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의길 7코스(낙하 IC - 임진강역)

 

여행일 : ‘25. 3. 1()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및 문산읍 일원

여행코스 : 낙하 IC내포 IC임월교당동어린이공원반구정임진강역(거리/시간 : 12.1km, 실제는 반구정부터 7.75km 2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낙하 IC(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낙하리)

자유로(국도 77호선)의 낙하 IC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만나는 마을이 낙하리이다. ‘평화의길 인증 QR코드는 마을 버스정류장 옆 평화의길 이정표에 붙어있다.

 낙하마을을 출발 임진강의 언저리를 따라 임진각관광지까지 북진하는 12.1km의 여정

 산악회에서는 7코스와 8코스를 한꺼번에 걷겠단다. 하지만 집사람의 체력으로 22.3km는 무리다. 그래서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을 과감히 생략하고, 대신 평화의길이 살짝 비켜 지나가는 반구정과 임진각관광지를 들러보기로 했다.

 09 : 00  09 : 20. 계획대로 반구정(황희선생 유적지)’부터 들른다.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52)가 말년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자연을 즐기던 곳이다. 정확히 10시에 문을 여는 유적지는 1천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5살 이하나 경로는 면제해준다.

 18년이나 의정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 재직했던 분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영당(影堂)을 중심으로 노년의 황희가 유유자적했다는 반구정(伴鷗亭), 고손인 황맹헌(黃孟獻)의 부조묘(不祧廟), 앙지대, 경모제, 고직사 그리고 방촌기념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만남은 방촌기념관. 청백리의 표상이라 할 만큼 깨끗한 정치를 펼쳤던 인물로 잘 알려진 황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면 선생의 일대기를 접하게 된다. ’황희하면 정승이란 수식어가 으레 따라다닌다. 의정부 수반인 영의정(또는 좌·우의정)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얘기다. 정승을 지낸 역사인물이 어찌 황희뿐이겠는가. 하지만 24년이나 재임한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영의정 18, 좌의정 5, 우의정 1년을 지냈다. 특히 6대 임금을 섬긴 인물은 황희가 유일하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삶과 사상이 담긴 작품과 유품들도 전시되고 있었다. ’! 명필이네~~‘ 이석암 작가님의 말마따나 지극히 아름다운 글씨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등 삶에 얽힌 일화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황희는 겸손한 자세와 치우침 없는 몸가짐으로 존경을 받았다. 인격과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말을 공손하게 하는 법이다. 대통령 탄핵 결정을 앞둔 요즘,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쏟아내는 오염된 말들로 인해 세상이 어지럽다. 황희의 겸손 리더십이 한층 더 중요해지는 요즘이다.

 청정문(淸政門)’으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된다. ‘청백리(淸白吏)’였음을 은연중에 자랑하는 이름이다. 청백리는 청백탁이(淸白卓異), 즉 청렴하고 결백함이 이상적인 관료를 의미한다. 조선시대는 200명 내외가 청백리로 선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으로 들어가자 유적지의 중심축인 반구정(伴鷗亭)’이 반긴다. 관직에서 물러난 황희 정승이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곳으로, 임진강 강물 위로 바로 치솟은 옹색한 언덕에 비집고 들어서 있다.

 원래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인근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시멘트로 대폭 개축했고,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목조건물로 바꿨다. 하나 더. 반구정은 세조 때 재상 한명회의 압구정(狎鷗亭)’과 비교되기도 한다. ‘  모두 벗 삼는다는 뜻을 담았지만, ‘자는 상하 관계에서 높은 이가 아랫사람을 가까이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에 명칭에서부터 두 사람의 인품을 보여준다는 시각이다.

 처마에는 미수 허목선생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가 걸려있었다. <반구정은 임진강 하류에 있다. 먼 옛날 재상 황희의 정자다. -중략- 정자는 임진(臨津) 밑에 있는데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모여든다. -이하 생략->

 정자에 오르자 시야가 툭 트인다. 발아래로는 임진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경칩을 앞두어선지 날씨가 확 풀렸다. 하지만 흰 선이 강물을 둘로 가르는 걸 보면 겨우내 살을 찌웠던 얼음은 아직 녹지 않은 모양이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맑은 날에는 멀리 개성의 송악산까지 보인다는데 짙은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앙지대(仰止臺)’라는 또 하나의 정자가 있었다. 1915년 반구정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지었다고 한다. 상량문은 오직 선()만을 보배로 여기고, 다른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앙지대라는 이름은 시경의 호인(好人)이라는 뜻을 취했다.’라고 적고 있단다.

 정자 맞은편. 영당을 비롯한 전각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맨 오른쪽은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는 경모재(景慕齋), 그 옆으로 방촌 영당, 월헌사, 고직사 등이 차례로 늘어섰다. 모두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影堂)’이다. 1452(문종 2) 황희가 90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세조 1) 후손들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반구정 옆에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했다. 6.25 때 불탔으나 1962년 후손들에 의해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복원했다.

 황희 정승의 영정. 2년쯤 전인가? ‘진안고원길을 답사하는 중에도 선생의 영정을 만났었다. 진안군 안천면(백화리)에 있는 화산서원(華山書院)’인데 황방촌영정(黃尨村影幀, 전북유형문화유산)’이란 이름으로 걸려있었다.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두 영정이 다른 이유는 뭘까?

 그 왼쪽은 월헌사(月軒祠). 황희 선생의 고손(高孫)인 월헌(月軒) 황맹헌(黃孟獻, 1472-1535)의 불천위 신주를 모셔놓은 부조묘(不祧廟)이다.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되는데, 이들은 4대가 지나서도 신주를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하나 더. 황맹헌은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며, 그의 죽지사(竹枝詞)는 명나라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해진다.

 맨 왼쪽은 사직재(舍直齋)’가 자리한다.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란다. 하지만 입구에서 본 종합안내도에는 고직사로 적혀 있었다. ‘고직사(庫直舍)’라는 게 본디 시설을 관리하는 관리인(고지기)이 거처하던 곳일지니, 저곳에서 살던 고지기가 제사 준비를 도맡았었던 모양이다.

 경모재 오른쪽, 그러니까 맨 오른쪽에는 황희 정승의 동상이 있다. 황희는 정승을 24년간이나 지낸 인물이다. 뛰어난 능력과 겸손의 덕을 함께 갖췄기 때문이겠지만, 나이가 들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몸을 낮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관노였던 장영실을 과학자로 관직에 올리고, 노비의 아이가 수염을 잡아당겨도 마음 좋게 웃어 허허 정승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선생이 허허 웃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09 : 20. 주차장으로 되돌아와 트레킹에 나선다. 사목2(자유로)의 교각 아래에 낯익은 아치형 대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평화누리길 8코스(반구정길)가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걷기 딱 좋은 어느 주말. 우리 함께 콧바람을 쐬어보잔다. 어찌 그리 우리 일행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질까?

 맞은편에는 평화의길(7코스, 12.6km) 말고도 평화누리길(8코스, 반구정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경기둘레길에서는 이정표(율곡습지공원 13km/ 성동사거리 20.1km)를 준비했다. 세 길이 함께 간다는 얘길 것이다.

 09 : 21. 자유로 아래로 빠져나오면 사거리. ‘평화의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사목리(沙鶩里) 반구정마을을 거쳐 온 서해랑길이 황희선생유적지(반구정)를 들르지 않은 채, 이곳에서 우회전해버리기 때문이다.

 경기둘레길(7코스)에서 시작점임을 알리는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세 길이 함께 쓰는 구간답게 탐방로 곳곳에서 세 종류의 이정표를 만난다. 하지만 이렇게 거리표시까지 한 이정표는 경기둘레길이 유일했다.

 반구정로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간다. 자유로(77번 국도)에 기대듯이 일차선의 도로를 내놓았다.

 고갯마루에는 평화누리길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벤치는 물론이고 그네 의자까지 갖춘 멋진 쉼터이다.

 탐방로와 함께 가는 자유로 너머는 임진강이다. 철조망으로 막힌 강은 일반인에게 불가침의 영역이다. 문산읍이 긴장감 넘치는 접경지역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반듯반듯하게 지어진 민가나 큼직한 공장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섰는데 어찌 긴장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길은 자유로와 나란히 간다. 하지만 자유로보다 지대가 낮기 때문에 임진강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오른쪽은 사목2리 석결동(石結洞) 마을이라고 했다. 임진강변에서 연결된 노루매봉에 돌이 많은데, 이 돌들에 결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09 : 45. 자유로와 헤어져 들녘으로 들어간다. 자그만 개울을 따라 농로가 나있는데, 농경지 너머의 임진강역에는 전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때 낙곡을 주워 먹고 있던 기러기 떼를 만났다. 하지만 그동안 평화의길을 걸어오면서 숫하게 만났던 기러기 떼들에 비하면, 떼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숫자가 작았다.

 09 : 51. ‘경의중앙선이 지나가는 운천2리 건널목’. 무인 철도건널목이지만 옛 기억을 소환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차단봉에 ‘X’자형 멈춤 표지판, 금방이라도 딸랑딸랑 거릴 것 같은 판때기 등 건널목의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철길 너머로 임진강역이 보인다.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면 저 역을 지나 장단면(파주시) 노상리에 있는 도라산역까지 갈 수 있다.

 철로를 횡단하면 임진각로이다. 통일로(1번 국도)의 마정교차로와 임진각을 잇는 4차선 도로다.

 파주에도 평화누리길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디엠지 스테이라는 이름처럼 하룻밤 머물면서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평화를 보고 느껴보라는 모양이다.

 임진각로는 7코스의 종점인 임진강역 앞을 지나간다. 하지만 인도가 따로 나있지 않아 통행은 불가능하다.

 탐방로는 임진각로의 오른쪽 아래를 따라간다.

 09 : 58. 자유로의 마정육교 교각 아래 경기둘레길 이정표(율곡습지공원 10.1km/ 반구정 2.9km)가 세워져 있었다. 임진각 관광지로 들어가지 말고 곧장 율곡습지공원으로 가라는 모양이다. 하지만 평화의길은 임진강역 쪽으로 조금 더 가란다.

 100m쯤 더 걸으면 임진강역. 평화의길 7코스의 종점이자 8코스의 시점이다. 평화의길 이정표(QR코드 부착)는 역 앞의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나 더. 이곳은 8코스뿐만 아니라 8-1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8코스는 임진각관광지를 지나 임진강변을 따라가고, 반면에 우회노선인 8-1코스는 마정육교의 교각 아래로 되돌아가 마정리로 연결되는 농로를 따라간다.

 임진강역은 경의선 전철이 연결되는 ‘DMZ 관광의 출발지이다. 2000년 남북철도연결 기공식을 거쳐 2001 930일 운전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전력선이 없는 단선철도로 하루 한 번 ‘DMZ 평화열차가 오가던 작은 역사였으나, 2020년 경의선 전철이 연장되면서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10 : 00  11 : 15. 계획했던 대로 임진각관광지로 향한다. 원래대로라면 8코스의 GPX트랙을 따라가는 셈이 된다. 하지만 8코스는 뭔가의 이유로 통행이 불가능하단다. 때문에 우회노선인 8-1코스를 선택해야만 했고, 임진각관광지를 둘러보고 싶었던 나는 탐방시간을 만들기 위해 7코스의 일부를 줄여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은 분단의 현실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길로 정의할 수 있다. 그 길의 초입에서 17개의 계단 위에 올라앉은 17m 높이의 거대한 탑을 만났다. 1983 10 9일 미얀마(당시는 버마)의 아웅산 묘역에서 대통령을 수행 중이던 우리 외교사절(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장관 등 열일곱 분)이 북한의 테러에 의해 순국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6·25전쟁 납북자기념관 아웅산순국 외교사절위령탑과 어깨를 맞대듯이 가까이 있었다. <기억으로 잊지 못하고, 보고 싶어, 만나야하는 사람들>로 시작되는 브로슈어처럼 6.25전쟁과 납북피해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전시납북피해자의 문제를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공간이다.

 전시관은 특별전시실(1)과 상설전시실(2), 전망대(옥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별전시실에는 납북피해 가족들이 기증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 중이다. 상설전시장은 납북의 배경과 원인, 납북의 전개과정과 납북자의 고통, 귀환노력과 납북자 가족의 고통, 납북과 인권 그리고 통일을 위한 노력 순으로 꾸며져 있었다.

 납북자 가족의 고통은 자료 또는 밀랍인형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다. 특히 밥상에 둘러앉은 어느 납북자 가족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비어있는 아버지의 자리에 밥그릇을 놓아둔 것은 납북된 아버지의 생사를 아직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벽면에 납북자들의 이름을 적어 넣은 공간도 있었다. 그런데 함께 둘러보던 몽중루 작가님이 눈물을 훔치고 계시는 게 아닌가. 작가의 숙부께서 납북되셨는데, 벽면에서 그 이름을 찾아냈던 모양이다. 장손으로 가계를 이끌어가다 보니 맞닥뜨리는 감회 또한 남달랐을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새천년의 장이란 조형물이 반긴다.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아 새천년 통일조국의 희망찬 미래를 상징하는 작품이란다. 50주년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기둥이 세계평화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한민족의 군상들을 떠받히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어지는 공간은 보훈단지로 각양각색의 참전비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의 동상을 중심으로 미국군참전비, 일본계미군참전비, 임진강지구전적비 등 수많은 빗돌들이 들어서 있다.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의 동상. 미국의 33(1945-1953) 대통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천황인 히로히토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하라고 명령한 국가원수이기도 하다. 요즘이야 푸틴이 심심하면 쏘아대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지만.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6.25전쟁 참전기념비’. 6.25전쟁에 참전한 파주시 출신 군인과 경찰, 학도의용군, 진지를 구축하는데 힘을 보탰던 지역주민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담은 빗돌이다.

 임진강지구전적비. 서부의 요충인 임진강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 싸운 제1사단, 해병 제1전투단, 유엔군의 공로를 기리는 빗돌이다.

 김포국제공항 폭발사고 희생자추모비.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둔 1986 9 14일에 일어난 의문(북한의 사주로 추정)의 테러사건이다. 고성능 사제 시한폭탄의 폭발로 가족을 배웅하러 나왔던 일가족 4명과 국제공항관리공단 직원 1명 등 5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3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다음은 임진각(臨津閣)이다. 남북분단이라는 한국의 비극적인 현실을 상징하는 이색적인 장소로, 옥상에 만들어놓은 전망대가 볼만하다. 하지만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주변 분위기와는 달리 건물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편의점과 햄버거가게가 들어선 1층도 손님이 뜸했고, 식당이 있었던 2층은 아예 텅 비어 있었다.

 3층의 전망대는 꽤 많은 사람들이 조망을 즐기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민간인통제선 너머의 풍경을 살펴보는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쉽다면 직접 민간인통제선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DMZ 안보관광 매표소에서 안보관광을 신청하면 된다. , 신분증 미소지자는 신청이 불가능하다.

 북쪽 조망. 임진강 철교. 신구의 다리가 나란히 가지만, 6.25전쟁의 아픈 상처를 품은 옛 다리는 상판이 사라지고 없다.

 서쪽 조망. 민통선 너머의 임진강. 물길은 저 모퉁이를 돈 다음 한강과 합류한다. 그리고는 조강으로 변해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남쪽 조망. 조금 전 둘러본 보훈단지(참전비)’.

 동쪽 조망. 평화누리공원과 평화랜드가 들어서 있다.

 임진각에도 실향민들을 위한 '망배단'이 마련돼 있다. 명절이 다가오면, 이곳에서 실향민과 탈북민들이 망향의 한을 달래며 함께 차례를 지낸단다.

 망향의 노래비에서는 잃어버린 30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건호와 남국인이 작사·작곡하고 설운도가 부른 노래로 1983(6.30-11.14) KBS에서 방영된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138일에 걸친 특별 생방송을 통해 53,536건의 이산가족 사연이 소개되고, 그중 10,189건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의 배경음악이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나 더. 해당 방송의 기록물도 비극적인 냉전 상황과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세계 유일의 기록물로, 지구상에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또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 2015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잃어버린 30도 함께 등재됐다)

 망배단 뒤쪽에 놓인 다리는 자유의 다리. 1953년에 6·25전쟁 포로 1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 귀환했다. 당시 포로들은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이동한 뒤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왔다. 임시로 설치한 다리지만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어 6·25전쟁의 대표적 유산으로 꼽힌다.

 평화의 소녀상도 눈에 띈다. 맹추위에 놀랐는지 목도리에 털신까지 착용하고 있는데, 평화로 도배되다시피 한 관광지답게 하나가 아니고 둘씩이나 된다.

 독개다리로 가는 길, ‘BEAT 131’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Beat(군에서는 Beat back)’가 물리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이 근처에 벙커나 참호 같은 옛 시설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뒤에는 와해되기 일보 직전인 열차가 놓여있었다.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라는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의선 장단역 남쪽 50m 지점에서 폭탄을 맞고 탈선하여 멈춰선 채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2004년 이곳으로 옮겨왔단다. 녹슨 부분은 복원하고 더 이상 녹슬지 않도록 부식방지 처리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총탄 자국과 휘어진 바퀴에서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나 더. 증기기관차 상단에서 자라고 있던 뽕나무도 함께 옮겨와 기관차 근처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다음은 임진강 독개다리이다. 6·25전쟁 때 파괴되어 교각만 남아 있던 임진각 앞 경의선 상행선 철교의 교각에 상판을 올려 관광시설로 꾸며놓았다. 유료 입장이며 독개다리로 입장하면 노란선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노란선 안쪽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구역 이외에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참고로 독개다리란 이름은 장단면 노상리 쪽 자연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옛 경의선 열차를 만난다. 나무로 된 의자, 선반 위의 짐 가방들, 차창 풍경 영상 등 당시의 열차 내부를 재현해놓았다.

 열차를 벗어나면 새로 만든 다리가 나온다. 다리는 길이 105m에 폭 5m로 만들어놓았다. 바닥 몇 곳에 강화유리를 깔아 스카이워크 기분을 내게 했는가 하면, 바닥의 또 다른 공간(강화유리 아래)에는 철로를 연상시키는 것들을 전시해놓기도 했다.

 벽에는 파괴된 채로 널브러져 있는 철교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 몇 장도 게시해 놓았다. 끄트머리의 전망대 아래층에서는 영상효과인 듯 했지만 전쟁 이전의 온전한 다리 모습도 느껴볼 수 있었다.

 다리 위를 걷는다. 민통선 안쪽의 실제 땅을 밟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민통선 안쪽 구역이기에 북한과 가까운 곳을 걷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전망대를 만난다.

 마주하는 교각에는 총탄자국들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한국전쟁 당시의 치열했던 상황을 대변해준다고나 할까?

 시선을 조금 옮기자 곤돌라가 눈에 들어온다. 임진각스테이션에서 출발 임진강을 건넌 다음, 민간인 출입통제선 지역(군내면 백연리) DMZ스테이션에 이르는 ‘DMZ 하늘 길이다. 건너편에서 갤러리 그리브스, 밀리터리 스트리트, 소망리본 존, 바람개비 존, 평화등대, 평화정, 임진강전망대 등을 만날 수 있다.

 500원만 더 내면 ‘BEAT 131’에 들어가 볼 수 있다. 6·25전쟁 때 군사시설로 사용하던 지하 벙커를 원형 그대로 살려 전시 공간으로 꾸몄다. 평화 메시지를 담은 다양한 콘텐츠도 감상할 수 있다.

 전시 공간이 협소해서 오르내리는 계단을 포함 3분 이내에 모든 관람이 가능할 정도다.

 안에는 대전차지뢰를 비롯해 총기·수통·철모·무전기 등 벙커에서 썼을 법한 군용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 지휘부인 상황실을 재현한 공간이 있고, 몇 가지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 미디어아트 작가의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임진각은 분단의 아픔이 있다. 달리기를 멈춘 철도 끝에는 임진강이 흐르고, 그 주변에는 철조망이 처져있다. 철조망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평화의 리본이다. 하나씩 매달기 시작한 소망들이 모이다보면 언젠가는 그날이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오지 않을까?

 내부 전시장만으로는 부족했던 탓일까? 야외전시장을 만들고 증기기관차의 녹슨 파편들을 전시해놓았다. 옆에는 이들과 운명을 함께 했을 법한 임진각역 표지판도 세웠다. 개성이 2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단다.

 ‘DMZ 평화의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매일 2회씩 개방되는데 온라인으로 신청을 해야만 가능하단다. 하나 더. 안내도에 그려진 탐방로는 두루누비에서 배포한 8코스의 트랙과 크게 달랐다. 신청하기 전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발길은 이제 평화누리공원으로 향한다. 지난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조성되었는데, 무심하게 산책하기 딱 좋은 공간으로 다양한 조형물들을 만날 수 있다. 공연장과 전시장 등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을 갖지만 그보다는 99만 평방미터나 되는 잔디언덕으로 대변되는 곳이다.

 무지막지하게 너른 주차장 오른편에는 놀이공원이 들어섰다. 놀이공원 특유의 음악과 함께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 내려앉기를 반복하는 놀이기구도 보인다. 그래선지 임진각이 예전 같지 않게 어수선해졌다. 아니 삼일절 황금 연휴를 맞아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 탓일 수도 있겠다.

 주차장의 끄트머리에는 해병대 장단·사천강 전투 전승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6.25전쟁 당시 판문점에서 임진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에서 불과 5,000여 명의 병력으로 중국군 4 2,000여 명의 4차례에 걸친 공격을 격퇴하며, 수도권 및 파주 일대를 성공적으로 지킨 해병대의 대표적인 전투다.

 평화누리공원은 넓은 잔디밭과 바람개비 언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이다. 3,000여개의 바람개비를 심어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평화를 향한 바람을 보여준다. 또한 공원 곳곳에 평화를 주제로 한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관광객들에게 힐링과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평화누리공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상징적인 통일 부르기이다. 최평곤 작가의 작품으로 흡사 거인들이 북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통일을 향한 나지막하고 강렬한 호소를 담았다고나 할까?

 바람의 언덕 아래, 연못에 자리 잡은 포비(FourB) 평화누리점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로 특별한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평화누리 야외공연장. 공원은 크게 음악의 언덕과 바람의 언덕으로 나뉜다. 음악의 언덕에는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잔디광장과 수상 야외공연장이 있다. 자연 친화적 공간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광장처럼 얕은 경사를 따라 펼쳐진 너른 초원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국적이다. 평화누리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저런 잔디언덕을 걸으며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을 찾아가며 감상하는 것이다.

 실향민들의 소망을 담은 '이제 만나러 갑니다. 소망함'이다. 채널A의 프로그램 이름이기도 한데, 실향민과 탈북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았단다. 60여년의 그리움이 담긴 편지와 선물은, 통일이 되는 그날 북한의 가족들에게 전하려 한다나?

 이경림 작가의 솟대집이다. 사람을 품어 안고 평화와 안녕의 염원이 자라는 공간을 상징화했다고 한다.

 둥그렇게 돌기둥들이 늘어서있다. ‘통일기원 돌무지 조형물이라고 한다. 기원의 의미를 담은 장승과 돌무지를 현대적으로 재현하여 만들었단다. 1만원의 기부금(북한 어린이 돕기)을 낸 이들의 희망 메시지나 소망의 글을 석판에 새겨 기둥에 부착하면, 여러 개의 석판이 모이면서 하나의 돌무지로 완성되는 기획 의도다. 하지만 참여 부족으로 흥행이 실패하면서 30개의 원형 기둥 대부분은 벌거숭이처럼 남아 있었다.

 () 김기태 경감은 한국전쟁 당시 고랑포 지서 탈환을 위해 출동했다가 북한군과 전투 중 전사한 전쟁 영웅이다.

 저 팬텀기의 이름은 ‘F-4D 하늘의 도깨비로 적혀 있었다.

 평화의 발이란다.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DMZ에 맨발로 첫 발을 살포시 내딛는 형상으로, 북한의 8.4 DMZ 지뢰도발로 잃은 장병의 다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단다. 아울러 8.4 DMZ 작전에 참가했던 육군 용사들의 군인정신과 전우애를 기리고, 평화통일을 만들어가기 위한 민··군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11 : 15. 임진강역으로 되돌아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7코스는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12km  9km나 단축했다. 아니 단축시간을 이용해 황희선생유적지(반구정)와 임진각국민관광지에 들러 선현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접해보고 싶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나저나 GPX트랙은 7.75km 2시간 15분에 걸었다고 표시하고 있었다. 반구정과 임진각을 둘러보느라 4km를 더 걸을 셈이다.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손가락으로 ‘V’자까지 만들어댄다. 맞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구간을 대폭 줄이는 대신, 선현이 남긴 옛 얘기에 더해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까지 느긋하게 엿봤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서해랑길 64-5코스(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합덕수리민속박물관)

 

여 행 일 : ‘25. 2. 22( )

소 재 지 : 충남 당진시 면천면·순성면·합덕읍 일원

여행코스 : 내포문화숲길 아미산센터아미산몽산구절산입구(실제 출발)나산마을회관둔군봉석우리마을회관합덕수리민속박물관(거리/시간 : 19.3km, 실제는 구절산입구부터 14.85km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창리항에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연결되는 64코스의 지선( 6) 중 다섯 번째 구간을 걷는다.

 

 들머리는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충남 당진시 면천면 죽동리)

서해안고속도로 면천 IC에서 내려와 아미로(609번 지방도)를 타고 당진방면으로 3km쯤 들어오면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에 이른다. 서해랑길(당진 64-5코스) 안내도는 임도를 따라 300m쯤 올라가는 곳에 위치한 아미산 산림욕장 앞에 세워져 있다.

 죽동마을에서 시작 당진 내륙의 산과 들을 누비다 합덕읍에 이르는 19.3km짜리 구간. 산길을 9km나 타는데다, 높지는 않지만 몽산과 둔군봉은 정상까지 찍어야하는 고단한 여정이다. 그런데도 난이도는 별이 3(전체 5), 산길이 버겁지는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종점에 있는 합덕제수변공원 합덕성당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09 : 00  09 : 10. 트레킹을 나서기 전, 출발지(방문자센터)에서 당진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충정사(忠貞祠)’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고려 말의 무신이자 교동인씨(喬桐印氏) 중시조인 인당(印璫 ?~1356)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계단을 오르면 경모제(敬慕齋)가 맞는다. 조상을 공경하고 숭모하는 교동인씨 후손들의 정성이 집약된 재실이다. 경모제 앞에는 석성 부원군 인당장군추모비가 있고, 맞은편에는 첨의평리사사석성부원군인당장군추모비(僉議平理司事碩城府院君印堂將軍追慕碑)라는 더 큰 빗돌이 있다.

 외삼문인 정례문(整禮門)을 들어서면 충정사(忠貞祠)가 반긴다. 인당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인당은 고려 충렬왕 때 태어나 공민왕까지 4대에 걸쳐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일생 동안 왜구와 홍건적을 무찔렀으며 서북면병마사 때는 쌍성(雙城)을 수복하고 파사부(婆娑府) 3()을 무찔러 참지정사가 되었다. 이에 원나라 황제가 국경 침입을 구실로 80만 대군으로 위협해 오자 공민왕이 인당으로 하여금 서북면 일대의 수비를 강화하도록 응원군을 보냈다. 이 싸움에서 인당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도 하고, 원나라의 문책 위협에 직면한 공민왕을 위해 인당이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고도 전해진다. 인당 장군의 묘는 개성에 있고, 이곳에는 사당만 있다.

 09 : 20  09 : 40. 64-5 코스도 조금 줄여 걷는 대신, 당진의 주요 명소 중 하나인 면천읍성 복지겸장군유적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물론 산악회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면천읍성(沔川邑城)에 도착하니 커다란 빗돌이 반긴다. 그런데 면()이 아닌 ()’의 터()란다. 맞다. 이곳 면천면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품은 지역으로, 과거 당진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백제 시대에는 '혜군(兮郡)', 통일신라 때는 '혜성군(兮城郡)'으로 불리었다. 고려와 조선 때도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충청도 조운(漕運)의 중심지로 전국에서 운반된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1477(성종 8) 창고가 범근내에서 공세곶으로 이전되면서 마을은 활기를 잃었다. ! 곁에 있는 또 다른 빗돌은 시경의 한 구절에서 면천이란 이름을 따왔다고 적고 있었다. <면피류수 조종우해(沔彼流誰 朝宗于海), 넘쳐흐르는 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네>

 면천읍성은 1439(세종 21) 서해안으로 침입해오는 왜구를 대비하여 쌓은 평지읍성이다. 조선후기까지 이 지역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 기능을 수행했다. 당진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현장 중 하나였으며, 당진 의병이 일본군 수비대 및 관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치성과 옹성을 더한 전체 둘레는 약 1.5km, 순천의 낙안읍성과 비슷한 규모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고 쌓았다. 하지만 전국의 읍성들이 그러하듯이 유실되거나 철거되어 간신히 형태만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다 2007년부터 복원을 시작 남문을 중심으로 일부 구간이 옛 모습을 되찾았고, 객사인 조종관,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 작은 정자인 군자정 등이 새로 지어졌다.

 면천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豐樂樓). 둘레 1,558의 읍성은 적대 7, 옹성 1, 여장 56곳을 두었다. 안에는 동헌, 객사 등 8개의 관아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인 풍락루는 말 그대로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살기 좋은 땅에서 백성과 더불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붕괴 위험으로 철거(1943)되었던 것을 2007년 사진자료를 토대로 2층 누각형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복원했다.

 객사인 조종관(朝宗館).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정청에 전패와 궐패를 모셔 지방관이 왕에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기도 했다.

 조종관 앞에는 한 눈에도 심상치 않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자리한다. 수령 1,1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는 바라보기만 해도 신비롭고 웅장하며 탄성이 절로 난다. 2016년 천연기념물(551)로 지정되었는데,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두 나무가 지지대에 의지한 채 서있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면 초록이파리로 무성해지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들면서 환상적인 미태를 자랑한단다.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과 얽힌 전설도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복지겸 장군이 병을 앓자 그의 딸 영랑이 아미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렸고, 아미산에 활짝 핀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면천면 성상리)의 물로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뜰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다하라는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병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빚어진 술이 바로 면천 두견주이며, 그때 심은 은행나무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단다.

 은행나무 아래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고려 말 지군사 곽충령이 못을 파 연꽃을 심었고, 1803년 면천군수 유한재가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고 그 위에 팔각정을 세워 군자정(君子亭)’이라 불렀다. ‘흙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군자의 덕을 상징하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면천읍성은 내포 문화숲길의 주요 기점이기도 하다. 내포불교순례길(6코스), 백제부흥군길(7코스, 8코스), 내포동학길(1코스) 등이 이곳을 출발 또는 도착 지점으로 삼고 있다.

 면천 100년 우체국 - 카페가 되다’. 천년 묵은 고을답게 면천에는 옛 모습을 오롯이 품고 있는 공간들이 많다. 슬레이트지붕을 뒤집어 쓴 미인상회가 대표적인데 일제강점기 때 우체국이었던 건물에 차린 카페다.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저곳에는 옛 우체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태원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법한 전화기와 낡은 우체통 등을 진열해 놓았다. 시간여행을 돕는다고나 할까? 하나 더. 우체통은 그 기능을 지금도 갖고 있다고 했다. 놀랍게도 카페 측에서 매월 마지막 날에 원하는 주소지로 편지를 부쳐준단다. 일종의 느린 우체통인 셈이다.

 60여 년 전에 지었다는 2층 가정집에는 독립서점 오래된 미래가 들어섰다. 대형 서점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독립출판물을 상당수 갖추고 있어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옛 막걸리집을 개조했다는 진달래상회도 눈길을 끈다. 소품 상점이라는데, 복지겸 장군의 전설에 나오는 두견주를 브랜드로 삼았지 않나 싶다. 아무튼 둘 모두 문을 열기 전이라서 외관만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문화 고을답게 버스정류장도 시()로 꾸며졌다. 이밖에도 면천에는 볼거리가 꽤 많다. 군현(郡縣)이었으니 향교가 있었을 것은 당연, 향교 앞에는 연암 박지원이 재임하면서 조성했다는 연못 골정지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 북학파 친구 홍대용의 시에서 따왔단다)’이라는 정자가 있다. 면천의 또 다른 우체국은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이 되었고, 농협의 창고였던 건물은 리모델링 후 청년창업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09 : 45  09 : 55. 다음은 무공사(武恭祠)’이다. 면천읍성에서 송악읍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 生歿年代 미상) 장군의 사당이다. 무공(武恭)은 복지겸의 시호(諡號)이다.

 복지겸은 면천복씨(沔川卜氏)의 시조로 고려를 건국한 4명의 1등 개국공신 중 한 명이다. 태봉(奉封)의 마군(馬軍) 장수로 있다가 궁예가 횡포해져서 민심을 잃자 배현경, 신숭겸,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웠다. 그 뒤 환선길(桓宣吉)의 반역 음모를 적발하여 주살하였으며 임춘길(林春吉)의 역모도 평정하는 등 큰 공을 세워 994(성종 13) 태사로 추증되었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원래는 제단, 신도비, 태사사(太師祠)만 있었는데 2008년의 정비사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인 무공사를 중심으로 홍살문, ·외삼문인 정충문과 창의문, 후손들이 공부를 하거나 제사에 관한 일을 보는 추원재와 무영사, 숭모당, 신도비, 준공비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매년 복씨 문중에서 음력 10 1일에 제사를 지낸다.

 홍살문과 창의문, 정충문을 차례로 지나면 복지겸 장군의 위패를 모시는 무공사(武恭祠)가 나온다.

 묘에서 내려다 본 유적지. 사당 앞에 내·외삼문인 정충문과 창의문이 나란히 서있고, 마당을 가운데 두고 왼쪽은 추원재이다. 오른쪽에 있는 무영사는 내삼문에 가려져있다.

 묘는 뒤편 언덕에 있었다. 그런데 그 흔한 빗돌 하나 보이지 않는다. 복지겸의 말년 행적을 찾을 수 없는데다, 그의 죽음 또한 안개 속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럴듯한 봉분에다 석물까지 갖춘 번듯한 묘역(墓域)이지만 결국에는 허묘(虛墓)인 것이다.

 10 : 01. 실제 출발지인 구절산입구 버스정류장(당진시 순성면 봉소리).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아미산과 몽산을 올랐었기에 이를 핑계 삼아 산길 구간을 생략했다. 대신 산악회의 도움을 받아 당진시의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 면천읍성과 무공사(복지겸장군유적지)를 둘러본 다음 이곳으로 왔다.

 10 : 02. 원백석길을 따라 남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두루누비 앱이 시점(아미산 산림욕장)으로부터 5.72km쯤 떨어진 곳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 더. 이 구간은 백제부흥군길(7코스)’이기도 하다. 합덕수리박물관에서 둔군봉과 구절산을 거쳐 면천읍성에 이르는 17.2km짜리 여정으로 백제를 지키려는 민초들의 숱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서기 660 7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후 임존성과 주류성을 거점으로 한 백제부흥운동은 무려 3년 넘게 이어졌다. 일본이 참전했던 국제전이기도 했다.

 이정표가 내포 문화숲길  백제부흥군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내포지역의 고대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백제'. 한성백제 시기를 거쳐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내포지역은 백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까지 백제의 영토로 정체성을 지켜왔다. 때문에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백제부흥세력은 내포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펼쳤다. 백제부흥군길은 이런 역사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코스이다.

 뒤돌아본 풍경. 순성로(619번 지방도)와 함께 가는 수로(水路)가 고가도로를 연상시킨다. 고풍에 조형미까지 더해진 유럽의 수도교만큼은 아니어도 멋진 풍광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하긴 동급이었다면 퐁 뒤 가르(가르 교)’나 세고비아의 수도교처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겠지?

 백제 부흥군이 되어 나지막한 구릉지를 넘는다. 그러자 망국의 병사들이 누비고 다녔을 들녘이 널찍하니 펼쳐진다. 백제 부흥전쟁의 시발점이 예산군(대흥면)의 임존성(任存城)이었고, 그 중심은 홍성군(장곡면)의 주류성(周留城)이었으며, 백촌강(白村江) 전투의 현장이 당진시(석문면·고대면)의 앞바다였다니 말이다.(위치에 대한 설은 다양하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즈음 낙곡을 주어먹고 있는 엄청난 기러기 떼를 만났다. 저 먼 시베리아 대륙에서 훨훨 날아 한반도를 찾아온 귀한 손님들이다. 대기는 차고 무쇠빛 하늘이 일상인 겨울이다. 하지만 반가운 생명들을 만났으니 이 정도 추위쯤이야 못 참겠는가.

 길은 드넓은 들녘을 가로지르며 나아간다. ‘토물들 대리들을 좌우에 끼고 가는 모양새인데, 이중환(李重煥)이 택리지(擇里志)에서 말한 내포지역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큰 길목이 아니어서 임오·병자의 두 난리에도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을 정도로 외지지만, 땅이 평평한데다 기름져서 충청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백제 부흥전쟁의 중심이었지만 이중환의 눈에는 마냥 평화롭게 보였던 모양이다.

 10 : 18. 백석리(白石里) 앞 도로변에는 작은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자와 벤치를 구비해 마을 주민들의 쉼터도 겸하도록 했다. 하지만 농사일로 바쁜 주민들이 이곳까지 운동하러 올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10 : 21. 체육공원에서 만난 개울 수준의 남원천(南院川)’ 지류를 따라가다 아예 건너버린다.

 다리(이름이 없었다)를 건넌 다음에는 개울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10 : 26. 이번에는 남원천(南院川)’의 본류를 건넌다. 이 다리(이정표 : 둔군봉 3.96km/ 구절산입구 2.30km)도 역시 이름이 없었다. 하나 더. 남원천은 면천면 몽산의 남쪽 계곡에서 발원, 순성면·신평면·우강면의 들녘을 적셔주며 동진하다 우강면 부장리에서 남원포(南院浦)를 지나 삽교천으로 유입되는 23.24km 길이의 하천이다.

 다리 건너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몽산 아래서 백제부흥군길(7코스)을 만난 이후 줄곧 의지해 간다. 그렇다고 일치하지는 않는데 이곳이 그중 하나다. 이정표(백제부흥군길)가 왼쪽(둑길)을 가리키는데 반해, 서해랑길의 앱은 오른쪽으로 가라고 지시하기 때문이다.

 누루누비 앱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둑길을 이용해 남원천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이때 우리가 생략해버린 아미산 몽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참고로 면천의 진산인 몽산(蒙山 299.4m)에는 읍성의 외곽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된 석성인 몽산성이 있다. 나당연합군에 나라를 빼앗긴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싸웠던 백제 부흥전쟁의 전략적 요충지로 면천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유서 깊은 산이다.

 잠깐의 부주의로 길을 잃기도 했다. 농로를 이용해 도로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아미산과 몽산을 카메라에 담다가 그만 들머리를 놓쳐버렸다.

 10 : 36. 우여곡절 끝에 남원로(2차선 도로)’로 올라섰다.

 서해랑길은 도로로 올라서자마자 다시 이별을 고한다. 그곳에 나산리(羅山里)’ 마을회관이 있었다. 어르미산, 즉 어라산(於羅山, 98m)에서 이름을 빌려왔다는 마을이다. 회관 앞 빗돌은 그런 마을의 유래를 전해준다. 그 어라산을 지금은 함봉산이라 부른다나?

 나산리는 100m 내외의 산능선 사이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산록지에 가옥들이 주로 분포하고 있다. 서해랑길을 그런 산간 마을을 향해 간다.

 10 : 40.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갈림길에서는 왼쪽으로 난 임도로 들어선다.

 임도는 산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 길을 부흥군의 심정으로 걸어본다. 지체 높은 자들이야 죽거나 투항해 제 살길을 찾았겠지만, 전쟁에서 패한 군졸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지 않았겠는가. 참고로 백제 부흥군은 동지끼리 서로 죽이는 내분으로 패망했다. 660, 소정방(蘇定方)의 주력군이 귀국하자,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지휘하는 부흥군은 주류성으로 이동해 총사령부로 삼고, 662년 일본에 체류하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귀국하자 백제왕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복신이 승장(僧將)인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내부 분열이 일어났고, 임존성의 수비장이던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당나라에 투항했다. 그 흑치상지가 당나라 병력을 이끌고 임존성을 함락시켰으니 부흥군 스스로가 자멸한 셈이다.

 10 : 49. 고갯마루는 순성면과 합덕읍의 경계다. 서해랑길은 이 고갯마루에서 (왼쪽)능선을 따른다. 그 산길을 걸으며 부흥전쟁의 마지막을 떠올려본다. 백제부흥군의 총사령부였던 주류성은 663 9월 함락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통해 부흥군의 당시 심정을 되짚어보자. <주류성이 항복하고 말았구나. 무어라 할 말이 없도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끊겼구나! 조상님의 묘소를 어이 또 다시 와 뵐 수 있겠는가.>

 서해랑길은 능선을 따라간다. 잘 닦여있지는 않았지만, 길을 찾아가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이 구간. 그러니까 남원천에서 백제부흥군길과 헤어지고부터는 그 어떤 이정표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길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길이 나뉘는 곳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애매하다싶으면 어김없이 가이드리본을 매달아놓았기 때문이다.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둔군봉의 높이가 137.3m에 불과하다보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다. 가끔은 이런 급경사 오르막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끔가다 만나는 응달은 걷기여행자들을 애먹이기도 했다. 연일 계속되던 맹추위가 살얼음을 만들었는데, 어젯밤 내린 눈이 그 위를 살짝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엉덩방아를 찧는 일행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는데, 큰 부상을 당한 이들이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끔은 조망이 트이기도 했다. 당진의 터줏대감인 아미산과 몽산은 물론이고 그 오른편에 들어앉은 순성면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당진시의 고층 아파트들도 자신도 있다며 능선 뒤에서 고개를 살짝 내민다.

 11 : 15. 그렇게 한참을 걷자 능선이 푹 꺼진다. 숲 사이로 민가가 보이기도 한다. 자연 그대로이던 산길은 이곳에서 정비한 흔적을 보인다. 자연석으로 계단을 만들었는가 하면, 길의 폭도 많이 넓어졌다.

 잠시 후 어느 문중의 묘역을 지나기도 한다. 둔군봉 구간에서는 이런 묘역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지기(地氣)가 솟아나는 명당이 많은 산이라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11 : 23. 묘역을 지나자 길은 한수 더 뜬다. 아예 임도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벚나무 가로수가 일렬로 서있는 것이 봄이면 상춘객들로 들끓을 수도 있겠다.

 11 : 26  11 : 32. 오랜만에 보는 이정표(둔군봉 1.15km/ 구절산입구 5.11km)가 반갑다.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임도와 헤어져 오솔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난 이정표의 방향을 잘못 읽은 탓에 잠시지만 임도를 따라가기도 했다.

 그러다 만난 저 시설의 정체는 대체 뭘까? 지킬 게 얼마나 값나가는지 고화질 카메라로 녹화하고 있다며 겁까지 잔뜩 주고 있었다.

 이어지는 산길도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울창한 숲길을 걷는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구간이다. 조망도 일절 트이지 않는다.

 11 : 47. 벤치는 물론이고 정자까지 들어앉힌 쉼터(이정표 : 둔군봉 0.53km/ 구절산입구 5.74km)도 만날 수 있었다. 산행에 지친 걷기여행자들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시설이라 하겠다.

 이곳에는 도곡리 사지(寺址)’에 대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 도곡리에 두 개의 절터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하나는 마을 뒷산의 남쪽 기슭에 밭으로 쓰고 있는 300여 평의 터이며, 다른 하나는 둔군봉의 북쪽능선 서향사면 중상단부에 위치했단다. 해당 사지에서 다수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발견되었다나?

 530m만 더 가면 둔군봉 정상이라던 쉼터(寺址) 이정표의 안내와는 달리 산길은 꽤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11 : 58. 변화 없는 산길이 지루해질 즈음 둔군봉(屯軍峰 137.3m)’에 올라섰다. 이름처럼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산이다. 후백제 때 면천 쪽을 향해 군대를 주둔시켰고, 조선 말기 동학혁명 때는 관군이 주둔했다고 한다.

 하지만 군대를 주둔시킬만한 공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소대 규모의 참호나 들어설만한 공터에 정자 하나만 달랑 지어져 있을 따름이다. 견훤이 고려와 싸우기 위해 쌓았다는 성동산성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정표(합덕수리민속박물관 6.60km/ 구절산입구 6.30km)가 가리키는 합덕수리민속박물관 쪽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나무계단이 만들어내는 나선형의 문양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구간이다.

 하산 길도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걷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에 취하다보면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

 12 : 24. 그렇게 내려선 면천로(70번 지방도)는 그냥 횡단해버렸다. 횡단보도가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다, 신호등까지 없어서 안전하게 건너는데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이다. 그래선지 이정표(합덕수리민속박물관 5.19km/ 둔군봉 1.43km)도 곧장 건너도록 인도하고 있었다.

 12 : 28. 농로를 따라 200m쯤 걷다가 석우2를 건넌다. 이후부터는 석우천의 둑길을 타고 하류로 내려간다. 합덕읍 석우리에서 발원 동남쪽으로 흘러 옥금리에서 삽교천으로 합류되는 길이 9.5km의 지방하천이다.

 개울 건너에는 합덕산업단지가 있다. 29만 평의 규모를 자랑하는 일반산업단지인데 경기 악화 및 분양시장 위축, 원자재 값 상승 등으로 인해 개발이 지지부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12 : 33. 석우천을 따라 걷다보면 심심찮게 다리를 만난다. 그 첫 번째 다리가 석우교이다.

 다리 근처에 석우리(石隅里)’ 마을회관이 있었다. 원래 이름은 돌모루’, 마을 모퉁이에 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석우리로 변했단다.

 계속해서 석우천을 따라간다. 도중에 지류를 합친 때문인지, 물길은 아까보다 많이 풍성해졌다.

 12 : 46. ‘운곡교로 석우천을 건넌다. 예당평야로(32번 국도)의 진출입로와 예덕로(40번 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다.

 교차로답게 오가는 차량 또한 무척 많았다. 그런데도 신호등은커녕 횡단보도조차 없으니 문제다. 안전은 오롯이 걷기 여행자 몫이라는 얘기다.

 예당평야로의 운산2는 교각 사이로 지나간다. 그늘진 곳에는 평상이 놓여있었다. 인근 주민들의 참새방앗간 노릇을 톡톡히 하는 모양이다.

 석우천은 이곳에서 또 다른 지류를 보태면서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석우천은 저런 지류들을 여럿 보탠다고 했다. 두산백과는 원석우천·소소천·북리천·박골천·쑥고개천·남리천 등 6개의 소하천을 나열하고 있는데, 어디를 이르는 지명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산책 나온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길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나무 한 그루 없던 길이 아름드리 벚나무가 일렬로 도열해 있는 풍치 넘치는 길로 변한 것이다.

 13 : 01. ‘운산로가 지나가는 성동교 자형으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다리를 건너지는 않는다. 초입에서 도로를 횡단한 다음 계속해서 강둑을 따라간다.

 왼쪽, 들녘 너머에는 합덕시가지가 놓여있다. 합덕은 본래 부곡(部曲)’이었다. 고려의 향··부곡은 노비와 양인 사이의 피차별 계층을 의미한다. 1298(충렬왕 24), 고을 사람 황석량이 원나라에서 공을 세운 덕분에 합덕현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895(고종 32) 면천군에 편입되었으며, 1973년에는 읍()으로 승격되면서 면천면보다 오히려 더 번화해졌다.

 13 : 17. 보행자전용의 다리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수문(水門)을 만난다. 합덕제(合德堤)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시설이지 싶다. ‘합덕제 수변공원으로 들어선 것이다.

 두루누비는 계속해서 둑길을 따라가란다. 하지만 나는 수변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걸을 것을 권해본다. ‘연꽃원 백련지’, ‘호중도같은 합덕제 수변공원의 주요 볼거리들을 눈에 담아가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둑길을 따라봤자 건조하기 짝이 없는 석우천과 다리(연호교·연지교) 말고는 볼만한 게 없다.

 합덕제는 연지, 혹은 연제라고도 불리는데 원래는 합덕평야를 관개하던 저수지였다. 길이 1,771m에 저수면적이 103ha나 되는 규모를 자랑했으나 현재는 농경지로 변해 제방만 길게 남아있다. 합덕제의 역사는 후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 둔전을 개간하고 12,000명의 둔병과 말 6,000필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에 의해 저수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나? 제방의 서쪽 끝부분에 1800(정조 24)에 세운 개수비와 그 후에 세운 중수비가 있다고 했으나 찾아보지는 못했다.

 13 : 27. ‘호중도란다. 호수 속에 있는 섬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인공섬인 모양인데 정자를 짓고 벤치를 놓았는가 하면 산책로를 만들어 주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백련지 쪽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연꽃 공주와 개구쟁이 개구리 조형물이 연못의 정체를 넌지시 알려준다.

 하지만 춘래불사춘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요즘이니 연꽃이나 개구리를 만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렇다고 너무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귀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저 철새 떼를, 큰고니를 위시한 수많은 종류의 철새들이 연못에서 노닐고 있는 것이다. 그 종류나 수가 웬만한 동물원보다도 더 많아 보인다.

 백련지의 수변을 따라간다. 연꽃원의 사잇길이나 호중도 산책로를 이용해 종점인 수리민속박물관으로 곧장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두루누비의 트랙을 따라 수변공원의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알찬 볼거리를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

 이때 철새 떼로 한가득인 백련지가 자신의 속살까지 아낌없이 내보여준다. 합덕제는 1900년 초까지는 하트 모양의 제를 갖고 있었단다. 하지만 1960년 초 합덕제가 폐지되면서 농지로 변했으며, 석우천이 합덕제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저수지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다 2005부터 당진시에서 제방을 복원하고 야외전시장을 조성하면서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단다.

 13 : 37. ‘연지교 (이정표 : 수리민속박물관 0.51km/ 둔군봉 6.12km)에서 석우천과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합덕제의 제방을 따라 종점인 합덕수리민속박물관으로 간다. 하지만 저수지가 사라지고 없는데다, 둑 위로 널찍하게 길이 나있어 제방이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 구간은 버그네 순례길로 함께 쓰는 모양이다. 당진의 천주교 성지들을 하나로 이어놓은 일종의 순례길인데, 한국 천주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이 길은, 영성 여행을 원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것으로 알려진다. ‘버그내라는 이름은 합덕 읍내를 거쳐 삽교천으로 흘러드는 물길이자 합덕 장터의 옛 지명인 버그내에서 유래했다.

 제방 오른쪽에는 농어촌 테마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합덕제는 조선시대 3대 방죽으로 전시에는 국가의 보급기지 평시에는 왕실의 곡간 역할을 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1960년대 예당저수지 축조와 함께 농경지로 변해버린 합덕(연호)방죽을 당진시에서 7만평 규모로 정비해 연꽃방죽과 수리박물관, 생태체험센터, 농촌테마공원 등을 조성했다.

 공원에는 초가정자와 디딜방앗간, 초가체험동, 분수대 등을 지어놓았다. 또한 합덕제의 기원 등 저수지에 얽힌 사연들을 이야기판으로 만들어 내방객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13 : 45  13 : 55. ‘합덕성당은 테마공원 뒤 언덕에 있었다. 합덕성당은 공세리성당과 더불어 충청도 최초의 본당이다.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 내포지방은 규모가 크고 중요한 신앙공동체가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박해의 피해가 어느 곳 보다도 극심했으며, 그로인해 대부분의 교우촌 공동체가 와해되고 말았다. 1886년 새로운 믿음의 자유가 허용되자 한국천주교는 내포교회의 재건을 위해 양촌본당과 간양골 본당을 설립한다. 양촌본당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합덕본당이 됐다. 이후로 본당은 충청도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가 됐다.

 성당은 정면의 종탑이 쌍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한다). 건물의 전면에는 3개의 출입구와 3개의 창이 있는데 그 상부는 모두 무지개 모양의 아치로 되어 있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창의 둘레와 종탑의 각 모서리는 회색벽돌로 쌓았으며, 창의 아래 부분과 종탑의 각 면에는 회색벽돌로 마름모 모양의 장식을 더했다.(역광이라서 facade는 제대로 찍지 못했다)

 성당 후면. 벽돌로 지은 저 건물은 1929년 페랭(Perrin, P., 白文弼) 신부가 지었다고 한다.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벽돌조인데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145)로 지정되었으며, 각종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tvN ‘정년이의 촬영지인 성당 내부는 아치형 천정에 벽돌로 쌓은 열주가 좌우로 늘어서 있다. 지역 성당, 그것도 옛날에 지어진 탓에 그리 넓지는 않다. 화려하지 않은 스테인드글라스 등 전체적으로 소박하다는 느낌을 준다.(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뒤뜰에는 네 분의 순교비와 여섯 분의 순교자 묘가 있었다. 성 황석두 루카(1813-1866, 괴산군 장연면 출신으로 페롱권 신부와 성 다블뤼 주교를 도와 성서번역·출판 등의 일을 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오천면 영보리 갈매못에서 참수 당했다). 백문필 비리버(1885-1950, 합덕성당을 지은 분으로 한국전쟁 때 피랍 살해됐다)신부, 윤복수 레이몬드·송상원 요한(합덕성당의 평신도로 총회장과 사무장으로 임무를 다하던 중 한국전쟁 때 백문필 신부 피랍시 자진 동행하여 피살되었다)의 순교비와, 이 매스트르(1808-1857, 김대건·최양업·최방제 신학생의 스승으로 1852년 입국하여 전교하다 황무실 공소에서 선종했다)신부, 홍병철(랑드르, 1828-1863)신부, 백문필신부, 심재덕(마르코, 1908-1945, 백문필신부의 보좌신부)신부, 그리고 윤복수·송상원의 무덤이다.

 13 : 55. 성가정순례자의 집(성당의 부속건물)을 지나자 생태관광체험센터가 맞는다. 합덕제의 자연과 생태 부분을 특화시켜 실감영상을 통해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된 체험관이다.

 야외 체험도 빼놓을 수 없다. 다섯 동의 초가에 들어가 제방다지기, 타작 및 농경기구, 도정기구, 수리기구 등 농경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도록 했다. 굴렁쇠 굴리기, 가마타기, 지게지기, 디딜방아 찧기 등 60-70년대, 그것도 시골에나 볼 법한 풍경들이다.

 체험센터를 빠져나오니 연꽃방죽이 반긴다. 합덕제는 역사와 생태, 그리고 수변공원의 복합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연꽃방죽이 아닐까 싶다. 백련지, 연꽃원, 조선홍련지 등 눈에 들어오는 게 온통 연꽃방죽 천지다. 합덕제 연꽃은 조선시대부터 주요 식재료로 이용되어 온 기록들이 있단다. 방죽마다 연꽃들로 채워 넣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시원한 버드나무 숲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연꽃단지로 각광받고 있어 주말이면 전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단다.

 14 : 01  14 : 15.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이다. 김제의 벽골제, 연안(황해도)의 남대지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저수지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합덕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박물관으로 지금은 거의 사라진 수리농경문화를 이해하고, 선조들의 지혜를 느껴볼 수 있는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다.

 박물관은 두 개의 전시관으로 나누어진다. 1전시실은 수리문화관으로, 합덕제의 기원과 축조기법·한국의 수리 역사·수리 도구 등을 전시한다.

 2전시실은 합덕과 당진 문화의 형성 배경과 합덕 지역의 국가유산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한 문화관이다.

 미니어처를 통해 합덕방죽과 구만리보의 축조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으며 튼튼한 제방을 만들기 위해 짚과 나뭇가지와 점토를 30cm 두께로 번갈아 가며 12m 높이까지 쌓아 올린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참고로 합덕제는 지역주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저수지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바닷물이 들어왔던 불모지를 일궈 농업생산량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으며, 저수지 형태 역시 구불구불한 형태로 만들어 수압을 견딜 수 있도록 했다. 축조방식도 찰흙과 나뭇가지, 나뭇잎을 켜켜이 쌓아 만들어 공학적으로도 우수한 구조로 평가받는다. 세계관개시설물유산에 등재된 이유일 것이다.

 서해랑길(당진 64-6) 코스 안내도는 수리민속박물관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구절산입구에서 출발 14.85km 4시간 10분에 걸었다. 5km도 넘는 산길 그것도 눈길을 걸은 데다, 합덕제수변공원의 볼거리들을 기웃거리느라 많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여행지 : 조지아  바투미, 고니오 요새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바투미(Batumi) : 조지아 최대 항구이자 최대의 휴양도시다. 터키 국경까지 약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여름이면 터키나 유럽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인구 15만 남짓의 조지아 제2의 도시이기도 한데, 외세 침략을 많이 받아서인지 그리스·로마 양식뿐만 아니라 터기 등 다양한 건축 양식들이 섞여있다.

 

 조지아 여행, 아니 코카서스 3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는 고니오 요새이다. 바투미에서 남쪽으로 15km, 터키 국경에서는 북쪽으로 4km 지점에 위치한다. 길은 바투미 국제공항을 지나 초로키강(Chorokhi River)을 건너 고니오 요새로 이어진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현수막(‘Archaeological and architectural site of Gonio-Apsaros) 은 이곳 고니오의 지명을 그리스식 이름인 압사로스와 함께 적었다. 로마식으로 표기할 때는 압시르투스(Apsyrtus)’가 된단다. 그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된다. 압사로스(Apsaros)는 콜키스 왕국의 왕자로, 메데아의 이복동생이다. 황금 양가죽을 가지고 떠나는 메데아가 압사로스를 납치해 아르고호에 태우고 떠난다. 그리고 아버지 아이에테스 왕의 추격을 받자 압사로스를 찢어 죽여 사지를 바다에 버린다. 아버지는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 이곳 고니오 요새에 묻었다고 한다. 이곳의 지명이 압사로스가 된 이유이다.

 육중한 성문으로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고니오 요새는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성곽으로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문이 나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서쪽 문만 열려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푸른 잔디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맞다. 안내판은 고니오 요새의 면적이 4.5ha나 된다고 적고 있었다. 사각형인 성곽은 길이가 228m에 폭이 195m나 된다. 1,200-1,500명이나 되는 병사가 주둔했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안내판은 그런 고니오-압사로스 고고학 및 건축 유적지의 내력을 전해준다. 요새의 위치(초로키강 하구의 왼쪽 기슭)와 규모, 역사 등 다양한 얘기들을 전한다. 아르곤 원정대(Argonautai) ‘Aeaea-Colchis’을 원정하면서 아이에테스(Aeetes) 왕의 아들인 압시로스를 죽이고 이곳에 묻었다는 얘기도 적었다. 기원전 8-7세기에 최초로 정착지가 생겼다는 등 자세한 얘기는 성곽을 돌아보면서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성곽은 텅 비어 있었다. 건물이라곤 달랑 고고학박물관 하나뿐인 것이다. 순천의 낙안읍성을 예상했던 내 기대가 어긋났다고나 할까? 당국도 그게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조지아 국기 모양의 꽃밭을 만들어 공터의 여백을 메꿨다.

 유적발굴은 현재진행형이다. 성터 곳곳을 파헤쳐놓았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 듯. 관광객들의 출입을 막아줄 금줄 하나도 없었다. 참고로 고니오 요새의 발굴은 20세기 초 러시아 학자들에게 발굴허가가 떨어지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하지만 발굴은 빨리 이뤄지지 못했고, 1974년에야 요새 안에서 기원후 2-3세기 금장신구가 발견되었다. 1994년 고니오 요새는 조지아 정부에 의해 사적으로 지정됐고, 1995년부터 폴란드 역사학자들에 의해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성 마태오(마티아스)’의 무덤이라고 한다. 콜키스 왕국의 서남쪽에서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다 고니오의 아자리야에서 순교해 이곳에 묻혔다는 것이다. 조지아 정교회의 영광을 보여주는 이콘화에 마태오가 안드레아와 함께 그려지는 이유란다. 참고로 콜키스 지역의 기독교는 1세기 초반 시작되었다. 사도 시몬과 안드레아의 설교를 시작으로, 327년에는 미리안 3에 의해 카프카스 이베리아의 국교가 된다. 기독교로의 마지막 개종은 카파도키아의 성 니나에 의해서였음은 이미 거론했던 사실이다. 아무튼 기독교는 조지아의 문학, 예술과 나라의 통합에 큰 자극을 준다. 하나 더. 조지아는 아르메니아(301)와 로마 제국(313) 다음 세 번째로 오래된 기독교 국가이다.

 안내판은 그가 조지아에서 성 안드레아 성 시몬 가나안과 함께 설교했다고 적었다. 그들이 조지아 남서부 지역을 여행했고, 초로키 강까지 오면서 많은 마을에서 설교했다는 것이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무덤에 기도를 드려오고 있으며, 성 마티아스의 기적도 많이 목격된다고 했다. ‘성 마티아스여 우리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 간청해주소서! 빛과 태양의 화신인 당신의 말씀 교회에 자비를 베푸소서! 등의 기도문도 함께 적었다.

 고니오 요새에서 발굴된 유물을 보존·전시하기 위해 박물관이 만들어져 있다. 이하 박물관의 상황은 오마이 뉴스의 기사를 옮겨본다. ‘고니오 요새 발굴은 독일의 사업가 겸 고고학자인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 처음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미케네유적 발굴로 크게 성공한 슐리만이 그리스 신화 속 아르고호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러시아제국 황실에 고니오-압사로스 요새 발굴을 신청했단다. 그러나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0세기 초에야 러시아 학자들에게 발굴허가가 떨어졌다. 하지만 발굴은 빨리 이뤄지지 못했고, 1974년에야 요새 안에서 기원후 2~3세기 금장신구가 발견되었다.

 지하로 들어가다시피 하는 박물관의 문은 무척 작았다.

 유물은 시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7-8세기 흑해 연안 언덕에 살던 원주민의 유물이라고 한다. 이들은 청동으로 만든 무기, 제기와 생활용기인 도기다. 그리고 기원 후 1~3세기 로마시대 유물이 가장 많다.

 무덤에 부장된 금과 보석으로 만든 귀족의 장신구가 보인다. 동전, 철제 마구와 청동 제기, 도자기 등도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로마시대 유물 중 눈에 띄는 것이 유리기다. 푸른빛을 띤 얇은 유리기로 정교하거나 화려하지는 않다. 대개 둥근 형태지만, 네모난 모양의 병도 보인다. 가장 정교한 것은 유리기에 원형의 무늬를 만들었고, 손잡이까지 만들어 붙였다.

 도기와 자기는 수준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콜키스가 로마의 동쪽 변방으로 생활수준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출토 유물이 생활용기이기 때문이다. 전시된 도기는 황색이 대부분이고, 자기는 흑색이다. 청동기는 비교적 소품으로 이들 역시 부장품으로 보인다. 동전도 몇 점 없다. 장신구는 목걸이, 팔찌, 귀걸이인데, 이들 역시 단순소박한 편이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보니 유물보관실에 커다란 도기를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도기는 조지아 포도주 용기인 크베브리의 원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유적지에 대한 자료는 사진 및 부연 설명을 통해 전하고 있었다.

 요건 당시의 지형도일 것이다.

 이젠 성곽을 한 바퀴 둘러볼 차례이다. 우리 부부는 조지아 초등학생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걸었다. 체험학습이라도 나온 모양인지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눈에 띈다. 웃고 떠들며 장난질 삼매경인 애들이 더 많았지만...

 탐방로는 성벽을 따라 나있다. 그러니 1km 가까이나 걸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할 필요까지는 없다. 갈림길이 곳곳에 나있으니 체력에 맞게 돌아보면 될 일이다.

 첫 만남은 테르마(Thermae). 즉 로마식 공중목욕탕이다. 목욕탕은 열탕(caldarium)과 온탕(tepidarium), 냉탕(frigidarium) 그리고 탈의실 겸 휴게실(apoditerium)로 이루어져 있단다. 이들 목욕탕 건물은 사라졌지만 온수 배관과 건물 바닥은 아직도 잘 남아 있다. 황토색 도기(陶器)로 관을 묻어 온수를 보일러실에서 목욕탕 안으로 끌어들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판은 두 개의 욕조가 확인되었다고 적었다. 그중 작은 것은 보일러실과 온수 구역만 있다고 했다. 다른 욕실은 수비대를 위해 설계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게 더 기념비적이란다. 욕탕의 남쪽 부분에 있는 보일러실은 뜨거운 욕탕의 지하실과 좁은 터널로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뜨거운 공기 덩어리가 퍼져서 뜨거운 욕탕의 바닥과 벽을 가열했다나? 열탕(caldarium)은 이른바 테피다리움(tepidarium)이라는 온탕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냉탕, 즉 프리기다리움(frigidarium)과 욕조, 대기실(아포디테리움) 등도 확인된단다. 오스만 제국 때는 이곳에 동양식 목욕탕을 건설했다는 얘기도 적고 있었다.

 모두를 놀라게 만든 지역, 즉 황토색의 도기(陶器)로 된 관이 일렬로 깔려있는 곳은 막사가 있던 자리라고 했다.

 안내판은 원문대로 옮겨본다. 바깥문에서 로마시대(2~3세기)의 막사 유적이 발견됐다. 잘게 자른 돌로 만든 큰 벽은 기초와 지반의 구조에 사용됐다. 1층과 지붕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같은 구조의 바닥이 있고 지붕은 타일로 덮인 건물도 확인된다. 동쪽과 북쪽 방향으로 폭 3m의 갤러리가 발견됐고, 남서쪽 모서리에는 와인 저장고의 흔적도 확인됐다. 그 결과 목재 기둥을 수용할 수 있는 사각형 구멍이 있는 석조 기초가 드러났다.

 이후부터는 성벽을 따라간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고니오 요새는 길이 228m에 폭이 195m인 직사각형의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략적 요충지다운 규모이라 하겠다. 흑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초로키(Chorokhi)와 아카리스칼리(Acharistskali) 강 계곡을 보호하는 게 임무였다니 말이다.

 이때 높이가 5m쯤 된다는 성벽의 위로 올라가 볼 수도 있다. 성벽은 견고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맞다. 저 성벽은 축조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튼튼하던지 성을 쌓은 로마제국 말고도 비잔틴제국, 오스만제국에서도 사용해왔단다. 심지어는 1930대 소련군까지 사용했었다나? 유적 전체가 고고학적으로 주목받는 이유일 것이다.

 이왕에 올라갔으니 탑의 내부도 살펴보자. 그래봤자 텅 비어있지만... 아무튼 성곽에는 이런 탑이 22개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못 이기고 지금은 18개만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또 다른 탑의 내부. 크기는 비슷하지만 형태는 아까와 판이하게 다르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요새 곳곳이 파헤쳐져 있다. 유적지 발굴이 그다지 시급하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군 막사를 재현해 놓았는가 하면, 당시의 무기들도 전시하고 있었다. 어린이들에게는 사방에 널린 유적보다 그게 더 호기심을 자극했나보다. 기웃거리고 만져보면서 쉼 없이 재잘거린다. 로마병사의 차림으로 검을 들고 대련해 볼 수도 있다.

 당시 사용하던 마차와 무기, 공성기기 등도 전시해놓았다.

 군인들의 막사. 그 앞에는 방패가 무기를 놓아두었다.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나대던 아이들이 선생님의 설명이 시작되자 진지해지면서 역사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또 다른 발굴현장. 로마시대에 지어진 곡물창고와 목욕탕, 그리고 사령관의 집이 발견되었단다. 참고로 당시 흑해 연안에서의 로마 존재는 거대했다. 연안에 있는 몇 곳의 기지들은 수세기 동안 보병 군단이 지켜냈다고 한다. 고대 콜키스의 중심 도시였던 이곳 고니오도 그중 하나였단다.

 안내판은 조지아-폴란드 합동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사실을 적고 있었다. AD 1세기-2세기 요새의 일부였던 건물들을 시기별로 나누어 설명한다. 곡물 창고(네로-AD 54-68), 로마식 목욕탕(트라야누스-AD 98-117), 사령관의 집(하드리안-AD 117-138)이 각기 다른 시기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사령관 집의 한 방은 바닥 전체가 여러 가지 빛깔의 자갈 조각으로 만든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고니오 요새를 끝으로 조지아, 아니 코카서스 3국의 여행이 끝난다. 이제는 귀국길, 우리를 태운 버스는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해안을 따라 4km쯤 떨어진 국경마을 사르피(Sarpi)’로 간다. 그리고 간단한 출입국 절차를 거친 후 튀르키에로 넘어간다. ! 출입국사무소로 들어가기 전 면세점을 거치니 여행 중 쓰고 남은 조지아 돈을 모조리 사용하면 되겠다.

 비행장이 있는 리제(Rize)’로 가기 전 튀르키에의 아르하비(Arhavi)’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흑해 연안의 도시인데 우리가 머무는 호텔(Arhavi Resort Hotel) 앞으로 오르치(Orçi)강이 흐른다. 강 건너에 인구 2만 정도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데, 도심 뒤로는 높은 산이 바로 연결된다. 가장 높은 산(Kiziltepe)은 해발이 3200m도 넘는다고 했다.

 에필로그(epilogue), 신화의 나라 조지아(Georgia)를 떠나면서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지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4개가 등재되어 있다(‘아나누리 성채는 잠정목록에 들어있다). 쿠타이시(Kutaïssi)에 있는 바그라티 성당과 겔라티 수도원(Bagrati Cathedral & Gelati Monastery, 1994년 등재)’, 츠빌리시 근교의 므츠헤타의 역사 기념물(Historical Monuments of Mtskheta, 1994년 등재)’, 메스티아 지역(Mestia district)의 차자시마을(Village of Chajashi)에 있는 어퍼 스바네티(Upper Svaneti, 1996년 등재)’ 그리고 콜키스 우림과 습지(Colchic Rainforests and Wetlands, 2021년 등재)‘이다. 그런데 므츠헤타의 역사기념물 하나만 보고 조지아를 떠나니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패키지여행을 따라온 탓이겠지만, 칠십을 넘긴 내 나이에 그 아쉬움을 해소할 기회가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DMZ 평화의길 6코스(성동사거리  낙하 IC)

 

여행일 : ‘25. 2. 15()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일원

여행코스 : 성동사거리프로방스마을자유로만우천오금리썰매장문지리535 카페낙하 IC(거리/시간 : 11km, 실제는 헤이리 투어 포함 13.44km 3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성동사거리(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자유로(국도 77호선) 성동 IC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만나는 첫 번째 사거리가 성동사거리이다. ‘평화의길 안내판(인증 QR코드)’은 프로방스마을 진입도로의 초입에 세워져 있다.

 성동사거리를 출발 임진강의 언저리를 따라 낙하 IC까지 동북진하는 11km의 여정이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프로방스마을과 임진강 하류의 습지가 주요볼거리. 짬을 조금 내면 헤이리예술인마을에 들러 이색적인 분위기를 맘껏 즐길 수 있다.

 08 : 15  09 : 00. 트레킹을 나서기 전, 파주의 명소로 꼽히는 헤이리 예술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들머리인 성동사거리에서 4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잠깐이면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헤이리 예술마을은 국내 출판인과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만든 공간이다. 현재 미술인·음악인·방송인·영화인·출판인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과 문화예술 비즈니스 종사자 등 380여 명이 저마다의 콘텐츠로 마을을 가꾸어 가는 중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꼭 가봐야 할 올해의 한국관광 100 헤이리 예술마을을 선정했다. 트레킹을 나서기 전 들른 가장 큰 이유이다. 올해로 7회째를 맞는 한국관광 100은 한국의 대표 관광지를 2년에 한 번씩 선정해 홍보하는 사업이다. SNS 검색량 등 빅데이터 분석과 3차에 걸친 관광분야 전문가의 서면·현장 평가를 거쳐 선정한다.

 마을 면적이 15만 평이나 되므로 미리 어느 곳을 갈 지를 정해놓지 않으면 찾아다니다 지칠 수도 있다. 나는 지도까지 준비해서 찾아갔지만, 길을 헤매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롯데월드 어드벤처의 연면적이 175,948 평이라면 그 규모가 대충 짐작 갈지 모르겠다.

 요즘은 주택이 머무르는 공간으로 다가 아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힐링 공간으로서의 기능이 더 부각된다. 그래선지 신도시를 만들 때는 호수부터 먼저 만드는 게 추세다. 헤이리예술마을도 다를 게 없었다. 중앙에 인공호수를 두고 빙 둘러 마을을 만들었다. 그러니 시간이 부족할 경우 4~7번 게이트 중 하나로 들어가 호수(갈대광장)’ 주변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면 가장 알찬 투어가 될 수 있다.

 호숫가 갈대광장. 글자 조형물이 헤이리 예술마을의 중심임을 알려준다. 야외무대를 갖추고 있어 가끔 공연이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헤이리는 문화예술의 생산·전시·판매·거주가 함께하는 통합적 개념의 특수한 공동체 마을이다. 수많은 갤러리·박물관·공연장·카페·서점·아트숍·레스토랑, 그리고 예술인들의 창작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같이 10시에 문을 열고 있어 외관을 눈에 담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투어의 첫 만남은 한길 책박물관이다. 인문학 출판을 선도해 온 한길사에서 운영하는 책 박물관이다. 유럽의 고서(17-19세기), 윌리엄 모리스(초서 저작집), 귀스타브 도레, 윌리엄 터너, 생텍쥐페리 등 유명 예술가들이 남긴 희귀 서적과 아트북을 소장하고 있단다.

 헤이리 투어는 건축물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건물, 지형을 그대로 살려 비스듬히 세워진 건물, 사각형의 건물이 아닌 비정형의 건물 등 각양각색의 건축물들이 개성을 뽐내며 서있다. ‘2020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한향림 도자미술관도 그중 하나다. 이정호이사장과 한향림관장이 설립한 ‘Jay & Lim Collection’을 통해 수집해 온 1,000여 점의 국내·외 현대 도예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단다. 건물에는 전시장 말고도 도자 체험장과 아트숍, 카페가 들어서 있다.

 건축가 박진희가 설계한 아트센터 화이트 블럭(White Block)’은 미국건축가협회 건축디자인상(2011)과 제1회 파주시건축문화상(2013) 등을 받았다. 6개의 대형 전시실에서 다양한 현대미술을 보여준다고 한다.

 지하에 들어서있는 제이제이커스텀(JJCUSTOM)’. 이태리산 최고급 베지터블 통가죽을 이용한 핸드메이드 업체라고 한다. 집사람에게 줄 소품이라도 하나 건지고 싶었지만 이 역시 문이 닫혀있었다. 하긴 해외여행 때 사준 꽤 비싼 가죽 재킷도 옷장에서 365일 내내 쉬고 있지만...

 27회 한국건축가협회상에 빛나는 갤러리 MOA’는 영국 유니버스 사에서 출판한 ‘1001개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세계 건축물에도 포함되었을 정도란다. 21세기 국내외 예술계를 선도할 실험정신이 강한 작가들을 선별하여 전시 및 세미나를 개최해오고 있단다.

 벽봉 한국장신구박물관. 경기도 무형문화유산(18) 옥석(장신구)장 김영희씨가 조선시대의 왕실과 민가에서 사용하던 장신구를 오례(상례·가례·빈례·군례·흉례)로 분류·전시해 놓은 공간이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 100여 개국 2000여 점의 민속 악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악기 설명과 함께 전시된 전통 의상을 입은 인형과 풍물, 그림들이 각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단다. 일부 악기는 직접 연주해 볼 수도 있다나?

 타임앤블레이드박물관(The Museum Time & blade). 시계와 칼을 테마로 한 이색적인 박물관이다. 18세기에 제작된 시계부터 작은 부품들, 제작 도구까지 알기 쉽게 전시해 놓았단다. 시계와 칼을 통해 인류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나?

 코카콜라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다는 잇츠 콜라박물관. 일산에서 코카콜라 카페를 운영하던 김재학 대표가 확장·이전해왔다고 한다. 빈티지존, 키친존, 보틀존, 익시피리언스존 등에서 다양한 전시물을 만날 수 있단다.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 1970년대부터 40여 년간 라디오 DJ로 활약한 아나운서 출신 황인용이 수집한 빈티지 오디오와 LP, CD 컬렉션을 기반으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1층은 음악 감상실, 2·3층은 미술작품 전시 공간으로 꾸며졌다. 하지만 문이 닫혀 들어가 볼 수는 없었고, 대신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고별방송(1980 11 30 TBC KBS에 강제 편입되면서) 멘트를 떠올리며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인가 봅니다. 남은 5분이~, 남은 5분이~. 남은 5분이 너무 야속합니다.>

 헤이리란 지명은 인근 지역에서 불리던 금산리 농요의 받음 구 후반에 나오는 에 헤이 에 헤이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농요의 흥을 받아서일까? 자연이 만든 굴곡을 따라 구불구불 나있는 길가에는 카페가 무척 많이 들어서 있었다. 대부분이 갤러리를 겸하는 카페들이다.

 이곳 헤이리는 인사동(2002)과 대학로(2004)에 이어 2009 12월에 세 번째로 문화지구로 지정되었다. 그런 자부심인지는 몰라도 헤이리의 Barista들은 커피를 예술로 여기며 빚고 있었다.

 그 화룡점정은 귀천이 아닐까 싶다. ‘천상병 커피라는 브랜드로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천상병 시인은 막걸리 한 잔, 담배 한 갑이면 족했던 분이었다. 그가 커피도 좋아했었나보다. 아님 그의 후손 중 누군가가 저 카페를 열었을 테고.

 헤이리 마을을 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걷는 것이다. 그러다 예쁜 건축물을 만나면 카메라에 담고 마주치는 미술관에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면 된다. 그게 지루해졌다면 산책을 나서면 된다. 1km쯤 되는 헤이리 노을숲길(한향림 도자미술관 뒷산)’을 올라 사방으로 탁 트이는 경관을 만끽할 수도 있고, 예술작품들로 치장된 마을길을 걸어보는 것도 권할만하다.

 산책로인 마음이 닿길은 헤이리가 자랑하는 에코힐링로드라고 했다. 국내 최초로 마을과 기업(현대자동차)이 손잡고 만든 길이기도 하단다. 그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자동차 조형물을 떡하니 전시해놓았다.

 이밖에도 다양한 작품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김기철, 정승윤, 김태균 등 많은 작가들이 참여했는데 걷고 싶은 길, 걷다보면 문화와 예술이 느껴지는 길, 그리고 힐링이 되는 길을 목표로 조성했단다.

 저 조형물에서 헤이리 소리를 떠올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헤이리 헤이리 어허야>, 서로 주거니 받거니 메기고 되받아치는 형식의 노래로 혼자서도 부르고, 논 맬 때도 부른다는 노동요다. 그래! 더 늙기 전에 부지런히 걷고, 느끼며 맘껏 즐겨보자.

 09 : 00. 헤이리마을 투어를 마치고 평화의길(6코스) 시점인 성동사거리로 향한다. ‘게이트 3’으로 빠져나왔으니 헤이리로(남서쪽 방향)’를 따라 400m쯤 걸어 나오면 된다.

 09 : 04. 국립민속박물관(파주). 15개 수장고에 100만여 점의 소장품과 아카이브 자료를 보관하고 있으며, ‘열린 수장고 보이는 수장고를 통해 유물을 일반에 공개한단다. 하지만 개장 전이라서 외관만 눈에 담으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09 : 08. 성동사거리에 도착하니 평화누리길의 낯익은 게이트가 반긴다. 함께 가는 경기둘레길의 이정표(반구정 20.1km/ 동패지하차도 15.3km)와 스탬프보관함도 눈에 띈다. 반면에 평화의길은 안내판 하나뿐이다. 더부살이의 서러움이라고나 할까?

 이곳 파주는 메주콩으로 흔히 알려진 장단콩의 고향이다. 여기서 장단은 콩의 품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단 지역의 콩이란 뜻이다. 지금은 파주시 장단면이란 지명으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전에는 경기도 장단군(대부분 민통선 안에 있다)이었다. 그래선지 장단콩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여럿 세워놓았다.

 장단콩을 브랜드로 내건 음식점들도 눈에 띈다. 메인 요리는 물론 장단콩으로 만든 두부. 두부(豆腐) BC 2세기경 한나라(중국) 회남왕 유안(劉安)이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그 원료인 콩은 식물 중 단백질을 많이 함유한 대표 고단백 작물이다. 대두 기준 40% 정도는 지방, 33%는 단백질, 27%는 탄수화물이다. 단백질의 품질도 좋다. 고기 한 점 없는 농경민족의 상차림에서 꼭 필요한 단백질 반찬이었던 셈이다.

 09 : 10. ‘새오리로(북서쪽 방향)’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오르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파주 맛고을 장단콩 거리라는 지명답게 두부요리를 메인 메뉴로 내건 음식점들을 중심으로 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서있었다.

 09 : 18. 길가에 늘어선 음식점들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스테이크에 피자, 파스타 같은 평소에 자주 찾는 메뉴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걷다보면 성동리(城洞里) 큰말에 이르게 된다. 파주의 또 다른 명소인 프로방스 마을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09 : 20  09 : 38. 프로방스 마을. ‘하트형 대문으로도 모자라 러브인 프로방스 빛축제라는 자랑까지 매달았다. 프로방스 마을에 야간 경관 조명등을 설치해 '빛 테마 거리'로 꾸며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파주시는 프로방스 마을을 아름다운 정원과 이야기가 있는 벽화, 야간 조명이 조화를 이루며, 유럽풍 베이커리와 카페, 이탈리안 레스토랑, 한국적인 음식 등 전세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트렌드를 선도하는 패션, 생활용품, 체험시설 등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된 테마형 마을이기 하단다. 따뜻한 색을 가진 독립된 건물에서 각각의 컨셉을 갖고 운영되는 상점들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나?

 안으로 들어서면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기자기한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은 1996 프랑스 레스토랑이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주변에 각종 음식점·제과점·액세서리·의류판매점들이 들어섰고, 현재는 식음료·리빙&잡화·패션&잡화 등 37개의 아이템으로 상점이 운영되고 있단다.

 25년쯤 전인가? 세미나 참석차 들렀던 마르세유에서 이색적으로 다가오던 주택을 이곳에서도 만났다. 프랑스 관계자의 설명으로는 따가운 지중해의 햇볕을 가리기 위해 창문 밖에 나무문을 하나 더 둔다고 했었다.

 프로방스는 프랑스 남동부의 지중해 연안과 이에 접한 내륙지역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그래선지 소담스런 정원은 프랑스풍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을까? 엉뚱하게도 프로방스가 아닌 파리 중심가에 있는 에펠탑까지 옮겨놓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마치 영화 속 옛 유럽을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동화 속 배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파스텔 톤의 건물들은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섬세하게 꾸며졌다. 저런 풍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축제 등을 기획 4계절 내내 방문객에게 다양한 문화 공연과 새로운 체험, 아름다운 이벤트를 선사한단다.

 아쉬운 점은 마을이 텅 비어있다는 점이다. 이른 시간이어선지 문을 연 가게가 하나도 없었고, 외부 방문객도 평화의길 트레킹을 이어가도 있는 우리 일행뿐이다. 가게에 들어가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명색이 명품 마을인데 포토존 하나 없겠는가. 그중에서도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로 풀어놓은 고백 터널이 눈길을 끌었다. ‘따스한 눈 맞춤을 시작으로 부드러운 손잡기, 포근하게 안아주기, 달콤하게 뽀뽀하기, 정열적인 딥 키스(deep kiss)하기를 순차적으로 해나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집사람이 두 번째 코스부터 도망가기에 바쁜 걸 보면, 고백은 아무에게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터도 준비되어 있었다. 다양한 놀이시설과 동물들을 보유한 프로방스 펠리씨떼는 아이들이 동물들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체험형 관광농원이라고 했다.

 유럽의 고도(古都)를 돌아다니다보면 투어용 마차를 흔하게 만난다. 그런 마차가 프로방스 마을에도 있었다. 비록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게이트를 통해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프로방스마을 투어는 끝을 맺는다. 프로방스 마을은 잘 꾸며진 테마형 관광지가 분명했다. 하지만 가게 문이 열리지도 않은 시간에, 그것도 트레킹 도중에 잠시 스치듯 들렀으니 주마간산(走馬看山)의 대표적이 사례라 할 수 있겠다.

 09 : 38. 못다 본 풍경들을 아쉬워하며 다시 길을 나선다. 아까처럼 새오리로를 따라 북진한다. 옛 지명인 교하군 신오리면(新五里面)에서 이름을 얻어온 2차선 도로이다.

 09 : 42. (힐하우스)버스정류장 옆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새오리로와 헤어져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샛길로 들어간다.

 고개를 넘자 희미하게나나 두물머리의 드넓은 물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짙은 미세먼지 탓이다. 아무튼 한강과 임진강이 저곳에서 합쳐지면서 조강으로 변한다. 이즈음 어화둥둥이라는 화로생선구이 식당을 지나기도 한다.

 09 : 51. 길은 임진강의 강둑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가지를 못한다. 하지만 둑 위로 난 자유로에서는 자동차들이 잘들만 달려댄다.

 주인과 더부살이의 차이점이랄까? 시점과 종점의 방향만 적어놓은 평화의길 이정표와는 달리 경기둘레길 이정표는 거리는 물론이고 지도까지 반듯하게 표시해 놓았다.

 이후부터는 자유로와 나란히 가는 농로를 따라간다. 자유로의 아래로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있다.

 09 : 56. 대동리나들목. 길을 걷다보면 자유로에서 빠져나오는 이런 진출입로를 심심찮게 만난다.

 10 : 00. 접경지역의 오지일 것으로 여겼던 대동리(大洞里)’는 예상 외로 큰 마을이었다. 반듯반듯하게 지어진 건물들도 대도시 근교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하긴 대동리가 본디 임진강가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니 어련하겠는가. 참고로 대동리는 지금은 없어진 교하군의 신오리면에 있던 마을이다.

 자유로 아래로 난 굴다리도 심심찮게 만난다. 하지만 이중삼중으로 막혀있어 통행은 할 수 없다. 하긴 민통선의 역할을 하는 통로이니 어련하겠는가. 저 지하통로를 빠져나가면 임진강이고, 군사분계선이 그 물길을 가른다.

 농기계가 우선이란다. 맞다. 이 길은 접경지역의 주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지나다니는 길이다.

 얘기봉의 십자가등탑을 연상시키는 저 철탑의 정체는 대체 뭘까? 애기봉에서 철거된 등탑을 이곳으로 옮겨왔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해본다. 참고로 30 높이의 애기봉 등탑은 1971년 만들어진 뒤 성탄절을 즈음해 트리로 치장해 불을 밝히다 2004년 상호 비방을 중단하기로 한 남북합의 이후 중단됐다. 그러다 연평도 포격사건을 계기로 2010 12월부터 재점등했으나 2014년 안전을 이유로 철거되었다.

 정체모를 시설물들을 만나기도 한다. 원통형의 관을 박은 뒤, 그 위에다 알 수 없는 숫자들을 적어놓았다.

 10 : 11. 걷기 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시설(화장실)도 눈에 띈다. 쉼터로 제격이었던지 환경정화(노인일자리인 듯)를 나온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이후부터는 아예 자유로와 함께 간다. 차량들이 내는 소음으로 인해 귀가 먹먹해지는 구간이다. 많은 차량들이, 그것도 누가 빨리 달리는지 시합이라도 하려는 듯 번개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고통이 오래가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잠시 후 길은 둑길 아래로 다시 내려간다.

 두루누비는 6코스를 임진강 하류의 습지를 조망할 수 있는 길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레킹을 마칠 때까지 임진강 하류는 만날 수 없었다. 자유로에 막혀 먼발치에서도 구경할 수 없다. 그 아쉬움을 갈대로 가득한 수로로 대신해 본다.

 10 : 20. 대동리·만우리 나들목. 진출입 차량이 많은지 도로 바닥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나들목 아래로 난 굴다리. 자유로가 민간인 출입 통제선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 바퀴자국이 선명한 걸로 보아, 허용된 사람이나 차량들에 한해 출입이 허락되는 모양이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농로를 따른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밋밋한 구간이다.

 10 : 26. 평화누리길 쉼터. 자전거 거치대는 기본, 파고라에 벤치를 20여 개나 놓아둔 큼지막한 쉼터이다.

 평화누리 자전거길 안내도는 파주구간을 나타내고 있었다. 파주출판도시휴게소에서 장남교까지 57km 2개 코스(4코스·5코스)로 나누어 놓았다.

 쉼터 근처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자전거길은 계속해서 자유로의 가장자리를 따라가고, 평화의길은 둑 아래로 난 농로로 내려간다.

 이어서 나타난 굴다리는 자동차 통행이 더 빈번한 모양이다. 바닥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날 정도다. 통로 끝에서는 병사가 보초까지 서고 있었다. 살짝 비켜나게 사진을 찍은 이유다.

 발길은 이제 대동리에서 만우리(萬隅里)’로 넘어간다. ‘임진강가의 큰 모퉁이에서 유래된 지명답게 마을 대부분이 평탄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우리로 들어서자 들녘이 넓어졌다. 그래선지 낙곡을 주워 먹고 있는 기러기 떼가 눈에 들어온다. 인기척에 놀란 한 떼는 요란한 날갯짓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다.

 10 : 39. 오금 양·배수장. 수문이 7개나 되는 걸로 보아 만우천의 물줄기가 제법 큰 모양이다. 하나 더, 반대편 그러니까 만우천이 임진강에 합수되는 지점에는 질오목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건너편에서 길이 또 나뉘고 있었다. 평화의길은 오른쪽으로 간다.

 평화누리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이한 이정표. 둘 모두 평화누리길인데도 한쪽은 자전거 라이더, 다른 한쪽은 걷기 여행자들만 이용하도록 했다.

 잠시지만 만우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월롱면(파주시) 덕은리에서 발원 북서방향으로 흐르다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길이 9.5km의 지방하천이다. ! 농어촌공사에서 내건 현수막에는 탄포천이라 적고 있었다. 만우천의 다른 이름인 모양이다.

 10 : 42. 평화누리길 오금리 쉼터’. 아까보다 규모는 작지만 대신 화장실을 갖추었다. 안내판은 소울원(疏鬱園)과 용주서원, 파주향교, 통일공원, 반구정을 주요 볼거리로 꼽고 있었다. 다음 구간을 걸을 때 눈에 담을 수 있는 행운을 기대해본다.

 10 : 47. 만수천을 300m쯤 거슬러 올라갔을까, 이제 그만 물가를 벗어나란다.

 냇가를 떠난 길은 나지막한 구릉지로 파고든다. 오금리로 들어가는 길이어선지 오금로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10 : 50. 잠시 후 오금리(吾今里)로 들어섰다. 임진강이 굽이져 흐르는 곳이라 하여 오그미, 오고미 등으로 불리다 오금리가 됐다. 자연부락으로는 오금, 골말, 모팅 등이 있다는데, 어느 부락을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을은 나지막한 언덕 두 개를 끼고 형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고개에서 만난 늙은 향나무가 눈을 호사시켜준다.

 마을은 주택보다 창고가 더 많아 보인다. 대형 창고들이 우후죽순처럼 마을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10 : 58. 오금리 썰매장. 생태관광 마을로 거듭난 질오목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시설이다. 도심 속 야외 스케이트장처럼 큰 빌딩에 둘러싸여 있지도, 화려한 불빛도 없지만 논 썰매장에서 보이는 고즈넉한 농촌 풍경은 그 옛날 시골에서 얼음 썰매를 타던 추억을 새록새록 불러일으킨다.

 외딴 곳이어선지 손님은 별로 없었다. 빈 논에 물을 대는 건 기본, 직접 나무를 깎고 날을 붙여 썰매를 만들고 얼음판을 정리해 썰매장을 조성한 마을 주민들의 노고가 헛된 것 같아 안타깝다.

 썰매장을 빠져나오니 이번에는 양식장이 반긴다. 임진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 담수어를 양식하고 있단다.

 11 : 05. 애견 테마파크인 자유로 멍 놀러와’.

 몇 걸음 더 걸으면 자유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난 도로를 다시 만난다.

 11 : 11. 카페 문지리 585’. 식물원 카페답게 엄청나게 큰 규모를 자랑한다. 카페 내부가 나무와 꽃들로 가득한데, 거기다 햇살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뷰를 자랑한단다. 그러다보면 식물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버린다나?

 계속해서 자유로의 가장자리를 따라간다. kakaomap은 이 근처에 탄현야구장을 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산으로 올라간 범선. 아쿠아랜드라는 잘 나가던 업체가 지은 레스토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잉 투자로 인한 자금경색으로 부도 처리된 후 방치되어 있는 상태란다.

 11 : 23. 탄현국가산업단지 나들목. 이곳에도 평화누리길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kakaomap은 이곳에서 오른쪽을 가리킨다. 산업단지까지 갔다가 종점인 낙하 IC로 가란다. 하지만 두루누비에서 내려 받은 앱은 계속해서 자유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갈 것을 지시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곳의 굴다리도 장애물이 없었다. 허가받은 차량에 한해 통행이 허용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굴다리의 민간인 통과는 선택이 아닌 필수일 수밖에 없겠다. 자유로와 임진강 사이에 들어선 저 너른 들녘에서 누군가는 농사를 지어야하지 않겠는가.

 11 : 32. 낙하 IC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엘지로(77번 국도)를 따라 낙하리(洛河里)’로 빠져나온다. 옛 교하군 탄포면 지역으로 임진강 옆에 있던 낙하원(洛河院)에서 얻어온 지명이다. 장단을 거쳐 개성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진출로 부근에는 자유로 레저워터파크가 들어서 있었다.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쉬다가기에 딱 좋은 곳으로 알려진다.

 11 : 42. 낙하리(아랫말) 입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헤이리 마을을 포함 13.44km 3시간 30분에 걸었다. 명품 관광지인 헤이리마을과 프로방스마을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평화의길의 완주인증 QR코드는 버스정류장 옆 평화의길 이정표에 붙여놓았다. 코스의 지도가 들어간 안내판 하나쯤 세워놓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트레킹을 마친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아니 그녀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를 향해 미소를 보낸다. 생선의 가시를 발라주는 등 귀찮은 일을 할 때마저 웃어주는 그녀의 마음이 부부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아주 작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속에는 배려와 사랑의 진정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작은 도움으로 서로를 편하게 하고,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관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부부의 의미일 테니 말이다.

 

 

여행지 : 조지아  바투미 시가지 투어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바투미(Batumi) : 조지아 최대 항구이자 최대의 휴양도시다. 터키 국경까지 약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여름이면 터키나 유럽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인구 15만 남짓의 조지아 제2의 도시이기도 한데, 외세 침략을 많이 받아서인지 그리스·로마 양식뿐만 아니라 터기 등 다양한 건축 양식들이 섞여있다.

 

 조지아 서부지역에 위치한 바투미로 가는 길. 스탈린의 고향이라는 고리 쿠타이시(‘콜키스 왕국의 수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젤라티수도원이 있다)‘를 지난다. 압하지아(Abkhazia)와 남오세티아(South Ossetia)을 지날 때는 2008년 조지아 영토 내에서 자치공화국을 선포한 두 지역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조지아를 침공한 러시아에 분노도 터뜨린다. 그리고 꽈리강과 리오니(Rioni)강을 나누는 분수령이자 시다카르틀리주(주도: 고리)와 이메레티주(주도: 쿠타이시)의 경계인 고개를 넘어 흑해 연안으로 들어선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트빌리시를 출발한지 6시간.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조지아의 서쪽 땅 끝인 흑해연안에 이른다. 그리고는 바닷가 작은 마을 그리골레티(Grigoleti)’에서 여장을 푼다. 트빌리시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300km 정도. E60 E692 등 고속도로를 이용해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도 6시간이나 걸렸으니 우리네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라 하겠다.

 그리골레티(Grigoleti)’는 자성이 있는 검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하다. 그래선지 전 세계 5대 브랜드 호텔 그룹인 윈덤(Trademark Collection by Wyndham)이 운영하는 리조트가 들어서 있었다. 세계적인 리조트라 그런지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는데 2022년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전 세계 6개 대륙 9,300개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윈덤은 미국과 유럽에 특히 많으며 최근에는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고 있다.

 바닷가와 접하고 있으니 흑해 해변이 리조트의 전용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로비 가까운 곳에 수영장을 만들어 해수욕에 싫증을 느낀 투숙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시간이 나면 스파나 피트니스센터 등을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흑해가 코앞까지 성큼 다가오는 레스토랑과 테라스가 가장 마음에 든다.

 바닷가로 나간다. 이름과는 달리 바다의 색깔은 세계 방방곡곡에서 만나본 여느 바다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 어떤 바다보다도 푸르렀다. 다만 바닷가 모래사장이 거무튀튀하다는 게 약간 다를 뿐. 저 모래사장이 흑해라는 이름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겠다.

 리조트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심어져 경치가 좋은 편이다. 바다 쪽으로는 꽃이 가꾸어진 정원도 있다. 날씨가 화창한 탓인지 아직은 수온이 차가울 텐데도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비키니 차림의 피서객들이 여럿 보였다.

 저녁식사까지 시간이 조금 남기에 해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1km남짓 걸었는데 해변은 부유한 이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별장의 테라스를 바닷가 모래사장에 잇대어 만드는 등 낭만을 더했다. 붉게 물드는 저녁놀의 바닷가, 그리고 식탁에는 와인을 곁들인 만찬이 차려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가.

 다음 날 아침 바투미로 간다. ‘그리골레티 비치에서 바투미까지는 30km쯤 떨어져 있다. 가는 내내 흑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공연장과 놀이공원이 보이는가 하면, 바투미식물원도 곁눈질해 볼 수 있다

 버스는 국제 컨테이너터미널을 지나 바투미 항구에서 멈춘다. 가이드는 우릴 선착장으로 인도한다. 해안을 따라 요트와 보트, 유람선들이 골고루 뒤섞여 있다. 참고로 바투미 항(Batumi Sea Port)’은 조지아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항구라고 한다. 1878년 로스차일드와 노벨 형제가 참여해 항구를 건설했는데, 조지아의 메인 항구 역할을 한다. 외국과의 교역품의 운반이나 국제여객선 루트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곳 흑해에서 더 큰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야만 하니 운송로가 썩 편치만은 않다.

 선착장으로 가는 도중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차차 분수(Batumi chacha fountain)’라는 이름의 타워(Tower)인데 예전에는 차차(와인 만들고 남은 찌꺼기로 만든 술)가 분수대에서 흘러나왔다나? 아무튼 지금은 프랑스 건축가 ‘Raymond Charles Père’가 디자인했다는 오스만 스타일의 시계탑만 남아있다. 그런데 튀르키예의 이즈미르 시계탑을 쏙 빼다 닮았다면 나만의 오해일까?

 우리가 타고 갈 유람선이다. 이름은 ‘Sea Star 1’. 2층으로 되어 있는데, 2층에서의 조망이 조금 더 나은 편이다. 유람선은 어항, 페리항, 유람선항, 요트항 그리고 해수욕장을 한 바퀴 돈 다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옛 해적선을 닮은 낭만의 유람선도 눈에 띈다. 바투미를 찾는 관광객들의 숫자가 제법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유람선은 음악에 맞춰 파도를 타면서 천천히 움직인다.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간다. 그러자 해안도시 바투미의 전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바닷가를 따라 펼쳐지는 고층빌딩의 파노라마가 무척 멋있다. 바투미는 15만 명의 인구를 가진 중소도시지만 현대적 고층빌딩이 즐비한 현대도시다. ‘아자라 자치공화국의 인구가 33만 명이라니 절반이 수도권에 모여 사는 셈이다.

 해안을 따라 우뚝우뚝 솟아 있는 고층빌딩들은 대부분 2010년부터 지어졌다고 한다. 쉐라톤 호텔, 래디슨 블루 호텔, 켐핀스키 호텔, 힐튼 호텔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그 옆에는 야간에 불을 밝히는 등대(1863년 오스만튀르크 시절 나무로 만든 등대인데, 1882 21m 높이의 팔각형 석조로 새로 지었단다)도 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커다란 회전관람차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흑해를 따라 늘어선 현대도시 바투미의 고층빌딩들이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다.

 유람선은 바투미 해안을 따라 2km쯤 가다가 되돌아온다. 유람이라고 해봐야 해안의 빌딩을 보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해수욕장의 피서객들을 보는 재미가 조금 더해진다고나 할까? 참고로 흑해의 둘레는 5,800km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 조지아가 차지하는 부분은 310km쯤 된단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투미의 명물로 알려진 알리와 니노(Ali and Nino)’를 찾았다. 사랑하는 청춘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으로 조지아 조각가인 크베시타제(Tamara Kvesitadze)’가 만들었고, 이곳 바투미 해변에는 2010년 설치했단다. 작품은 원래 남과 여(Man and Woman)’로 발표되었고 한다. 하지만 너무 일반적이어서 사이드(Kurban Said)의 소설 알리와 니노(Ali and Nino)’에서 이름을 차용했다나? 아무튼 소설 속 알리는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무슬림이고, 니노는 조지아 출신의 기독교도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이별한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아제르바이잔을 공격하면서 니노는 딸을 데리고 조지아로 피신한다. 그러나 알리는 간자(Ganja)에 남아 러시아군과 싸우다 죽음에 이르게 된다(1920년 아제르바이잔은 소련연방에 편입된다). 이후 알리와 니노는 카프카스 지역에서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져 1998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조형물은 키네틱 아트(움직이는 예술)로 움직임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알리와 니노는 처음에 먼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잠시 후 서로 손을 잡는가 싶더니, 이들은 다시 멀어져 간다. 알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소설과는 달리 두 연인의 조형물은 만났다 헤어지기를 10분 간격으로 반복한다. 소설이 알리와 니노의 일대기라면, 조형물은 사랑과 이별이라는 메시지가 중심이 된다. 참고로 바투미는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은 도시다. 그런 도시에서 알리와 니노는 다양한 민족, 문화와 종교의 화합과 평화로운 공존을 상징한다.

 2011년에 지어졌다는 알파벳 타워 130m 높이를 자랑한다. 철골 구조물 밖으로 두 개의 밴드 형태 알루미늄 판이 넝쿨손처럼 돌며 올라가는데, 그 판 위에 33개 조지아어 알파벳이 붙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투미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단다.

 바투미 타워(탑처럼 생긴 건물)’는 바투미 기술대학의 건물로 조지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했다. 2012년 준공했으나 건물의 위치, 형태, 관람차 등 대학에 맞지 않아 10년 채 표류중이라고 한다. 곧 호텔로 변신할 계획이라나?

 바닷가로 나가면 흑해 전망대가 있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가도록 이층 구조물을 설치해 바다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흑해(Black Sea)’는 우리나라 면적의 4배에 이르는 호수 같은 바다다. 터키 해협을 통해 지중해와 연결되는 갇힌 바다이다.

 바다 전망이라고 해야 별 게 없었다.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해안과는 달리 이곳 흑해는 섬이나 리아스식 해안이 없어 단조롭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수평선이 보이는 푸른 바다만 펼쳐질 따름이다.

 대신 좌우로 펼쳐지는 바닷가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푸른 숲을 배경으로 둔 해안은 바닥이 자갈이어서 물이 더 깨끗하게 보인다. 그 자갈 위로 파도가 부딪쳐 하얀 포말이 생겨난다. 그 때문에 바다가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래선지 아직은 철이 이른데도 바닷가에서 여름을 즐기는 피서객들이 여럿 보였다.

 반대편으로도 흑해가 질펀하게 펼쳐진다. 이쯤해서 가이드가 전해준 팁 하나. 흑해가 ‘Black Sea’가 된 이유는 흑해의 바닥이 검어서라고 했다. 때문에 물속의 가시거리가 굉장히 짧단다. 흑해와 접한 나라들 간의 잦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죽음을 뜻하는 검은색의 바다가 되었다는 설도 있단다.

 바닷가를 떠나 바투미 시내로 들어간다. 시내로 연결되는 바투미대로(Batumi Boulevard)’는 분수 광장을 지나 유럽광장으로 이어진다.

 감사후르디아 대로(Zviad Gamsakhurdia Avenue : ‘감사후르디아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조지아의 초대 대통령이다) 루스타벨리 대로(Rustaveli Avenue)’가 만나는 지점에 넵튠 분수가 있었다. 분수 한 가운데 바다의 신 넵튠이 삼지창을 들고 우뚝 서 있는 모양새이다. 냅튠은 물의 신이다. 샘이나 강, 바다의 신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니 바닷가에 터를 잡은 바투미로서는 해양에서의 안녕과 평화를 빌기에 딱 좋은 신이라 하겠다.

 넵튠(Neptune, 포세이돈) 분수는 이탈리아 볼로냐의 네투노 광장 16C에 세워진 쟝드 볼로뉴(Jean de Boulogne)’의 조각상 ‘Fontana di Nettuno’를 그대로 복제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똑 같게 복제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원작을 빌려오면서 청동상을 금도금으로 옷을 갈아입혔다.

 분수 건너편에는 고대 그리스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바투미 극장이 있었다. 4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과 두 개의 소극장에서 음악, 연극, 무용 등 예술과 관련된 공연이 열린다. 지붕 아래 박공벽에는 리라(lyre)로 불리는 현악기와 트럼펫으로 불리는 관악기를 양각해 놓았다. 그 가운데서 두 사람이 웃고 있는데, 오마이뉴스는 리라의 명수 오르페우스와 음악의 신 아폴로로 추정하고 있었다.(바투미 편은 오마이뉴스의 기사가 많은 도움을 줬다)

 그런데 바투미 극장 뒤편에 있는 저 동상은 대체 누구일까? 어쩌면 일리아 차브차바제(Ilia Chavchavadze, 1837-1907)’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바투미 극장을 후원했었다니 말이다. 시인이자 소설가, 법률가, 언론인, 정치인 등으로 활동한 그는 조지아 민족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시가지는 유럽의 어느 중세도시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노랑머리의 남녀도 심심찮게 보인다. 맞다. 바투미는 조지아 최대 항구도시이자 조지아 최대의 휴양도시라고 했다. 터키 국경까지 약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여름이면 터키나 유럽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단다.

 좁은 거리는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가득하다. 오스만투르크와 러시아, 유럽 등 다양한 나라들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데, 고풍스럽고 특이한 형태의 건물도 많아 마치 동화 속 마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바투미 광장(Batumi Piazza)’에 가까워질 무렵 성 니콜라스교회(St. Nikolas Church)’를 만났다. 바투미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그리스 출신의 바투미 시장 에프레미디(Ilya Efremidi)의 후원으로 1865년 공사를 시작해 1871년 완공했다. 20세기 초에는 성 니콜라스, 성 조지, 성모 마리아 이콘이 그리스 히로스(Khiros) 섬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근처에서 아르메니아 교회(Christ the Saviour Armenian Apostolic Church)’도 만날 수 있었다.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고 해서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러시아정교회나 조지아정교회와는 달리 우리나라 교회처럼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다고 했다.

 활을 들고 있는 큐피드를 형상화 한 꼬맹이 분수도 눈에 띈다. 독신자가 이 물을 마실 경우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있고, 부부가 함께 마시면 오래오래 행복과 화합을 보장해준다나?

 그 뒤에는 황금빛 여인의 동상도 있었다. 여성 본연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란다.

 바투미 광장(Batumi Piazza)’에 도착하니 시간이 일러서인지 인적이 뜸했다. 하지만 점심 손님들이 많은지 식당에서 내놓은 탁자들이 널따란 광장의 절반 이상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바투미의 역사지구 재건과 관광인프라 확충계획에 따라 조성된 광장은,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을 모방하여 2010년 완공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식당과 술집 그리고 커피숍도 마르코폴로, 피아짜, 미미노 같은 이탈리아어 상호를 가지고 있었다.

 바투미 광장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양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의 느낌이 난다는 것이다. 광장 주변의 부티크 호텔과 시계탑이 산 마르코 광장의 총독관저 같은 느낌을 준다나? 하지만 내 기억속의 산 마르코광장 99m 높이의 종탑(Campanile di San Marco)은 저 풍경과 많이 달랐다.

 광장 한가운데는 2010년에 만들어진 커다란 모자이크화가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유명 성악가들이 이곳에서 공연하기도 했단다.

 한가운데서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유럽광장(Europe Square : 옛 이름은 시대광장이라고 했다)’은 넵튠분수의 남서쪽에 있다. 바투미광장에서도 무척 가깝다. ‘유럽이란 이름만으로 조지아의 유로 가입의자가 엿보이는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 또한 밝고 활기차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많아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나 싶다.

 광장의 예쁜 건물들은 유서 깊은 동유럽의 도시들을 연상시킨다. 바투미의 근·현대를 함께 보여주기도 한다. 아르누보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주를 이루지만, 그 뒤쪽으로 21세기 빌딩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건물은 현재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 식당, 기념품점 등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광장에는 2007년에 세웠다는 메데아 동상(Statue of Medea)’이 우뚝 서있다. 그리스 신화 속 황금의 나라 콜키스 왕국이 역사상 실존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존감의 상징으로 조각가 흐말라제(David Khmaladze)’가 제작했다. 동상은 콜키스 왕국의 공주 메데아가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는 황금 양가죽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이올코스 왕국의 이아손 왕자를 사랑해서, 아버지를 배신하고 그에게 황금 양가죽을 넘겨준다는 것을 형상화한 모양이다. 이쯤해서 의문점 하나. 콜키스 왕국의 입장에서 메데아는 적국 왕자와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조국을 버린 배신자다. 그런데도 아테네 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로 콜키스의 왕위를 계승케 하는 등 전설을 해피엔딩으로 끝내는 이유는 뭘까?

 기둥에 새겨놓은 아르고 원정대의 부조에서 이아손과 황금 양가죽에 대한 얘기를 소환해본다. 황금 양가죽은 콜키스 왕국의 영광과 번영의 상징으로 아이에테스 왕이 아레스 숲속에 숨겨놓고 황소와 용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이아손이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들 두 동물을 물리쳐야 했는데, 이아손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메데아다. 조국과 아버지를 배신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도 역시 이아손에게 배신을 당해,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을 죽이는 악녀가 된다. 그녀는 아테네 왕국을 거쳐 마침내 콜키스 왕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때 아버지 아이에테스는 동생에게 왕위를 잃고 궁에서 쫓겨나 있었다. 메데아는 마법을 부려 아버지를 왕위에 복귀시키고, 나중에는 아테네 왕과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로 콜키스 왕위를 계승케 한다.

 광장에는 옛 풍경을 담은 사진도 게시해놓았다. 광장을 돌아다니다보면 옛 풍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런 사진들을 여럿 볼 수 있다.

 광장의 한쪽에서는 2010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커다란 천문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체코 프라하 시청의 천문시계를 벤치마킹한 것 같은데, 덕분에 천문시계가 매달린 저 건물은 바투미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했단다.

 천문시계는 시간 말고도 태양, , 별자리, 행성의 위치 등 천문 정보까지 함께 알려준다고 했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자오선, 지평선, 일출과 일몰, 달의 나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달의 실제 움직임까지 보여준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천문시계의 안내판을 세워두는 고객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바닷가. 해변에 분수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저녁이면 이곳에서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추는 분수쇼가 펼쳐진다고 한다. 하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볼거리는 아니라고 했다.

 분수광장 초입에 ‘Under-21 Championship’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UEFA 유러피언 U-21 챔피언십은 유럽 축구 연맹(UEFA)이 주관하는 21세 이하 축구 국가대표팀 간의 국가대항전이다. 그러니 조지아와 루마니아의 시합이 곧 열린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닷가로 가다보면 푸치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나비부인(Madame Butterfly) 동상을 만나게 된다.

 이젠 공원(Mircle park)을 둘러볼 차례이다. 한마디로 공원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예쁜 건축물들과 독특한 조형물들, 그리고 나무가 우거진 길게 뻗은 산책로가 있는 멋진 공원이다. 초입에 조성해놓은 울창한 대나무 숲도 잠깐 쉬다가기에 딱 좋았다.

 뭔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은 동서양을 불문하는가 보다. 어른 팔뚝만큼이나 굵은 대나무에 뭔가를 끄적거려놓았다. 낙서가 된 대나무는 의외로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글로 된 낙서는 보이지 않았다.

 공원은 테마별로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져 있는데, 어린이들을 위한 미니 동물원이 있는가 하면, 조각공원과 여러 형태의 분수도 눈에 띈다.

 조류 동물원, 날아갈 우려가 있는 새들은 커다란 새장 안에서 기르고 있었다.

 유료로 여겨지지만 탁구대와 당구대도 설치해놓고 있었다.

 조지아인들이 사랑하는 스포츠답게 체스도 야외로 나왔다. 참고로 조지아 국적의 여성 체스선수 노나 가프린다시빌리 20세에 여성 챔피언에 오른 후 16년간(1962-1978)이나 자리를 지켰고, 세계 최초로 그랜드 마스터 칭호를 받기도 했다.

 바투미는 요런 이층 버스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그리고 미리 예약해둔 식당 근처에서 내려 현지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우리도 코카서스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즐겼다. 메뉴는 아자리안 하차푸리(Ajarian Khachapuri)’. 바투미가 속한 아자리야(Ajaria)지역 특유의 빵으로, 보트 모양의 빵 안에 치즈와 버터를 넣어 녹인 다음 계란 노른자를 얹었다. 이스트를 사용해 부풀어 오른 빵을 뜯어 치즈와 달걀을 찍어 먹으면 된다.

 

서해랑길 64-4코스(운산교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

 

여 행 일 : ‘25. 2. 8( )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및 당진시 용연동·대덕동·정미면·면천면 일원

여행코스 : 운산교수당2대운산교신성대학교용천교대덕공원내포문화숲길 아미산센터(거리/시간 : 18.7km, 실제는 대운산교부터 14.85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창리항에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연결되는 64코스의 지선( 6) 중 네 번째 구간을 걷는다.

 

 들머리는 운산교(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장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내려와 운암로(70번 지방도)를 타고 운산방면으로 1.5km쯤 들어오면 운산교에 이른다. 서해랑길(당진 64-4코스) 안내도는 다리 초입에 설치되어 있다.

 운산면소재지(용장리)에서 역천을 따라 내려가다 용천교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아미산 초입까지 가는 20.1km짜리 여정. 험하지는 않지만 산길을 7km나 타는데다,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도 없어 추천할만한 코스는 아니다. 난이도도 별이 4(전체 5), 어려운 코스로 분류된다.

 두루누비(한국관광공사의 정보 플랫폼) 64-4코스의 관광 포인트로 서산 유기방가옥을 추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탐방로에서 2km 가까이나 떨어져 있어 쉽게 들러볼 수는 없다. 그래서 초반의 4km 정도를 생략하는 대신,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여미리에 있는 유기방가옥을 다녀오기로 했다. 마을에 도착하니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거대한 느티나무(수령 250년의 보호수)가 반긴다.

 여미리는 달의 넉넉함을 나눌 수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하긴 늦봄인 사월 여미리에서 바라보는 달빛이 가장 아름답다 하여, 서산8경 중 5경인 여월미야(餘月美也)’에 꼽혔을 정도이니 어련하겠는가.

 마을 초입의 유상묵 가옥(충남 민속문화재 제22)’부터 먼저 둘러본다. 구한말인 1925년 종5품 벼슬을 지낸 유상묵이 운현궁(雲峴宮)을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 야산을 배경으로 경사면에 기단을 쌓고 U자형으로 토담을 두른 후 안채와 사랑채를 들어앉혔다. 모티브로 삼았다는 운현궁과 어떻게 닮았는지가 궁금했지만, 문이 닫혀있는 데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외관만 살펴보고 발길을 돌렸다.

 사랑채 대문에는 나전헌(螺田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유상묵의 손자인 유정로의 호라나? 안에는 일중 김충현(1921-2006)의 공산무인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를 비롯해 나전심경(螺田心畊), 향감여미(鄕感餘美) 등의 편액이 걸려있다고 한다.

 자형의 사랑채와 자형의 안채가 자형의 행랑채와 담장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출입문도 구별되어 각각 안대문과 사랑대문으로 출입할 수 있으며, 행랑채 익랑에 있는 중문으로 사랑마당과 안마당으로 통하게 되어있다.(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해왔다)

 유상묵 가옥에서 80m쯤 떨어진 곳에는 320년이나 묵었다는 거대한 소나무가 있다. ‘서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나이만큼이나 풍성한 품을 미륵불에 내어준다.

 소나무 그늘에는 고려(초기) 때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충남 유형문화재 제132)‘이 있었다. 높이가 307cm나 된다는 거대한 미륵불은 살찐 방형(方形)으로 근엄하다. 머리 위에는 화불(化佛)이 새겨진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용장천(龍獐川)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인근 주민들이 수습·보수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미륵불의 왼쪽 옆으로 난 샛길로 70-80m쯤 들어가면 선정묘(宣靖廟)‘가 나온다. 조선 정종의 4남 선성군(宣城君)과 배위 3명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왼쪽이 사당, 오른쪽은 재실인 선미재(宣美齋)‘이다. 두 건물 모두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홍살문과 외삼문을 차례로 지나면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이 맞는다. 경기도 파주에 있던 것을 후손이 끊기면서 다른 후손들이 살아가던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참고로 전주이씨(全州李氏) 집성촌인 여미리는 경연참찬관을 지낸 이창주(李昌冑, 1567~1648)가 입향 시조이다.

 초입으로 되돌아오자 이번에는 달빛미술관이 맞는다. ‘우전 마진식이란 분의 개인 미술관으로, ·여름·가을·겨울을 느껴볼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가끔은 여미달빛음악회 같은 이벤트도 열린단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작품을 구경하지는 못했다.

 건물 밖도 전시장으로 꾸몄다. 대신 그림이 아닌 조각품들로 채워 넣었다. 그런데 서산과 말은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2주 전, ’해미 국제성지순례길을 답사할 때도 저런 말 조형물을 보았었다.

 여미리를 방문한 탐방객들의 느낌을 담은 글과 그림들을 타일로 제작해 벽화를 만들었다. 옆에는 신재 이원중의 여미가 어드메뇨 고향 한번 돌아보세!’란 시비도 세워져 있다.

 달맞이 동산이라고 했다. 정자에 올라 그 유명한 달빛을 구경해보란 모양이다. 참고로 여미리는 저 달맞이동산을 비롯해 석불입상, 성선군사당, 비자나무, 라전고택, 서암동천, 유기방가옥, 느티나무마당, 전라산 등을 ‘9으로 꼽고 있었다.

 마을 끝에는 여미리의 얼굴 마담격인 유기방 가옥(충남 민속문화재 제23)’이 있었다. ‘두루누비 64-4코스의 관광 포인트로 꼽은 고택으로, 양지바른 산자락 남고북저의 지형에 건물을 앉히고 타원형 토담을 둘렀다. 가옥 좌측에는 지붕이 개량된 가랍집(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을 배치했다. 1919년에 지어졌는데, 서산지역의 전통 양반 가옥 배치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고택은 자형 안채와, 동편에 담을 사이에 두고 자형의 사랑채, 그 앞에 자형 사랑 대문채가 자리한다. 안마당 서측에는 동향으로 작은 행랑채가 안마당을 감싸며, 대문은 누각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안채에서 작은 문으로 연결되는 사랑채에서는 한옥 체험도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여미헌(餘美軒)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누각형 대문을 들어서면 부엌과 방, 대청, 건넌방으로 이어지는 ' 자형' 안채가 양반가다운 규모를 드러낸다. 안채 왼쪽에 행랑채,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마당을 가운데 둔 'ㅁ 자형'이다. 덕분에 크기가 상당한 가옥인데도 아늑한 인상이다.(구도가 안 맞아 다른 분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구해왔다)

 고택 곁에 있는 감나무(서산시 보호수)’도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수령이 400년도 넘었다는데 높이가 13m나 된다고 했다.

 유기방 가옥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성인 기준 8천원이라니 제법 비싼 편이다. 하지만 수선화가 피어 있을 때만 받는다니 마음 놓고 들어가 볼 일이다. 대신 살림집을 겸한다니 주인장의 안정을 깨뜨리지는 말자.

 주막이란다. tvN 미스터 선샤인을 비롯해 KBS-2 직장의 신 붉은 단심’, MBC ‘연인’, SBS ‘꽃선비 열애사 등 수많은 드라마가 이 주막이나 고택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가옥 안내도는 수선화로 치장되어 있었다. 맞다. 유기방 가옥에서는 수선화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수선화 꽃밭에 둘러싸인 고택을 중심으로 열리는데, 만개한 수선화를 벗 삼아 마음껏 봄나들이를 즐길 수 있단다.

 유기방 가옥의 오른쪽 언덕에는 수령이 350년이나 된다는 비자나무가 있다. 입향조(이창주)의 증손인 이택(李澤, 1651-1719) 1675년 제주도에서 흙과 함께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세 그루를 심었는데 한 그루만 남아 둘레 246cm에 높이가 20m나 되는 거대한 몸집을 자랑한다. 제주에서 군락을 이루는 비자나무는 전라도의 백양산과 내장산에서 자생하는 게 전부라고 한다. 중부지방 이북은 이처럼 장수하는 고목이 흔치 않다니 충남 기념물(174)로 지정받을 만하다.

 유기방 가옥 앞에는 한 쌍의 해태상이 세워져 있었다. 저곳이 서산 아라메길’ 1구간인 천년미소길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서산아라메길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를 합친, 서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길이다. 1구간은 역사 유적지와 계곡, 산으로 이뤄진 친환경 트레킹 코스로 전라산·용현리 등을 거쳐 해미읍성에 이르는 20.1km 구간이다.

 09 : 50. 실제 출발지인 대운산교’. 첨부된 지도에서 탐방로가 ‘647번 지방도와 만나는 지점이다. ‘여미리를 둘러본 다음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이곳까지 왔다. 덕분에 오늘은 정규코스에서 4.35km(두루누비 표기)를 단축해서 걷는 셈이 됐다.

 내포 문화숲길  원효깨달음길을 걷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내포 문화숲길은 내포(內浦)의 역사·문화·생태를 아우르는 걷기 여행길이다. 서산·당진·홍성·예산 등 내포지역에 위치한 4개 시·군이 공동으로 조성·운영하는 숲길로 26개 읍면동, 121개 마을 총 320km를 지난다. 원효깨달음길, 내포천주교순례길, 백제부흥군길, 내포역사인물길, 내포동학길 등 5개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09 : 50. ‘역천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제방 위로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있다. 잠시 후 둑길(이정표 : 영탑사 9.14km/ 안국사지 4.45km)과 헤어져 들녘으로 들어간다참고로 역천(驛川)은 서산시 가야산 석문봉에서 발원, 북으로 흘러가면서 서산(운산면당진(고대면·정미면)의 퇴적평야를 일군 뒤 서해로 유입되는 29.13Km 길이의 하천이다.

 원효깨달음길 내포불교순례길로 이름을 바꾸었나보다. 원효깨달음길은 우리나라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원효대사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성찰과 깨달음을 얻는 길이다. 103.5,km 10개 코스로 나누었는데, 이곳이 7코스와 8코스의 경계지점인 모양이다.

 09 : 58.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검암천(劍岩川)’을 건넌다. ‘두루누비 대방교의 교각 침하로 위험할 수도 있다며 검암천교로 우회시키는 구간이다. 하지만 안내판은 차량통행만 금지하고 있었다. 참고로 검암천(劍岩川)은 당진시 아미산(峨嵋山)에서 발원 남서로 흐르다가 정미면에서 역천으로 유입되는 길이 8.96km의 하천이다.

 10 : 05. 또 다시 역천을 따라간다. 역천과 대방(大防)’ 들녘을 좌우에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10 : 12. ‘신성대학교로 들어가는 덕마교는 스치듯 지나간다. 때문에 대학교나 학사촌은 곁눈질하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다리 건너에는 1995년에 개교한 신성대학교가 있다. 2007 4년제 학사과정을 인가 받아 전공심화학부를 열었다. 그래선지 전문학교에서 보아오던 물리치료학과와 치위생학과, 사회복지학과 등이 4년제로 편재되어 있었다.

 10 : 13. 역천은 덕마교를 이용해 건넜다. 하지만 이 다리도 중간이 움푹 꺼져 있었다.

 이후부터는 역천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왼쪽에는 모평리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요리조리 꿈틀대는 역천의 물줄기가 빚어놓은 충적평야이다. 이름에 걸맞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모평리(模坪里)’란 지명이 대모산(大模山) 기슭에 들어앉은 촌락이 드넓은 평야(平野)를 뜨락으로 삼았다는 데서 유래했다니 말이다.

 10 : 30. ‘모평중보란다. 모평리 들녘에 물을 대기 위해 막아놓은 수중보(水中洑)라는 얘기일 것이다.

 10 : 37. 운평교. 저 다리를 건너 용연동으로 갈 수도 있지만, 탐방로는 계속해서 둑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10 : 45. ‘용천교로 역천을 건넌다. 정미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저 다리를 기점으로 당진시내인 용연동으로 넘어간다.

 초입의 안내판은 양지말(역말)’의 유래를 전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 당진에는 순성역(順城驛)과 흥세역(興世驛)이 있었는데, 이곳 용연동이 흥세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역말이란다. 참고로 홍세역에는 역리(驛吏) 17명과 노() 2, () 2, 기마 4, 복마 4필이 있었다고 한다. 꼬맹이 역참(驛站)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우리가 흔히 쓰는 한참이나 간다라는 어휘는 이 역참에서 유래되었다는 것도 알아두자.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를 한 참()’이라 했는데, 고려시대는 이 '한 참'의 거리가 100( 40km)에 이르렀다니 오죽이나 힘들었겠는가.

 역천의 상류 쪽 풍경. 모평리 들녘에 물을 대는 용현보가 물길을 막고 있다. 참고로 역천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시흥도역승(時興道驛丞) 산하 7개 속역 중 하나인 흥세역(興世驛)’의 옆을 흐르는 하천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하류 쪽 풍경. 저 물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석문호수를 만난다.

 10 : 49. 다리 건너 삼거리에서 역천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간다. 150m쯤 진행하면 또 다른 삼거리, 탐방로는 이곳에서 역천로를 벗어나 용연로로 들어선다. 옛날 흥세역이 있었다는 곳이기도 한다. 자연부락 이름도 역말(驛村)’로 불린다고 했다.

 이후부터는 용연로를 따라간다. 오른편은 용연천’, 면천면(죽동리) ‘음고개에서 발원 서쪽으로 흘러 용천교 앞에서 역천에 유입되는 2.8km 길이의 하천이다.

 1975년에 문을 열었다는 용연초등학교도 험난한 세파를 배겨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학생 수 부족으로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당진 유일의 공립 단설유치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용연1 마을회관. ‘용연(龍淵)’이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있었다는 큰 연못(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가뭄이 있을 때 남쪽 이배산(利背山)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돼지머리를 굴려서 용연에 떨어지면 비가 온다고 믿었단다.

 11 : 02. 2차선의 널찍한 용연로와 헤어진 다음, 1차선인 용란재길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사진에서 보이는 움푹 파인 능선안부를 넘어간다.

 탐방로는 이제 용란재길을 따라간다. 읍내동과 용연동 간을 잇는 1차선 도로다. 아까 삼거리에서 만났던 이정표(어름수변공원 3.13km/ 용천교 1.30km)를 시작으로 심심찮게 나타나는 내포불교순례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어름수변공원 방향으로 가면 된다.

 양지바른 산자락. 그럴듯하게 지어진 저 건물은 재사(齋舍)일까 아니면 살림집일까?

 11 : 18. 길은 해발 72m(핸드폰 앱)의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용란재라고 하던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고갯마루 부근에서 만난 염수 분사장치가 눈길을 끌기도 했다. 원격제어로 염수를 분사시킬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고개를 넘으면 대덕동이다. 당진 시내에 가까워졌는지 고층아파트가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11 : 24. 아미로(609번 지방도)는 곧장 횡단해버린다. 이어서 자 모양으로 들녘을 가로지른다. ‘엘지시스템 에어컨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개울둑을 따르는데 이정표(어름수변공원 1.26km/ 용천교 3.18km)가 방향을 알려준다.

 11 : 29. 빌라촌 앞에서 양지말길을 만나 어름수변공원을 향해 간다. 왼쪽 산자락에 대덕맨션, 송정빌리지, 송정빌라 등 공동주택 단지가 여럿 들어서 있었다.

 잠시 후 임도가 시작된다. 당진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능선의 숲속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11 : 38. kakaomap은 이 일대를 봉암() 근린공원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어름수변공원, 버들수변공원, 여울수변공원과 연계 조성된 도심 근린공원으로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내포문화숲길 종합안내도. 내포 지역 지자체(서산·당진·홍성·예산)들이 불교 성지와 천주교 성지, 동학, 역사인물, 백제 부흥운동 등 수많은 흔적들을 옛길과 마을길, 숲길, 들길, 하천길로 연결한 길이 320km의 장거리 도보 트레일이다.

 50m쯤 더 걸으면 삼거리. 이정표(어름수변공원 0.46km/ 용천교 3.97km/ 아미산정상 6.87km)가 이제껏 함께 걸어오던 어름수변공원과 헤어지란다. 그리고는 아미산을 향해 걸을 것을 지시한다.

 탐방로는 근린공원답게 잘 닦여 있었다. 산책 나온 시민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 도심에서 가까운 탓인지 능선에 농지나 농가가 들어서 있기도 했다.

 11 : 49. 10분 남짓 더 걸었을까 이제 그만 임도를 벗어나란다. 임도가 넷으로 나뉘는 지점인데, 산길 하나를 더 내놓은 것이다.

 이정표(아미산 정상 6.4km/ 어름수변공원 0.9km)와 함께 세워놓은 안내판이 산길이 시작됨을 알려준다.

 도심 근교의 산답게 길은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은 널찍하게 잘 닦여있는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었다. 시민들이 산책삼아 나서기에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이즈음 산비탈 반대편으로 풍요로운 당진의 들녘이 먼발치로 건너다보이기도 한다.

 12 : 00. 길이 나뉘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고, 곳곳에 놓아둔 벤치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12 : 05. 잠시지만 임도에 내려서기도 한다.

 12 : 08. 느닷없이 나타난 계단. 이정표(아미산정상 5.27km/ 어름수변공원 2.07km)가 계단으로 올라가란다.

 계단 위에는 대덕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대덕산(주민들은 그렇게 부르나, 검색되는 지도는 없다)에 조성된 공원으로, 풋살이나 농구를 즐길 수 있는 경기장에다 산책로, 벤치·파고라 같은 휴식시설 등을 가미해 시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대덕공원 표석과 조형물. 조형물은 가족나들이에 딱 좋은 공간이라는 자랑을 담았지 않나 싶다.

 12 : 17. 대덕공원 앞. ‘당진시 도로관리사무소 진입로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으로 올라간다.

 12 : 22. 눈티고개.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눈티고개. 새말에서 대덕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높고 험하여 늦봄까지 눈이 녹지 않고 있다 하여 설티(雪峙눈틔고개·눈티고개 등으로 불린다는 곳이다.

 안내판은 면천군과 당진현을 잇는 가장 큰 대로가 이 고개를 지나갔다고 적었다. 군수나 현감이 다니던 길이라서 당진군에서 가장 큰 서낭당이 고갯마루에 있었단다. 눈이 오면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고 길을 닦는 부역에 동원된 주민들의 고층과 애환이 서려있는 고개이기도 하단다. 그들의 삶의 흔적과 염원이 깃든 돌탑도 있었다고 했으나 눈에 띄지는 않았다. 널찍했다던 고갯길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산길은 여전히 고왔다. 하지만 경사는 아까보다 상당히 가팔라졌다.

 왼쪽 나뭇가지 사이로 당진시가지가 내다보인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것이 대도시의 풍모가 엿보인다. 1990년대 말 당진화력에 출장 왔을 때만해도 소읍에 불과했었는데,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에 딱 어울리는 풍경으로 변해있다.

 12 : 26. 공식적인 지명은 없었지만 공동묘지를 지나기도 한다.

 이때 아미산과 다불산이 조망된다. 두 산을 잇는 능선에는 출렁다리가 놓여있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명색이 산길인지라 가파른 오르막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금방 끝나기 때문에 버겁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64-4코스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서해랑길의 이정표를 만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시설물에 붙여놓은 화살표식 엠블럼’, 그리고 이런 가이드 리본이 전부였다.

 12 : 37. 대신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팔랐다. 그렇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다. 계단을 놓아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도록 했다.

 12 : 45. 운치어린 대나무 숲을 스치듯 지나치자, 서해안고속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가 입을 딱 벌리고 있다.

 굴다리를 빠져나오자 삼거리(이정표 : 아미산정상 3.57km/ 어름수변공원 3.37km)가 맞는다.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잠시지만 서해안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기도 한다.

 12 : 50. 산속으로 들어갈 것을 지시하는 이정표가 지금 우리가 백제부흥군길(8코스)’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홍성 오서산의 장곡산성(주류성), 예산의 봉수산 임존성을 거쳐 당진의 아미산까지 이어지는 '백제부흥군길'은 총 8개 코스로, 백제를 지키려는 민초들의 숱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참고로 660 7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후, 임존성과 주류성을 거점으로 한 백제부흥운동은 무려 3년 넘게 이어졌다.

 다시 시작되는 산길은 아까보다 많이 가팔라졌다. 오르내림도 상당히 커졌다. 당진시에서 가장 높은 아미산(350.9m) 자락에 들어섰다는 증거일 것이다.

 12 : 57.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이정표를 만났다. 가야할 방향(아미산 정상 2.85km)은 같은데, 반대방향인 어름수변공원(4.49km)’을 우리가 왔던 길이 아닌 능선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두루누비의 앱을 따라 왔는데도 말이다.

 13 : 07. 산길에서 나와 임도(이정표 : 아미산정상 2.22km)를 가로지른다. 죽동2리와 성북2리를 잇는 임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음고개)인데 차량통행이 잦은 듯 바퀴자국이 여럿 나있었다.

 길은 건너편 아미산 자락으로 파고든다. 250m쯤 떨어진 산중턱의 민가까지 비포장 길(도로에 가까운)이 나있다.

 13 : 13. 민가에 딸린 정자 옆에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13 : 15. 가파른 산길을 잠시 치고 오르자 임도(이정표 : 아미산정상 1.93km/ 몽산 4.05km/ 어름수변공원 5.41km)가 나타난다. 왼쪽은 64-5코스의 주요 기점 중의 하나인 몽산으로 연결된다. 64-4코스의 종점은 당연히 오른쪽으로 간다.

 13 : 23. ‘야외교실이란다. 체험학습이라도 하는 공간인 모양인데, 나로서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실린 시판에 더 관심이 간다. 30년 가까운 공직생활 동안 늘 책상머리에 놓아두고 지표로 삼았었으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했던가?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立春)이 지났지만 동장군은 가실 줄을 모른다. 매일처럼 한파, 그것도 경보까지 발령하던 기상청이 어제는 이곳 서해안에 폭설이 내릴 거란 예보까지 덧붙였었다. 눈이 적게 내려 트레킹을 하는데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3 : 31. 아미산 쉼터. 아미산에 만들어놓은 여러 쉼터 중 하나로 산행을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 채비하기 딱 좋은 곳이다. ‘백제부흥길의 주요 포스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8코의 종점이자 9코스의 시점이다. 그래선지 이정표(아미산정상 1.2km/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터 0.7km/ 대덕공원 4.0km, 몽산 4.8km) 옆에 내포문화숲길 종합안내도를 세워놓았다.

 아미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코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상까지 1.2km로 다소 멀지만, 대신 가장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아미산 등산로 안내도.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터 방향으로 간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임도를 따라가면 된다.

 13 : 38. 서해랑길(64-5코스) 안내도는 아미산산림욕장 입구(이정표 :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터 0.26km/ 몽산 3.77km/ 아미산쉼터 0.5km)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두루누비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까지 조금 더 걸으란다. 자동차가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64-5코스 답사 때는 이 길을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13 : 41. 아미행복교육원. 당진교육지원청에서 운영하는 교육시설로, 폐교된 면천초등학교 죽동분교를 리모델링해 당진외국어교육센터로 활용하고 있단다. 원어민 교사가 이 지역 학생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외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나?

 그러나 빗돌은 우리네 것을 고집하고 있었다. 시인이자 서예가인 늘빛 심응섭 교수의 효행을 새겨놓았다. 한글문자조형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분이다.

 13 : 46.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14.85km 4시간에 걸었다. 7km나 되는 산길을 오르내린데다, 눈까지 쌓여있어 속도가 떨어졌던 모양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줬다. 오늘만이 아니다. 내 생의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켜줄 것이다. 어느 날 작은 시험이 진행됐다. 주부에게 아주 친한 사람 20명을 적게 한 다음, 덜 친한 순으로 지워나가도록 했단다. 동료, 이웃, 친구 등이 차례로 지워져나갔다. 부모님을 지울 때는 오래 망설였다. 자녀를 지울 때는 아예 대성통곡을 하더라나? 맞다. 시간이 흐르면 부모님은 세상을 떠날 것이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만들어 부모 곁을 떠나간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함께 할 사람은 배우자뿐인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아내와 함께 한 하루였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DMZ 평화의길 5코스(고양종합운동장-성동사거리)

 

여행일 : ‘25. 2. 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일산서구) 대화동·가좌동 및 파주시 동패동·송촌동·탄현면 일원

여행코스 : 고양종합운동장가좌근린공원동패지하차도심학산둘레길파주출판단지공릉천살래길통일동산성동사거리(거리/시간 : 21km, 실제는 동패지하차도에서 출발 16.7km 5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고양종합운동장(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자유로(국도 77호선) 이산포 JC에서 고양대로로 바꿔 타고 3km쯤 들어오면 고양종합운동장이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보조경기장 뒤쪽에 위치한 휴게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고양종합운동장(휴게공원)을 출발 자유로 언저리를 따라 파주 통일동산까지 북진하는 21km의 여정이다. 도심에서 출발해 숲길과 시골길, 공원 등 다양한 길을 걸어볼 수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심학산, 출판단지, 통일동산 등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나 가슴에 담아둘만한 얘깃거리는 없다. 하지만 짬을 조금만 내면 종점 근처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올라 평화통일의 의지들 되새겨 볼 수 있다.

 08 : 20. 실제 출발지인 동패지하차도(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동).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코스를 단축하기로 했다. 아니 이름(DMZ 평화의길)에 어울리지 않는 시내구간을 줄였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08 : 23. 동패지하차도 상단(이정표 : 성동사거리 15.8km). 고양시와 파주시의 경계인데, 평화누리길(6코스) 및 경기둘레길(5코스) 시작 지점임을 알리는 다양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평화의길(5코스)’도 뭔가를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점인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6km로 적고 있다. 하지만 두루누비에서 제공한 앱에는 ‘4.95km’로 뜬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안내도는 평화누리길(6코스)과 경기둘레길(5코스)만 표기하고 있었다. 더부살이하고 있는 평화의길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서글픔이라고나 할까?

 08 : 27. ‘산남로를 따라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100m쯤 걸었을까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란다.

 08 : 29. 동서대로(358번 지방도) 하부 굴다리. 평화누리길은 6코스의 시점을 이곳으로 삼는 듯 눈에 익은 아치형 대문이 세워져 있었다. 하나 더. 이곳에는 화장실도 설치되어 있다. 다음 화장실은 출판도시를 지나고서야 만날 수 있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꼭 들렀다 가도록 하자.

 길은 심학산의 정상을 향해 가파른 오름짓을 시작한다. 시작부터 겁을 준다고나 할까?

 08 : 33.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잠시 후 심학산 둘레길을 만나게 되고,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평화누리길 6코스는 심학산 둘레길(출판도시길 순환코스)’의 남쪽 코스를 따라간다. 하지만 안내판은 북쪽 코스도 타볼 것을 권하고 있었다. 정상에 서면 한강의 유장한 물줄기는 물론이고 날씨라도 좋을라치면 북한의 송악산까지 코앞으로 다가온단다.

 심학산은 한강을 향해 솟아오른 해발 194m의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곳곳에 바위가 포진하고 있는데다 경사까지 급해 산을 오르려면 상당한 체력이 요구된다. 그래서일까? 탐방로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둘레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08 : 48.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이정표 등의 시설물은 물론이고, 탐방객들을 위한 쉼터도 여럿 만들어놓았다. 하긴 심학산 둘레길 축제까지 열린다니 어련하겠는가. 주민들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서라지만 심학산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작년에는 1026일에 열렸다나?

 08 : 55. 산머루가든 갈림길(이정표 : 낙조전망대 1,699m/ 산머루가든 660m/ 배수지 1,387m). 심심찮게 길이 나뉘지만 그때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을 찾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09 : 08. 약천사 갈림길(이정표 : 배밭정자 1,592m/ 약천사 260m/ 전원마을 516m)도 그중 하나다. ‘약천사(藥泉寺)’ 1932 (고려시대의 절터에) 법성사로 중창되어 1995년 약천사로 개명한 앳된 사찰이지만 13m 크기의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로 유명세를 탔다. JTBC 주말드라마 나의해방일지의 촬영지이자, 인기배우였던 고 박용하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길은 큰 오르내림이 없이 이어진다. 산책하기 딱 좋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배낭도 없이 걷고 있는 시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다. 가끔은 이런 가파른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데크 계단이나 밧줄 난간을 설치해 오르내리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

 09 : 24. 낙조전망대. 소나무와 신갈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숲길의 끝, 서쪽으로 시야가 확 열리는 곳에 세워놓은 전망대이다. 한강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낙조라는 이름을 얻었다.

 난간에 서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장중히 흐르는 한강 너머, 김포 한강신도시를 시작으로 하성면 일대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 중심에 봉성산과 전류리포구가 있다. 3코스와 4코스를 답사하면서 눈만 들면 심학산이 차올랐었는데, 이번 5코스는 반대로 김포의 드넓은 들녘과 전류리포구를 눈에 담으며 가는 모양새이다.

 동쪽에서 굽이친 한강의 물줄기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뻗어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밀물일 땐 바닷물이 이곳까지 오기도 한단다. 봉성산, 태산, 문수산 등 앙증맞은 멧부리들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시선을 조금 더 비틀면 저 멀리 북녘에 황해도 개풍군 관산반도가 희끄무레하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리듬감을 더해주어 지루할 틈이 없다. 거기다 널따란 바위들이 등산로 곁에 군데군데 놓여 있어 좋은 쉼터가 된다. 이 구간에서는 추락위험 경고판까지 만날 수 있었다.

 09 : 34. ‘배밭 정자란다. 요 아래 있는 배 과수원에서 이름을 얻어온 모양인데, 사통팔달로 길이 나뉘는 지점답게 정자 말고도 이정표와 벤치, 운동기구 등 다양한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배밭입구(510m)’ 방향으로 내려간다. 완만한 산길을 5분쯤 내려가자 한껏 덩치를 부풀린 한강이 얼굴을 드러낸다. 오두산 아래서 임진강과 합쳐지면서 조강으로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09 : 43. 심학산등산로 입구. 4개의 등산길과 둘레길 코스를 그려 넣은 심학산 종합안내판과 이정표, 평화누리길 6코스(출판도시길)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심학산의 원래 이름은 수막산(水幕山)’이다. 넓은 평야와 구릉지에 한강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산이란 뜻이란다. 홍수 때 산이 깊이 잠겼다거나 바위가 깊숙이 포진해 있다며 심악산(深嶽山)’ 심악산(深岳山)’, 지세가 거북의 등딱지를 닮았다며 구봉산(龜峰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 이름인 심학산(尋鶴山)’은 숙종이 애지중지하던 학() 두 마리 도망갔다가 이곳에서 잡혔다는데서 유래됐단다. 하지만 이는 1913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전설급동화(朝鮮傳說及童話)’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일제의 곡해(曲解) 또는 의도적인 변경으로 보는 이유다. 고로 대동여지도 등 일제 이전의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심악산(深岳山)’으로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09 : 46. 몇 걸음 더 걸어 도착한 마을에는 두어 개의 카페가 들어있었다. 참고로 이곳 책마을에는 인포떼끄’, ‘보물섬’, ‘헤세 같은 입소문을 탄 카페가 여럿 있다. 하나 같이 책과 카페를 합쳐놓은 공간이다. 책을 꼭 구매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에 드는 책 한권 골라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읽다 가면 그만이다. 그러다 좋아하는 작가라도 우연히 만나게 될 지도 누가 알겠는가.

 09 : 52. 다리(이름표가 없는)를 건너 출판단지로 들어간다. 정식명칭은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기획부터 인쇄까지 출판의 전 과정을 해결 할 수 있는 국가산업단지이자 1만여 명의 종사자들이 250여 개 출판관련업체에서 일하는 책 마을이다. 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전 과정이 '원스톱'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비용이 절감되고 속도도 빨라졌다. 덕분에 시내 곳곳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구할 수 있다.

 다리는 출판단지 유수지를 가로지른다. 유수지(遊水池)란 가뭄이나 홍수 때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 마련한 천연 또는 인공의 저수지를 말한다. 출판단지를 가로지르는 하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보를 막아 인공의 저수지를 만들어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09 : 54. 이채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문발로를 따라간다. 파주출판도시가 품은 가장 큰 도로인 문발로를 중심으로 위 아래로 뻗은 길들을 따라 출판사와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크고 작은 책방(완전 매력적인 가격으로 할인 판매한다), 그리고 북카페(역시 할인판매)와 아트샵, 박물관 등이 자리한다. 길가에 늘어선 건축물들도 하나의 볼거리이다. '좋은 공간에서 좋은 시각, 좋은 글, 좋은 디자인이 나오고 이게 곧 바른 책을 펴내는 밑거름이 된다는 믿음에서 도시 전체를 멋진 건축물들로 채웠다고 한다. 덕분에 책의 도시이자 건축의 도시로 불린다나?

 광화문의 교보문고 앞 빗돌에 새겨진 문구를 책 마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맞다.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책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전달된 책은 읽혀서 사람을 변화시킨다. 사람을 가장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매개체가 인 것이다. 그래 이곳은 상상하고, 만들고, 공감하고, 나누는 책 마을이었다.

 09 : 59. 심학교사거리에서 도로를 횡단한다. ! ‘책 마을은 한적했다. ‘이라는 선입감 때문일까? 인근에 있는 ‘(헤이리)예술인마을이나 영어마을처럼 북적인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단지를 통과하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10 : 04. ‘직지길을 따라 걷다보면 출판단지 근린공원에 이른다. 출판단지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공원으로, 너른 잔디밭과 야트막한 언덕 등 피크닉 명소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 언덕은 지금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수북하게 쌓인 눈 덕분에 눈썰매장이 만들어진 모양이다.

 유수지 쪽에는 탐조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유수지를 찾는 철새 숫자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2023년에 생태모니터링을 했는데 101종의 조류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중에는 큰기러기·저어새·노랑부리저어새·수리부엉이·흰꼬리수리 같은 법정보호종도 포함되어 있단다.

 계속해서 직지길을 따라간다. 아니 8차선의 자유로 2차선의 직지로 사이에 보행로까지 품은 자전거도로를 따로 내놓았다.

 10 : 17. 유수지가 끝나는 곳에 노주교 사거리가 있었다. 머리 위로는 문발 IC’의 고가 진출입로가 얼키설키 지나간다.

 10 : 19. 문발교사거리(이정표 : 성동사거리까지 8.3km). ‘운정신도시 중 최초로 조성된 교하지구로 연결된다는 표식일 것이다. 교하(交河)는 최창조라는 풍수가가 통일 한국의 수도로 추천했던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인 1612(광해군 4)에는 풍수가 이의신(李懿信)이 왕에게 국도(한양)의 기운이 쇠하였고 교하는 길지(吉地)라면서 교하천도론을 적극 개진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계속해서 자전거도로를 따른다. ‘자유로 재두루미길(활자마을 가장자리를 따라 난 도로)’의 사이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차량 통행이 허락되는 듯 꽤 많은 차량들이 길가에 주차되어 있었다. 안전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라는 얘기다.

 10 : 37. ‘재두루미길과 만나는 지점에는 쉼터(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운동기구까지 배치한 걸로 보아 주민들의 쉼터로도 이용되는 모양이다.

 탐방로는 이제 재두루미길을 따라간다. 1차선의 차도를 중심에 두고 양옆에 점선으로 자전거길을 나누어 놓았다.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걸을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10 : 46. 슬슬 지겹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려고 할 때쯤 길은 직각으로 꺾여 마을(송촌동)로 들어간다. 이정표(성동사거리 7.9km/ 동패지하차도 7.9km)가 정확히 절반을 걸어왔음을 알려준다.

 탐방로는 이제 농로를 따라간다. 강변을 따르던 길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고 보면 되겠다.

 길은 두어 곳에서 나뉘고 있었다. 그것도 마을을 전방에 두고도 들녘으로 에돌아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때마다 이정표가 방향을 지시해준다.

 10 : 58. 그렇게 도착한 송촌동’. ‘동곡심방(銅谷心房)’이라는 편액을 건 3층 건물이 반긴다. 마당에는 거대한 석불이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의 설명으로 보아 운주사(雲住寺) 와불(臥佛)’을 모티브로 삼았지 않나 싶다.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운주사는 풍수비보설(風水裨補說)이 근저에 깔려있다.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선복(船腹)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며 선복에 해당하는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세웠다고 한다.

 안내판은 화순(전라남도)의 운주사에 있는 와불(臥佛)’에 얽힌 전설을 전하고 있었다. 운주사에 있는 수많은 불상들의 정점은 대웅전 왼편 산등성이에 누워있는 두 기의 와불이다. 각각 비로자나불좌상과 석가여래불입상인 이 와불은 실제로는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부처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민초들이 그렇게도 일어나기를 염원했던 그 부처님이기도 하다.

 11 : 00. 언덕으로 올라서자 2차선 도로인 소라지로가 반긴다. 탐방로는 소라지로를 따라 북진한다.

 11 : 06.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한강이 자신도 보아달란다.

 동쪽에서 굽이친 한강의 물줄기가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한강은 저 너머 북한 땅을 배경에 둔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끼고 동서로 흘러드는 임진강과 교회(交會)한다. 조금 더 나가보자. 한반도 문명의 젖줄이었던 한강과 임진강은 다시 북에서 유유히 내려오는 예성강을 만나 서해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길가에는 멋진 카페들이 여럿 들어서있었다. 그중에서도 우연히, 설렘이라는 디저트 감성 카페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멀리 보이는 한강 뷰와 통 유리창 밖의 초록뷰를 보며 디저트를 즐길 수 있다는데, 잠시 쉬다가자는 내 부탁을 들은 채도 않고 지나쳐버리는 걸 보면 집사람의 눈에는 별로였던 모양이다.

 메뉴판도 예술로 변할 수 있는가 보다. 이곳만의 시그니처 크림커피와 디저트를 마시다보면 여행의 재미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맞은편에는 ‘Eastern ~ One’이라는 인테리어 소품 창고형 매장도 들어서 있었다. 발길을 재촉하는 집사람의 기세에 눌려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짬을 내 들러보신 이석암 작가님이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할 곳이라고 귀띔해주신다.

 11 : 10. ‘송촌동 종점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간다. ‘소라지로327번길이라는데 2차선이었던 도로가 1차선으로 좁아졌다.

 길이 좁아진 탓인지 도로라기보다는 임도에 가깝게 느껴진다. 고갯마루에서는 살림채(한옥펜션)로 연결되는 갈림길(이정표 : 성동사거리 6.7km)을 만나기도 한다.

 11 : 18. 고개를 넘으면 재두루미길과 다시 만난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도로를 만나자마자 방향을 틀어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11 : 25. 탐방로는 마을(松村洞)을 관통한 다음, ‘재두루미길로 다시 올라서고 있었다. 그리고는 철책으로 둘러싸인 공릉천변을 따라 동진한다.

 11 : 28. 공릉천에는 송촌교가 놓여있었다. 아래로 물만 지나갈 수 있는 특징을 가진 다리다. 공릉천을 따라 침투하는 공비를 막기 위해서라는데, 실제로 침투한 적도 있었단다.

 다리 난간은 윤형철조망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그런데 서쪽을 향해서만 있는 게 아닌가. 하류 쪽은 철책으로 꽉 막혀 있는데 반해, 상류 쪽은 아무 제한 없이 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지금 걷고 있는 이 다리 자체가 민통선인 셈이다.

 공릉천의 상류 쪽 풍경. 공릉천(恭陵川)은 양주 칠봉계곡에서 발원 고양시를 거쳐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서 한강에 합류되는 길이 75km의 국가하천이다. 공릉천은 철새의 낙원으로 알려진다. 송촌대교 일원과 하구에 습지가 발달된 탓에 저어새·흰꼬리수리·재두루미 등의 철새가 관찰되는데, ·고라니 같은 야생동물들도 서식한단다.

 하류 쪽에는 송촌대교가 놓여있다. 힘차게 내달리는 공릉천의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백로와 기러기 떼 등 겨울 철새와 원앙, 비오리 등 천연기념물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리 몇 마리가 전부였다.

 11 : 33. 다리를 건넌 다음에는 왼쪽으로 간다. 이때 공공하수처리시설을 지나기도 한다. 시설의 담장을 끼고 쉼터도 들어서 있었다. 하수처리시설이 비릿한 농업비료 같은 냄새를 스멀스멀 풍긴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리를 잡아도 한참이나 잘못 잡았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탄현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왼쪽에 탄현 시가지가 들어섰다. 시골의 소읍인줄로만 알았는데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11 : 48. ‘소리지로를 빠져나와 지하 차도로 들어간다. ‘자유로에서 필승로로 빠져나가는 진출로 아래로 난 일종의 굴다리다.

 굴다리는 벽면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작품명은 '평화의 삼거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하구 습지 지역의 특성을 그림으로 담았단다.

 굴다리를 빠져나온 다음(이정표 : 성동사거리 2.2km), 이번에는 자전거 길과도 헤어진다. 이어서 통일동산관광특구 도로 표지판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11 : 51. 이후부터는 필승로를 따라간다. 50년 전, 육군 졸병이었던 시절 구호가 필승이었던 것 같은데.

 이즈음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11 : 58. 검단사 입구. 탐방로는 검단사 쪽으로 올라간다. 검단사(黔丹寺) 847(신라 문성왕 9)에 혜소(慧昭) 스님이 창건했다. 혜소는 얼굴색이 검어 흑두타(黑頭陀) 또는 검단(黔丹)으로 불리었는데, 사찰 이름은 그의 별명에서 유래됐단다. 노태우 전 대통령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두루누비(DURUNUBI)에서 제공한 GPX 트랙이나 이정표 등 모든 지표는 검단사 방향으로 가란다. 하지만 난 통일공원 이정표가 가리키는 장준하 추모공원으로 진행할 것을 권한다. 특별한 눈요깃거리나 이야깃거리가 없는 산길을 걷느니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운동가인 장준하 선생의 묘역을 찾아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아서이다.

 1975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사 한 장준하 선생은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혀있었다. 그러다 홍수로 묘가 파괴되면서 2012년 이곳으로 이장하게 됐단다. 공원에는 선생의 행적을 알리는 연혁이 적은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다. 공원 뒤편 산길을 50m쯤 오르면 선생의 묘가 나오는데, 그의 책 돌베개의 이름을 따 봉분을 돌베개로 만들었단다. 아래 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했다.

 11 : 59. 우리부부는 도로를 따라갈 경우 통일동산을 만날 수 없다는 선두대장의 엄포에 헷갈려 검단사 방향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지못해 50m쯤 올라갔을까 이정표(성동사거리 3.5km)가 왼쪽 산자락을 가리킨다. 이어서 초입의 침목계단을 오르자 살래길 표지판이 길손을 반긴다. 파주 시민들이 건강 증진 및 휴식공간으로 많이 찾는 둘레길이다.

 살래길은 엉덩이(또는 몸을)를 살래살래 흔들며 걷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장단콩웰빙마루를 출발 검단사·유승앙브와즈아파트·전망대를 거쳐 축구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에 이르는 4.2km 구간으로 걸어서 1시간30분가량 소요된다.

 검단산(黔丹山, 151.8m)의 허리쯤을 에돌아가는 둘레길은 곱디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은 경사까지 거의 없어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았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곳곳에 놓여있는 벤치나 평상에서 쉬어가면 그만이다.

 검단산은 그리 높지도 않은데다 완만하기까지 해서 누구나 산책하듯 가볍게 나서기 좋은 산이다. 거기에 살래길까지 조성되면서 길은 더욱 고와졌다. 주어진 시간에 따라 코스를 정할 수 있는데, 모든 코스를 다 누빈다고 해도 4-5시간이면 충분하단다.

 12 : 15. 길고 긴 계단 위에서 고려통일대전이 날개를 편 듯한 자세로 내려다보고 있다. 고려 왕과 충신들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이 내다보일 것도 같은 산등성이에 걸터앉아 옛 영화를 회상하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미공개 시설이라고 하나, 건설업체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되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무쪼록 잘 마무리되어 또 하나의 귀한 구경거리로 탄생했으면 좋겠다. 사진은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찍었다.

 12 : 22. 조금 더 걸어 살래길이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지점에 이르면, 나지막한 언덕 위에 만들어놓은 전망대가 길손을 맞는다.

 나무 계단을 오르면 앞이 탁 트이면서 오두산 정상의 통일전망대로부터 성동리를 지나 헤이리까지 뻗어간 오두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허리를 자유로가 지나간다. 길을 뚫기 위해 오두산 줄기를 뭉텅 잘라냈다.

 2021년에 개장했다는 장단콩 웰빙마루도 눈에 들어온다. 파주를 대표하는 특산품인 장단콩을 테마로 생산-가공-유통-판매와 체험-관광-문화가 어우러진 6차 산업의 농촌 융복합단지다.

 12 : 25. ‘호텔지구에 가로막힌 탐방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골짜기로 들어간다.

 산길은 한참이나 더 이어지고 있었다. 검단산 산책로는 크게 살래길과 능선길로 나누어진다. ‘평화의길은 이중 살래길만 오롯이 따른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탐방로가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이유이다.

 참호나 교통호 같은 옛 군사시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시설보수를 해온 듯 옛 모습 그대로이다. 군사적 요충지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12 : 48. ‘이제 그만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즈음에야 유아숲체험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테마별 숲속 놀이시설인데, 유아숲지도사가 참여하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단다.

 12 : 57. 골프하우스인 ‘Bunker Hill’을 지나자 이번에는 통일동산이 맞는다. ‘통일동산(統一東山)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 제시된 평화시 건설구상의 일환으로 조성된 안보·관광단지이다. 그 규모가 168만여 평이나 된다니 성동리 일대가 모두 포함된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이곳을 통일동산으로 적은 Kakao map의 표기는 잘못되었지 않나 싶다.

 13 : 14. 공원을 빠져나온 다음, ’평화로를 따라 200m쯤 더 진행하면 성동사거리가 나오면서 트래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글자조형물(통일동산관광특구)이 있는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가면 만날 수 있다. 프로방스마을 진입도로 입구다. 참고로 통일동산 관광특구는 탄현면의 성동리·법흥리 일원에 조성된 접경지역 최초의 관광특구이다. 평화와 역사, 생태와 예술문화 그리고 쇼핑까지 파주의 멋과 맛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이곳 파주는 메주콩으로 흔히 알려진 장단콩의 고향이다. 여기서 장단은 콩의 품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단 지역의 콩이란 뜻이다. 지금은 파주시 장단면이란 지명으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전에는 경기도 장단군(대부분 민통선 안에 있다)이었다. 그래선지 장단콩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눈에 띄는가 하면, 이를 브랜드로 내건 음식점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오늘은 16.70km 5시간에 걸었다. ‘평화의길이라는 이미지를 퇴색시키는 4.5km정도의 시내 구간을 생략했지만 시간은 코스 전체를 다 걷는 것만큼 소요됐다. 산길이 6km도 넘은데다, 눈까지 수북하게 쌓여 속도를 뚝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트래킹을 마치고 날머리 부근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들렀다. ‘평화의길에 근접해 있는 북한 땅 조망을 위한 전망대는 빠짐없이 안내해주겠다는 산악회의 배려 덕분이다. 아무튼 이 전망대는 1992 98일 문을 열었다. 북한 인권을 포함한 북한실상 알리기 차원의 많은 자료를 전시·운영하고 있으며, 북한 관산반도와 북한 주민들의 실제 생활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강화나 김포에서 들렀던 전망대들과는 달리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흔히 통일전망대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전망대'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정말 잘 꾸며진 박물관이자 전망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하 1층은 어린이 체험관’, 1층과 2층은 상설전시실 및 기획전시실, 그리고 3-4층은 전망대로 꾸몄다. 4층에 있는 전망라운지도 한번쯤 들러볼만 하다.

 1-2층의 전시실. 국립통일교육원에서 운영하는 시설답게 통일교육과 북한과 관련한 정보를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탈북민들이 직접 증언한 북한 경제, 사회실태 인식보고서  북한인권보고서 내용 등 다양하고 알찬 통일교육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층의 실내 전망대’. 원형의 유리창 너머로 북녘 땅을 살펴볼 수 있다. 오두산 인근을 축소시킨 미니어처를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유리창에는 그 너머로 보이는 북녘 땅의 지명을 적어 실물과 대비해가며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그곳에 들어선 선전마을에는 인민문화회관과 소학교, 김일성별장, 북한군 초소 등이 있으며 주민은 4,000여 명이 산단다.

 유리창이 시야를 방해한다고 생각되면 야외전망대로 나가볼 일이다. 북한의 관산반도를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실시간 XR확장현실 망원경을 통해서인데, 망원경으로 담은 장면을 QR코드로 스캔해 저장해 갈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디지털 세대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난간에 서면 서울의 젖줄인 한강과 북에서 흘러내리는 임진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하나가 된 물줄기는 조강으로 변해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파주의 옛 이름인 교하(交河)를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지난 달 신형 극초음속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는 북한의 발표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북한 땅이 더 스산하게 보인다. 그 기분에 떠밀려 개풍군(황해북도)을 망원경으로 당겨보기로 했다. ‘쌀로써 사회주의를 지키자는 등의 선전구호가 다르게 변해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구호는 눈에 띄지 않고, 대신 지게를 지고 이동하고 있는 북한 농민들만 눈에 들어왔다.

 밖으로 나오면 고당 조만식 선생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1883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평양 숭실중학교와 일본 명치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가 해외로 떠나버린 이 고난의 땅에서 애국·애족 운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렀다. 해방이 된 후에는 북한 동포를 버리고 자신만 월남할 수 없다며 북한 땅에 남았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자유민주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소련 군정 및 공산당에 맞서 싸우다 끝내 순국하셨다.

 실향민을 위한 공간인 망배단(望拜壇)’도 만들어져 있었다. 명절 때면 실향민과 실향민 후손, 탈북민 등이 차례상을 차려놓고 북녘을 향해 절을 올린단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한 오두산은 해발 118m의 야트막한 산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과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던 곳이다. 통일전망대가 들어서면서 이곳에 있던 오두산성(鰲頭山城,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의 성터도 없어져버린 것으로 알았는데 그 흔적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사진은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 작가님 것을 빌려왔다. KBS드라마 광개토대왕을 보면서 남다르게 받아들였던 관미성(關彌城)’을 그 흔적이라도 볼 수 있게 해준 작가님께 감사드려본다.

 

서산 아라메길 2구간(해미 국제성지순례길)

 

여 행 일 : ‘25. 1. 25()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덕산면·해미면 일원

여행코스 : 대치2리 입구우리옹기박물관한티고개대곡1리 마을회관송덕암산수저수지해미읍성해미국제성지(거리/시간 : 11km, 실제는 해미읍성까지 10.71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아라메길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고유어인 를 합쳐 만든 명칭으로 서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누구나 자유롭게 산책 또는 트래킹 할 수 있도록 서산 관내의 8개 노선을 선정 세상에 내놓았다.

 

 09 : 22. 들머리인 대치리 2 입구(충남 서산시 덕산면 대치리)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에서 내려와 45번 국도(예산방면)를 타고 10km쯤 들어오면 대치리 버스정류장(2구 입구)에 이르게 된다.

 서산 아라메길 2구간인 해미 국제성지순례길은 조선시대 말 천주교 박해 때 천주교인들을 압송했던 해미순교성지-한티고개 구간(11km)이다. 고통 속에서 끌려가면서도 목숨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했던 옛 순교자들의 신앙심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코스로, 해미순교성지가 교황청으로부터 국제성지로 지정된 것을 반영했다.

 내포 문화숲길을 구성하는 천주교순례길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충의사(忠義祠, 윤봉길의사 사적지)와 해미순교성지를 잇는데, 3/1쯤에 위치한 한티고개에서 해미순교성지까지가 서산 아라메길과 중복된다고 보면 되겠다.

 09 : 24. 윤봉길로(45번 국도, 해미방면)를 따라 50m쯤 걷다가 오른쪽 소로로 들어간다. 일 년 중 가중 춥다는 대한(大寒)’ 5일 전에 지났다. 성급한 일부 기상전문가들은 한랭전선의 이동경로를 제시하며 올 추위는 이미 끝났다고도 했다. 그래서일까? 언제 추웠냐는 듯 날씨가 포근해졌다.

 이정표가 내포 천주교순례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1.72km쯤 더 걸어야 해미성지순례길의 시점인 한티고개를 만날 수 있단다. 하나 더. 이 길은 고통을 받으며 끌려가면서도 자신을 지키려했던 옛 순교자들의 신앙정신을 되새겨 보며 걷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참회하고 기도하며 걸어볼 일이다.

 이 구간은 삽교의 용머리마을, 배나드리마을 등지에서 집단으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으로 압송하던 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순교자들이 느꼈을 애틋함과 비장함이 느껴질 것은 당연. ‘순례는 걸어가는 기도다라고 했다. 맞다. 오늘의 내 화두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이다.

 초입에서 만난 또 다른 이정표는 화장실 위치까지 담았다.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이지 싶다. 참회하고 기도하며 걷다보면 속도는 자꾸 떨어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생리작용을 해소해야 할 곳을 찾게 될 테니까 말이다.

 09 : 25. 마을길(대치1)을 따라 한티고개로 간다. 한티고개로 올라가는 길은 과거 내포지역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이 해미로 압송되어 가던 고통의길 이었다. 그동안 천주교는 믿음이 허락되었고, 확장된 교세를 자랑이라도 하듯 전국 어디서나 성당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나지막한 산들에 둘러싸인 아담한 마을길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가야산(伽倻山, 678m)’이 성큼 다가온다. 해인사가 있는 합천의 가야산만큼은 아니어도 충청권에서는 아름답기로 손꼽이는 명산이다. 특히 산자락에 품고 있는 용현리 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은 내가 본 석불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09 : 32  09 : 35. ‘우리 옹기박물관이란다. 옹기는 숨을 쉬는 그릇이다. 옹기토에 있는 모래 알갱이가 굽는 과정에서 미세한 숨구멍을 만들어 내는데, 이 숨구멍들이 옹기의 안·밖으로 공기를 통하게 함으로써 발효 작용을 돕는다. 아무튼 문이 열려있기에 들어가 봤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눈요기만 하고 나왔다.

 옹기만 모아놓았을 뿐 직접 만들지는 않는 모양이다. 옹기 제작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는 흙과 불(땔나무), 가마 중 어느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옹기는 흙···바람이라는 사총사가 가마 속에서 만나면서 만들어진다. 인체에 무해, 무독한 그릇으로 자연으로의 환원성이 좋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역사 민속자료관도 꾸며져 있었다. 옛 사람들의 생활용품을 전시하는 모양인데 이 역시 구경할 수는 없었다.

 이정표에 적혀있던 화장실인 모양이다. ! 오는 도중에도 간이화장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문이 잠겨 있었지만.

 09 : 42. ‘순례길답게 곳곳에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key map을 단 이정표는 한티고개까지 0.85km쯤 남았음을 알려준다. 반대방향은 삽교성당(17.55km), 여사울성지(31.7km)로 연결된단다.

 CCTV가 지켜보고 있으니 농작물에 손대지 마란다. 길을 걷는 여행자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둘레길은 지역 주민의 생활 터전을 지나기 때문에 농작물을 따거나 논밭에 함부로 들어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주인 있는 임산물 채취도 마찬가지다. 지역 주민에게 농작물이나 임산물은 소중한 재산이자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09 : 45. 마지막 민가. 깔끔하게 포장되었던 길은 이곳에서 비포장으로 바뀐다.

 이후부터는 산길을 올라간다. 길은 고운 편이다. 폭신폭신한 흙길에다 경사까지 완만해서 순례삼아 나들이 나온 노약자들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09 : 52. 첫 번째 조형물. 이곳은 천주교 순례길’, 그러니 저 조형물은 십자가의 길 제1처인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훑어봐도 그런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이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며 묵상 및 기도를 드려보겠다는 내 결심이 흐트러져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2(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를 연상시키는 조형물은 세 번째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여정이다.

 네 번째 조형물도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섯 번째 조형물. 5처였다면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졌어야 한다. 다행이라고나 할까? 여섯 번째는 6(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를 연상할 수 있었다.

 기력이 떨어지신 예수님이 넘어지는 장면은 3처와 7, 그리고 9처에 해당된다. 이곳도 일곱 번째와 아홉 번째는 이를 연상시키는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10(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 11(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12(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는 순서는 물론이고 전하고자 하는 이미지까지 제대로 되어 있었다.

 13(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는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과 멕시코시티의 소우미술관에서 만났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를 쏙 빼다 닮았다. 피에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맞은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뜻하며, 기독교 예술을 대표하는 주제 중 하나다. 주로 성모 마리아가 부활하기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예술 작품으로 나타난다.

 14(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도 해당 장면을 연상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전반부의 몇 개만 문제가 있었던 셈이다. 그 때문에 나는 제대로 된 십자가의 길 대신 간단한 기도로 끝내는 우를 범해버렸고.

 10 : 08. 한티고개에 올라선다. ‘한티는 큰 고개라는 의미다. 해미면(서산시)과 덕산면(예산군)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해발 297m), 옛날에는 이곳에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널따란 터로만 남아있던 것을 성지순례길을 조성하면서 그에 걸맞는 조형물과 이를 설명하는 안내판들로 채워 넣었다. 정자에 파고라, 화장실을 배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기념 조형물. 포승줄에 묶인 채 압송되고 있는 천주교인들을 형상화 했다.

 천주교 박해 때, 이곳에는 우물과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신자들을 잡아들이고 호송하던 포졸이나 육신의 고통을 견뎌야 했던 신자들 모두에게 이곳은 고통과 희망이 함께 하는 공간이었다. 포졸들에게는 해미읍성이 멀지 않았고, 신자들에게는 천국이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안내판은 이곳 한티고개가 천주교순례길이 지나가는 한 지점이자, 아라메순례길의 출발지임을 알려준다.

 이곳은 해미성지순례길. 참된 순례자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마음가짐으로 먼저 고해성사부터 보란다. 일상에서의 잘못을 반성하는 참회와 회개의 태도를 갖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나는 빵점짜리 순례자다. 고해성사를 드리지 못한 채 길을 나섰으니 말이다.

 고갯마루에서의 조망. 가야산과 덕숭산 사이로 덕산시가지가 고개를 내민다. 그 뒤로는 내포지역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가야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다. 채석장으로 보이는 저 암장이 그 증거다. 하나 더. 이곳은 금북정맥(錦北正脈)의 한 지점이기도 하다. 한남금북정맥의 칠장산(492m, 경기 안성)에서 분기, 칠현산·오서산·가야산·팔봉산·백화산 등을 일구면서 남·서진하다 태안반도의 안흥진(安興鎭)에서 그 숨을 다하는 길이 295km의 산줄기다.

 10 : 14. 하산 길, 아니 해미 성지순례길은 올라왔던 반대(서쪽) 방향으로 열린다. 그 초입에 십자가의 길 1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받침돌에 주문(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을 적고, 그 위에다 이미지를 판화 형식으로 새긴 반구(半球)를 올려놓았다.

 아까 올라올 때 놓쳤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 빌라도의 관저라고 추측되는 곳부터 갈바리아에 이르기까지 각 장면의 사건이 일어난 곳들을 따라 걸으며 묵상했던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십자가의 길(Stations of the Cross)’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무덤에 묻히기까지 그리스도 수난의 마지막 사건들을 묘사한 14장면의 연속 그림 또는 조각을 말한다. 이 연속 장면들은 대체로 성당이나 경당 안벽에 배치해두지만 공동묘지, 병원 복도, 종교단체 건물, 산기슭 같은 곳에 두기도 한다.

 시작부터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길이 나뉘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서산아라메길(2코스인 해미성지순례길)’로 옷을 갈아입은 이정표는 이제 해미읍성과 해미순교성지를 가리킨다.

 이정표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곳곳에서 가이드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오늘 아침. 새벽 3시에 눈을 뜬 나는 컴퓨터로 달려가 예루살렘의 성지순례 동영상을 찾아봤고, 쏟아지는 눈물을 한참이나 멈출 수 없었다. 피정을 위해 매년 수도원을 찾던 젊은 시절, 통곡 기도를 드리던 때 이후로는 첫 경험이었다. 그런 감동의 여운으로 2처를 맞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묵상하면서 기도를 드린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묵상하는 신심행위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부활절 전 사순 시기의 금요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행한다. 올해는 420일이 부활절이니 조금 앞당겨서 한다고 여기면 되지 않겠는가.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이어서 5처의 주문인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짐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차례로 드린다.

 10 : 41. 14(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니다)를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길은 끝난다. 한티고개에서 이곳까지는 500m, 기도를 드리면서 내려오다 보니 27분이나 걸렸다.

 10 : 45. 산속에서 만난 민가. 가축을 키우는지 악취가 진동을 한다. 천국에서 노닐다가 세속으로 되돌아왔다는 증거라고나 할까?

 10 : 53. 해미폐차장. 널따란 공터에는 분해된 차량들로 가득했다. 차량 부속을 추출해 재활용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폐차된 차량을 통째로 압축시켜 고철로 만들던 영화 장면이 전부인 그동안의 앎이 얕아도 너무 얕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10 : 55. ‘대왕석재를 스치듯 지나 2차선 도로인 큰골로로 내려섰다. 이정표(해미읍성 6.9km/ 한티고개 정상 1.3km)가 도로를 가로지르라며 건너편을 가리킨다.

 이후부터는 마을길(한티2)을 따라간다. 길 양옆으로 듬성듬성 민가가 들어서 있다. 예스런 풍치를 물씬 풍기는 돌담들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럽, 그것도 동유럽에서나 볼 법한 고성(古城)을 닮은 저 건물의 정체는 대체 뭘까?

 11 : 05. 대곡1리 경로당. 대곡마을 구간은 순교자들이 두 번이나 지나갔다고 한다. 포승줄에 묶인 채 해미읍성으로 끌려갔고, 유골이 되어 다시 한 번 머물다 갔단다. 1935 41, 여숫골에서 순교자들의 유해 중 일부가 수습됐고, 그날 이 마을에 있던 대곡리 공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는 것이다.

 이를 기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을 앞에 순례자들을 위한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파고라에 벤치는 기본, 음수대와 화장실까지 갖췄다. 덕분에 걷기 행자들에게 최고의 쉼터가 되어준다.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어 대곡리 공소를 찾아보려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안내판만으로는 위치를 추적할 수 없었고, 길을 물어볼만한 주민들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11 : 10. 길은 이제 대곡1을 따라간다. 대도시 근교의 부잣집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이 즐비한 구간이다. 굵고 잘 생긴 소나무들이 즐비한 주변 산자락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11 : 20. 송덕암교차로. 이정표(해미읍성 5.5km/ 한티고개 정상 2.7km)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티로(45번 국도)’를 건너란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큰골로를 따라갔다. 한티로의 오른쪽에 붙어서 가는 2차선 도로인데, 그 끝에 송덕암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색이 전통사찰(48)인데 뭔가 볼거리가 있지 않겠는가.

 11 : 25. 송덕암(松德庵)은 들어앉은 터를 가야산(伽倻山)이 아닌 상왕산(象王山, 가야산의 옛 이름)으로 적었다. 문지기인 금강역사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찰은 그 자체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세계로부터 독립된 공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금강역사나 사천왕이 그 경계를 지키는데, 송덕암은 금강역사가 그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한국불교태고종 소속인 송덕암은 무척 아담한 절집이었다. 금당인 약사보전(藥師寶殿)과 종각. 두어 채의 요사(佛思滿堂)가 전부다. 아니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산신각도 나온다고는 했다. 절은 1785(정조 9) 승지 임하(任夏)가 말을 타고 가다 미륵여래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지었다고 알려진다. 부처님의 덕을 칭송한다는 의미로 송덕암이라 했단다.

 11 : 32. 송덕암 근처 원터교차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4차선 도로라서인지 오가는 차량들이 무섭도록 빨리 달린다.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건너편에서 순례길과 다시 만나 원터교(이정표 : 해미읍성 5.0km)’를 건넌다. 다리 건너는 원룸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인근에 한서대학교(서산캠퍼스)가 들어서면서 한적하던 산골이 요란스런 도시적 풍경으로 바뀌었다.

 11 : 34. 이후부터는 해미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말이 천()이지 개울 수준이다. 덕분에 앙증맞은 철다리나 능수버들의 휘휘 늘어진 가지로 눈요기를 할 수 있었지만.

 11 : 41. 목교로 해미천을 건넌다. 예전에는 그 뒤로 보이는 민가를 지나 해미천을 건넜다고 한다.

 남의 집 마당을 무단으로 지나다니는 게 미안했다는 후기가 많이 눈에 띄었는데, 그게 서산시 관계자의 귀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탐방로는 이제 해미천의 오른쪽 둑길을 탄다.

 오른쪽, 가야산 자락에는 항공관련 학과로 특화된 한서대학교(서산캠퍼스)’가 들어섰다. 그 앞에는 웬만한 소읍 수준의 학사촌도 형성되어 있었다.

 11 : 49. 탐방로는 산수저수지의 호안을 따라 새로 조성해놓은 숲길로 연결된다. 저수지 바로 위 해미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물고기 모양의 조형물을 씌워 저수지와 함께하는 구간임을 은연 중 알려준다.

 내포 문화숲길(천주교순례길 4코스)과 서산 아라메길(해미성지순례길)이 공동으로 쓰는 구간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각각의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소나무숲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이 구간은 성지순례길의 백미로 꼽힌다. 호숫가를 따라 이어지는 1.5km 길이의 숲길 중간 중간에 쉼터와 조형물, 이야기 안내판 등을 설치해 걷고 있는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도록 했다.

 11 : 57  12 : 07. 첫 번째 쉼터. 전망데크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쌍으로 온 순례자들을 위해 흔들의자까지 배치하는 센스도 발휘했다. 덕분에 우리부부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안내판은 천주교 탑압 당시의 압송로가 산수저수지에 잠겨있음을 알려준다. 전해주는 얘기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놓았다. 천주교인들이 묶인 채로 한티고개를 내려오던 장면, 서문 밖에서 자행된 학살 장면 등을 당시 이곳에서 살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전해준다.

 안내판과 대조해가며 호수를 살펴본다. 그리고는 굴비 엮듯 포박당해 끌려가던 순교자들을 떠올려본다. 내포의 각지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해미로 압송돼 가기 위해서는 가야산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삽교천 인근에서 체포된 교인들은 덕산을 거쳐 처형장소인 해미읍성으로 가야했다. 그러니 순교자들에게 있어서 저곳은 순교를 위해 떠나는 생의 마지막 순례길이었던 셈이다.

 길은 호숫가를 따라간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는데, 가끔은 제법 가파르게 변하기도 한다.

 가끔은 물가로 내려서기도 한다. 물속에 나무들이 잠겨 있는 것이 주왕산 근처에 있는 주산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비록 왜소하기는 하지만 여름철에 찾으면 제법 볼만한 풍경을 만날 수도 있겠다.

 12 : 12. 두 번째 쉼터. 파고라에 벤치는 물론이고, 운동기구 몇 점까지 배치했다. 걷기 여행자와 주민들이 함께 쓰는 공간을 만들려고 했던 모양이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천주교인들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설치했다. 해설판도 눈에 띈다. 끌려가는 천주교인들은 주민들이 보기에는 죄인이었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정작 천주교 신자들은 누구보다 당당했단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천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맞다. 어떤 이는 보는 것을 믿고, 다른 어떤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

 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간다. 굵고 휜 것이 전형적인 우리나라 소나무이다.

 12 : 30. 셋째, 넷째에 이은 다섯 번째 전망대는 아예 공중에 걸려있다. 하지만 잡목에 둘러싸여 썩 좋은 조망은 보여주지 못한다.

 12 : 34. 제방에 가까워지자 취수탑이 고개를 내민다. 산수저수지의 제당 형식은 균일형 필댐(fill dam)이며 취수 형식은 취수탑형이란다.

 취수탑은 그 자체를 로 표현했다. ‘오늘도 예쁘구나. 산수라는 문구에서 빼어난 경관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산수저수지는 높이 23m의 제방을 295m 길이로 쌓아 만든 저수지다. 그 둑에 말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서산과 말이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산수저수지(山水貯水池), 가야산에서 발원한 해미천의 상류 지역에 입지한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진 농업 관개용 저수지다. 1953 3 3일 착공하여 1962 12 31일 준공되었다.  344 5,370톤의 물을 모아 723의 농경지에 대준단다.

 둑 아래에는 지성정(枳城亭)’이라는 국궁장이 들어서 있었다.

 12 : 40. 둑을 내려온 탐방로는 서해안고속도로의 교각 아래를 지나간다. 시나브로 길이 나뉘는 구간이나 곳곳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을 찾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12 : 46. 해미천의 오른쪽 둑길을 따라간다.

 건너편 암벽에 뻥 뚫린 굴이 두엇 눈에 들어온다. 그중 하나는 철책으로 출입을 막고 있었다. 경쟁력이 다해 문을 닫은 광산의 갱구이지 싶다.

 12 : 54. 다리 건너 해미 예수재림교회쪽으로 간다. 오늘은 토요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은 오늘이 안식일이다. 설 명절을 앞두어선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신자들의 손에 선물보따리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이번에는 해미천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벚나무로 치장된 멋진 구간이다. 봄이면 저 길에 꽃비가 내린다고 했다. 얼마나 많이 내리는지 수북하게 쌓일 정도란다. 그게 호사가들의 눈에는 흰 눈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봄 눈이라는 애칭으로 둔갑시켜 시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벚나무 꽃길을 따라 들어선 저런 ‘Cafe & Gallery’들이 그 증거다.

▼ 13 : 07. 잠시지만 해미천의 둔치를 따라가기도 한다길은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은 벚나무 아래를 지나간다그러다 무지개다리로 해미천을 건넌다보행자 전용 다리다.

 다리 오른편은 황락천이 해미천으로 흡수되는 두물머리이다. 황락리에서 발원 남서쪽으로 흐르다 읍내리에서 해미천과 합쳐지는 2.7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다리에서 본 해미천’.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양쪽 둔치에 생태탐방로 및 자전거도로를 설치하는 등 주민들을 위한 친수(親水) 및 생활체육 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다.

 13 : 12. 이번에는 해미천의 오른쪽 둑길을 따라간다. 벚나무 그늘 아래로 데크길을 내놓았다. 그러다 해미교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해미읍성으로 간다.

 13 : 18. 해미읍성에 이른다. 10.71km 3시간 50분을 걸어 도착했다. 종점인 해미순교성지까지는 아직도 1.8km쯤 더 가야 한다. 하지만 어제 토사곽란으로 몸살을 앓았던 집사람의 체력으로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더 이상 못 걷겠다며 이쯤에서 산악회버스가 있는 운산면소재지로 가잔다. 하긴 병원에서 응급조치까지 받고 겨우 길을 나섰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참고로 산악회에서 진행한 서해랑길 64-3코스의 종점은 운산면소재지에 있는 운산교이다. 우리부부는 개심사, 보원사지, 용현리 마애삼존불상 등 이 구간에 있는 명소들을 4개월 전에 이미 둘러봤기에 서해랑길 대신 천주교성지순례길을 걸었다.

 나머지 구간의 풍경들은 2주 전 64-2코스 때 찍어두었던 사진을 올려본다. 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해미읍성(사적 제116)은 낙안·고창 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모습을 간직한 3대 읍성에 꼽힌다. 서해안지역은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이를 막기 위해 태종 17(1417)부터 세종 3(1421)까지 석성으로 쌓았다.

 해미읍성은 문화재이다. 하지만 천주교인들에게는 순교성지로서의 위치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읍성 한가운데 호야나무로 불리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박해의 증인처럼 서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했다는 나무이다.

 바로 옆에는 1790년부터 100여 년간 내포 일대의 천주교인을 잡아 가두었던 옥사를 복원해 놓았다. 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이며, 성인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복자 김진후 비오님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수령이 24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 뒤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 관아(官衙)가 있다. 조선 초기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던 곳으로,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해(이를 겸영장이라 함) 지역을 통치했다. 당시 내포지방 13개 군현을 담당하던 해미읍성 겸영장은 군권과 관권을 한 손에 쥐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까닭에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고 해당 지역 교도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단다. 그 숫자가 무려 1,000여명에 달했다나?

 서문(지성루)으로 빠져나가 진둠벙교로 해미천을 건너면 해미순교자국제성지가 맞는다.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는 곳이다. 1800년대의 천주교 박해 때, 기록되지 않은 천주교 신자 1천여 명이 사약·몰매·교수형·참수형·동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됐고 심지어 산 채로 땅에 묻는 생매장과 물에 빠뜨리는 수장형까지 자행됐다. 그렇다고 유명한 성인이 있거나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이름이나 세례명을 남기고 순교한 132명의 천주교 신자가 기록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교황청은 2021년 국제순교성지로 지정했다. 국내에서 첫 번째이며,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다. 세계적으로도 역사적 장소인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산티아고 등 3, 성모 발현지인 멕시코 과달루페와 포르투갈 파티마 등 20, 성인 관련 순례지 6곳 등이 있을 따름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모범으로 인정하고 이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무덤을 형상화 했다는 순교자성지 기념관’. 순교자들의 희생과 역사를 전해주는 곳으로, 순교 당시의 모습을 담은 조각과 판화, 성지에서 발굴된 순교자 유해가 안치돼 있다.

 안으로 들면 이곳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진이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가 신앙의 증거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라는 축복과 함께 게시되어 있다. 2014 816,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화문에서 조선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거행했다.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마르티노), 김진후(비오), 이보현(프란치스코)  3위도 함께 시복됐다. 교황은 이튿날 해미순교성지에 들러 순교자 3위의 기념비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기념관에는 여숫골에서 발견된 유골이 모셔져 있었다. 그밖에도 당시의 유물과 조각·그림·사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천주교의 역사와 발굴과정 등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 하나 더. 동구 밖 숲정이라 부르던 곳은 신자들이 생매장 당한 곳이다. 당시 순교자들은 죽으면서도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외쳤다고 한다. 주민들에게는 그게 여수머리로 들렸던 모양이다. ‘여우에 홀린 머리채로 죽어갔다 '여숫골'이라 불렀단다.

 신자들의 가슴과 머리를 으스러뜨리던 자리개돌’. 신자들을 처형하는 방법은 잔혹했다. 군졸들은 이들이 사용하던 성물을 밟게 하고 돌다리에 눕힌 뒤 커다란 돌로 내리쳐 돌다리를 도마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신자들이 흘린 피가 해미천을 붉게 물들이며 거머리바위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진둠벙. 천주교인들을 빠뜨려 죽게 한 아픔이 깃든 곳으로, 자그마한 연못에 한복을 입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두 여성(한 분은 성모인 듯)의 석상이 물에 반쯤 잠겨 있다. 당시 100년 가까이 사형장으로 이용되던 서문 밖 냇가는 민가와 가까웠다. 그래서 조금 떨어진 벌판에다 수십 명씩 생매장하기 시작했단다. 군졸들은 생매장터로 가기 전 개울과 연결된 둠벙’(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에 오랏줄에 묶인 신자들을 산 채로 수장시키기도 했단다. 훗날 이 둠벙은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죄인둠벙'으로 불리다 말이 줄어 '진둠벙'으로 바뀌었다. 그래선지 순교자들의 유해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맨 뒤에는 해미순교탑이 들어섰다. 무덤을 형상화 한 둥근 봉우리 위에 16m 높이의 흰색 탑이 세워져 있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개의 날개 형상이 십자가를 떠받치는 모양새이다. 그 앞에는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가 있었다. 둥근 모양의 분묘는 아랫부분을 화강암으로 둘렀다. 앞쪽 양옆으로 한 쌍의 문관석이 세워져 있다.

 2014 8 16일 시복된 3위의 복자 상.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 정사박해의 여파로 1800 19일에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 10년간의 옥고 끝에 1814 1020일 해미옥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복된 이분들 말고도 해미에는 132명의 순교자가 더 있다.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무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DMZ 평화의길 4코스(전류리포구-고양종합운동장)

 

여행일 : ‘25. 1. 18()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양천읍·운양동 및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일원

여행코스 : 전류리포구전류정 충절유적봉성리교차로운양삼거리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일산대교고양종합운동장(거리/시간 : 15.2km, 17.34km 4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전류리 포구(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전류리)

김포한강로(올림픽대로 개화 IC에서 연결) 운양·용화사 IC에서 내려온다. ‘금포로(78번 지방도)’를 따라 4km쯤 북진하면 전류리포구에 이른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포구 북쪽 250m 지점에 위치한 평화누리길 쉼터에 설치되어 있다.

 전류리포구에서 출발 한강의 서쪽(김포) 가장자리를 따라 올라오다 일산대교를 건너 고양(일산)으로 넘어가는 15.2km짜리 여정. 철책과 자연을 벗 삼아 걷는 김포에서의 마지막 구간으로,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에서 철새와 텃새를 살피며 자연을 즐기고 나면 어느덧 김포와의 아쉬운 이별을 고하게 된다.

 08 : 25. 길을 나서기 전, ‘전류정 여흥민씨 충절유적부터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하성방면의 금포로(78번 지방도)를 따라 150m쯤 걸어가면, 유적지로 올라가는 길이 행운부동산 맞은편으로 열린다.

 초입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봉성산 꼭대기에 위치한 재두루미전망대까지 다녀올 것을 권한다. 김포 제일의 조망 명소 중 하나로 꼽히기 때문이다.

 봉성산은 해발 129m의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군사시설이 정상을 차지한 금단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김포시의 노력으로 정상을 한강의 상·하류와 김포평야 일대를 비롯해 한남정맥의 마지막인 문수산, 파주의 심학산, 그리고 북한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기존의 군사시설을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홍살문이 세워진 걸로 보아 경의(敬意)를 표할만한 인물을 모시는 곳이란 의미일 것이다. 맞다. 이곳은 국가가 인정하는 여흥민씨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상징하는 유적이다.

 정성지문(旌垶之門). 1636,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참전한 민성(閔垶, 1586-1637)을 비롯한 일가족 12명의 정려를 모신 전각이다. 민성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가 아들 삼 형제와 함께 의병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화성이 무너지자 아들··며느리 등 12가족이 모두 자결했단다. 인조 18(1640), 조정은 민성의 품계를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올리고 12정려 충신 정성지문을 하사했다. 한꺼번에 하사된 정려로는 가장 많은 수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단다.

 전류정(顚流亭)’은 고려 말 민유(閔愉, 출생·생몰 년대 미상)가 신돈의 난을 피해 봉성산 기슭에 지은 정자다. 하지만 정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표충사(表忠祠)라는 제각이 여흥민씨 문중에서 선조의 업적을 기리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민유는 충혜왕 원년(1331)에 병과 1위로 급제하여 밀직사사, 진현관대재학, 지춘추관사 등을 지낸 고려 후기의 인물이다. 신돈의 폭정에 회의를 느끼고 도읍인 개경과 가까우며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머물며 전류정을 짓고 학사 주사옹과 교류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08 : 36. ‘평화누리길 쉼터로 되돌아와, 금포로(78번 지방도)를 따라 남진하면서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다. 철책으로 중무장한 한강변을 따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08 : 39.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전류리 포구를 만났다. 전류리는 한강 내수면 어업의 최전방 포구다. 어부들은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 김포대교부터 전류리 어로한계선(하류 쪽으로 200m 지점에 월선금지 부표가 떠있다)까지 14km 구간에 그물을 친다. 20척 가량의 소형 어선이 선단을 이뤄 웅어·숭어·황복·참게를 잡는데, 여기서 잡히는 참게는 수라상에 올랐다고 한다. 겨울철인 요즘에는 쫀득쫀득해 씹는 맛이 일품인 제철 숭어가 많이 잡힌단다.

 전류(顚流)란 강물과 바닷물이 뒤섞인다는 뜻이다. 밀물 때 소용돌이로 차오르는 강물의 헐떡거림이 장관이고 진풍경이라고 했다. 강바람이지만 서해 개펄냄새도 물씬 풍긴단다. 하지만 포구로 가는 입구가 굳게 닫혀 있는데다, 위압스런 저 감시탑이 무서워 다가가 보지는 못했다.

 길은 봉성산의 산자락을 에돌아간다. 앞에서 거론했던 閔愉가 산에 올라 고려의 사직을 걱정하고 국왕을 사모했다고 해서 국사봉(國思峯)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옛 문헌에는 진류산(鎭流山) 또는 전류산(顚流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강 건너는 심학산이 우뚝하다. 파주시에 있으니 통행이 자유로운 남녘땅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념의 산물인 철조망은 이 모든 것을 훼방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수로에 막힌 전류리 포구는 생각보다 을씨년스럽고 신산했으며, 도로변의 식당은 허름한 작업장 같은 느낌을 물씬 풍겼다.

 어선에 달린 저 깃발은 고기잡이 허가를 받았다는 표식이란다. 그뿐 아니다. 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마다 군부대 초병에게 출항 신고도 해야 한단다. 아무튼 저 물길을 따라 진객 웅어가 거슬러온다고 했다. 그걸 안강망으로 잡는데, 이게 여간 맛있는 게 아니란다.

 08 : 48. ‘해뜨는 한강정원’. 봉성리는 해돋이 명소로 유명한 지역이다. 탁 트인 한강 뷰를 자랑하는 언덕에 작은 공원을 만들고, 크고 작은 수목과 함께 다양한 초화류를 심어 계절의 변화를 다양하게 느껴볼 수 있도록 했다.

 08 : 52. ‘봉성로가 갈려나가는 봉성교차로’. 한강변을 따르는 길은 매력적인 산책로가 분명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어른 키를 훌쩍 넘기는 이중 철책이 한강 조망을 방해하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 저장된 10년쯤 전의 언론보도는 철책(김포대교-전류리포구)을 걷어내겠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쯤은 저 철책 대신 아름다운 공원이 들어앉아 있어야 하지 않나?

 하성면의 강변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이곳 하동천을 경계로 양촌읍에 바톤을 넘겨준다. 이후부터는 양촌읍의 저 강변을 따라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하동천이 한강에 합류되는 지점에는 집중호우 때 빗물을 한강으로 퍼내는 하동배수펌프장이 있다. 참고로 한강 하구에 위치한 김포는 한강 둑보다 지대가 낮은 데다 홍수와 서해의 밀물이 겹치면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펌핑으로 빗물을 한강으로 퍼내야 한다.

 하동천은 기러기·청둥오리 같은 조류와 두더지·너구리·족제비 등의 포유류가 서식한단다. 135종에 달하는 관속식물도 만날 수 있다나? 그런 생태계의 보물창고가 개발로 인해 훼손이 심해졌던 모양이다. 김포시에서 생물의 서식환경 제공과 수질개선을 위해 호소형 습지를 조성했단다. 관찰데크, 망원경, 조류전망대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생태학습장을 겸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계속해서 금포로를 따라간다.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로가 따로 나있다.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는 헤어져서 가는 구간이기도 하다.

 09 : 02. 이 멋꼬? 난쟁이 세상에라도 들어온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꼬맹이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애완동물들을 테마로 한 체험 동물농장인지도 모르겠다.

 09 : 06. ‘봉성제2배수장’. 폭우로 팔당댐이 방류를 시작하면 8시간 뒤 물이 김포에 닿는다. 이때 봉성포천이 빗물을 한강으로 내보내지 못할 경우 하천 유역은 침수 피해를 입게 된다. 거기에 서해의 만조 사리라도 겹치면 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단다. 배수장의 규모가 저렇게 큰 이유일 것이다.

 봉성포천(奉城浦川)은 양촌읍 구래리에서 발원, 북동쪽으로 흐르다 누산리에서 한강으로 합류되는 지방하천이다. 지류인 거물대천·가마지천·서암천·수참천·석모천을 보탠 탓인지 커다란 몸집을 자랑한다. 하긴 배수를 위해 1,800마력짜리 펌프를 10대나 가동시켜야 할 정도라니 어련하겠는가.

 탐방로는 포장길과 데크길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하나 더. 이곳 누산리(양촌읍)’의 한강변에도 포구가 있는 모양이다. 김포시의 홍보용 간판은 누산리의 특산물로 참게와 숭어를 꼽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양촌읍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새까만 점들로 덮여 있었다. 낱알로 배를 채우며 휴식하는 쇠기러기들이다. 맞다. 김포는 쇠기러기들의 천국이라고 했다. 간조 때 뭍이 드러나면 수백 마리가 귀가 아플 정도로 떼 지어 합창을 한단다. 한강하구 양안을 넘나드는 모습이 장관이라나?

 김포의 특산물은 쌀만이 아닌 모양이다. 고구마와 배까지 로컬 푸드로 내걸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김포 들녘의 볼거리는 농경지에서 놀고 있는 철새 떼만이 아니다. 가끔은 이런 갈대밭이 시야를 꽉 메우기고 한다.

 평화의길 4코스 경기옛길과도 함께 간다. 경기옛길은 조선시대 실학자 신경준 선생이 집필한 도로고(道路考)의 육대로(六大路)를 기반으로 조성됐다. 그중 강화길(김포옛길)’, 아니 정확히는 그 세 번째 구간인 운양나룻길을 지금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조선시대 강화도로 향하는 간선도로 중 하나로, 강화길을 걷다보면 당산미와 김포아트빌리지, 김포장릉, 김포한강조류생태공원 등 다양한 명소를 만날 수 있다.

 09 : 27. 운양삼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금포로의 내륙 쪽 가장자리를 떠나 한강변으로 옮긴다고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화합의 장이다. ‘평화의길 평화누리길로도 모자라 경기둘레길 경기옛길도 함께 쓴다. 저런 러너(runner)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09 : 36. ‘제촌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용화사삼거리’.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용화사(龍華寺)가 잠시 들렀다 가란다. 운양산 자락의 용화사 1405(태종 5)에 창건된 한강하구의 유일한 전통사찰이다.

 일주문인 모양이다. 문득 일본의 절간에서 흔히 만나는 도리이(鳥居 : 일본식 솟대)가 떠오른다. 못된 버릇이리라.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龍華殿). 조선 초, 뱃사공 정도명(鄭道明)이 조공을 싣고 오다가 운양산 아래 한강 하류지역에 배를 정박했는데, 그날 밤 부처가 꿈에 나타나 배 밑에 석불이 있으니 잘 모시라고 하더란다. 아니나 다를까 배 밑에서 미륵불을 찾아냈고, 불도의 깨달음을 얻어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삭발을 하고 불도에 정진했음은 물론이다.

 미륵불은 돌부처치고는 너무 미끈했다. 근래 하얗게 분을 칠한 탓이란다. 아무튼 빛을 발하며 출현했던 부처님은 영험함까지 보증된 모양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기도를 드리고 있는 신도가 여럿 보였다.

 운양추파(雲陽秋波, 김포8경의 하나). 용화사가 자리한 운양동은 가을빛 하늘에 물든 한강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고풍스런 범종각 뒤로 한강하구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있었다.

 09 : 43. ‘용화사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이어간다. 탐방로는 삼거리를 기점으로 삼아 도로(금포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한강 둑길을 따라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으로 간다.

 09 : 46. 재두루미쉼터.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으로 들어가기 전, 사치스러울 정도로 잘 꾸며진 쉼터를 만났다. 파고라에 벤치는 기본, 피크닉 나온 가족들을 위한 식탁용 테이블은 파라솔까지 갖췄다.

 이름처럼 벤치 위로 재두루미가 날아간다. 두루미는 우아하고 고고하며 영리한 새다. 옛 선인들이 불로장생 천년 학이란 의미까지 부여했을 정도다. 지구상에 6천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멸종위기 야생동물이기도 한데, 그게 이 부근에서 머문다는 얘기일 것이다.

 두루미는 가족애가 강하고 공동체 의식에 질서의식까지 갖췄단다. 특히 자기가 태어난 곳과 월동지를 포기하지 않는 특성을 가졌단다. 그래서일까? 부화하기 일보 직전인 두루미의 알도 전시해 놓았다. 그게 집사람의 방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를 되뇌며 알을 깨고 나온다.

 서해랑길은 한강 둑길을 따라간다. 이 구간은 보행자 전용의 산책로가 평화누리 자전거길이 따로 나있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함께 가는 철책 너머로는 서해바다와 만나는 한강하구의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탐방로 오른쪽의 야생조류생태공원에는 유수지(遊水池)가 조성되어 있었다.

 경계용 수목 울타리에 매달린 열매. 조경수로 인기가 높은 낙상홍(落霜紅)’ 열매가 아닐까 싶다.

 09 : 57.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이 발길을 붙잡는다. 꽃은 지고 나뭇잎은 떨어졌지만 겨울만의 또 다른 매력으로 화사한 곳이다. 655,310나 되는 엄청난 면적에 한강을 수원으로 한 생태습지원과 야생 조류의 취·서식지로 조성된 낱알들녘을 비롯해, 참나무숲, 송송숲, 특산수목 탐방숲, 생활환경 숲 등 풍성한 생태자원을 가지고 있다.

 김포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은 한강신도시 개발에 따른 생태 보전과 철새들의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야생조류 취·서식 공간을 보전하고, 생태 체험·학습의 장소를 마련해 시민과 생태가 공존하도록 꾸며놓았다.

 첫 만남은 향기의 뜰(푸른 봄의 뜰)’이다. 마가목·산수국·옥잠화·금낭화·꽃무릇·벌개미취 등 이른 봄 푸른 잎으로 개화하는 관목과 초화류를 심어놓았단다.

 공원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빨간 지붕의 풍차가 가녀린 몸매를 한껏 뽐내는가 하면, 두루미는 먼 하늘을 향해 힘껏 날아오른다. 그 사이로 들어가 푸른 하늘을 배경 삼는다면 인생 샷 하나쯤은 너끈하겠다.

 갈대와 억새, 그리고 넝쿨식물들로 뒤엉킨 숲은 버려진 듯 보살펴지고 있었다. 겨울철새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이랄 수도 있는 인간의 통행을 막는 것이다. 이렇듯 관리한 덕분인지 공원은 생태환경이 뛰어난 김포에서도 허파 역할을 톡톡히 한단다. 공원 곳곳이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듯한 자연미로 가득했다.

 철새들의 쉼터인 낱알들녘. 지금은 텅 비어 있지만 여름이면 푸른 벼가 자라고, 가을이면 고개 숙인 벼이삭이 누렇게 물들이는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하나 더. 낱알들녘에서 나오는 벼는 모두 철새들의 먹이로 공급된다고 했다. 이를 주워 먹으려는 철새들을 망원경 없이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나?

 운이 따르지 않았던지 철새는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들녘 한켠에서 전통농업기구를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의 노동력을 이용해 물을 퍼올리는 용두레 수차인데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단다.

 10 : 13. 탐방로는 조망마루를 비켜 지나간다. 참고로 생태공원은 둘레가 약 5km쯤 된다고 했다. 서서히 걷다보면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30분 정도 걸린단다. 하나 더. 공원은 철새들의 쉼터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도 걷는 재미가 쏠쏠한 여행지로 꼽힌다. 강변길, 철새이야기길, 사색의길 등 테마가 있는 다채로운 길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 볼 수 있다.

 조망마루 옆의 숲은 푸른 숲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계수나무, 튤립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는데, 여름철이면 도시락을 들고 온 가족들이 돗자리를 깔고 누워 한가로운 피크닉을 즐긴다는 곳이다.

 조망마루, 이름대로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더 넓게는 김포지역과 한강 너머의 일산이나 파주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맨 위층은 조망마루라는 이름에 걸맞게 야외 전망대를 배치했다. 김포의 특성을 맛보기식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김포는 한반도 젖줄인 한강과 북쪽에서 내려온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한강의 거대한 물줄기가 실어 나른 흙들이 퇴적되면서 형성된 드넓은 평야지대이다.

 시선을 옮기자 이번에는 한강 너머의 풍경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일산의 고층건물들이 영락없는 마천루(摩天樓)이다.

 2층은 실내에서 편안히 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의자와 테이블 등을 놓아두었다. 터치스크린 모니터를 통해 공원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제공 받을 수 있다.

 10 : 18. 조망마루를 빠져나와 이번에는 에코센터 쪽으로 간다. 그러자 습지생태원이 잠시 들렀다 가란다. 갈대·억새밭 사이로 난 데크 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연못들을 만난다. 습지 뒤쪽에는 황톳길도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신발을 벗고 황톳길을 걸어보고 싶다. 발을 씻을 수 있는 시설까지 마련돼 있다니 발가락 사이에 황토가 묻을 일도 없겠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빠듯한 걷기 여행자에게는 그런 낭만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생태습지답게 커다란 연못도 들어서 있었다. 연못 뒤로 보이는 정자는 감암정이다. 정자에 오르면 광활한 갈대·억새밭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2024년 녹색도시 우수사례 공모에서 도시숲 분야 우수상(산림청장상)까지 수상한 풍경이다.

 10 : 26. 이정표는 이제 그만 공원을 빠져나가란다. 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기로 했다. 전면에 있는 에코센터에 들러보기 위해서다.

 ! 대한민국에도 피사의 사탑이 있었나보다. 탑처럼 생긴 건물이 기울어도 한참이나 기울어진 채로 위태롭게 서있다. 생태공원과 철책 너머 한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에코센터 전망대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망원경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높은 시야에서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는데, 안타깝게도 시설을 보수한다며 출입을 막고 있었다.

 에코센터 야외쉼터에서의 조망. 한강 너머는 고양시(일산서구) 구산동·법곳동 지역이다. 그 왼쪽에는 심학산이 있다. 이 모든 곳이 통행의 자유가 보장되는 남한 땅이건만, 한강에는 다리조차 놓을 수 없고, 철책에 가로막힌 강은 배로도 건널 수 없다. 가슴 아픈 현실이라 할 수 있겠다.

 10 : 36. 금포로를 따라 한강 감바위 나루터 위쪽에 있는 군부대 초소 앞을 지난다. 6분쯤 후에는 다시 만난 78번 지방도(금포로)를 횡단한다. 그리고는 금포로를 따라 김포시가지 쪽으로 간다.

 10 : 46. ‘김포한강로에서 김포한강신도시 IC로 빠져나오는 접속고가교 아래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이어서 접속고가교의 왼쪽 아래를 따라간다. 이즈음 평화의길 쉼터를 만날 수 있다.

 접속고가교 아래를 지나면 탐방로는 다시 금포로를 만나고, 곧이어 감암교(계양천을 가로지른다)’를 건너 방수문삼거리 쪽으로 간다.

 10 : 59. 신향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감암로를 따라간다. 오른쪽에는 신개념의 하수처리장인 레코파크(Recopark)가 있었다. Recycle+Eco+Friendly+Park의 합성어로 하수를 깨끗한 물로 재생하여 환경을 아름답게 하고 시민과 함께하는 휴식공간이라는 뜻이다. 하수처리장을 지하에 두고 여분 공간을 활용하여 풋살장, 인라인스케이트장 같은 운동시설을 접목했다.

 11 : 02. 레코파크 정문 앞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간다. 이어서 일산대교 진입로의 하부 굴다리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언덕으로 오른다.

 11 : 05. 언덕 위는 민자를 유치해 건설한 일산대교의 톨게이트(TG).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경기지사 시절 일산대교 통행을 무료로 하겠다며 요란법석을 떨었었는데 아마 성사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후부터는 일산대교의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내놓은 보도를 따라간다.

 다리 아래로는 6차선의 김포한강로가 지나간다. 2차선의 금포로는 김포한강로에 기대어 가는 모양새이다.

 다리는 눈터지는 조망을 선사해준다. 다리 어디에서나 한강 하류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거대한 물줄기가 감바위를 휘돌아 봉성산 자락의 전류리 포구로 흘러가는가 하면, 오른쪽에는 파주의 심학산이 놓여있다.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는 감바위를 당겨봤다. 한자로는 감암(甘巖)’. 강 건너 일산의 이산포 송포를 오가던 나루터 감암포가 있었다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감나무 시()’자를 써서 시암으로 고쳤다는데, 원래의 이름인 감바위가 훨씬 더 정감이 가지 않나 싶다.

 검단신도시와 장기신도시가 한강의 강줄기를 따라 길게 들어서있다. 평화의길 3코스는 김포 쪽의 저 강변을 헤집으며 이곳으로 온다.

 김포의 너른 들녘과 한강변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일단대교의 중간쯤에서 고양(일산서구)에 바톤을 넘겨준다. 고양에서의 첫 만남은 드넓게 펼쳐지는 습지다. 요 아래에 위치한 장항습지만큼은 아니어도 대화천을 품은 습지는 크고도 아름다웠다.

 11 : 24. 일산대교 끝자락에서 만나는 이산포 JC’. 교차로도 예술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나 보다. 도로 여러 개가 상하좌우로 얼키설키면서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낸다.

 다리 아래로는 자유로가 지나간다. 가양대교 북단에서 문산읍(파주시) 자유 IC(임진각)까지 연결되는 고속화도로로, 종점인 임진각 경내 '자유의 다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자유통일의 의지를 담았다고나 할까?

 11 : 31. 다리가 끝나는 지점. 문자조형물(GOYANG)이 고양 땅에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고양대로를 따라간다. ‘대화천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가는 구간이기도 하다. 왕복 8차선의 도로가 삭막하다고 느껴진다면, 둔치로 내려가 산책로를 따라가면 된다.

 11 : 34.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이산포교’. 경기둘레길 이정표(고양종합운동장 2.3km/ 일산대교 0.6km)가 다리를 건너라는데, 이정표에 붙여놓은 평화의길 방향표시는 곧장 직진하라는 것이다. 개인 의견이지만 이곳에서는 경기둘레길을 권하고 싶다. ‘대화천의 둔치를 따라가는 경기둘레길이 도로변을 걸어야하는 평화의길보다 안전이나 시간절약 면에서 더 낫기 때문이다. 하나 더. 평화의길 4코스와 경기둘레길 4코스는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어느 길을 따르더라도 종점까지 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

 이를 모른 우리는 평화의길을 따라 직진했다. 대화천의 오른쪽 강둑 위로 나있는 길은 무척 고왔다. 향긋한 소나무향이 코끝을 스쳐 가는가 하면, 수북이 쌓인 솔가리는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촉감을 전해준다.

 왼쪽 발아래로는 대화천이 흐른다. ‘경기둘레길은 저 둔치를 따라간다.

 11 : 38. 분에 넘치는 호사도 잠시. 탐방로는 이내 사포교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다리 앞에서 도로를 횡단한다. 그런데 문제는 횡단보도가 없다는 것이다. 오가는 차량을 피해가며 건너라는 모양이다. 조금 전, ‘경기둘레길을 따르라고 권했던 이유다.

 11 : 40. 잠시 후 만나는 법곳 IC’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곳이다. 4코스와 지선인 4-1코스가 만나는 지점인데, 이정표가 이곳으로 오는 두 방향(전류리포구 및 행주산성)만 표시하고 있을 뿐, 가야할 방향(고양종합체육관)을 빼먹은 것이다. 옆의 안내판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누구 할 것 없이 길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 길눈 밝기로 소문난 선두대장도 이정표만 보고 진행했다가 무려 15km를 더 걷고 나서야 종점(고양종합체육관)에 이를 수 있었단다.

 이후는 고양대로를 따라간다. 국내 최대 규모의 전시면적을 자랑하는 킨텍스(KINTEX)’를 끼고 가는 구간이기도 하다. 3만 평이 넘는 전시공간에서 대형 국제전시회는 물론, 중소형 전시회 및 다양한 문화행사가 일 년 내내 열린다.

 11 : 54. ‘대화마을입구 삼거리에서 대화천으로 내려왔다. 신호대기 시간이 지겹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둘레길의 형편을 잠깐이나마 살펴보고 싶어서다.

 다시 올라선 고양대로’. 몸집 큰 킨텍스(KINTEX)’는 아직도 함께 간다. 이 구간은 가로수삼아 심어놓은 벚나무가 볼만했다. 봄이면 여의도의 윤중로 못지않은 환상적인 벚꽃 터널을 자랑할 수도 있겠다.

 이 구간은 국토안전관리원, 건설기술연구원 등 건설관련 공공기관들이 몰려있었다. 하나 더. 도심에 가까워진 탓인지 산책 나온 시민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국토안전관리원. 둘레길 도반 중 한분인 몽중루 작가님의 자제분이 다니는 직장이기도 하다. 기술사 자격증까지 딴 수재란다.

 12 : 13. 4코스의 종점이라 할 수 있는 고양 종합운동장(Sports complex)에 도착했다. 43,000명 수용 규모의 주경기장과 992명 규모의 보조경기장, 야구장, 체육관 등이 들어서 있다.

 고양 소노 아래나’. 프로농구단인 고양 소노 스카이거너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체육관이다. 스카이거너스(Skygunners) 하늘 높이 향하는 대포라는 뜻을 지녔단다. 그래서일까? 튀어 오르며 볼을 다투는 조형물들이 무척 와일드하게 보인다.

 잠시지만 호수로를 따른다. 종합운동장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12 : 21. ‘대화로를 건너자 평화누리길 쉼터가 있는 작은 공원이 맞는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목교(木橋)가 반긴다. 그렇다고 다리를 건너지는 않는다. 평화누리길 이정표(동패지하차도 5.0km)가 가리키는 대화천의 둑길을 따르면 된다.

 모처럼 만난 흙길이 반갑다. 가운데 야자매트까지 깔아 흙길의 단점인 질퍽거림까지 없애버렸다.

 12 : 32. 날머리인 휴게공원의 고양 인공암벽경기장’. 그렇게 400m쯤 걸었을까 오른쪽으로 희미하게 오솔길이 나있다. 이정표는 없지만 나무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미는 인공암벽경기장으로 들어간다고 여기면 되겠다. 여기서 팁 하나. 길 찾기가 걱정된다면, 우리처럼 평화누리 쉼터공원으로 들어가지 말고 대화로를 따라 400m쯤 들어오면 된다.

 평화의길(5코스)’ 안내도는 인공암벽 경기장 앞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17.34km 4시간 10분에 걸었다.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볼거리가 드물었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서해랑길 64-2코스(부석버스정류장 - 해미읍성)

 

여 행 일 : ‘25. 1. 11()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부석면·인지면·해미면 일원

여행코스 : 부석버스정류장부석사도비산전망대모월저수지도당천해미천해미국제성지해미읍성(거리/시간 : 22.7km, 실제는 19.96km 5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창리항에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연결되는 64코스의 지선( 6) 중 두 번째 구간을 걷는다.

 

 들머리는 부석 버스정류장(충남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내려와 32번 국도를 타고 서산까지 온다. 석림남부사거리에서 양열로(부석방면 4km), 예천교차로에서 649번 지방도(부석·안면 방면)로 옮겨 8km쯤 내려오다 부석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서해랑길(서산 64-1코스) 안내도는 부석버스정류장 옆에 설치되어 있다.

 부석면소재지인 취평리에서 도비산을 넘은 다음 도당천을 따라 해미읍성까지 가는 22.7km짜리 여정. 길이가 조금 길지만 대신 부석사와 해미순교성지, 해미읍성 등 볼거리로 넘쳐나는 구간이다. 난이도는 별이 4(전체 5), 어려운 코스로 분류된다.

 12 : 42(1228). 계속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64-1코스를 마쳤지만 64-2코스 중 일부를 앞당겨 걸어두기 위해서다. 면사무소 방향으로 30m쯤 떨어진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부석사를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12 : 47. ‘취평2 마을회관. 법정 동리인 취평리(翠坪里)를 구성하는 2개 행정단위 중 하나다. 취평리는 새말·성안·취개·톳굴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어느 부락을 지칭하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서해랑길은 부석사길을 따라간다. 가로수삼아 심어놓은 배롱나무 꽃길로 유명한 구간이다. 배롱나무의 꽃말은 부귀. 그래선지 예로부터 배롱나무는 사찰이나 선비들의 공간에 많이 심어왔다. 이 배롱나무 길도 그런 의미를 담았을지 모르겠다.

 12 : 52. ‘도곡지란다. 간척지에 물을 댄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얘깃거리나 볼거리를 갖고 있지 못한 저수지다.

 저수지 바로 위에서 동사(東寺)’로 가는 길이 나뉘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저 암자를 경유한다. 그렇다고 저 길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부석사를 먼저 들른 다음 오솔길을 이용해 동사로 간다.

 12 : 58. ‘수도사는 먼발치에 두고 스치듯 지나간다. 궁중음식과 사찰음식의 대가로 알려진 수진스님이 주지로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서울 청룡사에서 음식을 담당하던 별좌 시절 궁녀출신의 스님들과 인연이 닿아 궁중음식을 배웠다고 한다. 저지난달에는 ‘2024 수도사 사찰음식 대항연이란 문화행사까지 열었다나?

 하지만 수도사는 절간보다 절간 앞에 있는 잘 생긴 소나무가 더 눈길을 끌고 있었다. 몸이라도 불편하신지 철제 빔(beam)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법주사 앞의 정이품송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수도사를 지나면서 길이 가팔라진다. ‘도비산의 가슴 높이에 있는 부석사까지 올라가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도비산(島飛山, 352m)은 연암산(燕岩山), 팔봉산(八峰山)에 이어 서산의 셋째 봉우리이다. 바다 위를 날아가는() ()’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나?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도비산(桃肥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13 : 06. 한정식 명소라는 도비마루’. ‘부석사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다. 그런데도 사하촌(寺下村)이 따로 들어서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최근에 지어진 듯한 전원주택 몇 채와 음식점 두엇이 전부였다.

 13 : 08. 주차장. ‘도비산 탐방안내도 옆에 예쁘장한 빗돌 하나를 세워놓았다. ‘태종대왕 도비산 강무기념비.

 강무(講武)는 임금이 참여하는 군사훈련이다. 1416년 태종이 3남인 충령대군(세종)과 함께 7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몰이를 했다는 것이다.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이곳에서 적의 동향을 살핀다는 의미였다나? 이 행사는 훗날 해미읍성 축성의 기초가 되었단다. 다음 해인 1417년부터 1421년까지 해미읍성을 축조하고, 덕산에 있던 충청 병마절도사영을 해미읍성으로 옮기게 된다.

 13 : 10.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문일지니,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털어내고 일심으로 부처의 진리를 생각하며 통과해보자.

 ! 일주문 앞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이정표(부석사 0.6Km/ 해넘이전망대 0.8Km/ 취평리 1.0Km)는 조망의 명소인 해넘이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이 왼쪽으로 갈려나감을 알려준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해넘이는 제켜두고 대신 해맞이 전망대만 들렀다 간다.

 13 : 19  13 : 43. 가파른 오르막길을 10분쯤 올랐을까 천년고찰 부석사(浮石寺)’가 얼굴을 내민다. 부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677(문무왕 17) 의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고려 말의 충신 유금헌(柳琴軒)이 창건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망국의 한을 품은 그가 물러나 이곳에다 별당을 지어 독서삼매로써 소일하였는데, 그가 죽자 승려 적감(赤感)이 별당을 사찰로 변조하고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섬이 마치 뜬 것같이 보인다며 부석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의상의 창건설은 영주에 있는 부석사의 창건설과 너무나 똑 같다.

 절 앞에 이르면 누각처럼 보이는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공중에 걸려있다는 느낌이 드는 이 누각은 운거루(雲居樓)’라는 이름으로 현재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요즘에야 차와 다과를 파는 사찰이 흔해졌지만, 저곳은 오래 전부터 운영되어 온 사찰 다원계의 역사와 같은 곳이다.

 구름이 머무는 누각’. 이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난간(欄干) 가까이에 놓인 탁자에 앉아 차라도 한 잔 마시다보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것 같다. 난간 밖으로 천수만의 풍경이 마치 그림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심검당 앞에 있는 약수로 목을 축인다. 이 약수는 우유약수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목룡장과 심검당이 줄을 잇는 건물의 모양이 흡사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른단다. 그러나 내 눈에는 소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절을 다시 지은 무학대사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豕眼見唯豕)’고 했는데 아무래도 내 수준으로는 그런 현학적(衒學的)인 풍경을 그리기에 무리였던가 보다.

 금당격인 극락전(極樂殿)’.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는데, 금당치고는 규모가 너무 작았다. 하지만 이곳 부석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성지나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가 근대에는 선불교를 중흥시킨 경허, 만공 대선사가 머물면서 수행·정진 했었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삼고, 좌우 협시로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셨다. 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689(숙종 15) 왕자의 탄생을 기념해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는 용봉사라는 절에 있었으나 1905년 이곳으로 옮겨 왔단다.

 요즘은 출가 권유도 MZ세대에 맞춰가는 모양이다. 젊고 잘생긴 스님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힙(hip)하게 달라진 출가 생활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불교는 좋지만 출가는 겁나는 젊은이들을 홀린다고나 할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사진도 눈길을 끈다. 지난 2012 10, 한국인 절도단이 일본 대마도 간논지(觀音寺·관음사)에서 국내로 이 좌상을 들여오다가 발각됐다. 이에 부석사는 ‘1330년경 서주(서산의 고려시대 명칭)에 있는 사찰에 봉안하려고 이 불상을 제작했다는 불상 결연문을 바탕으로 왜구에게 약탈당한 불상인 만큼 원소유자(부석사)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국가에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서주 부석사와 서산 부석사가 동일한 절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간논지가 1973년 일본 민법에 따라 불상 소유권을 취득했다고 판단했다. 불상은 내년 5월에 있을 반환을 앞두고 있는데, 부석사의 입장을 지지해달라는 모양이다.

 극락전 앞의 안양루(安養樓)는 서해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과는 달리 단층짜리 건물에다 후면까지 막혀있어 누각의 역할을 조금도 하지 못한다. 하나 더. 불가에서 안양은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이 살고 있다는 정토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맨 위쪽에는 산신각이 있고, 뒤로 돌면 만공토굴도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곧장 올라가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산신각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로지르면 마애불(2014년 석공예문화재 기능보유자인 김대연 조각가가 조성했다)과 함께 멋진 조망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애불 앞은 조망의 명소다. 서쪽 하늘 저 멀리 천수만을 품은 태안반도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광경도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했다. 하나 더. 저 들녘 어디쯤에는 전설 속의 검은여가 있을 것이다. 부석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부석이 부남대교 부근(부석면 대두리)에 있다니 말이다. 이 돌이 적돌만의 조수간만의 차이에도 항상 떠있는 것같이 보인다고 해서 부석(浮石)’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간척공사 이후 검은여 주변은 육지로 변했고 돌도 땅 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 바위를 지금도 신성하게 여기고 있단다.

 만공선사가 수도했다는 토굴(土窟)은 산신각 뒤 3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나 더. 부석사 투어는 만공토굴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그러니 천왕문으로 되돌아와 근처 오솔길(도비산둘레길)로 들어서서 서해랑길을 이어가야 한다.

 동사(東寺). 산악회는 64-2코스의 잔여 구간을 2주 후에 이어갔다. 하지만 난 9년 전에 이미 도비산을 샅샅이 누벼봤기 때문에 도비산 구간을 아예 생략해버렸다. 대신 옛 추억을 소환해 중요 포인트를 소개해 본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인 동사는 독립된 절이라기보다는 어느 절의 부속 암자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정도로 그 규모가 작다. 그래선지 편액도 동암(東庵)’으로 적고 있다. 동사의 창건 연대나 절의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1619(광해군 11) 한여현(韓汝賢)이 편찬한 호산록(湖山錄)‘에 승려들이 동사의 그윽한 정취를 찾아 왔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이전에 지어진 사찰임은 분명하다.

 도비산은 일출과 일몰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해돋이 해넘이 등 특별한 행사는 열리지 않으나 사람들은 최고의 송구영신(送舊迎新) 여행지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서해랑길은 이중 해돋이전망대를 들렀다 간다. 첨부된 지도에 전망대로 표시된 곳이다.

 나무데크로 깔끔하게 만들어진 전망대에 서면 시원스런 조망이 펼쳐진다. 천수만 간척지를 비롯하여 서산의 넓은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들녘너머로 희미하게 나타나는 고을은 아마 해미읍성일 것이다.

 이후는 임도를 따라 산동리(인지면)로 간다. 이때 오른편으로 널따란 들판이 펼쳐지는데 그 끄트머리에는 서산시가지가 똬리를 틀고 있다. 길이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나있다는 점도 자랑거리다. 숨을 크게 들여 마시면 코끝을 맴돌던 솔향이 온몸으로 펴져나가면서 심신은 한없이 맑아진다.

 09 : 46(111). 실제 출발지인 야당천교(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2주 전, 64-1코스 때 부석사까지 2.8km를 더 걸었으니 오늘은 나머지 20km를 걸어야 한다. 하지만 도비산(9년 전 다녀왔었다) 구간을 생략하고 이곳부터 걷기 시작했다. 덕분에 64-2코스는 18km만 걷는 모양새가 됐다.

 09 : 46. ‘야당천(野堂川)’의 둑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남정리에서 발원한 2.5km 길이의 야당천은 산동리에서 도당천으로 합류된다. 그나저나 지난밤 내린 눈이 발밑에서 뽀도독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덕분에 기분 좋은 나들이가 될 수 있었다.

 이때 도비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예로부터 저 산은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1927년에 발간된 서산군지에 실려 있는 서산팔경 중 3경이 도비낙하(島飛落霞)인 것만 봐도 그 아름다움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2000년대의 새로운 서산팔경에서도 제7경으로 도비산 만하채운(島飛山 晩霞彩雲)을 꼽는다. 도비산의 저녁노을이 천수만 바닷물에 되비치면 하늘이 오색 노을을 꽃피우고 주위의 구름까지 주황색으로 물들인다나?

 09 : 53. 300m 남짓 걸었을까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종점 14.4km/ 시점 8.3km) 서해랑길과 만났음을 알려준다.

 09 : 56. 서해랑길은 계속해서 둑길을 탄다. 하지만 난 야당천을 건너기로 했다. 개울 건너에 있는 모월저수지를 조금 더 꼼꼼히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모월저수지’. 인지면 모월리(毛越里)’에 있는 관개용 저수지로 1982년 준공되었다. 서산A지구 간척지에 물을 대려고 축조했다는데, 수초가 무성한 것이 입질깨나 좋겠다. 맞다. 서산시 주최로 낚시대회가 열리기도 한단다. 직사각형으로 생긴 게 볼만했는지 나들이 삼아 풍경을 감상하려는 사람들도 종종 찾는다나?

 10 : 05. 저수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서해랑길과 다시 만난다. 그리고는 함께 야당천을 건넌다.

 이후부터는 야당천을 따라간다. 둑 아래서 다른 물길을 보탠 탓인지 몸집이 제법 커졌다.

 길은 엄청나게 너른 들녘을 헤집으며 나간다. 그 유명한 서산A지구 간척지이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저수지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직사각형의 저수지들이 여럿 포개지다시피 널려 있었다. 아니 저수지가 아니라 휴경지일지도 모르겠다. 서산시에서 철새의 쉼터로 제공하기 위해 휴경지에 물을 담아놓기도 한다니 말이다.

 10 : 26. ‘간월로1로 올라서니 이정표(종점까지 12km)가 반긴다.

 곧바로 도당천을 건넌다. 야당천이 도당천에 합류되는 두물머리에 잠수교가 놓여있다. 도당천(道堂川)은 음암면 도당리에서 발원하여 운산면을 지나 해미면 석포리에서 서해로 흐르는 15.2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이즈음 철새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지난 구간에서도 얘기했듯이 이곳 서산은 철새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 철새를 눈이 짓무르도록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이번 64-2코스이기도 하다.

 이후부터는 도당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제방 위로 도로가 나있다.

 철새가 이렇게 많을 수도 있을까?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철새 떼가 놓여있었다. 그것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다양한 철새들이. 맞다. 이곳 도당천은 왜가리, 백로, 가창오리, 가마우치 등 철새들의 낙원이라고 했다.

 저건 백조? 이곳은 간월호의 상류, 앞으로는 백조의 호수로 부르겠다며 넉살을 떠는데 도반 한 분이 고니라고 바로잡아 주신다.

 길은 이제 서산시의 시가지를 왼편 가까이에 끼고 간다. 도심 가까이라서 철새의 안정에 위해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일까? 감시 차량이 둑길을 순찰하고 있었다.

 도당천은 습지가 잘 형성되어 있었다. 그게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내기도 한다.

 이 일대는 매년 황새를 비롯한 260여 종의 철새 수십만 마리가 찾아온다고 했다. 가끔씩 보이는 모래톱 근처에서는 흰 왜가리가 노닐고 있었다. 먹이를 잡기 위해 우뚝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고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늘과 물이 무척 깨끗해서 겨울이지만 짙은 색감과 청명함으로 상쾌하다.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철새들의 군무도 눈에 담을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농경지의 적막함 속에서 철새들의 날갯짓이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먼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은 겨울 풍경의 또 다른 그림을 완성시킨다. 들녘의 고요함과 철새들의 생동감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겨울의 색다른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11 : 09. ‘청지천(靑之川, 또는 龍遊川)’이 합류되는 두물머리.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 철새 무리가 눈길을 끈다. 서산시가지를 거쳐 왔는데도 물이 맑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음암면 대미산(台微山)에서 발원한 청지천은 상홍리와 서산시가지를 거친 다음 이곳에서 도당천에 흡수된다.

 두물머리를 지나서도 탐방로는 도당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강안을 따라 습지가 잘 발달되어 있어 곳곳에서 철새 무리를 만날 수 있다.

 11 : 27. ‘와당교를 지나면 군부대 망루. 이후부터는 사진촬영을 삼가기로 했다. ! 군부대 정문에서는 초병들의 살가운 인사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지난 달, ‘DMZ평화의길을 걷다가 만난 해병대 초병들과는 얼굴 표정부터가 사뭇 달랐다.

 정문을 지나고서는 군부대의 담장을 따라간다. 철책을 따라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있다.

 11 : 50. 사진 찍기조차 불편한 군부대 지역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도당천 둑길을 전세 내 걸어간다. 툭 터진 시야에는 바라만 봐도 배부른 풍경이 한가득이다. 추수를 끝낸 황량한 들판이 도당천을 가운데 두고 광활하게 펼쳐진다.

 길은 아직도 철새들과 함께 간다. 하도 많이 만나서일까? 철새가 아닌 다른 볼거리를 찾아본다. 운이라도 좋으면 인공 둥지를 만날 수도 있다는 누군가의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수만을 찾는 황새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한편, 번식 공간으로도 활용된다고 했다. 생김새도 멋져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나?

 12 : 01. ‘신장천이 합류되는 두물머리. 1960년대까지만 해도 드나드는 어선들로 성황을 이루었다는 곳이다. 덕지천동에 선적을 둔 12-15척의 고깃배가 칠산이나 연평도까지 고기잡이를 다녔으며, 새우젓배·황새기젓배 등 외지 생선배들도 끊임없이 드나들었단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냇가는 고깃배는커녕 배가 다닐만한 물길조차 보이지 않았다.

 12 : 12. 소하천에 길이 막힌 탐방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150m쯤 더 걸으면 이정표(종점 5.1km/ 시점 17.6km)가 왼쪽을 가리킨다. 이즈음 벌판 뒤로 덕숭산과 가야산이 길게 이어진 금북정맥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가야산 아래 있는 도시가 해미이다.

 다리를 건넌 탐방로가 이번에는 들녘을 횡단해버린다. 가야산을 전면에 놓고 가는 길, 농경지 곳곳에 마시멜로처럼 보이는 하얀색 곤포사일리지가 놓여있었다. 새들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물체로 보일 수도 있겠다.

 12 : 24. 또 다시 만난 도당천’. 길은 아직도 철새들과의 동행을 멈추지 않는다. 도당천을 국내 제일의 철새 탐조지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12 : 30. 도당천과 해미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가야봉 대곡리에서 발원한 해미천(海美川)은 유암리·저성리·조산리·전천리·응평리 등을 거친 다음 이곳에서 도당천으로 흡수된다.

 이후부터는 해미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해미천은 유속이 느리고 수초와 부유 물질이 많아 잉어와 같은 물고기들의 산란지로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흰꼬리좀도요, 노랑부리저어새 등 다양한 철새들이 매년 찾아온단다.

 12 : 34. ‘응평교로 해미천을 건넌다. 그리고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서산시가지에서 가까운 탓인지 들녘에는 비닐하우스가 한가득이었다.

 13 : 00. ‘해미2’. 오는 길에 잠수교(12:56)를 만났었다. 서해랑길은 이 다리를 건넌다. 그런데도 이를 지나쳐버렸고, 그런 우리를 해미2가 맞는다. 이곳에서는 둔치로 내려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이 옳다. 반대편 둔치에 탐방로가 나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섰는지도 몰랐던 우리 일행은 인도가 따로 없는 4차선의 해미2를 위태롭게 건넜고, 골목(성지2)을 이용해 해미국제성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서 본 해미천’.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양쪽 둔치에 생태탐방로 및 자전거도로를 설치하는 등 주민들을 위한 친수(親水) 및 생활체육 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다.

 13 : 07  13 : 46. ‘해미순교자국제성지’.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는 곳이다. 1800년대의 천주교 박해 때, 기록되지 않은 천주교 신자 1천여 명이 사약·몰매·교수형·참수형·동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됐고 심지어 산 채로 땅에 묻는 생매장과 물에 빠뜨리는 수장형까지 자행됐다. 그렇다고 유명한 성인이 있거나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이름이나 세례명을 남기고 순교한 132명의 천주교 신자가 기록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교황청은 2021년 국제순교성지로 지정했다. 국내에서 첫 번째이며,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다. 세계적으로도 역사적 장소인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산티아고 등 3, 성모 발현지인 멕시코 과달루페와 포르투갈 파티마 등 20, 성인 관련 순례지 6곳 등이 있을 따름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모범으로 인정하고 이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해미천변 28400의 부지에 조성된 성지에는 대성당과 소성당, 진둠벙과 자리개돌, 무명순교자 묘, 순교탑 등이 들어서있다.

 먼저 성당부터 찾아봤다. 하지만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짧은 기도만 드리고 빠져나왔다. 수수하게 꾸며진 성당에는 성화 몇 점이 걸려있을 따름이었다.

 무덤을 형상화 했다는 순교자성지 기념관’. 순교자들의 희생과 역사를 전해주는 곳으로, 순교 당시의 모습을 담은 조각과 판화, 성지에서 발굴된 순교자 유해가 안치돼 있다.

 안으로 들면 이곳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진이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가 신앙의 증거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라는 축복과 함께 게시되어 있다. 2014 816,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화문에서 조선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거행했다.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마르티노), 김진후(비오), 이보현(프란치스코)  3위도 함께 시복됐다. 교황은 이튿날 해미순교성지에 들러 순교자 3위의 기념비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전시공간은 밧줄에 묶어 끌려가고 있는 조각상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천주교는 1784(정조 8)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교회를 건립하면서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조선에 소개됐지만 이후 종교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1790년에 시작된 박해는 병인양요와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현군 묘 도굴 사건 이후 정점으로 치달았다.

 순교자들의 유골. 당시 내포지방 13개 군현을 담당하던 해미읍성 겸영장은 군권과 관권을 한 손에 쥐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까닭에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고 해당 지역 교도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단다. 그 숫자가 무려 1,000여명에 달했다나? 기념관에는 여숫골에서 발견된 유골이 모셔져 있다.

 당시의 유물들은 물론이고, 조각·그림·사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천주교의 역사와 발굴과정 등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 하나 더. 동구 밖 숲정이라 부르던 곳은 신자들이 생매장 당한 곳이다. 당시 순교자들은 죽으면서도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외쳤다고 한다. 주민들에게는 그게 여수머리로 들렸던 모양이다. ‘여우에 홀린 머리채로 죽어갔다 '여숫골'이라 불렀단다.

 그중에서도 순교 장면을 담은 그림이 오랫동안 시선을 붙들어 맸다.

 고통 받는 순교자들의 조각상. 바로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파사드(Façade), 아니 멕시코시티 소우마야미술관에서 만났던 로댕의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을 떠올렸다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아무튼 고통으로 일그러진 저 분들은 지옥이 아닌 천당으로 가셨을 게 분명하다.

 이젠 밖을 돌아볼 차례이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유해발견 터’. 해미성지는 신자를 잡아 고문하고 처형한 해미읍성과 사형장으로 이용했던 서문 밖 순교 터, 생매장 터인 이곳 여숫골  3개의 순교성지로 구분된다.

 신자들의 가슴과 머리를 으스러뜨리던 자리개돌’. 신자들을 처형하는 방법은 잔혹했다. 군졸들은 이들이 사용하던 성물을 밟게 하고 돌다리에 눕힌 뒤 커다란 돌로 내리쳐 돌다리를 도마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신자들이 흘린 피가 해미천을 붉게 물들이며 거머리바위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진둠벙. 천주교인들을 빠뜨려 죽게 한 아픔이 깃든 곳으로, 자그마한 연못에 한복을 입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두 여성(한 분은 성모인 듯)의 석상이 물에 반쯤 잠겨 있다. 당시 100년 가까이 사형장으로 이용되던 서문 밖 냇가는 민가와 가까웠다. 그래서 조금 떨어진 벌판에다 수십 명씩 생매장하기 시작했단다. 군졸들은 생매장터로 가기 전 개울과 연결된 둠벙’(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에 오랏줄에 묶인 신자들을 산 채로 수장시키기도 했단다. 훗날 이 둠벙은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죄인둠벙'으로 불리다 말이 줄어 '진둠벙'으로 바뀌었다. 그래선지 순교자들의 유해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성모자상. 궁중복장으로 차려입은 게 눈길을 끈다. 성지순례 차원은 아니었지만 과달루페나 파티마 등 천주교 성지들을 꽤 여럿 둘러봤고, 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에서는 현지화 된 성모님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 풍경을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니 이 아니 기쁠손가.

 맨 뒤에는 해미순교탑이 들어섰다. 무덤을 형상화 한 둥근 봉우리 위에 16m 높이의 흰색 탑이 세워져 있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개의 날개 형상이 십자가를 떠받치는 모양새이다. 그 앞에는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가 있었다. 둥근 모양의 분묘는 아랫부분을 화강암으로 둘렀다. 앞쪽 양옆으로 한 쌍의 문관석이 세워져 있다.

 2014 8 16일 시복된 3위의 복자 상.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 정사박해의 여파로 1800 19일에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 10년간의 옥고 끝에 1814 1020일 해미옥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복된 이분들 말고도 해미에는 132명의 순교자가 더 있다.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무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13 : 46.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를 담았다는 조형물(생명의 나무)을 보는 것으로 성지 투어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는 조산2를 건너며 길을 이어간다. 다리 건너에서는 해미천을 오른쪽 옆구리에 차고 간다.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은 벚나무가 늘어서있는 운치 있는 구간이다.

 이때 해미성당을 만날 수 있다. 순교자성지가 천주교인들의 가슴 아픈 역사라면, 커다란 저 본당은 가톨릭의 현재를 알려주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겠다.

 13 : 58. ‘해미교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서산의 제1경인 해미성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답게 소문난 맛집들이 여럿 늘어서 있었다. 카페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옛날식 다방이 아니라 개성 넘치는 분위기로 취향을 살린 커피전문점이다.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나있긴 하지만 교황 빵집도 그중 하나다. 서산육쪽마늘을 가미한 도넛 모양의 빵인데, 순교자성지를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드시고 가셨다며 자랑하고 있었다. 맛도 뛰어났다. 크루아상을 연상시키는 바삭한 페스츄리와 함께 고소한 마늘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14 : 02  14 : 35. 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해미읍성(사적 제116)은 낙안·고창 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모습을 간직한 3대 읍성에 꼽힌다. 서해안지역은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이를 막기 위해 태종 17(1417)부터 세종 3(1421)까지 석성으로 쌓았다. ! 해미읍성은 서산시가 관광객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서산9' 중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는 것도 알아두자.

 정문인 진남문(鎭南門)’. 아치형의 성문(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형식의 팔작지붕 건물(정면 3, 측면 2)을 얹었다. 하나 더. 성 안쪽 문루에는 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리플렛은 1491(성종 22)에 중수했다는 기록이라며, ‘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라고 적고 있었다. 독자적인 연호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하던 조선의 아픈 현실이랄까?

 성은 무척이나 넓어 보였다. 하긴 면적이 6만여 평이나 된다니 어련하겠는가. 성벽의 총 길이도 1.8km나 된다고 했다. 높이도 5m에 이른단다. 하지만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병영성의 모습이 사라졌었다. 그러다 1997년부터 발굴·복원이 이뤄져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해미읍성은 문화재이다. 하지만 천주교인들에게는 순교성지로서의 위치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읍성 한가운데 호야나무로 불리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박해의 증인처럼 서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했다는 나무이다. 바로 옆에는 1790년부터 100여 년간 내포 일대의 천주교인을 잡아 가둔 원형 옥사를 복원해 놓았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가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수령이 24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 뒤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 관아(官衙)가 있다. 조선 초기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던 곳으로,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해(이를 겸영장이라 함) 지역을 통치했다.

 동헌(東軒).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 관료들이 회의를 하는 장면을 밀랍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도 한때 저 무리 중에 끼어있었을 것이다.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약 10개월간 근무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니 말이다.

 내아(內衙). 관리와 그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으로 미스터 션사인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인기 때문인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밖에도 서리의 집, 상인의 집, 부농의 집 등 조선시대의 민가 여러 채가 복원되어 있었다. 우리는 구경하지 못했지만, 민가에서는 지역 노인들이 직접 시연하는 다듬이질, 짚풀 공예, 삼베 짜기 등을 관람할 수도 있단다.

 카페 탱자성(해미읍성의 별칭) 사랑방도 눈에 띈다. 해미읍성역사보존회에서 운영하는 전통 주막인데, 기념품점과 연 판매소도 겸하고 있다. 아무튼 부침개 익어가는 고소한 냄새로 진동하는 주막은 해미읍성의 명소다. 도토리묵 등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지역 양조장의 막걸리를 음미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동헌 오른쪽에는 108계단이 놓여있었다. 백팔번뇌를 털어내듯 돌계단을 하나씩 세면서 오르면 정확히 108번째 계단 위에 있는 정자 '청허정'과 만난다.

 청허정(淸虛停)’은 소나무와 대나무 숲을 좌우로 거느린 언덕 한가운데에 서있다. ‘맑은 기운으로 욕심을 비우는 곳이라는 의미로, 1491(성종 22) 충청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曺淑沂,1434-1509)가 지었다. 훈련을 하던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문객들이 글을 짓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충청감사 조위(曺偉, 1454-1503)가 병마절도사 이손(李蓀, 1439-1520)에게 지어 올린 시가 명작으로 남아있다.

 동문인 잠양루(岑陽樓)’이다. 정문인 진남문, 서문(지성루), 북문(암문)과 함께 해미읍성의 사대문을 구성한다.

 14 : 38. 성곽을 빠져나와 공영주차장으로 간다. 그리고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16.96km 4시간 50분에 걸었다. 2주 전, 1구간 때 3.0km(1시간)를 더 걸었으니 19.96km 5시간 50분에 걸은 셈이다. 정규코스에서 5km 남짓이나 생략했는데도 말이다. 부석사와 순교자국제성지, 해미읍성을 둘러보느라 거리와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