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일본 간사이 지역 여행
여행일 : ‘17. 3. 15(수)-17(금)
여행지 : 오사카(오사카 성, 도톰보리),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천룡사, 노노미야신사), 나라(동대사)
일 정 :
○ 3.15(수) : 오사카(도톰보리)
○ 3.16(목) :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노노미야신사)
○ 3.17(금) : 오사카(오사카 성), 나라(동대사)
여행 셋째 날 :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
특징 : 일본에는 우리의 고대사와 관련된 유물이 많다. 두 나라 사이에 교류가 많았고, 그 교류의 결과인 유적이 일본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물들 중에 일본 나라지역에 있는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만큼 중요하면서도 논란이 많은 곳도 없다. 그런 동대사는 누가 뭐래도 일본에서 가장 큰 절이다. 단일 건물로는 세계최대의 목조건물인 대불전(大佛殿)이 있고, 대불전에는 세계 최대의 실내불인 청동 비로자나불이 안치되어 있다. 이밖에도 남대문과 남대문의 금강역사상, 팔각등룡, 종루, 법화당, 개산당, 계단원 사천왕상, 전해문 등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문화의 최대 유적지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아스까 문화(飛鳥文化)’의 보고인 호오류사(法隆寺)에 대비해 ‘덴표문화(天平文化, 729~48)’의 보고라면서 말이다. 동대사는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절이기도 하다. 이 절의 부속건물인 정창원에서 국사 교과서에 소개되어 있는 '신라장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정창원 문서'로도 불리는 신라장적은 통일신라 서원경(청주) 부근 4개 촌락의 경제적 요소들을 조사하여 기록한 문서로 통일신라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동대사 대불과 대불전을 포함한 7개의 건축물이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라있다.
▼ 나라(奈良)는 관서지방에 있는 일본의 옛 도읍(都邑, 710~784)으로 오사카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져 있다. 헤이조쿄(平城京)라 불리던 이 천년고도(千年古都)는 일본의 초기 문명을 대표하는 7대 사찰 등 많은 불교 건축물과 유물들을 품고 있다. 고후쿠 사(興福寺) 5층탑은 710년에 만들어졌으며, 755년에 세워진 도다이 사(東大寺)는 높이 22m의 대불로 유명하다. 또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호류사(法隆寺)는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와 같은 그림과 조각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 동대사는 ‘일금당(一金堂) 쌍탑(雙塔)’을 기본으로 삼았다. 본당인 대웅전을 중심에 두고 전면 좌우에 목탑(木塔, 현재 터만 남아있다), 그리고 주위를 회랑(回廊)으로 둘렀다. 경주의 감은사나 불국사와 같은 가람배치다. 이곳 동대사가 통일신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 주차장에서 내리면 ‘동대사’의 표지석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세계유산, 고도 나라, 문화재(世界遺産 古都 奈良 文化財)’라고 적혀있는 걸 보면 이곳 동대사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아니 표지석보다도 먼저 반기는 게 ‘사슴’이었다. 표지석을 살펴보는 나에게 다가와 반갑다며 얼굴을 비벼댄다. 그리곤 떼로 뭉쳐서 졸졸 따라다닌다. 동대사가 위치한 ‘나라공원’에서 방목하는 사슴들인데, 그 수가 무려 천여 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참고로 예로부터 이곳 나라현에는 사슴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646년)’ 때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라는 아스카시대 호족을 죽이고 ‘소가노 마코’와 ‘소가노 이루카’의 이름을 합해 ‘바카(바보)’라는 뜻으로 사슴을 풀어 놓은 것이 그 원인이란다.
▼ 사슴으로서는 사람보다도 과자가 더 먼저이다. 특히 냄새가 나는 과자를 손에 쥐고 있으면 수십 마리의 사슴이 달려드는데 나라(공원)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이색 체험이다. 하지만 과자가 떨어지면 가방을 물어뜯거나, 더 달라고 머리로 들이받기도 한다니 유의하자.
▼ 사슴과 실컷 노닐었으면 이젠 동대사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그 첫 번째 만남은 정문인 남대문(南大門/ 난다이몬). 이름 그대로 거대한 문이다. 문 위에는 화엄종의 대본산(大本山)에 걸맞게 '대화엄사(大華嚴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동대사가 통일신라의 원효와 의상의 화엄사상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그것에 감동하여 지은 절로 알고 있었는데, 남대문의 편액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의 불교는 710년 나라(奈良)의 평성경(平城京/ 헤이죠쿄)으로 수도를 이전한 후 ‘나라불교’라는 여섯 교종이 근간을 이루었는데 그 중 하나가 화엄종이다. 이 화엄종은 신라의 심상(審祥)이 이곳 동대사에서 화엄경을 강론하면서 시작되어 양변(良弁, 료벤)이 그의 제자가 되어 종파를 확립하게 된다. 일본은 한반도를 경유해 538년 불교를 접하게 되지만 702년부터 8번에 걸쳐 중국에 견당사를 파견해 그들의 문물과 불교문화를 왕성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나라시대 덴표(天平) 시기인 729–749년 중국의 대불 양식이 반영된 이런 건축물을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 현재 건물은 가마쿠라시대에 재건한 것으로 송나라의 건축양식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한다. 팔작지붕이며, 정면이 다섯 칸이나 문은 정작 세 개뿐인 이중문이다. 문의 높이는 기단 위에서 25.46m이며, 바닥에서 지붕 안쪽에까지 이르는 큰 기둥이 18개로 21m에 이른다. 대불전의 규모에 어울리는 일본 최대의 산문이라고 하겠다. 국보(國寶)로 지정된 이유일 것이다. 문은 수평방향의 재를 사용해 기둥과 결합함으로써 구조를 강화시켰고, 기둥위에 공포를 배치하는 일본풍의 선종양식(중국양식)과는 달리 도중에 나무를 찔러 넣듯이 공포를 배치했다.
▼ 남대문에 모셔진 역동적인 두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은 '동대사 가마쿠라 초엽인 1203년에 불과 69일 만에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의 유명 불상 조각가 운케이와 가이케이에 의해 제작됐는데 하나의 큰 통나무를 조각한 것이 아니고 의 인왕상(仁王像)'으로 더 알려져 있다. 높이가 8.4m에 이르는 이 거대한 목조상은여러 조각을 붙여가며 만들었다고 한다. 뒷면을 평면으로 놓아둔 채로 앞면 만 여러 개로 조각해 붙여 만든 기법인데, 이걸 ‘요세기즈쿠리(寄木造/ 쪽매질기법)’라 한단다. 세월이 흘러 손상이 심하던 것을 1988년에서 1993년까지 5년간의 수리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되찾았다.
▼ 남대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에 종무소가 있고, 왼편에는 권학원(勸學院)과 진언원(眞言院)이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 위치한 이월당(二月堂)으로 가는 입구에 경지(鏡池)라는 커다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의 수면 위에 대불전과 중문이 비추인다고 해서 ‘거울 경(鏡)’자를 붙였다고 한다.
▼ 경내에는 ‘명치천황나라행재소(明治天皇奈良行在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옆줄에 ‘동대사 동남원 구경내(東大寺 東南院舊境內)’라고 적힌 걸로 보아 ‘메이지(1852-1912)’ 일본 국왕이 이곳(동남원의 옛터)에서 일정기간 동안 머물다 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건물은 중요문화재인 ‘중문(中門/ 나카몬)’이다. 이곳에서 입장권을 구매한 후 금당인 대불전으로 가게 되는데, 문의 중심에는 악귀를 쫓고 축복을 비는 향을 피우는 향로가 있다.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향의 연기를 맞으며 몸을 정화한 후에 금당으로 들어간단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가림막으로 둘러쳐져 있어 전체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없었다.
▼ 아래 사진은 공사가 끝난 뒤의 중문(中門)으로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왔다. 중문은 현재 출입을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고 한다. 왼쪽 회랑 끝으로만 출입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문은 무늬만 문인 셈이다.
▼ 중문을 통과하면 곧이어 본전인 대불전(大佛殿/ 다이부츠덴)이 나온다. 동대사의 대불전은 세계 최대의 목조건축물답게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동대사는 749년에 대불상이 먼저 완성된 다음 752년에 금당(金堂)인 대불전이 준공되었다고 한다. 건립 당시는 상계(裳階/ 모코시, 아래쪽의 지붕이 덧대어진 형태)를 포함 정면11칸(87m), 측면 7칸(51m)의 건물이었으며 기둥의 총수는 84개였고 공포는 3출목 원형단면의 장연과 각형단면의 부연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초기에 들어섰던 건물은 1180년 방화로 소실되었고, 이듬해인 1195년 헛첨차(檐遮를 기둥에 삽입) 공포형식을 사용하는 중국 송나라의 대불양(大仏様/ 다이부쓰요)으로 재건되었으나 1566년 이 또한 소실된다. 이후 140년간의 재건공사를 거쳐 1705년에 완공된 것이 현재의 대불전이다.
▼ 2층 지붕의 단층 건물인 대불전(大佛殿)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통층인 내부에 큰 불상을 안치시키기 위해 지붕을 2층으로 만든 것이다. 현존 건물은 동서길이 57m에 측면 50.5m. 높이가 46.8m로 처음 지어질 당시보다 1/3이나 축소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세계 최대의 목조건축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파란 하늘과 푸른 들판에 큰 전각하나가 앞뒤 다 잘라버리고 그 자체가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버티고 서 있다’는 누군가의 표현처럼 실로 대단한 크기이다.
▼ 대불전의 처마는 가지런하다. 하지만 에도시대에는 지붕 무게에 눌려 비뚤빼뚤했을 뿐만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려 활주기둥을 세워 지탱했었다고 한다. 하긴 지붕 무게만도 2,000톤이 넘었다니 무게를 분산시키고 처마선을 가지런하게 유지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참! 동대사는 가람 건설의 총책임자로 고구려출신인 고려복신(高麗福神), 재정지원은 백제 왕인의 후손인 행기(行基)스님, 조불사 또한 백제 사람인 국중마려(國中麻呂), 거기다 대불전의 건축 책임자까지도 신라인인 저명부백세(猪名部百世)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아예 한반도 출신의 도래인들이 다 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 대불전 앞에는 청동 등롱(燈籠, 우리나라의 절들은 보통 석등을 세운다)이 세워져 있었다. 국보(國寶)인 금동팔각등롱(金銅八角燈籠)이라는데, ‘음각 보상당초문(陰刻 寶相唐草文, 보상꽃과 당초 덩굴로 나타낸 장식 무늬)’을 바탕으로 한 여덟 면 가운데 네 면에는 보살이 그리고 나머지 네 면에는 구름 속을 질주하는 사자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보살의 의상을 새긴 기법은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 받는다. 부드러운 자태, 악기를 잡은 팔과 가슴 사이의 원근감, 바람에 휘날리는 천의 등 입체적인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이는 당시 일본의 청동문화가 대단히 발달해 있었음을 증명한다.
▼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일본의 신사(神社) 입구에 있는 테즈미야(手水舎)의 물은 마실 수 없는 게 보통이다. 청결한 몸으로 신사에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구면 임무 끝인 것이다. 그런데 이곳의 물은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깨끗하다는 얘기겠지만 냉큼 마셔볼 용기는 없어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 이젠 대불전의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그렇다고 냉큼 들어설 일은 아니다. 세계 최대의 목조건축이라는데 추녀마루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쯤은 쳐다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쳐다본 문간은 실로 대단한 크기였다. 아래층 전면만 눈에 들어올 따름인데도 요즘 지어진 5층 건물의 높이에 맞먹을 정도로 아스라하다.
▼ 대불전에는 동대사의 상징과도 같은 청동대불(國寶이다)이 모셔져 있다. 쇼무천황(8세기)에 의해 주조된 이 대불은 일본 최대의 청동불상이라고 한다. 절에서 불사를 행할 경우 전각을 먼저 짓고 불상을 안치시키는 게 보통이나, 동대사의 경우는 대불을 먼저 주조하고 그 크기에 맞춰 전각을 지었다니 불상이 얼마나 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불사가 얼마나 컸던지 이를 계기로 일본 왕실의 경제 쇠락을 가져와 한동안 일본에서는 다른 금동불을 제조하지도 못했단다. 대불의 원래 이름은 ‘동조로사나불좌상(銅造盧舎那佛坐像)’이다. 노사나불은 오랜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을 쌓고 나타난 부처다. 화엄사상의 유행과 함께 나타난 대승불교의 부처님 중 하나다. 일본에 화엄사상이 전달되면서 지은 절이니 노사나불이 안치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참고로 이 불상은 14.7m 높이에 추정 중량 450톤으로 아시아 최대의 금동불이었다. 하지만 1997년 설악산 신흥사의 대불(18m)이 완성됨에 따라 아시아 최대라는 이름을 빼앗기고 말았단다. 하지만 약 1,200여 년 동안 아시아에서 최고의 위엄을 자랑했던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높이가 15m나 되는 비로자나대불은 워낙 커서 그 얼굴 길이만 하더라도 약 5m, 손바닥의 길이도 3.1m나 된다고 한다. 이 불상은 매년 8월7일에 거행되는 연중행사가 장관이란다. 이른바 '어신(御身) 닦기'라는 대청소 행사인데, 약 250명의 승려가 이른 아침부터 대불전 천장에 둥근 볏짚 의자를 새끼줄로 줄줄이 매달고, 거기 걸터앉아 부처님 얼굴을 닦고 귀를 닦고 입술을 닦아낸다. 이게 흔치 않는 구경거리라서 이날만 되면 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단다.
▼ 본존불(本尊佛)의 좌우에는 협시보살(脇侍菩薩)로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 사진)과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을 배치했다. 허공장보살은 지혜와 자비를 무한히 베풀어 주는 보살이며, 여의륜관음은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 온 세상에 이익을 주는 보살이다.
▼ 본존불을 호위하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은 광목천(廣目天, 아래 사진)과 다문천(多聞天)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각각의 천하를 보호하고 수호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사대천왕은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아래 사진의 서방천왕(광목천)은 붓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갑옷을 입고 새끼줄과 삼차극을 지닌다. 그리고 북방천왕인 다문천은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창·막대기·보서를, 왼손에는 항상 보탑을 들고 있는 게 보통이다. 그건 그렇고 사천왕의 나머지 둘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쩌면 대전 바닥에 놓여있는 거대한 두상(頭像)들일지도 모르겠다.
▼ 불전의 왼쪽으로 돌아서자 나라시대 당시의 동대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미니어처가 제작되어 있다. 이 목제 모형은 우리에게 동탑과 서탑의 당시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753년과 746년에 각각 지어진 동탑과 서탑은 320척(약 100m) 높이의 웅장한 칠층탑이었다고 한다.
▼ 연꽃무늬 받침대인 ‘대불연변(大佛蓮弁)’의 복제품,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도 전시되어 있다. 대불이 올라앉는 연화대좌를 장식하는 연꽃잎(蓮弁)을 말하는데, 표면에 그려진 그림은 화엄의 세계를 그린 것이란다. 참고로 연화장세계란 비로자나불이 있는 공덕무량(功德無量), 광대장엄(廣大莊嚴)의 세계를 말한다. 이 세계는 수행을 마치고 불과(佛果)를 증득하여 들어가는 이(證入生)들이 사는 세계라 한다. 이곳은 큰 연화로 되어 있고 그 가운데 일체국(一切國)·일체물(一切物)을 모두 간직하였으므로, 연화장세계라 한다.
▼ 화재 때 살아남았다는 대불의 손도 전시되고 있었다. 현재 대불에 붙어있는 손은 1568–1615년에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한다. 그밖에도 사천왕상의 머리 두 개(‘지국천/持國天’과 ‘증장천/增長天’일 것이다)와 어른 등치만한 귀면와(鬼面瓦), 치미(鴟尾, 용마루 끝에 높게 부착하던 기와)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불전을 수리하면서 교체한 것들이 아닐까 싶다.
▼ 대불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던 기둥도 전시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어른의 허리 위까지 이를 정도로 굵다. 요 아래 사진과 비교해보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 대불전의 기둥들 가운데 하나는 구멍이 뚫려있었다. ‘대불의 콧구멍 크기’라는 이 구멍을 통과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그러니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이유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 하지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소원이 이루어질지는 몰라도 가끔은 굴욕 사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대불전 옆에는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의 목조나한상이 모셔져 있었다. 빨강 망토를 둘러쓰고 있다고 해서 ‘빨간 망토의 할머니’라고도 불리는데, 거대한 대불과는 대조적으로 우스꽝스럽고 재밌는 모습에서 친근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망토를 씌웠는지는 알 수 없단다. 다만 손에 든 약합(藥盒)으로 인해 여행객들에게는 인기 만점이라고 한다. 자신의 아픈 부위와 같은 부위를 만지면 낫는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빈두로존자는 부처님 열반 뒤 미륵불이 출현하기 전까지 중생을 제도하고자 원력을 세운 분이다. 천태산 위에서 홀로 선정을 닦으며 열반에 들지 않고 미륵불을 기다리는 존재라고 해서 ‘독성(獨聖)’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성존자(獨聖尊者) 혹은 나반존자(那畔尊者)로 불리며 독성전(獨聖殿)에 모시는 경우가 많다.
▼ 내부의 풍경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모셔진 대불(大佛) 등의 불상들은 거대하면서도 솜씨까지도 빼어났다. 바닥에 늘어놓은 것까지도.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대불전 안에 기념품가게가 들어서 있었다는 점이다. 엄숙하기 짝이 없는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생활불교에 가까운 일본 불교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중문의 양 옆에서 시작된 회랑(回廊)은 대불전을 감싸고 돌아가 그 뒤에 서있는 북중문의 좌우까지 연결된다. 평지에 있는 사찰은 절의 경내와 그 바깥을 구분하는 회랑을 짓는 게 보통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평지 절간도 이런 회랑을 갖추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회랑에도 역시 기념품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 대불전을 빠져나오면 숲속에 들어앉은 금속 조형물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1970년에 개최된 오사카엑스포의 ‘古河館(코가 그룹 파빌리온)’의 상단부를 1971년에 기증받아 동대사에 설치했다고 한다. 현재의 이름은 ‘동대사칠중탑(東大寺七重塔)’의 상단부인 상륜(相輪). 그 높이가 무려 23.3미터에 이른단다. 상륜이란 탑 꼭대기의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을 말한다. 그렇다면 저것을 올려놓고 있었을 ‘동대사칠중탑(東大寺七重塔)’은 대체 얼마나 거대했을까? 참! 상륜 옆에는 1988년 인도로 부터 기증받았다는 석사자상(石獅子像)도 있었다. ‘아쇼카 필라(Ashoka Pillar)’라 불린단다.
▼ 대불전에서 동쪽으로 가면 토리이가 있다. ‘수향산팔번궁(手向山八幡宮/ 타무케 야마하치만구)’를 거쳐 ‘이월당’으로 가는 길인데, 토리이로 가지 않고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종루(鐘樓)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 계단의 끄트머리에서 만나는 종루(鍾樓/ 쇼우로우)는 유난히 하늘로 솟구치듯 우뚝 솟은 모습이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이 건축물은 1207~1210년 사이에 재건한 것으로, 중국으로부터 전해왔다는 대불양(大仏様/ 다이부츠요우)에 약간의 선종양식을 가미했다고 한다.
▼ 종루에 걸려있는 범종도 역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752년 동대사 창건 당시 주조되었으며, 높이 385㎝에 구경 271㎝로 중세 이전에 만들어진 범종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한다. 무게도 26.3톤이나 된단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세 개의 범종 가운데 하나이다.
▼ 종루 오른편의 한 칸짜리 건물은 동대사 대불전을 세울 때 큰 공을 세운 교키(行基) 대사를 기리는 ‘행기당(行基堂)’이다. 교키는 백제계 도래인 ‘고시(高志) 씨’ 출신으로 법흥사(호코지)로 출가해 도오쇼오(道昭)에게 사사한 후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민중교화와 더불어 사원·연못·교량 등 사회사업을 벌림으로써 ‘교키보살’로 추앙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743년 성무(成務/ 쇼무) 천황이 동대사 비로자나불을 조성할 때 대불조영(大佛造營)의 권진(權進)에 기용되었고, 이어 일본 최초로 대승정위(大僧正位)에 오르게 된다. 참! 행기당 뒤편에 백제계 양변(良弁)스님의 어영당(御影堂)인 개산당(開山堂)도 있으니 한번쯤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 종루로 올라오다가 ‘신국신사(辛國神社/ 가라쿠니진자)’도 만났었다. 의식 있는 한국인들이 주목해서 보는 곳이다. 모시는 신이 한반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신국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한국옹(韓國翁)’으로 원래 이름은 천구사(天狗社/ 덴구자)였다고 한다. 대불전 중수시 덴구가 방해를 하자 이 신사를 짓고 위무했단다. 여기서 말하는 덴구는 안마사(鞍马寺/ 구라마데라)에 가면 볼 수 있는 붉은 얼굴에 피노키오 같은 긴 코를 가진 산의 정령이다.
▼ 종루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사월당(四月堂/ 시가츠도)’이 나온다. ‘법화삼매회(法華三昧会)'가 음력 4월에 열린다고 해서 '사월당' 또는 ’삼매당(三昧堂/ 산마이도)‘으로 불린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삼월당(三月堂/ 산가츠도)’이다. 덴표(天平) 20년(748)경에 건설된 것으로 동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화엄경이 강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삼월당’이란 매년 3월 이곳에서 법화회(法華会)가 열린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법화회가 열린다고 해서 ‘법화당(法華堂/ 호케도)’이라 불린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 건물은 처음에는 쌍당 형식의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뒤쪽의 정당(正堂) 부분과 앞쪽 예당(禮堂)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당 부분은 죠겐(重源)이 1199년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입장료를 따로 받는데다 사진 촬영까지 금지되어 있다기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삼월당의 불당에는 본존인 ‘불공견색관음(不空羂索觀音)’을 중심으로 총 16개의 불상이 비좁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고 한다. 이 불상들 중 12개가 국보이고, 4개가 중요문화재란다.
▼ 삼월당 옆에는 또 다른 국보인 ‘이월당(二月堂/ 니까츠도)’이 있다. 이월당이라는 이름은 이 건물에서 음력 2월에 ‘수이회(修二會/ 슈니에)’가 열리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의 이월당은 1667년 소실된 것을 2년 후에 재건한 것이다. 창건 당시의 건물은 규모가 작았지만, 재건을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되었단다. 참고로 수이회(修二會)의 정식명칭은 ‘십일면회과법’이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범하는 잘못을 본존인 ‘십일면관음’ 앞에서 참회하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청정한 일심을 얻어, 악업으로 인한 응보를 소멸하고 보다 나은 불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곳에서 모시는 ‘십일면관음’은 현재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비불(祕佛)이란다.
▼ 이월당은 건물 자체뿐만 아니라 전망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동대사와 나라 시내의 풍경은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 이월당의 뒤편 언덕 오른편엔 ‘원부신사(遠敷神社/ 오뉴진자)’가 있다. 이밖에도 이월당의 주변에는 반도신사(飯道神社)와 흥성신사(興成神社)가 더 있는데, 셋 모두 이월당의 수호신사라고 한다. 보살펴주는 부처님이 있는데도 굳이 또 다른 신의 도움을 원하는 일본의 불교가 참 생경스럽다.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와 외래의 불교가 융합. 즉 신토의 신은 부처가 모습을 바꾸어 현세에 나타난 것이라고 믿는 신불습합(神佛習合) 사상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참! 흥성신사 뒤의 양변삼(良弁杉) 나무도 눈에 띄는 풍경이다. 일본 화엄종의 2대조로 추앙 받는 백제계 양변(良弁/ 료벤) 스님이 어릴 때 독수리에게 물려 이곳 삼나무에 걸렸다가 의연스님에게 구출되어 승려가 되었다는 전설이 깃든 나무이다. 양변스님은 740년 신라승 심상(審祥/ 신조)을 초빙해 화엄종을 연다. 그래서 심상이 초조, 료벤이 2대조로 추앙받고 있다. 또한 양변은 동대사 건축에 큰 역할을 해 나중에 이 절의 최고위직인 승정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 이월당에서 빠져나오는데 귀틀집으로 지어진 ‘부경(浮京)’이 눈에 띈다. 일종의 창고인데 일본의 왕궁과 신사(神社)의 수호신인 맥견(貊犬/ 코마이누)과 함께 일본에 전해진 고구려 문화의 흔적이라고 한다. 부경이란 게 본디 고구려인들이 갖고 있던 창고이기 때문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의 고구려조(高句麗條)에 기록된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는데, 이름을 부경이라 한다(家家有小倉 名爲 浮京)’는 구절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이밖에도 이 일대에는 꽤 많은 전각들이 모여 있었다. 로벤(양변) 승정이 모셔진 개산당(開山堂/ 가이산도)과 가마쿠라시대의 큰 욕실인 대탕옥(大湯屋), 보물로 지정된 알가정옥(閼伽井屋), 나라지방의 수호신을 모시는 ‘수향산팔번궁(手向山八幡宮)’ 부동당(不動堂), 관음당(觀音堂) 등 많은 전각들이 있다.
▼ 다음 방문지인 정창원을 찾다가 엉뚱하게도 대불전 왼편으로 들어서버렸고, 그곳에서 ‘계단당(戒壇堂)’ 등 여러 전각들을 만났다. 계단이라는 게 본디 수계의식과 설계(說戒)를 위한 성역일지니 계(戒)를 받는 장소라는 의미일 것이다. 맞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간진(鑑眞)이 754년 이곳에 일본 최초의 계단원을 설치하고 쇼무(聖武)·고켄(孝謙) 천황을 포함한 황족들에게 보살계를 주면서 일본 불교계에 수계제도를 정착 시켰다고 한다. 이후 진언종을 연 ‘구카이(弘法)’ 대사나 천태종을 연 ‘사이초(最澄)’ 대사도 이곳에서 수계를 받았단다. 초기 일본 불교에서 계단원이 설치된 사찰과 그렇지 못한 사찰의 엄청난 위상의 차이를 생각할 때 동대사는 나라의 인정을 받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따로 입장료를 받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 주마간산으로 서쪽지역을 살펴본 후 찾아간 ‘정창원(正倉院, 쇼소인)’. 출입문이 분명하건만 금줄을 쳐놓았다. 그리고는 오른쪽으로 돌아서 들어가란다. 안내판에는 ‘정창 외구(正倉 外構)’라는 글귀도 보인다. 설마 외관만 보라는 건 아니겠지?
▼ 조금 더 걸으니 정창원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나오지만, 이곳도 역시 막혀있는 게 아닌가. 매주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공개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조금 전 대문에서 감지됐던 불길한 예감이 딱 들어맞아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낯선 이방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그저 멀찍이서 바라볼 따름이다.
▼ 정창원(正倉院, 쇼소인)은 검은 통나무로 만든 ‘귀틀식’ 건축물로 729–749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표에서 오는 습기를 제거하고 통풍문제를 감안하여 고상식(高床式)으로 지어졌다. 나라시대인 756년 고묘 황후는, 남편인 쇼무(聖武) 천황의 7주기에 맞춰 유품 650여 점과 60여 종의 약품을 동대사(도다이지)의 비로자나불(대불)에 봉헌했다. 정창원의 시작으로 보면 되겠다. 그 뒤로도 고묘 황후는 3번에 걸쳐서, 자신과 쇼무 천황과 연관이 있는 물건을 대불에게 봉헌했단다. 이후로도 고대 황실의 진귀한 보물들이 계속해서 확충되어 지금은 명실상부한 왕실의 보물창고가 되었다. 1998년에는 나라시 지역의 다른 문화재(주로 사찰)들과 함께, ‘고도 나라의 문화재’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아쉬움에 혀를 차고 있는데, 관람객으로 보이는 이가 원래부터 내부는 공개가 되지 않는다고 알려준다. 행여 소장품에 대한 글귀라도 있을까 해서 출입구 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을 기웃거려보지만 온통 건축공법에 대한 설명뿐이다. 그래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등록된 내용을 옮겨본다. <정창원보물(正倉院寶物)로 통칭되는 보관유물은 755년(天平勝寶 8) 쇼오무천황(聖武天皇)의 장례용품과 유품 및 황실에서 동대사(東大寺)에 헌납한 보물들과, 동대사 대불(大佛)의 개안(開眼)행사에 쓰인 용품, 그리고 그밖에 각종의 연중행사용품들을 수납한 것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칙사의 입회 아래 여닫는 칙봉(勅封)제도가 시행되어 긴 시간동안 보존하는데 기여하였다. 현재 일본 궁내청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년에 한 번씩 나라국립박물관(奈良國立博物館)에서 부분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 정창원에서 왼편으로 조금만 더 가면 동대사의 ‘전해문(轉害門, 데가이몬)’을 만날 수 있다.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생김새는 차지하고라도, 동대사 창건 때 지어진 유일한 건축물이라니 한번쯤은 살펴봐야 하지 않겠는가.
♧ 에필로그(epilogue), ‘나라 동쪽의 관대사(官大寺)’란 뜻의 동대사는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에 세워졌다. 일종의 국립 가람으로 당시 일본으로서는 중요한 정부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일본 인구 5백만 명이던 시절 동원된 인력만도 2백만이 넘었을 정도로 엄청난 역사였단다. 여기서 ‘나라시대’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 직전까지를 말하는데 백제·신라와 깊은 관계가 있을 때였다. 동대사는 743년 착공된다. 불교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래한 것이 552년인데 거의 2백년이 지난 때의 일이다. 이미 신라에서는 676년 부석사가, 715년에는 불국사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그리고 720년에는 황룡사 9층탑이 각각 건립되었다. 그즈음 일본에 세워졌던 절은 667년의 관세음사(觀世音寺)가 최초이고 741년에 세워진 국분사(國分寺)가 두 번째 쯤 되고 있었다. 동대사는 그후 최초·최대의 절이 되는 것이다. 동대사의 절 짓기에는 백제계 도래인(渡來人)인 행기와 양변 스님이 앞장섰고 국공마려(國公麻呂)와 저명부백세(猪名部百世) 등 백제·신라계의 건축가들이 그들을 뒷받침 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이 절을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일본 정부가 세운 것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역사적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도래인은 한국인은 아니다. 일본열도에 정착하여 살아가며 업적들을 이루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네들이 가져간 기술력이 동대사와 청동대불의 건설에 크게 기여한 것 또한 사실이다. 무작정 한국의 역사로 단정하는 것도 무리지만 아예 뿌리까지 무시하는 것 또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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