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남미의 멕시코 및 페루

 

여행일 : ‘18. 4. 23() - 5.2()

여행지 : 멕시코, 페루. 쿠바(비행기 사정으로 인해 취소)

 

일 정 :

4.23() : 멕시코시티(소깔로광장, 과달루페성당)

4.24() : 멕시코시티(테오티우아칸)

4.25() : 쿠스코(마추픽추)

4.26() : 쿠스코(12각 돌, 쿠스코대성당, 산토도밍고성당)

4.27() : 리마(아르마스광장, 사랑의 공원, 라르꼬마르)

4.28() : 파라가스(바예스타 섬), 이카(와카치나 사막)

4.29() : 나스카(나스카라인)

4.30() : 멕시코시티(소우마야 미술관)

 

여행 일곱째 날 : 하늘에서 내려 보는 지상 최대의 미스터리, 나스카라인(Nazca lines)

 

특징 : 신화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페루의 나스카는 수많은 미스터리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것은 바로 하늘 위에서만 볼 수 있다는 거대한 나스카 라인(Nazca Lines), 즉 나스카의 지상화(地上畵) 때문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왜 그렸는지 여전히 상상만 난무할 뿐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어서 더욱 미스터리한 지상화의 도시가 바로 나스카다. 리마에서 동남쪽으로 370떨어진 곳에 위치한 나스카라인은 450가 넘는 광대한 벌판에 800개가 넘는 직선과 300개에 달하는 그림들이 있다. 간단한 선과 기하학적 형상이 주를 이루지만 이 가운데 70여 점은 새, 물고기, 야마, 재규어, 원숭이 같은 동물이나 사람, 그리고 나무와 꽃 같은 식물을 형상화했다. 크기도 다양해서 큰 것은 370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이 가운데 경비행기를 타고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12개로 고래, 삼각형과 콤파스, 우주인, 원숭이, , 콘도르, 거미, 벌새, 왜가리, 앵무새, 나무 등이다. 참고로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림책'이라는 나스카라인은 1994년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었으며, 그 규모와 모양, 특성 때문에 '지상화(地上畵)'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나스카라인(Nazca lines)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리마의 동남쪽 약 370지점에 위치한 나스카(Nazca) 마을까지 와야만 한다. 해발고도가 700m쯤 되는 이 도시는 잉카 이전의 문명, 프레 잉카(Pre-inca)’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남미 고고학 연구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나스카 문명(BC 200~AD 600)’의 중심지다. 나스카 문명은 파라카스 문명에 이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스카 강 유역의 카와치(Cahuachi)가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 유적은 우리의 흙벽돌과 비슷한 아도베(adobe)로 만든 신전과 피라미드를 비롯해 광장을 중심으로 한 공공건물들, 관개용수로 등 수준 높은 과학 기술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고도의 제작기술과 함께 섬세함과 상징적 모티프를 지닌 채문토기(彩文土器)가 나스카 문명의 명성을 높여준다. 주전자와 접시, 주발 등에 고추, 옥수수, 감자, 사슴, , 개구리, 물고기 등 다양한 동식물 무늬가 새겨진 이 토기들은 제작 기술도 빼어나지만 예술적으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아침식사를 일찍 마치고 10분 거리에 있는 공항으로 향한다. 이른 시간에 경비행기를 타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해가 뜬 직후에 나스카라인(Nazca Lines)을 가장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도 안전과 관련된 것이 더 중요하단다. 한낮 비행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낮에 햇볕을 받아 땅이 데워지면서 상승기류가 생기게 된다. 때문에 경비행기가 나스카라인 가까이 접근하려고 하강할 때 요동을 치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조건에서 안전하게 나스카라인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가이드의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비행장 안에는 꽤나 많은 경비행기(세스나, Cessna)들이 늘어서 있다. 경비행기 투어는 나스카 라인을 감상하기에 최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멀미를 할 경우도 있으므로 웬만하면 비행 전에 식사를 삼가고 멀미약을 미리 먹어 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건물로 들어서니 여러 개의 부스(booth)가 만들어져 있다. 그만큼 많은 항공사들이 경비행기(세스나, Cessna) 투어를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투어는 나스카에 있는 여러 여행사나 항공사, 일부 호스텔 등을 통해 예약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3인승 경비행기 기준에 70~80달러 선에서 이용이 가능하며 성수기 때는 좀 더 가격이 올라간다고 한다. 비행시간은 대략 30분 내외로 보면 되겠다.

 

 

출입문에는 수많은 스티커들이 빼곡하게 붙어있다. 홍보용으로 보이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눈길을 끈다. ‘릴라링이라는 글자를 도안 형태로 써놓긴 했지만 분명히 한글인 것이다. 스티커의 하단에 사진·동영상 공유 애플리케이션인 인스타그램(instagram)ID까지 적어 놓았지만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겠는가. 수천, 아니 수만 킬로나 떨어진 낯선 땅에서 내가 쓰고 있는 언어를 만났다는 게 중요하지 않겠는가.

 

 

 

 

벽에는 나스카라인의 지도가 걸려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나스카라인의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는 마리아 레이체(Maria Reiche)’ 박사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녀를 떼어놓고는 나스카라인에 대해 왈가왈부를 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다리기 지루하면 밖으로라도 나가볼 일이다. 기념품가게에 들러 보들보들한 면 티셔츠나 꼼꼼하게 손질이 된 작은 손지갑도 추천할만하다. 아니면 나스카라인과 관련된 기념품 하나 챙겨도 될 일이고 말이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체중계 위에 올라선다. 몸무게를 재기 위해서이다. 비행기가 하도 작다보니 좌우의 무게까지도 균형을 맞추어야 한단다. 가운데를 통로로 두고 양 옆으로 나뉜 좌석의 번호가 주어졌음은 물론이다.

 

 

비행기 앞에 이르니 우리를 인솔하던 부기장(조종간이 없는 보조석에 앉았다)이 비행 중에 지켜야할 주의사항을 일러준다. 영어로 읊어대고 있느니 100%를 다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저 기장이 오른쪽 또는 왼쪽이라고 알려 줄 경우 비행기의 날개 끝이 향하는 곳에 시선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만 명심해 두자. 라이트(right)냐 레프트(left)의 발음을 어떻게 알아들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잠시 후면 영어가 아니라 발음도 선명한 우리나라 말로 오른쪽’ ‘왼쪽이라면서 그 끄트머리에 있는 그림의 종류까지도 우리나라 말로 전해줄 테니까 말이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무섬증에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고소공포증(Acrophobia, 高所恐怖症) 탓이다. 그런 내가 이렇게 작은 경비행기를 타고 있으니 무섭지 않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긴 2014년엔가 이곳을 찾았던 윤상과 유희열, 이적 등 꽃보다 청춘의 멤버들도 무비카메라(movie camera) 앞에서까지 두려움을 호소했는데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무사히 비행을 마쳤었고, 원숭이와 벌새 등 나스카 라인의 절경에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었다. 고소공포증에도 불구하고 경비행기에 내 한 몸을 실었던 이유이다.

 

 

 

무섬증이 조금 가라앉자 숨은 그림 찾기가 시작된다. 지상에는 그림들 외에도 여러 가지의 줄무늬들이 나타나고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작품인지가 구분이 안 되는 직선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개중에는 곡선도 있어 우리가 보고 싶은 원숭이나 벌새, 거미 등 아까 지도에서 보았던 그림들을 찾는 게 만만치가 않다.

 

 

 

 

민낯의 사막, 그 바싹 마른 광활한 대지에서 그림 찾기를 하고 있는데 기장의 안내 멘트가 시작된다. 이때쯤이면 다들 화들짝 놀라는 게 정상일 것 같다. 그 멘트가 우리나라 말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오른쪽! 오른쪽 날개! 고래!’ 거기다 발음까지도 또렷하다. 이곳을 찾는 우리나라 관광객의 숫자가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꽃보다 청춘팀이 이곳을 다녀갔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그렇다면 반대편 줄에 앉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림을 보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승객들이 좌우로 나누어 앉은 만큼 모든 승객들이 나스카라인을 볼 수 있도록 비행하기 때문이다. 일단 좌우 어느 편이든 날개의 밑에 목표물이 오도록 비행을 하고 이어서 8자형으로 날아 반대편 날개 밑에 목표물이 오도록 돌아온다. 이때는 멘트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뀌어 있음은 물론이다.

 

 

기장이 알려주는 오른쪽 날개 밑을 내려다보니 정말 고래가 나타났다. 바다가 아닌 모래 위에서 말이다. 그런데 로비의 지도에서 구경한 고래의 생김새와 약간 달라서 당황한다.

 

 

기장의 멘트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텐데도 사람들의 시선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하나라도 더 많은 그림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다가 비슷한 그림이라도 하나 발견할라치면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지른다. 오직 비행기에서만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거대한 그림들이다. 그렇다면 저렇게 큰 그림들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평생 나스카 라인 연구에 매달려온 마리아 레이체(Maria Reiche)’ 박사는 말뚝에 줄을 매어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직선을 그리고 콤파스의 원리를 이용해 원과 곡선을 그렸다고 확신했다. 실제 말뚝을 박았던 흔적도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첫 번째 가설은 천체 관측과 고대인들이 사용한 달력이라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농경을 위한 계절의 변화를 알기 위해 천체를 관측하고 그 움직임을 지면에 새겼다고 보는 주장이다. 하지만 천문학자들이 고대의 해와 달, 별들의 위치를 추정한 결과 나스카 라인이 당시의 천체 위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나스카가 고도(古都)인 만큼 종교 의식이나 성지로의 인도를 목적으로 한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자연과 산을 숭배하는 고대인들이 성스러운 마음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만든 그림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가설은 외계인과의 교류를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고대 외계인들이 두 개의 활주로를 건설하고 떠난 뒤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약하고 자신들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공중에서 알아볼 수 있도록 거대한 도식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명확히 납득할 수 있는 주장과 근거는 밝혀지지 않고 있어 미스터리는 더욱 의문으로 남는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비탈에서 우주인(astronaut)의 형상을 찾아낸다. 아까 지도에서 보았던 것처럼 누워있는 형상이라서 찾아내기는 쉬웠는데, 섬세하게 묘사된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사람의 모습을 영 닮지 않았다. 그림을 그린 이가 과감하게 선을 생략해버린 모양이다.

 

 

아래 그림은 원숭이(monkey)이다. 꼬리를 돌돌 말고 있는 게 인상적인데, 선이 가는 탓인지 희미하게 보여 찾아내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까 지도에서 보았던 tringletrapezoids의 그림은 엉겁결에 지나쳐버렸다. 비행기의 날개가 지나간 뒤에까지 해당 그림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즘 부쩍 나빠지는 시력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어서 개(dog)의 그림이 나타난다. 첨부된 사진에는 희미하게 나타나지만 실제로 눈에 들어오는 그림은 선명하다. 나스카 지상화가 2천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도록 선명하게 유지된 이유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곳의 특별한 기후 때문이라고 했는데, 과연 물감을 기다리는 마른 캔버스처럼 암갈색의 평원은 평평하고 광활했다.

 

 

 

 

날개와 꼬리 부분을 세밀하게 묘사한 벌새(hummingbird)는 단단한 지형으로 보이는 곳에 그려져 있다. 나스카사람들은 사물을 섬세하게 묘사하기도 했지만, 과감하게 생략하는 다양성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다음은 거미(spider)이다. 암갈색의 평원 위에 새겨진 이 그림들은 자연이 빚어낸 수많은 다른 선에 섞여 있고, 심지어 고속도로 같은 인공 선들도 얽혀 있어서 시력이 좋은 사람들도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어서 비행기는 콘도르(condor)의 위를 나른다. 2013년엔가 우리나라의 방송에서도 나스카의 지상화들을 집중 조명한 일이 있었다. MBC-TV에서 방영했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방송은 나스카라인의 발견 과정과 그림을 만든 이들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소개하면서 이런 주장들이 각자의 추측일 뿐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래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알카트라즈(alcatraz)라는 새이다. 지상화 가운데 가장 큰 그림이 아닐까 싶다. 구불구불 지그재그로 길게 꺾인 부리를 갖고 있는데, 하도 크다보니 그림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구불구불한 부리를 찾았다면 당신은 이미 알카트라즈를 찾은 셈이다. 엄청나게 긴 부리와는 상반되게 아주 작은 몸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앵무새(parrot)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앵무새 같지가 않으니 문제다.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 개국초기의 승려인 무학대사가 썼던 어휘인데,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의미이다. 전문가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내 안목을 잘 나타내주는 글이 아닐까 싶다.

 

 

가운데를 일직선으로 지나가는 굵은 선은 판아메리칸(Pan-American)이라는 고속도로(Highway)이다.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를 잇는 고속도로망으로 총 연장이 거의 48,000에 달한다.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사회간접자본(社會間接資本, social overhead capital)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도로가 뚫리면서 허리가 잘려나간 그림(도마뱀)이 생겨났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허리가 잘려나간 슬픈 도마뱀의 오른편에는 나무(tree)와 손(hands)이 그려져 있다. 특히 손 그림이 눈길을 끈다. 병아리처럼 생긴 무언가에 두 개의 손이 달려있다.

 

 

비행기가 공항으로 방향을 돌리자 푸른 들녘이 펼쳐진다. 이런 사막지대에 경작지라니 놀랍기 짝이 없다. 그러다 문득 나스카라는 이름에 얽힌 고통스런 옛 이야기를 떠올린다. 잉카족이 안데스산맥에 흩어져 살던 26개 종족을 통합하여 제국을 건설한 뒤에 메마르고 척박한 나스카로 죄인들을 귀양 보냈다고 한다. 어차피 죽을 것이기 때문이었단다. 그런데 이곳에 쫓겨 온 죄인들은 우연히 사막 안에서 물을 발견했고 농작물을 경작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단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잉카왕이 군대를 보내 이들을 토벌했다니 이들은 두 번 죽은 셈이다.

 

 

 

 

리마로 되돌아 나오는 길에 전망대(Mirador)에 들렀다. 나스카 라인에 대한 연구에 반생을 바친 독일의 여성 수학자 마리아 레이체(Maria Reiche)’ 박사가 세운 전망대라는데 나스카 라인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판 아메리칸 고속도로변에 20m의 높이로 설치되어 있다. 그녀는 페루정부가 추진하던 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있던 나스카라인을 지켜낸 인물이라고 한다. 자칫 수수께끼를 풀기도 전에 유적지가 사라질 뻔 했던 것이다.

 

 

 

 

1 USD를 내고 위로 오르니 나스카 라인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가시거리가 확보되지 않은 탓에 도마뱀과 나무, 손 등 3개 정도의 나스카 라인만 볼 수 있다. 거기다 옆에서 보는 것 같은 각도로 인해 그림의 원래 모양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얼핏 보면 무슨 그림인지도 모를 지경이라는 얘기이다. 이로보아 나스카라인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비행기를 타는 게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 나스카를 빠져나가면서 마지막으로 나스카라인의 발견과 학문적 연구결과에 대해 짚어보면서 투어를 끝내면 어떨까? 나스카라인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페루의 고고학자 토리비오 메히아 세스페1939년 리마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보고하면서부터다. 그 후 미국 롱아일랜드대학의 폴 코소크가 학문적 연구를 처음 시작한 이래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아직까지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밝혀진 것은 없다. 별자리 기록이라는 설, 지하수의 흐름을 나타낸 것이라는 설, 종교적 주술이라는 설 등이 제기되었지만 모두 추론에 머물렀다. 그러다보니 외계인의 작품이라는 설도 끊임없이 나온다. 실제 하늘에서 보아야 형체를 알 수 있는 이 그림들을 어떻게 이처럼 정교하게 그렸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외계인 이야기가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거기에다 나스카 부근 무덤에서 발견된 직물을 조사해 본 결과 오늘날의 낙하산보다 더 정교한 소재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에 비행 물체에 관한 여러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천에는 하늘을 나는 사람의 그림도 여럿 있었단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나스카의 카사 안디나 스탠더드(Casa Andina Standard)’

아르마스 광장 근처에 있는 3.5성급 호텔이다. 페루는 도시마다 카사 안디나(Casa Andina)’라는 이름의 호텔이 꼭 있는데, 합리적인 가격대부터 최고 등급까지 다양한 편이라고 한다. 이중 나스카의 카사 안디나 스탠더드는 배낭여행자도 부담 없이 하룻밤 묵어갈 만하다는 평이다. 로비를 지나면 가운데가 뻥 뚫린 ㅁ자 구조의 공간이 나오고, 사방으로 객실이 있다. 또한 전용 레스토랑과 야외 수영장, 비즈니스 라운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아르마스 광장과 버스 터미널이 가깝고 주변에 고급 레스토랑과 카페, 여행사가 즐비해서 편하게 나스카 일정을 소화할 수 있다.

 

 

 

 

 

여행을 마치면서 : 이번 여행은 원래 계획했던 쿠바를 들어가 보지 못했다. 기상악화로 인해 쿠스코에서 리마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뜨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음날 리마에서 멕시코시티를 거쳐 아바나로 들어가는 일정이 순연될 수밖에 없었다. 미리 예약해 놓은 비행기표가 무효가 되어버렸음은 물론이다. 대신에 추진된 게 바예스타섬과 이까사막, 그리고 나스카라인이었다. 궁여지책이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행이란 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난 이미 가보고 싶었던 곳을 모두 다 둘러봤을 것이다. 결론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세상 구석구석을 다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절한 선에서 만족을 하는 게 최선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쿠바를 못 들른 게 조금도 억울하지가 않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면 될 테니까 말이다. 여행이란 볼 것을 찾아 떠나는 행위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익숙한 환경을 떠나는 것 자체가 아닐까 싶다. 여행이라는 건 본래 돈 주고 사서 하는 고생이다. 그러나 여행만큼 보람되고 여행만큼 나를 변화시키는 것도 없다. 심금을 울리는 그 어떤 글이 나를 이만큼 변화시키겠는가. 세계 도처에서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사건은 나를 분명히 변화시킨다.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 할 수는 있지만, 여행을 하는 사람은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집에서 편안히 쉬면서 TV나 보고, 정치인들이나 욕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싶지는 않다.

여행지 : 중남미의 멕시코 및 페루

 

여행일 : ‘18. 4. 23() - 5.2()

여행지 : 멕시코, 페루. 쿠바(비행기 사정으로 인해 취소)

 

일 정 :

4.23() : 멕시코시티(소깔로광장, 과달루페성당)

4.24() : 멕시코시티(테오티우아칸)

4.25() : 쿠스코(마추픽추)

4.26() : 쿠스코(12각 돌, 쿠스코대성당, 산토도밍고성당)

4.27() : 리마(아르마스광장, 사랑의 공원, 라르꼬마르)

4.28() : 파라가스(바예스타 섬), 이카(와카치나 사막)

4.29() : 나스카(나스카라인)

4.30() : 멕시코시티(소우마야 미술관)

 

여행 여섯째 날 : 와카치나 오아시스를 끼고 있는 이카사막(Ica deser)

 

특징 : 파라가스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이카 사막(Ica deser)‘이 나온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사막지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데, 300m 높이의 모래언덕 한가운데 푹 꺼진 곳에는 와카치나(Huacachina)’라는 자그마한 오아시스(oasis)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막의 본질을 오아시스가 어딘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찾는 게 보통이다. 오아시스가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알 수 없기에 목숨을 걸고 걷고 또 걸어야만 간신히 오아시스에 도달할까 말까 한 그런 곳을 사막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카 사막사막의 신비오아시스의 축복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장소라 할 수 있겠다. 동행자 없이 홀로 걷는다면 고즈넉한 사막의 신비를 느낄 수 있고,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마을 와카치나(Huacachina)’를 향해 걷는다면 오아시스의 축복 또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겉으로는 더없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사막의 모범답안처럼 보이지만 막상 그 속내를 알면 광대무변한 사막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축복과 인공의 노력이 합쳐진 조화로운 공간이라는 것이다.

 

 

 

사막투어는 와카치나 오아시스(Huacachina Oasis)’에서 시작된다. ‘와카울다는 뜻이고 치나어린 여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 ‘와카치나는 울고 있는 어린여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불리게 된 데는 슬픈 전설이 얽혀 있다. 먼 옛날, 잉카의 어린 공주가 사냥꾼에 쫓기다가 와카치나에 이르러서는 인어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공주가 흘린 눈물이 오아시스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오아시스는 아메리카 오아시스(Oasis of America)’라 불리기도 한단다. 그만큼 오아시스의 본질에 가깝고 남북미를 통틀어 오아시스를 대표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일 게다. 또한 작은 마을이 발달되어 사람들이 거주하는 생명수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오아시스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오색찬란한 사륜구동형의 찦차 무리와 여행자들을 바삐 유혹하는 운전사들이다. ‘던 버기’(Dunn Buggie)‘라 불리는 사륜구동차인데, 생김새로 보아 사막의 가파른 모래언덕을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개조해 놓았지 않나 싶다. 그나저나 버기카4인승과 6인승, 9인승, 12인승까지 다양한 크기가 있으니 인원에 맞게 선택하면 될 일이다. 다만 안전벨트 착용은 필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버기카(buggy car)에 올라 사막으로 향한다. 엔진룸의 뚜껑도 없이 철봉을 얼기설기 엮은 모습이 마치 벌레를 닮았다. 시동을 걸자 요란한 엔진소음과 함께 매캐한 배기가스가 훅 달려든다. 하지만 참을만하다. 사막으로 들어간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굽이굽이 모래언덕을 오르내리다보면 몸이 튕겨져 나갈 듯아 엄청나게 흔들린다. 안전벨트는 필수이며 핸드폰도 잘 챙겨두라는 가이드의 경고가 너무 실감난다. 아무튼 경사가 다른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달리다보면 마치 청룡열차를 탄 듯 짜릿한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사막 깊숙이 들어가다가 혹시라도 길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등의 쓸데없는 걱정은 떠오를 틈도 없다.

 

 

사진을 찍을 엄두도 못 낼 정로로 스릴 만점이다. 서서 걷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가파른 모래사막을 서슴치 않고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경사지를 대각선으로 달리기까지 한다.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것 같은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탑승객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비명을 질러대지만 버기카는 그러거나 말거나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비명소리를 즐기고 있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사막의 하늘은 특이하다. 빌딩은 물론이고 가로수조차도 없는 하늘이다. 오로지 모래언덕의 능선만이 하늘과 맞닿아있다. 그래선지 사막의 하늘은 어느 때보다도 넓고, 깊고, 아득해 보인다. 사막이 아름다운 또 다른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사막이라고 해서 꼭 오아시스(oasis)를 품어야할 이유는 없을 듯도 싶다.

 

 

 

 

 

바람이 만들어 낸 모래의 곡선과 기하학적인 무늬가 한데 어우러진 사막은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그래 그동안 그림에서나 보아오던 사막이 바로 저랬었다. 사람의 손으로는 결코 그려낼 수 없는 그런 문양(紋樣)들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곡예운전을 하던 버기카가 높다란 모래언덕 위에서 차를 멈춘다. 그리고 내리라고 한다. 보드를 타고 모래언덕을 내려가는 스릴을 맛보기 위해서이다,

 

 

 

차에서 내린 첫 느낌은 모래의 입자가 무척 가늘다는 것이다. 모래가 아니라 숫제 흙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걸음을 옮겨도 흙먼지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모래는 모래인가 보다. 바닷가의 모래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게 사막이라고 생각해오던 그동안의 내 상상이 무참하게 깨져 버리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문제될 일은 결코 없다. 이렇게 고운 문양(紋樣)을 만들어내는 풍경을 아직까지 본 일이 없었으니까.

 

 

 

 

 

 

누가 뭐래도 사막투어의 백미(白眉)샌드 보딩(Sand boarding)‘이라 할 수 있다. ’스노 보딩을 눈이 아닌 모래 위에서, 그것도 서서가 아니라 엎드린 채로 한다고 보면 되겠다. 보드 위에 엎드려 팔을 직각으로 세우고 두 다리는 모은 채로 모래 위를 내려가면 된다. 그러가다 너무 빠르다 싶으면 두 다리를 벌리면 된다. 두 다리가 브레이크가 되는 셈이다.

 

 

첫 번째 도전은 몸 풀기 수준이다. 경사 또한 만만하게 보여 누구나 선뜻 나설 수 있다, 모래를 막기 위해서 모자와 선글라스에 더하여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 은행을 털어도 될 것 같다. 그리고는 신나게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 이때 환호성까지 질러댄다면 분위기는 한껏 고조될 것이다. 꼭 환호성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까지도 여기서는 아름다운 음악소리로 바뀌어버릴 테니까.

 

 

 

 

 

 

일행이 모두 내려오면 또 다른 언덕으로 장소를 옮긴다. 이번에는 모래언덕의 높이가 조금 더 높아졌다. 타고 내려오는 보드의 속도 또한 많이 빨라졌다.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샌드보딩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사막의 모래가 온몸으로 파고들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카메라 조심해야지, 휴대폰 조심해야지, 마스크를 써야 하나하고 온갖 걱정에 사로잡히다가, 몇 번 모래알갱이가 옷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하면 에라, 모르겠다, 그냥 모래 속으로 온몸을 던지자는 심정이 된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사막의 정경도, 직접 만져보면 쌀가루처럼 곱디고운 사막의 모래도 그저 좋기만 하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그동안 상상해왔던 사막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이겠는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면서 즐거우면 그만인 것을. 미세한 모래언덕을 오르내리며 모래바람을 헤치고 다니며 소리지르다보면 어느덧 사막과 하나가 된다. 머리를 온통 감싼 복면으로 감춘 얼굴과 새까만 선글라스가 묘하게 잘 어울린다.

 

 

 

 

두 번째의 보딩(boarding)이 끝나면 또 다시 자리를 옮긴다. 이번에는 엄청나게 높은 모래언덕이다. 경사 또한 아까보다 훨씬 더 가팔라졌다.

 

 

 

 

세 번째 도전은 경사가 만만치 않아 처음 만났더라면 오금이 저렸을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보딩에 맛을 들인 터라 냉큼 나선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환호성을 지른다. 스릴을 지나 이젠 즐거움으로 변했나 보다. 처음 스키를 배울 때가 이랬지 않나 싶다. 그때도 짧고 경사가 만만한 곳에서 타다가 점점 난이도를 높여갔으니 말이다.

 

 

 

 

 

세 번째 보딩이 끝나자 이젠 돌아갈 시간이란다. 일행들 모두의 얼굴에 아쉬운 표정이 역력하다. 눈치 빠른 가이드가 이를 알아차리고 오아시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서 차를 멈춘다. 기념사진이라도 찍어두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포토죤(photo-zone)이다. 사막다운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모래 언덕이 펼쳐지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그림 속에서나 보아오던 진짜 오아시스가 존재한다. 어느 뛰어난 화가가 이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어쩌면 조물주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모래언덕에 올라 굽어보는 호수는 정말 환상적이다. 버기카 투어를 즐기다가 만나는 오아시스가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렇다면 오랜 사막여행 끝에 만나게 되는 오아시스는 과연 어떠한 느낌일까? 아름답기보다는 차라리 반갑다는 생각이 먼저 들지 않을까? 아니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만난 새로운 삶의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난생 처음 보는 풍경이선지 아름다움을 넘어 차라리 경이롭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버기카 투어가 끝나면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와카치나 오아시스(Huacachina Oasis)을 한 바퀴 둘러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와카치나(Huacachina)‘는 안데스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지하로 스며든 물이 솟아오르는 오아시스이다. 옛날에는 이런 오아시스가 여럿 있었으나 농업용수로 혹은 생활용수로 끌어쓰다보니 모두 말라버리고 이제는 와카치나 오아시스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사실은 와카치나 오아시스 역시 마찬가지 신세인데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가 되다보니 수돗물로 호수를 채우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주민이 100명에 불과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연간 1만 명을 훌쩍 넘긴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겠다.

 

 

조그만 오아시스는 여행자용 숙소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카페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마을은 걸어서 10분이면 전체를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다. 하지만 사막에서 다양한 레포츠를 즐기기 위해 찾아온 전 세계 관광객들로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우리나라 관광객들도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단다. 특히 2014년엔가 방영했던 tvn꽃보다 청춘출연자들이 다녀간 뒤로는 눈에 띄게 그 숫자가 늘었다고 한다.

 

 

 

 

 

 

와카치나(Huacachina)는 사막 속에서 홀연히 솟아 오른 듯한 오아시스 마을이다. ‘오아시스(oasis)’는 리비아 사막의 비옥한 지역을 일컫는 라틴어인 Oasis에서 유래되었다. 사막에 물이 존재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보면 되겠다. 대수층(aquifer)의 지하수가 오아시스의 수원이 되는데, 그 넓이가 22,000에 이르는 것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는 영역이 줄어들거나 아예 없어지기도 한단다.

 

 

 

호수 안에는 놀잇배들이 떠돌아다닌다. 버기카 투어를 끝낸 관광객들이 흥겨웠던 여흥을 식히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호수의 주변에는 야자수 등 잎이 크고 두꺼운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모래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민들이 심어놓았을 것이다. 리조트단지와 레스토랑, 카페 등은 그보다 밖에 지어져 있다. 하지만 농작물을 재배하는 경작지는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이 생활공간이라기보다는 레포츠를 즐기러 찾아온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물놀이를 하고 있는 곳도 보인다. 윤상과 유희열, 이적 등 꽃보다 청춘출연자들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 물장구를 치던 곳이다. 그들이 했던 것처럼 버기카 투어샌드 보딩을 따라 했으니 이제 저곳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물이 그다지 맑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숫가의 모래언덕에서 샌드 보딩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이 보인다. 그런데 타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우리 같이 엎딘 채로 타는 게 아니라 마치 서핑(surfing)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예 보드에 올라서서 언덕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의 어린이들인 모양이다.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다가 젊은 어부(?)를 만났다. 그런데 고기를 잡는 방법이 너무 요상하다. 낚시를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그렇다고 어망 등의 다른 어구(漁具)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비닐봉지 안에다 튀밥으로 보이는 미끼를 넣은 다음, 물에 잠기게 해놓았다가 고기가 안으로 들어가면 비닐봉지를 들어 올리는 방법이다. 하도 말이 안 되기에 그래가지고 고기가 잡히느냐고 물었더니 작은 물고기 두 마리가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방금 잡았다면서 보여준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이 청년도 대단하지만, 그 정도의 유혹에까지 넘어가는 물고기의 순박함이 더 대단하다 하겠다.

 

 

 

 

여행지 : 중남미의 멕시코 및 페루

 

여행일 : ‘18. 4. 23() - 5.2()

여행지 : 멕시코, 페루. 쿠바(비행기 사정으로 인해 취소)

 

일 정 :

4.23() : 멕시코시티(소깔로광장, 과달루페성당)

4.24() : 멕시코시티(테오티우아칸)

4.25() : 쿠스코(마추픽추)

4.26() : 쿠스코(12각 돌, 쿠스코대성당, 산토도밍고성당)

4.27() : 리마(아르마스광장, 사랑의 공원, 라르꼬마르)

4.28() : 파라가스(바예스타 섬), 이(와카치나 사막)

4.29() : 나스카(나스카라인)

4.30() : 멕시코시티(소우마야 미술관)

 

여행 여섯째 날 : 작은 갈라파고스라는 바예스타 섬(Isla de Ballesta)

 

특징 :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10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갈라파고스 제도(Galápagos Islands, official name으로는 Archipiélago de Colón)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에 많은 영향을 준 곳이다. 이 섬들을 살아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라고 하는데 바예스타 섬(Isla de Ballesta)‘은 갈라파고스 제도에 못지않으나 상대적으로 가기 쉬워서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갈라파고스(the poor man's Galapagos)‘ 혹은 작은 갈라파고스라고 부른다. 바다 한가운데 있는 무인도(無人島)이자 수십 개의 암석과 동굴로 이루어진 바예스타 섬은 바닷새의 배설 퇴적물인 구아노(guano)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구아노가 많다는 건 바닷새들이 그만큼 섬에 많이 서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가마우지, 물떼새, 펠리컨, 갈매기들이 이 작은 섬에 무려 100만 마리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아밖에도 엄청난 수의 물개와 바다사자도 볼 수 있어 일명 물개섬이라고도 불린다.

 

 

 

바예스타로 가기 위해서는 리마에서 남쪽으로 300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파라카스(Paracas)‘까지 와야만 한다. 바예스타섬을 왕복하는 보트 투어가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주민이 4천 명쯤 되는 해안마을 파라카스(Paracas)‘는 역사적으로는 1821년 칠레를 출발한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장군이 이끄는 여섯 척의 페루독립군 함대가 상륙했던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파라카스는 비를 의미하는 케추아어 ‘para’와 모래를 의미하는 ‘aco’가 합쳐진 이름으로 모래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입구에 ‘marina turistica de Paracas’라고 적힌 간판이 내걸려 있다. 투어용 보트의 정박지임을 알려주려는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바예스타 제도(Islas Ballestas)’를 왕복하는 보트의 매표소가 있다. 투어는 하루 종일 진행되니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다만 신청인원이 많을 경우에는 순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탑승권을 구입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파라솔을 꽂은 테이블들이 길게 놓여있다. 배를 탈 순서가 돌아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라는 모양이다. 음료나 간식을 앞에 놓고 시간을 때우면서 말이다.

 

 

앉아서 기다리기 지루하다면 바닷가 풍경을 즐기면 된다. 넓고 푸른 바다와 수많은 보트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나름대로의 볼거리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다는 잔잔하기 짝이 없다. 항구가 파라카스 반도로 둘러싸인 만()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싫증이 났다면 사진이라도 찍어볼 일이다. 바예스타 섬의 물속에서 물고기들과 함께 노니는 풍경이 연출될 것이다.

 

 

길게 놓인 선착장을 따라 진행하면 투어용 쾌속정의 탑승장이 나온다. 차례차례 배에 올라탄 다음 의자에 놓인 노란색 구명조끼를 입으면 된다.

 

 

 

 

 

 

 

배가 부두를 떠나 바다로 향하자 왼편으로 야트막한 모래언덕이 나타난다. 그 자체가 사막과 해변, , 절벽 등 온갖 다양한 지형들이 공존하는 경이로운 지질학적 보고라는 파라카스 국립보존지구(Reserva Nacional de Paracas)’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 해안의 경관이 장난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굳어진 모래가 바닷물에 침식되면서 기괴한 모양의 해안선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여느 유명해안에 뒤질 게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반도의 모래언덕을 끼고 얼마쯤 달렸을까. 삼지창처럼 생긴 문양(文樣)이 나타난다. ‘엘 칸델라브로(El Candelabro)’라는 지상화인데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단다. 그러나 촛대의 가운데 부분이 정남향을 가리키고 있어 뱃사람들에게 중요한 표지가 되어온 것만은 분명하단다. ‘엘 칸델라브로는 스페인어로 촛대를 의미하는데 이 그림은 크기가 181m나 되어 19km 밖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로는 삼지창을 계속해서 연장시킬 경우 내일 들르게 될 나스카지역으로 연결된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엘 칸델라브로는 흙을 약 2피트 정도 파내고 그곳에 돌을 쌓아 만든 문양이라고 한다. 부근에서 발견된 토기를 방사성 탄소로 연대를 측정해보았더니 기원전 200년경으로 나와 파라카스문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은 되지만, 연계성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현지사람들은 남아메리카에 널리 전해오는 전설에 나오는 비라코차(Viracocha)신이 가지고 다니는 삼지창 모양의 번개몽둥이와 흡사하다고 믿고 있단다. 이밖에도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1778-1850)’ 장군과 관련이 있다거나, 프리메이슨(Freemason)의 표지라는 등의 설이 전해진다니 참조한다.

 

 

빠른 속도로 30분 정도 물살을 가르자 작은 바위섬들이 물 위로 떠오른다. 12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바예스타 제도(Islas Ballestas)‘로 모두를 다 합쳐도 면적이 0.12km²에 불과한 작은 섬들이다. 참고로 바예스타제도는 서식하고 있는 생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허가된 사람만이 상륙할 수 있다고 한다.

 

 

섬에 이르자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섬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것처럼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호사를 누린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섬에 가까워질수록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독한 냄새가 맡아지기 때문이다. 온갖 새들과 물개들이 만들어놓은 배설물들에서 나는 냄새라고 한다.

 

 

오랜 세월 침식작용을 거쳐 온 해안은 기괴한 모양새를 만들어냈다. 그중에서도 압권(壓卷)은 동굴이 아닐까 싶다. 섬의 등성이를 뻥 뚫어 놓으며 뒤편의 작은 부속 섬들을 액자(額子) 속에다 가두어 버렸다. 그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그림들을 그리면서 말이다.

 

 

 

 

 

 

섬은 새들의 천국이다. 나무, 아니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민둥의 섬은 물론이고 하늘까지도 온통 새들로 덮여있다. 이 섬에는 펠리컨, 갈매기, 칠레 홍학 등 70여종의 새가 서식한다고 한다. 특히 빨간부리 바다제비는 페루의 천연기념물로 이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빨간부리 바다제비는 암컷과 수컷의 모양이 똑 같아 모습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지만, 짝짓기 할 때는 구분이 가능하단다. 암컷이 바다를 향해 멍 때리고 있으면 수컷은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다 암컷에게 준다는 것이다. 이때 암컷은 여러 마리의 수컷이 잡아오는 생선 가운데 마음에 드는 수컷이 잡아온 생선을 받아먹고, 그 수컷과 짝짓기가 이루어진단다.

 

 

 

 

 

훔볼트 펭귄(Humboldt Penguin)‘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세상에, 남극도 아닌데 펭귄들이 아장아장 걷고 있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참고로 훔볼트 펭귄은 칠레와 페루의 해안에서 서식하는 펭귄종류로 아프리카펭귄, 마젤란펭귄, 갈라파고스펭귄의 친척뻘이 된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모여 있던 펭귄들 또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너희들은 왜 왔니? 귀찮게!’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해안절벽에 들어붙은 빨강색의 게도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에는 조개 등 다른 종류의 어류들도 풍부하단다. 바다 깊은 곳에서 수면으로 올라오는 영양 가득한 해조류가 풍부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선지 해안에서 어로작업(漁撈作業)을 하고 있는 꼬맹이 배도 눈에 띄었다.

 

 

 

 

배가 천천히 섬 주위를 돌자 사람들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사람들의 호들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새들은 유유히 하늘을 날고 물개들은 일광욕을 하거나 바다에서 먹이 사냥을 한다. 새때만 있는 게 아니다. 물개와 바다사자 같은 포유류들도 엄청나게 많은 숫자가 무리를 지어 살고 있다. 거북이와 돌고래 같은 어류도 살고 있다는데 눈에 띄지는 않았다.

 

 

 

 

조금 더 들어가자 물개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니 작은 바위섬을 온통 물개들이 차지해 버렸다. 물개는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영역싸움을 벌이는데 수컷 한 마리가 12-15마리의 암컷을 거느린다고 한다. 새끼를 낳아서 수영을 가르치고 먹이 잡는 법을 가르친 후에는 건너편에 있는 섬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2-3월에 물개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단다. 그렇다면 지금은 제철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물개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섬은 붉은 색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위가 온통 하얗다. ‘구아노(guano)’인데 바닷새의 배설물이 바위 위에 계속 쌓이면서 하얀 석회질처럼 딱딱한 광물질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구아노는 페루의 중요한 수입원일 뿐만 아니라 해안생태계 유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하얀 황금으로 불린다. 구아노가 풍부한 땅은 식물이 자라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바다로 흘러들어간 구아노는 플랑크톤의 먹이가 되어 바다의 생태계 균형과 정화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구아노가 결정적으로 하얀 황금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은 19세기 농업혁명 이후였고, 비료에 대한 수요가 급증해지면서 그 가치는 치솟게 된다. 한때는 페루 국고 수입의 약 80%를 구아노가 담당할 정도였다고 하니, 새똥이 모여 한나라의 경제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 놀랍기 이를 데 없다.

 

 

 

 

붉은 색 섬이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렸다. 하얀색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만큼 구아노(guano)’가 두텁게 쌓여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구아노는 질소, 인산, 칼륨 등이 풍부하기 때문에 아주 좋은 비료로 사용된다. 잉카제국에서도 이미 구아노를 사용하고 있었다니 그 효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를 세상에 알린 것은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였던 알렉산더 폰 훔볼트(Friedrich Wilhelm Heinrich Alexander von Humboldt, 1769-1859)였다. 탐험 중에 우연히 이를 발견하고 페루의 칼라오(Callao)에서 비료로서의 효능을 조사했고, 그 결과를 유럽사회에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오랜 세월을 두고 쌓인 구아노는 두께가 50m에 이르기도 했는데, 먼저 발견한 자의 소유를 인정해주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1864년부터 1866년 사이에는 스페인과 페루-칠레 동맹군 사이에 친차(Chincha) 섬의 구아노를 둘러싸고 전쟁을 치루기도 했다. 20세기 들어 페루정부는 구아노 자원의 고갈을 우려하여 자국 농업에 우선적으로 사용하도록 제한을 두기도 했다.

 

 

 

 

새와 물개들만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이 지어놓은 시설물들도 보인다. 숙도로 보이는 건물은 물론이고 항구에서나 볼 법한 장치들도 보인다. 3-4년에 한번 씩 채굴하는 구아노를 실어내기 위한 서설들일 것이다. 숙소는 섬에서 상주하는 경비원들이 머무는 곳일 테고 말이다. 참고로 경비원들은 15일에 한 번씩 교대된다고 한다.

 

 

 

 

 

 

 

 

 

 

바예스타섬은 물개 섬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새 섬이라는 별명이 더 어울릴 정도로 엄청난 수의 새들이 섬을 뒤덮고 있다. ‘인간 없는 세상의 완벽한 유토피아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인간이 오직 구경꾼으로만 존재할 때 자연이 얼마나 위대한 자태로 스스로의 진면목을 드러내는지, 바예스타는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만 같다.

 

 

 

 

 

 

 

머리 위로는 새 떼가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바다사자만큼이나 새소리도 시끄럽다. 고요한 바다 위의 섬일 것만 같았는데 무척이나 요란한 섬이다. 여기는 그들만의 세상이다. 수많은 새들이 날아다니기도 하고 어떤 새들은 바위에 모여 앉아 시끄럽게 수다를 떨기도 한다. 만화 속에서 보던 펠리컨도 실제로는 처음 본다. 그 자태가 하도 특이해서 눈길이 간다.

 

 

 

 

 

 

뱃전을 스쳐가는 바람이 세찬데도 불구하고 집사람은 모자를 쓰고 있다. 집사람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모자를 쓰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이다. 여행자들의 머리 위에 하얀 새똥이 수직으로 낙하할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겁박 아닌 겁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개들은 끼리끼리 모여 있기도 하고 수영을 하는가하면 바위에서 일광욕을 즐기기도 한다. 널따란 해안을 아예 전세 내버린 곳도 있다. 움푹 들어간 해안에서 득시글거리는 바다사자와 물개들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특히 바다사자들이 늑대처럼 울어대는 소리가 절벽에 부딪혀 만들어내는 합창은 마치 서라운드 음향시스템을 연상시킬 정도로 웅장하다. 한마디로 장관이라 하겠다. 살면서 언제 이렇게 많은 무리의 바다사자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까?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한낮, 배에서 내려 선착장으로 돌아온다. 사막을 달군 태양은 어김없이 해변에도 쏟아져 그 진가를 발휘한다. 땡볕에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식당가로 향한다. 기념품가게를 기웃거리다 해변으로 시선을 돌리니, 무심하게 날아온 펠리컨이 더위에 지친 날개를 쉬고 있다.

 

 

 

해안가를 따라 조금 걷자 마치 우리나라의 해운대나 속초의 유원지에 온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해변과 식당가가 나타난다. 거기서 우린 태극기가 그려진 식당에 들어가 페루산 맥주 쿠스케냐(Cusqueña)‘를 마시며 모처럼 느긋하게 점심을 즐겼다. 그것도 엘 콘도르 파사를 라이브로 들으면서 말이다. 팬플루트(panflute)와 기타를 든 동네가수들은 우리나라 가요까지도 능수능란하게 불러주고 있었다. 물론 약간의 팁을 위해서겠지만 말이다. 오늘의 요리는 세비체(Ceviche)‘, 신선한 생선살을 깍둑썰기해 레몬즙이나 라임즙에 재운 뒤 각종 토핑과 타이거 밀크를 올린 차가운 샐러드이다. 유럽과 일본의 식문화가 혼합된 페루의 대표 메뉴로, ’세비체를 먹어보지 않고는 페루를 논하지 말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니 메뉴 선택을 제대로 한 셈이다. 매콤하면서도 새콤하고, 달콤하면서도 짭짤한 것이 맛 또한 괜찮은 편이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국산 소주에 딱 맞는 안주로 보였다. 그래서 난 가이드의 동의를 얻어 페트병에 넣어 다니는 소주를 꺼내 식당에서 주문한 맥주에다 섞어 마셨다. 알콜의 도수가 올라가니 맥주 맛이 한결 더 좋아졌다.

 

 

 

에필로그(epilogue), 오늘은 원래 쿠바에서의 여정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우린 페루의 남부지역을 여행하고 있다. 쿠스코에서 비행기가 뜨지 않은 탓에 하루 늦게 리마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린 쿠바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탈 수가 없었다. 이날이 마침 노동절과 겹친 탓에 다른 비행기로 바꿔 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찾아낸 대안이 바로 페루의 남부 해안을 따라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쿠바를 못 가본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그나마 남부지역에 나스카라인과 이카사막, 바예스타제도 등 뛰어난 볼거리가 널려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여간 남미 여행을 할 때는 여행 계획을 촘촘하게 짜지 않아야 한다.’는 남미여행자들 사이에 떠도는 얘기가 정설이었음이 입증되는 날이었다 하겠다. 남미에서는 변수가 너무 많아 계획을 짜봤자 그대로 지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항공은 끊임없이 연착되고 취소되며, 기차나 버스 같은 교통편도 제시간에 출발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페루 역시 이런 정설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경비행기도 떴을만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운행 자체를 취소해 버린 것이다. 아무튼 오늘 난 또 하나의 팁을 얻었다. 냠미 여행, 아니 어느 지역을 여행하건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그 예상치 못함에 자신을 던져 넣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자유로움이 여행의 첫 번째 매력이 아니겠는가.

여행지 : 중남미의 멕시코 및 페루

 

여행일 : ‘18. 4. 23() - 5.2()

여행지 : 멕시코, 페루. 쿠바(비행기 사정으로 인해 취소)

 

일 정 :

4.23() : 멕시코시티(소깔로광장, 과달루페성당)

4.24() : 멕시코시티(테오티우아칸)

4.25() : 쿠스코(마추픽추)

4.26() : 쿠스코(12각 돌, 쿠스코대성당, 산토도밍고성당)

4.27() : 리마(아르마스광장, 사랑의 공원, 라르꼬마르)

4.28() : 파라가스(바예스타 섬), 이(와카치나 사막)

4.29() : 나스카(나스카라인)

4.30() : 멕시코시티(소우마야 미술관)

 

여행 다섯째 날 : 피사로가 건설한 도시, 리마(Lima)

 

특징 : 페루의 중부해안 가까이에 위치한 상업 및 공업 중심지이자 페루의 수도이다. 페루 전체 인구의 3/1 이상이 거주하는 남아메리카 내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이다. 리마는 피사로가 1535년 잉카제국을 멸망시켰을 당시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Cuzco)가 내륙 고원에 위치하여 스페인으로의 물자수송이나 연락이 여의치 않자 태평양 연안에 별도로 건설한 도시이다. 이런 이유로 리마는 남아메리카가 스페인 지배하에 있는 동안 큰 번영을 누릴 수 있었고, 그 결과 이러한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아름다운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과 박물관이 도심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리마의 역사지구(Historic Centre of Lima)’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일 것이다. 아무튼 도시는 도심과 주변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식민지시대 문화와 현대문화가 조화를 이룬다. 대부분의 대도시가 그러하듯 리마 역시 도심에는 고층 건물들과 번화한 광장이 화려한 수도임을 알리고 있는 반면에, 변두리 사막에는 직접 말려 만든 아도베(adobe)라는 흙벽돌로 쌓아 올린 붉은 건물들이 지붕도 없이 빈민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리마를 여행할 때에는 크게 구시가지인 리마 센트로 지구와 신시가지인 미라플로레스 지구로 분류하여 일정을 짜는 것이 효율적이다.

 

 

 

남미의 수많은 국가 중 페루만큼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한 나라도 드물다. 마추픽추, 나스카 라인 등 신비로운 고대 문명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 세계 수많은 여행객들이 기대를 가득 안고 이곳을 찾고 있으며, 또한 이곳을 남미여행의 시작점으로 잡는다. 그렇다면 페루의 수도인 리마 여행의 시작점은 어딜까? 사람들은 식민지시대의 유럽풍 건축물들로 둘러싸여 있는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대성당과 대통령궁을 포함한 고풍스러운 건축물들과 잘 가꿔진 분수 등 다양한 볼거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아르마스 광장과 그 주변부는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바 있다.

 

 

 

 

 

 

 

심각한 교통 체증을 뚫고 구시가의 역사지구(Historic Centre of Lima)’에 이르자 고풍스런 건물들이 선을 뵈기 시작한다. 리마는 1535년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제왕의 도시로 건설된 식민도시. 당시 스페인의 남미 대륙 침략을 위한 주도이자 최대 거점이었던 만큼, 구시가를 중심으로 16세기 콜로니얼 양식의 건물들이 옛 모습 그대로 고풍스럽게 남아 있다. 지난 10여 년간 도시가 급격히 팽창하며 현대적인 신시가지와 비즈니스 지구 등이 속속 들어서긴 했지만, 여전히 리마의 정서적 중심지는 바로 이곳 구시가 역사지구이다. 역사지구는 남미 스페인 식민도시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구획을 나누고, 중앙에 타원형의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을 배치한 뒤, 광장을 중심으로 총독 관저와 관청, 대성당을 비롯해 교회 건물들을 짓는 형식이다. 스페인 식민도시인 도미니카공화국의 산토도밍고나 과테말라의 안티구아 등이 모두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다.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분수대(噴水臺)가 만들어져 있다. 원래는 피사로의 동상이 있던 자리라는데 철거된 걸로 보아 국민정서상 맞지 않았나 보다. 경복궁 앞에 있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과 같은 운명이라고나 할까. 분수의 물줄기는 사자와 날개가 달린 괴이한 동물들이 내뿜고 있다. 날개달린 동물은 콘도르와 퓨마를 합친 것으로 페루를 상징하며, 사자는 스페인을 나타낸단다. 침략자와 침략을 당한 자의 묘한 동거가 아닐 수 없다. 옛 일은 이쯤에서 잊고 앞으로는 잘 지내보자는 의미일까?

 

 

그런데 아르마스라는 광장의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 그러고 보니 어제 머물렀던 쿠스코에서도 아르마스광장을 만났었다. 같은 이름의 광장이 두 곳에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다. 중남미의 공통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많은 도시들이 중심이 되는 광장(plaza)에다 아르마스(armas)‘라는 이름을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이에는 아픈 역사적 사연이 있다고 한다. 스페인어로 직역할 경우 아르마스 광장무기 광장이 되는데, 과거 스페인 식민시대에 스페인 사람들이 광장에서 무기를 만들거나 재정비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plaza de mayor(메인 광장 or 중앙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려는 노력도 엿보인다고 한다. 오랜 세월동안 굳어진 이름인데 금방 고쳐질 수 있을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광장의 북쪽에는 '대통령궁(Palacio de Gobierno)‘이 자리하고 있다. 최초로 지어질 당시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피사로가 직접 설계를 담당했다고 해서 피사로 궁(Casa de Pizarro)‘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37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위엄 있게 펄럭이는 페루 국기와 건물 꼭대기의 정면에 달린 붉은 휘장(徽章)이 대통령 궁임을 알려준다. 건물은 외관만 구경이 가능하다. 그것도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날카로운 검은 철창의 밖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총칼을 차고 경호를 서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위압적인 풍경은 아르마스 광장의 평화스러운 분위기와 판이하게 다르다. 하긴 우리나라도 청와대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마침 근위병(近衛兵)의 교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장난감 병정처럼 기계적인 동작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인 의식이다. 먼저 기악대가 나와 음악을 연주하더니 그 자리를 근위병들에게 내준다. 이후부터는 근위병들의 갖가지 동작들을 보여준다. 대통령 궁의 또 다른 볼거리로 충분했지만 철창의 창살 틈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아무튼 매일 정오에 이루진다고 알고 있었는데 마침 맞게 도착했던 모양이다.

 

 

서쪽의 노란색 건물은 리마 시청사이다. 하얀색으로 치장된 장식과 검정색 테라스가 노란색건물과 조화를 이루면서 마치 동화나라의 궁전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google 지도에 시민궁전(municipal palace of lima)’이라고 표기해 놓은 모양이다. 옥상에는 페루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1825년에 제정된 페루의 국기는 빨간색과 하얀색, 빨간색 등 세 개의 세로 줄무늬로 구성되어 있다. 빨간색은 독립을 위해 흘린 피를, 하얀색은 평화와 용맹함을 의미한단다. 정부와 민간이 서로 다른 국기를 사용하는데, 정부에서는 하얀색 바탕에 국장이 그려져 있는 깃발을, 반면에 민간에서는 국장이 없는 기를 사용한단다. 둘 모두 공식 국기임은 물론이다.

 

 

광장의 동쪽은 거대한 규모의 리마 대성당(Catedral de Lima)’이 차지하고 있다. 페루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스페인 침략군대를 이끈 피사로가 직접 주춧돌을 놓았다고 해서 더욱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스페인의 주류 양식이었던 바로크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지어진 대성당은 몇 차례의 대지진으로 손상을 입은 후 1755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되었다고 한다. 고풍스러우면서도 대담한 조각과 장식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라 할 수 있겠다.

 

 

1535년에 공사를 시작해 1세기 뒤에야 완공한 리마 대성당은 우아한 건축양식과 호화로운 장식. 그리고 수많은 예술작품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침략자였던 스페인은 열과 성을 다해 으리으리한 성당을 짓는 한편, 그 안을 그림과 조각으로 호화롭게 치장했다. 자기들의 종교인 가톨릭을 조금이라도 더 우월하게 보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통해 하나의 통일체를 만들어보려는 의도였다는 것 또한 부인하지 못할 게다. 1937년 일제가 전쟁 협력 강요를 위해 취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또 다른 표출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이런 기분은 페루를 여행하는 내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화두(話頭)가 되어버렸다.

 

 

 

 

대성당 옆에 있는 대주교 궁(Palacio Arzobispal de Lima)’의 이슬람건축 영향을 받았다는 검은 색 발코니가 눈길을 끈다. 하나의 나무를 통째로 조각해놓은 것이라는 얘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큰 나무가 존재했을까를 생각하니 차라리 경이롭기까지 하다.

 

 

대성당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스페인의 침략 당시를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맨 앞에서 뭔가를 지시하고 있는 군인은 피사로가 분명하다 하겠다. 그 오른편에 권력다툼 끝에 살해당했다는 피사로의 관이 놓여있었으니까 말이다.

 

 

 

 

성당의 안은 2년 전쯤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만났던 성당들과 거의 비슷한 구조이다. 중앙에 대형의 주 제단(祭壇)을 놓고 그 주위를 15개 남짓한 작은 제단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하나 호화롭지 않은 곳이 없다. 그래서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호화롭게 만드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는 얘기를 듣는 모양이다.

 

 

 

 

 

 

 

 

 

 

 

 

 

 

 

 

성당의 한켠은 박물관처럼 꾸며놓았다. 17~18세기의 종교 유물과 전례용품 등 성물들을 전시해 종교예술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가이드가 없이 혼자서 둘러보다보니 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페루의 종교예술을 조금 더 깊이 느껴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이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의 아래에 ‘sala de libros corales’라고 쓰인 팻말이 보이기에 올라가 봤다. 각각 ‘sala(널따란 홀, 거실)’, ‘libros()’, ‘corales(법의)’라는 뜻을 가졌으니 대충 종교관련 서적이나 역대 대주교들이 입었던 법의(法衣)가 전시되어 있을 것 같아서이다.

 

 

위로 올라가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건축물의 모형과 악보가 전시되어 있고, 벽에는 초기의 성직자로 여겨지는 인물들을 새긴 판각화(板刻畵)가 여러 점 걸려있다. ! 성직자가 입었을 것으로 보이는 법의도 보인다.

 

 

 

 

 

광장을 모두 둘러봤다면 이젠 신시가지로 가볼 차례이다. 우리를 그곳까지 실어다 줄 관광버스는 대통령궁과 시청사가 대각선으로 만나는 사거리에서 시청사를 왼편에 끼고 한 블록쯤 걸어야 하는 곳에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 이르니 산토도밍고성당(Cathedral of Santo Domingo)’이 나온다. 1549년에 세운 교회로 대 지진에도 외부 손상을 입지 않아 건축 당시와 거의 변함이 없다고 한다. 당시 이 교회에서는 리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일 246개의 빵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특히 주말에는 50마리 분의 양고기를 나눠주기도 했단다. 참고로 1551년 이 교회 안에 남미 최초의 대학인 산마르코스대학이 설립되기도 했다.

 

 

 

 

버스가 멈춘 곳은 신시가지(미라플로레스)에 있는 사랑의 공원(Parque del Amor)’이다. 해안 절벽 위에 만들어진 작은 테마공원으로 두 연인이 키스하는 동상과 바다를 향해 뚫린 하트모양 창문이 연인들과 신혼부부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한다. 절벽 아래 방파제 위에는 팔각형 지붕의 예쁜 고급레스토랑 '라로사나우띠까(La Rosa Nautica)'가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랑의 공원1993발렌타인 데이(Saint Valentine’s Day)‘에 오픈했다고 한다. 이쯤에서 궁금증 하나가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공원의 이름에 걸맞게 개장 날짜를 맞췄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사랑의 성인인 발렌타인으로부터 취해온 이름인지로 말이다. 웃자고 한 얘기이지만 이왕에 나왔으니 발렌타인데이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자. 서기 270214일은 사제 발렌타인이 처형된 날이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가 원정을 떠나는 병사들의 정신이 해이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결혼을 금지했는데, 한 연인의 참된 사랑을 알게 된 발렌타인이 이들의 결혼을 승인해 처형을 당한 것이다. 2세기 후 교황 율리우스는 그를 성인(聖人) 발렌타인으로 품(諡聖)하고 214일을 그를 기리는 휴일로 정했다. 그 덕분에 나도 그를 주보성인(主保聖人)으로 삼고 매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공원은 뛰어난 조망대이다. 바닷가 절벽 위에 조성되어 있는 탓에 어느 곳에서건 아름다운 해안선과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전망 좋은 곳에서 쉬다 가라는 배려인지 곳곳에 벤치도 놓아두었다. 예술성 짙은 조형물들도 여럿 보인다. 그래선지 이곳은 리마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장소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이 공원은 타일로 치장된 담이 인상적이다. 2년쯤 전에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 있는 구엘공원(Park Güell)에서 보았던 타일벤치를 쏙 빼다 닮았다. ‘까탈루나 스타일이기도 한 트랜카디스기법(Trencadis : 타일과 유리, 거울 등을 깨서 모자이크화)을 말이다. 참고로 구엘공원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가 그의 후원자였던 에우세비 구엘(Eusebi Güell Bacigalupi)‘을 위해 만든 공원이다.

 

 

 

 

공원의 또 다른 특징은 수 없이 많은 사랑의 글귀가 공원의 곳곳에 적혀 있다는 것이다. 타일 벽면에도 적혀있음은 물론이다. 스페인어라 해독은 불가능했지만 물어물어 알아낸 것만 해도 그 내용은 다양했다. ’Amor es como luz(사랑은 빛과 같다)‘. 등등... 가이드북에도 내 작은 비둘기야, 달콤한 둥지로 돌아오려무나.‘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이 공원의 명물은 단연 키스하는 연인상이라 하겠다. 공원의 한가운데에서 과감한 포즈로 키스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매가 두루뭉술해서인지 선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고나 할까? ’치마가 들춰진 것 같으니 살짝 내다볼까?‘ 실없이 던지는 농담을 그냥 넘기는 걸 보니 집사람의 느낌 또한 나와 다르지 않았던가 보다.

 

 

연인으로 보이는 한 쌍의 남녀가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올리기가 민망할 정도의 포즈를 취하는 연인들도 보인다. ’사랑의 공원에 오면 누구나 사랑하는 마음이 짙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상황이 분위기를 만드는 게 아니고 분위기가 상황을 만든다는 얘기도 있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라르꼬마르(Larcomar)‘이다. 라르꼬마르는 수도 리마의 태평양 해변에 새로 조성된 복합 쇼핑단지다. 우리나라의 삼성동 코엑스 몰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며 리마에서는 가장 서구화된 지역으로 주변에는 초특급 호텔들과 각종 고급식당,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3층 규모의 현대적 복합 쇼핑몰은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해안의 절벽을 깎아서 만들었다. 그 덕분에 어느 곳에서나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바다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쇼핑몰 안에서는 태평양을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부터 각 나라의 유명 패스트푸드 체인점들이 가득하다. 그밖에도 영화관, 디스코텍, 볼링장, 토니로마스 등 전통춤과 식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식당, 여행사, 고급의 알파카제품을 판매하는 쇼핑전문점 등이 있으며 아이들을 위한 대형 오락실도 있다.

 

 

 

 

집사람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종일 걸어 다니느라 지쳤던 모양이다. 아니 어제 저녁 내내 고통스러워했던 고산병 증세를 아직까지 털어버리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찾아든 게 카페, 실외에다 내놓은 테이블에 앉아 페루의 자부심이라는 잉카 콜라(Inca Kola)를 주문해볼까도 했는데 결국에는 아이스크림으로 선회하고 말았다. 그녀가 싫다는 걸 어쩌겠는가. 그저 달콤한 것이 피로에 좋다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내 앞에는 시원한 맥주가 놓여있었음은 물론이다. 이곳 페루에서 생산되는 맥주는 아레키페냐(Arequipeña)와 쿠스케냐(Cusqueña)가 유명한데, 오늘은 아레키페냐(Arequipeña)을 선택하기로 했다. 쿠스케냐(Cusqueña)는 쿠스코 지역에서 머문 이틀 내내 마셨기 때문이다.

 

 

 

사흘 밤을 머물렀던 리마의 산 오거스틴 익스클루시브 호텔(San Agustin Exclusive hotel)’

미라플로레스 지역에 위치한 호텔로 등급은 비록 3.5성급에 불과하지만 시설이나 서비스 면에서는 일류 호텔에 하등 뒤질 게 없어 보인다. 와이파이도 제법 잘 터지며 제공되는 아침식사 또한 괜찮은 편이었다.

 

 

여행지 : 중남미의 멕시코 및 페루

 

여행일 : ‘18. 4. 23() - 5.2()

여행지 : 멕시코, 페루. 쿠바(비행기 사정으로 인해 취소)

 

일 정 :

4.23() : 멕시코시티(소깔로광장, 과달루페성당)

4.24() : 멕시코시티(테오티우아칸)

4.25() : 쿠스코(마추픽추)

4.26() : 쿠스코(12각 돌, 쿠스코대성당, 산토도밍고성당)

4.27() : 리마(아르마스광장, 사랑의 공원, 라르꼬마르)

4.28() : 파라가스(바예스타 섬), 이(와카치나 사막)

4.29() : 나스카(나스카라인)

4.30() : 멕시코시티(소우마야 미술관)

 

여행 넷째 날 : 쿠스코(Cuzco)

 

특징 : 타완팅수우유(Tawantinsuyu, 잉카 제국의 정식 명칭)’의 수도로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페루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페루는 동쪽으로는 아마존, 서쪽으로 태평양, 남쪽으로 칠레, 북으로는 에콰도르에 이르는 거대한 나라였으며 그 중심에 쿠스코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결과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고 잉카로드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적을 남겼다. 그러나 오늘날의 쿠스코는 잉카의 고도(古都)라기보다 유럽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스페인의 도시에 더 가깝다. 자신들의 문화를 이식하고자 했던 스페인의 파괴 행태로 잉카 신전과 건축물 대신 광장과 대성당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완전히 지우지 못한 잉카 제국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쿠스코는 해발이 3,399m나 되는 고산지대(高山地帶)에 자리하고 있으며 4,000m를 훌쩍 넘기는 높은 산들이 도시를 빙 둘러싸고 있다. 그 덕분에 쿠스코는 적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천혜의 요새가 될 수 있었고, 거기다 우루밤바 강을 끼고 있어 비옥한 농경지의 확보까지도 가능했다. 이만하면 제국의 수도로 삼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하지만 쿠스코는 많은 여행자들이 고산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쿠스코는 198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바 있다

 

 

 

공항은 초라한 편이다. 세계 각국의 버킷리스터(bucket-list-er), 그것도 매년 백만 명도 훨씬 넘는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는 곳치고는 말이다. 하지만 공항을 빠져나오면 역시 유명관광지가 맞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행세깨나 한다는 기업의 광고용 간판들이 늘어서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문명의 하나인 잉카 문명의 중심지 쿠스코! 안데스산맥의 고원에 있는 쿠스코에서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은 아르마스광장(Plaza de Armas)’이다. 도시의 중심지이자 쿠스코를 상징하는 대표적 볼거리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스페인 식민시대의 관청과 성당들이 잉카의 주춧돌 위에서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그나저나 아르마스광장은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광장을 포함한 구시가지 전체를 관광버스 진입 금지구역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린 마추픽추에서 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도시의 외곽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광장을 향해 내려간다고 보면 되겠다.

 

 

잉카의 문명을 찾아가는 길이니 그들의 문명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잉카는 안데스산맥의 원주민인 케추아족의 언어로 태양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래서 잉카인들은 그들의 창조주인 비라코차(Viracocha)’의 아들인 인티(Inti)’를 태양신으로 모셨다. 태양신 인티는 지금 사는 세상, 즉 현세를 관장하는 신이다. 안데스산맥의 대지를 따뜻하게 품어 곡식을 맺게 해 주는 신이기에 잉카 농민들의 조상신이기도 하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잉카 인들은 마야나 아스텍 인들처럼 매일 지는 해를 에너지로 충전시켜 다시 떠오르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바치는 의식을 치렀다. 그런 의식을 통해 태양이 매일 다시 떠오르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한편으로 잉카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문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잉카인들은 마야 인들이 상형문자를 썼던 것과는 달리 문자 대신 아마우타라를 사용했다고 한다. 사람들끼리 말로 전하고 기억하는 것으로 역사를 이어가는 방법이다. 다른 보조 수단으로 퀴프(quipu, 결승문자)’라는 것을 쓰기도 했단다. 한 가닥 끈에 여러 가닥의 끈을 직각으로 매단 것을 말한다. 잉카 인들은 그 퀴프의 색깔과 퀴프에 지어진 매듭의 숫자나 모양, 매듭이 지어진 위치 등으로 가구 수나 세금액 등을 계산했단다. 좀 엉성한 의사전달 방법 같아 보이지만 꽤나 정확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유럽인들이 이 퀴프를 해독하고 그 정확성에 매우 놀랐다니 말이다. 또 다른 특징인 뛰어난 석축기술은 잠시 뒤로 미뤄두자.

 

 

골목을 따라 10분쯤 내려가자 쿠스코에서 가장 넓다는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is)’이 나온다. 스페인 문화권의 중앙광장으로서 원래는 군사용 광장이었으나 나중에 그 기능이 다양해지면서 정치·군사·문화·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잉카제국 시대에는 태양신을 위한 축제 장소였으며 아우카이파타(Haukaypata)’로 불리던 잉카의 중심지였다. 잉카인들은 이곳에서 여러 신성한 의식들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피사로가 쿠스코를 함락시킨 뒤 도시를 재정비 한다는 구실로 아우카이파타(Haukaypata)’를 허물고 그 자리에다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is)’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광장 주변에는 대성당과 교회, 여행사, 선물상점, 레스토랑 등 다양한 삶들이 들어서 있다. 테라스(terrace)와 회랑(回廊)을 품은 고풍스런 건물들이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아름다운 품격을 한결 높여준다. 참고로 이곳 아르마스 광장의 야경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잉카의 광장이었건만 지금은 스페인의 모습으로만 남았다. 스페인에 의한 식민지 시절 침략자들은 잉카제국의 궁전과 신전을 파괴하고 그 터의 초석위에다 바로크풍의 교회들을 건설했다. 비라코차(Viracocha) 신전이 있던 자리에는 대성당(Catedral)’, 카파쿠 궁전 터에는 라 콤파냐 헤수스 교회를 지었다. 잉카유적지의 초석 위에 지어진 침략자들의 상징물들은 분명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하지만 400여 년이라는 시간은 이 특이한 조합마저 아름답게 재구성을 해놓았다. 그리고 중남미 여행객들에게 애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광장의 동쪽, 그러니까 광장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는 대성당(Catedral)’이 자리하고 있다. 키스와르칸차(Kiswarkancha)라는 비라코차(Viracocha)의 신전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성당으로 공식명칭은 성모승천의 대성당(The Cathedral Basilica of the Assumption of the Virgin)이다. 1559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00년이 지난 후에야 완공할 수 있었다는 이 성당은 잉카의 흔적을 없애고 식민시대를 여는 상징이었다고 한다. 스페인의 톨레도 대성당이나 세비야 대성당에 견줄 수는 없지만 제단을 만드는 데만 은 300t을 쏟아 부었다고 하니 잉카를 지우려는 정복자들의 대역사였던 셈이다.

 

 

스페인양식의 영향을 받은 직사각형 모양 대성당은 고딕·르네상스 양식으로 짓기 시작했으나 뒤에 바로크양식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대성당을 가운데에 두고 왼쪽에는 헤수스 마리아(Jesús Maria) 성당과 그리고 오른쪽의 엘 트리운포(El Triunfo) 성당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데, 이 중 엘 트리운포 성당은 1536년에 지어진 쿠스코 최초의 성당이다. 입장은 헤수스 마리아(Jesús Maria) 성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중앙제단 아래 지하실에는 쿠스코교구의 대주교 유해들이 안치되어 있고, 성당의 오른쪽 종탑에는 1659년에 주조된 마리아 앙골라 종(Maria Angola Bell)이 걸려 있다. 이 종은 2.15m 높이에 무게가 5,980kg이 나가는데, 20마일 밖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성당의 내부는 관람이 가능하도록 개방되어 있다. 물론 유료(有料)이다. 하지만 사진촬영은 금지된다. 그래서 사진은 첨부하지 않고, 내가 본 실상과 다른 이들의 글을 참조해서 설명해 본다. 일명 바로코 안디노(Barroco Andino)’라고 하는 페루 스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성당 내부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수많은 제대와 400여점이 넘는 종교화가 빈틈없이 성당을 채우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태양신의 황금관을 썼고, 예수상은 이곳 원주민처럼 검은 피부를 지녔다. 검은 예수상은 이곳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그을음으로 검은색이 됐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데, 그 후로 지진을 막아주는 신으로 숭상되고 있단다. 종교화 속의 악인들 그러니까 예수를 팔아먹은 배신자 유다라든가 성인을 핍박하는 로마 군인들이 스페인군으로 묘사된 점도 특이하다. 그러나 가장 재미있는 것은 마르코스 사파타라는 현지 민속 화가가 그렸다는 최후의 만찬이 아닐까 싶다. 만찬 속 음식이 이곳 페루의 가장 유명한 민속요리인 꾸이라니까 말이다. 이로보아 대성당은 겉으로는 지배자의 신앙인 가톨릭을 숭상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면면에는 잉카인의 저항과 토속적인 면모가 가미된 곳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그밖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걸려 있었지만 예술에 문외한이라서 내력이나 가치 등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남쪽에는 바로크양식의 라 꼼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Iglesia la compania de Jesus)’가 자리 잡았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좌우 대칭을 이루는 종탑과 섬세한 외벽 부조로 옆의 대성당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이 교회는 15676년 착공했지만 1650년의 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1688년에서야 완공을 보았다고 한다. 교회 내부에 마르코스 사바타, 디에고 데 라 푸엔테, 크리스토 부르고스 등의 벽화와 조각품 등이 있다고 하나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예술에 문외한인 내가 사진촬영이 되지 않은 곳까지 일부러 들어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이다. ! 원래 이곳에는 잉카제국의 11대 황제 와이나 카팍(Huayna Capac)’의 궁전이었던 아마루칸차(Amarucancha)’가 있었다고 하니 참조한다.

 

 

 

 

 

 

300이상이나 떨어진 해안의 모래를 퍼다 조성했다는 광장에는 대성당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잉카제국의 제9대 왕이었던 파차쿠텍(Pachacutec Inca Yupanqui, 1438~1471)’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그는 부족국가로 남아있던 잉카를 제대로 된 왕국으로 바꾼 왕이었다. 수도 쿠스코의 정비와 함께 제국의 영토 확장에 힘써 수도로부터 약 4000에 달하는 안데스의 영토를 지배하였으며, 당시 인구가 6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조세제도도 마련되었단다. 특히 케추아어를 공용어로 삼음으로써 실질적인 제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단다. 그건 그렇고 그가 치켜든 팔이 제국의 영광을 무너뜨린 자들을 향해 뭐라고 꾸짖는 것 같아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아니 제국의 신민들에게 옛 영광이 다시 돌아올 것임을 설파하려는 모양새일지도 모르겠다.

 

 

 

 

대성당과 헤수스교회의 사이에는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가와 깔끔한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장식목공품과 보석 등의 기념품 외에도 페루의 특산품인 양탄자나 양털 스웨터(sweater) 등이 진열되어 있으니 기념으로 하나쯤 구입해 볼 일이다. ! 스웨터를 짊어지고 다니며 파는 노점상도 보이니 아주 저렴한 가격을 원할 경우에는 이를 이용하면 된다.

 

 

 

 

 

이젠 ‘12각 돌을 만나러 갈 차례이다. 잉카인의 석조 건축술을 가장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12각 돌이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7~8분 거리에 있는데, 이곳으로 가고 싶을 경우 아툰 루미위크 거리(Av. Hatun Rumiyoc)’를 찾으면 된다. 잉카인이 쌓아놓은 돌담들을 만날 수 있고, 특히 쿠스코에 간 사람들이 절대 빠트리지 않는다는 ‘12각 돌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성당과 헤수스교회가 대각선으로 만나는 사거리에서 대성당을 왼편에 끼고 진행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툰 루미위크 거리(Av. Hatun Rumiyoc)’를 잠시 걷다보면 종교 예술 박물관(Museo de Arte Religioso)’이 나온다. 원래는 6대 황제인 잉카 로카(Inca Roca, 1348-1378)의 궁전이었는데 스페인 사람들이 궁전을 허물고 그 석벽을 토대로 가톨릭의 대교구청 건물을 지어 사용해오다가. 지금은 종교 예술 박물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건물 역시 잉카인들이 남긴 석축의 위에 지어졌다.

 

 

 

 

 

 

박물관의 담벼락 아래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게 보인다. 다가가 보니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가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담벼락 앞에서 말이다. 돌의 크기만 조금 더 커졌을 뿐이라며 툴툴거리는데 이를 본 가이드가 가운데에 있는 돌의 면()을 한 번 세어보란다. 12각으로 이루어졌을 거라면서 ‘12각의 돌(La Piedra de Los Doce Anguios)’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거라면서 맞물린 돌들의 사이에 틈이 있는지도 살펴보란다. 그의 말은 옳았다. 그렇다면 철을 사용하지 못했던 잉카인들은 어떻게 돌 자르는 기술을 갖게 됐을까?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히마타이트라고 하는 매우 단단한 돌을 강가에서 주워 단단한 돌칼을 만들어 사용했단다. 다이아몬드 강도가 10이라면, 히마타이트의 강도는 대략 8정도가 된단다.

 

 

 

 

‘12각의 돌(La Piedra de Los Doce Anguios)’의 특징은 돌과 돌의 사이가 종이 한 장 끼울 수 없이 정교하다는데 있다. 그리고 돌이 12각으로 다듬어져 있다는 게 두 번째 특징이다. 보다 많은 돌들이 서로 맞물림으로써 견고성을 높이려는 아이디어란다. 여러 차례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은 원인이고 말이다. 잉카의 석축기술은 고대로부터 이 지역을 흔들었던 강력한 지진의 산물이었다. 돌을 쌓기 위하여 다듬을 때 서로 맞물릴 수 있도록 한다거나 돌을 쌓아올릴 때 경사각을 적절하게 유지하였던 것인데, 잉카의 석공들은 네모난 돌이 서로 잘 들어맞아 전체와 통일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서로 합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찍 터득했던 모양이다.

 

 

골목에는 꽤 많은 기념품가게들이 들어서있다. 그런데 기웃거리는 사람들보다 뭔가 하나씩 들고 나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아 보인다. 고풍스런 분위기에 취하기라도 했나보다.

 

 

 

 

 

‘12각의 돌뿐만이 아니다. 근처의 담벼락들도 거의 비슷한 모양새이다. ‘12각의 돌에는 못 미칠지 몰라도 그 정교함은 보는 이의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잉카의 만들어낸 건축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로 승화되어 있었다. 돌이 만들어낸 예술품의 전시장이자 축제의 마당인 것이다. 돌들은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양이 없다. 돌의 원래 모양을 살려가면서 깎았기 때문일 것이다. 홈을 파거나 여기에 맞는 옹이가 달리도록 깎아 맞추었다. 정교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 같다. 아무튼 이런 석조 벽이 만들어내는 쿠스코 골목길의 풍경이야말로 잉카의 도시에서만이 볼 수 있는 잉카의 느낌이 아닐까 싶다.

 

 

잉카 제국의 발달된 여러 문명과 기술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게 돌담, 즉 정교한 건축술이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조그마한 틈새조차도 허용하지 않고 아귀를 맞추어 촘촘히 쌓아 올린 벽은 수백 년의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처음 모습 그대로 요지부동이며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함을 자랑한다. 똑같은 모양의 벽돌을 일렬로 맞춰 쌓는 현대의 방식과 다르게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의 돌들을 조금씩 엇갈리게 쌓으면서도 틈새를 정확히 맞추었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6각이나 8.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은 각() 등 바위의 생긴 모양대로 각을 맞추어 쌓아올린 돌담은 아름다움을 넘어 차라리 경이롭다는 느낌까지 들게 만든다. 그 아래로 난 길의 바닥도 돌을 깔아놓았다. 길을 온통 돌이 차지해버렸다고나 할까?

 

 

거리에 돌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흙벽돌로 담을 쌓은 뒤에 그 위를 다시 흙으로 발라놓은 곳도 보인다.

 

 

남쪽 방향의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산토도밍고 성당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남동쪽으로 비교적 큰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된다. 가는 길에도 꽤 많은 특산품가게와 기념품가게를 만날 수 있으니 참조한다.

 

 

 

 

길가의 건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정한 특징을 갖고 있다. 아래에다 촘촘하기 짝이 없는 돌 축대를 쌓고, 그 위에다 건축물들을 지어놓은 것이다. 돌 축대는 잉카인들이 쌓았고 건물은 스페인 사람들이 지었다고 한다. 잉카의 뼈에 스페인 정복자의 살이 붙었다고나 할까? 스페인의 침략자 피사로가 이 찬란했던 제국을 멸망시키고 300년 넘게 식민통치를 했지만 그 뼈대까지는 없애지 못한 셈이다.

 

 

한참을 걷자 성당이 나타난다. ‘산토도밍고 성당(Templo de Santo Domingo)’이다. 이곳에는 잉카의 또 다른 유적지인 코리칸차(Coricancha)’ 터가 있다. 아니 코리칸차의 터에다 성당을 지었다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쿠스코를 점령한 피사로는 태양의 신전을 완벽하게 부수고 그 위에다 성당을 세우려 했단다. 그런데 잉카인들이 쌓은 기단(基壇)이 너무나 견고해서 도저히 부술 수 없었다고 한다. 피시로가 잉카인들이 축조한 기단 위에다 산토 도밍고 성당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부수기는 쉬워도 새로 만들기는 어려운 법인데 얼마나 치밀하고 촘촘히 쌓아 올렸으면 난폭한 침략자들마저 손을 들었을까? 하긴 1950년과 1650년의 대지진으로 산토도밍고 성당이 많은 피해를 입었을 때에도 코리칸차의 초석은 끄떡없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산타도밍고 성당(Templo de Santo Domingo)이 세워진 곳은 잉카제국의 전성기 때 태양신전과 궁전으로 사용되던 코리칸차자리라고 한다. ‘코리칸차는 케추아 어로 황금을 뜻하는 코리와 울타리를 의미하는 칸차를 합한 말이다. 이름의 뜻대로 코리칸차의 벽은 황금으로 덮여 있었고 광장은 황금으로 만든 나무와 식물, 동물 조각들로 꾸며져 있었다고 한다. 광장을 꾸민 나무와 조각들을 모두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 힘들겠지만 이는 사실이란다. 스페인에 있는 박물관과 자료관에 당시 스페인 군대를 따라 쿠스코에 왔던 역사학자와 연대기 작가들이 기록해 놓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확인이 가능하단다. 아무튼 금으로 덮여있는 궁전을 본 침략자들이 그걸 그냥 두었을 리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금을 모두 녹여서 스페인으로 가져갔는데 어찌나 금이 많았는지 유럽경제가 혼란에 빠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너무 견고하게 만들어져 부수는 것조차 힘들었다는 태양의 신전은 교회 바깥과 내부에 그 터와 일부 돌담만을 남기고 있다 한다. 스페인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빼어난 기술력을 자랑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비행기를 타야할 시간이 촉박하다는 가이드의 재촉이 그 원인이었다. 아니 잉카 최고의 축조물이라는 ‘12각의 돌을 이미 보아버렸기에 또 다시 돌담을 본다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는 게 더 옳은 고백일 수도 있겠다. 참고로 태양의 신전터가 남아 있는 앞 광장에는 코리칸차 박물관(Museo de Sitio del Qoricancha)이 있는데 이곳에서 잉카 제국의 유물들과 외과수술이 행해진 해골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산타도밍고 성당 근처에서 만난 광장, 작고 예쁜 모습인데 이름은 모르겠다.

 

 

마추픽추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얀 예수상(Cristo Blanco)’이 있는 언덕에 올랐다. 쿠스코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이 예수상은 1945년 팔레스타인 기독교그룹이 난민신세가 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받아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남미에서 두 번째로 큰 예수상이라니 쿠스코의 랜드마크(landmark)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전망대답게 쿠스코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쿠스코는 한때 100만 명이나 살았다는 옛 타완틴수요(Twantinsuyo)’, 잉카제국의 수도였다. 4방으로 뻗은 나라라는 뜻의 타완틴수요답게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초에는 안데스를 중심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볼리비아, 칠레 북부까지 지배하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이 제국의 왕을 잉카라고 불렀는데, 유럽인들이 이 용어를 그대로 제국의 이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쿠스코는 원주민 언어인 케추아어로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이다. 잉카인들은 하늘은 독수리,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 쿠스코는 도시 전체가 퓨마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문자와 종이가 없었던 이 제국은 구전에 의해 그 역사가 전해오는데, 티티카카 호수에서 태어난 만코 카팍(Manco Capac, 1198-1228)’과 그의 누이 마마 오클로가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쿠스코가 타완틴수요라는 제국의 수도로 성장하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438년 만코 카팍의 18세손인 파차쿠티(Pachacuti.14381471)’ 왕 때부터이다. 그는 사피와 툴루마요 강에 수로를 만들고 그들이 신성시했던 퓨마의 형상을 따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총이나 말(horse)을 몰랐고 신()은 흰 피부를 지녔다고 믿었던 잉카인들은 불과 200명의 군대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예수상 말고도 십자가 몇 개가 더 세워져 있다. 역시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있는 나라답다. 그런데 십자가가 천 등으로 지저분하게 묶여있다. 마치 무당집 앞마당에 세워진 대나무 같다고나 할까? 어쩌면 기독교 문화에 토속신앙이 섞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민속의상을 차려입은 원주민이 사진촬영을 권한다. 집사람에게 추억을 갖게 해주고 싶어 이에 응하기로 했다. 원주민에 라마까지 배경으로 넣으니 집사람의 인물이 한결 돋보인다. 그래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다시 돌아온 쿠스코비행장’, 이번엔 리마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어제 아침에 도착했을 때의 들떴던 기분과는 사뭇 다른 결과가 초래되어 버렸다. 공항 대합실에서 1시간쯤 기다렸을까 비행기 정보 안내판을 보니 딜레이(delay)가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행기를 타기는 탔다. 페루의 저가항공사들에게 한두 시간 정도의 딜레이는 돌출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얘기를 들은바있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비행기가 못 뜬다며 다시 내리라는 것이 아닌가. 대합실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캔슬(cancel)로 안내가 바뀌어버렸다. 맞은편 산자락이 짙은 구름에 잠겨있을 뿐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비행기는 내일 아침에나 출발할 수 있단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정은 어쩌란 말인가. 리마로 나가 오늘 저녁비행기로 멕시코시티까지 가서, 쿠바로 들어가는 비행기로 환승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망했다. 그리고 우린 끝내 쿠바에 들어가 보지를 못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 덕분에 우린 쿠스코에서 일박을 해야만 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고산병 증상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다는 게 더 억울했다. 이렇게 비행기가 취소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시간이 없어 포기해야만 했던 유적지들을 둘러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바위를 차곡차곡 쌓았으면서도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짜 맞춘 사크사우아만(Sacsayhuamán) 유적지는 물론이고, 잉카인들의 뛰어난 관개(灌漑) 기술을 엿볼 수 있다는 탐보 마차이(Tambo machay)’, 잉카의 종교적 중심지 켄코(Qenqo) 등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지명들이 공허하게 내뱉는 한숨소리와 함께 허공을 맴돈다.

 

 

여행지 : 중남미의 멕시코 및 페루

 

여행일 : ‘18. 4. 23() - 5.2()

여행지 : 멕시코, 페루. 쿠바(비행기 사정으로 인해 취소)

 

일 정 :

4.23() : 멕시코시티(소깔로광장, 과달루페성당)

4.24() : 멕시코시티(테오티우아칸)

4.25() : 쿠스코(마추픽추)

4.26() : 쿠스코(12각 돌, 쿠스코대성당, 산토도밍고성당)

4.27() : 리마(아르마스광장, 사랑의 공원, 라르꼬마르)

4.28() : 파라가스(바예스타 섬), 이(와카치나 사막)

4.29() : 나스카(나스카라인)

4.30() : 멕시코시티(소우마야 미술관)

 

여행 셋째 날 오후 : 잉카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적, 마추픽추(Machu Picchu)

 

특징 : 지금은 좀 시들해졌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써내려가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리스트의 첫머리에다 마추픽추라는 단어를 올렸었다. 그들이 거론했던 마추픽추는 페루 아니 더 나아가 남아메리카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이 유적은 1911하이램 빙엄(Hiram Bingham, 1875-1965)‘이 발견해내기 전까지는 산속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었다. 덕분에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파괴되어버린 대부분의 잉카유적들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다. 잉카의 고대도시(잃어버린 도시)는 마추픽추(Machu Picchu)와 와이나픽추(Huayna Picchu) 사이에 숨어있다. 흔히들 잃어버린 도시를 마추픽추라 부르지만 실제 마추픽추는 도시를 감싸고 있는 산을 말하고, 건너편 산은 와이나픽추라 부른다. 산 아래에서는 도시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공중도시라고도 불리는데 잉카의 후예들은 이곳에 숨어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런 이유로 마추픽추는 잃어버린 공중 도시로 불리며 이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여행자들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다.

 

 

  

굽이굽이 13군데의 급경사를 돌고 돌던 버스는 30분쯤 후에 마추픽추 국립공원의 매표소 앞에 관광객들을 내려놓는다. 깎아지른 듯한 마추픽추 계곡의 속가슴을 엿봐야만 할 정도로 날카로운 절벽을 헤집으며 올라왔는데도 위험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페루 정부가 잘 훈련시킨 베테랑 운전사들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안전사고라도 일어난다면 관광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페루경제에 큰 타격이 될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 마추픽추 입장권은 하루 두 타임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시간은 오전과 오후로 나뉘며 오전은 6시부터 12, 오후는 12시부터 17시까지다. 그리고 티켓에 적힌 시간은 퇴장시간을 의미하니 참고해두자

 

 

 

 

 

 

여권과 함께 입장권을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선다. 잠시 후 유적지가 보이기 시작하는 모퉁이에 이르자 동판 몇 개가 박혀있는 바위벽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하나는 1911하이램 빙엄(Hiram Bingham, 1875-1965)’이 발견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198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동판도 보인다. 이 공중의 도시를 도대체 누가 발견했었는지 정도는 알고 나서 보라는 모양이다.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유적지는 계단식 농경지(terrace)‘이다. 잠시 후 건물군이 보이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위로 오른다. 마추픽추 제일의 전망대가 그쪽 방향의 언덕에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계단길을 잠시 오르면 길은 이내 평지와 같아진다. 이 길을 계속해서 따를 경우 마추픽추(Machu Picchu)’ 산으로 연결된다. 또한 잉카트레일(Inca Trail)’로 이곳을 찾아올 경우 진입로는 저 길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걷고 싶은 길’ 1위로 선정된 바 있는 잉카트레일34일에 걸쳐 오얀따이땀보 부근 피스카추초(Piscacucho)에서 잃어버린 도시에 이르는 트레킹 루트이다. 전체 길이가 47로 지리산 종주코스와 비슷한 거리지만 해발 2,380m부터 최고 4,200m까지의 고도를 오르내리기 때문에 무척 힘든 코스로 알려진다. 특히 죽은 여인의 길(Dead Woman’s Pass)’은 매우 경사가 급한 험난한 코스로 유명하다. 그 옛날 칠레에서 에콰도르에 이르렀던 광대한 잉카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안데스의 산중턱에 만들어진 잉카트레일은 잉카황제에게 바치는 진상품과 황제가 각 지역 부족장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통로였다. ‘차스키(비각飛脚)’라고 불리는 파발꾼들은 이 길을 연속적으로 이어달리며 하루 평균 280정도의 속도로 전파시켰다고 전해진다.

 

 

지붕을 인 건물. 망지기의 집(Recinto del Guardian)‘이 보이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잉카트레일을 따라 마추픽추 산까지 올라갔다 돌아올 만한 시간이 우리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건물에 이를 즈음 돌의 예술인 '마추픽추'가 드디어 얼굴을 일부 내밀었다. 그 뒤에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와이나픽추가 하늘을 향해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기술이 조화를 이룬 천상의 파노라마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관광객들 모두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 역시 감히 숨을 고르면서 자연의 신비로운 장단에 맞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처음 와본 곳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여러 번 들러본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휘둘러본다. 보면 볼수록 눈에 익은 풍경들이다. 그리고 이내 깨닫는다. 그만큼 이곳 마추픽추가 매스컴을 많이 탔다는 것을 말이다. 다른 한편으론 마추픽추를 대표하는 경관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전망대 부근은 초지로 이루어져 있다. 제법 너른 것이 올라오면서 보았던 비좁기 짝이 없는 계단식농경지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앞에 보이는 바위는 장례식과 제사 때 사용하던 바위(La Roca Funeraria)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부근은 묘역(Cementerio Superior)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빙엄175구의 미라를 발견했다는 제단구역이 이곳이라는 증거가 될 수도 되겠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농경지를 따라 조금 더 진행하자 마추픽추 유적군은 한층 더 또렷해진다. ‘마추픽추제일의 전망대라 할 수 있겠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파수꾼 전망대(Recinto del Giardián)‘보다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우루밤바 계곡과 그 절벽 위에 세워진 마추픽추, 또 그 마추픽추를 바라볼 수 있는 와이나픽추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니 일단은 꼼꼼히 살펴보자.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인 상과 하, 우측과 좌측, 남성과 여성, 시간과 공간의 두 기준에 따라 절묘한 위치에 의도적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마추픽추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라는 원뿔 모양의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는데 와이나픽추는 잉카인들의 토템으로 신봉하는 두 동물의 형태를 갖고 있단다.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앞에서 보면 퓨마의 형상으로 보이지만 좌측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봉우리는 새(콘도르)가 날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신성한 산으로 여겨진단다. 또한 그런 이유로 와이나픽추에서 바라보이는 대지에다 신성한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왼편에는 우루밤바강 협곡이 지그재그로 돌면서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협곡의 깎아지른 바위절벽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옮기면 와이나픽추(WaynaPpicchu)가 나타난다. 유적지와 와이나픽추는 완벽하게 조화로운 모습이다. 산허리의 구름들은 연신 흩어졌다 다시 몰려오기를 반복한다. 마추픽추의 전경을 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구름이 오가는 정도에 따라 탄성과 비명을 번갈아가며 내뱉는다. 물론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와이나픽추는 물론이고 마추픽추의 유적군까지도 구름 속에 완전히 가려버린다. 허망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잠시 후 마추픽추를 덮고 있던 구름이 걷히자 또 다시 유적지가 나타난다. 구름은 연신 이리저리 움직이고 그럴 때마다 마추픽추를 이루는 석축, 주거지, 계단식 농경지, 관광객의 모습들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마추픽추의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수천 년을 감춰온 그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먼 옛날 건축 자재조차 나르기 힘든 첩첩산중에 자급자족이 가능한 완벽한 도시를 무슨 이유로 건설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스페인 침략 이후 스페인을 피해 황금을 가지고 건설한 최후의 도시였다는 주장이나 종교적인 목적의 도시였다는 주장 혹은 단순히 잉카 왕족의 여름 피서를 위한 별장이었다는 주장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확한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한다. 참고로 마추픽추 유적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신성한 광장과 3개의 창문 신전, 콘도르신전, 태양신전, 귀족 거주지, 농경지역과 서민거주지 등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읽었던 한 건축가의 글이 생각난다. ‘깊고 깊은 계곡 위에 세워진 이 도시는 자연의 우주적 광경이다. 의례 같은 우아함, 그 돌들이 토해내는 영원의 표현 속에 성스러운 장소로서의 중요한 역할이 반영되어 있다. 안데스의 고봉들이 펼치는 환상적인 세계에 보석처럼 꼭 끼워진 잉카인들의 가장 위대한 유물이다.’ 이 하나의 문장에 마추픽추의 모든 것이 다 담겨있는데 더 이상의 미사여구가 무에 필요하겠는가.

 

 

마추픽추의 농경지는 2m쯤 되는 높이의 계단식 밭40단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밭들은 3천여 개의 계단으로 연결된단다. 개중에는 이렇게 바위를 돌출시켜 만든 계단도 보인다. 아니 곳곳에 만들어져 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쉽게 내려설 수는 없는 계단이다. 옛날 사람들이야 뛰어다녔을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이젠 직접 마추픽추의 건축물들을 둘러볼 차례이다. 성채의 정문으로 향한다.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갈 갈수록 잉카의 고대도시는 점점 또렷해진다. 송곳 모양의 와이나픽추도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유적지의 석조물들 가운데 하나가 유독 눈길을 끈다. 독야청청 둥근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의 신전(Templo del Sol)'이라는데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지금은 들어가 볼 수가 없단다.

 

 

 

 

마추픽추의 심장이라 일컬어지는 태양의 신전(El Templo del Sol)’은 정교하게 쌓아 올린 석벽과 탑 특유의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외관이 특징이다. 또한 거대한 자연석 위에 탑의 형태로 우뚝 세워져 있어 여느 건축물과도 한눈에 구별이 된다. 해마다 열리는 태양의 축제(621)’ 때에는 태양의 빛이 신전 중앙의 창문으로 딱 맞추어 들어온다고 한다. 신전을 건축하는 데 있어 그런 부분까지 고려한 잉카인들의 세심함이 더욱 돋보이는 면모라고 하겠다.

 

 

널따란 녹지는 중앙광장이다. 종교 건축물들은 대부분 이 광장의 둘레에 배치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고 반원형의 탑이 있는 태양신전,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1신전 그리고 왕의 묘()’가 바로 그것이다. 왕의 묘는 잉카 최고의 신에게 헌정된 숭배의 장소로 추정되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신전 근처인 왕의 궁전에는 식당과 거실 등이 있으며 마추픽추에서 유일한 화장실도 갖고 있단다.

 

 

2001년 페루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인 톨레도(Alejandro Toledo)’가 그의 취임식을 이곳 중앙광장에서 거행했다고 한다. 물론 페루 제일의 효자 관광자원인 이곳 마추픽추를 홍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저변에 잉카의 자존심을 한껏 드높여 보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들러보지는 못했지만 중앙광장 근처에 있는 왕녀의 궁전(Picchu Aposento de la Ñusta)’도 거론해 보자. 마추픽추에서 유일하게 2층으로 설계된 왕녀의 궁전은 왕녀가 사용한 곳이 맞는지, 왕녀가 존재하기는 했는지 등의 여러 의문점이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유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용도의 건물에서만 보여지는 2층의 설계 형태를 통해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했으리라는 추측이 성립된다. 또한 태양의 신전 바로 옆에 위치한 점이 왕실이나 신성한 곳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한다.

 

 

잉카의 도시로 접어드는 주 게이트(Puerta de acceso a la ciudad=main Gate)'로 들어선다. 성채의 정문(正門)치고는 매우 좁아 보인다. 방어용으로 짓다보니 그랬지 않았나 싶다. 문틀의 위에는 문짝을 매달았던 고리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크고 작은 돌들이 나뒹굴고 있는 채석장이 나타난다. 다양한 크기의 화강암들인데 과거 잉카인들이 마추픽추를 건설하면서 사용하고 남은 돌들이라고 한다. 어떤 돌들은 쪼개다 남은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잉카는 청동기문명을 거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도 저렇게 정교하게 돌을 다듬을 수 있었다니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채석장의 뒤에 보이는 건물군은 신전지구(Sector de los Templos)‘이며, 그 뒤에서 뽈록하니 솟아오른 곳은 인티와타나(Intihuatana)’이다.

 

 

신전지구로 가는 길에 만난 주택가. 고대 잉카인들은 계급사회 속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왕과 귀족들은 주로 햇볕이 잘 드는 남쪽에 거주(Las Tres Portadas) 했고 서민들은 북쪽에 살았단다. 계급에 따라 거주지 지대의 높낮이가 달랐다는 점도 흥미롭다. 아무튼 왕과 귀족 그리고 신들을 모셨던 곳은 정교하고 고르게 돌을 쌓아 올린 주거지로 되어 있는 데 반해, 지체가 낮은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지는 돌의 짜임새가 고르지 못하고 엉성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단다. 역시 앉을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는 속담은 우리나라에만 통용되는 건 아닌가 보다.

 

 

 

 

잠시 후 마추픽추의 핵심이 되는 '신성한 광장(Plaza sagrada)‘이 나타난다. 광장 주위에 신전(神殿)들이 많다고 해서 신전지구(Sector de los Templos)’로도 불린다. 이 지역의 특징은 정교하게 지어진 건축물이라 할 수 있겠다. 조금 전의 건물들이 조악하게 다듬은 석축들인데 반해, 이곳 신전지구의 석축은 거대한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구축했다. 특히 '주신전'(Templo Principal)은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창()의 밑변이 윗변 보다 더 넓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단다.

 

 

커다란 바위들을 잇대어 쌓았건만 조그만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돌로 도구를 만들어 돌을 정교하게 가공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궁금하다. 그래선지 많은 이견이 존재한단다. 잉카의 신묘한 돌 건축술이 그만큼 미스터리란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마추픽추가 현재 30% 정도 밖에 발굴되지 않았다니 어서 빨리 조사를 마쳐서 갖고 있는 의문점들을 밝혀줬으면 좋겠다.

 

 

잉카의 초대 황제인 망코 카팍(Manco Capac,1198-1228)’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세 창문의 신전(Templo de las Tres Ventanas)’이다. 이 신전의 창문도 역시 지진에 견디도록 밑변이 더 넓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마추픽추'의 건물들은 접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돌들을 짜 맞춰 쌓는 '드라이 스톤(dry-stone)‘ 방식으로 지어진 게 특징이다. 그렇다고 모든 건물을 이처럼 정성껏 돌을 다듬어 짜 맞추기식으로 만든 건 아니란다. 신전과 같이 중요한 건물들만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돌을 다듬은 정성과 정교함의 정도를 보면 그 건물의 중요도와 용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신전지구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인티와타나(Intihuatana,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가 나온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를 깎아 기단(基壇)을 만들고 그 위에다 막대모양의 기둥을 세웠다. 태양이 비칠 때 기둥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가늠한 해시계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구조물이다. 동짓날(남반구에서는 여름) 하루 동안 사제들은 여기에서 제물을 바치며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잉카인들은 태양이 두 개의 의자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북쪽의 주의자와 남쪽의 보조의자가 그것이다. 태양이 남쪽 의자에 자리 잡을 때인 하지가 한 해의 시작이었단다. 아무튼 사람들은 이를 보고 대단하다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는 훨씬 더 정교한 해시계를 갖고 있었다. 세종대왕 때 장영실이 개발한 '앙부일구(仰釜日晷)'가 바로 그것이다. 15년 전쯤인가 독일의 구텐베르크 박물관(Gutenberg Museum)’을 공식 방문했을 때 박물관장이 직접 나와 자기네들보다 앞서 발명된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를 거론하면서 부러워하던 생각이 난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우리네 선조들인가. 참고로 잉카인들은 인티와타나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고 한다.

 

 

신성한 바위(Roca Ceremonial)’로 이동하는 주변에도 마추픽추의 많은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 중앙광장 건너편에 위치한 일반인 거주지역은 물론이고, 산꼭대기 가까이 쫒아 올라간 계단식 밭들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투명한 하늘, 잉카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돌 하나하나가 영롱한 태양의 빛을 받아 막 깨어날 듯한 기운으로 다가온다. 내게는 결코 단순한 폐허의 유적이 아니었다.

 

 

 

 

인티와타나(Intihuatana)에서 내려와 북쪽으로 가자 제관(祭官)들이 머물렀다는 건물 두 동이 나온다.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출입문은 사다리꼴이고 지붕은 3,500m 이상의 고산지에서만 자라는 이추(Ichu)라는 짚으로 만들어 덮었다. 건물의 안에서 관광객들이 쉬고 있는 게 보인다. 관광객들의 휴식을 위해 복원해 놓지 않았나 싶다.

 

 

건물의 앞마당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놓여있다. 바위에 손을 대면 땅의 여신으로부터 기운을 전수받게 된다는 전설을 지닌 성스러운 바위(Roca Sagrada)‘라고 한다. 그래선지 바위에 손을 대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그들은 문화재 훼손을 염려해서 쳐놓은 금()줄 정도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와이나픽추 통제소가 나타난다. 그 뒤에서 날카롭게 허리를 곧추세운 와이나픽추가 어서 오라는 신호를 보내온다. 가슴 설레는 순간이다. 하지만 건물 옆에 내놓은 출입문은 굳게 닫혀있다. 입산(入山) 인원을 하루 2회 각 200명씩으로 제한하고 있다더니 오늘은 아예 그것마저도 금하고 있나보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서였겠지만 산길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아무튼 와이나픽추 등반은 시도조차 해볼 수 없게 됐다. 잃어버린 도시를 한눈에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정상(2,693m)에 올라 그곳에 있다는 농경지와 망루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성곽, 그리고 달의 신전을 곁눈으로라도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덕분에 정상으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계단과 로프, 난간 등이 설치되어 있어 조심만 한다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전조사까지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이곳은 공동마당이 아닐까 싶다. 정방형의 공동 마당을 가운데 두고 열 채씩 무리로 지어진 집들이 좁은 도로나 다소 돋운 골목으로 연결된다는 특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200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유적지의 건축물들은 지형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했고 화강암으로 건설했다. 참고로 공동마당에는 커다란 맷돌과 부피가 큰 농기구, 연료로 사용하는 라마의 배설물 저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추뇨(잉카인들의 주식으로 감자 말린 것)’를 만들기 위해 태양과 서리에 번갈아 노출되도록 감자를 널었는가 하면 말린 고기 등은 줄에 매어 집 바깥에 매달기도 했단다.

 

 

마추픽추는 스페인에 정복된 이후 5세기 동안이나 정글 안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건물들의 지붕을 제외하고는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해발이 2280m나 되는 높은 산봉우리에다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울창한 수림과 기암괴석의 봉우리들, 그리고 신성한 계곡으로 불리며 우기에는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지형이 험한 골짜기가 마추픽추를 외부세계와 격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란다.

 

 

 

 

별자리 수면거울이라고 한다. 동그랗게 파인 부분에 물을 채워 넣고 수면에 반사되는 별의 위치를 추적하여 계절과 시간, 별자리의 이동 등을 연구하던 유적이란다. 그렇다면 이곳은 천문대쯤으로 보면 되겠다.

 

 

 

 

동쪽으로 빠져나오자 콘도르 신전(Temple of Condor)’이 나온다. 말 그대로 독수리 형상을 띤 신전(神殿)이다. 자연석에다 잉카족의 석조기술을 조합하여 날개를 편 독수리의 형상을 만들었다. 돌바닥에는 독수리의 머리와 부리를 만들어 넣었고, 이를 중심축으로 삼아 양편으로 거대한 크기의 독수리가 날개를 편 형상을 조각하여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고고학자들은 콘도르 신전에서 '인신공희 의식'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산사람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잔혹하게 죽였다니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엊그제 들렀던 멕시코의 마야유적지들에서도 인신공희 의식의 흔적을 보았는데, 잉카족도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는 천재지변에 인간이 매우 취약했던 고대인들에게 신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잉카인들의 건축기술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게 수로(水路)가 아닐까 싶다. 특히 고지대(高地帶)인 마추픽추에서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게다. 그들은 식수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가 나오는 곳에서부터 돌을 이용하여 고랑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돌을 깎아 도시 전체에 물이 흐르도록 조성했다. 잉카인들의 돌 다루는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 바퀴 다 돌아봤으면 이젠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유적지 남동지역에 있는 계단식 밭(Zona Agricola)’ 방향인데 계단이 하도 많다보니 이 또한 뛰어난 볼거리가 된다. 잉카인들은 평지가 없고 구릉지로만 되어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산비탈을 빙 둘러가며 돌 축대를 쌓아 농경지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옥수수와 감자 그리고 코카 등을 재배했다. 계단농경지의 규모로 볼 때 마추픽추의 인구를 대략 1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 게 대세란다.

 

 

1.5~2m 정도로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들었다. 평지가 없는 지형 조건을 극복한 잉카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계단식 밭(Zona Agricola)’이라 하겠다. 이곳에는 몇 동의 건물도 지어져 있다. 농경지에 지어진 건물들이니 대충 곡물창고로 사용되었을 게다.

 

 

 

돌아가는 길, 계단식 농경지의 초지대에 야마(라마)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아까 내렸던 비로 인해 고운 털이 촉촉이 젖어 있지만 아랑곳 않고 하나 같이 선한 표정들을 짓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저마다의 버킷리스트였을 이곳이 리마에게는 그저 일상일 뿐인가 보다. 그래 잉카인의 화신이듯 당당한 여유로움이 참 좋다.

 

 

여행지 : 중남미의 멕시코 및 페루

 

여행일 : ‘18. 4. 23() - 5.2()

여행지 : 멕시코, 페루. 쿠바(비행기 사정으로 인해 취소)

 

일 정 :

4.23() : 멕시코시티(소깔로광장, 과달루페성당)

4.24() : 멕시코시티(테오티우아칸)

4.25() : 쿠스코(마추픽추)

4.26() : 쿠스코(12각 돌, 쿠스코대성당, 산토도밍고성당)

4.27() : 리마(아르마스광장, 사랑의 공원, 라르꼬마르)

4.28() : 파라가스(바예스타 섬), 이(와카치나 사막)

4.29() : 나스카(나스카라인)

4.30() : 멕시코시티(소우마야 미술관)

 

여행 셋째 날 오전 : 마추픽추로 가는 길목,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

 

특징 : 페루(Republic of Peru) : 한반도보다 1.2배 큰 땅덩어리에서 인디언(45)과 메스티조(37), 백인(15) 등이 함께 살고 있으며, 언어는 스페인어와 케츄아어, 아이마라어를 사용한다. 수도는 리마(Lima)이다. 종교는 가톨릭이 국교로 90% 이상이 믿는다. 페루 땅에 인간이 출현한 증거는 기원전 9,000년경에 나타난다. 노르테 치코 문명은 기원전 3000년에서 1800년경 사이에 태평양 연안을 따라 번성하였다. 그 뒤를 이어 쿠피스니케·차빈·파라카스·모치카·나스카·와리·치무 문화가 고고학적으로 발견된다. 15세기 이후에는 현재의 에콰도르 북부 및 칠레 중부에 걸친 고대 잉카제국의 중심지였다. 1533년 이래 스페인통치를 받아오다가 1821726일 독립하였다. 1866년에는 이웃 칠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북부 영토를 상실하였고, 1841년에는 에콰도르와 국경분쟁을 겪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중립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45년 유엔, 1973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우리나라와는 1963년 국교를 수립하고, 1971년부터 상주공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페루의 광물자원 개발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참고로 페루(Peru)‘란 이름은 16세기 초 파나마의 산 미겔 만 근처에 살았던 지방 통치자의 이름 ’Biru‘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 : 페루는 두 얼굴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의 수도인 리마를 비롯하여 옛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까지 깔끔하게 정비된 도로와 유럽풍의 건물들, 역사를 간직한 잉카 제국의 벽들, 친절한 시민들 등 역사와 조화되면서도 현대적인 대도시의 면모를 여지없이 볼 수 있다. 반면에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안개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분위기들을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원초적인 자연 경관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양면성이 페루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의 여정, 산상의 잊혀진 도시 마추픽추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는 그 가운데 후자라고 보면 되겠다. ‘살아있는 잉카의 마을오얀따이땀보에서는 현재도 페루의 전통과 관습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 현지인들을 만날 수 있다.

 

 

 

마추픽추로 가는 여정은 쿠스코로부터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는 데는 엄청난 인고(忍苦)의 시간이 필요했다. 오후 5시에 멕시코시티를 출발한 비행기는 6시간이 지난 후에야 페루의 수도 리마에 도착했다. 도착시간은 자정에 가까운 저녁 11,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고 공항을 빠져나오니 이미 다음 날 1시 무렵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쿠스코로 들어가는 비행기가 530분에 출발한다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란 언질이 주어지는 게 아닌가. 호텔에 들어가 대충 씻고 난 후에 모래알 씹는 기분으로 대충 아침식사를 때울 수밖에 없다. 잠시잠깐도 눈을 부쳐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어렵게 탄 비행기는 예정대로 650분에 쿠스코에 내려주었다. 드디어 마추픽추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마추픽추로 가는 육로(陸路)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산허리를 따라 옆으로 도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4000m급의 산릉을 아예 넘어버리는 것이다. 우린 후자를 택했다. 다른 길은 마추픽추에서 돌아올 때 이용하기로 했고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올라가도 민가들이 없어지지 않는다. 산비탈에 기대어 다닥다닥 지어진 집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국유지인 산비탈에 집을 지어놓고 일정기간을 거주하면 소유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란다. 물론 국유지를 점용한데 대한 사용료는 내야한단다.

 

 

산허리에 구름이 걸려있다. 해발고도가 3400m에 이르는 쿠스코에서는 일반적인 풍경이란다. 그보다도 훨씬 더 높으니 구름이 산허리에 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안데스 산맥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참 아름답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산상 휴게소, 쉬어갈만한 마을을 만날 수 없는 오지에서는 꼭 필요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특히 이렇게 조망까지 좋은 곳이라면 힐링까지도 제공해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화장실이 잠겨있다는 건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카페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기들이 문을 연 후에야 화장실도 개방하는 모양이다. 하루 종일 문을 열어놓는 화장실만 보아오던 나에게는 낯선 풍경으로 다가온다.

 

 

저 아래 보이는 협곡으로 우르밤바강이 흐른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길고 가장 넓은 유역을 가진 강의 최상류가 이곳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난 지금 7km의 안데스산맥 품에서 7km의 아마존 강을 발밑에 두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우루밤바강 유역은 성스러운 계곡(Sacred Valley)’으로도 불린다. 피삭(Pisac)에서 오얀따이땀보를 거쳐 마추픽추까지 우루밤바(Urubamba)강을 따르는 2,000~3,000m 고도의 100에 걸친 지역을 말하는데, 이 지역의 계단식 농지에서 대량의 농산물 재배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 농산물로 쿠스코 잉카가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해서 신이 주신 성스러운 계곡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높은 산자락에 널따란 분지(盆地)가 펼쳐져 있는 게 보인다. 잘 다듬어진 게 경작지가 분명하다. 가이드의 말로는 저 부근에 농업연구소가 있다고 했다. 잉카인들의 농업유적인 모라이(Moray)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짙은 감흥이 느껴진다. 모라이(Moray)는 잉카인들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낸 농업연구소였다고 한다. 유적은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원형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아래쪽의 밭과 가장 위쪽의 밭의 기온차가 있기 때문에 어떤 온도에서 어떤 작물이 가장 잘 자라는지를 연구한 후 대중들에게 농업기술을 전파했단다.

 

 

이런 고산지대에도 꽃은 피는가 보다. 노랗게 핀 이름 모를 꽃들이 산자락을 온통 뒤덮어버렸다.

 

 

마추픽추로 가거나 오는 길에 한번쯤은 우루밤바(Urubamba)’를 지나게 된다. 우루밤바 강 유역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우루팜파(Urupampa)라고도 불린다. ‘성스러운 계곡(Sacred Valley)’이라 불리는 우르밤바계곡투어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식사를 위해서라도 들를 수밖에 없는 요지라고 한다. 또한 산속의 보석 같은 소금밭인 살리나스(Salinas)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우린 하룻저녁을 이곳에 묵었다. 해발이 3400m나 되는 쿠스코보다는 2280m에 불과한 이곳이 숙면(熟眠)과 휴식에 좋을 것 같아서이다.

 

 

하룻밤을 머문 ‘hotel agusto’s Urubamba‘, 넓은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진 리조트형식의 예쁜 호텔이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호텔 주위를 산책해보라는 가이드의 귀띔이 이를 증명한다 할 것이다. 3성급 호텔이지만 시설 또한 괜찮은 편이다. 웬만한 시설은 다 갖추고 있으며 조금 느리기는 하지만 와이파이까지도 터진다. 제공되는 음식도 쿠스코나 리마 등 대도시의 호텔들에 비해 하등 뒤질 게 없었다.

 

 

 

 

조금 더 달리면 해발 2,792m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가 나온다. 쿠스코에서 88쯤 떨어진 지점이니 쿠스코와 마추픽추의 중간 지점쯤으로 보면 되겠다. 잉카 연대기를 작성했던 학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성스러운 계곡에 자리한 오얀따이땀보는 쿠스코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다고 한다. 중심지에만 1000명이 넘게 살았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쿠스코에서 오얀따이땀보까지 곧장 도로로 연결되어 있어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했으며 잉카의 지배층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란다. 그래선지 작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인상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널따란 광장이 들어서 있다. 나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묵은 노거수(老巨樹)를 가운데 놓고 작은 화단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광장의 밖은 상점들이 둘러싸고 있다. 테라스를 갖추고 있는 것이 하나같이 고풍스런 느낌을 물씬 풍긴다. 스페인과 페루의 건축양식이 함께 섞여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관광지여서인지 쓰레기통까지도 그럴듯하게 만들어놓았다. 잉카인들이 신성시 여겼다는 퓨마의 머리를 씌워놓았다. 그 옆에는 뭔가 보따리를 매고 있는 잉카여인의 조형물도 보인다.

 

 

 

 

 

이젠 골목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가장 큰 특징은 담벼락이 두 개의 단()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이다. 커다란 바위를 쌓아올린 축대의 위에 집을 지은 것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아래 부분의 돌 축대는 잉카 때의 흔적이란다. 그러면서 그는 바위와 바위가 맞닿아있는 곳에 틈이 생기지 않는 것을 증거로 들었다. 그게 바로 잉카의 자랑인 토목기술이라며 만일 빈틈이 있다면 그건 스페인 통치기에 새로 쌓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잉카의 마을오얀타이탐보에서는 현재도 페루의 전통과 관습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 현지인들을 만날 수 있다. 가이드가 안내해준 민가에서도 그런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다.

 


 

 

 

초가지붕 위에 뭔가가 올라앉아 있다. 토로(Torro)라고 한다. 잉카인들은 결혼을 하거나 새로 이사를 했을 때에는 지붕 위에다 한 쌍의 황소와 암소 조형물을 올려놓는다고 한다. 집을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사람의 해골과 여러 가지 인형 등 알록달록한 장식물들로 꾸며져 있는 실내로 들어가니 찍찍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팔뚝보다 조금 작다 싶은 꾸이들이 바닥에서 뛰어놀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이로 주어진 듯 싶은 풀을 뜯어먹고 있다. ‘꾸이’(Cuy)라는 이름의 쥐란다. 쥐목 고슴도치과에 속하는 동물인 꾸이는 페루가 원산지이며, 돼지같이 통통하다 하여 영문명으로는 '기니피그(Guinea pig)'라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도 애완용 동물로 잘 알려져 있는 꾸이를 이곳 원주민들은 고기를 얻기 위해 집단으로 사육해왔단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페루 사람들의 별미 요리로 사용된단다. 그런데 쥐인데도 불구하고 징그럽다거나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귀엽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아마 식용으로 길러진다는 정보가 우리에게는 혐오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라는 이미지를 지워버렸나 보다.

 

 

 

 

 

 

 

 

마을 전체에 시냇물처럼 순환하는 수로(水路) 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다. 잉카문명의 뛰어난 흔적이라 할 수 있겠다.

 

 

 

 

 

 

 

뒤편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경작지(耕作地)가 보인다. 가파른 산비탈을 이용하여 건설한 17개의 계단식 경작지라고 한다. 연대기 작가들은 계단식 경작지를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꽃과 거대한 돌로 만든 성벽과 계단이 어떤 곳보다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나 아름다운 곳을 우린 들러보지 못했다. ‘비라꼬차(Viracha:태양의 신)를 모시는 신전과 공주의 목욕탕, 물건을 저장했던 창고, 방어용 요새 등 오얀따이땀보에 있는 다른 유적들도 마찬가지다. 아쉬운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패키지여행이란 게 본디 빠듯하게 짜여진 일정이 특징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오얀따이땀보는 잉카 군대가 에스파냐 군대와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한 곳이기도 하단다. 1536년 잉카 저항의 지도자 망코 잉카가 이끄는 군대가 쿠스코를 공격한 후 이곳으로 이동하여 피사로가 이끄는 에스파냐 군대와 벌인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던 곳이라는 것이다.

 

 

 

 

마을을 다 둘러봤으면 이젠 마추픽추로 떠날 차례이다. 광장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기차역이 나온다. 마추픽추로 가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헬리콥터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이용은 불가능하다니 일단 빼놓고 보자. 두 번째 방법은 트래킹을 하는 것이다. 주로 대학생 등 각국의 젊은 청년들이 활용한다. 나 같이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에게는 이것 또한 그림의 떡(畵中之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제 하나가 남았을 뿐이다. 바로 관광열차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곳 ‘오얀따이땀(Ollantaytambo)’까지 와서 관광열차를 타고 마추픽추 역까지 가는 방법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이 방법을 이용한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쿠스코-오얀따이땀보-아구아스 칼리엔테스 구간을 운행하는 철도회사는 두 개가 있다. 잉카레일(Inca Rail)과 페루레일(Peru Rail). 이곳 오얀따이땀보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잉카레일이다.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한 골목을 지나자 오얀따이땀보역이 나온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쉼터 등의 시설까지 두루 갖춘 제대로 된 역사(驛舍)이다. 역사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하나같이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열차를 타기 위한 사람들이다. 하긴 마추픽추가 있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까지 가는 교통편이 오로지 기차뿐이라니 어쩌겠는가.

 

 

 

 

열차의 내부는 반은 정방향, 반은 역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물론 지정된 좌석에 앉아야만 한다. 역방향에 앉을 경우 창밖의 풍경을 보는데 어려울 수도 있으니 복불복(福不福)이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아름다운 주변 경관에 빠져들 즈음이면 한 잔의 차와 비스킷(biscuit)이 제공된다. 맛도 괜찮을뿐더러 열차요금에 포함되어 있는 서비스라니 마음 놓고 음미해볼 일이다. 아무튼 차창 밖으로 나타나는 풍경은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 그리고 물살이 센 물길의 파노라마가 끊이지 않고 펼쳐지는 것이다. 누군가 경춘선의 경치와 백담사 계곡의 맑은 물을 합쳐놓은 듯한 분위기라고 했는데 딱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다만 백담사에 비해 유속이 빠르고 물빛 또한 탁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물속에 석회질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난 이런 풍경을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조금 더 나은 경치를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을 뜬눈으로 새웠으니 몰려드는 잠을 어찌 참을 수 있었겠는가.

 

 

1시간 30분 정도의 기차여행이 끝나면 마추픽추의 들머리라 할 수 있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역에 도착한다. 이곳은 마추픽추를 오르기 위한 사람들이 모이는 베이스캠프. 오로지 마추픽추만을 위해 존재하는 작은 마을. 지나가는 길손이나 머무는 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마추픽추를 인연의 끈으로 묶고 있다. 오늘도 그들은 사라진 제국의 흔적을 보기 위해 하늘에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오를 것이다. 나 또한 그 가운데 한사람일 테고 말이다.

 

 

 

물의 도시라 일컬어지는 아구아스 깔이엔테스(Augas Calientes)’(Auga)’'뜨겁다(Calientes)'가 합쳐진 온천마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편으론 마추픽추 마을(Machupicchu Pueblo)이라고도 불리는데 1901년 쿠스코 철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정착민촌이란다. 비록 옛 철도부설 및 광산촌의 모습을 여전히 담고 있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매년 전 세계에서 1백만 명 이상이 머물다 가는 세계적인 도시이다. 잉카 전성기를 이끌었고 마추픽추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지는 파차쿠텍 황제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마추픽추 비지터센터, 환경청, 전통시장, 기타 잉카문명을 상징하는 조형물들이 마을 곳곳을 장식한다.

 

 

 

여행자들 사이에는 어디서 무엇을 할지 모를 경우에는 광장으로 가보라는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마을 중앙에 있는 망코카팍 광장(plaza manco capac)’이다. 광장에 들어서니 추장 한 분이 환영인사를 건네 온다. 잉카의 9대왕인 파차쿠텍 잉카 유팡키(Pachacutec Inca Yupanqui, 1438~1471)’라고 한다. 그는 부족국가로 남아있던 잉카를 제대로 된 왕국으로 바꾼 왕이었다. 수도 쿠스코의 정비와 함께 제국의 영토 확장에 힘써 수도로부터 약 4000에 달하는 안데스의 영토를 지배하였으며, 당시 인구가 6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조세제도도 마련되었단다. 특히 케추아어를 공용어로 삼음으로써 실질적인 제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단다. 우리나라의 광개토대왕쯤으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마추픽추도 그가 건설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는데, 이곳에 그의 동상을 세워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셔틀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빠져나오니 또 다른 동상이 기다린다. 이번에는 잉카인들이 신성시 여겼다는 퓨마와 콘돌까지 거느리고 있다. 대단한 위용이지만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마을에는 기념품가게와 음식점들이 수없이 많이 들어서 있다. 구경도 할겸 기웃거리다가 마추픽추를 축소해놓은 자그만 기념품 하나쯤 사갖고 돌아가면 어떨까 싶다. 조금은 조잡스럽지만 왔다간 기념은 남겨야하지 않겠는가. 만일 그것도 아니라면 나 같이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갈증을 풀어볼 일이다. 장거리 여행에 지친 심신을 말끔히 치유해 줄 것이다.

 

 

기념품가게들을 들락거리며 상가를 통과하고 나면 셔틀버스(실제 버스보다 더 좋게 나와서 모형을 촬영한 사진을 사용했다)가 기다리고 있다 마추픽추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버스로 관광객들을 마추픽추의 입구가 있는 중턱까지 데려다 준다. 물론 걸어서 올라가는 방법도 있다. 실제로 버스를 타고가다 보면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젊은 트레커(tracker)들이 자주 눈에 띈다.

 

 

여행지 : 중남미의 멕시코 및 페루

 

여행일 : ‘18. 4. 23() - 5.2()

여행지 : 멕시코, 페루. 쿠바(비행기 사정으로 인해 취소)

 

일 정 :

4.23() : 멕시코시티(소깔로광장, 과달루페성당)

4.24() : 멕시코시티(테오티우아칸)

4.25() : 쿠스코(마추픽추)

4.26() : 쿠스코(12각 돌, 쿠스코대성당, 산토도밍고성당)

4.27() : 리마(아르마스광장, 사랑의 공원, 라르꼬마르)

4.28() : 파라가스(바예스타 섬), 이(와카치나 사막)

4.29() : 나스카(나스카라인)

4.30() : 멕시코시티(소우마야 미술관)

 

여행 마지막 날 : 멕시코시티 소우마야 미술관(Museo Soumaya)

 

특징 : 1994년에 문을 연 소우마야 미술관(Museo Soumaya)‘은 멕시코 제일의 갑부이자 포브스가 선정한 2017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재산이 많은 카를로스 슬림(Carlos Slim) 텔맥스 텔레콤(Telmex) 회장이 세운 미술관이다. ’소우마야라는 이름은 세상을 떠난 그의 부인 소우마야(Soumaya Domit)에서 따왔다고 한다. 소장 작품은 총 66,000여 점에 이르며 주로 15~20세기의 유럽의 르네상스, 인상주의, 근현대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멕시코 미술 및 종교 유물, 그리고 메소아메리카 및 스페인 콜로니얼 시대의 광범위한 역사적 문서들과 주화들도 소장되어 있다. 특히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 가장 많은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미술관으로도 유명하다. 380여점의 로댕 작품 외에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앙리 마티스‘, ’클로드 모네‘, ’엘 그레코‘, ’바르톨로메 무리요‘, ’틴토레토등 유럽 거장들의 그림이 즐비하다. 멕시코의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루피노 타마요(Rufino Tamayo)‘의 그림들도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은 다빈치의 '얀와인더의 마돈나(Madonna of the Yarnwinder)'라고 한다. 미술관은 1994년 구입한 건물인 플라사 로레토(Plaza Loreto)2011년에 신축 개장한 플라사 카르소(Plaza Carso) 등 두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니 참조한다.

 

 

 

멕시코시티 폴란코 지역에 있는 이 미술관은 소우마야미술관의 두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름은 플라사 카르소(Plaza Carso)‘. 알루미늄 타일이 외관에 덮여 있는 비대칭적이며 기하학적인 디자인이 특징이다. 7000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2011년에 새로 지었는데 높이는 46m, 16000에 이른다. 내부 공간은 6개의 전시실과 여러 부대시설들이 들어서있다. 설계는 설립자인 슬림(Carlos Slim)‘의 사위 페르난도 로메로(Fernando Romero)‘가 맡았다. 그는 100억에 가까운 돈을 들여가며 야심차게 새로 짓는 멕시코시티 공항의 설계를 맡았을 정도로 유명한 건축가라고 한다. 이왕에 시작한 김에 전문가의 평도 한번 살펴보자. 소우마야 미술관은 하나의 오브제(objet, 주제에 대응하여 일상적 합리적인 의식을 파괴하는 물체 본연의 존재 방식)‘이면서도 그 도시의 일부인 회전하는 형상의 조각적인 건물로써 고안되었다고 한다. 이 미술관의 전위적인 형상은 멕시코 건축과 세계 건축의 역사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의되며, 6개 층에 걸쳐 연속적으로 분포하는 6,000의 전시 공간 안에는 다양한 컬렉션을 수용하고 있단다.

 

 

 

 

'모두를 위한 예술(Arte para todos)’이라는 기치와 함께 입장료는 무료이다. ’유럽 명작들을 보고 싶지만 유럽에 가기 힘든 수많은 멕시코인들을 위해서라고 한다.‘ 검색대에서 가방의 안쪽만 확인시켜주면 다음은 무사통과이다. 단 커다란 백팩(backpack)을 가져왔을 경우에는 좌측에 있는 데스크에다 맡기고 들어가야만 한다. 가방으로 인해 예술품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란다.

 

 

엄청나게 높은 천장을 가진 내부로 들어가면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이란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지옥의 문'은 로뎅(Auguste Rodin)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고, 피렌체에 있는 기베르티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지는 작품인데, 청동의 단단하고 차가운 질감이 뒤틀린 인체의 포즈와 어우러지면서 완성도를 한층 높였다는 평가이다. 이 작품에서 지옥을 헤매는 인간군상의 처절한 최후를 내려다보며 고뇌하는 단테의 모습은 생각하는 사람으로 표현됐다.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걸작 중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왕에 나온 거 지옥의 문이 만들어진 배경까지 알아보자. 1880년 프랑스 정부는 새로 지을 장식미술관에 쓰일 정문 조각상을 만들어 달라고 로댕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로댕은 석고를 이용, 지옥의 문을 구상했고 청동주물로 완성본을 만들 채비를 했다. 하지만 프랑스정부는 1885년 미술관 건립 계획을 취소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작품을 완성했단다. 로댕은 지옥의 문 청동주물 완성본까진 만들지 못했고 석고로 만든 미완성본만 공개한 채 세상을 떠났다. 석고본 지옥의 문은 현재 프랑스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전체의 일부로 만들어진 조상들은 독립적인 작품으로 전시되었다.

 

 

 

로댕의 지옥의 문이나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 이곳에도 있네?’하며 진품 여부에 대해 의아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모조품이겠지하고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진품이라고 보는 게 옳다. 로댕의 유명 작품들은 에디션(edition, 하나의 형틀로 찍어낸 조형물에 제작 순서대로 붙이는 번호)을 여러 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덟 개 남짓 되는 국제적인 로댕 전문 갤러리에서 동일한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작품보다도 크게 제작해 독립적으로 전시되는 에디션도 있다니 참조한다. 아무튼 지옥의 문은 로댕이 만들어 낸 종합 패키지세트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 ’키스지옥의 문에 동원된 작품들이 단품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우골리노‘, ’웅크린 여인‘, ’세 망령등의 작품이 지옥문에서 시작되어 나중에 독립상으로 제작된 작품들이란다.

 

 

같은 공간에는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도 전시되어 있다. 거친 질감과 인물의 본질 묘사에 탁월했던 로댕의 대표적 작품으로 원래는 '지옥의 문'이란 작품 중 일부로 만들어졌다고 하다. 장식미술박물관의 문을 장식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만들 때만 해도 문의 윗부분에서 아래의 군상(群像)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 주문이 취소되자 독립적인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란다. 아무튼 단테의 신곡(神曲)‘을 주제로 한 지옥의 문에 시인을 등장시키고 싶었던 로댕의 시도가 실현된 작품이란다. 벗은 채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여러 인간의 고뇌를 바라보면서 깊이 생각에 잠긴 남자의 상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신 근육의 긴장에 의해 격렬한 마음의 움직임을 응결시켜, 영원히 계속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을 강력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벽면에는 여러 개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통스런 삶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의 남편인 디에고 라베라(Diego Rivera, 1886-1957)의 작품들이라고 한다. 20세기 멕시코의 민중화가로 남미 벽화운동의 선구자이며 주요 작품으로 교차로에 서 있는 남자(Man at the Crossroads)‘가 있다. 멕시코에서 태어난 그는 산카를로스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정부장학금으로 스페인과 서유럽 등에서 수학했으며 이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프레스코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멕시코에서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벽화의 내용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대중의 호소력 덕분에 정부의 박해에서 벗어나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단다.

 

 

 

 

심플(simple)하면서도 모던(modern)한 가구들이 돋보인다. 교육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미술관에는 전시 공간 외에도 350좌석 규모의 오디토리움(auditorium)과 도서관, 레스토랑, 기념품 판매점, 다목적 라운지, 행정 사무소 등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지하에는 뷔페식당도 들어서있다. 하지만 우리같이 시간제약을 받는 패키지 여행객들에게는 그림의 떡(畵中之餠)’이 될 수밖에 없어 보였다. 가격이 싸서인지 늘어선 줄이 제법 길어보였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6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층과 층은 이런 원형의 계단으로 연결된다. 엘리베이터(elevator)가 별도로 운행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첫 번째 관람 장소는 6층이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올라갔다가 걸어서 내려오는 동선(動線)이 가장 편할 것 같아서이다. 6층은 조각예술품 전용 전시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열렬한 로댕 애호가로 알려진 슬림회장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공간으로 보면 되겠다. 그는 개인으로는 단연 세계 최대의 로댕 소장자(380여점 보유)인데 이 작품들을 위주로 해서 세계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한때 우리나라에도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을 상시로 전시하는 공간이 있었다. 삼성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전문 갤러리 플라토(PLATEAU)‘인데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문을 연 로댕작품 상설전시장이었다. 세계최고의 갑부 가운데 한명인 카를로스 슬림멕시코 텔맥스텔레콤 회장이 방문했던 곳으로도 유명한데, 이곳에서는 로댕의 대표작인 지옥의 문‘ 7번째 에디션(edition, 하나의 형틀로 찍어낸 조형물에 제작 순서대로 붙이는 번호)깔레의 시민‘ 12번째 에디션을 상설 전시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니 참조한다. 2017년 삼성생명 사옥(서울 태평로 소재)이 매각되면서 미술관 역시 폐관(廢館)되었고, 두 에디션(edition)은 호암미술관 수장고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단다.

 

 

 

 

 

 

 

 

 

 

5층과 4층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나 같이 아름답고, 섬세하고 때론 강열하기도 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한 그런 그림들이다 .하나하나가 유명작가들의 그림이라는데 예술에 문외한인 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보는 즐거움에 더해 채워가는 행복감까지 누렸을 텐데 말이다. 하긴 주어진 시간에 쫓겨 일일이 살펴볼 수도 없었겠지만.

 

 

 

 

 

 

 

 

 

 

 

 

 

 

 

 

 

 

 

 

 

 

 

 

 

 

층과 층을 연결하는 통로에는 작품들을 촬영한 사진들을 걸려있다. 그 옆에는 작품에 대한 설명도 적어 놓았다. 전시공간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예습을 해보라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3층은 동양의 색체가 물씬 풍기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상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은데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세공기술이 돋보인다.

 

 

 

 

 

 

 

 

 

 

2층은 생활 집기로 보이는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펜던트초상화가 보이는가 하면 회중시계와 옛 동전들도 진열되어 있다. 멕시코에서 사용되던 지폐도 보인다. 그런데 지폐의 지역명이 각기 다른 게 이색적이다. 각 지역마다 사용하던 지폐가 서로 달랐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관람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는 길에 피에타(Pieta)를 만났다. 계단 중간의 한가운데다 전시해 놓았다. 피에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맞은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뜻하며, 기독교 예술을 대표하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주로 성모 마리아가 부활하기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예술 작품으로 나타난다. 14세기 초 독일 미술에서 발전하여 북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미켈란젤로 작품에서 절정을 이뤘다고 한다. 이곳의 피에타도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피에타의 에디션(edition)인 모양이다. 작년에 로마에 들렀을 때 성 베드로성당에서 보았던 피에타와 모양새가 똑 같은 걸 보면 말이다. 크기만 조금 커졌을 뿐 생김새는 같은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 ‘슬림(Carlos Slim)’ 텔맥스 텔레콤(Telmex) 회장은 특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가진 돈에 비해서는 화려한 삶을 즐기는 편이 아니란다. ‘슈퍼리치의 필수품이라 여겨지는 요트도 없단다. 회사에서도 다른 경영진과 비서를 공동으로 쓰면서 보좌진도 따로 두지 않고 운전도 스스로 한단다. 대신 고전 명화와 조각품을 수집하는 데에는 열정적이라고 한다. 그는 로뎅, 르누아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위대한 아티스트들의 컬렉션을 소유하고 있다. 멕시코시티에 아내의 이름을 딴 소우야마 박물관을 건립해 이 작품들을 '모두를 위한 예술(Arte para todos)’을 기치로 내걸며 무료로 전시하고 있다. 인류의 유산인 로댕을 소장품이 아닌 감상품으로 보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거부인 슬림의 스타일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기업인들이 참고했으면 좋겠다.

여행지 : 중남미의 멕시코 및 페루

 

여행일 : ‘18. 4. 23() - 5.2()

여행지 : 멕시코, 페루. 쿠바(비행기 사정으로 인해 취소)

 

일 정 :

4.23() : 멕시코시티(소깔로광장, 과달루페성당)

4.24() : 멕시코시티(테오티우아칸)

4.25() : 쿠스코(마추피추)

4.26() : 쿠스코(12각 돌, 쿠스코대성당, 산토도밍고성당)

4.27() : 리마(아르마스광장, 사랑의 공원, 라르꼬마르)

4.28() : 파라가스(바예스타 섬), 이(와카치나 사막)

4.29() : 나스카(나스카라인)

4.30() : 멕시코시티(소우마야 미술관)

 

여행 둘째 날 : 신들의 도시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특징 : 아메리카대륙에서 발굴된 피라미드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큰 테오티우아칸은 멕시코시티로부터 40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1987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인간이 신이 되는 장소로 알려져 신들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기원전 300년 전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테오티우아칸은 기원후 150년 경 태양의 피라미드, 기원후 500년 경 달의 피라미드가 건설됨으로써 태양과 달의 신화의 무대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표적 볼거리로는 태양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 께쌀꼬아뜰 신전, 께쌀빠빨로뜰 궁전(Palacio de Quetzalpapalotl), 유적 박물관, 죽은 자의 길 등이 있다. 참고로 나중에 이곳을 발견한 아스텍인들은 테오티우아칸을 신들의 고향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스텍 우주관의 중심인 태양과 달의 신화의 무대로 이곳을 삼았던 거란다. 아스텍과 마야, 잉카 문명이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을 행했던 것이 바로 이 테오티우아칸의 영향이라고 보면 되겠다. 당시 이곳은 콘스탄티노플에 맞먹을 정도로 큰 도시였다고 전해진다. 인구가 20만에 육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큰 도시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부터 시작해서 350년에서 650년 사이에 크게 번성했고 이렇게 거대하고 웅장한 피라미드를 만든 문명이 7세기경에 갑작스럽게 쇠퇴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단다.

 

 

 

죽은 자와 신이 만나는 영험한 도시이자 융성했던 고대도시로 연결되는 길목은 멕시코시티에 기대 사는 서민들의 동네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2000만 명이 거주한다는 세계 최대 도시의 외곽을 달동네들이 산자락과 능선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것이다. 주로 메스티조들이 살면서 매일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도심(都心)으로 출퇴근을 한단다.

 

 

 

 

멕시코시티를 출발한지 1시간쯤 지나자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에 이른다. 이곳의 피라미드들은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었던 태양숭배 신앙의 성스러운 제단(祭壇)이었다. 그러나 산사람의 가슴을 갈라 뛰는 심장을 꺼내고 인육을 먹었던 참담한 제사(祭祀)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런 광신적인 믿음은 킨토솔이라는 인디오의 전설에서 연유되었다고 전해진다. 네 번째 태양이 테오티우아칸을 비추다 사라지자 신들에게 경배드리던 인간도 몰사(沒死)됐다. 절망에 빠진 신들이 이곳에 모여 상의한 끝에 그중 두 신이 각각 태양과 달의 신이 되었다. 그러면서 태양의 신이 태양의 운행을 위해 인간의 피를 요구했다. 태양이 다시 떠오르지 않는 날 멸망할 것이라고 믿었던 테오티우아칸 사람들은 태양이 다시 떠오르길 빌며 피라미드 앞에서 제사를 올렸다. ‘피의 제전’. 그것이 정기적으로 이 피라미드 정상에서 펼쳐졌다. 이 잔인한 의식은 1521년 스페인 정복자들이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 현 멕시코시티)’에 당도했을 때도 계속 됐다고 한다. 고도의 수학과 천문학을 바탕으로 정확한 태양력을 사용했던 그들이 이 잔인한 의식 때문에 미개한 야만인으로 몰렸고, 끝내는 멸망하고 만다.

 

 

 

 

이 지역은 멕시코시티의 대표적인 관광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기가 아까우기라도 했던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념품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아직 문은 열려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만큼 우리가 일찍 도착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덕분에 호객행위에 시달리지 않고도 곧바로 관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출입구 근처의 허물어진 유적지 건물군이다. ‘나비의 궁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께쌀빠빨로뜰 궁전(Palacio de Quetzalpapalotl)’인데 테오티우아칸의 여러 유적지 가운데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벽화와 조각으로 장식된 건축물이란다.

 

 

피라미드들과는 달리 이곳 께쌀빠빨로뜰(Quetzalpapalotl)’은 기둥과 지붕을 갖춘 방과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가들이 궁전(宮殿)과 신전(神殿)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유이다. 지금은 지붕의 대부분이 없어졌지만 견고하게 지어진 벽들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벽은 대부분 큰 돌과 작은 돌을 함께 이용해 쌓았다. 문양(紋樣)을 넣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보다 더 견고하게 쌓으려는 아이디어 일 수도 있겠다. 사이가 뜰 수밖에 없는 큰 돌들의 사이사이에 작은 돌들을 넣어 빈틈을 없앨 경우 훨씬 더 견고한 건물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벽의 하단에 재규어(jaguar)가 프레스코화(Fresco : 덜 마른 석회벽에 수용성 그림물감으로 그리는 기법)로 그려져 있다. 인신공희(人身供犧)로 바쳐진 인간의 심장을 먹고 있는 재규어를 그렸다는데 특이하게도 머리에 깃털이 달려 있다. 재규어(jaguar)는 고대 중미 사람들이 가장 숭배하던 동물이었다고 한다.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살던 고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독특한 그림과 조각으로 자신들의 문화와 생활상을 표현했다. 그 대표적인 유적지가 바로 이곳 테오티우아칸이며 이외에도 내일쯤 들르게 될 잉카문명의 유적인 마추픽추와 쿠스코 등이 있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단다. 이렇게 훌륭한 문화를 갖고 있었으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안쪽의 기둥 벽에 나비의 몸통을 한 께찰(Quetzal)’이 새겨져 있어 나비의 궁전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께찰이란 중앙아메리카에서 서식하는 꼬리가 긴 초록색 새()로 아즈텍과 마야문명에서 신성하게 여겨진다. 그런 문화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고 한다. 특히 과테말라에서는 국조인 동시에 화폐단위로도 이용된다.

 

 

 

 

 

 

 

물속에 있는 재규어를 그린 벽화도 보인다. 그밖에도 깃털이 달린 고동등 다양한 동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색상이 약간 바래기는 했지만 원래의 색깔을 아직까지도 잘 간직하고 있다. 이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도 엿보인다. 플래시를 터뜨리지 말라는 경고판이다.

 

 

 

 

다음은 달의 피라미드(Piramide de la luna)’이다. ‘께쌀빠빨로뜰의 바로 이웃에 위치하고 있다.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의 북단(北端)에 있는 달의 피라미드는 밑변의 길이가 146m, 높이가 46m4층 구조물로 100만톤 이상의 흙과 돌이 쓰였다고 한다. 기원후 500년경에 건설되었다고 알려진 이 피라미드는 인간의 심장과 피를 바쳤던 곳, 즉 인신공희(人身供犧)가 있었던 곳으로 추측된다. 당시 인신공희를 위해 기다리는 사람의 줄이 끝이 없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희생되었는지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이런 사람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일은 16세기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지속되어 오다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후에야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인명 경시행위는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이어졌다고 하니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재미삼아 호박 찌르듯이 인디언들을 찔러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개미 새끼 목숨만도 못하게 생각했던 그네들의 업보(業報)가 아니었을까?

 

 

달의 피라미드는 태양의 피라미드 보다 조금 낮다. 하지만 눈대중으로는 거의 비슷하게 보인다.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지어졌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테오티우아칸의 전체적인 조망은 달의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올라갈 수가 없단다. 얼마 전 관광객이 떨어져 목숨을 잃은 뒤부터는 통행을 금지시켰단다.

 

 

 

 

달의 피라미드는 여러 제단(祭壇)과 작은 피라미드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중 정면에 위치한 제단에 올라가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한다. 가이드의 발걸음은 이미 태양의 피라미드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의 피라미드는 경사가 심해 위험할 수도 있으니 대신 태양의 피라미드를 올라가보는 것으로 만족하라면서 말이다. 달의 피라미드 위에서 바라보는 죽은 자의 길에 대한 조망이 일품이라고 하던데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패키지여행의 가장 큰 단점이 보고 싶은 것을 모두 다 볼 수가 없다는 게 아니겠는가. 대신 편하고 싸게 돌아보고 있는 중이니 이쯤에서 만족해보기로 하자.

 

 

달의 피라미드 정면으로 곧게 뻗어나간 길이 죽은 자의 길이다.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작은 신전들이 늘어서 있다. 이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다. 제단에라도 올라온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형태와 규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죽은 자의 길(La Calle de los Muertos)’은 인신공희(人身供犧)의 길이다. 인신공희로 뽑힌 사람들의 의전(儀典)의 길로서 그들이 이 길을 걸어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길의 폭은 40m, 길이가 5.5에 이르나 현재 발굴되어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는 2.5정도라고 한다. 당시 인신공희로 바쳐질 사람들을 뽑을 때는 가장 용감한 사람을 뽑았는데, 경기를 해서 이긴 사람을 뽑는 방법이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많은 젊은이들이 제물로 선택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했는데, 이는 인신공희로 뽑혀지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태양이 작열하는 날에 죽은 자의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길을 걸어본다. 그러다 문득 맥없이 걷기만 한다는 게 마땅찮아 거리 좌우에 있는 유적들의 위로 올라본다.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에서 가장 높다는 태양의 피라미드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의 다른 유적들도 빠짐없이 시야에 잡힌다.

 

 

 

 

 

 

 

신에게 바칠 인간 제물이 오가던 성스러운 길을 요즘은 산 자들이 거닌다. 이 길은 달의 피라미드와 태양의 피라미드 등 다양한 건물들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을 이루는 모든 건축물들이 죽은 자의 거리로 합해지는 것이다. 아무튼 양쪽에 늘어선 신전과 주택 등 석조 구조물들이 고대도시의 완연한 모습을 추측하게 해준다.

 

 

 

얼마쯤 걸었을까 왼편으로 테오티우아칸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태양의 피라미드(Pirámide del Sol)’가 나타난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이 피라미드는 겉보기에는 4단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6단 구조라고 한다. 높이 63m에 가로세로 222mx225m의 규모인데 꼭대기에 신전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높이가 74m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대단한 건축물이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가 이집트에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멕시코에 있다고 한다. ‘촐룰라 (Cholula) 피라미드가 바로 그것인데 쁘에블라(Puebla) 서쪽 10지점에 있다고 한다. 기단 폭()450m에 높이가 65m에 이를 정도여서 이집트 체오프스(Cheops) 피라미드를 능가한다고 한다. 하지만 스페인 점령군에 의해 파괴되고 꼭대기에 교회가 세워져 지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라 그저 낮은 산봉우리 정도로만 여겨진단다.

 

 

! 이곳 멕시코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확연히 다른 용도를 갖고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왕의 무덤으로 만들어졌지만 이곳 멕시코의 피라미드는 신을 모시는 장소로 쓰이던 제단(祭壇)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큰 제단으로 보면 되겠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특별한 현상을 보이기도 한단다. 춘분과 추분 때면 정상 중심부에 태양이 떨어진다고 한다. 한 낮이 되면 태양이 태양의 피라미드의 바로 위로 오게 되고, 피라미드 서쪽면의 아랫단에 완벽한 직선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태양의 그림자와 피라미드 그림자의 길이가 66.6초 동안 같아진다고 한다. 때문에 매년 춘분과 추분 때에는 이런 현상을 보기 위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단다. ()를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피라미드 계단을 오른다. ‘걷다 보면 올라가겠지하는 각오로 시작했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함께 오른다. 다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걸 보면 국적과 인종을 불문하고 힘들기는 매한가지인가 보다. 아무튼 여행자들은 뙤약볕과 고산지대의 가쁜 호흡을 기꺼이 끌어안고 태양의 피라미드 정상까지 도전한다. 피라미드 위로 오르는 행위가 허용되는 것도 낯설고, 남녀노소 예외 없이 그 계단을 오르는 행렬도 장관이다.

 

 

 

 

버거울 정도로 가파른 구간도 있다. 고소공포증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공포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계단의 중간에다 밧줄난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무섭다거나 힘이 부칠 경우에는 붙잡고 오르라는 배려일 것이다.

 

 

 

 

올라가면서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면, 크기가 각각 다른 돌을 쌓고 그 사이에 회반죽을 발라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철기 문명이 아니어서 오로지 돌로 돌을 다듬어 쌓아올려 이 피라미드를 만드는 데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전문가들에 계산으로는 이 피라미드를 짓는데 하루에 3천 명이 동원되었다고 해도 최소 30년은 족히 걸렸을 것이라고 한다. 다른 특징도 보인다. 피라미드 경사면에 삐죽이 나온 돌들이 이채롭다. 겉에 발랐던 회반죽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지지대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252계단은 끝이 난다. 정상에 올라선 것이다. 정상은 제단으로 사용되어서인지 평평하게 되어 있다. 옛날 이곳에는 신전(神殿)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파괴되어 없어진지 오래고 지금은 이곳을 한 바퀴 돌면서 사방을 바라보는 전망대 역할을 할 뿐이다. 아무튼 신전이 있어서인지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 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꼭대기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고대도시 테오티우아칸의 흔적 너머로는 광활한 고원(高原)이 펼쳐진다. 저 멀리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이 장난감 집처럼 펼쳐져 있다. 더 멀리 눈을 들어보면 반쯤 안개에 가려 아련히 산과 나무가 마치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다.

 

 

 

 

남쪽에도 피라미드가 보인다. 테오티우아칸에서 세 번째로 큰 피라미드인 께찰코아틀 신전(Templo de Quetzalcoatl)’일 것이다. 아메리카의 여러 고대문명들이 성스러운 동물로 여기던 깃털달린 뱀을 모시던 의식을 행하던 공간이다. 깃털달린 뱀의 머리 조각상이 신전(神殿)의 벽에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께찰코아틀은 뱀 몸통에 비늘 대신 께찰(Quetzal)의 깃털을 두르고 있다. 도마뱀의 몸통에 날개가 달린 동양의 용과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께찰코아들은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신으로 농경사회에서는 풍요로 받아들이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나저나 난 저곳에 가보지를 못했다. 주어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주변의 유적지들이 빠짐없이 시야에 잡힌다. 테오티우아칸은 건설 초기부터 완벽한 구상 하에 정교하고 치밀하게 계획하였으며, 종교적인 상징성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 계획의 중심은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넓은 길이다. ‘죽은 자의 길이라고 불리는 이 길 좌우로 많은 석조 구조물, 피라미드와 사원, 광장, 주택 등이 건설되었고 그 끝에 사람의 심장과 피를 바쳤던 달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다. 또 다른 분석도 있다. ‘케찰코아를 태양으로 하고 태양의 피라미드는 토성과 목성, ‘달의 피라미드는 천왕성, 그리고 죽은 자의 길은 은하수를 나타낸다고 한다. 오늘날의 태양계를 중심으로 한 행성의 위치와 같단다.

 

 

북쪽으로는 달의 피라미드가 나타난다. 이곳을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이 기념물의 건축 연대를 AD 150년에서 300년으로 본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만 그 규모는 훨씬 더 크다. 하지만 거의 40년 동안을 발굴 작업에 종사했던 고고학자는 이렇게 말했단다. ‘우리는 테오티우아칸 사람들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으며 그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혹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여전히 알지 못한다.’ 세월 속에 묻혀버린 역사라 할 수 있겠다.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빠져나오니 길가 곳곳에 선인장들이 늘어서 있다. 선인장은 역시 멕시코를 대표하는 식물인가 보다. 사방에 버려지다시피 널려있는 걸 보면 말이다. 쏘깔로 광장에서 거론했던 바와 같이 멕시코 하면 데킬라와 용설란과 함께 떠오르는 단어가 애니깽이 아닐까 싶다. 100여 년 전 이곳으로 끌려와 노예나 다름없이 살아야 했던 우리네 선조와 그 후예들을 이르는 말이다. 그들이 끌려갔던 곳이 선박용 밧줄을 만드는데 쓰이는 선인장을 재배하는 '에네켄(Henequen) 농장'이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길가의 선인장들마저 허투루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여행지 : 중남미의 멕시코 및 페루

 

여행일 : ‘18. 4. 23() - 5.2()

여행지 : 멕시코, 페루. 쿠바(비행기 사정으로 인해 취소)

 

일 정 :

4.23() : 멕시코시티(소깔로광장, 과달루페성당)

4.24() : 멕시코시티(테오티우아칸)

4.25() : 쿠스코(마추픽추)

4.26() : 쿠스코(12각 돌, 쿠스코대성당, 산토도밍고성당)

4.27() : 리마(아르마스광장, 사랑의 공원, 라르꼬마르)

4.28() : 파라가스(바예스타 섬), 이(와카치나 사막)

4.29() : 나스카(나스카라인)

4.30() : 멕시코시티(소우마야 미술관)

 

여행 첫째 날 : 멕시코시티 과달루페 대성당(Basílica de Guadalupe)

 

특징 : 과달루페(Guadalupe)’는 포르투갈의 파티마, 프랑스의 루르드와 함께 세계 3대 성모발현 성지이다. 2만 명의 신도가 동시에 미사를 드릴 수 있을 정도로 크다는 것 말고도 교황 바오로 2세가 5차례 이상이나 방문한 곳. 이 지역에서 살던 농부의 푸른 외투에서 성모의 형상이 나타나 성지로 여겨지고 있는 성당. 성모가 피부가 까맣고 원주민 모습을 했다고 해서 이단아로 취급받던 가톨릭 성지 등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과달루페 성당의 탄생 이야기는 15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안 디에고(Juan Diego)라는 인디언 농부에게 성모 마리아(Virgin Mary)가 나타나 테페약(Tepeyac) 언덕에 교회를 지으라고 말한다. 자신은 농부에 불과하므로 그런 힘이 없다고 하자, 성모 마리아는 그에게 능력을 부여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디에고는 이런 이야기를 주교에게 찾아가 여러 번 말했으나, 주교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디에고가 걸친 망토 위에 마치 기적과도 같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주교가 엎드려 경배 드렸음은 물론이다. 현재 디에고가 입었다는 망토는 과달루페 성당 벽에 걸려있으며 참배객들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면서 구경할 수 있다. 이 성모상은 얼굴이 유럽인이 아니라 인디언을 닮았다는 것과, 디에고라는 인디언에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인디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737년에는 성모 마리아가 멕시코의 수호성인(patron saint)이 되었고, 라틴 아메리카의 천상 수호성인으로 인정받았다. ‘후안 디에고2002요한 바오로 2에 의해 성인으로 인정되었다. 오늘날 이 일대는 성스러운 곳으로 인식되어 하루에 수천 명이 찾아오고 축제일인 1212일에는 수십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이 성당이 수많은 기적을 불러 일으켰다는 소문 때문이란다.

 

 

 

성모 마리아는 스페인인들이 멕시코를 점령한 이후인 1531년에 발현했다. 이 성당의 뒤편에 있는 떼뻬약 (Tepeyac) 언덕에 갈색 피부 빛을 한 채로이다. 백인이 아니고 갈색 피부를 한 성모마리아가 현현한 거다. 이 사건 이후 7년 동안 (1531-38) 800만 원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 했다고 하니 성모의 발현은 가톨릭 이라는 종교를 멕시코에 확실하게 뿌리내리게 한 결정적 이유가 된거다. 그걸 기념하기 위해 뒷동산에 첫 성당을 세웠고, 이후 하나씩 늘어나 현재는 무리를 이룰 정도로 많아졌다. 멕시코 가톨릭의 영원한 성지로 자리 잡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과달루페 성당이다. ‘올드 과다루페의 뒤편에 도톰하게 솟아오른 게 떼뻬약 언덕이고 그 위에는 1553년에 지은 성모 출현 성당이 서있다. ‘과달루페 성모(Nuestra Señora de Guadalupe 혹은 Virgen de Guadalupe)’에 대해 한걸음 더 나가보자. ‘과달루페 성모는 멕시코 가톨릭을 대표하는 이미지이자 멕시코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16세기에 발현했다는 멕시코의 성모마리아를 일컫는 호칭이다. 멕시코 인디오를 닮은 구릿빛 피부의 과달루페 성모는, 멕시코 독립 운동 시기 미겔 이달고(Miguel Hidalgo)와 멕시코 혁명시기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군대의 깃발에 그려지는 등, ‘멕시코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인물로써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전 멕시코 국민에게 상징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멕시코 대표 소설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멕시코 국민들의 정신적 요람과 국민적 행운의 대상으로써 유일무이한 지위라는 기록이나 또 다른 국민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Carlos Fuentes)’기독교 신자 여부를 막론하고 과달루페 성모를 믿지 않는다면 진정한 멕시코 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표현이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2002년에는 로마교황청이 중남미의 대표 가톨릭 성지로 공표하였고, 매년 1212일 과달루페 성모 축일에는 무릎으로 기어서 성당을 오르는 행렬이 이어진다고 한다.

 

 

 

경내로 들어서면 교황 요한 바오로 2(Johannes Paulus II)’의 동상이 참배객들을 반긴다. ‘과달루페의 성모와의 깊은 인연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그는 이탈리아를 벗어난 첫 번째 사목 방문지로 과달루페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199056후안 디에고의 시복(諡福)을 시작으로 1992년에는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과달루페의 성모 경당을 지어 축성했다. 1999년에는 아메리카 주교회의의 요청을 받아들여 과달루페의 성모 축일을 아메리카 대륙 교회 전체의 전례 축일로 지정하였으며, 다음 날에 과달루페의 성모 대성당을 다시 방문하였다. 2002731, 그는 12백만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후안 디에고의 시성식을 거행하였으며, 다음 해에 성 후안 디에고(129)와 과달루페의 성모(1212)를 로마 전례의 전례력에 기재했다. 그가 얼마만큼 극진히 과달루페의 성모를 챙겼는지를 알려주는 일정들이라 하겠다.

 

 

마당에 서면 고색창연한 두 개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왼쪽은 성모가 발현한 한참 뒤인 1709 년 세워진 추리게레스코(Churrigueresco)’ 양식의 과달루페 원 본당이다. 에스파냐에서 나타난 바로크 말기의 건축양식으로, 추리게라가(:Churriguera family)와 그 제자인 ‘P.리베라, N.토메에 의해 확립되었다. 곡선, 회화, 조각 등을 많이 사용한 과잉 장식이 특징이다. 그 오른편에 보이는 붉은 돔의 건물은 주교좌성당(主敎座聖堂)’이다.

 

 

올드 바실리카(old basilica, 원래 본당)’주교좌성당사이의 틈이 일정하지 않아 보인다. 1709년에 완공된 올드 바실리카가 지반 침하로 인해 기울어졌기 때문이란다. 이로 인해 근처에 1974년부터 2년에 걸쳐 새로운 본당, 뉴 바실리카를 현대적인 모습으로 세웠다. 과달루페의 동정녀 마리아상의 원화는 현재 뉴 바실리카에 보관되어 있다.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이해 시성이 된 후안 디에고의 망토에 나타난 성모의 모습과 장미가 새겨진 조형물이 성당 구내에 세워져 있다.

 

 

두 성당을 왼편에 끼고 돌아보기로 한다. 자그만 성당과 조형물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어 잠깐의 눈 돌릴 틈조차 주지 않는다. 조금 더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가슴에 담아 둘 그 뭔가를 조금 더 살펴볼 수 있었으련만 주어진 시간에 쫓겨 발걸음을 서두르는 게 안타깝다. 아니 건축기법이나 예술에는 문외한인데다 스페인어까지 모르는 나에겐 낫 놓고 기역자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언덕 위에 최초로 성당이 지어진 이래 언덕 주변에는 작은 성당들이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포시토사원((templo del pocito)’도 그중의 하나란다. 별 모양의 창틀과 밝은 색의 타일로 장식된 돔(dome) 형식의 지붕이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포시토사원을 지나면 널따란 쉼터가 나오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분수대 앞으로 몰려들어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풍경이다. 분수대에 세워진 조형물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멕시코인들이란다. 원주민인 인디오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성모님께 경배하는 모습이 실제의 크기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후안 디에고가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최초로 지어졌다는 성당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정성들여 가꾸어놓은 아름다운 길을 따르다보면 여러 종류의 조형물들을 만나게 된다. 꽃으로 장식된 성모 마리아상이 보이는가 하면, 범선의 날개부분을 세워 놓기도 했다. 오르는 높이가 상당하다 보니 길가에는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쉬엄쉬엄 올라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마침내 용을 무찌른 미카엘 천사상(San Miguel)’이 지키는 떼뻬약(Tepeyac) 언덕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작은 예배당이 지어져 있다. 누군가는 1660년에 지어진 세리토 예배당(Capilla del Cerrito)’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또 크리스토발 데 아귀레테레사 펠레그리나가 세웠다고 했다. 153112후안 디에고라는 인디언 개종자에게 동정녀 마리아가 2번 나타나 교회를 세우라고 명령했다는 그 장소라면서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1553년에 지은 성모발현성당(Basilica de Nuestra Senora de Guadalupe)’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고해 두자.

 

 

성모가 발현했다는 떼뻬약(Tepeyac)은 원래 아스텍 여신 또난친(Tonantzin, 신의 어머니)‘을 모시던 곳이라고 한다. 원주민의 성지가 가톨릭의 성지로 바뀌게 된 셈이다. 그래선지 가톨릭의 성모신앙과 아스텍의 지모신앙이 덧 입혀져 과달루페 성모를 숭배하는 과달루페노가 탄생 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외래 종교가 현지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일정부분 토착화 현상은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 싶다.

 

 

성당의 앞은 뛰어난 전망대이다. 우뚝 솟아 있는 성당의 꼭대기에는 종탑이 있고 그 위에 피뢰침을 등에 업은 십자가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중개자처럼 서 있다. 성당의 뒤에는 멕시코시티의 시가지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성당의 내부는 온통 과달루페 성모일색이다. 중앙 제단은 물론이고 벽화들까지도 대부분 성모의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성모를 위해 세웠으니 뭐라고 할까마는 예수님이 너무 축소된 것 같아 약간은 어색한 감마저 든다.

 

 

 

 

 

 

 

 

 

 

 

 

 

 

이젠 본당으로 내려가야 할 차례이다. 아까와는 다른 방향으로 난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이 계단은 성모에 기도하려고 전국에서 몰려오는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오르는 코스로도 유명하다. 특히 과달루페 성모 축일1212(성모 마리아가 후안 디에고 앞에 나타난 날)에는 무릎으로 기어오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고 한다. 바닥이 돌로 되어 있어 잘못 했다가는 무릎이 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모님이 도움이 있어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말이다.

 

 

 

 

머리에 왕관을 쓰고 손에는 십자가를 든 사제가 지구를 밟고 섰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 입장에서는 광오(狂傲)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

 

 

 

과달루페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 왕의 속죄 교회 (Templo Expiatorio a Cristo Rey)’로도 불린다는 올드 바실리카(old basilica)’ 즉 원래의 본당이다. 1709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안전을 위해 미사 등 공식적인 행사는 하지 않으며 참배객들만 받아들이고 있단다.

 


 

 

 

 

 

금박을 입힌 내부시설이 화려하기 짝이 없다. 특히 사방에 걸려있는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인디오들의 개종(Conversion de los indios), 2월의 첫번째 기적(Primer milagro Diciembre) 등 과달루페 성모가 발현한 시대상이 그려진 그림들이 많이 보인다. 후안 디에고의 망토(tilma)에 그려진 성모화를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는 성직자들을 그린 그림도 걸려있다. 성모발현의 인정 여부를 놓고 그만큼 말이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어갈 곳은 새로 지어진 본당이다. 올드 바실리카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1974년부터 2년에 걸쳐 새로 지었다는데 천막 모양으로 된 대성당의 외관 중앙에는 ’¿No estoy yo aqui que soy tu MADRE?‘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너의 어머니인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라는 뜻이란다. ‘국립 인류학 박물관을 설계한 페드로 라미레스 바스케스(Pedro Ramirez Vasquez)’가 설계했는데, 한꺼번에 20,0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건물이란다.

 

 

성당 안에서는 미사가 거행되고 있다. 매일 매일이 같은 풍경이라고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30분 단위로 계속해서 미사가 열린단다. 하긴 바티칸의 바실리카(basilica) 다음으로 많은 신도들이 방문하는 순례지(巡禮地)라는데 이 정도 규모에 이 정도는 바쁘게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새 본당의 제단 뒤편으로 돌아가자 평지 에스컬레이터가 나타난다. 왼편에 걸려있는 그림, 1531년 발현한 과달루페 성모’, 후안 디에고(우리말로 요한 야고보)‘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은 멕시코 원주민 콰우틀라또아친(Cuauhtlatoatzin, 말하는 독도리라는 의미)‘의 망토(tilma)에 새겨져 나타났다는 그 성모화를 수월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다. 아무튼 이 망토(tilma)48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혀 삭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다. 덕분에 수많은 순례객들이 디에고에게 발현하셨던 성모님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벽에 걸린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조금 묘하다. 늘상 보아오던 유럽인이 아니라 남미 인디언 비슷하게 생긴 것이다. 멕시코 국민들은 그런 외모와 함께 인디언에게 나타난 사실을 중시하고 있단다. 그래서 여느 성모마리아와 구별하여 과달루페의 성모라고 부른다, 아무튼 이 성모화(聖母畵)는 현대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신비를 간직하고 있단다. 1979년 적외선을 이용해 형상을 조사한 미국 과학자들은 사람의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칠감이나 붓질의 흔적이 전혀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과학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눈을 우주광학 기술로 2,500배 확대해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홍채와 동공에 동일 인물들이 비쳤기 때문이다. 후안 디에고가 틸마를 펼쳤던 순간과 몇몇 인디언 가족들이 보였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 결과를 성모 마리아의 눈은 즉석 사진기처럼 눈앞의 형상을 그대로 포착했다.’라고 밝혔다. 또한 이 그림은 47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성모화의 섬유조직과 형태, 색감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고 한다.

 

 

성당에는 성물(聖物)을 파는 매점이 들어서있다. 길거리에서 판매하는 과달루페 성모상이나 성모화(聖母畵)를 믿지 못하겠다면 이곳에서 구입해 둘 일이다. 조금은 비싸겠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성물들이 대부분 과달루페 성모와 관련이 있다. 멕시코에 오면 예수의 상은 별로 안 보이고 오나가나 성모뿐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았나 보다.

 

 

밖으로 나오니 신부님 앞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다. 성당 안에서 구입한 성물(聖物)에 축성을 받으려는 신자들인 모양이다. 저런 풍경이 멕시코의 본모습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과달루페 성모발현 후 아즈텍인들은 대부분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현재의 멕시코는 인구 12,000여만 명 가운데 1억의 신도를 갖고 있는 가톨릭국가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머리가 혼란해져야 정상이지 싶다. 원주민과 그들의 신앙을 몰살시키는데 정신적 지주가 됐던 가톨릭은 이들에게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너른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는 시계탑 역할을 하고 있는 거대한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잉카문명과 스페인양식이 혼합되었다는 설명인데 내 얄팍한 상식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십자가의 가로세로가 교차되는 지점의 바로 아래에 작은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인형극을 펼치기 위한 공간인데,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 광경을 인형들이 움직이면서 재현한다. 그 스토리가 궁금했지만 시간이 없어 끝까지는 보지 못했다.

 

 

성당 울타리 쪽에는 대형의 십자가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십자가의 길을 새겨놓지 않았나 싶다.

 

 

투어를 끝내고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 지역은 멕시코시티의 대표적인 관광지 가운데 하나이다. 때문에 출입구 주변에는 성지(聖地)와 관련된 기념품 외에도 멕시코의 토산품들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하긴 이 일대가 온전히 성지처럼 취급되고 있다니 오죽하겠는가. 그로인해 멕시코 시골에서는 마을 주민 전체가 과달루페 성당을 순례하기 위해 걸어서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통한 신앙훈련의 하나로 성당 근처에서부터 무릎걸음으로 기어오기도 한단다.

 

 

 

에필로그(epilogue) : ‘과달루페의 성모MBC-TV의 인기 예능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20168월에 방영된 방송에서는 큰 키와 금발, 흰 피부인 보통의 성모화(聖母畵)’와는 달리 멕시코 원주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 멕시코 원주민의 망토에 그려졌다는 점, 그리고 액자에 넣어진 채로 보관되어 있는 사연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과달루페 성모를 모신 이후에 생긴 기적들, 그리고 멕시코 원주민들의 천주교 개종을 위해 조작되었다는 의혹에 대한 실험결과 등을 재현시켰다. 논란이 계속되자 교황청은 미국 항공우주국 나사에 조사를 의뢰했고, 연구를 맡은 필립 칼라한조디 스미스이 적외선 투시를 이용해 성모화를 정밀 조사를 실시했는데, 과달루페의 성모화가 사람이 그린 게 아니라고 결론이 난 것이다. 성모화에서는 어떠한 붓질의 흔적도 없었고, 물감으로 사용된 도료 역시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란다. 과학적인 기술로도 밝혀내기 불가능한 신비로운 그림이라는 게 '신비한 TV 서프라이즈'가 내린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