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둘레길 2코스(불암산역 – 불암산역)
일 시 : ‘26. 8. 5(토)
소재지 : 서울시 노원구 일원
코 스 : 불암산역→당고개갈림길→거인손바닥바위→학림사갈림길→동막골→덕릉고개→상계동나들이철쭉동산→불암산역(거리/시간 : 5.4km+1.2km, 실제는 7.37km를 3시간 30분에)
특징 : 서울 외곽을 따라 조성된 21개 코스, 156.5km 규모의 순환형 트레일이다. 도봉산·수락산·불암산·망우산·아차산·고덕산·일자산·대모산·우면산·관악산·호암산·안양천·노을공원·봉산·북한산 등 서울을 둘러싼 자연과 도시가 하나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
▼ 09 : 15. 불암산역(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지하철 4호선, 불암산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옛 이름은 ‘당고개역’, 고개 근처에 무사안녕을 빌던 당집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불암산역‘을 출발, 수락산과 불암산의 3부쯤 되는 산허리를 ‘∩’자 모양으로 돈 다음 다시 ‘불암산역’으로 되돌아오는 코스이다.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기 때문에 난이도가 ‘상’으로 분류되나 속도만 조금 떨어뜨리면 부담 없이 마칠 수 있다.

▼ 09 : 15. ‘상계로’를 따라 서·남진(상계역 방향)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고가철도를 왼쪽에 두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 09 : 19. 수락산 등산로의 기점이 되는 ‘당고개 공원’. 상계 3·4동 주민자치회에서 주관하는 ‘어울림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 당고개공원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덕암정(德巖亭)’. 조선시대 문인 서계 박세당 선생의 시판 등이 걸려 있다.

▼ ‘덕암정’ 맞은편에서 산길이 열린다. 산길은 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무척 가팔랐다. 당고개공원의 해발고도는 45m, 반면에 1코스와 2코스 경계지점인 ‘당고개 갈림길’은 160m나 된다. 450m를 걷는 동안 고도를 115m나 높이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 09 : 38. 1코스 종점이자 2코스의 시점인 ‘당고개 갈림길’. 이정표가 2코스 종점인 ‘상계동나들이 철쭉동산(이하 종점으로 표기)’까지의 거리를 5.4km로 적고 있다. 여기에 ‘불암산역’에서 시점(당고개갈림길)까지의 접근거리 0.7km와 종점(상계동나들이철쭉동산)에서 불암산역까지의 접근거리 0.5km를 더하면 2코스는 6.6km를 걷게 된다.

▼ 2코스는 급하게 고도를 낮추면서 시작된다.

▼ 계단을 내려서면 오르내림이 없는 반반한 길이 이어진다.

▼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나선형의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한 번 더 뚝 떨어진다.

▼ 등산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했다. 수월한 내리막(안락)이 있었으니 가파른 오르막(시련)이 나올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숨을 고를 수 있는 평탄한 길이 빠질 리가 없다. 거기에 손을 담글 수 있는 개울까지 보태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09 : 50. 집채만 한 바위가 ‘거인 손바닥’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암석이 물리적·화학적 풍화작용을 받으면 표면에 벌집이나 동굴 모양의 수많은 구멍이 숭숭 뚫리게 된다. ‘타포니(Tafoni) 현상’이라고 하는데 이게 손바닥을 닮았던 모양이다.

▼ 옛날 수락산에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산속의 동식물들을 보호해 주던 거인이 살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주변이 개발되면서 수락산이 파괴되고 정겨운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자 수락산을 버리고 떠나갔다나?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훼손되어가는 자연이 안타까워 만들어낸 이야기일 터다.

▼ 탐방로는 전형적인 오솔길의 형태를 보인다. 도심 속 일상을 벗어나 자연을 만끽하며 거닐기에 딱 좋은 산길이다.

▼ 작은 지능선 위에서 사거리(이정표 : 종점까지 5km)를 만났다. 이렇듯 2코스는 불암산역에서 올라오는 길과 수락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간다.

▼ 탐방로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수락산 산자락을 옆으로 째며 작은 지능선을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 푸른 나무 사이로 드는 햇살, 바스락거리는 흙길. 조용한 사색과 여유가 있는 낭만의 길이다.

▼ 10 : 00. 안내판이 ‘복천암(사찰)’이 있으니 정숙 보행을 해달란다. 길가에는 언제 달았는지도 모를 낡은 연등이 매달려 있었다. 이왕에 보시를 한 불심이니, 새것으로 교체까지 해주면 어떨까 싶다.

▼ 복천암부터는 ‘데크 길’이 계속되고 있었다. 산비탈에 길을 내다보니 오솔길마저도 만들기가 수월치 않았던 모양이다.

▼ 가끔은 숲이 열리고 있었다. 온전치는 않지만 솔가지 사이로 ‘불암산’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 ‘안전’은 현대인들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다. ‘서울둘레길’도 이들의 관심을 방관하지 않았다. 탐방로 곳곳에 ‘지능형 CCTV’를 설치해 시민들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 10 : 09. 산속 화장실도 ‘안심화장실’이란다. ‘112 비상통화 시스템’을 갖췄다.

▼ 공중화장실 근처에서 개울을 건넜다. ‘장마철’이 지났다는 기상청 발표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개울은 건천(乾川)에 가까웠다. 징검다리가 놓인 걸 보면 계곡도 깊지 않은 모양이다.

▼ 울창한 나무그늘 아래로 맑은 물줄기가 흘러간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삼복더위에 탁족(濯足)하기에는 부족함이 없겠다.

▼ 개울을 건너자 산길이 가팔라졌다. 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길가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 10 : 15. ‘덕릉로129가길’로 올라선다. 이정표(종점까지 4.1km)가 ‘학림사’로 연결되는 길임을 알려준다.

▼ 이 길은 ‘수락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를 겸한다.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등산안내도까지 세워놓았다.

▼ 10 : 16. 탐방로는 ‘학림사’ 쪽으로 50m쯤 올라가다 반대편 산자락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300m도 채 되지 않는 곳에 천년고찰, 특히 초의선사와 추사(김정희)가 해붕대사를 모시고 공(空)과 각(覺)을 주제로 열띤 법거량(法擧量)을 펼쳤던 곳인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 을해년(1815) 겨울, 눈길을 헤치며 ‘해붕선사’를 찾아가던 추사의 마음으로 100m쯤 올라갔을까? 경내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약사전(藥師殿)’이 얼굴을 내민다. ‘학림사 연혁’을 적은 안내판도 눈에 띈다. 하지만 추사나 초의선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이곳에서 주석하셨다는 ‘해붕선사’에 대한 얘기까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 100m쯤 더 들어가니 ‘학림사’가 산비탈에 기대듯 들어앉아 있다. 비탈을 깎아 계단식 터를 만들고 전각들을 들어앉혔다. 참! 수락산 등산로는 절간 앞(아래 사진에서 물통이 놓인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갈려나가고 있었다.

▼ 일주문을 겸하는 ‘해탈문(解脫門)’. 속세를 벗어나 불교의 진리세계인 불국정토로 들어선다는 종교적 의미를 담은 문이다. 그래선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꾸준한 선행과 실천을 상징)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지혜를 상징)가 좌우에서 내방객을 맞이한다. 하나 더. 벽에 사천왕상을 그려 넣은 걸 보면 ‘천왕문(天王門)’까지도 겸하는 모양이다.

▼ 해탈문을 거쳐 청학루로 이어지는 108 계단에는 눈, 귀, 입을 막고 있는 익살스러운 원숭이 석상 네 쌍이 세워져 있었다. 중생들에게 <사악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불교적 수행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단다. 마지막 원숭이는 만세를 부르는 형상이다. 모든 번뇌를 이겨내고 해탈한데 대한 환희의 발현이라나?

▼ 번뇌를 이겨낸 발길은 ‘청학루(靑鶴樓)’로 이어진다. 학포지란(鶴抱之卵, 학이 알을 품은)의 형국이라는 절간 유래를 살짝 비틀어 이름으로 삼았다. 참고로 학림사(鶴林寺)는 671년(문무왕 11)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절을 중수하고 머물렀을 정도로 성세를 누렸으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 1624년(인조 2) 무공(無空)이 중수하고 이후로도 여려 중·보수가 이루어지면서 오늘에 이른다. 대웅전과 설법전(청학루), 오백나한전, 삼성각, 약사전, 선불장(選佛場) 등의 전각으로 이루어져있으며, 학림사석불좌상과 학림사삼신불괘불도 등의 서울시 지정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 정서라도 깨뜨릴까 싶어 염불소리로 낭랑한 대웅전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니, 약사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집사람 때문에 어느 하나 꼼꼼히 살펴보지를 못했다. 옛 현인(賢人)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해붕대사가 하룻밤을 머물다 가는 추사에게 내렸다는 계송(偈頌)으로 대신해본다. <당신은 집 밖으로 나가고 나는 집안에 앉아있네. 집 밖에 무엇이 있겠냐마는 집안에도 본디 불조차 없다>

▼ 10 : 32. 서울둘레길(이정표 : 종점까지 4.0km)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갈 경우 ‘불암산역’에 이른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잠시지만 산길이 급하다싶을 정도로 고도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경사가 심한 곳에는 침목 계단을 놓아 안전을 도모했다.

▼ 10 : 38. 그러다 만난 개울에는 다리를 놓여 있었다. 중간에 널찍하니 공간을 만들고 쉼터를 들어앉힌 특이한 다리다

▼ 이후부터는 개울을 따라간다. 수량은 비록 작지만 오뉴월 물놀이에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 10 : 42. 탐방로에서 조금 비켜나있지만 약수터도 이용할 수 있다. 이정표(종점까지 3.8km)가 150m쯤 떨어진 곳에 ‘수암샘약수터’가 있음을 알려준다.

▼ 10 : 44. 작은 체육공원(‘石泉약수’ 근처)이 있는 삼거리. 이정표(종점까지 3.7km)가 이제 그만 능선으로 올라가란다. 계속해서 내려갈 경우 ‘석천공원’을 거쳐 ‘불암산역(1.2km)’으로 연결된다.

▼ 이후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나무계단 두 개가 연이어 나타난다.

▼ 10 : 50. 그렇게 50m쯤 고도(高度)를 높였을까 잠시지만 길이 평탄해지고 있었다.

▼ 2코스는 수락산 자락을 옆으로 째면서 간다. 때문에 작은 지능선을 수없이 오르내린다.

▼ 그러다보니 지능선과 지능선 사이에서 이렇게 뚝 떨어지기도 한다. 골짜기까지 내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아까도 얘기했듯이 산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수월하게 내려왔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

▼ 11 : 07. 고도를 낮추다보면 만나게 되는 ‘동막골 체육공원’. 숲속 곳곳에 정자와 벤치, 운동시설들을 배치했다. 참고로 ‘동막골’은 동쪽 주막(막사)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포천지역 사람들은 한양(서울)을 오갈 때 수락산 동편 길을 이용해 덕릉고개를 넘었다. 당시 장수원의 동쪽인 이 길목에 음식을 파는 주막과 막사가 있었는데, 나그네들이 ‘동쪽에 있는 막(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옹기나 독을 짓는 막사(가마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동쪽이 산으로 꽉 막힌 골짜기 형태라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 공원을 빠져나오면 ‘동막골(이정표 : 종점까지 2.8 km)’이다. 골짜기가 깊고 숲이 무성한 ‘동막골’은 일찌감치 유원지로 개발되었다. 때문에 ‘동막골유원지’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동안 행락시설은 모두 철거되고 대신 도심형 자연휴양림인 ‘수락 휴’와 ‘유아숲 체럼장’ 같은 공공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 탐방로는 이제 ‘덕릉로145길’을 따라간다. 2코스의 또 다른 특징은 차도를 걸어야하는 구간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너무 당황하지는 말자. 이정표만 잘 살펴본다면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 멋쟁이 담벼락. 녹음 짙은 숲으로 채워 넣어 흡사 울창한 숲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 11 : 16. 도시외곽순환고속도로 아래. 이정표(종점까지 2.4km)가 산자락을 가리킨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가면 불암산역(1km)으로 연결된다.

▼ 산길은 급할 것 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고도를 높여간다.

▼ 11 : 28. 능선 조금 못미처의 첫 삼거리. 이정표(종점까지 2.0km)가 수락산 정상(4km)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뉨을 알려준다.

▼ 11 : 30. 잠시 후 능선(이정표 : 종점까지 1.8km)으로 올라섰다. 수락산과 불암산을 잇는 등산로가 능선을 따라 나있다. 젊은 시절 ‘불·수·도·북’을 종주하면서 걸었던 추억의 옛길이다.

▼ 11 : 33. 덕릉고개. 서울과 경기(남양주시)를 나누는 고갯마루이자 불암산과 수락산을 잇는 능선의 안부이기도 하다. ‘덕릉’이란 지명은 요 아래 있는 선조(宣祖)의 친부인 덕흥대원군 묘에서 유래했다. 선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왕릉인 ‘덕릉(德陵)’으로 추존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이에 선조는 동대문 밖의 나무장수들에게 ‘덕릉을 넘어왔다’고 말하는 사람의 땔감을 비싸게 사주고 술까지 대접하도록 했다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덕릉’으로 부르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애물덩어리로 취급되는 임금이지만 효심 하나만은 깊었던 모양이다.

▼ 신작로(新作路, 덕릉로)가 나면서 끊겼던 ‘덕릉고개’는 현재 ‘생태육교’가 놓여있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파헤쳤던 능선을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며 다시 이어놓았다고나 할까? 생태육교를 건너면 ‘T’자형 삼거리(이정표 : 종점까지 1.7km), 서울둘레길은 오른쪽으로 간다. 참! 반대 방향은 불암산 정상으로 연결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서울둘레길’은 이제 ‘불암산 둘레길’을 따라간다. 2010년 ‘북한산둘레길’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로 생긴 ‘불암산둘레길’은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정상과 산비탈을 타고 도는 ‘하루길(10km)’과 공릉동 일대 역사·문화 중심의 나절길(8km)’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둘레길 2코스는 이중 ‘하루길’의 일부(1코스) 구간을 빌려 쓴다.

▼ 11 : 40. ‘연인바위’란다. 바위의 생김새를 이용해 스토리텔링을 해놓았다. 사람 모양의 바위가 둘로 나누어져 서로 붙어 있는 모습이 마치 사랑하는 두 남녀가 서로 포옹하고 있는 것 같다나?

▼ 이름처럼 바위 둘이 애틋한 정을 달래고 있다. 생김새도 사람의 형상을 쏙 빼다 닮았다. 얼마나 그립고 애틋했으면 저렇게도 딱 붙어있을까 싶다.

▼ ‘불암산’ 구간은 ‘수락산’보다 상대적으로 경사가 적은 오솔길이 이어진다.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 설악산의 ‘여심폭포’를 떠올리게 만드는 벼랑이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비라도 내릴라치면 비슷한 풍경을 만들어 낼 것 같아서이다. 바위틈에서는 물도 떨어지고 있었다. 생수병 하나쯤은 금방 채울 수 있겠다.

▼ ‘불암산(佛巖山)’도 산이다. 그것도 높이가 508m나 된다. 수락산보다 경사가 적다고는 해도 만만히 볼 일은 아니다. 가끔은 가파른 오르내림을 만나기도 한다.

▼ 11 : 45. 밋밋한 흙길을 걸어온데 대한 보상이라도 주려는 듯 느닷없이 거대한 바위벼랑이 나타난다. 그 벼랑 위에는 ‘데크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 난간에 서자 우측으로 도봉산의 봉우리들과 한북정맥 산줄기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발아래로는 도시외곽순환고속도로가 지나간다. 마음 놓고 달려대는 차량들이 내지르는 굉음이 이곳까지 들려오는 듯하다.

▼ 11 : 45 – 12 : 05. 전망대는 벤치를 놓아두지 않았다. 안전 등 뭔가를 이유로 쉼터 기능을 배제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주변이 바위로 되어있어 쉬어가기 딱 좋았다. 덕분에 우리 부부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 탐방로는 바위절벽 아래로 이어진다. 수직의 바위벼랑에 기대듯 계단을 놓았다.

▼ 절벽 아래는 ‘채석장’ 터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서울의 주요 석조건축과 토목사업을 위해 바위를 캐던 현장이다. 산림 복구로 현재는 울창한 숲으로 되돌아와 있지만 인간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던 아픈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안내판은 ‘작은 채석장’으로 적고 있었다. 1코스에 있는 ‘채석장’과 구별하기 위한 작명이지 싶다. 1코스의 것보다 규모가 한참이나 작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방치하듯 놓아둔 바위덩어리가 가히 예술이다. 저걸 보고 추상예술(Abstract Art)이라고 하나?

▼ 벼랑에는 채석을 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벼랑은 단단하기로 유명한 ‘화강암’이다. 조선시대 궁궐의 대명사인 경복궁 경회루의 주춧돌이 불암산의 돌이다. 뿐만 아니라 문정왕후의 태릉, 명종의 강릉 등 조선왕릉을 장식하고 있는 혼유석, 병풍석, 난간석 역시 불암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 돌탑을 쌓아올렸는가 하면 돌담을 두른 공간도 눈에 띈다. 돌을 채굴하던 거친 공간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려는 노력의 결과물일 것이다.

▼ 길을 이어간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인데도 거대한 바위들이 산자락에 널려있다시피 했다.

▼ 이즈음 타포니 현상의 바위들을 만날 수 있다. 아까 수락산에서 만났던 ‘거인손바닥 바위’에 견줄 수는 없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 바위가 오랜 세월 지질학적 풍화작용을 겪으면 벌집이나 해골,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구멍이 숭숭 뚫리는 형상으로 변한다. 그런데 요건 손가락을 닮았다. 아까 2코스를 시작하면서 만났던 ‘거인 손가락바위’를 쏙 빼다 닮았다.

▼ 이후로도 길은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길은 사색을 즐기며 걸어도 좋을 만큼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경사가 심하다싶으면 나무계단을 놓았고, 미끄러운 곳에는 어김없이 야자매트를 깔아놓았다. 힘은 들지만 안전하게 산행을 마칠 수 있다는 얘기다.

▼ 수락산 구간과 마찬가지로 불암산 구간도 작은 지능선을 수없이 넘나든다.

▼ 12 : 23. 그렇게 지능선 두어 개를 넘자 물기 하나 없는 ‘건천(乾川)’이 나타난다. 200m쯤 떨어진 곳에 ‘칠성암(사찰)’이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종점까지 900m)도 눈에 띈다.

▼ 잠시지만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위에서 얘기한 건천을 오른쪽에 끼고 내려간다고 보면 되겠다.

▼ 12 : 27. 이정표(종점까지 0.8km)가 다시 오솔길로 들어가란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갈 경우 불암산역(0.9km)로 연결된다.

▼ 산길은 완만한 오름짓을 한다. ‘도시와 자연을 잇는 생태길’이라는 2코스의 테마에 걸맞게 울창한 숲속을 느긋하게 오른다.

▼ 12 : 32. 탐방로가 거대한 바위를 에돌아가고 있었다. 앞서 다녀간 이들이 ‘마당바위’로 적고 있는 지점이다.

▼ 상부는 일부러 깎아놓은 것처럼 평평했다. 무리지어 쉬어가도 될 만큼 공간도 넓었다. 나무 난간을 두르고 벤치를 놓아 쉼터로 만들어 놓은 이유일 것이다.

▼ 또 다시 나타나는 오르막길. 1코스에 이어 2코스도 난이도가 ‘상’으로 분류된다. 앞서 다녀간 이들도 둘레길이니 순할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라고 했다. 오르내림이 가파른데다 그 폭도 상당히 크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이에 겁을 잔뜩 먹은 우리 부부는 오뉴월 삼복더위가 끝날 때까지 답사를 기다려야만 했다. 7월 말 1코스를 걸으면서 무더위에 무척 고생을 했던 기억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종점을 코앞에 두었는데도 버겁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급경사 오르내림이 많이 있었지만 까짓 속도만 조금 떨어뜨리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 12 : 38. 주상절리를 닮은 바위가 누워있다. 얼핏 시멘트 구조물 같기도 한데, 바위가 옳다면 주상절리가 분명하다.

▼ 12 : 40. 울창한 숲 너머로 민가가 엿보이는가 싶더니 숲속 작은 공원이 꾸며져 있었다. 짙은 그늘 아래 벤치를 놓았는가 하면 공들여 쌓아올린 돌탑도 눈에 띈다.

▼ 잠시지만 ‘덕릉로126사길’을 따라간다. 불암산 자락에 위치한 대표적인 달동네 중 하나인 ‘희망촌’이 아닐까 싶다. 1960-1970년대 도심 철거민들이 이주해 오면서 형성된 정착촌으로, 인근의 중계동 백사마을과 함께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달동네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 희망촌은 무허가 건축물이 전체의 90%를 차지한다고 했다. 토지는 서울시나 산림청 소유인 국공유지가 절반에 가깝단다. 집은 있지만 땅이 없는 특이한 소유구조와 40도에 이르는 급경사지, 거기에 자연녹지라는 용도규제까지 겹치면서 많은 집들이 저렇게 변했다. 지붕 너머로 나타나는 ‘수락산’의 아름다운 자태처럼 하루 빨리 재개발이 되어 행복이 넘치는 마을로 변했으면 좋겠다.

▼ 12 : 43. 골목길을 100m쯤 걸었을까 탐방로는 숲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 숲속은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짙은 그늘 아래 벤치와 평상을 놓아 주민들의 쉼터로 만들었다.

▼ 산자락에는 철망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야생 멧돼지가 출몰할 수 있으며 대처법까지 게시해 놓았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상계동(나들이) 철쭉동산’이다. 2005년 불법경작지 정비를 시작으로 백철쭉·자산홍 등 3만 주를 식재하면서 틀을 갖췄고, 2021년에는 철쭉 사이로 산책로를 내고 전망대, 휴게쉼터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 상계동 주민들은 자신의 뜨락처럼 드나든다고 했다. 가볍게 걸을 수 있도록 철쭉 사이로 산책로를 냈는가 하면, 서로 어울리며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휴게시설까지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철쭉이 만개한 봄철은 두말할 것도 없다.

▼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좋은 편이다. 지대가 낮은 탓에 아파트 숲에 많은 부분이 가려버리기는 했지만 도봉산의 헌걸찬 암릉을 눈에 담을 수 있다.

▼ 12 : 52. 철쭉동산 끄트머리에 있는 종점에는 코스가 변경됨을 알리는 여러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정표(화랑대역 6.9km/ 당고개공원갈림길 5.4km)가 접근 지점인 ‘불암산역’까지 500m쯤 떨어져 있음을 알려준다.

▼ ‘불암산역’으로 가는 길. 철쭉동산 아래서 덕릉로124길, 덕릉로126가길을 연이어 타고 가면 된다.

▼ 13 : 10. 지하철 4호선 ‘불암산역’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오늘은 7.37km를 3시간 30분에 걸었다. 정규 코스(5.4km)에 시점과 종점까지의 접근거리(1.2km), 그리고 학림사까지 다녀온 거리를 합쳤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줬습니다. 덕분에 서로를 도와가는 가운데 사랑을 한층 더 키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집사람을 선택한 것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을 움직인 그녀만의 특별한 장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녀도 나만의 특별한 점이 있어 저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옛 현인들은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살아갑니다. 퍼즐처럼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 부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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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남인도(South India)–타밀나두(Tamil Nadu)-탄자부르(Thanjavur)-브리하디스와라 사원(Brihadisvara Temple)
여행일 : ‘26. 3. 23(월) - 3. 28(토)
세부 일정 : 첸나이→마하발리푸람→퐁디셰리→탄자부르→마두라이→코친
특징 : 11세기 초 촐라왕조의 ‘라자라자 1세’가 세운 힌두교 사원. 드라비다 건축양식의 걸작이자 최고 정점으로 꼽히며, 66m 높이의 거대한 탑(Vimana)과 정교한 석조 조각들이 장관을 이룬다. ‘촐라왕조의 대사원들(Great Living Chola Temples)’이란 이름으로 후기 촐라시대의 다른 사원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 남인도(South India), 5개 주(州)와 1개의 특별자치구(프랑스령이었던 ‘푸두체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현대차가 진출해있는 ‘타밀나두(Tamil Nadu)’와 인도 향신료특구 ‘케랄라(Kerala)’를 다녀왔다.

▼ 타밀나두(Tamil Nadu). 인도 남부의 대표적인 제조업 중심지로 자동차·전자·중공업 산업기반과 항만·물류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타밀나두 주의 중심부(주도인 첸나이에서 남쪽으로 320Km 지점)에 위치한 ‘탄자부르’는 역사 깊은 고도(古都)로 과거 강력했던 중세 촐라제국의 수도였다. 당시 촐라제국은 인도 전역, 실론 일부, 몰디브, 래카다이브까지 지배했다.

▼ ‘브리하디스와라 사원(Brihadisvara Temple)’의 동쪽 입구. ’Brihadisvara‘는 산스크리트어 ‘브리하트(Brihat, 위대한)’와 ‘이스와라(Isvara, 최고신)’의 합성어라고 한다. 주신인 우주의 위대한 지배자 시바 신에게 받쳐진 신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사원 조감도. 가로 120m 세로가 240m의 부지에 15개의 건축물이 있다. 본전인 ‘브리하디스와라 사원’ 말고도 6개의 부속 신전(shrine)이 더 있음을 알 수 있다.

▼ 탑문을 통해 사원 안으로 들어간다. 이 문은 ‘마라타 게이트(Maratha Gate)’로 불린다. 17-19세기 이 지역을 통치하던 마라타 왕조가 기존 사원 외곽에 방어용 성벽을 쌓아 요새화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추가된 정문이다. 그건 그렇고 경비초소에 힌두 신상이 들어앉았다. 자리를 빼앗긴 경비원은 간이 의자, 그것도 뙤약볕 아래로 쫓겨나 있었다.

▼ 튼튼하게 쌓아올린 성벽이 신(神)과 속(俗)을 구분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었는지 성벽 아래로 해자(垓字)까지 둘러놓았다.

▼ 안으로 들어가면 성벽이 이중으로 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두 번째 문인 ‘케랄란타칸 고푸람(Keralantakan Gopuram)’. 10세기 사원을 처음 건축한 촐라 왕조의 ‘라자라자 1세(Rajaraja I)’가 체라 왕조(케랄라 지역)와의 전쟁 승리를 기념해 세운 사원 정문이다. 참고로 ‘케랄란타칸’은 이 사원을 지은 ‘라자라자 1세’의 별칭 중 하나라고 한다.

▼ ‘케랄란타칸 고푸람’ 상부. 첫 번째 문과의 사이가 너무 좁아서 상하로 나누어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각양각색으로 묘사된 시바 상들이 현란하기 짝이 없다.

▼ ‘케랄란타칸 고푸람’ 뒷면. ‘고푸람(Gopuram)’이란 힌두교 사원 건축에서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커다란 출입문 또는 탑문을 말한다. 후기로 갈수록 본당 건물보다도 고푸람을 더 크게 지음으로써 사원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삼았다.

▼ ‘케랄란타칸 고푸람’ 안내판. 코푸람 대신 ‘티루바살(Tiruvasal)’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 타밀어로 ‘신성한 문(Sacred Gate)’을 의미한다니,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을 얼마만큼 신성시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세 번째 문인 ‘라자라잔 고푸람(Rajarajan Gopuram)’은 그 자체만도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크기도 크기지만 문루에 새겨진 각종 문양들이 신비롭게 다가온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거대한 돌에 각양각색으로 새겨놓은 시바 신의 춤추는 모습이다. 유연한 자세로 자유롭게 춤을 추는 시바 신의 모습은 어쩐지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해준다.

▼ 힌두사원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라자라잔 고푸람 앞에 신발 보관소가 있는데, 혼잡해서인지 현지인들은 입구에다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던지고 갔다. 하지만 자칫 신발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귀띔이 있었기에 신발장에다 넣어두기로 했다. 몇 푼의 보관료까지 물어가면서. ‘영혼의 자유’를 지향하는 인도에서 신발 하나까지도 놓지 못하는 이방이라고나 할까?

▼ ‘라자라잔 고푸람’은 신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다. 그래선지 3개의 문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 왕의 이름에 걸맞는 자태라 하겠다. 아치형 입구 양옆에는 석조 경비병, 즉 ‘드바라팔라(Dvarapala)’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슴이 봉긋한 저 경비병이 ‘드워팔리카(Dwarapalika, 여성 수문장)로 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오해일까?

▼ 3개 층으로 나누어진 문루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주로 시바와 파르바티(Parvati)의 결혼, 마르칸데야(Markandeya)를 보호하는 시바, 아르주나(Arjuna)가 시바 신으로부터 파슈파티 아스트라(신성한 무기)를 받은 장면 등 시바의 생애를 묘사한 조각들이라고 한다.

▼ ‘라자라잔 고푸람’ 뒷면.

▼ 경내로 들어가면 화강암과 벽돌로 지은 ‘브리하디스와라 사원(本殿)’이 반긴다. 드라비다 양식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내부에 시바 신을 모시는 성소(聖所)가 있다. 드라비다 양식(Dravidian style)이란 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인도 남부에서 크게 번성한 전통 힌두교 사원 건축양식을 말한다. 북인도의 나가라(Nagara) 양식이 부드러운 곡선형 탑을 강조하는 반면, 남인도의 드라비다 양식은 웅장한 피라미드형 탑과 정교한 원색 조각상이 빽빽하게 들어찬 화려한 구조를 자랑한다.

▼ 본전인 ‘브리하디스와라 사원’과 예닐곱 개의 부속 신전을 회랑(回廊)이 둘러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회랑은 정교하게 조각된 수많은 석조 기둥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어 압도적인 공간감과 대칭미를 자랑한다. 가이드는 저 회랑 역시 드라비다 건축 양식의 걸작으로 꼽힌다고 했다.

▼ 반대편 회랑. 회랑 내부를 따라 걷다보면 ‘시바 링가(Shiva Linga)’ 무리와 나야카(Nayaka) 왕조 시대의 다채로운 벽화들을 구경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정보를 얻지 못했던 필자는 이를 놓치고 말았다.

▼ ‘브리하디스와라 사원(本殿)’의 앞에 ‘난디 만다팜(Nandi Mandapam)’이 있었다. 시바 신의 탈것(Vahana)인 신성한 황소 ‘난디(Nandi)’의 조각상을 모셔둔 전각이다. 주성소에 있는 시바의 상징인 ‘링가(Lingham)’를 정면에서 바라보도록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의 정면에 배치해 놓았다.

▼ 사원 본전은 11세기 촐라왕조 시대에 지어졌다. 하지만 난디를 감싸고 있는 이 화려한 만다팜 구조물은 16-17세기 나야카(Nayaka) 왕조 시대에 추가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천정에는 마라타왕조 시대의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 난디상은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 바위를 깎아 만들었단다. 가로 약 6m, 높이 약 4m 크기이며 무게는 약 25톤에 달한다. 인도에서 두 번째로 큰 난디상이라고 한다.

▼ ‘난디 상’ 앞에서는 힌두교 사두(sadhu)가 끊임없이 힌두 주문을 중얼거린다. 웃통을 벗은 채 음유시인이 노래하듯 암송하고 있다. 울타리 너머는 난디에게 공양물을 바치려는 신도들로 붐빈다. 저마다 가져온 공양물을 두 손으로 받들고 기도를 올리며 사두에게 건네준다. 사두는 건네받은 공양물 중 꽃은 난디 상에 뿌리고 다른 공양물은 난디상 주변에 걸어 놓거나 밑에 놓아둔다.

▼ ‘난디 만다팜’ 안내판. ‘난디 상’이 원래의 것이 아니라 나야카(Nayaka) 시대에 새로 만들어졌음을 알려준다.

▼ 신도들은 이제 시바 신에게 경배하기 위해 ‘비마나’로 향한다. 비마나(vimana)란 힌두 사원의 가장 신성한 장소인 ‘성소(Garbhagriha)’와 그 위에 솟아오른 높은 탑 구조를 의미한다. 높이 66미터에 달하는 ‘비마나’는 시바신이 거처를 하고 있다는 카일라스 산(Mt. Kailasa)을 유추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 ‘만다팜(mandapam)’으로 들어간다. 사원의 입구와 본전(성소) 사이에 위치한 기둥이 있는 커다란 홀(hall)로, 성소인 ‘가르바그리하(Garbhagriha)’로 들어가기 전 신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준비하고, 종교 의식을 치르거나, 찬가와 전통 무용을 바치던 공공 집회 공간이다.

▼ 입구 근처에서 ‘칼라 바이라바(Kala Bhairava)’로 여겨지는 신상을 만날 수 있었다. 주신인 시바(Shiva)의 가장 강력하고 두려운 분노의 화신(아바타)으로 신자들은 ‘시간의 파괴자’이자 ‘죽음을 정복한 자’로 숭배한다. 산스크리트어 ‘Bhairava(무시무시한 자)’와 ‘Kala(시간 또는 검은색)’의 합성어이다.

▼ ‘락슈미(Lakshmi)’로 여겨지는 신상도 눈에 띈다. 부와 번영, 행운,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가장 중요한 여신 중 한 명이다. 힌두교의 주신 중 하나인 비슈누의 배우자이며, 물질적인 풍요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취와 번영까지도 상징한다.

▼ 천정에 매달린 저 고리의 정체는 뭐지? 보초를 서고 있는 비둘기에게 물어봤지만 마이동풍이다.

▼ 이젠 내부를 둘러볼 차례이다. 여러 개 홀과 복도(무카 만다파, 마하 만다파, 아르다 만두파)가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비마나로 이어진다. 하지만 어두컴컴해서인지 특별한 볼거리를 만나지는 못했다. 아니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마당을 걷는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취해 놓쳤는지도 모르겠다.

▼ 성소인 가르바그리하(Garbhagriha)에는 5미터 높이의 링감(lingam, 시바 신을 상징하는 남성 성기 모양의 기둥)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힌두교도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눈요기조차 못했다. 참고로 ‘가르바그리하(Garbhagriha)’란 힌두 사원의 중심에 있는 가장 신성한 탑 내부의 성소(지성소)를 뜻한다. 산스크리트어 ‘가르바(Garbha, 자궁)’와 ‘그리하(Griha, 집)’의 합성어이다. 신도들이 이 공간을 바라보거나 돌면서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상징한다.

▼ 그 아쉬움을 ‘아르티 거울(Aarti Mirror)’로 달래본다. 성소(Garbhagriha) 내 신상 뒤나 주변에 배치하는 거울이니 시바 신의 ‘링감’을 상념으로라도 품고 있을 줄 누가 알겠는가. 참고로 ‘아르티(Aarti)’는 힌두교의 가장 대표적인 예배(푸자) 형태로, 신에게 불(빛)을 바치며 찬양하는 의식이다.

▼ 아쉬움을 안고 성소를 빠져나온다. 남쪽 출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 출구 양쪽에도 ‘드바라팔라(Dvarapala)’가 배치되어 있었다. 힌두교 사원의 출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이다. 우리나라 사찰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강역사나’ ‘사천왕’은 이 드바라팔라 문화가 동아시아로 건너와 토착화된 형태다. 하지만 무섭디무서운 금강역사와는 달리 드바라팔라는 애교스러운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다.

▼ 높이가 66m에 이른다는 화강암으로 만든 비나마(본당)는 흡사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탑을 이루고 있다. 촐라왕조(846-1270)는 985년에 왕위를 계승한 ‘라자라자 1세’ 때부터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는 카웨리 강 부근의 작은 왕국에서 군대를 육성해 북쪽의 찰루키아와 체라, 그리고 남쪽의 판디아 왕조를 물리치고 스리랑카까지 정복해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브리하디스와라 사원도 이 시기에 축조됐다고 한다.

▼ 비마나(本殿) 상부는 13층의 피라미드 형태로 각 층마다 조각 장식을 하였으며, 직선적인 윤곽으로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맨 꼭대기에 올려놓은 ‘시카라(sikhara, 힌두사원의 첨탑)’는 무게가 81.3톤이나 된다고 했다. 실로 엄청난 무게다. 천 년도 전, 기중기나 운송장비가 없던 시절에 저렇게 무거운 돌을 저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올렸을까? 가이드는 경사로를 가설해서 끌어올렸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 인원과 물자가 동원되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생긴 석조사원은 전체가 아름다운 조각으로 새겨져 있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 눈요깃거리만 놓고 본다면 단순한 바윗덩어리에 불과한 피라미드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나다.

▼ 이젠 경내를 둘러볼 차례다. 동서 중심축을 따라 2개의 고푸람, 난디 사당, 2개의 만다파(예배당), 안타라라(전실), 비나마(본당)가 일직선상으로 늘어서 있다. 이들을 아름다운 회랑이 둘러싸고, 그 사이사이에 ‘Shrine’이나 ‘Mandapa’ 같은 부속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 첫 만남은 ‘가네샤 사당(Ganesha Shrine)’이다. 지혜와 번영의 신이자 시바와 파르바티의 아들인 가네샤(Ganesha)를 모시는 사당으로 18세기 말 마라타 왕조의 ‘사라보예 왕(Serfoji II)’이 세웠다.

▼ 안에 가네샤 신상을 모셨다는데 저 아저씨가 하도 오래 기도를 하는 탓에 사진을 찍는데 실패했다.

▼ ‘카루부르 데바 사당(Karuvur Devar Shrine)’은 내부 사진만 올린다. ‘카루부르 데바’는 남인도 힌두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적 스승이자 시인, 연금술사였다. 타밀어 찬가인 ‘티루비사이파(Tiruvisaippa)’를 지어 바친 아홉 명의 사제 중 한 명이기도 하다.

▼ 수브라흐마냐 사당(Subrahmanyam Shrine). 전쟁의 신인 무루간(Murugan)을 모시는 사당으로 16-17세기 나야크 왕조(Nayak dynasty) 때 지어졌다. 참고로 ‘수브라흐마냐’는 시바 신의 둘째 아들이다.

▼ 드라비다 건축과 조각 예술의 최고 정점으로 꼽힌다. 외벽과 기둥 전체가 미려한 석조 조각으로 뒤덮여 있다. 신화 속 무루간이 타고 다니는 공작새(바하나)와 무루간의 다양한 무기, 영웅적 모습을 외벽에 입체적으로 조각해 놓았다.

▼ ‘수브라흐마냐 사당’ 입구. 사당으로 들어가는 만다팜(Mandapam) 기둥들에 물고기나 신화 속 동물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는데 문이 닫혀있어 구경할 수는 없었다.

▼ 나타라자 만다파(Nataraja Mandapa). 춤추는 시바 신인 ‘나타라자’를 모시기 위해 후대에 추가로 건립된 전용 예배당(hall)이다.

▼ 찬디케스와라 사당(Chandikeshwara Shrine). 시바 신의 가장 충직한 수행자이자 박티(Bhakti) 운동의 성인인 ‘찬디케스와라’에게 헌정된 사당이다. 라자라자 1세가 안뜰에 세운 유일한 사당으로 촐라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 시바 사원을 방문한 신도들은 마지막에 찬디케스와라 사당을 찾아 예배를 마무리 한다. 본당(비마나)과 연결되었나 싶을 정도로 붙어있는 이유이다. 어린 ‘찬데슈바라’가 모래로 시바의 상징인 ‘링감’을 만들고 우유를 바치며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화가 난 아버지가 이를 발로 차 부수자 격분하여 아버지의 다리를 잘랐다는 전설이 있다. 그의 절대적인 헌신에 감동한 시바 신이 현신하여 그를 축복하고 ‘내 사원에 오는 모든 신도는 너를 거쳐 가야 한다’며 사원 관리자의 지위를 주었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사원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사당 앞에서 손뼉을 치거나 옷자락을 터는 행위를 한단다.

▼ 이쯤해서 투어를 마치기로 했다. 이밖에도 바라히(Varahi, 멧돼지 머리의 여신), 암만(Amman, 시바의 아내인 ‘파르바티’를 모신다) 등의 사당(shrine)과 두어 개의 예배당(Mandapa)을 더 둘러보았음은 물론이다.

▼ ‘라자라잔 고푸람(Rajarajan Gopuram)’을 빠져나가면서 투어를 종료한다. 참! 이왕에 왔으니 ‘힌두교’의 기초 상식 하나쯤 알고 가자.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마(창조), 비슈누(유지와 보존), 시바(파괴) 삼주신 중 ‘시바’가 가장 인기가 많다고 했다. 다른 종교는 창조신이 가장 강력하면서도 인기가 높은데, 힌두교는 파괴의 신이 더 인기가 높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파괴란 창조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마치 대홍수 이후 세계가 재건되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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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남인도(South India)–퐁디셰리(Pondicherry)-오로빌(Auroville)
여행일 : ‘26. 3. 23(월) - 3. 28(토)
세부 일정 : 첸나이→마하발리푸람→퐁디셰리→탄자부르→마두라이→코친
특징 : 퐁디셰리 인근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대안적 생태계획 공동체이다. 1968년 인도의 영적 스승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 1872-1950)‘의 철학을 바탕으로 프랑스 출신의 ’미라 알파사(Mirra Alfassa, 1878-1973)‘에 의해 설립되었다. 국적·정치·종교·인종을 초월하여 인류의 평화와 조화로운 상생을 실험하는 독특한 대안 사회이다.
▼ 남인도(South India), 5개 주(州)와 1개의 특별자치구(프랑스령이었던 ‘푸두체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현대차가 진출해있는 ‘타밀나두(Tamil Nadu)’와 인도 향신료특구 ‘케랄라(Kerala)’를 다녀왔다.

▼ 첸나이 남쪽 120Km쯤에 위치한 연방 직할지 ‘퐁디셰리(Pondicherry)’는 푸두체리(Puducherry)의 행정 중심지로 17세기에서 18세기 프랑스령 인도의 수도였다. 이후로도 비군사적 식민지로 영국령 인도 속에서 프랑스령으로 남아있었다.(지도에서 ‘쿠달로르’의 바로 위, 움푹 파인 부분).

▼ ‘오로빌(Auroville)’에 도착했다. 퐁디셰리에서 10km가량 떨어진 코로만델 해안 인근에 위치한 오로빌은 ‘이상적인 인간의 삶’을 실현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이다.

▼ ‘전망대 가는 길’ 지도. 방문자센터(Information·Exhibition)를 거쳐 가도록 동선(動線)이 짜여있는 모양이다.

▼ ‘방문자센터’로 가는 길. 다양한 안내판들이 길손을 반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곁눈질이라도 해가면서 걸어보자.

▼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와 ‘마더(The Mother=Mirra Alfassa)’가 ‘스리 오로빈도 아쉬람(Sri Aurobindo Ashram)’에서 수행한 통합 요가 연구에서 시작되었단다.

▼ ‘오르빌’은 1988년에 입법화되었나 보다. 단순한 물질적 표현이나 집단적인 인간 현상을 넘어서는 법안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부여된다나? 인간 의식 범위를 넘어선 무언가. 미래를 향한 화살과 같은 아이디어를 다루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오로빌 헌장’, ‘인류통합 메시지’ 등 다양한 안내판이 줄줄이 나타난다.

▼ 숲속으로 길이 나있다. 하지만 설립 초기에는 풀 한 포기 없던 메마르고 척박한 황무지였다고 한다. 주민들이 직접 수백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울창한 생태 숲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 앗! 자전거가 열매 노릇도 하나보다. 맞다. 오로빌에서 자전거는 단순한 여가 수단이 아닌, 지속 가능한 생태마을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교통수단이라고 했다. 방문자센터에서 저렴한 가격(일일/주간)으로 대여할 수 있다.

▼ 5분쯤 숲길을 걷다보면 ‘방문자 센터(Visitor Center)’에 이른다. 오로빌(Auroville)을 여행할 때 가장 먼저 들러야 하는 곳이자 꼭 거쳐 가야 하는 곳이다. 오로빌의 철학과 역사를 배우고, 하이라이트인 마트리만디르(Matrimandir) 전망대 입장권을 받을 수 있는 공식 장소이다.

▼ ‘방문자 센터(Visitor Center)’ 지도.

▼ 센터에서 만난 인도 젊은이들.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꽤 많은가 보다. 한국 방문이 꿈이라며 이것저것 많이도 물어본다. 하긴 이 젊은이들에게 한국 방문은 동경의 대상일 수도 있겠다. 문득 비자가 나오지 않아 ‘Export consultation meeting’에 참석할 수 없다며 하소연하던 인도 상인이 떠오른다. 2012년일 것이다. 그만큼 한국 비자는 발급받기 어렵기로 소문나있다.

▼ 안으로 들어가자 ‘오로빌 헌장(Auroville Charter)’이 눈이 들어온다. 종교·정치·국적을 초월, 온 인류가 평화와 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국제공동체를 지향하는 오로빌의 4대 헌장 전문을 게시해 놓았다.

▼ 오로빌의 정신적 뿌리인 인도의 사상가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와 설립자인 그의 영적 동반자 ‘마더(The Mother, 미라 알파사)’의 생애 및 사진, 그리고 오로빌의 설립 배경, 역사, 비전을 담은 각종 영상과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다.

▼ 오로빌에 대해 빠른 시간 안에, 또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니 짬을 내볼 일이다. 영어가 서투른 필자는 처삼촌 벌초하듯 곁눈질로 살펴볼 수밖에 없었지만.

▼ 누가 뭐래도 오로빌의 얼굴마담은 ‘마트리만디르(Matrimandir)’이다. 그래선지 미니어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었다. 막대한 자본을 들여 만든 황금빛 원형구조물, 기능은 명상센터이다. 구체를 중심으로 주변에 꽃잎(Petals)처럼 생긴 12개의 거대한 구조물이 감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들 꽃잎은 각각 성실·겸손·감사·용기 등 ‘우주적 어머니’의 12가지 덕목을 상징하는 독립된 명상실로 채워져 있단다.

▼ 오로빌의 중심이자 영혼으로 불리는 거대 황금빛 명상 돔 ‘마트리만디르’의 구조와 긴 건축 과정, 그 안에 담긴 영적 진화의 철학을 시각적으로 설명해 준다.

▼ 실제 건축물은 높이 29m에 직경이 36m인 타원형에 가까운 구체이다. 외벽은 금박을 입힌 수천 개의 원형 디스크(접시)로 뒤덮여 있어 땅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황금 태양 혹은 우주적 알(卵)을 연상시킨다.

▼ 내부는 외부의 소음과 단절된 완벽한 침묵의 공간이라고 한다. 순백의 대리석으로 마감된 원형 홀에 12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 창립자인 ‘마더’가 직접 썼다는 축복 메시지와 서명. 1971년 2월 21일 새벽, ‘마트리만디르’ 건설의 시작을 알리는 초석이 놓이던 역사적 순간을 담았다. ‘마트리만드리’가 오르빌의 신성함에 대한 열망이 살아있는 상징이 되도록 하자나?

▼ 자신의 의식을 찾아가는 ‘명상의 방’. 정중앙에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 크리스탈 유리 구체(지름 70cm)가 놓여 있다고 한다. 천장 중앙의 개구부를 통해 들어오는 단 하나의 자연 햇빛 줄기가 정확히 이 크리스탈 구체를 수직으로 내리쬐도록 설계되어 있어, 밤이나 흐린 날을 제외하면 이 빛줄기 하나만이 방 전체를 은은하게 밝히며 집중과 명상을 돕는 역할을 수행한단다.

▼ ‘마트리만디르’에 하나하나 붙여놓은 원반인 듯.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이 크다.

▼ 방문자센터 외관. 오로빌의 건물들은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라며 예찬하는 이도 있었다. 하나같이 독특하고 창조적이며, 또 자연을 그대로 살려냈다는 것이다. 오로빌 주민 중 가장 많은 숫자가 ‘건축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부연 설명도 있었다. 건축가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들의 꿈과 개성을 담아 마음껏 집을 지어 지금처럼 특색 있는 마을을 만들 수 있었다나?

▼ 방문자센터의 야외 광장에는 booth 몇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Well Paper(버려지는 종이를 생활용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체험인 듯), Svaram(인도의 다양한 악기들을 이용한 사운드테라피를 경험할 수 있는 곳) 등 모든 방문이나 체험을 원할 경우 소정의 돈을 받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 Bird Park, Sound Journey, Svaram Sound Garden라고 예외이겠는가.

▼ 방문자센터 주변에는 여행자들이 쉬어가기 딱 좋은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오로빌 주민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친환경 제품, 수공예품, 서적 등을 판매하는 상점도 눈에 띈다. 수익금은 오로빌 기금으로 쓰인다고 했다. 공동체적 성격이 강해서 다들 오로빌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고 있다나? 참! 1년 이상 봉사활동을 해야 오로빌 거주 자격이 주어진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 카페가 있어선지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도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다. ‘인도’이지만 전혀 ‘인도’답지 않은 풍경이다.

▼ 오로빌이 물질과 정신을 잇는 ‘다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다양한 문화의 구도자들이 만나 내면의 진실과 외면의 노력이 균형을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곳이란다. 그런 삶에 동참하라는 홍보문구이겠지만 편하디 편한 속세에 익숙해진 필자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일 따름이다.

▼ 독창적인 정수 시스템으로 만들어낸 ‘생명의 물(Living Water)’이라고 했다. 활성탄, 침전물 필터, 역삼투압(RO) 등을 활용해 박테리아, 바이러스, 중금속 등의 오염원을 완벽히 제거한단다. 단순한 화학적·물리적 정수를 넘어 정수과정에서 손실된 물의 생명력을 되살리는 바이오 다이나미제이션(Bio-dynamisation)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나?

▼ 오로빌 관련 비디오를 시청한 뒤, 통행증(‘마트리만디르 전망대’까지 갈 수 있는)을 발급받아 길을 나선다. 전망대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오늘처럼 무더운 날에는 무료로 운행되는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 우리는 걷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보고 싶은 욕심에서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데 이까짓 더위쯤 못 참겠는가. 하나 더. 무더위에 지쳐 돌아올 때는 셔틀 버스를 이용했다.

▼ ‘반얀트리(Banyan Tree)’가 눈길을 끈다. 가지가 다시 뿌리를 내려 성장하는 반얀트리는 멀리서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작은 숲 같다. 반얀나무는 남인도의 시간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인도인들은 ‘살아있는 사당’으로 여기기도 해서, 신앙과 일상의 쉼터를 이어주는 공간이 되어준단다. 신목이면서도 동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우리나라의 ‘당산나무’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 흙길을 걷는다. 오로빌 마을의 길은 아스팔트가 아닌 흙으로 되어 있어 맨 발로 걷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인도는 인도답게 덥다. 고로 목이 탄다. 생수 한 병쯤 들고 나오지 않은 무지를 후회하며 걸었다.

▼ 나무뿌리 조형물. ‘쉿!’. 명상의 요람에 다가가고 있느니 조용히 해달라는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

▼ ‘마티르만디르 전망대(Matrimandir View Point)’에 도착했다. 황금빛 돔 형태의 명상센터를 0.5km쯤 떨어진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이다. 마트리만디르의 외관만 볼 수 있는 점은 흠. 황금 돔 내부에 들어가 명상이라도 하려면 최소 3-4일 전에 미리 온라인으로 예약해야 한단다. 명상 수련이야 그렇다 쳐도 내부 사진 몇 장쯤은 찍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마트리 만디르(Matrimandir)’는 오로빌 정중앙에 위치한 황금빛 구체 모양의 대형 명상센터이다. 스리 오로빈도의 영적 파트너이자 공동체에서 ‘어머니(The Mother)’로 추앙받는 ‘미라 알파사(Mirra Alfassa)’의 비전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건축가 ‘앙리 로제(Roger Anger)’가 설계했다. 특정 종교나 신을 숭배하는 사원이 아닌 인류의 통합과 내면의 평화를 위한 침묵의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 지름 36m에 높이가 29m인 거대한 타원형 구체이다. 외벽이 수많은 황금빛 원반 디스크로 뒤덮여 있어 오늘처럼 맑은 날에는 햇빛을 반사시키며 눈부시게 빛난다. 조명을 배제시킨 돔 내부는 온통 하얀 대리석으로 꾸며진 원형 명상실이 공중에 떠 있는 형태로 설계되어 있단다.

▼ 2021년 기준 53개국 출신 3,300여 명이 ‘오로빌’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35명 안팎의 한국인도 머물고 있단다. 그 한국인에 포함되지는 못하지만 분위기만은 집사람에게 전이가 되었나보다. 동심으로 돌아가 황금 구슬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느라 정신이 없다.

▼ 아까 방문자센터에서 눈여겨보던 창립자인 ‘마더’가 직접 썼다는 축복 메시지가 이곳에도 있었다. ‘마티르 만디르’가 오로빌의 신성을 향한 열망의 살아있는 상징이 되도록 하십시오.

▼ 이밖에도 꽤 많은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무더위 탓에 일일이 읽어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했다. 이곳으로 오면서 읽거나 들었던 오로빌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을 옮겨본다. ‘오로빌’은 국적, 인종, 종교, 계급에 관계없이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상향이다. 모두에게 필요한 물자를 무료로 배급하고 교육의 기회도 무료로 부여한다. 학력이나 자격증이 없어도 누구나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다.

▼ 58년 전인 1968년 2월 28일 ‘오로빌’의 착공식이 열렸다. 124개국에서 2명씩 참석했고 이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가져온 흙을 묻었다. 이에 앞서 유네스코는 1966년 오로빌의 탄생을 지지하는 총회 결의문을 채택했다. 오로빌이 문화 종교 인종의 차이를 극복하고 인류의 단합을 추구하는 유엔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 해서다.

▼ 오로빌 마을은 뭐든지 자연으로 돌아가 있다고 했다. 현대인들은 ‘웰빙’스럽게 살아가겠다며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간다. 하지만 이곳 오로빌 마을은 그 자체가 천연의 ‘웰빙 마을’이란다.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고, 자연으로 되돌리고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전기는 태양이나 바람에서 얻고, 먹을 것과 물은 땅에서 얻으며, 맑은 공기와 새소리는 나무와 숲에서, 물건들은 기계가 아닌 사람들의 손에서 직접 만들고 쓰이고 있단다.

▼ ‘마티르 만디르’는 1971년 주춧돌을 놓은 것을 시작으로 약 37년의 공사를 거쳐 2008년에 최종 완공되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현재진행형’이었다. 마트리만디르를 둘러싸고 있는 호수(해자)를 새롭게 단장시키려는 듯 토목공사로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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