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아르메니아  예레반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예레반(Yerevan) : 아르메니아의 수도로 인간이 살아온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하지만 러시아 건축가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yan)’이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 지배하에 있을 때 설계한 계획도시이기도 하다. 포인트는 공화국 광장에서 자유 광장을 거쳐 캐스케이드에 이르는 구간으로, 거리 전체가 신고전주의풍 건물들로 장식되어 있어 마치 파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행객들이 잃어버린 예레반을 낭만을 되찾아줄 것만 같은 분홍색 빛을 띤 도시라며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캐스케이드에서 바라본 예레반 시가지. 시가지 너머로 아라라트 산의 위용이 선명하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신들의 태생과 역사가 시작했다고 믿는 민족의 성산으로, 아라라트가 자리 잡은 아나톨리아 평원의 동쪽은 오랫동안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던 저 영산은 1920년 튀르키예의 영토로 변했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한창이던 1993년 터키가 경제봉쇄와 함께 국경까지 폐쇄한 후 더욱 멀어졌다.(날씨 탓인지 아라라트 산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아, ‘나무위키에서 사진을 빌려왔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예레반은 격자형 가로망을 원형 순환로가 감싸는 형태의 계획도시다. 그래선지 눈요깃거리들은 예레반 중심부에 모두 몰려있다.

 차에서 내리니 낯선 문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뜻은 고사하고 읽기조차 불가능한. 다른 낯선 나라에 발을 디뎠음을 눈이 가장먼저 알아차린 셈이다. 담벼락을 장식하고 있는 저 문자들은 아르메니아 알파벳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방인이 인식하기에는 너무 낯설다. 아래 오른쪽에 러시아어와 영어로 발음이 적혀 있는 것 같은데,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다.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창제 문자를 가진 뿌리 깊은 문화국가라고 했다. 문자가 만들어진 것은 405,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성직자 마슈토츠(Mesrop Mashtots)’에 의해서다. 브람샤푸(Vramshapuh)왕과 사학(Sahak)대주교의 지원을 받아 36자의 아르메니아 알파벳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아르메니아 문학의 시작을 의미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또한 언어를 통한 민족 통합과 종교적 일체감을 갖는 일이 가능해졌다.

 어찌 보면 한글을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마슈토츠가 최초로 옮겼다는 솔로몬의 잠언서 첫 문장은 대충 이렇다. <이것은 지혜와 가르침을 인식하도록 하고 위대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을 알게 한다(Ճանաչել զիմաստութիւն եւ զխրատ, իմանալ զբանս հանճարոյ)>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고문서박물관(Matena daran)’을 찾아보라고 했다(하지만 시간이 없어 다녀오지는 못하고,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게시한다). 안에는 17천여 점의 필사본과 10만권이 넘는 고문서가 보존·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고대·중세 시대의 필사본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필사본도 있단다. 그중 가장 큰 필사본은 무슈의 설교집으로 크기가 가로 55.3cm에 세로가 70.5cm나 되며 무게는 27.5kg이라고 한다. 필사본 중 가장 작은 것은 1434년도에 제작된 교회 달력으로 가로 3cm에 세로가 4cm인데, 무게는 19g에 불과하단다.

 캐스케이드로 가는 길. 해외 유명 브랜드숍과 유럽풍 분위기의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이다. 예레반은 이런 길들이 광장과 광장을 연결해준다.

 벽에 붙은 명패가 눈길을 끌기에 사진부터 찍고 본다. 귀국해서 알아보니 아라 사르그샨(Ara Sargsyan, 1902-1969)’이었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걸출한 조각가로. 라피크 카차트리안(1937-1993)과 같은 수많은 아르메니아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데, 그의 생가(명패에는 ‘1945-1959’로 적혀있다)였던 모양이다. 이사하키안 거리에 있는 그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개조해놓았다니 말이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예레반 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캐스케이드(Cascade Complex)’에 이른다. 예레반의 북쪽 언덕과 도심을 연결시키고 했던 알렉산더 타마니안이 구상한 계단형 구조물이다. 하지만 착공되지 못하고 설계도로만 남아 있던 것을 1970년대 말 예레반의 도시계획위원회 위원장 짐 토로스얀이 부활시켰다. 타마니안의 원안을 기초로 내부에 공간들을 만들어 연결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으며 전면에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예술품들로 치장한 정원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1988년 대지진과 1991년 독립, 전쟁 등으로 중단되었고, 2002년에야 아르메니아 출신 디아스포라의 후손이자 미국의 사업가인 카페스지안이 재산을 출연해 2009년 미술관으로 마침내 문을 열었다.

 캐스케이드의 초입. 캐스케이드를 설계한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ian, 1878-1936)’이 예레반의 도면을 살펴보고 있다. 러시아 출신인 그는 러시아에서 건축가로서의 명성이 정점을 향하던 마흔다섯에 아르메니아로 이주해 이후 반생을 보냈고 또 예레반에서 숨을 거두어 아르메니아의 건축가로 남았다. 그는 예레반의 오페라하우스, 공화국 광장과 주변의 건물 등을 설계하는 등 아르메니아의 건축사와 도시사에 일획을 그었다.

 캐스케이드는 외부의 카페지안 조각공원과 내부의 미술관(art gallery)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 모두 예술작품들로 꾸며졌는데, 조각공원에 조금 더 큰 조각품들이 50m 폭의 녹지와 보행로를 따라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콜롬비아 작가 보테로(Fernando Botero)’가 만들었다는 둥글둥글 오동통통한 여인이 인상적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것이 담배를 피우는 여인에 대한 뭔가를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바로 위에 게시된 로마 전사(Roman warrior)’도 보테로의 작품이라고 한다.

 영국작가 구하(Saraj Guha)’는 도약하는 임팔라를 만들었다. 한 마리의 임팔라가 도약하는 모습을 네 개 장면으로 보여준다.

 한국 예술가 지용호가 만든 정크아트 사자도 전시되어 있었다.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으로 역동성과 용맹성이 두드러진다. 2008년 작품으로 스텐레스와 타이어를 활용해 만들었다.

 그밖에도 포르투갈 출신의 바스콘셀로스(Joana Basconcelos)’, 중국작가 위민준(Yue Minjun), 미국 작가 워이툭(Peter Woytuk) 등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출품한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 작품들을 눈에 담다보면 어느덧 캐스케이드 앞에 이르게 된다. 언덕을 향해 놓인 계단식 정원으로, 572개의 대리석 계단을 6개 층으로 나누고 각 층마다 물이 흐르는 수직적 정원을 들어앉혔다. 작고 아름다운 분수(폭포)와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캐스케이드를 둘러보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밖에 놓인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기본, 그게 힘들다면 내부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면 된다. 이 또한 5개 층으로 나뉘어져 있으니 층이 바뀔 때마다 밖으로 나가 야외정원을 살펴보면 된다.

 내부는 5개 층의 테라스 공간을 만들고 에스컬레이터로 각층을 연결했다. 여기에 기부자의 이름 딴 카페스지안 아트센터를 들어앉혔다. 경사면과 각층의 평면에 흙·유리·금속·목재·폴리우레탄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공예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영국작가 크리스티(Maylee Christie)’가 만든 거대한 저 난()은 유리와 도자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천처럼 느껴지는 것은 색상과 문양이 동양적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는 유리로 만든 보라색 초롱꽃과 쇠로 만든 나비와 꽃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목공예품 의자도 보이는데, 예술이라기보다는 생활용품에 가깝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자동차도 한 대 놓여 있었다.

 ‘Khanjyan Hall’은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다기에 입구의 그림만 찍어왔다. ‘Gregor Khanjyan(1926-2000)’가 그렸다는데, 아르메니아인들의 삶, 투쟁, 역사를 담았다고 한다. 그림에는 아르메니아의 역사적 인물들 얼굴이 수십 명 그려져 있다고 했다.

 밖으로 나오면 작은 공원을 만난다. 벽면에서 물이 떨어지는 인공폭포(분수로 볼 수도 있겠다)와 마름모꼴의 연못으로 이루어진 앙증맞은 공간은 각종 조각품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예레반 시가지를 눈에 담아보는 즐거움은 덤이다. 1층과 2층에서는 조각공원과 오페라하우스를 눈앞까지 끌어당겨 볼 수 있다.

 야외 공원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안성맞춤인 모양이다.

 예레반 풍경은 층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고도를 높인 만큼 시야도 역시 넓어지기 때문이다.

 5층 분수대에는 마틴(David Martin)’의 다이버들이 놀고 있었다. 이들은 물에 뛰어들기 직전 몸의 균형을 잡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 2층에서는 영국작가 브로이어-웨일(David Breuer-Weil)’의 방문객(visitor)도 만날 수 있었다. 물속에 잠겨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청동으로 표현했다.

 에스컬레이터는 5층까지만 운행한다. 그러므로 맨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6층으로 올라서자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50주년 전승기념탑이 반긴다. 아르메니아의 소비에트 시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아르메니아는 주변국인 터어키와 아제르바이잔과는 적대관계이고, 러시아와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나라이다. 그래선지 1991년 소련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했지만, 저런 조형물까지 세워가며 우호를 과시하고 있다. 1945년에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했으니 50주년이면 1995년이 된다. 이 탑이 가지는 의미와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6층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 그 자체다. 예레반 시가지가 가장 넓어진 모습으로 펼쳐지는가 하면, 저 멀리 아라라트 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운이라도 좋으면 신기루처럼 다가온 아라라트 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단다.

 캐스케이드는 현재진행형인 모양이다. 맨 위쪽(6) 뒤에 철근을 드러낸 채로 멈춰있는 공사장이 눈에 띈다. 맞다. 캐스케이드를 조금 더 확대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와 예술작품 수집·기증에 어려움이 있어 사업이 진척되지 않고 있단다.

 전승기념탑으로 가려면 공사장을 에둘러 내놓은 통로를 따라가야 한다. 이어서 경사진 도로를 한참이나 더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이쯤에서 캐스케이드를 내려가기로 한 이유다. 그보다는 예레반 시가지를 조금 더 걸어보는 게 낫지 않겠는가.

 자유 시간을 이용해 시내 중심가를 걸어보기로 했다. 예레반은 격자형 가로망을 원형 순환로가 감싸는 형태의 계획도시라고 했다. 그래선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직각의 널찍한 도로가 인상적이다. 이 도시계획은 알렉산더 타마니안이 담당했다고 한다. 러시아 출신이나 아르메니아에 귀화한 그는 정부청사와 오페라하우스 등을 설계해 국민 건축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첫 만남은 놀이동산’.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다양한 놀이기구들을 갖췄다. 하지만주인인 어린이들 대신 데이트 중인 어른들만 눈에 띌 따름이다.

 옆에는 인공호수도 만들어놓았다. 오리배도 여러 척 띄어놓았으나 움직임은 없었다. 그저 어른들 몇 무리가 맥주잔을 앞에 놓고 담소를 즐기고 있을 따름이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호숫가를 라운지로 삼은 모양이다.

 거리 곳곳에 고급스런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거리에 의자를 내어놓은 야외카페가 있는가하면 실내를 개방해서 카페로 꾸민 곳도 많았다.

 예레반도 교통체증이 심한가 보다. 신호를 기다리는 차량들이 끝없이 늘어섰는데, 그 뒤에서 아르메니아 어머니상이 얼굴을 내민다. 원래 저곳에는 스탈린의 동상이 있었는데, 아르메니아 병사들에 의해 파괴되고 그 자리에 받침대 포함 52m의 거대한 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어머니상까지 다녀오지는 못하고,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올려본다. 어머니상은 칼집에서 칼을 빼는 듯 넣는 듯 거대한 칼을 들고 도시 너머 터키국경을 노려보고 있다. 터키와의 아픈 역사로 지금은 평화시기이지만 언제라도 칼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시가지 풍경. 건물들 대부분이 약간 어두운 핑크빛을 띤다. ‘알렉산더 타마니안이 설계한 건물들은 저보다 더 확실한 핑크빛을 띠고 있었다. 대부분이 응회암(凝灰巖)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 석재는 화산이 분출할 때 재와 모래가 엉겨서 굳어진 돌로 연한 분홍색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레반을 가리켜 핑크도시라고 부른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백조의 호수(Swan Lake)’라는 인공호수가 잠시 쉬었다가란다. 자그마한 호수인데 깨끗하게 물관리가 되어있고, 물가에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의 아르노 바바자니얀(Arno Babajanyan)’의 동상까지 세워놓았다.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호수 앞 도로를 건너면 보행자 전용 거리인 ‘Tashir Street’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즈음 우린 방향을 잃어버렸고, 우여곡절 끝에 ‘Grand Hotel’을 찾아냈다. 중세 유럽풍의 외관을 지닌 이 호텔은 골든 튜립상을 여러 번 받았을 정도로 명성이 높단다. 호텔 앞에 있는 근린공원풍의 샤를 아즈나부르 광장(Charles Aznavour Square)’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작은 분수에 조형물들까지 설치해 놓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광장의 분수였다. 쉽게 볼 수 없는 ‘Zodiac Sign’을 형상화 한 조형물들을 빙 둘러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띠처럼 서양 사람들은 12가지의 별자리(양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등)에 생일을 대비해 운세를 본다.

 분수쇼가 펼쳐진다는 공화국 광장으로 간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가는데, 하나같이 친절하게 가르쳐줘서 별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요 삼부자도 그 친절한 시민들 중 하나다. 이렇듯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방인을 위해 기꺼이 손길을 내민다. 국민소득이 낮은 국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문화적 품격이 돋보인다고 할까? 무엇을 흉내 낸 가벼움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만의 자연스러움과 자존감이 스며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에 다시 가고 싶어 하고, 예레반을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공화국 광장에 이르니 식수대가 반긴다. 맑은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데 지나다니는 시민들이 스스럼없이 물을 마신다. 맞다. ‘아자트 계곡 주상절리에서도 얘기했듯이 아르메니아에서는 마음 놓고 물을 마셔도 된다고 했다.

 예레반 투어의 귀결은 공화국 광장’. 이곳에 광장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20년대 알렉산더 타마니안에 의해서다. 1940년부터 레닌광장으로 불렸고, 1942년 광장 주변에 정부청사가 들어서기 시작해, 1950년대에는 네오클래식 건물들이 사방을 꽉 채우게 된다. 광장 북쪽으로 국립미술관 및 역사박물관, 북동쪽 방향으로는 국토관리부와 정부청사, 남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중앙우체국, 북서쪽으로는 외무성 건물과 에너지 및 천연자원 공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1990년 레닌광장에서 공화국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1년 아르메니아공화국 설립 후 행정부 건물에 대한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공화국광장은 무엇보다 주변의 붉은빛 건물이 인상적이다. 정열적인 붉은빛이 아니고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붉은빛이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이 건물들은 모두 현무암으로 된 기반 위에 다공질 탄산석회의 침전물인 붉은빛의 아르메니아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국립미술관과 역사박물관이라고 했다.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아르메니아 미술품 4만 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중 가치 있는 것들을 56개 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단다. 또한 아르메니아 최대 국립박물관인 역사박물관은 고고학, 인류학, 화폐, 현대사 관련 유물들을 보유 전시하고 있다.

 광장의 자랑거리는 음악분수이다. 야간에 조명을 하고 클래식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춘다. 우리 부부 역시 이 쇼를 보려고 찾아왔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9시부터 펼쳐지는 분수쇼를 보기 위해 예레반 시민들과 관광객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분수쇼는 유럽의 클래식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추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프랑스 국제수상쇼(Aquatique Show International) 회사의 제작으로 2007년부터 운영되고 있는데, 기계·전기·수리 공학적 토대 위에 물 분사, 빛 발사, 음악연주가 결합된 멀티미디어 분수이다.

 음악성, 예술성, 오락성을 갖춘 분수로도 유명하다. 현재는 컴퓨터 공학을 활용해 물과 빛 그리고 음악과 춤이 자동으로 결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단다.

 시간이 없어 가보지는 못했으나,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하는 곳으로 꼽히는 2곳은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게시해본다. 먼저 아르메니아 대학살 기념탑이다. 이왕에 왔으니 이 나라의 아픈 상처도 한번쯤은 보듬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터키인들이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이 사건은, 1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했다. 1915 4 24, 250여 명의 아르메니아인 지도자를 체포하여  앙카라로 연행한 후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를 필두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진행되었는데, 이때 희생된 희생자 수가 최소 80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추산된단다이 참화는 1973년 유엔에 의해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규정됐다. 제노사이드 때 학살을 피한 난민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교포)를 형성했다. 현재 해외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 80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 인구보다 많다.

 다른 하나는 아라라트사에서 운영하는 꼬냑박물관이다. 꼬냑은 프랑스 꼬냑(Cognac) 지방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증류하여 만든 브랜디의 일종으로 꼬냑 지역에서 생산된 술에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다. 바로 아르메니아 아라라트 꼬냑이다. 199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브랜디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워낙 맛이 뛰어나 프랑스 꼬냑협회의 승인을 받아 유일하게 꼬냑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한번쯤 들러 맛이라도 봐야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를 시행에 옮기지 못한 난 면세점에 들러 선물용으로 세 병을 챙겨왔다. 이중 한 병은 여행 중 마셨음은 물론이다.

 아르메니아 여행 중 머물렀던 ‘Ani Central Inn’. 근처에 지하철역과 대형 쇼핑센터 타시르(Tashir)가 있고 예레반의 중심인 공화국 광장까지 걸어서 10분이 채 안될 정도로 시내 중심에 있는 호텔이다. 덕분에 저녁 식사 후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이른 새벽, 아침 입맛도 돋울 겸해서 근처 시가지를 둘러봤다. 이른 아침부터 활기에 넘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편의점조차도 문이 닫혀있어 전체적으로 한적한 풍경을 보여준다. 빵집이 유일하게 문을 열고 있었다고나 할까? ! 아르메니아의 빵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으니 여기서는 음식 전반에 대해 살펴보자.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음식에서도 라이벌이다. 사실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은 조지아다. KBS 음식 다큐멘터리 요리 인류에서도 소개된바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아르메니아 음식이 조지아 음식보다 더 입에 맞는 편이다. 특히 간이 한국인 입맛에 맞는다. 고기를 익힐 때도 그렇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모두 샤슬릭 스타일의 돼지고기 꼬치구이가 유명한데 조지아식은 살코기 위주라 좀 퍽퍽하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꼬들꼬들한 식감을 살리고 비계 부위를 중시해 한국인에게 친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