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의길 10코스(리비교 남단  신장남교 북단)

 

여행일 : ‘25. 3. 15()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적성면 및 연천군 장남면 일원

여행코스 : 리비교 거점센터자장리 마을회관두지나루(황포돛배)장남교 북단(거리/시간 : 9.6km, 실제는 10.29km 2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들머리는 리비교 거점센터(파주시 파평면 장파리)

수원·문산고속도로 월롱 IC에서 내려와 통일로(국도 1호선) 문산방면, ‘여우고개사거리에서 율곡로(국고 37호선)로 옮겨 연천방면으로 올라오면 리비사거리에 이르게 된다. 평화의길 안내판(인증 QR코드)은 리비교 남단과 리비사거리 중간에 세워져 있다.

 리비교에서 장남교까지 임진강 언저리를 따라 북동진하는 길이 9.6km의 여정. 두지나루의 황포돛배를 빼면 특별한 얘깃거리나 볼거리는 없다. 하나 더. 두루누비 안내지도에 시점으로 표기되어 있는 리비교 거점센터(10코스 시점)’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도 알아두자.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이곳도 대북전단 살포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모양이다. 하긴 위험물이라는 핑계로 북한에서 총이라도 쏘아댈 경우 그 피해는 오롯이 주민들에게 돌아갈 테니 어디 그냥 넘길 일이겠는가.

 리비중사 추모비가 근처에 있는 모양인데 눈에 띄지는 않았다. ‘조지 리비(George D. Libby)’중사는 1950 7 20일 대전전투 당시 자신을 희생해 사단 병력을 철수시키는 데 공헌한 미 제24사단 전투공병대대 소속 군인이다. 그는 산악철수가 불가능한 부상병들을 차량에 태워 철수하면서 북한군의 사격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등 전진이 불가한 상황에 부닥쳤다. 이때 철수하는 포병 M-5 포차를 세워 부상병들을 옮겨 실은 다음, 기관단총으로 도로 주변의 적을 제압하며 철수작전을 이어갔다. 포차 운전병을 자기 몸으로 감싼 뒤 전속력으로 달리게 한 뒤, 길가의 부상병들까지 태워 철수하던 중 많은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6·25전쟁 최초로 미국의 최고 무공훈장 ‘Medal Honor’를 받았다.

 10 : 33. 리비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한때 기지촌으로 번영을 누리던 추억 속의 옛 고을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곳 장파리는 한국전쟁과 미군주둔, 통일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현대사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곳으로 알려진다. 영화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TV 드라마 형제의 강(1996) 봄날은 간다(1997) 등의 화면에서나 보던 50~60년대 도회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장파리의 또 다른 이름인 장마루는 지형이 마루처럼 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마을은 6.25전쟁 전에는 임진강변 긴 언덕에 들어앉은 가난에 찌든 벽촌이었다. 그러다 6.25전쟁이 마을을 확 바꿔 놓았다. 전쟁 직후 임진강 건너 DMZ 인근 JSA(공동경비구역)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부대 복귀나 휴가를 위해 들르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군들이 음식점, 다방, 여관, 술집, 클럽 등에서 달러를 사용하면서 장파리에서는 동네 강아지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1970년대 미군이 철수하면서 과거의 번영은 사라졌고, 현재는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로 남아있다.

 매운탕 촌 조형물. 주말 트레킹 때 장파리를 지나간다는 얘기에 벗은 장파리에서 매운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했다. 이른 시간에도 문을 여니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매운탕에 소주 한잔 걸쳐보라면서 말이다. 트레킹이 건강을 넘어 웰빙으로 승화된다나?

 저걸 보고도 들어갈 마음이 생기나요?’ 이석암 작가님은 단칼에 거절이다. 음식은 정성이라고 했는데, 저런 안내판을 보고도 그런 마음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면서 말이다. 물론 나처럼 개의치 않는 여행자들도 많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저런 안내판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 : 36. 평화의길은 공연장을 연상시키는 철제 구조물 앞에서 왼쪽으로 간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위에서 얘기하던 풍경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철제구조물 뒤 붉은 지붕 건물이 라스트 찬스’)

 3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라스트 찬스(Last chance)’도 그중 하나다.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미군 클럽으로, 미군들은 DMZ으로 연결된 리비교를 건너 휴가나 외출시에 라스트 찬스 등 장파리 일대 클럽을 이용했단다. 미군홀로 사용될 때의 벽면과 구조가 남아 있는 등 미군 주둔에 따라 형성된 지역적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경기도문화재(8)로 등록됐다.(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미군들이 리비교를 건너 장파리로 들어오면 맨 처음 접하는 클럽이 라스트 찬스였다. 그래서 퍼스트 찬스(First chance)’라고도 불렀단다. 부대로 복귀할 때는 외출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즐기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던 이들의 이름도 회자된다. 무명 시절의 조용필을 비롯해 initials만 대도 알아차릴 수 있는 유명 가수들이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단다.

 10 : 40. 옛 모습을 추억해 볼 수 있다는 마을 안길까지 둘러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빠듯하다는 집사람의 채근에 쫓겨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율곡로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10 : 42. ‘카페마루까지는 율곡로와 함께 간다. 왼편, 그러니까 임진강변의 너른 들녘에는 비닐하우스가 한가득이다. 하긴 요즘은 농촌도 경제성과 효율성을 최고의 선으로 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10코스는 평화누리길(9코스)의 이정표가 많은 도움이 된다. ‘평화의길과 마찬가지로 장남교를 종점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경기둘레길(8코스)이 동행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탐방로는 널디너른 임진강변의 충적평야를 가로지르며 나아간다. 친환경 쌀과 장단콩, 개성인삼 같은 특산품들이 생산되는 들녘이다. 특히 우렁이농법으로 공동 생산하는 경기추청미 친환경장마루촌이라는 상표로 출하되는데, 그 품질을 인정받아 전량 주문·판매될 정도로 수도권에서 인기가 높단다.

 들녘에서 철새들이 남겨진 알곡을 쪼아 먹고 있었다. 최근 보아오던 새떼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반갑기는 마찬가지다. 철새가 머문다 함은 자연이 잘 살아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과 연결된 존재이다. 자연이 잘 살아있어야 인간도 살 수 있다. 자연을 다시 살리려면 자연을 온전히 느끼고 사랑하는 감수성을 살려야 한다.

 트레킹을 마친 뒤 총무님이 재두루미 사진을 찍었느냐고 물어온다. 그 흔한 기러기인줄로만 알고 사진조차 찍지 않았는데 귀하신 몸(천연기념물)이었던가 보다. 그녀가 보내준 사진을 올려본다.

 10 : 52.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는가 싶더니 자장로(17번길)’로 올라간다. 이어서 왼쪽(북쪽), 그러니까 장좌리 쪽으로 간다.

 기운목장인데 젖소를 42마리나 기른다고 했다. HACCP 인증을 받은 업체라니 시설관리를 제대로 해오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금 전 마주쳤던 상수원보호지역 경고판이 자꾸만 오버랩되는 이유는 뭘까?

 닷새 후면 완연한 봄으로 진입한다는 춘분(春分)이다. 그래선지 들녘 곳곳에서 부지런한 농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늘을 심나보다고 했더니 집사람이 양파라고 바로잡아 준다. 신기하다. 양파나 마늘이나 그게 그건데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10 : 55. 잠시 후, 탐방로가 자장로(17번길)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이름조차 없는 농로를 따라 들어간다. 숨 가쁘게 파평면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적성면(積城面)’에게 바톤을 넘겨준다. 이어서 장좌리(長佐里)와 자장리(紫長里), 두지리(斗只里)를 거쳐 연천군으로 넘어간다.

 이후부터는 장좌리의 들녘을 누빈다. 야트막한 산과 산들 사이, 산골짜기에 들어선 손바닥만 한 들녘들을 헤집으며 나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장좌리는 동··북 삼면을 임진강이 휘돌아가는 모양새이다. 그 너머에는 고랑포구와 삼국시대에 쌓았다는 연천호로고루가 있다. 장좌리 쪽 강가에는 궁예가 쉬었고 왕건이 다녀갔다는 칠송정(七松亭) 터도 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풍경들이 여럿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평화의길은 임진강으로 가지를 않고 장좌리 내륙을 관통한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산모롱이를 돌게 되고, 또한 여러 곳에서 길이 나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럴 때마다 경기둘레길과 평화누리길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준다. 거기다 곁방살이로 들어온 평화의길까지 힘을 보태니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11 : 16. 꼬불대는 고갯길을 올라 해발 54m의 나지막한 고개를 넘기도 한다. 장좌리와 자장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인데 특별한 볼거리나 이야깃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고개를 넘어 자장리(紫長里)’로 들어간다.

 고개 너머에는 작은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임진강을 북쪽에 끼고 들어선 자장리는 자연마을로 검은들·나루턱·대추나무골·불근바치·샘말·식현·아랫불근바치·영채이·큰말 등을 두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디를 이르는지는 눈치조차 챌 수 없었다. 요즘은 옛 이름 찾기가 유행이라고 했다. 찾아낸 이름은 표석으로 만들어 동구 밖에 세우는 게 대세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곳 파주에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살고는 있지만 풍류만은 차고도 넘친답니다. 옹기와 목각, 바람개비 등 각가지 조형물들을 이용해 동화나라로 만들어놓았다.

 11 : 21. ‘자장로로 올라서서 왼쪽(북동쪽)으로 간다. 이정표(장남교 6.2km/ 율곡습지공원 12.1km) 1/3쯤 걸어왔음을 알려준다. 하나 더. 오른쪽은 율곡로의 답곡교차로로 연결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11 : 25. 자장로 걷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4분쯤 지나 이름조차 희한한 듸링거리길로 내려서기 때문이다. 참고로 듸링은 오래 전부터 불리어온 지명이라고 했다. 기록으로 전해지지는 않지만 옛 이름을 찾자는 의미에서 붙여놓았단다. 그래서일까? 길가 정자는 평화누리길 자장리 쉼터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쉼터는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래선지 일행들이 간식이라도 먹고 가자며 정자로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걷기로 했다. 그동안은 막걸리로 요기도 할 겸해서 쉬곤 했었는데, 최근 술을 끊은 뒤부터는 떡으로 요기를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떡이야 걸어가면서도 먹을 수 있으니 구태여 앉아서 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탐방로는 자장4(수로에 놓인)’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둑길을 따라 자장마을로 간다.

 11 : 33. 농수로 다리를 건넌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국사로로 올라선다. 마을 뒷산이라 할 수 있는 국사봉(國祠峰, 150m)’에서 얻어온 이름이지 싶다.

 농번기를 맞아선지 농기계와 유난히도 자주 마주쳤다. ‘코리아트레일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지역 주민은 낯선 나그네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지자체는 나그네가 헤매지 않도록 안내판과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니 우리 같은 걷기여행자들보다 농기계가 먼저 지나가야 한다.

 11 : 40.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 만에 자장리(紫長里)’에 도착했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검은들, 샘말, 큰말 등 9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법정 동리이다. 하지만 이곳이 어느 부락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더. ‘자장이란 임진강변에 붉은 찰흙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했다.

 경로당을 겸한 마을회관도 자장리라는 간판을 달았을 뿐이다. 어렵게 만난 인연이니 마을 이력 정도는 알려주는 것도 괜찮을 텐데 말이다.

 마을 지도가 그려진 안내판에서도 그런 정보는 얻어낼 수 없었다. ‘초원마을이란 브랜드를 내건 체험시설들만 줄줄이 늘어놓았다. 함께 세워놓은 평화누리자전거길 안내도와 이정표(장남교 4.9km/ 율곡습지공원 14.1km)도 마찬가지다.

 판자 담벼락이 예술적이다. Soffio d' Amore, Illumina la mente, di Luce e Porta Pace 등 이탈리아어를 적어 미적 감각에 감성을 보탰다. 사랑의 숨소리, 마음을 비추고, 거기에 빛과 평화의 문이라니 이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언어의 마술인가.

 들어왔던 반대방향으로 빠져나가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자장리 마을을 지나면 임진강이랑 서서히 가까워진다. 그나저나 중앙선까지 그어놓은 자전거길이 흡사 자동차도로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잘 지어진 저 한옥은 마을에서 운영하고 있는 체험장이라고 했다. 숙식도 가능하단다.

 썩 편치 않은 풍경도 눈에 들어왔다. 태양광발전소가 농경지에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전기를 더구나 무공해로 생산한다니 누가 뭐라 하겠는가마는 농경지에 들어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왼쪽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그 남쪽 언덕에 자장리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때로는 탐방로가 산모롱이를 에돌아가기도 한다. 능선 너머는 임진강이 흘러간다.

 봄은 봄인가 보다. 냉이가 나왔다며 집사람의 손놀림이 바빠지는 걸 보면 말이다. 저 냉이는 다음 주 내내 우리 집 밥상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그런 봄날을 즐기며 한갓지게 걷고 있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12 : 08. 커다란 비닐하우스 시설단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12 : 11. 굴다리 앞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율곡로(국도 37호선)’로 올라서게 된다. 국도 가장자리를 따라 탐방로를 따로 내놓았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방금 지나온 비닐하우스와 함께 임진강이 눈에 들어온다. 임진강 건너 저 어디쯤에 고랑포 나루가 있을 것이다. 삼국이 임진강변을 쟁패하던 시대, 고구려는 고랑포 위 절벽에 호로고루 성채를 건설했다. 서기 978년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이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언덕배기에 묻혔다. 1968 1 19일에는 북한 특수부대원 32명이 청와대를 목표로 얼어붙은 고랑포 여울목을 건넜다. 속칭 김신조 부대다.

 12 : 18. 탐방로가 국도변을 벗어나 언덕으로 올라가는 임도로 옮긴다. 그리고는 가파른 오름짓으로 고도를 20m 이상 끌어올린다.

 율곡로는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보행자의 접근을 엄격히 금지한다. 중앙 분리대로도 모자라 가드 레일까지 설치해 놓은 것이 그 증거다.

 12 : 24. 고갯마루를 넘으면 평화누리길 두지리 쉼터가 반긴다. 쉼터 앞에서 길이 나뉘는데 평화의길은 쉼터를 경유하도록 나있다.

 나물은 우리만 캤던 게 아닌가 보다. 10코스만 걷겠다면서 리비사거리까지 산악회 버스로 이동한 일행 둘이 오는 도중에 캤다며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팔랐다. 지자체에서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침목계단으로도 모자라 밧줄난간까지 설치해 놓았다.

 12 : 29  12 : 42. 탐방로는 두지나루로 연결된다. 리비사거리를 출발한지 1시간 50분 만이다. 두지나루는 북녘 땅에서 시작한 물길 사이로 남과 북을 잇는 황포돛배가 힘차게 오가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포구다. 반세기 넘게 왕래가 끊겼던 황포돛배는 2004년 복원돼 일부 구간을 운행하기 시작,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임진강을 일반인에게 유일하게 구경시키고 있다.

 나루터 초입에 평화의길(10코스)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평화누리길 이정표(장남교 2.2km/ 율곡습지공원 16.3km)는 그냥 지나치란다. 그렇다고 황포돛배로 유명한 10코스의 핫 플레이스 두지나루를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잠깐의 망설임도 없어 나루터로 들어가고 본다. 참고로 두지라는 지명은 땅 모양이 뒤주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첫 만남은 황포돛배이다. 한때는 임진강의 거친 물길을 오르내렸을 돛단배를 입구에 전시해 놓았다. 조선시대의 황포돛배는 지금의 상암동에 있던 한강 마포나루에서, 서해에서 생산한 소금이며 생선, 젓갈 등의 물건을 싣고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지막 포구였던 고랑포구까지 약 50여 킬로미터의 강줄기를 따라 운행했다고 한다. 쉬지 않고 가면 15시간 걸리는데, 보름까지 걸리는 게 보통이었다나? 21개의 포구를 들러 물건을 싣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데다 임진강이 서해의 조수 영향을 받기 때문이란다.

 매표소. 배 삯은 성인 기준으로 만원, 최대 승선인원이 45명인데 문제는 최소한 8명은 타야 출발한다는 점이다. 자칫 부지하세월로 기다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두지리 선착장(두지나루터)에서 고랑포구(자장리)를 돌아 선착장으로 원점 회귀하는 코스로 40쯤 걸린다.

 그 기다림이 오래갈 것 같으면 매표소 뒤 카페로 가면 될 일이다. 커피에 수제 전통차는 물론이고 서브 메뉴로 와플까지 내놓는다. 야외 테이블도 갖추고 있어 임진강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길 수도 있다.

 카페에서 바라본 풍경. 커다란 표석이 이곳이 두지나루임을 알려준다. 다들 황포돛배로 알고 있지만 실은 임진강변에 위치한 두지나루터인 것이다. 참고로 국토가 분단되기 전, 큰 배는 이곳보다 조금 하류에 위치한 고랑포까지 운행했었다고 한다. 반면에 작은 배는 안협까지 다닐 수 있었다니, 이곳 두지나루는 황포돛배가 제격이었겠다.

 나루터 진입로. 대전차방호시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민통선과 엔간치 떨어져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취수탑도 잠깐의 볼거리로 충분하다. 외벽에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임진적벽도(臨津赤壁圖)’를 그려 넣었다.

 물양장을 장식하고 있는 조형물. 제목은 황포돛배인데 하나같이 하얀 돛을 달고 있다. 그나저나 물양장은 강나루답지 않게 꽤나 널찍했다. 하긴 60여 년 전만 해도 이곳 두지나루는 서해의 해산물을 비롯한 각종 농산물이 돛배에 실려 왔다고 하지 않던가. 남과 북이 나뉘고 임진강 자체가 사람 통행을 가로막는 민통선이 되면서 그 풍경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주민들도 꽤 되는 모양이다. 꼬맹이지만 대여섯 척의 어선이 출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붕에 올린 황포 돛이 바람에 펄럭인다. 파주 유일의 뱃길 관광 체험인 임진강 황포돛배는 조선시대의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황포돛배를 재현한 유람선이다. 저 배를 타면 분단 이후 수십 년간 베일에 싸여 있던 임진강을 유람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고 했다. 거북바위를 지나 임진강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높이 10미터의 자장리 적벽을 지나는데, 60만 년 전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수직무늬의 절벽 아래쪽이 밀물과 썰물의 영향으로 선명한 가로줄무늬가 생겨 신비롭기까지 하다나?

 12 : 42. 눈이 호사를 누렸으니 이제 다시 길을 나설 차례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 한없이 구불거리는 시골길을 따라 간다.

 느닷없는 산신령. 요 근처 어딘가에 산신당이라도 지으려고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듯 길가에 내팽개쳐 있다.

 12 : 29. 자동차 길은 율곡로 아래로 난 굴다리로 들어간다. 하지만 평화의길은 데크길을 따라 왼쪽 언덕으로 올라간다. 참고로 굴다리를 통과하면 두지리 매운탕촌이 만난다고 했다. 참게와 민물새우를 바탕삼아 메기, 빠가사리로 맛을 더한다는 시원한 민물매운탕이 그리운 사람들은 잠시 다녀와도 좋겠다.

 언덕에는 평화누리길 쉼터가 있었다. 뒤에는 짓다가 그만둔 건물이 덩그러니 방치되고 있었다.

 탐방로는 이제 임진강 둑길을 따라간다. 장남교를 바라보며 간다고 보면 되겠다. 오른쪽에는 베이커리 카페인 삼성당이 있다.

 539m 길이의 신장남교는 파주시 적성면 두지리와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를 잇는다. 기존의 장남교가 장마 때만 되면 수시로 물에 잠기는 탓에 새로 만들었다. 장남교에 새로울 신()’를 보탠 이유이다. 2012 9, 건설과정에서 콘크리트 상판이 무너져 근로자 2명이 숨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2 : 49. 장남교 교각아래서 데크길을 이용해 장남교로 진입한다. 오른쪽은 파주어촌계에서 운영하는 민물고기 직판장이다.

 뿌듯한 마음으로 신장남교를 건넌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녘 땅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평화의길을 걸어오면서 임진강철교, 통일대교, 전진교, 리비교 등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여럿 만났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보기는 처음이다. 남북 평화통일로 가는 듯 그만큼 감회가 새롭다는 얘기다.

 황포돛배가 길을 나서고 있는 두지나루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저 배는 잠시 후 겸재 정선의 임진적벽도를 떠올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난다고 했다. 참고로 임진강에는 적벽이 11개가 있다고 했다. 북한 쪽에 7~8개가, 남한 쪽에 서너 개가 형성돼 있다나?

 줌으로 당겨봤다. 그러자 임진적벽도가 선명해진다. 황포돛배에 올라 겸재(謙齋)의 시선으로 임진적벽을 둘러보고 싶었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집사람의 채근에 쫓겨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다. 마냥 고운 풍경만 눈에 담을 수는 없었나 보다. JTBC의 사건반장에나 나올법한 현장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동차 바퀴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타이어가 도로변에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재생타이어를 사용했을 때 발생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데 생각할수록 아찔하기만 하다. 달리는 차량에서 저런 타이어가 튕겨져 나올 경우 자칫 큰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리 아래, 임진강 둔치에는 캠핑 브릿지라는 야영장이 들어서 있었다. 그 뒤로는 원당리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하나 더. 들녘 너머에 삼국시대의 고구려 성곽인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와 임진강을 통한 물자교류 중심 역할을 하던 나루터 고랑포구(高浪浦口)’가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캠핑용 테이블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모습이 정겹기 짝이 없다. 저런 한갓진 삶에서 가족애가 생겨날 것이고, 그 가족애가 삭막한 도심의 아귀다툼을 배겨낼 수 있게 만들 것이다.

 13 : 10. 신장남교 북단. 다리를 건너면 연천군(장남면) 땅이다. 파주시 권역의 임진강 언저리를 숨가쁘게 달려온 평화의길이 신장남교에서 연천군에 바톤을 넘겨준 것이다.

 13 : 16. ‘술이흘로를 따라 장남면 쪽으로 간다. 100m 조금 넘게 걷자 도로변에 소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평화의길 등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각종 시설물들을 세워놓았는가 하면, 벤치를 놓고 몇 가지 운동기구까지 배치했다.

 평화누리길 10코스(고랑포길)의 시점임을 알리는 아치형 게이트를 중심으로 이정표(숭의전 16.2km/ 율곡습지공원 18.5km), 10코스안내도 등 많은 시설들을 세워놓았다. 길을 함께 쓰고 있는 평화의길 경기둘레길에서도 안내판이나 스탬프보관함 등 몇 가지 시설들을 보탰다.

 평화의길 완주인증 QR코드는 세 트레일이 함께 쓰는 안내도에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산악회에서는 술이홀로를 따라 100m 남짓 더 걸어오란다. 참고로 술이홀로는 파주시(파주읍) 봉암리 주라위삼거리에서 연천군(장남면) 원당리에서 끝나는 도로다. 파주시의 삼국시대 명칭인 술이홀현(述爾忽縣)에서 이름을 따왔다.

 13 : 21. 잠시 후, 또 다른 소공원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10코스는 10.29km 2시간 40분에 걸었다. 아니 9코스까지 함께 걸었으니 오늘은 17.44km 4시간 20분에 걸었다. 두지나루를 둘러보느라 지체됐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이곳은 정자와 벤치로는 모자라다는 듯 화장실까지 갖추었다. 그보다도 더 눈길을 끄는 것은 평화의 염원을 담은 조형물이었다. 서울까지가 46km인데 반해 개성은 25km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정표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 하루라도 빨리 평화통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평화의길 안내판은 이곳에 세워놓았다.(아까는 이정표만 있었다) 완주인증 QR코드도 붙어있다. 이곳에서도 인증이 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여행지 : 홍콩  마카오

 

여행일 : ‘24. 2. 24() - 2. 27()

 

세부 일정 : 홍콩(1881헤리티지·소호거리·빅토리아산정·왕타이신사원)마카오(성바울성당·세나도광장·원팰리스분수쇼·마카오타워)

 

특징 : 중국의 특별행정구. 조차기간 만료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주권을 넘겨받았으나 일국양제에 의거 중국과 다르게 독립적으로 굴러가는 도시국가 형태를 띤다. 면적은 서울의 1.82, 하지만 개발이 어려운 산지가 대부분이라서 750만 명의 주민이 구도심인 침사추이(尖沙咀)와 홍콩섬(香港島), 신계(新界) 등에서 옹기종기 모여 산다. 실제로 이 지역은 서울보다 훨씬 더 조밀하며 아파트의 가격도 상상을 초월한다.

 

 첫 방문지는 침사추이’. 그중에서도 랜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시계탑을 찾았다. 높이 45미터의 시계탑으로 1915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옛날 이곳에는 홍콩과 중국(본토)을 연결하는 철도의 종착역인 카우롱(Kowloon)’역이 있었고, 저 시계탑은 역사(驛舍)의 일부였단다. 세월이 흐르면서 카우롱역은 근처 홍함역(Hung Hom)’에 그 임무를 넘겨줬고, 지금은 시계탑만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내 사진이 별로여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주요 볼거리들은 대부분 구룡반도의 침사추이 지역 홍콩섬에 모여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본 시계탑. 저녁이면 홍콩문화센터(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와 어우러져 멋진 야경을 보여준단다.

 시계탑 옆에는 홍콩문화센터가 위치하고 있다. 대형 콘서트 등이 자주 열리는 장소라는데, ‘52회 홍콩예술절(Hong Kong Arts Festival, 2024.2.22.-3.28)’을 맞아 분주한 모습이다. 1973년에 시작된 이 행사는 홍콩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만들고 공연예술가의 작품을 홍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예술절 행사 때문인지 시계탑 앞 분수대도 예쁘게 치장해 놓았다. 참고로 홍콩예술절은 공연예술의 모든 장르에서 선도적인 국내외 예술가들을 선보여 왔다.

 아니 광장 전체가 알록달록한 조형물로 꽉 차 있었다. 하긴 홍콩예술절이 세계 최대 규모의 축제 중 하나이고, 그 행사장이 시계탑 근처이니 어련하겠는가.

 낙서이자 범죄행위로 여겨지던 그래피티(graffiti)’가 요즘은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정체 모를 저 구축물은 아예 그래피티로 장식을 해놓았다.

 시계탑 앞. 바닷가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매일 밤 펼쳐지는 심포니 오브 라이트(Symphony of Lights)’ 때는 최고의 관람석으로 변신하는 곳이다.

 전망대에 서면 카우룽 반도의 빅토리아하버 일대와 홍콩섬의 센트럴, 완차이에 늘어선 고층 빌딩들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스타페리 선착장’. 홍콩은 구룡반도의 침사추이와 홍콩섬 일대가 양대 번화가로 꼽힌다. 둘 사이의 바다를 가로지르며 주민들을 실어 나르는 게 스타페리로 홍콩의 주요 교통수단 중 하나이다.

 여행은 왔노라! 보았노라! 찍었노라!’의 반복이라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집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카메라 앞에 선다.

 이번에는 캔턴 로드(Canton Road, 廣東道)’로 간다. 카우룽 반도의 대표적 번화가이자 쇼핑가로, 홍콩 최대의 쇼핑몰인 하버 시티(Harbour City)’와 명품 부티크 몰인 ‘1881 헤리티지(1881 Heritage)’가 유명하다.

 ‘1881 Heritage’ 입구. 거대한 노거수가 눈길을 끈다. 동남아 여행 중에 자주 만나게 되는 나무인데, 이 나무는 유난히도 더 굵다.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수많은 나무줄기들이 흡사 인간의 수염을 닮았다. 이 부티크몰이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1881 헤리티지는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 빅토리아 양식으로 지어져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다. 예전에 해양경찰본부였던 건물을 홍콩의 한 기업이 사들인 후 리노베이션하여 홍콩의 럭셔리 부티크 몰로 2009 11월 재탄생시켰다.(전경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광장에는 그럴듯한 조형물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쇼핑보다 사진 찍는 장소로 더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덕분에 우리 부부도 한 컷.

 가난한 공직자의 아내인 집사람에게 명품은 사치다. 그래선지 명품에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빅토리아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쇼핑몰을 배경삼아 사진 몇 커트 찍고 돌아서버린 이유다. 때문에 1881 헤리티지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사진들까지 구경을 못해버렸지만...

 어린이 놀이기구가 되어버린 저 대포는 오래 전 이곳이 해양경찰본부였음을 암시해 준다.

 이번엔 연인의 거리(Avenue of Romance)’로 간다. 시계탑에서 강을 따라 죽 이어지는데, 1980년대 홍콩 영화를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꼭 들려야 할 곳 ‘TOP 1’이다. 홍콩 영화 전성기를 그리워하는 홍콩 시민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홍콩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라고 할 수 있는 이소룡의 동상을 초입에 세워놓았다.

 거리의 상징과도 같은 이소룡(李小龍, Bruce Lee, 1940-1973)’의 동상. 홍콩·미국의 배우이자 무술가. 절권도의 창시자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문화적 아이콘 중 하나로 꼽히며 전 세계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여배우 대표로는 매염방(梅艷芳, 1963-2003)’이 뽑혔나보다. 홍콩의 가수 겸 배우로 20세기 후반 홍콩 느와르·무협 영화의 전성기 당시 카리스마 여배우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이곳은 스타의 거리로도 불린다. 난간에 홍콩의 영화배우 및 감독들을 기념하는 핸드프린트와 명판이 줄지어 붙어있기 때문이다.

 바닷가를 걸으며 홍콩 영화의 황금기를 주름 잡았던 임청하·황금보·성룡·주윤발·장국영·유덕화·장만옥·양조위·주성치 등의 이름과 손바닥이 새겨진 동판을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이름과 약력만 적혀있을 뿐,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동판도 눈에 띈다. 핸드프린팅을 설치하기 전에 사망한 이들이란다. 매염방과 그녀와 생전 절친했던 장국영이 이에 해당한다.

 홍콩영화의 전설들이 남긴 흔적에 직접 손대본다는 것은 지극히 색다른 경험이다.

 중국에서도 돼지는 복을 불러오는 동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연인의 거리는 바다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널찍하게 다리를 놓은 다음, 그 위에 파고라, 벤치 등의 각종 편의시설들을 들어앉혔다.

 스타의 거리 뒤에는 ‘K11 MUSEA’라는 큰 쇼핑몰이 있었다. 다양한 브랜드와 고급레스토랑이 모여 있어 식사와 쇼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아니 우리 같은 여행자들에게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더 고마웠다.

 난간 너머로는 고층빌딩들이 숲을 이루는 홍콩섬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요트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이번에는 홍콩섬에 있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Mid-Levels Escalator)’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800m)로 기네스북에까지 등재되어 있단다. 1994년 미드레벨에 사는 주민들의 출퇴근용으로 건설되었는데, 홍콩섬의 평지에서 시작해 빅토리아피크 중턱(미드레벨)까지 이어진다. 영화 중경삼림에 등장한 후부터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여행 명소가 되었다.

 한쪽 방향으로만 운행되는 게 특징. 그러니 내려올(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면) 때는 걸어서 내려와만 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끝까지 오르지 않고 도중에 내려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으며, 꼭대기까지 올라간다고 해도 20분이면 충분하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내려올 수 있다는 얘기이다.

 올라가는 도중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다본 풍경. 살펴보다 눈에 담을만한 풍경이라도 눈에 띄면 망설이지 말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면 된다. 빌딩 숲 뒤에 숨겨진 또 다른 홍콩을 만날 수 있다.

 중간에서 내려 소호거리로 들어가 본다. 언덕이 길도 좁은데다 경사까지 가팔라서 걷는 게 쉽지는 않다. 우리네로 치면 달동네라고나 할까?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풍경이 좋다고 꾸역꾸역 몰려온다. 그것도 세계 각국에서... 참고로 소호(SOHO)거리 South of Hollywood Road의 줄임말이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카페와 세계 각국의 레스토랑, 와인바 등이 모여 북적이는 시내와는 사뭇 다른 분위를 느껴 볼 수 있다는 게 특징. 주위에 홍콩스러운 벽화들이 즐비하게 있어 인생샷을 남기기에도 걸맞은 곳으로 알려진다. 어느 호사가는 뉴욕의 소호를 넘어서는 핫 플레이스라고도 했다.

 압축된 공간에는 볼거리 말고도 먹을거리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한국 음식점도 있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니 K-Food’가 이미 글로벌화 되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홍콩을 골목의 도시라고 했다. 맞다. 홍콩은 골목마다 아기자기하고 특색 있는 펍과 카페가 꽉꽉 들어차 있었다.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이국적인 거리 풍경은 처음 홍콩을 찾은 우리 부부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홍콩 누아르 영화에 나올 법한 풍경을 찾는다면 화려한 거리 뒤편 허름한 골목 아무 곳이나 가면 된다. 영화 중경삼림 아비정전 등 수많은 영화가 이런 골목에서 촬영되었다.

 얼마나 유명한 빵집이면 저렇게나 줄이 길까?

 홍콩은 곳곳에 다채로운 벽화가 가득한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전역에 걸쳐 알록달록한 벽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명한 벽화 외에도 골목 곳곳에 벽화들이 있어 사진 찍을 만한 곳이 많다.

 소호거리는 벽화로 유명하다. 골목길 사이사이, 건물 외벽에 팝아트 같은 일러스트벽화가 그려져 있어 최고의 포토 스팟으로 꼽힌다. 그렇다고 거리 전체가 벽화로 도배되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골목골목을 누비다가 마음에 드는 벽화를 찾아 인생샷을 찍으면 된다.

 홍콩 인증샷 성지로 유명한 덩라우 벽화’. 헐리우드 거리의 벽면에 홍콩의 옛 건물들을 가득 그려 넣었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언덕길에 빼꼭하게 벽화가 그려져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해질 무렵 석양을 배경으로 찍으면 그 분위기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다니 참조할 일이다.

 벽화는 홍콩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Alex Croft’가 그려 넣었다고 했다. 지금은 철거된 옛 주택가 구룡채성을 다채로운 색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고 한다.

 여기도 꽤 유명한 듯. 순서를 기다리다가 겨우 배경으로 삼을 수 있었다. 부근에서 메릴린 먼로, 찰리 체플린 등 할리우드 스타들의 그림도 찾아볼 수 있다.

 그래피티는 범죄행위이다? 천만의 말씀. 요즘은 예술로 치부하며 살짝 묵인되는가 하면, 지자체에서 유동인구를 끌어들일 목적으로 일부러 하는 경우도 있다. 드물게는 본인 소유의 건물을 그래피티로 꾸미기도 한다나?

 소호거리는 할리우드 거리 남쪽이라는 뜻으로 빈티지숍, 갤러리 등이 많아서 볼거리가 풍성한 곳이다.

 소호의 구석구석을 걷다 보면 홍콩인의 일상과 속살, 그리고 홍콩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만나볼 수 있다. 난 한걸음 더 나가보기로 했다. ‘올드 타운(Old Town)’의 참맛을 조금 더 느껴보기 위해 카페나 숍이 드문 외진 골목으로 들어가 봤다. 가이드의 추천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는 노천시장이 열리기 때문에 과거의 틈에서 솟아나는 묵직한 감성을 맛볼 것이라고 했다.

 홍콩에서 가장 오랜 거리 중 하나인 소호거리, 가지처럼 뻗은 길 사이로 가게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었다. 그중에도 상당수는 아예 비어있다. 슬럼화 된 골목이라고나 할까? 그 빈자리를 노점상들이 차고앉았다. 품목 불문은 물론이고 신구(新舊)도 불문. ·신발·가방 등 온갖 잡동사니들이 무질서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바라던 올드 타운의 흥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소호거리의 또 다른 명소인 타이쿤(Tai Kwun : Big Station이란 뜻)’으로 간다. 도심재생프로젝트로 탄생한 복합문화공간이다. 할리우드 로드에 있는 170년 된 옛 경찰청과 중앙재판소, 빅토리아교도소 건물을 리노베이션 해 대규모 전시장과 공연장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현대미술·무용·연극·영화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개최한다.

 옛 경찰청. 경찰청 본부와 무기고, 장교 숙소 등이 들어있었는데, 현재 레스토랑과 카페로 사용하고 있다.

 도심 속 너른 광장. ‘퍼레이드광장인데 초고층 빌딩 숲속에서 하늘이 내다보인다. 그 광장은 지금 홍콩예술제 준비로 한창이었다.

 광장 너머의 하얀 건물은 경찰 숙소인 ‘Barrack Block’이다. 1863년 빅토리아시대에 지어진 건축물인데, 건물 안에는 헤리티지 갤러리가 들어있다. 참고로 타이쿤에는 중앙경찰서 이야기부터 법원, 그리고 빅토리아 감옥까지 총 8곳의 헤리티지 스페이스(Heritage Storytelling Space)가 있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해당 공간에서는 타이쿤의 역사와 이야기 및 삶을 엿볼 수 있다.

 안내판 하단에 ‘UNESCO’ 표시가 들어있다. 2019년에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보존상(UNESCO Asia-Pacific Awards for Cultural Heritage Conservation)에서 우수상을 받았단다.

 어마어마하게 견고한 담벼락. 저렇게 높은데도 도망가는 죄수가 있었을까?

 ‘JC컨템포러리는 교도소 옆에 신축으로 지어진 현대미술관이다. M+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듀오 헤르조그 드뫼롱이 이곳도 설계했다. 실험적인 전시가 많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퍼레이드광장과 연결된 골목을 지나면 프리즌 야드’. 홍콩 여행자들의 포토 스팟이기도 하다. 수감자들이 투옥되어 있던 비좁은 감방을 살펴볼 수 있는데, 베트남 독립을 이끈 국부 호찌민 전 국가주석도 이 교도소에 수감됐었다고 한다.

 실제 유치장과 감방으로 사용되던 공간을 공개하고 있었다. 쇠창살로 대변되는 감방에는 빅토리아교도소에 대한 사료와 당시 사용하던 기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이곳에 수감되어 있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내부에 있는 작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이제 빅토리아 피크(Victoria peak, 太平山頂)’에 올라갈 차례이다. 홍콩에서 가장 높은 산(552m)인데, 오르는 방법은 트램(tram)과 버스 두 가지가 있다. 여행객들은 대부분 트램을 타고 올라갔다가 버스(좁은 길을 휙휙 지나는 재미가 있다)를 타고 내려온다. 하나 더. 이 트램은 홍콩을 대표하는 명물이다. 따라서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줄지어 기다리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

 산정으로 올라가는 트램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케이블카 철도 중 하나이다. 45도쯤 되는 경사각을 타고 올라가는 산악 트램은 1888년 개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트램을 타고 올라가면서 홍콩의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하나의 묘미이다. 이쯤해서 팁 하나. 바깥 풍경을 좀 더 잘 보고 싶다면 올라갈 때는 오른쪽, 내려올 때는 왼쪽에 앉는 게 좋다.

 선로의 길이는 1278m라고 했다. 6-7분 정도면 종점인 상부 탑승장(해발 396m)에 도착한다.

 빅토리아 피크는 말 그대로 빅토리아 산 정상이다. 이곳에 오르면 홍콩의 시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니 전망대부터 찾아가는 게 우선이다.

 조망의 명소답게 조망도를 세워 실물과 비교해가며 눈에 담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겨우겨우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고 쳐도(사진을 찍어주는 상대방도 반대편 난간에서 틈새를 마련해야만 한다), 다른 일행의 얼굴이 들어가는 것쯤은 각오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풍경사진까지 못 얻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홍콩의 시내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바다를 따라 건설된 빅토리아 항구 전경, 홍콩섬과 구룡반도 스카이라인의 숨 막히는 전경을 만끽할 수 있다. 해가 지면 유명한 홍콩의 야경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인파에 밀려 전망대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산자락을 헤집으며 내놓은 산책로를 따라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산책로 곳곳에서도 시가지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피크 타워 옆으로 보이는 저 산이 실제 빅토리아 피크가 아닐까 싶다. 트램의 상부탑승장 높이가 해발 396m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높이가 552m라는 빅토리아 산의 정상은 저쯤이 되지 않겠는가.

 빅토리아 피크에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인 피크 타워는 반원을 기둥이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다. 내부에 각종 쇼핑센터와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으며, 전망대가 있어 홍콩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피크 타워의 맞은편에는 대형 쇼핑몰인 피크 갤러리아가 있는데 면세점을 비롯해 서점, 패션몰, 레스토랑 등이 있다. 이 건물들 주변에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DMZ 평화의길 9코스(율곡습지공원 – 리비교 거점센터)

 

여행일 : ‘25. 3. 15()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일원

여행코스 율곡습지공원두포교차로파평면사무소금파교리비교거점센타(거리/시간 : 8.5km, 실제는 7.15km를 1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청마산악회

 

특징 드디어 코리아둘레길의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은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그리고 2024년 9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 들머리는 율곡습지공원(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수원·문산고속도로 월롱 IC에서 내려와 통일로(국도 1호선문산방면, ‘여우고개사거리에서 율곡로(국고 37호선)로 옮겨 연천방면율곡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곧장 율곡습지공원으로 연결된다평화의길 안내판(인증 QR코드)은 평화누리길(9코스)의 아치형 대문 옆에 설치되어 있다.

 율곡습지공원에서 리비교까지 임진강 언저리를 따라 북진하는 길이 8.5km의 여정. ‘두포천 눌노천을 건넌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얘깃거리나 볼거리가 없다.

 출발지 근처 학자의 숲 안내판. 1548,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한 율곡이 이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을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린다나? 하단에는 그가 주장했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적었다.

 09 : 00. 실제 출발은 두포교차로에서. 9코스(8.5km) 10코스(9.6km)는 둘을 합쳐도 20km가 채 되지 않는다. 둘 모두를 한꺼번에 진행시키면서 내놓은 산악회의 구실이다. 하지만 집사람 체력으로는 다소 부담스러운 거리라서 집사람은 파평면사무소, 그리고 나는 집사람이 기다려야 할 시간을 감안 두포교차로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길을 나서기 전, 잠시지만 평화의길을 역방향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율곡로(국도 37호선) 아래 굴다리를 지나면 전진교 두포천이라는 볼거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진교는 민통선 내에 군사용으로 만든 폭이 좁은 다리이다. 관할 부대의 명칭이 전진부대여서 전진교로 불리고 있으며 통일대교처럼 군사 시설물이다.

 이정표가 평화의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곳 두포교차로 9코스의 주요 기점 중 하나다. 그러니 거리 정도는 적어 넣는 게 여행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09 : 02. 250m쯤 진행하면 두포교에 이른다. 두포천(斗浦川)을 가로지르는 다리(두포교)에 잇대어 탐방로를 내놓았다.

 법원읍 금곡리에서 발원한 두포천(斗浦川)은 북서방향으로 흐르다 저곳에서 임진강으로 흡수된다. 하나 더. 혹자는 저곳 어디쯤엔가 몽구정(夢鷗亭)’ 터가 있다고 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성담수(成聃壽, 1436~?)가 지었다는 정자로, 성담수는 단종 폐위에 불복하여 세조가 내린 벼슬을 사양하고 두문리(옛 지명) 외진 곳에서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내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한 인물이다.

 임진강 너머는 민간인통제지역이다. 때문에 임진강 쪽은 카메라 들이대기조차 무서울 정도로 통제가 심하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에게는 삶의 현장일 따름인가 보다. 강가에 기댄 농경지는 벌써 쟁기질을 끝내고 파종을 기다린다.

 되돌아 나오는 길. ‘전진교 남단의 검문소가 눈에 들어온다. 민통선 안에 있는 농경지로 가려는 차량 등으로 인해 항상 붐빈다는 곳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금단의 영역이다. 통행은커녕 사진촬영조차 금지하고 있었다.

 두포나루터라는 입간판이 눈에 띈다. 근처 음식점에서 세워놓은 것이겠지만 이 근처 어딘가에 두포나루터가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09 : 06. 교차로로 되돌아와 평화의길을 순방향으로 탄다. 두포3(장포동) 표석 오른쪽, 그러니까 율곡로의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두포리(斗浦里)는 임진강을 끼고 있어, 강변을 따라 소규모로 발달된 농경지가 주민들의 일터다. 간뎃말·건넌말·노적굴·두문리·방학동·새텟굴·아랫말·아랫장깨·윗장깨·장깨·장담동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고 했으나 어디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진진교는 통행량이 많다고 했다. 두포교차로 부근에 들어선 여러 음식점과 카페들이 그 증거가 아닐까?

 탐방로는 율곡로와 나란히 간다.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 도보&자전거 길을 따로 내놓았다.

 09 : 12. 두포삼거리. 탐방로는 이곳에서 율곡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청송로를 따라간다. 파평면 두포삼거리와 적성면의 적성교차로를 잇는 지방도인데, 중간쯤에 있는 파산서원(坡山書院)’에서 파생된 이름이지 싶다. 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는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호가 청송(聽松)이니 말이다.

 청송로가 오름짓을 시작한다. ‘파평산의 지능선을 넘어가면서 만들어내는 가냘픈 몸짓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도로 건너편에 파평면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은 파평면의 대표 볼거리인 화석정이 아닐까 싶다.

 09 : 15. ‘단양 우씨 망향제단 입구에 이른 탐방로가 청송로마저도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능선을 넘어가기 위해 북쪽으로 나있는 임도를 따라간다.

 안정공(安靖公派)과 충정공(忠靖公)을 모시는 망제단(望祭壇)’이란다. 여말선초의 문신 우홍강(禹洪康, 1357-1423)과 그의 아버지 우현보(禹玄寶, 1333-1400)의 시호(諡號)인데, 이들의 묘가 북녘 땅에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후손들의 소원이 통일이 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청송로를 따르기로 했다. 면사무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집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지나다니는 차량과의 충돌이 염려될 정도로 갓길은 좁았고, 거기다 씽씽 달려대며 내지르는 굉음은 사람의 정신을 쏙 뽑아버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9시를 겨우 넘긴 이른 시간인데도 문을 연 식당이 있었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고 했다. ‘부지런한 새는 먹이를 더 얻는다고도 했다. 남들이 쉴 때 가게 문을 여는 저 주인장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덤프트럭이 지나갈 때는 더 소름이 끼쳤다. 심심찮게 마주치는데 그럴 때마다 지반까지 흔들렸기 때문이다.

 09 : 24. 가슴조리며 올라선 고갯마루. ‘장마루라고 적힌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장마루 장파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파주시에서는 장파리, 금파리, 늘노리에 속한 자연마을들을 묶어 장마루권역이란 이름으로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중 하나인 금파리로 들어선다는 얘기일 것이다.

 고갯마루 부근에서 평화의길을 다시 만났다. 이정표는 이곳을 박석고개로 적고 있었다. 뒤로 보이는 고갯마루를 이르는 지명인가 보다.

 이후부터는 다시 평화의길을 타기로 했다. 집사람도 목숨까지 위협 받아가며 빨리 오는 걸 원치는 않을 것이다.

 널찍한 길은 도로에 못지않게 고왔다. 아니 보드라운 흙길이라서 도로보다 한결 더 걷기가 좋다.

 길은 심심찮게 나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정표로도 모자라 시선이 머물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가이드리본이 매달려 있다.

 이즈음 금파산업단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영상·음향, 통신, 전기·전자기기 등 다양한 업종을 유치하고 있다나?

 09 : 35. ‘금파리(金坡里)’로 내려선다. 임진강의 지류인 눌노천 언저리에 분포되어 있는 마을로, 파평면의 행정타운이 들어서 있다.

 친절한 이정표. 열린 화장실까지 안내해준다.

 탐방로는 행정타운의 안마당을 통과한다. 농산물 저온유통시설과 북파주농협, 파평도서관, 소방서, 행정복지센터 등을 차례로 지난다.

 파평면행정복지센터. 파평(坡平)의 역사는 고구려의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게 신라로 넘어오면서 파평현(坡平縣)이 되었다고 한다. 금파리·눌노리·덕천리·두포리·마산리·율곡리·장파리 등 7개의 법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복지센터 앞의 송덕비(頌德碑). 하나같이 이씨(李氏)들이다. 금파1리 금곡동마을 뒤 산자락에 세종의 아들 담양군(潭陽君) 이거(李璖, 1439-1450)의 묘가 있다고 했는데, 이곳 금파리가 그들의 세거지일지도 모르겠다.

 09 : 39. 행정타운을 빠져나와 청송로를 따라간다. 내가 도착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집사람과 다시 만났음은 물론이다.

 09 : 42. 대전차방호벽. 평화를 갈망하는 염원들이 모여 전쟁을 대비한 시설까지도 멋진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전통의상 패션쇼?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별칭까지 얻어낸 고을에 걸맞는 그림이라 하겠다. 이곳 파주는 이율곡과 성혼 등이 중심이 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산실이다. 그뿐 아니다. 고려 때 여진을 정벌한 윤관 장군과 조선시대 대표 재상 황희, 조선 초 예악제도를 정비한 허조, 경국대전 편찬을 지휘한 노사신, 파산학을 태동시킨 백인걸,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인물들이 파주에서 나고 자랐으며 묻혔다.

 반대편에는 화석정(花石亭)을 그려 넣었다. 율곡 선생이 여덟 살에 지었다는 시도 적혀있었음은 물론이다.

 09 : 44. 파평삼거리. 청송로와 장마루로가 나뉘는 삼거리이다. 평화의길은 왼쪽 장마루로를 따라간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청송로는 감악산으로 유명한 적성면으로 간다. 가는 도중 눌노리에서 천연 연못인 파평 용연(坡平 龍淵)’을 눈에 담을 수도 있다. 필자의 시조가 탄강(誕降)한 곳인데 간략하게 소개해본다.

 용연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인 윤신달(尹莘達, 893-973)이 탄강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용연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고, 사흘째 되는 날 윤온(尹媼)이라는 할머니가 연못 한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건져서 열어보니 한 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체 속에 누워있더란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할머니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손바닥에 윤자 모양이 있어 윤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탐방로는 이제 장마루로를 따라간다. 금파리의 널찍한 들녘을 헤집으며 길이 나있다. ‘눌노천이 휘돌아 굽이치면서 몰고 온 퇴적물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충적평야다.

 09 : 53. ‘금파교를 건넌다. 금파리는 이 다리를 경계로 삼아 1리와 2리로 행정 단위가 나뉜다.

 눌노천은 법원읍 직천리에서 발원, 북쪽과 서쪽으로 연이어 흐르다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21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상류는 전형적인 산지하천의 형태를 보이나, 중하류지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다리를 건너면 금파2리 아래장마을 표석이 반긴다. 2리에는 초당골로 불리는 마을도 있다고 했다. 마을 뒷산에 눌노천과 임진강이 바라보이는 초당이 있었는데, 선비들이 학문을 갈고 닦던 곳이라 하여 붙은 지명이란다.

 09 : 54. 금파교 북단에 이른 탐방로가 이번에는 눌노천의 둑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반대편은 눌노리(訥老里)’로 연결된다. 조선 중기 율곡 이이와 함께 대학자로 이름을 떨친 성혼(成渾, 1535-1598)의 학문적 근거지가 된 곳이다. 성혼의 호 우계(牛溪)는 자신의 집 앞을 흐르는 소개울(현재 눌노천)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즈음 파평산(坡平山, 496m)’이 눈에 들어온다. 파주의 진산이지만 군사시설에 정상을 빼앗긴 서글픈 산이다. 대신 개성시가지와 장풍군의 산마루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동봉에 정상석을 세워놓았다.

 눌노천도 곡류하천(曲流河川)으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휘휘 돌아가며 만들어내는 곡선이 여간 고운 것이 아니다.

 10 : 00. 평화의길은 눌노천의 끝까지 가지는 않는다. 율곡로(국도 37호선)로 접근하는가 싶더니 그 하부로 난 굴다리로 들어간다.

 이후부터는 율곡로를 오른쪽에 끼고 간다. 임진강과 국도 사이에 오솔길이 나있다고 보면 되겠다.

 임진강 쪽 분지는 잡초만 가득했다. 지역 언론인 파주민보 37번 국도와 임진강 사이에 금파리성지(金坡里城址),  궁예성터가 남아 있다고 했다. <후고구려 궁예왕이 철원에서 피신하여 이곳에 거주하면서 쌓은 토성이라는 전설이 있으며 길이 1,500m정도, 높이 6m정도 되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다>는 기록이 전해진단다. 임진강 언저리의 저 분지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0 : 06. 노거수가 멋진 풍광을 자아내는 또 다른 굴다리. 임진강에 어깨를 맞댄 공터에는 정체 모를 초소까지 지어져 있었다. 임진강 건너는 진동면 하포리로 민간인 통제지역이다. 그걸 알아차리라는 듯 철망 울타리까지 둘러놓았다.

 굴다리. 율곡로의 아포삼거리에서 내려와 금마루6을 타고 조금만 내려오면 이곳으로 연결된다.

 이정표(장남교 11.6km/ 율곡습지공원 6.9km)는 현재 위치를 적벽산책로로 적고 있었다. 임진강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임진강 적벽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중 하나인 금파리 또는 장파리 적벽이 부근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임진강의 적벽 주상절리는 신생대 시기 화산활동으로 인해 만들어졌다. 선조들이 임진강변에 형성된 주상절리가 붉은빛이나 자줏빛으로 보인다고 하여 적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평화의길은 계속해서 북진한다. 임진강과 율곡로를 좌우에 끼고 가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주변 풍광은 확 달라졌다. 바닥을 우레탄으로 깔아놓는 등 도심의 공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닦아놓았다.

 쉼터에 이르니 선두대장이 막걸리 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의 권유로 금주를 시작하지 벌써 4개월인데 그걸 몰랐던 모양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하지 않았던가. 고맙다는 인사만 남긴 채 바람같이 지나쳐버릴 수밖에 없었다.

 잡초더미에 묻힌 저 초소의 정체는 대체 뭘까? 군의 시설로 보이기는 한데.

 탐방로는 임진강에 기대듯이 나있다. 덕분에 나뭇가지 사이로나마 임진강을 눈에 담으며 걸을 수 있다.

 가끔은 시야가 툭 트이기도 한다. 임진강 건너는 진동면 하포리이다. 저 어디쯤에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정곤수(鄭崑壽, 1538-1602)의 묘가 있을 것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으로 유명한 의성(醫聖) 허준(許浚, 1539-1615)의 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민통선 너머에 있어 허가를 받아야만 구경할 수 있다.

 10 : 15. 금파취수장. 파주 시민 15만 명이 먹고살 수 있는 물을 공급하고 있단다.

 취수장 진입도로를 벗어난(이정표 : 장남교 10.6km/ 율곡습지공원 7.7km) 평화의길은 다시 강변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임진강과 어깨를 맞대고 북진한다. 임진강을 발아래 두고 걷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민통선 너머를 은밀한 속살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리고 민간인통제지역에서도 농사를 짓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긴 1970년대 만들어진 대성동과 통일촌 말고도 2000년대에는 해마루촌까지 조성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이즈음 리비교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잠시 후 만난 또 다른 쉼터. 여간 정성을 들여 만든 게 아니다. 정자에 벤치는 물론이고 운동기구들까지 갖췄다.

 10 : 24. ‘리비교 문화공원에 이른다. ‘리비교 1951년 휴전협정 이후 보급로가 필요했던 미군이 건설한 다리다. 1950 7 20일 대전전투 당시 자신을 희생해 사단 병력을 철수시키는 데 공헌한 미 제24사단 전투 공병대대 소속 조지 리비(George D. Libby)’ 중사의 이름을 브랜드로 삼았다.

 리비교 1953년 미군에 의해 임진강에 건설된 다리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다리로 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지역주민의 삶을 이어주던 다리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적 교훈과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다리 주변에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공원안내도. 추가로 조성하겠다는 부지(10)에서 이곳을 관광명소로 개발하려는 파주시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공원은 철조망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민통선 이남인데 꼭 그래야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튼 안에는 철제 빔(beam)이 놓여있었다. 리비교를 재 가설하면서 철거한 기존 다리 상판이 아닐까 싶다.

 중간에 공원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내부는 여느 공원과 다름없었다. 산책로와 쉼터는 기본, 임진강변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건너편 민간인통제구역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오버 브릿지는 저걸 이르는 모양이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 위에 선반을 걸치듯 가로놓여 있다.

 저것은 뭘 의미하는 조형물일까?

 리비교는 파평면 장파리와 진동면 용산리를 잇는 총연장 328m( 11.9m)의 콘크리트 다리다. 1951 7월 휴전협정을 시작할 당시, 전선은 정리돼 있었으나 계속된 보급로가 필요했던 미군은 임진강 하류인 파주에서 상류인 연천까지 자유의 다리를 포함해 모두 11개 교량을 설치했다. 하지만 홍수에 유실되는 등 사고가 잦자 1952 9월 반영구적인 교량으로 바꾼다. 8군 공병대가 리비교의 설계 및 건설을 위한 연구를, 2 건설공병대가 설계를, 그리고 임진강의 정복자 로 불리던 미 84 건설공병대대가 건설을 맡았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통로. 대전차방호벽이 설치되어 있다. 도강해온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선착장은 텅 비어 있었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낡은 꼬맹이 배 두 척이 한가롭게 낮잠을 자고 있을 따름이다.

 리비교 남단에는 검문소가 있었다. 때문에 다리 방향은 사진촬영이 금지된다. 하나 더. ‘리비교는 통일대교, 전진교와 함께 민통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주요 통로이다. 하지만 2016년 안전진단에서 ‘D 등급을 받아 폐쇄되었다가 전면 재가설 공사를 거쳐 7년만인 2023 11 7일 통행이 재개됐다. 이 시기 민통선을 넘나들며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전진교까지 20km를 우회해야 하는 큰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리비교 진입로. 진입 차단시설이 남북 분단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사진조차 함부로 찍을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인 것이다.

 10 : 32. ‘리비사거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안내판(인증 QR코드 부탁)은 리비교 남단과 리비사거리의 중간쯤(아래 사진에서 태극기 아래)에 세워져 있다.

 9코스는 7.15km 1시간 40분에 걸었다.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특별히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없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서해랑길 64-6코스(합덕수리민속박물관 - 삽교호함상공원)

 

여 행 일 : ‘25. 3. 8( )

소 재 지 : 충남 당진시 합덕읍·우강면·신평면 일원

여행코스 : 합덕수리민속박물관솔뫼성지신촌교회신촌제2소들쉼터남원천삽교호호수공원삽교호함상공원(거리/시간 : 17.2km, 실제는 솔뫼성지부터 16.33km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창리항에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연결되는 64코스의 지선( 6) 중 마지막 구간을 걷는다.

 

 들머리는 합덕수리박물관(충남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익산평택고속도로(평택-부여) 예산추사고택 IC에서 내려와 예당평야로(32번 국도, 당진방면)를 타고 0.7km쯤 올라오다 신택교차로에서 오신로로 옮겨 5km쯤 들어오면 합덕수리민속박물관에 이른다. 서해랑길(당진 64-6코스) 안내도는 박물관 마당에 설치되어 있다.

 합덕수리박물관에서 시작 내포의 너른 들녘을 누비면서 삽교호로 가는 17.2km짜리 구간. 망망대해, 아니 망망대지를 끝 간 데 없이 걷다보면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지만, 후반부에 만나는 삽교호의 아름다운 풍광이 그 보상을 넉넉히 해준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 솔뫼성지와 삽교호호수공원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08 : 50. 실제 출발지인 합덕버스터미널’. 17.2km짜리 코스이니 결코 길지는 않다. 하지만 3km쯤 줄여서 걷기로 했다. ‘서해랑이란 브랜드에도 걸맞지 않는 시가지를 걷는 것 보다는 한국의 베들레헴으로 알려지는 솔뫼성지를 조금 더 알뜰하게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이정표가 지금 걷고 있는 구간이 버그네 순례길임을 알려준다. 성지순례는 신앙을 굳건히 하고 삶을 돌아보면서 걷는 회개의 여정이다. 성경 속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대표적인데, 한국에도 그와 비슷한 버그네 순례길이 있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솔뫼성지부터 조선 제5대 교구장인 다블뤼 주교 유적지가 있는 신리성지까지 13.3km구간이다.

 08 : 50. ‘덕평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100m쯤 걷다가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솔뫼로로 옮긴다. 그곳에 순례(巡禮)’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버그내를 중심으로 한 내포지역은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었다. 버그내 장터와 합덕방죽을 걸어가는 순교여정과 순교자들의 발자취가 기록으로 남아있기도 하단다. 오랜 역사를 두고 스며있는 내포사람들의 애환과 진리를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들의 신앙심을 떠올리며 걸어보라는 모양이다.

 종교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성지순례가 요즘은 일반화되었다. 꼭 종교인이 아니어도 온전히 자신의 걸음에 의지하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여행자들은 종교를 넘어 삶을 살아갈 희망과 이유를 얻는다. 조형물 속의 군상들이 너나없이 배낭을 둘러메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순례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어 종교를 떠나 천주교 역사, 종교의 형식 등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솔뫼성지만 순례하는 프로그램을 기본으로, 한국 천주교의 중요한 성전 가운데 하나인 합덕성당까지의 도보순례, 1866년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손자선 성인의 생가가 있는 신리성지(손자선 생가, 기념 성당 등)’까지의 도보순례 등이 추가로 운영된단다. 다리품만 조금 더 팔면 천주교 초기 순교자로 내포의 사도라 불렸던 이존창의 생가 터와 성당이 있는 여사울 성지’, 하 발바라 등 32명의 순교자를 기념하는 공세리성지(성지, 공세리 성당 등)’도 둘러볼 수 있단다.

 유엔(UN)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은 고령 사회, 20% 이상은 초고령 사회로 구분한다. 작년 말, 행정안전부는 우리나라도 12 23일부로 초고령사회에 도달했다고 발표했었다. 65세 이상 주민등록 인구가 1,024 4,550명으로, 전체 주민등록 인구(5,122 1,286) 20.0%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저런 노인복지 시설이 카페보다도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를 그냥 흘려듣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당진시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버그네 순례길이다. 그래선지 도로변의 담벼락까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종교 사진들을 게시에 걷기여행자들에게 또 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2014 8 15.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요 행사 장소인 이곳 당진 솔뫼성지(폐막 미사는 서산 해미읍성에서 열렸다)를 방문해 전 세계인의 이목을 당진으로 집중시켰다. 담벼락에는 당시의 행사장면을 담은 사진들을 게시하고 있다.

 09 : 04. 우강면(牛江面) 행정타운은 황소를 얼굴마담으로 내걸었다. ‘우강 우평강문(牛坪江門)’ 즉 우평포(牛坪浦)와 강문포(江門浦)의 합성어이다. 이중 우평이란 지명은 소 모양의 돌 두 개가 바다 섬 중에 돌출했다가 매몰되었다는 데서 유래했는데, 이를 형상화시킨 모양이다.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도시답게 버스정류장도 예술적으로 꾸몄다.

 09 : 13. 솔뫼교차로. 육교 아래로는 면천로가 지나간다. 지방도(70)이지만 자동차전용도로이다.

 09 : 15. - 10 : 10. 솔뫼성지. ‘+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그러니 솔뫼에 위치한 성스러운 땅으로 보면 되겠다. 1821 8 21일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했으며,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용인 한덕동(현 골배마실)으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다. 뿐만 아니라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1846년 순교)에 이르기까지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김대건 신부의 생가를 중심으로 김대건 신부의 동상 및 기념관,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경당, 기억과 희망(대성전+이춘만미술관), 솔뫼아레나, 소나무숲, 십자가의 길, 성모 칠고동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만남은 기억과 희망이다. 2021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禧年, 특별히 기념하는 해)을 맞아 신부님과 동료 순교자들이 남긴 위대한 신앙의 유산과 삶의 가치를 이어받기 위해 만든 건축물로 대성전과 예술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디자인은 뮈텔 주교(8대 조선대목구장)의 사목 표어인 피어라, 순교자의 꽃들아!’에서 영감을 받아 장미꽃을 형상화했단다.

 기억과 희망 (Memory and hope)의 대성전’. 미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모자이크로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가 특징이다.

 이춘만 미술관. 성경 말씀을 조각하는 이춘만(크리스티나)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작가의 브론즈 조각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사진은 올리지 않았지만 김대건 신부의 집안을 소개하는 공간도 있었다. 4대에 걸친 순교자들 이름을 조형물로 만들고 가계도를 설명해 놓았다.

 밖으로 나오니 거룩한 탄생이라는 작은 경당이 눈에 띈다. 처마에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이라는 누가복음(2:13-14)의 문구를 적어놓은 걸 보면, 이곳 솔뫼성지가 한국의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동상도 보인다. 솔뫼성지를 방문했을 당시 한복을 차려입은 소녀로부터 꽃을 받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단다. 시선을 조금 넓히면 교황님의 족흔(足痕·발자국 문양)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조형물을 담은 토피어리도 만들어 놓았다. 프란치스코 교황, 김대건 신부, 남녀 어린이들이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성모칠고 동산이란다. 성모칠고(聖母七苦)란 성모 마리아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았던 7가지 슬픔과 고통을 말한다. 1고 시메온의 예언(루카 2,34-35), 2고 이집트로 피신(마태 2. 13-15), 3고 예수님을 성전에서 읽으심(루카 2,41-50), 4고 예수님 십자가를 짊(요한 19,17), 5고 예수님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요한 19,28-30), 6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림(마르 15,42-45), 7고 예수님 무덤에 묻히심(마르 15,46-47) 등인데, 이춘만(크리스티나) 작가가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잠깐 쉬었다가자는 몽중루 작가님의 제안으로 들렀던 카페 솔뫼’. 한 잔만 주문(집사람이 마시지 않겠다고 해서)한 우리 부부에게 나누어 마시라며 여벌의 잔까지 갖다 줄 정도로 친절했다. 덕분에 느림의 미학을 노래하며 여유로움을 한껏 즐기다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릴 초대하고 커피 값까지 치러주신 작가님은 신용카드를 분실하는 불상사를 초래했다. 회수까지는 제대로 했는데, 패스포드가 아닌 주머니 속에 임시로 넣었다가 트레킹을 하면서 흘려버렸다나?

 이제 성지로 들어가 볼 차례다. 초입에 돌대문을 설치해 놓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솔뫼 아레나 반긴다. 아레나(arena)의 어원은 모래’, 또는 모래사장이다. 투기장 안에 모래를 깔고 검투사나 맹수의 피로 더러워지면 모래를 그 위에 끼얹으면서 계속 진행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실내경기장이나 공연장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래선지 솔뫼 아레나도 커다란 무대와 관람석을 갖추고 있었다.

 솔뫼 아레나는 김대건 신부와 밀사들이 합정동 새남터 한강 모래사장에서 순교한 것을 형상화 한 건축물이다. 12사도상은 가톨릭교회가 12사도로부터 이어져왔다는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회유문을 근거로 제작된 작품이다.

 김대건 신부 생가. 1906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60주년을 맞아 당시 합덕 성당의 주임신부였던 크램프 신부가 주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생가 터를 고증했고, 1946년 순교 100주년을 맞아 동상과 함께 순교 기념비를 세우면서 소나무 군락지를 중심으로 성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 후 정부와 문화재위원의 검증 작업을 거쳐 1998년 충청남도 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받았으며, 2004년에 생가 안채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솔뫼성지 방문을 앞두고 국가 사적지 529(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로 지정받기도 했다.

 생가 기둥에는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신부님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시선이 머무는 마당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기도문이 적힌 빗돌도 눈에 띈다. 교황님처럼 김대건 신부님께 기도를 드려보라는 모양이다. 참고로 김대건 신부는 골배마실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가 1845년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그 해 10월 귀국한다. 귀국 후 용인 일대에서 사목을 하다가 1846 9월 국문 효수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이후 1984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의 한국 방문 때 성인 품위에 오르게 된다. 하나 더. 김대건 신부님은 ‘2021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4년부터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와 일치하는 역사적 인물들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해오고 있는데, 2012년에는 다산 정약용(탄신 250주년), 2013년 구암 허준(동의보감 간행 400주년)이 선정된 바 있다.

 솔뫼라는 이름처럼 성지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절두산 성지 등 다른 성지들에서도 흔히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박해당하다 순교한 사람들의 꿋꿋한 믿음과 기개를 나타내는 상징이라고나 할까? ‘의 맨 꼭대기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을 모셔놓았다. 반듯한 몸매와 가지런한 옷매무시가 선구자의 기풍을 드러낸다. ‘순교 복자비도 눈에 띈다.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기념한다고 했으니 1946년에 세웠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옆의 성인비와 함께 성지가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고 성역화 되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곳의 소나무는 조성을 위해 이식한 게 아닌, 300년 전부터 서식하던 나무들이라고 한다.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모두 보며 살아왔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의미 있는 숲을 그냥 내버려두었을 리 만무하다. 빙 둘러 내놓은 산책로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배치했고, 순례 온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기도드리고 있는 광경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십자가의 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십자고상’. ‘십자가의 길(Stations of the Cross)이란 예수가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진 사실을 기억하며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의 길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무덤에 묻히기까지 그리스도 수난의 마지막 사건들을 묘사한 14장면의 연속 그림(또는 조각)을 차례로 돌면서 기도를 드린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이어서 각 처의 주문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차례로 드린다.

 백색의 모자상. 쪽진 머리에 치마저고리 차림인 성모님이 역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데,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의 자태며 천진난만한 아가의 모습이다. 그동안 유럽이나 중남미 등 해외여행을 해오면서 현지화 된 성모님들을 심심찮게 만났었다. 그리고 이색적인 풍경에 늘 부러워했었는데, 요즘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게 반갑고도 즐겁다.

 대전교구 역사관(옛 김대건 신부 기념관). 김대건 신부와 밀사들이 조선 입국을 위해 탔던 라파엘호(하느님이 보호하신다는 뜻으로 페레올 주교가 명명)를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하여 건축했단다. 서해 폭풍우에 라파엘호가 돛이 찢기고 키까지 부러져 망망대해에 있는 수반과 같이 방향성을 모두 잃었지만 성모님의 도움으로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안에는 그동안 모은 김대건 신부와 솔뫼성지의 역사 자료를 대중에 공개하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 가문의 순교자 연보를 적고, 그에 맞춰 대전교구 연보를 하단에 적어 넣었다. 이름은 대전교구 역사관이지만 내용물은 대부분 김대건 신부의 얘기들로 채워져 있다는 얘기다. 신부님의 가문과 순교자들을 소개하는가 하면, 신부님의 육필도 보여준다.

 맞은편 전시장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10주년 및 대전교구 역사관 개관을 기념하는 천주 신앙의 못자리 & 묏자리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문희 초대작가가 대전교구에 속한 순교성지들을 걸으며 성자와 순교자들을 만났던 순간들을 담았다고 한다. 그곳이 곧 천주신앙의 못자리이고 묏자리라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뜻을 담아 지었다는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의 집이다. 교황님은 고민이 생길 때마다 성모님께 문제의 매듭을 풀어 해결해 주시길 청원했다고 한다. 봉헌 초라도 올리고 싶었는데 너무 지체되었다는 집사람의 채근에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10 : 10. ‘솔뫼성지 투어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성지 대문에서 동쪽으로 100m 남짓 걸으면 평야지대가 드넓게 펼쳐진다. 서해랑길은 그 들녘을 가로지르며 나아간다.

 농로는 심심찮게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행여 길이라도 나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그림으로 표현해놓은 이정표가 이색적이다. 가야 할 삽교호 자전거터미널에서 자전거를 쏙 빼고 대신 그림으로 채워 넣었다. 반대 방향의 솔뫼성지는 누가 봐도 김대건 신부님이 분명하다.

 10 : 15. 잠시 후 도착한 구릉지에는 우강교회(이정표 : 삽교호자전거터미널 11.03km/ 솔뫼성지 0.89km)’가 있었다. 이곳 송산리는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강면 대부분이 높이 10m 내외의 간척평야인 점을 감안하면 특이하다 하겠다. 그런 야산에 소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송산(松山)’이란 지명이 붙여졌다. 솔뫼·비석골·갯말·북넹기·당살미 등 16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는데, 이곳은 솔뫼 마을이지 싶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길이 2차선으로 활짝 넓어졌다. 그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들녘을 꿰뚫으며 나아간다. 들판이 넓으니 벼의 수확도 남다를 것은 당연. 길가에 들어선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저 미곡처리장이 그 증거다.

 들녘은 가고 또 가도 끝이 나오지 않는다. 맞다. 이곳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곡창지대 중 하나이다. ‘해나루쌀이 생산되는데 우리나라 탁구계를 대표하는 삐약이 신유빈이 광고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10 : 30. 그런 망망 대지를 바라보며 걷길 15. 작은 개울이 앞을 가로막는다. 자전거길은 다리(삽교호자전거터미널 9.86km/ 솔뫼성지 1.9km)를 건넌 다음 2차선 도로(평야2)를 따라 왼쪽으로 간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다리 앞에서 왼쪽 농로를 따라간다. 서해랑길의 가이드리본이 펄럭이고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길은 공포리(孔浦里)’로 들어간다. 평야의 한가운데에 들어앉은 마을인데, 350년 전 공씨(孔氏)가 갯뚝을 막아서 농경지를 간척했다하여 공개, 공개원 등으로 불리다가 공포(孔浦)가 되었다.

 끝 간 데가 없다.’는 이런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곳은 아산만에서 조류에 의해 밀려온 간석지성 해안 충적지가 드넓게 분포한다. ‘소들강문(牛坪江門) 평야라고 불리는 갯땅인데, 경지 정리가 잘된 저평한 기하학적 패턴의 경작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10 : 53. 서해랑길은 신촌교회를 만나면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교회 이름을 보니 신촌리(新村里)’에 들어섰나보다. 아무튼 길은 이제 왼쪽에 수로를 끼고 간다.

 경칩(驚蟄)이 지나선지 날씨가 확 풀렸고, 부지런한 농부는 일 년 농사 준비로 분주하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11 : 04. 정겨운 농촌 풍경을 벗 삼아 900m쯤 걷다보면 신촌2가 나온다.

 다리에서 바라본 공포천 풍경. ‘소들강문 평야가 넓어서인지 꽤 크고 수량도 풍부했다.

 소들강문 평야를 헤집는 들길은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된다. 똑 같은 풍경이 계속되기에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구간이다. 참고로 옛날 이 지역은 소머리 모양의 돌 2개가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아 넓은 들이 되었다고 한다. ‘소들이라는 이름은 이 설화에서 유래했다. 소는 예로부터 부와 성실함의 상징으로 쓰여 왔다. 그만큼 잘 사는 고장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11 : 25. 드디어 삽교호에 닿았다. ‘소들섬을 마주보는 제방에 삽교호 수위관측소가 설치되어 있다.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이번에는 소들 쉼터에 이른다. 삽교호의 명물인 소들섬을 마주보는 둔치에 만들어놓은 쉼터이다. 참고로 소들섬 17 크기로 1973년 삽교천지구 대단위사업 이후 모래가 쌓이면서 생긴 섬이다. 충남 북부권의 이름 없는 섬으로 남아 있다가 2016년부터 섬 명명 운동을 시작해 2019 9 13일 우강면민 한마당 행사 때 이름을 확정했다. 이름은 충남의 대표 곡창지대인 소들강문(牛坪江門) 평야에서 따왔다. 2022 128일 야생생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철새도래지이기도 하다.

 코리아트레일 등 전국의 수많은 걷기 여행길을 답사하면서 곳곳에서 자전거길을 만났었다. ‘국토종주자전거길을 중심축에 두고 많은 지자체들이 주민들의 건강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자전거길을 냈다. 그만큼 자전거로 일상생활을 즐기는 동호인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당진이라고 뒷짐 지고 있었겠는가. 삽교호 언저리를 따라 자전거길을 내고 삽교호 자전거길이라 이름 붙였다. 동호인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자전거길 중 하나이다.

 박라연 시인의 시비(詩碑)도 눈에 띈다. 그런데 이 지역 출신의 많은 시인들을 제키고 전남(보성군) 출신의 여류시인 시를 새긴 이유가 뭘까? ‘삽교천에서라는 시가 이곳 삽교호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소들섬은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선지 소들섬의 사계를 안내판에 담아 보여주고 있었다.

 철새도래지이니 철새 사진이 빠질 리가 없다. 소들섬은 한강 하구와 함께 국내에서 중요한 철새 도래지 중 하나로 꼽힌다. 매년 겨울 큰고니·청둥오리·기러기·흰뺨검둥오리 등 다양한 철새들이 이곳에서 월동한다.

 소들섬 지키기는 다양한 단체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해오고 있다. 우강초등학교 환경동아리 환경의사회도 그중 하나인데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개최한 19회 이곳만을 꼭 지키자 시민공모전에서 환경부장관상까지 수상했단다. 나이 어린 친구들인데도 환경정화활동과 캠페인, 야생동물보호구역지정 청원 등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나?

 소들 쉼터라는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듯, 소들섬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썩 편치 않은 풍경도 펼쳐진다. 새들의 낙원이라는 섬에 송전철탑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전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따라서 발전소는 어디엔가 지어져야하고, 생산된 전기는 저런 철탑들을 따라 현대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철새들에게는 목숨까지 위협받는 시설이겠지만 인간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시설인 것이다. 둘 모두가 공존하는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워메~ 섬 아닌겨? 철새가 떼를 이룬 게 영락없는 섬이다. 하긴 야생생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을 정도이니 어련하겠는가. 육지의 일정한 지역 또는 물이 가까운 육지에서 서식하는 생물을 위한 피난지 또는 보호구역으로 보존과 보호를 위해 유지되는 구역 말이다. 멸종 위기종, 보호 대상 종, 수렵금지 종 등이 포함된다.

 겨울철마다 다양한 철새들이 소들섬을 찾는다고 했다. 매년 50만 마리 이상의 철새들이 찾아온단다. 흰꼬리수리, 큰고니, 수달, 수원청개구리 등 10여종의 1, 2급 멸종위기종 및 천연기념물을 포함한 야생생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철새들은 주로 3월 중순까지 소들강문(예당) 평야에서 머물다 시베리아로 돌아가는데, 잠시 머무는 동안 볍씨를 먹이로 공급하는 일이 겨울 철새들의 건강 유지와 지역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11 : 35. 파천수로 배수갑문. Open street map은 이곳을 공포천(孔浦川)’으로 적고 있었다. 우강면 강문리에서 발원 공포리를 거쳐 부장리에서 남원천에 유입되는 길이 2.7km의 하천이다. 소들강문(牛坪江門)의 드넓은 평야지대를 흐르므로 경사가 거의 없다는 게 특징이란다.

 공포천의 배수지. 웬만한 국가하천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다.

 서해랑길은 이제 삽교호의 제방을 따라간다. 둑 위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넓이로 길이 나있다. 그래선지 자동차와 자전거, 그리고 도보 여행자들이 함께 쓰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소들강문평야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부장리(富長里)의 들녘이 펼쳐진다. 풍요로움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원뚝이 길다()고 했으니 들녘이 넓은 것은 당연. 그러니 부자들 또한 많을 게 아닌가. 부촌(富村) 길 장()’을 더해 부장(富長)’이 되었다고 한다.

 오른쪽에는 삽교호(揷橋湖)’가 있다. 당진, 아산, 예산, 홍성 4개 시군의 농경지와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개발된 인공호수이다. 국민관광지로도 개발되어 있으며 백로, 왜가리 등 철새들의 서식지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11 : 52. 둑길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래 이어졌다. ‘이제 그만~’을 서너 번쯤 되뇌었을까? 드디어 남원천(南院川)’의 하구역에 도착했다.

 남원천교를 건넌다. 지역주민 및 자전거라이더들의 편의를 위해 만든 다리로 사람과 자전거, 농기계만 다니는 걸 원칙으로 한다. 그렇다고 통행을 금지시키지는 않아 다리를 건너는 차량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초입에 야생동물 보호지역 출입을 금지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동물전염병(AI) 예방을 위해서라는데 금지 기간(12-2)이 끝나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트레킹을 도중에 그만 둘 수도 있었겠다.

 남원천은 면천면 몽산의 남쪽 계곡에서 발원, 순성면·신평면·우강면의 들녘을 적셔주며 동진하다 우강면 부장리에서 남원포(南院浦)를 지나 삽교천으로 유입되는 23.24km 길이의 하천이다.

 삽교호의 둑길을 따르는 기나긴 여정이 또 다시 시작된다.

 이 구간에서는 세월, 아니 물고기를 낚는 강태공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잡초와 잡목으로 뒤덮인 둔치 곳곳에 낚시꾼들이 들어앉았다. 하지만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취미생활을 즐기는 거야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주변에 널린 쓰레기들은 꼭 저들이 버린 게 아닐지라도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기에 충분했다.

 ·배수장은 간척지의 필수 시설이다. 그래선지 요런 시설을 두어 곳이나 만날 수 있었다. 삽교호로 연결되는 수로의 끄트머리마다 배수장이 설치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12 : 19. 호수의 폭이 바다처럼 넓어졌다. 호숫가에는 작은 선착장도 만들어져 있다. 삽교천방조제에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12 : 23. 운정양수장. 1979년에 착공 1983년에 준공된 전천후 농업생산기반시설로, 당진 지역의 농경지 14500에 물을 공급해준다.

 12 : 29. ‘자 모양으로 양수장을 돌아서면 삽교호 호수공원이 맞는다. 25천 평이나 되는 삽교호 둔치에 조성된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다목적마당·야구장·파크골프장·어린이놀이터·생태습지·잔디광장 등 다양한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한마디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운동시설이 어우러진, 휴식과 운동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보면 되겠다.

 야구장은 인조 잔디에 라이트시설까지 갖췄다. 그런데 텅 비어있는 이유는 뭘까?

 모퉁이를 돌아서면 2층 정자인 삽교정’.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왼쪽으로 간다. 그렇다고 곧장 진행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오른쪽으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새들 쉼터라는 구경거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들 쉼터 함께 어울리다를 주제로 삼았다고 한다. 생태를 체험하고 자연과 소통하며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걸 표현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삽교호에 풍부한 붕어를 조형물로 만들어 포토 죤으로 삼았다. 소통의 분위기를 조금 더 느껴보고 싶다면 호숫가 선착장으로 내려가 볼 일이다.

 새들 쉼터 새들 새롭게 생긴 들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백제 때는 신평으로 불리었단다. 산으로 형성되어 있던 지역이 천지개벽으로 넓은 평야와 갯벌로 변한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나?

 일렁이는 물결 위를 춤추며 떠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나룻배와 종이배 벤치도 배치했다. 벤치에 앉아 고요한 물 위로 떠오르는 그리운 추억들을 되새기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보라나?

 삽교정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쪽으로 간다. 공원의 한가운데를 지나간다고 보면 되겠다.

 파크골프도 골프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모양이다. ‘나이스 샷!’을 외치는 탄성의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파크골프는 작은 공간에서 짧은 코스를 걸으며 공을 치기 때문에 필드를 쉽게 조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9개의 홀로 구성되는데 간단한 규칙과 적당한 운동량 덕분에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각광받는다.

 조금 더 걷자 조각 공원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잔디광장에 신다혜 작가의 달토끼’, 최상근 작가의 꿈나무’. 박만철 작가의 어울림 등 많은 조각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빨간 사과의 형상을 담은 전용환 작가의 공간-하나로부터는 평면 공간을 3차원 형태인 생성-결실의 열매 사과로 시각화 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자연의 소리’, ‘마주하기’, ‘도시산책 등의 조각상이 자연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12 : 48. 예쁘게 단장된 주차장을 마지막으로 호수공원은 끝난다. 그리고는 삽교천길을 따라 삽교호관광지로 간다. 이때 풋살경기장과 족구장, 농구장 등이 들어서있는 생활체육공원을 스치듯 지나가기도 한다.

 삽교대교를 지나면서 길은 분위기가 확 바뀐다. 체육공원이라는 느낌이 강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유원지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이다. 벚나무 가로수까지도 아름드리로 바뀌어 상춘객을 불러 모으기에 딱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12 : 56. 월드아트 서커스. 중국식 서커스 공연장으로 링체조, 실타래돌리기, 무용, 공중곡예, 모자묘기, 이인체조, 오토바이묘기 등의 묘기를 보여준단다. 주중 1(14:00), 주말 3(11:00, 14:00, 16:00) 공연(1시간)한다고 했는데 작년 12 25일부로 중단됐단다. 문에는 올 41일부터 새롭고 멋진 공연을 보여주겠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신평 잠령탑(新平 蠶靈塔). 양잠업이 성행하던 1960-70년대의 산업유산으로, 당진 일대의 잠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되던 시기, 잠업을 권장하기 위해 1967년 신평면의 망객산 정상에 세운 빗돌이다. 잠업이 쇠퇴하고 뽕나무밭을 갈아엎어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되면서 2000년대 운정리 삽교천으로 이전했다.

 13 : 02. 호수와 바다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삽교호관광지는 볼거리와 먹거리, 즐길 거리가 가득하다. 서해와 인공호수, 황금 들녘과 각종 놀이공원이 한곳에 모여 있다. 하지만 범위가 워낙 넓기 때문에 자전거터미널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둘러보는 게 편할 수도 있다.

 유명 관광지답게 길가는 먹거리로 넘쳐난다. 서해의 싱싱한 해산물을 직접 골라 맛볼 수 있는 어시장과 회센터, 서해 갯벌에서 채취한 갖가지 조개를 숯불에 구워 먹는 조개구이 전문점 등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매년 10월이면 조개구이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불꽃놀이, 수산물 깜짝경매, 맨손 물고기 잡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단다.

 삽교천유역농업개발기념탑. 1979 10 26일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행사로 기억되는 곳, 기념탑은 삽교천방조제 준공을 기념해 1980 5 1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건립했다. 머릿돌에 ‘1979 10 26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 우람한 호수를 삽교호로 명명하고 준공했다.’라는 문구도 새겼다. 그러다 43년 뒤인 2023 5월쯤 붕괴위험이 있다며 철거됐었는데 최근 다시 세운 모양이다.

 삽교호 함상공원’. 대양을 호령하던 군함이 명예로운 퇴역과 함께 해군·해병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이색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함정 내외부나 해군·해병의 주제별 전시관을 둘러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항공기, 탱크 등도 살펴볼 수 있단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후일 83코스를 답사할 때 들러볼 요량이다.

 함상공원 뒤로는 아산만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13 : 12. 삽교천방조제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당진시 신평면 운정리와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 사이에 축조된 방조제로, 삽교천 하구에 3,360m 길이의 둑을 쌓아 인공담수호를 만들었다. 이 담수호의 조성으로 당진·아산·예산·홍성 등 4개 시·군의 관개용수가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업·생활용수도 하루 4 8000t이나 공급 가능해졌다고 한다.

 64-6코스는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완주인증 QR도 눈에 띄지 않는다. 방조제 초입의 가로등에 매달린 종점 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할 따름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16.33km 4시간 10분에 걸었다. 솔뫼성지와 삽교호호수공원을 둘러보면서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DMZ 평화의길 8코스(임진강역 - 율곡습지공원)

 

여행일 : ‘25. 3. 1()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및 파평면 일원

여행코스 : 임진강역통일육교장산1리 마을회관맨밧골장산전망대임진리화석정율곡습지공원(거리/시간 : 10.2km, 실제는 11.92km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11 : 20. 트레킹 들머리는 임진강역(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자유로(국도 77호선)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면 그 끄트머리에서 임진각국민관광지를 만난다. 임진각관광의 출발점이랄 수 있는 임진강역이 8코스 및 8-1코스의 시점이다.

 완주 인증 QR코드는 도로 건너에 세워놓은 평화의길 이정표에 붙어있다.

 임진강역을 출발 마정리와 장산리의 드넓은 평야를 횡단하여 파평면의 율곡습지공원으로 가는 10.2km의 여정. 율곡선생의 때가 묻은 화석정과 율곡습지공원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11 : 20. 자유로의 마정육교 아래를 지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탐방로는 자유로와 함께 간다. 도로 오른쪽 아래로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농로가 나있다.

 11 : 32. 또 다른 4차선 도로인 통일로(1번 국도)’는 굴다리를 통해 횡단한다. 평화누리길 이정표는 이곳을 통일대교로 적고 있었다.

 굴다리를 빠져나오니 이정표가 왼쪽을 가리킨다. 몇 걸음 떼지 않아 이번에는 평화누리길 쉼터가 잠시 쉬었다가란다.

 평화의길 8코스는 역사와 자연을 아우르는 길이다.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에서 사는 동물들을 만날 수 있는가하면, 우리의 역사를 아우르는 유적을 품고 있다. 천적이 없는 들녘에서 노닐고 있는 철새 떼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길은 장산1를 향해 간다. 왼쪽은 자유 IC’, 1번국도인 통일로와 자유로가 만나면서 만들어놓은 곡선을 따라가며 길이 나있다.

 오른쪽으로 엄청나게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민통선 철책이 가른 저 들판에서 나오는 쌀은 파주 임진강 쌀이란 고유의 브랜드까지 갖고 있단다. 충청도의 예당평야나 전라도의 만경평야 같은 드넓은 곡창지대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북쪽의 파주에도 이렇게 너른 평야지대가 있을 줄은 몰랐다.

 11 : 39. 이정표가 들녘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 더 가면 민통선이니 이쯤에서 방향을 틀라는 모양이다.

 100m쯤 진행했을까 이번에는 왼쪽으로 가란다. 오른쪽은 마정2(야미동 : 夜味洞)’로 연결된다는 것도 알아두자. 마정리(馬井里)는 남북분단으로 인해 생긴 민간인통제구역의 임진강 남안지역 첫 마을이다. 마정(馬井)은 말 우물이란 뜻이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짙던 어느 날 새벽 햇살 기둥이 우물에 꽂히자 그 안에서 용마(龍馬)가 뛰어나왔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탐방로는 마정리 들녘을 횡단한다. 8-1코스의 초반은 이렇듯 마정리와 장산리의 들녘을 헤집으며 나아간다. 둘 모두 널찍하지만 임진강에 맞대고 있는 마정리의 들판이 장산리보다 훨씬 더 넓다.

 11 : 47. 한갓진 들판이 지루해질 즈음 민통선으로 보이는 둑으로 빠져나간다. 옛 토성(土城)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둑이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다. 북한의 침략에 대비한 방호시설이 아닐까 싶다. 그 너머는 민간인통제지역이란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평화의길은 이제 그 둑을 따라간다. 둑 아래로 농로가 나있다.

 둑 위에는 윤형철조망이 처져 있었다. 금단의 땅이니 넘어오지 말라는 듯이.

 경기도 권역의 평화의길 대부분은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 함께 쓴다. 그래선지 곳곳에서 자전거 라이더들을 만나게 된다. 별도의 경보음을 내는 장치가 없어서인지 멀리서부터 미안합니다을 외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11 : 55  12 : 00. 길은 또 다시 들녘으로 파고든다. 그곳에 평화누리길에서 만든 쉼터가 있었다. 덕분에 우리부부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쉬다 갈 수 있었다.

 텅 빈 들판을 걷는 기분은 겨울여행의 참맛이다. ‘평야는 평화다란 외침이 절로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12 : 10. 또 다른 평화누리길 쉼터. 라이더 한 분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쉼터 옆 굴뚝처럼 생긴 저 시설의 정체는 대체 뭘까? 그동안 등산을 해오면서 만났던 저런 굴뚝 밑에는 어김없이 군의 벙커가 있었는데 말이다.

 탐방로는 농로를 빌려 쓴다. 그러니 농기계라도 마주칠라치면 길을 양보해주는 게 예의라 하겠다.

 12 : 13. 이번에는 아예 석성(石城)이다. 아니 웬만한 산성보다도 더 높고 튼실하게 쌓아올렸다. 함께 걷던 일행이 대전차 방호벽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12 : 15. 그 끄트머리에서 맨박골천을 만났다. 차마 물길을 끊어놓지 못한 대전차 방호벽은 대신 시멘트덩어리를 매달고 있었다. 유사시에 떨어뜨릴 요량일 것이다.

 방호벽을 통과한 탐방로는 장산1리로 들어간다. 규모가 제법 큰 이 마을은 옛 장산진의 동헌(東軒)이 있었기 때문에 동헌마당이라고도 부른다. 도안마당, 동안, 동헌안, 동안마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참고로 장산리(長山里)는 임진강이 휘감아 돌아나가는 마을이다. 장산에서 임진나루까지 약 2km 가량 높이가 같은 산이 임진강 가를 따라 길게 뻗었으므로 진동산 또는 장산(長山)이라 하였다. 1755(영조 31)에 진()과 보루(堡壘)를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어 지켰으므로 장산보 또는 장산진이라고 하다가 진을 폐한 후 다시 장산이라 하였다. 장산진, 장산보, 진동산이라고도 한다.

 장산1리 표석. 행정 동리보다, 위에서 거론했던 자연부락의 이름을 적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요즘은 옛 지명을 찾는 게 대세라고 하지 않았던가.

 12 : 22. 장산1리 마을회관. 이정표(율곡습지공원 5.5km/ 반구정 7.5km)가 절반쯤 왔음을 알려준다. 반구정에서 시작되는 경기둘레길 7코스와는 달리, 임진강역에서 출발하는 평화의길 8코스는 길이가 10.2km이니 말이다.

 12 : 25. 마을을 빠져나온 평화의길은 맨박골천의 둑길을 따라 올라간다.

 12 : 33.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이정표는 오른쪽을 가리킨다. 하지만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들녘을 일부러 에돌아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곧장 직진하면 오히려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다.

 고지식한 필자는 들녘으로 에둘러 갔다.

 12 : 37. 2차선 도로인 장산로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보이는 맨밧골을 향해 간다. 오른쪽은 운천리(雲泉里)로 연결된다. 산골짜기로 구름이 돌아가며 여러 곳에서 샘이 솟아난다는 마을이다.

 장산1리의 자연부락인 맨밧골이다. 마을 부근에 바위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매암밧골, 매음동(梅岩洞)으로도 불린단다.

 12 : 41.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사거리(도로표지판은 삼거리)에서 평화의길은 오른쪽으로 간다. 왼쪽으로 가면 같은 장산1리인 맛개(麻浦)’라는 자연부락이 나온다. ‘제주 고씨네 열녀문과 거창 신씨네 정자인 래소정(來蘇亭)이 있었다. 현재는 사라지고 없지만, 대신 조선후기 호곡 남용익 선생이 래소정에서 바라 본 임진강 8경을 노래하며 지은 래소정어(來蘇亭於)’가 전해지고 있다.

 이후부터는 임진리 방향의 임도를 탄다. 무척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이런 오르막길은 장산리의 뒷산인 장산 고갯마루까지 이어진다.

 12 : 49. 고갯마루에는 간이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탐방로는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려갈 일은 아니다. 다리품을 조금 더 팔면 뛰어난 조망을 자랑하는 장산전망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표(율곡습지공원 3.6km/ 반구정 9.4km / 장산전망대 0.3km) 300m쯤 떨어진 곳에 장산전망대가 있음을 알려준다.

 12 : 53. 잠시 후 도착한 장산전망대. 임진강의 하중도인 초평도와 그 너머의 북녘 땅을 한꺼번에 살펴 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처이다.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개성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왼쪽은 역사의 아픔을 끌어안은 초평도이다. 초평도는 임진강의 대표적인 하중도(河中島, 곡류하천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 삼각주)이다. 민간인 통제구역이라는 금줄 속에 갇힌 또 다른 의미의 이기도 하다. 철저한 이념 검증을 통과한 바람, , 새와 동물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금단의 영역이다. 하지만 6.25전쟁 이전에는 사람이 거주했으며 잘 정리된 논과 밭도 있었다고 한다.

 조망도를 설치해 실물과 대조해가며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푹 빠져있는데, 건너편을 지긋이 응시하던 젊은 연인이 북한 땅이냐고 물어온다. 우리 땅(파주시 진동면)임을 알려주며 부연설명까지 해주었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2km씩 도합 4km를 비무장지대로 규정하는데, 저곳은 그 남방한계선보다도 더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며 말이다. 다만 보안상의 이유로 민간인의 출입은 통제된다는 것도.

 대북전단 살포자들의 출입통제 및 행위금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누군가에게는 꼭 해야만 하는 사명이겠지만, 접경지 주민들로서는 눈에 가시일 것이다. 혹시라도 위험물이라는 핑계로 북에서 총이라도 쏘아댈 경우 그 피해는 오롯이 주민들에게 돌아갈 것이 뻔할 테니까 말이다. 하긴 남북분쟁을 일부러 조장하려던 몹쓸 인간들도 최근 있었지만.

 임진리를 향해 내려간다. 포장되어 있지 않은 것이 전형적인 임도의 풍경이다.

 이런 심심산골에 웬 낚시터?

 임진나루길을 걷고 있는 당신, 종점인 임진나루터까지 1.3km가 남았답니다.

 임도는 언덕위로 지나가는 도로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바로 앞에 두고도, 길이 나있지 않아 오른쪽으로 한참을 에돌아서야 올라설 수 있었다.

 12 : 18. 갈림길 모서리에 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종국 시인의 시판(詩板)이 세워져 있었다. ‘들킬까 숨어 핀 꽃 아니외다.’로 시작되는 들꽃이외다가 적혀있다. 시와 함께 걷는 평화누리길이란 부연설명도 보인다.

 13 : 20. 언덕으로 올라선 길은 임진나루 마을(臨津洞)’로 들어간다. 초입에 마을 표석과 함께 장승을 세워놓았다. 솟대로 구색까지 맞췄으니 솟대공원 쯤으로 해두면 어떨까?

 조금 전 저 골짜기를 지나왔다. 흉물스럽게만 보이던(사진도 찍지 않았을 정도로) 흄관과 맨홀이 위에서 바라보니 제법 그럴 듯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임진동은 잘 지어진 주택들로 가득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패키지마을로 조성했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임진(臨津)은 임진나루터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임진강 가에 고려·조선 시대 남북을 오가던 옛길 의주대로의 뱃길인 임진나루터가 남아 있다. 최근에는 임진나루터의 진서문터가 발굴되어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마을에는 식당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그 대부분은 쏘가리매운탕 등 임진강의 어족자원을 활용한 메뉴를 내걸고 있다. 마을과 접하고 있는 임진강에서 선단을 이뤄 어업활동을 하는 덕분이란다.

 매운탕전문점인 임진대가 TV 프로그램 식객 허영만의 백반 기행’ 81회에 등장하기도 했다. 허영만 선생이 가수 민해경과 함께 방문한 집으로, 밑반찬으로 나온 깻잎장아찌, 시래기 무침과 함께 참게 매운탕이 소개되었다. 채널A 엄마의 여행, 고두심이 좋아서에서도 다녀갔던 모양이다.

 장단콩으로 대변되는 장단면을 근거리에 두고 있어서인지 임진나루협동조합(마을기업)에서는 두부를 직접 만들고, 이를 이용한 요리를 팔고 있었다.

 길은 임진나루로 이어진다(나루터까지 가지는 않는다). 임진동의 가장 큰 특징은 고려·조선 시대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는 점이다. 영조 때인 1755년 군진인 임진진(臨津鎭)을 설치한 이유다. 나루 안쪽 협곡을 가로지르는 성벽을 쌓고 진서문(鎭西門)을 냈으며, 그 위에 목조 누각인 임벽루(臨壁樓)를 올리기도 했다. 문헌에도 나타난다. 고려사절요에 1045(정종 11) 행인들이 앞 다투며 임진강을 건너다 빠져 죽는 경우가 많아 왕이 이를 근심하여 특별히 부교(浮梁)를 만들게 함으로써 이때부터 사람과 말이 평지를 다니듯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1418(태종18) 2월 어가가 임진나루 북쪽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고,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한양을 떠나 북쪽으로 피신하면서 한밤중 빗속에 임진나루를 건넜다고 적는다.

 13 : 32. 평화의길은 임진나루 초입에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언덕으로 올라 화석정로를 만난다. 임진강 벼랑 위로 난 화석정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보도를 따로 만들어 놓았다.

 임진나루 뱃사공 이야기를 담은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양반으로 변장한 다른 나루 뱃사공의 정체를 밝혀낸 지혜로운 뱃사공 이야기를 담았다.

 이곳은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임진강과 그 건너 민간인통제구역을 은밀한 속살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 254km 길이의 임진강(臨津江)’은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산맥에서 발원, 황해북도(판문군)와 경기도(파주시) 사이에서 한강으로 유입되어 황해 바다로 흘러든다. ‘()’ 더덜  다닫다라는 뜻이며 ()’ 나루라는 뜻으로, 임진강의 옛 이름은 더덜나루였다고 알려진다. ‘이진매 또는 더덜매’(언덕 밑으로 흐르는 강)라고도 불리었단다.

 건너편은 파주시 진동면(津東面)이다. 군사보호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나 2000년을 전후해 동파리에 실향민 마을인 해마루촌이 조성되어 일부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왼쪽 모퉁이 너머에는 임진나루가 있다.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임진왜란을 맞아 몽진을 하면서 임진나루를 건넌 뒤 나루를 폐쇄하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때 임금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도 철거시킴으로써 수많은 백성이 피난을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단다. 625 전쟁 중에도 임진강과 임진나루를 경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다.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물자를 원활하게 보급하기 위해 임진나루에 부교를 가설하기도 했다. 휴전협정 체결 뒤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었고, 1972년에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히 폐쇄되었다.

 13 : 34. 문산읍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율곡로(37번 국도) 아래를 지나면서 파평면에 바톤을 넘겨준다. 필자 문중의 세거지(世居地)이기도 한데, 고구려의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이었다가 757(신라 경덕왕 16)에 파평현(坡平縣)으로 개칭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파평(坡平)이라는 이름은 파평산(坡平山)과 영평산(鈴平山)의 명칭에서 연유하며 전 지역이 평평한 언덕으로 되어 있다.

 13 : 36. 화석정 입구. 평화의길은 율곡로로 연결되는 진입로를 건너 보도로 올라간다. 이어서 50m쯤 걷다가 화석정으로 이어지는 임도(화석정로)를 따라간다.

 화석정 주차장. 화석정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은 듯 널찍하게 만들어 놓았다.

 군의 시설물인 것 같은데, 개조하여 화석정의 홍보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른쪽 벽면에는 파주시 관광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13 : 40  13 : 45. 평화의길(8-1코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화석정에 도착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여생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며 시와 학문을 논했다는 장소로, 임진왜란 때는 커다란 횃불이 되어 선조의 도망가는 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화석정(花石亭) 1443(세종 25) 율곡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이 처음 지었고, 1478(성종 9)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고, 이의석의 스승인 이숙함(李淑瑊) 화석정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673(현종 14) 후손들이 복원했으나 6.25전쟁 때 또 다시 불타고 말았다. 현재의 건물은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했다.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하지만 이게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고증을 거치지 않고 지은 탓에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 지어야한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고, 최근에는 율곡의 망실된 유적과 정신을 복원하겠다는 파주시의 발표도 있었다. 복원되는 화석정은 현재와 같은 일반적인 정자 모습이 아니라 정면 3, 측면 2칸의 건물로 내부에 온돌방이 있는 형태라고 한다.

 정자에서의 조망은 매우 뛰어나다. 강가 벼랑 위에 지어진 탓에 발아래로 임진강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지금은 민간인 통제지역으로 변한 장단(長湍)의 들녘(파주시 진동면이지만 옛날엔 장단군에 속한 면이었다)이 드넓게 펼쳐지는가 하면 임진나루의 풍경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五冠山)까지 보인다는 이도 있었으나, 미세먼지 탓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언젠가 정자 옆의 저 늙은 느티나무를 두고 다툰 일이 있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율곡선생이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심었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이 나무는 560살을 먹었었다. 1422년에 심어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율곡은 1537년에 태어나셨다. 선생이 태어나기 100년도 전에 심어졌다는 얘기다. 뭔가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장삼이사들 때문에 생긴 일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래소정어(來蘇亭於)’를 소개하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조선 숙종 때 문신인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임진강변에 자리한 정자 래소정(6.25전쟁 때 소실됐다)’에 올라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시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꼭 살펴보는 빗돌. 앎이 얕으니 잘 지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시를, 그것도 여덟 살에 지었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을 향해 붉구나/ 산위에는 둥근달이 떠오르고/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위에서 거론했던 얘기들을 적은 화석정 안내판‘. 옆에는 경기옛길 스탬프보관함도 설치되어 있다.

 율곡은 임진왜란에 앞서 국가변란을 대비한 십만양병설을 주창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율곡이 죽은 후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같은 해 429일 밤, 선조는 물밀 듯이 쳐들어오는 왜적을 피해 의주로 도망가면서 화석정 옆 임진강변에 다다른다. 하지만 억수 같은 비로 인해 앞은 강물에 길이 막히고 뒤로는 왜적에 쫓기는 위태로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됐다. 이때 화석정을 불태워 길을 밝혀 임금이 무사히 임진강을 건넜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율곡이 틈날 때마다 들기름을 묻힌 걸레로 정자의 기둥과 마루를 닦게 했고, 어려움이 있을 때 열어보라며 남긴 편지에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적었다는 일화도 함께 전해진다.

 13 : 45. 율곡리(栗谷里)로 내려선다. 조선중기의 대학자이자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본향 마을이다. 선생의 호 율곡(栗谷)’은 이 마을에서 비롯된 것이다. ‘율곡이란 지명은 밤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졌다. 마을에는 나도밤나무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린 율곡이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지나가는 스님이 율곡을 보고 아이의 운명이 좋지 않으니 뒷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시오.’라고 하여 율곡의 부친이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 그루가 자라는 과정에서 죽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고, 이때 나도밤나무가 모라란 것을 채워주어 율곡선생은 훌륭한 인물로 성장했다는 전설이다. 전설은 믿거나 말거나지만 지금도 율곡리 마을에는 유난히 밤나무가 많다.

 예쁜 꽃이 그려진 집, 당호를 율곡마을 꽃 댁()’으로 내걸었다. 뒤로 돌아가면 소희네 외가댁도 만날 수 있다.

 울 엄마네 집이었는데 지금은 막내딸네 집이란다. 하지만 그 막내딸도 지금은 타지로 나갔나보다. 문은 굳게 닫혀있고, 마당에는 쓰레기만 한 가득이었다.

 화석정, 그곳에 가면이라는 작은 쉼터도 만날 수 있었다. 율곡 선생의 15대손인 이성룡씨와 어머니 하옥남씨, 소야 하옥이씨가 함께 운영하는 전시장인데, 한국가곡작사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하옥이씨는 시집 숨겨진 밤과 다수의 가곡집을 발표해오고 있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라간다. 개울가를 따라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길이 나있다.

 농어촌공사의 장산양수장이 있다는 것은 이 마을이 임진강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현인농원. 토종닭(재래종 닭)의 복원·보존을 연구하는 농장이란다. 입구의 잘 생긴 저 닭을 얘기하는 모양이다.

 14 : 00. 임진강변으로 빠져나가려면 자동차전용도로인 율곡로(37번 국도)를 횡단해야만 한다. 이정표(율곡습지공원 0.5km/ 반구정 12.5km)가 굴다리로 들어갈 것을 지시한다.

 굴다리를 지나자 율곡습지공원이 다 왔다며 반긴다. 진행방향에는 종점인 주차장도 놓여있다. 그러나 호수가 가로막고 있어서 한참을 더 걸어가야만 한다.

 이정표는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우린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가리키는 오른쪽(율곡2리 방향)으로 진행했다.

 14 : 07. 장승이 맞아주는 율곡습지공원 입구. 율곡습지공원은 주민들의 노력이 빚어낸 멋진 결과물이다. 재해예방시설(저류지)에 꽃을 심고 가꾸어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봄이면 유채꽃이 피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피는 아름다운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공사 현장(겨울철을 맞아 시설 보수를 하는 듯)을 지나자 율곡 숲이 나온다. 호숫가에 숲을 조성하고 이 지역이 낳은 큰 인물인 이이의 호를 이름으로 삼았다. 정자나 전망대, 벤치 같은 편의시설들을 배치했음은 물론이다. 여름철에는 저 호수에서 분수까지 품어져 나온단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것은 그네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이 지긋한 집사람을 동심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공원은 고향의 정겨운 시골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넓은 꽃밭과 습지에 피어있는 연꽃 군락지, 억새, 옛 농기구가 걸려있는 초가집, 높이 솟아 있는 솟대들, 삐뚤빼뚤 재미난 모양의 장승, 물레방아 등이 정감을 자아낸다.

 천국의 문도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평화 계단으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평화로 한 걸음 나가듯이 계단을 올라라보라는 모양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비둘기를 희롱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말이다.

 14 : 20. 임진강변 생태탐방안내소에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안내판(완주 인증 QR코드 부착)은 평화누리길 9코스(율곡길)의 아치형 대문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번 8코스는 11.92km 3시간에 걸었다. 화석정과 율곡습지공원을 돌아보느라 조금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오늘도 집사람과 떨어져서 출발했다. 반구정(황희선생 유적지)에서 시작한 나와는 달리 집사람은 3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임진강관광지를 출발지로 삼았다. 일종의 반보기 풍습을 따른 셈이다. ‘반보기란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양가 중간 지점에서 만나 그리움과 정담을 나누던 옛 풍습을 말한다. 친정으로 가지 않아 시댁 가사에 큰 지장을 주지 않고, 친정에 드릴 정받이 음식을 장만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거기다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으니 이 아니 좋았겠는가. 하지만 JTBC 사건반장을 보던 집사람이 앞으로는 사양하겠단다. 세상이 하수상한데 어떻게 혼자서 걸을 수 있느냐면서 말이다. 걷기 여행조차 두려워지는 세상은 언제쯤 사라지려나?

DMZ 평화의길 7코스(낙하 IC - 임진강역)

 

여행일 : ‘25. 3. 1()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및 문산읍 일원

여행코스 : 낙하 IC내포 IC임월교당동어린이공원반구정임진강역(거리/시간 : 12.1km, 실제는 반구정부터 7.75km 2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낙하 IC(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낙하리)

자유로(국도 77호선)의 낙하 IC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만나는 마을이 낙하리이다. ‘평화의길 인증 QR코드는 마을 버스정류장 옆 평화의길 이정표에 붙어있다.

 낙하마을을 출발 임진강의 언저리를 따라 임진각관광지까지 북진하는 12.1km의 여정

 산악회에서는 7코스와 8코스를 한꺼번에 걷겠단다. 하지만 집사람의 체력으로 22.3km는 무리다. 그래서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을 과감히 생략하고, 대신 평화의길이 살짝 비켜 지나가는 반구정과 임진각관광지를 들러보기로 했다.

 09 : 00  09 : 20. 계획대로 반구정(황희선생 유적지)’부터 들른다.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52)가 말년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자연을 즐기던 곳이다. 정확히 10시에 문을 여는 유적지는 1천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5살 이하나 경로는 면제해준다.

 18년이나 의정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 재직했던 분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영당(影堂)을 중심으로 노년의 황희가 유유자적했다는 반구정(伴鷗亭), 고손인 황맹헌(黃孟獻)의 부조묘(不祧廟), 앙지대, 경모제, 고직사 그리고 방촌기념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만남은 방촌기념관. 청백리의 표상이라 할 만큼 깨끗한 정치를 펼쳤던 인물로 잘 알려진 황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면 선생의 일대기를 접하게 된다. ’황희하면 정승이란 수식어가 으레 따라다닌다. 의정부 수반인 영의정(또는 좌·우의정)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얘기다. 정승을 지낸 역사인물이 어찌 황희뿐이겠는가. 하지만 24년이나 재임한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영의정 18, 좌의정 5, 우의정 1년을 지냈다. 특히 6대 임금을 섬긴 인물은 황희가 유일하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삶과 사상이 담긴 작품과 유품들도 전시되고 있었다. ’! 명필이네~~‘ 이석암 작가님의 말마따나 지극히 아름다운 글씨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등 삶에 얽힌 일화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황희는 겸손한 자세와 치우침 없는 몸가짐으로 존경을 받았다. 인격과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말을 공손하게 하는 법이다. 대통령 탄핵 결정을 앞둔 요즘,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쏟아내는 오염된 말들로 인해 세상이 어지럽다. 황희의 겸손 리더십이 한층 더 중요해지는 요즘이다.

 청정문(淸政門)’으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된다. ‘청백리(淸白吏)’였음을 은연중에 자랑하는 이름이다. 청백리는 청백탁이(淸白卓異), 즉 청렴하고 결백함이 이상적인 관료를 의미한다. 조선시대는 200명 내외가 청백리로 선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으로 들어가자 유적지의 중심축인 반구정(伴鷗亭)’이 반긴다. 관직에서 물러난 황희 정승이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곳으로, 임진강 강물 위로 바로 치솟은 옹색한 언덕에 비집고 들어서 있다.

 원래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인근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시멘트로 대폭 개축했고,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목조건물로 바꿨다. 하나 더. 반구정은 세조 때 재상 한명회의 압구정(狎鷗亭)’과 비교되기도 한다. ‘  모두 벗 삼는다는 뜻을 담았지만, ‘자는 상하 관계에서 높은 이가 아랫사람을 가까이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에 명칭에서부터 두 사람의 인품을 보여준다는 시각이다.

 처마에는 미수 허목선생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가 걸려있었다. <반구정은 임진강 하류에 있다. 먼 옛날 재상 황희의 정자다. -중략- 정자는 임진(臨津) 밑에 있는데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모여든다. -이하 생략->

 정자에 오르자 시야가 툭 트인다. 발아래로는 임진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경칩을 앞두어선지 날씨가 확 풀렸다. 하지만 흰 선이 강물을 둘로 가르는 걸 보면 겨우내 살을 찌웠던 얼음은 아직 녹지 않은 모양이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맑은 날에는 멀리 개성의 송악산까지 보인다는데 짙은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앙지대(仰止臺)’라는 또 하나의 정자가 있었다. 1915년 반구정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지었다고 한다. 상량문은 오직 선()만을 보배로 여기고, 다른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앙지대라는 이름은 시경의 호인(好人)이라는 뜻을 취했다.’라고 적고 있단다.

 정자 맞은편. 영당을 비롯한 전각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맨 오른쪽은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는 경모재(景慕齋), 그 옆으로 방촌 영당, 월헌사, 고직사 등이 차례로 늘어섰다. 모두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影堂)’이다. 1452(문종 2) 황희가 90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세조 1) 후손들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반구정 옆에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했다. 6.25 때 불탔으나 1962년 후손들에 의해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복원했다.

 황희 정승의 영정. 2년쯤 전인가? ‘진안고원길을 답사하는 중에도 선생의 영정을 만났었다. 진안군 안천면(백화리)에 있는 화산서원(華山書院)’인데 황방촌영정(黃尨村影幀, 전북유형문화유산)’이란 이름으로 걸려있었다.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두 영정이 다른 이유는 뭘까?

 그 왼쪽은 월헌사(月軒祠). 황희 선생의 고손(高孫)인 월헌(月軒) 황맹헌(黃孟獻, 1472-1535)의 불천위 신주를 모셔놓은 부조묘(不祧廟)이다.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되는데, 이들은 4대가 지나서도 신주를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하나 더. 황맹헌은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며, 그의 죽지사(竹枝詞)는 명나라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해진다.

 맨 왼쪽은 사직재(舍直齋)’가 자리한다.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란다. 하지만 입구에서 본 종합안내도에는 고직사로 적혀 있었다. ‘고직사(庫直舍)’라는 게 본디 시설을 관리하는 관리인(고지기)이 거처하던 곳일지니, 저곳에서 살던 고지기가 제사 준비를 도맡았었던 모양이다.

 경모재 오른쪽, 그러니까 맨 오른쪽에는 황희 정승의 동상이 있다. 황희는 정승을 24년간이나 지낸 인물이다. 뛰어난 능력과 겸손의 덕을 함께 갖췄기 때문이겠지만, 나이가 들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몸을 낮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관노였던 장영실을 과학자로 관직에 올리고, 노비의 아이가 수염을 잡아당겨도 마음 좋게 웃어 허허 정승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선생이 허허 웃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09 : 20. 주차장으로 되돌아와 트레킹에 나선다. 사목2(자유로)의 교각 아래에 낯익은 아치형 대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평화누리길 8코스(반구정길)가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걷기 딱 좋은 어느 주말. 우리 함께 콧바람을 쐬어보잔다. 어찌 그리 우리 일행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질까?

 맞은편에는 평화의길(7코스, 12.6km) 말고도 평화누리길(8코스, 반구정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경기둘레길에서는 이정표(율곡습지공원 13km/ 성동사거리 20.1km)를 준비했다. 세 길이 함께 간다는 얘길 것이다.

 09 : 21. 자유로 아래로 빠져나오면 사거리. ‘평화의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사목리(沙鶩里) 반구정마을을 거쳐 온 서해랑길이 황희선생유적지(반구정)를 들르지 않은 채, 이곳에서 우회전해버리기 때문이다.

 경기둘레길(7코스)에서 시작점임을 알리는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세 길이 함께 쓰는 구간답게 탐방로 곳곳에서 세 종류의 이정표를 만난다. 하지만 이렇게 거리표시까지 한 이정표는 경기둘레길이 유일했다.

 반구정로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간다. 자유로(77번 국도)에 기대듯이 일차선의 도로를 내놓았다.

 고갯마루에는 평화누리길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벤치는 물론이고 그네 의자까지 갖춘 멋진 쉼터이다.

 탐방로와 함께 가는 자유로 너머는 임진강이다. 철조망으로 막힌 강은 일반인에게 불가침의 영역이다. 문산읍이 긴장감 넘치는 접경지역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반듯반듯하게 지어진 민가나 큼직한 공장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섰는데 어찌 긴장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길은 자유로와 나란히 간다. 하지만 자유로보다 지대가 낮기 때문에 임진강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오른쪽은 사목2리 석결동(石結洞) 마을이라고 했다. 임진강변에서 연결된 노루매봉에 돌이 많은데, 이 돌들에 결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09 : 45. 자유로와 헤어져 들녘으로 들어간다. 자그만 개울을 따라 농로가 나있는데, 농경지 너머의 임진강역에는 전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때 낙곡을 주워 먹고 있던 기러기 떼를 만났다. 하지만 그동안 평화의길을 걸어오면서 숫하게 만났던 기러기 떼들에 비하면, 떼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숫자가 작았다.

 09 : 51. ‘경의중앙선이 지나가는 운천2리 건널목’. 무인 철도건널목이지만 옛 기억을 소환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차단봉에 ‘X’자형 멈춤 표지판, 금방이라도 딸랑딸랑 거릴 것 같은 판때기 등 건널목의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철길 너머로 임진강역이 보인다.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면 저 역을 지나 장단면(파주시) 노상리에 있는 도라산역까지 갈 수 있다.

 철로를 횡단하면 임진각로이다. 통일로(1번 국도)의 마정교차로와 임진각을 잇는 4차선 도로다.

 파주에도 평화누리길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디엠지 스테이라는 이름처럼 하룻밤 머물면서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평화를 보고 느껴보라는 모양이다.

 임진각로는 7코스의 종점인 임진강역 앞을 지나간다. 하지만 인도가 따로 나있지 않아 통행은 불가능하다.

 탐방로는 임진각로의 오른쪽 아래를 따라간다.

 09 : 58. 자유로의 마정육교 교각 아래 경기둘레길 이정표(율곡습지공원 10.1km/ 반구정 2.9km)가 세워져 있었다. 임진각 관광지로 들어가지 말고 곧장 율곡습지공원으로 가라는 모양이다. 하지만 평화의길은 임진강역 쪽으로 조금 더 가란다.

 100m쯤 더 걸으면 임진강역. 평화의길 7코스의 종점이자 8코스의 시점이다. 평화의길 이정표(QR코드 부착)는 역 앞의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나 더. 이곳은 8코스뿐만 아니라 8-1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8코스는 임진각관광지를 지나 임진강변을 따라가고, 반면에 우회노선인 8-1코스는 마정육교의 교각 아래로 되돌아가 마정리로 연결되는 농로를 따라간다.

 임진강역은 경의선 전철이 연결되는 ‘DMZ 관광의 출발지이다. 2000년 남북철도연결 기공식을 거쳐 2001 930일 운전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전력선이 없는 단선철도로 하루 한 번 ‘DMZ 평화열차가 오가던 작은 역사였으나, 2020년 경의선 전철이 연장되면서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10 : 00  11 : 15. 계획했던 대로 임진각관광지로 향한다. 원래대로라면 8코스의 GPX트랙을 따라가는 셈이 된다. 하지만 8코스는 뭔가의 이유로 통행이 불가능하단다. 때문에 우회노선인 8-1코스를 선택해야만 했고, 임진각관광지를 둘러보고 싶었던 나는 탐방시간을 만들기 위해 7코스의 일부를 줄여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은 분단의 현실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길로 정의할 수 있다. 그 길의 초입에서 17개의 계단 위에 올라앉은 17m 높이의 거대한 탑을 만났다. 1983 10 9일 미얀마(당시는 버마)의 아웅산 묘역에서 대통령을 수행 중이던 우리 외교사절(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장관 등 열일곱 분)이 북한의 테러에 의해 순국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6·25전쟁 납북자기념관 아웅산순국 외교사절위령탑과 어깨를 맞대듯이 가까이 있었다. <기억으로 잊지 못하고, 보고 싶어, 만나야하는 사람들>로 시작되는 브로슈어처럼 6.25전쟁과 납북피해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전시납북피해자의 문제를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공간이다.

 전시관은 특별전시실(1)과 상설전시실(2), 전망대(옥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별전시실에는 납북피해 가족들이 기증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 중이다. 상설전시장은 납북의 배경과 원인, 납북의 전개과정과 납북자의 고통, 귀환노력과 납북자 가족의 고통, 납북과 인권 그리고 통일을 위한 노력 순으로 꾸며져 있었다.

 납북자 가족의 고통은 자료 또는 밀랍인형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다. 특히 밥상에 둘러앉은 어느 납북자 가족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비어있는 아버지의 자리에 밥그릇을 놓아둔 것은 납북된 아버지의 생사를 아직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벽면에 납북자들의 이름을 적어 넣은 공간도 있었다. 그런데 함께 둘러보던 몽중루 작가님이 눈물을 훔치고 계시는 게 아닌가. 작가의 숙부께서 납북되셨는데, 벽면에서 그 이름을 찾아냈던 모양이다. 장손으로 가계를 이끌어가다 보니 맞닥뜨리는 감회 또한 남달랐을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새천년의 장이란 조형물이 반긴다.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아 새천년 통일조국의 희망찬 미래를 상징하는 작품이란다. 50주년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기둥이 세계평화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한민족의 군상들을 떠받히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어지는 공간은 보훈단지로 각양각색의 참전비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의 동상을 중심으로 미국군참전비, 일본계미군참전비, 임진강지구전적비 등 수많은 빗돌들이 들어서 있다.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의 동상. 미국의 33(1945-1953) 대통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천황인 히로히토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하라고 명령한 국가원수이기도 하다. 요즘이야 푸틴이 심심하면 쏘아대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지만.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6.25전쟁 참전기념비’. 6.25전쟁에 참전한 파주시 출신 군인과 경찰, 학도의용군, 진지를 구축하는데 힘을 보탰던 지역주민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담은 빗돌이다.

 임진강지구전적비. 서부의 요충인 임진강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 싸운 제1사단, 해병 제1전투단, 유엔군의 공로를 기리는 빗돌이다.

 김포국제공항 폭발사고 희생자추모비.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둔 1986 9 14일에 일어난 의문(북한의 사주로 추정)의 테러사건이다. 고성능 사제 시한폭탄의 폭발로 가족을 배웅하러 나왔던 일가족 4명과 국제공항관리공단 직원 1명 등 5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3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다음은 임진각(臨津閣)이다. 남북분단이라는 한국의 비극적인 현실을 상징하는 이색적인 장소로, 옥상에 만들어놓은 전망대가 볼만하다. 하지만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주변 분위기와는 달리 건물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편의점과 햄버거가게가 들어선 1층도 손님이 뜸했고, 식당이 있었던 2층은 아예 텅 비어 있었다.

 3층의 전망대는 꽤 많은 사람들이 조망을 즐기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민간인통제선 너머의 풍경을 살펴보는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쉽다면 직접 민간인통제선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DMZ 안보관광 매표소에서 안보관광을 신청하면 된다. , 신분증 미소지자는 신청이 불가능하다.

 북쪽 조망. 임진강 철교. 신구의 다리가 나란히 가지만, 6.25전쟁의 아픈 상처를 품은 옛 다리는 상판이 사라지고 없다.

 서쪽 조망. 민통선 너머의 임진강. 물길은 저 모퉁이를 돈 다음 한강과 합류한다. 그리고는 조강으로 변해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남쪽 조망. 조금 전 둘러본 보훈단지(참전비)’.

 동쪽 조망. 평화누리공원과 평화랜드가 들어서 있다.

 임진각에도 실향민들을 위한 '망배단'이 마련돼 있다. 명절이 다가오면, 이곳에서 실향민과 탈북민들이 망향의 한을 달래며 함께 차례를 지낸단다.

 망향의 노래비에서는 잃어버린 30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건호와 남국인이 작사·작곡하고 설운도가 부른 노래로 1983(6.30-11.14) KBS에서 방영된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138일에 걸친 특별 생방송을 통해 53,536건의 이산가족 사연이 소개되고, 그중 10,189건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의 배경음악이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나 더. 해당 방송의 기록물도 비극적인 냉전 상황과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세계 유일의 기록물로, 지구상에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또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 2015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잃어버린 30도 함께 등재됐다)

 망배단 뒤쪽에 놓인 다리는 자유의 다리. 1953년에 6·25전쟁 포로 1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 귀환했다. 당시 포로들은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이동한 뒤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왔다. 임시로 설치한 다리지만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어 6·25전쟁의 대표적 유산으로 꼽힌다.

 평화의 소녀상도 눈에 띈다. 맹추위에 놀랐는지 목도리에 털신까지 착용하고 있는데, 평화로 도배되다시피 한 관광지답게 하나가 아니고 둘씩이나 된다.

 독개다리로 가는 길, ‘BEAT 131’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Beat(군에서는 Beat back)’가 물리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이 근처에 벙커나 참호 같은 옛 시설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뒤에는 와해되기 일보 직전인 열차가 놓여있었다.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라는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의선 장단역 남쪽 50m 지점에서 폭탄을 맞고 탈선하여 멈춰선 채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2004년 이곳으로 옮겨왔단다. 녹슨 부분은 복원하고 더 이상 녹슬지 않도록 부식방지 처리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총탄 자국과 휘어진 바퀴에서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나 더. 증기기관차 상단에서 자라고 있던 뽕나무도 함께 옮겨와 기관차 근처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다음은 임진강 독개다리이다. 6·25전쟁 때 파괴되어 교각만 남아 있던 임진각 앞 경의선 상행선 철교의 교각에 상판을 올려 관광시설로 꾸며놓았다. 유료 입장이며 독개다리로 입장하면 노란선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노란선 안쪽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구역 이외에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참고로 독개다리란 이름은 장단면 노상리 쪽 자연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옛 경의선 열차를 만난다. 나무로 된 의자, 선반 위의 짐 가방들, 차창 풍경 영상 등 당시의 열차 내부를 재현해놓았다.

 열차를 벗어나면 새로 만든 다리가 나온다. 다리는 길이 105m에 폭 5m로 만들어놓았다. 바닥 몇 곳에 강화유리를 깔아 스카이워크 기분을 내게 했는가 하면, 바닥의 또 다른 공간(강화유리 아래)에는 철로를 연상시키는 것들을 전시해놓기도 했다.

 벽에는 파괴된 채로 널브러져 있는 철교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 몇 장도 게시해 놓았다. 끄트머리의 전망대 아래층에서는 영상효과인 듯 했지만 전쟁 이전의 온전한 다리 모습도 느껴볼 수 있었다.

 다리 위를 걷는다. 민통선 안쪽의 실제 땅을 밟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민통선 안쪽 구역이기에 북한과 가까운 곳을 걷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전망대를 만난다.

 마주하는 교각에는 총탄자국들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한국전쟁 당시의 치열했던 상황을 대변해준다고나 할까?

 시선을 조금 옮기자 곤돌라가 눈에 들어온다. 임진각스테이션에서 출발 임진강을 건넌 다음, 민간인 출입통제선 지역(군내면 백연리) DMZ스테이션에 이르는 ‘DMZ 하늘 길이다. 건너편에서 갤러리 그리브스, 밀리터리 스트리트, 소망리본 존, 바람개비 존, 평화등대, 평화정, 임진강전망대 등을 만날 수 있다.

 500원만 더 내면 ‘BEAT 131’에 들어가 볼 수 있다. 6·25전쟁 때 군사시설로 사용하던 지하 벙커를 원형 그대로 살려 전시 공간으로 꾸몄다. 평화 메시지를 담은 다양한 콘텐츠도 감상할 수 있다.

 전시 공간이 협소해서 오르내리는 계단을 포함 3분 이내에 모든 관람이 가능할 정도다.

 안에는 대전차지뢰를 비롯해 총기·수통·철모·무전기 등 벙커에서 썼을 법한 군용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 지휘부인 상황실을 재현한 공간이 있고, 몇 가지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 미디어아트 작가의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임진각은 분단의 아픔이 있다. 달리기를 멈춘 철도 끝에는 임진강이 흐르고, 그 주변에는 철조망이 처져있다. 철조망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평화의 리본이다. 하나씩 매달기 시작한 소망들이 모이다보면 언젠가는 그날이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오지 않을까?

 내부 전시장만으로는 부족했던 탓일까? 야외전시장을 만들고 증기기관차의 녹슨 파편들을 전시해놓았다. 옆에는 이들과 운명을 함께 했을 법한 임진각역 표지판도 세웠다. 개성이 2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단다.

 ‘DMZ 평화의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매일 2회씩 개방되는데 온라인으로 신청을 해야만 가능하단다. 하나 더. 안내도에 그려진 탐방로는 두루누비에서 배포한 8코스의 트랙과 크게 달랐다. 신청하기 전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발길은 이제 평화누리공원으로 향한다. 지난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조성되었는데, 무심하게 산책하기 딱 좋은 공간으로 다양한 조형물들을 만날 수 있다. 공연장과 전시장 등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을 갖지만 그보다는 99만 평방미터나 되는 잔디언덕으로 대변되는 곳이다.

 무지막지하게 너른 주차장 오른편에는 놀이공원이 들어섰다. 놀이공원 특유의 음악과 함께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 내려앉기를 반복하는 놀이기구도 보인다. 그래선지 임진각이 예전 같지 않게 어수선해졌다. 아니 삼일절 황금 연휴를 맞아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 탓일 수도 있겠다.

 주차장의 끄트머리에는 해병대 장단·사천강 전투 전승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6.25전쟁 당시 판문점에서 임진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에서 불과 5,000여 명의 병력으로 중국군 4 2,000여 명의 4차례에 걸친 공격을 격퇴하며, 수도권 및 파주 일대를 성공적으로 지킨 해병대의 대표적인 전투다.

 평화누리공원은 넓은 잔디밭과 바람개비 언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이다. 3,000여개의 바람개비를 심어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평화를 향한 바람을 보여준다. 또한 공원 곳곳에 평화를 주제로 한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관광객들에게 힐링과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평화누리공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상징적인 통일 부르기이다. 최평곤 작가의 작품으로 흡사 거인들이 북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통일을 향한 나지막하고 강렬한 호소를 담았다고나 할까?

 바람의 언덕 아래, 연못에 자리 잡은 포비(FourB) 평화누리점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로 특별한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평화누리 야외공연장. 공원은 크게 음악의 언덕과 바람의 언덕으로 나뉜다. 음악의 언덕에는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잔디광장과 수상 야외공연장이 있다. 자연 친화적 공간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광장처럼 얕은 경사를 따라 펼쳐진 너른 초원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국적이다. 평화누리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저런 잔디언덕을 걸으며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을 찾아가며 감상하는 것이다.

 실향민들의 소망을 담은 '이제 만나러 갑니다. 소망함'이다. 채널A의 프로그램 이름이기도 한데, 실향민과 탈북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았단다. 60여년의 그리움이 담긴 편지와 선물은, 통일이 되는 그날 북한의 가족들에게 전하려 한다나?

 이경림 작가의 솟대집이다. 사람을 품어 안고 평화와 안녕의 염원이 자라는 공간을 상징화했다고 한다.

 둥그렇게 돌기둥들이 늘어서있다. ‘통일기원 돌무지 조형물이라고 한다. 기원의 의미를 담은 장승과 돌무지를 현대적으로 재현하여 만들었단다. 1만원의 기부금(북한 어린이 돕기)을 낸 이들의 희망 메시지나 소망의 글을 석판에 새겨 기둥에 부착하면, 여러 개의 석판이 모이면서 하나의 돌무지로 완성되는 기획 의도다. 하지만 참여 부족으로 흥행이 실패하면서 30개의 원형 기둥 대부분은 벌거숭이처럼 남아 있었다.

 () 김기태 경감은 한국전쟁 당시 고랑포 지서 탈환을 위해 출동했다가 북한군과 전투 중 전사한 전쟁 영웅이다.

 저 팬텀기의 이름은 ‘F-4D 하늘의 도깨비로 적혀 있었다.

 평화의 발이란다.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DMZ에 맨발로 첫 발을 살포시 내딛는 형상으로, 북한의 8.4 DMZ 지뢰도발로 잃은 장병의 다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단다. 아울러 8.4 DMZ 작전에 참가했던 육군 용사들의 군인정신과 전우애를 기리고, 평화통일을 만들어가기 위한 민··군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11 : 15. 임진강역으로 되돌아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7코스는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12km  9km나 단축했다. 아니 단축시간을 이용해 황희선생유적지(반구정)와 임진각국민관광지에 들러 선현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접해보고 싶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나저나 GPX트랙은 7.75km 2시간 15분에 걸었다고 표시하고 있었다. 반구정과 임진각을 둘러보느라 4km를 더 걸을 셈이다.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손가락으로 ‘V’자까지 만들어댄다. 맞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구간을 대폭 줄이는 대신, 선현이 남긴 옛 얘기에 더해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까지 느긋하게 엿봤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서해랑길 64-5코스(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합덕수리민속박물관)

 

여 행 일 : ‘25. 2. 22( )

소 재 지 : 충남 당진시 면천면·순성면·합덕읍 일원

여행코스 : 내포문화숲길 아미산센터아미산몽산구절산입구(실제 출발)나산마을회관둔군봉석우리마을회관합덕수리민속박물관(거리/시간 : 19.3km, 실제는 구절산입구부터 14.85km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창리항에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연결되는 64코스의 지선( 6) 중 다섯 번째 구간을 걷는다.

 

 들머리는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충남 당진시 면천면 죽동리)

서해안고속도로 면천 IC에서 내려와 아미로(609번 지방도)를 타고 당진방면으로 3km쯤 들어오면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에 이른다. 서해랑길(당진 64-5코스) 안내도는 임도를 따라 300m쯤 올라가는 곳에 위치한 아미산 산림욕장 앞에 세워져 있다.

 죽동마을에서 시작 당진 내륙의 산과 들을 누비다 합덕읍에 이르는 19.3km짜리 구간. 산길을 9km나 타는데다, 높지는 않지만 몽산과 둔군봉은 정상까지 찍어야하는 고단한 여정이다. 그런데도 난이도는 별이 3(전체 5), 산길이 버겁지는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종점에 있는 합덕제수변공원 합덕성당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09 : 00  09 : 10. 트레킹을 나서기 전, 출발지(방문자센터)에서 당진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충정사(忠貞祠)’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고려 말의 무신이자 교동인씨(喬桐印氏) 중시조인 인당(印璫 ?~1356)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계단을 오르면 경모제(敬慕齋)가 맞는다. 조상을 공경하고 숭모하는 교동인씨 후손들의 정성이 집약된 재실이다. 경모제 앞에는 석성 부원군 인당장군추모비가 있고, 맞은편에는 첨의평리사사석성부원군인당장군추모비(僉議平理司事碩城府院君印堂將軍追慕碑)라는 더 큰 빗돌이 있다.

 외삼문인 정례문(整禮門)을 들어서면 충정사(忠貞祠)가 반긴다. 인당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인당은 고려 충렬왕 때 태어나 공민왕까지 4대에 걸쳐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일생 동안 왜구와 홍건적을 무찔렀으며 서북면병마사 때는 쌍성(雙城)을 수복하고 파사부(婆娑府) 3()을 무찔러 참지정사가 되었다. 이에 원나라 황제가 국경 침입을 구실로 80만 대군으로 위협해 오자 공민왕이 인당으로 하여금 서북면 일대의 수비를 강화하도록 응원군을 보냈다. 이 싸움에서 인당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도 하고, 원나라의 문책 위협에 직면한 공민왕을 위해 인당이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고도 전해진다. 인당 장군의 묘는 개성에 있고, 이곳에는 사당만 있다.

 09 : 20  09 : 40. 64-5 코스도 조금 줄여 걷는 대신, 당진의 주요 명소 중 하나인 면천읍성 복지겸장군유적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물론 산악회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면천읍성(沔川邑城)에 도착하니 커다란 빗돌이 반긴다. 그런데 면()이 아닌 ()’의 터()란다. 맞다. 이곳 면천면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품은 지역으로, 과거 당진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백제 시대에는 '혜군(兮郡)', 통일신라 때는 '혜성군(兮城郡)'으로 불리었다. 고려와 조선 때도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충청도 조운(漕運)의 중심지로 전국에서 운반된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1477(성종 8) 창고가 범근내에서 공세곶으로 이전되면서 마을은 활기를 잃었다. ! 곁에 있는 또 다른 빗돌은 시경의 한 구절에서 면천이란 이름을 따왔다고 적고 있었다. <면피류수 조종우해(沔彼流誰 朝宗于海), 넘쳐흐르는 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네>

 면천읍성은 1439(세종 21) 서해안으로 침입해오는 왜구를 대비하여 쌓은 평지읍성이다. 조선후기까지 이 지역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 기능을 수행했다. 당진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현장 중 하나였으며, 당진 의병이 일본군 수비대 및 관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치성과 옹성을 더한 전체 둘레는 약 1.5km, 순천의 낙안읍성과 비슷한 규모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고 쌓았다. 하지만 전국의 읍성들이 그러하듯이 유실되거나 철거되어 간신히 형태만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다 2007년부터 복원을 시작 남문을 중심으로 일부 구간이 옛 모습을 되찾았고, 객사인 조종관,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 작은 정자인 군자정 등이 새로 지어졌다.

 면천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豐樂樓). 둘레 1,558의 읍성은 적대 7, 옹성 1, 여장 56곳을 두었다. 안에는 동헌, 객사 등 8개의 관아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인 풍락루는 말 그대로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살기 좋은 땅에서 백성과 더불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붕괴 위험으로 철거(1943)되었던 것을 2007년 사진자료를 토대로 2층 누각형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복원했다.

 객사인 조종관(朝宗館).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정청에 전패와 궐패를 모셔 지방관이 왕에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기도 했다.

 조종관 앞에는 한 눈에도 심상치 않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자리한다. 수령 1,1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는 바라보기만 해도 신비롭고 웅장하며 탄성이 절로 난다. 2016년 천연기념물(551)로 지정되었는데,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두 나무가 지지대에 의지한 채 서있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면 초록이파리로 무성해지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들면서 환상적인 미태를 자랑한단다.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과 얽힌 전설도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복지겸 장군이 병을 앓자 그의 딸 영랑이 아미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렸고, 아미산에 활짝 핀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면천면 성상리)의 물로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뜰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다하라는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병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빚어진 술이 바로 면천 두견주이며, 그때 심은 은행나무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단다.

 은행나무 아래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고려 말 지군사 곽충령이 못을 파 연꽃을 심었고, 1803년 면천군수 유한재가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고 그 위에 팔각정을 세워 군자정(君子亭)’이라 불렀다. ‘흙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군자의 덕을 상징하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면천읍성은 내포 문화숲길의 주요 기점이기도 하다. 내포불교순례길(6코스), 백제부흥군길(7코스, 8코스), 내포동학길(1코스) 등이 이곳을 출발 또는 도착 지점으로 삼고 있다.

 면천 100년 우체국 - 카페가 되다’. 천년 묵은 고을답게 면천에는 옛 모습을 오롯이 품고 있는 공간들이 많다. 슬레이트지붕을 뒤집어 쓴 미인상회가 대표적인데 일제강점기 때 우체국이었던 건물에 차린 카페다.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저곳에는 옛 우체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태원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법한 전화기와 낡은 우체통 등을 진열해 놓았다. 시간여행을 돕는다고나 할까? 하나 더. 우체통은 그 기능을 지금도 갖고 있다고 했다. 놀랍게도 카페 측에서 매월 마지막 날에 원하는 주소지로 편지를 부쳐준단다. 일종의 느린 우체통인 셈이다.

 60여 년 전에 지었다는 2층 가정집에는 독립서점 오래된 미래가 들어섰다. 대형 서점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독립출판물을 상당수 갖추고 있어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옛 막걸리집을 개조했다는 진달래상회도 눈길을 끈다. 소품 상점이라는데, 복지겸 장군의 전설에 나오는 두견주를 브랜드로 삼았지 않나 싶다. 아무튼 둘 모두 문을 열기 전이라서 외관만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문화 고을답게 버스정류장도 시()로 꾸며졌다. 이밖에도 면천에는 볼거리가 꽤 많다. 군현(郡縣)이었으니 향교가 있었을 것은 당연, 향교 앞에는 연암 박지원이 재임하면서 조성했다는 연못 골정지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 북학파 친구 홍대용의 시에서 따왔단다)’이라는 정자가 있다. 면천의 또 다른 우체국은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이 되었고, 농협의 창고였던 건물은 리모델링 후 청년창업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09 : 45  09 : 55. 다음은 무공사(武恭祠)’이다. 면천읍성에서 송악읍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 生歿年代 미상) 장군의 사당이다. 무공(武恭)은 복지겸의 시호(諡號)이다.

 복지겸은 면천복씨(沔川卜氏)의 시조로 고려를 건국한 4명의 1등 개국공신 중 한 명이다. 태봉(奉封)의 마군(馬軍) 장수로 있다가 궁예가 횡포해져서 민심을 잃자 배현경, 신숭겸,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웠다. 그 뒤 환선길(桓宣吉)의 반역 음모를 적발하여 주살하였으며 임춘길(林春吉)의 역모도 평정하는 등 큰 공을 세워 994(성종 13) 태사로 추증되었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원래는 제단, 신도비, 태사사(太師祠)만 있었는데 2008년의 정비사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인 무공사를 중심으로 홍살문, ·외삼문인 정충문과 창의문, 후손들이 공부를 하거나 제사에 관한 일을 보는 추원재와 무영사, 숭모당, 신도비, 준공비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매년 복씨 문중에서 음력 10 1일에 제사를 지낸다.

 홍살문과 창의문, 정충문을 차례로 지나면 복지겸 장군의 위패를 모시는 무공사(武恭祠)가 나온다.

 묘에서 내려다 본 유적지. 사당 앞에 내·외삼문인 정충문과 창의문이 나란히 서있고, 마당을 가운데 두고 왼쪽은 추원재이다. 오른쪽에 있는 무영사는 내삼문에 가려져있다.

 묘는 뒤편 언덕에 있었다. 그런데 그 흔한 빗돌 하나 보이지 않는다. 복지겸의 말년 행적을 찾을 수 없는데다, 그의 죽음 또한 안개 속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럴듯한 봉분에다 석물까지 갖춘 번듯한 묘역(墓域)이지만 결국에는 허묘(虛墓)인 것이다.

 10 : 01. 실제 출발지인 구절산입구 버스정류장(당진시 순성면 봉소리).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아미산과 몽산을 올랐었기에 이를 핑계 삼아 산길 구간을 생략했다. 대신 산악회의 도움을 받아 당진시의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 면천읍성과 무공사(복지겸장군유적지)를 둘러본 다음 이곳으로 왔다.

 10 : 02. 원백석길을 따라 남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두루누비 앱이 시점(아미산 산림욕장)으로부터 5.72km쯤 떨어진 곳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 더. 이 구간은 백제부흥군길(7코스)’이기도 하다. 합덕수리박물관에서 둔군봉과 구절산을 거쳐 면천읍성에 이르는 17.2km짜리 여정으로 백제를 지키려는 민초들의 숱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서기 660 7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후 임존성과 주류성을 거점으로 한 백제부흥운동은 무려 3년 넘게 이어졌다. 일본이 참전했던 국제전이기도 했다.

 이정표가 내포 문화숲길  백제부흥군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내포지역의 고대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백제'. 한성백제 시기를 거쳐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내포지역은 백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까지 백제의 영토로 정체성을 지켜왔다. 때문에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백제부흥세력은 내포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펼쳤다. 백제부흥군길은 이런 역사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코스이다.

 뒤돌아본 풍경. 순성로(619번 지방도)와 함께 가는 수로(水路)가 고가도로를 연상시킨다. 고풍에 조형미까지 더해진 유럽의 수도교만큼은 아니어도 멋진 풍광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하긴 동급이었다면 퐁 뒤 가르(가르 교)’나 세고비아의 수도교처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겠지?

 백제 부흥군이 되어 나지막한 구릉지를 넘는다. 그러자 망국의 병사들이 누비고 다녔을 들녘이 널찍하니 펼쳐진다. 백제 부흥전쟁의 시발점이 예산군(대흥면)의 임존성(任存城)이었고, 그 중심은 홍성군(장곡면)의 주류성(周留城)이었으며, 백촌강(白村江) 전투의 현장이 당진시(석문면·고대면)의 앞바다였다니 말이다.(위치에 대한 설은 다양하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즈음 낙곡을 주어먹고 있는 엄청난 기러기 떼를 만났다. 저 먼 시베리아 대륙에서 훨훨 날아 한반도를 찾아온 귀한 손님들이다. 대기는 차고 무쇠빛 하늘이 일상인 겨울이다. 하지만 반가운 생명들을 만났으니 이 정도 추위쯤이야 못 참겠는가.

 길은 드넓은 들녘을 가로지르며 나아간다. ‘토물들 대리들을 좌우에 끼고 가는 모양새인데, 이중환(李重煥)이 택리지(擇里志)에서 말한 내포지역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큰 길목이 아니어서 임오·병자의 두 난리에도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을 정도로 외지지만, 땅이 평평한데다 기름져서 충청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백제 부흥전쟁의 중심이었지만 이중환의 눈에는 마냥 평화롭게 보였던 모양이다.

 10 : 18. 백석리(白石里) 앞 도로변에는 작은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자와 벤치를 구비해 마을 주민들의 쉼터도 겸하도록 했다. 하지만 농사일로 바쁜 주민들이 이곳까지 운동하러 올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10 : 21. 체육공원에서 만난 개울 수준의 남원천(南院川)’ 지류를 따라가다 아예 건너버린다.

 다리(이름이 없었다)를 건넌 다음에는 개울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10 : 26. 이번에는 남원천(南院川)’의 본류를 건넌다. 이 다리(이정표 : 둔군봉 3.96km/ 구절산입구 2.30km)도 역시 이름이 없었다. 하나 더. 남원천은 면천면 몽산의 남쪽 계곡에서 발원, 순성면·신평면·우강면의 들녘을 적셔주며 동진하다 우강면 부장리에서 남원포(南院浦)를 지나 삽교천으로 유입되는 23.24km 길이의 하천이다.

 다리 건너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몽산 아래서 백제부흥군길(7코스)을 만난 이후 줄곧 의지해 간다. 그렇다고 일치하지는 않는데 이곳이 그중 하나다. 이정표(백제부흥군길)가 왼쪽(둑길)을 가리키는데 반해, 서해랑길의 앱은 오른쪽으로 가라고 지시하기 때문이다.

 누루누비 앱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둑길을 이용해 남원천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이때 우리가 생략해버린 아미산 몽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참고로 면천의 진산인 몽산(蒙山 299.4m)에는 읍성의 외곽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된 석성인 몽산성이 있다. 나당연합군에 나라를 빼앗긴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싸웠던 백제 부흥전쟁의 전략적 요충지로 면천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유서 깊은 산이다.

 잠깐의 부주의로 길을 잃기도 했다. 농로를 이용해 도로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아미산과 몽산을 카메라에 담다가 그만 들머리를 놓쳐버렸다.

 10 : 36. 우여곡절 끝에 남원로(2차선 도로)’로 올라섰다.

 서해랑길은 도로로 올라서자마자 다시 이별을 고한다. 그곳에 나산리(羅山里)’ 마을회관이 있었다. 어르미산, 즉 어라산(於羅山, 98m)에서 이름을 빌려왔다는 마을이다. 회관 앞 빗돌은 그런 마을의 유래를 전해준다. 그 어라산을 지금은 함봉산이라 부른다나?

 나산리는 100m 내외의 산능선 사이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산록지에 가옥들이 주로 분포하고 있다. 서해랑길을 그런 산간 마을을 향해 간다.

 10 : 40.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갈림길에서는 왼쪽으로 난 임도로 들어선다.

 임도는 산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 길을 부흥군의 심정으로 걸어본다. 지체 높은 자들이야 죽거나 투항해 제 살길을 찾았겠지만, 전쟁에서 패한 군졸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지 않았겠는가. 참고로 백제 부흥군은 동지끼리 서로 죽이는 내분으로 패망했다. 660, 소정방(蘇定方)의 주력군이 귀국하자,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지휘하는 부흥군은 주류성으로 이동해 총사령부로 삼고, 662년 일본에 체류하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귀국하자 백제왕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복신이 승장(僧將)인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내부 분열이 일어났고, 임존성의 수비장이던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당나라에 투항했다. 그 흑치상지가 당나라 병력을 이끌고 임존성을 함락시켰으니 부흥군 스스로가 자멸한 셈이다.

 10 : 49. 고갯마루는 순성면과 합덕읍의 경계다. 서해랑길은 이 고갯마루에서 (왼쪽)능선을 따른다. 그 산길을 걸으며 부흥전쟁의 마지막을 떠올려본다. 백제부흥군의 총사령부였던 주류성은 663 9월 함락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통해 부흥군의 당시 심정을 되짚어보자. <주류성이 항복하고 말았구나. 무어라 할 말이 없도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끊겼구나! 조상님의 묘소를 어이 또 다시 와 뵐 수 있겠는가.>

 서해랑길은 능선을 따라간다. 잘 닦여있지는 않았지만, 길을 찾아가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이 구간. 그러니까 남원천에서 백제부흥군길과 헤어지고부터는 그 어떤 이정표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길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길이 나뉘는 곳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애매하다싶으면 어김없이 가이드리본을 매달아놓았기 때문이다.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둔군봉의 높이가 137.3m에 불과하다보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다. 가끔은 이런 급경사 오르막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끔가다 만나는 응달은 걷기여행자들을 애먹이기도 했다. 연일 계속되던 맹추위가 살얼음을 만들었는데, 어젯밤 내린 눈이 그 위를 살짝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엉덩방아를 찧는 일행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는데, 큰 부상을 당한 이들이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끔은 조망이 트이기도 했다. 당진의 터줏대감인 아미산과 몽산은 물론이고 그 오른편에 들어앉은 순성면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당진시의 고층 아파트들도 자신도 있다며 능선 뒤에서 고개를 살짝 내민다.

 11 : 15. 그렇게 한참을 걷자 능선이 푹 꺼진다. 숲 사이로 민가가 보이기도 한다. 자연 그대로이던 산길은 이곳에서 정비한 흔적을 보인다. 자연석으로 계단을 만들었는가 하면, 길의 폭도 많이 넓어졌다.

 잠시 후 어느 문중의 묘역을 지나기도 한다. 둔군봉 구간에서는 이런 묘역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지기(地氣)가 솟아나는 명당이 많은 산이라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11 : 23. 묘역을 지나자 길은 한수 더 뜬다. 아예 임도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벚나무 가로수가 일렬로 서있는 것이 봄이면 상춘객들로 들끓을 수도 있겠다.

 11 : 26  11 : 32. 오랜만에 보는 이정표(둔군봉 1.15km/ 구절산입구 5.11km)가 반갑다.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임도와 헤어져 오솔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난 이정표의 방향을 잘못 읽은 탓에 잠시지만 임도를 따라가기도 했다.

 그러다 만난 저 시설의 정체는 대체 뭘까? 지킬 게 얼마나 값나가는지 고화질 카메라로 녹화하고 있다며 겁까지 잔뜩 주고 있었다.

 이어지는 산길도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울창한 숲길을 걷는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구간이다. 조망도 일절 트이지 않는다.

 11 : 47. 벤치는 물론이고 정자까지 들어앉힌 쉼터(이정표 : 둔군봉 0.53km/ 구절산입구 5.74km)도 만날 수 있었다. 산행에 지친 걷기여행자들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시설이라 하겠다.

 이곳에는 도곡리 사지(寺址)’에 대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 도곡리에 두 개의 절터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하나는 마을 뒷산의 남쪽 기슭에 밭으로 쓰고 있는 300여 평의 터이며, 다른 하나는 둔군봉의 북쪽능선 서향사면 중상단부에 위치했단다. 해당 사지에서 다수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발견되었다나?

 530m만 더 가면 둔군봉 정상이라던 쉼터(寺址) 이정표의 안내와는 달리 산길은 꽤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11 : 58. 변화 없는 산길이 지루해질 즈음 둔군봉(屯軍峰 137.3m)’에 올라섰다. 이름처럼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산이다. 후백제 때 면천 쪽을 향해 군대를 주둔시켰고, 조선 말기 동학혁명 때는 관군이 주둔했다고 한다.

 하지만 군대를 주둔시킬만한 공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소대 규모의 참호나 들어설만한 공터에 정자 하나만 달랑 지어져 있을 따름이다. 견훤이 고려와 싸우기 위해 쌓았다는 성동산성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정표(합덕수리민속박물관 6.60km/ 구절산입구 6.30km)가 가리키는 합덕수리민속박물관 쪽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나무계단이 만들어내는 나선형의 문양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구간이다.

 하산 길도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걷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에 취하다보면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

 12 : 24. 그렇게 내려선 면천로(70번 지방도)는 그냥 횡단해버렸다. 횡단보도가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다, 신호등까지 없어서 안전하게 건너는데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이다. 그래선지 이정표(합덕수리민속박물관 5.19km/ 둔군봉 1.43km)도 곧장 건너도록 인도하고 있었다.

 12 : 28. 농로를 따라 200m쯤 걷다가 석우2를 건넌다. 이후부터는 석우천의 둑길을 타고 하류로 내려간다. 합덕읍 석우리에서 발원 동남쪽으로 흘러 옥금리에서 삽교천으로 합류되는 길이 9.5km의 지방하천이다.

 개울 건너에는 합덕산업단지가 있다. 29만 평의 규모를 자랑하는 일반산업단지인데 경기 악화 및 분양시장 위축, 원자재 값 상승 등으로 인해 개발이 지지부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12 : 33. 석우천을 따라 걷다보면 심심찮게 다리를 만난다. 그 첫 번째 다리가 석우교이다.

 다리 근처에 석우리(石隅里)’ 마을회관이 있었다. 원래 이름은 돌모루’, 마을 모퉁이에 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석우리로 변했단다.

 계속해서 석우천을 따라간다. 도중에 지류를 합친 때문인지, 물길은 아까보다 많이 풍성해졌다.

 12 : 46. ‘운곡교로 석우천을 건넌다. 예당평야로(32번 국도)의 진출입로와 예덕로(40번 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다.

 교차로답게 오가는 차량 또한 무척 많았다. 그런데도 신호등은커녕 횡단보도조차 없으니 문제다. 안전은 오롯이 걷기 여행자 몫이라는 얘기다.

 예당평야로의 운산2는 교각 사이로 지나간다. 그늘진 곳에는 평상이 놓여있었다. 인근 주민들의 참새방앗간 노릇을 톡톡히 하는 모양이다.

 석우천은 이곳에서 또 다른 지류를 보태면서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석우천은 저런 지류들을 여럿 보탠다고 했다. 두산백과는 원석우천·소소천·북리천·박골천·쑥고개천·남리천 등 6개의 소하천을 나열하고 있는데, 어디를 이르는 지명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산책 나온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길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나무 한 그루 없던 길이 아름드리 벚나무가 일렬로 도열해 있는 풍치 넘치는 길로 변한 것이다.

 13 : 01. ‘운산로가 지나가는 성동교 자형으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다리를 건너지는 않는다. 초입에서 도로를 횡단한 다음 계속해서 강둑을 따라간다.

 왼쪽, 들녘 너머에는 합덕시가지가 놓여있다. 합덕은 본래 부곡(部曲)’이었다. 고려의 향··부곡은 노비와 양인 사이의 피차별 계층을 의미한다. 1298(충렬왕 24), 고을 사람 황석량이 원나라에서 공을 세운 덕분에 합덕현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895(고종 32) 면천군에 편입되었으며, 1973년에는 읍()으로 승격되면서 면천면보다 오히려 더 번화해졌다.

 13 : 17. 보행자전용의 다리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수문(水門)을 만난다. 합덕제(合德堤)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시설이지 싶다. ‘합덕제 수변공원으로 들어선 것이다.

 두루누비는 계속해서 둑길을 따라가란다. 하지만 나는 수변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걸을 것을 권해본다. ‘연꽃원 백련지’, ‘호중도같은 합덕제 수변공원의 주요 볼거리들을 눈에 담아가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둑길을 따라봤자 건조하기 짝이 없는 석우천과 다리(연호교·연지교) 말고는 볼만한 게 없다.

 합덕제는 연지, 혹은 연제라고도 불리는데 원래는 합덕평야를 관개하던 저수지였다. 길이 1,771m에 저수면적이 103ha나 되는 규모를 자랑했으나 현재는 농경지로 변해 제방만 길게 남아있다. 합덕제의 역사는 후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 둔전을 개간하고 12,000명의 둔병과 말 6,000필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에 의해 저수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나? 제방의 서쪽 끝부분에 1800(정조 24)에 세운 개수비와 그 후에 세운 중수비가 있다고 했으나 찾아보지는 못했다.

 13 : 27. ‘호중도란다. 호수 속에 있는 섬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인공섬인 모양인데 정자를 짓고 벤치를 놓았는가 하면 산책로를 만들어 주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백련지 쪽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연꽃 공주와 개구쟁이 개구리 조형물이 연못의 정체를 넌지시 알려준다.

 하지만 춘래불사춘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요즘이니 연꽃이나 개구리를 만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렇다고 너무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귀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저 철새 떼를, 큰고니를 위시한 수많은 종류의 철새들이 연못에서 노닐고 있는 것이다. 그 종류나 수가 웬만한 동물원보다도 더 많아 보인다.

 백련지의 수변을 따라간다. 연꽃원의 사잇길이나 호중도 산책로를 이용해 종점인 수리민속박물관으로 곧장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두루누비의 트랙을 따라 수변공원의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알찬 볼거리를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

 이때 철새 떼로 한가득인 백련지가 자신의 속살까지 아낌없이 내보여준다. 합덕제는 1900년 초까지는 하트 모양의 제를 갖고 있었단다. 하지만 1960년 초 합덕제가 폐지되면서 농지로 변했으며, 석우천이 합덕제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저수지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다 2005부터 당진시에서 제방을 복원하고 야외전시장을 조성하면서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단다.

 13 : 37. ‘연지교 (이정표 : 수리민속박물관 0.51km/ 둔군봉 6.12km)에서 석우천과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합덕제의 제방을 따라 종점인 합덕수리민속박물관으로 간다. 하지만 저수지가 사라지고 없는데다, 둑 위로 널찍하게 길이 나있어 제방이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 구간은 버그네 순례길로 함께 쓰는 모양이다. 당진의 천주교 성지들을 하나로 이어놓은 일종의 순례길인데, 한국 천주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이 길은, 영성 여행을 원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것으로 알려진다. ‘버그내라는 이름은 합덕 읍내를 거쳐 삽교천으로 흘러드는 물길이자 합덕 장터의 옛 지명인 버그내에서 유래했다.

 제방 오른쪽에는 농어촌 테마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합덕제는 조선시대 3대 방죽으로 전시에는 국가의 보급기지 평시에는 왕실의 곡간 역할을 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1960년대 예당저수지 축조와 함께 농경지로 변해버린 합덕(연호)방죽을 당진시에서 7만평 규모로 정비해 연꽃방죽과 수리박물관, 생태체험센터, 농촌테마공원 등을 조성했다.

 공원에는 초가정자와 디딜방앗간, 초가체험동, 분수대 등을 지어놓았다. 또한 합덕제의 기원 등 저수지에 얽힌 사연들을 이야기판으로 만들어 내방객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13 : 45  13 : 55. ‘합덕성당은 테마공원 뒤 언덕에 있었다. 합덕성당은 공세리성당과 더불어 충청도 최초의 본당이다.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 내포지방은 규모가 크고 중요한 신앙공동체가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박해의 피해가 어느 곳 보다도 극심했으며, 그로인해 대부분의 교우촌 공동체가 와해되고 말았다. 1886년 새로운 믿음의 자유가 허용되자 한국천주교는 내포교회의 재건을 위해 양촌본당과 간양골 본당을 설립한다. 양촌본당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합덕본당이 됐다. 이후로 본당은 충청도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가 됐다.

 성당은 정면의 종탑이 쌍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한다). 건물의 전면에는 3개의 출입구와 3개의 창이 있는데 그 상부는 모두 무지개 모양의 아치로 되어 있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창의 둘레와 종탑의 각 모서리는 회색벽돌로 쌓았으며, 창의 아래 부분과 종탑의 각 면에는 회색벽돌로 마름모 모양의 장식을 더했다.(역광이라서 facade는 제대로 찍지 못했다)

 성당 후면. 벽돌로 지은 저 건물은 1929년 페랭(Perrin, P., 白文弼) 신부가 지었다고 한다.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벽돌조인데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145)로 지정되었으며, 각종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tvN ‘정년이의 촬영지인 성당 내부는 아치형 천정에 벽돌로 쌓은 열주가 좌우로 늘어서 있다. 지역 성당, 그것도 옛날에 지어진 탓에 그리 넓지는 않다. 화려하지 않은 스테인드글라스 등 전체적으로 소박하다는 느낌을 준다.(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뒤뜰에는 네 분의 순교비와 여섯 분의 순교자 묘가 있었다. 성 황석두 루카(1813-1866, 괴산군 장연면 출신으로 페롱권 신부와 성 다블뤼 주교를 도와 성서번역·출판 등의 일을 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오천면 영보리 갈매못에서 참수 당했다). 백문필 비리버(1885-1950, 합덕성당을 지은 분으로 한국전쟁 때 피랍 살해됐다)신부, 윤복수 레이몬드·송상원 요한(합덕성당의 평신도로 총회장과 사무장으로 임무를 다하던 중 한국전쟁 때 백문필 신부 피랍시 자진 동행하여 피살되었다)의 순교비와, 이 매스트르(1808-1857, 김대건·최양업·최방제 신학생의 스승으로 1852년 입국하여 전교하다 황무실 공소에서 선종했다)신부, 홍병철(랑드르, 1828-1863)신부, 백문필신부, 심재덕(마르코, 1908-1945, 백문필신부의 보좌신부)신부, 그리고 윤복수·송상원의 무덤이다.

 13 : 55. 성가정순례자의 집(성당의 부속건물)을 지나자 생태관광체험센터가 맞는다. 합덕제의 자연과 생태 부분을 특화시켜 실감영상을 통해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된 체험관이다.

 야외 체험도 빼놓을 수 없다. 다섯 동의 초가에 들어가 제방다지기, 타작 및 농경기구, 도정기구, 수리기구 등 농경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도록 했다. 굴렁쇠 굴리기, 가마타기, 지게지기, 디딜방아 찧기 등 60-70년대, 그것도 시골에나 볼 법한 풍경들이다.

 체험센터를 빠져나오니 연꽃방죽이 반긴다. 합덕제는 역사와 생태, 그리고 수변공원의 복합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연꽃방죽이 아닐까 싶다. 백련지, 연꽃원, 조선홍련지 등 눈에 들어오는 게 온통 연꽃방죽 천지다. 합덕제 연꽃은 조선시대부터 주요 식재료로 이용되어 온 기록들이 있단다. 방죽마다 연꽃들로 채워 넣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시원한 버드나무 숲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연꽃단지로 각광받고 있어 주말이면 전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단다.

 14 : 01  14 : 15.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이다. 김제의 벽골제, 연안(황해도)의 남대지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저수지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합덕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박물관으로 지금은 거의 사라진 수리농경문화를 이해하고, 선조들의 지혜를 느껴볼 수 있는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다.

 박물관은 두 개의 전시관으로 나누어진다. 1전시실은 수리문화관으로, 합덕제의 기원과 축조기법·한국의 수리 역사·수리 도구 등을 전시한다.

 2전시실은 합덕과 당진 문화의 형성 배경과 합덕 지역의 국가유산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한 문화관이다.

 미니어처를 통해 합덕방죽과 구만리보의 축조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으며 튼튼한 제방을 만들기 위해 짚과 나뭇가지와 점토를 30cm 두께로 번갈아 가며 12m 높이까지 쌓아 올린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참고로 합덕제는 지역주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저수지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바닷물이 들어왔던 불모지를 일궈 농업생산량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으며, 저수지 형태 역시 구불구불한 형태로 만들어 수압을 견딜 수 있도록 했다. 축조방식도 찰흙과 나뭇가지, 나뭇잎을 켜켜이 쌓아 만들어 공학적으로도 우수한 구조로 평가받는다. 세계관개시설물유산에 등재된 이유일 것이다.

 서해랑길(당진 64-6) 코스 안내도는 수리민속박물관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구절산입구에서 출발 14.85km 4시간 10분에 걸었다. 5km도 넘는 산길 그것도 눈길을 걸은 데다, 합덕제수변공원의 볼거리들을 기웃거리느라 많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여행지 : 조지아  바투미, 고니오 요새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바투미(Batumi) : 조지아 최대 항구이자 최대의 휴양도시다. 터키 국경까지 약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여름이면 터키나 유럽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인구 15만 남짓의 조지아 제2의 도시이기도 한데, 외세 침략을 많이 받아서인지 그리스·로마 양식뿐만 아니라 터기 등 다양한 건축 양식들이 섞여있다.

 

 조지아 여행, 아니 코카서스 3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는 고니오 요새이다. 바투미에서 남쪽으로 15km, 터키 국경에서는 북쪽으로 4km 지점에 위치한다. 길은 바투미 국제공항을 지나 초로키강(Chorokhi River)을 건너 고니오 요새로 이어진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현수막(‘Archaeological and architectural site of Gonio-Apsaros) 은 이곳 고니오의 지명을 그리스식 이름인 압사로스와 함께 적었다. 로마식으로 표기할 때는 압시르투스(Apsyrtus)’가 된단다. 그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된다. 압사로스(Apsaros)는 콜키스 왕국의 왕자로, 메데아의 이복동생이다. 황금 양가죽을 가지고 떠나는 메데아가 압사로스를 납치해 아르고호에 태우고 떠난다. 그리고 아버지 아이에테스 왕의 추격을 받자 압사로스를 찢어 죽여 사지를 바다에 버린다. 아버지는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 이곳 고니오 요새에 묻었다고 한다. 이곳의 지명이 압사로스가 된 이유이다.

 육중한 성문으로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고니오 요새는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성곽으로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문이 나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서쪽 문만 열려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푸른 잔디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맞다. 안내판은 고니오 요새의 면적이 4.5ha나 된다고 적고 있었다. 사각형인 성곽은 길이가 228m에 폭이 195m나 된다. 1,200-1,500명이나 되는 병사가 주둔했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안내판은 그런 고니오-압사로스 고고학 및 건축 유적지의 내력을 전해준다. 요새의 위치(초로키강 하구의 왼쪽 기슭)와 규모, 역사 등 다양한 얘기들을 전한다. 아르곤 원정대(Argonautai) ‘Aeaea-Colchis’을 원정하면서 아이에테스(Aeetes) 왕의 아들인 압시로스를 죽이고 이곳에 묻었다는 얘기도 적었다. 기원전 8-7세기에 최초로 정착지가 생겼다는 등 자세한 얘기는 성곽을 돌아보면서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성곽은 텅 비어 있었다. 건물이라곤 달랑 고고학박물관 하나뿐인 것이다. 순천의 낙안읍성을 예상했던 내 기대가 어긋났다고나 할까? 당국도 그게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조지아 국기 모양의 꽃밭을 만들어 공터의 여백을 메꿨다.

 유적발굴은 현재진행형이다. 성터 곳곳을 파헤쳐놓았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 듯. 관광객들의 출입을 막아줄 금줄 하나도 없었다. 참고로 고니오 요새의 발굴은 20세기 초 러시아 학자들에게 발굴허가가 떨어지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하지만 발굴은 빨리 이뤄지지 못했고, 1974년에야 요새 안에서 기원후 2-3세기 금장신구가 발견되었다. 1994년 고니오 요새는 조지아 정부에 의해 사적으로 지정됐고, 1995년부터 폴란드 역사학자들에 의해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성 마태오(마티아스)’의 무덤이라고 한다. 콜키스 왕국의 서남쪽에서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다 고니오의 아자리야에서 순교해 이곳에 묻혔다는 것이다. 조지아 정교회의 영광을 보여주는 이콘화에 마태오가 안드레아와 함께 그려지는 이유란다. 참고로 콜키스 지역의 기독교는 1세기 초반 시작되었다. 사도 시몬과 안드레아의 설교를 시작으로, 327년에는 미리안 3에 의해 카프카스 이베리아의 국교가 된다. 기독교로의 마지막 개종은 카파도키아의 성 니나에 의해서였음은 이미 거론했던 사실이다. 아무튼 기독교는 조지아의 문학, 예술과 나라의 통합에 큰 자극을 준다. 하나 더. 조지아는 아르메니아(301)와 로마 제국(313) 다음 세 번째로 오래된 기독교 국가이다.

 안내판은 그가 조지아에서 성 안드레아 성 시몬 가나안과 함께 설교했다고 적었다. 그들이 조지아 남서부 지역을 여행했고, 초로키 강까지 오면서 많은 마을에서 설교했다는 것이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무덤에 기도를 드려오고 있으며, 성 마티아스의 기적도 많이 목격된다고 했다. ‘성 마티아스여 우리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 간청해주소서! 빛과 태양의 화신인 당신의 말씀 교회에 자비를 베푸소서! 등의 기도문도 함께 적었다.

 고니오 요새에서 발굴된 유물을 보존·전시하기 위해 박물관이 만들어져 있다. 이하 박물관의 상황은 오마이 뉴스의 기사를 옮겨본다. ‘고니오 요새 발굴은 독일의 사업가 겸 고고학자인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 처음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미케네유적 발굴로 크게 성공한 슐리만이 그리스 신화 속 아르고호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러시아제국 황실에 고니오-압사로스 요새 발굴을 신청했단다. 그러나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0세기 초에야 러시아 학자들에게 발굴허가가 떨어졌다. 하지만 발굴은 빨리 이뤄지지 못했고, 1974년에야 요새 안에서 기원후 2~3세기 금장신구가 발견되었다.

 지하로 들어가다시피 하는 박물관의 문은 무척 작았다.

 유물은 시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7-8세기 흑해 연안 언덕에 살던 원주민의 유물이라고 한다. 이들은 청동으로 만든 무기, 제기와 생활용기인 도기다. 그리고 기원 후 1~3세기 로마시대 유물이 가장 많다.

 무덤에 부장된 금과 보석으로 만든 귀족의 장신구가 보인다. 동전, 철제 마구와 청동 제기, 도자기 등도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로마시대 유물 중 눈에 띄는 것이 유리기다. 푸른빛을 띤 얇은 유리기로 정교하거나 화려하지는 않다. 대개 둥근 형태지만, 네모난 모양의 병도 보인다. 가장 정교한 것은 유리기에 원형의 무늬를 만들었고, 손잡이까지 만들어 붙였다.

 도기와 자기는 수준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콜키스가 로마의 동쪽 변방으로 생활수준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출토 유물이 생활용기이기 때문이다. 전시된 도기는 황색이 대부분이고, 자기는 흑색이다. 청동기는 비교적 소품으로 이들 역시 부장품으로 보인다. 동전도 몇 점 없다. 장신구는 목걸이, 팔찌, 귀걸이인데, 이들 역시 단순소박한 편이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보니 유물보관실에 커다란 도기를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도기는 조지아 포도주 용기인 크베브리의 원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유적지에 대한 자료는 사진 및 부연 설명을 통해 전하고 있었다.

 요건 당시의 지형도일 것이다.

 이젠 성곽을 한 바퀴 둘러볼 차례이다. 우리 부부는 조지아 초등학생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걸었다. 체험학습이라도 나온 모양인지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눈에 띈다. 웃고 떠들며 장난질 삼매경인 애들이 더 많았지만...

 탐방로는 성벽을 따라 나있다. 그러니 1km 가까이나 걸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할 필요까지는 없다. 갈림길이 곳곳에 나있으니 체력에 맞게 돌아보면 될 일이다.

 첫 만남은 테르마(Thermae). 즉 로마식 공중목욕탕이다. 목욕탕은 열탕(caldarium)과 온탕(tepidarium), 냉탕(frigidarium) 그리고 탈의실 겸 휴게실(apoditerium)로 이루어져 있단다. 이들 목욕탕 건물은 사라졌지만 온수 배관과 건물 바닥은 아직도 잘 남아 있다. 황토색 도기(陶器)로 관을 묻어 온수를 보일러실에서 목욕탕 안으로 끌어들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판은 두 개의 욕조가 확인되었다고 적었다. 그중 작은 것은 보일러실과 온수 구역만 있다고 했다. 다른 욕실은 수비대를 위해 설계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게 더 기념비적이란다. 욕탕의 남쪽 부분에 있는 보일러실은 뜨거운 욕탕의 지하실과 좁은 터널로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뜨거운 공기 덩어리가 퍼져서 뜨거운 욕탕의 바닥과 벽을 가열했다나? 열탕(caldarium)은 이른바 테피다리움(tepidarium)이라는 온탕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냉탕, 즉 프리기다리움(frigidarium)과 욕조, 대기실(아포디테리움) 등도 확인된단다. 오스만 제국 때는 이곳에 동양식 목욕탕을 건설했다는 얘기도 적고 있었다.

 모두를 놀라게 만든 지역, 즉 황토색의 도기(陶器)로 된 관이 일렬로 깔려있는 곳은 막사가 있던 자리라고 했다.

 안내판은 원문대로 옮겨본다. 바깥문에서 로마시대(2~3세기)의 막사 유적이 발견됐다. 잘게 자른 돌로 만든 큰 벽은 기초와 지반의 구조에 사용됐다. 1층과 지붕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같은 구조의 바닥이 있고 지붕은 타일로 덮인 건물도 확인된다. 동쪽과 북쪽 방향으로 폭 3m의 갤러리가 발견됐고, 남서쪽 모서리에는 와인 저장고의 흔적도 확인됐다. 그 결과 목재 기둥을 수용할 수 있는 사각형 구멍이 있는 석조 기초가 드러났다.

 이후부터는 성벽을 따라간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고니오 요새는 길이 228m에 폭이 195m인 직사각형의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략적 요충지다운 규모이라 하겠다. 흑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초로키(Chorokhi)와 아카리스칼리(Acharistskali) 강 계곡을 보호하는 게 임무였다니 말이다.

 이때 높이가 5m쯤 된다는 성벽의 위로 올라가 볼 수도 있다. 성벽은 견고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맞다. 저 성벽은 축조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튼튼하던지 성을 쌓은 로마제국 말고도 비잔틴제국, 오스만제국에서도 사용해왔단다. 심지어는 1930대 소련군까지 사용했었다나? 유적 전체가 고고학적으로 주목받는 이유일 것이다.

 이왕에 올라갔으니 탑의 내부도 살펴보자. 그래봤자 텅 비어있지만... 아무튼 성곽에는 이런 탑이 22개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못 이기고 지금은 18개만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또 다른 탑의 내부. 크기는 비슷하지만 형태는 아까와 판이하게 다르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요새 곳곳이 파헤쳐져 있다. 유적지 발굴이 그다지 시급하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군 막사를 재현해 놓았는가 하면, 당시의 무기들도 전시하고 있었다. 어린이들에게는 사방에 널린 유적보다 그게 더 호기심을 자극했나보다. 기웃거리고 만져보면서 쉼 없이 재잘거린다. 로마병사의 차림으로 검을 들고 대련해 볼 수도 있다.

 당시 사용하던 마차와 무기, 공성기기 등도 전시해놓았다.

 군인들의 막사. 그 앞에는 방패가 무기를 놓아두었다.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나대던 아이들이 선생님의 설명이 시작되자 진지해지면서 역사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또 다른 발굴현장. 로마시대에 지어진 곡물창고와 목욕탕, 그리고 사령관의 집이 발견되었단다. 참고로 당시 흑해 연안에서의 로마 존재는 거대했다. 연안에 있는 몇 곳의 기지들은 수세기 동안 보병 군단이 지켜냈다고 한다. 고대 콜키스의 중심 도시였던 이곳 고니오도 그중 하나였단다.

 안내판은 조지아-폴란드 합동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사실을 적고 있었다. AD 1세기-2세기 요새의 일부였던 건물들을 시기별로 나누어 설명한다. 곡물 창고(네로-AD 54-68), 로마식 목욕탕(트라야누스-AD 98-117), 사령관의 집(하드리안-AD 117-138)이 각기 다른 시기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사령관 집의 한 방은 바닥 전체가 여러 가지 빛깔의 자갈 조각으로 만든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고니오 요새를 끝으로 조지아, 아니 코카서스 3국의 여행이 끝난다. 이제는 귀국길, 우리를 태운 버스는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해안을 따라 4km쯤 떨어진 국경마을 사르피(Sarpi)’로 간다. 그리고 간단한 출입국 절차를 거친 후 튀르키에로 넘어간다. ! 출입국사무소로 들어가기 전 면세점을 거치니 여행 중 쓰고 남은 조지아 돈을 모조리 사용하면 되겠다.

 비행장이 있는 리제(Rize)’로 가기 전 튀르키에의 아르하비(Arhavi)’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흑해 연안의 도시인데 우리가 머무는 호텔(Arhavi Resort Hotel) 앞으로 오르치(Orçi)강이 흐른다. 강 건너에 인구 2만 정도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데, 도심 뒤로는 높은 산이 바로 연결된다. 가장 높은 산(Kiziltepe)은 해발이 3200m도 넘는다고 했다.

 에필로그(epilogue), 신화의 나라 조지아(Georgia)를 떠나면서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지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4개가 등재되어 있다(‘아나누리 성채는 잠정목록에 들어있다). 쿠타이시(Kutaïssi)에 있는 바그라티 성당과 겔라티 수도원(Bagrati Cathedral & Gelati Monastery, 1994년 등재)’, 츠빌리시 근교의 므츠헤타의 역사 기념물(Historical Monuments of Mtskheta, 1994년 등재)’, 메스티아 지역(Mestia district)의 차자시마을(Village of Chajashi)에 있는 어퍼 스바네티(Upper Svaneti, 1996년 등재)’ 그리고 콜키스 우림과 습지(Colchic Rainforests and Wetlands, 2021년 등재)‘이다. 그런데 므츠헤타의 역사기념물 하나만 보고 조지아를 떠나니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패키지여행을 따라온 탓이겠지만, 칠십을 넘긴 내 나이에 그 아쉬움을 해소할 기회가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DMZ 평화의길 6코스(성동사거리  낙하 IC)

 

여행일 : ‘25. 2. 15()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일원

여행코스 : 성동사거리프로방스마을자유로만우천오금리썰매장문지리535 카페낙하 IC(거리/시간 : 11km, 실제는 헤이리 투어 포함 13.44km 3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성동사거리(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자유로(국도 77호선) 성동 IC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만나는 첫 번째 사거리가 성동사거리이다. ‘평화의길 안내판(인증 QR코드)’은 프로방스마을 진입도로의 초입에 세워져 있다.

 성동사거리를 출발 임진강의 언저리를 따라 낙하 IC까지 동북진하는 11km의 여정이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프로방스마을과 임진강 하류의 습지가 주요볼거리. 짬을 조금 내면 헤이리예술인마을에 들러 이색적인 분위기를 맘껏 즐길 수 있다.

 08 : 15  09 : 00. 트레킹을 나서기 전, 파주의 명소로 꼽히는 헤이리 예술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들머리인 성동사거리에서 4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잠깐이면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헤이리 예술마을은 국내 출판인과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만든 공간이다. 현재 미술인·음악인·방송인·영화인·출판인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과 문화예술 비즈니스 종사자 등 380여 명이 저마다의 콘텐츠로 마을을 가꾸어 가는 중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꼭 가봐야 할 올해의 한국관광 100 헤이리 예술마을을 선정했다. 트레킹을 나서기 전 들른 가장 큰 이유이다. 올해로 7회째를 맞는 한국관광 100은 한국의 대표 관광지를 2년에 한 번씩 선정해 홍보하는 사업이다. SNS 검색량 등 빅데이터 분석과 3차에 걸친 관광분야 전문가의 서면·현장 평가를 거쳐 선정한다.

 마을 면적이 15만 평이나 되므로 미리 어느 곳을 갈 지를 정해놓지 않으면 찾아다니다 지칠 수도 있다. 나는 지도까지 준비해서 찾아갔지만, 길을 헤매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롯데월드 어드벤처의 연면적이 175,948 평이라면 그 규모가 대충 짐작 갈지 모르겠다.

 요즘은 주택이 머무르는 공간으로 다가 아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힐링 공간으로서의 기능이 더 부각된다. 그래선지 신도시를 만들 때는 호수부터 먼저 만드는 게 추세다. 헤이리예술마을도 다를 게 없었다. 중앙에 인공호수를 두고 빙 둘러 마을을 만들었다. 그러니 시간이 부족할 경우 4~7번 게이트 중 하나로 들어가 호수(갈대광장)’ 주변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면 가장 알찬 투어가 될 수 있다.

 호숫가 갈대광장. 글자 조형물이 헤이리 예술마을의 중심임을 알려준다. 야외무대를 갖추고 있어 가끔 공연이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헤이리는 문화예술의 생산·전시·판매·거주가 함께하는 통합적 개념의 특수한 공동체 마을이다. 수많은 갤러리·박물관·공연장·카페·서점·아트숍·레스토랑, 그리고 예술인들의 창작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같이 10시에 문을 열고 있어 외관을 눈에 담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투어의 첫 만남은 한길 책박물관이다. 인문학 출판을 선도해 온 한길사에서 운영하는 책 박물관이다. 유럽의 고서(17-19세기), 윌리엄 모리스(초서 저작집), 귀스타브 도레, 윌리엄 터너, 생텍쥐페리 등 유명 예술가들이 남긴 희귀 서적과 아트북을 소장하고 있단다.

 헤이리 투어는 건축물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건물, 지형을 그대로 살려 비스듬히 세워진 건물, 사각형의 건물이 아닌 비정형의 건물 등 각양각색의 건축물들이 개성을 뽐내며 서있다. ‘2020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한향림 도자미술관도 그중 하나다. 이정호이사장과 한향림관장이 설립한 ‘Jay & Lim Collection’을 통해 수집해 온 1,000여 점의 국내·외 현대 도예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단다. 건물에는 전시장 말고도 도자 체험장과 아트숍, 카페가 들어서 있다.

 건축가 박진희가 설계한 아트센터 화이트 블럭(White Block)’은 미국건축가협회 건축디자인상(2011)과 제1회 파주시건축문화상(2013) 등을 받았다. 6개의 대형 전시실에서 다양한 현대미술을 보여준다고 한다.

 지하에 들어서있는 제이제이커스텀(JJCUSTOM)’. 이태리산 최고급 베지터블 통가죽을 이용한 핸드메이드 업체라고 한다. 집사람에게 줄 소품이라도 하나 건지고 싶었지만 이 역시 문이 닫혀있었다. 하긴 해외여행 때 사준 꽤 비싼 가죽 재킷도 옷장에서 365일 내내 쉬고 있지만...

 27회 한국건축가협회상에 빛나는 갤러리 MOA’는 영국 유니버스 사에서 출판한 ‘1001개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세계 건축물에도 포함되었을 정도란다. 21세기 국내외 예술계를 선도할 실험정신이 강한 작가들을 선별하여 전시 및 세미나를 개최해오고 있단다.

 벽봉 한국장신구박물관. 경기도 무형문화유산(18) 옥석(장신구)장 김영희씨가 조선시대의 왕실과 민가에서 사용하던 장신구를 오례(상례·가례·빈례·군례·흉례)로 분류·전시해 놓은 공간이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 100여 개국 2000여 점의 민속 악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악기 설명과 함께 전시된 전통 의상을 입은 인형과 풍물, 그림들이 각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단다. 일부 악기는 직접 연주해 볼 수도 있다나?

 타임앤블레이드박물관(The Museum Time & blade). 시계와 칼을 테마로 한 이색적인 박물관이다. 18세기에 제작된 시계부터 작은 부품들, 제작 도구까지 알기 쉽게 전시해 놓았단다. 시계와 칼을 통해 인류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나?

 코카콜라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다는 잇츠 콜라박물관. 일산에서 코카콜라 카페를 운영하던 김재학 대표가 확장·이전해왔다고 한다. 빈티지존, 키친존, 보틀존, 익시피리언스존 등에서 다양한 전시물을 만날 수 있단다.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 1970년대부터 40여 년간 라디오 DJ로 활약한 아나운서 출신 황인용이 수집한 빈티지 오디오와 LP, CD 컬렉션을 기반으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1층은 음악 감상실, 2·3층은 미술작품 전시 공간으로 꾸며졌다. 하지만 문이 닫혀 들어가 볼 수는 없었고, 대신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고별방송(1980 11 30 TBC KBS에 강제 편입되면서) 멘트를 떠올리며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인가 봅니다. 남은 5분이~, 남은 5분이~. 남은 5분이 너무 야속합니다.>

 헤이리란 지명은 인근 지역에서 불리던 금산리 농요의 받음 구 후반에 나오는 에 헤이 에 헤이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농요의 흥을 받아서일까? 자연이 만든 굴곡을 따라 구불구불 나있는 길가에는 카페가 무척 많이 들어서 있었다. 대부분이 갤러리를 겸하는 카페들이다.

 이곳 헤이리는 인사동(2002)과 대학로(2004)에 이어 2009 12월에 세 번째로 문화지구로 지정되었다. 그런 자부심인지는 몰라도 헤이리의 Barista들은 커피를 예술로 여기며 빚고 있었다.

 그 화룡점정은 귀천이 아닐까 싶다. ‘천상병 커피라는 브랜드로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천상병 시인은 막걸리 한 잔, 담배 한 갑이면 족했던 분이었다. 그가 커피도 좋아했었나보다. 아님 그의 후손 중 누군가가 저 카페를 열었을 테고.

 헤이리 마을을 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걷는 것이다. 그러다 예쁜 건축물을 만나면 카메라에 담고 마주치는 미술관에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면 된다. 그게 지루해졌다면 산책을 나서면 된다. 1km쯤 되는 헤이리 노을숲길(한향림 도자미술관 뒷산)’을 올라 사방으로 탁 트이는 경관을 만끽할 수도 있고, 예술작품들로 치장된 마을길을 걸어보는 것도 권할만하다.

 산책로인 마음이 닿길은 헤이리가 자랑하는 에코힐링로드라고 했다. 국내 최초로 마을과 기업(현대자동차)이 손잡고 만든 길이기도 하단다. 그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자동차 조형물을 떡하니 전시해놓았다.

 이밖에도 다양한 작품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김기철, 정승윤, 김태균 등 많은 작가들이 참여했는데 걷고 싶은 길, 걷다보면 문화와 예술이 느껴지는 길, 그리고 힐링이 되는 길을 목표로 조성했단다.

 저 조형물에서 헤이리 소리를 떠올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헤이리 헤이리 어허야>, 서로 주거니 받거니 메기고 되받아치는 형식의 노래로 혼자서도 부르고, 논 맬 때도 부른다는 노동요다. 그래! 더 늙기 전에 부지런히 걷고, 느끼며 맘껏 즐겨보자.

 09 : 00. 헤이리마을 투어를 마치고 평화의길(6코스) 시점인 성동사거리로 향한다. ‘게이트 3’으로 빠져나왔으니 헤이리로(남서쪽 방향)’를 따라 400m쯤 걸어 나오면 된다.

 09 : 04. 국립민속박물관(파주). 15개 수장고에 100만여 점의 소장품과 아카이브 자료를 보관하고 있으며, ‘열린 수장고 보이는 수장고를 통해 유물을 일반에 공개한단다. 하지만 개장 전이라서 외관만 눈에 담으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09 : 08. 성동사거리에 도착하니 평화누리길의 낯익은 게이트가 반긴다. 함께 가는 경기둘레길의 이정표(반구정 20.1km/ 동패지하차도 15.3km)와 스탬프보관함도 눈에 띈다. 반면에 평화의길은 안내판 하나뿐이다. 더부살이의 서러움이라고나 할까?

 이곳 파주는 메주콩으로 흔히 알려진 장단콩의 고향이다. 여기서 장단은 콩의 품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단 지역의 콩이란 뜻이다. 지금은 파주시 장단면이란 지명으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전에는 경기도 장단군(대부분 민통선 안에 있다)이었다. 그래선지 장단콩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여럿 세워놓았다.

 장단콩을 브랜드로 내건 음식점들도 눈에 띈다. 메인 요리는 물론 장단콩으로 만든 두부. 두부(豆腐) BC 2세기경 한나라(중국) 회남왕 유안(劉安)이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그 원료인 콩은 식물 중 단백질을 많이 함유한 대표 고단백 작물이다. 대두 기준 40% 정도는 지방, 33%는 단백질, 27%는 탄수화물이다. 단백질의 품질도 좋다. 고기 한 점 없는 농경민족의 상차림에서 꼭 필요한 단백질 반찬이었던 셈이다.

 09 : 10. ‘새오리로(북서쪽 방향)’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오르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파주 맛고을 장단콩 거리라는 지명답게 두부요리를 메인 메뉴로 내건 음식점들을 중심으로 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서있었다.

 09 : 18. 길가에 늘어선 음식점들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스테이크에 피자, 파스타 같은 평소에 자주 찾는 메뉴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걷다보면 성동리(城洞里) 큰말에 이르게 된다. 파주의 또 다른 명소인 프로방스 마을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09 : 20  09 : 38. 프로방스 마을. ‘하트형 대문으로도 모자라 러브인 프로방스 빛축제라는 자랑까지 매달았다. 프로방스 마을에 야간 경관 조명등을 설치해 '빛 테마 거리'로 꾸며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파주시는 프로방스 마을을 아름다운 정원과 이야기가 있는 벽화, 야간 조명이 조화를 이루며, 유럽풍 베이커리와 카페, 이탈리안 레스토랑, 한국적인 음식 등 전세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트렌드를 선도하는 패션, 생활용품, 체험시설 등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된 테마형 마을이기 하단다. 따뜻한 색을 가진 독립된 건물에서 각각의 컨셉을 갖고 운영되는 상점들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나?

 안으로 들어서면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기자기한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은 1996 프랑스 레스토랑이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주변에 각종 음식점·제과점·액세서리·의류판매점들이 들어섰고, 현재는 식음료·리빙&잡화·패션&잡화 등 37개의 아이템으로 상점이 운영되고 있단다.

 25년쯤 전인가? 세미나 참석차 들렀던 마르세유에서 이색적으로 다가오던 주택을 이곳에서도 만났다. 프랑스 관계자의 설명으로는 따가운 지중해의 햇볕을 가리기 위해 창문 밖에 나무문을 하나 더 둔다고 했었다.

 프로방스는 프랑스 남동부의 지중해 연안과 이에 접한 내륙지역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그래선지 소담스런 정원은 프랑스풍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을까? 엉뚱하게도 프로방스가 아닌 파리 중심가에 있는 에펠탑까지 옮겨놓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마치 영화 속 옛 유럽을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동화 속 배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파스텔 톤의 건물들은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섬세하게 꾸며졌다. 저런 풍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축제 등을 기획 4계절 내내 방문객에게 다양한 문화 공연과 새로운 체험, 아름다운 이벤트를 선사한단다.

 아쉬운 점은 마을이 텅 비어있다는 점이다. 이른 시간이어선지 문을 연 가게가 하나도 없었고, 외부 방문객도 평화의길 트레킹을 이어가도 있는 우리 일행뿐이다. 가게에 들어가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명색이 명품 마을인데 포토존 하나 없겠는가. 그중에서도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로 풀어놓은 고백 터널이 눈길을 끌었다. ‘따스한 눈 맞춤을 시작으로 부드러운 손잡기, 포근하게 안아주기, 달콤하게 뽀뽀하기, 정열적인 딥 키스(deep kiss)하기를 순차적으로 해나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집사람이 두 번째 코스부터 도망가기에 바쁜 걸 보면, 고백은 아무에게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터도 준비되어 있었다. 다양한 놀이시설과 동물들을 보유한 프로방스 펠리씨떼는 아이들이 동물들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체험형 관광농원이라고 했다.

 유럽의 고도(古都)를 돌아다니다보면 투어용 마차를 흔하게 만난다. 그런 마차가 프로방스 마을에도 있었다. 비록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게이트를 통해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프로방스마을 투어는 끝을 맺는다. 프로방스 마을은 잘 꾸며진 테마형 관광지가 분명했다. 하지만 가게 문이 열리지도 않은 시간에, 그것도 트레킹 도중에 잠시 스치듯 들렀으니 주마간산(走馬看山)의 대표적이 사례라 할 수 있겠다.

 09 : 38. 못다 본 풍경들을 아쉬워하며 다시 길을 나선다. 아까처럼 새오리로를 따라 북진한다. 옛 지명인 교하군 신오리면(新五里面)에서 이름을 얻어온 2차선 도로이다.

 09 : 42. (힐하우스)버스정류장 옆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새오리로와 헤어져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샛길로 들어간다.

 고개를 넘자 희미하게나나 두물머리의 드넓은 물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짙은 미세먼지 탓이다. 아무튼 한강과 임진강이 저곳에서 합쳐지면서 조강으로 변한다. 이즈음 어화둥둥이라는 화로생선구이 식당을 지나기도 한다.

 09 : 51. 길은 임진강의 강둑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가지를 못한다. 하지만 둑 위로 난 자유로에서는 자동차들이 잘들만 달려댄다.

 주인과 더부살이의 차이점이랄까? 시점과 종점의 방향만 적어놓은 평화의길 이정표와는 달리 경기둘레길 이정표는 거리는 물론이고 지도까지 반듯하게 표시해 놓았다.

 이후부터는 자유로와 나란히 가는 농로를 따라간다. 자유로의 아래로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있다.

 09 : 56. 대동리나들목. 길을 걷다보면 자유로에서 빠져나오는 이런 진출입로를 심심찮게 만난다.

 10 : 00. 접경지역의 오지일 것으로 여겼던 대동리(大洞里)’는 예상 외로 큰 마을이었다. 반듯반듯하게 지어진 건물들도 대도시 근교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하긴 대동리가 본디 임진강가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니 어련하겠는가. 참고로 대동리는 지금은 없어진 교하군의 신오리면에 있던 마을이다.

 자유로 아래로 난 굴다리도 심심찮게 만난다. 하지만 이중삼중으로 막혀있어 통행은 할 수 없다. 하긴 민통선의 역할을 하는 통로이니 어련하겠는가. 저 지하통로를 빠져나가면 임진강이고, 군사분계선이 그 물길을 가른다.

 농기계가 우선이란다. 맞다. 이 길은 접경지역의 주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지나다니는 길이다.

 얘기봉의 십자가등탑을 연상시키는 저 철탑의 정체는 대체 뭘까? 애기봉에서 철거된 등탑을 이곳으로 옮겨왔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해본다. 참고로 30 높이의 애기봉 등탑은 1971년 만들어진 뒤 성탄절을 즈음해 트리로 치장해 불을 밝히다 2004년 상호 비방을 중단하기로 한 남북합의 이후 중단됐다. 그러다 연평도 포격사건을 계기로 2010 12월부터 재점등했으나 2014년 안전을 이유로 철거되었다.

 정체모를 시설물들을 만나기도 한다. 원통형의 관을 박은 뒤, 그 위에다 알 수 없는 숫자들을 적어놓았다.

 10 : 11. 걷기 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시설(화장실)도 눈에 띈다. 쉼터로 제격이었던지 환경정화(노인일자리인 듯)를 나온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이후부터는 아예 자유로와 함께 간다. 차량들이 내는 소음으로 인해 귀가 먹먹해지는 구간이다. 많은 차량들이, 그것도 누가 빨리 달리는지 시합이라도 하려는 듯 번개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고통이 오래가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잠시 후 길은 둑길 아래로 다시 내려간다.

 두루누비는 6코스를 임진강 하류의 습지를 조망할 수 있는 길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레킹을 마칠 때까지 임진강 하류는 만날 수 없었다. 자유로에 막혀 먼발치에서도 구경할 수 없다. 그 아쉬움을 갈대로 가득한 수로로 대신해 본다.

 10 : 20. 대동리·만우리 나들목. 진출입 차량이 많은지 도로 바닥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나들목 아래로 난 굴다리. 자유로가 민간인 출입 통제선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 바퀴자국이 선명한 걸로 보아, 허용된 사람이나 차량들에 한해 출입이 허락되는 모양이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농로를 따른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밋밋한 구간이다.

 10 : 26. 평화누리길 쉼터. 자전거 거치대는 기본, 파고라에 벤치를 20여 개나 놓아둔 큼지막한 쉼터이다.

 평화누리 자전거길 안내도는 파주구간을 나타내고 있었다. 파주출판도시휴게소에서 장남교까지 57km 2개 코스(4코스·5코스)로 나누어 놓았다.

 쉼터 근처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자전거길은 계속해서 자유로의 가장자리를 따라가고, 평화의길은 둑 아래로 난 농로로 내려간다.

 이어서 나타난 굴다리는 자동차 통행이 더 빈번한 모양이다. 바닥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날 정도다. 통로 끝에서는 병사가 보초까지 서고 있었다. 살짝 비켜나게 사진을 찍은 이유다.

 발길은 이제 대동리에서 만우리(萬隅里)’로 넘어간다. ‘임진강가의 큰 모퉁이에서 유래된 지명답게 마을 대부분이 평탄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우리로 들어서자 들녘이 넓어졌다. 그래선지 낙곡을 주워 먹고 있는 기러기 떼가 눈에 들어온다. 인기척에 놀란 한 떼는 요란한 날갯짓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다.

 10 : 39. 오금 양·배수장. 수문이 7개나 되는 걸로 보아 만우천의 물줄기가 제법 큰 모양이다. 하나 더, 반대편 그러니까 만우천이 임진강에 합수되는 지점에는 질오목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건너편에서 길이 또 나뉘고 있었다. 평화의길은 오른쪽으로 간다.

 평화누리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이한 이정표. 둘 모두 평화누리길인데도 한쪽은 자전거 라이더, 다른 한쪽은 걷기 여행자들만 이용하도록 했다.

 잠시지만 만우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월롱면(파주시) 덕은리에서 발원 북서방향으로 흐르다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길이 9.5km의 지방하천이다. ! 농어촌공사에서 내건 현수막에는 탄포천이라 적고 있었다. 만우천의 다른 이름인 모양이다.

 10 : 42. 평화누리길 오금리 쉼터’. 아까보다 규모는 작지만 대신 화장실을 갖추었다. 안내판은 소울원(疏鬱園)과 용주서원, 파주향교, 통일공원, 반구정을 주요 볼거리로 꼽고 있었다. 다음 구간을 걸을 때 눈에 담을 수 있는 행운을 기대해본다.

 10 : 47. 만수천을 300m쯤 거슬러 올라갔을까, 이제 그만 물가를 벗어나란다.

 냇가를 떠난 길은 나지막한 구릉지로 파고든다. 오금리로 들어가는 길이어선지 오금로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10 : 50. 잠시 후 오금리(吾今里)로 들어섰다. 임진강이 굽이져 흐르는 곳이라 하여 오그미, 오고미 등으로 불리다 오금리가 됐다. 자연부락으로는 오금, 골말, 모팅 등이 있다는데, 어느 부락을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을은 나지막한 언덕 두 개를 끼고 형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고개에서 만난 늙은 향나무가 눈을 호사시켜준다.

 마을은 주택보다 창고가 더 많아 보인다. 대형 창고들이 우후죽순처럼 마을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10 : 58. 오금리 썰매장. 생태관광 마을로 거듭난 질오목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시설이다. 도심 속 야외 스케이트장처럼 큰 빌딩에 둘러싸여 있지도, 화려한 불빛도 없지만 논 썰매장에서 보이는 고즈넉한 농촌 풍경은 그 옛날 시골에서 얼음 썰매를 타던 추억을 새록새록 불러일으킨다.

 외딴 곳이어선지 손님은 별로 없었다. 빈 논에 물을 대는 건 기본, 직접 나무를 깎고 날을 붙여 썰매를 만들고 얼음판을 정리해 썰매장을 조성한 마을 주민들의 노고가 헛된 것 같아 안타깝다.

 썰매장을 빠져나오니 이번에는 양식장이 반긴다. 임진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 담수어를 양식하고 있단다.

 11 : 05. 애견 테마파크인 자유로 멍 놀러와’.

 몇 걸음 더 걸으면 자유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난 도로를 다시 만난다.

 11 : 11. 카페 문지리 585’. 식물원 카페답게 엄청나게 큰 규모를 자랑한다. 카페 내부가 나무와 꽃들로 가득한데, 거기다 햇살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뷰를 자랑한단다. 그러다보면 식물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버린다나?

 계속해서 자유로의 가장자리를 따라간다. kakaomap은 이 근처에 탄현야구장을 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산으로 올라간 범선. 아쿠아랜드라는 잘 나가던 업체가 지은 레스토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잉 투자로 인한 자금경색으로 부도 처리된 후 방치되어 있는 상태란다.

 11 : 23. 탄현국가산업단지 나들목. 이곳에도 평화누리길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kakaomap은 이곳에서 오른쪽을 가리킨다. 산업단지까지 갔다가 종점인 낙하 IC로 가란다. 하지만 두루누비에서 내려 받은 앱은 계속해서 자유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갈 것을 지시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곳의 굴다리도 장애물이 없었다. 허가받은 차량에 한해 통행이 허용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굴다리의 민간인 통과는 선택이 아닌 필수일 수밖에 없겠다. 자유로와 임진강 사이에 들어선 저 너른 들녘에서 누군가는 농사를 지어야하지 않겠는가.

 11 : 32. 낙하 IC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엘지로(77번 국도)를 따라 낙하리(洛河里)’로 빠져나온다. 옛 교하군 탄포면 지역으로 임진강 옆에 있던 낙하원(洛河院)에서 얻어온 지명이다. 장단을 거쳐 개성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진출로 부근에는 자유로 레저워터파크가 들어서 있었다.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쉬다가기에 딱 좋은 곳으로 알려진다.

 11 : 42. 낙하리(아랫말) 입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헤이리 마을을 포함 13.44km 3시간 30분에 걸었다. 명품 관광지인 헤이리마을과 프로방스마을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평화의길의 완주인증 QR코드는 버스정류장 옆 평화의길 이정표에 붙여놓았다. 코스의 지도가 들어간 안내판 하나쯤 세워놓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트레킹을 마친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아니 그녀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를 향해 미소를 보낸다. 생선의 가시를 발라주는 등 귀찮은 일을 할 때마저 웃어주는 그녀의 마음이 부부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아주 작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속에는 배려와 사랑의 진정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작은 도움으로 서로를 편하게 하고,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관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부부의 의미일 테니 말이다.

 

 

여행지 : 조지아  바투미 시가지 투어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바투미(Batumi) : 조지아 최대 항구이자 최대의 휴양도시다. 터키 국경까지 약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여름이면 터키나 유럽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인구 15만 남짓의 조지아 제2의 도시이기도 한데, 외세 침략을 많이 받아서인지 그리스·로마 양식뿐만 아니라 터기 등 다양한 건축 양식들이 섞여있다.

 

 조지아 서부지역에 위치한 바투미로 가는 길. 스탈린의 고향이라는 고리 쿠타이시(‘콜키스 왕국의 수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젤라티수도원이 있다)‘를 지난다. 압하지아(Abkhazia)와 남오세티아(South Ossetia)을 지날 때는 2008년 조지아 영토 내에서 자치공화국을 선포한 두 지역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조지아를 침공한 러시아에 분노도 터뜨린다. 그리고 꽈리강과 리오니(Rioni)강을 나누는 분수령이자 시다카르틀리주(주도: 고리)와 이메레티주(주도: 쿠타이시)의 경계인 고개를 넘어 흑해 연안으로 들어선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트빌리시를 출발한지 6시간.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조지아의 서쪽 땅 끝인 흑해연안에 이른다. 그리고는 바닷가 작은 마을 그리골레티(Grigoleti)’에서 여장을 푼다. 트빌리시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300km 정도. E60 E692 등 고속도로를 이용해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도 6시간이나 걸렸으니 우리네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라 하겠다.

 그리골레티(Grigoleti)’는 자성이 있는 검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하다. 그래선지 전 세계 5대 브랜드 호텔 그룹인 윈덤(Trademark Collection by Wyndham)이 운영하는 리조트가 들어서 있었다. 세계적인 리조트라 그런지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는데 2022년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전 세계 6개 대륙 9,300개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윈덤은 미국과 유럽에 특히 많으며 최근에는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고 있다.

 바닷가와 접하고 있으니 흑해 해변이 리조트의 전용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로비 가까운 곳에 수영장을 만들어 해수욕에 싫증을 느낀 투숙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시간이 나면 스파나 피트니스센터 등을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흑해가 코앞까지 성큼 다가오는 레스토랑과 테라스가 가장 마음에 든다.

 바닷가로 나간다. 이름과는 달리 바다의 색깔은 세계 방방곡곡에서 만나본 여느 바다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 어떤 바다보다도 푸르렀다. 다만 바닷가 모래사장이 거무튀튀하다는 게 약간 다를 뿐. 저 모래사장이 흑해라는 이름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겠다.

 리조트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심어져 경치가 좋은 편이다. 바다 쪽으로는 꽃이 가꾸어진 정원도 있다. 날씨가 화창한 탓인지 아직은 수온이 차가울 텐데도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비키니 차림의 피서객들이 여럿 보였다.

 저녁식사까지 시간이 조금 남기에 해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1km남짓 걸었는데 해변은 부유한 이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별장의 테라스를 바닷가 모래사장에 잇대어 만드는 등 낭만을 더했다. 붉게 물드는 저녁놀의 바닷가, 그리고 식탁에는 와인을 곁들인 만찬이 차려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가.

 다음 날 아침 바투미로 간다. ‘그리골레티 비치에서 바투미까지는 30km쯤 떨어져 있다. 가는 내내 흑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공연장과 놀이공원이 보이는가 하면, 바투미식물원도 곁눈질해 볼 수 있다

 버스는 국제 컨테이너터미널을 지나 바투미 항구에서 멈춘다. 가이드는 우릴 선착장으로 인도한다. 해안을 따라 요트와 보트, 유람선들이 골고루 뒤섞여 있다. 참고로 바투미 항(Batumi Sea Port)’은 조지아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항구라고 한다. 1878년 로스차일드와 노벨 형제가 참여해 항구를 건설했는데, 조지아의 메인 항구 역할을 한다. 외국과의 교역품의 운반이나 국제여객선 루트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곳 흑해에서 더 큰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야만 하니 운송로가 썩 편치만은 않다.

 선착장으로 가는 도중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차차 분수(Batumi chacha fountain)’라는 이름의 타워(Tower)인데 예전에는 차차(와인 만들고 남은 찌꺼기로 만든 술)가 분수대에서 흘러나왔다나? 아무튼 지금은 프랑스 건축가 ‘Raymond Charles Père’가 디자인했다는 오스만 스타일의 시계탑만 남아있다. 그런데 튀르키예의 이즈미르 시계탑을 쏙 빼다 닮았다면 나만의 오해일까?

 우리가 타고 갈 유람선이다. 이름은 ‘Sea Star 1’. 2층으로 되어 있는데, 2층에서의 조망이 조금 더 나은 편이다. 유람선은 어항, 페리항, 유람선항, 요트항 그리고 해수욕장을 한 바퀴 돈 다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옛 해적선을 닮은 낭만의 유람선도 눈에 띈다. 바투미를 찾는 관광객들의 숫자가 제법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유람선은 음악에 맞춰 파도를 타면서 천천히 움직인다.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간다. 그러자 해안도시 바투미의 전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바닷가를 따라 펼쳐지는 고층빌딩의 파노라마가 무척 멋있다. 바투미는 15만 명의 인구를 가진 중소도시지만 현대적 고층빌딩이 즐비한 현대도시다. ‘아자라 자치공화국의 인구가 33만 명이라니 절반이 수도권에 모여 사는 셈이다.

 해안을 따라 우뚝우뚝 솟아 있는 고층빌딩들은 대부분 2010년부터 지어졌다고 한다. 쉐라톤 호텔, 래디슨 블루 호텔, 켐핀스키 호텔, 힐튼 호텔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그 옆에는 야간에 불을 밝히는 등대(1863년 오스만튀르크 시절 나무로 만든 등대인데, 1882 21m 높이의 팔각형 석조로 새로 지었단다)도 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커다란 회전관람차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흑해를 따라 늘어선 현대도시 바투미의 고층빌딩들이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다.

 유람선은 바투미 해안을 따라 2km쯤 가다가 되돌아온다. 유람이라고 해봐야 해안의 빌딩을 보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해수욕장의 피서객들을 보는 재미가 조금 더해진다고나 할까? 참고로 흑해의 둘레는 5,800km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 조지아가 차지하는 부분은 310km쯤 된단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투미의 명물로 알려진 알리와 니노(Ali and Nino)’를 찾았다. 사랑하는 청춘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으로 조지아 조각가인 크베시타제(Tamara Kvesitadze)’가 만들었고, 이곳 바투미 해변에는 2010년 설치했단다. 작품은 원래 남과 여(Man and Woman)’로 발표되었고 한다. 하지만 너무 일반적이어서 사이드(Kurban Said)의 소설 알리와 니노(Ali and Nino)’에서 이름을 차용했다나? 아무튼 소설 속 알리는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무슬림이고, 니노는 조지아 출신의 기독교도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이별한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아제르바이잔을 공격하면서 니노는 딸을 데리고 조지아로 피신한다. 그러나 알리는 간자(Ganja)에 남아 러시아군과 싸우다 죽음에 이르게 된다(1920년 아제르바이잔은 소련연방에 편입된다). 이후 알리와 니노는 카프카스 지역에서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져 1998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조형물은 키네틱 아트(움직이는 예술)로 움직임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알리와 니노는 처음에 먼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잠시 후 서로 손을 잡는가 싶더니, 이들은 다시 멀어져 간다. 알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소설과는 달리 두 연인의 조형물은 만났다 헤어지기를 10분 간격으로 반복한다. 소설이 알리와 니노의 일대기라면, 조형물은 사랑과 이별이라는 메시지가 중심이 된다. 참고로 바투미는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은 도시다. 그런 도시에서 알리와 니노는 다양한 민족, 문화와 종교의 화합과 평화로운 공존을 상징한다.

 2011년에 지어졌다는 알파벳 타워 130m 높이를 자랑한다. 철골 구조물 밖으로 두 개의 밴드 형태 알루미늄 판이 넝쿨손처럼 돌며 올라가는데, 그 판 위에 33개 조지아어 알파벳이 붙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투미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단다.

 바투미 타워(탑처럼 생긴 건물)’는 바투미 기술대학의 건물로 조지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했다. 2012년 준공했으나 건물의 위치, 형태, 관람차 등 대학에 맞지 않아 10년 채 표류중이라고 한다. 곧 호텔로 변신할 계획이라나?

 바닷가로 나가면 흑해 전망대가 있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가도록 이층 구조물을 설치해 바다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흑해(Black Sea)’는 우리나라 면적의 4배에 이르는 호수 같은 바다다. 터키 해협을 통해 지중해와 연결되는 갇힌 바다이다.

 바다 전망이라고 해야 별 게 없었다.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해안과는 달리 이곳 흑해는 섬이나 리아스식 해안이 없어 단조롭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수평선이 보이는 푸른 바다만 펼쳐질 따름이다.

 대신 좌우로 펼쳐지는 바닷가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푸른 숲을 배경으로 둔 해안은 바닥이 자갈이어서 물이 더 깨끗하게 보인다. 그 자갈 위로 파도가 부딪쳐 하얀 포말이 생겨난다. 그 때문에 바다가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래선지 아직은 철이 이른데도 바닷가에서 여름을 즐기는 피서객들이 여럿 보였다.

 반대편으로도 흑해가 질펀하게 펼쳐진다. 이쯤해서 가이드가 전해준 팁 하나. 흑해가 ‘Black Sea’가 된 이유는 흑해의 바닥이 검어서라고 했다. 때문에 물속의 가시거리가 굉장히 짧단다. 흑해와 접한 나라들 간의 잦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죽음을 뜻하는 검은색의 바다가 되었다는 설도 있단다.

 바닷가를 떠나 바투미 시내로 들어간다. 시내로 연결되는 바투미대로(Batumi Boulevard)’는 분수 광장을 지나 유럽광장으로 이어진다.

 감사후르디아 대로(Zviad Gamsakhurdia Avenue : ‘감사후르디아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조지아의 초대 대통령이다) 루스타벨리 대로(Rustaveli Avenue)’가 만나는 지점에 넵튠 분수가 있었다. 분수 한 가운데 바다의 신 넵튠이 삼지창을 들고 우뚝 서 있는 모양새이다. 냅튠은 물의 신이다. 샘이나 강, 바다의 신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니 바닷가에 터를 잡은 바투미로서는 해양에서의 안녕과 평화를 빌기에 딱 좋은 신이라 하겠다.

 넵튠(Neptune, 포세이돈) 분수는 이탈리아 볼로냐의 네투노 광장 16C에 세워진 쟝드 볼로뉴(Jean de Boulogne)’의 조각상 ‘Fontana di Nettuno’를 그대로 복제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똑 같게 복제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원작을 빌려오면서 청동상을 금도금으로 옷을 갈아입혔다.

 분수 건너편에는 고대 그리스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바투미 극장이 있었다. 4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과 두 개의 소극장에서 음악, 연극, 무용 등 예술과 관련된 공연이 열린다. 지붕 아래 박공벽에는 리라(lyre)로 불리는 현악기와 트럼펫으로 불리는 관악기를 양각해 놓았다. 그 가운데서 두 사람이 웃고 있는데, 오마이뉴스는 리라의 명수 오르페우스와 음악의 신 아폴로로 추정하고 있었다.(바투미 편은 오마이뉴스의 기사가 많은 도움을 줬다)

 그런데 바투미 극장 뒤편에 있는 저 동상은 대체 누구일까? 어쩌면 일리아 차브차바제(Ilia Chavchavadze, 1837-1907)’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바투미 극장을 후원했었다니 말이다. 시인이자 소설가, 법률가, 언론인, 정치인 등으로 활동한 그는 조지아 민족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시가지는 유럽의 어느 중세도시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노랑머리의 남녀도 심심찮게 보인다. 맞다. 바투미는 조지아 최대 항구도시이자 조지아 최대의 휴양도시라고 했다. 터키 국경까지 약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여름이면 터키나 유럽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단다.

 좁은 거리는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가득하다. 오스만투르크와 러시아, 유럽 등 다양한 나라들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데, 고풍스럽고 특이한 형태의 건물도 많아 마치 동화 속 마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바투미 광장(Batumi Piazza)’에 가까워질 무렵 성 니콜라스교회(St. Nikolas Church)’를 만났다. 바투미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그리스 출신의 바투미 시장 에프레미디(Ilya Efremidi)의 후원으로 1865년 공사를 시작해 1871년 완공했다. 20세기 초에는 성 니콜라스, 성 조지, 성모 마리아 이콘이 그리스 히로스(Khiros) 섬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근처에서 아르메니아 교회(Christ the Saviour Armenian Apostolic Church)’도 만날 수 있었다.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고 해서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러시아정교회나 조지아정교회와는 달리 우리나라 교회처럼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다고 했다.

 활을 들고 있는 큐피드를 형상화 한 꼬맹이 분수도 눈에 띈다. 독신자가 이 물을 마실 경우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있고, 부부가 함께 마시면 오래오래 행복과 화합을 보장해준다나?

 그 뒤에는 황금빛 여인의 동상도 있었다. 여성 본연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란다.

 바투미 광장(Batumi Piazza)’에 도착하니 시간이 일러서인지 인적이 뜸했다. 하지만 점심 손님들이 많은지 식당에서 내놓은 탁자들이 널따란 광장의 절반 이상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바투미의 역사지구 재건과 관광인프라 확충계획에 따라 조성된 광장은,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을 모방하여 2010년 완공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식당과 술집 그리고 커피숍도 마르코폴로, 피아짜, 미미노 같은 이탈리아어 상호를 가지고 있었다.

 바투미 광장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양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의 느낌이 난다는 것이다. 광장 주변의 부티크 호텔과 시계탑이 산 마르코 광장의 총독관저 같은 느낌을 준다나? 하지만 내 기억속의 산 마르코광장 99m 높이의 종탑(Campanile di San Marco)은 저 풍경과 많이 달랐다.

 광장 한가운데는 2010년에 만들어진 커다란 모자이크화가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유명 성악가들이 이곳에서 공연하기도 했단다.

 한가운데서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유럽광장(Europe Square : 옛 이름은 시대광장이라고 했다)’은 넵튠분수의 남서쪽에 있다. 바투미광장에서도 무척 가깝다. ‘유럽이란 이름만으로 조지아의 유로 가입의자가 엿보이는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 또한 밝고 활기차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많아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나 싶다.

 광장의 예쁜 건물들은 유서 깊은 동유럽의 도시들을 연상시킨다. 바투미의 근·현대를 함께 보여주기도 한다. 아르누보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주를 이루지만, 그 뒤쪽으로 21세기 빌딩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건물은 현재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 식당, 기념품점 등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광장에는 2007년에 세웠다는 메데아 동상(Statue of Medea)’이 우뚝 서있다. 그리스 신화 속 황금의 나라 콜키스 왕국이 역사상 실존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존감의 상징으로 조각가 흐말라제(David Khmaladze)’가 제작했다. 동상은 콜키스 왕국의 공주 메데아가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는 황금 양가죽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이올코스 왕국의 이아손 왕자를 사랑해서, 아버지를 배신하고 그에게 황금 양가죽을 넘겨준다는 것을 형상화한 모양이다. 이쯤해서 의문점 하나. 콜키스 왕국의 입장에서 메데아는 적국 왕자와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조국을 버린 배신자다. 그런데도 아테네 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로 콜키스의 왕위를 계승케 하는 등 전설을 해피엔딩으로 끝내는 이유는 뭘까?

 기둥에 새겨놓은 아르고 원정대의 부조에서 이아손과 황금 양가죽에 대한 얘기를 소환해본다. 황금 양가죽은 콜키스 왕국의 영광과 번영의 상징으로 아이에테스 왕이 아레스 숲속에 숨겨놓고 황소와 용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이아손이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들 두 동물을 물리쳐야 했는데, 이아손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메데아다. 조국과 아버지를 배신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도 역시 이아손에게 배신을 당해,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을 죽이는 악녀가 된다. 그녀는 아테네 왕국을 거쳐 마침내 콜키스 왕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때 아버지 아이에테스는 동생에게 왕위를 잃고 궁에서 쫓겨나 있었다. 메데아는 마법을 부려 아버지를 왕위에 복귀시키고, 나중에는 아테네 왕과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로 콜키스 왕위를 계승케 한다.

 광장에는 옛 풍경을 담은 사진도 게시해놓았다. 광장을 돌아다니다보면 옛 풍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런 사진들을 여럿 볼 수 있다.

 광장의 한쪽에서는 2010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커다란 천문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체코 프라하 시청의 천문시계를 벤치마킹한 것 같은데, 덕분에 천문시계가 매달린 저 건물은 바투미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했단다.

 천문시계는 시간 말고도 태양, , 별자리, 행성의 위치 등 천문 정보까지 함께 알려준다고 했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자오선, 지평선, 일출과 일몰, 달의 나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달의 실제 움직임까지 보여준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천문시계의 안내판을 세워두는 고객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바닷가. 해변에 분수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저녁이면 이곳에서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추는 분수쇼가 펼쳐진다고 한다. 하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볼거리는 아니라고 했다.

 분수광장 초입에 ‘Under-21 Championship’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UEFA 유러피언 U-21 챔피언십은 유럽 축구 연맹(UEFA)이 주관하는 21세 이하 축구 국가대표팀 간의 국가대항전이다. 그러니 조지아와 루마니아의 시합이 곧 열린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닷가로 가다보면 푸치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나비부인(Madame Butterfly) 동상을 만나게 된다.

 이젠 공원(Mircle park)을 둘러볼 차례이다. 한마디로 공원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예쁜 건축물들과 독특한 조형물들, 그리고 나무가 우거진 길게 뻗은 산책로가 있는 멋진 공원이다. 초입에 조성해놓은 울창한 대나무 숲도 잠깐 쉬다가기에 딱 좋았다.

 뭔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은 동서양을 불문하는가 보다. 어른 팔뚝만큼이나 굵은 대나무에 뭔가를 끄적거려놓았다. 낙서가 된 대나무는 의외로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글로 된 낙서는 보이지 않았다.

 공원은 테마별로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져 있는데, 어린이들을 위한 미니 동물원이 있는가 하면, 조각공원과 여러 형태의 분수도 눈에 띈다.

 조류 동물원, 날아갈 우려가 있는 새들은 커다란 새장 안에서 기르고 있었다.

 유료로 여겨지지만 탁구대와 당구대도 설치해놓고 있었다.

 조지아인들이 사랑하는 스포츠답게 체스도 야외로 나왔다. 참고로 조지아 국적의 여성 체스선수 노나 가프린다시빌리 20세에 여성 챔피언에 오른 후 16년간(1962-1978)이나 자리를 지켰고, 세계 최초로 그랜드 마스터 칭호를 받기도 했다.

 바투미는 요런 이층 버스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그리고 미리 예약해둔 식당 근처에서 내려 현지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우리도 코카서스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즐겼다. 메뉴는 아자리안 하차푸리(Ajarian Khachapuri)’. 바투미가 속한 아자리야(Ajaria)지역 특유의 빵으로, 보트 모양의 빵 안에 치즈와 버터를 넣어 녹인 다음 계란 노른자를 얹었다. 이스트를 사용해 부풀어 오른 빵을 뜯어 치즈와 달걀을 찍어 먹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