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60코스(대천해수욕장 – 깊은골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4. 10. 12(토)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신흑동·남곡동·대천동 및 주교면·오천면 일원
여행코스 : 대천해변→대천항→대천천 노둣길→대천방조제→안산마을→사당골→토정묘역→깊은골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7.2km, 실제는 사당골까지 14.63km를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0코스를 걷는다. 8개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3개(전체 5개)로 분류되나, 평지라서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 들머리는 대천해수욕장(충남 보령시 신흑동)
서해안고속도로 대천 IC에서 내려와 36번 국도를 타고 ‘대천해수욕장’으로 들어오면 된다. 매년 열리는 ‘보령 머드축제’의 주 무대이자, 본격적인 휴가철에는 야간에도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즐기자 밤바다’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패들보드, 수상 징검다리 등 다양한 미니게임이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단다.
▼ 서해랑길(보령 60코스) 안내도는 ‘머드광장’의 바닷가 ‘바다의 여인’ 조형물 옆에 세워져 있다.
▼ ‘대천해수욕장’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보령화력 입구(오천면 오포리)’까지 가는 17.2km짜리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대천해수욕장, 토정묘역 등이 꼽힌다. 하나 더, 물때를 못 맞춰 ‘대천천’의 노둣길을 못 건널 경우, ‘쇳개포구’의 인도교까지 6km 이상을 더 걸어야만 한다.
▼ 10 : 13. 해수욕장과 상가 사이로 난 도로(해수욕장10길)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 바닷가 해송 숲을 따라갈 수도 있다. 조금 구불대기는 해도, 하트모양의 예쁜 통로 등 눈에 담을만한 조형물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어 걷기 여행자들에게 더 선호되는 코스다. 솔숲 사이로 내다보이는 서해바다는 덤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삽시도(揷矢島)도 눈에 담을 수 있다. 화살(矢)을 꽂아놓은(揷) 활처럼 생겼다는 섬이다.
▼ 10 : 22. 잠시 후 ‘분수광장’에 이른다. 노을광장, 머드광장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의 핵심을 이루는 광장 중 하나로 다양한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어 개성 넘치는 사진을 찍기에 딱 좋다. 여름철에는 음악분수가 운영되는데, 저녁이면 현란한 조명까지 가미된단다.
▼ 로봇을 닮은 ‘우체동’은 커도 너무 크다. 간절곶의 우체통보다도 더 크다나? ‘감성’이란 이름표까지 달았는데, 거짓말 좀 보태 원룸으로 개조하면 사람이 살아갈 수도 있겠다.
▼ 10 : 24. 집트랙(Zip Trek) 탑승장. 바다로 돌진하는 듯한 오싹한 설렘을 선사해주는 집트랙은 ‘액티비티 스포츠’다. 하지만 갈 길 바쁜 걷기 여행자들은 그저 눈으로 즐길 수밖에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트레킹을 마치려면 말이다.
▼ 서해랑길은 바닷가를 따라 계속 직진한다. 스카이바이크 궤도와 함께 가는 멋진 구간이다. 대천해수욕장과 대천항을 오가는 전국 최초의 해상 레일 바이크로, 수면에서 8-15m 높이에 선로를 달아 바닷길을 달리게 했다.
▼ 스카이 레일 위를 씽씽 달려가는 바이크, 40분간 2.3km를 왕복 운행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쌍쌍이다. 고로 스카이바이크는 연인끼리 즐기기에 딱 좋은 레저이다.
▼ 집트랙은 왜 싱글을 고집했을까? 커플로 타는 곳도 있던데 말이다. 하나 더. 요 아래로는 ‘보령 해저터널’이 지나간다. 원산도까지 6,927m로 우리나라에서 가징 긴 해저터널이다. 원산도에서 안면도까지는 다리로 연결된다.
▼ 아무튼 난 ‘집트랙 탑승장’에서 바닷가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천항로’를 따르는 지름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아니 고갯마루에 있는 ‘김성우장군전첩사적비(金成雨將軍 戰捷史蹟碑)’를 만나고 싶었다는 것이 더 옳겠다.
▼ 10 : 27. 김성우(金成雨, 1327~1392)는 고려 말 전라우도 도만호로 보령지역을 황폐화시킨 왜구를 격퇴한 무장이다.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충청남도 보령에 사패지(賜牌地)를 하사 받아 ‘광산김씨’ 입향 시조가 되었다. 이후 초토영전사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보령으로 돌아와 살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정에서 부르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거절하고 자결하였다. 김성우를 도운 신마가 나온 옥마봉, 보검이 나온 비도, 김성우의 군사가 들어온 군입포, 병사를 매복시킨 매복 등 김성우의 행적과 관련된 지명들이 아직까지 보령 곳곳에 남아있다. 보령을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대천항로’는 고개를 넘어 ‘대천항’으로 이어준다. 곧장 직진하면 ‘유람선 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 10 : 34. 꽃게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사거리(이정표 : 종점 15.6km/ 시점 1.6km)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대천항4길’을 따라 동진한다.
▼ 도중에 ‘대천항연안여객선터미널’과 ‘대천항’을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하도 여러 번 들렀던 곳인지라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 10 : 52. 강당마을. 신흑동(新黑洞) 최북단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앞바다에 조개·게·소라 등 해산물이 풍부하여 옛날부터 군마루·절굴·거먹개 사람들이 넘어와 해산물을 잡아가고는 했단다. 현재도 김 양식 등 수산업에 종사하는 집이 많다고 한다.
▼ 바닷가 외딴 마을은 현재 ‘통나무 펜션단지’로 변신해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지어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단다. 해안도로변에 위치해 아름다운 바다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 계속해서 ‘해안로’를 따른다. 아니 도로변을 따라 내놓은 자전거길을 따라간다.
▼ 이때 ‘대천천’의 하구역 풍경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로 지금은 육지로 변해버린 ‘송도(松島)’와 ‘보령화력’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 11 : 06. 같은 신흑동인 ‘군헌(軍軒)마을’에는 어촌유치(귀어) 체험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농어촌 공동화(空洞化)’가 사회문제가 되어버린 요즘. 시(市)라고 해도 바닷가 외진 마을은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추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 체험장 옆 데크 전망대. 망원경 말고도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한 줄기 쇠줄로 얼굴을 그린 조형물도 배치했다. 덕분에 밋밋할 수도 있는 해변 길이 감상의 포인트가 됐다. 분명 인위(人爲)인데도 배경으로 삼은 자연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대천방조제와 보령화력발전소는 물론이고 죽도와 송도, 원산도 등 주변의 섬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눈만 좀 크게 뜨면 원산·안면대교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 시선을 조금 비틀자 대천천의 하구역이 놓여있다. 대천방조제가 서해안고속도로의 ‘대천2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탐방로는 이제 ‘대천천(大川川)’을 거슬러 올라간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교’의 거대한 교각을 앞에 두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넝쿨장미로 치장된 터널을 지나기도 한다. 꽃이라도 필라치면 꽃 대궐에서 노니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겠다.
▼ ‘오월의 장미’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10월. 장미가 있을 리가 없다. 대신 ‘송엽국(松葉菊)’이 만발해 있었다. 솔잎과 닮은 잎에 국화를 닮은 꽃이 핀다는 ‘상록 식물’이다. 잎 모양과 무리 지어 피는 모습이 채송화와 비슷해 ‘사철채송화’라고도 한다.
▼ 11 : 20. ‘밤골마을’ 해변은 해수욕장이 부럽지 않은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보령지역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해안 곳곳에 사빈이 잘 발달되어있는 현상 말이다. 그 대부분은 해수욕장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은 대천해수욕장과 가깝다보니 그냥 방치하고 있지 않나 싶다.
▼ ‘남곡동(藍谷洞)’에 속한 자연부락인 ‘밤골’에는 리조트와 펜션, 카페, 음식점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유원지 수준이라고나 할까? 하긴 뻥 뚫린 시야로도 모자라 새하얀 모래사장까지 끼고 있으니 어찌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 동화나라에서나 볼 법한 집도 눈에 띈다. 하지만 스머프가 이사를 가버렸는지 새로운 주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밤골마을 앞바다. 해망산 갯벌도 일반인에게는 금단의 땅인 모양이다. 어촌계에서 바지락 양식을 하고 있으니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단다. 저 벤치에 앉아 조개 캐는 주민들의 뒷모습이나 구경하다 가라는 모양이다.
▼ 11 : 30 – 11 : 40. 이곳에는 자전거 라이더들을 위한 휴게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덕분에 벤치에 않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 또 다른 스머프네 집. 노을이 곱다고 알려진 ‘357카페’라는데, 이곳 역시 영업은 하고 있지 않는 듯 했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 11 : 46. 내항동(內項洞)의 왕대골. 왕대산(王臺山, 122.7m) 자락의 마을인데, ‘밤골’처럼 리조트와 음식점이 여럿 들어서 있다. 숫자는 작아도 규모는 밤골보다 훨씬 더 크다. 참! 왕대산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천년사직을 넘기고 돌아오다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이때 느닷없는 간판 하나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友のや’라는 일본어 간판만 내걸려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저걸 ‘토모노야’로 읽고 있었다. ‘친구며···’라는 뜻이라나? 건물의 외벽도 검정과 흰색이 대비되며 일본 전통 건축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일본인들의 전용 호텔인가? 아니면 일본인이 운영하는 숙소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썩 흔치않은 풍경인데다, 얼마 전 광복절날 일장기를 내걸었던 지역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기에 심사는 편치 않았다.
▼ 11 : 52. 서해랑길은 서해안고속도로의 ‘대천2교’ 앞에서 일단 멈춘다. 그리고는 잠수교(‘노둣길’이라 부르기도 한다)를 이용해 ‘대천천’을 건넌다. 초입에 이정표(종점 9.8km/ 시점 7.4km)가 세워져 있다.
▼ 초입에 만조(滿潮) 때는 우회도로를 이용하라는 안내판이 걸려있었다. 대천천을 따라 대천3동까지 올라가 ‘대천천 인도교’를 건넌 다음, ‘대천1동’에서 대천천의 제방을 걸어 저 건너(잠수교 북단)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6.1km나 더 걸어야 한다니 서해랑길 60코스는 때를 잘 맞추어 걷는 게 필수라 하겠다.
▼ 잠수교는 영농철 농기계의 통행을 위해 개설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모든 차량의 통행을 금지한다는 경고판까지 입구에 붙여놓았다. 하지만 많은 차량들이 잠수교를 오가고 있었다. 덕분에 차량을 만날 때마다 다리 난간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켜 설 수밖에 없었다.
▼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 따깨비는 이 다리가 심심찮게 바닷물에 잠긴다는 증거다.
▼ 앗! 소라가 가득담긴 그물망이 바닷물에 잠겨있는 게 아닌가. 마침맞게 주위에는 사람도 없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했는데, 저걸 가져다가 산악회에 부탁해 삶아달라고 해?
▼ 대천천 하구역(河口域). ‘대천천(大川川)’은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에서 시작하여 궁촌동을 거쳐 서해로 흘러드는 길이 13.8km의 지방하천이다. 보령지역의 옛 이름 중 하나인 ‘큰내(한내)’를 한자로 고치면서 대천천이 됐다. 하천은 크게 2개의 지류가 있는데, 한 지류는 오서산(烏棲山) 동남쪽에서 발원하고, 다른 한 지류는 성주산(聖住山) 줄기인 성태산(星台山)과 백월산(白月山)에서 발원하여 흐른다.
▼ 뒤돌아 본 잠수교. 그 뒤에는 아까 본 왕대산 말고도 ‘해망산(海望山, 114.3m)’이 있다. 고려 말, 도만호(都萬戶) 김성우 장군이 병사로 하여금 왜구의 동태를 감시하게 했다는 산이다.
▼ 11 : 59. 잠수교 북단(이정표 : 종점까지 9.4km)에 올라선 다음부터는 대천방조제의 제방을 따라간다. 둑 위에 우레탄을 깐 탐방로를 곱게 내놓았다. 참고로 대천1동에서 시작되는 ‘대천방조제’는 대천2동과 주교면의 주교리(舟橋里) 및 은포리(隱浦里)를 거쳐 같은 주교면의 송학리(松鶴里)까지 이어진다. 길이 6.2km로 1952년에 착공하여 1960년에 준공되었다.
▼ 둑길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왼쪽으로는 ‘대천천’의 하구역이 드넓게 펼쳐진다. 한껏 등치를 부풀린 물줄기를 서해바다가 집어삼켜버리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제방에 쌓아놓은 저 돌탑들은 대체 누구의 작품일까? 50m쯤 되는 간격으로 줄지어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공들여 쌓은 흔적이 역력했다.
▼ 오른쪽으로는 ‘봉당천’과 ‘신대천’ 하구를 막아 조성한 거대한 간척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 뒤에서 솟아오른 ‘봉대산(烽臺山, 233.3m)’은 동쪽으로 뻗어 ‘태봉산(240m)’을 솟구친다. 군사시설인 봉수대 및 아현산성(我峴山城)을 각각 품고 있는 산들이다.
▼ 12 : 16. 방파제가 90도에 가깝게 휜다. 대천1동과 송학리를 잇는 대천방조제는 이렇듯 중간쯤에서 크게 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농토를 만들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의 결과일 것이다. 하나 더. ‘대천동’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주교면(보령시)’에 바톤을 넘겨준다.
▼ 이곳은 ‘대천천’의 하구역이 거침없이 폭을 넓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륙을 휘젓고 내려온 냇물은 이곳에서 드넓은 바다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저 강태공들은 대체 뭘 잡고 있을까? 낚싯대는 망둥어 낚기에도 부담스러워 보이는데...
▼ ‘이 뭣꼬?’ 스님의 화두가 아니라 도로변에 적치되어 있는 저 통들의 정체가 궁금해서 게시해봤다.
▼ 코너를 돌아서자 해안도로에 꽤 많은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다. 화장실까지 갖춘 공영주차장이 마련되어있는가 하면 둑에는 무선방송장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 주교마을(허락 없이 갯벌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판을 세워놓았다)에서 뭔가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도로변에 조성된 공영주차장. 차선을 하나 더 만든 다음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을 만들어놓았다.
▼ 반대편에는 바다를 향해 길게 줄을 매어놓았다. ‘해루질’ 나가는 누군가를 위한 안전시설이다. 둑 위의 방송장비 또한 저들을 위해 설치했다. 조개채취 중 방향을 잃는 갯벌 고립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하기 때문이란다.
▼ 갯벌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조개를 캐고 있었다. ‘해루질’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야외활동 중 하나로 꼽힌다. 거기다 조개까지 얻을 수 있으니 숫제 ‘꿩 먹고 알 먹고’이다. 하지만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물때와 지형을 미리 확인하고 안전장비를 착용하는 등 안전수칙을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 방조제는 이후로도 꽤 오래 이어진다. 하지만 하늘거리는 억새꽃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 12 : 42. 대천방조제는 ‘주교배수갑문’에서 끝을 맺는다. 둑길에서 내려선 탐방로는 ‘대천방조제2교’를 건너 ‘송학리’로 들어간다.
▼ 12 : 45. 다리를 건너 ‘현장마을(버스정류장의 이름표)’로 올라선다. 송학리(3리)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 ‘바지락마을’이란다. 아니 ‘황금’이란 최상의 서술어까지 덧붙였다. 대체 바지락이 얼마나 많이 널려있기에 저런 표현까지 쓸 수 있을까?
▼ ‘송학항’도 이제껏 보아온 다른 포구들처럼 텅 비어있었다. 안내판에 그려진 배들은 마을 어디쯤에선가 출어의 날만 기다리고 있겠지? 경운기 꼬랑지에 매달려서...
▼ 선착장 옆으로 나있는 ‘갯길’이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머드 맥스’라고 일컬어지는 경운기의 행렬이 펼쳐지는 곳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버스정류장에서 그 사진을 볼 수 있다.
▼ 계속해서 ‘대천방조제로’를 따라간다. 방조제의 둑길 구간이 끝났는데도 도로는 아직까지 같은 이름표를 달고 있다. 아무튼 좁고 긴 백사장을 옆구리에 끼고 가는 멋진 구간이다.
▼ 이때 ‘죽도(竹島)’가 눈에 들어온다. 시쳇말로 주먹만큼이나 작은 섬인데, 옛날엔 저 섬이 대나무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 12 : 53. ‘송학2리’에 이른다. 마을 표지석은 이곳을 ‘안산고내’라고 적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밖산고내’가 나온단다. ‘고내’라는 마을이 ‘안산’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누어져 있는 모양이다.
▼ 이 마을 갯벌도 귀어·학습 체험장을 열고 있었다. 허락받지 않은 사람들이 갯벌에 들어갈 수 없음은 물론이다. 참! 이곳 송학리는 조선시대부터 바지락 양식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지금도 매년 5천 톤씩이나 생산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만큼이나 뛰어난 양식기술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품질 좋은 바지락을 시중에 내놓고 있단다.
▼ 버스정류장을 치장하고 있는 사진이 눈길을 끈다. 한국관광공사의 홍보 영상 ‘머드 맥스(Mad Max)’를 연상시키는 갯벌을 질주하는 경운기들의 행렬이다. 사진은 주민들이 갯벌에서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을 담았는데, 이게 광활한 갯벌과 어우러지며 자못 비장감까지 불러일으킨다.
▼ 13 : 03. 잠시 후 도착한 ‘(안산·고내)버스정류장’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서해랑길이 도로를 벗어나 마을길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마을안길은 누빈 다음 ‘안산마을’에서 다시 도로(대천방조제로)로 나온다. 오가는 자동차를 피할만한 공간(갓길)이 없는 협소한 도로를 피해 일부러 에둘러놓지 않았나 싶다.
▼ 13 : 06 – 13 : 19. 우리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한 채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그 위험에 대한 보상은 컸다. ‘산고래 하늘공원’이라는 멋진 공간을 만났기 때문이다. ‘산고내(散古乃)’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뼈를 상했을 때 약재로 쓰는 돌(산골)이 채취된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 엉덩이 대기가 부끄러울 만큼 예쁜 의자. 공원은 정자에 벤치는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우린 10분 정도를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 조망도 자랑거리라고 했다. 맑은 날에는 효자도, 삽시도, 원산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단다. 그래선지 바다 쪽으로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난간에 서자 죽도가 성큼 다가온다. 고려청자가 발견된 ‘해저유물 매장해역(사적 제321호)’의 중심에 놓여있는 섬이다.
▼ 1983년경 고려청자 등의 유물이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1987년 수중발굴조사를 진행 32점의 상감청자를 비롯한 100여 점의 청자류를 수습했다. 13세기 또는 14세기, 전남 강진(대구면)이나 전북 부안(보안면)의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배로 운반하던 도중 이 부근에서 배가 난파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신보령발전본부’를 당겨봤다. 보령지역의 발전소에서 전국전기생산량의 7.3%를 만들어내고 있단다.
▼ 13 : 27.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오가는 차량을 주의해가며 10분 정도를 걸어 ‘안산마을’에 이른다. 그리고 마을안길로 에돌아 온 ‘서해랑길’을 다시 만났다.
▼ 13 : 30. 잠시 후, 서해랑길이 또 다시 도로(대천방조제로)와 헤어지란다. 이번에도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예쁜 풍경을 보여주는 기존의 탐방로를 따를 것을 권한다.
▼ 탐방로는 해안길을 따라간다. 오른편의 농경지가 갯벌보다 낮으니 방조제의 둑길이라 할 수도 있겠다.
▼ 해안길 구간은 잠깐이면 끝난다. 하지만 보여주는 풍광만큼은 만만치 않았다. 고운 모래사장이 발아래 놓여있고, 그 너머로는 검붉은 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 13 : 33. 잠시 후, 탐방로는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파고든다. 또 다른 마을을 에돌아가는 길이다.
▼ 볼거리도 그렇다고 이야깃거리도 없는 마을길이 싫은 우리는 논두렁을 이용해 ‘ㄷ’자 형의 구간을 단축하기도 했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송학천’을 가로막은 방조제가 나타난다. 이 둑을 쌓음으로써 안쪽에 상당히 너른 간척지가 만들어졌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오던 고정리 주민들에게 넉넉함을 가져다 준 풍요의 상징이다.
▼ ‘송학천 배수갑문’의 밖. 즉 송학천의 하구역이었음직 한 갯벌에는 작은 포구가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충남의 바닷가에서 만났던 여느 포구들과는 달리 꽤 많은 배들이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다. 배를 올려둘만 한 공터가 없었나?
▼ 13 : 40. 제방 끝에서 610번 지방도를 만났다. ‘토정로’라는 이름이 토정 이지함 선생의 고향으로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사당골(고정2리)’이 반긴다. 법정 동리인 고정리(高亭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사당골’이란 ‘한산 이씨’ 사당(祠堂)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래선지 마을 입구에 찬성공파(贊成公派)의 사당(高巒齋) 말고도 조상의 묘갈(墓碣)과 신도비(神道碑)가 즐비했다.
▼ 13 : 46. ‘신보령발전본부’ 입구(화력발전소 폐기물처리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松島’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초입에 위치한 보령시민체육공원 주차장에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종점인 ‘깊은골’에 주차 공간(점심상을 차릴 수 있는)이 없는 탓에 이곳에서 식사를 한 다음 잔여 구간은 버스로 이동하겠단다.
▼ 종점으로 가는 도중 들른 ‘토정선생 묘역’. 국수봉(187m)의 남쪽 산자락에 들어선 묘역에는 선생과 형제, 존·비속 등 14기의 묘가 모셔져 있다. 선생의 학문과 전해지는 기이한 일화들로 인해 명당자리로 인식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단다.
▼ 선생은 생전에 미리 ‘墓터’를 정해두었다고 한다. 모친상을 당해 형제분들과 함께 선영의 묘를 이장할 자리를 찾다가 이곳이 명당임을 알았다나? ‘토정비결(土亭秘訣)’까지 지은 현인이니 어련하겠는가.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정초가 되면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낡은 ‘토정비결’을 펼쳐들고 저마다의 괘를 뽑아보면서 한 해의 길흉을 점쳤다. 누군가 좋은 점괘가 나오면 함께 기뻐했고 나쁜 점괘가 나오면 서로 격려하면서 새해의 첫날을 보냈다. 그 시절 토정비결은 힘겹게 살아가던 서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던 비밀의 열쇠였다.
▼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조선중기 학자로 천문·지리·의약 등에 능통하였으며,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평생을 방랑하다 1573년(선조6년) 56세에 도덕과 학문이 뛰어난 선비로 추천되어 포천현감으로 백성의 가난해결을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지어 빈민구제에 힘썼다고 한다. 1713년(숙종39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한 곳에 얽매이거나 구속되는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남긴 ‘대인설’에 걸맞는 삶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안으로는 똑똑하고 강하기를, 밖으로는 귀하기를 바란다.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고, 욕심내지 않는 것보다 부유한 것이 없으며,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은 없고, 알지 못하는 것보다 똑똑한 것은 없다. 알지 못하면서 똑똑하고, 다투지 않으면서 강하고, 욕심내지 않으면서 부유하고, 벼슬하지 않으면서 존귀한 것은 실로 대인만이 할 수 있다>
▼ 넓적바위(簿石). 연당자락 바닷가에 놓여 솔섬목을 오가던 사람들의 쉼터로 사용되던 바위였으나, 토정선생이 타고 다니던 ‘돌배’라는 설이 있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돌의 존재로 인해 항해의 영웅이라는 설화 속 선생의 또 다른 인물상이 생겨났다나?
▼ 고개를 넘어온 탐방로는 보령화력발전소 입구에 있는 ‘깊은골 버스정류장’ 앞에서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보령 61코스) 안내판은 버스정류장 곁에 세워져있다. 오늘은 본의 아니게 종점에서 1.7km 정도 못 미친 ‘사당골’에서 트레킹을 마쳤다. 그래선지 gpx트랙에 14.63km를 3시간 20분에 걸었다고 나타난다.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하루 세끼를 차려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야외활동까지 함께 해주는 집사람. 이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현대는 무목적·무감동·무책임·무관심이라는 ‘4무(無)’ 병이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건 무관심일 것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고 했다. 아름다움의 반대도 추함이 아닌 무관심이란다. 그러니 나에게 집사랑은 사랑이자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서해랑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짧디 짧은 해안선이지만 홍성은 잘도 꾸며 놓았어유. 서해랑길 63코스(천북굴단지-궁리항) (2) | 2024.12.09 |
---|---|
천북 굴밭 따라가며 영그는 맛깔스런 추억. 서해랑길 62코스(충청수영성-천북굴단지) (1) | 2024.11.25 |
무장포에서 한국판 ‘모세의 기적’을 엿보다. 서해랑길 59코스(춘장대해변-대천해변) (19) | 2024.10.07 |
밀가루처럼 보드라운 규사해변을 따라 북진하다. 서해랑길 58코스(선도리해변-춘장대해변) (24) | 2024.09.02 |
서천갯벌, 그리고 꼬맹이 섬들과 나란히 걷다. 서해랑길 57코스(와석마을-선도리해변) (0) | 2024.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