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의길 7코스(낙하 IC - 임진강역)
여행일 : ‘25. 3. 1(토)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및 문산읍 일원
여행코스 : 낙하 IC→내포 IC→임월교→당동어린이공원→반구정→임진강역(거리/시간 : 12.1km, 실제는 ‘반구정’부터 7.75km를 2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의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은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년 9월,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 트레킹 들머리는 낙하 IC(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낙하리)
자유로(국도 77호선)의 낙하 IC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만나는 마을이 ‘낙하리’이다. ‘평화의길 인증 QR코드’는 마을 버스정류장 옆 평화의길 이정표에 붙어있다.
▼ 낙하마을을 출발 임진강의 언저리를 따라 임진각관광지까지 북진하는 12.1km의 여정.
▼ 산악회에서는 7코스와 8코스를 한꺼번에 걷겠단다. 하지만 집사람의 체력으로 22.3km는 무리다. 그래서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을 과감히 생략하고, 대신 평화의길이 살짝 비켜 지나가는 반구정과 임진각관광지를 들러보기로 했다.
▼ 09 : 00 – 09 : 20. 계획대로 ‘반구정(황희선생 유적지)’부터 들른다.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52)가 말년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자연을 즐기던 곳이다. 정확히 10시에 문을 여는 유적지는 1천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5살 이하나 경로는 면제해준다.
▼ 18년이나 의정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 재직했던 분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영당(影堂)을 중심으로 노년의 황희가 유유자적했다는 ‘반구정(伴鷗亭), 고손인 황맹헌(黃孟獻)의 부조묘(不祧廟), 앙지대, 경모제, 고직사 그리고 방촌기념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 첫 만남은 방촌기념관. 청백리의 표상이라 할 만큼 깨끗한 정치를 펼쳤던 인물로 잘 알려진 황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 기념관으로 들어가면 선생의 일대기를 접하게 된다. ’황희‘하면 정승이란 수식어가 으레 따라다닌다. 의정부 수반인 영의정(또는 좌·우의정)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얘기다. 정승을 지낸 역사인물이 어찌 황희뿐이겠는가. 하지만 24년이나 재임한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영의정 18년, 좌의정 5년, 우의정 1년을 지냈다. 특히 6대 임금을 섬긴 인물은 황희가 유일하다고 전해진다.
▼ 선생의 삶과 사상이 담긴 작품과 유품들도 전시되고 있었다. ’와! 명필이네~~‘ 이석암 작가님의 말마따나 지극히 아름다운 글씨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등 삶에 얽힌 일화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황희는 겸손한 자세와 치우침 없는 몸가짐으로 존경을 받았다. 인격과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말을 공손하게 하는 법이다. 대통령 탄핵 결정을 앞둔 요즘,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쏟아내는 오염된 말들로 인해 세상이 어지럽다. 황희의 ‘겸손 리더십’이 한층 더 중요해지는 요즘이다.
▼ ‘청정문(淸政門)’으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된다. ‘청백리(淸白吏)’였음을 은연중에 자랑하는 이름이다. 청백리는 청백탁이(淸白卓異), 즉 청렴하고 결백함이 이상적인 관료를 의미한다. 조선시대는 200명 내외가 청백리로 선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안으로 들어가자 유적지의 중심축인 ‘반구정(伴鷗亭)’이 반긴다. 관직에서 물러난 황희 정승이 갈매기(鷗)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곳으로, 임진강 강물 위로 바로 치솟은 옹색한 언덕에 비집고 들어서 있다.
▼ 원래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인근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시멘트로 대폭 개축했고,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목조건물로 바꿨다. 하나 더. 반구정은 세조 때 재상 한명회의 ‘압구정(狎鷗亭)’과 비교되기도 한다. ‘반’과 ‘압’ 모두 벗 삼는다는 뜻을 담았지만, ‘압’자는 상하 관계에서 높은 이가 아랫사람을 가까이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에 명칭에서부터 두 사람의 인품을 보여준다는 시각이다.
▼ 처마에는 미수 허목선생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가 걸려있었다. <반구정은 임진강 하류에 있다. 먼 옛날 재상 황희의 정자다. -중략- 정자는 임진(臨津) 밑에 있는데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모여든다. -이하 생략->
▼ 정자에 오르자 시야가 툭 트인다. 발아래로는 임진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경칩을 앞두어선지 날씨가 확 풀렸다. 하지만 흰 선이 강물을 둘로 가르는 걸 보면 겨우내 살을 찌웠던 얼음은 아직 녹지 않은 모양이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맑은 날에는 멀리 개성의 송악산까지 보인다는데 짙은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 조금 더 높은 곳에 ‘앙지대(仰止臺)’라는 또 하나의 정자가 있었다. 1915년 반구정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지었다고 한다. 상량문은 오직 선(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다른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앙지대라는 이름은 시경의 호인(好人)이라는 뜻을 취했다.’라고 적고 있단다.
▼ 정자 맞은편. 영당을 비롯한 전각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맨 오른쪽은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는 경모재(景慕齋), 그 옆으로 방촌 영당, 월헌사, 고직사 등이 차례로 늘어섰다. 모두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影堂)’이다. 1452년(문종 2) 황희가 90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년(세조 1) 후손들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반구정 옆에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했다. 6.25 때 불탔으나 1962년 후손들에 의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복원했다.
▼ 황희 정승의 영정. 2년쯤 전인가? ‘진안고원길’을 답사하는 중에도 선생의 영정을 만났었다. 진안군 안천면(백화리)에 있는 ‘화산서원(華山書院)’인데 ‘황방촌영정(黃尨村影幀, 전북유형문화유산)’이란 이름으로 걸려있었다.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두 영정이 다른 이유는 뭘까?
▼ 그 왼쪽은 월헌사(月軒祠). 황희 선생의 고손(高孫)인 월헌(月軒) 황맹헌(黃孟獻, 1472-1535)의 불천위 신주를 모셔놓은 부조묘(不祧廟)이다.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되는데, 이들은 4대가 지나서도 신주를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하나 더. 황맹헌은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며, 그의 죽지사(竹枝詞)는 명나라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해진다.
▼ 맨 왼쪽은 ‘사직재(舍直齋)’가 자리한다.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란다. 하지만 입구에서 본 종합안내도에는 ‘고직사’로 적혀 있었다. ‘고직사(庫直舍)’라는 게 본디 시설을 관리하는 관리인(고지기)이 거처하던 곳일지니, 저곳에서 살던 고지기가 제사 준비를 도맡았었던 모양이다.
▼ 경모재 오른쪽, 그러니까 맨 오른쪽에는 황희 정승의 동상이 있다. 황희는 정승을 24년간이나 지낸 인물이다. 뛰어난 능력과 겸손의 덕을 함께 갖췄기 때문이겠지만, 나이가 들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몸을 낮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관노였던 장영실을 과학자로 관직에 올리고, 노비의 아이가 수염을 잡아당겨도 마음 좋게 웃어 ‘허허 정승’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선생이 허허 웃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 09 : 20. 주차장으로 되돌아와 트레킹에 나선다. 사목2교(자유로)의 교각 아래에 낯익은 아치형 대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평화누리길 8코스(반구정길)가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 걷기 딱 좋은 어느 주말. 우리 함께 콧바람을 쐬어보잔다. 어찌 그리 우리 일행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질까?
▼ 맞은편에는 평화의길(7코스, 12.6km) 말고도 평화누리길(8코스, 반구정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경기둘레길에서는 이정표(율곡습지공원 13km/ 성동사거리 20.1km)를 준비했다. 세 길이 함께 간다는 얘길 것이다.
▼ 09 : 21. 자유로 아래로 빠져나오면 사거리. ‘평화의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사목리(沙鶩里) 반구정마을을 거쳐 온 서해랑길이 황희선생유적지(반구정)를 들르지 않은 채, 이곳에서 우회전해버리기 때문이다.
▼ 경기둘레길(7코스)에서 시작점임을 알리는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세 길이 함께 쓰는 구간답게 탐방로 곳곳에서 세 종류의 이정표를 만난다. 하지만 이렇게 거리표시까지 한 이정표는 ‘경기둘레길’이 유일했다.
▼ ‘반구정로’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간다. 자유로(77번 국도)에 기대듯이 일차선의 도로를 내놓았다.
▼ 고갯마루에는 평화누리길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벤치는 물론이고 ‘그네 의자’까지 갖춘 멋진 쉼터이다.
▼ 탐방로와 함께 가는 자유로 너머는 임진강이다. 철조망으로 막힌 강은 일반인에게 불가침의 영역이다. 문산읍이 긴장감 넘치는 접경지역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반듯반듯하게 지어진 민가나 큼직한 공장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섰는데 어찌 긴장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 길은 ‘자유로’와 나란히 간다. 하지만 자유로보다 지대가 낮기 때문에 임진강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오른쪽은 사목2리 석결동(石結洞) 마을이라고 했다. 임진강변에서 연결된 노루매봉에 돌이 많은데, 이 돌들에 결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 09 : 45. 자유로와 헤어져 들녘으로 들어간다. 자그만 개울을 따라 농로가 나있는데, 농경지 너머의 임진강역에는 전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 이때 낙곡을 주워 먹고 있던 기러기 떼를 만났다. 하지만 그동안 평화의길을 걸어오면서 숫하게 만났던 기러기 떼들에 비하면, 떼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숫자가 작았다.
▼ 09 : 51. ‘경의중앙선’이 지나가는 ‘운천2리 건널목’. 무인 철도건널목이지만 옛 기억을 소환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차단봉에 ‘X’자형 멈춤 표지판, 금방이라도 딸랑딸랑 거릴 것 같은 판때기 등 건널목의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 철길 너머로 ‘임진강역’이 보인다.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면 저 역을 지나 장단면(파주시) 노상리에 있는 도라산역까지 갈 수 있다.
▼ 철로를 횡단하면 ‘임진각로’이다. 통일로(1번 국도)의 마정교차로와 임진각을 잇는 4차선 도로다.
▼ 파주에도 평화누리길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디엠지 스테이’라는 이름처럼 하룻밤 머물면서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평화를 보고 느껴보라는 모양이다.
▼ 임진각로는 7코스의 종점인 임진강역 앞을 지나간다. 하지만 인도가 따로 나있지 않아 통행은 불가능하다.
▼ 탐방로는 임진각로의 오른쪽 아래를 따라간다.
▼ 09 : 58. 자유로의 ‘마정육교’ 교각 아래 경기둘레길 이정표(율곡습지공원 10.1km/ 반구정 2.9km)가 세워져 있었다. 임진각 관광지로 들어가지 말고 곧장 율곡습지공원으로 가라는 모양이다. 하지만 평화의길은 임진강역 쪽으로 조금 더 가란다.
▼ 100m쯤 더 걸으면 임진강역. 평화의길 7코스의 종점이자 8코스의 시점이다. 평화의길 이정표(QR코드 부착)는 역 앞의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나 더. 이곳은 8코스뿐만 아니라 8-1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8코스는 임진각관광지를 지나 임진강변을 따라가고, 반면에 우회노선인 8-1코스는 마정육교의 교각 아래로 되돌아가 마정리로 연결되는 농로를 따라간다.
▼ 임진강역은 경의선 전철이 연결되는 ‘DMZ 관광의 출발지’이다. 2000년 남북철도연결 기공식을 거쳐 2001년 9월30일 운전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전력선이 없는 단선철도로 하루 한 번 ‘DMZ 평화열차’가 오가던 작은 역사였으나, 2020년 경의선 전철이 연장되면서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 10 : 00 – 11 : 15. 계획했던 대로 임진각관광지로 향한다. 원래대로라면 8코스의 GPX트랙을 따라가는 셈이 된다. 하지만 8코스는 뭔가의 이유로 통행이 불가능하단다. 때문에 우회노선인 8-1코스를 선택해야만 했고, 임진각관광지를 둘러보고 싶었던 나는 탐방시간을 만들기 위해 7코스의 일부를 줄여 걸을 수밖에 없었다.
▼ 이 길은 분단의 현실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길로 정의할 수 있다. 그 길의 초입에서 17개의 계단 위에 올라앉은 17m 높이의 거대한 탑을 만났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당시는 버마)의 아웅산 묘역에서 대통령을 수행 중이던 우리 외교사절(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장관 등 열일곱 분)이 북한의 테러에 의해 순국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 ‘6·25전쟁 납북자기념관’은 ‘아웅산순국 외교사절위령탑’과 어깨를 맞대듯이 가까이 있었다. <기억으로 잊지 못하고, 보고 싶어, 만나야하는 사람들>로 시작되는 브로슈어처럼 6.25전쟁과 납북피해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전시납북피해자의 문제를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공간이다.
▼ 전시관은 특별전시실(1층)과 상설전시실(2층), 전망대(옥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별전시실에는 납북피해 가족들이 기증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 중이다. 상설전시장은 납북의 배경과 원인, 납북의 전개과정과 납북자의 고통, 귀환노력과 납북자 가족의 고통, 납북과 인권 그리고 통일을 위한 노력 순으로 꾸며져 있었다.
▼ 납북자 가족의 고통은 자료 또는 밀랍인형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다. 특히 밥상에 둘러앉은 어느 납북자 가족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비어있는 아버지의 자리에 밥그릇을 놓아둔 것은 납북된 아버지의 생사를 아직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 벽면에 납북자들의 이름을 적어 넣은 공간도 있었다. 그런데 함께 둘러보던 몽중루 작가님이 눈물을 훔치고 계시는 게 아닌가. 작가의 숙부께서 납북되셨는데, 벽면에서 그 이름을 찾아냈던 모양이다. 장손으로 가계를 이끌어가다 보니 맞닥뜨리는 감회 또한 남달랐을 것이다.
▼ 밖으로 나오니 ‘새천년의 장’이란 조형물이 반긴다.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아 새천년 통일조국의 희망찬 미래를 상징하는 작품이란다. 50주년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기둥이 세계평화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한민족의 군상들을 떠받히고 있는 모양새이다.
▼ 이어지는 공간은 ‘보훈단지’로 각양각색의 참전비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의 동상을 중심으로 미국군참전비, 일본계미군참전비, 임진강지구전적비 등 수많은 빗돌들이 들어서 있다.
▼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의 동상. 미국의 33대(1945-1953) 대통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천황인 히로히토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하라고 명령한 국가원수이기도 하다. 요즘이야 푸틴이 심심하면 쏘아대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지만.
▼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6.25전쟁 참전기념비’. 6.25전쟁에 참전한 파주시 출신 군인과 경찰, 학도의용군, 진지를 구축하는데 힘을 보탰던 지역주민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담은 빗돌이다.
▼ 임진강지구전적비. 서부의 요충인 임진강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 싸운 제1사단, 해병 제1전투단, 유엔군의 공로를 기리는 빗돌이다.
▼ 김포국제공항 폭발사고 희생자추모비.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둔 1986년 9월 14일에 일어난 의문(북한의 사주로 추정)의 테러사건이다. 고성능 사제 시한폭탄의 폭발로 가족을 배웅하러 나왔던 일가족 4명과 국제공항관리공단 직원 1명 등 5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3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 다음은 ‘임진각(臨津閣)이다. 남북분단이라는 한국의 비극적인 현실을 상징하는 이색적인 장소로, 옥상에 만들어놓은 전망대가 볼만하다. 하지만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주변 분위기와는 달리 건물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편의점과 햄버거가게가 들어선 1층도 손님이 뜸했고, 식당이 있었던 2층은 아예 텅 비어 있었다.
▼ 3층의 전망대는 꽤 많은 사람들이 조망을 즐기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민간인통제선 너머의 풍경을 살펴보는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쉽다면 직접 민간인통제선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DMZ 안보관광 매표소에서 안보관광을 신청하면 된다. 단, 신분증 미소지자는 신청이 불가능하다.
▼ 북쪽 조망. 임진강 철교. 신구의 다리가 나란히 가지만, 6.25전쟁의 아픈 상처를 품은 옛 다리는 상판이 사라지고 없다.
▼ 서쪽 조망. 민통선 너머의 임진강. 물길은 저 모퉁이를 돈 다음 한강과 합류한다. 그리고는 조강으로 변해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 남쪽 조망. 조금 전 둘러본 ‘보훈단지(참전비)’.
▼ 동쪽 조망. 평화누리공원과 평화랜드가 들어서 있다.
▼ 임진각에도 실향민들을 위한 '망배단'이 마련돼 있다. 명절이 다가오면, 이곳에서 실향민과 탈북민들이 망향의 한을 달래며 함께 차례를 지낸단다.
▼ ‘망향의 노래비’에서는 ‘잃어버린 30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건호와 남국인이 작사·작곡하고 설운도가 부른 노래로 1983년(6.30-11.14) KBS에서 방영된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138일에 걸친 특별 생방송을 통해 53,536건의 이산가족 사연이 소개되고, 그중 10,189건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의 배경음악이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나 더. 해당 방송의 기록물도 비극적인 냉전 상황과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세계 유일의 기록물로, 지구상에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또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잃어버린 30년’도 함께 등재됐다)
▼ 망배단 뒤쪽에 놓인 다리는 ‘자유의 다리’다. 1953년에 6·25전쟁 포로 1만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 귀환했다. 당시 포로들은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이동한 뒤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왔다. 임시로 설치한 다리지만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어 6·25전쟁의 대표적 유산으로 꼽힌다.
▼ ‘평화의 소녀상’도 눈에 띈다. 맹추위에 놀랐는지 목도리에 털신까지 착용하고 있는데, 평화로 도배되다시피 한 관광지답게 하나가 아니고 둘씩이나 된다.
▼ ‘독개다리’로 가는 길, ‘BEAT 131’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Beat(군에서는 Beat back)’가 물리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이 근처에 벙커나 참호 같은 옛 시설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그 뒤에는 와해되기 일보 직전인 열차가 놓여있었다.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라는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의선 장단역 남쪽 50m 지점에서 폭탄을 맞고 탈선하여 멈춰선 채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2004년 이곳으로 옮겨왔단다. 녹슨 부분은 복원하고 더 이상 녹슬지 않도록 부식방지 처리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총탄 자국과 휘어진 바퀴에서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나 더. 증기기관차 상단에서 자라고 있던 뽕나무도 함께 옮겨와 기관차 근처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 다음은 ‘임진강 독개다리’이다. 6·25전쟁 때 파괴되어 교각만 남아 있던 임진각 앞 경의선 상행선 철교의 교각에 상판을 올려 관광시설로 꾸며놓았다. 유료 입장이며 독개다리로 입장하면 노란선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노란선 안쪽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구역 이외에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참고로 ‘독개다리’란 이름은 장단면 노상리 쪽 자연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 안으로 들어가면 옛 경의선 열차를 만난다. 나무로 된 의자, 선반 위의 짐 가방들, 차창 풍경 영상 등 당시의 열차 내부를 재현해놓았다.
▼ 열차를 벗어나면 새로 만든 다리가 나온다. 다리는 길이 105m에 폭 5m로 만들어놓았다. 바닥 몇 곳에 강화유리를 깔아 스카이워크 기분을 내게 했는가 하면, 바닥의 또 다른 공간(강화유리 아래)에는 철로를 연상시키는 것들을 전시해놓기도 했다.
▼ 벽에는 파괴된 채로 널브러져 있는 철교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 몇 장도 게시해 놓았다. 끄트머리의 전망대 아래층에서는 영상효과인 듯 했지만 전쟁 이전의 온전한 다리 모습도 느껴볼 수 있었다.
▼ 다리 위를 걷는다. 민통선 안쪽의 실제 땅을 밟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민통선 안쪽 구역이기에 북한과 가까운 곳을 걷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전망대를 만난다.
▼ 마주하는 교각에는 총탄자국들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한국전쟁 당시의 치열했던 상황을 대변해준다고나 할까?
▼ 시선을 조금 옮기자 곤돌라가 눈에 들어온다. 임진각스테이션에서 출발 임진강을 건넌 다음, 민간인 출입통제선 지역(군내면 백연리)의 DMZ스테이션에 이르는 ‘DMZ 하늘 길’이다. 건너편에서 갤러리 그리브스, 밀리터리 스트리트, 소망리본 존, 바람개비 존, 평화등대, 평화정, 임진강전망대 등을 만날 수 있다.
▼ 500원만 더 내면 ‘BEAT 131’에 들어가 볼 수 있다. 6·25전쟁 때 군사시설로 사용하던 지하 벙커를 원형 그대로 살려 전시 공간으로 꾸몄다. 평화 메시지를 담은 다양한 콘텐츠도 감상할 수 있다.
▼ 전시 공간이 협소해서 오르내리는 계단을 포함 3분 이내에 모든 관람이 가능할 정도다.
▼ 안에는 대전차지뢰를 비롯해 총기·수통·철모·무전기 등 벙커에서 썼을 법한 군용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 지휘부인 상황실을 재현한 공간이 있고, 몇 가지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 미디어아트 작가의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 임진각은 분단의 아픔이 있다. 달리기를 멈춘 철도 끝에는 임진강이 흐르고, 그 주변에는 철조망이 처져있다. 철조망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평화의 리본이다. 하나씩 매달기 시작한 소망들이 모이다보면 언젠가는 그날이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오지 않을까?
▼ 내부 전시장만으로는 부족했던 탓일까? 야외전시장을 만들고 증기기관차의 녹슨 파편들을 전시해놓았다. 옆에는 이들과 운명을 함께 했을 법한 ‘임진각역 표지판’도 세웠다. 개성이 2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단다.
▼ ‘DMZ 평화의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매일 2회씩 개방되는데 온라인으로 신청을 해야만 가능하단다. 하나 더. 안내도에 그려진 탐방로는 두루누비에서 배포한 8코스의 트랙과 크게 달랐다. 신청하기 전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 발길은 이제 ‘평화누리공원’으로 향한다. 지난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조성되었는데, 무심하게 산책하기 딱 좋은 공간으로 다양한 조형물들을 만날 수 있다. 공연장과 전시장 등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을 갖지만 그보다는 99만 평방미터나 되는 잔디언덕으로 대변되는 곳이다.
▼ 무지막지하게 너른 주차장 오른편에는 ‘놀이공원’이 들어섰다. 놀이공원 특유의 음악과 함께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 내려앉기를 반복하는 놀이기구도 보인다. 그래선지 임진각이 예전 같지 않게 어수선해졌다. 아니 삼일절 황금 연휴를 맞아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 탓일 수도 있겠다.
▼ 주차장의 끄트머리에는 ‘해병대 장단·사천강 전투 전승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6.25전쟁 당시 판문점에서 임진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에서 불과 5,000여 명의 병력으로 중국군 4만 2,000여 명의 4차례에 걸친 공격을 격퇴하며, 수도권 및 파주 일대를 성공적으로 지킨 해병대의 대표적인 전투다.
▼ 평화누리공원은 넓은 잔디밭과 바람개비 언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이다. 3,000여개의 바람개비를 심어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평화를 향한 바람을 보여준다. 또한 공원 곳곳에 평화를 주제로 한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관광객들에게 힐링과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 평화누리공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상징적인 ‘통일 부르기’이다. 최평곤 작가의 작품으로 흡사 거인들이 북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통일을 향한 나지막하고 강렬한 호소를 담았다고나 할까?
▼ 바람의 언덕 아래, 연못에 자리 잡은 ‘포비(FourB) 평화누리점’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로 특별한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 평화누리 야외공연장. 공원은 크게 음악의 언덕과 바람의 언덕으로 나뉜다. 음악의 언덕에는 2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잔디광장과 수상 야외공연장이 있다. 자연 친화적 공간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 광장처럼 얕은 경사를 따라 펼쳐진 너른 초원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국적이다. 평화누리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저런 잔디언덕을 걸으며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을 찾아가며 감상하는 것이다.
▼ 실향민들의 소망을 담은 '이제 만나러 갑니다. 소망함'이다. 채널A의 프로그램 이름이기도 한데, 실향민과 탈북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았단다. 60여년의 그리움이 담긴 편지와 선물은, 통일이 되는 그날 북한의 가족들에게 전하려 한다나?
▼ 이경림 작가의 ‘솟대집’이다. 사람을 품어 안고 평화와 안녕의 염원이 자라는 공간을 상징화했다고 한다.
▼ 둥그렇게 돌기둥들이 늘어서있다. ‘통일기원 돌무지’ 조형물이라고 한다. 기원의 의미를 담은 장승과 돌무지를 현대적으로 재현하여 만들었단다. 1만원의 기부금(북한 어린이 돕기)을 낸 이들의 희망 메시지나 소망의 글을 석판에 새겨 기둥에 부착하면, 여러 개의 석판이 모이면서 하나의 돌무지로 완성되는 기획 의도다. 하지만 참여 부족으로 흥행이 실패하면서 30개의 원형 기둥 대부분은 벌거숭이처럼 남아 있었다.
▼ 고(故) 김기태 경감은 한국전쟁 당시 고랑포 지서 탈환을 위해 출동했다가 북한군과 전투 중 전사한 전쟁 영웅이다.
▼ 저 팬텀기의 이름은 ‘F-4D 하늘의 도깨비’로 적혀 있었다.
▼ ‘평화의 발’이란다.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DMZ에 맨발로 첫 발을 살포시 내딛는 형상으로, 북한의 8.4 DMZ 지뢰도발로 잃은 장병의 다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단다. 아울러 8.4 DMZ 작전에 참가했던 육군 용사들의 군인정신과 전우애를 기리고, 평화통일을 만들어가기 위한 민·관·군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 11 : 15. 임진강역으로 되돌아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7코스는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12km 중 9km나 단축했다. 아니 단축시간을 이용해 황희선생유적지(반구정)와 임진각국민관광지에 들러 선현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접해보고 싶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나저나 GPX트랙은 7.75km를 2시간 15분에 걸었다고 표시하고 있었다. 반구정과 임진각을 둘러보느라 4km를 더 걸을 셈이다.
▼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손가락으로 ‘V’자까지 만들어댄다. 맞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구간을 대폭 줄이는 대신, 선현이 남긴 옛 얘기에 더해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까지 느긋하게 엿봤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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