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조지아 - 시그나기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시그나기(Sighnaghi) : 시그나기는 과거 조지아에서 무역과 상업의 거점도시 역할을 해왔다. 18세기 초, 당시 왕이었던 헤라클리우스 2(Heraclius)가 약탈을 일삼는 주변 부족들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아 올리고 23개의 망루를 설치하면서 지금의 도시 형태가 갖춰졌다.

 

 조지와의 첫 만남인 라고데키(Lagodekhi) 국경검문소.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을 뒤로 하고 기독교의 나라, 와인의 나라 조지아로 들어간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로 가는 길은 고단했다. 국경에서 차에 탄 사람은 짐을 다 가지고 내려야 한다(운전기사와 차량은 따로 검사와 절차를 밟는다). 승객은 비행기 탑승하듯 여권과 짐을 확인받아야 한다. 자신의 모든 짐을 자기가 챙겨가야 함은 물론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조그만 건물을 통과하자 눈앞에는 경사가 높은 좁은 계단길이 나타났다. 그곳을 각자 짐을 가지고 올라가면 그 위쪽에 조지아의 건물이 있다. 뜨거운 날씨에 짐을 들고 길을 올라가 다시 한 번 절차를 밟고 나서야 드디어 조지아에 입성했다.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여행사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흑해 연안의 바투미(조지아 제2의 도시)’도 들렀다. 그리고 튀르키예의 리제로 넘어가 이스탄불(환승)을 거쳐 귀국했다.

 카헤티(Kakheti province)’ 지역의 라고데키(Lagodekhi municipality)’에 있는 와인 저장고(wine cellar)부터 들른다. 와이너리 투어 겸 점심을 먹기 위해서이다. 점심은 빵 안에 야채를 넣은 므흐르바니, 소고기, 스프, 힌칼리(Khinkali)가 와인 1리터와 함께 제공된다. 참고로 힌칼리는 만두피가 두툼하고 육즙이 가득한 고기만두다. 육즙이 쏟아지지 않게 먹는 게 요령이기도 하다. 꼭지는 먹지 말라는 가이드의 조언도 있었으나 시험 삼아 먹어봤고, 다음부터는 가이드의 말을 무조건 믿기로 했다.

 키라말라 와어너리(Chateau Kiramala)’쯤 되겠다. 유럽연합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조지아 농촌개발모델 강화사업의 대상 사업장이고.

 농장 안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그 옆에 상당히 넓은 레스토랑이 있다. 조경도 사진 찍기 딱 좋게 꾸며놓았다.

 저건 야외 테이블? 두셋이 단출하게 왔을 때 이용하면 딱 좋겠다.

 식사를 마치고 지하의 와인 저장고로 들어가 10분 정도 조지아 전통 크베브리 양조법,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기구, 땅 속에 묻힌 크베브리 등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설명이 끝나면 입구에 차려진 시음대로 자리를 옮겨 시음에 들어간다. 투명한 노란빛을 띠는 화이트와 검은빛에 가까운 레드 등 주어지는 서너 종류의 와인은 하나같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향긋한 과일향과 꽃향이 풍부했고 상쾌하면서도 뒤로 갈수록 묵직한 맛을 내는 것이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크베브리(kvevri)’가 묻혀있는 와인 저장고.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크베브리 양조법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했다. 카헤티 지방에서는 사츠니헬리(압착기)에서 압착한 포도즙과 차차(포도껍질·포도줄기·씨앗)의 혼합물을 크베브리의 85%정도 채운다. 자연적으로 발효되도록 뚜껑을 뚫고 통을 저어주다가 3주가 지나 발효가 되었다싶으면 뚜껑을 점토나 실리콘으로 밀봉한 뒤 다시 6개월 정도 숙성시킨다. 이후 숙성된 포도주를 와인병이나 다른 항아리로 옮기는데, 항아리의 둥근 벽이 침전물이 바닥에 잘 가라앉도록 만들어주는 덕분에 따르기가 쉽다나?

 크베브리는 조지아 전통양조의 역사이다. 조지아 전역에서 크베브리 양조법에 의해 와인이 만들어지는데, 특히 이곳 카헤티지역은 대표적인 생산지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당까지 따라 나온 크베브리 두 개가 손님을 배웅하고 있었다.

 시그나기(Signagi)로 가는 길. 양 옆으로 포도농장이 줄을 잇는다. 맞다. 이곳 카헤티(Kakhet)’는 조지아 와인을 상징한다. 전체 조지아 와인 생산량의 60% 이상이 생산되는 최대 와인 산지이며, 조지아 와인의 맛과 양조방식의 전통을 지켜온 곳이다. 카헤티의 와인산지는 알라자니라는 강을 끼고 형성되어있어, 영양분과 수분이 풍부하며 배수가 잘되는 토양에서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다. 여기에 흑해의 따스한 바람과 시리아 고원의 햇빛이 더해져 조지아 와인만의 특별한 맛을 얻을 수 있다.

 조지아에서의 첫 방문지는 보드베(Bodbe) 수도원이었다. 하지만 보드베 수도원은 홍수피해로 인한 진입로 보수공사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단다.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Nino)’가 묻혀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참로고 성녀 니노(St. Nino)는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래한 인물로 조지아 정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로 꼽힌다. 전설에 따르면 카파도키아 출신인 니노는 신의 계시를 받고 조지아로 건너와 죽어가는 아이를 소생시키고 병자를 낫게 하는 기적을 행한다. 이런 소문은 조지아 왕비에게까지 전달됐고 불치병을 앓고 있던 왕비는 니노에게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길 부탁한다. 니노의 기도로 병이 완치된 왕비는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고 니노는 기독교로 개종해 줄 것을 청한다. 선교를 위해 평생을 힘쓴 니노는 보드베 계곡으로 돌아와 은수자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후에 수백 명의 장정이 그녀의 유해를 므츠헤타(Mtskheta)로 옮기려 했지만 유해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이곳에 영원히 잠들게 됐다.

 시그나기 관광의 시작과 끝은 버스주차장. 보드베수도원을 걸른 채 곧바로 시그나기로 향했다. 역사성(시그나기 주변지역은 역사지구로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으로 인해 카헤티(Kakheti)주의 관광명소가 된 인구 2,500명의 작은 마을이다.

 시그나기는 주변 평야지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 전쟁 때 피난지로 삼기위해서다. 그러니 관광 포인트로 가기 위해서는 잠시지만 경사로를 올라가야 한다. 참고로 시그나기는 1762년에 피난용 성곽마을이 조성됐고,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후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였으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마을의 규모가 줄어들어 농업 위주의 작은 마을로 퇴락했단다.

 당나귀를 탄 왕진 의사(Doctor Benjamin)’. 이곳 출신의 천재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그림 속 인물을 조형물로 제작했다. 이밖에도 시그나기에는 그의 그림에서 나오는 장면들을 본뜬 조형물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시청으로 올라가다 만난 분수. 크베브리(Qvervri) 항아리 위에서 귀여운 사슴이 노닐고 있다.

 결혼등록소(예식장)’라고 했다. 24시간 이용이 가능한데, 공증인과 하객 앞에서 신랑신부가 사인을 하면 부모가 참석하지 않아도 결혼으로 인정한단다. 시그나기가 사랑의 도시가 된 주요 근원 중 하나라나?

▼ 앞마당에는 장미 꽃다발을 든 소녀상이 세워져 있었다. ‘백만 송이 장미를 의미하는 조형물일지도 모르겠다일화에 의하면 이곳 출신의 천재화가 니코 피로스마니는 시그나기에 머물던 프랑스 여배우 마르가리타에게 첫눈에 반해 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재산을 털어 100만 송이의 장미를 가득 실고 그녀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했단다그의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이후 시그나기는 사랑의 도시가 되었다참고로 심수봉이 불러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백만 송이 장미는 러시아의 국민가수인 푸카초바가 불러 대 히트를 쳤는데그 가사 주인공이 바로 니코 피로스마니라고 한다.

 시그나기 시청사(Signagi Municipality administration). 결혼식 장소로도 유명하다니 시티센터 웨딩하우스쯤 되겠다. 아무튼 유명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곳 시그나기 사랑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결혼하려는 커플들이 몰려온다나? 이쯤에서 아재개그 하나. 결혼 등록비용은 우리 돈으로 7,500. 오늘 7,500원 내고 결혼하고, 다음날 7.500원만 더 내면 이혼도 가능하단다.

 시그나기 극장(Signagi theater)이라고 했다.

 시그나기 박물관으로 올라가다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i, 18621918)’의 흉상을 만났다. 원초주의라 불리는 독특한 화풍으로 조지아의 전통과 자연, 사람들의 삶을 그린 화가다. 그는 정규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고, 상점 간판이나 초상화 등을 그려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사후에 유명해졌으며, 피카소와 같은 유명한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하나 더. 니코 피로스마니는 짝사랑의 노래 백만송이 장미의 주인공이다. 혹시 그가 살아생전에 유명한 화가였다면 여배우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1959년 문을 연 시그나기 박물관은 리노베이션을 거쳐 2007년도에 현대적인 운영체계를 갖춘 뮤지움으로 재탄생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조지아의 5대 국립박물관에 들 정도로 내실 있는 박물관이다. 2009년에는 조지아 최초로 피카소 전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카헤티 지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물론이고, ‘니코 피로스마니의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시그나기 박물관 뜨락의 깐지를 든 타마다’. 조지아에도 우리처럼 전통 건배 문화인 타마다(Tamada)’가 있다. 타마다는 저녁식사 혹은 연회를 뜻하는 말로, 수르파(Surpa)에서 건배를 제의하는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이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에 만든 깐지라고 부르는 각배(角盃)를 들고 건배를 제의하는 타마다상이 발견됐는데, 이는 조지아가 와인의 발원지임을 알려주는 유물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박물관 주변에는 여러 개의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지아 학생들은 언제보아도 명랑해 보인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함께 사진찍자는 주문이 심심찮게 들어온다.

 박물관 뒤 테라스는 뛰어난 뷰 포인트이다. 주황색 주택 지붕과 멀리 코카서스산맥의 웅장함, 그 아래로 펼쳐지는 알라자니 평원의 풍경이 숨이 턱 멎을 정도로 아름답다.

 옆은 솔로몬 도다슈빌리(Solomon Dodashvili) 공원으로 조지아의 역사를 보여주는 부조가 있다. ‘World War  Memorial 기념공원으로도 불린다고 했다.  부조는 포도농장에 일하는 농부들을 그리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러 나가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평화를 바라는 염원을 올리브나무와 비둘기로 표현하기도 했다.

 전사의 벽에는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에 강제적으로 징집되어 전사한 사람들의 이름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다. 그 옆의 글귀는 죽어가는 병사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라고 가이드가 귀띔해준다. 그루지아어를 알지 못하니 내용은 모르겠고, 대충 ‘Be Sad, mother I am dying give me the light of your love’쯤 되지 않을까?

 소련에 대항하여 트빌리시에서 벌어졌던 시위 때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는 ‘49일 비라고 했다. 참고로 ‘4 9일의 비극(트빌리시 대학살, 트빌리시 비극으로도 알려짐)’ 1989 4 9일 그루지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트빌리시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의 반-소비에트 시위는 소련군에 의해 해산되었고, 20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4 9일은 국가 통일의 날로 기억되며, 조지아에서는 공휴일이라고 한다.

 솔로몬 도다쉬빌리(Solomon Dodashvili, 1805-1836)’의 동상. 시그나기 태생의 문학가이자 역사학자, 계몽주의 철학자로 니코 피로스마니와 함께 시그나기의 자랑으로 여겨지는 사람이다.

 공원에서 만난 또 다른 이의 흉상. 그루지아어를 모르니 누구인지는 모르겠고.

 사랑의 도시답게 결혼식을 막 끝내고 나온 신혼부부도 눈에 띈다. 신랑신부와 하객들이 공원에서 흥겨운 춤판을 벌이고 있었다.

▼ 고개 너머 성곽으로 가는 길. 시그나기는 광장을 중심에 두고 마을이 길쭉하게 형성되어 있다. 바삐 서두르는 게 미안할 정도로 거리는 잘 꾸며져 있었다. 집들은 예쁘고, 마당과 테라스에는 어김없이 꽃들이 자란다. 이런 길은 걷는 것 자체가 힐링이 된다.

 경사진 박공지붕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동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방식인데, 이곳 코카서스도 동유럽 문화의 영향권에 놓여있지 않나 싶다.

 잠시 후 성곽에 이른다. 시그나기는 4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이다. 약탈을 일삼은 주변 다케스탄 부족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1762년 헤라클리우스 2(Heraclius)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한다. 성곽은 주변을 살피기 위해 23개나 되는 레이스 모양의 둥근 망루와 6개의 성문을 세웠다고 한다. ‘시그나기라는 이름도 터키어에서 온 대피소, 피난처(Shelter)에서 유래되었단다.

 마을을 아늑하게 에워싼 기다란 성벽과 파스텔 톤의 가옥들이 줄지어 선 삐뚤빼뚤한 골목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워 누운 돌담의 풍경은 언뜻 서유럽의 작은 성벽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관광지답게 골목에는 기념품 판매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소박한 공예품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사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아직은 여행의 초반. 가급적 짐을 줄여야만 한다.

 성 조지교회(St. George basilica)’. 시그나기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1793년 아르메니아 교회로 만들어졌다. 1920년대 이후 조지아정교회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벽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성 스테판교회는 찾아보지 못했다.

 성문은 빈약하다는 느낌을 준다. 성문을 부수려고 공성기를 앞세워 쳐들어오는 적들을 과연 막아낼 수 있었을까? 이들에게 활을 쏘아야 할 병사들이 올라설만한 지지대가 안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젠 성벽의 위를 걸어볼 차례이다. 성벽의 길이는 4km쯤 되지만 공개된 구간이 한정돼 있으니 쉬엄쉬엄 걸어보면 되겠다.

 성벽 길. 처마에 매달린 제비집처럼 성벽 상단에 잔도(棧道)를 매달아놓았다. 이런 길을 20분 정도 걷게 된다.

 위태한 난간을 따라 성벽 위를 걷는다. 그러자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형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성벽도 조망의 명소다. 알라자니 평원이 드넓게 펼쳐지는가 하면, 그 뒤로는 가프카스 산맥이 동서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저 풍경, 즉 카헤티 지방의 황홀한 전경을 피로스마니가 그린 동화적인 색채의 원천이라고 했다.

 느긋하게 걷다보면 망루가 나타난다. 조망이 괜찮다는 가이드의 귀띔에 홀려 일단을 들어가고 본다.

 나무 계단을 밟고 망루의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올라오는 게 편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보수를 안했는지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날 뿐만 아니라, 판자가 떨어져나간 곳이 눈에 띈다. 방심하다간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는 얘기다.

 망루에라도 오를라치면 능선을 따라 할머니의 가르마처럼 뻗어나간 성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관광객들은 성곽을 따라 걸으며 발아래로 펼쳐지는 대평원과 멀리 코카서스 산맥을 바라본다. 주위의 풍경이 워낙 빼어나 걷다보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성곽 위는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마을 외곽을 둘러싼 성곽은 과거 평원과 마을을 가로막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단절됐던 것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여행객들을 불러들인다. 그래서일까?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낀 성곽이 지극히 평화스러워 보이는 것은...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자 우직한 자태로 서 있는 성문이 모습을 드러내고, 성벽 투어는 끝을 맺는다. 성곽 전체를 공개하지 않아 일부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