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아르메니아 – 코르비랍 수도원(Khor Virap Monastery)
여행일 : ‘23. 5. 31(수) - 6. 12(월)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①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③ 아라라트((Ararat) : 아라스강(Aras River) 유역으로 BC 2세기-AD 5세기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다. 비옥한 평야와 동서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접하고 있어 ‘아르타샤트(Artashat)’가 수도로 번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우마이야왕조·셀주크 터키·몽골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며 도시가 파괴되고 폐허로 변했다. 1813년에는 러시아와 이란 사이에 굴리스탄(Gulistan) 조약이 체결되어, 아라스강이 아르메니아와 튀르키예의 국경이 되었고,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는 아라라트 평야의 절반을 잃게 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의 성산인 ‘아라라트 산’으로의 접근도 불가능해졌다.
▼ 예레반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성산인 ‘아라라트 산’을 보다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다(예레반에서도 볼 수는 있다). 그렇다고 산으로 가는 것은 아니고, 튀르키예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호르비랍 수도원’으로 가서 ‘아라라트 산’을 눈, 아니 가슴에 담는다. 아라라트 산이 튀르키예에 속해 있어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주차장에 이르자 나지막한 언덕에 걸터앉은 ‘호르비랍 수도원’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이다.

▼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 수도원은 나지막한 산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야 한다.(사진은 내려오면서 찍은 것이다)

▼ 무릎이 시원찮은 사람들은 도로(특별한 경우에만 통행이 허락되는 듯)를 따라 올라가면 된다. 나는 도로를 선택했다. 산자락에 들어서있는 공동묘지를 곁눈질로라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 공동묘지는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특이한 돌 십자가 ‘하츠카르(Khachkar)’의 용도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 하치카르 십자가의 아래는 현세의 지상을 뜻하고 위는 천상의 세계를 뜻한다고 했다. 이 땅에 살다가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도구인 셈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었을 때 노잣돈 개념으로 하치카르를 만들기도 했다. 공동묘지에 널리다시피 한 수많은 하치카르들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 잠시 후 이른 수도원 담벼락은 ‘하츠카르(Khachkar)’의 전시장으로 만들어놓았다. 문양이나 하단의 문구(읽을 수는 없었지만)가 제각각인 하치카르가 열 손가락으로는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많이 도열해 있었다.

▼ 정문에 이르면 ‘코르비랍(Khor Virap)’이 수도원(monastery)일 뿐만 아니라 방어를 위한 ‘성채(fortress)’용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의 높이가 6-8m에 두께도 2-3m나 된다니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라 하겠다.

▼ 성문 앞 공터는 전망대 노릇을 톡톡히 수행한다. 드넓게 펼쳐지는 평원 너머의 ‘아라라트 산’이 지척으로 다가와 마주선다. 조지아를 달리는 카프카스가 ‘신화의 땅’이라면 아르메니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카프카스는 ‘성서의 땅’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낳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시발점이자 노아가 방주를 댔다는 성지이기도 하다.

▼ 안으로 들어서자 종탑과 돔이 있는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662년에 지어진 ‘성모교회’로 수도원의 본당쯤으로 보면 되겠다. 이곳에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 이하 ‘그레고르’)를 위한 교회가 생긴 것은 ‘네르세스 3세(Nerses Ⅲ)’ 때인 642년으로 추정된다. 지하감옥 위에 대리석 건물을 짓고 ‘네르세스 교회’로 부른다. 그 후 1,000년 동안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다 1662년 현재와 같은 수도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성모교회로 불리는 저 건물이 폐허 위에 세워졌고, 수도원, 식당, 사제관 등이 만들어졌다.

▼ 수도원의 역사는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를 기독교로 만든 ‘성 그레고르’가 이곳의 지하 감옥에 13년 동안 갇혀 있던 데서 시작된다. 그레고르의 아버지인 ‘아낙’은 페르시아가 고용한 자객으로 아르메니아 왕을 죽인다. 때문에 어린 그레고르는 카파도키아(튀르키예)에서 자라며 기독교 사제가 된다. 이후 이교(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아르메니아로 돌아와 기독교를 전파하다 ‘티리다테스 3세(Tiridates Ⅲ)’에게 잡힌다. 왕은 아버지를 죽인 죄와 이교를 전파한 죄를 물어 전갈과 뱀이 우굴 거리는 땅굴에 가두었다고 한다. 이곳이 ‘깊은 또는 지하 감옥’이라는 뜻의 ‘코르비랍’으로 불리는 이유다. 당시 왕은 자신과의 혼인을 거부하는 ‘흐립시메’를 비롯한 33명의 수녀를 죽이는(이때 유일하게 살아남아 조지아로 도망간 수녀가 ‘니노’라는 설도 있다) 등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그레고르를 구원해 준 것은 티리다테스의 여동생 ‘호스로비둑트(Khosrovidukht)’였다. 그녀는 꿈에서 그리고르를 풀어주라는 계시를 받았고, 그것을 오빠에게 말해 그리고르를 석방시켰다고 한다. 호스로비둑트와 왕비인 아쉬켄(Ashkhen)이 이미 기독교 신자였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석방된 그레고르는 티리다테스의 병을 고쳐 주었고, 이를 계기로 세례를 받은 티리다테스가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된다. 세계 최초의 기독교 왕국이 탄생한 것이다.

▼ 외벽에 그려진 저 문양은 ‘해시계’라고 했다.

▼ 안으로 들어가면 ‘성모자상’이 반긴다. 돔 아래, 반원형의 벽면에 제단을 만들고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모셨다.

▼ 아르메니아에서 만난 여느 교회들처럼 이곳도 돔에 뚫어놓은 창을 통해 빛살이 들어온다. 하지만 별도의 조명시설을 해놓아 다른 곳보다 훨씬 밝았다.

▼ 제단 앞 양옆으로 두 개의 벽화가 걸려 있었다. 왼쪽은 아라라트 산을 배경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두 사도 ‘바르톨로메우스(St. Bartholomaeus)’와 ‘타데우스(St. Thaddeus)’다. 오른쪽은 아르메니아에 기독교가 뿌리내리도록 한 두 사람, 즉 ‘성 그레고르’와 ‘티리다테스 3세’이다.

▼ 그밖에도 몇 점의 성화가 더 걸려 있었다. 그중 하나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는 예수님을 그렸다.

▼ 요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일 것이다.

▼ 북서쪽 모서리에는 바실리카 양식의 ‘성 그레고르교회’가 자리한다. 동방정교의 특징이랄 수 있는 돔이나 십자가가 없는 건물은 얼핏 교회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예배당을 만날 수 있다.

▼ 파사드의 ‘하츠카르’. 뭔가도 적혀있으나 알아 볼 수는 없었다. 이곳은 ‘그레고르’ 성인의 땀과 피가 스며있는 신성한 장소다. 대충 그런 얘기가 적혀있지 않을까?

▼ 예배당의 제대에는 이콘 형식으로 그려진 성모자상을 모셔놓았다.

▼ 주교 복장을 한 ‘그레고르’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참고로 ‘그레고르’는 아르메니아에서 사도교회의 불을 밝힌 사람(the Illuminator) 또는 개척자로 불린다고 한다. 현재의 에치미아진(Echmiadzin) 교회 자리에 순교자 묘지를 만들었고, 이게 나중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모태교회로 발전했기 때문이란다. 이후 314년까지 왕과 사도교회를 위해 봉사하다가 328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다.

▼ 다른 그림은 그레고르가 티리다테스 왕을 치료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이들 옆에서 ‘호스로비둑트 왕비’가 치료를 돕고 있었다.

▼ 예배당 옆, 바닥에 뚫린 구멍이 눈에 띈다. 그레고르가 13년 동안이나 갇혀 지냈다는 ‘지하 감옥’이다. 감옥은 철제계단을 이용해 내려갈 수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통로다. 그러니 동시에 오르내리는 교차 이동은 불가능하다. 내려가거나 혹은 올라오는 사람들이라도 있을라치면 반대편 사람들은 그 이동이 끝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한다.

▼ 계단은 사다리에 가깝다. 그것도 수직으로 서있다시피 한다. 그러니 여성이라면 치마를 입은 채로 내려올 일은 아니다. 내려오는 행렬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아래쪽 사람들의 눈에 민망한 꼴을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치마를 입고 내려오는 여성이 있었기에 거론해 봤다.

▼ 지하 감옥은 6m 깊이에 폭이 4.4m라고 한다. 내부는 무척 단순했다. 제대를 만들고 하츠카르 십자가를 안치해 놓았을 뿐이다.

▼ 한쪽 벽에는 ‘성 그레고르’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조금 전 ‘그레고르교회’의 제대 옆에 걸려있던 초상화처럼 주교의 복장을 하고 있는데, 오래 전에 그린 듯 색상이 변해있다.

▼ ‘성 그레고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기독교 신자들이 밤마다 몰래 도왔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저 구멍을 통해 먹고 마실 것을 넣어주었다고 한다.

▼ 수도원은 두 교회 말고도 꽤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성직자들의 숙소로 여겨지는 건물은 물론이고 기념품판매점도 눈에 띈다.

▼ 암굴형의 기도처도 만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초상화가 프레스코 기법으로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 감실에는 성모자상을 모셨다. 다른 감실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과 기도를 하고 있는 성인의 그림 등을 넣어두었다. 가톨릭 성당에서 흔히 만나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연상시키는데, 수도승들이 그렸는지 그림 솜씨는 엉망이었다.

▼ ‘튀르키예’와의 국경 쪽 성벽 위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세반호수’와 함께 아르메니아를 상징하는 ‘아라라트 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조금 더 자세히, 그리고 조금 더 편안히 보라는 듯, 망원경에다 벤치까지 설치해 놓았다. 하긴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되는 ‘신화의 고향’이자 아르메니아의 아이콘으로 적극 활용되는 ‘신성한 산’이니 어련하겠는가. 참고로 아라라트 산은 홍수가 끝난 뒤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 내려온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이 ‘노아의 홍수’ 이후 이 세상에 나타난 최초의 민족이라고 믿기에 아라라트 산을 신성시한다. 또한 아르메니아가 세계 기독교 국가의 최초라는 자부심이 아르메니아인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 성벽에 오르자 광활한 대지 너머로 ‘아라라트 산(Mt. Ararat)’이 보인다. 만년설로 덮여 있는 이 산은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이라 전해진다. 국가 문장 가운데에 그려놓을 만큼 아르메니아인들이 어머니로 여기는 신성한 산이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눈앞에 두고도 가볼 수 없는 비운의 상징이다. 원래는 아르메니아 땅이었으나 지금은 터키 영토에 편입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중국을 통해서나 오를 수 있는 것과 꼭 닮았다.

▼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아라라트 산’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른쪽을 ‘대 아라라트(5,165m : 튀르키예어로는 ‘뷔위크아리다이’), 그리고 그보다 조금 낮은 가파른 원추형의 왼쪽을 ‘소 아라라트(3,896m : 튀르키예어로는 ‘퀴취크아리다이’)’라 구분하여 부른다고 한다.

▼ 수도원 바깥 멀지 않은 곳으로 아르메니아-터키 사이의 철조망 국경선이 지난다. 인적 하나 없는 국경은 적막하고 긴장감마저 돌아 우리나라 DMZ에 버금가는 비감함이 느껴진다. 그나저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처럼,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아라라트 산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의 상징이다. 코르비랍의 하늘을 유난히도 많은 독수리들이 날고 있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어 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염원을 아라라트 산에 전해주기 위해.

▼ 마지막으로 수도원 뒤편의 산꼭대기로 간다. 조망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게 어디 나만의 생각이겠는가. 수도원을 찾은 관광객들 대부분의 발걸음도 산꼭대기로 향하고 있었다.

▼ 정상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작은 깃대에선 아르메니아 국기가 펄럭인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아라라트 산’은 성스러운 산이자 국가의 상징이라고 했다. 국기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국가 문장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단다. 지폐의 도안으로도 활용된다. 하지만 그런 영산(靈山)은 현재 아르메니아의 영토 밖 ‘튀르키예’ 땅에 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1813년에 있었던 굴리스탄 조약 탓이다.

▼ 고개를 돌리니 조금 전 둘러본 ‘코르비랍 수도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높고도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게 영락없는 ‘성채(fortress)’다. 그만큼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왔다는 얘기일 것이다.

▼ 수도원 뒤쪽(남쪽, 산꼭대기에서 바라봤을 때 아라라트 왼쪽)으로 펼쳐진 평원 뒤로는 ‘노아가 정착했다’는 뜻을 가진 ‘나히체반(Nakhichevan)’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제르바인잔 영토이라서 육로로는 들어갈 수 없단다.

▼ 이곳에서도 아라라트 산을 조망할 수 있다. 아니 조금 전의 전망대보다 높아진 고도만큼이나 더 가까이 다가온 아라라트 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아라라트 산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날씨만 맑으면 어느 지역에서든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중에서도 이곳 ‘코흐비랍’은 가장 가까이서, 가장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 산자락에는 커다란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었다. 신비로운 아라라트 산과 대비되며 살아도 한 평 죽어도 한 평, 땅속에 묻히는 인간의 비애가 느껴진다.

▼ 투어 중 만난 안내판은 ‘코르비랍’에 대해 적고 있었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길이가 10km 이상이나 되었다나? 아르메니아의 옛 수도 ‘아르타샤트(Artashat)’를 얘기하는 듯. 아무튼 성벽은 두께 2.6-3.5m에 높이가 20-25m나 되었단다. 엄청난 규모라 하겠다. 그중 한 언덕에서 발견되었다는 유적은 안내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시타델과 궁전의 잔해, 광장, 그리고 우주에서 찍은 위성사진으로도 볼 수 있는 주요 거리, 사이드 스트리트, 빌딩 기초가 있다. 건물에는 주거용 건물과 대장장이 겸 작업장이 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것은 3000개의 겨드랑이 창, 검, 단검, 대리석 조각상과 조각들, 도자기, 유리 작품, 장식용 금속 조각들 그리고 다른 공예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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