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선비순례길 1코스(선성현길)

 

여행일 : ‘24. 8. 3()

소재지 : 경북 안동시 와룡면 및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오천유적지보광사예끼마을선성수상길호반자연휴양림월천서당(거리/시간 : 13.7km, 실제는 13.42km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오천유적지(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타고 안동방면으로 내려오다, 지곡교차로에서 928번 지방도(녹전방면으로 28km), 녹전삼거리에서 935번 지방도(안동방면으로 8km), 서부교차로에서 35번 국도(안동방면)로 옮겨 10km쯤 들어오면 오천유적지에 이르게 된다. 1코스 들머리는 유적지 입구에서 80m쯤 못 미친 지점에 있다.

 안동선비순례길(91.3km)’ 9개 코스는 각 구간마다 옛 선비의 발자취와 이야기가 담겨있다. 선성현길·도산서원길·청포도길·왕모산성길·서도길 등 코스의 이름에 걸맞게 서당·서원·향교·고택과 퇴계 이황을 비롯한 선비들의 숨결을 느끼고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1코스(선성현길)에는 고고한 선비정신을 지키며 살았던 군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 하여 군자리라는 이름을 얻은 외내마을부터 현대판 선비들의 놀이터 예끼마을’, 물 위로 늘어진 선성수상길을 지나 월천서당까지 수많은 선인이 우리 앞을 걸어가며 길을 안내한다.

 11 : 14. 길을 나서기 전 오천유적지부터 들러본다. 찾아가는 정보는 물론이고 근처에 오천유적지가 있음을 알리는 그 어떤 정보도 접할 수 없지만, 이곳으로 들어왔던 길을 따라 조금 더 걷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튼 70m쯤 걸어 모퉁이를 돌아서자 오천유적지의 입구임을 알리는 대문이 반긴다. ‘선경유방 유장백세(善慶遺坊 流長百笹)’. ‘선을 행하고 쌓음으로서 집안에 경사가 있고, 그 가풍이 영원히 이어 간다라는 뜻이다.

 100m쯤 더 들어가면 20여 채의 고가(古家)가 들어앉은 안배된 유적지가 맞는다. ‘오천유적지로 광산김씨 예안파가 20여 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세거해 온 마을이다. 1974년 안동댐에 물이 차면서 외내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자 고가들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참고로 오천이란 지명은 동네 앞 하천에서 유래됐다. 수몰 전 낙동강으로 흘러든 물이 맑아 물 밑에 깔린 돌이 검게 보여 까마귀 오’()자를 썼다고 한다.

 읍청정(揖淸亭).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선조 때 문신 후조당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지었다는 후조당(後彫堂)’이다. 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안에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대신 협문으로 연결되는 별채(안채와 사랑채) 및 김부의(金富儀, 1525-1582)가 건립한 읍청정(김부의의 )’을 둘러볼 수 있었다.

 김부의는 형인 김부필처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읍청정의 편액을 이황이 써준 이유이다. 이렇듯 이 마을은 가문의 영광으로 내세우는 불천위(不遷位)를 세 분이나 모시고 있단다. 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학문이 높아 나라가 영구히(보통은 4대 봉사로 끝낸다)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한 신위를 말한다.

 이들 건물 앞에는 설월당(雪月堂)’이 있었다. 설월당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이 학문과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한 정자라고 한다. 그 역시 퇴계의 문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가산을 털어 향병을 지원했다고 전해진다.

 계암정(溪巖亭).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은 평생 대의명분을 신조로, 광해-인조 연간의 혼탁한 시절 속에서 꼿꼿하게 지조를 지킨 인물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맏아들을 의병으로 보내고 가산을 털어 군비에 보태기도 했다. 하나 더. 옆에는 김유(金綏, 1491-1555)가 지었다는 탁청정(濯淸亭)’도 있었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하니 이는 물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라나?

 침락정(枕洛亭). 의병대장 김해(金垓)의 아들인 김광계(金光繼, 1580-1646)가 세운 정자다. 일명 운암정사(雲巖精舍)라고도 하는데, 대청 뒤쪽 벽에 지금의 당호와는 다른 운암정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 후진을 모아 강론하는 데도 사용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밖에도 김부인(金富仁, 1512-1584)이 지은 산남정(山南亭)’, 김부신(金富信, 1523-1566) 양정당(養正堂)’, 지애정(芝厓亭), 장판각(藏板閣) 등 수많은 고가들이 산기슭의 경사면 곳곳에 들어앉아 있다.

 군자고와(君子古瓦)’에서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이는 군자마을 일부를 한옥스테이로 개방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위에 있는 아호고려(雅湖古麗)’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하나 더. 고택도 흐르는 세태를 무시할 수는 없었던 듯, 아호고려에는 인스타그램 인증사진 촬영장소가 만들어져 있었다.

 지애정(芝厓亭)’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었다. 하긴 수운잡방(需雲雜方, 보물 제2134)’이 탄생한 고을이니 어련하겠는가. 참고로 이곳은 군자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입향조의 종손과 외손 7명을 오천 7군자라 불렀는데, 모두 퇴계의 제자로 도덕과 덕행이 높았다. 정구라는 이가 마을에 들렀다가 한 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 이후 마을 이름도 군자리로 불렸다. 그런 인물들 중 입향조의 둘째 아들인 탁청정 김유는 수운잡방이라는 책을 남겼다. 16세기 안동 음식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안동식혜를 비롯해 안동 전통 음식에 대한 고유한 비밀을 담고 있다.

 안동선비순례길은 도산구곡(陶山九曲) 주변을 따라 선비의 숨결을 느끼고 그 흔적을 찾아보며 걷는 여행길이다. 그중 1코스인 선성현길은 도산구곡 중 첫 번째 물굽이인 운암사곡(雲巖寺曲)’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운암산(雲巖山)의 산기슭 강변에 있던 운암사라는 절에서 따온 지명인데, 절은 오래전부터 없어졌었다. 아니 지금은 그 터마저도 물속에 잠겨버렸다. 그러니 옛 선비들이 배 띄우고 놀던 아름다운 풍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저 녹색으로 물든 호수만 눈에 들어올 따름.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고나 할까?

 11 : 37. 들머리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시작한다. 초입에 1코스 표석과 함께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참고로 오천유적지를 둘러보는 데는 23분이 걸렸다. 1.21km를 걷는데 소요된 시간이다.

 초입에는 오천유적지 등산로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선비순례길은 트레킹이라기보다 산행에 가깝게 시작되고 있었다. 통나무계단을 가파르게 올라선 다음에도,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11 : 49. 산길로 들어선지 12. 임도(외내길)로 내려선다.

 갓을 쓴 이정표(월천서당 11.0km/ 오천유적지 2.7km)가 우리가 지금 선비순례길을 걷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멋진 아이디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담고 있는 정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기 딱 좋았다. 1코스 표석이 세워진 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 0.65m, 오천유적지에서 출발했다고 쳐도 0.9km에 불과한데 이정표에는 2.7km로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11 : 53. 임도를 따라 잠시 내려오면 35번 국도(이정표 : 월천서당 10.5km/ 오천유적지 3.2km)를 만난다. 삼거리의 버스정류장이 이곳이 당고개임을 알려준다. 옛날 이 근처 어디쯤에 성황당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후부터는 국도를 따른다. 조선 최고의 유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을 배출한 고장답게 도로 이름도 퇴계로로 붙여놓았다. 선생의 탄생지가 안동부 예안현(禮安縣, 현재의 도산면·예안면 일대)’이었으니 말이다.

 탐방로는 안동호를 끼고 간다. 와룡면 중가구리로 흐르는 낙동강의 협곡에 높이 83m, 길이 612m의 댐을 쌓아 만든 낙동강 수계의 최대 인공 저수지이다. 조금 더 좁히면 안동호의 상류, 도산구곡의 1곡과 2곡의 중간쯤이 된다.

 12 : 14. ‘역동선생유허비(易東先生 遺墟碑)’. 유허비란 한 인물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는 빗돌을 말한다. 역동(易東)은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우탁(禹倬, 1262-1342)의 호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우탁 선생의 옛 집터이거나 그의 위패를 모시던 서원이 있던 자리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아니 안동댐의 수몰을 피해 1975년 이곳으로 옮겨왔다니 원래의 터는 이곳이 아니었다.

 우탁은 고려 후기의 대학자이자 성리학의 선구자로 알려진다. 동방(東方)에서 가져온 주역 1개월 만에 터득했다 하여 역동선생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로 시작되는 대표작 탄로가(歎老歌)’는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늙음을 인위적으로 막아보려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12 : 16. ‘안동호 수상레저 마린’. 안동호와 임하호를 보유한 안동은 물의 도시이다. 덕분에 수상스키와 웨이크보드, 워터슬라이드, 블롭점프 등 수상레포츠의 천국으로 알려진다.

 도로 건너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물놀이하러 찾아온 이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성수기인데도 잔디밭에 방치된 모터보트가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든다. 녹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최근의 안동호’, 녹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저런 물속에서 노닐고 싶은 사람들은 없었을 게고, 할 일이 없어진 보트는 저렇게 낮잠만 잔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예안교가 맞는다. ‘역계천(驛溪川)’ 하류를 가로지르는 다리로 와룡면과 도산면을 이어주는 소통의 가교이기도 하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안동호’. 도산구곡의 1곡인 운암사곡이 끝나고 2곡인 월천곡이 시작되는 어림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12 : 19. 다리를 건넌 선비순례길은 오른쪽 호안으로 빠져나간다. 호숫가를 따라 데크 탐방로가 나있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퇴계로를 따르기로 했다. 탐방로에서 살짝 비켜나있는 보광사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12 : 23. 보광사 표지석이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란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라고 권하고 싶다. 조금만 더 가면 보광사의 후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표석의 지시대로 들어서니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보광사가 얼굴을 내민다. 비탈진 언덕 아래를 지나가는 선비순례길의 데크 탐방로도 눈에 들어온다.

 12 : 25. 보광사(寶光寺).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주민들의 발의에 의해 1962년 창건됐다(디지털안동문화대전). 원래는 예안면 동부리에 있었으나 안동호의 수몰을 피해 197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역사가 일천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소장하고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 유물(보물 제1571)’은 그런 선입견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하다. 인근 용수사(龍壽寺)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지는데, 봉정사(안동)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620)과 함께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보살상이라고 한다.

 절간 앞은 큼지막한 정자가 들어앉았다. 안동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길 수 있는 멋진 쉼터이다. 아니 절간의 독경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시 졸다 갈 수도 있겠다.

 정자 옆에서 나무계단을 이용해 선비순례길로 내려선다.

 승려들이 일구는 듯한 작은 텃밭을 만나기도 한다. 중국 당나라 때 고승으로 유명한 백장선사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했다. 중생들에게 일은 삶의 한 방편인 노동을 뜻하나 사찰에서는 수행의 하나로 여겨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 저 텃밭은 일터이자 수행처가 분명하다.

 호숫가로 내려서면 안동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녹색으로 멍든 물빛이 그 감흥을 절반 이하로 뚝 떨어뜨려버리지만.

 길을 내느라 고생한 흔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 구간은 통나무를 울타리처럼 세워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았다.

 12 : 49. 예끼마을에 이르니 서부선착장이 반긴다. 서부선착장-도산서원, 서부선착장-요촌을 운항하는 작은 배들이 수시로 들락거린다고 한다.

 선착장의 위 언덕에는 선성 공원(이정표 : 월천서당 6.6km/ 오천유적지 7.1km)’이 조성되어 있었다. 929년 신라의 선곡현감 이능선이 고려에 귀순하여 (안동)병산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단다. 이에 왕건이 이능선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능선의 선()자를 따서 이곳을 선성(宣城)’이라 하였다나?

 13 : 00. ‘예끼마을’. ‘예끼란 누군가를 혼내거나, 혼이 날 경우에 듣는 말.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쓰는 표현이다. ‘예끼 다음은 이놈이나 고얀놈이 입에 붙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예끼는 재주 예()’자와 재능·소질을 뜻하는 우리말 를 합쳐 만들었단다. 하나 더. 이 마을은 오래되지는 않았다. 1976. 낙동강 물길을 막아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여러 마을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예안마을도 그중 하나였다. 주민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차마 마을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산언덕으로 모여들었으니 그게 예끼마을이다. 그러나 농촌공동화 현상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농사짓고 소 키우던 이웃은 돈벌이를 찾아 도시로 떠났고, 그렇게 마을은 절반으로 줄었다. 그러다 2015년 안동시의 예술마을 조성사업을 지원받아 벽화 골목을 꾸미고 상가 간판도 입체적이고 감각적인 모양으로 바꿨다. 빈집을 활용해 식당이나 한옥카페로 꾸몄다. 예술가들이 마을에 들어와 터전을 잡으면서 골목골목에 작은 갤러리 등을 내면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이 되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밝은 페인트로 칠한 벽과 정겨운 벽화, 그리고 아기자기한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물길 테마, 글 읽는 테마, 재미있는 테마, 트릭아트 등 저마다의 개성과 색깔을 뽐내는 골목들이 마을 곳곳에 들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도자공방 근처는 핫 플레이스로 꼽힌다. 벽과 바닥에 입체적이고 실감나게 트릭아트를 그려놓았다. 재미있는 사진을 찍어볼 수 있다는 얘기다.

 요즘 애들은 저 벽화의 놀이를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우리 가족이란 조형물도 눈에 띈다. 이곳 서부리는 안동댐 조성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수몰민들이 집단으로 옮겨온 이주단지이다. 작품은 새로운 터전으로 이주하는 가족을 수직적 조형미를 부여해 해학적으로 표현했단다. 가장 아래서 가족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아버지, 그 위로 짐꾸러미를 머리에 인 어머니, 그들의 위에서는 두 남매가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다.

 일부 조형물은 지붕 위까지 올라갔다. 이렇듯 마을 곳곳이 예술향이 가득하다. 조용하던 마을을 예술과 끼로 채워 넣은 것이다. 우체국은 유명작가의 전시공간과 교육공간으로, 마을회관도 작가 창작실로 탈바꿈시켰다. 안동선비순례길 종합안내소 앞의 끼 갤러리는 마을 아이들의 솜씨를 뽐내는 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앞(문화단지 입구), 호수를 마주보는 곳에는 민가촌이 들어서 있었다. 한옥체험(숙박)이 가능한 곳인데, 객실마다 담장을 둘러 독립공간으로 나누어 놓았다. 현대식 욕실에 취사도 가능하단다.

 선성현 문화단지도 조성해놓았다. 옛 선성현(宣城縣)의 관아 건물을 복원하여 조성한 예끼마을 내 문화단지다. 장관청에서는 전통 의복체험, 형리청에서는 죄수를 벌주던 형벌체험을 해볼 수 있으며, 문화단지 내 역사관에서는 선성과 예안의 유래와 인물 등에 관한 자료도 확인할 수 있다.

 문화단지로 들어가는 길. 패널로 시판을 만들어 게시했다. 볼거리에 읽을거리를 더해 탐방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선성현 아문(衙門). 옛 고을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층의 문루로, 아래층은 통로로 사용하고 윗층은 누마루로 이용하도록 했다. 앞면 4칸에 측면이 3칸이니 현청의 아문치고는 대단한 위세라 하겠다.

 형리청. 벌을 받는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장관청. 이곳에서는 전통 혼례도 가능하나 보다.

 사시사철 방문객으로 들끓는 곳이니 어찌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 안동호 속으로 파고드는 선성수상길’, 그게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액자형 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다.

 선비순례길의 백미는 선성수상길이다. 그러니 포토박스 안에 저 풍경을 넣어보면 어떨까? 사실 선비순례길은 안동호 위에 곡선으로 설치해놓은 저 데크 길 덕분에 유명해졌다. 수면에 거의 맞닿을 정도로 설치돼 있어 물 위를 걷는 듯 짜릿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13 : 24. 예끼마을 모두 둘러본 다음 다시 길을 나선다. 민가촌 앞에서 선성수상길이 열리는데, 초입의 선비순례길 안내도와 이정표(호반자연휴양림 1.2km/ 오천유적지 7.8km)가 길을 안내해준다.

 선비순례길 1코스(성선현길)의 자랑거리는 안동호 위를 걷는 선성수상길이다. 예끼마을 앞 호수에 1.1km 길이의 다리(교각이 없는)를 놓았다. 과거 누군가의 집을, 학교를, 일터를, 골목을 밟고 물 위를 둥둥 떠서 걸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깊이를 알 수 없는 안동호 위를 걷는 기분은 짜릿하면서도 이색적이었다. 그러니 탁 트인 안동호 전망을 즐기며 여유롭게 걸어볼 일이다.

 다리는 부교(浮橋)의 형식을 취했다. 안동호의 수위 변동에 따라 뜨고 가라앉는 구조라고 한다. 초입의 안내판은 이에 대한 설명과 함께 걸을 때의 주의사항까지 적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가 하면, 또 물과 매우 가까우니만큼 이에 따른 주의사항이 필요했을 것이다. 단체로 이동할 때는 분산 통행이 필수, 수위가 낮을 때는 초입의 경사가 가팔라지니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란다.

 호수에는 수많은 수차가 쉼 없이 돌고 있었다. 역대 최악의 녹조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안동호. 이를 조금이라도 개선해보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맞다. 최근의 안동호는 폭증한 녹조로 인해 수면이 두꺼운 매트를 깔아놓은 것처럼 끈적끈적하다고 했다. 덩어리 진 녹조 알갱이가 손에 만져질 정도이고 심한 곳은 악취까지 풍긴단다. 그러니 지자체에서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다리로 연결되는 저 섬(보기에만) 선성산성 공원이 아닐까 싶다. 나지막한 구릉에 있는 산성을 공원으로 꾸며놓은 곳이다. ‘선성산성은 영남지역에서 안동을 지나 영동지역으로 가는 교통로의 배후에 방어와 행정을 목적으로 쌓았던 치소성(治所城)’이다. 왕건이 견훤과 고창(안동의 옛 이름)전투를 치를 때 예안진에 주둔했었다고 할 만큼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수상길 중간에는 쉼터도 두 곳이나 만들어 놓았다. 첫 번째 쉼터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옛 예안국민학교를 추억하는 공간이다. 추억의 오르간과 책걸상, 그리고 교가와 사진들도 함께 전시해 놓았다. 이제는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근현대사를 간직한 학교를 안동시의 배려로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안국민학교는 1909년 이인화님이 후진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사재를 투입하여 설립한 사립학교다. 설립 당시에는 3년 과정으로 수신(도덕국어·한문·산술·창가·도화·체조를 가르쳤으며, 1912 1회 졸업생으로 6명을 배출했다. 예안공립보통학교(1912), 예안공립국립학교(1941)를 거쳤고, 1945년 광복 후에는 예안국민학교가 되었다. 그러다 1974년 안동댐으로 인해 마을이 수몰되면서 현재의 한국국학진흥원 옆으로 옮겨갔다가 학생이 없어지면서 폐교되었다고 한다.

 눈에 들어오는 안동호는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넓었다. 맞다. 안동호는 소양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단다. 조선 시대에 낙동강은 하류의 배가 안동까지 드나들 정도로 물이 깊고 맑아 관개 및 교통에도 큰 몫을 했다. 하지만 광복 후 해마다 홍수의 범람으로 많은 피해를 겪었다. 이에 1971년 댐 공사를 시작 1976 10 28일 준공함으로서 안동호가 탄생했다.

 수상길은 안동호반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진다. 수상길의 총 길이는 1.1km. 공중부양이라도 하듯 물위를, 그것도 사부작사부작 걷는 맛이 여간 색다른 게 아니다. 하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이달(2018. 5)의 추천 길로까지 뽑았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13 : 45. 수상 데크가 끝나는 지점에서 뒤돌아본 풍경. 꿈틀대며 호수로 파고드는 모양새가 흡사 뱀을 닮았다. 여기서 팁 하나. 저 길은 물안개 낄 때가 최고라고 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을 선사해준단다.

 13 : 48. 수상 데크가 끝나면 길은 초가와 기와, 현대식 숙소가 갖춰진 안동호반 자연휴양림(100)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선비순례길은 200m쯤 들어가는 곳(‘둠벙이 있다)에서 오른쪽으로 갈려나간다.

 숲속의 작은 둠벙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다가온다. 자연휴양림에서 조성한 모양인데, 이용객들로서는 이만한 산책코스도 없겠다.

 이후부터는 테크 로드를 따른다. 비탈진 산자락에 기대듯 길을 냈다. 그러다보니 오르내림이 심한 편이다. 아니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는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큰 고도차를 보인다.

 선비순례길은 옛 선비들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걷기여행 길이다. 그러니 선비걸음으로 사부작사부작 걸어야 제멋이다. 옛 시조라도 흥얼거리며 말이다. 하지만 선비순례길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저렇게 가파른 계단을 어떻게 선비걸음으로 오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코스가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원시의 숲을 헤집으며 내놓은 길로 들어서면 웬만한 더위쯤은 저리가라다. 오늘처럼 36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는 별 수 없었지만.

 14 : 16. 뼈대만 남아있는 고가(古家)도 눈에 띈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기와로 보아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월의 무게를 배겨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 안동호에 물이 차면서 길 자체가 사라져버린 게 원인일 수도 있겠다.

▼ 날이 선 벼랑에는 잔도(棧道)처럼 길을 내기도 했다.

 덕분에 시야가 열리면서 발아래로 안동호의 풍광이 펼쳐진다. 감탄이 연달아 나올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호수를 가득 메운 녹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나저나 녹조 아래 물 속 생물들은 잘 살아가고 있을까?

 14 : 26. ‘전망대로 올라가는 데크 계단이 놓여있다. 안동호의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조망처이다. 특히 마음을 비우고 물멍 때리라며 무심정이란 정자까지 지어놓았단다. 하지만 0.3km나 되는 거리가 문제였다. 36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저런 가파른 계단을, 그것도 300m나 올라간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고서는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갈림길에 만들어놓은 쉼터에서도 안동호가 보인다는 점이다. 더 이상 못가겠다며 널브러진 집사람에게 식염(15년쯤 전 미주 출장 때 구입했는데 포도당까지 가미되어있어 효과가 꽤 좋다)을 주고, 이곳이 무심정이려니 하며 느긋하게 물멍을 때려본다.

 누군가는 산길이 인생을 닮았다고 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가며 일어난다는 것이다. 선비순례길의 데크 구간이 딱 그랬다. 한참을 올라왔으니 이제 또 그만큼을 내려가야지 않겠는가.

 14 : 51. 길은 산자락을 향해 파고들기도 한다. 그러다 만난 농막(kakaomap에는 청고개골로 적혀있다). 걷기 여행의 도반이자 사진작가이신 몽중루님이 귀인을 만났다는 곳이다. 갈증을 참지 못하고 문을 두드렸는데, 마침맞게 주인장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인장이 생수(샘이 없어 물을 사다 먹는단다)는 물론이고, 체력을 보충하라며 박카스까지 대접하더라는 것이다. ‘안동 선비다운 손님 대접이라고나 할까?

 청고개에서 내려온 임도는 농막을 지나 호반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비순례길은 농막 근처(이정표 : 월천서당 2.6km/ 오천유적지 11.1km)에서 다시 데크 로드로 올라선다.

 길은 여전히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아니 가끔은 버겁다싶을 정도로 길고 가파르게 오르내리기도 한다.

 15 : 07. 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탐방로 곳곳에 쉼터를 만들고 벤치를 놓아두었다. 아무튼 이즈음 우리 부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더 이상 못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앉아있기도 힘들다며 벌러덩 누워버리는 게 아닌가. 남아있던 식염(10알이나)과 함께 식수를 먹이고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는 집사람의 뒷모습은 가여울 정도다. 천근만근이나 되는 듯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워 보인다.

 15 : 23.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오르막(이정표 : 월천서당 1.6km/ 수변 60m). 이번에는 아예 한국문화테마파크가 걸터앉은 언덕까지 오르란다. 뭔가 보여줄게 있으니 저 높은 곳까지 오르라고 하겠지?

 15 : 27. ‘이런 나쁜 놈들’. 지친 다리를 이끌고 올라온 언덕에는 흉물스런 하수처리시설말고는 아무런 볼거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육두문자가 튀어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명한 사람들은 계곡을 횡단하고 있었다. 맞다. ‘데크 로드는 원래부터 언덕으로 오를 일이 아니었다. 저 계곡을 가로질러야 정상이다. 거리가 단축됨은 물론이고, 시설비 또한 많이 줄였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오솔길을 따라간다. 이 구간 역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지만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15 : 51. 이때 세계유교선비공원의 연무마당 앞을 지나기도 한다. 참고로 22 8월에 개장한 세계유교선비공원은 컨벤션, 박물관, 테마파크가 함께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그중 연무마당은 군사들이 무예를 익히던 훈련장을 연출해놓았지 않나 싶다.

 15 : 53. 준비해간 식수(1.5리터)가 동이 나고서야 월천길(퇴계로와 월천서당을 연결시킨다)’로 올라설 수 있었다. 이정표(월천서당 0.5km/ 수변데크 1.16km)가 거의 다왔다며 조금만 참으란다.

 15 : 57. 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월천서당이 놓여있다. 그보다 더 반가운 것은 유적지 초입에 주차되어 있는 산악회 버스였다. 덕분에 얼음물로 갈증을 달랜 다음 월천서당을 둘러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안동호를 눈에 담을 수 있다. 도산구곡(陶山九曲)의 두 번째 물길인 월천곡(月川曲)’이기도 하다. 참고로 선비순례길이 지나는 도산구곡은 이황(李滉)의 후학들이 모여 시문(詩文)을 지으며 학문을 전승하던 곳이다.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 무이구곡(武夷九曲)’을 흉내 내 낙동강 상류의 여러 산골짜기와 물굽이 중 대표적인 아홉 곳의 경승지에 그에 맞는 이름을 붙여 원림(園林)으로 구성했다. ‘오가산지를 보면 많은 유학자들이 배를 타고 도산구곡을 유람했음을 알 수 있다.

 월천선생 고택(편액은 舊宅이라 적었다).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52(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경전 연구에 주력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이황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의 상덕사에 신주(神主)가 모셔져 있단다.

 16 : 04. 월천서당(月川書堂)은 수령이 470년이나 된다는 은행나무가 지켜주고 있었다. 조선시대 문신 조목(趙穆)이 중종 34(1539)에 세워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라고 한다. 현판은 스승인 퇴계 이황이 써주었단다. 하지만 문이 닫혀 있는데다 담장까지 높아 편액은커녕 안을 들여다보기도 어려웠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3.42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아니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씨를 감안하면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출발할 때만 해도 집사람은 평상시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갔고, 결국 종료지점에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게 싫다며 카메라 앞에조차 서지를 않았다. 하긴 트레킹을 미치고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제대로 먹는 회원이 거의 없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이에 산악회 운영진들도 놀랐던 모양이다. 8월 둘째·셋째 주말은 트레킹을 쉬어가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