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봉(城主峰, 533m)

 

산 행 일 : ‘21. 10. 9(토)

소 재 지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산행코스 : 둔전교→사기점 마을→부엉바위→성주봉→암릉(하이라이트)→둔전마을(순창샘물공장)→둔전교(소요시간 : 5.4km/ 2시간 10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정맥(正脈)은 물론이고 기맥(岐脈)이나 지맥(支脈), 분맥(分脈), 단맥(短脈), 여맥(餘脈)으로도 검색이 되지 않는 의문의 산줄기에 놓인 산. 그저 호남정맥의 용추봉에서 분기한 산줄기가 치재산을 거친 다음 추령천에서 숨을 다하기 직전에 일궈놓은 나지막한 산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산세만큼은 전국의 어느 명산에 뒤지 않을 정도로 빼어나다. 전형적인 육산인데도 천애절벽을 끼고 있어 ‘보는 재미(조망)’와 ‘즐기는 재미(스릴)’를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령천 건너에 위치한 하서 김인후 선생의 강학당 ‘훈몽재(訓蒙齋)’ 또한 성주봉이 품은 자랑거리다. 허나 지자체에서 내팽개쳐 놓은 것은 흠이라 하겠다. 이정표나 밧줄 등 안전시설이 전무한 것은 물론이고 길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산행에 이골이 난 사람이 아니라면 전문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 산행들머리는 ‘둔전교’(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호남고속도로 정읍 IC에서 내려와 국도 29호선을 타고 담양방면으로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순창군으로 들어서게 되고, 곧이어 쌍치면 관내에 있는 둔전리에 이르게 된다. 둔전마을 버스정류장 근처의 다리(둔전교)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성주봉의 들머리는 두 군데. 즉 둔전마을(순창샘물공장)과 둔전사방댐 뿐이다. 치재 쪽에서 올라오는 길도 있지만 이용하는 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치재 방향은 자신이 오른 봉우리의 숫자를 헤아려가는 사람들이 ‘산수봉’과 ‘황새봉’이란 봉우리를 따먹기 위해 다니는 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 ‘둔전교(屯田橋)’ 다리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둔전사방댐 근처의 사기점 마을까지 도로가 나있으나 일차선이라서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둔전(屯田)이란 고려·조선 시대에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변경이나 군사 요충지에 설치한 토지를 말한다. 이곳 둔전리에도 군사 훈련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주둔병의 군량을 제공하기 위한 논밭도 있었을 터. 병사들의 막사가 있었던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현재의 둔전리가 되었단다.

▼ 다리 아래로는 추령천(秋嶺川)이 유유히 흘러간다. 복흥면(순창군) 서북쪽 끝에 있는 추령봉(내장산)에서 발원하여 복흥면과 쌍치면을 거쳐 산내면(정읍시)에서 옥정호로 들어가는 섬진강의 지류이다. 옥정호(玉井湖)는 물이 맑기로 유명한 호수다. 그러니 추령천의 물 맑음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은어낚시나 다슬기 채취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게 그 증거라 하겠다.

▼ 한로(寒露)가 어제였으니 이젠 완연한 가을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둔전마을 앞 뜨락의 고개 숙인 벼들은 풍요로운 가을기운을 한껏 전해준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보면서 걷다보니 내 마음도 풍성해진다. 옛 사람들은 내 마음이 넉넉해져야 상대방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가을은 모든 이들에게 너그러운 계절일 수밖에 없다.

▼ 잠시 후 ‘순창 샘물’이 얼굴을 내민다. 뒤를 받쳐주고 있는 멋진 바위산을 주민들은 ‘가락(물레 손잡이)봉’이라 부른단다. ‘가락봉에 가락 들어간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가락봉 아래에 생수공장이 들어섰고, 가락(물 뽑아 올리는 대롱)을 집어넣었으니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 추령천 건너에서는 ‘훈몽재(訓蒙齋)’가 한번쯤 들러보라며 손짓한다. 을사사화로 조정의 분위기가 어지럽던 시기,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면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친구인 유희춘·노수신·김희년 등이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러자 옥과 현감으로 있던 하서(河西, 김인후의 호)는 벼슬을 내려놓고 잠시 고향인 장성에 머물다가 부모님과 함께 처가인 순창 점암촌(지금의 둔전리)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경관 좋은 저곳에 강학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단다.

▼ 산행을 나선지 20분. ‘사기점’ 마을에 도착했다. ‘사기점’이란 사기그릇 따위를 만드는 곳을 말한다. 그러니 옛날 이 근처에 가마터가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1.5㎞ 가량 떨어진 도둑골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자기(분청사기와 백자) 조각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가마터도 함께 발견되었다니 사기점이란 지명은 그 가마터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싶다.

▼ 오는 도중 블루베리 과수원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사기점 마을 앞에는 ‘블루베리 체험농장’이라는 입간판도 세워놓았다. 그만큼 많이 재배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얼마 전 순창군에서 블루베리를 활용해 아동 면역력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강기능식품(슈퍼케이 키즈비타민)까지 출시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걷자 굵직한 소나무에 ‘도로 끝’이란 팻말이 걸려있다. 조금 더 들어간 곳에는 아예 차단봉으로 길을 막아버렸다. 이후의 임도는 차량통행을 제한하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 잠시 후, 그러니까 산행을 나선지 25분 만에 ‘둔전 사방댐’에 도착했다. 이어서 사방댐과 임도 사이의 능선으로 올라붙으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 산길은 처음부터 거칠다. 잡목과 가시넝쿨로 뒤덮인 곳에서 길을 찾아야 함은 물론이고, 곳곳에서 쉽지 않은 바윗길을 만난다. 그러나 바윗길이 아무리 험해도 멋진 산을 오른다는 설렘에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땀 흘리는 족족 꿀맛 같은 경치로 되갚아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바위에 올라서자 발아래로 빼어난 풍광이 펼쳐진다. 옥녀봉을 만난 추령천 물길이 에돌면서 만들어놓은 예술품이다. 사진으로는 확인이 안 되지만 추령천은 이 부근에서 산태극수태극을 만들어낸다. 어디에 빼놓아도 뒤지지 않을 절경이기에 지자체인 순창군에서는 추령천의 강변을 따라 ‘훈몽재 선비의 길’이라는 명품 둘레길까지 조성해 놓았다.

▼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추령천 너머에서 백방산(柏芳山)이 손짓한다. 하서 선생은 저 산자락에 강학당인 ‘훈몽재’를 지어놓고 후학을 양성했다.

▼ 산길은 릿지(ridge) 구간이 계속된다. 계단은커녕 밧줄도 매어져있지 않는 순수한 바윗길이다. 그러니 무서울 수밖에. 하지만 스릴만은 10점 만점에 20점이다. 그 스릴은 겁까지 없애버리는 모양이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도 저리 유연한 자세를 취하는 걸 보면 말이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소나무에 걸터앉더니 냉큼 포즈부터 취하고 본다. 암릉을 오르다보면 저런 멋진 소나무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 햇살은 완연한 가을날이다. 따가울 정도로 반짝거리지만 그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런 햇살의 변주곡에 몸을 맡긴 바윗길은 마냥 아름다울 뿐! 손바닥 발바닥으로 눈으로 손으로 달콤한 산행의 맛이 전해온다. 이런 재미로 우리부부는 오늘도 산을 찾았다.

▼ 고도감 높은 벼랑에 올라서면 성취감이 주는 꿀맛은 정점에 이른다. 그 맛에 취한 집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만세를 부른다. 그래 저런 맛에 산, 그것도 바위산에 오를 것이다.

▼ 또 하나의 바위봉우리를 넘자 그보다 훨씬 큰 바위봉우리가 얼굴을 내민다. 성주산 암릉의 백미라는 ‘부엉바위’다. 어떤 이는 ‘부엉’이라는 지명의 어원을 부엉이가 사는 바위라는 데서 찾고 있었다. 그럴 듯한 가설이다.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찾는다면 저만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 바윗길은 경사가 무척 가파르다. 크랙(crack, 바위틈)을 붙잡고 올라야 하니 난이도가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거칠게 튀어나온 표면 덕분에 발이 전혀 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고도감에 비해 산행이 어렵지 않은 이유이다. 그렇다고 조심하는 것까지 잊지는 말자.

▼ 암릉에는 바위손이 널려있다시피 했다. 꽃을 피우지 않지만 숲 다양성의 일익을 담당하는 양치식물의 하나이다. 그런데 안쪽으로 돌돌 말려있는 게 바위손도 가뭄을 타나보다. 하긴 척박한 바위로도 모자라 물기까지 부족했으니 어찌 제대로 된 외모를 지닐 수 있겠는가.

▼ 부엉바위에 올라서서 까마득한 고도감을 만끽해본다. 그러자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의 즐거움이 극에 달한다. 리처드 버크는 ‘갈매기의 꿈’에서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조금 전에 보았던 풍경화의 폭이 아까보다 한참이나 넓어졌다. 거기다 추령천의 물돌이도 아까보다 훨씬 더 고와졌다. 저 물돌이를 돌아가면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1888-1964)’ 선생의 생가가 나올 것이다.

▼ 20분 정도의 바윗길이 끝나자 이번에는 전형적인 흙길이 나타난다. 하지만 길은 더 사나워졌다. 산자락이 온통 잡목과 넝쿨식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길을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거기다 숲을 헤치며 오르다보면 찔리고 할퀴는 것은 물론이고, 심심찮게 싸대기까지 맞을 수밖에 없다. 성주봉을 초보 산꾼들에게 권할 수 없는 이유이다.

▼ 암릉이 끝나갈 즈음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 하나가 눈에 띈다. 누군가가 험상궂은 암릉을 무사히 올라올 수 있게 해준 산신령께 감사라도 드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 산길은 무척 가파르다. 하지만 버겁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어쩌면 잡목과의 힘겨운 싸움 때문에 가파름 정도는 신경 쓸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최인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길 없는 길’이 떠오른다.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경허선사와 만공선사를 축으로 한국 불교의 진리를 빌어 인간이 나아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장편소설이다.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다고나 할까? 선답자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길에서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에 의지해 길을 찾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 그렇게 20분 정도를 오르자 뜬금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에 이골이 난 산꾼들도 고개를 내두를 정도로 험하고 높은 산중에 무덤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의젓하게 묘비까지 갖췄다. 이런 묘들은 이후로도 여럿 눈에 띈다. 인근에 위치한 회문산(回文山)의 지운(地運)을 기대하며 쓴 묘들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의 5대 명당(明堂) 가운데 하나가 회문산이니 말이다. 전설적인 풍수가 홍성문(洪成文)은 회문산에서 도통(道通)한 후, 묘혈(墓穴)과 관련된 책자를 적었는데, 이 책에서 회문산 정상에 24혈이 있다하며, 오선위기혈에 묘를 쓰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代까지 간다고 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조상의 묘를 쓰지 않고 배겨내겠는가?

▼ 정상에 이를 즈음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치재로 연결되는 능선의 분기점인 것 같아 집사람에게 포즈까지 취하게 했으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집에 돌아와 확인해보니 아까 만났던 묘역의 근처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 하도 사납다보니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모양이다.

▼ 산자락으로 들어선지 55분 만에 성주봉의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두루뭉술한 것이 정상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거기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찾아볼 수 없으니 어느 누가 이곳이 정상인줄 알겠는가. 그저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그린나레 산행대장이 붙여놓은 정상표시지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함께 왔으나 답사 코스를 달리한 ‘배하사’라는 또 한 명의 베테랑 산꾼이 매달아놓은 정상표시지도 보인다. 그는 둔전마을을 들머리로 삼아 이곳 성주산을 오른 다음 인근의 황새봉(443m)과 산수봉(308m), 철마봉(350m)까지 모두 둘러보는 장거리 산행을 소화했다.

▼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꺾어 하산을 시작한다. 하산 구간도 역시 길은 또렷하지 않다. 그저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갈 따름이다. 그런데도 무덤이 두어 기나 있다. 발복(發福)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걸어서 올라오기도 힘든 이곳에까지 무덤을 써야만 했을까.

▼ 잠시 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조망을 즐기고 있는 일행 몇이 눈에 들어온다. 성주봉의 하이라이트인 바윗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 바윗길의 가장 큰 매력은 물론 가슴조리는 ‘스릴’이다. 조망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인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올망졸망한 산하를 품은 풍경화 한 폭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참!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맨 오른편에는 회문산이 있다.

▼ 고개를 살짝 돌리자 이번에는 잠시 후 오르내리게 될 능선이 눈에 쏙 들어온다. 푸른 숲속에 감춰져 있지만 저 능선은 바윗길의 연속이다. 바위의 크랙에 의지해서 내려가야만 하는 구간이 수두룩하고, 거기다 양 옆은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 계속된다.

▼ 집사람은 요즘 선글라스의 매력에 쏙 빠져 있다. 평소의 그녀는 바위절벽이라면 무섬증 때문에 제대로 서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리나케 선글라스부터 쓰고 본다. 하긴 사랑하는 이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겠는가.

▼ 이제 바윗길이 시작된다. 양 옆이 수십 미터에 이르는 낭떠러지라서 초보자는 고도에서 오는 공포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할 일이다. 쉬운 등반 동작일지라도 높이로 인한 공포 때문에 몸이 굳어 자칫 실수로 이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 바위에 매달리다시피 해가며 내려가는 집사람의 모습에서 설악산의 ‘용아장성(龍牙長城)’을 떠올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암봉이 줄지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용아장성은 등반이 금지되어 있을 정도로 위험한 코스다. 그러니 이곳 성주봉을 용아장성에 비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겪고 있을 집사람의 가슴조림은 내가 옛날 용아장성에서 느꼈던 스릴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 바윗길은 꽤 오래 지속된다. 크랙을 붙잡고 오르내리다 그게 어려울 때는 바위를 피해 우회한다. 이때 스릴과 조망을 함께 즐길 수 있는데, 그걸 계룡산처럼 느낀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자연성릉’이라 부르며 눈앞에 펼쳐지는 아기자기한 바윗길과 조망에 혀를 내둘렀다고 적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무계단 등 인간의 손길로 덧칠을 해버린 자연성릉을 어디 감히 이곳에 비유할 수 있을까?

▼ 정신 나간 진달래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고도감에서 오는 공포감이 저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하는 곳이니 꽃이라고 해서 온전할 수 있겠는가.

▼ 왼쪽 방향도 심심찮게 시야가 열린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는데도 추령천이 만들어놓은 들녘이 제법 넓다. 첩첩이 쌓인 산들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내장산이 아닐까 싶다.

▼ 하산을 시작한지 26분.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왼편으로 바뀐다. 능선을 벗어나라는 것이다. 능선으로도 길의 흔적이 보이는데 말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능선을 따라보려다 집사람에게 지청구만 엄청 들었다. 집사람의 눈에 비치는 나는 언제나 변함없는 초보 산꾼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후로도 길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거기다 이 구간은 능선도 아니어서 아마추어가 길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나 역시 선두대장의 표시에 의지해 무의식적으로 내려가고 있을 따름이다.

▼ 그렇게 15분쯤 내려왔을까 또 다른 무덤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망주석에 상석까지 제대로 갖췄다. 하지만 수십 년은 족히 내팽개쳐두었는지 상태는 극히 엉망이다. 복(福)이 이미 고갈되어 버린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풍수란 본디 믿을게 못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산행날머리는 둔전마을(순창 생물공장 옆)

암릉을 비켜 내려선지 25분 만에 ‘둔전마을’에 내려섰다. 이어서 마을 앞길을 지나자 다리 곁에 산악회의 버스가 주차되어 있다. 성주봉 산행이 종료된 것이다. 오늘은 쉬는 시간 없이 2시간 10분을 걸었다. 5km 남짓 되는 거리, 그것도 2/3정도가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 산악회의 다음 일정은 장군봉을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등산 대신 ‘훈몽재 선비의 길’을 답사해 보기로 했다. ‘전북천리길’에까지 끼인 둘레길이라니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겠는가. 이곳 ‘둔전마을’에서 훈몽재까지는 1km 남짓. 추령천의 지류인 방산천을 50m쯤 거슬러 올라가다 아래 사진의 잠수교를 건너면 된다. 29번 국도를 따라 정읍방면으로 100m쯤 가다가 ‘중안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차도를 이용해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정류장 옆에 ‘훈몽재’라 적힌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다리를 건너자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추령천의 강둑을 따라가는 방법, 다른 하나는 방산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차도를 이용해 훈몽재로 간다. 하지만 우리는 농로를 따르기고 했다. 길가를 장식하고 있는 하얀 갈대꽃 무리가 집사람의 방심을 자극하는데 어쩌겠는가.

▼ 눈요깃거리는 갈대꽃뿐만이 아니다. 조금 전에 올랐던 성주봉이 그 빼어난 자태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이번에는 장군봉이 눈에 쏙 들어온다. 만만찮은 산세인데, 다녀온 이들의 전언에 의하면 산길까지 거칠단다. 그러면서 훈몽재를 다녀온 우리 부부의 선택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 그렇게 20분 남짓 걸었을까 ‘훈몽재(訓蒙齋, 전라북도 지정문화재자료 제189호)’가 얼굴을 내민다. 조선 유학의 큰 별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이 1548년 순창 점안촌의 백방산(667.8m) 자락에 지은 강학당이다. 인종 임금의 세자시절 스승이자, 호남출신으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그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당대의 석학으로 길러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들은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2009년에 다시 태어났다. 전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과정을 거쳤음은 물론이다.

▼ 입구로 들어서자 삼연정(三然亭)이 길손을 맞는다. ‘훈몽재 복원사업’ 때 지은 팔각정으로 하서 김인후가 산(山)·수(水)·인(人) 등 세 자연을 노래한 ‘자연가’(自然歌)에서 명칭을 따왔다.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산도 절로 물도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하리라(已矣哉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 맨 안쪽에는 강학당(講學堂)인 훈몽재(訓蒙齋)가 들어앉았다.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한 선생은 장성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명종의 부름이 계속되자 1548년 봄 처가가 있는 이곳 점암촌(둔전리)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이곳에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訓蒙)이라 내건 다음 당대의 석학 변성온·기효간·조희문·양자징·정철 등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터만 남아 있다가 위에서 말한 복원사업을 통해 중건되었다. 현재는 단국대학교에서 정년하고 강원도 산중에 ‘산동서당’을 짓고 강학을 하던 고당 김충호 산장이 하서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단다.

▼ 아래 사진은 ‘훈몽재 복원사업’ 때 훈몽재의 부속 건물로 중건된 ‘자연당(自然堂)’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훈몽재는 1680년 무렵 선생의 5대손인 자연당 김시서(金時瑞, 1652-1707)에 의해 복원됐다. 그는 훈몽재 옆에 하서 선생의 ‘자연가’에서 뜻을 취한 ‘자연당’이란 초당도 함께 지었다고 한다. 이후 훈몽재와 함께 사라졌다가 복원사업에 의해 교육생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되살아난 것이다.

▼ 맨 앞에는 숙박과 교육의 역할을 겸하는 ‘양정관(養正館)’이 들어섰다. 양정관이란 이름은 매산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훈몽재기(訓蒙齋記)에 수록된 하서 선생의 교육이념인 ‘몽이양정(蒙以養正, 어리석은 사람을 바르게 기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양정관 뒤의 건물은 ‘양생당’이다. 오래 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병에 걸리지 않게 노력한다는 의미를 지닌 취사·샤워·세탁 등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공간이란다.

▼ 훈몽재 앞마당에는 커다란 지석묘가 있었다.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남방식 지석묘로 규모(길이 4.9m×폭 2.43m×높이 1.4m)가 큰 편이라서 권력을 가진 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단다. 이로보아 훈몽재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 훈몽재 앞 천변에는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있다. 선생이 제자들에게 대학을 가르쳤다는 너럭바위로, 하서의 제자인 정철이 썼다는 대학암(大學巖)이 각자되어 있다.

▼ 사람을 불러 모았으니 어찌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 앞마당에 한옥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세워 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도록 했다.

▼ 자 이제 ‘선비의 길’을 걸어볼 차례이다. 이 둘레길은 전북천리길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래선지 ‘현재에서 따라가 보는 선비의 시간’이라고 적인 스탬프보관함에는 전북천리길의 스탬프 북이 보관되어 있었다. 참고로 순창의 전북천리길 구간은 선비의 길을 비롯해서 순창-장군목길, 강천산길 등 3곳이다.

▼ ‘선비의 걸음으로 걷는 역사문화 탐방길’이란 부제를 단 탐방로는 동국 18현 중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 선생이 제자를 양성한 훈몽재에서 출발해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선생의 생가를 거쳐 낙덕정에 이르는 6km 길이의 둘레길이다.

▼ 길을 나선다. 하서 김인후 선생은 물론 문하생들도 여가를 이용해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470여 년 전 선비들이 걸었을 그 길을 지금 내가 걷는다. 싱그러운 녹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길은 데크로 조성되어 걷기가 한결 편했다. 그 여유로움 덕분일까 문득 그들이 추구하던 도(道)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길 도(道)’이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는 게 도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공자도 도척(盜跖, 중국 춘추 시대의 큰 도적)에게도 도가 있다고 했을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하자마자 ‘사진 찍기 좋은 곳’이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물길을 향해 툭 튀어나간 테라스형의 전망대와 추령천, 거기다 삼연정까지 집어넣으면 인생샷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이곳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눈길 드는 곳마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하니 말이다.

▼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정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잠시 이층 전망대 올라 성주봉과 그 산자락에 터를 잡은 사기막 마을을 감상해보는 것도 좋고, 시간에 여유라도 있다면 천가로 내려가 발이라도 담아볼 일이다. ‘느림보의 미학’을 따라보기 딱 좋은 코스라는 얘기이다.

▼ 물 위를 스치듯이 날아가는 백로(왜가리일지도 모르겠다)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힘찬 날갯짓이 마치 다른 일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찾아준 우리를 환영이라도 하는 듯하다.

▼ 산자락을 따라 길게 늘어선 데크와 추령천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탐방로는 텅 비어있다. ‘언택트 관광’이 최고의 미덕이 된 코로나19 팬데믹 시국에서 이만한 관광지도 없을 텐데 말이다. 아직도 입소문을 덜 탄 모양이다.

▼ 이곳 쌍치는 ‘복분자’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선지 탐방로 주변은 온통 복분자 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참고로 복분자의 원조 생산지가 전북 고창이라면 순창지역은 복분자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쌍치복분자는 주·야간 일교차가 13도나 되는 내륙성 기후 영향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당도와 단단한 과육은 지녔다고 한다.

▼ 절개지 사면에 뿌리를 내린 운지버섯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운지버섯은 마치 구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양에서는 칠면조의 꼬리 깃털 같은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는지 이를 ‘터키 테일 버섯(Turkey Tail Mushroom)’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기왓장처럼 버섯 갓이 겹쳐져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구름이나 칠면조의 꼬리 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 데크가 끝날 무렵 수중보가 나타났다. 이곳 추령천, 아니 심심산골을 흐르는 하천들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들녘다운 들녘이 없으니 커다란 저수지보다는 저런 수중보를 만들어 농용수를 확보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 데크의 끝. 수중보의 옆에는 사과정(麝過亭)이란 정자가 2층으로 지어져 있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육각정이나 팔각정이 아니라 사각으로 지어진 정자인데, 하서가 지은 백년초해(百聯抄解)라는 시의 구절 ‘사과춘산초자향(麝過春山草自香)’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과정이 있는 곳의 풍경이 사향노루가 지나다닐듯한 곳으로 은은한 향기가 피어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단다.

▼ 사과정에서 탐방로는 황토를 다져놓은 황톳길로 변한다. 이 구간은 맨발로 걸어도 좋을 듯 싶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나들이는 딱 여기까지였다. 주어진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법 종사자들이 귀감으로 삼는다는 가인(김병로)의 생가를 둘러보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음을 기약하며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둔전마을로 되돌아 올 수밖에...

 

무직산(珷織山, 578.5m)

 

산 행 일 : ‘21. 4. 15(목)

소 재 지 :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산행코스 : 금평교→옥새바위→한반도 전망대→정상→제2전망대→스핑크스바위→수변산책로→호정소→금평교(거리/ 소요시간 : 7.2km/ 2시간 45분)

 

함께한 사람들 : 산두레

 

특징 : 두 번째로 산두레를 따라나섰다. 미답의 산만을 오른다는 내 고집 탓에 본의 아니게 격주로 만나게 됐다. 이번 산은 내가 태어난 고향의 산이라는 또 다른 특징도 있다. 오래 전 현직에 있을 때이다. ‘무진장(무주·진안·장수를 줄여서 부르는 단어이다) 촌에서 출세했다’는 내 농담을 들은 한 지인은 ‘산에다 간짓대를 걸쳐놓고 턱걸이를 할 수 있는 곳’에서 온 놈은 출세한 게 아니냐는 농담으로 나에게 반격을 했었다. 이는 순창도 역시 무지막지한 산골이라는 얘기일 것이고, 그러다보니 내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올라보지 못한 산들이 아직도 사방에 널려있다. 무직산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눈에, 아니 가슴에 담아둘만한 기암괴석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한반도를 닮은 지형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보기 드문 산인데도 말이다. 거기다 호정소 수변산책길은 또 어떠한가. 아무튼 내 고향에도 이런 멋진 산이 있다는데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산이었다.

 

▼ 산행들머리는 ‘금평교’(순창군 구림면 금천리 558-21)

호남고속도로 전주 IC에서 내려와 국도 21호선, 이어서 구이교차로에서 27호선을 타고 순창방면으로 오다 장암교차로(임실군 덕치면 장암리 624-5)에서 빠져나온다. 이어서 일중교 아래를 통과해 회문산로를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평교에 이르게 된다. 다리 건너에 있는 자그마한 주차장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무직산의 들머리는 정확히 셋이다. 금평마을(금천리) 앞의 금평교, 통안마을(율북리), 그리고 산내마을(안정리) 근처의 ‘잠수교’이다. 하지만 십중팔구는 금평교에서 시작해 금평교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산행을 한다. 그래야만 옥새바위와 한반도전망대, 호정소 등 무직산이 품은 명소들을 빠짐없이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치천(淄川)을 오른편 옆구리에 차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탐방로는 치천의 제방 위로 나있다. 참!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산행안내도(위의 사진)를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서라는 말을 깜빡 잊을 뻔했다. 안내도는 ‘호정소 수변산책로’를 가운데 두고, 무직산 등산로 및 둘레길(만일사와 회문산자연휴양림을 잇는다)을 끼워 넣었다. 그래선지 등산로도 무직산 대신 ‘호정소’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표를 달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시간에 맞춰 트레킹 코스를 정하면 될 일을...

▼ 200m쯤 걸었을까 이정표 하나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정표에 매달려 있어야 할 방향표시판들이 하나같이 땅에서 나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한술 더 떠서 3개의 방향표시판(호정소 등산로, 호정소 수변산책로, 만일사 3.2㎞)에는 무직산이란 지명은 눈에 띄지도 않는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지자체의 무성의한 행정 행위 탓일 것이다. 아무튼 이곳은 ‘호정소 수변산책로’와 ‘무직산 등산로’가 나뉘는 지점이라는 것쯤은 기억해두도록 하자.

▼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방향표시판 가운데 하나는 ‘만일사(萬日寺)’이다. 백제 무왕(673년) 때 창건(절을 세운 이는 未詳이다)된 만일사가 3.2㎞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절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인연이 깊다고 전해진다.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자 만일 동안 이곳에서 기도했기 때문이다. ‘만일사’라는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다. 절에 이런 내용이 닮긴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 비석에는 순창고추장이 대궐에 진상하게 된 내력도 적고 있단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우리나라에 고추가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와는 조금 다르니 믿고 말고는 각자의 몫이다.

▼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직각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이어서 황톳길 임도를 따라 올라간다. 참! 방향을 틀지 않고 강변을 따라 계속 진행하면 치천(淄川)이란 마을이 나온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마을 앞 하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흘러간다고 해서 치천(淄川)이란 이름이 붙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한지(韓紙) 공장이 20여 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위에서 닥나무가 많이 자란데다 맑은 물이 풍부해서 선자지(扇子紙) 같은 고급 품질의 종이도 제조했었단다.

▼ 이때 왼편으로 시야가 활짝 열린다. 조금 전에 산행을 시작했던 금평교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치천 너머 들녘에는 금평(錦坪)마을이 그림같이 앉아있다. 금평(錦坪)은 평평한 비단 자락을 의미한다. 지형이 ‘회문산가(回文山歌)’에 나오는 옥녀가 비단을 짜는 ‘옥녀직금(玉女織錦)’의 형상과 유사한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 더. 마을의 옛 이름은 ‘베트라(베틀아우)’였다고 한다. ‘베틀아우’가 베틀과 그에 맞는 여러 가지 도구를 말하는 것일지니 옛 지명 또한 옥녀직금에서 유래되었지 않나 싶다.

▼ 임도를 따라 8분쯤 올라가자 나무다리가 놓여있다. 이곳에서 산속으로 파고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속으로 들어섰어도 길은 여전히 널찍했다. 오르막길의 경사도 걷기 딱 좋을 정도로 완만한 편이었다.

▼ 5분쯤 더 걷자 오솔길로 변하면서 산길 또한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속도만 조금 떨어뜨리면 될 일이니 말이다. 거기다 반반으로 섞여있는 소나무에서는 솔향기까지 솔솔 보내오는 게 아닌가. 힘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활기로 넘치는 산행이 이어진다.

▼ 산행을 시작한지 22분 만에 무직산의 정상이 조망되는 널찍한 바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조망은 그것만이 아니다. 산자락 아래를 휘돌아가는 치천에 더해 호정소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바위를 우회하여 암반지역으로 나가자 소나무 숲에 가려져있던 그 바위가 자태를 드러낸다. 무직산의 내노라하는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옥새바위’인데, 바위가 하도 크다보니 혹자는 ‘옥새봉(玉璽峰, 385m)’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올라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바위에다 ‘봉우리 봉(峰)’ 자를 붙이는 것은 좀 무리일 듯. 그나저나 임금의 옥새(玉璽)처럼 소중하게 관리되어야 할 산하겠지만 위로 오를 수 있도록 밧줄 하나쯤은 매어두어도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 옥새바위부터는 기분 좋은 산길이 이어진다. 사방이 온통 소나무 세상이라서 숨을 들이킬 때마다 짙은 솔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이다. 저 내음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듬뿍 들어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지쳐있던 심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치유되어버리는 이유이다.

▼ 10분 후 ‘412.8m’봉에 올라선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옥새봉(玉璽峰’으로 부르고 있었다. 옥새바위에다 ‘봉(峰)’ 자를 붙이는 건 무리라면서 말이다. 무당집 처마처럼 매달아놓은 수많은 표지기들은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거나 아닐까?

▼ 옥새봉에서 가파르게 내려선다. 아래로 내려뜨린 데크 계단이 푸른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인데, 건너편으로는 잠시 후면 오르게 될 무직산이 흡사 장벽처럼 버티고 있다. 산길은 정비가 잘 되어있다는 느낌이다. 탐방로 주변의 잡목들을 다듬어놓았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은 곳에는 이런 계단이나 안전로프 심지어는 철제난간까지 설치했다. 또한 갈림길마다 이정표를 세워두었음은 물론이다. 그 방향표지판이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보수를 않은 것은 흠이었지만 말이다.

▼ 안부에 이른 산길은 또 다시 가파른 오름짓을 시작한다. 아니 내려올 때보다 훨씬 더 가팔라졌다. 그래선지 바위 사이에다 설치해놓은 계단마저도 ‘갈 지(之)’ 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고도를 높인다.

▼ 계단을 올라서면 ‘제1전망대’가 나온다. 무직산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수직의 절벽 위에다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었다. 전망대 아래의 절벽은 그 모양이 마치 성벽을 쌓아 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한다. 그런 생김새로 인해 이 산에서 ‘무직’이란 장군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까지 만들어냈단다.

▼ 전망대에 서자 기막힌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태극모양으로 휘돌아가는 치천(緇川)의 물길이 우리나라의 지도를 쏙 빼다 닮은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저런 형상은 정선의 ‘병방치’ 및 ‘상정바위’, 영월 ‘선암마을’, 영동 ‘월류봉’, 나주 ‘느러지’ 등 네댓 곳에서만 만날 수 있다. 그만큼 희귀한 풍경이라는 얘기인데, 그런 기경을 이런 오지의 산에 만난 것이다. 그것도 괜찮은 그림이다. 다른 곳보다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썩 뒤지지도 않는 형상을 그려내고 있다.

▼ 전망대 이후는 가파른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엄청나게 가파른 구간도 있다. 오죽했으면 밧줄난간까지 설치해 놓았을까.

▼ 숨이 턱에 차게 20분쯤 오르자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율북리의 통안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인데 이곳의 이정표(무직산 0.4㎞/ 통안마을 1.7㎞/ 금평마을 2.25㎞)도 방향표시판이 두 개나 땅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얼마 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이곳 지자체에서 대대적으로 등산로를 개설하고 정비해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저 모양이라면 그들이 한 다른 행정 행위들은 또 어떻겠는가. 한심한 일이다.

▼ 이후부터는 경사가 거의 없는 순한 길이 이어진다. 가끔은 가팔라지기도 하나 아까에 비할 바는 아니고 거기다 거리까지도 짧다. 그렇게 5분쯤 걷자 오르막이 끝나는 곳에 산불감시초소가 버티고 있다. 무직산의 정상에 올라선 것이다. 초소를 지키던 산불감시원이 반기는 걸 보면 빼어난 산세에 비해 찾는 이들은 무척 적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무직산은 회문산과 관련된 풍수지리설에 등장한다. 증산교 교주 강증산이 말하는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두는 오선위기(五仙圍基) 형상이라는 것이다. 회문산 정상(회문봉)이 주인이고, 서쪽 신선봉(장군봉)과 남쪽 무직산은 바둑을 두고, 동쪽 성미산과 서쪽 여분산은 훈수를 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정확히 1시간 10분이 걸렸다. 

▼ 두세 평이나 됨직한 좁아터진 정상에는 생소한 모양새의 정상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말뚝처럼 돌기둥을 심어놓고 그 윗면에다 이곳이 ‘무직산 정상(578.5m)’임을 표시했다. 하지만 먼저 다녀간 이들의 기록은 대부분 정상을 다른 곳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이 정상석이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난 편이다. 한국의 5대 명당이 있다는 회문산이 북쪽으로 보이는가 하면, 서쪽으로는 추월산과, 광덕산 다가온다. 반대편에도 산중 고을인 순창의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그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은 남원고을의 산들이 분명하다. 어머니의 품새라는 지리산이 고리봉에서 문덕봉으로 이어지는 마룻금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는 모양새이다.

▼ 하산을 시작한다. 50m쯤 걷자 능선이 갑자기 바윗길로 변한다. 온통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아름답기 짝이 없는 능선이다. 맞다. 무직산은 ‘옥돌 무(珷)’에 ‘짤 직(織)’ 자를 쓴다. ‘옥돌로 짠 산’이란 의미의 낱말을 어디 허투루 사용할 수 있겠는가. 저렇게 빼어난 산세가 있었기에 그런 이름이 가능했을 것이다. 참! 선답자들은 이곳을 정상으로 적고 있었다. 자연석으로 성벽을 쌓은 것처럼 생긴 바위봉우리로 표현하면서 소나무에 앙증맞은 표지판이 걸려있다고 했다.

▼ 뒤돌아보니 방금 넘어온 바위가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매를 한 스핑크스(sphinx)처럼 생겼다. 사람의 얼굴치고는 한참 못생겼지만 몸통은 영락없는 스핑크스다. 하지만 산행을 끝내고 확인해보니 이 바위는 무직산에 널린 기암괴석 가운데 하나일 뿐이란다. 이렇듯 무직산은 수려한 자연환경과 볼거리를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송림과 아기자기한 암릉, 수려한 경치, 사방이 탁 트인 조망, 명산이 갖추고 있는 요소들을 어느 하나 빼먹지 않았으니 무직산을 명산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다 하겠다. 거기다 호정소 수변산책로 따라 돌아오는 원점회귀 산행까지 가능하지 않겠는가.

▼ 또 다른 바위는 개를 닮았다. 동네 어귀를 어슬렁거리던 누렁이를 쏙 빼닮았다. 이뿐 아니라 이 부근은 눈만 아니라 가슴에까지 담아두어도 충분할 만큼 잘 생긴 바위들이 수두룩하다.

▼ 기암괴석에 홀려 기웃거리다보니 어느덧 두 번째 한반도지형 전망대이다. 이곳도 역시 날카롭게 선 바위절벽 위에다 전망대를 걸쳐놓았다. 다만 한반도처럼 생긴 지형을 정면 대신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 전망대에 서면 물돌이 남쪽 끝에서 움푹한 호정소가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한반도의 생김새는 아까의 제1전망대보다 훨씬 못하다. 한반도라기보다는 차라리 남성의 생식기라고 하는 게 나을 듯. 그래서 금평마을 사람들이 호정소가 ‘U’자 모양의 여자 자궁이며,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자궁에 삽입된 성난 남근으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 고개를 돌리면 순창과 임실을 가르는 회문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회문산은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는 데다, 서쪽을 제외한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 왔다. 그래선지 역사적으로도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동학혁명과 구한말 의병활동의 근거지였고,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이곳에 자리 잡고 오랫동안 저항한 곳으로 소설 ‘남부군’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전래 초기에 순교한 이들의 묘가 안치된 성지이며, 비현세적 삶을 사는 갱정유도(更定儒道)의 발상지도 회문산의 ‘금강암’이다.

▼ 전망대에서 내려가는 길엔 계단이 길게 놓여있다. 덕분에 회문산 방향의 조망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데, 그 중심에는 이성계와의 인연을 내세우는 ‘산내마을’이 있다. 고려 말쯤 만일사에 머무르던 무학대사를 찾아가던 이성계가 이 마을의 어느 농가에서 고추장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초시’를 반찬 삼아 점심을 얻어먹었더란다. 그런데 배가 너무 고팠던 탓인지 그게 엄청나게 맛있었던 모양이다. 훗날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당시의 맛을 잊지 못해, 순창군수에게 고추장을 진상할 것을 명했다니 말이다. 그게 조선시대 말까지 궁궐에서 쓰는 고추장의 역사가 되었단다.

▼ 조금 더 걷자 크고 동그란 바위 하나가 산내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부처님을 닮았다는 ‘불(佛) 바위’이다. 사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모가지 바위’라고도 불린단다. 등산객들은 또 ‘스핑크스 바위’라는 이름으로 부른단다. 조형미가 부족한 내 눈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대만의 야류지질공원에서 보았던 ‘여왕머리 바위(女王頭)’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 뭔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그 생김새에 얻어온 ‘두꺼비’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는 바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쥐바위’나 ‘카멜레온바위’라고도 부른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그 생김새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맛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 두꺼비바위에서 산길은 갑자기 고도를 떨어뜨린다. 밧줄난간에 의지하지 않고는 내려서기가 난감할 정도의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동절기나 우기에는 안전사고에 주의해야겠다.

▼ 다행히도 그 가파름은 잠깐이며 끝난다. 그리고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고도를 낮추어간다.

▼ 잠시 후 무직산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칼날능선에 올라섰다. 흡사 공룡의 등줄기라도 되려는 듯 바위능선이 날카롭게 솟아오른 능선이다. 능선은 양쪽이 모두 서슬 시퍼런 절벽.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철제난간을 세워놓았으니 행여 다리라도 후들거릴 경우에는 이에 의지하면 된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 걸렸다.

▼ 칼날능선에서의 조망도 뛰어나다. 조망의 백미인 한반도 지형은 물론이고, 그 뒤를 받쳐주고 있는 강천산과 추월산 등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나저나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풍경이다.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한국의 어느 산악인은 ‘눈으로 마시고 가슴으로 담는다’는 표현을 썼었다. 맞다. 나도 오늘은 그리해보자. 그래야 저 아름다운 풍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 칼날능선에서 내려서는 구간도 역시 바윗길이다. 이곳은 안전시설도 없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하면 서서도 내려갈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바윗길이 끝난 다음에도 가파른 내리막길은 조금 더 계속된다. 그러다가 밀양 박 씨 묘 이후부터는 평지와 다름없어진다.

▼ 잠시 후, 발복한 후손들이 썼음직한 묘역이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산행 중에도 꽤 많은 무덤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 한둘은 후손들이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높은 곳에다 쓰기도 했다. 어쩌면 명당을 찾다보니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곳 회문산 일대는 우리나라 5대 명당(明堂) 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홍문대사(홍성문)가 이곳에서 도통(道通)한 후, 묘혈(墓穴)과 관련된 책자를 적었는데, 이 책에서 회문산 정상에 24혈이 있다며, 오선위기혈에 묘를 쓰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대까지 간다고 했다니, 어느 누가 조상의 묘를 쓰지 않고 배겨내겠는가?

▼ 묘역을 빠져나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임도에 내려선다. 무직산 산행이 끝난 것이다. 정상에서 1시간쯤 되는 지점인데, 이후부터는 ‘호정소 수변산책로’를 따라 걷게 된다. 산행을 시작했던 ‘금평교’까지인데 호정소의 물길을 따라 조성된 탐방로라 해서 ‘호정소 수변산책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 탐방로는 이제 치천의 제방을 따른다. 호정소는 원래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기암괴석들까지 널려있어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한 폭의 산수화가 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참! 아래 사진에서 치천 뒤로 보이는 바위절벽은 ‘부채바위’라고 했다.

▼ 풍경이 예쁜 그림은 물길을 건너는 다리마저도 아름답게 만드는 모양이다. 흔하디흔한 잠수교마저도 풍경화를 완성시키는 화룡첨정이 될 수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건 그렇고 저 다리를 건넌 다음 조금만 더 내려가면 안심마을에 이른다고 했다. 마을 앞 천변에다 각을 짓고 미륵불을 모시는 마을로 유명하다. 전설에 의하면 큰 비로 인해 마을이 물에 잠길 뻔했으나 이 미륵불로 인해 침수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침수피해를 면한 마을 사람들이 미륵불을 물에서 건져냈고, 매년 정월 제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 치천 너머로 보이는 저 고갯마루는 옛날 지게를 지고 넘던 고갯길인 ‘노루목재’이다. 산행을 하는 내내 바라보던 ‘한반도 지형’의 모가지 부분인데, 이 지형은 회문산에서 쭉 뻗어 나온 산줄기가 목을 길게 하고 호정소에서 물을 마시는 ‘노루형’으로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저 고갯마루에 도로가 생기면서 마을에 재앙이 생기기 시작했단다. 노루목재에 길을 뚫으면서 장정 11명 정도가 영문도 모르게 죽어갔다는 것이다. 노루목이 잘려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이 부랴부랴 노루목 부분을 현재와 같은 철제로 지붕을 만들어 재를 연결하는 공사를 한 후부터 별다른 화는 없었다고 한다.

▼ 오른편에서 따라 오는 치천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세찬 물길에 괴성을 지르는 기암괴석에 너른 갈대밭까지 더했다. 호정소 풍경은 4~5월 강가에 버들이 필 때와 10월 황금 들녘 때가 특히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우린 때를 제대로 맞춰 찾아왔다고 보겠다.

▼ 산책로는 ‘밀양 박씨 세장산’ 표지석을 지나면서부터 태고의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태극 모양으로 물길이 휘돌아 감기는 물돌이 지형, 즉 감입곡류하천(嵌入曲流河川)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천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지반의 융기 또는 침식을 반복하며 깊게 팬 것이라는데, 그 정점에 호정소(湖瀞沼)가 있다. 이런 명소를 지자체에서 그냥 놓아둘 리가 없다. 강변을 따라 데크 탐방로를 놓고 호정소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두었다.

▼ 호정소 앞의 바위에는 공룡발자국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보는 것까지는 그만두기로 했다. 까짓 사도와 추도, 낭도로도 모자라 고성의 상족암까지 찾아가서 실컷 보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고 물길 건너는 아까 무직산에서 바라보이던 우리나라 지형의 하단부이다. 뽈록하게 튀어나온 형상인데 인근 사람들은 이게 움푹 팬 호정소를 마주보고 있어 풍수지리상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모양새라고 한단다. 발기한 남근이 유(U)자 모양의 자궁에 삽입된 형태라는 것이다.

▼ 수변산책로 탐방의 백미는 호정소다. 유난히 넓은 웅덩이에 못된 이무기가 살고 있어서 비린 생선을 먹고 지나가면 나타나서 문다는 전설까지도 재미있다. 그나저나 이 아름다운 하천은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태어난 임실 진메마을 앞에서 섬진강이란 이름으로 합류된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이니 김용택시인이 이곳을 다녀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가 읊조린 싯귀. 그 아름다운 구절들 가운데 하나쯤은 이곳 치천의 풍경도 들어있을 것이다.

▼ 바위를 스쳐가는 물길은 맑디맑다. 이런 환경이 있었기에 순창의 명물인 고추장이 태어났을 것이다. 깊은 산골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과 여름철 장마 때 떠내려 온 토사가 만들어놓은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된 쌀, 그리고 배수가 잘 되는 비탈진 밭에서 자란 고추가 합쳐지면서 순창 고추장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 산행날머리는 금평교(원점회귀)

호정소를 지나면 탐방로는 또 다시 흙길로 변한다. 왼편에는 심심찮게 과수원을 나타나고, 오른편으로는 잔잔한 물길이 따라온다. 저 물속에는 다슬기가 지천이란다. 그렇다면 다슬기를 먹이로 하는 반딧불이가 많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거기다 운이 좋으면 물가에서 노닐고 있는 수달도 만날 수 있다니 밤나들이도 괜찮은 일정이 될 수 있겠다. 그나저나 강변으로 내려선지 30분 만에 금평교에 도착하면서 오늘 산행은 종료됐다. 오늘은 7.2㎞를 걷는데 2시간 45분이 걸렸다. 비록 꼴찌로 산행을 마쳤지만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오늘 산행은 보너스까지 주어졌다. 산악회에서 무직산 산행에 더해 순창의 진산인 ‘금산(錦山)’까지 오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순창읍의 중심이랄 수 있는 ‘터미널사거리’에서 광주방면으로 잠시 진행하다가 순창경찰서를 오른편에 끼고 우회전하면 순창여중이 나온다. 이곳에서 200m쯤 더 올라가면 지하차도가 나오고 이를 통과하면 ‘실상암’ 표지석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금산의 산행들머리인데, 그 옆의 ‘일절유심조 신불심(一切唯心造 信佛心)’라는 비석이 더 눈길을 끈다. 까짓 신불심이야 절간이려니 처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나의 마음가짐 하나하나에 좌우된다니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인가.

▼ 먼저 ‘실상암(實相庵)’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순창 읍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암자는 1936년 순창읍 순화리에 거주하는 이가화(일명 正實行)와 주운대사(柱雲大師)의 제기로 창건했다고 한다. 이 절을 창건할 때 순창여자중학교에 위치하고 있는 3층석탑(전북 유형문화재 제26호)으로부터 상서로운 빛이 이곳에 비쳤다고 해서 절 이름을 실상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경내에는 대웅전, 요사채 2동, 석탑, 관음보살상이 있었다.(Daum 백과에서 발췌하여 정리)

▼ 등산로를 가운데에 두고 왼편에는 순평사(淳平寺)가 있다. 이 절도 역시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니 누가 언제 어떤 연유로 지었는지 알 수 없을 수밖에. 들리는 얘기로는 따로 법당도 없이 여승 몇이 주석하는 인법당(因法堂)으로 유지되어오다가 1995년 대웅전을 새로 짓고 불상도 모셨다고 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조계종 원로의원이던 ‘활안 대종사’의 이력에 이곳이 포함되어 있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스님이 1945년부터 5년간 이곳에서 행자생활을 했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절에는 조선시대 초기의 작품이라는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를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다른 사찰의 것을 옮겨다 놓았다지만 명색이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165호)이니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 자 이젠 산행을 나서보자.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널찍한 길은 윤기가 돌 정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경사가 조금이라도 있다 싶으면 어김없이 침목 계단을 놓았고, 흙길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야자매트를 깔아 질퍽거리지 않고도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거기다 조망이 좋거나 아름다운 숲길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벤치를 놓았다. 언제든 쉬어가라고, 자기 속도로 가라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나무와 함께 어우러진 의자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 10분쯤 올랐을까 길이 둘(이정표 : 팔각정↑/ 오솔길←/ 순평사↓)로 나뉜다. 침목계단이 놓여있는 오른편은 팔각정을 거쳐 금산의 정상으로 연결된다. 왼편도 역시 정상으로 연결된다. 다만 오솔길을 걷게 된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아니 팔각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도 다르다 하겠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180도로 변한다. 엄청나게 가팔라져 버린 것이다. 덕분에 이 구간은 계단에서 시작해 계단에서 끝난다. 심지어는 바위에다 철제계단까지 걸쳐놓았다. 그냥은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비탈진데다 또 어떤 곳에서는 거대한 암벽까지 길을 막아서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 숨이 턱에 차게 15분을 올라서니 금성정(禽鍟亭)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 팔각정이 반긴다. 주변에는 운동기구와 벤치를 설치해 주민들의 건강지킴이 휴식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순창 사람들에게 가까운 산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금산은 순창이라는 동네의 뒷산이다. 제주도에 한라산이 있고, 남원에 지리산이 있듯이 이곳 순창에는 금산이 있다.

▼ 팔각정에 오르니 순창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발아래에 있는 순창여중은 물론이고 경천을 가로지르며 지나가는 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하지만 고층건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 흔한 아파트도 이곳에서는 귀하신 몸이 된다. 그만큼 낙후된 지역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팔각정을 지나면서부터는 바윗길의 연속이다. 덕분에 어설프게나마 릿찌 산행도 즐겨볼 수 있다.

▼ 산행을 시작한지 35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 구릉을 연상시키는 정상에는 오석으로 만든 정상석과 삼각점(순창 23), 그리고 이정표(골프장/ 오솔길←/ 팔각정↓)가 지키고 있었다. 참고로 금산(錦山, 432.9m)은 일명 추산(追山)으로도 불리며 순창의 북쪽에 솟은 순창읍의 기(氣)를 조성하는 진산이다. 금산이란 이름은 풍수지리상 옥녀가 비단을 짜는 옥녀직금(玉女織金) 형상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의 대가인 홍성문대사가 지은 회문산가에서 그 유래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 책에 기술된 ‘천마는 동주(東走)하고 홍안(鴻雁)은 남비(南飛)로다.’를 ‘말은 동쪽으로 달리고 기러기는 남쪽인 순창읍 방향으로 날아간다’로 해석하면서 ‘비단 금(錦)’자 대신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형상의 ‘새 금(禽)’자를 쓴다는 것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북쪽은 두류봉과 성미산 너머로 회문산과 백련산이 지켜주고, 동쪽은 건지산과 채계산 너머로 문덕봉과 고리봉이 솟구쳐 올랐다. 청명한 날에는 지리산까지 보인다지만 오늘은 거기까지가 다이다.

▼ 다른 일행들은 골프장 방향으로 넘어가 반대편 산릉을 타고 출발지로 되돌아온다지만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오솔길을 따라 하산하기로 했다. 버스로 이동해서 오르게 될 무직산에 대한 체력안배용 배려이다. 내려가는 길은 ‘갈 지(之)’자를 쓰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춰간다. 바닥에 내려서자 소나무 숲길이 반긴다. 그런데 소나무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도 곧게 자랐다. 이 지역 사람들의 올곧은 정신을 닮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순창이 녹두장군 전봉준의 마지막 항거지이자, 면암 최익현이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단종 때의 선비 신말주(신숙주의 동생)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해 칩거했으며, 중종 때는 순창·담양·무안 고을의 수령들이 목숨을 걸고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복위를 결의했던 곳이기도 하다.

 

아미산(峨媚山, 515m)-배미산(船尾山, 414m)-가산(421m)

 

산행일 : ‘18. 12. 25()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과 풍산면, 금과면의 경계

산행코스 : 송정마을88고속도로굴다리아미산배미산못토재가산탄금마을(산행시간 : 8.94, 3시간 50)

 

함께한 산악회 : 온라인 산악회

 

특징 : 조선의 대학자이며 풍수지리에 능통한 서거정은 순창을 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湖南之勝地)’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다른 시인묵객들도 산은 높으나 그윽하다(山高勢幽)’고 예찬했단다. 이곳 순창의 산수(山水)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이곳 순창 땅에는 강천산과 회문산, 무량산, 용궐산, 책여산 등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산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과 추월산도 한쪽 다리를 순창 땅에 걸쳐놓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아름다운 산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미산이 아닐까 싶다. 아미산은 호남정맥이 강천산과 광덕산을 지나 덕진봉 직전의 332봉에서 동쪽으로 가지 친 지맥(支脈)에 솟아오른 산이다. 이 산은 골산(骨山)에다 육산(肉山)을 합쳐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방축리(금과면)에서 시작되는 산행에서의 첫 느낌은 정형적인 육산이다. 하지만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그 느낌은 확 바뀌어 버린다. 어느 유명산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훤칠한 골산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덕분에 눈요깃거리가 넘쳐난다. 일망무제로 터지는 조망은 기본이고, 빼어난 자태의 기암괴석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거기다 가산으로 넘어가는 암릉에 놓인 아슬아슬한 철계단은 아미산 산행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 싶다. 그러나 이어서 오르게 되는 가산은 내려올 때에 하산지점을 잘 선택해야 할 것 같다. 자칫 좋았던 산행컨디션을 망쳐버릴 수도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으로 치고 싶다. 귀경길에 신말주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연상하며 지었다는 귀래정(歸來亭)’이나 고추장민속마을까지 들러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송정마을 버스정류장 옆 88고속도로 굴다리(순창군 금과면 방축리 산 3-9)

88고속도로 순창 I.C를 빠져나와 ’IC교차로(순창읍 교성리)에서 좌회전 ‘729번 지방도를 이용해 ‘24번 국도로 올라선다. 광주방면으로 달리다가 송정마을 버스승강장에서 좌회전하면 ‘88고속도로가 나온다. 고속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고속도로의 오른편으로 난 임도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고속도로변에 세워놓은 순창이 참 좋다는 광고판과 1전방에 강천산휴게소가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이곳이 순창 땅임을 실감나게 해준다.



오른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아미산 자락을 기웃거리며 10분 정도를 걷자 김해 김씨 문중의 세장산(世葬山)임을 알리는 빗돌(碑石)이 길손을 맞는다. 임도는 이곳에서 산속으로 파고든다. 잠시 후 탐방로는 이번에는 임도를 벗어나 왼편의 오솔길로 접어든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갈리는 지점에 이정표(아미산 정상 1.42/ 송정마을 0.40)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되는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한 편이다. 거기다 가파른 곳에는 통나무계단을 깔았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밧줄을 매달아 놓은 곳도 보인다. 갈림길이라도 나타났다싶으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음은 물론이다.



5분쯤 더 걷자 능선에 올라서게 되면서 산길은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반대방향인 왼편으로는 길이 나있지 않다. 호남정맥인 덕진봉 근처 332m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인데도 길이 나있지 않은 것을 보면 88고속도로를 내면서 능선을 끊어놓은 모양이다. 산길은 아직도 완만한 편이다. 서두를 것 없이 서서히 오르는데 마침맞게 조망까지 터진다. 같은 순창 땅에서 솟아오른 강천산과 회문산은 물론이고 그 너머에 있는 내장산과 추월산까지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능선에 올라선지 20분쯤 지나자 나지막한 안부에 내려선다. 위급상황을 대비한 국가지점번호 표지판(다마 6377-0677) 말고도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오늘 길에 순창고추장마을로 빠져나가는 삼거리를 지나게 된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이정표(아미산정상1.24/ 순창고추장마을1.05/ 송정마을입구0.87)가 세워져 있는데다 개의치 않아도 되었기에 그냥 방심했었나 보다. 참고로 다른 이의 글을 보면 이곳을 내동삼거리라고 적고 있었다. 국가지점번호판이 매달린 이정표에 정상과 송정마을 외에도 내동마을의 방향표시가 되어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가 갔을 때는 내동마을의 방향표시는 사라지고 없었다.



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상당히 가팔라진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고 차오르는 호흡까지도 무시할 수는 없었나 보다. 헐떡거리며 잠시 오르자 거대한 암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전형적인 육산이었는데 갑자기 암벽이 나타나니 생경스럽기까지 하다. 그것도 저렇게 무시무시할 정도로 거대하니 말이다.



산길은 암벽을 피해 왼편으로 우회를 시킨다. 암벽을 끼고 길이 나있지만 조금 가파를 따름이지 험하지는 않다. 흙길이라서 위험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그렇게 올라선 암벽의 위는 환상적인 조망을 선사한다. 금과면의 마을들이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88고속도로와 24번 국도에는 차량들이 신나게 달린다. 높고 낮은 수많은 산들도 자신도 보아달라며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서암산과 추월산, 광덕산, 덕진봉, 무등산, 병풍산, 불태산 등이란다.



조망을 즐기다가 길을 나서면 내동삼거리(이정표 : 정상0.14/ 내동리0.7/ 고례리1.28)를 만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정상에 올라서게 되는데 이 구간은 커다란 바위들을 심심찮게 만난다는 게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바위를 피해가면서 산길을 내놓았지만 암릉으로 느낄만한 곳도 나타난다. 그렇게 오르기를 잠시, 진행방향에 하늘이 보이는가 싶더니 산길은 오른편으로 직각에 가깝게 방향을 튼다. 이정표(정상0.02, 배미산 1.02/ 내동리0.92, 고례리1.4)까지 세워놓았으니 방향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55분 만에 정상에 올라선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삼각점 외에도 산불감시초소와 무인감시카메라가 세워져 있다. 아미산의 본래 이름은 배산이었다고 전해진다. 순창에서 바라볼 때 배의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배맨산으로 불리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인데 천지개벽이 일어났을 때 배를 매어두었던 곳이라면서 그렇게 불렀단다. 아미산에서 금과 방향으로 뻗어나간 다섯 개의 봉우리가 다섯 재상을 태어나게 만드는 풍수를 지녔는데 일본인들이 이를 우려해 오상재에다 쇠말뚝을 몰래 박은 다음 배를 매었던 곳이라고 우기면서 그리 불렀다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아미산(蛾眉山)이라 부르고 있다. 금과 방향에서 바라볼 때 미인의 눈썹 또는 초승달을 쏙 빼다 닮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중국 산동성의 백산현에 있는 아미산(蛾眉山)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는데, 내 생각으로는 조금 지나치다 싶다. 중국의 아미산은 오대산, 구화산, 보타산과 함께 중국불교의 ‘4대 명산을 이룬다. 중국의 아미산에 비견하려면 최소한 유명사찰 하나쯤은 품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한국지명총람에는 산이 높고 험하다는 의미로 정상을 아미산(峨嵋山), 서남쪽 금과로 뻗어 나온 산줄기에 있는 다섯 봉우리 중 414봉은 중아미산, 끝 봉은 소아미산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탓에 정상에서의 조망은 단연 압권이다. 금과면과 순창읍의 들녘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일행 가운데 한 분은 순창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다. 순창에 있는 산들을 거의 다 올라봤는데 순창시가지를 눈에 담을 수 있는 산은 이곳이 유일하다면서 말이다. 아무튼 강천산과 금성산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고 그 뒤에서는 추월산이 고개를 내민다. 북쪽의 회문산과 장군봉도 보이는가 하면, 동쪽으로는 남원의 고리봉과 문덕봉이 한눈에 잡힌다. 서쪽 방향도 빠지지 않는다. 광주의 명산인 무등산이 나도 있다며 손짓을 보내고 있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따르다보면 여러 곳에서 아미산의 정상이 눈에 담을 수 있다.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에 올라탄 정상은 산불감시초소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솔가리가 수북하게 쌓인 폭신폭신한 산길을 잠시 걷자 고인돌바위가 나타난다. 두 개의 밑돌이 위태위태하게 덩치 큰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인데 그 생김새가 고인돌을 쏙 빼다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청동기 유적으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 아미산을 배맨산이라고 부르는 일부 사람들은 아득한 옛날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시루봉 정상에 있는 절구통바위에다 배를 매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고인돌바위가 그들이 주장하는 절구통바위일 수도 있겠다.



잠시 후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철계단을 만난다. 엄청나게 거대한 암벽구간에 철계단을 설치했는데 하도 높다보니 다섯 개로 나누어서 놓았다. 하지만 경사까지 줄일 수는 없었나보다. 앞서가는 집사람이 바르게 서서 내려가지를 못하고 난간을 붙잡고 옆으로 서서 한발 한발 내려서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이 구간은 조망까지도 빼어나다.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배미산은 물론이고 남원의 문덕봉과 고리봉, 그리고 광주의 무등산이 그 거대한 자태를 드러낸다. 누군가의 환호성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동남쪽 방향에 있던 지리산이 희미하게나마 그 웅장한 몸집을 보여준다.





안부까지 내려섰다가 반대편 능선으로 향한다. 이곳도 역시 바윗길의 연속이다. 길은 바위를 넘는가 하면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좌우를 오가며 우회를 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은 고운편이다. 폭신폭신한 것이 마치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소나무 숲에서 떨어진 솔가리들이 오랜 세월동안 쌓여온 탓일 것이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널찍한 공터에 벤치 두 개가 놓인 쉼터가 나온다. 아미산 정상에서 10분 남짓 되는 지점인데, 방금 전에 내려온 암릉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 쉼터용으로는 이만한 곳이 없겠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 위에 걸터앉은 데크전망대를 만난다. 배미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은 물론이고 이어서 오르게 될 가산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명품 전망대이다. 무등산 등 남서쪽에 있는 산들도 빠짐없이 시야에 잡힌다.




전망대를 지나자마자 거대한 바위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바위의 아래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앞서 다녀간 이들은 이 바위를 일러 신선바위라 했다. 하지만 그 내력은 전하는 이들은 없었다. 요즘 유행인 스토리텔링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길을 오가던 후세 사람들이 바위의 생김새를 보고 지은 이름이었을 수도 있겠다. 신선(神仙) 정도나 되어야 바위의 위로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높고 험하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나저나 몇 걸음 걷지 않아 또 다른 바위를 만나게 된다. 이번 것도 크고 험해서 인간이 오를 수는 없겠다. 다만 그 규모가 신선바위에 미치지 못하니 이번 것은 선녀바위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솔가리가 수북이 쌓여있는 길은 여전히 곱다. 거기다 바닥이 흙길이다 보니 내딛는 발걸음을 조심할 필요까지도 없어졌다. 이러한 길은 배미산 정상까지 계속된다. ! 오는 도중에 상죽마을(죽곡리) 갈림길을 만난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지명을 놓쳐버린 이정표를 보면서 혀까지 찼었는데도 말이다.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모토고개1.74/ 죽곡리 상죽마을1.5/ 아미산정상0.57)에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배미산이 표기되어 있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그렇데 30분 정도를 걷자 배미산(414m) 정상이다. 물론 아미산 정상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정상은 남양 홍씨의 묘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밋밋한 형태의 구릉(丘陵)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주인인 묘비가 정상석의 입주를 허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쉬웠던지 오늘 선두대장을 맡고 있는 그린나래가 손수 제작한 정상표지판을 매달아 놓았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배미산은 원래 이름이 없던 봉우리였는데 누군가가 임의로 이름을 지었던 것이 입소문을 거치면서 굳어진 지명이란다. 이따가 오르게 될 가산에서 보면 이곳이 배의 선미(船尾) 부분에 해당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배미산에서의 조망도 괜찮은 편이다. 뒤편 나무숲 틈새로는 아미산의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이 나타나고, 반대방향에는 가산과 무등산 등 아까 절벽전망대에서 바라보던 수많은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배미산에서의 하산은 왼편 방향이다. 이번에도 역시 철계단이 길게 놓여있다. 철계단 아래에서 만나는 상죽마을 갈림길’(이정표 : 못도고개1.22/ 죽곡리 상죽마을1.2/ 배미산 정상0.1, 아미산정상 1.13)를 지나고 나서도 산길은 계속해서 가파르다. 거기가 활엽수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미끄럽기까지 하다. 통나무계단이 놓여있기는 하나 조심성이 요구되는 구간이라 하겠다.



가파른 구간이 끝났다싶으면 오른편에 철망을 끼고 걷는다. 염소목장에서 쳐놓은 것이라는데 염소는 보이지 않는다. 구멍이 뚫려있는 곳도 여럿 보인다. 더 이상 목장이 아니라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철망이 끝나갈 즈음이면 임도(이정표 : 못도고개 0.51/ 아미산 정상 1.84)로 내려선다.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걷자 못도고개이다. 아미산에서 50분 남짓 걸렸다. 못도고개는 민가 두어 채가 들어선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산을 내려오면서 보았던 도로(729번 지방도)는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래도 고개 아래로 터널을 뚫었나 보다. 못도고개는 아미산과 가산의 경계선이다. 고도(高度)가 바닥까지 떨어졌다는 얘기이다. 산행을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배미산으로 향한다. 고갯마루의 대나무 숲을 오른편에 끼고 50m쯤 진행하자 오른편에 들머리가 나타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길을 찾는데 어려움은 없다. 임도처럼 길이 넓을 뿐만 아니라 앞서 다녀간 산악회에서 매달아놓은 리본 두어 개가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곳 못도고개는 옛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는 순창으로 통하는 큰 고개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풍산과 순창을 잇는 729번 지방도가 이 고개를 지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라 하겠다.



산길은 울창한 대나무 숲 사이로 나있다. 이어서 대나무 숲이 끝나갈 즈음에는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그리고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첫 번째 난관은 길 찾기라 하겠다. 길이 하도 희미해서 초심자들이라면 큰 애로를 겪을 수밖에 없겠다. 특히 너덜지대에서의 길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핸드폰에 앱을 깔아놓고 그에 따르는 우리 부부까지도 애를 먹었으니 말이다.




너덜지대를 통과하자 이번엔 거대한 슬랩이 앞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슬랩을 오른편에 끼고 우회를 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길이 편해진 것은 아니다. 이곳도 역시 거대한 바위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좌우로 피해가며 오를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솔가리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주변 풍광이 눈에 담을만하다는 점이다. 특히 기억에 남을 만큼 멋지게 생긴 바위들이 가끔씩 눈에 띈다는 것은 장점이라 하겠다.




밧줄에 의지해야만 오를 수 있는 구간도 만난다. 굵은 밧줄 두 개를 매달아 놓았다.



바위지대를 통과해서 암릉의 위로 오르면 암반으로 이루어진 널찍한 전망대가 기다린다. 아까 지나왔던 아미산과 배미산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명품 전망대이다. 옥녀봉과 순창시가지도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힘들게 올라온데 대한 보상치고는 쏠쏠하다 하겠다.




이제부터 산길은 평지나 마찬가지다. 바위구간이 잠깐 끼어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흙길이다. 거기다 솔가리들까지 수북이 쌓여있어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건 그렇고 코끝을 스쳐가는 향긋한 솔향에 머리가 맑아진다. 이어서 두 개의 산을 오르느라 쌓였던 피로가 확 사라져 버린다. 피로회복의 기능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피톤치드(phytoncide)의 효능 덕분일 것이다. 그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가운데 하나가 소나무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10분 남짓을 걷자 드디어 가산의 정상이다. 못도고개에서 50, 아미산에서는 1시간 40분이 걸렸다. 가산의 정상도 역시 밋밋한 형태의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간 그린나래선두대장이 매달아놓고 간 정상표지판이 정상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도 배미산과 마찬가지이다. 이곳은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멈추지 않고 그냥 통과해버리는 이유이다. 참고로 국립지리원의 발행지도에는 가산이 나와 있지 않다. 아까 지나온 배미산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인근 주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등산객들이 지어냈던지 말이다.



이젠 하산만 남았다. 산길은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이어지는데 내려서는 게 만만찮은 편이다.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길의 흔적이 또렷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렇게 20분쯤 내려서자 좌우로 길이 하나씩 나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오른편은 풍산면의 죽곡리(하죽마을), 그리고 왼편은 순창읍 신남리로 연결될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쯤에서 하산을 고민해야 하지 않나 싶다. 가시에 할퀴거나 찔리는 것은 물론이고 심심찮게 따귀까지 얻어맞을 것을 각오하겠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면 될 일이다. 앞으로 진행해야할 능선은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길이 거칠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게 싫은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하산할 것을 권한다. 마침 선등했던 산악회들도 오른편에다 리본을 매달아 놓았다.



온라인산악회는 작은 봉우리 몇 개가 이어지는 능선을 타는 걸 고집했다. 그 덕분에 우리 부부는 옛날 군인들이나 했을 법한 고난의 행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길을 걸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핸드폰에 설치해놓은 앱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잡목과 가시넝쿨들이 가야할 방향을 가로막고 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선두대장이 깔거나 매달아놓은 표식을 따라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



능선을 좌우로 오가면서 그가 새로 내놓은 길을 따른다. 그렇다고 해서 가시에 찔리거나 할퀴는 것을 면할 수는 없다.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욕지거리에 자신이 놀라버리는 상황이 반복된다. 성질까지 버리기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선두대장도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25분쯤 지난 지점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내려서는 것을 보면 말이다. 5분쯤 내려왔을까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만난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르면 된다.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왼편으로 진행했음은 물론이다. 탈출한 능선을 곁에 끼고 걷겠다는 심산이 아닐까 싶다.



산행날머리는 탄금정 오리요릿집(순창읍 신남리 673-4)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27번 국도가 보인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국도 아래로 난 옛길(舊道)을 따라 조금 더 걷자 탄금마을의 표지석과 이정표가 얼굴을 내밀면서 탄금정 앞 공터에 이른다. 산행이 종료된 것이다. 오늘 산행은 3시간 5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8.94를 걸었다고 떠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조망을 즐기느라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지만 후반부의 거친 탐방로가 걷는 속도를 더디게 만들었음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장산(智藏山, 774.5m)-지소산(智小山, 441.6m)

 

산행일 : ‘18. 6. 5()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용담면·안천면과 무주군 부남면의 경계

산행코스 : 삼락교임도능선 고갯마루지장산지소산느티나무유평마을(산행시간 : 3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 산악회


특징 : 남한에는 모두 다섯 개의 지장산이 있는데 그중 세 개가 등산객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오늘 오르게 되는 진안의 지장산(智藏山)과 포천의 지장산(地藏山), 그리고 상주의 지장산(芝庄山)이다. 이곳 진안의 지장산은 백두대간 덕유산 백암봉에서 서북으로 분기된 덕유지맥에 속한 산봉우리중 하나이다. 그래선지 덕유산과 마찬가지로 포근한 모양새의 육산(肉山)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특별히 눈에 담아두어야 할 만한 산세는 갖고 있지 못하다. 조망 또한 거의 트이지 않는다. 특히 무주 방면의 산길은 거칠기까지 하다. 시간을 쪼개가면서까지 찾아볼 가치는 없겠다는 얘기이다. 그래도 꼭 올라보고 싶다면 진안 쪽 산줄기만 타볼 것을 권한다. 무주 쪽은 눈에 담아둘만한 풍경도 없을 뿐만 아니라 등산로 정비까지 되어 있지 않아 고생문이 훤하기 때문이다. 관내에 유명산이 많다보니 이곳까지 정비할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산행들머리는 삼락교(진안군 안천면 삼락리 1125-3)

대전-통영고속도로 무주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이용하여 장수방면으로 내려가다 적상교차로(무주군 적상면 사천리)에서 ’30번 국도로 갈아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백화삼거리(진안군 안천면 백화리)가 나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13번 국도로 옮기면 잠시 후 삼락교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도로 아래로 금강 상류의 물을 가두어놓은 용담댐이 내려다보인다. 에메랄드 색깔의 물빛은 중하류 충청권에서 보던 그 금강이 아닌 것처럼 맑고도 투명하다. 참고로 용담댐은 진안읍과 용담면·안천면·정천면·주천면·상전면 등 15면에 속한 많은 마을들을 수몰시키며 만들어진 거대한 담수호로 높이 70m에 길이 498m, 총 저수용량은 81,500만톤에 이른다. 그렇게 가두어진 금강 상류의 물은 하루 135만 톤씩 직경 3.2m 연장 21.9km의 도수터널을 통해 만경강 상류에 공급된다. 수몰의 대가로 전주시민이 맑은 물을 풍족하게 먹고 사는가 하면, 완주 고산으로 농업용수가 철철 흘러 내려 만금평야를 적시는 것이다.



길가에 진안 고원길이라고 적힌 푯말이 세워져 있다. 무진장(茂鎭長)이란 말이 있다. 경관이 수려한 무주와 진안, 장수의 세 지역을 일컫는 말인데 그중 진안은 산이 많고,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 마음껏 굽이진 곳이다.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 장수 신무산 계곡의 뜬봉샘에서 시작되는 금강의 물길이 이곳 진안을 흐르고 만경강 발원지인 밤샘도 진안 땅에 바짝 붙어 있다. 또한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진안은 수많은 고갯마루와 마을을 품고 있는 곳이다. 이 고원 마을들을 걷게 되는 진안 고원길은 진안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209km의 환형을 이루는 도보 트레일(trail)로 전체 14개 구간에 평균 고도(高度)300m에 이르는 100개 마을과 40개의 고개를 지나게 되는 길이다.



오른편에 보이는 임도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지장골 골짜기의 왼편으로 나있는데 들머리 왼편의 버스정류장옆에 이곳이 등산로 입구임을 알려주는 방향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오른편에는 미리못 다반이라고 적힌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그 아래에 황토방 펜션이라는 팻말을 달아놓은 걸로 보아 음식까지 제공되는 펜션이 아닐까 싶다.



길을 가다보면 멋진 전원주택들도 두어 채 보인다. 오지(奧地)치고는 너무나 잘 지어져 있다. 손님들을 받는 펜션이거나 아니면 돈 깨나 있는 사람들이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지 싶다.



앞서가던 김말숙 회장님이 어서 오라며 손짓을 하는 게 보인다. 크디 큰 오디가 달고 맛있으니 어서와 따먹으라는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탐스러운 오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인적이 끊기다시피 한 한적한 산길이라서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도 더디어 질 모양이다. 시작부터 주전부리감이 널려있으니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7분 만에 만나게 되는 마지막 민가를 지나면서 임도는 왔다갔다 갈 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꿈틀대고 나서야 겨우 위로 향할 수밖에 없었음이리라. 하긴 해발고도가 거의 800m에 이르는 지장산의 7~8분 능선까지 널찍한 임도를 내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길가에는 망초꽃이 지천이다. 번식력이 강하고 아무 곳에서나 자라 농부들의 농사를 방해한다 하여 개망초라 불리게 되었다는 국화과의 식물이다. 미국이 원산지인데 우리나라에는 조선말 일본 선박에 실려 온 화물에 흙과 함께 묻혀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이 식물이 들어오면서 나라(조선)가 망했다고 해서 개망초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금계국(金鷄菊)은 아예 꽃밭을 이루고 있다. 여름철에 도로를 달리다보면 길가에 노란 코스모스처럼 무리지어 피어있는 꽃으로 북아메리카 원산의 원예식물이다. 임도를 내면서 조경용으로 꽃씨라도 뿌려놓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나를 향해 방긋 웃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해진다.



임도를 따르다보면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오른편으로 율현고개에서 시작해 쌍교봉(雙轎峰, 633.3m)을 거쳐 지장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조망된다.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일행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지금 저 능선을 타고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야 무더운 여름 날씨를 핑계 삼아 삼락교에서 출발하는 단축 산행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비록 일부분이긴 하지만 용담댐도 보인다. 용담호는 장수군 신무산 기슭 뜬봉샘에서 시작된 금강물이 모이는 곳이다. 10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01년에 준공되었는데, 댐의 역사보다는 용담(龍潭)‘이라는 지명이 더 예사롭지가 않다. 댐이 완공되기 전부터 있었던 지명이라니 말이다. 우리네 조상들은 이곳에 댐이 생길 줄 어떻게 알고 그런 이름을 지었을까 싶다.



산행을 시작한지 50분 만에 능선 안부에 올라선다. 임도는 고갯마루를 넘어 감동마을로 이어지지만 산길은 이곳에서 두 번에 걸쳐 좌우(左右)로 나뉜다. 양쪽 모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길을 못 찾아 헤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첫 번째 갈림길은 첨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이정표(지장산 0.68Km/ 전망대 0.4Km, 용담댐 조각공원 2.52Km)에는 전망대를 거쳐 용담댐 조각공원으로 연결된다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아름답기로 소문난 용담댐이 잘 조망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로보아 우리가 들머리로 삼았던 삼락교보다는 용담댐 조각공원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게 좋지 않았나 싶다. 이는 산행을 마칠 때까지 제대로 된 용담댐 조망처를 만날 수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첨산으로 오르는 탐방로의 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어느 글에선가 첨산의 지명을 거론하면서 뾰쪽할 첨()‘ 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의 표현에 선뜻 고개가 끄떡여진다. 저 정도로 가파른 등산로라면 산의 모양새 또한 뾰쪽하게 솟아올랐지 않겠는가.




100m 조금 못되게 걷자 또 다른 이정표(지장산0.6Km/ 감동마을3.9Km/ 용담댐 조각공원2.6Km)가 길손을 맞는다. 감동마을로 연결되는 왼편 임도를 버리고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아니 엄청나게 가파르다고 하는 게 더 옳을 수도 있겠다. 그나마 통나무로 계단을 놓은 게 다행이라 하겠다. 계단을 놓을 수도 없을 정도로 가파른 곳에는 왔다갔다 갈지()‘ 자를 쓰면서 길을 내었다. 다들 버거운지 발걸음의 속도를 뚝 떨어뜨린다. 옳은 선택이라 하겠다. 이렇게 버거운 곳에서는 서서히 오르는 수밖에 마땅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마침 주어진 시간까지도 넉넉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20분쯤 오르자 사납던 산길이 그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린다. 그리고 그곳에 벤치가 놓여있다. 올라오느라 힘들었으니 잠깐 쉬어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다시 길을 나선다. 산길은 계속해서 가파르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집사람과 얘기를 나누면서 걸어도 호흡에 지장이 없을 정도이니 평지나 다름없다고 봐도 되겠다.



6~7분쯤 더 오르자 삼거리가 나온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지소산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데 무주군청에서 세운 이정표(건너뜰1.8Km/ 감동마을 2.0Km/ 용담 1.5Km)가 보는 이를 헷갈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건너뜰이 옳은 방향이다. 나머지 두 지명은 널판 한 개에다 면()만 바꿔 적어놓았다. 그것도 글자의 위와 아래가 서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산행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훼방을 주는 이정표가 아닐 수 없다. 없는 것만도 못하다는 얘기이다.




지장산으로 향한다.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으니 대충 높을 곳으로 올라간다 싶은 방향으로 진행하면 될 것 같다. 그렇게 50m쯤 올라가면 드디어 지장산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쯤이 지났다. 대여섯 평쯤 되어 보이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기둥 모양으로 생긴 정상표지석과 삼각점(무주 21) 외에도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힘들게 정상에 오른 사람들 하나하나가 정성들여 쌓아올렸으리라. 뭔가 각자의 간절한 바램을 담아서 말이다.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고 저렇게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바램의 농도(濃度)가 얼마나 지극했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참고로 지장산(智藏山)이란 이름은 산의 형세가 활짝 핀 연꽃이 장막을 친 듯하고, 은은한 모양의 형상은 보살의 모습과 같고, 봉우리들은 마치 나한들이 나란히 서 있는 것과 같다는 데서 연유한단다.




정상의 오른편은 천애(天涯)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빼어난 전망대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곳이다. 덕유의 연봉들이 마룻금을 그리는데 그중에서도 옥녀봉과 조항산, 구왕산이 또렷하게 조망된다. 발아래로는 고창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빨갛고 파란 지붕들로 모자이크된 마을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그것도 썩 잘 그린 그림이다.




지소산으로 향한다. 아까 올라올 때 만났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이정표가 지시하고 있는 건너뜰방향이다. ‘건너뜰이라는 낯선 지명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저 방향만 보고 찾아갈 따름이다. 알맞을 정도로 가파른 산길을 따라 잠시 내려서자 또 다른 이정표(유평마을 3.2Km/ 지장산 0.5Km)가 나타난다. 하산지점으로 정해둔 유평마을이 나타나 있는 고마운 이정표라 하겠다.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바윗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다. 그 길이가 짧은데다 바위의 크기까지도 작은 탓에 보잘 것이 없지만 하도 바위가 귀한 산이라서 사진을 올려봤다.



지장산에서 내려선지 10분쯤 지나자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헨드폰에 깔아둔 '(application)‘에 해발고도가 722m로 뜨는 봉우리이다. 구태여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는 평범한 봉우리를 왜 거론하는지 궁금해 하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기에 적어봤다. 산길이 이곳에서 왼편으로 직각(直角)에 가깝게 꺾이기 때문이다.



’722m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아니 엄청나게 가파르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비탈에 놓인 통나무 계단은 오랫동안 방치해둔 탓에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푸석푸석 부서져 내리고, 그 위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미끄럽기까지 하다. 밧줄 등의 안전시설도 일절 없다. 위험지역으로 분류한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겠다. 중간쯤에 세워놓은 긴급구조 표시목(4)‘이 이를 증명해준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길게 내려섰다가 짧게 오르기를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는 얘기이다. 능선은 흙길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아래 사진과 같은 바윗길 나타나기도 한다. 비록 왜소하면서도 짧기까지 하지만 말이다.



그러다보니 시야(視野)가 열리기도 한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암릉은 암릉인 것이다. 바위 끄트머리에 서면 첩첩이 쌓여있는 수많은 산릉들이 거침없이 펼쳐진다. 왼쪽에 보이는 가장 높은 봉우리는 운장산일 것이고, 그 오른편에는 명덕봉과 성치산 등이 늘어서 있을 게 분명하다.




정상에서 내려선지 50분쯤 되는 지점에서 길이 둘(이정표 : 도소마을2.5Km/ 유평교1.3Km/ 지장산1.4Km)로 나뉜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놓고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도소마을로 향하는 길의 후반부가 엄청나게 거칠기 때문이다. 고생해가며 도소산을 오를 이유가 없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유평교 방향으로 하산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얘기이다. 우린 도소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지소산을 생략할 경우 산행 거리가 너무 짧아져버리기 때문이다. 잠시 후 보는 이를 헷갈리게 만드는 또 다른 이정표(이정표 : 유평마을 1.5Km/ 지장산 1.7Km)를 만난다. 조금 전 삼거리에서 보았던 도소마을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를 유평마을이 꿰차고 앉았다. 가는 길 어디쯤에 유평마을로 내려가는 탈출로가 있을지는 몰라도, 남은 거리가 1.5Km라는 당치도 않은 숫자로 적혀있다.




이후부터 산길은 묘한 변화를 준다. 봉우리를 피해 왼쪽으로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난 우회로를 따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지소산을 그냥 지나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이다. 그렇게 올라 다니길 두어 번 만에 지소산 상봉(450m)‘이라고 쓰인 정상표시 코팅지를 만났다. ‘서래야 박건석선생의 작품으로, 그가 또 하나의 산 이름을 만들어 낸 모양이다. 매직 펜(magic pen)으로 휘갈겨 쓴 것으로 보아 갑자기 생각난 이름이지 싶다. 삼거리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는 30분이 걸렸다.




5분쯤 더 진행하자 지소산 정상이다. 산봉우리라기보다는 약간 도톰하게 솟아오른 구릉(丘陵)에 더 가깝다. 말이 정상이지 능선상의 한 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는 얘기이다.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삼각점(무주406) 하나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게 마음에 걸렸던지 새마포산악회와 청산수산악회에 정상표지판을 걸어 놓았다. 오지산행을 전문으로 해오는 산악회들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안태골로 연결되는 군계(郡界) 능선은 왼편이다. 하지만 잡목들로 가득 차있어 진행이 불가능하다. 원래부터 계획했던 코스이지만 우린 도소마을 방향으로 직진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잠시 후 TV 안테나로 보이는 시설물을 지났다싶으면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하산지점인 유평마을과 그 왼편의 도소마을, 그리고 면소재지인 대소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주황과 파랑으로 대비 되는 마을 지붕들의 색 조화가 맘에 든다. 참 예쁘다. 주변의 산들에 대한 조망도 썩 좋은 편이다. 옥녀봉을 가운데에 두고 왼편에 조항산과 노고산, 그리고 오른편 저 멀리에는 구왕산이 뽈록하니 솟아올랐다.




도소마을 방향의 능선을 따라 내려간다. 길이 희미한 탓에 방향으로 가늠해가며 내려갈 수밖에 없다. 잡목들 때문에 내려가는 게 만만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진행을 못 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왔을까 반반한 곳이 나온다. 얼핏 임도로 오해를 살만도 한 곳이다. 그로 인해 방향을 헛짚을 수도 있으니 주의가 요구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능선을 따라 계속해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길처럼 보이는 오른편으로 진행하는 우()를 범해버렸다. 그 덕분에 우린 산초나무와의 전쟁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합류한 윤대장에게 선두를 미뤄봤지만 그도 넌더리를 친다. 그리고 더 이상의 진행은 불가능하다며 능선으로 되돌아나가고 말았다.



20분 가까이를 헤매다가 아까 내려왔던 능선이 까뭉개진 곳으로 되돌아 나온다. 이어서 초입의 잡목을 헤치고 들어가니 희미하게나마 산길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진행이 수월해졌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그저 산초나무와의 전쟁만 없어졌을 따름이다. 이 구간을 통과하는 데는 대략 10분 정도가 걸린다.



악전고투(惡戰苦鬪)에 지쳐갈 즈음이면 드디어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지소산을 출발한지 43분 만이다. 어렵게 내려선 임도 주변은 온통 인삼밭 천지이다. 누군가 충남의 금산보다도 무주·진안에서 나오는 인삼의 물량이 더 많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참고로 아래 사진은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 뒤돌아본 풍경이다. 임도의 뒤편에 보이는 산을 지소산으로 보면 되겠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인데도 그 고생을 치룬 것이다. 길이 나있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잠시 후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도소마을로 넘어가는 길이다. 400년이나 묵었다는 느티나무를 옆을 지나 마을로 연결된단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유평마을은 물론 오른편이다. 참고로 도소(島所)마을은 진안 땅을 거쳐 무주군으로 흘러오는 금강 최상류 지역에 있는 자연부락이다. 금강은 진안 감동을 돌아 나와 마을의 북쪽을 안고 크게 돌아 섬소앞에 이르러 점차 넓어진다. 이후 강폭이 두세 갈래로 갈라지면서 섬을 만든다. 강으로 둘러싸여 섬을 이뤄 예부터 마을이름을 섬소라 불러왔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도소(島所)로 바뀌었단다.



길가에 널리다시피 한 오디를 따먹으면서 유평마을로 향한다. 집사람은 뽕잎을 사냥하느라 바쁘다. 누에처럼 날 사육이라도 시킬 요량인지도 모르겠다. 길을 가다보면 유평저수지도 만나게 된다. 유평마을의 너른 들녘에 비해 규모가 작아 실효성은 없어 보인다.



산행날머리는 유평 마을회관(무주군 부남면 대소리)

그렇게 20분쯤 내려가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유평마을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비교적 큰 규모인 유평(柳坪)마을은 부남면의 소재지인 대소리(大所里)를 형성하고 있는 대소(大所 또는 大水), 유평, 섬소(島所), 문암(文岩), 개안(開眼), 안죽동(安竹洞), 질바우(路岩) 8개 자연마을 가운데 하나이다. 예로부터 버드나무가 많고 들녘이 비교적 넓다고 해서 유평(柳坪)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 40분 가량을 걸은 셈이다. 물론 길을 잃고 헤맨 시간까지 포함되어 있다.


영대산(靈臺山, 666m)-오봉산(五峰山, 625m)-칠봉산(七峰山, 524m)

 

여행일 : ‘17. 2. 21()

소재지 : 전북 임실군 성수면과 장수군 산서면의 경계

산행코스 : 구암마을회관구암소류지임도열두구부(이정표)영등할매바위뒷재임실 영대산장수 영대산(왕복)당재오봉산분통골정상칠봉산전망데크아침재(산행시간 :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장수 5악 중의 하나라는 영대산을 위시해서 오봉산, 칠봉산 등 오늘 오른 산들은 모두가 다 전형적인 육산(肉山)들이다. 때문에 가슴에 담을 만한 산세는 보여주지 못한다. 기억에 남을 만한 눈요깃거리 또한 없다. 조망도 마찬가지이다. 영대산 정상과 오봉산 등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 외에는 보잘 것이 없다. 흙산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둘러볼만한 고찰(古刹)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압계서원까지 없었더라면 기억에 남을 만한 볼거리가 전무했을 것이다. 극에 달한 지역 이기주의를 빼놓았을 경우엔 말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보드라운 흙길이라서 오래 걸어도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능선의 경사(傾斜) 또한 거의 없는 편이다. 운동 삼아 산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코스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오지(奧地)의 산들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구암마을회관(장수군 장수읍 대성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오수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를 타고 장수방면으로 달리다 산서면소재지인 동화리의 산서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군도(郡道. 동백로)를 따라 들어가다 학선리 삼거리(압곡마을 조금 못미처)에서 또 다시 좌회전 하면 잠시 후에 구암마을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마을회관의 옆으로 난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하지만 먼저 들러봐야 할 곳이 하나 있다. 이왕에 이곳 학선리(귀암촌)까지 왔으니 말이다. 바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35로 지정되어 있는 압계서원(鴨溪書院)이다. 그러나 마을 왼편의 산자락에 숨어있는 듯 자리를 잡고 있는 사원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위치를 알려주는 이정표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별수 없이 동네 어르신을 찾아 방향을 물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난 그네들의 친절을 마주하는 행운을 얻을 수가 있었다. 서원까지 직접 안내를 해주시는가 하면, 잠겨 있는 사당의 문까지 열어줘 모시고 있는 분들의 위패를 직접 참배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참고로 압계라는 이름은 서원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따온 것이란다.



압계서원(鴨溪書院)1789(정조 13)에 지방 유림의 공의(共議)로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고려의 명신 육려(陸麗)와 임옥산(林玉山), 박이항(朴以恒) 3인의 신위(神位)를 모시다가 1798(정조 22)에 박이겸(朴以謙)을 그리고 1799년에는 전설(全渫)을 추가 배향함으로써 모두 다섯 분의 위패가 봉안되었으며, 이때 강당 울흥재(蔚興齋)를 건립하였다. 그 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1868(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후손과 유림에 의하여 유허지(遺墟地)에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를 계속하여 왔다. 그러다가 1958년에 후손의 협력으로 서원을 복원하면서 후손의 의견에 따라 전설(全渫)을 향사에서 제외시켰다. 반면에 1960년대 전라북도 유림회의 공의에 따라 문암 육홍진(陸洪鎭)을 추가 배향하였다.



아래의 건물은 신주(神主)를 모셔놓은 사우(祠宇)인 압계사(鴨溪祠)이다. 이밖에도 서원의 강당으로 사용하는 4칸짜리 울흥재(蔚興齋. 위의 사진)와 상의문(尙義門), 산앙문(山仰門), 협문(夾門), 고사(庫舍) 등이 있다.



마을로 되돌아 나와 마을안길을 통과한다. 마을회관 앞에 이정표(영대산 등산로 입구 0.58Km)가 세워져 있어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이어서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따라 부지런히 걸으면 6분 후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는 작은 저수지를 만난다. 겨울 가뭄이라도 들었는지 거의 바닥을 드러내놓고 있다.




저수지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3분 후에는 차량이 회전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공터에 이른다. 마을회관 앞의 이정표에 적혀있던 등산로 입구인 모양이다. 들머리에는 이정표(영대산 2.48Km, 무수밭골 0.555Km) 외에도 커다란 등산안내도를 세워져 놓았다. 장수군 관할 지역만 그려놓은 반쪽짜리 지도에 불과하지만 한번쯤 살펴보고 난 뒤에 산행을 시작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영대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다.



개설한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첫 번째로 임도가 방향을 트는 곳에 이르자 산악회에서 깔아놓은 진행방향표시지가 오른편 계곡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지시였다. 오래 전에는 이 길로 다녔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잡목(雜木)만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5~6분 정도를 헤매면서 싸대기 두어 대를 얻어맞고 난 뒤에야 임도에 다시 올라선다. 곧장 임도를 따랐으면 되었을 것을 일부러 사서 고생을 한 꼴이 되어버렸다.



이번에도 임도가 방향을 튼다. 이곳도 역시 왼편방향으로 틀고 있다. 등산로는 이곳에서 임도를 벗어난다. 절개지(切開地) 사면(斜面)을 따라 돌계단을 놓고, 밧줄난간까지 설치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있다. 그것도 최근에 정비를 한 모양이다. 가파른 곳에는 돌이나 통나무를 이용하여 계단을 설치했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두었다. 곳곳에 벤치를 놓아두는 배려도 잊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잠시 오르면 등산로가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열두구부0.365Km/ 쇠종골0.555Km)의 하단에 무수밭골이라고 적혀있다. ’무수란 일년생 채소인 무의 또 다른 표현이다. 지역에 따라서 무수 또는 무시라고 불리는데 이 지역에서는 무수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하지만 밭을 만들 만한 터는 보이지 않는다. 지명에 대한 의심이 드는 순간이다. ’쇠종골이라는 지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쇠종이란 쇠로 만든 종()을 뜻하는 말일 게다. 그렇다면 절집이 있는 골짜기를 나타내는 지명이 분명할 텐데,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그곳, 즉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들머리에서는 그런 절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북한지역에서는 큰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란다고 해서 무수골이라는 지명을 쓰기고 한단다. 이곳에서도 그런 의도로 쓰였을지 몰라서 거론해봤다.



산길은 사면(斜面)을 따라 나있다. 왼편 산자락에 바위들이 들어앉았지만 암릉으로 치기에는 조금 옹색하다. 어이서 조금은 펑퍼짐해진 산자락을 따라 잠시 오르면 임도로 다시 올라서게 된다. 무수밭골에서 7, 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한지는 30분이 지났다.



새로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임도(林道)를 따라 30~40m쯤 걷다가 다시 옛길로 올라선다. 이정표가 없으니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임도를 새로 내느라 길의 흔적 또한 희미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눈대중으로 대충 거리를 재본 다음에 왼편 산자락으로 치고 오르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10m쯤 위에서 통나무계단을 만났다면 제대로 올라온 셈이다.



잠시 후 능선에 올라선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두구부'라는 낯선 지명이 적혀있는 이정표(큰영두0.490Km/ 무수밭골0.365Km)를 만난다. 흑산도에 가면 열두구비도로라는 지명이 있다. 흑산도아가씨 노래비가 서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도로이다. 그렇다면 이곳도 역시 열두 곳에서 구부러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화순에도 열두구비재가 있으니 참조한다.



열두구부의 바로 위에서 산길은 능선을 버린다. 그리고 산자락을 옆으로 째면서 이어진다. 벼랑에 가까운 사면(斜面)으로 길이 나있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길의 폭이 생각보다 넓기 때문이다. 그저 굽이굽이 돌고 있는 산길을 걸으며 열두구부라는 지명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볼 따름이다.




산허리를 감아 돌자 작은 계곡에 벤치 두어 개를 놓은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쉼터에는 안내판과 함께 작은 돌 하나가 서있다. 생김새로 보아서는 영락없는 제주도의 돌하르방이다. 하지만 이 바위는 '영등할매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다. 곁에 세워진 이정표(뒷재 0.320Km/ 열두구부 0.490Km)에는 이곳의 지명을 큰영두라고 적어놓았다. 안내판을 보니 영등할미를 이곳에서는 영두할미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작은 영등할매라는 바위가 또 하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안내판의 글을 대충 옮겨본다. 음력으로 2월을 우리조상들은 영등맞이를 하는 바람달또는 영등달이라고 불렀다. 2월 초하루 오전1시경에 바람의 여신인 영등이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들의 생활을 하나하나 살피고 다니다가 보름날이나 20일쯤에 다시 올라가기 때문이다. 영등이 내려오는 2월 초하루를 '영등날', 바람님날'이라고 부르는데 보통 이때부터 꽃샘바람이 분다고 한다. 매년 2월에 이 영등할매(바람의신) 바위에 제사를 지내는데,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성들이 지극정성으로 치성을 드리면 자식을 낳는다는 전설도 있다. 옛날엔 상사화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으며 나무꾼들의 쉼터이기도 했단다. 그 하단에는 문헌에 의하면 영등할미(영두 할미바위)로도 쓰인다고 적어 놓았다.



큰영두(영등할매바위)를 지나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두 산줄기의 사이를 왔다갔다 갈지()자로 길이 나있어 오르는 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8분 정도 올라서자 능선안부에 있는 뒷재가 나온다. 삼거리(이정표 : 660고지230m/ 큰영두320m)인 이곳에서 왼쪽 능선을 따라야만 영대산에 이를 수가 있다. 반대편 능선은 지름재를 거쳐 성수산으로 연결되니 참조한다.



뒷재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하던 어떤 이의 말이 생각날 정도로 가파르기 짝이 없는 오르막길이다. 그 길이가 짧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7분 정도면 임실 영대산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의 힘겨루기가 끝나면 ’666고지에 올라선다. ‘임실 영대산으로 불리는 봉우리이다. 10평도 훨씬 넘는 널따란 정상은 벤치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힘겹게 올라온 이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낯선 풍경을 대하게 된다. 접경을 이루고 있는 임실군과 장수군에서 따로따로 이정표를 세워놓은 것이다. 이곳의 지명 또한 다르게 적었다. 임실군에서 세운 이정표(오봉산 1.44Km/ 구름재 4.78Km)영대산으로 표기한 반면에 장수군의 이정표(영대산0.410Km/ 오봉산1.44Km, 아침재 4.48Km/ 뒷재0.230Km)‘666고지라고 이곳의 높이를 지명으로 나타냈다. 지독한 지역 이기주의가 아닐까 싶다. 영대산의 정상이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차분하게 다시 거론해보자. 장수군에서는 이곳이 임실 영대산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는 666m 높이의 산봉우리라고 치부해버린다. 반면에 이곳이 영대산이라고 주장하는 임실군에서는 이곳에서 4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수 영대산을 아예 빼먹어 버렸다. 인정 자체가 싫다는 노골적인 의사표시이다. 그러다보니 이정표를 두 개나 설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낸 혈세(血稅)를 낭비한 셈이 되었고 말이다.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 마땅한 일이 분명하다. 요즘 세간에 떠도는 화두(話頭) 중에 협치(協治)’라는 단어가 있다. 두 군()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협치를 해간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겠기에 거론해봤다. 세금을 낸 민초의 한사람으로서 말이다.




장수 영대산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웃자란 잡초들이 점령해버린 폐 헬기장을 지났다싶으면 7분 후에는 초장숲 갈림길’(이정표 : 영대산 정상/ 전망데크1.060Km, 초장숲 2.29Km/ 666고지0.410Km)을 만난다. 이정표에 나와 있는 초장 숲은 초장마을에 있는 숲을 뜻한다. 마을회관 뒤쪽에 소나무 숲이 그윽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생명 숲에서 주관한 아름다운 마을 숲부분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니 시간이 날 경우 한번쯤 찾아봐도 좋겠다. 초장이란 이름은 마을의 지형을 풍수적으로 볼 때 마치 풀 속에 뱀이 들어 있는 초중반사(草中盤蛇)’의 형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삼거리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장수 영대산의 정상이다. 서너 평도 채 되지 않는 비좁은 정상에는 공들여 쌓아올린 케언(cairn)과 스테인리스로 된 정상표지 말뚝이 세워져 있다. 높이가 666.3m이니 임실 영대산(666m)’보다는 높은 셈이다. 그게 0.3m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두 지자체에서 영대산을 놓고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다. 이곳에서 주의할 게 하나 있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에 능곡(2.3Km)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있지만 임실 영대산으로 되돌아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난 편이다. 비록 남쪽으로만 열리지만 사방이 꽉 막혀있던 임실 영대산에 비할 바가 아니다. 팔공산(1,151m)과 호남정맥(湖南正脈)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지는가 하면, 팔공산에서 시작되는 성수지맥(聖壽枝脈) 또한 또렷하게 나타난다. ‘영산영월(靈山迎月)’이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다. ‘장수팔경(長水八景)’의 제7경을 말하는데, 이곳 영대산을 풍광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산에 떠오르는 저녁달을 오뫼에서 바라보면 신선이 달 속의 항아선녀를 맞이하는 선경처럼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뫼란 오산리에 있는 산, 즉 영대산을 이른다. 그만큼 이곳 영대산의 조망이 뛰어나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참고로 장수팔경에는 매산청풍(梅山淸風)과 노평낙안(蘆坪落雁), 유천표모(柳川漂母), 용추만풍(龍湫晩風), 단평비폭(丹坪飛瀑), 송탄어적(松灘漁笛), 반계은린(磻溪銀麟) 등이 더 있다.



임실영대산으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대체적으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지만 어떤 곳에서는 골이 깊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가팔라진다. 600m급의 봉우리들을 연결시키는 능선임을 감안할 때 생각보다는 어려운 산행이 이어진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진행하면 능선안부에 내려선다. 좌우로 희미하게나마 길의 흔적이 나타나는 걸로 보아 당재인 모양이다. ! 잊고 지나갈 뻔 했다. 고개에 내려서기 바로 직전의 봉우리에서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아픈 상처를 만났다는 것을 말이다. 오산저수지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 산서면의 들녘이 나타나지만 사진은 생략한다. 잠시 후에 오르게 될 오봉산에서 바라보는 경치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재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거리 또한 제법 멀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통나무계단을 놓아 서서히만 오른다면 생각보다는 쉽게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산불로 인해 훤해져버린 왼편으로 시야(視野)까지 활짝 열린다. 서서히 오르면서 조망을 즐기다보면 힘들다는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된다. 오산저수지와 산서면의 들녘이 발아래로 펼쳐지는데 아까 보다 폭이 훨씬 더 넓어졌다. 그만큼 고도가 높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9분 만에 올라선 봉우리에서 이정표(분통골정상 0.32Km/ 오봉산 0.03Km/ 1.44Km) 하나를 만난다. 물론 당재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뒤돌아보면 임실영대산과 장수영대산 등 우리가 걸어왔던 산릉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이곳으로 올라오면서 보았던 산서면 방향의 풍경이 계속해서 펼쳐짐은 물론이다.




오른편으로 향한다. 오봉산의 정상이 주능선에서 30m쯤 약간 비켜나있기 때문이다. 대여섯 평쯤 되어 보이는 정상은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관할지자체인 임실군에서는 말뚝 모양의 정상표지목도 세워 놓았다. ‘숲으로 가자는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를 내걸었는데 높이를 620m로 적어 놓았다. 근처의 나무에는 정상표지판도 매달려 있다. 대구지역 산악인인 김문암씨의 작품이다. 그런데 높이가 625m이다. 둘 중의 하나는 틀렸다는 얘기인데 어떤 것이 틀렸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물론 분통골정상을 향해서이다. 안부를 향해 내려가는 길은 한마디로 예쁘다. 불에 타다 남은 고사목(枯死木)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그 뒤에 펼쳐지는 산서면의 들녘 또한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반대방향으로도 시야가 트인다. 발아래에는 오봉저수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고, 고덕산과 상봉산, 성수산 등이 그 뒤를 바치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산들은 내동산과 덕태산, 선각산 등일 테고 말이다.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 두어 번을 반복하고 나면 15분 후에는 근처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에 세워진 이정표(칠봉산0.43Km/ 조치마을1.41Km/ 오봉산0.82Km)는 이곳의 지명을 분통골 정상로 적어놓았다. 보면 볼수록 묘한 이름이다. ’이란 보통 골짜기를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골짜기에 어찌 정상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산행 후에 검색을 해봤으나 그 연유는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직각(直角)에 가깝게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곧장 진행했을 경우에는 조치마을에서 산행이 끝나버리니 주의한다.



분통골정상을 지나면서 산길은 매우 가팔라진다. 통나무계단을 놓아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려서는 게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안부에 이른 산길이 이번에는 위로 향한다. 그리고 그 길은 굵직한 소나무들로 가득 찬 능선을 따른다. 은은한 솔향에 취해 걷게 되는 멋진 구간이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면 이정표(전망데크 1.03Km/ 분통골정상 0.63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거리를 만나다. 이정표는 이곳을 칠봉산이라 적고 있다. 하지만 정상은 이곳에서 20m쯤 더 진행해야 만날 수 있으니 주의한다.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왼편에 보이는 희미한 길로 들어서면 잠시 후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한두 평이나 됨직한 정상에는 정상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이것도 역시 김문암씨의 작품이다. 참고로 이곳 칠봉산에서 곧장 직진하면 미륵암으로 내려가게 된다.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칠봉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전망데크까지 30분 조금 못되게 걸리는 이 구간의 특징은 지루하다는 것이다. 육산(肉山)의 특징대로 눈요깃거리가 일절 없기 때문이다. 그저 앞만 보고 걷는 산행이 이어진다.



그게 미안했던지 중간에 시야를 열어주기도 한다. 산불 때문인지 아니면 벌목(伐木)으로 인해선지는 몰라도 왼편 산자락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발아래에 지사면의 들녘이 펼쳐지는데, 장수나 임실 지방이 대부분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것을 감안할 때 엄청나게 널따랗다고 할 수 있다.



조망을 즐기고 나면 산길은 다시 한 번 고도(高度)를 뚝 떨어뜨린다. 통나무계단을 놓아야 할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런 다음에는 위로 향한다. 이번에는 왼편 산자락이 바위벼랑으로 되어있다. 지자체에서는 이게 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길가에 밧줄 난간을 만들어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했다.




그렇게 3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이정표 : 아침재 0.76Km/ 칠봉산 1.03Km)를 만난다. 그다지 넓지 않은 전망대에 오르면 조금 전에 보았던 지사면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 뒤로 보이는 산들은 봉화산과 덕재산 등이 아닐까 싶다. 그 너머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회문산일 것이고 말이다.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제법 가파른 내리막길이지만 소나무 숲을 뚫고 나있어 힘들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아니 피곤함이 가시면서 오히려 활력이 더 솟구친다고 할 수도 있다. 소나무가 내뿜고 있는 피톤치드(phytoncide)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피톤치드의 효능 중에는 몸으로 스며드는 각종 병균의 살균기능 외에도 심폐기능을 강화시키는 효능도 있다니까 말이다.



산행날머리는 721번 지방도 상의 아침재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만드는 멋진 길이 계속된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던 노랫가락이 언제부턴가 타령으로 변했다. 그리곤 아직도 익히고 싶은 소망이 채 가시지 않는 판소리로 이어진다. 물론 자작곡인데 앞서가는 집사람이 가만히 있는 걸로 보아 나름대로 격식이 갖추어졌나보다. 그렇게 18분 정도를 내려서자 저 만큼에 아침재가 내려다보이면서 오늘 산행이 끝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이 걸렸다. 목을 축이느라 중간에 멈추었던 시간이 채 10분을 넘기지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백련산(白蓮山, 754.1m)

 

여행일 : ‘17. 1. 8()

소재지 : 전북 임실군 청운면과 강진면, 운암면의 경계

산행코스 : 수동마을용소폭포헬기장갈담리갈림길백련산칠백리고지(706m)용동마을갈림길이윤마을용동마을(산행시간 : 4시간10)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호남정맥이 진안 성수산으로 북진하는 길목인 팔공산에서 남서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에 위치한 산으로 아래에서 볼 때에는 바위산으로 보이기도 하나 막상 올라보면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바윗길 한번 걸어보지 않고 산행을 마치게 된다는 얘기이다. 이는 산행 중에 특별히 눈에 담을 만한 비경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조망(眺望)만은 뛰어나다. 백련산의 정상 등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보았던 바위지대들의 근처에서 시야가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아무튼 걷기 좋은 육산에다 조망까지 뛰어나니 명산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할 산이라는 얘기이다.

 

산행들머리는 학석마을(임실군 강진면 방현리)

완주-순천간고속도로 임실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745번 지방도와 병행)를 타고 태인·부안방면으로 달리면 임실읍과 청웅면사무소를 지나 강진면(임실군) 소재지인 갈담리가 나온다. 이곳 강진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군도(郡道)를 타고 옥정호 방향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 방현마을 입구에 이르게 된다. 군도의 왼쪽 옆구리를 따라 확·포장된 27번 국도가 함께 달리며 버스가 멈추는 들머리 부근에는 버스정류장(방현리)이 설치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오른편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7분 후 학석마을에 이른다. 마을회관에 보건진료소시설이 들어서있는 것이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마을 앞으로 난 길이 끝나갈 즈음 길이 둘로 나뉜다. 어디로 가야할 지를 놓고 우왕좌왕하는데 마을주민이 우리를 부른다. 마을 안길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뭘 보겠다고 이런 산골까지 찾아왔느냐면서 말이다. 하긴 이곳 학석마을을 산행들머리로 삼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개설된 등산로도 물론 없다. 그저 선답자들이 오가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길의 흔적만이 나있을 따름이다.



마을 안길을 통과하면 길은 산자락을 따른다. 오른편에는 소나무 묘목들을 심어 놓았다. 분재(盆栽)처럼 예쁘게 자란 것이 공을 들여 키운 흔적이 역력하다. 양묘장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시 길이 둘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오른편으로 가야하는데도 왼편의 길이 훨씬 더 또렷하기 때문이다. 그저 폭포가 있을만한 계곡, 즉 조금이라도 더 크다 싶은 계곡을 방향으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누가 보더라도 오른편을 꼭 찍겠지만 말이다.



산비탈을 따라 잠시 오르면 용소폭포가 나타난다. 산행을 시작한지 18분 만이다. 이 폭포는 조금 전에 지나온 마을의 이름을 따서 수동폭포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조한다. 그만큼 입소문을 덜 탔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높이가 10m쯤 되어 보이는 폭포는 빼어난 자태를 자랑한다. 갈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떨어지는 물줄기 또한 제법 거세다. 세간의 입소문을 탄 유명폭포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보통의 다른 폭포들에는 뒤질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이 정도라면 진작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텐데도 아직까지도 입소문을 타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폭포의 반대방향으로 나가본다. 바위의 좁은 틈 사이로 물길이 나았다. 그리고 그 끝은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 용소폭포는 ‘3으로 이루어졌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게 높이가 20m쯤 되는 2폭포라고 했다. 그는 자태는 아름다우나 가장 규모가 작은 3폭포도 있다고 했다. 아무튼 그는 굽이치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을 흡사하게 닮았다고 하면서 가운데 폭포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절경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저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는데 일행들은 이미 저만큼에서 달리다시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폭포의 상단으로 나있다. 이후부터는 계곡과 묵밭을 오가며 이어진다. 정식으로 개설된 등산로가 아니어선지 길은 또렷하지가 않다. 하지만 길을 못 찾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이 코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조금만 뜸해도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지역(강진면)의 자율방범대원들이 등산로를 정비하곤 한다는 기사를 읽었던 것 같다. 등산로 주변의 잡목과 잡초를 제거한 것은 물론 이정표 등 편의시설에 대한 보수까지 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 부근에는 축대(築臺)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흔적들도 보인다. 인가(人家)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작은 밭뙈기일망정 어느 것 하나 내버려두지 않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산길은 계속해서 계곡을 따른다. ‘물방아골이란다. 중간에 수통골무너미골을 지난다는데 웃자란 잡초와 잡목들 때문에 분간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계곡에는 물기가 없다. 겨울 가뭄이 생각보다 심했던가 보다. 그게 아니라면 장마 때나 물이 흐르는 건천(乾川)이었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산길은 계곡을 벗어나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그리고 그 가파름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진다. 그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고 나서야 고도(高度)를 높여갈 정도라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숨이 턱에 차서 오르기를 20분 남짓, 산길의 경사가 조금 누그러졌다 싶더니 널따란 헬기장이 나온다. 먼저 올라온 일행 몇 명이 바닥에 널브러져 쉬고 있는 게 보인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헬기장을 지나자마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정표(정상0.5Km/ 갈담리4.5Km/ 방현리2.7Km)를 만난다. 오른편에 보이는 길은 강진면의 소재지인 갈담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다. 낮게 깔린 탓에 아래로 지나가는 것이 쉽지가 않다. 아니 납작 엎드려야만 겨우 길을 열어줄 정도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예절교육까지 받아야 하는 날인가 보다 누군가 높이 오를수록 자세를 낮추라고 했다. 자세를 낮추는 것은 꼭 높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예절교육은 자세를 낮추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잠시 후 가파른 오르막길이 다시 시작된다. 아니 아까보다 경사가 더 심해졌다. 이럴 경우에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속도를 뚝 떨어뜨린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것 말이다. 그런 마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오르막길에는 통나무계단을 깔아 놓았다. 썩어 문드러진 것들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헬기장을 출발해서 20분쯤 지나면 주능선(이정표 : 정상0.2Km/ 갈담리4.8Km)에 올라선다. 왼편 능선은 사봉과 뻘곡산으로 이어지나 산길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등산객들이 다니지 않는 코스라는 얘기일 것이다. 정상은 물론 오른편 능선을 따르면 된다.



주능선에 올라선 다음부터는 수월한 산행이 이어진다. 가팔랐던 산길이 사나웠던 그 기세를 뚝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 더 진행하면 이정표(정상 0.1Km/ 갈담 4.9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묘역(墓域)이 나온다. ‘칠백리고지가 있는 왼편으로도 길이 나있지만 이정표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또 다시 가팔라진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면 암릉이 나타난다. 벼랑에 가까운 암릉에는 나무계단이 놓여 있다. 3년 전쯤엔가 이곳 지자체에서 백련산의 등산로를 정비했다는 기사(記事)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기사는 강진리(강진면의 소재지인 갈담리를 잘 못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의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백련산 정상에 이르는 5.75km 구간을 정비하면서 전망대와 이정표 등의 기본시설은 물론이고 위험구간에는 목재계단을 새로 설치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의 바로 이웃에 위치한 산이기에 관심 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옛날에는 밧줄을 매어놓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초심자들에겐 많이 부담스러운 구간이었을 것 같다.



계단의 위로 올라서면 시야가 툭 트인다. 아예 벤치까지 놓아둔 걸 보면 푹 쉬면서 조망을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일단은 앉고 본다. 인근에서 가장 높은 회문산은 물론이고 원통산과 용궐산 등 주변의 산군들이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 잡은 임실호국원(任実護國院)’이 눈길을 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을 사후(死後)에 모시는 국립묘지(國立墓地)이다. 예로부터 국립묘지는 명당(明堂) 중의 명당만을 골라 조성된다고 알려져 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령들을 모시는 곳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영산(靈山)으로 소문난 백련산을 마주보는 곳에 자리 잡은 임실호국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예로부터 이 지역에는 생거부안(生居扶安) 사후임실(死後任實)’이란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생전에 살기는 부안이 가장 좋고, 죽어서는 임실에 묻혀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국립묘지를 쓸 묘역을 임실 땅에서 찾았을 것이고, 결국에는 조선 8대 명당(明堂)’으로 알려진 백련산을 바라보는 곳에다 임실호국원을 조성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튼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만으로도 영예인데 명당 풍수까지 갖췄으니 호국원에 묘를 쓴 이들은 명당운까지 누리는 셈이다. 참고로 전국에는 8개의 국립묘지가 있다. 국립묘지의 효시는 물론 국립서울현충원이다. 흔히 동작동 국립묘지로 알려진 곳이다. 전후인 1954년 조성된 이곳은 한국전쟁과 여순사건 등에서 발생한 국군 전사자나 순직자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하면서 국립묘지의 출발이 됐다. 나머지 국립묘지들은 국립대전현충원이 1985년 문을 열었고 이어 국립 4·19민주묘지(4·19혁명)5·18민주묘지(광주민주화운동), 3·15민주묘지(3·15마산의거)가 개장됐다. 호국원은 3개가 있다. 2000년 경북 영천호국원에 이어 2002년 임실호국원이 개원했고, 2007년에는 이천호국원이 문을 열었다.



꽤 오래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몇 걸음을 걸은 것 같지 않은데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백련산50m/ 칠백리고지2.94Km)를 보니 잠시 후에 가게 될 칠백리고지가 이곳에서 나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정상을 둘러본 다음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잠시 후 정상에 올라선다. 정상에는 섬진강 홍수통제소가 들어있다는 네모난 건물 한 동과 무인산불감시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들머리에서 이곳 정상까지는 1시간 40분이 걸렸다.




홍수통제소 건물의 옥상은 전망대로 꾸며 놓았다. 한쪽 귀퉁이에 산불감시초소도 보인다. 시야가 잘 트인다는 이점을 살린 모양이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옥정호의 빛나는 물결 넘어 모악산과 국사봉, 회문산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가 하면 지리산 성삼재에서부터 천황봉까지의 백리길 능선이 아스라이 실루엣으로 펼쳐진다. 그 앞에 있는 원통산과 무량산, 용골산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옴은 물론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동쪽으로도 선각산과 내동산 등 전북 동부의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잠시 후에 걷게 될 능선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가장 높게 보이는 봉우리가 칠백리고지인데 일단은 그곳까지 갈 계획이다. 그리고 주능선을 벗어난 다음 왼편 지능선을 따라 걷다가 이윤마을로 내려가는 일정이다. 한 바퀴를 돌게 되는 셈인데 제법 먼 거리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큰 오르내림은 없어 보인다. 산행을 이어가는데 큰 부담이 없을 것 같다는 얘기이다.



자연석으로 만든 커다란 정상석은 홍수통제소 건물의 앞에다 세워 놓았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길이 나뉘지 않으니 세울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백련산(白蓮山)이라는 산의 이름은 신기마을에서 바라본 상봉 모습이 마치 하얀 연꽃봉우리 같이 생겼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론 영취산(靈鷲山)이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이름에 얽힌 사연은 모르겠다.



임실호국원(任実護國院)’이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조망을 즐기면서 호국영령(護國英靈)에 대한 추모도 함께 해보라는 모양이다.



정상 아래의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산행을 이어간다. 길게 놓인 스테인리스 계단을 내려서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사동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뉘는데,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칠백리고지 2.90Km/ 사동(절안) 1.90Km/ 백련산 0.90Km, 신기마을 1.90Km)가 눈길을 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각 방향 거리의 끝자리들이 똑 같은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늘 산행이 생각보다 훨씬 수월했나보다.



칠백리고지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간다. 썩 고맙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내려간 만큼 다시 올라가야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산을 인생에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다. 산에 오르내림이 있듯이 인생 또한 굴곡(屈曲)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이 힘들다고 해서 결코 낙망하지는 말라고 권한다. 다음에는 분명 좋은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면서 말이다.



하산을 시작한지 13분쯤 되었을까 숲이 열리는가 싶더니 시야(視野)가 툭 터진다. 길가의 한쪽 면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덕분이다. ‘칠백리고지로 연결되는 진행방향에 한쪽 면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봉우리 두 개가 나타난다. 누군가 그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에 쌍선대라는 두 개의 큰 바위가 솟아있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후 기묘하게 생긴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하나의 뿌리에서 두 줄기가 자랐는데 그 둘이 마치 두 마리의 뱀이 뒤엉켜 있는 듯한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마디로 괴이하기 짝이 없는 자태이다. 이 정도의 생김새라면 명품소나무의 반열에 올려놔도 손색이 없겠는데 아직까지 입소문을 타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생김새로 보아 용송(龍松)’이란 이름을 얻고도 남겠는데 말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능선을 벗어난 길이 왼편으로 우회(迂迴)를 한다. 능선의 꼭지점을 따라 거대한 암릉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까 전망바위에서 쌍선대으로 추정했던 봉우리들이 아닐까 싶다. 이런 바위벼랑들이 곳곳을 차지하고 있어서 산 아래에서는 바위산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지 35분 만에 이윤마을 갈림길’(이정표 : 칠백리고지1.09Km/ 이윤리0.7Km/ 백련산1.82Km)이 있는 능선 안부에 내려선다.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하산을 하고 싶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된다. 하산지점까지의 거리가 가장 짧을 뿐만 아니라 경사까지도 느긋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도를 많이 까먹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쯤에서 탈출해도 될 이유는 또 있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봐야 볼만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칠백리고지까지 가보기로 한다. 버스를 출발시키겠다는 시간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새로운 코스를 걸어보겠다는 유혹이 더 컸다고 보는 게 옳겠다. 아무튼 맞은편으로 올라서는 능선은 제법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런 다음에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벌목(伐木)을 끝낸 오른편 능선이 시원스럽게 트여 있다. 그 덕본에 조망이 시원스럽다. 덕대산과 선각산, 팔공산 등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은 끄는 건 마이산이 아닐까 싶다. 말의 귀를 닮았다는 두 개의 암봉이 아슴푸레하게나마 시야에 잡히기 때문이다.



14분 후 원두복 갈림길’(이정표 : 칠백리고지0.49Km/ 원두복2.51Km/ 백련산2.43Km)을 만난다. 오른편은 원두복마을(청웅면 두복리)로 연결된다.



칠백리고지를 향해 고도를 높이다보면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기도 한다. 그리고 뽈록하게 솟아오른 백련산의 정상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혹자는 저 모습을 보고 거대한 배의 형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 문제다. 그저 준수하게 생긴 하나의 봉우리일 따름인 것이다. 조선 개국초기의 승려인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는 말을 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의미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내 수양은 아직도 멀었나 보다.



원두복 갈림길에서 14분 만에 칠백리고지에 올라선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평범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이곳 칠백리고지‘6.25 전쟁의 산물이다. 전투에 참여했던 군인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6.25 당시 이곳 백련산은 빨치산(partizan)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대사령부가 주둔했던 회문산의 이웃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100만 권의 책이 팔려나갔고, 관객 70만 명을 기록했던 영화 남부군의 빨치산 활동 무대가 바로 회문산 주변이었기 때문이다. 국군의 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 전투기들의 폭격을 피해 숨어든 곳 또한 이곳 백련산이었다. 백련산 자락에 있던 부흥광산(江津面 白蓮里 山 154번지)의 동굴에 무려 600여 명이나 숨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마지막 토벌은 19522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광산의 굴에 불을 때기 시작하여 장장 7일간을 계속해서 청솔가지와 고춧대, 고추 등을 태워 굴속에 있던 빨치산들을 모두 질식사 시켰다. 작전을 전개하기 전, 굴 안에다 스피카방송을 통해 투항할 것을 권했으나 골수 빨치산들이 양측 통로에 무장하고 자수하려는 자를 사살함으로써 거의 모두가 질식사하였고 한다. 겨우 한두 명 정도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칠백리고지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하산은 이정표(이윤리2.61Km/ 모시울산1.86Km/ 백련산2.92Km)가 가리키고 있는 이윤마을 방향이다. 내려가는 길은 대체로 순한 편이다. 떡갈나무 잎이 두텁게 깔린 길이 조금 미끄럽기는 하지만 경사(傾斜)가 완만해서 내려서는 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저 변화가 거의 없는 탓에 지루한 느낌이 든다는 게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내리막이지만 조그만 위안거리는 있다. 오른편 나뭇가지들 사이로 옥정호(玉井湖)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 산행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삭막하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만일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철이었다면 언감생심(焉敢生心), 호수를 내다보는 꿈은 애초부터 꾸어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반듯하게 쓴 묘() 하나가 능선을 독차지 하고 있다. 백련산 산행의 특징 중 하나가 이런 묘들을 유난히도 자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긴 이곳 백련산이 영산(靈山)으로 소문나 있으니 어찌 묘들이 몰려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이곳 백련산에는 조선 8대 명당(明堂)’ 중의 하나인 잉어 명당이 있다고 전해 온다. 옛날 그곳에 묘를 쓰려고 땅을 파내려가자 널빤지 같은 암반(巖盤) 아래에서 놀던 잉어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고 한다. 사람들이 얼른 암반을 다시 내려놓고 그 위에 묘를 썼는데, 후손들이 명당바람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명당을 가운데에 두고 우측에 그물봉이 있고, 앞산은 작살봉’, 회진마을 맞은편의 다래끼봉등이 에워싸고 있는데, 주위에 형성된 산들의 지명과 모습이 너무나 흡사하여 대 명당으로 불린다. 아무튼 그물봉은 필봉리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인데 그 형상이 마치 그물이 잉어를 포획하려는 모습이고, 작살(고기잡는 창)봉은 작살이 누어있는 형태이며, 다래끼(고기망)봉은 어느 곳에서 보아도 다래끼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모두 잉어를 잡는 용구세트로 구성된 봉우리 이름이다. 지방 주민들의 신성한 물고기 관념이 풍수사상(風水思想)과 결합해서 드러난 문화현상이 아닐까 싶다.



능선을 탄지 20분쯤 되면 갈림길(이정표 : 용동마을/ 이윤마을/ 칠백리고지)이 나타난다. 혹시라도 버스를 대절해서 이곳으로 왔다면 어느 곳으로 가던지 상관이 없다. 두 코스 모두 주차가 가능한 용동마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편한 코스를 원한다면 왼편으로 진행할 일이다. 하지만 승용차를 갖고 왔다면 상황을 달라진다. 틀림없이 당신은 이윤마을에다 차를 놓아두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히 왼편으로 내려가라는 얘기이다.



왼편으로 내려선다. 벼랑으로 느껴질 만큼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리고 그런 가파름은 20분을 훌쩍 넘길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이어진다. 이런 때는 조심하는 게 상책이다. 자칫 방심하다가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엔 생각보다 큰 부상으로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했던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서 멋진 고사목(枯死木)을 만난다. 고진감래(苦盡甘來), 비탈길을 내려오느라 고생한데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저만큼 아래에 이윤마을이 나타난다. 그리고 갈림길에서 내려선지 정확히 27분 만에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 앞에는 칠백고지로 올라가는 방향을 표시해 놓은 이정표와 백련산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곳 이윤마을에 차를 세워두고 원점회귀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던데 많은 도움이 될 듯 싶다



이윤마을에서부터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른다. 차선이 하나뿐인지라 버스는 다닐 수가 없다. 하지만 승용차들은 예외이다. 서로 비켜 지나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넓다. 길가에는 정자(亭子)까지 갖춘 전원주택들도 보인다. 그만큼 산골마을의 풍광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도로는 이윤계곡을 옆구리에 끼고 나있다. 이윤계곡은 어디다 내세울 만큼 수려하지는 않다. 협곡(峽谷)을 이루는 양 옆의 바위벼랑이 거대하지도 않은데다 흐르는 물 또한 많지가 않다. 하지만 잠시 쉬어가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듯 싶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곳곳에다 공중화장실을 만들어 두었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인간들이 이런 멋진 곳을 그냥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전주순복음교회에서 만든 옥정호 영성원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가장 멋지다 싶은 곳에다 자기네들만의 왕국을 차려놓았다.



산행날머리는 용동마을(임실군 강진면 방현리)

그렇게 30분 정도를 걸으면 저만큼에 용동마을이 나타나면서 오늘의 산행이 종료된다. 전주로 이어지는 27번 국도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20분이 걸렸다. 땀을 씻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 10분이 걸린 셈이다.


칠보산(七寶山, 469m)-용추봉(龍湫峰, 473.9m)-연수봉(延壽峰, 489m)

 

여행일 : ‘16. 9. 1()

소재지 : 전북 정읍시 금붕동과 칠보면, 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피오고개약수암칠보산용추봉연수봉헬기장싸리재49번 지방도수청저수지(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정읍의 칠보산은 괴산, 영덕, 화성에 있는 칠보산과 더불어 전국 4대 칠보산에 속한다. 하지만 다른 칠보산들에 비해 그 격이 많이 떨어진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일곱 개의 보석을 품은 산에서 그 어원(語原)을 찾는 다른 칠보산들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많은 눈요깃거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곳 정읍의 칠보산에는 그런 눈요깃거리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보석 같은 일곱 개의 봉우리라는 어원이 무색할 지경이다. 바위다운 바위가 하나도 없는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눈에 담아둘만한 구경거리가 없음은 물론, 조망(眺望)까지도 별로인 육산의 특징들 말이다. 대신에 좋은 점도 있다. 찾는 사람들이 극히 드문 덕분에 한적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곳 칠보산은 웬만큼 이력이 붙은 산꾼들에게조차 낯선 이름이다. 전국 제일의 단풍을 자랑하는 내장산과 머리에 갓을 쓴 영산기맥의 관문인 입암산, 그리고 호남의 삼신산으로 일컬어지는 동학혁명의 진원지인 두승산 등 주변 명산들의 유명세에 철저히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산은 텅 비어있다. 아무튼 난 이 산을 가족 산행지로 추천하고 싶다.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傾斜)까지 없는데다 지자체인 정읍시에서 등산로 정비를 하도 잘 해놓아 어린이나 노약자들도 부담 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피오고개(정읍시 칠보면 수청리)

호남고속도로 정읍 I.C에서 내려와 29번 국도를 타고 정읍시가지로 들어온다. 이어서 내장산 문화광장앞에 있는 부전사거리(정읍시 부전동)에서 좌회전하면 잠시 후 부전제삼거리(부전동)가 나온다. 이곳에서 왼편 49번 지방도로 바꿔 타고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칠보면 수청리와 정읍시 부전동의 경계인 피오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고갯마루에 정읍시 내장상동약수암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고갯마루에서 약수암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이곳 피오고개의 높이는 대략 310m, 칠보산의 높이가 469m이니 160m만 더 오르면 된다. 오늘은 칠보산이라는 산 하나를 거저먹는 셈이 된다.



들머리에는 칠보산 등산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오늘 우리가 걷게 될 코스를 미리 알아들 겸 해서 한번쯤 살펴보고 출발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지 말아야 할 것도 하나 있다. 수청리 임도까지 이어지는 능선을 타고자 할 경우, 지도에는 칠보산 정상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꺾게끔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는 정상 조금 못미처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잘못 이해한 우리 역시 20분 동안을 엉뚱한 길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다.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를 따라 5분쯤 걸었을까 왼편으로 길이 하나 나뉘는 곳(이정표 : 칠보산1.22Km/ 행정마을2.31Km/ 부전·칠보방면0.22Km)에 대웅전과 요사채로 이루어진 단출한 암자(庵子) 하나가 웅크리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약수암이라는데 누가 언제 무슨 사연을 갖고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조계종 홈페이지에서도 검색이 안 되는 것을 보면 그다지 의미 있게 살펴봐야 할 절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아까 들머리에서 본 입간판에는 천년동굴 기도 도량이라고 적혀있었는데, 동굴 또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칠보산 방향으로 들어선다. 산길은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다. 임도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폭이 넓은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평지 수준인 것이다. 거기다 정비까지도 잘 되어 있다. 누군가가 추석맞이 단장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말끔하게 벌초(伐草)를 해놓았다.



쉬엄쉬엄 노송(老松) 숲길을 걷다보면 밋밋한 봉우리 하나를 지나게 된다. 첨부된 지도에 나와 있는 372m봉일 것이다. 별다른 특징이나 표시가 없어 봉우리라는 느낌보다는 차라리 능선 상의 한 지점으로 보일 따름이다. 잠시 후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것도 꽤나 길게 내려선다. 어쩌면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피오고개보다도 더 낮은 지점까지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약수암을 출발한지 20분을 조금 넘겼을까 안부삼거리(이정표 : 칠보산 0.5Km/ 노인복지관 0.93Km/ 약수암 0.72Km)에 내려선다. 왼편은 정읍시 노인요양시설이 있는 금붕동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금붕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금붕마을로 연결되는 고갯마루라서 그리 부르는 모양이다.



이곳 안부는 벤치를 놓아 작은 휴게소까지 겸하도록 하고 있다. 편백나무 몇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 분위기까지 끝내주는 멋진 쉼터이다.



안부를 지나면서 오름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다른 쉼터를 만난다. 이번에는 통나무를 나무에 매달아 놓아 의자를 겸하도록 했다. 인위적인 것 보다는 자연스러움을 택한 셈이다.



이번 쉼터에는 3 쉼터라는 이름표까지 달고 있다. ‘마음을 넓히면 우주를 덮고, 마음을 좁히면 바늘도 안 들어간다.’라는 글귀까지 적어 놓았다. 법륜스님의 저서 방황해도 괜찮아에 나오는 글귀를 산속에서 만나게 되다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은 사색을 즐기면서 걷는 산행이 될 수도 있겠다.



3 쉼터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주변은 온통 푸르른 소나무들 천지, 가쁘게 들이쉬는 숨결 속에 짙은 솔향이 묻어난다. 오르막길임에도 불구하고 힘들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들 중의 하나가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웰빙(well-being), 아니 힐링(healing)산행이라 해도 되겠다.



쉼터 조금 위에서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건너편에서 하늘금을 그리고 있는 능선은 아마 호남정맥의 마룻금일 것이다. 뾰쪽하게 솟아오른 시설물은 553.3m봉의 통신기지일 것이고 말이다. 호남칠보분맥 상의 고당산도 한눈에 잘 들어옴은 물론이다.



10분쯤 후, 정상 조금 못미처에서 삼거리를 만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정표(보림사1.75Km/ 상동1.82Km/ 노인복지관1.43Km)가 세워져 있으나 제구실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다음에 올라야할 연수봉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야만 한다. 왼편에 있는 칠보산을 둘러보고 난 다음에는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무릇 시설물이란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정표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등산객들의 입장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이정표는 그러한 기능을 조금도 감안하지 않고 있다. 이정표에 표기되어 있는 지명들만 보고는 도무지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곳의 지리를 알고 있는 현지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칠보산을 찾는 사람들이 어디 현지인들뿐이겠는가. 덕분에 우리 부부는 상동방향으로 진행하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아니 세 무리로 나눠진 우리 일행 모두가 똑 같은 일을 겪었으니 우()라는 표현이 옳지 않을 수도 있겠다.



잠시 후 칠보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50분 만이다. 10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무인산불감시탑이 외롭게 지키고 있다. 다른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다만 한쪽 귀퉁이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 또한 없다. 그저 감시탑의 철망에 매달려 있는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구의 산악인 김문암 선생의 작품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아니었으면 이곳이 칠보산의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겠기에 하는 말이다. 철망에는 4 쉼터라는 안내판도 매달려 있다. ‘정상에 오르면 세상이 보이고, 동산에 오르면 마을만 보인다.’라는 글귀를 적어 놓았다. 하지만 그 어휘(語彙)가 조금 어색하다. 높이 오를수록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보다는 차라리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글귀를 적었더라면 더 이해하기가 쉬웠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바크(Richard Bach)의 우화소설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에 나왔던 글귀 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꽉 막혀있다고 보면 된다. 주변이 잡목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변 풍광을 보고 싶다면 올라왔던 길목에서 대여섯 걸음쯤 왼편으로 옮겨볼 것을 권한다. 희미하게나마 오솔길이 열릴 것이다. 이어서 20m쯤 더 나아가면 시야가 활짝 열린다. 그리고 내장산 방향으로의 조망이 터진다. 서래봉과 불출봉, 연지봉, 망해봉은 물론이고 입암산과 방장산까지 시원하게 내다보인다. 아까 보았던 553.3m봉의 통신기지는 더욱 또렷해졌다.



올라왔던 곳의 반대편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 바로 아래에서 만났던 이정표가 표기하고 있던 상동방향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잘못된 방향이다. 칠보면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는데도 정읍시가지 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억울해 할 일은 아니다. 잠시 후 멋진 바위전망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바위에 걸터앉고 본다. 먼저 눈이 시원해지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땀에 젖은 몸을 청량감이 들 정도로 시원하게 해준다. 이어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린다. 나지막한 산줄기들 사이에 제법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그 들녘엔 정읍시가지가 조용히 엎드려 있다.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다보니 마치 신선(神仙)이라도 된 느낌이다. 저 아래는 중생(衆生)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 나는 구름 위에 오롯이 앉아 있다. 저 아래에는 아주 하찮은 세상사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리라.



조망을 즐기다가 발길을 옮긴다. 계속해서 상동 방향이다. 아직까지도 길이 틀리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얘기도 된다. 경사가 가파른 통나무계단을 길게 내려서니 왼편으로 거대한 바위벼랑이 나타난다. 조금 전에 조망을 즐기던 그 바위전망대의 아래인 모양이다. 그리고 이후로도 한참을 더 헤매다가 방향이 틀리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20분여를 더 헤매고 나서야 되돌아온 칠보산 정상, 가야할 방향을 아직도 못 찾고 허둥대고 있는데 앞서갔던 일행이 되돌아온다. 안전산악회의 선두대장을 하고 있는 낯익은 산꾼이다. 그도 역시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이 구간도 역시 길은 잘 닦여 있다. 잡티 하나 없이 깔끔하게 벌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작은 쉼터용으로 배치한 벤치 등의 시설물들 또한 새것인양 깔끔하기 짝이 없다. 20여년 이상 산행을 해왔지만 이렇게 정성들여 가꾼 산길은 처음인 것 같다. 국립공원들도 한 수 접어주어야 할 정도이다. 조금 전에 만났던 이정표만 좀 고쳐 놓는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정도만 해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관할 지자체(地方自治團體)인 정읍시청 직원들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잠시 후 부직포(不織布)가 깔려있는 곳에 이른다. 예전에는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 활공장으로 사용했었던 모양이나 지금은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는 모양새이다. 하긴 이런 곳까지 찾아오는 라이더(rider)이 있을까 싶다. 바람의 방향을 알려주는 풍향계야 예전에는 있었다고 치자. 하지만 이 정도 크기의 마당에서 이륙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무거운 장비를 둘러매고 이곳까지 올라오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여 진다.



하지만 조망(眺望)만은 뛰어나다. 산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 복흥리를 넘어 신태인까지 이르는 너른 들녘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그래 호남평야라 하면 이 부근까지 아우르는 낱말일 것이다. 아무튼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철이면 그 그림은 최상의 작품으로 변하지 않을까 싶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는 꽃보다 아름답다는 얘기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곳에 활공장을 만들어 놓은 이유일 것이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능선은 온통 산죽(山竹)들의 세상, 어른의 어깨까지 차올라 조그만 틈새도 허락하지 않는다. 길이 헷갈릴까 고민할 필요 없이 계속해서 능선만 타면 된다는 얘기이다.



13분 쯤 지났을까 작은 봉우리를 만난다. 생김새로 보아 용추봉(473.9m)인 모양인데, 산죽으로 가득 차 있어 위로 오를 수는 없다. 산길 또한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킨다.



산길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하지만 아까 칠보산과 용추봉 사이의 골보다는 상당히 깊어졌다.



가는 길 한두 번쯤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하지만 연무(煙霧)로 인해 흐릿할 뿐이다.



아직까지도 길은 또렷하다. 거기다 정비까지 잘 되어 있다. 들머리에서 만났던 호남칠보분맥(湖南七寶分脈)이 제 값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호남칠보분맥이란 호남정맥(湖南正脈) 상의 고당산(高堂山, 639.7m)에서 천치재 방향으로 약 160m 떨어진 지점(정읍시 부전동과 칠보면. 그리고 순창군 쌍치면의 경계 지점)에서 우측능선으로 분기(分岐)하여 칠보산을 지나 정읍시 북면 농공단지~1번 국도~호남고속도로를 건너 장재산과 정토산을 일군 후 칠보천이 동진강을 만나는 곳(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송정마을)에서 그 숨을 다하는 약 20.4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정읍천과 동진강 본류인 태인천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13~4분 쯤 지났을까 농짝만한 바위가 하나 나타나는가 싶더니 어설픈 바윗길로 연결된다. 작은 바위들이 바닥에 심어지듯이 널려있는 정도라서 바윗길이라 부르기엔 민망스러운 수준이지만 하도 바위가 귀한 산이기에 그렇게 표현해봤다. 이어서 2~3분 후에는 연수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칠보산의 일곱 개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선 것이다. 연수봉의 높이는 489m, 칠보산의 정상판이 매달려 있던 7봉의 높이가 469m이니 정상보다 20m가 더 높다. 사실상의 정상인 셈이다. 그래서 인근의 칠보면 사람들은 이곳 연수봉을 칠보산의 정상으로 부르고 있단다. 칠보산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35분이 걸렸다.



칠보산 정상은 집채만한 바위 하나가 점령하고 있다. 바위 정면에는 칠보면의 보림산악회에서 제단(祭壇)을 만들어 놓았다. 어설프게나마 축대를 쌓고, 그 위에다 산신제단이라고 적힌 빗돌을 세웠다. 매년 초에 제사까지 올리고 있단다.



정상은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내장산과 호남정맥의 마룻금이 조망될 터이지만 아쉽게도 시계가 좋지 않다.



능선의 왼편은 거의 벼랑 수준이다. 그 벼랑은 가끔 협곡(峽谷)을 만들기도 한다. 그것도 바위로 말이다. 규모는 비록 크지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벼랑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시야(視野)도 열린다. 나뭇가지로 인해 시원스럽지는 않지만 복흥리의 너른 들녘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연수봉을 지나면서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길가에 안전로프까지 매어 놓은 것을 보면 얼마나 가파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꽤나 길게 이어진다. 그만큼 두 봉우리 사이의 골이 깊다는 얘기일 것이다.




편백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는 안부까지 내려섰다가 살짝 오르면 좌측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아까 들머리에서 살펴보았던 등산로 안내판에서 보림사(寶林寺)로 연결되는 길이 이쯤에서 나뉘었었다. 하지만 이정표(헬기장 1.44Km/ 칠보산 1.75Km)에는 그쪽 방향의 표지판이 매달려 있지 않다. 원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쉬운 부분이다.



7분 후, 4봉으로 보이는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잠시 안부로 내려서면 8분 후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를 만나게 된다. 누군가는 두꺼비를 닮았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피라미드를 빼다 닮았다.



아무튼 오늘 산행에서 만난 바위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번쯤 올라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대여섯 명쯤 둘러앉아 간식을 나눠먹기에 충분할 테니까 말이다.



이후로도 산길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하지만 그 오르내림이 아까보다는 많이 깊어졌다. 경사 또한 가파르다. 생각보다는 힘이 많이 든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중간에 3봉과 2봉으로 여겨지는 봉우리들을 만나지만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정상임을 알려주는 아무런 표식도 없을뿐더러 마음에 새겨둘만한 볼거리 또한 일절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능선의 주인이 참나무들로 바뀌어 있다. 숲이 만들어내는 풍치야 소나무들만 못하지만 그들 또한 그들만의 독특한 멋을 만들어내고 있다. 녹음으로 물든 숲이 싱그럽기 짝이 없다.



지루한 오르내림을 40분 정도 반복하다보면 잘 관리된 헬기장에 올라선다. 삼각점(정읍473, 1997재설)이 설치되어 있는 걸로 보아 첨부된 지도에 나와 있는 402m봉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호남칠보분맥은 왼편 끄트머리에서 열린다. 싸리재로 내려서려는 우린 오른편 능선을 탄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길은 상당히 길다. 그나마 대행인 것은 길가에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아 몸을 의지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스런 구간이 있으니 미끄러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가파른 구간이 끝나자마자 산길이 고와진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평탄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능선은 또 다시 소나무들이 주인이 되었다. 그것도 상당히 오래 묵은 나무들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심신(心身)이 맑아져 온다. 그리고 지친 육신이 활력을 되찾아 간다. 솔향 속에 가득한 피톤치드 덕분일 것이다. 피톤치드에는 치료의 효능 외에도 심신안정과 피로회복의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니 말이다.



헬기장에서 내려선지 25분 만에 십자안부인 싸리재에 내려선다. 왼편으로 내려가면 축현리, 우리는 오른편 수청리 방향의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른다. 고갯마루에 이정표(벌수/ 수청리/ 축현리/ 칠보산4.36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포장과 비포장이 번갈아가며 나오는데 여름철에는 별로 달갑지 않은 구간이다. 그늘이 없어 온몸을 통째로 햇볕에 노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볼거리 또한 일절 없다. 잡초만이 가득한 묵밭이나 무성한 칡넝쿨도 볼거리라면 몰라도 말이다.



20분 후 2차선 도로인 49번 지방도에 내려선다. 수청저수지가 유턴하듯 쑥 들어온 지점이다. 바로 아래가 수청저수지이지만 물가로 내려갈 수는 없다. 저수지에 물이 적게 차있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겠지만, 그보다는 애초부터 길이 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몸을 씻을만한 물을 만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산행날머리는 수청저수지 둑 아래(정읍시 칠보면 수청리)

몸을 씻을 만한 곳을 찾아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왼편 산외면 방향이다. 늦여름의 땡볕 아래서 10분 정도를 더 걸은 후에야 오른편에 수청저수지의 둑이 보인다. 드디어 물길을 찾은 것이다.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수로(水路)에 덜퍼덕 주저앉고 본다. 물론 옷을 입은 채로이다. 수로에는 땀을 닦아내기에 딱 좋은 만큼의 물이 흐르고 있다. 행복하다. 그제야 이렇게 좋은 곳을 찾아준 산악회 운영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 건, 난 어쩔 수 없는 중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4시간 35분이 걸렸다. 준비해 간 간식을 먹으려고 쉬었던 시간과 길을 잘못 들어 헤맨 시간을 감안 할 경우 순수하게 걸었던 시간은 4시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상사봉(想思峰, 403m)-도지봉(棹止峰, 430m)

 

산행일 : ‘16. 7. 23()

소재지 : 전북 임실군 신덕면

산행코스 : 희망교전망봉상사봉도지봉제비설날(410m)피재도로신덕면사무소(산행시간 : 2시간 3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태고에 호수의 지면이 지각변동으로 솟구쳐 올랐다는 도지봉(掉止峰)과 상사암(想思巖)은 임실군 신덕면의 주산(主山)이다. 해발은 낮은 편이지만 암벽(巖壁)으로 이루어져 스릴만점이다. 특히 749번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서 솟아오른 노적봉과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은 흡사 마이산의 두 암봉을 보는 듯하다. 거기다 능선의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멋진 조망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강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 할 수 있다. 덕분에 숲이 울창하여 여름 산행에도 어울리는 편이다. 다만 하산지점에 물이 귀하다는 게 흠()이라면 흠일 수도 있겠으나, 면소재지의 공공시설에서 물 쓰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크게 문제될 것도 없다.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할 산으로 꼽고 싶다. 참고로 피재에서 내려서는 산행이 짧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지초봉과 둥지봉, 꽃밭날등을 거치는 종주산행을 꾀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산행거리는 11.5Km로 늘어난다.


 

산행들머리는 희망교(전북 임실군 신덕면 신흥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임실방면으로 달리다가 관촌면 슬치리(임실군)’에서 우회전 745번 지방도를 탄다. 임실방면인데 전주상그릴라 C·C' 이정표를 참조하면 된다. 이어서 원천교차로(임실군 신평면 원천리)를 만나면 우회전하여 49번 지방도(정읍방면)로 옮겨 타고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삼길삼거리(신덕면 신흥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다리가 산행들머리인 희망교이다.




희망교를 건너 100m쯤 더 들어가다 만나게 되는 산자락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들머리에 등산안내도와 이정표(상사암 0.7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정표에 보면 등산로 입구4.8Km'란 표기가 보인다. 이는 다섯 개의 등산로 입구 중 네 번째 등산로 입구인 피재까지의 거리가 4.8Km란 의미이니 참조한다.




묘역(墓域)을 가로지른다. 묘역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금()줄까지 쳐 놓았지만 무시한 채로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정규 등산로는 묘역의 아래를 꽤나 크게 우회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남의 묘역을 통과한 대가는 혹독하게 치러진다. 가파르기 짝이 없는 산자락을 헤집으며 진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비탈진 산자락은 잡목(雜木)들이 우거져 한사람이 빠져나가기도 빠듯하다. 길이 애초부터 없었음은 물론이다. 거기다 가시넝쿨들까지 가득 들어차 있다. 찔리거나 긁히는 것은 보통, 자칫 한눈이라도 팔다간 싸대기라도 얻어맞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죽을 맛이란 얘기이다.



없는 길을 만들어가며 헤매기를 15,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면서 정규의 등산로를 만난다. 튼튼한 밧줄까지 매어 놓았을 정도로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이렇게 좋은 길을 놓아두고 죽을 고생했다는 생각을 하니 허무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그러다가 문득 오늘 산행이 조금은 불안해진다. 그리고 그 불안은 끝내 현실이 되었다. 완주를 다 못하고 중간에서 탈출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바윗길이 시작되면서 조망이 열리기 시작한다. 옥녀동천을 가운데에 두고 두 개의 ‘49번 지방도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왼편이 현재의 지방도이고 오른편은 201612월에 개통 예정인 새로운 도로이다. 그 오른편에는 바위봉우리인 노적봉(430m)이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자랑하고 있다.




조망을 즐기면서 10분 조금 못되게 더 오르다보면 또 다른 전망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상사바위가 코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멋진 조망처이다. 바위의 위에 설치된 전망데크에서 조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까지 한눈에 잘 들어온다.





또 다른 방향의 풍경을 눈에 담고 싶다면 반대편의 바위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럴 경우 멋지게 생긴 바위봉우리 노적봉을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운암방면의 오봉산과 국사봉도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산길은 달성 서씨묘역 방향으로 이어진다. 잠시 아래로 내려섰던 산길이 또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하지만 경사가 완만한데다 통나무계단까지 만들어져 있어 오르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렇게 7분 정도를 진행하면 상사봉이다.



거대한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진 상사봉(想思峰)은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이다. 불귀신 전설에 기인해 이곳 주민들은 화산(火山)이라 부르기도 한다니 참조한다. 수백 길의 단애(斷崖), 즉 상사암(想思巖) 위에는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마음 놓고 조망을 즐겨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상사봉에는 정상표지석이 없다. 그저 상사암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기름재 1.3Km, 코바위 0.1Km/ 등산로 입구 0.7Km)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일부 지도에는 상사봉(想思峰)을 상은봉(想恩峰)으로 표기하고 있다. 지도를 만든 이가 사()를 은혜 은()으로 잘못 읽었던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상사암에 얽힌 전설이 재미있어 옮겨본다. 옛날 상사암에 은거하던 불귀신이 호수의 물을 마르게 하고 화재를 일으켜서 거북을 돌로 만들었다. 그리고 주민들의 재산과 생명까지 앗아갔던 모양이다. 이에 주민들이 당산에 올라 백일기도를 하자 거북의 혼이 꿈속에 나타나 불귀신을 쫓는 방법을 알려줬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거북이 일러준 대로 거북배미()에서 거북돌을 출토하여 수호신으로 모시고, 마을에는 상사암이 보이지 않도록 느티나무를 심은 뒤 매년 제사를 지내자 불귀신의 피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불귀신의 화염을 없애려면 얼음이나 물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마을 이름 또한 수천(水川) 또는 빙채(氷債)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상사봉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옛날 이 지방에 오랜 가뭄이 들자 주민들이 이곳에 써져있던 묘()를 파내고 돼지의 피를 바위에 바르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단다. 그러자 하늘이 바위를 깨끗이 씻으려고 비를 내려 주었다는 것이다.



데크에 올라서며 일망무제로 시야가 열린다. 우선 발아래에는 그다지 넓지 않은 신덕면의 들녘이 내려다보인다. 그 왼편에는 가야할 도지봉, 둥지봉이 관측된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노적봉이 우뚝하고 그 뒤에 오봉산과 국사봉 라인이 펼쳐진다.




도지봉으로 향한다. 처음부터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하지만 길 양편에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조금만 조심한다면 별 어려움 없이 내려설 수 있다는 얘기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평탄하게 이어진다.



길이 편하다보니 주변의 풍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능선에는 꽤나 많은 종류의 버섯들이 보인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알기론 예쁘게 생긴 버섯들은 모두 독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송전탑(送電塔) 앞에서 이정표(기름재 0.9Km/ 상사암 0.4Km) 하나를 만난다. 오른편 신덕면 소재지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만 이정표에는 표기를 해놓지 않았다. 그러니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기름재 쪽으로 진행하면 된다.



길가에는 야생화들도 여러 종류가 보인다. 그중에 산나리 사진을 하나 올려본다.



이후로도 산길은 변함없이 순하다. 보드라운 흙길이 폭신폭신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날씨만 덥지 않았더라면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중간에 만나게 되는 안부에서 희미하게나마 좌우로 길이 갈리기도 하지만 고민하지 말고 능선만 고집하면 될 일이다.




18분 후 이정표(도지봉 0.6Km/ 등산로 입구 0.2Km/ 상사암 1.3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름재에 내려선다. 물론 상사봉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면 신덕면 소재지이다.



기름재는 상사봉과 도지봉 사이에 있는 해발 280m의 고갯마루이다. 옛날에는 고개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는 사기소와 수천리 사람들이 넘나드는 고갯마루의 역할을 했던 모양이나 지금은 왼편으로 내려가는 길은 보이지도 않고, 오른편 수천리 방향으로만 길(2등산로)이 나있을 따름이다. 아무튼 기름재라는 지명은 풍수지리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한다. 근처에 묘지가 있는데 이곳을 호롱불 혈이라고 하고 불을 켜기 위한 연료(기름)가 땅속에 있다고 해서 기름재라 불렀다는 것이다.



기름재를 지난 산길은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코끝을 스쳐가는 진한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들어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무더위에 지쳐있던 심신(心身)이 어느새 새로운 활력으로 충전된 듯한 느낌이다. 이런 걸 두고 힐링(Healing) 산행이라 하는가 보다.



편백나무 숲을 지난 산길이 갑자기 가팔라진다. 통나무계단까지 놓아야 할 정도로 그 가파름이 심한 편이다. 그렇게 얼마를 오르면 드디어 도지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상사봉에서 37, 기름재에서는 19분이 걸렸다.



도지봉에 오르면 어른의 허리 어림에 닿을 높이로 쌓아 올린 돌담이 보인다. ‘6.25 전쟁당시 후방지역의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설치했던 참호(塹壕)라고 한다. 당시 이 지역에서 준동하는 빨치산들을 막기 위해 경찰과 주민들이 합동으로 보루대를 만들어 운영했던 흔적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도지봉은 돛대봉으로도 불린다. 산봉우리의 생김새가 배의 돛대와 흡사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호수로 배가 드나들 때 이 봉우리에다 배를 매어 놓았다고 한다.



도지봉 정상도 정상표지석이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이곳도 역시 도지봉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제비설날 0.6Km/ 기름재 0.6Km)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정상은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래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유이다.



제비설날로 향하는 산길은 큰 오르내림이 없이 평탄하게 이어진다. 하지만 평범하다보니 자칫 지루해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간에 왼편으로 시야가 트인다는 점이다. 옥녀봉과 경각산, 불재, 모악산, 치마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조망처를 지나면 어정쩡한 산길이 나타난다. 바닥에 바위들이 깔려 있으니 흙길은 분명히 아니다. 그렇다고 바윗길로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그저 걷는 속도만 지체시키는 산행에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된다.



잠시 후 제비설날봉의 정상에 올라선다. 도지봉에서 10분 거리이다. 제비설날이란 봉우리의 생김새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라고 한다. 요 아래 골짜기에 민가(民家)가 몇 집 살고 있는데 그 생김새가 제비집(燕巢)과 흡사하다고 해서 연소골 또는 제비골이라 불린단다. 그런데 제비가 날아 들어오는 형국인 그 뒷산의 생김새가 제비의 혀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의 이름 뒤에다 혀 설()’을 더했단다. 정상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는 이정표(병풍바위 삼거리 0.9Km, 당산 1.0Km/ 도지봉 0.6Km)병풍바위라는 지명이 보인다. 바위벼랑의 생김새가 병풍처럼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는데 피재로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모양이다. 60~70년대 인근 초등학교의 소풍 장소였고, 늦은 봄에는 선남선녀들이 도시락을 싸갖고 나들이를 왔을 정도였다니 그 경관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산길은 제비설날을 지나면서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통나무계단을 깔아놓았을 뿐만 아니라 로프로 난간까지 만들어 두었다. 내려가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는 얘기이다.



아래로 내려서던 길이 또다시 위로 향하더니 제법 큰 바위의 위에다 올려놓는다. 바위의 한쪽 면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쩌면 병풍바위의 상단(上端)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봐야겠다. 바위벼랑의 규모가 너무 왜소해서 병풍바위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망(眺望)만은 시원스럽다.




바위에 올라서면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아까 제비설날 조금 못미처에서 보았던 옥녀봉과 경각산, 불재, 모악산, 치마산 등이 또 다시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훨씬 더 넓어진 모습이다.



산길은 또 다시 평범하게 이어진다. 울창한 참나무 숲속으로 난 길은 경사가 거의 없다. 어쩌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금방 끝나버리기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얼마쯤 지났을까 이정표(등산로 입구 / 병풍바위 0.2Km, 제비설날 0.9Km) 하나가 나타난다. 제비설날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지점이다. 그런데 이정표에 문제가 좀 있어 보인다. 아니 많다고 봐야겠다. 이정표는 현재의 위치를 병풍바위 삼거리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병풍바위로 가는 길이 나뉘어야 한다. 하지만 양편으로 난 길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도 역시 길을 나누어 놓지 않았다. 제비설날과 병풍바위를 같은 방향으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어쩌면 아까 조망을 즐겼던 바위벼랑이 병풍바위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 바위 외에는 바위다운 바위를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얼마쯤 갔을까 오른편으로 난 임도가 보인다. 피재로 곧장 내려가는 길이다. 하지만 산길은 415m봉으로 오르는 능선을 고집하고 있다. 우리 역시 능선을 따르기로 한다. 잠시 후 봉우리를 우회하자 제비설날까지의 거리가 잘못 표기된 이정표(등산로 입구 0.7Km/ 제비설날 0.5Km)를 만난다. 415m봉으로 연결되는 듯한 길이 왼편으로 보이나 이정표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삼거리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또 다시 임도를 만나게 된다. 아까 415m봉으로 오르는 길에 헤어졌던 임도일 것이다.



널찍한 임도를 따라 5분쯤 내려서면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에 내려서게 된다. ‘등산로 입구이자 월성리와 수천리를 잇는 고갯마루인 피재이다. 이곳에도 상사봉 등산로 안내도와 이정표(지초봉 0.7Km/ 병풍바위 삼거리 0.7Km)가 세워져 있다. 산행을 시작한 곳에서 이곳까지는 4.8Km, 완주를 할 경우 앞으로도 5Km를 더 걸어야 한다. 여기가 딱 중간인 셈이다.



지초봉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이곳에서 신덕면 소재지 방향으로 50m쯤 가다가 왼쪽으로 열린다. 들머리에 이정표(지초봉 0.7Km, 배나무골정상 2.5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피재에서 탈출하기로 한다. 사실 집사람은 내일 종합병원에 입원해야만 한다. 모래로 잡혀있는 수술 일정 때문이다. 수술을 받을 만한 체력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집사람의 걱정을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이곳에서의 탈출을 권하고 싶지 않다. 특히 여름철에는 말이다. 신덕면소재지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완전히 햇볕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날에 불볕 속에서 30분 가까이나 도로를 걷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산행날머리는 신덕면소재지인 수천리

30분 가까이를 흐느적거리며 걷다보면 저만큼에 신덕면소재지인 신천리가 나타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30분이 걸렸다. 한 번도 제대로 쉬지를 않았으니 온전히 걷는데 소요된 시간으로 보면 된다. 참고로 이곳 수천리는 아까 상사암을 설명할 때 얘기했던 전설과 인연이 깊은 마을이다. 거북돌이 출토된 뒤부터 거북을 신령스럽게 여기게 되었으며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손님이 찾아오면 융숭하게 대접하고 볏짚으로 거북을 만들어 무병장수하고 부자가 되라는 의미로 선물로 주는 풍습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수천리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의 집성촌(集姓村)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면사무소 앞의 개울 건너편에다 선조들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양효문(兩孝門)과 충신각(忠臣閣)이다. 그중 양효문은 이조 정조 및 순조 때 사람인 신병덕, 신성희 부자의 효행(孝行)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것이고, 그 옆의 충신각은 평산 신씨 시조인 신숭겸 장군의 21세손인 좌찬성 신개(申漑) 선생을 모시는 사당이다. 신개선생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중봉(重峰) 조헌(趙憲) 선생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우다가 장열이 전사한 칠백의사(七百義士) 중의 한분이다.

 

백운산(白雲山, 1,010m)-깃대봉(1,055m)-청량산(1,122m)

 

여행일 : ‘16. 5. 15()

소재지 : 전북 무주군 설천면과 적상면의 경계

산행코스 : 신두마을쉼터전망대일봉백운산깃대봉청량산 갈림길청량산성지산 갈림길566학소대(산행시간 : 4시간30)

 

함께한 사람들 : 안전산악회


특징 : ‘8Km밖에 안되니 4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산행대장은 자신만만하기만 하다. 5시간20분이 소요된다고 적은바 있는 국제신문의 산행기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줄만 알았다. 오늘 오르게 될 산이 덕유산자락임이 분명하고, 내가 알고 있는 덕유산은 부드러운 능선이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능선에 오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거침없이 대닫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초반부터 어긋나고 말았다. 백운산 오르는 길은 토끼나 올라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거칠었고, 백운산에서 청량산으로 연결되는 능선 또한 밋밋한 육산(肉山)이 아니라 바위투성이에다 골까지 깊어 속도를 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흔적조차 찾기 힘든 산길을 걷다보며 할퀴거나 찔리는 것은 물론 심심찮게 따귀까지 맞아야만 했다. 산행거리 또한 국제신문이 옳았다. 하여간 수송대로 내려가는 가파른 하산길 등 4시간30분의 산행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산이 별로라는 얘기는 아니다. 스릴(thrill)을 만끽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암릉까지 갖춘 데다 덕유산이나 민주지산 등 인근의 산군(山群)들을 조망할 수 있는 뛰어난 전망대들을 여러 곳에서 만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의 때를 거의 타지 않은 원시(原始)의 숲은 신선하기만 했고, 심심찮게 나타나는 철쭉무리들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분에 넘치는 수준이었다. 거기다 산행 후 무주 구천동의 비경(秘境)인 학소대에서 목욕까지 할 수 있었으니 이게 바로 신선놀음이 아니겠는가. 결과적으로 한번쯤은 다시 와보고 싶은 산이라는 얘기이다. 그게 비록 무주군에 등산로를 정비하고 난 이후가 되겠지만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신두마을 회관(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대전-통영고속도로 무주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영동방면으로 가다가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칠리대교(大橋 : 무주읍 당산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빠져나와 30번 국도로 바꿔 탄다. 무주반디랜드와 설천면소재지(소천리)를 지나 라제통문삼거리(설천면 두길리)에서 이번에는 오른편 37번 국도로 바꿔 타면 잠시 후 신두마을에 이르게 된다. 산행들머리이다. 버스정류장에는 하두마을로 표기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신두마을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국도변에 위치하지만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오른편에 사각정자(四角亭子)인 마을쉼터가 보이니 참조한다.



마을 안길을 통과하면 다음은 시멘트포장 농로(農路)가 이어진다. 5분 후 만나게 되는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진행한다. 잠시 후에는 또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에 올라선다. 아까 헤어졌던 농로와 다시 만난 게 아닐까 싶다.



진행방향에 백운산이 나타날 즈음이면 길은 우마차나 다닐만한 넓이의 흙길로 변한다. 뾰쪽하게 생긴 산의 모양을 보니 오름길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어서 물기 한 점 없는 작은 계곡을 가로질러 잘 자란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선다. 소나무인데도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쑥쑥 자란 것을 보면 개량종인 모양이다.



소나무 숲을 지나면 작은 지능선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4분 만이다. 산길은 이곳에서 임도(林道)를 버리고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지능선을 따른다고 보면 된다. 산길은 또렷하지가 않다. 오늘 산행이 만만찮을 모양이다.



잠시 후 주위가 갑자기 훤해진다. 능선이 텅 비어있는 것이다. 뭔가를 위해 벌목(伐木)을 해놓은 것이다. 덕분에 조망이 시원스럽다.



오르고 있는 능선의 오른편에 예쁘장하게 지어진 건물 하나가 보인다. 국립태권도원의 부속시설인 태권도공원전망대이다. 태권도는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키워드 중 하나이다. 태권도 종주국의 모든 것을 담아 새롭게 만든 성지(聖地)가 국립태권도원, 사람들은 이를 태권도공원이라고 부른다. 서울 월드컵경기장의 10배나 되는 넓은 터에 경기장을 비롯해 박물관, 체험관 그리고 숙박시설과 산책시설을 갖췄단다. 전망대에 오르면 태권도공원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무주의 산하가 한눈에 달 들어온다고 했다. 옳은 말일 것 같다. 여기서도 덕유산과 민주지산 등 백두대간의 헌걸찬 산봉들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후 산길은 벌목지 경계선을 따른다. 꽤 오랫동안 계속되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힘들게 오르고 있다는 것까지 잊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시원스럽게 조망이 터지기 때문이다. 덕유산과 민주지산을 낀 백두대간의 마룻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비할 데 없이 장쾌(壯快)한 것이 한 나라의 등뼈라는 게 실감이 난다.




25분 후 또 다른 지능선과 합쳐지는 곳에서 오른편 숲으로 들어선다. 제법 또렷하던 산길이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 같다. 들머리나 중요한 포인트마다 국제신문의 리본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일반 산악회의 리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띔은 물론이다.



쓰러진 나무들이 갈 길을 방해하고 있는 거친 산길을 200m정도 진행하면 이번에는 거대한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맞닥뜨린 것이다. 이럴 때는 여유를 갖고 주위를 살펴보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위틈 근처에 리본이 매달려 있다. 바위와 바위의 사이로 길이 나있는 것이다. 그렇게 산길은 바위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위로 오른다. 안전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15분 정도의 악전고투를 지르고 나면 길의 형편은 많이 좋아진다. 그리고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공적(公的) 시설물을 만난다. 무진장소방서와 무주군청에서 세운 ‘119구조지점 표시목(백운 22)’이다. 오른편으로 난 길(라제통문에서 올라오는 길이 아닐까 싶다)도 하나 보인다. 고개가 끄떡거려지는 순간이다. 무주는 전체면적의 82%가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때문에 덕유산이나 적상산, 민주지산 등 세간의 입소문을 탄 산들이 많다. 백운산도 그중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산을 이렇게까지 방치하고 있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겠는가. 결과적으로 우리가 진행해온 코스는 무주군청에서 개설한 주 등산로가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4분 후 이정표(정상 1.2Km/ 주차장 1.1Km)도 만난다. 왼편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보인다. 위가 반반한 것이 쉼터로 제격이겠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올라온 일행이 바위 위에 드러누워 있는 게 보인다.



이정표를 지나면서 산길은 사면(斜面)을 따라 옆으로 향한다. 곧장 치고 오를 수가 없을 정도로 능선이 험했던 모양이다. 하여간 얼마간 옆으로 나가던 산길은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면서 위로 향한다. 그만큼 사면이 가파르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안전로프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12분 후 또 다른 이정표(정상0.9Km/ 주차장1.5Km/ 쉼터)를 만난다. 첨부된 지도에 쉼터전망대로 표기된 지점이다. 왼편으로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시야(視野)가 뻥 뚫리는 뛰어난 전망대가 나타난다. 반석(盤石)으로 이루어진 것이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겠다. 그래서 이정표에 쉼터라고 표기했나보다. 바위에 서면 조망이 시원스럽다. 가깝게는 백운산에서 깃대봉과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그리고 조금 더 멀리로는 덕유산의 주봉인 향적봉과 설천봉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서쪽에다 백운산을 놓고 시계의 반대방향으로 산들이 배치되었다고 보면 된다.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갈지자를 쓰는 것 또한 같다. 오른편에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이 보이는가 싶더니 잠시 후 능선(이정표 : 정상0.6Km/ 주차장1.8Km/ 일봉)에 올라선다. ‘쉼터전망대에서 14분 만이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일봉으로 향한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또 하나의 뛰어난 전망대를 만난다. 이름만 들어서는 봉우리인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보니 바위로 이루어진 하나의 전망대일 따름이다.



바위에 올라선다. 삼면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조금 전에 만났던 쉼터전망대보다도 오히려 시야가 더 넓게 열린다. 아찔한 벼랑 아래로는 구천동계곡이 선명하고, 그 뒤에는 각호산과 그 오른쪽으로 영동 민주지산, 그리고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를 가르는 삼도봉 등 내륙의 1000m급 명산들이 줄지어 인사를 한다.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오르막길이 계속되긴 하지만 그 가파름은 많이 누그러졌다. 중간에 의미 없는 이정표(정상 0.2Km/ 주차장 2.2Km) 하나를 지나면 산죽(山竹) 숲이 길손을 맞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백운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40분이 조금 못 되었다.



정상은 생김새가 좀 묘하다. 그저 펑퍼짐한 언덕일 따름이다. 그나마 눈여겨 볼만한 점은 큼지막한 바위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정상표지석은 그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아니 생김새로 보아서는 기존의 바위에다 글자만 새겨놓은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정상석이 없었더라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조망도 없다.



정상에는 이정표(쉼터/ 반딧불이 공원4Km/ 주차장2.4Km)가 세워져 있다. 우리가 올라왔던 방향(주차장) 외에도 반딧불이 공원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생태자연 학습장이라는 무주반디랜드를 말하는가 보다. 그곳은 곤충박물관과 자연학교, 식물원과 천문대, 청소년수련시설인 별이 쏟아지는 집과 숙박시설인 통나무집 등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생태체험도 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시간이 날 때 한번쯤은 들러보고 싶은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행해야 할 방향은 두 군데 모두 아니다. 청량산은 이정표가 지시하고 있는 쉼터방향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쉼터가 어디를 말하는지도 모르고, 또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등산로는 이곳 백운산까지만 정비를 해놓은 모양이다.



깃대봉으로 향한다. 능선길이다. 길을 나서자마자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헬기장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내리막길을 5분 정도 내려서면 안부에 이른다. 먼저 도착한 일행이 서성이고 있는 것이 산나물이라도 뜯고 있는 모양이다.



안부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거기다 곳곳에 바윗길까지 버티고 있다. 그것도 여자 혼자서는 쉽게 오를 수 없을 정도로 험하다. 누군가 유격장 수준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사귄지 얼마 안 되는 연인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코스는 없을 것 같다. 끌어주고 밀어주다 보면 둘의 사랑은 그만큼 더 짙어질 테니까 말이다.



바위들과 씨름하길 8, 저만큼에 집채만 한 바위가 나타난다. 첨부된 지도에 암봉(970m)로 표기된 지점이다. 산길은 바위를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지만 바위 위로 올라본다. 그리고 뛰어난 조망처임을 알아차린다. 발아래에는 무주반디랜드와 용화면(충북 영동군) 소재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뒤에는 각호산에서 민주지산을 거쳐 삼도봉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마룻금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이어지는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바위가 많은 능선이다. 산길은 바위 위를 걷기도하고, 여의치 않을 때에는 좌우로 피해가면서 이어진다. 걷기가 사나운 산길이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오르면 1022m봉이다. 지도에는 암봉(1022m)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내 눈에는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흙봉우리로 보일 따름이다. 오르는 길에 바위들이 많이 보여 그렇게 표기를 해놓았나 보다.



오늘 산행의 또 다른 특징은 철쭉이다. 곳곳에서 군락지(群落地)를 만날 수 있는데, 꽃의 색깔이 우리가 늘상 보아오던 빨강색이 아니라 거의 흰색에 가깝다. 그래선지 화사함 보다는 청초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1022m봉에서 살짝 내려섰던 산길은 이내 다시 위로 향한다. 그리고 10분 후에는 깃대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반반 지형에 커다란 노송들이 몇 그루 보일뿐 깃대봉 정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깃대봉이라고 쓰인 리본까지 없었더라면 이곳이 깃대봉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십중팔구(十中八九)는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갈 길 바쁜 산꾼들이 작은 리본의 글자까지 살펴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깃대봉 정상에서의 조망은 없다고 보는 게 옳다. 주변의 잡목(雜木)들이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라도 쉬어갈 요량이라면 이야기는 확 달라진다. 앉기라도 할라치면 시야가 활짝 열리면서 건너편에 있는 덕유산이 확연히 그 자태를 드러낸다.



깃대봉에서 만난 기암(奇巖), 거북이를 쏙 빼다 닮았다. 건너편에 있는 덕유산을 향해 금방이라도 달려갈 모양새이다.



향적봉으로 향한다. 잠시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타난다. 그리고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평범하지만 바위들이 많아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그렇게 13분을 진행하면 안부에 내려선다.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생각보다 가파르다.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코끝을 간질이는 짙은 향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냄새의 주인공은 더덕이다. 향기가 짙은 것으로 보아 주변이 온통 더덕 밭인 모양이다. 가던 길까지 멈추고 더덕 캐기에 열중하고 있는 일행들이 그 증거일 거고 말이다.



길가의 산죽(山竹)들이 그 밀도(密度)를 점차 높여간다. 그러더니 능선을 통째로 점령해 버렸다. 높이도 어느새 어른의 어깨 높이까지 차올랐다. 다행이도 길의 흔적은 나타난다. 그렇다고 진행하기가 편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산죽들과의 씨름까지 피할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하여튼 깃대봉을 내려선지 30분 정도가 지나면 산죽의 숲속에 들어앉아있는 삼각점(무풍 21) 하나가 눈에 띈다. 지도에 삼각점(1120m)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하지만 국토지리원장 명의로 세운 삼각점 안내판에는 높이가 1127.1m로 되어 있다. 지도의 높이가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삼각점봉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물론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다. 청량산으로 가는 길은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열린다. 하지만 하산지점인 수송대는 왼편이다. 청량산으로 둘러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청량산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울창한 소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곧고 굵게 잘 자란 것이 이곳도 역시 개량종 소나무인 모양이다.



소나무 숲이 끝나면 산죽(山竹)이 기다린다. 하지만 반기는 게 아니라 갈 길을 막고 있는 모양새이다. 어른의 어깨 높이로 자란 산죽들이 길을 없애버린 것이다. 이곳에서는 자그만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리본을 찾아가며 길을 열기보다는 대충 눈짐작으로 가장 높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얘기이다.



산죽들과의 몸싸움이 끝나면 드디어 청량산 정상이다. 삼각점봉에서 10분 정도 걸렸다. 어렵게 올라선 정상은 실망 그 자체이다. 펑퍼짐한 것이 생김새부터 산봉우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다, 조망까지도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도 없음은 물론이다. 만일 대구의 산꾼 김문암씨의 작품으로 보이는 정상표지판까지 없었더라면 어느 누구도 이곳이 청량산인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삼각점봉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삼각점까지 다시 올라갈 필요는 없고 봉우리 바로 아래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잠시 후 봉우리에서 내려오는 길을 만나기 때문이다. 성지산 방향의 능선이다. 하지만 길의 흔적은 아까보다 더 희미해졌다. 그리고 길 주변의 나무들도 한층 더 굵어졌다. 그만큼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삼각점봉에서 7, 그러니까 청량산을 출발한지 15분쯤 되면 하늘을 향해 치솟은 거대한 바위 하나를 만난다. 입석(立石), 그러니까 선돌을 닮았다. 아니 촛대바위라도 해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정해진 이름은 없다. 훗날 이곳 청량산까지 등산로를 정비하게 될 경우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라도 해서 적당한 이름 하나 지어줬으면 좋겠다.



산길은 선돌을 피해 왼편으로 우회(迂廻)한다. 급경사면(急傾斜面)을 따라 길이 나있기 때문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하지만 이 구간만 통과하고 나면 편안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반면에 길가 풍경은 볼거리로 넘친다. 괴상하게 생긴 바위가 나오는가 하면 호랑이굴을 연상시키는 작은 바위벼랑도 만난다. 거기다 기이한 형상의 고사목(枯死木)들까지 한몫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눈이 호사를 누리는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선돌을 우회한지 26분쯤 되었을까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는 없지만 곧장 능선을 따를 경우 성지산(992.4m)으로 가게 된다. 하산 지점인 수성대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의 지능선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또 다시 고생이 시작된다. 가파른 내리막길 때문이다. 눈요깃거리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묵묵히 내려설 따름이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내려서면 또 다른 삼각점(무풍 401)이 나타난다. 높이는 566.6m란다.




삼각점을 지나면서 산길은 그 사나운 기세를 많이 누그러뜨린다. 그리고 10분 후에는 37번 국도(구천동로)에 내려서게 된다. 수성대(水城臺) 입구이다. 수성대는 구천동의 3대 경승지 중의 하나로 일사대(一士臺)라고도 불린다. 구한말 충절을 지켰던 송병선(宋秉璿) 선생이 서벽정(棲碧亭)을 세우고 창암(滄巖)의 고고함을 들어 일사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산행날머리는 학소대

도로를 가로지른 후 비포장길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물이 누워있는 용을 닮은 바위를 맴돌아 담()을 이룬다.’와룡담 갈림길'(이정표 : 와룡담110m)을 만난다. 와룡담의 반대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공중화장실이 나오고, 그 아래 냇가가 바로 학이 둥지를 틀고 살던 노송(老松)이 있었다는 학소대이다. 경관이 빼어나다는 수성대는 이곳에서 조금 더 가야하지만 냇가로 내려가 물속에 몸을 담그며 오늘 산행을 종료한다. 뼈 속까지 시원해지는 물속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비록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었다는 노송은 보이지 않지만 잘 그린 그림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문광부에서 올해의 관광도시로 선정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무주는 전체 면적의 82%가 산림을 이루고 환경지표 곤충이자 천연기념물 제322호 반딧불이(반딧불이와 그 먹이서식지)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2016 올해의 관광도시. 올해의 관광도시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관광 잠재력이 큰 도시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도시를 말한다. 오늘 산행은 4시간 40분 정도가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만덕산(萬德山, 763.3m)

 

산행일 : ‘15. 9. 1()

소재지 : 전북 완주군 상관면·소양면과 진안군 성수면의 경계

산행코스 : 원신촌마을미륵사입구만덕폭포미륵사2쉼터남봉(삼면봉)만덕산남봉관음봉5쉼터거리정수사(산행시간 : 3시간50)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만덕산 하면 사람들은 먼저 전남 강진에 있는 만덕산을 떠올린다. 특히 요즘에는 야당의 유력 정치인인 손학규씨가 칩거하고 있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전북 완주에도 또 하나의 만덕산이 있다. 그것도 강진의 만덕산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은 산세(山勢)를 가졌다. 아니 높이만 놓고 볼 때에는 강진의 만덕산보다도 오히려 더 높다. 거기다 입소문을 덜 탄 덕분에 찾는 사람들도 드물다. 호젓한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산이다. 원시림에 가까운 숲길과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을 번갈아 걷는 즐거움에다 툭 터지는 조망(眺望)까지 보너스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원신촌마을(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익산-포항고속도로 소양 I.C에서 내려와 좌회전하여 26번 국도를 타고 화심(소양면)까지 온다. 이곳 화심교차로에서 ‘DSM화심온천연수원방향으로 빠져나와 삼화가든 앞에서 오른편 군도(郡道 : 곰티로)로 접어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원신촌마을에 이르게 된다.

 

 

 

원신천마을 앞에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이 도로는 완주군(소양면)과 진안군(부귀면)을 잇는 26번 국도이지만 모래재를 넘나드는 새로운 국도가 뚫리면서 옛()도로로 남았다. 물론 비포장인 채로이다. 이 도로를 따를 경우 곰티재를 넘어 진안군 부귀면에 이르게 되는데, 호남정맥과 만나는 곰티재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하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이때는 물론 차량을 이용해서 고갯마루까지 올라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8분쯤 지나면 벧엘국제신학원이 나온다. 그리고 이어서 동원기도원이다. 하지만 두 시설 모두 버려진 지 오래인 듯 인적을 찾아볼 수 없고, 특히 기도원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 있다.

 

 

비포장 신작로를 걷는 일은 낭만(浪漫)에 가깝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난 도로는 구불구불한 것이 여간 멋스런 게 아니다. 옛날 가마타고 넘어가던 추억의 고갯길 풍경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거기다 고개만 들면 익산-포항고속도로의 교각(橋脚)이 나타난다. 대칭을 이루며 길게 이어지는 다리가 푸른 하늘과 어우러지며 한 폭의 잘 그린 그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도로를 걷는데 길가에 서있는 이정표 하나가 눈에 띈다. ‘송광사까지의 거리를 표시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순례길이라는 반듯한 이름표까지 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잠시 후에 들르게 될 미륵사는 천년고찰이라는 역사 외에도 원불교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상종사가 이곳에서 수행했던 곳으로 알려지면서 요즘도 원불교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라북도에서 아름다운 순례길이라는 둘레길을 만들면서 이곳까지 연장하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아름다운 순례길'이란 종교 간의 대화와 소통을 주제로 만든 총 길이가 240Km나 되는 순례길, 즉 전라북도 판 둘레길이다. 쉽게 말해 천주교, 개신교, 유교, 불교, 원불교, 민족종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어느 하나의 종교로서만이 아니라 여러 종교와 문화가 더불어서 새로운 정신으로 나아가자는 모토(motto)인 것이다. 참 순례길 이야기가 나왔으니 짚고 가야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이곳 만덕산에는 소태산 대종사가 수시로 머물며 선()에 들었다는 원불교의 만덕산성지가 있다는 얘기이다. 그가 만덕암에 머물며 제자들을 모아 원불교 창립의 주요 인재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후 원불교 최초의 하선(夏禪)’동선(冬禪)’이 여기서 진행됐다. 이런 연유로 원불교에서는 대종사가 12명의 제자와 1개월 동안 최초의 선()을 했다는 의미로 여기를 성지로 정했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남짓 지나면 길이 둘로 나뉜다. 곧장 도로를 따를 경우 곰티재로 이어지고, 미륵사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 포장길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입구에 천년고찰 진묵성지 만덕산 미륵사라고 적힌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5분쯤 올라가면 오솔길 하나가 왼편으로 열린다. 만덕산의 명소(名所) 중 하나라는 만덕폭포(萬德瀑布)를 만나려면 왼편 오솔길로 들어서야 한다. 곧장 포장길을 따르면 폭포를 거치지 않고 미륵사에 이르게 되니 만일 폭포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계속해서 포장길을 따라도 될 것이다. 들머리에 위험성 때문에 암벽 및 빙벽 등반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솔길로 들어선다. 수풀사이로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도록 난 등산로를 따라가면 돌밭길이 시작된다. 한마디로 거친 산길이다. 너덜로 이루어진 울퉁불퉁한 바닥은 걷기조차 힘들게 만들고, 거기다 웃자란 잡초와 잡목(雜木)들에 포위된 산길은 길손의 발걸음을 자꾸만 붙잡는다.

 

 

만덕폭포로 올라가는 이 계곡은 이끼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막상 대하고보니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계곡에 물이 흐르지 않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끼라는 게 원래 습기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식물인데 계곡이 말랐으니 이끼 또한 왕성하지 못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거친 계곡길을 15분쯤 올라가면 드디어 만덕폭포가 길손을 맞는다. 높이가 50m도 더될 것 같은 거대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폭포이다. 그러나 오늘은 폭포가 아니라 그냥 수직(垂直)의 바위벼랑일 따름이다. 물이 떨어지지 않는 민낯으로 길손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폭포 옆에 아까 입구에서 보았던 경고판이 하나 더 세워져 있다. 해마다 겨울철이면 이 폭포는 얼음으로 뒤덮인다고 한다. 빙폭(氷瀑)이 되는 셈이다. 때문에 이 지역 젊은 산악인들로부터 빙벽타기 훈련장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 빙벽(氷壁)을 타다가 떨어져 목숨을 잃은 사고가 발생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한 발짝 내딛기도 힘든 너덜길을 겨우겨우 오르다보면 산길이 둘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덕폭포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만덕산 정상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너덜겅을 따라 위로 올라야한다. 그러나 우린 오른편 바위벼랑의 허리를 뚫으며 난 길을 따른다. 진묵(震默)대사 일옥(一玉: 15621633)이 주석했었다는 천년고찰 미륵사(彌勒寺)에 들러보기 위해서이다. 물론 미륵사를 둘러보고 난 뒤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계단을 오르면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웅크리고 있는 미륵사(彌勒寺)이다. 미륵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백제 위덕왕 때(재위: 554598)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자신의 수도처로 삼으려고 세운 암자(庵子)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절의 중창비(重創碑)나 문헌(文獻)이 없어서 미륵사가 창건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법당 안에 봉안된 신중탱화에서 미륵사 이전의 옛 사찰의 이름을 찾을 수는 있다. 광서 18년 임진(1892)년에 조성된 이 탱화에는 만덕산 금강암(金剛庵) 봉안(奉安)’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 사찰의 이름이 옛날에는 금강암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 다만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사찰의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인법당과 요사채, 그리고 산신각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빼먹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인법당 뒤편 바위벼랑 위에 위치한 돌탑이다. 모전석탑(模塼石塔)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 높이 2m의 이 돌탑은 자연암석 위에 탑신과 옥개를 2층으로 조성하고 상층부는 자연석으로 보주를 삼았다. 진묵대사가 탑을 조성할 때 동자에게 도술을 써서 탑에 쓸 돌을 날라 오도록 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탑이다.

 

 

 

절에 들면 약수(藥水)를 찾는 버릇이 있다. 대부분의 절들이 명당에 자리 잡고 있는 탓에 절에서 나는 물들 또한 뛰어난 맛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샘이 보이지 않아 낭패다. 별수 없이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요사(寮舍)에 들어가 물 한 바가지를 떠다주신다. 거기다 물통에까지 물을 채워 주시겠단다.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 같아 사양했지만 그 자비로운 마음이 더해진 물맛이 어찌 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걸 일러 감로수(甘露水)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영향일까? 미륵사에서 바라보는 조망(眺望)은 물맛만큼이나 뛰어나다. 발아래에는 익산-포항고속도로가 만들어내는 곡선이 한없이 부드럽고, 그 뒤에 있는 운장산과 원등산, 구봉산 등 전라북도 내륙의 고산준령(高山峻嶺)들이 줄줄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미륵사에서 되돌아 나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너덜의 경사(傾斜)는 아까보다 더 가팔라진다. 그리고 너덜의 돌들도 아까보다 훨씬 더 잘아졌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이유이다. 거기다 가끔은 발길에 걸린 돌이 아래로 구르기도 해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그러나 좋은 점도 있다. 너덜구간이 길다보니 시야(視野)가 트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까 미륵사에서 보았던 풍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데, 양 옆의 산자락 안에 갇힌 풍경이 마치 액자 속의 산수화를 연상시키고 있다.

 

 

 

가파른 너덜길과의 사투는 꽤 오랫동안 계속된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나면 드디어 능선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지도(地圖)에는 능선에 올라서자마자 2쉼터를 만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벤치 등의 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주변에 앉아 쉴만한 반반한 바위가 몇 개 보이는 것이 아마 이곳을 일러 쉼터라고 했나 보다. 능선에 일단 올라섰다면 이제부터는 호남정맥(湖南正脈)을 따르게 된다. 진안군 부귀면과 완주군 소양면의 경계에 있는 주화산(565m)에서 시작하여 광양의 백운산까지 이어지는 총길이 398.7의 산줄기가 바로 호남정맥이다. 이곳에서 주화산으로 연결되는 왼편 능선 상에 곰티재가 있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전주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침입해온 왜군(倭軍)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니 만덕산 산행을 곰티재에서 출발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으니 말이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오른편 능선을 탄다. 잠시 후 멋진 바위지대에 올라서게 된다.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트이는 멋진 전망대이다. 어쩌면 오늘 산행에서 가장 조망(眺望)이 뛰어난 곳이 아닐까 싶다. 만덕산의 정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이 펼쳐지니 구태여 서두르지 말고 조망을 즐겨보라는 얘기이다.

 

 

우선 맞은편에는 가야할 만덕산 정상이 보인다. 오른편 사면(斜面)이 서슬 시퍼런 절벽으로 이루어졌다. 그 오른편에는 산행을 시작했던 신촌리와 미륵사 계곡이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고개라도 들라치면 수많은 알짜배기 산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운장산과 구봉산, 복두봉은 물론이고 진안의 덕태산과 선각산 등등 나타나는 봉우리들마다 내로라하는 명산들이다.

 

 

 

전망바위를 뒤로하고 잠시 더 걸으면 이정표(정수사2.5Km/ 헬기장, 미륵사)해발 745m'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남봉(삼거리봉)에 올라선다. 안부삼거리(2쉼터 추정)로부터 10분 정도의 거리이다. 통신시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이 봉우리는 호남정맥상에 위치한 덕에 만덕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흔히들 정상으로 혼동을 하는 곳이다. 그러나 만덕산 정상은 이곳이 아니다. 만덕산 정상은 호남정맥길에서 북쪽으로 살짝 비켜나 있다. 북쪽으로 200m쯤 더 나아가야 만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이곳 남봉(삼거리봉)은 삼면봉(三面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이곳에서 완주군 상관면과 소양면 그리고 진안군 성수면 등 세 개의 면(三面)이 만나는 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삼면봉에서 다시 한 번 멋진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아까 전망바위에서 보았던 풍경과 거의 같지만 주변의 나무들로 인해 아랫도리가 약간 잘려나가는 게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점을 찾는다면 이번에는 만덕산이 아까와는 반대편 사면(斜面)을 보여주고, 그 왼편으로 전주시가지가 넓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삼면봉에서 아래로 살짝 내려섰다가 작은 오르내림을 두어 번 하고 나면 드디어 만덕산 정상이다. 3~4평 넓이의 정상에는 삼각점 외에도 스테인리스 재질의 정상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막대 끝에 매달린 쇠판이 엉성하지만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정상판 아래에는 엉성하게 쌓아올린 돌탑도 보인다. 안전산행을 바라는 마음들을 보는 것 같아 친근하게 느껴진다. 참고로 만덕산은 한자로 일만 만()’큰 덕()’을 써서, ‘만 명(萬人)’에게 덕을 베푸는 산이란 뜻이다. 지역주민들에 의하면 임진왜란과 6.25를 비롯한 수많은 전란(戰亂)을 겪으면서도 지역주민들이 전화(戰禍)를 입지 않았던 이유란다. 만덕산이 덕을 베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때문인지 인근 주민들은 만덕산을 일러 부처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만 가지에 달하는 덕을 가진 이는 부처뿐이라면서 말이다.

 

 

 

정상에서 북쪽의 은내봉(452m) 방향으로 50m쯤 더 나아가면 또 다른 전망대가 나온다고 하지만 들러보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아까 바위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과 거의 같을 것 같아서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조망(眺望) 정도야 이곳 정상에서도 즐길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이다. 북동쪽으로 원등산 너머로 연석산과 운장산이 바라다 보인다. 발아래로는 거대한 분지(盆地)를 이룬 신촌리 들판지대가, 그리고 남동쪽으로는 덕유산과 백운봉 등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삼면봉(남봉)으로 되돌아와 서릉을 타고 하산을 시작한다. 산길은 맞은편 산봉우리를 왼편으로 우회(迂廻)하여 아래로 향한다. 봉우리 위로 올라가는 길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굵은 나무로 막아 놓았다.

 

 

무턱대고 앞선 이들을 따라내려 가다 문득 그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반대편 바윗길을 다시 치고 오른다. 선답자의 글에서 저 봉우리를 실제 정상이라고 적어 놓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되돌아 올라가는 바윗길은 경사가 가파르고 위험스럽기는 했지만 못 오를 정도는 아니다. 어렵게 오른 정상은 그저 전주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릴 따름이다. 이곳이 정상이라는 그 어떤 표시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다만 왜 그들이 이곳을 실제 정상이라고 표현했는지에 공감은 간다. 지나온 봉우리들이나 가야할 능선이 지금 서있는 곳보다 낮게 보였기 때문이다.

 

 

 

관음봉을 바라보면서 위태로운 바윗길을 다시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발 725m지점에서 정수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정상 0.2Km/ 정수사 2.3Km)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해발 699m지점에서 또 다른 정수사 갈림길(이정표 : 정상 0.4Km/ 정수사 2.3Km/ 상관)을 만난다. 이정표에 적힌 거리 표시로 보아 지자체에서는 만덕산의 정상을 삼면봉(삼거리봉 또는 남봉)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관음봉으로 가는 길에 뒤돌아본 풍경, 조금 전에 만덕산 최고봉으로 알고 올랐던 봉우리이다.

 

 

관음봉으로 가는 길은 오른편이 수십 길의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서슬 시퍼런 바윗길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윗길의 넓이가 의외로 넓기 때문에 일부러 벼랑 쪽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 그렇게 높은 벼랑 위를 걷고 있다는 것조차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벼랑은 관음봉에 가까워질수록 높아지다가 끝내는 천길 단애(斷崖)로 변해버린다. 벼랑 위를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가슴 졸임은 바라보는 사람들만의 몫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실제 걷는 사람들은 벼랑 위를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일부러 절벽 끝으로 나아가지만 않는 다면 말이다.

 

 

쇠줄에 의지해서 마지막 구간을 치고 오르면 드디어 관음봉 정상이다. 정상에 오르면 다시 한 번 시야(視野)가 툭 트인다. ‘만덕산 제일의 전망대라는 사람들의 칭찬에 고개가 끄떡여지는 순간이다. 남서쪽 아래로 정수사 골짜기가 아찔하게 내려다보이고 경각산과 고덕산이 멀리 모악산과 함께 하늘금을 이룬다. 그 왼편도 역시 산들 천지이다. 오봉산과 순창 쪽 산들인 회문산, 백련산 등이 아닐까 싶다. 북동쪽에 있는 진안의 고산준령들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다. 덕태산과 선각산도 저 속에 있을 게 틀림없다.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도 역시 바윗길이다. 그것도 경사까지 가파르기 때문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바위 면이 접지력(接地力)이 좋은 덕분에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관음봉을 내려서고 나면 길은 고와진다. 보드랍기 짝이 없는 황톳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는 길이 계속된다. 한껏 여유를 부려도 좋을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10분 후 의자 몇 개가 놓인 작은 쉼터(이정표 : 정수사 2.1Km, 상과면, 죽림온천)에 올라선다. ‘5쉼터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625m봉이다. 이곳에서 산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쉼터를 지나서도 산길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경사가 심해진 것이 달라졌을 따름이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사거리(이정표 : 정수사2.0Km/ 상관면/ 성수면/ 정상1Km)에 이른다. 정수사로 내려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계속해서 능선을 탈 경우 상관면으로 내려가게 되니 참조할 일이다.

 

 

능선삼거리에서 정수사 방향으로 내려서는 길은 얼마나 가파른지 거의 벼랑 수준이다. 산길은 그 가파름을 배겨내지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며 아래로 향한다. 그래도 그 가파름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23분 정도 걸리는 이 길을 내려선 집사람이 정형외과를 찾아야 할 정도가 되어버린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이사를 하느라 2개월 이상을 체육관에 못나갔으니 기초 체력이 떨어질 만도 할 것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은 욕설이 튀어나올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끝을 맺는다. 그리고 곧이어 기도터에 이른다.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진 기도터에는 여러 개의 제단(祭壇)이 만들어져 있다. 제단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기도를 드리려는 사람들의 숫자 또한 많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는 이 바위가 그만큼 영험하다는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기도터를 지나면 길가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감나무를 볼 수 있다. 그만큼 이 지역이 감으로 유명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감이라고 하면 이곳보다는 근처에 있는 동상면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동상면의 감은 씨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감나무의 품종(品種)에 관계없이 이 지역에만 오면 씨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반대로 씨 없는 이곳의 감나무를 다른 지역으로 옮겨 심을 경우 다시 씨가 생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전에 전주에 출장 왔다가 이곳에 근무하는 관료들로부터 들은 얘기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감나무밭 속에서 갈림길(이정표 : 정수사1.3Km/ 정상1.2Km/ 정상(마지리)2.0Km)을 만난다. 오른편은 아까 관음봉으로 내려오는 길에 만났던 첫 번째 갈림길에서 곧장 내려오는 길인 모양이다. 삼거리에 만덕산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오늘 산행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것이다.

 

 

삼거리부터는 임도(林道)를 따른다. 잠시 후 개울을 건넌다. 물기가 보이지 않는 개울이다. 만덕폭포도 물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가뭄이 제법 심했던가 보다. 널따란 임도를 따라 얼마간 더 내려오면 왼편에 만덕암이 보인다. 절간이라기보다는 일반 여염집에 가까운 외형인지라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길의 오른편에는 움막도 보인다. 주변에 염소들이 노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염소 사육시설이 아닐까 싶다. 이어서 희천 김씨문중 제실(祭室)을 지나면 정수사는 금방이다.

 

 

산행날머리는 정수사 앞 주차장

삼거리를 출발한지 17분쯤 지나면 만복산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천년고찰 정수사(淨水寺)에 이르게 되면서 사실상의 산행이 종료된다(이정표 : 정상 2.5Km). 오늘 산행은 총 4시간1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50분이 걸린 셈이다. 정수사(淨水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신라 진성여왕 2(899)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1799(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따르면 처음에는 중암(中庵)이라고 했다가 후일 주변 산수가 청정하고 해서 정수사(淨水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법등이 이어졌다고 하나 문헌상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조선시대에 들어 1581(선조 14)에 진묵대사(震黙大師)가 중건하였다. 중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절이 모두 불에 타버렸는데 이후의 구체적인 중건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1652(효종 3)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 보물 제1853)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걸로 보아 난을 거친 후 어느 때인가 다시 중건하여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들어 1923년 초운선사가 요사 2동을 지어 새롭게 법등을 이었고, 여러 번의 불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건물로는 법당인 극락전과 지장전, 삼성각과 요사(寮舍)인 관음전, 그리고 범종각과 또 다른 요사채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위에서 말한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