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의길 1코스(강화평화전망대-문수산성 남문)

 

여행일 : ‘24. 12. 7()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송해면·강화읍 및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일원

여행코스 : 강화평화전망대고려천도공원연미정6.25참전용사 기념공원()강화대교문수산성 남문(거리/시간 : 15.6km, 실제는 17.01km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 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강화평화전망대(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88올림픽도로로 김포까지 온 다음, ‘국도 48호선으로 갈아타고 강화대교를 건넌다. 신당교차로(송해면 솔정)에서 빠져나와 전망대로를 타고 8km쯤 올라가면 강화평화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지난 9 28일 개통한 ‘DMZ 평화의 길(이하 평화의길‘)’은 인천 강화군부터 강원도 고성군까지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길이다. 510에 이르는 횡단 노선은 2개 광역 시·도에 10개 기초자치단체를 지난다.

 강화평화전망대에서 강화도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다 )강화대교를 건너 문수산성 남문 앞에서 종료되는 15.6km의 여정이다. 휴전선에 해당하는 한강하구 중립수역과 북녘 땅 조망과 함께 조선시대 한성 방어의 최전선이었던 강화도의 군사 유적을 둘러볼 수 있다. 하나 더. 군사분계선이 인접해 있어 신분증 지참은 필수다.

 평화의길 안내도는 남북1.8평화센터 앞 소형차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16.9km의 거리인데 5시간30분이 걸린단다. ! 서해랑길(103코스) 안내도도 눈에 띈다. 이곳 강화 평화전망대가 서해랑길의 종점이자 평화의길의 시점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9 : 18. 먼저 평화전망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초입, 국제구호개발 NGO ‘World Share’에서 무료급식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한 끼 100원이면 충분한데도 지구 곳곳의 많은 어린이가 굶주리고 있단다. 공감이 가기에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넣어드릴까 해서 모금함을 찾아봤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카드를 내놓으며 서명부터 해달라는 것이 정기적인 참여를 권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월 급여의 101에 가까운 금액을 국제구호단체 두엇에 정기적으로 기부해오고 있기에 정중히 사양하고 자리를 떴다.

 09 : 24.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을 위한 곳으로 평화통일의 기원을 담았다. 1~3층에 전시관과 전망대 통일염원소 등이 만들어져 있다. 지하1층과 지상 4층은 군사시설로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 입장료로 2,500원을 받고 있었다. 연중무휴이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단다.

 전시실 풍경. 강화도와 국방, 끝나지 않은 전쟁, 통일로 가는 길 등의 구성으로 남북한의 상황과 통일에 대한 열망, 그리고 통일 후의 비전을 제시한다.

 도전과 저항으로 점철된 강화의 역사도 시대별로 전해준다.

 북한 주민들의 의식주와 생활상도 살짝 엿볼 수 있다.

 3층에 있는 실내전망대. 고성능 망원경으로 북한의 산하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흐린 날씨에도 영상을 통해 북한 전경을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시설이 되어 있었다.

 야외는 작은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기념비 몇 개를 세우고, 그 옆에 해병대 상륙돌격장갑차를 전시해놓았다.

 가장 높은 곳은 제적봉(制赤峰)’의 정상석이 차지했다. 당초 애기봉을 제적봉으로 명명하려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애기봉 전설을 듣고 원래의 이름을 유지하라 했다나? 덕분에 이 봉우리가 제적봉이 되었다고 한다.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는 임진왜란 때 연안부사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이 이끄는 황해도 의병이 연안성에서 흑전장정의 3천여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긴 내용을 담았다. 원래의 비는 횡정리(연백군 용봉면)에 있으나, 미수복지역인 관계로 연백군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망향과 통일의 기원을 담아 1983년에 세웠다고 한다. 양사면 인화리에 있던 것을 1997년 고향 땅이 보이는 이곳 평화전망대로 옮겨왔다. 옆 빗돌의 주인공은 편강열 의사(片康烈 義士)’.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만주에서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성단을 조직, 장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 등 항일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얻은 척수염으로 1929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평화전망대 건물 뒤, 야외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북한까지의 직선거리는 2.3km. 얼마나 가까운지 소리치면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어 줄 것 같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빌며 북한 땅, 동포들의 고된 생활상을 가슴에 담아보자.

 해마다 음력 10월 상달을 전후해 실향민과 가족들이 모여 망향제를 연다고 했다. 6.25 전쟁 종료와 함께 시작된 전통행사로, 1년 중 조상에게 햇곡식을 바치기 가장 좋은 시기인 10월 상달에 열어오고 있단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도 눈에 띈다. 강화도가 고향인 한상억, 최영섭이 만들었다는데, 유명 성악가가 부른 노래를 들어 볼 수도 있다.

 건너편 삼달리(황해북도 개풍군 대성면)까지는 2.3km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망원경까지 비치해 북한 땅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북한의 주택, 마을회관, 학교, 선전용 위장마을 등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특히 다른 지역의 전망대들과는 달리 북한주민들이 농사짓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날씨가 좋아야 하겠지만.

 다른 분의 시선도 빌려보자. <정말 가깝다. 소리치면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어 줄 것 같다.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우측으로 개성공단,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경계로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까지 확인할 수 있다. 좌측으론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와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무궁화동산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던가? 나라꽃인 무궁화의 품종이 이렇게나 많은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긴 몽땅숲협동조합에서는 이원화립·일노환·치구·적일중·하보마 같은 생소한 이름으로도 모자라 꽁트드에몽·토투스알부스·다이어나·블루버드·레드하트·헬렌·도로시크레인·하이리테드 같은 외국어로 된 품종까지 선보이고 있었지만.

 09 : 40. ‘남북1.8평화센터(남한과 북한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인 1.8km를 모티브로 삼았다)’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때 조강(祖江)과 조강으로 인해 돌출된 철곶(鐵串)이 조망된다. 하나 더. 강화도의 북쪽 해안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던 민통선 지역이었다. 그래선지 우리나라 영토임에도 군인들이 서 있는 검문소를 지날 때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잊을만하면 이정표가 얼굴을 내밀어 걷기여행자들의 길벗이 되어 준다.

 그래도 못 미더웠던지 곳곳에서 평화의길 리본이 팔랑인다.

 평화의길은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 대부분 중복된다. 이곳 강화도에서 동해안의 고성까지 자전거와 인간이 사이좋게 간다고 보면 되겠다.

 09 : 48. 첫 만남은 철곶 마을. 제적봉에 걸터앉은 평화전망대가 마을 뒤에서 고개를 내민다. 참로고 철곶은 법정 동리인 철산리(鐵山里)’를 구성하는 3개의 자연부락(철곶·산이포·진말) 중 하나다. 조선시대 철곶보(鐵串堡)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강화도는 5(), 7(), 8포대(砲臺), 54돈대(墩臺)를 두어 톱니바퀴처럼 섬 전체를 감싸며 섬을 방어했다.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나 할까? 그렇게 강화는 한양을 지키는 제일선이자 수도 방어체제를 수행할 수 있는 보장처가 됐다.

 철곶마을 들녘 뒤로 조강(祖江)이 흘러간다. 그 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지나가고, 군사분계선 너머는 황해도 개풍군이다. 또한 저곳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세 강물이 바닷물과 함께 흐른다. 하지만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실향민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물결에 파묻혀 말없이 흘러간다.

 전망대로(옛 이름은 制赤大路’)는 철산고개를 넘는다. 철산리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자연부락 철곶과 산이포의 경계에 놓인 고갯마루쯤으로 보면 되겠다.

 고개를 내려서면 철산리 입구(이정표 : 강화대교 12.94km/ 평화전망대 0.91km).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철산리(鐵山里)는 대부분 평지로 이뤄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철곶보가 있던 철곶(鐵串)과 포구마을인 산이포(山伊浦)를 합해 철산리가 됐다.

 뒤돌아본 철산고개. 도로 왼쪽에 산이포(山伊浦)’마을이 꽤 크게 형성되어 있다. 하나 더. 이곳 철산리는 북한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고 했다. 조강(祖江)을 사이에 둔 철산리 산이포와 북녘 땅 해창포(황해도 개풍군)는 직선거리로 1.8km에 불과하단다.

 전망대로를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꽤 너른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09 : 59. 철산삼거리. 양사면사무소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으로, ‘교산리 고인돌군이나 교산교회와도 연결된다. 강화 최초로 설립된 개신교 교회로 선상세례의 일화를 간직한 교회다. 이승환 모자가 선교사의 배까지 찾아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강화 땅에 기독교의 뿌리가 내리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삼거리 근처에 산이포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산이포(山伊浦)는 철산리 동남쪽 바닷가에 있던 포구다. 6.25 이전까지 700여 가구가 모여 살던 강화에서 가장 번화했던 포구로 알려진다. 서울과 북한을 오가던 배들의 정박지였고, 삼남 지방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물자가 한강을 따라 서울로, 예성강을 따라 개성으로 올라갈 때 물때를 기다리며 머물던 포구였다. 오일장이 열리면 황해도 연백 사람들까지 모일 만큼 북적였다고 한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철조망이 쳐졌고 주민들은 강제 이주 당했다. ‘널다리돈대(’석우돈대 판교돈대로도 불린다)’까지 있었다는 마을은 그렇게 사라졌다. 돈대가 있던 자리는 현재 대북 방송용 확성기가 들어서있다고 한다. 문화재 보호보다 안보가 더 우선시되던 시대의 유산이다. 안내판의 <그리움은 늙지 않아요. 뜨거운 눈시울 날이 새어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우리>라는 문구가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10 : 05. 잠시 후 석우교차로(이정표 : 12.2km/ 평화전망대 1.65km)’에 이른다. 강화대교와 강화읍으로 가는 도로가 좌우로 나뉘는 지점으로, ‘평화의길은 바닷가를 따라 난 2차선 도로를 따른다. 접근은 물론이고 사진촬영까지 금지한다는 날선 경고 문구에 살짝 쫄게 되는 구간이다.

 평화의길은 이제 해안을 따라 설치된 철책 앞에서 분단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차선이 둘이나 되는 널찍한 도로도 텅 비어있었다. 농로에까지 주어지는 그 흔한 도로명도 붙어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가끔이었지만 차량들이 오갔기 때문이다. 연미정 부근에 군의 초소가 있는 걸로 보아 지역 주민들에게만 통행이 허용되는지도 모르겠다.

 탐방로는 도로변에 따로 내놓았다. 그 바닥에 평화누리길의 방향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어느 독일 여행자는 자서전에서 곳곳에 그려놓은 방향표시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적고 있었다. 국내의 걷기 길에서도 만나보기를 학수고대 해 왔었는데, 오늘에야 그 원을 풀었나보다.

 평화의길은 진록과 연록으로 진행 방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정방향이 진록으로 보이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왼쪽 군의 순찰통로는 방조제를 따라 쳐놓은 모양이다. 도로 오른쪽에 배수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게 또 물억새와 갈대로 뒤덮이면서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다니는 차량이 아무리 적어도 도로는 도로인 모양이다. 과속을 단속중이니 알아서 속도를 줄이란다.

 뒤돌아본 풍경. 석우교차로에서 시작된 길은 고려천도공원까지 일직선으로 뻗어나간다. 하나 더. 저 철책 너머에서는 남과 북, 바다와 강이 하나로 만난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임진강과 한강이 한데 어우러져 다시 서해와 염하(鹽河)로 흘러 들어간다. 옛날엔 자연의 산물과 사람이 사시사철 모여들던 물길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1953년 정전협정을 하면서 땅에도 바다에도 철책이 둘러쳐졌다. 마을에 진동하던 생선 비린내도 지워졌다.

 10 : 25.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고려천도공원(이정표 : 강화대교 10.5km/ 평화전망대 3.35km)’에 이른다. 민통선 안보 관광코스 조성사업의 하나로 송해면 당산리에 만들어놓은 역사 테마공원이다. 강화천도는 고려-몽골 전쟁 때 항전하기 위해 고려 고종이 1232년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일이다. 이후 38년간 고려의 임시수도였던 강화도의 역사를 천도문을 시작으로 고종사적비까지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다.

 고려 만월대의 출입문을 형상화 한 천도문을 들어서면 대몽항쟁을 위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팔만대장경과 상정고금예문 등에 대한 자료와 강화도에 흩어져 있는 역사문화 유적지들도 소개해준다. 정자 및 전통연못, 폭포 등이 있어 여유롭게 산책과 휴식하기에도 좋다.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새긴 팔만대장경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를 형상화 한 7미터짜리 철제조형물로 만들어놓았다. 승천포(휴전이 되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큰 포구이다)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온 고종은 대몽항쟁을 이어간다. 하지만 항복에 가까운 화해를 하고 개경으로 돌아간다. 이에 불복한 삼별초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항쟁을 이어갔고, 그런 역사도 조형물 뒤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맨 안쪽은 고려고종사적비 차지다. 강화해협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조류가 빨라 기병 중심이던 몽골군에 맞서 저항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몽골군에 쫒긴 고종은 이곳 승천포를 통해 강화에 들어왔고(그래선지 배 모양의 전망대도 만들어놓았다), 임시수도로 삼아 39년을 머물면서 팔만대장경과 같은 국가 유산을 남기는 등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10 : 32.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가도 가도 똑같은 길을 계속 걸었다. 흙길이 아닌 포장된 길을 오래 걷다보니 발바닥과 발목이 아파온다.

 왼쪽은 철책의 연속이다. 지루해지기 딱 좋은 풍경인데,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들녘 풍경이 그나마 해방감을 준다. 뒤로 보이는 산은 고려산과 혈구산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데다 다양한 생태계를 갖춰 새들이 서식하기에 최적의 환경으로 알려진다. 탐조가들 사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탐조 여행지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이곳 강화도도 그중 하나라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들녘이 온통 철새들 천지다.

 11 : 02. 송해면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어느덧 강화읍(대산리)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송릉천(이정표 : 문수산성 남문 7.9km/ 평화전망대 7.7km)이라는 작은 하천을 스치듯 지나간다. ! 이즈음에서 도로명이 해안북로라는 이름으로 뜨고 있었다. 도로변에는 버스승강장도 만들어놓았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주어진 건가?

 11 : 22. 강화읍으로 들어선 탐방로는 돌모루 고개를 넘어 월곳리로 내려간다. 잠시지만 이때 바닷가를 떠나기도 한다.

 10분 남짓 더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돈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연미정이 얼굴을 내민다. 마을 끝에 왕릉처럼 솟아오른 곳이 월곶돈대(月串墩臺), 그 위에 올라앉은 정자가 연미정(燕尾亭)이다.

 11 : 42. 관광안내소를 지나자 월곶 돈대 앞에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 이곳이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黃衡, 1459-1520)의 옛 집터(향토유적 3)라는 것이다. 황형은 삼포왜란(중종 5) 때 왜적을 무찔렀고, 중종 7년에는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의 반란을 진압했다. 왕이 그 업적을 찬양하여 연미정을 하사했단다.

 연미정은 임시완, 임윤아, 홍종현 주연의 MBC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의 촬영지라고 한다. 고려 충렬왕으로부터 충선왕 대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아름다우면서 슬픈 우정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인데, 이곳에서 이별 장면이라도 찍었나 보다.

 아치형 암문(暗門)을 들어서자 느티나무(540년 된 보호수란다) 그늘 아래 연미정(燕尾亭)이 앉아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아름답다. 하긴 강화10경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저곳은 인조 5(1627)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참고로 연미정이란 정자 아래로 한강과 임진강 물이 합쳐졌다가 한 줄기가 서해로 흘러들고 또 한 줄기가 김포와 강화를 가르는 염하(鹽河)로 흘러드는 모습이 마치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하지만 나무는 죽어서 그루터기를 남기나 보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링링 그날의 상처라는 브랜드로 포장까지 해놓았다. 맞다. 누군가의 전환의 발상이 있었기에 저런 볼거리가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연미정이 있는 월곶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이다. 그곳에 김포반도가 한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작은 섬 유도(留島)’가 있다.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한국전쟁 이전에는 농가 2가구가 거주했고, 주막과 선착장까지 있었다고 한다. 홍수가 났을 때 북한에서 소 한 마리가 떠내려 와 우리 군인이 구출했던 인연으로 평화의 소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재밌는 일화도 전해진다.

 북한 땅도 조망된다. 개풍군의 신흥리와 령정리, 해평리라고 한다. 크게 소리치면 손짓이라도 보내올 만큼 지척이지만 우리에겐 너무나도 먼 거리로 인식된다. 하지만 예성강과 임진강, 한강은 연미정 앞에서 하나가 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서해로 흘러간다. 우리 민족의 철조망에 갇힌 역사를 아프게 갈무리하면서.

 11 : 57. 강화팔경의 하나인 연미정의 비경을 맘껏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때 가야할 나들길과 함께 조해루가 발아래로 펼쳐진다. 저 대문을 나서면 월곶진일 게다. 예전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가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리다 물때에 맞춰 한강으로 들어갔다는 곳. 뱃사람들의 사랑방이다.

 조해루(朝海樓)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강화 외성(江華 外城)’의 문루 중 하나로 강화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옛날 이곳은 남으로 염하, 북으로는 조강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는 해상로의 요충지였다)하는 초소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참고로 강화외성(사적 452)은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고려 23대 왕) 1233년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적북돈대에서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축조한 성이다. 성에는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했단다.

 평화누리길과 함께 사이좋게 달려온 평화의길은 이제 강화나들길이라는 친구를 하나 더 보태서 이어간다.

 이후로도 길은 겹겹의 철책이 드리워진 바닷가를 따라간다. 철책 외에는 볼거리가 없으니 지루할 것은 당연하다. 그게 싫다면 연미정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 나고 드는 게 자유로워 나들길이라는 강화 걷기에 시작과 끝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드넓게 펼쳐지는 들녘과 이를 받쳐주고 있는 고려산과 혈구산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2 : 34. 연미정을 출발한지 40. 테니스장이 들어선 작은 고갯마루를 넘는다. ‘제승돈대(制勝墩臺)’가 있었다는 부새산을 절단해가며 도로를 내놓은 모양이다. ! 중간에 강화나들길이 갈려나가기도 했었다. 도로를 벗어나 들녘의 둑길과 야산의 숲길을 걷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안내판은 이 어림을 한강하구 습지보호지역으로 적고 있었다.

 고갯마루를 넘자 국궁장과 대산기계공업이 연이어 나온다. 아까 헤어졌던 강화나들길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도 한다.

 12 : 43. 몇 걸음 더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에는 접경지역의 특성을 살린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있던 자리(강화읍 용정리)에 그들의 뜻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조성했단다. 국난극복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호국충절의 고장이자 호국보훈 성지인 강화군의 지리적 여건에 걸맞는 시설이라고나 할까?

 상단은 공원의 주인공인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자리한다. 그밖에도 강화특공대의적불망비와 한반도를 형상화한 조형물 등을 설치해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하단에는 6.25 전쟁 때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우리나라에 병력을 지원해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6개국의 참전 규모 등을 상세히 적은 안내판을 설치하여 6.25 전쟁의 실상을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안보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경계용 울타리도 버려두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광복과 혼란기, 참담했던 6·25전쟁, 정전협상 등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사진 벽화로 만들어 분단의 현실을 담았다.

 공원을 빠져나오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강화대교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12 : 58. 강화대교 아래를 지난다. 한옥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강조한 아치가 눈길을 끄는 강화도의 관문이다.

 옛날 이곳에는 갑곶나루가 있었다. 세종 원년 박신이라는 사람이 사재를 털어 14년간의 공사 끝에 석축로를 완성했고, 이후 500년간 나루의 기능을 수행해왔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인조가 이곳을 통해 강화도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교통수단의 변화로 1920년 기능을 잃었고, 1970년에는 강화대교가 놓이면서 완전히 폐쇄됐다.

 평화의길은 강화대교 아래서 갑곶순교성지로 들어간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된 우윤집·최순복·박상손 등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천주교(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 그들이 처형된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 매입하고, 지금의 순교성지를 조성했다. 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예수님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해루(鎭海樓)’가 길손을 맞는다. ‘강화외성 6개 문루 중 하나로, 염하를 건너와 갑곶나루에서 내린 사람들이 강화읍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문을 통과해야만 했단다. 강화도의 관문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저 문루는 최근에야 복원되었다. 완전히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세기 말 제작한 지도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성문 밖으로 나가자 김포반도를 향해 두 개의 다리가 뻗어나간다. 왼쪽은 1997년 개통된 신() 강화대교(길이 780m)로 갑곳리(甲串里, 강화읍)와 포내리(浦內里, 김포시 월곶면)를 연결한다. 그리고 오른편은 1970년 개통되어 27년 동안 강화도를 육지와 연결시켜주던 구() 강화대교이다. 그 임무를 새로운 다리에 넘겨주고 지금은 보행교로 남아있다.

 진해루 앞 광장에는 통제영학당(인천시 기념물 49)’이 있었다고 한다. 통제영학당은 조선 고종 30(1893)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사관생도 38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한 통제영은 영국 장교들까지 교관으로 부임시켰으나,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1896년 영국군 교관들이 귀국하면서 학교도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당시 사용하던 우물만이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13 : 06.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하나의 너른 광장이 나온다. 공터의 뒤는 갑곶성지’. 성지로 오르는 길목에는 하얀 예수님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신다. 쇄국정책과 종교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이 품었을 전교에 대한 염원을 내륙에 전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통로는 계단을 없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만들기의 일환일 것이다.

 통로는 갑곶 순교성지로 이어진다. 가장 높은 곳은 갑곶진두(나루터)에서 처형된 순교자 세 분을 기리는 순교자 삼위비 차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해역에 미국 군함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다.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면서 군사 충돌이 빚어졌고, 고종은 이를 빌미로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를 박해했다. 그 결과 제물진두(현재 화수동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는 세 분이 순교했다.

 광장의 오른쪽 끝은 기도하는 예수상이 자리 잡았다. 그 앞에는 장궤틀(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틀)을 놓았다. 예수님을 마주보도록 해놓은 것은, 그만큼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13 : 14. 순교성지를 빠져나오면 )강화대교. 1970년에 개통된 이 다리는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로서는 경남 충무교와 전남 완도교에 이어 국내 3번째라고 한다. 1997년 새로운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폐쇄되었으나 다리가 평화누리자전거길로 활용되면서 낮 시간에 한해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인도교로 변한 강화대교를 이용해 염하(鹽河)를 건넌다. 길이 694m의 다리는 상판을 3등분 한 다음 가운데로만 걸을 수 있도록 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대형 배관이 양옆에서 따라온다.

 13 : 24. 강화대교 동단에는 평화의길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층으로 된 전망대도 눈에 띈다. 경비초소 등 군인들이 사용하던 옛 시설물들이 걷기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설로 탈바꿈했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강화의 동쪽 바다가 그 속살을 드러낸다. ‘염하(鹽河)’라고 흔히 불리는 강화해협은 한양으로 들어서는 중요 물길이었다. 그래서  ’, 그리고 돈대가 촘촘하게 들어서서 바다를 지켰다.

 평화의길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강화대교의 아래를 지난다.

 강화나들길과 헤어진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경기둘레길이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 평화누리길 이정표(문수산성 남문 0.5km/ 대명항 13km)가 종점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고 알려준다.

 13 : 30. 다리를 횡단하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문수산성 남문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문수산성(文殊山城)은 강화도 방어를 위해 1694(숙종 20) 삼군문(三軍門)을 동원하여 쌓았다. 내륙으로부터 강화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다. 성에는 서·· 3개의 대문과 아문(亞門) 4개가 있는데, 이곳 희우루(喜雨樓)는 그중 남문이다. 1866(고종 3) 일어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성문에서의 조망도 일품이다. 소금 강 염하가 도도한 자태를 드러내는가 하면, 그 너머 더러미 포구에는 작은 어선들이 한가로이 떠있다. 지극히 평화로운 풍경이라고나 할까?

 13 : 40. 남문에서 내려오면 김포장례협동조합(문수산수목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2코스) 안내도는 장례조합 건물 뒤 산자락에 세워져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이 17.01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줬다. 나에게 집사람은 연인이자 친구다. 옥스퍼드대학의 '로빈 던바'교수는 한 개인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친구를 150명 남짓으로 봤다. 많을수록 좋겠지만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에게는 친구가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꿈쩍없이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집사람이 항상 함께 해주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안동선비순례길 8코스(마의태자길)

 

여행일 : ‘24. 11. 16()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도산온천 입구퇴계태실(왕복)용수사용두산소정마을 경로당수운정(거리/시간 : 10.6km, 실제는 12.05km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도산온천 입구(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안동방면)를 타고 27km쯤 내려온다. 지곡교차로에서 928번 지방도(녹전방면)로 옮겨 14km쯤 들어오면 도산온천 입구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신라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를 코스 브랜드로 삼았다. 신라가 망하자 태자였던 김일이 추종자들과 함께 부흥운동을 일으킨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의태자를 떠올릴 수 있는 유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함께 걸었던 도반(道伴) 마의태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그나마 이곳은 종점인 수운정 근처에서 태자리 태자사라는 지명을 찾아볼 수 있다나?

 8코스(마의태자길) 안내판은 이정표(수운정 7.8km/ 국학진흥원 10.6km)와 함께 온천교 옆 삼거리(도산온천 입구)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이곳은 7코스(산림문학길)의 시점이기도 하다. 영지산(433.3m)을 거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간다. 반면에 8코스는 용두산(664.6m)을 거처 수운정으로 간다.

 11 : 12. 탐방로는 용수길을 따라 북진한다. 하지만 난 온천로(928번 지방도)’를 따라 동진한다. 길을 나서기 전 퇴계태실부터 먼저 들러보기 위해서다.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인데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11 : 14. 잠시 후 만난 웅부중학교는 기숙형 공립학교이다.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스러져가는 인근 지역의 초미니 중학교들을 통·폐합했다고 한다.

 11 : 16. 웅부중학교 앞(이정표 : 노송정 종택 300m)에서 왼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선다. 그러자 양지바른 산자락 아래 웅크리고 있는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眞城李氏 溫惠派 宗宅, 국가문화재 제295)’이 거대한 등치를 드러낸다. ‘노송정 종택(老松亭 宗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노송정은 이 집을 지은 퇴계 이황의 조부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의 호라고 한다.

 종택의 대문인 성림문(聖臨門)‘. 퇴계 선생의 어머니인 춘천 박씨가 임신 중에 꿈을 꾸었는데, 공자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대문으로 들어서더란다. 이 사연을 들은 퇴계의 수제자 학봉 김성일이 성림문이라 명명했단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노송정(老松亭)‘이 있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지었는데, 계유정난 때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 온혜에 터를 잡았단다. 당시 집 주위에 오래된 소나무가 많아 노송정을 당호와 아호로 삼았다나? 하나 더. 편액은 석봉 한호가 썼단다.

 노송정 왼쪽,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있는 본채에는 온천정사(溫泉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곳은 퇴계 이황뿐만 아니라 퇴계의 숙부이자 엄한 스승이었던 송재 이우(松齋 李堣)’, 퇴계의 형님 온계 이해(溫溪 李瀣)‘ 등이 태어나 분가할 때까지 살며 가학을 이루던 생가다. 1454(단종2)에 지어진 550년이 넘는 고택으로 퇴계 선생과 관련된 수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다.

 1501 11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1571)‘이 저 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자라 조선 성리학의 거두가 되면서 퇴계 태실(退溪 胎室)‘이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종택 마당에는 이계양이 아들인 식(, 퇴계의 부친)과 우()에게 보낸 권학시(勸學詩)와 퇴계가 손자인 안도(安道)에 보낸 권학시가 적힌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이런 가풍이 있었기에 후대에 현달한 인물과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그밖에도 종택을 건립한 이계양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사당 등 대여섯 채의 부속 건물이 더 있었다. ! 종택에서 하룻밤 머무는 숙박체험도 가능하다고 했다.

 11 : 24. 온혜초등학교 쪽으로 200m 남짓 더 들어가면 온계종택(溫溪宗宅)‘을 만날 수 있다.

 온계종택은 퇴계의 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가 노송정에서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이해의 12대손 이인화(李仁和, 1858-1929가 의병 활동을 주도했고, 이곳이 그 거점이었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사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태웠다. 지금의 종택은 후손들이 뜻을 모아 불타기 전 선조들이 그린 설계도를 바탕으로 2011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안채는 후손들의 안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기웃거리는 것조차 삼가기로 했다. 대신 별채로 여겨지는 삼백당(三栢堂)‘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온계선생의 손자 이유도의 호이기도 한데, 잣나무 세 그루처럼 선비의 의리를 지키라는 가르침을 담았단다.

 온계종택 뒤에는 요산정(樂山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었는지는 몰라도 이름처럼 소나무를 배경삼아 들어선 아름다운 정자다.

 집은 비록 옛것이 아니지만, 수령 500년 된 밤나무가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다. 나무 둘레가 5.5m나 된다니 성인 3명이 양팔을 벌려 맞잡아야 하는 거목이다. 하나 더. 저 밤나무는 아직도 밤이 열린다고 했다. 매년 300~500개의 밤알이 수확되는데, 단단해서 벌레가 먹지 않는 토종이라나?

 선비순례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하지만 안동시에서 배포한 지도나 각종 안내문 등 그 어디서도 선비순례길이 이곳을 지나간다는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11 : 37.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용수길을 따라 북진한다. 도로표지판이 운곡리 방향임을 알려준다.

 도 안동의 특산물 중 하나인 모양이다. 광활한 무밭 풍경으로 점철되던 5코스나 6코스만큼은 아니어도 길가 농경지가 온통 무밭이다. 맞다. 이곳 도산면은 무청 시래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단무지용 무라고는 하지만 시래기를 주로 하고, 무 뿌리는 거의 거둬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밭에서는 무는 무대로 무청은 무청대로 구분해서 거둬들이고 있었다.

 수확은 파종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저 농부는 대체 무엇을 심고 있을까. 그게 궁금해 물어보니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만 되돌아올 따름이다. 기초 대화만 가능한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문득 외국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없으면 농사도 지을 수 없다던 어느 농부의 넋두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11 : 53. 풍천임씨(豊川任氏) 문중의 빗돌이 눈길을 끈다. 부근에 용담(龍潭) 임흘(任屹, 1557~1620) 취규정(翠虬亭)’이 있다는 게 아닌가. 임흘은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활약했다. 전쟁이 끝나고 공을 인정받아 동몽교관에 제수되기도 했지만 향리로 돌아와 자연을 벗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정자는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다녀오지는 않았다. 그저 퇴계 집안과 인연이 있어 그리도 청백하게 살았으려니 하며 지나치기로 했다. 그의 부인이 퇴계의 숙부이자 스승인 이우(李堣)의 증손녀 진성이씨(眞城李氏)였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용두산을 바라보며 간다. 용두산에서 발원해 도산면소재지인 온혜리에서 토계천에 합류되는 온혜천의 골짜기를 따라 도로(용수길)가 나있다.

 12 : 04. ‘용문정(龍門亭)’이란다.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까지 세워놓았다.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할 정도로 존귀한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이와 관련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개울에 놓인 용문교(龍門橋)’는 옛 멋까지 폴폴 풍긴다. 꽤 오래된 다리를 복원해 놓은 것 같은데, 이 역시 내력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뭔가를 조성(또는 복원)하려면, 안내판 하나쯤은 예의가 아닐까?

 잠시 후 모퉁이를 돌아서자 용두산이 그 전모를 드러낸다. 무척 높다. 저걸 어떻게 올라가지?

 12 : 08. 용수사 버스정류장(이정표 : 수운정 8.3km/ 도산온천 2.3km). 삼거리인데 왼쪽은 이름(구레실황정길)대로 구레실 황정마을로 연결된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용수길을 따른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운곡리 경로당이다. 운곡리(雲谷里)는 지대가 높아(고도계는 244m를 찍고 있었다), 용두산과 국망봉 사이 골짜기에 항상 구름이 서려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우리말로는 구름실·구래실·구레실로 불린다.

 경로당은 미소쉼터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다. 행복에 겨운 미소가 넘치는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도 지루하다 싶으면 밖으로 나와 쉬라는 듯, 개울가에 야외 쉼터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 개울도 예산을 들여 물고기가 헤엄치는 도랑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나?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농·어촌에 대한 정부의 배려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따뜻해졌다.

 12 : 14. 용수사 일주문(이정표 : 수운정 7.8km/ 도산온천 2.8km). 정자와 화장실까지 갖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용수사의 부도전도 이곳에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선비순례길과 용수사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기 때문이다.

 퇴계예던길 안내도도 보인다. 아까 온계종택에서 봤던 안동선비순례길 안내도와 품은 내용이 얼추 비슷한데도 다른 제목을 달았다. 이왕에 안동선비순례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알렸으니 탐방로에 설치된 시설물들도 이름을 통일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옛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면 새로운 이름은 이쯤에서 없애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선비순례길 8코스는 일부 구간이 퇴계 귀향길과 겹친다. 안동 출신인 퇴계는 선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1568년 조정이 거듭해서 부르자 고향에서 상경했다. 그는 대제학으로 어린 임금을 보좌했으나, 낙향해 학문을 수양하며 만년을 보내고자 했다. 이에 퇴계는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한 끝에 1569 3 4일 일시적 귀향 허락을 받아냈다. 다음날 바로 길을 나선 퇴계는 임금의 배려로 충주까지 관선(官船)을 이용했고, 이후는 말을 타고 죽령을 넘어 도산서원에 이른다. 그 길이 지금의 퇴계 귀향길이다.

 탐방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지만 용수사(龍壽寺)’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대한불교조계종에 속한 용수사는 고려 의종 원년(1146) 봉화의 각화사(覺華寺) 주지 성원(誠源)이 암자를 지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1164년 왕명으로 용수사란 사액(賜額)을 받아 화엄종단의 독립사찰이 되었다. 그러다 1895년 을미의병 와중에 전소된 것을 원행스님과 불자들이 힘을 합쳐 1994년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했단다.

 수월루(水月樓)’로 올라가기 전 광장부터 살펴보는 게 어떨까 싶다. ‘육바라밀길을 꾸며놓았으니 말이다. 팻말에 적혀있는 여섯 가지 덕목(보시·인욕·지계·정진·선정·지혜)을 의미하는 코스를 걷다가 열반에라도 들지 누가 알겠는가.

 절간의 구조는 무척 단출했다. 산신각과 용왕전 등 꼬맹이 전각 두엇과 대웅전과 두 채의 요사에 공양간이 전부다. 하지만 대웅전이나 요사, 공양간은 총림에 있는 전각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인심도 절간만큼이나 컸다. 주지스님이 점심 공양을 하고 가라며 한사코 붙잡는 것이다. 차량 출발시간이 정해져 있다며 사양했지만 절간, 아니 안동에 대한 이미지까지 좋아지게 만든 기분 좋은 상황이었다.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 이곳은 어린 퇴계가 학문을 연마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은 퇴계는 7세부터 용수사에서 공부했다. 조선시대는 유학을 숭상하는 분위기였으나 퇴계는 유교와 불교에 칸막이를 친 시대적 제약을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절간이 너무 커진 탓인지 당시의 면학 분위기는 느낄 수가 없었다.

 12 : 32. 일주문으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들머리는 일주문에서 용수사 쪽으로 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열린다. 초입에 용두산 등산로 이정표(정상 1.9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하나 더. 이 코스는 선비순례길이 아닌 일반 등산로라는 것도 알아두자.

 붉은색 선이 우리가 오른 코스다. 그 왼쪽에 있는 코스가 선비순례길이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이정표(용두산 정상 1.8km/ 용수사 02km/ 등산로 입구 0.2km). 산길은 이렇듯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가파른 곳에는 계단이 놓여있고, 갈림길이라도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두었다.

 산길을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지만 산길은 산길이다. 거기다 오랜만의 산행, 그것도 전보다 몸이 불은 탓인지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숨이 턱에 차오른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가 심신을 맑게 해준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소나무가 많으니 송이버섯이 날 것은 어쩌면 당연, 그래선지 곳곳에 입산금지 현수막과 표지판이 붙어있다.

 12 : 46. 지자체는 나처럼 힘들어하는 걷기 여행자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중간 중간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이 가팔라졌다. 아니 버거울 정도로 가파르다는 것이 더 옳겠다. 나처럼 배가 나온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구간이 될 수도 있겠다.

 13 : 02. 이번 쉼터에는 등산로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등산로 입구에서 이곳까지는 1.2km, 정상까지는 아직도 0.8km를 더 올라가야한단다.

 임산금지 경고판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금줄까지 쳐놓은 곳도 수시로 나타난다. 하긴 송이 채취꾼들은 가을 한 철을 벌어서 일 년을 먹고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길은 전형적인 육산의 특징을 보여준다. 울창한 숲 때문에 조망이 트이지 않는데다 눈요깃거리도 없다. 이런 길은 한시라도 빨리 정상에 오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오르고 또 올라도 정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기에 찾아갔더니, 행복은 그 다음 산 너머에 있다더라고 했던가? 정상이려니 하고 올라서면 또 다른 봉우리가 어서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13 : 16.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임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정표(용두산 정상 360m/ 녹전,매정리/ 용수사 1.54km)가 정상이 코앞이라고 알려준다.

 13 : 20. 또 한 번의 오름짓 끝에 능선에 올라선다. ‘굴티고개라는 지명이 적힌 이정표(용두산 240m/ 굴티고개 3.8km)가 우리가 지금 문수지맥과 만났음을 알려준다. ‘만리산(萬里山)’에서 뻗어온 문수지맥은 용두산을 거쳐 굴티고개로 간다.

 13 : 28  13 : 41.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에 정상에 올라선다.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칡넝쿨과 억새 등이 주변에 쌓여있는 걸 보면 한두 달 전에 정비를 했던 모양이다.

 용두산(龍頭山, 664.6m)’은 산의 모양이 용의 머리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머리 두()’ 대신 머리 수()’자를 쓰기도 하며, 용수사(龍壽寺)에서 이름을 따와 용수산(龍壽山)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 정상석 뒷면에는 안동의 정기 용두산에서 발원하다고 적혀 있었다.

 정상에는 퇴계예던길(8코스) 안내도 말고도 문수지맥트레킹길(6구간) 안내도와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제단이 놓여있는 걸 보면 기우제도 지내는 모양이다. 참고로 문수지맥(文殊枝脈)’은 백두대간 옥돌봉(1,244m) 서남쪽 280m 지점에서 분기, 서남진하며 문수산·용두산·학가산·보문산 등을 일구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대하는 도상거리 114.5 km의 산줄기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청량산 말고는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학가산과 일월산, 국망봉 등도 조망된다고 했다.

 13 : 41.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하산길은 시작부터 거칠었다. 칡넝쿨이 허리춤까지 차올라 여름철에는 진행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길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곳곳에 매달려있는 가이드리본이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오늘은 청마산악회 허총무님 것도 눈에 띈다. 퇴계태실에 다녀오느라 20분 정도 늦게 출발했더니 나보다 한참이나 먼저 이곳을 지나간 모양이다.

 산길은 엄청나게 가팔랐다. 이런 곳에서는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집사람은 끝가지 스틱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 결과 손목 인대를 상한 그녀는 병원진료를 한참이나 받아야만 했다.

 13 : 51. 그렇게 길 아닌 듯 길이었던 곳에서 한참이나 고생한 뒤에야 제대로 된 등산로를 만날 수 있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아까 정상에서 문수지맥을 잠시 따라가다 어느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갈려나왔더라면 수월했지 않나 싶다.

 이후로는 별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아까 산을 올라올 때처럼 등산로 정비가 잘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정표를 세우는 등 기초적인 정비는 해 놓았다.

 그렇다고 가파른 경사까지 없앨 수야 있겠는가. 거기다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무릎 관절이 약한 집사람은 죽을 맛인 모양이다.

 길이 조금 수월해진 뒤에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주변 활엽수들이 이미 헐벗어버렸다. 제대로 된 단풍을 보지도 못했는데 잎은 이미 져버린 것이다. 올 가을을 단풍 없는 단풍철이라며 넋두리하던 어느 등산객의 인터뷰가 문득 떠오른다.

 하산길이라고 해서 계속 내려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이렇게 올라가는 구간도 나타난다. 짧고 완만한 오르막에 길고 가파른 내리막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14 : 12. 그렇게 얼마를 내려갔을까 산자락이 앙상한 고사목들로 가득하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귀가해 확인해보니 2020 3 25일 이곳(도산면 운곡리 일대)에서 산불이 발생했다는 기사가 떠 있었다.

 산불은 백해무익하다고 했다. 아니 좋은 점도 있기는 하다. 그 여파로 숲이 헐거워지면서 조망이 트이기도 하니 말이다.

 경각심이라도 불러일으키려는 것일까? 화마로 쓰러진 나무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를 피해 에도는 것은 기본, 아래를 지나거나 심할 때는 나무를 타고 넘기도 한다.

 산불 구간만 지나면 길은 수월해진다. 경사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납던 기세를 확 떨어뜨린다.

 14 : 26. 길이 편해지니 심신도 편해진 모양이다.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잠시 내려서자 이정표(수운정 2.9km/ 용두산 1.1km)가 이제 그만 능선에서 탈출하란다.

 길이 더 완만해졌다. 널찍한 게 영락없는 임도다. 지자체에서 신경을 써가며 정비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조금 전 탈출지점에는 벤치까지 놓여있었다.

 14 : 30. 잠시 후, 길이 잡초와 잡목으로 뒤덮이는가 싶더니 이내 임도로 내려선다. 아니 용수골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물이 흔한 골짜기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날머리(임도와 접한)에는 이정표(수운정 2.2km/ 용두산 1.8km)가 세워져 있었다. 역방향으로 트레킹을 하는 경우 꼭 필요한 시설이라 하겠다. 어디로 들어서야 할지를 모를 정도로 웃자란 잡초가 길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라간다. 아니 주위가 온통 사과밭이니 농로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사방이 온통 사과밭이다. 맞다. 안동사과는 전국 최대의 생산면적과 생산량을 자랑한다고 했다. 거기다 청정지역에서 비옥한 토질과 밤낮의 일교차가 큰 지리적 여건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자연 그대로의 맛과 신선한 향이 그윽하고 당도도 무척 높단다.

 열매를 대롱대롱 매달고 있는 사과밭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유럽의 농촌지역을 여행하면서 고급 와인을 얻기 위해 서리가 내릴 때까지 포도 수확을 늦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안동사과도 뭔가를 위해 일부러 수확을 늦추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안동사과에는 애이플이란 브랜드가 있다. 안동사과 생산량의 1%에만 붙여주는 최고급 사과브랜드이다.

 빨갛게 영근 사과가 군침을 흘리게 만든다. 하긴 한국소비자만족지수 ·특산물 공동브랜드(사과)’ 1위를 8년간이나 지킨바 있는 귀하신 몸이니 어련하겠는가.

 14 : 48. 작은 마을을 지나가기도 한다. 길의 이름이 소정리길인 걸로 보아 소정마을이 아닐까 싶다. 법정 동리인 태자리(太子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다. 사과재배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15 : 00. 차도인 태자로와 만나는 곳에는 소정마을 경로당이 들어서 있었다.

 이후부터는 태자로를 따라간다. 35번 국도상의 (태자리)버스정류장에서 다랫재까지 이어지는 군도(郡道), 행정구역인 태자리(太子里)’에서 이름을 따왔지 않나 싶다. 태자리라는 지명은 또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갈 때 잠시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됐을 거고 말이다. 민초(民草)들은 자기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구전(口傳)으로 1000년 뒤 후손에게 전한다. 지명과 전설로 말이다. 덕분에 역사책에 없는 마의태자 발자국은 이곳 안동에도 찍혀있다. ‘국망봉에서 경주를 돌아봤는가 하면, ‘태자리에서는 잠시 머물기도 했다.

 15 : 08. ‘수운정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50분을 걸었다. 앱이 12.05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아니 높이가 664.6m나 되는 용두산을 오롯이 넘은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빠르게 걸은 셈이다.

 수운정(水雲亭)’은 퇴계 이황의 제자 매헌(梅軒) 금보(琴輔, 1521-1586) 60세 때 지은 건물이다. 물과 구름을 벗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한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참고로 금보는 1546(명종 1)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낙향하여 성리학에 뜻을 두고 퇴계에게 수학했다. 글씨에 뛰어나 이숙량(李叔樑), 오수영(吳守盈)과 더불어 삼절이라 불렸으며, 퇴계묘비(退溪墓碑도산신판(陶山神版) 등을 썼다.

 정자는 정면 4, 측면 1.5칸 규모의 일자형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는데다 담장까지 높아 자세한 내부구조는 확인할 수 없었다.

 수운정은 8코스(마의태자길)의 종점이자 9코스(서도길)의 시점이다. 이와 관련된 시설(안내판 및 이정표)들은 수운정 앞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다.

 수운정에서 시작되는 9코스(서도길)는 가송마을의 고산정 입구까지 7.4km를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간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얘깃거리나 가슴에 담을만한 풍광을 만나지 못한다. 그저 브랜드처럼 글씨를 공부하러 가는 선비의 마음으로 걸어야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걷는 걸 포기하고 산악회 황사장님께 부탁해 버스를 이용해 종점으로 곧장 갔다.

 점심상은 가송리 마을회관 앞 공터에 마련되어 있었다. 4코스 때도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고, 5코스는 이 근처에서 걷기 시작했다. 둘레길 도반들이 종점인 고산정 입구까지 다녀오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마을회관 건너편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고산정(孤山亭)과 가송협(佳松峽)을 가장 확실히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전망대에 서자 눈앞에 세외도원이 펼쳐진다. 어느 유명화가가 저리도 예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창조주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내 느낌은 지난번 5코스 때 적었으니 이번에는 다른 분의 느낌을 잠시 빌려보자 <날아갈 듯 멋들어진 바위 절벽을 양옆에 끼고 맑게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고, 물 건너 바위 절벽 옆 물가에 멋들어진 소나무를 벗하여 앉아 있는 것이 고산정이다. 흐르는 물은 맑고, 물가 바위 절벽은 날아가는 듯하고, 정자가 자리한 곳은 아늑하다.>

 퇴계는 고산정의 수려한 풍경을 보고 그림 속(畵圖中)’으로 들어간다고 읊었다. 그런가하면 나귀를 타고 미천을 건너며 맑고 맑은 여울(淸淸灘)과 높고 높은 산(高高山)’이 끊임없이 사라졌다 다시 보이네(隱復見)’라며 지형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풍경을 표현했다. 산이 굽이치는 형세에 따라 물이 S자로 굽이치는 저런 아름다운 풍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표현이 아닐까 싶다.

 

안동선비순례길 6코스(역동길)

 

여행일 : ‘24. 11. 2()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및 예안면 일원

여행코스 : 원천교오성농장(트레킹 중단)번남댁계상고택부라원루성성재종택부포리선착장(거리/시간 : 11.5km, 실제는 3.84km 1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원천교(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로 영주까지 온다. 가흥교차로에서 36번 국도(봉화방면으로 19km), 금봉교차로에서 918번 지방도(청량산방면으로 21km), 도산교차로에서 928번 지방도(토계리방면으로 7km), ‘뒷재(도산면 단천리)’버스정류장에서 왕모산성길로 옮겨 600m쯤 들어오면 원천교에 이르게 된다. 내살미마을 초입에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의 대가인 우탁(禹倬)의 아호(雅號)가 코스의 브랜드로 굳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길이랍니다. 우탁 말고도 성성재 금난수, 번암 이동순 등 퇴계선생과 관련된 선비들의 흔적도 엿볼 수 있지요. 하지만 결코 추천하고 싶지 않은 코스이기도 합니다. 탐방로 정비가 되어있지 않아 코스 중간이 끊겨있기 때문입니다. gpx트랙 없이 진행하다가는 조난당하기 십상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6코스의 시작 지점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은 퇴계예던길 안내도, 이정표(부포선착장 10.9km/ 고산정 11.9km)와 함께 주차장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11 : 02 : ‘왕모산성길을 따라 서진(西進)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낙동강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간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출발지점 근처의 원천리 마을회관’. 원천리(遠川里) 3코스를 답사하면서 만났던 이육사(李陸史)의 고향이자 진성이씨(眞城李氏) 집성촌인 원촌마을’, 이곳 내살미마을’, 그리고 이곡마을이 포함된 법정 동리(洞里)랍니다.

 마을회관 마당에 다이시아가 만개했습니다. 생명력이 강인해 게을리 키워도 잘 자라고, 예쁜 꽃도 계속해서 피워낸다니 일손 바쁜 농촌에서 키우기 딱 좋지 않나 싶습니다.

 그제가 입동(立冬)이었습니다. 그해의 새 곡식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토광·터줏단지·씨나락섬에 가져다 놓았다가 먹고, 농사에 애쓴 소에게도 가져다주며, 이웃집과도 나누어 먹는다는 날입니다. 이는 추수가 이미 끝났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런데도 저 감나무는 튼실한 과실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습니다. 서리를 맞힌 다음 홍시로 만들 모양입니다.

 길은 들녘을 가로지르며 이어집니다. ‘왕모산 산자락에 기대어 들어선 모양새인데, 자그만 동네 하나쯤은 너끈히 먹여살릴만한 크기입니다.

 11 : 07. 도산교회.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라는 요한복음 14 6절의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 목사님은 저 말씀을 몸소 실천하고 계시나봅니다. 안동시가지로 나가는 교통편을 못 찾아 애를 먹고 있는 저희들을 안동시청까지 30km 이상 태워다 주셨을 정로로요.

 교회 앞에서 길은 낙동강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낙동강 물줄기가 휘돌아가며 만들어놓은 충적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건지산과 왕모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4코스와 5코스를 답사할 때 오를 수밖에 없는 산들이지요. 그 사이에서 청량산이 자신도 있다며 고개를 쏙 내밀고 있네요.

 11 : 11. 낙동강 둔치에 이를 즈음 버스정류장을 만납니다. ‘내살미 마을까지 들어오는 시내버스 노선의 종점인가 봅니다.

 버스정류장을 지나면서 길은 확 좁아집니다. 그리고는 내살미 마을로 들어갑니다. 자연부락인 내살미는 원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랍니다. 아름다운 강변마을로 알려져 있지요.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수려하고 넓은 강변에 쌓인 모래가 정결하고 광채가 아름답다 하여 예로부터 천사미라 불리었을 정도라나요?

 마을은 충적지 들녘에 들어앉았습니다. 그래선지 주변이 온통 무밭이군요. 무가 본디 배수가 잘 되는 토양에서 잘 자라니까 말입니다.

 마을을 둘러싼 비닐하우스도 무가 차지했네요. 산간 고지대의 특징인 일교차를 감안했나봅니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낙동강변입니다. 정확히는 도산구곡 중 6곡인 천사곡(川沙曲)’이랍니다. 선성지(宣城誌)에 예안14곡의 하나로 기록되었을 정도로 풍광이 뛰어난 곳입니다.

 낙동강 건너는 원촌마을의 들녘일 것입니다.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가다듬었다는 그 너른 들녘 말입니다.

 이후부터 길은 강변을 따라갑니다. 낙동강과 맞닿은 산자락의 아랫도리를 잘라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보여주는 풍경만큼은 전국의 소문난 명소들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11 : 21. 축대에 월란정사 등산로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군요. 축대 위를 조금 더 걸으면 이정표(월란정사 0.23km)도 만납니다. 그런데 월란정사로 가는 길을 등산로로 적은 이유가 뭘까요?

 길은 시작부터 무척 가팔랐습니다. 거기다 이끼가 잔뜩 낀 너덜구간도 있습니다. 통나무 계단을 놓았다지만 험하기가 산길보다 더하면 더했지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이정표에 등산로라고 적혔던 이유일 것입니다.

 11 : 29 :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월란정사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길이 거칠었던 탓인지 230m를 오르는데 8분이나 걸렸습니다.

 월란정사(月瀾精舍) 월란암이란 암자가 있던 터에 지어졌습니다. 퇴계 이황이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던 도산학의 발상지라는군요. 농암 이현보 등과 어울려 시문을 읊기도 했답니다. 현재 건물은 퇴계의 제자 중 이곳에서 가장 늦게까지 머물렀던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 1539-1601)의 후손들이 1860년에 지었다고 합니다.

 건물은 정면 3, 측면 1칸 반 규모의 자형 홑처마 팔작지붕입니다. 퇴계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를 가진데다, 건축양식도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며 안동시에서 문화유산(105)으로 지정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해온 듯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한국 유교문화의 본고장임을 자랑하는 안동시답지 않은 행정이라 하겠습니다.

 퇴계선생의 시 月瀾臺(월난대)’가 적힌 편액이 눈에 띕니다. 높은 산에는 모서리도 있고 펀펀한 곳도 있는데(高山有紀堂)/ 경치도 좋은 곳은 모두 강가에 있네(勝處皆臨水)/ 오래된 암자 저절로 적막하니(古庵自寂寞)/ 그윽하게 사는 이에게 있을 수 있네(可矣幽棲子)/ 넓은 하늘에 구름이 문득 걷히니(長空雲乍捲)/ 짙푸른 소()에 바람일 것 같네(碧潭風欲起)/ 바라노니 달을 즐기는 사람을 쫓아서(願從弄月人)/ 이 물결 이는 것을 관찰하는 취지에 부합하고자 하네(契此觀瀾旨)

 월란암칠대기적비(月瀾庵七臺紀蹟碑)’는 퇴계선생의 시 月瀾臺(월란대)’를 떠올릴 수 있는 바깥마당에 세워놓았습니다.

 퇴계의 시를 떠올리며 주변 경관을 살펴봅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천사곡이 발아래 놓여있는가 하면, 눈을 들자 청량산 등 크고 작은 주변 산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퇴계가 농암선생과 함께 시문을 읊기에 충분한 풍광이라 하겠습니다.

 11 : 36. 도로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갑니다. 낙동강과 접하고 있는 바위벼랑을 깎아 길을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조망 하나만은 끝내줍니다.

 낙동강 상류 쪽 풍경. 이육사가 태어났고, 그가 시상을 떠올리던 원촌마을과 내살미마을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집니다. 그 뒤에서는 청량산이 우뚝 솟아오릅니다.

 진행방향에는 도산구곡 중 6곡인 천사곡(川沙曲)이 놓여있습니다. 5(탁영담곡)에서 물줄기가 한 굽이를 크게 왼쪽으로 휘돌아간 뒤 다시 오른쪽으로 휘감는 뾰족한 모서리가 6곡 천사곡이랍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고도가 뚝 떨어집니다.

 11 : 45. 도로를 버리고 강변으로 내려섭니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습니다. 초입의 갓처럼 생긴 선비순례길 조형물이 길이 갈려나감을 암시한다고나 할까요?

 천사곡(川沙曲)’이랍니다. 도심의 삭막한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 눈이 호사를 누리는 있는 풍광을 만났습니다.

 잠시지만 둔치를 따라갑니다. 찾는 사람이 드문 탓인지 길은 나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이유는 잠시 후 알게 됩니다.

 11 : 48. ! 안동호가 갈 길을 막아버립니다. gpx트랙은 안동호를 가로지르라고 하네요. 하지만 물에 잠긴 호수는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물에 잠기지 않은 상류까지 에돌아갈 수밖에요. 하나 더. 안동시는 왜 이곳으로 길을 냈을까요. 물이 엔간히만 차도 길이 끊겨버리는 데도요.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안동은 인구가 15만도 넘습니다. 그렇다면 행정도 그에 걸맞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후부터는 길을 개척해가며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길이 거칠지만 활짝 핀 억새꽃밭을 누비기 때문에 싫지만은 않은 구간이랍니다.

 높아진 가을 하늘 아래 억새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는 춤을 추듯 일렁거리며 낙동강 둔치를 은빛 물결로 물들입니다.

▼ 억새 꽃밭이 끝나자 이번에는 갈대 꽃밭이 펼쳐집니다억새만은 못해도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상류에 도착했습니다. 저곳에서 개울을 건너 맞은편 산자락에 들어붙으면 됩니다. 그런데 앞서가던 일행들이 산비탈에 매달린 채로 도로로 되돌아나가라고 외쳐대는군요. 길이 없는 탓에 방향만 보고 무작정 치고 오르는데, 하도 가팔라서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11 : 55. 상류에 이르니 일행 몇 명이 되돌아 나오는 게 보입니다. 그 중에는 몽중루 작가님과 꿈이 있다면 멈출 수 없다의 저자 이석암 작가님도 끼어있습니다. 목숨까지 담보로 잡혀가며 산을 오를 수는 없답니다. 덕분에 저희 부부도 별 고민 없이 도로로 되돌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되돌아 나오는 길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도깨비바늘 군락이라서 갈고리처럼 생긴 가시에 찔릴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가 나지는 않지만 모기에 쏘인 것처럼 따끔거리는가 하면 옷에서 잘 떨어지지도 않는 애물덩어리 풀입니다.

 11 : 59. 이후부터는 도로를 따라갑니다. 되돌아가라며 외치던 분이 도로를 따라 오라고 했거든요. 도로가 맞은편 능선을 넘어가나 봅니다.

 12 : 10.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였습니다. 잠시 후 만난 외딴집에서 길이 끊겨있었으니까요. Naver 지도에 오성농장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인데, 주인장 말로는 더 이상 길이 없는데 저희 같은 걷기여행자들이 심심찮게 길을 물어온다고 합니다. 아무튼 산을 넘기를 포기한 저희 일행 10명은 마음씨 좋은 주인장의 배려로 내살미마을까지 트럭을 타고 되돌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더 태워다주고 싶지만 트럭이라서 사람들을 태울 수가 없다는 군요.

 그런 이유로 ‘6코스의 잔여 구간은 걸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허총무님 등 둘레길 도반들의 사진을 이용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건너편 산자락에는 길이 나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른데다 잡목까지 앞을 가로막아 한 걸음 내딛기조차 힘들었답니다.

 매우 가파른데다 습지라서 미끄럽기까지 했다나요? 매 순간순간이 위험의 연속이었다는 전언입니다. 그러다보니 할퀴고 찔리는 것은 기본. 가끔은 잡목에 싸대기까지 얻어맞아가며 진행했다더군요.

 그렇게 20여 분의 사투를 치룬 뒤에야 산등성이에 올라설 수 있었고, 그곳에서 제대로 된. 아니 방치되고 있는 탐방로를 만날 수 있었답니다.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이렇듯 좋은 길을 만난답니다. 강변을 따라 나있기 때문에 뷰가 무척 좋은 구간입니다.

 이곳에서 천사곡(川沙曲)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을 수 있답니다. 다음은 이야순(李野淳)이 읊은 천사곡의 풍경입니다. <육곡이라 나무숲이 옥 같은 물굽이를 감싼 곳(六曲林墟抱玉灣)/ 피라미와 백로는 사이좋게 지내네(鯈魚白鳥好相關)/ 하명동(霞明洞)에 핀 늦은 꽃 더욱 어여뻐(更憐花晩霞明處)/ 서쪽 바라보며 한적한 골짜기 하나 차지했네(西望曾專一壑閒)>

 6코스는 버려진 듯한 고택들을 여럿 만난다고 했습니다.

 창덕궁(昌德宮)을 모방했다는 번남고택(樊南古宅)은 퇴계의 9세손인 번엄(樊广) 이동순(李同淳, 1779-1860)이 지었다고 합니다. ‘번남은 이동순의 아호라고 하더군요. 1807(순조 7) 문과에 급제해 시강원설서, 병조·호조 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순조 때 삼척부사를 지낸 아들(李彙溥, 1809-1869) 1857년 북쪽 사랑채(번남정사)를 지었으며, 남쪽 사랑채(삼호당) 1870년에 손자인 이만윤(李晩胤)이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99칸으로 지어진 가옥은 전체 모습이 자 모양을 이룬다고 합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고 현재는 50여 칸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가치까지 사라지지는 않았겠지요.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적 주거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며 국가민속문화유산(268)으로 지정·관리하고 있습니다.

 선비순례길은 이제 의촌길을 따라갑니다. 법정 동리인 의촌리(宜村里)’를 지나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길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고 시내버스도 다닙니다. 하지만 폭이 좁은데다 구불거리기까지 해서 대형버스의 진입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 의촌리는 청보리밭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도산서원 맞은편에 있던 시사단(試士壇)’ 기억하시죠? 시사단 부근의 너른 들녘에 청보리를 심고 매년(안동호의 수위 변화로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축제를 열어오고 있답니다.

 코스를 완주하지 못한 아쉬움을 가장 심하게 만든 사진입니다. 단풍이 늦는다느니, 조금 더 나아가 고운 단풍은 애초부터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기사가 심심찮게 떠도는 요즘, 저렇게나 고운 단풍을 볼 수 있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습니까.

 총무님은 남의 문중 재실(齋室)까지 촬영했나봅니다. 하긴 어느 여행자는 저곳까지 다녀왔다면서 평산 신씨까지 들먹이기도 했었습니다.

 어느 지점에서는 탐방로가 도로를 벗어난다고도 했습니다. 안동호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에돌아가도록 한 모양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도 눈에 담을 수 있었겠죠? 빨강 단풍과 새하얀 억새꽃의 멋진 앙상블로도 모자라 안동호의 파란 물결까지 더해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냅니다.

 계상고택(繼尙古宅)은 역동 우탁을 배향하는 역동서원이 있던 곳입니다. 퇴계 이황이 고려 후기 대학자인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2-134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70년 건립한 안동지역 최초의 서원인 역동서원이 있던 곳인데, 그 자리에 퇴계선생의 11대손인 이만응(李晩鷹, 1829-1905) 1800년대 후반 전통한옥을 지었답니다. 하나 더. 역동서원(易東書院) 1868(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69년 송천동(안동시)로 옮겨 복원시켜 놓았답니다.

 고택의 대문 위에는 역동이란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역동서원을 옮겨갔어도 역동 우탁의 기억은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역동선생은 단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안동에 머물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으셨다고 합니다.

 관수대는 계상고택()을 둘러싼 나지막한 언덕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곳에 하상(河床)으로부터 수직으로 10여 미터 높이로 솟아있던 천연 오석을 부르던 이름입니다. 역동서원을 찾은 퇴계선생이 낚시를 즐기던 곳으로도 알려지는데 안동 댐 건설로 물속으로 숨어버렸답니다. 현재의 관수대는 계상고택의 아름다웠던 옛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2015년에 쌓은 것이라는군요.

 탑처럼 생겼지만 탑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계상고택의 풍치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드는 데는 이만한 것도 없겠습니다. 고택의 긴 세월을 헤아려보게 만드는 거대한 고목 그루터기(아래 두 번째 사진)도 그중 하나랍니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모양새가 후진양성을 위해 애쓰셨을 우탁선생의 기품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tvN 개똥이네 철학관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던 모양입니다. 나이·성격·직업 등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게스트가 호스트들과 함께 철학관에서 하루를 보내며 소통하고 교감하는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입니다.

 고택 부근은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하긴 이 부근에서 청보리축제까지 열린다니 어련하겠습니까. 전통 한옥과 드넓은 청보리밭이 어우러지는 절묘한 콤비네이션으로 인해 안동의 대표적 힐링 명소로 손꼽히고 있으며, 많은 사진작가들이 이곳을 찾는다더군요.

 풍월정이랍니다. 정자에 올라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풍월이라도 읊으라는 모양입니다.

 선비순례길은 호안 데크길을 조금 더 걷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차도로 변하면서 내륙으로 파고든다나요? 서너 개나 되는 고갯마루를 오롯이 넘는 이 구간을 걷기 여행자들은 차도를 따라 지겹게 걷는다며 투덜댔습니다. 힘들게 높여가는 고도에 비해 주변 경관은 보잘 것이 없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경주손씨(慶州孫氏)의 문중 제각인 부포재(浮浦齋)’라고 합니다. 경주손씨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을 구성하는 양대 성씨 중 하나입니다.

 부라원루(浮羅院樓)’는 다들 놓쳤더군요. 탐방로가 지나가는 도로에서 약간 비켜나있었던 탓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사진을 구해 올려봅니다. 조선시대 예안현에 있던 부라원루는 전통 교통수단이던 역원(驛院) 건물이 있었던 곳입니다. ‘영가지(永嘉誌, 안동부의 역사지리지)’는 안동부 관내에 27개의 원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 가운데 그 자취가 남은 곳은 부라원이 유일하다네요. 원사(院舍)는 없어지고 원루(院樓)만 남았지만요. 부포리 앞 들판에 있던 것을 1976년 안동댐 건설로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편액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라원루는 1600년 이전에 지어졌겠지요?

 고갯마루를 넘나드는 게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래 사진처럼 아름다운 경관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며 다들 호들갑을 떨더군요.

 부포마을이랍니다. 부라원이 있어 부라리로도 불리는 마을은 금난수(琴蘭秀)의 종택이 있는 봉화금씨 집성촌입니다. 조선시대 이래 예안현은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고장으로 굳어졌습니다. 영남학파의 중심지로 그 선두에는 퇴계 이황이 있었습니다. 금난수도 한 축을 담당했답니다. 퇴계의 제자인 금난수는 이황이 도산서당을 지을 때 도산서당 영건기를 썼던 인물입니다. 퇴계선생도 금난수가 머물던 청량산 자락의 고산정(孤山亭)을 자주 방문했고, 시도 여러 편 남겼습니다.

 부포마을에 위치한 성성재종택(惺惺齋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5코스를 답사하면서 들른바 있는 고산정(孤山亭)을 지은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 가문의 종갓집입니다. 금난수는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로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는 데 힘썼으며, 1561(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봉화현감 등을 역임했습니다. 정유재란 때는 안동 수성장(守城將)으로 활약해 좌승지에 증직되기도 했답니다.

 집은 자 형의 본채와 사당 및 아래채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사진은 담장너머로 찍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1700년대에 건립된 안동지방의 주택에서 가끔 발견되는 특이한 유형의 구조라는데, 주인장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어쩌겠습니까. 하나 더. 금난수는 월천 조목 선생과는 처남 매부지간이라고 했습니다. 2코스의 시작시점이었던 그 월천서당을 지었다는 분 기억하시죠?

 성성재종택을 지나면 또 다시 고개 하나를 넘습니다. 이때 먼발치로 안동호를 건너오는 배 한척을 볼 수도 있답니다. 월천서당과 부포선착장을 오가는 배인데, 이게 안동호반에 녹아들면서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더군요. 하지만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는 점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애국지사 기념공원도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멋진 해넘이가 펼쳐진다고 해서 해넘이공원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 부포리에서 출생한 이동하(1875-1959) 선생과 이선호(1904-?) 선생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동하 선생은 1909년 안동 보문의숙을 설립하고, 1911년 만주 망명 이후 동창학교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이선호 선생은 1925년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를 창립했고, 1926.6.10.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렀습니다.

 6코스는 부포선착장에 이르면서 끝납니다. 월천서당을 오가는 도선이 배를 대는 곳이랍니다. 배는 안동시에서 운영하고 있다는 군요. 선원도 공무원 신분이라서 무척 친절하다는 평가였습니다.

 도산교회 목사님이 데려다 준 안동시청입니다. 우리네 한옥에서 모티브를 따온 현관이 눈길을 끄는군요. 안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양반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안동하면 많은 사람들이 먼저 하회마을을 떠올리며, 하회마을과 함께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을 꼽습니다. 물론 저처럼 술을 좋아하는 한량들이라면 안동 쌀로 빚은 안동소주와 제사 후 남은 음식을 다시 조리해 먹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안동찜닭도 발길을 안동으로 이끌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점심을 먹었던 안동구시장입니다. 시장이 온통 찜닭 일색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랍니다. 하지만 몽중루 작가님은 닭 냄새도 못 맡을 정도로 닭요리를 싫어한다는군요. 덕분에 찜닭골목에서 보리비빔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해 버렸답니다. 하지만 음식은 맛깔스러웠고, 잔술까지 따라주는 주인장 모자의 친절도 도산학의 본고장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진풍경이었습니다. 벽걸이 액자 속에서 주인장과 함께 활짝 웃던 가수 설훈도가 가히 자랑할 만한 식당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택시를 이용해 안동댐으로 갔답니다. 공원처럼 잘 단장되어 있다는 댐 주변의 경관들을 카메라에 담아보기 위해서지요. 아니 술이 고팠던 저는 아름다운 풍경을 안주삼아 술을 마셔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과 헤어져 식당을 찾았지요. 하지만 이는 최악의 선택이 되어버렸습니다. 맛없는 음식에 불친절까지 더해져 선비문화의 도시, 안동이라는 그동안 지녀왔던 좋은 선입감까지 사라지게 만들어버렸으니까요.

 안동댐 하부의 월영교’. 옛날에는 하부 교각까지도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는 다리입니다. 이게 썩어서 보수해놓은 게 지금 저 모습이랍니다. 아직도 상판은 나무로 되어 있었습니다.

 안동호를 배경으로 선 집사람이 활짝 웃습니다. 아니 이때까지만이라고 하는 게 옳겠습니다. 이 지점을 지나자마자 선비순례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이를 대처할 수 있는 안내를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요. 잔여 구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지요. ‘걷기 길을 만들고 이를 세상에 알린 지방자치단체가 결코 해서는 안 될 행정이었습니다. 거기다 차선책으로 찾아간 안동호에서까지 불친절을 겪었으니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안동선비순례길 5코스(왕모산성길)

 

여행일 : ‘24. 10. 5()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가송마을 버스정류장고산정맹개마을백운지단천교(실제 출발지)항골 입구칼선대왕모당원천교(거리/시간 : 12km, 실제는 4.95km 2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가송마을 버스정류장(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로 영주까지 옵니다. 가흥교차로에서 36번 국도(봉화방면으로 19km), 금봉교차로에서 918번 지방도(청량산방면으로 15km), 도천삼거리에서 35번 국도로 옮겨 11km쯤 내려오면 가송리(佳松里)‘에 이르게 됩니다.

 고산정에서 낙동강을 따라 내살미 마을까지 내려가는 12km짜리 여정이랍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 낙동강은 왕모산을 넘지 못했고, 강을 건너지 못한 주변 산줄기들은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면서 맹개마을·단사마을 등 곳곳에 기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왕모산성길은 이런 기이한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걷는 여정이랍니다.

 차에서 내리자 강 건너에 위치한 고산정(孤山亭)’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옵니다.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의 단애 아래에 터를 잡았습니다. ‘금남수처럼 유유자적하기에 딱 좋은 자리라고나 할까요? 저곳은 최고 시청률 18.1%를 기록한 이병헌·김태리 주연의 24부작 tvN드라마 미스터션샤인(2018)’의 촬영지이기도 하답니다. 주인공 애신(김태리 분)과 유진(이병헌 분)이 배를 타고 오가던 아름다운 나루터 장면이 바로 고산정의 전경이랍니다.

 고산정은 정유재란 때 안동 수성장(守城將)으로 활약하여 좌승지에 증직된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지은 정자입니다. 금난수는 이황(李滉)의 제자로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는 데 힘썼으며, 1561(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봉화현감 등을 지냈습니다. 35세 때. 당시 선성현(宣城縣, 예안현의 별칭) 제일의 명승이던 가송협(佳松峽)에 고산정을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한 채 유유자적하였다는 선비입니다.

 삼 칸 겹집의 팔작지붕인데 3m 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자연석을 가공 없이 주춧돌로 사용)를 놓고 기둥을 세웠습니다. 조선시대 정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더군요.

 낙동강의 상류인 가송협의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고산(孤山)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룹니다. 그 아름다움에 푹 빠진 퇴계선생이 문인들과 함께 여러 차례 찾아와 영시유상(詠詩遊賞)을 즐겼다더군요.

 이 일대는 도산구곡  8곡인 고산곡(孤山曲)입니다. 협곡 모양새를 보여 가송협(佳松峽)’으로도 불린답니다. 고산정 주인장 금난수의 봉화금씨(奉化琴氏)’ 세거지인데, 퇴계의 후손인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 1755-1831) 도산구곡가에서 <팔곡이라 옥거울 같은 물가에 홀로 선 산(八曲山孤玉鏡開)/ 또렷또렷한 심법이 이 물가에 맴도는구나(惺惺心法此沿洄)>라며 그 아름다움을 읊었습니다.

 5코스(왕모산성길) 고산정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대형버스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마을 앞 버스정류장에서 종암종택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잠수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하나 더. 우리 부부는 다리를 건너는 대신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이육사문학관으로 이동합니다. 2주 전의 4코스(퇴계예던길)에 불참해서 3코스(청포도길)의 후반부를 못 걸었었거든요, 그 구간을 마치면 5코스의 중간쯤인 단천교에 이르기 때문에 5코스의 전반부는 답사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별 수 없이 몽중루 작가님과 허총무님 등 다른 도반들의 사진과 얘기를 종합해 빠뜨린 구간을 완성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가송리(佳松里)의 또 다른 자연부락. 이곳에서 왼쪽으로 400m쯤 올라가면 5코스(왕모산성길)‘가 시작되는 고산정입니다. 하지만 5코스의 잔여 구간이 오른쪽으로 나있으니 고산정을 둘러본 다음 되돌아와야 하겠지요?

 이후부터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갑니다. 고산구곡 중 고산곡을 이웃하며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구간이지요. 그런 길을 400m남짓 걸으면 월명정이란 정자가 나옵니다. 2020년에 지은 정자인데, 월명담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곳이라는 뜻이겠지요.

 이정표(칼선대 9.7km/ 고산정 0.8km)가 가리키는 칼선대 방향, 그러니까 낙동강의 강변으로 내려섭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深淵), 월명담(또는 월명소)은 그 푸른 색깔에서 조차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월명담 뒤의 저 절벽으로 길이 나있다는 점입니다.

 월명담(月明潭). 강물이 산줄기에 막혀 자 형태로 돌면서 벼랑 아래에 깊은 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보름달이 밝게 비춘다고 해서 월명담·월명소·월명당이라 했다나요? 용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가뭄이 들면 고을 수령이 기우제를 올렸다고 전해옵니다.

 월명담은 낙동강 상류의 명승 중 하나로 꼽히는데, 퇴계는 달빛 쏟아지는 월명담을 비가 오게 하는 연못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윽한 늪이 있는 골짜기는 수려하고 맑은데(窈然潭洞秀而淸)/ 음침한 그 속엔 나무와 돌로 만든 진혼비가 있다네(陰嘼中藏木石靈)/ 열흘 동안 수심 겨운 여름 장마가 그치고 말끔히 개고(十日愁霖今可霽)/ 석양빛을 안고 집에 돌아와 누우니 달빛이 그윽하다네(抱珠歸臥月冥冥)>

 길은 강가 바위절벽을 따라 나있답니다. 바위절벽인데도 길을 낼만한 공간은 있었나 봅니다. 그렇다고 안전까지 확보할 수는 없었겠지요. 위태위태한 곳이 하도 많아 바윗길이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니까요. 이런 길을 벼룻길이라고 한다나요? 아래가 강가나 바닷가로 통하는 벼랑길을 그렇게 부른다고 하네요. 아무튼 안전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지만 눈의 호사 또한 만만찮은 구간이랍니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일대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는 지형입니다. 때문에 물이 휘돌아나가는 곳마다 수십·수백 길의 단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길을 내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강안(江岸)의 바위절벽에 저렇게 벼룻길을 거쳐 놓았답니다. 치솟은 바위 벼랑을 에돌아가는 길로 딱 한사람이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랍니다.

 이즈음 벽력암(霹靂巖)과 학소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했습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편 절벽이 학소대, 그리고 왼쪽은 벽력암인데 저곳에는 전망대가 있답니다.

 벼룻길이 끝나면 다시 위로 올라가야만 한답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5코스 최고의 전망대 중 하나인 벽력암 전망대를 만나기 위한 수고로움이니 참아야하겠지요?

 벼룻길은 벽력암 위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에서 화룡점점(畵龍點睛)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가 하면, 거기에 강 건너 농암종택이 더해진다고 하네요. 농암종택은 원래 분천마을에 있었습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분천마을이 수몰되면서 저곳으로 옮겨졌다는군요. 그때 다른 곳에 있던 사당과 긍구당(肯構堂)도 함께 옮겨왔으며, 2007년에는 분강서원(汾江書院)도 재이건되었다고 하네요.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었음은 물론이지요.

 농암(聾巖)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호입니다. 연산군 시절 귀양을 갔다가 처형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죽음을 면했고, 중종반정으로 복직한 이후 주로 지방 수령으로 관료생활을 했습니다. 가끔은 중앙보직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지방 수령으로 봉직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는데, 중종 임금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탔는데 고작 화분(花盆) 몇 개와 바둑판 하나가 전부였다는 일화는 나 같은 공직자(은퇴했지만)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농암종택(聾巖宗宅)’. 안채·사랑채·대문채·별채·긍구당·명농당·사당 등 농암선생의 명성만큼이나 거대한 등치를 자랑합니다. 그중에서도 별당인 긍구당(肯構堂)’이 눈길을 끄는군요. 농암이 서경의 한 구절에서 취해서 당호를 지었는데,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훌륭한 업적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오래도록 이어 받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1542년 공직에서 물러날 때 경복궁과 한강의 제천정에서 전별연을 열어주었을 정도로 존경과 신망을 받던 자신을 닮으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이었다니까요.

 분강서원(汾江書院). 1699년에 후손과 사림이 농암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2007년 현재 위치로 이건했는데, 강당(흥교당)과 동·서재 외에도 한속정사의 안채와 바깥채, 농암의 위패를 모신 사당(숭덕사) 등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있습니다. 서원의 왼편에 있는 작은 건물은 농암 신도비입니다. 농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종 20(1566)에 신남리의 농암 묘소 앞에 세웠는데, 2006년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고 합니다. 신도비란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으로 무덤 앞에 있는 게 보통입니다.

 맨 왼쪽에는 애일당(愛日堂)’이 있습니다. 2코스(도산서원길) 답사 때 지도만 보고 잘못 찾아갔던 그 문화재입니다. 아무튼 농암은 1512년 부모를 위해 저 별당을 지었습니다. 분강마을의 집에서 400m쯤 떨어진 곳에 귀먹바위가 있었는데 농암이 이름을 한자로 옮겨 자신의 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계신 나날을 아낀다는 의미의 애일당을 지었습니다. 농암은 1533년에 당시 94세였던 부친을 포함해 9명의 노인을 모시고 저곳에서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를 열었습니다. 농암 자신이 67세의 노인이었는데 더 연로한 분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때때옷을 입고 춤을 췄다고 합니다.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것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강각(江閣)’인데 설명은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벽력암 전망대에서 내려선 길은 맹개마을로 이어집니다. 거칠게 내려오던 강줄기가 학소대를 돌아 완만해지면서 흙을 실어 놓는 곳에 맹개마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이 강 쪽으로 툭 밀려 나온 안쪽은 흡사 육지 속의 섬과도 같습니다. 그곳에 가족펜션인 소목화당(小木花堂)’이 있답니다. 휘돌아가는 낙동강 물길의 안쪽 예쁜 펜션이자, 주인 부부가 공들여 술을 담는 곳이랍니다. ‘진맥소주라는 브랜드의 전통주가 이곳에서 나온다더군요. ! gpx트랙을 살펴보니 월명담에서 맹개마을까지의 거리가 2.5km로 나타나고 있었답니다.

 술도가’. 주인장이 직접 재배한 100% 유기농 통밀로 소주를 만든다고 하네요. 자연 숙성실인 저 토굴로 들어가면 특유의 술 내음과 함께 오크통, 옹기 등에 담긴 술들이 한 눈 가득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진맥(眞麥)’은 밀의 옛말이랍니다. 그러니 진맥소주 맹개술도가에서 만든 소주의 브랜드이자, 유기농 밀로 만든 증류식 소주라는 자랑이기도 합니다. 가장 오래된 조리서로 알려진 수운잡방에 술 빚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 전통이 깊다고 합니다. 53도짜리가 자랑거린데, 미국 샌프란시스코 세계 증류주 대회에서 더블골드를 획득했을 정도라는군요.

 강 건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학소대(鶴巢臺)’라고 합니다. 건지산(577m)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로, 물길이 크게 휘어지는 바깥에 수직의 암벽으로 솟아있습니다. 예로부터 천연기념물인 오학(烏鶴. 먹황새)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살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가로 줄무늬 퇴적층이 선명한 절벽에 학까지 날아들었으니 학소대라는 이름과 꼭 어울립니다.

 경암(景巖). 퇴계는 학소대와 맹개마을 사이에 우뚝 솟은 바위를 경암이라 부르면서 버릇대로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합니다. 거센 물결 속에서도 천년 동안 변함없는 바위를 보면서 말이지요. <격한 물살 천년인들 다할 날 있으련만(激水千年詎有窮)/ 물살 가운데 우뚝 서서 기세를 다투누나(中流屹屹勢爭雄)/ 인생의 발자취란 부평초 줄기 같은지라(人生蹤跡如浮梗)/ 그 누군들 여기 서서 버틸 수 있으랴(立脚誰能似此中)>

 경암은 위가 상처럼 네모지게 평평한 바위입니다. 바위 주위로는 옥색 강물이 흐릅니다. 하지만 몽중루 작가님의 성에는 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특이할 게 없는 외모에 왜소하기까지 해서 퇴계선생님의 풍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맹개마을은 육지 속의 섬 같은 오지입니다. 산태극수태극의 지형이 마을 양옆을 수백 길 단애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농암종가에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네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소목화당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면 차고를 올려 튜닝한 SUV를 끌고 나오거나 트랙터에 손님을 실어 나른답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유인촌장관이 타고 있는 모습도 얼핏 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마저도 안 되면 배로 강을 건너게 해준답니다. 하나 더. 우리 도반(道伴)들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벼룻길을 통해 들어갈 수도 있기는 하답니다.

 맹개마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답니다. 늦은 여름에서 초가을이 특히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마을이 온통 매밀 밭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때쯤이면 하얀 메밀꽃이 소복이 피어나기 때문이랍니다. 그게 세외선경을 보는 듯 하다나? 맹개마을에서는 11월에 밀을 심어 이듬해 7월 수확하고, 밀을 수확한 땅에 메밀을 심어 가을에 수확하고 있다더군요.

 이렇게 고운 곳을 사람들이 그냥 놓아둘 리가 없습니다. 숙박예약이 힘들 정도로 인기랍니다. 하긴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이병헌과 김태리, 예능 인더숲의 세븐틴, 아마존TV ‘버터플라이의 대니얼 대 킴 등도 촬영차 찾았다가 한 눈에 반했다는데 어련하겠습니까.

 백운지로 넘어가는 길도 만만치가 않았던 모양이더군요. 끝없이 이어지는 통나무계단이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확 질려버립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요렇게 위험스런 벼랑길도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농암종택을 통해 맹개마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산자락을 빠져나온 길은 자연스럽게 백운지(白雲池)’로 이어집니다. 맹개마을에서 1.6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또 다른 오지마을이지요. 이곳은 몽중루님의 표현을 잠시 빌리겠습니다. ‘청량산을 내린 낙동강이 도산(陶山)에 이르러 큰 물굽이로 휘돌며 펼치는 작은 들녘 마을이라네요. 제방 따라 늘어선 대추와 밤나무 밭엔 붉은 대추와 알밤들이 툭툭대고, 모래땅 넓은 무밭에는 회전식 스프링클러가 돌며 연신 물을 뿌리고 있더라는 군요.

 백운지의 옛 이름은 백운동(白雲洞). 흰 구름이 넘나들며 청산과 녹수까지 세속의 기운을 넘어서버리게 만든다는 곳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흰 구름 대신 무의 푸른 잎으로 뒤덮여있습니다. <청산과 녹수는 이미 세속의 기운을 넘어섰고(靑山綠水已超氛)/ 그 사이로 희고도 흰 구름이 또 다시 밀려오네(更著中間白白雲)/ 고향의 소리 씻어내고 타고난 성품으로 돌아 가렸더니(爲洗鄕音還本色)/ 지령이 그 뜻을 알고 흔쾌히 허용하더라(地靈應許我知君)>

 백운지에서 1.5km쯤 걸어 나오면 단천교에 이릅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단사와 백운지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제가 5코스의 출발지로 삼은 지점이지요. 그래서 이후부터는 제 사진과 느낌, 기억으로 글을 적어가겠습니다.

 12 : 02. ‘단천교를 건너면서 ‘5코스(왕모산성길)’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단천교 앞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다리를 건너면 ‘5코스(왕모산성길)’, 즉 공민왕 어머니가 피신했다는 왕모산성으로 가는 길로 연결되고, 왼쪽은 4코스(퇴계예던길)로 퇴계가 13세 때부터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에게 학문을 배우러 청량산으로 다니던 길입니다.

 퇴계 오솔길은 예던길이라고도 하는데, ‘()’란 신발과 지팡이를 끌며 다니던 곳이란 뜻이라 하네요. 퇴계가 청량산에 가던 낙동강변의 길이기도 한데, ‘산태극수태극이란 말처럼 산이 굽이치는 형세에 따라 물도 S자로 굽이친다고 하네요.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학소대·월명담·고산정 등 수려한 풍경이 퇴계의 그림 속(畵圖中)’이란 표현처럼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한다고 알려집니다. 아쉽게도 저는 그런 풍경을 가슴은커녕 눈에조차 담지를 못했네요. 언젠가 다시 한 번 찾아와야 하는 이유이지요.

 다리를 건너다 바라본 상류쪽 풍경입니다. 백운지 근처이니 저 어디쯤에 미천장담(彌川長潭)’이 있을 것입니다. 고산을 지난 낙동강이 S자를 그리며 돌아가는 곳에 만들어진 깊은 못을 말하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험하고 물이 깊어 물고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퇴계가 어린 시절 낚시하던 때를 떠올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낚시하던 때를 돌이켜 보니(長憶童時釣此間)/ 삼십년 세월동안 벼슬 때를 묻히며 살았네 그려(卅年風月負塵寰)/ 이제 돌아와 보니 산수의 옛 모습을 알겠네 그려(我來識得溪山面)/ 그렇지만 산수는 내 늙은 얼굴 알란가 몰라(未必溪山識老顔)>

 반대편, 그러니까 하류쪽 풍경이겠네요. 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 왕모산이고 그 아래 산자락을 고산구곡  단사곡이 때리며 지나갑니다.

 12 : 06. 다리 건너는 묵시골 입구입니다. ‘급행버스가 다니는지 버스정류장에 노선도와 시간표까지 붙여놓았습니다.

 예던길 이정표인데 이름 모를 새가 방향을 알려줍니다. 옆에는 갓을 씌워놓은 선비순례길 이정표(왕모산주차장 4.9km/ 고산정 7.0km)도 세워져 있습니다.

 안동도 사과가 특산물인 모양입니다. ‘정일품(正一品)’이란 브랜드에서 그 자부심이 잔뜩 묻어납니다.

 탐방로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갑니다. 강변에 바짝 붙어서 길이 나있는데 항골로 연결된다고 해서 항곡길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12 : 13. 강변을 떠나 산골짜기로 파고듭니다. ‘왕모산의 뒤쪽에 위치한 오지마을(몇 가구 살지 않는 항곡마을일 것입니다)로 들어가는 길이랍니다. 이왕에 왔으니 왕모산에 대해 살펴볼까요? 1361년 겨울, 중국 원나라가 쇠퇴하여 기울어갈 때 생겨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와 수도 개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려 말기 공민왕 시절인데, 왕은 알콩달콩 사랑을 엮어가던 원나라 출신 노국공주와 어머니를 모시고 추위를 견디며 멀고 먼 후방 지역인 안동까지 피난을 오게 됩니다. 이때 모후(母后), 그러니까 공민왕의 어머니가 머물던 곳이라고 해서 왕모산(王母山)’이란 이름이 붙었답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꼬맹이 마을을 만났습니다. 두어 세대쯤 되는 규모인데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12 : 19. ‘항곡길과도 헤어졌습니다. 이제 산길이 시작된다는 얘기겠지요.

 이정표는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인 칼선대까지 2.7km가 남았다고 하네요. 아까 3코스를 걸어오면서 눈여겨보았던 풍경, 즉 깎아지른 산줄기와 낙동강 물줄기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놓은 수묵담채화의 그윽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퇴계선생 말마따나 그림 속으로 표현해도 나무랄 데가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곧 나타난답니다.

 임도는 가파르게 산속으로 파고듭니다. 꽤 힘들지만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조금만 속도를 떨어뜨리면 되니까요. 그런 다음 퇴계의 마음이 되어 걸어보면 어떨까요. 이곳은 퇴계선생님의 고향이니까요.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은 오솔길로 변합니다. 이후부터는 순수한 산길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지자체에서 정비를 잘 해놓아 보드라운 흙길이 널찍하기까지 합니다.

 탐방로가 산자락을 헤집으며 나있기 때문에 심심찮게 작은 골짜기를 건너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교가 놓여있어 장마철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곳은 산속. 위급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그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답니다. 곳곳에 국가지점번호판을 설치해놓아 신고전화만 하면 금방 찾아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무리 쉬워보여도 산길은 산길이랍니다. 그러니 체력이 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선지 곳곳에 벤치도 놓아두었군요.

 탐방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누빕니다. 향긋한 소나무 향기가 코끝을 스쳐갑니다. 그 속에는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가득할 것입니다. 조금도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정도로 소나무가 울창하니 틀림없이 송이버섯이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산길을 따라 줄지어 붙어있는 저 입산금지 표시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숲속에 들어가는 것은 삼가고 대신 길가에서 만날 수 있는 야생버섯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고사목이 심심찮게 나타났고, 그때마다 버섯들이 눈에 띕니다.  말발굽버섯도 그중 하나입니다. 혈당조절과 콜레스테롤 감소, 면역력 강화, 암 예방에 효능이 있다는 버섯입니다. 물론 눈에만 담아갑니다.

 요건 버터애기버섯? 가을철이면 눈에 띄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네요. 식용이라지만 이 또한 채취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12 : 49. 이런 첩첩산중에 웬 민가?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지 마당 아니 집 전체가 웃자란 잡초에 파묻혀 있습니다.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릅니다. 산길이니 계단이 주를 이룸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계단을 두지 않고 경사만 주는 곳도 많습니다. 길을 낼 말한 처지가 아니다보니 어쩔 수 없이 통째로 데크 로드를 만들었나 봅니다. 흡사 다리처럼 말입니다.

 가끔은 비탈진 산자락을 헤집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길고 가파른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길이 오솔길로 변합니다. 비탈지지만 길을 낼만은 했던지 통나무계단을 깔아놓았습니다.

 13 : 05.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다리 모양의 데크 로드로 변해버립니다. 그만큼 왕모산의 사면이 비탈지다는 얘기겠지요.

 13 : 16. 데크로드에서 오솔길 갈려나가고 있습니다. ‘왕모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랍니다.

 이곳에는 이정표 대신 안내지도를 세워놓았습니다.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는 모두 4개인데, 이곳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1코스로 출발지는 원천교라는군요.

 13 : 18. 몇 걸음 더 걸으면 오른편으로 작은 봉우리 하나가 나타납니다. ‘칼선대로 오르는 길이니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20m쯤 더 가면 또 다른 입구가 나타나고, 그곳에는 이정표까지 세워져 있어 무심코 지나칠 일은 없겠습니다.

 왕모산 능선이 내려와 낙동강으로 떨어지며 폭이 약 1km쯤 되는 병풍바위를 빚어 놓았습니다. 그 바위능선의 위, 한 지점에 칼선대가 놓여있습니다. 봉긋한 봉우리가 칼끝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갈선대라고도 부르더군요. 갈선(葛仙)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신선이 된 갈현(葛玄)을 말합니다. 도교에서는 갈선공(葛仙公)이라 존칭하며 태극좌선공(太極左仙公)으로 높여 부르는 인물이랍니다.

 칼선대는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집니다.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 너머로 건지산과 청량산의 축융봉이 한꺼번에 펼쳐집니다. 발아래로는 단사마을의 들녘이 깔려있습니다. 예천의 회룡포나 안동의 하회마을 만큼은 아니어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신선하면서도 아름답기 짝이 없습니다.

 갈선대 아래로는 단사협(丹砂峽)’이 흘러갑니다.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이 그 신비함을 묘사하기 위해 도교까지 끌어들인 곳이랍니다. <칠곡이라 휘감아 도는 한줄기 여울물(七曲縈迴一水灘)/ 갈선대와 고세대를 다시 돌아서 보네(葛仙高世更回看)/ 만 섬의 붉은 단사 하늘이 감춘 보배네(丹砂萬斛天藏寶)/ 푸른 절벽에 구름 일어 찬물이 서리네(靑壁雲生相暎寒)>

 하류 쪽 풍경입니다. 강 건너 저 능선에는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떠올렸다는 윷판대가 있을 것입니다. 낙동강은 그 아래를 휘돌면서 속도를 확 떨어뜨린 다음 안동호로 들어갑니다.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왕모산(王母山)’이 성큼 다가옵니다. 높이는 648.2m.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경사가 매우 급해 천연의 요새로 알려지는 산이랍니다. 천혜의 피난처라고나 할까요?

 전망대에는 이육사의 ‘절정(絶頂)’ 시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곳까지 올라 절정의 시상을 가다듬었나 봅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3 : 22: 다시 산행을 이어갑니다. 잠시 데크 길을 따르는가 싶더니 이내 흙길로 변하는군요.

 통행금지 안내판도 눈에 띄더군요. 안전을 위해 바위 벼랑 안쪽으로 길을 내놓았지만, 바위벼랑 위를 지나 칼선대로 올라가려는 무모한 사람들도 있었나봅니다.

 길이 무척 가팔라졌습니다. 침목계단이 놓여있지만 집사람처럼 무릎이 시원찮은 사람들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구간입니다.

 13 : 29  13 : 41. 지자체도 그게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안부삼거리(이정표 : 왕모산주차장 0.79km/ 천곡지 1.53km)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덕분에 우리 부부도 준비해간 치즈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답니다. 그러다 문득 이게 임하막걸리였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더군요. 안동쌀과 밀, 누룩으로 빚는다는 막걸리의 맛이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임하양조장은 무려 10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술을 빚어 왔다고 하지 않던가요.

 13 : 41. 선비순례길 이정표(왕모산주차장 1.1km/ 고산정 10.8km)가 가리키는 왕모산 주차장 방향으로 갑니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임도를 만납니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왕모당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하더니, 제물 등을 운반하기 위해 놓은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3 : 44. 공민왕의 어머니를 모시는 왕모당(王母堂)’이랍니다. 이 일대는 공민왕계 신을 모시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청량산 꼭대기에 좌정한 공민왕을 중심으로 내살미의 공민왕 어머니, 북고리와 높은데의 부인, 가송리와 정자골, 등자다리의 딸, 새터의 사위와 같이 청량산 일대 20여 개 마을에서 공민왕계 신을 동신으로 모시고 있답니다. 이 중에서도 내살미·가송리·산성마을은 공민왕 신앙의 핵심지역이라고 합니다.

 왕모당은 공민왕의 어머니가 기거하던 터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내살미왕모당이나 공민왕어머니당으로도 불리는데, 내살미마을(원천리)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기 위해 공동으로 동신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그래선지 당집 안에 신체로 남녀 목신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탐방로는 왕모당 뒤쪽 산봉우리로 올라갑니다.

 이 봉우리를 중심으로 왕모산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1361년 고려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왔을 때 축성했다는 전설 속의 성()입니다. 하지만 성은커녕 돌무더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전설은 그저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3. 50. 왕모산 등산안내도가 국가지점번호판과 함께 세워져 있네요. 뭔가 특이한 점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야가 툭 트이더니 낙동강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네요. 강폭을 한껏 넓힌 낙동강은 요 아래 내살미마을에서 안동호로 숨어듭니다.

 길이 또 다시 가팔라졌습니다. 어찌나 가파른지 그냥 떨어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면서 고도를 낮추어갑니다.

 울창한 숲 사이로 원천교가 내려다보이네요. 원천리의 단사마을과 내살미마을을 잇는 다리랍니다.

 이후로도 산길은 한참이나 계속됩니다. 하지만 길이 고와서 걷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니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솔숲 길이랍니다.

 14 : 06. 내살미 마을에 내려섭니다. ‘천사미(川沙美)’라고도 불리는데, 말 그대로 내()의 모래()가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얘기하고요. 중간의 모래 사()자만 억양이 들어가서 살이라는 말로 변하여 내살미가 되었답니다.

 14 : 08. 왕모산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됩니다. 주차장은 지자체에서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대학병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화장실에 유압식 흙먼지털이기까지 설치되어 있더군요. 이정표와 안내판은 기본이구요. 아무튼 오늘은 3코스 후반부와 5코스 후반부를 함께 걸었습니다. 소요시간은 3시간 10. 트랙이 8.96km를 찍고 있으니 느긋하게 걸었나봅니다. 아니 절반이 산길이었음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차장에 왕모산 등산로안내도가 세워져 있기에 게재해 봅니다. 5코스를 답사하면서 왕모산까지 다녀오시고 싶은 분들이 참조하면 되겠습니다.

 집사람의 표정이 오늘따라 더 활짝 피었습니다. 전 구간을 저와 함께, 거기다 느긋하게까지 걸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더 웃고, 더 떠들고, 그로 인해 더 행복했으니 그 표정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안동선비순례길 3코스(청포도길)

 

여행일 : ‘24. 9. 7()  10. 5()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퇴계종택수졸당이육사문학관(105일 출발지)목재고택단천리경로당단천교(거리/시간 : 6.3km, 실제는 7.89km 2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퇴계종택(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산악회의 코스 조정으로 인해 3코스 중 일부(이육사문학관까지) 2코스에 보태서 걷기로 했다. 나머지 구간은 2주 후, 4코스를 걸을 때 추가해서 걷게 된다. 참고로 퇴계종택(退溪宗宅)‘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살던 집이다. 원래의 종택은 동암(東巖) 이안도(李安道)가 한서암 남쪽에 세웠고, 1715년 정자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별도로 지었다. 이후 10세손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이 구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다. 그러나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고, 지금의 퇴계종택은 1926-1929 13세손 하정(霞汀) 이충호(李忠鎬)가 새로 지은 것이다.

 퇴계종택에서 시작되는 ‘3코스(청포도길)’는 이육사의 고향 원촌마을을 지나간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떠올리게 만드는 포도밭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으며, ‘윷판대에 이르면 육사의 또 다른 시 광야를 연상시키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거기에 퇴계묘역, 수졸당 등 퇴계와 관련된 유적들을 함께 둘러보며 걷는 여정이다.

 (97) 15 : 18. ‘토계천의 강변길을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15 : 20. 몇 걸음 걷지 않아 상계1에 이른다. 선비순례길은 이곳에서 다리를 건넌다. 하지만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100m 남짓만 더 걸으면 또 하나의 귀한 유적을 만날 수 있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15 : 22. 잠시 후 계상서당에 도착했다. 퇴계가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선생이 머물던 한서암을 중심으로, 우측 아래 계상서당, 좌측 아래는 기숙사로 사용한 계재(溪齋)’가 복원되어 있다. 하나 더. 문하생들의 숫자가 늘어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할 수 없게 되자,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에 도산서당을 새로 지었으나, 퇴계는 이곳을 없애지 않고 겨울이면 바람 센 도산서당을 떠나 이곳으로 왔단다.

 퇴계의 공부방인 계상서당(溪上書堂)’.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퇴계선생과 젊은 율곡의 만남이 이뤄졌던 곳이다. 1558년 약관 23세의 율곡은 58세의 퇴계를 찾아와 한껏 존경을 담은 시를 지어 바쳤고 퇴계도 화답했다. 두 사람은 사흘을 계상서당에서 함께 지냈고, 퇴계는 떠나는 율곡이 가르침을 청하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줬다고 한다.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일 만들기를 좋아함을 경계해야 한다(持心貴在不欺 立朝當戒喜事)>

 퇴계 선생이 기거하던 한서암(寒栖庵)’, 선생이 만년에 기거하다 숨을 거둔 곳이다. ‘퇴계(退溪)’라는 시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몸이 물러나니 내 분수에 편안하지만/ 학문이 퇴보하니 노년이 걱정스럽네/ 계상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고/ 흐르는 물 보면서 날마다 성찰하네>

 15 : 25.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다리(상계1)를 건넌다. 그리고는 928번 지방도(백운로)를 따라 남·동진 한다.

 다리에서 내려다본 토계천(土溪川)’. 도산면 북쪽 끝에 있는 월오현과 투구봉 아래서 시작되는 물이 모여 태자리 부근에서부터 토계천을 형성한다. 도산면 소재지를 거쳐 토계리에서 낙동강에 합류되는데, 하천을 따라 퇴계 이황의 태실·종택·묘역 등 선생과 관련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퇴계천(退溪川)’이라고도 불리는 이유이다.

 청포도길이란 브랜드답게 곳곳에서 포도밭을 만난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요즘은 포도밭도 과학이다. 과목 위에 비닐 천정을 씌우는 등 모든 과정을 과학적으로 하고 있다.

 15 : 29. 다리를 건너자마자 고성이씨 탑동파 파조 이적의 추모 공간인 산천정사로 들어가는 샛길이 왼쪽으로 나뉜다(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고계정(古溪亭)’으로 들어가는 샛길이 역시 왼쪽으로 갈려나간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고계정을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고계(古溪) 이휘령(李彙寧, 1788-1862)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했다. 퇴계의 10대 종손으로 1816(순조 16) 생원에 급제 호조좌랑·동복현감·영천군수·동래부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러니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향토문화대전은 또 건물이 정면 4,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라고도 했다.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는데, 1977년 안동댐에 물이 차면서 현재 위치로 이건했단다. ‘고계산방(古溪山房)’이란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써줬다나? 하지만 건물의 크기가 우선 달랐다. 위치도 이곳(도산면 토계리)이 아닌 온혜리(같은 도산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는 향토문화대전이 가리키는 고계정과 이곳은 이름은 같으나 건물은 다른 정자(同名異亭)’라는 얘기일 것이다.

 건물은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멋스런 정자가 맞다. 거기다 학식 높은 선비가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딱 좋아 보인다. 그러니 선비문화수련원 안내도에 정자(고계정)’로 표시해 놓았겠지? 그나저나 이런저런 궁금증은 해소할 수가 없었다. 안내판도 없는데다, 물어볼만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겠는가. 그저 퇴계종택의 부속건물쯤 되나보다 하며 발길을 돌렸다.

 오늘은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진다는 백로(白露)’. 고된 여름 농사를 다 짓고 추수까지 잠시 일손을 놓고 쉬는 때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길가 벼가 고개를 숙여가고 있다.

 15 : 33. ‘토계마을 쉼터는 걷기여행자들에게도 자신의 품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나무도 오래 묵다보면 신끼(神氣)를 띠는 법. 토계마을의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는 서낭당의 신목이 되었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보장해주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물레방아까지 배치했다. 요즘처럼 비가 잦은데도 돌지 않는, 아니 돌지 못하는 물레방아가 되었지만 말이다.

 15 : 45. ‘하계마을에 이를 즈음, 도로변에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들어가 보니 퇴계예던길 안내판과 함께 퇴계선생 묘소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退溪先生墓下라고 쓰인 돌 말뚝도 눈에 띈다. 퇴계 이황의 무덤()이 이 산자락 어디쯤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초입의 이정표는 퇴계선생 묘소까지 150m쯤 떨어져 있다고 했다. 이까짓 것쯤이야 하기에 딱 좋은 거리다. 하지만 우습게 볼 상황은 아니었다. 서있다시피 한 급경사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만하기 때문이다.

 15 : 48. 첫 번째 무덤은 퇴계의 며느리인 봉화 금씨(奉化琴氏)’ 것이다. 그녀가 남긴 유언(시아버님 살아계실 적에 내가 모시는데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사후에 다시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든 나의 시체는 반드시 아버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어 주기 바란다)에 따른 것이란다. ‘봉화 금씨는 선생이 돌아가신 이듬해인 1571 2월에 죽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불과 2개월만이다.

 퇴계의 무덤은 이곳에서도 100m쯤 더 올라가야 한다. 계단은 더 가팔라진다.

 15 : 52.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퇴계의 무덤에 올라설 수 있었다. 건지산(搴芝山)의 남쪽 봉우리 중턱쯤이다. 선생은 70세 되던 1570(선조 3) 12 8일 세상을 떠났다. ‘퇴계집(退溪集)’ 연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신축일 유시, 정침에서 돌아가다. 이날 아침에 모시고 있는 사람을 시켜서 화분에 심은 매화에 물을 주라 하였다. 유시 초에 드러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되어 일어나 앉아서 편한 듯이 운명하였다>

 무덤에는 묘비(墓碑) 대신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었다.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란다.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이며,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다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와 조상의 내력과 지행(志行출처(出處)를 쓰라고 했다나? 참고로 묘비와 묘갈은 경계가 모호하지만 네모진 것이 비이고 둥근 것이 갈로 보면 된다. 비의 체재를 웅혼전아(雄渾典雅 : 기운차고 원숙하며 고상함)하고, 갈의 체재는 질실전아(質實典雅 : 소박하고 고상함)하다는 학자도 있다. 하나 더. 당대(唐代)에 와서 관직이 4품 이상은 귀부이수(龜趺螭首)인 비를 세울 수 있고, 5품 이하는 방부원수(方趺圓首)인 갈을 세우도록 규제했다니 갈이 비보다 하대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퇴계는 갈()을 고집한 것이다. 이기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이 배워야할 점이 아닐까 싶다.

 무덤은 건지산(搴芝山) 남쪽 자좌오향(子坐午向 : 정남향)의 언덕에 써져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곳을 명당이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울창하게 자란 소나무 숲이 앞을 가려버린 것은 흠으로 보인다. 명당의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것이 더 좋다면 몰라도 말이다.

 묘역에서 내려오는 길. ‘수졸당이 내려다보인다. 요 어디쯤의 언덕에 양진암고지(養眞庵古址)’가 있을 것이다. 퇴계가 46세가 되는 1546년 벼슬에서 물러나 작은 집을 짓고 살며 양진암이라 이름 지었다는 곳이다. 빗돌까지 세워져 있다고 했는데, 시간에 쫓겨 발걸음을 서두르다 그만 놓쳐버렸다.

 16 : 00. ‘수졸당(守拙堂)’은 진성이씨 하계파의 종택이다.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 1559-1637)가 분가하면서 지어 하계종택 또는 동암종택이라고도 하나 동암의 장자 수졸당 이기(李技 1591-1654)의 호에서 이름을 따 수졸당이 되었다. ‘자 형의 본채와 정자,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퇴계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은 이영도는 임진왜란 때 안동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웠으며, 전쟁 중 군량미를 조달함으로써 큰 공을 세웠다.

 종택답게 현재도 종손이 기거하면서 동암선생의 불천위를 포함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별채에서는 한옥체험도 가능하다고 했다. ! 수졸당은 KBS 다큐멘터리 누들로드에 소개되기도 했었다. 전통을 한결같이 지켜가는 제례 행사와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으로 차려지는 종가음식들이 소개됐었다. 하지만 체험객들에게 제공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다.

 16 : 04. 수졸당 앞 삼거리. 이정표(단천교 4.7km/ 퇴계공원 1.6km)는 하계마을 쪽으로 가란다. 법정 동리인 토계리(土溪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퇴계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사는 마을이다. 마을로 내려가다 능선을 타고 윷판대를 거쳐 이육사문학관으로 넘어오라는 것이다.

 삼거리의 독립운동기적비’. 퇴계는 제자들에게 늘 배움과 실천을 함께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가르쳤다. 나라가 어려울 때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이 바로 선비정신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퇴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하계마을에는 구한말 의병활동과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독립유공자가 25명이나 나왔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기적비를 세워놓았다.

 그들의 애국충정에 동조라도 하려는 듯 주변의 무궁화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16 : 05. 계속해서 ‘928번 지방도(백운로)를 따르기로 했다. 폭염에 시달리느라 고갈된 현재의 체력으로는 윷판대 능선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선답자의 gpx트랙도 백운로를 따르라는데 고민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16 : 09. 길가에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 안쪽에는 애국지사 이동봉(李東鳳)의 묘비가 있었다. 하계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이동봉은 1919 3 17일 면민들과 함께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주동자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병세가 악화되어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20년 순국했다.

 도로 건너 이정표(건지산 3.5km/ 수졸당 0.4km)는 산속으로 들어가란다. ’퇴계 예던길의 안내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안동선비순례길을 걷다보면 코스와 맞지 않는 이런 이정표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두 길을 하나로 통합시키든지 아니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두 길에 차이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고갯마루를 넘자 데크 길이 이제 그만 탐방로로 올라오란다. 도로변에 보행자 전용의 탐방로를 별도로 내놓았다.

 이정표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윷판대를 다녀오란다.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떠올렸다는 곳이다. 하지만 지친 내 육신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신작로를 내면서 만들어진 인공의 능선 위로 길을 내놓았다.

 내려가는 길에 서낭당도 만날 수 있었다. 기도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는 듯 제단 위에 신주(神主)와 제사 용품, 그리고 소주 몇 병이 놓여있다.

 16 : 20  16 : 31. 고개를 넘자 이육사문학관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이육사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길이 전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의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들을 한 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정신관(전시관)과 생활관(연수원), 목우당(생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정(絶頂)’ 시비와 이육사(李陸史, 1904-1944). 육사는 시인이기 전에 독립운동가였다. 그것도 항일무장투쟁단체인 의열단 소속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 출신이다. 의열단에서 육사는 권총사격은 물론이고 폭탄 제조 및 투척, 심지어 변장술도 배웠다. 1927년 처음 옥살이를 한 뒤 1944년 중국 베이징의 감옥에서 쓸쓸히 숨을 거둘 때까지 무려 17번이나 감옥 생활을 했다. 하나 더. 본명은 원록(源祿). ‘육사(陸史)’는 필명이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배달사건에 연루돼 육사가 첫 옥살이를 할 때 수인번호가 ‘264’였다는 데서 연유했다.

 민족시인 이육사의 저항과 문학의 피는 부모 집안에서 물려받았다고 한다. 육사의 어머니 김해 허씨는 한말 의병장 허위의 조카이다. 퇴계 이황이 14대 할아버지이고, 그에게 한학을 가르친 조부 치헌 이중직은 일찍이 개화하여 노비를 풀어주고 땅을 나누어 준 사람이다.

 문학관은 이육사의 생애와 문학세계, 독립운동 자취를 다양한 방법과 매체로 구성해 놓았다. () 체험시설도 갖춰 놓았는데, 헤드폰을 쓰고 버튼을 누르면 육사의 시를 눈과 귀로 동시에 접할 수 있다.

 선생의 흉상과 육필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안경,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생활 모습 등을 재현해 놓았다.

 감방이 특히 눈길을 끈다. 1934년 이육사가 체포된 곳이 광화문에 있던 서울경찰국 본청이라며, 까마득한 날의 기억은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 여사의 증언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1943년 서울에서 베이징으로 끌려갈 때 이육사가 용수를 쓰고 있었다는 그녀의 증언을 더욱 실감나게 해주고 싶었던지 죄수를 이송할 때 사용하는 용수와 수갑, 밧줄, 쇠사슬 등을 진열해 놓았다.

 전시관 맞은편 언덕에 있는 목우당(六友堂). ‘여섯 형제의 우의를 지키는 집이라는 뜻으로 복원된 이육사의 생가이다. 육사와 원기·원일·원조·원창·원홍 6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저 집은 원래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원천리에 있었다. 그러다 안동댐에 물이 차면서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이건되었다. 이후 생가의 기능이 훼손되자, 현재 위치에 고증을 거쳐서 복원하였다.

 문학관 앞에 서면 평야지대가 드넓게 펼쳐진다. 넓은 들녘 너머로 강물이 흐르고 멀리 왕모산이 우뚝하다. 이육사가 태어난 곳으로, 육사는 윷판대를 위시한 이곳 원천리에서 광야의 시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105). 10 : 00. 928번 지방도(백운로)를 따라 걸으며 트레킹을 이어간다. 산악회에서는 오늘 5코스를 안내해준다. 하지만 작은아버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4코스 답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우리 부부는 산악회와 따로 떨어져 독자적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10 : 05. ‘원천마을 퇴계 이황의 후손들이 둥지를 튼 집성촌이자 이육사(이황의 14대손이란다)’가 태어난 곳이다. 본명은 이원록. 어린 시절 그는 이 마을의 전통대로 유학과 한학을 익혔다. 참고로 원천은 퇴계선생의 5대손인 원대처사(遠臺處士) 이구(李榘, 1681-1761)가 정착하면서 붙인 지명이다. 세간명리를 떠도는 구름처럼 여기고 속진과 치욕을 멀리한다()’는 뜻으로 원촌(遠村)’이라 부른 것이 마을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초가(草家)’라는 작품이 새겨진 이육사의 시비(詩碑). 하지만 마을에는 초가집이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이육사의 생가 터. 한때는 큰 마을을 이루었을 동네는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 지역이 되었고 시인의 생가(‘六友堂에 대해서는 위에서 얘기했다)도 그때 헐렸다. 그 집은 현재 문학관 언덕에서 만날 수 있다.

 생가 터의 청포도 시비. 작고 둥그런 7개의 화강암 위에 올라앉았다. 청포도 알갱이를 상징하는 모양이다.

 옆에는 목재고택(穆齋古宅)’이 들어앉았다. 조선 후기 문신인 목재(穆齋) 이만유(李晩由, 1822-1904)의 옛집으로, 그가 영해부사를 역임하였기에 영감댁(令監宅)’이라고도 부른다. 이황의 후손으로 형조참판을 지낸 이귀운(李龜雲,1681-1761)의 증손자로 영남만인소의 소두(疏頭) 이만손(李晩孫)의 친족이기도 하다. 1858(철종 9) 전시(殿試)에서 병과로 급제한 이후 승정원 승지, 영해부사, 사간원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고택은 문도 담도 없었다. 옛날에는 솟을대문을 가진 대문채(행랑채)가 있었지만 수몰로 유실됐다고 한다. 고택에서는 민박이 가능하단다. 안채로 통하는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 집을 관리하는 이육사 시인의 따님인 이옥비여사를 만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룻밤 머물 계획이 없는지라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목재고택의 오른편에는 원대구택(遠臺舊宅)’이 있다. 원촌마을이란 이름을 부여한 원대처사(遠臺處士)’ 이구(李榘)의 옛집이다. 이 고택 역시 대문채는 없고 정면 6, 측면 6칸 반 규모의 정침만 전한다.

 맨 오른쪽은 사은구장(仕隱舊庄)’ 차지다. 조선 정조·순조 때의 문신인 사은 이귀운(仕隱 李龜雲, 1744-1823)의 옛집이다. 이귀운은 이구의 증손으로 벼슬길에 있을 때는 의리와 신의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고 한다. 이름을 드러내기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호를 벼슬길에서 숨는다는 뜻으로 사은(仕隱)’이라 했단다. 1786(정조 10)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삼사 요직을 거쳐 형조참판까지 지냈다.

 이 집은 이원영(李源永, 1886~1958) 목사의 생가로 더 유명하다.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1919 3·1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인물이다. 목회자가 된 후 1930년대부터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등을 거부하면서 4차례 옥고를 치렀다.

 11 : 13. 도로(백운로)로 빠져나와 몇 걸음 더 걷자 이정표(퇴계공원 3.6km)가 세워져 있다. gpx 트랙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라며 경고를 보내오는 지점이다.

 도로변 언덕에 그럴듯한 한옥이 들어서있기에 올라가봤다. 그리고 원호정사(遠湖精舍)’를 만났다. 퇴계의 11세손인 교리(校理) 이만형(李晩鉉, 1832-1911)’과 그 형제들의 면학정신과 우애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4형제 후손들이 1977년에 지은 건물이다.

 요 아래 들녘에는 칠곡고택(漆谷古宅)’도 있었다고 한다. 퇴계선생 10대손인 이휘면(李彙冕, 1807-1858)의 고택인데, 2006년 안동시에서 성곡동 고건축박물관(Gurume 리조트) 경내로 이건했단다.(사료를 뒤져보다 눈에 띄기에 거론해봤다)

 11 : 14. 도로를 벗어나 들녘으로 들어간다. 이때 낙동강이 한 손에 잡히고, 왕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육사가 어린 시절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던 풍경이자 자라서는 광야의 시상을 떠올리던 풍경일 것이다. 그는 이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되리라 다짐하며 독립을 갈구하였다.

 안동댐 수몰로 인해 들녘은 황무지로 변해있었다. 이육사의 광야를 떠올리기에 딱 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를 쓰던 시인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독립투사였다. 그의 시는 시리고 아프지만 희망차다. 그러니 한 걸음 한 걸음 시인이 전하고자 했던 마음을 떠올리며 걸어보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길을 갈수록 거칠어졌다. gpx트랙이 없었더라면 헤쳐 나갈 엄두도 못 냈을 정도다. 대신 시심에 한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광야는 대한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염원하면서 지은 시로 평가 받는다. 과거부터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고, 수많은 침략에도 굴하지 않았던 한반도가 일제의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지만 자신은 저항의 씨앗인 이 시를 남기어 훗날 일어날 대한 광복을 기다린다는 저항시이다.

 새옹지마라 했던가? 한걸음 내딛기조차 힘들 정도로 길이 거칠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고왔다. 억새꽃 만발한 들녘 너머에는 왕모산, 그리고 뭉게구름 둥둥 떠다니는 파란 하늘. 이 아니 아름다울 손가.

 누군가는 가을 억새꽃을 일러 그 어느 꽃보다도 아름답다고 했다.

 11 : 33. 거칠기 짝이 없는 들길과의 전쟁은 농로를 만나면서 끝난다. 주변지역 농민들의 경작지가 원천들 안에 있는지 자동차 바퀴자국이 제법 또렷하다.

 11 : 36. 이번에는 도로(왕모산성길)로 올라선다. 오른편에 보이는 원천교를 건너면 5코스(왕모산성길)가 종료되는 내살미마을(원천리)’이다. 3코스(청포도)는 왼쪽 단천리쪽으로 간다.

 길가 야생 나팔꽃이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아침 일찍이 피었다가 낮이면 시들어버리는 불쌍한 꽃(‘morning glory’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일 것이다)이다. 그래선지 꽃말도 일편단심 사랑이란다. 탐관오리에 빼앗긴 아내를 그리다 죽은 남편의 애절한 전설까지 담았으니, 집사람을 향한 내 사랑을 쏙 빼다 닮았다고나 할까?

 오른쪽으로는 왕모산 자락의 험상궂은 바위절벽이 펼쳐진다. 낙동강변과 맞물린 저 벼랑의 꼭대기에 갈선대가 있고, 저 벼랑의 안쪽으로 5코스(왕모산성길)가 지나간다.

 ()도산청소년수련원을 리모델링했다는 안동영화예술학교’. 미인가 영화특성화 대안학교로 영화를 주제로 시나리오 작법, 카메라의 이해 등 특별과목과 윤리·국어·수학 등 일반과목을 가르친다고 했다. 하지만 문을 닫았는지 텅 빈 운동장에는 학생들 대신 잡초만 무성했다.

 단천리의 너른 들녘. 왕모산에 가로막힌 낙동강이 방향을 틀면서 만들어놓은 일종의 충적평야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이따가 갈선대에서 감상하게 된다.

 11 : 43. 잠시 후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건지산 4.8km/ 칼선대 2.1km)에서 왕모산성길과 헤어져 단사길로 들어선다. ‘단천리로 들어가는 길인데 2차선에서 1차선으로 바뀌었다.

 11 : 46. 단천리 경로당. 이정표(건지산 4.7km/ 칼선대 2.2km)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낙동강 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곧장 직진하기로 했다. 다음 블록에 있는 진성 이씨의 종택에 들러보기 위해서다.

 11 : 48. 네이버 지도는 진성이씨(眞城李氏)’ 가문의 종택(宗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주하리(안동시 와룡면)에 있는 주하동 경류정 종택’, 즉 국가민속문화재(291)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그 진성이씨 종택과는 어떤 관계일까?

 단천리(丹川里) 56가구 중 20가구가 진성이씨라고 했다. 그중 대부분이 이곳 단사(丹沙) 마을에서 살아간다고도 했다. 그러니 토계리(진성이씨의 원래 세거지)’에서 단사마을로 옮겨 온 이후의 종가(宗家) 쯤으로 보면 되겠지?

 100m쯤 떨어진 곳에는 퇴계선생의 8세손 이귀용이 지었다는 계남고택(溪南古宅, 경북 민속문화재)’도 있다고 했다. 행여나 놓칠세라 두리번거리는데 주민분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알려주신다. 현재 성곡동 고건축박물관(Gurume 리조트)에서 숙박 손님을 맞고 있단다.

 그는 인접해 있던 서운정(栖雲亭)’에 대해서도 얘기해줬다. 헌종(憲宗) 때 이조참판을 지낸 농와(聾窩) 이언순(李彦淳, 1774-1845)이 말년에 지은 정자인데, 이 또한 성곡동 고건축박물관(Gurume 리조트)로 옮겨졌다고 한다.

 11 : 51. 문화재 찾기를 끝내고 마을을 빠져나온다. 그리고는 탐방로가 있는 낙동강 쪽으로 간다.

 11 : 53. 강 너머로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큼지막한 움직임이 한꺼번에 정지되어버린 듯 요지부동의 단애가 아랫도리를 물에 담그고 있다. 단애의 색깔이 붉어 보이는 것은 단사마을의 유래를 떠올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붉은 점토질 산맥이 마을 뒤로 뻗어 있고, 강가의 자갈이 연분홍빛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니 말이다.

 이후부터는 제방(단사길)을 따라간다. 능수벚나무를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멋쟁이 둑길이다.

 12 : 02. 단천교에 이르면서 3코스(청포도길) 트레킹이 종료된다. 3코스는 걷는데 2시간 10분이 걸렸다. 앱이 7.89km를 찍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산악회는 ‘3코스의 길이가 짧다며 둘로 나눈 다음, 2코스(도산서원길) 4코스(퇴계예던길)에 포함시켜 진행했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작은아버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4코스(2주 전에 진행했다)에 참석을 못했고, 때문에 3코스의 후반부를 다른 걷기 여행자들과 헤어져 단 둘이 걸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더 많은 밀어들을 속삭일 수 있었지만...

 

안동선비순례길 2코스(도산서원길)

 

여행일 : ‘24. 9. 7()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월천서당산림문화휴양촌경북산림과학박물관분천리마을회관도산서원퇴계종택(거리/시간 : 11.3km, 실제는 경북산림과학박물관부터 7.71km 2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월천서당(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타고 안동방면으로 내려오다, 지곡교차로에서 928번 지방도(녹전방면으로 28km), 녹전삼거리에서 935번 지방도(안동방면으로 8km), 서부교차로에서 35번 국도(태백방면)로 옮겨 1.8km쯤 올라가다 경북산림자원개발원입구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3.8km쯤 들어오면 2코스 들머리인 월천서당에 이르게 된다.

 월촌서당에서 시작되는 ‘2코스(도산서원길)’는 퇴계선생의 생애와 함께했던 길이다. 퇴계의 후손들이 청빈한 선비정신을 지키며 살아온 원촌마을까지 도산구곡 길 어느 구간보다도 퇴계의 숨결이 살아있는 길이다. 스승인 퇴계 이황과 제자인 월천 조목이 서로 오가며 만났다고 해서 사제의 길로도 불린다.

 월천서당(月川書堂)’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라고 한다. 안내판은 중종 34(1539)에 세웠다고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이 15세에 벌써 제자를 키웠다는 얘기인데 그게 사실일까? 아무튼 월천은 어려서부터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한 수제자로 알려지는 인물이다. 그래선지 현판을 스승인 이황이 직접 써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담장너머 먼발치에서 겨우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월천선생 고택(편액은 舊宅이라 적었다)도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조목(趙穆)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52(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경전 연구에 주력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이황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의 상덕사에 신주(神主)가 모셔져 있단다.

 월천서당에서는 도산구곡(陶山九曲)’  2곡과 3곡을 만날 수 있다. 서당 앞 도선장(渡船場)으로 나오면 제2곡인 월천곡(月川曲)’과 마주하게 된다. 참고로 도산구곡은 각 구간마다 명촌(名村)들이 세거해왔다는 점이 독특하다. 퇴계 선생의 직계 제자와 후손들이 거의 500년 세월 동안 이 도산구곡에 포진해 있었다. 그중 2곡에는 횡성조씨(橫城趙氏)’들이 살았다. 월천서당의 주인인 조목이 대표적이다.

 시선을 왼쪽으로 비틀면 제3곡인 오담곡(鰲潭曲)’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온전한 모습이 아닌 끄트머리에 불과하지만 입맛이라도 살짝 볼 수 있으니 행운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3곡에는 단양우씨(丹陽禹氏)’들이 세거했다. 퇴계가 존경하던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3-1342)’의 서원이 있었다.

 월천서당에서 안동호반자연휴양림까지는 데크 길이 이어진다. 길고 가파른 계단이 끝 간 데 없이 계속된다. 거기다 울창한 숲속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쉽게 말해 얻는 것 없이 고생만 잔뜩 하는 구간이라는 얘기다. 이게 싫은 나는 도반 몇 명과 함께 이 구간을 생략하고 대신 주변의 다른 명소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한국문화테마파크’. 2,000여개의 산성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지형 특성을 공간개념으로 설정해놓은 체류형 복합문화단지로, 산성마을과 연무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렉티브 체험시설, 어드벤처 챌린지시설, 상설 공연장 등도 갖추고 있단다,(사진은 트레킹 道伴이자 작가이신 몽중루님의 것을 빌려왔다. 평소에도 이분의 사진을 자주 빌려 쓴다)

 안에는 다양한 체험장과 놀이마당 등의 저잣거리가 꾸며져 있어 즐길거리·먹거리·볼거리로 넘친다고 했다. 선비체험관에서는 유교정신을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단다. 백발의 나이에도 부모를 위해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는 농암선생의 효(), 퇴계선생의 건강법과 자연관 등 자취를 따라가는 경(), 노령의 나이에도 나라를 위해 의병지원에 적극 협조한 월천 조목선생의 충()이다.

 하지만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3 Super Hiking in Andong(9.7~9.8)’이 열린다며 일반인의 입장을 막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론은 차치하더라도 홈페이지에는 이런 사실을 미리 알려야하지 않았을까?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건너편에는 안동국제컨벤션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최대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컨벤션홀, 동시 700명 수용 가능한 13개의 중소회의실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부대시설인 세계유교문화박물관은 컨벤션센터의 자랑거리. 라키비움 형식의 박물관으로 유교지식 디지털아카이브를 구축해 전 세계 이용객에게 세계유교지식 정보와 문화향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단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살펴보지 못한 유교문화의 아쉬움을 군자상으로 달래며 발길을 돌린다. <군자는 화합하나 동조하지 않고, 소인은 동조하나 화합하지 않는다.> 안동시의 미숙한 행정에 큰소리를 내지 않고, 쯧쯧 혀만 차는 선에서 발길을 돌리는 내 행동이 곧 군자가 아니겠는가.

 디지털 스포츠 테마파크인 놀팍의 현수막. 의병을 소재로 헬스케어시스템까지 갖춘 첨단시설로, 남녀노소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20종의 콘텐츠로 구성돼 있단다. 콘텐츠에 따라 근력·지구력·유연성·순발력·민첩성 등 다양한 신체적 기능을 필요로 하는 형태로 구성돼 있어 체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나?

 12 : 15. 두 번째로 찾은 곳은 경상북도 산림과학박물관’. 산림문화의 보존과 산림의 소중함을 체험하도록 설립한 박물관으로, 4개의 전시실에 산림의 역사, 산림 정책, 산림자원의 활용, 산림보호 등에 대해 전시하고 있다.

 입구의 조형물. ‘自然으로부터 산, , 이란 작품인데, 예술에 문외한이라선지 조형물이 품은 속뜻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멋진 인공폭포도 만들어놓았다. 이밖에도 영지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을 이용해 만든 습지산책로, 산촌의 가옥(너와집·귀틀집), 분수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상부의 분수대 옆에는 전국의 황장금표도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긴 돌계단. 양옆에 경상북도를 위시해 예하 시·군의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각 시군의 캐릭터와 꽃··나무 등을 일일이 소개해 준다.

 안동시의 꽃은 매화라고 한다. 맞다. 고결함이 군자와 같다는 꽃이니 안동시의 꽃으로 이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12 : 23. 박물관은 문이 닫혀 있었다. 박물관 휴관일은 월요일이 아니었나? 왜 문을 닫았는지는 알려주지도 않은 채, 건물 전체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적막강산이다. 아무튼 4600여점이나 된다는 유물을 하나도 보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12 : 25. 박물관 밖으로 나와 35번 국도(퇴계로)를 따른다. 북진하여 송티고개를 넘는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송티 600여 년 전부터 예안시장을 오가던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넘다 쉬던 고개로,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12 : 29. 첫 번째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 송티길로 들어간다. 초입에 분천리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확히는 송티(松峙)’ 마을이다. 넘티(‘넙티 廣峴으로도 불린다)과 함께 분천리를 이룬다.

 이곳에서 안동선비순례길과 만났다. 이정표는 월천서당에서 이곳까지를 6.0km로 적고 있었다. 내 앱은 0.63km를 찍는다. 5.4km.  11.3km 2코스의 절반을 생략해버린 셈이다.

 12 : 33. ‘분천리 마을회관. 고려 말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낸 이헌(李軒)이 붙인 지명이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을 떠나 돌과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분강(汾江) 굽이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는데, 마을을 둘러보니 낙동강 물이 맑게 흐르므로 부내라 하였다는 것이다. 분천(汾川)은 부내의 한자식 표기다.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했는데, 이현보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이 대를 이어 배출된 유서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임도를 따라 낙동강 쪽으로 간다.

 12 : 40. 그렇게 잠시 내려가자 삼거리가 나왔다. 이정표(퇴계종택 3.8km/ 월천서당 6.6km)는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오솔길을 따르란다.

 이정표가 퇴계예던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500년 전 퇴계가 사색에 잠겨 걷던 한국판 철학자의 길을 새롭게 복원해놓은 안동의 걷기 여행길이다. 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이게 안동선비순례길과 중복되는가 보다.

 우린 낙동강 쪽으로 조금 더 나가보기로 했다. 도산구곡 중 제4곡인 분천곡(汾川曲)’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강호가도(江湖歌道)라고 하는 영남 풍류의 창시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전후한 영천이씨들의 600년 세거지다. 하나 더. 예로부터 청량산에서 발원 도산서원을 거쳐 부내 외곽으로 흐르는 물을 낙강이라 했다. 분강촌 앞에서 강물이 두 줄기로 갈라졌으므로 분수(分水분천(分川)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강에 농암이 자신의 호로 삼은 농암(聾巖)’이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12 : 43. 하지만 농암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안동댐 수위가 낮아질 때 모습을 드러낸다니, 조금 더 물이 빠져야 드러날 모양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벼슬을 버리고 부내에 살던 이현보(李賢輔, 1467-1555)가 이황(李滉)을 비롯한 지기들을 불러 배를 띄우고 노닐던 풍경을 떠올려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되돌아 나왔다.

 12 : 47. 삼거리로 돌아와 이번에는 오솔길을 따라간다. 인적이 뜸한 산길이지만 누군가의 희생으로 깔끔하게 벌초가 되어 있었다.

 저게 사랑나무로 보이는 것은 내가 속물이라서 일까? 아니 함께 걷던 도반께서도 사랑나무가 분명하다고 했다. 사랑을 나누는 몸짓이 분명하다면서...

 12 : 53. 건너편에는 영지산(443.4m)이 우뚝하니 솟아올랐다. 그 아래 작은 마을이 있었다. 네이버 지도에 애일당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이다. 애일당(愛日堂)이란 1533년 농암 이현보가 94세의 아버지 이흠(李欽) 92세의 숙부, 82세의 외숙부 김집(金緝)을 중심으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소일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경로당이다. 그러니 어찌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애일당은 없었다. 그 자리에는 여염집으로 보이는 한옥 한 채가 있었을 따름이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은 애일당은 애초부터 없었고, 왜 그런 표시가 되어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그저 안동호에 물이 채워지던 무렵 잠시지만 영천이씨(이현보의 본관)’의 제사(祭舍)가 있었을 뿐이란다.

 주민분이 멀리서 온 길손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집으로 초대했다.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우리 일행을 막무가내로 끌고 가다시피 한다. 그리고는 넝쿨에 매달려 있는 참외를 실컷 따먹으라 하신다. 아니 손수 따주며 농암선생과 퇴계선생 등 지역에서 배출한 선현들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셨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주인장은 부산에서 사업을 해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하지만 7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마을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문중 땅 3만 평을 사서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그리고는 광운사(光運寺)’라는 절을 짓고, 자신의 법명을 아난이라 했다나? 모든 사람이 마음의 눈을 떠주기를 빌면서...

 13 : 09. 마을을 빠져나와 도산서원길(이정표 : 퇴계공원 3.6km/ 월천서당 7.2km)’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도산서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광현고개이다. 이현보의 농암가비(聾巖歌碑)’가 세워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농암가(聾巖歌)’ 1665년에 간행된 이현보의 농암문집(聾巖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관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울리는 기쁨을 노래한 작품으로, 작자가 서울에서 오래 머물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농암에 올라 산천을 두루 살피니 옛 자취가 너무나 의연함에 기뻐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광현고개를 기점으로 길은 내리막으로 변한다. 2차선 도로지만 울창한 숲속을 요리조리 헤집으며 내놓은 덕분에 숲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길섶에서 노닐던 귀한 손님을 만났다. 독일은 사슴벌레의 머리를 재산을 모아들이는 행운의 장식으로 여기며, 터키인들은 악을 물리치는 호패로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알려진다. 그러니 이 아니 행운이겠는가.

 도산서원(매표소)에 가까워질 무렵 오른쪽 물가에서 간석대 답청(磵石臺 踏靑)’이란 시비를 만날 수 있었다. 퇴계 이황이 62세이던 1562년 요 아래에 있는 석간대(石澗臺)’에 와서 예전에 농암 이현보선생을 모시고 노닐던 감회를 읊은 시라고 한다. 뒷면에는 제자인 구암(龜岩) 이정(李楨, 1512-1571)과 헤어지면서 써 준 당나라 시인 유상(劉商)의 시를 새겼다. 원래는 석간대에 새겨져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석간대가 물에 잠기게 되자 저렇게 모사(模寫)해 옮겨놓은 모양이다.

 13 : 30. 도산서원의 집단시설지구에 도착했다. 도산서원의 입구로, 매표소를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편의점과 분식점은 물론이고 특산물판매점에 서점까지 눈에 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답게 서원은 관람권을 사야만 입장이 가능했다. 그렇게 소중한 문화유산이니 무턱대고 들어가 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먼저 하마비(下馬碑)가 걸어갈 것을 지시한다. 다음은 입구에 설치해 놓은 각종 안내판을 꼼꼼히 살펴보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서원으로 가는 길은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은 걷기에 딱 좋고, 곳곳에 설치해놓은 각종 조형물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서원은 문화해설사와 함께 둘러볼 수 있다고 했다. 저곳에서 신청하면 해박한 지식으로 꼼꼼하게 안내해 준단다.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의 후손 공덕성(孔德成)이 쓴 글을 새긴 빗돌이라고 한다.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을 이르는 사자성어다. 1981년 공자의 77세손인 공덕성 박사가 도산서원을 찾아와 참배한 후 퇴계선생의 가르침이 5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음에 감동하여 적은 글이라나?

 서원 마당에 이르기 직전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가 반긴다. 퇴계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주자(朱子)가 지은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 나오는 하늘의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天光雲影共排徊)’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곳은 시사단(試士壇)’를 바라보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시사단은 정조 때 별시가 열렸던 곳이다. 1792년 정조가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해 퇴계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신설하여 안동 지역의 인재를 선발토록 한 데서 비롯된다. 당시 응시자가 너무 많아 강 건너 들판으로 시험장을 옮겼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의 글로 비문을 새기고 시사단을 세웠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10m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비각과 비를 옮겨 놓았단다.

 반대편 절벽으로도 산책로가 나있다. 500년 전 퇴계가 사색에 잠겨 걷던 한국판 철학자의 길이다.

 그 끄트머리에는 천연대(天淵臺)’가 있었다. 시경(詩經)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 漁躍于淵)’라는 구절에서 하늘  연못 자를 따서 지었다.

 천연대는 도산구곡의 제5곡인 탁영담곡(濯纓潭曲)’이 가장 잘 조망되는 곳이다. ‘갓끈을 씻는다는 뜻의 탁영(濯纓)은 굴원(屈原) 어부사(漁父詞)’에서 유래했다. 강남으로 귀양 온 굴원이 거기서 만난 어부에게 다른 이는 틀리고 자신만의 곧음을 내세우자, 어부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며 노래했다는 고사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에 있어서 크게 퇴계가 생전에 건축한 서당 구역과 사후에 조성된 서원 구역으로 구분된다. 도산서원은 1561년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강학과 수행을 위해 건립한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기반으로 지어졌다. 사후에 그의 문인이었던 권호문(權好文), 금난수(琴蘭秀) 등이 발의하여 서당이 있던 자리 위쪽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했다. 1574년 서원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 다음 해인 1575년 사액되어 석봉 한호가 쓴 편액을 하사받는다. 1615년에는 월천 조목의 위패를 함께 모신다. 성덕사와 삼문, 전교당, 농운정사, 도산서당 등 4곳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 앞 광장, 땅에 닿을 듯이 길게 누워있는 왕버들나무가 오랜 세월 서원과 함께 해왔음을 알려준다. 안동댐에 수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당을 5m 가까이 성토하는 과정에서 나무의 아랫부분이 대부분 땅속에 묻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나무들이 기기묘묘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열정(冽井). 서당에서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 주역(周易)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井冽寒泉食)’에서 이름을 따왔다. 퇴계는 서당의 남쪽에 맑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書堂之南 石井甘冽)’는 시를 짓기도 했다.

 서원 구역으로 올라가는 긴 돌계단. 서원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대가 조금씩 높아지고 남북으로 길게 축을 형성하면서 좌우에 건물을 들어앉혔다. 정문으로 들어가기 전 왼쪽에 역락서재(亦樂書齋)가 있고,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도산서당, 왼쪽에는 농운정사가 있다.

 계단의 끄트머리, 진도문(進道門)으로 들어서자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이 반긴다. 서원의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도산서원이란 사액 현판은 1575년 선조가 내려주었으며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고 하고 당시 선조가 마지막 글자부터 쓰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내삼문(內三門) 너머에는 상덕사(尙德祠, 보물 제211)’가 있다. 퇴계선생과 월천 조목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데, 일반인에게 개방을 않는지 문이 닫혀 있었다.

 도산서당(陶山書堂, 보물 제2015). 퇴계선생이 4년에 걸쳐 지은 건물로 기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기거하던 방은 완락재(玩樂齋, 완상하여 즐긴다), 마루는 암서헌(巖栖軒, 바위에 깃들어 작은 효험을 바란다)이란 현판을 달았다. 둘 모두 주자의 글에서 따온 것으로 학문의 즐거움과 겸손한 마음을 담았다. 서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건물도 고치고 문도 새로 냈지만 퇴계 선생이 거처하던 도산서당만큼은 손끝 하나 안 대고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역락서재(亦樂書齋). 퇴계가 61세에 완공을 본 도산서당은 선생의 공부방인 서당과 학생의 기숙사인 농운정사(隴雲精舍, 보물 제2016)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자 기숙사가 포화상태가 되었고, 이에 어린 나이에 입학한 제자 정사성(鄭士誠)의 부친이 기숙사를 따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당호는 벗이 있어 스스로 먼 길을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왔다.

 옥진각(玉振閣). 1970년 보수를 할 때 지은 퇴계선생의 유물전시관이다. ‘집대성 금성옥진(集大成 金聲玉振)’의 줄임말로 집대성했다는 것은 금소리에 옥소리를 떨친 것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단다.

 안에는 퇴계선생에 관한 각종 자료가 전시되고 있었다. 덕분에 선생의 철학을 주마간산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선생의 각종 유품도 전시해 놓았다. 자리·베개 등의 실내 비품과 매화연(梅花硯옥서진(玉書鎭) 같은 문방구, 그밖에 청려장(靑藜杖투호(投壺혼천의(渾天儀) 등도 눈에 띈다.

 서원 마당에서는 목판인출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퇴계 이황의 좌우명을 목판으로 직접 인출해보는 프로그램이다. 선생이 그렇게나 그리워했다는 매화를 읊은 시도 인출해 볼 수 있다니 한번쯤 도전해 볼 일이다.

 퇴계선생은 사무사(思無邪, 간사한 생각을 품지 마라), 무불경(毋不敬, 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라), 무자기(無自欺,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신기독(愼其獨, 혼자 있을 때도 행동을 바로 하라) 등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이 글귀들을 나무판에 새겨 방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쳐다보며 몸과 마음을 다스렸단다.

 14 : 34. 매표소 광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도산서원길을 따라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올라가다 도산십이곡 시비를 만났다. 도산십이곡은 퇴계가 도산서당을 짓고 4년이 지난 1565, 나이 65세 때 지은 시조이다. 오른쪽에 전 6(마음이 사물과 자연에 접하여 일어나는 감흥), 그리고 왼쪽에 후 6(학문과 덕행을 실천하는 내용)을 새겨 넣었다.

 14 : 40. 고갯마루에 닿기 전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임도(이정표 : 퇴계종택 1.2km/ 도산서원 0.9km)로 내려선다.

 이정표는 이 구간을 퇴계명상길로 적고 있다. 계상서당 앞 퇴계종택에서 도산고개를 넘어 도산서원에 이르는 구간으로 퇴계선생이 생전에 걸었던 길이란다. 관직에서 물러난 퇴계선생은 자신의 학문을 정진시키는 한편, 가르침을 받으려고 찾아오는 선비들을 위해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을 지었다. 그리고는 추운 겨울에는 계상서당에서, 반면에 무더운 여름에는 도산서당에서 강론을 했단다. 이때 도산고개를 넘어 왕래한 길이 퇴계명상길이다.

 길은 꽤 가파른 오르막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버겁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생전에 이 길을 걸었을 퇴계선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선비걸음으로 걸어볼 일이다.

 14 : 52. ‘도산고개에 올라선다. 걷기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인지 고갯마루에 평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고갯마루에서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계속해서 임도(선비문화수련원길)를 따를 수도 있고, 비탈을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퇴계명상길을 따라가도 있다. 그렇다고 너무 고민하지는 말자. 잠시 후 다시 만나게 되니 말이다.

 15 : 02. 도산서원의 부설기관인 선비문화수련원 2001년 퇴계 선생의 16대 종손인 이근필(2024년 작고) 옹의 제안으로 설립됐다. 이후 수련생이 급증하자 2014 2원사를 착공 2016년 완공했다. 선비문화체험 프로그램이 윤리경영을 내세우는 기업의 경영전략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공직자·기업·임직원 등 다양한 계층에서 찾아오고 있단다.

 수련원의 아침은 5시 반에 퇴계명상길 산책으로 시작된다고 했다. 새벽 산책코스는 퇴계가 머물던 한서암에서부터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도산서원까지 가는 왕복 1.5km 남짓한 산길이란다. 새벽공기 감도는 초록빛 세상을 걸으며, 퇴계선생이 지은 도산십이곡을 읊조려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나?

 수련원 앞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퇴계의 육우(六友 : ·····自身)로 꾸며진 동산, 군자못(君子塘)이라는 연못, 산책로 등의 조경은 물론이고, 퇴계의 시를 새긴 빗돌 십여 기를 세워놓았다. 한자를 모르는 이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한글로 번역된 시를 석판에 새겨 빗돌 앞에 놓아두었다.

 자명(自銘). 퇴계의 마지막 작품으로 자신의 평생을 성찰하면서 삶을 회고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선생이 지은 2,300여 수의 시들 가운데 자신을 주제로 읊은 유일한 시라고 했다.

 15 : 11  15: 17. 퇴계종택(退溪宗宅)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아니 3코스 중 일부를 앞당겨 진행하겠다는 산악회의 결정에 따라 이육사문학관까지 더 걸어야 한단다. 아무튼 2코스는 2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은 7.71km를 찍는다. 코스 대부분이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고 보면 되겠다.

 조선시대 중기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살던 집이다. 원래의 종택은 동암(東巖) 이안도(李安道)가 한서암 남쪽에 세웠고, 1715년 정자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별도로 지었다. 이후 10세손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이 구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다. 그러나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두 곳 종택이 모두 불타 버렸고, 지금의 퇴계종택은 1926-1929 13세손 하정(霞汀) 이충호(李忠鎬)가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은 5칸 솟을대문과 자형 정침(正寢 : 주택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집 또는 방)이 있는 영역(아래 사진), 같은 규모와 양식의 5칸 솟을대문과 추월한수정으로 이루어진 영역, 추월한수정 영역 뒤쪽에 접한 솟을삼문과 사당이 있는 영역으로 이루어졌는데, 세 영역은 각각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1715년 조선 중기의 문신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1654-1725)이 퇴계의 정신을 기리며 세운 정자다. 이름은 중국 남송의 주자(朱子)가 지은 시 재거감흥(齋居感興)’  공손히 생각건대, 성인의 심법은 천년의 시공을 넘어(恭惟千載心) 차가운 물에 비치는 가을 달빛이라(秋月照寒水)’에서 유래했다. 옛 성인의 마음이 가을 달빛이 비치는 차고 맑은 물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다.

 하지만 1896년 일제의 방화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러다 1926년 이충호에 의해 종택 본채와 함께 복원되었다. 정면 5.5(측면 2.5) 자형 평면을 이루는 기거(起居)형 정자로 보면 되겠다. 지금도 수련생들의 강의나 문중 모임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단다. 그래선지 관리인으로 보이는 분이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며 소매를 이끌기도 했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부부의 계명(誡命)을 잘 따라주었다고나 할까? 부부(夫婦)란 결혼한 남편과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지아비와 지어미라는 뜻으로, 여기서  짓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한집에 사는 두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니 부부는 하나의 짝이라는 생각으로 누구 한 사람이 앞서나가지 않고 늘 함께 나란히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이해하고, 채워주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밀양아리랑길

 

여행일 : ‘24. 8. 31()

소재지 : 경남 밀양시 교동·용평동·가곡동·삼문동·내이동 일원

산행코스 : 밀양역관광안내소천경사용두보금시당월연정추화산성천문대동문고개영남루용두교유원지(소요시간 : 12.59km 4시간 1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밀양시에서 조성한 둘레길로 행정안전부의 친환경 걷는 녹색 길 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아 2013년 조성됐다. 밀양 도심과 인근에 산재한 역사문화 유적지가 하나로 연결돼 있어, 밀양의 옛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걸을 수 있는 도심 속 친환경 산책로이다.

 

 트레킹 들머리는 밀양역(경남 밀양시 가곡동)

중앙고속도로 남밀양 IC에서 내려와 25번 국도(밀양대로)를 타고 밀양시내로 3km쯤 들어오면 예림교를 건너게 되고, 곧이어 밀양역에 이르게 된다.

 순환에 가까운 별개의 3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1코스(6.2km : 읍성-삼문송림-영남루), 2코스(4.2km : 향교-시립박물관-추화산성), 3코스(5.6km : 용두목-금시당-월연정)를 따로따로 돌 수도 있고, 아래 지도처럼 용두교에서 시작해 연결해가며 걸어볼 수도 있다.

 밀양트레일 도보여행을 위해 밀양역부터 들른다. 밀양역 앞 밀양종합관광안내소에서 스탬프 북을 받아 7개 포스트에 비치된 도장을 찍어 제출하면 완주 메달과 인증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증이벤트 참여도 가능하단다. 코스 내 스탬프보관함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필수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 게시 후 네이버 폼을 작성하면, 추첨을 통해 매달 50여 명에게 아라리쌀  2만원 상당의 상품을 지급한다. , 밀양시민은 완주하더라도 선거법 제112조에 따라 메달과 인증서 등 기념품을 받을 수 없고, SNS 인증이벤트에 당첨돼도 상품을 받을 수 없다.

 실제 출발지인 용두교유원지’. 가곡동과 삼문동을 잇는 용두교 아래 화장실까지 갖춘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11 : 40. ‘밀양강 둔치를 따라 동진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밀양아리랑길의 3개 코스 중에서 ‘3코스에서 시작한다고 보면 되겠다.

 ! 길을 나서기 전에 안내도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나라도 더 많이 가슴에 담고 싶다면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11 : 45 : 첫 만남은 징검다리’. 밀양강에 놓인 저 징검다리(상판을 덮었으니 잠수교로 분류하는 게 옳을 것이다)를 건너면 1코스로 연결된다.

 계속해서 3코스를 따르기로 했다. ‘스탬프 북에 적힌 7개의 포인트 가운데 두 번째 포스트(첫 번째 도장은 밀양역의 관광안내소에 있다) 용두보 3코스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도장을 찍을 칸도 3코스2코스1코스 순으로 배열해 놓았다. 1코스부터 시작할 경우 자칫 길이 헷갈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11 : 47. 밀양강철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간다. 밀양강철교는 개량공사가 한창이었다. 두 개의 철교(경부선 상하선인 듯) 사이에 새로운 다리를 놓는데, 공사가 끝나면 옛 다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참고로 1904년 일본 강점기 때 만든 저 다리에는 아픈 사연이 서려있다. 교각을 지을 때 사용된 석축이 다름 아닌 조선시대 밀양읍성을 허물어서 나온 돌이었기 때문이다.

 11 : 49. 강기슭이 가파르게 변하는가 싶더니 길이 잔도(棧道)로 변해버린다. 바위벼랑에 선반을 달아매듯 계단을 놓았다. 그것도 왔다갔다 갈 지()’자를 써가며 위로 올라간다. 하나 더. 얼마 뒤에는 위로 오르지 않고도 이 구간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 벼랑을 따라 다리 모양의 길은 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11 : 53.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천경사가 반긴다. 대숲 사이로 노란 벽이 인상적인 사찰이다. 탐방로는 이 절간을 오른쪽에 끼고 빙 에둘러간다.

 천경사 일주문. 절벽에 걸터앉은 절간답게 벼랑을 기둥삼아 누각 모양으로 지었다. 절간은 붓다나라 연수원을 겸하는가 보다. 하지만 1970년대 국제적 무술배우로 활동했던 왕호씨가 직접 지도한다는 왕호영화예술학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말고도 미술, 음악, 방송 등 각 분야의 전문 교수진들도 초빙한다고 했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천경사(天鏡寺)’는 용두산 자락의 절벽에 자리한 작은 절이다. 아니 터는 좁지만 크고 작은 전각들이 빼곡히 들어찬 실속 있는 사찰이다. 하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단다. 1988, 소실되어 이름만 전하던 작은 암자 터에 수원 스님이 중창했다고 한다.

 절간은 밀양강 강변의 비탈진 벼랑에 매달리듯 의지하고 있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크게 활처럼 휜 밀양강과 그 너머 볕 좋은 들녘 암새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밀양강을 가로막고 있는 용두보도 눈에 들어온다. 강을 한 일()’자로 가로막아 물을 모은 다음 수로를 통해 농경지(상남벌) 쪽으로 흘려보내는 거대한 물막이(수리시설).

 천경사의 주요 볼거리인 석굴법당은 찾아보지 못했다. 대웅전 아래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명심보감(明心寶鑑)용 법어(法語)들을 가슴에 새기며 절간을 나선다. ‘다 잘 될거야. 당신이니까 등등...

 12 : 03. ‘용두산 갈림길(이정표 : 금시당 1.8km/ 산성산 3km/ 용두연주차장 0.7km). 밀양아리랑길은 강변길(금시당 방향)’을 따른다. 용두산의 능선을 따라가다 금시당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스탬프 북에 도장을 찍고 싶다면 강변길을 따라가야 한다.

 산성산 등산로안내도. ‘용두산(龍頭山, 116m)’은 산성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자씨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의 형세가 흡사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설화에 따르면, 이무기가 하늘의 복숭아가 담긴 바구니를 몰래 훔쳐 나오다 용두목의 용에게 들켜 싸움이 났다. 그때 엎어진 바구니가 용두산이 되고, 용이 이무기를 치면서 쏟아 부은 물이 밀양강이 됐다고 한다.

 12 : 05. 길은 밀양강 쪽으로 대밭이 길게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잠시 걷자 용두보 갈림길이 반긴다. 두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용두보(龍頭湺)’는 수차 없이 강물을 상남벌의 농업용수로 제공해 주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수리시설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마쓰시타 베이찌로가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자행된 곡식 수탈의 흔적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도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니 토착왜구들에게는 좋은 얘깃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용두목에서 옛 별서 금시당까지 가는 강변길은 50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선비길이다. 조선 선비들이 학문을 닦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오가던 길이었다. 근세에 넘어오면서는 단장면 미촌리와 활성동 주민의 통행로이자 학생들이 등굣길로 이용하던 운치 있는 옛길이기도 했다.

 길 위에서 만난 구단방우(巫岩)’. ‘굿을 하는 바위라는 뜻의 지명으로 옛날부터 무당들이 이곳에서 굿을 하며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그 굿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모양인지 제단에는 과일과 술 등이 차려져 있었다.

 길은 수직에 가까운 바위지대를 지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다. 처마에 매달린 제비집처럼 잔도(棧道)를 놓아 안전을 도모했음은 물론, 오히려 낭만을 더해주고 있다.

 12 : 16. 길은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이때 밀양강에서 가장 길다는 징검다리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호사가들은 저 징검다리를 꼭 건너볼 것을 권한다. 밀양아리랑 노래처럼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종종걸음으로 건너는 기분이 색다르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는 다슬기 잡이 삼매경인 아낙네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스치듯 지나간다.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하지만 경사가 완만해 힘들지 않고 걷는 즐거움만 더해준다. 거기다 용두산 나무숲이 오뉴월 햇볕까지 막아주니 이 아니 즐거울 손가.

 숲길 왼쪽에는 밀양강이 흐른다. 덕분에 잠깐 잠깐이지만 밀양강의 물길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하나 더. 저 밀양강은 은어로 유명했었다. 청정수에서 자라 수박향이 강하고 감칠맛도 남달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은어를 찾아볼 수가 없단다. 1987년 완공된 낙동강 하굿둑 탓이다. 어릴 때 바다로 나갔다 다시 하천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길목이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강변길은 인간의 손길을 거부했다. 정비랍시고 지나친 포장을 안했다. 그러다보니 걷는 내내 강물소리와 풀냄새가 따라다닌다. 친환경 탐방로인 셈이다. 그렇다고 탐방객을 위한 배려까지 빼먹지는 않았다. 알록달록 예쁜 색상을 입힌 벤치로도 모자라 아예 드러누울 수 있는 의자까지 배치했다.

 12 : 32.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금시당(今是堂)’이다. 조선 명종 때 좌부승지를 지낸 이광진이 낙향해 지은 별서(別墅 : 현대의 별채·별장과 같은 개념)’로 주변 자연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는 영남지방 선비 가문의 전형적인 정자 건축물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이곳에 세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금시당(今是堂). 금시당은 이 별서를 지은 이광진(李光軫, 1513-1566)의 호다. 조선 성종 때인 1566년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후손들이 1744년에 복원했다. 이후 1867년에 증축을 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금시당 안에 백곡서원(栢谷書院)도 창건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하나 더. 고택 옆에 새 한옥을 짓고 후손이 살고 있었다.

 백곡재(栢谷齋). 금시당을 복원한 이지운(李之運, 1681-1763)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인 백곡을 이름으로 삼아 1860년에 지었다. 영조 때 학행으로 이름 높아 교남처사(嶠南處士)로 불렸던 분이다.

 12 : 40. 밀양시 국궁장(國弓場). 이광진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 아래서 잠시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자 국궁장이 나온다. 주말엔 누구나 국궁을 배울 수 있고, 직접 쏴보는 체험(4천원)까지 가능한 곳이다. 이후부터는 밀양강 둑길을 따른다.

 12 : 46. 활성교(活成橋).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지나자마지 오른쪽으로 간다(왼쪽은 잠수교를 건너 암새들로 이어진다). 이어서 활성교를 건넌다. 주민들에게는 살내다리로 더 익숙하단다.

 활성교 아래 밀양강변에는 금시당 유원지가 있다. 여름철이면 많은 야영객들이 물놀이를 즐기는 곳이다. 여름철이 아니더라도 차박(車泊)을 위해 찾아오는 이들로 항상 붐빈다고 했다.

 난간 아래로 펼쳐지는 풍광이 가히 압권이다. 밀양강은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어서 오라 손짓하고, 이웃한 들녘 너머로는 가지산·운문산·억산·구만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우람스레 펼쳐진다.

 12 : 52. 다리를 건넌 다음 벚나무가로수로 치장된 용평로를 따라간다. 왼쪽 옆구리에 끼고 왔던 밀양강을 오른쪽 옆구리에 바꿔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12 : 53. ‘용호정(龍湖亭)’. 조선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둔한 격제(格濟) 손조서(孫肇瑞(1412-?)’를 모시기 위해 일직손씨 문중의 묘역 아래에 지은 건축물이다. 주 건물인 정당과 정문격인 심경루(心鏡樓)로 이루어졌는데, 이중 심경루는 정면 3, 측면 2칸의 누각으로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뜻한단다.

 호수처럼 잔잔한 강물을 뜻한다는 용호정(龍湖亭)은 문이 닫혀있어 담장 너머로 곁눈질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편액을 달고 있는 대청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5칸 겹집이다. 참고로 손조서는 집현전학사를 거쳐 병조정랑과 봉산군수를 지냈다. 김종직과 교우했으며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정여창 등이 스승의 예로 섬겼다고 전해진다.

 도로가 1차선으로 바뀌었다. 옛 모습, 그러니까 1905년 건설된 경부선 철도가 놓여있던 시절의 풍경이라고나 할까? 1940년 경부선이 복선화되면서 선로가 다른 곳으로 이설됐고, 철길은 이제 비좁은 일반도로로 변했다.

 안내판은 오른쪽을 활성유원지라고 했다. 밀양강의 동천수(단장천)와 북천수(밀양강 본류)가 합류하면서 심연을 이루며 넓은 백사장을 만들어놓은 자연발생 유원지라나? 1566년 근재 이경홍이 그린 밀양12경도에도 나타나있는 명소라고 한다.

 13 : 02. 용평터널. 옛 경부선 철도의 또 다른 추억이다. 월연터널 또는 백송터널이라고도 하는데,  3m에 길이는 130m쯤 된다.

 증기기관차가 내뱉은 석탄 연기로 새까맣게 그을렸을 만도한데, 안은 잡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아니 은은한 조명이 터널을 신비롭게까지 만들어준다. 그래선지 사진을 찍으려는 젊은이들이 꽤 많이 보였다. 그들 덕분에 꽤 많은 차량들이 밖에서 기다려야 했지만... 참고로 터널은 일방통행만 가능하다. 때문에 안에 사람이나 차량이 있으면 입구의 전광판에 진입금지라고 뜨기 때문에 차량 진입이 금지된다.

 이곳은 정우성 주연의 영화 똥개가 촬영되기도 했다. 그래선지 생뚱맞게도 똥개터널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나?

 13 : 08. 터널을 피해 강변길을 따라간다. 그러자 또 다른 문화재인 월연정(月淵亭)’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월연정은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 등을 지낸 월연(月淵) 이태(李迨, 1483-1536)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직전 벼슬을 버리고 밀양으로 돌아와 지은 쌍경당과 월연대 일원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이 월연대, 왼쪽은 쌍경당 영역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후손들에 의해 쌍경당은 1757, 월연대는 1866년 복원됐다. 하나 더. 네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이곳 월연정에 설치되어 있다.

 강물과 달이 맑기가 한 쌍의 거울 같다는 쌍경당(雙鏡堂)’. 이태가 세운 월연정(月淵亭)의 건물 중 하나다. 함경도 도사 재직 중 기묘사화를 예견하고 사직·귀향한 이듬해인 1520년 용평의 월영사(月影寺) 옛터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기초를 닦아 건물을 지었단다.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 좋도록 방과 대청을 개방형으로 꾸미고 사철 기거할 수 있도록 아궁이를 두었다. 이밖에도 쌍경당 영역에는 제헌(霽軒)이 들어서 있었다. 이태의 맏아들인 이원량(李元亮)을 추모하는 건물로 1956년 지었다. 살림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쌍경당 영역을 빠져나오면 실개천. ‘쌍청교라는 돌다리를 건너자 배롱나무 꽃무리에 둘러싸인 월연대 영역이다.

 연못에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는 월연대(月淵臺)’는 정자 기능이 두드러지도록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방을 대청으로 둘렀다. 참고로 밀양의 아름다운 경승지 12곳을 일컫는 밀양십이경(密陽十二景)’ 중 하나인 연대제월(淵臺霽月)’은 월연대의 풍광을 가리킨다. 매월 보름이 되면 밀양강에 비친 둥근 달의 모습이 길게 달빛기둥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월주경(月柱景)이라고 한다나?

 월연대에서의 조망. 밀양강과 단장천이 합수하는 호수 같은 월연(月淵)’의 물결이 거울 표면처럼 맑다. 하지만 웃자란 배롱나무가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렸다. 하나 더월연대의 빼어난 승경 12곳을 일컫는 월연대십이경 징담제월(澄潭霽月)’을 제일로 치는데, 이는 거울 같은 저 수면에 맑은 달이 비치는 풍광을 묘사한 것이다.

 월연정(月淵亭) 정자 정()’자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안내판은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하나임을 강조한다. 2012년에는 월연정 일원 전체를 명승(87)으로 지정까지 했다. 그렇다면 먼저 뜨락 정()’자로 이름부터 바꿔놓아야 하지 않을까?

 월연정의 또 다른 명물이 백송을 살펴보기로 했다. 백송은 월연대에서 강가로 내려서서 20m쯤 올라가면 나온다. ‘백송나무 가는길(또는 보는곳)’이라고 적힌 팻말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참고로 백송의 나무껍질 색깔은 어릴 때는 회녹색이다가 나무가 자라면서 나무껍질이 계속 벗겨지면서 점점 회백색으로 변해간다. 그리하여 나이가 많이 들면, 껍질이 마치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흰색이 된다고 한다.

 최초의 월연정 백송은 약 500년 전 중국을 다녀온 사신이 가져와 쌍경대 북쪽 축대의 모서리 끝부분에 심었으나 1925년 대홍수 때 뿌리째 뽑혀 고사되었다. 하지만 최초 심었던 백송에서 솔방울이 언덕으로 날아가 자연 발아로 바위틈에 세 그루의 백송이 자랐다. 그중 한 그루는 2014년 태풍으로 고사되었고 현재 수령이 약 280년 된 마지막 한 그루의 백송 나무만이 살아남아 월연정 절벽에서 자라고 있다.

 13 : 20. ‘2코스와의 접점인 추화산성으로 가기 위해 등산을 시작한다. 산행은 월연대의 왼쪽(정문 앞)에서 시작된다. 초입에 이정표(추화산봉수대 1,561m/ 활성교 697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또렷한 편이다. 거기다 밀양아리랑길 엠블럼과 리본이 곳곳에 매달려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는 땀 깨나 쏟아야만 한다.

 13 : 42. 첫 이정표(추화산봉수대 761m/ 월연정 800m). 갈림길도 여럿 만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중요한 포스트에는 이정표를 세웠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엠블럼이나 리본이 길을 안내해 준다.

 13 : 53. 추화산성 남문 터(이정표 : 추화산봉수대 280m/ 월연정 1.28km). 5분쯤 더 걸어 사거리(이정표 : 추화산봉수대 500m/ 섬벌마을 1.5km/ 월연정 1.07km)를 만났다싶으면 곧이어 추화산성(남문 터)에 올라선다.

 밀양아리랑길 안내도가 ‘2코스와 만났음을 알려준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성황사 유지(밀양손씨 문중 사당)’와 추화산 정상(243m)으로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체력에 한계를 느낀 우리 부부는 이를 생략하고 곧장 추화산성으로 가기로 했다.

 성벽에서의 조망. 밀양시가지와 주변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밀양읍성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으로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13 : 58  14 : 21. 임도처럼 잘 닦인 길을 따라 5분쯤 더 걸으면 추화산성이다. 하지만 성벽은커녕 성터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분지처럼 널찍한 잔디밭과 건너편 언덕에 걸터앉은 봉수대가 다라고나 할까? 아니 식탁형의 의자까지 갖춘 멋진 쉼터를 겸하고 있었다. 덕분에 막걸리를 반주삼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봉화대 맞은편은 추화산(推火山, 243m)’이다. 산 이름은 밀양의 옛 이름인 추화군(推火郡)’에서 유래했다.

 이곳에는 다섯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정표(박물관 1.1km/ 월연정 1.5km)와 추화산성 안내판도 눈에 띈다. 추화산 정상 부분을 빙 둘러싼 산성인데,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보아 신라와 가야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던 시기에 만들어져 조선시대 전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단다. 특이한 것은 축성 초기에는 읍성(邑城)’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저 아래 들녘에서 농사짓던 백성들은 어떻게 이곳까지 왕래하며 살아갔을까?

 시야가 툭 터지는 민둥봉우리는 봉수대가 올라앉았다. 봉수제도가 국법으로 확립된 고려시대(1149)에 설치되어 갑오개혁(1894)으로 봉수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가락국의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할 때 봉화로 신호했다는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봉수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봉수대의 특징대로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높고 낮은 주변의 산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영남좌도연제 제2거서노선의 간봉선에 해당하는 주화산 봉수는 김해 성화예산에서 봉기, 분산·자암산·밀양백산남산을 거쳐 온 봉수를 경북 청도남산으로 전달했단다.

 14 : 27. 하산을 시작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하지만 나선형으로 만들어놓은 침목계단의 아름다운 곡선이 힘들다는 느낌까지 싹 날려버린다.

 산길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쓰레기는 물론이고 잡초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잡초 대신 지자체에서 이식해놓은 맥문동 등의 꽃들이 곳곳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탐방객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벤치마다 부채를 비치해두는 친절까지 베풀고 있다.

 14 : 45.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사거리(이정표 : 천문대 130m/ 추화산성 760m/ 좌우는 아리랑고갯길)가 나온다.

 이곳에는 출향인들을 위한 쓰리랑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고향을 떠나있는 출향인들에게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 숲의 특징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아닐까 싶다. 편백나무, 산수유, 산사나무, 매화나무 등 심어놓은 나무들마다 기증한 사람이나 단체의 이름이 일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건너편에는 밀양아리랑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월남전참전비(사진)과 충혼탑도 세워져 있단다. 하지만 정규탐방로에 벗어나있어 들러보지는 않았다.

 14 : 52. 여섯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된 밀양아리랑 우주천문대’. 국내 최초로 외계 행성·생명이라는 특화된 주제의 과학 체험공간으로 조성되었으며, 관측실·천체투영관·전시체험실 등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4층 주관측실에서는 세계 최초 음성인식 제어시스템이 설치된 70cm 구경의 고성능 망원경 별이로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

 14 : 56. 천문대를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간다. 이때 밀양성당을 스치듯 지나간다.

 14 : 58. 오른쪽에는 밀양시립박물관이 있었다. 밀양시립박물관은 1974 밀양군립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1993년 고고학 전문박물관으로 되었고, 2008년에는 이곳 교동으로 이전·개관했다. 상설전시실(역사실·민속실·유학실·서화실)과 화석전시관, 독립기념관 등을 거느리고 있다.

 갖가지 조형물들로 치장된 광장을 지나자 박물관이 반긴다. 삼한시대(변한) 미리미동국으로 불린 이래 오늘날 밀양시에 이르기까지 밀양지역의 풍성한 역사·문화 사료를 담고 있는 곳이다. 밀양아리랑 같은 민속놀이뿐 아니라 밀양의 유학자, 선비의 사랑방, 조선시대의 서화와 같은 특색 있는 전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밀양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영남지역 최초로 일어난 3·13 밀양 만세의거,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창단, 23회에 걸친 의열투쟁 등 수많은 항일 독립투쟁이 이곳 밀양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선지 박물관 안에 독립운동기념관을 별도로 두었는가 하면, 밀양시 출신 독립운동가 36인의 흉상이 둘러싸고 있는 조형물(선열의 불꽃 : 변건호 작품), 독립의열사숭모비, 파리장서비 등을 광장에 설치해 놓았다.

 15 : 07.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밀양대공원로’. 밀양읍성을 향해 왼쪽으로 간다. 오른쪽에 밀양향교와 손씨고가(孫氏古家)라는 문화재가 있으나, 약속된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 선답자의 GPX트랙도 두 문화재를 건너 뛴 채로 진행하고 있었다.

 15 : 21. 15분쯤 걷다가 만난 로터리에서는 오른쪽 3시 방향이다. 이어서 용평로를 따라 동문고개로 올라간다.

 15 : 26. ‘동문고개’. 고갯마루에는 밀양읍성(密陽邑城)의 동문이 들어섰다. 최근 복원된 동문은 크고도 견고한 것이 중국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었다. 가히 난공불각의 요새라고나 할까?

 ‘2020 공공미술프로젝트 혜택을 본 밀양읍성은 갖가지 조형물들로 치장됐다. 참고로 밀양읍성은 성종 10(1479)에 축조됐다. 대부분의 읍성이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밀양읍성은 100년 이상 일찍 만들어졌다. 높이 4.2m에 둘레가 2.2km인 성곽은 옹성(甕城치성(雉城해자(垓子)까지 갖췄었다고 한다. 하지만 1902년 성문과 성벽이 헐려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에 사용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15 : 29. 성곽으로 올라가는 진입로. 길섶의 붉노랑상사화가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혔다.

 상사화는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날 수 없는 연인에 빗대어 표현된다. 그래서 꽃말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됐다. 꽃은 잎을 생각하고, 잎도 꽃을 생각하지만 서로 만날 수 없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성곽을 따를 경우 만나게 되는 무봉대(舞鳳臺). 길을 달리 들었기 때문에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왔다.

 첨부된 지도(부산일보의 안내도도 같다)는 읍성의 성곽을 따라 영남루로 간다. 하지만 아리랑길 표식은 반대편(해발 88.1m 아동산을 가운데 두고)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이 길을 따른 탓에 우리는 명소 몇 곳을 둘러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15 : 35. 밀양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영남루에 이른다. 일곱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그건 그렇고 누각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왼쪽 언덕에는 작곡가 박시춘(1913-1996)의 생가가 있었다. 박시춘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시기에 유행가 3000여 곡을 지었다. ‘애수의 소야곡’, ‘비단장사 왕서방’,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 ‘봄날은 간다 등 하나하나가 당대를 풍미했다. 많은 사람들이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그의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일제의 패색이 짙어진 1943년 이후 학도병 참여를 권유하는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아내 같은 노래를 지어 친일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영남루(嶺南樓 : ‘國寶로 지정되어 있다)’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누각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로 꼽히는데, 신라 경덕왕(742-765) 때 신라 5대 명사 중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 누각으로 세워졌다. 화재·전쟁으로 몇 차례 소실됐다가, 1844년 밀양부사 이인재가 중건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하나 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누각은 기둥과 기둥 사이가 넓고, 땅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마루를 만들어 누각 자체가 시원하고 웅장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누각의 다양한 현판들도 주요 볼거리다. ‘강성여화(강과 밀양읍성이 한데 어우러져 그림과 같다)’ ‘용금루(높은 절벽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누각)’, ‘고남명루(문경새재 이남의 이름 높은 누각)’ 등 하나같이 영남루의 아름다움과 명성을 찬양하는 것들이다.

 누각 끝으로 발길을 옮기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만큼이나 가슴도 확 트인다. 육지 속의 섬 삼문동과 이를 에돌아나가는 물줄기가 어우러지며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

 널따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에는 천진궁(天眞宮)’이 들어서 있었다. 천진궁은 단군을 비롯한 역대 왕조 시조들이 배향된 사당이다. 조선 효종 때 건립됐으며, 원래는 객사(공진관)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을 비롯한 역대 왕조를 세운 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역할을 하고 있다.

 단군(檀君)으로 여겨지는 신상(神像). 곁을 지키고 있는 빗돌은 태상노군(太上老君). 칠원성군(七元星君), 삼신제왕(三神帝王)’이라 적었다. 우리네 시조가 이들의 직위를 겸한다는 얘기일까?

 마당에서는 밀양향토예술단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밀양백중놀이, 무안용호놀이, 감내게줄당기기, 밀양법흥상원놀이, 작약산예수제 등 밀양의 무형유산을 매월 첫째·셋째 주 토요일에 번갈아가며 보여준단다.

 영남루 근처에는 다른 문화재들도 여럿 있다. 천년고찰 무봉사(舞鳳寺)도 그중 하나지만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다. 발품만 조금 더 팔면 아랑각(조선 명종때 정절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은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모신 사당)이나 밀양이 낳은 역사적 인물인 사명대사 유정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15 : 52. 수변공원길로 가기 위해서는 돌계단을 내려서야 한다. 그런데 이 계단이 특이한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계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고 지그재그로 걸으면 경사로로 이용할 수 있다. 휠체어나 자전거, 캐리어 등도 다닐 수 있는 무장애 탐방로라고나 할까? 그래선지 위에서 내려다보면 심오함을 담은 조형작품을 연상시킨다.

 15 : 54. ‘밀양교를 건너 삼문동(三門洞)’으로 간다. 서울로 치면 여의도이다. 오래 전 이곳 삼문동은 강 건너 가곡동과 붙어 반도모양 지형을 이루고 있었단다. 그러다 1920년대의 대홍수가 반도의 허리를 끊어버렸고, 저곳 삼문동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렸다.

 영남루 앞, 밀양강의 둔치는 숫제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그 앞으로 흘러가는 강물이 영남루를 두고 떠나는 것이 아쉬운지 흐르지 않고 멈추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라며 아리랑 소리를 자아내는 듯하다.

 15 : 56. 다리 건너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하긴 이처럼 온전하게 영남루를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선지 글자조형물을 세워 포토죤까지 겸하도록 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밀양강의 본류가 바뀌면서. 물길을 잃은 영남루의 풍치는 내세울 게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만들어 놓은 게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징검다리가 놓인 ()’. 보를 막아 밀양강의 물을 가둠으로써 예전처럼 영남루 앞이 물로 넘실거리게 만든 것이다. 아무튼 물길 너머 영남루는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맞다. 저런 풍광이 있었기에 옛날부터 수많은 명사가 찾아왔을 것이고, 그럴듯한 시들을 남겼을 것이다. 영남루에 걸린 수많은 시판(詩板)이 그 증거다. 당대 최고의 인플루언서들이 핫플레이스를 찾았다가 일종의 리뷰를 남긴 셈이다.

 전망대 앞에서는 밀양아리랑 아트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밀양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장르의 젊은 작가들이 임시 공방을 열고 있다. 일단은 체험을 해보고 마음에 들 경우 구입하면 된다는 얘기다.

 15 : 58. 공방 몇 곳을 기웃거리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밀양강 제방을 따라간다. 둑 위에 차도가 부럽지 않을 만큼 널찍하니 산책로가 나있다.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던 밀양강 둔치가 언제부턴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바뀌었다. 산림유전자 보호림으로 지정된 삼문송림으로 약 2ha에 이르는 면적에 수령이 100년도 넘는 곰솔 2000여 그루가 울창하다. 소나무 아래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여름이면 맥문동, 가을이면 구절초가 만발한단다. 참고로 이곳 송림공원은 조선시대 말엽 고종 때 밀양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방수림으로 조성됐다.

 16 : 10. 송림공원의 끄트머리에서 둔치로 내려서니 이재금 시비가 반긴다. 밀양 출신 이재금(1941-1997) 시인의 시 도래재가 적혀있다.

 16 : 15. () 위에 놓은 징검다리(뚜껑을 덮었으니 엄밀한 의미의 징검다리는 아니다)를 건너면 용두교유원지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 15분을 걸었다. 앱이 12.59km를 찍고 있으니 추화산을 올랐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라 많았다는 얘기가 되겠다.

 

내포지역 문화유산 탐방

 

여행일 : ‘24. 8. 17()

소재지 충남 서산시 및 예산군 일원

여행코스 서산(개심사보원사지용현리 마애삼존입상및 예산(추사고택예산시장)

 

함께한 사람들 기분좋은 산행

 

특징 내포(內浦)는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충남 서북부의 비슷한 문화와 의식을 공유하는 지역을 총칭한다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는 가야산 전후와 오서산 이북의 열 개 정도의 고을이라며,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라고 썼다산이 험하지 않고 평야가 넓으며 바다가 있어 농수산물이 풍부하고느리고 여유로운 민도가 특징이며예술과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이다이번 여정은 그런 맛과 멋을 지닌 내포고을(서산·예산)의 4개 문화유적과 최근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예산전통시장을 방문한다.

 

▼ 여행의 시작은 개심사’(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내려와 647번 지방도를 타고 해미·홍성방면으로 7km쯤 내려온다. ‘운신초등학교(운산면 신창리)’를 지나자마자 좌회전개심사로를 따라 3km쯤 들어오면 개심사 주차장에 이른다차에서 내려 사하촌의 농·특산물 판매장을 기웃거리다보면 개심사 일주문이 반긴다. ‘상왕산 개심사(象王山開心寺)’라는 저 편액은 여원구선생이 썼나보다. ‘구당제(丘堂題)’라는 그의 호가 적힌 걸 보면 말이다.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이 세워지기 전, 개심사의 문지기 노릇을 묵묵히 수행해 왔다는 노거수이다. 개심사는 그동안 저 느티나무를 경계로 성()과 속()이 나뉘어 왔다. 길은 자연스레 지역주민들이 농·특산물을 파는 속세를 떠나 피안(彼岸)‘의 세계로 들어선다.

 널찍한 포장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쪽으로 휘어져나가는 자동차 길을 제켜두고 돌계단이 산자락을 향해 일직선으로 파고든다. 그 초입, ‘세심동(洗心洞)’이라고 쓰인 빗돌이 눈길을 끈다. 맞다. 누군가는 개심사를 일러 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절이라고 했다.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이 정연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면서, 세심동(洗心洞)에서 마음을 씻고, 안양루(安養樓)에서 마음을 연 다음, 심검당(尋劍堂)에서 지혜를 구해보라고 했다. 일련의 마음 수련이 파노라마처럼 연결되는 사찰이라면서 말이다.

 길은 꽤 가파르게 이어진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다. 부드럽게 휘어지면서 약간의 숨참만으로 절까지 오를 수 있도록 했다. 아무튼 이 계절은 눈을 어디에 두어도 녹색의 잔치다. 심장까지 푸르게 물들 것 같다. 그러니 최대한 속도를 늦추고 대신 숨은 크게 들이쉬면서 올라가 보자. 솔향이 코끝을 간질이며 기분이 상쾌해질 것이다.

 이곳은 세심동(洗心洞)’. 마음을 씻으면서 걷는 구간이다. 그러니 너무 채근하지 말고 느긋하게 걸어보자. 쉬엄쉬엄 걷다가 그마저도 힘들면 잠시 쉬어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20분 남짓 올라갔을까 안양루(安養樓, ‘누각이 아니지만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고 해서 가 되었다 보다)’가 중생을 맞는다. 말 그대로 안양(극락)으로 들어서는 과정이니, 이 누각을 지나면 바로 극락 세상이 펼쳐진다는 의미다. 하지만 극락으로 들어가는 길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 상당히 높은 계간을 두 번이나 지난 다음, 해탈문(解脫門)을 통과한 다음에야 대웅보전(大雄寶殿)’에 이르게 된다. 하나 더. 안양루는 상왕산 개심사라는 또 하나의 편액을 달고 있었다.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썼다는데, 무거울 대로 무겁고, 농익을 대로 농익었고, 깊을 대로 깊다는 평을 듣는 조선 말의 명필이다.

 개심사 배치도. 연못을 지나면 범종각, 해탈문, 안양루, 심검당, 대웅보전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밖에도 명부전, 무량수각, 독선당, 산신각 등 많은 전각들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터가 좁아선지 구석구석 들여다본다고 왔다 갔다 해 보았자 20분이면 족했다.

 초입의 장방형 연못은 백제정원 양식이라고 했다. 개심사의 역사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증거라나? ! 이 연못은 경호(鏡湖)’로 불린다고도 했다. 마음을 열고 자신을 연못에 비춰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개심사(開心寺)‘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하나 더. 이 연못은 상왕산(象王山, 가야산 줄기)의 코끼리(불교에서는 신성한 동물로 섬긴다)가 먹을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연못에는 부엽성(浮葉性) 연잎으로 한가득이다. 듬성듬성 노랑꽃도 피워내고 있다. 생김새로 보아 남개연으로 여겨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연꽃은 절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꽃이다. 진흙탕 속에서 고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물 밖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을 구원한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꽃으로 여겨지며, 나아가 어둠을 밝히는 빛과 극락정토를 상징한다.

 폭이 좁고 긴 연못 중간에는 통나무다리 하나가 놓여있다. 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경내로 들 수 있지만, 일부러 걸음 한 이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이 풍경에 반해 다리를 건너게 된다. 그러면서 양보와 배려를 배운다. 최근 큰 나무 두 개를 겹쳐놓았지만, 교차 통행을 하기는 여전히 좁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먼저 올라서면 반대쪽에서는 그 사람이 다 건너오기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니 양보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연못가에서 둥지를 튼 배롱나무 구부러지고 매끄러운 줄기에서 새빨간 꽃망울을 활짝 열어 제켰다. 개심사의 자랑거리이기도 한 이 나무는 41cm나 되는 굵기에 높이도 6m나 된단다. ‘보호수답게 나이도 150살을 훌쩍 넘겼다.

 연못을 지나면 범종각(梵鐘閣)’이 반긴다. 최근 개축을 했는지 아직도 송진 냄새가 폴폴 풍기고 있다. 하지만 휘휘 구부러진 나무기둥은 예나 다름이 없었다. 휘어진 대로 비틀린 대로의 육송 기둥들이 세상살이에 힘들고 고달파 뒤틀리고 꼬여진 우리네를 편히 다가오게 만들어준다고나 할까? 휘어지고 갈라지며 옹이 박힌 기둥들, 즉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에서 편안함과 위로를 느꼈기 때문이지 싶다.

 해탈문을 지나면 불국토라 할 수 있는 금당(金堂)이다. 개심사(開心寺)는 뜻 그대로 마음을 여는 절이다. 백제가 망하기(660) 불과 6년 전인 의자왕 14, 서기 654년에 창건되었으니 말 그대로 천년 고찰이다. 당시 절을 창건한 해감 스님은 절의 이름을 개원사(開元寺)로 했으나 고려 때인 1350년에 처능 스님이 중건하면서 오늘의 이름인 개심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1955년 전면 보수 공사의 결과물이다.

 1484년 건립된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143)은 조선 초 건물이 갖는 정갈함의 표상과도 같다. 다포식이지만 쇠서를 강하게 빼지 않아 장식적이지 않고, 맞배지붕을 하고 있어 단정하다. 안내판은 주심포계와 다포계가 절충되어 있는 걸 특징으로 꼽고 있었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부재를 공포라 하는데, 이러한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것을 주심포계’, 기둥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걸 다포계라 한다. ! 안에 모셔놓은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도 보물(1619)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사진촬영은 금하고 있었다.

 대웅전의 측문 섬돌. 기와 조각에 적힌 이곳에 신발을 올려놓지 마세요라는 문구에 미소부터 짓는다. 신발에서 이물질이 떨어질 때마다 물걸레질을 해야만 했을 스님의 애교스런 넋두리가 아닐까? 그런데 하나가 더 있다. 섬돌에 덧대서 만든 디딤판에도 같은 내용을 적어놓았다. 문제는 이 둘이 겹쳐지면서 경고판 같은 썩 편치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결과? 귀여운 넋두리가 일그러진 불평으로 변해버렸다.

 오층석탑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중정은 대웅보전과 안양루, 심검당, 무량수각이 둘러싸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심검당(尋劍堂)은 대웅보전을 전면에 두고 왼쪽에 있다. 그런데 높은 기단과 풍요로운 다포, 화려한 단청으로 이루어진 대웅전에 비해 심검당은 스산할 정도로 검박(儉朴)했다. 기거하고 있는 승려들의 마음을 나타낸다고나 할까? 심검당의 검이 마지막 무명(無明)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의 혜명(慧明)을 증득(證得)하게 하는 검()을 상징한다니 말이다.

 심검당의 검박함은 아래쪽에 덧댄 툇간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숲에서 자라난 뒤틀린 나무를 그대로 기둥과 서까래로 세우고 얹은 탓에 집의 모양까지 기우뚱하다. 격벽조차 제멋대로인 판재를 이어 붙였다. 이렇듯 개심사의 건물들 대부분(해탈문·범종각·심검당·요사 등)은 자연 그대로이다. 각 가람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굽어있고 배가 불룩하며 위아래의 굵기가 다르다. 매끈하지 않고, 참 못생겼다. 나무를 전혀 손질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대로 갖다 쓴 탓이다.

 요사채(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른편에 있는 명부전(冥府殿)은 겹벚꽃 맞이 장소로 알려진다. 오래된 돌담 아래로 탐스러운 가지를 늘어뜨린 모습이 세월을 머금은 절과 잘 어울린다.

 개심사는 붉은색·분홍색·흰색 등 여러 색깔의 겹벚꽃으로 유명하다. 꽃잎이 쌓이고 쌓여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만드는 겹벚꽃(만첩개벚) 4월 중순부터 핀다. 이곳 개심사가 봄 여행지로 꼽히는 이유이다. 하지만 개심사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명부전 옆에서 자라고 있는 청벚꽃이다. 푸른빛이 감도는 겹벚꽃은 오로지 개심사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절간을 빠져나오다 서해랑길 표식이 붙어있는 이정표를 만났다. 맞다. 이곳 개심사는 서해랑길의 지선인 ‘64-3’코스가 지나간다. 우리부부가 서해랑을 걸어온지도 벌써 3년째, 다음 주말에는 58코스(서천 지역)를 걷게 된다. 그러니 올 겨울쯤이면 이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 미처 보지 못한 문화재를 빠짐없이 둘러봤으면 좋겠다. 문화절정기인 영·정조 시대에 제작되었다는 영산화괘불탱(보물 제1264)와 오방제위도·사진사자도(보물 제1265), 제석·범천도 및 팔금강·사위 보살도(보물 제1766), 달마대사관심론 목판(보물 제1915) 등이다. 특별한 날에만 일반에게 공개된다고는 하지만...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신창저수지와 서산 한우목장을 눈에 담다보면 버스는 어느덧 용현리(개심사와 같은 운산면)’에 이른다. 두 번째 방문지인 보원사지(普願寺址, 사적 제316)’에 도착한 것이다.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보원사의 옛터로, 축구장의 2배도 더 되는 너른 부지에 삼국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축조된 유물들이 다섯 기나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안내판은 보원사가 백제시대에 지어졌음을 알려준다. 100개의 암자와 1천여 명의 승려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교국가인 조선이 들어서면서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자리에 민가와 논밭이 들어섰다가 다시 절터로 복원되었으나, 석물들만 남아 그 옛날의 자취와 영광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가야산 옛절터 이야기라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가야산에 숨겨진 옛 절터를 찾아 그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어가며 산행을 즐길 수 있는 등산로라고 한다. 산행을 하면서 불교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다나?

 첫 만남은 석조(石槽, 보물 제102)’이다. 치석수법(治石手法)이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조 중 국내에서 가장 크다(길이 3.5m, 너비 1.8m, 높이 0.9m)고 한다.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케 해주는 유물이라 하겠다. 이 석조 안의 물을 떠서 1000여 명의 스님들이 먹을 밥을 했고, 그 쌀뜨물이 용현 계곡을 뿌옇게 만들었다나? 특히 절의 행사가 있는 날이면 그 물이 홍수가 날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밋밋한 장방형으로 파낸 이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로 아래편에 구멍을 내어 물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안쪽과 위쪽을 정교하게 다듬은 반면 밖은 거친 것으로 보아 땅속에 묻어두고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나? 내 눈에는 오십보백보로 보였지만...

 석조 근처에는 높이 4.2m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103)’가 있다. 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자리도 옮기지 않고 제자리라고 한다. 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바깥쪽에만 양편 가장자리에 돌대를 돋을새김 하였다. 참고로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작은 개울을 건너면 길은 오층석탑(五層石塔, 보물 제104)’으로 이어진다. 백제와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으로, 2중으로 만들어진 기단부 위에 5층의 탑신을 형성했는데 안정감이 있고 수려하다. 1968년과 2003년에 해체·보수작업을 했는데, 1968년 해체 때 사리구와 함께 납석제 소탑(작은 모형탑)이 나왔다고 한다.

 석탑의 상하층 기단부에는 각각 팔부중상(부처의 법을 지키는 8명의 선신)과 사자장이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많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하나하나 꼼꼼히 보면 어느새 윤곽이 나타나고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진다. ! 안내판에 탑의 구조와 신상(神像)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으니 비교해가며 살펴보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 싶다.

 오층석탑 뒤에는 금당지(金堂址)’가 있었다. 절의 본존불을 모시는 건물, 즉 대웅전 같은 본당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놓여있는 초석만으로는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한가운데 있는 저 좌대는 부처가 앉아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금당 터 뒤편의 축대 위에는 법인국사탑(法印國師塔, 보물 제105)‘과 법인국사탑비(法印國師塔碑, 보물 제106)가 있었다. 이중 법인국사탑은 고려 초의 승려 탄문(坦文)의 승탑(僧塔 : 부도)인데, 광종 때 왕사가 되었고 은퇴하면서 국사가 되어 이곳 보원사에서 열반한 고승이다. 그러니 탄문이 입적한 975(광종 26) 어림에 세워졌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5m에 육박하는 부도의 온 몸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가득했다.

 법인국사탑비에는 법인국사 탄문에 대한 내력이 적혀있다고 한다. 까만 대리석에 빼곡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글은 김정언이 짓고, 글씨는 한윤이 썼다고 한다. 참고로 고려태조 왕건은 왕후가 임신하자 탄문에게 백일기도를 주문했고, 4대 왕인 광종을 낳았다. 과거시험과 노비안검법을 매개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왕이다. 왕건에 이어 혜종·정종·광종까지 4명의 왕이 모두 탄문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고, 국사가 되어 가야산 자락의 보원사로 옮겨갈 때는 광종이 왕후와 백관을 데리고 전송하였으며 어의를 보내 병을 살피게 했을 정도란다. 탄문은 다음해 3월에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으니 그 때 나이 75세다. 광종 또한 탄문이 죽은 지 2개월 후에 죽으니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다.

 탑비의 이수(螭首)는 사방에서 용이 모여드는 모양새를 취한다. 그런데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가 거북이가 아니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라는 게 특이하다. 하지만 몸통은 거북이가 분명했다. 그것도 꼬리까지 달린...

 탑비 뒤쪽으로 가니 숲속으로 난 오솔길이 보이고, 초입에 서해랑길 표식이 붙은 이정표(개심사 1.7km/ 마애여래삼존상 1.2km)가 세워져 있었다. 개심사에서 상왕산을 넘어 이곳으로 내려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라메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현재 서산시에는 아라메길이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아라는 백제 고유어로 바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바다와 산을 걷는 길이란 뜻이 된다. 고대와 중세 때 이 바닷길과 산길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이 들어오고 나갔다. 이러한 사실은 용현리 마애삼존불, 보원사지, 백화산 마애삼존불(태안) 등이 말해준다. 또한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 가기 전 해골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은 곳도 이 지역 이야기다.

 유적지를 모두 둘러보고 나서야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작은 절간이 눈에 들어왔다. 보원사 복원을 위한 임시법당이란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 보원사를 복원한다며 사적지 내 200평 정도의 땅을 기증받아 보원사를 개설하고 제7교구의 말사로 등록했다나? 하지만 난 유적지에 사찰을 짓고 중들이 관리하는 것은 절대 반대다. 언젠가는 또 문화재관람료라는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30년 가까이 등산을 해오면서 절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은 채 입장료를 강탈당한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절간 옆 안내판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여래입상(국립부여박물관 소장)과 고려시대에 제작된 철불좌상 등이 있다. 이중 철불은 해외에서 열리는 전람회 때마다 출품되는 스타라고 한다. 철조여래좌상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에 대한 설명도 눈에 띈다.

 그 옆에는 와편과 석조물들이 정리되어있었다. 아마 이곳을 발굴하면서 나온 듯한데 그 양이 상당하다. 지난날 보원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다시 버스를 타고 아까 들와왔던 길로 1km쯤 되돌아가다 용현계곡에서 내린다. 버스정류장(마애여래삼존상) 말고도 유적지의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목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용현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산림이 우거져 여름철 휴양지로 유명하다. 그래선지 많은 사람들이 용현계곡을 찾아 여름철 끝자락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나무다리를 이용해 용현계곡을 건넌다. 반대편 산자락으로 들어붙자 데크 탐방로가 맞는다. 이쯤에서 마애삼존불을 대중들에게 알린 유홍준 교수의 글을 빌어보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삼존불과 관련된 에피소드와 함께 30여 년간 서산마애불을 관리해온 노인장의 사연이 실려 있다.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선생이 보원사터를 올 때마다 동네 사람들에게 바위에 부처님 새긴 것이나, 석탑이 무너진 것 등을 묻곤 했는데 어느 날 나이 많은 나무꾼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산 중턱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바위에 새겨져 있유. 양 옆에 본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도 있는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 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 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집어던질 려고 하는 게 있슈.> 어느 전문가의 해석보다도 현실적이고 그럴듯한 해석이 아니겠는가.

 잠시지만 용현계곡을 왼쪽에 끼고 올라간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테크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가파른 돌계단이 나타난다. 하지만 길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거기다 이곳은 울창한 숲속. 빛살 한 점 파고들기 힘들 정도로 숲이 우거져있다. 조금 전 따가운 햇볕 아래서 고행하듯 보원사지를 둘러보던 것에 비하면 숫제 소풍 나왔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잠시 후 관리사무소에 올라선다.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는 곳으로 원할 경우 마애여래삼존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관람시간은 제한을 두고 있었다. 문화제 훼손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닐까 싶다. 일부 몰지각한 광신도(어느 종교나 이런 사람들은 있다)들이 다른 종교의 문화재들을 훼손했던 게 어디 한두 번이었는가.

 불이문(不二門)’을 넘어야 마애삼존불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불이라 함은 둘이 아님을 뜻하는데, 생과 사, 부처와 중생 등 분별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르지 않음을 말하는 불교의 교리다. , 불이를 깨닫고 속세로부터 벗어나(解脫), 진정한 불국토에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불국토(佛國土)는 불이문을 지나서도 한참을 더 걸어야 만날 수 있다. 돌계단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간다. 하긴 부처님의 나라에 드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 국보 제84)’은 동문리(태안) 마애삼존불입상(국보 제307)과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꼽힌다. 높이 10m가 넘는 거대한 암벽을 깎아 만든 마애여래삼존상은 풍부한 입체감과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높이 2.8m의 석가여래입상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높이 1.7m 협시보살을 두었는데 우측의 보살은 보통의 보살입상이지만 좌측의 보살은 특이하게도 반가사유상의 형식으로 조각되었다. 반가사유상은 6-7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불상으로 많이 제작되었지만 마애불 중에서는 사례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화강암 암벽에 조각한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가운데 석가여래입상은 엄숙하면서도 넉넉한 미소로, 왼쪽의 제화갈라보살입상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오른쪽 미륵반가사유상은 천진난만하고 꾸밈 없는 미소로 맞이한다. 80도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는 미학적 설계도 뛰어나다. 1965년에 삼존상을 보호하겠다고 보호각을 설치했는데 오히려 습기가 차고 백화현상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자 2005년부터 문과 벽을 부분적으로 철거했고 2006년에는 완전히 철거했단다.

 이들 마애불의 미소는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불상의 미소는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자애로워 보이는 웃상(웃는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며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간다.

 도로로 되돌아오니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입구 주변의 주차장은 모두가 식당이나 민박집의 소유라서 차를 댈만한 곳이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공용주차장까지 500m정도를 더 걸을 수밖에 없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다.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무더운 날씨에 걷는다는 것은 재난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볼거리를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그중 하나가 인바위(印巖)’, 이를테면 도장바위이다. 전설은 오랜 옛날 상왕(像王)이 이곳에다 도장(금 나와라 뚝딱 하는 요술방망이였단다)을 감춰 놓았다고 전한다. 고을 수령이 이 말을 듣고 석공을 불러 큰 정으로 바위를 깨뜨리려고 하자 갑자기 운무가 모여들더니 천둥과 함께 소낙비가 내려 산천이 진동하더란다. 크게 놀라 도망간 수령이 그 후에는 얼씬도 못했음은 물론이다.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강댕이미륵불이 나온다.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모셔놓았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7000만 년이 지나 이 사바세계에 오시는 부처님이다. 그래선지 이 미륵불에 기도를 드리려 찾아오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단다. 인근 고풍저수지를 축조할 때 수몰지역 안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는데,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이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 ​고려말-조선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미륵불은 높이 216cm에 어깨의 폭은 65cm, 두께는 25cm이다. 머리에 보관을 썼으며, 오른팔을 위로 올려 가슴에 붙이고, 왼팔은 구부려 배위에 대어 서산지방의 다른 미륵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추사 고택’. 인근 고을인 예산에 위치하기 때문에 버스로 30분 이상을 이동해야 한다. !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개심사를 인근의 서산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 해미읍성과 함께 한나절로 답사를 마칠 수 있는 최고의 코스로 소개했다. 하지만 우린 해미읍성 대신에 추사고택을 묶어보기로 했다. 예산군에 소재하고 있어 조금 멀지만 점심이 예정되어 있는 예산 전통시장(예산읍 소재)으로 보면 지근거리이기 때문이다.

 추사고택(秋史故宅)’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생가로, 예산군(신암면) 용궁리의 나지막한 언덕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집 앞은 예당평야, 평야 너머로 삽교천과 무한천이 흐른다.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혼인해 용궁리 일대를 하사받고 이 집을 지었는데, 당시 충청도 53개 군현이 한 칸씩 비용을 분담해 53칸으로 지어졌다고 전한다. 1976년 복원사업을 해 현재 안채·사랑채·사당 등 34칸이 남아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자의 사랑채가 맞는다. 사랑채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자로 꺾이는 곳에 대청을 두고 온돌방이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 있다. 큰방이 추사가 머물던 곳이다. 방안에는 추사의 글씨로 만든 큰 병풍과 보료서탁이 놓여 있다.

 안채는 사랑채에 살짝 비켜서 있다. 사랑채가 동향인 데 비해 안채는 남향으로 자리한 자 집이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대갓집 형태로 6칸의 대청과 두 칸의 안방, 그리고 건넛방이 있고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도 보인다. 전체적으로 넓지는 않지만 이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정갈한 마음을 엿보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안채는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가 머물던 집이기도 하다. 화순옹주는 김정희의 증조모다. 그건 그렇고 고택은 주련 천지였다. 기둥마다 하나씩 매달고 있어 눈만 들면 주련의 글씨가 성큼 다가온다. 주련은 글씨마다 추사의 성품과 노력과 고난이 배어있다. 그러니 하나하나 살펴보며 그의 자취를 따라가 보자. 한자를 몰라도 하등 문제가 될 게 없다. 하단에 글귀의 한자와 음 그리고 뜻이 적혀 있다.

 울타리 밖에는 우물이 있었다. 가문 대대로 이용해온 우물로, 김정희의 출생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민규호(閔奎鎭, 1836-1856)가 쓴 완당김공소전(阮金公小傳)’에 따르면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지 24개월 만에 김정희를 낳았다고 한다. 그 무렵 우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의 풀과 나무들이 모두 시들었는데, 그가 태어나자마자 우물이 다시 차오르고 나무와 풀들도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우물 근처에 있는 김정희의 묘(). 묘는 봉분도 높지 않고 석물들도 고만고만하다. 하지만 범접하지 못할 기품을 갖추고 있었다. 참고로 김정희의 묘에는 첫째 부인 한산이씨와 둘째 부인 예안이씨가 합장되어 있다. 하나 더. 유배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머물다 생을 마쳤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 계속 글을 썼는데, 죽기 사흘 전에 쓴 봉은사 경판전의 현판이 마지막이었다고 전해진다.

 고택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길은 소나무 숲과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 묘, 그리고 화순옹주 홍문을 거쳐 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으로 이어진다.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의 묘(月城尉金漢藎墓)’. 이 묘에는 김한신과 그의 부인인 화순옹주가 합장되어 있다.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은 13세에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진다. 영조가 애지중지했던 외동딸 화순옹주는 13살에 동갑의 김한신과 부부의 연을 맺고 25년을 살았다. 39살이 되던 해 남편이 세상을 뜨자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물 한 모금 넘기지 않은 채 지내다가 보름 만에 남편을 따라갔다고 한다.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 홍문(紅門). 영조의 둘째 딸이자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정면 8, 측면 1칸의 열녀문이다. 옹주는 동갑인 남편 월성위(1720-1758)가 세상을 떠나자 음식을 입에 대지 않다가 보름 뒤 따라 죽었다. 조선 왕실 여성 중 유일하게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 영조가 화순옹주의 집에 찾아와 미음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고 한다. 영조가 부왕의 뜻을 저버렸다 하여 정려를 내리지 않았으나, 조카인 정조가 고모의 사후 25년인 1783년 정절을 기리며 열녀문을 세웠다.

 안에는 묘막(墓幕) 가 있었다. 53칸이나 될 정도로 거대했으나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주초(柱礎)만이 남아 있다. 하나 더. 이쯤에서 고모의 정절을 칭송하는 정조의 글도 한번쯤 음미해보자. <부부의 의리를 중히 여겨 같은 무덤에 묻히려고 결연히 뜻을 따라 죽기란 어렵지 않은가.  어찌 우리 가문의 아름다운 법도에 빛이 나지 않겠는가.  ! 참으로 어질도다>

 홍문 옆엔 백송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최근에 만들었는지 조형물의 색깔이 티끌 하나 없이 선명하다. 이곳에는 여러 그루의 어린 백송이 심어져있다고 했다. 세월이 가면 그 흰 등걸의 아름다움이 곁의 조각품들과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리 넓지 않은 면적이지만 추사가 남긴 서예작품을 주제로 한 조각 작품들이 꽤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추사의 글씨를 한 번 더 살필 시간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진짜 백송을 구경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더위, 그것도 뙤약볕 아래서 700m(왕복 거리)를 더 걷는다는 게 무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신 추사기념관을 더 꼼꼼히 살펴보기로 했다. 참고로 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은 추사가 25세 때 청나라 연경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자란 아름다운 모양이었지만, 현재는 두 가지는 말라 죽고 한 가지만 남았다고 한다.

 추사기념관. 추사를 연상하기에는 어쩐지 어색해 보이는 디자인의 2층 건물이 주차장 한켠에 있다. 이름처럼 안에다 추사 김정희의 삶과 학문, 예술의 세계를 펼쳐놓았다. 추사의 작품 50, 71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단다.

 추사 연보 및 유년기가 적힌 입구로 들어서면 추사의 학문과 업적(1전시실), 제주 유배기와 만년기(2전시실), 서예사 및 추사의 서예개관(3전시실), 추사의 서예 작품 및 심훈 기증 유물(4전시실), 영상실 등이 차례로 나온다. 체험실에서는 추사 낱말 퍼즐 맞추기, 틀림 그림 찾기 등도 체험해 볼 수 있다.

 추사의 수많은 서예 작품과 기증유물을 만나 볼 수 있다. 추사는 끊임없이 단련하고 타고난 천품으로 서예에 구현했다고 알려진다. <나는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추사의 다양한 서체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된다. 추사는 고증학의 문호를 개설한 학자이며 문장가다. 글씨는 물론이고 그림에도 뛰어나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금석학 연구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천문학·지리학·문자학·음운학에도 정통했다.

 가슴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한학과 사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실제로 가문의 비문을 직접 짓고 쓰기까지 할 정도였다)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주장하며 졸필인 나를 줄곧 못마땅해 하셨다. 이왕에 들어선 관직이니 승승장구해야 할 것이 아니냐며 말이다. 그런데 추사선생이 그 원인이 책을 덜 읽어서였다고 알려준다. 나도 꽤 많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해왔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밖으로 나오니 세한도(歲寒圖)가 반긴다.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제자인 역관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기념관 앞 이정표. 내포문화숲길은 충청남도 서북부지역에 조성된 길이 315.3km의 걷기 길이다. 서산시·당진시·홍성군·예산군이 역사·문화·생태적 가치가 있는 자연 친화적인 4개 테마별 숲길(26코스)을 조성하였다. 그중 백제부흥군길이 이곳을 지나가는 모양이다. · 당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역사적 의미를 갖는 지점들을 연결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기념관을 마지막으로 추사고택 투어는 끝을 맺는다. 버스로 향하는데 추사선생이 뭐라도 좀 챙겨 가느냐며 이별을 아쉬워한다. 참고로 1819년 문과에 급제한 추사는 규장각 대제·호서안찰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친다. 55세 때 윤상도 옥사에 연루돼 9년에 걸친 제주도 유배생활을 했다. 65세 때는 진종조예론(眞宗弔禮論)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다시 2년간 함경도 북청에 유배됐다. 하지만 추사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예술로 승화시켜 추사체라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를 만들었다. 스스로 불우를 딛고 불후의 작품들을 남긴 것이다.

 추사고택의 상사화(相思花). 상사화는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날 수 없는 연인에 빗대어 표현된다. 그래서 꽃말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됐다. 그런데도 집사람은 상사화를 배경삼아 활짝 웃는다. 우리 사랑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우리 부부는 하루 24시간을 내내 붙어서 다닌다. 상사화를 비웃는 것은 아니지만.

 ! 이왕에 왔으니 포토죤에 올라가 사진을 남겨보면 어떨까? 글씨라도 써내려가다 보면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눈요기를 마쳤으니 이젠 먹거리를 찾아 나설 때다. 그렇게 찾아간 예산읍은 군청 소재지다. 도시계획을 새로 새운 듯 군청과 각종 행정기관은 대부분 외곽에 있었다. 하지만 입소문을 탄 맛집들은 하나같이 노포,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옛 동네에 들어앉아 있었다.

 ! 대한민국에도 저런 시설이 있었다니. 10년쯤 전, 두바이 인근을 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 이때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버스정류장에서 땀을 식히며 놀라워한 적이 있는데, 이곳 예산에서 그런 냉방 버스정류장을 본 것이다.

 우리 부부가 찾아든 곳은 외갓집 한우 암소국밥’. 2대를 이어온 음식점이란다. 안에는 백종원씨와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주인장의 사진을 내걸어 신뢰감을 더해주고, 유명 연예인들의 사인지도 엄청나게 많이 붙어 있었다. 맛과 양도 훌륭했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예산 국밥은 다른 지역 시장과 차별화된 맛으로 유명하다. 평야와 들판, 낮은 구릉이 많은 지리적 특성이 농사와 축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수도권과 활발한 수운 교류는 예산 지역의 활발한 오일장 문화를 형성했다. 오가는 보부상들은 빠르게 먹을 식사를 찾았고 그 결과 자연스레 국밥 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백종원 거리로 불리며 관심을 모은바 있는 국밥거리’. 가게 지붕을 볏짚으로 덮고 표주박을 걸어 조선시대 주막을 연상시키는데,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 낸 국밥가게가 즐비하다. 가게 간판에 원조라고 쓰여 있거나, 6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한다. 사장님의 증명사진이 걸린 가게도 있다. 하지만 작년에는 백종원씨가 자신의 이름(7년 전인 2016년부터 백종원이란 이름을 사용해왔다)을 떼고 철수한다고 밝히기도 했었다. 그게 사실이었던지 백종원이란 이름이 브랜드화 되어있다시피 한 대로변 음식점들과는 달리 국밥거리에서는 백종원씨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입소문을 탄 음식 몇 가지를 사가기 위해 예산전통시장으로 간다. 아니 정확히는 장터광장’. 터가 좁은 전통시장의 흠을 상쇄시키고자 널찍한 광장을 만들고 테이블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2023 1. 예산시장은 새롭게 리뉴얼했다. 그리고 이 뉴트로 시장은 그야말로 초대박이 났다. 주말이나 예산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전국적으로 엄청난 인파가 모여든다고 한다.

 예산시장은 게이트가 총 8곳이라고 했다. 많은 점포로 둘러싸인 이곳 장터광장은 1번 게이트이다. 광장의 테이블에 앉기 위해서는 게이트에서의 대기번호 접수가 필수라고 했다. 전국적으로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염경보는 이마저도 훼방을 놓는 모양이다. 주말인데도 꽤 많은 테이블이 비어 있었고, 대기줄도 운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참고로 메뉴 주문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대기번호를 접수하고 카톡으로 자리를 안내받은 뒤 매장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된다. 음식은 각각의 매장에서 먹어도 되고 광장으로 갖고 나와서 먹어도 된다.

 하지만 우리가 찾고 있던 매장에는 전통시장 안으로 들어오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별수 없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장소, 예산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예산시장은 꽤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공식 시장 인가는 1926년에 받았지만, 조선 후기부터 시장이 형성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1980년대에는 지역 주민과 상인으로 붐볐지만, 1990년 이후 수도권으로 인구가 유출되며 시장의 규모는 점차 축소됐다.

 그러던 2018, ‘더본코리아의 백종원 대표가 예산군과 상호 협약을 체결하여 예산시장 일대에 예산형 구도심 지역상생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시장의 낙후된 시설을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정비했고 상인들에게 '더본코리아'에서 개발한 레시피를 제공했다. 아무튼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정신없는 나와는 달리 집사람을 거침없이 시장을 누빈다. 그리고는 광시 카스테라를 찾아냈다. 우리를 장터광장으로부터 이곳으로 오게 만든 장본인이다.

 집사람은 이신복 꽈배기도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다. 내일 교회에서 만날 손주들에게 건네준다며 넉넉히 주문하고 있었다.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는지 두 집 모두 줄을 서야만 했고,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안동선비순례길 1코스(선성현길)

 

여행일 : ‘24. 8. 3()

소재지 : 경북 안동시 와룡면 및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오천유적지보광사예끼마을선성수상길호반자연휴양림월천서당(거리/시간 : 13.7km, 실제는 13.42km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오천유적지(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타고 안동방면으로 내려오다, 지곡교차로에서 928번 지방도(녹전방면으로 28km), 녹전삼거리에서 935번 지방도(안동방면으로 8km), 서부교차로에서 35번 국도(안동방면)로 옮겨 10km쯤 들어오면 오천유적지에 이르게 된다. 1코스 들머리는 유적지 입구에서 80m쯤 못 미친 지점에 있다.

 안동선비순례길(91.3km)’ 9개 코스는 각 구간마다 옛 선비의 발자취와 이야기가 담겨있다. 선성현길·도산서원길·청포도길·왕모산성길·서도길 등 코스의 이름에 걸맞게 서당·서원·향교·고택과 퇴계 이황을 비롯한 선비들의 숨결을 느끼고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1코스(선성현길)에는 고고한 선비정신을 지키며 살았던 군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 하여 군자리라는 이름을 얻은 외내마을부터 현대판 선비들의 놀이터 예끼마을’, 물 위로 늘어진 선성수상길을 지나 월천서당까지 수많은 선인이 우리 앞을 걸어가며 길을 안내한다.

 11 : 14. 길을 나서기 전 오천유적지부터 들러본다. 찾아가는 정보는 물론이고 근처에 오천유적지가 있음을 알리는 그 어떤 정보도 접할 수 없지만, 이곳으로 들어왔던 길을 따라 조금 더 걷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튼 70m쯤 걸어 모퉁이를 돌아서자 오천유적지의 입구임을 알리는 대문이 반긴다. ‘선경유방 유장백세(善慶遺坊 流長百笹)’. ‘선을 행하고 쌓음으로서 집안에 경사가 있고, 그 가풍이 영원히 이어 간다라는 뜻이다.

 100m쯤 더 들어가면 20여 채의 고가(古家)가 들어앉은 안배된 유적지가 맞는다. ‘오천유적지로 광산김씨 예안파가 20여 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세거해 온 마을이다. 1974년 안동댐에 물이 차면서 외내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자 고가들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참고로 오천이란 지명은 동네 앞 하천에서 유래됐다. 수몰 전 낙동강으로 흘러든 물이 맑아 물 밑에 깔린 돌이 검게 보여 까마귀 오’()자를 썼다고 한다.

 읍청정(揖淸亭).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선조 때 문신 후조당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지었다는 후조당(後彫堂)’이다. 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안에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대신 협문으로 연결되는 별채(안채와 사랑채) 및 김부의(金富儀, 1525-1582)가 건립한 읍청정(김부의의 )’을 둘러볼 수 있었다.

 김부의는 형인 김부필처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읍청정의 편액을 이황이 써준 이유이다. 이렇듯 이 마을은 가문의 영광으로 내세우는 불천위(不遷位)를 세 분이나 모시고 있단다. 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학문이 높아 나라가 영구히(보통은 4대 봉사로 끝낸다)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한 신위를 말한다.

 이들 건물 앞에는 설월당(雪月堂)’이 있었다. 설월당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이 학문과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한 정자라고 한다. 그 역시 퇴계의 문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가산을 털어 향병을 지원했다고 전해진다.

 계암정(溪巖亭).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은 평생 대의명분을 신조로, 광해-인조 연간의 혼탁한 시절 속에서 꼿꼿하게 지조를 지킨 인물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맏아들을 의병으로 보내고 가산을 털어 군비에 보태기도 했다. 하나 더. 옆에는 김유(金綏, 1491-1555)가 지었다는 탁청정(濯淸亭)’도 있었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하니 이는 물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라나?

 침락정(枕洛亭). 의병대장 김해(金垓)의 아들인 김광계(金光繼, 1580-1646)가 세운 정자다. 일명 운암정사(雲巖精舍)라고도 하는데, 대청 뒤쪽 벽에 지금의 당호와는 다른 운암정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 후진을 모아 강론하는 데도 사용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밖에도 김부인(金富仁, 1512-1584)이 지은 산남정(山南亭)’, 김부신(金富信, 1523-1566) 양정당(養正堂)’, 지애정(芝厓亭), 장판각(藏板閣) 등 수많은 고가들이 산기슭의 경사면 곳곳에 들어앉아 있다.

 군자고와(君子古瓦)’에서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이는 군자마을 일부를 한옥스테이로 개방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위에 있는 아호고려(雅湖古麗)’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하나 더. 고택도 흐르는 세태를 무시할 수는 없었던 듯, 아호고려에는 인스타그램 인증사진 촬영장소가 만들어져 있었다.

 지애정(芝厓亭)’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었다. 하긴 수운잡방(需雲雜方, 보물 제2134)’이 탄생한 고을이니 어련하겠는가. 참고로 이곳은 군자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입향조의 종손과 외손 7명을 오천 7군자라 불렀는데, 모두 퇴계의 제자로 도덕과 덕행이 높았다. 정구라는 이가 마을에 들렀다가 한 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 이후 마을 이름도 군자리로 불렸다. 그런 인물들 중 입향조의 둘째 아들인 탁청정 김유는 수운잡방이라는 책을 남겼다. 16세기 안동 음식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안동식혜를 비롯해 안동 전통 음식에 대한 고유한 비밀을 담고 있다.

 안동선비순례길은 도산구곡(陶山九曲) 주변을 따라 선비의 숨결을 느끼고 그 흔적을 찾아보며 걷는 여행길이다. 그중 1코스인 선성현길은 도산구곡 중 첫 번째 물굽이인 운암사곡(雲巖寺曲)’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운암산(雲巖山)의 산기슭 강변에 있던 운암사라는 절에서 따온 지명인데, 절은 오래전부터 없어졌었다. 아니 지금은 그 터마저도 물속에 잠겨버렸다. 그러니 옛 선비들이 배 띄우고 놀던 아름다운 풍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저 녹색으로 물든 호수만 눈에 들어올 따름.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고나 할까?

 11 : 37. 들머리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시작한다. 초입에 1코스 표석과 함께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참고로 오천유적지를 둘러보는 데는 23분이 걸렸다. 1.21km를 걷는데 소요된 시간이다.

 초입에는 오천유적지 등산로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선비순례길은 트레킹이라기보다 산행에 가깝게 시작되고 있었다. 통나무계단을 가파르게 올라선 다음에도,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11 : 49. 산길로 들어선지 12. 임도(외내길)로 내려선다.

 갓을 쓴 이정표(월천서당 11.0km/ 오천유적지 2.7km)가 우리가 지금 선비순례길을 걷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멋진 아이디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담고 있는 정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기 딱 좋았다. 1코스 표석이 세워진 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 0.65m, 오천유적지에서 출발했다고 쳐도 0.9km에 불과한데 이정표에는 2.7km로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11 : 53. 임도를 따라 잠시 내려오면 35번 국도(이정표 : 월천서당 10.5km/ 오천유적지 3.2km)를 만난다. 삼거리의 버스정류장이 이곳이 당고개임을 알려준다. 옛날 이 근처 어디쯤에 성황당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후부터는 국도를 따른다. 조선 최고의 유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을 배출한 고장답게 도로 이름도 퇴계로로 붙여놓았다. 선생의 탄생지가 안동부 예안현(禮安縣, 현재의 도산면·예안면 일대)’이었으니 말이다.

 탐방로는 안동호를 끼고 간다. 와룡면 중가구리로 흐르는 낙동강의 협곡에 높이 83m, 길이 612m의 댐을 쌓아 만든 낙동강 수계의 최대 인공 저수지이다. 조금 더 좁히면 안동호의 상류, 도산구곡의 1곡과 2곡의 중간쯤이 된다.

 12 : 14. ‘역동선생유허비(易東先生 遺墟碑)’. 유허비란 한 인물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는 빗돌을 말한다. 역동(易東)은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우탁(禹倬, 1262-1342)의 호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우탁 선생의 옛 집터이거나 그의 위패를 모시던 서원이 있던 자리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아니 안동댐의 수몰을 피해 1975년 이곳으로 옮겨왔다니 원래의 터는 이곳이 아니었다.

 우탁은 고려 후기의 대학자이자 성리학의 선구자로 알려진다. 동방(東方)에서 가져온 주역 1개월 만에 터득했다 하여 역동선생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로 시작되는 대표작 탄로가(歎老歌)’는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늙음을 인위적으로 막아보려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12 : 16. ‘안동호 수상레저 마린’. 안동호와 임하호를 보유한 안동은 물의 도시이다. 덕분에 수상스키와 웨이크보드, 워터슬라이드, 블롭점프 등 수상레포츠의 천국으로 알려진다.

 도로 건너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물놀이하러 찾아온 이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성수기인데도 잔디밭에 방치된 모터보트가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든다. 녹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최근의 안동호’, 녹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저런 물속에서 노닐고 싶은 사람들은 없었을 게고, 할 일이 없어진 보트는 저렇게 낮잠만 잔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예안교가 맞는다. ‘역계천(驛溪川)’ 하류를 가로지르는 다리로 와룡면과 도산면을 이어주는 소통의 가교이기도 하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안동호’. 도산구곡의 1곡인 운암사곡이 끝나고 2곡인 월천곡이 시작되는 어림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12 : 19. 다리를 건넌 선비순례길은 오른쪽 호안으로 빠져나간다. 호숫가를 따라 데크 탐방로가 나있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퇴계로를 따르기로 했다. 탐방로에서 살짝 비켜나있는 보광사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12 : 23. 보광사 표지석이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란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라고 권하고 싶다. 조금만 더 가면 보광사의 후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표석의 지시대로 들어서니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보광사가 얼굴을 내민다. 비탈진 언덕 아래를 지나가는 선비순례길의 데크 탐방로도 눈에 들어온다.

 12 : 25. 보광사(寶光寺).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주민들의 발의에 의해 1962년 창건됐다(디지털안동문화대전). 원래는 예안면 동부리에 있었으나 안동호의 수몰을 피해 197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역사가 일천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소장하고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 유물(보물 제1571)’은 그런 선입견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하다. 인근 용수사(龍壽寺)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지는데, 봉정사(안동)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620)과 함께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보살상이라고 한다.

 절간 앞은 큼지막한 정자가 들어앉았다. 안동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길 수 있는 멋진 쉼터이다. 아니 절간의 독경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시 졸다 갈 수도 있겠다.

 정자 옆에서 나무계단을 이용해 선비순례길로 내려선다.

 승려들이 일구는 듯한 작은 텃밭을 만나기도 한다. 중국 당나라 때 고승으로 유명한 백장선사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했다. 중생들에게 일은 삶의 한 방편인 노동을 뜻하나 사찰에서는 수행의 하나로 여겨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 저 텃밭은 일터이자 수행처가 분명하다.

 호숫가로 내려서면 안동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녹색으로 멍든 물빛이 그 감흥을 절반 이하로 뚝 떨어뜨려버리지만.

 길을 내느라 고생한 흔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 구간은 통나무를 울타리처럼 세워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았다.

 12 : 49. 예끼마을에 이르니 서부선착장이 반긴다. 서부선착장-도산서원, 서부선착장-요촌을 운항하는 작은 배들이 수시로 들락거린다고 한다.

 선착장의 위 언덕에는 선성 공원(이정표 : 월천서당 6.6km/ 오천유적지 7.1km)’이 조성되어 있었다. 929년 신라의 선곡현감 이능선이 고려에 귀순하여 (안동)병산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단다. 이에 왕건이 이능선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능선의 선()자를 따서 이곳을 선성(宣城)’이라 하였다나?

 13 : 00. ‘예끼마을’. ‘예끼란 누군가를 혼내거나, 혼이 날 경우에 듣는 말.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쓰는 표현이다. ‘예끼 다음은 이놈이나 고얀놈이 입에 붙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예끼는 재주 예()’자와 재능·소질을 뜻하는 우리말 를 합쳐 만들었단다. 하나 더. 이 마을은 오래되지는 않았다. 1976. 낙동강 물길을 막아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여러 마을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예안마을도 그중 하나였다. 주민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차마 마을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산언덕으로 모여들었으니 그게 예끼마을이다. 그러나 농촌공동화 현상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농사짓고 소 키우던 이웃은 돈벌이를 찾아 도시로 떠났고, 그렇게 마을은 절반으로 줄었다. 그러다 2015년 안동시의 예술마을 조성사업을 지원받아 벽화 골목을 꾸미고 상가 간판도 입체적이고 감각적인 모양으로 바꿨다. 빈집을 활용해 식당이나 한옥카페로 꾸몄다. 예술가들이 마을에 들어와 터전을 잡으면서 골목골목에 작은 갤러리 등을 내면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이 되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밝은 페인트로 칠한 벽과 정겨운 벽화, 그리고 아기자기한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물길 테마, 글 읽는 테마, 재미있는 테마, 트릭아트 등 저마다의 개성과 색깔을 뽐내는 골목들이 마을 곳곳에 들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도자공방 근처는 핫 플레이스로 꼽힌다. 벽과 바닥에 입체적이고 실감나게 트릭아트를 그려놓았다. 재미있는 사진을 찍어볼 수 있다는 얘기다.

 요즘 애들은 저 벽화의 놀이를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우리 가족이란 조형물도 눈에 띈다. 이곳 서부리는 안동댐 조성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수몰민들이 집단으로 옮겨온 이주단지이다. 작품은 새로운 터전으로 이주하는 가족을 수직적 조형미를 부여해 해학적으로 표현했단다. 가장 아래서 가족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아버지, 그 위로 짐꾸러미를 머리에 인 어머니, 그들의 위에서는 두 남매가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다.

 일부 조형물은 지붕 위까지 올라갔다. 이렇듯 마을 곳곳이 예술향이 가득하다. 조용하던 마을을 예술과 끼로 채워 넣은 것이다. 우체국은 유명작가의 전시공간과 교육공간으로, 마을회관도 작가 창작실로 탈바꿈시켰다. 안동선비순례길 종합안내소 앞의 끼 갤러리는 마을 아이들의 솜씨를 뽐내는 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앞(문화단지 입구), 호수를 마주보는 곳에는 민가촌이 들어서 있었다. 한옥체험(숙박)이 가능한 곳인데, 객실마다 담장을 둘러 독립공간으로 나누어 놓았다. 현대식 욕실에 취사도 가능하단다.

 선성현 문화단지도 조성해놓았다. 옛 선성현(宣城縣)의 관아 건물을 복원하여 조성한 예끼마을 내 문화단지다. 장관청에서는 전통 의복체험, 형리청에서는 죄수를 벌주던 형벌체험을 해볼 수 있으며, 문화단지 내 역사관에서는 선성과 예안의 유래와 인물 등에 관한 자료도 확인할 수 있다.

 문화단지로 들어가는 길. 패널로 시판을 만들어 게시했다. 볼거리에 읽을거리를 더해 탐방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선성현 아문(衙門). 옛 고을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층의 문루로, 아래층은 통로로 사용하고 윗층은 누마루로 이용하도록 했다. 앞면 4칸에 측면이 3칸이니 현청의 아문치고는 대단한 위세라 하겠다.

 형리청. 벌을 받는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장관청. 이곳에서는 전통 혼례도 가능하나 보다.

 사시사철 방문객으로 들끓는 곳이니 어찌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 안동호 속으로 파고드는 선성수상길’, 그게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액자형 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다.

 선비순례길의 백미는 선성수상길이다. 그러니 포토박스 안에 저 풍경을 넣어보면 어떨까? 사실 선비순례길은 안동호 위에 곡선으로 설치해놓은 저 데크 길 덕분에 유명해졌다. 수면에 거의 맞닿을 정도로 설치돼 있어 물 위를 걷는 듯 짜릿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13 : 24. 예끼마을 모두 둘러본 다음 다시 길을 나선다. 민가촌 앞에서 선성수상길이 열리는데, 초입의 선비순례길 안내도와 이정표(호반자연휴양림 1.2km/ 오천유적지 7.8km)가 길을 안내해준다.

 선비순례길 1코스(성선현길)의 자랑거리는 안동호 위를 걷는 선성수상길이다. 예끼마을 앞 호수에 1.1km 길이의 다리(교각이 없는)를 놓았다. 과거 누군가의 집을, 학교를, 일터를, 골목을 밟고 물 위를 둥둥 떠서 걸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깊이를 알 수 없는 안동호 위를 걷는 기분은 짜릿하면서도 이색적이었다. 그러니 탁 트인 안동호 전망을 즐기며 여유롭게 걸어볼 일이다.

 다리는 부교(浮橋)의 형식을 취했다. 안동호의 수위 변동에 따라 뜨고 가라앉는 구조라고 한다. 초입의 안내판은 이에 대한 설명과 함께 걸을 때의 주의사항까지 적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가 하면, 또 물과 매우 가까우니만큼 이에 따른 주의사항이 필요했을 것이다. 단체로 이동할 때는 분산 통행이 필수, 수위가 낮을 때는 초입의 경사가 가팔라지니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란다.

 호수에는 수많은 수차가 쉼 없이 돌고 있었다. 역대 최악의 녹조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안동호. 이를 조금이라도 개선해보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맞다. 최근의 안동호는 폭증한 녹조로 인해 수면이 두꺼운 매트를 깔아놓은 것처럼 끈적끈적하다고 했다. 덩어리 진 녹조 알갱이가 손에 만져질 정도이고 심한 곳은 악취까지 풍긴단다. 그러니 지자체에서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다리로 연결되는 저 섬(보기에만) 선성산성 공원이 아닐까 싶다. 나지막한 구릉에 있는 산성을 공원으로 꾸며놓은 곳이다. ‘선성산성은 영남지역에서 안동을 지나 영동지역으로 가는 교통로의 배후에 방어와 행정을 목적으로 쌓았던 치소성(治所城)’이다. 왕건이 견훤과 고창(안동의 옛 이름)전투를 치를 때 예안진에 주둔했었다고 할 만큼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수상길 중간에는 쉼터도 두 곳이나 만들어 놓았다. 첫 번째 쉼터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옛 예안국민학교를 추억하는 공간이다. 추억의 오르간과 책걸상, 그리고 교가와 사진들도 함께 전시해 놓았다. 이제는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근현대사를 간직한 학교를 안동시의 배려로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안국민학교는 1909년 이인화님이 후진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사재를 투입하여 설립한 사립학교다. 설립 당시에는 3년 과정으로 수신(도덕국어·한문·산술·창가·도화·체조를 가르쳤으며, 1912 1회 졸업생으로 6명을 배출했다. 예안공립보통학교(1912), 예안공립국립학교(1941)를 거쳤고, 1945년 광복 후에는 예안국민학교가 되었다. 그러다 1974년 안동댐으로 인해 마을이 수몰되면서 현재의 한국국학진흥원 옆으로 옮겨갔다가 학생이 없어지면서 폐교되었다고 한다.

 눈에 들어오는 안동호는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넓었다. 맞다. 안동호는 소양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단다. 조선 시대에 낙동강은 하류의 배가 안동까지 드나들 정도로 물이 깊고 맑아 관개 및 교통에도 큰 몫을 했다. 하지만 광복 후 해마다 홍수의 범람으로 많은 피해를 겪었다. 이에 1971년 댐 공사를 시작 1976 10 28일 준공함으로서 안동호가 탄생했다.

 수상길은 안동호반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진다. 수상길의 총 길이는 1.1km. 공중부양이라도 하듯 물위를, 그것도 사부작사부작 걷는 맛이 여간 색다른 게 아니다. 하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이달(2018. 5)의 추천 길로까지 뽑았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13 : 45. 수상 데크가 끝나는 지점에서 뒤돌아본 풍경. 꿈틀대며 호수로 파고드는 모양새가 흡사 뱀을 닮았다. 여기서 팁 하나. 저 길은 물안개 낄 때가 최고라고 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을 선사해준단다.

 13 : 48. 수상 데크가 끝나면 길은 초가와 기와, 현대식 숙소가 갖춰진 안동호반 자연휴양림(100)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선비순례길은 200m쯤 들어가는 곳(‘둠벙이 있다)에서 오른쪽으로 갈려나간다.

 숲속의 작은 둠벙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다가온다. 자연휴양림에서 조성한 모양인데, 이용객들로서는 이만한 산책코스도 없겠다.

 이후부터는 테크 로드를 따른다. 비탈진 산자락에 기대듯 길을 냈다. 그러다보니 오르내림이 심한 편이다. 아니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는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큰 고도차를 보인다.

 선비순례길은 옛 선비들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걷기여행 길이다. 그러니 선비걸음으로 사부작사부작 걸어야 제멋이다. 옛 시조라도 흥얼거리며 말이다. 하지만 선비순례길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저렇게 가파른 계단을 어떻게 선비걸음으로 오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코스가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원시의 숲을 헤집으며 내놓은 길로 들어서면 웬만한 더위쯤은 저리가라다. 오늘처럼 36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는 별 수 없었지만.

 14 : 16. 뼈대만 남아있는 고가(古家)도 눈에 띈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기와로 보아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월의 무게를 배겨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 안동호에 물이 차면서 길 자체가 사라져버린 게 원인일 수도 있겠다.

▼ 날이 선 벼랑에는 잔도(棧道)처럼 길을 내기도 했다.

 덕분에 시야가 열리면서 발아래로 안동호의 풍광이 펼쳐진다. 감탄이 연달아 나올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호수를 가득 메운 녹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나저나 녹조 아래 물 속 생물들은 잘 살아가고 있을까?

 14 : 26. ‘전망대로 올라가는 데크 계단이 놓여있다. 안동호의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조망처이다. 특히 마음을 비우고 물멍 때리라며 무심정이란 정자까지 지어놓았단다. 하지만 0.3km나 되는 거리가 문제였다. 36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저런 가파른 계단을, 그것도 300m나 올라간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고서는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갈림길에 만들어놓은 쉼터에서도 안동호가 보인다는 점이다. 더 이상 못가겠다며 널브러진 집사람에게 식염(15년쯤 전 미주 출장 때 구입했는데 포도당까지 가미되어있어 효과가 꽤 좋다)을 주고, 이곳이 무심정이려니 하며 느긋하게 물멍을 때려본다.

 누군가는 산길이 인생을 닮았다고 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가며 일어난다는 것이다. 선비순례길의 데크 구간이 딱 그랬다. 한참을 올라왔으니 이제 또 그만큼을 내려가야지 않겠는가.

 14 : 51. 길은 산자락을 향해 파고들기도 한다. 그러다 만난 농막(kakaomap에는 청고개골로 적혀있다). 걷기 여행의 도반이자 사진작가이신 몽중루님이 귀인을 만났다는 곳이다. 갈증을 참지 못하고 문을 두드렸는데, 마침맞게 주인장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인장이 생수(샘이 없어 물을 사다 먹는단다)는 물론이고, 체력을 보충하라며 박카스까지 대접하더라는 것이다. ‘안동 선비다운 손님 대접이라고나 할까?

 청고개에서 내려온 임도는 농막을 지나 호반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비순례길은 농막 근처(이정표 : 월천서당 2.6km/ 오천유적지 11.1km)에서 다시 데크 로드로 올라선다.

 길은 여전히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아니 가끔은 버겁다싶을 정도로 길고 가파르게 오르내리기도 한다.

 15 : 07. 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탐방로 곳곳에 쉼터를 만들고 벤치를 놓아두었다. 아무튼 이즈음 우리 부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더 이상 못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앉아있기도 힘들다며 벌러덩 누워버리는 게 아닌가. 남아있던 식염(10알이나)과 함께 식수를 먹이고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는 집사람의 뒷모습은 가여울 정도다. 천근만근이나 되는 듯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워 보인다.

 15 : 23.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오르막(이정표 : 월천서당 1.6km/ 수변 60m). 이번에는 아예 한국문화테마파크가 걸터앉은 언덕까지 오르란다. 뭔가 보여줄게 있으니 저 높은 곳까지 오르라고 하겠지?

 15 : 27. ‘이런 나쁜 놈들’. 지친 다리를 이끌고 올라온 언덕에는 흉물스런 하수처리시설말고는 아무런 볼거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육두문자가 튀어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명한 사람들은 계곡을 횡단하고 있었다. 맞다. ‘데크 로드는 원래부터 언덕으로 오를 일이 아니었다. 저 계곡을 가로질러야 정상이다. 거리가 단축됨은 물론이고, 시설비 또한 많이 줄였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오솔길을 따라간다. 이 구간 역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지만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15 : 51. 이때 세계유교선비공원의 연무마당 앞을 지나기도 한다. 참고로 22 8월에 개장한 세계유교선비공원은 컨벤션, 박물관, 테마파크가 함께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그중 연무마당은 군사들이 무예를 익히던 훈련장을 연출해놓았지 않나 싶다.

 15 : 53. 준비해간 식수(1.5리터)가 동이 나고서야 월천길(퇴계로와 월천서당을 연결시킨다)’로 올라설 수 있었다. 이정표(월천서당 0.5km/ 수변데크 1.16km)가 거의 다왔다며 조금만 참으란다.

 15 : 57. 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월천서당이 놓여있다. 그보다 더 반가운 것은 유적지 초입에 주차되어 있는 산악회 버스였다. 덕분에 얼음물로 갈증을 달랜 다음 월천서당을 둘러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안동호를 눈에 담을 수 있다. 도산구곡(陶山九曲)의 두 번째 물길인 월천곡(月川曲)’이기도 하다. 참고로 선비순례길이 지나는 도산구곡은 이황(李滉)의 후학들이 모여 시문(詩文)을 지으며 학문을 전승하던 곳이다.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 무이구곡(武夷九曲)’을 흉내 내 낙동강 상류의 여러 산골짜기와 물굽이 중 대표적인 아홉 곳의 경승지에 그에 맞는 이름을 붙여 원림(園林)으로 구성했다. ‘오가산지를 보면 많은 유학자들이 배를 타고 도산구곡을 유람했음을 알 수 있다.

 월천선생 고택(편액은 舊宅이라 적었다).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52(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경전 연구에 주력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이황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의 상덕사에 신주(神主)가 모셔져 있단다.

 16 : 04. 월천서당(月川書堂)은 수령이 470년이나 된다는 은행나무가 지켜주고 있었다. 조선시대 문신 조목(趙穆)이 중종 34(1539)에 세워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라고 한다. 현판은 스승인 퇴계 이황이 써주었단다. 하지만 문이 닫혀 있는데다 담장까지 높아 편액은커녕 안을 들여다보기도 어려웠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3.42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아니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씨를 감안하면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출발할 때만 해도 집사람은 평상시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갔고, 결국 종료지점에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게 싫다며 카메라 앞에조차 서지를 않았다. 하긴 트레킹을 미치고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제대로 먹는 회원이 거의 없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이에 산악회 운영진들도 놀랐던 모양이다. 8월 둘째·셋째 주말은 트레킹을 쉬어가겠다고 한다.

 

진안고원길 14구간(진안천 물길)

 

여행일 : ‘24. 7. 20()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상전면 및 진안읍 일원

여행코스 : 상전면사무소수변체련공원연지고개(인증)중기마을도치재(인증)상도치마을운산인공습지공원진안만남쉼터(거리/시간 : 13.4km, 실제는 중기마을부터 10.9km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트레킹 들머리는 상전면사무소(진안군 상전면 주평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 진안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를 타고 무주방면으로 8km쯤 달리다가 언건교차로에서 49번 지방도(상전·동향방면)로 옮겨 2km쯤 들어오면 상전면 소재지인 주평리에 이르게 된다. 진안고원길(12구간) 조형물은 상전면사무소 앞에 설치되어 있다.

 상전면에서 진안천을 따라 진안읍에 이르는 길이다. 연지고개와 도치재를 넘은 다음, 진안읍으로 들어서서 진안천변에 조성된 길을 따라 걷게 된다. 읍내에서는 재래시장과 삼지교, 우화정 등을 거쳐 종점(진안 만남쉼터)으로 간다.

 10 : 29. 실제 출발지는 중기마을 입구(버스정류장). 비가 시간당 20-40나 내린다는 기상청의 예보(실제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에 우산을 쓴 채로 연지고개를 넘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전면사무소에서 1km남짓 떨어진 (중기마을)버스정류장(49번 지방도가 지나간다)까지는 산악회 버스로 이동했다.

 길을 나서기 전 용담호부터 가슴에 담는다. 10구간에서의 첫 만남 이후 늘 함께 걸어온 호수를 더 이상은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2001년에 완공된 용담호(龍潭湖)’는 진안군의 1 5면을 수몰시키며 만들어진 거대한 담수호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라는 크기만큼이나 보여주는 경관 또한 빼어나다. 그래선지 진안군에서는 진안고원 길이라는 트레일을 만들면서 5개 구간(10구간-14구간)을 용담호를 옆에 끼고 걷을 수 있도록 길을 냈다.

 10 : 30. ‘중기길을 따라 산골짜기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 양옆으로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은행나무가 멋진 구간이다. 용담호의 완공시기와 맞물려 심어졌음인지 나무의 굵기도 지난 세월만큼이나 풍성해졌다. 하나 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던 비가 언제부턴가 보슬비로 변해있다.

 10 : 35. ‘상전 공설묘지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 연지고개를 넘어온 진안고원 길은 이곳을 지나 중기마을로 간다.

 이정표는 출발지(상전면사무소)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3.3km로 적었다. 내 앱은 현재 0.37km를 찍는다. 그러니 폭우를 핑계 삼아 3km를 단축하고 있는 셈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산자락에 들어붙듯이 다가가더니 뭔가를 따느라 열중한다. 사진작가이신 도반은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다. 걷는 것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그곳에는 복분자가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이십여 년을 이어온 산행, 집사람의 무릎이 시원찮아진 이후로는 트레킹 위주로 매 주말 집을 나선다. 그게 삼십 년에 가까워졌지만 이번 구간처럼 복분자가 많은 것은 처음이다. 일부러 기른다고(실제 내 고향인 순창에서는 복분자를 재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길가 산비탈이 온통 복분자 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10 : 45. 길은 다시 둘로 나뉜다. 오른쪽은 임도. 고원길은 중기마을이 위치한 왼쪽으로 간다. 하지만 마을 구경이 별로인 사람이라면 그냥 임도를 따라가도 된다. 이럴 경우 코스도 300m쯤 단축된다.

 10 : 48. ‘중기마을(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9.3km/ 상전면사무소 4.1km)’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갈현리가 통째로 용담댐에 수몰되면서 새로 조성된 마을이다. 좁다란 산골짜기에서 20세대, 38명이 옹기종기 살아가는 전형적인 산골마을로, ‘중기라는 지명은 상전면의 중앙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중터라 하다가 한자음으로 고치면서 중기(中基)’가 되었다.

 중기 마을회관(경로당). 경로당 그린리모델링 사업이라도 마쳤는지 산뜻하게 단장되어 있다. 고령을 넘어서 초고령 사회로 변한 시골은 요즘 어르신들의 복지 증진과 환경 보호가 최대 화두가 되었다.

 중기마을은 경주 김씨 집성촌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상서공파 중기문중의 제각이 커다랗게 지어져 있었다.

 10 : 53. 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온다. 그러자 아까 마을 입구에서 헤어졌던 임도와 다시 만난다.

 임도 안내판. 갈현리(상전면) ‘중기마을과 물곡리(진안읍) ‘상도치마을을 잇는 3.5km 길이의 임도란다.

 이즈음 만난 경고판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임도에 건축 잔재물이나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불법 투기자를 신고하면 상금까지 지급한단다. 불법 투기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면 저런 경고판까지 붙여 놓았겠는가.

 임도치고는 오르막의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다. 정점인 도치재의 높이는 393m. 반면에 임도 초입인 중기마을은 294m에 불과하다. 1.1km쯤 걸으면서 고도를 100m나 높여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1 : 13. 임도로 들어선지 22. ‘도치고개에 올라서니 이정표(진안만남쉼터 7.8km/ 상전면사무소 5.6km)가 반긴다. 멀리 금남호남정맥의 성수산(聖壽山 1059.2m)에서 내려온 산줄기에 속한 안부로, 고갯마루에는 국가지점번호 표지목과 벤치도 설치되어 있었다. 걷기 여행자들을 위한 쉼터인 모양이다.

 하늘색 마름모꼴 모자를 쓰고 있는 이정표가 이곳이 14구간의 완주 인증지점임을 알려준다.

 비 때문에 곧바로 하산을 시작한다. 오늘은 임도를 걷다가 쓰러져 있는 나무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집중호우’. 올해 장마의 특징이라고 했다. 어느 한 지점을 target으로 삼아 집중적으로 쏟아 붓는다는 것이다. 그 집중호우가 이곳 진안도 때리고 지나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길은 무척 곱다. 포장과 비포장이 번갈아 나타나지만,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비포장 구간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숲이 우거진 탓에 조망은 일절 없다고 보면 되겠다.

 11 : 27. 작은 오름 끝에 또 다른 고갯마루(363m) 올라섰다. 이정표(진안만남쉼터 6.8km/ 상전면사무소 6.6km)는 이곳이 14구간(진안천물길)의 중간쯤 되는 지점임을 알려준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임도안내판이 얼굴을 내민다. 이런 안내판은 잠시 후 하나가 더 나온다. 하지만 걷는데 하등의 도움도 되지 못하기에 그냥 지나쳐버리기로 했다. 지도에 현재 위치라도 표시해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1 : 39. ‘상도치(上道峙)’ 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물곡리(物谷里)’를 구성하는 5개 행정부락(원물곡·궁동·종평·상도치·하도치) 중 하나로 아까 지나온 중기마을처럼 이곳 역시 산골짜기로 파고든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이틀 후면 일 년 중 가장 무덥다는 대서(大暑)’. 그런데도 길가 자두나무는 아직도 파릇파릇한 열매를 매달고 있다. 홍천에 있는 내 농장에서는 일주일 전에 이미 자두 수확을 끝냈는데도 말이다. 지대가 높은 만큼 철도 늦게 찾아오나 보다.

 11 : 43 - 12 : 02. 마을에 들어서자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길손을 맞아준다. 마을의 신목(神木)으로 옛날에는 이곳에서 정월 대보름날에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하나 더, 빗줄기가 거세져 당산나무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산골마을의 정적을 깨뜨렸나 보다. 할머니 한 분이 내다보더니 뭐 볼게 있다고 이런 비까지 맞아가며 찾아왔냐고 혀까지 차신다.

 어른의 몸통 둘을 합쳐도 모자랄 만큼 굵은 느티나무 아래에 당산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낭당(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을 쌓고 제단까지 만들어 놓았다.

▼ 12 : 06. 잠시 후 본마을로 들어선다상도치(上道峙)의 옛 이름은 웃되재’, ‘되재의 웃뜸(윗마을의 방언정도로 여기면 되겠다예전에 진안읍에서 마을로 가려면 빠른 길이 되재를 넘어야 했기에 마을을 되재라 부르다가 뒤에 한자어로 도치(道峙)라 부르게 되었다.

 상도치 마을회관. 중기마을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12 : 09. 마을을 빠져나와 2차선 도로인 물곡로로 내려선다. 이어서 100m 조금 못되게 이 길을 따라간다.

 이후부터는 내오천(머우내)’ 둑길을 따라간다.

 머우내의 물줄기가 제법 사납다. ‘양동이로 쏟아 붓다는 표현이 떠오를 정도로 거세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그나마 빨리 그쳤기에 저 정도일 것이다.

 상도치 들녘. 상도치는 동쪽 초승봉과 서쪽 우제산 사이의 충적지에 위치한다. 오천리·죽산리·구룡리·물곡리에서 흘러내린 머우내(오천)가 마을 앞으로 휘감아 흐르면서 마을이 들어설만한 충적지를 만들었다.

 12 : 22. ‘하도치교(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4.4km/ 상전면사무소 9.0km)’에서 아까 헤어졌던 물곡로를 다시 만났다.

 하도치 마을회관과 버스정류장. 다리 근처에 위치한 하도치(下道峙)’ 마을은 스치듯 지나친다.

 진안천에 합류되기 직전의 내오천(內梧川, 머우내)’. ‘오천리는 마을 앞으로 하천이 흐르고 그 가장자리에 머우나무(머귀나무, )가 많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하천이 머우내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때 마을이 그 바깥쪽이 되므로 외오천이라고 하고 그 안쪽을 내오천이라 했다.

 이후부터는 물곡로를 따라간다. 교통량은 많지 않지만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안전에 유의해가며 걸어야 한다.

 내오천과 진안천이 합류되는 곳에는 충적평야가 드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두 하천이 실어온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삼각주(三角洲, delta)’일 것이다.

 12 : 28. ‘도치교를 건너면 하도교차로(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3.9km/ 상전면사무소 9.5km)’. 고원길은 교차로 못미처에서 180도로 방향을 틀어 진안천의 둑길로 내려선다.

 다리(도치교)에서 내려다본 진안천(鎭安川)’. 진안읍 반월리에서 발원하여 단양리·군하리·군상리·운산리·갈현리를 거쳐 용담호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요 아래에서 내오천과 합쳐진다.

 이후부터는 진안천의 둑길을 탄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느티나무가 울창하게 가지를 뻗어 한여름 뙤약볕에도 걱정 없겠다.

 12 : 34. 콧노래 흥얼거리며 잠시 걸으면 운산인공습지에 이른다. 진안읍을 가로질러 용담호로 흘러드는 진안천 주변 부지 57490에 조성된 자연공원이다. 습지로 이루어진 공원에는 수질정화식물인 꽃창포, 억새, 붓꽃, 수크령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식재되어 있다.

 탐방로는 습지의 양옆으로 나있다. 마을 내키는 대로 골라잡아 반대편으로 가면 된다는 얘기다. 아니 맨발산책로도 만들어놓았으니 힐링 삼아 한번쯤 걸어볼 일이다.

 인공습지(人工濕地)’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자연습지의 특성을 설계에 반영 및 시공하여 운영하는 습지를 말한다. 그래선지 침강지나 생태연못 말고도, 깊은 습지와 얕은 습지 거기다 수평 지하흐름 습지까지 그 형태도 다양했다. 개개의 습지에는 꽃창포와 물억새, 수크렁 등 각종 수질정화식물들이 자라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탐방객들을 위한 시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관람 데크가 놓여있는가 하면, 징검다리가 습지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자연석을 그것도 자연스럽게 휘는 모양새로 놓아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물방울을 형상화 한 조형물도 눈에 띈다. ‘수몰의 아픔과 노력으로 충남과 전북의 생명수를 지키고 있는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버려진 땅(수몰)’에서 생명의 땅으로 거듭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인공습지의 공정과 조감도를 담은 안내판.

 12 : 50. ‘운산인공습지를 빠져나온다. 습지를 횡단하는데 16분이나 걸렸다면 그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공습지와의 경계를 나누는 수로(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2.8km/ 상전면사무소 10.6km)를 건너자 ‘cafe 카요코코가 잠시 쉬었다 가란다. 공간도 넓은데다 뷰 맛집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이들의 발길이 불어났다는 곳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연꽃단지가 반긴다. 조금 전 둘러봤던 운산인공습지의 조감도에는 없었던 시설인데, 엄청나게 넓은 연못에서 크고 탐스런 연꽃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가 타고 나왔다는 연꽃이 저만큼이나 예뻤을까?

 그런 연꽃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없음은 흠이라 하겠다. 더 가까이서, 특히 위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관람데크나 관망대를 만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다른 인공습지. 이곳도 역시 운산인공습지의 조감도에는 없었다.

 13 : 04. 공공하수처리장(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2.2km/ 상전면사무소 11.2km)과 진안천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 진안 읍내로 들어간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사위가 밝아지면서 주변 풍광이 또렷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장마까지 물러가지는 않은 듯 부귀산은 아직도 구름 속에 잠겨 있다.

 13 : 07. 진안교육지원청 앞에서는 인도교를 이용해 진안천을 건넌다. 그리고는 천변에 걸치듯이 내놓은 인도를 따라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진안읍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졌다는 느낌이다. 도시 전체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거기다 도로는 온통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국회의장을 배출한 고장답다고나 할까?

 진안 인삼이 세계가 인정하는 고려인삼의 원조라는 넉살이 낯설지 않음은 왜일까? 그동안 진안고원길을 걸어오면서 진안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그만큼 더 가까워졌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13 : 16. ‘시장2를 지키고 있는 저 조형물은 대체 무엇을 형상화한 것일까.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모르겠다며 마이산을 닮았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가버린다.

 요즘 시골은 젊은이들이 귀하다고 했다. 지자체들마다 그네들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이유다.  청년 몰도 그런 절박함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13 : 24. 고원길에서 잠시 벗어나 진안향교에 들렀다. ‘시장교를 건넌 다음 중앙로를 따라 잠시 올라가면 진안향교의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향교는 문이 닫혀있었고, 볼거리에 목말라하는 나그네는 아쉬운 발걸음 돌릴 수밖에 없었다. 후문 쪽으로 가서 담장너머로 살짝 엿본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진안향교(鎭安鄕校, 전북 문화재자료) 1414(태종 14)에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1(선조 34) 중건했고, 1636(인조 14)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번안당(番安堂서재(書齋)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五聖), 송조4(宋朝四賢), 우리나라 18(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3 : 26. 향교를 빠져나오자 상촌천(桑村川)’이 반긴다. 진안읍 군상리에서 발원하여 중앙동에서 진안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상촌(桑村)’이란 뽕나무가 많은 마을 사이를 흐른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kakaomap에는 상림천으로 표기되어 있다.

 13 : 28. 하류 쪽으로 나오자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하천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삼지교(이정표 : 진안만남쉼처 0.7km/ 상전면사무소 12.7km)’라는 다리를 놓았다. 이름처럼 다리를 세 지점으로 연결시키는데, 이게 만만찮은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다리 난간을 꽃으로 장식했는가하면 중앙에는 잘생긴 팔각정까지 들어앉혀 멋스러움을 더했다.

 삼지교를 건넌 다음에는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13 : 32. 몇 걸음 더 걷자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길을 막고 있는 바위벼랑에 걸치듯이, 그것도 왔다갔다 갈 지()’자를 써가며 계단을 놓았다.

 13 : 34. 계단을 오르면 우화정(羽化亭)’이 맞는다. 우화산(향토문화대전은 월랑산으로 적는다)의 남쪽 기슭 바위절벽에 걸터앉은 정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 정자가 현재 위치에서 서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우화산 산등성이 너머 암벽 아래에 위치한다고 했다. 그게 퇴락하자 1921년 지역 유지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했단다. 1998년에 진안군에서 다시 중수하였다. 하나 더. 기암절벽과 그 사이의 초목이 어우러지는 경관이 매우 빼어나 월랑팔경(月浪八景)의 하나로 꼽힌다.

 안내판은 이 일대를 우화산 일원 유적군(진안군 향토문화유산 2)’로 적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화정에 얽힌 전설을 전해준다.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글 읽기에 정성을 다하며 동네사람들을 잘 보살펴주던 한 홀아비 선비가 칼바위에 앉아 손을 씻고 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우뢰와 함께 하늘에서 어여쁜 선녀가 내려와 선비와 함께 두 개의 날개로 둔갑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 했고, 이게 자연스레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정자가 걸터앉은 우화산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월랑산으로도 불리는지 akaomap는 이 일대를 월랑체육공원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13 : 35. 고원길은 정자 뒤쪽의 나무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이어진다.

 13 : 37. 계단은 암각서가 즐비한 바위절벽으로 인도해 준다. 옛날 우화정이 있었다는 가학대라는 곳이다.

 암벽에는 초서로 가학(駕鶴)’이라 새겨놓았다. 신선이 학을 타고 노니는 자리라는 뜻이니 우화정에서 얘기한 우화등선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또 다른 각자인 영모대(永慕臺)’는 이 지방 호족인 천안 전씨들이 자신들의 집안 내력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천안전씨 시조인 환성군이 백제 개국공신이란 내용과 후손들의 명단도 적어 놓았다. 하나 더. 광서 16(1889) 현감 김요협이 고을의 선비 전의호, 전재택과 이름을 연이어 각하고 썼다는 소서(小序)도 있다고 했으나 일일이 살펴볼 여유가 없어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계속해서 나무계단을 따른다. 이 계단은 산등성이를 넘도록 나있다. 트레킹 막바지에서 만나는 오르막이라 힘들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구간이다.

 오르는 게 싫은 사람들은 천변으로 내려가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13 : 45. 산등성이를 넘으면 진안청소년수련관’. 14코스가 종료되는 진안만남쉼터는 수련관 바로 아래 들어서 있었다. 주차장과 캐노피(canopy) 그늘막이 전부인 단조로운 쉼터이다. 산자락에 세워놓은 두어 개의 기념탑과 시비가 그나마 쉼터라는 이름값을 해준다.

 일단은 ‘6.25참전호국영웅기념탑에 묵념을 드리고 본다. 우리가 웰빙·힐링을 외치며 전국의 산하를 누빌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저런 분들이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켜주신 덕분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이곳 진안과 인연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 옆의 진안사랑가과 맞은편의 진안예찬도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진안고원길 안내도 앞에서 7개월에 걸쳐 이어온 대장정(개인 사정으로 14개 구간 중 11개만 끝냈다)을 종료한다. 진안은 전체 면적의 76% 5 9406가 산림이자 평균 해발 400m의 고원지대이다. 산이 많아서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 마음껏 굽이지는 곳이기도 하다.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 장수의 뜬봉샘에서 시작되는 금강의 물길이 진안을 흐르고 만경강 발원지인 밤샘도 진안 땅에 바짝 붙어 있다. 그런 진안의 매력을 제대로 살펴보고 싶다면 진안고원길을 걸어볼 것을 권한다. 진안고원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210.2km의 걷기 여행길로, 100개의 마을과 40개의 고개를 지나는 총 14개 구간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1구간 마이산길, 9구간 운일암반일암 숲길, 11-1 용담 감동벼룻길 등 3개 구간은 전북 1000리 길에 포함돼 있기도 하다.

 오늘은 장마철 폭우를 핑계로 중기마을부터 시작했고, 덕분에 3시간에 끝마칠 수 있었다. 앱이 10.9km를 찍고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우산을 쓰고 걷느라 속도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귀경길 산악회의 배려로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의 진안마이산휴게소에 들를 수 있었다. 진안의 얼굴마담이라 할 수 있는 마이산(馬耳山)’이 가장 또렷이 조망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7개월 동안 진안의 방방곳곳을 둘러봤으니, 제대로 된 마이산도 한번쯤은 구경해야하지 않겠는가.

 주차장의 한쪽 귀퉁이 언덕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누군가 그랬다. ‘진안 여행의 절반은 마이산을 어디서 보느냐라고. 마이산의 남, 북부 구역에선 오히려 마이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이산에 오르니 마이산이 안 보이더라라나? 그러니 좀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야 한다. 이곳 진안휴게소 전망대는 그중에서도가 최고의 포인트로 알려진다.

 전망대에 오르자 포토죤이 반긴다. ‘I  you’. 마이산도 사랑하나 그보다는 당신을 더 사랑한다? 이 얼마나 새콤달콤한 사랑의 메시지인가.

 마이산을 조금 더 당겨보고 싶다면 팔각정을 추천한다. 정자에 오르면 마이산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다.

 마이산은 조선의 3대 왕 태종이 이 일대를 지나다 말()의 귀()와 같다며 붙여놓은 이름이다. 두 봉우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게 태종의 눈에는 말의 귀로 보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서쪽의 암마이봉은 687.4m, 동쪽의 수마이봉이 681.1m로 다소 낮다. 산은 전체가 거대한 암석 덩어리다. 특히 암마이봉의 타포니 지형이 인상적이다. 타포니는 풍화혈(風化穴)을 뜻하는 지질용어다. 풍화와 차별 침식 등으로 암석의 측면에 형성된 구멍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