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일본 간사이 지역 여행

 

여행일 : ‘17. 3. 15()-17()

여행지 : 오사카(오사카 성, 도톰보리),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천룡사, 노노미야신사), 나라(동대사)

 

일 정 :

 3.15() : 오사카(도톰보리)

○ 3.16() :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노노미야신사)

○ 3.17() : 오사카(오사카 성), 나라(동대사)

 

여행 셋째 날 :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

 

 

특징 : 일본에는 우리의 고대사와 관련된 유물이 많다. 두 나라 사이에 교류가 많았고, 그 교류의 결과인 유적이 일본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물들 중에 일본 나라지역에 있는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만큼 중요하면서도 논란이 많은 곳도 없다. 그런 동대사는 누가 뭐래도 일본에서 가장 큰 절이다. 단일 건물로는 세계최대의 목조건물인 대불전(大佛殿)이 있고, 대불전에는 세계 최대의 실내불인 청동 비로자나불이 안치되어 있다. 이밖에도 남대문과 남대문의 금강역사상, 팔각등룡, 종루, 법화당, 개산당, 계단원 사천왕상, 전해문 등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문화의 최대 유적지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아스까 문화(飛鳥文化)’의 보고인 호오류사(法隆寺)에 대비해 덴표문화(天平文化, 729~48)’의 보고라면서 말이다. 동대사는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절이기도 하다. 이 절의 부속건물인 정창원에서 국사 교과서에 소개되어 있는 '신라장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정창원 문서'로도 불리는 신라장적은 통일신라 서원경(청주) 부근 4개 촌락의 경제적 요소들을 조사하여 기록한 문서로 통일신라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동대사 대불과 대불전을 포함한 7개의 건축물이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라있다.

 

 

 나라(奈良)는 관서지방에 있는 일본의 옛 도읍(都邑, 710~784)으로 오사카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져 있다. 헤이조쿄(平城京)라 불리던 이 천년고도(千年古都)는 일본의 초기 문명을 대표하는 7대 사찰 등 많은 불교 건축물과 유물들을 품고 있다. 고후쿠 사(興福寺) 5층탑은 710년에 만들어졌으며, 755년에 세워진 도다이 사(東大寺)는 높이 22m의 대불로 유명하다. 또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호류사(法隆寺)는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와 같은 그림과 조각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동대사는 일금당(一金堂) 쌍탑(雙塔)’을 기본으로 삼았다. 본당인 대웅전을 중심에 두고 전면 좌우에 목탑(木塔, 현재 터만 남아있다), 그리고 주위를 회랑(回廊)으로 둘렀다. 경주의 감은사나 불국사와 같은 가람배치다. 이곳 동대사가 통일신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주차장에서 내리면 동대사의 표지석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세계유산, 고도 나라, 문화재(世界遺産 古都 奈良 文化財)’라고 적혀있는 걸 보면 이곳 동대사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니 표지석보다도 먼저 반기는 게 사슴이었다. 표지석을 살펴보는 나에게 다가와 반갑다며 얼굴을 비벼댄다. 그리곤 떼로 뭉쳐서 졸졸 따라다닌다. 동대사가 위치한 나라공원에서 방목하는 사슴들인데, 그 수가 무려 천여 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참고로 예로부터 이곳 나라현에는 사슴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646)’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라는 아스카시대 호족을 죽이고 소가노 마코 소가노 이루카의 이름을 합해 바카(바보)’라는 뜻으로 사슴을 풀어 놓은 것이 그 원인이란다.

 

 

 사슴으로서는 사람보다도 과자가 더 먼저이다. 특히 냄새가 나는 과자를 손에 쥐고 있으면 수십 마리의 사슴이 달려드는데 나라(공원)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이색 체험이다. 하지만 과자가 떨어지면 가방을 물어뜯거나, 더 달라고 머리로 들이받기도 한다니 유의하자.

 

 

 사슴과 실컷 노닐었으면 이젠 동대사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그 첫 번째 만남은 정문인 남대문(南大門/ 난다이몬). 이름 그대로 거대한 문이다. 문 위에는 화엄종의 대본산(大本山)에 걸맞게 '대화엄사(大華嚴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동대사가 통일신라의 원효와 의상의 화엄사상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그것에 감동하여 지은 절로 알고 있었는데, 남대문의 편액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의 불교는 710년 나라(奈良)의 평성경(平城京/ 헤이죠쿄)으로 수도를 이전한 후 나라불교라는 여섯 교종이 근간을 이루었는데 그 중 하나가 화엄종이다. 이 화엄종은 신라의 심상(審祥)이 이곳 동대사에서 화엄경을 강론하면서 시작되어 양변(良弁, 료벤)이 그의 제자가 되어 종파를 확립하게 된다. 일본은 한반도를 경유해 538년 불교를 접하게 되지만 702년부터 8번에 걸쳐 중국에 견당사를 파견해 그들의 문물과 불교문화를 왕성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나라시대 덴표(天平) 시기인 729749년 중국의 대불 양식이 반영된 이런 건축물을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건물은 가마쿠라시대에 재건한 것으로 송나라의 건축양식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한다. 팔작지붕이며, 정면이 다섯 칸이나 문은 정작 세 개뿐인 이중문이다. 문의 높이는 기단 위에서 25.46m이며, 바닥에서 지붕 안쪽에까지 이르는 큰 기둥이 18개로 21m에 이른다. 대불전의 규모에 어울리는 일본 최대의 산문이라고 하겠다. 국보(國寶)로 지정된 이유일 것이다. 문은 수평방향의 재를 사용해 기둥과 결합함으로써 구조를 강화시켰고, 기둥위에 공포를 배치하는 일본풍의 선종양식(중국양식)과는 달리 도중에 나무를 찔러 넣듯이 공포를 배치했다.

 

 

 남대문에 모셔진 역동적인 두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동대사 가마쿠라 초엽인 1203년에 불과 69일 만에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의 유명 불상 조각가 운케이와 가이케이에 의해 제작됐는데 하나의 큰 통나무를 조각한 것이 아니고 의 인왕상(仁王像)'으로 더 알려져 있다. 높이가 8.4m에 이르는 이 거대한 목조상은여러 조각을 붙여가며 만들었다고 한다. 뒷면을 평면으로 놓아둔 채로 앞면 만 여러 개로 조각해 붙여 만든 기법인데, 이걸 요세기즈쿠리(寄木造/ 쪽매질기법)’라 한단다. 세월이 흘러 손상이 심하던 것을 1988년에서 1993년까지 5년간의 수리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되찾았다.

 

 

 남대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에 종무소가 있고, 왼편에는 권학원(勸學院)과 진언원(眞言院)이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 위치한 이월당(二月堂)으로 가는 입구에 경지(鏡池)라는 커다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의 수면 위에 대불전과 중문이 비추인다고 해서 거울 경()’자를 붙였다고 한다.

 

 

 경내에는 명치천황나라행재소(明治天皇奈良行在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옆줄에 동대사 동남원 구경내(東大寺 東南院舊境內)’라고 적힌 걸로 보아 메이지(1852-1912)’ 일본 국왕이 이곳(동남원의 옛터)에서 일정기간 동안 머물다 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건물은 중요문화재인 중문(中門/ 나카몬)’이다. 이곳에서 입장권을 구매한 후 금당인 대불전으로 가게 되는데, 문의 중심에는 악귀를 쫓고 축복을 비는 향을 피우는 향로가 있다.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향의 연기를 맞으며 몸을 정화한 후에 금당으로 들어간단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가림막으로 둘러쳐져 있어 전체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없었다.

 

 

 아래 사진은 공사가 끝난 뒤의 중문(中門)으로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왔다. 중문은 현재 출입을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고 한다. 왼쪽 회랑 끝으로만 출입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문은 무늬만 문인 셈이다.

 

 

 중문을 통과하면 곧이어 본전인 대불전(大佛殿/ 다이부츠덴)이 나온다. 동대사의 대불전은 세계 최대의 목조건축물답게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동대사는 749년에 대불상이 먼저 완성된 다음 752년에 금당(金堂)인 대불전이 준공되었다고 한다. 건립 당시는 상계(裳階/ 모코시, 아래쪽의 지붕이 덧대어진 형태)를 포함 정면11(87m), 측면 7(51m)의 건물이었으며 기둥의 총수는 84개였고 공포는 3출목 원형단면의 장연과 각형단면의 부연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초기에 들어섰던 건물은 1180년 방화로 소실되었고, 이듬해인 1195년 헛첨차(檐遮를 기둥에 삽입) 공포형식을 사용하는 중국 송나라의 대불양(大仏様/ 다이부쓰요)으로 재건되었으나 1566년 이 또한 소실된다. 이후 140년간의 재건공사를 거쳐 1705년에 완공된 것이 현재의 대불전이다.

 

 

 2층 지붕의 단층 건물인 대불전(大佛殿)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통층인 내부에 큰 불상을 안치시키기 위해 지붕을 2층으로 만든 것이다. 현존 건물은 동서길이 57m에 측면 50.5m. 높이가 46.8m로 처음 지어질 당시보다 1/3이나 축소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세계 최대의 목조건축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파란 하늘과 푸른 들판에 큰 전각하나가 앞뒤 다 잘라버리고 그 자체가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버티고 서 있다는 누군가의 표현처럼 실로 대단한 크기이다.

 

 

 대불전의 처마는 가지런하다. 하지만 에도시대에는 지붕 무게에 눌려 비뚤빼뚤했을 뿐만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려 활주기둥을 세워 지탱했었다고 한다. 하긴 지붕 무게만도 2,000톤이 넘었다니 무게를 분산시키고 처마선을 가지런하게 유지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 동대사는 가람 건설의 총책임자로 고구려출신인 고려복신(高麗福神), 재정지원은 백제 왕인의 후손인 행기(行基)스님, 조불사 또한 백제 사람인 국중마려(國中麻呂), 거기다 대불전의 건축 책임자까지도 신라인인 저명부백세(猪名部百世)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아예 한반도 출신의 도래인들이 다 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대불전 앞에는 청동 등롱(燈籠, 우리나라의 절들은 보통 석등을 세운다)이 세워져 있었다. 국보(國寶)인 금동팔각등롱(金銅八角燈籠)이라는데, ‘음각 보상당초문(陰刻 寶相唐草文, 보상꽃과 당초 덩굴로 나타낸 장식 무늬)’을 바탕으로 한 여덟 면 가운데 네 면에는 보살이 그리고 나머지 네 면에는 구름 속을 질주하는 사자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보살의 의상을 새긴 기법은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 받는다. 부드러운 자태, 악기를 잡은 팔과 가슴 사이의 원근감, 바람에 휘날리는 천의 등 입체적인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이는 당시 일본의 청동문화가 대단히 발달해 있었음을 증명한다.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일본의 신사(神社) 입구에 있는 테즈미야(手水舎)의 물은 마실 수 없는 게 보통이다. 청결한 몸으로 신사에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구면 임무 끝인 것이다. 그런데 이곳의 물은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깨끗하다는 얘기겠지만 냉큼 마셔볼 용기는 없어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이젠 대불전의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그렇다고 냉큼 들어설 일은 아니다. 세계 최대의 목조건축이라는데 추녀마루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쯤은 쳐다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쳐다본 문간은 실로 대단한 크기였다. 아래층 전면만 눈에 들어올 따름인데도 요즘 지어진 5층 건물의 높이에 맞먹을 정도로 아스라하다.

 

 

 대불전에는 동대사의 상징과도 같은 청동대불(國寶이다)이 모셔져 있다. 쇼무천황(8세기)에 의해 주조된 이 대불은 일본 최대의 청동불상이라고 한다. 절에서 불사를 행할 경우 전각을 먼저 짓고 불상을 안치시키는 게 보통이나, 동대사의 경우는 대불을 먼저 주조하고 그 크기에 맞춰 전각을 지었다니 불상이 얼마나 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불사가 얼마나 컸던지 이를 계기로 일본 왕실의 경제 쇠락을 가져와 한동안 일본에서는 다른 금동불을 제조하지도 못했단다. 대불의 원래 이름은 동조로사나불좌상(銅造盧舎那佛坐像)’이다. 노사나불은 오랜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을 쌓고 나타난 부처다. 화엄사상의 유행과 함께 나타난 대승불교의 부처님 중 하나다. 일본에 화엄사상이 전달되면서 지은 절이니 노사나불이 안치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참고로 이 불상은 14.7m 높이에 추정 중량 450톤으로 아시아 최대의 금동불이었다. 하지만 1997년 설악산 신흥사의 대불(18m)이 완성됨에 따라 아시아 최대라는 이름을 빼앗기고 말았단다. 하지만 약 1,200여 년 동안 아시아에서 최고의 위엄을 자랑했던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높이가 15m나 되는 비로자나대불은 워낙 커서 그 얼굴 길이만 하더라도 약 5m, 손바닥의 길이도 3.1m나 된다고 한다. 이 불상은 매년 87일에 거행되는 연중행사가 장관이란다. 이른바 '어신(御身) 닦기'라는 대청소 행사인데,  250명의 승려가 이른 아침부터 대불전 천장에 둥근 볏짚 의자를 새끼줄로 줄줄이 매달고, 거기 걸터앉아 부처님 얼굴을 닦고 귀를 닦고 입술을 닦아낸다. 이게 흔치 않는 구경거리라서 이날만 되면 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단다.

 

 

 본존불(本尊佛)의 좌우에는 협시보살(脇侍菩薩)로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 사진)과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을 배치했다. 허공장보살은 지혜와 자비를 무한히 베풀어 주는 보살이며, 여의륜관음은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 온 세상에 이익을 주는 보살이다.

 

 

 본존불을 호위하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은 광목천(廣目天, 아래 사진)과 다문천(多聞天)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각각의 천하를 보호하고 수호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사대천왕은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아래 사진의 서방천왕(광목천)은 붓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갑옷을 입고 새끼줄과 삼차극을 지닌다. 그리고 북방천왕인 다문천은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창·막대기·보서를, 왼손에는 항상 보탑을 들고 있는 게 보통이다. 그건 그렇고 사천왕의 나머지 둘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쩌면 대전 바닥에 놓여있는 거대한 두상(頭像)들일지도 모르겠다.

 

 

 불전의 왼쪽으로 돌아서자 나라시대 당시의 동대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미니어처가 제작되어 있다. 이 목제 모형은 우리에게 동탑과 서탑의 당시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753년과 746년에 각각 지어진 동탑과 서탑은 320( 100m) 높이의 웅장한 칠층탑이었다고 한다.

 

 

 연꽃무늬 받침대인 대불연변(大佛蓮弁)’의 복제품,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도 전시되어 있다. 대불이 올라앉는 연화대좌를 장식하는 연꽃잎(蓮弁)을 말하는데, 표면에 그려진 그림은 화엄의 세계를 그린 것이란다. 참고로 연화장세계란 비로자나불이 있는 공덕무량(功德無量), 광대장엄(廣大莊嚴)의 세계를 말한다. 이 세계는 수행을 마치고 불과(佛果)를 증득하여 들어가는 이(證入生)들이 사는 세계라 한다. 이곳은 큰 연화로 되어 있고 그 가운데 일체국(一切國일체물(一切物)을 모두 간직하였으므로, 연화장세계라 한다.

 

 

 화재 때 살아남았다는 대불의 손도 전시되고 있었다. 현재 대불에 붙어있는 손은 15681615년에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한다. 그밖에도 사천왕상의 머리 두 개(‘지국천/持國天 증장천/增長天일 것이다)와 어른 등치만한 귀면와(鬼面瓦), 치미(鴟尾, 용마루 끝에 높게 부착하던 기와)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불전을 수리하면서 교체한 것들이 아닐까 싶다.

 

 

 대불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던 기둥도 전시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어른의 허리 위까지 이를 정도로 굵다. 요 아래 사진과 비교해보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대불전의 기둥들 가운데 하나는 구멍이 뚫려있었다. ‘대불의 콧구멍 크기라는 이 구멍을 통과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그러니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이유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하지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소원이 이루어질지는 몰라도 가끔은 굴욕 사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불전 옆에는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의 목조나한상이 모셔져 있었다. 빨강 망토를 둘러쓰고 있다고 해서 빨간 망토의 할머니라고도 불리는데, 거대한 대불과는 대조적으로 우스꽝스럽고 재밌는 모습에서 친근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망토를 씌웠는지는 알 수 없단다. 다만 손에 든 약합(藥盒)으로 인해 여행객들에게는 인기 만점이라고 한다. 자신의 아픈 부위와 같은 부위를 만지면 낫는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빈두로존자는 부처님 열반 뒤 미륵불이 출현하기 전까지 중생을 제도하고자 원력을 세운 분이다. 천태산 위에서 홀로 선정을 닦으며 열반에 들지 않고 미륵불을 기다리는 존재라고 해서 독성(獨聖)’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성존자(獨聖尊者) 혹은 나반존자(那畔尊者)로 불리며 독성전(獨聖殿)에 모시는 경우가 많다.

 

 

 내부의 풍경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모셔진 대불(大佛) 등의 불상들은 거대하면서도 솜씨까지도 빼어났다. 바닥에 늘어놓은 것까지도.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대불전 안에 기념품가게가 들어서 있었다는 점이다. 엄숙하기 짝이 없는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생활불교에 가까운 일본 불교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중문의 양 옆에서 시작된 회랑(回廊)은 대불전을 감싸고 돌아가 그 뒤에 서있는 북중문의 좌우까지 연결된다. 평지에 있는 사찰은 절의 경내와 그 바깥을 구분하는 회랑을 짓는 게 보통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평지 절간도 이런 회랑을 갖추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회랑에도 역시 기념품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불전을 빠져나오면 숲속에 들어앉은 금속 조형물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1970년에 개최된 오사카엑스포의 古河館(코가 그룹 파빌리온)’의 상단부를 1971년에 기증받아 동대사에 설치했다고 한다. 현재의 이름은 동대사칠중탑(東大寺七重塔)’의 상단부인 상륜(相輪). 그 높이가 무려 23.3미터에 이른단다. 상륜이란 탑 꼭대기의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을 말한다. 그렇다면 저것을 올려놓고 있었을 동대사칠중탑(東大寺七重塔)’은 대체 얼마나 거대했을까? ! 상륜 옆에는 1988년 인도로 부터 기증받았다는 석사자상(石獅子像)도 있었다. ‘아쇼카 필라(Ashoka Pillar)’라 불린단다.

 

 

 대불전에서 동쪽으로 가면 토리이가 있다. ‘수향산팔번궁(手向山八幡宮/ 타무케 야마하치만구)’를 거쳐 이월당으로 가는 길인데, 토리이로 가지 않고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종루(鐘樓)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의 끄트머리에서 만나는 종루(鍾樓/ 쇼우로우)는 유난히 하늘로 솟구치듯 우뚝 솟은 모습이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이 건축물은 1207~1210년 사이에 재건한 것으로, 중국으로부터 전해왔다는 대불양(大仏様/ 다이부츠요우)에 약간의 선종양식을 가미했다고 한다.

 

 

 종루에 걸려있는 범종도 역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752년 동대사 창건 당시 주조되었으며, 높이 385에 구경 271로 중세 이전에 만들어진 범종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한다. 무게도 26.3톤이나 된단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세 개의 범종 가운데 하나이다.

 

 

 종루 오른편의 한 칸짜리 건물은 동대사 대불전을 세울 때 큰 공을 세운 교키(行基) 대사를 기리는 행기당(行基堂)’이다. 교키는 백제계 도래인 고시(高志)  출신으로 법흥사(호코지)로 출가해 도오쇼오(道昭)에게 사사한 후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민중교화와 더불어 사원·연못·교량 등 사회사업을 벌림으로써 교키보살로 추앙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743년 성무(成務/ 쇼무) 천황이 동대사 비로자나불을 조성할 때 대불조영(大佛造營)의 권진(權進)에 기용되었고, 이어 일본 최초로 대승정위(大僧正位)에 오르게 된다. ! 행기당 뒤편에 백제계 양변(良弁)스님의 어영당(御影堂)인 개산당(開山堂)도 있으니 한번쯤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종루로 올라오다가 신국신사(辛國神社/ 가라쿠니진자)’도 만났었다. 의식 있는 한국인들이 주목해서 보는 곳이다. 모시는 신이 한반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신국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한국옹(韓國翁)’으로 원래 이름은 천구사(天狗社/ 덴구자)였다고 한다. 대불전 중수시 덴구가 방해를 하자 이 신사를 짓고 위무했단다. 여기서 말하는 덴구는 안마사(鞍马寺/ 구라마데라)에 가면 볼 수 있는 붉은 얼굴에 피노키오 같은 긴 코를 가진 산의 정령이다.

 

 

 종루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사월당(四月堂/ 시가츠도)’이 나온다. ‘법화삼매회(法華三昧会)'가 음력 4월에 열린다고 해서 '사월당' 또는 삼매당(三昧堂/ 산마이도)‘으로 불린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삼월당(三月堂/ 산가츠도)’이다. 덴표(天平) 20(748)경에 건설된 것으로 동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화엄경이 강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삼월당이란 매년 3월 이곳에서 법화회(法華会)가 열린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법화회가 열린다고 해서 법화당(法華堂/ 호케도)’이라 불린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 건물은 처음에는 쌍당 형식의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뒤쪽의 정당(正堂) 부분과 앞쪽 예당(禮堂)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당 부분은 죠겐(重源) 1199년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입장료를 따로 받는데다 사진 촬영까지 금지되어 있다기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삼월당의 불당에는 본존인 불공견색관음(不空羂索觀音)’을 중심으로 총 16개의 불상이 비좁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고 한다. 이 불상들 중 12개가 국보이고, 4개가 중요문화재란다.

 

 

 삼월당 옆에는 또 다른 국보인 이월당(二月堂/ 니까츠도)’이 있다. 이월당이라는 이름은 이 건물에서 음력 2월에 수이회(修二會/ 슈니에)’가 열리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의 이월당은 1667년 소실된 것을 2년 후에 재건한 것이다. 창건 당시의 건물은 규모가 작았지만, 재건을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되었단다. 참고로 수이회(修二會)의 정식명칭은 십일면회과법이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범하는 잘못을 본존인 십일면관음 앞에서 참회하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청정한 일심을 얻어, 악업으로 인한 응보를 소멸하고 보다 나은 불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곳에서 모시는 십일면관음은 현재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비불(祕佛)이란다.

 

 

 이월당은 건물 자체뿐만 아니라 전망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동대사와 나라 시내의 풍경은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이월당의 뒤편 언덕 오른편엔 원부신사(遠敷神社/ 오뉴진자)’가 있다. 이밖에도 이월당의 주변에는 반도신사(飯道神社)와 흥성신사(興成神社)가 더 있는데, 셋 모두 이월당의 수호신사라고 한다. 보살펴주는 부처님이 있는데도 굳이 또 다른 신의 도움을 원하는 일본의 불교가 참 생경스럽다.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와 외래의 불교가 융합. 즉 신토의 신은 부처가 모습을 바꾸어 현세에 나타난 것이라고 믿는 신불습합(神佛習合) 사상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 흥성신사 뒤의 양변삼(良弁杉) 나무도 눈에 띄는 풍경이다. 일본 화엄종의 2대조로 추앙 받는 백제계 양변(良弁/ 료벤) 스님이 어릴 때 독수리에게 물려 이곳 삼나무에 걸렸다가 의연스님에게 구출되어 승려가 되었다는 전설이 깃든 나무이다. 양변스님은 740년 신라승 심상(審祥/ 신조)을 초빙해 화엄종을 연다. 그래서 심상이 초조, 료벤이 2대조로 추앙받고 있다. 또한 양변은 동대사 건축에 큰 역할을 해 나중에 이 절의 최고위직인 승정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이월당에서 빠져나오는데 귀틀집으로 지어진 부경(浮京)’이 눈에 띈다. 일종의 창고인데 일본의 왕궁과 신사(神社)의 수호신인 맥견(貊犬/ 코마이누)과 함께 일본에 전해진 고구려 문화의 흔적이라고 한다. 부경이란 게 본디 고구려인들이 갖고 있던 창고이기 때문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의 고구려조(高句麗條)에 기록된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는데, 이름을 부경이라 한다(家家有小倉 名爲 浮京)’는 구절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이밖에도 이 일대에는 꽤 많은 전각들이 모여 있었다. 로벤(양변) 승정이 모셔진 개산당(開山堂/ 가이산도)과 가마쿠라시대의 큰 욕실인 대탕옥(大湯屋), 보물로 지정된 알가정옥(閼伽井屋), 나라지방의 수호신을 모시는 수향산팔번궁(手向山八幡宮)’ 부동당(不動堂), 관음당(觀音堂) 등 많은 전각들이 있다.

 

 

 다음 방문지인 정창원을 찾다가 엉뚱하게도 대불전 왼편으로 들어서버렸고, 그곳에서 계단당(戒壇堂)’ 등 여러 전각들을 만났다. 계단이라는 게 본디 수계의식과 설계(說戒)를 위한 성역일지니 계()를 받는 장소라는 의미일 것이다. 맞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간진(鑑眞) 754년 이곳에 일본 최초의 계단원을 설치하고 쇼무(聖武고켄(孝謙) 천황을 포함한 황족들에게 보살계를 주면서 일본 불교계에 수계제도를 정착 시켰다고 한다. 이후 진언종을 연 구카이(弘法)’ 대사나 천태종을 연 사이초(最澄)’ 대사도 이곳에서 수계를 받았단다. 초기 일본 불교에서 계단원이 설치된 사찰과 그렇지 못한 사찰의 엄청난 위상의 차이를 생각할 때 동대사는 나라의 인정을 받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따로 입장료를 받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주마간산으로 서쪽지역을 살펴본 후 찾아간 정창원(正倉院, 쇼소인)’. 출입문이 분명하건만 금줄을 쳐놓았다. 그리고는 오른쪽으로 돌아서 들어가란다. 안내판에는 정창 외구(正倉 外構)’라는 글귀도 보인다. 설마 외관만 보라는 건 아니겠지?

 

 

 조금 더 걸으니 정창원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나오지만, 이곳도 역시 막혀있는 게 아닌가. 매주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공개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조금 전 대문에서 감지됐던 불길한 예감이 딱 들어맞아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낯선 이방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그저 멀찍이서 바라볼 따름이다.

 

 

 정창원(正倉院, 쇼소인)은 검은 통나무로 만든 귀틀식 건축물로 729749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표에서 오는 습기를 제거하고 통풍문제를 감안하여 고상식(高床式)으로 지어졌다. 나라시대인 756년 고묘 황후는, 남편인 쇼무(聖武) 천황의 7주기에 맞춰 유품 650여 점과 60여 종의 약품을 동대사(도다이지)의 비로자나불(대불)에 봉헌했다. 정창원의 시작으로 보면 되겠다. 그 뒤로도 고묘 황후는 3번에 걸쳐서, 자신과 쇼무 천황과 연관이 있는 물건을 대불에게 봉헌했단다. 이후로도 고대 황실의 진귀한 보물들이 계속해서 확충되어 지금은 명실상부한 왕실의 보물창고가 되었다. 1998년에는 나라시 지역의 다른 문화재(주로 사찰)들과 함께, ‘고도 나라의 문화재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쉬움에 혀를 차고 있는데, 관람객으로 보이는 이가 원래부터 내부는 공개가 되지 않는다고 알려준다. 행여 소장품에 대한 글귀라도 있을까 해서 출입구 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을 기웃거려보지만 온통 건축공법에 대한 설명뿐이다. 그래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등록된 내용을 옮겨본다. <정창원보물(正倉院寶物)로 통칭되는 보관유물은 755(天平勝寶 8) 쇼오무천황(聖武天皇)의 장례용품과 유품 및 황실에서 동대사(東大寺)에 헌납한 보물들과, 동대사 대불(大佛)의 개안(開眼)행사에 쓰인 용품, 그리고 그밖에 각종의 연중행사용품들을 수납한 것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칙사의 입회 아래 여닫는 칙봉(勅封)제도가 시행되어 긴 시간동안 보존하는데 기여하였다. 현재 일본 궁내청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년에 한 번씩 나라국립박물관(奈良國立博物館)에서 부분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정창원에서 왼편으로 조금만 더 가면 동대사의 전해문(轉害門, 데가이몬)’을 만날 수 있다.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생김새는 차지하고라도, 동대사 창건 때 지어진 유일한 건축물이라니 한번쯤은 살펴봐야 하지 않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나라 동쪽의 관대사(官大寺)’란 뜻의 동대사는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에 세워졌다. 일종의 국립 가람으로 당시 일본으로서는 중요한 정부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일본 인구 5백만 명이던 시절 동원된 인력만도 2백만이 넘었을 정도로 엄청난 역사였단다. 여기서 나라시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 직전까지를 말하는데 백제·신라와 깊은 관계가 있을 때였다. 동대사는 743년 착공된다. 불교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래한 것이 552년인데 거의 2백년이 지난 때의 일이다. 이미 신라에서는 676년 부석사가, 715년에는 불국사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그리고 720년에는 황룡사 9층탑이 각각 건립되었다. 그즈음 일본에 세워졌던 절은 667년의 관세음사(觀世音寺)가 최초이고 741년에 세워진 국분사(國分寺)가 두 번째 쯤 되고 있었다. 동대사는 그후 최초·최대의 절이 되는 것이다. 동대사의 절 짓기에는 백제계 도래인(渡來人)인 행기와 양변 스님이 앞장섰고 국공마려(國公麻呂)와 저명부백세(猪名部百世) 등 백제·신라계의 건축가들이 그들을 뒷받침 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이 절을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일본 정부가 세운 것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역사적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도래인은 한국인은 아니다. 일본열도에 정착하여 살아가며 업적들을 이루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네들이 가져간 기술력이 동대사와 청동대불의 건설에 크게 기여한 것 또한 사실이다. 무작정 한국의 역사로 단정하는 것도 무리지만 아예 뿌리까지 무시하는 것 또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여행지 : 일본 간사이 지역 여행

 

여행일 : ‘17. 3. 15()-17()

여행지 : 오사카(오사카 성, 도톰보리),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천룡사, 노노미야신사), 나라(동대사)

 

일 정 :

 3.15() : 오사카(도톰보리)

○ 3.16() :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노노미야신사)

○ 3.17() : 오사카(오사카 성), 나라(동대사)

 

여행 셋째 날 : 오사카 성(大坂城)

 

 

 

특징 : 우리나라를 가장 괴롭힌 일본인을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떠올릴 것이다. 농민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하인이었던 히데요시는 추운 겨울 주군(主君)의 신을 가슴에 품을 정도의 충성심으로 노부나가의 눈에 들었고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1582년 노부나가가 죽자 정권을 잡았고 이듬해 11월에는 오사카로 본거지를 이전한다. 이때부터 오사카 성 축성(築城)이 이루어졌다. 1년 반에 걸친 대규모 공사로 완성된 오사카 성은 성벽 앞으로 강물이 흐르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졌으며, 규모 또한 지금의 요도가와 강까지 이를 정도로 큰 성이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이후 임진왜란을 일으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98년 병사한다. 히데요시의 사후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도요토미 가문과 추종 세력을 완전히 꺾고자 1614년 오사카 성을 공격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패한다. 하지만 강화조약을 이용해 성벽 앞의 해자(垓字)를 메운 후 성을 다시 공략해 1615년 오사카 성을 점령하고 도요토미 가문의 항복을 받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오사카 성은 이에야스의 셋째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에 의해 1629년 재건되었다. 성의 중심 건물인 천수각(天守閣)은 당초의 규모보다 더 크게 지어졌으나 1665년 낙뢰(落雷)로 인해 다시 불타고 만다. 현재의 건물은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이 도요토미의 것을 본떠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나고야 성(名古屋城) 및 구마모토 성(熊本城)과 함께 일본의 3대 성 가운데 하나이다.

 

 

 오사카는 전통문화와 도시문화가 공존하는 일본 제2의 도시로, 눈이 즐거운 역사 유적지 뿐 아니라 다양한 식도락까지 즐길 수 있어 여행객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오사카는 교토, 나라, 고베 등 일본의 전통을 간직한 도시와도 근접해 있어 다양한 볼거리를 원하는 관광객들이 여행하기에도 적합하다. 옛날에도 오사카는 다섯 키나이(畿內 : 쿄토 근방의 야마시로, 야마토, 카와치, 이즈미, 셋츠 지방의 총칭)의 중심지였다. 또한 교토를 가까이 두었는가 하면 서쪽으로 세토나이카이와도 접한 수상 교통의 요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이기도 했다.

 

 

 오사카성은 윤곽식 평성으로, 혼마루(本丸/本城)를 중심에 두고 외성을 동심원으로 배치했다. 그 사이에 내측 해자와 외측 해자를 두었다. 요도가와 강의 본류와 접한 대지의 북단에 축성한 오사카 성의 방위상의 약점은 대지의 높이가 같은 남쪽이다. 그래서 서에서 남으로 해자를 만들어 성을 감쌌고, 다마쓰쿠리 문의 남쪽에 반월형의 외성 사나다마루를 축성했다.

 

 

 오사카 국제평화센터 근처에 위치한 버스전용 주차장에서 내려 한참을 걸었는데도 성곽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만큼 성의 범위가 넓다는 증거일 것이다. ! 오사카성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JR 오사카 역에서 순환선 열차를 타고 오사카성공원역에서 내려 걸어오면 된다. 지하철 다니마치욘쵸메역. 텐만바시역, 모리노미야역, 게이한 전철 텐만바시역 등에서도 가깝다. 입장료는 어른이 600엔이고 중학생 이하는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

 

 

 굵직한 벚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자 오사카 성의 성벽(城壁)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우리가 늘 보아오던 동양의 성들보다는 서양의 성곽을 닮은 것 같다. 저렇게 큰 해자(垓字),  소토보리(外堀)’가 만들어져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해자 너머에 보이는 건물은 이치반 성루가 아닐까 싶다. ‘1번 성루라는 뜻인데 오사카성의 동쪽 출입구 남쪽에 있다. 오사카성에는 이밖에도 로쿠반 망루(六番櫓)’ 다몬 망루’. ‘센간 망루’, ‘이누이 망루 등이 남아있다고 한다. 참고로 망루는 해자 안쪽의 성벽에 만들어 놓은 방어용 시설이다. 평소에는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쟁시에는 총과 활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1차 방어선이 된다.

 

 

 소토보리는 오사카 성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거대한 해자(外堀, 소토보리).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인공호수로 깊이가 6m, 폭은 75m에 이른다. 또한 그 둘레를 에워싼 급경사의 성벽은 거대한 바위를 24~32m 높이까지 가파르게 쌓아올려 적이 기어오르는 것을 막았으며 웬만한 대포 공격에도 끄떡없을 만큼 견고하다. 이렇듯 완벽한 방어체제를 갖춘 덕에 오사카 성은 완공과 더불어 난공불락의 요새로 통했으며, 오사카 겨울전투(1614)를 감행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역시 이 해자를 넘지 못해 엄청난 고생을 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소토보리 주변의 가파른 성벽을 따라 대공포 진지가 구축돼 연합군의 주요 공습 목표가 되기도 했단다.

 

 

 해자를 건너지 않은 탓인지 천수각이 아직도 아스라하다. 오사카성으로 가는 길 주변은 매화나무와 벚나무 등이 들어찬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음악 홀이나 운동시설도 많아 시민들에게는 친숙한 공원이다.

 

 

 성으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벚꽃나무를 가로수로 심어놓았다. 이 일대에 무려 4500그루나 심어져 있단다. 하지만 도로변의 화단에는 요런 소나무들이 주인공이다. 품종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토종 소나무보다 훨씬 못 생겼다.

 

 

 차단용 난간 위에 참새 몇 마리가 올라앉아 있다.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시설물 가운데 하나이지만 밋밋하게 그냥 놔두는 것 보다는 훨씬 정취가 있어 보인다.

 

 

 조금 더 걸으니 렌뇨상인(蓮如上人)의 가사(袈裟)를 걸었었다는 나무가 나온다. 정토진종(淨土眞宗) 혼간지(本願寺)’라는 절이 이곳에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1496년 렌뇨상인은 지금의 오사카성 부근에다 방사(坊舍)를 짓는다. 이후 호사카(이시야마) 혼간지라는 큰 절이 되어 세력을 떨치기도 했으나, 1580년 천하통일을 목표로 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굴복하여 절은 주변 시가지와 함께 불탔다고 한다.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그 절터에다 오사카성을 쌓았다.

 

 

 오테몬(大手門)’ 1620년에 세워진 오사카 성의 정문으로 높이는 6m. 1783년 벼락에 맞아 원래의 문이 불타버린 뒤 1848년과 1967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했다. 문 앞에 서자 엄청나게 두꺼운 철문이 눈길을 끈다. 웬만한 대포로는 꿈쩍도 않을 것 같다. 거기다 철문의 위, 수직으로 세워진 나무 창살 사이로 화살을 쏘며 적의 침입을 막았다니 성벽에 못지않은 방어막이라고 보면 되겠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스타일의 문을 코라이몬’,  고려문(高麗門)’이라고 부른다는 것.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란다.

 

 

 외호(外堀, 소토보리)를 끼고 얼마간 걷자 다소 작은 해자가 나온다. 성의 안쪽 해자(内堀, 우치보리)’로 성의 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보면 되겠다. 오사카성은 이렇듯 2중의 방어막을 갖추고 있었다. 그나저나 해자와 맞닿은 성벽이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 모서리를 직각으로 쌓지 않고 올라갈수록 줄어들게 성벽을 쌓음으로써 성벽은 견고해졌고, 그래서 어느 나라의 성벽보다도 높게 지어졌다.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 무수한 전투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워진 이 성벽은 400년이 넘는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단다.

 

 

 안쪽의 다른 해자에는 물이 없었다. 이곳 오사카 성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쌓았다. 깊은 해자와 높은 석벽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후 마주한 깊은 해자는 물이 마르고 대신 온갖 잡풀이 자라고 있었다. 권력도, 그 권력을 지키던 성채도 길고 긴 시간 앞에 아무 것도 아님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길은 사쿠라몬(櫻門, 벚꽃문)’을 통해 성의 중심인 천수각(天守閣, 덴슈가쿠)’으로 연결된다. 오사카성 관광의 주요 통로인 이 문은 오사카 성 재건 공사가 한창이던 1626년에 세워졌다. 당시 이 근처에 사쿠라. 즉 벚나무가 많아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868년 화재로 불타 버린 것을 1887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으며 19세기 후반에 소실된 담벼락도 1969년 현재와 같은 형태로 재건시켰다.

 

 

 사쿠라몬의 양 옆에는 직사각형의 큰 돌이 하나씩 박혀있다. 오른쪽 돌은 용석(龍石)’, 그리고 왼쪽 돌을 호석(虎石)’이라 부르는데. 비가 내리면 오른쪽에 용 그리고 왼쪽에는 호랑이의 형상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에도시대(조선 후기쯤)에 일어난 일이니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말이다.

 

 

 사쿠라몬(桜門) 안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누군가 킨메이스이 우물(金明水 井亭)’이라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천수각이 세워지기 직전에 히데요시를 암살하려고, 이곳에 독을 풀었는데, 히데요시가 황금을 넣어서 우물을 해독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우물이다. 다른 한편으론 맛있는 물을 솟게 하려고 금을 넣었다는 설도 있다. 지금은 소원을 비는 동전들이 소원의 해독제처럼 우물 속으로 던져진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정보였다. 킨메이스이 우물에는 지붕이 씌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지붕은 1626년에 만들어졌는데 오사카성 천수각의 화재에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사쿠라몬 근처에는 소석(蛸石)이라 부르는 거대한 바윗돌도 있었다. 성문을 통과한 적을 막기 위한 내부 성벽의 일부분인데, 130톤이나 되는 거석으로 오사카성 안에서 가장 큰 돌이다. 거대한 이 바윗돌은 오사카성을 재건할 때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가 도쿠가와(德川) 막부에게 바친 돌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다이묘들이 가져다 바친 바윗돌의 크기가 클수록 막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것으로 여겨졌단다.

 

 

 안내판은 櫻門枡形 巨石(Huge stones at Sakuramon-Masugata Square)’으로 적고 있었다. 사쿠라몬-마스가타 광장에 있는 거석이란 뜻일 것이다. 맞다. 이 거석은 오사카 성 제일의 크기를 자랑하며 면적 60에 무게가 130톤이나 나간다. 바로 오른쪽에는 세 번째로 크다는 면적 54, 무게 120톤의 거석도 있다.

 

 

 타코이시(蛸石)’ 타코는 일본어로 문어()를 뜻한다. 이시가키(石築)를 이루는 이 거석의 왼쪽에 문어 모양의 흐릿한 얼룩이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바윗돌의 내력이 조금 어이없기는 하지만 그 크기만큼은 정말 엄청나게 크다. 17세기 당시 저렇게 큰 거석을 어떻게 옮겨왔을까? 일본 내해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의 이누시마(犬島)로부터 성 안까지 옮겼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저렇게 큰 거석들을 오사카성까지 옮기는 것이 오사카성을 지을 당시 가장 난공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조금 더 걷자 금박 기와와 금장식을 한 망루형의 천수각(天守閣, 덴슈가쿠)이 눈에 들어온다. ‘오사카성의 꽃으로 불리며 수많은 일본 영화와 소설 속에서 각색되는 건축물이다. 천수각의 화려함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력을 상징한다. 그의 권력과 명예욕, 야망의 크기만큼 웅장하게 지었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1615년 에도막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넘어뜨리기 위해 벌인 전쟁에 불탔다. 화마도 이 꽃을 탐냈던지 17세기에는 낙뢰로 전체가 소실되기도 했다. 1931년 일부가 복원되었지만 천수각의 기구한 운명은 근대까지 계속된다. 2차 세계대전 때 성안의 군사시설을 파괴하려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후 20세기 들어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지면서 8층 전망대까지 갖춘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건물의 형상은 세월보다 역사의 굴곡을 따랐나 보다.

 

 

 천수각(天守閣)이란 일본의 전통적인 성 건축물에서 가장 크고 높은 누각을 가리킨다. 일본어로는 덴슈(てんしゅ/천수) 또는 덴슈카쿠(てんしゅか/천수각)라고 부른다. 사실 천수각은 성의 일부분에 속하는 건물이지만, 얼굴마담이자 상징격인 건물로 취급된다. 성에서 제일 높게 솟은 구조물이다 보니 다이묘가 기거하는 화려한 시설로 상상하는 경우가 많으나, 기본적으로 천수각은 센고쿠 시대 이후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생겨난 군사용 시설이다. 수성전 때 지휘관+수뇌부가 주둔하면서 시야를 넓게 보고 전황을 파악, 지휘하기 용이하게 성의 중앙부에 높게 쌓아올렸다. 그러다보니 천수각의 내부는 높게 짓기 위해 많은 기둥이 필요했고, 때문에 어둡고, 좁고, 오르내리기 불편했다. 그래서 다이묘들의 실제 생활&업무 공간은 천수각 근처에 지어진 주택인 혼마루고덴(本丸御殿, 혼마루 어전)이었다고 한다.

 

 

 천수각 앞 광장의 오른편에 있는 미라이자’. 즉 옛() ‘오사카 시립박물관은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幕末, 維新, 150 등의 문구가 적힌 걸로 보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50주년을 기념하는 무슨 행사라도 열리는 모양이다. 덕분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가림막 뒤의 구 오사카 시립박물관은 유럽식 건물이다. 텐슈카쿠를 재건한 1931년에 함께 지어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 제4사단 사령부. 전후에는 오사카 경시청(경찰청). 1960~2001년에는 오사카 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됐다. 2001년 시립박물관이 지금의 오사카역사박물관으로 이전하면서 복합 상업시설(레스토랑+카페+기념품 숍) 미라이자로 바뀌었다. 건물의 쓰임은 역사가 결정한다고 보면 되겠다.

 

 

 걸음을 옮길수록 천수각이 점점 눈에 꽉 차게 다가온다. 높게 쌓은 석축을 기단 삼고, 그 위에 다층으로 전각을 얹은 모양새가 날렵하다. 이렇듯 지붕을 중첩하여 쌓은 방식은 조선시대 양식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퍽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또한 8층으로 지어진 천수각이 층고(層高)가 높은 5층 건축물로 보이는가 하면, 우리나라와는 달리 기와지붕과 용마루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모두 뻗어나가는 모습이 특히 눈에 띄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마주한 천수각의 거대한 기단. 네 귀퉁이에 자리 잡은 돌들은 웬만한 사람의 키쯤은 훌쩍 넘겨 버린다. 이 거대한 것들을 정갈하게 자르고 끼워 맞추어 그 위에 층층이 성채를 쌓아 올린 것.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지. 주군에 대한 존경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일본의 성에서 천수각이 건립된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전의 이야기는 아니다. 대체로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 성을 거처로 삼을 때 건립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천수각은 망루와 비슷한 건물로 외관은 2-5층으로 보이며 혼마루(本丸, 성의 중심 구역)에 건립된 경우가 많이 있다. 천수각 밑은 천수대(天守台)라는 석벽이 받치고 있으며, 천수의 크기에 따라 소천수, 중천수, 대천수 등으로 불린다.

 

 

 천수각 지붕의 황금빛으로 만든 장식이 눈길을 끈다. 용마루 위에 올려져있는 이 장식물은 목조건물의 화재예방을 위한 주술적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샤치가와라(鯱瓦, 호와)’. 몸통과 꼬리는 물고기이고 머리가 호랑이인 이 동물은 상상 속의 동물이다. 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 물을 불러온다는 의미에서 매 층마다 설치했는데, 용마루 양 끝에 배치한 암수 가운데 남쪽에 올리어져 있는 것이 수컷이라고 한다.

 

 

 샤치가와라(鯱瓦, 호와)’의 접사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새로 산 카메라의 조작이 서툴러 이밖에도 여러 장을 빌려다 썼다.

 

 

 오사카성의 핵심 건물인 천수각은 한마디로 왕조사와 전쟁사 박물관이다. 오사카성의 첫 주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였기 때문일까? 왕조사는 주로 도요토미 가문에 할애되고 있다. 오사카 여름 전투도 병풍, 역사자료 등을 1층부터 7층까지의 전시실에서 관람할 수 있다. 또한 8층 전망대에 오르면 오사카 시내 전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3층과 4층은 촬영 금지 구역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전망대를 먼저 보고 걸어 내려오면서 각층에 전시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과 오사카성에서 있었던 전투를 관람하는 게 일반적인 관람 동선(動線)이다.

 

 

 오사카성의 상징인 천수각은 오사카 시장인 세키 하지메의 건의에 의해 1931년 다시 지어졌다. 1930년대 이후 각지에 건설된 복원천수(復元天守, 센고쿠시대 이후 지어진 성 내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인 건물 양식의 복원) 1호였다. 외관은 옛 그림을 토대로 새롭게 재탄생되었다고 한다. 오사카성의 천수는 도요토미 가문의 것과 도쿠가와 가문의 것이 서로 달랐다고 한다. 복원된 천수는 두 가문의 것을 혼합시켜 1층부터 4층까지는 도쿠가와 풍인 백색 회벽으로 처리했고, 5층에서는 도요토미 풍으로 흑색에 금박으로 호랑이와 두루미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고, 도요토미 가문의 형식으로 전부 통일해야 된다는 주장도 있었단다. 1997년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천수각의 뒤쪽 공터(刻印石 廣場)에는 커다란 돌들이 가득했다. 지방 다이묘(영지를 가진 무사의 우두머리)들의 가문을 새긴 돌들로,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이행했음을 증명한다.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무너진 성곽의 돌들은, 다른 한편으론 영화로움을 품고 있는 쇠락의 잔재이기도 하다. 사람은 죽고 사라졌는데 그들이 만든 것들은 사라지지 못하고 남았다. ! 오사카성의 이시가키(돌담), 돌덩이에는 도쿠가와(德川) 가문에 충성한 막부시대의 영주들 흔적(가문의 표식)이 있었다. 인간은 짧은 생에 대한 기록을 돌에 새긴다. 사라진 과거에 대한 기록을 몇 글자로 품고 있는 돌들이다.

 

 

 천수각의 뒤에도 해자(垓子)가 파여 있었다. 오사카성의 최대 특징은 거대한 해자와 성벽이다. 성벽의 높이가 15미터에 이르는가 하면, 도랑은 폭이 30미터에 달할 정도로거대하다. 특히 성을 지키기 위해 성 외곽으로 둘러 판 해자는 당시 성을 쌓았던 사람들이 적에게서 느꼈던 공포의 크기만큼이나 깊고 넓게 파였다. 그 안에 담긴 수량만 해도 엄청나게 많아서 마치 거대한 강줄기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러니 현대 무기가 발명되기 전인 당시 기준으로 보면, 이 오사카성은 함락하기 어려운 요새 중의 요새였을 게 분명하다. 그런 오사카성을 보고 있자니 이 성을 세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권력욕이 새삼 느껴진다.

 

 

 공원의 녹색이 펼쳐진 끄트머리에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오사카 비즈니스 파크. 남아있는 늙은 유적이 외려 어색할 정도. 반짝이는 유리와 탄탄한 스틸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과 그 사이사이 오래된 건물들이 다양한 건물 생태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늙은 건물에선 시간이 멈춰있다.

 

 

 천수각의 앞마당에는 삼백 살로 추정된다는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오사카성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라고 하는데, 오사카성 내부에는 이런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조·명연합군에 포위된 채로 울산성에서 농성하였으나 식수와 식량 부족으로 병사 대다수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갈증과 아사로 죽었던 것을 교훈 삼았기 때문이란다. 당시는 은행나무 열매가 식량이 되었던 모양이다.

 

 

 일본의 고성(古城)은 그 자체로 위엄 있는 풍모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림을 완성시켜주는 것은 까마귀 등 성탑을 맴도는 새들이다. 고성과 잘 어울리면서 한 폭의 수묵화를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일본 고유의 정원 양식으로 조성된 일본정원(日本庭園/ 니혼테이엔)’도 눈에 띄었다. 신선 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영향을 받은 섬세한 양식이 특징이라는데 내 눈에는 그저 얄밉도록 깔끔하게 꾸며 놓았다는 느낌이 전부였다. 맞다. 누군가는 일본정원을 바라봄의 대상이라고 했다. 나뭇가지를 머리 손질하듯 오밀조밀 예쁘게 다듬는 등 정원 안의 모든 것을 눈에 담기 좋게 가공한다는 것이다.

 

 

 천수각 마당은 전형적인 공원이다. 지금은 이전하여 폐쇄된 옛 오사카 역사박물관 건물이 있고, 기념품가게와 음식점은 물론이고, ‘푸드 트럭도 대여섯 대나 늘어서 있었다.

 

 

 천수각의 앞. 정원에 있는 타임캡슐은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볼거리이다. 1970년에 개최된 오사카 엑스포를 기념해 제작한 것으로, 안에는 당시의 문화를 상징하는 2,098점의 물건이 들어있으며 지하 15m에 두 개의 타임캡슐을 매설했다. 하나는 지난 2000 3 15일 개봉했고 나머지 하나는 5,000년 뒤인 6970년에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 날이 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덴슈가쿠 정문 왼쪽에 놓여있는 커다란 바위 두 개는 아쉬움을 가진 돌이란 의미의 잔넨세키(残念石)’로 불린다. 이 돌들은 원래 오사카성 공사에 사용할 목적으로 60km 정도 떨어진 쇼도시마에서 채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용되지 못한 채 400여 년 간 채석장에 방치돼 있었단다. 1908년 그 한을 풀고자 쇼도시마의 청년들이 옛 방식대로 돌을 옮겨다 이곳에 전시해 놓았다.

 

 

 킨조(金藏)’ 1626년에 지은 창고 건물이다. ‘금 창고를 뜻하는 킨조란 이름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과거에는 금화·은화 등의 재물을 보관하는 금고 역할을 했다. 내부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화재와 도난 방지를 위해 바닥에는 두꺼운 돌을 깔고 입구에는 두 개의 문과 한 개의 강철 문을 설치했다. 건물은 작아도 돈을 탐내는 이들을 막을 수 있는 제반 장치를 모두 갖춘 셈이다.

 

 

 오사카성은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와 관련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그가 갇혀있던 위수형무소(육군형무소)’가 바로 오사카성의 이치반 야구라(一番櫓)’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외호와 내호 사이)에는 현재 반전(反戰) 작가인 쓰루 아카라(鶴彬,1909~1938)’를 기리는 비석(句碑)이 세워져 있다.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윤봉길 의사와 같은 시기에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한 인물이다. 군에 입대한 쓰루 아키라 1930 7월 일본 공산청년연맹 기관지를 소지한 죄(가나자와 제7연대 적화 사건)로 군법회의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판결을 받고 '위수형무소' 1 8개월간 수감된다. 반면에 윤봉길 의사는 '위수형무소'에 수감(1932.11.20-12.18)되었다가 '가나자와'로 이송되어 다음 날(12.19) 미쓰코우지산(三小牛山)에 위치한 육군 제9사단의 연병장(, 육상 자위대 미쓰코우지산 연습장)에서 오전 7 27분에 총살당한다.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같은 시기에 수감생활을 한 것이다. 이왕에 오사카성까지 왔으니 잠시 시간을 내어 윤봉길 의사를 추도해 보면 어떨까 싶다. 쓰루 아키라와 함께 말이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 빛을 품어준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새벽이 찾아올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수각에서 빠져나오는 길에 신의 세상과 인간 세상의 경계를 나타낸다는 도리이(鳥居, torii)’가 보이기에 일단은 들어서고 본다. 이 신사(神社)의 이름은 호코쿠(豊國).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함께 그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그리고 그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를 제신(祭神)으로 기리는 곳이다. 일본의 107대 일왕인 고요제이 일왕(後陽成天皇)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코쿠다이묘진(豊國大神明)이라는 신호(神呼)를 내려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으로 모셔지게 됐고, 신호에 따라 호코쿠 신사(豊國 神社)‘라고 불리게 됐다. 이 신사는 한국 사람이라면 편한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을 신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기억하고 싶은 역사도 있지만 기억하기 싫은 역사도 있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가 아닐까 싶다. 이곳 오사카성은 우리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의 일부분이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쇠퇴의 길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은 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외면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선조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똑 같이 되풀이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본전 앞에는 도리이(鳥居) 하나가 더 세워져 있다. 신의 세상과 인간 세상의 경계를 나타내는 게 도리이라는 걸 생각하니 두 도리이 사이의 공간이 가지는 의미가 궁금해진다. 그나저나 다른 이들이 보았다는 도요토미 가문의 노란색 오동나무 문장(紋章)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철거한 모양이다. 오동나무 문장은 일본 돈 ‘500짜리에도 박혀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일왕이 왕실에서 신성시하던 오동나무 문장을 도요토미 가문에 내렸고, 근대 일본의 메이지 정부 이후 일본 정부에서도 사용하게 된 문장이다. 참고로 도리이는 불경한 곳(일반적인 세계)과 신성한 곳(신사)을 구분 짓는 경계에 세우는데, 일본에서는 신의 사자인 새가 머물다 가는 곳이라고 해서 (새 조/토리)+(살 거/)’라 부른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 한가운데에 동상 하나가 세워져있다. 오사카성을 지은 사람이자, 우리에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낙인찍혀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고 한다. 1537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하인이었다. 하지만 추운 겨울 주군(主君)의 신을 가슴에 품고 있었을 정도로 충성심을 보여 노부나가의 눈에 들었고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노부나가 혼노지의 변(本能寺)’으로 살해당하자 그를 대신해 전국통일 사업을 완성한다. 이 과정에서 받은 성씨가 도요토미(豊臣)’이다. 당시 일본은 왕족과 귀족, 무사들만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하니 엄청난 신분상승이라 하겠다.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에게 섬나라 일본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가 눈을 돌린 곳은 명나라’, ‘대륙진출을 원하니 조건이 그 길을 내어달라는 구실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만다. 동북아시아에 일어난 중세시대 최대의 전쟁이었다. 당시 조선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태평성대로 무사안일에 빠져 있다가 직격탄을 맞고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가는 초유의 사태에까지 이르고 만다. 결국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한반도는 조선과 왜() 그리고 명나라까지 합세한 3국의 전쟁으로 초토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전쟁의 결과는 그 크기만큼이나 처참했다. 중국의 명나라는 아예 나라가 멸망해 버렸고, 조선은 이후 병자호란(丙子胡亂)’까지 겪으면서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져 근세에 이르기까지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야만 했다. 일본도 역시 조용하지는 않았다. 히데요시의 급사 후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았지만 다시 한 번 전국이 분열되는 혼돈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히데요시의 과욕이 빚어낸 결과였다.

 

 

 연녹색 지붕을 인 본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아들 위패가 함께 세워져 있다. 상업의 도시 오사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직을 발전시키는 리더십을 가진 리더이자 성공과 출세의 신으로 높게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 출세의 꿈을 꾸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출세시키고자 하는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자주 찾는 편이란다.

 

 

 진한 갈색의 목재로 꾸며진 제단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만들어져 있다. 신전 안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라는 이름으로 경배되고 있다. 그동안 자주 보아온 일본의 신사지만 인간을 신으로 받드는 일본인들의 문화는 언제나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신사 마당에는 소위 출세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원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본전 왼편에 걸려있는 큼지막한 에마(繪馬)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2017년을 상징하는 닭의 그림과 함께 출세와 좋은 운을 바라는 '출세개운(出世開運)'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출세의 운을 받아보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기도가 담긴 에마일 것이다. 그 옆에는 개인의 길흉을 점치기 위해 뽑는 제비인 오미쿠지(おみくじ)’가 주렁주렁 걸려 있다. 제비를 뽑아 나쁜 점인 흉()이 나오면 저렇게 접어서 걸어두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을 빌러 온 사람들이 나쁜 점에 실망하고 오미쿠지를 걸어두고 갔을 것이다. 오미쿠지 위에는 개인의 사랑과 행복을 기원하는 나무판인 에마(繪馬)도 한 가득 걸려있다.

 

 

 신사의 또 다른 문을 빠져나오면서 오사카성 투어는 종료된다. 오늘 둘러본 오사카성은 오사카성 공원의 일부분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성터를 커다란 규모의 공원으로 조성했는데, 외호와 내호, 천수각과 영빈관, 무도장, 아오야몬, 그리고 망루인 야구라, 호코쿠신사 등 유적지와 오사카성 음악당, 오사카국제평화센터, 삼림공원, 오사카성구동장, 광장, 야구장, 오사카성홀, 복숭아밭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에필로그(epilogue), 오사카성을 지은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몰락시킨 뒤 일본을 통일한 그는 중국(中國, 당시는 )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켜 7년간이나 조선을 괴롭힌 장수이다. 우리로 봐서는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이 지은 오사카성이 내가 찾았을 때는 한국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임진왜란은 400년도 더 지난 먼 옛일이다. 그러니 다시 곱씹을 일이 뭐 있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기록이고, 기록을 통하여 사람은 교훈을 삼고 배운다. 다시는 그런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를 망각했던 우리 역사는 과연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가. 1910년 치욕의 일제 강점기가 다시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일본은 지금도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긴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고, 어째서 그렇게 당해야만 하는지 이왕에 온 오사카성에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행지 : 일본 간사이 지역 여행

 

여행일 : ‘17. 3. 15()-17()

여행지 : 오사카(오사카 성, 도톰보리),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천룡사, 노노미야신사), 나라(동대사)

 

 

일 정 :

 3.15() : 오사카(도톰보리)

○ 3.16() :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노노미야신사)

○ 3.17() : 오사카(오사카 성), 나라(동대사)

 

여행 둘째 날 : 교토의 청수사(清水寺 , 기요미즈데라)

 

특징 :  교토(京都) : 산업도시 오사카(大阪)에서 북동쪽으로 47, 문화도시인 나라(奈良)의 북쪽으로도 비슷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긴키(近幾)지방의 중심도시이다. 우리나라에 천년 고도 경주가 있다면 일본에는 교토가 있다. 교토는 794년 간무 천황이 도읍지로 정한 이래, 1868년 무사정권이 가마쿠라로 수도를 옮긴 200년을 제외하고는 일본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도시 전체가 유물로 가득 차 있는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유구한 세월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가 많다. 17(사찰 13개소, 신사 3개소,  1개소)이나 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그 증거라 하겠다. 교토 탐방의 장점은 길 찾기가 수월하다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모방해 건설한 탓에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 돌아다니는 관광객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런 여행객들의 트렌드(trend)도 요즘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역사 탐방만을 위해 교토를 방문하였으나 최근에는 일본 전통 공예·음식 등 다양한 일본 문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도 많이 찾는단다.

 

 청수사(清水寺, 기요미즈데라) : ‘물이 맑은 절이라는 뜻의 청수사는 교토가 도읍이 되기 이전인 778년 세워진 사원이다. 교토 시내의 동쪽에 있는 오토와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청수사라는 명칭은 이곳에 있는 오토와 폭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 몇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에도시대 초기인 1633 도쿠가와 이에미스(徳川家光)’의 명령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으며, 199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도 교토의 문화재 가운데 일부이다. 이곳에서 꼭 찾아봐야 할 곳으로는 십일면 천수관음상을 모시고 있는 본당과 절벽 위에 거대한 목조 구조물로 지어진 기요미즈의 무대이다. 참고로 13에 달하는 기요미즈테라는 원래 기타카논지(北觀音寺)라고 했다가 오토와야마(音羽山)에서 내려오는 물이 맑아 기요미즈테라(淸水寺, 물 맑은 사원)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법상종(法相宗)의 총본산으로 말사(末寺)나 단가(檀家)도 갖지 않은 기요미즈테라는 일종일산일사(一宗一山一寺)의 대본산이다. 본당이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으며 경내 유물 15건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주차장에서 내리면 엄청나게 많은 상점들과 마주한다. 사람들 또한 인산인해(人山人海). 수많은 중국의 유커(游客)들과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고 아장아장 걷고 있는 일본 여자들 사이에서 한국어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만큼 입소문을 많이 탄 관광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15분 정도 올라가니 청수사를 상징하는 니오몬(仁王門)’ 산쥬노토(三重塔)’가 얼굴을 내민다. 니오몬은 서문(西門, 니시몬)’과 함께 청수사로 들어가는 두 개의 문 가운데 하나이다. 니오몬 기둥에 귀를 기울이면 멀리 떨어진 기둥 근처에서 하는 이야기도 들린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기둥을 쓰다듬으면 귀가 좋아지고, 좋은 소리만 듣는다는 전설이 있다. 참고로 인왕문(仁王門)은 사찰의 정문격인 건축물이다. 인왕은 불교에서 사찰과 불탑을 수호하는 수문신장으로 불법 외호선신의 하나다. 사찰 내부를 지키는 경계의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되겠다.

 

 

 청수사(기요미즈데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2007년에 발표된 세계 신 7대 불가사의의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을 만큼 일본 유산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창건 설화 하나쯤 갖고 있는 건 당연하다 하겠다. 778년 나라(奈良)에서 온 승려 현심(賢心)이 꿈에서 계시를 받고 오토와야마(音羽山)에 도착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는 수백 년에 걸쳐 수행을 계속해오던 교우에이(行叡)라는 이름의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엔친(延鎭, 현심의 바뀐 이름)에게 자신은 지금부터 동쪽 나라로 여행을 떠나니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엔친은 암자를 짓고 수행에 열중했는데 어느 날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라는 무사가 방문했단다. 임신한 부인 미요시 다카코의 병을 치료하는데 사슴의 생피가 좋다는 말을 듣고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엔친은 살생을 금하고 부인의 순산을 기원했다. 덕분에 무사히 자식을 얻은 다무라마로는 엔친에게 깊이 귀의하여 기요미즈테라를 건립하고 십일면관음입상(十一面觀音立像)과 협사인지장보살, 비사문천상을 안치했단다. 이런 창건설화 덕분인지 기요미즈테라에는 여인들의 참배로 붐비는 것 같았다.

 

 

 니시몬은 일본에서 보기 드물게 단청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문은 서쪽으로 향하고 있어 오후에 햇빛을 받으면 그 붉은 빛이 더욱 강렬해진다고 한다. 화려한 색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이 바로 그 때가 아닐까 싶다. 햇빛뿐만이 아니다. 대문 앞 홍매화가 피워낸 진홍빛 꽃송이들이 니시몬의 화려함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서문(西門, 사이몬)이다. 에도 초기에 재건되었는데 화려한 장식에 붉은색의 단청이 인상적이다. 서문은 우리나라 사찰의 천왕문(天王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건축물로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 중 동방의 지국천왕과 남방의 증장천왕을 모신다. 인왕문과 마찬가지로 악한 자들을 쫓아내고, 죄 지은 자에게 벌을 내린다.

 

 

 니시몬 뒤 탑()처럼 생긴 건물은 삼중탑(三重塔, 산쥬노토)’이다. 삼층탑 형태의 불전(佛殿)으로 각 층마다 석가, 미륵, 다보를 모셨다고 한다. 때문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위로 올라가더라도 폭이 좁아지지 않고 동일한 크기를 유지한단다.

 

 

 산쥬노토(三重塔)’을 지나면 수구전(隨求殿, 즈이구도)'이 나온다. 아래 사진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랄 수 있는 보문각(普門閣)‘을 가운데에 놓고 왼편에 자리하고 있다. 수구전은 앞서 본 두 건물과는 달리 검은색 지붕에 흰색 벽으로 이루어진 일본 전통가옥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즈이구도는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인 수구보살을 모시는 법당이다. 태반체험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별도의 대금을 지불해야 한다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본당으로 가는 길목은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짙푸른 녹음과 새빨간 단풍 등 교토의 아름다운 사계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명소라고 한다.

 

 

 

 아래 사진은 1633년 재건된 광문(轟門)이다. 본당의 중문으로 정면 처마 밑 중앙에 월주스님이 썼다는 보문각(普門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전각의 좌우 양쪽에 지국천왕상과 광목천왕상이 있고, 배면에는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장인 아교우(阿形)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자상인 응교우(吽形)의 석상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문 앞에는 올빼미 쵸우즈바찌(신사나 절에 참배 전에 손과 얼굴을 씻는 곳)’가 봉납되어 있다.

 

 

 중문을 지나면 일본의 국보(國寶)로 지정되어 있는 본당(本堂)이 나온다. 본당의 마루는 무대(舞台)’라는 별도의 이름이 붙어 있다. 예전에 십일면천수관음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단다. 이 둘은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기부에 의해 칸에이 10(1633)에 재건되었는데 정면 36m에 측면 30m, 무대높이 18m로 매우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지붕은 우진각 구조, 노송나무 껍질로 이은 지붕, 정면(남쪽) 좌우에 팔작지붕의 익랑(翼廊)이 튀어나오도록 외관에 변화를 주었다. 건물의 앞부분은 산의 경사면에 앞으로 내밀듯이 지어져 있다. 크고 긴 수많은 기둥(139개라고 한다)을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세워 상단을 지탱하는 구조하고 한다. 하지만 공사 중이라서 실제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일본의 유명한 속담 중에 청수사에서 뛰어내릴 각오로 하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청수의 무대에서 뛰어내릴 각오로 하면 세상에 못 이룰 일이 없다는 표현이란다. 이런 속담 때문인지는 몰라도 청수의 무대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속설이 전해졌고, 이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그렇지 목숨까지 건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일이 아닐까 싶다. 생존확률이 85.4%였다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지금은 난간을 둘러놓아 뛰어내리는 것을 막아놓았다.

 

 

 

 기요미즈 무대에 사람들이 몰려있기에 다가가보니 쇠막대 두 개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쇠로 만든 나막신 한 켤레가 놓여있다. 철장(鐵杖) 가운데 하나는 무게가 무려 90가 넘고 작은 것도 14나 된다고 한다. 그러니 작은 것은 여자들도 들 수 있겠지만 큰 것은 건장한 남성들에게도 불가능에 가깝다. 사진에서 보듯이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작은 것에 도전하고 있는 게 그 증거일 것이다. 굽이 높은 나막신의 무게도 12나 된다니 참조한다.

 

 

 본당(本堂)의 수미단(須彌壇)은 텅 비어 있었다. 중앙의 궤에는 본존의 천수관음(千手觀音) 입상, 오른쪽의 궤에는 비사문천(毘沙門天) 입상, 왼쪽의 궤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입상을 각각 안치하는데 평소에는 공개를 하지 않는단다. 지난 2000년에 마지막으로 공개를 했고 다음에는 2033년에 공개를 할 예정이라니 33년에 한 번씩 얼굴을 내미는 셈이다.

 

 

 대신 요상하게 생긴 보살상 하나가 한켠에 모셔져 있다. 소원 성취의 신인 출세대흑천(出世大黑天)’이라는데 까만 머리에 어깨에 보물자루를 메고 오른손엔 요술방망이를 들었다. 그리곤 쌀가마니를 딛고 선 형상이다.

 

 

 

 본당의 건너편에는 옥원(奥院, 오쿠노인)’이 버티고 있다. 본당에서 복도로 이어지는데 촘촘한 나무로 지탱된 본당의 전경과 교토 시내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최고의 포토 스팟(photo spot)’이다. 이 건물은 본당 무대와 같은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붕도 본당과 같은 삼나무 껍질의 우진각 구조로 되어있다. 모시는 부처도 역시 본당과 같다고 한다.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 잡은 고야스노토(子安塔)‘가 눈에 들어온다. ’칸무 천황의 후궁인 사카노우에노 하루코(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의 딸)‘가 황태자 카도이 친왕 탄생을 축하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청수사 인왕문 아래에 있었지만, 메이지 시대에 태산사가 폐지되면서 청수사 안의 남쪽으로 이축되었다고 한다.

 

 

 청수의 무대 아래에는 청수사의 또 다른 상징인 오토와 폭포(音羽, 오토와노타키)’가 있다. 오토와야마(音羽山)에서 내려온 물이 세 갈래로 흐르는데 예로부터 황금수’, ‘연명수라고 불리며 일본 십육 명수의 하나로 꼽혔을 정도로 유명한 물이다. 청수사라는 이름도 이 맑고 깨끗한 청수가 오토와의 산중에서 1000년 이상 계속 솟고 있다는데서 유래하고 있다. 세 줄기로 떨어지는 낙수가 특징이며 각각의 낙수는 왼쪽부터 학문과 연애, 장수를 의미한단다. 이 가운데 두 개만 골라 마시는 것이 예의로 여러 개를 마시면 어느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전해져 오는데, 이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함이란다.

 

 

 

 물을 받아 마시려고 길게 늘어선 줄이 장난이 아니었다. 기다란 손잡이가 달린 바가지로 물을 받아 마시는데 물이 세 줄기로 떨어지고 있으므로 세 명씩 번갈아가며 마시는 셈이다. 그런데도 줄은 도무지 줄어들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하긴 이 물을 받아 마시면 건강·학업·연애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니 어느 누가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본당 옆 산자락에는 지주신사(地主神社)‘가 자리 잡았다. 연인들의 사랑을 이루어주는 곳으로 젊은 여성과 연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청수사를 수호하는 신사 역할을 해왔으며 메이지시대의 신불분리정책 이전에는 청수사에 포함된 시설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록 두 시설이 분리되어 있지만 아직도 입구를 같이 쓰고 있는 등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지주신사는 일본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인 스사노오(素戔嗚命)’의 후손인 제신 오오쿠니누시노 미코토 (大国主命, 오오쿠니)’를 모시는 신사이다. 오오쿠니는 연분을 맺어주는 신이란다. 때문에 인연의 신사’, ‘사랑의 신사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여중·여고생들에게 최고의 수학여행 코스로 꼽히고 있단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일본인의 종교관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불교(佛敎)와 신도(神道)는 분명히 다른 종교이다. 심지어 기독교와 천주교처럼 뿌리가 같은 종교도 아니다. 불교가 대륙을 통해 건너온 종교인데 반해, 신도는 일본 전통의 민간 정령신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모든 사물에 신이 있다고 믿으며 종교에 대한 개방이 큰 편이라고 한다. 때문에 종교 간의 분쟁이 매우 적고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는 국가란다. 이곳 청수사와 지주신사처럼 두 종교가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와는 반대로 신사의 안에 절이 있는 경우도 있다니 참조한다. 이는 서로를 일본인의 문화에 녹아있는 종교로 인정함과 동시에 두 종교의 영역이 서로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총문(総門)이라는 중요문화재도 보였으나 특이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노노미야 신사에서 보았던 연애 샘물‘, 즉 물위에 띄워놓은 종이에 적힌 사연의 글자가 모두 사라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그런 종류의 물통이 놓여있는 게 눈길을 끄는 정도였다.

 

 

 에마(絵馬)’도 눈에 띈다. 신사(神社)나 사원(寺院)에 기원(祈願)했던 것이 이루어졌을 때 그 사례로 봉납하는 그림이 그려진 작은 나무판이다. 말 등의 그림이 그려지고 나머지 여백이나 이면에다 기원의 내용이나 이름 등을 쓰는 것이 보통인데, 판자는 신사나 사원에서 판매하고 있다. 나라시대에는 신이 탈 것으로 말(神馬 : 신사에 봉납한 말)을 봉납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은 고가(高價)라서 자주 헌납할 수가 없었고, 또한 신사나 사원들도 헌납된 말들을 돌보는 것이 어려운지라 다른 대용품을 찾게 되었는가 보다. 그 대용으로 나온 것이 나무나 종이, 흙으로 만든 말의 상이었고, 헤이안 시대부터는 나무판에 그린 말의 그림으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래 사진은 연점석(戀占, 사랑을 점치는 돌)’이라고 한다. 무릎 높이 정도의 검은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머리 부분에는 새끼줄을 두른 채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며 청춘남녀의 영원한 사랑 고백을 증명해주고 있다. 10m를 간격으로 또 다른 돌이 있는데, 첫 번째 돌에서 눈을 감고 똑바로 걸어서 두 번째 돌까지 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참고로 이 돌은 원자물리학자 보스트 박사의 과학적인 연대측정 결과 기원 3000년 전인 조우몽시대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이는 지주신사의 창건이 고사기 등에 나오는 신화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탐방객의 대부분은 여자이다. 그 가운데서도 앳되게 보이는 여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두 손을 잡고 있는 젊은 연인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입구에 주련처럼 붙어 있던 양년기원(良緣祈願)’의 네 마디 속에 이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지 않나 싶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또 연애 운을 열어주는 사랑의 신사라니 어느 누군들 찾아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지주신사(地主神社)도 별도의 쵸즈야(手水舎)를 갖고 있었다. 비록 잠시지만 걸어오면서 더럽혀졌을지도 모를 속세의 때를 깨끗이 씻고 들어가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탐방을 끝내고 절을 빠져나오는데 십일중석탑(十一重石塔)이 보인다. 사각의 받침 석주 위에 10개의 옥개석(屋蓋石)을 올린 석탑이다. 근처의 경관도 아름다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되돌아 나오는 길, 주어진 시간에 여유가 있어 느긋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거리는 온통 기념품가게와 전통 공방, 찻집, 주전부리 가게, 전통 식당 등으로 가득 차있다. 청수사의 참배객들을 위해 음식이나 물건을 파는 점포와 상인들의 주거지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보면 되겠다. ‘사하촌(寺下村)’이라고나 할까? ‘사하촌이란 조관희의 교토, 천 년의 시간을 걷다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절이나 신사 주변에 형성된 기념품상가를 나타낸다. 김정한은 동명의 단편소설에서 사찰 소유의 논밭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소작농들의 삶의 터전을 그렇게 불렀었다. 이곳 분위기에는 조관희의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가득하다. 서울의 인사동 거리를 뺨칠 정도라 하겠다. 하긴 청수사(기요미즈데라)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숫자가 연간 400만 명 이상이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교토를 들르는 관광객 4800만 명 가운데 10퍼센트 정도가 이곳 청수사를 찾는다고 한다.

 

 

 

 주차장에 다다를 즈음 오른편으로 작은 골목길 하나가 나뉜다. 들머리에 세워진 이정표는 산네이자카(産寧坂)’ 니넨자카(二年坂)’로 연결되는 지점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길은 산넨자카(三年坂)’라고고 불리는데 청수사(기요미즈데라)를 구경하고 내려오는 관광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들렀다 가는 아름답고도 재미있는 길이다. ‘산네이자카(産寧坂)’라는 지명의 유래도 재밌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부인인 고다이인(高台院)은 젊을 때 네네(ねね)라고만 불렸다.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히데요시를 계승할 후사가 없자 네네가 다이안지(泰産寺)’를 오가며 출산을 기원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일반인들도 출산을 기원할 때 이 길을 오른다고 해서 산()자와 녕()자를 썼는데, 나중에 발음에 따라 산넨자카라고 변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일본의 유명한 거리의 이름에는 자카(ざか)’라는 발음이 뒤에 따라붙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자카란 언덕()을 일컫는다. 언덕은 오르기 힘들지만 반면에 지대가 높아 전망이 좋은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그 조망이 힘들다는 단점을 완전히 극복하면서 명품거리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46개라는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면서 산넨자카(三年坂)’가 시작된다. 산넨자카란 다이도 3(808)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이곳에서 넘어지면 3년 안에 죽는다는 믿거나말거나 이야기인데 이를 액땜하기 위한 호리병박을 파는 가게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기념품으로 호리병박을 판단다. 아무튼 이곳은 광고와 포스터에도 자주 등장하는 돌 바닥길로 유명한 촬영 스팟(spot)이다.

 

 

 완만한 경사의 언덕과 계단은 납작한 돌로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다. 전통 건축물 보존지구로 지정된 지역답게 예스러운 목조주택이 늘어선 고즈넉한 풍경이 눈길을 끄는가 하면, 길가에는 아기자기한 기념품점과 도자기 가게, 전통요릿집 등이 모여 있어 산책하는 기분으로 돌아보기에 딱 좋다.

 

 

 

 전통 가옥에 기념품 가게와 카페 등이 들어서 있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한다. 전통 과자를 맛볼 수 있는가 하면 벚꽃을 주제로 한 다양한 기념품도 구입할 수 있어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 가운데는 교토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관심을 가지게 되는 선물로 요지야의 기름종이를 빼놓을 수 없다. 새초롬한 여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으며 다양한 미용용품을 판매하고 있다. 벚꽃이 곱게 그려져 있는 다양한 모양의 부채도 훌륭한 선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100년 이상씩 된 흑갈색의 목조건물들이 비좁은 언덕길 사이로 삐뚤빼뚤 자리 잡은 광경은 한없는 미로의 장난감처럼 예쁘다. 사이사이에는 찻집이나 군것질 거리를 파는 집도 있어서 올라가는 길도 내려오는 길도 힘들지 않다.

 

 

 기모노를 입고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이 의외로 많아 보인다. 거리를 배경으로 셀피(Selfie, 셀카)를 찍느라 바쁜데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함께 사진을 찍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심심찮게 눈에 뜬다. 디자인이 거의 비슷한 것으로 보아 다들 빌려 입었을 게 분명하다. 한복을 빌려 입고 경복궁이나 북촌을 걷는 것이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았는데, 이곳 교토도 역시 마찬가지인가 보다.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잘 꾸며진 정원도 만날 수 있었다.

 

 

 

 산넨자카 아래에는 니넨자카(二年坂)라는 길이 이어진다. 산넨자카의 초입이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는 말도 있고, 한편으로는 평지 마을로부터 키요미즈테라까지 오르는 힘겨운 언덕길을 격려하기 위해 여기서 멈추면 2년 안에 죽는다라는 풍문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재밌다. 하긴 산넨자카와 니넨자카를 오르는 재미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청수사를 찾는다는 얘기까지 전해지지 않는가.

 

 

 

 에필로그(epilogue), 교토는 도시 전체가 관광지라 할 수 있을 만큼 볼 것이 무척 많은 도시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볼거리를 꼽자면 전각을 금각으로 입힌 교토의 상징 킨카쿠지, 아름다운 자연과 좋은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기요미즈데라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상징인 니조 성(二條城)을 들 수 있다. 거기다 하나를 더 꼽으라면 아라시야마라 하겠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기요미즈데라 아라시야마만 둘러볼 수 있었다. 딱 절반만 둘러본 셈이다. 아쉽지만 패키지여행을 따라왔으니 어쩌겠는가. 이로보아 이곳 교토는 자유여행에 적합한 여행지로 여겨진다. 사방에 널려있는 볼거리들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여행지 : 일본 간사이 지역 여행

 

여행일 : ‘17. 3. 15()-17()

여행지 : 오사카(오사카 성, 도톰보리),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천룡사, 노노미야신사), 나라(동대사)

 

일 정 :

 3.15() : 오사카(도톰보리)

○ 3.16() :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노노미야신사)

○ 3.17() : 오사카(오사카 성), 나라(동대사)

 

여행 둘째 날 : 아라시야마(嵐山)의 노노미야 신사(野宮神社)

 

특징 : 일본의 신화 속 태양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日照大神)’를 모시는 자그만 사원이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에 일왕을 대신해 이세 신궁伊勢神宮)’을 봉양하는 미혼의 왕녀들이 몸을 정갈하게 하고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사 안에 위치한 바위이다. 바위를 문지르며 소원을 빌면 1년 안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 외에도 샘물에 소원을 적은 종이를 물에 띄운 후에 글자가 모두 녹아 사라지면 소원이 성취된다고도 하고, 재물운을 기원하는 벤자이텐(弁財天, 일본 전통 신앙에 등장하는 七福神 중 유일한 女神) 등도 위치하고 있다. 참고로 신사(神社)’란 태평양전쟁 패전 이전까지 일본이 국교로 내세운 신도(神道)의 사당이다쉽게 말해 신도의 신을 제사 지내는 곳이 신사라고 보면 되겠다. ‘신도는 일본의 고유 민족신앙으로,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는 토착 신앙이다. 하지만 종교라기보다는 조상의 유풍을 따라 가미(신앙의 대상)를 받들어 모시는 국민 신앙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을 기초로 하여 전개되는 문화현상을 포함해서 말할 수도 있다. 현재 일본에 산재한 신사는 전설의 인물 또는 신격화된 실존 인물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고 누구를 내세우는지 불분명한 곳도 있다일본 곳곳에는 8만여 개의 신사가 있다고 한다.

 

 바람의 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노노미야 신사에 다다르게 된다. 정확하게는 톈류지 북문 오른쪽에 위치한 신사로 사랑을 이어주는 신과 자녀의 진학을 기원하는 신을 모시는 곳이다. 이곳은 천황을 대신하여 황녀 또는 여왕이 미에현 이세시에 위치한 성지 이세진구로 치성을 드리러 떠나기 전에 심신을 씻어 내던 곳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일본의 문학작품들에서 심심찮게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단다. 특히 일본 고전문학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1세기 초에 지어진 이 대하소설에서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光源氏)’가 신사로 들어간 로쿠조고시키쇼를 찾아가는 것으로 나온단다. 참고로 당신이 만약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 ,겐지 이야기)’의 팬이라면 인근에 있는 세이료지(淸凉寺)’도 한번 찾아볼만 하다. 현재는 절로 개조됐지만 소설의 주인공 히카리 겐지의 실제 모델이었던 미나모토 노 토루의 별장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신사의 입구에는 사진 몇 장이 게시되어 있다. 매년 10월에 열리는 전통 행사인 사이구 교우레츠(伊勢神宮에 봉사한 미혼의 황녀 행렬)’를 홍보하는 사진들이다. 사이구(斎宮) 행렬은 노노미야 신사를 출발해 도게츠쿄를 건넌 다음 아라시야마 선착장에 이르는 거리를 사이구를 비롯해 헤이안 시대의 의상으로 몸을 감싼 사람들이 함께 걷는 행사이다. 화려한 옷을 입은 채 가마를 탄 사이구의 모습이 볼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역대 천황들은 이세신궁에 미혼의 황녀를 봉사시키는 것을 전통으로 이어왔다. 사이구에 오른 황녀는 황궁 내에서 1년여를 결재(제사가 있거나 신에게 기도를 해야 할 때 며칠 전부터 주색을 금하고 언행을 삼가며, 잡념을 버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한 뒤, 노노미야에서 3년간 몸을 깨끗이 하고 이세로 향했다. 이런 사이구 제도 14세기 후반까지 약 660년을 이어왔다고 한다.

 

 

 

 신사의 대문이라 할 수 있는 도리이(鳥居)’가 눈길을 끈다. 붉거나 주홍빛의 도리이를 갖고 있는 다른 산사들과는 달리 이곳의 도리이는 검은색이기 때문이다. '구로키노 도리이'라고도 불리는데 가공되지 않는 참나무를 그대로 세워놓은 것이란다. 이점이 매우 특이했던지 일본 고전소설의 최고라고 불리는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 겐지 이야기)`에도 나온단다. ‘현목편에서 노노미야의 검은 도리이와 섶나무로 엮은 울타리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단다. 참고로 도리이는 신사의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를 나타내는 의식적인 관문으로 신성한 공간과 평범한 공간의 경계를 나타낸다. 보편적으로 2개의 원통형 수직기둥 위에 직4각형의 들보가 가로로 2개 얹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불교와 함께 일본에 전래된 인도의 아치형 관문인 '도라나'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어떤 학자들은 만주나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 대문과 관련지어 설명한다.

 

 

 

 

 안으로 들자 왼쪽에 데미즈(手水)’라는 샘이 보인다. 주의해야 할 점은 한국의 사찰처럼 이 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물은 신사를 참배하기 전에 손을 씻고 왼손으로 받은 물로 입을 살짝 행구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경내의 노노미야 다이코쿠텐(野宮大黒天)‘이라는 신은 사랑·결혼 등의 인연을 맺어주는 신으로 유명하다. 그래선지 젊은 여성들이 소원을 빌면서 내는 방울소리가 경내에 요란하다. 참고로 소원을 비는 방법이 따로 있다고 한다.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 옮겨본다. 원칙은 두 번 경배 후 두 번 박수를 치고, 다시 한 번 경배하며 소원을 비는 것이다. 그 다음 보시함에 동전을 넣고, 종 밑에 드리운 줄을 두 번 흔들어 소리를 낸다. 경배를 할 때는 두 손을 합장한 후 고개를 살짝 숙여야 한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가뜩이나 작은데 사람들까지 몰리다보니 정신이 없을 정도다. 조그만 신사(神社)에 불과하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뭔가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노노미야 신사의 경내에 있는 노노미야 다이코쿠텐(野宮大黒天)은 사랑과 결혼을 이루어주는 신으로 유명하다. 참배객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게 그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을 찾는 사람들만 오는 것은 아니란다. 남녀 간의 인연뿐만 아니라 직장, 학교 등에서의 좋은 인연도 빌 수 있단다. 가족의 건강과 시험합격 기원 등도 빼놓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돌로 유명한 오카이메이시이다. 우리말로는 거북돌이라고 불리는데 마음속으로 자신의 소원을 빌면서 손으로 이 돌을 문지르면 1년 안에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거북이처럼 생기지 않아서 미리 알지 못했을 경우엔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거북의 옆에는 물통이 하나 있는데 연애 샘물이란다. 물위에 띄워놓은 종이에 적힌 사연, 즉 바라는 내용의 글자가 모두 사라지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원을 적은 애마라는 나무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신사의 번성함을 알려주는 듯하다. 보통은 한두 개에 그치는데 비해 이곳은 대여섯 개는 족히 넘길 것 같다. 그러나 한국어로 된 애마는 눈에 띄지 않았다. 전에 들렀던 다른 사찰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본의 정치가들을 ’(ㅇㅂ) 나쁜 놈의 괄호 안에 적어 넣은 등 재미있는 글귀들이 간혹 보이기도 했는데 말이다.

 

 

 

 매점(관리소인지도 모르겠다)에서 결혼 운과 관련된 부적들을 팔고 있었다.

 

 

 

 신사의 또 다른 볼거리인 이끼정원이다. 삼월 중순이니 봄이라 부르기엔 아직 이른데도 이끼는 이미 푸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만큼 기후가 따뜻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나저나 앙증스러울 정도로 작은 다리가 눈길을 끈다. 그 아래로는 물의 흐름을 나타내려는 듯 하얀 모래를 깔아놓았다. 아기자기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미나리신(비옥과 쌀, 농업과 공업, 성공의 신)을 모신 것으로 여겨지는 신당도 보인다. 미나리신의 곁에 늘 붙어 다닌다는 백여우가 여럿 놓여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밖에도 신사에는 꽤 많은 사당들이 들어서있다. 임산부의 순산을 기원하는 사당이 있는가 하면 재물운을 기원하는 벤자이텐(弁財天) 등도 위치하고 있다. 벤자이텐은 일본 전통 신앙에 등장하는 칠복신 중 유일한 여신(女神)이다.

 

 

 

 

 

 

 전통 복장인 기모노를 입고 돌아다니는 여행객들도 꽤 많이 보인다. 웨딩 촬영을 하고 있는 커플도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 아닐까 싶다.

 

 

 

 노노미야 신사를 한 바퀴 둘러보는 데는 20분이면 족하다. 아까 신사로 들어올 때 지나왔던 치쿠린(竹林)을 빠져나와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들면 노노미야신사의 탐방은 끝을 맺는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도케츠교는 이곳에서 오른편, 여행 일정에 조금 여유가 있다면 왼편으로 가볼 일이다. 멀지 않은 곳에 아라시야마의 또 다른 체험거리로인 토록코 열차의 탑승역이 있기 때문이다. 토록코 열차는 요즘은 흔히 볼 수 없는 증기기관차다. 토록코 카메오카역까지 20여 분 정도를 단풍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게 되는데, 이때 객차마다 창문을 열 수 있어 상쾌한 공기를 실컷 들여 마실 수 있음은 물론이고 사진 찍기에도 좋단다.

 

여행지 : 일본 간사이 지역 여행

 

여행일 : ‘17. 3. 15()-17()

여행지 : 오사카(오사카 성, 도톰보리),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천룡사, 노노미야신사), 나라(동대사)

 

일 정 :

 3.15() : 오사카(도톰보리)

○ 3.16() :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노노미야신사)

○ 3.17() : 오사카(오사카 성), 나라(동대사)

 

여행 둘째 날 : 아라시야마(嵐山)의 도케츠교(渡月橋)와 덴류지(天龍寺), 치쿠린(竹林)

 

특징 : 교토(京都) 아라시야마(嵐山)‘는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에 귀족의 별장지로 개발된 이후 교토의 대표적 관광지로서 자리를 굳혀오고 있다. 이 지역의 특징은 사계절의 변화가 선명하다는 점이다. 봄의 벚꽃과 가을의 단풍은 특히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찾아볼만한 문화재로는 목조로 된 길이 154m의 도게츠교(渡月橋)와 덴류사(天竜寺), 노노미야신사(野宮神社) 등이 있으며, 북쪽에는 대나무 숲과 수풀이 우거진 산의 출발점을 따라 작은 절들이 흩어져 있고 호즈강(保津川)에서는 보트 투어를 할 수 있다.

 

 버스는 우릴 강가에다 내려놓는다. 도로의 우측은 상가, 왼편은 가츠라강(佳川)’이다. 가츠라강을 가로지르고 있는 다리가 도월교(渡月橋, 도게츠교)’이니 아라시야마 관광을 도월교에서부터 시작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교토의 외곽 '바람산'이라는 이름의 아라시야마(嵐山)는 교토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해 경치가 빼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교토에서 열차로 20분가량이면 닿을 수 있는데, 이곳 도게츠다리 외에도 유네스코문화유산에 오른 사찰 덴류지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히는 울창한 대나무길 치쿠린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차디찬 바람이 볼을 스친다. 그래, 오늘이 315일이니 온화함을 실은 바람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바람결에는 가츠라강이 내는 약간의 소음도 실어져 있다. 유명 관광지임을 알리는 군상들의 소음도 빠지지 않는다. 그 소리와 함께 아라시야마 산이 밀어내는 바람이 연신 볼을 때린다.

 

 

 오른편에는 식당과 상점, 특히 잡화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그만큼 소문난 관광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호객(呼客)을 하는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도월교(渡月橋, 도게츠교)’가 나온다. 가츠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인데 이 다리를 기준으로 상류는 호즈강, 하류는 가츠라강이라고 부른단다. 도월교(渡月橋, 도게츠교)라는 이름은 풍류와 사유를 즐기던 왕족에게서 나왔다. ‘달이 건너는 다리라는 뜻인데, 가마쿠라 시대의 가메야마 천황이 밤에 이 다리를 보고 마치 달이 건너가는 듯하다고 한데서 유래되었단다.

 

 

 

 1934년에 놓은 154m 남짓한 이 다리는 역사의 산 증인이요 목격자라 할 수 있다. 시대를 갈아타며 콘크리트로 분칠해 사람과 차의 무게를 이겨낸 지 어언 400년이 넘었단다. 교각(橋脚)은 철근 콘크리트로 되어 있지만 난간부근은 목조로 만들어져 운치가 있다. 차도의 양 옆으로 인도가 나있어 호즈강과 아라시야마를 함께 찍을 수 있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또한 도월교에서 바라보는 봄의 벚꽃 가을 단풍은 특히 아름다운 것을 알려져 있다.

 

 

 

 

 

 

 도월교에서 북쪽으로 강을 바라보면 낮은 둑이 있어 강물이 잠시 머물다 넘쳐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강 양옆으로는 들판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水路)가 보이는데 그 옛날 (, 하타)들이 제방을 쌓은 다음 관개 사업을 벌인 자취들이다. 이름은 대언천 제방’. 재앙과도 같았던 가츠라강(佳川)’의 풍부한 수량을 이용해 농업혁명을 가져온 전설적인 제방이란다. 그런데 그 하타씨가 신라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의 후손이라는데 귀가 솔깃해진다. 5세기 후반에 집단으로 건너와 일본의 국가 형성에 문화기술 등에서 크게 공헌한 사람들인데, 누에를 키우고 비단을 직조하여 천황에게 바치니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살과 같다며 하타라는 성씨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들은 양잠기술 이외에도 선진기술이었던 양조, 제철, 목공기술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아라시야마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사공이 직접 노를 젓는 호즈강 뱃놀이’,  야카타부네라고 한다. 야카타부네란 지붕이 있는 놀잇배를 말한다. 옛날 귀족들은 저런 배의 선상에서 연회를 열고 시와 연주를 즐겼다고 한다. 이를 모방해 메이지시대 초기부터 관광용 뱃놀이가 유행하기 시작했단다. ‘대언천 제방에서 배를 타고 호즈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되돌아오는 코스인데 운이 좋으면 물가에 나온 사슴이나 원숭이도 볼 수 있단다.(첨부된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도월교를 둘러봤으면 이젠 대나무 숲으로 유명한 치쿠린(竹林)’으로 갈 차례이다. 그다지 멀지 않기 때문에 걸어가는 게 보통이지만 그마저도 부담스럽다면 발바닥까지 근육이 꽉 잡힌 사내가 끄는 인력거를 이용하면 된다. 무엇보다 편하게 앉아 이동할 수 있는데다 명소에서는 사진도 찍어준다니 다리를 핑계 삼지 않더라도 한번쯤은 이용해볼만 하지 않나 싶다. 특히 일본어가 가능할 경우 인력거꾼의 설명까지 들어가며 여행을 즐길 수 있다지 않는가. 붐비는 인파에 휩쓸릴 필요가 없고 느긋하게 앉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 하겠다.

 

 

 

 치쿠린으로 가는 길,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기분 좋은 길이 이어지는데 거리를 따라 기념품 가게와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다. 그 사이에 꼭 끼인 골목에라도 들어설라치면 세파가 새겨진 기와 아래 나무로 매무새를 마무리한 집과 매일 내 몸처럼 가꿨을 정원이 있다. 작은 사찰은 어깨를 나란히 이어간다. 흡사 타임머신을 타고 옛 교토의 거리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길을 걷다보면 오른편에 아라시마 역(嵐山駅)’이 보인다. 역사의 이름 앞에 적어놓은 란덴(嵐電)’은 노선(路線)의 이름일 것이다. ‘란덴은 시조오미야와 기타노하쿠바이초, 아라시야마를 잇는 전철(電鐵)로 노면차량(路面車輛)이 운행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지 이미 오래인 교통수단이라 하겠다. 1899년부터 운행해오던 경성전차 1968년 문을 닫으면서 이젠 기억에서조차 가물가물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대기오염 걱정이 없는 청정교통수단이지만 도시환경이 급격히 변하면서 버스와 지하철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만 것이다.

 

 

 

 전철역을 지나자마자 이번에는 천룡사(天龍寺, 덴류지)’가 나온다. 입구에 세워놓은 거대한 표지석은 이곳이 임제종(臨濟宗)의 대본산(大本山)임을 알리고 있다. 그 옆에 보이는 입간판에는 사적(史蹟)이자 특별명승(特別名勝) 조원지 정원(曹源池 庭園)’에 대해 안내하고 있다.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는 것도 소개하고 있으나 사찰 전체를 이르는 것인지, 아니면 조원지 정원에 국한하는지는 구분하지 않고 있다.

 

 

 덴류지(天龍寺)’는 교토고잔(교토의 5대 선종 사찰로 이곳 덴류지 외에 쇼코쿠지, 도후쿠지, 겐닌지, 만주지 등이 있다) 가운데 하나이자 선종(禪宗) 사찰의 으뜸으로 꼽히는 절이다. 덴류지가 일본 제일의 사찰로 불리게 된 것은 일본 황실에서 세운 첫 번째 선종 사찰이기 때문이다. 1255년 조성된 왕실 별궁을 1339년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초대장군 아시카가 다카우지 고다이고(後嵯峨) 천황을 애도하기 위한 절로 고쳐지었다고 한다. 덴류지는 교토에서 일어난 변고를 함께 겪기도 했다. ‘오닌의 난 와중에 피해를 입었음은 물론이고 금문의 변 때는 조슈군이 이곳에 주둔했다는 이유로 큰 화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대부분 메이지 연간 이후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아래의 사진은 일주문에 해당하는 칙사문(敕使門, 조쿠시몬)’이다. 덴류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명색이 일본인데 기념품가게가 안보일 리가 없다. 기념품은 물론이고 안전을 기원하는 다양한 부적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기념품 가게의 뒤편에는 본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고리(庫裏, 쿠리)가 자리 잡았다. 1899년에 지어진 건물로 매표소가 이 안에 들어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 소방장(小方丈, 쇼호조)과 대방장(大方丈, 다이호조)을 거쳐 일본 최초의 사적(史蹟)이자 특별명승지인 조원지(曹源池, 쇼겐지)’ 정원(庭園)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난 안은 들어가 보지를 못했다. 입장료를 물어야 하는데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만 하는 등 절차까지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주어진 시간에 맞추려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는데 필요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 덴류지가 여행사의 일정에 빠져있었던 탓에 절에 대한 정보를 미리 파악해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록되어 있는 문화재인데 일정에서 빠져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덕분에 4세기 일본 정원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조원지 정원은 구경하지 못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미리 준비를 못해온 탓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저 여행사에 대한 뒷담화로 그 아쉬움을 달래볼 따름이다. 참고로 덴류지를 세운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1275-1351)’ 국사는 난세를 슬기롭게 헤쳐 나간 고승으로 정원 설계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덴류지의 조원지는 마음심()자형의 커다란 연못을 조성하고 그 주변으로 산책길을 낸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 정원이란다. 한적함 속에서 우아함을 추구하는 일본 문화를 잘 나타내는 정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웅장한 방장 건물 앞의 마루에 조원지를 감상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도 볼거리라고 한다.(첨부된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경내에는 꽤 많은 부속사찰들이 들어서 있다. 우리나라의 암자쯤으로 여기면 될 것 같은데, 일부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었다.

 

 

 

 

 

 

 

 절을 빠져나오는 길에 마치 분재처럼 잘 가꾸어진 소나무를 만났다. 멋진 소나무만 보면 인증사진을 찍어두는 습관이 배어버린 집사람이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냉큼 포즈부터 잡고 본다.

 

 

 치쿠린으로 향하는 덴류지의 담장을 따르다보면 눈길을 끄는 풍경들을 만나기도 한다. 호기심 많은 동자승들이 축대 위에서 노닐고 있는가 하면, 길모퉁이에서는 신당(神堂)이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다양한 신들이 사는 나라답다 하겠다.

 

 

 

 대나무 숲길에 이르니 아이스크림 가게가 여행객들에 손짓을 보내온다. 추천 품목은 녹차 아이스크림이란다. 녹차의 고장에 왔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관광객들이 만들어낸 줄이 길고도 긴 이유일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하늘을 향해 죽죽 뻗어 있는 대나무들 세상이다. 밀도 높은 대나무 줄기는 짙다 못해 거무죽죽한데, 1,000년 유구한 역사가 서늘한 바람을 몰며 성큼 마중 나왔다. 치쿠린(竹林)‘은 곧게 뻗은 대마무가 촘촘하게 이어지는 아름다운 산책로이다. 일본의 가장 아름다운 3대 대나무 숲 가운데 하나로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서 주인공 장쯔이가 차를 타고 지나며 바라보던 대나무 숲이다. 이준기와 미야자키 아오이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첫눈에도 등장했었단다. 풍기는 분위기는 담양의 죽녹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다만 대숲이 더 촘촘하고 울창하며 규모도 크다. 그러나 울산의 십리대숲보다는 그 규모가 한참이나 작았다.

 

 

 

 

 녹색의 싱그러움과 청량한 공기에 둘러싸인 채 걷다 보면 일상의 자잘한 근심을 잊게 된다. 봄날의 대숲은 청량감으로 넘친다. 가만히 서서 댓잎에 이는 바람소리를 듣노라면 마음마저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감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긴 담양의 죽녹원(竹綠苑)과 울산의 십리대숲을 이미 둘러봤으니 당연하다 하겠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끔 사진의 과장됨에 놀랄 때가 있다. 이곳 치쿠린에서 느낀 솔직한 내 표현이다. 요리 보고 저리 봐도 좀처럼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사진작가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너무 홀려있었던 모양이다. 작품은 작품이고 실물은 실물인 것을...

 

 

 

 하늘은 휘청거리는 대나무 이파리로 조각이 나고, ‘사각사각’ ‘쓱쓱 서슬 퍼런 초봄의 냉기가 회오리진다.

 

 

 

 대나무숲길을 거니는데 엄청나게 많은 비석들이 보인다. 입구에 삼수원(三秀院)의 묘소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덴류지에 딸린 공동묘지쯤으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 싶다. 삼수원이 덴류지의 부속사찰 가운데 하나이니 말이다.

여행지 : 일본 간사이 지역 여행

 

여행일 : ‘17. 3. 15()-17()

여행지 : 오사카(오사카 성, 도톰보리),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노노미야신사), 나라(동대사)

 

일 정 :

 3.15() : 오사카(먹자골목 도톰보리)

○ 3.16() :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노노미야신사)

○ 3.17() : 오사카(오사카 성), 나라(동대사)

 

여행 첫째 날 : 오사카의 시가지 관광

 

특징 :  일본(日本, Japan) : 홋카이도·혼슈·시코쿠·규슈의 4개 섬과 수많은 작은 섬으로 구성되며, 수도는 도쿄이다. 단일 아시아계 민족이 압도적이고 주요 종교는 신도·불교·그리스도교이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하와이 및 필리핀의 미군 기지를 공격했고, 유럽 식민지를 점령했으나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된 후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전후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여 폐허로 변한 산업기반을 재건하여 놀랄 만한 경제 회복이 이어졌고,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우리 겨레와는 천 년 숙안(宿案)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해탄을 사이에 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지리적 관계에서 연유하는 운명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일본적인 것은 우리 주변에 범람하고 있으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일본인과 그 역사에 대하여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을까. 앞으로 수세대를 통하여 우리 겨레의 중요한 문제가 한일관계라는 것을 달관하고, 올바른 한일관계의 수립을 위해서도 지나온 한일관계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오사카(大阪, Ōsaka) : 간사이 지역의 도시 중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 지역의 교통, 산업, 관광의 중심지다. 넓은 태평양을 바로 앞에 두고 있어 예전부터 고베와 함께 간사이 지역의 최대 해양 도시이자 상업·무역 도시로 성장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오사카는 교토가 과거 수도였을 때에는 주요 지방 도시에 불과했으나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을 건축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 쇠퇴하기 시작하였지만 메이지 유신 때 태평양을 낀 해양 도시로 상공업과 근대공업을 육성하여 간사이 지역의 최대 도시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주변 도시인 교토, 나라, 고베를 1시간 안에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오사카를 중심으로 많은 외국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2000년 이전에는 오사카의 심장부인 오사카 역 주변과 우메다 역 주변, 그리고 남쪽의 교통 요충지인 난바 역 중심으로 관광지가 형성되었으며 2000년 이후에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과 덴포잔에 일본 최대 규모의 수족관 가이유칸이 들어서면서 더욱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도톤보리(道頓堀) : ’난카이센(南海線)‘ 난바(難波)  신사이바시(心斎橋) 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도톤보리는 한국 관광객이 꼭 들르는 관광 명소 중 하나다. 음식점, 기념품 가게 그리고 수많은 술집이 모두 여기에 있다. 특히 온갖 음식점이 다 모여 있어 맛의 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사진을 한번쯤 찍는 쿠리코 러너 간판, 쿠쿠루 도톤보리 대형 문어 간판을 비롯해 화려한 간판들도 도톤보리의 즐길 거리다.

 

 버스는 우릴 도톤보리(道頓堀) 강변에다 내려놓는다. ’도톤보리로 들어가는 입구쯤으로 보면 되겠다. 도톤보리 지역은 과거 물자 수송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 수로(水路)였다고 한다. ’도톤보리라는 지명도 이 지역의 북쪽을 흐르는 도톤보리 강(道頓堀川)‘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비록 오사카 최고의 관광 명소로 개발되었다지만 강까지 옮겨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오사카 여행은 난바·신사이바시 지역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교통의 중심지인 이 지역은 오사카 최고의 인기 상점가인 신사이바시 상점가와 먹거리가 풍부한 도톤보리와 센니치마에, 전자제품·프라모델 전문 상가들이 밀집한 덴덴타운, 복합 엔터테인먼트 쇼핑몰인 난바 파크스 등 오사카 여행의 핵심 명소들이 몰려 있다. 오늘은 그중 도톤보리 신사이바시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잠시 후 도톰보리 골목으로 들어선다. 예로부터 도쿄는 입다가 죽고 오사카는 먹다가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사카는 먹거리가 다양하기로 유명하다. 오사카의 먹거리 그 중심에는 '도톤보리'가 있다. 그러니 오늘 여행은 먹거리 투어라 불러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일일이 다 들어가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소문난 음식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먼저 먹고 싶은 음식을 콕 찍고 난 다음 핸드폰의 앱을 이용해 가고 싶은 곳을 고르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아닐까 싶다.

 

 

 

 도톤보리는 좁은 길과 뒷골목을 따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레스토랑과 바들이 즐비해있다. 다채로운 간판과 잘 꾸며진 입구는 눈을 부시게 하는 빛과 디자인의 교향곡을 만들어낸다.

 

 

 가장 먼저 손짓을 보내오는 건 길거리 음식이다. 박스형으로 만들어진 공간에 다코야끼’. 오코노미야끼’, ‘쿠시카츠 등 온갖 길거리음식들이 총 집합되어 있다. 그야말로 길거리 음식들 세상이라 하겠다. 돌아오는 길에 들러볼 요량으로 그냥 지나치려는데 귀와 코가 발길을 더디게 만든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지글지글 소리와 군침을 돌게 하는 향기가 청각과 후각을 마비시켜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도톤보리를 먼저 둘러보는 게 순서가 아니겠는가.

 

 

 

 잠시 후 오코노미야끼 전문점인 본구라야가 나온다. 오코노미야끼 외에도 다코야끼와 야키소바를 팔고 있는데, 다코야끼를 밖에서 만들고 있어 그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색다르다. 아니 이 식당의 주 메뉴가 오코노미야끼에서 다코야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코야끼 조리대 앞에 늘어선 줄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오코노미야키는 밀가루 반죽에 양배추와 돼지고기, 해물을 섞어 철판에 구워먹는 요리로 한국인 입맛에 꼭 맞는다. 일본 전역에서 즐기는 음식이지만 오사카가 원조라고 보면 된다. 국내에도 진출한 오코노미야키 전문점 후게츠(風月)도 오사카에서 출발했다.

 

 

 

 몇 걸음 더 걷자 게 요리 전문점인 카나도라쿠이(かに道楽本店)의 게가 엄청난 크기로 소님을 맞는다. 게에 관련해서는 이 음식점을 절대 따라올 수 없다는 입소문이 퍼져있는 곳이다. 가격이 다소 비싼 게 흠이지만 오사카의 특별한 요리를 맛보고 싶다면 눈 딱 감고 들어가 볼 일이다. 그건 그렇고 3대째 내려온다는 이 요릿집은 간판으로 내건 꽃게 조형물이 눈여겨 볼만한 구경거리다. 꼼꼼히 살펴보면 눈과 다리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다음은 타코야키의 캐릭터(character)라 할 수 있는 문어 간판이 여행객들에게 손짓한다. 오사카에서도 알아주는 타코야키 전문점인 쿠쿠루(たこ家道頓堀)라고 한다.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길게 늘어서있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 부부도 줄을 서볼까 하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도톤보리의 탐방이 우선이기 때문에 줄을 서있을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따가 돌아오는 길에도 줄이 줄어들지 않을 경우엔 까짓 푸드 트럭(Food truck)‘에서 사먹으면 되지 않겠는가. 참고로 타코야키는 일본식 문어 풀빵이다. 밀가루 반죽 속에 문어를 넣어 지름 3-5cm 정도로 둥글게 구운 요리이다. 1935년 오사카에서 개발된 음식으로 타코(문어)와 야키(굽다)를 합성한 명칭에서 유래됐다. 보통은 타코야키 소스와 가다랑어포, 파래가루를 같이 얹는다.

 

 

 또 다른 문어 간판도 보인다. 이곳 역시 타코야키 전문점인 쿠쿠류라고 한다. 가까운 거리에 두 곳이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소문난 음식점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오사카 명물(大阪 名物)이라고 적힌 간판에 이끌려 걸음을 멈춘다. 우유와 아이스크림, 초콜릿 등을 생산하는 유제품업체인 메이지에서 내건 광고 간판인데, 한가운데에 넣어놓은 모니터(monitor)에서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비춰진다. 화면에 나타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깔깔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명물이라는 호칭이 맞을 것도 같다. 간판이 매달려 있는 2층에는 오코노미야끼 전문점인 보테쥬(Botejyu)’가 들어서있다. 1946년에 문을 열었다니 내놓는 음식만 가지고도 오사카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이 집의 상호에 얽힌 얘기가 재미있다. 오코노이야키를 요리하면서 뒤집을 때 나는 소리가 보테~ ~’라는 것처럼 들린다고 해서 보테쥬라는 이름을 붙였단다.

 

 

 

 일본은 식초로 간을 한 밥에다 어패류를 얹은 일본식 요리인 스시(壽司, sushi)’의 본고장이다. 그러니 먹거리 골목으로 유명한 도톤보리에 스시집이 없을 리가 없다. ‘겐로쿠(元綠)’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이 음식점은 '회전초밥의 원조'로 불린다. 오사카에서 작은 생선초밥 가게를 운영하던 히로이시 요시아키 1947년 아사히 맥주 공장의 컨베이어벨트를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곳이란다. 그래선지 간판에다 원조(元朝)라고 큼지막하게 적어놓기까지 했다. 초밥은 한 접시에 무조건 ‘130’, 최상급의 품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격대비 만족도가 높아 배낭여행객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 대기 시간은 기본이라 하겠다.

 

 

 

 

 

 대로(大路)를 건넜지만 지명은 아직까지도 도톤보리로 표시되어 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아직도 도톤보리를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신사이바시는 대체 어디쯤일까? 정보가 부족했던 우리 부부는 이 근처에서 서성이다가 집합장소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우린 신사이바시를 둘러보지 못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아쉬운 일이지만 준비를 덜해왔으니 어쩌겠는가.

 

 

 이곳도 역시 음식점들 일색이다. 하긴 오사카는 음식 천국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일본의 부엌이라 불릴 만큼 먹거리가 다양하다면서 말이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멋 내기 좋아하는 교토는 입다 망하고 음식이 맛있는 오사카에서는 먹다 망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오고 갈 정도라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이발소도 보였다. 가격은 1,200, 며칠 전에 다녀온 내 단골 이발소에서 13,000원을 냈었으니 우리나라보다 조금 싼 편이다. 아니 이곳이 시내의 중심가임을 감안한다면 한참이나 싸다고 봐야 하겠다.

 

 

 누군가 인간은 먹고, 입고 싸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살아간다고 했다. 그러니 먹거리의 천국인 이곳 도톤보리에서 잠자리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캡슐호텔‘, 말 그대로 캡슐 형태의 미니 객실을 갖춘 숙박업소이다. 캡슐호텔이란 게 본디 일본에서 시작되었으니 이처럼 흔하게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캡슐호텔은 땅값이 비싼 대도시의 도심에서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숙박 아이디어이다. 1인 고객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만 제공함으로써 같은 공간에 기존 대비 더 많은 객실을 만들었다. 실비여행을 즐기는 배낭여행객들에겐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사찰(寺刹)도 눈에 띈다. 도심(都心)에 들어서 있는 게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라 하겠다. 아니 그보다도 카페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외관이 더 익숙하지가 않다. 생활불교에 가까운 일본 불교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일본에 들어온 불교가 일본의 고유 신앙인 신도(神道)와 절충되면서 특이한 형식으로 민간 속에 깊이 뿌리내린 것으로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대로변에는 ‘HIPS’라는 백화점 건물도 보인다. 첼로모양의 가운데에 설치된 자이로드롭(gyro drop)’이라는 놀이기구가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다. 하지만 안전성을 이유로 지금은 운행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대신 인공암장을 설치해 성업 중이란다.

 

 

 이번에는 도톤보리 강가를 거닐어보기로 한다. 강변을 따라 산책로가 나있는데 모양새로 봐서는 차라리 운하(運河)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산책로에 만들어 놓은 작은 공연장에서는 아이돌의 공연이 한창이다. 도톤보리 강가에다 거리예술가들을 위한 나니와워터프론트 극장가를 만든다고 하더니 저곳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기사에서는 활기차고 생명력 넘치는 오사카의 심벌로 거듭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잠시 걷는데 오사카를 대표하는 캐릭터라는 글리코맨(Glico)’이 활짝 웃으며 맞이해 준다. 결승점에 골인하는 마라토너의 모습인 글리코맨은 식품회사 에자키 글리코 1935년에 만든 거대한 네온사인(neon sign)이다. 1 365일을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르는 마라토너의 모습이 촌스러우면서도 볼수록 정감이 넘친다. 그나저나 저 광고판은 오사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찍어오는 인증사진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명소이다. 도톤보리, 아니 오사카를 넘어 일본의 명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참로고 글리코맨 에자키 글리코에서 판매중인 글리코 캐러멜의 표지모델이다. 육상 선수가 파란색 트랙 위를 달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도톤보리로 다시 돌아오니 이번에는 에비수바시-수지(Ebisu Bashi-Suji)’라는 간판이 눈길을 끈다. 얼핏 패션타운이라는 얻어들은 풍월이 있었기에 일단은 들어서고 본다. 아치형 지붕을 이고 있는 아케이드(arcade) 안에는 수많은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귀띔을 해준 이가 한국으로 치면 명동쯤 된다고 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명동에는 한참이나 못 미치고 있었다.

 

 

 

 

 상가 뒤편으로 빠져나가니 아까 걸었던 중심가보다는 못하지만 이곳 역시 음식점 천지다. 오가는 사람들은 좀 뜸한 걸 보면 아직은 덜 알려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선지 상가의 지도까지 세워놓았다. 하지만 나 같은 이방인에게는 그림의 떡일 따름이다. 한글로 까지는 바라지 않겠지만 최소한 영어로는 병기(倂記)를 해놓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이곳 오사카, 특히 도톤보리는 낯설고 물설은 이방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 아니겠는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식당에서 파는 요리들을 모두 유리박스 안에다 모셔 놓았다. 아래에 가격까지 적어 두었음은 물론이다. 손님들이 손쉽게 메뉴를 선택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식당 측으로 봐서도 테이블의 회전율을 높여줄 테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의 좋은 예라 하겠다.

 

 

 한술 더 뜬 풍경도 보인다. 식당에서 팔고 있는 음식의 메뉴들을 자판기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음식물 사진과 함께 가격표까지 붙어 있으니 카드를 넣은 다음 자기가 원하는 메뉴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는 자판기가 출력해주는 티켓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선택했던 음식을 받아먹는 시스템이다. 참고로 저런 음식자판기는 80년대의 경제위기 때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주인 혼자서 식당을 운영할 수 있도록 개발되었단다. 자판기에 돈을 넣고 원하는 음식을 누르면 티켓이 출력됨과 동시에 주방으로 신호가 전해진다고 한다. 주방은 주문된 음식을 만들어 선반에 올려놓으면 손님이 티켓을 주고 음식을 가져다 먹는 시스템이다. 빈 식기를 손님들이 반납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소자본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시스템인데도 왜 우리나라에서는 활용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도톤보리에서는 고깔모자를 쓰고 북 치는 마네킹을 쉽게 볼 수 있다. ‘구이다오레 타로인데, ‘구이다오레라는 식당에서 1959년에 천만 엔이라는 거액을 들여서 만든 피에로 인형이다. 가게의 간판이자 마스코트라 할 수 있겠다. ‘구이다오레 8층으로 된 대형 푸드 코트(food court)’로 손님에게 500여 가지의 음식을 팔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8 7월에 문을 닫았다. 1949년에 문을 열었었다니 환갑을 못 보고 쓰러진 셈이다. 이유는 뻔하다. 음식의 종류가 많다보니 전문성이 떨어졌을 것이고 식재료와 품이 많이 들었을 테니 경제성 또한 다른 식당들에 비해 뒤쳐졌을 것이다. 시대에 맞는 트렌드(trend)를 쫒아가지 못한 결과는 적자에 이어 식당 문을 닫는 사태에 이르게까지 되고 말았단다. 하지만 구이다오레 타로는 살아남아 오사카 도톤보리를 대표하는 캐릭터 인형으로 관광객들에게 팔리고 있다.

 

 

 

 오사카의 명물인 쿠시카츠 다루마의 간판도 보인다. 식당 사장님을 캐릭터로 했는데 으스스하면서도 코믹한 것이 이색적이다. 쿠시카츠란 돼지고기와 닭고기, 채소 등을 꼬치에 꽂아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 길거리 음식이다. 튀김꼬치라고 여기면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오른편에 보이는 식당은 다코야키 크레오루이다. 도톤보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다코야키 전문점이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여러 가지 토핑을 다양하게 추가할 수 있는 점이 이 집의 장점이란다. 토핑에 따라 가격이 달라짐은 물론이다.

 

 

 

 대형 용() 간판은 해장라면으로 유명한 킨류(金龍) 에서 내건 것이다. 이곳은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라면집으로 알려진다. 밥과 김치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다 한국의 곰탕 국물과 비슷한 맛이어서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단다.

 

 

 

 날이 저물자 도톤보리가 민낯을 드러낸다. 도톤보리의 은 단순한 먹거리 천국에 불과하다. 하지만 해가 떨어지고 난 뒤에는 분위기가 확 바뀌어버린다. 젊은이들이 몰려들면서 활력과 다양성이 넘치는 거리로 변하는 것이다. 그 속에 퇴폐적인 색깔도 약간 섞여있다는 게 조금 문제지만 말이다.

 

 

 어스름이 짙은 강가로 빠져나오자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잡화점, ‘돈키호테 건물이 보인다. 화장품부터 식품, 의약품, 생활용품 등 다양한 아이템을 판매하고 있어 쇼핑하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는 곳이다. 하긴 간사이 여행의 백미는 쇼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손재주 좋은 일본인들이 만든, 특히 여심을 홀리는 잇템들이 그득하다니 찾지 않고 어찌 배기겠는가. 거기다 24시간 문을 연다니 아무 때라도 찾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참고로 돈키호테는 1989년에 설립된 할인 잡화점(디스카운트 숍) 브랜드다. 오랫동안 창고에 보관돼있어 처치가 곤란한 창고정리 상품이나 덤핑 제품들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매장으로 출발했는데, 초창기만 해도 그저 그렇고 그런 숍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버블 경제가 쇠퇴하고 일본의 장기 경기불황 잃어버린 10이 시작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어떤 경쟁 업체보다도 가장 저렴한 매장을 콘셉트로 내세워 가뜩이나 근검절약이 상식인 일본 소비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단다. 잡화점을 표방하는 만큼 없는 게 없다고 느낄 정도로 상품이 많아 한 번에 쇼핑이 가능하다는 점,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 그리고 심야(오사카 도톤보리점은 24시간 운영, 점포별 상이)에도 쇼핑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젊은 세대와 외국인 관광객들을 겨냥한 마케팅을 전개하는 점으로 돈키호테는 승승장구해왔단다.

 

 

 대충 한 바퀴 둘러보았으니 이젠 맥주로 목을 축여볼 차례이다. 그렇다고 해서 맨숭맨숭 돌아만 다녔던 것은 아니다. 다코야끼와 오코노미야끼, 아이스크림 등 이동을 하면서 먹을 만한 것들은 거의 다 맛을 보았다. 그러나 쿠시카츠만은 남겨 두었었다.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도톤보리 투어의 대미를 장식하려는데, 이때 안주로 삼기 위해서이다. 맥주안주로 튀김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여행지 : 중부 베트남

 

여행일 : ‘19. 12. 17()-21()

세부 일정 : 다낭(1)마블 마운틴호이안다낭(1)후에다낭(1)바나산 국립공원다낭 시내투어

 

베트남의 옛 수도, 후에(Hue)

 

특징 : 다낭에서 110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 트어티엔후에성(Thừa Thiên-Huế)’의 성도(省都)이다.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1802-1945)의 수도가 되면서 정치·경제·문화적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후에가 문화유산으로 가득한 역사적 도시가 된 이유이다. 반면에 이 도시는 베트남 전쟁의 참화가 깊이 새겨진 곳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집중적인 폭격으로 1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부터 적극적인 복구 작업이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폐허인 곳이 많다.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베트남에서 가장 길고 높은 고갯길이자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National Geographic Traveler)’가 완벽한 여행자가 꼭 가봐야 할 50곳 중 하나로 꼽은 하이반 고개(Deo Hai Van)‘를 넘어 도착한 후에’. 첫 방문지는 베트남의 옛 수도(首都)라는 명성에 걸맞는 유적인 왕릉(王陵)’이다. 정확히는 응우엔 왕조의 12대 황제인 카이딘(啓定帝)의 무덤이다. 차에서 내려 잠시 걸으면 계단과 삼문(三門)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 네 개의 난간이 있고 그 위에 용() 부조가 자리 잡고 있다. 계단을 올라 철문을 들어가면 이번에는 양쪽에 재실(齋室)이 있는 널찍한 마당이다. 여기서 다시 계단을 올라가야 석상(石像) 영역에 이를 수 있다. 참고로 후에에는 이곳 말고도 자롱 황릉(嘉隆帝, 1)’민망 황릉(明命帝, 2)’, ‘티에우찌 황릉(紹治帝, 3)’, ‘뜨득 황릉(嗣德帝, 4)’, ‘동칸 황릉(同慶帝, 9)’ 등의 황릉들이 더 있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서면 계단과 그 끝에 있는 패방 형식의 문이 여행객을 맞는다. 그런데 대문과 함께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들이 동양에서는 흔치 않은 바로크양식이다.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꾸며진 동양식 능()이 아닌 것이다. 카이딘 황릉의 특징이 베트남양식과 유럽양식이 혼재라고 하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보다. 당시 베트남을 통치하고 있던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선지 이 황릉은 후에를 소개하는 책자나 팜플렛에 거의 빠짐없이 메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 새겨진 난간 사이로 계단을 오르자 황릉의 첫 번째 마당이 나타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회백색의 팔각형 정자(亭子). 내부에는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가 아버지인 카이딘 황제를 위해 세운 송덕비(頌德碑)인 응릉비(Bi đình Ứng Lăng, 應陵碑)가 있다. 응릉은 카이딘 황릉의 능호다. 비를 2층의 석조건물이 감싸고 있는 모양새인데 건축 양식은 서양식이다. 그렇지만 기와형식의 지붕과 조각 그리고 장식은 동양적이다. 그나저나 난간과 기둥을 수놓은 섬세한 조각들이 눈길을 끈다. 검게 그을린 세월을 입으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고나 할까.

 

 

마당의 양쪽 끝에는 유럽식의 높은 탑이 세워져 있다. 무덤은 유럽의 바로크 양식을 기본으로 삼고 중국과 베트남 양식을 혼합시켰다고 한다. 이는 응우옌 왕조에서는 유일무이하단다. 무덤 같지 않은 무덤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저렇게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기법의 반대편에는 전통문화가 지배자의 문화에 흡수되어 버리는 서글픈 현실도 전제한다. 참고로 1920년에 공사를 시작한 이 능은 11년 후인 1931년 완공되었다. 카이딘 황제의 재임기간이 1916년부터 1925년까지였으니 그의 생전과 사후를 거치며 무덤은 계속 만들어 지고 있었던 셈이다.

 

 

마당에는 문인석, 무인석, 시종석, 동물석상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 문인석은 도포를 입고 무인석은 칼을 들고 있다. 그 뒤에 있는 시종들은 뾰족 삿갓을 쓰고 있다. 이들 석상 옆에는 커다란 코끼리와 말이 서 있다. 사후 세계의 황제가 나들이할 때 타고 다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자들에게 기념사진의 포인트가 되어 주는 카이딘 황릉의 명물로 남아있다.

 

 

둘로 나누어진 계단을 연거푸 오르자 두 번째 마당과 함께 능의 하이라이트인 천정궁(天定宮, Cung Thien Dinh)’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카이딘 황제의 유골을 모신 곳인데, 흰색이 주조를 이루는 바로크 양식의 콘크리트 건물이 마치 서양의 궁전을 보는 듯하다. 파리의 화려한 문화에 매료된 황제의 취향이 반영된 때문이란다. 참고로 카이딘 황릉은 외부가 거의 흑백이다. 섬세한 맛도 좀 덜하다. 당시 신공법이었던 '콘크리트'로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지금이야 건축자재 가운데 최하위지만 당시만 해도 그게 유행이었을 테니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선현들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 앞에다 인생지사(人生之事)를 놓는 걸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능()은 화려했다. 말이 능이지 숫제 궁전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문득 서울 근교에서 만났던 여러 능들이 생각난다. 아담하고 단출하던 조선 임금들의 무덤 말이다. 어쩌면 지배 이데올로기(Ideologie)가 강했던 조선에서는 이런 허세가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가진바 철학이 빈곤하면 빈곤할수록 허세를 부리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카이딘 황제의 사후 안식처인 계성전(啓成殿)은 건물의 외관보다 더욱 화려했다. 후에의 여러 황릉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던 지인의 귀띔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던가 보다. 도자기의 파편으로 모자이크 처리한 벽면과 기둥은 물론 금박으로 도배된 황제상까지, 시선이 향하는 어디나 번쩍번쩍함 일색인 것이다. 이 능은 백성의 원성 속에 지어졌다고 한다. 정사보다는 사치와 방탕함을 일삼던 카이딘 황제가 엄청난 국비를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복받지 못했던 능은 이제 베트남 관광산업의 효자가 되었다. 세월이 빚어낸 아이러니라 하겠다.

 

 

옥좌에는 청동에 금박을 입힌 1톤 무게의 카이딘 황제상가 앉아있다. 동상의 아래 지하 18m에는 그의 유체가 안치되어 있단다. ‘응우옌 왕조12대 왕인 카이딘 황제(1916~1925)’는 비운의 왕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꼭두각시였던 그는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치만을 일삼았다. 프랑스는 그런 왕을 위해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도록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단다. 그로인해 베트남인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다지만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었을까? 문득 자신의 무력함을 허세와 사치로 소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3개의 홀로 나누어진 계성전의 내부 벽과 천장은 서양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자기와 유리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바닥에는 대리석을 깔아 서양식 멋을 더했다. 하지만 장식된 문양이나 동식물은 동양적이다. 4계절, 8선녀, 8보물 등 나전 공예품을 진열해 놓은 듯하다.

 

 

황제가 사용하던 유럽풍의 집기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화려함 일색이다. 그는 베트남 사람들로부터 월급 받는 프랑스 관리'라는 조롱을 듣기도 했다. 그만큼 친 프랑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덤도 프랑스를 방문하면서 감명 받았던 그곳의 건축양식을 적용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런 화려함을 위해 세금을 30%나 올리기도 했단다. 춘향전에 나오는 歌聲高處 怨聲高라는 싯귀에 딱 어울리는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집기의 뒤편에는 당시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소년처럼 빛나는 앳된 외모이다. 그렇다면 황릉은 화려한 그의 외모를 옮겨놓기라도 한 모양이다. 아무튼 그는 독특한 외모의 황릉을 짓기 원했다. 그리고는 유럽의 고성을 빼닮은 위압적인 검은빛의 외모에다, 형형색색 유리와 도자기로 안을 채워 넣었다. 그 결과 베트남 왕조의 가장 화려하고 예술적인 왕릉을 만들었다.

 

 

두 번째 방문지는 티엔무 사원(Chùa Thiên Mụ/ 天姥寺)‘이다. 후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불교 사원으로 1601년에 투안호아(현재의 후에)의 호족이던 응우옌 호앙(Nguyen Hoang)‘이 세웠다. 당시의 통치자였던 호잉이 이곳을 지나가던 중 빨간색과 파란색 옷을 입고 뺨을 문지르고 있는 천모(天姥)로 알려진 노파를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한 영주가 와서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언덕에 탑을 세울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 후 홀연히 사라졌단다. 그 예언대로 호잉이라는 영주가 세운 절이 곧 천모사(天姥寺)라는 것이다.

 

 

사원 앞에 이르자 네 개의 정문 기둥이 우릴 맞이한다. 기둥에는 불경 구절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불교 역시 중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 절의 중흥조(中興祖)격인 티치다이산(釋大汕)‘ 선사도 1695년 중국에서 왔다고 한다. 청나라의 유명한 학승(學僧)이었던 그는 응우옌씨 정권인 광남국(Quảng Nam Quốc/ 廣南國, 15581777)’6대 군주이던 푹 쭈(Nguyễn Phúc Chu/ 阮福淍/ 완복주)‘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서 법회를 열고 불교를 발전시켰다.

 

 

계단을 오르면 8각형의 7층 석탑이 나타난다. 이 탑의 이름은 복연보탑(福緣寶塔, Tháp Phước Duyên)이며 높이가 21.24m. 응우옌왕조(1802-1945)티에우찌(Thiệu Trị/ 紹治)‘ 황제가 1844년에 세운 이 탑은 1904년 태풍으로 훼손되었다가 1907년 다시 지어졌다. 탑문 좌우에는 법을 담은 비(法雨)와 법신의 구름(身雲)에 대한 한문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또한 탑의 각 단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고 했으나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탑의 오른쪽에 있는 비각(碑閣) 안에는 복연보탑비가 들어있다. 귀부(龜趺) 위에 탑신이 있고, 그 위에 이수(螭首) 형태의 덮개가 있다. 중국적이고 동양적인 양식이다. 이 탑비에는 탑의 유래에 대한 글이 적혀 있다. 그 맞은편에 보이는 전각은 종각(鐘閣)이다. 1884년 티에우찌 황제가 세웠다는 2톤이 넘는 이 거대한 범종은 그 소리가 후에시내까지 들린다고 한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천왕문 앞에는 티엔무사원의 사적비(寺跡碑)‘가 세워져 있다. 밥상 형태의 기단 위에 비신과 이수를 일체형으로 만들어 얹었다. 비신의 사면에 날개 장식을 한 것이 특징이다. 이수의 한 가운데 태극문양이 보인다. 비면(碑面)에는 카이딘 황제(Khải Định/ 啓定/ Nguyễn Phúc Tuấn/ 阮福昶/ 완복창)가 티엔무사원을 방문하고 지은 시와 서문을 새겨 넣었다. 티엔무 사원의 유래와 이곳에 있는 불탑, 그리고 불탑에서 바라본 경치를 서술하고 이를 칠언율시(七言律詩)로 노래하고 있단다.

 

 

비석 뒤로는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천왕전이 있다. 그런데 그 사천왕이 우리나라처럼 크고 무섭지 않았다.

 

 

천왕전을 지나면 자연스럽게 본전인 대웅전으로 인도 된다. 대웅전에는 가운데 칸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바깥 칸에 두 분 부처님이 더 있다. 한 분은 신통지승(神通智勝)이라고 썼고, 다른 분은 광운자심(廣運慈心)이라고 썼다. 다른 공간에는 16나한이 있다. 이들은 모두 유리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본전 앞의 유리 상자 속에도 금색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다. 미륵보살의 현신이라는 포대화상(布袋和尙)으로 보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처럼 사찰의 중심부에 모셔져 있는 걸로 보아 탁광득스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절 옆으로는 요사채 형태의 건물이 있는데, 그곳에 오스틴(Austin)이라는 구형 자동차 한 대가 전시되고 있었다. 베트남 불교계의 지도자이자 이 절의 주지였던 틱쾅득(Thích Quảng Đức, 釋廣德)스님이 고딘디엠(Ngô Đình Diệm) 정부의 불교 탄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 당시 사이공까지 타고 갔던 승용차라고 한다. 1963년 스님은 350명의 승려와 함께 시위를 벌이며 종교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틱쾅득 스님은 분신을 선택한다. 결국 이 사건은 현장에 있던 뉴욕타임스 특파원 할버스탐(David Halberstam)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그해 11월 쿠데타가 일어났고 고딘디엠 정부는 무너진다. ! 스님의 심장이라는 사진도 눈에 띄었다. 스님이 분신한 후, 그 유해를 다시 화장하였는데도 심장이 멀쩡하게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지금은 호치민 국립은행에 보관중이란다.

 

 

절 뒤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며져 있고, 그 뒤에는 또 다른 석탑이 있었다. 역시 8각형이지만 이번에는 5층이다. ’틱동하우(Thích Đôn Hậu)‘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하는데 설명은 없었다.

 

 

절에는 또 다른 눈요깃거리도 있었다. 잘 다듬어진 분재와 예쁜 화분들이 꽤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수종이나 모양새가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사원이 들어선 언덕의 아래로는 흐엉강(Sông Hương/ 香江)이 흐른다. 가을이 되면 후에 상류의 난초에서 떨어진 꽃잎이 강으로 떨어져, 향수와 같은 방향(芳香)을 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착장에는 ()‘의 머리로 치장된 용선(龍船)이 여러 척 정박되어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매너를 문제 삼아 한국인들의 탑승을 거절한다는 가이드의 귀띔이었으나 글쎄다. 같은 한국인에다 똑 같은 매너인데 다낭에서는 태워주고 후에에서는 안 태워준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응우엔 왕조의 황궁(皇宮)이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전동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시원스럽게 뚫린 대로를 따라 달리게 되는데, 너무 빨리 목적지에 이르는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눈앞에 펼쳐지는 주변 풍경이 고왔다. 거기다 가이드의 특별 배려로 리무진 모양의 최신형 전동차까지 타고 있었으니 어찌 내리고 싶었겠는가.

 

 

 

후에 황궁은 자금성을 본떠 만들었다. 자금성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궁전, 정원, 누각들이 들어서 있다. 다만 자금성이 완벽한 남향인 반면 후에 황궁은 그 축이 동남쪽을 향해 흐엉강을 바라보는 형태다. 응우옌 왕조가 존재하던 1945년까지만 해도 이곳은 수십 채의 건물과 수백 개의 방들이 있었다. 하지만 왕정제가 폐지되면서 약탈에 시달렸고, 대 프랑스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주요 전각과 행랑이 모두 불타버리는 참화를 겪었다. 그러다가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이루어졌으며 현재까지 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기분 좋게 다다른 황궁.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코트코(Cot Co)‘, 깃발탑이다. 1807년 자롱 황제가 처음 만들었을 때만 해도 나무로 만든 18m 높이의 탑에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 깃발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이후 전란을 거치면서 여러 번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1968년 콘크리트를 이용해 37m의 높이로 다시 만들었고, 지금은 베트남의 국기인 금성홍기(金星紅旗)가 게양되어 있다. 하노이 탕롱(Tang Long) 성채의 깃발탑과 함께 베트남에서 가장 유명한 깃발탑이란다.

 

 

해자를 지나면 응오문(Cua Ngo Mon, 午門)‘이 나온다. 1833년 민망 황제 때 완성된 황궁의 정문으로 태양이 정상에 오는 남문을 정문으로 삼았기 때문에 영어로 정오(noon) 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석축(石築)한 성문의 위에 2층의 목조 누각(樓閣)을 올린 구조인데 이 누각은 황제가 과거에 급제한 자들에게 상을 내리던 장소였으며, 1945년에는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Bao Dai)‘가 이곳에서 왕국의 종말을 고하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총 다섯 개다. 가운데 노란색 문은 왕, 그 옆 양쪽 문은 대신, 외곽 쪽의 두 문은 일반 신하가 통행했다고 한다.

 

 

 

 

황궁의 정전(正殿)인 태화전(Dien Thai Hoa, 太和殿)으로 가기 위해서는 패방(牌坊) 두 개를 지나야 한다. 첫 번째 패방에는 정직탕평(正直蕩平)이라고 썼다. 두 번째 패방에는 고명유구(高明悠久)라고 썼다. 황제의 정직함에 치우침이 없고, 총명함이 영원하다는 뜻이란다.

 

 

패방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태화전(太和殿)‘으로 황성의 정전이자 국사를 논의하던 곳이다. 황제의 공식 접견과 대관식 등 중요한 행사가 모두 이곳에서 치러졌다. 정면이 9칸으로 된 건물은 1805년 자롱제가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전쟁으로 심하게 무너진 것을 1970년에 재건한 것이다. 태화전 내부에는 황제가 사용하던 황금 옥좌가 그대로 놓여있으며, 전시실에는 황제의 옥새와 고관대작들의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태화전 마당 좌우에는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 궁전과 마찬가지로 1품부터 9품까지 9개가 서열대로 배치되어 있다.

 

 

태화전으로 오르는 계단의 밖에는 성을 지키는 동물 수호상이 세워져 있었다. 몸에 비늘이 있는가하면 얼굴은 호랑이상이다. 동쪽을 지키는 청룡과 서쪽을 지키는 백호를 결합해 놓지 않았나 싶다.

 

 

북쪽 마당에는 방화용 청동솥을 걸어놓았다. 중국의 자금성에서 보았던 것보다 크기만 달라졌을 뿐 생김새는 똑 같았다.

 

 

태화전은 중국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과 한자 이름까지 똑같다. 자금성 태화전을 모방해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화전 뿐 아니라 후에 황궁 전체가 자금성을 모방했단다. 그러나 규모나 내부 장식, 주변 환경 등에서 자금성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 후에 황궁을 자금성의 짝퉁이라고 하는 이유일 것이다. 태화전의 안은 붉은 기둥에 노란 금박으로 장식을 했다. 일반적으로 노란색은 황제의 색이다. 붉은색은 복을 주고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역할을 한단다. 옥좌를 감싸고 있는 닫집은 화려한 금박이다. 기둥 위 벽에는 '태평신제도(太平新制度) 춘풍만제도(春風滿帝都)' 등의 문구가 보인다. 제도를 새롭게 해 태평성대를 만들고, 봄바람이 제국의 수도에 가득하다는 뜻이다.

 

 

태화전 근처의 공간에는 황궁의 미니어처가 만들어져 있었다. 벽에는 베트남 전도도 매달아 놓았다. 여기에 가이드의 설명이 첨가되면서 투어의 열기가 한층 더 무르익는다. 하지만 가이드의 설명을 100%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한국인 가이드의 황궁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탓에 베트남인 가이드가 설명을 해주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한글이 외국어일 테니 어떻게 완벽하게 전달할 수 있겠는가.

 

 

태화전 뒤의 엄청나게 너른 공간은 텅 비어있었다. 황제의 집무공간인 자금성(紫禁城)이 있던 곳이니 옛날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이곳도 역시 전쟁의 참화를 피해가지 못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복구공사는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태화전 뒷마당에는 두 채의 전각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지도에는 좌무, 우무로 표시하고 열시당, 태평루와 함께 자금성에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전각들 가운데 하나로 표시해 놓았다. 이 건물에는 황제를 보좌하는 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6조의 관리들이 근무하던 장소쯤 되겠다. 지금은 왕궁에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반대편 건물은 행사장으로 이용되는 듯했다.

 

 

 

 

 

두 전각은 회랑(回廊)으로 연결되는데 옛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태화전을 둘러보고 난 뒤에 주어졌던 자유 시간 때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황실가족이 거주하던 공간인 자금성과 역대 황제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를 둘러보지도 않았는데 현지 여행사의 직원(한국어가 어설픈 베트남 처자)이 이동해줄 것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로컬 가이드(Local guide)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일어난 일인데다 황궁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밖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가 왜 이리 빨리 나오느냐고 묻는 것을 보고나서야 상황을 눈치 챘으니 그저 혀를 찰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지 않겠는가.

 

 

황궁을 빠져나오는 길, 주변은 정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 도중에 중세 유럽풍의 건물(혹자는 공예품박물관이라고 했다)과 문묘(Trieu Mieu Temple, 지도에는 조묘로 표시)가 눈에 띄었으나 이동 중이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참고로 조묘는 자롱황제가 응우옌씨 정권(광남국 : 1558-1777)’의 초대 군주였던 응우옌 호앙(Nguyễn Hoàng/ 阮潢)’의 아버지 응우옌 킴(Nguyễn Kim/ 阮淦)’과 그의 아내를 위해 지은 사당이라고 한다.

 

 

몇 걸음 더 걷자 왕궁의 동쪽 문인 현인문(顯仁門)’이 나온다. 그 자태가 너무 화려해서 후에를 찾은 여행자들의 인생샷 배경으로 꼭 등장하는 곳이다. 현인문뿐만이 아니다. ‘후에 왕궁자체가 왕조의 도시 후에가 자랑하는 핫 플레이스(hot place)이자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만 하는 ‘Must visit place’. 143년간 이어진 응우옌(Nguyen) 왕조와 흥망의 맥을 같이 해온 장소이기 때문이다.

 

 

현인문을 빠져나오면서 황궁 투어는 끝을 맺는다. 황궁은 초대 황제인 자롱(Gia Long)3만여 명을 동원해 쌓았다는 높이 5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높고 두터운 성벽은 요새 같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성곽 밖에 해자(연못)를 설치함으로써 외적의 접근을 막았다. 여기에 더해 도읍의 외곽에다 성벽을 다시 쌓았으니 가히 일국의 도읍다운 방어체계라 할 수 있겠다.

 

 

둘러보지 못한 전각들은 다른 분의 사진을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본다. 첫 번째 사진은 ‘’현임각(Hiển Lâm Các, 顯臨閣)‘으로 세조묘(Thế Tổ Miếu, 世祖廟)와 함께 응유엔 황제들을 기리는 태묘(Thế Miếu, 太廟)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각이다. 높이 17m3층 건물로 이곳에서 거행되던 태묘 제례악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현임각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우리의 종묘 정전에 해당하는 세조묘가 위치하는데, 응유엔 왕조 역대 황제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두 번째 사진은 황제의 침전인 연수궁(延壽宮)이다. 정면 일곱 칸의 건물로 가운데 칸 안쪽에 연수궁이란 현판을 걸었다. 건물 앞쪽으로 거실 형태의 주랑이 있고, 그 안쪽으로 방이 마련되어 있다. 연수궁 주변에는 왕비와 후궁들이 사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이들 건물 옆으로 태평루(Thái Bình Lâu, 太平樓)와 연지(蓮池)가 있어 왕족들이 독서도 하고 풍류도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구중궁궐 내에서 그나마 물과 정자를 볼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단다.

여행지 : 중부 베트남

 

여행일 : ‘19. 12. 17()-21()

세부 일정 : 다낭(1)마블 마운틴호이안다낭(1)후에다낭(1)바나산 국립공원다낭 시내투어

 

중세의 시간이 멈춘 도시, 호이안(Hoi An)

 

특징 : 다낭에서 30쯤 떨어진 남쪽, ’꽝남성(Quảng Nam/ 廣南省)‘의 해안평야를 가로지르는 투본강(Sông Thu Bồn/ 瀧秋盆)‘ 하구에 있는 호이안은 중세의 시간이 걸음을 멈춘 곳이다. 1619세기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했지만 투본강의 퇴적작용으로 수위가 낮아져 큰 배가 들어올 수 없게 되자 무역항의 지위를 다낭에 넘겨주고 말았다. 덕분에 베트남전쟁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는 작은 항구도시로 전락한 호이안의 특별한 매력은 바로 옛 번성기의 풍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건축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됐다. 참고로 이곳 호이안은 지난 달 CNN이 선정하는 가장 아름다운 아시아 도시’ 1위에 꼽히기도 했다. 해당 지역의 건축이나 아름다운 풍경, 도시에 녹아든 문화적 특징 등을 기준으로 리스트를 선정했는데, 이곳 호이안은 사진작가와 미식가, 건축에 관심이 많은 관광객들에게 천국과 같은 곳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또한 올 7월에는 세계적인 미국의 여행 잡지 트래블 앤 레저(Travel + Leisure)’가 선정하는 세계 최고의 관광도시가운데 1위에 꼽히기도 했다. 구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다. 설문이 경치·관광명소·문화·음식·친근감·쇼핑·비용대비 가치 등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지표들을 포함하고 있다니, 여행객들이 이곳 호이안을 얼마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결과라 하겠다.

 

호이안 여행의 시작은 깜탄 코코넛 워터빌리지(Cam Thanh coconut water village)‘로부터 시작됐다. 호이안 아니 베트남 여행자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바구니 배를 타기 위해서이다. ’바구니 배는 원래 낚시용 무동력 보트이다. 하지만 괴상한 생김새가 세간의 관심을 끌면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자 용도를 바꿔 현재는 관광객의 놀잇배로 활용되고 있다. 주민들의 주업도 어업에서 관광서비스업으로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5분 정도를 걷고 난 뒤에야 도착한 바구니 배선착장, 이런 선착장은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배는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바구니의 모양새이다. 가장 가벼운 차림새라 하겠다. 거기다 외부를 코팅해놓은 탓에 물이 스며들지도 않는다. 조그만 크기인데도 뱃사공 포함 3~4명이 탈 수 있는 이유이지 싶다.

 

 

배는 투본강의 본류를 향해 나아간다. 강폭이 넓어지면서 바구니 배의 숫자도 점점 늘어단다. 그러다 널찍한 투본강에 이르자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버린다.

 

 

강의 양안(兩岸)은 코코넛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이름에 코코넛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정도로 유명한 습지생태계라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만난 어느 지인은 이곳 호이안과 다낭을 일러 베트남 속의 한국이라고 표현했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 셋 가운데 하나는 꼭 한국인일 것이라는 가이드의 귀띔도 있었다. 그런데 그 농도가 이곳에서 한층 더 깊어졌다. 들려오는 언어가 오로지 한국어뿐인 것이다. 배와 배 사이에 주고받는 언어는 물론이고 뱃사공이 부르는 노래도 전부 한국노래 뿐이다.

 

 

많은 바구니배가 모여 있기에 다가가 봤더니 한 사공이 신나는 음악에 맞춰 바구니배로 묘기를 부리고 있다. 사방에서 관광객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지고 그에 맞춰 더욱 신나고 박진감 넘치는 묘기가 펼쳐진다. 너나 할 것 없이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씩을 내놓는 걸 보면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한쪽에서는 노래자랑이 한창이다. 베트남 뱃사공이 한국 노래를 불러주는데 흥을 돋우는 사람들 역시 한국인들뿐이다. 익숙한 노랫가락이 흥에 겨웠던지 일부는 뱃사공과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흥에 겨운 사람들은 이곳에서도 1달러 짜리 한 장을 내놓는다.

 

 

 

강변에 주민들이 사는 집들이 보이는가하면, 강에는 고기잡이를 위한 배들도 몇 척이 떠있었다. ! 이곳 주민들의 생계 수단이던 낚시 체험도 할 수 있다는데 우리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게를 직접 낚아볼 수도 있다지만 시간이 없다는데 어쩌겠는가.

 

 

호이안을 향해 얼마쯤 더 달렸을까 버스를 멈추더니 이번에는 전동카를 타라고 한다. ’유람선 선착장이 잇는 도자기 마을까지 전동카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이다. ! 그러고 보니 선택관광 일정에 전동카 체험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은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눈요깃거리보다는 그저 전동카를 타보는 데다 의미를 두었던 모양이다. 전동카 한번 타보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전동카에서 내리면 탄하 도자기마을(Thanh Hà pottery village)’이다. 호이안 시내에서 서쪽으로 3km가량 떨어진 투본강 바로 옆에 위치한 ‘Thanh Hà’라는 작은 마을로 이곳 주민들은 투본강의 진흙을 이용하여 베트남의 전통도자기를 만들어 파는 것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다. 호이안에서 관광상품으로 판매되는 도자기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고 보면 되겠다.

 

 

이 마을은 응우옌 왕조의 장식용 도자기를 만들던 곳으로 유명하다. 입장권을 사서 마을에 들어서면 물레를 돌려가며 옛 방식 그대로 도자기를 빚는 마을 주민들의 정겨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21조로 한 명은 발로 도자기 물레를 돌리고 나머지 한 명은 모양을 잡아간다. 오로지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주민들은 관광객이 다가서면 앉으라고 손짓한다. 체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실수해도 괜찮다. 일평생 물레를 돌린 베테랑이 옆에 있으니 금세 모양이 만들어진다.

 

 

 

주민들의 오랜 노하우로 만들어진 도자기는 마을 한편 바닥에서 건조한 뒤 굽는 작업을 거쳐 판매용으로 탄생한다. 작게는 꼬마 인형부터 돼지, , , 사람, 그릇 등 가지각색의 형태가 완성된다. 우리 부부는 가이드로부터 복 많이 받으라는 축복과 함께 꼬마 돼지인형을 선물 받았다. ! 탄하 마을 사람들은 호이안과 그 인근 건물의 벽돌과 타일 등도 함께 만든다고 했다.

 

 

마을에는 도자기박물관도 들어서 있었지만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편한 게 좋아 따라나선 패키지여행이니 보고 싶은 것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도자기 체험이 끝나면 이번에는 투본강변에 있는 선착장에서 배를 탄다. 이게 소위 말하는 투본강 크루즈. 그러나 말이 크루즈지 통통배 수준이다.

 

 

강 주변으로는 마을이 이어진다. 강변에서 풀을 뜯는 소들도 볼 수 있다는데 날이 어두운 탓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배는 투본강을 따라 내려가다 호이안에 근접해 호아이(Hoai)강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박당(Bach Dang) 거리 앞의 선착장에다 배를 댄다.

 

 

 

 

배에서 내리자 사위는 이미 어두워졌다. 배를 탄 시간이 30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덕분에 우린 호이안의 절반만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낮이 밤이라는 특이한 문장으로 이곳 호이안을 표현했었다. 낮에도 이기고 밤에도 이길 정도로 낮과 밤이 각기 다른 매력적 풍광을 자랑한다면서 말이다. 그는 또 낮과 밤이 다른 호이안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려면 하룻밤 이상을 이곳 호이안에서 머물러야 한다고 조언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머물게 될 숙소는 다낭이다. 그렇다면 우린 반쪽짜리 호이안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강에는 형형색색의 등불을 밝힌 나룻배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다. 해가 진 호이안의 또 다른 얼굴을 속속들이 보고 싶다면 저 배를 타야한다. 나룻배를 타는 장소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구시가지를 감싸고 흐르는 투본강 어디든 정박한 배가 있고, 배에 탈 사람을 구하는 호객꾼이 있기 때문이다. 정박지에서 출발해 보행교까지 갔다가 다시 정박지로 돌아오는 것이 보통. 뱃사공의 컨디션에 따라 일부러 먼 곳까지 둘러 가기도 한단다.

 

 

강변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구시가지 투어가 시작된다. ‘응유엔 타이(Nguyễn Thái)’ 거리와 함께 호이안 구시가의 중심거리로 꼽힌다는 트란 푸(Tran Phu)’ 거리가 아닐까 싶다. 탄키 하우스와 광조회관, 은성회관, 복건회관, 금산사, 중화회관, 내원교 등의 볼거리들이 트란 푸 거리에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호이안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야경(夜景)이다. 호이안의 야경은 축제를 연상케 할 정도로 등()의 향연이었다. 거리나 시장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강()에까지 온통 등으로 치장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특별한 광경이라 하겠다.

 

 

첫 번째 방문지는 턴키고택(Tan Ky house)‘이다. 무역도시로 번성했던 호이안은 베트남과 일본, 중국의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건축물들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곳 탄키 하우스인데, 18세기 호이안의 부호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관광객들에게는 약재와 차, 실크 등을 판매하던 1층만 개방되어 있다. 2층은 현재 그의 7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턴키고택은 중국 광동지역의 어부였던 진기(進記)가 살던 곳으로 호이안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이다. 하지만 특별한 볼거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냥 정문으로 들어와 후문으로 나가면서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구경하는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아니 벽면을 도배하다시피 한 명함들은 구경거리일 수도 있겠다. 이곳에 명함을 붙이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다는데, 은퇴한 나에겐 명함이 없으니 부자가 되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인가 보다.

 

 

탄키 하우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눈금이다. 호이안은 자주 홍수가 나는데, 강물이 얼마나 범람했는지 그 높이를 기록해 두었단다.

 

 

호이안의 야경은 등()으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다. 해가 지면 길을 따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등들이 예쁘게 불을 밝힌다. 거리에 늘어선 집들도 수십 개씩의 등들을 매달았다. 투본강의 수많은 배들도 아름다운 등으로 수를 놓는데, 이때 예쁜 유등들이 떠다니며 달빛과 함께 물을 비추는 풍경이 가히 일품이다. 고색창연하던 도시가 밤이 되자 화려함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역사지구에는 눈에 띄는 중국식 건축물들이 특히 많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광조회관(廣肇會館)’복건회관(福建會館, 푸젠회관)’이 꼽히는데 우린 광조회관을 찾았다. 중국 광저우에서 온 상인들이 1786년에 지은 향우회관으로, 중국 건축물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아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이 건물은 이곳에서 지어진 게 아니고 중국 본토에서 지은 후 호이안으로 옮겨와 완성시켰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아래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광조회관은 관성대제(關聖大帝)와 천후성모(天后聖母)도 모시고 있다. 관성대제는 삼국시대 장군 관우를 말하고, 천후성모는 바다의 신 마조(妈祖)를 말한다. 사당 한 가운데 관우상이 있고, 좌우에 흰말과 붉은 말이 있다. 붉은 말이 그 유명한 적토마다. 관우는 안타깝게 죽었지만 아시아 전역의 사당에서 숭배되는 신이 되었다.

 

 

현재는 중국인들의 향우회 장소이자 재단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중정(中庭)에는 용() 모양의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도자기로 만들어졌는데 물은 내뿜고 있지 않았다. 용조각상의 뒤편은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다음은 1539년에 건설되었다는 내원교(來遠橋)이다. 일본 무역상들이 자주 드나들던 호이안에는 그들이 남긴 흔적도 여럿 만나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내원교(Cau Lai Vien)’라 하겠다. 일본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해서 일본교라고도 불리는데 길에서 보면 다리라기보다 차라리 건물로 보인다. 이 다리건너에 일본 사람들의 거주지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다리는 베트남 지폐 20,000동의 도안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유명하다는 얘기이다.(아래는 자료사진을 첨부했다)

 

 

이 다리의 아름다움은 밤에 그 정점을 찍는다고 알려져 있다. 내 생각도 같았다. 다리와 불빛, 그리고 물에 비친 반영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게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여행객들이 많은 걸 보면 말이다. 맞다. 역사를 품고 있는 이 다리는 호이안을 찾은 여행자이 가장 선호하는 포토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다리 가운데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가우사원이 들어서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머리는 인도, 몸통은 베트남, 꼬리는 일본에 둔 꾸(Cu)라는 거대한 괴물이 살았는데 이 괴물이 움직이면 홍수나 지진이 발생했다고 한다. 꾸를 없애기 위해 꾸의 약점이 있는 이곳에다 다리를 세웠단다.

 

 

 

 

안에는 두 개의 동물상이 세워져 있었다. 중국인마을 쪽에 개 조각상을 그리고 반대편인 일본인마을 쪽에는 원숭이 조각상을 배치했다. 이는 원숭이()’ 해에 공사를 시작해서 ()’ 해에 완공했다는 뜻을 담고 있단다.

 

 

야경에 취해 걷고 있는데 가이드가 넌지시 손짓을 한다. 나무뿌리를 이용해 만든 조각품을 구경해보라는 것이다.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귀한 작품이라서 사진촬영은 금지란다. 때문에 건물 밖에서 창문 너머로 살짝 찍을 수밖에 없었다.

 

 

호이안 다리에도 불이 밝혀졌다. 이 다리를 건너면 안호이(An Hoi) 이 나온다. 야시장과 홍등가게로 유명한 섬이다.

 

 

 

호이안의 밤풍경은 황홀하다. 날이 저물면 거리에는 각양각색의 등불이 켜지고 야시장도 열린다. 말 그대로의 불야성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때쯤이면 강가에 놓아둔 식탁도 여행객들로 가득 찬다. 식탁 옆의 거리도 사람들로 빈틈없이 북적거린다. 행여나 일행을 잃을까 손 붙들고 다녀야 할 만큼 정신이 없다.

 

 

호이안에는 기념품 가게가 특히 많았다. 관광객들이 많은 곳이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지만 진열되어 있는 상품은 다낭과 많이 달랐다. 손으로 직접 만든 목공예나 종이공예, 천공예 작품 등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도시 풍경에 어울리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가격도 상당히 비싼데다 깎아주지도 않더라는 일행의 귀띔이 있었다. 자신들이 만든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호이안 야시장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홍등가게이다. 올드타운과 안호이섬에서 만날 수 있는데, 안호이섬의 홍등이 더 많고 예뻤다. 그래선지 어두워지고 홍등에 불이 들어오자 이곳 안호이섬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그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카메라나 핸드폰이 들려져 있었다.

 

 

야시장에 먹거리가 빠질 리가 있겠는가. 베트남의 대표 음식으로 꼽히는 반미(Banh Mi, 샌드위치 일종)나 반쎄오(Banh Xeo, 베트남식 부침개)는 물론이고 개구리 뒷다리 등 냉큼 주워들기가 좀 거북스런 음식들도 눈에 띈다.

 

 

꼬치구이는 이제 세계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굽고 있는 고기의 종류만 다를 뿐 세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이안의 명소로 자리 잡은 코코넛 꿀타래 와플가게 앞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다. 제품에 대한 설명을 한글로 적어놓은 걸 보면 한국 여행자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은 모양이다. 제조과정을 핸드폰에 담을 수도 있다니 한번쯤 시도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비록 들러보지는 못했지만 호이안의 또 다른 볼거리인 풍흥고가(風興古家)와 복건회관(福建會館)의 사진을 올려본다. 물론 남이 찍은 사진이다. 참고로 호이안에는 이런 옛 건축물들이 꽤 많다. 구시가지 입장권을 사면 6개의 옛날 가옥과 3개의 향우회관, 4개의 박물관 그리고 5개의 문화유산 중에서 5곳을 둘러볼 수 있단다.

 

여행지 : 중부 베트남

 

여행일 : ‘19. 12. 17()-21()

세부 일정 : 다낭(1)마블 마운틴호이안다낭(1)후에다낭(1)바나산 국립공원다낭 시내투어

 

다낭의 주변의 명소들

 

특징 : 마블마운틴(오행산) : 다낭 시내에서 대략 12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마블마운틴은 놀랄 만큼 거친 지형과 대리석(marble)으로 이루어진 5개의 돌 언덕 그리고 100여 개의 호수로 구성돼 있다. 5개의 높지 않은 봉우리로 구성돼 오행산이라고도 불린다. 전체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산의 정상에 오르면 멋진 동굴과 불상 그리고 탁 트인 다낭의 모습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참고로 오행산은 서유기에서 날뛰던 손오공이 갇혔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석가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500년간 갇혀 지내던 곳이란다.

 

바나힐(Ba Na Hill) : 해발 1,487m의 바나산 꼭대기에 건설된 베트남 최대의 테마파크이다. 연평균 기온이 15~20로 일 년 내내 시원한 날씨가 계속된다니 최상의 유원지라 하겠다. 원래 이곳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을 때 더위를 피해 산 중턱에 프랑스인들이 모이면서 생긴 마을이다. 프랑스인들이 돌아간 후 방치되어있던 바나산은 베트남 정부의 지원과 베트남 최고의 기업 '썬그룹'의 투자를 통해 지금의 테마파크로 재탄생했다. 그밖에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다는 케이블카와 플라워 가든’, ‘판타지 랜드가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차에서 내리면 거대한 바위산 하나가 여행객들을 맞는다. ‘··나무··을 상징하는 오행산(五行山)’ 중 하나로 ()’에 해당하는 ‘Thuy Son(水山)’이란 봉우리이다. 여기서 오행산은 대리석과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마블 마운틴(MarbleMountains)’의 다섯 봉우리를 의미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 다섯 개의 봉우리 가운데 유일하게 이 봉우리만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단다. ‘Thuy Son’을 탐방하는 방법은 크게 둘로 나뉜다. 157개의 계단 또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08m 높이의 정상으로 올라 영응사(靈應寺)와 호아응히엠동굴(HoaNghiemCave), 현공동굴(HuienKhongCave) 등의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 코스와 다른 하나는 산 아래에 있는 동굴만 둘러보는 방법이다.

 

 

 

우린 산 아래에 있는 동굴만 둘러보기로 했다.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사후세계를 표현해 놓아 상부코스보다 볼거리가 더 많다는 가이드의 얘기였으나 글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패키지여행의 특성상 가이드의 결정에 반할 수도 없으니 오행산에 대한 전설이나 살펴보자. 아주 오랜 옛날 눈누엌 비치의 바다 속에 살던 용이 승천을 하면서 5개의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새끼가 태어난 후 남겨진 껍질이 지금의 다섯 봉우리로 변했다고 한다. 오행산이란 약 200백 년 전 이곳을 방문한 ‘Minh Mang’왕이 ‘Ngu Hanh Son(5개의 원소)’이라고 부르면서 공식적인 이름으로 굳어졌단다.

 

 

동굴로 들어서서 오행교를 건너면 사후 세계란다. 이때 떡하니 나타는 게 심판관들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 심판관들에 의해 심판을 받은 다음 그 결과에 따라 천당 또는 지옥으로 가게 된다. 넓게 펴진 지하광장의 아래는 지옥이고, 뻥 뚫린 천정으로 향하는 계단은 천당으로 가는 길이다.

 

 

일단은 천당부터 가보기로 한다. 천당으로 가는 길은 길고도 험하다. 좁고 가파른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고리를 잡고 올라야만 할 정도로 가파른 곳도 나온다. 거기다 더위까지 더해지니 아주 죽을 맛이다. 하긴 하늘나라에 오르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갖가지 불상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동굴에 조그만 틈이라도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불상들을 들어앉혔다. ! 불상들이 하나같이 평화롭고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천국으로 오르는 착한 이들을 맞는 부처님의 마음을 표현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오름을 멈출 수밖에 없다. 이때 뻥 뚫린 동굴 너머로 하늘나라가 내다보인다. 지금 내가 서있는 어두운 세상과 비교되는 밝고 푸른 세상이다. 그래 하늘나라는 저렇게 밝고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땀을 한 바가지나 쏟고 동굴을 빠져나오니 7층 석탑이 기다리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면 만나게 되는 영웅보탑을 축소시켜 놓지 않았나 싶다. 벽면에는 꽤 많은 불상들을 부조해 놓았다. 아니 예술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조각상들을 붙여놓았을 따름이다.

 

 

동굴 상부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다낭 시가지는 물론이고 이곳 오행산의 다른 봉우리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동굴로 되돌아 내려오니 아까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동굴 안에는 갖가지 조형물들이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이 들어서 있었다. 불교의 사상이 깃든 불상들이 대부분이지만 붉은 항아리 모양의 불빛 등 현란한 불빛으로 치장한 조형물들도 여럿 보였다.

 

 

선악의 무게를 단다는 천칭(天秤)‘도 눈에 들어온다. 열 명의 심판관의 지혜로도 모자라 천칭까지 준비했다면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은 정확할 수밖에 없겠다.

 

 

지옥은 동굴 깊숙이에 있다. 원형의 화려한 광채를 등에 업은 불상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이곳에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생전 지은 죄의 크기에 따라 받게 되는 끔찍하고 무서운 형별들이다. 아무래도 남은 생이라도 죄는 짓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가이드가 귀띔해준 부처상인데, 숨은 그림 찾듯이 뒤진 끝에 찾아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부처님을 닮은 것 같기도, 또 어떻게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말이다. 아서라. 무학대사께서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부처로 보았다면 그만인 것을...

 

 

밖으로 빠져나오니 기념품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내 관심을 끄는 건 오로지 모자이다. 제 값에 사려면 이곳이 제격이라는 가이드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바나산 테마파크로 오행산과 함께 다낭 근교의 주요 관광지 가운데 하나이다. 차에서 내리면 왕궁에서나 볼 법한 성곽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테마파크로 올라가는 케이블카의 하부 탑승장이 있는 ‘sun world’ 지역이란다.

 

 

 

케이블카 탑승장은 성문에서도 한참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름다운 주변 경관이 계속해서 펼쳐질 뿐만 아니라 상가와 레스토랑 등이 연이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썬그룹이 만든 또 하나의 유원지라고 보면 되겠다.

 

 

 

바나힐이 유명해진 데는 높은 바나산에 조성된 아름답고도 거대한 테마파크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 테마파크를 가기 위해 타야하는 케이블카도 한 몫 했다. 중국 장가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케이블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가 5,801에 달하는 이 케이블카는 CNN 방송이 평가한 세계 10개의 케이블카 중 가장 인상 깊은 케이블카로 뽑히기도 했다. 참고로 케이블카 탑승료는 별도로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바나힐 테마파크의 입장료에 케이블카 탑승료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케이블카를 타면 순식간에 오른 높이만큼이나 설렘도 호기심도 수직 상승한다. 속도감과 아찔함에 두근두근 심장 박동도 속도를 높인다. 케이블카를 타고 있는 내눈앞에 펼쳐지는 초록빛 울창한 숲은 이다. ! 썬월드에서 출발하는 케이블카 노선은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테마파크로 곧장 올라가는 노선과 중간에 골든브리지를 거쳐서 올라가는 노선이다. 하지만 우린 가이드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지붕이 고운 중간(Golden Bridge) 정거장에서 내리니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곳 골든 브리지가 그만큼 인기가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밖으로 빠져나오니 2018년에 지어진 이래 바나힐의 최고 인증샷 명소가 된 골든브리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리는 두 손으로 금줄을 들고 있는 모양새이다. 다리를 이렇게 설계한 발상이 신기하다.

 

 

 

다리 위에선 사람에 떠밀리듯 걸음을 내딛어야 해서 좀처럼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셀카봉을 들고 인증샷을 남기려는 여행객들의 치열한 사투가 다리를 건너는 내내 이어진다. 볼썽사나울 수도 있으나 우리 부부도 그 가운데 끼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어쩌겠는가.

 

 

다리 위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사방으로 확 트인 멋진 전망을 자랑하는데, 다리 너머 언덕에는 하얀색 불상이 점잖게 앉아있다. 높이가 무려 27m에 달한다는 영흥사의 불상일 것이다.

 

 

다리 건너에는 조각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사진 찍기 딱 좋은 장소라 하겠다.

 

 

 

바나힐은 케이블카를 또 다시 타야만 만날 수 있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바니산은 신비로움에 쌓여있다.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고성(古城)이 어디 그리 흔한 풍경이겠는가.

 

 

정상에 다가갈 무렵 바나힐의 놀이기구 가운데 가장 인기가 좋다는 알파인 코스터의 나선형 트랙이 내려다보인다. 혼자 타고 바나힐 정상부터 내려가는 루지(luge)라고 한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중세 프랑스의 어느 작은 마을에라도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을은 광장을 중심으로 옛 프랑스 마을을 재현했고, 교회와 광장, 호텔, 상점 등도 들어서 있다. 덕분에 시공간을 확 옮겨 놓은 듯 낭만적인 프랑스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그런 특이성으로 인해 현지인에게는 웨딩 촬영장소로 여행객들에겐 인생사진을 건질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단다.

 

 

 

 

광장에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지구본을 떠오르게 하는 선 월드글자가 새겨진 파란 지구본이 있어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근처 유럽풍 조각품들이 늘어서있는 분수대도 사진 찍기에 딱 좋은 곳이니 참조한다.

 

 

 

프랑스인들의 피서지였던 언덕은 이제 테마파크로 변해있다. 퍼레이드나 볼거리 들은 디즈니랜드의 것을 모방한 것 같았다.

 

 

 

놀이동산 건물에 가면 층별로 다양한 놀이기구를 탈 수 있다. ‘지구 속으로의 여행해저 2만리를 모티브로 설계됐다는 판타지 파크인데 자이로드롭부터 알파인 코스터, 4D·5D 영화시스템, 인공암장, 범버카 등 꽤나 다양하지만, 퀄리티나 재미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무튼 이 모든 놀이기구의 이용대금은 테마파크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그냥 눈 구경만 했다.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자이드롭처럼 마음에 드는 시설은 순서를 기다리기에는 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Beer Plaza’를 권한다. 맥주는 물론이고 꼬치구이 같은 간단한 안주와 피자 등의 브런치(Brunch)’를 파는 곳도 있다. 이곳에서는 맥주축제와 할로윈축제 등이 열리기도 한단다. 유럽의 낭만적인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는 겨울축제 등도 열린다니 시기를 잘 맞춰 가면 한층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여행지 : 중부 베트남

 

여행일 : ‘19. 12. 17()-21()

세부 일정 : 다낭(1)마블 마운틴호이안다낭(1)후에다낭(1)바나산 국립공원다낭 시내투어

 

다낭의 명소 투어

 

특징 : 베트남(Vietnam) : 인도차이나반도의 동부에 남북으로 가늘고 긴 S자 모양을 띠고 있는 베트남(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은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수도를 하노이(Hanoi)에 두고 있다. 국토 면적은 332378지만 이 가운데 75%는 산악지대다. 1960~1970년대에 발발했던 미국과의 전쟁 및 캄보디아와의 전쟁으로 갖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국내총생산(GDP)이 매년 6~8%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나라다. 전체인구 9434만 명의 90%에 이르는 베트남족은 북부 하노이와 중부의 후에, 다낭 지역, 그리고 남부의 호찌민에 고루 분포돼 있다. 하니족을 비롯한 나머지 54개 소수민족은 대부분 산악지대에 살고 있다. 다양한 민족이 섞여 다채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만큼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참고로 베트남의 국명인 비엣남(Việt Nam 越南)은 베트남 북부에서 중국 남부에 이르렀던 기원전 2세기의 고대 국가 남비엣에서 유래하였다. 비엣(Việt, )은 백월(Bách Việt, 百越)족을 뜻하는 말이다. 비엣남이란 낱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베트남의 시인 응우옌 빈 키엠의 시 삼짱찐(Sấm Trạng Trình, 讖狀程)이다. 1945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공식적인 국명이 되었다. 비엣남이 맞는 명칭이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식 발음인 베트남을 국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다낭(Da Nang) : 베트남 남중부 지방의 최대 상업 및 항구도시이자 베트남의 다섯 개의 직할시 중 하나이고, 베트남에서 호찌민시, 하노이, 하이퐁 다음으로 네 번째 큰 도시이다. 면적은 1,285.53 km², 인구는 약 752,493(2014)이다. 도시의 기원은 192년 말레이계인 참족 거주자가 세운 참파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다낭은 참족의 중요 거점으로 번영을 누렸다. 도시의 옛 이름인 ‘Da Nak’큰 강의 입구라는 뜻의 참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1858년 프랑스에 점령당했던 때에는 투란(Tourane)’이라고 불리었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5대 도시의 하나로 성장했다. 1963년 베트남전쟁이 발발하면서 다낭은 남베트남 군과 미군의 주요한 공군 기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참고로 다낭은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 중 하나이다.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과 저렴한 물가에다 이색적인 볼거리를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일본여행 보이콧으로 한층 더 각광을 받고 있단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절반이 한국인들일 것이라는 가이드의 귀띔이 있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눈을 뜨자마자 미케 비치(Mykhe beech)’를 찾았다. 다낭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니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아니 2005년 미국의 경제 잡지 포브스지구상에서 가장 섹시한 6대 해변중 하나로 손꼽았다는데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도로 하나만 건너면 나오는데 말이다;

 

 

 

 

해변은 이름에 걸맞게 잘 꾸며져 있었다. 이곳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의 휴양지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1960~70년대부터 시설이 만들어진 셈이다. 거기다 요즘은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많다니 저 정도는 꾸며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해변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기에 다가가 보니 펩시(pepsi)’의 로고(logo) 등으로 도배되어 있다. 펩시콜라에서 광고판 대용으로 설치해 놓은 모양이다. 아니면 미키비치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의 스폰서라도 되는 모양이고 말이다.

 

 

길이가 10에 이른다는 해안은 마치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곱디고운 모래로 덮여있었다. 그 고운모래에 푸른 바다를 더한 풍경이 좋아 웨딩촬영 장소로도 인기가 높단다. 그게 또 하나의 볼거리라는데 시간이 이른 게 안타깝다 하겠다.

 

 

해변은 푸른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바다, 거기다 고운 모래사장이 한데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저 해변은 그 길이가 무려 10에 이른다고 한다. 다낭 북쪽 선짜 반도에서 시작해 남쪽 호이안 방향까지 이어진단다. ! 사시사철 패러세일링이나 바나나보트, 수상오토바이 같은 다양한 해양스포츠도 즐길 수 있다는데 이른 아침이어선지 바다는 텅 비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고층의 호텔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우리가 묵고 있는 막시밀란 호텔도 저 가운데 하나이다. 저 건물들 맞은편에는 맛집과 바가 즐비하다. 내가 아는 지인도 저곳에 해산물 식당을 열고 있었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자주 찾는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체재기간 내내 머물렀던 막시밀란 호텔 다낭(Maximilian Danang Beach Hotel)‘이다. 이 호텔의 가장 큰 장점은 올해(2019) 문을 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모든 집기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침대 시트와 타월, 가운 등은 물론이고 샤워기나 변기도 내가 처음으로 사용하는 듯한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또 하나 좋은 점은 세계 6대 해변으로 꼽히는 미케비치를 바로 앞에다 두었다는 것이다. 오션뷰가 자랑일 텐데 아쉽게도 우리에게 배정된 방에서는 옆 호텔의 벽만 보였다. 하나 더 꼽으라면 5성급 호텔(4성급 규모와 서비스라고 귀띔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에 걸맞는 편의시설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WiFi도 펑펑 잘 터졌고, 냉장고 속에는 식수 외에도 캔맥주와 콜라까지 들어있었다. 여행사에서 제공한 것이라지만 기분은 엄청 좋았다. 2층에서 먹는 아침 식사도 훌륭한 편이었다. 베트남식과 아시아식, 유럽식의 식단을 고루 갖추고 있어 입맛에 맞는 음식을 고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말이다. 외국인들 속에 파묻혀 지낸 세월이 오래인 난 물론 유럽식, 집사람은 골고루 섞는다. 특히 그녀는 쌀국수가 입맛에 맞다며 매일 아침 빼놓지 않고 챙겼다.

 

 

시가지는 베트남의 여느 도시와 다름없었다. 출퇴근시간이 아닌데도 도로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오토바이의 물결이 눈길을 끌었다. 다른 한편으로 거리는 혼자 돌아다녀도 문제가 없어보였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의 상인들 말고도 한국어 한두 마디 정도는 할 줄 아는 사람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베트남은 치안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지 않은가. 다만 베트남 화폐인 (VND)’은 필수다. 베트남 화폐 외에는 받지 않는 상점들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난 베트남 사람들의 훈훈한 인심을 만나기도 했다. 목이 말라 들어선 식당에서 달러뿐이 없다는 나에게 무료로 캔맥주를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달러라도 받으라고 해봤지만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했다.

 

 

 

다낭에서의 첫 방문지는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다낭대성당이다. 다낭지역을 관할하는 주교가 상주하는 이 성당은 각종 SNS에서 핑크성당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명소이다. ‘핑크란 성당의 외벽을 밝은 핑크빛으로 칠해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분홍 색상으로 뒤덮인 중세풍의 건물이 사람들의 마음을 홀렸나보다. 다낭을 찾는 여행객들이 빼놓지 않고 꼭 들른다니 말이다. 현지인들이라고 해서 다를 리가 없다. 신혼부부들의 웨딩촬영 장소로 인기가 높단다.

 

 

성당은 프랑스 식민통치 시기인 1923년에 지어졌다. 사제(司祭)발레(Vallet)’의 작품으로 치솟는 선과 크라운 아치의 고딕 양식으로 설계됐다. 참고로 프랑스는 가톨릭신자들이 박해를 받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베트남과 전쟁을 벌였고 승리했다. 1884년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속한 식민지가 되었고, 가톨릭도 이 시기부터 전국적으로 퍼져나간다. 현재는 베트남 국민의 7.35%가 가톨릭을 믿고 있단다.

 

 

현지인들 사이에는 꽁가 성당(Chinh Toa Con Ga)’으로 불린다고 한다. ‘꽁가(Con Ga)’는 수탉을 의미하는데 꼼꼼히 살펴보면 성당의 첨탑 꼭대기에 올라앉은 회색 수탉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풍향계의 노릇을 하느라 일 년 내내 쉬지도 못하는 불쌍한 닭이란다.

 

 

문이 닫혀있던 탓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서구 교회를 모티브로 한 성서의 사건을 그린 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이 볼만하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한쪽 귀퉁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조형물이 들어서 있었다. 뭔가 내력이 있는 듯했으나 안내판이 베트남어로만 적혀있어 조그만 실마리도 얻을 수 없었다.

 

 

성직자로 여겨지는 동상 둘이 세워져 있었지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호성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둘이나 될 리가 없지 않겠는가.

 

 

다음은 베트남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까오다이 사원(Cao Dai Temple)’이다. ‘까오다이교1926응오 민 찌에우(Ngo Minh Chieu)’에 의해 창시된 민간종교로서 호아하오(Hoa Hao)와 함께 베트남의 양대 신흥종교이다. 세계 5대 주요 종교(기독교·이슬람교·불교·유교·도교)의 신앙을 절충, 장점들을 집약해서 만들어졌는데 현재 300만 명 정도의 신자를 거느리고 있단다. 참고로 1920년대는 항불 투쟁이 본격화된 시기로서 무장 투쟁보다 계몽을 통한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했다. 까오다이교 이외에도 토속적 신앙이 강하게 깃든 호아하오교도 이때 생겨났다.

 

 

 

까오다이(Cao Dai)’높은 곳으로 신이 지배하는 천상의 영역, 곧 천국을 의미한다. 또한 까오다이교의 유일신 이름인 까오 다이 띠엔 옹 다이 보 탓 마 하 탓(Cao Đài Tiên Ông Đại Bồ Tát Ma Ha Tát)’의 약칭이기도 하다. 사원의 모습을 보면 두 개의 높은 탑이 사원 좌우로 높게 솟아 있는데 나름의 명분이 있다. 왼쪽 탑은 최초의 여성 추기경인 람 후옹, 오른쪽 탑은 최초의 남성 교주인 레 반 쩡을 상징한다. 예배당에 들어갈 때에는 신발을 벗고 남자는 오른편, 여자는 왼편에 있는 아홉 계단을 걸어야 한다. 아홉 계단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의미한단다. 하루에 모두 4차례 기도시간이 열리는데, 직접 기도에 참가할 수도 있고 2층에 올라가 구경만 할 수도 있단다. 본부는 호치민 시 북서쪽에 있는 떠이닌(Tây Ninh)에 있다.

 

 

법당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의 눈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천안(天眼)’이라는데 커다란 눈이 신비로운 빛을 내뿜고 있는 형상이다. 유일신이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모든 행실을 조심하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눈이 그려진 푸른 공의 위에 예수와 마호메트, 부처, 공자 등이 함께 있는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는데 직접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법당의 중앙 쪽으로 다가가다 사제로 보이는 여자로부터 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일행 모두가 뒤에서 웅성거리다 법당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참고로 까오다이교의 교리는 도교와 유교적 요소가 혼합된 대승불교에서 기인한단다. 따라서 최종 목적은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는 것이다. 불교 이외에 타 종교에서 주장하는 호혜와 애정 등도 종교 교리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란다.

 

 

 

다음은 아오자이 체험이란다. 간략한 설명을 듣고 난 후, 치수에 맞는 베트남 전통의상으로 바꿔 입고 사진촬영을 하면 끝나는 일정이다. 소품도 물론 준비되어 있다. ! 전통의상을 파는 것도 같았으나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트남은 태국에 못지않은 마사지의 나라다. 그러니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기본 일정에 포함되어 있는 코스를 업그레이드시켰는가 하면, 마지막 날에는 자투리 시간을 아예 마사지로 소일했다. 가이드가 운영하는 곳이라는데 솜씨는 보통이었으나 한국말을 대충 알아들어서 심심찮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모습의 박항서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베트남인들이 갖고 있는 그에 대한 신드롬을 엿본 여행이었지 싶다.

 

 

동남아 패키지여행의 가장 큰 특징은 쇼핑이라 하겠다. 이번에도 노니와 잡화, 마른과일·커피 매장을 들르는 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별로 마음에 드는 일정은 아니지만 상황버섯이나 라텍스, 히노끼 등 불필요한 매장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하겠다. 아니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몰라도 꽤나 많은 종류의 물품을 구매까지 했다.

 

 

다낭에도 한강(Han river)’이 있다. 그것도 서울처럼 시내를 가로 지른다. 그렇다면 서울처럼 이곳도 야경(夜景)을 눈에 담을 수 있는 유람선 투어가 있을까? 대답은 물론 ‘Yes’. 하지만 이번 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선택 관광에 포함되어 있었던 게 다행이랄까?

 

 

어느 여행지나 야경은 곱다. 특히 뱃머리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곱지 않은 곳이 없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이곳 다낭을 부다페스트나 프라하, 파리, 상하이 같은 야경의 명소와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강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야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유람선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용다리(龍橋)’이다. 다리 전체를 용의 형상으로 디자인한 다리로 다낭의 랜드 마크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다리는 밤에 정점을 찍는다. 다리에 장착된 약 15,000개의 LED가 빨주노초파남보 등 무지개 색으로 번갈아가면서 빛의 향연을 연출하는 것이다. 주말에는 용머리에서 불과 물을 내뿜는 이벤트까지 한다는데 날짜를 맞추지 못한 게 아쉽다.

 

 

 

용다리가 생기기 전까지 다낭의 랜드마크였다는 ‘Song Han 다리도 볼만하다 .이 다리에도 LED가 장착되어 있어, 밤에는 점등이 되는데 용다리와는 항상 다른 색으로 점등된다고 한다.

 

 

다낭여행의 필수코스라는 선짜(Son Tra) 반도의 린응사(영흥사)’는 저녁에 찾았다. 영흥사의 하이라이트는 60미터가 넘는 해수관음상이다. 태풍의 피해를 막기 위해 세웠다는데 베트남에서 가장 큰 해수관음상이란다. 이 관음상은 어떤 각도로 보더라도 풍경과 잘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는 평을 듣는다. 저녁이라서 확인은 불가능했지만 은은한 불빛으로 치장된 불상은 나름대로 풍치가 있었다.

 

 

 

저녁이라서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한계가 있었으나 엄청나게 많은 분재들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다양한 모양새의 불상들도 볼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밤바다도 볼만했다. 이곳 영흥사에서 바라보는 해안선은 다낭의 어떤 곳보다 아름답고 유명하다고 했다. 그런 바다에 휘황찬란한 불빛까지 더해지니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저 바다는 월남전 종전 시 보트피폴 14,000여 명이 수몰된 슬픔의 바다이기도 하단다.

 

 

아래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온 영흥사의 전경이다.

 

 

 

다낭의 또 다른 볼거리는 챠밍 쇼이다. 다낭의 과거와 현재를 테마로 한 판타지 쇼로 베트남 전통무용의 매력을 한껏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다른 한편으론 다낭의 색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체험일 수도 있다.

 

 

 

 

베트남 전통문화와 참파 시대 압살라춤, 아오자이쇼, 전통 결혼식 등 악사들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계속해서 펼쳐지는데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 공연의 구성이 바뀔 때마다 무대의 양 옆에 있는 스크린에서 영어, 중국어와 함께 한글 자막이 뜨는 것이가. 하지만 속도가 너무 빨라 제대로 읽을 수는 없었다. 극의 내용까지 알고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