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의길 11코스(신장남교 북단 - 숭의전)

 

여행일 : ‘25. 4. 5()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백학면·미산면 일원

여행코스 : 신장남교 북단장남면 행정타운사미천석장천 징검다리학곡리 고인돌구미배수펌프장아미2숭의전(거리/시간 : 16.6km, 실제는 13.65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들머리는 신장남교 북단(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수원·문산고속도로 월롱 IC에서 내려와 통일로(국도 1호선) 문산방면, ‘여우고개사거리에서 율곡로(국고 37호선) 연천방면, ‘장남교교차로에서 빠져나와 신장남교를 건넌다. 평화의길 QR코드는 다리 북단 100m지점에 있는 평화누리길·경기둘레길 안내도에 붙어있다. 아래 사진은 100m쯤 더 가서 있는 소공원이다. 이곳의 평화의길 안내판에도 QR코드가 붙어있다.

 신장남교 북단에서 숭의전까지 임진강 언저리를 따라 북동진하는 길이 16.6km의 여정. 협곡처럼 변한 임진강의 색다른 풍경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는 게 장점. 거기다 고인돌과 적석총이라는 선사시대 유적까지 살펴 볼 수 있다. 첨부된 지도에서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서너 개의 하천 중 두 번째 하천과 지방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트레킹을 시작했다.

 09 : 03. 실제 출발지인 석장천삼거리(백학면 전동리)’. 갈수록 굵어지는 빗줄기를 핑계로 코스를 단축하기로 했다. 사미천이나 석장천의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두 하천 사이의 둔치 구간이 만만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빗물에 잠긴 습지를 걷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전동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전동리 앞 석장천에 놓인 다리로 장백로(372번 지방도)와 청정로(371번 지방도)를 잇는 소로가 이 다리를 지나간다. 참고로 전동리(箭洞里)’는 삼국시대 초기 임진강 남쪽의 육계토성에서 주둔하던 군사들이 강 건너 대안에 있는 이곳에 과녁을 설치해 놓고 활을 쏘았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 끝난 후 자유의 땅이 된 곳이기도 하다.

 석장천(石墻川). 연천군 왕징면 작동리에서 발원, 남동방향으로 흘러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길이 13.56km의 하천이다. 특별한 얘깃거리나 볼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다리 건너에서 만난 평화누리길 이정표. 원래의 평화누리길(평화의길 포함)은 이곳을 지나가지 않는다. 폭우로 인해 사미천이나 석장천이 물에 잠길 때 우회하는 코스로 이용될 따름이다. 그나저나 이정표는 종점인 숭의전까지의 거리를 13.2km로 적고 있었다. 16.6km 11코스를 3.4km쯤 줄여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석장천 물길을 따라 하류로 간다. 노곡제(蘆谷堤, 맞은편 제방은 斗日堤라 부르고 있었다) 위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갈만한 길이 나있다.

 왼쪽으로 펼쳐지는 통구리·노곡리 들녘이 꽤 넓다. 그런데 들녘 곳곳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게 아닌가. 잔디라도 재배하고 있는 모양이다.

 노곡제(蘆谷堤) 배수문. 제방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배수문(排水門)을 심심찮게 만난다. 홍수 때 임진강의 물이 농경지로 역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09 : 16. ‘노곡배수펌프장이란다. 펌프를 이용해서까지 배수해야 할 경우도 심심찮게 생기는 모양이다. 그만큼 이 일대 들녘의 표고가 낮다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09 : 23. 석장천 징검다리(이정표 : 숭의전 10.5km/ 장남교 5.7km). 이정표와 안내판 등 걷기 여행길의 잡다한 시설물들이 평화의길 정규 코스와 만났음을 알려준다.

 집중 호우로 징검다리가 침수되었을 때는 우리가 걸어왔던 길로 우회하란다.

 설사 징검다리를 건넌다고 해도 저 습지를 통과하는 게 만만찮아 보인다. 안내판도 하천의 하상(河床)을 이용하는 구간이니 기상정보와 징검다리 수위 변화를 반드시 확인하고 건너라고 적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오는 일행들이 의외로 말짱하다. 하지만 습지에 잠긴 물은 발목을 넘겼고, 미끄럽기까지 해서 넘어진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했다.

 계속해서 제방을 따른다. 이곳부터는 감악산을 전방에 두고 걷는다고 했다. 하지만 빗줄기 때문인지 어디에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석장천이 임진강에 합류되는 두물머리에 이른다. 아니 바로 뒤에 사미천과 임진강이 합쳐지는 또 하나의 두물머리가 버티고 있으니 세물머리라고 하는 게 옳겠다. 저곳에서 두 물길을 흡수한 임진강은 주월리(파주시)와 원당리(연천군)의 산하를 굽이굽이 에돌아가며 서해로 흘러간다.

 임진강의 커다란 여울이 조금 전의 석장천만큼이나 얕다. 강폭이 넓어서일 것이다. 맞다. 이 일대를 술탄(戌灘),  개여울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그 깊이가 개도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얕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노곡리쉼터(이정표 : 숭의전 10.5km/ 장남교 5.7km)’는 걷기 여행자들에게 최고의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정자에 벤치는 기본, 운동기구에 화장실까지 갖췄다.

 읽을거리도 빼놓지 않았다. 11코스(평화의길과는 달리 경기둘레길은 9코스, 평화누리길은 10코스이다)의 특징을 소리도 풍경이 되는 길이라며 스토리텔링까지 만들어놓았다. 강가로 내려가면 포근한 갈대숲 풍경이 반기는데, 바람에 순응하듯 느릿느릿 몸을 가누는 갈대들이 햇살의 기운에 따라 금빛이나 은빛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쓸데없는 자존심도 세우지 않고, 과시욕이나 과한 소유욕도 갖고 있지 않는 현자의 모습 같단다. 그 사이로 갈대를 흔드는 바람과 수면을 박차고 오르는 새들이 소리도 풍경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준다나?

 하지만 옥에 티도 눈에 띈다. 장남교에서 숭의전지까지의 연천 9코스를 머리말로 적어놓고는 내용은 엉뚱하게도 신탄진역에서 시작해 고대산 줄기를 누비는 코스를 설명하고 있다. 하단에 이 구간에서 만나게 되는 사미천과 학곡리고인돌, 숭의전지 등을 첨부해 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후부터는 임진강의 강둑을 따라간다. 잔디밭으로 가득하던 들녘이 언제부턴가 비닐하우스로 바뀌어 있다.

 남북분단의 산물이던 임진강 하류의 철책들과는 달리 이곳은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의 전파를 차단하기 위해 설치했단다.

 10 : 42. 이정표가 제방을 벗어나란다. 그리고는 농로(청정로 53번길)를 따라 샛터로 가란다.

 연천둘레길이란다. 평화의길, 평화누리길, 경기둘레길로도 부족했던지 트레일 하나를 더 보탰다.

 노곡양수장. 노곡리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대단위 시설이다. 하지만 갈수기(渴水期)에 북한의 황강댐에서 적정량의 물을 흘려보내지 않을 경우에는 그 효능이 뚝 떨어지는 모양이다. 이를 대비해 펌프 흡입로를 강 속 깊이 설치했다나?

 개성주악커피. 개성의 향토 음식인 주악(우메기)을 커피와 함께 판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주악은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소를 넣고 송편처럼 만들어 기름에 지진 뒤 조청·꿀 등을 이용해 약과처럼 즙청한 한과의 일종이다.

 09 : 57. 요기조기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371번 지방도(청정로)’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 농로로 내려간다. 버스정류장은 이곳을 새터로 적고 있었다. 노곡리(蘆谷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이다.

 신망리순대국 왼쪽으로 난 농로(청정로 52번길)로 들어간다. 참고로 371번 지방도(남쪽 방향)를 따라 300m쯤 가면 임진강에 놓인 비룡대교가 나온다. 하지만 평화의길은 들녘을 가로지르며 임진강변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아직도 여관이란 이름표를 내건 숙박시설이 존재한다는 게 놀랍다. 모텔이나 러브텔로도 모자라 호텔로까지 둔갑까지 시키는 마당에 보무도 당당히 옛 이름을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외진 곳까지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기는 할까?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음식점. 그것도 엄청나게 큰 규모이다. 풍천장어 구이를 안주삼아 얼큰하게 마신 뒤, 조금 전의 여관에서 하룻밤 묵어가면 딱 좋겠다.

 10 : 06. 평화의길을 인도해 온 청정로 52번길 2차선 도로인 노아로를 만나면서 그 임무를 마친다. 평화의길은 노아로(이정표 : 숭의전 8.3km/ 장남교 7.9km)를 횡단해 임진강 제방으로 올라간다.

 이후부터는 동쪽으로 뻗어나가는 제방(안내판은 학곡제로 적고 있었다)을 따라간다.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즈음 비룡대교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파주시(적성면) 주월리와 연천군(백학면) 노곡리를 잇는 길이 440m의 다리다. 보병 제25사단의 상징인 비룡에서 다리 이름을 따왔는데, 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6.25전쟁 중이던 1953년 미군 공병대가 건설한 틸교(Teal bridge)가 있었다고 한다.

 노곡리에도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는 주민들이 있는 모양이다. 하나 더. 한국전쟁 이전까지 요 어디쯤에 술탄포구가 있었다고 했다. 설사 그 포구겠는가 만은 강화나 서해안 등지에서 올라온 새우젓과 소금배들이 물물교환 하던 옛 풍경을 살짝 떠올려 본다.

 양쪽 강안(江岸)이 확연히 다른 풍경을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연천 쪽에는 배수문이 들어서 있는데, 반대편(파주)에는 기능이 반대인 ‘(가월)양수장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임진강과 들녘의 높이가 엇비슷한 연천은 제방을 쌓아 물을 관리할 수밖에 없는데 반해, 지대가 높은 파주는 양수시설만으로도 물을 관리할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경작금지 경고판. 그러거나 말거나 철책 밖 둔치에는 농작물이 심어져 있었다.

 보도블록, 그것도 고급스런 블록을 깔아놓은 구간도 보인다. 트레일을 조성하는데 공을 많이 들인 모양이다. 하나 더. 제방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방송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이 임진강의 수위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접경지역임을 알려주는 풍경이지 싶다.

 10 : 22. 노곡리(蘆谷里)와 학곡리(鶴谷里)의 경계로 여겨지는 지점. 이정표가 강변으로 내려가란다. 하지만 안내판은 우천시에는 출입을 금지한다고 적고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기라도하면 물에 잠긴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은 초입에 대문을 만들어놓았다. 그러니 통과한 다음 다시 문을 닫아두는 에티켓을 발휘해 보자.

 잠시지만 임진강의 둔치를 따라간다. 제방에 기대듯 길을 내놓았다.

 강변은 갈대밭이 평원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노곡(蘆谷)이란 지명은 임진강변에 갈대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했다. 지명의 유래를 되새겨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10 : 32. 또 다른 대문이 이제 그만 둔치를 벗어나란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왼쪽은 학곡마을을 관통하는 코스, 직진하면 학곡마을을 에둘러간다. 오른쪽으로 가면 강 건너 율포리 뱃터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평화의길과 경기둘레길 이정표는 왼쪽에 있는 학곡마을을 가리킨다. 하지만 평화누리길은 곧장 직진하라는 게 아닌가. 거기다 두루누비에서 배포한 트랙까지도 직진하라니 걷기 여행자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답은 왼쪽이다. 마을을 관통해야만 11코스의 명소 중 하나인 학곡리 고인돌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마을 안길을 지나간다. 이곳 학곡리(鶴谷里)는 학이 많이 날아와 깃들던 철새도래지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자연마을로 돌마돌(石戶洞), 뒷골, 매미터, 맹강골(孟江洞), 미역골(沐浴洞), 와간이(臥看洞), 해골(鶴谷) 등을 두고 있는데, 이곳은 돌마돌(石戶洞)’이지 싶다.

 학곡마을의 내노라는 볼거리 고인돌은 마을안길 중간쯤에서 만날 수 있었다. 민가 한 채쯤 들어갈 만한 공터에 고인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맞다. 이 고인돌은 예전엔 어느 집 뒷마당에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그 집을 헐어내고 마당에 고인돌만 남겨 놓은 상태다. 때문에 마당 둘레에는 여전히 다른 주택들이 남아 있다. 여기서 팁 하나. 우리나라는 고인돌이 많기로 유명하다. 전 세계 고인돌 중 약 40%가 한반도 곳곳에 분포해 있다. 고창·화순·강화 등이 고인돌이 많은 지역으로 꼽히는데, 연천도 그들 지역 못지않다고 한다. 13곳에 31기의 고인돌이 분포해 있는데, 오늘 그중 하나를 만난 것이다.

 학곡리 고인돌(支石墓, 경기도기념물 제158)’은 땅 위에 4개의 받침돌로 석실(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큰 상석(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덮개돌의 길이가 2.8m(너비는 2.7m)라니 아담한 크기라 하겠다. 이는 자그마한 부족이 이 지역에서 거주했음을 추정케 해준다. 고인돌이라는 게 본디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이었다니 말이다.

 덮개돌은 현무암을 사용했다. 제주의 바닷가에서나 보던 바위인데, 이곳 연천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 더. 가장자리에서 중앙부로 가면서 완만하게 파인 모양새가 특이했다. 그게 세숫대야처럼 빗물을 담았다. 때문에 풍년이나 자식 낳기를 빌며 파놓았다는 알구멍(性穴)은 살펴볼 수 없었다.

 10 : 43. 마을안길을 벗어나 노아로로 나왔다. 오는 도중 아까 헤어졌던 평화누리길을 다시 만났지만, 마을안길이 끝나기도 전에 탐방로와 헤어져 도로로 빠져나왔다. 때문에 돌마돌(石戶洞) 마을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벽화는 놓쳐버렸다. 새와 짐승, 꽃으로도 부족해 월북시인 박세영의 시(임진강)까지 적혀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학곡리 버스정류장은 이 마을 자랑거리인 고인돌을 담았다. ! 앞서 걸었던 어느 여행자(마을 초입에서 두루누비의 트랙을 따랐던)는 이 그림을 보고나서야 길을 잘못 들었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덕분에 청동기시대의 유적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며 연천군청 담당자의 재치를 칭찬하고 있었다.

 10 : 48.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정표가 도로를 벗어나란다. 그리고는 임진강의 제방을 따라가란다. ‘학곡리적석총으로 연결되는 길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초입에 세워져 있다.

 강변에 늘어선 버드나무가 그럴 듯한 풍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썩 좋지 않은 풍경도 눈에 띈다. 경작을 금지한다는 경고판이 무색하게도 둔치에는 농작물이 심어져 있었다.

 10 : 52. ‘학곡리 적석총은 멀지 않은 곳에 누워 있었다. 강변 언덕에 검은 돌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얼핏 길가에서 흔히 보는 돌무더기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단순히 돌을 모아다 쌓아놓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학곡리 적석총(積石寵, 경기도 기념물 제212)은 삼국시대 유적이다.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무덤으로 추정된다나? 그래선지 물에 씻겨 둥글게 모가 깎인 강돌들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검게 변색되어 있다. 만만찮은 세월이 흘렀다는 증거이리라. 유물로는 평저호(平底壺), 구슬, 골제(骨製) 장신구, 청동환(靑銅環), 철제 낫(鐵鎌), 청동방울(靑銅鈴), 타날문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무덤은 적석부의 붕괴와 유수로 인한 침식을 막기 위해 강 쪽의 구릉지 말단부에 일정한 크기의 강돌을 보강했다고 한다. 그 위의 자연 구릉에 기대어 돌을 쌓은 다음, 구릉 정상부에 무덤방을 앉히고 다시 강돌을 쌓아 마무리했단다. 안내판은 원래 크기를 25x10m로 적고 있었다. 하지만 잦은 강물의 침범과 주변 개발로 파괴되면서 무덤의 상당 부분이 유실되었을 것이란다.

 11 : 00.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아로 자유로 CC’ 입구로 내려선다.

 새둥지마을이 잠시 들렀다 가란다. 백학면 구미리(九尾里)’의 또 다른 이름으로 풍성한 농사 수확체험과 팜스테이를 통해 농촌의 넉넉한 인심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20년 전만해도 민간인출입통제선 지역이었던 덕분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이 많고 청정 자원이 다양한 편이다.

 이후부터는 노아로를 따라간다. ‘학곡리를 지나온 노아로는 학곡교를 건너고 수우리고개(水月峴)를 넘어 구미리로 간다. 임진강의 수우리 소()’ 위에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고개에는 몽생미셸 펜션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여행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해온 몽생미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태상이 문지기로 나섰다. 건물도 몽생미셸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 그저 마당에 화장실까지 딸린 평화누리길 (학곡리)쉼터를 만들어놓았기에 잠시 들렀다 갈 따름이다.

 11 : 08. 수우리고개를 넘자 이정표(숭의전 4.3km/ 장남교 11.9km)가 오른쪽을 가리킨다.

 도로를 벗어나 또 다시 임진강의 제방을 따르라는 것이다.

 저런 바위절벽이 가로막고 있기에 잠시나마 노아로를 따라 에돌아왔다고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이제 제방(九尾堤)을 따라간다. 그런데 담장처럼 평면 위에 제방을 쌓아올렸던 노곡리나 학곡리와는 달리 이곳은 왼편이 제방의 상부와 높이가 거의 같다. 반대로 임진강은 푹 꺼진 것이 영락없는 협곡이다.

 11 : 16. 잠시 후, 이번에는 풍차가 반긴다. 탑 모양의 원통형 건물을 짓고 상부에 날개를 매달았다. 하지만 네덜란드처럼 방앗간 모양은 아니다. 오히려 이슬람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첨탑(minaret, 이슬람 건축에서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탑)을 닮았다. 중간쯤에는 신도들에게 기도시간을 알려주던 아잔(adhan)’을 했을 법한 난간도 만들어놓았다.

 밤나무집매운탕 주인장은 본채도 돌멩이로 지었다. 그래서일까? 쌓아올린 돌멩이 하나하나마다 풍파에 시달려온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고풍스런 멋을 폭폭 풍긴다.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폭삭 속았수다를 보면서 옛집들 몇이 눈길을 끌었는데, 이곳도 그에 뒤떨어지지 않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강 건너 저 건물은 율포양수장이 아닐까 싶다. 협곡(峽谷)처럼 생긴 바위벼랑에 양수시설이 흡사 제비집처럼 매달렸다. 아무튼 파주의 들녘은 임진강의 수면보다 높아도 한참이나 높은가 보다.

 11 : 23. 구미배수펌프장. 둑에는 배수문이 있었다. 왼쪽은 구미리 새둥지마을이다. 나지막한 산들을 병풍삼고 임진강을 뜨락삼은 아늑한 산간마을로, 오염되지 않은 청정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농업자원과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는 덕분에 농촌체험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여건을 구비하고 있단다.

 11 : 31. ‘리버사이드펜션 앞에서 제방을 벗어난다. 그리고는 들녘으로 들어간다.

 길은 해쌀팜토리 복합곡물가공센터 앞으로 이어간다. ‘팜토리는 팜(farm)과 팩토리(factory)를 합친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개인 농장의 전용 도정공장쯤으로 여기면 될 것 같다. 인근 농경지에서 수확한 경기미품종의 벼를 건조·도정·포장하여 판매하는 곳 말이다.

 11 : 41. 들녘을 지나 노아로로 올라섰다. 오는 도중 종점인 숭의전까지 2.4km가 남았음을 알리는 이정표도 만날 수 있었다.

 또 다시 노아로를 따라간다. 11코스는 이처럼 노아로와 유난히도 자주 만나고 있었다. 11코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노곡리, 학곡리, 구미리, 아미리 등을 잇는 간선도로라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빗속에서도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제비꽃인줄 알았는데, 집사람이 소래풀이라고 알려준다. 꽃말이 변함없는 사랑이니 자신을 쏙 빼닮았지 않았느냐면서 말이다.

 11 : 50. 승마체험장은 스치듯 지나간다.

 11 : 57. ‘약대산(藥大山) 고개를 넘는다. 임진강 옆 산비탈에 약수가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고갯마루에는 미산면에 들어서고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맞다. 백학면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이 고개에서 미산면에 바톤을 넘겨준다.

 12 : 01. 내려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크리스탈 빌리지’. 수익형(또는 별장형) 전원주택단지라는데 kakaomap에는 온통 개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애완견 동반 펜션으로 특화된 단지가 아닐까 싶다.

 12 : 04. 잠시 후, 이번에는 ‘Studio 330’이란 촬영장 앞을 지나간다. 1100평 스튜디오 2개를 갖추고 영화나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광고,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포맷의 촬영이 가능한 곳이라고 했다.

 12 : 07. 고개를 내려오면 아미1교 삼거리이다. 지금껏 함께 걸어온 노아로 숭의전로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오른쪽(전곡 방면)으로 간다. 왼쪽은 백학면의 행정타운(두일리)으로 연결된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아미2리 마을회관. 세계적인 K-Pop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팬덤 아미와 이름이 같아 더 주목을 받는 마을이다. 실제로 마을 주민들은 멤버 진이 훈련소에 입소할 때 연천군이 지켜줄 테니 힘내라는 메시지를 담은 플래카드를 내걸기도 했다.

 촬영산업의 후방산업은 밥차였던 모양이다. 139, 330, 331 같은 대형 스튜디오들이 없었더라면 저런 음식산업은 들어설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의자도 멋진 소품이 될 수 있는가 보다. 작다면 작은 배려였겠지만 길의 풍모를 한결 돋보이게 만드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12 : 17. ‘임진강폭포랜드(아미원)’란다. 한옥스타일의 3층 건물과 폭포가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는 한식 전문점이다. 1층에 베이커리 카페도 들어서 있다니 꼭 식사가 아니더라도 잠깐 들러볼만 하겠다.

 아미원 앞에서 논골교라는 예쁜 다리를 건넌다. 상판이야 여느 다리와 다름없지만 아치형의 아름다운 교각이 카메라를 들이대게 만든다.

 12 : 22. 숭의전 주차장. 널찍한데다 깔끔한 화장실까지 딸려있어 트레킹을 마친 후 뒷정리하기에 딱 좋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버스정류장이다. 숭의전의 사하촌이라 할 수도 있는 마을 앞 주차장에 경기둘레길 10코스(평화누리길 11코스 포함)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평화의길 QR코드는 셋방살이답게 이 안내도의 하단에 살짝 붙여놓았다.

 12 : 25. 버스정류장 바로 위에서 숭의전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뉜다. 그 초입에 어수정(御水井)이 있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 877-943)이 물을 마셨다는 우물이다.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철원과 개성을 오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어가면서 물을 마셨다나? 그나저나 물맛이 좋은지 커다란 생수통 여럿에다 물을 담고 있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홍살문을 지나 숭의전으로 올라간다. 홍살문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었다. 안에 있는 숭의전이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할 정도로 존귀한 시설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숭의전은 12코스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트레킹은 이쯤에서 끝내면 된다. 하지만 해외여행 때문에 다음 구간을 참여할 수 없어 미리 다녀오기로 했다.

 숭의전으로 올라가는 도중, 임진강으로 내려가는 샛길도 만날 수 있었다. 예전에는 평화의길이 저곳으로 내려갔었던 모양이다.

 12 : 29  12 : 44. 숭의전(崇義殿, 사적 제223)에 도착했다. 숭의전은 태조 왕건(王建)을 비롯해 고려를 부흥시킨 4명의 왕과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에 1397(조선 태조 6)에 전조(前朝)인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것이 시초이다. 사라진 왕조의 지도층을 회유할 목적으로 사당을 지었지 않나 싶다.

 중심 건물인 숭의전(崇義殿)은 고려 태조·현종·문종·원종 등 4명의 왕 위패를 모신 정전(正殿)이다. 1397년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에게 이 지역의 봉토를 주고 머물면서 고려 태조의 묘를 세우도록 했다. 정종 때인 1399년 숭의전 건물을 짓고 고려 태조와 8(혜종·현종·원종·충렬왕·성종·경종·문종·공민왕)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그러나 세종 때인 1425년 예법에 제후는 5묘를 세워야 하는데 고려의 8위는 부당하다 하여 태조·현종·문종·원종 4위만을 받들도록 했다.

 숭의전에서는 매년 4월과 10월 춘·추계 대제(연천군 향토문화재 제25)가 봉행된다고 했다. 그중 25년도 춘계대제가 내일(46) 열린단다. 그래선지 수많은 제기들이 때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신청(陪臣廳)’은 고려조의 충신 16(복지겸·홍유·신숭겸·유금필·배현경·서희·강감찬·윤관·김부식·김취려·조충·김방경·안우·이방실·김득배·정몽주)의 위패를 모신다. 이밖에도 숭의전을 청소하거나 공사할 때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이안청(移安廳)’,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하는 향··폐 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 준비를 하며 머무는 앙암제(仰巖齊)’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숭의전은 글로서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숭의전의 내력과 제례 등을 담은 안내판 10여 개를 앞마당에 세워놓았다.

 숭의전 앞의 수령이 600년도 더 되었다는 느티나무 두 그루도 주요 볼거리다. 장승처럼 우뚝 서서 숭의전을 지키고 있는데, 사연까지 담았다니 능히 가슴에 담아둘 만하지 않겠는가. 조선 문종 2년 왕씨 자손이 심었는데, 이 나무에 까치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나고, 까마귀들이 모여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나?

 숭의전 앞을 지나자 평화누리길 11코스(임진적벽길)의 출발 지점임을 알리는 아치형 게이트가 세워져 있었다. 경기둘레길의 연천구간안내판과 스탬프보관함도 이곳에 설치해 놓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끝을 맺는 평화의길과는 달리 두 길은 이곳을 시·종점으로 삼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오늘은 13.65km 3시간 40분에 걸었다. 걷는 내내 비가 내렸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역시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우리 부부의 나이를 합하면 100년 하고도 절반에 가까워진다. 최근의 화두인 100세 시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바람직한 삶을 살고 있을까? 집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내 대답은 예스이다. 아직까지는 왕성하게 걸을 수 있고, 또 그것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게 빈고(貧苦), 병고(病苦), 고독고(孤獨苦), 무위고(無爲苦) 등 노년에 겪는다는 네 가지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노년을 괴롭게 하는 네 가지 고통의 가장 첫 시작이 할 일 없음에서 비롯된다니 말이다.

DMZ 평화의길 10코스(리비교 남단  신장남교 북단)

 

여행일 : ‘25. 3. 15()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적성면 및 연천군 장남면 일원

여행코스 : 리비교 거점센터자장리 마을회관두지나루(황포돛배)장남교 북단(거리/시간 : 9.6km, 실제는 10.29km 2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들머리는 리비교 거점센터(파주시 파평면 장파리)

수원·문산고속도로 월롱 IC에서 내려와 통일로(국도 1호선) 문산방면, ‘여우고개사거리에서 율곡로(국고 37호선)로 옮겨 연천방면으로 올라오면 리비사거리에 이르게 된다. 평화의길 안내판(인증 QR코드)은 리비교 남단과 리비사거리 중간에 세워져 있다.

 리비교에서 장남교까지 임진강 언저리를 따라 북동진하는 길이 9.6km의 여정. 두지나루의 황포돛배를 빼면 특별한 얘깃거리나 볼거리는 없다. 하나 더. 두루누비 안내지도에 시점으로 표기되어 있는 리비교 거점센터(10코스 시점)’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도 알아두자.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이곳도 대북전단 살포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모양이다. 하긴 위험물이라는 핑계로 북한에서 총이라도 쏘아댈 경우 그 피해는 오롯이 주민들에게 돌아갈 테니 어디 그냥 넘길 일이겠는가.

 리비중사 추모비가 근처에 있는 모양인데 눈에 띄지는 않았다. ‘조지 리비(George D. Libby)’중사는 1950 7 20일 대전전투 당시 자신을 희생해 사단 병력을 철수시키는 데 공헌한 미 제24사단 전투공병대대 소속 군인이다. 그는 산악철수가 불가능한 부상병들을 차량에 태워 철수하면서 북한군의 사격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등 전진이 불가한 상황에 부닥쳤다. 이때 철수하는 포병 M-5 포차를 세워 부상병들을 옮겨 실은 다음, 기관단총으로 도로 주변의 적을 제압하며 철수작전을 이어갔다. 포차 운전병을 자기 몸으로 감싼 뒤 전속력으로 달리게 한 뒤, 길가의 부상병들까지 태워 철수하던 중 많은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6·25전쟁 최초로 미국의 최고 무공훈장 ‘Medal Honor’를 받았다.

 10 : 33. 리비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한때 기지촌으로 번영을 누리던 추억 속의 옛 고을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곳 장파리는 한국전쟁과 미군주둔, 통일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현대사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곳으로 알려진다. 영화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TV 드라마 형제의 강(1996) 봄날은 간다(1997) 등의 화면에서나 보던 50~60년대 도회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장파리의 또 다른 이름인 장마루는 지형이 마루처럼 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마을은 6.25전쟁 전에는 임진강변 긴 언덕에 들어앉은 가난에 찌든 벽촌이었다. 그러다 6.25전쟁이 마을을 확 바꿔 놓았다. 전쟁 직후 임진강 건너 DMZ 인근 JSA(공동경비구역)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부대 복귀나 휴가를 위해 들르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군들이 음식점, 다방, 여관, 술집, 클럽 등에서 달러를 사용하면서 장파리에서는 동네 강아지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1970년대 미군이 철수하면서 과거의 번영은 사라졌고, 현재는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로 남아있다.

 매운탕 촌 조형물. 주말 트레킹 때 장파리를 지나간다는 얘기에 벗은 장파리에서 매운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했다. 이른 시간에도 문을 여니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매운탕에 소주 한잔 걸쳐보라면서 말이다. 트레킹이 건강을 넘어 웰빙으로 승화된다나?

 저걸 보고도 들어갈 마음이 생기나요?’ 이석암 작가님은 단칼에 거절이다. 음식은 정성이라고 했는데, 저런 안내판을 보고도 그런 마음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면서 말이다. 물론 나처럼 개의치 않는 여행자들도 많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저런 안내판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 : 36. 평화의길은 공연장을 연상시키는 철제 구조물 앞에서 왼쪽으로 간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위에서 얘기하던 풍경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철제구조물 뒤 붉은 지붕 건물이 라스트 찬스’)

 3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라스트 찬스(Last chance)’도 그중 하나다.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미군 클럽으로, 미군들은 DMZ으로 연결된 리비교를 건너 휴가나 외출시에 라스트 찬스 등 장파리 일대 클럽을 이용했단다. 미군홀로 사용될 때의 벽면과 구조가 남아 있는 등 미군 주둔에 따라 형성된 지역적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경기도문화재(8)로 등록됐다.(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미군들이 리비교를 건너 장파리로 들어오면 맨 처음 접하는 클럽이 라스트 찬스였다. 그래서 퍼스트 찬스(First chance)’라고도 불렀단다. 부대로 복귀할 때는 외출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즐기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던 이들의 이름도 회자된다. 무명 시절의 조용필을 비롯해 initials만 대도 알아차릴 수 있는 유명 가수들이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단다.

 10 : 40. 옛 모습을 추억해 볼 수 있다는 마을 안길까지 둘러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빠듯하다는 집사람의 채근에 쫓겨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율곡로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10 : 42. ‘카페마루까지는 율곡로와 함께 간다. 왼편, 그러니까 임진강변의 너른 들녘에는 비닐하우스가 한가득이다. 하긴 요즘은 농촌도 경제성과 효율성을 최고의 선으로 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10코스는 평화누리길(9코스)의 이정표가 많은 도움이 된다. ‘평화의길과 마찬가지로 장남교를 종점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경기둘레길(8코스)이 동행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탐방로는 널디너른 임진강변의 충적평야를 가로지르며 나아간다. 친환경 쌀과 장단콩, 개성인삼 같은 특산품들이 생산되는 들녘이다. 특히 우렁이농법으로 공동 생산하는 경기추청미 친환경장마루촌이라는 상표로 출하되는데, 그 품질을 인정받아 전량 주문·판매될 정도로 수도권에서 인기가 높단다.

 들녘에서 철새들이 남겨진 알곡을 쪼아 먹고 있었다. 최근 보아오던 새떼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반갑기는 마찬가지다. 철새가 머문다 함은 자연이 잘 살아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과 연결된 존재이다. 자연이 잘 살아있어야 인간도 살 수 있다. 자연을 다시 살리려면 자연을 온전히 느끼고 사랑하는 감수성을 살려야 한다.

 트레킹을 마친 뒤 총무님이 재두루미 사진을 찍었느냐고 물어온다. 그 흔한 기러기인줄로만 알고 사진조차 찍지 않았는데 귀하신 몸(천연기념물)이었던가 보다. 그녀가 보내준 사진을 올려본다.

 10 : 52.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는가 싶더니 자장로(17번길)’로 올라간다. 이어서 왼쪽(북쪽), 그러니까 장좌리 쪽으로 간다.

 기운목장인데 젖소를 42마리나 기른다고 했다. HACCP 인증을 받은 업체라니 시설관리를 제대로 해오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금 전 마주쳤던 상수원보호지역 경고판이 자꾸만 오버랩되는 이유는 뭘까?

 닷새 후면 완연한 봄으로 진입한다는 춘분(春分)이다. 그래선지 들녘 곳곳에서 부지런한 농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늘을 심나보다고 했더니 집사람이 양파라고 바로잡아 준다. 신기하다. 양파나 마늘이나 그게 그건데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10 : 55. 잠시 후, 탐방로가 자장로(17번길)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이름조차 없는 농로를 따라 들어간다. 숨 가쁘게 파평면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적성면(積城面)’에게 바톤을 넘겨준다. 이어서 장좌리(長佐里)와 자장리(紫長里), 두지리(斗只里)를 거쳐 연천군으로 넘어간다.

 이후부터는 장좌리의 들녘을 누빈다. 야트막한 산과 산들 사이, 산골짜기에 들어선 손바닥만 한 들녘들을 헤집으며 나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장좌리는 동··북 삼면을 임진강이 휘돌아가는 모양새이다. 그 너머에는 고랑포구와 삼국시대에 쌓았다는 연천호로고루가 있다. 장좌리 쪽 강가에는 궁예가 쉬었고 왕건이 다녀갔다는 칠송정(七松亭) 터도 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풍경들이 여럿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평화의길은 임진강으로 가지를 않고 장좌리 내륙을 관통한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산모롱이를 돌게 되고, 또한 여러 곳에서 길이 나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럴 때마다 경기둘레길과 평화누리길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준다. 거기다 곁방살이로 들어온 평화의길까지 힘을 보태니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11 : 16. 꼬불대는 고갯길을 올라 해발 54m의 나지막한 고개를 넘기도 한다. 장좌리와 자장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인데 특별한 볼거리나 이야깃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고개를 넘어 자장리(紫長里)’로 들어간다.

 고개 너머에는 작은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임진강을 북쪽에 끼고 들어선 자장리는 자연마을로 검은들·나루턱·대추나무골·불근바치·샘말·식현·아랫불근바치·영채이·큰말 등을 두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디를 이르는지는 눈치조차 챌 수 없었다. 요즘은 옛 이름 찾기가 유행이라고 했다. 찾아낸 이름은 표석으로 만들어 동구 밖에 세우는 게 대세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곳 파주에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살고는 있지만 풍류만은 차고도 넘친답니다. 옹기와 목각, 바람개비 등 각가지 조형물들을 이용해 동화나라로 만들어놓았다.

 11 : 21. ‘자장로로 올라서서 왼쪽(북동쪽)으로 간다. 이정표(장남교 6.2km/ 율곡습지공원 12.1km) 1/3쯤 걸어왔음을 알려준다. 하나 더. 오른쪽은 율곡로의 답곡교차로로 연결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11 : 25. 자장로 걷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4분쯤 지나 이름조차 희한한 듸링거리길로 내려서기 때문이다. 참고로 듸링은 오래 전부터 불리어온 지명이라고 했다. 기록으로 전해지지는 않지만 옛 이름을 찾자는 의미에서 붙여놓았단다. 그래서일까? 길가 정자는 평화누리길 자장리 쉼터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쉼터는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래선지 일행들이 간식이라도 먹고 가자며 정자로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걷기로 했다. 그동안은 막걸리로 요기도 할 겸해서 쉬곤 했었는데, 최근 술을 끊은 뒤부터는 떡으로 요기를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떡이야 걸어가면서도 먹을 수 있으니 구태여 앉아서 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탐방로는 자장4(수로에 놓인)’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둑길을 따라 자장마을로 간다.

 11 : 33. 농수로 다리를 건넌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국사로로 올라선다. 마을 뒷산이라 할 수 있는 국사봉(國祠峰, 150m)’에서 얻어온 이름이지 싶다.

 농번기를 맞아선지 농기계와 유난히도 자주 마주쳤다. ‘코리아트레일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지역 주민은 낯선 나그네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지자체는 나그네가 헤매지 않도록 안내판과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니 우리 같은 걷기여행자들보다 농기계가 먼저 지나가야 한다.

 11 : 40.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 만에 자장리(紫長里)’에 도착했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검은들, 샘말, 큰말 등 9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법정 동리이다. 하지만 이곳이 어느 부락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더. ‘자장이란 임진강변에 붉은 찰흙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했다.

 경로당을 겸한 마을회관도 자장리라는 간판을 달았을 뿐이다. 어렵게 만난 인연이니 마을 이력 정도는 알려주는 것도 괜찮을 텐데 말이다.

 마을 지도가 그려진 안내판에서도 그런 정보는 얻어낼 수 없었다. ‘초원마을이란 브랜드를 내건 체험시설들만 줄줄이 늘어놓았다. 함께 세워놓은 평화누리자전거길 안내도와 이정표(장남교 4.9km/ 율곡습지공원 14.1km)도 마찬가지다.

 판자 담벼락이 예술적이다. Soffio d' Amore, Illumina la mente, di Luce e Porta Pace 등 이탈리아어를 적어 미적 감각에 감성을 보탰다. 사랑의 숨소리, 마음을 비추고, 거기에 빛과 평화의 문이라니 이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언어의 마술인가.

 들어왔던 반대방향으로 빠져나가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자장리 마을을 지나면 임진강이랑 서서히 가까워진다. 그나저나 중앙선까지 그어놓은 자전거길이 흡사 자동차도로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잘 지어진 저 한옥은 마을에서 운영하고 있는 체험장이라고 했다. 숙식도 가능하단다.

 썩 편치 않은 풍경도 눈에 들어왔다. 태양광발전소가 농경지에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전기를 더구나 무공해로 생산한다니 누가 뭐라 하겠는가마는 농경지에 들어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왼쪽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그 남쪽 언덕에 자장리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때로는 탐방로가 산모롱이를 에돌아가기도 한다. 능선 너머는 임진강이 흘러간다.

 봄은 봄인가 보다. 냉이가 나왔다며 집사람의 손놀림이 바빠지는 걸 보면 말이다. 저 냉이는 다음 주 내내 우리 집 밥상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그런 봄날을 즐기며 한갓지게 걷고 있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12 : 08. 커다란 비닐하우스 시설단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12 : 11. 굴다리 앞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율곡로(국도 37호선)’로 올라서게 된다. 국도 가장자리를 따라 탐방로를 따로 내놓았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방금 지나온 비닐하우스와 함께 임진강이 눈에 들어온다. 임진강 건너 저 어디쯤에 고랑포 나루가 있을 것이다. 삼국이 임진강변을 쟁패하던 시대, 고구려는 고랑포 위 절벽에 호로고루 성채를 건설했다. 서기 978년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이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언덕배기에 묻혔다. 1968 1 19일에는 북한 특수부대원 32명이 청와대를 목표로 얼어붙은 고랑포 여울목을 건넜다. 속칭 김신조 부대다.

 12 : 18. 탐방로가 국도변을 벗어나 언덕으로 올라가는 임도로 옮긴다. 그리고는 가파른 오름짓으로 고도를 20m 이상 끌어올린다.

 율곡로는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보행자의 접근을 엄격히 금지한다. 중앙 분리대로도 모자라 가드 레일까지 설치해 놓은 것이 그 증거다.

 12 : 24. 고갯마루를 넘으면 평화누리길 두지리 쉼터가 반긴다. 쉼터 앞에서 길이 나뉘는데 평화의길은 쉼터를 경유하도록 나있다.

 나물은 우리만 캤던 게 아닌가 보다. 10코스만 걷겠다면서 리비사거리까지 산악회 버스로 이동한 일행 둘이 오는 도중에 캤다며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팔랐다. 지자체에서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침목계단으로도 모자라 밧줄난간까지 설치해 놓았다.

 12 : 29  12 : 42. 탐방로는 두지나루로 연결된다. 리비사거리를 출발한지 1시간 50분 만이다. 두지나루는 북녘 땅에서 시작한 물길 사이로 남과 북을 잇는 황포돛배가 힘차게 오가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포구다. 반세기 넘게 왕래가 끊겼던 황포돛배는 2004년 복원돼 일부 구간을 운행하기 시작,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임진강을 일반인에게 유일하게 구경시키고 있다.

 나루터 초입에 평화의길(10코스)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평화누리길 이정표(장남교 2.2km/ 율곡습지공원 16.3km)는 그냥 지나치란다. 그렇다고 황포돛배로 유명한 10코스의 핫 플레이스 두지나루를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잠깐의 망설임도 없어 나루터로 들어가고 본다. 참고로 두지라는 지명은 땅 모양이 뒤주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첫 만남은 황포돛배이다. 한때는 임진강의 거친 물길을 오르내렸을 돛단배를 입구에 전시해 놓았다. 조선시대의 황포돛배는 지금의 상암동에 있던 한강 마포나루에서, 서해에서 생산한 소금이며 생선, 젓갈 등의 물건을 싣고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지막 포구였던 고랑포구까지 약 50여 킬로미터의 강줄기를 따라 운행했다고 한다. 쉬지 않고 가면 15시간 걸리는데, 보름까지 걸리는 게 보통이었다나? 21개의 포구를 들러 물건을 싣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데다 임진강이 서해의 조수 영향을 받기 때문이란다.

 매표소. 배 삯은 성인 기준으로 만원, 최대 승선인원이 45명인데 문제는 최소한 8명은 타야 출발한다는 점이다. 자칫 부지하세월로 기다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두지리 선착장(두지나루터)에서 고랑포구(자장리)를 돌아 선착장으로 원점 회귀하는 코스로 40쯤 걸린다.

 그 기다림이 오래갈 것 같으면 매표소 뒤 카페로 가면 될 일이다. 커피에 수제 전통차는 물론이고 서브 메뉴로 와플까지 내놓는다. 야외 테이블도 갖추고 있어 임진강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길 수도 있다.

 카페에서 바라본 풍경. 커다란 표석이 이곳이 두지나루임을 알려준다. 다들 황포돛배로 알고 있지만 실은 임진강변에 위치한 두지나루터인 것이다. 참고로 국토가 분단되기 전, 큰 배는 이곳보다 조금 하류에 위치한 고랑포까지 운행했었다고 한다. 반면에 작은 배는 안협까지 다닐 수 있었다니, 이곳 두지나루는 황포돛배가 제격이었겠다.

 나루터 진입로. 대전차방호시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민통선과 엔간치 떨어져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취수탑도 잠깐의 볼거리로 충분하다. 외벽에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임진적벽도(臨津赤壁圖)’를 그려 넣었다.

 물양장을 장식하고 있는 조형물. 제목은 황포돛배인데 하나같이 하얀 돛을 달고 있다. 그나저나 물양장은 강나루답지 않게 꽤나 널찍했다. 하긴 60여 년 전만 해도 이곳 두지나루는 서해의 해산물을 비롯한 각종 농산물이 돛배에 실려 왔다고 하지 않던가. 남과 북이 나뉘고 임진강 자체가 사람 통행을 가로막는 민통선이 되면서 그 풍경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주민들도 꽤 되는 모양이다. 꼬맹이지만 대여섯 척의 어선이 출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붕에 올린 황포 돛이 바람에 펄럭인다. 파주 유일의 뱃길 관광 체험인 임진강 황포돛배는 조선시대의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황포돛배를 재현한 유람선이다. 저 배를 타면 분단 이후 수십 년간 베일에 싸여 있던 임진강을 유람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고 했다. 거북바위를 지나 임진강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높이 10미터의 자장리 적벽을 지나는데, 60만 년 전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수직무늬의 절벽 아래쪽이 밀물과 썰물의 영향으로 선명한 가로줄무늬가 생겨 신비롭기까지 하다나?

 12 : 42. 눈이 호사를 누렸으니 이제 다시 길을 나설 차례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 한없이 구불거리는 시골길을 따라 간다.

 느닷없는 산신령. 요 근처 어딘가에 산신당이라도 지으려고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듯 길가에 내팽개쳐 있다.

 12 : 29. 자동차 길은 율곡로 아래로 난 굴다리로 들어간다. 하지만 평화의길은 데크길을 따라 왼쪽 언덕으로 올라간다. 참고로 굴다리를 통과하면 두지리 매운탕촌이 만난다고 했다. 참게와 민물새우를 바탕삼아 메기, 빠가사리로 맛을 더한다는 시원한 민물매운탕이 그리운 사람들은 잠시 다녀와도 좋겠다.

 언덕에는 평화누리길 쉼터가 있었다. 뒤에는 짓다가 그만둔 건물이 덩그러니 방치되고 있었다.

 탐방로는 이제 임진강 둑길을 따라간다. 장남교를 바라보며 간다고 보면 되겠다. 오른쪽에는 베이커리 카페인 삼성당이 있다.

 539m 길이의 신장남교는 파주시 적성면 두지리와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를 잇는다. 기존의 장남교가 장마 때만 되면 수시로 물에 잠기는 탓에 새로 만들었다. 장남교에 새로울 신()’를 보탠 이유이다. 2012 9, 건설과정에서 콘크리트 상판이 무너져 근로자 2명이 숨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2 : 49. 장남교 교각아래서 데크길을 이용해 장남교로 진입한다. 오른쪽은 파주어촌계에서 운영하는 민물고기 직판장이다.

 뿌듯한 마음으로 신장남교를 건넌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녘 땅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평화의길을 걸어오면서 임진강철교, 통일대교, 전진교, 리비교 등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여럿 만났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보기는 처음이다. 남북 평화통일로 가는 듯 그만큼 감회가 새롭다는 얘기다.

 황포돛배가 길을 나서고 있는 두지나루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저 배는 잠시 후 겸재 정선의 임진적벽도를 떠올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난다고 했다. 참고로 임진강에는 적벽이 11개가 있다고 했다. 북한 쪽에 7~8개가, 남한 쪽에 서너 개가 형성돼 있다나?

 줌으로 당겨봤다. 그러자 임진적벽도가 선명해진다. 황포돛배에 올라 겸재(謙齋)의 시선으로 임진적벽을 둘러보고 싶었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집사람의 채근에 쫓겨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다. 마냥 고운 풍경만 눈에 담을 수는 없었나 보다. JTBC의 사건반장에나 나올법한 현장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동차 바퀴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타이어가 도로변에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재생타이어를 사용했을 때 발생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데 생각할수록 아찔하기만 하다. 달리는 차량에서 저런 타이어가 튕겨져 나올 경우 자칫 큰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리 아래, 임진강 둔치에는 캠핑 브릿지라는 야영장이 들어서 있었다. 그 뒤로는 원당리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하나 더. 들녘 너머에 삼국시대의 고구려 성곽인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와 임진강을 통한 물자교류 중심 역할을 하던 나루터 고랑포구(高浪浦口)’가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캠핑용 테이블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모습이 정겹기 짝이 없다. 저런 한갓진 삶에서 가족애가 생겨날 것이고, 그 가족애가 삭막한 도심의 아귀다툼을 배겨낼 수 있게 만들 것이다.

 13 : 10. 신장남교 북단. 다리를 건너면 연천군(장남면) 땅이다. 파주시 권역의 임진강 언저리를 숨가쁘게 달려온 평화의길이 신장남교에서 연천군에 바톤을 넘겨준 것이다.

 13 : 16. ‘술이흘로를 따라 장남면 쪽으로 간다. 100m 조금 넘게 걷자 도로변에 소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평화의길 등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각종 시설물들을 세워놓았는가 하면, 벤치를 놓고 몇 가지 운동기구까지 배치했다.

 평화누리길 10코스(고랑포길)의 시점임을 알리는 아치형 게이트를 중심으로 이정표(숭의전 16.2km/ 율곡습지공원 18.5km), 10코스안내도 등 많은 시설들을 세워놓았다. 길을 함께 쓰고 있는 평화의길 경기둘레길에서도 안내판이나 스탬프보관함 등 몇 가지 시설들을 보탰다.

 평화의길 완주인증 QR코드는 세 트레일이 함께 쓰는 안내도에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산악회에서는 술이홀로를 따라 100m 남짓 더 걸어오란다. 참고로 술이홀로는 파주시(파주읍) 봉암리 주라위삼거리에서 연천군(장남면) 원당리에서 끝나는 도로다. 파주시의 삼국시대 명칭인 술이홀현(述爾忽縣)에서 이름을 따왔다.

 13 : 21. 잠시 후, 또 다른 소공원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10코스는 10.29km 2시간 40분에 걸었다. 아니 9코스까지 함께 걸었으니 오늘은 17.44km 4시간 20분에 걸었다. 두지나루를 둘러보느라 지체됐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이곳은 정자와 벤치로는 모자라다는 듯 화장실까지 갖추었다. 그보다도 더 눈길을 끄는 것은 평화의 염원을 담은 조형물이었다. 서울까지가 46km인데 반해 개성은 25km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정표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 하루라도 빨리 평화통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평화의길 안내판은 이곳에 세워놓았다.(아까는 이정표만 있었다) 완주인증 QR코드도 붙어있다. 이곳에서도 인증이 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DMZ 평화의길 9코스(율곡습지공원 – 리비교 거점센터)

 

여행일 : ‘25. 3. 15()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일원

여행코스 율곡습지공원두포교차로파평면사무소금파교리비교거점센타(거리/시간 : 8.5km, 실제는 7.15km를 1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청마산악회

 

특징 드디어 코리아둘레길의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은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그리고 2024년 9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 들머리는 율곡습지공원(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수원·문산고속도로 월롱 IC에서 내려와 통일로(국도 1호선문산방면, ‘여우고개사거리에서 율곡로(국고 37호선)로 옮겨 연천방면율곡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곧장 율곡습지공원으로 연결된다평화의길 안내판(인증 QR코드)은 평화누리길(9코스)의 아치형 대문 옆에 설치되어 있다.

 율곡습지공원에서 리비교까지 임진강 언저리를 따라 북진하는 길이 8.5km의 여정. ‘두포천 눌노천을 건넌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얘깃거리나 볼거리가 없다.

 출발지 근처 학자의 숲 안내판. 1548,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한 율곡이 이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을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린다나? 하단에는 그가 주장했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적었다.

 09 : 00. 실제 출발은 두포교차로에서. 9코스(8.5km) 10코스(9.6km)는 둘을 합쳐도 20km가 채 되지 않는다. 둘 모두를 한꺼번에 진행시키면서 내놓은 산악회의 구실이다. 하지만 집사람 체력으로는 다소 부담스러운 거리라서 집사람은 파평면사무소, 그리고 나는 집사람이 기다려야 할 시간을 감안 두포교차로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길을 나서기 전, 잠시지만 평화의길을 역방향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율곡로(국도 37호선) 아래 굴다리를 지나면 전진교 두포천이라는 볼거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진교는 민통선 내에 군사용으로 만든 폭이 좁은 다리이다. 관할 부대의 명칭이 전진부대여서 전진교로 불리고 있으며 통일대교처럼 군사 시설물이다.

 이정표가 평화의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곳 두포교차로 9코스의 주요 기점 중 하나다. 그러니 거리 정도는 적어 넣는 게 여행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09 : 02. 250m쯤 진행하면 두포교에 이른다. 두포천(斗浦川)을 가로지르는 다리(두포교)에 잇대어 탐방로를 내놓았다.

 법원읍 금곡리에서 발원한 두포천(斗浦川)은 북서방향으로 흐르다 저곳에서 임진강으로 흡수된다. 하나 더. 혹자는 저곳 어디쯤엔가 몽구정(夢鷗亭)’ 터가 있다고 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성담수(成聃壽, 1436~?)가 지었다는 정자로, 성담수는 단종 폐위에 불복하여 세조가 내린 벼슬을 사양하고 두문리(옛 지명) 외진 곳에서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내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한 인물이다.

 임진강 너머는 민간인통제지역이다. 때문에 임진강 쪽은 카메라 들이대기조차 무서울 정도로 통제가 심하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에게는 삶의 현장일 따름인가 보다. 강가에 기댄 농경지는 벌써 쟁기질을 끝내고 파종을 기다린다.

 되돌아 나오는 길. ‘전진교 남단의 검문소가 눈에 들어온다. 민통선 안에 있는 농경지로 가려는 차량 등으로 인해 항상 붐빈다는 곳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금단의 영역이다. 통행은커녕 사진촬영조차 금지하고 있었다.

 두포나루터라는 입간판이 눈에 띈다. 근처 음식점에서 세워놓은 것이겠지만 이 근처 어딘가에 두포나루터가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09 : 06. 교차로로 되돌아와 평화의길을 순방향으로 탄다. 두포3(장포동) 표석 오른쪽, 그러니까 율곡로의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두포리(斗浦里)는 임진강을 끼고 있어, 강변을 따라 소규모로 발달된 농경지가 주민들의 일터다. 간뎃말·건넌말·노적굴·두문리·방학동·새텟굴·아랫말·아랫장깨·윗장깨·장깨·장담동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고 했으나 어디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진진교는 통행량이 많다고 했다. 두포교차로 부근에 들어선 여러 음식점과 카페들이 그 증거가 아닐까?

 탐방로는 율곡로와 나란히 간다.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 도보&자전거 길을 따로 내놓았다.

 09 : 12. 두포삼거리. 탐방로는 이곳에서 율곡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청송로를 따라간다. 파평면 두포삼거리와 적성면의 적성교차로를 잇는 지방도인데, 중간쯤에 있는 파산서원(坡山書院)’에서 파생된 이름이지 싶다. 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는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호가 청송(聽松)이니 말이다.

 청송로가 오름짓을 시작한다. ‘파평산의 지능선을 넘어가면서 만들어내는 가냘픈 몸짓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도로 건너편에 파평면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은 파평면의 대표 볼거리인 화석정이 아닐까 싶다.

 09 : 15. ‘단양 우씨 망향제단 입구에 이른 탐방로가 청송로마저도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능선을 넘어가기 위해 북쪽으로 나있는 임도를 따라간다.

 안정공(安靖公派)과 충정공(忠靖公)을 모시는 망제단(望祭壇)’이란다. 여말선초의 문신 우홍강(禹洪康, 1357-1423)과 그의 아버지 우현보(禹玄寶, 1333-1400)의 시호(諡號)인데, 이들의 묘가 북녘 땅에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후손들의 소원이 통일이 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청송로를 따르기로 했다. 면사무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집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지나다니는 차량과의 충돌이 염려될 정도로 갓길은 좁았고, 거기다 씽씽 달려대며 내지르는 굉음은 사람의 정신을 쏙 뽑아버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9시를 겨우 넘긴 이른 시간인데도 문을 연 식당이 있었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고 했다. ‘부지런한 새는 먹이를 더 얻는다고도 했다. 남들이 쉴 때 가게 문을 여는 저 주인장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덤프트럭이 지나갈 때는 더 소름이 끼쳤다. 심심찮게 마주치는데 그럴 때마다 지반까지 흔들렸기 때문이다.

 09 : 24. 가슴조리며 올라선 고갯마루. ‘장마루라고 적힌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장마루 장파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파주시에서는 장파리, 금파리, 늘노리에 속한 자연마을들을 묶어 장마루권역이란 이름으로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중 하나인 금파리로 들어선다는 얘기일 것이다.

 고갯마루 부근에서 평화의길을 다시 만났다. 이정표는 이곳을 박석고개로 적고 있었다. 뒤로 보이는 고갯마루를 이르는 지명인가 보다.

 이후부터는 다시 평화의길을 타기로 했다. 집사람도 목숨까지 위협 받아가며 빨리 오는 걸 원치는 않을 것이다.

 널찍한 길은 도로에 못지않게 고왔다. 아니 보드라운 흙길이라서 도로보다 한결 더 걷기가 좋다.

 길은 심심찮게 나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정표로도 모자라 시선이 머물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가이드리본이 매달려 있다.

 이즈음 금파산업단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영상·음향, 통신, 전기·전자기기 등 다양한 업종을 유치하고 있다나?

 09 : 35. ‘금파리(金坡里)’로 내려선다. 임진강의 지류인 눌노천 언저리에 분포되어 있는 마을로, 파평면의 행정타운이 들어서 있다.

 친절한 이정표. 열린 화장실까지 안내해준다.

 탐방로는 행정타운의 안마당을 통과한다. 농산물 저온유통시설과 북파주농협, 파평도서관, 소방서, 행정복지센터 등을 차례로 지난다.

 파평면행정복지센터. 파평(坡平)의 역사는 고구려의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게 신라로 넘어오면서 파평현(坡平縣)이 되었다고 한다. 금파리·눌노리·덕천리·두포리·마산리·율곡리·장파리 등 7개의 법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복지센터 앞의 송덕비(頌德碑). 하나같이 이씨(李氏)들이다. 금파1리 금곡동마을 뒤 산자락에 세종의 아들 담양군(潭陽君) 이거(李璖, 1439-1450)의 묘가 있다고 했는데, 이곳 금파리가 그들의 세거지일지도 모르겠다.

 09 : 39. 행정타운을 빠져나와 청송로를 따라간다. 내가 도착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집사람과 다시 만났음은 물론이다.

 09 : 42. 대전차방호벽. 평화를 갈망하는 염원들이 모여 전쟁을 대비한 시설까지도 멋진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전통의상 패션쇼?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별칭까지 얻어낸 고을에 걸맞는 그림이라 하겠다. 이곳 파주는 이율곡과 성혼 등이 중심이 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산실이다. 그뿐 아니다. 고려 때 여진을 정벌한 윤관 장군과 조선시대 대표 재상 황희, 조선 초 예악제도를 정비한 허조, 경국대전 편찬을 지휘한 노사신, 파산학을 태동시킨 백인걸,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인물들이 파주에서 나고 자랐으며 묻혔다.

 반대편에는 화석정(花石亭)을 그려 넣었다. 율곡 선생이 여덟 살에 지었다는 시도 적혀있었음은 물론이다.

 09 : 44. 파평삼거리. 청송로와 장마루로가 나뉘는 삼거리이다. 평화의길은 왼쪽 장마루로를 따라간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청송로는 감악산으로 유명한 적성면으로 간다. 가는 도중 눌노리에서 천연 연못인 파평 용연(坡平 龍淵)’을 눈에 담을 수도 있다. 필자의 시조가 탄강(誕降)한 곳인데 간략하게 소개해본다.

 용연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인 윤신달(尹莘達, 893-973)이 탄강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용연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고, 사흘째 되는 날 윤온(尹媼)이라는 할머니가 연못 한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건져서 열어보니 한 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체 속에 누워있더란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할머니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손바닥에 윤자 모양이 있어 윤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탐방로는 이제 장마루로를 따라간다. 금파리의 널찍한 들녘을 헤집으며 길이 나있다. ‘눌노천이 휘돌아 굽이치면서 몰고 온 퇴적물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충적평야다.

 09 : 53. ‘금파교를 건넌다. 금파리는 이 다리를 경계로 삼아 1리와 2리로 행정 단위가 나뉜다.

 눌노천은 법원읍 직천리에서 발원, 북쪽과 서쪽으로 연이어 흐르다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21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상류는 전형적인 산지하천의 형태를 보이나, 중하류지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다리를 건너면 금파2리 아래장마을 표석이 반긴다. 2리에는 초당골로 불리는 마을도 있다고 했다. 마을 뒷산에 눌노천과 임진강이 바라보이는 초당이 있었는데, 선비들이 학문을 갈고 닦던 곳이라 하여 붙은 지명이란다.

 09 : 54. 금파교 북단에 이른 탐방로가 이번에는 눌노천의 둑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반대편은 눌노리(訥老里)’로 연결된다. 조선 중기 율곡 이이와 함께 대학자로 이름을 떨친 성혼(成渾, 1535-1598)의 학문적 근거지가 된 곳이다. 성혼의 호 우계(牛溪)는 자신의 집 앞을 흐르는 소개울(현재 눌노천)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즈음 파평산(坡平山, 496m)’이 눈에 들어온다. 파주의 진산이지만 군사시설에 정상을 빼앗긴 서글픈 산이다. 대신 개성시가지와 장풍군의 산마루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동봉에 정상석을 세워놓았다.

 눌노천도 곡류하천(曲流河川)으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휘휘 돌아가며 만들어내는 곡선이 여간 고운 것이 아니다.

 10 : 00. 평화의길은 눌노천의 끝까지 가지는 않는다. 율곡로(국도 37호선)로 접근하는가 싶더니 그 하부로 난 굴다리로 들어간다.

 이후부터는 율곡로를 오른쪽에 끼고 간다. 임진강과 국도 사이에 오솔길이 나있다고 보면 되겠다.

 임진강 쪽 분지는 잡초만 가득했다. 지역 언론인 파주민보 37번 국도와 임진강 사이에 금파리성지(金坡里城址),  궁예성터가 남아 있다고 했다. <후고구려 궁예왕이 철원에서 피신하여 이곳에 거주하면서 쌓은 토성이라는 전설이 있으며 길이 1,500m정도, 높이 6m정도 되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다>는 기록이 전해진단다. 임진강 언저리의 저 분지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0 : 06. 노거수가 멋진 풍광을 자아내는 또 다른 굴다리. 임진강에 어깨를 맞댄 공터에는 정체 모를 초소까지 지어져 있었다. 임진강 건너는 진동면 하포리로 민간인 통제지역이다. 그걸 알아차리라는 듯 철망 울타리까지 둘러놓았다.

 굴다리. 율곡로의 아포삼거리에서 내려와 금마루6을 타고 조금만 내려오면 이곳으로 연결된다.

 이정표(장남교 11.6km/ 율곡습지공원 6.9km)는 현재 위치를 적벽산책로로 적고 있었다. 임진강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임진강 적벽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중 하나인 금파리 또는 장파리 적벽이 부근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임진강의 적벽 주상절리는 신생대 시기 화산활동으로 인해 만들어졌다. 선조들이 임진강변에 형성된 주상절리가 붉은빛이나 자줏빛으로 보인다고 하여 적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평화의길은 계속해서 북진한다. 임진강과 율곡로를 좌우에 끼고 가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주변 풍광은 확 달라졌다. 바닥을 우레탄으로 깔아놓는 등 도심의 공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닦아놓았다.

 쉼터에 이르니 선두대장이 막걸리 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의 권유로 금주를 시작하지 벌써 4개월인데 그걸 몰랐던 모양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하지 않았던가. 고맙다는 인사만 남긴 채 바람같이 지나쳐버릴 수밖에 없었다.

 잡초더미에 묻힌 저 초소의 정체는 대체 뭘까? 군의 시설로 보이기는 한데.

 탐방로는 임진강에 기대듯이 나있다. 덕분에 나뭇가지 사이로나마 임진강을 눈에 담으며 걸을 수 있다.

 가끔은 시야가 툭 트이기도 한다. 임진강 건너는 진동면 하포리이다. 저 어디쯤에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정곤수(鄭崑壽, 1538-1602)의 묘가 있을 것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으로 유명한 의성(醫聖) 허준(許浚, 1539-1615)의 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민통선 너머에 있어 허가를 받아야만 구경할 수 있다.

 10 : 15. 금파취수장. 파주 시민 15만 명이 먹고살 수 있는 물을 공급하고 있단다.

 취수장 진입도로를 벗어난(이정표 : 장남교 10.6km/ 율곡습지공원 7.7km) 평화의길은 다시 강변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임진강과 어깨를 맞대고 북진한다. 임진강을 발아래 두고 걷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민통선 너머를 은밀한 속살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리고 민간인통제지역에서도 농사를 짓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긴 1970년대 만들어진 대성동과 통일촌 말고도 2000년대에는 해마루촌까지 조성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이즈음 리비교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잠시 후 만난 또 다른 쉼터. 여간 정성을 들여 만든 게 아니다. 정자에 벤치는 물론이고 운동기구들까지 갖췄다.

 10 : 24. ‘리비교 문화공원에 이른다. ‘리비교 1951년 휴전협정 이후 보급로가 필요했던 미군이 건설한 다리다. 1950 7 20일 대전전투 당시 자신을 희생해 사단 병력을 철수시키는 데 공헌한 미 제24사단 전투 공병대대 소속 조지 리비(George D. Libby)’ 중사의 이름을 브랜드로 삼았다.

 리비교 1953년 미군에 의해 임진강에 건설된 다리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다리로 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지역주민의 삶을 이어주던 다리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적 교훈과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다리 주변에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공원안내도. 추가로 조성하겠다는 부지(10)에서 이곳을 관광명소로 개발하려는 파주시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공원은 철조망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민통선 이남인데 꼭 그래야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튼 안에는 철제 빔(beam)이 놓여있었다. 리비교를 재 가설하면서 철거한 기존 다리 상판이 아닐까 싶다.

 중간에 공원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내부는 여느 공원과 다름없었다. 산책로와 쉼터는 기본, 임진강변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건너편 민간인통제구역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오버 브릿지는 저걸 이르는 모양이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 위에 선반을 걸치듯 가로놓여 있다.

 저것은 뭘 의미하는 조형물일까?

 리비교는 파평면 장파리와 진동면 용산리를 잇는 총연장 328m( 11.9m)의 콘크리트 다리다. 1951 7월 휴전협정을 시작할 당시, 전선은 정리돼 있었으나 계속된 보급로가 필요했던 미군은 임진강 하류인 파주에서 상류인 연천까지 자유의 다리를 포함해 모두 11개 교량을 설치했다. 하지만 홍수에 유실되는 등 사고가 잦자 1952 9월 반영구적인 교량으로 바꾼다. 8군 공병대가 리비교의 설계 및 건설을 위한 연구를, 2 건설공병대가 설계를, 그리고 임진강의 정복자 로 불리던 미 84 건설공병대대가 건설을 맡았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통로. 대전차방호벽이 설치되어 있다. 도강해온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선착장은 텅 비어 있었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낡은 꼬맹이 배 두 척이 한가롭게 낮잠을 자고 있을 따름이다.

 리비교 남단에는 검문소가 있었다. 때문에 다리 방향은 사진촬영이 금지된다. 하나 더. ‘리비교는 통일대교, 전진교와 함께 민통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주요 통로이다. 하지만 2016년 안전진단에서 ‘D 등급을 받아 폐쇄되었다가 전면 재가설 공사를 거쳐 7년만인 2023 11 7일 통행이 재개됐다. 이 시기 민통선을 넘나들며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전진교까지 20km를 우회해야 하는 큰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리비교 진입로. 진입 차단시설이 남북 분단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사진조차 함부로 찍을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인 것이다.

 10 : 32. ‘리비사거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안내판(인증 QR코드 부탁)은 리비교 남단과 리비사거리의 중간쯤(아래 사진에서 태극기 아래)에 세워져 있다.

 9코스는 7.15km 1시간 40분에 걸었다.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특별히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없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DMZ 평화의길 8코스(임진강역 - 율곡습지공원)

 

여행일 : ‘25. 3. 1()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및 파평면 일원

여행코스 : 임진강역통일육교장산1리 마을회관맨밧골장산전망대임진리화석정율곡습지공원(거리/시간 : 10.2km, 실제는 11.92km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11 : 20. 트레킹 들머리는 임진강역(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자유로(국도 77호선)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면 그 끄트머리에서 임진각국민관광지를 만난다. 임진각관광의 출발점이랄 수 있는 임진강역이 8코스 및 8-1코스의 시점이다.

 완주 인증 QR코드는 도로 건너에 세워놓은 평화의길 이정표에 붙어있다.

 임진강역을 출발 마정리와 장산리의 드넓은 평야를 횡단하여 파평면의 율곡습지공원으로 가는 10.2km의 여정. 율곡선생의 때가 묻은 화석정과 율곡습지공원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11 : 20. 자유로의 마정육교 아래를 지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탐방로는 자유로와 함께 간다. 도로 오른쪽 아래로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농로가 나있다.

 11 : 32. 또 다른 4차선 도로인 통일로(1번 국도)’는 굴다리를 통해 횡단한다. 평화누리길 이정표는 이곳을 통일대교로 적고 있었다.

 굴다리를 빠져나오니 이정표가 왼쪽을 가리킨다. 몇 걸음 떼지 않아 이번에는 평화누리길 쉼터가 잠시 쉬었다가란다.

 평화의길 8코스는 역사와 자연을 아우르는 길이다.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에서 사는 동물들을 만날 수 있는가하면, 우리의 역사를 아우르는 유적을 품고 있다. 천적이 없는 들녘에서 노닐고 있는 철새 떼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길은 장산1를 향해 간다. 왼쪽은 자유 IC’, 1번국도인 통일로와 자유로가 만나면서 만들어놓은 곡선을 따라가며 길이 나있다.

 오른쪽으로 엄청나게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민통선 철책이 가른 저 들판에서 나오는 쌀은 파주 임진강 쌀이란 고유의 브랜드까지 갖고 있단다. 충청도의 예당평야나 전라도의 만경평야 같은 드넓은 곡창지대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북쪽의 파주에도 이렇게 너른 평야지대가 있을 줄은 몰랐다.

 11 : 39. 이정표가 들녘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 더 가면 민통선이니 이쯤에서 방향을 틀라는 모양이다.

 100m쯤 진행했을까 이번에는 왼쪽으로 가란다. 오른쪽은 마정2(야미동 : 夜味洞)’로 연결된다는 것도 알아두자. 마정리(馬井里)는 남북분단으로 인해 생긴 민간인통제구역의 임진강 남안지역 첫 마을이다. 마정(馬井)은 말 우물이란 뜻이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짙던 어느 날 새벽 햇살 기둥이 우물에 꽂히자 그 안에서 용마(龍馬)가 뛰어나왔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탐방로는 마정리 들녘을 횡단한다. 8-1코스의 초반은 이렇듯 마정리와 장산리의 들녘을 헤집으며 나아간다. 둘 모두 널찍하지만 임진강에 맞대고 있는 마정리의 들판이 장산리보다 훨씬 더 넓다.

 11 : 47. 한갓진 들판이 지루해질 즈음 민통선으로 보이는 둑으로 빠져나간다. 옛 토성(土城)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둑이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다. 북한의 침략에 대비한 방호시설이 아닐까 싶다. 그 너머는 민간인통제지역이란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평화의길은 이제 그 둑을 따라간다. 둑 아래로 농로가 나있다.

 둑 위에는 윤형철조망이 처져 있었다. 금단의 땅이니 넘어오지 말라는 듯이.

 경기도 권역의 평화의길 대부분은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 함께 쓴다. 그래선지 곳곳에서 자전거 라이더들을 만나게 된다. 별도의 경보음을 내는 장치가 없어서인지 멀리서부터 미안합니다을 외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11 : 55  12 : 00. 길은 또 다시 들녘으로 파고든다. 그곳에 평화누리길에서 만든 쉼터가 있었다. 덕분에 우리부부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쉬다 갈 수 있었다.

 텅 빈 들판을 걷는 기분은 겨울여행의 참맛이다. ‘평야는 평화다란 외침이 절로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12 : 10. 또 다른 평화누리길 쉼터. 라이더 한 분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쉼터 옆 굴뚝처럼 생긴 저 시설의 정체는 대체 뭘까? 그동안 등산을 해오면서 만났던 저런 굴뚝 밑에는 어김없이 군의 벙커가 있었는데 말이다.

 탐방로는 농로를 빌려 쓴다. 그러니 농기계라도 마주칠라치면 길을 양보해주는 게 예의라 하겠다.

 12 : 13. 이번에는 아예 석성(石城)이다. 아니 웬만한 산성보다도 더 높고 튼실하게 쌓아올렸다. 함께 걷던 일행이 대전차 방호벽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12 : 15. 그 끄트머리에서 맨박골천을 만났다. 차마 물길을 끊어놓지 못한 대전차 방호벽은 대신 시멘트덩어리를 매달고 있었다. 유사시에 떨어뜨릴 요량일 것이다.

 방호벽을 통과한 탐방로는 장산1리로 들어간다. 규모가 제법 큰 이 마을은 옛 장산진의 동헌(東軒)이 있었기 때문에 동헌마당이라고도 부른다. 도안마당, 동안, 동헌안, 동안마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참고로 장산리(長山里)는 임진강이 휘감아 돌아나가는 마을이다. 장산에서 임진나루까지 약 2km 가량 높이가 같은 산이 임진강 가를 따라 길게 뻗었으므로 진동산 또는 장산(長山)이라 하였다. 1755(영조 31)에 진()과 보루(堡壘)를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어 지켰으므로 장산보 또는 장산진이라고 하다가 진을 폐한 후 다시 장산이라 하였다. 장산진, 장산보, 진동산이라고도 한다.

 장산1리 표석. 행정 동리보다, 위에서 거론했던 자연부락의 이름을 적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요즘은 옛 지명을 찾는 게 대세라고 하지 않았던가.

 12 : 22. 장산1리 마을회관. 이정표(율곡습지공원 5.5km/ 반구정 7.5km)가 절반쯤 왔음을 알려준다. 반구정에서 시작되는 경기둘레길 7코스와는 달리, 임진강역에서 출발하는 평화의길 8코스는 길이가 10.2km이니 말이다.

 12 : 25. 마을을 빠져나온 평화의길은 맨박골천의 둑길을 따라 올라간다.

 12 : 33.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이정표는 오른쪽을 가리킨다. 하지만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들녘을 일부러 에돌아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곧장 직진하면 오히려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다.

 고지식한 필자는 들녘으로 에둘러 갔다.

 12 : 37. 2차선 도로인 장산로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보이는 맨밧골을 향해 간다. 오른쪽은 운천리(雲泉里)로 연결된다. 산골짜기로 구름이 돌아가며 여러 곳에서 샘이 솟아난다는 마을이다.

 장산1리의 자연부락인 맨밧골이다. 마을 부근에 바위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매암밧골, 매음동(梅岩洞)으로도 불린단다.

 12 : 41.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사거리(도로표지판은 삼거리)에서 평화의길은 오른쪽으로 간다. 왼쪽으로 가면 같은 장산1리인 맛개(麻浦)’라는 자연부락이 나온다. ‘제주 고씨네 열녀문과 거창 신씨네 정자인 래소정(來蘇亭)이 있었다. 현재는 사라지고 없지만, 대신 조선후기 호곡 남용익 선생이 래소정에서 바라 본 임진강 8경을 노래하며 지은 래소정어(來蘇亭於)’가 전해지고 있다.

 이후부터는 임진리 방향의 임도를 탄다. 무척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이런 오르막길은 장산리의 뒷산인 장산 고갯마루까지 이어진다.

 12 : 49. 고갯마루에는 간이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탐방로는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려갈 일은 아니다. 다리품을 조금 더 팔면 뛰어난 조망을 자랑하는 장산전망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표(율곡습지공원 3.6km/ 반구정 9.4km / 장산전망대 0.3km) 300m쯤 떨어진 곳에 장산전망대가 있음을 알려준다.

 12 : 53. 잠시 후 도착한 장산전망대. 임진강의 하중도인 초평도와 그 너머의 북녘 땅을 한꺼번에 살펴 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처이다.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개성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왼쪽은 역사의 아픔을 끌어안은 초평도이다. 초평도는 임진강의 대표적인 하중도(河中島, 곡류하천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 삼각주)이다. 민간인 통제구역이라는 금줄 속에 갇힌 또 다른 의미의 이기도 하다. 철저한 이념 검증을 통과한 바람, , 새와 동물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금단의 영역이다. 하지만 6.25전쟁 이전에는 사람이 거주했으며 잘 정리된 논과 밭도 있었다고 한다.

 조망도를 설치해 실물과 대조해가며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푹 빠져있는데, 건너편을 지긋이 응시하던 젊은 연인이 북한 땅이냐고 물어온다. 우리 땅(파주시 진동면)임을 알려주며 부연설명까지 해주었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2km씩 도합 4km를 비무장지대로 규정하는데, 저곳은 그 남방한계선보다도 더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며 말이다. 다만 보안상의 이유로 민간인의 출입은 통제된다는 것도.

 대북전단 살포자들의 출입통제 및 행위금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누군가에게는 꼭 해야만 하는 사명이겠지만, 접경지 주민들로서는 눈에 가시일 것이다. 혹시라도 위험물이라는 핑계로 북에서 총이라도 쏘아댈 경우 그 피해는 오롯이 주민들에게 돌아갈 것이 뻔할 테니까 말이다. 하긴 남북분쟁을 일부러 조장하려던 몹쓸 인간들도 최근 있었지만.

 임진리를 향해 내려간다. 포장되어 있지 않은 것이 전형적인 임도의 풍경이다.

 이런 심심산골에 웬 낚시터?

 임진나루길을 걷고 있는 당신, 종점인 임진나루터까지 1.3km가 남았답니다.

 임도는 언덕위로 지나가는 도로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바로 앞에 두고도, 길이 나있지 않아 오른쪽으로 한참을 에돌아서야 올라설 수 있었다.

 12 : 18. 갈림길 모서리에 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종국 시인의 시판(詩板)이 세워져 있었다. ‘들킬까 숨어 핀 꽃 아니외다.’로 시작되는 들꽃이외다가 적혀있다. 시와 함께 걷는 평화누리길이란 부연설명도 보인다.

 13 : 20. 언덕으로 올라선 길은 임진나루 마을(臨津洞)’로 들어간다. 초입에 마을 표석과 함께 장승을 세워놓았다. 솟대로 구색까지 맞췄으니 솟대공원 쯤으로 해두면 어떨까?

 조금 전 저 골짜기를 지나왔다. 흉물스럽게만 보이던(사진도 찍지 않았을 정도로) 흄관과 맨홀이 위에서 바라보니 제법 그럴 듯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임진동은 잘 지어진 주택들로 가득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패키지마을로 조성했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임진(臨津)은 임진나루터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임진강 가에 고려·조선 시대 남북을 오가던 옛길 의주대로의 뱃길인 임진나루터가 남아 있다. 최근에는 임진나루터의 진서문터가 발굴되어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마을에는 식당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그 대부분은 쏘가리매운탕 등 임진강의 어족자원을 활용한 메뉴를 내걸고 있다. 마을과 접하고 있는 임진강에서 선단을 이뤄 어업활동을 하는 덕분이란다.

 매운탕전문점인 임진대가 TV 프로그램 식객 허영만의 백반 기행’ 81회에 등장하기도 했다. 허영만 선생이 가수 민해경과 함께 방문한 집으로, 밑반찬으로 나온 깻잎장아찌, 시래기 무침과 함께 참게 매운탕이 소개되었다. 채널A 엄마의 여행, 고두심이 좋아서에서도 다녀갔던 모양이다.

 장단콩으로 대변되는 장단면을 근거리에 두고 있어서인지 임진나루협동조합(마을기업)에서는 두부를 직접 만들고, 이를 이용한 요리를 팔고 있었다.

 길은 임진나루로 이어진다(나루터까지 가지는 않는다). 임진동의 가장 큰 특징은 고려·조선 시대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는 점이다. 영조 때인 1755년 군진인 임진진(臨津鎭)을 설치한 이유다. 나루 안쪽 협곡을 가로지르는 성벽을 쌓고 진서문(鎭西門)을 냈으며, 그 위에 목조 누각인 임벽루(臨壁樓)를 올리기도 했다. 문헌에도 나타난다. 고려사절요에 1045(정종 11) 행인들이 앞 다투며 임진강을 건너다 빠져 죽는 경우가 많아 왕이 이를 근심하여 특별히 부교(浮梁)를 만들게 함으로써 이때부터 사람과 말이 평지를 다니듯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1418(태종18) 2월 어가가 임진나루 북쪽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고,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한양을 떠나 북쪽으로 피신하면서 한밤중 빗속에 임진나루를 건넜다고 적는다.

 13 : 32. 평화의길은 임진나루 초입에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언덕으로 올라 화석정로를 만난다. 임진강 벼랑 위로 난 화석정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보도를 따로 만들어 놓았다.

 임진나루 뱃사공 이야기를 담은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양반으로 변장한 다른 나루 뱃사공의 정체를 밝혀낸 지혜로운 뱃사공 이야기를 담았다.

 이곳은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임진강과 그 건너 민간인통제구역을 은밀한 속살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 254km 길이의 임진강(臨津江)’은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산맥에서 발원, 황해북도(판문군)와 경기도(파주시) 사이에서 한강으로 유입되어 황해 바다로 흘러든다. ‘()’ 더덜  다닫다라는 뜻이며 ()’ 나루라는 뜻으로, 임진강의 옛 이름은 더덜나루였다고 알려진다. ‘이진매 또는 더덜매’(언덕 밑으로 흐르는 강)라고도 불리었단다.

 건너편은 파주시 진동면(津東面)이다. 군사보호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나 2000년을 전후해 동파리에 실향민 마을인 해마루촌이 조성되어 일부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왼쪽 모퉁이 너머에는 임진나루가 있다.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임진왜란을 맞아 몽진을 하면서 임진나루를 건넌 뒤 나루를 폐쇄하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때 임금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도 철거시킴으로써 수많은 백성이 피난을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단다. 625 전쟁 중에도 임진강과 임진나루를 경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다.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물자를 원활하게 보급하기 위해 임진나루에 부교를 가설하기도 했다. 휴전협정 체결 뒤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었고, 1972년에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히 폐쇄되었다.

 13 : 34. 문산읍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율곡로(37번 국도) 아래를 지나면서 파평면에 바톤을 넘겨준다. 필자 문중의 세거지(世居地)이기도 한데, 고구려의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이었다가 757(신라 경덕왕 16)에 파평현(坡平縣)으로 개칭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파평(坡平)이라는 이름은 파평산(坡平山)과 영평산(鈴平山)의 명칭에서 연유하며 전 지역이 평평한 언덕으로 되어 있다.

 13 : 36. 화석정 입구. 평화의길은 율곡로로 연결되는 진입로를 건너 보도로 올라간다. 이어서 50m쯤 걷다가 화석정으로 이어지는 임도(화석정로)를 따라간다.

 화석정 주차장. 화석정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은 듯 널찍하게 만들어 놓았다.

 군의 시설물인 것 같은데, 개조하여 화석정의 홍보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른쪽 벽면에는 파주시 관광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13 : 40  13 : 45. 평화의길(8-1코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화석정에 도착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여생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며 시와 학문을 논했다는 장소로, 임진왜란 때는 커다란 횃불이 되어 선조의 도망가는 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화석정(花石亭) 1443(세종 25) 율곡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이 처음 지었고, 1478(성종 9)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고, 이의석의 스승인 이숙함(李淑瑊) 화석정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673(현종 14) 후손들이 복원했으나 6.25전쟁 때 또 다시 불타고 말았다. 현재의 건물은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했다.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하지만 이게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고증을 거치지 않고 지은 탓에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 지어야한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고, 최근에는 율곡의 망실된 유적과 정신을 복원하겠다는 파주시의 발표도 있었다. 복원되는 화석정은 현재와 같은 일반적인 정자 모습이 아니라 정면 3, 측면 2칸의 건물로 내부에 온돌방이 있는 형태라고 한다.

 정자에서의 조망은 매우 뛰어나다. 강가 벼랑 위에 지어진 탓에 발아래로 임진강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지금은 민간인 통제지역으로 변한 장단(長湍)의 들녘(파주시 진동면이지만 옛날엔 장단군에 속한 면이었다)이 드넓게 펼쳐지는가 하면 임진나루의 풍경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五冠山)까지 보인다는 이도 있었으나, 미세먼지 탓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언젠가 정자 옆의 저 늙은 느티나무를 두고 다툰 일이 있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율곡선생이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심었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이 나무는 560살을 먹었었다. 1422년에 심어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율곡은 1537년에 태어나셨다. 선생이 태어나기 100년도 전에 심어졌다는 얘기다. 뭔가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장삼이사들 때문에 생긴 일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래소정어(來蘇亭於)’를 소개하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조선 숙종 때 문신인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임진강변에 자리한 정자 래소정(6.25전쟁 때 소실됐다)’에 올라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시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꼭 살펴보는 빗돌. 앎이 얕으니 잘 지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시를, 그것도 여덟 살에 지었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을 향해 붉구나/ 산위에는 둥근달이 떠오르고/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위에서 거론했던 얘기들을 적은 화석정 안내판‘. 옆에는 경기옛길 스탬프보관함도 설치되어 있다.

 율곡은 임진왜란에 앞서 국가변란을 대비한 십만양병설을 주창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율곡이 죽은 후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같은 해 429일 밤, 선조는 물밀 듯이 쳐들어오는 왜적을 피해 의주로 도망가면서 화석정 옆 임진강변에 다다른다. 하지만 억수 같은 비로 인해 앞은 강물에 길이 막히고 뒤로는 왜적에 쫓기는 위태로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됐다. 이때 화석정을 불태워 길을 밝혀 임금이 무사히 임진강을 건넜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율곡이 틈날 때마다 들기름을 묻힌 걸레로 정자의 기둥과 마루를 닦게 했고, 어려움이 있을 때 열어보라며 남긴 편지에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적었다는 일화도 함께 전해진다.

 13 : 45. 율곡리(栗谷里)로 내려선다. 조선중기의 대학자이자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본향 마을이다. 선생의 호 율곡(栗谷)’은 이 마을에서 비롯된 것이다. ‘율곡이란 지명은 밤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졌다. 마을에는 나도밤나무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린 율곡이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지나가는 스님이 율곡을 보고 아이의 운명이 좋지 않으니 뒷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시오.’라고 하여 율곡의 부친이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 그루가 자라는 과정에서 죽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고, 이때 나도밤나무가 모라란 것을 채워주어 율곡선생은 훌륭한 인물로 성장했다는 전설이다. 전설은 믿거나 말거나지만 지금도 율곡리 마을에는 유난히 밤나무가 많다.

 예쁜 꽃이 그려진 집, 당호를 율곡마을 꽃 댁()’으로 내걸었다. 뒤로 돌아가면 소희네 외가댁도 만날 수 있다.

 울 엄마네 집이었는데 지금은 막내딸네 집이란다. 하지만 그 막내딸도 지금은 타지로 나갔나보다. 문은 굳게 닫혀있고, 마당에는 쓰레기만 한 가득이었다.

 화석정, 그곳에 가면이라는 작은 쉼터도 만날 수 있었다. 율곡 선생의 15대손인 이성룡씨와 어머니 하옥남씨, 소야 하옥이씨가 함께 운영하는 전시장인데, 한국가곡작사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하옥이씨는 시집 숨겨진 밤과 다수의 가곡집을 발표해오고 있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라간다. 개울가를 따라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길이 나있다.

 농어촌공사의 장산양수장이 있다는 것은 이 마을이 임진강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현인농원. 토종닭(재래종 닭)의 복원·보존을 연구하는 농장이란다. 입구의 잘 생긴 저 닭을 얘기하는 모양이다.

 14 : 00. 임진강변으로 빠져나가려면 자동차전용도로인 율곡로(37번 국도)를 횡단해야만 한다. 이정표(율곡습지공원 0.5km/ 반구정 12.5km)가 굴다리로 들어갈 것을 지시한다.

 굴다리를 지나자 율곡습지공원이 다 왔다며 반긴다. 진행방향에는 종점인 주차장도 놓여있다. 그러나 호수가 가로막고 있어서 한참을 더 걸어가야만 한다.

 이정표는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우린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가리키는 오른쪽(율곡2리 방향)으로 진행했다.

 14 : 07. 장승이 맞아주는 율곡습지공원 입구. 율곡습지공원은 주민들의 노력이 빚어낸 멋진 결과물이다. 재해예방시설(저류지)에 꽃을 심고 가꾸어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봄이면 유채꽃이 피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피는 아름다운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공사 현장(겨울철을 맞아 시설 보수를 하는 듯)을 지나자 율곡 숲이 나온다. 호숫가에 숲을 조성하고 이 지역이 낳은 큰 인물인 이이의 호를 이름으로 삼았다. 정자나 전망대, 벤치 같은 편의시설들을 배치했음은 물론이다. 여름철에는 저 호수에서 분수까지 품어져 나온단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것은 그네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이 지긋한 집사람을 동심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공원은 고향의 정겨운 시골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넓은 꽃밭과 습지에 피어있는 연꽃 군락지, 억새, 옛 농기구가 걸려있는 초가집, 높이 솟아 있는 솟대들, 삐뚤빼뚤 재미난 모양의 장승, 물레방아 등이 정감을 자아낸다.

 천국의 문도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평화 계단으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평화로 한 걸음 나가듯이 계단을 올라라보라는 모양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비둘기를 희롱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말이다.

 14 : 20. 임진강변 생태탐방안내소에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안내판(완주 인증 QR코드 부착)은 평화누리길 9코스(율곡길)의 아치형 대문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번 8코스는 11.92km 3시간에 걸었다. 화석정과 율곡습지공원을 돌아보느라 조금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오늘도 집사람과 떨어져서 출발했다. 반구정(황희선생 유적지)에서 시작한 나와는 달리 집사람은 3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임진강관광지를 출발지로 삼았다. 일종의 반보기 풍습을 따른 셈이다. ‘반보기란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양가 중간 지점에서 만나 그리움과 정담을 나누던 옛 풍습을 말한다. 친정으로 가지 않아 시댁 가사에 큰 지장을 주지 않고, 친정에 드릴 정받이 음식을 장만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거기다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으니 이 아니 좋았겠는가. 하지만 JTBC 사건반장을 보던 집사람이 앞으로는 사양하겠단다. 세상이 하수상한데 어떻게 혼자서 걸을 수 있느냐면서 말이다. 걷기 여행조차 두려워지는 세상은 언제쯤 사라지려나?

DMZ 평화의길 7코스(낙하 IC - 임진강역)

 

여행일 : ‘25. 3. 1()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및 문산읍 일원

여행코스 : 낙하 IC내포 IC임월교당동어린이공원반구정임진강역(거리/시간 : 12.1km, 실제는 반구정부터 7.75km 2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낙하 IC(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낙하리)

자유로(국도 77호선)의 낙하 IC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만나는 마을이 낙하리이다. ‘평화의길 인증 QR코드는 마을 버스정류장 옆 평화의길 이정표에 붙어있다.

 낙하마을을 출발 임진강의 언저리를 따라 임진각관광지까지 북진하는 12.1km의 여정

 산악회에서는 7코스와 8코스를 한꺼번에 걷겠단다. 하지만 집사람의 체력으로 22.3km는 무리다. 그래서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을 과감히 생략하고, 대신 평화의길이 살짝 비켜 지나가는 반구정과 임진각관광지를 들러보기로 했다.

 09 : 00  09 : 20. 계획대로 반구정(황희선생 유적지)’부터 들른다.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52)가 말년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자연을 즐기던 곳이다. 정확히 10시에 문을 여는 유적지는 1천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5살 이하나 경로는 면제해준다.

 18년이나 의정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 재직했던 분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영당(影堂)을 중심으로 노년의 황희가 유유자적했다는 반구정(伴鷗亭), 고손인 황맹헌(黃孟獻)의 부조묘(不祧廟), 앙지대, 경모제, 고직사 그리고 방촌기념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만남은 방촌기념관. 청백리의 표상이라 할 만큼 깨끗한 정치를 펼쳤던 인물로 잘 알려진 황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면 선생의 일대기를 접하게 된다. ’황희하면 정승이란 수식어가 으레 따라다닌다. 의정부 수반인 영의정(또는 좌·우의정)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얘기다. 정승을 지낸 역사인물이 어찌 황희뿐이겠는가. 하지만 24년이나 재임한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영의정 18, 좌의정 5, 우의정 1년을 지냈다. 특히 6대 임금을 섬긴 인물은 황희가 유일하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삶과 사상이 담긴 작품과 유품들도 전시되고 있었다. ’! 명필이네~~‘ 이석암 작가님의 말마따나 지극히 아름다운 글씨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등 삶에 얽힌 일화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황희는 겸손한 자세와 치우침 없는 몸가짐으로 존경을 받았다. 인격과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말을 공손하게 하는 법이다. 대통령 탄핵 결정을 앞둔 요즘,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쏟아내는 오염된 말들로 인해 세상이 어지럽다. 황희의 겸손 리더십이 한층 더 중요해지는 요즘이다.

 청정문(淸政門)’으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된다. ‘청백리(淸白吏)’였음을 은연중에 자랑하는 이름이다. 청백리는 청백탁이(淸白卓異), 즉 청렴하고 결백함이 이상적인 관료를 의미한다. 조선시대는 200명 내외가 청백리로 선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으로 들어가자 유적지의 중심축인 반구정(伴鷗亭)’이 반긴다. 관직에서 물러난 황희 정승이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곳으로, 임진강 강물 위로 바로 치솟은 옹색한 언덕에 비집고 들어서 있다.

 원래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인근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시멘트로 대폭 개축했고,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목조건물로 바꿨다. 하나 더. 반구정은 세조 때 재상 한명회의 압구정(狎鷗亭)’과 비교되기도 한다. ‘  모두 벗 삼는다는 뜻을 담았지만, ‘자는 상하 관계에서 높은 이가 아랫사람을 가까이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에 명칭에서부터 두 사람의 인품을 보여준다는 시각이다.

 처마에는 미수 허목선생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가 걸려있었다. <반구정은 임진강 하류에 있다. 먼 옛날 재상 황희의 정자다. -중략- 정자는 임진(臨津) 밑에 있는데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모여든다. -이하 생략->

 정자에 오르자 시야가 툭 트인다. 발아래로는 임진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경칩을 앞두어선지 날씨가 확 풀렸다. 하지만 흰 선이 강물을 둘로 가르는 걸 보면 겨우내 살을 찌웠던 얼음은 아직 녹지 않은 모양이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맑은 날에는 멀리 개성의 송악산까지 보인다는데 짙은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앙지대(仰止臺)’라는 또 하나의 정자가 있었다. 1915년 반구정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지었다고 한다. 상량문은 오직 선()만을 보배로 여기고, 다른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앙지대라는 이름은 시경의 호인(好人)이라는 뜻을 취했다.’라고 적고 있단다.

 정자 맞은편. 영당을 비롯한 전각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맨 오른쪽은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는 경모재(景慕齋), 그 옆으로 방촌 영당, 월헌사, 고직사 등이 차례로 늘어섰다. 모두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影堂)’이다. 1452(문종 2) 황희가 90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세조 1) 후손들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반구정 옆에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했다. 6.25 때 불탔으나 1962년 후손들에 의해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복원했다.

 황희 정승의 영정. 2년쯤 전인가? ‘진안고원길을 답사하는 중에도 선생의 영정을 만났었다. 진안군 안천면(백화리)에 있는 화산서원(華山書院)’인데 황방촌영정(黃尨村影幀, 전북유형문화유산)’이란 이름으로 걸려있었다.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두 영정이 다른 이유는 뭘까?

 그 왼쪽은 월헌사(月軒祠). 황희 선생의 고손(高孫)인 월헌(月軒) 황맹헌(黃孟獻, 1472-1535)의 불천위 신주를 모셔놓은 부조묘(不祧廟)이다.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되는데, 이들은 4대가 지나서도 신주를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하나 더. 황맹헌은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며, 그의 죽지사(竹枝詞)는 명나라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해진다.

 맨 왼쪽은 사직재(舍直齋)’가 자리한다.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란다. 하지만 입구에서 본 종합안내도에는 고직사로 적혀 있었다. ‘고직사(庫直舍)’라는 게 본디 시설을 관리하는 관리인(고지기)이 거처하던 곳일지니, 저곳에서 살던 고지기가 제사 준비를 도맡았었던 모양이다.

 경모재 오른쪽, 그러니까 맨 오른쪽에는 황희 정승의 동상이 있다. 황희는 정승을 24년간이나 지낸 인물이다. 뛰어난 능력과 겸손의 덕을 함께 갖췄기 때문이겠지만, 나이가 들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몸을 낮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관노였던 장영실을 과학자로 관직에 올리고, 노비의 아이가 수염을 잡아당겨도 마음 좋게 웃어 허허 정승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선생이 허허 웃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09 : 20. 주차장으로 되돌아와 트레킹에 나선다. 사목2(자유로)의 교각 아래에 낯익은 아치형 대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평화누리길 8코스(반구정길)가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걷기 딱 좋은 어느 주말. 우리 함께 콧바람을 쐬어보잔다. 어찌 그리 우리 일행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질까?

 맞은편에는 평화의길(7코스, 12.6km) 말고도 평화누리길(8코스, 반구정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경기둘레길에서는 이정표(율곡습지공원 13km/ 성동사거리 20.1km)를 준비했다. 세 길이 함께 간다는 얘길 것이다.

 09 : 21. 자유로 아래로 빠져나오면 사거리. ‘평화의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사목리(沙鶩里) 반구정마을을 거쳐 온 서해랑길이 황희선생유적지(반구정)를 들르지 않은 채, 이곳에서 우회전해버리기 때문이다.

 경기둘레길(7코스)에서 시작점임을 알리는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세 길이 함께 쓰는 구간답게 탐방로 곳곳에서 세 종류의 이정표를 만난다. 하지만 이렇게 거리표시까지 한 이정표는 경기둘레길이 유일했다.

 반구정로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간다. 자유로(77번 국도)에 기대듯이 일차선의 도로를 내놓았다.

 고갯마루에는 평화누리길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벤치는 물론이고 그네 의자까지 갖춘 멋진 쉼터이다.

 탐방로와 함께 가는 자유로 너머는 임진강이다. 철조망으로 막힌 강은 일반인에게 불가침의 영역이다. 문산읍이 긴장감 넘치는 접경지역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반듯반듯하게 지어진 민가나 큼직한 공장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섰는데 어찌 긴장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길은 자유로와 나란히 간다. 하지만 자유로보다 지대가 낮기 때문에 임진강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오른쪽은 사목2리 석결동(石結洞) 마을이라고 했다. 임진강변에서 연결된 노루매봉에 돌이 많은데, 이 돌들에 결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09 : 45. 자유로와 헤어져 들녘으로 들어간다. 자그만 개울을 따라 농로가 나있는데, 농경지 너머의 임진강역에는 전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때 낙곡을 주워 먹고 있던 기러기 떼를 만났다. 하지만 그동안 평화의길을 걸어오면서 숫하게 만났던 기러기 떼들에 비하면, 떼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숫자가 작았다.

 09 : 51. ‘경의중앙선이 지나가는 운천2리 건널목’. 무인 철도건널목이지만 옛 기억을 소환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차단봉에 ‘X’자형 멈춤 표지판, 금방이라도 딸랑딸랑 거릴 것 같은 판때기 등 건널목의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철길 너머로 임진강역이 보인다.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면 저 역을 지나 장단면(파주시) 노상리에 있는 도라산역까지 갈 수 있다.

 철로를 횡단하면 임진각로이다. 통일로(1번 국도)의 마정교차로와 임진각을 잇는 4차선 도로다.

 파주에도 평화누리길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디엠지 스테이라는 이름처럼 하룻밤 머물면서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평화를 보고 느껴보라는 모양이다.

 임진각로는 7코스의 종점인 임진강역 앞을 지나간다. 하지만 인도가 따로 나있지 않아 통행은 불가능하다.

 탐방로는 임진각로의 오른쪽 아래를 따라간다.

 09 : 58. 자유로의 마정육교 교각 아래 경기둘레길 이정표(율곡습지공원 10.1km/ 반구정 2.9km)가 세워져 있었다. 임진각 관광지로 들어가지 말고 곧장 율곡습지공원으로 가라는 모양이다. 하지만 평화의길은 임진강역 쪽으로 조금 더 가란다.

 100m쯤 더 걸으면 임진강역. 평화의길 7코스의 종점이자 8코스의 시점이다. 평화의길 이정표(QR코드 부착)는 역 앞의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나 더. 이곳은 8코스뿐만 아니라 8-1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8코스는 임진각관광지를 지나 임진강변을 따라가고, 반면에 우회노선인 8-1코스는 마정육교의 교각 아래로 되돌아가 마정리로 연결되는 농로를 따라간다.

 임진강역은 경의선 전철이 연결되는 ‘DMZ 관광의 출발지이다. 2000년 남북철도연결 기공식을 거쳐 2001 930일 운전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전력선이 없는 단선철도로 하루 한 번 ‘DMZ 평화열차가 오가던 작은 역사였으나, 2020년 경의선 전철이 연장되면서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10 : 00  11 : 15. 계획했던 대로 임진각관광지로 향한다. 원래대로라면 8코스의 GPX트랙을 따라가는 셈이 된다. 하지만 8코스는 뭔가의 이유로 통행이 불가능하단다. 때문에 우회노선인 8-1코스를 선택해야만 했고, 임진각관광지를 둘러보고 싶었던 나는 탐방시간을 만들기 위해 7코스의 일부를 줄여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은 분단의 현실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길로 정의할 수 있다. 그 길의 초입에서 17개의 계단 위에 올라앉은 17m 높이의 거대한 탑을 만났다. 1983 10 9일 미얀마(당시는 버마)의 아웅산 묘역에서 대통령을 수행 중이던 우리 외교사절(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장관 등 열일곱 분)이 북한의 테러에 의해 순국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6·25전쟁 납북자기념관 아웅산순국 외교사절위령탑과 어깨를 맞대듯이 가까이 있었다. <기억으로 잊지 못하고, 보고 싶어, 만나야하는 사람들>로 시작되는 브로슈어처럼 6.25전쟁과 납북피해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전시납북피해자의 문제를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공간이다.

 전시관은 특별전시실(1)과 상설전시실(2), 전망대(옥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별전시실에는 납북피해 가족들이 기증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 중이다. 상설전시장은 납북의 배경과 원인, 납북의 전개과정과 납북자의 고통, 귀환노력과 납북자 가족의 고통, 납북과 인권 그리고 통일을 위한 노력 순으로 꾸며져 있었다.

 납북자 가족의 고통은 자료 또는 밀랍인형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다. 특히 밥상에 둘러앉은 어느 납북자 가족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비어있는 아버지의 자리에 밥그릇을 놓아둔 것은 납북된 아버지의 생사를 아직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벽면에 납북자들의 이름을 적어 넣은 공간도 있었다. 그런데 함께 둘러보던 몽중루 작가님이 눈물을 훔치고 계시는 게 아닌가. 작가의 숙부께서 납북되셨는데, 벽면에서 그 이름을 찾아냈던 모양이다. 장손으로 가계를 이끌어가다 보니 맞닥뜨리는 감회 또한 남달랐을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새천년의 장이란 조형물이 반긴다.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아 새천년 통일조국의 희망찬 미래를 상징하는 작품이란다. 50주년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기둥이 세계평화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한민족의 군상들을 떠받히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어지는 공간은 보훈단지로 각양각색의 참전비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의 동상을 중심으로 미국군참전비, 일본계미군참전비, 임진강지구전적비 등 수많은 빗돌들이 들어서 있다.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의 동상. 미국의 33(1945-1953) 대통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천황인 히로히토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하라고 명령한 국가원수이기도 하다. 요즘이야 푸틴이 심심하면 쏘아대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지만.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6.25전쟁 참전기념비’. 6.25전쟁에 참전한 파주시 출신 군인과 경찰, 학도의용군, 진지를 구축하는데 힘을 보탰던 지역주민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담은 빗돌이다.

 임진강지구전적비. 서부의 요충인 임진강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 싸운 제1사단, 해병 제1전투단, 유엔군의 공로를 기리는 빗돌이다.

 김포국제공항 폭발사고 희생자추모비.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둔 1986 9 14일에 일어난 의문(북한의 사주로 추정)의 테러사건이다. 고성능 사제 시한폭탄의 폭발로 가족을 배웅하러 나왔던 일가족 4명과 국제공항관리공단 직원 1명 등 5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3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다음은 임진각(臨津閣)이다. 남북분단이라는 한국의 비극적인 현실을 상징하는 이색적인 장소로, 옥상에 만들어놓은 전망대가 볼만하다. 하지만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주변 분위기와는 달리 건물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편의점과 햄버거가게가 들어선 1층도 손님이 뜸했고, 식당이 있었던 2층은 아예 텅 비어 있었다.

 3층의 전망대는 꽤 많은 사람들이 조망을 즐기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민간인통제선 너머의 풍경을 살펴보는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쉽다면 직접 민간인통제선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DMZ 안보관광 매표소에서 안보관광을 신청하면 된다. , 신분증 미소지자는 신청이 불가능하다.

 북쪽 조망. 임진강 철교. 신구의 다리가 나란히 가지만, 6.25전쟁의 아픈 상처를 품은 옛 다리는 상판이 사라지고 없다.

 서쪽 조망. 민통선 너머의 임진강. 물길은 저 모퉁이를 돈 다음 한강과 합류한다. 그리고는 조강으로 변해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남쪽 조망. 조금 전 둘러본 보훈단지(참전비)’.

 동쪽 조망. 평화누리공원과 평화랜드가 들어서 있다.

 임진각에도 실향민들을 위한 '망배단'이 마련돼 있다. 명절이 다가오면, 이곳에서 실향민과 탈북민들이 망향의 한을 달래며 함께 차례를 지낸단다.

 망향의 노래비에서는 잃어버린 30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건호와 남국인이 작사·작곡하고 설운도가 부른 노래로 1983(6.30-11.14) KBS에서 방영된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138일에 걸친 특별 생방송을 통해 53,536건의 이산가족 사연이 소개되고, 그중 10,189건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의 배경음악이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나 더. 해당 방송의 기록물도 비극적인 냉전 상황과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세계 유일의 기록물로, 지구상에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또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 2015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잃어버린 30도 함께 등재됐다)

 망배단 뒤쪽에 놓인 다리는 자유의 다리. 1953년에 6·25전쟁 포로 1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 귀환했다. 당시 포로들은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이동한 뒤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왔다. 임시로 설치한 다리지만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어 6·25전쟁의 대표적 유산으로 꼽힌다.

 평화의 소녀상도 눈에 띈다. 맹추위에 놀랐는지 목도리에 털신까지 착용하고 있는데, 평화로 도배되다시피 한 관광지답게 하나가 아니고 둘씩이나 된다.

 독개다리로 가는 길, ‘BEAT 131’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Beat(군에서는 Beat back)’가 물리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이 근처에 벙커나 참호 같은 옛 시설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뒤에는 와해되기 일보 직전인 열차가 놓여있었다.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라는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의선 장단역 남쪽 50m 지점에서 폭탄을 맞고 탈선하여 멈춰선 채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2004년 이곳으로 옮겨왔단다. 녹슨 부분은 복원하고 더 이상 녹슬지 않도록 부식방지 처리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총탄 자국과 휘어진 바퀴에서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나 더. 증기기관차 상단에서 자라고 있던 뽕나무도 함께 옮겨와 기관차 근처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다음은 임진강 독개다리이다. 6·25전쟁 때 파괴되어 교각만 남아 있던 임진각 앞 경의선 상행선 철교의 교각에 상판을 올려 관광시설로 꾸며놓았다. 유료 입장이며 독개다리로 입장하면 노란선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노란선 안쪽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구역 이외에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참고로 독개다리란 이름은 장단면 노상리 쪽 자연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옛 경의선 열차를 만난다. 나무로 된 의자, 선반 위의 짐 가방들, 차창 풍경 영상 등 당시의 열차 내부를 재현해놓았다.

 열차를 벗어나면 새로 만든 다리가 나온다. 다리는 길이 105m에 폭 5m로 만들어놓았다. 바닥 몇 곳에 강화유리를 깔아 스카이워크 기분을 내게 했는가 하면, 바닥의 또 다른 공간(강화유리 아래)에는 철로를 연상시키는 것들을 전시해놓기도 했다.

 벽에는 파괴된 채로 널브러져 있는 철교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 몇 장도 게시해 놓았다. 끄트머리의 전망대 아래층에서는 영상효과인 듯 했지만 전쟁 이전의 온전한 다리 모습도 느껴볼 수 있었다.

 다리 위를 걷는다. 민통선 안쪽의 실제 땅을 밟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민통선 안쪽 구역이기에 북한과 가까운 곳을 걷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전망대를 만난다.

 마주하는 교각에는 총탄자국들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한국전쟁 당시의 치열했던 상황을 대변해준다고나 할까?

 시선을 조금 옮기자 곤돌라가 눈에 들어온다. 임진각스테이션에서 출발 임진강을 건넌 다음, 민간인 출입통제선 지역(군내면 백연리) DMZ스테이션에 이르는 ‘DMZ 하늘 길이다. 건너편에서 갤러리 그리브스, 밀리터리 스트리트, 소망리본 존, 바람개비 존, 평화등대, 평화정, 임진강전망대 등을 만날 수 있다.

 500원만 더 내면 ‘BEAT 131’에 들어가 볼 수 있다. 6·25전쟁 때 군사시설로 사용하던 지하 벙커를 원형 그대로 살려 전시 공간으로 꾸몄다. 평화 메시지를 담은 다양한 콘텐츠도 감상할 수 있다.

 전시 공간이 협소해서 오르내리는 계단을 포함 3분 이내에 모든 관람이 가능할 정도다.

 안에는 대전차지뢰를 비롯해 총기·수통·철모·무전기 등 벙커에서 썼을 법한 군용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 지휘부인 상황실을 재현한 공간이 있고, 몇 가지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 미디어아트 작가의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임진각은 분단의 아픔이 있다. 달리기를 멈춘 철도 끝에는 임진강이 흐르고, 그 주변에는 철조망이 처져있다. 철조망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평화의 리본이다. 하나씩 매달기 시작한 소망들이 모이다보면 언젠가는 그날이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오지 않을까?

 내부 전시장만으로는 부족했던 탓일까? 야외전시장을 만들고 증기기관차의 녹슨 파편들을 전시해놓았다. 옆에는 이들과 운명을 함께 했을 법한 임진각역 표지판도 세웠다. 개성이 2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단다.

 ‘DMZ 평화의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매일 2회씩 개방되는데 온라인으로 신청을 해야만 가능하단다. 하나 더. 안내도에 그려진 탐방로는 두루누비에서 배포한 8코스의 트랙과 크게 달랐다. 신청하기 전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발길은 이제 평화누리공원으로 향한다. 지난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조성되었는데, 무심하게 산책하기 딱 좋은 공간으로 다양한 조형물들을 만날 수 있다. 공연장과 전시장 등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을 갖지만 그보다는 99만 평방미터나 되는 잔디언덕으로 대변되는 곳이다.

 무지막지하게 너른 주차장 오른편에는 놀이공원이 들어섰다. 놀이공원 특유의 음악과 함께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 내려앉기를 반복하는 놀이기구도 보인다. 그래선지 임진각이 예전 같지 않게 어수선해졌다. 아니 삼일절 황금 연휴를 맞아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 탓일 수도 있겠다.

 주차장의 끄트머리에는 해병대 장단·사천강 전투 전승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6.25전쟁 당시 판문점에서 임진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에서 불과 5,000여 명의 병력으로 중국군 4 2,000여 명의 4차례에 걸친 공격을 격퇴하며, 수도권 및 파주 일대를 성공적으로 지킨 해병대의 대표적인 전투다.

 평화누리공원은 넓은 잔디밭과 바람개비 언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이다. 3,000여개의 바람개비를 심어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평화를 향한 바람을 보여준다. 또한 공원 곳곳에 평화를 주제로 한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관광객들에게 힐링과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평화누리공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상징적인 통일 부르기이다. 최평곤 작가의 작품으로 흡사 거인들이 북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통일을 향한 나지막하고 강렬한 호소를 담았다고나 할까?

 바람의 언덕 아래, 연못에 자리 잡은 포비(FourB) 평화누리점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로 특별한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평화누리 야외공연장. 공원은 크게 음악의 언덕과 바람의 언덕으로 나뉜다. 음악의 언덕에는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잔디광장과 수상 야외공연장이 있다. 자연 친화적 공간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광장처럼 얕은 경사를 따라 펼쳐진 너른 초원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국적이다. 평화누리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저런 잔디언덕을 걸으며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을 찾아가며 감상하는 것이다.

 실향민들의 소망을 담은 '이제 만나러 갑니다. 소망함'이다. 채널A의 프로그램 이름이기도 한데, 실향민과 탈북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았단다. 60여년의 그리움이 담긴 편지와 선물은, 통일이 되는 그날 북한의 가족들에게 전하려 한다나?

 이경림 작가의 솟대집이다. 사람을 품어 안고 평화와 안녕의 염원이 자라는 공간을 상징화했다고 한다.

 둥그렇게 돌기둥들이 늘어서있다. ‘통일기원 돌무지 조형물이라고 한다. 기원의 의미를 담은 장승과 돌무지를 현대적으로 재현하여 만들었단다. 1만원의 기부금(북한 어린이 돕기)을 낸 이들의 희망 메시지나 소망의 글을 석판에 새겨 기둥에 부착하면, 여러 개의 석판이 모이면서 하나의 돌무지로 완성되는 기획 의도다. 하지만 참여 부족으로 흥행이 실패하면서 30개의 원형 기둥 대부분은 벌거숭이처럼 남아 있었다.

 () 김기태 경감은 한국전쟁 당시 고랑포 지서 탈환을 위해 출동했다가 북한군과 전투 중 전사한 전쟁 영웅이다.

 저 팬텀기의 이름은 ‘F-4D 하늘의 도깨비로 적혀 있었다.

 평화의 발이란다.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DMZ에 맨발로 첫 발을 살포시 내딛는 형상으로, 북한의 8.4 DMZ 지뢰도발로 잃은 장병의 다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단다. 아울러 8.4 DMZ 작전에 참가했던 육군 용사들의 군인정신과 전우애를 기리고, 평화통일을 만들어가기 위한 민··군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11 : 15. 임진강역으로 되돌아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7코스는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12km  9km나 단축했다. 아니 단축시간을 이용해 황희선생유적지(반구정)와 임진각국민관광지에 들러 선현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접해보고 싶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나저나 GPX트랙은 7.75km 2시간 15분에 걸었다고 표시하고 있었다. 반구정과 임진각을 둘러보느라 4km를 더 걸을 셈이다.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손가락으로 ‘V’자까지 만들어댄다. 맞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구간을 대폭 줄이는 대신, 선현이 남긴 옛 얘기에 더해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까지 느긋하게 엿봤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DMZ 평화의길 6코스(성동사거리  낙하 IC)

 

여행일 : ‘25. 2. 15()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일원

여행코스 : 성동사거리프로방스마을자유로만우천오금리썰매장문지리535 카페낙하 IC(거리/시간 : 11km, 실제는 헤이리 투어 포함 13.44km 3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성동사거리(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자유로(국도 77호선) 성동 IC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만나는 첫 번째 사거리가 성동사거리이다. ‘평화의길 안내판(인증 QR코드)’은 프로방스마을 진입도로의 초입에 세워져 있다.

 성동사거리를 출발 임진강의 언저리를 따라 낙하 IC까지 동북진하는 11km의 여정이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프로방스마을과 임진강 하류의 습지가 주요볼거리. 짬을 조금 내면 헤이리예술인마을에 들러 이색적인 분위기를 맘껏 즐길 수 있다.

 08 : 15  09 : 00. 트레킹을 나서기 전, 파주의 명소로 꼽히는 헤이리 예술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들머리인 성동사거리에서 4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잠깐이면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헤이리 예술마을은 국내 출판인과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만든 공간이다. 현재 미술인·음악인·방송인·영화인·출판인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과 문화예술 비즈니스 종사자 등 380여 명이 저마다의 콘텐츠로 마을을 가꾸어 가는 중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꼭 가봐야 할 올해의 한국관광 100 헤이리 예술마을을 선정했다. 트레킹을 나서기 전 들른 가장 큰 이유이다. 올해로 7회째를 맞는 한국관광 100은 한국의 대표 관광지를 2년에 한 번씩 선정해 홍보하는 사업이다. SNS 검색량 등 빅데이터 분석과 3차에 걸친 관광분야 전문가의 서면·현장 평가를 거쳐 선정한다.

 마을 면적이 15만 평이나 되므로 미리 어느 곳을 갈 지를 정해놓지 않으면 찾아다니다 지칠 수도 있다. 나는 지도까지 준비해서 찾아갔지만, 길을 헤매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롯데월드 어드벤처의 연면적이 175,948 평이라면 그 규모가 대충 짐작 갈지 모르겠다.

 요즘은 주택이 머무르는 공간으로 다가 아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힐링 공간으로서의 기능이 더 부각된다. 그래선지 신도시를 만들 때는 호수부터 먼저 만드는 게 추세다. 헤이리예술마을도 다를 게 없었다. 중앙에 인공호수를 두고 빙 둘러 마을을 만들었다. 그러니 시간이 부족할 경우 4~7번 게이트 중 하나로 들어가 호수(갈대광장)’ 주변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면 가장 알찬 투어가 될 수 있다.

 호숫가 갈대광장. 글자 조형물이 헤이리 예술마을의 중심임을 알려준다. 야외무대를 갖추고 있어 가끔 공연이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헤이리는 문화예술의 생산·전시·판매·거주가 함께하는 통합적 개념의 특수한 공동체 마을이다. 수많은 갤러리·박물관·공연장·카페·서점·아트숍·레스토랑, 그리고 예술인들의 창작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같이 10시에 문을 열고 있어 외관을 눈에 담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투어의 첫 만남은 한길 책박물관이다. 인문학 출판을 선도해 온 한길사에서 운영하는 책 박물관이다. 유럽의 고서(17-19세기), 윌리엄 모리스(초서 저작집), 귀스타브 도레, 윌리엄 터너, 생텍쥐페리 등 유명 예술가들이 남긴 희귀 서적과 아트북을 소장하고 있단다.

 헤이리 투어는 건축물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건물, 지형을 그대로 살려 비스듬히 세워진 건물, 사각형의 건물이 아닌 비정형의 건물 등 각양각색의 건축물들이 개성을 뽐내며 서있다. ‘2020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한향림 도자미술관도 그중 하나다. 이정호이사장과 한향림관장이 설립한 ‘Jay & Lim Collection’을 통해 수집해 온 1,000여 점의 국내·외 현대 도예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단다. 건물에는 전시장 말고도 도자 체험장과 아트숍, 카페가 들어서 있다.

 건축가 박진희가 설계한 아트센터 화이트 블럭(White Block)’은 미국건축가협회 건축디자인상(2011)과 제1회 파주시건축문화상(2013) 등을 받았다. 6개의 대형 전시실에서 다양한 현대미술을 보여준다고 한다.

 지하에 들어서있는 제이제이커스텀(JJCUSTOM)’. 이태리산 최고급 베지터블 통가죽을 이용한 핸드메이드 업체라고 한다. 집사람에게 줄 소품이라도 하나 건지고 싶었지만 이 역시 문이 닫혀있었다. 하긴 해외여행 때 사준 꽤 비싼 가죽 재킷도 옷장에서 365일 내내 쉬고 있지만...

 27회 한국건축가협회상에 빛나는 갤러리 MOA’는 영국 유니버스 사에서 출판한 ‘1001개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세계 건축물에도 포함되었을 정도란다. 21세기 국내외 예술계를 선도할 실험정신이 강한 작가들을 선별하여 전시 및 세미나를 개최해오고 있단다.

 벽봉 한국장신구박물관. 경기도 무형문화유산(18) 옥석(장신구)장 김영희씨가 조선시대의 왕실과 민가에서 사용하던 장신구를 오례(상례·가례·빈례·군례·흉례)로 분류·전시해 놓은 공간이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 100여 개국 2000여 점의 민속 악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악기 설명과 함께 전시된 전통 의상을 입은 인형과 풍물, 그림들이 각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단다. 일부 악기는 직접 연주해 볼 수도 있다나?

 타임앤블레이드박물관(The Museum Time & blade). 시계와 칼을 테마로 한 이색적인 박물관이다. 18세기에 제작된 시계부터 작은 부품들, 제작 도구까지 알기 쉽게 전시해 놓았단다. 시계와 칼을 통해 인류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나?

 코카콜라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다는 잇츠 콜라박물관. 일산에서 코카콜라 카페를 운영하던 김재학 대표가 확장·이전해왔다고 한다. 빈티지존, 키친존, 보틀존, 익시피리언스존 등에서 다양한 전시물을 만날 수 있단다.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 1970년대부터 40여 년간 라디오 DJ로 활약한 아나운서 출신 황인용이 수집한 빈티지 오디오와 LP, CD 컬렉션을 기반으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1층은 음악 감상실, 2·3층은 미술작품 전시 공간으로 꾸며졌다. 하지만 문이 닫혀 들어가 볼 수는 없었고, 대신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고별방송(1980 11 30 TBC KBS에 강제 편입되면서) 멘트를 떠올리며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인가 봅니다. 남은 5분이~, 남은 5분이~. 남은 5분이 너무 야속합니다.>

 헤이리란 지명은 인근 지역에서 불리던 금산리 농요의 받음 구 후반에 나오는 에 헤이 에 헤이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농요의 흥을 받아서일까? 자연이 만든 굴곡을 따라 구불구불 나있는 길가에는 카페가 무척 많이 들어서 있었다. 대부분이 갤러리를 겸하는 카페들이다.

 이곳 헤이리는 인사동(2002)과 대학로(2004)에 이어 2009 12월에 세 번째로 문화지구로 지정되었다. 그런 자부심인지는 몰라도 헤이리의 Barista들은 커피를 예술로 여기며 빚고 있었다.

 그 화룡점정은 귀천이 아닐까 싶다. ‘천상병 커피라는 브랜드로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천상병 시인은 막걸리 한 잔, 담배 한 갑이면 족했던 분이었다. 그가 커피도 좋아했었나보다. 아님 그의 후손 중 누군가가 저 카페를 열었을 테고.

 헤이리 마을을 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걷는 것이다. 그러다 예쁜 건축물을 만나면 카메라에 담고 마주치는 미술관에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면 된다. 그게 지루해졌다면 산책을 나서면 된다. 1km쯤 되는 헤이리 노을숲길(한향림 도자미술관 뒷산)’을 올라 사방으로 탁 트이는 경관을 만끽할 수도 있고, 예술작품들로 치장된 마을길을 걸어보는 것도 권할만하다.

 산책로인 마음이 닿길은 헤이리가 자랑하는 에코힐링로드라고 했다. 국내 최초로 마을과 기업(현대자동차)이 손잡고 만든 길이기도 하단다. 그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자동차 조형물을 떡하니 전시해놓았다.

 이밖에도 다양한 작품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김기철, 정승윤, 김태균 등 많은 작가들이 참여했는데 걷고 싶은 길, 걷다보면 문화와 예술이 느껴지는 길, 그리고 힐링이 되는 길을 목표로 조성했단다.

 저 조형물에서 헤이리 소리를 떠올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헤이리 헤이리 어허야>, 서로 주거니 받거니 메기고 되받아치는 형식의 노래로 혼자서도 부르고, 논 맬 때도 부른다는 노동요다. 그래! 더 늙기 전에 부지런히 걷고, 느끼며 맘껏 즐겨보자.

 09 : 00. 헤이리마을 투어를 마치고 평화의길(6코스) 시점인 성동사거리로 향한다. ‘게이트 3’으로 빠져나왔으니 헤이리로(남서쪽 방향)’를 따라 400m쯤 걸어 나오면 된다.

 09 : 04. 국립민속박물관(파주). 15개 수장고에 100만여 점의 소장품과 아카이브 자료를 보관하고 있으며, ‘열린 수장고 보이는 수장고를 통해 유물을 일반에 공개한단다. 하지만 개장 전이라서 외관만 눈에 담으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09 : 08. 성동사거리에 도착하니 평화누리길의 낯익은 게이트가 반긴다. 함께 가는 경기둘레길의 이정표(반구정 20.1km/ 동패지하차도 15.3km)와 스탬프보관함도 눈에 띈다. 반면에 평화의길은 안내판 하나뿐이다. 더부살이의 서러움이라고나 할까?

 이곳 파주는 메주콩으로 흔히 알려진 장단콩의 고향이다. 여기서 장단은 콩의 품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단 지역의 콩이란 뜻이다. 지금은 파주시 장단면이란 지명으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전에는 경기도 장단군(대부분 민통선 안에 있다)이었다. 그래선지 장단콩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여럿 세워놓았다.

 장단콩을 브랜드로 내건 음식점들도 눈에 띈다. 메인 요리는 물론 장단콩으로 만든 두부. 두부(豆腐) BC 2세기경 한나라(중국) 회남왕 유안(劉安)이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그 원료인 콩은 식물 중 단백질을 많이 함유한 대표 고단백 작물이다. 대두 기준 40% 정도는 지방, 33%는 단백질, 27%는 탄수화물이다. 단백질의 품질도 좋다. 고기 한 점 없는 농경민족의 상차림에서 꼭 필요한 단백질 반찬이었던 셈이다.

 09 : 10. ‘새오리로(북서쪽 방향)’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오르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파주 맛고을 장단콩 거리라는 지명답게 두부요리를 메인 메뉴로 내건 음식점들을 중심으로 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서있었다.

 09 : 18. 길가에 늘어선 음식점들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스테이크에 피자, 파스타 같은 평소에 자주 찾는 메뉴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걷다보면 성동리(城洞里) 큰말에 이르게 된다. 파주의 또 다른 명소인 프로방스 마을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09 : 20  09 : 38. 프로방스 마을. ‘하트형 대문으로도 모자라 러브인 프로방스 빛축제라는 자랑까지 매달았다. 프로방스 마을에 야간 경관 조명등을 설치해 '빛 테마 거리'로 꾸며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파주시는 프로방스 마을을 아름다운 정원과 이야기가 있는 벽화, 야간 조명이 조화를 이루며, 유럽풍 베이커리와 카페, 이탈리안 레스토랑, 한국적인 음식 등 전세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트렌드를 선도하는 패션, 생활용품, 체험시설 등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된 테마형 마을이기 하단다. 따뜻한 색을 가진 독립된 건물에서 각각의 컨셉을 갖고 운영되는 상점들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나?

 안으로 들어서면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기자기한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은 1996 프랑스 레스토랑이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주변에 각종 음식점·제과점·액세서리·의류판매점들이 들어섰고, 현재는 식음료·리빙&잡화·패션&잡화 등 37개의 아이템으로 상점이 운영되고 있단다.

 25년쯤 전인가? 세미나 참석차 들렀던 마르세유에서 이색적으로 다가오던 주택을 이곳에서도 만났다. 프랑스 관계자의 설명으로는 따가운 지중해의 햇볕을 가리기 위해 창문 밖에 나무문을 하나 더 둔다고 했었다.

 프로방스는 프랑스 남동부의 지중해 연안과 이에 접한 내륙지역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그래선지 소담스런 정원은 프랑스풍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을까? 엉뚱하게도 프로방스가 아닌 파리 중심가에 있는 에펠탑까지 옮겨놓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마치 영화 속 옛 유럽을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동화 속 배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파스텔 톤의 건물들은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섬세하게 꾸며졌다. 저런 풍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축제 등을 기획 4계절 내내 방문객에게 다양한 문화 공연과 새로운 체험, 아름다운 이벤트를 선사한단다.

 아쉬운 점은 마을이 텅 비어있다는 점이다. 이른 시간이어선지 문을 연 가게가 하나도 없었고, 외부 방문객도 평화의길 트레킹을 이어가도 있는 우리 일행뿐이다. 가게에 들어가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명색이 명품 마을인데 포토존 하나 없겠는가. 그중에서도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로 풀어놓은 고백 터널이 눈길을 끌었다. ‘따스한 눈 맞춤을 시작으로 부드러운 손잡기, 포근하게 안아주기, 달콤하게 뽀뽀하기, 정열적인 딥 키스(deep kiss)하기를 순차적으로 해나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집사람이 두 번째 코스부터 도망가기에 바쁜 걸 보면, 고백은 아무에게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터도 준비되어 있었다. 다양한 놀이시설과 동물들을 보유한 프로방스 펠리씨떼는 아이들이 동물들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체험형 관광농원이라고 했다.

 유럽의 고도(古都)를 돌아다니다보면 투어용 마차를 흔하게 만난다. 그런 마차가 프로방스 마을에도 있었다. 비록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게이트를 통해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프로방스마을 투어는 끝을 맺는다. 프로방스 마을은 잘 꾸며진 테마형 관광지가 분명했다. 하지만 가게 문이 열리지도 않은 시간에, 그것도 트레킹 도중에 잠시 스치듯 들렀으니 주마간산(走馬看山)의 대표적이 사례라 할 수 있겠다.

 09 : 38. 못다 본 풍경들을 아쉬워하며 다시 길을 나선다. 아까처럼 새오리로를 따라 북진한다. 옛 지명인 교하군 신오리면(新五里面)에서 이름을 얻어온 2차선 도로이다.

 09 : 42. (힐하우스)버스정류장 옆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새오리로와 헤어져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샛길로 들어간다.

 고개를 넘자 희미하게나나 두물머리의 드넓은 물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짙은 미세먼지 탓이다. 아무튼 한강과 임진강이 저곳에서 합쳐지면서 조강으로 변한다. 이즈음 어화둥둥이라는 화로생선구이 식당을 지나기도 한다.

 09 : 51. 길은 임진강의 강둑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가지를 못한다. 하지만 둑 위로 난 자유로에서는 자동차들이 잘들만 달려댄다.

 주인과 더부살이의 차이점이랄까? 시점과 종점의 방향만 적어놓은 평화의길 이정표와는 달리 경기둘레길 이정표는 거리는 물론이고 지도까지 반듯하게 표시해 놓았다.

 이후부터는 자유로와 나란히 가는 농로를 따라간다. 자유로의 아래로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있다.

 09 : 56. 대동리나들목. 길을 걷다보면 자유로에서 빠져나오는 이런 진출입로를 심심찮게 만난다.

 10 : 00. 접경지역의 오지일 것으로 여겼던 대동리(大洞里)’는 예상 외로 큰 마을이었다. 반듯반듯하게 지어진 건물들도 대도시 근교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하긴 대동리가 본디 임진강가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니 어련하겠는가. 참고로 대동리는 지금은 없어진 교하군의 신오리면에 있던 마을이다.

 자유로 아래로 난 굴다리도 심심찮게 만난다. 하지만 이중삼중으로 막혀있어 통행은 할 수 없다. 하긴 민통선의 역할을 하는 통로이니 어련하겠는가. 저 지하통로를 빠져나가면 임진강이고, 군사분계선이 그 물길을 가른다.

 농기계가 우선이란다. 맞다. 이 길은 접경지역의 주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지나다니는 길이다.

 얘기봉의 십자가등탑을 연상시키는 저 철탑의 정체는 대체 뭘까? 애기봉에서 철거된 등탑을 이곳으로 옮겨왔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해본다. 참고로 30 높이의 애기봉 등탑은 1971년 만들어진 뒤 성탄절을 즈음해 트리로 치장해 불을 밝히다 2004년 상호 비방을 중단하기로 한 남북합의 이후 중단됐다. 그러다 연평도 포격사건을 계기로 2010 12월부터 재점등했으나 2014년 안전을 이유로 철거되었다.

 정체모를 시설물들을 만나기도 한다. 원통형의 관을 박은 뒤, 그 위에다 알 수 없는 숫자들을 적어놓았다.

 10 : 11. 걷기 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시설(화장실)도 눈에 띈다. 쉼터로 제격이었던지 환경정화(노인일자리인 듯)를 나온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이후부터는 아예 자유로와 함께 간다. 차량들이 내는 소음으로 인해 귀가 먹먹해지는 구간이다. 많은 차량들이, 그것도 누가 빨리 달리는지 시합이라도 하려는 듯 번개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고통이 오래가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잠시 후 길은 둑길 아래로 다시 내려간다.

 두루누비는 6코스를 임진강 하류의 습지를 조망할 수 있는 길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레킹을 마칠 때까지 임진강 하류는 만날 수 없었다. 자유로에 막혀 먼발치에서도 구경할 수 없다. 그 아쉬움을 갈대로 가득한 수로로 대신해 본다.

 10 : 20. 대동리·만우리 나들목. 진출입 차량이 많은지 도로 바닥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나들목 아래로 난 굴다리. 자유로가 민간인 출입 통제선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 바퀴자국이 선명한 걸로 보아, 허용된 사람이나 차량들에 한해 출입이 허락되는 모양이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농로를 따른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밋밋한 구간이다.

 10 : 26. 평화누리길 쉼터. 자전거 거치대는 기본, 파고라에 벤치를 20여 개나 놓아둔 큼지막한 쉼터이다.

 평화누리 자전거길 안내도는 파주구간을 나타내고 있었다. 파주출판도시휴게소에서 장남교까지 57km 2개 코스(4코스·5코스)로 나누어 놓았다.

 쉼터 근처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자전거길은 계속해서 자유로의 가장자리를 따라가고, 평화의길은 둑 아래로 난 농로로 내려간다.

 이어서 나타난 굴다리는 자동차 통행이 더 빈번한 모양이다. 바닥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날 정도다. 통로 끝에서는 병사가 보초까지 서고 있었다. 살짝 비켜나게 사진을 찍은 이유다.

 발길은 이제 대동리에서 만우리(萬隅里)’로 넘어간다. ‘임진강가의 큰 모퉁이에서 유래된 지명답게 마을 대부분이 평탄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우리로 들어서자 들녘이 넓어졌다. 그래선지 낙곡을 주워 먹고 있는 기러기 떼가 눈에 들어온다. 인기척에 놀란 한 떼는 요란한 날갯짓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다.

 10 : 39. 오금 양·배수장. 수문이 7개나 되는 걸로 보아 만우천의 물줄기가 제법 큰 모양이다. 하나 더, 반대편 그러니까 만우천이 임진강에 합수되는 지점에는 질오목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건너편에서 길이 또 나뉘고 있었다. 평화의길은 오른쪽으로 간다.

 평화누리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이한 이정표. 둘 모두 평화누리길인데도 한쪽은 자전거 라이더, 다른 한쪽은 걷기 여행자들만 이용하도록 했다.

 잠시지만 만우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월롱면(파주시) 덕은리에서 발원 북서방향으로 흐르다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길이 9.5km의 지방하천이다. ! 농어촌공사에서 내건 현수막에는 탄포천이라 적고 있었다. 만우천의 다른 이름인 모양이다.

 10 : 42. 평화누리길 오금리 쉼터’. 아까보다 규모는 작지만 대신 화장실을 갖추었다. 안내판은 소울원(疏鬱園)과 용주서원, 파주향교, 통일공원, 반구정을 주요 볼거리로 꼽고 있었다. 다음 구간을 걸을 때 눈에 담을 수 있는 행운을 기대해본다.

 10 : 47. 만수천을 300m쯤 거슬러 올라갔을까, 이제 그만 물가를 벗어나란다.

 냇가를 떠난 길은 나지막한 구릉지로 파고든다. 오금리로 들어가는 길이어선지 오금로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10 : 50. 잠시 후 오금리(吾今里)로 들어섰다. 임진강이 굽이져 흐르는 곳이라 하여 오그미, 오고미 등으로 불리다 오금리가 됐다. 자연부락으로는 오금, 골말, 모팅 등이 있다는데, 어느 부락을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을은 나지막한 언덕 두 개를 끼고 형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고개에서 만난 늙은 향나무가 눈을 호사시켜준다.

 마을은 주택보다 창고가 더 많아 보인다. 대형 창고들이 우후죽순처럼 마을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10 : 58. 오금리 썰매장. 생태관광 마을로 거듭난 질오목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시설이다. 도심 속 야외 스케이트장처럼 큰 빌딩에 둘러싸여 있지도, 화려한 불빛도 없지만 논 썰매장에서 보이는 고즈넉한 농촌 풍경은 그 옛날 시골에서 얼음 썰매를 타던 추억을 새록새록 불러일으킨다.

 외딴 곳이어선지 손님은 별로 없었다. 빈 논에 물을 대는 건 기본, 직접 나무를 깎고 날을 붙여 썰매를 만들고 얼음판을 정리해 썰매장을 조성한 마을 주민들의 노고가 헛된 것 같아 안타깝다.

 썰매장을 빠져나오니 이번에는 양식장이 반긴다. 임진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 담수어를 양식하고 있단다.

 11 : 05. 애견 테마파크인 자유로 멍 놀러와’.

 몇 걸음 더 걸으면 자유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난 도로를 다시 만난다.

 11 : 11. 카페 문지리 585’. 식물원 카페답게 엄청나게 큰 규모를 자랑한다. 카페 내부가 나무와 꽃들로 가득한데, 거기다 햇살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뷰를 자랑한단다. 그러다보면 식물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버린다나?

 계속해서 자유로의 가장자리를 따라간다. kakaomap은 이 근처에 탄현야구장을 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산으로 올라간 범선. 아쿠아랜드라는 잘 나가던 업체가 지은 레스토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잉 투자로 인한 자금경색으로 부도 처리된 후 방치되어 있는 상태란다.

 11 : 23. 탄현국가산업단지 나들목. 이곳에도 평화누리길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kakaomap은 이곳에서 오른쪽을 가리킨다. 산업단지까지 갔다가 종점인 낙하 IC로 가란다. 하지만 두루누비에서 내려 받은 앱은 계속해서 자유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갈 것을 지시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곳의 굴다리도 장애물이 없었다. 허가받은 차량에 한해 통행이 허용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굴다리의 민간인 통과는 선택이 아닌 필수일 수밖에 없겠다. 자유로와 임진강 사이에 들어선 저 너른 들녘에서 누군가는 농사를 지어야하지 않겠는가.

 11 : 32. 낙하 IC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엘지로(77번 국도)를 따라 낙하리(洛河里)’로 빠져나온다. 옛 교하군 탄포면 지역으로 임진강 옆에 있던 낙하원(洛河院)에서 얻어온 지명이다. 장단을 거쳐 개성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진출로 부근에는 자유로 레저워터파크가 들어서 있었다.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쉬다가기에 딱 좋은 곳으로 알려진다.

 11 : 42. 낙하리(아랫말) 입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헤이리 마을을 포함 13.44km 3시간 30분에 걸었다. 명품 관광지인 헤이리마을과 프로방스마을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평화의길의 완주인증 QR코드는 버스정류장 옆 평화의길 이정표에 붙여놓았다. 코스의 지도가 들어간 안내판 하나쯤 세워놓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트레킹을 마친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아니 그녀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를 향해 미소를 보낸다. 생선의 가시를 발라주는 등 귀찮은 일을 할 때마저 웃어주는 그녀의 마음이 부부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아주 작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속에는 배려와 사랑의 진정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작은 도움으로 서로를 편하게 하고,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관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부부의 의미일 테니 말이다.

 

 

DMZ 평화의길 5코스(고양종합운동장-성동사거리)

 

여행일 : ‘25. 2. 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일산서구) 대화동·가좌동 및 파주시 동패동·송촌동·탄현면 일원

여행코스 : 고양종합운동장가좌근린공원동패지하차도심학산둘레길파주출판단지공릉천살래길통일동산성동사거리(거리/시간 : 21km, 실제는 동패지하차도에서 출발 16.7km 5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고양종합운동장(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자유로(국도 77호선) 이산포 JC에서 고양대로로 바꿔 타고 3km쯤 들어오면 고양종합운동장이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보조경기장 뒤쪽에 위치한 휴게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고양종합운동장(휴게공원)을 출발 자유로 언저리를 따라 파주 통일동산까지 북진하는 21km의 여정이다. 도심에서 출발해 숲길과 시골길, 공원 등 다양한 길을 걸어볼 수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심학산, 출판단지, 통일동산 등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나 가슴에 담아둘만한 얘깃거리는 없다. 하지만 짬을 조금만 내면 종점 근처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올라 평화통일의 의지들 되새겨 볼 수 있다.

 08 : 20. 실제 출발지인 동패지하차도(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동).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코스를 단축하기로 했다. 아니 이름(DMZ 평화의길)에 어울리지 않는 시내구간을 줄였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08 : 23. 동패지하차도 상단(이정표 : 성동사거리 15.8km). 고양시와 파주시의 경계인데, 평화누리길(6코스) 및 경기둘레길(5코스) 시작 지점임을 알리는 다양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평화의길(5코스)’도 뭔가를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점인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6km로 적고 있다. 하지만 두루누비에서 제공한 앱에는 ‘4.95km’로 뜬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안내도는 평화누리길(6코스)과 경기둘레길(5코스)만 표기하고 있었다. 더부살이하고 있는 평화의길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서글픔이라고나 할까?

 08 : 27. ‘산남로를 따라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100m쯤 걸었을까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란다.

 08 : 29. 동서대로(358번 지방도) 하부 굴다리. 평화누리길은 6코스의 시점을 이곳으로 삼는 듯 눈에 익은 아치형 대문이 세워져 있었다. 하나 더. 이곳에는 화장실도 설치되어 있다. 다음 화장실은 출판도시를 지나고서야 만날 수 있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꼭 들렀다 가도록 하자.

 길은 심학산의 정상을 향해 가파른 오름짓을 시작한다. 시작부터 겁을 준다고나 할까?

 08 : 33.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잠시 후 심학산 둘레길을 만나게 되고,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평화누리길 6코스는 심학산 둘레길(출판도시길 순환코스)’의 남쪽 코스를 따라간다. 하지만 안내판은 북쪽 코스도 타볼 것을 권하고 있었다. 정상에 서면 한강의 유장한 물줄기는 물론이고 날씨라도 좋을라치면 북한의 송악산까지 코앞으로 다가온단다.

 심학산은 한강을 향해 솟아오른 해발 194m의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곳곳에 바위가 포진하고 있는데다 경사까지 급해 산을 오르려면 상당한 체력이 요구된다. 그래서일까? 탐방로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둘레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08 : 48.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이정표 등의 시설물은 물론이고, 탐방객들을 위한 쉼터도 여럿 만들어놓았다. 하긴 심학산 둘레길 축제까지 열린다니 어련하겠는가. 주민들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서라지만 심학산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작년에는 1026일에 열렸다나?

 08 : 55. 산머루가든 갈림길(이정표 : 낙조전망대 1,699m/ 산머루가든 660m/ 배수지 1,387m). 심심찮게 길이 나뉘지만 그때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을 찾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09 : 08. 약천사 갈림길(이정표 : 배밭정자 1,592m/ 약천사 260m/ 전원마을 516m)도 그중 하나다. ‘약천사(藥泉寺)’ 1932 (고려시대의 절터에) 법성사로 중창되어 1995년 약천사로 개명한 앳된 사찰이지만 13m 크기의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로 유명세를 탔다. JTBC 주말드라마 나의해방일지의 촬영지이자, 인기배우였던 고 박용하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길은 큰 오르내림이 없이 이어진다. 산책하기 딱 좋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배낭도 없이 걷고 있는 시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다. 가끔은 이런 가파른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데크 계단이나 밧줄 난간을 설치해 오르내리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

 09 : 24. 낙조전망대. 소나무와 신갈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숲길의 끝, 서쪽으로 시야가 확 열리는 곳에 세워놓은 전망대이다. 한강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낙조라는 이름을 얻었다.

 난간에 서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장중히 흐르는 한강 너머, 김포 한강신도시를 시작으로 하성면 일대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 중심에 봉성산과 전류리포구가 있다. 3코스와 4코스를 답사하면서 눈만 들면 심학산이 차올랐었는데, 이번 5코스는 반대로 김포의 드넓은 들녘과 전류리포구를 눈에 담으며 가는 모양새이다.

 동쪽에서 굽이친 한강의 물줄기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뻗어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밀물일 땐 바닷물이 이곳까지 오기도 한단다. 봉성산, 태산, 문수산 등 앙증맞은 멧부리들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시선을 조금 더 비틀면 저 멀리 북녘에 황해도 개풍군 관산반도가 희끄무레하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리듬감을 더해주어 지루할 틈이 없다. 거기다 널따란 바위들이 등산로 곁에 군데군데 놓여 있어 좋은 쉼터가 된다. 이 구간에서는 추락위험 경고판까지 만날 수 있었다.

 09 : 34. ‘배밭 정자란다. 요 아래 있는 배 과수원에서 이름을 얻어온 모양인데, 사통팔달로 길이 나뉘는 지점답게 정자 말고도 이정표와 벤치, 운동기구 등 다양한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배밭입구(510m)’ 방향으로 내려간다. 완만한 산길을 5분쯤 내려가자 한껏 덩치를 부풀린 한강이 얼굴을 드러낸다. 오두산 아래서 임진강과 합쳐지면서 조강으로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09 : 43. 심학산등산로 입구. 4개의 등산길과 둘레길 코스를 그려 넣은 심학산 종합안내판과 이정표, 평화누리길 6코스(출판도시길)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심학산의 원래 이름은 수막산(水幕山)’이다. 넓은 평야와 구릉지에 한강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산이란 뜻이란다. 홍수 때 산이 깊이 잠겼다거나 바위가 깊숙이 포진해 있다며 심악산(深嶽山)’ 심악산(深岳山)’, 지세가 거북의 등딱지를 닮았다며 구봉산(龜峰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 이름인 심학산(尋鶴山)’은 숙종이 애지중지하던 학() 두 마리 도망갔다가 이곳에서 잡혔다는데서 유래됐단다. 하지만 이는 1913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전설급동화(朝鮮傳說及童話)’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일제의 곡해(曲解) 또는 의도적인 변경으로 보는 이유다. 고로 대동여지도 등 일제 이전의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심악산(深岳山)’으로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09 : 46. 몇 걸음 더 걸어 도착한 마을에는 두어 개의 카페가 들어있었다. 참고로 이곳 책마을에는 인포떼끄’, ‘보물섬’, ‘헤세 같은 입소문을 탄 카페가 여럿 있다. 하나 같이 책과 카페를 합쳐놓은 공간이다. 책을 꼭 구매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에 드는 책 한권 골라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읽다 가면 그만이다. 그러다 좋아하는 작가라도 우연히 만나게 될 지도 누가 알겠는가.

 09 : 52. 다리(이름표가 없는)를 건너 출판단지로 들어간다. 정식명칭은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기획부터 인쇄까지 출판의 전 과정을 해결 할 수 있는 국가산업단지이자 1만여 명의 종사자들이 250여 개 출판관련업체에서 일하는 책 마을이다. 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전 과정이 '원스톱'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비용이 절감되고 속도도 빨라졌다. 덕분에 시내 곳곳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구할 수 있다.

 다리는 출판단지 유수지를 가로지른다. 유수지(遊水池)란 가뭄이나 홍수 때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 마련한 천연 또는 인공의 저수지를 말한다. 출판단지를 가로지르는 하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보를 막아 인공의 저수지를 만들어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09 : 54. 이채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문발로를 따라간다. 파주출판도시가 품은 가장 큰 도로인 문발로를 중심으로 위 아래로 뻗은 길들을 따라 출판사와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크고 작은 책방(완전 매력적인 가격으로 할인 판매한다), 그리고 북카페(역시 할인판매)와 아트샵, 박물관 등이 자리한다. 길가에 늘어선 건축물들도 하나의 볼거리이다. '좋은 공간에서 좋은 시각, 좋은 글, 좋은 디자인이 나오고 이게 곧 바른 책을 펴내는 밑거름이 된다는 믿음에서 도시 전체를 멋진 건축물들로 채웠다고 한다. 덕분에 책의 도시이자 건축의 도시로 불린다나?

 광화문의 교보문고 앞 빗돌에 새겨진 문구를 책 마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맞다.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책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전달된 책은 읽혀서 사람을 변화시킨다. 사람을 가장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매개체가 인 것이다. 그래 이곳은 상상하고, 만들고, 공감하고, 나누는 책 마을이었다.

 09 : 59. 심학교사거리에서 도로를 횡단한다. ! ‘책 마을은 한적했다. ‘이라는 선입감 때문일까? 인근에 있는 ‘(헤이리)예술인마을이나 영어마을처럼 북적인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단지를 통과하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10 : 04. ‘직지길을 따라 걷다보면 출판단지 근린공원에 이른다. 출판단지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공원으로, 너른 잔디밭과 야트막한 언덕 등 피크닉 명소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 언덕은 지금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수북하게 쌓인 눈 덕분에 눈썰매장이 만들어진 모양이다.

 유수지 쪽에는 탐조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유수지를 찾는 철새 숫자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2023년에 생태모니터링을 했는데 101종의 조류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중에는 큰기러기·저어새·노랑부리저어새·수리부엉이·흰꼬리수리 같은 법정보호종도 포함되어 있단다.

 계속해서 직지길을 따라간다. 아니 8차선의 자유로 2차선의 직지로 사이에 보행로까지 품은 자전거도로를 따로 내놓았다.

 10 : 17. 유수지가 끝나는 곳에 노주교 사거리가 있었다. 머리 위로는 문발 IC’의 고가 진출입로가 얼키설키 지나간다.

 10 : 19. 문발교사거리(이정표 : 성동사거리까지 8.3km). ‘운정신도시 중 최초로 조성된 교하지구로 연결된다는 표식일 것이다. 교하(交河)는 최창조라는 풍수가가 통일 한국의 수도로 추천했던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인 1612(광해군 4)에는 풍수가 이의신(李懿信)이 왕에게 국도(한양)의 기운이 쇠하였고 교하는 길지(吉地)라면서 교하천도론을 적극 개진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계속해서 자전거도로를 따른다. ‘자유로 재두루미길(활자마을 가장자리를 따라 난 도로)’의 사이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차량 통행이 허락되는 듯 꽤 많은 차량들이 길가에 주차되어 있었다. 안전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라는 얘기다.

 10 : 37. ‘재두루미길과 만나는 지점에는 쉼터(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운동기구까지 배치한 걸로 보아 주민들의 쉼터로도 이용되는 모양이다.

 탐방로는 이제 재두루미길을 따라간다. 1차선의 차도를 중심에 두고 양옆에 점선으로 자전거길을 나누어 놓았다.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걸을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10 : 46. 슬슬 지겹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려고 할 때쯤 길은 직각으로 꺾여 마을(송촌동)로 들어간다. 이정표(성동사거리 7.9km/ 동패지하차도 7.9km)가 정확히 절반을 걸어왔음을 알려준다.

 탐방로는 이제 농로를 따라간다. 강변을 따르던 길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고 보면 되겠다.

 길은 두어 곳에서 나뉘고 있었다. 그것도 마을을 전방에 두고도 들녘으로 에돌아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때마다 이정표가 방향을 지시해준다.

 10 : 58. 그렇게 도착한 송촌동’. ‘동곡심방(銅谷心房)’이라는 편액을 건 3층 건물이 반긴다. 마당에는 거대한 석불이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의 설명으로 보아 운주사(雲住寺) 와불(臥佛)’을 모티브로 삼았지 않나 싶다.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운주사는 풍수비보설(風水裨補說)이 근저에 깔려있다.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선복(船腹)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며 선복에 해당하는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세웠다고 한다.

 안내판은 화순(전라남도)의 운주사에 있는 와불(臥佛)’에 얽힌 전설을 전하고 있었다. 운주사에 있는 수많은 불상들의 정점은 대웅전 왼편 산등성이에 누워있는 두 기의 와불이다. 각각 비로자나불좌상과 석가여래불입상인 이 와불은 실제로는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부처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민초들이 그렇게도 일어나기를 염원했던 그 부처님이기도 하다.

 11 : 00. 언덕으로 올라서자 2차선 도로인 소라지로가 반긴다. 탐방로는 소라지로를 따라 북진한다.

 11 : 06.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한강이 자신도 보아달란다.

 동쪽에서 굽이친 한강의 물줄기가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한강은 저 너머 북한 땅을 배경에 둔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끼고 동서로 흘러드는 임진강과 교회(交會)한다. 조금 더 나가보자. 한반도 문명의 젖줄이었던 한강과 임진강은 다시 북에서 유유히 내려오는 예성강을 만나 서해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길가에는 멋진 카페들이 여럿 들어서있었다. 그중에서도 우연히, 설렘이라는 디저트 감성 카페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멀리 보이는 한강 뷰와 통 유리창 밖의 초록뷰를 보며 디저트를 즐길 수 있다는데, 잠시 쉬다가자는 내 부탁을 들은 채도 않고 지나쳐버리는 걸 보면 집사람의 눈에는 별로였던 모양이다.

 메뉴판도 예술로 변할 수 있는가 보다. 이곳만의 시그니처 크림커피와 디저트를 마시다보면 여행의 재미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맞은편에는 ‘Eastern ~ One’이라는 인테리어 소품 창고형 매장도 들어서 있었다. 발길을 재촉하는 집사람의 기세에 눌려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짬을 내 들러보신 이석암 작가님이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할 곳이라고 귀띔해주신다.

 11 : 10. ‘송촌동 종점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간다. ‘소라지로327번길이라는데 2차선이었던 도로가 1차선으로 좁아졌다.

 길이 좁아진 탓인지 도로라기보다는 임도에 가깝게 느껴진다. 고갯마루에서는 살림채(한옥펜션)로 연결되는 갈림길(이정표 : 성동사거리 6.7km)을 만나기도 한다.

 11 : 18. 고개를 넘으면 재두루미길과 다시 만난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도로를 만나자마자 방향을 틀어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11 : 25. 탐방로는 마을(松村洞)을 관통한 다음, ‘재두루미길로 다시 올라서고 있었다. 그리고는 철책으로 둘러싸인 공릉천변을 따라 동진한다.

 11 : 28. 공릉천에는 송촌교가 놓여있었다. 아래로 물만 지나갈 수 있는 특징을 가진 다리다. 공릉천을 따라 침투하는 공비를 막기 위해서라는데, 실제로 침투한 적도 있었단다.

 다리 난간은 윤형철조망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그런데 서쪽을 향해서만 있는 게 아닌가. 하류 쪽은 철책으로 꽉 막혀 있는데 반해, 상류 쪽은 아무 제한 없이 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지금 걷고 있는 이 다리 자체가 민통선인 셈이다.

 공릉천의 상류 쪽 풍경. 공릉천(恭陵川)은 양주 칠봉계곡에서 발원 고양시를 거쳐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서 한강에 합류되는 길이 75km의 국가하천이다. 공릉천은 철새의 낙원으로 알려진다. 송촌대교 일원과 하구에 습지가 발달된 탓에 저어새·흰꼬리수리·재두루미 등의 철새가 관찰되는데, ·고라니 같은 야생동물들도 서식한단다.

 하류 쪽에는 송촌대교가 놓여있다. 힘차게 내달리는 공릉천의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백로와 기러기 떼 등 겨울 철새와 원앙, 비오리 등 천연기념물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리 몇 마리가 전부였다.

 11 : 33. 다리를 건넌 다음에는 왼쪽으로 간다. 이때 공공하수처리시설을 지나기도 한다. 시설의 담장을 끼고 쉼터도 들어서 있었다. 하수처리시설이 비릿한 농업비료 같은 냄새를 스멀스멀 풍긴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리를 잡아도 한참이나 잘못 잡았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탄현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왼쪽에 탄현 시가지가 들어섰다. 시골의 소읍인줄로만 알았는데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11 : 48. ‘소리지로를 빠져나와 지하 차도로 들어간다. ‘자유로에서 필승로로 빠져나가는 진출로 아래로 난 일종의 굴다리다.

 굴다리는 벽면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작품명은 '평화의 삼거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하구 습지 지역의 특성을 그림으로 담았단다.

 굴다리를 빠져나온 다음(이정표 : 성동사거리 2.2km), 이번에는 자전거 길과도 헤어진다. 이어서 통일동산관광특구 도로 표지판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11 : 51. 이후부터는 필승로를 따라간다. 50년 전, 육군 졸병이었던 시절 구호가 필승이었던 것 같은데.

 이즈음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11 : 58. 검단사 입구. 탐방로는 검단사 쪽으로 올라간다. 검단사(黔丹寺) 847(신라 문성왕 9)에 혜소(慧昭) 스님이 창건했다. 혜소는 얼굴색이 검어 흑두타(黑頭陀) 또는 검단(黔丹)으로 불리었는데, 사찰 이름은 그의 별명에서 유래됐단다. 노태우 전 대통령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두루누비(DURUNUBI)에서 제공한 GPX 트랙이나 이정표 등 모든 지표는 검단사 방향으로 가란다. 하지만 난 통일공원 이정표가 가리키는 장준하 추모공원으로 진행할 것을 권한다. 특별한 눈요깃거리나 이야깃거리가 없는 산길을 걷느니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운동가인 장준하 선생의 묘역을 찾아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아서이다.

 1975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사 한 장준하 선생은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혀있었다. 그러다 홍수로 묘가 파괴되면서 2012년 이곳으로 이장하게 됐단다. 공원에는 선생의 행적을 알리는 연혁이 적은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다. 공원 뒤편 산길을 50m쯤 오르면 선생의 묘가 나오는데, 그의 책 돌베개의 이름을 따 봉분을 돌베개로 만들었단다. 아래 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했다.

 11 : 59. 우리부부는 도로를 따라갈 경우 통일동산을 만날 수 없다는 선두대장의 엄포에 헷갈려 검단사 방향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지못해 50m쯤 올라갔을까 이정표(성동사거리 3.5km)가 왼쪽 산자락을 가리킨다. 이어서 초입의 침목계단을 오르자 살래길 표지판이 길손을 반긴다. 파주 시민들이 건강 증진 및 휴식공간으로 많이 찾는 둘레길이다.

 살래길은 엉덩이(또는 몸을)를 살래살래 흔들며 걷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장단콩웰빙마루를 출발 검단사·유승앙브와즈아파트·전망대를 거쳐 축구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에 이르는 4.2km 구간으로 걸어서 1시간30분가량 소요된다.

 검단산(黔丹山, 151.8m)의 허리쯤을 에돌아가는 둘레길은 곱디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은 경사까지 거의 없어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았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곳곳에 놓여있는 벤치나 평상에서 쉬어가면 그만이다.

 검단산은 그리 높지도 않은데다 완만하기까지 해서 누구나 산책하듯 가볍게 나서기 좋은 산이다. 거기에 살래길까지 조성되면서 길은 더욱 고와졌다. 주어진 시간에 따라 코스를 정할 수 있는데, 모든 코스를 다 누빈다고 해도 4-5시간이면 충분하단다.

 12 : 15. 길고 긴 계단 위에서 고려통일대전이 날개를 편 듯한 자세로 내려다보고 있다. 고려 왕과 충신들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이 내다보일 것도 같은 산등성이에 걸터앉아 옛 영화를 회상하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미공개 시설이라고 하나, 건설업체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되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무쪼록 잘 마무리되어 또 하나의 귀한 구경거리로 탄생했으면 좋겠다. 사진은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찍었다.

 12 : 22. 조금 더 걸어 살래길이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지점에 이르면, 나지막한 언덕 위에 만들어놓은 전망대가 길손을 맞는다.

 나무 계단을 오르면 앞이 탁 트이면서 오두산 정상의 통일전망대로부터 성동리를 지나 헤이리까지 뻗어간 오두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허리를 자유로가 지나간다. 길을 뚫기 위해 오두산 줄기를 뭉텅 잘라냈다.

 2021년에 개장했다는 장단콩 웰빙마루도 눈에 들어온다. 파주를 대표하는 특산품인 장단콩을 테마로 생산-가공-유통-판매와 체험-관광-문화가 어우러진 6차 산업의 농촌 융복합단지다.

 12 : 25. ‘호텔지구에 가로막힌 탐방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골짜기로 들어간다.

 산길은 한참이나 더 이어지고 있었다. 검단산 산책로는 크게 살래길과 능선길로 나누어진다. ‘평화의길은 이중 살래길만 오롯이 따른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탐방로가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이유이다.

 참호나 교통호 같은 옛 군사시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시설보수를 해온 듯 옛 모습 그대로이다. 군사적 요충지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12 : 48. ‘이제 그만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즈음에야 유아숲체험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테마별 숲속 놀이시설인데, 유아숲지도사가 참여하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단다.

 12 : 57. 골프하우스인 ‘Bunker Hill’을 지나자 이번에는 통일동산이 맞는다. ‘통일동산(統一東山)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 제시된 평화시 건설구상의 일환으로 조성된 안보·관광단지이다. 그 규모가 168만여 평이나 된다니 성동리 일대가 모두 포함된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이곳을 통일동산으로 적은 Kakao map의 표기는 잘못되었지 않나 싶다.

 13 : 14. 공원을 빠져나온 다음, ’평화로를 따라 200m쯤 더 진행하면 성동사거리가 나오면서 트래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글자조형물(통일동산관광특구)이 있는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가면 만날 수 있다. 프로방스마을 진입도로 입구다. 참고로 통일동산 관광특구는 탄현면의 성동리·법흥리 일원에 조성된 접경지역 최초의 관광특구이다. 평화와 역사, 생태와 예술문화 그리고 쇼핑까지 파주의 멋과 맛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이곳 파주는 메주콩으로 흔히 알려진 장단콩의 고향이다. 여기서 장단은 콩의 품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단 지역의 콩이란 뜻이다. 지금은 파주시 장단면이란 지명으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전에는 경기도 장단군(대부분 민통선 안에 있다)이었다. 그래선지 장단콩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눈에 띄는가 하면, 이를 브랜드로 내건 음식점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오늘은 16.70km 5시간에 걸었다. ‘평화의길이라는 이미지를 퇴색시키는 4.5km정도의 시내 구간을 생략했지만 시간은 코스 전체를 다 걷는 것만큼 소요됐다. 산길이 6km도 넘은데다, 눈까지 수북하게 쌓여 속도를 뚝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트래킹을 마치고 날머리 부근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들렀다. ‘평화의길에 근접해 있는 북한 땅 조망을 위한 전망대는 빠짐없이 안내해주겠다는 산악회의 배려 덕분이다. 아무튼 이 전망대는 1992 98일 문을 열었다. 북한 인권을 포함한 북한실상 알리기 차원의 많은 자료를 전시·운영하고 있으며, 북한 관산반도와 북한 주민들의 실제 생활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강화나 김포에서 들렀던 전망대들과는 달리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흔히 통일전망대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전망대'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정말 잘 꾸며진 박물관이자 전망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하 1층은 어린이 체험관’, 1층과 2층은 상설전시실 및 기획전시실, 그리고 3-4층은 전망대로 꾸몄다. 4층에 있는 전망라운지도 한번쯤 들러볼만 하다.

 1-2층의 전시실. 국립통일교육원에서 운영하는 시설답게 통일교육과 북한과 관련한 정보를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탈북민들이 직접 증언한 북한 경제, 사회실태 인식보고서  북한인권보고서 내용 등 다양하고 알찬 통일교육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층의 실내 전망대’. 원형의 유리창 너머로 북녘 땅을 살펴볼 수 있다. 오두산 인근을 축소시킨 미니어처를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유리창에는 그 너머로 보이는 북녘 땅의 지명을 적어 실물과 대비해가며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그곳에 들어선 선전마을에는 인민문화회관과 소학교, 김일성별장, 북한군 초소 등이 있으며 주민은 4,000여 명이 산단다.

 유리창이 시야를 방해한다고 생각되면 야외전망대로 나가볼 일이다. 북한의 관산반도를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실시간 XR확장현실 망원경을 통해서인데, 망원경으로 담은 장면을 QR코드로 스캔해 저장해 갈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디지털 세대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난간에 서면 서울의 젖줄인 한강과 북에서 흘러내리는 임진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하나가 된 물줄기는 조강으로 변해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파주의 옛 이름인 교하(交河)를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지난 달 신형 극초음속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는 북한의 발표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북한 땅이 더 스산하게 보인다. 그 기분에 떠밀려 개풍군(황해북도)을 망원경으로 당겨보기로 했다. ‘쌀로써 사회주의를 지키자는 등의 선전구호가 다르게 변해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구호는 눈에 띄지 않고, 대신 지게를 지고 이동하고 있는 북한 농민들만 눈에 들어왔다.

 밖으로 나오면 고당 조만식 선생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1883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평양 숭실중학교와 일본 명치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가 해외로 떠나버린 이 고난의 땅에서 애국·애족 운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렀다. 해방이 된 후에는 북한 동포를 버리고 자신만 월남할 수 없다며 북한 땅에 남았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자유민주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소련 군정 및 공산당에 맞서 싸우다 끝내 순국하셨다.

 실향민을 위한 공간인 망배단(望拜壇)’도 만들어져 있었다. 명절 때면 실향민과 실향민 후손, 탈북민 등이 차례상을 차려놓고 북녘을 향해 절을 올린단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한 오두산은 해발 118m의 야트막한 산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과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던 곳이다. 통일전망대가 들어서면서 이곳에 있던 오두산성(鰲頭山城,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의 성터도 없어져버린 것으로 알았는데 그 흔적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사진은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 작가님 것을 빌려왔다. KBS드라마 광개토대왕을 보면서 남다르게 받아들였던 관미성(關彌城)’을 그 흔적이라도 볼 수 있게 해준 작가님께 감사드려본다.

 

DMZ 평화의길 4코스(전류리포구-고양종합운동장)

 

여행일 : ‘25. 1. 18()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양천읍·운양동 및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일원

여행코스 : 전류리포구전류정 충절유적봉성리교차로운양삼거리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일산대교고양종합운동장(거리/시간 : 15.2km, 17.34km 4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전류리 포구(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전류리)

김포한강로(올림픽대로 개화 IC에서 연결) 운양·용화사 IC에서 내려온다. ‘금포로(78번 지방도)’를 따라 4km쯤 북진하면 전류리포구에 이른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포구 북쪽 250m 지점에 위치한 평화누리길 쉼터에 설치되어 있다.

 전류리포구에서 출발 한강의 서쪽(김포) 가장자리를 따라 올라오다 일산대교를 건너 고양(일산)으로 넘어가는 15.2km짜리 여정. 철책과 자연을 벗 삼아 걷는 김포에서의 마지막 구간으로,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에서 철새와 텃새를 살피며 자연을 즐기고 나면 어느덧 김포와의 아쉬운 이별을 고하게 된다.

 08 : 25. 길을 나서기 전, ‘전류정 여흥민씨 충절유적부터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하성방면의 금포로(78번 지방도)를 따라 150m쯤 걸어가면, 유적지로 올라가는 길이 행운부동산 맞은편으로 열린다.

 초입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봉성산 꼭대기에 위치한 재두루미전망대까지 다녀올 것을 권한다. 김포 제일의 조망 명소 중 하나로 꼽히기 때문이다.

 봉성산은 해발 129m의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군사시설이 정상을 차지한 금단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김포시의 노력으로 정상을 한강의 상·하류와 김포평야 일대를 비롯해 한남정맥의 마지막인 문수산, 파주의 심학산, 그리고 북한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기존의 군사시설을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홍살문이 세워진 걸로 보아 경의(敬意)를 표할만한 인물을 모시는 곳이란 의미일 것이다. 맞다. 이곳은 국가가 인정하는 여흥민씨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상징하는 유적이다.

 정성지문(旌垶之門). 1636,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참전한 민성(閔垶, 1586-1637)을 비롯한 일가족 12명의 정려를 모신 전각이다. 민성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가 아들 삼 형제와 함께 의병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화성이 무너지자 아들··며느리 등 12가족이 모두 자결했단다. 인조 18(1640), 조정은 민성의 품계를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올리고 12정려 충신 정성지문을 하사했다. 한꺼번에 하사된 정려로는 가장 많은 수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단다.

 전류정(顚流亭)’은 고려 말 민유(閔愉, 출생·생몰 년대 미상)가 신돈의 난을 피해 봉성산 기슭에 지은 정자다. 하지만 정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표충사(表忠祠)라는 제각이 여흥민씨 문중에서 선조의 업적을 기리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민유는 충혜왕 원년(1331)에 병과 1위로 급제하여 밀직사사, 진현관대재학, 지춘추관사 등을 지낸 고려 후기의 인물이다. 신돈의 폭정에 회의를 느끼고 도읍인 개경과 가까우며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머물며 전류정을 짓고 학사 주사옹과 교류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08 : 36. ‘평화누리길 쉼터로 되돌아와, 금포로(78번 지방도)를 따라 남진하면서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다. 철책으로 중무장한 한강변을 따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08 : 39.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전류리 포구를 만났다. 전류리는 한강 내수면 어업의 최전방 포구다. 어부들은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 김포대교부터 전류리 어로한계선(하류 쪽으로 200m 지점에 월선금지 부표가 떠있다)까지 14km 구간에 그물을 친다. 20척 가량의 소형 어선이 선단을 이뤄 웅어·숭어·황복·참게를 잡는데, 여기서 잡히는 참게는 수라상에 올랐다고 한다. 겨울철인 요즘에는 쫀득쫀득해 씹는 맛이 일품인 제철 숭어가 많이 잡힌단다.

 전류(顚流)란 강물과 바닷물이 뒤섞인다는 뜻이다. 밀물 때 소용돌이로 차오르는 강물의 헐떡거림이 장관이고 진풍경이라고 했다. 강바람이지만 서해 개펄냄새도 물씬 풍긴단다. 하지만 포구로 가는 입구가 굳게 닫혀 있는데다, 위압스런 저 감시탑이 무서워 다가가 보지는 못했다.

 길은 봉성산의 산자락을 에돌아간다. 앞에서 거론했던 閔愉가 산에 올라 고려의 사직을 걱정하고 국왕을 사모했다고 해서 국사봉(國思峯)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옛 문헌에는 진류산(鎭流山) 또는 전류산(顚流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강 건너는 심학산이 우뚝하다. 파주시에 있으니 통행이 자유로운 남녘땅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념의 산물인 철조망은 이 모든 것을 훼방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수로에 막힌 전류리 포구는 생각보다 을씨년스럽고 신산했으며, 도로변의 식당은 허름한 작업장 같은 느낌을 물씬 풍겼다.

 어선에 달린 저 깃발은 고기잡이 허가를 받았다는 표식이란다. 그뿐 아니다. 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마다 군부대 초병에게 출항 신고도 해야 한단다. 아무튼 저 물길을 따라 진객 웅어가 거슬러온다고 했다. 그걸 안강망으로 잡는데, 이게 여간 맛있는 게 아니란다.

 08 : 48. ‘해뜨는 한강정원’. 봉성리는 해돋이 명소로 유명한 지역이다. 탁 트인 한강 뷰를 자랑하는 언덕에 작은 공원을 만들고, 크고 작은 수목과 함께 다양한 초화류를 심어 계절의 변화를 다양하게 느껴볼 수 있도록 했다.

 08 : 52. ‘봉성로가 갈려나가는 봉성교차로’. 한강변을 따르는 길은 매력적인 산책로가 분명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어른 키를 훌쩍 넘기는 이중 철책이 한강 조망을 방해하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 저장된 10년쯤 전의 언론보도는 철책(김포대교-전류리포구)을 걷어내겠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쯤은 저 철책 대신 아름다운 공원이 들어앉아 있어야 하지 않나?

 하성면의 강변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이곳 하동천을 경계로 양촌읍에 바톤을 넘겨준다. 이후부터는 양촌읍의 저 강변을 따라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하동천이 한강에 합류되는 지점에는 집중호우 때 빗물을 한강으로 퍼내는 하동배수펌프장이 있다. 참고로 한강 하구에 위치한 김포는 한강 둑보다 지대가 낮은 데다 홍수와 서해의 밀물이 겹치면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펌핑으로 빗물을 한강으로 퍼내야 한다.

 하동천은 기러기·청둥오리 같은 조류와 두더지·너구리·족제비 등의 포유류가 서식한단다. 135종에 달하는 관속식물도 만날 수 있다나? 그런 생태계의 보물창고가 개발로 인해 훼손이 심해졌던 모양이다. 김포시에서 생물의 서식환경 제공과 수질개선을 위해 호소형 습지를 조성했단다. 관찰데크, 망원경, 조류전망대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생태학습장을 겸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계속해서 금포로를 따라간다.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로가 따로 나있다.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는 헤어져서 가는 구간이기도 하다.

 09 : 02. 이 멋꼬? 난쟁이 세상에라도 들어온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꼬맹이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애완동물들을 테마로 한 체험 동물농장인지도 모르겠다.

 09 : 06. ‘봉성제2배수장’. 폭우로 팔당댐이 방류를 시작하면 8시간 뒤 물이 김포에 닿는다. 이때 봉성포천이 빗물을 한강으로 내보내지 못할 경우 하천 유역은 침수 피해를 입게 된다. 거기에 서해의 만조 사리라도 겹치면 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단다. 배수장의 규모가 저렇게 큰 이유일 것이다.

 봉성포천(奉城浦川)은 양촌읍 구래리에서 발원, 북동쪽으로 흐르다 누산리에서 한강으로 합류되는 지방하천이다. 지류인 거물대천·가마지천·서암천·수참천·석모천을 보탠 탓인지 커다란 몸집을 자랑한다. 하긴 배수를 위해 1,800마력짜리 펌프를 10대나 가동시켜야 할 정도라니 어련하겠는가.

 탐방로는 포장길과 데크길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하나 더. 이곳 누산리(양촌읍)’의 한강변에도 포구가 있는 모양이다. 김포시의 홍보용 간판은 누산리의 특산물로 참게와 숭어를 꼽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양촌읍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새까만 점들로 덮여 있었다. 낱알로 배를 채우며 휴식하는 쇠기러기들이다. 맞다. 김포는 쇠기러기들의 천국이라고 했다. 간조 때 뭍이 드러나면 수백 마리가 귀가 아플 정도로 떼 지어 합창을 한단다. 한강하구 양안을 넘나드는 모습이 장관이라나?

 김포의 특산물은 쌀만이 아닌 모양이다. 고구마와 배까지 로컬 푸드로 내걸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김포 들녘의 볼거리는 농경지에서 놀고 있는 철새 떼만이 아니다. 가끔은 이런 갈대밭이 시야를 꽉 메우기고 한다.

 평화의길 4코스 경기옛길과도 함께 간다. 경기옛길은 조선시대 실학자 신경준 선생이 집필한 도로고(道路考)의 육대로(六大路)를 기반으로 조성됐다. 그중 강화길(김포옛길)’, 아니 정확히는 그 세 번째 구간인 운양나룻길을 지금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조선시대 강화도로 향하는 간선도로 중 하나로, 강화길을 걷다보면 당산미와 김포아트빌리지, 김포장릉, 김포한강조류생태공원 등 다양한 명소를 만날 수 있다.

 09 : 27. 운양삼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금포로의 내륙 쪽 가장자리를 떠나 한강변으로 옮긴다고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화합의 장이다. ‘평화의길 평화누리길로도 모자라 경기둘레길 경기옛길도 함께 쓴다. 저런 러너(runner)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09 : 36. ‘제촌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용화사삼거리’.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용화사(龍華寺)가 잠시 들렀다 가란다. 운양산 자락의 용화사 1405(태종 5)에 창건된 한강하구의 유일한 전통사찰이다.

 일주문인 모양이다. 문득 일본의 절간에서 흔히 만나는 도리이(鳥居 : 일본식 솟대)가 떠오른다. 못된 버릇이리라.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龍華殿). 조선 초, 뱃사공 정도명(鄭道明)이 조공을 싣고 오다가 운양산 아래 한강 하류지역에 배를 정박했는데, 그날 밤 부처가 꿈에 나타나 배 밑에 석불이 있으니 잘 모시라고 하더란다. 아니나 다를까 배 밑에서 미륵불을 찾아냈고, 불도의 깨달음을 얻어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삭발을 하고 불도에 정진했음은 물론이다.

 미륵불은 돌부처치고는 너무 미끈했다. 근래 하얗게 분을 칠한 탓이란다. 아무튼 빛을 발하며 출현했던 부처님은 영험함까지 보증된 모양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기도를 드리고 있는 신도가 여럿 보였다.

 운양추파(雲陽秋波, 김포8경의 하나). 용화사가 자리한 운양동은 가을빛 하늘에 물든 한강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고풍스런 범종각 뒤로 한강하구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있었다.

 09 : 43. ‘용화사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이어간다. 탐방로는 삼거리를 기점으로 삼아 도로(금포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한강 둑길을 따라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으로 간다.

 09 : 46. 재두루미쉼터.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으로 들어가기 전, 사치스러울 정도로 잘 꾸며진 쉼터를 만났다. 파고라에 벤치는 기본, 피크닉 나온 가족들을 위한 식탁용 테이블은 파라솔까지 갖췄다.

 이름처럼 벤치 위로 재두루미가 날아간다. 두루미는 우아하고 고고하며 영리한 새다. 옛 선인들이 불로장생 천년 학이란 의미까지 부여했을 정도다. 지구상에 6천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멸종위기 야생동물이기도 한데, 그게 이 부근에서 머문다는 얘기일 것이다.

 두루미는 가족애가 강하고 공동체 의식에 질서의식까지 갖췄단다. 특히 자기가 태어난 곳과 월동지를 포기하지 않는 특성을 가졌단다. 그래서일까? 부화하기 일보 직전인 두루미의 알도 전시해 놓았다. 그게 집사람의 방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를 되뇌며 알을 깨고 나온다.

 서해랑길은 한강 둑길을 따라간다. 이 구간은 보행자 전용의 산책로가 평화누리 자전거길이 따로 나있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함께 가는 철책 너머로는 서해바다와 만나는 한강하구의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탐방로 오른쪽의 야생조류생태공원에는 유수지(遊水池)가 조성되어 있었다.

 경계용 수목 울타리에 매달린 열매. 조경수로 인기가 높은 낙상홍(落霜紅)’ 열매가 아닐까 싶다.

 09 : 57.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이 발길을 붙잡는다. 꽃은 지고 나뭇잎은 떨어졌지만 겨울만의 또 다른 매력으로 화사한 곳이다. 655,310나 되는 엄청난 면적에 한강을 수원으로 한 생태습지원과 야생 조류의 취·서식지로 조성된 낱알들녘을 비롯해, 참나무숲, 송송숲, 특산수목 탐방숲, 생활환경 숲 등 풍성한 생태자원을 가지고 있다.

 김포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은 한강신도시 개발에 따른 생태 보전과 철새들의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야생조류 취·서식 공간을 보전하고, 생태 체험·학습의 장소를 마련해 시민과 생태가 공존하도록 꾸며놓았다.

 첫 만남은 향기의 뜰(푸른 봄의 뜰)’이다. 마가목·산수국·옥잠화·금낭화·꽃무릇·벌개미취 등 이른 봄 푸른 잎으로 개화하는 관목과 초화류를 심어놓았단다.

 공원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빨간 지붕의 풍차가 가녀린 몸매를 한껏 뽐내는가 하면, 두루미는 먼 하늘을 향해 힘껏 날아오른다. 그 사이로 들어가 푸른 하늘을 배경 삼는다면 인생 샷 하나쯤은 너끈하겠다.

 갈대와 억새, 그리고 넝쿨식물들로 뒤엉킨 숲은 버려진 듯 보살펴지고 있었다. 겨울철새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이랄 수도 있는 인간의 통행을 막는 것이다. 이렇듯 관리한 덕분인지 공원은 생태환경이 뛰어난 김포에서도 허파 역할을 톡톡히 한단다. 공원 곳곳이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듯한 자연미로 가득했다.

 철새들의 쉼터인 낱알들녘. 지금은 텅 비어 있지만 여름이면 푸른 벼가 자라고, 가을이면 고개 숙인 벼이삭이 누렇게 물들이는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하나 더. 낱알들녘에서 나오는 벼는 모두 철새들의 먹이로 공급된다고 했다. 이를 주워 먹으려는 철새들을 망원경 없이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나?

 운이 따르지 않았던지 철새는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들녘 한켠에서 전통농업기구를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의 노동력을 이용해 물을 퍼올리는 용두레 수차인데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단다.

 10 : 13. 탐방로는 조망마루를 비켜 지나간다. 참고로 생태공원은 둘레가 약 5km쯤 된다고 했다. 서서히 걷다보면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30분 정도 걸린단다. 하나 더. 공원은 철새들의 쉼터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도 걷는 재미가 쏠쏠한 여행지로 꼽힌다. 강변길, 철새이야기길, 사색의길 등 테마가 있는 다채로운 길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 볼 수 있다.

 조망마루 옆의 숲은 푸른 숲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계수나무, 튤립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는데, 여름철이면 도시락을 들고 온 가족들이 돗자리를 깔고 누워 한가로운 피크닉을 즐긴다는 곳이다.

 조망마루, 이름대로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더 넓게는 김포지역과 한강 너머의 일산이나 파주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맨 위층은 조망마루라는 이름에 걸맞게 야외 전망대를 배치했다. 김포의 특성을 맛보기식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김포는 한반도 젖줄인 한강과 북쪽에서 내려온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한강의 거대한 물줄기가 실어 나른 흙들이 퇴적되면서 형성된 드넓은 평야지대이다.

 시선을 옮기자 이번에는 한강 너머의 풍경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일산의 고층건물들이 영락없는 마천루(摩天樓)이다.

 2층은 실내에서 편안히 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의자와 테이블 등을 놓아두었다. 터치스크린 모니터를 통해 공원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제공 받을 수 있다.

 10 : 18. 조망마루를 빠져나와 이번에는 에코센터 쪽으로 간다. 그러자 습지생태원이 잠시 들렀다 가란다. 갈대·억새밭 사이로 난 데크 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연못들을 만난다. 습지 뒤쪽에는 황톳길도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신발을 벗고 황톳길을 걸어보고 싶다. 발을 씻을 수 있는 시설까지 마련돼 있다니 발가락 사이에 황토가 묻을 일도 없겠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빠듯한 걷기 여행자에게는 그런 낭만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생태습지답게 커다란 연못도 들어서 있었다. 연못 뒤로 보이는 정자는 감암정이다. 정자에 오르면 광활한 갈대·억새밭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2024년 녹색도시 우수사례 공모에서 도시숲 분야 우수상(산림청장상)까지 수상한 풍경이다.

 10 : 26. 이정표는 이제 그만 공원을 빠져나가란다. 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기로 했다. 전면에 있는 에코센터에 들러보기 위해서다.

 ! 대한민국에도 피사의 사탑이 있었나보다. 탑처럼 생긴 건물이 기울어도 한참이나 기울어진 채로 위태롭게 서있다. 생태공원과 철책 너머 한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에코센터 전망대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망원경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높은 시야에서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는데, 안타깝게도 시설을 보수한다며 출입을 막고 있었다.

 에코센터 야외쉼터에서의 조망. 한강 너머는 고양시(일산서구) 구산동·법곳동 지역이다. 그 왼쪽에는 심학산이 있다. 이 모든 곳이 통행의 자유가 보장되는 남한 땅이건만, 한강에는 다리조차 놓을 수 없고, 철책에 가로막힌 강은 배로도 건널 수 없다. 가슴 아픈 현실이라 할 수 있겠다.

 10 : 36. 금포로를 따라 한강 감바위 나루터 위쪽에 있는 군부대 초소 앞을 지난다. 6분쯤 후에는 다시 만난 78번 지방도(금포로)를 횡단한다. 그리고는 금포로를 따라 김포시가지 쪽으로 간다.

 10 : 46. ‘김포한강로에서 김포한강신도시 IC로 빠져나오는 접속고가교 아래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이어서 접속고가교의 왼쪽 아래를 따라간다. 이즈음 평화의길 쉼터를 만날 수 있다.

 접속고가교 아래를 지나면 탐방로는 다시 금포로를 만나고, 곧이어 감암교(계양천을 가로지른다)’를 건너 방수문삼거리 쪽으로 간다.

 10 : 59. 신향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감암로를 따라간다. 오른쪽에는 신개념의 하수처리장인 레코파크(Recopark)가 있었다. Recycle+Eco+Friendly+Park의 합성어로 하수를 깨끗한 물로 재생하여 환경을 아름답게 하고 시민과 함께하는 휴식공간이라는 뜻이다. 하수처리장을 지하에 두고 여분 공간을 활용하여 풋살장, 인라인스케이트장 같은 운동시설을 접목했다.

 11 : 02. 레코파크 정문 앞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간다. 이어서 일산대교 진입로의 하부 굴다리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언덕으로 오른다.

 11 : 05. 언덕 위는 민자를 유치해 건설한 일산대교의 톨게이트(TG).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경기지사 시절 일산대교 통행을 무료로 하겠다며 요란법석을 떨었었는데 아마 성사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후부터는 일산대교의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내놓은 보도를 따라간다.

 다리 아래로는 6차선의 김포한강로가 지나간다. 2차선의 금포로는 김포한강로에 기대어 가는 모양새이다.

 다리는 눈터지는 조망을 선사해준다. 다리 어디에서나 한강 하류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거대한 물줄기가 감바위를 휘돌아 봉성산 자락의 전류리 포구로 흘러가는가 하면, 오른쪽에는 파주의 심학산이 놓여있다.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는 감바위를 당겨봤다. 한자로는 감암(甘巖)’. 강 건너 일산의 이산포 송포를 오가던 나루터 감암포가 있었다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감나무 시()’자를 써서 시암으로 고쳤다는데, 원래의 이름인 감바위가 훨씬 더 정감이 가지 않나 싶다.

 검단신도시와 장기신도시가 한강의 강줄기를 따라 길게 들어서있다. 평화의길 3코스는 김포 쪽의 저 강변을 헤집으며 이곳으로 온다.

 김포의 너른 들녘과 한강변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일단대교의 중간쯤에서 고양(일산서구)에 바톤을 넘겨준다. 고양에서의 첫 만남은 드넓게 펼쳐지는 습지다. 요 아래에 위치한 장항습지만큼은 아니어도 대화천을 품은 습지는 크고도 아름다웠다.

 11 : 24. 일산대교 끝자락에서 만나는 이산포 JC’. 교차로도 예술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나 보다. 도로 여러 개가 상하좌우로 얼키설키면서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낸다.

 다리 아래로는 자유로가 지나간다. 가양대교 북단에서 문산읍(파주시) 자유 IC(임진각)까지 연결되는 고속화도로로, 종점인 임진각 경내 '자유의 다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자유통일의 의지를 담았다고나 할까?

 11 : 31. 다리가 끝나는 지점. 문자조형물(GOYANG)이 고양 땅에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고양대로를 따라간다. ‘대화천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가는 구간이기도 하다. 왕복 8차선의 도로가 삭막하다고 느껴진다면, 둔치로 내려가 산책로를 따라가면 된다.

 11 : 34.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이산포교’. 경기둘레길 이정표(고양종합운동장 2.3km/ 일산대교 0.6km)가 다리를 건너라는데, 이정표에 붙여놓은 평화의길 방향표시는 곧장 직진하라는 것이다. 개인 의견이지만 이곳에서는 경기둘레길을 권하고 싶다. ‘대화천의 둔치를 따라가는 경기둘레길이 도로변을 걸어야하는 평화의길보다 안전이나 시간절약 면에서 더 낫기 때문이다. 하나 더. 평화의길 4코스와 경기둘레길 4코스는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어느 길을 따르더라도 종점까지 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

 이를 모른 우리는 평화의길을 따라 직진했다. 대화천의 오른쪽 강둑 위로 나있는 길은 무척 고왔다. 향긋한 소나무향이 코끝을 스쳐 가는가 하면, 수북이 쌓인 솔가리는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촉감을 전해준다.

 왼쪽 발아래로는 대화천이 흐른다. ‘경기둘레길은 저 둔치를 따라간다.

 11 : 38. 분에 넘치는 호사도 잠시. 탐방로는 이내 사포교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다리 앞에서 도로를 횡단한다. 그런데 문제는 횡단보도가 없다는 것이다. 오가는 차량을 피해가며 건너라는 모양이다. 조금 전, ‘경기둘레길을 따르라고 권했던 이유다.

 11 : 40. 잠시 후 만나는 법곳 IC’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곳이다. 4코스와 지선인 4-1코스가 만나는 지점인데, 이정표가 이곳으로 오는 두 방향(전류리포구 및 행주산성)만 표시하고 있을 뿐, 가야할 방향(고양종합체육관)을 빼먹은 것이다. 옆의 안내판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누구 할 것 없이 길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 길눈 밝기로 소문난 선두대장도 이정표만 보고 진행했다가 무려 15km를 더 걷고 나서야 종점(고양종합체육관)에 이를 수 있었단다.

 이후는 고양대로를 따라간다. 국내 최대 규모의 전시면적을 자랑하는 킨텍스(KINTEX)’를 끼고 가는 구간이기도 하다. 3만 평이 넘는 전시공간에서 대형 국제전시회는 물론, 중소형 전시회 및 다양한 문화행사가 일 년 내내 열린다.

 11 : 54. ‘대화마을입구 삼거리에서 대화천으로 내려왔다. 신호대기 시간이 지겹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둘레길의 형편을 잠깐이나마 살펴보고 싶어서다.

 다시 올라선 고양대로’. 몸집 큰 킨텍스(KINTEX)’는 아직도 함께 간다. 이 구간은 가로수삼아 심어놓은 벚나무가 볼만했다. 봄이면 여의도의 윤중로 못지않은 환상적인 벚꽃 터널을 자랑할 수도 있겠다.

 이 구간은 국토안전관리원, 건설기술연구원 등 건설관련 공공기관들이 몰려있었다. 하나 더. 도심에 가까워진 탓인지 산책 나온 시민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국토안전관리원. 둘레길 도반 중 한분인 몽중루 작가님의 자제분이 다니는 직장이기도 하다. 기술사 자격증까지 딴 수재란다.

 12 : 13. 4코스의 종점이라 할 수 있는 고양 종합운동장(Sports complex)에 도착했다. 43,000명 수용 규모의 주경기장과 992명 규모의 보조경기장, 야구장, 체육관 등이 들어서 있다.

 고양 소노 아래나’. 프로농구단인 고양 소노 스카이거너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체육관이다. 스카이거너스(Skygunners) 하늘 높이 향하는 대포라는 뜻을 지녔단다. 그래서일까? 튀어 오르며 볼을 다투는 조형물들이 무척 와일드하게 보인다.

 잠시지만 호수로를 따른다. 종합운동장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12 : 21. ‘대화로를 건너자 평화누리길 쉼터가 있는 작은 공원이 맞는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목교(木橋)가 반긴다. 그렇다고 다리를 건너지는 않는다. 평화누리길 이정표(동패지하차도 5.0km)가 가리키는 대화천의 둑길을 따르면 된다.

 모처럼 만난 흙길이 반갑다. 가운데 야자매트까지 깔아 흙길의 단점인 질퍽거림까지 없애버렸다.

 12 : 32. 날머리인 휴게공원의 고양 인공암벽경기장’. 그렇게 400m쯤 걸었을까 오른쪽으로 희미하게 오솔길이 나있다. 이정표는 없지만 나무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미는 인공암벽경기장으로 들어간다고 여기면 되겠다. 여기서 팁 하나. 길 찾기가 걱정된다면, 우리처럼 평화누리 쉼터공원으로 들어가지 말고 대화로를 따라 400m쯤 들어오면 된다.

 평화의길(5코스)’ 안내도는 인공암벽 경기장 앞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17.34km 4시간 10분에 걸었다.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볼거리가 드물었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DMZ 평화의길 3코스(애기봉 입구 - 전류리포구)

 

여행일 : ‘25. 1. 4()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하성면 일원

여행코스 : 애기봉 입구가금2양택천마근포리시암2가자골후평1석탄리 철새조망지전류리포구(거리/시간 : 17km, 17.31km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 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애기봉 입구(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김포한강로 등을 이용 통진읍까지 온다. ‘하성입구삼거리에서 하성로로 옮겨 통진방면으로 8km쯤 달리다 애기봉입구삼거리에서 평화대로를 타고 3km쯤 들어가면 애기봉 평화생태공원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들머리는 매표소에서 남쪽으로 250m쯤 떨어진 지점에 있다. ‘아치형 게이트가 세워져있으니 참조한다.

 애기봉 입구를 출발 김포의 북(조강동쪽(한강) 가장자리를 따라 전류리포구로 가는 17km짜리 여정. 드넓은 김포평야를 감상하며 걷는 구간으로, 조강과 한강 철책 사이로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냉혹한 현실을 되뇌기도 한다. 석탄리 철새조망지에서는 각종 철새와 재두루미를 관찰해 볼 수도 있다.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과 평화누리길 안내판이 사이좋게 서있다. 경기둘레길 스탬프보관함도 눈에 띈다. 이번 구간도 세 길이 나란히 간다는 의미이지 싶다.

 08 : 42. ‘평화공원로를 따라 애기봉(평화생태공원)쪽으로 올라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08 : 44. 버스정류장(애기봉 입구)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금로를 따라간다.

 08 : 47. ‘가금리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당산목 두 그루가 맞는다. 둘레 7.1m에 높이가 20m나 된다는 저 느티나무는 나이가 490살도 넘었단다. 가금리가 만만찮은 내력을 지녔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녹녹치 않았던 모양이다. 반 천년을 살아온 노거수가 수문장을 자처할 만큼 오래된 마을인데도, 진입로는 오가는 차량이 교차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저 나무도 마을의 나이만큼이나 오래 묵었나보다. 속이 텅 빈 껍데기만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08 : 54. ‘코리아트레일이란 명성에 걸맞게 탐방로는 잘 꾸며져 있었다. 촘촘히 설치된 이정표나 가이드리본은 기본, 가끔은 이런 쉼터(이정표 : 전류리포구 16.5km/ 애기봉입구 0.9km)를 배치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08 : 56  08 : 58. 여말선초의 문신인 박신의 묘역이란다. 박신(朴信, 1362~1444) 1385(우왕11) 23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규정을 거쳐 예조정랑, 형조정랑을 지냈다. 조선에 들어와선 강원도 안렴사, 대사성, 이조판서를 지냈고, 청렴한 관리로 칭송이 높았다. 단심가(丹心歌)로 대변되는 스승 정몽주와는 다른 길을 걸은 셈이다.

 저헌재(樗軒齋)’. 박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저헌(樗軒)은 그의 호이다. 사당 앞에는 그의 행적을 기리는 송덕비도 세워놓았다. 박신(朴信) 갑곶나루의 석축로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1419(세종1) 통진에서 귀양살이할 때 사재를 털어 만들었는데 공사가 14년이나 걸렸을 정도로 큰 공사였던 모양이다. 그래선지 1432년 축조된 이래 약 500년이나 사용되었단다.

 문중 묘역. 박신 말고도, ‘운봉 박씨 시조도 저곳에 묻혀 있다고 했다. 하나 더. 박신은 경포8의 하나인 홍장야우(紅粧夜雨)’에 얽힌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박신이 강원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강릉 기생 홍장(紅粧)을 사랑하여 애정이 매우 깊었단다. 임기가 차서 돌아갈 즈음, 정몽주에게서 동문수학하던 강릉 부윤 조운흘(趙云仡)이 홍장을 죽은 것으로 꾸민 다음, 다시 만나게 만드는 등 신선놀음을 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박신이 <경포대에서 놀던 것이 꿈속으로 드는구나(鏡浦淸遊入夢中)>라고 읊었을 정도로...

 묘역 입구. 수령이 500년도 넘었다는 향나무가 나이만큼이나 그윽하다. 박신이 마음을 수양하고자 심었다는 나무다. 그리고 열심히 학문을 닦아 문과에 급제했다나? 이후 심성이 약하거나 행동이 불미한 사람이 이곳에서 공부하면 배움에만 전념하게 되더란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 나무를 학목(學木)’이라 불렀고, 학문을 닦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한다.

 08 : 59. ‘가금2는 스치듯 지나간다. 가금리(佳金里)는 달감(月甘), 용산동, 샛말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부락을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09 : 02. 마을 앞 삼거리에서는 왼쪽 가금로를 따라간다. 조강 철책을 바라보며 간다고 보면 되겠다. ! 오른쪽은 가금3리로 연결되는 평화공원로70번길이라 했다.

 이즈음 철새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한 떼가 푸드득거리며 날아오르는데, 그보다도 더 많은 무리는 인간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낙곡을 주워 먹느라 정신이 없다.

 09 : 08. 커다란 축산농가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3코스는 이런 작은 고개를 꽤 여럿 오르내린다.

 09 : 12. 고개 너머에는 가금리놀이터라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당산목 아래 정자를 짓고 평상을 놓아 쉼터로 만들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4H’ 표석이 더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50년 넘게 잊어왔던, ‘나는 나의 클럽과 나의 공동체와 나의 나라를 위하여로 시작되는 맹세문을 떠올려본다. <나의 머리(Head)를 더 명철하게 생각하는 데/ 나의 가슴(Heart)을 더 위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데/ 나의 손(Hand)을 더 큰 봉사를 하는 데/ 나의 건강(Health)을 더 나은 삶을 위해 바치기로 맹세한다>

 체험농장인 애기봉 농장이란다. 간판에는 조선시대 기생 관비(官婢) 이야기라고 적어놓았다. 설마 기생을 직접 체험해보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09 : 15. ‘평화의길 쉼터 앞에서 가금로와 헤어진 다음 왼쪽 농로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김포평야의 너른 들녘을 꿰뚫으며 마금포리쪽으로 간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양택천(楊澤川), 하성면 양택리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유입되는 지방하천이다.

 이즈음 애기봉과 그 꼭대기에 걸터앉은 조강전망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 기괴한 소음도 들어야만 했다. ‘쇠를 깎는 듯한 소리인데, 듣는 것만으로 구역질나게 만드는 음이다. 북한에서 쏘아대는 대남방송이다. 남한에 대한 비판이나 북한 체제의 선전이 씨알도 먹히지 않자, 스트레스 받기 딱 좋은 소리로 주민들은 괴롭히는 모양이다.

 탐방로는 마근포리(麻近浦里)’를 바라보며 간다. 마근포에는 안행동과 덕개라는 두 개의 자연부락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저건 안행동이지 싶다. ‘덕개가 인천과 서울을 왕래하던 수많은 운반선과 어선들로 들끓던 마을이었다니 말이다.

 09 : 24. 마을 초입에 마근포(麻近浦)’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한국수산지(1908~1911)’는 당시 김포에서 가장 큰 포구로 조강포·강령포·마근포를 꼽는다. 그중 마근포는 우리말 막은 개’(개펄)라는 뜻으로 막은의 음을 따 마근포’(麻斤浦)라고 불렀다. 당시 마근포는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가거나 강 건너 정곶리(황해도 개풍군 임한면) 사이를 왕래하던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고 한다.

 마근포 마을도 스치듯 지나쳤다. 조강을 마주보며 걷는 구간인데, 북녘 땅인 개풍군의 산들이 철책 너머에서 고개를 내민다.

 09 : 35. 조강(祖江) 너머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우리네 땅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둑 앞에서 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는 수밖에. 왼쪽은 출입을 금지한다는 표지판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었다.

 잠시지만 철책 길을 따라간다. 아까 만났던 안내판은 이 부근을 마근포로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산은 뱃사람들이 용왕제를 지내던 부엉바위산일 것이다. ‘당집이 있었다는.

 뒤돌아본 풍경. 조강리로 이어지는 철책 너머로 애기봉과 조강전망대가 보인다. 그 뒤에 있는 것은 문수산이다.

 부엉바위산은 오른쪽으로 에돌아간다. 왼쪽, 그러니까 철책 쪽으로 난 소로는 몽땅 막아놓았다.

 산을 한 바퀴 에돌면 길은 다시 조강 철책을 향해 간다. 강변에 쌓아올린 둑 안쪽으로 꽤 너른 들녘이 조성되어 있다.

 09 : 48. 배수갑문을 지나면 철책이 쳐진 둑길. 탐방로는 그 아래로 나있는 농로를 따른다.

 이곳에서도 낙곡을 주워 먹고 있는 한 떼의 철새를 만날 수 있었다.

 철책이 쳐진 둑은 옛날로 치면 성벽이다. 그렇다면 저 수로는 해자(垓字)?

 09 : 57. ‘마조리(麻造里)’ 들녘이 잠깐 얼굴을 내미는가싶더니, 수로가 시작되면서 시암리(枾岩里)’로 바톤을 넘겨준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수로를 따라 내륙으로 파고든다.

 10 : 07. 2차선 도로인 하성로로 올라선다. 오른쪽(시암1리 방향)으로 50m쯤 걷다가 도로를 횡단한다.

 농로를 따라 시암2로 간다. 시암리(枾岩里)는 한강이 마을을 둘러싸는 형세라고 했다. 덕분에 밀려오는 바닷물과 내려가려는 강물 간 힘의 평형이 이뤄지는 곳에 유사가 쌓인 습지로 유명하단다. 고양의 장항습지, 고양과 파주 경계에 있는 산남습지와 더불어 한강하구의 3대습지로 꼽힌단다. 하지만 탐방로가 바닷가를 피해가는 탓에 구경할 수는 없었다.

 10 : 17. ‘시암2’. ‘주민안전 위협하는 대북전단 살포 반대한다는 현수막이 남북 분단의 현실을 대변해준다. 누군가에게는 꼭 해야만 하는 사명이겠지만, 접경지 주민들로서는 눈에 가시일 것이다. 혹시라도 위험물이라는 핑계로 북에서 총이라도 쏘아댈 경우 그 피해는 오롯이 주민들에게 돌아갈 것이 뻔할 테니까 말이다. 하긴 남북분쟁을 일부러 조장하려던 몹쓸 인간들도 최근 있었지만.

 하성로를 따라 50m쯤 걷다가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농로로 들어간다.

 탐방로는 듬성듬성 민가가 들어서 있는 시암리의 들길을 따라 남진한다. 이즈음 오른쪽 산봉우리에 걸터앉은 전망대가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군부대인줄 알고 그냥 지나쳤는데, 나중에 주민분이 전망대라고 알려주셨다.

 10 : 31. ‘석평로를 가로지르자 길은 갈릴리수양관으로 이어진다. ! 석평로는 건널 게 아니었다. 석평로를 따라가다 연화사부터 들러봤어야 했다. 이야깃거리는 물론이고 볼거리까지 넘친다는 이석암 작가님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안을 하신 작가님조차 길을 놓쳤는데 어쩌겠는가. 갈릴리수양관을 지나다가 만난 주민에게 물어보고서야 진입로를 지나친 줄 알았다.

 10 : 36. 조금 더 걸으면 삼거리. 이곳에서도 연화사로 연결되지만 다녀오기에는 너무 멀어져버렸다. 그 아쉬움을 연화봉 유래를 소환해 달래본다. 삼국시대 때 고구려가 백제를 침략했고, 점령군이던 고구려 병사와 백제 낭자가 사랑을 하게 되었단다. 그러다 백제군이 반격을 시작했고, 고구려 병사는 돌아오겠다는 약속만 남긴 채 본진을 따라 한강 이북으로 후퇴했단다. 이후 낭자는 매일같이 산봉우리에 올라 낭군이 돌아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더란다. 지친 낭자가 님을 찾아 한강은 건너다 빠져죽었고, 낭자가 매일같이 올랐던 산봉우리에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났다나?

 길은 이제 후평리로 넘어간다. 저 고갯마루를 경계로 시암리와 후평리가 나뉜다.

 이즈음 한강 너머의 구릉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도 함께 시야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남한 땅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철책에 가로막혀 바라보는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DMZ평화의길이 진정한 평화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한강 양안의 철책이 사라지고, 누구나 자유롭게 한강을 건널 수 있어야만 한다.

 10 : 42. 고갯마루에는 남간의 재실인 수정재(守正齋)’가 들어서 있었다. 남간(南簡, 1400-1440)은 형조·호조 좌랑, 장령, 예문직제학을 역임한 세종대왕 때의 문신이다. ‘남간의 사람됨이 청렴결백하고 정도를 지켜 아부하지 않았다는 세종의 평에서 착안 수정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0 : 44. 고개를 넘으면 후평리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인 가자골이다.

 10 : 52. 아리수낚시터 앞에서 평화의길과 평화누리길이 헤어지고 있었다. 평화의길은 석평로를 따라 후평1리로 넘어가고, 평화누리길은 왼쪽 평야지대로 들어간다. 참고로 이 길을 따르더라도 후평리 수로에서 평화의길과 다시 만난다.

 잠시 후, 거대한 당산나무가 후평1에 다다랐음을 알려준다.

 10 : 57.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후평1(後坪一里)’가 반긴다. 철새들의 낙원으로 알려지는 마을이다. 재두루미 도래지역인 한강하구 홍도평야와 고촌면 태리 일원이 무분별한 개발로 재두루미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들어 2011년부터 후평리 일대 농경지 37ha를 재두루미 취·서식지로 조성해오고 있단다.

 마을 안길을 걷다가 만나는 생활도자기 공방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11 : 00. 흑돈 김포정(고깃집, ‘선탠스 힐이라는 카페와 마당을 같이 쓴다) 앞에서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골목길(석평로420번길)로 들어선다.

 벽화가 아름다운 카페 들길따라’. 출입구 옆에 매달아놓은 여보게!  한 잔 들고 가게라는 액자가 귀엽다. 하지만 카페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11 : 03. 마을을 빠져나온 길은 후평리 들녘으로 내려선다. 천리 길을 달려온 한강이 임진강을 만나기 전 잠시 몸을 풀면서 만들어놓은 엄청나게 넓은 충적평야이다. 하나 더. 이곳은 아까 아리수낚시터에서 헤어졌던 평화누리길과 다시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후부터는 후평리 수로를 따라간다. 수로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서 도로와 둑길이 함께 가는 모양새이다.

 둑길을 따라가다 이번에는 도로(또 다른 둑길일 수도 있다) 위로 올라가봤다. 지대가 높으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런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드넓은 김포평야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한강이 있는 왼쪽은 강 건너 파주지역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오두산 통일전망대도 그 안에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내륙인 오른쪽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들녘이 넓다. 그 뒤에는 후평리(後坪里)의 취락지가 있었다. ‘들녘 뒤쪽이란 마을 이름처럼 말이다. ! 저 들녘의 일부는 재두루미가 머물거나 월동할 수 있도록 관리되고 있다고 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물을 대고 볏짚을 깔아 놓는가 하면, 먹이용 볍씨를 뿌려 놓는단다. 주민들의 출입이 금지됨은 물론이다.

 이 구간은 새떼와 함께 걷는 구간이기도 하다. 시선이 미치는 곳마다 새들이 무리지어 낙곡을 주워 먹고 있었다. 운이라도 좋으면 저렇게 날아오르는 광경을 눈에 담을 수도 있다.

 김포시새마을회에서 운영한다는 저 생명살림학습장은 뭘 가르치는 곳일까? ‘하천은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하천정화활동을 해오는 단체로 알고 있는데. 그나저나 오늘은 운이 무척 좋은 날인가보다. 가금리의 ‘4H’에 이어 이번에는 새마을까지 오늘의 우리나라를 있게 한 계몽운동들을 접할 수 있었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공들여 가꾼 듯한 억새밭도 만날 수 있었다. 2020년엔가 희망 일자리 특화사업의 일환으로 108000본의 억새를 심었다는 기사가 떴었는데, 그게 자라서 새로운 볼거리로 틀을 잡았나보다.

 11 : 30. 3코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석탄리 철새조망대에 도착했다. 아니 조금 못미처에 있는 다친 새들의 쉼터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석탄리·후평리·시암리 일대의 들녘에서 구조해온 다친 새들이 임시로 쉬어가는 공간이다.

 입구 안내판은 후평리 들녘을 찾아오는 겨울 철새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특히 재두루미는 생태로도 모자라 국제동향까지 알려주고 있었다.

 독수리 등 맹금류를 보호하는 공간이란다. 하지만 멀리서 사진만 찍기로 했다. 간간히 들려오는 조류 독감에 민감한 곳이니 구경꾼인 나부터 조심해야지 않겠는가.

 쉼터 옆 하천. 얼음낚시가 가능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었다. 철새들도 이웃이라며 공존의 세상을 꿈꾸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이들은 먹고 사는데 목을 매기도 한다.

 11 : 34  11 : 45. ‘석탄리 철새조망대’. 석탄리·후평리·시암리 일대는 한강과 김포평야가 맞닿아 먹이가 풍부해 많은 철새를 관찰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백로, 황로, 왜가리 등은 물론 겨울 철새인 재두루미도 날아온다. 흑두루미가 찾기도 한단다.

 가장 큰 볼거리인 재두루미는 아예 조형물까지 세워놓았다. 안내판은 몸의 길이를 1.2m로 적고 있었다. 날개는 그보다도 더 길어 1.8m나 된단다. 한국에는 10월 하순에 찾아와 이듬해 3월에 되돌아가는 드문 겨울새라고 한다.

 조망대는 각자의 취향에 맞게 철새를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눈 좋은 젊은이들은 맨눈, 아쉬운 사람들을 위해서는 망원경을 배치했다. 고성능 망원경까지 챙겨온 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전문가의 포스를 폴폴 풍기는 카메라. 몽중루 작가님에 의하면 너무 크고 무거워서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맞지 않는단다.

 이젠 철새들을 관찰해 볼 차례다. 맹추위일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에 놀라 디지털카메라를 챙겨갔으니, 그냥 맨눈 수준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독수리, 흑두루미, 쇠기러기, 큰기러기,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말똥가리, 황조롱이 등 안내판에 적혀있던 새들과 비교해가며 살펴보다 그만두어버린 이유다.

 그러니 날아가는 장면은 언감생심이다. 몽중루님의 사진으로 구색을 맞춘 이유이다. 그나저나 오른쪽 한강 너머는 파주시, 그 위쪽에는 임진강과 북녘 땅이 놓여있다. 말은 장황했지만 모든 정경이 한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거리가 가깝다. 그런데도 이념은 그 가까움을 천리 길보다도 더 멀게 밀어내버렸다. 그런 곳을 마음만 먹으면 달려갈 수 있는 새들이 부럽다. 그리고 나도 저 새들처럼 한달음에 달려가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동포들을 만나보고 싶다.

 ! ()총무님은 무리지어 있는 재두루미도 보았다고 했다. 엄청나게 운이 좋은 셈이다. 1945년까지만 해도 1천 마리 정도의 무리가 각지에서 겨울을 났으나, 이후 수십 마리 단위로 줄어들었고, 최근에는 아예 20-30마리 단위도 보기가 어렵다니 말이다. 멸종야생생물 2급으로도 모자라 천연기념물 제203로까지 지정된 이유이다.

 11 : 45. 다시 길을 나선다. 한강의 서쪽 둑 위로 길이 나있다. 그렇다고 강변으로 내려가 볼 수는 없다. 이중으로 쳐진 군의 경계용 철책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강 건너는 파주시가 분명한데도 말이다. 남북분단, 그것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냉혹한 현실이라고나 할까?

 국은천(國恩川)’이란다. 하성면 마곡리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합류하는 3.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석탄배수펌프장. 집중호우 때 빗물을 한강으로 퍼내는 시설이다. 한강 하구에 위치한 김포는 한강 둑보다 지대가 낮은 데다 홍수와 서해의 밀물이 겹치면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펌핑으로 빗물을 한강으로 퍼내야 한다.

 배수펌프장에서 전류리포구까지는 4km. 한강 둑길이 일직선으로 뻥 뚫려있다. 하지만 자동차와 자전거도 함께 사용하고 있어 안전에 주의가 요구된다. 오른쪽 가장자리에 야자매트를 깔아놓았으니 이를 이용하면 되겠다.

 왼편 철책 너머로는 한강이 도도하게 흐른다. 그 건너는 파주 출판문화단지다. 하지만 남북분단의 냉혹한 현실은 한강의 양옆을 철책으로 꽁꽁 막아놓았다. 조금 전 본 철새들이나 오갈 수 있는...

 라이더들을 위한 평화누리 쉼터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자전거 거치대는 기본, 벤치도 놓아두어 평화의길 나그네들에게도 좋은 쉼터가 되어준다.

 쉼터는 조망대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었다. 뒤편으로 김포평야가 드넓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추수가 끝난 그 들판은 새까만 점들로 뒤덮여 있었다. 낱알로 배를 채우며 휴식하는 쇠기러기들이다. 운이라도 좋으면 독수리, , 재두루미, 참매, 큰기러기, 황조롱이, 흑두루미, 흰꼬리수리 등 8종의 법적 보호종도 눈에 담을 수 있단다.

 두 번째 쉼터. 이번에는 특이하게 생긴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사진은 올리지 않았지만 쉼터는 하나가 더 있었다.

 멋진 풍경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살아있는 소나무 네 그루를 기둥삼아 정자를 만든 것이다. 소나무의 풍성한 잎이 그늘을 만들어주니 지붕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나 보다.

 억새꽃이 흩날리는 구간을 지나기도 한다. 일부러 심어 놓은 것 같다.

 석탄리를 지나온 들녘에는 하성면소재지인 마곡리가 들어앉아 있었다. 그 뒤에서 솟아오른 산은 문수산일 것이고.

 이후로도 길은 꽤 지루하게 이어진다. 전류리 포구에 다 와갈 무렵에는 군부대까지 들어서있어 사진조차 찍을 수 없었다.

 12 : 42. 전류리 포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종합안내도(완주 인증 QR코드)’는 포구 조금 못미처에 위치한 평화누리길 쉼터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은 17.31km 4시간에 걸었다. 철새들과 어울리느라 곳곳에서 속도를 뚝 떨어뜨렸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빨리 걸은 셈이다. 추위에 쫓겨 정신없이 걸었다고나 할까?

 

DMZ 평화의길 2코스(문수산성 남문  애기봉 평화생태공원)

 

여행일 : ‘24. 12. 21()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하성면 일원

여행코스 : 문수산성 남문남아문문수산 정상(왕복)DMZ평화의길거점센터조강저수지개화천애기봉 평화생태공원 입구(거리/시간 : 8.2km, 역방향으로 9.62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 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애기봉 평화생태공원주차장(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김포한강로 등을 이용해 통진읍까지 온다. ‘하성입구삼거리에서 하성로로 옮겨 통진방면으로 8km쯤 달리다 애기봉입구삼거리에서 평화대로를 타고 3km쯤 들어오면 애기봉 평화생태공원에 이르게 된다. 2코스는 원래 문수산성 남문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애기봉전망대를 둘러보기 위해 역코스로 진행했다. DMZ의 접경지역에는 북한을 조망할 수 있는 안보관광지가 꽤 많다. ‘DMZ 평화의길은 이들 중 대부분과 어깨를 맞대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들러볼 수 있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군부대 내 시설이지만 우리네 분단 현실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데 말이다. 특히 애기봉전망대는 평화생태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관광자원화 되었다지 않는가.

 문수산성 남문에서 출발해 애기봉 입구로 이어지는 7.8km 길이의 짧은 구간이다. 하지만 문수산의 8부 능선까지 올라가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 포함되어 있어 난이도는 어려움으로 분류된다. 다리품만 조금 더 팔면 애기봉 평화생태공원 문수산 정상에 올라 조강 너머의 북녘 땅 풍물을 실컷 감상할 수 있다.

 930분에 매표(출입신청서와 함께 입장료 3천원을 내야 한다)가 시작됐고, 신분확인 등의 절차를 거치다보니 10시를 훌쩍 넘기고서야 평화생태전시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래 전 뉴스에서 본 애기봉전망대는 낡고 조금은 무서운 안보관광지였다. 북한 주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상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점등식을 하던 뉴스 말이다. 그게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다양한 문화전시와 공연,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조강할아버지가 반긴다. 할아버지의 신력에 기대보려는 바램들이 소원나무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2층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8살 눈높이에서 조강과 북녘 땅을 바라볼 수 있단다. 실물과 대조해가며 살펴 볼 수 있도록 유리면에 지명을 적어 넣는 센스도 발휘했다.

 이곳은 김포, 김포의 역사도 한꺼번에 담아갈 수 있다. 조강(祖江)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행주대교 밑으로 흐르는 한강이 임진강과 만나면서 두 물줄기가 어우러져 서해에서 몸을 풀기 직전까지의 드넓은 흐름을 이르는데, 바다가 시작되는 원조의 강’, 여러 강물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으뜸 강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걸 줄여서 할아버지의 강’,  조강이 되었다나?

 생태관에는 20여점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경기도 젊은 작가들의 독창적인 작품들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밖에도 영상관과 평화관, 미래관, VR체험관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생태전시관과 조강전망대는 생태탐방로로 연결된다. 112m 흔들다리와 지그재그 모양의 산책로인 스카이포레스트 가든으로 이루어졌는데, 눈이 수북이 쌓인 탓에 오늘은 통행이 불가능하단다. 그나저나 저 탐방로는 연말마다 대형 성탄 트리로 변신한다고 했다. 오늘 저녁에는 김포시 주관으로 겨울밤 낭만주의보, 애기봉 크리스마스 행사도 열린단다. 생태탐방로 위를 수놓은 잔잔하고 고급스러운 조명과 매쉬LED로 표현한 희망의 메시지가 방문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나?

 우린 도로를 따라 전망대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파르지만 시간은 1/4 정도로 확 줄어든다.

 잠시 후 올라선 애기봉(愛妓峰, 155m). 병자호란 당시 평양감사와 기생 애기의 슬픈 일화가 어린 곳이다. 한양으로 함께 피난을 오던 중 감사는 강 건너 개풍군에서 청나라 오랑캐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고, 애기만 한강을 건너게 되었다. 매일 쑥갓머리봉(당시 이름)’에 올라 감사를 기다리던 애기는 병들어 죽었고, 사랑하는 이가 끌려간 북녘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세워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 전설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애기봉이라 쓴 비석을 세워줬다고 한다. 한편 망배단은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애기의 심정과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의 아픔을 함께 담았단다.

 평화의 종은 비무장지대(DMZ)의 철조망과 625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나온 탄피를 녹여 2018년에 만들었다. ‘아널드 슈워츠만 작가가 설계하고 국가무형문화제(112) 원광식 장인이 제작한 종탑은 ‘UN’을 형상화 했단다.

 조강전망대. 북한(개풍면 해물선전마을)과의 거리가 불과 1.4km로 남한에서 가장 가깝게 북한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해병대의 까다로운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도 세계에서 가장 큰 다국적 커피 전문점이 입점해 있었고, 빈자리 없이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야외전망대(루프탑 154)에는 망원경을 설치해 북한의 선전마을과 송악산 등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조강은 쌍마고지 앞에서 서해로 유입된다. 중립수역 왼쪽은 우리 땅인 유도와 강화도, 그 오른쪽에 북녘 땅인 쌍마고지를 시작으로 암실마을과 해물선전마을, 석류포마을 등이 들어서 있다. 송악산과 도고개산, 한터산도 조망된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조망된다. 군사분계선은 조강을 남북으로 가르다가 합수지인 관산포에서 왼쪽 임진강의 중앙으로 이어진다.

 내려올 때는 생태탐방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전망대를 둘러보는 동안 눈을 치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에 쫒긴 우리 부부에게 800m의 길이가 부담스러웠고 결국에는 도로를 따라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하긴 한국전쟁 때 순국한 해병대 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해병대전적비(아래 사진에서 평화생태전시관 뒤 봉우리)’조차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시간에 쫓겼으니 어련하겠는가.

 10 : 49. 평화생태전시관에서 들머리(2코스 종점이자 3코스 시점)까지는 산악회버스로 이동했다. 애기봉 평화생태공원 매표소에서 남쪽으로 250m쯤 떨어진 지점으로, 입구에 아치형 게이트가 세워져있으니 참조한다.

 DMZ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은 공생(共生)의 현장이다. 자건거길인 평화누리길’, 그리고 경기도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경기둘레길과 오손도손 함께 쓴다.

 10 : 50. 개곡리(월곶면)로 연결되는 산길을 올라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바닥에는 눈이 제법 쌓여있었다. 하지만 폭설일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와는 달리 발목에도 못 미칠 정도여서 걷는 데는 아무 지장도 없었다.

 10 : 55. 케언(cairn)이 반기는 개곡리 고개를 넘는다. 하성면(가금리)과 월곶면(개곡리)의 경계에 놓인 고갯마루이다.

 평화의길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점이다. 행여 갈림이라도 나타났다 싶으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고,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곳곳에 가이드리본을 매달아놓았다.

 11 : 01.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개곡1’. 이어서 애기봉로(409번길)을 따라 들녘으로 나간다.

 11 : 06. 탐방로는 마을 앞 널찍한 들녘으로 이어진다. 지역민들은 저 들녘에서 나오는 쌀을 밀다리 쌀(중국 길림성에서 벼 품종을 가져왔단다)’이라 부른다고 했다. 조강 밀물이 갯골따라 밀려 올라오면 나무로 만든 다리가 밀려 오른다는 데서 유래된 이 지역 지명에서 따왔단다.

 11 : 12. 잠시지만 개화천(開化川)의 둑길을 따라간다. 이어서 조강2 앞에서 다리를 이용해 하천을 건넌다.

 조강2. 마을이 제법 큰데도 인기척이 없었다. 기르는 개조차도 늦잠을 자는지 눈이 뽀얗게 쌓인 길에는 발자국 하나 없다.

 이후부터는 조강2 조강1를 잇는 차도를 따라간다. 아니 조강1리는 같은 2리보다 개곡리와 더 많이 왕래를 하는지 길바닥에 타이어 자국이 선명했다.

 길은 조강리의 들녘을 가로지르며 나있다. 이즈음 조강과 접한 널따란 들녘과 함께 애기봉의 조강전망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11 : 20. 조강저수지 수문(水門)에 이른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하나 더. 저수지에서 물을 대는 저 들녘 아래로는 조강’, 즉 한강과 임진강이 한 몸이 되어 흘러간다. 서해를 통해 한강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만 했던 물길이다. 그곳에 조강나루가 있었다. 한강 하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나루였고, 북한을 오가는 나루이기도 했다.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도로(저수지 제방을 따라간다)와 헤어져 저수지 동쪽 가장자리(東岸)를 따라간다. 그런데 초입을 철망으로 막아놓았으니 문제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그냥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1937)에 만들어졌다는 조강저수지는 캠핑과 낚시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저수지 가장자리를 따라 수십 개의 낚시 좌대를 만들고, 상부 광장에는 식수대와 화장실 등 캠핑에 필요한 편의시설들을 비치했다. 그나저나 저수지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하늘을 품었다. 그래서일까?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미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탐방로는 울안천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문수산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런데 높이가 500m에도 미치지 못하는 산이 저렇게 높이 보이는 이유는 뭘까?

 11 : 31. 잠시 후 도착한 김포 DMZ 평화의길 거점센터’. 코리아둘레길 걷기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이다. 커다란 테이블이 있는 거실에서 잠시 쉬어가거나, 걷기 여행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평화의길 말고도 해파랑·남파랑·서해랑 길에 관한 팸플릿들도 갖춰져 있었다.

 1인실과 다인실로 나누어진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한다고 했다. 이용료가 싼데다 시설까지 깔끔해서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편이란다. 1인당 이용료는 15천원(주말 2만원)이며, 홈페이지(http://dmz.callmom.co.kr/) 및 모바일 앱(DMZ김포)을 통해 사전 예약하면 된다. 예약문의(031-8049-3960)

 11 : 38. 탐방로는 용강로를 따라 마을(조강1)을 관통한다. 문수산을 정면에 놓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다 경기둘레길과 헤어지기도 한다. 경기둘레길은 오른쪽, 평화의길과 평화누리길은 왼쪽으로 간다.

 탐방로는 이제 월곶면소재지(군하리)’를 향해 남진한다. 이때 문수굿당이란 간판이 눈길을 끈다. 천공, 건진법사, 명도사에 이어 엊그제는 노보살까지,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무속 비선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상식처럼 되어버린 이 사회가 하시라도 빨리 정상으로 되돌아왔으면 좋겠다.

 이런 오지에 편의점이라니. 그래선지 포레스트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그나저나 금주령만 아니었으면 캔 맥주 하나쯤 냉큼 주워들었을 텐데...

 새로운 미래 100, 희망의 나무를 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기념해 나무를 심은 모양이다.

 조강리와 고막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를 넘는다.

 11 : 48. 고개를 넘자 라파엘요양원이 반긴다. 문수산 자락의 아름다운 경관을 벗 삼아 들어선 치유의 공간이다. 치매, 뇌졸증 등 노인성질환으로 고생하는 어르신과 그 가족들을 위한 요양시설로 1-2인실, 4인실, 부부실 등 다양한 규격의 생활공간과 재활을 위한 기구·프로그램을 구비하고 있단다.

 맞은편은 호기심놀이터이다. 아니 최근에 후에고 캠프라는 이름으로 변경됐다. 후에고(Juego)가 놀이·유희를 뜻하는 스페인어라니 외국어로 번역만 해놓은 셈이다. 대형 에어바운스·공릉공원·숲놀이터·실내놀이터 등 체험시설에다 감성 캠프닉을 더한 테마파크라고 보면 되겠다.

 11 : 52. 평화누리길 이정표(거리는 없고 방향만 표시되어 있다)가 이제 그만 용강로와 헤어지란다. 문수산 방향에 있는 고막2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이 즐비한 마을이다.

 고막천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리에 그런대로 괜찮은 할아버지라는 편액이 걸려있었다. 영어(Korea Good Grand Father)로 번역까지 해놓았는데 대체 뭐가 괜찮다는 얘기일까? 남부럽지 않은 노후를 즐기고 있다는 자랑일지도 모르겠다.

 12 : 01. 마을을 벗어나 문수산 자락으로 들어간다. 2코스의 최대 난관인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문수산의 8부 능선까지 올라가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정표가 종점인 문수산성 남문까지 2.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가파른 산길이 시작부터 겁을 잔뜩 주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100m쯤 올라가면 임도를 만나고, 이후부터는 완만한 경사로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심심찮게 나타나는 쉼터에서 잠시 쉬다 가면 그만이다.

 산길은 무척 고왔다. 경사가 완만할 뿐만 아니라, 눈에 들어오는 풍경까지 무척 아름답다.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을 헤집으며 올라가는데, 수십 년은 족히 먹었음직한 소나무들이 풍성한 가지를 휘휘 늘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 18.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갈림길이 나타난다. 문수산성 남문에서 시작된 평화의길 2코스가 이곳에서 둘로 나뉘면서 우회로인 ‘2-1’은 김포국제조각공원을 거쳐 종점인 통진성당으로 간다. 여기서 팁 하나. 이곳에서 2코스를 선택할 경우에는 3코스를 이어 걸어야 하고, 반대로 2-1코스를 선택하면 3-1코스를 걸어야 한다.

 이정표(문수산 정상 0.7km/ 김포국제조각공원 2.1km/ 청룡회관 0.7km)말고도 문수산길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4개 코스로 이루어진 탐방로가 문수산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모양새이다.

 가끔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바닥이 흡사 콘크리트를 부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자갈이 진흙이나 모래에 섞여서 굳은 퇴적암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코리아트레일을 함께 이어가고 있는 몽중루 작가님이 문수산은 원래 바닷속에 있었다고 알려주신다. 융기작용으로 솟아올랐기 때문에 바위들이 역암(礫巖)’ 아니면사암(沙巖)’일 것이란다.

 12 : 23. 이번에는 정자가 맞는다. 청룡회관에서 기증이라도 했는지 사람들은 이 정자를 청룡회관 팔각정이라 부르고 있었다. 참고로 청룡회관은 해병대 2사단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이다. 군인 및 그 가족들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데, 숙소·식당·목욕탕·이발소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정자에서의 조망은 뛰어났다. 월곶면뿐 아니라 하성면과 통진읍 일원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눈만 크게 뜨면 한강에다 파주의 심학산까지 주워 담을 수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나무계단이 맞는다. 그만큼 가팔라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길지 않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올라설 수 있다.

 12 : 33. 문수산성과의 첫 만남은 남아문(南亞門)’이다. 무지개를 닮은 홍예문(虹霓門)의 바깥 출입구에 문수산성의 문지 및 깃발에 대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문수산성(文殊山城, 사적 139)은 강화의 갑곶진(甲串鎭)을 마주보고 있는 문수산의 험준한 줄기와 해안지대를 연결하는 요새다. 1694(숙종 20) 강화 입구를 지키기 위해, 다듬은 돌로 견고하게 쌓고 그 위에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말하는데 장대 말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을 둘렀다. 성곽의 길이는 6,123m, 현재 남은 구간은 4,640m이고 해안 쪽의 없어진 구간 등 성벽이 없는 부분은 1,483m라고 한다.

 바깥은 홍예문이지만 안쪽은 문짝을 걸 수 있도록 사각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문수산성에는 희우루(喜雨樓, 남문), 공해루(控海樓, 서문), 취예루(取豫樓, 북문)  3개의 문루와 3개의 암문(暗門,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는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병인양요(1866) 때 성문 모두가 소실됐는데, 북문은 1995년 남문은 2002년에 복원됐다.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간다. 하지만 난 이정표(정상까지 0.4Km)가 가리키는 정상으로 향했다. 북녘 땅을 마주보며 통일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싶어서다. 정상은 마주보이는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12 : 38. 헬기장. 날씨라도 좋을라치면 단체 등산객들이 옹기종기 점심상을 차리는 곳이다.

 신년 해맞이 행사라도 열리는지 제단(祭壇)’을 만들어놓았다. 이밖에도 이정표, 문수산성 안내판, 문수산길 안내도 등 다양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나무계단이 반긴다. 추락위험이 있으니 등산로를 따르라는 안내판이 꼭 아니어도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성곽을 기다시피 올라갈 사람을 없을 것 같다.

 계단은 꽤 길었다. 하지만 버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잠시 후 감상하게 될 조망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지 싶다.

 12 : 47. 장대에서 북문으로 연결되는 능선 안부에 올라섰다. 이곳에서 길이 나뉘는데 오른쪽은 문수산 정상, 왼쪽은 전망대를 거쳐 북문으로 연결된다.

 일단은 문수산 정상부터 올라보기로 한다. 동쪽 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12 : 49. 이곳은 문수산’. 그러니 가장 높은 곳에 정상 표석이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참고로 김포의 금강이라고도 불리는 문수산(文殊山, 376m)은 이 산에 있던 문수사에서 이름을 차용했다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아산(比兒山)’, 여지도서에서는 비예산(肶晲山)’으로 적기도 한다. 부평 안남산(安南山)에서 북쪽으로 줄기가 이어져 읍치의 주맥을 형성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상에는 문수산성의 장대(將臺)’가 들어서 있었다. 지휘자의 중요성을 나타내기라도 하려는 듯, 또 하나의 성벽이 장대를 둘러싼 모양새이다. 2017년 군용 헬기장으로 사용되던 공터에 정면 3칸에 측면 1칸인 전각을 복원해놓았다.

 장군의 지휘소답게 장대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염하강(강화해협)이 강화도와 김포반도를 가르는데, 그 강을 신구 강화대교가 훌쩍 건너고 있다. 고려산, 혈구산, 별립산, 봉천산 등이 함께 조망됨은 물론이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문수산성의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흡사 용이라도 되는 양 용틀임을 해가며 염하강을 향해 뻗어나간다.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능선에는 전망대가 놓여있었다. ! 월곶면과 대곶면도 눈에 들어오나 사진은 생략했다.

 12 : 54. 안부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반대편 능선을 탄다. 북녘 땅을 살펴볼 수 있다는데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12 : 56. 문수산 등반의 하이라이트랄 수도 있는 전망대에 올라섰다. 옛 전망초소(OP)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전망대를 들어앉혔다.

 염하(강화해협)부터 눈에 담아본다. 그 옛날 남과 북에서 모여든 고기잡이배들이 깃발을 펄럭이며 만선으로 출렁거렸을 그 바다다. 욕심도 이념도 부질없다는 듯 푸른 물결만 넘실거린다. 그 오른쪽은 한강의 하구역인 조강(祖江)’이다. 강화팔경인 연미정과 유도(留島)도 자신도 보아달라며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조강이 통째로 달려온다. ‘할아버지 강이라는 푸근한 이름(祖江)을 가졌지만 넘어갈 수 없는 한반도 유일의 남북 공동 이용 수역이다. 그 너머는 북녘 땅. 분명 우리 땅이건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다. 하시라도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북녘 동포들을 벗 삼아 소찬에 박주라도 나눠보고 싶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문수산 정상에 걸터앉은 장대가 한 폭의 풍경화가 되어 다가온다.

 13 : 11. ‘남아문으로 되돌아와 다시 평화의길을 이어간다. 남문으로 연결되는 성벽을 따라가면 된다. 탐방로는 성벽과 그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나있는 오솔길을 오락가락하며 이어진다.

 성곽에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옛날 군사들이 사용하던 깃발은 문기(門旗)와 인기(認旗, 소속을 표시한 깃발), 영기(令旗, 명령을 전할 때 사용), 순시기(巡視旗, 죄지은 자를 적발·처벌하는 巡軍이 소지) 등으로 구분된다.

 13 : 20. 산림욕장 갈림길(이정표 : 성동검문소 1.3km/ 산림욕장 1.0km/ 정상 0.8km)에서 성동검문소로 내려가야 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내려가지는 말자. 산림욕장 쪽으로 10m쯤 가면 조망이 툭 터지는 정자가 지어져 있으니 말이다.

 정자에 오르자 염하 너머 강화도가 성큼 다가온다. 혈구산과 고려산, 별립산 등 지난번 1코스 때 올려다보던 산들을 오늘은 발아래 놓고 살펴볼 수 있다.

 성곽 위를 걷기도 한다. 사적으로까지 지정된 문화재이기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따로 내놓은 길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성곽 덕분인지 심심찮게 조망이 터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강화해협은 물론이고 강화도까지 그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계속해서 내려가는 것만은 아니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13 : 39. 가파른 오르막의 끝에는 전망대가 있었다. 강화 지역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인데, 의자에 탁자까지 배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문수산성의 문지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 읽을거리까지 제공하고 있었다.

 13 : 50. ‘모란각 삼거리(이정표 : 문수산성 남문 0.5km/ 관리사무소 0.7km/ 정상 1.7km)’에서는 아예 성벽을 넘어버린다.

 이제 문수산성과는 헤어져야 한다. 조선시대로의 시간 여행을 끝낸다고나 할까? 아무튼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이 산등성이에 산성을 쌓아 올리며 품었을 선조들의 나라사랑 마음을 다시 한 번 새기며 발길을 돌렸다.

 잠시지만 무척 가파른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했다. 곧장 내려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겨우 고도를 낮추어간다.

 이후부터는 곱디고운 산길이 이어진다. 보드라운 흙길에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 흡사 양탄자 위를 걷는 듯 폭신폭신하다. 거기다 경사까지 느끼지 못할 정도이니 이 아니 좋을 손가.

 14 : 01. 종점 조금 못미처에서 토지지신(土地之神)’을 모시는 제단을 만났다. 지신(地神)은 토지나 대지, 또는 그 힘을 관장하는 신이다. 일부러 찾아와서 소원을 빌 만큼 영험해보이지는 않는데 누가 세웠을까?

 14 : 06. ‘김포장례협동조합(문수산수목장)’ 뒤쪽으로 내려서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출발지로 명시된 문수산성 남문은 장례협동조합의 맞은편 언덕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지만, 코스안내도와 이정표 등 2코스의 출발지임을 알리는 모든 시설물들이 모두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

 평화의길(2코스) 안내도는 아치형 게이트 오른쪽에 세워놓았다. 방문 인증 QR코드는 평화의길 이정표 기둥에 2코스와 2-1코스가 함께 붙어있다. 아무튼 오늘은 9.62km 3시간 20분에 걸었다. 후반부의 가파른 산길과 정규 코스를 벗어나 문수산 정상까지 다녀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