼12 : 05.길은 밀양강 쪽으로 대밭이 길게 이어진다.그 길을 따라 잠시 걷자‘용두보’갈림길이 반긴다.두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참고로‘용두보(龍頭湺)’는 수차 없이 강물을 상남벌의 농업용수로 제공해 주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수리시설이다.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마쓰시타 베이찌로’가 만들었다고 한다.일제에 의해 자행된 곡식 수탈의 흔적인 셈이다.하지만 지금도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니 토착왜구들에게는 좋은 얘깃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용두목’에서 옛 별서‘금시당’까지 가는 강변길은50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선비길이다.조선 선비들이 학문을 닦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오가던 길이었다.근세에 넘어오면서는 단장면 미촌리와 활성동 주민의 통행로이자 학생들이 등굣길로 이용하던 운치 있는 옛길이기도 했다.
▼길 위에서 만난‘구단방우(巫岩)’. ‘굿을 하는 바위’라는 뜻의 지명으로 옛날부터 무당들이 이곳에서 굿을 하며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그 굿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모양인지 제단에는 과일과 술 등이 차려져 있었다.
▼길은 수직에 가까운 바위지대를 지나기도 한다.그렇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다.처마에 매달린 제비집처럼 잔도(棧道)를 놓아 안전을 도모했음은 물론,오히려 낭만을 더해주고 있다.
▼12 : 16.길은‘중앙고속도로’아래를 지나기도 한다.이때 밀양강에서 가장 길다는 징검다리를 눈에 담을 수 있다.호사가들은 저 징검다리를 꼭 건너볼 것을 권한다.밀양아리랑 노래처럼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종종걸음으로 건너는 기분이 색다르다면서 말이다.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는 다슬기 잡이 삼매경인 아낙네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스치듯 지나간다.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하지만 경사가 완만해 힘들지 않고 걷는 즐거움만 더해준다.거기다 용두산 나무숲이 오뉴월 햇볕까지 막아주니 이 아니 즐거울 손가.
▼숲길 왼쪽에는 밀양강이 흐른다.덕분에 잠깐 잠깐이지만 밀양강의 물길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하나 더.저 밀양강은 은어로 유명했었다.청정수에서 자라 수박향이 강하고 감칠맛도 남달랐다고 한다.하지만 지금은 그 은어를 찾아볼 수가 없단다. 1987년 완공된 낙동강 하굿둑 탓이다.어릴 때 바다로 나갔다 다시 하천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길목이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강변길은 인간의 손길을 거부했다.정비랍시고 지나친 포장을 안했다.그러다보니 걷는 내내 강물소리와 풀냄새가 따라다닌다.친환경 탐방로인 셈이다.그렇다고 탐방객을 위한 배려까지 빼먹지는 않았다.알록달록 예쁜 색상을 입힌 벤치로도 모자라 아예 드러누울 수 있는 의자까지 배치했다.
▼12 : 32.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어느덧‘금시당(今是堂)’이다.조선 명종 때 좌부승지를 지낸 이광진이 낙향해 지은‘별서(別墅:현대의 별채·별장과 같은 개념)’로 주변 자연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는 영남지방 선비 가문의 전형적인 정자 건축물이라고 한다.그래선지 이곳에 세 번째‘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금시당(今是堂).금시당은 이 별서를 지은 이광진(李光軫, 1513-1566)의 호다.조선 성종 때인1566년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후손들이1744년에 복원했다.이후1867년에 증축을 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금시당 안에 백곡서원(栢谷書院)도 창건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하나 더.고택 옆에 새 한옥을 짓고 후손이 살고 있었다.
▼백곡재(栢谷齋).금시당을 복원한 이지운(李之運, 1681-1763)을 기리기 위해,그의 호인 백곡을 이름으로 삼아1860년에 지었다.영조 때 학행으로 이름 높아 교남처사(嶠南處士)로 불렸던 분이다.
▼12 : 40.밀양시 국궁장(國弓場).이광진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 아래서 잠시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이어서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자 국궁장이 나온다.주말엔 누구나 국궁을 배울 수 있고,직접 쏴보는 체험(4천원)까지 가능한 곳이다.이후부터는‘밀양강’둑길을 따른다.
▼12 : 46.활성교(活成橋).중앙고속도로 아래를 지나자마지 오른쪽으로 간다(왼쪽은 잠수교를 건너‘암새들’로 이어진다).이어서‘활성교’를 건넌다.주민들에게는‘살내다리’로 더 익숙하단다.
▼활성교 아래 밀양강변에는‘금시당 유원지’가 있다.여름철이면 많은 야영객들이 물놀이를 즐기는 곳이다.여름철이 아니더라도 차박(車泊)을 위해 찾아오는 이들로 항상 붐빈다고 했다.
▼난간 아래로 펼쳐지는 풍광이 가히 압권이다.밀양강은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어서 오라 손짓하고,이웃한 들녘 너머로는 가지산·운문산·억산·구만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우람스레 펼쳐진다.
▼12 : 52.다리를 건넌 다음‘벚나무’가로수로 치장된‘용평로’를 따라간다.왼쪽 옆구리에 끼고 왔던 밀양강을 오른쪽 옆구리에 바꿔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12 : 53. ‘용호정(龍湖亭)’.조선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둔한‘격제(格濟)손조서(孫肇瑞(1412-?)’를 모시기 위해‘일직손씨’문중의 묘역 아래에 지은 건축물이다.주 건물인 정당과 정문격인 심경루(心鏡樓)로 이루어졌는데,이중 심경루는 정면3칸,측면2칸의 누각으로‘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뜻한단다.
▼‘호수처럼 잔잔한 강물’을 뜻한다는 용호정(龍湖亭)은 문이 닫혀있어 담장 너머로 곁눈질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편액을 달고 있는 대청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5칸 겹집이다.참고로 손조서는 집현전학사를 거쳐 병조정랑과 봉산군수를 지냈다.김종직과 교우했으며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정여창 등이 스승의 예로 섬겼다고 전해진다.
▼도로가1차선으로 바뀌었다.옛 모습,그러니까1905년 건설된 경부선 철도가 놓여있던 시절의 풍경이라고나 할까? 1940년 경부선이 복선화되면서 선로가 다른 곳으로 이설됐고,철길은 이제 비좁은 일반도로로 변했다.
▼안내판은 오른쪽을‘활성유원지’라고 했다.밀양강의 동천수(단장천)와 북천수(밀양강 본류)가 합류하면서 심연을 이루며 넓은 백사장을 만들어놓은 자연발생 유원지라나? 1566년 근재 이경홍이 그린 밀양12경도에도 나타나있는 명소라고 한다.
▼13 : 02.용평터널.옛 경부선 철도의 또 다른 추억이다.월연터널 또는 백송터널이라고도 하는데,폭3m에 길이는130m쯤 된다.
▼증기기관차가 내뱉은 석탄 연기로 새까맣게 그을렸을 만도한데,안은 잡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아니 은은한 조명이 터널을 신비롭게까지 만들어준다.그래선지 사진을 찍으려는 젊은이들이 꽤 많이 보였다.그들 덕분에 꽤 많은 차량들이 밖에서 기다려야 했지만...참고로 터널은 일방통행만 가능하다.때문에 안에 사람이나 차량이 있으면 입구의 전광판에‘진입금지’라고 뜨기 때문에 차량 진입이 금지된다.
▼이곳은 정우성 주연의 영화‘똥개’가 촬영되기도 했다.그래선지 생뚱맞게도‘똥개터널’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나?
▼13 : 08.터널을 피해 강변길을 따라간다.그러자 또 다른 문화재인‘월연정(月淵亭)’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월연정’은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 등을 지낸 월연(月淵)이태(李迨, 1483-1536)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직전 벼슬을 버리고 밀양으로 돌아와 지은 쌍경당과 월연대 일원을 가리키는 지명이다.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이 월연대,왼쪽은 쌍경당 영역이다.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후손들에 의해 쌍경당은1757년,월연대는1866년 복원됐다.하나 더.네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이곳 월연정에 설치되어 있다.
▼강물과 달이 맑기가 한 쌍의 거울 같다는‘쌍경당(雙鏡堂)’.이태가 세운 월연정(月淵亭)의 건물 중 하나다.함경도 도사 재직 중 기묘사화를 예견하고 사직·귀향한 이듬해인1520년 용평의 월영사(月影寺)옛터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기초를 닦아 건물을 지었단다.주변 경관을 조망하기 좋도록 방과 대청을 개방형으로 꾸미고 사철 기거할 수 있도록 아궁이를 두었다.이밖에도 쌍경당 영역에는 제헌(霽軒)이 들어서 있었다.이태의 맏아들인 이원량(李元亮)을 추모하는 건물로1956년 지었다.살림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행랑채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쌍경당 영역을 빠져나오면 실개천. ‘쌍청교’라는 돌다리를 건너자 배롱나무 꽃무리에 둘러싸인 월연대 영역이다.
▼연못에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는‘월연대(月淵臺)’는 정자 기능이 두드러지도록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방을 대청으로 둘렀다.참고로 밀양의 아름다운 경승지12곳을 일컫는‘밀양십이경(密陽十二景)’중 하나인‘연대제월(淵臺霽月)’은 월연대의 풍광을 가리킨다.매월 보름이 되면 밀양강에 비친 둥근 달의 모습이 길게 달빛기둥을 이룬다는 것이다.이 광경을 월주경(月柱景)이라고 한다나?
▼월연대에서의 조망.밀양강과 단장천이 합수하는 호수 같은‘월연(月淵)’의 물결이 거울 표면처럼 맑다.하지만 웃자란 배롱나무가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렸다.하나 더. 월연대의 빼어난 승경12곳을 일컫는‘월연대십이경’은‘징담제월(澄潭霽月)’을 제일로 치는데,이는 거울 같은 저 수면에 맑은 달이 비치는 풍광을 묘사한 것이다.
▼월연정(月淵亭)은‘정자 정(亭)’자를 쓰고 있었다.하지만 안내판은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하나임을 강조한다. 2012년에는 월연정 일원 전체를 명승(87호)으로 지정까지 했다.그렇다면 먼저‘뜨락 정(庭)’자로 이름부터 바꿔놓아야 하지 않을까?
▼월연정의 또 다른 명물이‘백송’을 살펴보기로 했다.백송은 월연대에서 강가로 내려서서20m쯤 올라가면 나온다. ‘백송나무 가는길(또는 보는곳)’이라고 적힌 팻말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참고로 백송의 나무껍질 색깔은 어릴 때는 회녹색이다가 나무가 자라면서 나무껍질이 계속 벗겨지면서 점점 회백색으로 변해간다.그리하여 나이가 많이 들면,껍질이 마치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흰색이 된다고 한다.
▼최초의 월연정 백송은 약500년 전 중국을 다녀온 사신이 가져와 쌍경대 북쪽 축대의 모서리 끝부분에 심었으나1925년 대홍수 때 뿌리째 뽑혀 고사되었다.하지만 최초 심었던 백송에서 솔방울이 언덕으로 날아가 자연 발아로 바위틈에 세 그루의 백송이 자랐다.그중 한 그루는2014년 태풍으로 고사되었고 현재 수령이 약280년 된 마지막 한 그루의 백송 나무만이 살아남아 월연정 절벽에서 자라고 있다.
▼13 : 20. ‘2코스’와의 접점인‘추화산성’으로 가기 위해 등산을 시작한다.산행은 월연대의 왼쪽(정문 앞)에서 시작된다.초입에 이정표(추화산봉수대1,561m/활성교697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또렷한 편이다.거기다 밀양아리랑길 엠블럼과 리본이 곳곳에 매달려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하지만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는 땀 깨나 쏟아야만 한다.
▼13 : 42.첫 이정표(추화산봉수대761m/월연정800m).갈림길도 여럿 만난다.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중요한 포스트에는 이정표를 세웠고,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엠블럼이나 리본이 길을 안내해 준다.
▼13 : 53.추화산성 남문 터(이정표:추화산봉수대280m/월연정1.28km). 5분쯤 더 걸어 사거리(이정표:추화산봉수대500m/섬벌마을1.5km/월연정1.07km)를 만났다싶으면 곧이어 추화산성(남문 터)에 올라선다.
▼밀양아리랑길 안내도가‘2코스’와 만났음을 알려준다.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성황사 유지(밀양손씨 문중 사당)’와 추화산 정상(243m)으로 오를 수 있다.하지만 체력에 한계를 느낀 우리 부부는 이를 생략하고 곧장 추화산성으로 가기로 했다.
▼성벽에서의 조망.밀양시가지와 주변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밀양읍성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으로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13 : 58–14 : 21.임도처럼 잘 닦인 길을 따라5분쯤 더 걸으면‘추화산성’이다.하지만 성벽은커녕 성터도 눈에 띄지 않는다.그저 분지처럼 널찍한 잔디밭과 건너편 언덕에 걸터앉은‘봉수대’가 다라고나 할까?아니 식탁형의 의자까지 갖춘 멋진 쉼터를 겸하고 있었다.덕분에 막걸리를 반주삼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봉화대 맞은편은‘추화산(推火山, 243m)’이다.산 이름은 밀양의 옛 이름인‘추화군(推火郡)’에서 유래했다.
▼이곳에는 다섯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이정표(박물관1.1km/월연정1.5km)와 추화산성 안내판도 눈에 띈다.추화산 정상 부분을 빙 둘러싼 산성인데,출토된 유물로 미루어보아 신라와 가야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던 시기에 만들어져 조선시대 전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단다.특이한 것은 축성 초기에는‘읍성(邑城)’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그렇다면 저 아래 들녘에서 농사짓던 백성들은 어떻게 이곳까지 왕래하며 살아갔을까?
▼시야가 툭 터지는 민둥봉우리는‘봉수대’가 올라앉았다.봉수제도가 국법으로 확립된 고려시대(1149년)에 설치되어 갑오개혁(1894년)으로 봉수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참고로 우리나라는 가락국의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할 때 봉화로 신호했다는‘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봉수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봉수대의 특징대로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높고 낮은 주변의 산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영남좌도연제 제2거서노선의 간봉선에 해당하는 주화산 봉수는 김해 성화예산에서 봉기,분산·자암산·밀양백산남산을 거쳐 온 봉수를 경북 청도남산으로 전달했단다.
▼산길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쓰레기는 물론이고 잡초 하나 보이지 않는다.아니 잡초 대신 지자체에서 이식해놓은 맥문동 등의 꽃들이 곳곳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탐방객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벤치마다 부채를 비치해두는 친절까지 베풀고 있다.
▼14 : 45.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사거리(이정표:천문대130m/추화산성760m/좌우는 아리랑고갯길)가 나온다.
▼이곳에는 출향인들을 위한‘쓰리랑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고향을 떠나있는 출향인들에게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다.이 숲의 특징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아닐까 싶다.편백나무,산수유,산사나무,매화나무 등 심어놓은 나무들마다 기증한 사람이나 단체의 이름이 일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건너편에는‘밀양아리랑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월남전참전비(사진)과 충혼탑도 세워져 있단다.하지만 정규탐방로에 벗어나있어 들러보지는 않았다.
▼14 : 52.여섯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된‘밀양아리랑 우주천문대’.국내 최초로‘외계 행성·생명’이라는 특화된 주제의 과학 체험공간으로 조성되었으며,관측실·천체투영관·전시체험실 등 시설을 갖추고 있다.특히4층 주관측실에서는 세계 최초 음성인식 제어시스템이 설치된70cm구경의 고성능 망원경‘별이’로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
▼14 : 56.천문대를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간다.이때 밀양성당을 스치듯 지나간다.
▼14 : 58.오른쪽에는 밀양시립박물관이 있었다.밀양시립박물관은1974년‘밀양군립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1993년 고고학 전문박물관으로 되었고, 2008년에는 이곳 교동으로 이전·개관했다.상설전시실(역사실·민속실·유학실·서화실)과 화석전시관,독립기념관 등을 거느리고 있다.
▼갖가지 조형물들로 치장된 광장을 지나자‘박물관’이 반긴다.삼한시대(변한)미리미동국으로 불린 이래 오늘날 밀양시에 이르기까지 밀양지역의 풍성한 역사·문화 사료를 담고 있는 곳이다.밀양아리랑 같은 민속놀이뿐 아니라 밀양의 유학자,선비의 사랑방,조선시대의 서화와 같은 특색 있는 전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밀양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영남지역 최초로 일어난3·13밀양 만세의거,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창단, 23회에 걸친 의열투쟁 등 수많은 항일 독립투쟁이 이곳 밀양에서 일어났다고 한다.그래선지 박물관 안에‘독립운동기념관’을 별도로 두었는가 하면,밀양시 출신 독립운동가36인의 흉상이 둘러싸고 있는 조형물(선열의 불꽃:변건호 작품),독립의열사숭모비,파리장서비 등을 광장에 설치해 놓았다.
▼15 : 07.박물관을 빠져나오면‘밀양대공원로’.밀양읍성을 향해 왼쪽으로 간다.오른쪽에 밀양향교와 손씨고가(孫氏古家)라는 문화재가 있으나,약속된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참!선답자의GPX트랙도 두 문화재를 건너 뛴 채로 진행하고 있었다.
▼15 : 21. 15분쯤 걷다가 만난 로터리에서는 오른쪽3시 방향이다.이어서‘용평로’를 따라‘동문고개’로 올라간다.
▼15 : 26. ‘동문고개’.고갯마루에는 밀양읍성(密陽邑城)의 동문이 들어섰다.최근 복원된 동문은 크고도 견고한 것이 중국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었다.가히 난공불각의 요새라고나 할까?
▼‘2020공공미술프로젝트’혜택을 본 밀양읍성은 갖가지 조형물들로 치장됐다.참고로‘밀양읍성’은 성종10년(1479년)에 축조됐다.대부분의 읍성이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밀양읍성은100년 이상 일찍 만들어졌다.높이4.2m에 둘레가2.2km인 성곽은 옹성(甕城)·치성(雉城)·해자(垓子)까지 갖췄었다고 한다.하지만1902년 성문과 성벽이 헐려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에 사용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15 : 29.성곽으로 올라가는 진입로.길섶의‘붉노랑상사화’가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혔다.
▼상사화는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날 수 없는 연인에 빗대어 표현된다.그래서 꽃말도‘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됐다.꽃은 잎을 생각하고,잎도 꽃을 생각하지만 서로 만날 수 없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성곽을 따를 경우 만나게 되는 무봉대(舞鳳臺).길을 달리 들었기 때문에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왔다.
▼첨부된 지도(부산일보의 안내도도 같다)는 읍성의 성곽을 따라‘영남루’로 간다.하지만 아리랑길 표식은 반대편(해발88.1m의‘아동산’을 가운데 두고)으로 인도하고 있었다.이 길을 따른 탓에 우리는 명소 몇 곳을 둘러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15 : 35.밀양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지는가 싶더니 이윽고‘영남루’에 이른다. 일곱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그건 그렇고 누각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왼쪽 언덕에는 작곡가 박시춘(1913-1996)의 생가가 있었다.박시춘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시기에 유행가3000여 곡을 지었다. ‘애수의 소야곡’, ‘비단장사 왕서방’,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 ‘봄날은 간다’등 하나하나가 당대를 풍미했다.많은 사람들이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그의 노래를 불렀다.하지만 일제의 패색이 짙어진1943년 이후 학도병 참여를 권유하는‘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아내’같은 노래를 지어 친일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영남루(嶺南樓: ‘國寶’로 지정되어 있다)’는 진주 촉석루,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3대 누각이다.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로 꼽히는데,신라 경덕왕(742년-765년)때 신라5대 명사 중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 누각으로 세워졌다.화재·전쟁으로 몇 차례 소실됐다가, 1844년 밀양부사 이인재가 중건하면서 오늘에 이른다.하나 더.정면5칸 측면4칸의 누각은 기둥과 기둥 사이가 넓고,땅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마루를 만들어 누각 자체가 시원하고 웅장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누각의 다양한 현판들도 주요 볼거리다. ‘강성여화(강과 밀양읍성이 한데 어우러져 그림과 같다)’ ‘용금루(높은 절벽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누각)’, ‘고남명루(문경새재 이남의 이름 높은 누각)’등 하나같이 영남루의 아름다움과 명성을 찬양하는 것들이다.
▼누각 끝으로 발길을 옮기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만큼이나 가슴도 확 트인다.육지 속의 섬‘삼문동’과 이를 에돌아나가는 물줄기가 어우러지며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
▼널따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에는‘천진궁(天眞宮)’이 들어서 있었다.천진궁은 단군을 비롯한 역대 왕조 시조들이 배향된 사당이다.조선 효종 때 건립됐으며,원래는 객사(공진관)로 사용되었다.하지만 해방 이후‘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을 비롯한 역대 왕조를 세운 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역할을 하고 있다.
▼단군(檀君)으로 여겨지는 신상(神像).곁을 지키고 있는 빗돌은‘태상노군(太上老君).칠원성군(七元星君),삼신제왕(三神帝王)’이라 적었다.우리네 시조가 이들의 직위를 겸한다는 얘기일까?
▼마당에서는‘밀양향토예술단’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밀양백중놀이,무안용호놀이,감내게줄당기기,밀양법흥상원놀이,작약산예수제 등 밀양의 무형유산을 매월 첫째·셋째 주 토요일에 번갈아가며 보여준단다.
▼영남루 근처에는 다른 문화재들도 여럿 있다.천년고찰 무봉사(舞鳳寺)도 그중 하나지만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다.발품만 조금 더 팔면 아랑각(조선 명종때 정절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은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모신 사당)이나 밀양이 낳은 역사적 인물인 사명대사 유정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15 : 52.수변공원길로 가기 위해서는 돌계단을 내려서야 한다.그런데 이 계단이 특이한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계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고 지그재그로 걸으면 경사로로 이용할 수 있다.휠체어나 자전거,캐리어 등도 다닐 수 있는 무장애 탐방로라고나 할까?그래선지 위에서 내려다보면 심오함을 담은 조형작품을 연상시킨다.
▼15 : 54. ‘밀양교’를 건너‘삼문동(三門洞)’으로 간다.서울로 치면‘여의도’이다.오래 전 이곳‘삼문동’은 강 건너‘가곡동’과 붙어 반도모양 지형을 이루고 있었단다.그러다1920년대의 대홍수가 반도의 허리를 끊어버렸고,저곳 삼문동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렸다.
▼영남루 앞,밀양강의 둔치는 숫제 공원으로 꾸며놓았다.그 앞으로 흘러가는 강물이 영남루를 두고 떠나는 것이 아쉬운지 흐르지 않고 멈추어‘날 좀 보소,날 좀 보소’라며 아리랑 소리를 자아내는 듯하다.
▼15 : 56.다리 건너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하긴 이처럼 온전하게 영남루를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그래선지 글자조형물을 세워 포토죤까지 겸하도록 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밀양강의 본류가 바뀌면서.물길을 잃은 영남루의 풍치는 내세울 게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그래서 만들어 놓은 게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징검다리가 놓인‘보(湺)’다.보를 막아 밀양강의 물을 가둠으로써 예전처럼 영남루 앞이 물로 넘실거리게 만든 것이다.아무튼 물길 너머 영남루는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다.맞다.저런 풍광이 있었기에 옛날부터 수많은 명사가 찾아왔을 것이고,그럴듯한 시들을 남겼을 것이다.영남루에 걸린 수많은 시판(詩板)이 그 증거다.당대 최고의 인플루언서들이 핫플레이스를 찾았다가 일종의‘리뷰’를 남긴 셈이다.
▼전망대 앞에서는‘밀양아리랑 아트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밀양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장르의 젊은 작가들이 임시 공방을 열고 있다.일단은 체험을 해보고 마음에 들 경우 구입하면 된다는 얘기다.
▼15 : 58.공방 몇 곳을 기웃거리다 다시 길을 나선다.이후부터는 밀양강 제방을 따라간다.둑 위에 차도가 부럽지 않을 만큼 널찍하니 산책로가 나있다.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던 밀양강 둔치가 언제부턴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바뀌었다.산림유전자 보호림으로 지정된‘삼문송림’으로 약2ha에 이르는 면적에 수령이100년도 넘는 곰솔2000여 그루가 울창하다.소나무 아래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여름이면 맥문동,가을이면 구절초가 만발한단다.참고로 이곳 송림공원은 조선시대 말엽 고종 때 밀양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방수림으로 조성됐다.
세부 일정: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①코카서스(Caucasus)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캅카스(Kavkaz)’라 부른다.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뻔한 코스와 일정,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아르메니아(Armenia) :인구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구소련의 해체로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③가르니 신전Garni Temple) :예레반에서 남동쪽으로32km쯤 떨어진 코타이크(Kotayk)지방에 있는 신전. BC 3세기 요새로 지어졌으나,로마의 지배를 받았던BC 1세기 아르메니아 왕‘트리다테스1세(Tiridates I)’가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태양신 미트라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했다.
▼아자트 협곡 위에 형성된‘가르니 마을’에서 투어를 시작했다.점심식사를 마친 후10분쯤 걷자 목적지인‘가르니 신전’이 나온다.참고로 가르니 지역이 역사에 나오는 것은 기원전8세기 우라르트(Urart)왕국 때부터라고 한다.이후 기원전3세기 오론트(Oront)왕국 때 이곳에 왕의 여름궁전이 지어졌다.
▼수도인 예레반에서 가깝기 때문에 당일치기 투어가 가능하다. 7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게하르트 수도원’과‘가르니 신전’이 걸터앉은 아자트 협곡의 세상에서 가장 큰 주상절리를 한데 묶어 투어를 진행하는 게 보통이다.
▼입장권을 사서 안으로 들어온다.저렇게 견고한 성벽(지금은 성문에 문짝도 없지만)이 있었기에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평을 들었을 것이다.참고로 기원후1세기 이베리아(Iberia)왕조의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 AD 32-51)왕과 그의 가족이 양자이자 조카였던 라다미스투스(Rhadamistus)에 의해 암살당한 후부터 이곳은 왕궁보다는 성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신전은 동·서·남이 절벽으로 차단되고,북쪽으로만 접근이 가능한 천연의 요새다.높이6-8m(두께2-3m)에 길이374m인 성벽에는14개의 망루 겸 탑까지 있었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원형을 너무 많이 상실했다는 이유로 등재에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다 아래 문장을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떡 거린다.유네스코에서 선정하는‘문화경관의 보호와 관리를 위한 그리스 멜리나 메르쿠리 국제상(Greece Melina Mercouri International Prize for the Safeguarding and Management of Cultural Landscapes)’을 수상했다는 것이다.대상자는‘가르니 역사문화박물관(Historical and Cultural Museum-Reservation of Garni)’이고 말이다.참고로‘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 1920-1994)’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정치활동가로 문화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약탈문화재 반환 등 문화재보호 활동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다른 안내판은1945년 가르니 마을의 공동묘지에서 발견했다는 비문을 소개하고 있었다.아르메니아 화가‘마르티로스 사얀(Martyros Saryan)’이 발견한 이 비문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왕국의‘티리다테스1세(66-88,재위 년도인 듯)’가 기원후77년에 난공불락의 요새(복원이었을 게다)와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안내판이 전하는‘헬라어 비석’은 북쪽 성벽의 문(조금 전 들어온)맞은편에 놓여있었다.빙 둘러 쳐놓은 금줄에서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이 유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꼬맹이의 호기심까지 막을 수 있겠는가.아니 저 소년은 지금 음각되어 있는 메시지와 교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르메니아의 위대한 왕인 티리다테스가 즉위11년 만에 신전과 함께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었다.’는...
▼탐방로를 야외 박물관으로 삼은 모양이다.출토된 유물들을 좌대까지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복원 과정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들이지 싶다.그렇다고 허투루 대할 수는 없었을 테고.
▼찰떡궁합을 이루는 것들도 눈에 띈다.성곽이니 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을 게다.그러니 어디선가 물을 끌어왔을 테고,성 안에는 크고 작은 물길이 거미줄처럼 퍼져있었을 것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천 길 낭떠러지에 위태롭게 걸터앉은‘가르니 신전’이 얼굴을 내민다. 1세기 후반 아르사스 왕조의‘티리다테스(Tiridates) 1세’가 지었다는 태양신 미르(Mihr)에게 바치는 이오니아식 신전이다.왕은 신전과 함께 왕비를 위한 궁전 겸 성채도 건축했다고 한다.
▼신전은 아르메니아가 로마에 속하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어졌다고 한다.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태양신 미트라(Mitra,혹은Mihr)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했다.때문에‘가르니 태양신전’으로 불리기도 한다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닮은 신전은 아르메니아 장인들이 어떻게 전통적인 그리스·로마식 신전 디자인을 변형해 받아드렸는가를 보여준다고 했다.신전 외부는 둥근 기둥으로 둘러싼 이오니아 양식의 그리스·로마 사원 형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만든 반면,건축자재는 대리석 대신 현무암을 사용했다.내부 장식은 이 지역이 로마의 문화를 수용했다는 증거로 포도와 석류 등의 장식을 풍부하게 사용했으며,로마 이전 시기에 성행했던 황소와 사자의 모티브 장식도 많이 나타나고 있단다.
▼신전은 기독교가 공인된4세기 초반 티리다테스3세 때 호스로비둑트의 여름궁전으로 변신했단다.그러다8-9세기경에는 궁전과 교회(Saint Sion),목욕탕이 들어선 복합단지로 변한다.하지만1386년 티무르제국의 침입과1679년의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고,이후 동서로 분열된 아르메니아가 이란과 튀르키에의 지배를 받으면서 잊혀졌다.그러다20세기 초·중엽의 발굴과정을 거쳐, 1968-1976년 건축가 사히냔(Sahinyan)의 주도로 발굴 부자재를 활용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그러나 본래 것이66%가 되지 않아 세계문화유산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정면6개 측면8개의 원형 기둥이 우뚝하다.기둥의 상부 주두(柱頭)는 이오니아식으로 되어 있다.그 위로 면석과 장식벽 그리고 천장받침이 있다.식물문양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 벽은 프리즈 형태로 연결된다.천장받침 위로 삼각형 모양의 박공과 지붕이 보인다.박공은 민무늬이다.부조장식이 있었을 게 확실하지만 이에 맞는 부자재를 찾아내지 못했던 모양이다.대신 용마루에는 화려한 장식의 조각품을 올려놓았다.
▼신전 파사드(facade).주워 모은 부자재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어나간 흔적들이 감탄보다는 오히려 짠하게 느껴졌다면 나 혼자만의 오해였을까?
▼내부에는 전실이 있고,그 안쪽에 신과 만나는 기도공간을 만들었다.지붕과 벽이 있는 건물 형태로 만들어진 신실(神室)이다.제단과 지성소는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아르메니아 교회당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천장을 뚫어 만든 구멍,즉 예르디크(Yerdik)를 꼽을 수 있다.이 구멍은 환기와 더불어 내부를 밝히는 역할까지 해준다.그런데 그리스·로마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가르니신전도 천정에 구멍을 뚫어놓지 않았겠는가.고개를 갸웃거리다 로마의 판테온에서도 저런 구멍을 봤다는 기억을 소환해내면서 그만 수긍하기로 했다.
▼신전을 빠져나오자 건물 터가 나온다.역사는AD 897년 신전 근처에2층으로 된 여름 궁전을 추가로 지어졌다고 전한다.아니 목욕탕과 교회 등이 함께 들어선 커다란 복합지구를 형성했단다.하지만 모진 세월을 이겨내지 못한 채 지금은 저렇게 터만 남아있다.
▼원통형으로 생긴 이 터에‘성 시온교회(St. Sion Church)’가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완전히 파괴된 탓에 원형의 벽과 내부 구조만 확인해 볼 수 있다.
▼안내판은 이 일대를‘왕궁’으로 적고 있었다.아치형의 큰 홀을 가진2층 건물이었을 것이란다.그밖에도 꽤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나,술을 좋아하는 내 관심은 포도주를 만들던 시설에 대한 설명에 꽂히고 있었다.
▼지대가 조금 높은 곳으로 가면‘목욕탕’유적이 나온다. 3세기에 지어진 로마식 목욕탕으로 왕실 여름궁전의 부속시설이지 싶다.목욕탕은 바닥의 모자이크화와 난방시설 일부가 남아 있어,아르메니아 왕실의 목욕문화와 목욕탕의 역사를 알려준다.
▼목욕탕은 건물 상부가 없어져 정확한 외관은 알 수 없다.현재의 지붕은 복원과정에서 유적지 보호를 위해 씌워놓은 것이다.
▼하지만 일부 벽과 배관,바닥의 모자이크화가 남아 있기 때문에,목욕 시스템과 평면구조는 어느 정도 짐작된다고 했다.
▼목욕탕은 네 개의 연속된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입구 쪽 방이 탈의실 겸 전실이다.두 번째와 세 번째 방은 열탕과 온탕으로 여겨진다.
▼방은 한쪽 벽에 반원형의 공간을 할애해 보일러 시설을 만들었다.지면 위에 지름이20-25cm되는 원통형의 배관 기둥을 세우고,배관을 통해 뜨거운 물과 증기를 목욕탕으로 공급하는 구조다.때문에 목욕탕은 배관 위에 평평하게 만들어졌다.
▼네 번째 방의 바닥에는1953년에 발견되었다는2.9x2.9m크기의 모자이크화가 있다.그래선지 전문가들은 이곳을 휴게실로 분류하고 있었다.(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 인터넷에서 빌려왔다)
▼모자이크화는 사각형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대양의 신‘오케아노스(Oceanus)’와 바다의 여신‘탈라사(Thalassa)’로 추정되는 두 신을 그려 넣었다.남신은 뿔이 달린 댕기 머리를 하고,여신은 긴 머리에 아름다운 눈을 갖고 있다.머리 위에 적힌 두 줄의 헬라어는‘우리는 열심히 일했지만 얻은 게 없다’로 번역된다고 했다.그렇다면 건축에 동원된 예술가들이 보수를 받지 못한데 대한 항의 표시로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바다의 여신‘테티스(Thetis)’라고 했다.그 아래에는 돌고래가 그려져 있다.이들 주변으로 물고기나 굴 같은 바다생물과 그물을 던지는 어부와 선원이 묘사되어 있다.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와 반인반어인 인어도 보인다.하나 더,누군가는 이 모자이크를 설명하면서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의 실생활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라고 했다.그러면서 모자이크를 만든 이들이 지중해 도시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안내판은 이곳이‘가르니 왕실목욕탕’이었음을 알려준다.가르니 왕궁의 다른 건물들과 같은 재료와 기술로 지어졌으며,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천장 회반죽의 파편들로 보아 둥근 형태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그밖에도 목욕탕의 제작시기,구조,가열방법,모자이크에 대한 설명 등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가르니 요새’는 난공불락이라고 했다.북쪽의 성벽을 제외한 나머지3면이 천 길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덕분에 요새(가르니 신전)곳곳에서 멋진 조망을 즐길 수 있다.발아래로 아까 둘러봤던‘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가 광활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다리품만 조금 더 팔면 계곡으로 내려가 볼 수도 있다.
▼절벽위에 들어선 마을이 보기만 해도 아찔하게 만든다.문득 스페인을 여행하다 만났던 절벽 위의 도시‘론다(Ronda)’가 생각난다.당시도 건너편 절벽 위에 위태위태하게 들어선 하얀색 일색의 구시가지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었기 때문이다.하긴 소설가 헤밍웨이는 그런 풍경에 반해 호텔‘론다 파라도르(Parador de Ronda)’에 머물며‘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지만...
▼‘wines upona time’.조망을 즐기며 돌아다니다 와인역사박물관에 대한 안내판도 만날 수 있었다.와인의 역사를‘노아의 방주’까지 끌고 올라가며‘와인 종주국’임을 고집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안내판이라고나 할까?
▼옆에는‘가르니 요새(The fortress of Garni)’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기원전3세기에 지어졌을 것이라며,요새가 소개되어 있는 각종 문헌의 저자와 내용 및 성곽의 구조에 대해 자세히 전하고 있었다.
특징:‘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마을길 등을 잇는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거치는 지자체만도5개 광역에 기초가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오늘은58코스를 걷는다. 8개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난이도는 별이3개(전체5개)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선도리 갯벌체험장(충남 서천군 비인면 선도리)
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IC에서 내려와21번 국도를 타고 서천방면으로4km쯤 내려오다, ‘해본마린(보트 판매·수리업체)’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나오면 잠시 후 비인해변에 이르게 된다.서해랑길(서천58코스)안내도는 선도리갯벌체험장 앞에 설치되어 있다.
▼ ‘선도리(갯벌체험장)’에서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춘장대해변’까지 가는 11.7km짜리 여정이다. 코스 대부분이 바닷가를 따라 나있어 여름철에는 다소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곱디고운 모래사장을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데다, 생태계가 잘 발달된 갯벌에서는 재수라도 좋으면 조개 한두 개 정도는 너끈히 주워들 수 있다.
▼이곳 선도리해변은 전국 제일의‘갯벌체험장’으로 꼽히는 곳이다.접수창구 앞에 줄지어 늘어서있는 저 인파가 그 증거다.
▼10 : 00.해안산책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때‘쌍도(雙島)’가 눈에 들어온다.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과 천석지기 부잣집 외동딸의 애틋한 사랑얘기가 전해지는 전설의 섬이기도 하다.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남녀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극단적 선택을 했고,선도리 앞바다의 두 개의 작은 섬으로 우뚝 솟아났다나?(갯벌체험장의 분위기 연출을 위해 지난57코스 때 사진을 게시했다)
▼아재개그 하나.왜‘배롱나무인지 아시나요?’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다.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한번 성한 것은 오래가지 않아 반드시 쇠해진다는 뜻이다.그런데도 부귀라는 꽃말의 배롱나무 꽃은7-9월까지 계속 꽃을 피워 백일홍 나무라고도 불린다.그걸 자랑하며 십일홍일 뿐인 다른 나무들에게‘메롱’하며 놀린 것이 시간이 자나면서‘배롱’으로 변했다나?
▼10 : 23.인생은 좋은 일로만 계속될 수는 없는가 보다.비인천(庇仁川)을 가로지르는‘쌍도교’를 건넜다싶으면 이정표(종점10.2km/시점1.5km)가 이제 그만 배롱나무 꽃길과 헤어지란다.
▼이정표가 서해랑길 본연의 임무를 되찾았다.시점과 종점까지의 거리를 기본으로 인근의 주요 포인트를 추가했다.하단의 지도에는 현재위치의 주소까지 적어 넣었다.
▼이후부터는 방조제의 둑길을 따라간다.길은‘월하성 어촌체험마을’로 이어진다.
▼이즈음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한‘쌍도’를 눈에 담을 수 있다.그저 뭉툭한 모양새일 따름이었던 섬이 언제부턴가 고래와 거북 모양을 닮은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다.
▼10 : 27.바닷가 습지에는 조류관찰대가 만들어져 있었다.아니 무늬만‘탐조대’였다.바다생물 관찰 사이트라는 것이다.그렇다면 관찰 구멍을 아래가 아닌 위에다 뚫어 놓은 이유는 대체 뭘까?
▼안내판은 철새가 아닌 흰발농게,갯게,대추귀고둥 등 해양생물에 대한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반 폐쇄형 갯벌인 월호리 갯벌에3종의 해양보호생물이 서식하고 있는데,특히 갯게는 서해안에서 유일한 서식지라고 한다.
▼10 : 29. ‘해뜨는비치하우스 펜션’.서해랑길(kakaomap)은 펜션 앞에서 직진이다.하지만‘두루누비(한국관광공사의 공식 사이트)’에서 배포한 트랙은 오른쪽으로 가란다.우리 부부는kakaomap을 따르기로 했다. ‘월하성 포구’를 둘러본 다음 바닷가를 따라‘띠섬목’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10 : 32.월하성 마을.법정 동리인‘월호리(月湖里)’를 구성하는3개 자연부락(화동·월하성·큰장굴)중 하나로‘달빛 아래 신선이 노는 것 같은 마을’이라고 해서 예로부터 신성지로 꼽히던 마을이다.
▼마을 담벼락은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하지만 오랫동안 보수를 안해서인지 없던 것만도 못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10 : 35.월하성마을 앞 풍경. 58가구196명이 살아간다는 마을은 규모가 제법 컸다.민박이나 펜션은 기본.편의점에 식당(그것도 셋이나)까지 들어서 있었다.
▼바닷가에는‘철새나그네길’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충남 서천은 서해안을 끼고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데,보령 땅과 경계를 이룬‘부사호’에서 전북 군산을 마주보고 있는 장항까지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서천 철새나그네길’이다.총5개 코스37.8km에 이르며, 1코스(붉은낭만길) 8.8km, 2코스(해지게길) 5km, 3코스(나그네길) 14km, 4코스(윤슬길) 5km, 5코스(해찬솔길) 5km로 조성되어 있다.
▼앞바다는 만 형태의 지형으로 수심이 얕아 갯벌이 잘 발달해있다.썰물 때면 갯벌이1km가까이 드러난다.또한 질퍽한 갯벌이 아니라 고운 모랫벌이라 움직이기도 편하다.덕분에 봄부터 가을까지 갯벌에 직접 들어가 바지락,모시조개,맛조개 같은 조개류를 채집하고 갯벌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다.
▼월하성 포구의 어선들도 하나같이 물양장으로 올라와 있었다.서천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만나오다 보니 이젠 익숙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배는 경운기나 트랙터에 의해 바다로 옮겨진다.저 배는 언제라도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마친 상태다.아니 다른 배들도 출발선상에 선 달리기 주자들처럼 신호가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길가에는‘쭈꾸미 잡이’용 소라껍데기가 줄에 묶인 채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다.쭈꾸미는 낚시로 잡는 것보다‘소라방 잡이’방식으로 잡는 것이 힘은 더 든다고 했다.하지만 쭈꾸미에게 스트레스를 적게 주는 만큼 가격을 더 비싸게 받는다고 한다.
▼저 길은 어선 전용이다.어민들은 바다가 멀리 물러나는 썰물 때는 경운기 뒤에 배를 싣고 이 길 끝까지 가서 바다에 배를 띄운다.이게 또 이색적인 풍경으로 비쳐지면서 탐방객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킨다나?맞다.끝 간 데 없는 갯벌 위로 배를 싣고 바다로 가거나,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배를 싣고 나오는 경운기들의 행렬이 어디 그리 흔한 풍경이겠는가.
▼10 : 43.포구의 끝.방파제 앞에는 어촌체험 안내소 겸 매표소가 있었다. 8월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이용한‘월하성 횃불문화축제’까지 열어가며 체험객들을 유치하는 중이라고 했다.이때 배올리기 문화체험,어부체험,맨손으로 고기잡기 체험,돌게잡이 등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단다.
▼방파제에서 바라본‘월하성 마을’.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모양이 달을 닮았다하여‘달 아래 성’즉, ‘월하성(月下城)’이라고 부른다나?해안가의 지형이 기러기 날개처럼 굽어졌다고 해서‘월아성’으로 불리기도 했단다. 1864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 마을 서쪽에‘월아산’이 표시되어 있는데,이게 지금의 옥녀봉으로 추측되며 마을 이름도 이 월아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마을의 끝에는 봉긋하니 솟아오른 동산이 하나 있었다.내가‘띠섬’으로 오해했던 섬이다.주민들 말로는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육지로 변한 섬이라고 했다.
▼방파제에서 바라본 북쪽 해안.저 해안선을 따라‘띠섬목’으로 가려고 했다.하지만 주민들 말로는 무릎까지 빠질 각오를 해야 한단다.갯고랑이 제법 깊다는 것이다.고민해볼 필요도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이유이다.
▼10 : 52.마을로 되돌아와 이번에는‘월하성길’을 따라‘서울시 서천연수원’쪽으로 간다.
▼10 : 58.고갯마루에서 서해랑길 이정표(종점8.7km/시점3km)를 만났다.그런데 옥녀봉(75.9m)으로 올라가라는 게 아닌가.
▼하지만 우린‘서울시 서천연수원’으로 간다.해안선을 따라가며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띠섬’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아니 해안선을 따라가는‘철새나그네길(3코스)’이 옥녀봉을 넘는‘서해랑길’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11 : 09.연수원 경내를 횡단해 바닷가로 내려선다.건물들이 밀집해있어 길 찾기가 수월치는 않으나 연수원 이정표의 보존습지·모래톱마당·해변가 등을 참조하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하나 더.해안선을 따르는 이 구간은 밀물 때는 이용할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해변은 광활하지는 않지만 연수원 식구들을 소화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널찍했다.거기다 규사 성분의 모래사장은 한없이 보드랍다.이런 고품격의‘프라이빗 비치’를 갖고 있는 서울시청은 대체 무슨 복일까?서울 시내의 지하철역을 시작으로‘독도 지우기’를 나서고 있는 매국 행위는‘토착 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던데...
▼가는 입자의 모래가 물에 다져진 탓에 발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 바닥이 단단했다.아니 발바닥으로는 폭신폭신한 촉감이 느껴져 온다.보드라우면서도 단단하다고나 할까?아무튼 이런 로드 컨디션이라면 하루 종일 걸어도 좋을 것 같다.
▼‘띠섬’은 육지와30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다.저 섬은 하루 두 번 썰물 때‘모세의 기적’이 일어나 육지와 연결된다고 했다.그래선지 바다에서 조개를 캐고 있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길은 갯바위지대로 연결된다.위험하다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을만한 검붉은 바위들이 해안선을 따라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갯바위는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었다.흡사 조각전시장을 보는 것 같다.언젠가TV화면에서 살짝 스쳐지나가던 달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모두가 다 오밀조밀하다는 얘기는 아니다.험상궂으면서도 거대한 갯바위들이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살짝 비켜 지나가면 그만이었지만...아무튼 모래해변은 모래해변대로,갯바위는 갯바위대로 바다와 찰떡궁합을 이루고 있었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갯바위들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동안 바다와 사랑에 빠져 지금과 같은 아기자기한 모양이 됐다.그러다보니 해식지형의 변화과정도 살짝 엿볼 수 있다.해안절벽이 침식을 거쳐 해식동굴로 변한...저런 동굴들은 흐르는 세월과 함께‘씨 아치(sea arch,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시스텍(sea stack,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마량포구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串),즉 반도가 눈에 들어온다.서천화력의 거대한 마천루도 시야에 잡힌다.
▼11 : 14.갯바위로 이루어진 모퉁이를 돌아서면‘띠섬목’이다.이정표(종점8.3km/시점3.4km)는 월하성마을에서 이곳까지를1km로 적고 있다.하지만 내 트랙은1.4km를 찍는다.해안선을 따르는 철새나그네길(3코스)이 서해랑길보다 더 길다는 얘기일 것이다.
▼들일 나온,아니 갯일 나온 어느 가족.꽤 오래 버틸 요량인지 바닷가에 돗자리까지 펼쳐놓았다.바리바리 싸온 간식도 펼쳐놓았음은 물론이다.
▼‘띠섬목’이란 지명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 ‘띠섬’으로 들어가는‘길목’이 곧‘띠섬목’이 아니겠는가.
▼이후부터는‘띠섬목 해변’을 따른다.규사성분의 고운입자로 이루어진 백사장이 자랑인 해변이다.배후에 울창한 송림까지 끼고 있으니 해수욕장 부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하지만 사유지인지 해안선을 따라 길게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마량포구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串),즉 반도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해변은 가고 또 가도 끝이 없었다.맞다. ‘띠섬목 해변’은 그 길이가4km나 된다고 했다.물먹은 규사성분의 모래사장이 단단하게 굳어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그렇다고 딱딱하다는 것은 아니다.발을 내디딜 때마다 폭신폭신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의 연한 움직임이 있었다.
▼뒤돌아 본‘띠섬’. ‘띠 모(茅)’자를 써‘모도’라고도 하는데,월호리에서 갯벌로 이어진 덕분에 갯벌체험장으로 이용된다.
▼11 : 35–11 : 55.바닥이 곱다고 뜨거운 태양열까지 없애주지는 못했나보다.앞서가던 집사람이 스스럼없이‘해송펜션’으로 올라가버린다.더 이상은 무리라면서 잠시 쉬어가자는 것이다.덕분에 우린 다른 일행들과 함께 막걸리 잔을 나누며20분 정도 푹 쉬어 갈 수 있었다.
▼이 일대의 갯벌은 장벌어촌계 및 개인 소유의 양식장이라고 한다.그러니 펜션손님이나 관광객들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조개를 채취해야 한단다.
▼11 : 55.다시 길을 나선다.모래사장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그렇다고 못 견딜 정도로 지루하지는 않았다.조개를 캐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고,바지락·동죽·굴·고동 등 그들이 거둔 수확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차고도 넘쳤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국물이 시원한 바지락,구우면 더욱 맛있는 모시조개,뽀얀 속살이 쫄깃한 돌조개 등 각양각색의 조개가 잘 잡힌다고 했다.하지만 서천 갯벌체험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맛조개 잡기.호미로 흙을 파낸 뒤 조개를 줍는 것과 달리 송송 뚫린 갯벌 구멍 안에 소금을 뿌리면 맛이 쏙 튀어나온다.
▼맛조개 잡이는 삽과 소금만 있으면 충분하다.펜션에서 장비를 빌려주고,잡는 방법도 간단해서 아이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다.먼저 삽으로 개흙을 살짝 걷어내고 구멍에 소금을 한 움큼씩 뿌려놓으면 소금의 짠 기운을 견디지 못한 맛이 마치 안테나를 올려 갯벌 위를 탐색하듯 고개를 살짝 내민다.이때 맛을 억지로 잡아 빼는 것은 금물.잘못하면 끊어지기 때문에 스스로 튀어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반 이상 올라왔을 때 재빨리 낚아채야 한다.
▼어!모래사장이 거칠어졌다.엊그제 지나간 태풍‘종다리’가 남긴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12 : 10.해변은 배후 숲이 계속해서 따라온다.울창한 송림이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이룬다.앞서가던 집사람이 또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그만큼 그늘이 절실했다는 얘기일 것이다.하긴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그것도 오뉴월 뙤약볕 아래서 모래사장을 걷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숲에는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었다.캠핑 사이트도 눈에 띈다. ‘해오름관광농원’에서 만들어놓은 부대시설이다.철새나그네길(3코스:해오름관광농원→다사항)걷기 여행자들이 기점으로 삼는 곳이기도 하다.
▼12 : 16.그 끝에는‘해오름 모텔’이 있었다.서해의 푸른 경관을 두 눈에 담으며 잠들 수 있으니 하룻밤 머물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하지만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12 : 19.길이 끊겨있어 다시 해변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한참이나 더 모래사장을 걸어야만 했다.
▼12 : 24.드디어 도로(공암남촌길)로 올라섰다.이후부터는 방파제의 축대 위를 걷는다.축대의 높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음주 보행을 삼가야 하는 구간이다.하나 더.이 일대는 긴 벌판이란 뜻의‘장벌’로 불리기도 한다.벌판이 하도 길어 가다가 쉬어갔다고 해서‘쉬엄장벌’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12 : 29.해양재난구조대 앞에서는 도로 오른편으로 들어붙는다.널찍하니 길이 나있었기 때문이다.
▼12 : 30.서도초등학교.서해바다를 뜨락 삼았으니 입지조건으로는 이만한 곳도 없을 듯 싶다.하지만 이번 종다리 태풍 때만 해도 학교 앞 도로가 통제되는 등,기상이변 때마다 비상이 걸린다니 세상 일이란 마냥 좋을 수만은 없나보다.
▼12 : 35. ‘신바람 난 찐빵·만두집’앞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남촌마을’이다.법정 동리인‘도둔리(都屯里, ’군사가 주둔하던 곶‘에서 유래된 지명)’에 속한 행정부락 중 하나로‘도둔리’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남촌마을 골목.장방형의 마을을 남북으로 짧게 관통한다.
▼요즘은 민박도 월 단위로 내주는 모양이다.하긴 작년 코카서스3국을 여행하면서 들른 조지아에서는 주민들이 한 달이 아니라 일 년 살기를 권하기도 했었다.내가 수령하는 연금이면 호화롭지는 않아도 여유롭게 주변 나라들까지 모두 둘러볼 수 있다면서 말이다.
▼12 : 37.골목을 빠져나와‘서면로’를 횡단한다.이어서 도둔리의 또 다른 행정부락인‘공정마을(7리)’로 들어선다.마을에는 노인정(마을회관)말고도‘커뮤니티센터’가 따로 지어져 있었다.그런데‘춘장대역’이란 이름표를 달았다.맞다.저곳에는 서천화력선(간치~동백정)의‘춘장대역(春長臺驛)’이 있었다.영등포역에서 출발하는 관광열차(통통통 뮤직카페트레인)가 이곳까지 운행하기도 했으나, 2018년 서천화력선이 폐지되면서2020년 춘장대역 커뮤니티센터로 변신했다.
▼공정마을 뒤 언덕을 넘으면‘요포마을(10리)’이다.참고로 도둔리는1리 장벌, 2리 남촌, 3리 동리, 4리 아파트촌, 5리 중리, 6리 요치, 7리 정동, 8리 공암, 9리 홍원, 10리 요포 등10개의 행정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길가 화단에‘설악초(雪嶽草)’가 화사하다.회녹색의 잎이 나는데 가장자리가 흰색 테두리를 친 듯 하얗다.그런데 난생 처음 본 꽃마저 온통 하얀 게 아닌가. ‘설악초(snow-on-the-mountain)’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란다.
▼길은 이제‘홍원항’으로 이어진다.서면에서도 제일 서단에 위치한 어촌마을로,옛날에는‘탄포’라 불리었는데, 70년대 공정마을에서 분구하여 행정구역상‘홍원리(도둔9리)’가 되었다.이쯤에서 팁 하나. ‘요포 마을회관’을 지나면 두 곳에서 길이 오른쪽으로 나뉜다.중간 기점인 홍원항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곧장 오른쪽으로 가면 될 일이다.이 경우2km정도를 단축하게 된다.
▼12 : 59. ‘홍원마을(이정표:종점2.4km/시점9.3km)’에 이른다.바닷가 마을이라서90%가 어업에 종사하고 어선만도60척에 이른단다.그래선지 마을에서 열리는‘풍어제’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고 있었다.음력1월7일에는 마을주민2백여 명이 참여하여 마을의 안녕과 어민들의 안전사고 및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단다.
▼‘서천 지명 탄생600주년’기념 조형물. 1413년(태종13)에 서천군으로 개칭되었는데,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모양이다.참고로 서천은 마한시대의 비미국(卑彌國),백제의 설림군(舌林郡:서천)·마산현(馬山縣:한산)·비중현(比衆縣:비인),통일신라(西林郡·嘉林郡),고려(知西州使·知韓州使)등을 거쳐 조선 태종 때‘서천군’이 되었다.그러다1913년 서천군·한산군·비인군이 합쳐져 현재의 서천군이 된다.
▼13 : 02. ‘홍원항’은 서해랑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었다. 1940년경 중국·일본 어선4-5척이 갈치·조기 등을 싣고 입항하면서 어항이 형성되었는데,그 후 꾸준히 늘면서 어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성어기에는 하루150여척이 입·출항한다니 어업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고 보면 되겠다.
▼물양장에서는‘홍원항 자연산 전어·꽃게 축제(8.24-9.8)’가 한창이었다.참고로 홍원항 근해에서는 전어·농어·꽃게 등이 많이 잡힌다고 했다.특산물로는 앞바다에서 잡힌 멸치로 담근’액젓‘이 꼽힌단다. ’잡어 젓갈‘도 하나쯤 챙겨갈 만하다고 했다.
▼언론에서는 맨손 전어잡기 체험과 홍원항 보물찾기,수산물 깜짝경매,홍원항 수산물장터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몽골텐트도 엄청나게 많이 쳐져 있다.하지만 전체적으로 썰렁한 풍경이었다.비어있는 텐트가 보이는가 하면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전어회와 전어무침 등을 파는 저 음식코너가 그 썰렁함을 대변한다고 보면 되겠다. 50평도 더 되어 보이는 널찍한 매장에 손님이 한 명도 없는 것이다.아이스크림을 사려고 들어간 편의점 주인장은 음식을 식당에서 먹지 왜 광장에서 먹겠느냐며 에둘러 얘기했지만 말이다.
▼뜨거운 여름날,사람들은 에어컨도 없는 노점보다는 초대가수의 열창에 더 이끌렸던 모양이다.무대 앞50석쯤 되는 객석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차있었다.
▼포구는 꽤 번화했다.펜션이나 민박 등의 숙박업소와 횟집·식당들이 웬만한 도시의 번화가 못지않게 늘어서 있다.맞다.주말이면 외지에서 수많은 차량들이 포구로 들어오며,성수기에는 그 숫자가5백여 대도 더 넘는다고 했다.
▼13 : 16.축제 구경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잔디광장(주차장이 들어있다)을 왼쪽에 끼고 나있는‘요포길’을 따라 북·동진한다.
▼13 : 23.마리나방파제 못미처 삼거리(이정표:종점1.9km/시점9.8km)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간다.
▼13 : 27.고개 위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왼쪽으로 간다.길은 아직도‘요포길’이다. ‘파도소리 카페’와‘바다내음 캠핑장’등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오롯이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조망의 명소들이 들어서 있는 구간이다.
▼‘꽃범의 꼬리’가 길가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났다.꽃잎이 호랑이가 크게 입을 벌린 것 같은데다,꽃대가 기다란 범의 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그렇다고 호랑이처럼 무섭지는 않고 오히려 화사한 분홍빛이 달콤한 입맞춤을 하고 싶게 만든다.꽃말은‘청춘’, ‘젊은 날의 회상’이다.
▼고개를 넘는 도중 서해바다 쪽으로 시야가 트인다.그런데 언덕 아래로 길이 나있는가 하면,바다에는 산책용 다리까지 놓여있는 게 아닌가.그렇다면 아까 서해랑길이 방향을 꺾던 삼거리(마리나방파제 입구)에서 탐방로를 연결시키는 방법은 없었을까?그것도 아니라면 이쯤에서라도 바닷가로 내려가도록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개를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춘장대 해변’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동리(‘도둔고지’의 동쪽)와 중리(‘도둔고지’의 중앙),요치 등이 밀집해 제법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참고로‘도둔리’는 신라시대 서림군의 비비현에 속하면서 마을이 시작됐다.하지만 오랑캐들이 잦은 침범으로 고생깨나 했단다.조선 세종 때는 만호(萬戶)김성길이 아들 윤(倫)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왜적의 배50여척과 싸우다 전사하기도 했다.이곳에 바다로 쳐들어오는 오랑캐를 무찌르는 관방(官房)을 두었던 이유이다.
▼13 : 41.막바지에 이른 서해랑길은 춘장대 해변을 따라 북진한다.이 구간을 걷는 방법은 두 가지다.바닷가로 내려서서 모래사장을 걸을 수도 있고,우리처럼 해안 산책로를 따라가도 된다.
▼안전지킴이용 전망대가 막혀있는 걸 보면 해수욕 시즌은 이미 마감되었나 보다.
▼1.5km나 되는 긴 백사장을 자랑하는‘춘장대해수욕장’은1.5도의 완만한 경사와 얕은 수심,잔잔한 파도 등 해수욕을 즐기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알려진다.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자연학습장8선에 꼽히기도 했다. 1978년 서천화력발전소 건설로 동백정해수욕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서면 도둔리 북서쪽 토지를 개발해 새로운 해수욕장을 조성했는데,그곳이 오늘날 춘장대해수욕장이다.춘장대란 이름은 이때 토지 문제를 너그럽게 해결해준 땅 주인의 호‘춘장(春長)’에서 따왔다고 한다.
▼춘장대 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낙조’라고 했다.해무가 잦지 않은 여름이면 횃불처럼 타오르는 해넘이를 볼 수 있단다.거기다 먼 바다에서 야간 조업을 하는 고깃배라도 지나갈라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아름다운 풍경화가 그려진다고 한다.
▼13 : 50.캠핑사이트와 평상(대여를 하는 듯)이 늘어선 해안길을 따르다보면‘중앙광장’이 나온다.이곳에는 네덜란드에서나 볼 법한 초대형 풍차가 두 대나 세워져 있다.그것도 날개까지 돌린다.탐방객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해변에 기념촬영용‘문자 조형물’을 설치해 인생샷 한 장쯤 건질 수 있도록 했다.
▼13 : 56.중앙광장에서 마을 쪽으로 한 브럭 더 걷다가.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춘장대길8번길’을 따른다.이어서150m쯤 더 걸으면‘중앙솔밭·백일 캠핑장’의 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는 서해랑길(보령59코스)안내도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오늘은3시간40분을 걸었다.앱은14.46km를 찍고 있다.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정규코스보다3km나 더 걸었나 보다.
▼하버드대학교에서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의 인생 궤적을 추적하며‘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를 연구했다고 한다.그리고 그 결과를‘행복하고 건강한 삶의 원천은 바로 좋은 인간관계다.외로움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로 요약했다.그렇다면 우리 부부는 행복하다 할 수 있겠다.하루24시간도 부족하다며 항시 붙어 다니니 말이다.
▼오늘은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사양하고 맛집을 찾았다.춘장대 해변은 갯벌에서 잡은 조개를 이용한 조개구이와 해물칼국수가 유명하다.하지만 우리 부부는‘너 한쌈 나 한쌈’에 들어가 메인 메뉴인 쌈밥을 먹었다.맛집 검색에서 유일하게5점 만점을 받은 집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 평은 틀림이 없었다.맛도 맛이지만 주인장의 친절한 서비스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 했다.
세부 일정: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①코카서스(Caucasus)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캅카스(Kavkaz)’라 부른다.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뻔한 코스와 일정,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아르메니아(Armenia) :인구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구소련의 해체로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③아자트계곡 주상절리(Azat Valley-columnar joint) :예레반에서 동쪽으로23km쯤 떨어져 있는‘가르니 마을’.이 마을 바로 아래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아자트(또는 가르니)협곡’이 있다.골짜기를 따라 현무암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늘어섰는데,중력에 맞서 매달린 기둥이 오르간을 닮았다고 해서‘현무암 오르간’으로도 불린다.여기에 협곡의 물줄기가 보내주는‘사운드트랙’을 보태면 협곡은‘돌의 교향곡(Symphony of stone)’으로 승화된단다.
▼버스가 멈춘‘가르니 마을’에서 주상절리가 있는‘아자트계곡’까지는 사륜구동차로 이동했다.가는 길이 좁은데다 구불거리기까지 해서 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차를 바꿔 타는 것으로도 모자라 돈까지 따로 내야하는 불이익이 따르지만,이를 생계수단으로 살아가는 현지인들도 있으니 당국으로서는 길을 넓히려고 서두를 일은 없겠다.
▼수도인 예레반에서 가깝기 때문에 당일치기 투어가 가능하다. 7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게하르트 수도원’과 이 협곡의 절벽위에 걸터앉은‘가르니 신전’을 한데 묶어 투어를 진행하는 게 보통이다.
▼‘아자트 계곡(Azat Valley)’으로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양옆이 거대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골짜기,즉 협곡(峽谷)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멀리서 봐도 그 암벽이 주상절리로 이루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체력에 자신이 없거나,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둘러보고 싶은 사람들은 익스프레스라고 하는 전동차를 타면 된다.
▼말을 타고 돌아보는 방법도 있다.물론 최소한의 균형감각은 필요하겠지만.
▼굽이진 계곡길을 잠시 내려가면 주상절리 지대가 펼쳐진다.주상절리(柱狀節理)는 마그마의 냉각과 응고에 따른 부피 수축에 의해 생기는 다각형의 돌기둥이다.그나저나,여러 곳에서 주상절리를 만났던 적이 있지만 아자트(또는 가르니)협곡에 들어서는 순간 그 위용과 규모에 할 말을 잊고 만다.하긴 세계 최대 규모라니 어련하겠는가.
▼와!여행자들은 너나없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나 또한 다를 게 없었다.제주도 중문이나 서귀포에서 경이롭게 바라보던 돌의 향연.그 주상절리의 최대치를 이곳 아자트 계곡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절리(節理, joint)’란 암석에 나타나는 쪼개짐 현상이다.이게 주상(柱狀),즉 기둥 모양으로 쪼개지면‘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가 된다.이러한 현상은 현무암질 용암이 급하게 굳을 경우 부피가 줄어들면서 같은 간격의 수축 중심점을 향해 수축이 이루어지는데,이때 가장 효율적인 육각형 형태로 갈라지는 현상이다.아니 육각형으로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지만 다른 형태도 있다.
▼눈앞에 있는 다각형 돌기둥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자 점점 허리가 젖혀지더니 현기증이 날 듯했다.작은 계곡에 거대한 절경을 만들어낸 자연의 경이에 감탄만 나올 뿐이다.맞다.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는 규모나 크기,다양함에서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위용이 압도적이었다.
▼주상절리의 기둥모양 쪼개짐은 잘 부서지기 때문에 절벽 형태로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제주도의 정방폭포도 그 때문에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폭포가 되었다고 한다.하지만 판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절벽을 따라 다각형 돌기둥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그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제주의 중문·대포 해안 주상절리대가 전체 길이3.5km에 기둥 높이 최대20m인데 비해 여기는 길이가5배 이상이고 높이도2.5배 이상이나 된단다.
▼주상절리는 대체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건조한 기후를 꼽는다.나무들이 잘 자라지 않은 덕분에 바위의 균열을 막을 수 있었다나?
▼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는‘돌들의 교향곡(Symphony of Stones)’으로 불리기도 한다.주상절리대의 현무암 기둥들이 마치 파이프 오르간처럼 생겼기 때문이다.낭만파 글쟁이들은 이‘돌의 교향곡’이 협곡을 흐르는 아자트 강의 물소리가 내는‘물의 교향곡’과 앙상블을 이룬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 오르간은 50m도 넘는 거대한 대칭형 육각형 또는 오각형 현무암 기둥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게 명장이 만든 조각품처럼 하나하나가 정교하기 이를 데가 없다.
▼동굴 형태를 이룬 곳도 있다.덮개로 가려져있어 그 아래서 제비들이 집을 짓고 살기도 한다.또 주상절리 사이로 물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요건 벌집을 쏙 빼다 닮았다.아래 부분이 떨어져나간 것일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은 어느 하나 경이롭지 않은 게 없다.문득‘외계의 외딴 행성을 탐험하고 싶다면 굳이 태양계의 행성들로 여행할 필요가 없다.’던 모 일간지의 르포(reportage)기사가 떠오른다.맞다.창조주가 선사해준 주상절리가 마치 외계의 어느 행성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다.
▼용암이 식을 때 수축되면서 갈라지게 되는데,이때 아짜트 계곡을 흐르는 충분한 물이 있어,용암이 빠르게 냉각될 수 있었다고 한다.그로인해 저처럼 멋진 주상절리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짜트계곡의 주상절리는 세계 최대 규모라고 했다.그게 생김새까지 경이롭다.고개라도 들라치면 신비롭기 짝이 없는 풍경이 광범위하게 펼쳐진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돌기둥들이 직각과 직선을 이룬다.그 대단한 규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생김새만은 우리나라의 것이 더 뛰어나지 않나 싶다.그동안 세상 곳곳을 돌아다녀봤지만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경주(양남)의 주상절리보다 더 예쁜 것을 보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반대편,그러니까‘아자트 강(Azat river)’건너 절벽에도 주상절리가 만들어져 있었다.하지만 이쪽보다 상대적으로 덜 발달되어 있다.
▼주상절리는 단면이 육각형으로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이는 용암의 표면에 냉각·수축의 중심이 되는 점들이 고르게 분포할 때,각 수축 중심점들을 중심으로 수축이 균등하게 일어나면서 형성되기 때문이란다.하지만 사각형이나 오각형 등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하나 더.단면의 크기는 작은 것은 수 센티미터에서 크게는 수 미터에 이르기도 한다.기둥의 길이도 수 미터에서 길게는 수십·수백 미터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 주상절리는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모양도 기기묘묘하다. 파이프 오르간처럼 돌기둥이 상하로 길게 이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말뚝처럼 땅에 박힌 것도 있다. 심지어는 물결처럼 일렁이는 것도 눈에 띈다. 사람들이 ‘돌들의 향연’이라며 탄성을 터뜨리는 이유이다.
▼눈이 호사를 누리며 내려가길20분 여.오른쪽으로 오솔길이 하나 갈려나간다. ‘가르니신전’으로 올라가는 길이라는데,메인 탐방로도 이곳부터 거칠어지고 있었다.가이드 말로는 주상절리는 이후로도 계속된다고 했다.하지만 격이 떨어진다는 귀띔도 있었다.이쯤에서 발길을 돌려야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그곳에서 석간수를 만났다.아르메니아나 조지아에서는 식수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하지만 해외여행을 오래 해오면서 습관화되어버린‘물에 대한 의심’은 마셔보는 걸 망설이게 만든다.그러자 현장학습이라도 나온 듯한 학생들이 시범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덕분에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생수,그것도 감로수에 가까운 석간수를 마셔볼 수 있었다.
▼누군가는 아르메니아에서 꼭 먹어볼 음식으로 가재와 철갑상어를 꼽고 있었다.특히 철갑상어는 캐비어가 아닌 그릴에 구운 육질이 제공된다고도 했다.그런데 그 철갑상어를 연상시키는 물고기가 길가 둠벙에서 놀고 있는 게 아닌가.그것도 등치까지 제법 큰 놈이 말이다.
▼점심상이 차려진‘가르니 마을’의 식당에서는‘라바쉬’를 굽는 시연을 해주고 있었다.이스트를 넣지 않은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구워 만드는 아르메니아의 전통 빵이다.밀가루·물·소금을 혼합한 반죽을 나무로 만든 밀대로 얇고 평평하게 밀어 만든 후 뜨겁게 달구어진 화덕이나 오븐에 넣어30초에서1분정도 굽는다.반죽이 얇기 때문에 오븐에 넣는 과정에서 찢어지지 않도록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구운 직후에는 부드럽지만 시간이 지나면 수분이 증발하여 딱딱해진다.건조된 라바쉬는 장기적으로6개월까지 저장이 가능하며 다시 먹을 때는 물을 뿌려 부드럽게 만들거나 깨끗한 헝겊을 물에 적셔 건조된 라바쉬를 싸서 촉촉해지도록 한 후 먹는다.장기 저장이 가능하여 가정에서 한 번에 대량으로 구운 후 저장해 놓고 먹기도 한단다.
특징 : 내포(內浦)는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충남 서북부의 비슷한 문화와 의식을 공유하는 지역을 총칭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는 가야산 전후와 오서산 이북의 열 개 정도의 고을’이라며,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라고 썼다. 산이 험하지 않고 평야가 넓으며 바다가 있어 농수산물이 풍부하고, 느리고 여유로운 민도가 특징이며, 예술과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이번 여정은 그런 맛과 멋을 지닌 내포고을(서산·예산)의 4개 문화유적과 최근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예산전통시장을 방문한다.
▼ 여행의 시작은 ‘개심사’(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내려와 647번 지방도를 타고 해미·홍성방면으로 7km쯤 내려온다. ‘운신초등학교(운산면 신창리)’를 지나자마자 좌회전, 개심사로를 따라 3km쯤 들어오면 ‘개심사 주차장’에 이른다. 차에서 내려 사하촌의 농·특산물 판매장을 기웃거리다보면 개심사 일주문이 반긴다. ‘상왕산 개심사(象王山開心寺)’라는 저 편액은 ‘여원구’선생이 썼나보다. ‘구당제(丘堂題)’라는 그의 호가 적힌 걸 보면 말이다.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일주문이 세워지기 전,개심사의 문지기 노릇을 묵묵히 수행해 왔다는 노거수이다.개심사는 그동안 저 느티나무를 경계로 성(聖)과 속(俗)이 나뉘어 왔다.길은 자연스레 지역주민들이 농·특산물을 파는 속세를 떠나 피안(彼岸)‘의 세계로 들어선다.
▼널찍한 포장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길이 둘로 나뉜다.오른쪽으로 휘어져나가는 자동차 길을 제켜두고 돌계단이 산자락을 향해 일직선으로 파고든다.그 초입, ‘세심동(洗心洞)’이라고 쓰인 빗돌이 눈길을 끈다.맞다.누군가는 개심사를 일러 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절이라고 했다.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이 정연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면서,세심동(洗心洞)에서 마음을 씻고,안양루(安養樓)에서 마음을 연 다음,심검당(尋劍堂)에서 지혜를 구해보라고 했다.일련의 마음 수련이 파노라마처럼 연결되는 사찰이라면서 말이다.
▼길은 꽤 가파르게 이어진다.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다.부드럽게 휘어지면서 약간의 숨참만으로 절까지 오를 수 있도록 했다.아무튼이 계절은 눈을 어디에 두어도 녹색의 잔치다.심장까지 푸르게 물들 것 같다.그러니 최대한 속도를 늦추고 대신 숨은 크게 들이쉬면서 올라가 보자.솔향이 코끝을 간질이며 기분이 상쾌해질 것이다.
▼이곳은‘세심동(洗心洞)’.마음을 씻으면서 걷는 구간이다.그러니 너무 채근하지 말고 느긋하게 걸어보자.쉬엄쉬엄 걷다가 그마저도 힘들면 잠시 쉬어가면 그만이다.
▼그렇게20분 남짓 올라갔을까‘안양루(安養樓, ‘누각’이 아니지만‘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고 해서‘樓’가 되었다 보다)’가 중생을 맞는다.말 그대로 안양(극락)으로 들어서는 과정이니,이 누각을 지나면 바로 극락 세상이 펼쳐진다는 의미다.하지만 극락으로 들어가는 길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상당히 높은 계간을 두 번이나 지난 다음,해탈문(解脫門)을 통과한 다음에야‘대웅보전(大雄寶殿)’에 이르게 된다.하나 더.안양루는‘상왕산 개심사’라는 또 하나의 편액을 달고 있었다.해강(海岡)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썼다는데,무거울 대로 무겁고,농익을 대로 농익었고,깊을 대로 깊다는 평을 듣는 조선 말의 명필이다.
▼개심사 배치도.연못을 지나면 범종각,해탈문,안양루,심검당,대웅보전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그밖에도 명부전,무량수각,독선당,산신각 등 많은 전각들을 보유하고 있다.하지만 터가 좁아선지 구석구석 들여다본다고 왔다 갔다 해 보았자20분이면 족했다.
▼초입의 장방형 연못은 백제정원 양식이라고 했다.개심사의 역사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증거라나?참!이 연못은‘경호(鏡湖)’로 불린다고도 했다.마음을 열고 자신을 연못에 비춰보라는 얘기일 것이다.개심사(開心寺)‘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하나 더.이 연못은 상왕산(象王山,가야산 줄기)의 코끼리(불교에서는 신성한 동물로 섬긴다)가 먹을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연못에는 부엽성(浮葉性)연잎으로 한가득이다.듬성듬성 노랑꽃도 피워내고 있다.생김새로 보아‘남개연’으로 여겨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아무튼 연꽃은 절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꽃이다.진흙탕 속에서 고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물 밖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을 구원한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꽃으로 여겨지며,나아가 어둠을 밝히는 빛과 극락정토를 상징한다.
▼폭이 좁고 긴 연못 중간에는 통나무다리 하나가 놓여있다.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경내로 들 수 있지만,일부러 걸음 한 이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이 풍경에 반해 다리를 건너게 된다.그러면서 양보와 배려를 배운다.최근 큰 나무 두 개를 겹쳐놓았지만,교차 통행을 하기는 여전히 좁기 때문이다.한쪽에서 먼저 올라서면 반대쪽에서는 그 사람이 다 건너오기까지 기다려야만 한다.그러니 양보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연못가에서 둥지를 튼‘배롱나무’는구부러지고 매끄러운 줄기에서새빨간 꽃망울을 활짝 열어 제켰다.개심사의 자랑거리이기도 한 이 나무는41cm나 되는 굵기에 높이도6m나 된단다. ‘보호수’답게 나이도150살을 훌쩍 넘겼다.
▼해탈문을 지나면 불국토라 할 수 있는 금당(金堂)이다.개심사(開心寺)는 뜻 그대로‘마음을 여는 절’이다.백제가 망하기(660년)불과6년 전인 의자왕14년,서기654년에 창건되었으니 말 그대로 천년 고찰이다.당시 절을 창건한 해감 스님은 절의 이름을 개원사(開元寺)로 했으나 고려 때인1350년에 처능 스님이 중건하면서 오늘의 이름인 개심사로 개칭했다고 한다.지금의 모습은1955년 전면 보수 공사의 결과물이다.
▼1484년 건립된 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 제143호)은 조선 초 건물이 갖는 정갈함의 표상과도 같다.다포식이지만 쇠서를 강하게 빼지 않아 장식적이지 않고,맞배지붕을 하고 있어 단정하다.안내판은 주심포계와 다포계가 절충되어 있는 걸 특징으로 꼽고 있었다.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부재를 공포라 하는데,이러한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것을‘주심포계’,기둥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걸‘다포계’라 한다.참!안에 모셔놓은‘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도 보물(제1619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사진촬영은 금하고 있었다.
▼대웅전의 측문 섬돌.기와 조각에 적힌‘이곳에 신발을 올려놓지 마세요’라는 문구에 미소부터 짓는다.신발에서 이물질이 떨어질 때마다 물걸레질을 해야만 했을 스님의 애교스런 넋두리가 아닐까?그런데 하나가 더 있다.섬돌에 덧대서 만든 디딤판에도 같은 내용을 적어놓았다.문제는 이 둘이 겹쳐지면서 경고판 같은 썩 편치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결과?귀여운 넋두리가 일그러진 불평으로 변해버렸다.
▼오층석탑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중정은 대웅보전과 안양루,심검당,무량수각이 둘러싸고 있다.그중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심검당(尋劍堂)은 대웅보전을 전면에 두고 왼쪽에 있다.그런데 높은 기단과 풍요로운 다포,화려한 단청으로 이루어진 대웅전에 비해 심검당은 스산할 정도로 검박(儉朴)했다.기거하고 있는 승려들의 마음을 나타낸다고나 할까?심검당의 검이 마지막 무명(無明)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의 혜명(慧明)을 증득(證得)하게 하는 검(劍)을 상징한다니 말이다.
▼심검당의 검박함은 아래쪽에 덧댄 툇간에서 더욱 또렷해진다.숲에서 자라난 뒤틀린 나무를 그대로 기둥과 서까래로 세우고 얹은 탓에 집의 모양까지 기우뚱하다.격벽조차 제멋대로인 판재를 이어 붙였다.이렇듯 개심사의 건물들 대부분(해탈문·범종각·심검당·요사 등)은 자연 그대로이다.각 가람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굽어있고 배가 불룩하며 위아래의 굵기가 다르다.매끈하지 않고,참 못생겼다.나무를 전혀 손질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대로 갖다 쓴 탓이다.
▼요사채(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오른편에 있는 명부전(冥府殿)은 겹벚꽃 맞이 장소로 알려진다.오래된 돌담 아래로 탐스러운 가지를 늘어뜨린 모습이 세월을 머금은 절과 잘 어울린다.
▼개심사는 붉은색·분홍색·흰색 등 여러 색깔의 겹벚꽃으로 유명하다.꽃잎이 쌓이고 쌓여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만드는 겹벚꽃(만첩개벚)은4월 중순부터 핀다.이곳 개심사가 봄 여행지로 꼽히는 이유이다.하지만 개심사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명부전’옆에서 자라고 있는‘청벚꽃’이다.푸른빛이 감도는 겹벚꽃은 오로지 개심사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절간을 빠져나오다‘서해랑길’표식이 붙어있는 이정표를 만났다.맞다.이곳 개심사는 서해랑길의 지선인‘64-3’코스가 지나간다.우리부부가 서해랑을 걸어온지도 벌써3년째,다음 주말에는58코스(서천 지역)를 걷게 된다.그러니 올 겨울쯤이면 이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그때 미처 보지 못한 문화재를 빠짐없이 둘러봤으면 좋겠다.문화절정기인 영·정조 시대에 제작되었다는 영산화괘불탱(보물 제1264호)와 오방제위도·사진사자도(보물 제1265호),제석·범천도 및 팔금강·사위 보살도(보물 제1766호),달마대사관심론 목판(보물 제1915로)등이다.특별한 날에만 일반에게 공개된다고는 하지만...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신창저수지와 서산 한우목장을 눈에 담다보면 버스는 어느덧‘용현리(개심사와 같은 운산면)’에 이른다.두 번째 방문지인‘보원사지(普願寺址,사적 제316호)’에 도착한 것이다.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보원사의 옛터로,축구장의2배도 더 되는 너른 부지에 삼국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축조된 유물들이 다섯 기나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안내판은 보원사가 백제시대에 지어졌음을 알려준다. 100개의 암자와1천여 명의 승려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하지만유교국가인 조선이 들어서면서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그 자리에 민가와 논밭이 들어섰다가 다시 절터로 복원되었으나,석물들만 남아 그 옛날의 자취와 영광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가야산 옛절터 이야기’라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가야산에 숨겨진 옛 절터를 찾아 그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어가며 산행을 즐길 수 있는 등산로라고 한다.산행을 하면서 불교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다나?
▼첫 만남은‘석조(石槽,보물 제102호)’이다.치석수법(治石手法)이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현재 남아있는 석조 중 국내에서 가장 크다(길이3.5m,너비1.8m,높이0.9m)고 한다.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케 해주는 유물이라 하겠다.이 석조 안의 물을 떠서1000여 명의 스님들이 먹을 밥을 했고,그 쌀뜨물이 용현 계곡을 뿌옇게 만들었다나?특히 절의 행사가 있는 날이면 그 물이 홍수가 날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밋밋한 장방형으로 파낸 이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로 아래편에 구멍을 내어 물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다.안쪽과 위쪽을 정교하게 다듬은 반면 밖은 거친 것으로 보아 땅속에 묻어두고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나?내 눈에는 오십보백보로 보였지만...
▼석조 근처에는 높이4.2m의‘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103로)’가 있다.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자리도 옮기지 않고 제자리라고 한다.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바깥쪽에만 양편 가장자리에 돌대를 돋을새김 하였다.참고로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작은 개울을 건너면 길은‘오층석탑(五層石塔,보물 제104호)’으로 이어진다.백제와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으로, 2중으로 만들어진 기단부 위에5층의 탑신을 형성했는데 안정감이 있고 수려하다. 1968년과2003년에 해체·보수작업을 했는데, 1968년 해체 때 사리구와 함께 납석제 소탑(작은 모형탑)이 나왔다고 한다.
▼석탑의 상하층 기단부에는 각각 팔부중상(부처의 법을 지키는8명의 선신)과 사자장이 새겨져 있다.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많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하나하나 꼼꼼히 보면 어느새 윤곽이 나타나고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진다.참!안내판에 탑의 구조와 신상(神像)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으니 비교해가며 살펴보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 싶다.
▼오층석탑 뒤에는‘금당지(金堂址)’가 있었다.절의 본존불을 모시는 건물,즉 대웅전 같은 본당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하지만 놓여있는 초석만으로는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없었다.한가운데 있는 저 좌대는 부처가 앉아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금당 터 뒤편의 축대 위에는 법인국사탑(法印國師塔,보물 제105호)‘과 법인국사탑비(法印國師塔碑,보물 제106호)가 있었다.이중 법인국사탑은 고려 초의 승려 탄문(坦文)의 승탑(僧塔:부도)인데,광종 때 왕사가 되었고 은퇴하면서 국사가 되어 이곳 보원사에서 열반한 고승이다.그러니 탄문이 입적한975년(광종26)어림에 세워졌다고 보면 되겠다.하나 더. 5m에 육박하는 부도의 온 몸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가득했다.
▼’법인국사탑비‘에는 법인국사 탄문에 대한 내력이 적혀있다고 한다.까만 대리석에 빼곡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글은 김정언이 짓고,글씨는 한윤이 썼다고 한다.참고로 고려태조 왕건은 왕후가 임신하자 탄문에게 백일기도를 주문했고, 4대 왕인 광종을 낳았다.과거시험과 노비안검법을 매개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왕이다.왕건에 이어 혜종·정종·광종까지4명의 왕이 모두 탄문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고,국사가 되어 가야산 자락의 보원사로 옮겨갈 때는 광종이 왕후와 백관을 데리고 전송하였으며 어의를 보내 병을 살피게 했을 정도란다.탄문은 다음해3월에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으니 그 때 나이75세다.광종 또한 탄문이 죽은 지2개월 후에 죽으니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다.
▼탑비의 이수(螭首)는 사방에서 용이 모여드는 모양새를 취한다.그런데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가 거북이가 아니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라는 게 특이하다.하지만 몸통은 거북이가 분명했다.그것도 꼬리까지 달린...
▼탑비 뒤쪽으로 가니 숲속으로 난 오솔길이 보이고,초입에 서해랑길 표식이 붙은 이정표(개심사1.7km/마애여래삼존상1.2km)가 세워져 있었다.개심사에서 상왕산을 넘어 이곳으로 내려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라메길’안내판도 눈에 띈다.현재 서산시에는‘아라메길’이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아라는 백제 고유어로 바다라는 뜻이다.그러니 바다와 산을 걷는 길이란 뜻이 된다.고대와 중세 때 이 바닷길과 산길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이 들어오고 나갔다.이러한 사실은 용현리 마애삼존불,보원사지,백화산 마애삼존불(태안)등이 말해준다.또한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 가기 전 해골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은 곳도 이 지역 이야기다.
▼유적지를 모두 둘러보고 나서야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작은 절간이 눈에 들어왔다.보원사 복원을 위한 임시법당이란다.대한불교조계종에서 보원사를 복원한다며 사적지 내200평 정도의 땅을 기증받아‘보원사’를 개설하고 제7교구의 말사로 등록했다나?하지만 난 유적지에 사찰을 짓고 중들이 관리하는 것은 절대 반대다.언젠가는 또 문화재관람료라는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그동안30년 가까이 등산을 해오면서 절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은 채 입장료를 강탈당한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절간 옆 안내판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보원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여래입상(국립부여박물관 소장)과 고려시대에 제작된 철불좌상 등이 있다.이중 철불은 해외에서 열리는 전람회 때마다 출품되는 스타라고 한다.철조여래좌상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에 대한 설명도 눈에 띈다.
▼그 옆에는 와편과 석조물들이 정리되어있었다.아마 이곳을 발굴하면서 나온 듯한데 그 양이 상당하다.지난날 보원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다시 버스를 타고 아까 들와왔던 길로1km쯤 되돌아가다‘용현계곡’에서 내린다.버스정류장(마애여래삼존상)말고도 유적지의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목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용현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산림이 우거져 여름철 휴양지로 유명하다.그래선지 많은 사람들이 용현계곡을 찾아 여름철 끝자락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나무다리를 이용해 용현계곡을 건넌다.반대편 산자락으로 들어붙자 데크 탐방로가 맞는다.이쯤에서 마애삼존불을 대중들에게 알린 유홍준 교수의 글을 빌어보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삼존불과 관련된 에피소드와 함께30여 년간 서산마애불을 관리해온 노인장의 사연이 실려 있다.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선생이 보원사터를 올 때마다 동네 사람들에게 바위에 부처님 새긴 것이나,석탑이 무너진 것 등을 묻곤 했는데 어느 날 나이 많은 나무꾼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저 산 중턱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바위에 새겨져 있유.양 옆에 본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도 있는데,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 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본 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집어던질 려고 하는 게 있슈.>어느 전문가의 해석보다도 현실적이고 그럴듯한 해석이 아니겠는가.
▼잠시지만 용현계곡을 왼쪽에 끼고 올라간다.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테크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가파른 돌계단이 나타난다.하지만 길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거기다 이곳은 울창한 숲속.빛살 한 점 파고들기 힘들 정도로 숲이 우거져있다.조금 전 따가운 햇볕 아래서 고행하듯‘보원사지’를 둘러보던 것에 비하면 숫제 소풍 나왔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잠시 후‘관리사무소’에 올라선다.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는 곳으로 원할 경우‘마애여래삼존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관람시간은 제한을 두고 있었다.문화제 훼손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닐까 싶다.일부 몰지각한 광신도(어느 종교나 이런 사람들은 있다)들이 다른 종교의 문화재들을 훼손했던 게 어디 한두 번이었는가.
▼‘불이문(不二門)’을 넘어야‘마애삼존불’을 만날 수 있다.여기서‘불이’라 함은 둘이 아님을 뜻하는데,생과 사,부처와 중생 등 분별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르지 않음을 말하는 불교의 교리다.즉,불이를 깨닫고 속세로부터 벗어나(解脫),진정한 불국토에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불국토(佛國土)는 불이문을 지나서도 한참을 더 걸어야 만날 수 있다.돌계단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간다.하긴‘부처님의 나라’에 드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국보 제84호)’은 동문리(태안)마애삼존불입상(국보 제307호)과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꼽힌다.높이10m가 넘는 거대한 암벽을 깎아 만든 마애여래삼존상은 풍부한 입체감과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하다.높이2.8m의 석가여래입상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높이1.7m협시보살을 두었는데 우측의 보살은 보통의 보살입상이지만 좌측의 보살은 특이하게도 반가사유상의 형식으로 조각되었다.반가사유상은6-7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불상으로 많이 제작되었지만 마애불 중에서는 사례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화강암 암벽에 조각한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아름답기로 손꼽힌다.가운데 석가여래입상은 엄숙하면서도 넉넉한 미소로,왼쪽의 제화갈라보살입상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로,오른쪽 미륵반가사유상은 천진난만하고 꾸밈 없는 미소로 맞이한다. 80도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는 미학적 설계도 뛰어나다. 1965년에 삼존상을 보호하겠다고 보호각을 설치했는데 오히려 습기가 차고 백화현상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자2005년부터 문과 벽을 부분적으로 철거했고2006년에는 완전히 철거했단다.
▼이들 마애불의 미소는‘백제의 미소’로 불린다.불상의 미소는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자애로워 보이는‘웃상(웃는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며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간다.
▼도로로 되돌아오니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입구 주변의 주차장은 모두가 식당이나 민박집의 소유라서 차를 댈만한 곳이 없었다고 한다.덕분에 공용주차장까지500m정도를 더 걸을 수밖에 없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다.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무더운 날씨에 걷는다는 것은 재난이나 마찬가지다.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볼거리를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그중 하나가‘인바위(印巖)’,이를테면‘도장바위’이다.전설은 오랜 옛날 상왕(像王)이 이곳에다 도장(금 나와라 뚝딱 하는 요술방망이였단다)을 감춰 놓았다고 전한다.고을 수령이 이 말을 듣고 석공을 불러 큰 정으로 바위를 깨뜨리려고 하자 갑자기 운무가 모여들더니 천둥과 함께 소낙비가 내려 산천이 진동하더란다.크게 놀라 도망간 수령이 그 후에는 얼씬도 못했음은 물론이다.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강댕이미륵불’이 나온다.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모셔놓았다.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56억7000만 년이 지나 이 사바세계에 오시는 부처님이다.그래선지 이 미륵불에 기도를 드리려 찾아오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단다.인근 고풍저수지를 축조할 때 수몰지역 안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는데,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이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 고려말-조선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미륵불은 높이216cm에 어깨의 폭은65cm,두께는25cm이다.머리에 보관을 썼으며,오른팔을 위로 올려 가슴에 붙이고,왼팔은 구부려 배위에 대어 서산지방의 다른 미륵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추사 고택’.인근 고을인 예산에 위치하기 때문에 버스로30분 이상을 이동해야 한다.참!유홍준은‘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개심사를 인근의 서산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해미읍성과 함께 한나절로 답사를 마칠 수 있는 최고의 코스로 소개했다.하지만 우린 해미읍성 대신에 추사고택을 묶어보기로 했다.예산군에 소재하고 있어 조금 멀지만 점심이 예정되어 있는 예산 전통시장(예산읍 소재)으로 보면 지근거리이기 때문이다.
▼‘추사고택(秋史故宅)’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생가로,예산군(신암면)용궁리의 나지막한 언덕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집 앞은 예당평야,평야 너머로 삽교천과 무한천이 흐른다.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혼인해 용궁리 일대를 하사받고 이 집을 지었는데,당시 충청도53개 군현이 한 칸씩 비용을 분담해53칸으로 지어졌다고 전한다. 1976년 복원사업을 해 현재 안채·사랑채·사당 등34칸이 남아있다.
▼안으로 들어서면‘ㄱ’자의 사랑채가 맞는다.사랑채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ㄱ’자로 꺾이는 곳에 대청을 두고 온돌방이 남쪽에 한 칸,동쪽에 두 칸 있다.큰방이 추사가 머물던 곳이다.방안에는 추사의 글씨로 만든 큰 병풍과 보료‧서탁이 놓여 있다.
▼안채는 사랑채에 살짝 비켜서 있다.사랑채가 동향인 데 비해 안채는 남향으로 자리한‘ㅁ’자 집이다.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대갓집 형태로6칸의 대청과 두 칸의 안방,그리고 건넛방이 있고 부엌과 안대문,협문,광도 보인다.전체적으로 넓지는 않지만 이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정갈한 마음을 엿보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안채는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가 머물던 집이기도 하다.화순옹주는 김정희의 증조모다.그건 그렇고 고택은 주련 천지였다.기둥마다 하나씩 매달고 있어 눈만 들면 주련의 글씨가 성큼 다가온다.주련은 글씨마다 추사의 성품과 노력과 고난이 배어있다.그러니 하나하나 살펴보며 그의 자취를 따라가 보자.한자를 몰라도 하등 문제가 될 게 없다.하단에 글귀의 한자와 음 그리고 뜻이 적혀 있다.
▼울타리 밖에는 우물이 있었다.가문 대대로 이용해온 우물로,김정희의 출생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민규호(閔奎鎭, 1836-1856)가 쓴‘완당김공소전(阮金公小傳)’에 따르면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지24개월 만에 김정희를 낳았다고 한다.그 무렵 우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의 풀과 나무들이 모두 시들었는데,그가 태어나자마자 우물이 다시 차오르고 나무와 풀들도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우물 근처에 있는 김정희의 묘(墓).묘는 봉분도 높지 않고 석물들도 고만고만하다.하지만 범접하지 못할 기품을 갖추고 있었다.참고로 김정희의 묘에는 첫째 부인 한산이씨와 둘째 부인 예안이씨가 합장되어 있다.하나 더.유배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머물다 생을 마쳤다고 한다.죽기 전까지 계속 글을 썼는데,죽기 사흘 전에 쓴 봉은사 경판전의 현판이 마지막이었다고 전해진다.
▼고택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길은 소나무 숲과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 묘,그리고 화순옹주 홍문을 거쳐‘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으로 이어진다.
▼추사의 증조부인‘월성위 김한신의 묘(月城尉金漢藎墓)’.이 묘에는 김한신과 그의 부인인 화순옹주가 합장되어 있다.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은13세에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진다.영조가 애지중지했던 외동딸 화순옹주는13살에 동갑의 김한신과 부부의 연을 맺고25년을 살았다. 39살이 되던 해 남편이 세상을 뜨자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물 한 모금 넘기지 않은 채 지내다가 보름 만에 남편을 따라갔다고 한다.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홍문(紅門).영조의 둘째 딸이자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정면8칸,측면1칸의 열녀문이다.옹주는 동갑인 남편 월성위(1720-1758)가 세상을 떠나자 음식을 입에 대지 않다가 보름 뒤 따라 죽었다.조선 왕실 여성 중 유일하게 남편을 따라 죽은‘열녀’다.영조가 화순옹주의 집에 찾아와 미음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고 한다.영조가 부왕의 뜻을 저버렸다 하여 정려를 내리지 않았으나,조카인 정조가 고모의 사후25년인1783년 정절을 기리며 열녀문을 세웠다.
▼안에는‘묘막(墓幕)터’가 있었다. 53칸이나 될 정도로 거대했으나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주초(柱礎)만이 남아 있다.하나 더.이쯤에서 고모의 정절을 칭송하는 정조의 글도 한번쯤 음미해보자. <부부의 의리를 중히 여겨 같은 무덤에 묻히려고 결연히 뜻을 따라 죽기란 어렵지 않은가.…어찌 우리 가문의 아름다운 법도에 빛이 나지 않겠는가.…아!참으로 어질도다>
▼홍문 옆엔 백송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최근에 만들었는지 조형물의 색깔이 티끌 하나 없이 선명하다.이곳에는 여러 그루의 어린 백송이 심어져있다고 했다.세월이 가면 그 흰 등걸의 아름다움이 곁의 조각품들과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리 넓지 않은 면적이지만 추사가 남긴 서예작품을 주제로 한 조각 작품들이 꽤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추사의 글씨를 한 번 더 살필 시간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진짜 백송을 구경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더위,그것도 뙤약볕 아래서700m(왕복 거리)를 더 걷는다는 게 무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대신 추사기념관을 더 꼼꼼히 살펴보기로 했다.참고로‘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은 추사가25세 때 청나라 연경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자란 아름다운 모양이었지만,현재는 두 가지는 말라 죽고 한 가지만 남았다고 한다.
▼추사기념관.추사를 연상하기에는 어쩐지 어색해 보이는 디자인의2층 건물이 주차장 한켠에 있다.이름처럼 안에다 추사 김정희의 삶과 학문,예술의 세계를 펼쳐놓았다.추사의 작품50건, 71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단다.
▼추사 연보 및 유년기가 적힌 입구로 들어서면 추사의 학문과 업적(1전시실),제주 유배기와 만년기(2전시실),서예사 및 추사의 서예개관(3전시실),추사의 서예 작품 및 심훈家기증 유물(4전시실),영상실 등이 차례로 나온다.체험실에서는 추사 낱말 퍼즐 맞추기,틀림 그림 찾기 등도 체험해 볼 수 있다.
▼추사의 수많은 서예 작품과 기증유물을 만나 볼 수 있다.추사는 끊임없이 단련하고 타고난 천품으로 서예에 구현했다고 알려진다. <나는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추사의 다양한 서체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된다.추사는 고증학의 문호를 개설한 학자이며 문장가다.글씨는 물론이고 그림에도 뛰어나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금석학 연구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천문학·지리학·문자학·음운학에도 정통했다.
▼가슴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한학과 사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실제로 가문의 비문을 직접 짓고 쓰기까지 할 정도였다)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주장하며 졸필인 나를 줄곧 못마땅해 하셨다.이왕에 들어선 관직이니 승승장구해야 할 것이 아니냐며 말이다.그런데 추사선생이 그 원인이 책을 덜 읽어서였다고 알려준다.나도 꽤 많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해왔는데,아니었던 모양이다.
▼밖으로 나오니 세한도(歲寒圖)가 반긴다.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제자인 역관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기념관 앞 이정표.내포문화숲길은 충청남도 서북부지역에 조성된 길이315.3km의 걷기 길이다.서산시·당진시·홍성군·예산군이 역사·문화·생태적 가치가 있는 자연 친화적인4개 테마별 숲길(26코스)을 조성하였다.그중‘백제부흥군길’이 이곳을 지나가는 모양이다.나·당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역사적 의미를 갖는 지점들을 연결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기념관을 마지막으로 추사고택 투어는 끝을 맺는다.버스로 향하는데 추사선생이 뭐라도 좀 챙겨 가느냐며 이별을 아쉬워한다.참고로1819년 문과에 급제한 추사는 규장각 대제·호서안찰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는 등 승승장구했다.하지만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친다. 55세 때 윤상도 옥사에 연루돼9년에 걸친 제주도 유배생활을 했다. 65세 때는 진종조예론(眞宗弔禮論)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다시2년간 함경도 북청에 유배됐다.하지만 추사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예술로 승화시켜 추사체라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를 만들었다.스스로 불우를 딛고 불후의 작품들을 남긴 것이다.
▼추사고택의 상사화(相思花).상사화는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날 수 없는 연인에 빗대어 표현된다.그래서 꽃말도‘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됐다.그런데도 집사람은 상사화를 배경삼아 활짝 웃는다.우리 사랑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맞다.우리 부부는 하루24시간을 내내 붙어서 다닌다.상사화를 비웃는 것은 아니지만.
▼참!이왕에 왔으니 포토죤에 올라가 사진을 남겨보면 어떨까?글씨라도 써내려가다 보면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눈요기를 마쳤으니 이젠 먹거리를 찾아 나설 때다.그렇게 찾아간 예산읍은 군청 소재지다.도시계획을 새로 새운 듯 군청과 각종 행정기관은 대부분 외곽에 있었다.하지만 입소문을 탄 맛집들은 하나같이 노포,시간이 멈춘 것 같은 옛 동네에 들어앉아 있었다.
▼앗!대한민국에도 저런 시설이 있었다니. 10년쯤 전,두바이 인근을 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이때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버스정류장’에서 땀을 식히며 놀라워한 적이 있는데,이곳 예산에서 그런 냉방 버스정류장을 본 것이다.
▼우리 부부가 찾아든 곳은‘외갓집 한우 암소국밥’. 2대를 이어온 음식점이란다.안에는 백종원씨와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주인장의 사진을 내걸어 신뢰감을 더해주고,유명 연예인들의 사인지도 엄청나게 많이 붙어 있었다.맛과 양도 훌륭했었음은 물론이다.참고로 예산 국밥은 다른 지역 시장과 차별화된 맛으로 유명하다.평야와 들판,낮은 구릉이 많은 지리적 특성이 농사와 축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수도권과 활발한 수운 교류는 예산 지역의 활발한 오일장 문화를 형성했다.오가는 보부상들은 빠르게 먹을 식사를 찾았고 그 결과 자연스레 국밥 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백종원 거리’로 불리며 관심을 모은바 있는 국밥거리’.가게 지붕을 볏짚으로 덮고 표주박을 걸어 조선시대 주막을 연상시키는데,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 낸 국밥가게가 즐비하다.가게 간판에 원조라고 쓰여 있거나, 6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한다.사장님의 증명사진이 걸린 가게도 있다.하지만 작년에는 백종원씨가 자신의 이름(7년 전인2016년부터‘백종원’이란 이름을 사용해왔다)을 떼고 철수한다고 밝히기도 했었다.그게 사실이었던지 백종원이란 이름이 브랜드화 되어있다시피 한 대로변 음식점들과는 달리 국밥거리에서는 백종원씨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입소문을 탄 음식 몇 가지를 사가기 위해‘예산전통시장’으로 간다.아니 정확히는‘장터광장’.터가 좁은 전통시장의 흠을 상쇄시키고자 널찍한 광장을 만들고 테이블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2023년1월.예산시장은 새롭게 리뉴얼했다.그리고 이 뉴트로 시장은 그야말로 초대박이 났다.주말이나 예산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전국적으로 엄청난 인파가 모여든다고 한다.
▼예산시장은 게이트가 총8곳이라고 했다.많은 점포로 둘러싸인 이곳 장터광장은1번 게이트이다.광장의 테이블에 앉기 위해서는 게이트에서의 대기번호 접수가 필수라고 했다.전국적으로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기 때문이다.하지만 폭염경보는 이마저도 훼방을 놓는 모양이다.주말인데도 꽤 많은 테이블이 비어 있었고,대기줄도 운영을 하지 않고 있었다.참고로 메뉴 주문 방법은 간단하다.우선 대기번호를 접수하고 카톡으로 자리를 안내받은 뒤 매장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된다.음식은 각각의 매장에서 먹어도 되고 광장으로 갖고 나와서 먹어도 된다.
▼하지만 우리가 찾고 있던 매장에는 전통시장 안으로 들어오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별수 없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장소,예산시장으로 향했다.사실 예산시장은 꽤 긴 역사를 갖고 있다.공식 시장 인가는1926년에 받았지만,조선 후기부터 시장이 형성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1980년대에는 지역 주민과 상인으로 붐볐지만, 1990년 이후 수도권으로 인구가 유출되며 시장의 규모는 점차 축소됐다.
▼그러던2018년, ‘더본코리아’의 백종원 대표가 예산군과 상호 협약을 체결하여 예산시장 일대에‘예산형 구도심 지역상생 프로젝트’를 추진했다.시장의 낙후된 시설을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정비했고 상인들에게'더본코리아'에서 개발한 레시피를 제공했다.아무튼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정신없는 나와는 달리 집사람을 거침없이 시장을 누빈다.그리고는‘광시 카스테라’를 찾아냈다.우리를 장터광장으로부터 이곳으로 오게 만든 장본인이다.
▼집사람은‘이신복 꽈배기’도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다.내일 교회에서 만날 손주들에게 건네준다며 넉넉히 주문하고 있었다.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는지 두 집 모두 줄을 서야만 했고,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세부 일정: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①코카서스(Caucasus)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캅카스(Kavkaz)’라 부른다.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뻔한 코스와 일정,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아르메니아(Armenia) :인구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구소련의 해체로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③게하르트 수도원(Geghard Monastery)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위대한 정신적·문화적 유산으로 꼽힌다. 4세기경 아르메니아를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개종시킨 성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가 기도하러 왔다가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동굴을 파서 수도원을 만들었다고 한다.그 후 절벽을 깎아 만든 교회,동굴 안에 만든 교회,벽을 쌓아 만든 교회,절벽 안 깊은 곳에 만든 교회 등 다양한 형태의 교회가 지어졌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차에서 내리니 신선이 산다 해도 믿을 만큼 수려한 골짜기가 나타난다.그 골짜기 깊숙한 곳에‘게하르트 수도원’이 있다.덕분에 우린 한참을 걸은 뒤에야 수도원을 만날 수 있었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세반호수(세반 수도원),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수도인 예레반에서35km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당일치기 투어가 가능하다. 7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가르니 신전’과‘주상절리’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골짜기로 들어가다 보면 수도원에 이르기도 전부터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깊은 산속,높은 바위산에 둘러싸인 풍경 때문이지 싶다.그런 느낌은 잠시 후 동굴교회에서 정점을 찍는다.바위굴을 깎아 교회를 만든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심과 절벽에 석굴을 깎아 절을 만든 불교도들의 신앙심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깎아지른 듯한 저 바위절벽은 수도승들의 기도처였다고 한다.사다리나 밧줄로만 닿을 수 있는 수많은 동굴에서 거주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단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기념품 말고도 토피 사탕처럼 달고 쫀득한 건살구를 파는 노점상들이 있었다.동그란 모양에 장식이 된 달콤한 빵‘가타(Gata)’가 쌓여 있고,길게 엮은 호두를 젤리가 될 때까지 포도 시럽에 담가 초의 심지처럼 땋은 긴 줄 모양의‘수죽(Sujukh)’도 여러 뭉치 놓여있다. ‘아르메니아식 스니커스(snickers,초콜릿 바)’라고나 할까?아무튼 이런 것들이 아르메니아 여행의 전형적인 길거리 간식이 되어준다.
▼이곳도‘하츠카르(Khachkar)’가 먼저 길손을 맞아준다.수도원 입구 외벽을 따라 수많은 하츠카르를 세웠다.이렇듯 아르메니아에서는 하츠카르를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다.어딜 가나 있다.교차로에도 서 있고,도시의 공원을 수놓기도 한다.어떤 것들은 무덤에 세워지기 때문에 교회 주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하츠카르는 마을의 이정표나 기념비가 될 수도 있고,사람들의 기도를 실질적으로 가시화시켜 놓은 징표가 될 수도 있다.
▼수도원의 아치형 정문.이곳도 역시 성곽을 연상시킨다.수도원을 둘러싼 높은 축대는 성벽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유일한 통로에는 두텁고 높게 성벽을 쌓고 작게 문을 냈다.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온 나라들의 전형적인 건축 스타일이라 하겠다.
▼투어를 시작하기 전,행운이 있는지부터 시험해보자.입구 바위벽에 동전이나 돌멩이를 던져 바위 구멍이나 경사진 턱에 안착하면 행운이 온다니 말이다.
▼수도원 전경.뒤쪽 커다랗게 돔을 올린 건물이‘카토히케 교회(Katoghikeh church)’이고,앞부분의 펑퍼짐한 건물은 카토히케 교회의‘가비트(Gavit,전실)’다.참고로 게하르트 수도원의 역사는4세기 초‘성 그레고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초기 수도원은 교회와 수도원,순례자를 위한 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그러나8세기부터 이슬람의 탄압을 받았고, 923년에는 아르메니아 지역 통치자인‘알 나스르(Al Nasr)’에 의해 대대적으로 파괴됐다.건물은 물론이고 성경과 필사본 등 중요한 서적까지 불태워졌단다.그러다 타마르 여왕 때 재건이 시작됐고, 1215년 중심 건물인 카토히케 교회가 완성되었다. 13세기 후반에는 이 지역 영주였던‘프로시(Prosh Khaghbakian)’의 경제적 도움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당시7개의 교회 건물에40개의 제단이 있었단다.
▼반대방향에서 본 수도원.수도원은 네다섯 개의 교회와 그 앞의 넓은 홀(narthex)로 이루어져 있다.이들 중 대부분은 동굴교회인데,거대한 바위를 파내고 안을 세심하게 조각해 만들었다.사람의 힘으로 들 수 없는 무거운 돌덩이를 쌓고 깎은 것으로도 모자라 암벽을 파내기까지,신심이 이끌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해를 돕기 위해‘나무위키’에서 얻어온 사진을 올려본다.
▼수도원이니 그 중심이 교회 건물들일 것은 당연,그밖에도 학교,필사실,도서관,그리고 성직자들의 주거시설들이 교회를 빙 둘러싸고 있다.
▼‘카토히케 가비트(Katoghike church Gavit)’입구.문안의 전실(Gavit)은 본당 말고도 북쪽(왼쪽)으로 아바잔교회,프로시안 예배묘당,성모교회와 연결된다.
▼‘가비트(Gavit,전실)’란 서양 교회의 나르텍스(Narthex)와 비슷한 개념으로,교회 정면 입구와 본당 사이에 꾸며 놓은 공간을 말한다.즉 주교좌 교회인‘카토히케’로 들어가기 전 만나는 공간으로 신자들의 기도공간이자 성직자의 설교공간으로 사용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성당에 들어오자마자(교회에서)구입한 초를 꽂고 기도를 드린다.초를 꽂아야만 기도가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 하나를 더 지나면 본당인‘카토히케 교회(Katoghike church)’다.투르크로부터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을 되찾은 타마르 여왕의 장군인 자카레(Zakare)와 이반(Ivane)형제의 후원으로1215년 세워졌다.고전 아르메니아 양식의 십자가 형태 건물로,건물 중앙에 거대한 기둥4개가 중심을 이루고,그 위에 톨로베이트(Tholobate:돔이 세워진 건물의 직립 부분)와 돔을 얹었다.돔형 천정에 구멍이 있어 빛이 은은하게 들어오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다.
▼반원형 제대 벽면에는 천사들의 축복을 받는 성모자상이 모셔져 있다.성모자 양쪽에서‘세례 요한’과‘성 그레고르’가 성모자를 축복해준다.이들의 양쪽 벽면 아래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과 승천하는 예수상이 그려져 있다.
▼전실에서 북측 왼쪽으로 난 문으로 들어가면‘아바잔 동굴교회(Avazan cave church)’를 만난다.바위에 동굴을 파서 만든 예배당인데,정교하게 조각된 제대와 하치카르가 눈길을 끈다.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샘에 쏠리고 있었다.성 게오르그가 발견하고 수도원을 짓기로 결심했다는 그 전설의 샘이 아닐까 싶다.암벽에서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데,이 물이 웅덩이에 모였다가 예배당 바닥을 수로삼아 밖으로 흘러나간다.하나 더.이곳 어딘가에 건축가 갈작(Galdzak)이40년 동안 이 동굴수도원을 지었다는 명문이 적혀있다는데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내부는 무척 어두웠다.동굴 속이라서 빛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그래선지 천장을 뚫어 예르디크(Yerdik)라고 부르는 구멍을 만들었다.이 구멍이 환기와 더불어 내부를 밝히는 역할까지 한다.참고로 아르메니아의 수도원은 묵직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어두운 내부를 비추는 것은 신과 만나기 위해 뚫어놓은 천장 구멍과 창으로 들어오는 빛,그리고 촛불뿐.화려하게 장식된 유럽 대도시 성당과는 다른 단정하고 신성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다.
▼다음은‘프로시안 예배 묘당(Proshian chapel-sepulcher)’이다.수도원 복구에 막대한 후원을 했던 프로시안 왕자를 위한 동굴 예배당 겸 그의 묘가 안치된 곳이다.그래선지 예배당 안에 프로시안을 상징하는 동물을 조각해 놓았다(가문의 문장이라고 했다).맨 위쪽은 뿔을 가진 숫양(ram)이 고리를 입에 물고 두 마리 사자를 조종하고 있다.고리와 줄 아래 두 마리 사자 사이에는 독수리가 반쯤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한다.독수리는 두 발톱으로 어린 양(lamb)을 잡고 있다.상단의 숫양은 죽은 자들을 관장하는 하늘나라의 저승사자로,낮과 밤이라는 두 마리 사자를 조종하면서 세월을 관장한단다.주님의 어린 양인 인간은 이 세월의 흐름을 거역 못하고 죽는데,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독수리의 도움을 받아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나?(내 사진이 흐려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이들 교회를 둘러보고 나서‘카토히케 교회(Katoghikeh church)’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이층에 있는 성가대실로 올라가기 위해서이다.참!사진은 없지만 성모교회도 둘러봤고,내부에서는 하츠카르와 인물 및 동식물 벽장식을 만날 수 있었다.(어두웠던 탓에 사진은 한 장도 못 건졌다)
▼본당 파사드는 부조로 새겨진 화려한 문양들로 장식되어 있었다.맨 위와 유리창 오른쪽에 보이는 둥근 모양의 장식은 영생을 의미한단다.조금 내려오면 사자가 황소를 공격하는 부조가 있는데,수도원 재건을 적극 지원한 자칼리안(Zakarian)가문의 프로시안 왕자를 용맹함을 상징하는 사자에 비유하고 있단다.조금 더 내려가서 만나는 공작새 두 마리는 왕실을 상징하는데,수도원 재건에 주도적으로 지원한 왕실에 대한 예우란다.맨 아래는 포도나무로 장식했다.조지아보다 먼저 와인을 만들었다는 암묵적 주장이 아닐까 싶다.
▼2층으로 올라‘상부 가비트(Upper Gavit)’로 간다.안내도는‘파팍과 루주칸의 묘역(Papak & Ruzukan Gavit-sepulcher)’이라 적는다.수도원 재건에 큰 후원을 한 프로시안 가문의 왕자들 유해가 묻혀있다고 한다. ‘자마툰(zhamatun)’이라고도 불린다는데,벽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1288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단다.
▼이곳은‘성가대실’로도 이용된다고 했다.때문에 구조가 음향을 고려해서 지어졌을 것이라며,여러 명이 함께 성가를 부르면 그 소리가 더욱 웅장하게 들린다고도 했다.실제 소리를 내보면 돔과 벽에 소리가 울려 증폭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천장의 저‘예르디크(Yerdik)’도 음향효과를 감안해 뚫었을지도 모르겠다.그나저나 이곳에서 아카펠라 중창단의 공연이 이루어진다고 했다.동굴의 울림이 가미된 음은 이곳이 천상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름답다고도 했다.하지만 때를 못 맞췄던지 실제로 들어볼 수는 없었다.
▼바닥에도 구멍이 하나 뚫려있었다.이곳에서 부르는 성가대의 노래를 아래층에 있는‘프로시안 묘지교회(Proshian chapel-sepulcher)’로 흘려보내기 위해서란다.하나 더.성가대실을2층에 둔 것은 노래를 잘 부르는 여성들을 성가대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옛날에는 여성이 성가대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안 보이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게하르트 수도원’의 유래를 알려주는 그림이 눈에 띈다.이 수도원의 원래 이름은 동굴 사원을 뜻하는‘아이리방크(Ayrivank)’였다고 한다.그러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병사가 찌른 창을 뜻하는 게하르트(Gehard)로 변경되었다.전설에 의하면 유대인 사도였던 타데우스(Thaddeus)가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로마 병사의 창을 아르메니아로 가져왔다고 한다.현재 이 창은 에치미아진 교회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다.
▼‘게하르트 수도원’이 들어간 코인도 주조하는 모양이다.소정의 대가를 지불하면 저 구멍에서 코인이 나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정문 앞에서 또 다른 유적을 찾아보기로 했다.안내도에 성모교회(St. Astvatsatsin cave chapel)로 표기된 지점이 이 부근이었기 때문이다.
▼비탈길을 잠시 오르니 수도사들이 은거하며 묵상과 기도를 드리던 수많은 암혈기도처들이 나타났다.성모교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춘 건물도 있었다.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주어진 시간이 다되어간다는 집사람의 채근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부로 들어가려면 조금 더 올라가야 한다.문을 낼 수 있는 공간이 그쪽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아무튼 보기만 해도 아찔한 저런 곳에서 세속의 즐거움을 모두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고자 했던 수도승들의 헌신에 경의를 표해본다.
▼집사람의 채근에 쫒기면서도 살짝 들여다본 어느 동굴.앗!내가 잘못 봤나?서툴게 쌓아올린 돌탑들이 꽉 차있는 게 아닌가.덕분에 골짜기를 들어오면서 느꼈던 감정이 이곳에서 대미를 장식했다.동양이나 서양이나 사람 사는 것은 똑 같다는...
특징: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91km(9개 코스)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오천유적지(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풍기IC에서 내려와5번 국도를 타고 안동방면으로 내려오다,지곡교차로에서928번 지방도(녹전방면으로28km),녹전삼거리에서935번 지방도(안동방면으로8km),서부교차로에서35번 국도(안동방면)로 옮겨10km쯤 들어오면 오천유적지에 이르게 된다. 1코스 들머리는 유적지 입구에서80m쯤 못 미친 지점에 있다.
▼‘안동선비순례길(91.3km)’의9개 코스는 각 구간마다 옛 선비의 발자취와 이야기가 담겨있다.선성현길·도산서원길·청포도길·왕모산성길·서도길 등 코스의 이름에 걸맞게 서당·서원·향교·고택과 퇴계 이황을 비롯한 선비들의 숨결을 느끼고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1코스(선성현길)에는 고고한 선비정신을 지키며 살았던 군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 하여 군자리라는 이름을 얻은‘외내마을’부터 현대판 선비들의 놀이터‘예끼마을’,물 위로 늘어진‘선성수상길’을 지나‘월천서당’까지 수많은 선인이 우리 앞을 걸어가며 길을 안내한다.
▼11 : 14.길을 나서기 전‘오천유적지’부터 들러본다.찾아가는 정보는 물론이고 근처에‘오천유적지’가 있음을 알리는 그 어떤 정보도 접할 수 없지만,이곳으로 들어왔던 길을 따라 조금 더 걷는다고 생각하면 된다.아무튼70m쯤 걸어 모퉁이를 돌아서자 오천유적지의 입구임을 알리는 대문이 반긴다. ‘선경유방 유장백세(善慶遺坊 流長百笹)’. ‘선을 행하고 쌓음으로서 집안에 경사가 있고,그 가풍이 영원히 이어 간다’라는 뜻이다.
▼100m쯤 더 들어가면20여 채의 고가(古家)가 들어앉은 안배된 유적지가 맞는다. ‘오천유적지’로 광산김씨 예안파가20여 대에 걸쳐600여 년 동안 세거해 온 마을이다. 1974년 안동댐에 물이 차면서‘외내’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자 고가들을 이곳으로 옮겨왔다.참고로‘오천’이란 지명은 동네 앞 하천에서 유래됐다.수몰 전 낙동강으로 흘러든 물이 맑아 물 밑에 깔린 돌이 검게 보여‘까마귀 오’(烏)자를 썼다고 한다.
▼읍청정(揖淸亭).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선조 때 문신 후조당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지었다는‘후조당(後彫堂)’이다.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안에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대신 협문으로 연결되는 별채(안채와 사랑채)및 김부의(金富儀, 1525-1582)가 건립한‘읍청정(김부의의號)’을 둘러볼 수 있었다.
▼김부의는 형인 김부필처럼 퇴계(退溪)이황(李滉, 1501-1570)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읍청정’의 편액을 이황이 써준 이유이다.이렇듯 이 마을은 가문의 영광으로 내세우는 불천위(不遷位)를 세 분이나 모시고 있단다.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학문이 높아 나라가 영구히(보통은4대 봉사로 끝낸다)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한 신위를 말한다.
▼이들 건물 앞에는‘설월당(雪月堂)’이 있었다.설월당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이 학문과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한 정자라고 한다.그 역시 퇴계의 문하였는데,임진왜란 때 가산을 털어 향병을 지원했다고 전해진다.
▼계암정(溪巖亭).계암(溪巖)김령(金坽, 1577-1641)은 평생 대의명분을 신조로,광해-인조 연간의 혼탁한 시절 속에서 꼿꼿하게 지조를 지킨 인물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맏아들을 의병으로 보내고 가산을 털어 군비에 보태기도 했다.하나 더.옆에는 김유(金綏, 1491-1555)가 지었다는‘탁청정(濯淸亭)’도 있었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하니 이는 물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라나?
▼침락정(枕洛亭).의병대장 김해(金垓)의 아들인 김광계(金光繼, 1580-1646)가 세운 정자다.일명 운암정사(雲巖精舍)라고도 하는데,대청 뒤쪽 벽에 지금의 당호와는 다른‘운암정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 후진을 모아 강론하는 데도 사용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밖에도 김부인(金富仁, 1512-1584)이 지은‘산남정(山南亭)’,김부신(金富信, 1523-1566)의‘양정당(養正堂)’,지애정(芝厓亭),장판각(藏板閣)등 수많은 고가들이 산기슭의 경사면 곳곳에 들어앉아 있다.
▼‘군자고와(君子古瓦)’에서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이는 군자마을 일부를‘한옥스테이’로 개방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그 위에 있는‘아호고려(雅湖古麗)’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하나 더.고택도 흐르는 세태를 무시할 수는 없었던 듯,아호고려에는 인스타그램 인증사진 촬영장소가 만들어져 있었다.
▼‘지애정(芝厓亭)’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었다.하긴‘수운잡방(需雲雜方,보물 제2134호)’이 탄생한 고을이니 어련하겠는가.참고로이곳은‘군자마을’로 불리기도 한다.입향조의 종손과 외손7명을‘오천7군자’라 불렀는데,모두 퇴계의 제자로 도덕과 덕행이 높았다.정구라는 이가 마을에 들렀다가 한 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 이후 마을 이름도 군자리로 불렸다.그런 인물들 중 입향조의 둘째 아들인 탁청정 김유는‘수운잡방’이라는 책을 남겼다. 16세기 안동 음식을 기록해놓은 책이다.안동식혜를 비롯해 안동 전통 음식에 대한 고유한 비밀을 담고 있다.
▼안동선비순례길은 도산구곡(陶山九曲)주변을 따라 선비의 숨결을 느끼고 그 흔적을 찾아보며 걷는 여행길이다.그중1코스인‘선성현길’은 도산구곡 중 첫 번째 물굽이인‘운암사곡(雲巖寺曲)’주변을 둘러보게 된다.운암산(雲巖山)의 산기슭 강변에 있던‘운암사’라는 절에서 따온 지명인데,절은 오래전부터 없어졌었다.아니 지금은 그 터마저도 물속에 잠겨버렸다.그러니 옛 선비들이 배 띄우고 놀던 아름다운 풍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그저 녹색으로 물든 호수만 눈에 들어올 따름.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고나 할까?
▼11 : 37.들머리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시작한다.초입에1코스 표석과 함께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참고로‘오천유적지’를 둘러보는 데는23분이 걸렸다. 1.21km를 걷는데 소요된 시간이다.
▼초입에는‘오천유적지 등산로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선비순례길’은 트레킹이라기보다 산행에 가깝게 시작되고 있었다.통나무계단을 가파르게 올라선 다음에도,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11 : 49.산길로 들어선지12분.임도(외내길)로 내려선다.
▼갓을 쓴 이정표(월천서당11.0km/오천유적지2.7km)가 우리가 지금‘선비순례길’을 걷고 있음을 암시해준다.멋진 아이디어라 할 수 있겠다.하지만 담고 있는 정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기 딱 좋았다. 1코스 표석이 세워진 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0.65m,오천유적지에서 출발했다고 쳐도0.9km에 불과한데 이정표에는2.7km로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11 : 53.임도를 따라 잠시 내려오면35번 국도(이정표:월천서당10.5km/오천유적지3.2km)를 만난다.삼거리의 버스정류장이 이곳이‘당고개’임을 알려준다.옛날 이 근처 어디쯤에 성황당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후부터는 국도를 따른다.조선 최고의 유학자 퇴계(退溪)이황(李滉, 1502-1571)을 배출한 고장답게 도로 이름도‘퇴계로’로 붙여놓았다.선생의 탄생지가‘안동부 예안현(禮安縣,현재의 도산면·예안면 일대)’이었으니 말이다.
▼탐방로는‘안동호’를 끼고 간다.와룡면 중가구리로 흐르는 낙동강의 협곡에 높이83m,길이612m의 댐을 쌓아 만든 낙동강 수계의 최대 인공 저수지이다.조금 더 좁히면 안동호의 상류,도산구곡의1곡과2곡의 중간쯤이 된다.
▼12 : 14. ‘역동선생유허비(易東先生 遺墟碑)’.유허비란 한 인물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는 빗돌을 말한다.역동(易東)은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우탁(禹倬, 1262-1342)의 호이다.그렇다면 이곳은 우탁 선생의 옛 집터이거나 그의 위패를 모시던 서원이 있던 자리쯤으로 여기면 되겠다.아니 안동댐의 수몰을 피해1975년 이곳으로 옮겨왔다니 원래의 터는 이곳이 아니었다.
▼우탁은 고려 후기의 대학자이자 성리학의 선구자로 알려진다.동방(東方)에서 가져온‘주역’을1개월 만에 터득했다 하여‘역동선생’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로 시작되는 대표작‘탄로가(歎老歌)’는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늙음을 인위적으로 막아보려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도로 건너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물놀이하러 찾아온 이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하지만 성수기인데도 잔디밭에 방치된‘모터보트’가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든다.녹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최근의‘안동호’,녹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저런 물속에서 노닐고 싶은 사람들은 없었을 게고,할 일이 없어진 보트는 저렇게 낮잠만 잔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예안교’가 맞는다. ‘역계천(驛溪川)’하류를 가로지르는 다리로 와룡면과 도산면을 이어주는 소통의 가교이기도 하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안동호’.도산구곡의1곡인‘운암사곡’이 끝나고2곡인‘월천곡’이 시작되는 어림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12 : 19.다리를 건넌‘선비순례길’은 오른쪽 호안으로 빠져나간다.호숫가를 따라 데크 탐방로가 나있다.하지만 우린 계속해서‘퇴계로’를 따르기로 했다.탐방로에서 살짝 비켜나있는‘보광사’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12 : 23.보광사 표지석이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란다.하지만 난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라고 권하고 싶다.조금만 더 가면‘보광사’의 후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아무튼 표석의 지시대로 들어서니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보광사가 얼굴을 내민다.비탈진 언덕 아래를 지나가는 선비순례길의 데크 탐방로도 눈에 들어온다.
▼12 : 25.보광사(寶光寺).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주민들의 발의에 의해1962년 창건됐다(디지털안동문화대전).원래는 예안면 동부리에 있었으나 안동호의 수몰을 피해197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역사가 일천하다는 얘기다.하지만 소장하고 있는‘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 유물(보물 제1571호)’은 그런 선입견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하다.인근 용수사(龍壽寺)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지는데,봉정사(안동)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620호)과 함께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보살상이라고 한다.
▼절간 앞은 큼지막한 정자가 들어앉았다.안동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길 수 있는 멋진 쉼터이다.아니 절간의 독경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시 졸다 갈 수도 있겠다.
▼정자 옆에서 나무계단을 이용해‘선비순례길’로 내려선다.
▼승려들이 일구는 듯한 작은 텃밭을 만나기도 한다.중국 당나라 때 고승으로 유명한 백장선사는‘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며,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했다.중생들에게 일은 삶의 한 방편인 노동을 뜻하나 사찰에서는 수행의 하나로 여겨진다는 얘기일 것이다.그러니 저 텃밭은 일터이자 수행처가 분명하다.
▼호숫가로 내려서면 안동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눈에 담을 수 있다.녹색으로 멍든 물빛이 그 감흥을 절반 이하로 뚝 떨어뜨려버리지만.
▼길을 내느라 고생한 흔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이 구간은 통나무를 울타리처럼 세워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았다.
▼12 : 49.예끼마을에 이르니‘서부선착장’이 반긴다.서부선착장-도산서원,서부선착장-요촌을 운항하는 작은 배들이 수시로 들락거린다고 한다.
▼선착장의 위 언덕에는‘선성 공원(이정표:월천서당6.6km/오천유적지7.1km)’이 조성되어 있었다. 929년 신라의 선곡현감 이능선이 고려에 귀순하여(안동)병산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단다.이에 왕건이 이능선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능선의 선(宣)자를 따서 이곳을‘선성(宣城)’이라 하였다나?
▼13 : 00. ‘예끼마을’. ‘예끼’란 누군가를 혼내거나,혼이 날 경우에 듣는 말.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쓰는 표현이다. ‘예끼’다음은‘이놈’이나‘고얀놈’이 입에 붙는 게 일반적이다.하지만 이곳에서의 예끼는‘재주 예(藝)’자와 재능·소질을 뜻하는 우리말‘끼’를 합쳐 만들었단다.하나 더.이 마을은 오래되지는 않았다. 1976년.낙동강 물길을 막아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여러 마을이 물속으로 사라졌다.예안마을도 그중 하나였다.주민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졌지만,차마 마을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산언덕으로 모여들었으니 그게‘예끼마을’이다.그러나 농촌공동화 현상을 피해가지는 못했다.농사짓고 소 키우던 이웃은 돈벌이를 찾아 도시로 떠났고,그렇게 마을은 절반으로 줄었다.그러다2015년 안동시의‘예술마을 조성사업’을 지원받아 벽화 골목을 꾸미고 상가 간판도 입체적이고 감각적인 모양으로 바꿨다.빈집을 활용해 식당이나 한옥카페로 꾸몄다.예술가들이 마을에 들어와 터전을 잡으면서 골목골목에 작은 갤러리 등을 내면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이 되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밝은 페인트로 칠한 벽과 정겨운 벽화,그리고 아기자기한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물길 테마,글 읽는 테마,재미있는 테마,트릭아트 등 저마다의 개성과 색깔을 뽐내는 골목들이 마을 곳곳에 들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도자공방 근처는‘핫 플레이스’로 꼽힌다.벽과 바닥에 입체적이고 실감나게‘트릭아트’를 그려놓았다.재미있는 사진을 찍어볼 수 있다는 얘기다.
▼요즘 애들은 저 벽화의 놀이를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우리 가족’이란 조형물도 눈에 띈다.이곳‘서부리’는 안동댐 조성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수몰민들이 집단으로 옮겨온‘이주단지’이다.작품은 새로운 터전으로 이주하는 가족을 수직적 조형미를 부여해 해학적으로 표현했단다.가장 아래서 가족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아버지,그 위로 짐꾸러미를 머리에 인 어머니,그들의 위에서는 두 남매가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다.
▼일부 조형물은 지붕 위까지 올라갔다.이렇듯 마을 곳곳이 예술향이 가득하다.조용하던 마을을 예술과 끼로 채워 넣은 것이다.우체국은 유명작가의 전시공간과 교육공간으로,마을회관도 작가 창작실로 탈바꿈시켰다.안동선비순례길 종합안내소 앞의‘끼 갤러리’는 마을 아이들의 솜씨를 뽐내는 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앞(문화단지 입구),호수를 마주보는 곳에는‘민가촌’이 들어서 있었다.한옥체험(숙박)이 가능한 곳인데,객실마다 담장을 둘러 독립공간으로 나누어 놓았다.현대식 욕실에 취사도 가능하단다.
▼‘선성현 문화단지’도 조성해놓았다.옛 선성현(宣城縣)의 관아 건물을 복원하여 조성한 예끼마을 내 문화단지다.장관청에서는 전통 의복체험,형리청에서는 죄수를 벌주던 형벌체험을 해볼 수 있으며,문화단지 내 역사관에서는 선성과 예안의 유래와 인물 등에 관한 자료도 확인할 수 있다.
▼문화단지로 들어가는 길.패널로 시판을 만들어 게시했다.볼거리에 읽을거리를 더해 탐방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선성현 아문(衙門).옛 고을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2층의 문루로,아래층은 통로로 사용하고 윗층은 누마루로 이용하도록 했다.앞면4칸에 측면이3칸이니 현청의 아문치고는 대단한 위세라 하겠다.
▼형리청.벌을 받는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장관청.이곳에서는 전통 혼례도 가능하나 보다.
▼사시사철 방문객으로 들끓는 곳이니 어찌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안동호 속으로 파고드는‘선성수상길’,그게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액자형 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다.
▼선비순례길의 백미는‘선성수상길’이다.그러니 포토박스 안에 저 풍경을 넣어보면 어떨까?사실‘선비순례길’은 안동호 위에 곡선으로 설치해놓은 저 데크 길 덕분에 유명해졌다.수면에 거의 맞닿을 정도로 설치돼 있어 물 위를 걷는 듯 짜릿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13 : 24.예끼마을 모두 둘러본 다음 다시 길을 나선다.민가촌 앞에서‘선성수상길’이 열리는데,초입의 선비순례길 안내도와 이정표(호반자연휴양림1.2km/오천유적지7.8km)가 길을 안내해준다.
▼선비순례길1코스(성선현길)의 자랑거리는 안동호 위를 걷는‘선성수상길’이다.예끼마을 앞 호수에1.1km길이의 다리(교각이 없는)를 놓았다.과거 누군가의 집을,학교를,일터를,골목을 밟고 물 위를 둥둥 떠서 걸어간다고 보면 되겠다.아무튼 깊이를 알 수 없는 안동호 위를 걷는 기분은 짜릿하면서도 이색적이었다.그러니 탁 트인 안동호 전망을 즐기며 여유롭게 걸어볼 일이다.
▼다리는 부교(浮橋)의 형식을 취했다.안동호의 수위 변동에 따라 뜨고 가라앉는 구조라고 한다.초입의 안내판은 이에 대한 설명과 함께 걸을 때의 주의사항까지 적고 있었다.걸을 때마다 흔들리는가 하면,또 물과 매우 가까우니만큼 이에 따른 주의사항이 필요했을 것이다.단체로 이동할 때는‘분산 통행’이 필수,수위가 낮을 때는 초입의 경사가 가팔라지니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란다.
▼호수에는 수많은 수차가 쉼 없이 돌고 있었다.역대 최악의 녹조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안동호.이를 조금이라도 개선해보려는 안간힘일 것이다.맞다.최근의 안동호는 폭증한 녹조로 인해 수면이 두꺼운 매트를 깔아놓은 것처럼 끈적끈적하다고 했다.덩어리 진 녹조 알갱이가 손에 만져질 정도이고 심한 곳은 악취까지 풍긴단다.그러니 지자체에서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다리로 연결되는 저 섬(보기에만)은‘선성산성 공원’이 아닐까 싶다.나지막한 구릉에 있는 산성을 공원으로 꾸며놓은 곳이다. ‘선성산성’은 영남지역에서 안동을 지나 영동지역으로 가는 교통로의 배후에 방어와 행정을 목적으로 쌓았던‘치소성(治所城)’이다.왕건이 견훤과 고창(안동의 옛 이름)전투를 치를 때 예안진에 주둔했었다고 할 만큼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수상길 중간에는 쉼터도 두 곳이나 만들어 놓았다.첫 번째 쉼터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옛‘예안국민학교’를 추억하는 공간이다.추억의 오르간과 책걸상,그리고 교가와 사진들도 함께 전시해 놓았다.이제는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은,하지만 우리 근현대사를 간직한 학교를 안동시의 배려로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안국민학교는1909년 이인화님이 후진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사재를 투입하여 설립한 사립학교다.설립 당시에는3년 과정으로 수신(도덕)·국어·한문·산술·창가·도화·체조를 가르쳤으며, 1912년1회 졸업생으로6명을 배출했다.예안공립보통학교(1912),예안공립국립학교(1941)를 거쳤고, 1945년 광복 후에는‘예안국민학교’가 되었다.그러다1974년 안동댐으로 인해 마을이 수몰되면서 현재의‘한국국학진흥원’옆으로 옮겨갔다가 학생이 없어지면서 폐교되었다고 한다.
▼눈에 들어오는‘안동호’는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넓었다.맞다.안동호는 소양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단다.조선 시대에 낙동강은 하류의 배가 안동까지 드나들 정도로 물이 깊고 맑아 관개 및 교통에도 큰 몫을 했다.하지만 광복 후 해마다 홍수의 범람으로 많은 피해를 겪었다.이에1971년 댐 공사를 시작1976년10월28일 준공함으로서 안동호가 탄생했다.
▼수상길은‘안동호반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진다.수상길의 총 길이는1.1km.공중부양이라도 하듯 물위를,그것도 사부작사부작 걷는 맛이 여간 색다른 게 아니다.하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이달(2018. 5)의 추천 길’로까지 뽑았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13 : 45.수상 데크가 끝나는 지점에서 뒤돌아본 풍경.꿈틀대며 호수로 파고드는 모양새가 흡사 뱀을 닮았다.여기서 팁 하나.저 길은 물안개 낄 때가 최고라고 했다.마치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을 선사해준단다.
▼13 : 48.수상 데크가 끝나면 길은 초가와 기와,현대식 숙소가 갖춰진 안동호반 자연휴양림(100만㎡)으로 이어진다.하지만 선비순례길은200m쯤 들어가는 곳(‘둠벙’이 있다)에서 오른쪽으로 갈려나간다.
▼이후부터는‘테크 로드’를 따른다.비탈진 산자락에 기대듯 길을 냈다.그러다보니 오르내림이 심한 편이다.아니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는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큰 고도차를 보인다.
▼‘선비순례길’은 옛 선비들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걷기여행 길이다.그러니 선비걸음으로 사부작사부작 걸어야 제멋이다.옛 시조라도 흥얼거리며 말이다.하지만 선비순례길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저렇게 가파른 계단을 어떻게 선비걸음으로 오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코스가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원시의 숲을 헤집으며 내놓은 길로 들어서면 웬만한 더위쯤은 저리가라다.오늘처럼36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는 별 수 없었지만.
▼14 : 16.뼈대만 남아있는 고가(古家)도 눈에 띈다.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기와로 보아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월의 무게를 배겨내지 못했던 모양이다.아니 안동호에 물이 차면서 길 자체가 사라져버린 게 원인일 수도 있겠다.
▼ 날이 선 벼랑에는 잔도(棧道)처럼 길을 내기도 했다.
▼덕분에 시야가 열리면서 발아래로 안동호의 풍광이 펼쳐진다.감탄이 연달아 나올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호수를 가득 메운 녹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그나저나 녹조 아래 물 속 생물들은 잘 살아가고 있을까?
▼14 : 26. ‘전망대’로 올라가는 데크 계단이 놓여있다.안동호의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조망처이다.특히 마음을 비우고 물멍 때리라며‘무심정’이란 정자까지 지어놓았단다.하지만0.3km나 되는 거리가 문제였다. 36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저런 가파른 계단을,그것도300m나 올라간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고서는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갈림길에 만들어놓은 쉼터에서도 안동호가 보인다는 점이다.더 이상 못가겠다며 널브러진 집사람에게 식염(15년쯤 전 미주 출장 때 구입했는데 포도당까지 가미되어있어 효과가 꽤 좋다)을 주고,이곳이 무심정이려니 하며 느긋하게 물멍을 때려본다.
▼누군가는 산길이 인생을 닮았다고 했다.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가며 일어난다는 것이다.선비순례길의 데크 구간이 딱 그랬다.한참을 올라왔으니 이제 또 그만큼을 내려가야지 않겠는가.
▼14 : 51.길은 산자락을 향해 파고들기도 한다.그러다 만난 농막(kakaomap에는‘청고개골’로 적혀있다).걷기 여행의 도반이자 사진작가이신‘몽중루’님이‘귀인을 만났다’는 곳이다.갈증을 참지 못하고 문을 두드렸는데,마침맞게 주인장이 있었던 모양이다.주인장이 생수(샘이 없어 물을 사다 먹는단다)는 물론이고,체력을 보충하라며 박카스까지 대접하더라는 것이다. ‘안동 선비’다운 손님 대접이라고나 할까?
▼‘청고개’에서 내려온 임도는 농막을 지나 호반으로 향하고 있었다.하지만 선비순례길은 농막 근처(이정표:월천서당2.6km/오천유적지11.1km)에서 다시 데크 로드로 올라선다.
▼길은 여전히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아니 가끔은 버겁다싶을 정도로 길고 가파르게 오르내리기도 한다.
▼15 : 07.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탐방로 곳곳에 쉼터를 만들고 벤치를 놓아두었다.아무튼 이즈음 우리 부부에게 문제가 생겼다.앞서가던 집사람이 더 이상 못가겠다는 것이다.그러더니 앉아있기도 힘들다며 벌러덩 누워버리는 게 아닌가.남아있던 식염(10알이나)과 함께 식수를 먹이고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하지만 계단을 오르는 집사람의 뒷모습은 가여울 정도다.천근만근이나 되는 듯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워 보인다.
▼15 : 23.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오르막(이정표:월천서당1.6km/수변60m).이번에는 아예‘한국문화테마파크’가 걸터앉은 언덕까지 오르란다.뭔가 보여줄게 있으니 저 높은 곳까지 오르라고 하겠지?
▼15 : 27. ‘이런 나쁜 놈들’.지친 다리를 이끌고 올라온 언덕에는 흉물스런‘하수처리시설’말고는 아무런 볼거리도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니 어찌 육두문자가 튀어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명한 사람들은 계곡을 횡단하고 있었다.맞다. ‘데크 로드’는 원래부터 언덕으로 오를 일이 아니었다.저 계곡을 가로질러야 정상이다.거리가 단축됨은 물론이고,시설비 또한 많이 줄였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오솔길을 따라간다.이 구간 역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지만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15 : 51.이때‘세계유교선비공원’의 연무마당 앞을 지나기도 한다.참고로22년8월에 개장한 세계유교선비공원은 컨벤션,박물관,테마파크가 함께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다.그중 연무마당은 군사들이 무예를 익히던 훈련장을 연출해놓았지 않나 싶다.
▼15 : 53.준비해간 식수(1.5리터)가 동이 나고서야‘월천길(퇴계로와 월천서당을 연결시킨다)’로 올라설 수 있었다.이정표(월천서당0.5km/수변데크1.16km)가 거의 다왔다며 조금만 참으란다.
▼15 : 57.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월천서당’이 놓여있다.그보다 더 반가운 것은 유적지 초입에 주차되어 있는 산악회 버스였다.덕분에 얼음물로 갈증을 달랜 다음 월천서당을 둘러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안동호를 눈에 담을 수 있다.도산구곡(陶山九曲)의 두 번째 물길인‘월천곡(月川曲)’이기도 하다.참고로 선비순례길이 지나는 도산구곡은 이황(李滉)의 후학들이 모여 시문(詩文)을 지으며 학문을 전승하던 곳이다.중국 송나라 주자(朱子)의‘무이구곡(武夷九曲)’을 흉내 내 낙동강 상류의 여러 산골짜기와 물굽이 중 대표적인 아홉 곳의 경승지에 그에 맞는 이름을 붙여 원림(園林)으로 구성했다. ‘오가산지’를 보면 많은 유학자들이 배를 타고 도산구곡을 유람했음을 알 수 있다.
▼월천선생 고택(편액은‘舊宅’이라 적었다).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월천(月川)조목(趙穆, 1524-1606)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1552년(명종7)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경전 연구에 주력했다고 한다.그래선지 이황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의 상덕사에 신주(神主)가 모셔져 있단다.
▼16 : 04.월천서당(月川書堂)은 수령이470년이나 된다는 은행나무가 지켜주고 있었다.조선시대 문신 조목(趙穆)이 중종34년(1539)에 세워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라고 한다.현판은 스승인 퇴계 이황이 써주었단다.하지만 문이 닫혀 있는데다 담장까지 높아 편액은커녕 안을 들여다보기도 어려웠다.그건 그렇고,오늘은4시간20분을 걸었다.앱이13.42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아니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씨를 감안하면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출발할 때만 해도 집사람은 평상시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갔고,결국 종료지점에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게 싫다며 카메라 앞에조차 서지를 않았다.하긴 트레킹을 미치고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제대로 먹는 회원이 거의 없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이에 산악회 운영진들도 놀랐던 모양이다. 8월 둘째·셋째 주말은 트레킹을 쉬어가겠다고 한다.
세부 일정: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①코카서스(Caucasus)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캅카스(Kavkaz)’라 부른다.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뻔한 코스와 일정,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아르메니아(Armenia) :인구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구소련의 해체로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③아라라트((Ararat) :아라스강(Aras River)유역으로BC 2세기-AD 5세기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다.비옥한 평야와 동서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접하고 있어‘아르타샤트(Artashat)’가 수도로 번성할 수 있었다.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우마이야왕조·셀주크 터키·몽골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며 도시가 파괴되고 폐허로 변했다. 1813년에는 러시아와 이란 사이에 굴리스탄(Gulistan)조약이 체결되어,아라스강이 아르메니아와 튀르키예의 국경이 되었고,이로 인해 아르메니아는 아라라트 평야의 절반을 잃게 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의 성산인‘아라라트 산’으로의 접근도 불가능해졌다.
▼예레반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아르메니아인들의 성산인‘아라라트 산’을 보다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다(예레반에서도 볼 수는 있다).그렇다고 산으로 가는 것은 아니고,튀르키예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호르비랍 수도원’으로 가서‘아라라트 산’을 눈,아니 가슴에 담는다.아라라트 산이 튀르키예에 속해 있어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아무튼 주차장에 이르자 나지막한 언덕에 걸터앉은‘호르비랍 수도원’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아르메니아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이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세반호수(세반 수도원),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수도원은 나지막한 산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야 한다.(사진은 내려오면서 찍은 것이다)
▼무릎이 시원찮은 사람들은 도로(특별한 경우에만 통행이 허락되는 듯)를 따라 올라가면 된다.나는 도로를 선택했다.산자락에 들어서있는 공동묘지를 곁눈질로라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공동묘지는 특별할 게 없었다.하지만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특이한 돌 십자가‘하츠카르(Khachkar)’의 용도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하치카르 십자가의 아래는 현세의 지상을 뜻하고 위는 천상의 세계를 뜻한다고 했다.이 땅에 살다가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도구인 셈이다.그래서 사람이 죽었을 때 노잣돈 개념으로 하치카르를 만들기도 했다.공동묘지에 널리다시피 한 수많은 하치카르들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잠시 후 이른 수도원 담벼락은‘하츠카르(Khachkar)’의 전시장으로 만들어놓았다.문양이나 하단의 문구(읽을 수는 없었지만)가 제각각인 하치카르가 열 손가락으로는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많이 도열해 있었다.
▼정문에 이르면‘코르비랍(Khor Virap)’이 수도원(monastery)일 뿐만 아니라 방어를 위한‘성채(fortress)’용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성벽의 높이가6-8m에 두께도2-3m나 된다니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라 하겠다.
▼성문 앞 공터는 전망대 노릇을 톡톡히 수행한다.드넓게 펼쳐지는 평원 너머의‘아라라트 산’이 지척으로 다가와 마주선다.조지아를 달리는 카프카스가‘신화의 땅’이라면 아르메니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카프카스는‘성서의 땅’이다.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낳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시발점이자 노아가 방주를 댔다는 성지이기도 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종탑과 돔이 있는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662년에 지어진‘성모교회’로 수도원의 본당쯤으로 보면 되겠다.이곳에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이하‘그레고르’)를 위한 교회가 생긴 것은‘네르세스3세(NersesⅢ)’때인642년으로 추정된다.지하감옥 위에 대리석 건물을 짓고‘네르세스 교회’로 부른다.그 후1,000년 동안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다1662년 현재와 같은 수도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성모교회로 불리는 저 건물이 폐허 위에 세워졌고,수도원,식당,사제관 등이 만들어졌다.
▼수도원의 역사는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아르메니아를 기독교로 만든‘성 그레고르’가 이곳의 지하 감옥에13년 동안 갇혀 있던 데서 시작된다.그레고르의 아버지인‘아낙’은 페르시아가 고용한 자객으로 아르메니아 왕을 죽인다.때문에 어린 그레고르는 카파도키아(튀르키예)에서 자라며 기독교 사제가 된다.이후 이교(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아르메니아로 돌아와 기독교를 전파하다‘티리다테스3세(TiridatesⅢ)’에게 잡힌다.왕은 아버지를 죽인 죄와 이교를 전파한 죄를 물어 전갈과 뱀이 우굴 거리는 땅굴에 가두었다고 한다.이곳이‘깊은 또는 지하 감옥’이라는 뜻의‘코르비랍’으로 불리는 이유다.당시 왕은 자신과의 혼인을 거부하는‘흐립시메’를 비롯한33명의 수녀를 죽이는(이때 유일하게 살아남아 조지아로 도망간 수녀가‘니노’라는 설도 있다)등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었다.그레고르를 구원해 준 것은 티리다테스의 여동생‘호스로비둑트(Khosrovidukht)’였다.그녀는 꿈에서 그리고르를 풀어주라는 계시를 받았고,그것을 오빠에게 말해 그리고르를 석방시켰다고 한다.호스로비둑트와 왕비인 아쉬켄(Ashkhen)이 이미 기독교 신자였다는 설도 있다.아무튼 석방된 그레고르는 티리다테스의 병을 고쳐 주었고,이를 계기로 세례를 받은 티리다테스가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된다.세계 최초의 기독교 왕국이 탄생한 것이다.
▼외벽에 그려진 저 문양은‘해시계’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면‘성모자상’이 반긴다.돔 아래,반원형의 벽면에 제단을 만들고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모셨다.
▼아르메니아에서 만난 여느 교회들처럼 이곳도 돔에 뚫어놓은 창을 통해 빛살이 들어온다.하지만 별도의 조명시설을 해놓아 다른 곳보다 훨씬 밝았다.
▼제단 앞 양옆으로 두 개의 벽화가 걸려 있었다.왼쪽은 아라라트 산을 배경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두 사도‘바르톨로메우스(St. Bartholomaeus)’와‘타데우스(St. Thaddeus)’다.오른쪽은 아르메니아에 기독교가 뿌리내리도록 한 두 사람,즉‘성 그레고르’와‘티리다테스3세’이다.
▼그밖에도 몇 점의 성화가 더 걸려 있었다.그중 하나는‘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는 예수님을 그렸다.
▼요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일 것이다.
▼북서쪽 모서리에는 바실리카 양식의‘성 그레고르교회’가 자리한다.동방정교의 특징이랄 수 있는 돔이나 십자가가 없는 건물은 얼핏 교회로 여겨지지 않는다.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예배당을 만날 수 있다.
▼파사드의‘하츠카르’.뭔가도 적혀있으나 알아 볼 수는 없었다.이곳은‘그레고르’성인의 땀과 피가 스며있는 신성한 장소다.대충 그런 얘기가 적혀있지 않을까?
▼예배당의 제대에는 이콘 형식으로 그려진 성모자상을 모셔놓았다.
▼주교 복장을 한‘그레고르’의 초상화도 걸려있다.참고로‘그레고르’는 아르메니아에서 사도교회의 불을 밝힌 사람(the Illuminator)또는 개척자로 불린다고 한다.현재의 에치미아진(Echmiadzin)교회 자리에 순교자 묘지를 만들었고,이게 나중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모태교회로 발전했기 때문이란다.이후314년까지 왕과 사도교회를 위해 봉사하다가328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다.
▼다른 그림은 그레고르가 티리다테스 왕을 치료하는 장면이라고 한다.이들 옆에서‘호스로비둑트 왕비’가 치료를 돕고 있었다.
▼예배당 옆,바닥에 뚫린 구멍이 눈에 띈다.그레고르가13년 동안이나 갇혀 지냈다는‘지하 감옥’이다.감옥은 철제계단을 이용해 내려갈 수 있다.한 사람이 겨우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통로다.그러니 동시에 오르내리는 교차 이동은 불가능하다.내려가거나 혹은 올라오는 사람들이라도 있을라치면 반대편 사람들은 그 이동이 끝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한다.
▼계단은 사다리에 가깝다.그것도 수직으로 서있다시피 한다.그러니 여성이라면 치마를 입은 채로 내려올 일은 아니다.내려오는 행렬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아래쪽 사람들의 눈에 민망한 꼴을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실제로 통치마를 입고 내려오는 여성이 있었기에 거론해 봤다.
▼지하 감옥은6m깊이에 폭이4.4m라고 한다.내부는 무척 단순했다.제대를 만들고 하츠카르 십자가를 안치해 놓았을 뿐이다.
▼한쪽 벽에는‘성 그레고르’초상화가 걸려 있었다.조금 전‘그레고르교회’의 제대 옆에 걸려있던 초상화처럼 주교의 복장을 하고 있는데,오래 전에 그린 듯 색상이 변해있다.
▼‘성 그레고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기독교 신자들이 밤마다 몰래 도왔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저 구멍을 통해 먹고 마실 것을 넣어주었다고 한다.
▼수도원은 두 교회 말고도 꽤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성직자들의 숙소로 여겨지는 건물은 물론이고 기념품판매점도 눈에 띈다.
▼암굴형의 기도처도 만날 수 있었다.예수님의 초상화가 프레스코 기법으로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감실에는 성모자상을 모셨다.다른 감실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과 기도를 하고 있는 성인의 그림 등을 넣어두었다.가톨릭 성당에서 흔히 만나는‘십자가의 길’ 14처를 연상시키는데,수도승들이 그렸는지 그림 솜씨는 엉망이었다.
▼‘튀르키예’와의 국경 쪽 성벽 위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세반호수’와 함께 아르메니아를 상징하는‘아라라트 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조금 더 자세히,그리고 조금 더 편안히 보라는 듯,망원경에다 벤치까지 설치해 놓았다.하긴‘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되는‘신화의 고향’이자 아르메니아의 아이콘으로 적극 활용되는‘신성한 산’이니 어련하겠는가.참고로 아라라트 산은 홍수가 끝난 뒤‘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 내려온다.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이‘노아의 홍수’이후 이 세상에 나타난 최초의 민족이라고 믿기에 아라라트 산을 신성시한다.또한 아르메니아가 세계 기독교 국가의 최초라는 자부심이 아르메니아인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성벽에 오르자 광활한 대지 너머로‘아라라트 산(Mt. Ararat)’이 보인다.만년설로 덮여 있는 이 산은‘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이라 전해진다.국가 문장 가운데에 그려놓을 만큼 아르메니아인들이 어머니로 여기는 신성한 산이다.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눈앞에 두고도 가볼 수 없는 비운의 상징이다.원래는 아르메니아 땅이었으나 지금은 터키 영토에 편입되어있기 때문이다.우리나라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중국을 통해서나 오를 수 있는 것과 꼭 닮았다.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아라라트 산’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그래서 사람들은 오른쪽을‘대 아라라트(5,165m :튀르키예어로는‘뷔위크아리다이’),그리고 그보다 조금 낮은 가파른 원추형의 왼쪽을‘소 아라라트(3,896m :튀르키예어로는‘퀴취크아리다이’)’라 구분하여 부른다고 한다.
▼수도원 바깥 멀지 않은 곳으로 아르메니아-터키 사이의 철조망 국경선이 지난다.인적 하나 없는 국경은 적막하고 긴장감마저 돌아 우리나라DMZ에 버금가는 비감함이 느껴진다.그나저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처럼,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아라라트 산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의 상징이다.코르비랍의 하늘을 유난히도 많은 독수리들이 날고 있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어 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염원을 아라라트 산에 전해주기 위해.
▼마지막으로 수도원 뒤편의 산꼭대기로 간다.조망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게 어디 나만의 생각이겠는가.수도원을 찾은 관광객들 대부분의 발걸음도 산꼭대기로 향하고 있었다.
▼정상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작은 깃대에선 아르메니아 국기가 펄럭인다.아르메니아인들에게‘아라라트 산’은 성스러운 산이자 국가의 상징이라고 했다.국기에는 나타나지 않지만,국가 문장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단다.지폐의 도안으로도 활용된다.하지만 그런 영산(靈山)은 현재 아르메니아의 영토 밖‘튀르키예’땅에 있다.앞에서 얘기했듯이1813년에 있었던 굴리스탄 조약 탓이다.
▼고개를 돌리니 조금 전 둘러본‘코르비랍 수도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높고도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게 영락없는‘성채(fortress)’다.그만큼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왔다는 얘기일 것이다.
▼수도원 뒤쪽(남쪽,산꼭대기에서 바라봤을 때 아라라트 왼쪽)으로 펼쳐진 평원 뒤로는‘노아가 정착했다’는 뜻을 가진‘나히체반(Nakhichevan)’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하지만 아제르바인잔 영토이라서 육로로는 들어갈 수 없단다.
▼이곳에서도 아라라트 산을 조망할 수 있다.아니 조금 전의 전망대보다 높아진 고도만큼이나 더 가까이 다가온 아라라트 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다.아라라트 산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날씨만 맑으면 어느 지역에서든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그중에서도 이곳‘코흐비랍’은 가장 가까이서,가장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산자락에는 커다란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었다.신비로운 아라라트 산과 대비되며 살아도 한 평 죽어도 한 평,땅속에 묻히는 인간의 비애가 느껴진다.
▼투어 중 만난 안내판은‘코르비랍’에 대해 적고 있었다.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길이가10km이상이나 되었다나?아르메니아의 옛 수도‘아르타샤트(Artashat)’를 얘기하는 듯.아무튼 성벽은 두께2.6-3.5m에 높이가20-25m나 되었단다.엄청난 규모라 하겠다.그중 한 언덕에서 발견되었다는 유적은 안내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시타델과 궁전의 잔해,광장,그리고 우주에서 찍은 위성사진으로도 볼 수 있는 주요 거리,사이드 스트리트,빌딩 기초가 있다.건물에는 주거용 건물과 대장장이 겸 작업장이 있다.이 지역에서 발견된 것은3000개의 겨드랑이 창,검,단검,대리석 조각상과 조각들,도자기,유리 작품,장식용 금속 조각들 그리고 다른 공예품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