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천산(藥泉山, 210.8m)-월방산(月芳山, 360.1m)

 

산 행 일 : ‘22. 11. 5()

소 재 지 : 경북 문경시 산양면 및 호계면 일원

산행코스 : 봉정1리 입구봉정1(굴골)월방산봉천사3층석탑약천산산양농공단지(소요시간 : 7.58km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백두대간에서 갈려나온 운달지맥에 놓여있는 산들로 전형적인 흙산이다. 해발이 400m에도 못 미치니 높지도 않다. 하지만 최근 입소문을 타면서 찾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200년 이상 묵은 노송 백여 그루와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이게 봉천사의 주지스님에 의해 스토리텔링으로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다. 고인돌 같은 선사시대 유적을 비롯해 삼국시대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산신각, 최근 복원된 삼층석탑, 마애미륵불·약사여래상·마애관음상 등 역사적 흔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한번쯤은 다녀올만한 산으로 꼽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봉정1리 입구(경북 문경시 산양면 봉정리)

중부내륙고속도로 점촌·함창 IC에서 내려와 문경시가지를 관통(3번 국도의 대조교차로에서 34번 국도의 반곡IC교까지)한 다음 34번 국도로 진정삼거리(산양면 진정리)까지 온다. 좌회전하여 923번 지방도로 바꾸면 잠시 후 봉정1 입구(봉정1리 버스정류장은 200m쯤 더 가야 나온다)에 이른다. ‘봉정1(굴골)’ 주민들이 표지석을 세워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이 작아선지 단조로운 편이다. 지맥 종주꾼들을 제외하면 너나없이 봉정1 마을회관을 들머리로 삼는다. 오른편이나 왼편 중 어느 방향으로 시작하는가만 다를 뿐 월방산과 봉천사, 약천산을 둘러본 다음 마을회관으로 되돌아오는 원점산행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문경 시내에 있는 돈달산(273m)과 연계하기 위해 약천산에서 곧바로 산양농공단지로 내려갔다.

 왼쪽으로 난 농로(굴골길)를 따라가며 산행이 시작된다. 불승종 소속의 경선암에서 내건 입간판의 방향표시를 참조하면 되겠다.

 길은 확포장공사가 한창이다. 지나갈 때마다 동작을 멈춰주는 포크레인 기사께 감사 인사를 보내며 뛰다시피 지나쳤다.

 13분 만에 도착한 굴골(봉정1)’. 신라시대 정치가 고운 최치원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마을회관 앞에 마을 유래비와 함께 고운선생의 시비(詩碑)를 세워놓았다. 가야산 홍류동폭포 옆에 새겨진 글이라는데, 자신들의 조상인 점을 내세워 빗돌로 만든 모양이다. 시의 내용은 이랬다. <바위골짝 치닫는 물 첩첩산골 뒤흔드니/ 말소리는 지척이라도 분간이 어렵구나/ 세속의 시비소리 행여들릴세라/ 흐르는 계곡물로 산을 둘러치게 하였구나.>

 마을회관 앞에는 수령이 29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보호수) 한 그루가 서있었다. 오래 묵어 영험까지 띠었는지 나무 아래 제단까지 만들어놓았다.

 탐방로는 마을을 가로지른다. 반듯하게 지어진 주택들이 많을 걸 보면 굴골이 부촌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부티는 금방 드러났다. 남새밭에 일 나온 아주머니께 채소가 참 튼실하다고 말을 건넸더니 팔뚝만한 무 하나를 덥석 내미는 게 아닌가. 산행을 하다가 목이 마를 때 베어 먹으면 그만이라면서... 넉넉함이 불러다 준 인심 아니겠는가.

 봉정1(‘탑동이라는 자연부락일 게다)로 넘어가는 언덕배기로 오르면 곧바로 산길로 연결된다. 탐방로는 왼쪽 방향의 산속으로 들어간다.

 자그마한 고개를 넘자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오른편 산자락을 가리킨다. 하지만 경사진 산비탈에는 길이 나있지 않다. 제대로 가고 있는 지가 의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두대장을 믿고 따를 수밖에...

 능선에 오르니 길이 제법 또렷해진다. 그렇다고 수월해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길만 확실해졌을 뿐 사나운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향기 가득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면 길이 나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이 산행 길라잡이의 대세가 된지도 이미 오래다. 그렇다고 앱이 만능이 될 수야 없는 노릇. 산꾼들의 눈은 아직도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를 쫓아간다. 최신 기술에 고전적인 경험을 장착했다고 보면 되겠다.

 잠시 후 봉천 제1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얼굴을 내민다. 봉천산에서 가장 뛰어난 조망처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안내판의 지시대로 나가니 밧줄난간이 둘러쳐진 전망대가 나왔다. 그리고 봉천 제1에 걸맞는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별로 높지 않은 지점인데도 산양용궁벌판이 발아래로 펼쳐지는 것이다. 들녘을 감싸는 문경·예천의 산들은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한 이들에 주어지는 보너스이리라.

 저 들녘은 고구려의 유명한 장수왕이 다녀갔고, 여자문제로 복잡한 백제 개로왕도 다녀갔다고 한다. 견훤과 왕건의 운명을 건 싸움도 저곳에서 벌어졌단다. 승리한 왕건의 군사는 몰라도, 참패한 견훤의 군사들이라면 이곳 월방산의 산속으로 숨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전망대를 빠져나오는데 할매미소라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봉천사 주지인 지정스님이 월방산을 너럭바위공원으로 꾸미면서, 주변에 널려있다시피 한 소나무·너럭바위·산신각·석실무덤·() 등에 저런 이름표들을 붙여오고 있단다. 그나저나 바위는 추억속의 할머니처럼 따뜻한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이밖에도 다수의 안내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말벌바위·낙엽아래두꺼비·두꺼비37바위·고래바위 등 이름도 다양하다. 하지만 대다수가 이름표에 어울리는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바위의 숫자가 하도 많다보니 지정스님의 상상력에 한계가 왔던 것일까? 아니 내가 부처를 못 따라간 중생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길은 계속해서 오름질이다. 가파른 경사도 꺾일 줄 모른다.

 얼마쯤 올랐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월방산 정상은 왼편이다. 하지만 월방산의 또 다른 명물인 산신각을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망설임 없이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길은 산 사면을 헤집는다. 벼랑에 가까운 산비탈을 따라 오솔길이 나있다.

 잠시 후 만난 방향표시지, 오른편으로 들어갔다 나오란다. 뭔가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10m쯤 들어갔을까 자그마한 기와집 한 채가 바위 벼랑에 걸터앉아 있다. 접근이 어려운 지형인데도 한술 더 떠 주위를 돌로 울을 쌓아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만큼 신성한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산신각이라 부른다고 했다

 문이 잠겨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안에는 큰 호랑이를 타고 있는 백발노인의 초상이 걸려 있다고 한다. 심성 고운 아낙네와 심술궂은 사내의 전설도 전해진다. 사내의 심술로 재난을 겪은 주민들이 매년 정월 대보름 산신령께 제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산신각에서의 조망도 뛰어나다. 지대가 높은 편이 아닌데도, 고산 준봉이 발아래에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을 접하게 된다.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경사가 가팔라서인지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밧줄을 매어놓았다.

 오르는 도중 망양대라는 또 다른 전망대도 만날 수 있었다. ‘산양면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 뜻을 지녔지 않나 싶다.

 길을 나선지 1시간10(산행을 시작한지는 50), 월방산 정상에 올라섰다. 분지형의 정상은 아담한 정상석과 안내판 몇이 지키고 있었다. 월방산은 나지막한 산이다. 또한 문경의 주산도 아니다. 하지만 천혜의 자연과 문화가 숨어있는 영산으로, 옛 사벌국의 진산이자 고대의 수많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선지 옛적에는 이 산()을 경계로 주변 큰 마을의 이름들이 정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사람을 품었으니 봉서마을과 봉정마을, 반곡마을이다.

 정상의 소나무는 무당집 처마처럼 울긋불긋한 리본들로 뒤덮였다. 나무와 나무사이를 연결해놓은 비닐 끈도 보인다. 어떤 이는 저걸 무속인들의 흔적이라고 했었다. 실제로 그는 신물(리본에 적힌 글귀는 판독이 불가능했다)이 매달려있는 사진을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나의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나온 소나무는 화합송이란 이름표를 매달았다. ‘부부의 금슬을 나타낸 작명이지 싶다. 부부가 속정이 깊으면 자녀를 많이 둘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트이지 않는 조망에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안내판의 지시대로 20m만 내려가면 시야가 툭 터지는 멋진 전망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문경·예천의 산들에 더해 안동의 학가산과 의성의 비봉산까지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대체 어느 산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산을 시작한다. 봉천사 방향인데 길이 참 고왔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지 반들반들하게 길이 나있다.

 8분쯤 걸었을까 봉샘(鳳泉)’ 안내판이 눈에 띈다. 옛날 봉황새가 마셨다는 우물일 것이다. 사람이 마시면 신선이 되어 무병장수한다는 그 신비의 우물 말이다. 거리가 가까우니 일단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그만두는 게 옳겠다. 길이 나있지도 않을뿐더러 봉샘 또한 우물이라기보다 늪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할퀴고 찔리는 악전고투를 치러가며 내려선 봉샘은 실망 그 자체였다. 우물은 보이지도 않고 질퍽거리는 공터에 안내판 하나만 외로웠기 때문이다. 안내판은 샘을 정비할 때 고대의 것으로 보이는 사각의 통나무 틀이 발견되었다고 적고 있었다. 70년대까지는 수도관으로 물을 끌어 동네 식수로 사용하기도 했단다.

 탐방로로 되돌아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산길은 여전히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오른쪽 사면은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놓았다. ‘산양삼 같은 귀한 약초를 재배하는 모양이다.

 조망이 터지기도 한다. 산양면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월방산에서 30(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 40), ‘봉천사에 내려섰다. 법당과 삼성각, 요사가 전부인 자그마한 사찰이다. 1998년 향림(香林)이라는 이곳 출신의 비구니가 지었다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이 된 지금은 비구가 주석하고 있단다. 꽃으로 치장된 약사여래좌상은 절집꾸미기에 열심이라는 주지스님의 작품이지 싶다. 절집의 내부 구경은 그만두기로 했다. 썩 좋아하지 않는 이(전두환 전 대통령)를 모시는 흔적까지 가슴에 담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이다.

 법당 앞 너럭바위(‘봉천대란다)는 조망의 명소다. 시야가 툭 터지면서 산양면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특히 소나무 사이로 떠오르는 해는 사진작가들의 촬영 포인트이기도 하단다. 거기다 고여 있는 물에는 반영(反影)까지 이루어진다나?

 봉천사를 빠져나오는데 140(400년으로 적는 이들도 많았다) 묵었다는 등치 큰 소나무(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뒤는 거대한 바위가 받혀준다. 병암(屛巖, 김현규의 雅號)은 소나무를 감싸고 있는 저 바위를 아홉 겹 산봉우리로 비유하면서 자연이 만든 병풍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그 바위 한켠에 병암(屛巖)이라 새겨 넣었다.

 소나무, 바위와 함께 어우러진 병암정(屛巖亭)’은 한 폭의 산수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자는 병암 김현규(金顯奎, 1765-1842)가 후손들의 학문증진을 위해 1832년 지었다. 진사에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병암정을 세웠다고 한다. 정면 2, 측면 1칸의 작은 규모인데도 온돌방과 마루를 둔 독특한 배치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란다.

 봉천사 주변에는 예상외로 바위가 많았다. 그런데 그 돌들 하나하나마다 이름이 붙어있다. ‘좌선대라는 저 바위처럼 생김새에 어울리게 지어놓았는데,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이름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하긴 저렇게 많은 바위에 이름을 붙이다보면 상상력이 한계점에 이르렀을 수도 있겠다.

 백미(白眉)는 단연 오백나한이다. 오백나한이란 깨달음의 한 단계인 아라한과를 증득한 500명의 불교성자를 이른다. 이들은 한국·중국·일본 등지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주차장 앞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가 오백나한을 닮았다며 그런 이름을 붙여놓았다.

 봉천사를 세상에 알린 건 개미취이다. 주지인 지정스님이 절집을 찾는 발걸음을 늘리려고 일부러 심었다고 한다. 그게 몸집을 불리고 입소문을 타면서 올해는 축제까지 열렸단다. 푸른 가을하늘과 푸릇푸릇한 나무, 만개한 개미취가 조화를 이루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나? 하지만 입동을 앞두어선지 꽃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런 내 아쉬움을 눈치챘나보다. 게으른 개미취 한 그루가 이제야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갈색 들풀 사이에서 매일 깊어가는 가을을 붙잡고 있었나보다. 참고로 연보라색 여러해살이인 개미취는 꽃대의 작은 털이 마치 개미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꽃말은 기억 먼 곳의 벗을 그리다이다.

 봉천사의 주변 풍경은 매혹적이다. 사찰 주변에는 300년 된 소나무만 50그루 넘게 있다. 동네의 지기를 채우기 위해 조성된 비보림(裨補林)이라는데, 지정스님이 이를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다. ‘잿봉서 송림(松林)’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 마을 출신의 많은 남자들이 저 소나무 숲으로부터 정기를 얻어 입신양명했다는 얘기도 전하고 있다.

 이름 붙이기 행사는 숲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선대부송을 시작으로 이송정, 노인송, 한풍송 등 소나무의 생김새에 어울리는 이름을 다양하게 지어놓았다.

 곳곳에 세워놓은 시판(詩板)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황윤섭·강상률·권득용 등 문경에 기반을 둔 시인들이 주변 풍경이나 역사를 시로 읊었다.

 잿봉서(봉서2)’는 문경에서는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한다. 절간 아래 있으니 사하촌(寺下村), 즉 부처님의 법() 아래에 있는 마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마을 역시 쇠락이라는 농촌의 현실을 벗어나진 못했다. 한때 사십여 세대 삼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살았지만, 그 영화는 지금 색 바랜 사진에서나 찾아볼 수 있단다.

 잿봉서 마을 초입, 입간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조금 전 들렀던 봉천사가 고녕가야의 소도(蘇塗, 천신을 모시던 곳)라는 것이다. 상주·문경 지역에 위치했다는 고령가야(古寧伽倻)’를 이르는 모양이다. 봉천사 자리에는 소도가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절간은 이미 빠져나왔다. 이젠 잿봉서와도 헤어질 차례이다. 그런데도 삼층석탑이 눈에 띄지 않으니 문제다. ‘얻고 싶으면 구하라고 했던가? 들일 나온 주민들 몇 분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눈에 띌 거라는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구간에서도 몇 개의 안내판을 만날 수 있었다. 바위(곰바우·개바우·범바우·병풍돌)에 소나무(한풍송)에 샘(탑들샘)까지, 눈에 띄는 모든 사물마다 빠짐없이 이름을 붙였다.

 몇 걸음 더 걸으니 바위벼랑에 걸터앉은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월방산의 단전을 차지하던 봉덕사가 남긴 유물이다. 천 년도 더 전에 어느 못된 중이 범바위 턱과 개바위 턱을 떼어내면 봉덕사가 흥성한다고 부추기더란다. 그 말을 믿고 두 바위의 턱을 떼어내니 천둥과 벼락이 떨어졌고, 결국에는 폐사되었다나? 외로운 석탑만이 옛 영화를 자랑하고 있는 이유이다.

 탑은 높이 솟은 거대한 자연암반을 깎아 조성했다. 때문에 지대석이 생략된 특수한 구조로 되어있다. 통일신라 때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제 말기 사리구절취단에 의해 도괴되었던 것을 1991년 현재의 모습대로 복원했다. 탑 내의 사리구(청자완·목제사리함·수정사리호·자색 비단 등 11)는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 한·일 문화재협정에 의해 반환받았으나, 현재 대구국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단다.

 천년지기 안내판 주변의 봉덕사 터를 기웃거리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작은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고갯마루에는 홍보용 입간판이 내걸렸다. 그런데 수탉 한 마리가 올라앉았다. 아니, ‘의 나라라고 적힌 걸 보면 봉황을 그리려다 저리 되었나 보다. 이곳 봉서리(鳳棲里)’를 봉황으로 나타낸 듯. ‘고녕가야의 오랜 전설’, ‘겨레 문명의 맥박소리라는 문구도 눈길을 끈다. 맞다. 부족국가 시절, 이곳 문경은 상주와 함께 사벌국(沙伐國)’의 영토였다. 가야시대에는 고령가야(古寧伽倻)’가 있었다는데, 이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월방산 둘레길 안내도도 눈에 띈다. 월방산과 봉서1·2리 일대를 개략적으로 그린 다음, 그 위에다 이름이 있는 바위와 소나무는 물론이고 고대석실분·약사여래상·마애관음상 등 둘러볼만한 명소들을 사진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이 안내도를 참조해 찾아보는 것은 어려울 듯...

 탐방로는 다시 도로(봉서2)을 따른다. 2차선으로 널찍하게 뚫렸지만 지형지물을 건드리지 않고 내놓은 탓에 ‘S’자로 휘어나간 모양새가 여간 고운 게 아니다.

 객주 문학길도 개설했나 보다. ! 그러고 보니 반곡마을은 객주(김주영 작)의 시작점이다. 천봉삼을 비롯한 수많은 민초들이 꾸며가는 객주’, 반곡리 주막에서 하룻밤을 유한 보부상들은 옹기를 지고 출발하여 용궁·개포장을 거쳐 안동·진보로 넘어간다. 창수령을 넘어 영해에서 어물을 떼어 오기도하고 소금을 지고 나르기도 한다. 보부상의 애환이 서려있는 길의 일부를 둘레길로 조성해 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봉천사에서 30(기웃거린 시간 포함), 또 다른 고갯마루(Daum지도는 수루재로 적고 있었다)에 올라선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오른편은 반곡2를 거쳐 문경시내로 들어간다. 탐방로는 왼편으로 난 임도를 따른다. ! 그 사이로 나있는 운달지맥은 철망 문으로 막혀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임도를 따라 5분쯤 올라갔을까, 고갯마루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오른편으로 들어서란다. 핸드폰의 ‘GPX 트랙도 오른편 산자락을 가리킨다. 하지만 계속해서 임도를 타는 게 옳은 방법이다. 오른쪽은 운달지맥을 하는 이들, 특히 지맥을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꾼들이나 선택하는 코스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죽도록 고생만 했다. 길이 나있지 않다보니 잡목과 넝쿨식물들로 가득 찬 능선을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GPX트랙마저 없었더라면 먼저 다녀간 어느 지맥 사냥꾼 말마따나 개고생을 할 뻔 했다. 이 구간에 놓여있다는 ‘222.4m도 어디인지도 모르고 지나쳤음은 물론이다.

 거친 산속을 15분쯤 헤매다 다시 임도로 내려섰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랐더라면 2-3분이면 족했을 텐데 잘못된 판단으로 다리품만 헛 팔았다. ‘운달지맥을 탄 이의 트랙을 내려 받은 탓일 것이다. 참고로 운달지맥(雲達枝脈)’은 백두대간의 대미산에서 남으로 분기되는 능선으로 여우목고개를 지나 마전령에서 운달산으로 이어지고, 계속 남진하여 석봉산을 지나면서 고도를 낮춘다. 조항령을 지나 활공장(867m)을 살짝 들어 올린 후 단산과 월방산, 약천산으로 이어지다 금천이 낙동강에 합수되는 삼강교에서 맥을 다하는 약 48.8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능선을 계속 타는 운달지맥과 헤어져 이번에는 임도를 따랐다. 이어서 100m쯤 더 걸어 폐 축사를 만났다. 규모가 큰 것이 주인장이 한때는 축산왕의 꿈을 꾸었을 법도 하건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폐허로 변해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야은(冶隱) 선생만 읊을 일은 아닌가 보다.

 축사를 지나자마자 왼쪽 임도로 들어선다. 널찍한 임도이나 이용하는 사람들은 없는 듯. 잡초가 무성해 길을 찾기조차 힘들 정도다. 아무튼 묘역 앞에서 임도는 산자락을 에돌아 능선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150m쯤 걸어 능선에 올라선다. ‘봉정리쪽으로 에둘러 온 운달지맥을 다시 만난 것이다. 이후부터는 능선을 탄다. 지맥 종주꾼들이 많은지 길은 의외로 또렷했다.

 150m쯤 더 걸어 약천산(藥泉山) 올라섰다. 운달지맥의 마지막 부분으로 요 아래 가재골에 있는 약샘에서 이름을 빌려다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세 평 남짓의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오석으로 된 작은 정상석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봉긋하게 솟아올랐으나 육산의 특징대로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반곡마을 방향으로 가는 운달지맥과 헤어져, 추산마을 쪽 산비탈로 내려왔다. 헤어진 지맥의 형편은 잘 모르겠지만, 이쪽 길은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산비탈은 경사가 심했고, 웃자란 잡초에 잡목, 거기다 넝쿨식물들까지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10분쯤 악전고투를 치른 다음에야 추산마을에서 산양농공단지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내려설 수 있었다. 200년 묵은 상수리나무(보호수)가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는 고갯마루는 상수리나무를 중심에 두고 작은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다람쥐 조형물도 보인다. 상수리나무 열매를 주워 먹고 있는 모양새다.

 탐방로는 이제 임도를 따라 산양농공단지로 간다.

 5분쯤 더 걸어 산양농공단지에 도착했다. 산양면은 1949년도에 약관 22세의 나이로 문경군수를 지냈고 3공부터 5공까지 6선의 국회의원을 지낸  채문식 국회의장의 출신지이다. 그래서일까? 시골 공단 치고는 꽤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날머리는 산양농공단지 버스정류장(문경시 산양면 진정리)

농공단지를 지나면 국도 34호선’, 이후부터는 국도를 따라 문경시내로 들어간다. 하지만 난 버스정류장(산양농공단지)에서 산행을 끝내기로 했다. 인도가 따로 없는 대로변을 걸으며 목숨을 걸기보다는 버스로 이동하는 게 옳을 것 같아서이다. 아니 하시라도 빨리 식당으로 가서 문경의 특주인 호산춘(湖山春)’을 맛보고 싶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황희 정승의 후손이 손님 접대용으로 빚었다는, 자신의 호(湖山)에다 봄날 술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을 추가시켰다는 그 미주(美酒)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까치봉(418m)-용문산(龍門山, 602m)-함박산(432m)

 

산 행 일 : ‘22. 5. 12(목)

소 재 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및 옥포읍 일원

산행코스 : 명곡체육공원→원등→까치봉(299m)→기내미재갈림길→다른 까치봉(441m)→용문산→기내미재→함박산→기산→반송1리 마을회관(소요시간 : 9.33km/ 3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달성군(대구)의 명산인 용문산과 그 주위의 산들이다. 주산인 용문산을 빼면 산이랄 것도 없지만 그 용문산이 문제다. 높이가 602m나 되는데다 가파름도 버거울 정도로 심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바윗길의 연속이어서 안전에 각별한 주의까지 요구된다. 대신 장점도 많다. 바윗길의 특징대로 조망이 시원스럽고, 용문산을 제외한 나머지 산들은 솔가리가 수북하게 쌓인 보드라운 흙길을 걷는다. 피톤치드로 가득한 소나무 숲길을 걷노라면 피곤함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 산행들머리는 ‘화원명곡체육공원’(대구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화원·옥포 IC에서 내려와 좌회전 ‘5번 국도(비슬로)’를 타고 ‘대구시청’ 방향으로 달리다 설화명곡역(지하철)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화암로’로 옮기면 잠시 후 ‘화원명곡체육공원’의 옆 도로변에 이르게 된다.

▼ 5개나 되는 산이 연결되는 등산로라서 들머리 또한 여러 곳에서 열린다. 우리는 명곡체육공원에서 시작해 까치봉·용문산·함박·기산을 거쳐 ‘반송1리’로 하산했다. 이때 용문산를 생략할 수도 있으며(까치봉에서 내려와 기내미재까지 임도 이용), 함박산 정상에서 작약봉(함박꽃과 작약꽃은 같지 않나?)까지 왕복하는 추가 산행을 할 수도 있다.

▼ ‘화원명곡체육공원’으로 내려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2014년에 문을 연 체육공원으로 명곡리 일대 만여 평의 부지에 축구장과 인라인스케이트장이 들어서 있다.

▼ 신축중인 ‘우방아이유쉘아파트’에서 공원으로 들어오는 굴다리에는 ‘명곡체육공원’으로 적혀있다. 하지만 네비게이션에다 저 지명을 입력할 경우 양산시 명곡동 주변의 체육공원들로 도배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축구장 쪽으로 30m쯤 걷다가 왼편 주차 구역으로 올라간다. 125면이나 된다는 널찍한 주차장은 전기차충전소까지 갖췄다. 이어서 3단으로 나눠진 주차장의 가장 윗단의 오른쪽 끄트머리에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 이정표나 등산안내도 등 이곳이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시설물은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반질반질하게 길이 나있을 뿐만 아니라, 경사진 곳에는 나무계단까지 설치해놓아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 시야가 잠깐 열리면서 축구장이 눈에 들어온다. 인조 잔디에 라이트시설까지 갖췄으니 전천후 경기장인 셈이다. 하지만 평일이선지 운동장은 텅 비어있었다.

▼ 길은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 콧노래 흥얼거리며 10분쯤 걸었을까 널찍한 공터가 얼굴을 내민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 한가운데는 제단(祭壇)이 놓여있었다. 명곡마을 주민들이 해맞이 축제라도 여는 모양이다.

▼ 6분(산행을 시작한지는 30분)쯤 더 오르면 ‘원등(172m)’ 정상이다. 하지만 산봉우리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뽈록하니 튀어나온 능선 상의 한 지점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일 듯. 그러니 정상석이 있을 리가 없다. 원등(元嶝)이란 지명도 1908년경 대한제국 탁지부에서 설치했다는 구소삼각점(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기 전에 시행하는 시범사업 성격의 구소삼각지역에 세웠단다)의 안내판에 그렇게 적혀있을 따름이다.

▼ 먼저 다녀 간 이들이 매달아놓은 표지기로 정상석을 대신해본다. 심용보(沈爖輔)님과 배창랑님에 허총무님 것까지. 시작은 함께했지만 걸음이 빠르다보니 나보다 한참을 앞서가는 모양이다. 그런데 23,456개의 산을 올랐다는 문정남님의 것은 왜 보이지 않는 걸까. 어쩌면 다른 능선을 타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 이어지는 산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는다. 팔등신 몸매를 자랑하는 소나무가 한가득인데, 그 아래로 난 길에는 솔가리가 수북하다. 거기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까지.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산길이 계속된다.

▼ 산악회에서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오늘도 내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다. 특히 용문산 정상 어림의 바윗길에서는 큰 도움을 주었다.

▼ 산행을 시작한지 35분. 화원읍의 명곡지구 아파트단지에서 올라오는 주등산로와 만났다. 이 길의 이름은 ‘명심보감로’. 조선시대 서당 학동들의 필독서였던 ‘명심보감(明心寶鑑)’은 고려 말의 문신 ‘추적(秋適)’선생이 중국 원말·명초 때 학자인 법립본(范立本)이 편찬한 ‘명심보감’을 참고해 증보판으로 펴낸 일종의 교과서다. 글쓴이가 달성군 출신이라는 인연을 살려, 지자체에서 ‘명심보감로’라는 문화탐방로를 조성해놓은 모양이다.

▼ 이정표는 ‘제3쉼터’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명심보감로’가 시작되는 명곡 아파트단지가 아닌 체육공원에서 출발하다보니 1·2번 쉼터를 그냥 지나쳐버린 꼴이 됐다.

▼ 안내판도 ‘명심보감로’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그중 하나에는 ‘황금이 상자에 가득해도 자식에게 경서 한 권 가르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자식에게 천금을 물려주는 것이 기술 한 가지 가르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뜻의 훈자편 글귀(黃金滿籝이 不如敎子一經이요 賜子千金이 不如敎子一藝니라)를 적고 있었다.

▼ 탐방로는 ‘명심보감(明心寶鑑, 마음을 밝히는 보배 같은 거울)’의 본질을 제대로 살렸다. 자식을 가르치는 훈자편(訓子篇)의 글귀 외에도 성심(省心), 입교(立敎), 치정(治政), 치가(治家)에 관한 글들이 줄을 지어 나타난다. 또한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방법을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는가 하면, 숲에서의 오감체험, 숲에서 얻게 되는 건강, 숲 유치원의 등 숲과 관련된 많은 정보들을 현수막을 통해 탐방객들에게 알려준다.

▼ 탐방로는 정성들여 닦은 흔적이 역력하다. 바닥은 잡풀 하나 없을 정도로 말끔히 정리되어 있고, 심심찮게 만나는 갈림길에는 놓치지 않고 이정표를 세웠다. 곳곳에 쉼터도 만들어 두었다. 산책삼아 찾아온 주민들이 쉬엄쉬엄 걷다가 돌아가기에 딱 좋은 환경이라 하겠다.

▼ 길은 무척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경사 같지 않은 경사라도 생길라치면 부지런한 지자체는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 앗! 돌탑도 보인다. 평평하던 길이 조금 가팔라지다보니, 그게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편안한 산행을 꿈꾸며 하나둘 올려놓은 돌멩이들이 모여 저렇게 큼지막한 무더기로 변했다.

▼ 까치산은 라이더들의 천국인가 보다. 산행 도중 꽤 많은 산악자전거 라이더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대단한 사람들이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오르기도 이렇게 힘든데, 자전거까지 타고 오르다니...

▼ 4쉼터는 두어 그루의 홍단풍이 예뻤다. 하지만 이정표(까치봉 0.3㎞/ 명곡미래빌단지 2.5㎞)와 평상, 운동기구 외에는 특별히 거론할만한 게 없었다. 참! 4쉼터까지 오는 동안 두어 곳(#1 : 원당지→, #2 : 인흥서원←/기내미재→, #3 : 인흥서원←)에서 갈림길을 만났었다. 하지만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이 헷갈릴 일은 없었다.

▼ 아직도 산길은 고도 높이기를 서두르지 않는다. 하긴 까치봉의 높이가 299m에 불과하니 가파른 오르막길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 오늘은 유독 백선이 자주 눈에 띈다. 마침맞게 꽃망울까지 활짝 열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곳 달성지역은 ‘백선’ 자생지로 유명하단다. 방대한 면적에서 군락을 이루는 게 전국 최대로 부족함이 없단다.

▼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에 ‘까치봉(299m)’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정상이란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밋밋하게 흘러내리던 능선의 한 지점이 두루뭉술하게 튀어나왔다고나 할까? 지자체의 생각도 나와 같았던 모양이다. 정자를 지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정상이 아니겠는가. 이정표로도 모자라 정상석까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 까치봉을 지나서도 산길은 서두르지 않는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그나저나 길은 소나무로 가득했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솔향기까지 더해진 탓인지 어느덧 마음까지도 한없이 여유로워진다.

▼ 소나무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 하나. 지자체가 이를 놓칠 리가 있겠는가. 숲속에 침대형의 벤치를 놓아 푹 쉬어가도록 했다. 잠깐 누워보니 심신이 새로워지는 느낌이다. 맞다. 사람이 호흡을 통해 피톤치드를 흡수하면 스트레스가 완화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 저게 왜 여자의 엉덩이로 보이지? 무학대사는 부처와 돼지의 눈을 들어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그렇다면 아직도 나는 한창때라는 얘기일 것이다.

▼ 갈림길(이정표 : 기내미재↑ 1.6km/ 남평문씨 안흥세거지→ 2.7km/ 명곡체육공원↓3.0km) 하나를 더 지나 명곡임도에 내려선다. 화원읍 본리리와 명곡 기내미재를 이어주는 임도다.

▼ 이정표(기내미재→ 1.5km/ 남평문씨 세거지← 3.0km, 화원자연휴양림 종점 4.8km/ 안흥서원↓ 2.2km)는 많은 정보를 담았다. 먼저 까치봉과 용문산을 거치지 않고도 함박산으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기내미재 방향으로 가면 된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文益漸, 1329-1398)’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남평문씨 세거지’는 왼편이다.

▼ 이정표에는 방향표시가 없지만 맞은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용문산을 향해 산행을 이어간다. 이 구간 역시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는다.

▼ ‘산악오토바이 출입금지’. 초입은 물론이고 등산로 곳곳에 매달아놓은 현수막으로도 부족했던가 보다. 곳곳에 통나무를 놓아 오토바이의 출입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이건 숫제 오토바이와의 전쟁이다. 그것도 치열한...

▼ 잠시 후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그리고 18분을 걸어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까치봉(418m)’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아까 올랐던 ‘까치봉(299m)과는 동명이봉(同名異峰)이다. 그나저나 버거울 정도로 힘들게 올라왔건만, 정상은 허무하게도 텅 비어 있었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 까치봉도 먼저 다녀간 이들의 표지기로 위안을 삼는다. 아까 원등에서 보았던 심용보님과 배창랑님, 허총무님 등 우리 일행 말고도 꽤 많은 이들의 표지기가 매달려 있었다.

▼ 오늘의 메인 봉우리인 ‘용문산’으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나 혼자만의 산행이 된다. 한발 앞서 걷던 이들이 하나같이 명곡임도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강송산악회’를 따라 용문산을 다녀갔다면서, 두 번 오를 필요가 없으니 임도를 따라 기내미재로 가겠다는 것이다.

▼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높여간다. 이때가지만 해도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여유로운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솔가리가 수북이 쌓인 보드라운 흙길에 솔향기까지 코끝을 스치는데 어찌 콧노래가 흘러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하지만 바윗길로 변하면서 상황이 확 바뀌어버린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위를 피하거나 오르내리는 번거로움까지 더해진다.

▼ 졸고 있는 바둑이를 닮지 않았나요? 아니면 젖 짜주기를 기다리는 산양을 닮았을 수도 있겠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듯이 산길은 저렇게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들을 여럿 보여준다.

▼ 조망 또한 이 구간에서의 장점이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바위가 늘어나면서 심심찮게 시야가 터진다.

▼ 동네 뒷산처럼 올랐다는 인근지역 등산객들의 양해를 구하고 바위 끝으로 나가니 이따가 오르게 될 함박산이 성큼 다가온다. 그 오른편에서는 화원읍의 고층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 조금 더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비슬산 능선↑ 1.6㎞/ 화원자연휴양림← 1.78㎞/ 까치봉↓ 2㎞)는 왼편이 화원자연휴양림에서 올라오는 길임을 알려준다. 직진하면 ‘비슬산 능선’이란다. 그럼 요 위에 있는 ‘용문산’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령의 산이란 말인가.

▼ 삼거리를 지나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밧줄난간까지 매달린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자 두되는 싫다고 외쳐댄다. 강송산악회의 회원들은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 그런 이들이 지름길로 갔으니, 속도가 느려터진 데다 산 하나를 더 넘어야하는 나로서는 민폐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어진 시간에 맞추려고 무리한 속도로 올라오느라 진이 다 빠져버렸으니 어이할꼬?

▼ 그 오르막길이 짧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아무튼 까치봉을 출발한지 30분(산행을 시작한지는 2시간) 만에 용문산(606m) 정상에 올라섰다. 두세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날선 바위들로 포위되어 있는 모양새이다. 그 한가운데에 오석으로 된 정상석을 세워놓았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먼저 비슬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에서 솟아오른 ‘닭지봉’이 그 자태를 그러낸다. 계속에서 저 능선을 탈 경우 진달래로 유명한 비슬산으로 이어진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함박산’이 성큼 다가온다. 그 오른편에는 대구 시가지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놓여있다.

▼ 하산을 시작한다. 조금 전 올라왔던 곳으로 내려가 정상 바로 아래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그런데 길 찾기가 만만치 않다. 바위지대라서 길의 흔적을 잃어버리기 일쑤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산악회에서 매달아놓은 방향표시지가 구세주가 되어주었다.

▼ 바위에 의지해서 내려가야만 하는 산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들을 구경하는 장점도 있었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전설의 거인이 공기놀이를 했을 법한 저 바위도 그중 하나다.

▼ 관모(官帽)처럼 생긴 바위도 보인다.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TV 연속극에서 저런 모자를 쓴 고대왕국의 관료를 본적이 있었다.

▼ 밧줄에 의지해 내려가야만 하는 구간도 있다.

▼ 위험에 빠질 때 인간은 신을 찾는다고 했다. 저 돌탑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얼마나 가슴 졸였으면 저렇게 정성들여 쌓아올렸을까.

▼ 산길은 기내미재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가팔랐다. 무릎이 성치 않은 이들에게는 최악의 구간이 될 수도 있겠다.

▼ 그렇게 30분을 내려서니 ‘기내미재’다. 화원읍 명곡리에서 옥포읍 반송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간이식당(메인 디시인 국수와 수제비는 물론이고 닭백숙과 족발까지 파니 음식백화점이라는 게 더 옳겠다)에 화장실까지 갖춘 의젓한 쉼터다. 참고로 기내미라는 지명은 귀네미(정감록에서는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목으로 사용된다)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게 귀넘이를 거쳐 기내미로 변했다는 것이다.

▼ 찾는 사람이 많다보니 불미스러운 일도 생기나 보다. 이정표 옆에 잃어버린 사다리를 돌려달라는 당부를 적어놓았다. 카메라를 돌려보겠다는 엄포까지 놓으면서...

▼ 기내미재는 화원읍 명곡리와 옥포읍 반송리를 잇는 임도(아니 군내버스까지 다니는 의젓한 도로이다)가 지나간다. 탐방로는 임도 위로 내놓은 야생동물 이동통로(차량통행도 가능하다)를 따른다.

▼ 동물이동통로를 지나 함박산의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초입에 ‘달성보 녹색길’의 아치형 대문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달성보녹색길이란 대구수목원을 출발해 달성지역의 아름다운 경관과 문화유적지(남평문씨 세거지·인흥서원·용연사·소계정)들을 지나 달성보에 이르는 22km 길이의 둘레길이다. 이곳 기내미재에서 함박산까지의 구간이 달성보녹색길과 겹친다는 것이다.

▼ 하지만 난 곧장 오르지를 못하고 평상에 드러눕고 말았다. 지름길로 간 일행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가파른 산길을 달리다시피 오르내리느라 몸에 무리가 왔던 모양이다. 부랴부랴 포도염(鹽+糖) 다섯 알을 복용한 다음 15분 동안 푹 쉬니 체력이 회복된다. 다시 산행을 이어갔음은 물론이다.

▼ 해발 288m인 이곳 기내미재에서 함박산 정상까지는 600m에 불과하다. 하지만 144m의 고도차를 극복해야만 하는 쉽지 않은 구간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산길은 초반부터 침목계단이 깔려있다.

▼ 잠시 후, 이번에는 나무계단이 길손을 맞는다. 지친 몸이라서 버겁겠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속도를 조금 떨어뜨리고 한걸음 또 한걸음 내딛으면 될 일이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하지 않았던가.

▼ 고생은 좀 되지만 조망만은 일품이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오르내리느라 버거워했던 ‘용문산’이 버티고 있다. 그 고생을 시켰으면서도 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연록의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맞다. 신록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소만(小滿)이 일주일 밖에 안 남았다. 생강꽃, 진달래에 이어 철쭉까지 진 산하는 이제 녹음이 숲을 점령했다. 생명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는...

▼ 다시 나타난 침목계단을 오르자 산길은 언제 가팔랐느냐는 듯이 사나왔던 기세를 뚝 떨어뜨린다. 그리고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말 그대로 피톤치드 샤워장에 온 느낌이 드는 순간이다.

▼ 기내미재를 출발한지 20분 만에 ‘함박산(432m)’ 정상에 올라섰다. 두루뭉술한 흙봉우리인 정상은 왠지 꽉 차있다는 느낌이다. 정상석과 이정표(옥연지↑ 4.3㎞/ 기산리← 1.0㎞, 반송삼거리 2.4㎞/ 기내미재↓ 0.6㎞)로도 부족한 듯 김문암씨의 정상표지판까지 걸렸다. 참! 아까 용문산을 생략했던 회원들은 이곳에서 작약봉(446m)까지 다녀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언감생심이다. 그렇지 않아도 꼴찌인데 왕복 2.3km를 언제 다녀오겠는가.

▼ 정상 근처에는 두 개의 돌기둥이 우뚝 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함박바위'라는데 산 이름이 먼저 생겼는지 아니면 이 바위에서 산의 이름을 따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기산리 방향(왼쪽)이다. 이어서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낮추어 가는데, 아까보다는 못해도 길은 양호한 편이다. 소나무 숲도 여전하다. 다만 키가 작아졌을 따름이다.

▼ 그렇게 20분 남짓 내려오자 ‘기산(276.6m)’ 정상이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정상은 정상표지석까지도 없다. 그 흔한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대구의 ‘길손’이라는 분이 매달아놓은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할 따름이다. 아니 먼저 다녀간 이들이 매달아놓은 표지기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오늘 함께 산행을 한 심용보님과 김신원님, 배창랑님, 신산호님, 허총무님도 빠뜨리지 않고 매달아 놓았다. 그런데 저 ‘만산동호회’ 표지기는 누가 걸어놓고 간 걸까.

▼ 기산을 지나서도 산길의 형편은 변함이 없다. 내리막의 가파름도 여전하다. 아직은 코스 정비가 덜 돼 한발 한발이 조심스럽다.

▼ 15분 후, 삼각점(왜관 485)이 설치되어 있는 또 다른 봉우리(192.6m)에 올라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달성군에서 세운 안내판(삼각점의 내력을 적었다)에 이곳을 ‘기산(岐山)’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그럼 아까 만났던 ‘기산’은 대체 뭐란 말인가?

▼ 삼각점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고와진다.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경사를 누그러뜨린다. 다만 두어 곳에서 이정표 없이 길이 나뉘지만 산악회에서 깔아놓은 방향표시지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 무덤이 무리지어 있는 능선을 따르다가 갈림길에서 왼편 샛길로 내려서니 ‘반송마을’이 나온다. 반송(盤松)이란 지명은 이 지역에서 자라는 반송에서 유래됐다. 원래는 반석으로 이루어진 지형 때문에 나무가 자라지 못했는데, 한 농부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은 허기진 승려가 그 보답으로 반송을 심도록 권하더란다. 그 후로 반송이 산 전체를 뒤덮었고, 이에 마을 이름을 반송이라 했다는 것이다.

▼ 산행날머리는 반송1리 마을회관(달성군 옥포읍 반송리)

이어서 마을안길을 조금 더 걸으면 ‘반송1리 마을회관’ 앞 도로(용연사길)에 이르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은 9.33km를 3시간 30분에 걸었다. 산길 대부분이 가파른 산길이었음을 감안하면 무척 빠른 속도로 걸은 셈이다. 앞서간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그 덕분에 주어진 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 산행을 마친 뒤 인근 뷔페식당(다담뜰)으로 옮겨 ‘문정남’선생의 ‘23,456산 등정(4,500일 산행)’ 기념식을 치렀다. ‘1만 산’ 등정을 넘겼거나 가까워진 유명 산꾼들은 물론이고, 산을 주제로 시를 쓰는 ‘김운남’시인(저서인 ‘三千山 詩塔을 위하여’를 선물 받았다)과 취재차 나온 ‘월간 山’지 ‘신준범’기자도 함께했다. 그나저나 4,500일이라면 매주 5일씩을 산에 오른다고 해도 18년이나 걸린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불가능에 가까운 그의 열정을 곁에서 봐온 나로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황골산(383.1m)-천봉산(天峰山 , 435.8m)

 

산 행 일 : ‘21. 5. 6(목)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남적동·부원동·만산동·연원동·외서면 일원

산행코스 : 세천(SK주유소)→204.2봉→황골산→안부→천봉산→자산→임란 북천전적지(산행거리 : 8km, 소요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산두레

 

특징 : 상주의 삼악(三嶽) 가운데 하나이자 진산(鎭山)이다. 상주시의 자랑대로 이 산은 산세가 부드러운데다 등산로 주변에 소나무까지 우거져 있어 산림욕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하지만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천봉산의 정상 말고는 조망까지도 보잘 것이 없다. 육산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봉산은 언제나 분주하단다. 도심에 어깨를 맞대고 있는 접근성에다 등산로 주변에 운동기구까지 배치해 산책삼아 나온 주민들이 운동까지 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꾸며놓았기 때문이다. 상주 시민들에게 천봉산은 산책을 하듯 수시로 오르내리는 곳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 산행들머리는 ‘SK주유소’(상주시 남적동)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상주 IC’에서 내려와 국도 3호선을 타고 상주 방면으로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세천교’를 건너게 된다. 외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인데 산행들머리인 SK주유소는 이 다리에서 5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 산행은 꽤 여러 곳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이용되는 곳은 임란북천전적지 주차장. 이밖에도 흥복사 및 천봉산요양원 등이 있으나 대부분이 동남쪽 방향(만산동 일원)에 몰려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한참이나 북쪽에 위치한 세천교 근처의 SK주유소에서 시작했다. 천봉산뿐만 아니라 황골산까지 한꺼번에 답사해보기 위해서이다.

▼ SK주유소의 옆길. 그러니까 세천 재가노인복지센터와 신흥다방 사이의 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만난 삼거리마트 주변에는 꽤 여럿의 식당이 들어서 있었다. 중국집, 고깃집, 통닭집, 순대국밥집 등 종료도 꽤 다양하다. ‘도심 속 농촌의 정겨운 손맛’이란 주제로 조성된 ‘세천 먹거리촌’으로 석쇠구이와 짬뽕, 불고기 등을 대표 음식으로 내놓고 있다니 한번쯤 찾아볼 일이다.

▼ 도로변의 담장이나 벽면은 벽화로 채워 넣었다. 2018년의 도민체전 때 손님맞이를 위한 환경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꾸며놓은 것이란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벽화를 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꽤 된단다. 먹거리촌에서 식사를 마친 다음 산책삼아 걸으며 옛 추억이 녹아든 벽화를 감상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 이곳은 도시와 농촌마을의 경계지점이다. 이런 특징을 살리려 했는지 벽화는 하나같이 7080의 색채가 강하다.

▼ 담배를 팔고 있는 가게는 ‘우리동네 담배가게’란 이름표를 달았다. 그런데 문을 두드려보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우리동네 담배가게 사는 아가씨가 이쁘다네’. 이런 문구를 보고도 그런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 5분쯤 걸었을까 창고처럼 생긴 건물 앞에 ‘천봉산 등산로 안내도’와 이정표(천봉산 등산로 4.7㎞)가 세워져 있었다. 안내도는 지도와 함께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는 특징을 적었다. 산림욕을 즐기기에 그만이라면서 말이다.

▼ 20m쯤 들어가는 곳에 있는 ‘남적2동 마을회관’ 앞에는 또 다른 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예스런 느낌이 물씬 풍기는 지도에는 중요지점에 이르는 거리까지 적어 넣어 이해를 돕고 있다. 천봉산 정상까지 4.7㎞이고 날머리인 임란전적지까지는 7.5㎞라고 한다.

▼ 마을을 벗어난 탐방로는 이제 임도를 따른다. 꽤 긴데다 중간에 갈림길을 만나기도 하나 이정표(천봉산 정상→ 4.3㎞/ 세천먹거리촌↓ 250m)가 잘 되어 있어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 가는 도중 시야가 트이면서 외서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저런 들녘이 있기에 상주의 자랑거리인 삼백(三白)의 한 축을 쌀이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 산행을 시작한지 15분 만에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사직되는 것이다.

▼ 이정표는 천봉산 정상까지의 거리를 4.0㎞로 적고 있다. 남적동(세천)까지는 0.7㎞. 하지만 아까 안내도에서 보았던 ‘황골산’이란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방향에 거리까지 표시된 모범적인 이정표이지만 어딘지 5%쯤 부족하다고나 할까?

▼ 능선을 따라 난 산길은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서너 번 만나게 되는 갈림길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빠짐없이 이정표를 세워 놓았다.

▼ 산행을 시작한지 20여분 만에 송전탑(63번) 아래에서 첫 삼거리(이정표 : 천봉산 정상↑ 3.6㎞/ 부원동← 250m/ 세천먹거리촌↓ 850m)를 만났다. 왼편은 부원동에서 올라오는 길인데, 우리가 산행을 시작했던 세천먹거리촌보다 훨씬 가깝다. 이는 황골산-천봉산의 산세가 남북으로 긴 반면에 동서로는 홀쭉하게 늘어서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능선은 온통 소나무 세상이다. 거기다 신갈나무로 간을 맞추는 모양새이다. 코에 더해 눈까지 호사를 누리는 산행이 되는 이유이다. 코끝에 스쳐가는 솔향기만으로도 과분한데, 거기다 연록의 푸름까지 더해지니 이보다 더한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 이색적인 풍경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무덤의 둘레를 철조망으로 꽁꽁 막아놓은 것이다. 야생동물들과의 힘겨운 투쟁에 대한 기사가 심심찮게 뜨더니 이제는 무덤까지도 저렇게 변해버렸나 보다.

▼ 야생동물이 남기고간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 황골산과 천봉산은 해발이 500m에도 한참이나 못 미치는 나지막한 산이다. 그래도 명색이 산인데 오르막길 하나 없겠는가. 하지만 조금이라도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침목계단을 놓았다.

▼ 산행을 시작한지 35분 만에 ‘204.2m봉’으로 여겨지는 봉우리에 올라섰다. 그런데 이정표(천봉산 정상 3.0㎞/ 세천먹거리촌 1.5㎞) 아래에 낡은 의자 하나가 놓여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벤치나 의자 등 쉴만한 곳이 일절 눈에 띄지 않더니, 이곳에서라도 잠시 쉬어가라는 누군가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 도심 근교의 산인데도 나무들이 참 굵다. 아니 원시에 가까운 숲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숲을 잘 관리해 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 한마디로 멋진 길이다. 가파른 내리막길까지도 나선형으로 만들어 눈을 즐겁게 했다.

▼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푹 꺼진 안부에 내려섰다. 좌우로 널찍하게 임도가 나있지만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 이후부터는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그렇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다. 가파른 곳마다 침목계단을 놓았기 때문이다. 속도만 조금 떨어뜨리면 되는데 걱정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괴상하게 생긴 바위가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여자의 엉덩이를 쏙 빼다 닮았다. 그 위에 선돌까지 보이니 스토리텔링용으로 이만한 소재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 굵은 신갈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곳도 있다. 이번에는 소나무가 간을 맞춘다.

▼ 그렇게 30분 정도를 오르자 황골산(383.1m) 정상이다. 네다섯 평쯤 되는 정상에는 이정표(천봉산 정상↑ 1.6㎞/ 남적동← 2.3㎞/ 남적동(세천)↓ 3.0㎞)와 국가지점번호판(라바 5755-2875) 외에도 평상이 놓여있다. 아니 들머리의 산행안내도에서 산림욕하기에 딱 좋은 산이라고 자랑했으니 캠핑 사이트가 아닐까 싶다.

▼ 아쉽게도 정상석은 세워져 있지 않았다. 그 흔한 표지기조차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게 아쉬웠던지 산행대장이 이정표의 맨 위에다 ‘황골산’이라고 적는다. 후래자를 위한 배려일 것이다.

▼ 천봉산으로 향한다. 이곳 황골산에서 천봉산의 정상까지는 1.6㎞. 안부까지 가파르게 뚝 떨어졌다가 다시 오르막길과의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만 한다.

▼ 침목계단을 따라 10분쯤 내려서자 안부에 이른다. 부원동과 외서면의 봉강2리를 잇는 고갯마루로 첨부된 지도에 ‘이끼늠에 안부’. 상주시에서 만든 산행안내도에는 ‘이끼넘어 잘록지점’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끼늠에’란 지명은 요 아래에 큰 못이 있어 이끼가 많이 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하지만 이정표(천봉산 정상↑ 1.1㎞/ 부원동← 1.4㎞/ 남적동(세천)↓ 3.7㎞)는 부원동으로 내려가는 길만 표시하고 있었다. ‘이끼늠에’가 봉강리 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자연부락의 이름인데도 말이다.

▼ 안부를 지나자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아니 엄청나게 가파르다. 지자체는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조그만 도움이라도 주려는 듯 침목계단을 놓았다.

▼ 계단도 놓지 못할 정도로 가파른 곳에서는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위로 향한다. 왔다갔다 ‘갈 지(之)’를 써가면서 경사를 누그러뜨렸다는 얘기이다.

▼ 가파름과의 힘겨룸은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는다. 13분 정도면 그 기세를 팍 누그러뜨리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솔향기 가득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걷게 된다.

▼ 이때 왼편 나뭇가지 사이로 틈새가 열리면서 상주 들녘이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쌀이 대표적인 특산물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들녘이다.

▼ 그렇게 7분 정도를 걷자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아까 황골산에서 보았던 캠핑 사이트가 만들어져 있다. 이곳 역시 산림욕을 즐기기에 그만이겠다.

▼ 사이트와 천봉산 정상 사이는 온통 소나무 일색이다. 상큼한 솔향기를 한껏 들이키며 걸어본다. 온 몸이 새로운 활기로 넘쳐나는 듯하다. 소나무 숲길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40분 만에 산불감시탑을 겸한 팔각정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정상에 올라섰다. 10평 남짓 되는 너른 정상에는 정상석과 이정표는 물론이고 삼각점(상주 415)에 각종 안내판까지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 먼저 천봉산의 내력부터 살펴보자. 팔각정 앞에다 만들어놓은 큼지막한 석판을 읽어보면 된다. 석악(石岳)이라고도 부르는 상주의 진산으로 남쪽 갑장산(淵岳), 서쪽의 노음산(露岳)과 더불어 상주 삼악(三岳)을 이루고 있다한다. 봉황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상을 하고 있다하여 천봉산(天鳳山)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석판은 또 이 산이 외침을 막는 주요 요충지였음을 알려준다.

▼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석은 석판의 반대편에다 세웠다. 적힌 이름은 천봉산(天峰山). 정상에 서면 주변의 산봉우리 천개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 설을 인용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자세한 상황은 들머리에 세워져 있던 안내도의 글귀를 인용해본다. <정상에 오르면 황악산, 속리산, 주흘산 그리고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등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하산은 2.6㎞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임란북천전적지이다. 이 코스는 상주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을 얻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소나무가 길가에 가득하니 오죽하겠는가.

 

▼ 요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소나무가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문득 남녀가 교합하고 있는 듯한 자세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얘기를 집사람에게 했다가 불순하다는 지청구만 얻어들었다. 동일한 사물임에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이렇게 큰 것이다.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맞다. 육십년 이상을 쌓아온 내 수양은 아직도 멀었다.

▼ 5분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능선을 따르는 코스 및 약수터를 경유하는 코스인데, 이정표는 거리(2.7㎞)나 소요시간(60분)이 같다고 적고 있다. 우리 부부는 약수터를 경유해서 내려가는 코스를 선택했다. 길이 훨씬 편하다는 산행대장의 귀띔을 참조했음은 물론이다.

▼ 하지만 이 구간도 역시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었다. 침목계단을 놓아 미끄러짐을 방지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참! 중간에 바깥너추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났으나 개의치 않고 통과했다. 그쪽으로 200m만 더 가면 데크전망대가 나온다지만 아까 정상에서의 조망과 별반 달라질 것도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 정상에서 내려선지 10분 만에 약수터에 도착했다. 약수터는 데크로 대를 만들고 벤치를 놓아 쉼터로 꾸며놓았다. 물 한잔 마시면서 잠시 쉬어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말이다.

▼ 표주박 모양의 돌로 치장된 약수터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먹는 물 시험성적서는 눈에 띄지 않으나 바가지가 걸려있는 걸로 보아 마실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물맛은 썩 뛰어나지 못했다. 오늘처럼 따뜻한 날에는 뱃속까지 청량감이 느껴져야 하지 않겠는가.

▼ 약수터를 지나서도 가파른 내리막길은 계속된다. 하지만 아까 헤어졌던 길이 다시 합쳐지는 지점부터는 완만하게 변한다.

▼ 갈림길도 심심찮게 만난다. 그 가운데 ‘영암각’이란 지명이 표기된 이정표가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이름 그대로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바위를 모시는 전각이 바로 ‘영암각(靈巖閣)’이기 때문이다. 높이가 9m, 둘레가 18m나 되는 커다란 바위인데 하도 영험하다보니 전각까지 세워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사가 봉행됨은 물론이다.

▼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돌탑 하나 없겠는가. 그리고 소망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가슴에 품어왔던 소망이라도 있다면 저 돌탑에 빌어보면 어떨까.

▼ 잠시 후 이정표(임란북천전적비 1.6㎞/ 천봉산 정상 1.0㎞)가 세워져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 나와 있는 ‘292m봉’이 아닐까 싶다. 아니 ‘묘봉’일지도 모르겠다. 괄호 속에다 ‘묘봉 쉼터’라고 적어 넣은 걸 보면 말이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팔각정에 이른다. 전망대의 기능이 없이 오롯이 쉼터의 기능만 수행하는 정자이다.

▼ 정자의 뒤에는 거북이의 등짝처럼 생긴 바위가 올라앉았다.

▼ 그 옆에는 조망바위가 있었다. 상주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명당자리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다시피 이곳 상주는 예로부터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리어 왔다. 삼백이란 쌀과 명주(누에고치), 곶감 등 세 가지의 하얀색 특산품을 의미한다. 그 가운데 하나인 쌀은 저렇게 너른 들녘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참! 최근에는 ‘이백일청’이란 신조어가 생겨났을 정도로 포도 재배지가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또한 ‘명실상감 한우’라는 브랜드로 곶감을 먹여 기른다는 상주한우를 새로운 특산품으로 홍보까지 한다.

▼ 조망을 즐기다가 빠져나오니 나무계단이 길게 놓여있다. 하지만 집사람은 무릎에 무리가 간다며 흙길을 고집한다. 비탈진데다 미끄럽기까지 하지만 무릎에는 부담이 덜 간단다.

▼ MTB 전용 이정표도 눈에 띈다. 상주가 ‘자전거 도시’라더니 일반 자전거 말고도 저런 산악용자전거도 일상화가 되었나보다. 참고로 상주의 자전거 교통 분담률은 무려 21%(전국평균 3%)에 이른다고 한다. 가정당 평균 2대의 자전거를 보유한다니 아예 상주 사람들의 삶에 묻어나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다.

▼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이곳 천봉산은 상주 시민들에게 휴식처나 다름없다. 산책삼아 오르는 곳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니 시민들이 몸을 풀 수 있는 체육시설을 만들어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 몇 걸음 더 걷자 밋밋한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근처의 ‘119 구호지점 표시목’은 현 위치를 ‘자산’으로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산산성(紫山山城)이 있었다는 자산이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 하산길의 마지막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장식한다. 찾아온 길손을 그냥 떠나보내기가 아쉽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 정상에서 내려선지 50분 만에 임란북천전적지에 내려섰다. 임진왜란 당시 관군 60명과 민병 800여명이 조총으로 무장한 왜의 주력부대 1만7천여 명과 북천변에서 격전, 전원이 장렬히 산화한 곳으로 현재는 호국정신의 성지이자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77호로 지정돼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산행은 3시간이 걸렸다. 물론 임란북천전적지를 둘러보는데 소요된 시간까지 포함됐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가 8㎞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안으로 들어서면 ‘태평루(太平樓)’가 가장먼저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으로 된 다포식 팔작지붕의 2층짜리 누각이다.

▼ 다음은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분들을 배향하는 충렬사의 외삼문인 ‘경절문(景節門)’이다. 이 문의 출입은 오른쪽으로 올라갔다가 왼쪽으로 내려와야 한단다. 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오른쪽만 이용할 수 있었다.

▼ 외삼문을 통과하면 제실(祭室)과 비각(碑閣) 그리고 임란기념관(壬亂紀念館)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가운데 비각은 임진왜란 당시 북천 전투에서 싸우다 순국한 3충신(종사관 윤섬, 박호, 이경류)과 2의사(의병장 김준신, 김일)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충신의사단비(忠臣義士壇碑)’ 복제본과 상주목 판관으로 봉직 중 순국한 권길의 충절을 새겨둔 ‘판관권길사의비’가 모셔져 있다. 기념관에는 전투 참여 인물들에 대한 역사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는데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 내삼문인 충의문(忠義門)을 지나면 충렬사(忠烈祠)로 입장할 수 있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모했다. 참고로 충렬사는 북천전투에서 전사한 3충신·2의사,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과 함께 순국 무명열사들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매년 양력 6월4일 넋을 기리는 제향 행사를 가져오고 있단다.

▼ ‘침천정(枕泉亭)’은 1577년 상주목사 정곤수가 상주읍성 남문 밖에 건립한 연당으로 선비들이 휴식처와 글 짓는 곳으로 사용했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한 것을 다시 지으면서 천향정(天香亭)이란 이름을 붙였다. 1914년 상주읍성이 헐릴 때 뜻있는 유지 몇이 정자를 사서 현 위치에 옮기고 침천정이란 이름으로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단다.

▼ 침천정의 옆에는 상산관(商山館)이 있다. 지방 관아의 중심 건물로 고을 수령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행하였던 곳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던 시설이다.

▼ 경내에는 임란북천전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의병 800여 명의 귀중한 목숨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이다.

 

함월산(含月山, 584m)

 

산행일 : ‘21. 4. 10(토)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과 황룡동의 경계

산행코스 : 기림사→왕의 길→용연폭포→수렛재→함월산→481m봉→불령봉표→왕의 길→기림사(소요시간 : 약 11km/ 3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12개의 봉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함월산은 ‘품을 함(含)’ 자에 ‘달 월(月)’ 자를 쓴다. 달을 머금은 산이라 하겠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남쪽으로 토함산과 맞닿아 있고 북쪽의 운제산과는 같은 능선으로 이어진다. 전형적인 육산이라는 특징도 있다. 때문에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하지만 눈에 담을만한 바위들이 가끔 나타나는가 하면, 감포 앞바다의 시린 쪽빛을 눈에 담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함월산을 찾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앞의 두 산에 비해 입소문을 덜 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산이 요즘은 사람들로 넘친다고 한다. 함월산이 품은 명찰인 기림사와 골굴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배후산인 함월산까지 오르는가 하면, 최근 복원된 ‘왕의 길’이 명품 둘레길로 입소문을 타면서 찾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 산행들머리는 ‘기림사 주차장’(경주시 문무대왕면 호암리 399-1)

동해고속도로(울산-포항) 동경주 IC에서 내려와 국도 14호선을 타고 포항방면으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기림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동해고속도로의 시작점인 남포항 IC는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의 ‘포항 IC’에서 국도 31호선으로 연결시키면 된다. 그러나 우리를 싣고 온 산악회의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경주 IC에서 내려올 경우 훨씬 더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도 말이다.

▼ 함월산은 꽤 여러 곳에서 오를 수 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국제신문’의 ‘근교산&그 너머’ 취재팀이 개척한 루트를 따랐다. 함월산의 산행뿐만 아니라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신문왕 행차길’이라는 요즘 한참 각광을 받고 있는 명품 둘레길까지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 홍예다리(虹橋)를 본뜬 다리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보성 벌교나 여수 흥국사, 고성 육송정 등 홍교는 대부분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귀중한 문화재이다. 고흥 옥하리나 강진의 병영성 등 그 밖의 홍교도 최소한 유형문화재이다. 그런 홍교를 본떠 다리를 놓은 것이다. 시멘트로 만든 탓에 조잡하기 짝이 없지만 어쨌든 홍교는 홍교가 아니겠는가.

▼ 잠시 후 일주문(含月山 祇林寺)이 얼굴을 내민다. 기림사는 2600년 전부터 부처님께서 머물러 계신 곳임을 표방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큰 비구 1250인과 함께 계셨다’는 금강경(金剛經)의 첫마디를 인용했다. 기원정사(祇園精舍)로도 번역되는 그 ‘기수급고독원’이 바로 이곳 기림사라는 것이다.

▼ 기림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되어있다. 그러나 해방 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사찰로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렸다고 한다. 그러다 교통이 불편한 데다 불국사가 대대적으로 개발되면서 지금은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것이다.

▼ 일주문 옆에 몇 개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읽어보고 가는 것도 괜찮겠다. ‘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 서다’라는 제목으로 원효대사와 기림사의 인연을 적었는가 하면, 기림사의 연혁과 다섯 가지 맑은 샘인 오정수(五井水), 그리고 기림팔경(祗林八景)에 대한 설명판도 따로 세웠다.

▼ 절에 왔으니 경내부터 우선 둘러볼 일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천왕문(天王門)이 중생일 맞는다. 사찰로 들어가는 두 번째 문으로 네 명의 천왕(天王)을 모시는 곳이나 그보다는 전각 앞의 소나무가 더 눈길을 끈다. 저 늙은 소나무 아래로 수맥이 흐르는데, 음용하면 눈이 밝아진다고 해서 명안수(明眼水)로 불린단다. 위에서 말한 오정수 가운데 남방(南方)이기도 하다.

▼ 가람의 금당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833호)이다. 오랜 연륜 만큼이나 단청의 색깔이 바래 더 예스러운 이 건물은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세웠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으로 그동안 여러 번의 개축과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62년(철종 13년)의 큰 화재 때는 이 전각만이 화를 면하기도 했단다. 참혹하기 짝이 없는 화마도 비로자나불만은 피해갔던 모양이다. 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958호)과 비로자나삼불회도(보물 1611호) 등 또 다른 보물들이 대적광전의 내부에 있었으나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었다.

▼ 앞마당의 반송(盤松) 옆에는 석탑 하나가 외롭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205호인 ‘기림사 삼층석탑’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탑은 2층으로 된 바닥돌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올렸다. 1층 바닥돌이 묻히고 머리돌 일부가 없어졌으나 나머지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참! 이 탑의 아래로도 수맥이 흐른다고 했다. 음용하면 기골이 장대해지고 힘이 넘친다고 해서 ‘장군수(將軍水)’로 불린다. 기림사 오정수(五井水) 가운데 중방(中方)이기도 하다.

▼ 대적광전의 맞은편에 있는 진남루(鎭南樓, 경북 문화재자료 251호)는 꽤나 큰 건물이다. 이름은 누각이지만 누각처럼 생기지 않고 맞배지붕을 했다. 남방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남방은 일본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당시 기림사는 전략요충지로서 경주지역 의병과 승병활동의 중심사원이었다고 한다. 이 때 진남루는 승군의 지휘소로 썼던 건물이다.

▼ 이 일대는 가람의 핵심이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전(藥師殿, 경북 문화재자료 252호)과 맞은편에 진남루(鎭南樓), 오른쪽으로 응진전(應眞殿, 경북 유형문화재 214호), 수령이 500년 넘는다는 큰 보리수나무와 목탑터가 있다.

▼ 기림사의 또 다른 한 축은 ‘유물관(祇林遺物館)’이다. 기림사는 천축국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당시 이름은 임정사(林井寺), 이후 원효대사가 석가모니가 제자를 가르치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원정사에 착안하여 기림사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림사의 역사는 천 년 전으로 훌쩍 올라간다. 그런 역사를 품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유물관의 히어로는 1501년(연산군 7년)에 조성된 ‘건칠보살반가상(乾漆菩薩半跏像, 보물 415호)’이다. 반가좌(半跏坐)로 앉았는데, 원통형 보관을 쓰고 목에는 영락을 하고 있다. 이밖에도 자현장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모습을 나타낸 지옥시왕도가 눈길을 끈다. 상단에는 염라대왕을 포함한 열 명의 지옥 왕들이 심판을 하고, 하단에는 망자의 몸에 못을 박거나, 절구에 넣고 찧거나 혀를 빼내어 쟁기로 가는 등 옥졸들에게 죄를 받고 있는 지옥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화정당(華井堂) 옆에는 돌샘이 있었다. ‘서방 화정수(西方 華井水)’라는 이름표를 달았는데, 음용하면 폐부의 기운을 다스려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해준단다.

▼ 꽃밭 속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동자승이 귀여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기림사 경내는 이처럼 꽃밭과 소품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거기다 건물 앞에 세워놓은 주련(柱聯)들도 색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 일주문으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절간 뒤로 빠져나가도 탐방로와 연결된다). 이때 냇가에 세워놓은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호암천 건너 옛 동암(東庵, 東溪庵)에 오탁수(烏?水)가 있다는 것이다. 까마귀가 바위를 쪼아대자 물이 솟아나왔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다섯 가지 맛을 내는 물로 유명한 기림사의 오정수(五井水) 가운데 동방(東方)이기도 하다. 오정수의 나머지는 아까 보았던 화정수(西方)와 장군수(中方), 명안수(南方), 그리고 차를 끓여 마시면 맛이 으뜸이라는 북방 감로수(北方 甘露水)가 있다.

▼ 탐방로는 호암천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나있다. 이 구간은 여러 번에 걸쳐 갈림길을 만나는데 감로암(甘露庵) 앞의 첫 번째 갈림길에서 우린 또 하나의 오정수를 만났다. 바위에서 나오는 석간수로 하늘에서 내린 단 이슬 맛이 난다는 ‘북방 감로수(北方 甘露水)’이다. 안내판은 차를 다스리면 그 맛이 뛰어나다고 적고 있다. 우윳빛이 돌아 유천(乳泉), 단맛이 나서 감천(甘泉), 단이슬 감로와 같다고 해서 감로수(甘露水)라 부른단다.

▼ 산행을 시작한지 18분, 처음으로 만난 이정표(모차골→ 5.1㎞/ 기림사 주차장↓ 0.9㎞)는 우릴 오른편으로 가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왼편으로도 널찍하니 길이 나있다. 기림사에서 곧바로 빠져나오는 길이다.

▼ 조금 더 걸으면 ‘공원지킴터’다. 맞다. 이곳 함월산은 경주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아니 경주시 일원은 전체가 국립공원이다. 다른 국립공원들처럼 산이나 바다 등 자연경관이 아닌, 세계적으로도 놀라운 문화유산으로 이루어진 특별한 공원이다. 도시 전체가 벽 없는 박물관으로 보면 된다.

▼ 탐방로는 그야말로 곱다. 자동차가 다닐 정도로 널찍한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거기다 봄이 무르익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산벚꽃까지도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혔다.

▼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T자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자 이곳이 ‘신문왕 호국행차길’임을 알리는 커다란 목판이 눈에 띈다. 현대인들의 걷기 열풍은 오랫동안 자연의 품속에 숨어 있던 수많은 옛 길을 사람들 앞에 드러냈다. 만파식적의 전설이 내려오는 ‘신문왕 호국행차 길’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왕의 길’로도 불리는 이 둘레길은 경주시내 월성에서 시작해 월지·능지탑·황복사지·명활산성·덕동호·추원마을·모차골·수릿재·세수방·용연폭포·기림사·골굴사·감은사지·이견대를 거쳐 문무왕릉까지 이어진다. 이중 ‘신문왕 호국 행차길’은 추원마을에서 기림사까지 편도 약 6㎞를 걷는 길로 석탈해가 신라로 들어왔던 길이자 문무왕 장례 행렬이 지나갔고, 신문왕이 마차를 타고 아버지 문무왕 묘를 찾아가 나라를 구원할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기 위해 행차한 충효와 호국이 서린 길이기도 하다.

▼ ‘왕의 길(신문왕 호국 행차길)’은 신문왕이 부왕의 능침(대왕암)에 나아가 호국룡으로부터 나라의 평안과 안녕을 지켜줄 옥대와 만파식적을 받아서 돌아간 옛길이다. 경주국립공원관리소가 1500년 묵은 옛길을 공들여 복원했다. 기림사에서 시작한 이 둘레길은 용연폭포와 불령고개, 세수방, 수렛재, 모차골을 지나 추원마을로 이어진다.

▼ 탐방로는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이정표나 등산로안내도는 물론이고, 지명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을 곳곳에 세워 왕의 길을 찾은 탐방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거기다 함월산에서 식생하고 있는 동·식물과 물고기에 대한 안내판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좋은 체험학습이 될 수 있겠다.

▼ 계곡을 따라 잠시 올라가자 길이 오른쪽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계곡을 가로질러 목재 덱이 이어져 있다. ‘왕의 길’. 아니 함월산이 자랑하는 볼거리인 ‘용연폭포(龍淵瀑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름 그대로 용이 놀다가 하늘로 곧바로 차고 오르는 듯한 물줄기를 마주할 수 있다. 참! 폭포가 만들어놓은 깊은 못. 용연(龍淵)에는 멸종위기 2급 어류인 독종개가 서식하고 있다니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 ‘삼국유사’에 따르면, 만파식적(萬波息笛)과 옥대(玉帶)를 얻어 궁궐로 돌아가던 신문왕은 계곡에서 마중 나온 태자 이공을 만난다. 옥대의 장식에 새겨진 용이 진짜임을 알아본 태자가 장식을 떼어 물에 넣자 순식간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생긴 연못이 용연(龍淵)이고, 그 연못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용연폭포다.

▼ 명색이 ’왕의 길‘인데 쉼터 하나 없겠는가. 용연폭포 상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의 냇가에다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작은 쉼터(이정표 : 수렛재 2.5㎞/ 용연폭포)를 만들어 놓았다.

▼ 잠시 후 갈림길(이정표 : 수렛재 2.3㎞/ 용연폭포 0.2㎞)을 만난 탐방로는 널찍한 임도를 버리고 산속으로 파고든다.

▼ 때문에 길의 폭이 많이 좁아졌다. 경사도 아까보다는 조금 더 가팔라졌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숲속으로 길이 난 덕분에 푸릇푸릇한 봄의 향취를 더 가까이서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록으로 물든 산하는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 ‘119’에서 세운 구호지점표시목이 특이해 카메라에 담아봤다. 현위치 번호(경주 26-07)와 국가지점번호(마마 7051-6233) 등의 기본적인 정보 외에도 진행방향의 표시와 해발고도까지 적어 넣었다. 이정표와 고도표까지 겸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 완만한 오르막길이 잠시 계속된다. 그러더니 불령(佛嶺)이라는 작은 고갯마루(이정표 : 수렛재 1.6㎞/ 용연폭포 0.9㎞)에 올라선다. 쉼터에서 15분 거리인 이곳에는 소중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불령봉표(佛嶺封標)’가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입산을 금한다’는 왕명을 새긴 바윗돌로 옆에는 안내판을 세워 불령봉표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참! 이곳에서도 함월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수렛재에서 오르기로 하고 그대로 직진했다. 저 오솔길은 함월산 정상을 지나 하산할 때 걷게 된다.

▼ 봉표는 조선의 23대 임금인 순조 31년에 세웠다. 가로 1.2m, 세로 1.5m 크기의 화강석 표면에 ‘연경묘 향탄산인 계하 불령봉표(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라는 글귀를 새겼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묘(묘호 연경)에 대한 봉제사와 그에 따른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숯을 만드는 산이니 일반인이 나무를 베는 일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불령봉표 일대는 조선시대 고급 숯인 백탄(白炭)의 생산지로 전해지고 있다. 백탄을 만들기 위해선 나무가 많이 필요했으므로, 벌채를 막고자 봉표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 산비탈을 따르던 탐방로는 계곡을 서너 번쯤 건너기도 한다. 계곡 언저리에 밀식하고 있는 진달래들이 새하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집사람은 철쭉이라 우긴다. 진달래는 잎을 피우기 전에 꽃망울부터 터트린다는 특징을 내세우며 말이다.

▼ ‘왕의 길’은 한때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다보니 어떤 곳에서는 개울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긴 여정에 지친 신문왕 일행이 잠시 쉬며 손을 씻었다는 ‘세수방’이 이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겨우내 떨어진 낙엽이 계곡을 덮어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 탐방로가 갑자기 가팔라진다. 그러더니 절벽에 가까운 산비탈을 옆으로 째며 아슬아슬하게 올라간다. 맞다. 이곳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했던 주요 방어선이었다. 그러니 저 정도는 거칠어야 하지 않겠는가. 옛 사람들은 이곳을 ‘말구부리’라 불렀다. 길이 비탈진 탓에 수레를 끌던 말들이 구부러졌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말 뿐만이 아니라 왕의 행차도 이곳에서는 난관에 봉착했을 게 뻔하다.

▼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 만에 ‘수렛재’에 올라섰다. 신문왕이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갯마루이다. 681년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2년 후인 683년에 이 고개를 넘었다.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대왕암을 찾기 위해서이다. 이 무렵 정국은 매우 어지러웠다고 한다. 자신의 장인인 김흠돌(金欽突)이 난을 일으켰고, 수백 년 동안 신라를 괴롭혀온 왜구의 준동도 늘 고민거리였다. 이에 대한 해답을 삼국통일 위업을 달성한 그의 아버지에게서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이정표는 ‘모차골’까지의 거리를 1.4㎞로 적고 있다. ‘모차골’이란 신문왕이 탄 마차가 지나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차길이 모차골로 변했단다. 곁에는 ‘지명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란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수렛재와 모차골 외에도 용연폭포, ‘말구부리’, ‘세수방’ 등의 유래를 적었다.

▼ 이제 ‘왕의 길’을 벗어날 차례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을 타면 된다. 산길로 들어선다는 얘기이다. 지금까지는 산책삼아 걸어왔지만 앞으로는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산길이 또렷한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 산길은 작은 봉우리 두어 개를 넘으면서 함월산으로 향한다. 아니 비교적 가파른 오르막길을 길게 올랐다가 짧게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10분 남짓을 오르면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특별히 눈에 담을 것도 없는데다 조망까지도 일절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봉우리다.

▼ 9분을 더 고생해서 올라선 봉우리(국제신문에서는 550m으로 표기하고 있었다)에서 우린 명품바위를 만났다. 공룡의 등줄기라도 되려는 듯 뿔처럼 생긴 바위 몇 개가 뾰쪽하게 돌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 생김새가 자못 빼어나서 ‘명품’이란 표현을 써봤다.

▼ ‘바위의 자태뿐만 아니라 조망까지도 일품이랍니다.’ 산책삼아 산을 올랐다는 현지 산꾼 부부의 자랑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바위 사이로 올라서니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 부부가 자랑삼아 말하던 동부민요보존회수련원(그들은 국악학교라고 했다)이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그 뒤를 받혀주고 있는 동대봉산과 무장봉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 조망을 즐기다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바위 무더기는 오른편으로 우회한다. 이어서 꽃망울을 활짝 연 진달래가 반기는 오솔길을 잠시 걸으면 드디어 함월산 정상이다. 수렛재를 출발한지 34분 만이다. 참! 정상 근처에서 만나게 된다는 ‘무장봉 갈림길’은 무심코 지나쳐버렸다. 수렛재에서 올라온 호미지맥이 무장봉 방향으로 흐르는 중요한 지점이지만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으니 어찌 알아보겠는가.

▼ 정상은 별다른 특징도 없고 조망도 없는 밋밋한 봉우리다. 그리고 정상인지도 확실치가 않다. 헬기장에 버금갈 정도로 널따랗지만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국립공원에서까지 내팽개쳤을 정도로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그게 아쉬웠던지 누군가가 돌무더기를 쌓고 그걸 지지대 삼아 판자를 세워놓았다. 서툰 글씨로나마 ‘함월산’이라 적었음은 물론이다.

▼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으로 오를 때와는 달리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조심조심 10분 정도를 내려서니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도 물론 이정표는 없다. 국제신문 취재팀은 이곳에서 왼편 ‘모차골’로 내려섰다. 하지만 우린 곧장 직진하기로 했다. 불령봉표가 있는 불령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그게 10분이면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숨이 턱에 차서 올라선 ‘481m봉’은 그야말로 전망대 일색이다. 꼭대기가 바위무더기들로 이루어져 있어 서는 곳마다 시야가 트이기 때문이다. 소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첫 번째 조망처에 서면 산자락 사이로 포항 지역의 쪽빛 바다가 살짝 고개를 내민다.

▼ 반대편으로 나가면 이번에는 경주시 방면의 바다가 펼쳐진다. 태초의 빛 그대로 쪽빛 시린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 481m봉에서 내려서는 길 역시 많이 가팔랐다.

▼ 소나무가 많이 굵어졌다. 해를 두고 거듭 쌓여온 솔가리도 수북하다. 송이버섯이 자라기에 딱 좋은 환경이라 하겠다. 그래선지 비닐 끈으로 금줄을 쳐놓은 곳이 많이 보였다.

▼ 짧게 올라선 또 다른 봉우리에는 눈에 담아둘만한 바위들이 두어 개 보였다. 참고로 이 길은 부산일보의 ‘산&산’ 취재팀이 답사했던 코스이다. 기림교(기림사 입구)에서 출발해 함월산 정상과 도통골을 거친 다음 기림사로 하산했는데, 이런 볼거리들이 그들의 발걸음을 이끌었지 않나 싶다.

▼ 걸터앉아 쉬기에 딱 좋은 바위들도 여럿 보였다. 쉬면서 조망까지 즐길 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 이후로는 평범한 산길이 이어진다. 그저 화사하게 피어난 진달래에 눈 맞추며 걷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흥이라도 나면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면 될 일이고 말이다. 다만 이 구간은 송이 채취지역이라서 가을철에는 피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40분 내려서자 드디어 불령고개다. 물론 함월산 정상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이젠 왕의 길을 따라 기림사까지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건 그렇고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20분이 걸렸다. 국제신문에서 산행거리를 11㎞로 적고 있었으니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대부분이 트레킹 코스인데다 산길 또한 걷기에 딱 좋을 정도로 완만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 이번 산행은 이동 중에 ‘골굴사(骨窟寺)’라는 사찰을 들러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기림사와 함께 함월산을 대표하는 천년고찰인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일주문도 ‘함월산 골굴사(含月山 骨窟寺)’라는 편액을 달았다. 골굴사는 신라 불교가 번창하던 6세기경 인도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 일행이 12개의 석굴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해온 인공 석굴사원이다.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석굴들이 특이해서 ‘한국의 둔황석굴(敦煌石窟)’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기림사와 함께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등록되어있다.

▼ 조선 후기에 이르러 화재로 폐사된 골굴사는 1990년 적운스님이 머물며 중창을 시작해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골굴사는 현재 사찰에서의 생활과 발우공양, 다도, 참선 및 명상 그리고 선무도(禪武道)를 체험할 수 있는 독특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일일체험과 1박 2일 템플스테이, 그리고 장기 입산 수련 등 다양하다니 기회가 되면 한번쯤 시도해 볼 일이다.

▼ 경내로 들어가자 육중한 몸매의 포대화상과 개 모양의 상이 있다. 개 모양의 상은 골굴사에서 유명세를 떨친 ‘동아보살상’이라고 한다. 겨울에 태어났다고 해서 ‘동아’라는 이름을 얻은 이 개는 골굴사에서 오래 길렀는데 일체 육식을 하지 않고 아침·저녁 예불에 꼭 동참하면서 절간의 명물이 되었다. 개가 늙어 죽자 그 영혼을 기리고자 동상을 세웠단다.

▼ 원융당(템플스테이 숙소)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마애불이 있는 골굴사 사찰이고 오른쪽은 선무도 대학과 화랑사관학교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다. 근처에는 선무도 대학인 원효관도 있다. 그건 그렇고 소림사 하면 무술이 떠오른다. 한 때 중국영화에 자주 등장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리에도 깊게 새겨졌다. 그 소림사처럼 무술을 연마하는 사찰이 바로 이곳 골굴사이다. 첨부된 사진은 선무도 대학의 숙소와 식당인 ‘마하지관원(摩訶止觀院)’이다.

▼ 법당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선무도(禪武道)’로 여겨지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동상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선무도란 위빠사나(Vipasanna)라 불리는 수행법으로 본래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이라 하여 부처님 당시부터 전수되어 온 수행법이라고 한다. 이는 깨달음을 위한 실천방법으로 인도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요가와 명상을 아우르는 관법수행이란다. 범어사의 양익(兩翼)스님이 흩어진 관법수련을 체계화하여 승가에만 전수했고, 이를 적운스님이 전수받아 대중포교를 하면서 1985년 '선무도'라 칭했단다. 현재는 국내는 물론이고 멀리 외국에서까지 선무도를 배우기 위해 총본산인 이곳을 찾고 있으며, 14개 나라에 선무도를 배울 수 있는 지부들이 열려있다고 한다.

▼ 골짜기 끝에 이르자 골굴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수십 미터의 응회암 절벽에 크고 작은 동굴이 군데군데 숭숭 뚫려 있고, 그 절벽의 맨 꼭대기에는 모나리자처럼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마애여래불이 앉아 있다. 참고로 응회암(凝灰岩)은 바위가 비바람에 깎여 나갈 때 암석에 포함된 크고 작은 암석덩어리들이 함께 빠져나간다. 그 자리가 수많은 구멍들을 만들고 이 구멍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고 발달(타포니)하게 된다. 골굴암은 이러한 타포니 동굴을 다듬어서 석실을 만들고 불상을 배치한 석굴사원이다.

▼ 골굴사의 핵심은 높은 응회암 암벽을 깎아서 만든 마애석불이다. 높은 암벽의 꼭대기에 돋을새김 기법으로 조각했는데, 현재 유리로 지붕을 씌워 보호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제작한 다른 지역의 석불들과는 달리 이 부처님은 모래 성분이 다량 함유된 응회암에다 새겼고, 응회암의 가장 큰 약점인 풍화작용에 의한 훼손을 막기 위해 지붕을 씌운 것이다.

▼ 골굴사의 금당(金堂)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석가모니불 대신 비로자나불을 모시기 때문에 이름 또한 대웅전이 아닌 대적광전을 쓴다. 이 전각의 앞마당에서 선무도(禪武道)의 공연이 펼쳐진다는데 때(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오후 3시)를 맞추지 못해 구경하지는 못했다.

▼ 대웅전을 지나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굴 앞에 전각을 세워 놓은 관음굴이 나타난다. 옛 모습을 한 유일한 석굴이라고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곳은 화려하게 단청된 여러 채의 전각과 이를 연결하는 회랑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골굴 석굴도’와 우담 정시한(愚潭 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단다. 특히 정시한은 석굴사원이 ‘마치 한 폭의 병풍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고 찬탄하기까지 했단다.

▼ 줄을 잡고 관음굴 오른쪽 바위 절벽으로 올라가면 작은 암문(岩門)이 나타난다. 몸을 비틀어야만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이 문을 통과해야만 골굴사의 얼굴마담인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자연이 빚어낸 ‘천왕문(天王門)’ 또는 ‘불이문(不二門)’이라 할 수 있겠다.

▼ 좁은 틈새를 비집고 나오면 골굴사 투어의 백미인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보물 518호)이다. 마애불은 뚜렷한 얼굴 윤곽과 잔잔한 미소가 압권이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4m에 폭이 2.2m 정도.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세련되지 못한 옷 주름 때문에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기도 하고, 평면적인 신체와 수평적인 옷 주름, 겨드랑사이의 ‘V’자형 옷 주름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철원 도피안사와 장흥 보림사의 불상과 비슷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 마애불 앞에 서면 조망도 압권이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골굴사 주변과 감포로 나가는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 골굴사의 특징은 암벽사원이라는 점이다. 마치 사람의 뼈처럼 생긴 자연절벽에 12개의 굴을 뚫어 불상을 모시기도 하고 그 안쪽 벽에 불상을 새기기도 했다. 이 굴들은 천축국에서 건너온 광유선사가 자신의 나라 사원양식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의 ‘둔황석굴’로 불리는 이유이다.

▼ 관음굴을 내려오면 산신당이다. ‘산신당 여궁(女宮)과 남근바위(男根石)’에 대한 설화를 낳게 한 주인공이다. 자손이 귀한 집안 부녀자들이 남근바위에 참배하고 산신당 앞 여궁(女宮)을 깨끗이 청소한 후 판자를 깔고 철야기도를 하면 후세를 얻는다는 것. 흥미로운 얘기라서 주변을 살펴봤지만 남근바위는 눈에 띄지 않았다.

▼ 암자들을 둘러본 다음 ‘오륜탑(五輪塔)’이 있는 언덕 위에 오르면 골굴사 투어는 끝난다. 1500년 전 인도로부터 불법을 전래한 골굴사의 창건주 광유성인을 받들기 위해 조성된 이 탑은 대일여래불(大日如來佛)을 상징하는 만다라(曼茶羅)로 모든 덕과 지혜를 갖추었음을 의미한단다. 안에는 태국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佛舍利) 3과를 봉안했다. 그래선지 탑의 앞에다 꽤 많은 의자들을 배치했다. 템플스테이의 수련장소로 활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금계산(金溪山, 489.3m)

 

산행일 : ‘18. 5. 29()

소재지 :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

산행코스 : 달성군농업기술센터굴다리전망대금계산삼거리봉싱이골재-선녀지달성군농업기술센터(산행시간 : 2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그러니 특별히 눈에 담을 만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거기다 산행거리까지도 3.8Km로 무척 짧다. 그렇다고 산행에 끼워 넣을만한 관광지가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일부러 찾아올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얘기이다. 전국의 산봉우리들을 모두 다 올라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런데도 찾아왔다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선녀봉과 대방산을 연계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럴 경우 거리가 8.5Km까지 늘어나기 때문이다. 다만 등산로가 나있지 않기 때문에 잡목들에게 싸대기 서너 대 정도는 맞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산행들머리는 달성군농업기술센터(달성군 옥포면 교항리 2521-1)

중부내륙고속도로 회원옥포 IC에서 내려와 우회전하면 금방 옥포(달성군 옥포면)에 이르게 된다. 교향교차로(옥포면 교항리 2532-10)에서 좌회전하여 돌미로를 타면 두 번째 블록(block)에서 농업기술센터를 만나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버스는 우릴 달성군농업기술센터의 뒤편 대로에다 내려놓는다. 농업기술센터란 농업진흥법에 따라 시군에 설치된 농업관련 계몽지도와 기술보급 및 훈련을 담당하는 행정기관이다. ‘농촌지도소라는 이름으로 농촌진흥청 산하에 있었는데, 언제부터 시군 소속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도로와 센터의 청사 사이에는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정자가 두 동이나 지어져 있어 산행의 들머리나 날머리로 삼기에 안성맞춤이지 않나 싶다. 화장실은 공공기관인 센터의 것을 사용하면 될 것이고 말이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게 하나 있다. 길 찾기에 주의해야한다는 것이다. 금계산이 보인다고 해서 무턱대고 그쪽 방향, 즉 센터의 맞은편으로 진행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아래 사진에 나오는 방향인데 길이 막혀있기 때문이다.



옳은 방향은 왼편이다. 70~80m쯤 진행하다가 달성군 농산물가공기술 지원센터신축공사 현장이 보이면 옳게 온 셈이다. 이곳 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대성베르힐아파트가 나온다. 길은 이 아파트를 왼편에 끼고 이어진다.




그렇게 100m 정도를 들어가면 광주-대구고속도로의 아래를 지나는 굴다리가 나온다. 입구에 이정표(금계산 등산로0.1Km, 선녀지 0.3Km/ 국도방면0.5Km/ 보금자리주택0.9Km)가 세워져 있다면 제대로 온 셈이다.



굴다리를 통과하자마자 들머리가 나온다. 초입에 이정표(금계산 정상1.8Km/ 선녀마을0.2Km/ 옥포 보금자리주택1.0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정표는 이곳의 해발고도를 85m로 적고 있다. 그렇다면 수직으로 400m를 더 올라야만 한다. 400m대의 나지막한 산이라고 우습게 봤다간 자칫 낭패를 볼 수도 있겠다.



들머리를 찾았다고 해서 그냥 올라가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선녀마을 방향으로 약간 비켜난 지점에 세워진 등산로 안내도를 꼭 살펴보라는 것이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이왕에 왔으니 금계산과 선녀마을 등의 유래도 알아두는 게 좋지 않겠는가.



산자락으로 들어서자마자 조망이 열린다. 가족 묘역(墓域)을 조성하면서 사방을 훤하게 벌목(伐木)해 놓은 덕분이다. 고개를 돌려보면 조금 전에 지나왔던 대성베르힐아파트신축공사 현장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잠시 후 또 다른 이정표(쉼터 0.5Km/ 선녀마을 0.5Km)를 만난다. 드물게 보이는 멋진 이정표이다. 나타내고 싶은 지명과 거리는 물론이고, 현재 위치의 위성좌표(N:35 46 19.6, E:128 27 08.0)와 해발고도(364m)까지도 적어 놓았다. 비상사태 발생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전화번호(053-668-3761, 119)도 적어놓았음은 물론이다. 이정표 하나에 다양한 기능을 포함시킨 발상이 신선하다 하겠다. 그리고 다른 지자체들에서 벤치마킹했으면 좋겠다. 아쉬운 점도 하나 있기는 하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곳의 지명까지 적어 놓았더라면 만점짜리가 되었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산길은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나지막한 산이라서 우습게 봤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버거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버겁다는 생각이 떠오를 겨를도 없다. 등산로 주변에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그럴 틈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손놀림들이 부지런해진다. 더 빨리, 더 많이... 스포츠 캐치 프레이즈(catchphrase)’가 결코 아니다. 같이 걷고 있던 일행들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나은 문구가 어디 있을까 싶다.




길가에 벤치가 놓여있다. 아까 이정표에서 보았던 쉼터는 이곳을 말하는가 보다. 아무튼 2012년엔가 명품 숲길을 새로 내었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쉼터는 물론이고, 경사가 심한 곳에는 밧줄까지 매다는 등 각종 편의시설들을 설치해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당시 기사는 선녀마을 앞의 고속도로 암거에서 시작해서 정상을 거쳐 달성군청 동편 주차장에 이르는 총 3.8Km 구간에 안내도와 이정표, 그리고 전망대와 의자, 계단 등을 설치했다고 전했었다.



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더욱 가팔라진다. 아니 버거울 정도로 가파르다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길가에 매어놓은 긴 밧줄이 그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미끄럽지는 않다. 바닥에 야자수 매트를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바닥의 흙이 빗물에 씻겨나가는 것을 방지하려고 깔아놓은 모양인데 그 덕을 등산객들이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25분쯤 되었을까 첫 갈림길(이정표 : 금계산 정상1.0Km/ 선녀마을0.8Km/ 쉼터(전망대)0.1Km)을 만난다. 왼편은 선녀마을로 연결된단다. 그렇다면 우리가 올라온 탐방로 말고도 또 다른 진입로가 선녀마을 쪽에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이곳의 높이는 300m, 앞으로도 고도를 180m나 더 높여야하니 이제 중간쯤 왔다고 보면 되겠다. 조금 더 고생을 해야만 정상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이다.



삼거리 근처에는 또 다른 묘역(墓域)이 조성되어 있다. 운동장처럼 널따란 것이 아까보다도 훨씬 더 넓다. 꽤나 오래 묵은 가문(家門)인가 보다. 산길은 이 묘역의 오른편 가장자리를 따라 나있다.



또 다른 쉼터를 만난다. 이번에는 굵은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서 만든 의자를 배치했다.



산길은 계속해서 가파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런 곳에서는 걷는 속도를 조금만 떨어뜨리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마침 주어진 시간까지도 넉넉하지 않겠는가. 거기다 이번에는 야생화들까지 나도 여기 있다며 고운 얼굴을 내민다. 빨갛게 익은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려있음은 물론이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더디어 질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렇게 13분 정도를 더 오르자 데크로 만든 전망대가 나타난다. 눈 아래 펼쳐지는 옥포 시가지의 모습과 그 뒤로 흐르는 낙동강, 그리고 너른 들에 들어앉은 비닐하우스의 물결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전망대의 바로 뒤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하지만 웃자란 잡초가 점령해버려 사용은 불가능하다. 정비를 하지 않은 채로 오랫동안 방치해온 탓이 아닐까 싶다. 이곳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어느 정치인의 고향이다. 그가 보여주던 쓸쓸한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이때 코끝을 스쳐가는 무언가가 있다. 향이다. 그것도 감미롭기 짝이 없는 향이 침샘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찔레꽃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게 아닌가. 찔레꽃 향기가 이렇게 향기로운 줄 예전엔 왜 몰랐을까? 아무튼 산딸기를 따먹는 것만도 행운인데 거기다 이런 향기까지 맡을 수 있으니 오늘은 그야말로 복이 넘치는 날이라 하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여 만에 정상에 올라선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구릉(丘陵) 모양으로 생긴 정상에는 귀엽게 생긴 정상표지석 외에도 정상표지목을 하나 더 세워놓았다. 왼편 날개에 금계산 정상’, 그리고 오른편에는 이곳의 해발고도가 적어있지만 그 생김새는 이곳으로 올라오면서 보았던 이정표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그건 그렇고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 아래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도 겸하도록 했다. 참고로 금계산은 산의 지형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산의 중턱쯤에 놓여있는 2개의 돌이 주방의 도마를 쏙 빼다 닮았다고 해서 도마산이라 부르는가 하면, 산봉우리에 큰 바위가 우뚝 솟아있다고 해서 돌미산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단다.




정상에서도 조망이 열린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만났던 전망대에는 한참이나 못 미친다. 옥포시가지와 그 뒤로 흐르는 낙동강 등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아까와 같은데 잡목들이 풍경화의 아랫도리를 잘라먹어버리기 때문이다.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개인 묘역(墓域)의 끄트머리까지 나가보았지만 한번 잘려나간 아랫도리는 돌아올 줄을 몰랐다. ! 이왕에 산에 왔으니 산에 대한 조망도 짚어보자. 인봉산과 제석산 등 옥포들녘의 뒤편에 있는 산들은 물론이고, 대구 즉 반대편 방향의 산들도 눈에 들어온다. 앞산과 청룡산이 앞줄에 서있는가 하면 함박산과 용문산의 뒤편에 있는 주암산과 최정산의 능선까지도 조망된다.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의 능선을 따른다. 잠시 후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싶으면 이후부터 산길은 한없이 거칠어진다. 초심자들은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 웃자란 잡초들이 산길을 완전히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 정상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는 걸 깜빡 잊을 뻔 했다. 대방산까지 종주를 하려는 우린 계속해서 능선을 타지만 달성군청으로 내려가는 정규 탐방로는 오른편 방향이다.



길을 찾고 있는데 뭔가가 바닥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바퀴자국이 나있는 것으로 보아 산악오토바이가 지나갔던 모양이다. 자연을 해친다고 해서 나무라는 사람들이 많지만 오늘은 예외로 쳐야겠다. 그네들이 헤집고 간 길을 따르기만 하면 되겠기에 말이다.



아직도 주변은 산딸기의 천국이다. 아니 아까보다도 훨씬 더 개체수를 늘려 놓았다. 하도 많이 열려있다 보니 산자락이 아예 빨갛게 물들어버렸다. 마치 꽃밭에라도 들어선 느낌이라고 해야겠다.



두어 번의 오르내림 끝에 분기봉(475m)에 올라선다. 하산을 시작한지 10분 만인데,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대방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야 하기 때문이다. 직진할 경우 용화사로 내려가게 되니 참조한다.



이후부터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속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가파르다. 조심스럽게 내려서는데 스쳐가는 바람결에 짙은 솔향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나무들이 언제부턴가 소나무로 변해있다. 심신(心身)이 맑아져온다. 솔향과 함께 스며드는 피톤치드(phytoncide)의 효능 덕분일 것이다. 피톤치드의 효능 중에는 몸으로 스며드는 각종 병균에 대한 살균기능 외에도 피로회복 기능까지 함유하고 있다니 말이다. 그런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바로 소나무가 아니겠는가.



능선은 작은 봉우리 두어 개를 오르내리며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산길은 역시 희미하기만 하다. 초심자들은 길을 잃기 딱 좋겠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면 만나게 되는 봉우리, 앞서가던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정상표시 코팅지를 매달고 있는 게 보인다. ‘싱이골봉(341.6m)’이란다. 요 아래에 있는 싱이골재에서 따온 모양인데 이 봉우리는 오늘부로 새로운 이름 하나를 얻은 셈이다. 뒤에 오는 다른 이들이 쓸데없는 짓이라며 떼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잠시 후 싱이골재에 내려선다. 옥포면 선녀마을에서 논공면 노이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다. 대방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고갯마루에서 선녀마을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열리니 참조한다. 정상에서 이곳까지 내려오는 데는 대략 35분 정도가 걸렸다.



싱이골재에는 비닐하우스처럼 생긴 임시건물이 지어져 있다. 당연히 허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벤트 진행자인 이해열(010-4532-9900)씨의 스튜디오(studio)가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드럼(drum)과 트럼펫(trumpet), 큰북(大鼓), 꽹과리 등의 악기는 물론이고, 노래방 기기까지 들어있는 것이다. 그가 진행하는 이벤트의 예행연습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듯 싶다. 주변의 조경도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예쁜 꽃들이 비닐하우스 주변의 빈 공간마다 들어앉았다.





고갯마루에 내려서니 이해열씨가 어디서 왔느냐며 말을 건네 온다. 고생했으니 커피라도 마시며 잠시 쉬어가라는 것이다. 자기 고장을 찾아온 손님이니 그냥 대접하겠단다. 그를 따라 들어선 스튜디오(studio)는 방문객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기에 충분했다. TV 방송에서나 보아오던 기기들이 빠짐없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그가 내놓는 커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그의 거침없는 너스레에 배꼽을 잡는다. 방송계와 꽤 오래 인연을 가져온 내 눈에도 대단한 실력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의 리드(lead)에 따라 노래와 춤을 곁들인 가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산행 중 마시려고 챙겨간 막걸리와 맥주를 마셔가며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말이다.




가건물의 위에는 장독대가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그 규모가 제법 크다. 아니나 다를까 된장과 고추장을 만들어 팔고 있단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사갈 필요는 없단다. 맛있다고 소문이 난 탓에 물량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는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다. 부처가 열반(涅槃)에 들면서 슬퍼하는 제자 아난(阿難)에게 하신 말씀으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실려 전해오는 법어(法語)이다. ‘생명을 얻어 만나게 된 세상 만물은 죽음으로 헤어지도록 돼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 말마따나 놀만큼 놀았으니 이제 그만 헤어져야 할 때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이선생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나선다.



산행은 이쯤에서 끝났다고 보면 되겠다. 대방산까지의 종주는 아까 노래방기계 마이크를 들 때부터 이미 물 건너간 게 아니겠는가. 임도를 따라 산행출발지로 내려가는 이유이다.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는 대형버스가 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넓다. 이런 길은 햇볕을 가려주지 못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곳만은 예외인 것 같다. 선녀마을에 이를 때까지 주변의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행운이 따라줄 모양이다.



잠시 후 낚시꾼들 두엇이서 세월을 낚고 있는 저수지를 만난다. ‘선녀지이다. 조금 더 내려가면 또 다른 저수지가 나온다. 조금 전에 보았던 저수지보다 훨씬 더 큰데, 이것 또한 선녀지란다. 그렇다면 선녀지는 두 개의 댐(dam)으로 이루어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달성군농업기술센터(원점 회귀)

그렇게 25분 정도를 내려가면 선녀마을 나오면서 오늘 산행이 대충 종료된다.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농업기술센터는 5분쯤 더 걸어 나가야 되지만 말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2시간이 걸렸다. 물론 순수하게 걷는데 소요된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참고로 선녀마을은 교항2리를 통과하는 광주-대구고속도로(88올림픽고속도로)와 인접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남서쪽 방향으로 깊숙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물이 하도 맑아 하늘에서 일곱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고 한다. 그리고 그게 마을의 이름으로 굳어졌단다.


울련산(蔚蓮山, 938.6m)

 

산행일 : ‘18. 2. 20()

소재지 : 경북 영양군 수비면

산행코스 : 황장교헬기장정상(왕복)815.9m삼각점봉질재고개(산행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바위다운 바위 하나 볼 수 없을 정도로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때문에 특별히 가슴에 담아 둘만한 산세는 보여주지 못한다. 정상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 또한 일절 없다. 흙산이 지닌 일번적인 특징일 것이다. 거기다 정상으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무척 가팔라서 오르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괜찮은 특징도 갖고 있다. 일단 오르고 나면 이후부터는 보드라운 흙길을 걷는 편안한 산행을 즐길 수가 있다는 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 울련산의 특징은 누가 뭐래도 울창한 금강송 숲이다. 산림청에서 울련산 자락에 위치한 본신리 일대를 에코투어가 이끄는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으로 지정했다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지만 일부러 찾아올 필요는 없는 산이라고 본다. 전국의 산봉우리들을 모두 다 올라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런데도 찾아왔다면 수려하기로 소문난 본신계곡이나 금강소나무 생태숲까지 함께 둘려볼 것을 꼭 권하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황장교(영양군 수비면 신원리 산26-6)

중앙고속도로 풍기 IC에서 내려와 우회전하여 5번 국도를 타고 영주까지 들어온다. 가흥교차로(영주시 가흥동)에서 36번 국도로 갈아타고 봉화(법전1: 봉화군 법전면 어지리 118-2)까지 들어와서 이번에는 31번 국도로 갈아타고 영양방면으로 진행한다. 운암삼거리(영양군 일월면 문암리)에서 좌회전하여 88번 국도를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수비면소재지에 이르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황장교가 나온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황장교에서 발리리(수비면 소재지) 쪽으로 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왼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울련산 1.89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것도 무척 가파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버겁다고 여겨지는 곳마다 계단을 놓아두었다는 점이다. 미끄러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럴 때는 속도를 뚝 떨어뜨린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방법 밖에 없다. 마침 주어진 시간까지도 넉넉하지 않겠는가. 금장산까지 이어지는 종주코스를 절반으로 줄여 울련산 구간만 타기로 했으니 말이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든 산행을 45분쯤 이어갔을까 산길이 그 기세를 살짝 누그러뜨린다. 그렇다고 내리막길이 나타났다는 얘기는 아니다. 가파른 경사가 조금 줄어들었을 따름이다. 오늘 산행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내리막길이 일절 없이 그저 오르막길의 경사가 가팔라졌다 누그러졌다만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가 우수(雨水), 대동강 물이 녹는다는 절기이다. 하지만 뺨을 스쳐가는 공기가 차가운 것을 보면 아직은 겨울인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바닥에 깔린 낙엽을 조심해야 한다. 그 아래가 얼어붙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복병은 따로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뜸했던 탓에 낙엽이 너무 두텁게 쌓여 있는 것이다. 낙엽을 헤집으며 나가는 게 더 큰 일이 되어 버렸다.



능선은 참나무가 주인이다. 가끔 굵직한 소나무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참나무라고 보는 게 옳겠다. 그런데 그 나무들이 하나 같이 범상치가 않다. 엄청나게 굵은 데다 그 생김새까지도 제멋대로인 것이다. 오지(奧地)의 산이라서 사람들의 때를 덜 탔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12분쯤 진행하면 무명봉에 올라서게 된다. 이름이 없다보니 정상표지석은 있을 리가 없다. 이정표를 세워 0.5Km만 더 가면 울련산이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 벤치 두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잠시 쉬었다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2~3분쯤 내려섰을까 봉우리들 사이에 들어앉은 너른 분지(盆地)가 나타난다. 드디어 주능선에 올라선 것이다. 이곳에 있는 내버려진 헬기장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울련산0.38Km/ 옥녀당9.32Km/ 황장교1.50Km)로 나뉜다. 울련산 정상은 왼편 방향이다. 하지만 최종 목적지인 질재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울련산을 둘러본 다음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또 다시 나타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6~7분쯤 오르니 전위봉이 나타난다.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 울련산 정상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뾰쪽하게 솟아오른 것이 정상에 올라서는 게 만만치는 않을 것 같다.




가파른 오르막길과의 힘겨운 싸움을 한 번 더 치르고 난 다음에야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 만이다. 정상은 대여섯 평도 되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좁다. 그나마도 절반은 무인산불감시탑이 차지해 버렸다. 참고로 울련산은 울람산, 우련산, 우렁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울련산(蔚蓮山)이란 지명은 산맥이 울진군과 연결되어 있고, 또한 그 산세가 연꽃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울연산(蔚然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말뚝 모양으로 생긴 정상표시목은 공터의 가장 높은 곳에다 꽂아놓았다. 그 뒤에는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정표(옥녀당 9,70Km/ 섬촌 1.60Km/ 수하산촌마을 2.43Km)도 보인다. 방향 표시판이 세 곳으로 나뉘는 것을 보면 산행들머리로 삼을 수 있는 곳이 우리가 올라온 황장교 말고도 두 곳이 더 있는 모양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서쪽으로는 낙동정맥(洛東正脈)의 마룻금이 물결치고 남쪽 멀리에는 백암산(1,004m) 능선이 꿈틀거린다. 남쪽 신원천 건너편으로는 남이장군이 칼을 갈았다는 검마산(918.2m)이 보이며 서북쪽으로는 장수포천 너머로 일월산(1,219m) 정상에 서 있는 송신탑과 중계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헬기장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옥녀당 방향이다. 산길은 널찍한 분지(盆地)의 한가운데를 한참동안이나 따른다. 10분 이상을 걸어야할 정도로 너른 분지이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기괴하게 생긴 고목(古木)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안부를 지난 산길은 또 다시 오르막길로 변한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거기다 상당히 길기까지 하다. 봉우리를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로(迂廻路)가 나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도 있겠다.




봉우리를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하면 잠시 후 삼거리(이정표 : 옥녀당7.96Km/ 생태숲1.70Km/ 울련산1.74Km)가 나온다. 헬기장을 지난 지 35분 만이다. 이곳에서 오른편은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이정표에다 표기하기에는 그 지명이 너무 길었나보다. ‘생태숲이라고 간략하게 적어놓은 걸 보면 말이다. 아무튼 생태 숲이란 생물이 군집(群集)을 이루어 영양 상태를 공유하는 기능적 환경조건을 만들어 주는 식물군락을 말한다. 이곳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이 왕피천의 상류인 신원천의 맑은 물과 울련산 자락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는 금강송이 그만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일부러라도 한번쯤은 찾아볼만한 곳이라는 얘기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가끔은 가파른 내리막길도 나타나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완만한 능선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해하기 힘든 이정표도 보인다. ‘3 탐방로라는데 양쪽 끝까지의 거리만 적어 놓았을 뿐, 그 끝이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정표를 세운 산림청 직원들만이 알 수 있겠지 않나 싶다. 명색이 중앙행정기관에서 만든 시설물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자주 나타나는가 싶더니 문득 능선안부에 내려선다. 이정표(옥녀당 7.76Km/ 울련산 2.56Km) 옆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오른편 산자락에 분포되어 있는 금강소나무 숲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편히 쉬면서 숲을 감상해 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생태숲 갈림길에서 이곳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렸다.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던 능선이 이번에는 제법 긴 오르막길을 만들어 놓는다. 또 다른 특징도 보인다. 언제부턴가 소나무들의 개체수가 많이 늘어나 있다는 점이다.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그 크기도 아까보다는 훨씬 더 굵어졌다. 금강송(金剛松) 본연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튼 하늘을 향해 쭉쭉 솟아오른 소나무들의 자태가 너무나 싱싱하고 곱게 다가온다. 오죽했으면 미인송(美人松)이란 말이 생겨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솔향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새 815.9m봉에 올라선다. 안부 쉼터에서 6분 거리이다. 정상에는 우렁산이라고 적힌 낯익은 정상표시지가 걸려있다. 2년 전에 돌아가신 고() 한현우선생님의 작품이다. 가끔가다 산행을 함께 해오던 그는 ‘3000산 오르기라는 캐치 프레이즈(catchphrase)로 산행을 이어가던 분이었다. 또한 그는 산을 오를 때마다 저런 정상표시지를 하나씩 걸어놓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산은 그가 5,685번째로 올랐던 모양이다. 그 옆에는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걸어놓은 코팅지도 보인다. 울련산 산행을 함께 시작했었는데 나보다 앞서 이곳을 통과하신 모양이다. 그는 봉우리의 이름을 번동봉이라고 적어놓았다.




벌목(伐木)이 된 산자락 아래로 임도(林道)가 뚫려있다. 이 또한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사업의 일환일 것이다. 이 일대가 금강소나무 숲의 후계숲 조성을 위한 시범림으로도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숲가꾸기 작업들이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그런 제반 작업들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투입되는 임업장비들이 드나들 수 있는 필수시설이 바로 임도가 아니겠는가.



이후로도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낮춘다. 아니 오르막이 제법 긴 구간도 나온다. 가파르기까지 하다 보니 왼쪽 산자락을 헤집으며 난 임도가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경사가 가팔라 내려설 수는 없다. 고달프지만 능선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주변은 온통 금강송(金剛松) 세상이다. 산림청에서 이곳 본신리 일대를 에코투어가 이끄는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으로 지정했다더니 그에 걸맞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이란 인위적인 벌채와 환경적인 여건 변화로 쇠퇴되어가고 있는 금강소나무를 조선 말엽의 울창했던 금강소나무 숲으로 복원하고 아울러 국민들이 건강한 숲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관리하기 위한 사업이다. 이곳 본신리 외에도 울진 소광리와 봉화 고선·대현리 등이 지정되었는데, 100년 후 현재 숲을 대체할 수 있는 금강소나무 후계림 606를 조성해놓았다. 또한 방문객들이 금강소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와 음이온을 흠뻑 들여 마실 수 있도록 생태탐방로를 조성했음은 물론이다.



또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오르막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하지만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흙길이라서 다칠 염려가 없다는 얘기이다. 그저 옷이 더러워지는 일만 피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삼각점(울진 438)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666.8m봉에 올라선다. 이곳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그러니 조금 전에 지나간 박건석 선생이 매달아놓고 가신 코팅지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작은번동봉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놓은 것에 약간의 거부감은 생기지만 말이다.



눈에 들어오는 나무들이라곤 오로지 금강송(金剛松)들 뿐이다. 금강송은 국내 소나무 가운데서 으뜸으로 꼽힌다. 소나무의 껍질부터 붉은 색을 띠고 있는데 거죽을 벗겨내도 붉은 색을 띠기에 황장목(黃腸木)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워낙 귀한 나무라 조선시대에도 궁궐을 지을 때만 벨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해왔다. 참고로 이곳 본신리 일대(1,839ha)는 소나무 중 최고의 나무로 꼽히는 금강소나무(金剛松)가 밀집해서 자라고 있다. 이 외에도 27종의 미적 가치가 뛰어난 나무들이 즐비하여 아름다운 숲을 이루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특히 이곳의 소나무는 궁궐이나 사찰 등의 보수에 사용할 수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로 문화재 복원용 목재생산림(700, 40ha)으로도 지정된바 있다.



길가 소나무들마다 생채기를 안고 있다. 송진채취를 위해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내면서 생긴 흠집들이다. 그러나 나무들의 수령(樹齡)을 감안할 때 일제(日帝)가 남긴 흔적들은 아닌 것 같다. 60년대 한창 어려웠던 시절 송유(松油)를 생산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당시 송유는 고무제품 생산을 위한 고무반죽 첨가제(添加劑)’로 사용되었다. 소나무에서 채취한 송진을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하여 만든 기름이 송유이다.



이왕에 나온 김에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금강소나무는 속이 짙은 황색으로 황장목(黃腸木)’, 춘양역을 통해 외부로 반출되었다고 하여 춘양목’, 나무껍질이 붉다하여 적송(赤松)’, 그밖에도 강송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우리나라 소나무 중 가장 우수한 나무로 칭송받는다. 조선시대에는 봉산제도(封山制度) 등으로 울창하게 관리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무차별적으로 수탈되어 일본 관서지방으로 반출되었고, 해방 후 사회혼란기의 도·남벌과 6·25전쟁으로 산림자원이 파괴되면서 전체적으로 쇠퇴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울진 소광리와 영양 본신리, 봉화 고선·대현리에 그 명맥을 이을 군락지가 분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이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유이다.



산행날머리는 질재 고갯마루(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산 15-6)

그렇게 20분쯤 더 내려서면 질재 고갯마루(이정표 : 옥녀당 5.20Km/ 울련산 4.50Km)를 만난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산간도로가 널찍한 것이 노선버스가 다녀도 되겠다. 고갯마루에는 또 다른 이정표(본신 1Km/ 번동 3Km/ 공수하 9Km)도 보인다. 임도의 방향표시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고갯마루에는 산악회의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종주산행을 하는 A팀의 하산지점인 옥녀당까지 버스로 이동시켜 준단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잃은 것도 있었다. 요 아래에 있는, 경치 좋기로 유명한 본신계곡(本新溪谷)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그 길이가 장장 6km에 달한다는 본신계곡은 울창한 숲 주위로 흐르는 물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시킨다고 알려져 있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멈추지 않고 걷기만 했으니 오롯이 걷는 데만 소요된 시간이라 하겠다.



옥련산과 금장산을 연계해서 산행을 한 팀들의 하산지점인 구주령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옥녀당(玉女堂)’이라는 사당(祠堂)이 지어져 있다. 잠시 이 옥녀당에 얽힌 옛 이야기나 더듬어 보자. 조선 인조 때 황()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영해부사로 있었는데 그에게는 옥녀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영양은 독자적인 행정구역을 갖지 못하고 영해부에 편속되어 있었다. 어느 날엔가 아버지의 명(부탁)으로 영양관아(수비)에 중요한 공문서를 전달하려 왔던 옥녀가 임무를 마치고 영해로 돌아가던 길에 이 구주령에서 덜컥 병이 들어버렸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녀는 나졸들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하루 만에 객사하고 말았단다. 이에 본신리 주민들이 꽃다운 나이에 안타깝게 죽은 옥녀의 넋을 위로하고 공을 기리기 위하여 옥녀가 죽은 이 고개에 무덤을 만들고 사당을 세웠으며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에 동제(洞祭)를 지내오고 있단다. 참고로 옥녀사당은 95년 수비-온정간 도로공사 때 시멘트블록 건물로 이전 개축되었으나 민속자료로서의 원형복원을 염원하는 지역주민들의 건의에 의해 현재의 건물로 복원되었으며 20025월에는 옥녀무덤에 묘비(墓碑)까지 세우고 주변에 조경공사를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사당의 안에는 옥녀(玉女) 외에도 선풍도골(仙風道骨) 노인의 초상화가 하나 더 걸려있다. 아랫단에는 달마대사로 보이는 초상화도 보인다. 그나저나 안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정리·정돈 또한 잘 되어있다. 외부에 세워놓은 조형물들에도 오색(五色)의 천들을 묶어놓았다. 정월 대보름에 지낸다는 동제를 위해 새롭게 단장을 해놓은 모양이다. 옥녀의 무덤에 벌초만 해도 득남을 하거나 작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어느 누가 정성들여 관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귀경길에는 후포(울진군)에 있는 맛집 조선시대에 들렀다. ‘붉은 대게를 무한 리필 해준다는 쌈밥 식당이다. 1인당 28천원만 내면 배가 터질 때까지 홍게를 먹을 수 있다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누군가는 대게가 아니니 별 것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속살이 꽉 차오른 홍게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문가들까지도 혹시 대게가 아닐까 하며 헷갈려할 정도로 그 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젊은 주인장의 매너 또한 뛰어나다. 게를 먹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줄 뿐만 아니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늘어놓는 훈수 또한 넉살스럽기 짝이 없다. 한마디로 말해 기분 좋게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SBS-TV의 인기 프로그램인 백년손님에도 나왔다는 선전문구가 꼭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찾아볼만한 식당이지 않나 싶다. 아니 시간이 허락된다면 횟수에 관계없이 자주 찾아보고 싶은 식당이다. 아무튼 우리 부부는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었다. 이런 기회를 제공해주신 갤러리산악회 임원진분들에게 글로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북암산(北巖山, 894m)문바위봉(884m)-사자봉(924m)

 

산행일 : ‘17. 8. 12(토)

소재지 : 경북 청도군 매전면과 경남 밀양시 산내면의 경계

산행코스 : 석골교석골사주차장수리봉능선삼거리사자봉 왕복문바위봉전망바위북암산인골산장인곡마을회관(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산들은 억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솟구쳐 있는 봉우리들이다. 덕분에 골산(骨山)인 억산의 특징이 절반쯤 섞여있다. 즉 육산(肉山)과 골산의 특징들이 적당히 뒤섞였다고 보면 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바로 곁에 있는 억산은 물론이고 운문산이나 구만산 등 주변 명산들의 유명세에 철저하게 가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유명산들에 비해 조금도 뒤질 게 없어 보인다.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싶다. 앞에서 얘기했던 대로 골산과 육산의 특징들을 한꺼번에 맛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산길은 짙은 숲속으로 나있어 여름철 산행에도 무리가 없고, 거기다 산꾼들이 선호하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빼어난 산세와 멋진 조망까지 곳곳에 품고 있다. 한마디로 명산의 반열에 놓아도 손색이 없을 산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오르내리기가 무척 힘들다는 점이 문제다. 어느 코스를 선택하더라도 경사가 가팔라서 체력소모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으로 꼽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석골교 앞 주차장(밀양시 산내면 원서리 1230-18)

중앙고속도로(대구-부산) 밀양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타고 울산방면으로 달리다가 원서교차로(산내면 원서리 1212-1)에서 빠져나와 좌회전하여 굴다리를 통과하면 곧이어 동천을 가로지르는 석골교()‘의 바로 앞의 주차장(대형차량용)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혹시라도 승용차를 몰고 왔다면 석골사 주차장까지 들어가도 된다.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석골교 다리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다리 초입에 석골사 방향 1Km지점에 공중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이러한 이정표는 화장실에 이를 때가지 심심찮게 나타난다. 이곳에 주차장을 마련하면서도 화장실을 갖추지 못했음을 미안해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잠시 후면 오르게 될 수리봉이 나타난다. 그 왼쪽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산은 북암산이다. 두 봉우리 모두 거대한 암벽(岩壁)을 끼고 있다. 오늘 오르게 될 산들의 일반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사진 게재는 하지 않았지만 오른편에는 운문산이 우람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다리를 건너면 흔히들 석골사 입구라고 부르는 원당마을(산내면 원서리)이다. 전형적인 산골마을이지만 그 규모는 제법 큰 편이다. 펜션은 물론이고 식당까지도 가끔 보인다. 운문산과 억산의 사이에 끼어있는 계곡을 찾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동네에 들어서자 거대한 빗돌(碑石) 하나가 보이고, 그 옆에는 밀양문화원에서 세운 안내판도 보인다. ’임진왜란창의유적기념비(壬辰倭亂倡義遺蹟紀念碑)‘라는데, 설명은 석동(石洞)이라는 곳을 해놓았다. ’호거산(虎踞山) 아래 석동(石洞)은 임진왜란 때 작원관(鵲院關,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 소재) 전투의 패배 이후 향촌수호(鄕村守護)를 위해 밀양의 오한 손기양(聱漢 孫起陽)이 근재 이경홍(謹齋 李慶弘), 진사 이경승(進士 李慶承), 김선홍(金善洪) 등과 함께 밀양에서 최초로 창의(倡義)한 전적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2얼음골의 오른쪽에 오한 손기양이 부모를 모시고 난을 피했던 손기굴이 있고, 석골사 북쪽 계곡 절벽에 근재 이경홍, 진사 이경승이 역시 노모를 모시고 난을 피했던 형제굴이 있다는 등 그들이 피난했던 굴에 대한 설명만 적혀있다. 만일 그들의 대일항쟁(對日抗爭) 기록까지 적혀있었더라면 금상첨화가 되었을 텐데 아쉽다.



빗돌을 읽어본 후 길을 다시 나선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석골사로 올라가는 길이 시작되는 셈이다. 길은 외길이다. 약간의 경사와 주변의 경관이 어우러져 걷는 내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든다. 산행을 시작한지 15분쯤 되자 석골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이곳으로 오면서 심심찮게 보았던 화장실을 갖추고 있다던 그 주차장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석골사(石骨寺)가 나온다. 신라 진흥왕 때 비허선사(備虛禪師)‘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후 20여 년 전에 불사(佛事)를 연 탓에 내세울 만한 문화재는 딱히 없지만 천년이라는 오랜 역사 하나만 갖고도 한번쯤은 들러봐야 할 의미는 있다. 하지만 난 그만두기로 한다. 10년쯤 전에 억산과 구만산을 연계해서 답사를 할 때 둘러봤었기 때문이다.



주차장 입구 근처에서 보면 왼편으로 작은 임도가 하나 나뉜다. 수리봉 등산로의 들머리인데 입구에 이정표(수리봉1.6, 문바위 3.1, 북암산 4.1/ 운문산5.1Km, 억산 2.97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분 후 임도를 벗어나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이곳에도 역시 이정표(수리봉 1.46Km)가 세워져 있다.



산길은 처음부터 기()를 죽이고 본다. 시작부터 엄청나게 가파른 것이다. 그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고 나서야 겨우 위로 오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런 길은 끝도 없이 계속된다. 오늘 산행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가파른 오르내림 말이다.



그런 가파른 오르막길에 통나무계단이 놓여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암반이나 너덜이 아닌 곳에는 어김없이 통나무 계단을 설치해 놓은 것이다. 아무튼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속도는 빠른 편이다. 워낙 길이 가파르기 때문이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게 20분쯤 올랐을까 오른편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일단은 오르고 본다. 뭔가 조망이 트일 것 같아서이다. 그런 내 결정은 옳았다. 올라온 반대 방향으로 운문산에서 석골사로 바로 연결되는 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헌걸찬 암릉을 끼고 있는 것이 여간 멋진 것이 아니다. 허나 얼음골 케이블카 상부 승강장이 시야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난 확인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산길은 그런 가파름이 못내 부담스러웠었나보다. 바윗길이라도 섞였다싶으면 어김없이 밧줄을 매어놓았다. 지친 몸을 의지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그렇게 7분쯤 더 치고 오르자 이번에는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널찍한 마당바위가 그쪽 방향으로 살짝 튀어나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역시 나아가본다. 아니 앞서가는 집사람이 먼저 서두른다. 집사람의 발걸음 가볍기 짝이 없다. 오랜만에 산을 찾은 것이 무척 즐거운 모양이다.



이곳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오늘 산행에서 만난 최고의 전망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우선 발아래에는 산내면의 들녘이 펼쳐진다. 주변의 높다란 산들 사이에 낀 협곡(峽谷)의 모양새이다. 그 뒤에 보이는 산들은 능동산(983m)과 천황산(1,189m), 실해산(828m)과 정각산(860m)이 아닐까 싶다. 협곡의 왼편도 조망됨은 물론이다. 범봉과 운문산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잠시 후 석골사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여겨지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를 만난다.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누그러졌던 산길이 또 다시 가팔라진다. 그리고 가파른 오르막길은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된다. 가히 죽을 맛이다. 특히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 날씨에는 더하다고 할 것이다.



중간에 전망대까지 없었더라면 거의 지옥 수준이었을 게다. 문바위와 북암산 등 주변의 산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데, 비록 잠시지만 힘들다는 것까지 잊게 만들 정도로 빼어난 자태들에 자랑하고 있었다. ! 이곳 말고도 조망이 열리는 곳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석골사 갈림길을 지난 뒤 오른쪽으로 수리봉 정상 아래의 수직 암벽인 수리덤이 살짝 보인다.



잠시 후 수리봉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20분 만이다. 수리봉 정상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까 오르면서 보았던 수리봉은 거대한 암봉이었기에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10평 남짓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오석(烏石)으로 만든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을 뿐 텅 비어있다. 삼각점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조망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다른 이들의 글을 보면 정상석 오른편으로 5~6분쯤 더 나아가면 수리덤 암벽 위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석골사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라지만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사자봉으로 향한다. 답사로는 정상석의 뒤로 나있다.



완만한 능선을 잠시 걸으면 분재(盆栽)처럼 생긴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오랜 세월이 버거웠던지 상체를 바닥에 기댄 채로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기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다른 산에서 보아오던 명품 소나무들에 비해 조금도 뒤질게 없다는 얘기이다.



소나무의 아름다운 자태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시야(視野)까지도 활짝 열린다. 문바위봉에서 사자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산세(山勢)가 자못 심상치가 않다. 빼어나다는 얘기이다. 하긴 억산(億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이니 이미 검증을 마친 미모(美貌)가 아니겠는가. 억산(億山)이란 이름은 '수많은 하늘과 땅 그리고 우주'라는 의미의 억만건곤(億萬乾坤)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온다. 즉 하늘과 땅 사이의 수많은 명산 가운데 명산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는 얘기이다. 그 줄기에 속해 있는 봉우리들이니 응당 저 정도의 모양새는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잠시 후 또 다른 전망대가 나타난다. 헌걸찬 암릉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자랑하던 조금 전의 풍경화에다 건너편 산릉(山稜)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하나 더 첨가했다. 중간이 날카로운 암릉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위태롭기 짝이 없어 보인다.




이후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내려서면 거대한 바위지대가 앞을 가로막는다. 조금 전에 보았던 서슬 시퍼런 암릉이다. 우회로(迂廻路)라도 있을까 살펴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직진해서 곧바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바윗길은 생각보다는 쉬웠다. 암릉의 위가 제법 너를 뿐만 아니라 위험한 곳에는 철제계단을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저 좌우로 터지는 명품 조망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번 산행의 백미(白眉)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날등을 따라가는 묘미도 짜릿하지만 좌우로 펼쳐지는 풍광이 그 이상의 감동을 전해준다.  





짧은 암릉이 끝나면 산길은 다시 숲속으로 나있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7분쯤 진행하자 안부로 여겨지는 곳에 이정표(억산 2.92Km/ 수리봉 0.44Km) 하나가 세워져 있다. 첨부된 지도에 운곡갈림길로 표기된 지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정표에는 갈림길이 나와 있지 않다.



운곡갈림길을 지나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7분쯤 지나서 오른편으로 억산으로 가는 길 하나를 분가시키고 나면 6분 후에는 또 하나의 멋진 바위전망대가 나타난다. 오늘 산행 중 가장 장관으로 꼽히는 문바위와 농바위가 멋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문바위의 왼쪽은 북암산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은 계속된다. 해발 700m를 조금 넘는 안부에서 900m까지 곧바로 치고 올라가야 하니 별 수 없었을 게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치고 오르면 능선삼거리(이정표 : 억산2.29Km/ 문바위0.35Km/ 주차장2.91Km)‘이다. 오른쪽은 사자봉을 거쳐 억산으로 가는 길이고 문바위는 왼쪽으로 간다. 사자봉을 둘러본 후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사자봉으로 향한다. 이정표가 지시하고 있는 억산 방향의 능선을 따르면 된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오르내림이 거의 없다. 119의 구조지점표시목이 설치되어 있는 삼거리에서 억산으로 가는 길을 나뉘어 보내고 나면 곧이어 사자봉 정상이다. ’능선삼거리에서 7분이 걸렸다.



두세 평도 못 되어 보이는 비좁은 정상에는 사각의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외의 다른 풍경은 수리봉과 매한가지이다. 이정표나 삼각점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조망까지도 터지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서운해 할 일은 아니다.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멋진 전망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걷게 될 문바위와 북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고 그 뒤는 운문산이 늠름하게 버티고 있다. ! 다른 이들의 글에서 구만산이 조망되는 전망바위가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이곳까지 오느라 너무 지쳐버린 탓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의 글을 잠시 옮겨본다. <발아래 기도원의 뒤가 복점산이고 정면의 구만산 뒤로는 육화산과 화악산, 남산이 나타난다. 우측 저 멀리 통신탑 뒤로는 통내산과 학일산, 선의산, 용각산, 효양산이, 그리고 왼쪽엔 문바위와 북암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문바위봉으로 향한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두 갈래이다. 능선 안쪽으로 안전한 길이 있는가 하면 절벽의 끄트머리 위로도 길이 하나 더 있다. 물론 천 길 낭떠러지의 위이다. 다른 이들이 농바위라 부르는 지점을 지나가고 있지 않나 싶다. 문바위처럼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졌다는 그 농바위 말이다.



문바위까지 이어지는 이 구간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싶다. 눈을 호사시켜줄만한 조망이 계속해서 터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그런 호사를 누릴 수는 없다. 두 갈래로 나있는 길 중에서 절벽 끄트머리를 따라 난 길을 따라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까 지나왔던 수리봉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가 하면 진행방향에는 문바위봉이 그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계속해서 터지는 조망을 즐기면서 10분쯤 진행하면 드디어 거대한 바위덩어리로 이루어진 문바위봉 정상이다. 정상표지석은 그 바위 꼭대기에 오롯이 앉아있다. 밀양의 마음산악회에서 세운 것이라는데 문바위, 884m‘라고만 적혀있다. 독자적인 하나의 봉우리라는 의미의 ()‘자가 빠져있는 것이다. 그들이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에도 능선 상에 놓여있는 바위 중 하나쯤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만 그 규모가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는 것이 특이할 따름이고 말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문바위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대한 바위가 둘로 갈라지면서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틈새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모양새를 하고 있어 문바위라는 이름을 얻지 않았나 싶다. 둘 사이의 틈을 문()으로 보고 말이다. 실제로 문바위라는 이름은 요 아래에 위치한 마을에서 올려다볼 때 문짝처럼 보이는 생김새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심조심 문바위의 위로 오르면 일망무제의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바로 앞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사자봉이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있고 그 오른쪽으로 미끈하게 뻗어나간 능선 위에는 수리봉이 솟아올랐다. 수리봉의 뒤에서는 운문산(1,195m)이 넉넉함을 자랑한다. 진행방향에는 북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또렷하고 그 오른편으로 보이는 또 다른 능선에서는 구만산이 나도 있다며 손짓을 보낸다.




북암산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잠시 후 가인계곡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오른편으로 나뉘고, 이어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아니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북암산으로 오르는 길 중간쯤에 거대한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산길은 그 바위들을 왼편에 끼고 이어진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약간의 모험심을 발동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에 대한 보상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조심조심 암릉 위로 오르면 수직절벽으로 이루어진 문바위봉과 사자봉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곳까지 오면서 눈에 담았던 아름다운 그림들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수리봉도 보이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더 멀어졌다. 그래선지 아까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암벽으로 치마를 두른 듯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뒤에 보이는 높은 산은 운문산과 가지산(1,241m)이 분명할 것이다. 그 오른편은 천황산(1,189m)일 게고 말이다.



바위지대를 지나면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이어서 10분 후에는 북암산 정상이다.



서너 평 남짓한 정상은 정상표지석이 외롭게 지키고 있다. 이정표나 삼각점 등 다른 시설물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아니다. 누군가 정상석의 뒤에다 돌탑 하나를 서툴게 쌓아놓았다. 정상석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싶었던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조망 또한 트이지 않는다. 오래 머물지 않고 하산 길을 재촉하는 이유이다. 참고로 북암산은 정상 서쪽의 바위인 북암에서 따 붙였다고 전해진다.



하산은 직진이다. 경사가 거의 없는 길을 5분쯤 진행하자 ’Y’자 갈림길이 나온다. 이정표(인골산장 1.9Km/ 문바위 1.2Km, 억산 3.9Km)에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으로도 길이 나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이정표의 지시를 따르기로 한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이어서 6분 후에는 봉의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바위전망대를 만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오를 일은 아니다. 턱이 높아 오르내릴 때 어려움에 봉착할 수도 있어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참고로 봉의(인곡)저수지는 억산에서 구만산으로 뻗은 줄기와 북암산으로 뻗은 줄기 사이를 구비 흐르는 가인계곡을 가로막아 만든 저수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인계곡은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과 옥빛을 띤 맑은 물이 잘 어우러지는 계곡으로 알려져 있다. 계곡 군데군데의 올망졸망한 바위들을 돌며 만들어내는 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신비로움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세간(世間)에 덜 알려진 덕분에 찾는 이들까지 적다니 한번쯤 들러볼 만도 하겠다.



전망바위 아래로 굵은 밧줄이 매어져 있다. 그만큼 내려가기가 어렵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어서 또 다른 밧줄이 나타난다. 이번 것은 아주 길게 매어져 있다. 밧줄 구간이 끝나고 나서도 산길의 경사는 누그러지질 않는다. 지긋지긋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18분쯤 후 삼거리를 만난다. 능선을 벗어나는 느낌이지만 오른편으로 향한다. 잠시 완만하다 싶던 산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대로 돌아가 버린다. 또다시 가팔라졌다는 얘기이다. 곧장 아래로 내려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아래로 내려설 수 있다고 하면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려서기가 만만치 않음은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알파인 스틱(alpine stick)을 적절히 짚어가면서 조심스럽게 내려서는 수밖에 없다.



산행날머리는 인곡마을회관(밀양시 산내면 인곡길 79)

그렇게 20분 남짓 더 내려서야만 산길이 완만해지고 이어서 10분 정도를 더 내려서면 봉의저수지(인곡저수지) 둑 아래에 위치한 인골산장이 나오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하지만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인곡마을회관까지는 10분 정도를 더 걸어 나가야만 한다. 대형버스의 진입이 마을회관까지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대략 4시간 10분 정도가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이 걸린 셈이다.


민백산(民白山, 1,212m)-삼동산(三洞山, 1,178.2m)

 

산행일 : ‘17. 8. 5()

소재지 :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하동면의 경계

산행코스 : 상금정 마을합수곡폐갱도주능선 삼거리민백산1119m삼동산1119m폐갱도상금정(산행시간 : 4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두 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산행을 마칠 때까지 제대로 된 바위 하나 만나보지 못했다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산들은 지맥종주오지산행을 하는 산꾼들 외에는 낯선 이름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덕분에 산길은 험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위험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하도 적다보니 길이 없어져버렸다고 보면 된다. 특히 상금정에서 민백산으로 오르는 길은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다. 20년 가까이 산행대장을 해온 산꾼이 핸드폰에다 앱(Application)까지 깔아놓고도 지도에 나오는 길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핸드폰이 일러주는 지점으로 가려고 해도 잡목(雜木)과 넝쿨식물들이 뒤엉켜있어 진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들게 오른다고 해도 특별이 눈에 담을만한 산세(山勢)는 없다. 흙산의 일반적인 특징대로 조망까지도 일절 트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다는 얘기이다.


 

산행들머리는 상금정마을(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중앙고속도로 제천 IC에서 내려와 38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서영월교차로(영월군 영월읍 방절리)에서 빠져나와 88번 지방도로 옮겨 고씨동굴랜드와 옥동, 내리를 연거푸 지나면 도리기재에 올라서게 된다. 백두대간을 넘는 고갯마루이다. 이 도래기재에 이르기 조금 전 하금정삼거리(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산 1-42)에서 왼편으로 군도(郡道, 상금정길)가 나뉘는데 이 길을 따라 조금만 더 들어가면 오늘 산행의 들머리가 되는 상금정마을이 나온다. 하금정 삼거리에 우구치리라고 적힌 큼직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상금정 마을은 말 그대로 전형적인 오지(奧地) 마을이다. 사방이 산들로 막혀 있는 계곡을 끼고 열 채도 안 되어 보이는 민가가 흩어져 있다. 그나마 반은 빈집으로 보인다. 그래도 봉화에서 아침과 저녁, 12회씩 버스는 들어온다고 한다. 종점에는 반듯한 화장실까지 만들어져 있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은 마을을 지나서도 넓고 곧다. 차 한대가 충분히 지나갈 정도인데 가끔가다 두 대가 비켜지나갈 수 있는 공간까지 만들어 두었다. 하긴 십여 년 전까지 노선버스가 다녔다고 하니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금정광산이 한창일 때만 해도 이곳 우두치에는 수천 세대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뿔뿔이 흩어졌단다. 그러다가 끝내는 버스도 다닐 필요가 없는 오지(奧地)로 변해버린 것이다.



5분쯤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시멘트로 지어진 2층 건물이 보인다. 그 맞은편에는 단층 건물도 두 동이나 지어져 있다. 1995년에 폐교(廢校)서벽초등학교 금정분교라고 한다, 지금은 비록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지만 당시에는 제법 큰 학교였던 것 같다. 하긴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금정광산이 이곳에 있었다니 학생 수도 그에 걸맞게 많았을 게 분명하다.




길가에 빈집들이 보이기도 한다. 이곳도 역시 이농(離農, rural exodus)현상이라는 보편적인 추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 이곳엔 금정광산이라는 커다란 금광(金鑛)이 있었다고 하니 광산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맥을 같이했다고 보는 게 더 옳을 수도 있겠다.



폐가(廢家) 근처에 도라지꽃이 만발한 텃밭이 일구어져 있다.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민가는 이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경작을 할 만한 땅이 적다는 증거일 것이다.



잠시 후에는 또 다른 폐가를 만난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깔끔한 외관(外觀)을 하고 있다. 관리를 해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처마 밑에 빈 벌통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게 보인다. 꿀의 채취시기에만 사용하는 가옥인 모양이다.



곧이어 합수곡(合水谷)에 이른다. 산행을 시작한지 16분만인데 사람들이 신촌이라고 부르는 지점일 아닐까 싶다. 두 물줄기가 만나는 부근에는 차량 몇 대가 세워져 있다. 냇가에 천막까지 쳐진 걸로 보아 물놀이를 나온 가족들일 것이다. 하긴 봉화군에서 우구치계곡 일원을 비지정관광지로 지정(1997)까지 했다는데 저 정도의 차량 정도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우구치리계곡이 물이 맑은데다 수림(樹林)까지 우거져 있어 여름철 행락객들이 놀다가기에 딱 좋은 장소라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길의 왼편에 높게 쌓아올린 돌 축대(築臺)가 보인다. 오른편은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계곡인데 그쪽도 역시 석축을 반듯하게 쌓아올렸다. 금정광산이 폐광(廢鑛)된 후 광해방지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10분 남짓 더 걸으면 또 다른 합수곡이 나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임도는 오른편으로 계속 이어지지만 민백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계곡으로 들어서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른편 계곡이다. 이따가 산행을 마치고 삼동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왼편 계곡을 따르게 되니 참조한다.



함수지점 오른편에 몇 개의 시설이 지어져 있다. 금정광산(金井鑛山)의 폐갱도(廢坑道)들을 관리하기 위한 시설이다. 즉 갱내에서 흘러나오는 갱내수를 정화하기 위해 필요한 시설들이라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금정광산(金井鑛山)은 한반도의 대표적인 금광으로 '짚신 신고 그 앞을 지나도 신발에 금조각이 박혀 나왔다'는 이야기가 회자될 만큼 금()이 많이 나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 때인데 당시 일본인들은 이곳의 금을 캐가기 위해 봉화군 최초의 변전소를 세웠고, 소학교는 물론이고 순사가 10명도 넘는 주재소까지 만들었단다. 도로와 터널이 뚫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시설물을 훼손하면 안 된다는 경고판에 눈에 익은 이름이 적혀있다. 이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광해관리공단(韓國鑛害管理公團, Mine Reclamation Corporation)’이다. 효율적인 광해방지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2006년에 설립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인데, 이 기관이 만들어질 때 직간접으로 간여를 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광산 피해의 방지 및 복구에 관한 법률이 제정(2005531)됨에 따라 석탄합리화사업단이 해체되고 광해방지사업단으로 새롭게 설립될 당시의 고생했던 일화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간다. 비록 고생은 했지만 나름대로 보람이 있었지 않나 싶다.



금정광산(金井鑛山)1923년에 개발된 이래 1945년 해방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제2의 금산지였다고 한다. 추정매장량이 1736백여 톤이나 되었고, 이곳에서 생산된 금이 264백 톤에 이르렀다니 얼마나 큰 광산이었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1993년에 문을 닫았으니 70년의 가행기간 동안 지역사회의 발전에 큰 역할을 수행했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금광은 금() 외에도 은()과 동(), (), 아연(亞鉛), 텅스텐(tungsten) 등이 함께 나오는 게 보통인데, 금정광산은 이 광물들을 모두 합쳐 67만여 톤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광산은 비록 문을 닫았지만 광물을 가득 실은 광차가 지나다니던 선로(線路)는 그대로 깔려있다. 노다지로 넘쳐나던 옛날이 그립기라도 했나보다. 차마 옛 시설들을 철거하지도 못했을 정도로 말이다. 참고로 금정(金井)’이라는 지명은 일본인들이 금광을 개발하면서 하도 금이 많이 나와서 금을 캐는 것이 마치 우물 속에서 금을 건져 올리는 것 같이 수월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에서는 제법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나온다. 그래선지 에어컨보다도 시원한 바람이 갱도 안으로부터 불어온다. 천정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고 하면 얼마만큼 시원한지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광해 방지시설의 왼편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양쪽의 계곡 중 오른편 계곡이다. 사방댐(砂防堰堤, erosion control dam)이 만들어져 있는 계곡이라고 보면 되겠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자마자 오늘 산행은 만만치 않겠구나.’하는 생각부터 떠오른다. 시작부터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은 편이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Application)이 지시하는 대로 찾아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거친 잡목과 가시넝쿨들을 헤치고나가느라 찔리고 할퀴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10분쯤 지났을까 자갈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곳이 나온다. 옛날 금정광산이 가행될 당시에 나온 폐석(廢石) 더미가 아닐까 싶다. 산길은 이곳에서 왼편 수풀 속으로 나있다. 하지만 폐석을 밟고 오르도록 난 길의 흔적도 보이니 주의한다. 아니 폐석 쪽으로 난 길의 흔적이 오히려 더 또렷하다.



길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핸드폰 앱(App)의 지시를 따르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가시넝쿨들이 뒤엉켜 지시대로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방해물을 피해 에돌아가는 방법을 택한다. 당연히 진행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10분 남짓 지나면 앱이 두 개의 길을 그리는 지점이 나온다. 왼편은 민백산과 삼동산의 중간 지점에 있는 안부로 올라가는 길이고, 오른편은 민백산의 오른편에 있는 안부사거리로 오르는 길이다. 당연히 오른편 길을 따른다. 그래야만 정상적으로 민백산을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5분 정도를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폐건물이 나타난다. 지붕까지 없어져 버린 탓에 흉물에 가깝지만, 반듯하게 각을 이루고 있는 벽면 등의 골격으로 보아 금정광산이 가행하고 있었을 당시만 해도 큰 역할을 수행하던 건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 다시 방향 찾기가 어려워진다. 그만큼 길이 더 사나와진 것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잔뜩 짜증난 목소리가 들려온다. 길을 헤매고 돌아다니는 것에 지친 여성분들이 그만 되돌아 내려가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산행대장의 결정은 달래어 함께 가는 것이지만 지칠 만도 했을 것이다. 핸드폰에 나오는 지도대로 진행하려고 해도 잡목과 넝쿨식물들이 뒤엉켜있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고도(高度)를 높이지도 못한 채로 이리저리 오가고만 있는 것이다.



길을 찾다보니 계곡으로 내려와 버렸다. 그리고 한동안 계곡을 따라 위로 오른다. 아니 계속해서 오를 수도 없다. 넝쿨식물 등의 방해물들로 인해 곧장 치고 오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개울을 건너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계곡 위 사면(斜面)으로 난 길을 따르기도 한다.



그렇게 25분을 헤매다가 끝내는 다른 방법을 택해보기로 한다. 대충 방향만 잡고 능선을 치고 오르는 것으로 말이다. 이제부터는 완전한 개척 산행이 된다. 잡목이나 넝쿨식물들과의 한판 싸움으로 봐도 되겠다. 할퀴거나 찔리는 것은 보통이고 자칫 한눈이라도 팔다간 싸대기를 얻어맞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길이 없는 길에서 길을 찾다.’라며 넋두리를 늘어놓는데 함께 걷던 여성분이 길에서 길을 묻다라고 지적해준다. 조금 더 유머러스(humorous)하게 표현해보려던 내 표현이 귀에 거슬렸나보다. 갑자기 그녀가 얘기하고자 한 의도가 궁금해진다. 앞만 보며 달려가는 이들에게 과연 생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전하고저 했다는 문무일 작가일까? 아니면 부산에서 시작해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해파랑길 770Km를 직접 걸으면서 보고 느낀 점을 적었던 김영현 작가의 의도일까. 아니 구도(求道)의 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법수 스님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어떠랴. 그녀의 감성이 나의 지성을 뛰어넘고 있음을...



그렇게 치고 오르길 30분 이름 모를 지능선에 올라선다. 앞서가던 이대장이 막무가내로 주저앉더니 캔 맥주부터 들이 키고 본다. 무척 힘이 들었었나 보다. 하긴 이런 코스에서 힘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뒤에서 따르기만 하면 되는 우리들보다는 길을 찾으려고 좌우를 오갔던 그가 훨씬 더 힘이 들었을 것이다.



지능선에 올라서고 난 후에는 길이 제법 또렷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앞에 보이는 가파른 봉우리를 일부러 넘을 필요는 없다. 왼편으로 우회(迂迴)를 하는 이유이다. 거의 바닥 난 체력을 조금이라도 아껴야 나머지 구간을 진행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이름 모를 봉우리를 오른편에 끼고 에돌면 15분 후에는 구룡산에서 삼동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 올라선다. 이어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능선안부에 있는 사거리에 이른다. 남들은 이곳까지 오는데 75분이 걸렸다는데 우린 120분을 훌쩍 넘겨버렸으니 우리가 얼마나 헤맸는지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오른편에 팻말이 세워져 있기에 다가가 보니 군사보호지역(사격장)’임을 알리는 경고판이다. 길이 나있지만 더 이상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민백산은 직진방향이다. 이 길은 통신(通信) 케이블(cable)이 깔려있는 게 특징이다. 아니 주능선에 올라섰을 때부터 케이블이 보였었다. 아무튼 용도는 모르겠으나 방향이 헷갈릴 경우에는 이 통신선만 따라가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겠다.



그렇게 4분쯤 걸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민백산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다음에 올라야할 삼동산은 왼편 방향이다. 민백산을 둘러본 다음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4분 후 민백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하고도 15분이 지나버렸으니 도래기재에서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 하긴 오는 길에 보니 그쪽에서 출발했던 선두대장의 방향지시지가 이미 깔려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이곳을 지나갔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서너 평도 안 되어 보이는 비좁은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대구지역의 산악인 김문암씨의 작품으로 보이는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조망(眺望) 또한 꽉 막혀있다. 참고로 민백산은 산의 지형이 둥글고 흰색의 바위가 많아 민백이(대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 길을 따른다. 무릎에도 못 미치는 산죽(山竹)과 잡목들로 가득 차있는 것만 제외하면 산길은 대체로 고운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는 얘기이다. 민백산과 삼동산의 높이가 거의 비슷하다보니 급하게 오르내릴 이유가 없었나 보다.



능선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황갈색이 아름다운 춘양목(春陽木)과 하늘을 향해 곧게 치솟은 잣나무들이다. 특히 집단을 이루며 빼곡히 들어찬 잣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아니 잣나무 아래에 떨어져 있는 열매가 더 눈길을 끈다고 봐야겠다. 열매를 줍고 있는 집사람을 기다리다 잠시 주저앉는다. 보드라운 바닥이 주는 촉감이 아주 곱다. 코로는 스멀스멀 흙냄새가 스며든다. 은은한 향기가 참 좋다. 수북하게 쌓인 솔가리가 흙과 뒤섞이며 만들어낸 독특한 향기이다.



그렇게 20분 남짓 진행하면 능선상의 안부에 이른다. 누군가의 글에서 이곳의 높이를 1090m라고 적은 것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아까 산을 오르면서 거론했던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진행하면 이곳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를 증명해줄 표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곳 역시 이정표가 없다는 얘기이다.



이후부터는 오름길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내리막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이 오르막길로 이루어졌다는 얘기였을 따름이다. 그 오르막 또한 버거울 정도로 힘들지는 않는다. 쉬엄쉬엄 오르기에 적당하다면 옳은 표현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첫 번째 봉우리(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1116m봉으로 부르기도 한다)에 올라선다. 사람들이 삼동산이겠거니 오해를 하는 봉우리 중 하나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능선은 백두삼동분맥(白頭三洞分脈)이다. 백두삼동분맥이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구룡산에서 북서쪽으로 분기(分岐)하여 경북(봉화군,낙동강)과 강원도(영월군,한 강)를 가르면서 민백산과 삼동산을 일구고 난 후, 영월군의 상동읍과 김삿갓면의 경계를 이루는 쇠이봉(1119.2m)과 목우산(牧牛山=상여봉, 1066m)을 지나 영월군 중동면에 위치한 옥동천변의 녹전대교에서 그 숨을 다하는 23.1km의 산줄기를 말한다. 그중 일부(민백산 못미처의 주능선삼거리에서 삼동산까지)를 오늘 걷게 되는 것이다.



무명봉에서 짧게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채면 이번에는 1119m봉이다. 무명봉(1116m)에서 20분 조금 못되는 거리라고 보면 되겠다. 이곳 역시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상금정으로 내려가는 하산길이 이곳에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산길이 이곳에만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삼동치까지 가서 상금정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다. 그뿐 아니라 상금정으로 가는 중간에 왼편으로 내려서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곳에 비해 엄청나게 길이 나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삼동산으로 향한다. 잠깐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위로 향하는 산길은 험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위험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잡목과 넝쿨식물들이 뒤엉켜 진행하기가 힘들다는 얘기이다. 고개를 숙인채로 넝쿨을 해쳐나가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아예 엎드려야만 통과할 수 있는 곳도 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싸우다보면 드디어 삼동산 정상이다.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헬기장으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널따랗다. 참고로 삼동산이란 지명의 근원을 조선시대 한성과 각 도의 호수와 인구수를 기록한 호구 통계기록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동면 삼동리(三洞里)라는 지명이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현재의 지명에서 찾고 싶다. 삼동산의 산줄기가 영월군의 상동(上東邑)과 중동(中東面) 그리고 하동(下東面, 현재는 김삿갓면)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이 셋을 합할 경우 세 개의 동리()라는 뜻의 삼동(三洞)이라는 지명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튼 삼동산(三洞山)이란 지명은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지형도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정상표지석은 공터의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춘양면 이장협의회에서 세웠는데, ‘천하명당 조선십승지라고 적어 이 지역의 풍수(風水)가 뛰어남을 잔뜩 자랑하고 있다. 그 앞의 소나무에는 김문암씨의 작품으로 보이는 정상표지판도 매달려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글에서 거론했던 삼각점(태백315/2004재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웃자란 잡초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상을 둘러본 후에는 1119m봉으로 되돌아 나온다. 계속해서 능선을 탈 경우에는 삼동치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삼동치는 40ha가 넘는 광활한 고랭지 채소밭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리고 삼동치를 들렀다가 상금정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길이 훤하게 뚫려있는 하산 길을 놔두고 일부러 1.2Km 정도를 돌아갈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산길은 또렷하게 나있다. 오늘 산행 중에 가장 또렷한 산길을 만났다고 보면 되겠다.



능선에는 짙은 황갈색의 소나무들이 많이 눈에 띈다. 아니 무리를 지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는 곳도 많다. 그런 이유로 옛날에는 이 일대를 황장산이라 부르기도 했단다. 궁궐에서 필요한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1872년 지방지도에도 '황장산'으로 표기되어 있다니 참조한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오면 임도를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수월하지 않은 산행이 이어진다.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탓에 잡목과 가시넝쿨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에는 산딸기나무들이 지천이다. 철만 잘 맞춘다면 뛰어난 간식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은 갈 길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일 따름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들 하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딸기를 따먹는 재미에 방해물이라는 것까지도 잊어버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훼방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산길은 이 물줄기를 따라 아래로 향한다. 바닥이 바위로 되어 있어 다소 위험할 수도 있으나 조금만 조심한다면 별 어려움 없이 내려설 수 있을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상금정마을(원점회귀)

임도를 따라 18분 정도를 진행하면 산행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산자락으로 접어들었던 금정광산의 폐갱구 앞 합수지점에 내려선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산행을 시작할 때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내려가면 된다. 물론 상금정마을까지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2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멈추었던 시간이 채 10분도 못되었으니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참고로 오늘 산행의 기점이자 종점이 되는 상금정 마을은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宇龜峙里)에 속한 자연마을 중 하나이다. 우구치리에는 이 마을 말고도 새터마을과 상시장, 사호, 하금정, 샘골, 와흥 등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마을들 대부분은 옛날 이곳에 있었던 금광(金鑛)과 관계가 깊다. ’금정광산의 이름을 그대로 갖다 쓰고 있는 상금정과 하금정은 물론이고, 새터는 인근에 금, , 동 광산이 많이 생겨나면서 이곳에 종사하는 광부들이 새로운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호는 금광을 뚫는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사호와 칠호에서 많은 금이 나왔다 하여 생긴 지명이란다.


베틀산(369.5m)

 

산행일 : ‘17. 7. 16()

소재지 : 경북 구미시 산동면과 해평면의 경계

산행코스 : 비재304m우베틀산(304m)베틀산(332m)좌베틀산(369.5m)동화사 갈림길동화사상어굴금산1리 마을회관(산행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팔공지맥 상에 놓여있는 높이 369.5m의 산으로 주봉(主峰)은 좌베틀산이다. 금산리에서 볼 때 왼편 동화사 뒤에 있는 산이 좌베틀산, 가운데가 베틀산, 그리고 남동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오른쪽 산이 우베틀산이다.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산세가 아기자기하고 암릉이 산재하고 있어 산행의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또한 산중턱의 바위절벽 곳곳에는 역암(礫岩, conglomerate)이나 사암(砂岩, sandstone)의 풍화나 해식작용으로 인해 생긴 해식굴(海蝕窟)이 널려 있는데, 그중에서도 큰 상어굴작은 상어굴은 베틀산의 명물로 꼽힌다. 작은 구멍들이 송송 뚫려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기묘하게 돌출되어 있는 것이 흡사 상어의 아가리를 빼다 닮았다. 또 다른 볼거리는 조망이라 할 수 있다. 해평면의 너른 들녘은 물론이고, 구미산과 천생산 그리고 냉산, 청화산, 가산, 팔공산 등 주변의 명산들이 빠짐없이 시야에 잡힌다. 아무튼 한번쯤은 꼭 가봐야 할 산으로 꼽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비재(구미시 산동면 동곡리)

상주-영천고속도로 서군위 하이패스 T.G를 빠져나와 923번 지방도를 타고 장천(구미시)방면으로 달리다가 백현리삼거리(산동면 백현리 1181)에서 오른편 군도(郡道 : 동백로)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비재에 올라서게 된다. 경부고속도로 구미 I.C에서 내려와 반대방향에서 비재로 오는 방법도 있다. 이 경우 514번 지방도를 이용해서 구미시가지를 통과한다. 이어서 67번 국도와 25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산동교차로(구미시 산동면 신당리)까지 온 다음 군도(郡道 : 동백로)를 이용해 비재로 오면 된다. 아무튼 비재 고갯마루는 현재 등산객들을 태운 관광버스나 올라 다닐 뿐 일반 차량들은 이용하지 않는 옛 도로이다. 요 아래에 비재터널이 새로 뚫렸기 때문이다.



비재는 산동면 백현리(동쪽)와 동곡리(서쪽)의 경계이다. 비재 고갯마루에서 백현리 방향으로 200m정도 내려오면 도로가 거의 360도에 가깝게 휘는 지점이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난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물론 고갯마루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지맥종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조금 더 편한 방법을 택했다. 봉우리 하나를 오르지 않고 우회(迂迴)했다고 보면 되겠다.



농로(農路)를 겸하고 있는 길을 따라 7분쯤 들어가면 임도는 끝을 맺는다. 산자락으로 들어선다는 얘기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능선에 올라선다. 공짜로 능선에 올라섰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산길은 순한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하긴 400m에도 못 미치는 산을 오르는데 급하게 고도(高度)를 높여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를 진행했을까 왼편으로 돌출된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능선에서 약간 비켜나 있지만 놓치지 말고 들어가 볼 일이다.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베틀산의 전경이 시야(視野)에 잡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현재 조성중인 구미 하이테크밸리 산업단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다른 곳에서도 나타나기에 사진은 생략했다).




상당히 가파르게 내려선 산길이 다시 위로 향한다. 오르막길 역시 상당히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오르내림의 길이가 그다지 길지 않기 때문이다. 능선을 따르다보면 암벽(岩壁)으로 띠를 두른 것 같아 보이는 왼편 산자락이 눈길을 끈다. 바위들이 층을 이루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면 벤치가 놓여있는 봉우리(304m)에 올라서게 된다. 일행 중 한 명이 우베틀산이라고 귀띰을 해준다. 헨드폰에 깔아놓은 어플(Application)에 이곳이 우베틀산이라고 뜬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상은 텅 비어있다. 이곳이 우베틀산이라는 것을 증명할만한 표식이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이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망만은 괜찮은 편이다. 왼편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까 전망바위에서 얘기했던 구미 하이테크밸리 산업단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구미 하이테크밸리는 구미권의 기존 전자반도체 산업과 연계하여 디지털 산업클러스터 구축 등 전자정보산업의 메카로 입지를 강화 하고 이와 더불어 첨단복합산업단지로의 개발을 통한 국가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조성되는 산업단지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우베틀산정상에 올라선다. 하지만 이곳이 우베틀산의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저 이정표(베틀산 0.7Km/ 동곡리 4.9Km)에 매달려 있는 정상표지판(우베틀산 332m)를 보고 이곳이 정상이려니 할 따름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개인이 매달아 놓은 표식이지만 믿어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무튼 우베틀산에서는 조망이 터지지 않는다.




베틀산으로 향한다. 큰 바위들이 듬성듬성 보이는가 싶더니 이어서 긴 철계단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계단을 내려서는 게 썩 편치만은 않다. 경사가 가파를 뿐만 아니라 디딤판의 폭이 좁기까지 한 것이다. 사면(斜面)의 경사가 가파르다보니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주능선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바로 앞이 베틀산이고 그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좌베틀산이다. 그런데 베틀산이 여간 뾰쪽한 게 아니다. 우베틀산 정상에서 만났던 이정표에 뾰족봉이라고 낙서(落書)가 되어있었는데, 그 표현은 베틀산에다 붙여야 할 것을 잘못 들이 덴 것이 확실하다.



우베틀산을 내려선지 15분쯤 지나면 임도(이정표 : 베틀산0.3km, 좌베틀산 1.2Km/ 도중리1.9Km/ 우베틀산0.3Km)가 나온다. 도중리(서쪽)와 백현리송산리(동쪽)를 잇는 임도이다.



산길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져 있다. 길이 나뉘는 지점에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경사가 가팔라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철계단을 놓았다.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10년쯤 전엔가 언론과 밀접한 일을 하면서 이곳 베틀산의 등산로 정비에 관한 기사를 본 것 같은데 당시에 설치한 시설들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걷지 않아 진행방향 저만큼에 거대한 암벽이 가로막으면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베틀산 0.1Km, 좌베틀산1.0Km/ 금산10.9Km/ 우베틀산0.3Km)로 나뉜다. 정상은 오른편에 보이는 철계단을 올라야만 만날 수 있다. 왼편은 우회하는 길로서 만일 이 길을 따를 경우 정상에 오를 수 없음은 물론이다.



계단을 올랐다 싶으면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온다. 그런데 이정표(이정표 : 베틀산 80m, 좌베틀산 950m. 금산1리 우회로 950m/ 우베틀산 450m) 뒤의 바위벼랑이 좀 묘하게 생겼다. 바위에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는 것이다. 이곳 베틀산이 바다 아래에 있던 지표면이 융기(隆起, uplift)하면서 생겨났다고 하더니 그 흔적들인 모양이다. 해식작용(海蝕作用, coastal erosion), 즉 해수가 육지를 침식하면서 만들어 낸 구멍들 말이다.




암벽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잠시 오르니 왼편에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조망 좋기로 소문난 곳이니 절대 놓치지 말 일이다. 너럭바위의 끝은 천길 단애(斷崖)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이 조망이 좋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비가 온 뒤끝이어선지 안개가 자욱하다. 준비해온 간식도 먹을 겸해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보기로 한다.



하늘은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20분쯤 지나자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것이다. ‘진인사대천명 (盡人事待天命)’은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우선 발아래에는 구미 하이테크밸리 산업단지가 펼쳐진다. 그 뒤의 낙동강 너머로 보이는 산은 아마 금오산일 것이다. 그리고 방금 지나온 우베틀산 너머에는 천생산이 희미하다. 시야(視野)가 뻥 뚫려있어 날씨만 받혀준다면 가히 환상적인 조망이 펼쳐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비온 뒤 끝에 이 정도만 해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잠시 후 베틀산 정상에 올라선다. 바위와 흙이 적당히 섞여있는 정상은 해발고도를 273m로 잘못 표기해놓은 이정표(좌베틀산 900m/ 우베틀산 500m)와 서툴게 쌓아올린 케언(cairn)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어느 등산 마니아가 매달아놓은 정상표지판(베틀산 324m)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배틀산의 원래 이름은 조계산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베틀산으로 바뀌었는데, 구미시지(龜尾市誌)에서는 그 이유를 세 가지의 옛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첫 번째는 문익점의 손자 문영이 구미시 해평면에 자리 잡고서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베 짜는 기계 만들기에 고심하다 이 산의 모양을 본떠 베틀을 만들었다고 해서 베틀산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베틀산의 산꼭대기에 석굴이 있는데 옛날 난리 때 사람들이 석굴로 피신하여 베틀을 놓고 베를 짰다는 데서 베틀산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나머지 하나는 일기가 화창하면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산꼭대기에서 금실로 베를 짰다는 데서 베틀산이라는 이름이 연유되었다고 한다.



정상에서는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그게 불만이라면 왼편에 보이는 벼랑 쪽으로 조금만 나아가면 될 일이다. 북서쪽으로 시야가 열리기 때문이다. 천년고찰 도리사를 품고 있는 냉산이 하늘금을 이룬다. 그 뒤에 보이는 산은 아마 청화산일 것이다.




좌베틀산으로 향한다.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중심을 잡기가 힘들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이어서 아까 베틀산으로 오르면서 헤어졌던 우회로(이정표 : 좌베틀산800m/ 금산1리 우회로800m/ 베틀산100m, 우베틀산 700m)와 다시 만난다.



함께 걷고 있던 김선배가 ()’()’의 차이를 물어온다. 같은 능선으로 연결되고 있더라도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이 깊을 때에는 별개의 산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베틀산과 좌베틀산 사이의 골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깊어 보인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봉과 산의 차이를 떠올렸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베틀산에서 내려선지 10분쯤 지나면 안부삼거리(이정표 : 좌베틀산600m/ 금산1700m/ 베틀산300m, 우베틀산 800m)에 내려선다. 누군가는 이곳을 베틀재로 적고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안부를 지난 산길은 또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커다란 바위들이 널려있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13분쯤 오르면 전위봉인 310m봉에 올라선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 아무런 시설물도 보이지 않는 밋밋한 봉우리이다.



하지만 조망만은 뛰어난 편이다. 왼편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구릉(丘陵)처럼 생긴 나지막한 산릉(山陵)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고만고만한 산들을 비집고 구비 구비 마을과 들판이 자리 잡고 있다. 잠시 후에 오르게 될 좌베틀산과 그 너머에 있는 냉산과 청화산이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좌베틀산으로 향한다. 짧게 아래로 내려선 산길이 다시 위로 향한다. 두 봉우리 사이의 골이 깊지 않다는 얘기이다. 오늘 걷고 있는 이 길은 팔공지맥(八公枝脈)의 일부 구간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갈려나온 낙동정맥(洛東正脈)은 주왕산과 통점재를 지나서 가사령에 내려서기 바로 전에 서쪽으로 큰 산줄기 하나를 가지치고 가사령으로 내려서서 침곡산으로 간다. 서쪽으로 가지 친 큰 산줄기는 면봉산(1121m)과 보현산(1126m)을 지나 석심산(石心山 750.6m)에 이르러 또 다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이중 남서진(南西進)하는 한줄기가 팔공지맥(八公枝脈)이다. 즉 남서진하며 방가산(755.8m)과 화산(828.1m), 팔공산(1,192.8m)을 만들고 가산(901.6m)에서 북진하여 좌베틀산(369.2m)과 청화산(700.7)을 일군 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새띠마을에서 그 숨을 다하는 총 길이 120.7km의 산줄기다. 오늘은 그중 일부를 걷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위에서 말한 두 갈래 산줄기 중 나머지 하나는 보현지맥(普賢枝脈)으로 석심산(石心山)에서 북서진하여 어봉산(634.2)과 산두봉(719) 구무산(676.3) 푯대산천제봉(359) 해망산(400m) 곤지산(330m) 비봉산(579.3) 등을 지나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팔공산쪽으로 온 산줄기를 마주보며 끝을 내는 총 길이 127.4km가 되는 산줄기다. 두 산줄기는 위천을 남과 북으로 애워 싸고 서로 마주보고 달리다가 다시 위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위천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며 만난다.



산길이 오르막으로 변하면서 길의 풍경 또한 확연하게 뒤바뀐다. 잠시 흙산으로 변하는가 싶었던 산길이 또 다시 바위의 숫자를 확실하게 늘려놓는 것이다. 그러다가 끝내는 골산(骨山)으로 분류를 해야만 할 정도로 바위산의 풍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덕분인지 두어 곳에서 조망이 열린다. 여기까지 오면서 보았던 산하가 다시 한 번 깔끔하게 열린다.



잠시 후 좌베틀산 정상에 올라선다. 전위봉에서 12, 베틀산에서는 36분이 걸렸다. 널찍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의외의 풍경을 보여준다. 언제 바윗길을 탔었냐는 듯이 온전한 흙산의 모양새인 것이다. 이곳 역시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이정표(상어굴 500m/ 베틀산 900m, 우베틀산 1.4Km)에다 정상표지판(좌베틀산 370m)를 매달아놓았을 따름이다. 그 외에도 삼각점(선산 22, 1981 재설)등산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아까 베틀산에서 보았던 케언(cairn)은 그 크기를 배로 불려놓았다. 베틀산의 3개 봉우리 중 좌장(座長)이 좌베틀산인데 이에 걸맞는 대접이 아닐까 싶다.



하산을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후 냉산과 청화산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를 만났다 싶으면 산길은 거대한 바위 사이로 들어선다. 베틀산에서 가장 멋진 사진을 선사하는 곳이다. 협곡(峽谷)을 연상시키는 바위 사이로 길게 통나무계단이 놓여있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잘 그린 그림이다.



계단을 빠져나오면 길은 두 갈래(이정표 : 금산11.5Km/ 군위소보/ 좌베틀산50m, 베틀산 950m)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정표의 상어굴 방향으로 내려왔는데 그 지명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군위소보 방향으로 향할 경우 계속해서 팔공지맥을 따르게 되므로 이곳에서는 금산1리 방향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동화사200m/ 상어굴400m, 금산11.43Km/ 좌베틀산150m, 베틀산 1.03Km)를 만난다. 이곳에서는 어디로 가더라도 베틀산의 명물인 상어굴에 들를 수 있다. 그냥 각자의 취향에 맡겨볼 일이다.



동화사로 향한다. 절간 뒤에 있다는 마애불(磨崖佛)을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로 내려가는 길이 또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놓았는데 그 모양새가 소라껍질을 연상시킨다. 나선형(螺旋形)으로 놓인 계단이 주변 숲과 어우러지며 멋진 경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계단이 끝나는가 싶으면 동화사이다. 일천한 역사라도 말해주려는 듯 절간의 모양새는 한마디로 을씨년스러운 풍경이다. 임시로 지은 듯한 조립식 대웅전은 합판(合板)들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형태이고 요사채로 보이는 건물은 동남아에서라도 온 듯이 뾰족지붕을 하고 있다. 아무튼 필요한 건물들을 하나씩 지어나가고 있는 듯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대웅전 옆으로 내놓은 난간을 따라 뒤로 돌면 거대한 바위벽에 키가 3m 정도 되는 부처님(磨崖如來三尊立像)이 새겨져 있다. 해 뜨는 동쪽을 향하고 선 마애불은 조성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깔을 쓴 듯한 모습은 야무지다. 다문 입술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마저 보인다. 양손에 약병으로 보이는 항아리를 들고 있으니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인 셈이다. 누군가의 글에 의하면 이 마애불은 법난(法難)이 있었던 19801027일 흰색 페인트를 뒤집어쓰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페인트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불상 곳곳에 아직도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다.



마애불 앞에는 여섯 분의 부처님을 따로 모셨다. 그 앞을 통과하면 또 다른 공양간이다. 거대한 바위 아래에다 산신령으로 추정되는 상()을 모셔놓았다. 산신각(山神閣)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아무튼 산신각의 앞은 멋진 조망처이다. 금산리를 위시해서 해평면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해평은 말 그대로 바다처럼 넓은 평야라는 의미다. 토지도 비옥해 이곳에서 나는 쌀은 특산물로 통한다.



동화사의 화장실 앞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베틀산의 명물인 상어굴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들머리에 이정표가 두 개(#1 : 상어굴 200m, 금산1500m/ 좌베틀산 350m, 베틀산 1.25Km, #2 : 상어굴 0.3Km/ 등산로입구 0.65Km/ 좌베틀산 0.5Km))나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위벼랑 아래로 난 오솔길을 따라 5분 남짓 걸으면 작은상어굴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굴은 아니다. 거대한 암벽이 안으로 약간 파여 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그 바위벽면이 여러 가지 특이한 문양(紋樣)을 하고 있다. 바다 밑바닥이 융기작용에 의해서 위로 솟구쳐 올라온 흔적들이란다. 베틀산이 위치한 해평면(海平面)의 지명 또한 이와 연관이 있지 않나 싶다. 조금 전에 지나온 동화사의 용왕당은 물론이고 말이다.





작은 상어굴에서 큰 상어굴은 금방이다. 아니 거대한 바위벽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봐도 되겠다. 수평으로 산허리를 돌면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잠시 후 길이가 30~40m쯤 되는 큰 상어굴에 이른다. 작은상어굴과 거의 비슷한 외모를 지녔는데 크기만 더 커졌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큰 상어굴은 그 크기도 어마어마하지만 물결모양과 벌집처럼 숭숭 구멍이 뚫린 기묘한 모습이다. 바람과 물, 자연이 빚어놓은 불후의 명작(名作)이란다.




작은 구멍들이 송송 뚫려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기묘하게 돌출되어 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흡사 상어의 아가리를 빼다 닮았다. 그러다보니 옆으로 길게 파인 굴의 형상이 마치 살아있는 상어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그래서 상어굴이라는 이름을 붙였나 보다.




이색적인 풍경을 감상하고 난 후 큰상어굴을 빠져나오면 길은 다시 두 갈래(이정표 : 금산리1.1Km/ 좌베틀산500m, 베틀산 1.4Km/ 동화사300m)로 나뉜다. 오른편에 보이는 높다란 철계단을 오를 경우엔 아까 동화사의 위에서 헤어졌던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하산지점인 금산리는 물론 왼편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 헤치며 나있는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한 편이다. 산행코스라기보다는 오히려 산책코스로 분류하는 게 더 옳겠다. 이런 길에서는 구태여 서둘 이유가 없다. 마침 길까지 넓으니 일행과 함께 옛이야기라도 나누면서 한가하게 걸어보자.



산행날머리는 금산1리 마을회관

그렇게 20분 가까이 걸으면 동화사로 연결되는 시멘트포장 임도(이정표 : 상어굴 1.2Km, 좌베틀산 1.6Km/ 베틀산 2.5Km)에 내려서게 된다. 산행은 이쯤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산악회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금산1리까지는 10분 남짓 더 걸어야하지만 말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3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쯤 걸린 셈이다. 참고로 산행날머리인 금산리의 옛 이름은 쇠산골(金山洞)이다. 옛날 마을 뒷산에서 철이 많이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소상골로도 불리는데 마을에 소상강이 있다는데서 소상곡이라 불리다가 점차 어휘가 변하면서 소상골로 변했단다. 아무튼 이 마을에는 고려시대 해평부원군을 지낸 영의공 윤석(尹碩)의 단소(壇所)와 그를 추모하는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하산 길, 뒤돌아보면 세 개의 뾰족한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다. 베틀산을 가운데에 놓고 왼편이 좌베틀산, 그리고 오른편은 우베틀산이다. 바윗길을 오르내렸던 기억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생김새가 마치 공룡의 등허리를 보는 듯하다.


태화산(太華山, 676.8m)-침곡산(針谷山, 725.4m)

 

산행일 : ‘17. 5. 27()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과 기계면기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한티재먹재태화산서당골재송전탑침곡산배실재덕동마을(산행시간 : 4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오늘 오른 산들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산행 내내 제대로 된 바위 하나 볼 수 없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때문에 특별히 가슴에 담아둘만한 산세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태화산 정상 부근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 또한 보잘 것이 없다. 아니 아예 시야(視野)가 트이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침곡산이나 태화산 만을 목적으로 찾아오는 이가 드문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저 낙동정맥을 하는 사람들이나 찾아오는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내 생각도 역시 같다. 일부러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얘기다.


 

산행들머리는 한티터널(포항시 북구 기계면 가안리 산 57-8)

익산-포항고속도로(대구-포항구간) 서포항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타고 청송방면으로 달리다 보면 낙동정맥의 산줄기를 관통하는 한티터널이 나온다. 터널로 들어가기 전 왼편에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참고로 당진-영덕고속도로의 청송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거꾸로 타고 이곳으로 오는 방법도 있다. 사실 우리를 실어다 준 버스는 이 후자를 택했다.




공원의 뒤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길이 제법 또렷할 뿐만 아니라 들머리의 나뭇가지에 산악회의 시그널(signal) 몇 개가 매달려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8분이 채 안되어 능선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긴 한티재의 높이가 266.3m나 된다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도 있겠다. 능선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능선으로 올라선 산길은 일단 숨을 죽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능선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무덤 한 기를 만난다. 이렇게 능선을 독차지하고 있는 무덤들은 산행을 하는 동안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그만큼 이 지역의 산들이 비탈지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서 묘()를 쓸 만한 자리를 찾다보니 능선까지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될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의 특징 중 하나라고 봐도 되겠다.



사유지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입산금지안내판도 보인다. 아니 경고판이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임산물(林産物)을 채취할 경우에는 관련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된다는 서슬 시퍼런 경고 문구까지 적어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약초는 모르겠지만 재배하는 것도 아닌 산채나 나무열매, 버섯 등까지 채취하지 말라니 이 동네 인심 참으로 야박한 것 같다.



능선에 올라선지 10분이 채 안되어 334m봉에 올라선다. 높지도 그렇다고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봉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눈여겨 봐두어야 할 것은 있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삼각점(기계435, 2004년 재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334m봉에서 5분쯤 내려갔을까 십자안부가 나타난다. 좌우로 난 길의 흔적이 제법 또렷하다. 선답자들의 후기에 나타나고 있는 먹재고갯마루가 아닐까 싶다.




먹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서서히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리고 15분 후에는 멋진 전망바위 앞에다 올려놓는다. 비학산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이다. 이곳 말고도 이 부근은 심심찮게 조망이 열린다. 서둘지 말고 조망을 즐기면서 진행해 볼 일이다.





그렇게 20분쯤 더 진행하면 585m봉에 올라선다. 작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석이나 이정표 하나 없다는 얘기이다. 하긴 이름도 없는 이런 봉우리에 정상석이 있을 리가 없다. 조망(眺望) 또한 보잘 것이 없다. 기룡산과 면봉산 등이 시야에 들어오나 잡목들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렸다.




이후로도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정맥(正脈) 산행의 일반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오늘 걷고 있는 능선은 낙동정맥(洛東正脈)의 한 구간이기 때문이다. 낙동정맥이란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백두대간의 구봉산(九峰山, 강원도 태백시)에서 남쪽으로 분기(分岐)하여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에서 그 숨을 다하는 총 길이 370의 산줄기이다. 정맥이 품고 있는 주요 산으로는 백병산(白屛山, 1,259m)과 주왕산(周王山, 907m), 단석산(斷石山, 829m), 가지산(加智山, 1,240m), 취서산(鷲棲山, 1,059m), 금정산(金井山, 802m) 등이 있다.



변화가 없는 지루한 산행이 이어진다. 참나무 천지인 능선에 가끔 나타나는 소나무들이 볼거리라면 볼거리일 뿐 특별히 눈에 담을 만한 것은 없다. 그럴 즈음 눈이 확 뜨이는 조망이 펼쳐진다. 기룡산과 보현산, 면봉산 등 경북 내륙의 수많은 산들이 줄을 이루며 첩첩이 쌓여있다.




산길은 가끔은 착한 심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능선만을 고집하지 않고 가끔은 우회(迂迴)를 시키기도 한다는 얘기이다. 특별한 의미도 없는 봉우리를 오르는 게 싫었는데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쯤 지났을까 커다란 봉우리 하나가 진행방향에 나타난다. 산길은 곧장 위로 치고 오르지를 않고 왼편으로 향한다. 우회(迂迴)를 시키려나 보다 했더니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비탈진 경사가 부담스러워 갈지()자로 길을 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길가에 밧줄까지 매어 놓았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안전시설이다.




밧줄이 끝났다 싶으면 태화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이다. 밋밋한 구릉(丘陵) 모양으로 생긴 정상은 산불감시탑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태화산이라고 적은 자연석을 감시탑 아래에 세워놓았을 따름이다. 그 옆에 이정표(한티) 용도의 돌 하나를 더 세우고 높이는 거기에다 적어 넣었다. 정상석으로 삼은 돌의 표면이 좁았던 모양이다. 감시탑 앞에는 서툴게 쌓아올린 케언(cairn)도 보인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이지만 저 돌맹이 하나하나에는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들이 켜켜이 쌓여있을 것이다.




태화산은 죽장면과 기북면, 그리고 기계면이 맞닿는 삼면 경계 지점으로 오늘 구간에서는 최고의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산불감시탑이 아닐까 싶다. 망루(望樓)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트인다. 서쪽에서는 천문대가 있는 영천의 보현산(1,124m)과 배틀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오고, 남서쪽으로는 대구와 경산 그리고 영천과 군위를 잇는 팔공산(1,192m)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또한 동으로는 포항 앞바다와 호미곶(虎尾串)이 아스라하다. 한편 남쪽에서는 운주산이 푸근하고 부드러운 능선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한티재로 오르는 꼬불꼬불한 31번 국도도 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침곡산으로 향한다. ‘7시 방향쯤으로 보면 되겠다. 올라왔던 길에서 좌측으로 크게 꺾어 숲길로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이다. 아니 산불감시탑의 뒤편에서 길을 찾으라고 하면 더 알아듣기 쉬울 수도 있겠다. 잠시 평평하던 산길은 허물어져가는 무덤을 지나면서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것도 똑바로 서서는 내려가지도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가팔라져 버린다.




볼거리가 없다 했더니 야생화까지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에 만난 백선(白鮮, 희고 선명하다는 뜻)’이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부리나케 달려가 카메라에 담고 본다. ‘자래초또는 검화라고도 불리는 백선은 여러해살이풀로, 반그늘 혹은 햇볕이 잘 드는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란다. 꽃은 5~6월에 피는데 흰색 바탕에 엷은 홍색의 줄무늬가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꽃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향기 또한 뛰어나며 뿌리껍질은 백선피라고 해서 약용으로 쓰인다. 특히 뿌리를 봉삼(鳳蔘)’ 또는 봉황삼(鳳凰蔘)’이라 부르기도 한다.



가끔은 아래 사진과 같이 노송(老松)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풍경도 만난다. 가도 가도 참나무 일색인 산에서 이런 그림도 만나지 못했다면 얼마나 더 지루했을지 모를 일이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20분 가까이 되면 안부에 내려서게 되고, 이어서 맞은편 능선을 10분 조금 못되게 치고 오르면 작은 바위들이 널려있는 나지막한 봉우리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 서낭당이라고 적혀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봉우리 위에 널려 있는 이 돌들은 옛날 이곳을 넘어 다니던 사람들이 쌓아올린 흔적들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그들의 염원이 담긴 돌들 또한 이런 모습으로 흩어졌을 게고 말이다.



또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이번에도 역시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다. 길가에 철쭉이 우거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나뭇가지를 잘만 이용하면 몸의 중심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8분 정도를 내려서면 서당골재이다. 서쪽의 감곡리(죽장면)와 동쪽의 용기리(기북면)를 연결하는 고갯마루인데 요 아래 감곡리 방향에 있는 서당골이란 계곡에서 따온 이름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왼편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포항 팔도산악회에서 제작한 이정표(침곡산/ 기북면/ 산불초소한티재)가 매달려 있다. 이곳의 해발이 530m인데 침곡산 정상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린단다. 그런데 태화산의 지명을 산불초소로 표기해 놓았다. 이 지방에서는 태화산이라는 지명을 쓰지 않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첨부된 지도에도 태화산이란 지명은 없다.




산길은 맞은편 능선을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 경사가 완만해서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서당골재로 내려오던 길이 하도 가팔랐기에 올라가는 길 또한 그만큼이나 가파를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4분쯤 오르면 송전탑(送電塔)을 만난다.




송전탑을 지나면서 산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하긴 서당골재와 침곡산 정상의 표고(標高) 차이가 200m가까이나 되니 마냥 느긋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다. 거기다 능선상의 모든 봉우리들을 오르지도 않는다. 의미가 없어 보이는 봉우리 하나는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켜버린다.



그렇게 30분 가까이 더 오르면 드디어 침곡산(針谷山) 정상이다. 헬기장으로 이용되었음직한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오석(烏石)으로 만든 자그마한 정상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잡목으로 둘러싸인 탓에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참고로 침곡산에는 바늘 침()’자가 들어있다. 다들 산의 생김새가 뾰쪽하게 생겨서 그러려니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다. 서쪽 아래 죽장면 입암리에서 이 산을 향해 형성된 좁고 긴 바늘 같은 골짜기 일대를 침곡리(針谷里)라 부르고 있어 이에 연유하여 생겨난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래선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산의 이름을 사감산(士甘山)’으로 표시하고 있다. 아무튼 낙동정맥에선 당당히 제 이름을 걸고 있는 산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포항 팔도산악회에서 붙여놓은 이정표(덕동수련장성법재/ 산불초소한티재)가 가리키고 있는 덕동수련장 방향이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이 하나 있다. 정상석 뒤편에 매달려 있는 리본에 현혹되지 말라는 얘기이다. 옳은 산길은 이정표 근처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잠시 후 작은 바위봉우리를 지나 우측으로 꺾어 내려가면 희미하게나마 좌우로 길이 나뉘는 안부에 이른다. 침곡산 정상에서 30분 거리이다. 하지만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는 계속해서 능선을 따르란다. 그래 오늘은 낙동정맥을 하는 산꾼들을 따라나선 산행이다. 그러니 그들의 일정에 맞춰야 함은 당연한 일일 게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가끔은 가파르게 내려서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상당히 높게 올라야만 하는 봉우리도 만난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고 대부분의 구간은 평탄하게 이어진다. 그렇게 10분 남짓 걸으면 삼거리를 만난다. 오른편으로 나뉘는 길이 또렷한 것을 보면 덕동마을로 이어지지 않나 싶다.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중간에 오르는 게 약간 부담스러운 봉우리(492.4m) 하나를 넘어야 하지만 대부분은 고도를 낮추어가는 구간이라서 부담은 되지 않는다.



그렇게 15분 남짓 걸으면 드디어 배실재에 내려서게 된다. 침곡산 정상을 출발한지 1시간 15분만이다. 배실재는 넓은 안부로 이곳이 낙동정맥(洛東正脈)의 중간지점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걸려있다. ‘대구 K2산악회에서 내걸었는데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피재까지의 거리가 227.3Km이고 정맥이 그 숨을 다하는 몰운대까지는 223.7Km가 된단다. 그 옆에는 개인이 만든 또 다른 표지판이 걸려있다. 그런데 거리는 피재 212.9Km와 몰운대 219.7Km로 적어 놓았다.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벼슬재(士官嶺,490m)는 기북면 오덕리성법리에서 죽장면 가사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다.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전국 지리지인 대동지지(大東地志)’ 경주편에는 관령(官領)으로 기록돼 있으며, 관령은 순우리말인 벼슬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벼슬재, 배실재, 사관령(士官嶺)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요 아래 기북면 오덕리 덕동은 신라때 죽장부곡(竹長部曲)과 성법이부곡(省法伊部曲)이 형성된 이래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제철과 연관된 철물기구와 무기 생산 공장들이 있었으므로 관리 이외에는 넘어 다니지 못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도 벼슬아치들만 넘어 갈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참고로 향. . 부곡은 특수 신분계층 즉 왕조에 반하는 사람들의 집단거주지였다. 그게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점점 반왕조(反王朝) 정신이 엷어졌다. 처음엔 특수 신분들이라 격리 차원이었고 다음엔 특수 직업군이 모여 있어 정부로서는 관리하는 차원에서 통제를 했던 곳이다.



배실재에서는 덕동마을이 있는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이후 덕동마을까지는 임도(林道)로 연결된다. 널찍한데다 경사까지 거의 없어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코스이다.



걷는 게 편하다보니 마음에 여유까지 생겼나보다. 빨갛게 익은 산딸기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새콤한 맛을 잊을 수가 없는데 어찌 그냥 지나치겠는가. 냉큼 다가가 손을 내밀고 본다. 새콤달콤한 것이 여간 맛있는 게 아니다.



산행날머리는 덕동마을(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15분 남짓 내려섰을까 산자락을 벗어나면서 저만큼에 덕동(德洞) 마을이 나타난다. ()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생각보다는 너른 들녘에 자리 잡았다. 이어서 15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덕동마을에 다다를 수 있다. 아무튼 덕동마을에 이르면 산행은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4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마을에 이르면 한옥건물들이 즐비하다. 하긴 문화마을이 어디로 가겠는가. 1992년 국가로부터 제15호 문화마을로, 2001년에는 환경친화마을로 지정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문신 정문부(鄭文孚, 1565~1624)가 종전 후 전주로 돌아가면서, 재산 모두를 손녀사위인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 1621~1688)에게 준 것을 계기로 이강이 이곳에다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집성촌이 되었다. 마을은 아름다운 자연과 고전미를 자랑하는 고택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경북민속자료 제80호인 애은당고택과 제81호인 사우정고택,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43호로 지정된 용계정 등이다. 특히 마을의 맑은 저수지와 계곡 사이에 있는 소나무 숲은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상에 선정된 곳으로, 200년생 은행나무와 160년생 향나무 등 다양한 고목이 자라고 있다. 집성촌 대대로 내려온 유물들을 보존, 전시하고 있는 덕동민속전시관(아래 사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단 2개가 보존돼 있다는 독(과학 단지)을 볼 수 있다.



마을에 들어서니 덕연구곡(德淵九曲)’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근처에 있는 덕연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명소를 추려낸 곳들이란다. 1곡은 물이 흐르는 연못이라는 수통연(水通淵), 2곡은 속세를 멀리한 너른 바위라는 뜻의 막애대(邈埃臺), 3곡은 서천폭포(西川瀑布). 4곡은 소나무 숲이 우거진 섬솔밭이고, 5곡은 용계정 부근에 위치한 연어대(鳶魚臺), 6곡은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합류대(合流臺). 7곡은 구름이 피어오르는 연못이라는 운등연(雲騰淵), 8곡은 용이 누운 바위라는 뜻의 와룡암(臥龍岩), 9곡은 가래같이 생긴 연못이라는 삽연이다. 덕연구곡의 구곡 경관 중 대부분은 명승 용계정과 덕동숲에 포함되는 경승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