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의길 1코스(강화평화전망대-문수산성 남문)

 

여행일 : ‘24. 12. 7()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송해면·강화읍 및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일원

여행코스 : 강화평화전망대고려천도공원연미정6.25참전용사 기념공원()강화대교문수산성 남문(거리/시간 : 15.6km, 실제는 17.01km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 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강화평화전망대(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88올림픽도로로 김포까지 온 다음, ‘국도 48호선으로 갈아타고 강화대교를 건넌다. 신당교차로(송해면 솔정)에서 빠져나와 전망대로를 타고 8km쯤 올라가면 강화평화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지난 9 28일 개통한 ‘DMZ 평화의 길(이하 평화의길‘)’은 인천 강화군부터 강원도 고성군까지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길이다. 510에 이르는 횡단 노선은 2개 광역 시·도에 10개 기초자치단체를 지난다.

 강화평화전망대에서 강화도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다 )강화대교를 건너 문수산성 남문 앞에서 종료되는 15.6km의 여정이다. 휴전선에 해당하는 한강하구 중립수역과 북녘 땅 조망과 함께 조선시대 한성 방어의 최전선이었던 강화도의 군사 유적을 둘러볼 수 있다. 하나 더. 군사분계선이 인접해 있어 신분증 지참은 필수다.

 평화의길 안내도는 남북1.8평화센터 앞 소형차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16.9km의 거리인데 5시간30분이 걸린단다. ! 서해랑길(103코스) 안내도도 눈에 띈다. 이곳 강화 평화전망대가 서해랑길의 종점이자 평화의길의 시점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9 : 18. 먼저 평화전망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초입, 국제구호개발 NGO ‘World Share’에서 무료급식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한 끼 100원이면 충분한데도 지구 곳곳의 많은 어린이가 굶주리고 있단다. 공감이 가기에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넣어드릴까 해서 모금함을 찾아봤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카드를 내놓으며 서명부터 해달라는 것이 정기적인 참여를 권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월 급여의 101에 가까운 금액을 국제구호단체 두엇에 정기적으로 기부해오고 있기에 정중히 사양하고 자리를 떴다.

 09 : 24.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을 위한 곳으로 평화통일의 기원을 담았다. 1~3층에 전시관과 전망대 통일염원소 등이 만들어져 있다. 지하1층과 지상 4층은 군사시설로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 입장료로 2,500원을 받고 있었다. 연중무휴이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단다.

 전시실 풍경. 강화도와 국방, 끝나지 않은 전쟁, 통일로 가는 길 등의 구성으로 남북한의 상황과 통일에 대한 열망, 그리고 통일 후의 비전을 제시한다.

 도전과 저항으로 점철된 강화의 역사도 시대별로 전해준다.

 북한 주민들의 의식주와 생활상도 살짝 엿볼 수 있다.

 3층에 있는 실내전망대. 고성능 망원경으로 북한의 산하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흐린 날씨에도 영상을 통해 북한 전경을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시설이 되어 있었다.

 야외는 작은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기념비 몇 개를 세우고, 그 옆에 해병대 상륙돌격장갑차를 전시해놓았다.

 가장 높은 곳은 제적봉(制赤峰)’의 정상석이 차지했다. 당초 애기봉을 제적봉으로 명명하려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애기봉 전설을 듣고 원래의 이름을 유지하라 했다나? 덕분에 이 봉우리가 제적봉이 되었다고 한다.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는 임진왜란 때 연안부사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이 이끄는 황해도 의병이 연안성에서 흑전장정의 3천여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긴 내용을 담았다. 원래의 비는 횡정리(연백군 용봉면)에 있으나, 미수복지역인 관계로 연백군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망향과 통일의 기원을 담아 1983년에 세웠다고 한다. 양사면 인화리에 있던 것을 1997년 고향 땅이 보이는 이곳 평화전망대로 옮겨왔다. 옆 빗돌의 주인공은 편강열 의사(片康烈 義士)’.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만주에서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성단을 조직, 장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 등 항일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얻은 척수염으로 1929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평화전망대 건물 뒤, 야외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북한까지의 직선거리는 2.3km. 얼마나 가까운지 소리치면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어 줄 것 같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빌며 북한 땅, 동포들의 고된 생활상을 가슴에 담아보자.

 해마다 음력 10월 상달을 전후해 실향민과 가족들이 모여 망향제를 연다고 했다. 6.25 전쟁 종료와 함께 시작된 전통행사로, 1년 중 조상에게 햇곡식을 바치기 가장 좋은 시기인 10월 상달에 열어오고 있단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도 눈에 띈다. 강화도가 고향인 한상억, 최영섭이 만들었다는데, 유명 성악가가 부른 노래를 들어 볼 수도 있다.

 건너편 삼달리(황해북도 개풍군 대성면)까지는 2.3km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망원경까지 비치해 북한 땅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북한의 주택, 마을회관, 학교, 선전용 위장마을 등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특히 다른 지역의 전망대들과는 달리 북한주민들이 농사짓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날씨가 좋아야 하겠지만.

 다른 분의 시선도 빌려보자. <정말 가깝다. 소리치면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어 줄 것 같다.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우측으로 개성공단,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경계로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까지 확인할 수 있다. 좌측으론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와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무궁화동산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던가? 나라꽃인 무궁화의 품종이 이렇게나 많은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긴 몽땅숲협동조합에서는 이원화립·일노환·치구·적일중·하보마 같은 생소한 이름으로도 모자라 꽁트드에몽·토투스알부스·다이어나·블루버드·레드하트·헬렌·도로시크레인·하이리테드 같은 외국어로 된 품종까지 선보이고 있었지만.

 09 : 40. ‘남북1.8평화센터(남한과 북한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인 1.8km를 모티브로 삼았다)’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때 조강(祖江)과 조강으로 인해 돌출된 철곶(鐵串)이 조망된다. 하나 더. 강화도의 북쪽 해안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던 민통선 지역이었다. 그래선지 우리나라 영토임에도 군인들이 서 있는 검문소를 지날 때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잊을만하면 이정표가 얼굴을 내밀어 걷기여행자들의 길벗이 되어 준다.

 그래도 못 미더웠던지 곳곳에서 평화의길 리본이 팔랑인다.

 평화의길은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 대부분 중복된다. 이곳 강화도에서 동해안의 고성까지 자전거와 인간이 사이좋게 간다고 보면 되겠다.

 09 : 48. 첫 만남은 철곶 마을. 제적봉에 걸터앉은 평화전망대가 마을 뒤에서 고개를 내민다. 참로고 철곶은 법정 동리인 철산리(鐵山里)’를 구성하는 3개의 자연부락(철곶·산이포·진말) 중 하나다. 조선시대 철곶보(鐵串堡)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강화도는 5(), 7(), 8포대(砲臺), 54돈대(墩臺)를 두어 톱니바퀴처럼 섬 전체를 감싸며 섬을 방어했다.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나 할까? 그렇게 강화는 한양을 지키는 제일선이자 수도 방어체제를 수행할 수 있는 보장처가 됐다.

 철곶마을 들녘 뒤로 조강(祖江)이 흘러간다. 그 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지나가고, 군사분계선 너머는 황해도 개풍군이다. 또한 저곳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세 강물이 바닷물과 함께 흐른다. 하지만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실향민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물결에 파묻혀 말없이 흘러간다.

 전망대로(옛 이름은 制赤大路’)는 철산고개를 넘는다. 철산리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자연부락 철곶과 산이포의 경계에 놓인 고갯마루쯤으로 보면 되겠다.

 고개를 내려서면 철산리 입구(이정표 : 강화대교 12.94km/ 평화전망대 0.91km).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철산리(鐵山里)는 대부분 평지로 이뤄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철곶보가 있던 철곶(鐵串)과 포구마을인 산이포(山伊浦)를 합해 철산리가 됐다.

 뒤돌아본 철산고개. 도로 왼쪽에 산이포(山伊浦)’마을이 꽤 크게 형성되어 있다. 하나 더. 이곳 철산리는 북한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고 했다. 조강(祖江)을 사이에 둔 철산리 산이포와 북녘 땅 해창포(황해도 개풍군)는 직선거리로 1.8km에 불과하단다.

 전망대로를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꽤 너른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09 : 59. 철산삼거리. 양사면사무소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으로, ‘교산리 고인돌군이나 교산교회와도 연결된다. 강화 최초로 설립된 개신교 교회로 선상세례의 일화를 간직한 교회다. 이승환 모자가 선교사의 배까지 찾아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강화 땅에 기독교의 뿌리가 내리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삼거리 근처에 산이포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산이포(山伊浦)는 철산리 동남쪽 바닷가에 있던 포구다. 6.25 이전까지 700여 가구가 모여 살던 강화에서 가장 번화했던 포구로 알려진다. 서울과 북한을 오가던 배들의 정박지였고, 삼남 지방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물자가 한강을 따라 서울로, 예성강을 따라 개성으로 올라갈 때 물때를 기다리며 머물던 포구였다. 오일장이 열리면 황해도 연백 사람들까지 모일 만큼 북적였다고 한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철조망이 쳐졌고 주민들은 강제 이주 당했다. ‘널다리돈대(’석우돈대 판교돈대로도 불린다)’까지 있었다는 마을은 그렇게 사라졌다. 돈대가 있던 자리는 현재 대북 방송용 확성기가 들어서있다고 한다. 문화재 보호보다 안보가 더 우선시되던 시대의 유산이다. 안내판의 <그리움은 늙지 않아요. 뜨거운 눈시울 날이 새어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우리>라는 문구가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10 : 05. 잠시 후 석우교차로(이정표 : 12.2km/ 평화전망대 1.65km)’에 이른다. 강화대교와 강화읍으로 가는 도로가 좌우로 나뉘는 지점으로, ‘평화의길은 바닷가를 따라 난 2차선 도로를 따른다. 접근은 물론이고 사진촬영까지 금지한다는 날선 경고 문구에 살짝 쫄게 되는 구간이다.

 평화의길은 이제 해안을 따라 설치된 철책 앞에서 분단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차선이 둘이나 되는 널찍한 도로도 텅 비어있었다. 농로에까지 주어지는 그 흔한 도로명도 붙어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가끔이었지만 차량들이 오갔기 때문이다. 연미정 부근에 군의 초소가 있는 걸로 보아 지역 주민들에게만 통행이 허용되는지도 모르겠다.

 탐방로는 도로변에 따로 내놓았다. 그 바닥에 평화누리길의 방향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어느 독일 여행자는 자서전에서 곳곳에 그려놓은 방향표시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적고 있었다. 국내의 걷기 길에서도 만나보기를 학수고대 해 왔었는데, 오늘에야 그 원을 풀었나보다.

 평화의길은 진록과 연록으로 진행 방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정방향이 진록으로 보이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왼쪽 군의 순찰통로는 방조제를 따라 쳐놓은 모양이다. 도로 오른쪽에 배수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게 또 물억새와 갈대로 뒤덮이면서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다니는 차량이 아무리 적어도 도로는 도로인 모양이다. 과속을 단속중이니 알아서 속도를 줄이란다.

 뒤돌아본 풍경. 석우교차로에서 시작된 길은 고려천도공원까지 일직선으로 뻗어나간다. 하나 더. 저 철책 너머에서는 남과 북, 바다와 강이 하나로 만난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임진강과 한강이 한데 어우러져 다시 서해와 염하(鹽河)로 흘러 들어간다. 옛날엔 자연의 산물과 사람이 사시사철 모여들던 물길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1953년 정전협정을 하면서 땅에도 바다에도 철책이 둘러쳐졌다. 마을에 진동하던 생선 비린내도 지워졌다.

 10 : 25.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고려천도공원(이정표 : 강화대교 10.5km/ 평화전망대 3.35km)’에 이른다. 민통선 안보 관광코스 조성사업의 하나로 송해면 당산리에 만들어놓은 역사 테마공원이다. 강화천도는 고려-몽골 전쟁 때 항전하기 위해 고려 고종이 1232년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일이다. 이후 38년간 고려의 임시수도였던 강화도의 역사를 천도문을 시작으로 고종사적비까지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다.

 고려 만월대의 출입문을 형상화 한 천도문을 들어서면 대몽항쟁을 위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팔만대장경과 상정고금예문 등에 대한 자료와 강화도에 흩어져 있는 역사문화 유적지들도 소개해준다. 정자 및 전통연못, 폭포 등이 있어 여유롭게 산책과 휴식하기에도 좋다.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새긴 팔만대장경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를 형상화 한 7미터짜리 철제조형물로 만들어놓았다. 승천포(휴전이 되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큰 포구이다)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온 고종은 대몽항쟁을 이어간다. 하지만 항복에 가까운 화해를 하고 개경으로 돌아간다. 이에 불복한 삼별초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항쟁을 이어갔고, 그런 역사도 조형물 뒤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맨 안쪽은 고려고종사적비 차지다. 강화해협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조류가 빨라 기병 중심이던 몽골군에 맞서 저항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몽골군에 쫒긴 고종은 이곳 승천포를 통해 강화에 들어왔고(그래선지 배 모양의 전망대도 만들어놓았다), 임시수도로 삼아 39년을 머물면서 팔만대장경과 같은 국가 유산을 남기는 등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10 : 32.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가도 가도 똑같은 길을 계속 걸었다. 흙길이 아닌 포장된 길을 오래 걷다보니 발바닥과 발목이 아파온다.

 왼쪽은 철책의 연속이다. 지루해지기 딱 좋은 풍경인데,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들녘 풍경이 그나마 해방감을 준다. 뒤로 보이는 산은 고려산과 혈구산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데다 다양한 생태계를 갖춰 새들이 서식하기에 최적의 환경으로 알려진다. 탐조가들 사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탐조 여행지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이곳 강화도도 그중 하나라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들녘이 온통 철새들 천지다.

 11 : 02. 송해면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어느덧 강화읍(대산리)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송릉천(이정표 : 문수산성 남문 7.9km/ 평화전망대 7.7km)이라는 작은 하천을 스치듯 지나간다. ! 이즈음에서 도로명이 해안북로라는 이름으로 뜨고 있었다. 도로변에는 버스승강장도 만들어놓았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주어진 건가?

 11 : 22. 강화읍으로 들어선 탐방로는 돌모루 고개를 넘어 월곳리로 내려간다. 잠시지만 이때 바닷가를 떠나기도 한다.

 10분 남짓 더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돈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연미정이 얼굴을 내민다. 마을 끝에 왕릉처럼 솟아오른 곳이 월곶돈대(月串墩臺), 그 위에 올라앉은 정자가 연미정(燕尾亭)이다.

 11 : 42. 관광안내소를 지나자 월곶 돈대 앞에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 이곳이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黃衡, 1459-1520)의 옛 집터(향토유적 3)라는 것이다. 황형은 삼포왜란(중종 5) 때 왜적을 무찔렀고, 중종 7년에는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의 반란을 진압했다. 왕이 그 업적을 찬양하여 연미정을 하사했단다.

 연미정은 임시완, 임윤아, 홍종현 주연의 MBC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의 촬영지라고 한다. 고려 충렬왕으로부터 충선왕 대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아름다우면서 슬픈 우정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인데, 이곳에서 이별 장면이라도 찍었나 보다.

 아치형 암문(暗門)을 들어서자 느티나무(540년 된 보호수란다) 그늘 아래 연미정(燕尾亭)이 앉아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아름답다. 하긴 강화10경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저곳은 인조 5(1627)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참고로 연미정이란 정자 아래로 한강과 임진강 물이 합쳐졌다가 한 줄기가 서해로 흘러들고 또 한 줄기가 김포와 강화를 가르는 염하(鹽河)로 흘러드는 모습이 마치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하지만 나무는 죽어서 그루터기를 남기나 보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링링 그날의 상처라는 브랜드로 포장까지 해놓았다. 맞다. 누군가의 전환의 발상이 있었기에 저런 볼거리가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연미정이 있는 월곶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이다. 그곳에 김포반도가 한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작은 섬 유도(留島)’가 있다.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한국전쟁 이전에는 농가 2가구가 거주했고, 주막과 선착장까지 있었다고 한다. 홍수가 났을 때 북한에서 소 한 마리가 떠내려 와 우리 군인이 구출했던 인연으로 평화의 소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재밌는 일화도 전해진다.

 북한 땅도 조망된다. 개풍군의 신흥리와 령정리, 해평리라고 한다. 크게 소리치면 손짓이라도 보내올 만큼 지척이지만 우리에겐 너무나도 먼 거리로 인식된다. 하지만 예성강과 임진강, 한강은 연미정 앞에서 하나가 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서해로 흘러간다. 우리 민족의 철조망에 갇힌 역사를 아프게 갈무리하면서.

 11 : 57. 강화팔경의 하나인 연미정의 비경을 맘껏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때 가야할 나들길과 함께 조해루가 발아래로 펼쳐진다. 저 대문을 나서면 월곶진일 게다. 예전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가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리다 물때에 맞춰 한강으로 들어갔다는 곳. 뱃사람들의 사랑방이다.

 조해루(朝海樓)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강화 외성(江華 外城)’의 문루 중 하나로 강화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옛날 이곳은 남으로 염하, 북으로는 조강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는 해상로의 요충지였다)하는 초소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참고로 강화외성(사적 452)은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고려 23대 왕) 1233년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적북돈대에서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축조한 성이다. 성에는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했단다.

 평화누리길과 함께 사이좋게 달려온 평화의길은 이제 강화나들길이라는 친구를 하나 더 보태서 이어간다.

 이후로도 길은 겹겹의 철책이 드리워진 바닷가를 따라간다. 철책 외에는 볼거리가 없으니 지루할 것은 당연하다. 그게 싫다면 연미정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 나고 드는 게 자유로워 나들길이라는 강화 걷기에 시작과 끝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드넓게 펼쳐지는 들녘과 이를 받쳐주고 있는 고려산과 혈구산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2 : 34. 연미정을 출발한지 40. 테니스장이 들어선 작은 고갯마루를 넘는다. ‘제승돈대(制勝墩臺)’가 있었다는 부새산을 절단해가며 도로를 내놓은 모양이다. ! 중간에 강화나들길이 갈려나가기도 했었다. 도로를 벗어나 들녘의 둑길과 야산의 숲길을 걷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안내판은 이 어림을 한강하구 습지보호지역으로 적고 있었다.

 고갯마루를 넘자 국궁장과 대산기계공업이 연이어 나온다. 아까 헤어졌던 강화나들길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도 한다.

 12 : 43. 몇 걸음 더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에는 접경지역의 특성을 살린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있던 자리(강화읍 용정리)에 그들의 뜻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조성했단다. 국난극복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호국충절의 고장이자 호국보훈 성지인 강화군의 지리적 여건에 걸맞는 시설이라고나 할까?

 상단은 공원의 주인공인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자리한다. 그밖에도 강화특공대의적불망비와 한반도를 형상화한 조형물 등을 설치해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하단에는 6.25 전쟁 때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우리나라에 병력을 지원해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6개국의 참전 규모 등을 상세히 적은 안내판을 설치하여 6.25 전쟁의 실상을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안보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경계용 울타리도 버려두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광복과 혼란기, 참담했던 6·25전쟁, 정전협상 등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사진 벽화로 만들어 분단의 현실을 담았다.

 공원을 빠져나오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강화대교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12 : 58. 강화대교 아래를 지난다. 한옥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강조한 아치가 눈길을 끄는 강화도의 관문이다.

 옛날 이곳에는 갑곶나루가 있었다. 세종 원년 박신이라는 사람이 사재를 털어 14년간의 공사 끝에 석축로를 완성했고, 이후 500년간 나루의 기능을 수행해왔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인조가 이곳을 통해 강화도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교통수단의 변화로 1920년 기능을 잃었고, 1970년에는 강화대교가 놓이면서 완전히 폐쇄됐다.

 평화의길은 강화대교 아래서 갑곶순교성지로 들어간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된 우윤집·최순복·박상손 등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천주교(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 그들이 처형된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 매입하고, 지금의 순교성지를 조성했다. 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예수님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해루(鎭海樓)’가 길손을 맞는다. ‘강화외성 6개 문루 중 하나로, 염하를 건너와 갑곶나루에서 내린 사람들이 강화읍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문을 통과해야만 했단다. 강화도의 관문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저 문루는 최근에야 복원되었다. 완전히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세기 말 제작한 지도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성문 밖으로 나가자 김포반도를 향해 두 개의 다리가 뻗어나간다. 왼쪽은 1997년 개통된 신() 강화대교(길이 780m)로 갑곳리(甲串里, 강화읍)와 포내리(浦內里, 김포시 월곶면)를 연결한다. 그리고 오른편은 1970년 개통되어 27년 동안 강화도를 육지와 연결시켜주던 구() 강화대교이다. 그 임무를 새로운 다리에 넘겨주고 지금은 보행교로 남아있다.

 진해루 앞 광장에는 통제영학당(인천시 기념물 49)’이 있었다고 한다. 통제영학당은 조선 고종 30(1893)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사관생도 38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한 통제영은 영국 장교들까지 교관으로 부임시켰으나,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1896년 영국군 교관들이 귀국하면서 학교도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당시 사용하던 우물만이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13 : 06.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하나의 너른 광장이 나온다. 공터의 뒤는 갑곶성지’. 성지로 오르는 길목에는 하얀 예수님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신다. 쇄국정책과 종교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이 품었을 전교에 대한 염원을 내륙에 전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통로는 계단을 없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만들기의 일환일 것이다.

 통로는 갑곶 순교성지로 이어진다. 가장 높은 곳은 갑곶진두(나루터)에서 처형된 순교자 세 분을 기리는 순교자 삼위비 차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해역에 미국 군함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다.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면서 군사 충돌이 빚어졌고, 고종은 이를 빌미로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를 박해했다. 그 결과 제물진두(현재 화수동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는 세 분이 순교했다.

 광장의 오른쪽 끝은 기도하는 예수상이 자리 잡았다. 그 앞에는 장궤틀(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틀)을 놓았다. 예수님을 마주보도록 해놓은 것은, 그만큼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13 : 14. 순교성지를 빠져나오면 )강화대교. 1970년에 개통된 이 다리는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로서는 경남 충무교와 전남 완도교에 이어 국내 3번째라고 한다. 1997년 새로운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폐쇄되었으나 다리가 평화누리자전거길로 활용되면서 낮 시간에 한해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인도교로 변한 강화대교를 이용해 염하(鹽河)를 건넌다. 길이 694m의 다리는 상판을 3등분 한 다음 가운데로만 걸을 수 있도록 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대형 배관이 양옆에서 따라온다.

 13 : 24. 강화대교 동단에는 평화의길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층으로 된 전망대도 눈에 띈다. 경비초소 등 군인들이 사용하던 옛 시설물들이 걷기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설로 탈바꿈했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강화의 동쪽 바다가 그 속살을 드러낸다. ‘염하(鹽河)’라고 흔히 불리는 강화해협은 한양으로 들어서는 중요 물길이었다. 그래서  ’, 그리고 돈대가 촘촘하게 들어서서 바다를 지켰다.

 평화의길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강화대교의 아래를 지난다.

 강화나들길과 헤어진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경기둘레길이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 평화누리길 이정표(문수산성 남문 0.5km/ 대명항 13km)가 종점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고 알려준다.

 13 : 30. 다리를 횡단하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문수산성 남문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문수산성(文殊山城)은 강화도 방어를 위해 1694(숙종 20) 삼군문(三軍門)을 동원하여 쌓았다. 내륙으로부터 강화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다. 성에는 서·· 3개의 대문과 아문(亞門) 4개가 있는데, 이곳 희우루(喜雨樓)는 그중 남문이다. 1866(고종 3) 일어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성문에서의 조망도 일품이다. 소금 강 염하가 도도한 자태를 드러내는가 하면, 그 너머 더러미 포구에는 작은 어선들이 한가로이 떠있다. 지극히 평화로운 풍경이라고나 할까?

 13 : 40. 남문에서 내려오면 김포장례협동조합(문수산수목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2코스) 안내도는 장례조합 건물 뒤 산자락에 세워져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이 17.01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줬다. 나에게 집사람은 연인이자 친구다. 옥스퍼드대학의 '로빈 던바'교수는 한 개인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친구를 150명 남짓으로 봤다. 많을수록 좋겠지만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에게는 친구가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꿈쩍없이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집사람이 항상 함께 해주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서해랑길 63코스(천북굴단지 - 궁리항)

 

여 행 일 : ‘24. 11. 9()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천북면 및 홍성군 서부면 일원

여행코스 : 천북굴단지홍성방조제모산도공원남당항남당노을전망대어사항속동해안공원궁리항(거리/시간 : 11.2km, 실제는 13.33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3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홍성군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 수월한 코스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천북굴단지 광장(충남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에서 내려와 갈산면소재지(상촌리)로 들어온다. 갈산교차로에서 와룡로(남당리방면)를 타고 4km, 이호삼거리에서 40번 국도(남당·천북방면)로 옮겨 12km쯤 내려오면 천북굴단지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홍성 63코스) 안내도는 굴단지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천북굴단지에서 홍성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궁리항까지 가는 11.2km짜리 여정으로, 남당항, 노을전망대, 홍성타워 등 곳곳에 볼거리가 널려있다. 도중에 들르는 포구에서 맛볼 수 있는 싱싱한 생선회는 여행의 또 다른 재미, 특히 어사항에서 구한 칠게 튀김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광장은 지난주에 끝난 굴 축제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놓고 있었다. 천북면 지역에서 생산되는 굴의 뛰어난 맛을 전국에 알리기 위해 지난 2001년부터 열어온 축제이다. 굴은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수확하는 것을 최고로 치는데, 출하 초기에 맞추어 축제를 연다고 보면 되겠다.

 천북항. 며칠 전, KBS-2TV ‘생생정보통에서 이곳 천북굴단지가 소개됐었다. 어부는 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그물망에 가득 든 튼실한 굴을 건져내며 웃음꽃을 활짝 피웠었다. 하나 더. 새벽이면 굴세척과 선별작업으로 분주한 이색적인 풍경과도 마주할 수 있단다.

 10 : 23. 홍성방조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둑 위로 국도 40호선(홍보로)이 지나간다. 도로 양옆으로 인도를 따로 내놓았음은 물론이다.

 천수만은 천북면 어민들의 보물 창고다. ‘바다의 보석이라는 석화(石花)를 무럭무럭 키워내니 말이다. 서해의 갯벌과 만나 찬바람을 맞으며 자란 천북 굴은 탁월한 품질을 자랑한단다. 식감이 쫄깃쫄깃하고 향이 강해 보령 9미 중 하나로 꼽힌다.

 오른쪽은 방조제를 막으면서 생긴 홍성호이다. 풍광이 뛰어난데다 붕어나 잉어의 입질이 좋아 낚시꾼들이 발길이 잦은 곳이다. 반면에 버려진 쓰레기와 불법어구로 인해 환경오염이라는 몸살을 앓고 있지만.

 10 : 34. 홍성에서의 첫 만남은 수룡항이다. 포구에는 해양경찰의 수룡동파출소도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수룡동마을은 홍성호의 안쪽 깊숙이에 있다. 그러니 홍성방조제로 인해 바닷길이 끊긴 어민들을 위해 새로 조성한 항구일 것이다.

 이어서 홍성교를 건넌다. 홍성방조제는 모산도를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다. 배수갑문은 그중 남쪽 방조제의 북단에 위치한다. 그 배수갑문에 놓인 다리가 홍성교이다.

 10 : 40. 서해랑길에서 살짝 비켜나있지만 모산도(茅山島)’의 꼭대기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조망의 명소이니 꼭 들러보라던 지인의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너스로 홍성방조제준공탑도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홍성교에서 150m쯤 북진하다보면, 도로변에 쳐놓은 철책을 1m쯤 띄운 다음 사철나무 숲 사이로 길을 만들어놓았다.

 10 : 43. 지인의 말대로 산마루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그만큼 조망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곳은 모산도(茅山島), 이름처럼 산으로 이루어졌고 이곳은 그 꼭대기다. 하지만 고도계는 기껏 42m를 찍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주위가 제로 레벨이어서 사방으로 시야가 툭 트이는 것이다.

 방조제 끝에는 최근 핫 플레이스로 뜨고 있다는 천북 굴단지가 놓여있다. 이를 가운데 두고 홍성호와 천수만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홍성호는 금리천(錦里川)의 하구역에 둑을 쌓아 만든 담수호이다. 아름다운 호수로 입소문을 탔지만 아쉽게도 역광이 망쳐버렸다. 참고로 금리천은 은하면(홍성군) 장곡리에서 발원 금국리·학산리·금곡리(결성면)를 지나 성남리에서 서해로 합류하는 길이 7.2km의 지방하천이다.

 방조제준공탑’. 1991-2001, 보령·홍성지구 대단위 농업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보령방조제와 홍성방조제를 쌓았다. 이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호수가 보령호와 홍성호이다. 이곳이 홍성인데도 보령·홍성방조제준공탑인 이유다. ! 옆에 풍력발전기도 세워져 있었으나 얘깃거리가 없어 생략했다.

 진입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김자 결성현감 승전지비(金滋 結城縣監 勝戰址碑)’를 만났다. 이곳 모산도(혹은 모산포)는 왜구의 노략질이 잦은 곳이었단다. 빗돌은 조선 태종 8(1408) 결성현감 김자가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빗돌에 적힌 결성현은 지금의 홍성군 결성면이다. ‘홍성이라는 지명은 홍주와 결성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10 : 51. 다시 만난 국도.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간다. 바닷가를 따라 모산도공원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널찍한 주차장 앞 솔숲에 쉼터 겸 정자가 놓여 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가 아른거린다. 예전 이곳은 모산도(茅山島)’라는 섬이었다. 금리천이 황해와 만나는 지점에 방조제를 쌓으면서 육지가 되었다.

 공원에서의 조망도 빼어난 편이다. 천북굴단지에서 남당항까지 천수만의 너른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천북이 굴 구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다면, 반대편에 위치한 남당항(사진)은 대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10 : 54.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홍성호의 북쪽 방조제이다. 홍성방조제는 남·북 방조제를 합칠 경우 1,856m나 된다. 올망졸망한 섬들로 수놓인 천수만이 없었더라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긴 방조제다.

 천수만은 세계적 철새 도래지이다. 기러기·독수리 등 다양한 철새들이 찾아오는 중요한 생태적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저 고니(?) 무리는 그중 선발대일까?

 11 : 02. 홍성방조제는 북단에 있는 신리교차로에서 끝을 맺는다.

 홍성군은 이정표를 조금 다르게 운용하고 있었다. 종점과 시점을 중심으로 인근의 주요 지점을 끼워 넣던 다른 지자체들과는 달리, ·종점은 하단의 지도에만 표시하고 날개부분에는 주요 지점들을 적어 넣었다.

 이후부터는 남당항을 바라보며 간다. 도로는 홍보로에서 남당관광로로 바뀐다.

 이때 천수만에서 죽도가 떠오른다. 5년도 더 전에 다녀왔지만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한 섬이다. 이름처럼 대나무가 많았던 섬, 두 개의 섬이 육계사주(陸繫砂洲)로 연결되어 있던 섬이다. 당시 기억을 잠시 빌려보자. <전망대에 오르면 하늘이 반, 바다가 반이다. 높이에 비해 전망이 시원하다는 얘기다. 천수만에 동동 떠있는 죽도는 자신보다 작은 11개의 섬을 거느린다. 올망졸망 새끼 섬들이 부러운 듯 그리운 듯 죽도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일부 섬은 물이 들고 남에 따라 가느다란 모래 띠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도 한단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한걸음 더 나가보자. 본섬의 서쪽에는 큰달섬과 작은달섬, 충태섬이 내려다보이고, 북쪽 방향으로 띠섬(모도), 멍대기(명덕도), 오가리(큰오가도와 작은오가도), 전재기(전도) 등이 늘어서 있다. , 남쪽 끝섬으로는 지마녀, 움마녀, 제일 북쪽 섬으로 꼬장마녀 등이 있다. 마녀의 뜻은 만조시간이 긴 섬이라는 의미이며, 꼬장은 끝장 , 제일 북쪽의 끝을 의미한단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육지의 맨 끝을 장식하고 있는 꽃섬이 눈에 들어온다. 지인으로부터 꼭 들러보라던 명소 중 하나이다.

 11 : 14. 작은 동네(‘소섬마을일 것이다)를 횡단하자 또 다시 바다가 나왔다. 왼쪽 끄트머리에 있는 꽃섬부터 일단 둘러보기로 했다.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빌던 당산(堂山)이었던 곳이다.

 당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굵직한 팽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제단 등 제사를 지낸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탐방로는 이제 바닷가를 따라 북진한다. 물 빠진 갯가를 따라 걷는 해안길은 정면에 남당항을 놓고 길을 이어간다.

 왼쪽으로는 천수만이 드넓게 펼쳐진다. 천수만(淺水灣)은 안면도와 충청남도 해안선에 둘러싸인 만이다. 서산시·보령시·태안군·홍성군 등 4개 시군에 접하고 있으며 항구도 수십 개에 이른다.

 11 : 27. ‘남당항(南塘港)’에 이른다. 서부면 남당리에 있는 국가어항으로 남당이란 지명은 조선 영조 때 학자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 낙향하여 이곳에 살게 되면서 그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송시열·권상하의 학통을 이어 정통 주자학을 계승·발전시켰으나, 변화하는 시대(당시는 실학자들의 사회개혁론이 제기되던 시기였다)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해양분수공원이다. 남당항의 거대한 광장 한가운데 음악과 분수쇼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바닥 분수와 형형색색 무지갯빛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저곳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단다. 바닥분수에서 팡팡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물줄기를 흠뻑 맞은 아이들이 사방팔방 물총을 쏘아대며 물놀이를 즐긴단다.

 국내 최초의 해양형 네트 어드벤처라고 한다. 팡팡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면 두 눈에 천수만이 가득 담긴다나? 튀어 올라 가까운 죽도도 보고, 한 번 더 높이 튀어 오르면 저 너머의 안면도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안에서는 아이들 두엇이 탄탄한 그물네트를 발판삼아 통통 튀어 오르고 있었다. ‘위아래 위위아래 박자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신기롭기까지 했다.

 길은 방파제에 기대듯 내놓았다. 바닥을 형형색색의 꽃들로 채워 넣어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하지만 분수 주변에 있다는 트릭아트는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니 있는 줄도 몰랐다. 일류의 포토죤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I  NAMDANG’. 이렇게 공들여서 포구를 꾸몄으니 사랑받을 만도 하겠다.

 작은 광장도 눈에 띈다. 방파제에 잇댄 작은 공간을 만들었으나, 힘들게 만들었을 그 공간은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여행자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비우듯 채워져 있는 공간에서 문득 도()까지 떠올렸다면 나만의 오해일까?

 감각적인 멋이 뚝뚝 떨어지는 새조개 형상의 의자. 평생을 꽃띠로 살고자 하는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정박되어 있는 배는 별로 없지만, 남당항은 현제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지 어선이 70척 이상이어야 지정받을 수 있다니, 천수만에서 가장 큰 어항으로 보면 되겠다.

 홍성군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홍성 서해랑길 63코스 걷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남당항 분수공원에서 출발 5km를 왕복하는 행사인데, 반려견과 함께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참가자에게는 기념품까지 준다고 한다.

 길은 자연스레 남당항 수산시장으로 이어진다.

 상가는 횟집 일색이다. 활어회에 해물탕, 칼국수 등 메뉴도 다양하지만 새조개를 팔지 않는 집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하긴 새조개 축제까지 열리는 곳이니 어련하겠는가. 축제 때는 살이 통통하고 맛이 좋기로 이름난 천수만 새조개를 맛보러 전국 각지에서 미식가들이 몰려온단다.

 상가 앞 조형물.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상인 두엇이 담소를 나누다가 뭐처럼 생겼냐며 물어온다. ‘꽃게 발?’ ! 하며 도리질을 하는 그녀. 그리고는 남당항을 유명하게 만든 게 새조개 축제였다고 알려준다. 맞다. ‘남당항은 겨울 새조개 고장의 대명사로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10분 거리에 있는 죽도로 들어가는 여객선 선착장. 남당항에서 죽도까지는 40인승 홍주호가 하루 5회 왕복한다. ·일요일과 공휴일엔 오전 10시 한 차례 추가 운항하고, 죽도에서 나오는 마지막 배는 오후 5시다.

 11 : 43. 수산시장 뒤(이정표 : 종점까지 6.7km)에 이르면 남당항 구경은 끝난다. 활처럼 바다로 휘어나간 방파제 입구이기도 한데, 서해랑길은 또 다시 바닷가를 따라 북진한다. 고운 모래가 깔려있는 해안은 웬만한 해수욕장은 저리가라다.

 홍성에는 해수욕장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4년 전쯤 거친 돌부리만 가득했던 저곳에 많은 모래를 쏟아 부어 인공해변을 만들었단다. 모험이라 할 수 있는데 저렇게 모래가 유실되지 않고 남아있으니 성공한 셈이다. 오히려 바닷물이 드나든 자국까지 부드럽게 나있는 게 천연의 모래사장이 전혀 부럽지 않게 됐다.

 11 : 53. ’남당 노을전망대이다. 바다로 휘어진 길모퉁이에서 딱 그 모양대로 곡선을 그리며 돌출된 해상 전망대다. 금빛 모래사장 위로 붉은색 다리를 놓고 그 끄트머리에 전망대를 들어앉혔는데, 해질 무렵이면 천수만 바다와 물기 촉촉한 갯벌까지 한꺼번에 붉은 기운에 휩싸인다고 했다.

 옆에서 본 노을전망대. 길이 102m에 높이가 13m나 되는 다리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한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 있어 걸을라치면 마치 하늘과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바다 품은 작은 섬 그러나 천지가 선경인 섬, 죽도.  죽도 죽도록 사랑하란다. 맞다. 내가 기억하는 죽도는 사랑받기에 충분한 섬이었다. 참고로 죽도는 홍성군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일한 섬이다. 천수만(淺水灣)의 고요한 물결 위에 떠있 듯 자리한 본섬을 11개의 꼬맹이 섬들이 호위하는 모양새인데 그 자태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덕분에 낭만과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 다른 기억을 소환해보자. 죽도는 눈을 들이대는 곳마다 세외선경이 펼쳐졌었다. 꾸며놓은 솜씨도 최고였다. 그중에서도 옹팡섬·동바지·담깨비 등의 조망대에서 만난 캐릭터들은 백미였다. 최영·한용운·김좌진 등 홍성이 낳은 인물들을 모셨다. 그중에서도 담깨비조망대에서 만난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본군을 대파했던 청산리대첩의 주역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군이 아닌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나라보다 이념을 더 중요시하는 공산주의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확실한 이유일 것이다.

 전망대를 빠져나와 다시 북진한다. 어느 기자는 이 구간을 임해관광도로로 적고 있었다. 그래선지 뷰가 좋은 카페나 음식점이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띈다. 이 구간 어디서나 천수만 바다와 그 너머 안면도가 눈에 쏙 들어오기에 가능할 것이다.

 12 : 06. 눈의 호사를 누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어사항(於沙港)’에 이른다. 천수만에 기대어 살아가는 전형적인 어촌이다. 앞에는 물고기가 많은 천수만이 있고, 주변 모래밭이 넓어 어사라는 명칭이 생겼단다.

 어사항 초입에서 만난 카페, 젊은이들로 붐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화려하게 치장된 여느 카페들과는 달리 단순하면서도 넓은 창으로 노을을 즐길 수 있도록 꾸몄다. 더 특이한 것은 최고의 로큰롤 앨범으로 꼽히는 비틀스의 8집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상호로 내건 것이다.

 밖에는 비틀즈의 11번째이자 마지막 음반인 ‘Abbey road’를 사진으로 제작 게시해 놓았다. 비틀즈의 음악 세계로 들어서는 가장 탁월한 시작점이 되어준 마지막 앨범으로 평가받는 앨범이다.

 12 : 09  12 : 18. ‘어사항은 인근 남당항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다. 하지만 이곳 또한 대하집산지다. 새조개도 흔하게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온통 칠게만 들어왔고, 그걸 튀김으로 부탁해서 챙겨왔다. 도반 한 분이 연태 고량주를 병째로 주겠다는데, 이만한 안주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후부터는 홍성스카이타워를 전면에 두고 간다.

 12 : 22 - 12 : 51. ‘어사리 노을공원’. 어사항 근처의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공원으로 산책로와 정자, 전망대, 광장 및 운동시설을 갖추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까 어사항에서 구입한 칠게 튀김에 반주를 곁들일 수 있는 좋은 쉼터가 되어주었다.

 노을공원의 하이라이트는 두 남녀가 행복한 모습으로 소중한 약속을 하는 모습을 담은 조형물(행복한 시간)이다. ’투조기법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낮에는 푸른 하늘빛을 담고 저녁에는 노을로 붉게 물드는 남녀의 얼굴을 보여준단다. 연인들이 바다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하늘빛을 담은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포토존도 만들어놓았다.

 남당항의 노을전망대보다 낮기는 하지만 이곳에도 노을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전망대 끝에 또 하나의 대를 세워 시야를 넓혔다. 천혜의 자원인 천수만 노을을 조금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전망대답게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천수만과 그 건너 안면도가 은밀한 속살까지 내보여준다.

 진행방향에는 홍성스카이타워가 놓여있다. 그 뒤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궁리항일 것이다.

 홍성군의 관광안내판은 ‘12을 꼽는다. 거기에 5(한우··새우젓·친환경농산물·한돈) 3(한우구이·대하구이·새조개 샤브샤브)를 추가하고 있었다.

 12 : 55. 다시 길을 나선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하나의 횟집타운이 조성되어 있었다. 생선을 공급해줄 포구도 없는데 말이다. 유난히도 해안선이 짧은 홍성의 특징이지 싶다. 실제 홍성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남당항을 얘기하면 금방 거기가 홍성이었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정도로 바다를 접한 면이 짧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홍성의 해변은 북쪽 궁리항에서 남쪽 홍성방조제까지 약 10km에 불과하다.

 이곳은 저녁노을의 명소. 먹거리에 눈요기를 보태라는 듯, 바닷가에 테라스 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식탁까지 배치했다.

 13 : 00. ’어사교(이정표 : 종점까지 4.1km)‘를 건넌다. 어사지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하천을 건너는 다리이다. 어사리를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 다리를 기점으로 거차리에 바톤을 넘겨준다.

 저것은 현대식 독살? ‘독살은 해변에 돌담을 쌓아 들물 때 들어온 물고기를 썰물 때 잡는 원시어로 방법이다. 일종의 돌 그물인 셈이다. 그런데 요즘은 부표를 매단 그물이 독담을 대신하는 모양이다.

 서해랑길은 이제 남당항로를 따라간다. 2차선의 도로변을 따라 자전거길이 잘 나있다.

 ! ‘화살나무도 열매를 맺는가 보다. 난생 처음 마주한 상황이니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연새골 선착장이 있는 이곳은 400m쯤 되는 해안선을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상점이나 펜션이 일절 없는 조용한 해변공원이다. 그러니 삭막한 도로변을 떠나 잠시지만 숲길을 걸어보자.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멋진 풍차가 반긴다. 근처 숲에는 원두막도 들어서 있다. 가족단위의 피크닉을 즐기기에 딱 좋은 장소로 하겠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조금 전 지나온 어사리노을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오른편에는 천수만 놓여있다.

 ‘13 : 13. 연새골선착장 진입로를 이용해 남당항로로 다시 올라왔다. 150m쯤 더 걸으면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 나타나나,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조금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 펼쳐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민들에게 갯벌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그러니 그 일터로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어야만 한다.

 13 : 25. 그렇게 잠시 걸으면 속동해양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2.5km)’이 얼굴을 내민다. ! 오다가 만난 두리팜이란 건물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두리+농장?, 부부가 두 자녀와 함께 농산물을 길러, 중간 유통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농장이라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속동마을에서 만났으니 응당 속동 선착장이겠지?

 서해랑길은 이제 속동해안공원의 산책로를 따라간다. 500m쯤 되는 바닷가를 따라 좁고 길게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이즈음 모섬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바닷물이 빠지면서 육지와 연결되어있다.

 13 : 39. 길은 상황교 아래 나무다리를 지나 홍성스카이타워로 향한다. 옛 속동전망대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어진 65m 높이의 타워는 기세도 당당하다. 올해 5월에 문을 열었는데도 이미 홍성의 랜드 마크로 자리를 잡았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면 죽도부터 멀리 안면도까지 천수만의 풍경이 두 눈에 와락 안겨 온다. 하지만 아래층에 있다는 실내전망대는 들러보지 못했다. 투명 강화유리가 깔린 스카이워크가 있어, 아드레날린이 확 솟구치는 아찔한 스릴을 즐길 수도 있다는데 말이다.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도가 발아래 놓여있는가 하면, 호수를 닮은 천수만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일렬로 늘어선 것처럼 보였던 죽도와 이에 딸린 섬들이 앞뒤로 입체감을 드러낸다. 천수만 너머로는 남북으로 길쭉하게 태안반도가 뻗어 있다. 높이만 살짝 바뀌었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풍광이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궁리항 쪽의 해안선이 눈에 들어온다. 홍성의 해안은 궁리항에서 홍성방조제까지 이어진다. 관광지로 제법 알려진 남당항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소박한 갯마을들이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바다와 육지가 조화를 이루는 해넘이를 보여준다나?

 타워에서 내려오니 서해랑길 쉼터가 눈에 띈다. 홍성군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코리아둘레길 쉼터운영 및 지역관광자원 연계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선정됐다더니 그 일환으로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어반스케치 트래킹 체험인 나만의 노을 남기기’, ‘남당플로깅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한다고 했다.

 13 : 48. 서해랑길은 이제 남당항로를 따라간다. 하지만 우린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르기로 했다. , 아니 가슴에 담을만한 구경거리라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13 : 50. 꼬맹이 무인도인 모섬은 데크 로드로 연결되고 있었다. 간월암이 바라보이는 섬의 꼭대기까지 산책이 가능하단다. 하지만 간식을 먹느라 여유시간을 다 써버린 탓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13 : 55. ‘모도 앞에서 방향을 튼 길은 남당항로까지 다시 데려다준다.

 이 구간에도 해안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캠크닉(캠핑과 피크닉의 합성어) 성지로 알려지는 곳이다. 그래선지 텐트는 물론이고 캠핑카도 여럿 눈에 띄었다. 간이 캠핑 테이블과 의자를 펴고 노을을 감상하려는 이들일 것이다.

 잠시 후, 서해랑길은 해안도로를 벗어나 바닷가로 간다. 해안선을 따라 축대를 쌓고 산책로를 내놓았다.

 궁리항의 끄트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저 산봉우리는 풍섬이라고 했다. 개발 바람을 맞아 이미 육지가 되어버렸지만.

 14 : 17. ‘궁리항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한적한 어촌 마을인 궁리포구는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이 평화롭다. 기다란 방파제로 연결된 선착장에는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싣고 온 고깃배가 수시로 들어온다. 하나 더. 궁리포구에도 새로운 명소가 생겼다. 바다 위에 놀궁리(’궁리항에서 놀자?) 해상파크를 만들어 색다른 낙조를 만날 수 있도록 했다.

 궁리어판장은 낚시질하는 사람들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머리에 얹고 있었다. 이곳 궁리포구가 가족단위 낚시터로 그만이라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서해랑길(서산 64코스) 안내도는 보령해양경찰서 궁리파출소의 뒤쪽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3.33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안동선비순례길 8코스(마의태자길)

 

여행일 : ‘24. 11. 16()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도산온천 입구퇴계태실(왕복)용수사용두산소정마을 경로당수운정(거리/시간 : 10.6km, 실제는 12.05km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도산온천 입구(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안동방면)를 타고 27km쯤 내려온다. 지곡교차로에서 928번 지방도(녹전방면)로 옮겨 14km쯤 들어오면 도산온천 입구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신라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를 코스 브랜드로 삼았다. 신라가 망하자 태자였던 김일이 추종자들과 함께 부흥운동을 일으킨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의태자를 떠올릴 수 있는 유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함께 걸었던 도반(道伴) 마의태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그나마 이곳은 종점인 수운정 근처에서 태자리 태자사라는 지명을 찾아볼 수 있다나?

 8코스(마의태자길) 안내판은 이정표(수운정 7.8km/ 국학진흥원 10.6km)와 함께 온천교 옆 삼거리(도산온천 입구)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이곳은 7코스(산림문학길)의 시점이기도 하다. 영지산(433.3m)을 거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간다. 반면에 8코스는 용두산(664.6m)을 거처 수운정으로 간다.

 11 : 12. 탐방로는 용수길을 따라 북진한다. 하지만 난 온천로(928번 지방도)’를 따라 동진한다. 길을 나서기 전 퇴계태실부터 먼저 들러보기 위해서다.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인데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11 : 14. 잠시 후 만난 웅부중학교는 기숙형 공립학교이다.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스러져가는 인근 지역의 초미니 중학교들을 통·폐합했다고 한다.

 11 : 16. 웅부중학교 앞(이정표 : 노송정 종택 300m)에서 왼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선다. 그러자 양지바른 산자락 아래 웅크리고 있는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眞城李氏 溫惠派 宗宅, 국가문화재 제295)’이 거대한 등치를 드러낸다. ‘노송정 종택(老松亭 宗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노송정은 이 집을 지은 퇴계 이황의 조부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의 호라고 한다.

 종택의 대문인 성림문(聖臨門)‘. 퇴계 선생의 어머니인 춘천 박씨가 임신 중에 꿈을 꾸었는데, 공자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대문으로 들어서더란다. 이 사연을 들은 퇴계의 수제자 학봉 김성일이 성림문이라 명명했단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노송정(老松亭)‘이 있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지었는데, 계유정난 때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 온혜에 터를 잡았단다. 당시 집 주위에 오래된 소나무가 많아 노송정을 당호와 아호로 삼았다나? 하나 더. 편액은 석봉 한호가 썼단다.

 노송정 왼쪽,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있는 본채에는 온천정사(溫泉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곳은 퇴계 이황뿐만 아니라 퇴계의 숙부이자 엄한 스승이었던 송재 이우(松齋 李堣)’, 퇴계의 형님 온계 이해(溫溪 李瀣)‘ 등이 태어나 분가할 때까지 살며 가학을 이루던 생가다. 1454(단종2)에 지어진 550년이 넘는 고택으로 퇴계 선생과 관련된 수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다.

 1501 11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1571)‘이 저 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자라 조선 성리학의 거두가 되면서 퇴계 태실(退溪 胎室)‘이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종택 마당에는 이계양이 아들인 식(, 퇴계의 부친)과 우()에게 보낸 권학시(勸學詩)와 퇴계가 손자인 안도(安道)에 보낸 권학시가 적힌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이런 가풍이 있었기에 후대에 현달한 인물과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그밖에도 종택을 건립한 이계양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사당 등 대여섯 채의 부속 건물이 더 있었다. ! 종택에서 하룻밤 머무는 숙박체험도 가능하다고 했다.

 11 : 24. 온혜초등학교 쪽으로 200m 남짓 더 들어가면 온계종택(溫溪宗宅)‘을 만날 수 있다.

 온계종택은 퇴계의 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가 노송정에서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이해의 12대손 이인화(李仁和, 1858-1929가 의병 활동을 주도했고, 이곳이 그 거점이었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사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태웠다. 지금의 종택은 후손들이 뜻을 모아 불타기 전 선조들이 그린 설계도를 바탕으로 2011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안채는 후손들의 안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기웃거리는 것조차 삼가기로 했다. 대신 별채로 여겨지는 삼백당(三栢堂)‘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온계선생의 손자 이유도의 호이기도 한데, 잣나무 세 그루처럼 선비의 의리를 지키라는 가르침을 담았단다.

 온계종택 뒤에는 요산정(樂山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었는지는 몰라도 이름처럼 소나무를 배경삼아 들어선 아름다운 정자다.

 집은 비록 옛것이 아니지만, 수령 500년 된 밤나무가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다. 나무 둘레가 5.5m나 된다니 성인 3명이 양팔을 벌려 맞잡아야 하는 거목이다. 하나 더. 저 밤나무는 아직도 밤이 열린다고 했다. 매년 300~500개의 밤알이 수확되는데, 단단해서 벌레가 먹지 않는 토종이라나?

 선비순례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하지만 안동시에서 배포한 지도나 각종 안내문 등 그 어디서도 선비순례길이 이곳을 지나간다는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11 : 37.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용수길을 따라 북진한다. 도로표지판이 운곡리 방향임을 알려준다.

 도 안동의 특산물 중 하나인 모양이다. 광활한 무밭 풍경으로 점철되던 5코스나 6코스만큼은 아니어도 길가 농경지가 온통 무밭이다. 맞다. 이곳 도산면은 무청 시래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단무지용 무라고는 하지만 시래기를 주로 하고, 무 뿌리는 거의 거둬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밭에서는 무는 무대로 무청은 무청대로 구분해서 거둬들이고 있었다.

 수확은 파종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저 농부는 대체 무엇을 심고 있을까. 그게 궁금해 물어보니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만 되돌아올 따름이다. 기초 대화만 가능한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문득 외국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없으면 농사도 지을 수 없다던 어느 농부의 넋두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11 : 53. 풍천임씨(豊川任氏) 문중의 빗돌이 눈길을 끈다. 부근에 용담(龍潭) 임흘(任屹, 1557~1620) 취규정(翠虬亭)’이 있다는 게 아닌가. 임흘은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활약했다. 전쟁이 끝나고 공을 인정받아 동몽교관에 제수되기도 했지만 향리로 돌아와 자연을 벗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정자는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다녀오지는 않았다. 그저 퇴계 집안과 인연이 있어 그리도 청백하게 살았으려니 하며 지나치기로 했다. 그의 부인이 퇴계의 숙부이자 스승인 이우(李堣)의 증손녀 진성이씨(眞城李氏)였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용두산을 바라보며 간다. 용두산에서 발원해 도산면소재지인 온혜리에서 토계천에 합류되는 온혜천의 골짜기를 따라 도로(용수길)가 나있다.

 12 : 04. ‘용문정(龍門亭)’이란다.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까지 세워놓았다.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할 정도로 존귀한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이와 관련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개울에 놓인 용문교(龍門橋)’는 옛 멋까지 폴폴 풍긴다. 꽤 오래된 다리를 복원해 놓은 것 같은데, 이 역시 내력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뭔가를 조성(또는 복원)하려면, 안내판 하나쯤은 예의가 아닐까?

 잠시 후 모퉁이를 돌아서자 용두산이 그 전모를 드러낸다. 무척 높다. 저걸 어떻게 올라가지?

 12 : 08. 용수사 버스정류장(이정표 : 수운정 8.3km/ 도산온천 2.3km). 삼거리인데 왼쪽은 이름(구레실황정길)대로 구레실 황정마을로 연결된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용수길을 따른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운곡리 경로당이다. 운곡리(雲谷里)는 지대가 높아(고도계는 244m를 찍고 있었다), 용두산과 국망봉 사이 골짜기에 항상 구름이 서려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우리말로는 구름실·구래실·구레실로 불린다.

 경로당은 미소쉼터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다. 행복에 겨운 미소가 넘치는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도 지루하다 싶으면 밖으로 나와 쉬라는 듯, 개울가에 야외 쉼터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 개울도 예산을 들여 물고기가 헤엄치는 도랑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나?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농·어촌에 대한 정부의 배려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따뜻해졌다.

 12 : 14. 용수사 일주문(이정표 : 수운정 7.8km/ 도산온천 2.8km). 정자와 화장실까지 갖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용수사의 부도전도 이곳에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선비순례길과 용수사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기 때문이다.

 퇴계예던길 안내도도 보인다. 아까 온계종택에서 봤던 안동선비순례길 안내도와 품은 내용이 얼추 비슷한데도 다른 제목을 달았다. 이왕에 안동선비순례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알렸으니 탐방로에 설치된 시설물들도 이름을 통일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옛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면 새로운 이름은 이쯤에서 없애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선비순례길 8코스는 일부 구간이 퇴계 귀향길과 겹친다. 안동 출신인 퇴계는 선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1568년 조정이 거듭해서 부르자 고향에서 상경했다. 그는 대제학으로 어린 임금을 보좌했으나, 낙향해 학문을 수양하며 만년을 보내고자 했다. 이에 퇴계는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한 끝에 1569 3 4일 일시적 귀향 허락을 받아냈다. 다음날 바로 길을 나선 퇴계는 임금의 배려로 충주까지 관선(官船)을 이용했고, 이후는 말을 타고 죽령을 넘어 도산서원에 이른다. 그 길이 지금의 퇴계 귀향길이다.

 탐방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지만 용수사(龍壽寺)’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대한불교조계종에 속한 용수사는 고려 의종 원년(1146) 봉화의 각화사(覺華寺) 주지 성원(誠源)이 암자를 지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1164년 왕명으로 용수사란 사액(賜額)을 받아 화엄종단의 독립사찰이 되었다. 그러다 1895년 을미의병 와중에 전소된 것을 원행스님과 불자들이 힘을 합쳐 1994년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했단다.

 수월루(水月樓)’로 올라가기 전 광장부터 살펴보는 게 어떨까 싶다. ‘육바라밀길을 꾸며놓았으니 말이다. 팻말에 적혀있는 여섯 가지 덕목(보시·인욕·지계·정진·선정·지혜)을 의미하는 코스를 걷다가 열반에라도 들지 누가 알겠는가.

 절간의 구조는 무척 단출했다. 산신각과 용왕전 등 꼬맹이 전각 두엇과 대웅전과 두 채의 요사에 공양간이 전부다. 하지만 대웅전이나 요사, 공양간은 총림에 있는 전각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인심도 절간만큼이나 컸다. 주지스님이 점심 공양을 하고 가라며 한사코 붙잡는 것이다. 차량 출발시간이 정해져 있다며 사양했지만 절간, 아니 안동에 대한 이미지까지 좋아지게 만든 기분 좋은 상황이었다.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 이곳은 어린 퇴계가 학문을 연마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은 퇴계는 7세부터 용수사에서 공부했다. 조선시대는 유학을 숭상하는 분위기였으나 퇴계는 유교와 불교에 칸막이를 친 시대적 제약을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절간이 너무 커진 탓인지 당시의 면학 분위기는 느낄 수가 없었다.

 12 : 32. 일주문으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들머리는 일주문에서 용수사 쪽으로 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열린다. 초입에 용두산 등산로 이정표(정상 1.9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하나 더. 이 코스는 선비순례길이 아닌 일반 등산로라는 것도 알아두자.

 붉은색 선이 우리가 오른 코스다. 그 왼쪽에 있는 코스가 선비순례길이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이정표(용두산 정상 1.8km/ 용수사 02km/ 등산로 입구 0.2km). 산길은 이렇듯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가파른 곳에는 계단이 놓여있고, 갈림길이라도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두었다.

 산길을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지만 산길은 산길이다. 거기다 오랜만의 산행, 그것도 전보다 몸이 불은 탓인지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숨이 턱에 차오른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가 심신을 맑게 해준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소나무가 많으니 송이버섯이 날 것은 어쩌면 당연, 그래선지 곳곳에 입산금지 현수막과 표지판이 붙어있다.

 12 : 46. 지자체는 나처럼 힘들어하는 걷기 여행자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중간 중간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이 가팔라졌다. 아니 버거울 정도로 가파르다는 것이 더 옳겠다. 나처럼 배가 나온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구간이 될 수도 있겠다.

 13 : 02. 이번 쉼터에는 등산로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등산로 입구에서 이곳까지는 1.2km, 정상까지는 아직도 0.8km를 더 올라가야한단다.

 임산금지 경고판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금줄까지 쳐놓은 곳도 수시로 나타난다. 하긴 송이 채취꾼들은 가을 한 철을 벌어서 일 년을 먹고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길은 전형적인 육산의 특징을 보여준다. 울창한 숲 때문에 조망이 트이지 않는데다 눈요깃거리도 없다. 이런 길은 한시라도 빨리 정상에 오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오르고 또 올라도 정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기에 찾아갔더니, 행복은 그 다음 산 너머에 있다더라고 했던가? 정상이려니 하고 올라서면 또 다른 봉우리가 어서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13 : 16.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임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정표(용두산 정상 360m/ 녹전,매정리/ 용수사 1.54km)가 정상이 코앞이라고 알려준다.

 13 : 20. 또 한 번의 오름짓 끝에 능선에 올라선다. ‘굴티고개라는 지명이 적힌 이정표(용두산 240m/ 굴티고개 3.8km)가 우리가 지금 문수지맥과 만났음을 알려준다. ‘만리산(萬里山)’에서 뻗어온 문수지맥은 용두산을 거쳐 굴티고개로 간다.

 13 : 28  13 : 41.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에 정상에 올라선다.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칡넝쿨과 억새 등이 주변에 쌓여있는 걸 보면 한두 달 전에 정비를 했던 모양이다.

 용두산(龍頭山, 664.6m)’은 산의 모양이 용의 머리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머리 두()’ 대신 머리 수()’자를 쓰기도 하며, 용수사(龍壽寺)에서 이름을 따와 용수산(龍壽山)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 정상석 뒷면에는 안동의 정기 용두산에서 발원하다고 적혀 있었다.

 정상에는 퇴계예던길(8코스) 안내도 말고도 문수지맥트레킹길(6구간) 안내도와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제단이 놓여있는 걸 보면 기우제도 지내는 모양이다. 참고로 문수지맥(文殊枝脈)’은 백두대간 옥돌봉(1,244m) 서남쪽 280m 지점에서 분기, 서남진하며 문수산·용두산·학가산·보문산 등을 일구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대하는 도상거리 114.5 km의 산줄기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청량산 말고는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학가산과 일월산, 국망봉 등도 조망된다고 했다.

 13 : 41.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하산길은 시작부터 거칠었다. 칡넝쿨이 허리춤까지 차올라 여름철에는 진행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길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곳곳에 매달려있는 가이드리본이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오늘은 청마산악회 허총무님 것도 눈에 띈다. 퇴계태실에 다녀오느라 20분 정도 늦게 출발했더니 나보다 한참이나 먼저 이곳을 지나간 모양이다.

 산길은 엄청나게 가팔랐다. 이런 곳에서는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집사람은 끝가지 스틱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 결과 손목 인대를 상한 그녀는 병원진료를 한참이나 받아야만 했다.

 13 : 51. 그렇게 길 아닌 듯 길이었던 곳에서 한참이나 고생한 뒤에야 제대로 된 등산로를 만날 수 있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아까 정상에서 문수지맥을 잠시 따라가다 어느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갈려나왔더라면 수월했지 않나 싶다.

 이후로는 별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아까 산을 올라올 때처럼 등산로 정비가 잘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정표를 세우는 등 기초적인 정비는 해 놓았다.

 그렇다고 가파른 경사까지 없앨 수야 있겠는가. 거기다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무릎 관절이 약한 집사람은 죽을 맛인 모양이다.

 길이 조금 수월해진 뒤에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주변 활엽수들이 이미 헐벗어버렸다. 제대로 된 단풍을 보지도 못했는데 잎은 이미 져버린 것이다. 올 가을을 단풍 없는 단풍철이라며 넋두리하던 어느 등산객의 인터뷰가 문득 떠오른다.

 하산길이라고 해서 계속 내려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이렇게 올라가는 구간도 나타난다. 짧고 완만한 오르막에 길고 가파른 내리막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14 : 12. 그렇게 얼마를 내려갔을까 산자락이 앙상한 고사목들로 가득하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귀가해 확인해보니 2020 3 25일 이곳(도산면 운곡리 일대)에서 산불이 발생했다는 기사가 떠 있었다.

 산불은 백해무익하다고 했다. 아니 좋은 점도 있기는 하다. 그 여파로 숲이 헐거워지면서 조망이 트이기도 하니 말이다.

 경각심이라도 불러일으키려는 것일까? 화마로 쓰러진 나무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를 피해 에도는 것은 기본, 아래를 지나거나 심할 때는 나무를 타고 넘기도 한다.

 산불 구간만 지나면 길은 수월해진다. 경사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납던 기세를 확 떨어뜨린다.

 14 : 26. 길이 편해지니 심신도 편해진 모양이다.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잠시 내려서자 이정표(수운정 2.9km/ 용두산 1.1km)가 이제 그만 능선에서 탈출하란다.

 길이 더 완만해졌다. 널찍한 게 영락없는 임도다. 지자체에서 신경을 써가며 정비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조금 전 탈출지점에는 벤치까지 놓여있었다.

 14 : 30. 잠시 후, 길이 잡초와 잡목으로 뒤덮이는가 싶더니 이내 임도로 내려선다. 아니 용수골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물이 흔한 골짜기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날머리(임도와 접한)에는 이정표(수운정 2.2km/ 용두산 1.8km)가 세워져 있었다. 역방향으로 트레킹을 하는 경우 꼭 필요한 시설이라 하겠다. 어디로 들어서야 할지를 모를 정도로 웃자란 잡초가 길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라간다. 아니 주위가 온통 사과밭이니 농로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사방이 온통 사과밭이다. 맞다. 안동사과는 전국 최대의 생산면적과 생산량을 자랑한다고 했다. 거기다 청정지역에서 비옥한 토질과 밤낮의 일교차가 큰 지리적 여건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자연 그대로의 맛과 신선한 향이 그윽하고 당도도 무척 높단다.

 열매를 대롱대롱 매달고 있는 사과밭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유럽의 농촌지역을 여행하면서 고급 와인을 얻기 위해 서리가 내릴 때까지 포도 수확을 늦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안동사과도 뭔가를 위해 일부러 수확을 늦추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안동사과에는 애이플이란 브랜드가 있다. 안동사과 생산량의 1%에만 붙여주는 최고급 사과브랜드이다.

 빨갛게 영근 사과가 군침을 흘리게 만든다. 하긴 한국소비자만족지수 ·특산물 공동브랜드(사과)’ 1위를 8년간이나 지킨바 있는 귀하신 몸이니 어련하겠는가.

 14 : 48. 작은 마을을 지나가기도 한다. 길의 이름이 소정리길인 걸로 보아 소정마을이 아닐까 싶다. 법정 동리인 태자리(太子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다. 사과재배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15 : 00. 차도인 태자로와 만나는 곳에는 소정마을 경로당이 들어서 있었다.

 이후부터는 태자로를 따라간다. 35번 국도상의 (태자리)버스정류장에서 다랫재까지 이어지는 군도(郡道), 행정구역인 태자리(太子里)’에서 이름을 따왔지 않나 싶다. 태자리라는 지명은 또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갈 때 잠시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됐을 거고 말이다. 민초(民草)들은 자기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구전(口傳)으로 1000년 뒤 후손에게 전한다. 지명과 전설로 말이다. 덕분에 역사책에 없는 마의태자 발자국은 이곳 안동에도 찍혀있다. ‘국망봉에서 경주를 돌아봤는가 하면, ‘태자리에서는 잠시 머물기도 했다.

 15 : 08. ‘수운정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50분을 걸었다. 앱이 12.05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아니 높이가 664.6m나 되는 용두산을 오롯이 넘은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빠르게 걸은 셈이다.

 수운정(水雲亭)’은 퇴계 이황의 제자 매헌(梅軒) 금보(琴輔, 1521-1586) 60세 때 지은 건물이다. 물과 구름을 벗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한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참고로 금보는 1546(명종 1)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낙향하여 성리학에 뜻을 두고 퇴계에게 수학했다. 글씨에 뛰어나 이숙량(李叔樑), 오수영(吳守盈)과 더불어 삼절이라 불렸으며, 퇴계묘비(退溪墓碑도산신판(陶山神版) 등을 썼다.

 정자는 정면 4, 측면 1.5칸 규모의 일자형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는데다 담장까지 높아 자세한 내부구조는 확인할 수 없었다.

 수운정은 8코스(마의태자길)의 종점이자 9코스(서도길)의 시점이다. 이와 관련된 시설(안내판 및 이정표)들은 수운정 앞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다.

 수운정에서 시작되는 9코스(서도길)는 가송마을의 고산정 입구까지 7.4km를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간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얘깃거리나 가슴에 담을만한 풍광을 만나지 못한다. 그저 브랜드처럼 글씨를 공부하러 가는 선비의 마음으로 걸어야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걷는 걸 포기하고 산악회 황사장님께 부탁해 버스를 이용해 종점으로 곧장 갔다.

 점심상은 가송리 마을회관 앞 공터에 마련되어 있었다. 4코스 때도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고, 5코스는 이 근처에서 걷기 시작했다. 둘레길 도반들이 종점인 고산정 입구까지 다녀오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마을회관 건너편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고산정(孤山亭)과 가송협(佳松峽)을 가장 확실히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전망대에 서자 눈앞에 세외도원이 펼쳐진다. 어느 유명화가가 저리도 예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창조주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내 느낌은 지난번 5코스 때 적었으니 이번에는 다른 분의 느낌을 잠시 빌려보자 <날아갈 듯 멋들어진 바위 절벽을 양옆에 끼고 맑게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고, 물 건너 바위 절벽 옆 물가에 멋들어진 소나무를 벗하여 앉아 있는 것이 고산정이다. 흐르는 물은 맑고, 물가 바위 절벽은 날아가는 듯하고, 정자가 자리한 곳은 아늑하다.>

 퇴계는 고산정의 수려한 풍경을 보고 그림 속(畵圖中)’으로 들어간다고 읊었다. 그런가하면 나귀를 타고 미천을 건너며 맑고 맑은 여울(淸淸灘)과 높고 높은 산(高高山)’이 끊임없이 사라졌다 다시 보이네(隱復見)’라며 지형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풍경을 표현했다. 산이 굽이치는 형세에 따라 물이 S자로 굽이치는 저런 아름다운 풍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표현이 아닐까 싶다.

 

서해랑길 62코스(충청수영성  천북굴단지)

 

여 행 일 : ‘24. 11. 9()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천북면 일원

여행코스 : 충청수영성보령방조제하만저수지사호회전교차로사기점저수지사호리 노두길천북굴단지(거리/시간 : 15.9km, 실제는 15.28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2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 수월한 코스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충청수영성 주차장(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서해안고속도로 광천 IC에서 내려와 광천읍까지 온다. 단아래사거리에서 21번 국도(보령방면으로 8km), 청소면의용소방대 앞에서 610번 지방도(도미항로)로 옮겨 7km쯤 들어오면 충청수영성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보령 62코스) 안내도는 충청수영성의 서문 입구에 세워져 있다.

 오천항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천북굴단지까지 가는 15.9km짜리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충청수영성(‘보령9경 더하기 7)과 사호리해안의 노두길, 천북굴단지 등이 꼽힌다. 하나 더, 이 구간은 물때에 맞춰 답사해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바닷물이 차오르면 해식애를 낀 노두길을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11 : 30. 충청수영성의 서문(西門)’으로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조선시대 서해 해군사령부였던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대흥산 상사봉에서 북서쪽으로 달리는 능선 말단부에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충청수영의 규모는 군선 142, 수군 8414명에 이른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고종 33(1896)에 폐영(廢營)됐다.

 뒤돌아본 서문. 충청수영성에는 진남문(鎭南門만경문(萬頃門망화문(望華門한사문(漢舍門)  4곳의 성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서문인 망화문만 홍예문 형태로 남아 있다.

 성곽은 대흥산의 상사봉에서 북서쪽으로 달리는 능선 말단부에 축조됐다. 그러니 잠시지만 가파른 언덕을 오를 수밖에 없다.

 서문을 들어서자 진휼청(賑恤廳, 도 문화재자료 제412)이 맞는다. 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덕분에 대청·온돌방·툇마루·부엌 등으로 이루어진 내부구조는 고사하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마저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참고로 진휼청은 흉년이 들면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하던 곳이다. 수영이 폐쇄된 후 민가로 팔렸다가 1994년 다시 매입했다고 한다.

 충청수군의 군선과 수군들로 북적였을 오천항. 천혜의 입지 덕택에 오천항은 삼국시대부터 중국과의 교역항 역할을 맡아왔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런데 포구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어쩌면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임을 알리던 초입의 안내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면 다 돼!’를 외치던 그 생활밀착형 치정 로맨스에 나 역시 푹 빠져 있었으니까.

 영보정(永保亭)은 연산군 11(1504) 수사로 부임한 이량(李良)에 의해 세워졌다. ‘영원히 보전한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뜻(忠君憂國之意)’도 담고 있단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채팽윤(蔡彭胤, 1669-1731) 호서의 많은 산과 물 중에 영보정이 가장 뛰어나다고 극찬했을 정도라나? 충청수영성이 폐쇄되면서 함께 사라졌으나 2015년 복원을 마친 덕분에 그 아름다움을 실제 체감해 볼 수 있었다.

 천상누대 화중강산(天上樓臺 畵中江山)’라고 쓰인 편액이 눈길을 끈다. ‘천상의 누대에 오르니 그림 같은 강산이 펼쳐지는구나.’ 영보정에서의 조망을 이 여덟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편액의 자랑처럼 영보정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발아래로 광천천의 하구역이자 천수만 입구의 바다가 펼쳐진다. 충청수군의 군선들로 붐볐을 바다는 푸른 하늘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 바다는 지금 자그마한 어선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10 : 40. 영보정을 지나온 길은 충청수영성의 성벽으로 향한다. 이어서 성곽을 관통하고 있는 ‘610번 지방도(충청수영로)’를 횡단한다. 북문지(北門址)로 예상되는 지점인데, 충청수영성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이렇듯 성곽은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해 많이 훼손됐다. 그나마 성지(城址)나 그 주변 지형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던가 보다. 국가 문화재(사적 제501)로 지정된 걸 보면 말이다.

 도로를 건너자 장교청(將校廳, 사진)’ 내삼문(內三門)’이 맞는다. 객사(장교청) 운주헌(運籌軒, 도 문화재자료 제411)’은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폐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곳이다.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삼문(위 사진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건물)은 수군절제사가 집무하던 공해관(控海館)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 문이다.

 장교청 앞의 선정비들. 충청수영성은 충청도 수군 전체를 관리하던 성이다. 저 많은 빗돌들이 그 증거다. 참고로 충청수영성은 관할 해역이 북쪽 아산만에서 남쪽 금강 하구 장항만에 이르렀다.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흩어진 섬들이 250개나 된다.

 탐방로는 이제 성벽을 따라 간다. 성벽은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운 외축내탁(外築內托)의 축성술을 이용했다. 길은 그런 성벽 위로 나있다. 참고로 충청수영성은 1509(중종 4) 수군절도사 이장생이 서해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돌로 축성했다. 성벽은 길이가 1650m에 이른다.

 그렇다고 앞만 보고 걷지는 말자. 뒤돌아볼라치면 장교청과 영보정은 물론이고 성벽까지 충청수영성의 전모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충청수영성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과 백사 이항복도 영보정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했단다.

 탐방로는 산등성이를 따라간다. 성벽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 흔적, 아니 그마저도 웃자란 잡초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10 : 46. ‘만경문(萬頃門)’이 있던 동문지(東門址). 안내문은 동문이 성벽 사이에 누각을 짓는 개거식(開拒式)이라고 적었다. 성문 가까이의 성벽에 돌출시켜 만든 적대(敵臺)’도 있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터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10 : 49. 동문지에서 바닷가로 내려간다. 이어서 소성2리 경로당을 지났다싶으면 이내 610번 지방도(충청수영로)로 올라선다. 인도가 따로 없어 안전에 각별한 유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10 : 58. 보령방조제의 남단인 소성삼거리’.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오른편 산등성이에 충청수영 해안경관조망대가 있다는 것이다. 오천의 아름다움을 파노라마로 만끽할 수 있는 곳이라는데 다녀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하나 더. 직진하면 도미부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 정절사도 만나볼 수 있다. 이 역시 잠깐 다녀오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지만.

 서해랑길은 이제 홍보로(국도 40호선)’를 따라간다. 오천면과 천북면을 잇는 보령방조제의 제방 위로 동명의 차도가 나있다. 양옆에 인도를 따로 내놓았음은 물론이다. 이 구간에서의 자랑거리는 조망이다. 둑길을 걸으며 오천항과 충청수영성, 보령호의 풍경을 색다른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천북마리나에 정박된 요트들의 이국적인 풍경도 함께 눈에 담을 수 있다.

 이즈음 천수만에 어깨를 기댄 충청수영성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충청수영성은 안면도·원산도로 둘러싸인 천수만에서도 좁은 내만(內灣)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 하지만 앞바다의 수심이 깊은 데다 서해안의 심한 조수간만의 차이에도 다른 포구와는 달리 배가 드나드는 데 어려움이 없단다. 주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뒷동산의 자연 지형까지 감안하면 천혜의 해군 요새라 할 수 있다.

 이곳은 낙조 감상의 포인트이기도 한 모양이다. 포토존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안내판은 또 정절의 상징인 도미부인의 설화를 바탕으로 주변 경관을 연계시킨 도미부인 솔바람길이 지나간다는 것도 살짝 귀띔해준다.

 오른쪽에는 보령호가 있다. ‘보령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겼으니 당연한 지명이겠으나, 그 보령호가 광천천의 물길을 가로막은 내수면임을 감안하면 마땅치 않은 이름일 수도 있겠다. 하나 더. 호수 너머로 보이는 섬은 정절을 상징하는 도미부인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빙도(미인도)’. 도미부부가 태어난 곳으로, 백제 개루왕으로부터 수난을 당하기 전까지 살았다고 한다.

 11 : 09. 배수갑문. 길이 1,082m(높이 20.7m)의 보령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보령호의 담수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수문이다.

 11 : 16. 도로를 따라 5-6분쯤 걸었을까. 서해랑길 표식이 오른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가란다. 농로를 따라 들녘을 에둘러가는 구간인데, 속도를 올리기 딱 좋은 직선도로인데다 인도까지 없는 국도를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국도를 따르기로 했다. 오가는 차량들을 조심해서 걷기만 하면 되는데, 눈요깃거리도 그렇다고 특별한 이야깃거리도 없는 들녘을 일부러 에둘러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거기다 거리까지 1km 가깝게 단축할 수 있는데 뭘 망설이겠는가.

 예상대로 인도는 따로 없었다. 거기다 안전선이랄 수 있는 흰색 페인트 선의 바깥도 한 사람이 걸어가기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폭이 좁았다. 나를 믿고 따라오는 도반들에게 약간 미안할 정도로... 하지만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단풍나무가 그 미안함을 약간이나마 덜어주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하만3’, 이즈음 오른쪽으로 두룽개들이 펼쳐진다. 서해랑길은 저 들녘을 가로지르며 나있다.

 도로변에는 두만소류지라는 둠벙에 가까운 저수지도 있었다. 입질이 좋은지 강태공들 여럿이 세월을 낚고 있었다.

 11 : 36. ‘하만3리 노인정에 이른다. 옆에 있는 천북농협 벼 건조·저장시설의 규모가 무척 크다. 천북면 주민들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43. ‘동음마을 버스정류장 앞에서 서해랑길과 다시 만났다. 샛길(농로)이 국도를 가로지르는 간이 사거리인데, 이정표(종점 8.5km/ 시점 7.4km)는 왼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가란다.

 도로를 건너면 대궁골(하만4)’. 전형적인 시골 풍경과 마주친다. 민가 대여섯 채가 산자락에 기대듯 들어섰는데, 마을 앞으로 산골 치고는 제법 너른 들녘이 풍요롭게 펼쳐진다. 널찍한 들녘은 인심까지도 넉넉하게 만드나보다. 주민 한 분이 처음 본 나그네에게 요기나 하라며 삶은 밤을 한 움큼이나 주셨다.

 11 : 59. ‘하만4리 노인정 앞에서 하학로로 올라선다. 아까 걸어왔던 홍보로(국도 40호선)’가 하만교차로에서 가지를 쳐놓은 지선이다. 보령과 홍성을 잇는 홍보로는 천북굴단지로 가고, 갈려나온 하학로는 이곳 하만4리 대궁골과 사호3리 짓개마을을 거쳐 천수만으로 나간다.

 12 : 06. ‘하만 회전교차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맨삽지(학성리)’로 가는 길이 나뉘는 곳이다. 다리품만 조금 더 팔면 다녀올 수 있다는 몽중루 작가님의 조언에 귀가 솔깃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록암(고성)과 사도·추도·낭도(여수)에서 실컷 보았던 기억이 있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12 : 10 - 12 : 20. ‘사호1 버스정류장. 걷기 여행자들에게 쉼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리고 그 역할은 주민들의 참새 방앗간인 마을 정자가 대신해주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정자를 만나지 못한 경우에는 버스정류장에서 쉬어갈 수밖에 없다.

 사호교차로부터는 사호장은로를 따라간다.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 가을빛으로 가득한 농촌 마을들을 차례로 지나간다. 마을 앞. 추수가 끝난 들녘은 텅 비어있다. 아니 곤포사일리지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늦가을의 진풍경이라 하겠다.

 12 : 32. ‘사호축산(영농법인)’의 거대한 축사를 지나자 사기점저수지가 얼굴을 내민다. ‘사기점(사호1)’ 마을의 입구이기도 하다. ‘사기점(沙器店)’은 사기그릇을 굽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가마터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단다.

 12 : 42. 서해랑길은 사호3 버스정류장 앞에서 차도(사호장은로)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농로를 따라 천수만으로 간다. 들머리의 표지석이 사호3리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짓개로 들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바닷가에 가까워지자 주변 풍광이 확 바뀐다. 농경지였던 들녘이 어느새 대하양식장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 했던가? 오늘도 난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대하양식장의 바닥이 비닐로 코팅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물만 빼면 대하를 쓸어 담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효율적인 방법인가.

 12 : 48. 대하양식장을 기웃거리다 작은 방조제(싯개 들녘을 만든) 위로 올라선다. 이어서 바닷가를 따라 북진한다.

 둑에는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5km) 말고도 천북굴따라길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천북굴단지를 종점과 시점으로 각각 삼고 있으니 두 길이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천북 굴 따라 길은 장은리 천북 굴단지에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학성리 맨삽지까지 천북면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내놓은 길이 7.8km의 둘레길이다. 해식애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바닷가를 걸으며 굴을 길러내는 양식장을 가까이서 눈에 담을 수 있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걷기에 제격이다.

 12 : 54. 잠시 후, 나지막한 그러나 경사가 무척 가파른 산 하나가 앞을 떡하니 가로막는다. 길은 오른쪽으로 나있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바닷가 방향이다. 해안선을 따라 데크 로드를 내놓았다.

 이곳은 물때에 따라 진행방향을 달리해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출렁다리까지는 노두길을 걸어야 하는데 바닷물이 차오르면 통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초입에 우회로 안내 현수막을 설치하고 QR코드로 만조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 더. 간조 시각 전후로 2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걷기를 권한다. 바닷물은 생각보다 빠르게 차오르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산자락과 바다의 경계를 따라 다리를 놓듯 길은 내놓았다

 천수만 입구 쪽 풍경이다. 건너편 학성리(천북면) 해안 앞에 작은 섬 하나가 오롯이 떠있다. 공룡발자국화석이 별견되었다는 맨삽지일지도 모르겠다. 보령시에서 공룡 테마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3 : 01 : 그렇게 얼마를 걷자 작은 포구가 길손을 맞는다. ‘사호3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열호동(烈湖洞, 우리말로는 여르문이)’인데, 안면도와 마주하는 해안에 포구가 들어서 있다.

 여르문이 마을 앞에서 바닷가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노두길을 따라 북진한다. 갯마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어선지 바닷가를 따라 시멘트로 길을 내놓았다. 이곳은 그 유명한 천북 굴이 생산되는 곳이다. 주민들이 생산한 굴을 가득 실은 경운기들이 노두길을 따라 줄지어 나오는 풍경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본다.

 서해랑길은 이제 천수만의 해안사빈(海岸沙濱)을 따라간다. 같은 천수만인데도 앞서 오천항에서 보았던 바다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선박들이 오가는 푸른 바다 대신 검붉은 갯벌이 드넓게 펼쳐지는 것이다.

 갯벌을 나누어놓은 저 경계표시는 뭘 의미하는 것일까? 경지정리를 끝낸 농경지처럼 반듯하게 나누어놓았다. 갯벌도 구역에 따라 주인이 따로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각자의 구역에 돌과 자갈을 넣어 굴 생산을 하는 모양이고 말이다. 하나 더. ‘천북 굴은 줄에 매달아 기르는 남해안과는 다른 방식으로 굴을 기른다고 했다. 갯벌에 돌을 넣거나 나무를 꽂는 방식으로 굴을 양식한단다.

 길은 침식해안을 따라간다. 이때 전국의 유명 바닷가들에 비해 손색이 없는 풍광이 펼쳐진다. 인근인 서산에도 황금산과 그 아랫자락을 에돌아가는 빼어난 풍광의 해안이 있다. 해식으로 인해 만들어진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놀고 있는 곳, 그리고 파도와 몽돌의 절묘한 하모니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한 기경을 이곳에서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해식애(海蝕崖)와 해식동, 파식대(波蝕臺), 간석지 등의 해안 지형이 번갈아가며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진풍경을 가슴에 담아가는 신선놀음은 15분 정도 계속된다. ! ‘천북 굴따라 길 중에서 순수하게 갯벌을 따라 걷는 구간은 5km 남짓 된다는 것도 알아두자.

 해안은 온통 해식애로 이루어져 있다. 해식작용으로 인해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파도가 만들어낸 동굴들로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해식절벽에서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13 : 19. 그렇게 눈의 호사를 누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하파동에 이른다. 사호3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인데, 마을 앞 바다가 육지를 향해 푹 파고들어와 작은 만()을 만들어놓았다.

 이때 옛 멋을 풀풀 풍기는 노두길이 나타나면서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오래전 바닷가 사람들은 섬과 섬, 또는 육지와 섬 사이 갯벌에 돌을 던져 징검다리 길을 만들었다. 돌을 던져 만든 그 노두길은 어촌 주민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걷기 여행자들의 마음을 끌어 잇는다. 노두길은 하루에 두 번씩 사라졌다 생겼다 한다. 물이 차면 수평선 아래로 숨었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나타나는 신비함 때문에 호사가들은 기적의 여행길이라고도 부른다.

 공자님은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다. 배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일 것이다. 갯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민들의 목욕탕일 것이란 지레짐작으로 흘려버렸던 저 바닷가 저수조(‘갯샘이라고 했다), 실은 바다에서 캐온 조개류를 세척하는 용도였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되는 지금의 나처럼..

 13 : 23. 건너편에서 다시 데크 로드로 올라간다. 아니, 길이라기에는 길이가 너무 짧았다. 쉼터를 겸한 전망대를 만들면서 바닥과 연결시키는 구간을 조금 길해 해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잘 단장되어 있었다. 데크 길은 흠하나 보이지 않고, 경관이 좋은 곳에는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곳에서는 너무 서두르지 말자. 벤치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며 잠깐의 여유라도 부려 볼 일이다.

 평생을 방년(芳年)’이고 싶어 하는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냉큼 자세부터 잡고 본다. 그러자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함께 하자며 우격다짐으로 달려든다.

 천북 굴따라 길의 종점인 맨삽지(학성리) 공룡발자국 화석으로 유명하다. 2015 4, 30센티 안팎의 원형 발자국 화석 10여 개가 발견됐는데, 역사·지리적으로 가치가 높아 학계의 주목을 받는단다.

 데크 로드는 금방 끝났다. 그리고는 노두길을 따라 또 다시 북진한다. 아까만치는 아니어도 눈요깃거리로 넘치는 구간이다. 작은 바위벼랑과 손바닥만 한 백사장으로 이루어진 해안은 귀엽기까지 하다.

 13 : 32. ‘불모골이란다. 모래보다는 잔자갈에 가깝지만, 해변이 꽤 넓어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다. 소문난 해수욕장이 하도 많은 보령이라서 그럴 필요도 없었겠지만.

 해안에는 제철 만난 칠면초가 길손을 반기고 있었다. 해마다 색깔이 7번 변한다는 바다의 단풍이다. 갯벌을 뒤덮고 있는 저 염생식물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으면 해변은 가을 풍경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가을철 바닷가는 그래서 더 예뻐진다.

 13 : 34. 해변이 끝나갈 즈음(이정표 : 천북굴단지 1.8km/ 하파동 740m)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바위벼랑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에 잠기기 때문에 길을 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계단 위에는 또 하나의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난간에 서자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푸른 바다 위로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다닌다. 저 바다는 저녁에 방점을 찍는다고 했다. 아름다운 바다 위를 물들이는 붉은 노을이 장관을 이룬단다.

 걸어서 행복한 작곡가 정의송 영상 노래길이란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정의송은 참아주세요(뱀이다), 빠이빠이야(소명), 어부바 등 수많은 노래를 히트시킨 유명 작곡가이다. ‘보령에 가자(문희경 노래)’라는 노래도 지었다고 하더니, 이를 들려주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조형물은 노래는커녕 전광판에 전원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굴은 지방이 적고 미네랄이 풍부한 식품으로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수확하는 것이 최고의 상품으로 꼽힌다. 특히 서해의 갯벌과 만나 찬바람을 맞으며 자란 천북 굴은 미네랄과 비타민이 많이 함유돼 있고 타우린도 많아 콜레스테롤과 혈압 저하 효능이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식감이 쫄깃하고 향이 강해 보령 9미 중 하나로도 손꼽혀 겨울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천북 굴을 즐겨 먹는다.

 이후부터는 숲속을 걷는다. 경사진 산비탈에 용케도 길을 냈다. 그것도 널찍하게

 13 : 39. 또 다시 내려선 해안(이정표 : 종점까지 1.5km) 아래사정이란다. ‘사호2에 속한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아래사정 앞 해변은 장은리에서 흘러내려온 개울이 지나간다. 그곳에 출렁다리가 놓여있었다.

 출렁다리를 건넌 다음 산속으로 들어간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길을 내놓았는데, 다양한 화초들이 길가에서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숲속에 들어앉은 숙이뜰이라는 산채농장에서 심어놓았지 않나 싶다.

 개미취도 그중 하나다. 조경용보다는 척박한 땅의 녹화용으로 제격인 화초이다.

 13 : 52. 숲길을 빠져나오니 펜션단지가 반긴다. 비탈진 산자락에 숙박시설들이 꽉 들어차 있다. ‘천수만 관광휴양단지라고 한다.

 관광휴양단지답게 쉼터를 겸한 전망대도 만들어져 있었다.

 드넓은 천수만에는 꼬맹이 섬들이 올망졸망 파도에 떠밀리고 있었다. 그 뒤는 안면도가 반도처럼 길게 뻗어나간다. 참고로 보령에는 16개의 유인도와 83개의 무인도가 있다고 했다.

 천수만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저 용()은 대체 뭘 상징하는 것일까.

 원래의 길은 관광휴양단지를 지나 천북굴단지로 간다. 하지만 새롭게 내놓은 굴따라길(서해랑길과 같이 쓴다)’은 바닷가 솔숲을 헤집으며 내놓았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면 지쳤던 심신이 상큼하게 되살아난다.

 소나무 그늘아래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쉼터를 만들어놓았다. 하트모양의 박스 안에는 두 사람이 앉기 딱 좋은 그네를 배치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앉아 서쪽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랑 놀음이라도 해봄 직하다.

 14 : 01. 솔숲을 빠져나오니 천북 굴단지가 반긴다. 천북면 장은리 바닷가에 10개 동에 80여 개의 점포가 모여 있는데, 이곳에서 파는 굴 요리가 입소문을 타면서 보령지역의 겨울철 대표먹거리로 자리 잡았다. 날씨라도 추워질라치면 제철 만난 굴이 미식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단지에 들어선 음식점들은 굴을 이용한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었다. 생으로 먹는 굴회, 굴 무침, 통통한 우윳빛이 나는 굴 찜, 굴 밥, 구워먹는 석화, 굴 전, 굴 칼국수, 굴 라면 등 굴의 독특한 풍미와 부드러운 식감을 살린 다양한 음식들이 여행자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이곳에서는 매년 굴 축제가 열린다. 올해는 다음 주말(1116)부터 열린단다. 석화로 불리는 굴은 구워먹어야 제격이라고 했다. 굴 구이는 1990년대 초반 천수만 일대에서 채취한 굴을 주민들이 웅기종기 모여 구워먹으면서 시작됐다. 이게 별미로 알려지면서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현재의 굴 축제 모태가 됐다.

 14 : 06. 천북굴단지 광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홍성 63코스) 안내도는 광장의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5.28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집사람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뽀얗다. 맞다. 미네랄과 비타민으로도 부족해 타우린까지 풍부한 굴을 실컷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은 운 좋게도 종점이 천북 굴 단지였다. 그러니 어찌 굴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마음씨 좋은 황사장님이 생굴을 구입해 밥상에 올렸고, 도반 한 분은 갑오징어 회를 사왔다. 거기다 날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는 굴전을 챙겼다. 덕분에 영양가 많은 먹거리로 배를 채운 행복한 하루가 될 수 있었다.

 

안동선비순례길 6코스(역동길)

 

여행일 : ‘24. 11. 2()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및 예안면 일원

여행코스 : 원천교오성농장(트레킹 중단)번남댁계상고택부라원루성성재종택부포리선착장(거리/시간 : 11.5km, 실제는 3.84km 1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원천교(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로 영주까지 온다. 가흥교차로에서 36번 국도(봉화방면으로 19km), 금봉교차로에서 918번 지방도(청량산방면으로 21km), 도산교차로에서 928번 지방도(토계리방면으로 7km), ‘뒷재(도산면 단천리)’버스정류장에서 왕모산성길로 옮겨 600m쯤 들어오면 원천교에 이르게 된다. 내살미마을 초입에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의 대가인 우탁(禹倬)의 아호(雅號)가 코스의 브랜드로 굳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길이랍니다. 우탁 말고도 성성재 금난수, 번암 이동순 등 퇴계선생과 관련된 선비들의 흔적도 엿볼 수 있지요. 하지만 결코 추천하고 싶지 않은 코스이기도 합니다. 탐방로 정비가 되어있지 않아 코스 중간이 끊겨있기 때문입니다. gpx트랙 없이 진행하다가는 조난당하기 십상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6코스의 시작 지점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은 퇴계예던길 안내도, 이정표(부포선착장 10.9km/ 고산정 11.9km)와 함께 주차장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11 : 02 : ‘왕모산성길을 따라 서진(西進)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낙동강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간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출발지점 근처의 원천리 마을회관’. 원천리(遠川里) 3코스를 답사하면서 만났던 이육사(李陸史)의 고향이자 진성이씨(眞城李氏) 집성촌인 원촌마을’, 이곳 내살미마을’, 그리고 이곡마을이 포함된 법정 동리(洞里)랍니다.

 마을회관 마당에 다이시아가 만개했습니다. 생명력이 강인해 게을리 키워도 잘 자라고, 예쁜 꽃도 계속해서 피워낸다니 일손 바쁜 농촌에서 키우기 딱 좋지 않나 싶습니다.

 그제가 입동(立冬)이었습니다. 그해의 새 곡식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토광·터줏단지·씨나락섬에 가져다 놓았다가 먹고, 농사에 애쓴 소에게도 가져다주며, 이웃집과도 나누어 먹는다는 날입니다. 이는 추수가 이미 끝났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런데도 저 감나무는 튼실한 과실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습니다. 서리를 맞힌 다음 홍시로 만들 모양입니다.

 길은 들녘을 가로지르며 이어집니다. ‘왕모산 산자락에 기대어 들어선 모양새인데, 자그만 동네 하나쯤은 너끈히 먹여살릴만한 크기입니다.

 11 : 07. 도산교회.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라는 요한복음 14 6절의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 목사님은 저 말씀을 몸소 실천하고 계시나봅니다. 안동시가지로 나가는 교통편을 못 찾아 애를 먹고 있는 저희들을 안동시청까지 30km 이상 태워다 주셨을 정로로요.

 교회 앞에서 길은 낙동강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낙동강 물줄기가 휘돌아가며 만들어놓은 충적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건지산과 왕모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4코스와 5코스를 답사할 때 오를 수밖에 없는 산들이지요. 그 사이에서 청량산이 자신도 있다며 고개를 쏙 내밀고 있네요.

 11 : 11. 낙동강 둔치에 이를 즈음 버스정류장을 만납니다. ‘내살미 마을까지 들어오는 시내버스 노선의 종점인가 봅니다.

 버스정류장을 지나면서 길은 확 좁아집니다. 그리고는 내살미 마을로 들어갑니다. 자연부락인 내살미는 원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랍니다. 아름다운 강변마을로 알려져 있지요.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수려하고 넓은 강변에 쌓인 모래가 정결하고 광채가 아름답다 하여 예로부터 천사미라 불리었을 정도라나요?

 마을은 충적지 들녘에 들어앉았습니다. 그래선지 주변이 온통 무밭이군요. 무가 본디 배수가 잘 되는 토양에서 잘 자라니까 말입니다.

 마을을 둘러싼 비닐하우스도 무가 차지했네요. 산간 고지대의 특징인 일교차를 감안했나봅니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낙동강변입니다. 정확히는 도산구곡 중 6곡인 천사곡(川沙曲)’이랍니다. 선성지(宣城誌)에 예안14곡의 하나로 기록되었을 정도로 풍광이 뛰어난 곳입니다.

 낙동강 건너는 원촌마을의 들녘일 것입니다.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가다듬었다는 그 너른 들녘 말입니다.

 이후부터 길은 강변을 따라갑니다. 낙동강과 맞닿은 산자락의 아랫도리를 잘라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보여주는 풍경만큼은 전국의 소문난 명소들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11 : 21. 축대에 월란정사 등산로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군요. 축대 위를 조금 더 걸으면 이정표(월란정사 0.23km)도 만납니다. 그런데 월란정사로 가는 길을 등산로로 적은 이유가 뭘까요?

 길은 시작부터 무척 가팔랐습니다. 거기다 이끼가 잔뜩 낀 너덜구간도 있습니다. 통나무 계단을 놓았다지만 험하기가 산길보다 더하면 더했지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이정표에 등산로라고 적혔던 이유일 것입니다.

 11 : 29 :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월란정사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길이 거칠었던 탓인지 230m를 오르는데 8분이나 걸렸습니다.

 월란정사(月瀾精舍) 월란암이란 암자가 있던 터에 지어졌습니다. 퇴계 이황이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던 도산학의 발상지라는군요. 농암 이현보 등과 어울려 시문을 읊기도 했답니다. 현재 건물은 퇴계의 제자 중 이곳에서 가장 늦게까지 머물렀던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 1539-1601)의 후손들이 1860년에 지었다고 합니다.

 건물은 정면 3, 측면 1칸 반 규모의 자형 홑처마 팔작지붕입니다. 퇴계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를 가진데다, 건축양식도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며 안동시에서 문화유산(105)으로 지정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해온 듯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한국 유교문화의 본고장임을 자랑하는 안동시답지 않은 행정이라 하겠습니다.

 퇴계선생의 시 月瀾臺(월난대)’가 적힌 편액이 눈에 띕니다. 높은 산에는 모서리도 있고 펀펀한 곳도 있는데(高山有紀堂)/ 경치도 좋은 곳은 모두 강가에 있네(勝處皆臨水)/ 오래된 암자 저절로 적막하니(古庵自寂寞)/ 그윽하게 사는 이에게 있을 수 있네(可矣幽棲子)/ 넓은 하늘에 구름이 문득 걷히니(長空雲乍捲)/ 짙푸른 소()에 바람일 것 같네(碧潭風欲起)/ 바라노니 달을 즐기는 사람을 쫓아서(願從弄月人)/ 이 물결 이는 것을 관찰하는 취지에 부합하고자 하네(契此觀瀾旨)

 월란암칠대기적비(月瀾庵七臺紀蹟碑)’는 퇴계선생의 시 月瀾臺(월란대)’를 떠올릴 수 있는 바깥마당에 세워놓았습니다.

 퇴계의 시를 떠올리며 주변 경관을 살펴봅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천사곡이 발아래 놓여있는가 하면, 눈을 들자 청량산 등 크고 작은 주변 산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퇴계가 농암선생과 함께 시문을 읊기에 충분한 풍광이라 하겠습니다.

 11 : 36. 도로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갑니다. 낙동강과 접하고 있는 바위벼랑을 깎아 길을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조망 하나만은 끝내줍니다.

 낙동강 상류 쪽 풍경. 이육사가 태어났고, 그가 시상을 떠올리던 원촌마을과 내살미마을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집니다. 그 뒤에서는 청량산이 우뚝 솟아오릅니다.

 진행방향에는 도산구곡 중 6곡인 천사곡(川沙曲)이 놓여있습니다. 5(탁영담곡)에서 물줄기가 한 굽이를 크게 왼쪽으로 휘돌아간 뒤 다시 오른쪽으로 휘감는 뾰족한 모서리가 6곡 천사곡이랍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고도가 뚝 떨어집니다.

 11 : 45. 도로를 버리고 강변으로 내려섭니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습니다. 초입의 갓처럼 생긴 선비순례길 조형물이 길이 갈려나감을 암시한다고나 할까요?

 천사곡(川沙曲)’이랍니다. 도심의 삭막한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 눈이 호사를 누리는 있는 풍광을 만났습니다.

 잠시지만 둔치를 따라갑니다. 찾는 사람이 드문 탓인지 길은 나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이유는 잠시 후 알게 됩니다.

 11 : 48. ! 안동호가 갈 길을 막아버립니다. gpx트랙은 안동호를 가로지르라고 하네요. 하지만 물에 잠긴 호수는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물에 잠기지 않은 상류까지 에돌아갈 수밖에요. 하나 더. 안동시는 왜 이곳으로 길을 냈을까요. 물이 엔간히만 차도 길이 끊겨버리는 데도요.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안동은 인구가 15만도 넘습니다. 그렇다면 행정도 그에 걸맞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후부터는 길을 개척해가며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길이 거칠지만 활짝 핀 억새꽃밭을 누비기 때문에 싫지만은 않은 구간이랍니다.

 높아진 가을 하늘 아래 억새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는 춤을 추듯 일렁거리며 낙동강 둔치를 은빛 물결로 물들입니다.

▼ 억새 꽃밭이 끝나자 이번에는 갈대 꽃밭이 펼쳐집니다억새만은 못해도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상류에 도착했습니다. 저곳에서 개울을 건너 맞은편 산자락에 들어붙으면 됩니다. 그런데 앞서가던 일행들이 산비탈에 매달린 채로 도로로 되돌아나가라고 외쳐대는군요. 길이 없는 탓에 방향만 보고 무작정 치고 오르는데, 하도 가팔라서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11 : 55. 상류에 이르니 일행 몇 명이 되돌아 나오는 게 보입니다. 그 중에는 몽중루 작가님과 꿈이 있다면 멈출 수 없다의 저자 이석암 작가님도 끼어있습니다. 목숨까지 담보로 잡혀가며 산을 오를 수는 없답니다. 덕분에 저희 부부도 별 고민 없이 도로로 되돌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되돌아 나오는 길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도깨비바늘 군락이라서 갈고리처럼 생긴 가시에 찔릴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가 나지는 않지만 모기에 쏘인 것처럼 따끔거리는가 하면 옷에서 잘 떨어지지도 않는 애물덩어리 풀입니다.

 11 : 59. 이후부터는 도로를 따라갑니다. 되돌아가라며 외치던 분이 도로를 따라 오라고 했거든요. 도로가 맞은편 능선을 넘어가나 봅니다.

 12 : 10.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였습니다. 잠시 후 만난 외딴집에서 길이 끊겨있었으니까요. Naver 지도에 오성농장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인데, 주인장 말로는 더 이상 길이 없는데 저희 같은 걷기여행자들이 심심찮게 길을 물어온다고 합니다. 아무튼 산을 넘기를 포기한 저희 일행 10명은 마음씨 좋은 주인장의 배려로 내살미마을까지 트럭을 타고 되돌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더 태워다주고 싶지만 트럭이라서 사람들을 태울 수가 없다는 군요.

 그런 이유로 ‘6코스의 잔여 구간은 걸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허총무님 등 둘레길 도반들의 사진을 이용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건너편 산자락에는 길이 나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른데다 잡목까지 앞을 가로막아 한 걸음 내딛기조차 힘들었답니다.

 매우 가파른데다 습지라서 미끄럽기까지 했다나요? 매 순간순간이 위험의 연속이었다는 전언입니다. 그러다보니 할퀴고 찔리는 것은 기본. 가끔은 잡목에 싸대기까지 얻어맞아가며 진행했다더군요.

 그렇게 20여 분의 사투를 치룬 뒤에야 산등성이에 올라설 수 있었고, 그곳에서 제대로 된. 아니 방치되고 있는 탐방로를 만날 수 있었답니다.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이렇듯 좋은 길을 만난답니다. 강변을 따라 나있기 때문에 뷰가 무척 좋은 구간입니다.

 이곳에서 천사곡(川沙曲)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을 수 있답니다. 다음은 이야순(李野淳)이 읊은 천사곡의 풍경입니다. <육곡이라 나무숲이 옥 같은 물굽이를 감싼 곳(六曲林墟抱玉灣)/ 피라미와 백로는 사이좋게 지내네(鯈魚白鳥好相關)/ 하명동(霞明洞)에 핀 늦은 꽃 더욱 어여뻐(更憐花晩霞明處)/ 서쪽 바라보며 한적한 골짜기 하나 차지했네(西望曾專一壑閒)>

 6코스는 버려진 듯한 고택들을 여럿 만난다고 했습니다.

 창덕궁(昌德宮)을 모방했다는 번남고택(樊南古宅)은 퇴계의 9세손인 번엄(樊广) 이동순(李同淳, 1779-1860)이 지었다고 합니다. ‘번남은 이동순의 아호라고 하더군요. 1807(순조 7) 문과에 급제해 시강원설서, 병조·호조 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순조 때 삼척부사를 지낸 아들(李彙溥, 1809-1869) 1857년 북쪽 사랑채(번남정사)를 지었으며, 남쪽 사랑채(삼호당) 1870년에 손자인 이만윤(李晩胤)이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99칸으로 지어진 가옥은 전체 모습이 자 모양을 이룬다고 합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고 현재는 50여 칸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가치까지 사라지지는 않았겠지요.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적 주거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며 국가민속문화유산(268)으로 지정·관리하고 있습니다.

 선비순례길은 이제 의촌길을 따라갑니다. 법정 동리인 의촌리(宜村里)’를 지나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길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고 시내버스도 다닙니다. 하지만 폭이 좁은데다 구불거리기까지 해서 대형버스의 진입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 의촌리는 청보리밭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도산서원 맞은편에 있던 시사단(試士壇)’ 기억하시죠? 시사단 부근의 너른 들녘에 청보리를 심고 매년(안동호의 수위 변화로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축제를 열어오고 있답니다.

 코스를 완주하지 못한 아쉬움을 가장 심하게 만든 사진입니다. 단풍이 늦는다느니, 조금 더 나아가 고운 단풍은 애초부터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기사가 심심찮게 떠도는 요즘, 저렇게나 고운 단풍을 볼 수 있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습니까.

 총무님은 남의 문중 재실(齋室)까지 촬영했나봅니다. 하긴 어느 여행자는 저곳까지 다녀왔다면서 평산 신씨까지 들먹이기도 했었습니다.

 어느 지점에서는 탐방로가 도로를 벗어난다고도 했습니다. 안동호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에돌아가도록 한 모양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도 눈에 담을 수 있었겠죠? 빨강 단풍과 새하얀 억새꽃의 멋진 앙상블로도 모자라 안동호의 파란 물결까지 더해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냅니다.

 계상고택(繼尙古宅)은 역동 우탁을 배향하는 역동서원이 있던 곳입니다. 퇴계 이황이 고려 후기 대학자인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2-134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70년 건립한 안동지역 최초의 서원인 역동서원이 있던 곳인데, 그 자리에 퇴계선생의 11대손인 이만응(李晩鷹, 1829-1905) 1800년대 후반 전통한옥을 지었답니다. 하나 더. 역동서원(易東書院) 1868(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69년 송천동(안동시)로 옮겨 복원시켜 놓았답니다.

 고택의 대문 위에는 역동이란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역동서원을 옮겨갔어도 역동 우탁의 기억은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역동선생은 단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안동에 머물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으셨다고 합니다.

 관수대는 계상고택()을 둘러싼 나지막한 언덕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곳에 하상(河床)으로부터 수직으로 10여 미터 높이로 솟아있던 천연 오석을 부르던 이름입니다. 역동서원을 찾은 퇴계선생이 낚시를 즐기던 곳으로도 알려지는데 안동 댐 건설로 물속으로 숨어버렸답니다. 현재의 관수대는 계상고택의 아름다웠던 옛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2015년에 쌓은 것이라는군요.

 탑처럼 생겼지만 탑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계상고택의 풍치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드는 데는 이만한 것도 없겠습니다. 고택의 긴 세월을 헤아려보게 만드는 거대한 고목 그루터기(아래 두 번째 사진)도 그중 하나랍니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모양새가 후진양성을 위해 애쓰셨을 우탁선생의 기품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tvN 개똥이네 철학관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던 모양입니다. 나이·성격·직업 등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게스트가 호스트들과 함께 철학관에서 하루를 보내며 소통하고 교감하는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입니다.

 고택 부근은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하긴 이 부근에서 청보리축제까지 열린다니 어련하겠습니까. 전통 한옥과 드넓은 청보리밭이 어우러지는 절묘한 콤비네이션으로 인해 안동의 대표적 힐링 명소로 손꼽히고 있으며, 많은 사진작가들이 이곳을 찾는다더군요.

 풍월정이랍니다. 정자에 올라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풍월이라도 읊으라는 모양입니다.

 선비순례길은 호안 데크길을 조금 더 걷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차도로 변하면서 내륙으로 파고든다나요? 서너 개나 되는 고갯마루를 오롯이 넘는 이 구간을 걷기 여행자들은 차도를 따라 지겹게 걷는다며 투덜댔습니다. 힘들게 높여가는 고도에 비해 주변 경관은 보잘 것이 없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경주손씨(慶州孫氏)의 문중 제각인 부포재(浮浦齋)’라고 합니다. 경주손씨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을 구성하는 양대 성씨 중 하나입니다.

 부라원루(浮羅院樓)’는 다들 놓쳤더군요. 탐방로가 지나가는 도로에서 약간 비켜나있었던 탓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사진을 구해 올려봅니다. 조선시대 예안현에 있던 부라원루는 전통 교통수단이던 역원(驛院) 건물이 있었던 곳입니다. ‘영가지(永嘉誌, 안동부의 역사지리지)’는 안동부 관내에 27개의 원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 가운데 그 자취가 남은 곳은 부라원이 유일하다네요. 원사(院舍)는 없어지고 원루(院樓)만 남았지만요. 부포리 앞 들판에 있던 것을 1976년 안동댐 건설로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편액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라원루는 1600년 이전에 지어졌겠지요?

 고갯마루를 넘나드는 게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래 사진처럼 아름다운 경관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며 다들 호들갑을 떨더군요.

 부포마을이랍니다. 부라원이 있어 부라리로도 불리는 마을은 금난수(琴蘭秀)의 종택이 있는 봉화금씨 집성촌입니다. 조선시대 이래 예안현은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고장으로 굳어졌습니다. 영남학파의 중심지로 그 선두에는 퇴계 이황이 있었습니다. 금난수도 한 축을 담당했답니다. 퇴계의 제자인 금난수는 이황이 도산서당을 지을 때 도산서당 영건기를 썼던 인물입니다. 퇴계선생도 금난수가 머물던 청량산 자락의 고산정(孤山亭)을 자주 방문했고, 시도 여러 편 남겼습니다.

 부포마을에 위치한 성성재종택(惺惺齋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5코스를 답사하면서 들른바 있는 고산정(孤山亭)을 지은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 가문의 종갓집입니다. 금난수는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로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는 데 힘썼으며, 1561(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봉화현감 등을 역임했습니다. 정유재란 때는 안동 수성장(守城將)으로 활약해 좌승지에 증직되기도 했답니다.

 집은 자 형의 본채와 사당 및 아래채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사진은 담장너머로 찍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1700년대에 건립된 안동지방의 주택에서 가끔 발견되는 특이한 유형의 구조라는데, 주인장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어쩌겠습니까. 하나 더. 금난수는 월천 조목 선생과는 처남 매부지간이라고 했습니다. 2코스의 시작시점이었던 그 월천서당을 지었다는 분 기억하시죠?

 성성재종택을 지나면 또 다시 고개 하나를 넘습니다. 이때 먼발치로 안동호를 건너오는 배 한척을 볼 수도 있답니다. 월천서당과 부포선착장을 오가는 배인데, 이게 안동호반에 녹아들면서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더군요. 하지만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는 점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애국지사 기념공원도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멋진 해넘이가 펼쳐진다고 해서 해넘이공원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 부포리에서 출생한 이동하(1875-1959) 선생과 이선호(1904-?) 선생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동하 선생은 1909년 안동 보문의숙을 설립하고, 1911년 만주 망명 이후 동창학교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이선호 선생은 1925년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를 창립했고, 1926.6.10.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렀습니다.

 6코스는 부포선착장에 이르면서 끝납니다. 월천서당을 오가는 도선이 배를 대는 곳이랍니다. 배는 안동시에서 운영하고 있다는 군요. 선원도 공무원 신분이라서 무척 친절하다는 평가였습니다.

 도산교회 목사님이 데려다 준 안동시청입니다. 우리네 한옥에서 모티브를 따온 현관이 눈길을 끄는군요. 안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양반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안동하면 많은 사람들이 먼저 하회마을을 떠올리며, 하회마을과 함께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을 꼽습니다. 물론 저처럼 술을 좋아하는 한량들이라면 안동 쌀로 빚은 안동소주와 제사 후 남은 음식을 다시 조리해 먹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안동찜닭도 발길을 안동으로 이끌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점심을 먹었던 안동구시장입니다. 시장이 온통 찜닭 일색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랍니다. 하지만 몽중루 작가님은 닭 냄새도 못 맡을 정도로 닭요리를 싫어한다는군요. 덕분에 찜닭골목에서 보리비빔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해 버렸답니다. 하지만 음식은 맛깔스러웠고, 잔술까지 따라주는 주인장 모자의 친절도 도산학의 본고장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진풍경이었습니다. 벽걸이 액자 속에서 주인장과 함께 활짝 웃던 가수 설훈도가 가히 자랑할 만한 식당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택시를 이용해 안동댐으로 갔답니다. 공원처럼 잘 단장되어 있다는 댐 주변의 경관들을 카메라에 담아보기 위해서지요. 아니 술이 고팠던 저는 아름다운 풍경을 안주삼아 술을 마셔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과 헤어져 식당을 찾았지요. 하지만 이는 최악의 선택이 되어버렸습니다. 맛없는 음식에 불친절까지 더해져 선비문화의 도시, 안동이라는 그동안 지녀왔던 좋은 선입감까지 사라지게 만들어버렸으니까요.

 안동댐 하부의 월영교’. 옛날에는 하부 교각까지도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는 다리입니다. 이게 썩어서 보수해놓은 게 지금 저 모습이랍니다. 아직도 상판은 나무로 되어 있었습니다.

 안동호를 배경으로 선 집사람이 활짝 웃습니다. 아니 이때까지만이라고 하는 게 옳겠습니다. 이 지점을 지나자마자 선비순례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이를 대처할 수 있는 안내를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요. 잔여 구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지요. ‘걷기 길을 만들고 이를 세상에 알린 지방자치단체가 결코 해서는 안 될 행정이었습니다. 거기다 차선책으로 찾아간 안동호에서까지 불친절을 겪었으니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행지 : 조지아  므츠헤타,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므츠헤타(Mtskheta) :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도시로 BC 3세기~AD 5세기 이베리아(Iberia) 왕국의 수도였다. 므츠바리(Mtkvari)와 아라크비(Aragvi),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 잡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덕분에 고대 무역로가 지나가던 흔적들이 종종 유물로 발견된다. 5세기에 조지아의 수도는 트빌리시로 이전됐지만 므츠헤타는 여전히 조지아 사람들에게 정신적 수도다.

 

 즈바리 수도원에서 내려다본 므츠헤타 시가지. 마을 뒤로 높고 낮은 산들이 겹겹이 모여 마을을 감싸고 있다. 앞으로는 강과 강이 만나 평야를 이뤄 풍요로운 조지아의 천년고도 므츠헤타를 이루고 있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흑해 연안에 위치한 조지아 제2의 도시/ 여행사에서 나누어준 지도에는 누락되어있다)’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10분 정도(‘즈바리 수도원에서) 걸려서 도착한 므츠헤타 역사지구 주차장. 차에서 내리자 조금 전에 들렀던 즈바리 수도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치형 대문을 지나 마을로 들어간다. 길바닥은 유럽의 중세 도시들처럼 규격화된 돌을 깔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을까, 옛 왕도답게 바닥이 반질반질하다.

 주차장에 관광안내도로 보이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조지아어를 모르니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스베티 츠호벨리 성당으로 간다. 므츠헤타는 천년고도(千年古都)답지 않게 규모가 작았다. 번화가라고 해봐야 성당으로 가는 길을 따라 양쪽으로 200~300미터 정도 가게들이 모여 있는 게 전부다.

 유명 관광지답게 여러 가게들이 손님을 맞는다. 기념품가게가 대부분인데 간혹 게스트하우스나 호텔, 레스토랑도 눈에 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추첼라(Churchkhela)’. 추첼라는 포도에 각종 견과류를 섞어서 만든 조지아의 달콤한 국민 간식이다. 붉은 색깔이 나는 등 색상까지 먹음직스러우니 하나쯤 사들고 곶감 빼먹듯이 먹으며 걸어볼 일이다. 그것 또한 여행의 낭만이 아니겠는가.

 성당의 담벼락은 카페트, 코스터 같은 양모제품의 전시장으로 변신했다. 덕분에 고풍스러우나 우중충할 수밖에 없었던 벽면이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예쁘게 단장됐다.

 골목길이 끝나자 널따란 광장과 성벽에 둘러싸인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Svetitskhoveli Cathedral)’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한 눈에 봐도 위엄이 느껴진다. ‘스베티 츠호벨리 둥근 기둥을 뜻하는 스베티(Sveti)’ 생명을 주는 또는 사람을 살리는이라는 의미인 츠호벨리(tskhoveli)’의 합성어이다. ‘사람을 살리는 성당이란 뜻으로 성당의 건립 신화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성당은 요새처럼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것도 여느 왕궁의 성곽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져 있었다. 외세의 침입이 그만큼 빈번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성당 입구에 있는 관광안내소’.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석조 건물이 눈길을 끈다. 하느님을 모시는 성당의 안내소를 하필이면 신전처럼 지어놓았을까? 묘한 이중성이 보는 이를 헷갈리게 한다.

 출입문은 서쪽 성벽에 커다랗게 만들어져 있다. 아치형 문의 2/3쯤 까지 철문이 올리어져 있고, 그 위 양옆에서 두 개의 소머리(牛頭) 장식이 탐방객을 맞는다. 5세기에 건립된 교회의 잔존물이라는데, 당시만 해도 기독교와 민간신앙이 융합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단다.

 출입문 앞에 대성당의 미니어처가 설치되어 있었다. 성당의 내력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음을 알린다.

 경내로 들어가자 붉은 벽돌로 지은 비잔틴 양식의 대성당이 반긴다. 남북보다 동서의 길이가 훨씬 긴 모양새인데 서쪽으로 출입문이 나있다. 성당은 4단 정도의 층위로 나누어졌다. 가장 앞쪽에 서문, 이어서 출입구, 본당, 돔의 순서로 높아진다.

 고딕 양식의 종탑은 출입문 옆 성벽에 올라앉았다. 비상시에는 망루 역할까지 겸했던 모양이다.

 성당의 담벼락은 성벽을 연상시킨다. 에렉클 2(King Erekle II)가 통치하던 1787년 외부침입을 막기 위해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로인해 성당의 탑은 한때 무기고로도 사용되었다. 성벽에는 원통형으로 된 탑 6개와 정사각형 모양으로 된 탑 2개가 있다.

 조지아의 성당 중 가장 아름답다는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은 트빌리시의 사메바 성당과 함께 조지아정교회의 총본산이라고 했다. 왕의 대관식이나 장례식 같은 국가의 중대한 행사가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그만큼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선지 웨딩 촬영을 하고 있는 신혼부부들이 여러 쌍 보였다.

 성당 주변에 무덤으로 여겨지는 돌판(石板)들이 여럿 보였다. 평장을 하고 그 위에 글씨를 써놓은 것 같은데 내용은 알 수 없었다. 하긴 조지아 왕들과 주교들이 이곳에 묻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 중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들의 무덤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 지역 출신의 유력 인사들일지도 모르겠고...

 북쪽에서 본 대성당 전경. 앞서 다른 장에서도 얘기했듯이 조지아정교의 역사는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카파도키아 출신의 수녀 니노(Nino)에 의해 나나(Nana) 왕비에 이어 미리안(Mirian) 왕까지 기독교로 개종, 337년 조지아 국교로 공인되었음도 이미 거론했다. 379년 미리안 왕의 명을 받은 니노에 의해 이곳에 이베리아 왕국 최초의 목조(木造) 교회가 세워진다. 하지만 아랍·페르시아·티무르 등 외세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했고, 지진으로 파괴되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기오르기 1(Giorgi I)’가 통치했던 11세기(1010-1029)에 조지아의 건축가 아르수키드제(Arsukisdze)’에 의해 십자형 돔 형태의 교회로 재건된 것이다. 이후 지진으로 인해 성당이 일부 파괴되자, 1970-1971년 친차체(V. Tsintsadze)의 주도로 바실리카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바실리카 양식은 5세기 말 바흐탕 고르가사리 왕(King Vakhtang Gorgasali) 때 성행했던 조지아교회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이란다.

 성당 건축을 완공했던 건축가 아르수키드제에 관한 흔적은 북쪽의 외부 벽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석공을 상징하는 끌을 쥔 팔과 손의 형상이 새겨져있는데, 이게 아르수키드제의 손이라는 것이다. 알아볼 수는 없지만 아르수키드제의 손, 하느님의 종, 그의 용서를 바라며이라는 글귀도 끌에 적혀있다고 했다. 조지아의 소설가 콘스탄티네 감사쿠르디아는 이 소재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해 소설을 썼단다. 게오르기 왕이 아르수키드제의 연인으로 미모가 뛰어난 쇼레라를 흠모했고, 아르수키드제의 후원자였던 사제가 아르수키드제의 성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에게 거짓을 고해 그의 손을 자르게 했다나? 왕의 질투심에 휘발유를 부었다는 얘긴데, 얘기는 얘기일 따름이다.

 동쪽 벽은 아치형 상부에 공작 꼬리 장식이 있다. 그 위 왼쪽에도 뭔가를 새겼는데, 날개를 편 독수리와 사자라고 했다. 독수리는 하늘을, 사자는 땅을 대표하는 동물이니 뭔가 큰 의미를 지녔겠지만 더 이상의 추론은 불가능 했다. 하나 더. 창문 아래에는 멜키체덱 1세에 의해 이 성당이 만들어졌음을 알리는 명문이 적혀있단다.

 서쪽으로 난 문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출입문 안쪽 위에는 천사의 호위를 받는 성모자상이 그려져 있다.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양 옆의 두 천사로부터 경배를 받는 모양새이다.

 성당은 돔 형태의 천정이 높게 올라가있고, 그 아래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내부의 가장 높은 곳에는 예수님이 앉아계신다. ‘가장 높은 곳에 영광(Glory In The Highest)’이라고나 할까?

 성당의 벽면은 각종 성화(이콘)와 프레스코화들로 가득하다. 조지아정교의 성지답게 그 하나하나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이곳의 이코노스타시스(ikonostasis, ‘이콘을 거는 칸막이라는 뜻,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는 칸막이로 여기에 이콘을 건다)도 역시 화려했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의 좌우에 예수님,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열두 제자 등을 그린 이콘이 걸려있다. 그런데 왼쪽의 그림은 누구를 나타내고 있을까? 미리안 왕과 성녀 니노 같은데, 가운데 인물은 도대체 모르겠다.

 제대(맞는지는 모르겠다)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하긴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그려져 있는데, 어찌 경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치형 문과 사모지붕을 가진 구조물, 키보리움(ciborium.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 부르고도 있었다)이 눈길을 끈다. 저곳에 예수님의 윗도리가 시도니아와 함께 묻혀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1세기경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할 당시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 있었던 므츠헤타 출신의 유대인 엘리아스(Elias)가 로마 군인에게서 받은 예수의 옷을 가지고 조지아로 돌아왔다. 그때 예수의 옷을 만진 그의 여동생 시도니아(Sidonia)가 감정이 격해져 즉사했다. 그녀가 죽은 후에도 그 옷을 손에서 놓지 않자, 그 옷을 그녀와 함께 매장했고, 훗날 그녀의 무덤 옆에서 거대한 백향목 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즈바리 수도원에서 보았던 성화, 즉 천사가 나무 기둥을 들고 있는 그림(‘이베리아의 영광이라고 했다)이 이곳에도 있었다. 전설은 미리안 3(Mirian )’가 성녀 니노에게 성당 건립을 명했다고 전한다. 이에 니노는 시도니야의 무덤 자리를 성당 부지로 정하고, 그 무덤에서 자라고 있던 나무를 성당 기둥으로 세우고자 일곱 토막으로 잘랐는데, 일곱 번째 나무토막이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해 하늘나라까지 올라갔단다. 이에 니노가 밤을 새워 기도를 했고, 다음날에야 땅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 나무 기둥으로부터 성유(聖油)가 흘러나왔고, 병든 사람들 모두를 치유해 주었다고 한다. ‘살아 있는 기둥 또는 생명을 주는 기둥이란 뜻의 스베티츠호밸리라는 성당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다. 그 얘길 1880년대의 작가 미하일사비닌이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나나 왕비와 미리안 왕도 그림 아랫부분 좌우에 그려져 있다. 그루터기와 나무 기둥 사이에서는 사도 안드레아(Saint Andrew)와 성녀 니노가 십자가를 들고 성스러운 장면을 바라본다. 하늘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모 마리아, 천사들과 함께 나무 기둥을 두 손 들어 환영한다.

 현지의 꼬마 아가씨가 뭔가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런 풍경을 통째로 담아 집사람도 포즈를 취해본다. 뒤에 보이는 십자가가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성녀 니노(St. Nino)는 최초 교회를 지으면서 예수님의 옷을 묻은 곳에서 자라난 백향목 나무를 베어냈고, 그걸로 교회의 기둥을 삼았다. 저 십자가 속에 당시의 나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십자가 전체가 백향목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은과 보석으로 만들어졌고, 백향목은 아주 작은 조각으로 남아 맨 밑에 들어있다. 이걸 신자들이 볼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내놓았다.

 별도의 작은 경당도 만들어져 있었다. 얼핏 선지자인 엘리야의 망토가 보관되어 있다고 들을 것 같은데, 메모를 해놓지 않아 구체적인 내력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12제자 중 한 명인 안드레아의 유골이 담긴 성물도 보관되어 있다는 얘기도 귓가를 맴돈다.

 경당 내부의 성화(이콘). 경당의 내력을 모르니 저 귀한 성화도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특히 유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지하 보관함에 대한 궁금증은 지금까지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13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프레스코화라고 했다. 별자리 인물도와 요한계시록(Apocalypse)의 짐승들(beast)’을 그렸단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바다와 땅에서 짐승들이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들 짐승은 용과 거짓 예언자와 동맹을 이뤄 인간세계를 파멸시키려 한다. 기독교 종말론에서는 이들 짐승과 용 그리고 거짓 예언자를 불경의 삼위일체(The Unholy Trinity)라 부른다.

 성당은 뛰어난 성화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진품은 조지아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성당에는 모사품이 걸려있다고 했다.

 기독교를 조지아의 국교로 공인한 미리안 3(Mirian )’일 것이다. 참고로 미리안 왕은 자신처럼 죄가 많은 사람은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에 거하거나 다닐 자격이 없다며, 자신을 위한 작고 검소한 성당을 새로 짓게 할 정도로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을 성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에게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은 성당 중에 성당이었단다.

 요건 그보다 먼저 기독교로 개종한 나나 왕비일 것이고...

 그밖에도 미리안 왕과 나나 여왕의 생애를 그린 장면, 비잔틴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콘스탄틴 1(Constantine I)의 초상화, 그의 어머니 헬레나(Helena)의 초상화 등 기억해둘만한 성화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가이드의 도움을 받지 못해 어떤 것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프레스코화는 삼나무 십자가를 미리안 왕과 나나 왕비가 들고 있다.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은 조지아 최대의 성지순례 장소답게 그 어느 곳보다 사람들이 많은데 단체로 온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 카르틀리와 카헤티의 왕인 에라클 2 고르가살리 왕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고 했다. 에라클 2세의 석관 상판에는 ‘1720-1798’이라는 연도가, 그리고 바흐탕 고르가살리의 무덤에는 검을 든 용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단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이제는 마을을 돌아볼 차례이다. 조지아의 천년고도라는데, 어찌 둘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퇴락한 므츠헤타는 올드 시티라고 말하기에는 마을이 많이 작았다.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여유를 부린다고 해도 1시간이면 족할 것 같았다. 아무튼 마을은 주민들이 거주하는 집들이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해준다.

 므츠헤타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러니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 것은 당연하다. 골목길 양옆으로 빼곡히 들어선 저 상점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는 물건도 다양했다.

 와인의 나라답게 차차(Chacha)’를 시음해 볼 수 있는 식당이 눈에 띈다. 입구에는 제조기까지 전시해놓았다. ‘차차는 크베브리 항아리 바닥에 침전된 포도씨·껍질·줄기 등 찌꺼기를 증류하여 만든 조지아 전통술인데 프랑스 코냑맛과 비슷한 알코올 도수가 40~52도인 독주다. 70도까지도 있단다. 우리나라 밀주처럼 집에서도 담가 먹는데, ‘그루지아 브랜드 또는 그루지아 보드카라고도 부른다. 조지아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집에서 담근 차차를 환대의 의미인 웰컴주로 준다고 한다. 이때 시원한 오이나 장아찌 같은 것을 안주삼아 같이 먹는단다.

 마을 외곽으로 나오자 중세풍의 건물들이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동방정교회의 검정 예복을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안쪽에 관사로 여겨지는 건물까지 있는 걸 보니 수도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전체적인 외양은 그다지 선기(禪氣)가 어려 보이지는 않는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건물들도 눈에 띈다. 아예 부서진 채 잔해로 남아있는 것도 있다. 왕국은 떠나고 왕들도 사라진 지 오래인 낡은 도시에서 문득 길제(吉再)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를 떠올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숙소와 식당으로 여겨지는 저 건물들을 보고 수도원을 떠올렸다. 가톨릭 신자인 난 꽤 여러 번 피정(避靜)에 들어갔었고, 언젠가 한번은 저런 풍경의 수도원을 만났었기 때문이다.

 마을 끝에서 바라본 즈바리 수도원’. 가파른 경사의 산봉우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므츠헤타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흡사 천년고도의 무사안녕을 지켜주기라도 하려는 듯...

 마을과 접한 꽈리강에는 작은 유원지가 들어서 있었다. 참고로 꽈리강은 튀르키에 북동부 카르스(Kars) 고원지대에서 발원해 조지아를 관통한 다음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카스피해로 들어간다. 길이가 1515km나 되는 긴 강으로, 카프카스 산맥 남부지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지류로 아라그비, 데베드, 알라자니, 아라스 등이 있다. 이 강의 명칭은 나라마다 다르게 불린다. 러시아와 유럽에서는 쿠라(Kura)라고 부른다. 튀르키에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뀌르(Kür), 이란에서는 꼬르(Korr),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키루스(Cyrus)라 불렸다.



여행지 : 조지아  므츠헤타, 즈바리 수도원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므츠헤타(Mtskheta) :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도시로 BC 3세기~AD 5세기 이베리아(Iberia) 왕국의 수도였다. 므츠바리(Mtkvari)와 아라크비(Aragvi),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 잡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덕분에 고대 무역로가 지나가던 흔적들이 종종 유물로 발견된다. 5세기에 조지아의 수도는 트빌리시로 이전됐지만 므츠헤타는 여전히 조지아정교회의 정신적 수도다.

 

 트빌리시를 떠난 버스는 아라그비강(Aragvi river)이 쿠라강(Kura river, 조지아에서는 꽈리강으로 부른단다)에 합류되는 지점에 이른다. 그곳에 고대 도시 므츠헤타(Mtskheta)’가 있다. 기원전 4세기부터 약 천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던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흑해 연안에 위치한 조지아 제2의 도시/ 여행사에서 나누어준 지도에는 누락되어있다)’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즈바리 수도원(Jvari Monastery)’은 가파른 산 정상에 있었다. 자동차가 아니면 접근하기 쉽지 않은 위치다. 그런 곳에 걸터앉아 천년고도 므츠헤타를 보호라도 하려는 듯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1994년 므츠헤타의 다른 역사적 유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수도원 바로 아래에 있는 주차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올라오는 도로는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완만했다. ‘즈바리 수도원 4세기 초 기독교가 전파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십자형으로 세웠다고 한다. 중세 말에는 성벽과 입구를 돌로 쌓아 요새화하기도 했으며, 이 시기에 축조되었던 건물 일부가 현재도 보존되어 있다. 참고로 조지아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은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온 성녀 니노. ‘즈바리는 조지아어로 포도나무라는 뜻. ‘니노 성녀가 포도나무로 된 십자가를 가져온 것을 기념하여 지었다는 얘기다. 니노의 포도나무 십자가로 기적이 행해지자, 이 교회는 순례자들의 필수코스가 됐단다.

 수도원은 미리안 3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세운 나무 십자가 위에 지었다고 했다. 334년 성녀 니노의 노력으로 미리안 3세가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즈바리 언덕에 나무 십자가를 세웠다는 것이다(성녀 니노가 세웠다는 설도 있단다). 그러다 585-604년 카르틀리의 공작 스테파노즈 1가 십자가가 있던 자리에 수도원을 세웠으니 이게 지금의 즈바리 수도원이다. ‘즈바리는 조지아어로 십자가’, 그러니 십자가 수도원이란 뜻이 되시겠다. 참고로 전설은 사냥을 나간 미리안 왕이 짙은 안개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되면서 시작된다. 미리안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드렸으나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다급해진 그는 니노가 믿는 신에게 기도를 드려본다. 그러자 순식간에 안개가 걷혔다. 이를 신의 계시로 받아들인 미리안은 그 즉시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세례를 해 줄 수 있는 사제를 보내줄 것을 청하였단다.

 건물은 본당을 중심으로 사방에 반원형 돌출부가 있으며,  4개의 돌출부 사이에는 본당과 부속 예배당을 연결해 주는 원형모양의 통로가 있다. ‘테트라 콘 양식이라 불리는 이 건축양식은 조지아 교회의 건축 양식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남 코카서스 전 지역에 있는 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무척 낡아보였다. 비바람에 부식된 채로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나 혼자만의 오해일까? 명색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는데 말이다. 아니 그런 내 추측은 옳았다. 조지아 정부의 부실한 관리를 지적받은 이 유적은 2004년 세계 유적재단(World Monuments Fund: WMF)에 의해 관리해야 하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되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단다.

 풍광 좋은 수도원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수도원이 모두에게 개방된 것은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라고 했다. 소련 시절에는 군사기지로만 사용되었었기 때문이다.

 성당 입구. 누렁이 한 마리가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개의치 않고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코카서스 여행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익숙한 풍경이다. 모든 개들을 국가가 관리해주기 때문일 것이다(개들의 귀엔 그 증표로 단추만 한 표지가 붙어 있다). 문득 그늘 한 점 없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낮잠을 자던 이집트 개들이 생각난다. 거기에 비하면 조지아 개들은 천국에서 사는 셈이다.

 파사드 외부는 얕게 새긴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 헬레니즘과 사산왕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남쪽 정문 입구에 있는 팀판(그리스식 건축의 지붕에 의해서 구획된, 박공지붕 윗부분의 벽)은 십자가의 영광을 표시하는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파사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장식한 양각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십자가가 낯선 이방인을 반긴다. 중앙에 천장까지 높이 솟은 커다란 나무십자가를 세워놓았다. 미리안 3세가 세웠다는 십자가이다. 십자가 앞에 서니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제단 위 십자가에 닿으면서 내 마음까지 포근하게 감싸준다. 저 빛과 함께 성령께서 찾아왔었나 보다.

 십자가의 좌대는 이콘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만큼 신성시되는 십자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성화에 손을 댄 채로 기도드리고 있는 조지아 여성. 저 성화는 이곳 즈바리 수도원의 십자가가 하늘나라까지 이어짐을 나타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경배를 드리는 신자들의 마음도 하느님에게까지 전해질 것이고...

 이코노스타시스(ikonostasis, ‘이콘을 거는 칸막이라는 뜻,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는 칸막이로 여기에 이콘을 건다)인 듯.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의 주위에는 이콘 몇 점이 걸려 있었다.

 꽃으로 치장된 작은 경당도 눈에 띈다.

 성녀 니노(Saint Nino : 280-332)’의 이콘. 조지아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4세기 경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카파도키아의 난민 출신 수녀인 성녀 니노는 계시를 받고 조지아 땅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고생 끝에 조지아의 남부 아할치헤주의 자바헤티를 거쳐 어버니시에 도착했고, 이어서 상인들 틈에 끼어 므츠헤타로 들어왔다. 니노는 므츠헤타의 유대인 지구에 머물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돌보면서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이때 여러 기적을 행하였는데 특히 당시 카르틀리를 다스리던 미리안 3세의 왕비 나나의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행했다고도 전해진다.

 벽에 걸린 성화 몇 점 외에 성당 내부에는 별다른 장식물이 없었다. 나무십자가의, 나무십자가에 의한, 오롯이 나무십자가만을 위한 수도원이라고나 할까?

 또 다른 이콘.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앞에는 꽃이 바쳐져 있다. 누군가가 촛불까지 켜 놓았다.

 즈바리 수도원을 있게 한 미리안 3(Mirian )’ 나나(Nana)’ 왕비의 이콘이 아닐까 싶다.

 수도원 입구의 언덕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즈바리수도원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발아래로 쿠라강과 아라그비강이 하나의 물줄기로 합해져 흘러간다. 두물머리에 들어앉은 므츠헤타가 강줄기에 녹아들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웅장한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라고나 할까?

 꽈리강은 조지아의 젖줄이다. 그것은 조지아의 중심도시 대부분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지아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꽈리강으로부터 얻는다. 그러므로 4500년 전부터 꽈리강을 따라 주민들이 거주하며 문명과 문화를 이룩해 왔다.

 두 강의 물 색깔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꽈리강이 흙탕물인데 반해 카프카스 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아라그비 강의 색깔은 훨씬 더 맑고 깨끗하다.

 건너편 언덕은 청춘남녀들로 가득했다. 결혼식을 막 끝내고 왔는지 하나같이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어떤 상태일지가 궁금해 줌을 당겨봤다. 문득 결혼식 날 500리터(한 사람당 1.5리터) 이상의 와인을 준비한다는 조지아 신부 아버지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 누구에서도 술 취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행지 : 조지아  카즈베기, 게르게티 츠민다 시메바 교회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카즈베기(Kazbegi 또는 스테판츠민다) : 조지아는 맛좋은 와인이 유혹하는 와인 천국이고 볼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트빌리시 북쪽 차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하는 산악지역 카즈베기가 단연 으뜸이다. ‘카즈베기는 구소련 시절에 부르던 이름이고, 현재는 스테판 츠민다로 불리고 있지만 그래도 현지에서는 카즈베기라는 지명이 더 쉽게 다가온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고산지대의 풍광에 젖다보면 어느덧 카즈베기에 도착한다. 인간을 위해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산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는 신화의 땅이다. 조지아인들의 정신적 고향인 게르게티 츠민다시메바(성 삼위일체) 성당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는 해발 1,870m쯤 된다는 게르게티(Gergeti)’마을 주차장에서 주어진 임무를 마친다. 이어서 사륜구동차량으로 갈아타고 츠민다시메바 교회로 올라간다. 포장까지 된 도로이지만 폭이 좁은데다 커브가 심하고, 거기다 경사까지 가파르기 때문이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흑해 연안에 위치한 조지아 제2의 도시/ 여행사에서 나누어준 지도에는 누락되어있다)’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자동차로 10분 남짓 올랐을까 상부주차장에 이른다. 교회 앞에 또 하나의 주차장이 있지만, ‘츠민다시메바 교회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니 잠시 쉬었다가겠단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을 보여주려는 택시기사의 배려라고 보면 되겠다.

 차에서 내리자 눈앞이 훤해진다. 푸름으로 젖은 초원 너머, 광활한 자연으로 둘러싸인 언덕에 조지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교회(Gergeti Tsminda Sameba Church)’가 다소곳이 앉아있는 것이다. ‘츠민다(Tsminda)’ 성스러운이라는 뜻이고, ‘사메바(Sameba )’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뜻이니 게르게티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쯤 되시겠다.

 교회는 거대한 산릉을 병풍삼아 오롯이 앉아있다. 교회 왼쪽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산은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는 샤니 산(Mt. Shani : 4,451m)’일 것이다.

 하도 높다보니 구름이 산허리에 걸려있다. 수천 미터의 산허리를 감싸며 제 모습을 시시때때로 바꾼다. 하늘 아래 구름이요 그 아래가 산이련만, 코카서스에서는 구름 위의 산이 일상인 모양이다. 그런 산의 꼭대기에는 6월 하순인데도 눈이 하얗게 쌓였다.

 반대편에는 카즈벡 산(Mt. Kazbek)’이 있다. 하지만 구름을 뒤집어쓴 채 속살 보여주길 거부한다. 그렇다고 트레킹까지 마다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민둥산을 오르고 있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는 걸 보면 말이다. 택시기사의 말로는 8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설마 Altihut, Bethlemihut(METEO)를 거쳐 카즈벡산 정상까지 다녀온다는 것은 아니겠지? 아무튼 트레킹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도 구해주지 않는다니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챙길 수밖에 없을 듯... 참고로 카즈벡 산은 조지아인들에게 성산(聖山)과 같은 존재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와도 연결된다. 제우스에게 벌을 받아 프로메테우스가 묶였다는, 지구를 받치고 있는 바위산이 카즈벡 산이라는 것이다. 제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프로메테우스에게 독수리가 간을 쪼게 하는 무서운 형벌을 내린다. 낮에 길어난 간은 밤마다 독수리에게 쪼여 먹혔고, 이런 고통은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사슬을 풀어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아손과 아르곤 원정대라는 또 다른 신화와도 관련이 있다. 아르곤이 황금양털을 취하러 찾아간 세상의 동쪽 끝이기도 하다.

 조망을 즐긴 다음 교회 아래에 있는 다른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택시를 타고 갔음은 물론이다.

 주차장에는 기념품판매점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지만 문은 열고 있지 않았다.

 일단은 주차장 뒤에 있는 언덕부터 올라보기로 했다. 꽤 많은 젊은이들이 서성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꼭대기에는 망원경까지 만들어놓았다. 뭔가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내 예상은 적중했다.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먼저 교회 쪽부터 눈에 담는다. 오른쪽 포장길은 교회로 올라가는 길. 왼쪽의 오솔길은 트레커들이 게르게티 마을에서 올라오는 산길일 것이다. 성질 급한 사람들도 꽤 되는 듯 교회로 곧장 올라다는 샛길도 눈에 띈다.

 푸른 언덕 위에 우직하게 서 있는 교회는 고풍스러운 자태가 돋보인다. 14세기에 건립된 이 교회는 조지아 케비(Khevy) 지방에서 교차식 돔 지붕 형식을 띠는 유일한 종교 건축물이란다. 본당을 포함해 종탑, 성직자들이 거주하던 건물들로 구성된 작은 복합단지를 이루고 있다. 워낙 높고 험준한 산세에 자리한 덕분에, 국가 재난 시 성 니노의 십자가를 비롯한 조지아정교회의 주요 성물들을 므츠헤타(Mtskheta)로부터 피신시키는 성소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구름 속에 갇혀있던 카즈벡 산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코카서스 산맥에서 일곱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첫 번째가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스(Elbrus : 5,642m). 조지아에서는 시카라(Shkhara : 5,193m)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수년 전까지 융가(Janga : 5,051m)가 두 번째였으나 2019년 조지아 정부의 실측 결과 5,053m로 밝혀져 순서가 바뀌었다. 카즈벡의 뜻은 그루지아어로 ‘Glacier Peak’ 또는 ‘Freezing Cold Peak’를 의미한다. ‘얼음산이나 만년설산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반대편에는 샤니 산이 있다. 조지아의 산간지역. ‘카프카스 산맥에 속하는 산봉우리들은 평균 높이가 4,600m를 넘길 정도로 높다. 때문에 항상 운무가 잔뜩 끼어있어 평상시 산봉우리를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샤니 산은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행운이라 하겠다.

 이제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교회로 올라가 볼 차례이다. 조지아 여행의 필수 코스이자 하이라이트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주차장에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담벼락은 투박하면서도 우람한 것이 영락없는 성벽이다. 맞다. 오스만투르크 전성기와 맞물린 14세기에 건립된 이 교회는 종교적 기능 말고도, 외세의 침입을 막는 요새의 역할까지 수행했다고 한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즈벡의 산자락에 교회를 지어놓고, 전쟁 때는 이곳으로 들어가 외적과 맞섰단다.

 교회는 돔이 있는 십자가 모양의 정사각형 건물이다. 이 교회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건축물의 아름다운 조화가 특징으로 꼽힌다. 한쪽을 바라보면 하늘 높이 솟은 카즈벡 산이 펼쳐지고, 또 다른 한쪽에는 보석처럼 알알이 박힌 카즈베기 마을의 전경이 품 안에 들어온다. 하늘과 맞닿은 산봉우리에 걸터앉은 교회도 빼놓을 수 없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을 풍경들이다.

 교회 건물은 남쪽과 서쪽에 출입문이 있다. 아래 사진은 서쪽 출입으로, 문 주위에 부조로 새겨진 화려한 장식이 있다. 하나 더. 교회의 출입문은 무척 작았다. 종탑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유사시 문을 폐쇄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아보려는 지혜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출입문 위쪽 벽에도 여러 장식이 있다. 부조로 새겨진 자그마한 십자가가 있고, 이 십자가에 매달 듯이 아치형 장식이 있는 좁고 긴 창문을 내놓았다.

 돔 아래의 톨로베이트(Tholobate : 돔이 세워진 건물의 직립 부분)에 좁고 긴 창들이 있다. 이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은은하게 실내를 비춘다.

 동쪽 벽면은 장식이 좀 복잡하다. 화려하게 장식된 사각형 틀이 있는 좁고 기다란 창을 냈다. 그 위에 커다란 십자가가 있는데, 이게 쉽게 볼 수 없는 십자가 형태다. 십자가 교차점의 네 구석에 정사각형 장식이 하나씩 붙어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형태의 십자가를 쿼드레이트 크로스(Quadrate Cross)’라고 했다. 마태(Matthew), 마가(Mark), 누가(Luke), 요한(John)  4대 복음이 이 땅의 사방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나?

 그밖에도 낙서에 가까운 부조들이 눈에 띈다. 인간, 동물, 십자가 등 다양한 형상을 보여준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다. 조지아 국민들이 정신적 고향으로 여긴다는 교회는 14세기 이후 한 번도 예배를 멈춘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선지 제약도 많았다. 민소매나 미니스커트, 반바지, 모자를 입거나 쓰지 못하는 것은 기본. 사진도 찍지 말란다. 인터넷에서 주워 모은 사진들로 내부를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내부 사진은 인터넷에서 얻어왔다). 동쪽 제대 앞에 있는 이코노스타시스(ikonostasis, ‘이콘을 거는 칸막이라는 뜻,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는 칸막이로 여기에 이콘을 건다)가 눈에 띈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의 위쪽에 십자가를 들고 승천하는 예수를 하느님이 맞이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문에서도 가브리엘이 성모에게 예수를 가지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수태고지와 복음사가들이 예수의 생애와 말씀을 기록하는 장면들을 살펴볼 수 있다.

 성당의 돔. 화려하게 치장된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그림이나 장식이 전혀 없다. 돔은 열 개의 창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다섯 개는 벽으로 나머지 다섯 개는 유리창으로 되어 있다. 그 유리창을 통해 성당 안으로 빛이 들어오게 설계되었다.

 반면에 벽면은 성화들로 가득했다. 예수 그리스도, 성모자, 천사, 12사도 등등... 화풍이 같지 않은 것은 이들 성화의 만들어진 시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콘 앞에는 염원이 담긴 촛불이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성화 앞에서 십자 성호를 긋고 촛불을 밝히는 신자들도 눈에 띈다.

 밖으로 빠져나오니 또 다른 문이 보인다. 남쪽 출입문인 모양이다.

 암굴처럼 생긴 공간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이콘이 걸려 있었다. 이쯤에서 궁금증 하나. 교회 천정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디 있을까? 국가 재난 때 옮겨 온 보물들을 숨겨두던 비밀의 방이 교회 천정에 있다고 했는데...

 종탑은 교회 건물의 남쪽에 있다. 초기 교회의 부속 건물이나 본관보다는 약간 늦게 지어졌다고 한다. 종탑은 2층으로 되어 있다. 아래층은 사각형으로 문이 동쪽으로 나 있다. 위층은 6각형으로 6개의 창을 가지고 있다.

 민둥산의 꼭대기에 걸터앉은 교회는 시야를 막는 게 없다. 때문에 멈추는 곳마다 최고의 전망대가 된다.

 멍때리기 삼매경인 젊은이들이 부럽다. 그리고 하나라도 더 보고 싶어 한시도 멈추지 못하는 내 자신을 돌아본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흔적까지도 지워버리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내가 꿈꾸고 있는 세계일주도 하나의 집착일 수밖에 없겠다.

 이때 어렴풋이나마 카즈벡 산이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이게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카즈벡 산을 코카서스산맥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꼽고 있었다. 하나 더. 카즈베기는 평범한 사람을 사진작가로 만들어주는 곳이라고 했다. 카메라를 어디다 들이대도 작품이 된단다. 흔히 말하는 인생샷을 건져올 수 있는 곳이다. 스위스 알프스나 네팔 히말라야를 다녀온 사람들이 그 이상으로 꼽는 곳이 바로 카즈베기라면 대충 짐작이 갈지 모르겠다.

 교회 뜨락에는 아예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마을도 마을이지만 그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고산준봉들이 하얀 눈을 뒤집어쓴 채 멋진 풍경화 한 폭을 그려낸다.

 발아래로 카즈베기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정식 이름은 스테판 츠민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카즈베기로 더 익숙하다. 눈에 들어오는 마을은 제법 컸다. 맞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저 하나의 마을이던 곳이 이제는 게스트하우스와 호텔이 있고, 여름이면 버스를 타고 오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거대한 마을로 성장했단다. 관광객들에게는 트래킹과 산악자전거 타기를 위한 최고의 기지가 되어준다고 했다.

 1921년부터 2007년까지의 공식 지명이었던 카즈베기(Kazbegi)’는 이 지역 출신의 작가이자 농민가수였던 알렉산더 카즈베기(Alexander Kazbegi)’라는 원주민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했다. 마을에는 이 사람의 동상도 있단다. 현재 지명인 스테판 츠민다(Stepantsminda)’ 성스러운 스테판(Saint Stephan)’이라는 의미로 조지아정교회 수도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단다.

 집사람 눈높이에도 최고의 여행지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만세 삼창으로도 모자라 승리의 ‘V’자를 두 개나 더했다. 맞다. ‘카즈벡 산이 있는 북동부 코카서스 지역은 조지아 여행이 완성되는 곳이다. 만약 조지아에 왔다 가면서 카즈벡 산에 와보지 않으면 조지아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고 했다. 조지아인들은 유럽의 기원은 조지아다라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드는 것 중의 하나가 와인이 조지아에서 발원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그리스·로마 신화의 원천이 코카서스라는 것이다. 이곳 카즈벡 산은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묶여 있던 바고 그 산이다.



서해랑길 60코스(대천해수욕장  깊은골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4. 10. 12()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신흑동·남곡동·대천동 및 주교면·오천면 일원

여행코스 : 대천해변대천항대천천 노둣길대천방조제안산마을사당골토정묘역깊은골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7.2km, 실제는 사당골까지 14.63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0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3(전체 5)로 분류되나, 평지라서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들머리는 대천해수욕장(충남 보령시 신흑동)

서해안고속도로 대천 IC에서 내려와 36번 국도를 타고 대천해수욕장으로 들어오면 된다. 매년 열리는 보령 머드축제의 주 무대이자, 본격적인 휴가철에는 야간에도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즐기자 밤바다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패들보드, 수상 징검다리 등 다양한 미니게임이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단다.

 서해랑길(보령 60코스) 안내도는 머드광장의 바닷가 바다의 여인 조형물 옆에 세워져 있다.

 대천해수욕장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보령화력 입구(오천면 오포리)’까지 가는 17.2km짜리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대천해수욕장, 토정묘역 등이 꼽힌다. 하나 더, 물때를 못 맞춰 대천천의 노둣길을 못 건널 경우, ‘쇳개포구의 인도교까지 6km 이상을 더 걸어야만 한다.

 10 : 13. 해수욕장과 상가 사이로 난 도로(해수욕장10)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바닷가 해송 숲을 따라갈 수도 있다. 조금 구불대기는 해도, 하트모양의 예쁜 통로 등 눈에 담을만한 조형물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어 걷기 여행자들에게 더 선호되는 코스다. 솔숲 사이로 내다보이는 서해바다는 덤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삽시도(揷矢島)도 눈에 담을 수 있다. 화살()을 꽂아놓은() 활처럼 생겼다는 섬이다.

 10 : 22. 잠시 후 분수광장에 이른다. 노을광장, 머드광장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의 핵심을 이루는 광장 중 하나로 다양한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어 개성 넘치는 사진을 찍기에 딱 좋다. 여름철에는 음악분수가 운영되는데, 저녁이면 현란한 조명까지 가미된단다.

 로봇을 닮은 우체동은 커도 너무 크다. 간절곶의 우체통보다도 더 크다나? ‘감성이란 이름표까지 달았는데, 거짓말 좀 보태 원룸으로 개조하면 사람이 살아갈 수도 있겠다.

 10 : 24. 집트랙(Zip Trek) 탑승장. 바다로 돌진하는 듯한 오싹한 설렘을 선사해주는 집트랙은 액티비티 스포츠. 하지만 갈 길 바쁜 걷기 여행자들은 그저 눈으로 즐길 수밖에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트레킹을 마치려면 말이다.

 서해랑길은 바닷가를 따라 계속 직진한다. 스카이바이크 궤도와 함께 가는 멋진 구간이다. 대천해수욕장과 대천항을 오가는 전국 최초의 해상 레일 바이크로, 수면에서 8-15m 높이에 선로를 달아 바닷길을 달리게 했다.

 스카이 레일 위를 씽씽 달려가는 바이크, 40분간 2.3km를 왕복 운행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쌍쌍이다. 고로 스카이바이크는 연인끼리 즐기기에 딱 좋은 레저이다.

 집트랙은 왜 싱글을 고집했을까? 커플로 타는 곳도 있던데 말이다. 하나 더. 요 아래로는 보령 해저터널이 지나간다. 원산도까지 6,927m로 우리나라에서 가징 긴 해저터널이다. 원산도에서 안면도까지는 다리로 연결된다.

 아무튼 난 집트랙 탑승장에서 바닷가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천항로를 따르는 지름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아니 고갯마루에 있는 김성우장군전첩사적비(金成雨將軍 戰捷史蹟碑)’를 만나고 싶었다는 것이 더 옳겠다.

 10 : 27. 김성우(金成雨, 1327~1392)는 고려 말 전라우도 도만호로 보령지역을 황폐화시킨 왜구를 격퇴한 무장이다.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충청남도 보령에 사패지(賜牌地)를 하사 받아 광산김씨 입향 시조가 되었다. 이후 초토영전사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보령으로 돌아와 살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정에서 부르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거절하고 자결하였다. 김성우를 도운 신마가 나온 옥마봉, 보검이 나온 비도, 김성우의 군사가 들어온 군입포, 병사를 매복시킨 매복 등 김성우의 행적과 관련된 지명들이 아직까지 보령 곳곳에 남아있다. 보령을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대천항로는 고개를 넘어 대천항으로 이어준다. 곧장 직진하면 유람선 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10 : 34. 꽃게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사거리(이정표 : 종점 15.6km/ 시점 1.6km)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대천항4을 따라 동진한다.

 도중에 대천항연안여객선터미널 대천항을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하도 여러 번 들렀던 곳인지라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10 : 52. 강당마을. 신흑동(新黑洞) 최북단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앞바다에 조개··소라 등 해산물이 풍부하여 옛날부터 군마루·절굴·거먹개 사람들이 넘어와 해산물을 잡아가고는 했단다. 현재도 김 양식 등 수산업에 종사하는 집이 많다고 한다.

 바닷가 외딴 마을은 현재 통나무 펜션단지로 변신해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지어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단다. 해안도로변에 위치해 아름다운 바다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계속해서 해안로를 따른다. 아니 도로변을 따라 내놓은 자전거길을 따라간다.

 이때 대천천의 하구역 풍경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로 지금은 육지로 변해버린 송도(松島)’ 보령화력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11 : 06. 같은 신흑동인 군헌(軍軒)마을에는 어촌유치(귀어) 체험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농어촌 공동화(空洞化)’가 사회문제가 되어버린 요즘. ()라고 해도 바닷가 외진 마을은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추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체험장 옆 데크 전망대. 망원경 말고도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한 줄기 쇠줄로 얼굴을 그린 조형물도 배치했다. 덕분에 밋밋할 수도 있는 해변 길이 감상의 포인트가 됐다. 분명 인위(人爲)인데도 배경으로 삼은 자연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대천방조제와 보령화력발전소는 물론이고 죽도와 송도, 원산도 등 주변의 섬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눈만 좀 크게 뜨면 원산·안면대교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대천천의 하구역이 놓여있다. 대천방조제가 서해안고속도로의 대천2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탐방로는 이제 대천천(大川川)’을 거슬러 올라간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의 거대한 교각을 앞에 두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넝쿨장미로 치장된 터널을 지나기도 한다. 꽃이라도 필라치면 꽃 대궐에서 노니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겠다.

 오월의 장미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10. 장미가 있을 리가 없다. 대신 송엽국(松葉菊)’이 만발해 있었다. 솔잎과 닮은 잎에 국화를 닮은 꽃이 핀다는 상록 식물이다. 잎 모양과 무리 지어 피는 모습이 채송화와 비슷해 사철채송화라고도 한다.

 11 : 20. ‘밤골마을 해변은 해수욕장이 부럽지 않은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보령지역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해안 곳곳에 사빈이 잘 발달되어있는 현상 말이다. 그 대부분은 해수욕장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은 대천해수욕장과 가깝다보니 그냥 방치하고 있지 않나 싶다.

 남곡동(藍谷洞)’에 속한 자연부락인 밤골에는 리조트와 펜션, 카페, 음식점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유원지 수준이라고나 할까? 하긴 뻥 뚫린 시야로도 모자라 새하얀 모래사장까지 끼고 있으니 어찌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동화나라에서나 볼 법한 집도 눈에 띈다. 하지만 스머프가 이사를 가버렸는지 새로운 주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골마을 앞바다. 해망산 갯벌도 일반인에게는 금단의 땅인 모양이다. 어촌계에서 바지락 양식을 하고 있으니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단다. 저 벤치에 앉아 조개 캐는 주민들의 뒷모습이나 구경하다 가라는 모양이다.

 11 : 30  11 : 40. 이곳에는 자전거 라이더들을 위한 휴게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덕분에 벤치에 않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또 다른 스머프네 집. 노을이 곱다고 알려진 ‘357카페라는데, 이곳 역시 영업은 하고 있지 않는 듯 했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11 : 46. 내항동(內項洞)의 왕대골. 왕대산(王臺山, 122.7m) 자락의 마을인데, ‘밤골처럼 리조트와 음식점이 여럿 들어서 있다. 숫자는 작아도 규모는 밤골보다 훨씬 더 크다. ! 왕대산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천년사직을 넘기고 돌아오다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때 느닷없는 간판 하나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のや라는 일본어 간판만 내걸려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저걸 토모노야로 읽고 있었다. ‘친구며···’라는 뜻이라나? 건물의 외벽도 검정과 흰색이 대비되며 일본 전통 건축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일본인들의 전용 호텔인가? 아니면 일본인이 운영하는 숙소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썩 흔치않은 풍경인데다, 얼마 전 광복절날 일장기를 내걸었던 지역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기에 심사는 편치 않았다.

 11 : 52. 서해랑길은 서해안고속도로의 대천2 앞에서 일단 멈춘다. 그리고는 잠수교(‘노둣길이라 부르기도 한다)를 이용해 대천천을 건넌다. 초입에 이정표(종점 9.8km/ 시점 7.4km)가 세워져 있다.

 초입에 만조(滿潮) 때는 우회도로를 이용하라는 안내판이 걸려있었다. 대천천을 따라 대천3동까지 올라가 대천천 인도교를 건넌 다음, ‘대천1에서 대천천의 제방을 걸어 저 건너(잠수교 북단)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6.1km나 더 걸어야 한다니 서해랑길 60코스는 때를 잘 맞추어 걷는 게 필수라 하겠다.

 잠수교는 영농철 농기계의 통행을 위해 개설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모든 차량의 통행을 금지한다는 경고판까지 입구에 붙여놓았다. 하지만 많은 차량들이 잠수교를 오가고 있었다. 덕분에 차량을 만날 때마다 다리 난간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켜 설 수밖에 없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 따깨비는 이 다리가 심심찮게 바닷물에 잠긴다는 증거다.

 ! 소라가 가득담긴 그물망이 바닷물에 잠겨있는 게 아닌가. 마침맞게 주위에는 사람도 없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했는데, 저걸 가져다가 산악회에 부탁해 삶아달라고 해?

 대천천 하구역(河口域). ‘대천천(大川川)’은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에서 시작하여 궁촌동을 거쳐 서해로 흘러드는 길이 13.8km의 지방하천이다. 보령지역의 옛 이름 중 하나인 큰내(한내)’를 한자로 고치면서 대천천이 됐다. 하천은 크게 2개의 지류가 있는데, 한 지류는 오서산(烏棲山) 동남쪽에서 발원하고, 다른 한 지류는 성주산(聖住山) 줄기인 성태산(星台山)과 백월산(白月山)에서 발원하여 흐른다.

 뒤돌아 본 잠수교. 그 뒤에는 아까 본 왕대산 말고도 해망산(海望山, 114.3m)’이 있다. 고려 말, 도만호(都萬戶) 김성우 장군이 병사로 하여금 왜구의 동태를 감시하게 했다는 산이다.

 11 : 59. 잠수교 북단(이정표 : 종점까지 9.4km)에 올라선 다음부터는 대천방조제의 제방을 따라간다. 둑 위에 우레탄을 깐 탐방로를 곱게 내놓았다. 참고로 대천1동에서 시작되는 대천방조제는 대천2동과 주교면의 주교리(舟橋里) 및 은포리(隱浦里)를 거쳐 같은 주교면의 송학리(松鶴里)까지 이어진다. 길이 6.2km 1952년에 착공하여 1960년에 준공되었다.

 둑길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왼쪽으로는 대천천의 하구역이 드넓게 펼쳐진다. 한껏 등치를 부풀린 물줄기를 서해바다가 집어삼켜버리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제방에 쌓아놓은 저 돌탑들은 대체 누구의 작품일까? 50m쯤 되는 간격으로 줄지어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공들여 쌓은 흔적이 역력했다.

 오른쪽으로는 봉당천 신대천 하구를 막아 조성한 거대한 간척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 뒤에서 솟아오른 봉대산(烽臺山, 233.3m)’은 동쪽으로 뻗어 태봉산(240m)’을 솟구친다. 군사시설인 봉수대 및 아현산성(我峴山城)을 각각 품고 있는 산들이다.

 12 : 16. 방파제가 90도에 가깝게 휜다. 대천1동과 송학리를 잇는 대천방조제는 이렇듯 중간쯤에서 크게 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농토를 만들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의 결과일 것이다. 하나 더. ‘대천동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주교면(보령시)’에 바톤을 넘겨준다.

 이곳은 대천천의 하구역이 거침없이 폭을 넓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륙을 휘젓고 내려온 냇물은 이곳에서 드넓은 바다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저 강태공들은 대체 뭘 잡고 있을까? 낚싯대는 망둥어 낚기에도 부담스러워 보이는데...

 이 뭣꼬?’ 스님의 화두가 아니라 도로변에 적치되어 있는 저 통들의 정체가 궁금해서 게시해봤다.

 코너를 돌아서자 해안도로에 꽤 많은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다. 화장실까지 갖춘 공영주차장이 마련되어있는가 하면 둑에는 무선방송장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 주교마을(허락 없이 갯벌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판을 세워놓았다)에서 뭔가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도로변에 조성된 공영주차장. 차선을 하나 더 만든 다음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을 만들어놓았다.

 반대편에는 바다를 향해 길게 줄을 매어놓았다. ‘해루질 나가는 누군가를 위한 안전시설이다. 둑 위의 방송장비 또한 저들을 위해 설치했다. 조개채취 중 방향을 잃는 갯벌 고립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하기 때문이란다.

 갯벌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조개를 캐고 있었다. ‘해루질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야외활동 중 하나로 꼽힌다. 거기다 조개까지 얻을 수 있으니 숫제 꿩 먹고 알 먹고이다. 하지만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물때와 지형을 미리 확인하고 안전장비를 착용하는 등 안전수칙을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방조제는 이후로도 꽤 오래 이어진다. 하지만 하늘거리는 억새꽃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12 : 42. 대천방조제는 주교배수갑문에서 끝을 맺는다. 둑길에서 내려선 탐방로는 대천방조제2를 건너 송학리로 들어간다.

 12 : 45. 다리를 건너 현장마을(버스정류장의 이름표)’로 올라선다. 송학리(3)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바지락마을이란다. 아니 황금이란 최상의 서술어까지 덧붙였다. 대체 바지락이 얼마나 많이 널려있기에 저런 표현까지 쓸 수 있을까?

 송학항도 이제껏 보아온 다른 포구들처럼 텅 비어있었다. 안내판에 그려진 배들은 마을 어디쯤에선가 출어의 날만 기다리고 있겠지? 경운기 꼬랑지에 매달려서...

 선착장 옆으로 나있는 갯길이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머드 맥스라고 일컬어지는 경운기의 행렬이 펼쳐지는 곳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버스정류장에서 그 사진을 볼 수 있다.

 계속해서 대천방조제로를 따라간다. 방조제의 둑길 구간이 끝났는데도 도로는 아직까지 같은 이름표를 달고 있다. 아무튼 좁고 긴 백사장을 옆구리에 끼고 가는 멋진 구간이다.

 이때 죽도(竹島)’가 눈에 들어온다. 시쳇말로 주먹만큼이나 작은 섬인데, 옛날엔 저 섬이 대나무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12 : 53. ‘송학2에 이른다. 마을 표지석은 이곳을 안산고내라고 적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밖산고내가 나온단다. ‘고내라는 마을이 안산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누어져 있는 모양이다.

 이 마을 갯벌도 귀어·학습 체험장을 열고 있었다. 허락받지 않은 사람들이 갯벌에 들어갈 수 없음은 물론이다. ! 이곳 송학리는 조선시대부터 바지락 양식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지금도 매년 5천 톤씩이나 생산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만큼이나 뛰어난 양식기술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품질 좋은 바지락을 시중에 내놓고 있단다.

 버스정류장을 치장하고 있는 사진이 눈길을 끈다. 한국관광공사의 홍보 영상 머드 맥스(Mad Max)’를 연상시키는 갯벌을 질주하는 경운기들의 행렬이다. 사진은 주민들이 갯벌에서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을 담았는데, 이게 광활한 갯벌과 어우러지며 자못 비장감까지 불러일으킨다.

 13 : 03. 잠시 후 도착한 ‘(안산·고내)버스정류장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서해랑길이 도로를 벗어나 마을길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마을안길은 누빈 다음 안산마을에서 다시 도로(대천방조제로)로 나온다. 오가는 자동차를 피할만한 공간(갓길)이 없는 협소한 도로를 피해 일부러 에둘러놓지 않았나 싶다.

 13 : 06  13 : 19. 우리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한 채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그 위험에 대한 보상은 컸다. ‘산고래 하늘공원이라는 멋진 공간을 만났기 때문이다. ‘산고내(散古乃)’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뼈를 상했을 때 약재로 쓰는 돌(산골)이 채취된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엉덩이 대기가 부끄러울 만큼 예쁜 의자. 공원은 정자에 벤치는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우린 10분 정도를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조망도 자랑거리라고 했다. 맑은 날에는 효자도, 삽시도, 원산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단다. 그래선지 바다 쪽으로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난간에 서자 죽도가 성큼 다가온다. 고려청자가 발견된 해저유물 매장해역(사적 제321)’의 중심에 놓여있는 섬이다.

 1983년경 고려청자 등의 유물이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1987년 수중발굴조사를 진행 32점의 상감청자를 비롯한 100여 점의 청자류를 수습했다. 13세기 또는 14세기, 전남 강진(대구면)이나 전북 부안(보안면)의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배로 운반하던 도중 이 부근에서 배가 난파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보령발전본부를 당겨봤다. 보령지역의 발전소에서 전국전기생산량의 7.3%를 만들어내고 있단다.

 13 : 27.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오가는 차량을 주의해가며 10분 정도를 걸어 안산마을에 이른다. 그리고 마을안길로 에돌아 온 서해랑길을 다시 만났다.

 13 : 30. 잠시 후, 서해랑길이 또 다시 도로(대천방조제로)와 헤어지란다. 이번에도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예쁜 풍경을 보여주는 기존의 탐방로를 따를 것을 권한다.

 탐방로는 해안길을 따라간다. 오른편의 농경지가 갯벌보다 낮으니 방조제의 둑길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해안길 구간은 잠깐이면 끝난다. 하지만 보여주는 풍광만큼은 만만치 않았다. 고운 모래사장이 발아래 놓여있고, 그 너머로는 검붉은 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13 : 33. 잠시 후, 탐방로는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파고든다. 또 다른 마을을 에돌아가는 길이다.

 볼거리도 그렇다고 이야깃거리도 없는 마을길이 싫은 우리는 논두렁을 이용해 자 형의 구간을 단축하기도 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송학천을 가로막은 방조제가 나타난다. 이 둑을 쌓음으로써 안쪽에 상당히 너른 간척지가 만들어졌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오던 고정리 주민들에게 넉넉함을 가져다 준 풍요의 상징이다.

 송학천 배수갑문의 밖. 즉 송학천의 하구역이었음직 한 갯벌에는 작은 포구가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충남의 바닷가에서 만났던 여느 포구들과는 달리 꽤 많은 배들이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다. 배를 올려둘만 한 공터가 없었나?

 13 : 40. 제방 끝에서 610번 지방도를 만났다. ‘토정로라는 이름이 토정 이지함 선생의 고향으로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사당골(고정2)’이 반긴다. 법정 동리인 고정리(高亭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사당골이란 한산 이씨 사당(祠堂)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래선지 마을 입구에 찬성공파(贊成公派)의 사당(高巒齋) 말고도 조상의 묘갈(墓碣)과 신도비(神道碑)가 즐비했다.

 13 : 46. ‘신보령발전본부 입구(화력발전소 폐기물처리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松島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초입에 위치한 보령시민체육공원 주차장에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종점인 깊은골에 주차 공간(점심상을 차릴 수 있는)이 없는 탓에 이곳에서 식사를 한 다음 잔여 구간은 버스로 이동하겠단다.

 종점으로 가는 도중 들른 토정선생 묘역’. 국수봉(187m)의 남쪽 산자락에 들어선 묘역에는 선생과 형제, ·비속 등 14기의 묘가 모셔져 있다. 선생의 학문과 전해지는 기이한 일화들로 인해 명당자리로 인식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단다.

 선생은 생전에 미리 를 정해두었다고 한다. 모친상을 당해 형제분들과 함께 선영의 묘를 이장할 자리를 찾다가 이곳이 명당임을 알았다나? ‘토정비결(土亭秘訣)’까지 지은 현인이니 어련하겠는가.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정초가 되면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낡은 토정비결을 펼쳐들고 저마다의 괘를 뽑아보면서 한 해의 길흉을 점쳤다. 누군가 좋은 점괘가 나오면 함께 기뻐했고 나쁜 점괘가 나오면 서로 격려하면서 새해의 첫날을 보냈다. 그 시절 토정비결은 힘겹게 살아가던 서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던 비밀의 열쇠였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조선중기 학자로 천문·지리·의약 등에 능통하였으며,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평생을 방랑하다 1573(선조6) 56세에 도덕과 학문이 뛰어난 선비로 추천되어 포천현감으로 백성의 가난해결을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지어 빈민구제에 힘썼다고 한다. 1713(숙종39)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한 곳에 얽매이거나 구속되는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남긴 대인설에 걸맞는 삶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안으로는 똑똑하고 강하기를, 밖으로는 귀하기를 바란다.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고, 욕심내지 않는 것보다 부유한 것이 없으며,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은 없고, 알지 못하는 것보다 똑똑한 것은 없다. 알지 못하면서 똑똑하고, 다투지 않으면서 강하고, 욕심내지 않으면서 부유하고, 벼슬하지 않으면서 존귀한 것은 실로 대인만이 할 수 있다>

 넓적바위(簿石). 연당자락 바닷가에 놓여 솔섬목을 오가던 사람들의 쉼터로 사용되던 바위였으나, 토정선생이 타고 다니던 돌배라는 설이 있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돌의 존재로 인해 항해의 영웅이라는 설화 속 선생의 또 다른 인물상이 생겨났다나?

 고개를 넘어온 탐방로는 보령화력발전소 입구에 있는 깊은골 버스정류장 앞에서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보령 61코스) 안내판은 버스정류장 곁에 세워져있다. 오늘은 본의 아니게 종점에서 1.7km 정도 못 미친 사당골에서 트레킹을 마쳤다. 그래선지 gpx트랙에 14.63km 3시간 20분에 걸었다고 나타난다.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하루 세끼를 차려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야외활동까지 함께 해주는 집사람. 이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현대는 무목적·무감동·무책임·무관심이라는 ‘4()’ 병이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건 무관심일 것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고 했다. 아름다움의 반대도 추함이 아닌 무관심이란다. 그러니 나에게 집사랑은 사랑이자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안동선비순례길 5코스(왕모산성길)

 

여행일 : ‘24. 10. 5()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가송마을 버스정류장고산정맹개마을백운지단천교(실제 출발지)항골 입구칼선대왕모당원천교(거리/시간 : 12km, 실제는 4.95km 2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가송마을 버스정류장(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로 영주까지 옵니다. 가흥교차로에서 36번 국도(봉화방면으로 19km), 금봉교차로에서 918번 지방도(청량산방면으로 15km), 도천삼거리에서 35번 국도로 옮겨 11km쯤 내려오면 가송리(佳松里)‘에 이르게 됩니다.

 고산정에서 낙동강을 따라 내살미 마을까지 내려가는 12km짜리 여정이랍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 낙동강은 왕모산을 넘지 못했고, 강을 건너지 못한 주변 산줄기들은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면서 맹개마을·단사마을 등 곳곳에 기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왕모산성길은 이런 기이한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걷는 여정이랍니다.

 차에서 내리자 강 건너에 위치한 고산정(孤山亭)’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옵니다.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의 단애 아래에 터를 잡았습니다. ‘금남수처럼 유유자적하기에 딱 좋은 자리라고나 할까요? 저곳은 최고 시청률 18.1%를 기록한 이병헌·김태리 주연의 24부작 tvN드라마 미스터션샤인(2018)’의 촬영지이기도 하답니다. 주인공 애신(김태리 분)과 유진(이병헌 분)이 배를 타고 오가던 아름다운 나루터 장면이 바로 고산정의 전경이랍니다.

 고산정은 정유재란 때 안동 수성장(守城將)으로 활약하여 좌승지에 증직된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지은 정자입니다. 금난수는 이황(李滉)의 제자로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는 데 힘썼으며, 1561(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봉화현감 등을 지냈습니다. 35세 때. 당시 선성현(宣城縣, 예안현의 별칭) 제일의 명승이던 가송협(佳松峽)에 고산정을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한 채 유유자적하였다는 선비입니다.

 삼 칸 겹집의 팔작지붕인데 3m 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자연석을 가공 없이 주춧돌로 사용)를 놓고 기둥을 세웠습니다. 조선시대 정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더군요.

 낙동강의 상류인 가송협의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고산(孤山)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룹니다. 그 아름다움에 푹 빠진 퇴계선생이 문인들과 함께 여러 차례 찾아와 영시유상(詠詩遊賞)을 즐겼다더군요.

 이 일대는 도산구곡  8곡인 고산곡(孤山曲)입니다. 협곡 모양새를 보여 가송협(佳松峽)’으로도 불린답니다. 고산정 주인장 금난수의 봉화금씨(奉化琴氏)’ 세거지인데, 퇴계의 후손인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 1755-1831) 도산구곡가에서 <팔곡이라 옥거울 같은 물가에 홀로 선 산(八曲山孤玉鏡開)/ 또렷또렷한 심법이 이 물가에 맴도는구나(惺惺心法此沿洄)>라며 그 아름다움을 읊었습니다.

 5코스(왕모산성길) 고산정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대형버스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마을 앞 버스정류장에서 종암종택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잠수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하나 더. 우리 부부는 다리를 건너는 대신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이육사문학관으로 이동합니다. 2주 전의 4코스(퇴계예던길)에 불참해서 3코스(청포도길)의 후반부를 못 걸었었거든요, 그 구간을 마치면 5코스의 중간쯤인 단천교에 이르기 때문에 5코스의 전반부는 답사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별 수 없이 몽중루 작가님과 허총무님 등 다른 도반들의 사진과 얘기를 종합해 빠뜨린 구간을 완성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가송리(佳松里)의 또 다른 자연부락. 이곳에서 왼쪽으로 400m쯤 올라가면 5코스(왕모산성길)‘가 시작되는 고산정입니다. 하지만 5코스의 잔여 구간이 오른쪽으로 나있으니 고산정을 둘러본 다음 되돌아와야 하겠지요?

 이후부터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갑니다. 고산구곡 중 고산곡을 이웃하며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구간이지요. 그런 길을 400m남짓 걸으면 월명정이란 정자가 나옵니다. 2020년에 지은 정자인데, 월명담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곳이라는 뜻이겠지요.

 이정표(칼선대 9.7km/ 고산정 0.8km)가 가리키는 칼선대 방향, 그러니까 낙동강의 강변으로 내려섭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深淵), 월명담(또는 월명소)은 그 푸른 색깔에서 조차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월명담 뒤의 저 절벽으로 길이 나있다는 점입니다.

 월명담(月明潭). 강물이 산줄기에 막혀 자 형태로 돌면서 벼랑 아래에 깊은 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보름달이 밝게 비춘다고 해서 월명담·월명소·월명당이라 했다나요? 용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가뭄이 들면 고을 수령이 기우제를 올렸다고 전해옵니다.

 월명담은 낙동강 상류의 명승 중 하나로 꼽히는데, 퇴계는 달빛 쏟아지는 월명담을 비가 오게 하는 연못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윽한 늪이 있는 골짜기는 수려하고 맑은데(窈然潭洞秀而淸)/ 음침한 그 속엔 나무와 돌로 만든 진혼비가 있다네(陰嘼中藏木石靈)/ 열흘 동안 수심 겨운 여름 장마가 그치고 말끔히 개고(十日愁霖今可霽)/ 석양빛을 안고 집에 돌아와 누우니 달빛이 그윽하다네(抱珠歸臥月冥冥)>

 길은 강가 바위절벽을 따라 나있답니다. 바위절벽인데도 길을 낼만한 공간은 있었나 봅니다. 그렇다고 안전까지 확보할 수는 없었겠지요. 위태위태한 곳이 하도 많아 바윗길이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니까요. 이런 길을 벼룻길이라고 한다나요? 아래가 강가나 바닷가로 통하는 벼랑길을 그렇게 부른다고 하네요. 아무튼 안전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지만 눈의 호사 또한 만만찮은 구간이랍니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일대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는 지형입니다. 때문에 물이 휘돌아나가는 곳마다 수십·수백 길의 단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길을 내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강안(江岸)의 바위절벽에 저렇게 벼룻길을 거쳐 놓았답니다. 치솟은 바위 벼랑을 에돌아가는 길로 딱 한사람이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랍니다.

 이즈음 벽력암(霹靂巖)과 학소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했습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편 절벽이 학소대, 그리고 왼쪽은 벽력암인데 저곳에는 전망대가 있답니다.

 벼룻길이 끝나면 다시 위로 올라가야만 한답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5코스 최고의 전망대 중 하나인 벽력암 전망대를 만나기 위한 수고로움이니 참아야하겠지요?

 벼룻길은 벽력암 위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에서 화룡점점(畵龍點睛)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가 하면, 거기에 강 건너 농암종택이 더해진다고 하네요. 농암종택은 원래 분천마을에 있었습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분천마을이 수몰되면서 저곳으로 옮겨졌다는군요. 그때 다른 곳에 있던 사당과 긍구당(肯構堂)도 함께 옮겨왔으며, 2007년에는 분강서원(汾江書院)도 재이건되었다고 하네요.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었음은 물론이지요.

 농암(聾巖)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호입니다. 연산군 시절 귀양을 갔다가 처형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죽음을 면했고, 중종반정으로 복직한 이후 주로 지방 수령으로 관료생활을 했습니다. 가끔은 중앙보직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지방 수령으로 봉직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는데, 중종 임금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탔는데 고작 화분(花盆) 몇 개와 바둑판 하나가 전부였다는 일화는 나 같은 공직자(은퇴했지만)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농암종택(聾巖宗宅)’. 안채·사랑채·대문채·별채·긍구당·명농당·사당 등 농암선생의 명성만큼이나 거대한 등치를 자랑합니다. 그중에서도 별당인 긍구당(肯構堂)’이 눈길을 끄는군요. 농암이 서경의 한 구절에서 취해서 당호를 지었는데,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훌륭한 업적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오래도록 이어 받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1542년 공직에서 물러날 때 경복궁과 한강의 제천정에서 전별연을 열어주었을 정도로 존경과 신망을 받던 자신을 닮으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이었다니까요.

 분강서원(汾江書院). 1699년에 후손과 사림이 농암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2007년 현재 위치로 이건했는데, 강당(흥교당)과 동·서재 외에도 한속정사의 안채와 바깥채, 농암의 위패를 모신 사당(숭덕사) 등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있습니다. 서원의 왼편에 있는 작은 건물은 농암 신도비입니다. 농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종 20(1566)에 신남리의 농암 묘소 앞에 세웠는데, 2006년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고 합니다. 신도비란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으로 무덤 앞에 있는 게 보통입니다.

 맨 왼쪽에는 애일당(愛日堂)’이 있습니다. 2코스(도산서원길) 답사 때 지도만 보고 잘못 찾아갔던 그 문화재입니다. 아무튼 농암은 1512년 부모를 위해 저 별당을 지었습니다. 분강마을의 집에서 400m쯤 떨어진 곳에 귀먹바위가 있었는데 농암이 이름을 한자로 옮겨 자신의 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계신 나날을 아낀다는 의미의 애일당을 지었습니다. 농암은 1533년에 당시 94세였던 부친을 포함해 9명의 노인을 모시고 저곳에서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를 열었습니다. 농암 자신이 67세의 노인이었는데 더 연로한 분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때때옷을 입고 춤을 췄다고 합니다.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것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강각(江閣)’인데 설명은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벽력암 전망대에서 내려선 길은 맹개마을로 이어집니다. 거칠게 내려오던 강줄기가 학소대를 돌아 완만해지면서 흙을 실어 놓는 곳에 맹개마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이 강 쪽으로 툭 밀려 나온 안쪽은 흡사 육지 속의 섬과도 같습니다. 그곳에 가족펜션인 소목화당(小木花堂)’이 있답니다. 휘돌아가는 낙동강 물길의 안쪽 예쁜 펜션이자, 주인 부부가 공들여 술을 담는 곳이랍니다. ‘진맥소주라는 브랜드의 전통주가 이곳에서 나온다더군요. ! gpx트랙을 살펴보니 월명담에서 맹개마을까지의 거리가 2.5km로 나타나고 있었답니다.

 술도가’. 주인장이 직접 재배한 100% 유기농 통밀로 소주를 만든다고 하네요. 자연 숙성실인 저 토굴로 들어가면 특유의 술 내음과 함께 오크통, 옹기 등에 담긴 술들이 한 눈 가득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진맥(眞麥)’은 밀의 옛말이랍니다. 그러니 진맥소주 맹개술도가에서 만든 소주의 브랜드이자, 유기농 밀로 만든 증류식 소주라는 자랑이기도 합니다. 가장 오래된 조리서로 알려진 수운잡방에 술 빚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 전통이 깊다고 합니다. 53도짜리가 자랑거린데, 미국 샌프란시스코 세계 증류주 대회에서 더블골드를 획득했을 정도라는군요.

 강 건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학소대(鶴巢臺)’라고 합니다. 건지산(577m)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로, 물길이 크게 휘어지는 바깥에 수직의 암벽으로 솟아있습니다. 예로부터 천연기념물인 오학(烏鶴. 먹황새)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살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가로 줄무늬 퇴적층이 선명한 절벽에 학까지 날아들었으니 학소대라는 이름과 꼭 어울립니다.

 경암(景巖). 퇴계는 학소대와 맹개마을 사이에 우뚝 솟은 바위를 경암이라 부르면서 버릇대로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합니다. 거센 물결 속에서도 천년 동안 변함없는 바위를 보면서 말이지요. <격한 물살 천년인들 다할 날 있으련만(激水千年詎有窮)/ 물살 가운데 우뚝 서서 기세를 다투누나(中流屹屹勢爭雄)/ 인생의 발자취란 부평초 줄기 같은지라(人生蹤跡如浮梗)/ 그 누군들 여기 서서 버틸 수 있으랴(立脚誰能似此中)>

 경암은 위가 상처럼 네모지게 평평한 바위입니다. 바위 주위로는 옥색 강물이 흐릅니다. 하지만 몽중루 작가님의 성에는 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특이할 게 없는 외모에 왜소하기까지 해서 퇴계선생님의 풍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맹개마을은 육지 속의 섬 같은 오지입니다. 산태극수태극의 지형이 마을 양옆을 수백 길 단애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농암종가에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네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소목화당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면 차고를 올려 튜닝한 SUV를 끌고 나오거나 트랙터에 손님을 실어 나른답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유인촌장관이 타고 있는 모습도 얼핏 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마저도 안 되면 배로 강을 건너게 해준답니다. 하나 더. 우리 도반(道伴)들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벼룻길을 통해 들어갈 수도 있기는 하답니다.

 맹개마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답니다. 늦은 여름에서 초가을이 특히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마을이 온통 매밀 밭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때쯤이면 하얀 메밀꽃이 소복이 피어나기 때문이랍니다. 그게 세외선경을 보는 듯 하다나? 맹개마을에서는 11월에 밀을 심어 이듬해 7월 수확하고, 밀을 수확한 땅에 메밀을 심어 가을에 수확하고 있다더군요.

 이렇게 고운 곳을 사람들이 그냥 놓아둘 리가 없습니다. 숙박예약이 힘들 정도로 인기랍니다. 하긴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이병헌과 김태리, 예능 인더숲의 세븐틴, 아마존TV ‘버터플라이의 대니얼 대 킴 등도 촬영차 찾았다가 한 눈에 반했다는데 어련하겠습니까.

 백운지로 넘어가는 길도 만만치가 않았던 모양이더군요. 끝없이 이어지는 통나무계단이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확 질려버립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요렇게 위험스런 벼랑길도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농암종택을 통해 맹개마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산자락을 빠져나온 길은 자연스럽게 백운지(白雲池)’로 이어집니다. 맹개마을에서 1.6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또 다른 오지마을이지요. 이곳은 몽중루님의 표현을 잠시 빌리겠습니다. ‘청량산을 내린 낙동강이 도산(陶山)에 이르러 큰 물굽이로 휘돌며 펼치는 작은 들녘 마을이라네요. 제방 따라 늘어선 대추와 밤나무 밭엔 붉은 대추와 알밤들이 툭툭대고, 모래땅 넓은 무밭에는 회전식 스프링클러가 돌며 연신 물을 뿌리고 있더라는 군요.

 백운지의 옛 이름은 백운동(白雲洞). 흰 구름이 넘나들며 청산과 녹수까지 세속의 기운을 넘어서버리게 만든다는 곳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흰 구름 대신 무의 푸른 잎으로 뒤덮여있습니다. <청산과 녹수는 이미 세속의 기운을 넘어섰고(靑山綠水已超氛)/ 그 사이로 희고도 흰 구름이 또 다시 밀려오네(更著中間白白雲)/ 고향의 소리 씻어내고 타고난 성품으로 돌아 가렸더니(爲洗鄕音還本色)/ 지령이 그 뜻을 알고 흔쾌히 허용하더라(地靈應許我知君)>

 백운지에서 1.5km쯤 걸어 나오면 단천교에 이릅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단사와 백운지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제가 5코스의 출발지로 삼은 지점이지요. 그래서 이후부터는 제 사진과 느낌, 기억으로 글을 적어가겠습니다.

 12 : 02. ‘단천교를 건너면서 ‘5코스(왕모산성길)’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단천교 앞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다리를 건너면 ‘5코스(왕모산성길)’, 즉 공민왕 어머니가 피신했다는 왕모산성으로 가는 길로 연결되고, 왼쪽은 4코스(퇴계예던길)로 퇴계가 13세 때부터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에게 학문을 배우러 청량산으로 다니던 길입니다.

 퇴계 오솔길은 예던길이라고도 하는데, ‘()’란 신발과 지팡이를 끌며 다니던 곳이란 뜻이라 하네요. 퇴계가 청량산에 가던 낙동강변의 길이기도 한데, ‘산태극수태극이란 말처럼 산이 굽이치는 형세에 따라 물도 S자로 굽이친다고 하네요.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학소대·월명담·고산정 등 수려한 풍경이 퇴계의 그림 속(畵圖中)’이란 표현처럼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한다고 알려집니다. 아쉽게도 저는 그런 풍경을 가슴은커녕 눈에조차 담지를 못했네요. 언젠가 다시 한 번 찾아와야 하는 이유이지요.

 다리를 건너다 바라본 상류쪽 풍경입니다. 백운지 근처이니 저 어디쯤에 미천장담(彌川長潭)’이 있을 것입니다. 고산을 지난 낙동강이 S자를 그리며 돌아가는 곳에 만들어진 깊은 못을 말하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험하고 물이 깊어 물고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퇴계가 어린 시절 낚시하던 때를 떠올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낚시하던 때를 돌이켜 보니(長憶童時釣此間)/ 삼십년 세월동안 벼슬 때를 묻히며 살았네 그려(卅年風月負塵寰)/ 이제 돌아와 보니 산수의 옛 모습을 알겠네 그려(我來識得溪山面)/ 그렇지만 산수는 내 늙은 얼굴 알란가 몰라(未必溪山識老顔)>

 반대편, 그러니까 하류쪽 풍경이겠네요. 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 왕모산이고 그 아래 산자락을 고산구곡  단사곡이 때리며 지나갑니다.

 12 : 06. 다리 건너는 묵시골 입구입니다. ‘급행버스가 다니는지 버스정류장에 노선도와 시간표까지 붙여놓았습니다.

 예던길 이정표인데 이름 모를 새가 방향을 알려줍니다. 옆에는 갓을 씌워놓은 선비순례길 이정표(왕모산주차장 4.9km/ 고산정 7.0km)도 세워져 있습니다.

 안동도 사과가 특산물인 모양입니다. ‘정일품(正一品)’이란 브랜드에서 그 자부심이 잔뜩 묻어납니다.

 탐방로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갑니다. 강변에 바짝 붙어서 길이 나있는데 항골로 연결된다고 해서 항곡길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12 : 13. 강변을 떠나 산골짜기로 파고듭니다. ‘왕모산의 뒤쪽에 위치한 오지마을(몇 가구 살지 않는 항곡마을일 것입니다)로 들어가는 길이랍니다. 이왕에 왔으니 왕모산에 대해 살펴볼까요? 1361년 겨울, 중국 원나라가 쇠퇴하여 기울어갈 때 생겨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와 수도 개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려 말기 공민왕 시절인데, 왕은 알콩달콩 사랑을 엮어가던 원나라 출신 노국공주와 어머니를 모시고 추위를 견디며 멀고 먼 후방 지역인 안동까지 피난을 오게 됩니다. 이때 모후(母后), 그러니까 공민왕의 어머니가 머물던 곳이라고 해서 왕모산(王母山)’이란 이름이 붙었답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꼬맹이 마을을 만났습니다. 두어 세대쯤 되는 규모인데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12 : 19. ‘항곡길과도 헤어졌습니다. 이제 산길이 시작된다는 얘기겠지요.

 이정표는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인 칼선대까지 2.7km가 남았다고 하네요. 아까 3코스를 걸어오면서 눈여겨보았던 풍경, 즉 깎아지른 산줄기와 낙동강 물줄기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놓은 수묵담채화의 그윽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퇴계선생 말마따나 그림 속으로 표현해도 나무랄 데가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곧 나타난답니다.

 임도는 가파르게 산속으로 파고듭니다. 꽤 힘들지만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조금만 속도를 떨어뜨리면 되니까요. 그런 다음 퇴계의 마음이 되어 걸어보면 어떨까요. 이곳은 퇴계선생님의 고향이니까요.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은 오솔길로 변합니다. 이후부터는 순수한 산길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지자체에서 정비를 잘 해놓아 보드라운 흙길이 널찍하기까지 합니다.

 탐방로가 산자락을 헤집으며 나있기 때문에 심심찮게 작은 골짜기를 건너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교가 놓여있어 장마철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곳은 산속. 위급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그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답니다. 곳곳에 국가지점번호판을 설치해놓아 신고전화만 하면 금방 찾아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무리 쉬워보여도 산길은 산길이랍니다. 그러니 체력이 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선지 곳곳에 벤치도 놓아두었군요.

 탐방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누빕니다. 향긋한 소나무 향기가 코끝을 스쳐갑니다. 그 속에는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가득할 것입니다. 조금도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정도로 소나무가 울창하니 틀림없이 송이버섯이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산길을 따라 줄지어 붙어있는 저 입산금지 표시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숲속에 들어가는 것은 삼가고 대신 길가에서 만날 수 있는 야생버섯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고사목이 심심찮게 나타났고, 그때마다 버섯들이 눈에 띕니다.  말발굽버섯도 그중 하나입니다. 혈당조절과 콜레스테롤 감소, 면역력 강화, 암 예방에 효능이 있다는 버섯입니다. 물론 눈에만 담아갑니다.

 요건 버터애기버섯? 가을철이면 눈에 띄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네요. 식용이라지만 이 또한 채취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12 : 49. 이런 첩첩산중에 웬 민가?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지 마당 아니 집 전체가 웃자란 잡초에 파묻혀 있습니다.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릅니다. 산길이니 계단이 주를 이룸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계단을 두지 않고 경사만 주는 곳도 많습니다. 길을 낼 말한 처지가 아니다보니 어쩔 수 없이 통째로 데크 로드를 만들었나 봅니다. 흡사 다리처럼 말입니다.

 가끔은 비탈진 산자락을 헤집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길고 가파른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길이 오솔길로 변합니다. 비탈지지만 길을 낼만은 했던지 통나무계단을 깔아놓았습니다.

 13 : 05.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다리 모양의 데크 로드로 변해버립니다. 그만큼 왕모산의 사면이 비탈지다는 얘기겠지요.

 13 : 16. 데크로드에서 오솔길 갈려나가고 있습니다. ‘왕모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랍니다.

 이곳에는 이정표 대신 안내지도를 세워놓았습니다.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는 모두 4개인데, 이곳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1코스로 출발지는 원천교라는군요.

 13 : 18. 몇 걸음 더 걸으면 오른편으로 작은 봉우리 하나가 나타납니다. ‘칼선대로 오르는 길이니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20m쯤 더 가면 또 다른 입구가 나타나고, 그곳에는 이정표까지 세워져 있어 무심코 지나칠 일은 없겠습니다.

 왕모산 능선이 내려와 낙동강으로 떨어지며 폭이 약 1km쯤 되는 병풍바위를 빚어 놓았습니다. 그 바위능선의 위, 한 지점에 칼선대가 놓여있습니다. 봉긋한 봉우리가 칼끝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갈선대라고도 부르더군요. 갈선(葛仙)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신선이 된 갈현(葛玄)을 말합니다. 도교에서는 갈선공(葛仙公)이라 존칭하며 태극좌선공(太極左仙公)으로 높여 부르는 인물이랍니다.

 칼선대는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집니다.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 너머로 건지산과 청량산의 축융봉이 한꺼번에 펼쳐집니다. 발아래로는 단사마을의 들녘이 깔려있습니다. 예천의 회룡포나 안동의 하회마을 만큼은 아니어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신선하면서도 아름답기 짝이 없습니다.

 갈선대 아래로는 단사협(丹砂峽)’이 흘러갑니다.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이 그 신비함을 묘사하기 위해 도교까지 끌어들인 곳이랍니다. <칠곡이라 휘감아 도는 한줄기 여울물(七曲縈迴一水灘)/ 갈선대와 고세대를 다시 돌아서 보네(葛仙高世更回看)/ 만 섬의 붉은 단사 하늘이 감춘 보배네(丹砂萬斛天藏寶)/ 푸른 절벽에 구름 일어 찬물이 서리네(靑壁雲生相暎寒)>

 하류 쪽 풍경입니다. 강 건너 저 능선에는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떠올렸다는 윷판대가 있을 것입니다. 낙동강은 그 아래를 휘돌면서 속도를 확 떨어뜨린 다음 안동호로 들어갑니다.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왕모산(王母山)’이 성큼 다가옵니다. 높이는 648.2m.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경사가 매우 급해 천연의 요새로 알려지는 산이랍니다. 천혜의 피난처라고나 할까요?

 전망대에는 이육사의 ‘절정(絶頂)’ 시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곳까지 올라 절정의 시상을 가다듬었나 봅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3 : 22: 다시 산행을 이어갑니다. 잠시 데크 길을 따르는가 싶더니 이내 흙길로 변하는군요.

 통행금지 안내판도 눈에 띄더군요. 안전을 위해 바위 벼랑 안쪽으로 길을 내놓았지만, 바위벼랑 위를 지나 칼선대로 올라가려는 무모한 사람들도 있었나봅니다.

 길이 무척 가팔라졌습니다. 침목계단이 놓여있지만 집사람처럼 무릎이 시원찮은 사람들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구간입니다.

 13 : 29  13 : 41. 지자체도 그게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안부삼거리(이정표 : 왕모산주차장 0.79km/ 천곡지 1.53km)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덕분에 우리 부부도 준비해간 치즈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답니다. 그러다 문득 이게 임하막걸리였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더군요. 안동쌀과 밀, 누룩으로 빚는다는 막걸리의 맛이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임하양조장은 무려 10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술을 빚어 왔다고 하지 않던가요.

 13 : 41. 선비순례길 이정표(왕모산주차장 1.1km/ 고산정 10.8km)가 가리키는 왕모산 주차장 방향으로 갑니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임도를 만납니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왕모당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하더니, 제물 등을 운반하기 위해 놓은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3 : 44. 공민왕의 어머니를 모시는 왕모당(王母堂)’이랍니다. 이 일대는 공민왕계 신을 모시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청량산 꼭대기에 좌정한 공민왕을 중심으로 내살미의 공민왕 어머니, 북고리와 높은데의 부인, 가송리와 정자골, 등자다리의 딸, 새터의 사위와 같이 청량산 일대 20여 개 마을에서 공민왕계 신을 동신으로 모시고 있답니다. 이 중에서도 내살미·가송리·산성마을은 공민왕 신앙의 핵심지역이라고 합니다.

 왕모당은 공민왕의 어머니가 기거하던 터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내살미왕모당이나 공민왕어머니당으로도 불리는데, 내살미마을(원천리)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기 위해 공동으로 동신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그래선지 당집 안에 신체로 남녀 목신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탐방로는 왕모당 뒤쪽 산봉우리로 올라갑니다.

 이 봉우리를 중심으로 왕모산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1361년 고려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왔을 때 축성했다는 전설 속의 성()입니다. 하지만 성은커녕 돌무더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전설은 그저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3. 50. 왕모산 등산안내도가 국가지점번호판과 함께 세워져 있네요. 뭔가 특이한 점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야가 툭 트이더니 낙동강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네요. 강폭을 한껏 넓힌 낙동강은 요 아래 내살미마을에서 안동호로 숨어듭니다.

 길이 또 다시 가팔라졌습니다. 어찌나 가파른지 그냥 떨어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면서 고도를 낮추어갑니다.

 울창한 숲 사이로 원천교가 내려다보이네요. 원천리의 단사마을과 내살미마을을 잇는 다리랍니다.

 이후로도 산길은 한참이나 계속됩니다. 하지만 길이 고와서 걷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니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솔숲 길이랍니다.

 14 : 06. 내살미 마을에 내려섭니다. ‘천사미(川沙美)’라고도 불리는데, 말 그대로 내()의 모래()가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얘기하고요. 중간의 모래 사()자만 억양이 들어가서 살이라는 말로 변하여 내살미가 되었답니다.

 14 : 08. 왕모산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됩니다. 주차장은 지자체에서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대학병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화장실에 유압식 흙먼지털이기까지 설치되어 있더군요. 이정표와 안내판은 기본이구요. 아무튼 오늘은 3코스 후반부와 5코스 후반부를 함께 걸었습니다. 소요시간은 3시간 10. 트랙이 8.96km를 찍고 있으니 느긋하게 걸었나봅니다. 아니 절반이 산길이었음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차장에 왕모산 등산로안내도가 세워져 있기에 게재해 봅니다. 5코스를 답사하면서 왕모산까지 다녀오시고 싶은 분들이 참조하면 되겠습니다.

 집사람의 표정이 오늘따라 더 활짝 피었습니다. 전 구간을 저와 함께, 거기다 느긋하게까지 걸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더 웃고, 더 떠들고, 그로 인해 더 행복했으니 그 표정이 어디로 가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