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씨버선길(13), ‘관풍헌 가는 길

 

여행일 : ‘21. 8. 7(토)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과 영월읍 일원

여행코스 : 김삿갓면사무소→옥동교→대야산성→가재골→가재골교→갈론마을→고씨동굴등산로→팔괴마을→관풍헌(소요시간 : 23.6km/ 실제는 김삿갓면사무소에서 고씨동굴까지 11.05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13번째 길인 ‘관풍헌 가는 길’을 걷는다. 3개로 나누어진 영월 권역의 마지막이자 외씨버선길이 마무리되는 구간으로, 관풍헌에서 마침표를 찍는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이 구간은 외씨버선길의 전체 길 가운데 가장 긴데다, 높이가 400m도 넘는 고갯마루를 3개나 넘어야 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게 대야산성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는 게 문제다. 도로를 따라 이동하면 잠깐이면 끝났을 것을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하는 셈이다. 외씨버선길의 모티브는 보부상. 편한 평지를 제쳐두고 일부러 이런 산길을 오르내렸을 보부상도 없었으련만, 이런 고행의 길을 고집하는 영월군의 의도를 모르겠다. 덕분에 우리부부는 걷는 내내 툴툴거렸고, 그 불만의 표시로 나머지 구간의 답사를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 같은 소시민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랄까?

 

▼ 들머리는 김삿갓면사무소(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리 266)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제천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과 38호선을 타고 일단 영월읍으로 온다. 영월교차로에서 88번 지방도로 옮겨 춘양 방면으로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김삿갓면사무소의 소재지인 옥동리에 이르게 된다. 김삿갓면의 옛 이름은 하동면(下東面). 조선 최고의 풍류시인으로 알려진 김삿갓(본명은 김병연)의 묘가 와석리에서 발견된 것이 인연이 되어 2009년 김삿갓면으로 이름을 바꿨다. 브랜드 가치를 높여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목적이었고, 바라던 대로 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반면에 땅이름의 역사성 훼손이란 지적도 만만찮다.

▼ 13길(관풍헌 가는 길)은 김삿갓면사무소에서 영월읍(관풍헌)까지 23.6km로 15개 코스로 나뉜 외씨버선길 가운데 가장 긴 구간이다. 이 구간은 또 해발고도가 400m도 넘는 고갯마루를 3개나 넘어야 하는 힘든 코스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에는 한꺼번에 완주한다는 게 무리일 수도 있다. 그래선지 산악회에서도 이를 둘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었다.

▼ 구간의 경계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김삿갓면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었다. ‘김삿갓문학길’에 이어 이 구간도 역시 ‘김삿갓’으로 시작된다. 고을 이름에서부터 온통 김삿갓으로 도배를 해 놓았다. 상호는 물론이고 농장 이름, 심지어는 특산품(포도)에까지 김삿갓이 빠지지 않는다.

▼ 영월방면(북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옥동장터길’이라는데 면소재지치고는 무척 한적한 풍경이다. 들판보다 산이 더 많은 고장 영월. 말이 좋아 산수가 맑고 풍광이 아름다운 고장이지 90년대까지도 탄광촌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탄광이 문을 닫고, 광부 숫자보다 수십 배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고장이 되었다. 외씨버선길을 걷고 있는 우리 역시 그 가운데 하나다.

▼ 잠시 후 예쁜 벽화골목을 만났다. 외지에서 찾아온 나그네들을 위한 팬서비스 차원일까? ‘옥동장터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골 장터의 풍경들을 빼곡히 그려 넣었다. 무쇠 솥을 파는가 하면, 튀밥을 튀기는 등 하나같이 5일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들이다.

▼ 각종 약재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 곁에는 백구 한 마리가 혀를 내민 채로 주인을 지켜주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게 아쉬웠던지 그 빈자리를 집사람이 냉큼 비집고 들어선다.

▼ 모처럼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내기 아쉬웠던 모양이다. 마을 어귀에 ‘김삿갓 아리랑장터(이정표 : 관풍헌 23.1㎞/ 김삿갓면사무소 0.5㎞)’를 만들어 놓았다. 김삿갓의 풍류를 상징하기 위해 ‘김삿갓’이란 브랜드를 붙였는데, 도시민과 김삿갓면의 농가를 직접 연결해 농가소득을 높이기 위한 ‘도농 교류의 장’이다.

▼ 그 옆에는 ‘늘보’라는 단어도 보인다. ‘자연과 함께 여유로운 삶’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맞다. 이곳 김삿갓면은 강원지역에서는 최초, 국내에서는 11번째로 슬로시티(slow city) 인증(2012년)을 받았었다.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시티 운동은 전통과 자연을 보전하면서 유유자적하고 풍요로운 도시를 만들어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 마을을 벗어난 탐방로는 잠시지만 88번 지방도를 따른다. 자동차의 통행이 빈번한 도로지만 보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으니 안전사고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김삿갓’이란 브랜드로 포장된 포도농장이나 살짝 곁눈질 해보자.

▼ 탐방로는 ‘옥동교’ 직전(이정표 : 관풍헌 23㎞/ 김삿갓면사무소 0.6㎞)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입구에 이 마을이 반딧불이 체험장임을 알리는 ‘마을표지석’과 함께 옥동리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 세웠다. 고려시대 옆 고을인 예밀리 밀동에 밀주(密州)의 관아가 있었는데, 당시 죄인들을 가두던 감옥(監獄)이 옥동리의 옥동중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옥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해서 ‘옥동(獄洞)’으로 불렀는데, 어감이 좋지 않아 ‘옥동(玉洞)’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 119지역대(영월소방서)를 지나자 이번에는 옥동천의 둑방길을 따른다. 이때 오른편으로 옥동천의 물길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저 물은 대야산성의 발치를 적신 후 이내 남한강으로 흡수된다.

▼ 옥동천의 물길이 회돌이 치는 곳에는 ‘마당바위펜션’이 들어서 있었다. 풍광이 뛰어난 곳인데도 불구하고 주차된 차량은 두어 대가 전부다. 그게 못마땅했던지 누렁이가 목청껏 짖어댄다. 아서라! 우린 그저 지나치는 길손일 따름이란다.

▼ 펜션의 앞마당을 가로지른 탐방로는 곧장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들머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산길은 완만하게 시작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 길은 고운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험하지도 않다. 비좁은데다 가파르기까지 하나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산골짜기를 헤집는 옛길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인공적인 시설을 배제하다보니 심지어는 벤치 하나도 놓아두지 않았다. 산골짜기의 강원도 사투리가 ‘산꼬라데이’라니 ‘산꼬라데이길’의 전형적인 풍경이랄까?

▼ 그렇게 얼마를 올랐을까 앞서가던 ‘몽중루’님이 쉬고 계신다. 노익장을 자랑하는 외씨버선길 도반(道伴)이신데 초반인데도 저렇게 힘들어하는 건 그만큼 이 구간이 힘들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에 가파른 오르막길과 힘겨룸까지 했으니 오죽하겠는가.

▼ 리본에 적힌 ‘폐광지역 걷는 길 조성사업’란 글귀가 눈에 익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2000년대 초반 석탄관련 업무를 담당하면서 폐광지역 주민들의 어려움을 직접 피부로 느껴봤기 때문이다. 1989년 정부는 석탄산업의 사양화로 인해 경제성이 떨어진 탄광들을 정리하는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을 추진했었다. 이로 인해 생겨난 게 ‘폐광지역’으로 탄광이 있거나 있었던 지역과 그 인접지역으로 폐광되거나 석탄생산이 감축됨에 따라 지역경제가 현저히 위축되어 있는 지역을 말한다. 이에 1995년‘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해당지역을 지원해오고 있는데 이 길도 그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다. 이 부근에 있던 옥동광업소와 후천탄광, 웅봉탄광 등도 당시에 문을 닫았었으니 말이다.

▼ 탐방로는 갈수록 더 가팔라진다. 그러다가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간다. ‘산 넘어 산’이라는 얘기에 딱 맞는 상황이라 하겠다.

▼ 숨이 턱에 차오를 쯤에서야 해발 445m의 고갯마루에 올라설 수 있었다. 펜션을 지난 지 43분만이다.

▼ 정상에는 옛길 이정표(대야뜰/ 옥동뜰)가 세워져 있었다. 낡아빠진 탓에 현재의 위치를 판독할 수 없었지만 영월군청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칠금이재’가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대야본동에서 옥동의 칠금이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했으니 말이다. 칠금이(七錦)는 마을 뒤 칠칠바위에 비가 개인 후 일곱 색깔의 무지개가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대야뜰로 내려가는 길은 의외로 순했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했기 때문이다.

▼ 그렇게 20분 남짓 내려서자 민가, 조금 더 내려가면 강원도의 전형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세련된 수묵화처럼 펼쳐진 암벽과 소나무 숲 아래로 수십 미터 절벽이 이어지고, 그 절벽 밑으로 옥동천이 흐른다. 옥동천 뒤의 그 산들은 하나같이 기세가 대단하다. 천과 강이 아름다운 영월 땅엔 산들도 높고 깎아지른 듯 가파르다.

▼ 탐방로는 88번 지방도(이정표 : 관풍헌 20㎞/ 김삿갓면사무소 3.6㎞)에 내려서자마자 또 다시 헤어져 버린다. 그리고는 널따란 들녘으로 파고든다. 김삿갓면은 남한강이 서부를 적시는가 하면, 중동면에서 흘러든 옥동천이 면을 가로질러 남한강에 유입한다. 하지만 옥동천 연안을 따라 약간의 경지가 전개될 뿐 평야의 발달은 미약하다. 그런데도 이곳은 끝이 가물거릴 정도로 들녘이 넓은 것이다. ‘대야(大野)’라는 지명이 붙은 이유이다.

▼ 잠시 후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대야리(大野里, 이정표는 ’대야본동‘으로 적고 있었다)’가 손짓한다. 들녘에 크고 넓은 논과 밭이 있다고 해서 토속적인 지명으로 ‘댓들’이라고 불렀으나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대야리(大野里)’로 변했다. 자연 부락으로 맛밭, 가재골, 덕내, 마대 등이 있다.

▼ 들녘이 넓으니 주민들의 살림도 넉넉할 게 뻔하다. 이는 반듯반듯하게 지어진 가옥들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맞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그의 저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영농방법 및 정부의 농업 정책을 비롯한 어업·의학 등 농촌의 생활전반을 다룬 정책서)’에서 맑은 물이 흐르고 넓은 들녘으로 형성된 대야리를 살기 좋은 ‘가거처(可居處)’로 기록하기도 했다. 명색이 선비였던 그가 어디 허투루 적었겠는가.

▼ 말복이 다음 주이니 아직은 ‘삼복더위’다. 기상청도 연일 ‘폭염경보’를 퐁퐁 날리며 외출을 삼가길 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시골집 처마 아래서는 빨갛게 영근 고추가 말라간다. 하긴 오늘이 입추(立秋)이니 계절은 이미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게 아니겠는가.

▼ 동구 밖 숲에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자를 지었는가 하면 노거수 아래에 의자를 놓아 서늘하게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참! 수도까지 설치되어 있어 성급한 사람 몇은 땀까지 씻고 있었다.(사진은 총무님 것을 빌려왔다). 들머리인 김삿갓면사무소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렸다.

▼ 오늘의 꽃은 ‘능소화’로 꼽아봤다. 오늘처럼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에는 이글거리는 태양 빛을 머금고 만개한 능소화 만큼 어울리는 꽃이 없어보여서이다. 능소화는 금등화(金藤花, 꽃말도 ‘명예’이다)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과거급제자에게 임금이 관모에 꼽아주던 어사화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운의 꿈을 안고 백일장으로 향하는 김삿갓의 마음이 되어 능소화를 바라보면 어떨까?

▼ 탐방로는 소공원의 앞(이정표 : 관풍헌 19㎞/ 김삿갓면사무소 4.6㎞)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맞대천’이라는 개울 수준의 하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를 건넌다.

▼ 산으로 들어서기 직전 해바라기 꽃밭이 널따랗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너머로는 옥동천이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이게 만만찮은 풍광을 만들어낸다. 꽃밭을 배경삼아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두면 좋으련만 집사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얘깃거리나 볼거리가 없는 고갯마루를 오르내리면서 심신이 지쳐버린 모양이다.

▼ 탐방로는 예상보다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가팔라져 버린다. 특별한 볼거리 없이 힘만 드는 구간이다.

▼ 대야마을을 출발한지 18분 만에 작은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큰재(성재)’가 벌써 나왔나보다 싶었는데, 막상 올라선 고갯마루는 텅 비어있는 게 아닌가. 이정표 등 이곳이 ‘큰재’임을 알리는 시설물이 일절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맞다. 핸드폰의 앱을 확인해보니 해발고도를 290m로 찍고 있다. 아직도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한다는 얘기다.

▼ 탐방로는 또 다시 아래로 향한다. 다음에 올라야 할 큰재는 조금 전에 올랐던 고갯마루보다 훨씬 더 놓은 데도 말이다. 그 내리막길이 250m 밖에 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다시 시작된 오르막길은 순하게 시작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파르게 변해버린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탐방로는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위로 향한다.

▼ 대야리를 통과한지 30분 만에 ‘큰재(성재, 400.8m)’에 올라설 수 있었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다리품을 조금만 더 팔면 ‘대야산성’이라는 문화재 하나를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외씨버선길의 여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야산성’을 별도의 이정표(구구새민박/ 대야산성/ 대야본동)에 표기해 놓은 이유이다.

▼ 외씨버선길에서도 ‘대야산성’ 안내판을 세워놓기는 했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퇴뫼식 산성(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산성)’으로 둘레 400여m의 성벽이 4.5~5m 높이로 쌓여있는데, 지금은 모두 붕괴되고 남쪽성벽 일부와 서쪽성벽 일부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란다.

▼ 배낭을 벗어놓은 채로 대야산성에 다녀오기로 했다. 무너져버린 옛 성곽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조상이 남긴 소중한 문화재를 그냥 지나쳐서야 되겠는가. 산성으로 가는 길은 ‘대야산성 안내판’의 뒤로 열린다. 탐방로는 밧줄난간을 설치하는 등 잘 닦아놓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는 않은 듯 웃자란 잡초와 잡목들이 가는 길을 자꾸 훼방 놓는다.

▼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이정표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그럼 이정표(전망대↑/ 대야산성→/ 큰재↓)를 한번 살펴보자. 큰재에서 올라왔고 전망대로 가는 길이니 두 지점의 방향표시는 맞다. 하지만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대야산성을 찾겠다면 이는 백발백중 허탕이다. 오른편에서는 성곽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야산성의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높이가 4~5m쯤 되어 보이는 성벽이 나타날 것이다. 이게 바로 ‘대야산성’이다. 삼국시대 남한강 뱃길을 지키기 위한 성으로, 온달성과 왕검성 사이에 축조됐다고 한다. 현재는 남쪽과 서쪽 성벽 일부만 남아 있는데, 이곳은 서쪽 성벽의 일부다.

▼ 성벽을 둘러본 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야산성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만난 정체모를 바윗돌. ‘이 뭐꼬’라는 스님들이 즐겨 사용하는 화두가 떠오를 정도로 그 용도가 궁금하다. 귀가 후 찾아낸 정보에는 출토 유물로 회백색연질의 기와편과 적갈색연질·회청색 경질의 토기편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 큼지막한 돌멩이들이 널브러져 있는 정상을 지나자 헬기장보다도 훨씬 더 넓어 보이는 전망대가 나온다. 하지만 관리를 하지 않는 듯 가시덤불로 가득 차있어 망원경까지 갖춘 조망처까지 나아가는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 전망대에 올라서면 굽이굽이 흘러가는 남한강의 물길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을 끼고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의 풍경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한 폭의 캔버스를 펼쳐 놓은 듯하다. 참고로 왼편에 보이는 물줄기는 남한강이다. 영월읍내에서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이 됐다. 그보다 조금 좁아 보이는 오른편은 ‘옥동천’이다. 두 물길은 요 아래에서 합쳐지면서 두물머리를 만든다.

▼ 두물머리에서 옥동천을 물을 보탠 남한강 물길은 이제 강원도를 벗어난다. 그리고는 충청도 땅을 휘감아 돌다 경기도를 지나면서 한강이 되고 서해로 흐른다. 반세기 전만 해도 저 물줄기는 뗏군들의 애환을 싣고 흐르던 뗏목길이었다. 정선 여량에서 출발한 뗏목이 동강에 오르면, 황새여울과 된꼬까리 같은 급류가 간혹 그곳을 지나는 뗏군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 볼 것을 다 보았으면 다시 길을 나설 차례이다. 큰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구구새민박 방향으로 내려선다. 아까 올라왔던 상황에 비하면 길은 엄청나게 고운 편이다. 널찍한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가래골의 해발이 275m이니 서둘러 고도를 낮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하면 ‘가재골 쉼터’에 내려선다. 고개를 넘느라 고생한 이들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벤치를 놓아두었는가 하면, 외씨버선길 알림판을 세워 탐방로에 대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

▼ 놓쳐서는 안 될 시설물인 이정표(관풍헌 17.6㎞/ 김삿갓면사무소 6㎞)도 보인다. 13길(관풍헌가는 길)의 완주를 인정받으려면 이 이정표를 담은 인물사진을 찍어두어야 하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가재골(可在洞)’은 풍수학적인 의미로 ‘가히 살아남을 만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워낙 물이 맑아 가재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아무튼 이곳은 김삿갓면 사람들조차 접근이 쉽지 않던 오지였다. 사람의 발길이 뜸하니 청산녹수(靑山綠水)의 자연이 훼손되지 않았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청산이 만들어내는 그늘진 암반 위로 푸른빛 가득 담은 옥수가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 이렇게 좋은 풍광을 그대로 내버려 둘 현대인들이 아니다. 북한산 자락의 고급 주택보다도 더 반듯한 전원주택이 떡하니 들어앉았다. 하긴 이곳은 정감록(鄭鑑錄)에서 말하는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하나. 삼재(三災), 즉 전쟁이나 기근, 괴질을 피할 수 있는 곳이니 돈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 예스러움을 퐁퐁 풍기는 저 주택은 십승지를 찾아온 이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조선 후기 사회혼란 때 정감록에 심취해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평안도 출신 박씨들의 후손일지도.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말하는 십승지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이 바로 가재골이라니 말이다. 참고로 십승지란 오랜 전란에 시달린 이 땅의 민초들이 찾던 이상향을 말한다.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질병의 침입에도 끄떡없으며 자연재해에서도 무탈한 복지(福地)가 바로 십승지다.

▼ 외지인들이라고 해서 이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도로가 뚫린 이후로는 자동차로도 접근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피크닉용 테이블을 물속에 펼쳐놓고 가족단위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 가재골을 일컫던 ‘오지’라는 단어는 이제 옛말이 됐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시멘트도로로 바뀐 지 꽤 되었기 때문이다. 영춘 장날 짐을 지고 다니던 토끼길도 지금은 등산로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길은 이제 우리처럼 둘레길을 걷는 나그네들 차지가 되었다. 아무튼 새로 뚫린 도로를 따라 얼마간 내려가자 시야가 툭 트인다. 남한강과 맞닿은 천애절벽의 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코너에는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공들여 쌓아올린 4기의 돌탑 앞에 의자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대신 ‘산은 그대고 그대는 강이니 깨끗이 즐겨달라’는 단서를 달았다. 의자에 적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문구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 길은 천애의 낭떠러지로 나있다. 도저히 길을 낼 수 없는 상황인데도 사면을 깎아 외길을 만든 것이다. 토목 공법의 발전이 만들어낸 역사라 하겠다. 그 길을 따라 잠시 걷자 ‘가재골교’가 나온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 가재골 사람들은 장마 때만 되면 며칠씩 고립되는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옥동천에 놓인 잠수교가 물에 잠겼기 때문이다.

▼ 굽이굽이 흘러가는 남한강 물줄기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옛날 영월의 특산물인 담배·콩·옥수수 등의 잡곡을 실은 돛단배가 서울 광나루로 가던 물길이다. 뱃사공들이 돌아올 때는 소금·광목·석유 등의 생필품을 싣고 왔다. 여울목에서는 줄로 끌어올리고 물이 많은 곳은 노를 저어 올라오며, 곳곳에 있는 작은 포구에서 물건을 팔았다.

▼ 이 다리가 새로 놓이기 전, 각동교로 이어주던 좁은 시멘트도로는 차단되어 있었다. 이유는 ‘안전사고 위험이 있는 급경사지’라서. 하지만 보다 큰 이유는 2019년 다리를 새로 놓으면서 물에 잠길 위험이 있는 잠수교의 통행을 막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 남한강과 옥동천이 합류하는 저곳은 옛날 ‘맛밭나루터’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주민들이 남한강을 건너던 나루터였다. 저곳과 맞은편 각동에서도 보부상이나 도부꾼 뱃사공들이 배를 정박시키고 물건을 팔았는데, 강물이 굽어 도는 곳으로 배가 드나든다고 해서 ‘뱃나드리’라 부르기도 했단다.

▼ 다리를 건넌 다음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 595번 지방도로 올라서게 된다. 5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이정표 하나가 눈길을 끈다. 외씨버선길에서 세운 이정표. 탐방로는 이곳에서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우린 이곳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더 이상의 진행은 무의미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 뒤돌아볼라치면 남한강과 옥동천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저곳은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특히 쏘가리의 입질이 좋다는데, ‘영월군수배’ 전국 쏘가리 낚시대회가 열리기도 한단다. 그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대야산성이다. 험준한데다 시야까지 뻥 뚫리니 산성이 자리 잡기에 저만한 곳도 없겠다.

▼ 탐방을 포기하고 고씨동굴관광지로 가는 길,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각동교(角洞橋)’가 나온다. 각동리와 진별리 사이의 남한강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다리이다. 저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맛밭에서 나룻배(찻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니 두 마을로 봐서는 엄청나게 고마운 다리라 하겠다.

▼ 다리의 양쪽 입구는 김삿갓이 지키고 있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삿갓과 두루마기, 괴나리봇짐, 지팡이 차림이다. 그래, 혹자는 이 길을 ‘김삿갓길’이라 부르기도 했다. 김삿갓이 세상의 번뇌를 훌훌 털어버린 채로 지나다녔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 길은 예사로운 길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길이자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왕에 찾아온 나 또한 그런 심정이 되어 걸어본다.

▼ 이제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여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레프팅을 즐기는 남한강. 그 건너에는 태화산이 튼실한 등성이를 자랑하며 뻗어 있다. 

▼ 젊은 김삿갓은 백일장 참석을 위해 이 길을 통해 관풍헌으로 갔을 것이다. 부푼 꿈을 안고 걸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난 세상을 등진 이후의 심정이 되어 걸어본다. 첫 걸음은 김삿갓의 ‘풍류’를, 또 한 번의 발걸음에 김삿갓의 ‘해학’을, 또 다시 내딛는 한 발에는 김삿갓의 ‘무소유’ 정신을 실어본다. 그리고 난 나이 칠십에 또 다른 무엇을 깨달아간다.

▼ 버스정류장에 김삿갓의 ‘내 삿갓’이란 시가 적혀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그는 우연히 쓴 삿갓이 평생의 반려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그의 길이자 도반(道伴)이라고나 할까? 누군가는 ‘사람살이가 길을 낸다’고 했다. 그 길이 모여 역사를 이루고, 역사가 다시 길을 낸다고도 했다. 김삿갓이 걸었을 이 길도 그 가운데 하나라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의 사념으로 걸을 따름이다. 보다 바람직한 사람의 길을 찾아가면서...

▼ 날머리는 ‘고씨동굴 관광지구’

각동교를 건넌지 10분 만에 ‘고씨동굴 관광지구’에 도착하면서 트레킹을 마무리한다. 이곳은 관광지와 숙박 시설이 밀집해 있어 관광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다리 건너에는 ‘고씨굴(천연기념물 제219호)’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과 싸운 고씨 일가가 피난한 곳이라 하여 이름 지어진 석회동굴이다. 하지만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코로나로 인해 입장 인원을 제한하는 탓에 1시간 이상이나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1.05km. 엄청나게 더디게 걸은 셈이다. 아니 그만큼 힘든 코스였다고 보는 게 옳겠다.

▼ 완주는 비록 포기했지만, 글로서나마 외씨버선길 240km를 완성시키기 위해 관풍헌(觀風軒)의 풍경을 트레킹 도반인 ‘몽중루’님의 사진으로 대신해본다. 외씨버선길의 종점인 관풍헌은 조선시대 영월 객사의 동헌(東軒)으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端宗)이 피눈물을 흘린 장소다. 이 지역 서강에 둘러싸인 청령포에 유배됐던 비운의 단종은 홍수가 나자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17년 짧은 생을 마감했다. 또 다른 사람은 김삿갓이다. 스무 살 나이의 김병연은 이곳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한다. 그리고는 덜컥 장원을 했다. 그런데 자신이 지탄한 대상이 조부 김익순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삿갓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하늘을 보지 않으며 지낸 비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 비극이 시작된 곳이 이곳 관풍헌이다.

▼ 마당 한켠에는 2층 누각인 ‘자규루(子規樓, 총무님 사진을 빌려왔다)’가 있다. 세종 때 영월 군수 신권근(申權近)이 세운 누각으로, 청령포에 물이 범람하자 이곳 영월객사로 거처를 옮긴 단종이 이 누각에 자주 올라 두견새 우는 소리에 자신의 한을 실어 시로 남기기도 했다. ‘자규사(子規詞)’ 및 ‘자규시(子規詩)’인데 그 내용이 어찌나 애절했던지 후세 사람들이 누각의 이름을 매죽루(梅竹樓)’에서 자규루로 바꾸었다고 한다. 둘 가운데 자규사를 옮겨본다. <월백야촉혼추(月白夜蜀魂啾), 함수정의류두(含愁情依榴頭), 이제비아문고(爾啼悲我聞苦), 무이성무아수(無爾聲無我愁), 기어세상고노인(寄語世上苦勞人), 신막춘삼월자규루(愼莫登春三月子規樓) ⇒ 달 밝은 밤 소쩍새는 슬피 우는데, 수심에 젖어 누각에 기대어 있으려니, 네가 슬피 울어 듣는 나도 괴롭구나, 네가 울지 않으면 내 시름도 없으련만, 보시오 세상 근심 많은 이들이어,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 마소>

 

외씨버선길(12), ‘김삿갓 문학길

 

여행일 : ‘21. 7. 17(토)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일원

여행코스 : 김삿갓문학관→김삿갓묘→조선민화 박물관→김삿갓계곡→묵산미술관→와석1리 마을회관→가랭이봉→김삿갓면사무소(소요시간 : 12.4km/ 실제는 13.11km를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열한 번째 길인 ‘마루금 길’을 걷는다. 3개로 나누어진 영월 권역의 두 번째 구간으로, 방랑시인 김삿갓이 숨어살던 지역을 지난다고 해서 ‘김삿갓 문학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구간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김삿갓 계곡’을 따른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옛날 김삿갓이 걸었음직한 길을 걷는 도중에는 그의 문학도 함께 되새겨볼 수 있다. 또한 조선민화박물관이나 묵산미술관 등 길에서 만나는 이색 박물관에서는 다양한 문화 체험까지 가능하다. 눈만이 아니라 가슴까지도 알차게 채워갈 수 있는 명품 둘레길이라 할 수 있겠다.

 

▼ 들머리는 김삿갓 문학관(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913-1)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제천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과 38호선을 타고 일단 영월읍으로 온다. 영월교차로에서 88번 지방도로 옮겨 춘양 방면으로 내려오다 와석상회(김삿갓면 와석리 598) 앞에서 오른쪽 28번 지방도로 바꿔 들어서면 얼마 지나니 않아 김삿갓 문학관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개관한 지 18년째를 맞은 김삿갓문학관에는 김삿갓 관련 연구 자료와 유물, 서적 등을 비롯해 주거지 복원 모형, 가계도, 김삿갓이 생전에 착용했던 신발과 삿갓 등이 전시돼 있다.

▼ 12길(김삿갓문학길)은 김삿갓문학관을 출발해 12.4km를 걸은 다음 ‘김삿갓면사무소(영월군)’에서 끝나는데, 코스 대부분이 냇가와 들녘을 따르지만 가랑이봉이라는 난관을 만나기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외씨버선길에서 가장 빼어난 구간의 하나로 12길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파른 산길에서 고생 좀 하는 것을 무서워해서야 되겠는가. 고진감래라는 옛말도 있지 않는가.

▼ 구간의 경계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영월객주’ 앞에 세워져 있었다. 구간난이도는 ‘중’. 주요 볼거리로는 김삿갓묘역과 조선민화박물관, 메기못, 가랑이봉을 꼽고 있다.

▼ 객주 옆에 머리를 빡빡 밀은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마에는 청산영리녹포란(靑山影裡鹿抱卵), 백운강변해타미(白雲江邊蟹打尾), 석양귀승계삼척(夕陽歸僧髻三尺), 누상직녀낭일두(樓上織女閬一斗)라고 새겨놓았다. 이 시에는 ‘허황된 시(虛荒詩)’라는 딱지가 붙어있다. 사슴이 알을 품고, 게가 꼬리를 치며, 중이 상투를 틀고, 계집에게 불알이 있을까를 묻는 내용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요즘은 ‘오도송(悟道頌·깨달음의 노래)’의 반열에 올려놓는 이들도 있다. 허망하고 거짓된 인간의 모습이 헛된 말장난 속에 숨어있다면서 말이다.

▼ 붓으로 난간을 두른 ‘노루목교’ 다리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어서 28번 지방도를 따라 100m쯤 더 걸으면 ‘김삿갓 유적지’이다.

▼ 유적지 입구에는 ‘정암 박영국(靜岩 朴泳國)’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영월을 찾아서’라는 향토지를 발간하여 영월 향토사연구의 체계를 정립한 사람으로, 난고 김삿갓이 영월로 찾아오게 된 내력을 밝혔는가 하면, 그가 살던 집터와 묘비도 찾아냈다고 한다. 또한 김삿갓이 방랑생활을 하며 읊은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찬 유시(遺詩)들을 발굴해 ‘김삿갓 유산’이란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김삿갓 유적의 발굴과 보전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나 할까? 그런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빗돌일 것이다.

▼ 길가에 늘어선 김삿갓 시비(詩碑)들을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땔나무가 없다는 핑계로 길손을 내쫓는 개성의 인심을 비꼬거나, 한자의 운을 빌려 세상사의 흐름을 재미나게 표현한 시구 등 김삿갓의 재치를 엿볼 수 있다.

▼ 김삿갓의 유적지임을 알리는 빗돌 앞에 도포(道袍) 차림의 멋쟁이 하나가 서있다. 그런데 삿갓이 아니라 보통의 갓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분위기에 안 맞는 풍경이라서 다가가보니 겨우 13살에 장가를 간 꼬마신랑을 놀려먹는 시가 적혀 있었다. 김삿갓이 아니라 그가 놀려먹은 꼬마신랑이었던 것이다.

▼ 김삿갓의 시 ‘환갑연(還甲宴)’을 표현한 조형물이다. <피좌노인불사인(彼坐老人不似人, 저기 앉은 저 노인은 사람 같지 않으니), 의시천상강진선(疑是天上降眞仙, 아마도 하늘 위에서 내려온 신선일 테지), 기중칠자개위도(其中七子皆爲盜, 여기 있는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니), 투득벽도헌수연(偸得碧桃獻壽筵,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를 훔쳐다 환갑잔치에 바쳤네)> 한 수의 시로 잔칫집 자식들을 놀려대다가, 장수의 상징인 ‘서왕모의 선도복숭아’로 환갑분위기를 살려주는 김삿갓의 재치가 돋보이는 시다.

▼ 조금 더 들어가면 김삿갓의 무덤이 나온다. 우리에게 김삿갓으로 더 익숙한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은 할아버지가 1811년 홍경래의 난에 연루돼 집안이 망하자 강원도 영월로 옮겨와 숨어 살았다. 집안의 내력을 모르고 성장한 김삿갓은 과거에 응시해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했다. 이후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으로 20세 무렵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길에 들어선다. 이때부터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다니며 수많은 시를 남겼다. 1863년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숨을 거두자 그곳에 묘를 썼으나 3년 후 둘째 아들 익균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 삿갓선생의 조롱박에서는 감로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걷다 보면 가장 당기는 것이 시원한 물이다. 물 좋은 대한민국이 옛말이라 느껴질 정도로 집집마다 정수기물을 마시니 미네랄, 철분이 풍부한 약수는 생소해진 지 이미 오래. 이곳 역시 약수는 아니다. 하지만 청량감만은 일품이니 준비해 간 물통을 꼭꼭 채워보자. 이따가 마주칠 가파른 오르막 구간에서는 구원의 생명수로 이만한 게 없을 테니 말이다. 참! 김삿갓의 생가로 가는 길은 저 삿갓선생의 뒤편으로 열린다. 하지만 다녀오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5년 전에 이미 다녀왔기 때문이다.

▼ 10분 남짓 유적지를 둘러본 다음 도로(28번 지방도)로 되돌아와 영월읍 방면으로 향한다. 이어서 만나게 되는 곳은 ‘김삿갓교’. 이름에 걸맞게 김삿갓 조형물이 보초를 서고 있다. 김삿갓 시비와 돌탑이 세워져 있는 다리의 초입(이정표 : 김삿갓면사무소 11.9㎞/ 김삿갓문학관 0.5㎞)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탐방로가 다리를 건너지 않고 천변을 따르기 때문이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돌탑의 오른편으로 난 소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앞사람의 꽁무니를 뒤쫓던 우리 부부는 무심코 다리를 건너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류를 알아차렸지만 그냥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형식에 억매이지 않고 살다간 김삿갓을 흉내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부터는 발걸음을 빨리하거나 정해진 길만을 고집하지 않겠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걷고 유유자적하면 그만. 천천히 걷다가 배고프면 어디든 앉아서 도시락을 먹고, 솔솔 잠이라도 오면 나무에 기대어 잠깐 졸면 그만이다. 그러니 구태여 숲속으로 난 정규 탐방로를 고집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숲길보다 시야가 더 트이는 도로를 따르는 이유이다.

▼ 유적지를 출발한지 28분 만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보초를 서고 있는 ‘조선민화박물관’에 도착했다. 2000년에 개관한 민화전문의 군립박물관으로 어해도와 화조도, 까치와 호랑이 등의 작품을 상시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문이 닫혀있어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19세 미만 출입금지인 춘화방에는 250여점이나 되는 춘화가 전시돼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사회에서 뒷방으로 전락했던 남녀상열지사의 그림을 어디 그리 쉽게 구경할 수 있겠는가.

▼ 큼지막한 바위들이 널린 ‘김삿갓 계곡’의 경관은 자못 빼어나다. 하긴 김삿갓이 ‘무릉계’라고 칭했을 정도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거기다 물이 차갑고 깨끗한데다가 수심까지 깊지 않으니 여름철이면 이곳은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그런데도 오늘은 한산하기 짝이 없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이 몰고 온 새로운 풍경일 것이다.

▼ 빼어난 계곡미에 빠져 걷다보면 어느새 ‘싸리골’에 이른다. 거석리(擧石里, 든돌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쌀농사가 가능한 20여 마지기의 논이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쌀골(米洞)’로 불리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싸리골’로 변했단다. 이곳은 또 정감록에서 얘기하는 십승지(十勝地)로도 유명하다. <寧越正東上流 可臧亂踪 無髮者先入則否, 영월 정동쪽 상류로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만한 곳이나 수염없는 자가 먼저 들어오면 안 된다>라는 글귀를 쫓아 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마을을 이루며 살았단다.

▼ 탐방로는 싸리골에서 이름조차 없는 다리를 건넌다. 아니 이 다리를 건너 정규탐방로와 다시 만난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겠다. 아무튼 이후부터는 마포천(김삿갓계곡)을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걷게 된다. 참! 정규탐방로를 벗어난 덕분에 우린 12길의 첫 번째 인증지점인 ‘물레방아’를 찾아보지 못했다. 거기다 빼먹은 구간이 하필이면 12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니 어쩌란 말인가. 김삿갓 흉내 좀 내다 망했다.

▼ 벼랑이라도 앞을 막을라치면 산비탈을 치고 오르기도 한다. 그마저도 폭이 좁은데다 기울기까지 해서 중심을 잡아가며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참! 걷는 도중 ‘양수사터’라도 눈에 띌까 해서 두리번거려 봤지만 찾을 수는 없었다. 옛날 호적과 부역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사냥과 고리를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양수척(陽水尺, 무자리)들이 살던 곳이 싸리골 아래에 있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 ‘개인 사유지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영월구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나무랄 수도 없는 이기심이 아닐까 싶다.

▼ 냇가로 내려섰으니 어찌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 손을 씻는 것은 기본. 땀이라도 흘렸다면 세수까지 해보자. 이렇듯 김삿갓문학길에는 느림의 미학이 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순한 산을 따라 길이 나있고, 시원하고 넓은 계곡이 끝없이 이어진다. 계곡엔 멋들어진 조각 같은 바위가 아무렇지 않게 솟아 있다. 복잡함이나 시끄러움보다 맑고 깨끗한 쪽. 느리고 조용한 것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곳이 영월의 외씨버선길이다. 참! 그러고 보니 이곳 김삿갓면은 강원도에서 처음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었다.

▼ 싸리골을 나선지 20분. ‘삿갓교’에 도착했다. 첨부된 지도에 ‘꽃비농원’으로 표시된 지점(이정표 : 김삿갓면사무소 8.3㎞/ 김삿갓문학관 4.1㎞)이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삿갓교를 건넌다.

▼ 이후로도 탐방로는 마포천을 따른다. 다만 오른편에 꿰차고 있던 게 이번에는 왼편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고요한 숲길을 걷는 집사람은 아무 말이 없다.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걷기 삼매경에 빠진 것일까? 나 역시 천천히 걸으며 흙의 촉감을 느끼고 자연의 향기를 음미해본다. 그러자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버린다.

▼ 하지만 이 구간에서는 가파른 산자락을 10분 이상 치고 올라야만 했다. 생각보다는 힘든 구간이라고 하겠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이곳 영월구간의 특징은 심심찮게 길을 에둘러놓았다는 점이다. 이 지점도 역시 사유지를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오를 만큼 올라왔으니 이젠 내려가야 할 차례. 이곳 ‘생골’의 해발고도가 345m나 되니 내려가는 길 또한 제법 길다. 하지만 눈은 즐겁다. 내려가는 내내 시야가 툭 트이면서 산촌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서자 ‘든돌마을’이다. 김삿갓문학관이 있는 노루목으로 올라가는 ‘골어귀’와 ‘싸리골(쌀골)’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든돌’이란 지명은 옛날 아기장수가 힘자랑을 하면서 집채만 한 바위를 들어다 작은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삼신할머니가 치마폭에 담아다 이곳에 옮겨놓았다는 전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순수한 우리말이었던 ‘든돌’은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거석리(擧石里)’로 바뀌었다.

▼ 든돌마을 앞에는 작은 현수교가 놓여있었다. ‘묵산미술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박물관은 정선과 김홍도, 이중섭의 작품을 비롯해 조선시대와 근현대 미술품을 고루 갖췄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문이 닫혀있을 게 뻔해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자화상을 그리는 체험도 해볼 만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든돌마을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도로변을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든돌’을 만나게 된다. 집채만 한 바위가 몇 개의 작은 바위 위에 올라앉은 모양새라는데, 이게 공중에 떠있기라도 한 듯 명주실을 넣고 잡아당기면 끊어지지 않고 나온단다. 신기한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눈앞에 들어난 바위는 그런 형상을 그려내지 못했다. 난리가 났을 때 마을사람들이 이 바위 밑에서 피난까지 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수해와 도로공사로 인해 많이 묻혀버렸기 때문이란다.

▼ 도로를 따라 6분쯤 걸으면 ‘와석1교’.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김삿갓계곡의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이곳에 화장실과 함께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우리 역시 이곳에서 준비해간 간식을 먹었다. 이때 함께 걸어왔던 갑장이 ‘김삿갓 북한 방랑기’ 얘기를 꺼냈다. 예전 TV가 귀하던 시절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는데 무척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초등학교 시절부터 듣기 시작했는데 이게 나이 50을 넘길 때까지 계속되었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왜 내 귀에는 생소할까? 평소에도 라디오나 TV 등을 별로 보지 않는 내 습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한창 인기가 있었다는 60~70년대는 공부하기도 바쁜데 라디오를 들을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 이 구간도 역시 잘 닦여있었다. 널찍한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거기다 비탈진 곳에는 데크로드까지 설치해 놓았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88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곡동교(이정표 : 김삿갓면사무소 5.2㎞/ 김삿갓문학관 7.2㎞)’에 이른다. 다리 근처 널따란 공터에는 ‘김삿갓휴게소 체험캠핑장’이 들어서 있었다. 4개의 카라반과 16개의 사이트를 보유하고 있는데 김삿갓계곡의 하류인 마포천을 곁에 두고 있어 물놀이 나온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 곡동교는 김삿갓계곡의 하류인 마포천이 숨을 다하는 곳이다. 다리 바로 아래서 남한강 줄기인 ‘옥동천(玉洞川)’으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포천에서는 물놀이와 다슬기잡이를, 반면에 물이 많은 옥동천에서는 낚시를 즐긴다.

▼ 다리를 건너면서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삼거리를 만난다. 왼편은 김삿갓유적지로 가는 28번 지방도. 삿갓을 형상화한 대문이 정겹다. 바람 무늬는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돈 김삿갓을 의미할 것이다.

▼ 조금 더 도로를 따라다가 ‘주문교’ 조금 못미처서 왼편으로 갈려나가는 마을길로 들어선다. 카페나 펜션 할 것 없이 외국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목조건축물로 가득한 ‘와석1리’다. 참고로 이곳 ‘와석리’는 비기서인 정감록(鄭鑑錄) 신봉자들이 살았던 삶의 터전이었다. 정감록은 물론이고 조선 명종 때 남사고가 지은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菴山水十勝保吉之地)’에서까지 영월의 정동인 이곳을 어지러운 세상에서 난리를 피할 수 있고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10승지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마을은 와인리, 거석리(들돌), 두릉골, 싸리골, 곡골, 노루목, 어둔, 미사리 등의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 마을회관 앞에 세워놓은 이정표(김삿갓면사무소 4.9㎞/ 김삿갓문학관 7.5㎞)는 놓쳐서는 안 될 중요 시설물이다. 12길(김삿갓문학길)의 완주를 증명해 줄 2번째 인증물이기 때문이다.

▼ 탐방로는 이제 농로를 따른다. 옥수수 밭이 주를 이루는 왼편은 강원도의 전형적인 풍경. 하지만 널따란 들녘으로 이루어진 오른편은 이와는 상반되는 그림이다. 그 가운데 ‘들모랭이’가 들어있었다. 용마(龍馬)의 무덤이 있었다는 마을이다. 아까 얘기했던 ‘든돌’의 아기장수가 힘센데다 똑똑하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장차 나라의 큰 역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죽인 다음 고지기재 밑 도일바위 근처에 묻었단다. 이 아기장수가 죽자 이웃 마을인 외룡리의 용담에서 용마가 나와 사흘 동안이나 울부짖다가 죽었고, 그 용마의 무덤을 이곳 들모랭이에 썼다는 것이다.

▼ 들모랭이를 지나서도 계속해서 농로를 따른다. 그러다보니 오르내림이 없이 평탄하게 이어진다. 묵은 생각을 정리하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조용한 가운데 소소한 행복! 사색도 즐겁고, 아무 생각 없이 빈둥빈둥 즐기는 것도 하나의 행복이 아닐까?

▼ 잠시 후 동남아에서나 볼 법한 지붕을 얹은 정자를 만났다. 편액은 ‘연지 테마단지’.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와 관련된 기사가 눈에 띈다. 마을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농촌관광·체험시설 확충사업의 일환으로 2008년에 조성했는데, 친환경 쌀 생산단지(10ha)와 연꽃단지(4,100㎡), 메기 못(3,000㎡), 두릉골 생태등산로(1km)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벼가 심어진 논이 전부. 13년이 지난 지금은 옛 얘기로만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 몇 걸음 더 걷자 위에서 얘기한 ‘메기못’이 나온다. 안내판은 옛날 이 소(沼)의 옆에 소를 매어놓았는데 큰 메기가 나와서 소를 잡아먹었다는 전설을 적고 있다. 명주실 한 꾸리가 다 들어갈 정도로 물이 깊었다는 또 다른 얘기도 적었는데 글쎄다. 갈대가 자라고 있는 것이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조금 더 진행하자 이번에는 ‘옥동천’과 마주한다. 그리고는 제방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다 ‘김삿갓송어장’ 앞에 이른다. 이정표(김삿갓면사무소 3.4㎞/ 김삿갓문학관 9㎞)는 이제 종점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 두릉골(杜陵谷) 입구에서는 마을길은 버리고 계곡 옆으로 난 산길로 접어든다. 이 구간은 조금 위태롭기는 해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니 보는 재미는 더 쏠쏠하다. 발아래로 수십 미터의 절벽이 아찔한데, 좁은 산비탈 길은 그 위로 아슬아슬하게 나있다. 절벽에 뿌리를 박고 옆으로 자란 소나무와 기암괴석을 곁을 지나기도 한다. 절경 지나 절경의 연속이다.

▼ 길이 위태하니 안전을 비는 마음도 그만큼 간절했을 것이다. 길가에 작은 돌탑들을 서너 개나 쌓아올렸다. 생김새만 보면 심심풀이 삼아 쌓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저 돌멩이 하나하나에는 간절한 소망이 가득할 것이다. 세상에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 멧돼지의 옹달샘도 만날 수 있었다. 이 길은 옛날 보부상이 걷던 길이다. 지금보다 숲도 더 울창했을 거고 야생동물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을 텐데 산길을 어떻게 지나다녔을지 궁금하다. 저런 멧돼지 놀이터만 보고도 이렇게 오싹거리는데 말이다.

▼ 옥동천 제방으로 올라선지 18분. 삼거리(이정표 : 옥동←/ 지르네→/ 와석송어장↓)인 ‘가랭이봉 입구’를 만났다. 왼편은 옥동(가랭이봉), 그리고 오른편은 ‘지르네’로 연결되는데 어디로 가더라도 날머리인 김삿갓면사무소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오른편은 하천을 횡단해야 되기 때문에 물이 불어날 경우 길이 막힌다는 산행대장의 귀띔이 있기는 했다. 오늘은 그저 발목이 잠기는 수준이었다지만 말이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이 가팔라진다. 아니 무지막지하게 가팔라졌다.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이석암(‘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 선생은 이런 길을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표현을 썼었다. 경사 때문에 상채를 숙이다보니 코가 땅에 닿을 정도까지 됐다는 것을 에둘러서 표현했을 것이다. 둘레길 관리자들도 이게 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붙잡고 올라가라며 드디어는 밧줄까지 매달아 놓았다.

▼ 숨이 턱에 차서 오르길 14분. 능선에 올라서면 이정표(옥동/ 지르네)가 가리키는 옥동방향을 따른다. 잠시 후 가랑이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인 ‘와석전망대’가 나오지만 그대로 통과한다. 시야가 트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구태여 정상까지 올라가 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후로 더 이상의 오름은 없다. 그렇다고 길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산비탈에 길을 내다보니 폭이 좁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비탈지기 때문이다. 자칫 한눈이라도 팔다간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그래선지 아래 사진처럼 밧줄을 매달아놓기도 했다.

▼ 그렇게 얼마간 더 걷자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사거리(옥동↑/ 약수터←/ 정상↙/ 지르네↓)를 지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지르네전망대(이정표 : 김삿갓면사무소 1.4㎞/ 김삿갓문학관 11㎞)’가 길손을 맞는다. 하지만 이름만 전망대이지 지르네는 숲에 가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겨울철 전용의 전망대일지도 모르겠다.

▼ 조망에 대한 아쉬움은 ‘밀골전망대’에서 떨쳐버릴 수 있었다. 낭떠러지 위로 나가자 시야가 툭 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예밀1리(밀골)’의 산촌 풍경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밀골’은 고려 의종 때 밀주라는 관청이 있던 곳으로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난리를 피하면서 적을 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고 한다. 마을회관 근처에는 당시 고을 원이 머무르던 ‘원터’도 남아있다고 했다.

▼ 이 구간에서는 울창한 소나무 숲도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굴곡이 심하다. 직각으로 줄기를 꺾어 사선으로 뻗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밑동부터 줄기 두개가 휘어져 뻗었다. 그런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김삿갓을 떠올렸다면 과민반응일까? 그의 기구한 인생이 나무로 자랐다면 딱 저와 같았지 않았을까 싶다. 하긴 그런 삶이 조선후기 문학에 작지만 뚜렷한 한 획을 그었지만 말이다.

▼ 산으로 들어선지 1시간. 산자락을 빠져나오자 옥동천의 물굽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옥동천(玉洞川)은 상동읍(영월군) 구운산(九雲山, 1,346m)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대야리 맞밭나루(김삿갓면)에서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길이 50.7km의 하천이다. 영월의 젓줄이기도 한 이 하천은 옥동리 부근에서 심한 곡류를 하면서 하천 양안에다 널찍한 하안단구를 만들어내는데, 그 현장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 강가로 내려서면 옥동천변의 28번 지방도이다. 옥동천에는 같은 이름(예밀교)의 다리가 두 개나 놓여있다. 그중 옛 다리는 보행자 전용. 수세미 터널을 둘러 관광 상품화 했다. 그러니 어찌 건너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외씨버선길은 다리 입구에서 왼편으로 나있다는 점도 잊지 말자. 하긴 들머리에 ‘가랑이봉 등산로’ 안내판과 함께 이정표(김삿갓면사무소 1.1㎞/ 김삿갓문학관 11.3㎞)를 세워놓아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 다리 건너편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곳 예밀마을이 ‘포도’로 유명하다는 것을 알리는 각종 조형물들을 배치했다. 참고로 예밀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라고 한다.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도 풍부한 데다 석회암지대라는 특성도 갖고 있단다. 덕분에 포도가 잘 자라며, 이게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품질 인증을 받기도 했다. 2001년부터 마을 자체적으로 포도축제를 개최하면서 ‘예밀 포도마을’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김삿갓포도’는 당도가 높아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단다.

▼ 날머리는 김삿갓면사무소(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리 266)

예밀교 입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으로 난 정규탐방로를 따른다. 잠시 후 덕가산(823m)의 산줄기를 배경삼은 ‘옥동초등학교’가 보이는가 싶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김삿갓면사무소가 나타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이 고을의 원래 이름은 하동면(下東面)이었다. 조선시대부터 불리어온 이름이다. 그러다가 1982년 김삿갓의 무덤이 와석리(어둔마을)에서 발견되면서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09년 고을 이름을 아예 ‘김삿갓’으로 바꿔버렸다. 그나저나 오늘 트레킹은 3시간 50분이 걸렸다. 물론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이다. 핸드폰의 앱은 13.11km를 찍고 있다.

 

외씨버선길(11), ‘마루금 길

 

여행일 : ‘21. 7. 3(토)

소재지 : 경북 봉화군 물야면과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일원

여행코스 : 상운사→늦은목이→선달산→회암봉→어래산→곰봉삼거리→김삿갓문학관(소요시간 : 15.4km/ 실제는 생달마을에서 남대리까지 12.96km를 5시간 1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열한 번째 길인 ‘마루금 길’을 걷는다. 3개로 나누어진 영월 권역의 첫 구간으로,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지난다고 해서 ‘마루금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구간도 역시 보부상들이 물건을 팔러 다니면서 걸었던 길이다. 하지만 ‘늦은목이’부터는 옛길과 헤어져 1천 미터가 넘는 고산준령의 마루금을 따른다. 이는 줄곧 보부상과 연결시켜 온 ‘외씨버선길’의 콘셉트에 어긋나는 잘못된 선택이 아닐까 싶다. 11길을 조성한 영월군이 보부상과 연이 덜 닿았는지는 몰라도 전체적인 맥락을 흐트러뜨려서야 되겠는가.

 

▼ 들머리는 생달마을 버스정류장(봉화군 물야면 서벽리 산 103-3)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을 타고 일단 풍기읍으로 들어온다. 이어서 931번 지방도를 타고 순흥면·단산면·부석면을 거쳐 물야면소재지(오록리)까지 온 다음, 이번에는 915번 지방도로 바꿔 타고 백두대간휴양림 방향으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물야저수지의 상류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곧이어 생달마을에 이르게 된다. 생달마을은 선달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의 형세가 마치 두 개의 달과 같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처음에는 ‘쌍달’로 불리다가 언제부턴가 ‘생달’로 바뀌었단다.

▼ 11길(마루금길)은 봉화군의 ‘상운사’를 출발해 15.4km를 걸은 다음 영월의 ‘김삿갓문학관’에서 끝난다. 하지만 실제로는 생달마을(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생달마을에서 상운사로 올라가는 길(2.7km)의 폭이 좁아 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생달마을에 세워놓은 이정표(약수탕길의 완주 인증시설이다)는 이곳에서 상운사까지의 거리를 2.7km로 적고 있다. 기존의 15.4km로도 모자라 2.7km를 더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구간. 즉 1천 미터 이상의 고산준령들을 오르내려야만 하는 고달픈 구간인데 우린 이제 죽었다.

▼ 내성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선달산 자락에 깊숙이 들어앉은 생달마을은 산수경관이 빼어나다고 소문난 곳이다. 그래선지 머물고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주택들이 여럿 눈에 띈다. 심지어는 ‘정(亭)’자를 넣은 옥호(屋號)를 지었을 정도로 예쁜 집도 보였는데, 이런 집들은 대개 산장과 산방, 별장, 쉼터 등의 이름을 내걸고 손님을 맞고 있었다.

▼ 모처럼 마음에 쏙 드는 멋진 길을 만났다. 전국 어디를 가나 벚나무 일색인데, 이곳은 가로수로 단풍나무를 심어놓은 것이다.

▼ 길가에 세워놓은 커다란 빗돌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곳이 ‘신선골’이라는 것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다. 선달산(仙達山)의 어원이 ‘신선이 놀던 곳’이라 했으니, 응당 물 맑은 이 골짜기까지 내려와 놀다갔지 않겠는가.

▼ 잠시 후 주목산장에 이른다. 맨 꼭대기에 있는 집이라선지 ‘주목산장’이란 이름표까지 매단 이정표(상운사 0.5㎞/ 백두대간후문 12.5㎞)가 세워져 있었다.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산장의 사진을 게시한 이유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5분. 탐방로는 도로를 벗어나 산속으로 향한다. 상운사에 조금 못 미치는 곳인데, 10길(약수탕길)과 11길(마루금길)이 나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정표 옆에 세워놓은 구간안내도가 마루금길의 길이(15.4km)와 함께 구간 난이도를 ‘최상’으로 적고 있는 게 아닌가. 그만큼 힘든 구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탐방로에서 벗어나 조금 더 올라가자 ‘상운사’가 얼굴을 내민다. 자그마한 불당 두어 채와 요사가 전부인 한국불교조계종 소속의 꼬맹이 산사이다. 하긴 세워진지 30년을 조금 더 넘겼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거기다 이곳까지 찾아와 불공을 드릴 신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 들머리로 되돌아와 오솔길로 들어선다. 시작부터 멋진 다리가 나타나는 등 볼거리가 제법 많은 길이다. 그건 그렇고 산은 온통 초록빛 세상이다. 연록을 자랑하던 봄날은 이미 지나가버린 모양이다.

▼ 오르막길에는 다듬지 않은 돌멩이들을 가지런히 쌓아 돌계단을 만들었다. 그 돌멩이마다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두터운 이끼가 돋아났다. 미끄러운 게 다소 부담스럽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하겠다. 그렇다고 우리 집사람처럼 엉덩방아를 찧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 잠시 후 하늘을 찌를 듯이 자라난 낙엽송 숲이 길손을 맞는다. 아니 가까이 다가가보니 잣나무다. 그건 그렇고 늦은목이로 올라가는 탐방로는 완만하면서도 편했다. 하긴 해발 1,000m를 넘기며 힘자랑을 하던 주능선이 786m로 푹 들어간 곳이니 그럴만하겠다.

▼ 길은 한마디로 멋지다.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도록 다리처럼 길을 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통나무를 세워가며 계단을 만들었다. 토사의 유출을 막아보려는 필사의 노력일 것이다.

▼ 길가에 작은 옹달샘 하나가 나타났다. 지붕까지 씌워 보호하고 있는 모양새인데, 이게 내성천(乃城川)의 발원지라고 한다. 이곳에서 발원해 봉화군과 영주시, 예천군을 지나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에서 낙동강과 합류하는 길이 109.5㎞의 하천으로 경북 북부지역의 젖줄이다.

▼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30분. 옹달샘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늦은목이’다. ‘느슨한 고개’라는 의미를 지녔다는데 옛날 이곳을 넘나들었을 보부상들이 지어낸 이름이 아닐까 싶다. 해발 786m의 고갯마루에는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긴 우리가 걷고 있는 ‘외씨버선길’ 외에도 ‘백두대간’, 거기다 ‘소백산 자락길’까지 겹쳤으니 오죽하겠는가.

▼ ‘늦은목이’는 마구령에서 선달산을 지나 박달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한 고개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선달산까지는 백두대간을 밟는 셈이다. 참!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던 나라 땅의 산줄기(山經)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쯤은 알고 지나가자. 이러한 산경개념은 신경준의 ‘산경표’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잘 반영되어 있다.

▼ 이곳은 또 ‘소백산 자락길’의 9자락인 ‘방물길(생달마을↔남대리 주막거리)’이 지나기도 한다. 옛날 보부상들이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지고 넘나들던 길이라고 해서 ‘방물길’이라는 독자적인 이름을 얻었다. 참고로 ‘소백산 자락길’은 영남의 진산이라 불리는 소백산자락을 한 바퀴 감아 도는 길이 143km(360리)의 둘레길이다. 모두 열 두 자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3개 도(경북·충북·강원)의 4개 시·군(영주·봉화·단양·영월)을 지난다.

▼ 선달산으로 향한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늦은목이에서 선달산까지 1.8km를 오르며 400m도 넘는 고도차를 극복하려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무척 힘든 코스라는 얘기이다. 이런 구간은 나올 듯 나올 듯 정상이 나오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한 고비 오르면 저만치에 있고, 또 올라도 정상은 저만치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 누군가는 이 구간을 ‘오르막’만 있다고 했다. 선달산 정상에 이를 때까지 더 가파름과 덜 가파름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맞다. 그의 말대로 산길은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위로 오를 수 있는 구간이 심심찮게 나타났다. 그건 그렇고 정오를 넘기자 오뉴월 무더위가 고산준령의 산줄기까지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정상으로 오르는 가파름까지 더해져 온 몸이 땀으로 젖는다. 그러니 가끔 빽빽한 숲 사이로 실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걸음이 자꾸만 더뎌지는 이유이다.

▼ 숲이 울창해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아래 사진처럼 멋진 소나무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저 나무를 쏙 빼다 닮은 소나무를 자은도의 분계해변에서는 ‘여인송(女人松)’이라 부르고 있었다.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아낙내의 전설까지 지닌 소나무인데, 여인이 하늘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저렇게 생겼었다.

▼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무는 저렇게 쓰러졌다. 그리고 그 아래를 지나가는 나그네는 저렇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차린다. 그래 ‘인자요산(仁者樂山)’.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 오늘은 오후부터 소나기가 내린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은 비가 내릴 기미는 없고, 다만 안개가 가득 차있어 시야가 좁을 뿐이다. 그래도 길이 또렷한데다 예상보다 표지기도 많이 매달려 있어 진행하는데 문제가 없다.

▼ 뿌연 안개 속에 잠긴 울창한 숲길을 걷노라면 꼭 미로 찾기를 하는 기분이다. 또한 가파른 오르막길이 겹치다보니 이마의 땀이 쉴 새 없이 흐른다. 그렇게 얼마를 진행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이정표(김삿갓문학관← 13.7㎞/ 상운사↓ 2.9㎞) 하나가 나타나면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라고 한다. 오를 만큼 올랐으니 이젠 백두대간 마루금을 벗어나 북쪽. 그러니까 어래산과 곰봉으로 연결되는 지능을 타라는 모양이다.

▼ 이정표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백두대간을 따르기로 했다. 이어서 50m쯤 더 걷자 드디어 선달산(先達山, 1,236m) 정상이다. 늦은목이에서 1시간,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2시간 10분이 지났다. 도(경북·강원)의 경계이자 3군(영월·봉화·영주)이 만나는 너른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커다란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백두대간의 가치와 중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영주국유림관리소에서 세운 정상표지석이다. 참고로 선달산은 한자로 ‘신선이 놀던 곳’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하지만 ‘먼저 올라야 한다’는 뜻의 ‘先達山’으로 쓰기도 한단다.

▼ 직진으로 뻗어나간 대간길을 버리고 삼거리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왼편으로 90도쯤 꺾인 능선. 즉 어래산과 곰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따른다. 키 작은 잡목에 묻힌 탐방로가 희미하지만 길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능선은 예상외로 부드럽다. 아까 선달산을 오를 때 고생했던 것에 비하면 비단길이라고 해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이런 곳에서는 콧노래라도 부르며 걸어야 제멋. 하지만 하늘이 점점 찌푸려지고 있으니 우리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나리꽃이 꽤 많이 눈에 띈다. 7~8월에 꽃을 피운다고 했으니 제철에 꽃망울을 연 셈이다. 죽음으로 순결을 지킨 어느 처녀의 전설을 간직한 꽃이기도 하다. 그래서 꽃말도 ‘순결’, ‘깨끗한 마음’이다.

▼ 화전(火田)을 일구어도 될성부른 너른 분지도 만난다. 맞다. 저렇듯 초본식물이 많이 분포된 지형이라면 식수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지 않겠는가.

▼ 흔하지는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한 바위도 만날 수 있었다. 털복숭이 개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거북이가 머리를 길게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능선은 원시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나무들 대부분이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다. 그래 1천 미터도 넘는 이런 고산준령까지 찾아와서 식생을 헤치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정상표지판이 걸려있는 봉우리 하나를 만났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밋밋한 봉우리인데 ‘준·희’라는 이름으로 이곳의 해발고도(1134.6m)를 적은 팻말을 매달아놓았다. 국제신문 근교산행 팀의 산행대장을 역임했던 최남준씨도 이곳을 지나갔던 모양이다.

▼ 산릉은 초본식물들이 다양하게 자라고 있었다. 또한 70년대 식재했다는 낙엽송이 하늘을 향해 치솟은 풍광도 만날 수 있다. 누군가는 이런 산길이 사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고 했다. 이상하게 걸을수록 평온해진다면서 말이다. 단순한 걸음의 반복이 평온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부부의 발걸음은 바빠지기만 했다. 3시에 비가 시작될 거라는 일기예보. 제대로 된 사진을 찍으려면 그 전에 산행을 마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 헬기장처럼 널찍한 안부에 내려섰다. 이정표(김삿갓문학관 11.3㎞/ 상운사 5.3㎞)까지 세워져 있지만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그냥 지나친다.

▼ 한 발은 강원도에 또 다른 발은 경상도에 걸치고 있는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그렇다고 가파른 오르막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아래 사진처럼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길이가 짧아서 부담은 없다.

▼ 다른 생명을 품은 바위가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영양가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척박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푸르름을 한껏 자랑하면서 말이다. 조그만 난관에도 곧잘 좌절해버리는 인간들이 보고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싶다.

▼ 선달산에서 내려선지 1시간 만에 회암봉에 올라선다. 특별할 게 없는 밋밋한 봉우리에 정상석은 보이지 않고 그저 삼각점(예미 463)만 외롭다. 울창한 참나무 숲에 둘러싸여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 최남준씨도 그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1136.9m’라고 적은 팻말을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한 이도 있었나 보다. 누군가가 ‘회암봉(1137m)’이라 프린팅 된 비닐을 나무기둥에 묶어놓았다.

▼ 이제 회암령으로 내려갈 차례이다. 잠시 후 완만하게 이어지던 탐방로가 갑자기 뚝 떨어진다. 협곡을 연상시키는 바위 사이로 길이 나있는데, 이게 여간 날이 서있는 게 아니다. 통나무계단으로도 모자라 밧줄까지 매어놓았다면, 그 가파름을 대충 이해할지 모르겠다.

▼ 이후로도 밧줄 구간은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난다. 이렇듯 회암봉과 회암령 사이는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무릇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히 비긴다. 오르내림의 길을 모두 지나고 나서 뒤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평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암령을 지나면서 다시 길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 그렇다고 오르막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아래 사진처럼 예쁜 바위봉우리를 스치듯 지나기도 한다.

▼ 회암봉에서 내려선지 45분. 회암봉과 어래산 사이의 안부인 회암령에 내려섰다. 그런데 선두를 치고나갔던 이대장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시간이 너무 지났으니 이곳에서 탈출하란다. 앞으로는 된비알의 연속이라면서 말이다. 맞다. 된비알은 1km를 걷는데 대략 30분 정도가 걸린다. 평지라면 달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도 말이다. 그런 된비알이 앞으로도 9.1km나 남았으니 어찌 탈출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고갯마루에는 고맙게도 안심장독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동안 만나왔던 장독대는 모두 땅속에 묻혀있었는데, 이곳은 지상에 노출시켜놓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이런 산중. 그것도 1000m가 넘는 산등성이에 물을 비치해 놓았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건 그렇고 가뜩이나 힘들어하던 집사람이 반색을 하며 생수 한 병을 꺼내든다. 마침 물이 떨어져가던 때라면서. 내게는 이 물을 다시 채워놓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보라는 엄명까지 내린다. 참! 이정표(김삿갓 문학관 9.1㎞/ 상운사 7.5㎞) 얘기를 깜빡 잊을 뻔했다. 11길(마루금길)에 설치된 2곳의 인증지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설치된 이정표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두어야만 11길(마루금길)을 지나갔음이 인정된다.

▼ 산 아래 ‘남대리’를 향해 하산을 시작한다. 산길은 울창한 잣나무 숲 사이로 나있다. 숲에는 수령이 10년도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 잣나무들이 가득했다. 군락도 꽤 너른 편이다. 그 숲길을 걷자니 온몸으로 퍼지는 송진 내음에 황홀함마저 느끼게 된다. 아니 마루금을 오르내리며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 잣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효과 덕분일 것이다.

▼ 코끝을 스쳐가는 짙은 솔향기에 바닥까지 폭신폭신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정신줄을 놓아버렸나 보다. 언제부턴가 길의 흔적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신 인적이 끊긴 원시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 우여곡절 끝에 원래의 길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남대리로 내려가는 길은 외씨버선길의 정규탐방로는 아니다. 하지만 ‘마루금길’과 동일하게 외씨버선길 특유의 표지기(리본)를 촘촘히 매달아놓아 길을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11길(마루금길)이 하도 힘들다보니 중간에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이에 관리처(4개 지자체와 사단법인 경북북부연구원이 함께 조성·관리·운영한다)가 회암령에서 내려오는 탈출로를 내면서 이들이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도록 정규 탐방로와 동일하게 리본을 매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 회암령에서 남대리까지 2.5km쯤 되는 산길은 대부분 골짜기를 따라 나있다. 그러다보니 여러 차례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없으나 골짜기가 제법 넓어서 장마철에는 통행이 제약을 받을 수도 있겠다.

▼ 트레킹 날머리는 남대리 송내마을(영주시 부석면 남대리 286)

그렇게 얼마를 내려오자 민가가 보이기 시작하고, 길은 어느덧 935번 지방도에 내려선다. 회암령에서 내려선지 1시간 만이다. 패잔병으로 전락한 우리 부부를 원래의 날머리인 ’김삿갓문학관‘까지 실어다 줄 산악회버스는 남대리경로당 근처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5시간 10분을 걸었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2.96km. 거리에 비해 엄청나게 시간이 많이 걸린 셈이다. 그만큼 힘이 들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본래의 날머리에는 김삿갓문학관이 들어서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자 방랑자였던 난고 김병연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강원도의 시책사업인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하나로 2003년에 개관했으며 김병연과 관련된 서책과 기증자료 등으로 총 3개의 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김삿갓 발자취를 쫒아 일생을 바친 정암 박영국 선생의 김삿갓 연구 자료가 주를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 광장에는 그의 동상을 세워놓았다. 그가 썼다는 시도 눈에 띈다. 참고로 김삿갓은 본명이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다. 호는 난고(蘭皐).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 스스로 여겨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자손이라고 자책하며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다녔으므로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당시 조선 후기 양반들이 짓던 한시의 전형적인 주제와 틀에서 벗어나 민중의 삶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자유로운 형식의 시를 썼던 천재시인이기도 하다.

▼ 10여 개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기에 다가가보니 대부분 알만한 시인들이다. 아니 신달자. 유안진, 나태주, 오탁번 등등 이미 유명세를 탄 시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선지 눈에 익은 싯구도 몇 눈에 띈다. ‘김삿갓문학상’ 수상자들의 시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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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씨버선길(2), 슬로시티길

 

여행일 : ‘21. 6. 19(토)

소재지 : 경북 청송군 청송읍과 파천면 일원

여행코스 : 신기리 느티나무→소망의 돌탑→용전천 징검다리→중평솔밭→중평마을→덕평마을→가풀막재→소헌공원(소요시간 : 10.5km/ 실제는 14.59㎞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두 번째 길인 ‘슬로시티 길’을 걷는다. 3개로 나누어진 청송 권역의 가운데 구간으로, 슬로시티(slow city)로 인증 받은 청송의 산길과 들길, 마을길을 걷게 된다. 슬로시티의 철학은 느림의 기술(slowware)을 느림(Slow)과 작음(Small), 지속성(Sustainable)에 둔다. 그러니 청송의 슬로시티 길을 걸으며 농촌과 도시, 아날로그와 디지털, 빠름과 느림이 조화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가슴깊이 느껴보자. 소읍이지만 도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청송 시내에서는 글로벌과 디지털을 그리고 고택이 즐비한 덕천마을에서는 로컬과 아날로그를 음미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강변이나 산길을 걷게 되는 나머지 구간에서는 느림의 미학이라도 펼쳐보면서 말이다.

 

▼ 들머리는 신기리 느티나무(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659)

당진-영덕고속도로(상주-영덕) 청송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타고 영양방면으로 올라가다 ‘신기1리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신기옹정길’을 따르면 잠시 후 들머리인 신기리에 이르게 된다. 들머리의 느티나무는 1660년경 ‘인동 장씨’의 입향 시조가 심었다고 한다. 360살이라는 나이는 느티나무 치고는 꽤 젊은 편일 것이다. 그렇다면 천연기념물(제192호)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나무가 품은 내력이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성시되어 정월 대보름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동네 제사를 지내왔다니 말이다. 나무의 아래와 윗가지에서 동시에 잎이 피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단다.

▼ ‘슬로시티 길’은 청송읍(월막리)의 소헌공원에서 시작해 송강리(파천면)의 전통한지체험장까지 11.5㎞ 구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지체험장까지 가지 않고 이곳을 들·날머리로 삼는다.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셋째길인 ‘김주영객주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외씨버선길의 이정표도 구간 거리를 10.5㎞로 적고 있었다. 아무튼 이 구간은 고택에서 전통가옥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옛길을 따라 걸으며 전통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멋진 길이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들머리 사진은 지난해 말 3길을 시작하면서 찍은 것을 사용했다)으로 나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미 3길(김주영 객주길)을 걸었던 나에게는 하등 문제될 게 없지만, 처음 길을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길 찾기가 다소 애매한 곳이다. 2길과 3길이 거의 같은 방향으로 나있기 때문이다. 왼쪽은 3길의 시점이고 오른편은 2길의 종점이라고 기억해두면 되겠다.

▼ 길가는 온통 사과밭 천지다. 문득 ‘사과가 익어가는 청송 들녘을 돌아 나오는 바람에는 사과향이 배어있다’던 어느 글이 떠오른다. 그만큼 사과밭이 많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맞다. 그래서 사람들은 청송 하면 가장 먼저 ‘사과’를 떠올린다. 영양의 ‘고추’, 봉화의 ‘송이버섯’과 함께 말이다.

▼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들길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래 계속된다. 그러다가 20분 조금 못되는 곳에 위치한 신기농원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꺾으면서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10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산길이라는 또 다른 형태로 변한다.

▼ 트레킹의 즐거움은 뭐니 뭐니 해도 눈요기다. 하지만 주전부리도 결코 그에 못지않다. 오늘의 주전부리는 산딸기가 되어주었다. 길가 비탈진 곳에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탐스럽게 열린 것을 반가운 마음에 몇 개 따먹어 봤다. 새콤달콤한 맛이 어릴적 추억의 맛 그대로였다.

▼ 산길로 들어서자마자. 신기리의 느티나무에게 이별을 고한지는 30분 만에 ‘한티재(257m)’에 올라섰다. 고갯마루에는 소망을 이루어준다는 돌탑이 쌓아져 있었다. 안내판은 큰 소원은 들어주지 않는다고 적었다. 특히 바라는 바가 너무 많은 어른들보다는 어린이의 소원을 더 잘 들어준단다. 그 이유가 행정 일손이 딸려서라는 게 재미있다. 요즘은 스토리텔링까지도 시대에 맞게 각색되는 모양이다. 참! 완주를 인증받기 위해서는 이곳의 이정표(소헌공원 9㎞/ 신기리 느티나무 1.5㎞)를 꼭 챙겨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 올라왔던 길에 비해 내려가는 길은 무척 사나웠다. 가파른 경사는 기본. 산비탈에 길을 내다보니 토끼비리에 가까운 곳도 있다. 거기다 오늘처럼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바닥에 깔린 돌멩이까지도 여간 거추장스러운 게 아니다.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여럿 있었다.

▼ 그렇게 6분쯤 내려서자 국도(31호선)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탐방로는 몇 걸음 걷지 않아 도로와 헤어진다. 그리고 들길로 내려선다.

▼ 이어서 탐방로는 용전천(龍纏川)의 제방을 따른다. 용전천은 청송군 부남면 중기리에서 발원하여 주산천과 주방천 등 소하천과 합류하면서 흐르다가 청송군 파천면 어천리에서 반변천에 합류되는 물줄기이다.

▼ 강변을 따르던 탐방로가 느닷없이 하천으로 내려선다. 그런데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각으로 반듯하게 자른 화강암을 놓아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제멋대로 생긴 자연의 돌이 아니어선지 가슴에 와 닿는 낭만은 없다. 그렇다고 껑충껑충 뛰어 다리를 건너는 재미까지 없는 것은 아니니 미리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다. 참! 이 길은 장마철이면 어김없이 길이 막힌다. 첨부된 지도에 우회로가 그려져 있는 이유이다.

▼ 징검다리를 건넌 후에도 탐방로는 용전천의 제방을 따른다. 그러다보니 오른편에는 널따란 농경지. 반면에 왼쪽의 천변은 갈대가 무성하다. 안타까운 것은 용전천을 곁눈질로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고기와 다슬기를 방류했으니 출입을 통제한다는 경고판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며 서있다.

▼ 들길로 내려선지 20분. 오른편 산자락에 들어앉은 ‘사양서원(泗陽書院)’이 눈에 들어온다. 평산신씨 영해파 시조인 신현(申賢)과 그의 아들 신용희(申用羲), 그리고 원천석(元天錫)를 배향하는 서원이다. 1888년 논산의 계룡산 아래에 화해사(華海祠)란 이름으로 창건했다가, 농지개혁으로 인해 서원의 땅이 분배되면서 사당의 유지가 어려워지자 1966년 종택이 있는 현 위치로 이전했다. 서원 내의 화해사란 편액은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이라고 한다.

▼ 서원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중평솔밭’이 나온다. 200살이 넘은 소나무 8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이 숲은 ‘평산 신씨’라는 본관까지 버리고 ‘평해 신씨’로 살아가던 중평마을의 선비들이 마을을 숨기기 위해 조성한 비보림(裨補林)이다. 현재 야영장으로 운영 중인데, 지반 정비를 잘 다듬어 놓아 텐트를 치고 근처 강에서 낚시나 물놀이하기 좋아 휴가철에는 가족단위 이용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 슬로시티길은 솔밭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용전천을 건넌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발길은 반대 방향에 위치한 ‘중평마을로 향했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들이 세 채나 들어서 있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중평마을에 대한 정보는 외씨버선길 트레킹을 함께 이어오고 있는 ‘몽중루’라는 분의 후기에서 얻을 수 있었다. 잠시 후에 들르게 될 고택의 주인장과 같은 ‘평산 신씨’라는 이분은 글에서 옛 은자가 살던 마을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중평솔밭을 만든 이들이 숨어살던 마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 마을입구의 안내판을 살피다가 동네로 들어선다. 연화봉 아래에 들어앉은 이 마을은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15세손인 신득청(申得淸)을 파시조로 한 ‘평산 신씨’ 판사공파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신득청은 고려말 공민왕 때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영해로 낙향한 뒤 은둔한 인물이다. 그 후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동해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 ‘점심 때가 되었는데도 대접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고택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찾아들어간 ‘우선당(又善堂)’이란 저택의 주인장이 우리 부부와 헤어지며 건네 온 인사말이다.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지도를 그리듯이 자세히 설명해 준 것 만해도 고마운데, 자신의 부인이 집을 비운 탓에 찾아온 손님에게 점심 한 끼도 대접하지 못한다며 미안해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정겨운 인사말인가. 그리고 얼마나 그리워했던 인심인가. 문득 ‘맑은 공기, 달콤한 바람, 따뜻한 마음’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청송을 찾아가라던 어느 글이 생각난다. 맞다. 이곳은 청송이다. 그리고 난 청송의 슬로시티 길에서 마음속으로 동경해오던 따뜻한 인심을 만났다.

▼ 그가 알려준 대로 ‘평산신씨 판사공파(平山申氏 判事公派)’의 종택(宗宅, 국가민속문화재 제282-1호)’을 찾았다. 판사공의 12세손인 신한태(申漢泰, 1663-1719)가 1705년경에 지었다는데 현재 안채와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영정, 서당이 보존되어 있다. 참고로 판사공파는 고려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의 13세손 신현(申賢)이 영해군(寧海君)이 되면서 영해파로 분파했다. 그 후 대동보 규정에 따라 15세손인 태복판사(太僕判事) 신득청(申得淸)을 분파조(分派祖)로 판사공파가 되었고, 이 집이 파종택이 되었다.

▼ 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라서 세세한 것까지는 살펴볼 수 없었다. 대신 안내판에 적힌 글을 옮겨본다. 대문채 중앙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바깥마당 우측에 별채가 빗겨 앉았고, 그 뒤편에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ㅁ’자형 본채가 자리 잡고 있다. 본채 배면 북동쪽 높은 곳에는 사당이 별곽을 이루고 있으며, 대문채 우측과 본채 후 좌측 모서리에는 내·외측이 놓여있다. 좌측 담장 중앙부에 나있는 트임문을 나서면 영정각과 서당이 사당과 이룬 동서축 선상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서당 앞쪽 낮은 곳에는 외거노비들이 살던 초가인 아래채가 들어앉았다.

▼ 종택과 붙어있는 서벽고택(棲碧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282-2호)은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가림막으로 가려놓아 본래의 모습을 가늠조차 해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이의 글로 상황 설명을 대신해본다.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의 서당 아래에 있는 아담한 ‘ㅁ’자형 한옥이 바로 서벽고택이다. 판사공파의 후손인 신한창(申漢昌)이 종택에서 분가하면서 건립했으며, 1739년 신치구(申致龜)가 확장 증축하면서 자신의 호를 따 ‘서벽고택’이라 했다.

▼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남고택(泗南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282-3호)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 고택도 역시 ‘ㅁ’자형 건물인데, 판사공파의 19세손인 신치학(申致鶴)이 1780년경에 지었다고 한다. 특징은 사랑채의 기단을 높게 조성하여 누처럼 보이게 했다는 점이다. 팔작지붕도 높지막하게 올려 마치 독립된 별동의 건물과 같은 느낌을 준다.

▼ 솔밭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중평교’ 다리를 건넌다. 다리 건너에는 이정표(소헌공원 6.1㎞/ 신기리 느티나무 6.1㎞)와 함께 작은 정자도 지어져 있었다. 준비해 온 간식이라도 있다면 잠시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참! 정규 탐방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중평마을을 둘러보고 나오는 데는 35분이 걸렸다.

▼ 이후부터는 용전천의 제방을 따라 걷는다. 용전천이 이번엔 오른쪽에서 우리를 따라왔다. 왼편에는 모내기를 끝낸 논들이 꽤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심심산골인 청송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라 하겠다. 아니 조금 전에 들른 중평마을이나 잠시 후에 들르게 될 덕천마을의 거대한 고택들은 이런 농경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그렇게 20분 남짓을 더 걷자 이차선 도로인 안파로(안덕면과 파천면을 잇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로 올라선다. 이정표(소헌공원 4.8㎞/ 신기리 느티나무 5.7㎞)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용전천을 건너란다. 그곳에 ‘덕천교’가 놓여있음은 물론이다.

▼ 조금 더 걷자 ‘경의교’라는 또 다른 다리가 나타난다. ‘덕천마을’로 들어서는 입구라 할 수 있는데, 다리 앞에 이르자 커다란 장승 둘이 길손을 맞아준다. 이 장승들은 수문장 역할 말고도 ‘전통 테마 마을’임을 알리는 홍보 도우미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맞다. 이곳 덕천마을은 2005년부터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운영되고 있다. 고택에서 머물며 천연염색과 문인화, 전통혼례 등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단다. 매년 3만 명 이상이 찾는 청송의 대표적인 농촌체험형 관광마을이기도 하다

▼ 마을에서의 첫 만남은 경의재(景義齋)라는 제실. 향파 시조인 악은공 심원부(沈元符)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기 위해 건립했다. 본채 1동과 행랑채 1동, 그리고 부속건물로 관리사 및 신도비가 들어서있는데, 비교적 최근인 1983년에 지어졌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은 이유이다.

▼ 경의재에서 마을은 가로수 길로 연결된다. 길 오른편에는 옛 둠벙(물 웅덩이)을 복원해 생태연못을 조성해 놓았다. 그러니 곧게 뻗어나간 가로수 길이 내키지 않을 경우 둠벙가로 내놓은 산책로를 따르면 된다. 참! 가로수길이 시작되는 곳에 덕천마을의 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덕천마을의 지도를 상세하게 그린 다음 고택과 정자 등의 주요 볼거리들을 사진과 함께 표시했다. ‘슬로시티’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마을의 역사도 한글은 물론이고 영어와 중국어, 일어를 병기했다.

▼ 숲길이 끝나자 ‘덕천마을’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들어앉았다. 풍수지리학자들은 저런 걸 명당이라 부른다. 그건 그렇고 고색창연한 주택들이 즐비한 마을은 ‘송소고택’을 중심으로 여러 고택이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으로 들어서고 본다. 생각지도 못한 볼거리라도 있을까 해서이다. 그런 내 예상은 옳았다. 거기서 창실고택(昌室古宅, 경북 문화재자료 제421호)이라는 중요한 문화재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저택은 1917년 청송 심부자로 알려진 심호택(송소고택의 주인)의 친동생인 심시택이 송소고택에서 분가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이 건물도 크게 보면 ‘ㅁ’자 형의 배치형태를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건축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一’자 형의 안채와 ‘ㄴ’자 형의 사랑채, 그리고 부속채로 나뉜 것이 영락없이 독립된 가옥들이다.

▼ 다음은 ‘초전댁(草田宅)’이다. 이 집은 순조 때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석촌공파(石村公派) 17세손인 덕활(德活)이 요절한 아우 덕종(德宗)의 양자로 입적한 친아들 헌문(憲文)의 네 번째 돌을 기념하여 1806년에 지었다고 한다. 전면의 대문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큰사랑 공간이 자리하고, 왼편은 작은사랑인 온돌방 좌우로 외양칸(現在 창고)과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 안의 안채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주인장의 안식을 헤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 마을 앞길(이정표 : 소헌공원 3.8㎞/ 신기리 느티나무 6.7㎞)로 되돌아오니 ‘청송장 가는 길’이란 글귀가 눈길을 끈다. 30㎏이나 되는 고추를 머리에 이고 청송장에 나간 어느 아낙내의 고단함이 잔뜩 묻어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글귀가 자꾸 낯설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으리으리한 고택들이 즐비한 마을 풍경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가난이라니. 하긴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살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 지도를 보고 찾아간 곳은 ‘송소고택(松韶古宅)’. 고택들이 즐비한 덕천마을에서도 가장 중요한 볼거리이다. 이 집은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청송 심씨’ 심처대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1880년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이곳 덕천리로 이주하면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 고택은 조선시대 상류층 주택의 원형을 비교적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소중한 문화재라고 한다.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250호)로 지정된 이유일 것이다. 현재 고택체험시설로 개방·운영되고 있는데 2011년에는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다.

▼ 송소고장(松韶古莊)이란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눈앞을 막아서는 담이 있다. ‘ㄱ자’를 아래위로 뒤집어 놓은 모양새의 ‘헛담’인데, 여인네들이 기거하는 안채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주려는 배려의 소산이란다. 이 담을 여인네들은 오른쪽으로, 남정네들은 왼쪽으로 돌아 각각 안채와 사랑채로 들어갔다. 그리니 남녀유별의 ‘내외담’이기도 하다. 헛담의 뒤에는 사랑채가 들어앉았다. 전면을 향해 오른쪽에 큰 사랑채, 그리고 왼쪽에 작은 사랑채를 배치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작은 사랑채가 큰 사랑채보다 한두 발짝 뒤로 물러앉아 있었다.

▼ 전체적으로는 영남지방 특유의 양반가옥 형태인 ‘ㅁ자’ 형을 취하고 있다. 송소고택은 각 채마다 다양한 마당을 지닌 게 특징이다. 그래서 내부를 연결하고 있는 문턱을 하나 넘어서면 다른 마당이 나온다. 이는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주요한 특징이란다. 참! 송소고택은 99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커보이지는 않았다. 방과 칸의 개념이 달라서라고 한다. 칸은 집의 기초가 되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하기 때문에 통상 방보다 칸이 많다. 정면 4칸, 측면 2칸 집은 ‘4×2=8’로 8칸으로 친다. 그래서 99칸이라고 해서 방이 99개는 아니라고 한다.

▼ 송소고택 바로 옆에는 그의 둘째 아들 송정 심상광이 기거하던 송정고택이 있다. 부친의 집과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내부로는 두 고택을 연결하는 쪽문도 있다. 송정 심상광은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원장을 역임했던 사람으로 학문에 뛰어난 유학자였다 한다.

▼ 송정고택 역시 전형적인 한옥인 장작 온돌방과 넓은 마당, 정원과 텃밭이 어우러져 있다. 농경제가 대부분이었던 당시의 경제적 여건 생각해 본다면 이 두 고택의 규모만으로 부(富)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참! 이 집을 지은 가문은 ‘만석꾼’이라고 했다. 논밭이 별로 없는 이런 산간지역에서 그렇게 큰 부자가 나올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일단은 믿어보란다. 한양으로 가려면 심씨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 없었을 정도였다면서 말이다. 해방 직전 심처대의 9대손까지 2만석을 유지했다고 하니 그 가세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 송소고택 오른쪽으로는 두 고택보다 50여 년 늦게 지어진 ‘찰방공종택(察訪公宗宅)’이 있다. 청송 심씨 시조 악은공의 9세손인 심당의 종택이다. 찰방공 종택은 다른 고택과는 달리 ‘ㄷ’ 자 모양이다. 다른 고택과 비교했을 때 안마당에 장독대와 화단이 배치된 점이 독특하다.

▼ 마을에는 ‘백일홍’이란 찻집도 운영되고 있었다. 고택이 즐비한 마을에서 한적함과 옛 멋을 즐기며 걸었다면 이곳에 들러 잠시나마 따스한 차 한 잔으로 마음과 몸을 달래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청송 심씨 본향’이라고 쓴 큼직한 자연석이 눈에 띈다. 맞다. 덕천마을의 소개는 보통 성씨로부터 시작된다. 청송 심씨(靑松 沈氏)의 시조는 심홍부(沈洪孚).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했다. 고려 말에 전리판서를 지낸 그의 4세손 심원부(沈元符)는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덕천마을은 심원부의 후손인 청송 심씨가 약 600년간 뿌리내리며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 청송 심씨의 대표적인 세거지이다. 한편 심원부의 형 심덕부(沈德符)는 조선의 개국공신에 올랐으며, 그의 후손들은 세 명의 왕후와 네 명의 부마를 배출한 조선의 세도가문이 되었다.

▼ 30분 남짓 머물던 덕천마을을 빠져나와 ‘덕천1교’를 건넌다. 이어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100m 조금 못되게 걷다가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가풀막재’로 연결시키는 농로이다. 방향을 꺾는 지점에는 ‘가풀막재’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오래전 마을에 살던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산을 넘다가 산적을 만나 변을 당했는데, 후손들이 도적을 찾아 원수를 갚았다하여 ‘가풀재’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시 치고 오르니 ‘914번 지방도’. 안내도는 ‘도로구간 보행주의’라는 경고까지 적고 있지만, 탐방로는 도로로 들어서지 않고 곧장 산속으로 향한다. 참! 이곳은 의자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 쉬어가라는 모양이다. 아니면 앞으로 부딪칠 가파른 오르막길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라는 배려일 것이고 말이다.

▼ 별동산의 정상 어림에 있는 ‘가풀막재’까지는 ‘소원길’이라는 산책로를 따른다. 산책로라고는 하지만 꽤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조금이라도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침목계단을 놓았고, 거기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짧기까지 하다.

▼ 계단이 끝나면서 길은 고와진다. 경사가 완만해졌을 뿐만 아니라 리기다소나무의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그런 길을 콧노래 흥얼거리며 잠시 걷자 ‘가풀막재’에 올라선다. 옛날 근동의 농민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이고지고 청송에 내다팔기 위해 이 재를 넘어갈 때면 힘들고 숨이 가빠진다고 해서 ‘가풀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고갯마루이다. 덕천마을에서 이곳까지는 15분이 걸렸다.

▼ 이곳의 이정표(소헌공원 3.1㎞/ 신기리 느티나무 7.4㎞)도 놓쳐서는 안 된다. 완주 인증을 위해서는 이정표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두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가풀막재에서 내려서자 아름다운 소나무에 둘러싸인 정자(이정표 : 소헌공원 2.4㎞) 하나가 나타난다. 용전천이 내려다보이는 벼랑 위에 걸터앉은 ‘벽절정(碧節亭)’이다. 6칸에 지나지 않는 이 정자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심청의 절개와 용기를 떠올린다고 한다. 벽절 심청은 1582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부친상을 당한 후 벼슬길에 나갈 것을 단념하고 집 뒤에 정자를 짓고 아홉 그루 소나무와 함께 학문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무수한 전공을 세우다 끝내 숨졌다. 왕은 이를 기려 충·용·의·열 네 글자를 내리고 벽절(碧節)이란 호를 내렸다. 원래 이름인 구송정(九松亭) 대신 ‘벽절정’이 된 이유이다.

▼ 벽절정을 지난 탐방로는 잠시 오솔길을 거친 다음 ‘용전천(龍纏川)’으로 내려선다. 날머리인 소헌공원을 2.1㎞쯤 남겨둔 지점인데, 이후부터 탐방로는 용전천의 강변길을 따른다.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걸을 수 있는 이 구간은 대략 1.4km 정도. ‘수달생태공원’이란 이름이 붙었다. 운이라도 좋으면 강변에서 노니는 수달 가족을 살짝 엿볼 수도 있다는 곳이다.

▼ 이를 알리려는 듯 ‘수달’ 조형물도 세워놓았다. 천연기념물(330호)이자 멸종위기종인 수달은 본래 깨끗한 지역에서만 서식한다면서 이런 수달의 특징이 푸르고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 ‘청송’의 이미지에 부합하므로 군의 동물로 지정하고 있단다.

▼ 길을 걷다보면 강 건너에 터를 잡은 청송읍 시가지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층빌딩은 보이지 않지만 도시의 풍모를 갖춘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3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청송군의 인구로 볼 때 제법 큰 규모라 하겠다. 하긴 한때 도호부(都護府)에까지 이르렀던 곳이니 이를 말이겠는가. 참고로 청송은 소헌왕후 심씨의 본향(本鄕)이라는 연유로 1459년(세조 5년) ‘청송군(靑松郡)’에서 ‘청송도호부’로 승격됐다. 그러다가 1895년(고종 32년) 갑오개혁 때 다시 청송군으로 환원되었다.

▼ 용전천은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홍수조절 기능을 갖추었다는 ‘보(洑)’가 먼저 눈길을 끈다. 기존의 재래식보와 차별화하려는 듯 입체적으로 만들어 단순한 보를 하나의 볼거리를 승화시켰다. 거기다 강변에 자전거 길을 조성했는가 하면 데크로드와 체력단련용 운동시설을 설치해 주민들의 나들이 코스로 만들었다. 여름이면 저곳은 물놀이장으로 변한단다. ‘현비암 강수욕장’. 강에서도 바닷가처럼 물놀이를 할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수중미끄럼틀, 수중징검다리, 수중시소, 수중암반 등의 놀이시설들이 들어선다니 어린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겠다.

▼ 용전천을 건너면 ‘청송 전통시장’이다. 청송지역에 있는 여섯 곳의 5일장(청송·진보·부남·도평·안덕·화목) 중 하나로 매 4일과 9일에 장이 선다. 그러니 오늘은 시장바닥이 텅 비어있을 게 뻔하다.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유이다. 참! 시골의 5일장은 온갖 농특산물들이 즐비하고 아직도 장돌뱅이들이 찾아다닌다고 한다. 옛날 보부상과는 달리 지금은 차량에 물건을 가득 싣고 다닌단다.

▼ 너른 모래사장을 거느린 용전천 너머로는 용머리 형상의 기암절벽이 솟구쳤다. 원래의 이름은 바위의 생김새에 착안한 용비암(龍飛岩). 이 바위의 기운으로 소헌왕후가 태어났다하여 ‘나타날 현(顯)’자를 써 현비암(顯妃岩)으로도 불리었는데, 그 소현왕후가 매우 어질다하여 지금은 ‘현비암(賢妃岩)’으로 고쳐 부른단다.

▼ 소헌공원으로 가는 도중 사과 조형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이곳 청송의 브랜드는 ‘사과’. 청송을 방문했다는 인증용으로 너나없이 올리던 ‘합격사과’를 찾지 못했으니 어쩌겠는가. 참! 이왕에 시작했으니 이것 하나는 알고 지나가자. 10월 24일은 애플데이(Apple Day)라고 한다. 둘(2)이 서로 사(4)과하고 화해하는 날이어서 `애플데이`란다. 누가 만들어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운치 있는 발상이다. 하나 더. 과즙이 풍부하고 육질이 단단해 ‘꿀맛사과’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청송사과는 전국으뜸농산물품평회에서 3년 연속 대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해발고도 250m 이상, 연평균 일교차가 12℃로 사과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날머리는 ‘소헌공원(昭憲公園)’

1길(주왕산·달기약수탕길)의 종점이자 2길(슬로시티길)이 시작되는 소헌공원은 사과 조형물에서 5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지역주민들의 문화공간인 이 공원은 조선시대에 가장 어진 왕후로 칭송받는 소헌왕후 심씨의 시호(諡號)에서 이름을 따왔다. 세종대왕의 정비(正妃)였던 그녀의 본향(本鄕)이 청송이라는 인연에서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총 14.59㎞를 걸었다. 탐방로에서 비켜나있는 중평마을을 다녀오느라 3㎞쯤 더 걸은 셈이다. 핸드폰에 찍힌 시간은 3시간 40분. 수많은 고택들을 기웃거리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빨리 걸은 셈이다. 참! 이곳 소헌공원의 입구에는 청송객주가 들어서있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완주 인증을 이곳에서 받으면 된다.

▼ 소헌공원은 운봉관과 찬경루, 청송부사·군수 송덕비(10기) 등이 주요 볼거리이다. 그 가운데 운봉관(雲鳳館, 경북 유형문화재 제252호)은 1428년에 청송군수 하담(河澹)이 건축한 객사(客舍)다. 세종의 명에 의해서였다. 객사란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공공 숙박의 기능 외에 중당(中堂)에 임금의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출장 중인 관원과 고을의 부사가 임금께 예를 올리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중당과 좌익사가 철거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2008년에 원형대로 복원시켰다고 한다.

▼ 운봉관과 함께 지어진 찬경루(讚慶樓, 보물 제2049호)는 소헌공원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 누각에서 소헌왕후 심씨의 시조 묘를 바라보며 우러러 찬미한다는 뜻에서 ‘찬경루’라 했다는데, 약간 경사지에 세워져 정면에서 보면 누각의 형태이나 뒤에서 보면 단층에 가까운 모습이다. 연회나 지방 유생들의 시문회(백일장) 장소로 사용되던 이 누각은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사들도 올랐다고 한다. 서거정과 김종직, 송시열 등이 쓴 시가 전해진단다.

 

외씨버선길(10), ‘약수탕 길

 

여행일 : ‘21. 6. 19(토)

소재지 :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물야면 일원

여행코스 : 백두대간수목원 끝부분→주실령→박달령→오전약수→물야저수지→생달마을→상운사(소요시간 : 15.1km/ 실제는 물야저수지까지 11.31km를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열 번째 길인 ‘약수탕 길’을 걷는다. 3개(연결구간까지 포함시키면 4개로 늘어난다)로 나누어진 봉화 권역(73.2㎞)의 마지막 구간으로, 중간에 조선 제일의 약수라는 주전약수를 거친다고 해서 ‘약수탕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구간도 역시 보부상들이 물건을 팔러 다니면서 걸었던 길이다. 주실령이나 박달령처럼 높은 고갯마루를 넘어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들머리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끝나는 고개(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산 103-3)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과 36호선을 이용해 울진 방면으로 달리다보면 봉화읍과 법전면을 거쳐 춘양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교차로에서 내려와 88번 지방도 영월방면으로 올라오면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앞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915번 지방도를 타고 오전약수 쪽으로 올라오면 백두대간수목원이 끝나면서 작은 고갯마루 위에 올라선다. 국가지점번호판(마바 1428-9034)의 하단에는 ‘서벽시점(0㎞)’이라고 적어 이곳의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아마 백두대간수목원의 뒤로 나있는 ‘금강소나무 숲길(외씨버선 9길의 일부구간)’이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 약수탕길은 이곳에서 시작해 상운사에서 끝을 맺는다. 첨부된 지도에 ‘시점’으로 표시된 지점이다. 하지만 들머리에 세워진 구간안내도는 시점을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의 후문(카페테리아)으로 적고 있었다. 이보다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아마 10길인 ’약수탕길‘의 얼굴마담이 주전약수탕 하나만으로는 외로웠던가 보다. 약수탕길을 설명하면서 수목원의 후문 근처에 있는 두내약수탕까지 포함시킨 걸 보면 말이다.

▼ 10길의 수문장은 ‘장승’이다. 흔히 만나게 되는 여느 장승들과는 달리 온화한 표정의 외씨대장군과 외씨여장군이 길손을 맞는다. 우체통도 보인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마음속 그리운 이에게 몇 자 적어 내 마음을 실어 보내는 ‘제멋대로 우체통’이다.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이. 그것도 그리운 이로부터 편지가 날아온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어쩌면 가슴 따뜻한 추억 오래오래 간직하며 두고두고 꺼내볼 것 같다. 엽서도 비치되어 있으니 서툰 글씨로나마 그리운 마음 가득 담아 우체통에 넣어보자. 곧바로 배달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전달 될. 제멋대로 편지다.

▼ 왼쪽, 그러니까 북쪽 방향의 숲으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탐방로가 산속으로 나있으니 트레킹(trekking)의 참맛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코스라 하겠다. 트레킹이란 게 본디 비교적 장기간에 걸친 산길에서의 도보 여행을 가리킨다고 하지 않았던가.

▼ 탐방로는 능선을 따른다. 오른편의 산자락 아래로 915번 지방도가 따라오는 모양새이다. 어쩌면 이 길은 ‘외씨버선길’을 조성하면서 도로변을 걷지 않아도 되도록 새로 만들었지 않나 싶다. 오가는 차량들을 피해가며 걸어야만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 중간에 임도를 가로지르기도 하나 이정표가 잘 되어있어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외씨버선길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탐방로가 도로변을 피한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처럼 외씨버선길을 조성하면서 별도의 탐방로를 새로 내놓은 것이다. 해파랑길을 3년간이나 걸으며 우리 곁을 씽씽 달리던 자동차들에 얼마나 소름끼쳐 했던가. 외씨버선 관계자들에게 지면을 빌어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 숲길을 따라 18분쯤 걸었을까 탐방로는 다시 915번 지방도로 내려선다. 그리고 주실령까지 도로변을 걷게 된다. 오뉴월 뙤약볕에 통째로 노출되는 고약한 구간이지만 금방 끝나기 때문에 부담스럽지는 않다.

▼ 잠시 후 춘양면(서벽리)과 물야면(오전리)의 경계인 ‘주실령’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백두대간 마룻금의 ‘옥돌봉(1,242m)’과 금강소나무 숲으로 유명한 ‘문수산(1,205.6m)’ 사이에 위치한 해발 780m의 고갯마루이다. ‘주실령’이란 지명은 옛 얘기로부터 출발한다. 옛날. 그러니까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 이곳은 물속에 잠겨있었다고 한다. 당시 움푹하게 파인 이곳으로 배가 지나다녔다고 해서 ‘배 주(舟)’자를 붙여 주실령이라 했다는 것이다. 얘기는 얘기일 따름이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 지리적 특성 때문인지 길가에 세워놓은 지도에도 물야과 춘양을 잇는 도로 말고도, 옥돌봉과 문수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를 그려 넣었다.

▼ 주실령은 보부상들이 해거름에 지게를 작대기에 걸쳐놓고 땀을 식히며 부모자식을 생각하던 고갯길이라고 했다. 탐방로는 이 고갯마루(이정표 : 상운사 12.2㎞/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0.8㎞)에서 도로와 헤어진다. 보부상들이 박달령으로 가기 위해 걷던 숲길이다.

▼ 길이 나뉘는 곳에는 외씨버선길의 알림판까지 갖춘 작은 쉼터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문수지맥 트레킹길’이란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문수지맥이란 백두대간 옥돌봉에서 서남쪽으로 분기해 문수산과 만리산, 조운산, 학가산 등의 산들을 일군 뒤 내성천이 낙동강으로 합수되는 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114,5㎞의 산줄기이다. 봉화군에서 이 산줄기에다 트레킹코스를 만들어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주실령과 헤어진 탐방로는 울창한 숲속으로 파고든다. 참! 지름길도 있다는 걸 깜빡 빼먹을 뻔했다. 첨부된 지도에 녹색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인데 이 경우 박달령을 오르지 않고도 도로를 따라 오전약수관광단지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망설이지 않고 숲속으로 들어섰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정규 탐방로를 온전히 걸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 이곳 ‘주실령’은 산기슭에 수목이 울창하여 다래나 머루 같은 열매가 많이 열린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도 있다. 맞다. 우리부부는 이곳에서 지명을 되새기게 만드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길가가 온통 산딸기 밭이었던 것이다. ‘산딸기 잼을 만들어도 되겠다.’는 집사람의 호들갑이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 울창한 숲속을 걷다보니 특별한 볼거리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솟아오른 침엽수림이 유일한 볼거리라고나 할까?

▼ 그렇게 15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자 임도(이정표 : 상운사 11.3㎞/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1.7㎞)와 마주친다. 박달령으로 올라가는 임도인데 거리는 대략 4.2㎞쯤 된다. 꼬불꼬불 산허리를 감아 도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구간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같은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 오르막 임도는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거리가 4.2㎞나 되니 급할 것이 없는 모양이다. 이 구간은 길이 꼬불꼬불해서 주변의 나무들이 그늘막이 되어준다는 장점이 있다. 대신 그 숲이 시야를 막아버려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다.

▼ 시야를 막았다는 미안함 때문일까? 가끔은 낙엽송이 만들어내는 이런 멋진 경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낙엽송은 초봄의 연두색 신록과 가을의 황금빛 단풍이 특히 아름답다고 알려진다. 숲을 더욱 풍성한 색감으로 물들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때를 제대로 맞추어 찾아온 셈이다.

▼ 겨울 풍경의 진미라는 ‘자작나무’도 보인다. 숲이 아니라 가로수 대용. 그마저도 금방 끝나버렸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풍경이라 하겠다.

▼ 임도는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래 계속되었다. 1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박달령에 올라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올라선 박달령은 마치 공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안내판과 이정표(선달산 5.0㎞/ 옥돌봉 3.0㎞) 등은 기본.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는가 하면, 기상악화 때를 대비한 대피소도 지어놓았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곳 박달령(해발 970m)은 예로부터 경북(봉화군)과 강원도(영월군)을 오가던 부보상들이 이용하던 고갯마루였다. 지금은 그 길을 우리처럼 외씨버선길을 걷는 종주꾼들로도 모라자 백두대간종주꾼들까지 걷는다.

▼ 고갯마루에는 이곳이 ‘백두대간(白頭大幹)’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높이가 4m쯤 되는 거대한 화강암 자연석에 ‘백두대간 심벌로고’와 ‘백두대간 박달령’ 글자를 선명하게 새겼는데, 백두대간 종주꾼들에게는 인증을 위한 포토죤이기도 하다. 참고로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설악산·태백산·소백산을 거친 다음 지리산에 이르는 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는 총 길이는 약 1,400km의 산줄기이다. 이 가운데 갈곶산에서 시작되는 봉화구간은 부소봉까지 대략 20km쯤 된다.

▼ ‘산령각(山靈閣)’도 들어서 있었다. 요 아래 오전마을 주민들이 자신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한편, 자연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는 고사를 매년 지내온다는 신당(神堂)이다. 산신제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공존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토속신앙이었다. 특히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고갯마루에 세워진 산령각은 마을 어귀에 세워진 성황당(城隍堂)과는 조금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며, 사찰에 세워진 산신각(山神閣)과도 다른 의미라고 한다.

▼ 안에는 ‘박달령 성황신(朴達嶺 城隍堂)’을 모시고 있었다. 성황신(또는 서낭신)은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서 최근까지 가장 널리 제사지내던 신이다. 그나저나 마을사람들이 우리처럼 어쩌다 한번 박달령을 찾는 사람들의 안녕도 빌어준다니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 탐방로는 고갯마루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선다. 우리부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짐을 풀었다. 벤치에 앉으니 선선한 바람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어서 산새들의 지저귐이 귀를 간지럽힌다. 박달령의 자연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러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바람이 주는 쉼과는 또 다른 종류의 쉼이 일상에 찌든 ‘스트레스’라는 때를 말끔히 날려준다.

▼ 초입의 이정표(상운사 7.5㎞/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5.5㎞)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시설물이다. ‘약수탕길’을 완주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 팻말을 배경으로 삼은 사진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 이젠 오전약수로 내려갈 차례이다. 산길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약수인데 이 길을 오가던 보부상들이 찾아낸 약수라 전해진다. 물야 후평장과 춘양 서벽장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곽개천’이라는 보부상이 약수터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가 쑥밭에 누워 자다 ‘네 옆에 만병통치의 약수가 있다’는 꿈을 꾼 후 옆을 보니 약수가 솟고 있더란다.

▼ 내려가는 길은 능선을 따라 나있다. 그런데 가끔은 능선을 꿰뚫어놓기도 했다. 능선의 곳곳을 움푹하게 파가며 길을 내놓은 것이다. 조금이라도 덜 오르려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가 보다.

▼ 어떤 곳은 능선을 따라 홈을 파듯이 길은 내놓은 곳도 있다. 이 길은 옛날 보부상들이 오가면서 만들어진 길이라고 했다. 그러니 소설가 김주영이 소설 ‘객주’를 완성하기 위해 걸었던 길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험하고 고된 이 길을 오가던 그들의 여정은 고스란히 시가 되고, 소설로 되살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 길에는 그네들의 삶의 애환이 오롯이 남아있다.

▼ 덕분에 뿌리가 만들어낸 예술품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개중에는 언젠가 캄보디아의 ‘따 프롬(Ta Prohm)’에서 만났던 풍경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잘 생긴 것도 눈에 띄었다. 설마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액션과 판타지에 모험까지 곁들인 영화 ‘툼 레이더(Tomb Raider)’에 등장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탄 나무에 견주겠는가마는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했다.

▼ 주전마을에 내려서면서 산길은 끝난다. 날머리에는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백두대간으로 올라가는 진입로라는 얘기일 것이다. 2002년도엔가 백두대간을 이어가면서 이곳을 들머리로 삼았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만 해도 백두대간은 접근이 어려웠던지라 무박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고, 이곳 주전마을 역시 첫 닭도 울기 전에 통과했었다.

▼ 부지런히 걷던 집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길가가 온통 산딸기 밭인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빨갛게 익은 산딸기는 순전히 자연이 준 선물이다. 집사람이 건네 준 산딸기 몇 알을 입에 넣자 새콤달콤한 맛이 온통 진동한다. 달콤함의 연장이 곧 행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맞다. 이런 게 바로 행복일 것이다.

▼ 이제 주전마을의 마을안길을 걷게 된다. 백두대간의 중심에 위치한 마을이자 경북 북부지역의 젖줄인 내성천(乃城川)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예로부터 주실령과 박달령을 통해 부석·풍기·봉화·춘양·태백·영월 등으로 통하는 도보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옛 보부상들이 드나들며 곳곳에 그들의 정취와 역사를 담은 이야기들을 많이 남겨놓았다.

▼ 몇 걸음 더 걷자 ‘오전약수’가 길손을 반긴다. ‘오전’이라는 지명을 낳게 한 약수이다. 이곳의 약수가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환자들이 약수를 먹고 몸을 씻은 다음 쑥으로 피부에 뜸을 뜨고 달여 먹으면서 병을 고쳤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면서 ‘쑥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도 있다. 생달과 물집마을 계곡의 물이 합수되는 지역이라서 하천이 범람하여 항상 늪지대를 이룬다 하여 ‘수전(水田)’. 이게 ‘쑤뱅이’로 불리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수밭’, ‘쑥밭’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190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쑥 애(艾)’자와 ‘밭 전(田)’자를 따서 애전(艾田)으로 불리다가, ‘쑥밭’의 한자식 표현인 오늘날의 ‘오전(梧田)’이 되었다.

▼ ‘으~~’ 약수를 떠 마시던 집사람의 표정이 마치 소태를 씹은 것처럼 변해버린다. ‘탄산약수’라 적혀있다고 해서 우리가 흔히 마시는 ‘사이다’로 여기면 안 된다는 얘기이다. 나도 한 모금 마셔봤다. 그러자 톡 쏘는 맛과 철분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익숙하지 않은 맛이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병까지 고치게 해준다는 오전약수를 어찌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두 잔이 아니라 서너 잔을 연거푸 마셔버린 이유이다.

▼ 조금 더 내려서면 이번에는 멋진 바위절벽이 길손을 맞는다. 주상절리처럼 만든 인공절벽인데 쉼터용으로 조성했는지 벤치 및 분수까지 함께 만들어놓았다. 참!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분수 앞에서 도로를 버리고 왼편으로 내려가야 오전약수의 ‘원탕’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도로(이정표 : 상운사 5.5㎞/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7.5㎞)를 건너면 ‘약수정’이란 정자를 만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약수터를 만나게 된다. 보부상의 유래가 적힌 석상까지 세워놓은 걸로 보아 이곳이 ‘원탕’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곳의 약수는 위장병과 피부병에 큰 효험이 있다고 전해지며 조선 최고의 약수로 인정받아 왔다. 청주의 초정약수는 그 다음이었다고 한다. 오전약수는 전설도 하나 전해진다. 옛날 이 부근에 살던 부정한 여인이 남자와 정을 통하기 위해 약수터를 찾았단다. 그런데 그때까지 맑게 샘솟던 약수가 갑자기 흙탕물로 변해버리더란다. 이는 약수가 몸을 이롭게 하는 효능 못지않게 마시는 이의 정갈한 마음가짐도 중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약수는 거북이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김새로만 봐서는 일반의 약수터와 다름없다. 그런데도 길거리 이정표들이 하나같이 ‘약수탕’으로 적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몸을 담글 수 있는 탕(湯)이 있는 줄 알고 속옷까지 챙겨갔다가 헛걸음만 했다는 어느 지인의 농담이 생각난다. 그나저나 방문객을 위해 비치해 둔 종이컵으로 한 모금 받아 마셔보니 혀끝을 톡 쏘는 맛이 일품이다. 하지만 달콤한 음료에 익숙해진 내 취향은 아니었다.

▼ 약수터 옆 바위에는 ‘人生不老 樂山樂水(인생불로 요산요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를 지낸 신재 주세붕이 이곳을 찾아 약수를 마시고 남겼다는 휘호로 ‘산을 즐기고 약수를 즐기면 인생이 늙지 않는다.’쯤 되겠다. 그는 또 주전약수를 일러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 만하다’고 칭송했단다.

▼ 마을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데크 탐방로는 기본. 분수로 치장된 하천에, 조그만 터라도 생길라치면 어김없이 물레방아나 조명등 같은 조형물들을 설치했다.

▼ 조금 더 내려가자 이번에는 보부상을 테마로 한 공원이 나온다. ‘보부상 정원’이라는 이름의 마을 쉼터로 보부상 조형물과 오두막, 장승, 솟대 등을 설치해 놓았다.

▼ 지게를 지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여간 안쓰럽다. 자신의 몸보다도 더 커 보이는 짐이 얹혀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굴 표정을 엿볼 수는 없었다.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누군가가 마스크를 씌워놓았다.

▼ 외씨버선길 나그네들을 위한 지원시설인 봉화객주는 ‘보부상 정원’의 맞은편에 들어서있었다. 외씨버선길 안내센터로 쓰이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길…노닐다 봉화객주’라는 이름의 카페로 재탄생시켰다. 봉화에서 생산되는 약초들을 활용한 한방족욕체험을 하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특색 있는 카페란다.

▼ 내부는 이곳이 ‘외씨버선길’의 객주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천정에 매달린 한 쌍의 ‘외씨버선’. 봉화군에서 만날 수 있는 관광명소가 사진과 함께 설명되어있는가 하면, 판매용의 외씨버선길 기념품도 여럿 진열해 놓았다.

▼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이곳 봉화객주를 지키는 근무자였다. 웃음 띤 환대와 친절한 안내로도 모자라 따뜻한 커피까지 대접받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슬그머니 건네주는 ‘토시’는 일정을 핑계 삼아 도망치듯 빠져나오던 우리 부부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오전약수를 모두 둘러봤으니 이젠 생달마을로 내려갈 차례이다. 그런데 낯익은 이름이 적힌 이정표 하나가 눈길을 끈다. 춘향전의 주인공인 이몽룡의 생가가 이 부근에 있다는 것이다. 이몽룡의 모티브가 된 ‘계서 성이성(成以性)’의 생가를 말하는데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만하다. 조선 중기 남원부사 성안의 아들로 태어나 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그 후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4차례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니 말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도로와 헤어져 숲속으로 들어선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가급적 도로변을 벗어나려는 외씨버선길의 특징이기도 한데, 이런 한적한 길을 걷다 보면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면서 아름다운 자연의 정취에 흠뻑 빠지게 된다.

▼ 또 다시 도로로 내려서자 길가에 커다란 자연석 하나가 심은 듯 세워져 있다. ‘보부상위령비 표지석 비문’을 새겼는데, 지금은 ‘물야저수지’ 속에 잠겨버린 마을(백병마을)에서 살던 보부상들을 기리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경상도와 강원도를 오가며 장사를 하던 보부상들이 언제부턴가 이 마을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족이 없던 그들은 죽으면서 소유하고 있던 땅을 모두 마을 소작인들에게 기부했는데, 이후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보상을 받게 되자 그 돈으로 마을 기금을 조성하여 이 위령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 그 옆에는 조선 말기 보부상 11명의 이름이 적힌 위령비를 세워놓았다. 매년 9월 그믐날이면 지낸다는 보부상들의 합동제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자손이 없는 그들의 영혼을 마을 주민들이 합동으로 섬긴다는 얘기이다.

▼ 생달마을을 향해 걷다가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렸다. 날머리인 상운사는 아직도 멀었는데, 아니 아직 물야저수지도 벗어나지 못했는데 산악회 버스가 도로변에 세워져있는 게 아닌가. 오늘은 대충 이곳에서 마무리 짓겠단다. 그렇다면 다음 11길을 이곳에서 시작하겠다는 얘기가 된다. 다음 코스는 선달산과 어래산 등 1천 미터를 훌쩍 넘기는 봉우리들을 넘어야한다. 거리도 15.4㎞나 되기 때문에 많이 버겁다. 그런 구간을 오히려 늘려서 걸어야만 한다니 난 이제 죽었다.

▼ 왼편으로는 ‘물야저수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홍수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한편, 안정적인 용수 공급을 위해 백병마을 부지에 조성한 다목적 댐이다. 아니 나에게는 추억의 저수지이기도 하다. 오래 전, 선달산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다 이 저수지를 만났었고, 이곳에서 난 또 다른 추억을 떠올렸었다. 당시의 소회를 옮겨본다. <몇 번인가 영국출장을 갔었지만. 런던, 맨체스터 등등 늘상 출장지에서만 머물다가, 언젠가, 워드워즈의 생가를 둘러보고파 힘들여 짬을 내어봤던 글라스미어 지방의 원더미어 호수. 내셔널 트러스트라는 단체에서 18세기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워즈워드 생가보다도, 난, 하룻밤을 묵으며 거닐었던 호숫가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 이곳에서 옛 추억을 되살리는 호수를 만나다니. 그때, 원더미어 호숫가에서 난 그 호젓함에 가슴을 떨며 울먹이고 있었다. 그 울렁거림에 나도 몰래 저수지 물에 손을 담가본다.>

▼ 생달마을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물야저수지의 또 다른 상류로 버스길은 이곳에서 끝난다. 상운사로 올라가는 길은 1차선이라서 대형버스의 통행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음 번 11길(마루금길)은 그 시점이 상운사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곳부터 걸아야만 한다.

▼ 약수탕길의 인증용 이정표(상운사 2.7㎞/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10.3㎞)는 마을 버스정류장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아까 박달령에서 인증사진을 찍지 못한 사람은 이곳에서라도 꼭 찍어두어야 할 일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총 3시간3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가 11.31km이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오르막 임도와 산길이 대부분이었던 데다, 오색약수를 둘러보느라 시간이 꽤 지체되었나 보다.

▼ 부근에는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 여겨지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소백산자락길의 스탬프보관함과 안내도도 보인다. 9자락과 10자락의 분기점이 이곳이란다.

 

외씨버선길(9), 춘양목 솔향기길

 

여행일 : ‘21. 6. 5(토)

소재지 :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일원

여행코스 : 춘양면사무소→서동리 삼층석탑→거포 사과마을→새터→도심1리공원→도심2리공원→도심3리 마을회관→춘양목군락지→서벽3리 버스정류장(소요시간 : 19.7km/ 실제는 19.98㎞를 4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아홉 번째 길인 ‘춘양목 솔향기길’을 걷는다. 3개(연결구간까지 포함시키면 4개로 늘어난다)로 나누어진 봉화 권역(73.2㎞)의 두 번째 구간으로, 전체의 1/4 정도를 금강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걷게 된다. ‘춘양목 솔향기길’이라는 별도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만산고택과 권진사댁 같은 춘양지역의 고택들과 보물로 지정된 ‘서동리 동·서 삼층석탑’, 그리고 서벽리의 춘양목군락지를 들 수 있다. 시간에 여유가 있을 경우 종점인 두내약수탕 근처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 들머리는 춘양면사무소(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409-10)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과 36호선을 이용해 울진 방면으로 달리다보면 봉화읍과 법전면을 거쳐 춘양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교차로에서 내려와 88번 지방도(춘양로)를 타고 올라오면 잠시 후 춘양면사무소가 나온다.

▼ 외씨버선길의 아홉 번째 구간인 ‘춘양목 솔향기길’은 춘양면에서 시작해 백두대간수목원에 이르는 19.7㎞ 길이의 둘레길이다. 이 구간의 특징은 1/4 정도를 춘양목이 울창한 숲길을 걷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고택(민속 문화재)이나 석탑(보물) 등의 볼거리는 전반부에 집중되어 있다. 19.7km라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고민스러워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이 구간의 테마가 되어있는 ‘춘양목 군락지’를 생략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 보부상길과 춘양목솔향기길의 시·종점은 춘양면사무소의 후문이다. 때문에 면소무소의 뒷벽을 왼편에 끼고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 길은 ‘춘양 장터’로 연결되는데, 정문에서 오른편으로 나가 의양로를 타고 가도 된다.

▼ 가는 도중 타일벽화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한옥의 용마루와 담장을 그린 다음 그 아래에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의 추진배경과 필요성에 대한 얘기를 적었다. 그 옆에는 백두대간을 상징이라도 하려는 듯 호랑이와 사슴을 그려 넣었다.

▼ 잠시 후 ‘억지춘양 시장’이 길손을 맞는다. 반듯하게 놓여야 할 철길을 힘 있는 향사가 애써 지금의 역사까지 철길을 끌어들인 몽니에서 유래된 썩 달갑지 않은 명칭이 이젠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참고로 사전에는 ‘억지춘양’ 대신에 ‘억지춘향’이 등재되어 있다. ‘어떤 일을 순리대로 하지 않고 억지로 하거나 어떤 일이 억지로 겨우 이루어지는 경우’를 뜻한다.

▼ 시골 장터치고는 규모가 크지만 시장은 한산했다. 장이 서는 날은 시끌벅적하고 부산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한가롭기 짝이 없는 여느 시골 장터와 다름없는 것이다. 8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이 시장은 4일과 9일에 서는 5일장으로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좁은 길거리에 그냥 좌판을 놓고 팔고 사는 전형적 시골 장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5년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된 후 문화와 관광이 어우러진 전통시장으로 생기를 찾아가고 있단다.

▼ 춘양장터를 가로지르면 곧이어 춘양초등학교가 나온다. 개교 103년을 자랑하는 학교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걷다가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만산고택(晩山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279호)’이 반긴다. 만산(晩山)은 조선 말기의 문신 강용(姜鎔, 1846~1934)을 말한다. 만산고택은 강용이 고종 15년(1878)에 지은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 별채 등이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11칸짜리 행랑채와 솟을대문. 솟을대문은 정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해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임금님이 계시는 근정전에 올라가서 정사를 논할 수 있는 반열이 돼야 한다는 것. 만산 선생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냈다고 한다.

▼ 마당에 들어서자 고색창연한 사랑채가 나타난다. 사랑방과 대청마루,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감실로 이뤄져 있다. 이 사랑채와 붙어 ‘ㅁ’자 형으로 안채가 뒤로 배치돼 있는데 이 ‘ㅁ’자 구조는 겨울철 추위를 막아주며 집의 안정감을 높여주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고택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안 곳곳에 걸린 현판이다. 사랑채의 처마 아래에는 ‘만산(晩山)’과 ‘정와(靖窩)’ ‘존양재(存養齋)’ ‘차군헌(此君軒)’이라고 적힌 현판이 있다. ‘만산’은 흥선대원군이 대기만성하라는 뜻으로 직접 짓고 쓴 호이고, 조용하고 편한 집이라는 뜻의 ‘정와’는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강벽원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마음을 보존해 본성을 잘 기르라는 의미의 ‘존양재’는 독립운동가 오세창 선생이 썼으며, ‘차군헌’은 조선후기 서예가인 권동수의 글로 ‘차군’은 대나무를 예스럽게 부르는 말이다.

▼ 사랑채를 정면으로 왼편에는 자녀들의 공부방인 서실(書室)이 자리 잡았다. ‘문필로 맺은 맑고 깨끗한 인연’을 뜻하는 한묵정연(翰墨淸緣)이란 현판을 함께 달아놓았다. 글씨는 고종의 일곱째 아들 영친왕이 8세 때 썼다고 한다. 사진은 게재하지 않았지만 오른편에는 담을 하나 더 쳐서 너머에 별당인 칠류헌(七柳軒)을 두었다. ‘칠류’는 두 가지 의미의 조합이란다. 칠(七)은 천지가 ‘월화수목금토일’을 따라 돌아오듯, 조선의 국운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차용했고, 류(柳)는 우국 충신이었던 중국 송나라 시인 도연명이 자신의 집 주위에 충절을 상징하는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은 옛이야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 도로(서동길)로 되돌아 나와 이정표가 가리키는 ‘서동리 삼층석탑’ 방향으로 향한다. 특별한 볼거리는 없고 그저 굵직한 벚나무 가로수가 인상적인 길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춘양성당’에 이른다. 면단위 마을에서는 보기 드물게 커다랗고, 외모까지도 고전미를 물씬 풍긴다. 하지만 이 성당의 사진을 게시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성당의 뒤편 언덕에 세워진 ‘망미대(望美臺)’라는 비석을 거론하지 위해서이다. 을사늑약 후 귀향한 만산(晩山)이 나라를 잃은 설움과 임금을 향한 안타까운 충정을 담은 글을 새겨놓았는데, 망미(望美)란 소동파의 적벽부(赤碧賦) 가운데 <묘묘혜여회(渺渺兮余懷) 망미인혜천일방(望美人兮天一方)>에서 따온 말로 <아득하고 아득한 나의 회포여, 미인(임금)을 하늘 저 끝에 바라보도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단다.

▼ 철길 아래를 지나자마자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낙천당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잠시 후에 들르게 될 권진사댁 말고도 고택들이 여럿 들어선 오래된 마을이다. 마을 앞의 너른 터는 춘양목 묘목을 생산하는 종묘장이라고 한다. 2년 내외의 춘양목을 키우는데 금강송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팔려나간단다.

▼ 철길을 왼편에 낀 채로 몇 걸음 더 걸으면 ‘태고정(太古亭)’이 얼굴을 내민다. 태고정은 만산이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망국의 한을 달래려 지은 정자다. 태고정 주위 바위를 ‘만취(晩翠)’라하고 소(沼)를 ‘세심(洗心)’, 대(臺)는 ‘망미(望美)’라 하고 헌(軒)을 ‘칠류(七柳)’라 했다. 기찻길이 나기 전까지 만산고택에서 망미대, 태고정에 이르는 길은 서로 통해서 쉽게 오갈 수 있었다고 한다.

▼ 태고정 바로 옆에는 안동 김씨의 정자인 낙천당(樂天堂)이 있다. 전서체로 쓴 현판이 돋보이는 이 정자는 수북(水北) 김람(金灠, 1601-1677)이 지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까지 국왕을 호종(扈從)했던 그는 명나라가 망하자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킨다며 낙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홍우정(洪宇定)·강흡(姜洽)·심장세(沈長世)·정양(鄭瀁)·홍석(洪錫) 등과 이 정자에서 교유했단다.

▼ 권진사댁(權進士宅)도 고택의 자취를 그대로 보여준다. 흙돌담 위에 기와를 얹은 모습과 옛날 기와의 진한 색깔은 고택을 더욱 고풍스럽게 한다. 이 집은 성암(省菴) 권철연(權喆淵, 1874-1951)이 살던 집이다. 선생은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자손으로 권중하의 장자다. 자는 성길(聖吉)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1888년 소과에 응시해 생원이 되었다. 집을 지은 것은 건너 마을인 운곡(雲谷)에서 이곳으로 정착한 고종 17년(1880년)이라고 한다. 100년 정도가 흐른 1987년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90호로 지정됐다.

▼ 아홉 칸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 형의 정침이 배치되어 있다. 전면의 사랑채는 7칸 규모로 오른편과 왼편 끝으로 각각 1칸 규모의 방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사랑방과 침방, 누마루로 구성돼 있다. 가문 계승을 위한 가부장과 장자 중심의 생활공간이면서 동시에 배움터라고 보면 되겠다. 사랑채에서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건너방, 안대청과 부엌, 곳간으로 구성돼 있다. 안방은 안방마님의 일상 거처고 종부, 큰 며느리, 작은 며느리를 위한 공간이다. 딸도 살림살이와 예절 수양을 위해 안채에서 함께 지냈다. 이렇듯 사랑채와 안채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과 내외법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채와 채를 나눠 남녀를 구분한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이다.

▼ 만산고택과 마찬가지로 사랑마당의 왼편에는 감개헌(鑑開軒)이라는 서당이 들어앉았다. 참! 서실 앞에는 권상경에게 수여된 대통령표창이 철판에 프린팅되어 있었다. 맞다. 이 집은 애국지사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곳이라고 했다. 권철연의 아들 권상경(1890-1958)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서명운동을 주도했고, 1926년 심산 김창숙이 독립자금을 모집할 때는 거액의 독립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심산을 숨겨주기도 했단다.

▼ 탐방로는 이제 춘양의 북측 끝자락에 위치한 춘양중학교(이정표 :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17.7㎞/ 춘양면사무소 2㎞)로 이어진다. 권진사댁에서 빠져나와 서원교를 건너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3층으로 지어진 학교건물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 한국산림과학고등학교와 함께 쓰는 운동장 동쪽에는 보물 제52호인 ‘서동리 삼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같은 규모와 양식을 가진 2기의 탑이 10m 남짓의 거리를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양새이다. 형식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층층이 쌓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삼층석탑이 학교 안에 있는 이유는 원래 이곳이 신라의 고찰 람화사(覽華寺)의 옛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학교 안에다 절을 복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석탑만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1962년 석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나온 사리병과 99개의 토탑들은 지금 경주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단다.

▼ 학교에서 빠져나오면 ‘서원마을’. 옛날에 이 부근에 ‘진성 이씨’ 서원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이어서 사과밭과 논 사이로 난 시멘트 포장길(거곡길)을 20분 정도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직진하면 거곡마을. 탐방로는 솟대가 보초를 서고 있는 왼쪽으로 향한다.

▼ 길은 고개를 넘어 ‘양반걸음 걷기’ 체험장에 이른다. 바닥에 새겨놓은 발자국을 밟고 지나가면서 양반걸음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양반걸음이란 다리를 크게 떼어 느릿느릿 걷는 걸음을 말한다. 옛날 양반들은 소나기가 쏟아지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느긋하고 여유 있게 걸었다고 한다. 뛰어가면 비를 피할 수도 있는데, ‘체면 때문에, 체통을 지킨다고’ 온 몸에 비를 적셔가면서까지 팔자걸음을 했다는 것이다. 그게 썩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채근하는 일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느릿느릿 여유롭게 걸어보자는 제안이 아닐까 싶다.

▼ 체험장을 지나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백두대간수목원 15.7㎞/ 춘양면사무소 4㎞). 이번에는 오른쪽에 위치한 염장마을로 향한다. 옛날 소금장수가 많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인데, 이 일대에서는 인삼밭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검은 천이 덮인 인삼밭이 산기슭에 넓게 펼쳐져 있다.

▼ 염장마을을 지난 탐방로는 거포마을(이정표 :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14.1㎞/ 춘양면사무소 5.6㎞)로 이어진다. 거호로도 불리는데 ‘진주 강씨’가 묘를 호걸형의 터에 쓴데서 연유한단다. 그 묘를 쓰고부터 그 후손들이 매우 번창하였기에 거호(巨濠)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마을은 ‘거포사과’라는 브랜드가 생겨났을 정도로 사과가 유명하다. 그래선지 마을로 들어오는 도로변의 가로수까지도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거포사과’는 그 품질이 매우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다. 마을 앞에 세워놓은 ‘탑프루트’ 인증마크가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탑프루트라는 게 최고 품질의 과일에 주어지는 인증이기 때문이다. 탑프루트 인증은 각 과일별로 적정 무게와 당도, 착색도, 안전성(농약 잔류) 기준을 통과해야만 주어진다. 그만큼 인증을 받기 어렵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인증을 받으면 가격이 15∼20% 높게 형성된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사과마을이라는 닉네임답게 눈만 들면 온통 사과밭으로 채워진다.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해발고도가 500m도 넘는다. 그러니 일교차가 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거기다 푸석푸석해 보이는 토양은 물도 잘 빠질 것 같다. 원예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사과재배의 최적지가 분명하다. 이런 환경에서 생산된 사과가 어찌 향과 맛, 그리고 당도가 뛰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마을 뒤 언덕에는 포토죤도 만들어놓았다. 사과 꽃이 필 무렵인 봄부터 수확하는 여름, 가을까지 장관의 연속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거포마을을 출발한지 10분.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35분 만에 ‘거포재’에 올라섰다. 거포에서 새터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이곳에는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 탐방로는 이제 내리막길로 변한다. 걷는 도중 각화산과 왕두산 등 1천m를 훌쩍 넘기는 봉화지역의 높은 산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코스이기도 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낙엽송들을 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자 송이버섯 조형물로 장식된 작은 쉼터가 길손을 맞는다. 심심산골로 이루어진 경북 내륙지역의 특산품은 ‘청송 사과’, ‘양양 고추’, ‘봉화 송이버섯’으로 대변된다. 특히 봉화 사람들에게 송이버섯은 그저 단순한 버섯이 아니라고 했다. ‘송이버섯의 본고장’이라는 자부심은 기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니 저 조형물에는 봉화 사람들의 ‘송이 사랑’이 담겨있다고 봐야겠다.

▼ 쉼터에는 이정표(백두대간수목원 후문 12.1㎞/ 춘양면사무소 7.6㎞)도 세워놓았다.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 되는 시설물이다. 이정표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두어야만 구간 완주가 인증되기 때문이다.

▼ 인증지점을 지나며서 탐방로는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널찍한 임도인데다 굵직한 소나무까지 울창해서 지루하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10분쯤 내려섰을까 임도와 헤어진 탐방로가 갑자기 숲속으로 파고든다.

▼ 산길은 활엽수로 가득하다. 요즘은 전국의 어느 산으로 가더라도 수목이 우거진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구간의 뛰어난 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길가가 온통 산딸기 밭이었던 것이다. 사랑꾼인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두 손 가득이 따더니 내 입에다 넣어준다. 그러자 새콤달콤한 기운이 입안에 가득해진다. 행복하다. 이런 게 사랑인가 보다.

▼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운곡천이 기다린다. 한자를 풀어쓰면 구름 낀 계곡 사이로 흐르는 하천 정도가 되겠다. 이정표(백두대간수목원 11.4㎞/ 춘양면사무소 8.3㎞)는 이곳을 ‘새터’라고 적고 있었다. 조선 말기 ‘김영 김씨’가 와서 새로 개척했다는 마을이다. 새로 터를 닦았다고 해서 ‘새터’라 부른단다.

▼ 탐방로는 이제 운곡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둑방길을 따른다. 이 둑방은 2008년 폭우로 하천 자체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손돼, 그 이후 폭 60m, 높이 5m 이상 규모로 새롭게 건립한 것이다. 하지만 새로 만들어서인지 그늘을 만들어줄만한 나무가 일절 없는 삭막한 풍경이다. 간간히 강바람이 불어온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 깊은 산골은 아니지만 양심장독대도 만날 수 있었다. 목마른 여행자들을 위해 생수를 보관해두는 곳이다. 다만 양심껏 1인당 1병씩만 가져가란다. 그래서 이름도 ‘양심장독대’이다. 우리처럼 넉넉하게 물을 챙겨가는 나그네들에게는 별무소용이겠지만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 도심1리의 앞뜰은 대부분 논으로 일구어져 있었다. 외씨버선길을 걸으면서 경북 오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오기 전에는 첩첩산중에 빈약한 농지, 가난한 살림일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너른 들과 풍요로운 마을, 오래된 전통이 곳곳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 ‘수진교’ 다리 곁에 조성해놓은 ‘도심1리 공원(이정표 :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9.7㎞/ 춘양면사무소 10㎞)’을 지나자 이번에는 ‘감동골’ 마을이 나온다.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 류성룡의 백씨 겸암 류운룡(謙菴 柳雲龍, 1539∼1601)이 부모님을 모시고 피난했었다는 마을이다. 그나저나 이 마을의 이정표(두내약수탕 7.6㎞/ 춘양면사무소 10㎞)가 우리 부부를 고생시키고 말았다. 종점까지 7.6㎞ 밖에 남지 않았다는 정보를 믿고 이쯤에서 택시를 불러 백두대간수목원으로 가려던 계획을 수정해 완주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남은 거리는 거의 9㎞. 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는가.

▼ 운곡천을 따라가다 보면 물막이를 여럿 만나게 된다. 경사진 하천의 토사유출을 막기 위한 시설로 보이는데 그 하나하나가 다른 모양새로 만들어져 있어 이를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운곡천으로 내려선지 35분 만에 ‘도심2리 공원(이정표 : 백두대간수목원 후문 7.8㎞/ 춘양면사무소 11.9㎞)’에 도착했다. 늙고 젊은 느티나무가 둘러싸고 있는 공원은 홍보용 송이버섯조형물 외에도 정자와 벤치에다 그네까지 갖췄다. 마을주민들 보다는 외씨버선길 나그네들을 위한 시설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 탐방로는 운곡천의 둑방길을 벗어나 내륙으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도심2리’에 이른다. 이 마을은 현재 한전과 한판 싸움 중인가 보다. 마을회관 앞에다 생명줄 자르는 송전탑 때문에 자신들의 마을이 소멸된다는 현수막을 내걸어 놓았다. 그건 그렇고 도심2리 마을 권역도 역시 사과밭 천지였다. 때문에 탐방로는 사과밭 사이로 나있다. 나무에는 꼬맹이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른 품종인지 종이봉지로 쌓아준 나무들도 간간히 보인다. 과일을 크게 하고, 낙과를 방지하기 위한 농부의 손길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 모내기가 끝난 논과 사과밭을 눈에 담으며 15분 정도 더 걷자 느티나무 숲이 나타난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울울창창한 숲속에는 서낭당이 들어앉았다. 마을 한가운데 이렇게 좋은 숲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도심3리’ 마을이 그만큼 평안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도심3리’ 마을회관이다. 이 마을은 길가를 온통 꽃밭으로 가꾸어놓았다는 게 특징이다.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그만큼 여유롭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이 마을은 ‘황터’라는 단위부락이다. 부족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에 구리왕이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오늘의 꽃은 ‘망초’로 꼽아봤다. 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이라는데 오늘따라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하긴 망초가 밭에 자라면 농사를 망치고, 농사를 망치면 나라가 기운다고 해서 ‘망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까지 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 탐방로는 황터7교를 지나면서 문수산 자락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이곳도 역시 눈만 들면 온통 사과밭이다. 아니 자두나무 과수원도 널따랗게 분포되어 있었다. 주인아저씨 말로는 25년이나 묵은 고목들이란다.

▼ 썩 좋지 않은 풍경도 만났다. 그간 애써서 뿌리고 가꾼 농작물이라며, 농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오가는 길손들이 농작물에 손을 댔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 과수원 지대가 끝나는가 싶더니 지도에 ‘풍경액자’로 표시된 지점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담아보라는 듯 액자 모양의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액자 속으로 머리를 넣자 각화산(1,202m)과 왕두산(1,046) 등 백두대간에 놓인 산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맞다. 봉화에는 이렇듯 해발 1천m 넘는 산이 10개도 넘는다고 한다. 그 가운데 봉화의 진산은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문수산(1,207m)이다. 외씨버선길은 문수산의 뒤쪽 비탈길을 따라 나있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울울창창하게 들어찬 저 소나무들은 외씨버선 9길의 테마를 ‘춘양목 솔향기’로 만든 장본인이다. ‘춘양목(春陽木)’이란 금강소나무(金剛松)의 또 다른 표현. 즉 춘양지역에서 올라온 ‘금강소나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금강송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수없이 잘려나간 소나무들이 춘양역 앞에 쌓이기 시작했고, 이 목재는 철마(鐵馬)라는 괴물이 하룻밤 사이 서울까지 옮겨다 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춘양목’이라 불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 산자락에는 수십 년은 되었음직한 소나무들이 꽉 들어차있다. 태백산맥 줄기에서 자라는 저 금강소나무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꼬불꼬불한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줄기가 곧바르며,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별나게 붉다. 또한 결이 곱고 단단하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 썩지도 않아서 궁궐이나 관아를 짓던 목재로 사용해왔다. 모진 남벌(濫伐)에도 그나마 남아 있는 곳은 이곳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 그리고 울진군 서면 소광리 일대라고 한다. 때문에 1981년 유전자 보호림, 1985년에는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단다.

▼ 길가에는 간벌(間伐)로 처낸 목재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간벌은 삼림을 가꾸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나무를 심은 후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주변상황을 살펴 솎아내는 것을 간벌이라 하는데, 삼림의 보호와 육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단다. 빽빽한(울폐된) 나무를 잘라내어 나무의 밀도를 조절하면 나무가 지름생장을 하면서 이용가치가 향상된다는 것이다.

▼ 숲으로 들어선지 12분 만에 벤치 두어 개를 놓아둔 작은 쉼터를 만났다. 9길(춘양목솔향기길)의 두 인증지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완주의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이정표(백두대간수목원 후문 3.6㎞/ 춘양면사무소 16.1㎞)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두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 ‘춘양목 군락지’는 봉화의 진산인 문수산의 산자락에 들어서 있다. 그래선지 문수산에도 숲길을 내놓았다. 하긴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가운데 하나가 소나무가 아니겠는가. 솔향기에 취해 걷는 신선놀음만으로 황송한데, 힐링까지 덤으로 얻어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뛰어난 산책로인가.

▼ 숲을 가꾸는 목적은 수자원 보전이나 환경보존이다. 그러니 자연친화적인 숲길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예쁜 나비까지 눈에 담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 ‘숲 해설 안내소’도 들어서 있었다. 문수산 숲길의 ‘숲 해설사’들이 머무는 공간인 것 같은데, 오늘은 이 해설사 아저씨가 공적이 되어 버렸다. 수목원으로 내려가는 샛문이 잠겨있다는 내 불평에 대한 그의 답변이 어긋나도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가면 만날 수 있다는 탈출로가 2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으니 거기까지 가는 동안 내 입에서는 얼마나 많은 불평이 쏟아져 나왔겠는가.

▼ 눈에 들어오는 소나무들은 썩 나이 들어보이지는 않는다. 맞다. 이 일대의 숲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남벌되었고, 지금은 수령이 50년 정도 된 ‘반백이’만 남아있다(건축용 목재로 쓰이는 춘양목은 일반적으로 100년 이상이 된 ‘올백이’를 사용한다)고 한다. 하긴 목질이 단단한데다 썩지도 않고, 소나무 향기가 오랫동안 진하게 풍기고, 대패질을 하면 윤기가 흘러나는 최상급의 목재라는데 어디 남아나겠는가.

▼ 숲으로 들어선지 50분. 춘양목이라는 ‘네임 벨류’까지도 지겨워지기 시작할 무렵이 되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백두대간수목원이 끝나는 지점인데 이정표(백두대간수목원 2㎞/ 춘양면사무소 17.7㎞)는 곧장 직진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진행방향표시지는 오른편을 향하고 있다. 이제 그만 걷고 싶다는 우리의 마음을 읽었나 보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 트레킹 날머리는 서벽3리 버스정류장(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1478-1)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4분쯤 내려서자 ‘광촌교’가 나오고 이어서 몇 걸음 더 걷자 서벽3리 버스정류장이다. 이정표에 적혀있는 ‘백두대간수목원 후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조금 더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우린 이쯤에서 트레킹을 종료하기로 했다. 한국관광공사가 꼽은 언택트(비대면) 관광지 100선에까지 들었다지만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오늘은 4시간 4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가 19.98㎞이니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외씨버선길(8), 보부상 길

 

여행일 : ‘21. 5. 29(토)

소재지 : 경북 봉화군 소천면과 춘양면 일원

여행코스 : 분천역(버스 이동)→합소삼거리→현동역→소천면사무소→씨라리골→높은터→가마골→춘양면사무소(소요시간 : 18.5km/ 실제는 13.8㎞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여덟 번째 길인 ‘보부상 길’을 걷는다. 3개(연결구간까지 포함시키면 4개로 늘어난다)로 나누어진 봉화 권역(73.2㎞)의 첫 번째 구간으로, 오래 전, 보부상들이 춘양장이나 현동장으로 물건을 팔러 가면서 걸었던 길을 따르게 된다. 그래선지 이 구간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고갯길이 유난히도 많았다.

 

▼ 들머리는 분천역(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964)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과 36호선을 이용해 울진 방면으로 달리다보면 봉화읍과 춘양면을 거쳐 분천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교차로에서 내려와 낙동강을 건너면 스위스의 산장 분위기가 나는 ‘분천역’이 나온다. 지난 1956년 영동선을 개통하면서 주변의 광물자원과 목재 등을 수도권으로 운송하기 위해 만든 역이다. 덕분에 1970년대까지만 해도 큰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벌목업의 쇠퇴에다 정부의 석탄합리화 정책까지 더해지면서 화물열차와 여객열차가 줄어들었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마이카시대가 열리면서 하루 이용객이 채 10명도 되지 않는 조용한 간이역으로 변해버렸단다. 참고로 봉화군을 가로지르는 영동선은 분천역을 비롯해 간이역이 13개나 된다.

▼ 외씨버선길의 여덟 번째 구간인 ‘보부상 길’은 분천역에서 시작해 춘양면사무소에 이르는 18.5㎞ 길이의 둘레길이다. 이 구간의 특징은 국도(36호선)에서의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우리 부부처럼 18.5㎞의 거리가 부담스러울 경우 체력에 맞게 거리를 조정할 수 있다. 참고로 우리 부부는 현동역에서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 역 앞에는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분천역과 함께 생겨난 마을로 역과 함께 흥망성쇠를 겪어왔다. 역이 생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두메산골로 몰려들었으나, 역이 쇠퇴하면서 마을 또한 적막한 산골마을로 전략해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옛 영화를 다시 만들어 보자는 주민들의 의견이 대두됐고, 거기에 행정기관의 도움이 더해지면서 쓸모없어져 가는 영동선을 활용해 2013년에는 V-Train과 O-Train 관광열차가 개통됐고, 다음 해인 2014년에는 산타마을과 산타열차가 생겨나면서, 불과 50여 일 만에 전국에서 연간 10만여 명이 다녀가는 기적이 일어나는 동네가 됐단다. 종류도 다양한 식당은 물론이고 카페 등 웬만한 도회지 거리가 부럽지 않을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마을과 철로 사이의 공터는 산타(Santa)를 주제로 한 축제장으로 바뀌어져 있다. 아니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마을 전체를 꾸몄다고 보는 게 옳겠다. 분천역, 산타 시네마, 소망 우체통, 이글루 소망터널, 물안개터널, 산타카페, 자전거 셰어링, 산타열차 휴게텔, 먹거리 장터, 산타 슬라이드, 농·특산물 판매부스, 대형 풍차 등이 아기자기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 산타마을은 2014년에 만들어졌다. 봉화 발전의 걸림돌로 추락했던 영동선을 활용해 지역 발전의 기회로 만들어 보자는 의견이 봉화군에서 대두됐고, 거기에 코레일과 산림청, 경북도청이 힘을 보태면서 이곳 ‘분천2리’에 산타마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 산타마을 아이디어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Rovaniemi)에 있는 ‘산타마을(Santa Claus Village)’에서 따왔다고 한다. 산타클로스는 고향인 북극에서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전 세계에 있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빨간 옷을 입은 뚱뚱한 사람이다. 그러니 이곳 ‘봉화 산타마을’의 주요 조형물도 산타클로스와 순록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곳은 대한민국. 산타의 오른편에 한국산 꽃사슴이 미소 띤 얼굴로 앉아있었다. 이 셋을 합친 풍경에서 너그러움과 넉넉함을 느꼈다면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 3년쯤 전인가 페루 여행을 하면서 기념사진께나 찍었던 알파카(Alpaca)도 보였다. 이름도 ‘알파카 체험농장’이란다. 알파카란 라마류에 속한 가축의 한 종으로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그런데 산타와는 무관한 이 동물을 왜 이곳에 모셔다 놓았을까?

▼ 생략한 구간의 풍경이 아쉬워서 다른 일행분의 사진을 빌려왔다. 아래 사진은 분천역에서 낙동강을 따라 걷다가 올라서게 되는 첫 번째 고개 ‘곧은재’이다. 옛날 보부상들이 간고등어나 소금, 쌀 등을 이고지고 오르던 언덕이라고 한다.

▼ 곧은재를 넘으면 만나게 되는 풍경. 즉 왼편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배나드리’의 사진도 그분의 것을 빌려왔다. 낙동강이 휘돌아나가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 말 그대로 ‘배로 드나들었다’는 뜻이다. 강 너머로 건너다보이는 맞은 편 마을은 ‘고제나루’라는 예쁜 이름을 가졌지만 지금은 사는 사람이 없는 빈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배나드리’ 사람들이 그리로 놓인 잠수교(세월교)를 건너가 농사를 짓는단다.

▼ 실제 들머리는 합소삼거리(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집사람의 체력으로는 완주가 걱정되는데, 마침맞게 산악회에서 단축코스를 운영하겠단다. 특히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단조로운 구간을 오롯이 빼버리겠다니 망설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 분천역 주변을 느긋이 둘러볼 수 있는 시간까지 주겠다는 게 아닌가. 이로 인해 실제 트레킹은 현동역 근처에 있는 합소삼거리에서 시작했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현동교’를 건너자마자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다.

▼ 낙동강변을 따라 난 도로(열람이길)를 따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아니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 게 옳겠다. 그건 그렇고 오늘 걷게 되는 구간은 ‘보부상’을 테마로 꾸며놓은 둘레길이다. 보부상은 행상, 선질꾼이란 이름 외에도 다리가 없는 ‘바지게’를 메고 다녀 이 지역에서는 ‘바지게꾼’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바지게에는 소금, 미역, 생선 등 소박한 생필품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 5분쯤 걸었을까 또 다른 간이역인 ‘현동역(縣洞驛)’이 반긴다. 상주 직원이 없는 무인역으로 무궁화열차가 오전과 오후 왕복 두 차례만 서는데, 이용 고객은 하루 평균 10명이 채 되지 않는단다. 그렇게나 한적한 시골역이지만 외씨버선길을 걷는 나그네들에게는 중요 포스트로 변한다. 역사 앞에 세워진 이정표(춘양면사무소 12.5㎞/ 분천역 6㎞)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두어야만 완주가 인증되기 때문이다.

▼ 영동선의 임기역과 분천역 사이에 있는 현동역은 1956년에 문을 열었다. 오랜 세월 견디고 살아남은 역사에는 시집 수백 권이 꽂혀 있었다. 반대편 벽면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공간을 배치했다. 잠시 쉬면서 시를 읽거나, 걸어오면서 느낀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적어놓고 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 선로를 건넌 다음 시멘트계단을 이용해 언덕 위로 올라선다. 막지고개로 올라가는 길(막지고개길)이 언덕 위로 나있기 때문이다. 

▼ 언덕 위에서 만나는 ‘현동3리’ 마을회관 앞에는 ‘현동역과 막지고개’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 길은 옛날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던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길이라고 한다. <미역 소금 어물지고 내성장에 운제(언제) 가노. 가노가노 운제 가노, 열두 고개 운제 가노…> 무거운 봇짐을 지고 험한 고갯길을 오르던 보부상들이 부르던 노래다. 바지게꾼들은 울진에서 소금·미역 등 해산물을 사서 지게에 지고 울진과 봉화사이 열두 고갯길을 넘어 봉화 내성장이나 춘양장에 와서 곡식이나 생활용품 등과 맞바꿨다고 한다. 이들이 걸어서 오가던 옛길은 ‘십이령 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지금은 트레킹 마니아들이 오가고 있다.

▼ 잠시 후 막지고개에 올라선다. 조금 전에 만났던 안내판은 ‘막지’라는 지명의 유래를 보배상들이 소천장(현동)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넘는 고개라는 데서 찾았었다. 또 어떤 이는 이 고개를 울진에서 봉화로 넘는 12령 고갯길 중 시장(市場)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고개라고도 했다. 아무튼 이 고갯마루는 지역주민들이 넘나들던 길이자 등짐장수(보부상)들이 넘나들던 생명의 장삿길이기도 했다.

▼ 고개를 넘으면 국도를 따라 형성된 운곡마을(현동4리)이다. 밭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봉화군에서는 보기 드물게 논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그만큼 물이 풍부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마을에 큰 샘이 솟아 석 달 이상 계속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이웃 주민들까지도 이 우물을 이용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 이제 탐방로는 ‘현동1리(창촌 : 현동의 으뜸 되는 마을로 군량미 보관 창고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로 들어선다. 소천면(小川面)의 소재지라고는 하지만 면의 전체 인구가 3천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제법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종류도 다양한 식당들은 물론이고 카페와 양조장, 심지어는 여관까지도 눈에 띈다. 그만큼 이동인구가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한때 이곳에는 시장까지 있었다지 않는가. 농촌인구의 감소로 시장기능을 상실한 지금은 비록 택지로 변해버렸지만 말이다.

▼ ‘여기가 봉하마을인가요?’ 뜬금없는 집사람의 질문에 내가 더 당황했다. ‘아니 여긴 봉하가 아니고 봉화일세’. 농담 삼아 말했지만 그녀가 가리키는 그림을 보고는 금방 고개를 끄떡거릴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트레드마크나 다름없는 밀짚모자를 쓴 남성이 볏가리를 수북이 쌓아놓은 들녘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의 위에다 적어놓은 ‘봉화’라는 지명도 집사람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만에 도착한 면사무소(이정표 : 춘양면사무소 11.6㎞/ 분천역 6.9㎞). 이밖에도 파출소와 보건지소, 우체국, 농협 등 주민들을 위한 지원기관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 마을을 통과한 탐방로는 현동천을 지나자 횡단보도를 건넌다. 소천중학교의 정문 앞이다. 곧이어 만나게 되는 ‘현동1교차로’에서는 3시 방향의 ‘시동길’로 진행한다.

▼ 시동길의 입구에는 ‘현동2리’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이제 현동2리로 들어선다는 얘기일 것이다.

▼ 조금 더 걷자 국도(36호선)로 올라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 안내판 하나가 이정표(춘양면사무소 10.7㎞/ 분천역 7.8㎞)와 함께 세워져 있다. 지금 들어가고 있는 골짜기가 ‘씨라리골’인데 골이 깊고 숲이 무성해서 전쟁 때 피난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골짜기에 억새가 많은 탓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억새풀에 베어 쓰라림을 맛봤다고 해서 그런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시동길’을 따라 씨라리골을 거슬러 올라간다. 참! 혹자는 이 길을 옛날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던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길이라고 했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넘어야만 했던 열두 개의 고개를 잇는 ‘십이령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울진의 울진장과 흥부장, 봉화의 내성장, 봉화장을 오가는 바지게꾼들이 3일 밤낮을 꼬박 걸어서 넘었다는 150리 길이라는 얘기가 된다. 울진에서 시작해 바릿재→새재→느삼밭재→저진치→한나무재→넓재를 거쳐 봉화 땅에 들어서고, 이어서 고채비재→멧재→배나들재→노룻재로 이어진다. 하지만 옛길이 아직도 호젓이 남아있는 울진지역과는 달리 이곳 봉화는 국도가 놓이면서 대부분을 훼손시켜버렸다.

▼ 길가는 온통 찔레꽃 세상이다. 우리나라 토종인 찔레꽃은 늦봄에서 초여름까지 들녘이나 산자락에 흔하게 피는 수수한 꽃이지만 향기는 어느 꽃에 못지않다. 찔레꽃 향기를 코끝에 매달고 걸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문득 한종인 시인의 ‘찔레꽃’이란 시가 떠오른다. 그는 찔레꽃을 평생 화려함을 모르고 산 어머니와 같은 꽃이라고 노래했었다. 그리고 사랑과 한이 가시로 남았다고도 했었다. 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 골짜기의 비탈진 산자락에는 어김없이 사과밭이 들어앉았다. 해발이 400m도 넘는 고지대이니 일조량이 풍부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거기다 경사진 탓에 배수까지 좋을 테니 사과밭으로는 이만한 적지도 없겠다.

▼ ‘씨라리골’이라는 네임 밸류에 맞지 않는 풍경도 만날 수 있었다. 어디선가는 기를 수밖에 없는 가축이겠지만, 이런 청정지역까지 축사가 들어섰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하다.

▼ 이처럼 좁아터진 산골짜기에 밭 한 뙈기 쉽게 나올 리가 있겠는가. 산비탈에 들어선 밭들은 하나같이 경사가 졌다. 그것도 가파르다싶을 정도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저런 밭에서는 농사짓기도 만만치가 않겠다.

▼ 소천면사무소를 출발한지 50분,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10분 만에 ‘시동농원’ 앞 삼거리에 도착했다. 어디로 갈지를 놓고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다. 정상적인 탐방로는 물론 오른편으로 난 길. 즉 ‘살피재’로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왼쪽(대연 호두농장 방향)으로 진행할 경우 걷는 거리를 1㎞ 정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 부부는 단축코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포장길이라고는 하지만 구절양장 (九折羊腸) 같은 산길을 따라 하염없이 올라가게 되는 약간은 힘든 구간이다.

▼ 그렇게 25분쯤 올랐을까 ‘대연호두농장’을 조금 지난 지점(아래 사진의 왼편 모퉁이쯤이라 생각하면 되겠다)에서 아까 헤어졌던 탐방로와 다시 만난다. 덕분에 우린 ‘살피재’를 올라보지는 못했다. 고개의 생김새가 눈이 쌓였을 때 신는 신발인 설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 살피재가 살펴서 조심히 가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 다시 만난 정규 탐방로를 따라 조금 더 걷자 작은 쉼터로 꾸며진 ‘높은터’가 길손을 맞는다. 높은터(Daum 지도에 부개재로 표기한 지점이 아닐까 싶다)는 옛날 현동에서 춘양장을 보러가는 또 다른 길목이다. 보부상이 주로 다닌 씨라리골 살피재와 함께 씨라리골에서 높은터를 지나 가마골을 거쳐 춘양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높은터’란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에는 사람들이 거주했으나 사람들이 떠난 지금은 농사만 짓고 있단다.

▼ 높은터에는 구간안내도와 함께 방향표시만 되어 있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인증용이 아닌데도 집사람이 포즈부터 잡는 게 아닌가. 눈에 담을만한 풍경도 없는 길을 오래 걷다보니 꽤나 지루했던가 보다.

▼ 조금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삼거리. 이번에는 ‘자작나무 숲’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춘양면사무소 6.1㎞/ 분천역 12.4㎞)가 반긴다. 놓치지 말아야할 시설물이기도 하다. 보부상길(외씨버선 8길)의 두 인증지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 포장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드는데 집사람의 가벼운 탄식이 들려온다. 이정표를 보고 ‘자작나무 숲’을 연상했는데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맞다. 자작나무숲은 분명 아니다. 가로수 대용으로 길가에 심어놓았을 따름이다.

▼ 자작나무 가로수길이 끝나자 이번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이곳 봉화도 송이버섯의 주 생산지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환경이라 하겠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길가에 비닐 끈으로 금줄을 쳐놓았다. 걷기는 하되 들어가지는 말라는 경고일 것이다.

▼ 자작나무 숲길로 들어선지 40분 만에 ‘가마골(가메골)’에 내려섰다. 소로리(춘양면)에 포함된 자연마을 가운데 하나로 지형이 마치 새색시가 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사진에서나 보아오던 화전(火田) 마을을 연상시킨다. 눈에 들어오는 밭들이 하나같이 만만찮은 경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산자락을 까뒤집어놓은 풍경이 그런 느낌에 한 몫을 더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 ‘관석길’을 따라 10분쯤 걸어 나오자 삼거리(이정표 : 춘양면사무소 4.5㎞/ 분천역 14㎞)가 나오고 탐방로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 이어서 나타나는 또 다른 삼거리(관석교)에서는 왼편이다. 이곳에도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 조금 더 걸어 도착한 산자락. 방향표시만 되어 있는 이정표와 함께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 적힌 춘양목에 대한 내용을 옮겨본다.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부터 경북 울진, 봉화를 걸쳐 자라는 소나무는 줄기가 곧바르며,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별나게 붉다. 이 소나무는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금강소나무(金剛松) 혹은 강송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흔히 춘양목(春陽木)이라고 더 알려진 나무로 금강소나무는 결이 곱고 단단하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 썩지도 않아 예부터 소나무 중에서 최고로 인정을 받았다.>

▼ 이제 탐방로는 오솔길을 따른다. 이어서 경사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모래재’까지 이어진다. 토질이 푸석푸석하고 모래와 같이 부서져 내리는 마사토라고 해서 ‘모래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 잠시 후 올라서게 된 ‘모래재’는 계단처럼 바닥에 홈이 파여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 고갯길은 소로리에서 춘양으로 가는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주민들이 춘양장을 보거나 외지로 나가는 고갯길이며 학생들의 추억이 묻어있는 통학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 모래재를 내려서면 봉화 땅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 펼쳐진다. 시쳇말로 한 뼘이나 될 법한 좁디좁은 골짜기에다 논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게 신선하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한 폭의 옛 풍경화로 다가오는 걸 보면 말이다.

▼ 이 구간에서는 유난히도 많은 ‘애기똥풀’을 만날 수 있었다. 가지나 잎을 꺾으면 노란 즙이 나오는데, 이 색깔이 애기똥색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애기똥풀은 길가에 널리다시피 한 흔하디흔한 꽃이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꽃말’만은 여간 범상치가 않다. ‘엄마의 지극한 사랑’ 또는 ‘몰래주는 사랑’이라니 말이다. 아기 재비의 눈병을 고치려고 애기똥풀의 꽃을 지키는 뱀과 싸우다 죽은 엄마재비의 전설에서 꽃말이 나왔단다.

▼ 산자락을 빠져나온 지 20분. 진행방향 저만큼에 춘양면소재지인 의양리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운곡마을에 들어선다. ‘운곡(雲谷)’은 구름에 덮인 골짜기란 뜻이다. 항상 구름에 가리어 있는 마을 동쪽의 높은 산에 ‘운중선인’이라는 신선이 살았는데, 이와 연관시켜 마을 이름을 지어냈다고 한다.

▼ 운곡마을로 들어서는데 담벼락에 붙여놓은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구경할 수는 없었다. 이정표에 적힌 거리보다도 훨씬 더 멀게 들어가 보았지만 끝내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찾는데 성공한 일행들 말로는 남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만날 수 있었단다. 그러니 눈에 띄었을 리가 만무하다.

▼ 석조여래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의 사진은 다른 일행분의 것을 빌려왔다. 높이가 232㎝인 이 불상은 춘양역사(春陽驛舍)를 건설하는 도중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고 한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코 부분이 약간 부셔진 것을 제외하고는 보전 상태는 양호한 편이란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춘양역(이정표 : 춘양면사무소 1㎞/ 분천역 17.5㎞)’에 이른다. 춘양역은 ‘억지 춘양’ 이란 말을 낳게 한 범인으로 회자되는 곳이다. 반듯하게 놓여야 할 철길을 힘 있는 향사가 애써 지금의 역사까지 철길을 끌어들인 몽니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 춘양은 일제 때 경북 북부 내륙의 임산물 집산지였다. 일제는 당시 영주와 철암을 잇는 중앙선을 놓아 수많은 목재를 수탈해 갔다. 조선 후기, 황장봉산(黃腸封山)이었던 울진과 봉화의 금강송(金綱松)이 춘양목이란 아픈 이름을 갖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 역사를 빠져나오는데 커다란 체육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주민이 노인으로 구성된 농촌의 현실에 어울리는 ‘게이트볼 경기장’은 물론이고 잔디가 깔린 축구장까지 떡하니 들어섰다. 이곳 춘양이 작은 면소재지인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변신이라 하겠다.

▼ 운곡천을 가로지르는 인도교는 송이버섯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다리 중간은 아예 울창한 솔밭과 송이버섯을 형상화한 조형물로 채워 넣었다. 깊고 깊은 산골짜기 봉화. 워낙 산세가 험하고 인적이 드물어 전쟁이 나도 소식 모르는 마을이 있을 정도였단다. 거기다 ‘춘양목’이란 단어가 생겨났을 정도로 금강소나무의 군락지다. 그러니 송이버섯이 봉화의 명품 브랜드가 되지 않고 어찌 배겨나겠는가.

▼ 트레킹날머리는 ‘춘양면사무소’(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409-10)

다리를 건넌 다음 마을 안길을 조금만 더 걸으면 드디어 ‘춘양면사무소’. 오늘 트레킹이 종료되는 지점이다. 8길이 끝나고 9길(춘양목 솔향기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은 면소무소의 후문에 세워져 있다. 오늘 트레킹은 정확히 3시간 4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3.8㎞. 구간을 단축해 걸었다는 안도감 때문에 속도를 많이 떨어뜨렸던 모양이다.

▼ 9길(춘양목 솔향기길)에 대한 종합 안내판은 면사무소의 정문에 세워져 있었다. 이곳 춘양이 천하명당 ‘십승지지(十勝之地)’ 임을 알리는 빗돌도 눈길을 끈다. 서양인들이 유토피아(Utopia)를 이상향으로 꿈꿨듯이, 우리 조상들은 ‘십승지지’를 이상향으로 꼽아왔다. 십승지지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10곳의 땅을 의미한다. 십승지지를 언급한 옛 책은 ‘정감록(鄭鑑錄)’ ‘택리지(擇里志)’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등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민중에게 큰 영향을 미친 비기(秘記)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지가 가장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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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씨버선길(7), 치유의 길

 

여행일 : ‘21. 5. 1(토)

소재지 : 경북 영양군 일월면과 봉화군 재산면 일원

여행코스 : 우련전→영양·봉화 경계→칡밭목 삼거리→아름다운숲길 입구→일월산 자생화공원(소요시간 : 8.3km/ 실제는 9.77㎞를 2시간 35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테마구간과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일곱 번째 길인 ‘치유의 길’을 걷는다. 4개로 나누어진 영양 권역의 마지막 구간으로, 우리의 역사적 아픔이 묻어있는 일제강점기의 광산을 둘러보고, 반변천 계곡 및 옛 국도를 따라 이어지는 아름다운 숲길을 따라 걷게 된다. 이 구간의 가장 큰 특징은 평지에 가까운 완만한 오르막길이어서 느긋하게 산보하듯 걸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요즘의 트렌드인 힐링을 만끽할 수 있는 구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 들머리는 우련전(영양군 수비면 신암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과 36호선을 이용해 봉화·울진 방면으로 달리다가 법전1교(봉화군 법전면 어지리)에서 국도 31호선으로 갈아타고 영양방면으로 내려오면 봉화와 영양의 경계인 ‘우련전’에 이르게 된다. 7길의 출발지는 원래 ‘일월산 자생화공원(영양군 일월면 용화리)’이나 우리 일행은 이곳 ‘우련전’에서 시작해 역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이곳 우련전에는 대형버스를 주차해 둘만한 공간이 없다니 어쩌겠는가.

▼ 외씨버선길의 일곱 번째 구간인 ‘치유의 길’은 일월산자생화공원에서 출발해 영양과 봉화의 경계인 우련전에 이르는 둘레길이다. 이 구간은 일제강점기의 시설들을 둘러보며 역사적 아픔을 느껴본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허물어져가는 시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선광장을 구경한 다음, 광물을 나르던 구절양장의 옛 도로를 따라 걷게 된다. 새로운 도로가 뚫리면서 버려져 있던 이 길은 웰빙과 힐링이 시대의 화두가 되면서 아름다운 숲길로 다시 태어났다. 이 구간이 ‘치유의 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이곳은 7코스인 ‘치유의 길’의 종점이지만 ‘봉화연결길(7-1코스)’의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영양터널’의 왼편. 즉 ‘봉화연결길’이 시작되는 지점에다 구간 안내도를 세워두었다. 또한 봉화군의 특징 및 특산물을 소개하는 안내판을 세워 봉화권역이 시작됨을 알려준다.

▼ 이곳 ‘우련전’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보인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연꽃이 물 위에 떠있는 형상)의 명당이라며,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묘를 써오던 지역이라고 적었다. 또한 1801년 신유박해 때는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안드레아)의 종조부 김종한(안드레아)이 30명의 신도와 함께 숨어살던 천주교의 성지이기도 하단다.

▼ 영양터널을 가운데에 두고 오른편으로 난 시멘트포장길(일월산길)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른 낙엽송과 소나무가 길게 도열해 있는 아름다운 숲길이다.

▼ 제대로 된 구간안내도는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 7코스(치유의 길)와 7-1코스(봉화연결길)의 지도와 함께 구간의 특징을 적었다. ‘낙동정맥트레일’ 안내판도 보인다. ‘낙동정맥’이란 백두대간에서 남쪽으로 갈려나와 백병산·주왕산·단석산·취서산·금정산 등 수많은 명산들을 일군 후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에서 그 숨을 다하는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산림청에서 낙동정맥 일원의 풍부하고 수려한 산림자원과 역사·문화자원 등이 분포된 거점마을들을 연결하는 도보 중심의 숲길을 만들고 ‘낙동정맥트레일’이란 이름을 붙였다.

▼ 세상은 요즘 초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길가 벚나무들은 이제야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곳 우련전의 해발고도는 무려 700m. 지대가 하도 높다보니 계절까지도 늦게 찾아오는가 보다.

▼ ‘일월산길’은 엄연한 차도이다. 하지만 차선은 하나뿐이다. 길가 곳곳에 ‘차량 교행지역’을 별도로 만들어놓은 이유일 것이다.

▼ 20분쯤 걸었을까 첫 번째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대티골 입구 5.8㎞/ 영양터널 1.6㎞)는 갈림길에 개의치 말고 곧장 직진하란다. 하긴 군 직영의 산나물 채취 체험장이라서 입산을 금지한다는 경고용 현수막까지 걸려있으니 누가 그쪽으로 가겠는가. 그나저나 이곳에는 ‘일월산 등산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부근 어디쯤에 등산로 입구라도 있는 모양이다.

▼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이 길은 엄연한 차도이다. 심심찮게 오가는 차량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 심심산골이라고 해서 사람이 살지 말란 법은 없나보다. 해발고도가 800m에 가까운데도 민가가 들어섰고, 주위에는 널따란 경작지까지 딸려있는 게 아닌가. 그나저나 고랭지 채소를 기르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을 것 같다.

▼ 8분쯤 더 걸었을까 탐방로가 차도를 벗어난다. 그리고는 숲속으로 파고든다. 우리 부부도 이정표(일월산 자생화공원 6.1㎞/ 우련전 2.2㎞)가 지시하는 대로 숲속으로 들어선다.

▼ 들머리에서부터 보아오던 ‘황씨 부인당’은 이곳에서 이별을 고한다. 월자봉 정상 근처에 ‘황씨부인당’이 있으니 일월산으로 올라가는 도로와 헤어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왕에 나왔으니 이 지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황씨 부인’에 대한 설화도 한번 살펴보자. 일월산 아랫마을에 황씨 처녀가 살고 있었다. 이 처녀는 자신을 좋아하는 두 명의 남자 중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신혼 첫날 밤 뒷간에 다녀오던 신랑은 신방 문에 어린 칼날의 그림자를 보고, 연적이 숨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엄청난 착각을 하게 된다. 마당의 대나무 잎 그림자를 칼날로 잘 못 본 것이다. 새신랑은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을 쳤고, 신부는 원삼과 족두리도 벗지 않은 채 신랑을 기다리다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오해를 푼 신랑은 신부의 주검을 수습하고 사당을 지어 혼령을 위로한다는 내용이다. 황씨 부인의 당시 심정은 조지훈(趙芝薰)의 시 ‘석문(石門)’에 잘 나타나 있으니 한번쯤 읽어볼 일이다.

▼ 잠시 후 물기 하나 없는 작은 개울을 건너는데 낡은 팻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 개울이 영양군과 봉화군의 경계라도 되는 모양이다.

▼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자갈 하나 박히지 않은 순수한 흙길이 그지없이 폭신폭신한데다 경사까지도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연록으로 물들어가는 초목들이라니. ‘연록은 꽃보다도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던가.

▼ 어느 현자는 길을 인생에 비유하기도 했다. 항상 편한 길만 만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생을 험한 길만 걷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탐방로는 이내 인간의 손때가 잔뜩 묻은 포장길로 올라선다. 이어서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칡밭목 삼거리’에 이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만이다. 이곳은 ‘대티골 숲길’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한데, 이를 알리려는 듯 외씨버선길의 이정표(일월산 자생화공원 5.7㎞/ 우련전 2.6㎞) 외에도 대티골 숲길의 이정표(숲길 입구←/ 칡밭목↑/ 일월재↓)를 세워놓았다. 칡밭목 방향으로 직진할 경우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로 이어지고, 외씨버선길은 물론 왼편 옛 국도를 따른다. 참고로 ‘칡밭목’이란 지명은 칡이 산을 덮고 있어 칡을 일부러 심어 놓은 밭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음으로는 ‘갈전(葛田)’이 된다.

▼ 이곳은 갈림길이라는 것 말고도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되는 지점이다. ‘치유의 길(외씨버선 7길)을 완주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이정표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어두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이후부터는 옛 국도를 따른다. 이 길은 지금의 국도(31호선)가 생기기 전, 영양군 일월면과 봉화군 재산면을 잇는 옛 국도로 일제 강점기 일월산에서 캐낸 광물을 봉화군 장군광업으로 수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제가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시켜 닦은 길이기 때문에 ‘수탈의 길’로 불리기도 했다.

▼ 그런 아픔의 역사는 모퉁이에 세워놓은 빛바랜 이정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영양 28㎞’. 옛날 국도로 명맥을 이어가던 시절의 이정표라는데 판독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낡아있다. 그래선지 곁에 안내판 하나를 세워 이해를 돕는다. 일제 때의 광물수송과 해방기의 목재수송으로 활기를 띠던 이 길은 새로운 국도가 놓이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그러다가 웰빙과 힐링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새롭게 단장되어 명품 둘레길로 다시 태어났고, 현재는 외씨버선길을 오가는 이들의 도우미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군데군데 돌로 쌓고 무너져 내린 흙을 치우며 다듬은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대티골 사람들이 숲길을 되살리기 위해 손을 댄 흔적들이란다. 옛 국도는 1990년대 초 새로운 길이 놓이면서 잊혀 갔다. 아니 잊혔다기보다는 자연 스스로가 인간들에게 짓밟혀온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다가 대티골 사람들이 무너진 흙을 치우고 허물어진 곳은 돌을 쌓아 북돋웠다. 그들은 옛 국도에 그치지 않고 댓골길·옛마을길·칠(칡)밭길 같은 옛길도 ‘아름다운 숲길’로 되살렸다. 길 중간중간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만들고 이정표를 세웠다. 그렇게 정성들여 가꾸면서 방치되었던 옛길이 그 어느 길보다 아름다운 숲길로 다시 태어났고, 이 같은 노력으로 대티골 숲길은 2009년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숲길 부문‘아름다운 어울림 상’을 받았다.

▼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은 찾는 이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전국에 몇 개 남지 않았을 비포장 옛 국도, 그것도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난 옛 도로를 걷는 것은 흔치 않은 매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 길은 평지에 가까운 완만한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오르막 구간은 아예 없다고 봐도 된다. 이 정도라면 원래의 순서대로 자생화공원에서부터 시작했어도 느긋하게 산보하듯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역으로 내려가고 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을 수 있는 이유이다.

▼ 콧노래 흥얼거리며 6분쯤 걸었을까 벤치에 정자까지 갖춘 의젓한 쉼터가 나타난다. 옛 길의 아픈 흔적들을 눈에 그치지 말고 느긋이 쉬면서 가슴에까지 담아가라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정자 옆에 세워놓은 이정표(숲길 입구↑/ 진등→/ 칡밭목↓)가 이채롭다. 솟대를 머리에 이었는가 하면 아름다운 숲길의 지도를 두 개나 달고 있다. 참! 이곳에서 ‘진등’ 방향으로 내려가면 반변천의 발원지인 ‘뿌리샘’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산자락에는 금강소나무와 활엽 교목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있다.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탐방로는 그 사이를 헤집는다. 네댓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이다. 이런 곳에서는 혼자 생각에 잠겨 걸어도 좋고 여럿이 수다를 떨며 걸어도 좋다. 숲의 청량한 숨소리만이 가득한 옛길을 서두르지 않고 걸어본다.

▼ 아름다운 숲길로 들어선지 30분 만에 만난 두 번째 쉼터에서는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도 합류했음은 물론이다. 우리 부부의 간식은 막걸리와 과일. 요기만 때우면 되기에 일행들과 나눠 마시면서 주변 풍광에 대한 담소로 한껏 여유를 부려본다.

▼ 또 다시 길을 나서는데 이때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대티(大峙)’. 아니 정확히는 ‘윗대티’ 마을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하루해가 반나절도 못되어 떨어질 정도로 좁디좁은 계곡에 들어앉은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참고로 대티골은 일월산의 북동사면 해발 450~600m에 자리한다. 낙동강 상류 지류인 반변천의 발원지이며 영양군의 젖줄을 간직한 청정자연지역으로 각종 산나물과 약초 등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다. 대티라는 지명은 한자어 ‘큰 대(大)’와 ‘언덕 치(峙)’에서 유래한 것으로 '치'가 구개음화에 따라 '티'로 소리가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 비록 잠시지만 황금빛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걷기도 한다. 크게 자란 소나무가 양쪽에 도열해 있는 풍경이 여간 멋진 게 아니다.

▼ 15분쯤 더 걸었을까 ‘웃대티’ 마을로 연결되는 도로에 내려섰다. 이정표는 이곳을 ‘아름다운 숲길 입구’로 적었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외씨버선 조형물’과 쉼터용 정자 외에도 아름다운 숲길과 관련된 입간판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참! 이곳의 이정표(일월산 자생화공원 2㎞/ 우련전 6.3㎞)도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이다. 완주를 인증해줄 사진을 찍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 산림청과 유한킴벌리 등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의 주최기관에서 세워놓은 안내판부터 살펴보자. 대티골 숲길이 제10회 대회 때 ‘어울림상’을 수상했다면서 일월산의 넉넉함을 품은 대티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정자 옆에 세워놓은 ‘아름다운 숲길’의 안내도는 ‘하늘은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영양에 허락해 주셨다’는 자랑과 함께 시작된다. 옛 국도를 살리고, 옛 사람들이 지게지고 걷던 옛길을 보수해서 만든 이 길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면서 피톤치드 가득한 소나무 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힐링까지 해보란다. 천천히 영양이 빨리빨리 지구촌을 힐링해 준다면서 말이다.

▼ 탐방로는 이제 아스팔트길을 따른다. 시야가 툭 터지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는 삭막한 풍경이 잠시 동안 펼쳐진다. 도로의 오른편은 일월산. 그러나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작은 봉우리들 때문에 정작 보아야 할 꼭대기는 보이지도 않는다. 참! 반대방향으로 가면 윗대티를 거쳐 반변천 발원지인 ‘뿌리샘’에 이른다고 했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물은 낙동강 본류와 합류해 멀리 부산 다대포까지 흘러갔다가 바다가 된다.

▼ 볼거리가 없다고 읽을거리까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곳곳에 세워놓은 시판(詩板)을 살펴보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석판에 새겨 넣은 게 돋보이는데, 영양이 낳은 걸출한 시인인 조지훈과 오일도의 시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의 작품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 그렇게 잠시 걷자 ‘천문사 갈림길’이 나온다. 그런데 수식어로 달아놓은 ‘일월산 황씨부인당’은 대체 뭐란 말인가. 다른 표지판은 아예 토속신앙의 본거지이며 무속인 전문기도도량이라고 적었다.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황씨부인 설화는 신랑의 어리석은 오해로 인해 첫날밤도 치르지 못하고 버림받은 여인이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다가 한을 품고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우리가 익히 아는 절은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 그러나 곁눈질로 본 전각에는 부처님의 가슴에 있는 길상의 표시라는 ‘卍’자가 또렷했다. 맞다. 저곳은 ‘대한불교 천불종(개그맨이던 황승환이 새로운 행보를 보이는 곳이다)’의 총본산이라고 했다. 하지만 법당이랄 수 있는 ‘천하대불전’에 부처님 대신 천지신명을 모셨고, 후불탱화도 옥황상제와 칠성, 팔선녀 등을 세운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게 사실이라면 온전한 사찰은 아닌 게 확실하다.

▼ 천문사 앞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이제 낙동강 상류 쪽 지류인 반변천 계곡 옆길로 이어진다. 소박한 돌길이다. 거기다 한 사람 정도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지만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 오히려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진다.

▼ 반변천을 만들어가는 저 물길은 꼬맹이 폭포와 소(沼)를 만들어가며 흘러간다. 그러다보니 짙푸른 물빛을 보일 정도로 깊은 곳도 더러 있다. 그런데도 속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물이 맑다. 그러기에 환경부가 지정한 멸종위기동물인 수달과 담비가 살아가지 않을까? 그나저나 이 부근에 ‘선녀탕’이란 명소가 있다고 했는데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 탐방로는 단풍 군락지 사이를 누비기도 한다. 일부러 식재한 모양이지만 내 눈에는 여간 신선한 게 아니다. 전국이 온통 벚꽃으로 치장된 탓에 봄만 되면 이곳이 혹시 일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나만의 기우일까?

▼ 이렇게 예쁜 길. 그것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외씨버선길에 포토죤 하나 없을까. 요즘 부쩍 인생샷에 목말라하는 집사람이 냉큼 포즈부터 잡고 본다.

▼ 단풍 터널을 벗어나자 예쁘장하게 생긴 다리가 길손을 맞는다. 단풍터널과 닿아있음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빨강색을 입혔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이름표 대신 단풍잎 조형물을 매달아놓았다.

▼ 다리를 건너면 대티골 마을의 ‘어울림터’이다. 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자연생태 우수마을(환경부)’. ‘식생활 우수체험공간(농림축산식품부)’, ‘농촌체험 휴양마을, 으뜸촌’. ‘팜스테이 인증마을’ 등 외벽에 걸려있는 갖가지 인증 표식들이 이 마을의 화려한 이력을 알려준다. 맞다. 해발 450~600m에 위치한 오지마을인 대티골은 현재 자연치유와 생태를 결합한 자연치유생태마을로 새롭게 태어났다. 방문객도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 어울림 터를 지나면서부터는 개울의 오른편 경사지를 따른다. 추락주의 안내판까지 세우는 친절을 베풀고 있으나 둘이 걸어도 충분할 정도로 폭이 넓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 몇 걸음 더 걷자 잘 지어진 초가가 몇 채 나타난다. ‘일월산 한우네’라는 소고기 전문식당인데 저 건물들은 취사가 가능한 민박용으로 사용된단다. 황토벽에 초가라니 힐링을 찾아 대티골에 오는 사람들에게 제격이라 하겠다.

▼ 식당을 비켜 지나자 탐방로는 처마에 매달린 제비집을 연상시키는 잔도(棧道)를 따른다. 선반을 달아내듯 개울가 석축에다 데크로 길을 내놓은 것이다.

▼ 이어서 ‘대티골’의 마을안길로 들어섰다. 아니 아까 눈여겨 살펴봤던 마을이 ‘웃대티’였으니 이곳은 ‘아랫대티’라고 하는 게 옳겠다. 마을에 들어서자 황토벽에 구들을 놓았다는 민가가 눈길을 끈다. 2008년엔가 대티마을이 경상북도가 지원하는 ‘부자마을 만들기 사업’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황토펜션이 들어서게 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런 가옥들을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기사는 발효식품가공공장, 생활하수 정화시설, 농산물판매장 등의 신설과 함께 등산로 및 산악자건거도로 정비도 이루어진다고 했었다.

▼ 대티골의 마을 안길을 빠져나와 국도로 올라선다. 그러자 트레킹이 종료되는 ‘일월산 자생화공원’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잠시 후면 트레킹이 종료된다는 얘기이다. 참! 길가 버스정류장은 ‘용화2리’라는 지명을 쓰고 있었다. 용화(龍化)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이 모두 승천하자 그곳에 용화사라는 절을 지은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절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명만 남아있는 셈이다.

▼ 도로변에는 이곳 대티골이 ‘자연치유 생태마을’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지던 자연환경을 최근의 트렌드인 건강과 웰빙에 맞게 꾸밈으로써 도시민들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저들은 일월산 등산로를 자연치유 생태길로 조성하는 한편, 지역 특성에 맞는 웰빙자연식품인 산마늘과 두메부추, 산나물 등 새로운 작물을 개발하여 체험환경을 조성했단다.

▼ 자생화공원에 이르기 직전. ‘용화리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들어서려는데 밭일을 하던 주민이 길이 없다고 알려준다. 그러면서 10여m쯤 되돌아가다가 골목으로 들어가라며, 이정표를 엉뚱한 곳에다 세워놓은 탓에 나처럼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는 넋두리까지 대신 해준다. 그렇게 해서 만난 삼층석탑은 마을 중간에 덩그러니 홀로 서있었다. 절은 사라지고 탑만 혼자 남아 있는 것이다. 통일신라 때 건립되었다니 천년도 넘는 문화재이련만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 삼층석탑과 붙어있다시피 한 ‘일월산 자생화공원’은 일월산과 그 주변 자락에서 자생하는 야생화를 봄·여름·가을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오랫동안 불모지로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일제 점령기인 1930년대에 문을 열어 채산성 악화로 폐광된 1976년까지 금·은·동·아연 등을 이곳에서 제련한 후유증 탓이다. 제련 과정에서 나온 찌꺼기를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토양이 심하게 오염되어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고 인근 계곡은 물고기 한 마리 살 수 없는 채로 30년간이나 버려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2001년도에 오염원을 완전 밀봉하여 매립한 후 객토를 실시하여 공원 부지를 조성하고 각종편의 시설과 야생화를 식재함으로써 전국 최대 규모의 야생화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 그런 아픈 추억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려는 듯 공원의 뒷면에 있던 옛 시설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산을 파고 들어간 가로 30m, 세로 80m 크기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은 일제가 광물 수탈을 목적으로 만든 옛 선광장(選鑛場)이다. 일월산에는 금·은·동·아연이 많이 났는데 1939년부터 일제는 일월산에서 채굴한 광물을 이곳으로 운반해 선별하고 제련했다고 한다. 당시 제련소 종업원은 500여명에 달했고, 인근에는 주민이 1천200여 명이나 거주했단다.

▼ 안내판은 이 시설을 선광장(選鑛場)으로 적고 있었다. 선광장은 채굴된 광물이 분쇄·분리·선별·탈수 과정을 거치면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시키는 공간이다. 하지만 산자락에 계단식으로 배치된 시설들 중에는 제련시설로 여겨지는 것들도 보였다. 아무튼 근대기의 이 산업시설은 당시의 선광 공정을 알 수 있으며, 근대 광업 발달사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등록문화제 제255호로 등록되기도 했다.

▼ 선광장의 꼭대기에는 용화광산(龍化鑛山)의 흔적인 듯 갱구와 광차가 복원되어 있었다.

▼ 선광장의 꼭대기에 올라서자 야생화공원의 전모가 낱낱이 드러난다. 5,475평의 널따란 부지에 일월산과 주변에 자생하는 야생화와 향토 수종이 심어져 있는가 하면, 주차장·화장실·정자 같은 편의설도 들어서 있다. 꽃밭의 상황은 전문가의 시선을 빌어보자. <분홍 철쭉꽃, 노란 기린초 꽃, 보라색 패랭이꽃, 하얀 조팝나무 꽃, 작고 흰 개망초 꽃, 하얀 보리수 꽃, 노랗고 자그마한 화살나무 꽃 등 갖가지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봄의 축복이자 향연이다. 6월에는 더 많은 종류의 꽃들이 핀다고 한다.>

▼ 액자 모양으로 생긴 포토죤도 만들어놓았다. 철쭉무리가 그 붉은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힌 공원은 물론이고 뒤의 선광장까지 틀의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명당자리이다. 이를 놓칠 집사람이 아니다. ‘치유의 길’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풍경과 함께 하겠다며 액자 속으로 냉큼 들어가고 본다.

▼ 트레킹 날머리는 자생화공원 전망대

선광장의 꼭대기 말고도 공원의 전모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곳이 있다. 공원 앞 도로변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인데 이번에는 선광장 시설까지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다. 그나저나 오늘 트레킹은 2시간 35분(공원 둘러보는 시간 포함)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9.77㎞. 안내지도가 제시하는 소요시간보다 훨씬 덜 걸렸다. 해발고도가 높은 곳(우련전 698m)에서 시작해 낮은 곳(자생화공원 469m)으로 내려가는 역방향으로 걷다보니 속도를 낼 수 있었나 보다.

▼ 외씨버선길의 구간 안내도는 낙동정맥트레일 안내판과 함께 주차장 옆에 세워져 있었다.

외씨버선길(6), 조지훈 문학길

 

여행일 : ‘21. 3. 20(토)

소재지 : 경북 영양군 영양읍 및 일월면 일원

여행코스 : 영양전통시장→삼지 수변공원→연지저수지→망운정→금촌산길→곡강교→영양향교→이곡교→조지훈문학관(소요시간 : 13.7km/ 실제로는 14㎞를 4시간 걸려)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코스와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여섯 번째 길인 ‘조지훈 문학길’을 걷는다. 4개로 나누어진 영양 권역의 세 번째 구간이기도 한데 청록파 시인의 한사람으로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한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의 문학이 구간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로 시작되는 승무(僧舞)의 작가인 그가 태어나고 자란 ‘주실마을’에서 구간이 종료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아름다운 그의 시(詩)들 만큼이나 빼어난 경관들을 눈에 담으며 걷게 된다. 반변천의 곡류단절지인 ‘삼지리’ 일대와 곡강 팔경의 으뜸인 ‘척금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바 있는 주실마을의 ‘비보(裨補) 숲’ 등이 대표적인 볼거리이다.

 

▼ 들머리는 영양전통시장(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288-3)

당진-영덕고속도로(상주-영덕) 동청송·영양 IC에서 내려와 34번 국도를 타고 안동 방면으로 달리다가 월전삼거리(청송군 진보면 월전리)에서 우회전 31번 국도로 옮겨 영양방면으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양에 이른다. 양평교차로에서 국도를 빠져나와 중앙로를 따라 들어가다 ‘농협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트레킹이 시작되는 영양전통시장이 바로 코앞이다.

▼ 외씨버선길의 여섯 번째 코스인 ‘조지훈 문학길’은 영양읍(전통시장)에서 출발해 같은 영양 땅인 주실마을(일월면)에 이르는 길이 13.7km의 둘레길이다. 반변천의 곡류단절지로 풍경이 수려한 삼지리 일대와 반변천이 빚어낸 바위절벽 지대인 곡강마을, 일월면소재지인 도계리 등을 지나게 되는데, 하나같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승무를 지은 조지훈이 태어나고 자란 주실마을은 그런 멋진 트레킹의 대미(大尾)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 외씨버선길 트레커들을 위한 편의시설인 영양객주 앞에 위치한 영양전통시장은 1918년 5월 4일에 개장한 1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오래된 시장이다. 아직도 매 4일과 9일에 장이 열리고 있으며 이때는 62개 점포가 일제히 문을 연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문을 연 상점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장날이 아니어선지 아니면 코로나의 여파가 이곳까지 미친 탓인지는 모르겠다.

▼ 전통시장 조형물 앞에서 영양경찰서가 있는 방향(동쪽)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때 ‘일월산 약초 건강원’이란 간판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영양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산이 ‘일원산’이며, 또한 그 일월산에는 귀한 약초가 많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저 상점에서는 그런 약초들로 엑기스를 만들어 파는 모양이다.

▼ 영양중앙초등학교에 이어 담벼락에다 신사임당과 조지훈을 그려 넣은 영양교육지원청을 스치듯 지나자 탐방로는 2차선 도로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오솔길로 변해 산속으로 파고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3분 만인데, 들머리에 외씨버선길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길가 매화나무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을 추워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상촌 신흠(象村 申欽)의 ‘야언(野言)’이라는 시에 나오는 문장이다. 옛 선비들은 봄이 되면 매화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이를 ‘탐매(探梅)’라고 하는데, 추운 계절에 피어나는 매화꽃을 보며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쉽게 타협하거나 굽히지 않겠노라 스스로의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오늘 공짜로 탐매를 한 셈이 됐다. 비록 빗길이지만 춘분(春分)의 봄나들이가 가져다 준 행운이라 하겠다.

▼ 잠시 후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작은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천연기념물 급의 노거수(老巨樹) 아래에 벤치를 놓고, 외씨버선길의 알림판과 이정표를 세웠다. 이제부터 걷게 될 ‘삼지리(三池里)’에 대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한양 조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인데, ‘삼지’라는 지명은 원댕이못(元塘池)과 탑밑못(塔底池), 바대못(坡大池) 등 세 연못에서 비롯됐다. 이밖에도 마을의 주요 볼거리들을 꼼꼼히도 설명해 놓았다.

▼ 산에서 내려오자 삼지연꽃테마단지(이정표 : 지훈문학관 12.3㎞/ 영양전통시장 1.4㎞)가 널따랗게 조성되어 있다. 주차장에는 정자는 물론이고 영양지역 전통의 물레방앗간까지 만들어 쉬면서 눈요기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밖에도 옛 멋이 물씬 풍기는 다리와 꽃 터널, 그리고 담양만큼 크지는 않지만 메타스퀘어길 등 다양한 볼거리를 갖췄다. 참!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삼지(三池)라는 이곳 지명을 낳게 한 3개의 연못 가운데 하나인 '항지(項池)'가 나온다. 못이 '새의 목처럼 길게 형성되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파대지(坡大池)' 또는 '바대지'라고 부르는데 이는 못의 형태가 마치 베틀의 바디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 공원의 주인장은 누가 뭐래도 ‘파크 골프장’이 아닐까 싶다. ‘공원에서 즐기는 골프’인 파크골프(park golf)는 골프와 게이트볼을 접목시킨 개념의 신종 스포츠로 골프채와 게이트볼채를 섞어놓은 것 같은 스틱으로 직경 6㎝의 플라스틱 공을 맞춰 홀에 넣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골프보다 비용부담이 적고, 공을 맞추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인기를 끌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 예스런 멋이 물씬 풍기는 나무다리도 두 개나 놓여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왕에 놓았으니 사후관리도 신경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 ‘아기탄생 기념나무’라는 문구가 특이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세 아이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고 ‘깊은 바다처럼, 높은 하늘처럼, 드넓은 우주처럼’이라는 엄마아빠의 마음을 가득 담았다. 영양군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출생지에 대한 긍지를 높이고, 전반적인 출산장려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심어놓은 나무들이라고 한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0분. 31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삼지2리’가 손짓한다. 삼지(三池)라는 마을 이름은 간지(澗池)와 연지(蓮池), 항지(項池)라는 세 개의 연못이 있다는 데서 유래됐다. 오랜 옛날 이곳에는 반변천이 돌아 흘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큰 홍수로 인해 옥산의 산맥이 끊어지면서 물길이 바뀌었고, 그 곳에 전형적인 우각호가 형성되자 주민들이 저수지를 만들었단다. 기름진 땅이 만들어졌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마을의 풍요로움은 '사슴이 은혜를 갚기 위해 산맥을 잘라놓았다'는 전설까지 만들어 냈다.

▼ 마을 입구(이정표 : 지훈문학관 11.2㎞/ 영양전통시장 2.5㎞)에서 자라고 있는 수백 년은 족히 됐을 법한 노송(老松) 무리도 마을의 풍경을 풍요롭게 해주는 한 요인이 됐다. 여름철이면 시원한 그늘에서 연꽃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쉼터가 되고, 거기다 낚시를 드리우는 재미까지 더해준단다.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기에 딱 좋은 장소라 하겠다.

▼ 소나무 둑방길의 오른편에는 '연지(蓮池)'가 터를 잡았다. '간지'와 '항지' 사이에 있는 연못으로 못에 연꽃이 많이 자생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혈사'라는 절 밑에 있다 하여 '영혈지'라고 부르는가 하면, 그 절에서 세운 3층 모전석탑 아래 있다고 해서 '탑밑못(塔底池)'이라고도 부른다. 아무튼 저 연못은 토종 연꽃인 법수홍련으로 유명하다. 키는 작지만 많은 꽃을 피우고 강한 향기를 지녔다. 지금이야 바닥을 훤히 드러내고 있지만 누군가는 연꽃이 핀 광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꽃잎은 하늘과 맞닿게는 홍색이었다가 땅을 향하여 백색으로 바림하고, 커다란 잎은 우산을 활짝 편 듯하다.’ 참! 나머지 하나인 '간지(澗池, 원당에 있다고 해서 元塘池로도 불린다)'는 하원리 앞에 있다. 못이 계곡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단다.

▼ 삼지(三池) 일대는 현재 수변공원(水邊公園)으로 조성되어 있다. 항지(파대지)와 연지(탑밑못), 간지(원당지) 등 3개의 연못을 활용해 37㏊ 규모의 공원을 조성했다. 원당지는 자연 그대로의 휴양공간, 연지는 '삼지연꽃체험장', 그리고 파대지는 '영양고추연테마공원'이다. 아름다운 연꽃을 가까이서 보고 즐길 수 있도록 3㎞ 길이의 데크 탐방로와 차를 마시며 연꽃의 운치를 감상할 수 있는 카페와 체험관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 마을 뒤 언덕으로 150m쯤 오른 탐방로는 도로와 헤어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거리표시가 없는 이정표는 이곳을 ‘노루목재’라 적고 있었다.

▼ 조붓한 산길은 흙과 돌무더기를 밟으며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하지만 고갯마루의 높이가 낮아서인지 서둘러 고도를 높이지는 않는다. 눈에 들어오는 숲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원시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지난 해 여름의 폭우 때 넘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아름드리 거목들을 정리하고 있는 광경도 눈에 띈다. 특별히 볼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은 그저 그렇고 그런 산길이 계속된다.

▼ 그렇게 15분쯤 올라서자 ‘노루목재’ 정상이다. 노루목재는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수비면 및 일월면 사람들이 영양읍으로 나가던 주요통로였다. 외씨버선길 트레커들의 차지가 된 지금은 그네들을 위한 외씨버선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을 따름이다. 쉼터용 평상도 놓아두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 쉬어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내려가는 길은 의외로 험상궂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길이 비탈진 사면을 헤집으며 나있는데다 비좁기까지 해서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걸음을 옮기는 게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토끼비리’라며 엄살까지 떠는 일행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 25분을 써가며 노루목재를 넘자 ‘논두들’마을이다. 여기서 ‘두들’이란 ‘언덕 위’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니 언덕 위에 있는 논배미라는 의미일 것이다. 마을은 반변천변의 논 가운데에 자리 잡았을 테고 말이다. 그나저나 이곳은 주의할 것이 두 가지나 된다. 첫 번째는 이정표(지훈문학관 10㎞/ 영양전통시장 3.7㎞)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두라는 것이다. 나중에 외씨버선길을 완주했다는 증명이 되니 놓쳐서는 결코 안 된다. 다른 하나는 이정표 옆에 세워놓은 안내판을 꼭 살펴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지름길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변천을 우회하고 있는 정규코스보다 1.5㎞를 단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변천변의 기암절벽과 망운정이라는 역사 유적까지 둘러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선지 외씨버선길의 또 다른 지도는 정규탐방로를 ‘우회로’로 표기하고 있었다.

▼ 지훈문학관 방향으로 50m쯤 진행하자 아래 사진과 같은 삼거리가 나온다. 위에서 얘기한 갈림길이다. 곧장 직진하는 정규 코스는 상원교를 건넌 다음 상원3리(무드리 마을)를 거쳐 지름길과 또 다시 만나는 ‘곡강마을’로 되돌아 나오게 되어있고, 왼편으로 나뉘는 지름길은 반변천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넌 다음 망운정과 곡강마을을 지나서 다시 정규코스와 합류된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왼편 지름길을 선택할 것을 강력 추천한다.

▼ 수월농원(사과나무 과수원)을 지나 강가로 내려서자 물 건너에 거대한 석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반변천의 물길이 깎아놓은 바위절벽인데 벼랑 아래는 맑은 물이 넘실거린다. 사진에서 보았던 ‘척금대(滌襟臺)’와 닮아 카메라에 담았으나 진짜 척금대는 상류로 조금 더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단다. 그건 그렇고 척금대라는 지명은 1692년(숙종18년) 현감 정석교(鄭錫僑)가 같은 장소에서 시회(詩會)를 열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첩첩 곧게 솟은 바위벽이 ‘비단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듯하다’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옛 추억을 돋게 한다는 ‘징검다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작년 여름 물난리 때 떠내려가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지자체에서 임시방편으로 자갈을 두둑이 쌓아놓아 건너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참! 이왕에 시작했으니 이 부근에 몰려있다는 곡강팔경(曲江八景)이라는 자연경관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위에서 말한 척금대(滌襟臺)를 위시해서 절벽위에 솟아 있는 여기봉(女妓峰), 강가에 둘러 있는 병풍암(屛風巖), 반달모양의 산봉우리 반월산(半月山), 배나무가 많은 이수곡(梨樹谷), 오동나무가 많은 동네 동만곡(桐晩谷), 약수가 샘솟는 약수천(藥水川), 백이숙제를 상징하는 지석암(砥石巖) 등이 여기에 속한단다.

▼ 반변천을 건넌 탐방로는 이제 천변을 따른다. 곡강팔경 가운데 하나인 여기봉(女妓峰)을 바라보며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다가 잘 생긴, 거기다 엄청나게 오래묵기까지 한 느티나무가 보이면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 느티나무를 지나자 대지(臺地) 위에 높직이 자리한 망운정(望雲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9호)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홑처마 팔작지붕의 누정으로 조홍복(趙弘復)이 1826년 선조의 묘소 옆에 터를 잡고 만년을 보낸 곳이다. 망운이란 ‘자식이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1807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나 오직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였을 뿐 출사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출사를 단념하고 향리에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구휼하며 후진을 기르는데 힘썼고, 만년에는 선영 근처에 망운정을 짓고 선조들의 무덤을 지키며 책으로 양식을 대신했다고 전해진다.

▼ 망운정을 지나자 ‘곡강마을(曲江里)’이 얼굴을 내민다. 반변천 물길이 흥림산(興霖山) 줄기의 굳은 암벽을 뚫지 못하고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며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니, 후세 사람들이 그 생김새를 보고 이 일대를 ‘굽은갱이’ 또는 ‘곡강(曲江)’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을은 반월형으로 툭 튀어나간 곳에 터를 잡았다.

▼ 마을 벗어나려는데 ‘이락당(二樂堂)’ 편액을 단 건물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낡고 쇄락했지만 뭔가 내력을 품지 않았을까 해서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 고택에 대한 얘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영양문화원에서 발간한 ‘고은향토(제2호, 古隱은 신라 초기의 영양 지명)’에서 이곳 곡강에 입향(入鄕)한 성씨 중에 ‘봉화 금씨(奉化 琴氏)’가 있고, 그 자손 중에 ‘이락당 금결(二樂堂 琴潔)’이 있다고 했는데 그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의 휘하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나중에 무과에 급제하여 조산대부(朝散大夫)까지 오른 인물이다.

▼ 곡강마을을 나선 탐방로는 이제 지방도로를 따른다. 마을을 뒤에 세우고 100m 조금 넘게 걷자 ‘금촌산길 입구’이다. 곡강리 산길이라고도 불리는 2㎞의 이 구간은 수비면 사람들이 영양읍으로 장보러 다니던 삶의 길이자 학생들이 통학하던 산길이었다. 참고로 논두들마을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 이정표(지훈문학관 7.4㎞/ 영양전통시장 6.3㎞)와 함께 세워놓은 6길 안내도는 이곳에서 길이 둘로 나뉨을 알려준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를 경우 6길의 시점인 영양전통시장으로 되돌아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종점인 지훈문학관으로 가려면 산속으로 파고드는 오솔길을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참! 함께 세워놓은 안내판은 곡강(曲江)에 대한 사연도 적고 있었다. 굽은 강이란 뜻의 곡강은 마을 생김새가 돛단배 모양이라 하여 우물을 파지 않는다고 한다. 배의 밑바닥을 파면 배가 파선되기 때문이란다.

▼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되는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길이 나있어, 수북하기 쌓인 솔가리로 인해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느낌까지 준다. 그런 오르막길은 15분 정도 계속된다.

▼ 내려가는 길. 이번에는 낙엽송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어 올랐다. 이 구간도 역시 그윽한 솔 내음이 코끝을 스쳐간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솔향까지 더해진 탓인지 어느덧 마음까지도 한없이 여유로워진다.

▼ 내려오는 도중에 ‘양심장독대’를 만났다. 항아리 안에 식수가 들어있으니 필요할 경우 한 사람이 한 개씩만 가져가란다. 양심껏 가져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목마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는 물을 나누어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식수의 온도를 일정하게 해주는 배려까지 했다.

▼ 정상에서 출발한지 15분. 곡강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마을 이름은 알 수 없었다)에 내려섰다. 반변천 물길이 빚어놓은 너른 들녘을 앞마당 삼고 있는 풍경이 마을 주민들의 풍요로운 삶을 짐작케 해준다.

▼ 길가 산수유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매화나무와 함께 새봄이 찾아왔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전령사(傳令使)이다. 참! 아까 금촌산길에서는 또 다른 봄의 전령사인 ‘생강나무꽃’을 만나기도 했다. 샛노란 꽃의 생김새가 비슷한 산수유와 흔히들 혼동하는 꽃이다.

▼ 마을에서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이어서 반변천을 가로지르는 ‘곡강교(曲江橋)’를 건넌다. 다리를 새로 놓고 있어 조금 어수선한 풍경이었지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을 보고 무사히 길을 찾을 수 있었다.

▼ 곡강교에서 도계리 입구까지의 300m쯤 되는 구간은 조금 묘하게 길을 냈다. 씽씽 신나게 달리는 차량들을 피하려고 도로의 가드레일 바깥에다 따로 보행로를 만든 것이다. 바닥을 야자매트로 까는 등 정성을 다했으나 길의 폭이 좁은데다 바닥도 고르지 않아 자칫 발이라도 헛디딜 경우 7~8미터 아래의 반변천으로 추락할 수도 있으니 주의가 요망된다.

▼ 대신 반변천변의 풍경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반변천과 장군천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근처에 토사가 쌓이면서 천연의 갈대밭을 널따랗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인생으로 치면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나 할까?

▼ 금촌산길을 빠져나온 지 20분 만에 일월면 소재지인 ‘도계리(道溪里)’에 닿았다. 1600년 무렵 어느 농부가 둔덕 위에 농토를 일구어 살면서부터 ‘뒷두들’이라 부른 것이 이 마을의 시초라고 한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좌우에 하천이 흐르고 이 하천을 따라 도로가 개설된 마을이라 하여 ‘도계동’이 되었단다. 현재는 면사무소와 지서, 초등학교, 우체국, 농협 등이 들어선 일월면의 행정 중심지다.

▼ 일월삼거리(이정표 : 지훈문학관 4.7㎞/ 영양전통시장 9㎞)에서 우회전해 일월면사무소 앞을 지나면 향교길 입구다. 이어서 100m 남짓 더 들어가면 영양향교(英陽鄕校, 경북 문화재자료 75호)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영양에 그런 향교가 처음 설치된 것은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9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자리는 아니었다. 동부리(영양읍)의 여기봉 아래에 있었으나 오랜 세월과 잦은 병란으로 사라지자 조선 숙종 때 이곳에다 새로 설치했단다. 현재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 서재, 신문(내삼문) 등이 남아있으며, 매년 춘추로 대성전에서 향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 이정표(지훈문학관 4.1㎞/ 영양전통시장 9.6㎞)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조금 더 걸으니 ‘조동홍 가옥(趙東興 家屋, 경북 문화재자료 491호)’이 나온다. 한양 조씨 18세손인 조관빈(趙觀賓 1699-1756)이 1719년에 건립한 가옥인데, 1899년의 중건을 거친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투신했던 조종호(趙宗鎬 1904-1987)가 1977년에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향교를 나선지 13분. 탐방로는 ‘이곡마을’에 이른다. 도계리 속한 자연부락으로 원래 이름은 ‘배골’. 마을 입구에 큰 배나무가 한 그루가 서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하지만 그 배나무는 현재 찾아볼 수 없다.

▼ 배골마을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개울을 건너자마자 삼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양쪽 방향 모두에 외씨버선길의 리본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영양 연결구간(6-1)’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나있는 게 원인이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편하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지훈문학관 방향을 고수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까짓 연결구간이야 다음 번 트레킹 때 고민하면 되지 않겠는가.

▼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탐방로는 우릴 이곡교(梨谷橋)로 인도한다. 이곳 역시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먼저 이정표(지훈문학관 3㎞/ 영양전통시장 10.7㎞)를 배경으로 사진부터 찍어두자. 6길의 완주를 인증하는 2개의 이정표 가운데 하나이니 말이다. 그런 다음에는 옆의 ‘외씨버선길 안내지도’도 한번쯤 살펴보자. 6길의 시점인 ‘영양전통시장’과 함께 적어놓은 ‘영양연결길’이 눈에 띌 것이다. 이곳이 ‘영양연결길’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지도도 6길 및 7길과 함께 ‘영양연결길’을 하나의 그림으로 설명하면서, 그 위·아래에다 6길과 영양연결길의 지도를 따로 그려 넣었다.

▼ 탐방로는 다리(이곡교)를 건너지 않는다. 오른편 제방을 따라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군천(壯軍川)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얘기이다. 8분쯤 후에 만나게 되는 수로(水路)에서는 안내판을 기웃거려본다. 행여 수로의 내력이라도 적어놓았을까 해서이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아까 보았던 ‘조동홍 가옥’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참고로 장군천은 '주계천' 또는 '매화천'으로 불리었는데 조선 영조 때 이 지역 출신인 오삼달 선생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고 난 뒤 장군으로 추대되면서 '장군천'으로 바꿔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 이후부터는 판자를 깔아놓은 수로의 위를 걷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하천가 산비탈에 길을 내다보니 위험하다 싶은 곳도 나오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이라도 가파른 곳에는 계단을 설치했고. 그마저 부족했던지 어떤 곳에는 밧줄까지 매어놓았다. 노거수 아래 만들어놓은 쉼터도 보인다. 한마디로 정성들여 가꾼 산길이라 하겠다.

▼ 산자락을 빠져나오자 사방이 온통 갈대로 뒤덮여 있다. 둑은 물론이고 하천까지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갈대로 가득하다. 늦가을 갈대가 꽃이라도 피운다면 또 하나의 멋진 풍경화가 그려지지 않을까 싶다. 그 갈대밭 끄트머리에서 우린 트레킹이 거의 끝나간다는 것을 알리는 이정표(지훈문학관 700m/ 영양전통시장 13㎞)를 만났다. 근처에는 영양연결길 시점이 ‘이곡교’임을 알리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6길 완주 후 영양연결길을 이어가려면 이곡교로 되돌아가란다.

▼ 이어서 잠시 후에는 데크로드로 올라선다. 개울 건너는 느티나무가 울창한 ‘시인의 숲’이다. 원래는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이라 불렀는데, 숲속에 조지훈과 20살에 요절한 그의 형 조동진의 시비(詩碑)가 세워지면서 ‘시인의 숲’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과 함께 바람을 막는 방풍림의 역할을 하는 이 숲은 2008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에 선정되기도 했다.

▼ 감천마을에서 북쪽으로 15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실마을’은 조선 중종 14년(1519)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 일파를 척살한 기묘사화를 피해 ‘한양 조씨(漢陽 趙氏)’ 일가가 정착한 마을이다. 조지훈이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답게 그의 생가(호은종택)와 문학관, 시비(詩碑) 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는가 하면, 옥천종택과 월록서당, 만곡정사 등이 볕 좋은 산자락에 고풍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 이곡교에서 30분,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3시간 30분 만에 ‘주실마을’에 도착했다. 첫 번째로 찾은 곳은 마을 동쪽에 위치한 ‘월록서당(月麓書堂, 경북 유형문화제 172호)’. ‘일월산 자락의 서당’이라는 뜻을 지녔다. 일제하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조지훈은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운 다음 이곳에서 한학과 조선어, 수신, 역사, 도서 등을 공부했다고 한다. 참고로 월록서당은 주곡리 한양조씨와 도곡리 함양오씨(咸陽吳氏), 가곡리 야성정씨(野性鄭氏)가 힘을 모아 영조 49년인 1773년에 건립했다고 한다. 현판 글씨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그리고 기문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썼단다.

▼ 두 번째 만남은 ‘조지훈 문학관(芝薰文學館)’이다. 조지훈의 삶과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정면 열두 칸의 긴 한옥 건물로 지어졌다. 현판은 지훈의 부인 김난희 여사가 쓴 것이라 한다.

▼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조지훈이 소년 시절 즐겨 읽었던 책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시대를 고민한 작품까지 시인의 전 생애가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자세한 상황은 류혜숙 작가의 표현을 빌어본다. <책 읽던 소년은 9세 때부터 글을 썼고, 그의 형 세림과 함께 마을 소년들의 모임인 '꽃탑회'를 조직해 동인지 '꽃탑'을 펴내기도 했다. 이어지는 청록시절 '문장'지에 추천을 받았던 20대, 고문, 절필, 그리고 광복. 문학 소년은 문학청년으로 커져 있다. 곧이어 전쟁의 시편들, 산문과 학술연구들, 추상같은 비평과 선언들이 있다. 커다란 벽에서 '지조론'을 마주한다. 1950년 말 과거의 친일파들은 뉘우침 없이 정치 일선에 나왔고, 지도자들은 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았다. '지조론'은 그러한 세태를 냉정한 지성으로 비판한다. 그의 유품들도 남아 있다. 평소 썼던 문갑과 가방, 30대 중반에 쓴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40대에 사용했다는 부채, 외출할 때 즐겨 입었던 외투와 삼베 바지, 그리고 세상을 뜨기 6~7년 전부터 애용했다는 담배 파이프와 안경 등. 벽에 그 생의 조각들이 100여 장의 사진으로 걸려 있다.>

▼ 문학관의 앞 광장은 야외공연장으로 꾸며졌다. ‘문인의 고장 영양’이라는 문구가 적힌 벽면이 눈길을 끈다. 청록파 시인이자 수필가. 한국학연구가였던 조지훈의 약력과 함께 그의 대표시인 ‘승무(僧舞)’를 적어 넣었다. 광장에는 쉼터용의 정자 말고도 ‘지훈 뜨락’과 승무관 같은 정체 모를 건물들도 들어서 있었다.

▼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시 공원(詩 公園)’이다. 문학관에서 조금 더 걷다가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된다.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정자와 함께 ‘지훈시공원’이라는 표지석을 만났다면 제대로 찾아온 셈이다.

▼ 정자의 뒤로는 산책로가 이어진다. 그 길섶에 시비들이 늘어서 있다. 영상(影像), 지옥기(地獄記), 종소리, 산방(山房) 등 조지훈이 지은 주옥같은 시들이다. 이곳에는 모두 27개의 시비와 청동조각상들이 어우러져 있다고 한다. 시인의 동상도 세워져 있음은 물론이다.

▼ 나무다리를 건너자 청동으로 제작된 임금님이 앉아있고 그 좌우에는 정일품(正一品)과 종구품(從九品)의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고뇌에 빠져있는 임금의 앞 청동판에는 봉황수(鳳凰愁)라는 조지훈의 산문시가 적혀있었다.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고전적 소재를 통해 나타낸 것이 특징이다.

▼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조지훈의 동상 옆에도 시비들이 배치됐다. 하지만 이 시비들은 시에다 청동조각상까지 더했다. 파초우(芭蕉雨)와 낙화(洛花)라는 시가 한결 더 감칠맛 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참! 조지훈의 동상 앞에 섰으니 멋을 알고 술을 즐겼다는 그의 ‘음주론’도 한번 살펴보자. 애주가였던 그는 바둑의 급수체계와 비슷한 ‘주도유단론(酒道有段論)’을 써서 술꾼의 등급을 불주(不酒), 외주(畏酒), 민주(憫酒), 은주(隱酒), 상주(商酒), 색주(色酒), 수주(睡酒), 반주(飯酒), 학주(學酒), 애주(愛酒), 기주(嗜酒), 탐주(耽酒), 폭주(暴酒), 장주(長酒), 석주(惜酒), 낙주(樂酒), 관주(關酒), 폐주(廢酒, 涅槃酒) 등 18단계로 분류했다. 애주가들에게 음주의 이론적인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고 보면 되겠다. 또한 자칭 타칭 애주가들의 수준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에 속할 수 있을까? 에라 그게 무슨 소용인가. 어느 술친구가 주졸(酒卒)과 주사(酒士), 주걸(酒傑), 주장(酒將), 주선(酒仙), 주신(酒神) 등 6단계로 분류하면서 나는 주선쯤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으니 이에 만족하면 되지 않겠는가.

▼ 우리 귀에 가장 익숙한 승무(僧舞)를 빼놓을 수는 없었나 보다. 그의 시처럼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박사(薄紗) 고깔에 감춘 여승이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을 고이 접은 채로 나비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 경북 기념물 78호)’은 마을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산봉우리가 붓끝처럼 생긴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터를 잡은 명당이란다. 1920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이 집의 중앙 가장 좋은 방에서 시인 조지훈이 태어났다고 한다. 본명은 동탁(東卓), 3남1녀 중 2남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말의 의병장이었던 조승기와 지훈의 조부인 조인석 등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분들도 이곳에서 태어났단다.

▼ 몸채는 앞면 7칸에 옆면이 7칸인 ‘ㅁ’자형 평면으로 지어졌다. 영남 북부지방 양반가의 전형적인 구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입향조(入鄕祖)인 조전(趙佺)의 둘째 아들 정형(廷珩)이 인조 때 지은 건물로 한국전쟁 때 일부가 불탔으나 1963년 복구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 조지훈이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본가는 생가의 뒤편에 있었다. 지훈 일가가 떠난 이후 상당 기간 폐옥으로 남아 있던 것을 2010년에 복원했단다. 대문에는 '방우산장(放牛山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는 수필 '방우산장가(1953년 신천지 기고)'에서 '방우산장은 내가 거처하고 있는 이른바 나의 집에다 스스로 붙인 집 이름'이라고 했다. 이곳과 서울 성북동 자택은 물론 자신이 기거했던 곳은 모두 방우산장이라는 것이다. ‘설핏한 저녁 햇살 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 어디에 가 있든지 내가 아랑곳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 조성복(趙星復)이 지었다는 학파헌(鶴坡軒)도 만날 수 있었다. 조성복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가학을 이어나간 인물로 학덕을 고루 갖춘 선비였다고 한다. 하긴 정약용이 학파헌의 현판까지 써주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 ‘낙화(落花)’는 아예 액자 모양의 조형물로 만들어버렸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로 시작되는 이 시는 떨어지는 꽃을 보며 느끼는 삶의 비애감을 담담한 어조로 표현한 조지훈의 대표 시 가운데 하나이다. 감성이 여린 나로서는 ‘승무’보다도 훨씬 더 곁에 두고자 했던 주옥같은 구절들이기도 하다. 하나 더. 이 시는 창작 의도와 상관없이 한 정치인에 의해 더 널리 알려졌다. 박지원 국정원장이 2003년 구속될 때 자신의 심경을 이 시를 인용해 표현했다.

▼ 개울 너머로 보이는 정자는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가 지었다는 ‘만곡정사(晩谷精舍, 경북 문화재자료 341호)’이다. 만곡정사의 현판 역시 78세의 노구로 이곳 주실마을을 찾아 왔던 채제공이 썼다고 한다.

▼ 트레킹 날머리는 주실마을 주차장

마을을 둘러보는데 30분이나 걸렸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 고개를 돌려보니 주실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은 문필봉(文筆峰)을 바라보는 곳에 터를 잡았다. 풍수에서는 문필봉이 정면에 있으면 공부 잘하는 학자가 많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주실마을의 조씨 가문은 홍패(대과급제증서)가 4장, 백패(소과급제증서)도 9장에 불과한데도 63인의 후손들이 문집과 유고를 남겼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도 4명의 박사를 배출하는 등 문인·학자를 많이 배출했단다. 그건 그렇고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4㎞. 불편한 다리로 쩔뚝거리며 걸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외씨버선길(5), 오일도 시인의 길

 

여행일 : ‘21. 3. 6(토)

소재지 : 경북 영양군 입암면과 영양읍 일원

여행코스 : 선바위관광지→산촌생활박물관→학초정→오일도마을→성황당→영양전통시장(소요시간 : 11.5km/ 실제는 입암면사무소에서 출발 14.44km/ 3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 13개 코스와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이 가운데 다섯 번째 길인 ‘오일도 시인의 길’을 걷는다. 4개로 나누어진 영양 권역의 두 번째 구간이기도 한데, 이 구간에 위치한 ‘감천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항일 시인인 오일도가 구간의 이름으로 승화됐다. 이밖에도 이 구간에는 쏠쏠한 볼거리들이 제법 많다. 대단위로 개발된 ‘선바위관광지’에는 ‘고추홍보전시관’과 ‘산촌생활박물관’ 같은 테마시설들이 들어서있고, ‘반변천’의 자랑거리인 기암절벽과 감천수로 등도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기에 부족함이 없다.

 

▼ 들머리는 입암면사무소(영양군 입암면 신구리 481-3)

당진-영덕고속도로(상주-영덕) 동청송·영양 IC에서 내려와 34번 국도를 타고 안동 방면으로 달리다가 월전삼거리(청송군 진보면 월전리)에서 우회전 31번 국도로 옮겨 영양방면으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입암면 소재지인 신구리가 나온다. 트레킹의 들머리로 삼으려는 곳이다. ‘외씨버선 5길’의 원래 들머리는 ‘선바위관광지’이지만 4길과 5길의 거리를 조절하느라 지난번 4길을 걸을 때 이곳 입암면사무소에서 트레킹을 종료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입암면의 소재지인 이곳 신구리는 진보에서 영양으로 들어오는 관문이 되는 마을로,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이 마을 앞을 흐르면서 뛰어난 경관을 만들어낸다. 마을의 모양이 배와 같기 때문에 물이 생기면 좋지 않다며 우물을 파지 않는다는 곳이기도 하다. 신구라는 지명은 옛 고을인 신사(新泗)와 탑구(塔邱)에서 한 자씩 따왔다.

▼ ‘오일도 시인의 길’은 입암면의 선바위관광지에서 시작해 영양읍의 전통시장에서 끝난다. 이 구간은 영양의 젓줄인 ‘반변천’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때문에 탐방로의 대부분은 냇가를 따르게 된다. 나머지는 대부분 산허리를 헤집으며 나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국도변을 가능한 피해보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덕분에 우리 같은 트레커들은 자동차 매연 대신 자연의 숨결을 맘껏 누리며 걸을 수 있다.

▼ 북쪽 방향으로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때 ‘솔 다방’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스타박스’나 ‘투섬플레이스’처럼 브랜드 자체를 간판으로 내거는 게 보통이고, 그 밖의 소규모의 점포들도 하나같이 카페나 커피숍으로 이름을 바꾼 지 이미 오래여서 옛 간판이 정겨웠던 모양이다.

▼ 잠시 후 입암초등학교를 만나면 도로와 헤어져 오른편 사잇길로 들어간다. 들머리에 ‘사과·고추 으뜸마을’이라는 부제까지 단 신구2리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신구2리는 ‘탑구마을’로도 불린다. 마을 중앙에 ‘삼층석탑’이 있다고 해서 ‘탑두들’이라 불리다가 한자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탑구(塔邱)’로 바뀌었단다. 이 마을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 약산 조광의(約山 趙光義, 1543-1608)가 학문연구를 했다는 약산당(約山堂)도 있다. 하지만 둘러보는 것까지는 하지 않기로 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만한 볼거리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탑구마을에 이어 나타나는 널따란 들녘을 지나자 빨간 고추와 반딧불이가 정겨운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만에 국도 31호선의 도로변에 위치한 ‘선바위관광지’에 이른 것이다. 핸드폰의 앱은 현재 1.76㎞를 찍고 있다.

▼ 국도를 따라 잠시 걷자 ‘동굴형민물고기전시관’이 얼굴을 내민다. 퉁가리·피리 등 토종어류와 납자루·쉬리 등 희귀어종, 쏘가리·꺽지 등 민물고기, 그리고 물자라·장구에비 등의 수서곤충 들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도로를 건너가보지도 않았다. ‘코로나-19’의 여파가 이곳까지 미치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참! 뒤편 언덕에 조성되어 있다는 ‘효공원’도 둘러보지 못했다. 아니 그곳에 효공원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 자! 이젠 대단위 국민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는 ‘선바위 일대’를 둘러볼 차례이다. 투어의 시작은 ‘영양고추 홍보관’이 되겠다. 특산품인 영양고추의 가치와 경쟁력을 높이고 고추산업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시설이라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예방차원이라며 문을 닫아걸었다. 테마관(고추이야기와 고추재배의 변천과정, 생활 속 고추 등 전시)과 홍보관(영양고추의 우수성, 고추축제, 재배기술 등 전시), 영상홍보실 등의 볼거리들이 들어서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 아니 세계적인 현실인 걸 어쩌겠는가.

▼ 까짓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라 하지 않았던가. 그 아쉬움을 야외광장에서 달래보자.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가 하면, 정성들여 가꾼 고추를 수확하고 말리는 일련의 고추재배 과정을 조형물을 통해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고추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뿌리내린 이후로 한국의 대표 맛을 지켜오고 있다. 이 고추는 고온성 작물로 토양이 비옥하고 물이 잘 빠지는 곳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강우량이 적고 일조량이 많은 영양이 고추 재배의 적지로 평가되는 이유이다. 특히 영양 고추는 고랭지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당질 함량이 많고 비타민A와 비타민C의 함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과일이 크고 과피가 두꺼워 고춧가루가 많이 나는 특징을 갖고 있단다.

▼ 우리의 어릴 때 기억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장독대에서 일하는 엄마의 옆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와 강아지는 우리가 흔하게 접하던 풍경이 아니던가. 또한 저런 정겨운 풍경이 바로 한국의 맛을 지키고 키워왔다고 보면 되겠다.

▼ 분재테마파크는 아예 겉면만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분재(盆栽)란 오랜 시간과 끊임없는 애정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무가 아니라 숫제 예술품으로 꼽는다. 그런 나무들, 즉 아름다운 자연을 담은 예술품들이 231점이 전시되어 있는데도 보지를 못한다니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거기다 5000본이나 되는 야생화와 수많은 수석도 전시하고 있다지 않는가.

▼ 역시 문을 닫아 건 ‘농·특산물직판장’에 대한 아쉬움은 건물의 뒤편에 만들어놓은 ‘서석지(瑞石池)’에 대한 내용을 읽는 것으로 달래본다. 담양 ‘소쇄원(瀟灑園)’ 및 보길도의 세연정(洗然亭, 지명을 따 부용원이라고도 한다)과 더불어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담은 대표적 정원이다. ‘상서로운 돌로 이루어진 연못’이라는 뜻을 지닌 서석지는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경정(敬亭) 앞에 만든 조선시대 민가(民家)의 대표적인 연못(池塘)이다. 예천의 용궁에서 태어난 그는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에게서 수학하고 1605년(선조38年)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하지만 광해군의 폭정과 병자호란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1636년(仁祖14年) 넷째 아들인 임천 제(臨川 悌)를 데리고 자양산(紫陽山)의 남쪽 기슭인 연동마을로 내려와 살았다 한다.

▼ 반변천으로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강과 절벽을 사이에 두고 바위를 깎아 세운 듯한 거대한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있는 것이다. 영양을 대표하는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선바위’인데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촛대를 세워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저 바위는 오른편에 보이는 바위절벽. 그러니까 소원바위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조선 세조때 남이장군이 운룡지라는 연못에 살던 용의 두 아들이 역모를 일으키자 이를 토벌한 다음. 다시는 난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려버렸다는 것이다.

▼ 선바위를 가슴에 품었다면 이젠 ‘석문교’로 가볼 차례이다. 이때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절벽이 한눈에 가득 들어온다. 남이장군이 칼로 내려치기 전까지만 해도 선바위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능선인데, 반변천 및 동천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산자락 전체가 천애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아찔하게 만든다. 참! 반변천과 동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터를 잡은 ‘남이정’도 눈에 들어온다.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휴식처 삼아 새로 지었을 것이다. 이름이야 남이장군의 전설에서 따왔을 게고 말이다.

▼ 명색이 국민관광지인데 어찌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 액자형의 조형물을 만들고 그 안에다 원하는 풍경을 골라 넣을 수 있도록 했다. 선바위나 소원봉을 품은 바위절벽, 그리고 반변천에 지어놓은 ’남이정‘ 등 어떤 것을 넣어도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히 걸질 수 있는 조망 좋은 곳이다.

▼ 잠시 후 ’석문교‘에 이른다. 선바위관광지의 집단시설이 있는 신구리와 자양산 등산로 및 산촌생활박물관을 잇는 보행자 전용의 다리로 2002년에 건설됐다. 석문이란 이름은 선바위에서 빌려다 썼다고 한다. 선바위의 모습이 마치 돌로 만든 문(門)처럼 보인다고 해서 ’돌문‘ 또는 ’석문‘으로 불리어온 데서 착안했다.

▼ 다리의 중간에는 영양을 상징하는 특산물인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빨갛고 파란 세 개의 고추 위에는 반딧불이가 올라앉았다. 이 또한 영양의 상징이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소원봉’이 올려다 보인다. 선바위를 내려다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그나저나 아찔한 절벽 위에 걸터앉은 전망대하며 그 아래로 난 탐방로가 아름답게 보여 다녀오고는 싶었지만 2㎞를 훌쩍 넘기는 산길이 발목을 잡았다. 1시간 가까이나 더 걸릴 시간이 부담스러웠다는 얘기이다. 아니 15㎞가까이 되는 5길을 걷기에도 힘이 부치는 내 체력으로는 애초부터 무리였을지도 모르겠다.

▼ 총연장 176m에 폭이 4m인 이 다리는 야경이 아름답다고 소문났다. 교량의 위 76m 구간에 수윙물안개와 물터널 등의 분수시설에다 오색조명과 음악을 가미함으로써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낮. 휘황찬란하게 빛날 다리 대신 지자체에서 세워놓은 ‘안내판’ 사진을 올리는 이유이다.

▼ 석문교를 건너자 ‘남이장군 등산로 안내도’가 길손을 맞는다. 오른쪽으로 ‘남이장군 놀이터’까지 산을 올라간 후, 능선을 따라 소원봉 전망대까지 갔다가 파란색 길을 따라 내려온 후 강변을 따라 되돌아 올 수 있도록 내놓은 일종의 둘레길이다. 지도에는 ‘막둥이 선바위’와 ‘애기 선바위’라는 지명도 보였다. 아무래도 선바위가 하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참! 산촌생활박물관으로 향하는 외씨버선길은 잠시 이 등산로를 따른다. 중간에 헤어지게 되지만 이정표가 하도 잘 되어서 길이 헷갈릴 염려는 없다.

▼ 등산로는 국민관광지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등산로 초입의 나무계단하며 솔숲사이로 난 산책로 등 정성들여 가꾼 흔적들이 역력하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단풍나무도 가을철에는 또 다른 매력을 물씬 풍길 것 같다.

▼ 그렇게 얼마간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등산로와 외씨버선길이 나뉘는 지점인데, 이정표(산촌생활박물관↑ 0.6㎞/ 남이장군 놀이터← 0.4㎞/ 선바위관광지↓ 0.3㎞)와 함께 세워놓은 ‘전통정원 서석지 이야기 길’이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이 둘레길의 총 길이는 28㎞. 7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며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걸으며 인근에 있는 아름다운 관광지 16곳도 함께 둘러보라고 권한다.

▼ 등산로와 헤어지고 나서도 길은 여전하다. 아니 출렁다리까지 놓는 등 오히려 한수 위라 하겠다.

▼ 다리를 건너 만나는 솔숲에는 ‘산촌생활체험마을’이 들어앉았다. 초가형태의 숙박시설(梅·蘭·菊·竹 등 4동)로 원두막과 물레방아, 장승, 그네 등의 볼거리와 놀거리를 포함시켜 산촌에서의 일상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선지 영양군의 홈페이지에도 체험마을의 앞에 ‘빛과 바람과 솔숲의 한가운데’라는 부제를 달아놓고 있었다.

▼ 조금 더 걷자 분위기가 확 바뀐다. 초가 일색이던 체험마을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대식 건물이 길손을 맞는 것이다. 이정표(영양전통시장 10.2㎞/ 선바위관광지 1.3㎞)는 이곳을 ‘영양 산촌생활박물관’으로 적고 있는데, 우리 조상의 생활상을 다양한 모형으로 재현하고 충실한 설명을 곁들여 누구나 알기 쉽도록 꾸며낸 공간이라고 한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겐 공부삼아 오기에 최적의 코스로도 알려진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굳게 문이 닫혀있었다. 물고기 잡이와 봄철 산나물 다듬기, 꿀따기 등 산촌의 생활상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받아온 안내도이다. ①본관 ②산책로 ③굴피집 ④농사 ⑤투방집 ⑥쟁기질 ⑦너와집 ⑧민속놀이 ⑨서낭당 ⑩입구 ⑪출구 ⑫사육장 ⑬효녀심청 ⑭자연관찰 ⑮별주부와 토끼 ⑯견우와 직녀 ⑰효자 조검 ⑱선녀와 나뭇군 ⑲소공연장 ⑳효자 오삼성 ㉑효부 숙부인 ㉒효자 김두행 ㉓효자 황경걸 ㉔의좋은 형제 ㉕해와달 ㉖호랑이와 곶감 ㉗석조유물 ㉘흥부와 놀부 ㉙주차장

▼ 박물관 아래에는 ‘전통생활 체험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산촌의 추위와 변덕스런 날씨를 견디기 위해 발달한 다양한 형태의 집들 가운데 ‘너와집(아래 사진의 오른편)’과 ‘굴피집(같은 사진의 왼편)’이 복원되어 있다. 너와집은 ‘너와’라고 부르는 나무토막을 이용하여 지붕의 기와를 올린 집을 말한다. 그 위에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거운 돌이나 통나무를 올려두는 것이 특징이다. 또 다른 형태의 집인 굴피집은 나무껍질을 이용하여 지붕을 올린 집이다. 참나무나 상수리나무 등 다양한 나무의 속껍질을 사용했다는데 생각보다 수명이 길다고 한다. 두 가옥의 집안도 직접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마루와 부엌, 안방과 외양간까지 모두 감싸고 있는 재미있는 구조이다.

▼ ‘투방집’도 복원되어 있어 산골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귀틀집‘이라고도 불리는 투방집은 통나무를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쌓아올린 후 그 틈을 진흙으로 메운 집이다. 위에서 거론한 너와집 및 굴피집과 더불어 목재 재료가 풍부한 산촌마을의 특색을 보여주는 집의 형태라 하겠다.

▼ 투방집 주변에는 쟁기질과 씨뿌리기 등 농사짓는 풍경을 재현해 놓았다. 그런데 상상치 못했던 광경도 눈에 띈다. 사람 그것도 아낙네가 쟁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인걸이 쟁기질’이라는데 이제껏 나는 쟁기는 소만 끄는 줄 알아왔기에 놀랍기 짝이 없었다.

▼ ‘연자방아’도 재현해 놓았다. 발동기가 없던 옛날에 말이나 소의 힘을 이용하여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빻는 데 사용하던 방아의 하나이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연자방아가 있었다는데 요즘은 옛 얘기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이밖에 성황당도 복원되어 있었다. 마을이 터를 잡으면서 함께 생긴 게 마을 입구 또는 마을내의 당집이었으니 어찌 빠뜨릴 수 있겠는가.

▼ 그 오른편에 꾸며놓은 ’전통문화공원‘에는 효녀심청, 별주부와 토끼, 견우와 직녀, 선녀와 나뭇꾼, 흥부와 놀부 등 모두들 알고 있는 전래동화가 꾸며져 있고. 그밖에도 효자조검, 효자숙부인, 효자 오삼성 등 귀감이 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 효녀와 심청, 별주부와 토끼 등 물과 관련된 동화들을 구현하기 위해선지 작은 호수도 만들었다. 그 호수로 오르는 계단의 위에는 아치형의 오작교를 만들고 애틋한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견우와 직녀를 배치했다.

▼ 선바위관광지 투어는 대략 55분 정도가 걸렸다. 마지막 코스인 산촌생활박물관을 빠져나와 31번 국도를 건너면 ’주역(注易·駐易)‘ 마을이다. 주역이란 한자를 풀면 ’말을 갈아탄다‘는 뜻이니 이 고을에 간이역 정도의 역(驛)이 있었지 않나 싶다. 아무튼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마을인데 수석(壽石)에 구멍을 뚫어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집이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문득 선사시대에 사용하던 ’돌 화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니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서태평양의 섬나라 미크로네시아(Micronesia)의 얍(Yap)섬의 주민들이 최근까지 화폐로 사용했었다는 그 원형의 돌들을 말이다.

▼ 마을을 빠져나오자 또 다시 반변천(半邊川)을 만난다. 이제 탐방로는 ’감천수로‘를 따른다. 1970년대에 만들어진 이 농사용 물길은 반변천의 천변을 따라 나있다. 그러다보니 거대하진 않지만 험한 바위벼랑을 헤집기도 한다. 덕분에 우리 같은 트레커들은 몸을 비틀어가며 걷는 곡예를 펼치기도 한다.

▼ 수로는 위를 판자로 씌워 탐방로로 바꾸었다. 하지만 맨몸을 내보이는 구간도 있다. 이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평균대와 같은 묘기를 펼칠 수밖에 없다. 그게 부담스러운 사람이라면 신발을 더럽힐 각오를 해야만 한다.

▼ 주역마을을 지난 지 20분 만에 ’감천교(甘川橋)‘에 도착했다. 옛날. 그러니까 널따란 자동찻길을 보고 ’신작로‘라고 부르던 시절에 놓은 듯 다리는 차선을 나눌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좁다. 거기다 난간이 허물어질 정도로 낡았다. 바로 옆에다 새로운 다리를 놓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다리를 건너면 경상북도 민속자료(제64호)로 지정된 ‘학초정(鶴樵亭)’과 ‘정침(正寢)’이 얼굴을 내민다. 반변천 너머 작은 들을 거느린 고아한 솟을대문과 정갈한 토석담. 그리고 대문 옆 담장 안에서 자라난 노송이 빼어난 경관을 만들어내는 옛 건축물이다. 참! 이곳은 ‘학초정’말고도 다른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다리를 건너자마 만나게 되는 이정표(영양전통시장 8.7㎞/ 선바위관광지 2.8㎞)가 바로 그것인데, ‘외씨버선 5길’을 완주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를 배경삼은 인물사진을 꼭 남겨두어만 한다.

▼ 학초정(정침을 포함한다)은 조선 효종 때의 인물인 삼수당 조규(三秀堂 趙頍)가 지은 살림집과 정자로 대문간채와 학초정 그리고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 격인 ‘학초정’은 대문의 안쪽 좌측에 있었다. 산석(山石)으로 쌓은 댓돌이 일부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누하주(樓下柱)를 세워 다락집처럼 보인다. 아쉽게도 자세한 내부구조는 살펴볼 수 없었다. 특히 ‘ㅁ’자형 기본구조에 정면 좌우 끝으로 두 칸을 더 달아 양날개집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정침은 곁눈질로도 구경할 수 없었다. 솟을대문이 굳게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정자는 지을 당시만 해도 ‘삼수당(三秀堂)’이었다고 한다. 건축주인 조규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러다가 고종 때 박학래(朴鶴來)로 주인이 바뀌면서 그의 호를 따서 학초정(鶴樵亭)이 되었단다.

▼ 이젠 감천마을로 넘어갈 차례이다. 인증샷 이정표에서 50m쯤 더 걷다가 오른편 임도로 들어서면 된다. 이어서 구릉(丘陵) 지대를 15분 정도 걷게 된다. 이 일대는 평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널따랗지만 대부분의 경작지는 그대로 묵혀두고 있었다. 낙동강의 수질보전을 위해서라는데 길가의 저수지 또한 바닥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 구릉지대를 통과하면 또 다시 반변천을 만난다. 그리고 잠수교를 겸하고 있는 ‘감천보’를 건넌다. 이 보(堡)가 놓이면서 상부는 인공호수가 됐다. 그 호숫가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의 숲이 들어서 있었다. 감천마을에 살던 침벽 오현병이 문무의 수련도장 용도로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이 그의 뒤를 이어 정성으로 가꾸었고, 지금은 침벽공원 또는 감천 유원지라 불리며 캠핑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 ‘감천보’의 상부는 높고 긴 단애(사진은 영양군 홈페이지에서 얻어왔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수직의 절벽에 측백나무가 자생하는데, 이게 숲을 이뤄 ‘감천측백수림’이라는 대명사까지 얻었다. 깊은 물과 높은 절벽이 나무들을 보호하니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이 숲은 현재 천연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이런 집단적 자생이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 감천보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감천마을로 향한다. 이어서 도로가에 만들어놓은 ‘감들내쉼터’를 지나자 양지 바른 둔덕 위에 터를 잡은 ‘감천마을(甘川里)’이 나타난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는 통정대부를 지낸 오시준(吳時俊)이라 한다. 당시의 땅 이름은 지곡(地谷)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오시준이 정착하면서 동곡(桐谷·東谷)이라 했고 정조 연간에는 주자(朱子)의 무이운곡(武夷雲谷)과 닮았다고 해서 운곡(雲谷)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마을 뒤 산기슭에 단맛이 나는 좋은 물이 샘솟고 감나무가 많아 감천이라 했단다.

▼ 마을 초입에 비각(碑閣)이 세워져있기에 살펴봤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오희집’의 효심이 남달리 지극하다고 해서 그의 후손들이 세운 ‘효자각(孝子閣)’이란다. 하지만 안에는 비석 대신 그의 효행을 적은 편액(扁額) 하나가 달랑 걸려 있었다. 원래는 나라에서 세워준 정려각(旌閭閣)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훼멸된 때문이란다.

▼ 조금 더 들어가면 ‘삼천지’라는 작은 연못이 나타난다. 동쪽 제방을 지키고 있는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늙은 소나무가 연못의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데, 반면에 정자는 최근에 새로 지은 듯 싶다. 연못의 연꽃이 만발할 때를 대비해서 전망데크도 만들어놓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여행객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일 것이다.

▼ 감천마을은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노변의 애가’ 등 주로 슬픈 서정시를 쓴 오일도(1901-1946) 시인의 고향이다. 그의 생가를 찾아보기 위해 제방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일도의 생가 대신 ‘낙안 오씨’의 종가집인 ‘감호헌(鑑湖軒)’을 찾아냈다. 문중에서 1800년대에 건립한 건축물로 ‘ㄷ’자 형의 정침과 ‘一’자 형 고방채가 ‘ㅁ’자 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불천위(不遷位) 사당인 충효사(忠孝祠)는 종택과 동떨어진 토석담장 안에다 별도로 배치했다.

▼ 감천마을에도 수석을 전시해 놓은 집이 있었다. 돌을 매달아놓았던 주역마을과는 달리 이곳에는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전시했다. 거기다 옹기와 솟대를 더해 멋까지 잔뜩 부렸다. 잠시 눈요기를 즐기다 뒤로 돌아가니 작은 공원이 나왔다. 마을 입구에 조성해 놓았다는 ‘문학테마공원’이 아닐까 싶다.

▼ 되돌아온 삼천지. 연못 뒤쪽에는 오일도 시공원이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누른 포도잎’ ‘그믐밤’ ‘코스모스’ ‘가을하늘’ 등 그의 시를 새겨 넣은 바윗돌들이 올망졸망하게 펼쳐진 나지막한 둔덕들 사이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시집은 한 권도 출판하지 못했다고 한다.

▼ 시인은 ‘지하실의 달’ 시비 옆에 책을 펼친 채 앉아 있었다. ‘지하실의 달’은 그의 유고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일제의 통제를 절감하며 이곳으로 낙향한 그는 절필하고 긴 칩거에 들었다. 광복 후 다시 상경해 ‘시원’의 복간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우울로 인한 폭음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간경변증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의 나이 겨우 45세였다고 한다. 그래선지 책을 읽고 있는 그는 여전히 젊은 모습이었다.

▼ 조금 더 들어가자 ‘44칸’이나 된다는 오일도 시인의 생가(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8호)가 나온다. 으리으리한 느낌을 주는 숫자이지만 칸들이 조막만 해 그다지 커보이지는 않는다. 이 집은 고종 원년인 1864년 오일도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건립했다고 한다. 크게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7칸의 홑처마 팔작집으로 전체 평면은 ‘ㅁ’자 형의 뜰집이다. 참고로 오일도의 본명은 희병(熙秉)이다. 1901년 감천마을에서 태어나 14세까지 마을의 사숙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 이후 영양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일본 도쿄의 리쿄대학 철학부에서 공부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시를 썼고 25년 ‘조선문단’ 4호에 시 ‘한가람백사장에서’로 등단했다. 아버지 오익휴는 천석의 거부로 오일도는 넉넉한 가풍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 대문채는 ‘一’자 형이며 대문간을 중심으로 외양간과 마굿간, 오른편에는 방과 부엌을 두고 있다. 대문을 지나면 안채로 들어가는 문의 오른쪽으로 '국운헌(菊雲軒)'이란 사랑채가 위치하는데, 임진왜란 때 학봉 김성일과 함께 의병활동을 한 선조 오수눌의 호인 '국헌'에다 구름 '운'자를 더했다고 한다. 대문의 왼편에는 오일도가 공부했다는 작은 글방이 있다. 하지만 마당을 트럭과 비닐하우스가 차지하고 있어 사진촬영이 썩 편치 않았다. 영양군청 홈페이지에서 사진을 빌려다 쓴 이유이다.

▼ 15분 남짓 마을을 구경시킨 탐방로는 마을의 입구로 되돌아나가는 대신 마을 뒤로 보이는 산자락으로 탐방객들을 이끈다. 차량 통행이 빈번한 국도를 피해보려는 고민의 결과겠지만, 트레커들에게는 이게 최상의 선물이 되었다. 구간 대부분이 경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만한데다. 울창한 솔숲 사이로 난 길바닥에는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 고개 하나를 넘은 탐방로는 이제 국도를 오른쪽 옆구리에 차고 달린다. 국도의 바로 위 산비탈에다 ‘토끼비리’처럼 길을 내놓았다. 덕분에 걷는 게 약간 부자연스럽기도 하지만 이 또한 낭만이니 무슨 상관이겠는가.

▼ 그렇게 15분 정도를 걷자 ‘감천1교’가 나온다. 물론 감천마을에서부터 걸은 시간이다. 이 다리는 탐방로와 국도가 겹치는 유일한 구간이다. 반변천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이제 반변천의 제방을 따른다. 새로 보수를 하고 있는 듯 어수선한 풍경이었으나 제방의 안쪽을 독차지하고 있는 광활한 사과농원이 눈길을 끌었다.

▼ 강 건너의 벼랑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일월산에서 시작된 반변천은 영양군을 관통한 다음 청송과 안동을 지나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이 반변천은 영양군 일대를 굽이쳐 흐르면서 수많은 절경을 만들어내는데, 초승달을 그리며 서늘한 단애를 이루고 있는 이 부근의 적벽(赤壁)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 제방을 따라 걷길 15분, 잠수교가 나타난다. 이 다리를 건너면 ‘진막골’이다. 영양현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고 진을 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데, 깊숙한 골짜기 안에는 현재 20여 호가 옹기종기 살아가고 있단다. 참! 마을 입구의 오른쪽 능선에 있다는 산성은 눈에 띄지 않았다. 탐방로가 그 능선을 넘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 잠수교를 건너면 만나는 진막골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이곳에도 완주를 증명해주는 이정표(영양전통시장 3.9㎞/ 선바위관광지 7.6㎞)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 마을 앞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탐방로는 능선을 넘어가도록 나있는데 이게 꽤나 힘들다고 소문나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우회로는 구태여 고생길을 택할 필요가 없다며 자기한테 오라고 자꾸만 유혹을 보내온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고생길을 택하기로 했다. 이왕에 내놓은 탐방로이니 무언가 하나쯤 얻어갈지 누가 알겠는가.

▼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길이 너무 가파른데다 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옆구리가 허전한 것이 영낙없이 반변천으로 떨어지는 절벽인데, 아슬아슬하게 나 있는 산길은 낙엽에 덮여 잘 보이지도 않는다. 행여 미끄러질세라 조심조심 걸을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볼거리 또한 전무했다. 그저 힘들기만 한 구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 장딴지가 빡빡할 만큼 가파른 오르막길과의 싸움을 치룬 뒤에야 만나게 되는 능선의 꼭짓점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액자 속에라도 넣으라는 듯 수제 망원경까지 박스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 전망대에 서면 반변천과 동부천이 만들어놓은 널따란 들녘과 함께 영양읍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뒤로 펼쳐지는 산릉은 검마산과 백암산, 독경산 등이 아닐까 싶다.

▼ 참! 볼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요렇게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을 쏙 빼다 닮은 고사목도 눈에 띄었으니 말이다.

▼ 산으로 들어선지 30여 분이 되는 곳에서 성황당은 만났다. 그런데 안내판에 적힌 글이 조금 묘하다. 이 성황당의 내력은 나몰라 하는 대신 요 아랫마을에 살던 어느 효자 이야기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늘어놓을 이야깃거리가 정 없었다면 스토리텔링이라도 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 성황당을 지나면서부터는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른다. 울창한 솔숲 속에서 곡선을 이루는 몸매가 고운 길이다.

▼ 이어서 10분 후에는 무량사(無量寺)라는 절간을 만난다. 금당인 무량수전을 위시해 인법당과 삼성각, 천왕문, 요사 등으로 꾸며진 영양을 대표하는 사찰이지만 사세가 약해서인지 낡고 어수선한 모양새이다.

▼ 트레킹 날머리는 영양전통시장

무량사 앞에서 산자락에 들어섰다가 이를 벗어나면 탐방로는 영양읍으로 연결되는 도로에 내려선다. 이제 1㎞ 정도만 더 걸으면 5길의 종점인 영양전통시장이 나온다. 하지만 이곳에서 트레킹을 마무리 짓는 사고가 발생해버렸다. 점심을 먹은 다음 종점으로 가라는 ’깔지‘를 보고 산악회의 버스가 멈춰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 그만 트레킹까지 마감해버렸기 때문이다. 반주삼아 마신 술에 얼큰하게 취했는데 까짓 전통시장을 다녀올 정신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전통시장은 5길의 종점이지만 6길의 시점이기도 하니 다음 번 답사 때 밟아보면 되지 않겠는가. 마지막 사진을 허총무님에게서 얻어다 쓴 이유이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 4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가 14.44㎞이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들이 많았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