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63코스(천북굴단지 - 궁리항)

 

여 행 일 : ‘24. 11. 9()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천북면 및 홍성군 서부면 일원

여행코스 : 천북굴단지홍성방조제모산도공원남당항남당노을전망대어사항속동해안공원궁리항(거리/시간 : 11.2km, 실제는 13.33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3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홍성군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 수월한 코스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천북굴단지 광장(충남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에서 내려와 갈산면소재지(상촌리)로 들어온다. 갈산교차로에서 와룡로(남당리방면)를 타고 4km, 이호삼거리에서 40번 국도(남당·천북방면)로 옮겨 12km쯤 내려오면 천북굴단지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홍성 63코스) 안내도는 굴단지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천북굴단지에서 홍성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궁리항까지 가는 11.2km짜리 여정으로, 남당항, 노을전망대, 홍성타워 등 곳곳에 볼거리가 널려있다. 도중에 들르는 포구에서 맛볼 수 있는 싱싱한 생선회는 여행의 또 다른 재미, 특히 어사항에서 구한 칠게 튀김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광장은 지난주에 끝난 굴 축제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놓고 있었다. 천북면 지역에서 생산되는 굴의 뛰어난 맛을 전국에 알리기 위해 지난 2001년부터 열어온 축제이다. 굴은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수확하는 것을 최고로 치는데, 출하 초기에 맞추어 축제를 연다고 보면 되겠다.

 천북항. 며칠 전, KBS-2TV ‘생생정보통에서 이곳 천북굴단지가 소개됐었다. 어부는 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그물망에 가득 든 튼실한 굴을 건져내며 웃음꽃을 활짝 피웠었다. 하나 더. 새벽이면 굴세척과 선별작업으로 분주한 이색적인 풍경과도 마주할 수 있단다.

 10 : 23. 홍성방조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둑 위로 국도 40호선(홍보로)이 지나간다. 도로 양옆으로 인도를 따로 내놓았음은 물론이다.

 천수만은 천북면 어민들의 보물 창고다. ‘바다의 보석이라는 석화(石花)를 무럭무럭 키워내니 말이다. 서해의 갯벌과 만나 찬바람을 맞으며 자란 천북 굴은 탁월한 품질을 자랑한단다. 식감이 쫄깃쫄깃하고 향이 강해 보령 9미 중 하나로 꼽힌다.

 오른쪽은 방조제를 막으면서 생긴 홍성호이다. 풍광이 뛰어난데다 붕어나 잉어의 입질이 좋아 낚시꾼들이 발길이 잦은 곳이다. 반면에 버려진 쓰레기와 불법어구로 인해 환경오염이라는 몸살을 앓고 있지만.

 10 : 34. 홍성에서의 첫 만남은 수룡항이다. 포구에는 해양경찰의 수룡동파출소도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수룡동마을은 홍성호의 안쪽 깊숙이에 있다. 그러니 홍성방조제로 인해 바닷길이 끊긴 어민들을 위해 새로 조성한 항구일 것이다.

 이어서 홍성교를 건넌다. 홍성방조제는 모산도를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다. 배수갑문은 그중 남쪽 방조제의 북단에 위치한다. 그 배수갑문에 놓인 다리가 홍성교이다.

 10 : 40. 서해랑길에서 살짝 비켜나있지만 모산도(茅山島)’의 꼭대기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조망의 명소이니 꼭 들러보라던 지인의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너스로 홍성방조제준공탑도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홍성교에서 150m쯤 북진하다보면, 도로변에 쳐놓은 철책을 1m쯤 띄운 다음 사철나무 숲 사이로 길을 만들어놓았다.

 10 : 43. 지인의 말대로 산마루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그만큼 조망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곳은 모산도(茅山島), 이름처럼 산으로 이루어졌고 이곳은 그 꼭대기다. 하지만 고도계는 기껏 42m를 찍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주위가 제로 레벨이어서 사방으로 시야가 툭 트이는 것이다.

 방조제 끝에는 최근 핫 플레이스로 뜨고 있다는 천북 굴단지가 놓여있다. 이를 가운데 두고 홍성호와 천수만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홍성호는 금리천(錦里川)의 하구역에 둑을 쌓아 만든 담수호이다. 아름다운 호수로 입소문을 탔지만 아쉽게도 역광이 망쳐버렸다. 참고로 금리천은 은하면(홍성군) 장곡리에서 발원 금국리·학산리·금곡리(결성면)를 지나 성남리에서 서해로 합류하는 길이 7.2km의 지방하천이다.

 방조제준공탑’. 1991-2001, 보령·홍성지구 대단위 농업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보령방조제와 홍성방조제를 쌓았다. 이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호수가 보령호와 홍성호이다. 이곳이 홍성인데도 보령·홍성방조제준공탑인 이유다. ! 옆에 풍력발전기도 세워져 있었으나 얘깃거리가 없어 생략했다.

 진입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김자 결성현감 승전지비(金滋 結城縣監 勝戰址碑)’를 만났다. 이곳 모산도(혹은 모산포)는 왜구의 노략질이 잦은 곳이었단다. 빗돌은 조선 태종 8(1408) 결성현감 김자가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빗돌에 적힌 결성현은 지금의 홍성군 결성면이다. ‘홍성이라는 지명은 홍주와 결성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10 : 51. 다시 만난 국도.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간다. 바닷가를 따라 모산도공원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널찍한 주차장 앞 솔숲에 쉼터 겸 정자가 놓여 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가 아른거린다. 예전 이곳은 모산도(茅山島)’라는 섬이었다. 금리천이 황해와 만나는 지점에 방조제를 쌓으면서 육지가 되었다.

 공원에서의 조망도 빼어난 편이다. 천북굴단지에서 남당항까지 천수만의 너른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천북이 굴 구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다면, 반대편에 위치한 남당항(사진)은 대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10 : 54.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홍성호의 북쪽 방조제이다. 홍성방조제는 남·북 방조제를 합칠 경우 1,856m나 된다. 올망졸망한 섬들로 수놓인 천수만이 없었더라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긴 방조제다.

 천수만은 세계적 철새 도래지이다. 기러기·독수리 등 다양한 철새들이 찾아오는 중요한 생태적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저 고니(?) 무리는 그중 선발대일까?

 11 : 02. 홍성방조제는 북단에 있는 신리교차로에서 끝을 맺는다.

 홍성군은 이정표를 조금 다르게 운용하고 있었다. 종점과 시점을 중심으로 인근의 주요 지점을 끼워 넣던 다른 지자체들과는 달리, ·종점은 하단의 지도에만 표시하고 날개부분에는 주요 지점들을 적어 넣었다.

 이후부터는 남당항을 바라보며 간다. 도로는 홍보로에서 남당관광로로 바뀐다.

 이때 천수만에서 죽도가 떠오른다. 5년도 더 전에 다녀왔지만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한 섬이다. 이름처럼 대나무가 많았던 섬, 두 개의 섬이 육계사주(陸繫砂洲)로 연결되어 있던 섬이다. 당시 기억을 잠시 빌려보자. <전망대에 오르면 하늘이 반, 바다가 반이다. 높이에 비해 전망이 시원하다는 얘기다. 천수만에 동동 떠있는 죽도는 자신보다 작은 11개의 섬을 거느린다. 올망졸망 새끼 섬들이 부러운 듯 그리운 듯 죽도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일부 섬은 물이 들고 남에 따라 가느다란 모래 띠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도 한단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한걸음 더 나가보자. 본섬의 서쪽에는 큰달섬과 작은달섬, 충태섬이 내려다보이고, 북쪽 방향으로 띠섬(모도), 멍대기(명덕도), 오가리(큰오가도와 작은오가도), 전재기(전도) 등이 늘어서 있다. , 남쪽 끝섬으로는 지마녀, 움마녀, 제일 북쪽 섬으로 꼬장마녀 등이 있다. 마녀의 뜻은 만조시간이 긴 섬이라는 의미이며, 꼬장은 끝장 , 제일 북쪽의 끝을 의미한단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육지의 맨 끝을 장식하고 있는 꽃섬이 눈에 들어온다. 지인으로부터 꼭 들러보라던 명소 중 하나이다.

 11 : 14. 작은 동네(‘소섬마을일 것이다)를 횡단하자 또 다시 바다가 나왔다. 왼쪽 끄트머리에 있는 꽃섬부터 일단 둘러보기로 했다.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빌던 당산(堂山)이었던 곳이다.

 당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굵직한 팽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제단 등 제사를 지낸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탐방로는 이제 바닷가를 따라 북진한다. 물 빠진 갯가를 따라 걷는 해안길은 정면에 남당항을 놓고 길을 이어간다.

 왼쪽으로는 천수만이 드넓게 펼쳐진다. 천수만(淺水灣)은 안면도와 충청남도 해안선에 둘러싸인 만이다. 서산시·보령시·태안군·홍성군 등 4개 시군에 접하고 있으며 항구도 수십 개에 이른다.

 11 : 27. ‘남당항(南塘港)’에 이른다. 서부면 남당리에 있는 국가어항으로 남당이란 지명은 조선 영조 때 학자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 낙향하여 이곳에 살게 되면서 그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송시열·권상하의 학통을 이어 정통 주자학을 계승·발전시켰으나, 변화하는 시대(당시는 실학자들의 사회개혁론이 제기되던 시기였다)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해양분수공원이다. 남당항의 거대한 광장 한가운데 음악과 분수쇼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바닥 분수와 형형색색 무지갯빛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저곳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단다. 바닥분수에서 팡팡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물줄기를 흠뻑 맞은 아이들이 사방팔방 물총을 쏘아대며 물놀이를 즐긴단다.

 국내 최초의 해양형 네트 어드벤처라고 한다. 팡팡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면 두 눈에 천수만이 가득 담긴다나? 튀어 올라 가까운 죽도도 보고, 한 번 더 높이 튀어 오르면 저 너머의 안면도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안에서는 아이들 두엇이 탄탄한 그물네트를 발판삼아 통통 튀어 오르고 있었다. ‘위아래 위위아래 박자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신기롭기까지 했다.

 길은 방파제에 기대듯 내놓았다. 바닥을 형형색색의 꽃들로 채워 넣어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하지만 분수 주변에 있다는 트릭아트는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니 있는 줄도 몰랐다. 일류의 포토죤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I  NAMDANG’. 이렇게 공들여서 포구를 꾸몄으니 사랑받을 만도 하겠다.

 작은 광장도 눈에 띈다. 방파제에 잇댄 작은 공간을 만들었으나, 힘들게 만들었을 그 공간은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여행자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비우듯 채워져 있는 공간에서 문득 도()까지 떠올렸다면 나만의 오해일까?

 감각적인 멋이 뚝뚝 떨어지는 새조개 형상의 의자. 평생을 꽃띠로 살고자 하는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정박되어 있는 배는 별로 없지만, 남당항은 현제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지 어선이 70척 이상이어야 지정받을 수 있다니, 천수만에서 가장 큰 어항으로 보면 되겠다.

 홍성군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홍성 서해랑길 63코스 걷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남당항 분수공원에서 출발 5km를 왕복하는 행사인데, 반려견과 함께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참가자에게는 기념품까지 준다고 한다.

 길은 자연스레 남당항 수산시장으로 이어진다.

 상가는 횟집 일색이다. 활어회에 해물탕, 칼국수 등 메뉴도 다양하지만 새조개를 팔지 않는 집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하긴 새조개 축제까지 열리는 곳이니 어련하겠는가. 축제 때는 살이 통통하고 맛이 좋기로 이름난 천수만 새조개를 맛보러 전국 각지에서 미식가들이 몰려온단다.

 상가 앞 조형물.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상인 두엇이 담소를 나누다가 뭐처럼 생겼냐며 물어온다. ‘꽃게 발?’ ! 하며 도리질을 하는 그녀. 그리고는 남당항을 유명하게 만든 게 새조개 축제였다고 알려준다. 맞다. ‘남당항은 겨울 새조개 고장의 대명사로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10분 거리에 있는 죽도로 들어가는 여객선 선착장. 남당항에서 죽도까지는 40인승 홍주호가 하루 5회 왕복한다. ·일요일과 공휴일엔 오전 10시 한 차례 추가 운항하고, 죽도에서 나오는 마지막 배는 오후 5시다.

 11 : 43. 수산시장 뒤(이정표 : 종점까지 6.7km)에 이르면 남당항 구경은 끝난다. 활처럼 바다로 휘어나간 방파제 입구이기도 한데, 서해랑길은 또 다시 바닷가를 따라 북진한다. 고운 모래가 깔려있는 해안은 웬만한 해수욕장은 저리가라다.

 홍성에는 해수욕장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4년 전쯤 거친 돌부리만 가득했던 저곳에 많은 모래를 쏟아 부어 인공해변을 만들었단다. 모험이라 할 수 있는데 저렇게 모래가 유실되지 않고 남아있으니 성공한 셈이다. 오히려 바닷물이 드나든 자국까지 부드럽게 나있는 게 천연의 모래사장이 전혀 부럽지 않게 됐다.

 11 : 53. ’남당 노을전망대이다. 바다로 휘어진 길모퉁이에서 딱 그 모양대로 곡선을 그리며 돌출된 해상 전망대다. 금빛 모래사장 위로 붉은색 다리를 놓고 그 끄트머리에 전망대를 들어앉혔는데, 해질 무렵이면 천수만 바다와 물기 촉촉한 갯벌까지 한꺼번에 붉은 기운에 휩싸인다고 했다.

 옆에서 본 노을전망대. 길이 102m에 높이가 13m나 되는 다리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한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 있어 걸을라치면 마치 하늘과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바다 품은 작은 섬 그러나 천지가 선경인 섬, 죽도.  죽도 죽도록 사랑하란다. 맞다. 내가 기억하는 죽도는 사랑받기에 충분한 섬이었다. 참고로 죽도는 홍성군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일한 섬이다. 천수만(淺水灣)의 고요한 물결 위에 떠있 듯 자리한 본섬을 11개의 꼬맹이 섬들이 호위하는 모양새인데 그 자태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덕분에 낭만과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 다른 기억을 소환해보자. 죽도는 눈을 들이대는 곳마다 세외선경이 펼쳐졌었다. 꾸며놓은 솜씨도 최고였다. 그중에서도 옹팡섬·동바지·담깨비 등의 조망대에서 만난 캐릭터들은 백미였다. 최영·한용운·김좌진 등 홍성이 낳은 인물들을 모셨다. 그중에서도 담깨비조망대에서 만난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본군을 대파했던 청산리대첩의 주역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군이 아닌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나라보다 이념을 더 중요시하는 공산주의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확실한 이유일 것이다.

 전망대를 빠져나와 다시 북진한다. 어느 기자는 이 구간을 임해관광도로로 적고 있었다. 그래선지 뷰가 좋은 카페나 음식점이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띈다. 이 구간 어디서나 천수만 바다와 그 너머 안면도가 눈에 쏙 들어오기에 가능할 것이다.

 12 : 06. 눈의 호사를 누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어사항(於沙港)’에 이른다. 천수만에 기대어 살아가는 전형적인 어촌이다. 앞에는 물고기가 많은 천수만이 있고, 주변 모래밭이 넓어 어사라는 명칭이 생겼단다.

 어사항 초입에서 만난 카페, 젊은이들로 붐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화려하게 치장된 여느 카페들과는 달리 단순하면서도 넓은 창으로 노을을 즐길 수 있도록 꾸몄다. 더 특이한 것은 최고의 로큰롤 앨범으로 꼽히는 비틀스의 8집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상호로 내건 것이다.

 밖에는 비틀즈의 11번째이자 마지막 음반인 ‘Abbey road’를 사진으로 제작 게시해 놓았다. 비틀즈의 음악 세계로 들어서는 가장 탁월한 시작점이 되어준 마지막 앨범으로 평가받는 앨범이다.

 12 : 09  12 : 18. ‘어사항은 인근 남당항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다. 하지만 이곳 또한 대하집산지다. 새조개도 흔하게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온통 칠게만 들어왔고, 그걸 튀김으로 부탁해서 챙겨왔다. 도반 한 분이 연태 고량주를 병째로 주겠다는데, 이만한 안주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후부터는 홍성스카이타워를 전면에 두고 간다.

 12 : 22 - 12 : 51. ‘어사리 노을공원’. 어사항 근처의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공원으로 산책로와 정자, 전망대, 광장 및 운동시설을 갖추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까 어사항에서 구입한 칠게 튀김에 반주를 곁들일 수 있는 좋은 쉼터가 되어주었다.

 노을공원의 하이라이트는 두 남녀가 행복한 모습으로 소중한 약속을 하는 모습을 담은 조형물(행복한 시간)이다. ’투조기법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낮에는 푸른 하늘빛을 담고 저녁에는 노을로 붉게 물드는 남녀의 얼굴을 보여준단다. 연인들이 바다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하늘빛을 담은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포토존도 만들어놓았다.

 남당항의 노을전망대보다 낮기는 하지만 이곳에도 노을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전망대 끝에 또 하나의 대를 세워 시야를 넓혔다. 천혜의 자원인 천수만 노을을 조금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전망대답게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천수만과 그 건너 안면도가 은밀한 속살까지 내보여준다.

 진행방향에는 홍성스카이타워가 놓여있다. 그 뒤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궁리항일 것이다.

 홍성군의 관광안내판은 ‘12을 꼽는다. 거기에 5(한우··새우젓·친환경농산물·한돈) 3(한우구이·대하구이·새조개 샤브샤브)를 추가하고 있었다.

 12 : 55. 다시 길을 나선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하나의 횟집타운이 조성되어 있었다. 생선을 공급해줄 포구도 없는데 말이다. 유난히도 해안선이 짧은 홍성의 특징이지 싶다. 실제 홍성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남당항을 얘기하면 금방 거기가 홍성이었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정도로 바다를 접한 면이 짧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홍성의 해변은 북쪽 궁리항에서 남쪽 홍성방조제까지 약 10km에 불과하다.

 이곳은 저녁노을의 명소. 먹거리에 눈요기를 보태라는 듯, 바닷가에 테라스 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식탁까지 배치했다.

 13 : 00. ’어사교(이정표 : 종점까지 4.1km)‘를 건넌다. 어사지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하천을 건너는 다리이다. 어사리를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 다리를 기점으로 거차리에 바톤을 넘겨준다.

 저것은 현대식 독살? ‘독살은 해변에 돌담을 쌓아 들물 때 들어온 물고기를 썰물 때 잡는 원시어로 방법이다. 일종의 돌 그물인 셈이다. 그런데 요즘은 부표를 매단 그물이 독담을 대신하는 모양이다.

 서해랑길은 이제 남당항로를 따라간다. 2차선의 도로변을 따라 자전거길이 잘 나있다.

 ! ‘화살나무도 열매를 맺는가 보다. 난생 처음 마주한 상황이니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연새골 선착장이 있는 이곳은 400m쯤 되는 해안선을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상점이나 펜션이 일절 없는 조용한 해변공원이다. 그러니 삭막한 도로변을 떠나 잠시지만 숲길을 걸어보자.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멋진 풍차가 반긴다. 근처 숲에는 원두막도 들어서 있다. 가족단위의 피크닉을 즐기기에 딱 좋은 장소로 하겠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조금 전 지나온 어사리노을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오른편에는 천수만 놓여있다.

 ‘13 : 13. 연새골선착장 진입로를 이용해 남당항로로 다시 올라왔다. 150m쯤 더 걸으면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 나타나나,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조금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 펼쳐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민들에게 갯벌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그러니 그 일터로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어야만 한다.

 13 : 25. 그렇게 잠시 걸으면 속동해양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2.5km)’이 얼굴을 내민다. ! 오다가 만난 두리팜이란 건물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두리+농장?, 부부가 두 자녀와 함께 농산물을 길러, 중간 유통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농장이라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속동마을에서 만났으니 응당 속동 선착장이겠지?

 서해랑길은 이제 속동해안공원의 산책로를 따라간다. 500m쯤 되는 바닷가를 따라 좁고 길게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이즈음 모섬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바닷물이 빠지면서 육지와 연결되어있다.

 13 : 39. 길은 상황교 아래 나무다리를 지나 홍성스카이타워로 향한다. 옛 속동전망대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어진 65m 높이의 타워는 기세도 당당하다. 올해 5월에 문을 열었는데도 이미 홍성의 랜드 마크로 자리를 잡았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면 죽도부터 멀리 안면도까지 천수만의 풍경이 두 눈에 와락 안겨 온다. 하지만 아래층에 있다는 실내전망대는 들러보지 못했다. 투명 강화유리가 깔린 스카이워크가 있어, 아드레날린이 확 솟구치는 아찔한 스릴을 즐길 수도 있다는데 말이다.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도가 발아래 놓여있는가 하면, 호수를 닮은 천수만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일렬로 늘어선 것처럼 보였던 죽도와 이에 딸린 섬들이 앞뒤로 입체감을 드러낸다. 천수만 너머로는 남북으로 길쭉하게 태안반도가 뻗어 있다. 높이만 살짝 바뀌었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풍광이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궁리항 쪽의 해안선이 눈에 들어온다. 홍성의 해안은 궁리항에서 홍성방조제까지 이어진다. 관광지로 제법 알려진 남당항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소박한 갯마을들이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바다와 육지가 조화를 이루는 해넘이를 보여준다나?

 타워에서 내려오니 서해랑길 쉼터가 눈에 띈다. 홍성군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코리아둘레길 쉼터운영 및 지역관광자원 연계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선정됐다더니 그 일환으로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어반스케치 트래킹 체험인 나만의 노을 남기기’, ‘남당플로깅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한다고 했다.

 13 : 48. 서해랑길은 이제 남당항로를 따라간다. 하지만 우린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르기로 했다. , 아니 가슴에 담을만한 구경거리라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13 : 50. 꼬맹이 무인도인 모섬은 데크 로드로 연결되고 있었다. 간월암이 바라보이는 섬의 꼭대기까지 산책이 가능하단다. 하지만 간식을 먹느라 여유시간을 다 써버린 탓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13 : 55. ‘모도 앞에서 방향을 튼 길은 남당항로까지 다시 데려다준다.

 이 구간에도 해안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캠크닉(캠핑과 피크닉의 합성어) 성지로 알려지는 곳이다. 그래선지 텐트는 물론이고 캠핑카도 여럿 눈에 띄었다. 간이 캠핑 테이블과 의자를 펴고 노을을 감상하려는 이들일 것이다.

 잠시 후, 서해랑길은 해안도로를 벗어나 바닷가로 간다. 해안선을 따라 축대를 쌓고 산책로를 내놓았다.

 궁리항의 끄트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저 산봉우리는 풍섬이라고 했다. 개발 바람을 맞아 이미 육지가 되어버렸지만.

 14 : 17. ‘궁리항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한적한 어촌 마을인 궁리포구는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이 평화롭다. 기다란 방파제로 연결된 선착장에는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싣고 온 고깃배가 수시로 들어온다. 하나 더. 궁리포구에도 새로운 명소가 생겼다. 바다 위에 놀궁리(’궁리항에서 놀자?) 해상파크를 만들어 색다른 낙조를 만날 수 있도록 했다.

 궁리어판장은 낚시질하는 사람들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머리에 얹고 있었다. 이곳 궁리포구가 가족단위 낚시터로 그만이라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서해랑길(서산 64코스) 안내도는 보령해양경찰서 궁리파출소의 뒤쪽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3.33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서해랑길 62코스(충청수영성  천북굴단지)

 

여 행 일 : ‘24. 11. 9()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천북면 일원

여행코스 : 충청수영성보령방조제하만저수지사호회전교차로사기점저수지사호리 노두길천북굴단지(거리/시간 : 15.9km, 실제는 15.28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2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 수월한 코스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충청수영성 주차장(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서해안고속도로 광천 IC에서 내려와 광천읍까지 온다. 단아래사거리에서 21번 국도(보령방면으로 8km), 청소면의용소방대 앞에서 610번 지방도(도미항로)로 옮겨 7km쯤 들어오면 충청수영성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보령 62코스) 안내도는 충청수영성의 서문 입구에 세워져 있다.

 오천항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천북굴단지까지 가는 15.9km짜리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충청수영성(‘보령9경 더하기 7)과 사호리해안의 노두길, 천북굴단지 등이 꼽힌다. 하나 더, 이 구간은 물때에 맞춰 답사해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바닷물이 차오르면 해식애를 낀 노두길을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11 : 30. 충청수영성의 서문(西門)’으로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조선시대 서해 해군사령부였던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대흥산 상사봉에서 북서쪽으로 달리는 능선 말단부에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충청수영의 규모는 군선 142, 수군 8414명에 이른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고종 33(1896)에 폐영(廢營)됐다.

 뒤돌아본 서문. 충청수영성에는 진남문(鎭南門만경문(萬頃門망화문(望華門한사문(漢舍門)  4곳의 성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서문인 망화문만 홍예문 형태로 남아 있다.

 성곽은 대흥산의 상사봉에서 북서쪽으로 달리는 능선 말단부에 축조됐다. 그러니 잠시지만 가파른 언덕을 오를 수밖에 없다.

 서문을 들어서자 진휼청(賑恤廳, 도 문화재자료 제412)이 맞는다. 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덕분에 대청·온돌방·툇마루·부엌 등으로 이루어진 내부구조는 고사하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마저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참고로 진휼청은 흉년이 들면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하던 곳이다. 수영이 폐쇄된 후 민가로 팔렸다가 1994년 다시 매입했다고 한다.

 충청수군의 군선과 수군들로 북적였을 오천항. 천혜의 입지 덕택에 오천항은 삼국시대부터 중국과의 교역항 역할을 맡아왔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런데 포구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어쩌면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임을 알리던 초입의 안내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면 다 돼!’를 외치던 그 생활밀착형 치정 로맨스에 나 역시 푹 빠져 있었으니까.

 영보정(永保亭)은 연산군 11(1504) 수사로 부임한 이량(李良)에 의해 세워졌다. ‘영원히 보전한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뜻(忠君憂國之意)’도 담고 있단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채팽윤(蔡彭胤, 1669-1731) 호서의 많은 산과 물 중에 영보정이 가장 뛰어나다고 극찬했을 정도라나? 충청수영성이 폐쇄되면서 함께 사라졌으나 2015년 복원을 마친 덕분에 그 아름다움을 실제 체감해 볼 수 있었다.

 천상누대 화중강산(天上樓臺 畵中江山)’라고 쓰인 편액이 눈길을 끈다. ‘천상의 누대에 오르니 그림 같은 강산이 펼쳐지는구나.’ 영보정에서의 조망을 이 여덟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편액의 자랑처럼 영보정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발아래로 광천천의 하구역이자 천수만 입구의 바다가 펼쳐진다. 충청수군의 군선들로 붐볐을 바다는 푸른 하늘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 바다는 지금 자그마한 어선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10 : 40. 영보정을 지나온 길은 충청수영성의 성벽으로 향한다. 이어서 성곽을 관통하고 있는 ‘610번 지방도(충청수영로)’를 횡단한다. 북문지(北門址)로 예상되는 지점인데, 충청수영성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이렇듯 성곽은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해 많이 훼손됐다. 그나마 성지(城址)나 그 주변 지형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던가 보다. 국가 문화재(사적 제501)로 지정된 걸 보면 말이다.

 도로를 건너자 장교청(將校廳, 사진)’ 내삼문(內三門)’이 맞는다. 객사(장교청) 운주헌(運籌軒, 도 문화재자료 제411)’은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폐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곳이다.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삼문(위 사진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건물)은 수군절제사가 집무하던 공해관(控海館)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 문이다.

 장교청 앞의 선정비들. 충청수영성은 충청도 수군 전체를 관리하던 성이다. 저 많은 빗돌들이 그 증거다. 참고로 충청수영성은 관할 해역이 북쪽 아산만에서 남쪽 금강 하구 장항만에 이르렀다.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흩어진 섬들이 250개나 된다.

 탐방로는 이제 성벽을 따라 간다. 성벽은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운 외축내탁(外築內托)의 축성술을 이용했다. 길은 그런 성벽 위로 나있다. 참고로 충청수영성은 1509(중종 4) 수군절도사 이장생이 서해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돌로 축성했다. 성벽은 길이가 1650m에 이른다.

 그렇다고 앞만 보고 걷지는 말자. 뒤돌아볼라치면 장교청과 영보정은 물론이고 성벽까지 충청수영성의 전모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충청수영성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과 백사 이항복도 영보정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했단다.

 탐방로는 산등성이를 따라간다. 성벽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 흔적, 아니 그마저도 웃자란 잡초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10 : 46. ‘만경문(萬頃門)’이 있던 동문지(東門址). 안내문은 동문이 성벽 사이에 누각을 짓는 개거식(開拒式)이라고 적었다. 성문 가까이의 성벽에 돌출시켜 만든 적대(敵臺)’도 있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터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10 : 49. 동문지에서 바닷가로 내려간다. 이어서 소성2리 경로당을 지났다싶으면 이내 610번 지방도(충청수영로)로 올라선다. 인도가 따로 없어 안전에 각별한 유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10 : 58. 보령방조제의 남단인 소성삼거리’.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오른편 산등성이에 충청수영 해안경관조망대가 있다는 것이다. 오천의 아름다움을 파노라마로 만끽할 수 있는 곳이라는데 다녀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하나 더. 직진하면 도미부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 정절사도 만나볼 수 있다. 이 역시 잠깐 다녀오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지만.

 서해랑길은 이제 홍보로(국도 40호선)’를 따라간다. 오천면과 천북면을 잇는 보령방조제의 제방 위로 동명의 차도가 나있다. 양옆에 인도를 따로 내놓았음은 물론이다. 이 구간에서의 자랑거리는 조망이다. 둑길을 걸으며 오천항과 충청수영성, 보령호의 풍경을 색다른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천북마리나에 정박된 요트들의 이국적인 풍경도 함께 눈에 담을 수 있다.

 이즈음 천수만에 어깨를 기댄 충청수영성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충청수영성은 안면도·원산도로 둘러싸인 천수만에서도 좁은 내만(內灣)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 하지만 앞바다의 수심이 깊은 데다 서해안의 심한 조수간만의 차이에도 다른 포구와는 달리 배가 드나드는 데 어려움이 없단다. 주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뒷동산의 자연 지형까지 감안하면 천혜의 해군 요새라 할 수 있다.

 이곳은 낙조 감상의 포인트이기도 한 모양이다. 포토존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안내판은 또 정절의 상징인 도미부인의 설화를 바탕으로 주변 경관을 연계시킨 도미부인 솔바람길이 지나간다는 것도 살짝 귀띔해준다.

 오른쪽에는 보령호가 있다. ‘보령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겼으니 당연한 지명이겠으나, 그 보령호가 광천천의 물길을 가로막은 내수면임을 감안하면 마땅치 않은 이름일 수도 있겠다. 하나 더. 호수 너머로 보이는 섬은 정절을 상징하는 도미부인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빙도(미인도)’. 도미부부가 태어난 곳으로, 백제 개루왕으로부터 수난을 당하기 전까지 살았다고 한다.

 11 : 09. 배수갑문. 길이 1,082m(높이 20.7m)의 보령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보령호의 담수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수문이다.

 11 : 16. 도로를 따라 5-6분쯤 걸었을까. 서해랑길 표식이 오른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가란다. 농로를 따라 들녘을 에둘러가는 구간인데, 속도를 올리기 딱 좋은 직선도로인데다 인도까지 없는 국도를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국도를 따르기로 했다. 오가는 차량들을 조심해서 걷기만 하면 되는데, 눈요깃거리도 그렇다고 특별한 이야깃거리도 없는 들녘을 일부러 에둘러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거기다 거리까지 1km 가깝게 단축할 수 있는데 뭘 망설이겠는가.

 예상대로 인도는 따로 없었다. 거기다 안전선이랄 수 있는 흰색 페인트 선의 바깥도 한 사람이 걸어가기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폭이 좁았다. 나를 믿고 따라오는 도반들에게 약간 미안할 정도로... 하지만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단풍나무가 그 미안함을 약간이나마 덜어주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하만3’, 이즈음 오른쪽으로 두룽개들이 펼쳐진다. 서해랑길은 저 들녘을 가로지르며 나있다.

 도로변에는 두만소류지라는 둠벙에 가까운 저수지도 있었다. 입질이 좋은지 강태공들 여럿이 세월을 낚고 있었다.

 11 : 36. ‘하만3리 노인정에 이른다. 옆에 있는 천북농협 벼 건조·저장시설의 규모가 무척 크다. 천북면 주민들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43. ‘동음마을 버스정류장 앞에서 서해랑길과 다시 만났다. 샛길(농로)이 국도를 가로지르는 간이 사거리인데, 이정표(종점 8.5km/ 시점 7.4km)는 왼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가란다.

 도로를 건너면 대궁골(하만4)’. 전형적인 시골 풍경과 마주친다. 민가 대여섯 채가 산자락에 기대듯 들어섰는데, 마을 앞으로 산골 치고는 제법 너른 들녘이 풍요롭게 펼쳐진다. 널찍한 들녘은 인심까지도 넉넉하게 만드나보다. 주민 한 분이 처음 본 나그네에게 요기나 하라며 삶은 밤을 한 움큼이나 주셨다.

 11 : 59. ‘하만4리 노인정 앞에서 하학로로 올라선다. 아까 걸어왔던 홍보로(국도 40호선)’가 하만교차로에서 가지를 쳐놓은 지선이다. 보령과 홍성을 잇는 홍보로는 천북굴단지로 가고, 갈려나온 하학로는 이곳 하만4리 대궁골과 사호3리 짓개마을을 거쳐 천수만으로 나간다.

 12 : 06. ‘하만 회전교차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맨삽지(학성리)’로 가는 길이 나뉘는 곳이다. 다리품만 조금 더 팔면 다녀올 수 있다는 몽중루 작가님의 조언에 귀가 솔깃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록암(고성)과 사도·추도·낭도(여수)에서 실컷 보았던 기억이 있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12 : 10 - 12 : 20. ‘사호1 버스정류장. 걷기 여행자들에게 쉼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리고 그 역할은 주민들의 참새 방앗간인 마을 정자가 대신해주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정자를 만나지 못한 경우에는 버스정류장에서 쉬어갈 수밖에 없다.

 사호교차로부터는 사호장은로를 따라간다.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 가을빛으로 가득한 농촌 마을들을 차례로 지나간다. 마을 앞. 추수가 끝난 들녘은 텅 비어있다. 아니 곤포사일리지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늦가을의 진풍경이라 하겠다.

 12 : 32. ‘사호축산(영농법인)’의 거대한 축사를 지나자 사기점저수지가 얼굴을 내민다. ‘사기점(사호1)’ 마을의 입구이기도 하다. ‘사기점(沙器店)’은 사기그릇을 굽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가마터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단다.

 12 : 42. 서해랑길은 사호3 버스정류장 앞에서 차도(사호장은로)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농로를 따라 천수만으로 간다. 들머리의 표지석이 사호3리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짓개로 들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바닷가에 가까워지자 주변 풍광이 확 바뀐다. 농경지였던 들녘이 어느새 대하양식장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 했던가? 오늘도 난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대하양식장의 바닥이 비닐로 코팅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물만 빼면 대하를 쓸어 담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효율적인 방법인가.

 12 : 48. 대하양식장을 기웃거리다 작은 방조제(싯개 들녘을 만든) 위로 올라선다. 이어서 바닷가를 따라 북진한다.

 둑에는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5km) 말고도 천북굴따라길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천북굴단지를 종점과 시점으로 각각 삼고 있으니 두 길이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천북 굴 따라 길은 장은리 천북 굴단지에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학성리 맨삽지까지 천북면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내놓은 길이 7.8km의 둘레길이다. 해식애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바닷가를 걸으며 굴을 길러내는 양식장을 가까이서 눈에 담을 수 있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걷기에 제격이다.

 12 : 54. 잠시 후, 나지막한 그러나 경사가 무척 가파른 산 하나가 앞을 떡하니 가로막는다. 길은 오른쪽으로 나있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바닷가 방향이다. 해안선을 따라 데크 로드를 내놓았다.

 이곳은 물때에 따라 진행방향을 달리해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출렁다리까지는 노두길을 걸어야 하는데 바닷물이 차오르면 통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초입에 우회로 안내 현수막을 설치하고 QR코드로 만조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 더. 간조 시각 전후로 2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걷기를 권한다. 바닷물은 생각보다 빠르게 차오르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산자락과 바다의 경계를 따라 다리를 놓듯 길은 내놓았다

 천수만 입구 쪽 풍경이다. 건너편 학성리(천북면) 해안 앞에 작은 섬 하나가 오롯이 떠있다. 공룡발자국화석이 별견되었다는 맨삽지일지도 모르겠다. 보령시에서 공룡 테마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3 : 01 : 그렇게 얼마를 걷자 작은 포구가 길손을 맞는다. ‘사호3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열호동(烈湖洞, 우리말로는 여르문이)’인데, 안면도와 마주하는 해안에 포구가 들어서 있다.

 여르문이 마을 앞에서 바닷가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노두길을 따라 북진한다. 갯마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어선지 바닷가를 따라 시멘트로 길을 내놓았다. 이곳은 그 유명한 천북 굴이 생산되는 곳이다. 주민들이 생산한 굴을 가득 실은 경운기들이 노두길을 따라 줄지어 나오는 풍경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본다.

 서해랑길은 이제 천수만의 해안사빈(海岸沙濱)을 따라간다. 같은 천수만인데도 앞서 오천항에서 보았던 바다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선박들이 오가는 푸른 바다 대신 검붉은 갯벌이 드넓게 펼쳐지는 것이다.

 갯벌을 나누어놓은 저 경계표시는 뭘 의미하는 것일까? 경지정리를 끝낸 농경지처럼 반듯하게 나누어놓았다. 갯벌도 구역에 따라 주인이 따로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각자의 구역에 돌과 자갈을 넣어 굴 생산을 하는 모양이고 말이다. 하나 더. ‘천북 굴은 줄에 매달아 기르는 남해안과는 다른 방식으로 굴을 기른다고 했다. 갯벌에 돌을 넣거나 나무를 꽂는 방식으로 굴을 양식한단다.

 길은 침식해안을 따라간다. 이때 전국의 유명 바닷가들에 비해 손색이 없는 풍광이 펼쳐진다. 인근인 서산에도 황금산과 그 아랫자락을 에돌아가는 빼어난 풍광의 해안이 있다. 해식으로 인해 만들어진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놀고 있는 곳, 그리고 파도와 몽돌의 절묘한 하모니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한 기경을 이곳에서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해식애(海蝕崖)와 해식동, 파식대(波蝕臺), 간석지 등의 해안 지형이 번갈아가며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진풍경을 가슴에 담아가는 신선놀음은 15분 정도 계속된다. ! ‘천북 굴따라 길 중에서 순수하게 갯벌을 따라 걷는 구간은 5km 남짓 된다는 것도 알아두자.

 해안은 온통 해식애로 이루어져 있다. 해식작용으로 인해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파도가 만들어낸 동굴들로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해식절벽에서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13 : 19. 그렇게 눈의 호사를 누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하파동에 이른다. 사호3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인데, 마을 앞 바다가 육지를 향해 푹 파고들어와 작은 만()을 만들어놓았다.

 이때 옛 멋을 풀풀 풍기는 노두길이 나타나면서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오래전 바닷가 사람들은 섬과 섬, 또는 육지와 섬 사이 갯벌에 돌을 던져 징검다리 길을 만들었다. 돌을 던져 만든 그 노두길은 어촌 주민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걷기 여행자들의 마음을 끌어 잇는다. 노두길은 하루에 두 번씩 사라졌다 생겼다 한다. 물이 차면 수평선 아래로 숨었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나타나는 신비함 때문에 호사가들은 기적의 여행길이라고도 부른다.

 공자님은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다. 배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일 것이다. 갯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민들의 목욕탕일 것이란 지레짐작으로 흘려버렸던 저 바닷가 저수조(‘갯샘이라고 했다), 실은 바다에서 캐온 조개류를 세척하는 용도였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되는 지금의 나처럼..

 13 : 23. 건너편에서 다시 데크 로드로 올라간다. 아니, 길이라기에는 길이가 너무 짧았다. 쉼터를 겸한 전망대를 만들면서 바닥과 연결시키는 구간을 조금 길해 해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잘 단장되어 있었다. 데크 길은 흠하나 보이지 않고, 경관이 좋은 곳에는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곳에서는 너무 서두르지 말자. 벤치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며 잠깐의 여유라도 부려 볼 일이다.

 평생을 방년(芳年)’이고 싶어 하는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냉큼 자세부터 잡고 본다. 그러자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함께 하자며 우격다짐으로 달려든다.

 천북 굴따라 길의 종점인 맨삽지(학성리) 공룡발자국 화석으로 유명하다. 2015 4, 30센티 안팎의 원형 발자국 화석 10여 개가 발견됐는데, 역사·지리적으로 가치가 높아 학계의 주목을 받는단다.

 데크 로드는 금방 끝났다. 그리고는 노두길을 따라 또 다시 북진한다. 아까만치는 아니어도 눈요깃거리로 넘치는 구간이다. 작은 바위벼랑과 손바닥만 한 백사장으로 이루어진 해안은 귀엽기까지 하다.

 13 : 32. ‘불모골이란다. 모래보다는 잔자갈에 가깝지만, 해변이 꽤 넓어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다. 소문난 해수욕장이 하도 많은 보령이라서 그럴 필요도 없었겠지만.

 해안에는 제철 만난 칠면초가 길손을 반기고 있었다. 해마다 색깔이 7번 변한다는 바다의 단풍이다. 갯벌을 뒤덮고 있는 저 염생식물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으면 해변은 가을 풍경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가을철 바닷가는 그래서 더 예뻐진다.

 13 : 34. 해변이 끝나갈 즈음(이정표 : 천북굴단지 1.8km/ 하파동 740m)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바위벼랑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에 잠기기 때문에 길을 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계단 위에는 또 하나의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난간에 서자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푸른 바다 위로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다닌다. 저 바다는 저녁에 방점을 찍는다고 했다. 아름다운 바다 위를 물들이는 붉은 노을이 장관을 이룬단다.

 걸어서 행복한 작곡가 정의송 영상 노래길이란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정의송은 참아주세요(뱀이다), 빠이빠이야(소명), 어부바 등 수많은 노래를 히트시킨 유명 작곡가이다. ‘보령에 가자(문희경 노래)’라는 노래도 지었다고 하더니, 이를 들려주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조형물은 노래는커녕 전광판에 전원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굴은 지방이 적고 미네랄이 풍부한 식품으로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수확하는 것이 최고의 상품으로 꼽힌다. 특히 서해의 갯벌과 만나 찬바람을 맞으며 자란 천북 굴은 미네랄과 비타민이 많이 함유돼 있고 타우린도 많아 콜레스테롤과 혈압 저하 효능이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식감이 쫄깃하고 향이 강해 보령 9미 중 하나로도 손꼽혀 겨울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천북 굴을 즐겨 먹는다.

 이후부터는 숲속을 걷는다. 경사진 산비탈에 용케도 길을 냈다. 그것도 널찍하게

 13 : 39. 또 다시 내려선 해안(이정표 : 종점까지 1.5km) 아래사정이란다. ‘사호2에 속한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아래사정 앞 해변은 장은리에서 흘러내려온 개울이 지나간다. 그곳에 출렁다리가 놓여있었다.

 출렁다리를 건넌 다음 산속으로 들어간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길을 내놓았는데, 다양한 화초들이 길가에서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숲속에 들어앉은 숙이뜰이라는 산채농장에서 심어놓았지 않나 싶다.

 개미취도 그중 하나다. 조경용보다는 척박한 땅의 녹화용으로 제격인 화초이다.

 13 : 52. 숲길을 빠져나오니 펜션단지가 반긴다. 비탈진 산자락에 숙박시설들이 꽉 들어차 있다. ‘천수만 관광휴양단지라고 한다.

 관광휴양단지답게 쉼터를 겸한 전망대도 만들어져 있었다.

 드넓은 천수만에는 꼬맹이 섬들이 올망졸망 파도에 떠밀리고 있었다. 그 뒤는 안면도가 반도처럼 길게 뻗어나간다. 참고로 보령에는 16개의 유인도와 83개의 무인도가 있다고 했다.

 천수만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저 용()은 대체 뭘 상징하는 것일까.

 원래의 길은 관광휴양단지를 지나 천북굴단지로 간다. 하지만 새롭게 내놓은 굴따라길(서해랑길과 같이 쓴다)’은 바닷가 솔숲을 헤집으며 내놓았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면 지쳤던 심신이 상큼하게 되살아난다.

 소나무 그늘아래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쉼터를 만들어놓았다. 하트모양의 박스 안에는 두 사람이 앉기 딱 좋은 그네를 배치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앉아 서쪽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랑 놀음이라도 해봄 직하다.

 14 : 01. 솔숲을 빠져나오니 천북 굴단지가 반긴다. 천북면 장은리 바닷가에 10개 동에 80여 개의 점포가 모여 있는데, 이곳에서 파는 굴 요리가 입소문을 타면서 보령지역의 겨울철 대표먹거리로 자리 잡았다. 날씨라도 추워질라치면 제철 만난 굴이 미식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단지에 들어선 음식점들은 굴을 이용한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었다. 생으로 먹는 굴회, 굴 무침, 통통한 우윳빛이 나는 굴 찜, 굴 밥, 구워먹는 석화, 굴 전, 굴 칼국수, 굴 라면 등 굴의 독특한 풍미와 부드러운 식감을 살린 다양한 음식들이 여행자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이곳에서는 매년 굴 축제가 열린다. 올해는 다음 주말(1116)부터 열린단다. 석화로 불리는 굴은 구워먹어야 제격이라고 했다. 굴 구이는 1990년대 초반 천수만 일대에서 채취한 굴을 주민들이 웅기종기 모여 구워먹으면서 시작됐다. 이게 별미로 알려지면서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현재의 굴 축제 모태가 됐다.

 14 : 06. 천북굴단지 광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홍성 63코스) 안내도는 광장의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5.28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집사람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뽀얗다. 맞다. 미네랄과 비타민으로도 부족해 타우린까지 풍부한 굴을 실컷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은 운 좋게도 종점이 천북 굴 단지였다. 그러니 어찌 굴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마음씨 좋은 황사장님이 생굴을 구입해 밥상에 올렸고, 도반 한 분은 갑오징어 회를 사왔다. 거기다 날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는 굴전을 챙겼다. 덕분에 영양가 많은 먹거리로 배를 채운 행복한 하루가 될 수 있었다.

 

서해랑길 60코스(대천해수욕장  깊은골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4. 10. 12()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신흑동·남곡동·대천동 및 주교면·오천면 일원

여행코스 : 대천해변대천항대천천 노둣길대천방조제안산마을사당골토정묘역깊은골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7.2km, 실제는 사당골까지 14.63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0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3(전체 5)로 분류되나, 평지라서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들머리는 대천해수욕장(충남 보령시 신흑동)

서해안고속도로 대천 IC에서 내려와 36번 국도를 타고 대천해수욕장으로 들어오면 된다. 매년 열리는 보령 머드축제의 주 무대이자, 본격적인 휴가철에는 야간에도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즐기자 밤바다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패들보드, 수상 징검다리 등 다양한 미니게임이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단다.

 서해랑길(보령 60코스) 안내도는 머드광장의 바닷가 바다의 여인 조형물 옆에 세워져 있다.

 대천해수욕장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보령화력 입구(오천면 오포리)’까지 가는 17.2km짜리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대천해수욕장, 토정묘역 등이 꼽힌다. 하나 더, 물때를 못 맞춰 대천천의 노둣길을 못 건널 경우, ‘쇳개포구의 인도교까지 6km 이상을 더 걸어야만 한다.

 10 : 13. 해수욕장과 상가 사이로 난 도로(해수욕장10)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바닷가 해송 숲을 따라갈 수도 있다. 조금 구불대기는 해도, 하트모양의 예쁜 통로 등 눈에 담을만한 조형물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어 걷기 여행자들에게 더 선호되는 코스다. 솔숲 사이로 내다보이는 서해바다는 덤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삽시도(揷矢島)도 눈에 담을 수 있다. 화살()을 꽂아놓은() 활처럼 생겼다는 섬이다.

 10 : 22. 잠시 후 분수광장에 이른다. 노을광장, 머드광장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의 핵심을 이루는 광장 중 하나로 다양한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어 개성 넘치는 사진을 찍기에 딱 좋다. 여름철에는 음악분수가 운영되는데, 저녁이면 현란한 조명까지 가미된단다.

 로봇을 닮은 우체동은 커도 너무 크다. 간절곶의 우체통보다도 더 크다나? ‘감성이란 이름표까지 달았는데, 거짓말 좀 보태 원룸으로 개조하면 사람이 살아갈 수도 있겠다.

 10 : 24. 집트랙(Zip Trek) 탑승장. 바다로 돌진하는 듯한 오싹한 설렘을 선사해주는 집트랙은 액티비티 스포츠. 하지만 갈 길 바쁜 걷기 여행자들은 그저 눈으로 즐길 수밖에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트레킹을 마치려면 말이다.

 서해랑길은 바닷가를 따라 계속 직진한다. 스카이바이크 궤도와 함께 가는 멋진 구간이다. 대천해수욕장과 대천항을 오가는 전국 최초의 해상 레일 바이크로, 수면에서 8-15m 높이에 선로를 달아 바닷길을 달리게 했다.

 스카이 레일 위를 씽씽 달려가는 바이크, 40분간 2.3km를 왕복 운행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쌍쌍이다. 고로 스카이바이크는 연인끼리 즐기기에 딱 좋은 레저이다.

 집트랙은 왜 싱글을 고집했을까? 커플로 타는 곳도 있던데 말이다. 하나 더. 요 아래로는 보령 해저터널이 지나간다. 원산도까지 6,927m로 우리나라에서 가징 긴 해저터널이다. 원산도에서 안면도까지는 다리로 연결된다.

 아무튼 난 집트랙 탑승장에서 바닷가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천항로를 따르는 지름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아니 고갯마루에 있는 김성우장군전첩사적비(金成雨將軍 戰捷史蹟碑)’를 만나고 싶었다는 것이 더 옳겠다.

 10 : 27. 김성우(金成雨, 1327~1392)는 고려 말 전라우도 도만호로 보령지역을 황폐화시킨 왜구를 격퇴한 무장이다.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충청남도 보령에 사패지(賜牌地)를 하사 받아 광산김씨 입향 시조가 되었다. 이후 초토영전사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보령으로 돌아와 살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정에서 부르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거절하고 자결하였다. 김성우를 도운 신마가 나온 옥마봉, 보검이 나온 비도, 김성우의 군사가 들어온 군입포, 병사를 매복시킨 매복 등 김성우의 행적과 관련된 지명들이 아직까지 보령 곳곳에 남아있다. 보령을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대천항로는 고개를 넘어 대천항으로 이어준다. 곧장 직진하면 유람선 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10 : 34. 꽃게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사거리(이정표 : 종점 15.6km/ 시점 1.6km)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대천항4을 따라 동진한다.

 도중에 대천항연안여객선터미널 대천항을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하도 여러 번 들렀던 곳인지라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10 : 52. 강당마을. 신흑동(新黑洞) 최북단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앞바다에 조개··소라 등 해산물이 풍부하여 옛날부터 군마루·절굴·거먹개 사람들이 넘어와 해산물을 잡아가고는 했단다. 현재도 김 양식 등 수산업에 종사하는 집이 많다고 한다.

 바닷가 외딴 마을은 현재 통나무 펜션단지로 변신해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지어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단다. 해안도로변에 위치해 아름다운 바다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계속해서 해안로를 따른다. 아니 도로변을 따라 내놓은 자전거길을 따라간다.

 이때 대천천의 하구역 풍경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로 지금은 육지로 변해버린 송도(松島)’ 보령화력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11 : 06. 같은 신흑동인 군헌(軍軒)마을에는 어촌유치(귀어) 체험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농어촌 공동화(空洞化)’가 사회문제가 되어버린 요즘. ()라고 해도 바닷가 외진 마을은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추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체험장 옆 데크 전망대. 망원경 말고도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한 줄기 쇠줄로 얼굴을 그린 조형물도 배치했다. 덕분에 밋밋할 수도 있는 해변 길이 감상의 포인트가 됐다. 분명 인위(人爲)인데도 배경으로 삼은 자연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대천방조제와 보령화력발전소는 물론이고 죽도와 송도, 원산도 등 주변의 섬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눈만 좀 크게 뜨면 원산·안면대교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대천천의 하구역이 놓여있다. 대천방조제가 서해안고속도로의 대천2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탐방로는 이제 대천천(大川川)’을 거슬러 올라간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의 거대한 교각을 앞에 두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넝쿨장미로 치장된 터널을 지나기도 한다. 꽃이라도 필라치면 꽃 대궐에서 노니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겠다.

 오월의 장미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10. 장미가 있을 리가 없다. 대신 송엽국(松葉菊)’이 만발해 있었다. 솔잎과 닮은 잎에 국화를 닮은 꽃이 핀다는 상록 식물이다. 잎 모양과 무리 지어 피는 모습이 채송화와 비슷해 사철채송화라고도 한다.

 11 : 20. ‘밤골마을 해변은 해수욕장이 부럽지 않은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보령지역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해안 곳곳에 사빈이 잘 발달되어있는 현상 말이다. 그 대부분은 해수욕장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은 대천해수욕장과 가깝다보니 그냥 방치하고 있지 않나 싶다.

 남곡동(藍谷洞)’에 속한 자연부락인 밤골에는 리조트와 펜션, 카페, 음식점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유원지 수준이라고나 할까? 하긴 뻥 뚫린 시야로도 모자라 새하얀 모래사장까지 끼고 있으니 어찌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동화나라에서나 볼 법한 집도 눈에 띈다. 하지만 스머프가 이사를 가버렸는지 새로운 주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골마을 앞바다. 해망산 갯벌도 일반인에게는 금단의 땅인 모양이다. 어촌계에서 바지락 양식을 하고 있으니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단다. 저 벤치에 앉아 조개 캐는 주민들의 뒷모습이나 구경하다 가라는 모양이다.

 11 : 30  11 : 40. 이곳에는 자전거 라이더들을 위한 휴게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덕분에 벤치에 않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또 다른 스머프네 집. 노을이 곱다고 알려진 ‘357카페라는데, 이곳 역시 영업은 하고 있지 않는 듯 했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11 : 46. 내항동(內項洞)의 왕대골. 왕대산(王臺山, 122.7m) 자락의 마을인데, ‘밤골처럼 리조트와 음식점이 여럿 들어서 있다. 숫자는 작아도 규모는 밤골보다 훨씬 더 크다. ! 왕대산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천년사직을 넘기고 돌아오다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때 느닷없는 간판 하나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のや라는 일본어 간판만 내걸려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저걸 토모노야로 읽고 있었다. ‘친구며···’라는 뜻이라나? 건물의 외벽도 검정과 흰색이 대비되며 일본 전통 건축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일본인들의 전용 호텔인가? 아니면 일본인이 운영하는 숙소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썩 흔치않은 풍경인데다, 얼마 전 광복절날 일장기를 내걸었던 지역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기에 심사는 편치 않았다.

 11 : 52. 서해랑길은 서해안고속도로의 대천2 앞에서 일단 멈춘다. 그리고는 잠수교(‘노둣길이라 부르기도 한다)를 이용해 대천천을 건넌다. 초입에 이정표(종점 9.8km/ 시점 7.4km)가 세워져 있다.

 초입에 만조(滿潮) 때는 우회도로를 이용하라는 안내판이 걸려있었다. 대천천을 따라 대천3동까지 올라가 대천천 인도교를 건넌 다음, ‘대천1에서 대천천의 제방을 걸어 저 건너(잠수교 북단)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6.1km나 더 걸어야 한다니 서해랑길 60코스는 때를 잘 맞추어 걷는 게 필수라 하겠다.

 잠수교는 영농철 농기계의 통행을 위해 개설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모든 차량의 통행을 금지한다는 경고판까지 입구에 붙여놓았다. 하지만 많은 차량들이 잠수교를 오가고 있었다. 덕분에 차량을 만날 때마다 다리 난간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켜 설 수밖에 없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 따깨비는 이 다리가 심심찮게 바닷물에 잠긴다는 증거다.

 ! 소라가 가득담긴 그물망이 바닷물에 잠겨있는 게 아닌가. 마침맞게 주위에는 사람도 없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했는데, 저걸 가져다가 산악회에 부탁해 삶아달라고 해?

 대천천 하구역(河口域). ‘대천천(大川川)’은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에서 시작하여 궁촌동을 거쳐 서해로 흘러드는 길이 13.8km의 지방하천이다. 보령지역의 옛 이름 중 하나인 큰내(한내)’를 한자로 고치면서 대천천이 됐다. 하천은 크게 2개의 지류가 있는데, 한 지류는 오서산(烏棲山) 동남쪽에서 발원하고, 다른 한 지류는 성주산(聖住山) 줄기인 성태산(星台山)과 백월산(白月山)에서 발원하여 흐른다.

 뒤돌아 본 잠수교. 그 뒤에는 아까 본 왕대산 말고도 해망산(海望山, 114.3m)’이 있다. 고려 말, 도만호(都萬戶) 김성우 장군이 병사로 하여금 왜구의 동태를 감시하게 했다는 산이다.

 11 : 59. 잠수교 북단(이정표 : 종점까지 9.4km)에 올라선 다음부터는 대천방조제의 제방을 따라간다. 둑 위에 우레탄을 깐 탐방로를 곱게 내놓았다. 참고로 대천1동에서 시작되는 대천방조제는 대천2동과 주교면의 주교리(舟橋里) 및 은포리(隱浦里)를 거쳐 같은 주교면의 송학리(松鶴里)까지 이어진다. 길이 6.2km 1952년에 착공하여 1960년에 준공되었다.

 둑길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왼쪽으로는 대천천의 하구역이 드넓게 펼쳐진다. 한껏 등치를 부풀린 물줄기를 서해바다가 집어삼켜버리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제방에 쌓아놓은 저 돌탑들은 대체 누구의 작품일까? 50m쯤 되는 간격으로 줄지어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공들여 쌓은 흔적이 역력했다.

 오른쪽으로는 봉당천 신대천 하구를 막아 조성한 거대한 간척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 뒤에서 솟아오른 봉대산(烽臺山, 233.3m)’은 동쪽으로 뻗어 태봉산(240m)’을 솟구친다. 군사시설인 봉수대 및 아현산성(我峴山城)을 각각 품고 있는 산들이다.

 12 : 16. 방파제가 90도에 가깝게 휜다. 대천1동과 송학리를 잇는 대천방조제는 이렇듯 중간쯤에서 크게 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농토를 만들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의 결과일 것이다. 하나 더. ‘대천동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주교면(보령시)’에 바톤을 넘겨준다.

 이곳은 대천천의 하구역이 거침없이 폭을 넓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륙을 휘젓고 내려온 냇물은 이곳에서 드넓은 바다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저 강태공들은 대체 뭘 잡고 있을까? 낚싯대는 망둥어 낚기에도 부담스러워 보이는데...

 이 뭣꼬?’ 스님의 화두가 아니라 도로변에 적치되어 있는 저 통들의 정체가 궁금해서 게시해봤다.

 코너를 돌아서자 해안도로에 꽤 많은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다. 화장실까지 갖춘 공영주차장이 마련되어있는가 하면 둑에는 무선방송장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 주교마을(허락 없이 갯벌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판을 세워놓았다)에서 뭔가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도로변에 조성된 공영주차장. 차선을 하나 더 만든 다음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을 만들어놓았다.

 반대편에는 바다를 향해 길게 줄을 매어놓았다. ‘해루질 나가는 누군가를 위한 안전시설이다. 둑 위의 방송장비 또한 저들을 위해 설치했다. 조개채취 중 방향을 잃는 갯벌 고립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하기 때문이란다.

 갯벌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조개를 캐고 있었다. ‘해루질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야외활동 중 하나로 꼽힌다. 거기다 조개까지 얻을 수 있으니 숫제 꿩 먹고 알 먹고이다. 하지만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물때와 지형을 미리 확인하고 안전장비를 착용하는 등 안전수칙을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방조제는 이후로도 꽤 오래 이어진다. 하지만 하늘거리는 억새꽃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12 : 42. 대천방조제는 주교배수갑문에서 끝을 맺는다. 둑길에서 내려선 탐방로는 대천방조제2를 건너 송학리로 들어간다.

 12 : 45. 다리를 건너 현장마을(버스정류장의 이름표)’로 올라선다. 송학리(3)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바지락마을이란다. 아니 황금이란 최상의 서술어까지 덧붙였다. 대체 바지락이 얼마나 많이 널려있기에 저런 표현까지 쓸 수 있을까?

 송학항도 이제껏 보아온 다른 포구들처럼 텅 비어있었다. 안내판에 그려진 배들은 마을 어디쯤에선가 출어의 날만 기다리고 있겠지? 경운기 꼬랑지에 매달려서...

 선착장 옆으로 나있는 갯길이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머드 맥스라고 일컬어지는 경운기의 행렬이 펼쳐지는 곳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버스정류장에서 그 사진을 볼 수 있다.

 계속해서 대천방조제로를 따라간다. 방조제의 둑길 구간이 끝났는데도 도로는 아직까지 같은 이름표를 달고 있다. 아무튼 좁고 긴 백사장을 옆구리에 끼고 가는 멋진 구간이다.

 이때 죽도(竹島)’가 눈에 들어온다. 시쳇말로 주먹만큼이나 작은 섬인데, 옛날엔 저 섬이 대나무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12 : 53. ‘송학2에 이른다. 마을 표지석은 이곳을 안산고내라고 적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밖산고내가 나온단다. ‘고내라는 마을이 안산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누어져 있는 모양이다.

 이 마을 갯벌도 귀어·학습 체험장을 열고 있었다. 허락받지 않은 사람들이 갯벌에 들어갈 수 없음은 물론이다. ! 이곳 송학리는 조선시대부터 바지락 양식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지금도 매년 5천 톤씩이나 생산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만큼이나 뛰어난 양식기술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품질 좋은 바지락을 시중에 내놓고 있단다.

 버스정류장을 치장하고 있는 사진이 눈길을 끈다. 한국관광공사의 홍보 영상 머드 맥스(Mad Max)’를 연상시키는 갯벌을 질주하는 경운기들의 행렬이다. 사진은 주민들이 갯벌에서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을 담았는데, 이게 광활한 갯벌과 어우러지며 자못 비장감까지 불러일으킨다.

 13 : 03. 잠시 후 도착한 ‘(안산·고내)버스정류장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서해랑길이 도로를 벗어나 마을길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마을안길은 누빈 다음 안산마을에서 다시 도로(대천방조제로)로 나온다. 오가는 자동차를 피할만한 공간(갓길)이 없는 협소한 도로를 피해 일부러 에둘러놓지 않았나 싶다.

 13 : 06  13 : 19. 우리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한 채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그 위험에 대한 보상은 컸다. ‘산고래 하늘공원이라는 멋진 공간을 만났기 때문이다. ‘산고내(散古乃)’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뼈를 상했을 때 약재로 쓰는 돌(산골)이 채취된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엉덩이 대기가 부끄러울 만큼 예쁜 의자. 공원은 정자에 벤치는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우린 10분 정도를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조망도 자랑거리라고 했다. 맑은 날에는 효자도, 삽시도, 원산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단다. 그래선지 바다 쪽으로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난간에 서자 죽도가 성큼 다가온다. 고려청자가 발견된 해저유물 매장해역(사적 제321)’의 중심에 놓여있는 섬이다.

 1983년경 고려청자 등의 유물이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1987년 수중발굴조사를 진행 32점의 상감청자를 비롯한 100여 점의 청자류를 수습했다. 13세기 또는 14세기, 전남 강진(대구면)이나 전북 부안(보안면)의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배로 운반하던 도중 이 부근에서 배가 난파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보령발전본부를 당겨봤다. 보령지역의 발전소에서 전국전기생산량의 7.3%를 만들어내고 있단다.

 13 : 27.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오가는 차량을 주의해가며 10분 정도를 걸어 안산마을에 이른다. 그리고 마을안길로 에돌아 온 서해랑길을 다시 만났다.

 13 : 30. 잠시 후, 서해랑길이 또 다시 도로(대천방조제로)와 헤어지란다. 이번에도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예쁜 풍경을 보여주는 기존의 탐방로를 따를 것을 권한다.

 탐방로는 해안길을 따라간다. 오른편의 농경지가 갯벌보다 낮으니 방조제의 둑길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해안길 구간은 잠깐이면 끝난다. 하지만 보여주는 풍광만큼은 만만치 않았다. 고운 모래사장이 발아래 놓여있고, 그 너머로는 검붉은 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13 : 33. 잠시 후, 탐방로는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파고든다. 또 다른 마을을 에돌아가는 길이다.

 볼거리도 그렇다고 이야깃거리도 없는 마을길이 싫은 우리는 논두렁을 이용해 자 형의 구간을 단축하기도 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송학천을 가로막은 방조제가 나타난다. 이 둑을 쌓음으로써 안쪽에 상당히 너른 간척지가 만들어졌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오던 고정리 주민들에게 넉넉함을 가져다 준 풍요의 상징이다.

 송학천 배수갑문의 밖. 즉 송학천의 하구역이었음직 한 갯벌에는 작은 포구가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충남의 바닷가에서 만났던 여느 포구들과는 달리 꽤 많은 배들이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다. 배를 올려둘만 한 공터가 없었나?

 13 : 40. 제방 끝에서 610번 지방도를 만났다. ‘토정로라는 이름이 토정 이지함 선생의 고향으로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사당골(고정2)’이 반긴다. 법정 동리인 고정리(高亭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사당골이란 한산 이씨 사당(祠堂)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래선지 마을 입구에 찬성공파(贊成公派)의 사당(高巒齋) 말고도 조상의 묘갈(墓碣)과 신도비(神道碑)가 즐비했다.

 13 : 46. ‘신보령발전본부 입구(화력발전소 폐기물처리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松島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초입에 위치한 보령시민체육공원 주차장에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종점인 깊은골에 주차 공간(점심상을 차릴 수 있는)이 없는 탓에 이곳에서 식사를 한 다음 잔여 구간은 버스로 이동하겠단다.

 종점으로 가는 도중 들른 토정선생 묘역’. 국수봉(187m)의 남쪽 산자락에 들어선 묘역에는 선생과 형제, ·비속 등 14기의 묘가 모셔져 있다. 선생의 학문과 전해지는 기이한 일화들로 인해 명당자리로 인식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단다.

 선생은 생전에 미리 를 정해두었다고 한다. 모친상을 당해 형제분들과 함께 선영의 묘를 이장할 자리를 찾다가 이곳이 명당임을 알았다나? ‘토정비결(土亭秘訣)’까지 지은 현인이니 어련하겠는가.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정초가 되면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낡은 토정비결을 펼쳐들고 저마다의 괘를 뽑아보면서 한 해의 길흉을 점쳤다. 누군가 좋은 점괘가 나오면 함께 기뻐했고 나쁜 점괘가 나오면 서로 격려하면서 새해의 첫날을 보냈다. 그 시절 토정비결은 힘겹게 살아가던 서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던 비밀의 열쇠였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조선중기 학자로 천문·지리·의약 등에 능통하였으며,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평생을 방랑하다 1573(선조6) 56세에 도덕과 학문이 뛰어난 선비로 추천되어 포천현감으로 백성의 가난해결을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지어 빈민구제에 힘썼다고 한다. 1713(숙종39)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한 곳에 얽매이거나 구속되는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남긴 대인설에 걸맞는 삶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안으로는 똑똑하고 강하기를, 밖으로는 귀하기를 바란다.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고, 욕심내지 않는 것보다 부유한 것이 없으며,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은 없고, 알지 못하는 것보다 똑똑한 것은 없다. 알지 못하면서 똑똑하고, 다투지 않으면서 강하고, 욕심내지 않으면서 부유하고, 벼슬하지 않으면서 존귀한 것은 실로 대인만이 할 수 있다>

 넓적바위(簿石). 연당자락 바닷가에 놓여 솔섬목을 오가던 사람들의 쉼터로 사용되던 바위였으나, 토정선생이 타고 다니던 돌배라는 설이 있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돌의 존재로 인해 항해의 영웅이라는 설화 속 선생의 또 다른 인물상이 생겨났다나?

 고개를 넘어온 탐방로는 보령화력발전소 입구에 있는 깊은골 버스정류장 앞에서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보령 61코스) 안내판은 버스정류장 곁에 세워져있다. 오늘은 본의 아니게 종점에서 1.7km 정도 못 미친 사당골에서 트레킹을 마쳤다. 그래선지 gpx트랙에 14.63km 3시간 20분에 걸었다고 나타난다.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하루 세끼를 차려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야외활동까지 함께 해주는 집사람. 이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현대는 무목적·무감동·무책임·무관심이라는 ‘4()’ 병이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건 무관심일 것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고 했다. 아름다움의 반대도 추함이 아닌 무관심이란다. 그러니 나에게 집사랑은 사랑이자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서해랑길 59코스(춘장대해수욕장 - 대천해수욕장)

 

여 행 일 : ‘24. 9. 28()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서면 및 보령시 웅천면·남포면·신흑동 일원

여행코스 : 춘장대해변부사방조제소황사구황교리노인회관소황리노인회관독산해변(실제 출발지)무창포해변용두해변대천해변(거리/시간 : 28.1km, 실제는 14.80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9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28km라는 거리가 우습게 보였는지 별이 2(전체 5)로 분류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관광공사 직원들은 날아다니는 모양이다.

 

 들머리는 춘장대해수욕장(충남 서천군 서면 도둔리)

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서천방면으로 3km쯤 내려오다 비인교차로에서 607번 지방도로 옮겨 서면(춘장대해수욕장) 방면으로 7km쯤 들어오면 춘장대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보령 59코스)안내도는 중앙솔밭·백일 캠핑장의 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다.

 춘장대해수욕장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대천해수욕장까지 가는 28.1km짜리 긴 여정이다. ‘소황리 공군사격장 등 군사시설을 피해 내륙으로 에둘러가기 때문이다. 길기만 한 것이 아니다. 코스 대부분이 해변이나 제방을 따라 나있어 여름철에는 최악의 코스로 분류된다. 하지만 곱디고운 모래사장을 걷는 재미와 서해의 작은 섬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어 걷기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코스로 꼽힌다.

 산악회는 소황사구(小篁沙丘)’의 입구인 장안해변(이정표 : 종점 23.2km/ 시점 4.7km)’을 공식 출발지로 삼았다. 지난번 58코스 때 이곳까지 연장해서 걸었었기 때문이다. 춘장대해변에서 트레킹을 마친 우리부부는 유명 맛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그로 인해 생긴 자투리 시간을 보냈었지만...

 부사방조제(扶士防潮堤) 준공기념탑. 서천군(서면) 도둔리와 보령시(웅천읍) 독산리를 잇는 3,474m 길이의 긴 방조제이다. 1997년 축조될 당시만 해도 웅천읍 일대의 농경지 보호가 임무였으나, 최근에는 낚시터로 더 각광을 받는단다. 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바다낚시와 민물낚시를 동시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서해랑길은 ‘607번 지방도(부사로)’를 따라간다. 이어서 황교리 소황리를 지나 독산해변으로 나온다. 하지만 산악회는 소황사구의 탐방로로 인도하고 있었다. 군사시설 때문에 평소에는 막혀있지만 주말에는 통행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탐방로는 소황사구를 꿰뚫으며 나아간다. 생태·보전지역이선지 데크 길을 따로 만들어 자연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였다. 하나 더. 네이버지도는 이곳을 장안해수욕장으로 적고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이나 샤워장, 취사장 같은 편의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생태·보전지역에 따른 개발제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10 : 40. 실제 출발지는 독대섬 입구로 소황사구의 최북단이다. 첨부된 지도에서 부사호 위 역()으로 된 자의 상단, 뽈록하니 튀어나온 부분으로 보면 되겠다.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소황사구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탐방로를 걸으면서 관찰 가능한 동·식물들을 살아있는 모래언덕으로 포장해서 전해준다. 다만 평일 사격훈련 시간 때는 탐방로 진입이 불가능하다나?

 독대섬은 바다에 산 하나가 떠있는 형상이다. 섬이면서도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되는데, 이때 맛조개와 돌게, 골뱅이 등을 잡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단다. 독대섬 앞바다에는 직언도, 황죽도가 일렬로 가지런히 놓여있다. 평소에는 독대섬까지만 물이 빠지지만, 음력 보름과 그믐 전후로 직언도까지 물이 빠져 무창포의 석대도와 함께 신비의 바닷길이 연출된다.

 소황사구(장안해변). 다른 여행자들은 저 해안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참고로 소황사구는 길이 2.3km,  200m, 최고 높이 17.6m에 이르는 대규모 사구이다.

 독대섬을 가운데 두고 반대편에는 독산해수욕장(獨山海水浴場)’이 있다. 왼쪽은 소황사구, 오른쪽으로는 독산해변의 갯벌과 금빛 모래사장이 갈매기 날개처럼 좌우로 펼쳐지는 모양새이다. 해수욕장은 길이 1,500m,  100m의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산해변 글자 조형물. 독산해변은 바다에 홀로 있는 산이라 하여 홀뫼해변이라고도 불린다. ‘독대섬의 생김새에서 유래된 지명이 아닐까 싶다.

 10 : 42. ‘열린바다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주말이어선지 길가가 온통 주차장이다. 덕분에 우리를 실어다 준 버스가 회전을 못하고 후진으로 빠져나가느라 고생깨나 했다.

 해수욕장의 배후 숲에는 무료 캠핑장이 들어서있었다.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텐트가 꽉꽉 들어차있다.

 틈새를 마련 못한 사람들은 바닷가로 밀려난다. 하지만 조망만은 소나무 숲보다 한수 위다. 독산해변의 자랑거리인 낙조, 즉 잔잔한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사라지는 해를 바라보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다만 뜨거운 햇살에 고생깨나 해야겠지만...

 모터 카약까지 끌고 온 낚시꾼도 보인다. 그만큼 어종이 풍부하다는 애기일 것이다.

 대어의 꿈은 백사장에서도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파도를 가르며 지나가는 보트까지도 끌어올리겠다는 듯 낚싯대 크기가 만만치 않다.

 10 : 50. 해수욕장을 빠져나와서도 열린바다로를 탄다. 길가에 들어선 빌라나 카페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이다. 아니 라바 카페 부근에서는 꼬맹이 섬과 여가 꾸미고 있는 빼어난 풍광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하나 더. 독산해수욕장에서 시작된 열린바다로는 해안선을 따라 용두해수욕장까지 이어진다.

 서천에서 시작된 배롱나무 가로수길은 보령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여름 꽃 배롱나무, 그 붉은 유혹에 빠져본다. 가까이 다가가면 정열적이던 꽃이, 한발 물러서자 수줍은 아름다움으로 변해버리는 이중성의 꽃이다.

 11 : 04. ‘낙조공원이란다. 바닷가 쪽으로 작은 공간을 만들고 일몰을 상징하는 조형물 두어 점을 배치했다. 떨어지는 해를 편히 감상하라는 듯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하지만 정비를 하지 않아 웃자란 잡목·잡초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11 : 08. ‘독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편 무창포해수욕장으로 간다. 독산해변에서 무창포해변에 이르는 2km 구간도 군사시설을 피해 내놓은 우회로라고 보면 되겠다. 중간에 만났던 군의 해상침투훈련장 안내판이 그 증거일 것이다.

 11 : 13. 무창포해변에 도착하니 비체펠리스가 반긴다. 용평리조트가 처음 개발한 대형 해양리조트라고 한다, 참고로 무창포(武昌浦)’라는 지명은 무창(武昌)’의 서쪽에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세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던 갯가의 포구라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바닷가로 나가 닭벼슬섬으로 간다. 섬까지 탐방용 보행교가 놓여있다. 섬과 육지 사이 물길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놓은 생태탐방로이다.

 초입에는 갯벌생태계복원사업 안내판과 함께 한국 새우양식 6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1963년 국내 최초로 이곳 웅천지역에서 새우양식이 시작되었다나? ‘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배우고 간다.

 다리에서 본 무창포해수욕장’. 남북으로 뻗어나간 백사장 길이가 1.5km나 되는 기다란 해변을 끼고 있다. 경사가 완만한데다 물이 잔잔하고 배후에 울창한 숲까지 끼고 있어 천혜의 입지조건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인근 대천해수욕장에 비해 많이 한산하며, 주로 종교단체·교육기관·기업체나 가족단위의 야영지로 이용된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담장처럼 생긴 돌무더기가 드러난다. 갯벌에 크고 작은 돌을 쌓아 고기를 잡던 전통 어구인 독살이 아닐까 싶다. 독살은 돌을 이용해 반원 형태로 쌓는 게 우선이다. 다음은 중앙에 대나무를 이용해 수문(水門)을 만들어 고인 물이 빠지도록 한다. 수문 앞은 물이 빠져도 고기들이 모여 놀 수 있을 정도로 물이 고여 있어서 물때에 무관하게 고기를 잡을 수 있다.

 왼쪽은 아까 지나왔던 독산쪽 해안이다. 바닷가에 널려있는 주먹만큼이나 작은 섬과 여(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들이 흡사 자갈밭을 보는 느낌이다.

 탐방로는 닭벼슬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낙조5 중 제5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서해바다와 무창포해수욕장은 물론 무창포타워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단다. 하나 더. 혹자는 독산해수욕장과 무창포해수욕장의 경계를 닭벼슬처럼 생겼다는 곶()으로 삼고 있었다. 독산 쪽에서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저곳(직전 사진 참조)을 이르는 말일 게다. ‘닭벼슬섬이라는 지명은 곶()의 생김새에서 따왔을 것이고 말이다.

 11 : 19. 바닷가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해안을 따라간다. 백사장과 배후 숲 사이에 포장길을 내놓았다.

 무창포의 빼어난 풍경화는 앞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 ‘석대도(石臺島)’가 완성시킨다. 섬의 모양이 돌로 된 좌대(座台), 즉 석대(石臺)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으로, 구전(口傳)에 따르면 아기장군이 죽었을 때 황새가 떼지어 나타나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매월 두 차례 간조 시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무창포 신비의 바닷길은 진도와 더불어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물때가 맞지 않아선지 바닷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아쉬움을 안내판의 사진으로 달래본다.

 그래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모세의 지팡이로 달래볼 일이다.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향하자 바다가 갈라지면서 길이 나타났다는 기적이자 구원의 지팡이다. ! 바닷가에 석대도 안내판과 함께 바닷길이 열리는 시기 및 시간을 적은 안내판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사리 때 열리는데, 5-6월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11 : 27. 중앙광장의 무창포를 상징하는 조형물은 이제 막 출범하려는 범선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았다. 리스본(포르투갈) 여행 때 만났던 대항해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 Descobrimentos)’를 축소시켜놓았다고나 할까? 대항해시대의 항해왕자 엔리케(Infante Dom Henrique)의 도움을 받은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항해를 떠난 자리에다 세운 기념물인데, 무창포의 것에는 세계를 호령했던 영웅들의 조각이 빠져있다.

 신비의 바닷길 조형물은 전설 속의 아기장군을 형상화 했다. 바닷길을 걸으며 주울 수 있는 해삼(·조개·게 등도 함께 잡힌단다)’과 함께이다. 참고로 아기장군은 석대도에서 살던 해룡과의 줄다리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을 정도로 힘이 센 인물이었다. 하지만 역적(다른 전설들처럼)으로 몰릴 것을 우려해 석대도에서 해룡과 함께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장사였다.

 무창포 해역은 쭈꾸미로도 유명한 모양이다. 맞다. 올해 3월엔가는 KBS-2TV ‘생생정보에서 이곳의 쭈꾸미 샤브샤브를 소개한 일도 있었다.

 물빛정원이라는 분수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특히 스크린처럼 떨어지는 분수의 가운데를 뚫은 게 눈길을 끈다. 그 사이로 징검다리를 놓음으로써 신비의 바닷길을 연상하게 만든다.

 홍완기(1932-2004) 시인의 시비도 세워져 있었다. 그의 작품 무창포의 사랑이 새겨진 빗돌, 이력과 예순 살의 색신이 적힌 또 다른 빗돌, 시비건립 취지문 빗돌이 떼지어 있다. 참고로 홍완기는 별난 이력의 소유자다. 이곳(궁촌리)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나뭇꾼·엿장수·뱃사공·철도국(임시직원지방신문(견습기자승려 등을 전전하다 등단했다.

 낙조5 중 제1경이라는 무창포타워는 곁눈질만 하고 간다. 서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오르면, 황홀한 일몰을 볼 수 있어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꼽힌다. 특히 해거름에는 노을 덕에 인생 사진을 남기기에 안성맞춤이란다. 하지만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으니 굳이 올라가볼 필요까지 뭐 있겠는가.

 무창포는 해마다 신비의 바닷길 축제가 열려왔다. 올해(24) 10 18일부터 20일까지 무창포해수욕장 일원에서 열린단다. 체험·공연·판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니 한번쯤 찾아볼 일이다. 풀에 들어가 전어나 대하를 맨손으로 잡아보는 체험도 해보면서 말이다.

 관광객들과 함께 바닷가를 누비고 다닐 꼬마 열차도 길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11 : 38. 이제 무창포항으로 간다. 해안길은 중앙광장을 지나서도 한참이나 계속된다.

 식당가를 끼고 나있어 구수한 음식냄새의 유혹을 참기 어려운 구간이기도 하다.

 음식점의 홍보는 백종원씨가 대세인가 보다. 그가 출연했던 SBS-TV ‘백종원의 삼대천왕에 대한 사진으로 식당 전체를 도배해 놓았다.

 11 : 43. 해변 끝에서 왼쪽(무창포항 방향)으로 간다. 이어서 외항과 내항 사이에 놓인 다리를 건넌다.

 동산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상화헌(尙和軒)’. 많은 이들이 죽도에 있는 상화원으로 오해하는 곳이다. 함께 걷고 있는 이석암 작가님도 이해를 못하겠다며 일단은 카메라부터 들이대고 본다. 하지만 상화헌 거품시대의 작가 홍상화가 집필할 때 머물렀던 곳으로, 한옥  ’, 그리고 만대루(안동 병산사원 것을 재현했단다), ‘작가의 집 등으로 구성된 일종의 북 카페이다.

 11 : 47. 수산물시장 앞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널찍한 주차장, 이어서 탐방로는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내항과 외항을 나누는 경계선으로, ‘낙조5 중 제3경이기도 하다. 고즈넉한 항구와 등대 3개를 한꺼번에 볼 수 있어 다채로운 풍경 속의 일몰을 줄길 수 있단다.

 다리 위에서 본 무창포항’. 무창포항은 원래 내만(內灣) 입구에 남북으로 방파제를 쌓아 항구를 만들고, 사구 위에 물양장(소형 선박이 접안하는 부두) 시설을 조성했었다. 하지만 간조 때 항구의 바닥까지 갯벌이 드러나 배를 댈 수가 없자, 방파제 시설을 새로 설치하고 항구를 서쪽으로 옮겼다. 덕분에 간조 때를 제외하면 입출항이 가능해졌지만 완전한 해결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현재까지 준설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덕분에 내항은 천혜의 대피항이 되었다. 연근해에서 광어와 쭈꾸미, 갑오징어 등을 잡는 소형어선의 정박지로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11 : 52. 배수갑문을 지나면서 무창포항과 이별을 고한다. 80m쯤 더 걸어 관동교에 이르자 이정표가 아직도 9.7km나 남았다며 속도를 올리란다. 오늘의 이벤트로 삼은 해물요리를 느긋하게 먹고 싶다면 말이다.

 이후부터는 열린바다로를 따른다. 왕복 2차선의 널찍한 도로인데도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안전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차량통행이 뜸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11 : 58  12 : 14. 충남수산자원연구소 뒤. 나지막한 고갯마루에는 쉼터를 겸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파고라 그늘에서 준비해온 간식에 막걸리 잔을 나누며 푹 쉬다갈 수 있었다.

 12 : 14. 다시 길을 나선다. 이즈음 대하양식장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방조제 안쪽 내수면에다 커다란 양식단지를 만들었다.

 12 : 23.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소공원. 이번에는 정자와 벤치는 물론이고 조각품까지 배치했다.

 조금은 조잡해보였지만(예술에 문외한이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원색적으로 표현된 탓인지 많은 여행자들의 소개 글에 올라오고 있었다.

 집사람이 부추꽃이란다. 선형으로 자라나는 잎사귀만 먹는 줄 알던 부추가 꽃도 피우는 모양이다. 그것도 저렇게나 예쁘게도 말이다.

 12 : 28. ‘월전교(이정표 : 종점 8.1km/ 시점 19.8km)’을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용두해수욕장(龍頭海水浴場)’에 이른다. 한적하지만 해수욕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해변을 갖고 있으며, 해변 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송림에는 숲속 야영장이 조성돼 있어 해수욕과 캠핑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캠핑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보령시 근로자종합복지관(동백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편리하게 숙박할 수도 있다.

 보령시 남서부 남포방조제의 남단에 위치한 용두해수욕장도 1,500m나 되는 기다란 백사장을 자랑한다. 미세한 입자의 알갱이로 이루어진 모래의 질도 뛰어나다. 거기다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까지 얕아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여행의 정석대로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

 백사장이 끝나갈 즈음 모래사장에 바위무더기가 널려있었다. 안내판이 신랑바위 각시바위임을 알려준다. 용두마을에 살던 처녀총각이 백년가약을 맺었는데, 앞바다에 살던 용이 처녀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던 모양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성주사의 무염스님에게 부탁했고, 용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용을 죽이고 총각과 처녀는 각시바위, 신랑바위가 되어 영원한 사랑을 하게 되었다나?

 장수바위 안내판도 눈에 띈다. 마을을 괴롭히던 탐욕스럽고 악덕한 용()을 물리친 장수의 말발굽 자국이 아직도 장수바위에 남아있단다. 하지만 어떤 게 장수바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신랑바위 각시바위와 이명동암(異名同岩)일지도 모르겠다.

 12 : 37. 해변 끝에서 웃자란 잡초더미를 헤치며 오솔길로 들어선다. 바닷가에 들어선 요트경기장에 번잡함을 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12 : 41. 오솔길을 빠져나와 남포방조제(藍浦防潮堤)’ 둑길로 올라선다. 남포면 월전리와 보령시 신흑동을 잇는 길이 3.7km의 둑으로, 서해로 유입되는 남포천을 막아 보령시 남서부 해안의 너른 간척지를 만들어냈다.

 시야가 툭 트이는 둑길은 일망무제의 조망을 보여준다. 조금 전 무창포 해안에서 눈여겨봤던 석대도가 요트경기장 뒤에서 고개를 내미는가 하면, 저 멀리 먼 바다에서는 호도, 녹도, ·소화시도 등 작은 섬들이 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풍경도 만만찮다. 광활한 남포평야 너머로 이름 모를 산들이 산그리메를 그리고 있다. 보령의 명산인 성주산과 옥마산, 오서산 등일 것이다.

 진행방향에는 과거 섬이었으나 방조제로 인해 육지로 연결된 죽도(竹島)’가 자리 잡고 있다. 죽도는 현재 섬 전체가 하나의 정원으로 꾸며졌다.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한국식 전통정원으로 조성하면서 상화원(尙和園)’이란 이름을 붙였다. 섬 둘레에 조성한 탐방로(2km)를 따라 걸으며 석양정원, 한옥마을, 전통혼례식장, 하늘정원 등을 구경할 수 있다.

 12 : 58. ‘상화원의 입구(이정표 : 종점 5.2km/ 시점 22.7km)를 지난다. 섬 전체에 올곧은 대나무가 울창했다는 죽도는 조개·꼬막·굴 등을 양식하면서 사는 전형적인 섬마을이었다. 그러나 육지와 연결되면서 민자 유치를 통한 죽도관광지 개발이 이루어져 각종 휴양시설을 갖춘 관광단지가 되었다. 2000년 죽도 섬 전체가 관광특구로 지정되었고, 2013 3 상화원을 개원했다. 소정의 입장료를 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이게 볼만했던 모양이다. 보령시에서 보령9경 더하기 중 제2으로 뽑아 놓았다.

 대천해변으로 가는 둑길은 멀고도 멀었다. 하긴 월전리에서 죽도 입구까지 걸어왔던 거리보다 배나 더 길다고 하니 어련하겠는가.

 13 : 29. 방조제 끝. 둑에서 내려오니 남포방조제 준공 기념비가 맞는다. 1999년 남포간척지 공사의 일환으로 방조제가 완공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빗돌일 것이다.

 배수갑문을 지나면서 남포방조제는 끝을 맺는다.

 방조제에 갇힌 남포천(藍浦川)은 거의 바다 수준이다. 남포천은 보령시(남포면) 읍내리에서 발원 남포저수지와 소송리를 지나 삼현리에서 서해로 합류되는 길이 4.5km의 지방하천이다.

 13 : 42. ‘갓배교차로에서 광장진입로를 따라 500m쯤 걷다 첫 사거리(이정표 : 종점 2.4km/ 시점 25.5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천해수욕장으로 간다.

 13 : 50. 해수욕장이 들어선 신흑동(新黑洞)’으로 들어선다. 길은 충남대 임해수련원과 국군복지단 대천콘도의 사이로 난 골목을 지나 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13 : 54. 이후부터는 해안산책로를 따라 머드광장으로 간다. 백사장과 배후 숲 사이로 포장길을 내놓았다. 하나 더. 보령시가지서 남서쪽으로 10km, 대천반도의 돌출부 끝에 위치한 대천해수욕장은 조개껍질로 덮여 있는 해안이 색다르다. 물은 그다지 맑지 않으나 수심이 얕고 수온이 알맞으며 밀썰물을 가리지 않고 어느 때나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이때 돌공원을 지나가니 전국 각지에서 모아온 돌들을 곁눈질이라도 하면서 걸어보도록 하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크고 작은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는 다보도부터 저 멀리 호도·녹도·삽시도·불모도까지 수많은 섬들이 흡사 돛단배라도 되는 양 파도에 밀려 둥둥 떠다니고 있다. 맞다. 보령시는 원산도, 삽시도 등 70여 개의 아름다운 섬을 가진 섬의 도시다. 법정기념일인 섬의 날 기념행사가 충청남도 주관으로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대천해수욕장(大川海水浴場)은 자타가 공인하는 서해안 최고의 해수욕장이다. 해변의 길이가 자그마치 3.5km를 넘는다. 해수욕장은 1932년 경남철도주식회사의 승객유치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됐다. 9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서해안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해수욕장이다. 최근에는 계절별 축제와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되고 있어 사계절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2022 8월 기준으로 연간 방문객 수가 1 200만 명에 이른다나? 특히 1998년부터 개최된 보령머드축제는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단다.

 대천해수욕장은 보령9경 더하기 중 제1경으로 꼽혀있다. 바다를 걸으며 힐링할 수 있는 곳이자 사계절 축제의 현장이란다. ‘보령9경 더하기의 나머지는 죽도 상화원(2), 성주산자연휴양림(3), 개화예술공원(4), 무창포해수욕장(5), 외연도(6), 충청수영성(7), 냉풍욕장(8), 보령호(9)에 플러스로 오서산을 더했다. 남들이 다하는 8경으로는 턱도 없다는 듯이 9경으로도 모자라 하나를 더 보탰다.

 14 : 00. 해변을 따라 10분 남짓 걷다가 시민헌장탑이 있는 노을광장으로 올라간다. ‘구광장인 머드광장과 대비해 신광장으로도 불리는데, 젊은 층들이 선호하는 공간이란다. 하지만 화장실과 야외샤워장만 있고 실내수영장은 없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노을광장이란 이름에 걸맞게 바다를 향해 스카이워크도 만들어 놓았다. 편하게 앉아 노을을 감상하라는 듯 다리 아래는 관람석까지 갖추었다.

 14 : 06. 이후부터는 도로변 소나무 숲을 따라간다. 해변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빼어난 해수욕장의 조건에 걸맞게 각종 휴양·편의시설, 문화예술 공간을 서해안에서는 으뜸으로 갖추었다. 최근에는 각종 서비스시설의 고급화도 병행되고 있단다.

 숲이나 노변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조형물들을 들어앉혔다.

 보통 송림이나 사구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해수욕장들의 자연 친화적인 경치에 비하면 대천해수욕장은 도시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해수욕장을 끼고 바로 도회지가 형성되어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아름다운 집과 높은 빌딩이 늘어서 있고, 곳곳에 광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갖가지 예술적인 조형물이 놓여 있다.

 14 : 13  15 : 13. 아무튼 우리가 바라던 대로 주어진 시간보다 1시간쯤 먼저 대천해변에 도착했다. 그 시간은 오롯이 먹는데 사용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박주를 나누면서 회포를 풀 수 있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특히 이곳 대천해수욕장은 키조개 삼합이라는 독특한 요리로 유명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해물상회’. ‘원조라는 수식어가 발길을 이끌어주었다.

 키조개 삼합은 바다와 육지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요리다. 대천 앞바다에서 잡은 키조개(관자)와 우삼겹(또는 차돌박이)에 채소를 섞음으로써 바다와 육지 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전복과 새우, 가리비 등 다른 해산물도 함께 나와 취향에 맞게 다양한 방법으로 조합해서 먹는 재미도 있다. 참고로 키조개는 아연과 칼슘, 철 등 미네랄 성분이 풍부해 피로 해소와 간장 보호에 효과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맛과 건강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해산물이라는 얘기다.

 15 : 15. 만남의 광장으로 빠져나와 종점인 머드광장으로 간다. 바닷가를 따라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조형물이 늘어서 있었다. 잘 단장된 조각공원을 구경하는 느낌으로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덕분에 곳곳에서 사진의 배경으로 삼기 딱 좋은 조형물들을 만난다. 그러니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고 카메라 앞에 서보자. 인생샷이라도 한 장 건질 지 누가 알겠는가.

 15 : 30. 구광장이라고도 불리는 머드광장에 도착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매년 열리는 보령 머드축제의 주 무대이자, 본격적인 휴가철에는 야간에도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즐기자 밤바다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패들보드, 수상 징검다리 등 다양한 미니게임이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단다.

 서해랑길(보령 60코스) 안내도는 바다의 여인 조형물 옆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4.80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걷기 버거울 정도로 여행자들을 괴롭히던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머드광장에서 바라본 바다. 저 멀리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보인다. 때로는 신기루 현상으로 아득한 중국대륙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오늘은 집사람 말고도 구우(舊友) 둘이 트레킹 후 소주라도 한잔 나누자며 함께 걸어주었다. 이런 게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겠는가. ‘장 바니에(Jean Vanier)’는 그의 저서 희망하는 사람들, 라르슈(Porte d'esperance)’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며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했다. <내 심장이 다른 사람의 심장 박동에 따라 고동치기까지, 그리하여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기까지 나 자신을 충분히 버리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니 몇 마디 담소를, 그것도 오가는 반주에 희석되어버릴 수도 있는 얘기 몇 마디를 나누기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시간을 써버린 저 친구들은 나에게는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거론한 책에는 1964년 파리 근교의 작은 집 라르슈(방주라는 뜻)’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필립, 라파엘 두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한 장 바니에. 그 집이 28개 나라에 103개의 공동체로 확산되기 까지, 고통 받는 많은 이들에게 바니에가 열어준 희망의 메시지가 따뜻하게 담겨 있다.

 

서해랑길 58코스(선도리 갯벌체험장  춘장대 해변)

 

여 행 일 : ‘24. 8. 24()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비인면·서면 일원

여행코스 : 선도리갯벌체험장월하성마을서울시연수원띠목섬해변공정마을홍원항춘장대 해변(거리/시간 : 11.7km, 실제는 14.46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8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3(전체 5)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선도리 갯벌체험장(충남 서천군 비인면 선도리)

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서천방면으로 4km쯤 내려오다, ‘해본마린(보트 판매·수리업체)’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나오면 잠시 후 비인해변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서천 58코스) 안내도는 선도리갯벌체험장 앞에 설치되어 있다.

▼ 선도리(갯벌체험장)’에서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춘장대해변까지 가는 11.7km짜리 여정이다코스 대부분이 바닷가를 따라 나있어 여름철에는 다소 힘들 수도 있다하지만 곱디고운 모래사장을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데다생태계가 잘 발달된 갯벌에서는 재수라도 좋으면 조개 한두 개 정도는 너끈히 주워들 수 있다.

 이곳 선도리해변은 전국 제일의 갯벌체험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접수창구 앞에 줄지어 늘어서있는 저 인파가 그 증거다.

 10 : 00. 해안산책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때 쌍도(雙島)’가 눈에 들어온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과 천석지기 부잣집 외동딸의 애틋한 사랑얘기가 전해지는 전설의 섬이기도 하다.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남녀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극단적 선택을 했고, 선도리 앞바다의 두 개의 작은 섬으로 우뚝 솟아났다나?(갯벌체험장의 분위기 연출을 위해 지난 57코스 때 사진을 게시했다)

 진행방향에는 옥녀봉을 병풍삼은 월호리(월하성 어촌체험마을)’ 포구가 놓여있다.

 10 : 10. 해안에서 빠져나간다. 해안산책로도 이쯤에서 끝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10 : 12. ’갯벌체험로로 올라섰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갯벌체험로 배롱나무길(서천군 군도 5호선 종천면 장구리에서 시작해, 비인면을 거처 서면으로 이어지는 약 20km 구간)’로도 불린다. 서천은 배롱나무 꽃길로 유명하다. 해안도로를 배롱나무 꽃길로 조성해 갯벌과 어우러지는 꽃무리의 운치를 보여준다.

 아재개그 하나.  배롱나무인지 아시나요?’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한번 성한 것은 오래가지 않아 반드시 쇠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부귀라는 꽃말의 배롱나무 꽃은 7-9월까지 계속 꽃을 피워 백일홍 나무라고도 불린다. 그걸 자랑하며 십일홍일 뿐인 다른 나무들에게 메롱하며 놀린 것이 시간이 자나면서 배롱으로 변했다나?

 10 : 23. 인생은 좋은 일로만 계속될 수는 없는가 보다. 비인천(庇仁川)을 가로지르는 쌍도교를 건넜다싶으면 이정표(종점 10.2km/ 시점 1.5km)가 이제 그만 배롱나무 꽃길과 헤어지란다.

 이정표가 서해랑길 본연의 임무를 되찾았다. 시점과 종점까지의 거리를 기본으로 인근의 주요 포인트를 추가했다. 하단의 지도에는 현재위치의 주소까지 적어 넣었다.

 이후부터는 방조제의 둑길을 따라간다. 길은 월하성 어촌체험마을로 이어진다.

 이즈음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한 쌍도를 눈에 담을 수 있다. 그저 뭉툭한 모양새일 따름이었던 섬이 언제부턴가 고래와 거북 모양을 닮은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다.

 10 : 27. 바닷가 습지에는 조류관찰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아니 무늬만 탐조대였다. 바다생물 관찰 사이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찰 구멍을 아래가 아닌 위에다 뚫어 놓은 이유는 대체 뭘까?

 안내판은 철새가 아닌 흰발농게, 갯게, 대추귀고둥 등 해양생물에 대한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 반 폐쇄형 갯벌인 월호리 갯벌에 3종의 해양보호생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특히 갯게는 서해안에서 유일한 서식지라고 한다.

 10 : 29. ‘해뜨는비치하우스 펜션’. 서해랑길(kakaomap)은 펜션 앞에서 직진이다. 하지만 두루누비(한국관광공사의 공식 사이트)’에서 배포한 트랙은 오른쪽으로 가란다. 우리 부부는 kakaomap을 따르기로 했다. ‘월하성 포구를 둘러본 다음 바닷가를 따라 띠섬목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10 : 32. 월하성 마을. 법정 동리인 월호리(月湖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화동·월하성·큰장굴) 중 하나로 달빛 아래 신선이 노는 것 같은 마을이라고 해서 예로부터 신성지로 꼽히던 마을이다.

 마을 담벼락은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보수를 안해서인지 없던 것만도 못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10 : 35. 월하성마을 앞 풍경. 58가구 196명이 살아간다는 마을은 규모가 제법 컸다. 민박이나 펜션은 기본. 편의점에 식당(그것도 셋이나)까지 들어서 있었다.

 바닷가에는 철새나그네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충남 서천은 서해안을 끼고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데, 보령 땅과 경계를 이룬 부사호에서 전북 군산을 마주보고 있는 장항까지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 서천 철새나그네길이다.  5개 코스 37.8km에 이르며, 1코스(붉은낭만길) 8.8km, 2코스(해지게길) 5km, 3코스(나그네길) 14km, 4코스(윤슬길) 5km, 5코스(해찬솔길) 5km로 조성되어 있다.

 앞바다는 만 형태의 지형으로 수심이 얕아 갯벌이 잘 발달해있다. 썰물 때면 갯벌이 1km 가까이 드러난다. 또한 질퍽한 갯벌이 아니라 고운 모랫벌이라 움직이기도 편하다. 덕분에 봄부터 가을까지 갯벌에 직접 들어가 바지락, 모시조개, 맛조개 같은 조개류를 채집하고 갯벌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다.

 월하성 포구의 어선들도 하나같이 물양장으로 올라와 있었다. 서천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만나오다 보니 이젠 익숙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배는 경운기나 트랙터에 의해 바다로 옮겨진다. 저 배는 언제라도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마친 상태다. 아니 다른 배들도 출발선상에 선 달리기 주자들처럼 신호가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길가에는 쭈꾸미 잡이용 소라껍데기가 줄에 묶인 채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쭈꾸미는 낚시로 잡는 것보다 소라방 잡이 방식으로 잡는 것이 힘은 더 든다고 했다. 하지만 쭈꾸미에게 스트레스를 적게 주는 만큼 가격을 더 비싸게 받는다고 한다.

 저 길은 어선 전용이다. 어민들은 바다가 멀리 물러나는 썰물 때는 경운기 뒤에 배를 싣고 이 길 끝까지 가서 바다에 배를 띄운다. 이게 또 이색적인 풍경으로 비쳐지면서 탐방객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킨다나? 맞다. 끝 간 데 없는 갯벌 위로 배를 싣고 바다로 가거나,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배를 싣고 나오는 경운기들의 행렬이 어디 그리 흔한 풍경이겠는가.

 10 : 43. 포구의 끝. 방파제 앞에는 어촌체험 안내소 겸 매표소가 있었다. 8월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이용한 월하성 횃불문화축제까지 열어가며 체험객들을 유치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때 배올리기 문화체험, 어부체험, 맨손으로 고기잡기 체험, 돌게잡이 등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단다.

 방파제에서 바라본 월하성 마을’.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모양이 달을 닮았다하여 달 아래 성 , ‘월하성(月下城)’이라고 부른다나? 해안가의 지형이 기러기 날개처럼 굽어졌다고 해서 월아성으로 불리기도 했단다. 1864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 마을 서쪽에 월아산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게 지금의 옥녀봉으로 추측되며 마을 이름도 이 월아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마을의 끝에는 봉긋하니 솟아오른 동산이 하나 있었다. 내가 띠섬으로 오해했던 섬이다. 주민들 말로는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육지로 변한 섬이라고 했다.

 방파제에서 바라본 북쪽 해안. 저 해안선을 따라 띠섬목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주민들 말로는 무릎까지 빠질 각오를 해야 한단다. 갯고랑이 제법 깊다는 것이다. 고민해볼 필요도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이유이다.

 10 : 52. 마을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월하성길을 따라 서울시 서천연수원쪽으로 간다.

 10 : 58. 고갯마루에서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8.7km/ 시점 3km)를 만났다. 그런데 옥녀봉(75.9m)으로 올라가라는 게 아닌가.

 하지만 우린 서울시 서천연수원으로 간다. 해안선을 따라가며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띠섬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아니 해안선을 따라가는 철새나그네길(3코스)’이 옥녀봉을 넘는 서해랑길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11 : 09. 연수원 경내를 횡단해 바닷가로 내려선다. 건물들이 밀집해있어 길 찾기가 수월치는 않으나 연수원 이정표의 보존습지·모래톱마당·해변가 등을 참조하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더. 해안선을 따르는 이 구간은 밀물 때는 이용할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해변은 광활하지는 않지만 연수원 식구들을 소화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널찍했다. 거기다 규사 성분의 모래사장은 한없이 보드랍다. 이런 고품격의 프라이빗 비치를 갖고 있는 서울시청은 대체 무슨 복일까? 서울 시내의 지하철역을 시작으로 독도 지우기를 나서고 있는 매국 행위는 토착 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던데...

 가는 입자의 모래가 물에 다져진 탓에 발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 바닥이 단단했다. 아니 발바닥으로는 폭신폭신한 촉감이 느껴져 온다. 보드라우면서도 단단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런 로드 컨디션이라면 하루 종일 걸어도 좋을 것 같다.

 띠섬은 육지와 30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다. 저 섬은 하루 두 번 썰물 때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 육지와 연결된다고 했다. 그래선지 바다에서 조개를 캐고 있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길은 갯바위지대로 연결된다. 위험하다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을만한 검붉은 바위들이 해안선을 따라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갯바위는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흡사 조각전시장을 보는 것 같다. 언젠가 TV 화면에서 살짝 스쳐지나가던 달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모두가 다 오밀조밀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험상궂으면서도 거대한 갯바위들이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살짝 비켜 지나가면 그만이었지만... 아무튼 모래해변은 모래해변대로, 갯바위는 갯바위대로 바다와 찰떡궁합을 이루고 있었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갯바위들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동안 바다와 사랑에 빠져 지금과 같은 아기자기한 모양이 됐다. 그러다보니 해식지형의 변화과정도 살짝 엿볼 수 있다. 해안절벽이 침식을 거쳐 해식동굴로 변한... 저런 동굴들은 흐르는 세월과 함께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마량포구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즉 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서천화력의 거대한 마천루도 시야에 잡힌다.

 11 : 14. 갯바위로 이루어진 모퉁이를 돌아서면 띠섬목이다. 이정표(종점 8.3km/ 시점 3.4km)는 월하성마을에서 이곳까지를 1km로 적고 있다. 하지만 내 트랙은 1.4km를 찍는다. 해안선을 따르는 철새나그네길(3코스)이 서해랑길보다 더 길다는 얘기일 것이다.

 들일 나온, 아니 갯일 나온 어느 가족. 꽤 오래 버틸 요량인지 바닷가에 돗자리까지 펼쳐놓았다. 바리바리 싸온 간식도 펼쳐놓았음은 물론이다.

 띠섬목이란 지명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 ‘띠섬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곧 띠섬목이 아니겠는가.

 이후부터는 띠섬목 해변을 따른다. 규사성분의 고운입자로 이루어진 백사장이 자랑인 해변이다. 배후에 울창한 송림까지 끼고 있으니 해수욕장 부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하지만 사유지인지 해안선을 따라 길게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마량포구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즉 반도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해변은 가고 또 가도 끝이 없었다. 맞다. ‘띠섬목 해변은 그 길이가 4km나 된다고 했다. 물먹은 규사성분의 모래사장이 단단하게 굳어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딱딱하다는 것은 아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폭신폭신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의 연한 움직임이 있었다.

 뒤돌아 본 띠섬’. ‘띠 모()’자를 써 모도라고도 하는데, 월호리에서 갯벌로 이어진 덕분에 갯벌체험장으로 이용된다.

 11 : 35  11 : 55. 바닥이 곱다고 뜨거운 태양열까지 없애주지는 못했나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스스럼없이 해송펜션으로 올라가버린다. 더 이상은 무리라면서 잠시 쉬어가자는 것이다. 덕분에 우린 다른 일행들과 함께 막걸리 잔을 나누며 20분 정도 푹 쉬어 갈 수 있었다.

 이 일대의 갯벌은 장벌어촌계 및 개인 소유의 양식장이라고 한다. 그러니 펜션손님이나 관광객들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조개를 채취해야 한단다.

 11 : 55. 다시 길을 나선다. 모래사장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못 견딜 정도로 지루하지는 않았다. 조개를 캐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고, 바지락·동죽··고동 등 그들이 거둔 수확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차고도 넘쳤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국물이 시원한 바지락, 구우면 더욱 맛있는 모시조개, 뽀얀 속살이 쫄깃한 돌조개 등 각양각색의 조개가 잘 잡힌다고 했다. 하지만 서천 갯벌체험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맛조개 잡기. 호미로 흙을 파낸 뒤 조개를 줍는 것과 달리 송송 뚫린 갯벌 구멍 안에 소금을 뿌리면 맛이 쏙 튀어나온다.

 맛조개 잡이는 삽과 소금만 있으면 충분하다. 펜션에서 장비를 빌려주고, 잡는 방법도 간단해서 아이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먼저 삽으로 개흙을 살짝 걷어내고 구멍에 소금을 한 움큼씩 뿌려놓으면 소금의 짠 기운을 견디지 못한 맛이 마치 안테나를 올려 갯벌 위를 탐색하듯 고개를 살짝 내민다. 이때 맛을 억지로 잡아 빼는 것은 금물. 잘못하면 끊어지기 때문에 스스로 튀어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반 이상 올라왔을 때 재빨리 낚아채야 한다.

 ! 모래사장이 거칠어졌다. 엊그제 지나간 태풍 종다리가 남긴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12 : 10. 해변은 배후 숲이 계속해서 따라온다. 울창한 송림이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이룬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또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그만큼 그늘이 절실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 그것도 오뉴월 뙤약볕 아래서 모래사장을 걷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숲에는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었다. 캠핑 사이트도 눈에 띈다. ‘해오름관광농원에서 만들어놓은 부대시설이다. 철새나그네길(3코스 : 해오름관광농원다사항) 걷기 여행자들이 기점으로 삼는 곳이기도 하다.

 12 : 16. 그 끝에는 해오름 모텔이 있었다. 서해의 푸른 경관을 두 눈에 담으며 잠들 수 있으니 하룻밤 머물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하지만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12 : 19. 길이 끊겨있어 다시 해변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더 모래사장을 걸어야만 했다.

 12 : 24. 드디어 도로(공암남촌길)로 올라섰다. 이후부터는 방파제의 축대 위를 걷는다. 축대의 높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음주 보행을 삼가야 하는 구간이다. 하나 더. 이 일대는 긴 벌판이란 뜻의 장벌로 불리기도 한다. 벌판이 하도 길어 가다가 쉬어갔다고 해서 쉬엄장벌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12 : 29. 해양재난구조대 앞에서는 도로 오른편으로 들어붙는다. 널찍하니 길이 나있었기 때문이다.

 12 : 30. 서도초등학교. 서해바다를 뜨락 삼았으니 입지조건으로는 이만한 곳도 없을 듯 싶다. 하지만 이번 종다리 태풍 때만 해도 학교 앞 도로가 통제되는 등, 기상이변 때마다 비상이 걸린다니 세상 일이란 마냥 좋을 수만은 없나보다.

 12 : 35. ‘신바람 난 찐빵·만두집 앞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남촌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도둔리(都屯里, ’군사가 주둔하던 곶에서 유래된 지명)’에 속한 행정부락 중 하나로 도둔리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남촌마을 골목. 장방형의 마을을 남북으로 짧게 관통한다.

 요즘은 민박도 월 단위로 내주는 모양이다. 하긴 작년 코카서스 3국을 여행하면서 들른 조지아에서는 주민들이 한 달이 아니라 일 년 살기를 권하기도 했었다. 내가 수령하는 연금이면 호화롭지는 않아도 여유롭게 주변 나라들까지 모두 둘러볼 수 있다면서 말이다.

 12 : 37. 골목을 빠져나와 서면로를 횡단한다. 이어서 도둔리의 또 다른 행정부락인 공정마을(7)’로 들어선다. 마을에는 노인정(마을회관) 말고도 커뮤니티센터가 따로 지어져 있었다. 그런데 춘장대역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맞다. 저곳에는 서천화력선(간치~동백정) 춘장대역(春長臺驛)’이 있었다. 영등포역에서 출발하는 관광열차(통통통 뮤직카페트레인)가 이곳까지 운행하기도 했으나, 2018년 서천화력선이 폐지되면서 2020년 춘장대역 커뮤니티센터로 변신했다.

 공정마을 뒤 언덕을 넘으면 요포마을(10)’이다. 참고로 도둔리는 1리 장벌, 2리 남촌, 3리 동리, 4리 아파트촌, 5리 중리, 6리 요치, 7리 정동, 8리 공암, 9리 홍원, 10리 요포 등 10개의 행정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길가 화단에 설악초(雪嶽草)’가 화사하다. 회녹색의 잎이 나는데 가장자리가 흰색 테두리를 친 듯 하얗다. 그런데 난생 처음 본 꽃마저 온통 하얀 게 아닌가. ‘설악초(snow-on-the-mountain)’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란다.

 길은 이제 홍원항으로 이어진다. 서면에서도 제일 서단에 위치한 어촌마을로, 옛날에는 탄포라 불리었는데, 70년대 공정마을에서 분구하여 행정구역상 홍원리(도둔9)’가 되었다. 이쯤에서 팁 하나. ‘요포 마을회관을 지나면 두 곳에서 길이 오른쪽으로 나뉜다. 중간 기점인 홍원항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곧장 오른쪽으로 가면 될 일이다. 이 경우 2km 정도를 단축하게 된다.

 12 : 59. ‘홍원마을(이정표 : 종점 2.4km/ 시점 9.3km)’에 이른다. 바닷가 마을이라서 90%가 어업에 종사하고 어선만도 60척에 이른단다. 그래선지 마을에서 열리는 풍어제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고 있었다. 음력 1 7일에는 마을주민 2백여 명이 참여하여 마을의 안녕과 어민들의 안전사고 및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단다.

 서천 지명 탄생 600주년 기념 조형물. 1413(태종 13)에 서천군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모양이다. 참고로 서천은 마한시대의 비미국(卑彌國), 백제의 설림군(舌林郡:서천마산현(馬山縣:한산비중현(比衆縣:비인), 통일신라(西林郡·嘉林郡), 고려(知西州使·知韓州使) 등을 거쳐 조선 태종 때 서천군이 되었다. 그러다 1913년 서천군·한산군·비인군이 합쳐져 현재의 서천군이 된다.

 13 : 02. ‘홍원항은 서해랑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었다. 1940년경 중국·일본 어선 4-5척이 갈치·조기 등을 싣고 입항하면서 어항이 형성되었는데, 그 후 꾸준히 늘면서 어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성어기에는 하루 150여척이 입·출항한다니 어업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고 보면 되겠다.

 물양장에서는 홍원항 자연산 전어·꽃게 축제(8.24-9.8)’가 한창이었다. 참고로 홍원항 근해에서는 전어·농어·꽃게 등이 많이 잡힌다고 했다. 특산물로는 앞바다에서 잡힌 멸치로 담근 액젓이 꼽힌단다. ’잡어 젓갈도 하나쯤 챙겨갈 만하다고 했다.

 언론에서는 맨손 전어잡기 체험과 홍원항 보물찾기, 수산물 깜짝경매, 홍원항 수산물장터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몽골텐트도 엄청나게 많이 쳐져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썰렁한 풍경이었다. 비어있는 텐트가 보이는가 하면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전어회와 전어무침 등을 파는 저 음식코너가 그 썰렁함을 대변한다고 보면 되겠다. 50평도 더 되어 보이는 널찍한 매장에 손님이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들어간 편의점 주인장은 음식을 식당에서 먹지 왜 광장에서 먹겠느냐며 에둘러 얘기했지만 말이다.

 뜨거운 여름날, 사람들은 에어컨도 없는 노점보다는 초대가수의 열창에 더 이끌렸던 모양이다. 무대 앞 50석쯤 되는 객석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차있었다.

 포구는 꽤 번화했다. 펜션이나 민박 등의 숙박업소와 횟집·식당들이 웬만한 도시의 번화가 못지않게 늘어서 있다. 맞다. 주말이면 외지에서 수많은 차량들이 포구로 들어오며, 성수기에는 그 숫자가 5백여 대도 더 넘는다고 했다.

 13 : 16. 축제 구경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잔디광장(주차장이 들어있다)을 왼쪽에 끼고 나있는 요포길을 따라 북·동진한다.

 13 : 23. 마리나방파제 못미처 삼거리(이정표 : 종점 1.9km/ 시점 9.8km)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간다.

 13 : 27. 고개 위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왼쪽으로 간다. 길은 아직도 요포길이다. ‘파도소리 카페 바다내음 캠핑장 등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오롯이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조망의 명소들이 들어서 있는 구간이다.

 꽃범의 꼬리가 길가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꽃잎이 호랑이가 크게 입을 벌린 것 같은데다, 꽃대가 기다란 범의 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호랑이처럼 무섭지는 않고 오히려 화사한 분홍빛이 달콤한 입맞춤을 하고 싶게 만든다. 꽃말은 청춘’, ‘젊은 날의 회상이다.

 고개를 넘는 도중 서해바다 쪽으로 시야가 트인다. 그런데 언덕 아래로 길이 나있는가 하면, 바다에는 산책용 다리까지 놓여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아까 서해랑길이 방향을 꺾던 삼거리(마리나방파제 입구)에서 탐방로를 연결시키는 방법은 없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쯤에서라도 바닷가로 내려가도록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개를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춘장대 해변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동리(‘도둔고지의 동쪽)와 중리(‘도둔고지의 중앙), 요치 등이 밀집해 제법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참고로 도둔리는 신라시대 서림군의 비비현에 속하면서 마을이 시작됐다. 하지만 오랑캐들이 잦은 침범으로 고생깨나 했단다. 조선 세종 때는 만호(萬戶) 김성길이 아들 윤()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왜적의 배 50여척과 싸우다 전사하기도 했다. 이곳에 바다로 쳐들어오는 오랑캐를 무찌르는 관방(官房)을 두었던 이유이다.

 13 : 41. 막바지에 이른 서해랑길은 춘장대 해변을 따라 북진한다. 이 구간을 걷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바닷가로 내려서서 모래사장을 걸을 수도 있고, 우리처럼 해안 산책로를 따라가도 된다.

 안전지킴이용 전망대가 막혀있는 걸 보면 해수욕 시즌은 이미 마감되었나 보다.

 1.5km나 되는 긴 백사장을 자랑하는 춘장대해수욕장 1.5도의 완만한 경사와 얕은 수심, 잔잔한 파도 등 해수욕을 즐기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알려진다.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자연학습장 8선에 꼽히기도 했다. 1978년 서천화력발전소 건설로 동백정해수욕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서면 도둔리 북서쪽 토지를 개발해 새로운 해수욕장을 조성했는데, 그곳이 오늘날 춘장대해수욕장이다. 춘장대란 이름은 이때 토지 문제를 너그럽게 해결해준 땅 주인의 호 춘장(春長)’에서 따왔다고 한다.

 춘장대 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 낙조라고 했다. 해무가 잦지 않은 여름이면 횃불처럼 타오르는 해넘이를 볼 수 있단다. 거기다 먼 바다에서 야간 조업을 하는 고깃배라도 지나갈라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아름다운 풍경화가 그려진다고 한다.

 즐거운 어울림은 오뉴월 삼복더위까지도 날려버리나 보다.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씨인데도 23각 경기 삼매경에 푹 빠져있다.

 13 : 50. 캠핑사이트와 평상(대여를 하는 듯)이 늘어선 해안길을 따르다보면 중앙광장이 나온다. 이곳에는 네덜란드에서나 볼 법한 초대형 풍차가 두 대나 세워져 있다. 그것도 날개까지 돌린다.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해변에 기념촬영용 문자 조형물을 설치해 인생샷 한 장쯤 건질 수 있도록 했다.

 13 : 56. 중앙광장에서 마을 쪽으로 한 브럭 더 걷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춘장대길8번길을 따른다. 이어서 150m쯤 더 걸으면 중앙솔밭·백일 캠핑장의 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는 서해랑길(보령 59코스) 안내도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은 14.46km를 찍고 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정규코스보다 3km나 더 걸었나 보다.

 하버드대학교에서 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의 인생 궤적을 추적하며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를 연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행복하고 건강한 삶의 원천은 바로 좋은 인간관계다. 외로움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로 요약했다. 그렇다면 우리 부부는 행복하다 할 수 있겠다. 하루 24시간도 부족하다며 항시 붙어 다니니 말이다.

 오늘은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사양하고 맛집을 찾았다. 춘장대 해변은 갯벌에서 잡은 조개를 이용한 조개구이와 해물칼국수가 유명하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너 한쌈 나 한쌈에 들어가 메인 메뉴인 쌈밥을 먹었다. 맛집 검색에서 유일하게 5점 만점을 받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평은 틀림이 없었다. 맛도 맛이지만 주인장의 친절한 서비스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 했다.

 

서해랑길 57코스(와석 마을회관  선도리 갯벌체험장)

 

여 행 일 : ‘24. 7. 27()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마서면·종천면·비인면 일원

여행코스 : 와석마을회관장구2리 마을회관당정1다사항비인해변선도리갯벌 체험장(거리/시간 : 15.9km, 실제는 13.76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7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와석마을회관(충남 서천군 마서면 송석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천 IC에서 내려와 4번 국도를 타고 서천읍으로 들어온다. 서천교차라에서 21번 국도(홍성·보령방면으로 3km), 당정교차로에서 617번 지방도(마서·당정리방면으로 3.4km), 한성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km쯤 들어오면 와석마을에 이른다. 서해랑길(서천 57코스) 안내도는 마을회관(노인정) 앞에 설치되어 있다.

 송석리(와석마을)’을 출발, 서천군의 서쪽 해안을 걸어 선도리(갯벌체험장)’까지 가는 15.9km짜리 여정이다. 리아스식 해안의 곶()을 떠나 들녘을 걷는 구간이 유난히 많아, 서해바다의 작은 섬들이 그려내는 예쁜 풍경화 말고도 드넓은 서천의 너른 들녘에서 풍요를 만끽하며 걷는다.

 서해랑길은 해안길을 따라 송석항으로 간다. 걷기 여행자들의 발걸음도 마서면에서 종천면을 향해 간다. 그러자 아목섬이 길 떠나는 나그네들을 향해 아쉬움의 솟짓을 보내온다. 섬의 모양이 거위의 목처럼 생겼다는 섬으로, ‘아항도(鵝項島)’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목섬은 모새의 기적이 연출되는 섬이다. 썰물 때 물이 빠지면 길이 만들어지면서 섬까지 연결된다. 이때 조개류나 해삼 등 짭짤한 수확도 거둘 수 있음은 물론이다.(아래는 지난번 56코스 답사 때 찍은 사진이다)

 송석항 쪽 풍경. 방파제가 있는 곳이 송석항. 그 오른쪽 산기슭이 슴갈목(원래 섬이었다)’, 중앙에 끼어있는 낮은 산은 갈무산이다.

 10 : 20. 실제 출발지인 (해창마을)버스정류장. 원래 출발지에서 2.6m쯤 떨어진 지점인데, 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경보까지 내려졌다)에 놀라 거리를 조금 단축했다. 아니 57코스의 특징이 발목을 잡았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바닷가와 들녘만 걷는 특징으로 인해 구간 전체가 오뉴월 뙤약볕 이래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10 : 20. ‘장천로(617번 지방도)’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해창 마을회관. 법정 동리인 한성리(漢城里)’를 구성하는 자연마을(한성·해창·골패·마동) 중 하나로, ‘해창이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해창(海倉, 군수 물자와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이 있었다는데서 유래했다.

 10 : 24. 대한불교삼론종 소속이라는 약사암’. 참고로 삼론종(三論宗)’은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中觀思想)을 중국에서 체계화해 성립한 종파이다. 인도 대승불교에는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두 흐름이 있었다. 이들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중관불교는 삼론종(三論宗), 유식불교는 법상종(法相宗)이 됐다. 대한불교삼론종은 1989년 대산(大汕) 이혜봉(李惠鳳) 스님이 창종했다. 여기서 삼론(三論)은 중관파의 주요한 세 논서, 즉 용수의 중론(中論), 12, 제바(提婆)의 백론(百論) 등을 말한다.

 10 : 24. 판교천은 배수갑문 위로 난 도로(장천로)를 이용해 건넌다. 참고로 판교천(板橋川)은 서천군(판교면) 복대리 무량골에서 발원 남쪽으로 흐르다가 종천면 장구리에서 서해로 유입되는 16.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판교천의 하구역(河口域). 해창마을의 포구를 겸하는가 보다.

 10 : 28. 판교천에서 100m쯤 더 걷다가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샛길(장촌길40번길)로 들어간다. 이때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외국인 걷기여행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 온다. 흔치않은 풍경이라 하겠다. 여성이 이국의 낯선 땅을, 그것도 외진 들녘을 혼자서 걷는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10 : 33. ‘장구2 마을회관. 장구리(長久里)는 지형이 장구처럼 곶을 이루고 있다는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갯장구, 뭍장구, 이재민촌, 후촌, 참샛골 등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 ‘2의 자연부락 이름은 무엇일까? 그게 궁금해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주민을 붙들고 물어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장구2’. 동네의 규모를 좁히고 또 좁혀가도 그의 입에서는 장구2만 되풀이 될 따름이었다. 우문현답인지 현문우답인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헷갈린다.

 서천군에서는 분리수거장을 깔끔으로 부르나 보다. 예쁜 이름처럼 깔끔하고 아름답게 관리하고 있었다.

 관상용으로만 알았던 백년초를 이 마을에서는 재배하고 있었다. 맞다. 백년초를 대표적인 회춘푸드라고 하지 않았던가. 노화 방지와 질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면서 말이다. 하나 더. ‘본초강목에는 기의 흐름과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독을 풀어 주며 심장과 위통 개선, 기관지 천식 등에 이로운 약초로 기록돼 있다.

 마을을 둘러싼 들녘이 무척 넓다. 풍요로움을 상징한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마을회관 앞 안내판은 장구2 풍성한 마을로 소개하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이제 종구3를 향해 간다. 푸름으로 가득한 들녘을 횡단한다고 보면 되겠다.

 들녘은 사방팔방으로 논만 드넓게 펼쳐진다. 그러니 쉴 만한 곳이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벌판 한가운데 파란색까지 칠한 귀여운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들에서 일하는 분들이 잠시 쉬라고 만들어 놓은 것일까? 아니 길가는 나그네들을 배려한 쉼터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장구3라고 써놓은 나무 벤치는 이 마을이 얼마나 배려심이 깊은가를 말해준다.

 10 : 48. 서해랑길은 종구3 조금 못미처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화산(200.5m)을 병풍삼아 들어앉았는데, 그 오른쪽 어디쯤에 장구리성지가 있다고 했다.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산성인데 고려시대 이전의 성으로 추정된다나?

 이곳에도 벤치가 놓여있었다. 이정표(종점 11.7km/ 시점 4.2km)도 눈에 띈다.

 10 : 50. ‘장천로(617번 지방도)’로 다시 올라선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무척 예쁘게 다가오나 서해랑길은 이를 따르지는 않는다. 곧장 횡단해 당정리 들녘으로 나간다. 하나 더. 코스를 단축하고 싶다면 판교천 갑문에서 이곳까지 도로를 따라오면 된다.

 당정리 들녘(‘물거내들로도 불린다)으로 들어간다. 비닐하우스 앞으로 당정천이 흐른다.

 10 : 52. ‘당정천이란다. 종천면 종천리에서 발원 남쪽으로 흐르다가 장구리에서 서해로 합류되는 4.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11 : 00. 이번에는 갯벌체험로(이정표 : 종점 10.7km/ 시점 5.2km)’로 내려선다. ‘물거내들의 끝, 구릉지 앞(이정표 : 종점 11km/ 시점 4.9km)에서 왼쪽으로 방향으로 튼 다음 충서로319번길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갯벌체험로 배롱나무길(서천군 군도 5호선 종천면 장구리에서 시작해, 비인면을 거처 서면으로 이어지는 약 20km 구간)’로도 불린다. 서천은 배롱나무 꽃길로 유명하다. 해안도로를 배롱나무 꽃길로 조성해 우리의 전통건축과 어우러지는 꽃무리의 운치를 보여준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한번 성한 것은 오래가지 않아 반드시 쇠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귀라는 꽃말의 배롱나무 꽃은 7-9월까지 계속 꽃을 피워 백일홍 나무라고도 불린다.

 탐방로는 배롱나무 꽃길을 만나자마다 헤어져버린다. 그리고는 당정1를 향해 구릉지로 올라간다.

 11 : 08. 여염집처럼 지어진 당정1마을회관. 법정 동리인 당정리(堂丁里)는 대부분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골뜸·뚜두렁이(당곡삼막골(산막) 등이 있는데, 이곳 당정1리는 삼막골이라고 한다.

 탐방로는 마을회관에서 오솔길로 바꿔 탄다. 시멘트포장길이 반듯하게 나있으나 구태여 에둘러갈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11 : 11. 당정1리 마을은 언덕의 남과 북에 나뉘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또 다른 삼막골 마을이라 할 수 있겠다.

 마을 앞 모정을 지나 당정리 들녘으로 들어간다.

 여름철을 만난 정미소는 낮잠 잘 일만 남았다.

 11 : 16.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이정표 : 종점 9.6km/ 시점 6.3km)가 이번에는 들녘을 횡단한다. 이때 썩 편치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익성이 더 뛰어나는지는 몰라도 농경지까지 훼손해가며 들어선 태양광발전소는 언제 봐도 눈에 거슬린다.

 11 : 23. 종천천(鍾川川)을 건넌다. 판교면(서천군) 상좌리를 기점으로 하여 종천면 종천리에 이르는 1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중류에 종천저수지, 장항저수지 등이 있어 종천평야와 당정평야를 관개한다.

 다리를 건너면 종천리(鐘川里)’ 땅이다. 하지만 취락지구로 들어가지는 않고 그저 들녘만 지나간다. 참고로 이곳은 토정(李之菡) 선생이 찾던 명당자리가 있다는 곳이다. 그래선지 냇물에 물이 흐를 때 가끔 종소리가 울리기도 한단다.

▼ 11 : 27. 들녘의 끝(이정표 종점 8.7km/ 시점 7.2km)에서 산자락(봉산, 124.4m)과 마주친 길이 좌우로 나뉜다서해랑길은 왼쪽(충서로)으로 간다이때 당정리 들녘을 만들어낸 종천방조제가 기다랗게 눈에 들어온다.

▼ 11 : 34. ‘다사2마을로 들어섰다서쪽과 남쪽을 서해에 접하고 있는 다사리(多沙里)’는 모래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하지만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다사리 해변은 백사장 대신 검은 갯벌만 한가득이었다.

▼ 11 : 41. 마을 뒤 언덕을 넘으니 다시 바다가 우리를 기다린다보령해경 다사출장소가 발아래에 놓였는가하면 다사항’ 전체가 한눈에 조망된다.

▼ 11 : 44. ‘다사2마을회관 앞에서 갯벌체험로(이정표 종점 7.2km/ 시점 8.7km)’를 다시 만났다그런데 배롱나무 꽃길로 단장되어 있던 아까와는 달리 이곳에는 해송(海松)이 가로수로 심어져 있었다하나 더. ‘구수메라는 식당 간판이 이곳 다사2리의 또 다른 지명이 구수메임을 알려준다.

▼ 탐방로는 갯벌체험로를 그냥 가로질러 버린다그리고는 해안도로(갯벌체험로44번길)를 따라 다사항으로 간다항아리처럼 내륙을 향해 움푹 들어온 다사리 해변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어촌체험관광안내소. ‘다사리도 어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다저 안내소는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고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다는 것은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예산 낭비일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나 혼자만의 기우이기를 바래본다.

 어항을 끼고 있어선지 길은 대체로 어수선한 풍경이었다. 도로변에 어망을 널어놓았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통발이 수북이 쌓여있다.

 이곳은 쭈꾸미를 소라껍질로 잡는가 보다. 쭈꾸미 잡이용 소라껍데기가 줄에 묶인 채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쭈꾸미는 낚시로 잡는 것보다 소라방 잡이 방식으로 잡는 것이 힘은 더 든다고 했다. 하지만 쭈꾸미에게 스트레스를 적게 주는 만큼 가격을 더 비싸게 받는다고 한다.

 11 : 55. 다사항(多沙港). 바다보다 뭍으로 올라와있는 배들이 더 많다. 서천지역에 들어오면서부터 눈에 띄는 이색적인 풍경이다(지난 56코스 때 만난 주민은 금어기라서 하릴없어진 배가 쉬는 중이라고 했다). 아무튼 물양장에는 경운기와 트랙터도 쉬고 있었다. 언제든지 바다를 향해 배를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다사항은 남쪽의 송석항과 마주보면서 큰 만()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썰물 때면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갯벌 너머로 송석항과 갈무산, 그리고 아목섬이 조망된다.

 서천갯벌은 습지보호지역(습지보전법에 의한) 및 람사르습지(국제 환경협약)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11 : 57. 이후부터는 해변산책로를 따른다. 다사항에서 장포항까지 바닷가를 따라 멋진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지난 2009년 서천군이 연안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해놓은 명품 둘레길이다.

 다사항 근처의 독살’. 독살은 의 사투리인 과 사냥을 뜻하는 의 합성어로, 바다에 돌을 둥글게(또는 ‘V형으로) 쌓아 밀물 때 들어온 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 잡는 가장 원시적인 포획방법이다. 남해에서는 석방렴(石防簾)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아직도 많은 곳에서 이런 원시어업이 이루어지고 있단다. 특히 태안군에서는 30여 곳이나 행해지고 있다나?

 시선을 조금 옮기자 서해바다가 아득하다. 바다 건너로 보이는 섬은 개야도와 죽도가 아닐까 싶다.

 산책로는 돈 깨나 쏟아 부은 흔적이 역력했다. 생김새도 다양한 파고라나 의자는 물론이고, 특이한 조형물들까지 세워 탐방객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하지만 조성만 해 놓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듯, 무너지기 직전인 시설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하나 더. 최근에 철거(보수가 아닌)를 했는지 바다 쪽 안전펜스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소라껍데기 조형물. 저 안에 들어가면 파도소리가 들릴까? ‘바닷가 작은 집(저자 : 케빈 헹크스)’에서 할머니는 소라 껍데기는 누군가의 작은 집이었다고 손녀에게 일러준다. 그러자 소녀의 상상력은 주황색 둥그런 방이 있는 집, 하얗고 올록볼록한 집, 반짝이거나 빛바랜 집을 만들어냈고, 나중에는 그 안의 풍경까지로 발전한다. 소라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무슨 소리일까. 둥근 껍데기 속에 꼬마유령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

 12 : 06. 어떤 용도인지는 몰라도, 갯바위 지대에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가는 방파제도 만들어놓았다.

 방파제는 전망대로 변신해 있었다. 세 방향으로 툭 트이는 서해바다를 편하게 구경하라는 듯 돌의자까지 놓아두었다. 구호장비를 비치하고 사방에 금줄까지 둘러 안전을 확보했음은 물론이다.

 계속해서 해변산책로를 따른다. 이후부터는 장포리 해안을 앞에 두고 걷게 된다.

 12 : 10. 갯바위를 등받이 삼아 힐링하고 있는 저 조각상은 다사리 해안산책로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지 않나 싶다. 최고로 편한 자세로 서해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처가 산책로(갯바위로 도배된) 곳곳에 널려있다는 특징 말이다.

 힐링하는 조각상이 있던 곳. 혹자는 저곳을 다사곶이라 부르고 있었다.

 12 : 12. ‘다사곶 모퉁이를 돌자 주변 풍광이 확 바뀐다. 바닷가가 갯바위나 갯벌이 아닌 모래사장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오른쪽 사구(沙丘)에는 캠핑하기 딱 좋은 송림도 들어앉았다. 그래서일까? 누군가는 이곳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와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꼭 다시 찾아올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라나?

 이곳도 역시 멋진 산책로가 나있었다. 야자매트를 바닥에 깔아 모래가 신발 속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주는가 하면, 바닷가 비탈진 곳에는 해당화를 심어 꽃길로 탈바꿈시켰다. 해당화는 꽃 대신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그러니 제 철도 모르고 피어난 저 꽃은 본의 아니게 귀하신 몸이 된다.

 순비기나무도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통기성이 좋은 자갈밭이나 모래사장, 특히 바닷가에서 짠물을 뒤집어쓰고도 잘 자라니 당연하다 하겠다. 아무튼 순비기나무는 모래 위를 기어 다니면서 터전을 넓혀 방석을 깔아놓듯이 펼쳐나가므로 덩굴식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무가 분명하단다.

 해변 한가운데, 기다랗게 설치된 저 목책은 거친 파도를 잠재우기 위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저렇게 좋은 모래가 파도에 휩쓸려나가는 건 막아야하지 않겠는가.

 탐방로는 모래사장으로 내려서기도 한다. 질 좋은 모래사장을 걸어보라는 모양이다. 아무튼 모래사장은 걷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었다. 규사 성분을 띄었는지 발자국도 찍히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12 : 25. 이때 장포해안의 명물인 옵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장포리 곶()의 끄트머리에 갯바위 몇 개가 뾰쪽하니 솟아올랐다. 그게 군함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바위라고도 불린단다.

 바위의 생김새는 자못 빼어나다. 하지만 옵바위가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그 형태보다 바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몰 때문이라고 한다. 바위 위에다 떨어지는 해를 걸쳐놓기라도 할라치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명품 풍경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옵바위 주변은 조개를 잡는 탐방객들로 한가득이었다. 이 지역에서 많이 난다는 동죽이라도 잡나보다.

 옵바위를 실컷 구경했다면, 이제 서해랑길로 돌아갈 차례이다. 모래사장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 해변에는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포장마차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영업을 하지 않는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정표가 철새나그네길이 이곳으로 지나감을 알려준다.

 19 : 29. 다사리 해안산책로를 빠져나와 갯벌체험로(이정표 : 종점 4.5km/ 시점 11.4km)’로 다시 올라선다. 이어서 방조제를 건너 장포리로 넘어간다.

 방조제 아래 바닷가는 장포리 어민들의 포구를 겸하는가 보다. 선착장이나 물양장 등 포구다운 시설이 일절 없는데도, 격식을 갖춘 다사항보다도 더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육지 풍경도 볼만하다. 소유를 표시하는 알록달록한 깃발들로 무당집 같다.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간척지에는 대하양식장이 집단으로 들어서 있었다. 수많은 수차가 물살을 일으키는 풍경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12 : 33. 방조제를 건너자마자 ‘Sea Garden 펜션 앞에서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샛길(‘1 마을회관으로 연결된다)로 들어선다. 걷기 여행자들의 안전을 위한 배려로 보이는데, ‘갯벌체험로의 통행량이 적어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 같다. 이로 인해 한참이나 에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 : 36. 100m 남짓 걷다가 첫 삼거리(이정표 : 종점 4.1km/ 시점 11.8km)에서 왼쪽으로 간다. 이어서 조금 더 걸어 장포2로 들어간다. 참고로 서해와 접한 장포리(長浦里)’는 자연마을로 지리실과 장진개, 산적말 등이 있다. 이곳 ‘2 지리실이라고도 불리는데, 마을의 흙이 몹시 질퍽거린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마을을 빠져나와 농로를 따라간다. 나지막한 산자락과 농경지 사이로 길이 나있다.

 12 : 45. ‘장포1버스정류장에서 다시 갯벌체험로를 만났다. 하지만 탐방로는 도로로 올라서지 않은 채 방향을 틀어 장포1 마을로 들어간다.

 그렇다고 마을을 누비지는 않는다. 60m쯤 걷다가 첫 삼거리(이정표 : 종점 3km/ 시점 12.9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포성대교회쪽으로 간다.

 장포1리 앞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가 바닷가로 간다. 참고로 마을에는 포성대교회가 있었다. 이로보아 이곳에 장포리산성이 있었지 않나 싶다. 앞바다의 장진(長津)을 감시하고, 포루의 역할을 담당했다는데 지금은 남벽 일부만 남아있단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포성대(浦城臺)’가 되었다고 한다.

 13 : 56  13 : 03. 길은 또 다시 갯벌체험로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종점인 선도리갯벌체험장을 향해간다. 그렇다고 무작정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고개만 돌려도 이곳 비인해변의 최고 볼거리인 할미바위를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파도에 씻기고 씻긴 모습이 할머니를 닮아서일까?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 섬을 할미섬이라 불렀다. 할머니가 홀로 살다가 죽어 섬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단다. 하나 더. 할미섬은 낙조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할미섬 뒤로 넘어가는 불덩어리 같은 낙조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고 소문났다.(내 사진이 별로여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13 : 04. 할미섬이 만들어내는 멋진 풍광에 취해 있다 다시 길을 나선다. ‘갯벌체험로를 따라 북진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는 게 아닌가. 기상청은 오후 4시부터 2시간 동안 폭우가 쏟아질 것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 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저녁 무렵처럼 어둑해져 버린다.

 13 : 06.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데크로 만들어놓은 할미섬전망대가 나온다. 잡초가 무성한 전망대로 올라서니 할미섬이 가까운 바다에서 포즈를 취해준다. 할미섬은 밀물에는 바위 윗부분만 드러나고, 썰물에는 해안과 갯벌로 연결되는 갯바위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쌍도가 눈에 들어온다. 57코스가 끝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고개를 넘어온 서해랑길은 선도리에 바톤을 넘겨준다. ! 넘어오는 도중에 쌍도 창문가(雙島 昌文家)’라는 정체 모를 저택을 만나기도 했다. ‘창성할  글월 이니 어느 문학가의 집일지도 모르겠다. 하나 더. 이 부근 민가의 처마에서 소나기를 피하느라 5분쯤 쉬기도 했다.

 13 : 17. 선도리3리 버스정류장(이정표 : 종점 1.5km/ 시점 14.4km)에는 노거수 한 그루가 커다란 등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늘이 필요했던지 주민들이 나무 아래에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아무튼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방향을 꺾어 바닷가로 간다.

 13 : 21. 선도2리에 도착한 다음에는 비인해변의 해안길(갯벌체험로564번길)을 따라 북진한다. 비인해변은 갯벌에서 잡은 조개를 이용한 조개구이와 해물칼국수가 유명하다. 별미 중의 별미로 알려지는 칼국수 맛에 해변을 바라보며 먹는 분위기까지 곁들여지는 맛의 핫 플레이스로 알려진다.

 ! ‘당산바위를 깜빡 빠뜨릴 뻔했다. 비인해변의 남쪽 초입에 있는 갯바위인데, 바위틈에서 해송 세 그루가 자라고 있는 게 영락없는 분재다. ‘철모바위라고도 불리는데, 군인들이 쓰는 철모에 위장용 나뭇가지를 꽂아놓은 형상이라나? 아무튼 이곳은 아침 일출과 저녁 일몰 사진을 찍기에 좋은 장소로 알려진다.

 고개를 조금 돌리면 기다란 해변을 이룬 선도리갯벌체험장이 펼쳐진다. 그 한가운데 비인해변의 명물인 쌍도가 놓여있다. 두 개의 작은 섬은 물이 빠지면 하나의 섬이 됐다가 물이 차면 두 개의 섬이 된다. 70m 정도 떨어져 있는 두 섬은 둘이면서 하나인 부부를 닮았다. 선도리 쪽에서 보면 왼쪽 섬은 거북모양이고, 오른쪽 섬은 고래모양이란다.

 비인해변의 장점은 울창한 송림을 배후 숲으로 거느리고 있다는 점이다. 주민들은 그 숲에 야영장을 열었다. 그리고 청소비라며 소정의 이용료를 받는다.

 13 : 26. 비인해변은 여느 유명해변에 못지않게 잘 꾸며 놓았다. 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라 이곳저곳 금줄을 쳐놓았다. 뭔가 또 주민들의 혈세를 낭비했다는 지적이라도 받았던 모양이다. 공사만 해놓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서 말이다. 그렇다 해도 이것은 너무했다. 바닷가이니 여름철이 성수기일 텐데 하필이면 지금 보수공사를 하고 있단 말인가.

 이곳 역시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서천갯벌에 포함되어 있다. 서천 군민들이 개발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켜낸 소중한 자연유산이다.

 비인해변을 왼쪽에 끼고 북진한다. 비인해변은 길이 2.km에 폭이 700m인 광활한 해수욕장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커 썰물 때면 2km나 갯벌이 펼쳐진단다. 덕분에 해수욕과 갯벌 체험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단다.

 시선을 조금 비틀면 선도리갯벌체험장이 드넓게 펼쳐진다. 선도리는 원래 이름난 해수욕장이었다. 해변에 물막이용 방파제가 세워진 뒤 모래가 쓸려나가 백사장이 많이 줄었다. 하나 더. 비인해변의 갯벌은 모래가 섞인 모래갯벌이라 장화를 신지 않고도 걸을 수 있다.

 13 : 41. ‘선도리갯벌 글램핑장이란다. 숙소 말고도 바닷가에 광장과 야외무대를 만드는 등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선도리 갯벌체험마을이라는 입간판도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

 13 : 46. 선도리 갯벌체험장 입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끝난다. 앞바다의 쌍도로 연결되는 노둣길의 초입으로 보면 되겠다.

 쌍도는 섬으로 떨어지는 일몰 풍경이 아름다워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과 천석지기 부잣집 외동딸의 애틋한 사랑얘기가 전해지는 전설의 섬이기도 하다.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남녀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극단적 선택을 했고, 선도리 앞바다의 두 개의 작은 섬으로 우뚝 솟아났다나? 그러자 고래와 거북 모양을 닮은 두 개의 섬을 후대의 사람들이 쌍도(雙島)라고 불렀단다. 지자체에서 이런 관광 호재를 놓쳤을 리가 없다. 러브() 조형물을 세우고 전설까지 적어 넣었다.

 비인해변은 갯벌체험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갯벌이 하도 넓다보니 다녀오는 게 만만찮았던 모양이다. 트랙터를 개조해 체험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하긴 쌍도까지만 해도 거리가 300m나 되는데, 그 너머로도 한참이나 더 펼쳐지는 갯벌을 어떻게 걸어 다닐 수 있겠는가.

 서해랑길(서천 58코스) 안내도는 갯벌체험장 입구(검문소까지 지어놓았다) 뒤편에 세워놓았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3.76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아니 폭염경보까지 내린 날씨를 감안하면 무리하게 속도를 냈지 않나 싶다.

 카메라 앞에 선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웃는 얼굴은 타인의 마음도 열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과 표정은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에 무장해제 시킬 수 있으며, 병든 마음을 치유하는 놀라운 능력도 있다. 그런 집사람이 늘 함께 해주기에 난 언제나 행복하다.

 

서해랑길 56코스(장항도선장 입구 - 와석마을 노인회관)

 

여 행 일 : ‘24. 7. 13()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장항읍 및 마서면 일원

여행코스 : 장항도선장장항송림산림욕장솔리천교옥남1백사마을하소마을와석마을(거리/시간 : 14.2km, 실제는 15.88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6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장항 송림산림욕장과 매바위공원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장항도선장 입구(충남 서천군 장항읍 신창리)

서천-공주고속도로 동서천 IC에서 내려와 29번 국도를 타고 장항방면으로 달리다가 하구둑사거리에서 68번 지방도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장항읍에 이른다. 서해랑길(서천 56코스) 안내도는 장항도선장 입구, 육교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장항 도선장을 출발, 서천의 서쪽 해안을 걸어 송석리(마서면)’까지 가는 14.2km짜리 여정이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길을 산들바람까지 맞아가며 걸을 수 있는 멋진 구간으로, 서해바다의 작은 섬들이 그려내는 예쁜 풍경화는 덤이라 할 수 있다.

 10 : 02. ‘장산로(68번 지방도)’를 따라 서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가 담벼락은 홍보의 장이다. 타일 벽면을 화선지삼아 금강하굿둑 철새도래지, 춘장대해수욕장, 문헌서원, 희리산자연휴양림 등 서천팔경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 넣었다.

 10 : 12. ‘장항항(長項港)’은 스치듯 지나간다. 1938년 개항하여 장항공단의 배후시설로 활용되고 있는데, 이곳에도 뜬다리부두(浮棧橋)’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군산항처럼 일제가 농산물 침탈을 목적으로 만든 역사적 시설은 아닌 것 같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4차선의 장산로 왼쪽으로는 철로가 함께 간다. 장항역과 장항항·장항공단을 잇던 철로로 장항역이 새 역사로 이전하면서 열차 운행이 끊겼으나, 철로는 녹이 슨 채로 남아있었다. 열차 운행시간 안내판이나 차단기 등 옛 시설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

 10 : 23. 발아래로 천리길을 내달려온 금강이 거센 기세로 서해와 몸을 섞는다. 그 연안에 아담한 공원(안내판은 친수서설이라고 적었다)이 조성되어 있었다.

 뒤돌아본 장항항’.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꽤 크다. 이웃한 군산항과 연계하는 군장항 건설사업이 진행된 결과일 것이다.

 10 : 26. ‘LS메탈() 장항공장 앞을 지나간다. 우리에게 장항제련소(長項製鍊所)’로 더 익숙한 곳으로, 1936년 일제가 국내의 비철금속(··동 등) 수탈을 위해 세운 아픈 역사의 흔적이다.

 ‘LS메탈(이정표 : 종점 12.5km/ 시점 1.7km)’ 앞에서 도로를 벗어난다. 그리고 샛길인 화송길로 들어간다.

 10 : 28. ‘LS메탈 맞은편에는 후망산(後望山, 90.1m)’이 있다. ‘LS메탈의 거대한 굴뚝이 올라앉은 전망산과 마주보는 모양새인데, 그 산등성이에 장암진성(長巖鎭城)’이 들어앉아 있다.

 조선 중종 9(1514)에 쌓은 진성(鎭城)으로, 성벽은 해발 443m 사이의 산 구릉과 해수면에 임해 석축으로 만들어졌다. 둘레는 640m(동서 190m, 남북 100m).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남벽과 북벽에 각각 1개소의 문지가 있단다. 현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10 : 31. 68번 지방도(장산로)와 다시 만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잠시지만 장산로 101번길을 따라간다. 담양이나 곡성, 진안의 메타세쿼이아 길에는 못 미치지만 나름대로의 풍치를 자랑하는 멋진 구간이다.

 10 : 34. 널찍한 도로를 벗어나 들길(이정표 : 종점 11.9km/ 시점 2.3km)로 들어선다. 갈대가 무성한 습지 사이로 오솔길이 나있다.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는 옛날 해수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게 물길이 막히면서 자연스레 습지로 변했다. 습지 너머 전망산(前望山, 56m)’이 자신도 보아달라며 고개를 내민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인 장항제련소의 거대한 굴뚝과 함께이다.

 10 : 41. 불 꺼진 장항제련소의 굴뚝을 벗 삼아 걷기를 7. 장항송림산림욕장의 널따란 (4)주차장에 이른다.

 서천 송림마을의 솔바람 숲 1954년 장항농고 학생들(5·6) 2년생 묘목을 식재하면서 조성됐다고 한다. 바닷가 모래날림과 바람으로부터 장항농고와 주변 마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단다. 현재 70년생 곰솔(해송)  12,000본과 그 아래서 자라고 있는 맥문동 등 초화류가 서해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생태공간을 이룬다. 2019년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됐다.

 서천은 왜 ‘9을 고집하는 것일까? 다른 지자체들은 다들 팔경이라며 대표 볼거리 여덟 곳을 뽑는데도 말이다. 서천을 구경하고 구미당기는 ‘Good을 사가라는 홍보용 멘트인 ‘9()·9()·9()’이라면 몰라도 따로 사용할 경우에는 ‘8으로 통일하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오랜만에 서해랑길 고유의 제대로 된 이정표(종점 11.4km/ 시점 2.8km)를 만날 수 있었다. 시점 및 종점의 방향과 거리에 더해 근처 주요 기점까지 표시해 놓았다.

 솔숲으로 들어선다. 6만평에 가까운 숲은 어른의 허리통만큼이나 굵직굵직한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있다. 5km쯤 된다는 산책로는 그런 숲속을 사통팔달로 헤집는다. 마음 내키는 길을 골라잡아 반대편으로 가면 된다는 얘기다. 그러다보면 소나무의 피톤치드와 서해의 선선한 바람과 아름다움이 함께 느껴지며 심신은 저절로 힐링이 된다. 때라도 잘 맞추면 맥문동의 보랏빛 향기에 젖어볼 수도 있다나?

 10 : 49. 장항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른 장항 스카이워크’. 높이 15미터의 공중 산책로인 스카이워크는 서천의 펄과 바다와 녹음을 한데 아우르는 전망대다. 드넓게 펼쳐지는 서해바다와 서천갯벌 풍광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고 발아래에 울창한 송림 숲이 있어 힐링을 선사한다. 또한 백제와 일본, 신라와 당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벌인 동북아시아 최초의 국제전 역사 탐방도 겸할 수 있다.

 스카이워크는 15m 높이의 아찔한 하늘길이다. 피톤치드 가득한 소나무 숲을 발아래에 두고 걷는다. 시선은 서천 바다의 멋진 풍경을 마주하면서 말이다.

 하늘 길의 끄트머리에 이를 즈음 기벌포 해전 전망대라고 적힌 표지판과 맞닥뜨린다. 기벌포는 서천 남서쪽에 걸친 장항읍 일대의 옛 지명으로,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을 수호하던 관문이었다. 백제는 관문인 기벌포를 적군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했고, 결국에는 나라가 망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트린 신라와 당 연합군이 한반도 패권을 두고 반목해 벌인 최후의 해상 전투도 바로 여기서 펼쳐졌다.

 250m 길이 스카이워크의 끝은 전망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가도록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망원경까지 설치해 탐방객들의 조망을 도와준다.

 전망대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금강하구와 서해바다, 그리고 근대 산업중흥을 이끌었던 장항제련소까지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군산시가지와 새만금방조제도 희미하나마 조망할 수 있었다.

 시선을 비틀자 이번에는 작은 섬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유부도와 유자도, 그 오른쪽은 큰대죽섬과 작은대죽섬, 그리고 묵도일 것이다. 그밖에도 꽤 많은 섬들이 서해바다를 마치 돛단배라도 되는 양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11 : 03. 스카이워크에서 내려서면 이번에는 서천갯벌이 맞아준다. 멸종위기 철새 17종과 각종 저서동물 181종이 서식하는 자연 생태계의 보고이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2021년 전북 고창갯벌 등 3곳의 갯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참고로 서천갯벌 개발 대신 보전을 택해 지켜낸 소중한 자산이다. 매립과 개발이냐, 생태와 보전이냐의 갈림길에서 서천은 생태와 보전을 택했다. 고심 끝에 내린 판단이 옳았음을 유네스코가 증명해 준 셈이다.

 저 갯벌에는 동죽·맛조개·고동·소라·돌게 등 수많은 갯벌 생물이 서식한다고 했다. 조개갈퀴나 호미 등으로 표면을 걷어내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잡을 수 있어 아이들에게 더할 나위없는 즐거운 여름을 선사해 준단다. 갯벌에서 노닐고 있는 수많은 저 인파가 그 증거라 하겠다.

 바닷가에서 올려다본 스카이워크. 15m나 되는 허공에 매달려 있지만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었다. 강화유리처럼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소재로 바닥을 깔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11 : 06. 길은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소나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내놓은 산책로는 여간 고운 게 아니다. 보드라운 흙길(맨발로 걷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에다 방문객들이 소나무 숲에서 편안한 힐링 타임을 가질 수 있도록 벤치, 정자, 운동시설 등 각종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었다.

 장항송림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맥문동이다. 19(5 7500)의 소나무 숲에 600만 본을 식재,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그런 자랑거리를 지자체에서 놓칠 리가 없다. 맥문동에 대한 설명으로도 모자라 권혁춘 시인의 시비까지 세워놓았다. 매년 8월말에서 9월초에는 맥문동축제도 열린다고 했다.

 송림이 끝나갈 무렵, 잠시지만 해변을 따라 걷기도 한다. 그런데 갯벌을 두부 자르듯이 나눠가며 울타리처럼 쳐놓은 저 목책은 용도가 대체 뭘까?

 솔숲에는 캠핑장도 들어서 있었다. ‘솔바람캠핑장이라는데 작은 도서관도 눈에 띈다. 갯벌체험으로도 모자라 독서까지 즐길 수 있다니 이 아니 좋을 손가. 하지만 텐트가 듬성듬성 들어선 것이 입소문은 아직 덜 탄 모양이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서천의 갯벌은 멸종위기 철새 17종과 각종 저서동물 181종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그래선지 둘레길의 이름까지도 철새 나그네길이란다.

 11 : 19. 송림을 벗어나 장항산단로로 내려선다. 바닷가에 걸터앉은 송림 캠프에서 구수한 파전 냄새로 나그네를 홀리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초반부터 막걸리로 목을 축일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로를 따라 70m쯤 걷다가 왼쪽으로 난 골목(장항산단로11번길)로 들어선다. 이정표(종점 9.7km/ 시점 4.5km)가 길을 안내해 준다.

 소서(小暑)가 지났다지만 초복(初伏)은 이틀 뒤에나 우리를 찾아온다. 삼복더위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기상이변은 삼복보다도 더 높이 수은주를 끌어올렸고, 들녘의 고추는 저렇게 빨갛게 익어간다.

 11 : 24. 마을길을 지나 송림리의 북쪽 해안에 이른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송림리 곶()을 가로질러 왔다고 보면 되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솔리천 배수갑문을 만난다.

 ()의 끄트머리로도 길이 나있었다. 널따란 물양장까지 갖춘 선착장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3층의 갯골어울림센터(어민회관인 듯)가 서천군의 개발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솔리천이란다. 장항읍 창선리에서 발원해 송림리에서 서해로 합류되는 3.67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솔리천은 수만 마리의 도요새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금강하구에 위치한 유부도와 함께 도요새 서식의 핵심지역으로 꼽힌다. 멸종위기종인 저어새, 노랑부리백로의 서식처이기도 하다.

 11 : 32. 솔리천 방조제를 지나 옥남1(‘솔리마을일 것이다)로 들어섰다. 이어서 마을안길(옥남길)을 따라 북진한다. ! 이 마을에 장항 국가생태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시골인데도 여러 동의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솔리(率里)’는 옛날에 부자가 계속해서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이후부터는 마을길과 들길을 번갈아가며 걷는다. 축사와 비닐하우스 등 전형적인 시골풍경이 연이어 펼쳐지는 구간이다.

 녹음방초(綠陰芳草)의 계절. 그 푸름 속에서 빨갛고 노란 칸나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저런 칸나 꽃밭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넓이도 관상용이라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넓었다. 구근 채취를 목적으로 재배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칸나의 구근은 지혈·소종·항암·항염에 효능이 있다고 했다. 류마티스관절염·학질·산증·각기·부스럼 등의 치료제로도 쓰인단다.

 도깨비 가지도 연보라 빛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냈다. 청초한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으나, 실제는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식물로 농민들에게는 기피 대상이다.

 저 망고수박 밭은 이번 장마의 피해? 아니면 수확을 끝낸 뒤 남은 이삭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군침이 도는 풍경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따 먹을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이즈음 눈에 들어오는 건물 하나. 태양광 패널을 머리에 이고 있는데, 생김새가 자못 괴이하다. 마을에서 운영하고 있는 농·어촌체험 관련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들녘과 바닷가를 함께 끼고 있으니 체험장으로 이만한 곳도 없지 않겠는가.

 11 : 52. 옥남리에서 남전리로 넘어오자 특이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도로변에 주차장에서나 볼 법한 차량방지턱이 줄줄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55. 잠시 후 백사마을로 들어선다. 법정 동리인 남전리(南田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로, 서쪽 바닷가에 모래가 많다고 해서 백사장 또는 백사정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서해랑길에서 약간 빗겨나 있는 바닷가로 나가봤다. ‘백사장(白沙場)’이란 별칭까지 갖고 있다면 그만한 볼거리가 있지 않겠는가. 맞다. 이곳은 고려 말기의 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백사정(白沙亭, 지금은 터만 남아있단다)이란 정자를 짓고 안빈낙도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하얀 모래밭에 우뚝 솟은 정자라나?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해안은 하얀 모래 대신 시커먼 갯벌만 가득했다. 옛날 이곳을 찾은 선비들이 바닷가를 거닐며 글을 읽고 시를 지었다고 했는데, 저런 갯벌을 보고 시를 지을만한 흥취가 났을까 싶다.

 대신 갯벌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습지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데크 탐방로라도 만든다면 탐방객들을 유치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백사마을은 해안가와 맞닿은 나지막한 구릉지에 기대듯 들어서 있다. 서해랑길은 마을 뒤 구릉지(이정표 : 종점 6.4km/ 시점 7.8km)를 넘어간다. 바닷가로 길을 내는 게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12 : 05. 고개를 넘은 서해랑길은 자연스레 바닷가로 향한다. kakaomap는 이곳을 삼바골로 적고 있었다. 농경지로 개간된 골짜기라고 보면 되겠다.

 12 : 12. 그렇다고 무작정 진행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중간에 논두렁을 이용해 맞은편 산자락으로 들어붙어야하니까 말이다(해안길을 따로 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표지기(리본)을 잘 찾아가며 진행할 일이다.

 앞장불산의 능선은 임도를 따라 넘는다. 울창한 숲속으로 길이 나있어 오늘처럼 햇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에 제격인 구간이다.

 12 : 21. 능선을 넘으면 신창동(新艙洞)’이다. 법정 동리인 월포리(月浦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로 선창가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그래선지 바닷가를 따라 수산업체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월포선착장으로 내려서서 해안길을 따라 북진한다.

 이즈음 매바위공원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들쑥날쑥 하는 것이 리아스식 해안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12 : 27  12 : 49. 하릴없는 배들이 낮잠을 자고 있는 물양장(이정표 : 종점 5.1km/ 시점 9.1km)’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정자의 그늘에다 바다에서 냉장고 바람까지 불어오니 이만한 쉼터가 없었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간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느긋하게 쉬어갈 수 있었다.

 12 : 49. 2차선의 마서로를 따라 100m남짓 걷다가 왼쪽으로 나뉘는 소로(같은 마서로이지만 1차선)로 들어선다.

 12 : 51. ‘죽산배수갑문교를 건너면 커다란 저수지가 얼굴을 내민다. 오른쪽에는 대규모 태양광발전단지가 들어서 있다.

 염전 아니면 양식장이 있었을 법한 곳에 들어선 대규모 태양광발전소.

 12 : 58. 하소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이정표(종점 4.4km/ 시점 9.8km) 1km쯤 더 걸으면 매바위공원을 만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참고로 하소마을은 직진해야 만날 수 있다.

 13 : 01. ‘하소길을 만나자 이번에는 대하양식장이 길손을 맞는다.

 단지를 이루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데, 개개의 방죽마다 수차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13 : 07. 민가 몇이 듬성듬성 들어서있는 하소마을을 빠져나와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해안길을 따라 매바위공원으로 간다. ! ‘하소라는 지명은 지형이 소처럼 생긴 소매 아래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했다.

 13 : 12. 잠시 후 도착한 하소마을 선착장’.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간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56코스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인 매바위 공원이 왼쪽에 있기 때문이다.

 매바위란 공원 이름은 공원 한가운데 있는 집채만 한 저 갯바위에서 따온 것이다. 매를 닮아 그렇게 부른다는데, 둥근 바위의 형상에서는 매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매를 꼭 닮았던 이 바위는 어느 해인가 태풍으로 목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탐방로는 공원을 한 바퀴 빙 둘러 나있다. 공원은 이런 산책로 말고도 조형물과 구름다리, 정자, 나무 덱 등으로 잘 꾸며져 있다. 하지만 공원 이름을 적은 팻말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은 흠이라 하겠다. 차량용 내비게이션이나 포털사이트 전자지도로는 검색조차 되지 않는다. 지자체가 꾸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널리 알리는 것이란 걸 모르는 모양이다.

 공원은 조망의 명소다.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갯벌과 함께 까마득한 갯벌 가운데로 이어지는 길이 드러난다. 이 일대의 갯벌은 죽산리 어민들이 관리하는 바지락·가무락·동죽·굴 양식장이라고 한다.

 공원 앞 갯벌에는 칼바위, 먹섬, 한목 등의 이름을 가진 갯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그 뒤로 길게 늘어진 섬은 임가르매(가르마를 탄 것처럼 생겼다나?)’일 것이다. 하나 더. 이곳은 썰물 시간이 해지는 시간과 맞아떨어지는 날에 찾는 게 제일이라고 했다. 드넓은 갯벌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노을 풍경 한가운데로 들어가, 일몰과 겹치는 저 바위들을 배경으로 삼으면 인생 사진 몇 장쯤은 너끈히 건질 수 있단다.

 공원에는 매의 형상을 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없는 것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원을 조성한 취지를 감안했었더라면, 틀림없이 목이 떨어나가기 전의 형상으로 만들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13 : 24. 선착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해안길을 따라 북진한다. 길가에 줄지어 늘어선 선박들이 이색적으로 다가오는 구간이다. 바다에 있어야 할 배들이 하나같이 뭍으로 올라와있는 것이다. 주민들 말로는 금어기(禁漁期)’라서 발이 묶인 탓이라고 했다. 하나 더. 금어기가 해제되면 저 배들은 경운기에 이끌려 바다로 간다.

 뒤돌아 본 매바위 공원’. 선착장에서 갯벌로 나가는 길이 살짝 드러난다. 썰물 때의 뱃길이라고 보면 된다. 갯벌이 드러나 배를 띄울 수 없으니 경운기에 배를 싣고 갯벌 끝까지 가서 바다에 배를 띄우는 것이다.

 13 : 36. 그렇게 한참을 걷자 또 다른 선착장(이정표 : 종점 2.2km/ 시점 12km)이 나온다.

 아목섬(거위의 목처럼 생겼단다)’ 방향. 반짝이는 갯벌 한가운데로 잔돌이 깔린 길이 이어져 있다. 죽산리의 어민들은 바다가 멀리 물러나는 썰물 때는 경운기 뒤에 배를 싣고 이 길 끝까지 가서 바다에 배를 띄운다. 이게 또 이색적인 풍경으로 비쳐지면서 탐방객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킨다나? 맞다. 끝 간 데 없는 갯벌 위로 배를 싣고 바다로 가거나,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배를 싣고 나오는 경운기들의 행렬이 어디 그리 흔한 풍경이겠는가.

 선착장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숲속으로 들어간다. 녹슨 어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조금은 어수선한 풍경을 보여준다.

 13 : 41. 청해수산 앞에서 마서로783번길을 따라 하소마을로 간다. 죽산리에 속한 자연부락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죽산교회가 큼지막하게 들어서있다. 저 교회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이 하소마을, 왼쪽은 상소마을이라고 한다.

 13 : 44. 하소마을 못미처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농로를 탄다. 죽산리 들녘을 벗어나 송석리의 드넓은 들녘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13 : 54. 서해랑길은 동지산 마을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가 56코스 종점인 와석마을로 간다. 하지만 난 그보다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종점이 코앞인데 일부러 돌아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조상의 얼이 깃는 보호수라고 했다. 그래서 소중히 관리해오고 있단다. 그런데도 수령이 322년이라는 팽나무는 죽어 있었다.

 14 : 02. 송석리 와석마을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마을에 넓은 바위가 누워있다고 해서 눈돌로 불리다가 한자화되면서 와석이 되었다. 서해랑길(서천 57코스) 안내도는 마을회관(눈돌노인회관) 맞은편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5.88km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어느 현인은 친구를 일러, 힘들 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내 말을 편견 없이 끝까지 들어주고, 외롭고 쓸쓸할 때 나의 허전함을 채워주며, 내가 잘못할 땐 뼈아픈 충고도 가리지 않는, 늘 따뜻한 눈길로 내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집사람은 내게 둘도 없는 친구가 분명하다. 더불어 그런 친구를 둔 나는 분명 성공한 인생이다.

 

서해랑길 55코스(진포 해양테마공원-장항도선장 입구)

 

여 행 일 : ‘24. 6. 29()

소 재 지 : 전북 군산시 장미동·경암동·내흥동 및 충남 서천군 마서면·장항읍 일원

여행코스 : 진포해양공원서래포구경암동 철길마을진포 시비공원금강하구언김인전공원평화공원장항도선장(거리/시간 : 14.9km, 실제는 15.8km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5코스를 걷는다. 5로 이루어진 김제·군산 구간(51-55코스)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금강 하구역의 남·북쪽 연안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전북특별자치도(군산시)에서 충청남도(서천군)로 넘어가면서 진포해양태마공원과 서래포구, 경암동 철길마을, 진포시비공원, 김인전공원 등 주요 볼거리들을 차례로 만난다. 난이도는 별이 하나(전체 5)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진포 해양테마공원(전북 군산시 장미동)

서천-공주고속도로 동서천 IC에서 내려와 29번 국도를 타고 장항방면으로 달리다가 원수교차로에서 4번 국도(군산방면), 동백대교를 건너자마자 21번 국도(시청방면)로 옮긴 다음 내항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곧이어 해양테마공원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군산 55코스) 안내도는 2 부잔교 앞에 설치되어 있다.

 진포 해양테마공원을 출발, 금강 하구역의 남·북쪽 연안을 걸어 장항 도선장에 이르는 14.9km짜리 여정이다. 오르내림이 일절 없는데다, 산들바람까지 맞아가며 걸을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강 건너로 펼쳐지는 예쁜 풍경화는 덤이라 할 수 있다.

 10 : 10. 내항 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곳은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인 진포대첩의 역사적 현장이다.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50척의 배로 왜선 500척을 이곳에서 물리쳤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선지 해양테마공원을 조성하고 육··공군의 퇴역 군장비 13 16대를 전시하고 있었다.

 1번 부잔교(浮棧橋, 뜬다리부두). 부잔교는 밀물 때 다리가 수면에 떠오르고 썰물 때는 수면만큼 내려가는 수위에 따라 다리의 높이가 자동 조절되는 선박 접안시설물이다. 3t급 배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고 이 다리를 통해 쌀 등이 일본으로 반출됐었다. 일제강점기 4기였으나 지금은 3기만 남아 있다.

 4200 t급 위봉함(676)은 아예 관람시설로 꾸몄다. 지하 2, 지상 4층의 거대한 선체 안에 병사들의 생활상을 그려 볼 수 있는 각종 용품들을 전시 재현하는 등 체험 위주의 전시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창고도 헐지 않은 채로 그냥 놓아두었다. 아니 안내판과 함께 안중근 의사가 쓴 大韓國人이라는 글씨를 적어 넣어 일제 침탈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게 해준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WBA 밴텀급타이틀전에서 챔피언에 오른 홍수환씨가 경기 직후 어머니와의 통화 때 외쳤던 일성이다. 하지만 군산시에서는 동향 출신의 복서 김득구가 하고 싶었던 말로 표현했다. 1982년 라스베이거스의 시저스팰리스 호텔에서 열린 레이 맨시니와의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KO당하면서 숨을 거둔 비운의 복서이다.

 10 : 21. ‘째보선창(군산 내항)’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선지 그 어디서도 어항의 모양새가 그려지지 않는다. 참고로 째보선창은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 됐고,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서도 일제가 이곳을 통해 쌀을 수탈해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째보는 언청이를 이르는 우리말이다. 와이(Y)자로 살짝 째진 강언덕에 석축을 쌓아 조성한 포구가 언청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이곳에 힘센 째보가 살았는데 부둣가에서 노점 등에게 자릿세를 받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째보 객주가 사는 선창이라는 것이다.

 군산시가 운영하는 군산 비어포트는 맥주 마니아들 사이에는 핫 플레이스로 소문이 자자하다. 시는 째보선창에 있는 옛 수협어판장을 개조해 2021년 수제맥주 공동양조장 및 체험판매장으로 문을 열었다. 아울러 옥구 들녘에 맥주보리 전용 재배단지를 조성하고, 수제맥주에 최적화된 품종(광맥)을 재배했다. ‘보리 재배-맥아 가공-맥주 양조-판매 등 수제맥주 일괄 생산·판매체계를 갖춘 것이다. 지난 주말 54코스 때 만났던 ‘2024 군산 수제맥주&블루스 페스티벌도 그런 일환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어항으로 개발된 째보선창은 일제강점기 번영을 누렸고, 해방 이후에는 동부어판장이 그 명성을 이어왔다. 하지만 근해어업 환경이 바뀌면서 그동안 침체해왔다. 이를 고민하던 군산시가 2018년부터 이 일대에서 째보스토리1899’라는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했단다. 군산항이 문을 연 1899년부터의 역사를 담자는 뜻이라고 한다.

 10 : 26. ‘해망로(21번 국도)’로 빠져나와 왼쪽으로 간다.

 이때 몽깃돌 길을 걸어보자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몽깃돌이란 밀물과 썰물 때 배가 밀려나가지 않도록 배꼬리에 다는 돌을 말한다. 몽깃돌을 매단 배들로 넘쳐나던 째보선창이, 지금은 폐선이 나뒹구는 생기 잃은 공간으로 변해버렸단다. 그러면서 잠자던 어선이 몽깃돌을 걷어 올리고 다시 바다로 나가듯, 몽깃돌길을 걸어보자는 것이다. 그게 바닷길이 아닌 어촌의 골목길이긴 하지만...

 군산 시간여행 마을이란다. 옆에는 군산시간여행 1930´s’란 문구도 보인다. 옛 도심의 활성화에 고심하던 군산시는 2018년부터 이 일대에서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해왔다고 한다. 그 사업이 만들어놓은 모던 타임즈 투어를 해보라는 모양이다.

 10 : 29. 경포천의 서래교 입구 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은 횡단보도를 건너 해망로를 따라간다.

 10 : 31. 몇 걸음 더 걷다가 이번에는 왼쪽으로 난 골목(서래5)으로 들어간다. 또 다른 근대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옛 풍물을 담은 저 벽화가 군산 시간여행 마을에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만신집도 시간여행에서 만나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가 보다.

 저 이발관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을까? 간판에 전화번호까지 내걸었지만 내부는 불이 꺼져있었다.

 도시재생사업이 만든 변신? 철판 울타리가 중동 지역을 소개하는 홍보의 장으로 바뀌었다. ‘중동(仲洞)’ 1980년대까지 동부어판장의 배후 지역이었다. 신영동에서 금암동 째보선창까지 이어지는 어업관련 및 상거래 지역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내항의 기능약화로 어업관련시설은 사라지고 공설시장 배후지역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고 있단다.

 서래포구 마을도 중동의 행정구역 안에 들어있다는 얘기겠지? 맞다. 서래포구(경포)는 지금의 중동로터리 부근이었다. ‘슬애포구로도 불리는데 슬애란 서래의 군산식 발음으로 서울로 가는 포구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걸 한자화하면서 경포(京浦)’가 되었다.

 서래포구 상인 벽화. 조선 후기, 농업생산력이 높아지고 수공업 생산이 다양해지면서 상품 유통이 활성화되었고, 더불어 서래포구와 서래장터도 수공업자와 상인들의 무대가 되었을 것이다. 개화기의 집배원(당시는 체전부라고 불렀다)과 어머니(모성애를 물씬 풍기고 있는)의 벽화도 눈에 띈다.

 10 : 34. 벽화와 사진 등의 게시가 끝나는 서래5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서래안2로 들어간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당산제당(堂山祭堂)’이 맞는다. 중동당제는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군산 유일의 동제(洞祭), 주민의 안녕과 복을 축원하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해오고 있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농토는 대부분 주택단지가 되었으나, 어업은 지금도 주민들의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가 조형물이 서래포구에 들어섰음을 알린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와 죽성포(째보선창)가 있었다. 개항(1899) 전후만 해도 군산의 민간무역은 경포(서래장터)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국권피탈(1910) 이후 일제가 장재시장을 개장하고 죽성포(째보선창)를 근대식 어항으로 조성하면서 경포는 장시와 포구 기능을 죽성포로 넘겨주게 된다.

 경포천과 서해안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서래포구는 오랫동안 뱃길의 요지로 존재해왔었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근해어업 환경의 변화를 피해가지는 못했나 보다. 노후화된 포구는 활력을 잃었고, 선착장에는 꼬맹이 어선 십여 척이 쉬고 있을 따름이다.

 10 : 40. 카페와 식당들이 여럿 늘어선 포구길을 지나 경포천을 건넌다. 하나 더. 옛날 이 거리는 간판도 없는 오두막 분위기의 대폿집(선술집)이 즐비했단다. 허술한 목로주점으로 지게꾼과 구루마꾼들은 막걸리 한 사발로 하루의 고단함을 달랬다나?

 잠시 후 군산천연가스발전소 앞을 지나는데, 발전소(서부발전)에서 세워놓은 시설물 몇 개가 눈길을 끌게 만든다. 풍력발전시설과 태양광발전시설을 한 몸에 품었으니 소형이지만 복합발전소라고 불러야할지도 모르겠다.

 10 : 46. ‘진포사거리에 이르러 횡단보도를 연이어 건넌다. ‘구암3.1 진포로 자 모양으로 가로지른다.

 경암동 철길마을로 진입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철길을 따라 걸으며 옛 풍경을 감상한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군산 원도심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로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어 군산 시간여행 마을이라 부른다. 이곳 경암동 철길마을도 그중 하나다.

 나로서는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가깝게는 2년 전 이맘때쯤 찾아왔었다. 대형마트 건너편,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그 뒷골목은 지금도 현란한 간판과 호객행위를 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가게의 모양새도 예전과 똑 같았다.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상품은 거의 없고, 그저 기억의 저편에서나 나올 법한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골목은 옛날 군산역과 북선제지 공장만 오가는 화물기차를 위한 철도였다. 그 당시 철길 주변은 논밭이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철길 바로 옆에 오두막집을 지었고, 선로에서 겨우 1미터도 안 되는 거리만큼 떨어져 지은 무허가 집들이 늘어나 동네가 되었다. 2008년 기차는 운행을 중단했다. 하지만 철길마을 사람들은 기차가 사라진 철길 옆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옛날 교복으로 갈아입고 철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골목은 가득 찼다. 그런데 너나없이 불량스러운 폼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학창시절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불량학생에 대한 동경일지도 모르겠다.

 골목은 옛 풍경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가게들도 옛날 모습 그대로이다. 특히 열차와 당시 사람들의 풍경을 묘사한 모형들이 더욱 더 정감을 느끼게 해준다.

 복원된 군산역. 기존의 철길에 옛것을 보존하려는 저런 노력들이 더해지면서, 철길마을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원하는 이들의 성지가 된다. 그리고 드라마 고맙습니다와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의 주인공들이 철길마을의 선로 위를 걸었고,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철길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0 : 57. 연안사거리로 빠져나와 이번에는 조촌로를 따라 금강으로 간다. 6분 후쯤 만나게 되는 강변삼거리에서는 강변로로 옮겨 동진한다. 6차선 도로에 통행량까지 많으나 도로 가장자리에 보도가 따로 나있어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11 : 04. 하지만 강변삼거리에서 서해랑길을 벗어나 샛길(외산4)로 들어갔다. ‘구암역사공원을 들러보기 위해서이다. 역사공원이 들어선 구암산(龜岩山, 34m)’은 한강이남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특히 구한말 선교사들이 정착하면서 세워진 구암교회는 군산 3.5만세운동의 발화지점이다.

▼ 아쉽게도 그런 내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역사공원이 위치한 구암산까지의 거리가 만만찮은데다, 공원을 둘러본 다음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결국 군산 3.5운동의 진원지라는 구암교회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2018년에 건축된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에 볼거리가 제법 많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11 : 13. 다시 강변로로 빠져나와 이번에는 강변로를 따라간다. 금강 물길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가는 멋진 구간이다.

 11 : 16. ‘구암천(주민들의 귀띔이었으나 맞는지는 모르겠다)’을 건너자마자 강변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강변에 잇대어 내놓은 산책로를 따라 금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즈음 금강의 하구역이 함께한다. 발아래로 천리길을 내달려온 금강이 거센 기세로 서해와 몸을 섞고, 강 건너 충남 서천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산책로와 강변로 사이의 공간은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구불길 안내석도 눈에 띈다. 금강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펼쳐가는 비단강길(공주산군산역)’이 이곳을 지나간다면서, 강물이 흐른 세월만큼이나 전설과 역사, 자연과 생태를 두둑이 품은 구간의 특징을 알려준다.

 11 : 41. 그 공간에는 진포 시비공원(鎭浦詩碑公園)’도 들어서 있었다. 국내외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비석에 새겨 전시해놓은 공원으로, 서해랑길이나 구불길을 여행하는 도보 여행자들의 휴식의 공간이자 군산 시민의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시비는 공원 곳곳에 들어서있었다. 1.5-2.5m 크기의 자연석에 신석정(부안), 이병훈(군산), 고은(군산) 등 전북 출신을 포함한 국내 시인 14명과 외국 시인 6명의 작품을 새겨 넣었다. 평소에도 좋아하는 시들이라서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가다 그만두기로 했다. 42점이나 되는 시를 일일이 음미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序詩를 올려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인가. 30년 가까운 공직생활, 아니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늘 되새기던 금과옥조(金科玉條).

 워즈워드는 저 시보다도 그의 생가가 더 생각난다. 몇 번의 영국출장. 한번은 워드워즈의 생가를 둘러보고파 글라스미어지방의 원더미어 호수를 찾았었다. 그리고 내셔널 트러스트라는 단체에서 18세기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던 워즈워드 생가를 만났다. 하지만 내 가슴에는 하룻밤을 묵으며 거닐었던 원더미어 호숫가가 더 많이 저장되어 있다. 호젓함에 가슴을 떨며 울먹이던...

 시비공원을 지나자 등치를 한껏 키운 금강 하굿둑이 성큼 다가온다. 전북을 떠날 때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46. ‘금강체육공원을 지난다. 축구장은 하나인데 야구장은 정규 규격 말도도 자그맣지만 두어 개나 더 갖고 있다. 군산 시민들이 바라보는 야구의 위상을 실감케 해주는 풍경이라 하겠다.

 11 : 52. 야구장 끄트머리에서 습지에 발이 묶인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군산 장애인체육관이 커다란 몸집을 드러낸다. 장애인체육관과 발달장애인 평생학습관으로 꾸며졌는데, 장애인들의 신체 기능회복이나 재활뿐 만아니라 체계적 평생교육을 통한 통합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단다.

 산책로 좌우로는 거대한 습지가 펼쳐진다. 연안(沿岸)의 습지는 생태계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습지 안에 탐방로를 만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1 : 57. 잠시 후 도착한 금강 시민공원에는 진포대첩기념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이용한 함포로 왜구 500여척을 무찌른 최무선(崔茂宣, 1330-1395)의 진포대첩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다. 1999년 개항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것인데 돛을 상징하는 큰 화강암 날개 모양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두 조형물이 만나는 가장 높은 곳에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쳐부순 화포가 하늘을 향해 화구를 겨누고 있다.

 진포대첩사적비도 눈에 띈다. 진포대첩이란 고려말 군산에서 있었던 전투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화포를 사용하여 적을 물리친 전투를 말한다. 우왕 6 8월 왜선 500여척이 진포에 침입하였다. 이때 침입한 왜구는 최소 25,000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이때 나세, 심덕부, 최무선 등이 최무선이 설계한 80여척의 병선과 역시 최무선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화약병기인 화통, 화포를 갖추고 적을 소탕했다.

 12 : 06. ‘강변로로 빠져나와 금강시민공원을 왼쪽에 끼고 돈다. 그러자 금강 하굿둑이 길손을 맞는다. 길이 401km의 금강 하구를 막아 건설한 둑으로, 담수된 물은 전북 및 충남 일원에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한다. 금강 주변지역의 홍수 조절도 주요 기능 중 하나다.

 도크(dock)로 여겨지는 시설이 있는 걸 보면 작은 선박의 출입도 가능한 모양이다. 밀물 때 하부갑문을 열어 배를 도크 안으로 들이고, 하부갑문을 닫은 다음 상부갑문을 서서히 개방해서 수위를 맞추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1,841m의 제방은 충남과 전북을 잇는 교량역할을 한다. 배수갑문만도 20(714m)에 이른다.

 둑에는 도로 말고도 철길이 지나가고 있었다. ‘장항선을 연장시킨 이 철길은 군산을 지나 익산에서 전라선과 합쳐진다.

 둑길은 가고 또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하긴 도에서 또 다른 도로 넘어가는 여정이 어디 그리 수월하겠는가.

 12 : 29. 하굿둑 북단에는 금강하구둑관광지가 들어서 있었다. 사계절썰매장과 바이킹, 회전목마 등 놀이시설이 있는 드림랜드와 게임월드, 자동차극장으로 이루어졌는데, 식당과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어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에게 안성맞춤형 관광지로 꼽힌다.

 관광지 맞은편은 김인전 공원이다. 이 고장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인전(金仁全, 1876-1923)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으로, 선생의 흉상과 건립기비,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서천(舒川)에서 태어난 김인전 선생은 1914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교육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학교를 세우는가 하면, 영명학교에 재직 중이던 1919년에는 군산의 ‘3.1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1922년 임시의정원 의장에 올랐고, 독립운동의 활성에 온 힘을 쏟으며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1923 5월 과로로 사망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에는 중국에서 선생의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초입의 관광안내도. 서천군 관광은 ‘9()·9()·9()’으로 집약된다. 서천을 대표하는 볼거리와 먹거리, 그리고 살거리를 각각 9개씩 선정해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서천을 구경하고 구미당기는 ‘Good을 사가라는 것이다.

 공원 안쪽에는 국민여가캠핑장이 들어서 있었다. 금강을 뜨락 삼았으니 입지조건은 좋은 편, 하지만 물가인데도 물을 접할 수 없다는 점은 흠으로 작용한다. 그래선지 잔디밭에 이동식 물놀이장을 만들어놓았다.

 탐방로는 강변을 따라 간다. 이때 만나게 되는 캠핑사이트는 쉼터 겸 전망대로 안성맞춤이었다. 강둑에 테라스처럼 걸쳐놓은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기 때문이다.

 발아래서 금강이 거센 기세로 서해와 몸을 섞는다. 그 너머로는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는 군산시가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12 : 38. 잠시 후 장산로로 올라서서 55코스의 종점인 장항도선장을 향해 간다. 이때 고려 해도원수 나세 진포대첩비 안내판이 눈에 띈다. 나세(羅世, 1320~1397)는 원나라에서 온 귀화인으로, 1380년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진포해전에 참여했고, 심덕부·최무선 등과 함께 왜구를 쳐부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같은 해전이지만 최무선의 공적을 기리는 군산과는 달리 이곳 서천에서는 나세의 공적을 더 크게 보는 모양이다.

 도로 건너는 당선리(堂仙里)’. 마을 뒤에 당산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인데, 마을 앞에 정자에 산책로까지 갖춘 소담스런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장산로를 따라간다. 당선리를 지나자 금강이 몸집을 한껏 부풀렸다. 강인 듯, 바다인 듯, 구분이 안 되게 너른 연안은 이제 갯벌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그 갯벌에 누운 채 물이 차오르기만을 기다리는 어선도 여러 척 눈에 띈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금강하굿둑이 성큼 다가온다. 하굿둑 뒤로 보이는 산. 즉 기상관측소의 레이더가 걸터앉은 봉우리는 오성산일 것이다. 소설 탁류의 저자 채만식이 임피팔경(臨陂八景)’ 중 하나인 오성낙조(五聖落潮)’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며 조망을 즐겼다는 산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래선지 나라꽃 무궁화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무궁화(無窮花) 끝없이 핀다는 꽃의 특성에서 유래했다. 100일 동안 매일 새 꽃이 줄기차게 피어나는데, 여기에 풍족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고자하는 우리 민족의 바람을 더했다고 한다.

 음식문화 특화거리 조형물. 머리글 삼아 적어놓은 라온제나가 눈길을 끈다. ‘라온제나 기쁜 나, 즐거운 우리를 뜻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금강 풍경을 감상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다보면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즐겁고 기쁜 하루가 될 것이라는 암시가 아닐까 싶다.

 조형물의 예고대로 큼지막한 음식점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하지만 대부분이 해산물 요리 전문점이라서 메뉴의 선택은 자유롭지 못해 보였다.

 맛있는 음식거리로 입소문이라도 탔는지 음식점의 주차장마다 차량들로 가득 찼다.

 ! ‘백악관이 망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선거로 시끄러운 미국인데, 백악관까지 저렇게 문을 닫아버렸으니 차기 당선자는 어디로 들어갈까?

 12 : 58. 평화공원. 금강과 도로(장산로) 사이는 이렇듯 녹지 공간으로 놓아두었다. 가끔은 이런 작은 공원들을 들어앉혔음은 물론이다.

 공원 안에는 월남참전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운 서천지역 참전유공자들의 위훈과 충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차도와 보도가 너무 가까워진 곳에는 이렇듯 또 하나의 길을 내놓기도 했다.

 녹지 공간 곳곳에는 조형물을 배치했다. 누가 만들었고, 또 무엇을 나타내고 싶었는지를 알려주는 안내판 하나쯤 세워놓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풍경이다.

 13 : 01. ‘송내천을 건너 장항읍으로 들어선다. 갈대만이 무성했던 긴 목에 시가지가 들어섰다고 해서 장항읍(長項邑)’이란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 푸름으로 물든 강변의 갈대밭그 뒤에는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는 군산시가지가 길게 늘어서있다그게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서래야는 서천군 농산물의 대표 브랜드이다. ‘넓은 들에 비옥한 토지라는 의미로 서천군에서 생산되는 각종 농산물 브랜드로 사용되고 있다. 한자(舒來野)로 풀면 서천에서 온 좋은 농산물이 된다나? 엄격한 품질관리를 거친 농산물만 출하시키겠다는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13 : 33. 서해랑길은 동백대교의 아래를 지난다. 55코스를 동백대교 남단 근처에서 시작했으니, 다리 남단에서 시작해 북단으로 온 셈이다. 지척에 두고도 자 모양으로 멀리 에돌아왔다고 보면 되겠다.

 다리 근처에는 동백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세멀부락이라는 표지석도 눈에 띈다. 원수리(元水里)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세멀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을 뒤로 보이는 저 산은 왕제산이 분명하다. 옛날 백제왕이 내려와서 제사를 지냈다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산이다.

 13 : 39. 동백대교를 지나면서 장항시가지로 진입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장항중학교 앞을 지나간다.

 이즈음 만나게 되는 방음벽. 축대를 홍보의 장으로 삼았다. 마량리 동백나무숲 등 서천의 8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아까 서천군으로 들어오면서 눈여겨봤던 관광안내판과 다른 게 아닌가. 2018년 서천군은 문화관광 콘텐츠를 구축하면서 ‘9()·9()·9()’를 선정했다. 하지만 기존의 서천팔경에 하나를 더하지 않고, 두 곳은 바꾸기까지 했다. 둘 모두 군에서 추진한 결과물이니 관광객들을 위해서라도 조정이 이루어졌어야 하지 않나 싶다.

 13 : 38. ‘장항항(長項港) 물양장은 서해랑길에서 살짝 비켜나있었다. 하지만 꼴갑축제까지 열리는 명소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운이라도 좋아 갓 잡아 올린 꼴뚜기나 갑오징어 회라도 맛볼지 누가 알겠는가.

 길 건너 담벼락의 벽화가 눈길을 끈다. 다가가보니 늙은 노동자의 노래 가사가 적혀있다. 노인의 구부정한 등이 세월의 무게를 겨우 버티고 있는 듯한데, 자존심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아 보인다. 삶의 무게를 지팡이에 의존하고 있지만 손주 손목잡고 금강산 구경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나? 내 또래의 늙은이들에게 딱 어울리는 가사가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김민기가 작사·작곡하고 양희은이 불렀던 늙은 군인의 노래와는 어떤 관계지?

 13 : 54. 잠시 후 도선장 입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도선장은 이제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추억 속의 공간은 직장인과 통학생으로 항상 붐볐다. 지역 주민들의 발이었던 도선은 황포돛배를 시작으로 경남환·경남호·군산호·서천호·금강호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루 이용객이 수천에서 수만을 헤아리는 시절도 있었으나 2009년 운항이 중단되어 오늘에 이른다.

 서해랑길(서천 56코스) 안내도는 육교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아래 사진은 출발지에서 찍은 것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50분을 걸었다. 앱이 15.8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이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내부 관람시설이 없었다는 얘기도 된다.

서해랑길 54코스(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진포 해양테마공원)

 

여 행 일 : ‘24. 6. 22()

소 재 지 : 전북 군산시 옥산면·지곡동·나운동·송풍동·월명동·장미동 일원

여행코스 : 외당마을 버스정류장은파 호수공원월명호수삼일기념탑월명동사무소군산근대화거리진포해양테마공원(거리/시간 : 11.6km, 실제는 14.42km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4코스를 걷는다. 5로 이루어진 김제·군산 구간(51-55코스)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군산시가지를 관통해 금강 하류에 있는 군산 내항까지 가는 여정이다. 은파호수공원과 월명공원, 근대화거리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난이도는 별이 3(5개 가운데)로 분류된다. 중간에 두어 번 산길을 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들머리는 외당마을 버스정류장(군산시 옥산면 당북리)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새만금방면으로 달리다가 당북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곧이어 지곡지구 아파트단지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군산 54코스) 안내도는 단지 맞은편 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옆에 설치되어 있다.

 외당마을 버스정류장을 출발, 군산 시내를 횡단해 군산 내항에 이르는 11.6km짜리 여정이다. 중간에 산길을 오르내린다고는 하지만, 별 어려움이 없는데도 거리가 무척 짧은 편이다. 막바지에서 만나게 되는 근대화거리의 각종 전시관들을 빠짐없이 돌아보면서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마음을 다잡아보라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10 : 23.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어서 아파트단지의 사잇길(외당원길)을 따라간다. 왼편은 옥산면이나 반면에 오른편은 지곡동이니 면계(面界)를 따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10 : 27. 아파트단지 끄트머리(숲속유치원 앞)에서 나지막한 언덕을 넘는다. 1차선 도로인데도 오가는 차량이 많아 안전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10 : 37. 고개를 넘자마자 은파호수공원이 맞는다. 입구의 서해랑길 이정표(물빛다리 2.2km/ 외당마을정류장 1.3km)’는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은파호수공원 안내도를 먼저 살펴보면 어떨까?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참고로 은파호수의 본래 이름은 미제지(米堤池)’이다. 우리말로 풀면 쌀뭍방죽이 된다. 쌀이 많이 생산되도록 주변 들녘에 물을 대주는 방죽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우리 부부는 오른쪽(주차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금은 에돌아가겠지만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보기 위해서이다. 아니, ·종점까지의 거리표시 하나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는 이정표 자체를 믿지 못했다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다.

 10 : 40. 몇 걸음 더 걸으면 만나는 정자. 이곳에서는 왼쪽 습지공원으로 가볼 것을 권한다. 습지 생태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건너편에서 서해랑길을 다시 만난다. 그런 다음 호수에 놓인 저 다리를 건너 이쪽으로 되돌아오면 된다. 하나 더. 은파호수는 햇빛이 내려쬘 때가 제격이라고 했다. 햇살이 호수 위에 하얗게 부서지면 은파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리는 비를 멈추게야 할 수 없는 노릇. 햇살 대신 빗줄기가 만들어내는 파랑에 만족하면서 걷기로 했다.

 다리는 호수를 가로지른다. 그렇다고 곧장 건너지는 않는다. 중간에 좌우로 날개를 달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호수를 느껴볼 수 있도록 했다. 그건 그렇고 경관 좋은 곳에서는 빗줄기도 문제가 되지 않는가 보다. 작은 우산 하나 쓰고 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감상하며 걷다 보면 호수의 낭만이 더욱 짙어진다.

 10 : 45. 이후부터는 오른쪽 호숫가를 따라 북진한다. 리아스식 호안을 따라 널찍하니 산책로를 내놓았다. 바닥에는 야자매트까지 깔아 질퍽거릴 염려도 없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푹 빠져보라는 모양이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은파호수가 드넓게 펼쳐진다. 1931년 일본인들이 금강 하구의 습지와 미등록 농지 등을 탈취하여 불이농장(不二農場)을 만들고 수리조합을 구성하면서 축조했단다. 아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미제지(米堤池)’가 나오니 생성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그걸 일본인들이 증축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부근에 미원동(米原洞미성동(米星洞미장동(米場洞미룡동(米龍洞) 등 미()자가 들어 있는 지명이 많을 정도로 쌀 생산에 큰 도움을 준 저수지였음은 확실하다.

 걷다보면 지명을 알리는 안내판을 심심찮게 만난다. ‘개정지는 야외 부엌(정지)을 말한단다. 사창에 벼와 쌀의 입출고가 빈번하면 일손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고, 늦가을에서 이른 봄까지 개정지를 마련해 일꾼들의 밥을 짓던 곳이라나? 다른 안내판에서는 용처(龍處, 방죽의 水源)와 사창골(社倉을 두고 방아를 찧어가던 곳)에 대한 내용도 엿볼 수 있다.

 호수의 면적 1.72. 크지만 그렇다고 거대하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호안 길이는 10.2km나 된단다. 그만큼 굴곡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산책로는 그런 굴곡들을 다 이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가끔은 이렇게 허리를 무찌르다시피 지나기도 한다.

 그러니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굴곡으로 내려설 것은 당연. 이렇듯 인공호수는 리아스식 호안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물을 가두면서 수면이 높아지고, 산봉우리와 산등성이가 물에 잠기면서 섬이나 곶으로 변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그걸 라 하는데, 방죽 둘레에 굽은 귀가 많다고 해서 아흔아홉 귀 방죽라 부르기도 했단다. 옛날 한 아기장수가 미제방죽을 서울 터로 만들려고 100귀로 만들면 밤에 한 귀가 무너지곤 해서 도로 아흔아홉 귀가 돼버려 끝내 실패하고 울면서 떠났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그만큼 방죽에 굴곡이 많고, 지형을 따라 보여주는 경관도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물위에는 연 잎이 무리지어 떠 있었다. 여름마다 백련, 수련, 노랑어리연이 만개한다는 연꽃자생지일지도 모르겠다.

 11 : 07. 요것조것 눈에 담으며 걷다보면 캐노피(canopy)가 쳐진 광장에 이른다. ‘물빛다리 동단에 조성해놓은 바닥분수이다. 하지만 장마철이라선지 물은 내뿜고 있지 않았다.

 은파호수의 랜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물빛 다리를 건넌다. 길이 370m에 너비가 3m인 보도 현수교로, 다리 위에서 호수에 비친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친 심신을 달래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야간에는 연출된 아름다운 빛을 비추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준단다.

 다리는 건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입체미를 두어 걷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양 옆으로 고저가 있는 길을 따로, 그것도 하트() 모양으로 만들었다.

 물빛다리는 현수교(懸垂橋)’로 분류된다. 하지만 양쪽 주탑(柱塔)에서 늘어뜨린 케이블에 행거케이블을 연결시키는 다른 현수교들과는 달리 이곳은 가운데에 주탑을 세우고 양옆으로 케이블을 늘어뜨리는 형식을 취했다.

 주탑 아래는 아예 사랑의 공간으로 꾸몄다. 하트 조형물을 세우고 사랑의 열쇠를 매달 수 있도록 했다. 연인들은 자물쇠를 걸고 두 손을 꼭 잡는다. 우리 사랑 영원하게 해주소서. 기도하듯 주문을 외운 다음 열쇠를 호수로 힘껏 던져버린다. 열쇠가 없으니 자물쇠는 영원히 봉인될 것이고 우리 둘의 사랑도 끝이 없겠지?

 눈에 들어오는 호수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호수 둘레 따라 푸른 자연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빗줄기 따라 물결이 찰랑찰랑 흔들릴 때마다 더위는 저만치 물러가고, 호수는 낭만이 차오른다.

 다리는 애기바우·중바우·개바우에 대한 설화를 배경으로 형상화했단다. 설화를 바탕으로 진입부에 놀이마당, 중간부에 주탑, 종점부에 사랑의 터널을 꾸몄다고 한다. 그 설화는 대충 이렇다. 옛날 방죽 근처에 마음씨 고약한 구두쇠 영감이 살았는데, 하루는 스님이 시주를 청하자 흙과 돼지 똥을 뿌리며 내쫓았다. 이를 본 마음 착한 며느리가 시주하니 스님이 극락왕생하려면 아들을 업고 이 집을 떠나되, 뒤를 돌아보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며느리는 정든 집과 가족 생각에 뒤돌아보았고, 그러자 일대가 물로 뒤덮이면서 며느리는 죽고, 스님과 아들, 강아지는 바위가 됐다는 슬픈 이야기다.

 음악분수는 은파의 특성과 이미지를 반영한 꽃잎 형태의 분수로 매회 20분씩 하루 8회 운영된다고 했다. 저녁이면 음악에 조명까지 더해지면서 여름철 더위를 한꺼번에 날려버린단다.

 오리 모양의 배를 타고 은빛 물결을 가르며 떠다니는 기쁨도 놓칠 수 없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탓인지 보트장의 오리보트와 모터보트는 오실 줄 모르는 손님만 하염없이 기다린다.

 11 : 13. 다리 건너에는 물빛다리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음식단지에 들러 전라도 음식의 풍미를 즐길 수도 있고, 물빛공연장에 앉아 수시로 열린다는 국악 등의 공연을 구경할 수도 있다.

 사랑의 문이란다. 물빛다리를 사랑이라는 콘셉트로 꾸몄다는 얘기일 것이다.

 물빛다리 조형물. 은파라는 명칭의 은()은 사랑의 빛(희망)이고 파()는 풍요의 물을 나타낸다고 적었다. ‘풍요와 미래, 사랑과 희망을 테마로 삼아 군산시민의 따뜻한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다나?

 한국농촌공사의 ‘100주년 기념탑’. 미제지의 용수는 우리나라 최초 수리조합 설립의 근거가 됐다고 한다. 미제(米堤)와 선제(船堤, 제방과 방수로만 남은 채 개답해 농지로 이용하고 있다)를 관개에 이용하기 위해, 근대 수리사업의 계기가 마련된 1906년의 수리조합 조례에 따라 1908 12 8일 탁지부(지금의 재경부에 해당)로부터 허가받아 설립됐는데 이것이 옥구서부수리조합이다. 조선인이 주도한 이 수리조합은 조합원 다수가 조선인이었다. 몽리(蒙利) 구역의 70가 조선인 소유였다는 점에서 다른 수리조합들과 사뭇 구별된다. 그런 역사성 때문에 이 조합의 설립일을 오늘날 농어촌공사의 시작으로 삼고 있다.

 11 : 19. 이번에는 서쪽 호숫가를 따라 북진한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그윽한 숲 향기가 어우러지면서 가슴속까지 뻥 뚫리게 해주는 산책로는 구불구불 이어진다. 그러니 군산의 명품 걷기 길인 구불길에 포함되어 있음은 당연. 5코스인 물빛 길이 이곳을 지나간다.

 11 : 26. 은파시민공원에 이르면서 은파호수와의 동거는 끝난다. 참고로 은파호수는 원래 농업용 저수지였다. 그러다 주변에 도시가 형성되면서 기능을 바꿔 주변 산과 함께 1985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이후 순환도로, 물빛다리, 음악분수, 인라인스케이트장, 생활체육장, 보트장 등을 조성해 도심 속 쉼터로 꾸몄다.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지역자원 콘테스트에서 전국 100대 관광 명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시민공원의 끄트머리는 수많은 탑들이 숲을 이룬다. 2010년 연평도에서 복무하다 순직한 해병대  문광욱 일병의 흉상을 중심으로 현충탑(6·25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29명이 전사한 군산사범학교 학생들을 기린다)’,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 ‘월남 참전 기념탑’, ‘6·25전쟁 참전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일종의 현충시설 단지라고 보면 되겠다.

 11 : 30. 공원을 벗어나 대학로로 올라선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지도(첨부 된) 두루누비에서 배포한 새로운 트랙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서해랑길 표지기는 양쪽 모두에 걸려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뭔가의 문제로 코스를 바꾸었다면 표지기 또한 떼어버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를 모른 우리 부부는 지도에 표시된 대로 한원컨벤션센터(예식장인 듯) 오른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갔다. kakaomap에서 이미 로드 뷰까지 확인해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00m쯤 올라가다 트랙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되돌아 나왔다. 아무래도 코리아둘길(해파랑길·남파랑길·서해랑길·DMZ평화의길)의 공식 홈페이지가 더 정확할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함께 걷던 80대 노익장 부부는 옛 코스를 그대로 따랐고, 그 결과 아무런 문제없이 해당 구간을 지날 수 있었다고 했다.

 11 : 37. 공원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대학로를 따라간다. 6차선 도로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인도와 자전거길이 따로 만들어져 있으니 알아서 선택하면 된다.

 11 : 48. ‘나운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공단대로(6차선 도로)’를 따른다. 코너에 있는 등산용품점(Black Yak)을 참조하면 되겠다.

 11 : 56. 터널 모양의 동물이동통로 앞에서 숲속으로 들어간다. 입구에 구불길(6코스인 달밝음길’)의 방향표지판과 함께 서해랑길 표지기가 매달려 있다.

 탐방로는 꽤 가파르게 올라간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나무계단까지 설치해놓았다.

 오른쪽은 상수도 나운배수지’. 태양광 패널이 숲을 이루고 있다. 배수지를 덮고 그 위에 태양광발전소를 만든 모양이다. 유휴시설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발상이 아닐까 싶다.

 12 : 04. 차도(월명공원2)로 내려서서 월명공원으로 진입한다. 길이 오솔길에서 아스팔트 포장길로 바뀌었다. 잘 닦인 이 공원길은 산자락 옆구리를 타고 가다 월명호수 옆을 스치듯 지나간다.

 안내판이 월명공원으로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월명공원2을 따른다. 은파호수 공원에 이어 이번에는 군산의 또 다른 관광지인 월명공원을 횡단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선지 주변은 정리정돈이 잘 된 느낌이다. 산뜻하게 뚫린 산책로는 기본, 편백나무 등으로 울창한 숲은 시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12 : 14. 월명호수가 얼굴을 내민다. 호숫가로 내려가는 산책로도 만들어져 있다.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저 수변길은 일상에 지친 답답한 가슴을  뚫어버리기에 딱 좋다. 하지만 내려가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근대화 거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아니 3년 전쯤 가족들과 함께 이미 둘러봤으니 또 가볼 필요가 없어서이다.

 편백나무 숲속에는 작은 독서실까지 들어앉혔다. 괜찮은 아이디어라 하겠다. 심신을 맑게 해주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편백나무로 알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12 : 29. 호수를 왼쪽 허리춤에 끼고 숲길을 따르다보면 점방산 밑에 자리한 청소년수련관을 만난다. 탐방로는 수련관 앞에서 2차선 도로(청소년회관로)를 만나 오른쪽으로 간다.

 송풍동(반대편은 소룡동) 방향으로 100m쯤 내려가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숲속(월명호수1)으로 들어간다.

 12 : 38. 염불사(念佛寺).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사찰로 누가 언제 지었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그저 일제 때 산재당으로 불렸고, 일본인들이 이곳에 와서 재를 지내고 갔다고 전해질 따름이다. 그래선지 안내판은 절의 역사보다는 절이 품은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전북 문화유산자료)’에 대해 전하고 있었다. 명나라 시대의 티베트 불상과 조선시대의 불상 양식이 적절하게 혼합된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단다.

 12 : 41. 잠시 후 월명산(101.3m)과 장계산(108.3m)을 잇는 능선의 안부로 올라선다. 길이 사통팔달로 나뉘는 지점이기도 하다. 수시탑과 월명호수, 월명동사무소로 각각 이어지는 길 말고도, 월명산과 장계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이곳에서 나뉜다.

 고갯마루에는 군산 3·5만세 운동을 기념하는 삼일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참고로 한강이남 최초의 3·1만세 운동지인 군산에서는 1919 3 5일 첫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총 28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참여한 인원도 37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3 5일에 일어났지만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맥락에서 ‘3·1 운동이라 부른단다.

 월명동사무소 방향으로 내려간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난 길은 얼마나 오래 묵었던지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은 나무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있다.

 12 : 52. 월명동에서의 첫 만남은 동산교회’. 탐방로는 이제 군산의 옛 역사와 문화 속으로 들어간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시가지 곳곳에 들어서 있으니 하나도 빼먹지 말고 꼼꼼히 둘러보도록 하자.

 군산체육관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은 아니다. 하지만 김완수 관장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 군산 복싱의 전설이다. 동양챔피언에 오르면 최고 스포츠스타로 대접받던 시절.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2회 아세아 아마복싱선수권대회(1965)’에서 한국은 8체급을 석권한다. 그중 3(서상영, 박구일, 황영일)이 김완수관장의 지도를 받은 군산체육관 소속이었다.

 기적으로 불리며 세간을 놀라게 했던 체육관은 지금 포토 죤이라는 임무를 하나 더 보탰다. ‘군산관광 포토투어의 한 지점이 되어 오가는 관광객들을 맞는다.

 몇 걸음 더 걸어 동국사길로 나오면 평화의 박물관이 반긴다. 평화라는 주제를 갖고 전시가 이루어지는 독특한 공간이다. 무기로 평화를 지키는 군사안보에 저항하는 평화운동의 기록이라나? 하지만 힘없는 평화는 바람 앞의 등불일 뿐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들여다볼 가치조차 없는 기록들이다. 박물관 앞에 전시해놓은 꽃마차(전국의 분쟁현장을 누비던 차량이 낡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조형물로 꾸며놓았다)’만 카메라에 담고 자리를 떠나버리는 이유이다.

 13 : 00. 오른쪽으로 100m쯤 가면 동국사가 나온다.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로, 한일합방 1년 전인 1909 6월에 창건됐다. 일본 조동종 승려 우찌다 금강선사란 포교소로 개창했고, 1913년 현 위치로 옮겨와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정부로 이관됐다가 1955년 불교전북교당이 인수하면서 동국사로 개명했다. 1970년 조계종 24교구 선운사에 증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붕이 높고 단청을 하지 않은 절집은 대웅전과 요사채가 복도로 연결된 점이 이채롭다. 누군가는 대웅전 지붕이 에도막부 시대 쇼군(장군)의 투구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글쎄다.

 경내에는 일본 조동종 운상사 주지 일호창황의 주도로 건립했다는 참사비(懺謝碑)’가 세워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만행을 참회하는 조동종의 참사문을 발췌해서 새겼단다. 하지만 내 눈에는 군산시민과 일본인들이 성금을 모아 제작했다는 평화의 소녀상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동국사 앞에서 만난 근대화 거리’ 안내판. 17개의 주요 포인트들을 지도에 표시하고, 효율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방법을 3개 코스로 나누어 소개해준다.

 평화의 박물관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쪽으로 간다. 이후부터는 일본식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바둑판식 거리를 둘러보며 걷는다.

 13 : 03. 첫 만남은 군산 항쟁관이다. 일제강점기 항거의 현장을 재현한 기념관이라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라지만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내부관람은 포기하기로 했다. 호남지방에서 최초로 일어난 3·5 대한독립 만세운동은 물론이고, 1920년대의 미선공과 부두노동자들의 항쟁, 옥구 농민항쟁 등에 대한 자료도 살펴볼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항쟁관 부근은 맛의 거리로 꾸며져 있었다. 군산은 과거 해상물류유통의 중심지였다. 이는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고, 이 지역만의 독특한 음식문화를 만들어냈다.

 월명로를 따라 조금 더 가면 군산 부윤 관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수탈을 총괄하던 군산부 부윤(시장)이 생활하던 곳으로, 1930년대 건축한 일본 고민가 형태의 근대건축물이다. 해방 후에도 1990년 초까지 시장 관사로 사용됐다.

 이후부터는 구영6을 따른다. 옛 멋을 퐁퐁 풍기는 건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예쁘장한 골목이다.

 예스런 길을 걷다보면 눈에 띄는 간판마저도 고상해진다. ‘당신이 나보다 행복하길 바래’. 수제 전통차 한 잔에 행복을 듬뿍 담아주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여미랑(오래된 친구의 집을 뜻한단다)’은 군산시에서 만든 게스트 하우스다. 군산에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 많다는 점을 감안 한 블럭을 통째로 일본식 집을 지어놓았다. 그러니 일본식 다다미방에서 하룻밤 보내보는 것도 여행의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부대시설인 고우당 찻집에서 배달시킨 전통차에 담소까지 곁들이면서...

 길을 걷다보면 군산시의 야무진 노력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홍보에 대한 노력도 그중 하나다.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근대화를 중심으로 알리고 있다.

 월명동사무소의 저 조형물은 ‘3·5 독립 만세운동을 형상화 한 모양이다. 아니면 1905년 을사늑약 때 스승인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임병찬 의병장일 수도 있겠고...

 군산상고 야구부도 역사적 가치로 충분하다. 1972년 제26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군산상고가 부산고에 1-4로 끌려가고 있었다. 9회 말 군산상고 선두타자 김우근이 안타로, 고병석과 송상복이 볼넷을 얻어 만루가 됐다. 김일권이 몸에맞는볼로 출루하며 한 점 따라붙고, 양기탁의 적시타로 4-4 동점을 이뤘다. 2사 만루에 김준환이 끝내기 좌전안타를 날려 역전승(사진)을 거뒀다. 그 뒤에도 군산상고는 유독 짜릿한 역전승이 많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역전의 명수라고 불렀다.

 시계 바늘을 일제강점기로 되돌려 놓은 저 조형물도 훌륭한 볼거리이다. 사내아이가 사탕을 빨아먹으며 심부름 가는 여자아이를 놀리는 모양새인데, ‘그때 그 시절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일제강점기의 옛 가옥인지, 아니면 새로 복원해놓은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닭요리 전문점인데, 비오는 날 파전에 막걸리 한 잔하기 딱 좋은 곳이란다. 복고풍의 인테리어가 술맛을 북돋아준다나?

 국제반점 짬뽕의 도시 군산에서도 소문난 맛집으로 꼽힌다. 비를 맞아가면서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저 관광객들이 그 증거다. 참고로 군산 짬뽕의 역사는 산둥성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일으켰다. 개항 후 화교들은 짬뽕의 원조 격인 초마면(炒碼麵)을 만들어 팔았다. 초마면은 해물과 고기, 다양한 야채를 기름에 볶아 닭이나 돼지 뼈로 만든 육수를 넣고 끓인 다음 면을 넣어 말아 먹는 요리다. 고춧가루 대신 후춧가루만 넣어 먹었다. 이때만 해도 흰 국물이었다. 한국인 입맛에 맞게 고춧가루를 넣으면서 빨간 국물인 짬뽕이 됐다.

 이성당은 줄이 더 길었다. 대전에 '성심당'이 있다면 군산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이성당이 있다. 지난해 매출(266억원)도 동네 빵집 매출액 순위에서 성심당에 이어 전국 2위를 기록했다. 이성당은 1945년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제빵 기구를 사용해 빵을 만든 것이 시초다. 이곳에서 만드는 단팥빵은 빵 마니아들 사이에서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하는 빵으로 꼽힐 정도다. 요즘은 야채빵을 찾는 마니아들이 더 많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맞다. 우리 부부의 입에도 야채빵이 더 맞았다.

 근대 쉼터’. 우수저류소의 유휴공간을 활용한 쉼터로 공연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는 듯 계단식 관람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부근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등을 패러디한 벽화도 몇 점 눈에 담을 수 있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우리 동네 미술)의 일환으로 그렸다는 군산 사람들의 모습도 눈길을 끈다.

 초원사진관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이다. 제작진이 마땅한 촬영지를 물색하기 위해 전국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다 겨우 발견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실제 사진관은 아니고 시나리오에 맞게 개조한 것인데, 촬영이 끝난 후 철거되었다가 군산시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복원했다. 내부에는 촬영당시 사용된 사진기와 선풍기 등 소품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영화 팬들의 추억을 자극한다.

 맞닿게 조성해놓은 영화거리도 눈요깃거리로 넘친다. 군산은 영화 촬영의 메카로 알려진다. 마더, 아저씨, 박하사탕, 장군의 아들, 타짜 등 많은 작품들이 촬영됐다. 거리를 누비다보면 영화 속 주인공이 품은 간절한 사랑이야기와 수많은 감성포인트에 공감할 것이다.

 13 : 43.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골목을 누비다보면 어느덧 해망로에 이른다. ‘근대화 거리라는 애칭답게 일제강점기의 건축물들이 몰려있는 곳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미즈카페’. 1930년대에 지어진 일본식 건물(무역회사)이라서 적산가옥을 찬찬히 구경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어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기에 제격이란다. 자그마한 정원을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적산가옥은 장미갤러리이다.

 그 옆에는 아이보리색 외관에 초록색 지붕을 한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국가 등록문화재 제372)’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일본 지방은행으로 조선에서는 1890년 처음 문을 열었다. 이후 전국에 지점을 개설했는데 군산은 1907년 일곱 번째 지점으로 건립됐다. 하나 더. 이 은행은 일본인들이 고리대금업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갈취하는 자금줄 역할을 했다. 일본인들은 은행에서 싼 이자로 대출을 받아 농민들에게 토지를 담보로 고리대금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은행은 일본인들의 배를 불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현재는 근대미술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옛 건물의 특징을 살린 갤러리로 꾸민 다음 군산시민들이 기증한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를 진행한다. 미술품 전시 외에도 별실을 활용해 일제수탈사 사진전’, ‘18은행 건물 역사 전시 등도 열린단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조선은행 군산지점(국가등록문화재 제374,  근대건축박물관)’을 만날 수 있었지만, 다리가 아프다며 중간에서 쉬고 있는 집사람을 생각해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탐방로에 접해있는 근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군산의 역사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곳으로, 과거 무역항으로 해상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옛 군산의 모습과 전국 최대의 근대문화자원을 전시 중이다. 군산시민들의 물품 기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로비에 들어서면 일제가 대륙에 진출할 목적으로 건설한 어청도등대가 반겨준다. 조선시대 군산은 호남평야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수송하기 위한 조창이 있던 경제적 요충지였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할 무렵에는 무역항으로서 황금빛 미래도 꿈꿨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면서 식민지 수탈의 근거지로 왜곡된 성장을 겪는다. 근대화의 상징인 기찻길이 놓이고 신작로가 뚫렸지만, 일제의 약탈을 위한 것이었다.

 박물관은 해양물류역사관, 근대생활관,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기획전시실(사진)은 다양한 테마전시를 수시로 교체·전시하여 방문객의 꾸준한 관심을 유도하는 공간이다. 또한 해양물류역사관에서는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군산의 과거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군산의 현재와 미래를 통찰해 볼 수 있다.

 근대생활관에는 일제강점기 군산의 다양한 풍경을 재현해 놓았다. 홍풍행(鴻豊行)은 화교가 운영하던 식료품 잡화점이었다고 한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미두장으로 등장하는 군산미곡취인소도 눈에 띈다. 군산 최고 번화가였다는 영동상가 맞은편에는 산비탈로 쫓겨난 도시 빈민이 거주하던 토막집이 있어 대비된다.

 독립영웅관은 군산에서 호남 최초로 일어난 3·1만세운동과 악질적인 일본인 농장을 대상으로 벌인 옥구 농민 항쟁을 다룬다. 그래선지 만세운동을 재현한 퍼포먼스도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군산세관(국가지정 사적 제545)’으로 간다. 1899년 군산항을 개방한 이후 인천세관 관할에 있던 군산세관은 1906년 인천세관 군산지사를 설립하고 1908년 이 건물을 완공한다.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건축 재료를 수입해 유럽 양식으로 지었다. 이 같은 양식은 서울역과 한국은행 등 단 3곳뿐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건축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의 곡물을 수탈하는 역사적 현장이었다는 점에서 후대에 교훈을 준다. 그래선지 내부를 박물관으로 꾸며놓았다. 시대별 수입·수출 품목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해방이후-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20년 단위로 전시되어 있다. 2000년대에 와서야 전기·전자 제품과 자동차 등 익숙한 제품들이 눈에 띄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군산의 역사와 문화는 박물관 밖에서도 만날 수 있다.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축산리 유적과 산북동의 공룡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548)’ 등을 복원해 놓았다. 1944년 군산항의 제지공장에서 사용하던 초대형 천장 크레인도 눈에 띈다.

 박물관 투어를 마치고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인 째보선창(군산 내항)’쪽으로 간다. 이때 장미공연장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옛 미곡창고를 리모델링해 다목적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장미라는 이름은 군산항을 포함한 일대의 지명에서 따왔다. 장미동하면 얼핏 꽃을 떠올리지만 전혀 다른 의미다. 곳간의 ()’과 쌀의 ()’가 합쳐져 쌀 창고를 뜻한다. 마을 이름에 쌀 수탈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공연장은 장편소설 탁류의 등장인물들 동상이 둘러싸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군산을 알리는데 탁류만한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서천 출신 정주사는 군산에 가면 번듯한 직업을 구할 수 있다는 말에 가족을 데리고 똑딱선에 오른다. 정주사는 이 화려한 근대도시에서 재산을 모두 잃고, 딸 초봉마저 팔아넘기듯 고태수에게 시집보낸다. 발버둥 칠수록 깊은 수렁에 빠진 초봉의 운명처럼 일제강점기 군산은 절망의 밑바닥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종점인 진포해양테마공원으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축구장 하나쯤 되는 구역에 울타리를 두르고 ‘2024 군산 수제맥주 블루스 페스티벌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100m 더 가다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때 구불길(6-1, 탁류길) 안내판이 눈에 띈다. 구불길은 총 11개 코스(188.4km)가 만들어졌다. 이중 탁류길은 도심 복판에 만들어진 골목길이다. 길이는 6km, 근대역사박물관을 출발해 원점 회귀하는 코스를 중심으로 골목마다 역사의 현장이 숨어 있다.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의 배경지(도심)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둘러보는 시간여행지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14 : 20. 트레킹이 종료되는 진포해양공원에 이른다. ··공군의 퇴역 군장비 13 16대를 전시하고 있는 공원은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인 진포대첩의 역사적 현장이다.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50척의 배로 왜선 500척을 이곳에서 물리쳤다.

 째보선창(군산 내항)에는 일제강점기 3t급 기선이 접안하던 부잔교(뜬다리부두)가 아픈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 부잔교는 밀물 때 다리가 수면에 떠오르며 썰물 때 수면만큼 내려가는 수위에 따라 다리의 높이가 자동 조절되는 선박 접안 시설물이다. 3t급 배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고 이 다리를 통해 쌀 등이 일본으로 반출됐다. 현재 전체 4기 중 3기만 남아 있다. 부잔교 준공식에 참가한 사이토 총독이 ,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이라며 경탄했다는 일화가 근대 군산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2 : 25. 서해랑길(군산 55코스) 안내도는 2번 부잔교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4.42km를 찍고 있으니 엄청나게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월명공원에 들어서면서부터 회한의 역사를 되뇌며 걸었으니 걸음이 더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만 생각하고, 내 이야기만 하며, 상대 의견은 묵살하라’. 미국의 한 신문에서 비참해지는 방법이라는 기사를 실으며 제시한 10가지 방법 중 첫 번째다. 이걸 반대로만 살아간다면 인생을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걷기 여행에서 우리 부부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하나라도 더 보려고 나대는 나, 반면에 체력이 약한 집사람은 조금이라도 덜 움직이려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도 똑 같은 상황이 발생했고, 이때 위의 방법을 떠올렸으면 좋았으련만 난 그러지를 못했다. 때문에 집사람의 고운 얼굴에서 짜증어린 표정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고사성어를 떠올리며 오늘 하루를 반성해본다.

 

서해랑길 53코스(새창이 다리-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4. 6. 8()

소 재 지 : 전북 군산시 대야면·회현면·옥산면 일원

여행코스 : 새창이다리(서단)금광교차로옥성마을(실제 출발지)광지산마을회현면사무소군산호수백석마을외당마을(거리/시간 : 19.6km, 실제는 11.84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3코스를 걷는다. 5로 이루어진 김제·군산 구간(51-55코스)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만경강의 둔치를 따라가다 하구역 직전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군산 시내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만경강변의 갈대밭과 군산호수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난이도는 별이 3(5개 가운데)로 분류된다. 19km가 넘는 거리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들머리는 새창이 다리(군산시 대야면 복교리)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 IC에서 내려와 712번 지방도를 타고 김제방면으로 4km쯤 내려오다 만경대교 직전 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오면 신촌마을(복교리)’이 나온다. 마을 앞에 새창이 다리가 있고, 서해랑길(군산 53코스) 안내도는 다리 초입에 세워놓았다.

 만경강 하류 새창이 다리에서 시작해 외당마을 버스정류장(옥산면 당북리)’까지 19.6km를 걷는다. 만경강 하구의 둔치를 따라 걷다 드넓은 옥구들녘을 거쳐 군산 시내로 들어간다. 하지만 난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유로 옥성마을에서 시작했다. 첨부된 지도의 744번 지방도와 서해랑길의 붉은 선이 만나는 지점 오른쪽에 있는 삼거리이다.

 10 : 44. 실제 출발지는 신기촌 버스정류장(군산시 회현면 금광리)’으로 삼았다. 윗 이빨을 4개나 뽑고 인공 뼈까지 이식한 게 월요일이라서 무리한 운동을 삼가야 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내 의지를 꺾지 못한 의사선생님도 가능한 한 거리를 줄여야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트레킹을 허락해주셨다.

 10 : 44. 수로(水路) 옆 둑길을 따라 서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744번 지방도(남군산로)를 따라갈 수도 있었으나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아, 수로를 가운데 두고 내놓은 둑길을 따르기로 했다.

 10 : 48. 잠시 후 이른 옥성마을’. 전봇대에 매달린 노랑·빨강 리본이 서해랑길에 올라섰음을 알려준다(참고로 해파랑길은 빨강·파랑, 남파랑길은 노랑·파랑이다). ‘두리누비에서 제공한 트랙은 53코스 시점에서 이곳까지를 8.13km로 찍고 있었다. 반면에 내 앱은 0.24km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그러니 53코스는 정규 코스의 60%쯤을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옥성마을 표지석. 법정 동리인 금광리(金光里)를 구성하는 9개 자연부락(월평·월평2·원당·광지산·금당·신기촌·옥성·옥흥·옥삼) 중 하나이다. 주민들은 만경강 하구에 제방을 쌓아 만든 간척지에서 보리와 쌀 위주의 농업을 위주로 살아간다.

 탐방로는 수로를 따라 조금 더 간다. 비가 오시려는지 하늘이 더 어두워졌다. 비가 그것도 제법 많은 양이 내릴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들어맞는 것일까? 하지만 고맙게도 하늘은 우리 편이었다. 빗방울이 잠시 떨어지더니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한다.

 10 : 50. ‘남평 문씨(南平文氏)’ 제각

 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744번 지방도(남군산로)를 가로질러 금광리(회현면)의 너른 평야지대로 들어간다.

 우렁이 농법은 한때 친환경 벼 재배의 아이콘으로 여겨졌었다. 아니 요즘도 우렁이 방사에 대한 뉴스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화학 제초제 대신 물속의 풀을 먹는 데는 우렁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수로의 벽에 우렁이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들녘은 모내기가 한창이다. 하지만 곡식 낱알을 누렇게 매단 채로 남아있는 곳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채종포(採種圃)’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은 품종을 하이스피드로 적고 있었다. 경영비를 절감해보려는 축산농가에서 하이스피드라는 사료용 귀리를 심었고, 또 최고의 종자를 얻기 위해 수확시기를 맞추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이스피드 고숙기(낱알이 완전히 익는 시기)’에 채종해야 발아율이 가장 높아진다니 말이다.

 11 : 00. ‘광지산 마을에 이른다. 아니 동구 밖에 있는 버스정류장이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동서로 뻗어나가는 도로(‘회미로’, 회현면의 옛 이름이 회미였단다)를 따라 같은 금광리의 광지산, 금당, 원당, 월평 등의 자연부락들이 들어서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만경강유역의 간척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수확한 쌀은 옥토 진미라는 브랜드로 시장에 나온다.

 11 : 06. 광지산마을의 북쪽 끝에는 두릉 두씨(杜陵 杜氏)’ 문중 제각이 지어져 있었다. 참고로 두릉두씨 시조는 중국 송나라에서 병부상서를 지낸 두경령(杜慶寧)’이다. 타 세력에 밀린 그가 일족과 함께 고려의 궁지현(조선시대의 만경현)으로 이주했고, 이를 안 조정에서 만경지역 일부를 식읍으로 하사하며 두릉군으로 삼았단다. 두경령의 11세손인 두승손(杜承孫)이 만경에서 옥구로 이주한 이후 후손들이 회현면·옥산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는데, 이곳 광지산마을도 그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금광리에서 대정리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도 민가 몇 채가 들어섰다. 광지산마을의 윗뜸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역사는 본뜸보다도 더 오래된 듯 당산목으로 여겨지는 팽나무 한 그루가 커다란 등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팽나무 뒤로 보이는 지성어린이집도 나그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동화나라에서나 볼 법한 궁전을 커다랗게 지어놓았다. 하지만 난 담벼락에 붙어있는 풍경화에 더 관심이 간다. 대체 어디에 있는 산이기에 저런 멋진 풍경을 보여줄까?

 11 : 10. 고개를 넘으면 대정리(大政里)’이다. 회현면의 소재지답게 건물의 등치부터가 달라진다. 2층은 기본. 3층짜리도 흔하고, 귀하지만 고층이랄 수 있는 4층 건물도 눈에 띈다.

 탐방로는 마을을 동서로 관통하는 711번 지방도(회현로)를 따라간다. 길가에 늘어선 면사무소·파출소·우체국·농협 등 공공시설들이 이곳이 회현면의 행정 중심임을 알려준다. 음식점·편의점·상점은 물론이고 카페까지 들어서있는 게 면소재지치고는 제법 번화하다는 느낌을 준다.

 회현면사무소. 회현면(澮縣面)의 옛 이름은 회미현(澮尾縣)이다. 백제의 부부리현이었던 것을 통일신라의 경덕왕이 개칭했다. 고려 때까지 회현현(澮縣縣)으로 남아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옥구군 장면 풍면이라는 생뚱맞은 이름으로 나누어진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면이 통합되어 옥구군 회현면이 된다. 현재 8개 법정 동리(월연리·금광리·대정리·세장리·고사리·학당리·원우리·증석리)를 관할한다.

 11 : 14. 회현사거리. 비석이 3개이니 비석군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문종철이라는 면장의 청직기념비를 가운데 놓고 양옆에 다른 이(인터넷에서도 조회가 되지 않는)의 영세불망비와 기념비를 세웠다.

 건너편에는 회현중학교가 있다. 무작정 교정으로 들어가는 게 싫어, 문지기 삼아 세워둔 장승만 카메라에 담고 자리를 떴다. 아니 장승에 쓰인 나를 무엇에 쓸까’, ‘어떤 세상을 만들까의 의미를 가슴에 담아왔다. 그리고 그 뜻이 회현중학교 학생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빌어줬다.

 11 : 20. 회현초등학교.

 11 : 22. 회현초등학교의 담장 끝. 삼거리에서 711번 지방도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서기길을 따른다. 모퉁이의 청암산 생태학습장(1km)’ 입간판을 참조하면 되겠다.

 서기마을(대정리)은 서울 근교의 전원주택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진 집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담쟁이넝쿨을 뒤집어쓰고 있는 창고형 건물에 더 눈길이 갔다. 공생(共生)을 아는 놈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감고 기어올라도 엉겨서 살아가지 진까지 빨아먹지는 않으며, 줄기를 움푹 패게 만들지만 죽이기까지는 않는 것이다. 벗하며 즐길 줄 안다고나 할까?

 옥산저수지로 들어가는 1km 정도의 구간은 도로 확포장공사가 한창이었다. 그건 그렇고, 비 멎은 하늘은 언제 빗줄기를 뿌렸냐는 듯이 싱그러운 햇살을 내보낸다. 맑고 푸른 게 영락없는 가을하늘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공활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사부작사부작 걸어보자. 마침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까지 빼어나지 않는가.

 이때 청암산(118.8m)’이 눈에 들어온다. 군산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저 산은 원래 취암산(翠岩山)’이었다. 푸르다는 의미인데. 일제강점기에 푸를 청()’자를 써서 청암산으로 이름을 둔갑시켰다나? 아무튼 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저 산의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구슬처럼 예쁘다고 해서 옥산이란 지명이 생겨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옥산(玉山)’이란 지명은 저수지가 축조되기 전인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었다. 옥구현의 다른 명칭인데, ‘대려골 북쪽, 꼭대기에 흰 돌이 있다는 작은 산의 이름에서 유래했단다.

 11 : 30. ‘죽동마을에 이른다. 세장리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죽동·신성동·사오개·가운데뜸) 중 하나로 마을이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댓골로 불리다가 죽동이 되었다.

 이왕에 들렀으니 죽동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한번쯤 들어보면 어떨까? 주차장 옆에 마을의 유래를 담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마을은 한때 80여 세대 400여 명이 살았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하지만 농촌 공동화현상을 피해가지 못해 한적한 시골마을로 전락했던 모양이다. 최근 은퇴자 및 자녀를 관내 초·중학교로 입학시키고자하는 학부모들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옛 영화를 되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사오갯 샘이라고 한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서, 인근 주민들은 물론이고 타 지역 사람들까지 물지게를 지고 찾아와서 물을 길어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는 소문난 우물이다. 해방 직후 콜레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나 죽동마을에서는 일절 해를 입지 않았는데, 주민들은 사오갯 샘 덕분으로 믿고 있다나?

▼ 11 : 37. 마을 뒤 고개(‘사오개가 아닐까 싶다)는 온통 대나무 숲으로 뒤덮여있다그 대숲이 만들어놓은 터널을 지나면 작은 광장이 나온다군산시의 명품 걷기 길인 구불길을 만나는 지점으로이와 관련된 안내판들을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이 세워놓았다.

 군산호수를 도는 방법은 구슬뫼길(구불 4), 수변길(13.8km), 청암산 등산로( 7km) 등 세 가지가 있다. 이중 수변길이 등산로보다 두 배 가까이 긴데, 이는 리아스식 호숫가를 굽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걷게 될 구슬뫼길(구불4)’은 수변길과 청암산 등산로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이어나간다. 어느 구간에서는 그 길을 따르기도 한다.

 이곳을 설명하는 안내판도 눈길을 끈다. ‘사오개는 옥산저수지가 축조되기 전 회현면 대정리·월연리·세장리 사람들이 옥산이나 군산으로 갈 때 넘나들던 고개라고 한다. 6척 이상의 큰 길이 시내까지 연결되어있었으나 1939년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대부분 물속에 잠겨버렸단다.

 이 사진은 군산시청을 나무라기 위해 게시했다. 서해랑길의 이정표이니 가장 필요한 것은 종점과 시점까지의 거리다. 그런데도 앞뒤 주요 포인트만 표시했다. 그러니 대체 얼마를 걸어왔고, 또 앞으로 얼마를 더 걸어야 할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하단의 지도라도 옳게 표시했으면 좋았으련만 시점 및 종점까지의 거리 대신 위 방향표지판에 적힌 거리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군산 지역에서 만난 이정표는 모두가 다 이러니 문제다. 30만에 가까운 인구를 자랑하는 큰 도시답지 않은 행정이라 하겠다.

 이후부터는 구슬뫼길(구불4)’을 따라간다. 어느 선답자는 청암산 등산로를 따르면 빠르긴 하나 호수의 그윽한 맛을 느끼기 어렵고, 수변길은 편하지만 호수의 다양한 표정을 엿볼 수 없다고 했다. ‘구슬뫼길은 그런 두 길의 장점을 합쳐놓았다니 이를 따르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나 더. 구슬뫼길의 길이는 수변길과 비슷하다고 했다. 하지만 난이도는 약간 더 높단다. 청암산 등산로와 만나려고 고도를 높이는 구간이 종종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탐방로에 들어서는 순간 서해랑길 표식은 사라져버린다. 대신 구슬뫼길 이정표가 길을 안내해준다. 참고로 구슬뫼길은 쉬지 않고 걸어도 6시간 이상 걸리는 긴 코스다. 그래서 사람들은 옥산저수지 주변을 도는 3-4시간짜리 단축 코스를 선호한다. 옥산저수지 둘레만 그려놓은 저 안내도가 그 증거이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나아가는 산책로는 무척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호숫가 습지로도 길을 냈다. 다리를 놓듯 테크로드를 조성,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자연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가끔은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전망대도 만들어놓았다.

 전망대에 서자 발아래까지 다가온 호수가 살갑게 맞는다. 수면 위는 초록의 연꽃잎으로 한가득이다.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인 가시연꽃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군산호수는 가시연꽃의 주요 서식지로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개화시기(7-8)가 아니어선지 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가시가 돋은 긴 꽃대와 자줏빛 꽃이 무척 아름답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호숫가 곳곳에는 쉼터를 배치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에 벤치는 기본, 심지어는 그네형의 의자까지 만들어놓은 곳도 보인다.

 강의실을 연상시키는 의자 배열이 생태학습장이 아닐까 싶다. 안내도에 나와 있던 습지관찰원이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오랜만에 느림의 미학을 즐기기로 했다. 6km 이상이나 코스를 단축해서 시간까지도 느긋한데 구태여 서두를 일이 없지 않겠는가. 덕분에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호수와 주변 숲의 그윽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길은 호숫가를 따라간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시야가 열리며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구슬뫼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대나무 숲을 걷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울창한 대나무 숲이 가고 또 가도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진다.

 1930-1940년대, 만경강 하구에는 민물고기나 바닷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어촌마을이 있었다. 그들은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 죽동마을로 몰려왔고, 댓금 흥정이 끝나면 대나무 다발을 바리바리 실은 달구지를 몰고 흙먼지 폴폴거리는 길을 되돌아갔단다. 밀물과 썰물을 이용한 고기잡이 방식인 쑤기놓기에 대나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민들은 대나무를 잘라 팔면 논농사로 얻는 소득보다 대여섯 배나 더 많이 벌 수 있었다나? 당시 대나무 군락이 얼마나 넓게 분포되었을 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얘기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사연을 품은 대숲이니 무작정 통과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듯 작은 공간을 만들고 청암정이란 정자를 들어앉혔다. 빙 두른 판넬은 생태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청암산과 옥산저수지 주변에서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들의 생태계를 소개하고 있다.

 청암산 둘레길의 지도는 큐알 코드로도 받아볼 수 있는 모양이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으니 어슬렁어슬렁 걸어보란다.

 문제는 나 하나쯤이야이다. 누군가 죽순에 손을 댔던 모양이고, 참다못한 지자체는 저런 팻말을 매달아놓았다. 나무껍질이나 식물을 무단채취 말라는...

 잠시 후, 이번에는 왕버드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물과의 친화력이 강한 나무라서 계곡의 하류나 호숫가에서 심심찮게 만나는 풍경이기도 하다. 깊은 물속에서도 썩지 않고 잘 자라는 특성 덕분이다. 수질정화 능력이 뛰어나서 일부러 심는 경우도 있다.

 그중에서도 호수가 품었을 때를 제일로 친다. 아랫도리를 물속에 담그고 있는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거기다 아침 안개라도 피어오를라치면 그 풍경은 창조주만이 그려낼 수 있는 작품으로 승화된다.

 다시 나타난 대나무 숲.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솟아오른 대나무 숲길. 깊은 호흡 두어 번이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맑아진다. 이산화탄소를 몽땅 빨아들이고 산소를 품어내는 대나무 숲의 효능 때문일 것이다. 하나 더. 안내도는 이곳을 죽림원으로 적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대나무 숲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히는 담양의 죽녹원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 자신감은 안내판에서도 확인된다. 대나무의 음이온 샤워로 걱정과 긴장을 풀 수 있는 청암산 죽향길에서는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마다 최고의 포토존이 된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아까보다 더 울창해진 대숲은 비밀의 숲이란 밀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누군가는 이 숲을 정돈되지 않았다고 적고 있었다. 담양 죽녹원이나 울산의 십리대숲 등 잘 가꿔진 대숲들의 조형미에 견주지 못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외려 그 덕에 한결 자연스럽고 웅숭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소나무가 섞인 풍경이 이채롭기 짝이 없다.

 몇 걸음 더 걸어 만나는 또 하나의 전망대. 안내도는 이곳을 수변생태관찰장으로 적고 있다. 습지가 잘 발달된 곳으로 곤충과 야생화, 새들이 공생하는 체험학습장이다.

 안내판은 호수와 접한 어림을 연못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청암산에서 유일하게 연중 물이 마르지 않는 습지를 이용한 생태연못으로, 군산호수에 서식하는 수생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단다.

 맨발로 걷고 있는 여행자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만큼 길이 곱다는 증거일 것이다.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인 듯. 포토존도 만들어 놓았다. 구슬뫼길을 다녀간 여행자들의 앨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명소이다.

 사랑꾼인 집사람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냉큼 사랑마크부터 만들고 본다. 그걸 본 나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진 채로 카메라에 주워 담는다.

 숲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호숫가의 가장 큰 단점은 길이 질퍽거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들뫼길에서는 그런 걱정은 놓아도 된다. 조금이라도 질퍽거릴라치면 맷돌모양의 석판을 징검다리처럼 놓았고, 그로도 안 될 경우에는 데크로드를 설치했다. 각종 편의시설도 눈길을 끈다. 노란색 안내판하며 둥근 통나무의자, 나이테가 선명한 널빤지 모양의 긴 의자, 녹색 화살표가 선명한 빨래판 모양의 이정표 등 세심하게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쉼터도 각양각색이다. 정자나 파고라는 기본. 특이하게도 대나무를 엮어 만든 곳도 눈에 띈다. 잠시나마 급할 것 없이 살아가던 원시인이 되어. 시간에 쫒기지 말고 푹 쉬다 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12 : 41. 구불구불, 한없이 구불대던 숲길을 빠져나와 둑으로 올라선다. 초입에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구불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구불길은 군산시에서 조성한 둘레길이다.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수풀이 우거진 길을 여유·풍요·자유를 느끼며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은 여행길로 만들겠다는 게 조성 목적이다. 모두 11개 코스로 나뉘는데 비단강길·햇빛길·큰들길·구슬뫼길·물빛길·달밝음길·탁류길·고군산길 등 이름만으로도 정겹다. 그중 옥산저수지를 에둘러 돌아가는 구슬뫼길은 구불길의 정수 중 하나로 꼽힌다. 서해랑길은 이 구슬뫼길의 일부 구간을 따라 걷는다.

 길이가 400m쯤 되는 저수지 제방을 따라간다. 군산호수(옛 옥산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조성됐다. 공업용수 확보가 주요 목적이었다. 1963년에는 군산의 제2수원지 노릇을 하느라 상수원보호구역에 지정됐고, 자연스레 사람들의 출입도 통제됐다. 그러다 2008, 45년 만에 상수원보호구역에서 해제됐다. 호수를 에둘러 아름다운 수변길이 조성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구슬뫼길(구불4)’은 옥산저수지의 호숫가를 에돈다. 한자이름 구슬 옥()’ 뫼 산()’을 순우리말로 바꿔 브랜드를 삼았다. 거리는 18.8km. 군산역에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이영춘 박사 고가와 옥산저수지 등을 지나 남내마을까지 간다.

 둑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탐방객들을 위해 망원경까지 배치했으니 잠시 머무르며 조망을 즐겨보자.

 난간에 서자 옥산저수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뒤로는 청암산의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가지런히 도열하고 있다. 저수지에 물이 차면서 산 중턱까지 물에 잠긴 산은 산봉우리들만 동글동글하게 남았다. 그걸 구슬이라고 본 사람들은 옥산이란 지명을 만들어냈고.,.

 물억새 사이를 걸어볼 수도 있다. 둑 아래 억새밭을 조성하고 산책로를 내놓았다. 지금은 허리춤에도 못 미치지만 늦가을쯤이면 흐드러진 억새꽃이 장관을 이룰 게 분명하다.

 12 : 52. 제방 끝(군산역에서 출발한 구슬뫼길로 봤을 때는 수변길의 초입이 된다)에는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청암산이 좋다는 글자 조형물을 중심으로 대나무로 만든 대형 오리, 토끼와 거북이 등 여러 조형물을 배치했다. 가장 큰 볼거리로 꼽히는 가시연꽃은 아예 쉼터로 만들어놓았다.

 전국은 요즘 맨발걷기 열풍으로 뜨겁다. 맨발로 걸으면서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이 늘면서 각 지자체마다 각자의 특성에 맞는 맨발 길을 조성하느라 부지런을 떤다. 하긴 맨발 걷기가 발바닥의 신경을 자극해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체내 독소배출이나 불면증 개선, 치매 예방 등에 도움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싱족(earthing+)’까지 등장할 정도이니 군산시라고 해서 별 수 있겠는가.

 12 : 57. 저수지 아래는 양수장관리사무소가 들어서 있었다. 사무소 마당은 화장실까지 갖춘 대형주차장으로 꾸몄다. 시골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다소 생뚱맞게까지 보이지만, 이는 옥산저수지의 호반을 따라 내놓은 걷기 길이 그만큼 많이 입소문을 탔다는 증거이도 하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걸어온 구슬뫼길 전북천리길에 포함되어 있는 모양이다. 군산시의 걷기 여행길 중 서너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전북천리길은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적 가치, 이야기가 있는 길을 엄선해 선정한 명품 둘레길이이다. 14개 시·군에서 3-4개씩 선정했는데, 각 길들은 해안길·강변길·산들길·호수길로 구분되며 짧게는 두세 시간에서 길게는 대여섯 시간을 걷는다. 현재 44개 노선 405km의 길이 개통되어 있다.

 12 : 59. 서해랑길은 이제 옥구평야를 향해 달려간다. ‘새만금이 아닌 기존의 들녘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옥산면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오른쪽에는 옥산면 소재지인 옥산리의 여로마을이 있다. 왼쪽은 같은 옥산리인 대려마을’, 드넓게 펼쳐지는 석교들 너머에서는 군산시가지의 고층빌딩들이 삐쭉이 고개를 내민다.

 눈에 들어오는 석교들도 무척 넓었다. 옥산저수지에서 시작 경암동에서 금강에 합류되는 경포천이 만들어놓은 충적평야이다. 하지만 막힘없이 펼쳐지면서 지평선을 만들어내던 새만금의 모습은 아니다. 좀 넓다 싶으면 옹기종기 마을이 들어앉았고, 그 너머 산자락에서 들녘은 끝나버린다.

 탐방로는 농로를 빌려 쓴다. 대려마을 앞에서 잠시 차도로 올라서기도 하나, 몇 걸음 걷지 않아 다시 농로로 내려서버린다. 그 길의 양옆으로 옥구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지평선으로 대변되던 김제들녘,  징게 맹게 외배미들 만큼은 아니어도 걷고 또 걸어도 끝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눈이 모자라 다 볼 수 없다는 표현에 어울리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평야지대에서 수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래선지 농로 옆에는 수로가 항상 따라다니고 있었다. 수로의 크기가 조금씩 다를 뿐...

 이름도 생소한 송엽국(松葉菊)’이란다. 솔잎 모양의 입에 꽃은 국화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꽃말은 나태 또는 태만. 연분홍(자주색과 흰색도 있다)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꽃이 너무 아름다워 꽃에 푹 빠져서 나태해진다나?

 그제가 망종(芒種)’ 수확한 보리가 밥상에 올라오고 보리를 베어낸 논에 모내기를 한다는 절기다. 그래선지 들녘은 이미 모내기가 끝나간다. ‘고양이 손도 빌린다’, ‘부지깽이도 나와서 돕는다라는 속담까지 오가는 농번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니 지금이야 기계가 다 해주니 조금은 나아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 이맘때는 들판은 온통 사람들로 북적댔다. 어린 모를 찌고 모심기를 시작하면 한 손에 막걸리 주전자를, 머리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못밥을 이고 오던 우리네 어머니도 있었다. 이젠 그런 정다운 풍경들이 사라졌지만, 올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해 본다.

 13 : 37. 길고도 길었던 농로는 백서마을에 이르러서야 끝을 맺는다. 법정 동리인 당북리(堂北里)를 구성하는 여러 자연부락(원당·백석·한림·석교·건니법·동숙·뒤미티·들랑뒤·새터·서숙·서원뜸·옥석) 중 하나다. ! 걷다가 마주치는 상황, 즉 방향을 꺾는다던지, 옥구선 철도의 아래를 지난다던지 등 너절한 설명은 생략했다. 이 구간은 앱을 보거나, 서해랑길의 리본을 찾아가며 걷는 게 최상이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백석로를 따라간다. 2차선에다 심심찮게 차량이 오가지만 보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다.

 13 : 46. 국도 21호선(새만금북로)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하면 원당마을이다. 당북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에 불과하지만 역사는 모체인 당북리보다 더 오래됐다. ‘당북(堂北)’이란 지명이 원당(元堂)’의 북쪽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니 말이다.

 13 : 51. 당북초등학교.

 13 : 58. 잠시 후 지곡동 지구 아파트단지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1.84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의사의 권유를 핑계 삼아 거리를 단축했고, 그로 인해 생긴 여유시간을 느림의 미학으로 소비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어진 시간보다 40분이나 먼저 도착했지만...

 서해랑길(군산 54코스) 안내도는 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오른편에 세워져 있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삶은 저마다의 길을 가는 것이다그 길은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항상 선택이 수반된다어떤 길을 갈 것인지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인지누구와 함께 갈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오늘 우리 부부가 함께 걸었던 여정도 그런 결정 중 하나였다그 여정에 배려와 사랑이 넘쳤기에 훗날 인생을 복기할 때 아름다운 추억만 새록새록 돋아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