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조지아  바투미 시가지 투어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바투미(Batumi) : 조지아 최대 항구이자 최대의 휴양도시다. 터키 국경까지 약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여름이면 터키나 유럽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인구 15만 남짓의 조지아 제2의 도시이기도 한데, 외세 침략을 많이 받아서인지 그리스·로마 양식뿐만 아니라 터기 등 다양한 건축 양식들이 섞여있다.

 

 조지아 서부지역에 위치한 바투미로 가는 길. 스탈린의 고향이라는 고리 쿠타이시(‘콜키스 왕국의 수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젤라티수도원이 있다)‘를 지난다. 압하지아(Abkhazia)와 남오세티아(South Ossetia)을 지날 때는 2008년 조지아 영토 내에서 자치공화국을 선포한 두 지역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조지아를 침공한 러시아에 분노도 터뜨린다. 그리고 꽈리강과 리오니(Rioni)강을 나누는 분수령이자 시다카르틀리주(주도: 고리)와 이메레티주(주도: 쿠타이시)의 경계인 고개를 넘어 흑해 연안으로 들어선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트빌리시를 출발한지 6시간.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조지아의 서쪽 땅 끝인 흑해연안에 이른다. 그리고는 바닷가 작은 마을 그리골레티(Grigoleti)’에서 여장을 푼다. 트빌리시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300km 정도. E60 E692 등 고속도로를 이용해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도 6시간이나 걸렸으니 우리네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라 하겠다.

 그리골레티(Grigoleti)’는 자성이 있는 검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하다. 그래선지 전 세계 5대 브랜드 호텔 그룹인 윈덤(Trademark Collection by Wyndham)이 운영하는 리조트가 들어서 있었다. 세계적인 리조트라 그런지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는데 2022년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전 세계 6개 대륙 9,300개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윈덤은 미국과 유럽에 특히 많으며 최근에는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고 있다.

 바닷가와 접하고 있으니 흑해 해변이 리조트의 전용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로비 가까운 곳에 수영장을 만들어 해수욕에 싫증을 느낀 투숙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시간이 나면 스파나 피트니스센터 등을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흑해가 코앞까지 성큼 다가오는 레스토랑과 테라스가 가장 마음에 든다.

 바닷가로 나간다. 이름과는 달리 바다의 색깔은 세계 방방곡곡에서 만나본 여느 바다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 어떤 바다보다도 푸르렀다. 다만 바닷가 모래사장이 거무튀튀하다는 게 약간 다를 뿐. 저 모래사장이 흑해라는 이름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겠다.

 리조트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심어져 경치가 좋은 편이다. 바다 쪽으로는 꽃이 가꾸어진 정원도 있다. 날씨가 화창한 탓인지 아직은 수온이 차가울 텐데도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비키니 차림의 피서객들이 여럿 보였다.

 저녁식사까지 시간이 조금 남기에 해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1km남짓 걸었는데 해변은 부유한 이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별장의 테라스를 바닷가 모래사장에 잇대어 만드는 등 낭만을 더했다. 붉게 물드는 저녁놀의 바닷가, 그리고 식탁에는 와인을 곁들인 만찬이 차려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가.

 다음 날 아침 바투미로 간다. ‘그리골레티 비치에서 바투미까지는 30km쯤 떨어져 있다. 가는 내내 흑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공연장과 놀이공원이 보이는가 하면, 바투미식물원도 곁눈질해 볼 수 있다

 버스는 국제 컨테이너터미널을 지나 바투미 항구에서 멈춘다. 가이드는 우릴 선착장으로 인도한다. 해안을 따라 요트와 보트, 유람선들이 골고루 뒤섞여 있다. 참고로 바투미 항(Batumi Sea Port)’은 조지아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항구라고 한다. 1878년 로스차일드와 노벨 형제가 참여해 항구를 건설했는데, 조지아의 메인 항구 역할을 한다. 외국과의 교역품의 운반이나 국제여객선 루트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곳 흑해에서 더 큰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야만 하니 운송로가 썩 편치만은 않다.

 선착장으로 가는 도중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차차 분수(Batumi chacha fountain)’라는 이름의 타워(Tower)인데 예전에는 차차(와인 만들고 남은 찌꺼기로 만든 술)가 분수대에서 흘러나왔다나? 아무튼 지금은 프랑스 건축가 ‘Raymond Charles Père’가 디자인했다는 오스만 스타일의 시계탑만 남아있다. 그런데 튀르키예의 이즈미르 시계탑을 쏙 빼다 닮았다면 나만의 오해일까?

 우리가 타고 갈 유람선이다. 이름은 ‘Sea Star 1’. 2층으로 되어 있는데, 2층에서의 조망이 조금 더 나은 편이다. 유람선은 어항, 페리항, 유람선항, 요트항 그리고 해수욕장을 한 바퀴 돈 다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옛 해적선을 닮은 낭만의 유람선도 눈에 띈다. 바투미를 찾는 관광객들의 숫자가 제법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유람선은 음악에 맞춰 파도를 타면서 천천히 움직인다.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간다. 그러자 해안도시 바투미의 전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바닷가를 따라 펼쳐지는 고층빌딩의 파노라마가 무척 멋있다. 바투미는 15만 명의 인구를 가진 중소도시지만 현대적 고층빌딩이 즐비한 현대도시다. ‘아자라 자치공화국의 인구가 33만 명이라니 절반이 수도권에 모여 사는 셈이다.

 해안을 따라 우뚝우뚝 솟아 있는 고층빌딩들은 대부분 2010년부터 지어졌다고 한다. 쉐라톤 호텔, 래디슨 블루 호텔, 켐핀스키 호텔, 힐튼 호텔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그 옆에는 야간에 불을 밝히는 등대(1863년 오스만튀르크 시절 나무로 만든 등대인데, 1882 21m 높이의 팔각형 석조로 새로 지었단다)도 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커다란 회전관람차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흑해를 따라 늘어선 현대도시 바투미의 고층빌딩들이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다.

 유람선은 바투미 해안을 따라 2km쯤 가다가 되돌아온다. 유람이라고 해봐야 해안의 빌딩을 보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해수욕장의 피서객들을 보는 재미가 조금 더해진다고나 할까? 참고로 흑해의 둘레는 5,800km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 조지아가 차지하는 부분은 310km쯤 된단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투미의 명물로 알려진 알리와 니노(Ali and Nino)’를 찾았다. 사랑하는 청춘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으로 조지아 조각가인 크베시타제(Tamara Kvesitadze)’가 만들었고, 이곳 바투미 해변에는 2010년 설치했단다. 작품은 원래 남과 여(Man and Woman)’로 발표되었고 한다. 하지만 너무 일반적이어서 사이드(Kurban Said)의 소설 알리와 니노(Ali and Nino)’에서 이름을 차용했다나? 아무튼 소설 속 알리는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무슬림이고, 니노는 조지아 출신의 기독교도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이별한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아제르바이잔을 공격하면서 니노는 딸을 데리고 조지아로 피신한다. 그러나 알리는 간자(Ganja)에 남아 러시아군과 싸우다 죽음에 이르게 된다(1920년 아제르바이잔은 소련연방에 편입된다). 이후 알리와 니노는 카프카스 지역에서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져 1998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조형물은 키네틱 아트(움직이는 예술)로 움직임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알리와 니노는 처음에 먼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잠시 후 서로 손을 잡는가 싶더니, 이들은 다시 멀어져 간다. 알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소설과는 달리 두 연인의 조형물은 만났다 헤어지기를 10분 간격으로 반복한다. 소설이 알리와 니노의 일대기라면, 조형물은 사랑과 이별이라는 메시지가 중심이 된다. 참고로 바투미는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은 도시다. 그런 도시에서 알리와 니노는 다양한 민족, 문화와 종교의 화합과 평화로운 공존을 상징한다.

 2011년에 지어졌다는 알파벳 타워 130m 높이를 자랑한다. 철골 구조물 밖으로 두 개의 밴드 형태 알루미늄 판이 넝쿨손처럼 돌며 올라가는데, 그 판 위에 33개 조지아어 알파벳이 붙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투미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단다.

 바투미 타워(탑처럼 생긴 건물)’는 바투미 기술대학의 건물로 조지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했다. 2012년 준공했으나 건물의 위치, 형태, 관람차 등 대학에 맞지 않아 10년 채 표류중이라고 한다. 곧 호텔로 변신할 계획이라나?

 바닷가로 나가면 흑해 전망대가 있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가도록 이층 구조물을 설치해 바다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흑해(Black Sea)’는 우리나라 면적의 4배에 이르는 호수 같은 바다다. 터키 해협을 통해 지중해와 연결되는 갇힌 바다이다.

 바다 전망이라고 해야 별 게 없었다.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해안과는 달리 이곳 흑해는 섬이나 리아스식 해안이 없어 단조롭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수평선이 보이는 푸른 바다만 펼쳐질 따름이다.

 대신 좌우로 펼쳐지는 바닷가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푸른 숲을 배경으로 둔 해안은 바닥이 자갈이어서 물이 더 깨끗하게 보인다. 그 자갈 위로 파도가 부딪쳐 하얀 포말이 생겨난다. 그 때문에 바다가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래선지 아직은 철이 이른데도 바닷가에서 여름을 즐기는 피서객들이 여럿 보였다.

 반대편으로도 흑해가 질펀하게 펼쳐진다. 이쯤해서 가이드가 전해준 팁 하나. 흑해가 ‘Black Sea’가 된 이유는 흑해의 바닥이 검어서라고 했다. 때문에 물속의 가시거리가 굉장히 짧단다. 흑해와 접한 나라들 간의 잦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죽음을 뜻하는 검은색의 바다가 되었다는 설도 있단다.

 바닷가를 떠나 바투미 시내로 들어간다. 시내로 연결되는 바투미대로(Batumi Boulevard)’는 분수 광장을 지나 유럽광장으로 이어진다.

 감사후르디아 대로(Zviad Gamsakhurdia Avenue : ‘감사후르디아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조지아의 초대 대통령이다) 루스타벨리 대로(Rustaveli Avenue)’가 만나는 지점에 넵튠 분수가 있었다. 분수 한 가운데 바다의 신 넵튠이 삼지창을 들고 우뚝 서 있는 모양새이다. 냅튠은 물의 신이다. 샘이나 강, 바다의 신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니 바닷가에 터를 잡은 바투미로서는 해양에서의 안녕과 평화를 빌기에 딱 좋은 신이라 하겠다.

 넵튠(Neptune, 포세이돈) 분수는 이탈리아 볼로냐의 네투노 광장 16C에 세워진 쟝드 볼로뉴(Jean de Boulogne)’의 조각상 ‘Fontana di Nettuno’를 그대로 복제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똑 같게 복제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원작을 빌려오면서 청동상을 금도금으로 옷을 갈아입혔다.

 분수 건너편에는 고대 그리스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바투미 극장이 있었다. 4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과 두 개의 소극장에서 음악, 연극, 무용 등 예술과 관련된 공연이 열린다. 지붕 아래 박공벽에는 리라(lyre)로 불리는 현악기와 트럼펫으로 불리는 관악기를 양각해 놓았다. 그 가운데서 두 사람이 웃고 있는데, 오마이뉴스는 리라의 명수 오르페우스와 음악의 신 아폴로로 추정하고 있었다.(바투미 편은 오마이뉴스의 기사가 많은 도움을 줬다)

 그런데 바투미 극장 뒤편에 있는 저 동상은 대체 누구일까? 어쩌면 일리아 차브차바제(Ilia Chavchavadze, 1837-1907)’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바투미 극장을 후원했었다니 말이다. 시인이자 소설가, 법률가, 언론인, 정치인 등으로 활동한 그는 조지아 민족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시가지는 유럽의 어느 중세도시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노랑머리의 남녀도 심심찮게 보인다. 맞다. 바투미는 조지아 최대 항구도시이자 조지아 최대의 휴양도시라고 했다. 터키 국경까지 약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여름이면 터키나 유럽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단다.

 좁은 거리는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가득하다. 오스만투르크와 러시아, 유럽 등 다양한 나라들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데, 고풍스럽고 특이한 형태의 건물도 많아 마치 동화 속 마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바투미 광장(Batumi Piazza)’에 가까워질 무렵 성 니콜라스교회(St. Nikolas Church)’를 만났다. 바투미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그리스 출신의 바투미 시장 에프레미디(Ilya Efremidi)의 후원으로 1865년 공사를 시작해 1871년 완공했다. 20세기 초에는 성 니콜라스, 성 조지, 성모 마리아 이콘이 그리스 히로스(Khiros) 섬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근처에서 아르메니아 교회(Christ the Saviour Armenian Apostolic Church)’도 만날 수 있었다.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고 해서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러시아정교회나 조지아정교회와는 달리 우리나라 교회처럼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다고 했다.

 활을 들고 있는 큐피드를 형상화 한 꼬맹이 분수도 눈에 띈다. 독신자가 이 물을 마실 경우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있고, 부부가 함께 마시면 오래오래 행복과 화합을 보장해준다나?

 그 뒤에는 황금빛 여인의 동상도 있었다. 여성 본연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란다.

 바투미 광장(Batumi Piazza)’에 도착하니 시간이 일러서인지 인적이 뜸했다. 하지만 점심 손님들이 많은지 식당에서 내놓은 탁자들이 널따란 광장의 절반 이상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바투미의 역사지구 재건과 관광인프라 확충계획에 따라 조성된 광장은,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을 모방하여 2010년 완공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식당과 술집 그리고 커피숍도 마르코폴로, 피아짜, 미미노 같은 이탈리아어 상호를 가지고 있었다.

 바투미 광장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양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의 느낌이 난다는 것이다. 광장 주변의 부티크 호텔과 시계탑이 산 마르코 광장의 총독관저 같은 느낌을 준다나? 하지만 내 기억속의 산 마르코광장 99m 높이의 종탑(Campanile di San Marco)은 저 풍경과 많이 달랐다.

 광장 한가운데는 2010년에 만들어진 커다란 모자이크화가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유명 성악가들이 이곳에서 공연하기도 했단다.

 한가운데서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유럽광장(Europe Square : 옛 이름은 시대광장이라고 했다)’은 넵튠분수의 남서쪽에 있다. 바투미광장에서도 무척 가깝다. ‘유럽이란 이름만으로 조지아의 유로 가입의자가 엿보이는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 또한 밝고 활기차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많아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나 싶다.

 광장의 예쁜 건물들은 유서 깊은 동유럽의 도시들을 연상시킨다. 바투미의 근·현대를 함께 보여주기도 한다. 아르누보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주를 이루지만, 그 뒤쪽으로 21세기 빌딩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건물은 현재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 식당, 기념품점 등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광장에는 2007년에 세웠다는 메데아 동상(Statue of Medea)’이 우뚝 서있다. 그리스 신화 속 황금의 나라 콜키스 왕국이 역사상 실존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존감의 상징으로 조각가 흐말라제(David Khmaladze)’가 제작했다. 동상은 콜키스 왕국의 공주 메데아가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는 황금 양가죽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이올코스 왕국의 이아손 왕자를 사랑해서, 아버지를 배신하고 그에게 황금 양가죽을 넘겨준다는 것을 형상화한 모양이다. 이쯤해서 의문점 하나. 콜키스 왕국의 입장에서 메데아는 적국 왕자와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조국을 버린 배신자다. 그런데도 아테네 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로 콜키스의 왕위를 계승케 하는 등 전설을 해피엔딩으로 끝내는 이유는 뭘까?

 기둥에 새겨놓은 아르고 원정대의 부조에서 이아손과 황금 양가죽에 대한 얘기를 소환해본다. 황금 양가죽은 콜키스 왕국의 영광과 번영의 상징으로 아이에테스 왕이 아레스 숲속에 숨겨놓고 황소와 용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이아손이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들 두 동물을 물리쳐야 했는데, 이아손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메데아다. 조국과 아버지를 배신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도 역시 이아손에게 배신을 당해,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을 죽이는 악녀가 된다. 그녀는 아테네 왕국을 거쳐 마침내 콜키스 왕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때 아버지 아이에테스는 동생에게 왕위를 잃고 궁에서 쫓겨나 있었다. 메데아는 마법을 부려 아버지를 왕위에 복귀시키고, 나중에는 아테네 왕과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로 콜키스 왕위를 계승케 한다.

 광장에는 옛 풍경을 담은 사진도 게시해놓았다. 광장을 돌아다니다보면 옛 풍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런 사진들을 여럿 볼 수 있다.

 광장의 한쪽에서는 2010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커다란 천문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체코 프라하 시청의 천문시계를 벤치마킹한 것 같은데, 덕분에 천문시계가 매달린 저 건물은 바투미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했단다.

 천문시계는 시간 말고도 태양, , 별자리, 행성의 위치 등 천문 정보까지 함께 알려준다고 했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자오선, 지평선, 일출과 일몰, 달의 나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달의 실제 움직임까지 보여준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천문시계의 안내판을 세워두는 고객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바닷가. 해변에 분수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저녁이면 이곳에서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추는 분수쇼가 펼쳐진다고 한다. 하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볼거리는 아니라고 했다.

 분수광장 초입에 ‘Under-21 Championship’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UEFA 유러피언 U-21 챔피언십은 유럽 축구 연맹(UEFA)이 주관하는 21세 이하 축구 국가대표팀 간의 국가대항전이다. 그러니 조지아와 루마니아의 시합이 곧 열린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닷가로 가다보면 푸치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나비부인(Madame Butterfly) 동상을 만나게 된다.

 이젠 공원(Mircle park)을 둘러볼 차례이다. 한마디로 공원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예쁜 건축물들과 독특한 조형물들, 그리고 나무가 우거진 길게 뻗은 산책로가 있는 멋진 공원이다. 초입에 조성해놓은 울창한 대나무 숲도 잠깐 쉬다가기에 딱 좋았다.

 뭔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은 동서양을 불문하는가 보다. 어른 팔뚝만큼이나 굵은 대나무에 뭔가를 끄적거려놓았다. 낙서가 된 대나무는 의외로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글로 된 낙서는 보이지 않았다.

 공원은 테마별로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져 있는데, 어린이들을 위한 미니 동물원이 있는가 하면, 조각공원과 여러 형태의 분수도 눈에 띈다.

 조류 동물원, 날아갈 우려가 있는 새들은 커다란 새장 안에서 기르고 있었다.

 유료로 여겨지지만 탁구대와 당구대도 설치해놓고 있었다.

 조지아인들이 사랑하는 스포츠답게 체스도 야외로 나왔다. 참고로 조지아 국적의 여성 체스선수 노나 가프린다시빌리 20세에 여성 챔피언에 오른 후 16년간(1962-1978)이나 자리를 지켰고, 세계 최초로 그랜드 마스터 칭호를 받기도 했다.

 바투미는 요런 이층 버스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그리고 미리 예약해둔 식당 근처에서 내려 현지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우리도 코카서스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즐겼다. 메뉴는 아자리안 하차푸리(Ajarian Khachapuri)’. 바투미가 속한 아자리야(Ajaria)지역 특유의 빵으로, 보트 모양의 빵 안에 치즈와 버터를 넣어 녹인 다음 계란 노른자를 얹었다. 이스트를 사용해 부풀어 오른 빵을 뜯어 치즈와 달걀을 찍어 먹으면 된다.

 

서해랑길 64-4코스(운산교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

 

여 행 일 : ‘25. 2. 8( )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및 당진시 용연동·대덕동·정미면·면천면 일원

여행코스 : 운산교수당2대운산교신성대학교용천교대덕공원내포문화숲길 아미산센터(거리/시간 : 18.7km, 실제는 대운산교부터 14.85km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창리항에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연결되는 64코스의 지선( 6) 중 네 번째 구간을 걷는다.

 

 들머리는 운산교(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장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내려와 운암로(70번 지방도)를 타고 운산방면으로 1.5km쯤 들어오면 운산교에 이른다. 서해랑길(당진 64-4코스) 안내도는 다리 초입에 설치되어 있다.

 운산면소재지(용장리)에서 역천을 따라 내려가다 용천교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아미산 초입까지 가는 20.1km짜리 여정. 험하지는 않지만 산길을 7km나 타는데다,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도 없어 추천할만한 코스는 아니다. 난이도도 별이 4(전체 5), 어려운 코스로 분류된다.

 두루누비(한국관광공사의 정보 플랫폼) 64-4코스의 관광 포인트로 서산 유기방가옥을 추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탐방로에서 2km 가까이나 떨어져 있어 쉽게 들러볼 수는 없다. 그래서 초반의 4km 정도를 생략하는 대신,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여미리에 있는 유기방가옥을 다녀오기로 했다. 마을에 도착하니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거대한 느티나무(수령 250년의 보호수)가 반긴다.

 여미리는 달의 넉넉함을 나눌 수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하긴 늦봄인 사월 여미리에서 바라보는 달빛이 가장 아름답다 하여, 서산8경 중 5경인 여월미야(餘月美也)’에 꼽혔을 정도이니 어련하겠는가.

 마을 초입의 유상묵 가옥(충남 민속문화재 제22)’부터 먼저 둘러본다. 구한말인 1925년 종5품 벼슬을 지낸 유상묵이 운현궁(雲峴宮)을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 야산을 배경으로 경사면에 기단을 쌓고 U자형으로 토담을 두른 후 안채와 사랑채를 들어앉혔다. 모티브로 삼았다는 운현궁과 어떻게 닮았는지가 궁금했지만, 문이 닫혀있는 데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외관만 살펴보고 발길을 돌렸다.

 사랑채 대문에는 나전헌(螺田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유상묵의 손자인 유정로의 호라나? 안에는 일중 김충현(1921-2006)의 공산무인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를 비롯해 나전심경(螺田心畊), 향감여미(鄕感餘美) 등의 편액이 걸려있다고 한다.

 자형의 사랑채와 자형의 안채가 자형의 행랑채와 담장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출입문도 구별되어 각각 안대문과 사랑대문으로 출입할 수 있으며, 행랑채 익랑에 있는 중문으로 사랑마당과 안마당으로 통하게 되어있다.(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해왔다)

 유상묵 가옥에서 80m쯤 떨어진 곳에는 320년이나 묵었다는 거대한 소나무가 있다. ‘서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나이만큼이나 풍성한 품을 미륵불에 내어준다.

 소나무 그늘에는 고려(초기) 때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충남 유형문화재 제132)‘이 있었다. 높이가 307cm나 된다는 거대한 미륵불은 살찐 방형(方形)으로 근엄하다. 머리 위에는 화불(化佛)이 새겨진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용장천(龍獐川)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인근 주민들이 수습·보수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미륵불의 왼쪽 옆으로 난 샛길로 70-80m쯤 들어가면 선정묘(宣靖廟)‘가 나온다. 조선 정종의 4남 선성군(宣城君)과 배위 3명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왼쪽이 사당, 오른쪽은 재실인 선미재(宣美齋)‘이다. 두 건물 모두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홍살문과 외삼문을 차례로 지나면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이 맞는다. 경기도 파주에 있던 것을 후손이 끊기면서 다른 후손들이 살아가던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참고로 전주이씨(全州李氏) 집성촌인 여미리는 경연참찬관을 지낸 이창주(李昌冑, 1567~1648)가 입향 시조이다.

 초입으로 되돌아오자 이번에는 달빛미술관이 맞는다. ‘우전 마진식이란 분의 개인 미술관으로, ·여름·가을·겨울을 느껴볼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가끔은 여미달빛음악회 같은 이벤트도 열린단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작품을 구경하지는 못했다.

 건물 밖도 전시장으로 꾸몄다. 대신 그림이 아닌 조각품들로 채워 넣었다. 그런데 서산과 말은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2주 전, ’해미 국제성지순례길을 답사할 때도 저런 말 조형물을 보았었다.

 여미리를 방문한 탐방객들의 느낌을 담은 글과 그림들을 타일로 제작해 벽화를 만들었다. 옆에는 신재 이원중의 여미가 어드메뇨 고향 한번 돌아보세!’란 시비도 세워져 있다.

 달맞이 동산이라고 했다. 정자에 올라 그 유명한 달빛을 구경해보란 모양이다. 참고로 여미리는 저 달맞이동산을 비롯해 석불입상, 성선군사당, 비자나무, 라전고택, 서암동천, 유기방가옥, 느티나무마당, 전라산 등을 ‘9으로 꼽고 있었다.

 마을 끝에는 여미리의 얼굴 마담격인 유기방 가옥(충남 민속문화재 제23)’이 있었다. ‘두루누비 64-4코스의 관광 포인트로 꼽은 고택으로, 양지바른 산자락 남고북저의 지형에 건물을 앉히고 타원형 토담을 둘렀다. 가옥 좌측에는 지붕이 개량된 가랍집(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을 배치했다. 1919년에 지어졌는데, 서산지역의 전통 양반 가옥 배치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고택은 자형 안채와, 동편에 담을 사이에 두고 자형의 사랑채, 그 앞에 자형 사랑 대문채가 자리한다. 안마당 서측에는 동향으로 작은 행랑채가 안마당을 감싸며, 대문은 누각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안채에서 작은 문으로 연결되는 사랑채에서는 한옥 체험도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여미헌(餘美軒)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누각형 대문을 들어서면 부엌과 방, 대청, 건넌방으로 이어지는 ' 자형' 안채가 양반가다운 규모를 드러낸다. 안채 왼쪽에 행랑채,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마당을 가운데 둔 'ㅁ 자형'이다. 덕분에 크기가 상당한 가옥인데도 아늑한 인상이다.(구도가 안 맞아 다른 분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구해왔다)

 고택 곁에 있는 감나무(서산시 보호수)’도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수령이 400년도 넘었다는데 높이가 13m나 된다고 했다.

 유기방 가옥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성인 기준 8천원이라니 제법 비싼 편이다. 하지만 수선화가 피어 있을 때만 받는다니 마음 놓고 들어가 볼 일이다. 대신 살림집을 겸한다니 주인장의 안정을 깨뜨리지는 말자.

 주막이란다. tvN 미스터 선샤인을 비롯해 KBS-2 직장의 신 붉은 단심’, MBC ‘연인’, SBS ‘꽃선비 열애사 등 수많은 드라마가 이 주막이나 고택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가옥 안내도는 수선화로 치장되어 있었다. 맞다. 유기방 가옥에서는 수선화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수선화 꽃밭에 둘러싸인 고택을 중심으로 열리는데, 만개한 수선화를 벗 삼아 마음껏 봄나들이를 즐길 수 있단다.

 유기방 가옥의 오른쪽 언덕에는 수령이 350년이나 된다는 비자나무가 있다. 입향조(이창주)의 증손인 이택(李澤, 1651-1719) 1675년 제주도에서 흙과 함께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세 그루를 심었는데 한 그루만 남아 둘레 246cm에 높이가 20m나 되는 거대한 몸집을 자랑한다. 제주에서 군락을 이루는 비자나무는 전라도의 백양산과 내장산에서 자생하는 게 전부라고 한다. 중부지방 이북은 이처럼 장수하는 고목이 흔치 않다니 충남 기념물(174)로 지정받을 만하다.

 유기방 가옥 앞에는 한 쌍의 해태상이 세워져 있었다. 저곳이 서산 아라메길’ 1구간인 천년미소길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서산아라메길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를 합친, 서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길이다. 1구간은 역사 유적지와 계곡, 산으로 이뤄진 친환경 트레킹 코스로 전라산·용현리 등을 거쳐 해미읍성에 이르는 20.1km 구간이다.

 09 : 50. 실제 출발지인 대운산교’. 첨부된 지도에서 탐방로가 ‘647번 지방도와 만나는 지점이다. ‘여미리를 둘러본 다음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이곳까지 왔다. 덕분에 오늘은 정규코스에서 4.35km(두루누비 표기)를 단축해서 걷는 셈이 됐다.

 내포 문화숲길  원효깨달음길을 걷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내포 문화숲길은 내포(內浦)의 역사·문화·생태를 아우르는 걷기 여행길이다. 서산·당진·홍성·예산 등 내포지역에 위치한 4개 시·군이 공동으로 조성·운영하는 숲길로 26개 읍면동, 121개 마을 총 320km를 지난다. 원효깨달음길, 내포천주교순례길, 백제부흥군길, 내포역사인물길, 내포동학길 등 5개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09 : 50. ‘역천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제방 위로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있다. 잠시 후 둑길(이정표 : 영탑사 9.14km/ 안국사지 4.45km)과 헤어져 들녘으로 들어간다참고로 역천(驛川)은 서산시 가야산 석문봉에서 발원, 북으로 흘러가면서 서산(운산면당진(고대면·정미면)의 퇴적평야를 일군 뒤 서해로 유입되는 29.13Km 길이의 하천이다.

 원효깨달음길 내포불교순례길로 이름을 바꾸었나보다. 원효깨달음길은 우리나라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원효대사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성찰과 깨달음을 얻는 길이다. 103.5,km 10개 코스로 나누었는데, 이곳이 7코스와 8코스의 경계지점인 모양이다.

 09 : 58.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검암천(劍岩川)’을 건넌다. ‘두루누비 대방교의 교각 침하로 위험할 수도 있다며 검암천교로 우회시키는 구간이다. 하지만 안내판은 차량통행만 금지하고 있었다. 참고로 검암천(劍岩川)은 당진시 아미산(峨嵋山)에서 발원 남서로 흐르다가 정미면에서 역천으로 유입되는 길이 8.96km의 하천이다.

 10 : 05. 또 다시 역천을 따라간다. 역천과 대방(大防)’ 들녘을 좌우에 끼고 가는 모양새이다.

 10 : 12. ‘신성대학교로 들어가는 덕마교는 스치듯 지나간다. 때문에 대학교나 학사촌은 곁눈질하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다리 건너에는 1995년에 개교한 신성대학교가 있다. 2007 4년제 학사과정을 인가 받아 전공심화학부를 열었다. 그래선지 전문학교에서 보아오던 물리치료학과와 치위생학과, 사회복지학과 등이 4년제로 편재되어 있었다.

 10 : 13. 역천은 덕마교를 이용해 건넜다. 하지만 이 다리도 중간이 움푹 꺼져 있었다.

 이후부터는 역천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왼쪽에는 모평리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요리조리 꿈틀대는 역천의 물줄기가 빚어놓은 충적평야이다. 이름에 걸맞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모평리(模坪里)’란 지명이 대모산(大模山) 기슭에 들어앉은 촌락이 드넓은 평야(平野)를 뜨락으로 삼았다는 데서 유래했다니 말이다.

 10 : 30. ‘모평중보란다. 모평리 들녘에 물을 대기 위해 막아놓은 수중보(水中洑)라는 얘기일 것이다.

 10 : 37. 운평교. 저 다리를 건너 용연동으로 갈 수도 있지만, 탐방로는 계속해서 둑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10 : 45. ‘용천교로 역천을 건넌다. 정미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저 다리를 기점으로 당진시내인 용연동으로 넘어간다.

 초입의 안내판은 양지말(역말)’의 유래를 전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 당진에는 순성역(順城驛)과 흥세역(興世驛)이 있었는데, 이곳 용연동이 흥세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역말이란다. 참고로 홍세역에는 역리(驛吏) 17명과 노() 2, () 2, 기마 4, 복마 4필이 있었다고 한다. 꼬맹이 역참(驛站)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우리가 흔히 쓰는 한참이나 간다라는 어휘는 이 역참에서 유래되었다는 것도 알아두자.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를 한 참()’이라 했는데, 고려시대는 이 '한 참'의 거리가 100( 40km)에 이르렀다니 오죽이나 힘들었겠는가.

 역천의 상류 쪽 풍경. 모평리 들녘에 물을 대는 용현보가 물길을 막고 있다. 참고로 역천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시흥도역승(時興道驛丞) 산하 7개 속역 중 하나인 흥세역(興世驛)’의 옆을 흐르는 하천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하류 쪽 풍경. 저 물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석문호수를 만난다.

 10 : 49. 다리 건너 삼거리에서 역천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간다. 150m쯤 진행하면 또 다른 삼거리, 탐방로는 이곳에서 역천로를 벗어나 용연로로 들어선다. 옛날 흥세역이 있었다는 곳이기도 한다. 자연부락 이름도 역말(驛村)’로 불린다고 했다.

 이후부터는 용연로를 따라간다. 오른편은 용연천’, 면천면(죽동리) ‘음고개에서 발원 서쪽으로 흘러 용천교 앞에서 역천에 유입되는 2.8km 길이의 하천이다.

 1975년에 문을 열었다는 용연초등학교도 험난한 세파를 배겨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학생 수 부족으로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당진 유일의 공립 단설유치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용연1 마을회관. ‘용연(龍淵)’이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있었다는 큰 연못(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가뭄이 있을 때 남쪽 이배산(利背山)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돼지머리를 굴려서 용연에 떨어지면 비가 온다고 믿었단다.

 11 : 02. 2차선의 널찍한 용연로와 헤어진 다음, 1차선인 용란재길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사진에서 보이는 움푹 파인 능선안부를 넘어간다.

 탐방로는 이제 용란재길을 따라간다. 읍내동과 용연동 간을 잇는 1차선 도로다. 아까 삼거리에서 만났던 이정표(어름수변공원 3.13km/ 용천교 1.30km)를 시작으로 심심찮게 나타나는 내포불교순례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어름수변공원 방향으로 가면 된다.

 양지바른 산자락. 그럴듯하게 지어진 저 건물은 재사(齋舍)일까 아니면 살림집일까?

 11 : 18. 길은 해발 72m(핸드폰 앱)의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용란재라고 하던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고갯마루 부근에서 만난 염수 분사장치가 눈길을 끌기도 했다. 원격제어로 염수를 분사시킬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고개를 넘으면 대덕동이다. 당진 시내에 가까워졌는지 고층아파트가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11 : 24. 아미로(609번 지방도)는 곧장 횡단해버린다. 이어서 자 모양으로 들녘을 가로지른다. ‘엘지시스템 에어컨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개울둑을 따르는데 이정표(어름수변공원 1.26km/ 용천교 3.18km)가 방향을 알려준다.

 11 : 29. 빌라촌 앞에서 양지말길을 만나 어름수변공원을 향해 간다. 왼쪽 산자락에 대덕맨션, 송정빌리지, 송정빌라 등 공동주택 단지가 여럿 들어서 있었다.

 잠시 후 임도가 시작된다. 당진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능선의 숲속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11 : 38. kakaomap은 이 일대를 봉암() 근린공원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어름수변공원, 버들수변공원, 여울수변공원과 연계 조성된 도심 근린공원으로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내포문화숲길 종합안내도. 내포 지역 지자체(서산·당진·홍성·예산)들이 불교 성지와 천주교 성지, 동학, 역사인물, 백제 부흥운동 등 수많은 흔적들을 옛길과 마을길, 숲길, 들길, 하천길로 연결한 길이 320km의 장거리 도보 트레일이다.

 50m쯤 더 걸으면 삼거리. 이정표(어름수변공원 0.46km/ 용천교 3.97km/ 아미산정상 6.87km)가 이제껏 함께 걸어오던 어름수변공원과 헤어지란다. 그리고는 아미산을 향해 걸을 것을 지시한다.

 탐방로는 근린공원답게 잘 닦여 있었다. 산책 나온 시민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 도심에서 가까운 탓인지 능선에 농지나 농가가 들어서 있기도 했다.

 11 : 49. 10분 남짓 더 걸었을까 이제 그만 임도를 벗어나란다. 임도가 넷으로 나뉘는 지점인데, 산길 하나를 더 내놓은 것이다.

 이정표(아미산 정상 6.4km/ 어름수변공원 0.9km)와 함께 세워놓은 안내판이 산길이 시작됨을 알려준다.

 도심 근교의 산답게 길은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은 널찍하게 잘 닦여있는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었다. 시민들이 산책삼아 나서기에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이즈음 산비탈 반대편으로 풍요로운 당진의 들녘이 먼발치로 건너다보이기도 한다.

 12 : 00. 길이 나뉘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고, 곳곳에 놓아둔 벤치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12 : 05. 잠시지만 임도에 내려서기도 한다.

 12 : 08. 느닷없이 나타난 계단. 이정표(아미산정상 5.27km/ 어름수변공원 2.07km)가 계단으로 올라가란다.

 계단 위에는 대덕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대덕산(주민들은 그렇게 부르나, 검색되는 지도는 없다)에 조성된 공원으로, 풋살이나 농구를 즐길 수 있는 경기장에다 산책로, 벤치·파고라 같은 휴식시설 등을 가미해 시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대덕공원 표석과 조형물. 조형물은 가족나들이에 딱 좋은 공간이라는 자랑을 담았지 않나 싶다.

 12 : 17. 대덕공원 앞. ‘당진시 도로관리사무소 진입로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으로 올라간다.

 12 : 22. 눈티고개.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눈티고개. 새말에서 대덕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높고 험하여 늦봄까지 눈이 녹지 않고 있다 하여 설티(雪峙눈틔고개·눈티고개 등으로 불린다는 곳이다.

 안내판은 면천군과 당진현을 잇는 가장 큰 대로가 이 고개를 지나갔다고 적었다. 군수나 현감이 다니던 길이라서 당진군에서 가장 큰 서낭당이 고갯마루에 있었단다. 눈이 오면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고 길을 닦는 부역에 동원된 주민들의 고층과 애환이 서려있는 고개이기도 하단다. 그들의 삶의 흔적과 염원이 깃든 돌탑도 있었다고 했으나 눈에 띄지는 않았다. 널찍했다던 고갯길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산길은 여전히 고왔다. 하지만 경사는 아까보다 상당히 가팔라졌다.

 왼쪽 나뭇가지 사이로 당진시가지가 내다보인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것이 대도시의 풍모가 엿보인다. 1990년대 말 당진화력에 출장 왔을 때만해도 소읍에 불과했었는데,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에 딱 어울리는 풍경으로 변해있다.

 12 : 26. 공식적인 지명은 없었지만 공동묘지를 지나기도 한다.

 이때 아미산과 다불산이 조망된다. 두 산을 잇는 능선에는 출렁다리가 놓여있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명색이 산길인지라 가파른 오르막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금방 끝나기 때문에 버겁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64-4코스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서해랑길의 이정표를 만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시설물에 붙여놓은 화살표식 엠블럼’, 그리고 이런 가이드 리본이 전부였다.

 12 : 37. 대신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팔랐다. 그렇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다. 계단을 놓아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도록 했다.

 12 : 45. 운치어린 대나무 숲을 스치듯 지나치자, 서해안고속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가 입을 딱 벌리고 있다.

 굴다리를 빠져나오자 삼거리(이정표 : 아미산정상 3.57km/ 어름수변공원 3.37km)가 맞는다.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잠시지만 서해안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기도 한다.

 12 : 50. 산속으로 들어갈 것을 지시하는 이정표가 지금 우리가 백제부흥군길(8코스)’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홍성 오서산의 장곡산성(주류성), 예산의 봉수산 임존성을 거쳐 당진의 아미산까지 이어지는 '백제부흥군길'은 총 8개 코스로, 백제를 지키려는 민초들의 숱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참고로 660 7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후, 임존성과 주류성을 거점으로 한 백제부흥운동은 무려 3년 넘게 이어졌다.

 다시 시작되는 산길은 아까보다 많이 가팔라졌다. 오르내림도 상당히 커졌다. 당진시에서 가장 높은 아미산(350.9m) 자락에 들어섰다는 증거일 것이다.

 12 : 57.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이정표를 만났다. 가야할 방향(아미산 정상 2.85km)은 같은데, 반대방향인 어름수변공원(4.49km)’을 우리가 왔던 길이 아닌 능선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두루누비의 앱을 따라 왔는데도 말이다.

 13 : 07. 산길에서 나와 임도(이정표 : 아미산정상 2.22km)를 가로지른다. 죽동2리와 성북2리를 잇는 임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음고개)인데 차량통행이 잦은 듯 바퀴자국이 여럿 나있었다.

 길은 건너편 아미산 자락으로 파고든다. 250m쯤 떨어진 산중턱의 민가까지 비포장 길(도로에 가까운)이 나있다.

 13 : 13. 민가에 딸린 정자 옆에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13 : 15. 가파른 산길을 잠시 치고 오르자 임도(이정표 : 아미산정상 1.93km/ 몽산 4.05km/ 어름수변공원 5.41km)가 나타난다. 왼쪽은 64-5코스의 주요 기점 중의 하나인 몽산으로 연결된다. 64-4코스의 종점은 당연히 오른쪽으로 간다.

 13 : 23. ‘야외교실이란다. 체험학습이라도 하는 공간인 모양인데, 나로서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실린 시판에 더 관심이 간다. 30년 가까운 공직생활 동안 늘 책상머리에 놓아두고 지표로 삼았었으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했던가?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立春)이 지났지만 동장군은 가실 줄을 모른다. 매일처럼 한파, 그것도 경보까지 발령하던 기상청이 어제는 이곳 서해안에 폭설이 내릴 거란 예보까지 덧붙였었다. 눈이 적게 내려 트레킹을 하는데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3 : 31. 아미산 쉼터. 아미산에 만들어놓은 여러 쉼터 중 하나로 산행을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 채비하기 딱 좋은 곳이다. ‘백제부흥길의 주요 포스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8코의 종점이자 9코스의 시점이다. 그래선지 이정표(아미산정상 1.2km/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터 0.7km/ 대덕공원 4.0km, 몽산 4.8km) 옆에 내포문화숲길 종합안내도를 세워놓았다.

 아미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코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상까지 1.2km로 다소 멀지만, 대신 가장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아미산 등산로 안내도.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터 방향으로 간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임도를 따라가면 된다.

 13 : 38. 서해랑길(64-5코스) 안내도는 아미산산림욕장 입구(이정표 :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터 0.26km/ 몽산 3.77km/ 아미산쉼터 0.5km)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두루누비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까지 조금 더 걸으란다. 자동차가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64-5코스 답사 때는 이 길을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13 : 41. 아미행복교육원. 당진교육지원청에서 운영하는 교육시설로, 폐교된 면천초등학교 죽동분교를 리모델링해 당진외국어교육센터로 활용하고 있단다. 원어민 교사가 이 지역 학생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외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나?

 그러나 빗돌은 우리네 것을 고집하고 있었다. 시인이자 서예가인 늘빛 심응섭 교수의 효행을 새겨놓았다. 한글문자조형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분이다.

 13 : 46. ‘내포문화숲길 아미산방문자센터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14.85km 4시간에 걸었다. 7km나 되는 산길을 오르내린데다, 눈까지 쌓여있어 속도가 떨어졌던 모양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줬다. 오늘만이 아니다. 내 생의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켜줄 것이다. 어느 날 작은 시험이 진행됐다. 주부에게 아주 친한 사람 20명을 적게 한 다음, 덜 친한 순으로 지워나가도록 했단다. 동료, 이웃, 친구 등이 차례로 지워져나갔다. 부모님을 지울 때는 오래 망설였다. 자녀를 지울 때는 아예 대성통곡을 하더라나? 맞다. 시간이 흐르면 부모님은 세상을 떠날 것이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만들어 부모 곁을 떠나간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함께 할 사람은 배우자뿐인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아내와 함께 한 하루였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DMZ 평화의길 5코스(고양종합운동장-성동사거리)

 

여행일 : ‘25. 2. 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일산서구) 대화동·가좌동 및 파주시 동패동·송촌동·탄현면 일원

여행코스 : 고양종합운동장가좌근린공원동패지하차도심학산둘레길파주출판단지공릉천살래길통일동산성동사거리(거리/시간 : 21km, 실제는 동패지하차도에서 출발 16.7km 5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고양종합운동장(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자유로(국도 77호선) 이산포 JC에서 고양대로로 바꿔 타고 3km쯤 들어오면 고양종합운동장이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보조경기장 뒤쪽에 위치한 휴게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고양종합운동장(휴게공원)을 출발 자유로 언저리를 따라 파주 통일동산까지 북진하는 21km의 여정이다. 도심에서 출발해 숲길과 시골길, 공원 등 다양한 길을 걸어볼 수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심학산, 출판단지, 통일동산 등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나 가슴에 담아둘만한 얘깃거리는 없다. 하지만 짬을 조금만 내면 종점 근처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올라 평화통일의 의지들 되새겨 볼 수 있다.

 08 : 20. 실제 출발지인 동패지하차도(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동).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코스를 단축하기로 했다. 아니 이름(DMZ 평화의길)에 어울리지 않는 시내구간을 줄였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08 : 23. 동패지하차도 상단(이정표 : 성동사거리 15.8km). 고양시와 파주시의 경계인데, 평화누리길(6코스) 및 경기둘레길(5코스) 시작 지점임을 알리는 다양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평화의길(5코스)’도 뭔가를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점인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6km로 적고 있다. 하지만 두루누비에서 제공한 앱에는 ‘4.95km’로 뜬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안내도는 평화누리길(6코스)과 경기둘레길(5코스)만 표기하고 있었다. 더부살이하고 있는 평화의길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서글픔이라고나 할까?

 08 : 27. ‘산남로를 따라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100m쯤 걸었을까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란다.

 08 : 29. 동서대로(358번 지방도) 하부 굴다리. 평화누리길은 6코스의 시점을 이곳으로 삼는 듯 눈에 익은 아치형 대문이 세워져 있었다. 하나 더. 이곳에는 화장실도 설치되어 있다. 다음 화장실은 출판도시를 지나고서야 만날 수 있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꼭 들렀다 가도록 하자.

 길은 심학산의 정상을 향해 가파른 오름짓을 시작한다. 시작부터 겁을 준다고나 할까?

 08 : 33.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잠시 후 심학산 둘레길을 만나게 되고,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평화누리길 6코스는 심학산 둘레길(출판도시길 순환코스)’의 남쪽 코스를 따라간다. 하지만 안내판은 북쪽 코스도 타볼 것을 권하고 있었다. 정상에 서면 한강의 유장한 물줄기는 물론이고 날씨라도 좋을라치면 북한의 송악산까지 코앞으로 다가온단다.

 심학산은 한강을 향해 솟아오른 해발 194m의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곳곳에 바위가 포진하고 있는데다 경사까지 급해 산을 오르려면 상당한 체력이 요구된다. 그래서일까? 탐방로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둘레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08 : 48.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이정표 등의 시설물은 물론이고, 탐방객들을 위한 쉼터도 여럿 만들어놓았다. 하긴 심학산 둘레길 축제까지 열린다니 어련하겠는가. 주민들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서라지만 심학산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작년에는 1026일에 열렸다나?

 08 : 55. 산머루가든 갈림길(이정표 : 낙조전망대 1,699m/ 산머루가든 660m/ 배수지 1,387m). 심심찮게 길이 나뉘지만 그때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을 찾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09 : 08. 약천사 갈림길(이정표 : 배밭정자 1,592m/ 약천사 260m/ 전원마을 516m)도 그중 하나다. ‘약천사(藥泉寺)’ 1932 (고려시대의 절터에) 법성사로 중창되어 1995년 약천사로 개명한 앳된 사찰이지만 13m 크기의 남북통일약사여래대불로 유명세를 탔다. JTBC 주말드라마 나의해방일지의 촬영지이자, 인기배우였던 고 박용하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길은 큰 오르내림이 없이 이어진다. 산책하기 딱 좋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배낭도 없이 걷고 있는 시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낮아도 산은 산이다. 가끔은 이런 가파른 구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데크 계단이나 밧줄 난간을 설치해 오르내리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

 09 : 24. 낙조전망대. 소나무와 신갈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숲길의 끝, 서쪽으로 시야가 확 열리는 곳에 세워놓은 전망대이다. 한강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낙조라는 이름을 얻었다.

 난간에 서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장중히 흐르는 한강 너머, 김포 한강신도시를 시작으로 하성면 일대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 중심에 봉성산과 전류리포구가 있다. 3코스와 4코스를 답사하면서 눈만 들면 심학산이 차올랐었는데, 이번 5코스는 반대로 김포의 드넓은 들녘과 전류리포구를 눈에 담으며 가는 모양새이다.

 동쪽에서 굽이친 한강의 물줄기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뻗어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밀물일 땐 바닷물이 이곳까지 오기도 한단다. 봉성산, 태산, 문수산 등 앙증맞은 멧부리들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시선을 조금 더 비틀면 저 멀리 북녘에 황해도 개풍군 관산반도가 희끄무레하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리듬감을 더해주어 지루할 틈이 없다. 거기다 널따란 바위들이 등산로 곁에 군데군데 놓여 있어 좋은 쉼터가 된다. 이 구간에서는 추락위험 경고판까지 만날 수 있었다.

 09 : 34. ‘배밭 정자란다. 요 아래 있는 배 과수원에서 이름을 얻어온 모양인데, 사통팔달로 길이 나뉘는 지점답게 정자 말고도 이정표와 벤치, 운동기구 등 다양한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배밭입구(510m)’ 방향으로 내려간다. 완만한 산길을 5분쯤 내려가자 한껏 덩치를 부풀린 한강이 얼굴을 드러낸다. 오두산 아래서 임진강과 합쳐지면서 조강으로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09 : 43. 심학산등산로 입구. 4개의 등산길과 둘레길 코스를 그려 넣은 심학산 종합안내판과 이정표, 평화누리길 6코스(출판도시길)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심학산의 원래 이름은 수막산(水幕山)’이다. 넓은 평야와 구릉지에 한강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산이란 뜻이란다. 홍수 때 산이 깊이 잠겼다거나 바위가 깊숙이 포진해 있다며 심악산(深嶽山)’ 심악산(深岳山)’, 지세가 거북의 등딱지를 닮았다며 구봉산(龜峰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 이름인 심학산(尋鶴山)’은 숙종이 애지중지하던 학() 두 마리 도망갔다가 이곳에서 잡혔다는데서 유래됐단다. 하지만 이는 1913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전설급동화(朝鮮傳說及童話)’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일제의 곡해(曲解) 또는 의도적인 변경으로 보는 이유다. 고로 대동여지도 등 일제 이전의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심악산(深岳山)’으로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09 : 46. 몇 걸음 더 걸어 도착한 마을에는 두어 개의 카페가 들어있었다. 참고로 이곳 책마을에는 인포떼끄’, ‘보물섬’, ‘헤세 같은 입소문을 탄 카페가 여럿 있다. 하나 같이 책과 카페를 합쳐놓은 공간이다. 책을 꼭 구매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에 드는 책 한권 골라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읽다 가면 그만이다. 그러다 좋아하는 작가라도 우연히 만나게 될 지도 누가 알겠는가.

 09 : 52. 다리(이름표가 없는)를 건너 출판단지로 들어간다. 정식명칭은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기획부터 인쇄까지 출판의 전 과정을 해결 할 수 있는 국가산업단지이자 1만여 명의 종사자들이 250여 개 출판관련업체에서 일하는 책 마을이다. 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전 과정이 '원스톱'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비용이 절감되고 속도도 빨라졌다. 덕분에 시내 곳곳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구할 수 있다.

 다리는 출판단지 유수지를 가로지른다. 유수지(遊水池)란 가뭄이나 홍수 때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 마련한 천연 또는 인공의 저수지를 말한다. 출판단지를 가로지르는 하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보를 막아 인공의 저수지를 만들어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09 : 54. 이채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문발로를 따라간다. 파주출판도시가 품은 가장 큰 도로인 문발로를 중심으로 위 아래로 뻗은 길들을 따라 출판사와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크고 작은 책방(완전 매력적인 가격으로 할인 판매한다), 그리고 북카페(역시 할인판매)와 아트샵, 박물관 등이 자리한다. 길가에 늘어선 건축물들도 하나의 볼거리이다. '좋은 공간에서 좋은 시각, 좋은 글, 좋은 디자인이 나오고 이게 곧 바른 책을 펴내는 밑거름이 된다는 믿음에서 도시 전체를 멋진 건축물들로 채웠다고 한다. 덕분에 책의 도시이자 건축의 도시로 불린다나?

 광화문의 교보문고 앞 빗돌에 새겨진 문구를 책 마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맞다.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책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전달된 책은 읽혀서 사람을 변화시킨다. 사람을 가장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매개체가 인 것이다. 그래 이곳은 상상하고, 만들고, 공감하고, 나누는 책 마을이었다.

 09 : 59. 심학교사거리에서 도로를 횡단한다. ! ‘책 마을은 한적했다. ‘이라는 선입감 때문일까? 인근에 있는 ‘(헤이리)예술인마을이나 영어마을처럼 북적인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단지를 통과하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10 : 04. ‘직지길을 따라 걷다보면 출판단지 근린공원에 이른다. 출판단지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공원으로, 너른 잔디밭과 야트막한 언덕 등 피크닉 명소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 언덕은 지금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수북하게 쌓인 눈 덕분에 눈썰매장이 만들어진 모양이다.

 유수지 쪽에는 탐조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유수지를 찾는 철새 숫자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2023년에 생태모니터링을 했는데 101종의 조류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중에는 큰기러기·저어새·노랑부리저어새·수리부엉이·흰꼬리수리 같은 법정보호종도 포함되어 있단다.

 계속해서 직지길을 따라간다. 아니 8차선의 자유로 2차선의 직지로 사이에 보행로까지 품은 자전거도로를 따로 내놓았다.

 10 : 17. 유수지가 끝나는 곳에 노주교 사거리가 있었다. 머리 위로는 문발 IC’의 고가 진출입로가 얼키설키 지나간다.

 10 : 19. 문발교사거리(이정표 : 성동사거리까지 8.3km). ‘운정신도시 중 최초로 조성된 교하지구로 연결된다는 표식일 것이다. 교하(交河)는 최창조라는 풍수가가 통일 한국의 수도로 추천했던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인 1612(광해군 4)에는 풍수가 이의신(李懿信)이 왕에게 국도(한양)의 기운이 쇠하였고 교하는 길지(吉地)라면서 교하천도론을 적극 개진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계속해서 자전거도로를 따른다. ‘자유로 재두루미길(활자마을 가장자리를 따라 난 도로)’의 사이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차량 통행이 허락되는 듯 꽤 많은 차량들이 길가에 주차되어 있었다. 안전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라는 얘기다.

 10 : 37. ‘재두루미길과 만나는 지점에는 쉼터(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운동기구까지 배치한 걸로 보아 주민들의 쉼터로도 이용되는 모양이다.

 탐방로는 이제 재두루미길을 따라간다. 1차선의 차도를 중심에 두고 양옆에 점선으로 자전거길을 나누어 놓았다.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걸을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10 : 46. 슬슬 지겹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려고 할 때쯤 길은 직각으로 꺾여 마을(송촌동)로 들어간다. 이정표(성동사거리 7.9km/ 동패지하차도 7.9km)가 정확히 절반을 걸어왔음을 알려준다.

 탐방로는 이제 농로를 따라간다. 강변을 따르던 길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고 보면 되겠다.

 길은 두어 곳에서 나뉘고 있었다. 그것도 마을을 전방에 두고도 들녘으로 에돌아간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때마다 이정표가 방향을 지시해준다.

 10 : 58. 그렇게 도착한 송촌동’. ‘동곡심방(銅谷心房)’이라는 편액을 건 3층 건물이 반긴다. 마당에는 거대한 석불이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의 설명으로 보아 운주사(雲住寺) 와불(臥佛)’을 모티브로 삼았지 않나 싶다.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운주사는 풍수비보설(風水裨補說)이 근저에 깔려있다.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선복(船腹)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며 선복에 해당하는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세웠다고 한다.

 안내판은 화순(전라남도)의 운주사에 있는 와불(臥佛)’에 얽힌 전설을 전하고 있었다. 운주사에 있는 수많은 불상들의 정점은 대웅전 왼편 산등성이에 누워있는 두 기의 와불이다. 각각 비로자나불좌상과 석가여래불입상인 이 와불은 실제로는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부처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민초들이 그렇게도 일어나기를 염원했던 그 부처님이기도 하다.

 11 : 00. 언덕으로 올라서자 2차선 도로인 소라지로가 반긴다. 탐방로는 소라지로를 따라 북진한다.

 11 : 06.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한강이 자신도 보아달란다.

 동쪽에서 굽이친 한강의 물줄기가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한강은 저 너머 북한 땅을 배경에 둔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끼고 동서로 흘러드는 임진강과 교회(交會)한다. 조금 더 나가보자. 한반도 문명의 젖줄이었던 한강과 임진강은 다시 북에서 유유히 내려오는 예성강을 만나 서해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길가에는 멋진 카페들이 여럿 들어서있었다. 그중에서도 우연히, 설렘이라는 디저트 감성 카페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멀리 보이는 한강 뷰와 통 유리창 밖의 초록뷰를 보며 디저트를 즐길 수 있다는데, 잠시 쉬다가자는 내 부탁을 들은 채도 않고 지나쳐버리는 걸 보면 집사람의 눈에는 별로였던 모양이다.

 메뉴판도 예술로 변할 수 있는가 보다. 이곳만의 시그니처 크림커피와 디저트를 마시다보면 여행의 재미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맞은편에는 ‘Eastern ~ One’이라는 인테리어 소품 창고형 매장도 들어서 있었다. 발길을 재촉하는 집사람의 기세에 눌려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짬을 내 들러보신 이석암 작가님이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할 곳이라고 귀띔해주신다.

 11 : 10. ‘송촌동 종점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간다. ‘소라지로327번길이라는데 2차선이었던 도로가 1차선으로 좁아졌다.

 길이 좁아진 탓인지 도로라기보다는 임도에 가깝게 느껴진다. 고갯마루에서는 살림채(한옥펜션)로 연결되는 갈림길(이정표 : 성동사거리 6.7km)을 만나기도 한다.

 11 : 18. 고개를 넘으면 재두루미길과 다시 만난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도로를 만나자마자 방향을 틀어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11 : 25. 탐방로는 마을(松村洞)을 관통한 다음, ‘재두루미길로 다시 올라서고 있었다. 그리고는 철책으로 둘러싸인 공릉천변을 따라 동진한다.

 11 : 28. 공릉천에는 송촌교가 놓여있었다. 아래로 물만 지나갈 수 있는 특징을 가진 다리다. 공릉천을 따라 침투하는 공비를 막기 위해서라는데, 실제로 침투한 적도 있었단다.

 다리 난간은 윤형철조망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그런데 서쪽을 향해서만 있는 게 아닌가. 하류 쪽은 철책으로 꽉 막혀 있는데 반해, 상류 쪽은 아무 제한 없이 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지금 걷고 있는 이 다리 자체가 민통선인 셈이다.

 공릉천의 상류 쪽 풍경. 공릉천(恭陵川)은 양주 칠봉계곡에서 발원 고양시를 거쳐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서 한강에 합류되는 길이 75km의 국가하천이다. 공릉천은 철새의 낙원으로 알려진다. 송촌대교 일원과 하구에 습지가 발달된 탓에 저어새·흰꼬리수리·재두루미 등의 철새가 관찰되는데, ·고라니 같은 야생동물들도 서식한단다.

 하류 쪽에는 송촌대교가 놓여있다. 힘차게 내달리는 공릉천의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백로와 기러기 떼 등 겨울 철새와 원앙, 비오리 등 천연기념물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리 몇 마리가 전부였다.

 11 : 33. 다리를 건넌 다음에는 왼쪽으로 간다. 이때 공공하수처리시설을 지나기도 한다. 시설의 담장을 끼고 쉼터도 들어서 있었다. 하수처리시설이 비릿한 농업비료 같은 냄새를 스멀스멀 풍긴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리를 잡아도 한참이나 잘못 잡았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탄현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왼쪽에 탄현 시가지가 들어섰다. 시골의 소읍인줄로만 알았는데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11 : 48. ‘소리지로를 빠져나와 지하 차도로 들어간다. ‘자유로에서 필승로로 빠져나가는 진출로 아래로 난 일종의 굴다리다.

 굴다리는 벽면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작품명은 '평화의 삼거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하구 습지 지역의 특성을 그림으로 담았단다.

 굴다리를 빠져나온 다음(이정표 : 성동사거리 2.2km), 이번에는 자전거 길과도 헤어진다. 이어서 통일동산관광특구 도로 표지판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11 : 51. 이후부터는 필승로를 따라간다. 50년 전, 육군 졸병이었던 시절 구호가 필승이었던 것 같은데.

 이즈음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11 : 58. 검단사 입구. 탐방로는 검단사 쪽으로 올라간다. 검단사(黔丹寺) 847(신라 문성왕 9)에 혜소(慧昭) 스님이 창건했다. 혜소는 얼굴색이 검어 흑두타(黑頭陀) 또는 검단(黔丹)으로 불리었는데, 사찰 이름은 그의 별명에서 유래됐단다. 노태우 전 대통령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두루누비(DURUNUBI)에서 제공한 GPX 트랙이나 이정표 등 모든 지표는 검단사 방향으로 가란다. 하지만 난 통일공원 이정표가 가리키는 장준하 추모공원으로 진행할 것을 권한다. 특별한 눈요깃거리나 이야깃거리가 없는 산길을 걷느니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운동가인 장준하 선생의 묘역을 찾아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아서이다.

 1975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사 한 장준하 선생은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혀있었다. 그러다 홍수로 묘가 파괴되면서 2012년 이곳으로 이장하게 됐단다. 공원에는 선생의 행적을 알리는 연혁이 적은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다. 공원 뒤편 산길을 50m쯤 오르면 선생의 묘가 나오는데, 그의 책 돌베개의 이름을 따 봉분을 돌베개로 만들었단다. 아래 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했다.

 11 : 59. 우리부부는 도로를 따라갈 경우 통일동산을 만날 수 없다는 선두대장의 엄포에 헷갈려 검단사 방향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지못해 50m쯤 올라갔을까 이정표(성동사거리 3.5km)가 왼쪽 산자락을 가리킨다. 이어서 초입의 침목계단을 오르자 살래길 표지판이 길손을 반긴다. 파주 시민들이 건강 증진 및 휴식공간으로 많이 찾는 둘레길이다.

 살래길은 엉덩이(또는 몸을)를 살래살래 흔들며 걷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장단콩웰빙마루를 출발 검단사·유승앙브와즈아파트·전망대를 거쳐 축구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에 이르는 4.2km 구간으로 걸어서 1시간30분가량 소요된다.

 검단산(黔丹山, 151.8m)의 허리쯤을 에돌아가는 둘레길은 곱디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은 경사까지 거의 없어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았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곳곳에 놓여있는 벤치나 평상에서 쉬어가면 그만이다.

 검단산은 그리 높지도 않은데다 완만하기까지 해서 누구나 산책하듯 가볍게 나서기 좋은 산이다. 거기에 살래길까지 조성되면서 길은 더욱 고와졌다. 주어진 시간에 따라 코스를 정할 수 있는데, 모든 코스를 다 누빈다고 해도 4-5시간이면 충분하단다.

 12 : 15. 길고 긴 계단 위에서 고려통일대전이 날개를 편 듯한 자세로 내려다보고 있다. 고려 왕과 충신들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이 내다보일 것도 같은 산등성이에 걸터앉아 옛 영화를 회상하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미공개 시설이라고 하나, 건설업체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되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무쪼록 잘 마무리되어 또 하나의 귀한 구경거리로 탄생했으면 좋겠다. 사진은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찍었다.

 12 : 22. 조금 더 걸어 살래길이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지점에 이르면, 나지막한 언덕 위에 만들어놓은 전망대가 길손을 맞는다.

 나무 계단을 오르면 앞이 탁 트이면서 오두산 정상의 통일전망대로부터 성동리를 지나 헤이리까지 뻗어간 오두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허리를 자유로가 지나간다. 길을 뚫기 위해 오두산 줄기를 뭉텅 잘라냈다.

 2021년에 개장했다는 장단콩 웰빙마루도 눈에 들어온다. 파주를 대표하는 특산품인 장단콩을 테마로 생산-가공-유통-판매와 체험-관광-문화가 어우러진 6차 산업의 농촌 융복합단지다.

 12 : 25. ‘호텔지구에 가로막힌 탐방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골짜기로 들어간다.

 산길은 한참이나 더 이어지고 있었다. 검단산 산책로는 크게 살래길과 능선길로 나누어진다. ‘평화의길은 이중 살래길만 오롯이 따른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탐방로가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이유이다.

 참호나 교통호 같은 옛 군사시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시설보수를 해온 듯 옛 모습 그대로이다. 군사적 요충지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12 : 48. ‘이제 그만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즈음에야 유아숲체험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테마별 숲속 놀이시설인데, 유아숲지도사가 참여하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단다.

 12 : 57. 골프하우스인 ‘Bunker Hill’을 지나자 이번에는 통일동산이 맞는다. ‘통일동산(統一東山)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 제시된 평화시 건설구상의 일환으로 조성된 안보·관광단지이다. 그 규모가 168만여 평이나 된다니 성동리 일대가 모두 포함된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이곳을 통일동산으로 적은 Kakao map의 표기는 잘못되었지 않나 싶다.

 13 : 14. 공원을 빠져나온 다음, ’평화로를 따라 200m쯤 더 진행하면 성동사거리가 나오면서 트래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글자조형물(통일동산관광특구)이 있는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가면 만날 수 있다. 프로방스마을 진입도로 입구다. 참고로 통일동산 관광특구는 탄현면의 성동리·법흥리 일원에 조성된 접경지역 최초의 관광특구이다. 평화와 역사, 생태와 예술문화 그리고 쇼핑까지 파주의 멋과 맛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이곳 파주는 메주콩으로 흔히 알려진 장단콩의 고향이다. 여기서 장단은 콩의 품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단 지역의 콩이란 뜻이다. 지금은 파주시 장단면이란 지명으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전에는 경기도 장단군(대부분 민통선 안에 있다)이었다. 그래선지 장단콩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눈에 띄는가 하면, 이를 브랜드로 내건 음식점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오늘은 16.70km 5시간에 걸었다. ‘평화의길이라는 이미지를 퇴색시키는 4.5km정도의 시내 구간을 생략했지만 시간은 코스 전체를 다 걷는 것만큼 소요됐다. 산길이 6km도 넘은데다, 눈까지 수북하게 쌓여 속도를 뚝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트래킹을 마치고 날머리 부근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들렀다. ‘평화의길에 근접해 있는 북한 땅 조망을 위한 전망대는 빠짐없이 안내해주겠다는 산악회의 배려 덕분이다. 아무튼 이 전망대는 1992 98일 문을 열었다. 북한 인권을 포함한 북한실상 알리기 차원의 많은 자료를 전시·운영하고 있으며, 북한 관산반도와 북한 주민들의 실제 생활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강화나 김포에서 들렀던 전망대들과는 달리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흔히 통일전망대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전망대'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정말 잘 꾸며진 박물관이자 전망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하 1층은 어린이 체험관’, 1층과 2층은 상설전시실 및 기획전시실, 그리고 3-4층은 전망대로 꾸몄다. 4층에 있는 전망라운지도 한번쯤 들러볼만 하다.

 1-2층의 전시실. 국립통일교육원에서 운영하는 시설답게 통일교육과 북한과 관련한 정보를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탈북민들이 직접 증언한 북한 경제, 사회실태 인식보고서  북한인권보고서 내용 등 다양하고 알찬 통일교육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층의 실내 전망대’. 원형의 유리창 너머로 북녘 땅을 살펴볼 수 있다. 오두산 인근을 축소시킨 미니어처를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유리창에는 그 너머로 보이는 북녘 땅의 지명을 적어 실물과 대비해가며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그곳에 들어선 선전마을에는 인민문화회관과 소학교, 김일성별장, 북한군 초소 등이 있으며 주민은 4,000여 명이 산단다.

 유리창이 시야를 방해한다고 생각되면 야외전망대로 나가볼 일이다. 북한의 관산반도를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실시간 XR확장현실 망원경을 통해서인데, 망원경으로 담은 장면을 QR코드로 스캔해 저장해 갈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디지털 세대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난간에 서면 서울의 젖줄인 한강과 북에서 흘러내리는 임진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하나가 된 물줄기는 조강으로 변해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파주의 옛 이름인 교하(交河)를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지난 달 신형 극초음속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는 북한의 발표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북한 땅이 더 스산하게 보인다. 그 기분에 떠밀려 개풍군(황해북도)을 망원경으로 당겨보기로 했다. ‘쌀로써 사회주의를 지키자는 등의 선전구호가 다르게 변해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구호는 눈에 띄지 않고, 대신 지게를 지고 이동하고 있는 북한 농민들만 눈에 들어왔다.

 밖으로 나오면 고당 조만식 선생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1883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평양 숭실중학교와 일본 명치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가 해외로 떠나버린 이 고난의 땅에서 애국·애족 운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렀다. 해방이 된 후에는 북한 동포를 버리고 자신만 월남할 수 없다며 북한 땅에 남았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자유민주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소련 군정 및 공산당에 맞서 싸우다 끝내 순국하셨다.

 실향민을 위한 공간인 망배단(望拜壇)’도 만들어져 있었다. 명절 때면 실향민과 실향민 후손, 탈북민 등이 차례상을 차려놓고 북녘을 향해 절을 올린단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한 오두산은 해발 118m의 야트막한 산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과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던 곳이다. 통일전망대가 들어서면서 이곳에 있던 오두산성(鰲頭山城,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의 성터도 없어져버린 것으로 알았는데 그 흔적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사진은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 작가님 것을 빌려왔다. KBS드라마 광개토대왕을 보면서 남다르게 받아들였던 관미성(關彌城)’을 그 흔적이라도 볼 수 있게 해준 작가님께 감사드려본다.

 

서산 아라메길 2구간(해미 국제성지순례길)

 

여 행 일 : ‘25. 1. 25()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덕산면·해미면 일원

여행코스 : 대치2리 입구우리옹기박물관한티고개대곡1리 마을회관송덕암산수저수지해미읍성해미국제성지(거리/시간 : 11km, 실제는 해미읍성까지 10.71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아라메길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고유어인 를 합쳐 만든 명칭으로 서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누구나 자유롭게 산책 또는 트래킹 할 수 있도록 서산 관내의 8개 노선을 선정 세상에 내놓았다.

 

 09 : 22. 들머리인 대치리 2 입구(충남 서산시 덕산면 대치리)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에서 내려와 45번 국도(예산방면)를 타고 10km쯤 들어오면 대치리 버스정류장(2구 입구)에 이르게 된다.

 서산 아라메길 2구간인 해미 국제성지순례길은 조선시대 말 천주교 박해 때 천주교인들을 압송했던 해미순교성지-한티고개 구간(11km)이다. 고통 속에서 끌려가면서도 목숨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했던 옛 순교자들의 신앙심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코스로, 해미순교성지가 교황청으로부터 국제성지로 지정된 것을 반영했다.

 내포 문화숲길을 구성하는 천주교순례길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충의사(忠義祠, 윤봉길의사 사적지)와 해미순교성지를 잇는데, 3/1쯤에 위치한 한티고개에서 해미순교성지까지가 서산 아라메길과 중복된다고 보면 되겠다.

 09 : 24. 윤봉길로(45번 국도, 해미방면)를 따라 50m쯤 걷다가 오른쪽 소로로 들어간다. 일 년 중 가중 춥다는 대한(大寒)’ 5일 전에 지났다. 성급한 일부 기상전문가들은 한랭전선의 이동경로를 제시하며 올 추위는 이미 끝났다고도 했다. 그래서일까? 언제 추웠냐는 듯 날씨가 포근해졌다.

 이정표가 내포 천주교순례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1.72km쯤 더 걸어야 해미성지순례길의 시점인 한티고개를 만날 수 있단다. 하나 더. 이 길은 고통을 받으며 끌려가면서도 자신을 지키려했던 옛 순교자들의 신앙정신을 되새겨 보며 걷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참회하고 기도하며 걸어볼 일이다.

 이 구간은 삽교의 용머리마을, 배나드리마을 등지에서 집단으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으로 압송하던 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순교자들이 느꼈을 애틋함과 비장함이 느껴질 것은 당연. ‘순례는 걸어가는 기도다라고 했다. 맞다. 오늘의 내 화두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이다.

 초입에서 만난 또 다른 이정표는 화장실 위치까지 담았다.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이지 싶다. 참회하고 기도하며 걷다보면 속도는 자꾸 떨어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생리작용을 해소해야 할 곳을 찾게 될 테니까 말이다.

 09 : 25. 마을길(대치1)을 따라 한티고개로 간다. 한티고개로 올라가는 길은 과거 내포지역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이 해미로 압송되어 가던 고통의길 이었다. 그동안 천주교는 믿음이 허락되었고, 확장된 교세를 자랑이라도 하듯 전국 어디서나 성당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나지막한 산들에 둘러싸인 아담한 마을길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가야산(伽倻山, 678m)’이 성큼 다가온다. 해인사가 있는 합천의 가야산만큼은 아니어도 충청권에서는 아름답기로 손꼽이는 명산이다. 특히 산자락에 품고 있는 용현리 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은 내가 본 석불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09 : 32  09 : 35. ‘우리 옹기박물관이란다. 옹기는 숨을 쉬는 그릇이다. 옹기토에 있는 모래 알갱이가 굽는 과정에서 미세한 숨구멍을 만들어 내는데, 이 숨구멍들이 옹기의 안·밖으로 공기를 통하게 함으로써 발효 작용을 돕는다. 아무튼 문이 열려있기에 들어가 봤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눈요기만 하고 나왔다.

 옹기만 모아놓았을 뿐 직접 만들지는 않는 모양이다. 옹기 제작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는 흙과 불(땔나무), 가마 중 어느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옹기는 흙···바람이라는 사총사가 가마 속에서 만나면서 만들어진다. 인체에 무해, 무독한 그릇으로 자연으로의 환원성이 좋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역사 민속자료관도 꾸며져 있었다. 옛 사람들의 생활용품을 전시하는 모양인데 이 역시 구경할 수는 없었다.

 이정표에 적혀있던 화장실인 모양이다. ! 오는 도중에도 간이화장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문이 잠겨 있었지만.

 09 : 42. ‘순례길답게 곳곳에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key map을 단 이정표는 한티고개까지 0.85km쯤 남았음을 알려준다. 반대방향은 삽교성당(17.55km), 여사울성지(31.7km)로 연결된단다.

 CCTV가 지켜보고 있으니 농작물에 손대지 마란다. 길을 걷는 여행자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둘레길은 지역 주민의 생활 터전을 지나기 때문에 농작물을 따거나 논밭에 함부로 들어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주인 있는 임산물 채취도 마찬가지다. 지역 주민에게 농작물이나 임산물은 소중한 재산이자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09 : 45. 마지막 민가. 깔끔하게 포장되었던 길은 이곳에서 비포장으로 바뀐다.

 이후부터는 산길을 올라간다. 길은 고운 편이다. 폭신폭신한 흙길에다 경사까지 완만해서 순례삼아 나들이 나온 노약자들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09 : 52. 첫 번째 조형물. 이곳은 천주교 순례길’, 그러니 저 조형물은 십자가의 길 제1처인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훑어봐도 그런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이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며 묵상 및 기도를 드려보겠다는 내 결심이 흐트러져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2(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를 연상시키는 조형물은 세 번째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여정이다.

 네 번째 조형물도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섯 번째 조형물. 5처였다면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졌어야 한다. 다행이라고나 할까? 여섯 번째는 6(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를 연상할 수 있었다.

 기력이 떨어지신 예수님이 넘어지는 장면은 3처와 7, 그리고 9처에 해당된다. 이곳도 일곱 번째와 아홉 번째는 이를 연상시키는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10(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 11(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12(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는 순서는 물론이고 전하고자 하는 이미지까지 제대로 되어 있었다.

 13(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는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과 멕시코시티의 소우미술관에서 만났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를 쏙 빼다 닮았다. 피에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맞은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뜻하며, 기독교 예술을 대표하는 주제 중 하나다. 주로 성모 마리아가 부활하기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예술 작품으로 나타난다.

 14(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도 해당 장면을 연상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전반부의 몇 개만 문제가 있었던 셈이다. 그 때문에 나는 제대로 된 십자가의 길 대신 간단한 기도로 끝내는 우를 범해버렸고.

 10 : 08. 한티고개에 올라선다. ‘한티는 큰 고개라는 의미다. 해미면(서산시)과 덕산면(예산군)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해발 297m), 옛날에는 이곳에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널따란 터로만 남아있던 것을 성지순례길을 조성하면서 그에 걸맞는 조형물과 이를 설명하는 안내판들로 채워 넣었다. 정자에 파고라, 화장실을 배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기념 조형물. 포승줄에 묶인 채 압송되고 있는 천주교인들을 형상화 했다.

 천주교 박해 때, 이곳에는 우물과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신자들을 잡아들이고 호송하던 포졸이나 육신의 고통을 견뎌야 했던 신자들 모두에게 이곳은 고통과 희망이 함께 하는 공간이었다. 포졸들에게는 해미읍성이 멀지 않았고, 신자들에게는 천국이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안내판은 이곳 한티고개가 천주교순례길이 지나가는 한 지점이자, 아라메순례길의 출발지임을 알려준다.

 이곳은 해미성지순례길. 참된 순례자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마음가짐으로 먼저 고해성사부터 보란다. 일상에서의 잘못을 반성하는 참회와 회개의 태도를 갖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나는 빵점짜리 순례자다. 고해성사를 드리지 못한 채 길을 나섰으니 말이다.

 고갯마루에서의 조망. 가야산과 덕숭산 사이로 덕산시가지가 고개를 내민다. 그 뒤로는 내포지역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가야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다. 채석장으로 보이는 저 암장이 그 증거다. 하나 더. 이곳은 금북정맥(錦北正脈)의 한 지점이기도 하다. 한남금북정맥의 칠장산(492m, 경기 안성)에서 분기, 칠현산·오서산·가야산·팔봉산·백화산 등을 일구면서 남·서진하다 태안반도의 안흥진(安興鎭)에서 그 숨을 다하는 길이 295km의 산줄기다.

 10 : 14. 하산 길, 아니 해미 성지순례길은 올라왔던 반대(서쪽) 방향으로 열린다. 그 초입에 십자가의 길 1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받침돌에 주문(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을 적고, 그 위에다 이미지를 판화 형식으로 새긴 반구(半球)를 올려놓았다.

 아까 올라올 때 놓쳤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 빌라도의 관저라고 추측되는 곳부터 갈바리아에 이르기까지 각 장면의 사건이 일어난 곳들을 따라 걸으며 묵상했던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십자가의 길(Stations of the Cross)’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무덤에 묻히기까지 그리스도 수난의 마지막 사건들을 묘사한 14장면의 연속 그림 또는 조각을 말한다. 이 연속 장면들은 대체로 성당이나 경당 안벽에 배치해두지만 공동묘지, 병원 복도, 종교단체 건물, 산기슭 같은 곳에 두기도 한다.

 시작부터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길이 나뉘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서산아라메길(2코스인 해미성지순례길)’로 옷을 갈아입은 이정표는 이제 해미읍성과 해미순교성지를 가리킨다.

 이정표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곳곳에서 가이드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오늘 아침. 새벽 3시에 눈을 뜬 나는 컴퓨터로 달려가 예루살렘의 성지순례 동영상을 찾아봤고, 쏟아지는 눈물을 한참이나 멈출 수 없었다. 피정을 위해 매년 수도원을 찾던 젊은 시절, 통곡 기도를 드리던 때 이후로는 첫 경험이었다. 그런 감동의 여운으로 2처를 맞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묵상하면서 기도를 드린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묵상하는 신심행위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부활절 전 사순 시기의 금요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행한다. 올해는 420일이 부활절이니 조금 앞당겨서 한다고 여기면 되지 않겠는가.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이어서 5처의 주문인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짐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차례로 드린다.

 10 : 41. 14(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니다)를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길은 끝난다. 한티고개에서 이곳까지는 500m, 기도를 드리면서 내려오다 보니 27분이나 걸렸다.

 10 : 45. 산속에서 만난 민가. 가축을 키우는지 악취가 진동을 한다. 천국에서 노닐다가 세속으로 되돌아왔다는 증거라고나 할까?

 10 : 53. 해미폐차장. 널따란 공터에는 분해된 차량들로 가득했다. 차량 부속을 추출해 재활용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폐차된 차량을 통째로 압축시켜 고철로 만들던 영화 장면이 전부인 그동안의 앎이 얕아도 너무 얕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10 : 55. ‘대왕석재를 스치듯 지나 2차선 도로인 큰골로로 내려섰다. 이정표(해미읍성 6.9km/ 한티고개 정상 1.3km)가 도로를 가로지르라며 건너편을 가리킨다.

 이후부터는 마을길(한티2)을 따라간다. 길 양옆으로 듬성듬성 민가가 들어서 있다. 예스런 풍치를 물씬 풍기는 돌담들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럽, 그것도 동유럽에서나 볼 법한 고성(古城)을 닮은 저 건물의 정체는 대체 뭘까?

 11 : 05. 대곡1리 경로당. 대곡마을 구간은 순교자들이 두 번이나 지나갔다고 한다. 포승줄에 묶인 채 해미읍성으로 끌려갔고, 유골이 되어 다시 한 번 머물다 갔단다. 1935 41, 여숫골에서 순교자들의 유해 중 일부가 수습됐고, 그날 이 마을에 있던 대곡리 공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는 것이다.

 이를 기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을 앞에 순례자들을 위한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파고라에 벤치는 기본, 음수대와 화장실까지 갖췄다. 덕분에 걷기 행자들에게 최고의 쉼터가 되어준다.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어 대곡리 공소를 찾아보려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안내판만으로는 위치를 추적할 수 없었고, 길을 물어볼만한 주민들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11 : 10. 길은 이제 대곡1을 따라간다. 대도시 근교의 부잣집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이 즐비한 구간이다. 굵고 잘 생긴 소나무들이 즐비한 주변 산자락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11 : 20. 송덕암교차로. 이정표(해미읍성 5.5km/ 한티고개 정상 2.7km)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티로(45번 국도)’를 건너란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큰골로를 따라갔다. 한티로의 오른쪽에 붙어서 가는 2차선 도로인데, 그 끝에 송덕암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색이 전통사찰(48)인데 뭔가 볼거리가 있지 않겠는가.

 11 : 25. 송덕암(松德庵)은 들어앉은 터를 가야산(伽倻山)이 아닌 상왕산(象王山, 가야산의 옛 이름)으로 적었다. 문지기인 금강역사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찰은 그 자체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세계로부터 독립된 공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금강역사나 사천왕이 그 경계를 지키는데, 송덕암은 금강역사가 그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한국불교태고종 소속인 송덕암은 무척 아담한 절집이었다. 금당인 약사보전(藥師寶殿)과 종각. 두어 채의 요사(佛思滿堂)가 전부다. 아니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산신각도 나온다고는 했다. 절은 1785(정조 9) 승지 임하(任夏)가 말을 타고 가다 미륵여래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지었다고 알려진다. 부처님의 덕을 칭송한다는 의미로 송덕암이라 했단다.

 11 : 32. 송덕암 근처 원터교차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4차선 도로라서인지 오가는 차량들이 무섭도록 빨리 달린다.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건너편에서 순례길과 다시 만나 원터교(이정표 : 해미읍성 5.0km)’를 건넌다. 다리 건너는 원룸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인근에 한서대학교(서산캠퍼스)가 들어서면서 한적하던 산골이 요란스런 도시적 풍경으로 바뀌었다.

 11 : 34. 이후부터는 해미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말이 천()이지 개울 수준이다. 덕분에 앙증맞은 철다리나 능수버들의 휘휘 늘어진 가지로 눈요기를 할 수 있었지만.

 11 : 41. 목교로 해미천을 건넌다. 예전에는 그 뒤로 보이는 민가를 지나 해미천을 건넜다고 한다.

 남의 집 마당을 무단으로 지나다니는 게 미안했다는 후기가 많이 눈에 띄었는데, 그게 서산시 관계자의 귀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탐방로는 이제 해미천의 오른쪽 둑길을 탄다.

 오른쪽, 가야산 자락에는 항공관련 학과로 특화된 한서대학교(서산캠퍼스)’가 들어섰다. 그 앞에는 웬만한 소읍 수준의 학사촌도 형성되어 있었다.

 11 : 49. 탐방로는 산수저수지의 호안을 따라 새로 조성해놓은 숲길로 연결된다. 저수지 바로 위 해미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물고기 모양의 조형물을 씌워 저수지와 함께하는 구간임을 은연 중 알려준다.

 내포 문화숲길(천주교순례길 4코스)과 서산 아라메길(해미성지순례길)이 공동으로 쓰는 구간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각각의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소나무숲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이 구간은 성지순례길의 백미로 꼽힌다. 호숫가를 따라 이어지는 1.5km 길이의 숲길 중간 중간에 쉼터와 조형물, 이야기 안내판 등을 설치해 걷고 있는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도록 했다.

 11 : 57  12 : 07. 첫 번째 쉼터. 전망데크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쌍으로 온 순례자들을 위해 흔들의자까지 배치하는 센스도 발휘했다. 덕분에 우리부부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안내판은 천주교 탑압 당시의 압송로가 산수저수지에 잠겨있음을 알려준다. 전해주는 얘기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놓았다. 천주교인들이 묶인 채로 한티고개를 내려오던 장면, 서문 밖에서 자행된 학살 장면 등을 당시 이곳에서 살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전해준다.

 안내판과 대조해가며 호수를 살펴본다. 그리고는 굴비 엮듯 포박당해 끌려가던 순교자들을 떠올려본다. 내포의 각지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해미로 압송돼 가기 위해서는 가야산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삽교천 인근에서 체포된 교인들은 덕산을 거쳐 처형장소인 해미읍성으로 가야했다. 그러니 순교자들에게 있어서 저곳은 순교를 위해 떠나는 생의 마지막 순례길이었던 셈이다.

 길은 호숫가를 따라간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는데, 가끔은 제법 가파르게 변하기도 한다.

 가끔은 물가로 내려서기도 한다. 물속에 나무들이 잠겨 있는 것이 주왕산 근처에 있는 주산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비록 왜소하기는 하지만 여름철에 찾으면 제법 볼만한 풍경을 만날 수도 있겠다.

 12 : 12. 두 번째 쉼터. 파고라에 벤치는 물론이고, 운동기구 몇 점까지 배치했다. 걷기 여행자와 주민들이 함께 쓰는 공간을 만들려고 했던 모양이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천주교인들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설치했다. 해설판도 눈에 띈다. 끌려가는 천주교인들은 주민들이 보기에는 죄인이었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정작 천주교 신자들은 누구보다 당당했단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천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맞다. 어떤 이는 보는 것을 믿고, 다른 어떤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

 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간다. 굵고 휜 것이 전형적인 우리나라 소나무이다.

 12 : 30. 셋째, 넷째에 이은 다섯 번째 전망대는 아예 공중에 걸려있다. 하지만 잡목에 둘러싸여 썩 좋은 조망은 보여주지 못한다.

 12 : 34. 제방에 가까워지자 취수탑이 고개를 내민다. 산수저수지의 제당 형식은 균일형 필댐(fill dam)이며 취수 형식은 취수탑형이란다.

 취수탑은 그 자체를 로 표현했다. ‘오늘도 예쁘구나. 산수라는 문구에서 빼어난 경관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산수저수지는 높이 23m의 제방을 295m 길이로 쌓아 만든 저수지다. 그 둑에 말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서산과 말이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산수저수지(山水貯水池), 가야산에서 발원한 해미천의 상류 지역에 입지한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진 농업 관개용 저수지다. 1953 3 3일 착공하여 1962 12 31일 준공되었다.  344 5,370톤의 물을 모아 723의 농경지에 대준단다.

 둑 아래에는 지성정(枳城亭)’이라는 국궁장이 들어서 있었다.

 12 : 40. 둑을 내려온 탐방로는 서해안고속도로의 교각 아래를 지나간다. 시나브로 길이 나뉘는 구간이나 곳곳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을 찾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12 : 46. 해미천의 오른쪽 둑길을 따라간다.

 건너편 암벽에 뻥 뚫린 굴이 두엇 눈에 들어온다. 그중 하나는 철책으로 출입을 막고 있었다. 경쟁력이 다해 문을 닫은 광산의 갱구이지 싶다.

 12 : 54. 다리 건너 해미 예수재림교회쪽으로 간다. 오늘은 토요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은 오늘이 안식일이다. 설 명절을 앞두어선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신자들의 손에 선물보따리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이번에는 해미천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벚나무로 치장된 멋진 구간이다. 봄이면 저 길에 꽃비가 내린다고 했다. 얼마나 많이 내리는지 수북하게 쌓일 정도란다. 그게 호사가들의 눈에는 흰 눈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봄 눈이라는 애칭으로 둔갑시켜 시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벚나무 꽃길을 따라 들어선 저런 ‘Cafe & Gallery’들이 그 증거다.

▼ 13 : 07. 잠시지만 해미천의 둔치를 따라가기도 한다길은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은 벚나무 아래를 지나간다그러다 무지개다리로 해미천을 건넌다보행자 전용 다리다.

 다리 오른편은 황락천이 해미천으로 흡수되는 두물머리이다. 황락리에서 발원 남서쪽으로 흐르다 읍내리에서 해미천과 합쳐지는 2.7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다리에서 본 해미천’.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양쪽 둔치에 생태탐방로 및 자전거도로를 설치하는 등 주민들을 위한 친수(親水) 및 생활체육 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다.

 13 : 12. 이번에는 해미천의 오른쪽 둑길을 따라간다. 벚나무 그늘 아래로 데크길을 내놓았다. 그러다 해미교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해미읍성으로 간다.

 13 : 18. 해미읍성에 이른다. 10.71km 3시간 50분을 걸어 도착했다. 종점인 해미순교성지까지는 아직도 1.8km쯤 더 가야 한다. 하지만 어제 토사곽란으로 몸살을 앓았던 집사람의 체력으로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더 이상 못 걷겠다며 이쯤에서 산악회버스가 있는 운산면소재지로 가잔다. 하긴 병원에서 응급조치까지 받고 겨우 길을 나섰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참고로 산악회에서 진행한 서해랑길 64-3코스의 종점은 운산면소재지에 있는 운산교이다. 우리부부는 개심사, 보원사지, 용현리 마애삼존불상 등 이 구간에 있는 명소들을 4개월 전에 이미 둘러봤기에 서해랑길 대신 천주교성지순례길을 걸었다.

 나머지 구간의 풍경들은 2주 전 64-2코스 때 찍어두었던 사진을 올려본다. 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해미읍성(사적 제116)은 낙안·고창 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모습을 간직한 3대 읍성에 꼽힌다. 서해안지역은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이를 막기 위해 태종 17(1417)부터 세종 3(1421)까지 석성으로 쌓았다.

 해미읍성은 문화재이다. 하지만 천주교인들에게는 순교성지로서의 위치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읍성 한가운데 호야나무로 불리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박해의 증인처럼 서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했다는 나무이다.

 바로 옆에는 1790년부터 100여 년간 내포 일대의 천주교인을 잡아 가두었던 옥사를 복원해 놓았다. 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이며, 성인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복자 김진후 비오님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수령이 24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 뒤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 관아(官衙)가 있다. 조선 초기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던 곳으로,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해(이를 겸영장이라 함) 지역을 통치했다. 당시 내포지방 13개 군현을 담당하던 해미읍성 겸영장은 군권과 관권을 한 손에 쥐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까닭에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고 해당 지역 교도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단다. 그 숫자가 무려 1,000여명에 달했다나?

 서문(지성루)으로 빠져나가 진둠벙교로 해미천을 건너면 해미순교자국제성지가 맞는다.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는 곳이다. 1800년대의 천주교 박해 때, 기록되지 않은 천주교 신자 1천여 명이 사약·몰매·교수형·참수형·동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됐고 심지어 산 채로 땅에 묻는 생매장과 물에 빠뜨리는 수장형까지 자행됐다. 그렇다고 유명한 성인이 있거나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이름이나 세례명을 남기고 순교한 132명의 천주교 신자가 기록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교황청은 2021년 국제순교성지로 지정했다. 국내에서 첫 번째이며,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다. 세계적으로도 역사적 장소인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산티아고 등 3, 성모 발현지인 멕시코 과달루페와 포르투갈 파티마 등 20, 성인 관련 순례지 6곳 등이 있을 따름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모범으로 인정하고 이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무덤을 형상화 했다는 순교자성지 기념관’. 순교자들의 희생과 역사를 전해주는 곳으로, 순교 당시의 모습을 담은 조각과 판화, 성지에서 발굴된 순교자 유해가 안치돼 있다.

 안으로 들면 이곳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진이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가 신앙의 증거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라는 축복과 함께 게시되어 있다. 2014 816,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화문에서 조선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거행했다.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마르티노), 김진후(비오), 이보현(프란치스코)  3위도 함께 시복됐다. 교황은 이튿날 해미순교성지에 들러 순교자 3위의 기념비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기념관에는 여숫골에서 발견된 유골이 모셔져 있었다. 그밖에도 당시의 유물과 조각·그림·사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천주교의 역사와 발굴과정 등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 하나 더. 동구 밖 숲정이라 부르던 곳은 신자들이 생매장 당한 곳이다. 당시 순교자들은 죽으면서도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외쳤다고 한다. 주민들에게는 그게 여수머리로 들렸던 모양이다. ‘여우에 홀린 머리채로 죽어갔다 '여숫골'이라 불렀단다.

 신자들의 가슴과 머리를 으스러뜨리던 자리개돌’. 신자들을 처형하는 방법은 잔혹했다. 군졸들은 이들이 사용하던 성물을 밟게 하고 돌다리에 눕힌 뒤 커다란 돌로 내리쳐 돌다리를 도마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신자들이 흘린 피가 해미천을 붉게 물들이며 거머리바위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진둠벙. 천주교인들을 빠뜨려 죽게 한 아픔이 깃든 곳으로, 자그마한 연못에 한복을 입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두 여성(한 분은 성모인 듯)의 석상이 물에 반쯤 잠겨 있다. 당시 100년 가까이 사형장으로 이용되던 서문 밖 냇가는 민가와 가까웠다. 그래서 조금 떨어진 벌판에다 수십 명씩 생매장하기 시작했단다. 군졸들은 생매장터로 가기 전 개울과 연결된 둠벙’(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에 오랏줄에 묶인 신자들을 산 채로 수장시키기도 했단다. 훗날 이 둠벙은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죄인둠벙'으로 불리다 말이 줄어 '진둠벙'으로 바뀌었다. 그래선지 순교자들의 유해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맨 뒤에는 해미순교탑이 들어섰다. 무덤을 형상화 한 둥근 봉우리 위에 16m 높이의 흰색 탑이 세워져 있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개의 날개 형상이 십자가를 떠받치는 모양새이다. 그 앞에는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가 있었다. 둥근 모양의 분묘는 아랫부분을 화강암으로 둘렀다. 앞쪽 양옆으로 한 쌍의 문관석이 세워져 있다.

 2014 8 16일 시복된 3위의 복자 상.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 정사박해의 여파로 1800 19일에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 10년간의 옥고 끝에 1814 1020일 해미옥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복된 이분들 말고도 해미에는 132명의 순교자가 더 있다.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무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DMZ 평화의길 4코스(전류리포구-고양종합운동장)

 

여행일 : ‘25. 1. 18()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양천읍·운양동 및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일원

여행코스 : 전류리포구전류정 충절유적봉성리교차로운양삼거리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일산대교고양종합운동장(거리/시간 : 15.2km, 17.34km 4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전류리 포구(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전류리)

김포한강로(올림픽대로 개화 IC에서 연결) 운양·용화사 IC에서 내려온다. ‘금포로(78번 지방도)’를 따라 4km쯤 북진하면 전류리포구에 이른다. ‘평화의길 안내도(인증 QR코드)’는 포구 북쪽 250m 지점에 위치한 평화누리길 쉼터에 설치되어 있다.

 전류리포구에서 출발 한강의 서쪽(김포) 가장자리를 따라 올라오다 일산대교를 건너 고양(일산)으로 넘어가는 15.2km짜리 여정. 철책과 자연을 벗 삼아 걷는 김포에서의 마지막 구간으로,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에서 철새와 텃새를 살피며 자연을 즐기고 나면 어느덧 김포와의 아쉬운 이별을 고하게 된다.

 08 : 25. 길을 나서기 전, ‘전류정 여흥민씨 충절유적부터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하성방면의 금포로(78번 지방도)를 따라 150m쯤 걸어가면, 유적지로 올라가는 길이 행운부동산 맞은편으로 열린다.

 초입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봉성산 꼭대기에 위치한 재두루미전망대까지 다녀올 것을 권한다. 김포 제일의 조망 명소 중 하나로 꼽히기 때문이다.

 봉성산은 해발 129m의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군사시설이 정상을 차지한 금단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김포시의 노력으로 정상을 한강의 상·하류와 김포평야 일대를 비롯해 한남정맥의 마지막인 문수산, 파주의 심학산, 그리고 북한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기존의 군사시설을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홍살문이 세워진 걸로 보아 경의(敬意)를 표할만한 인물을 모시는 곳이란 의미일 것이다. 맞다. 이곳은 국가가 인정하는 여흥민씨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상징하는 유적이다.

 정성지문(旌垶之門). 1636,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참전한 민성(閔垶, 1586-1637)을 비롯한 일가족 12명의 정려를 모신 전각이다. 민성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가 아들 삼 형제와 함께 의병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화성이 무너지자 아들··며느리 등 12가족이 모두 자결했단다. 인조 18(1640), 조정은 민성의 품계를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올리고 12정려 충신 정성지문을 하사했다. 한꺼번에 하사된 정려로는 가장 많은 수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단다.

 전류정(顚流亭)’은 고려 말 민유(閔愉, 출생·생몰 년대 미상)가 신돈의 난을 피해 봉성산 기슭에 지은 정자다. 하지만 정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표충사(表忠祠)라는 제각이 여흥민씨 문중에서 선조의 업적을 기리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민유는 충혜왕 원년(1331)에 병과 1위로 급제하여 밀직사사, 진현관대재학, 지춘추관사 등을 지낸 고려 후기의 인물이다. 신돈의 폭정에 회의를 느끼고 도읍인 개경과 가까우며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머물며 전류정을 짓고 학사 주사옹과 교류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08 : 36. ‘평화누리길 쉼터로 되돌아와, 금포로(78번 지방도)를 따라 남진하면서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다. 철책으로 중무장한 한강변을 따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08 : 39.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전류리 포구를 만났다. 전류리는 한강 내수면 어업의 최전방 포구다. 어부들은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 김포대교부터 전류리 어로한계선(하류 쪽으로 200m 지점에 월선금지 부표가 떠있다)까지 14km 구간에 그물을 친다. 20척 가량의 소형 어선이 선단을 이뤄 웅어·숭어·황복·참게를 잡는데, 여기서 잡히는 참게는 수라상에 올랐다고 한다. 겨울철인 요즘에는 쫀득쫀득해 씹는 맛이 일품인 제철 숭어가 많이 잡힌단다.

 전류(顚流)란 강물과 바닷물이 뒤섞인다는 뜻이다. 밀물 때 소용돌이로 차오르는 강물의 헐떡거림이 장관이고 진풍경이라고 했다. 강바람이지만 서해 개펄냄새도 물씬 풍긴단다. 하지만 포구로 가는 입구가 굳게 닫혀 있는데다, 위압스런 저 감시탑이 무서워 다가가 보지는 못했다.

 길은 봉성산의 산자락을 에돌아간다. 앞에서 거론했던 閔愉가 산에 올라 고려의 사직을 걱정하고 국왕을 사모했다고 해서 국사봉(國思峯)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옛 문헌에는 진류산(鎭流山) 또는 전류산(顚流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강 건너는 심학산이 우뚝하다. 파주시에 있으니 통행이 자유로운 남녘땅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념의 산물인 철조망은 이 모든 것을 훼방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수로에 막힌 전류리 포구는 생각보다 을씨년스럽고 신산했으며, 도로변의 식당은 허름한 작업장 같은 느낌을 물씬 풍겼다.

 어선에 달린 저 깃발은 고기잡이 허가를 받았다는 표식이란다. 그뿐 아니다. 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마다 군부대 초병에게 출항 신고도 해야 한단다. 아무튼 저 물길을 따라 진객 웅어가 거슬러온다고 했다. 그걸 안강망으로 잡는데, 이게 여간 맛있는 게 아니란다.

 08 : 48. ‘해뜨는 한강정원’. 봉성리는 해돋이 명소로 유명한 지역이다. 탁 트인 한강 뷰를 자랑하는 언덕에 작은 공원을 만들고, 크고 작은 수목과 함께 다양한 초화류를 심어 계절의 변화를 다양하게 느껴볼 수 있도록 했다.

 08 : 52. ‘봉성로가 갈려나가는 봉성교차로’. 한강변을 따르는 길은 매력적인 산책로가 분명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어른 키를 훌쩍 넘기는 이중 철책이 한강 조망을 방해하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 저장된 10년쯤 전의 언론보도는 철책(김포대교-전류리포구)을 걷어내겠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쯤은 저 철책 대신 아름다운 공원이 들어앉아 있어야 하지 않나?

 하성면의 강변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이곳 하동천을 경계로 양촌읍에 바톤을 넘겨준다. 이후부터는 양촌읍의 저 강변을 따라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하동천이 한강에 합류되는 지점에는 집중호우 때 빗물을 한강으로 퍼내는 하동배수펌프장이 있다. 참고로 한강 하구에 위치한 김포는 한강 둑보다 지대가 낮은 데다 홍수와 서해의 밀물이 겹치면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펌핑으로 빗물을 한강으로 퍼내야 한다.

 하동천은 기러기·청둥오리 같은 조류와 두더지·너구리·족제비 등의 포유류가 서식한단다. 135종에 달하는 관속식물도 만날 수 있다나? 그런 생태계의 보물창고가 개발로 인해 훼손이 심해졌던 모양이다. 김포시에서 생물의 서식환경 제공과 수질개선을 위해 호소형 습지를 조성했단다. 관찰데크, 망원경, 조류전망대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생태학습장을 겸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계속해서 금포로를 따라간다.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로가 따로 나있다.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는 헤어져서 가는 구간이기도 하다.

 09 : 02. 이 멋꼬? 난쟁이 세상에라도 들어온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꼬맹이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애완동물들을 테마로 한 체험 동물농장인지도 모르겠다.

 09 : 06. ‘봉성제2배수장’. 폭우로 팔당댐이 방류를 시작하면 8시간 뒤 물이 김포에 닿는다. 이때 봉성포천이 빗물을 한강으로 내보내지 못할 경우 하천 유역은 침수 피해를 입게 된다. 거기에 서해의 만조 사리라도 겹치면 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단다. 배수장의 규모가 저렇게 큰 이유일 것이다.

 봉성포천(奉城浦川)은 양촌읍 구래리에서 발원, 북동쪽으로 흐르다 누산리에서 한강으로 합류되는 지방하천이다. 지류인 거물대천·가마지천·서암천·수참천·석모천을 보탠 탓인지 커다란 몸집을 자랑한다. 하긴 배수를 위해 1,800마력짜리 펌프를 10대나 가동시켜야 할 정도라니 어련하겠는가.

 탐방로는 포장길과 데크길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하나 더. 이곳 누산리(양촌읍)’의 한강변에도 포구가 있는 모양이다. 김포시의 홍보용 간판은 누산리의 특산물로 참게와 숭어를 꼽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양촌읍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새까만 점들로 덮여 있었다. 낱알로 배를 채우며 휴식하는 쇠기러기들이다. 맞다. 김포는 쇠기러기들의 천국이라고 했다. 간조 때 뭍이 드러나면 수백 마리가 귀가 아플 정도로 떼 지어 합창을 한단다. 한강하구 양안을 넘나드는 모습이 장관이라나?

 김포의 특산물은 쌀만이 아닌 모양이다. 고구마와 배까지 로컬 푸드로 내걸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김포 들녘의 볼거리는 농경지에서 놀고 있는 철새 떼만이 아니다. 가끔은 이런 갈대밭이 시야를 꽉 메우기고 한다.

 평화의길 4코스 경기옛길과도 함께 간다. 경기옛길은 조선시대 실학자 신경준 선생이 집필한 도로고(道路考)의 육대로(六大路)를 기반으로 조성됐다. 그중 강화길(김포옛길)’, 아니 정확히는 그 세 번째 구간인 운양나룻길을 지금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조선시대 강화도로 향하는 간선도로 중 하나로, 강화길을 걷다보면 당산미와 김포아트빌리지, 김포장릉, 김포한강조류생태공원 등 다양한 명소를 만날 수 있다.

 09 : 27. 운양삼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금포로의 내륙 쪽 가장자리를 떠나 한강변으로 옮긴다고 보면 되겠다.

 탐방로는 화합의 장이다. ‘평화의길 평화누리길로도 모자라 경기둘레길 경기옛길도 함께 쓴다. 저런 러너(runner)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09 : 36. ‘제촌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용화사삼거리’.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용화사(龍華寺)가 잠시 들렀다 가란다. 운양산 자락의 용화사 1405(태종 5)에 창건된 한강하구의 유일한 전통사찰이다.

 일주문인 모양이다. 문득 일본의 절간에서 흔히 만나는 도리이(鳥居 : 일본식 솟대)가 떠오른다. 못된 버릇이리라.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龍華殿). 조선 초, 뱃사공 정도명(鄭道明)이 조공을 싣고 오다가 운양산 아래 한강 하류지역에 배를 정박했는데, 그날 밤 부처가 꿈에 나타나 배 밑에 석불이 있으니 잘 모시라고 하더란다. 아니나 다를까 배 밑에서 미륵불을 찾아냈고, 불도의 깨달음을 얻어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삭발을 하고 불도에 정진했음은 물론이다.

 미륵불은 돌부처치고는 너무 미끈했다. 근래 하얗게 분을 칠한 탓이란다. 아무튼 빛을 발하며 출현했던 부처님은 영험함까지 보증된 모양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기도를 드리고 있는 신도가 여럿 보였다.

 운양추파(雲陽秋波, 김포8경의 하나). 용화사가 자리한 운양동은 가을빛 하늘에 물든 한강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고풍스런 범종각 뒤로 한강하구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있었다.

 09 : 43. ‘용화사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이어간다. 탐방로는 삼거리를 기점으로 삼아 도로(금포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한강 둑길을 따라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으로 간다.

 09 : 46. 재두루미쉼터.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으로 들어가기 전, 사치스러울 정도로 잘 꾸며진 쉼터를 만났다. 파고라에 벤치는 기본, 피크닉 나온 가족들을 위한 식탁용 테이블은 파라솔까지 갖췄다.

 이름처럼 벤치 위로 재두루미가 날아간다. 두루미는 우아하고 고고하며 영리한 새다. 옛 선인들이 불로장생 천년 학이란 의미까지 부여했을 정도다. 지구상에 6천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멸종위기 야생동물이기도 한데, 그게 이 부근에서 머문다는 얘기일 것이다.

 두루미는 가족애가 강하고 공동체 의식에 질서의식까지 갖췄단다. 특히 자기가 태어난 곳과 월동지를 포기하지 않는 특성을 가졌단다. 그래서일까? 부화하기 일보 직전인 두루미의 알도 전시해 놓았다. 그게 집사람의 방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를 되뇌며 알을 깨고 나온다.

 서해랑길은 한강 둑길을 따라간다. 이 구간은 보행자 전용의 산책로가 평화누리 자전거길이 따로 나있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함께 가는 철책 너머로는 서해바다와 만나는 한강하구의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탐방로 오른쪽의 야생조류생태공원에는 유수지(遊水池)가 조성되어 있었다.

 경계용 수목 울타리에 매달린 열매. 조경수로 인기가 높은 낙상홍(落霜紅)’ 열매가 아닐까 싶다.

 09 : 57.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이 발길을 붙잡는다. 꽃은 지고 나뭇잎은 떨어졌지만 겨울만의 또 다른 매력으로 화사한 곳이다. 655,310나 되는 엄청난 면적에 한강을 수원으로 한 생태습지원과 야생 조류의 취·서식지로 조성된 낱알들녘을 비롯해, 참나무숲, 송송숲, 특산수목 탐방숲, 생활환경 숲 등 풍성한 생태자원을 가지고 있다.

 김포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은 한강신도시 개발에 따른 생태 보전과 철새들의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야생조류 취·서식 공간을 보전하고, 생태 체험·학습의 장소를 마련해 시민과 생태가 공존하도록 꾸며놓았다.

 첫 만남은 향기의 뜰(푸른 봄의 뜰)’이다. 마가목·산수국·옥잠화·금낭화·꽃무릇·벌개미취 등 이른 봄 푸른 잎으로 개화하는 관목과 초화류를 심어놓았단다.

 공원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빨간 지붕의 풍차가 가녀린 몸매를 한껏 뽐내는가 하면, 두루미는 먼 하늘을 향해 힘껏 날아오른다. 그 사이로 들어가 푸른 하늘을 배경 삼는다면 인생 샷 하나쯤은 너끈하겠다.

 갈대와 억새, 그리고 넝쿨식물들로 뒤엉킨 숲은 버려진 듯 보살펴지고 있었다. 겨울철새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이랄 수도 있는 인간의 통행을 막는 것이다. 이렇듯 관리한 덕분인지 공원은 생태환경이 뛰어난 김포에서도 허파 역할을 톡톡히 한단다. 공원 곳곳이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듯한 자연미로 가득했다.

 철새들의 쉼터인 낱알들녘. 지금은 텅 비어 있지만 여름이면 푸른 벼가 자라고, 가을이면 고개 숙인 벼이삭이 누렇게 물들이는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하나 더. 낱알들녘에서 나오는 벼는 모두 철새들의 먹이로 공급된다고 했다. 이를 주워 먹으려는 철새들을 망원경 없이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나?

 운이 따르지 않았던지 철새는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들녘 한켠에서 전통농업기구를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의 노동력을 이용해 물을 퍼올리는 용두레 수차인데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단다.

 10 : 13. 탐방로는 조망마루를 비켜 지나간다. 참고로 생태공원은 둘레가 약 5km쯤 된다고 했다. 서서히 걷다보면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30분 정도 걸린단다. 하나 더. 공원은 철새들의 쉼터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도 걷는 재미가 쏠쏠한 여행지로 꼽힌다. 강변길, 철새이야기길, 사색의길 등 테마가 있는 다채로운 길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 볼 수 있다.

 조망마루 옆의 숲은 푸른 숲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계수나무, 튤립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는데, 여름철이면 도시락을 들고 온 가족들이 돗자리를 깔고 누워 한가로운 피크닉을 즐긴다는 곳이다.

 조망마루, 이름대로 김포야생조류생태공원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더 넓게는 김포지역과 한강 너머의 일산이나 파주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맨 위층은 조망마루라는 이름에 걸맞게 야외 전망대를 배치했다. 김포의 특성을 맛보기식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김포는 한반도 젖줄인 한강과 북쪽에서 내려온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한강의 거대한 물줄기가 실어 나른 흙들이 퇴적되면서 형성된 드넓은 평야지대이다.

 시선을 옮기자 이번에는 한강 너머의 풍경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일산의 고층건물들이 영락없는 마천루(摩天樓)이다.

 2층은 실내에서 편안히 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의자와 테이블 등을 놓아두었다. 터치스크린 모니터를 통해 공원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제공 받을 수 있다.

 10 : 18. 조망마루를 빠져나와 이번에는 에코센터 쪽으로 간다. 그러자 습지생태원이 잠시 들렀다 가란다. 갈대·억새밭 사이로 난 데크 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연못들을 만난다. 습지 뒤쪽에는 황톳길도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신발을 벗고 황톳길을 걸어보고 싶다. 발을 씻을 수 있는 시설까지 마련돼 있다니 발가락 사이에 황토가 묻을 일도 없겠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빠듯한 걷기 여행자에게는 그런 낭만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생태습지답게 커다란 연못도 들어서 있었다. 연못 뒤로 보이는 정자는 감암정이다. 정자에 오르면 광활한 갈대·억새밭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2024년 녹색도시 우수사례 공모에서 도시숲 분야 우수상(산림청장상)까지 수상한 풍경이다.

 10 : 26. 이정표는 이제 그만 공원을 빠져나가란다. 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기로 했다. 전면에 있는 에코센터에 들러보기 위해서다.

 ! 대한민국에도 피사의 사탑이 있었나보다. 탑처럼 생긴 건물이 기울어도 한참이나 기울어진 채로 위태롭게 서있다. 생태공원과 철책 너머 한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에코센터 전망대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망원경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높은 시야에서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는데, 안타깝게도 시설을 보수한다며 출입을 막고 있었다.

 에코센터 야외쉼터에서의 조망. 한강 너머는 고양시(일산서구) 구산동·법곳동 지역이다. 그 왼쪽에는 심학산이 있다. 이 모든 곳이 통행의 자유가 보장되는 남한 땅이건만, 한강에는 다리조차 놓을 수 없고, 철책에 가로막힌 강은 배로도 건널 수 없다. 가슴 아픈 현실이라 할 수 있겠다.

 10 : 36. 금포로를 따라 한강 감바위 나루터 위쪽에 있는 군부대 초소 앞을 지난다. 6분쯤 후에는 다시 만난 78번 지방도(금포로)를 횡단한다. 그리고는 금포로를 따라 김포시가지 쪽으로 간다.

 10 : 46. ‘김포한강로에서 김포한강신도시 IC로 빠져나오는 접속고가교 아래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이어서 접속고가교의 왼쪽 아래를 따라간다. 이즈음 평화의길 쉼터를 만날 수 있다.

 접속고가교 아래를 지나면 탐방로는 다시 금포로를 만나고, 곧이어 감암교(계양천을 가로지른다)’를 건너 방수문삼거리 쪽으로 간다.

 10 : 59. 신향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감암로를 따라간다. 오른쪽에는 신개념의 하수처리장인 레코파크(Recopark)가 있었다. Recycle+Eco+Friendly+Park의 합성어로 하수를 깨끗한 물로 재생하여 환경을 아름답게 하고 시민과 함께하는 휴식공간이라는 뜻이다. 하수처리장을 지하에 두고 여분 공간을 활용하여 풋살장, 인라인스케이트장 같은 운동시설을 접목했다.

 11 : 02. 레코파크 정문 앞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간다. 이어서 일산대교 진입로의 하부 굴다리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언덕으로 오른다.

 11 : 05. 언덕 위는 민자를 유치해 건설한 일산대교의 톨게이트(TG).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경기지사 시절 일산대교 통행을 무료로 하겠다며 요란법석을 떨었었는데 아마 성사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후부터는 일산대교의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내놓은 보도를 따라간다.

 다리 아래로는 6차선의 김포한강로가 지나간다. 2차선의 금포로는 김포한강로에 기대어 가는 모양새이다.

 다리는 눈터지는 조망을 선사해준다. 다리 어디에서나 한강 하류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거대한 물줄기가 감바위를 휘돌아 봉성산 자락의 전류리 포구로 흘러가는가 하면, 오른쪽에는 파주의 심학산이 놓여있다.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는 감바위를 당겨봤다. 한자로는 감암(甘巖)’. 강 건너 일산의 이산포 송포를 오가던 나루터 감암포가 있었다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감나무 시()’자를 써서 시암으로 고쳤다는데, 원래의 이름인 감바위가 훨씬 더 정감이 가지 않나 싶다.

 검단신도시와 장기신도시가 한강의 강줄기를 따라 길게 들어서있다. 평화의길 3코스는 김포 쪽의 저 강변을 헤집으며 이곳으로 온다.

 김포의 너른 들녘과 한강변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일단대교의 중간쯤에서 고양(일산서구)에 바톤을 넘겨준다. 고양에서의 첫 만남은 드넓게 펼쳐지는 습지다. 요 아래에 위치한 장항습지만큼은 아니어도 대화천을 품은 습지는 크고도 아름다웠다.

 11 : 24. 일산대교 끝자락에서 만나는 이산포 JC’. 교차로도 예술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나 보다. 도로 여러 개가 상하좌우로 얼키설키면서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낸다.

 다리 아래로는 자유로가 지나간다. 가양대교 북단에서 문산읍(파주시) 자유 IC(임진각)까지 연결되는 고속화도로로, 종점인 임진각 경내 '자유의 다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자유통일의 의지를 담았다고나 할까?

 11 : 31. 다리가 끝나는 지점. 문자조형물(GOYANG)이 고양 땅에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고양대로를 따라간다. ‘대화천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가는 구간이기도 하다. 왕복 8차선의 도로가 삭막하다고 느껴진다면, 둔치로 내려가 산책로를 따라가면 된다.

 11 : 34.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이산포교’. 경기둘레길 이정표(고양종합운동장 2.3km/ 일산대교 0.6km)가 다리를 건너라는데, 이정표에 붙여놓은 평화의길 방향표시는 곧장 직진하라는 것이다. 개인 의견이지만 이곳에서는 경기둘레길을 권하고 싶다. ‘대화천의 둔치를 따라가는 경기둘레길이 도로변을 걸어야하는 평화의길보다 안전이나 시간절약 면에서 더 낫기 때문이다. 하나 더. 평화의길 4코스와 경기둘레길 4코스는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어느 길을 따르더라도 종점까지 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

 이를 모른 우리는 평화의길을 따라 직진했다. 대화천의 오른쪽 강둑 위로 나있는 길은 무척 고왔다. 향긋한 소나무향이 코끝을 스쳐 가는가 하면, 수북이 쌓인 솔가리는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촉감을 전해준다.

 왼쪽 발아래로는 대화천이 흐른다. ‘경기둘레길은 저 둔치를 따라간다.

 11 : 38. 분에 넘치는 호사도 잠시. 탐방로는 이내 사포교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다리 앞에서 도로를 횡단한다. 그런데 문제는 횡단보도가 없다는 것이다. 오가는 차량을 피해가며 건너라는 모양이다. 조금 전, ‘경기둘레길을 따르라고 권했던 이유다.

 11 : 40. 잠시 후 만나는 법곳 IC’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곳이다. 4코스와 지선인 4-1코스가 만나는 지점인데, 이정표가 이곳으로 오는 두 방향(전류리포구 및 행주산성)만 표시하고 있을 뿐, 가야할 방향(고양종합체육관)을 빼먹은 것이다. 옆의 안내판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누구 할 것 없이 길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 길눈 밝기로 소문난 선두대장도 이정표만 보고 진행했다가 무려 15km를 더 걷고 나서야 종점(고양종합체육관)에 이를 수 있었단다.

 이후는 고양대로를 따라간다. 국내 최대 규모의 전시면적을 자랑하는 킨텍스(KINTEX)’를 끼고 가는 구간이기도 하다. 3만 평이 넘는 전시공간에서 대형 국제전시회는 물론, 중소형 전시회 및 다양한 문화행사가 일 년 내내 열린다.

 11 : 54. ‘대화마을입구 삼거리에서 대화천으로 내려왔다. 신호대기 시간이 지겹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둘레길의 형편을 잠깐이나마 살펴보고 싶어서다.

 다시 올라선 고양대로’. 몸집 큰 킨텍스(KINTEX)’는 아직도 함께 간다. 이 구간은 가로수삼아 심어놓은 벚나무가 볼만했다. 봄이면 여의도의 윤중로 못지않은 환상적인 벚꽃 터널을 자랑할 수도 있겠다.

 이 구간은 국토안전관리원, 건설기술연구원 등 건설관련 공공기관들이 몰려있었다. 하나 더. 도심에 가까워진 탓인지 산책 나온 시민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국토안전관리원. 둘레길 도반 중 한분인 몽중루 작가님의 자제분이 다니는 직장이기도 하다. 기술사 자격증까지 딴 수재란다.

 12 : 13. 4코스의 종점이라 할 수 있는 고양 종합운동장(Sports complex)에 도착했다. 43,000명 수용 규모의 주경기장과 992명 규모의 보조경기장, 야구장, 체육관 등이 들어서 있다.

 고양 소노 아래나’. 프로농구단인 고양 소노 스카이거너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체육관이다. 스카이거너스(Skygunners) 하늘 높이 향하는 대포라는 뜻을 지녔단다. 그래서일까? 튀어 오르며 볼을 다투는 조형물들이 무척 와일드하게 보인다.

 잠시지만 호수로를 따른다. 종합운동장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12 : 21. ‘대화로를 건너자 평화누리길 쉼터가 있는 작은 공원이 맞는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목교(木橋)가 반긴다. 그렇다고 다리를 건너지는 않는다. 평화누리길 이정표(동패지하차도 5.0km)가 가리키는 대화천의 둑길을 따르면 된다.

 모처럼 만난 흙길이 반갑다. 가운데 야자매트까지 깔아 흙길의 단점인 질퍽거림까지 없애버렸다.

 12 : 32. 날머리인 휴게공원의 고양 인공암벽경기장’. 그렇게 400m쯤 걸었을까 오른쪽으로 희미하게 오솔길이 나있다. 이정표는 없지만 나무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미는 인공암벽경기장으로 들어간다고 여기면 되겠다. 여기서 팁 하나. 길 찾기가 걱정된다면, 우리처럼 평화누리 쉼터공원으로 들어가지 말고 대화로를 따라 400m쯤 들어오면 된다.

 평화의길(5코스)’ 안내도는 인공암벽 경기장 앞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17.34km 4시간 10분에 걸었다.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볼거리가 드물었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서해랑길 64-2코스(부석버스정류장 - 해미읍성)

 

여 행 일 : ‘25. 1. 11()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부석면·인지면·해미면 일원

여행코스 : 부석버스정류장부석사도비산전망대모월저수지도당천해미천해미국제성지해미읍성(거리/시간 : 22.7km, 실제는 19.96km 5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창리항에서 삽교호 함상공원으로 연결되는 64코스의 지선( 6) 중 두 번째 구간을 걷는다.

 

 들머리는 부석 버스정류장(충남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내려와 32번 국도를 타고 서산까지 온다. 석림남부사거리에서 양열로(부석방면 4km), 예천교차로에서 649번 지방도(부석·안면 방면)로 옮겨 8km쯤 내려오다 부석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서해랑길(서산 64-1코스) 안내도는 부석버스정류장 옆에 설치되어 있다.

 부석면소재지인 취평리에서 도비산을 넘은 다음 도당천을 따라 해미읍성까지 가는 22.7km짜리 여정. 길이가 조금 길지만 대신 부석사와 해미순교성지, 해미읍성 등 볼거리로 넘쳐나는 구간이다. 난이도는 별이 4(전체 5), 어려운 코스로 분류된다.

 12 : 42(1228). 계속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64-1코스를 마쳤지만 64-2코스 중 일부를 앞당겨 걸어두기 위해서다. 면사무소 방향으로 30m쯤 떨어진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부석사를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12 : 47. ‘취평2 마을회관. 법정 동리인 취평리(翠坪里)를 구성하는 2개 행정단위 중 하나다. 취평리는 새말·성안·취개·톳굴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어느 부락을 지칭하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서해랑길은 부석사길을 따라간다. 가로수삼아 심어놓은 배롱나무 꽃길로 유명한 구간이다. 배롱나무의 꽃말은 부귀. 그래선지 예로부터 배롱나무는 사찰이나 선비들의 공간에 많이 심어왔다. 이 배롱나무 길도 그런 의미를 담았을지 모르겠다.

 12 : 52. ‘도곡지란다. 간척지에 물을 댄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얘깃거리나 볼거리를 갖고 있지 못한 저수지다.

 저수지 바로 위에서 동사(東寺)’로 가는 길이 나뉘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저 암자를 경유한다. 그렇다고 저 길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부석사를 먼저 들른 다음 오솔길을 이용해 동사로 간다.

 12 : 58. ‘수도사는 먼발치에 두고 스치듯 지나간다. 궁중음식과 사찰음식의 대가로 알려진 수진스님이 주지로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서울 청룡사에서 음식을 담당하던 별좌 시절 궁녀출신의 스님들과 인연이 닿아 궁중음식을 배웠다고 한다. 저지난달에는 ‘2024 수도사 사찰음식 대항연이란 문화행사까지 열었다나?

 하지만 수도사는 절간보다 절간 앞에 있는 잘 생긴 소나무가 더 눈길을 끌고 있었다. 몸이라도 불편하신지 철제 빔(beam)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법주사 앞의 정이품송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수도사를 지나면서 길이 가팔라진다. ‘도비산의 가슴 높이에 있는 부석사까지 올라가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도비산(島飛山, 352m)은 연암산(燕岩山), 팔봉산(八峰山)에 이어 서산의 셋째 봉우리이다. 바다 위를 날아가는() ()’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나?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도비산(桃肥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13 : 06. 한정식 명소라는 도비마루’. ‘부석사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다. 그런데도 사하촌(寺下村)이 따로 들어서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최근에 지어진 듯한 전원주택 몇 채와 음식점 두엇이 전부였다.

 13 : 08. 주차장. ‘도비산 탐방안내도 옆에 예쁘장한 빗돌 하나를 세워놓았다. ‘태종대왕 도비산 강무기념비.

 강무(講武)는 임금이 참여하는 군사훈련이다. 1416년 태종이 3남인 충령대군(세종)과 함께 7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몰이를 했다는 것이다.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이곳에서 적의 동향을 살핀다는 의미였다나? 이 행사는 훗날 해미읍성 축성의 기초가 되었단다. 다음 해인 1417년부터 1421년까지 해미읍성을 축조하고, 덕산에 있던 충청 병마절도사영을 해미읍성으로 옮기게 된다.

 13 : 10.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문일지니,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털어내고 일심으로 부처의 진리를 생각하며 통과해보자.

 ! 일주문 앞에서 길이 나뉘고 있었다. 이정표(부석사 0.6Km/ 해넘이전망대 0.8Km/ 취평리 1.0Km)는 조망의 명소인 해넘이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이 왼쪽으로 갈려나감을 알려준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해넘이는 제켜두고 대신 해맞이 전망대만 들렀다 간다.

 13 : 19  13 : 43. 가파른 오르막길을 10분쯤 올랐을까 천년고찰 부석사(浮石寺)’가 얼굴을 내민다. 부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677(문무왕 17) 의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고려 말의 충신 유금헌(柳琴軒)이 창건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망국의 한을 품은 그가 물러나 이곳에다 별당을 지어 독서삼매로써 소일하였는데, 그가 죽자 승려 적감(赤感)이 별당을 사찰로 변조하고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섬이 마치 뜬 것같이 보인다며 부석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의상의 창건설은 영주에 있는 부석사의 창건설과 너무나 똑 같다.

 절 앞에 이르면 누각처럼 보이는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공중에 걸려있다는 느낌이 드는 이 누각은 운거루(雲居樓)’라는 이름으로 현재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요즘에야 차와 다과를 파는 사찰이 흔해졌지만, 저곳은 오래 전부터 운영되어 온 사찰 다원계의 역사와 같은 곳이다.

 구름이 머무는 누각’. 이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난간(欄干) 가까이에 놓인 탁자에 앉아 차라도 한 잔 마시다보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것 같다. 난간 밖으로 천수만의 풍경이 마치 그림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심검당 앞에 있는 약수로 목을 축인다. 이 약수는 우유약수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목룡장과 심검당이 줄을 잇는 건물의 모양이 흡사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른단다. 그러나 내 눈에는 소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절을 다시 지은 무학대사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豕眼見唯豕)’고 했는데 아무래도 내 수준으로는 그런 현학적(衒學的)인 풍경을 그리기에 무리였던가 보다.

 금당격인 극락전(極樂殿)’.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는데, 금당치고는 규모가 너무 작았다. 하지만 이곳 부석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성지나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가 근대에는 선불교를 중흥시킨 경허, 만공 대선사가 머물면서 수행·정진 했었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삼고, 좌우 협시로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셨다. 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689(숙종 15) 왕자의 탄생을 기념해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는 용봉사라는 절에 있었으나 1905년 이곳으로 옮겨 왔단다.

 요즘은 출가 권유도 MZ세대에 맞춰가는 모양이다. 젊고 잘생긴 스님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힙(hip)하게 달라진 출가 생활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불교는 좋지만 출가는 겁나는 젊은이들을 홀린다고나 할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사진도 눈길을 끈다. 지난 2012 10, 한국인 절도단이 일본 대마도 간논지(觀音寺·관음사)에서 국내로 이 좌상을 들여오다가 발각됐다. 이에 부석사는 ‘1330년경 서주(서산의 고려시대 명칭)에 있는 사찰에 봉안하려고 이 불상을 제작했다는 불상 결연문을 바탕으로 왜구에게 약탈당한 불상인 만큼 원소유자(부석사)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국가에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서주 부석사와 서산 부석사가 동일한 절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간논지가 1973년 일본 민법에 따라 불상 소유권을 취득했다고 판단했다. 불상은 내년 5월에 있을 반환을 앞두고 있는데, 부석사의 입장을 지지해달라는 모양이다.

 극락전 앞의 안양루(安養樓)는 서해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과는 달리 단층짜리 건물에다 후면까지 막혀있어 누각의 역할을 조금도 하지 못한다. 하나 더. 불가에서 안양은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이 살고 있다는 정토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맨 위쪽에는 산신각이 있고, 뒤로 돌면 만공토굴도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곧장 올라가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산신각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로지르면 마애불(2014년 석공예문화재 기능보유자인 김대연 조각가가 조성했다)과 함께 멋진 조망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애불 앞은 조망의 명소다. 서쪽 하늘 저 멀리 천수만을 품은 태안반도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광경도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했다. 하나 더. 저 들녘 어디쯤에는 전설 속의 검은여가 있을 것이다. 부석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부석이 부남대교 부근(부석면 대두리)에 있다니 말이다. 이 돌이 적돌만의 조수간만의 차이에도 항상 떠있는 것같이 보인다고 해서 부석(浮石)’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간척공사 이후 검은여 주변은 육지로 변했고 돌도 땅 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 바위를 지금도 신성하게 여기고 있단다.

 만공선사가 수도했다는 토굴(土窟)은 산신각 뒤 3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나 더. 부석사 투어는 만공토굴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그러니 천왕문으로 되돌아와 근처 오솔길(도비산둘레길)로 들어서서 서해랑길을 이어가야 한다.

 동사(東寺). 산악회는 64-2코스의 잔여 구간을 2주 후에 이어갔다. 하지만 난 9년 전에 이미 도비산을 샅샅이 누벼봤기 때문에 도비산 구간을 아예 생략해버렸다. 대신 옛 추억을 소환해 중요 포인트를 소개해 본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인 동사는 독립된 절이라기보다는 어느 절의 부속 암자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정도로 그 규모가 작다. 그래선지 편액도 동암(東庵)’으로 적고 있다. 동사의 창건 연대나 절의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1619(광해군 11) 한여현(韓汝賢)이 편찬한 호산록(湖山錄)‘에 승려들이 동사의 그윽한 정취를 찾아 왔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이전에 지어진 사찰임은 분명하다.

 도비산은 일출과 일몰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해돋이 해넘이 등 특별한 행사는 열리지 않으나 사람들은 최고의 송구영신(送舊迎新) 여행지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서해랑길은 이중 해돋이전망대를 들렀다 간다. 첨부된 지도에 전망대로 표시된 곳이다.

 나무데크로 깔끔하게 만들어진 전망대에 서면 시원스런 조망이 펼쳐진다. 천수만 간척지를 비롯하여 서산의 넓은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들녘너머로 희미하게 나타나는 고을은 아마 해미읍성일 것이다.

 이후는 임도를 따라 산동리(인지면)로 간다. 이때 오른편으로 널따란 들판이 펼쳐지는데 그 끄트머리에는 서산시가지가 똬리를 틀고 있다. 길이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나있다는 점도 자랑거리다. 숨을 크게 들여 마시면 코끝을 맴돌던 솔향이 온몸으로 펴져나가면서 심신은 한없이 맑아진다.

 09 : 46(111). 실제 출발지인 야당천교(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2주 전, 64-1코스 때 부석사까지 2.8km를 더 걸었으니 오늘은 나머지 20km를 걸어야 한다. 하지만 도비산(9년 전 다녀왔었다) 구간을 생략하고 이곳부터 걷기 시작했다. 덕분에 64-2코스는 18km만 걷는 모양새가 됐다.

 09 : 46. ‘야당천(野堂川)’의 둑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남정리에서 발원한 2.5km 길이의 야당천은 산동리에서 도당천으로 합류된다. 그나저나 지난밤 내린 눈이 발밑에서 뽀도독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덕분에 기분 좋은 나들이가 될 수 있었다.

 이때 도비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예로부터 저 산은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1927년에 발간된 서산군지에 실려 있는 서산팔경 중 3경이 도비낙하(島飛落霞)인 것만 봐도 그 아름다움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2000년대의 새로운 서산팔경에서도 제7경으로 도비산 만하채운(島飛山 晩霞彩雲)을 꼽는다. 도비산의 저녁노을이 천수만 바닷물에 되비치면 하늘이 오색 노을을 꽃피우고 주위의 구름까지 주황색으로 물들인다나?

 09 : 53. 300m 남짓 걸었을까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종점 14.4km/ 시점 8.3km) 서해랑길과 만났음을 알려준다.

 09 : 56. 서해랑길은 계속해서 둑길을 탄다. 하지만 난 야당천을 건너기로 했다. 개울 건너에 있는 모월저수지를 조금 더 꼼꼼히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모월저수지’. 인지면 모월리(毛越里)’에 있는 관개용 저수지로 1982년 준공되었다. 서산A지구 간척지에 물을 대려고 축조했다는데, 수초가 무성한 것이 입질깨나 좋겠다. 맞다. 서산시 주최로 낚시대회가 열리기도 한단다. 직사각형으로 생긴 게 볼만했는지 나들이 삼아 풍경을 감상하려는 사람들도 종종 찾는다나?

 10 : 05. 저수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서해랑길과 다시 만난다. 그리고는 함께 야당천을 건넌다.

 이후부터는 야당천을 따라간다. 둑 아래서 다른 물길을 보탠 탓인지 몸집이 제법 커졌다.

 길은 엄청나게 너른 들녘을 헤집으며 나간다. 그 유명한 서산A지구 간척지이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저수지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직사각형의 저수지들이 여럿 포개지다시피 널려 있었다. 아니 저수지가 아니라 휴경지일지도 모르겠다. 서산시에서 철새의 쉼터로 제공하기 위해 휴경지에 물을 담아놓기도 한다니 말이다.

 10 : 26. ‘간월로1로 올라서니 이정표(종점까지 12km)가 반긴다.

 곧바로 도당천을 건넌다. 야당천이 도당천에 합류되는 두물머리에 잠수교가 놓여있다. 도당천(道堂川)은 음암면 도당리에서 발원하여 운산면을 지나 해미면 석포리에서 서해로 흐르는 15.2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이즈음 철새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지난 구간에서도 얘기했듯이 이곳 서산은 철새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 철새를 눈이 짓무르도록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이번 64-2코스이기도 하다.

 이후부터는 도당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제방 위로 도로가 나있다.

 철새가 이렇게 많을 수도 있을까?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철새 떼가 놓여있었다. 그것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다양한 철새들이. 맞다. 이곳 도당천은 왜가리, 백로, 가창오리, 가마우치 등 철새들의 낙원이라고 했다.

 저건 백조? 이곳은 간월호의 상류, 앞으로는 백조의 호수로 부르겠다며 넉살을 떠는데 도반 한 분이 고니라고 바로잡아 주신다.

 길은 이제 서산시의 시가지를 왼편 가까이에 끼고 간다. 도심 가까이라서 철새의 안정에 위해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일까? 감시 차량이 둑길을 순찰하고 있었다.

 도당천은 습지가 잘 형성되어 있었다. 그게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내기도 한다.

 이 일대는 매년 황새를 비롯한 260여 종의 철새 수십만 마리가 찾아온다고 했다. 가끔씩 보이는 모래톱 근처에서는 흰 왜가리가 노닐고 있었다. 먹이를 잡기 위해 우뚝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고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늘과 물이 무척 깨끗해서 겨울이지만 짙은 색감과 청명함으로 상쾌하다.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철새들의 군무도 눈에 담을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농경지의 적막함 속에서 철새들의 날갯짓이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먼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은 겨울 풍경의 또 다른 그림을 완성시킨다. 들녘의 고요함과 철새들의 생동감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겨울의 색다른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11 : 09. ‘청지천(靑之川, 또는 龍遊川)’이 합류되는 두물머리.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 철새 무리가 눈길을 끈다. 서산시가지를 거쳐 왔는데도 물이 맑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음암면 대미산(台微山)에서 발원한 청지천은 상홍리와 서산시가지를 거친 다음 이곳에서 도당천에 흡수된다.

 두물머리를 지나서도 탐방로는 도당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강안을 따라 습지가 잘 발달되어 있어 곳곳에서 철새 무리를 만날 수 있다.

 11 : 27. ‘와당교를 지나면 군부대 망루. 이후부터는 사진촬영을 삼가기로 했다. ! 군부대 정문에서는 초병들의 살가운 인사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지난 달, ‘DMZ평화의길을 걷다가 만난 해병대 초병들과는 얼굴 표정부터가 사뭇 달랐다.

 정문을 지나고서는 군부대의 담장을 따라간다. 철책을 따라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있다.

 11 : 50. 사진 찍기조차 불편한 군부대 지역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도당천 둑길을 전세 내 걸어간다. 툭 터진 시야에는 바라만 봐도 배부른 풍경이 한가득이다. 추수를 끝낸 황량한 들판이 도당천을 가운데 두고 광활하게 펼쳐진다.

 길은 아직도 철새들과 함께 간다. 하도 많이 만나서일까? 철새가 아닌 다른 볼거리를 찾아본다. 운이라도 좋으면 인공 둥지를 만날 수도 있다는 누군가의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수만을 찾는 황새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한편, 번식 공간으로도 활용된다고 했다. 생김새도 멋져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나?

 12 : 01. ‘신장천이 합류되는 두물머리. 1960년대까지만 해도 드나드는 어선들로 성황을 이루었다는 곳이다. 덕지천동에 선적을 둔 12-15척의 고깃배가 칠산이나 연평도까지 고기잡이를 다녔으며, 새우젓배·황새기젓배 등 외지 생선배들도 끊임없이 드나들었단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냇가는 고깃배는커녕 배가 다닐만한 물길조차 보이지 않았다.

 12 : 12. 소하천에 길이 막힌 탐방로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150m쯤 더 걸으면 이정표(종점 5.1km/ 시점 17.6km)가 왼쪽을 가리킨다. 이즈음 벌판 뒤로 덕숭산과 가야산이 길게 이어진 금북정맥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가야산 아래 있는 도시가 해미이다.

 다리를 건넌 탐방로가 이번에는 들녘을 횡단해버린다. 가야산을 전면에 놓고 가는 길, 농경지 곳곳에 마시멜로처럼 보이는 하얀색 곤포사일리지가 놓여있었다. 새들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물체로 보일 수도 있겠다.

 12 : 24. 또 다시 만난 도당천’. 길은 아직도 철새들과의 동행을 멈추지 않는다. 도당천을 국내 제일의 철새 탐조지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12 : 30. 도당천과 해미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가야봉 대곡리에서 발원한 해미천(海美川)은 유암리·저성리·조산리·전천리·응평리 등을 거친 다음 이곳에서 도당천으로 흡수된다.

 이후부터는 해미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해미천은 유속이 느리고 수초와 부유 물질이 많아 잉어와 같은 물고기들의 산란지로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흰꼬리좀도요, 노랑부리저어새 등 다양한 철새들이 매년 찾아온단다.

 12 : 34. ‘응평교로 해미천을 건넌다. 그리고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서산시가지에서 가까운 탓인지 들녘에는 비닐하우스가 한가득이었다.

 13 : 00. ‘해미2’. 오는 길에 잠수교(12:56)를 만났었다. 서해랑길은 이 다리를 건넌다. 그런데도 이를 지나쳐버렸고, 그런 우리를 해미2가 맞는다. 이곳에서는 둔치로 내려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이 옳다. 반대편 둔치에 탐방로가 나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섰는지도 몰랐던 우리 일행은 인도가 따로 없는 4차선의 해미2를 위태롭게 건넜고, 골목(성지2)을 이용해 해미국제성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서 본 해미천’.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양쪽 둔치에 생태탐방로 및 자전거도로를 설치하는 등 주민들을 위한 친수(親水) 및 생활체육 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다.

 13 : 07  13 : 46. ‘해미순교자국제성지’.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는 곳이다. 1800년대의 천주교 박해 때, 기록되지 않은 천주교 신자 1천여 명이 사약·몰매·교수형·참수형·동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됐고 심지어 산 채로 땅에 묻는 생매장과 물에 빠뜨리는 수장형까지 자행됐다. 그렇다고 유명한 성인이 있거나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이름이나 세례명을 남기고 순교한 132명의 천주교 신자가 기록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교황청은 2021년 국제순교성지로 지정했다. 국내에서 첫 번째이며,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다. 세계적으로도 역사적 장소인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산티아고 등 3, 성모 발현지인 멕시코 과달루페와 포르투갈 파티마 등 20, 성인 관련 순례지 6곳 등이 있을 따름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모범으로 인정하고 이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해미천변 28400의 부지에 조성된 성지에는 대성당과 소성당, 진둠벙과 자리개돌, 무명순교자 묘, 순교탑 등이 들어서있다.

 먼저 성당부터 찾아봤다. 하지만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짧은 기도만 드리고 빠져나왔다. 수수하게 꾸며진 성당에는 성화 몇 점이 걸려있을 따름이었다.

 무덤을 형상화 했다는 순교자성지 기념관’. 순교자들의 희생과 역사를 전해주는 곳으로, 순교 당시의 모습을 담은 조각과 판화, 성지에서 발굴된 순교자 유해가 안치돼 있다.

 안으로 들면 이곳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진이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가 신앙의 증거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라는 축복과 함께 게시되어 있다. 2014 816,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화문에서 조선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거행했다.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마르티노), 김진후(비오), 이보현(프란치스코)  3위도 함께 시복됐다. 교황은 이튿날 해미순교성지에 들러 순교자 3위의 기념비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전시공간은 밧줄에 묶어 끌려가고 있는 조각상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천주교는 1784(정조 8)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교회를 건립하면서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조선에 소개됐지만 이후 종교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1790년에 시작된 박해는 병인양요와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현군 묘 도굴 사건 이후 정점으로 치달았다.

 순교자들의 유골. 당시 내포지방 13개 군현을 담당하던 해미읍성 겸영장은 군권과 관권을 한 손에 쥐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까닭에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고 해당 지역 교도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단다. 그 숫자가 무려 1,000여명에 달했다나? 기념관에는 여숫골에서 발견된 유골이 모셔져 있다.

 당시의 유물들은 물론이고, 조각·그림·사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천주교의 역사와 발굴과정 등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 하나 더. 동구 밖 숲정이라 부르던 곳은 신자들이 생매장 당한 곳이다. 당시 순교자들은 죽으면서도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외쳤다고 한다. 주민들에게는 그게 여수머리로 들렸던 모양이다. ‘여우에 홀린 머리채로 죽어갔다 '여숫골'이라 불렀단다.

 그중에서도 순교 장면을 담은 그림이 오랫동안 시선을 붙들어 맸다.

 고통 받는 순교자들의 조각상. 바로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파사드(Façade), 아니 멕시코시티 소우마야미술관에서 만났던 로댕의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을 떠올렸다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아무튼 고통으로 일그러진 저 분들은 지옥이 아닌 천당으로 가셨을 게 분명하다.

 이젠 밖을 돌아볼 차례이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유해발견 터’. 해미성지는 신자를 잡아 고문하고 처형한 해미읍성과 사형장으로 이용했던 서문 밖 순교 터, 생매장 터인 이곳 여숫골  3개의 순교성지로 구분된다.

 신자들의 가슴과 머리를 으스러뜨리던 자리개돌’. 신자들을 처형하는 방법은 잔혹했다. 군졸들은 이들이 사용하던 성물을 밟게 하고 돌다리에 눕힌 뒤 커다란 돌로 내리쳐 돌다리를 도마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신자들이 흘린 피가 해미천을 붉게 물들이며 거머리바위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진둠벙. 천주교인들을 빠뜨려 죽게 한 아픔이 깃든 곳으로, 자그마한 연못에 한복을 입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두 여성(한 분은 성모인 듯)의 석상이 물에 반쯤 잠겨 있다. 당시 100년 가까이 사형장으로 이용되던 서문 밖 냇가는 민가와 가까웠다. 그래서 조금 떨어진 벌판에다 수십 명씩 생매장하기 시작했단다. 군졸들은 생매장터로 가기 전 개울과 연결된 둠벙’(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에 오랏줄에 묶인 신자들을 산 채로 수장시키기도 했단다. 훗날 이 둠벙은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죄인둠벙'으로 불리다 말이 줄어 '진둠벙'으로 바뀌었다. 그래선지 순교자들의 유해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성모자상. 궁중복장으로 차려입은 게 눈길을 끈다. 성지순례 차원은 아니었지만 과달루페나 파티마 등 천주교 성지들을 꽤 여럿 둘러봤고, 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에서는 현지화 된 성모님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 풍경을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니 이 아니 기쁠손가.

 맨 뒤에는 해미순교탑이 들어섰다. 무덤을 형상화 한 둥근 봉우리 위에 16m 높이의 흰색 탑이 세워져 있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개의 날개 형상이 십자가를 떠받치는 모양새이다. 그 앞에는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가 있었다. 둥근 모양의 분묘는 아랫부분을 화강암으로 둘렀다. 앞쪽 양옆으로 한 쌍의 문관석이 세워져 있다.

 2014 8 16일 시복된 3위의 복자 상.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 정사박해의 여파로 1800 19일에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 10년간의 옥고 끝에 1814 1020일 해미옥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복된 이분들 말고도 해미에는 132명의 순교자가 더 있다.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무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13 : 46.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를 담았다는 조형물(생명의 나무)을 보는 것으로 성지 투어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는 조산2를 건너며 길을 이어간다. 다리 건너에서는 해미천을 오른쪽 옆구리에 차고 간다.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은 벚나무가 늘어서있는 운치 있는 구간이다.

 이때 해미성당을 만날 수 있다. 순교자성지가 천주교인들의 가슴 아픈 역사라면, 커다란 저 본당은 가톨릭의 현재를 알려주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겠다.

 13 : 58. ‘해미교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서산의 제1경인 해미성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답게 소문난 맛집들이 여럿 늘어서 있었다. 카페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옛날식 다방이 아니라 개성 넘치는 분위기로 취향을 살린 커피전문점이다.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나있긴 하지만 교황 빵집도 그중 하나다. 서산육쪽마늘을 가미한 도넛 모양의 빵인데, 순교자성지를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드시고 가셨다며 자랑하고 있었다. 맛도 뛰어났다. 크루아상을 연상시키는 바삭한 페스츄리와 함께 고소한 마늘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14 : 02  14 : 35. 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해미읍성(사적 제116)은 낙안·고창 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모습을 간직한 3대 읍성에 꼽힌다. 서해안지역은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이를 막기 위해 태종 17(1417)부터 세종 3(1421)까지 석성으로 쌓았다. ! 해미읍성은 서산시가 관광객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서산9' 중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는 것도 알아두자.

 정문인 진남문(鎭南門)’. 아치형의 성문(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형식의 팔작지붕 건물(정면 3, 측면 2)을 얹었다. 하나 더. 성 안쪽 문루에는 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리플렛은 1491(성종 22)에 중수했다는 기록이라며, ‘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라고 적고 있었다. 독자적인 연호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하던 조선의 아픈 현실이랄까?

 성은 무척이나 넓어 보였다. 하긴 면적이 6만여 평이나 된다니 어련하겠는가. 성벽의 총 길이도 1.8km나 된다고 했다. 높이도 5m에 이른단다. 하지만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병영성의 모습이 사라졌었다. 그러다 1997년부터 발굴·복원이 이뤄져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해미읍성은 문화재이다. 하지만 천주교인들에게는 순교성지로서의 위치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읍성 한가운데 호야나무로 불리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박해의 증인처럼 서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했다는 나무이다. 바로 옆에는 1790년부터 100여 년간 내포 일대의 천주교인을 잡아 가둔 원형 옥사를 복원해 놓았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가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수령이 24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 뒤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 관아(官衙)가 있다. 조선 초기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던 곳으로,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해(이를 겸영장이라 함) 지역을 통치했다.

 동헌(東軒).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 관료들이 회의를 하는 장면을 밀랍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도 한때 저 무리 중에 끼어있었을 것이다.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약 10개월간 근무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니 말이다.

 내아(內衙). 관리와 그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으로 미스터 션사인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인기 때문인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밖에도 서리의 집, 상인의 집, 부농의 집 등 조선시대의 민가 여러 채가 복원되어 있었다. 우리는 구경하지 못했지만, 민가에서는 지역 노인들이 직접 시연하는 다듬이질, 짚풀 공예, 삼베 짜기 등을 관람할 수도 있단다.

 카페 탱자성(해미읍성의 별칭) 사랑방도 눈에 띈다. 해미읍성역사보존회에서 운영하는 전통 주막인데, 기념품점과 연 판매소도 겸하고 있다. 아무튼 부침개 익어가는 고소한 냄새로 진동하는 주막은 해미읍성의 명소다. 도토리묵 등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지역 양조장의 막걸리를 음미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동헌 오른쪽에는 108계단이 놓여있었다. 백팔번뇌를 털어내듯 돌계단을 하나씩 세면서 오르면 정확히 108번째 계단 위에 있는 정자 '청허정'과 만난다.

 청허정(淸虛停)’은 소나무와 대나무 숲을 좌우로 거느린 언덕 한가운데에 서있다. ‘맑은 기운으로 욕심을 비우는 곳이라는 의미로, 1491(성종 22) 충청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曺淑沂,1434-1509)가 지었다. 훈련을 하던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문객들이 글을 짓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충청감사 조위(曺偉, 1454-1503)가 병마절도사 이손(李蓀, 1439-1520)에게 지어 올린 시가 명작으로 남아있다.

 동문인 잠양루(岑陽樓)’이다. 정문인 진남문, 서문(지성루), 북문(암문)과 함께 해미읍성의 사대문을 구성한다.

 14 : 38. 성곽을 빠져나와 공영주차장으로 간다. 그리고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16.96km 4시간 50분에 걸었다. 2주 전, 1구간 때 3.0km(1시간)를 더 걸었으니 19.96km 5시간 50분에 걸은 셈이다. 정규코스에서 5km 남짓이나 생략했는데도 말이다. 부석사와 순교자국제성지, 해미읍성을 둘러보느라 거리와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고 보면 되겠다.

 

DMZ 평화의길 3코스(애기봉 입구 - 전류리포구)

 

여행일 : ‘25. 1. 4()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하성면 일원

여행코스 : 애기봉 입구가금2양택천마근포리시암2가자골후평1석탄리 철새조망지전류리포구(거리/시간 : 17km, 17.31km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 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애기봉 입구(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김포한강로 등을 이용 통진읍까지 온다. ‘하성입구삼거리에서 하성로로 옮겨 통진방면으로 8km쯤 달리다 애기봉입구삼거리에서 평화대로를 타고 3km쯤 들어가면 애기봉 평화생태공원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들머리는 매표소에서 남쪽으로 250m쯤 떨어진 지점에 있다. ‘아치형 게이트가 세워져있으니 참조한다.

 애기봉 입구를 출발 김포의 북(조강동쪽(한강) 가장자리를 따라 전류리포구로 가는 17km짜리 여정. 드넓은 김포평야를 감상하며 걷는 구간으로, 조강과 한강 철책 사이로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냉혹한 현실을 되뇌기도 한다. 석탄리 철새조망지에서는 각종 철새와 재두루미를 관찰해 볼 수도 있다.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과 평화누리길 안내판이 사이좋게 서있다. 경기둘레길 스탬프보관함도 눈에 띈다. 이번 구간도 세 길이 나란히 간다는 의미이지 싶다.

 08 : 42. ‘평화공원로를 따라 애기봉(평화생태공원)쪽으로 올라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08 : 44. 버스정류장(애기봉 입구)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금로를 따라간다.

 08 : 47. ‘가금리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당산목 두 그루가 맞는다. 둘레 7.1m에 높이가 20m나 된다는 저 느티나무는 나이가 490살도 넘었단다. 가금리가 만만찮은 내력을 지녔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녹녹치 않았던 모양이다. 반 천년을 살아온 노거수가 수문장을 자처할 만큼 오래된 마을인데도, 진입로는 오가는 차량이 교차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저 나무도 마을의 나이만큼이나 오래 묵었나보다. 속이 텅 빈 껍데기만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08 : 54. ‘코리아트레일이란 명성에 걸맞게 탐방로는 잘 꾸며져 있었다. 촘촘히 설치된 이정표나 가이드리본은 기본, 가끔은 이런 쉼터(이정표 : 전류리포구 16.5km/ 애기봉입구 0.9km)를 배치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08 : 56  08 : 58. 여말선초의 문신인 박신의 묘역이란다. 박신(朴信, 1362~1444) 1385(우왕11) 23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규정을 거쳐 예조정랑, 형조정랑을 지냈다. 조선에 들어와선 강원도 안렴사, 대사성, 이조판서를 지냈고, 청렴한 관리로 칭송이 높았다. 단심가(丹心歌)로 대변되는 스승 정몽주와는 다른 길을 걸은 셈이다.

 저헌재(樗軒齋)’. 박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저헌(樗軒)은 그의 호이다. 사당 앞에는 그의 행적을 기리는 송덕비도 세워놓았다. 박신(朴信) 갑곶나루의 석축로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1419(세종1) 통진에서 귀양살이할 때 사재를 털어 만들었는데 공사가 14년이나 걸렸을 정도로 큰 공사였던 모양이다. 그래선지 1432년 축조된 이래 약 500년이나 사용되었단다.

 문중 묘역. 박신 말고도, ‘운봉 박씨 시조도 저곳에 묻혀 있다고 했다. 하나 더. 박신은 경포8의 하나인 홍장야우(紅粧夜雨)’에 얽힌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박신이 강원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강릉 기생 홍장(紅粧)을 사랑하여 애정이 매우 깊었단다. 임기가 차서 돌아갈 즈음, 정몽주에게서 동문수학하던 강릉 부윤 조운흘(趙云仡)이 홍장을 죽은 것으로 꾸민 다음, 다시 만나게 만드는 등 신선놀음을 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박신이 <경포대에서 놀던 것이 꿈속으로 드는구나(鏡浦淸遊入夢中)>라고 읊었을 정도로...

 묘역 입구. 수령이 500년도 넘었다는 향나무가 나이만큼이나 그윽하다. 박신이 마음을 수양하고자 심었다는 나무다. 그리고 열심히 학문을 닦아 문과에 급제했다나? 이후 심성이 약하거나 행동이 불미한 사람이 이곳에서 공부하면 배움에만 전념하게 되더란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 나무를 학목(學木)’이라 불렀고, 학문을 닦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한다.

 08 : 59. ‘가금2는 스치듯 지나간다. 가금리(佳金里)는 달감(月甘), 용산동, 샛말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부락을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09 : 02. 마을 앞 삼거리에서는 왼쪽 가금로를 따라간다. 조강 철책을 바라보며 간다고 보면 되겠다. ! 오른쪽은 가금3리로 연결되는 평화공원로70번길이라 했다.

 이즈음 철새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한 떼가 푸드득거리며 날아오르는데, 그보다도 더 많은 무리는 인간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낙곡을 주워 먹느라 정신이 없다.

 09 : 08. 커다란 축산농가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3코스는 이런 작은 고개를 꽤 여럿 오르내린다.

 09 : 12. 고개 너머에는 가금리놀이터라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당산목 아래 정자를 짓고 평상을 놓아 쉼터로 만들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4H’ 표석이 더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50년 넘게 잊어왔던, ‘나는 나의 클럽과 나의 공동체와 나의 나라를 위하여로 시작되는 맹세문을 떠올려본다. <나의 머리(Head)를 더 명철하게 생각하는 데/ 나의 가슴(Heart)을 더 위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데/ 나의 손(Hand)을 더 큰 봉사를 하는 데/ 나의 건강(Health)을 더 나은 삶을 위해 바치기로 맹세한다>

 체험농장인 애기봉 농장이란다. 간판에는 조선시대 기생 관비(官婢) 이야기라고 적어놓았다. 설마 기생을 직접 체험해보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09 : 15. ‘평화의길 쉼터 앞에서 가금로와 헤어진 다음 왼쪽 농로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김포평야의 너른 들녘을 꿰뚫으며 마금포리쪽으로 간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양택천(楊澤川), 하성면 양택리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유입되는 지방하천이다.

 이즈음 애기봉과 그 꼭대기에 걸터앉은 조강전망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 기괴한 소음도 들어야만 했다. ‘쇠를 깎는 듯한 소리인데, 듣는 것만으로 구역질나게 만드는 음이다. 북한에서 쏘아대는 대남방송이다. 남한에 대한 비판이나 북한 체제의 선전이 씨알도 먹히지 않자, 스트레스 받기 딱 좋은 소리로 주민들은 괴롭히는 모양이다.

 탐방로는 마근포리(麻近浦里)’를 바라보며 간다. 마근포에는 안행동과 덕개라는 두 개의 자연부락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저건 안행동이지 싶다. ‘덕개가 인천과 서울을 왕래하던 수많은 운반선과 어선들로 들끓던 마을이었다니 말이다.

 09 : 24. 마을 초입에 마근포(麻近浦)’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한국수산지(1908~1911)’는 당시 김포에서 가장 큰 포구로 조강포·강령포·마근포를 꼽는다. 그중 마근포는 우리말 막은 개’(개펄)라는 뜻으로 막은의 음을 따 마근포’(麻斤浦)라고 불렀다. 당시 마근포는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가거나 강 건너 정곶리(황해도 개풍군 임한면) 사이를 왕래하던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고 한다.

 마근포 마을도 스치듯 지나쳤다. 조강을 마주보며 걷는 구간인데, 북녘 땅인 개풍군의 산들이 철책 너머에서 고개를 내민다.

 09 : 35. 조강(祖江) 너머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우리네 땅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둑 앞에서 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는 수밖에. 왼쪽은 출입을 금지한다는 표지판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었다.

 잠시지만 철책 길을 따라간다. 아까 만났던 안내판은 이 부근을 마근포로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산은 뱃사람들이 용왕제를 지내던 부엉바위산일 것이다. ‘당집이 있었다는.

 뒤돌아본 풍경. 조강리로 이어지는 철책 너머로 애기봉과 조강전망대가 보인다. 그 뒤에 있는 것은 문수산이다.

 부엉바위산은 오른쪽으로 에돌아간다. 왼쪽, 그러니까 철책 쪽으로 난 소로는 몽땅 막아놓았다.

 산을 한 바퀴 에돌면 길은 다시 조강 철책을 향해 간다. 강변에 쌓아올린 둑 안쪽으로 꽤 너른 들녘이 조성되어 있다.

 09 : 48. 배수갑문을 지나면 철책이 쳐진 둑길. 탐방로는 그 아래로 나있는 농로를 따른다.

 이곳에서도 낙곡을 주워 먹고 있는 한 떼의 철새를 만날 수 있었다.

 철책이 쳐진 둑은 옛날로 치면 성벽이다. 그렇다면 저 수로는 해자(垓字)?

 09 : 57. ‘마조리(麻造里)’ 들녘이 잠깐 얼굴을 내미는가싶더니, 수로가 시작되면서 시암리(枾岩里)’로 바톤을 넘겨준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수로를 따라 내륙으로 파고든다.

 10 : 07. 2차선 도로인 하성로로 올라선다. 오른쪽(시암1리 방향)으로 50m쯤 걷다가 도로를 횡단한다.

 농로를 따라 시암2로 간다. 시암리(枾岩里)는 한강이 마을을 둘러싸는 형세라고 했다. 덕분에 밀려오는 바닷물과 내려가려는 강물 간 힘의 평형이 이뤄지는 곳에 유사가 쌓인 습지로 유명하단다. 고양의 장항습지, 고양과 파주 경계에 있는 산남습지와 더불어 한강하구의 3대습지로 꼽힌단다. 하지만 탐방로가 바닷가를 피해가는 탓에 구경할 수는 없었다.

 10 : 17. ‘시암2’. ‘주민안전 위협하는 대북전단 살포 반대한다는 현수막이 남북 분단의 현실을 대변해준다. 누군가에게는 꼭 해야만 하는 사명이겠지만, 접경지 주민들로서는 눈에 가시일 것이다. 혹시라도 위험물이라는 핑계로 북에서 총이라도 쏘아댈 경우 그 피해는 오롯이 주민들에게 돌아갈 것이 뻔할 테니까 말이다. 하긴 남북분쟁을 일부러 조장하려던 몹쓸 인간들도 최근 있었지만.

 하성로를 따라 50m쯤 걷다가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농로로 들어간다.

 탐방로는 듬성듬성 민가가 들어서 있는 시암리의 들길을 따라 남진한다. 이즈음 오른쪽 산봉우리에 걸터앉은 전망대가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군부대인줄 알고 그냥 지나쳤는데, 나중에 주민분이 전망대라고 알려주셨다.

 10 : 31. ‘석평로를 가로지르자 길은 갈릴리수양관으로 이어진다. ! 석평로는 건널 게 아니었다. 석평로를 따라가다 연화사부터 들러봤어야 했다. 이야깃거리는 물론이고 볼거리까지 넘친다는 이석암 작가님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안을 하신 작가님조차 길을 놓쳤는데 어쩌겠는가. 갈릴리수양관을 지나다가 만난 주민에게 물어보고서야 진입로를 지나친 줄 알았다.

 10 : 36. 조금 더 걸으면 삼거리. 이곳에서도 연화사로 연결되지만 다녀오기에는 너무 멀어져버렸다. 그 아쉬움을 연화봉 유래를 소환해 달래본다. 삼국시대 때 고구려가 백제를 침략했고, 점령군이던 고구려 병사와 백제 낭자가 사랑을 하게 되었단다. 그러다 백제군이 반격을 시작했고, 고구려 병사는 돌아오겠다는 약속만 남긴 채 본진을 따라 한강 이북으로 후퇴했단다. 이후 낭자는 매일같이 산봉우리에 올라 낭군이 돌아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더란다. 지친 낭자가 님을 찾아 한강은 건너다 빠져죽었고, 낭자가 매일같이 올랐던 산봉우리에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났다나?

 길은 이제 후평리로 넘어간다. 저 고갯마루를 경계로 시암리와 후평리가 나뉜다.

 이즈음 한강 너머의 구릉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도 함께 시야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남한 땅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철책에 가로막혀 바라보는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DMZ평화의길이 진정한 평화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한강 양안의 철책이 사라지고, 누구나 자유롭게 한강을 건널 수 있어야만 한다.

 10 : 42. 고갯마루에는 남간의 재실인 수정재(守正齋)’가 들어서 있었다. 남간(南簡, 1400-1440)은 형조·호조 좌랑, 장령, 예문직제학을 역임한 세종대왕 때의 문신이다. ‘남간의 사람됨이 청렴결백하고 정도를 지켜 아부하지 않았다는 세종의 평에서 착안 수정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0 : 44. 고개를 넘으면 후평리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인 가자골이다.

 10 : 52. 아리수낚시터 앞에서 평화의길과 평화누리길이 헤어지고 있었다. 평화의길은 석평로를 따라 후평1리로 넘어가고, 평화누리길은 왼쪽 평야지대로 들어간다. 참고로 이 길을 따르더라도 후평리 수로에서 평화의길과 다시 만난다.

 잠시 후, 거대한 당산나무가 후평1에 다다랐음을 알려준다.

 10 : 57.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후평1(後坪一里)’가 반긴다. 철새들의 낙원으로 알려지는 마을이다. 재두루미 도래지역인 한강하구 홍도평야와 고촌면 태리 일원이 무분별한 개발로 재두루미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들어 2011년부터 후평리 일대 농경지 37ha를 재두루미 취·서식지로 조성해오고 있단다.

 마을 안길을 걷다가 만나는 생활도자기 공방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11 : 00. 흑돈 김포정(고깃집, ‘선탠스 힐이라는 카페와 마당을 같이 쓴다) 앞에서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골목길(석평로420번길)로 들어선다.

 벽화가 아름다운 카페 들길따라’. 출입구 옆에 매달아놓은 여보게!  한 잔 들고 가게라는 액자가 귀엽다. 하지만 카페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11 : 03. 마을을 빠져나온 길은 후평리 들녘으로 내려선다. 천리 길을 달려온 한강이 임진강을 만나기 전 잠시 몸을 풀면서 만들어놓은 엄청나게 넓은 충적평야이다. 하나 더. 이곳은 아까 아리수낚시터에서 헤어졌던 평화누리길과 다시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후부터는 후평리 수로를 따라간다. 수로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서 도로와 둑길이 함께 가는 모양새이다.

 둑길을 따라가다 이번에는 도로(또 다른 둑길일 수도 있다) 위로 올라가봤다. 지대가 높으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런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드넓은 김포평야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한강이 있는 왼쪽은 강 건너 파주지역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오두산 통일전망대도 그 안에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내륙인 오른쪽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들녘이 넓다. 그 뒤에는 후평리(後坪里)의 취락지가 있었다. ‘들녘 뒤쪽이란 마을 이름처럼 말이다. ! 저 들녘의 일부는 재두루미가 머물거나 월동할 수 있도록 관리되고 있다고 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물을 대고 볏짚을 깔아 놓는가 하면, 먹이용 볍씨를 뿌려 놓는단다. 주민들의 출입이 금지됨은 물론이다.

 이 구간은 새떼와 함께 걷는 구간이기도 하다. 시선이 미치는 곳마다 새들이 무리지어 낙곡을 주워 먹고 있었다. 운이라도 좋으면 저렇게 날아오르는 광경을 눈에 담을 수도 있다.

 김포시새마을회에서 운영한다는 저 생명살림학습장은 뭘 가르치는 곳일까? ‘하천은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하천정화활동을 해오는 단체로 알고 있는데. 그나저나 오늘은 운이 무척 좋은 날인가보다. 가금리의 ‘4H’에 이어 이번에는 새마을까지 오늘의 우리나라를 있게 한 계몽운동들을 접할 수 있었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공들여 가꾼 듯한 억새밭도 만날 수 있었다. 2020년엔가 희망 일자리 특화사업의 일환으로 108000본의 억새를 심었다는 기사가 떴었는데, 그게 자라서 새로운 볼거리로 틀을 잡았나보다.

 11 : 30. 3코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석탄리 철새조망대에 도착했다. 아니 조금 못미처에 있는 다친 새들의 쉼터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석탄리·후평리·시암리 일대의 들녘에서 구조해온 다친 새들이 임시로 쉬어가는 공간이다.

 입구 안내판은 후평리 들녘을 찾아오는 겨울 철새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특히 재두루미는 생태로도 모자라 국제동향까지 알려주고 있었다.

 독수리 등 맹금류를 보호하는 공간이란다. 하지만 멀리서 사진만 찍기로 했다. 간간히 들려오는 조류 독감에 민감한 곳이니 구경꾼인 나부터 조심해야지 않겠는가.

 쉼터 옆 하천. 얼음낚시가 가능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었다. 철새들도 이웃이라며 공존의 세상을 꿈꾸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이들은 먹고 사는데 목을 매기도 한다.

 11 : 34  11 : 45. ‘석탄리 철새조망대’. 석탄리·후평리·시암리 일대는 한강과 김포평야가 맞닿아 먹이가 풍부해 많은 철새를 관찰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백로, 황로, 왜가리 등은 물론 겨울 철새인 재두루미도 날아온다. 흑두루미가 찾기도 한단다.

 가장 큰 볼거리인 재두루미는 아예 조형물까지 세워놓았다. 안내판은 몸의 길이를 1.2m로 적고 있었다. 날개는 그보다도 더 길어 1.8m나 된단다. 한국에는 10월 하순에 찾아와 이듬해 3월에 되돌아가는 드문 겨울새라고 한다.

 조망대는 각자의 취향에 맞게 철새를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눈 좋은 젊은이들은 맨눈, 아쉬운 사람들을 위해서는 망원경을 배치했다. 고성능 망원경까지 챙겨온 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전문가의 포스를 폴폴 풍기는 카메라. 몽중루 작가님에 의하면 너무 크고 무거워서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맞지 않는단다.

 이젠 철새들을 관찰해 볼 차례다. 맹추위일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에 놀라 디지털카메라를 챙겨갔으니, 그냥 맨눈 수준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독수리, 흑두루미, 쇠기러기, 큰기러기,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말똥가리, 황조롱이 등 안내판에 적혀있던 새들과 비교해가며 살펴보다 그만두어버린 이유다.

 그러니 날아가는 장면은 언감생심이다. 몽중루님의 사진으로 구색을 맞춘 이유이다. 그나저나 오른쪽 한강 너머는 파주시, 그 위쪽에는 임진강과 북녘 땅이 놓여있다. 말은 장황했지만 모든 정경이 한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거리가 가깝다. 그런데도 이념은 그 가까움을 천리 길보다도 더 멀게 밀어내버렸다. 그런 곳을 마음만 먹으면 달려갈 수 있는 새들이 부럽다. 그리고 나도 저 새들처럼 한달음에 달려가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동포들을 만나보고 싶다.

 ! ()총무님은 무리지어 있는 재두루미도 보았다고 했다. 엄청나게 운이 좋은 셈이다. 1945년까지만 해도 1천 마리 정도의 무리가 각지에서 겨울을 났으나, 이후 수십 마리 단위로 줄어들었고, 최근에는 아예 20-30마리 단위도 보기가 어렵다니 말이다. 멸종야생생물 2급으로도 모자라 천연기념물 제203로까지 지정된 이유이다.

 11 : 45. 다시 길을 나선다. 한강의 서쪽 둑 위로 길이 나있다. 그렇다고 강변으로 내려가 볼 수는 없다. 이중으로 쳐진 군의 경계용 철책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강 건너는 파주시가 분명한데도 말이다. 남북분단, 그것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냉혹한 현실이라고나 할까?

 국은천(國恩川)’이란다. 하성면 마곡리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합류하는 3.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석탄배수펌프장. 집중호우 때 빗물을 한강으로 퍼내는 시설이다. 한강 하구에 위치한 김포는 한강 둑보다 지대가 낮은 데다 홍수와 서해의 밀물이 겹치면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펌핑으로 빗물을 한강으로 퍼내야 한다.

 배수펌프장에서 전류리포구까지는 4km. 한강 둑길이 일직선으로 뻥 뚫려있다. 하지만 자동차와 자전거도 함께 사용하고 있어 안전에 주의가 요구된다. 오른쪽 가장자리에 야자매트를 깔아놓았으니 이를 이용하면 되겠다.

 왼편 철책 너머로는 한강이 도도하게 흐른다. 그 건너는 파주 출판문화단지다. 하지만 남북분단의 냉혹한 현실은 한강의 양옆을 철책으로 꽁꽁 막아놓았다. 조금 전 본 철새들이나 오갈 수 있는...

 라이더들을 위한 평화누리 쉼터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자전거 거치대는 기본, 벤치도 놓아두어 평화의길 나그네들에게도 좋은 쉼터가 되어준다.

 쉼터는 조망대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었다. 뒤편으로 김포평야가 드넓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추수가 끝난 그 들판은 새까만 점들로 뒤덮여 있었다. 낱알로 배를 채우며 휴식하는 쇠기러기들이다. 운이라도 좋으면 독수리, , 재두루미, 참매, 큰기러기, 황조롱이, 흑두루미, 흰꼬리수리 등 8종의 법적 보호종도 눈에 담을 수 있단다.

 두 번째 쉼터. 이번에는 특이하게 생긴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사진은 올리지 않았지만 쉼터는 하나가 더 있었다.

 멋진 풍경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살아있는 소나무 네 그루를 기둥삼아 정자를 만든 것이다. 소나무의 풍성한 잎이 그늘을 만들어주니 지붕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나 보다.

 억새꽃이 흩날리는 구간을 지나기도 한다. 일부러 심어 놓은 것 같다.

 석탄리를 지나온 들녘에는 하성면소재지인 마곡리가 들어앉아 있었다. 그 뒤에서 솟아오른 산은 문수산일 것이고.

 이후로도 길은 꽤 지루하게 이어진다. 전류리 포구에 다 와갈 무렵에는 군부대까지 들어서있어 사진조차 찍을 수 없었다.

 12 : 42. 전류리 포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종합안내도(완주 인증 QR코드)’는 포구 조금 못미처에 위치한 평화누리길 쉼터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은 17.31km 4시간에 걸었다. 철새들과 어울리느라 곳곳에서 속도를 뚝 떨어뜨렸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빨리 걸은 셈이다. 추위에 쫓겨 정신없이 걸었다고나 할까?

 

서해랑길 64-1코스(창리포구 - 부석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4. 12. 28()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부석면 일원

여행코스 : 창리항부남호 동안옻밭교차로봉락교차로대봉정교차로부석중학교부석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1.9km, 실제는 12.03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4-1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산남부·태안남부 구간(64-68코스 및 지선1-3)의 첫 번째 지선(창리항에서 삽교호함상공원까지 6개 코스로 이루어졌다)이기도 한데, 부남호의 동안을 따라 부석면소재로 가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 수월한 코스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창리 포구(충남 서산시 부석면 창리)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에서 내려와 좌회전, 상촌교차로(29번 국도)에서 96번 지방도를 타고 태안·안면 방면으로 18km쯤 달리다 창리교차로에서 내려오면 된다. 서해랑길(서산 64-1코스) 안내도는 궁리항 공중화장실 앞에 설치되어 있다.

 궁리항에서 부남호의 동쪽 호숫가(東岸)를 따라가다 서산시의 내륙으로 파고드는 11.9km짜리 여정, 코스가 무척 짧은데다 부남호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그래서 꿈이 있다면 멈출 수 없다의 작가 이석암님의 제안으로 트레킹을 나서기 전 먼저 서산 버드랜드를 둘러보기로 했다. 64-1코스 시점인 창리항에서 2.1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산악회 황사장님의 배려로 버스를 이용해 다녀올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주사창(舟師倉, 수군의 무기를 보관하던 곳)’이었던 창리포구는 성황을 누리던 포구 중 하나였다. 하지만 현대건설의 간척사업 이후 반으로 쪼그라들었고, 게다가 도로까지 확장되면서 간월도, 궁리포구, 남당항 등에 모든 명성을 내주고 이제는 뒷전의 한적한 포구로 남았다.

 수많은 군선이 오갔을 바다는 이제 가두리낚시터 차지가 됐다. 바다낚시의 일종인 가두리낚시는 손맛과 입맛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통상 우럭을 많이 풀어주는데 농어나 참돔을 풀기도 한단다. 시간을 정해 물고기를 풀어주는데 배낚시보다 접근성이 뛰어난데다 입질까지 좋아 낚시가 처음인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09 : 25  10 : 05. 그렇게 도착한 서산 버드랜드’. 하지만 10시부터 입장이 가능하단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발길을 돌리려는데 몽중루 작가님이 능력을 발휘해주셨다.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왔다는 점과 함께, 다음 일정에 쫓겨 개장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는 형편을 말씀드리고 관계자로부터 외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허락을 얻어낸 것이다. 관계자들의 배려는 그뿐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를 가동시켜주는가 하면, 철새에 대한 설명까지 해줘 속속들이는 아니지만 버드랜드의 이모저모를 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천수만의 산을 형상화했다는 ‘4D 영상관’. 천수만의 철새를 주제로 한 영상을 입체감 있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개장 전이라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참고로 서산 버드랜드는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천수만을 체계적으로 보전·관리하는 한편, 체험과 교육중심의 생태관광 활성화에 주력하고자 조성된 철새 생태공원이다. 철새를 주제로 다양한 볼거리와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으며, 철새를 직접 관찰할 수 있는 탐조투어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철새들을 주제로 한 생태공원답게 곳곳에 철새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주변의 붉은 단풍과 어우러지며, 마치 꽃밭에서 춤을 추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하긴 화사하게 만개한 꽃들과 새들의 지저귐을 연상시키는 스프링 왈츠(Spring Waltz)’를 주제로 컬렉션을 연 주얼리 브랜드도 있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왈츠를 추듯. 새들도 눈보라 이는 하늘위에서 날개를 펴고 춤을 추는 모양이다. 맞다. 클래식 음악 중에도 새를 소재로 한 것들이 제법 있었다. 스웨덴의 작곡가 요한 에마누엘 요나손의 뻐꾸기 왈츠는 이미 명곡의 반열에 올라있고, 차이콥스키의 고니의 호수도 엄청나게 유명하다. 비발디도 플루트 협주곡 홍방울새를 작곡했다지 않은가.

 들녘을 마주보는 언덕에는 오리·기러기 전망대가 걸터앉았다. 망원경까지 비치해 철새들의 안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탐조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간척사업이 만들어낸 들녘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망원경을 통하면 물이 가득한 논에서 노닐고 있는 철새들도 구경할 수 있다. 철새의 안정적인 월동환경 제공을 위해 버드랜드에서 해오고 있는 노력의 결과다. 간척농지 경작 농가를 대상으로 생태계서비스 지불제 사업을 시행하는데, 참가자들은 벼를 수확한 후 내년 3 10일까지 철새의 먹이활동을 위해 볏짚을 남겨두거나 휴식지로 사용될 수 있도록 무논을 유지해야 한단다. 참가자에게 소정의 대가를 지급함은 물론이다.

 철새전시관도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천수만에 서식하는 큰기러기, 청동오리, 노랑부리저어새, 큰고니 등 200여 종의 다양한 철새 표본을 전시하고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관람객들은 친환경 전기차를 이용해 경내를 둘러볼 수 있단다. 버드랜드의 범위가 그만큼 넓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철새뿐만 아니라 숲, 갯벌, 논 등 다양한 자연생태계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연중 운영하고 있단다.

 둥지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에는 각종 철새가 난다. 그 위에 올라탄 집사람. 활짝 웃는 것이 선녀라도 된 듯한 기분인가 보다.

 둥지전망대. 배를 형상화 한 하부구조물과 역동적인 회오리 모양의 상부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게 철새 알을 상징하는 다양한 크기의 원형 공간들과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해준다.

 관계자의 배려로 전망대까지 올라가 볼 수 있었다. 30m 높이의 전망대는 4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꼭대기인 4층은 실내 전망대다. 빙둘러가며 커다란 창을 내놓았는가 하면, 주요 포인트마다 망원경을 배치해 철새들의 생태를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4층 내부 벽면. 서해안의 비경을 하나만 꼽으라면 서해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낙조를 꼽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저녁노을이 주는 특유의 쓸쓸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천수만은 거기에 철새의 군무까지 더했다. 보라! 이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전망대 조망.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변해버린 검조도를 가운데 두고, 왼쪽은 토끼섬’, 그리고 오른편에는 창리포구가 있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서산A지구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간척지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오른쪽의 천수만과 함께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로 알려지는 곳이다. 천수만은 물살이 거칠지 않아 물고기가 풍부하다. 게다가 간월호, 부남호 주변의 대단위 간척지에는 추수 후에도 곡식들이 다량 남아 있다. 겨울 철새들의 먹이 조건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오는 이유다.

 반대 방향에는 부남호가 놓여있다.

 발아래 야외공원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가족, 연인, 친구 등과 함께 예쁜 사진을 남길 수 있도록 포토존으로 꾸며놓았다.

 3층은 창이 없는 전망대로 꾸몄다. 유리창 너머로 찍히는 사진이 싫은 사람들은 이곳으로 오면 된다. 대신, 낮아진 만큼 시야가 좁아진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10 : 14. 실제 출발지인 창리교차로’. 천수만로(96번 지방도)에서 무학로(649번 지방도)가 갈려나가는 지점으로, 서해랑길 64코스의 주요 포인트이기도 하다. 천수만로를 따라오던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교차로를 건넌 다음 창리 나루터로 간다.

 천수만로를 따라 서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4차선 도로의 오른편 가장자리를 따라 자전거길이 따로 나있다.

 10 : 18. 잠시 후 도착한 현대 서산농장’. 64코스와 64-1코스가 나뉘는 지점이다. ‘창리포구를 빠져나온 서해랑길은 이곳을 기점으로 64코스는 서산B지구방조제 둑길로 가고, 지선인 64-1코스는 부남호의 동쪽 호숫가를 따라 북진한다. 그리고 태안·서산·당진의 해안선을 거치지 않은 채 서산·당진의 내륙 지역을 가로질러 아산시 84코스에서 원래의 길과 합류한다.

 이정표가 64-1코스의 시점인 창리포구에서 300m쯤 떨어진 지점임을 알려준다. 창리교차로에서 기록을 시작한 내 GPX 트랙에는 360m를 걸어왔다고 찍혀있다.

 현대서산농장 정문에서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간다. 농장 담장과 부남호의 가장자리 사이로 길이 나있다. 서해랑길의 지선을 따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서산에서 당진까지 6개 구간으로 나누어진 지선은 109km쯤 된다. 해파랑·남파랑·서해랑·DMZ평화의길 등 코리아트레일 중 본선에서 지선으로 연결된 별도의 길은 이곳이 유일하다.

 둑 모양으로 나있는 길은 비포장이다. 하지만 승용차의 교차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했다.

 길이 1,228m의 서산B지구 방조제. 창리포구와 건너편 당암포구를 잇는 이 방조제는 천수만의 끝이기도 하다. 둑이 완공되면서 천수만의 내륙 쪽 일부가 담수호와 간척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야생생물 보호구역이란다. 맞다. 이곳 천수만은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이다. 요즘도 17만 마리의 철새가 관찰 된다고 했다. 지자체가 이를 놓쳤을 리가 없다. 서산시는 천수만의 다양한 철새와 간월암·부석사·해미읍성 등 주변 관광지를 함께 둘러보는 탐조투어를 운영한다고 했다. 참가자가 촬영한 사진 가운데 우수작품을 선정해 소정의 상품도 준단다.

 맞다. 부남호에서의 철새 조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하시라도 철새들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사진이 별로여서 몽중루 작가님의 것을 빌려왔다.

 천수만 일원은 매년 11월과 12월에 철새가 가장 많이 머무른다고 했다. 국제보호종인 시베리아흰두루미, 가창오리와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 큰고니 등 희귀 철새들도 심심찮게 관측된단다. 겨울철 여행지로 각광을 받는 이유다.

 철새가 그려내는 아름다운 군무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다.

 호숫가 두어 곳은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철새들의 날갯짓을 실컷 구경하다 가라는 모양이다.

 눈에 들어오는 부남호(浮南湖)’는 호수라기보다 바다에 가깝다. 방조제 길이는 A지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진 호수는 간월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길은 어느 곳 하나 포장된 구간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는 자동차는 애물단지에 가깝다. 흙먼지만 흠뻑 선사해주고 갈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된 딱딱한 노면을 걸을 때보다 걷기는 한결 수월했다.

 오른편 울타리 너머는 온통 태양광 패널로 뒤덮여 있었다. 서산지역의 간척사업은 식량 자급이 강조되던 시절 농지 확보를 목표로 추진됐다. 하지만 세월 따라 음식문화가 변하면서 쌀은 남아돌았고, 거기다 소금기 많은 간척지라서 경제성까지 처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안이 태양광발전사업이었고, 현대건설은 30만 평(여의도의 1/3 크기)에 가까운 부지에 국내 최대 태양광발전소를 건설했다. 22천 가구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양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단다.

 호수 건너편에는 관제탑까지 갖춘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에서 운영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타이어 테스트 트랙으로, 축구장 약 125개 크기의 부지(38만평) 13개의 다양한 트랙이 들어서있단다.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주관하는 운전 교육, 시승 프로그램인 HMG 드라이빙 익스피리언스도 저곳에서 진행하고 있단다.

 이 구간의 가장 큰 볼거리는 철새의 군무다. 또 다른 볼거리는 이따금 갈대와 같은 수초를 만나 눈길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꼼꼼히 살펴보지는 말자. 쓰레기로 뒤덮인 흉물스런 민낯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남호가 다시 바다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2019년부터 수질이 6등급 이하로 악화되면서 담수호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탓에 방조제 가운데를 헐어 바닷물이 드나들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간척사업 45년 만에 역간척사업으로 변해 세상을 다시 떠들썩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10 : 56. 그런데 부남호를 가로지르고 있는 저 둑의 정체는 대체 뭘까? 중간에는 잠수교 모양의 다리까지 놓여있다. 어쩌면 서산지구A·B방조제가 축조되기 전 주민들이 이용하던 농로를 겸한 도로였을지도 모르겠다.

 (zoom)으로 당겨보니 다리 상판이 끊겨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진행할 경우 호수로 빠지게 된다는 경고판이 초입에 세워져있었다.

 부남호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는 길은 이후로도 한참이나 더 계속된다.

 부남호도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아니 물길 두엇이 합쳐지기라도 하는 듯 오히려 더 넓어진 느낌이다.

 11 : 03. ‘2-배수장에도 전망대가 세워져 있었다.

 부남호는 상류부로부터 유입되는 오염물질로 인한 수질악화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그래선지 ‘2-배수장에서는 뭔지 모를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물관리자동화 시설이나 홍수·수질 예보·경보 시스템 같은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농업용수로도 못 쓸 정도로 수질이 악화되었다니 물고기라고 온전하겠는가.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는 저 꼬맹이 어선이 그 증거라 하겠다.

 호숫가 둑길은 가고 또 가도 끝날 줄 모른다. 40분 이상을 걸어왔건만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광활하기 짝이 없던 태양광발전소가 배수장을 경계로 끝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그보다 더 넓은 농경지가 펼쳐진다.

 지난 2000년 현대건설은 자금난을 겪었었다. 그 해소의 일환으로 영농조합법인과 전업농에게 서산간척지 중 B지구 일부를 매각하기도 했다. 저 현수막이 그 증거다.

 11 : 17. 다리를 건넌다. 부석면의 너른 들녘을 적시며 흘러오는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어깨를 맞대고 달려오던 부남호와는 이곳에서 헤어진다.

 이정표(종점까지 6.8km)가 이제 그만 봉락저수지 방향, 즉 내륙인 서산시의 산하 속으로 파고들란다.

 방향을 틀자마자 ‘3-배수장이 나타났다. 이곳도 역시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염 저감시설을 보강하는 공사가 아닐까 싶다.

 이후부터는 하천의 둑길을 따른다. ‘서산B지구 방조제로 인해 생긴 너른 들녘을 양옆구리에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 B지구방조제로 인해 매립된 면적은 5,783헥타르(ha)라고 했다. 이중 농지는 3,745헥타르(11,328,625)란다. 여의도 면적이 290헥타르이니 여의도의 13배나 되는 농경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함께 가는 하천은 웬만한 강줄기에 못지않을 정도로 컸다. 하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저 들녘을 적셔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서산지역 간척사업은 한때 바다를 육지로 만드는이나 지도를 바꾸는 등의 수식어까지 달고 다니지 않았던가.

 ! 들녘에 논두렁이 없다. 기계농이 아니면 농사를 짓지 못할 정도로 농경지가 넓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래 전, 비행기로 볍씨를 뿌리는가 하면, 농약까지 비행기로 쳐대던 뉴스를 보며 감탄해하던 일이 있었다. 그 뉴스의 생산지가 이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늘밭도 경계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산시에서 축제까지 연다는 서산6쪽마늘을 심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쪽저쪽 보시고, 서산6쪽마늘축제로 오세유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을 정도로 뛰어난 품종이라나?

 둑길이어선지 억새밭을 끼고 걷기도 한다. 가을철, 하얀 억새꽃이라도 흐드러지게 피면 또 하나의 풍성한 볼거리로 변할 게 분명하다.

 11 : 47. 봉락저수지에서 흘러오는 물길을 건넌다. 이정표가 종점까지 4.3km쯤 남았음을 알려준다.

 11 : 50. 조금 더 걷자 옻밭2교차로가 반긴다. 여기서 옻밭은 칠전리의 옛 이름이다. 옻나무밭이 많다고 해서 옻밭골, 옻밭말(漆田村), 칠전(漆田) 등으로 불리다가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옻 칠()’자가 일곱 ()’자로 바뀌어버렸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이제 ‘649번 지방도를 따라간다. 2차선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널찍하게 인도를 내놓았다.

 도로 건너. 태극기가 휘날리는 건물은 칠전리(七田里)’의 마을회관(경로당)이다. 부석면에 속한 법정리 중 하나로, 옻밭골·사기점·금곡·성절골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그렇다면 저 마을은 옻밭골일 것이다. 이 교차로의 이름이 옻밭인 것을 보면 말이다.

 11 : 56. 이번에는 옻밭2교차로. 도로 표지판은 옻밭골로 연결되는 지점임을 알려준다. 아니 신작로의 오른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도로의 버스정류장은 성절말, 승지골 등 다른 자연부락으로도 연결된다고 알려준다.

 교차로 근처에 칠전리사무소가 지어져 있었다. ‘칠전리 영농회라는 편액도 눈에 띈다. 경로당 기능이 없는 순수 사무실인 모양이다.

 봉락저수지는 스치듯 지나간다. 간척지 들녘을 적셔주는 물길의 원천으로, 월척을 노리는 프로 낚시꾼들이 심심찮게 찾아오는 곳이다. 겨울철, 맹추위에 꽁꽁 얼어붙기라도 할라치면 얼음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한단다.

 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마을은 부석면의 또 다른 법정 동리인 봉락리(鳳洛里)’. 검은돌·봉동·노라실·소댕이·장승배기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는데, 충남지역의 특징답게 어느 부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옛 이름이 적힌 마을 표석을 세우는 등 옛 지명 찾기에 힘을 쏟는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충남에서는 여전히 1, 2, 3리로 통칭되는 행정 동리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12 : 05. ‘봉락교차로를 지난다.

 도로 건너에는 봉락경로당이 들어서 있었다.

 12 : 10. ‘초당2교차로라고 한다. 하지만 초당이란 이름을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의 꿈속에 저장된 농촌은 대부분 낭만이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은 먹고 사는 게 우선이다. 스핑크스 고양이와 타조의 체험을 간판으로 내건 저 농장 & 카페도 그런 삶의 한 방편일 것이다.

 그런 현실을 타개하지 못할 경우 도태될 수밖에 없다.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는 저 주유소가 그 증거이다.

 12 : 15. 이번에는 초당1교차로를 지난다. 이름과는 달리 이곳은 봉락리’, 갈려나가는 길도 지산리로 연결된다.

 봉락1의 마을회관도 노인정을 겸하고 있나보다.

 생강 한과 공장도 눈에 띈다. 서산 생강은 전국 생산량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생강을 활용하는 서산 한과는 토종 생강을 곱게 갈아 일정 비율로 섞은 조청이나 물엿을 사용하기 때문에 맛과 향이 독특하다. 여기에 국산 참깨, , 백련초 등으로 각양각색의 한과를 만드는데, 한과 속살에 배어있는 생강 성분이 감칠맛을 더해줄 뿐 아니라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신장을 튼튼하게 해주며 감기 예방 효과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12 : 20. ‘대봉정교차로는 회전교차로 형식을 취했다.

 서산농협의 농산물집하장이란다. 마늘, 양파, 배추 등 서산지역에서 생산되는 채소류의 홍수 출하를 막음으로써 산지가격을 지지해보려는 시설쯤으로 보면 되겠다. 그나저나 면단위 집하장치고는 대단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부석면의 들녘이 그만큼 넓고, 생산되는 농산물의 양도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농민들의 삶도 그만큼 풍요로울 것이고 말이다.

 칠전리와 봉락리를 연이어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제 대두리(大頭里)로 넘어간다. 지형이 큰 머리처럼 생겼다는 마을로, 내건너·구억지·들마당·부엉굴(구억말사양골 등의 자연부락을 품고 있다.

 사양골지도 스치듯 지나간다. 간척지에 물을 대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을 보여주지 못하는 저수지다.

 12 : 33. ‘대두교차로에서는 횡단보도를 건너 도심(부석면 소재지)으로 진입한다. 종점까지 0.6km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길가에 세워져 있다.

 건너편에는 1954년에 문을 열었다는 부석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전체 학생수가 100명도 채 안되지만, 사용하는 건물만큼은 대도시 중학교에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12 : 40. 취평리(부석면 소재지)에 위치한 차부삼거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아니 시간이 너무 일러 64-2코스 중 일부(부석사까지)를 더 걷기로 했다. 22.7km나 되는 64-2코스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고 싶은 간절함이라고나 할까?

 버스정류장 주변은 공중화장실까지 갖춘 쉼터 겸 소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서해랑길(서산 64-2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그나저나 64-1코스는 12.03km 2시간 30분에 걸었다. 상당히 빠른 속도다. 버드랜드를 들르지 않은 일행들을 따라잡으려고 발길을 서두른 데다. 추위에 쫓겨 간식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달려온 덕분일 것이다.

 

DMZ 평화의길 2코스(문수산성 남문  애기봉 평화생태공원)

 

여행일 : ‘24. 12. 21()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하성면 일원

여행코스 : 문수산성 남문남아문문수산 정상(왕복)DMZ평화의길거점센터조강저수지개화천애기봉 평화생태공원 입구(거리/시간 : 8.2km, 역방향으로 9.62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 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애기봉 평화생태공원주차장(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김포한강로 등을 이용해 통진읍까지 온다. ‘하성입구삼거리에서 하성로로 옮겨 통진방면으로 8km쯤 달리다 애기봉입구삼거리에서 평화대로를 타고 3km쯤 들어오면 애기봉 평화생태공원에 이르게 된다. 2코스는 원래 문수산성 남문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애기봉전망대를 둘러보기 위해 역코스로 진행했다. DMZ의 접경지역에는 북한을 조망할 수 있는 안보관광지가 꽤 많다. ‘DMZ 평화의길은 이들 중 대부분과 어깨를 맞대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들러볼 수 있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군부대 내 시설이지만 우리네 분단 현실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데 말이다. 특히 애기봉전망대는 평화생태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관광자원화 되었다지 않는가.

 문수산성 남문에서 출발해 애기봉 입구로 이어지는 7.8km 길이의 짧은 구간이다. 하지만 문수산의 8부 능선까지 올라가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 포함되어 있어 난이도는 어려움으로 분류된다. 다리품만 조금 더 팔면 애기봉 평화생태공원 문수산 정상에 올라 조강 너머의 북녘 땅 풍물을 실컷 감상할 수 있다.

 930분에 매표(출입신청서와 함께 입장료 3천원을 내야 한다)가 시작됐고, 신분확인 등의 절차를 거치다보니 10시를 훌쩍 넘기고서야 평화생태전시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래 전 뉴스에서 본 애기봉전망대는 낡고 조금은 무서운 안보관광지였다. 북한 주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상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점등식을 하던 뉴스 말이다. 그게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다양한 문화전시와 공연,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조강할아버지가 반긴다. 할아버지의 신력에 기대보려는 바램들이 소원나무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2층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8살 눈높이에서 조강과 북녘 땅을 바라볼 수 있단다. 실물과 대조해가며 살펴 볼 수 있도록 유리면에 지명을 적어 넣는 센스도 발휘했다.

 이곳은 김포, 김포의 역사도 한꺼번에 담아갈 수 있다. 조강(祖江)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행주대교 밑으로 흐르는 한강이 임진강과 만나면서 두 물줄기가 어우러져 서해에서 몸을 풀기 직전까지의 드넓은 흐름을 이르는데, 바다가 시작되는 원조의 강’, 여러 강물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으뜸 강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걸 줄여서 할아버지의 강’,  조강이 되었다나?

 생태관에는 20여점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경기도 젊은 작가들의 독창적인 작품들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밖에도 영상관과 평화관, 미래관, VR체험관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생태전시관과 조강전망대는 생태탐방로로 연결된다. 112m 흔들다리와 지그재그 모양의 산책로인 스카이포레스트 가든으로 이루어졌는데, 눈이 수북이 쌓인 탓에 오늘은 통행이 불가능하단다. 그나저나 저 탐방로는 연말마다 대형 성탄 트리로 변신한다고 했다. 오늘 저녁에는 김포시 주관으로 겨울밤 낭만주의보, 애기봉 크리스마스 행사도 열린단다. 생태탐방로 위를 수놓은 잔잔하고 고급스러운 조명과 매쉬LED로 표현한 희망의 메시지가 방문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나?

 우린 도로를 따라 전망대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파르지만 시간은 1/4 정도로 확 줄어든다.

 잠시 후 올라선 애기봉(愛妓峰, 155m). 병자호란 당시 평양감사와 기생 애기의 슬픈 일화가 어린 곳이다. 한양으로 함께 피난을 오던 중 감사는 강 건너 개풍군에서 청나라 오랑캐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고, 애기만 한강을 건너게 되었다. 매일 쑥갓머리봉(당시 이름)’에 올라 감사를 기다리던 애기는 병들어 죽었고, 사랑하는 이가 끌려간 북녘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세워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 전설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애기봉이라 쓴 비석을 세워줬다고 한다. 한편 망배단은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애기의 심정과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의 아픔을 함께 담았단다.

 평화의 종은 비무장지대(DMZ)의 철조망과 625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나온 탄피를 녹여 2018년에 만들었다. ‘아널드 슈워츠만 작가가 설계하고 국가무형문화제(112) 원광식 장인이 제작한 종탑은 ‘UN’을 형상화 했단다.

 조강전망대. 북한(개풍면 해물선전마을)과의 거리가 불과 1.4km로 남한에서 가장 가깝게 북한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해병대의 까다로운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도 세계에서 가장 큰 다국적 커피 전문점이 입점해 있었고, 빈자리 없이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야외전망대(루프탑 154)에는 망원경을 설치해 북한의 선전마을과 송악산 등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조강은 쌍마고지 앞에서 서해로 유입된다. 중립수역 왼쪽은 우리 땅인 유도와 강화도, 그 오른쪽에 북녘 땅인 쌍마고지를 시작으로 암실마을과 해물선전마을, 석류포마을 등이 들어서 있다. 송악산과 도고개산, 한터산도 조망된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조망된다. 군사분계선은 조강을 남북으로 가르다가 합수지인 관산포에서 왼쪽 임진강의 중앙으로 이어진다.

 내려올 때는 생태탐방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전망대를 둘러보는 동안 눈을 치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에 쫒긴 우리 부부에게 800m의 길이가 부담스러웠고 결국에는 도로를 따라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하긴 한국전쟁 때 순국한 해병대 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해병대전적비(아래 사진에서 평화생태전시관 뒤 봉우리)’조차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시간에 쫓겼으니 어련하겠는가.

 10 : 49. 평화생태전시관에서 들머리(2코스 종점이자 3코스 시점)까지는 산악회버스로 이동했다. 애기봉 평화생태공원 매표소에서 남쪽으로 250m쯤 떨어진 지점으로, 입구에 아치형 게이트가 세워져있으니 참조한다.

 DMZ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은 공생(共生)의 현장이다. 자건거길인 평화누리길’, 그리고 경기도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경기둘레길과 오손도손 함께 쓴다.

 10 : 50. 개곡리(월곶면)로 연결되는 산길을 올라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바닥에는 눈이 제법 쌓여있었다. 하지만 폭설일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와는 달리 발목에도 못 미칠 정도여서 걷는 데는 아무 지장도 없었다.

 10 : 55. 케언(cairn)이 반기는 개곡리 고개를 넘는다. 하성면(가금리)과 월곶면(개곡리)의 경계에 놓인 고갯마루이다.

 평화의길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점이다. 행여 갈림이라도 나타났다 싶으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고,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곳곳에 가이드리본을 매달아놓았다.

 11 : 01.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개곡1’. 이어서 애기봉로(409번길)을 따라 들녘으로 나간다.

 11 : 06. 탐방로는 마을 앞 널찍한 들녘으로 이어진다. 지역민들은 저 들녘에서 나오는 쌀을 밀다리 쌀(중국 길림성에서 벼 품종을 가져왔단다)’이라 부른다고 했다. 조강 밀물이 갯골따라 밀려 올라오면 나무로 만든 다리가 밀려 오른다는 데서 유래된 이 지역 지명에서 따왔단다.

 11 : 12. 잠시지만 개화천(開化川)의 둑길을 따라간다. 이어서 조강2 앞에서 다리를 이용해 하천을 건넌다.

 조강2. 마을이 제법 큰데도 인기척이 없었다. 기르는 개조차도 늦잠을 자는지 눈이 뽀얗게 쌓인 길에는 발자국 하나 없다.

 이후부터는 조강2 조강1를 잇는 차도를 따라간다. 아니 조강1리는 같은 2리보다 개곡리와 더 많이 왕래를 하는지 길바닥에 타이어 자국이 선명했다.

 길은 조강리의 들녘을 가로지르며 나있다. 이즈음 조강과 접한 널따란 들녘과 함께 애기봉의 조강전망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11 : 20. 조강저수지 수문(水門)에 이른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하나 더. 저수지에서 물을 대는 저 들녘 아래로는 조강’, 즉 한강과 임진강이 한 몸이 되어 흘러간다. 서해를 통해 한강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만 했던 물길이다. 그곳에 조강나루가 있었다. 한강 하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나루였고, 북한을 오가는 나루이기도 했다.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도로(저수지 제방을 따라간다)와 헤어져 저수지 동쪽 가장자리(東岸)를 따라간다. 그런데 초입을 철망으로 막아놓았으니 문제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그냥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1937)에 만들어졌다는 조강저수지는 캠핑과 낚시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저수지 가장자리를 따라 수십 개의 낚시 좌대를 만들고, 상부 광장에는 식수대와 화장실 등 캠핑에 필요한 편의시설들을 비치했다. 그나저나 저수지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하늘을 품었다. 그래서일까?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미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탐방로는 울안천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문수산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런데 높이가 500m에도 미치지 못하는 산이 저렇게 높이 보이는 이유는 뭘까?

 11 : 31. 잠시 후 도착한 김포 DMZ 평화의길 거점센터’. 코리아둘레길 걷기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이다. 커다란 테이블이 있는 거실에서 잠시 쉬어가거나, 걷기 여행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평화의길 말고도 해파랑·남파랑·서해랑 길에 관한 팸플릿들도 갖춰져 있었다.

 1인실과 다인실로 나누어진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한다고 했다. 이용료가 싼데다 시설까지 깔끔해서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편이란다. 1인당 이용료는 15천원(주말 2만원)이며, 홈페이지(http://dmz.callmom.co.kr/) 및 모바일 앱(DMZ김포)을 통해 사전 예약하면 된다. 예약문의(031-8049-3960)

 11 : 38. 탐방로는 용강로를 따라 마을(조강1)을 관통한다. 문수산을 정면에 놓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다 경기둘레길과 헤어지기도 한다. 경기둘레길은 오른쪽, 평화의길과 평화누리길은 왼쪽으로 간다.

 탐방로는 이제 월곶면소재지(군하리)’를 향해 남진한다. 이때 문수굿당이란 간판이 눈길을 끈다. 천공, 건진법사, 명도사에 이어 엊그제는 노보살까지,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무속 비선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상식처럼 되어버린 이 사회가 하시라도 빨리 정상으로 되돌아왔으면 좋겠다.

 이런 오지에 편의점이라니. 그래선지 포레스트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그나저나 금주령만 아니었으면 캔 맥주 하나쯤 냉큼 주워들었을 텐데...

 새로운 미래 100, 희망의 나무를 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기념해 나무를 심은 모양이다.

 조강리와 고막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를 넘는다.

 11 : 48. 고개를 넘자 라파엘요양원이 반긴다. 문수산 자락의 아름다운 경관을 벗 삼아 들어선 치유의 공간이다. 치매, 뇌졸증 등 노인성질환으로 고생하는 어르신과 그 가족들을 위한 요양시설로 1-2인실, 4인실, 부부실 등 다양한 규격의 생활공간과 재활을 위한 기구·프로그램을 구비하고 있단다.

 맞은편은 호기심놀이터이다. 아니 최근에 후에고 캠프라는 이름으로 변경됐다. 후에고(Juego)가 놀이·유희를 뜻하는 스페인어라니 외국어로 번역만 해놓은 셈이다. 대형 에어바운스·공릉공원·숲놀이터·실내놀이터 등 체험시설에다 감성 캠프닉을 더한 테마파크라고 보면 되겠다.

 11 : 52. 평화누리길 이정표(거리는 없고 방향만 표시되어 있다)가 이제 그만 용강로와 헤어지란다. 문수산 방향에 있는 고막2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이 즐비한 마을이다.

 고막천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리에 그런대로 괜찮은 할아버지라는 편액이 걸려있었다. 영어(Korea Good Grand Father)로 번역까지 해놓았는데 대체 뭐가 괜찮다는 얘기일까? 남부럽지 않은 노후를 즐기고 있다는 자랑일지도 모르겠다.

 12 : 01. 마을을 벗어나 문수산 자락으로 들어간다. 2코스의 최대 난관인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문수산의 8부 능선까지 올라가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정표가 종점인 문수산성 남문까지 2.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가파른 산길이 시작부터 겁을 잔뜩 주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100m쯤 올라가면 임도를 만나고, 이후부터는 완만한 경사로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심심찮게 나타나는 쉼터에서 잠시 쉬다 가면 그만이다.

 산길은 무척 고왔다. 경사가 완만할 뿐만 아니라, 눈에 들어오는 풍경까지 무척 아름답다.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을 헤집으며 올라가는데, 수십 년은 족히 먹었음직한 소나무들이 풍성한 가지를 휘휘 늘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 18.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갈림길이 나타난다. 문수산성 남문에서 시작된 평화의길 2코스가 이곳에서 둘로 나뉘면서 우회로인 ‘2-1’은 김포국제조각공원을 거쳐 종점인 통진성당으로 간다. 여기서 팁 하나. 이곳에서 2코스를 선택할 경우에는 3코스를 이어 걸어야 하고, 반대로 2-1코스를 선택하면 3-1코스를 걸어야 한다.

 이정표(문수산 정상 0.7km/ 김포국제조각공원 2.1km/ 청룡회관 0.7km)말고도 문수산길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4개 코스로 이루어진 탐방로가 문수산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모양새이다.

 가끔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바닥이 흡사 콘크리트를 부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자갈이 진흙이나 모래에 섞여서 굳은 퇴적암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코리아트레일을 함께 이어가고 있는 몽중루 작가님이 문수산은 원래 바닷속에 있었다고 알려주신다. 융기작용으로 솟아올랐기 때문에 바위들이 역암(礫巖)’ 아니면사암(沙巖)’일 것이란다.

 12 : 23. 이번에는 정자가 맞는다. 청룡회관에서 기증이라도 했는지 사람들은 이 정자를 청룡회관 팔각정이라 부르고 있었다. 참고로 청룡회관은 해병대 2사단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이다. 군인 및 그 가족들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데, 숙소·식당·목욕탕·이발소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정자에서의 조망은 뛰어났다. 월곶면뿐 아니라 하성면과 통진읍 일원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눈만 크게 뜨면 한강에다 파주의 심학산까지 주워 담을 수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나무계단이 맞는다. 그만큼 가팔라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길지 않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올라설 수 있다.

 12 : 33. 문수산성과의 첫 만남은 남아문(南亞門)’이다. 무지개를 닮은 홍예문(虹霓門)의 바깥 출입구에 문수산성의 문지 및 깃발에 대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문수산성(文殊山城, 사적 139)은 강화의 갑곶진(甲串鎭)을 마주보고 있는 문수산의 험준한 줄기와 해안지대를 연결하는 요새다. 1694(숙종 20) 강화 입구를 지키기 위해, 다듬은 돌로 견고하게 쌓고 그 위에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말하는데 장대 말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을 둘렀다. 성곽의 길이는 6,123m, 현재 남은 구간은 4,640m이고 해안 쪽의 없어진 구간 등 성벽이 없는 부분은 1,483m라고 한다.

 바깥은 홍예문이지만 안쪽은 문짝을 걸 수 있도록 사각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문수산성에는 희우루(喜雨樓, 남문), 공해루(控海樓, 서문), 취예루(取豫樓, 북문)  3개의 문루와 3개의 암문(暗門,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는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병인양요(1866) 때 성문 모두가 소실됐는데, 북문은 1995년 남문은 2002년에 복원됐다.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간다. 하지만 난 이정표(정상까지 0.4Km)가 가리키는 정상으로 향했다. 북녘 땅을 마주보며 통일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싶어서다. 정상은 마주보이는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12 : 38. 헬기장. 날씨라도 좋을라치면 단체 등산객들이 옹기종기 점심상을 차리는 곳이다.

 신년 해맞이 행사라도 열리는지 제단(祭壇)’을 만들어놓았다. 이밖에도 이정표, 문수산성 안내판, 문수산길 안내도 등 다양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나무계단이 반긴다. 추락위험이 있으니 등산로를 따르라는 안내판이 꼭 아니어도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성곽을 기다시피 올라갈 사람을 없을 것 같다.

 계단은 꽤 길었다. 하지만 버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잠시 후 감상하게 될 조망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지 싶다.

 12 : 47. 장대에서 북문으로 연결되는 능선 안부에 올라섰다. 이곳에서 길이 나뉘는데 오른쪽은 문수산 정상, 왼쪽은 전망대를 거쳐 북문으로 연결된다.

 일단은 문수산 정상부터 올라보기로 한다. 동쪽 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12 : 49. 이곳은 문수산’. 그러니 가장 높은 곳에 정상 표석이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참고로 김포의 금강이라고도 불리는 문수산(文殊山, 376m)은 이 산에 있던 문수사에서 이름을 차용했다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아산(比兒山)’, 여지도서에서는 비예산(肶晲山)’으로 적기도 한다. 부평 안남산(安南山)에서 북쪽으로 줄기가 이어져 읍치의 주맥을 형성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상에는 문수산성의 장대(將臺)’가 들어서 있었다. 지휘자의 중요성을 나타내기라도 하려는 듯, 또 하나의 성벽이 장대를 둘러싼 모양새이다. 2017년 군용 헬기장으로 사용되던 공터에 정면 3칸에 측면 1칸인 전각을 복원해놓았다.

 장군의 지휘소답게 장대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염하강(강화해협)이 강화도와 김포반도를 가르는데, 그 강을 신구 강화대교가 훌쩍 건너고 있다. 고려산, 혈구산, 별립산, 봉천산 등이 함께 조망됨은 물론이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문수산성의 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흡사 용이라도 되는 양 용틀임을 해가며 염하강을 향해 뻗어나간다.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능선에는 전망대가 놓여있었다. ! 월곶면과 대곶면도 눈에 들어오나 사진은 생략했다.

 12 : 54. 안부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반대편 능선을 탄다. 북녘 땅을 살펴볼 수 있다는데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12 : 56. 문수산 등반의 하이라이트랄 수도 있는 전망대에 올라섰다. 옛 전망초소(OP)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전망대를 들어앉혔다.

 염하(강화해협)부터 눈에 담아본다. 그 옛날 남과 북에서 모여든 고기잡이배들이 깃발을 펄럭이며 만선으로 출렁거렸을 그 바다다. 욕심도 이념도 부질없다는 듯 푸른 물결만 넘실거린다. 그 오른쪽은 한강의 하구역인 조강(祖江)’이다. 강화팔경인 연미정과 유도(留島)도 자신도 보아달라며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조강이 통째로 달려온다. ‘할아버지 강이라는 푸근한 이름(祖江)을 가졌지만 넘어갈 수 없는 한반도 유일의 남북 공동 이용 수역이다. 그 너머는 북녘 땅. 분명 우리 땅이건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다. 하시라도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북녘 동포들을 벗 삼아 소찬에 박주라도 나눠보고 싶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문수산 정상에 걸터앉은 장대가 한 폭의 풍경화가 되어 다가온다.

 13 : 11. ‘남아문으로 되돌아와 다시 평화의길을 이어간다. 남문으로 연결되는 성벽을 따라가면 된다. 탐방로는 성벽과 그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나있는 오솔길을 오락가락하며 이어진다.

 성곽에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옛날 군사들이 사용하던 깃발은 문기(門旗)와 인기(認旗, 소속을 표시한 깃발), 영기(令旗, 명령을 전할 때 사용), 순시기(巡視旗, 죄지은 자를 적발·처벌하는 巡軍이 소지) 등으로 구분된다.

 13 : 20. 산림욕장 갈림길(이정표 : 성동검문소 1.3km/ 산림욕장 1.0km/ 정상 0.8km)에서 성동검문소로 내려가야 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내려가지는 말자. 산림욕장 쪽으로 10m쯤 가면 조망이 툭 터지는 정자가 지어져 있으니 말이다.

 정자에 오르자 염하 너머 강화도가 성큼 다가온다. 혈구산과 고려산, 별립산 등 지난번 1코스 때 올려다보던 산들을 오늘은 발아래 놓고 살펴볼 수 있다.

 성곽 위를 걷기도 한다. 사적으로까지 지정된 문화재이기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따로 내놓은 길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성곽 덕분인지 심심찮게 조망이 터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강화해협은 물론이고 강화도까지 그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계속해서 내려가는 것만은 아니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13 : 39. 가파른 오르막의 끝에는 전망대가 있었다. 강화 지역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인데, 의자에 탁자까지 배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문수산성의 문지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 읽을거리까지 제공하고 있었다.

 13 : 50. ‘모란각 삼거리(이정표 : 문수산성 남문 0.5km/ 관리사무소 0.7km/ 정상 1.7km)’에서는 아예 성벽을 넘어버린다.

 이제 문수산성과는 헤어져야 한다. 조선시대로의 시간 여행을 끝낸다고나 할까? 아무튼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이 산등성이에 산성을 쌓아 올리며 품었을 선조들의 나라사랑 마음을 다시 한 번 새기며 발길을 돌렸다.

 잠시지만 무척 가파른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했다. 곧장 내려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겨우 고도를 낮추어간다.

 이후부터는 곱디고운 산길이 이어진다. 보드라운 흙길에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 흡사 양탄자 위를 걷는 듯 폭신폭신하다. 거기다 경사까지 느끼지 못할 정도이니 이 아니 좋을 손가.

 14 : 01. 종점 조금 못미처에서 토지지신(土地之神)’을 모시는 제단을 만났다. 지신(地神)은 토지나 대지, 또는 그 힘을 관장하는 신이다. 일부러 찾아와서 소원을 빌 만큼 영험해보이지는 않는데 누가 세웠을까?

 14 : 06. ‘김포장례협동조합(문수산수목장)’ 뒤쪽으로 내려서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출발지로 명시된 문수산성 남문은 장례협동조합의 맞은편 언덕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지만, 코스안내도와 이정표 등 2코스의 출발지임을 알리는 모든 시설물들이 모두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

 평화의길(2코스) 안내도는 아치형 게이트 오른쪽에 세워놓았다. 방문 인증 QR코드는 평화의길 이정표 기둥에 2코스와 2-1코스가 함께 붙어있다. 아무튼 오늘은 9.62km 3시간 20분에 걸었다. 후반부의 가파른 산길과 정규 코스를 벗어나 문수산 정상까지 다녀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서해랑길 64코스(궁리항 - 태안관광안내소)

 

여 행 일 : ‘24. 12. 14()

소 재 지 : 충남 홍성군 서북면 및 서산시 부석면, 태안군 남면 일원

여행코스 : 궁리항서산A지구방조제간월교차로간월암창리교차로창리항서산B지구방조제태안관광안내소(거리/시간 : 13.2km, 실제는 15.03km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4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산남부·태안남부 구간(64-68코스 및 지선1-3)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산군의 서쪽해안선을 따라 북서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1(전체 5), 수월한 코스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궁리항(충남 홍성군 서부면 궁리)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에서 내려와 좌회전, 상촌교차로(29번 국도)에서 96번 지방도를 타고 안면방면으로 8km쯤 달리다가 궁리교차로에서 내려오면 된다. 서해랑길(서산 64코스) 안내도는 궁리 어판장 마당에 설치되어 있다.

 궁리항에서 서산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서진, ‘서산B지구방조제까지 가는 13.2km짜리 여정으로, 절반가까이를 방조제를 걸어야하는 유별난 코스이다. 하지만 철새를 실컷 구경할 수 있는가 하면, ‘간월암이라는 명소를 끼고 있어 심심해 할 틈이 없는 멋진 코스이기도 하다.

 어판장 지붕의 조각상. 낚시 명소인 궁리항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고기를 막 낚았는지 히트를 외치며 낚싯대를 잡아채는 아버지, 뒤에서는 어린 아들이 두 손 들어 환호성을 지른다. 어머니와 딸은 한 발 뒤에서 그 광경을 잔잔히 지켜보고 서있다. 정감이 뚝뚝 떨어지는 풍경이라 하겠다.

 09 : 26. ‘남당항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어깨를 맞댄 바닷가는 선착장으로 변해있었다. 하시라도 입출항이 가능한 선착장이 버젓이 있는데도 말이다. 모래사장 위로 배를 끌어올리려면 꽤나 힘이 들었을 텐데도.

 도로변은 숫제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전망 데크에서 천수만의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했는가 하면, 인생샷이라도 건지라는 듯 저런 천국의 계단도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서 바라본 궁리항’. ‘궁리(弓里)’란 지명은 포구의 모양이 활처럼 휘어있다는데서 유래했다. 천수만(淺水灣)의 포구답게 봄에는 꽃게와 주꾸미, 가을에는 대하와 꽃게, 겨울에는 간재미 등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방파제 끝에는 놀궁리 해상파크라는 해상 놀이공원이 들어섰다. ‘어촌뉴딜 300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공간인데 궁리라는 지명이 누군가의 재치가 더해지면서 놀 궁리라는 위트 넘치는 또 다른 지명으로 변했다.

 길은 서산 A지구 방조제를 향하여 간다. 길고도 긴 방조제의 둑 위로 도로(천수만로/96번 지방도)’가 나있기 때문이다.

 천수만 풍경. 이곳 궁리포구 일대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광활하면서도 잔잔한 천수만을 앞에 두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거기에 명품 낙조까지 더해지면서 홍성8의 한 자리까지 꿰차고 있다나?

 서산A지구 방조제 배수갑문.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간월호의 수위를 조절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참고로 간월호(看月湖)는 천수만의 물길이 막히면서 생긴 인공호수이다. 1980 5월에 착공 1982 10월 서산시 부석면 창리와 홍성군 서부면 궁리를 잇는 서산A지구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면서 담수호가 형성됐다.

 09 : 38. 탐방로는 과학관교차로 못미처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배수갑문교를 건넌다. 서산A지구 배수갑문의 수로에 놓인 다리다. 이정표(종점 12.4km/ 시점 0.8km) 64코스의 하이라이트인 간월암까지 4.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다리를 건넌 다음, 이번에는 궁리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간다.

 이후부터는 천수만로를 따라간다. 서산시 부석면(간월도리) 홍성군 서부면(궁리)을 잇는 방조제의 둑 위로 4차선의 도로(천수만로)를 냈다. 서해랑길은 도로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따로 만들어놓은 자건거길을 빌려 쓴다.

 눈에 들어오는 간월호는 숫제 바다이다. 이곳 천수만은 철새들의 국제 정거장이다. 그중에서도 간월호 일대는 국내 최대 철새도래지로 꼽힌다. 철새들이 마음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인공 섬까지 만들어 놓았을 정도다. 하지만 때를 못 맞춘 탓인지 인공 섬은 물론이고 철새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09 : 55. 둑 중간쯤에는 철새 탐조대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방조제의 준공과 함께 간월호 주변은 국내 최대의 철새도래지가 됐다. 매년 11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수십만 마리에 달하는 철새가 찾아온단다. 추수 후 농경지에 남겨지는 이삭과 호수에 서식하는 어류, 양서류 등이 월동 조류의 주 먹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철새탐조대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두고두고 회자될 건설사가 적혀있다. 1980년대 시작된 서산 간척지사업 7.7km의 방조제를 축조해 4,660만평의 간척지를 조성하는 대역사였다. 하도 대규모이다 보니 마지막 물막이 단계에서 난관에 부딪혔던 모양이다. 9m에 달하는 조수간만의 차와 초당 8.2m의 빠른 유속이 승용차만한 바윗덩어리조차 흔적도 없이 쓸어내 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정주영 회장이 고철로 쓸 23만 톤급(길이 322m, 높이 27m) 폐유조선을 가라앉히는 공법을 생각해냈고, 그게 성공하면서 정주영 공법이란 이름으로 세계 토목건설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나?

 이후로도 둑길은 한참이나 이어진다. 하긴 방조제의 길이가 3km(A지구만)도 넘는다니 어련하겠는가.

 방조제가 끝나갈 즈음 만나게 되는 농경지. 논에 물이 잡혀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천수만 여행 때나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다. 천수만을 찾은 철새들에게 먹이터와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 수확을 마친 논에 물을 가득 채워놓는 것이다. 물론 정부에서 적절한 보상을 해주고는 있지만.

 10 : 13. 둑길을 걷다보면 길은 자연스레 홍성군에서 서산시 부석면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방조제 끝에서 간월교차로를 만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계속해서 천수만로를 고집하는 자전거길과 헤어져, 해안도로(간월도2)를 새로운 길벗으로 삼기 때문이다.

 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건너자 화장실까지 갖춘 널찍한 주차장이 맞는다. 초입의 글자조형물이 간월도에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이제 길은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서산A지구방조제로 인해 물길이 끊긴 천수만을 눈에 담으며 걷는 구간이다.

 도로변에는 통창을 통해 천수만을 바라볼 수 있는 뷰 맛집이 꽤 여럿 들어서 있었다. 무인 카페인 ‘Cafe 월도리684’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저곳은 커피보다 수제맥주에 특화되었나 보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천수만을 낀 도로, 곳곳에서 멋진 뷰가 터지는데 그냥 놓아둘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라는 듯 도로변을 따라 두어 곳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전망대에 오르자 천수만이 드넓게 펼쳐진다. 천수만 건너편에서는 안면도가 수평선을 대신하고 있다. ! 물 빠진 해변에서 조개를 잡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했다. 길을 가다보면 얕은 물에 들어가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도 간혹 눈에 띈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간월도의 새로운 명물로 떠오르고 있는 스카이워크가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10 : 27. ‘간월도 스카이워크는 곡선의 미를 한껏 살린 모양새이다. 좌우로도 모자라 상하로까지 곡선의 형태를 취했다.

 툭 터지는 조망을 실컷 눈에 담다보면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광장에 이른다. 그곳에는 예쁘장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보통 요물이 아니다. 동그라미 안에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간월암을 품을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 있는 명소로 꼽히는 이유이다.

 구름을 뚫고 내려온 햇살이 간월암 주변을 조명처럼 비춘다. 간월암은 분명 섬, 아니 돌섬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암자다. 하지만 지금처럼 썰물 때면 산봉우리에 걸터앉은 작은 암자가 된다. 아름다움에 신비함까지 더한 명소라고 보면 되겠다. ‘서산9 ‘3으로 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스카이워크를 빠져나오니 굴 따는 여인들 조형물이 반긴다. 하단에 적힌 글을 옮겨본다. 간월도 어리굴젓은 고려 말기부터 조정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구전에 의하면 무학대사가 태조에게 간월도에서 난 어리굴젓을 진상했단다. 간월도의 굴은 자라는 과정이 특이하단다. 어릴 때는 돌과 바위에 붙어 석화(石花)로 자라다가 다 크면 떨어져서 갯벌에서 살아간다나? 그래서 토굴(土花)’로 불리기도 하는데, 육질이 단단하고 굴 특유의 바다냄새가 풍부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 굴로 젓갈을 담갔다니 임금님의 밥상에 올라가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10 : 32. 호로병의 목처럼 생긴 간월도(看月島) 입구. 간월도가 원래 섬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풍경이다. 맞다. 간월도는 천수만에 떠있는 작은 섬이었다. 안면도 북부를 관할하는 안면읍에 속해있었지만 1984년 천수만 일대의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부석면과 육지로 이어지면서 서산시 부석면으로 편입됐다.

 간월도 입구는 굴탑을 중심으로 작은 광장을 만들어놓았다. 음식물을 소재로 한 유별난 기념탑으로 매년 정월 대보름날 굴의 풍요를 위한 굴부르기제까지 지낸다고 한다. 100년 이상 이어져온다는 이 전통행사는 굴왕제 또는 군왕제로도 불리는데,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은 아낙네 들이 소복을 입고 마을 입구에서 춤을 추며 출발해 굴탑 앞에 도착하면 제물을 차려 놓고 굴 풍년 기원제를 지낸단다. 그런 다음 채취한 굴을 나눠 먹는다나? 이때 관광객들도 함께 즐길 수 있게 시식이 가능하단다. 굴 채취가 간월도 주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는지 알 수 있는 풍경이다.

 간월암은 서산, 아니 충남에서도 유명 관광지로 꼽힌다. 돌섬에 걸터앉은 사찰의 아름다움에 더해 선승(禪僧) 만공의 광복 기도발이 먹혔다는 소문 덕분이다. 그래선지 주차장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차량들로 한 가득이다.

 10 : 36. 주차장을 지난 길은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 건너에 작은 섬이 있다. 아니 섬이라기에는 민망한 크기라, 커다란 암초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린다. 그 돌섬에 신비로운 사찰 간월암(看月菴)’이 있다. 물이 빠지면 암자까지 50m 정도 걸어서 들어갈 수 있지만 물이 차면 암자는 바다에 갇힌다. 암자가 바다 위에 떠있는 형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간월암이 더 신비롭게 보이는 이유이다.

 가람배치도. 사진처럼 바닷물이 차면 물 한 가운데에 둥둥 뜬 형상이 된다. 그나저나 간월암은 아담했다. 법당인 관음전을 비롯해 산신각과 용왕각, 범종각까지 전부 한눈에 들어온다. 그렇다고 허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곳곳에서 만공선사의 숨결을 음미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간월암의 금당(金堂)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 대신 관음보살을 모시는 원통전이다. ‘어떤 이야기든 다 들어준다는 관음보살은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자비의 화신이다. 원통전은 그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고뇌를 주원융통(周圓融通, 두루 막힘이 없는 상태)하게 씻어준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관음보살을 모신 건물을 관음전이라 칭하는 절들이 많단다. 하나 더. 금당에는 간월암이라고 적힌 편액이 하나 더 붙어있었다. 일주문이 하도 작다보니 편액을 붙일만한 공간이 없었나보다.

 법당에는 유형문화재(충남) 목조보살좌상 말고도 무학대사, 만공선사, 벽초대사(만공의 제자)의 영정이 놓여 있었다. ‘간월암은 무학대사가 달빛을 보고 득도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만공대사는 암자를 중건했다. 조선불교 초기의 대표적 선승인 무학대사와 근대불교 선종의 중흥기 법통을 이은 만공선사의 정신이 간월암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나 더. 만공스님은 만해스님이나 용성스님처럼 직접 독립운동 일선에 나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원에서 정진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선학원을 만들어 한국불교 말살 정책을 피던 조선총독부의 핍박에서 벗어나 독신 수행가풍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스스로를 인간 부처라 일컫고 근세 선불교의 중흥을 이끈 괴짜 스님 경허대사의 셋째 제자이기도한데, 조계종 최대 문중 중 하나인 덕숭문중은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으로부터 법맥(法脈, 스승과 제자로 엮어진 인맥)을 잇는다.

 범종각과 산신각이다. 산이 있을 리가 없는 이런 꼬맹이 돌섬에 산신각이라니. 만공선사에게 이 돌섬은 산하가 압축된 산수석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바닷가. 그것도 섬에 들어앉았으니 용왕각은 선택이 아닌 필수일 것이다. 그런데 용왕이 아닌 부처님이 용을 타고 있다는 게 특이하다. 바다에서 파도를 다스리고 사람을 지켜준다는 해수관음상도 눈에 띈다. 용왕각 곁에서 소원 초를 켜려고 찾아오는 이들을 맞고 있었다.

 마당에는 덩치 큰 사철나무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안내판은 무학대사의 지팡이라고 알려준다. 무학대사가 간월암을 떠나면서 짚고 다니던 주장자(拄杖子, 수행승들이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를 뜰에 꽂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나뭇가지가 다시 살아나면 불교가 다시 흥하리라고 예언하셨다나?

 하지만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으로 간월암은 폐사됐다. 잊혀진 이름이던 간월암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건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다. 수덕사를 중창하고 마곡사 주지를 지내던 만공선사(滿空禪師, 1871-1946) 간월암 고목나무가 다시 살아나 잎이 핀다는 소문을 듣고 간월암을 찾았다. 그는 고목나무에서 새파란 잎이 돋아나 있는 것을 보았고, 그곳에 머물며 암자를 짓고 손수 간월암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만공스님은 1942 8월부터 3년 동안 이곳에서 조선독립을 기원하는 1000일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기도를 마치고 회황한 지 3일 만에 광복을 맞이했다나? 그런 이야기가 퍼지면서 간월암도 세간에 알려졌다. 그래선지 공양실 앞, 테라스풍의 공간에는 소원 연등이 덕지덕지 걸려있었다. 간절한 소원 하나 없는 중생이 어디 있겠는가. 만공선사의 소원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자신들의 바람도 이루지기를 비는 간절한 소원이 담겼을 것이다. 나도 빌어본다. 지친 몸과 마음의 무거운 짐들을 한꺼번에 다 내려놓는 올 한해가 될 수 있도록 해주소서.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담장으로 다가가자 고요한 서해가 앞마당인 양 펼쳐진다. 저 멀리 고깃배 몇 척이 한가롭게 떠 있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스카이워크가 다가온다. 그 뒤로는 천수만의 남단이 드넓게 펼쳐진다. 간월도는 천수만의 북쪽 중앙에 해당하기 때문에 가깝게는 궁리항과 홍성 스카이타워가 보이고, 날씨라도 좋을라치면 천수만 입구의 보령화력발전소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간월암은 낮보다 저녁 무렵이 더 사람들로 붐빈다고 했다. 간월암을 배경으로 하늘과 바다가 붉게 물들고 마침내 장엄하게 사그라드는 모습이 잊지 못할 감동을 준다나?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빌려왔다.

 10 : 48. 간월암에서 나와 왼쪽을 보면 긴 방파제 끝에 빨간 등대가 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진행하는 등대 스탬프투어에 포함되어 있는 곳인데, 어둠이 내리면 방파제와 등대에 조명이 들어와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해준다고 했다.

 간월도항. 방파제는 물론이고 선착장과 물양장까지 갖춘 의젓한 항구이다. 거기다 썰물인데도 저렇게 물이 찰랑거리니 천혜의 항구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꼬맹이 고깃배 열대여섯 척이 정박하고 있어 한산함 그 자체였다. 인근 수역에서 우럭·감성돔·농어 등이 잘 잡힌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10 : 55. ‘굴탑광장으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관광 명소답게 도로변은 식당이 즐비했다. 하나같이 간월도 어리굴로 만든 영양굴밥을 메인메뉴로 내걸고 있다. 맞다. 굴은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다. 선사시대의 조개더미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될 정도로 오랜 세월 바닷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왔다. 갯바위에 덕지덕지 붙어있어 어려운 해루질 없이도 쉽게 채취할 수 있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청산별곡(靑山別曲)이 그 증거 중 하나다.

 식당이 아닌 곳에서는 어김없이 어리굴젓을 팔고 있었다. 좌판 덕장에서는 인근 해역에서 잡아 올린 생선이 꼬실 꼬실 말라가고 있었다.

 천수만은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라고 했다. 그만큼 먹을거리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길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이런 풍경을 만난다. 저게 맹추위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네 밥도둑으로 변해간다.

 길은 천수만로(96번 지방도)’를 향해 간다. 그리고 간월·영농교차로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 구간에서도 천수만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저 갯벌은 어민들의 일터다. 다 자란 굴이 돌이나 바위에서 떨어지면 그것을 주워온다. 뻘로 범벅이 된 굴은 저 갯샘에서 깨끗이 씻을 게고 말이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길고 긴 방조제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 후 우리가 걸어가야 할 둑길이다. 그 시선 끝에는 토끼섬과 창리포구가 겹으로 놓여있다.

 11 : 10. ‘간월·영농교차로(이정표 : 종점까지 7.7km)’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런 다음 간월도리와 창리를 잇는 서산A-2지구 방조제를 탄다. 둑 위로 천수만로를 냈고, 서해랑길은 오른편 가장자리를 따라 따로 내놓은 자전거길을 빌려 쓴다.

 방조제가 만들어낸 들녘. 얼마나 넓은지 마한시대 이곳에 있었을 웬만한 나라 하나쯤은 너끈히 먹여 살릴 수도 있겠다. 그 끄트머리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은 도비산일 것이다. 서해랑길의 지선인 ‘64-2코스 답사 때 도비산의 허리 어림을 지나간다.

 도로변에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서산시를 상징하는 만년청(萬年靑)’이라는데, 내한성이 강하고 사계절 푸른 것이 변함없이 씩씩한 서산시민의 기상을 나타낸다나?

 들녘너머 야산에는 서산 버드랜드가 걸터앉았다. 이곳 천수만 일대는 우리나라 최고의 철새도래지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 철새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서산시에서 철새를 테마로 한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철새전시관, 4D영상관, 둥지전망대, 야외광장 등으로 구성되는데,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둥지전망대는 배를 형상화한 하부 구조물과 역동적인 회오리 모양의 상부 구조물이 철새 알을 상징하는 다양한 크기의 원형 공간들과 잘 어우러지는 전망대로 알려진다.

 11 : 41. 옛날 닭섬이라 부르던 곳에는 간월휴게소가 들어서 있었다. 주유소 말고도 식당 두엇이 있어 간월도나 창리포구로 이동하는 길에 들러 한 끼를 때우기 딱 좋은 곳이다.

 길은 버드랜드 교차로를 향해 간다. 도로 건너에는 천수만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주변에서 주워온 듯한 바위들을 진열해 놓은 풍경인데, 그 뒤에서 토끼섬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건물에 쓰인 글자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버드랜드가 가까워졌다. 서산 천수만에서 ‘2025 아시아 조류박람회(Asian Bird Fair 2025)’가 열릴 예정이라고 했다. 울산과 순천에 이어 국내 세 번째인데, 26개국 300명이 넘는 대표단과 연인원 1만 명이 참여하는 세계적인 조류행사라고 한다. 저런 시설이 있었기에 유치가 가능했지 않나 싶다.

 천수만은 86 7 6029개체의 철새가 확인된다고 했다.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으며 날갯짓을 하는 저 철새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천수만을 따라가는 서해랑길은 곳곳에서 인간과 야생조류가 공존해나가는 가슴 따뜻한 풍경들을 보여준다.

 11 : 53. 버드랜드 진입로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굴다리 입구에 아라메길의 안내도와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라메는 바다의 순수한 우리말인 아라에 산의 우리말인 를 더한 합성어로 청정한 바다와 수려한 숲길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서산시 전역에 17개 구간을 개설할 예정이라는데, 현재 1개 구간 5개 코스만 완성되었단다.

 버드랜드 조형물. 간척사업으로 인해 천수만 주변은 곳곳에 대단위 농경지가 조성됐다. 그 들녘에 추수 후 이삭이 남겨졌고, 거기에 수심 낮은 갯벌의 바다 생물들이 보태지면서 세계적인 철새도래지가 되었다.

 11 : 55  12 : 25. 굴다리를 지난 탐방로는 또 다시 천수만로로 올라간다. 하지만 산악회에서 간월호(창리) 쉼터공원에 잠시 들렀다 가란다. 점심상을 차려놓았으니 끼니를 먼저 때우고 잔여구간을 이어가라는 것이다. 공원은 굴다리 위로 올라선 다음 횡단보도를 건너면 된다.

 공원에는 화장실과 배드민턴장 등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점심상은 차릴만한 주차장도 물론 갖추었다.

 간월도로 향하는 길목에 조성해놓은 공원(‘해당화공원으로도 불리는 모양이다)은 천수만을 감상하며 쉬어갈 수 있는 휴식공간이다. 낮에는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고, 저녁에는 노을빛으로 아름답게 물드는 바닷가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단다.

 바다는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홍성으로 들어서면서 사라졌던 해식애가 다시 나타났는가하면, 잔물결조차도 일지 않는 천수만에는 바다낚시 좌대가 기다랗게 펼쳐진다.

 공원 근처에는 파티엔이라는 카라반도 들어서 있었다. 뷰 맛집으로 소문난 곳인데, 부대시설인 카페의 외모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12 : 25. 굴다리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이후부터는 천수만로를 따라간다. 오른쪽 가장자리에 잇대어 내놓은 자전거길을 따라 부남호 방향으로 간다.

 12 : 37. ‘창리교차로(이정표 : 종점까지 1.9km)’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이어서 창리2을 따라 창리 포구로 간다. 포구 풍경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천수만로를 따라갈 수도 있다. 이럴 경우 현대 서산농장 앞에서 서해랑길과 다시 만난다.

 12 : 43.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꼬맹이 고깃배 서너 척이 정박해있는 창촌나루터가 반긴다. 뒤로 보이는 구릉지대는 파티엔 카라반이 들어서 있는 검조도’,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변한 섬이다.

 이후부터는 해안길을 따라간다. 바닷가, 그것도 포구를 낀 바닷가답게 회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12 : 47. ‘창리 선착장은 낚시꾼들 사이에서 소문난 곳이다. 선착장 근처에서 낚시를 즐길 수도 있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좌대 낚시의 재미에 푹 빠져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창리포구의 역사는 조선시대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군의 배를 매어두던 주사창(舟師倉)이 있었는가 하면, 왜구의 침략이 잦자 태종이 도비산에서 강무(講武, 왕의 앞에서 실시하는 훈련)를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선착장이나 물양장 등 부대시설은 간월도항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묶여있는 배의 숫자나 크기는 간월도항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그만큼 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우럭이나 참돔, 점성어 등이 잘 잡힌다고 했다.

 수산복합단지라도 조성했는지 회 타운도 따로 만들어놓았다. 주차장도 차들로 붐빈다. 간월도로 관광 오는 사람들이 먹거리는 이곳에서 찾는 모양이다. 아니 이곳에도 구경거리가 있다고 했다. 매년 정월 초사흗날 창리 영신제가 어촌계 주관으로 열린다는 것이다. 임경업 장군(1594-1646)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당굿형 동제로, 300년 넘게 이어져오는 전통 행사라고 한다.

 창리포구 입구. 공중화장실 앞에 서해랑길 64-1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지선이라서 64코스의 종점에서 출발시킬 이유가 없었나 보다. 아무튼 2주 후에는 이곳에서 64-1코스를 시작하게 된다.

 서산64-1코스 안내도. 이곳 창리포구에서 출발 부남호의 동쪽 호안을 거쳐 부석버스정류장에 이르는 11.9km짜리 코스다.

 12 : 54. 창리포구를 빠져나와 천수만로(이정표 : 종점까지 0.7km)’로 올라선다. 서해랑길은 횡단보도를 건너 현대 서산농장 입구로 간다. 정주영 회장이 북한으로 1001마리 소떼를 몰고 간 일화가 깃든 곳으로, 지금은 당시 북으로 실려 갔던 한우의 후손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단다.

 서해랑길은 이제 서산B지구 방조제를 탄다. 초입에 부남호(浮南湖)의 배수갑문이 있다.

 서산B지구 방조제도 길이가 1.228m나 된다. 창리포구와 건너편 당암포구를 잇는 이 방조제는 천수만의 끝이기도 하다. 둑이 완공되면서 천수만의 내륙 쪽 일부가 담수호와 간척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부남호는 다시 바다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방조제(1228m) 가운데 일부 구간을 헐어 바닷물이나 배가 드나들게 한다는 것이다. 2019년부터 수질이 6등급 이하(화학적 산소요구량 기준 10mg/L 이상)로 악화되면서 담수호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간척사업 45년 만에 역간척사업으로 변해 세상을 다시 떠들썩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13 : 08. 방조제 중간쯤, 그러니까 태안과 서산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태안군 관광안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 안내도(태안 65코스) 안내도는 관광안내소 곁에 세워놓았다. 오늘은 15.03km 3시간 30분에 걸었다. 간월암을 둘러보느라 지체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꽤 빨리 걸은 셈이다. 하긴 날씨가 춥다보니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광안내소 옥상은 전망대로 꾸며져 있었다. 부남호와 천수만 방향에 망원경은 물론이고 조망도까지 세워 실물과 비교해가면서 구경할 수 있도록 했다.

 천수만 풍경. 좌대낚시터 뒤로 보이는 섬은 황도(荒島)’인데, 연도교(連島橋)로 안면도(安眠島)와 연결된다. 본섬에 딸린 꼬맹이 섬이니 섬 속의 섬이라고나 할까? 곁에는 그보다도 훨씬 더 작은 솔섬이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오늘도 함께 걸었다. 부부(夫婦)란 결혼한 남편과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한자에서 부()는 지아비, ()는 지어미라는 뜻으로 둘이 나란히 서있는 형상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앞서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의 마음이 멀어져 다른 한 사람이 눈물을 훔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짝으로 생각하면서 함께 나란히 걸어야하는 이유다. 트레킹 덕분이지만, 오늘도 우리 부부는 그런 삶의 지혜를 실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