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19구간(청남대 사색길)
여행일 : ‘23. 5. 20(토)
소재지 :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일원
여행코스 : 상산마을→곰실고개→곰실봉→철책초소→청남대2관문→좌골삼거리→피미숲길→작은용굴→괴실삼거리→노현리 습지공원(거리/시간 : 14km, 실제는 13.26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는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과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리’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을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열아홉 번째 구간인 ‘청남대 사색길(14km)’을 걷는다. 청남대(옛 대통령 별장)로 이어지는 드라이브 길(인도가 따로 없다)을 걷는 게 다소 부담스럽지만, 호젓한 대청호 풍광에 더해 선사시대 유적이라는 ‘작은 용굴’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 들머리는 하산마을 버스정류장(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산덕리)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문의 IC에서 내려와 32번 지방도를 타고 문의·대전 방면, 문의사거리(문의면 미천리)에서 회남·문의로(청남대 방면), 상장삼거리(문의면 상장리)에서 509번 지방도로 옮겨 회남·보은방면으로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하산마을에 이르게 된다. 19구간의 시점은 상산마을이나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해 출발지를 변경했다.
▼ 대통령 별장이던 청남대로 이어지는 호젓한 드라이브 길(주말에는 교통체증도 생긴다)이 포함된 구간, 상산마을에서 청남대2관문까지 곰실봉(326m) 구간(3km)을 제외하면 대부분 평지를 걸으며 아름다운 대청호 풍광과 마주한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피미숲길, 대청호반에 기대어 아름다운 산책로를 조성했다. 하지만 청남대로 연결되는 도로는 인도가 따로 없으니 안전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 하산마을 쉼터에 세워진 안내판. 19구간(청남대 사색길)의 초반부는 ‘초록감투마을 산책로’와 상당부분 겹치는 모양이다. ‘곰실봉’으로 가면서 만난 이정표도 대부분 초록감투마을에서 세운 것들이었다. 참고로 ‘초록감투마을’이란 산덕리 일대에 조성된 농촌휴양체험마을이다. 마을에 머물면서 ‘손두부·장아찌·과실청’만들기 등의 체험은 물론이고, 마을에서 생산되는 마늘·버섯·과일·효소 등을 로컬매장을 통해 구입할 수도 있다. 얼마 전 16구간 때 만났던 ‘벌랏한지마을’과 같은 형태의 체험마을로 보면 되겠다.
▼ 서쪽, 그러니까 상산마을로 연결되는 ‘산덕길’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시간에 쫓겨(집사람은 3km쯤 전방에서 걷기 시작했다) 답사를 포기했지만 왼편의 야트막한 봉우리에는 태실(충북 기념물 제86호)이 있다.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인성군’의 태를 봉안한 곳이다.
▼ 10분쯤 걸으면 ‘상산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산덕리(山德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로, 그 가운데 가장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상산(上山)이란 지명이 붙여졌다.
▼ 18구간과 19구간의 경계임을 알리는 이정표(19구간 청남대 4㎞/ 18구간 염치리 4.5㎞)는 상산마을 어귀의 쉼터(정자) 앞에 세워놓았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청남대 방향으로 들어서면서 19코스가 시작된다. 십여 호쯤 될까 한 작은 마을을 관통한다고 보면 되겠다.
▼ 마을길에서 만난 이정표(거리나 방향표시가 조금 전 마을 어귀에서 본 것과 같다)가 이제 그만 마을을 벗어나란다. 그런데 청남대 방향의 표지판을 뒤집어 놓은 건 무슨 이유일까?
▼ 내일이 소만(小滿).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절기다. 그래선지 농부는 모내기에 한창이었고, 마을 앞 들녘은 모내기를 이미 끝낸 논들도 상당히 보였다.
▼ 작고 외진 산골마을이지만 그 역사만큼은 오래인가 보다. 저렇게 큰 은행나무가 우릴 배웅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마을 어귀에서는 이보다 더 큰 느티나무도 만났었다.
▼ 은행나무 옆 제각이 눈길을 끌기에 다가가 봤다. 충효각이나 열녀각쯤 되겠거니 하며. 하지만 안에 묘비를 모시고 있었다. 부인이 숙부인(淑夫人)이니 본인은 조선시대 정삼품 당상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묘비는 중추부사(종이품 벼슬로 처에게 ‘정부인’의 작호를 내렸다)라 적었다. 앞뒤에 적힌 벼슬은 더 이상하다. 직장(直長, 종칠품)과 현령(縣令, 종오품)이란다. 아서라. 남의 가문 빗돌에 왈가왈부해서 뭐하겠는가.
▼ 농로였던 길이 산자락에 들어붙은 후부터 임도로 변했다. 오르막길이지만 경사가 완만해서 걷기에 딱 좋다. 웃자란 잡초가 심심찮게 발목을 휘감기는 했지만...
▼ 그렇게 15분쯤 걸어 ‘곰실고개’에 올라선다. 월굴봉과 곰실봉을 잇는 능선의 안부로, 이정표(정상전망대← 0.42㎞/ 2코스 초록감투마을→ 2.0㎞/ 초록감투마을↓ 1.5㎞)는 이 구간이 초록감투마을산책로와 겹침을 알려준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전망대 방향, 그러니까 곰실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따른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심심찮게 나타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밧줄난간을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0분(곰실고개에서 15분). 19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곰실봉(328.2m)’에 올라섰다. 높이가 300m를 겨우 넘기는 나지막한 봉우리지만 남쪽 산자락에 아름다운 청남대를 품었으니 명산의 반열에 놓아도 손색이 없겠다. 그런 점을 높이 샀던 모양이다. 꼭대기에 멋진 데크 전망대를 지어놓았다.
▼ 전망대에 올라서자 대청호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울창한 숲이 시야를 가로막아 완벽하지는 않다. 시야를 높이기 위해 대를 만들었지만 숲 위까지 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 정상석은 세워져 있지 않았다. 이정표(학바위전망대 2.7㎞/ 초록감투마을 2.0㎞)에 매달린 정상표지판이 그 아쉬움을 달래준다.
▼ 하산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학바위전망대’ 방향이다. 시작부터 급하게 내려서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이는 기우였다. 그 가파름은 오래지 않아 끝나고, 이후는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순탄한 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 얼마쯤 걸었을까 산봉우리를 향해 치닫는 방향표지판과는 달리 오백리길은 산의 허리께를 째며 옆으로 간다. 초록감투마을등산로와 헤어지는 지점이지 싶다.
▼ 오백리길은 대부분의 산봉우리를 피해 우회한다. 그러다보니 가파른 오르막길은 거의 만나지 않는다. 그저 피톤치드를 듬뿍 보내주는 기분 좋은 소나무 숲길을 걷는다고나 할까?
▼ 하산을 시작한지 15분. 시멘트로 지어진 초소(첨부된 지도에는 ‘대공초소’로 나타난다)가 눈에 띈다. 청남대가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되던 시절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군인들이 보초를 서던 곳이다.
▼ 초소를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곰실봉 구간에서 경사가 가장 심할 듯. 거기다 이곳에는 밧줄도 매어놓지 않았다. 그 가파름이 오래지 않아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 4~5분쯤 더 걸어 능선 안부(첨부된 지도의 ‘철책초소’)로 내려선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청남대로 연결되는 맞은편 능선이 철조망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 내려오는 도중 대청호와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진다. 대청호가 그 아름다운 자태를 살짝 드러낸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 청남대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에 내려섰다. 이정표(작은용굴 6㎞/ 청남대 1.5㎞)는 이곳을 ‘청남대 입구’로 적고 있었다.
▼ 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청남대 제2관문’이다. 저 길을 따라가면 전두환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청남대에 이르게 된다. 1983년에 지어져 역대 대통령들의 별장으로 사용되다, 2003년 민간에 개방됐다. 하지만 사전예약은 필수, 또한 소정의 입장료를 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이후부터는 ‘청남대길’을 따른다. 해를 등진 채 왼쪽으로 대청호를 옆에 끼고 북쪽(문의면소재지 방향)으로 걸어 올라간다. 이 구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청남대가 대통령 별장이었던 만큼 길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왼쪽에 대청호수가 펼쳐져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준다.
▼ 이 부근은 ‘산딸나무’ 군락지인 모양이다. 길의 양옆이 온통 새하얀 산딸나무 꽃으로 뒤덮였는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저 꽃을 성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를 산딸나무로 만들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거기다 묘하게도 넉 장의 꽃잎이 십자가를 쏙 빼닮지 않았겠는가.
▼ 대청댐 건설로 고향을 떠난 이들이 세운 ‘망향비’가 눈에 띈다. 대청호가 생기면서 수많은 마을들이 물속에 잠겼고, 대청호 주위 곳곳엔 실향민들의 마음을 달래는 망향비가 들어섰다.
▼ 굵직한 가로수를 친구 삼아 천천히 걷다가 호수 방향으로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대청호가 보여주는 풍광에 흠뻑 빠져본다.
▼ 그렇다고 너무 빠져들지는 말자. 이 구간은 인도가 따로 없는 2차선 도로라서 길 한쪽에 붙어 걸어야 한다. 평일은 어쩐지 몰라도 오늘 같은 주말에는 오가는 차량이 많아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호숫가 가까이 산책로를 따로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인근 지자체에 전해본다.
▼ 도로로 내려선지 40분. 청남대 관람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제1문’이 나온다. 차량통행을 막을 때 사용되는 바리게이트가 놓여 있는 게, 이곳에서 차량이나 사람의 통행을 제한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 청남대를 오가는 이 길(청남대길)은 좌우로 도열해 있는 가로수가 멋지다고 해서 ‘청남대 가로수길’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울창함이 드리운 숲길은 새어드는 햇살도 살갑고 파고드는 바람도 상쾌하다. 2004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 입상했는가 하면, 2005년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꼽힌바 있다.
▼ 조금 더 걸으면 정문. 방문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에 적힌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시작되는 ‘청남대가로수길’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풍광은 물론이고 숲이 보내주는 청정한 기운으로 넘치는 길...
▼ 정문을 벗어나자 여행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저 민박집은 커피에 라면까지 판단다. ‘매점’에 들러 시원한 맥주라도 하나 챙겨볼까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피미마을에 이미 도착해있다는 집사람으로부터 아직도 안 온다는 전화를 두 번이나 받았으니 어쩌겠는가.
▼ ‘이병의’란 사람의 효행비가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부모를 향한 효성이 지극해 성균관장의 표창을 받았단다. 2000년에 받았다니 최근, 사라져버린 줄만 알았던 효자가 아직도 존재했었던 모양이다. 참! 옆에는 이병걸이라는 사람의 추모비도 세워져 있었다.
▼ ‘청남대가로수길’을 벗어나서도 길은 여전히 고왔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풍성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아무튼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가로수길’은 기산사 갈림길에 이르면서 끝난다. 참고로 기산사(箕山祠)는 경술국치로 순절한 이재 조장하(趙章夏, 1848~1910)선생의 항일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지방유림에서 건립한 사당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0분(청남대길로 내려서서는 50분). 기산사 입구를 지나 ‘좌골삼거리(이정표 : 작은용굴 1.5㎞/ 청남대 6㎞)’에 이르면 ‘청남대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나뉘는 1차선 도로로 들어간다.
▼ 마을(상장2리) 표지석이 ‘피미마을’로 들어가란다. ‘작은 용굴’까지 도로를 따라 곧장 갈 수도 있지만, 피미마을까지 에둘러가면서 ‘피미숲길’이라는 명품 산책로를 걸어보라는 것이다.
▼ 4분쯤 더 걸어, ‘길모퉁이’란 민박집(카페)을 지나자 길이 다시 둘로 나뉜다. 탐방로는 도로를 벗어나 들길로 내려선다.
▼ 초입에 ‘피미마을 숲길’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피미마을의 숲길 산책로는 대청호 호반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마을 뒤 언덕으로 오르는 마을단위 둘레길이다. 수변산책길·명상숲길·전망대·가족쉼터 등 1.3㎞ 숲길을 조성해 온 가족이 자연을 느끼며 숲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 몇 걸음 더 걸어 만난 이정표는 기산사(아까 좌골삼거리에 이르기 직전 왼편으로 들어가는 길이 갈려나가고 있었다)에서도 이곳으로 곧장 올 수 있음을 알려준다.
▼ 탐방로는 도로(청남대길) 아래, 물 빠진 호숫가를 따른다. 대청호에 물이라도 넘실거리면 통행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 잠시 후 ‘가족쉼터’란 안내판이 맞는다. 선착장 근처를 가족단위 휴식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단다. 버스정류장은 ‘그리운 그 시절’이라는 소재의 벽화로 채웠다. 머리에 고속도로가 뚫린 소년은 울상이고, 이를 지켜보는 다른 소년은 자기도 걸릴세라 가슴만 두근거린다.
▼ 선착장은 텅 비었다. 손님을 기다리다 지친 사공은 이미 떠나버렸고, 고철로 변한 나룻배 한 척이 한가롭기 짝이 없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대청호의 물도 많이 줄었다. 호숫가는 풀밭으로 변했고, 저 배는 어즈버 태평연월을 그리며 하릴없이 낮잠만 잔다.
▼ 시야가 툭 트이니 전망대가 빠질 리 없다.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대청호와 함께 포토박스에 담아 인생샷이라도 건져보라는 모양이다.
▼ 난간에 서자 대청호가 성큼 다가온다.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와 우람한 산줄기, 그 경계에 자리 잡은 마을까지 한데 어우러져 멋지다는 표현으로 부족할 정도다. 일상에 지친 마음에 호수만큼 넓은 여유를 품는다.
▼ 가족쉼터 뒤는 ‘피미마을’이다. 지형이 키(箕, 곡식을 까불러서 쭉정이 등을 걸러내는 기구)처럼 생겼다 해서 ‘치뫼(箕山, ‘치’는 키의 방언형이다)’로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피미(皮味)’로 변했다는 산골마을이다. 마을 대부분이 대청호에 수몰되고 현재 몇 집만이 남아있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수변산책로로 들어선다. 이때 관광지로 탈바꿈한 피미마을의 현재를 살짝 가늠해 볼 수 있다.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저런 예쁜 집들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참!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우리 피미 갈래?’가 유행이라고 했다. 여기서 ‘피미’는 미세먼지를 피한다는 뜻으로 통한단다.
▼ ‘명상숲길’이란다. 핑크 뮬리(Pink muhly)로 치장된 구간이라는데 때를 못 맞추어선지 아름다운 꽃은 물론이고, 그 줄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여름에 자라기 시작해 가을에 분홍색이나 자주색 꽃이 핀다고 하지 않았던가.
▼ 명상숲길이 끝나면 물가를 따라 난 숲길 ‘수변산책길’이 이어진다. 호숫가를 따라 산책로를 만들었다. 바닥을 야자매트로 깔아 장마철에도 질퍽거리지 않게 했고, 곳곳에 벤치를 놓아 방문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 조금 더 걷자 ‘숲길종점’ 안내판이 이별을 고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 부근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앱이 가리키는 왼쪽 방향에 ‘사유지’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팻말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이를 무시하고 앱의 지시를 따랐으나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100m쯤 걸으면 두 길이 다시 만나는데, 오른쪽 길이 더 가까울 뿐 아니라 길의 상태도 더 좋았기 때문이다.
▼ 다시 뭉친 탐방로는 이제 산속으로 파고든다. 아니 임도로 변해 산자락을 헤집는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 이때 대청호가 살짝 얼굴을 내민다. 대청호에 물이 담기면서 인공호수엔 기이한 해안선이 곳곳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해안선보다도 더 복잡한 선들이 구불구불 윤곽을 드러낸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분, 10분 정도 임도를 타던 오백리길은 다시 청남대길로 내려선다. 이 도로를 따라 6분쯤 더 걷자 도로로 올라오는 자전거 마니아 몇이 눈이 띈다. 저 어디쯤에 뭔가 볼거리가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그런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50m쯤 들어가자 ‘작은 용굴’이라는 선사시대 유적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유적의 성격이나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안쪽에 널찍한 광장이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공간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참! 4만 년 전의 유골인 흥수아이와 짐승 뼈가 발견된 청원 ‘두루봉동굴’이 인근에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용굴’이라는 이름처럼 이 굴에는 용(龍)에 관한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 이무기들의 수도장에서 머물던 10마리의 이무기 중 탈선한 한 마리의 이무기가 옥황상제의 벌을 받아 죽게 되고 수도에 전념한 9마리의 이무기는 용으로 승천했다는 전설이다.
▼ 동굴 내부 계단을 오르면 천정에 뚫린 구멍 너머로 하늘이 내다보인다. 9마리의 이무기가 용이 되어 올라갈 때 생긴 ‘창굴’이라는데, 승천 때 마찰로 생긴 비늘 자국도 찾아볼 수 있단다.
▼ 동굴의 가장 큰 매력은 내부에서 내다보는 바깥 세상이다.
▼ 도로로 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곧이어 ‘월리사’ 갈림길(이정표 : 작은용굴 0.2㎞/ 노현습지공원 1.5㎞)을 마주한다. 표지판은 충북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라 적었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면서 본사인 법주사보다도 먼저 지었단다. 하지만 의신대사가 세운 법주사의 역사는 진흥왕 14년(55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참고로 625에 태어난 의상(義湘)은 702년까지 살았다.
▼ ‘작은 용굴’에서 8분. 느티나무가 많다는 ‘괴곡(塊谷)’마을 앞을 스치듯 지나자 ‘괴실삼거리’이다. 이정표(노현습지공원 1.3㎞/ 작은용굴 0.4㎞)는 이곳에서 청남대길을 버리고 대청호로 내려가란다.
▼ 잠시 후 습지로 내려서 ‘노현리 습지공원’을 향해 걸어간다. 대청호에 물이차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습지로, 여름에 걸으면 몸과 마음이 온통 초록으로 바뀌는 듯한 기분을 만끽 할 수 있는 싱그러운 구간이다.
▼ 이 구간의 자랑거리는 수양버들과 키 큰 갈대숲이라고 했다. 웃자란 갈대 때문에 길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가꾸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갈대밭이 싱그럽기 짝이 없었다.
▼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갈대밭은 원시의 숲을 연상시킨다. 대청호에 대한 각종 규제로 인해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덕분이다. 그게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우린 그 풍경 속으로 걸어간다. 하지만 대청호에 물이라도 차오르면 이 길은 물에 잠길 것이다.
▼ 습지공원에 가까워지면서 길이 또렷해졌다. 탐방로는 ‘품곡천(안내판은 ’노현천‘으로 적고 있었다)’을 거슬러 올라간다.
▼ ‘노현리 습지공원’은 ‘비점오염저감시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저곳은 원래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된 ‘소류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자연이 복원됐다. 수련·부들·난초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군락을 이루면서, 야생조류의 산란처·서식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단다.
▼ 품곡천이 대청호에 합류되는 지점에는 ‘청남대 만남의 광장’이 들어서 있었다. 간단한 요깃거리와 음료수를 파는 휴게소이다. 넓은 주차장과 쉴 수 있는 휴식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 해학적인 표정의 항아리들을 쌓아올린 담이 눈길을 끈다.
▼ 오백리길 19구간은 이곳에서 끝난다. 하지만 우린 문의면소재지를 향해 더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점심상이 20구간을 따라 200m 남짓 더 간 지점에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 노현교 건너 ‘품곡천’ 주변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오가는 이들의 따가운 눈총에 개의치 않고 입맞춤에 열중인 청춘남녀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라때’는 남녀가 손을 잡고 걷기도 부담스러웠는데...
▼ 마을의 번영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신탑(祭神塔)도 눈에 띈다. 왜소한데다 외모 또한 초라하지만 금줄을 쳐놓은 걸로 보아 요즘도 동제를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 날머리는 ‘노현리 습지공원’ 위 공터
문의면소재지 방향의 도로를 따라 200m쯤 더 걷자 너른 공터가 나온다. 그리고 산악회버스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3.26km. 초반 곰실봉 구간(3km정도)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꽤나 빨리 걸은 셈이다. 앞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고 속도를 냈던 모양이다.
▼ 공터는 일류의 전망대였다. 노현리 습지공원이 발아래로 펼쳐지는가 하면, 저 멀리 대청호의 분수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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