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선비순례길 3코스(청포도길)
여행일 : ‘24. 9. 7(토) 및 10. 5(토)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퇴계종택→수졸당→이육사문학관(10월5일 출발지)→목재고택→단천리경로당→단천교(거리/시간 : 6.3km, 실제는 7.89km를 2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 트레킹 들머리는 퇴계종택(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산악회의 코스 조정으로 인해 3코스 중 일부(이육사문학관까지)를 2코스에 보태서 걷기로 했다. 나머지 구간은 2주 후, 4코스를 걸을 때 추가해서 걷게 된다. 참고로 ’퇴계종택(退溪宗宅)‘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살던 집이다. 원래의 종택은 동암(東巖) 이안도(李安道)가 한서암 남쪽에 세웠고, 1715년 정자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별도로 지었다. 이후 10세손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이 구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다. 그러나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고, 지금의 퇴계종택은 1926-1929년 13세손 하정(霞汀) 이충호(李忠鎬)가 새로 지은 것이다.
▼ ‘퇴계종택’에서 시작되는 ‘3코스(청포도길)’는 이육사의 고향 원촌마을을 지나간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떠올리게 만드는 포도밭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으며, ‘윷판대’에 이르면 육사의 또 다른 시 ‘광야’를 연상시키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거기에 퇴계묘역, 수졸당 등 퇴계와 관련된 유적들을 함께 둘러보며 걷는 여정이다.
▼ (9월7일) 15 : 18. ‘토계천’의 강변길을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 15 : 20. 몇 걸음 걷지 않아 ‘상계1교’에 이른다. 선비순례길은 이곳에서 다리를 건넌다. 하지만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100m 남짓만 더 걸으면 또 하나의 귀한 유적을 만날 수 있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15 : 22. 잠시 후 ‘계상서당’에 도착했다. 퇴계가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선생이 머물던 ‘한서암’을 중심으로, 우측 아래 계상서당, 좌측 아래는 기숙사로 사용한 ‘계재(溪齋)’가 복원되어 있다. 하나 더. 문하생들의 숫자가 늘어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할 수 없게 되자,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에 ‘도산서당’을 새로 지었으나, 퇴계는 이곳을 없애지 않고 겨울이면 바람 센 도산서당을 떠나 이곳’으로 왔단다.
▼ 퇴계의 공부방인 ‘계상서당(溪上書堂)’.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퇴계선생과 젊은 율곡의 만남이 이뤄졌던 곳이다. 1558년 약관 23세의 율곡은 58세의 퇴계를 찾아와 한껏 존경을 담은 시를 지어 바쳤고 퇴계도 화답했다. 두 사람은 사흘을 계상서당에서 함께 지냈고, 퇴계는 떠나는 율곡이 가르침을 청하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줬다고 한다.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일 만들기를 좋아함을 경계해야 한다(持心貴在不欺 立朝當戒喜事)>
▼ 퇴계 선생이 기거하던 ‘한서암(寒栖庵)’, 선생이 만년에 기거하다 숨을 거둔 곳이다. ‘퇴계(退溪)’라는 시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몸이 물러나니 내 분수에 편안하지만/ 학문이 퇴보하니 노년이 걱정스럽네/ 계상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고/ 흐르는 물 보면서 날마다 성찰하네>
▼ 15 : 25.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다리(상계1교)를 건넌다. 그리고는 928번 지방도(백운로)를 따라 남·동진 한다.
▼ 다리에서 내려다본 ‘토계천(土溪川)’. 도산면 북쪽 끝에 있는 월오현과 투구봉 아래서 시작되는 물이 모여 태자리 부근에서부터 토계천을 형성한다. 도산면 소재지를 거쳐 토계리에서 낙동강에 합류되는데, 하천을 따라 퇴계 이황의 태실·종택·묘역 등 선생과 관련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퇴계천(退溪川)’이라고도 불리는 이유이다.
▼ ‘청포도길’이란 브랜드답게 곳곳에서 포도밭을 만난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요즘은 포도밭도 과학이다. 과목 위에 비닐 천정을 씌우는 등 모든 과정을 과학적으로 하고 있다.
▼ 15 : 29. 다리를 건너자마자 고성이씨 탑동파 파조 이적의 추모 공간인 ‘산천정사’로 들어가는 샛길이 왼쪽으로 나뉜다(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고계정(古溪亭)’으로 들어가는 샛길이 역시 왼쪽으로 갈려나간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고계정’을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고계(古溪) 이휘령(李彙寧, 1788-1862)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했다. 퇴계의 10대 종손으로 1816년(순조 16) 생원에 급제 호조좌랑·동복현감·영천군수·동래부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러니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향토문화대전은 또 건물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라고도 했다.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는데, 1977년 안동댐에 물이 차면서 현재 위치로 이건했단다. ‘고계산방(古溪山房)’이란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써줬다나? 하지만 건물의 크기가 우선 달랐다. 위치도 이곳(도산면 토계리)이 아닌 온혜리(같은 도산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는 향토문화대전이 가리키는 ‘고계정’과 이곳은 ‘이름은 같으나 건물은 다른 정자(同名異亭)’라는 얘기일 것이다.
▼ 건물은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멋스런 정자가 맞다. 거기다 학식 높은 선비가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딱 좋아 보인다. 그러니 선비문화수련원 안내도에 ‘정자(고계정)’로 표시해 놓았겠지? 그나저나 이런저런 궁금증은 해소할 수가 없었다. 안내판도 없는데다, 물어볼만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겠는가. 그저 퇴계종택의 부속건물쯤 되나보다 하며 발길을 돌렸다.
▼ 오늘은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진다는 ‘백로(白露)’. 고된 여름 농사를 다 짓고 추수까지 잠시 일손을 놓고 쉬는 때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길가 벼가 고개를 숙여가고 있다.
▼ 15 : 33. ‘토계마을 쉼터’는 걷기여행자들에게도 자신의 품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 나무도 오래 묵다보면 신끼(神氣)를 띠는 법. 토계마을의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는 서낭당의 신목이 되었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보장해주는...
▼ 작은 연못을 만들고 물레방아까지 배치했다. 요즘처럼 비가 잦은데도 돌지 않는, 아니 돌지 못하는 물레방아가 되었지만 말이다.
▼ 15 : 45. ‘하계마을’에 이를 즈음, 도로변에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 들어가 보니 ‘퇴계예던길 안내판’과 함께 ‘퇴계선생 묘소’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退溪先生墓下’라고 쓰인 돌 말뚝도 눈에 띈다. 퇴계 이황의 무덤(墓)이 이 산자락 어디쯤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초입의 이정표는 ‘퇴계선생 묘소’까지 150m쯤 떨어져 있다고 했다. 이까짓 것쯤이야 하기에 딱 좋은 거리다. 하지만 우습게 볼 상황은 아니었다. 서있다시피 한 급경사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만하기 때문이다.
▼ 15 : 48. 첫 번째 무덤은 퇴계의 며느리인 ‘봉화 금씨(奉化琴氏)’ 것이다. 그녀가 남긴 유언(시아버님 살아계실 적에 내가 모시는데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사후에 다시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든 나의 시체는 반드시 아버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어 주기 바란다)에 따른 것이란다. ‘봉화 금씨’는 선생이 돌아가신 이듬해인 1571년 2월에 죽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불과 2개월만이다.
▼ 퇴계의 무덤은 이곳에서도 100m쯤 더 올라가야 한다. 계단은 더 가팔라진다.
▼ 15 : 52.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퇴계의 무덤에 올라설 수 있었다. 건지산(搴芝山)의 남쪽 봉우리 중턱쯤이다. 선생은 70세 되던 1570년(선조 3)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퇴계집(退溪集)’ 연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신축일 유시, 정침에서 돌아가다. 이날 아침에 모시고 있는 사람을 시켜서 화분에 심은 매화에 물을 주라 하였다. 유시 초에 드러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되어 일어나 앉아서 편한 듯이 운명하였다>
▼ 무덤에는 묘비(墓碑) 대신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었다.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란다.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이며,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다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와 조상의 내력과 지행(志行)·출처(出處)를 쓰라고 했다나? 참고로 묘비와 묘갈은 경계가 모호하지만 네모진 것이 비이고 둥근 것이 갈로 보면 된다. 비의 체재를 웅혼전아(雄渾典雅 : 기운차고 원숙하며 고상함)하고, 갈의 체재는 질실전아(質實典雅 : 소박하고 고상함)하다는 학자도 있다. 하나 더. 당대(唐代)에 와서 관직이 4품 이상은 귀부이수(龜趺螭首)인 비를 세울 수 있고, 5품 이하는 방부원수(方趺圓首)인 갈을 세우도록 규제했다니 갈이 비보다 하대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퇴계는 갈(碣)을 고집한 것이다. 이기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이 배워야할 점이 아닐까 싶다.
▼ 무덤은 건지산(搴芝山) 남쪽 자좌오향(子坐午向 : 정남향)의 언덕에 써져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곳을 명당이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울창하게 자란 소나무 숲이 앞을 가려버린 것은 흠으로 보인다. 명당의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것이 더 좋다면 몰라도 말이다.
▼ 묘역에서 내려오는 길. ‘수졸당’이 내려다보인다. 요 어디쯤의 언덕에 ‘양진암고지(養眞庵古址)’가 있을 것이다. 퇴계가 46세가 되는 1546년 벼슬에서 물러나 작은 집을 짓고 살며 ‘양진암’이라 이름 지었다는 곳이다. 빗돌까지 세워져 있다고 했는데, 시간에 쫓겨 발걸음을 서두르다 그만 놓쳐버렸다.
▼ 16 : 00. ‘수졸당(守拙堂)’은 진성이씨 하계파의 종택이다.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 1559-1637)가 분가하면서 지어 ‘하계종택’ 또는 ‘동암종택’이라고도 하나 동암의 장자 수졸당 이기(李技 1591-1654)의 호에서 이름을 따 ‘수졸당’이 되었다. ‘ㅁ’자 형의 본채와 정자,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퇴계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은 이영도는 임진왜란 때 안동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웠으며, 전쟁 중 군량미를 조달함으로써 큰 공을 세웠다.
▼ 종택답게 현재도 종손이 기거하면서 동암선생의 불천위를 포함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별채에서는 한옥체험도 가능하다고 했다. 참! 수졸당은 KBS 다큐멘터리 ‘누들로드’에 소개되기도 했었다. 전통을 한결같이 지켜가는 제례 행사와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으로 차려지는 종가음식들이 소개됐었다. 하지만 체험객들에게 제공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다.
▼ 16 : 04. 수졸당 앞 삼거리. 이정표(단천교 4.7km/ 퇴계공원 1.6km)는 하계마을 쪽으로 가란다. 법정 동리인 ‘토계리(土溪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퇴계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사는 마을이다. 마을로 내려가다 능선을 타고 ‘윷판대’를 거쳐 이육사문학관으로 넘어오라는 것이다.
▼ 삼거리의 ‘독립운동기적비’. 퇴계는 제자들에게 늘 배움과 실천을 함께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가르쳤다. 나라가 어려울 때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이 바로 선비정신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퇴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하계마을에는 구한말 의병활동과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독립유공자가 25명이나 나왔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기적비’를 세워놓았다.
▼ 그들의 애국충정에 동조라도 하려는 듯 주변의 무궁화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 16 : 05. 계속해서 ‘928번 지방도(백운로)를 따르기로 했다. 폭염에 시달리느라 고갈된 현재의 체력으로는 ’윷판대‘ 능선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선답자의 gpx트랙도 백운로를 따르라는데 고민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16 : 09. 길가에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 안쪽에는 애국지사 이동봉(李東鳳)의 묘비가 있었다. 하계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이동봉은 1919년 3월 17일 면민들과 함께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주동자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병세가 악화되어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20년 순국했다.
▼ 도로 건너 이정표(건지산 3.5km/ 수졸당 0.4km)는 산속으로 들어가란다. ’퇴계 예던길‘의 안내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안동선비순례길을 걷다보면 코스와 맞지 않는 이런 이정표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두 길을 하나로 통합시키든지 아니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두 길에 차이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고갯마루를 넘자 데크 길이 이제 그만 탐방로로 올라오란다. 도로변에 보행자 전용의 탐방로를 별도로 내놓았다.
▼ 이정표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윷판대‘를 다녀오란다.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떠올렸다는 곳이다. 하지만 지친 내 육신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었다.
▼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신작로를 내면서 만들어진 인공의 능선 위로 길을 내놓았다.
▼ 내려가는 길에 서낭당도 만날 수 있었다. 기도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는 듯 제단 위에 신주(神主)와 제사 용품, 그리고 소주 몇 병이 놓여있다.
▼ 16 : 20 – 16 : 31. 고개를 넘자 ’이육사문학관‘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이육사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길이 전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의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들을 한 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정신관(전시관)과 생활관(연수원), 목우당(생가)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절정(絶頂)’ 시비와 이육사(李陸史, 1904-1944). 육사는 시인이기 전에 독립운동가였다. 그것도 항일무장투쟁단체인 의열단 소속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 출신이다. 의열단에서 육사는 권총사격은 물론이고 폭탄 제조 및 투척, 심지어 변장술도 배웠다. 1927년 처음 옥살이를 한 뒤 1944년 중국 베이징의 감옥에서 쓸쓸히 숨을 거둘 때까지 무려 17번이나 감옥 생활을 했다. 하나 더. 본명은 원록(源祿). ‘육사(陸史)’는 필명이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배달사건에 연루돼 육사가 첫 옥살이를 할 때 수인번호가 ‘264’였다는 데서 연유했다.
▼ ‘민족시인 이육사’의 저항과 문학의 피는 부모 집안에서 물려받았다고 한다. 육사의 어머니 김해 허씨는 한말 의병장 허위의 조카이다. 퇴계 이황이 14대 할아버지이고, 그에게 한학을 가르친 조부 치헌 이중직은 일찍이 개화하여 노비를 풀어주고 땅을 나누어 준 사람이다.
▼ 문학관은 이육사의 생애와 문학세계, 독립운동 자취를 다양한 방법과 매체로 구성해 놓았다. 시(詩) 체험시설도 갖춰 놓았는데, 헤드폰을 쓰고 버튼을 누르면 육사의 시를 눈과 귀로 동시에 접할 수 있다.
▼ 선생의 흉상과 육필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안경,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생활 모습 등을 재현해 놓았다.
▼ 감방이 특히 눈길을 끈다. 1934년 이육사가 체포된 곳이 광화문에 있던 서울경찰국 본청이라며, 까마득한 날의 기억은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 여사의 증언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1943년 서울에서 베이징으로 끌려갈 때 이육사가 ‘용수’를 쓰고 있었다는 그녀의 증언을 더욱 실감나게 해주고 싶었던지 죄수를 이송할 때 사용하는 ‘용수’와 수갑, 밧줄, 쇠사슬 등을 진열해 놓았다.
▼ 전시관 맞은편 언덕에 있는 목우당(六友堂). ‘여섯 형제의 우의를 지키는 집’이라는 뜻으로 복원된 이육사의 생가이다. 육사와 원기·원일·원조·원창·원홍 6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저 집은 원래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원천리’에 있었다. 그러다 안동댐에 물이 차면서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이건되었다. 이후 생가의 기능이 훼손되자, 현재 위치에 고증을 거쳐서 복원하였다.
▼ 문학관 앞에 서면 평야지대가 드넓게 펼쳐진다. 넓은 들녘 너머로 강물이 흐르고 멀리 왕모산이 우뚝하다. 이육사가 태어난 곳으로, 육사는 윷판대를 위시한 이곳 원천리에서 ‘광야’의 시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 (10월5일). 10 : 00. 928번 지방도(백운로)를 따라 걸으며 트레킹을 이어간다. 산악회에서는 오늘 5코스를 안내해준다. 하지만 작은아버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4코스’ 답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우리 부부는 산악회와 따로 떨어져 독자적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 10 : 05. ‘원천마을’은 ‘퇴계 이황’의 후손들이 둥지를 튼 집성촌이자 ‘이육사(이황의 14대손이란다)’가 태어난 곳이다. 본명은 이원록. 어린 시절 그는 이 마을의 전통대로 유학과 한학을 익혔다. 참고로 ‘원천’은 퇴계선생의 5대손인 원대처사(遠臺處士) 이구(李榘, 1681-1761)가 정착하면서 붙인 지명이다. 세간명리를 떠도는 구름처럼 여기고 속진과 치욕을 ‘멀리한다(遠)’는 뜻으로 ‘원촌(遠村)’이라 부른 것이 마을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 ‘초가(草家)’라는 작품이 새겨진 이육사의 시비(詩碑). 하지만 마을에는 초가집이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 이육사의 생가 터. 한때는 큰 마을을 이루었을 동네는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 지역이 되었고 시인의 생가(‘六友堂’에 대해서는 위에서 얘기했다)도 그때 헐렸다. 그 집은 현재 문학관 언덕에서 만날 수 있다.
▼ 생가 터의 ‘청포도’ 시비. 작고 둥그런 7개의 화강암 위에 올라앉았다. 청포도 알갱이를 상징하는 모양이다.
▼ 옆에는 ‘목재고택(穆齋古宅)’이 들어앉았다. 조선 후기 문신인 목재(穆齋) 이만유(李晩由, 1822-1904)의 옛집으로, 그가 영해부사를 역임하였기에 ‘영감댁(令監宅)’이라고도 부른다. 이황의 후손으로 형조참판을 지낸 이귀운(李龜雲,1681-1761)의 증손자로 영남만인소의 소두(疏頭) 이만손(李晩孫)의 친족이기도 하다. 1858년(철종 9) 전시(殿試)에서 병과로 급제한 이후 승정원 승지, 영해부사, 사간원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 고택은 문도 담도 없었다. 옛날에는 솟을대문을 가진 대문채(행랑채)가 있었지만 수몰로 유실됐다고 한다. 고택에서는 민박이 가능하단다. 안채로 통하는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 집을 관리하는 이육사 시인의 따님인 ‘이옥비’여사를 만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룻밤 머물 계획이 없는지라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 목재고택의 오른편에는 ‘원대구택(遠臺舊宅)’이 있다. 원촌마을이란 이름을 부여한 ‘원대처사(遠臺處士)’ 이구(李榘)의 옛집이다. 이 고택 역시 대문채는 없고 정면 6칸, 측면 6칸 반 규모의 정침만 전한다.
▼ 맨 오른쪽은 ‘사은구장(仕隱舊庄)’ 차지다. 조선 정조·순조 때의 문신인 사은 이귀운(仕隱 李龜雲, 1744-1823)의 옛집이다. 이귀운은 이구의 증손으로 벼슬길에 있을 때는 의리와 신의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고 한다. 이름을 드러내기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호를 벼슬길에서 숨는다는 뜻으로 ‘사은(仕隱)’이라 했단다. 1786년(정조 10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삼사 요직을 거쳐 형조참판까지 지냈다.
▼ 이 집은 이원영(李源永, 1886~1958) 목사의 생가로 더 유명하다.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1919년 3·1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인물이다. 목회자가 된 후 1930년대부터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등을 거부하면서 4차례 옥고를 치렀다.
▼ 11 : 13. 도로(백운로)로 빠져나와 몇 걸음 더 걷자 이정표(퇴계공원 3.6km)가 세워져 있다. gpx 트랙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라며 경고를 보내오는 지점이다.
▼ 도로변 언덕에 그럴듯한 한옥이 들어서있기에 올라가봤다. 그리고 ‘원호정사(遠湖精舍)’를 만났다. 퇴계의 11세손인 ‘교리(校理) 이만형(李晩鉉, 1832-1911)’과 그 형제들의 면학정신과 우애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4형제 후손들이 1977년에 지은 건물이다.
▼ 요 아래 들녘에는 ‘칠곡고택(漆谷古宅)’도 있었다고 한다. 퇴계선생 10대손인 이휘면(李彙冕, 1807-1858)의 고택인데, 2006년 안동시에서 성곡동 고건축박물관(Gurume 리조트) 경내로 이건했단다.(사료를 뒤져보다 눈에 띄기에 거론해봤다)
▼ 11 : 14. 도로를 벗어나 들녘으로 들어간다. 이때 낙동강이 한 손에 잡히고, 왕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육사가 어린 시절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던 풍경이자 자라서는 ‘광야’의 시상을 떠올리던 풍경일 것이다. 그는 이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되리라 다짐하며 독립을 갈구하였다.
▼ 안동댐 수몰로 인해 들녘은 황무지로 변해있었다. 이육사의 ‘광야’를 떠올리기에 딱 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를 쓰던 시인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독립투사였다. 그의 시는 시리고 아프지만 희망차다. 그러니 한 걸음 한 걸음 시인이 전하고자 했던 마음을 떠올리며 걸어보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길을 갈수록 거칠어졌다. gpx트랙이 없었더라면 헤쳐 나갈 엄두도 못 냈을 정도다. 대신 시심에 한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광야’는 대한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염원하면서 지은 시로 평가 받는다. 과거부터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고, 수많은 침략에도 굴하지 않았던 한반도가 일제의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지만 자신은 저항의 씨앗인 이 시를 남기어 훗날 일어날 대한 광복을 기다린다는 저항시이다.
▼ 새옹지마라 했던가? 한걸음 내딛기조차 힘들 정도로 길이 거칠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고왔다. 억새꽃 만발한 들녘 너머에는 왕모산, 그리고 뭉게구름 둥둥 떠다니는 파란 하늘. 이 아니 아름다울 손가.
▼ 누군가는 가을 억새꽃을 일러 그 어느 꽃보다도 아름답다고 했다.
▼ 11 : 33. 거칠기 짝이 없는 들길과의 전쟁은 농로를 만나면서 끝난다. 주변지역 농민들의 경작지가 ‘원천들’ 안에 있는지 자동차 바퀴자국이 제법 또렷하다.
▼ 11 : 36. 이번에는 도로(왕모산성길)로 올라선다. 오른편에 보이는 ‘원천교’를 건너면 5코스(왕모산성길)가 종료되는 ‘내살미마을(원천리)’이다. 3코스(청포도)는 왼쪽 ‘단천리’쪽으로 간다.
▼ 길가 야생 나팔꽃이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아침 일찍이 피었다가 낮이면 시들어버리는 불쌍한 꽃(‘morning glory’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일 것이다)이다. 그래선지 꽃말도 ‘일편단심 사랑’이란다. 탐관오리에 빼앗긴 아내를 그리다 죽은 남편의 애절한 전설까지 담았으니, 집사람을 향한 내 사랑을 쏙 빼다 닮았다고나 할까?
▼ 오른쪽으로는 왕모산 자락의 험상궂은 바위절벽이 펼쳐진다. 낙동강변과 맞물린 저 벼랑의 꼭대기에 ‘갈선대’가 있고, 저 벼랑의 안쪽으로 5코스(왕모산성길)가 지나간다.
▼ 구(舊)도산청소년수련원을 리모델링했다는 ‘안동영화예술학교’. 미인가 영화특성화 대안학교로 영화를 주제로 시나리오 작법, 카메라의 이해 등 특별과목과 윤리·국어·수학 등 일반과목을 가르친다고 했다. 하지만 문을 닫았는지 텅 빈 운동장에는 학생들 대신 잡초만 무성했다.
▼ 단천리의 너른 들녘. 왕모산에 가로막힌 낙동강이 방향을 틀면서 만들어놓은 일종의 충적평야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이따가 ‘갈선대’에서 감상하게 된다.
▼ 11 : 43. 잠시 후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건지산 4.8km/ 칼선대 2.1km)에서 ‘왕모산성길’과 헤어져 ‘단사길’로 들어선다. ‘단천리’로 들어가는 길인데 2차선에서 1차선으로 바뀌었다.
▼ 11 : 46. 단천리 경로당. 이정표(건지산 4.7km/ 칼선대 2.2km)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낙동강 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곧장 직진하기로 했다. 다음 블록에 있는 ‘진성 이씨’의 종택에 들러보기 위해서다.
▼ 11 : 48. 네이버 지도는 ‘진성이씨(眞城李氏)’ 가문의 종택(宗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주하리(안동시 와룡면)에 있는 ‘주하동 경류정 종택’, 즉 국가민속문화재(제291호)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그 ‘진성이씨 종택’과는 어떤 관계일까?
▼ 단천리(丹川里)는 56가구 중 20가구가 ‘진성이씨’라고 했다. 그중 대부분이 이곳 ‘단사(丹沙) 마을’에서 살아간다고도 했다. 그러니 ‘토계리(진성이씨의 원래 세거지)’에서 단사마을로 옮겨 온 이후의 종가(宗家) 쯤으로 보면 되겠지?
▼ 100m쯤 떨어진 곳에는 퇴계선생의 8세손 이귀용이 지었다는 ‘계남고택(溪南古宅, 경북 민속문화재)’도 있다고 했다. 행여나 놓칠세라 두리번거리는데 주민분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알려주신다. 현재 성곡동 고건축박물관(Gurume 리조트)에서 숙박 손님을 맞고 있단다.
▼ 그는 인접해 있던 ‘서운정(栖雲亭)’에 대해서도 얘기해줬다. 헌종(憲宗) 때 이조참판을 지낸 농와(聾窩) 이언순(李彦淳, 1774-1845)이 말년에 지은 정자인데, 이 또한 성곡동 고건축박물관(Gurume 리조트)로 옮겨졌다고 한다.
▼ 11 : 51. 문화재 찾기를 끝내고 마을을 빠져나온다. 그리고는 탐방로가 있는 낙동강 쪽으로 간다.
▼ 11 : 53. 강 너머로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큼지막한 움직임이 한꺼번에 정지되어버린 듯 요지부동의 단애가 아랫도리를 물에 담그고 있다. 단애의 색깔이 붉어 보이는 것은 ‘단사마을’의 유래를 떠올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붉은 점토질 산맥이 마을 뒤로 뻗어 있고, 강가의 자갈이 연분홍빛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니 말이다.
▼ 이후부터는 제방(단사길)을 따라간다. 능수벚나무를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멋쟁이 둑길이다.
▼ 12 : 02. 단천교에 이르면서 3코스(청포도길) 트레킹이 종료된다. 3코스는 걷는데 2시간 10분이 걸렸다. 앱이 7.89km를 찍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산악회는 ‘3코스’의 길이가 짧다며 둘로 나눈 다음, 2코스(도산서원길)와 4코스(퇴계예던길)에 포함시켜 진행했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작은아버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4코스(2주 전에 진행했다)에 참석을 못했고, 때문에 3코스의 후반부를 다른 걷기 여행자들과 헤어져 단 둘이 걸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더 많은 밀어들을 속삭일 수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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