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봉(441m)-망덕산(望德山, 365m)-부릉산(346m)

 

산 행 일 : ‘21. 12. 30(목)

소 재 지 :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산행코스 : 금강휴게소→지우대마을(조령1리)→참옻다리→망덕산→지우대전망대→송골쉼터↔호랑이굴(왕복)→어깨봉↔하늘전망대(왕복)→어깨정→차돌바위골(알바)→마티고개 갈림길→부릉산→(舊)금강2교(소요시간 : 8.39km/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의 배경이 되어주는 산들이다. 400m 내외의 산들이니 산이랄 것도 없지만 막상 부딪히고 보면 상황을 달라진다. 엄청나게 가파른데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까지 깊기 때문이다. 육산이라서 특별한 눈요깃거리도 없다. 하지만 조망만은 끝내준다. 산태극수태극을 그리는 금강의 물줄기는 물론이고 충북지역의 높고 낮은 산들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다만 이런 특징들은 어깨봉과 망덕산에 한한다. 부릉산은 산길이 희미할뿐더러 조망 또한 일절 트이지 않는다. 오르는 봉우리의 숫자를 헤아리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을 필요가 없는 산이다.

 

▼ 산행들머리는 ‘금강휴게소’(옥천군 동이면 조령리 576)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부산방향으로 내려오다 옥천군(충북) 소재 금강 TG를 빠져나오면 된다. TG 앞에 있는 고속도로휴게소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참고로 금강휴게소는 상하선이 함께 쓰는 몇 개 안되는 휴게소이자, TG의 밖에 있는 전국 유일의 휴게소이다. TG를 빠져나와 휴게소에 들른 다음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가는 형식을 취했다.

▼ 옥천군에서 ‘옻 산업특구’를 조성해놓은 덕분에 꽤 여러 곳에서 산행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금강휴게소나 금강3교 근처의 옻생태체험장 주차장을 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여타 코스들은 벼랑에 가까울 정도로 길이 험한데다 흔적까지 희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릉산으로 연결되는 등산로는 산행에 이골이 난 산꾼들조차 버거워 할 정도로 길이 거칠다.

▼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얼핏 고속도로를 사이에 둔 다른 쪽 방향의 금강휴게소로 가겠거니 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길은 오롯이 ‘지우대’라는 자연부락으로 연결된다. 외부와의 접속을 끊는 고속도로의 특징에 크게 어긋나는 특이한 상황으로 보면 되겠다.

▼ 참!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굴다리 앞에 세워놓은 마을안내판 정도는 읽고 나서 산행을 시작해보자. 그 옆의 빗돌은 우수리 삼아서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함양박씨와 옥천전씨, 영양천씨가 터를 잡은 ‘지우대’ 마을은 도리뱅뱅이라는 음식으로 유명한 마을이란다. 또한 특산물인 ‘옻’은 옛날 임금님의 수랏상을 만들던 장인이 직접 찾아와 옻진을 사갔을 정도라고 한다.

▼ 굴다리를 통과하자 주변이 온통 음식점 간판들뿐이다. 대표 메뉴는 ‘도리뱅뱅이’. 1980년대에 이 마을로 들어온 배창윤씨로부터 시작된 음식인데 처음에는 피라미로 만든 생선튀김에 불과했단다. 그러다가 이게 별미로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늘어났고, 또한 프라이팬에 빙 둘러 구우는 조형미까지 갖추면서 ‘도리뱅뱅이’라는 구수한 이름까지 얻게 되었단다.

▼ 식당가가 끝난 다음 만나게 되는 윗마을은 오롯이 농부들 차지다. 32가구가 모여 사는 이 마을은 절반 이상이 관광음식업소를 운영하고 있단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농업이나 임산물 채취 등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윗마을에 모여 산다.

▼ 탐방로는 마을안길을 통과한 다음 언덕을 넘는다. 경사가 제법 가파르지만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있어 힘들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거기다 잘 단장된 묘역을 지난 다음에는 그 경사까지도 사라져 버린다.

▼ 산행을 시작한지 15분. 푹 파인 고갯마루에 ‘참옻다리’가 놓여있다. 인간이 끊어놓은 능선을 인간의 손으로 다시 연결해놓은 셈이다. 고갯마루에는 ‘레저스포츠 3길’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있었다. ‘옻 산업특구’를 조성하면서 내놓은 길 가운데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 다리를 건너면 ‘새재’로 연결되는데, 옥천군에서 ‘옻 산업특구’를 조성하면서 내놓은 길들 가운데 하나다. 2014년 등산로 9km와 탐방로 5km, 레저스포츠길 9km를 개설했다. 옻배움터와 체험시설 등의 부대시설도 갖췄다. 참고로 2005년 옻산업특구로 지정된 이 지역은 현재 180여 농가가 146㏊에 31만여 그루의 참옻나무를 재배하고 있단다.

▼ 능선을 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아니 무지막지하게 가파르다. 능선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모양새인 것이다.

▼ 간간히 나타나는 바위도 나그네에게는 버거운 짐이다. 경사가 하도 가파르다보니 네 발로 기어서야 겨우 오를 수 있다.

▼ 그렇게 올라서길 10분.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늑대굴’ 안내판이 눈에 띈다. 하지만 막상 어디서 찾아야 할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호랑이 없는 골에 늑대가 왕 노릇 한다’고, 온 산을 늑대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일까? 그렇다면 ‘늑대굴’은 ‘늑대소굴’의 오기(誤記)가 된다.

▼ 가파른 오르막길과의 버거운 힘겨룸을 한 번 더 치른 후에야 망덕산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산행을 시작한지 33분 만이다. 이곳은 동이면 주민들의 새해맞이 장소라고 한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해를 돌아보며 새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다양한 새해맞이 행사가 열린단다. 하지만 썩 좋은 장소라고 할 수는 없겠다. 너른데다 조망까지 뛰어나다지만 올라오는 길이 저렇게 가파른 데야...

▼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망덕산은 이곳이 정상이라는 그 어떤 표식도 없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리본(정상의 표식이 적힌)조차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외로운 이정표(어깨산 정상 1,585m/ 지우대 갈림길 340m)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이 뭐꼬?’ 선방 수좌들에게는 가장 근원이 되는 화두(話頭)다. 하지만 참선과는 거리가 먼 나로서는 저 정도의 조형물마저도 하나의 화두가 된다.

▼ 망덕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먼저 산불감시초소 쪽부터 살펴보자. 경부고속도로와 금강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그 뒤로 철봉산과 큰날산 능선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일행 몇은 저 능선에 있는 철봉산과 해맞이산을 답사한다고 했다.

▼ 발아래에는 금강휴게소가 놓여있다. 그동안 많은 운전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경부고속도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게소로도 꼽힌다. 하지만 고속도로 곳곳에 휴게소가 생겨나면서 지금은 많이 한산해졌다. 공기의 압력으로 물을 가두어 만든 금강유원지가 그나마 명맥을 이어간다고나 할까?

▼ 반대편에는 높고 낮은 충청지역의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 진행방향인 북쪽에는 ‘어깨봉’이 있다. 어깨봉은 이름 그대로 멀리서 보았을 때 정상의 생김새가 어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특히 우산리 방향의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어깨가 기울지도 않고 똑 같단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어깨봉은 왼쪽 어깨가 약간 쳐져 있었다.

▼ ‘지우대 갈림길’로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버겁다 싶은 곳에는 통나무계단을 놓아 부담 없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 망덕산 정상에서 7분. 고갯마루에 내려서니 ‘지우대’라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전망대라는 단어가 낯간지러울 정도로 조망은 일절 허락되지 않는다. 벤치 한두 개 놓아두고 ‘쉼터’로 이름을 바꾸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 전망대 앞에는 ‘옥천 옻 산업특구’의 안내판을 세웠다. 지도에 생태체험장과 탐방로, 편의시설 등을 표시해 탐방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정표(어깨산 정상↑ 2,220m/ 조령1리 입구← 1,020m/ 망덕산 정상↓ 330m)도 세웠다. 그런데 어깨봉까지의 거리가 조금 묘해졌다. 망덕산에서 330m를 더 걸었는데도, 거리는 오히려 635m나 늘어나 버렸다.

▼ 참! 이정표의 방향표시도 문제였다. 임도를 내면서 생긴 가파른 절개지에서 길을 찾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제대로 된 들머리는 조령1리 방향으로 50m쯤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 산길은 무척 가파르다. 아까 망덕산에서 내려올 때보다 더 가팔라졌다. 산은 굴곡진 인생과 같아 오르내림이 반복된다고 했다. 그러니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이에 상응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날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그래 쉬운 산이 어디 있으랴.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겠는가.

▼ 그런 버거운 힘겨룸을 10분 정도 치른 후에야 첫 번째 봉우리(앱은 332m를 찍고 있었다)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 이때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 ‘어깨봉’이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산이 가팔라도 너무 가파르다. 아예 허리를 곧추세워 버렸다. 맞다. 어깨봉의 특징은 엄청나게 뾰쪽하게 생겼다는데 있다. 옥천읍 등 멀리서 볼 때 너무 뾰쪽하니 삽이나 괭이로 좀 낮추는 게 어떠냐는 농담이 있을 정도란다.

▼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망덕산에서는 27분). 안부에 자리를 튼 ‘송골쉼터’를 만났다. 이곳은 어깨봉의 볼거리 중 하나인 ‘호랑이굴’로 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이다.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난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정표(어깨산↑ 615m/ 호랑이굴← 140m/ 청마갈림길→ 630m/ 지우대갈림길↓ 630m)를 꼭 살펴보도록 하자.

▼ 명색이 쉼터인데도 앉아서 쉴만한 시설은 갖추고 있지 못했다. 대신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조망은 뛰어나다. 충청북도의 전형적인 풍경. 즉 차곡차곡 쌓인 나지막한 산들, 그리고 그 사이에 들어앉은 작은 들녘들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 청마갈림길 방향은 나처럼 옻을 타는 사람에게는 금단의 지역이다. 경고판까지 세워놓았다. 망덕산과 어깨봉 일대에 10만여 그루의 옻나무를 심었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이었나 보다.

▼ 산자락을 따라 5분 조금 못되게 내려가자 ‘호랑이굴’이 나온다.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은 굴은 크지도 그렇다고 깊지도 않았다. 산중의 왕. 즉 외적의 침입을 두려워하지 않는 호랑이 정도는 되어야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 쉼터로 되돌아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도 역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아까에 비해 그 기세가 많이 꺾였다.

▼ 이 구간에서는 바윗길도 만날 수 있었다.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날카롭지도 않은 바윗길이지만 전형적인 육산에서 만난 이질적인 풍경이어선지 반갑기까지 하다.

▼ 바윗길의 특징은 조망이 좋다는 점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이곳에도 멋진 조망처가 있었다. ‘매 조망대’. 허공을 나는 매의 높이에서 주변 경관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바위 끝으로 다가가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망덕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왼편은 금강.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 했던가. 망덕산을 넘지 못한 금강 물줄기가 산자락 끝을 휘돌아 흘러나온다.

▼ 조망대를 지나자 주변 풍광이 확 변해버린다. 뼈대만 남은 고사목(枯死木)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다. 그것도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역력하다. 맞다. 이곳 어깨산은 지난 2016년 산불이 발생해서 많은 나무들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 산불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 화마의 흔적은 가슴 벅차게 받아들여야 할 풍광까지도 안타깝게 만들어버린다. 휘돌아가는 금강의 물줄기가 아름답기 짝이 없는데도 그게 고사목과 겹치면서 흉측스럽게 변해버린 것이다. 우리 같은 등산객들부터 산불방지와 자연보호에 앞장서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래야 후손들도 우리들처럼 등산을 즐기며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눈에 담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에 어깨봉 정상에 올라섰다.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상은 텅 비어있는 모양새이다. 정상석이나 삼각점 등 이곳이 정상임을 알리는 표식이 일절 눈에 띄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나마 하나 세워놓은 이정표도 ‘하늘전망대’만 가리키고 있다.

▼ 정상은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먼저 왼편(북서쪽)부터 살펴보자. 아까 송골쉼터에서 바라보던 풍경. 즉 충청도의 차곡차곡 쌓인 나지막한 산들, 그리고 그 사이에 들어앉은 작은 들녘들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하지만 고도가 높아진 탓인지 옥천읍의 빌딩들까지 눈에 들어오는 등 아까보다 한참이나 더 넓어졌다.

▼ 서쪽에서는 철봉산과 함께 금강이 나타난다. 장수군의 신무산(뜬샘봉)에서 발원한 금강 물줄기는 이곳 어깨산을 접하며 180도 굽이쳐 흐른다. 이어 금강유원지 앞을 흐른 강은 또 다시 굽이쳐 옥천1경인 ‘둔주봉(屯駐峰)’으로 향한다. 이처럼 어깨봉에 오르면 금강 줄기의 경이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 남동쪽으로 눈을 돌리자 이번에는 망덕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왼편은 망덕산의 끝자락을 휘돌아 온 금강이다. 눈에 들어오는 풍광은 자못 빼어나다. 하긴 동이구경 가운데 하나가 ‘어깨산에서 바라보는 금강줄기’라니 어련하겠는가.

▼ 하늘전망대가 있는 북동쪽도 역시 금강이다. 어느 기사에선가 어깨봉은 금강의 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라고 적고 있었다. 맞다. 어깨봉은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라도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를 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강 건너 남서쪽으로 장령산과 서대산이 조망되는가 하면, 북동쪽으로는 멀리 속리산까지 바라볼 수 있다.

▼ 동쪽으로 뻗어나간 능선의 끄트머리에는 ‘하늘전망대’가 둥지를 틀었다. 서슬 시퍼런 벼랑에 걸터앉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 싶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산하를 내려다보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러니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강의 자태는 자못 빼어났다. 휘돌아가는 물굽이가 만들어놓은 모래사장과 고요하게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가 한 폭의 풍경화로 그려진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이다.

▼ 조망을 실컷 즐겼다면 이제 산상의 정자, 즉 ‘어깨정’으로 갈 차례이다. 어깨봉 정상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지어놓은 쉼터인데, 조망이 좋아 산불감시초소까지 겸한다니 가히 다목적이라 하겠다.

▼ 어깨정에서의 조망도 빼어나다. 금강과 그 너머의 철봉산 및 해맞이산은 물론이고 옥천읍의 시가지까지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옥천읍 너머의 산들은 충남 제1봉이라는 서대산과 식장산, 천·성·장·마(天聖壯馬) 등일 것이다.

▼ 이곳에서는 꼭 살펴봐야 할 시설물이 있다. 지도가 그려진 안내판인데 나처럼 부릉산으로 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부릉산으로 연결되는 길이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길이 나있지 않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니 오르는 산의 숫자를 헤아리려는 산꾼들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지 못했던 나는 이를 두고두고 후회하며 산행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 이젠 ‘부릉산’으로 향할 차례이다. 하지만 이정표(옻배움터↑ 2,510m/ 금강3교 입구← 1,545m/ 송골갈림길↓ 615m)에는 부릉산이 나타나 있지 않다. 대신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길을 인도한다. 북서쪽 능선, 그러니까 폐 벙커가 있는 ‘옻배움터(옻을 이용한 다양한 체험 제공)’ 방향으로 따라 오란다.

▼ 벙커를 지나자마자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얼마나 가파른지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겨우 고도를 낮추어 간다. 길의 흔적이 또렷한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렇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길의 흔적만 쫓다가는 부릉산이 아니라 이정표가 가리키던 ‘옻배움터(청마리)’로 내려서버리니 말이다. 이곳에서는 북서쪽 방향의 능선을 이어간다는 목표를 세우고 길을 내가며 진행하는 게 바람직하다.

▼ 갑자기 희미해져버린 길 때문에 헷갈려하고 있는데, 오른편 산비탈에 매달리다시피 내려가고 있는 ‘초이스’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는 5천 개도 넘는 전국의 산을 오른 전문가다. 그러니 진행방향을 놓고 망설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내려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길의 흔적은 보이지만 벼랑에 가까운 산비탈인데다 참나무 낙엽까지 수북이 쌓여 미끄럽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네 발에 스틱으로도 모자라 엉덩이의 힘까지 빈 다음에야 겨우겨우 내려설 수 있었던 이유이다.

▼ 목숨을 걸다시피 한 악전고투를 20분 이상이나 치렀는데도,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져 버렸다. 능선이 아니라 민가 두어 채가 들어선 골짜기로 내려서버린 것이다. ‘옻 배움터’로 유명해진 청마리의 자연부락인 ‘차돌바위골’인 모양인데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하긴 아까 같은 상황에서는 전문 산꾼인 ‘초이스’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초이스님을 뒤따라가며 잠깐이지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길도 나있지 않는 저런 산비탈을 기어오르는 것보다 요 아래 청마리에 있는 ‘제신탑(祭神塔, 충북 민속자료 제1호)’을 찾아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이다. 제신탑이란 ‘탑신제당(塔身祭堂)’이라고도 불리는 민속신앙 유적으로 그 기원이 마한(BC2-AD4)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탑신당(塔神堂)·솟대·장승·산신당 등으로 구성된 유적이 청마리에 있다는데, 그런 문화유적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10분 쯤 골짜기를 헤매다가 산비탈을 치고 오르기로 했다. 물론 길은 없다. 거기다 벼랑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르기까지 하다.

▼ 네 발로 기어오르는 것만 해도 버거운데 가시넝쿨은 왜 이리 많은지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40분간이나.

▼ 끝없는 악전고투에 체력이 바닥 날 즈음에야 능선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희미하나마 제대로 된 산길을 만났다. 거기다 사람까지. 우리처럼 길을 잃고 헤맸다는 분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동병상린(同病相燐)이랄까?

▼ 나뭇가지에 꽂혀있는 강송산악회의 ‘방향표시지’가 하도 반가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논어의 첫 구절에 나오는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나 할까? 아무튼 멀리서 찾아온 친구만큼이나 반가웠다.

▼ 이후의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봉(峰)과 봉 사이의 골이 깊지 않은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해서 힘들지는 않다. 하지만 체력이 이미 바닥나버렸으니 어찌할까나. 초이스님과 나이 지긋한 또 다른 일행이 저만큼에서 달아나고 있는데도 쫓아가지 못하는 이유다.

▼ 묘비에 적힌 문구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가선대부(嘉善大夫)라면 종2품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품계. 썩 낮지 않은 벼슬살이를 한 나조차도 오르지 못했던 자리다. 그런 이의 묘를 이런 오지에다 쓴 것으로도 모자라 방치까지 하고 있으니 어찌 눈길을 끌지 않았겠는가.

▼ 길은 썩 편치가 않았다. 일 년에 한두 사람이나 다닌 듯 산길이 온통 잡목과 넝쿨식물로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찔리거나 할퀴는 것은 기본. 재수 없으면 따귀까지 맞아가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 반가워야 할 명감나무도 오늘은 별로다. 저 열매를 이용해 잡은 들·날짐승이 꽤 되기에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아니다. 이곳까지 오면서 생긴 할퀴고 찔린 자국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찌 좋은 기억이 떠오를 수 있겠는가.

▼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20분. 능선으로 올라선지 25분 만에 ‘마티 갈림길(선답자의 글에서 찾아낸 지명이다)’을 만났다. 높이 402m(앱에 나타난 수치다)의 이 봉우리에서 동명(同名)의 이봉(異峰)인 ‘부릉산’으로 가는 길이 나뉜다.

▼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겠다는 ‘허총무’님. 그녀도 이젠 내로라하는 산악인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광주지역 산악인들의 대부로 알려지는 고 ‘백계남’선생의 것과 함께 걸려있는 그녀의 표지기가 그 증거라 하겠다.

▼ 또 다시 이어지는 오르내림은 버거워진 듯한 느낌이다. 기껏 저 정도의 산봉우리를 버거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지쳐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힘들게 10분 정도를 더 진행하자 드디어 ‘부릉산’ 정상이다. 하지만 고생고생해가며 찾아온 산치고는 무척 초라한 모습이었다. 정상석이나 삼각점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조차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기껏 이 정도를 보려고 그 고생을 했다는 게 후회될 정도이다.

▼ ‘서래야 박건석’ 선생의 정상표시 코팅지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끔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지명을 접하기도 하지만, 나처럼 이력이 덜 붙은 산꾼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는 표식이다. 고인이 되신 ‘한현우’ 선생님께서 매달아놓은 정상표시지도 눈에 띄었다. 두 분과 함께 산행을 하던 게 꼭 엊그제 같건만 벌써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 솔가리가 수북이 쌓인 산길은 폭신폭신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걷기에 편했다. 하지만 이미 지쳐버린 내 걸음은 그마저도 더디기만 하다.

▼ 무뎌진 발걸음으로 7분쯤 더 진행하면 이번에는 ‘헬기장’이다. 하지만 헬기장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유이다.

▼ 헬기장을 끝으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오르막 구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내리막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내리막길이라고 해서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가파른데다 오토바이 라이더들이 헤집어놓은 구덩이가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자꾸만 붙잡았기 때문이다.

▼ 내려오는 도중 ‘압촌마을’의 메타세쿼이아 길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시공할 때 심어놓은 조경수라는데, 50년을 자라 이제는 담양의 것 못지않게 됐단다. 다만 길이가 좀 짧다는 게 흠이라고나 할까?

▼ 정성들여 구축한 벙커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시멘트 구축물이 아니라 작은 돌멩이를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그것도 쌍으로 둥그렇게 쌓은 다음 지하 터널로 연결시키는 등 예술성까지 더했다. 보기는 좋지만은 우리네 자식들은 저걸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꼬.

▼ 부릉산에서 하산을 시작한지 25분. 진행방향 저만큼에 옛 경부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인다. 험난했던 산행이 끝나가는 것이다.

▼ 산행날머리는 ‘금강2교’(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옛 고속도로에 내려선 다음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 금강2교에 이르면서 산행이 끝난다. 오늘 산행은 4시간이 걸렸다. 앱에 찍힌 거리는 8.39km. 길을 잘못 들어선 덕분에 남들보다 1.5km 정도를 더 걸었다. 시간도 물론 1시간 정도가 더 걸렸다. 험난했던 산행이라 하겠다. 하지만 고진감래랄까 강송산악회에서 제공한 닭백숙은 이 모든 것을 보상하고도 남았다. 거기다 함께 고생한 두 분과 반주까지 나누었으니 이 아니 즐거울 손가.

좌구산(峨媚山, 657.7m)

 

산행일 : ‘19. 6. 25()

소재지 : 충북 증평군 증평읍과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의 경계

산행코스 : 줄타기매표소눈썰매장체력단련지구2쉼터정상2쉼터1쉼터천문대별무리하우스바람소리길구름다리명상의집(산행시간 : 3시간20)

 

함께한 산악회 : 뉴갤러리 산악회

 

특징 : 좌구산은 높이가 657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보니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 또한 없다. 전국의 모든 산을 올라보겠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겠다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만 되면 이 산은 사람들로 넘친다고 한다. 좌구산의 증평쪽 산자락에 자연휴양림을 조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천문대구름다리등의 볼거리는 물론이고 눈썰매장물놀이장등의 즐길거리을 두루 갖췄으니 사람들이 찾지 않고 어찌 버티겠는가. 특히 극한의 공포와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짚 트랙(Zip trek)’은 탐방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할 것이다. 참고로 좌구산은 거북 구()’자에 앉을 좌()’자를 쓴다. 거북이가 웅크리고 있는 산세라는 것이다. 거북이라는 게 본디 행복과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이곳 좌구산에 휴양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이 들어올 것을 미리 예견한 선현들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산행들머리는 좌구산 줄타기매표소(증평군 증평읍 율리 302-2)

중부고속도로 증평 I.C에서 내려와 508번 지방도를 타고 증평읍으로 들어온다. 연탄교차로(증평읍 연탄리)에서 우회전하여 54번 국도, 보강천을 건너자마자 좌회전, 군청사거리(증평읍 창동리 57)에서는 우회전하여 540번 지방도로 갈아탄다. 그렇게 증평읍을 통과한 후 계속해서 540번 지방도를 타고 초정약수 쪽으로 달리면 율리삼거리(증평읍 남차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해서 율리휴양로를 따라 좌구산자연휴양림으로 들어오다 보면 좌구산 줄타기매표소가 나온다. 하강레포츠의 일종인 줄타기(Zip trek)’의 표를 팔고 있는 이곳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매표소 앞에는 좌구산 휴양랜드좌구산 천문대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그 곁에는 이곳의 지명인 율리의 표지석도 보인다. 버스정류장의 이름표는 솟점말이다. 율리에 있는 자연마을인 솟점말이란 얘기일 것이다.



율리 웰빙타운 종합안내도도 세워놓았으니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산행 중 길을 잃고 헤매지 않으려면 말이다. 아무튼 우린 숲속체력단련지구와 제2쉼터를 거쳐 좌구산 정상에 오른 다음 하산은 능선을 타고 천문대까지 내려올 계획이다.



삼기천(三岐川)을 가로지르는 점촌교다리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율리 삼거리에서 시작해 방고개(이정표에는 밤고개로 표시)’ 고갯마루까지 이어지는 길이 3.9km의 이 길을 거북이 별 보러 가는 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왕복 2차선의 도로지만 보도(步道)는 따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차량 통행이 뜸해서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10분쯤 오르자 삼거리(이정표 : 좌구산 휴양림0.8/ 눈썰매장0.2)가 나타난다. 진행방향은 왼편이다. ‘2쉼터를 거쳐 좌구산 정상으로 오를 계획이기 때문이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몽골텐트가 쳐져있다. 좌구산으로 연결되는 탐방로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삼거리에 이정표(좌구산 정상1.84/ 눈썰매장0.1/ 수변산책로0.13)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은 눈썰매장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이곳 좌구산휴양림이 자랑하는 명물 가운데 하나라는데 빼먹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이 눈썰매장은 길이 82m, 12m6명이 동시에 출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튜브자동이송기와 동시 출발시스템 등의 자동화시스템까지 갖추고 있단다. 하지만 지금은 여름. 허연 배를 드러내놓고 있는 트랙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성인 10,000, 청소년 8,000원이라는 요금표도 눈에 띈다. 증평군민과 휴양랜드 숙박객, 단체 이용객은 10%를 할인 받을 수 있단다.



시멘트 포장길을 잠시 오르자 높다란 철제구조물이 나타난다. ‘좌구산 줄타기(짚트랙)승강장일 것이다. 아니 세워진 위치가 바닥에 가까운 것을 보면 짚 트랙(Zip trek)’이 끝나는 하강장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짚 트랙(Zip trek)’은 양 편의 나무 또는 지주대 사이로 튼튼한 와이어를 설치하고 탑승자와 연결된 트롤리(trolley, 일종의 도르래)를 와이어에 걸어 빠른 속도로 반대편으로 이동하면서 자연경관을 즐기며 담력을 키우는 공중 레저스포츠다. 국내에서는 짚라인(Zipline)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데, 와이어를 타고 이동할 때 트롤리와 와이어의 마찰음이 '~(zip~)‘하는 것처럼 들리는 점에 착안해서 지어낸 이름이라고 한다. 짚라인코리아()의 브랜드이자 등록상표명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는 지역에 따라 플라잉폭스(Flying Fox), 짚와이어(zip-wire), 에어리얼런웨이(Aerial Runway), 티롤리언크로싱(Tyrolean Crossing) 스카이플라이(SkyFly)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산길은 짚 트랙시설에 조금 못 미치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열린다. 나무계단의 입구에 이정표(좌구산 정상1.74/ 캠핑공원0.4/ 썰매장0.2)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무계단을 올라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능선으로 올라서자 사각의 정자가 보이는가 싶더니 다음에는 다양한 운동기구를 갖춘 쉼터가 나타난다. 첨부된 지도에 숲속 체육공원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이 부근이 생강나무군락지라는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꽃의 생김새와 피는 시기가 비슷해서 산수유로 자주 오해를 받는 나무이다.



그렇게 잠시 진행하자 임도가 나타난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남짓 지난 지점이다. 좌구산 정상으로 오르는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10m쯤 빗겨난 지점에서 열린다. 들머리가 눈에 띄지 않으나 당황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입구에 세워놓은 이정표(좌구산 정상 1.44/ 동고동락ART 체험마을 0.34/ 관리사무소주차장 0.7/ 좌구산 천문대 2.0)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자 산길이 가파르게 변한다. 그것도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파르다. 너무 가파르다 싶은 곳에 통나무계단을 깔고 밧줄난간까지 설치해 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마저도 안 되는 곳은 왔다갔다 갈 지()’자를 그리며 위로 오르도록 했다.



그렇게 얼마간 진행하자 또 다른 사거리(이정표 : 2쉼터0.6/ 천문대 1.72/ 교육체험지구0.41/ 주차장0.89)를 만난다. 정상은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 함은 물론이다.



이제 산길은 극기훈련장으로 변해버린다.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코스라 하겠다. 하도 가파르다보니 코를 땅에 박다시피 해야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도 역시 밧줄난간을 매어놓았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을 고생이 그나마 산술적으로 변했으니 말이다.



임도를 통과한지 30분 만에 주능선에 있는 2 쉼터에 올라선다. 두세 평쯤 되는 공터에 벤치 2개를 놓고, 이정표(좌구산 정상0.7/ 밤고개1.24/ 주차장1.44)에는 동명의 이름표를 달아두었다.



이후부터 산길은 편안해진다. 하지만 그 편안함은 오래가지 못한다. 작은 안부로 내려섰던 산길이 다시 오름짓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밧줄난간에 의지하지 않고는 위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어렵게 도착한 깔딱고개에는 벤치가 놓여있다. 턱에 차오른 숨도 고를 겸해서 쉬어가라는 모양이다.



산나리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하긴 개화시기가 6~7월이니 철에 맞게 피어난 셈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순결(purity / virginity)’이라는 꽃말 보다는 전장의 핏물을 머금은 붉은 꽃으로 더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마에 흐르던 땀이 마르기도 전해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산길은 이번에도 엄청나게 가파르다. 그 오르막길이 아까보다는 많이 짧아졌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2쉼터를 출발한지 25분 만에 돌탑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이곳도 역시 벤치를 놓아두었다. !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능선은 한남금북정맥이다. 백두대간상의 속리산에서 갈라져나간 한남금북정맥은 충청북도를 동서로 가르며 북쪽으로 올라가 칠장산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60km에 걸쳐 뻗어 있는 이 산줄기는 사실 눈에 띄는 봉우리가 드문 곳이다. 대부분의 산봉우리가 600m에 미치지 못하다보니 657m 높이의 좌구산이 최고봉이 되었다.



가파르게 돌탑봉을 내려서자 안부삼거리(이정표 : 좌구산 정상0.1/ 바람소리길0.93/ 천문대2.6)가 나온다. 바람소리길을 이용해 이곳으로 올라올 수도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경사가 가파른데다 습기까지 많아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는 경고판까지 세워놓은 걸 보니 그다지 편한 코스는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산길은 다시 위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날카로운 칼날을 세워놓은 것처럼 생긴 바위지대를 만난다. 안내판은 이곳을 칼춤바위라 적고 있다. 바위의 생김새가 칼춤을 추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잠시 후 좌구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25분 만이다. 두세 평이 채 되지 않는 비좁은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한남금북정맥 질마재/ 대덕마을2/ 한남금북정맥 분젓티4) 외에도 벤치를 놓아 쉼터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했다. 참고로 좌구산(坐龜山)앉을 좌()’자에 거북 구()’자를 쓴다. 말 그대로 거북이가 앉아있는 모양으로 생겼다는데서 연유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원래는 개 구()’자를 사용한 좌구산(坐狗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지역에 민가가 없던 옛날에는 산에 올라가야만 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다른 주장도 있다. 조선의 광해군 시절 김치(金緻)라는 인물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인조반정을 모의하던 그가 좌구산에서 들려온 세 번의 개짓는 소리에 깨어 거처를 옮긴 덕분에 변고를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좌구산 정상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또 다른 이정표(질마재 2.4/ 밤고개 1.9)의 발아래에는 ‘2등 삼각점(미원 22)’이 설치되어 있다. 좌구산의 높이는 해발 657m, ‘한남금북정맥의 마룻금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좌구산은 산의 생김새가 거북이가 앉아있는 모양새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북이라면 장수의 상징이 아니던가. 증평군에서 이곳 좌구산 일대에 좌구산 휴양랜드를 조성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건강한 일상을 위한다면서 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이다. 증평방면의 평원지대가 있는 서쪽 방향을 제외하고는 웃자란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2쉼터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천문대 방향의 능선을 따른다. 가파른 구간이 대부분이지만 내려서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난간 삼아 매어놓은 밧줄에 의지하면 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내려오니 칼로 자른 듯 반듯하게 갈라진 충절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이 바위는 좌구산 아래 율리에 살았던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어릴 때부터 심약했던 그가 좌구산에서 심신을 단련하면서 이 바위를 칼로 치며 마음을 다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나이 59세에야 중광시 병과에 급제한 그는 늦깎이로 유명한 문인(文人)이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던 그는 노둔한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 한문 사대가였던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주력한 그가 백이전(伯夷傳)’113천 번(요즘 셈법으로는 113,000)이나 읽었다는 일화는 그의 서재인 억만재(億萬齋)’와 함께 후세의 귀감으로 전해진다.



능선을 걷다보면 생채기를 안고 있는 소나무들이 자주 눈에 띈다. 송진채취를 위해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내면서 생긴 흠집들이다. 안내판은 소나무에 남겨진 아픈 역사의 흔적이라고 적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군수물자를 얻고자 우리 국민들을 혹사시켜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제만 송진을 채취했던 것은 아니다. 60년대 한창 어려웠던 시절에는 우리나라도 송유(松油)를 생산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했었기 때문이다. 당시 송유는 고무제품 생산을 위한 고무반죽 첨가제(添加劑)’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소나무에서 채취한 송진을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하여 만든 기름이 송유이다.



하산길이 내리막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밧줄을 매어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구간도 나타난다. 그게 비록 길지는 않지만 말이다.



2쉼터를 지난 지 15분 만에 1쉼터에 이른다. 이곳도 역시 이정표(밤고개0.98/ 주차장1.72/ 정상1.26)와 함께 벤치를 놓아두었다. 힘들게 올라온 이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뒤처져서 걷다보니 조용하기 짝이 없다. 더 이상의 고요함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낮잠이라도 자다 일어났는지 새들의 노랫소리마저도 다소 몽환적이다. 사색하면서 걷기 딱 좋은 길이라 하겠다.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자 좌구산 천문대가 나온다. 그런데 건물이 들어선 위치가 조금 묘하다. 산봉우리에 올라앉은 다른 천문대들과는 달리 능선의 안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쩌랴 해발이 657m나 된다니 말이다. 거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356mm 굴절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단다. 1층에는 천체 투영실과 전시실 등이 있고 2층에는 스페이스랩이라는 전시 공간이, 그리고 3층에는 주 관측실인 우주를 보는 창과 보조 관측실인 하늘을 보는 눈’, 그리고 태양 망원경 등이 설치되어 있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점심시간에 딱 맞춰버린 덕분에 내부관람을 하지 못했다. 대신 야외전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건물의 1층에는 측우기와 첨성대 등을 포함한 다양한 천체관측기구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고, 옥외에는 반구형(半球形)의 지붕을 만들고 그 안에다 여러 별자리들을 그려 넣었다.




천문대 밖으로 나오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공기 서늘하고 새소리가 평화로운 곳에는 벤치와 식탁 등이 놓여있다. 첨부된 지도에 나와 있는 소나무숲 산림욕장은 이곳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새소리를 벗 삼아 쉬어가기 딱 좋은 장소이다.



천문대부터는 임도(이정표 : 좌구정2.8/ 별무리하우스0.6/ 미원9.0/ 좌구산2.7)를 따른다. 양 옆으로 줄지어 선 단풍나무들이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구간이다. ‘일본 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국의 도로가에 늘어선 벚꽃나무들에 식상해온 나였기에 더욱 감명 깊게 다가왔지 않나 싶다.



잠시 후 숲속에 들어선 철제 구조물이 눈에 띈다. 다섯 개 코스로 이루어진 총 길이 1.2좌구산 줄타기(짚 트랙)’가 시작되는 타워(tower)이다. 하늘을 날기 전에 받게 되는 안전교육이 저곳에서 이루어짐은 물론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짚 트랙의 줄(wire)이 숲의 위나 사이를 지나도록 매어져 있는 게 보인다. 그렇다면 길이가 짧을 뿐만 아니라 경사도 약할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액티비티(activity)’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상상은 하지말자. 3년쯤 전인가 라오스방비엥Vang Vieng)’에서 타본 경험에 의하면 저 정도만 갖고도 짜릿한 공포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단풍나무의 매력에 흠뻑 취해 걷다보면 별무리하우스가 나온다. 매점과 식당이 들어선 건물인데 우리 일행의 점심상이 차려져 있단다. 이곳의 청국장이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산악회 회장님이 미리 예약해 두었던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명상 구름다리로 향한다. 휴양림의 명소로 자리매김한지 이미 오래라는데 어찌 건너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악회의 버스 또한 구름다리의 아래에다 주차시켜 놓았단다. 구름다리는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명상의 집에서 다리 위로 올라가는 방법이 보편적이다. 하지만 우린 별무리하우스의 담벼락에서 시작되는 바람소리길을 이용하기로 한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아스팔트도로보다는 울울창창한 숲길을 걸으면서 참나무와 소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에 흠뻑 빠져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사각정자 앞에서 삼거리(이정표 : 주차장9.23/ 교육체험지구1.36/ 천문대0.76)를 만난다. 구름다리는 이곳에서 왼쪽으로 내려가야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정표에는 구름다리대신에 주차장이라는 지명만 적혀있을 따름이다. 구름다리를 놓기 전에 만들어진 이정표라는 얘기일 것이다. 시기적절한 교체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3~4분쯤 내려가자 임도(이정표 : 주차장0,12/ 병영체험장1.47/ 천문대0.87)가 나오고, 잠시 후에는 계곡을 가로지르고 있는 멋진 구름다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명상구름다리로 길이 230m(출렁다리구간 130m)에 폭은 2m, 최고높이가 50m에 이른단다. 산꼭대기에 설치된 다른 구름다리들에 비해 고도감과 스릴이 한참이나 떨어진다 하겠다. 그러나 계곡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의 자태가 아름답고 규모도 웅장해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볼거리가 된다.




이곳 좌구산의 구름다리는 조금 묘하다. 계곡이나 호수 위에 걸쳐놓은 다른 구름다리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단순한 이동수단으로서의 다리는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오직 관광객 유치만을 목적으로 한 것 같지도 않다. ‘명상(冥想)’이라는 주제 안에 설치도 동선(動線)의 하나일 따름이란다.



다리 아래로 2017년에 문을 열었다는 체험시설 숲 명상의 집이 내려다 보인다. 건강한 사람들이 찾아와 산림 치유를 체험하는 곳이란다. 자율신경과 스트레스, 혈관건강 등 신체의 기본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숲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명상구름다리에서 수변산책로까지 걸은 다음, ‘습식 족욕(濕式 足浴)’ 또는 건식 족욕과 꽃차 마시기 등을 체험하는 코스로 운영되고 있단다. 병을 치료하는 곳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다리의 끄트머리에는 데크로 작은 광장을 만들어 놓았다. 하트 모양의 포토죤(photo zone)도 보인다. 하트의 품안으로 끌어들인 구름다리를 배경으로 세운다면 멋진 추억으로 채워질 게 분명하다.



데크 광장의 앞에는 거북바위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수많은 돌탑과 산책로, 거북이와 토끼의 조형물로 꾸며졌는데, 아직도 마무리가 되지 않았는지 공사자재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공사를 마치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어설프게 보인다.



공원의 맨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자리 잡았다. ‘바위전망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커다란 바위에다 거북이와 토끼를 그려 넣었다. 하지만 전망대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조망은 보잘 것이 없다. 우거진 숲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서운해 할 일은 아니다. 공원을 걷다보면 구름다리가 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터들을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좌구산 숲 명상의 집(증평군 증평읍 율리 산 61-30)

구름다리 입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물놀이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100m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는 좌회전이다. 길은 잘 닦여 있는 편이다. 그렇다고 마냥 이 길을 따를 수는 없다.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가 명상의 집앞에 주차되어 있기 때문이다. 100m남짓 걷다가 오른편 계곡으로 내려서는 이유이다. 계곡을 건너자 천문대로 이어지는 도로 위에 주차된 버스를 만난다. 산행이 끝난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20분이 걸렸다. 별무리하우스에서의 점심시간과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휴식시간을 감안할 경우 실제로는 3시간 20분을 걸은 셈이다.


희양산(曦陽山, 999.1m)-시루봉(914.5m)

 

산행일 : ‘17. 4. 25()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

산행코스 : 은티마을성터구왕봉갈림길희양산성터시루봉백두대간 복귀도막갈림길분지리 연풍별당(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희양산은 백두대간(白頭大幹) 마룻금에 걸쳐있는 산으로 깎아지른 암벽과 암봉으로 이뤄져 있어 마치 거대한 성채와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또한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는 데다 바위 낭떠러지들이 하얗게 드러나 있어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전형적인 골산(骨山)이라는 얘기이다. 덕분에 이 산은 볼거리로 넘친다. 기암괴석들이 즐비할 뿐만 아니라 조망(眺望) 또한 거칠 것 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양산의 가치는 이러한 산세나 지형보다 불교사적인 면에서 더 발한다. 신라의 고승(高僧)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창건했다는 봉암사(鳳巖寺)가 이 산의 품에 안겨있기 때문이다. 이후 봉암사는 우리나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종찰(宗刹)로 우뚝 섰다. 또한 봉암사는 근대 불교의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한국 불교는 왜색화로 급속히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난맥에 빠진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성철, 청암, 자운 등 50여 스님은 희양산에 모여 이른바 봉암사 결사를 결행했다. 한국 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지만 구호는 간결했다. ‘오직 부처님 법대로였다.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의 혁신 운동이었다. 스님들은 제일 먼저 왜풍을 일소하고 수도 도량으로 거듭날 것을 결의했다. 불법에 어긋나는 불공과 천도재를 없애고 화려했던 가사(袈裟)도 괴색으로 바꾸었다. 일일부작 일일부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정신을 생활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수행자들이 노동에 지쳐 선방에서 졸기하도 할라치면 밥값 내놔라 이 도둑놈들아하는 성철 스님의 고함소리가 산을 쩌렁쩌렁 울렸다고 한다. 1982년에는 수도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사찰은 물론 일대 임야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다. ‘금단의 사원’, '비밀 수도원'이라는 전통의 시작 이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석가탄신일에만 산문을 열었으나 그것도 경내로 방문이 제한되었다.


 

산행들머리는 은티마을(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514-5)

중부내륙고속도로 연풍 I.C에서 내려와 좌회전, 곧이어 적석교차로(괴산군 연풍면 적석리)에서 34번 국도로 올라가 수안보문경 방면으로 2~3분쯤 달리다가 연풍 I.C교차로에서 내려와 은티중리길을 따라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은티마을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이 길은 양보의 미덕이 필요한 길이다. 차량 두 대가 비켜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비좁기 때문에 먼저 본 차량이 약간이라도 넓은 지점에서 기다려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은티마을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아름드리 노송(老松)들이 무리지어 길손을 반겨준다. 소나무 아래에는 장승 두 개와 은티마을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 주차장에 커다랗게 세워놓은 등산안내도를 한번쯤 살펴보고 산행을 시작하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우리같이 길을 잘 못 드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몇 걸음 더 걸으니 기묘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보인다. 돌담을 둘러쌓고 그 안에다 모셔 놓은 걸 보면 이 마을에서 신주단지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모양이다. 이곳 은티마을은 풍수지리(風水地理)로 볼 때 자궁혈(子宮穴)’에 해당되어 천지간의 기를 모야 생명이 잉태되는 양택(陽宅)의 땅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궁혈이란 게 본디 물이 많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에는 좋으나 여자의 기()가 너무 세다는 단점이 있단다. 그래서 마을 입구에 소나무 숲(陰宅에 해당된단다)’을 만들고 남근석(男根石)을 세워 남녀 간 기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한편 매년 정월 초이튿날이면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고제(洞告際)를 지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돌의 모양이 남성의 성기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또 다른 설도 있다. 은티마을은 희양산과 악휘봉에서 흘러 내려오는 두 개울이 만나는 곳에 있다. 그래서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개울 때문에 가끔 수해를 보는데 그 개울 줄기가 여인네의 오줌 줄기 같다 해서 수해의 방패막이로 마을 앞에 남근석을 세워 놓았다는 것이다.



마을로 들어가기 전 반가운 풍경과 마주한다. 주막집이다. 2002년엔가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 처음으로 만났던 이래 잊을만하면 들렀던 추억의 장소이다. 초창기만 해도 간단하게 막걸리나 한잔씩 하고 지나가던 허름한 가게였는데 언제부턴가 반듯한 식당으로 변해있다. 그것도 토종닭 요리는 물론이고 찌개나 전골, 그리고 두부김치와 녹두전, 더덕구이, 도토리묵 등 메뉴도 도회지 식당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다양하다. 맛있는 두부를 안주 삼아 시원한 막걸리라도 한 잔 걸치고 싶지만 오늘은 불가능하다. 하산지점이 다른 곳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산행의 피로를 싹 날려버릴 기회를 잃은 셈이 되어 버렸다.



주막을 지나자마자 길이 둘(이정표 : 희양산4.4Km/ 마분봉4Km)로 나뉜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시멘트 포장길을 따른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또 다른 등산안내도세워져 있다. 이번 것은 희양산과 구왕봉, 그리고 시루봉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번에는 시루봉으로 가는 길(이정표 : 구왕봉3.3Km/ 시루봉3.2Km/ 은티마을0.4Km)이 나뉜다. 구왕봉 방향으로 향한다.



뒤돌아보면 은티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은티마을의 원래 이름은 의인(義仁村里)’이었다 한다. 경술국치(庚戌國恥) 뒤 일본인들이 '의인'이 민족정신을 뜻한다 해서 은평으로 고친 것이 은티(銀峙)로 변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자그맣기 이를 데가 없는 작은 산골마을이다. 그러니 농사를 지을 땅이 넉넉하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선지 마을 주민들은 농사보다는 임산물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 같다. 아까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만났던 임산물 직판장들이 그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송이나 능이버섯, 두릅 등 임산물은 물론이고 곶감과 사과 등의 과일들까지 팔고 있었다.



한옥(韓屋)으로 한껏 멋을 부린 은티산장을 지났다 싶으면 이번에는 양옥으로 지어진 은티펜션이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이곳 은티마을도 많이 변해있다. 생업으로 하던 임산물 채취가 언제부턴가 여행자들을 위한 서비스업으로 바뀐 것을 보면 말이다.



길은 너른 과수단지(果樹團地) 사이로 연결된다. 때는 바야흐로 꽃피는 춘사월, 사과나무마다 하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누군가는 사과밭 길을 일컬어 카멜레온(chameleon) 이라고도 했다. 봄이면 예쁜 꽃으로 치장된 하얀 길이지만 여름철엔 녹음 짙은 녹색 길로 변하고, 가을이 되면 빨간 사과 길로 바뀌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참고로 사과는 배수가 잘 되고, 일교차 크고, 일조량 많고, 비가 적은 지역이 당도가 높고 맛있다고 한다. 은티마을이 희양산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20분쯤 진행하자 시멘트포장길이 끝나면서 길이 둘로 나뉜다. 정자를 지어 쉼터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해놓은 이곳에는 이정표(희양산3.6Km/ 구왕봉(호리골재)3.0Km/ 은티마을0.8Km) 외에도 이곳이 희양산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백두대간 희양산)과 산행안내도, ‘국가지점번호 표지판(라바 43765902)’, 입산통제 경고판 등 다양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만큼 중요한 포인트라는 증거일 것이다.



희양산 방향으로 들어선다. 비록 비포장이지만 아직도 길은 임도처럼 널찍하다. 그렇게 5분 조금 못되게 걸으니 또 다시 길이 둘로 나뉜다. 아까 구왕봉 갈림길의 등산안내도에 표기되어 있던 갈림길이 아닐까 싶다. 지름티재로 올라가는 길과 산성터로 연결되는 길이 나뉘는 지점 말이다. 하지만 이정표가 보이지 않으니 문제다.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다른 길(호리골재)로 들어서버린 지 이미 오래인 그가 이곳에 표시지를 깔아 놓았을 리가 없다. 덕분에 우린 길을 잘못 들어서고 말았다. 오른편 지름티재로 진행해야 하는데도 희양산성이 있는 왼편으로 들어서버린 것이다.



잠시 후 숲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른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산길은 개울을 옆구리에 끼고 이어진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별다른 안전시설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장마철에는 주의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 14분쯤 오르면 골짜기에 가로로 걸터앉은 널따란 암반(巖盤)을 만난다. 어른과 키 재기를 해도 될 정도로 높으니 만일 장마철에라도 찾아온다면 멋진 폭포(瀑布)로 변한 경관을 눈에 담을 수도 있겠다. 그래선지 일부 사람들은 이곳을 희양폭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건폭(乾瀑)으로 있는 날이 더 많으니 이름까지 붙이는 건 과대포장이 아닐까 싶다.



산길은 계속해서 골짜기를 따른다. 물기가 없는 골짜기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널려있다. 물을 대신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아무튼 엄청나게 큰 바위가 있는가 하면 시루떡을 층층이 쌓아놓은 모양의 낭떠러지가 이어지기도 한다. 그 위에 묘하게 걸터앉은 낙락장송(落落長松)은 그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느긋하던 산길이 언제부턴가 가팔라져 있다. 흙냄새가 날 정도라고 한다면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다. 흙냄새가 코로 솔솔 들어올 정도로 허리를 숙여야만 오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런 오르막길이 길지가 않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게 5분쯤 치고 오르면 드디어 능선(이정표 : 희양산1.0Km/ 시루봉2.2Km/ 은티마을3.2Km)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5분 만이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난데없이 희양산성(曦陽山城)의 성벽(城壁)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오르려고 했던 지름티재에는 이런 성벽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선두를 선 사람이 길을 잘못 들어섰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시루봉은 이곳에서 왼편 능선을 타야한다. 오른편으로 1Km쯤 떨어져 있는 희양산 정상을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똑 같은 코스를 왕복해야만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사태를 맞고야 말았다. 참고로 희양산성은 희양산의 능선 일대와 그 동남쪽 바로 아래 산사면(山斜面)에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가은현 북쪽 15리에 옛 성이 있으니 3면이 모두 석벽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산성의 주된 방어 방향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증거는 ‘929년 후백제 견훤(甄萱)이 그의 고향 가은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찾으면 되겠다. 아무튼 이곳이 과거 후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이었음은 분명할 것이다.



이후부터는 능선을 탄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하지만 버겁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에 눈을 맞춰가며 걷기라도 할라치면 산행은 오히려 더 즐거워진다.



그렇게 12분쯤 더 진행하면 안부삼거리를 만난다. 그런데 이정표(구왕봉1.5Km/ 시루봉3.0Km)의 희양산 방향이 텅 비어있다. 초행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딱 좋겠다. 어쩌면 봉암사의 영향력이 여기까지 미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봉암사는 1982년부터 수도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사찰은 물론 일대 임야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다. ‘금단의 사원전통의 시작 이었다. 매년 석가탄신일엔 산문을 열었으나 그것도 경내로 방문이 제한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상표지석까지 세워놓은 정상을 올라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행위는 해도 해도 너무했다. 아무튼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면 지름티재를 거쳐 구왕봉으로 연결된다. 애초에 우리 일행이 마음에 두었던 코스이다. 지름티재를 거쳐서 이곳 희양산으로 오려고 했던 것이다. ‘지름티재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풍과 봉암사를 연결하는 지름길이다. 지름길을 이용하면 조금 더 쉽게 정상으로 오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만 길을 잘 못 들어 엉뚱한 코스로 올라와 버렸다.



정상으로 향한다. 진달래꽃이 곱게 핀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면 암릉이 시작된다. 오른쪽으로 수백 길의 암벽(岩壁)이 까마득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암벽 위로 난 길이 생각보다는 널찍하기 때문이다. 배포가 크다는 걸 증명이라도 한답시고 일부러 벼랑까지 나가지만 않는다면야 문제될 일은 없다. 아무튼 이곳 희양산은 대간길에서도 가장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있다. 대간상 위치가 신체의 단전(丹田)에 해당하는 데다 봉우리 전체가 에너지가 충만한 바위산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란다.



멀리 칠보산과 보배산, 낙가산으로 짐작되는 산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구왕봉(九王峰, 898m)은 바로 코앞이다. 무협영화 같으면 단 한 번에 건너뛰어도 될 만큼 가깝다. 우람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구왕봉은 험상궂기 짝이 없다. 대신에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골산(骨山)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것이다. 구왕봉은 지증대사가 절을 세울 때 연못에 살던 아홉 용()들이 이 봉우리로 쫓겨 왔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야호!’라고 외쳐보고도 싶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요 아래에 한국 선맥(禪脈)의 산실이라는 봉암사(鳳巖寺)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방이나 토굴에서 화두를 잡고 깨달음에 몰두하고 있을 스님들의 청정을 어찌 깨뜨릴 수 있겠는가. 문득 언젠가 귓가로 흘려들었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어느 산에서든 정숙은 에티켓(etiquette)이지만 특히 희양산에서 만큼은 <음소거(音消去) 모드>를 유지해야 한다.’...







능선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상큼한 솔향과 함께 백두대간의 준령들이 실루엣으로 펼쳐진다. 봉암용곡(鳳巖龍谷) 너머로 대야산과 속리산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악희봉과 민주지산이 옅게 낀 박무(薄霧) 속에서 아득하기만 하다.



서너 평쯤 됨직한 정상은 의외의 풍경을 보여준다. 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걸어온 근육질의 암릉을 생각해볼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정상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자연석의 앞뒷면에 한글과 한자로 백두대간 희양산이라고 새겨 넣었다. 이 년 전(2015)쯤 희양산의 정상석을 교체했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당시 기사는 희양산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작고 초라한 기존의 표지석을 봉암사와 협의해서 높이 1.5m, 0.8m의 큰 표지석으로 교체했다고 했다. 글씨를 봉암사의 원근스님이 썼다고 첨언했음은 물론이다. 들머리에서 이곳 정상까지는 1시간 45분이 걸렸다.



그러나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으스스한 바위벼랑이다. 그것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천인단애(千仞斷崖)이다. 희양산은 햇빛 희()에 볕 양()자를 쓴다. 햇빛이 비치고 볕이 드는 산이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 산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이 산은 유독 더하다 할 것이다.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산 전체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어서 햇빛에 반사되는 하얀 암봉이 더 크고 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이름을 붙였을 거고 말이다.



정상 주변도 역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히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연상시킬 지경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말이다. 옛날 사람들이 이곳 희양산을 일러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고 했다더니 이런 경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럼 지증대사가 느꼈다는 감정도 한번 끄집어 내보자.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 처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 하고 계곡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였다.’



정상에서의 조망 또한 화려하다. 백화산을 거쳐 황학산으로 이이지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마룻금이 가없이 우람하고 그 오른편에서는 성주산과 뇌정산 등이 나도 있다며 손짓한다.



성터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성터를 따라 반대편 능선을 탄다. 계속해서 백두대간의 마룻금을 따른다는 얘기이다. 산길은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심하게 가파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수월하게 오르내릴 만큼 만만치도 않다.





성터에서 35분 조금 넘게 걸었을까 구릉(丘陵)처럼 평평한 안부에서 사거리(이정표 : 시루봉0.9Km/ 이만봉2.0Km/ 은티마을2.4Km/ 구왕봉2.8Km)를 만난다. 시루봉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백두대간과는 헤어져야 한다. 백두대간의 마룻금에서 약간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시루봉으로 향한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시루봉을 오르려면 어느 정도 경사가 져야하겠건만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우린 지금 배너미평전을 걷고 있는 모양이다. ()가 넘나들었다는 설화(說話)가 전해지는 구릉(丘陵) 말이다. 아무튼 8분쯤 후에는 ‘T’자형 삼거리(이정표 : 시루봉0.3Km/ 이만봉2.3Km/ 구왕봉3.6Km)를 만난다. 시루봉은 왼편 방향이다. 하지만 하산지점인 분지리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 즉 이만봉 방향으로 한참을 더 가야만 한다. 다시 말해 시루봉 정상을 둘러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경사(傾斜)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로 가팔라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오르기 딱 좋을 만큼 경사가 주어진다. 잠시 후 진촌리 갈림길’(이정표 : 시루봉0.2Km/ 진촌리2Km/ 이만봉2.5Km)을 만났다 싶으면 곧이어 한두 평 넓이의 비좁은 공터로 이루어진 시루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은 충청북도 특유의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과 삼각점(문경 301, 2003재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참고로 시루봉은 이 봉우리를 멀리서 볼 때 마치 시루를 엎어 놓은 것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희양산에서 이곳 시루봉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



시루봉은 백두대간 줄기의 이만봉과 희양산 사이에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 마룻금에서는 약간 비켜나있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인지라 산세(山勢) 또한 보잘 것이 없다.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조망만은 끝내준다. 조령산과 주흘산 등 주변의 산군들이 막힘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뒤쪽에는 구왕봉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T’자형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이만봉 방향이다. 경사가 거의 없다시피 한 산길을 따라 6분쯤 걸었을까 분지저수지 갈림길’(이정표 : 이만봉1.8Km/ 분지저수지2.6Km/ 시루봉1.4Km)이 나온다. 이곳에서 분지저수지로 내려가더라도 하산지점인 연풍별당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만봉으로 향한다. 아까와는 달리 경사가 제법 심해졌다. 거기다 바닥이 온통 너덜로 이루어져 있다. 속도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다는 얘기이다. 산길이 능선을 고집하지 않고 사면(斜面)을 따른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진행하면 삼거리(이정표 : 이만봉1.4Km/ 구왕봉4.7Km/ 시루봉1.8Km)가 나타난다. 아까 헤어졌던 백두대간 마룻금과 다시 만나는 지점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평탄해서 속도를 내기에는 좋지만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산길이다. 아니 길가의 진달래들이 무리지어 피어났으니 이것도 볼거리라면 볼거리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5분쯤 더 걸으면 독막 갈림길을 만난다. 하산을 하려고 하는 지점인데 이정표(이만봉 0.8Km/ 도막 2.3Km/ 시루봉 1.7Km) 외에도 국가지점번호표지판(라바46605879, 이만봉 7지점)이 세워져 있으니 길을 못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코스는 최악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한다.



하산을 시작한다. 바윗길이 뒤섞인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안전시설도 일절 설치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다음에는 급경사 너덜지대가 계속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몸에 중심을 잡아가며 조심조심 내려서다보면 자신도 몰래 짜증이 나게 되고, 끝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육두문자(肉頭文字)까지 쏟아져 나온다.



그렇다고 모두가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중세 기사들이 쓰고 다니던 투구를 닮은 귀한 볼거리도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인적이 드문 덕분에 아직까지 저런 볼거리가 남아있지 않았겠는가.



하산을 시작한지 30분쯤 되면 낙엽송(일본이깔나무) 숲이 나타난다. 집사람의 표정이 밝아지는 순간이다. 조림지(造林地)이니 이제 거의 바닥에 다 내려섰을 거라며 말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거친 산길은 이후로도 20분 가까이나 계속되기 때문이다.



마을로 내려서기 전 물소리가 들려온다. 계곡에 내려서니 돌 틈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나뭇가지 사이를 나는 새들 울음소리도 청량하다. 오지(奧地)의 산은 생명력으로 충만하기만 했다.



산행날머리는 연풍별당(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203-1)

산행에서 흘린 땀을 씻은 후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장독대가 줄지어 늘어서있는 연풍별당이라는 펜션을 지나면 군도(郡道)인 중앙로가 나오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공터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하지만 산행은 이쯤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 3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5시간쯤 걸렸다고 보면 되겠다.


백마산(白馬山, 532m)-무량산(無量山, 426.5m)

 

여행일 : ‘17. 2. 25()

소재지 : 충북 영동군 영동읍과 황간면의 경계

산행코스 : 가리재538m백마산치마바위성황당고개무량산솔치재공원(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둘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중간에 바위지대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정도의 바위도 없는 산들이 어디 있겠는가. 때문에 특별한 볼거리도 없을뿐더러 조망(眺望)까지도 별 볼 일이 없다. 흙산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특징들이라 할 것이다. 영동읍민들이 산책코스로 이용하는 듯한 무량산 구간을 제외하고는 등산로 또한 뚜렷하지가 않다. 외지의 등산객들이 별로 찾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볼 필요는 없다는 얘기이다. 지맥(枝脈) 답사를 주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꼭 찾아보고 싶다면 무량산 코스만 단독으로 오를 것을 권하고 싶다. 나머지 구간을 포함시킬 경우에는 얻는 것 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가리재(영동군 황간면 서동원리 산 130-61)

경부고속도로 황간 I.C에서 내려와 4번 국도를 타고 영동읍으로 들어온다. 오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고갯마루가 산행들머리인 가리재이다. 하지만 말이 고개이지 생김새로 봐서는 그저 평평한 도로에 불과할 따름이니 참조한다. 황간면(신탄2)과 영동읍(가리)의 경계지점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히 기점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그저 들머리에 세워진 명륜동마을로 들어가는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과 영동감자체험장의 입간판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 길 건너 저만큼에 있는 퇴비공장을 참조할 수도 있겠다.




명륜동 마을표지석 앞으로 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2년쯤 전엔가 명륜동 진입로가 확·포장되었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외관(外觀)만 봐서는 꼭 엊그제 공사를 마친 것처럼 산뜻하기만 하다. 50m쯤 걸었을까 왼편으로 길이 나뉜다. 농로(農路)일 것이다. 농로를 따라 50m쯤 들어가면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과수원진입로가 나뉜다. 지맥(枝脈)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따르는 게 보통이다. 우리도 물론 이 길을 따랐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구태여 이 길을 따를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농로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외딴집에서 산자락으로 들어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길이 이곳보다는 훨씬 더 또렷하다고 알려져 있다.




지맥(枝脈) 길로 들어서면서 고생문이 활짝 열린다. 과수원으로 지나자마자 길이 희미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한두 명이나 다니는지 산길은 온통 잡목(雜木)으로 가득 찼다. 가시넝쿨 또한 뒤질 수 없다는 듯이 휘휘 감고 들어온다. 가시에라도 찔릴세라 조심이라도 할라치면 이번에는 위가 문제다. 나뭇가지들이 싸대기를 때려대는 것이다. 아무튼 찔리거나 할퀴는 것은 물론 싸대기 두어 대는 각오해야만 통과할 수 있는 최악의 구간이다.



그렇게 10분쯤 악전고투를 치르다보면 능선에 올라선다. 그렇다고 길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사납던 가시넝쿨이 웃자란 억새로 바뀌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잡목도 소나무들로 뒤바뀌어 있다. 아무튼 산길은 이런 장애물들을 피해 빙빙 돌아가며 위로 오른다.



능선에 오르자 시야(視野)가 열린다. 소문난 산간지역답게 높고 낮은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 있다. 가장 오른편에 보이는 산은 각호지맥 상에 있는 삼봉산이 아닐까 싶다. 그 뒤에 있는 건 각호산과 민주지산일 것이고 말이다.



12분쯤 지나면 폐자재(廢資材)가 널려 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산불감시초소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진행방향 저만큼에 538m봉이 나타난다. 오늘 오르게 되는 봉우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이 부근에서는 산불의 흔적도 보인다. 잔불처리 때 모아놓은 듯한 나무들에서 불에 탄 흔적이 아직까지도 역력하다.



산길은 급할 게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언제부턴가 산길 또한 또렷해졌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중간에 왼편에서 올라오는 길 하나를 만난 것을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이후부터 산길이 임도처럼 널따래진 것 같다.



오른편으로 빼꼼히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나뭇잎이 다 지고 난 빈 나뭇가지 사이로 산봉우리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정상 어림이 암팡진 암봉으로 이루어진 것이 굴봉이 아닐까 싶다.



얼마쯤 올랐을까 임도처럼 널따란 길은 산봉우리를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回)를 한다. 길을 바꾸어 오솔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급경사 오름길을 잠깐 치고 오르면 538.2m봉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46분만이다. 서너 평쯤 되어 보이는 정상은 잡목과 잡초가 점령하고 있을 뿐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정표도 없다. 그저 삼각점(영동460, 1980재설) 하나만이 외로울 따름이다. 하긴 이름도 없는 봉우리에다 정상석을 세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라는 닉네임을 쓰는 최남준씨가 각호지맥 538.2m’라고 적은 표지판을 매달아 놓았다는 점이다. 국제신문 근교산 취재팀의 산행대장을 역임하신 분이라는데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백마산으로 향한다. 왼편, 그러니까 동남방향으로 내려서면 된다. 하지만 능선은 직진방향이 더 발달되어있으니 주의한다. 자칫 엉뚱한 곳으로 연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기도 한다. 나뭇잎을 다 떨구어버린 나뭇가지들이 조그만 틈새를 열어주는 덕분이다. 겨울철만이 가질 수 있는 특혜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좁디좁은 들녘을 헤집으며 1번 국도와 경부선철도가 지나간다. 전형적인 산간지역 풍경이 아닐까 싶다.



시나브로 고도(高度)를 낮추던 능선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더니 10분쯤 지나자 암릉지역에다 내려놓는다.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알맞게 발달된 암릉을 가운데에다 놓았는데, 양쪽 사면(斜面) 또한 깎아 세운 듯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바위의 위가 생각보다는 넓고 평평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30분쯤 진행하면 능선 안부에 내려서게 된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지만 좌우로 길의 흔적이 나타난다. ‘사기점고개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갈 경우 사기점 마을(영동읍 가리)로 연결될 것이다. 오른편은 탑선이마을(영동읍 심원리)’로 내려가는 길이고 말이다.



또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것도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이다. 떨어뜨린 만큼의 고도(高度)를 다시 올려놓아야하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10분쯤 지난 후, 왼편으로 지능선 하나를 갈려 보내고 나서야 산길은 그 기세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5분쯤 후에는 또 다른 지능선을 왼편으로 갈려보낸다.



얼마쯤 걸었을까 임도처럼 널따란 길을 만난다. 그만큼 경사(傾斜)가 누그러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고 오름길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걷기에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의 오르막은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면 돌담을 만나게 된다. 반듯하게 쌓아올린 것으로 보아 옛날 이곳에서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나 싶다.



몇 걸음 더 걷자 잡목(雜木)들로 가득 차 있는 널따란 공터가 나온다. 이곳이 백마산의 정상이란다. 널따란 분지(盆地)에 있는 하나의 지점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정상표지석이 세워진 것도 아니다.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보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저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코팅지가 이곳이 백마산의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이곳이 정상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뻔했기 때문이다.



무량산으로 향한다. 잠시 후 헬기장이 나오는데,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능선이 구릉(丘陵)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능선의 방향을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능선이 어디로 뻗어나가는지가 자꾸 헷갈린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헬기장 끄트머리에서 직진이 아니라 왼편으로 꺾어야 하는데, 나침반의 도움을 받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싶다.



펑퍼짐한 능선으로 이루어진 소나무숲길을 따라 10분쯤 진행하다보면 마치 쟁반을 비스듬하게 세워놓은 것 같은 바위를 만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일러 치마바위라고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처마처럼 툭 튀어나온 형상으로 인해서 생겨난 처마바위라는 이름을 버젓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바위는 이정표로 삼을 수도 있겠다.



산길은 처마바위를 지나면서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몸을 반듯이 세우고는 내려설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르다. 거기다 밧줄이나 계단 등의 안전시설도 전혀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저 조심조심, 아니 엉거주춤해서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처마바위를 만난다. 비록 규모는 아까보다 작지만 그 생김새는 오히려 더 뛰어났다.



두 번째 처마바위에서 산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갈 즈음 또 다른 처마바위를 만난다. 이번의 바위는 수많은 돌탑들로 둘러싸여 있다. 서툴게 쌓아올린 것이 오가는 길손들이 그냥 가기가 안타깝다고 하나 둘씩 올려놓고 간 모양이다. 가슴속에 간직해오던 그네들의 소원과 함께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의 바위는 치성바위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3~4분이 지나 안부에 내려선 후부터는 한동안 밋밋한 능선이 이어진다. 이어서 작은 오르내림을 두어 번 하고나면 16분 만에 양쪽으로 길이 또렷하게 나있는 고갯마루에 내려서게 된다. 왼편 주곡교(영동읍 주곡리)와 오른편의 봉현저수지(영동읍 봉현리)를 연결시키는 성황당고개란다. 하지만 성황당의 흔적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는 성황당의 흔적이 확연하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다.



이제부터 무량산의 오름길이 시작된다. 이곳까지 오느라 지친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가파른 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지친 사람들을 여러 번에 걸쳐 골탕을 먹인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이겠거니 하지만, 막상 이르고 보면 그보다 더 높은 봉우리가 떡 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오르막 구간들이 짧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 않나 싶다.



얼마쯤 올랐을까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진행방향 표시지가 왼편으로 향한다. 정규 등산로를 벗어난다는 얘기이다. 무량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오랫동안 인적이 끊긴 탓에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길을 가로막고 있는 고사목(枯死木)들을 위험스럽게 넘는가 하면, 산길에 가득 찬 잡목(雜木)들에 싸대기 서너 대쯤 맞고 난 후에야 겨우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길은 거칠었다. 그렇게 35분쯤 진행하면 저만큼에 무량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굵직한 능선이 나타난다. 물론 성황당고개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성터의 흔적이 아닐까 싶은 돌무더기를 기어오른다. 그리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에는 무량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봉분(封墳)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정상에는 자그마한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영동303, 1980재설)이 설치되어 있다. 무량산 정상과 봉화터를 병기(倂記)하고 있는 이정표(영동대학교 2.6Km무량산(봉화터)영동그릴 2.3Km)도 보인다. 옛날에는 이곳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나 보다. 하지만 문헌(文獻)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으니 참조한다. 그런가하면 스테인리스(stéinlis) 의자 하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보잘 것이 없다. 아니 꽉 막혔다고 보는 게 옳겠다. 지금은 비록 텅 빈 나뭇가지 사이로나마 영동시가지가 나타나고 있지만, 계절이 바뀌어 잎이라도 무성해진다면 그것마저도 사라져버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조금 전에 올라왔던 방향으로 되돌아나간다. 이어서 잠시 아래로 내려서면 오른편으로 길이 나뉘는 삼거리 하나를 만난다. 아까 무량산으로 오르면서 정규등산로를 벗어나지 않았더라면 이곳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헛고생을 한 꼴이 되어버렸다. 거리를 단축시키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하나 둘 보이던 바위들이 그 빈도를 점차 높여간다. 그리고 곳곳에서 시야(視野)를 터놓는다.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백마산은 물론이고, 백화산과 주행봉, 팔음산 등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본격적인 암릉으로 변해버린다. 안전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그래선지 암릉이 시작되는 지점에다 절터·(돌아가는 길)’이라고 적힌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우회(迂廻)하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 권고가 효력이 있었는지 바위 위로 올라갔던 집사람이 되돌아 내려온다. 길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방향으로 돌아가 보면 길이 나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조금은 위험해 보이지만 말이다. 무량산 정상에서 내려선지 17분이 지났다.




아쉽지만 암릉구간은 금방 끝나버린다. 그리고 밋밋한 능선이 이어진다. 7분 후 또 다른 바위군락이 나타날 때까지는 말이다. B팀을 인솔했던 이대장이 멋지지 않았느냐고 물어올 정도로 이번의 암릉은 빼어나다. 하지만 바위가 귀한 산에서나라는 전제조건(前提條件)은 깔아야겠다. 바위가 많은 다른 산들이라면 이정도의 암릉은 쌔고도 쌨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옛말이 있다. 자리를 잘 잡은 덕택에 귀물 취급을 받고 있는 저 바위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집사람의 눈에도 귀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선뜻 병풍바위라는 이름까지 붙여 놓는다.




병풍바위 근처에서 다시 한 번 조망(眺望)이 열린다. 아까 암릉에서 보았던 그림이 똑 같이 그려지지만 눈여겨 보아둘 것을 권해본다. 앞으로는 이만한 조망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10분쯤 지났을까 절터·0.1Km’라고 적힌 이정표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저만큼에 돌탑들이 보인다. 옛날에는 이곳(이정표 : 영동대학교 1.7Km/ 정상 0.8Km)에 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비록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오가는 길손들은 그게 못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그 흔적으로 수많은 돌탑들을 쌓아 올렸다. 대부분이 서툴기 짝이 없지만 개중에는 제법 번듯하게 쌓아올린 것들도 보인다.



돌탑들의 가운데에 옹달샘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도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지붕까지 씌워 놓았다. 플라스틱 바가지가 놓여있지만 마셔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한다. 흐르지 않은 채로 고여 있는 것이 영 께름칙했기 때문이다.



절터를 지난 산길은 다시 오름길로 변한다. 그리고 잠시 후 능선 위로 다시 올려놓는다. 이정표(영동대학교/ 소류지(어미실못)1.0Km/ 절터·)는 왼편 능선이 어미실못으로 연결된다고 적어 놓았다. 영동읍 설계리에 있는 향엄사 근처의 소류지를 말하는 모양이다.



산길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길은 제법 또렷한 편이다. 영동 군민들이 운동삼아 자주 오르내리는 코스인 모양이다. 그리고 12분 후에는 삼거리(이정표 : 봉현리 3.5Km/ 영동대학교 0.5Km/ 무량산 정상 2.1Km)를 만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유원대학교(옛 영동대학교)가 나온다. 우리가 하산하려고 하는 솔치재는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만 한다. 하지만 난 이곳에서 하산할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물론 지맥 답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아무런 눈요깃거리도 없는 능선을 계속해서 타야만할 이유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지루한 산행이 이어진다. 눈요깃거리가 하나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능선이 계속된다. 거기다 오르내림도 제법 심한 편이다. 능선만을 고집하지 않고 어떤 곳(372m봉이 아닐까 싶다)에서는 사면(斜面)을 따른 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그마저도 피하고 싶을 정도로 위험천만이지만 말이다. ‘차라리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게 나을 뻔 했다며 집사람이 투정을 내뱉기까지 했다면 그 정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20분쯤 진행하면 295m봉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도 최남준씨가 각호지맥 295m’라고 적은 팻말을 매달아 놓았다. 그 아래에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매달아 놓은 코팅(coating)지도 보인다. 그는 이곳을 양지말봉이라는 이름으로 표기했다. 높이도 291.9m라고 다르게 적었다. 아무튼 이 봉우리는 오늘 새로운 이름을 하나 얻은 셈이다. 그게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295m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계속해서 아래로 향한다. 저쯤에서 산행이 끝나겠지 하는 기대감에 부풀게 만드는 구간이다. 푹 파인 안부의 생김새로 보아 틀림없이 임도가 나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바위산이 보이지만 설마 저곳까지 가겠는가 하는 기대감이 강하게 든다.



건너편에 면() 경계봉인 암봉이 보인다. 그 뒤 오른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산은 아마 박달산(480.5m)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5분쯤 후에 임도(林道)에 내려선다. 그리고 비록 잠시지만 임도를 따른다. 산행이 끝나간다는 믿음이 강하게 드는 구간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산길은 다시 위로 향한다. 아까 보았던 암봉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15분 후에는 영동읍과 심천면이 맞닿은 면경계봉에 올라선다.



이 부근의 바위들은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자갈과 모래 등이 마구 뒤섞여 있는 것이 영락없는 콘크리트(concrete)이다. 퇴적물이 쌓여 형성되었다는 퇴적암(堆積岩, sedimentary rock)의 모양새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 전 이곳은 바다 속이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다가 지반운동(地盤運動, tectonic movement)’에 의해 융기(隆起), 즉 바다 밑의 지면이 해수면 위로 솟아올랐을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또 다시 조망이 열린다. 가까이 백마산은 물론이고, 박달산, 그리고 그 너머로는 백화산과 주행봉까지 나타난다.



왼편으로 내려선다. 솔치재 방향이다. 물론 직진방향으로도 길의 흔적은 보인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 내리막길을 잠시 진행하면 유원대학교 방향으로 조망이 트이는 슬랩구간이 나타난다. 참로고 오늘 걷어온 이 능선은 각호지맥(角虎枝脈)의 일부구간이다. 각호지맥이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삼도봉(1.178m)에서 분기해서 석기봉(1.242m)과 민주지산(1.242m), 각호산(1.202m), 천만산(960m), 삼봉산(930.4m), 백마산(534m) 등을 일구고 난 후 영동군 심천면 소재지 인근의 초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7.3km의 마루금을 말한다. 하지만 이 지맥은 아직은 덜 알려진 탓인지 백두대간일대와 각호산 일대를 제외하고는 산길이 또렷하지가 않다. 청정 마루금이라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반면에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 수두룩하다는 얘기도 된다.




산행날머리는 솔치재

그렇게 10분 정도를 내려서면 저만큼에 솔치재가 나타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19번 국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에는 이곳이 솔치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펜스를 피해 절개지 우측으로 내려선 후,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잠시 걸으면 통신탑으로 향하는 길이 나뉘는데 산악회 버스는 이곳에 주차되어 있다. 차량통행이 뜸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정확히 4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멈춘 일이 없으니 오롯이 걷는 데만 걸린 셈이다.


태령산(胎嶺山, 400m)-만뢰산(萬賴山, 611.7m)

 

여행일 : ‘17. 2. 18()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친천읍·백곡면과 충남 천안시 병천면의 경계

산행코스 : 주차장김유신장군탄생지국궁장태실(태령산)생태공원갈림길쥐눈이고개갈미봉만뢰산보탑사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진천은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의 고향이다. 김유신 장군은 595년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에서 태어나 15세에 화랑이 됐다. 삼국이 통일하는 데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명장으로 673년 숨을 거뒀다. 그의 고향답게 진천은 김유신 관련 유적지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16곳에 달한다. 그중 김유신의 탄생지와 태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서현이 쌓았다는 만노산성 등이 위치한 곳이 바로 만뢰산과 태령산 자락이다. 때문에 오늘 산행은 등산로를 따라 걷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된 유적지(遺蹟地)들을 둘러보는 셈이 된다. 아무튼 두 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바위다운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으니 뚜렷한 볼거리가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태령산과 만뢰산 정상 어림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 또한 별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산은 꼭 찾아봐야 할 산으로 꼽고 싶다. (보탑사)과 산(만뢰산과 태령산), 그리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의 생가가 있어서 여가와 휴식, 그리고 적당한 운동까지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종교적인 여운과 역사의 아취(雅趣)까지 더불어 느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코스가 어디에 있겠는가.

 

산행들머리는 김유신장군탄생지 주차장(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18)

중부고속도로 진천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옥천 방면으로 진행한다. 진천읍 시가지를 통과하니 참조한다. 21번 국도 상의 보탑사삼거리(진천읍 자암리)에서 오른편 김유신길로 들어서면 잠시 후에 산행들머리인 김유신장군탄생지의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참 잊을 뻔했다. 보탑사삼거리에서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오른편에 김유신길 말고도 313번 지방도가 나뉘는데 지방도가 훨씬 더 좋으니 주의해서 진행해야 한다.




주차장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김유신(金庾信) 탄생지가 나온다. 이곳과 태실을 한데 묶어 사적 제414호로 지정해 놓았으니 참조한다. 김유신은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13세손이다. 만노군(진천의 옛 이름) 태수인 김서현장군의 아들로 진평왕 17(595)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609(진평왕 31)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 무열왕 7(660) 상대등이 되어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하고 태대각간이 되었으며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다. 참고로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담안밭'이라 부른다고 한다. '담안밭''담 안의 밭'을 줄인 말이란다. 옛날 이곳은 태수의 사택이었다. 당연히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건물이 무너진 후 집터는 농작물이 심어진 밭으로 변했을 게 뻔하다. ‘담안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연유일 듯 싶다.



유적지의 왼편에는 네 칸짜리 기와집 한 채가 지어져 있다. 만노군 태수 김서현의 관저에 김유신의 생가를 복원해 놓은 것이란다. 김유신은 이곳 진천이 만노군(萬勞郡)이었던 시절, 태수 김서현(金敍玄)과 만명(萬明)부인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595(신라 진평왕 17)이다. 김서현은 원래 가야국의 사람으로 신라에 들어와 왕족의 딸인 만명과 눈이 맞았다. 그러다가 신라 조정이 김서현을 3국의 각축장인 변방의 진천태수로 보내자, 그 둘이 야합하여 이곳으로 와 낳은 아들이 바로 김유신인 것이다. 참고로 삼국사기 열전 제1<김유신> 편을 소개해 본다. <처음 서현이 갈문왕 입종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았을 때 내심으로 기뻐하여 그녀에게 눈짓하여 중매도 없이 야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현재의 진천군) 태수가 되었을 때 만명과 함께 가려하니 숙흘종이 비로소 딸이 서현과 야합한 사실을 알고 그녀를 미워하여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대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만명이 창문으로 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 또 다시 삼국사기를 들여다보자. 그가 태어날 때의 태몽(胎夢)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서현은 경진일 밤에 화성과 토성 두 별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도 역시 신축일 밤에 동자가 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잉태하여 스무 달 만에 유신을 낳았다. 김유신의 이름을 유신이라고 한 것은 서현이 경진일 밤에 태몽을 꾸어 유신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서현은 날짜로 이름을 지을 수 없다고 하고 경진의 경()자와 자형이 비슷한 유()자와 진()자와 비슷한 신()자로 이름을 지어 유신이라고 하였다.> 



유적지 입구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비각(碑閣) 하나가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비각 안에는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물론 김유신 장군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하지만 비각의 이전공사가 한창이어서 자세히 살펴 볼 수는 없었다. 대신 비각의 뒤편에 세워진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안내판을 읽어보기로 한다. 김유신 장군의 일생을 간략하게 나열하고, 생가(生家)와 연보정, 태실 등 김유신장군 관련 유적이 '국가사적 414'라는 사실을 적어 놓았다.



유적지의 오른편 귀퉁이, 그러니까 유허비 비각(遺墟碑 碑閣)‘의 뒤편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들머리에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출발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길 찾기에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몇 걸음 걷지 않아 연보정김유신 태실로 가는 방향을 표시해 놓은 이정표를 만난다면 제대로 길을 들어섰다고 보면 된다.



7~8분쯤 올라서자 시멘트로 지어진 커다란 기와집 한 채가 나타난다. 국궁인(國弓人)들이 심신을 달련하는 곳으로 화랑정(花郞亭)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요 아래가 김유신장군 탄생지인 걸로 보아 그의 화랑정신을 이어받는 다는 의미로 지은 게 아닐까 싶다. <삼국사기> 중 진흥왕 37(576)의 기록을 보자. 화랑들은 '도덕과 의리로 서로를 연마했고(相磨以道義), 노래와 음악을 즐겼으며(相悅以歌樂), 산과 물에서 노닐고 즐겨(遊娛山水) 먼 곳 어디든 가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無遠不至).' 그래서 김대문의 <화랑세기>'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서 선발되었고(賢佐忠臣 從此而秀),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도 여기서 나왔다(良將勇卒 由是而生)'고 하였다. 그런 정신으로 활을 쏜다면 어찌 백발백중(百發百中)이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이 화랑정과 이 위에 있는 연보정을 한번 연결시켜 보자. 지금 시대의 궁수(弓手)들이 한바탕 시위를 날린 후 시원한 냉수로 갈증을 풀듯이, 어쩌면 만노군 시절을 살았던 신라의 병사들도 연보정의 샘물을 떠 마시며 타는 목마름을 해소했을 것이다.




국궁장에서 조금 더 올라서자 삼거리(이정표 : 태실1.0Km/ 연보정)가 나온다. 김유신 장군의 태실로 가려면 곧장 산자락으로 들어서야 한다. 하지만 오른편에 있는 연보정(蓮寶井)에 들러볼 것을 권한다. 1천년을 넘길 정도로 오래된 우물터이니 달라도 뭔가 다르지 않겠는가.



50m쯤 들어가자 연보정(蓮寶井)이 나온다. 만노군 관아(官衙)에서 쓰던 우물이라고 전해지는데, 그렇다면 김유신 또한 이 우물을 사용했음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연보정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둥글게 돌려 쌓았으며, 그 규모는 직경이 1.8m이고 최대 높이는 2.6m이다. 앞면에 우물로 내려갈 수 있도록 계단을 설치하였고, 4m가량의 수로를 설치하여 물이 흐르도록 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태령산 중턱에서 샘솟는 지하수라서 예전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말라 있다시피 하다. 물이 고여 있을 뿐 넘쳐흐르지는 않는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우물 옆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100m쯤 더 올라가자 이정표(태실 0.9Km)가 나타난다. 이정표의 뒤편으로도 희미하나마 길의 흔적이 보이나 무시한다. 잠시 후 산길은 오른편으로 살짝 방향을 틀면서 지능선 위로 올라선다.




산은 공들여 가꾼 흔적들이 역력하다. 조금만 경사(傾斜)가 심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그것도 참나무 토막을 손질도 하지 않은 채로 깔아 자연친화적으로 가꾸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은 곳에는 안전로프를 매어 놓았다. 고생했을 진청군청 관계자분들께 글로써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자연친화적인 가꿈은 벤치에서도 나타난다. 이것도 역시 다듬지 않은 참나무 토막을 이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산길은 지능선을 만나면서 상당히 가팔라진다. 어린 김유신은 화랑이 될 뜻을 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체력단련 등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사전준비를 철저히 했을 것이다. 옛날에는 체력단련이라고 해봐야 그저 걷고, 뛰고, 달렸을 것이다. 산이 나타나면 넘어야 하고, 물을 만나면 건너야 하는 것이 화랑의 '자세'였기 때문이다. 지금 오르고 있는 이 길 또한 그가 뛰어다녔던 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나도 힘을 내보자. 그와 같이 뛰지는 못할망정 어기적거리며 오를 수야 없지 않겠는가.




주변은 온통 참나무들 세상이다. 그 덕분에 잎이 다 져버린 빈 나뭇가지 사이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연곡계곡의 상류에 자리 잡은 연곡저수지가 살짝 고개를 내민다. 이러한 눈요기는 겨울산행 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싶다. 잎이 무성한 여름철이라면 어찌 이런 호사를 누릴 수가 있겠는가.



진행방향에 바위벼랑이 나타나자 산길은 이를 피해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통나무계단과의 힘겨루기가 끝나면 이윽고 능선안부에 있는 삼거리(이정표 : 태령산(태실)0.25Km/ 보탑사7.56Km, 만뢰산 정상 4.97Km, 자연생태공원 1.82Km/ 김유신 탄생지1.0Km)에 올라선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김유신의 태()가 묻혀있다는 태실이 이곳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락국 후예인 서현과 서라벌 공주인 만명의 사랑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소설 같다. 오로지 한 남자만 믿고 떠날 수 있었던 만명공주의 용기는 결국 김유신이라는 위대한 결실을 맺는다. 그들이 만들어낸 사랑이야기를 떠올리며 걷는다. 그리고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집사람에게서 만명공주의 용기를 찾아낸다. 산행 중 다친 손목 때문에 꼼짝을 못하다가 4개월 만에야 겨우 따라나선 산행이니 집사람 역시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능선을 따라 5분쯤 걷자 김유신장군의 태실(胎室)이 나타난다. 태실은 태어날 때 나온 태를 따로 보관한 시설을 말한다. 김유신의 태실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봉토(封土)를 마련하였으며, 태령산 꼭대기를 따라 돌담을 산성처럼 쌓아 신성(神聖)한 구역임을 표시하였다. 이 태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역대의 지리지에 김유신의 태를 묻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태실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 축조의 형식을 가진 것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참고로 이곳은 태령산(胎嶺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김유신의 태()를 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괜찮은 편이다. 남동쪽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문백면 일대의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산릉(山陵)의 사이에 비집고 들어앉았지만 산악지형의 비중이 높은 충북지역임을 감안해보면 엄청 넓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만뢰산으로 향한다. 태령산을 출발한지 20분쯤 되면 이정표(보탑사 7.03Km, 만뢰산 정상 4.44Km, 자연생태공원 1.29Km/ 태령산(태실) 0.78Km, 김유신 탄생지 1.29Km) 하나를 만난다. 출발지와 도착지를 김유신 탄생지와 보탑사로 표기하고 있다. 거리는 8.32Km란다. 이후에 만나는 이정표들도 모두가 이런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얼마쯤 왔고, 또 얼마쯤 더 걸으면 산행이 끝나게 되는지를 알 수가 있으니 산행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무튼 산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 뒤로도 산길의 흔적이 보이나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다.




방향을 튼 산길이 가파르게 변한다. 거기다 미끄럽기 짝이 없는 눈길이다. 등산객들이 오가며 다져놓은 눈이 꽁꽁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는 그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내려가는 사람들 모두가 누구 할 것 없이 기다시피 하면서 내려가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산길은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수월하게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13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또 다른 이정표(보탑사 6.49Km, 만뢰산 정상 3.9Km, 자연생태공원 0.75Km/ 태령산(태실) 1.32Km, 김유신 탄생지 2.07Km)를 만난다.



그리고 14분 후에는 자연생태공원 갈림길’(이정표 : 보탑사 5.81Km, 만뢰산 정상 3.22Km/ 자연생태공원 0.07Km/ 태령산(태실) 2.0Km, 김유신 탄생지 2.75Km)에 내려선다. 혹자는 이곳을 쥐눈이고개라고도 하나 아니라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 참조한다.



민가가 발아래까지 다가와 있다. 그만큼 고도(高度)를 낮추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젠 고생할 일만 남았다.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야만 하는 게 산행이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산에서 인생을 배운다.’고 말하기도 한다. 길과 흉이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번갈아 나타난다는 데서 힌트를 얻은 말일 것이다. 그게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산행과 비슷하다고 느꼈을 것이고 말이다.



민가(民家)로 연결되는 고갯길을 지났다싶으면 산길은 제법 가팔라진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아까보다 조금 더 가팔라졌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30(쥐눈이고개에서) 정도를 진행하면 송전탑이 나오고, 이어서 널따란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쥐눈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고개인데, 고갯마루에는 이정표가 두 개(#1 : 보탑사 4.64Km, 만뢰산 정상 2.05Km/ 자연생태공원 1.24Km, 태령산(태실) 3.17Km, 김유신 탄생지 3.92Km, #2 : 보탑사4.63Km, 만뢰산 정상 2.04Km, 갈미봉 0.59Km/ 연곡저수지2.01Km/ 백곡 34번 국도6.49Km)나 세워져 있다.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 갈미봉이 나타난다. 뾰쪽하게 솟아오른 것이 고생깨나 하게 생겼다.



임도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 이번에는 버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 가파름이 심하다. 위를 향해 곧장 치고 오르지를 않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간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그것도 될 수 있는 대로 폭을 넓혀 최대로 경사(傾斜)를 누그러뜨려 놓았다.



이 구간에서도 왼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잎이 져버린 빈 나뭇가지 사이로 연곡저수지를 품은 풍경화가 빼꼼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20분 정도 고생을 치루고 나면 서너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갈미봉 정상에 올라선다. 정상표지석도 세워져 있지 않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산봉우리이다. 그저 누군가가 이정표(보탑사4.04Km, 만뢰산 정상 1.45Km/ 백곡 구수리/ 철탑로 0.59Km, 연곡저수지 2.6Km)에다 매달아 놓은 갈미봉이라고 적힌 표지판 하나가 이곳이 갈미봉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대신 이곳에는 벤치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게 했다. 힘겹게 올라온 사람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갈미봉에서부터는 수월한 산행이 이어진다. 작은 오르내림이 대부분이고, 어쩌다 가파른 구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만큼 적당히 가파르다. 그렇게 18분쯤 걸으면 하수문 갈림길’(이정표 : 보탑사3.17Km, 만뢰산 정상 0.58Km/ 하수문1.52Km/ 갈미봉0.87Km, 철탑로 1.46Km)을 만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잘 지어진 정자(亭子)가 나온다. ‘만뢰정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데, 잠시라도 쉬어볼 요량이라면 이곳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몇 걸음만 더 떼면 만나게 되는 정상은 헬기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늘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마침 조망(眺望)까지 툭 트이니 이보다 더 나은 쉼터가 어디 있겠는가. 조망에 대한 개관(槪觀)은 정상에서 거론하겠다.




잠시 후 만뢰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은 그 옛날 산성(山城)의 중심부였을 것이다. 이곳에 만노산성(萬弩山城)’이 있었다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헬기장으로 바뀌었다. 원래 성터였으니 두루뭉술했을 터, 헬기장으로 바꾸느라 힘은 덜 들었을 것 같다. 아무튼 만노산성만노(萬弩)’란 진천의 옛 이름임을 참조한다.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이 축조했다고 전해지는데, 태뫼식으로 쌓았다는 성의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정상에 세워진 안내판만이 이곳에 산성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조선 성종 때 왕명에 따라 노사신(盧思愼) 등이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김유신의 부친인 김서현 장군이 돌로 성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약 3,980(1,300m)이고, 성 안에는 샘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당시 이곳은 백제의 침입을 방어하던 신라 서북국경지대의 요충지였으며, 이곳에서 샘터와 신라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됨으로써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단다.



가장 높은 곳에는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어디로 내려갈지를 살피다가 눈길을 돌리면 정상표지석이 반갑게 맞는다.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이 정상석은 충청북도의 트레이드마크( trademark)나 다름없다. 이정표(만뢰산 정상 0.04Km/ 하수문 1.86Km/ 보련마을 2.88Km, 보탑사 2.55Km)와 삼각점(진천11, 1984재설)은 그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 참고로 만뢰산의 원래 이름은 만노산(萬弩山) 또는 금노산(今奴山), 금노산(今弩山), 금물노산(今勿奴山) 등으로 불려왔다. 고구려시대의 지명을 따서 그대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원래 이곳이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흘산이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었다니 참조한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광활하다. 진천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서 앞을 가로막는 것들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연곡저수지와 상계리가 발아래에 놓여있다. 그리고 봉암산과 작성산, 몽각산. 환희산 등 주변의 산들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자세한 것은 다른 이의 글로 대체해 본다. <북쪽으로는 금북정맥의 칠현산과 서운산을 잇는 산줄기가 물결치듯 이어오고, 동쪽으로는 월악산과 속리산을 잇는 백두대간의 주능선이 아득하며, 남쪽으로는 덕유산의 하늘 마루금이 햇살에 눈이 부시는가하면, 서쪽으로는 작성산, 은석산을 잇는 작은 산 병풍 너머로 흑성산과 성거산이 뚜렷이 보인다.>



하산을 시작한다. 보탑사 방향이다. 잠시 후 이정표가 두 개나 세워진 삼거리에 이른다. 하나는 이곳까지 오면서 보아온 눈에 익은 이정표(보련마을2.35Km, 보탑사 2.02Km/ 엽돈재9.2Km/ 만뢰산 정상0.57Km)인데 반해, 다른 하나는 새로운 외형(봉황3리 마을회관2.2Km/ 돌목이고개2.0Km/ 정상0.4Km)이다. 그런데 두 이정표가 표기하고 있는 방향의 지명이 서로 다른데다 거리 또한 다르게 표기가 되어 있다. 보는 이들이 헷갈릴 수도 있으니 둘 중의 하나는 치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하산지점인 보탑사까지의 거리가 2Km가 넘다보니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중간에 여러 곳에서 갈림길을 만나기도 한다. 그 첫 번째는 2분 후에 만나게 되는 봉황3리 마을회관 갈림길’(이정표 : 보탑사2.0Km/ 봉황3리 마을회관2.2Km/ 정상0.6Km)이다.



이어서 7분 후에는 보련마을 갈림길’(이정표 : 보탑사1.52Km/ 보련마을1.85Km/ 만뢰산 정상1.07Km)을 만난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보련마을에 이르게 된다. 연꽃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인 보련(寶蓮)이란 마을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마을은 연꽃 보존마을로 지정된 곳이다. 7~8월에 이 마을을 방문할 경우 하얗게 만개한 연꽃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름밤에는 깨끗한 환경에서만 산다는 반딧불이도 볼 수 있단다. 그런 볼거리들을 찾아오는 관광객을 위해 두부 만들기와 짚풀 공예, 활쏘기, 전통 떡 만들기, 천연비누 만들기, 다도 체험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니 한번쯤 찾아볼 일이다. 마침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연잎식당에서 제공한다는 연꽃 정식도 먹어볼 겸해서 말이다. 연잎으로 싸서 찐 밥과 맑고 개운한 연잎차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갈림길은 다시 한 번 나타난다. 9분쯤 지나서 나타나는데 이번에는 보탑사로 가는 길(이정표 : 보탑사1.02Km/ 보탑사1.3Km/ 만뢰산 정상1.57Km)이 양쪽으로 나뉘는 게 특징이다. 어디로 가더라도 보탑사에 이르게 되지만 이곳에서는 왼쪽 방향으로 진행한다.



잠시 후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 오른편(이정표 : 보탑사0.76Km/ 만뢰산 정상1.83Km)으로 내려선다. 산행이 마무리되는 보탑사가 코앞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서도 여전히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급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차라리 더 좋아졌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것 같다. 하늘 높을 줄을 모르고 솟아오른 낙엽송(일본이깔나무) 숲속으로 산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자잘한 침엽수들이 수북이 쌓인 바닥이 마치 양탄자를 걷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폭신폭신하기 그지없다.



산행날머리는 보탑사

15분쯤 내려섰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보탑사가 얼굴을 내민다. 이쯤에서 오늘 산행이 종료됐다고 보면 되겠다. 보탑사는 만뢰산 줄기의 능선을 업은 밋밋한 지형위에 위치하고 있다. 절간을 지을 공간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은 지형이라는 얘기이다. 하지만 내가 본 보탑사의 첫 인상은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전각(殿閣)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멈추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순수하게 걸은 시간은 3시간50분쯤 되는 셈이다.



보탑사(寶塔寺)는 고려 시대 절터로 전해지던 곳에 1996년 지광, 묘순, 능현 스님이 세운 비구니 사찰이다. 1992년 대목수 신영훈을 비롯한 여러 장인들이 참여한 불사를 시작하여 199683층 목탑을 완공하였고, 그 후 지장전과 영산전, 산신각 등을 건립하고 2003년 불사를 마쳤다. 보탑사의 백미(白眉)는 누가 뭐라고 해도 3층짜리 목탑불전이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모델로 만들었는데, 목탑의 높이는 42.71m, 상륜부(9.99m)까지 더하면 총 높이가 52.7m에 이르는데 이는 14층 아파트와 견줄 만한 높이이다. 목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모두 29개이다. 강원도산 소나무를 재료로 하여 전혀 못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 방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밖에도 보탑사에는 장수왕릉(장수총)을 재현해 만든 지장전과 너와지붕을 얹은 귀틀집 형식의 산신각, 부처가 500명의 비구들에게 설법하던 모습을 재현한 영산전, 그리고 와불 열반적정상을 모신 적조전을 비롯하여 범종각, 법고전, 불유각(佛乳閣), 삼소실(三笑室) 등의 건축물이 조성되어 있다.



경내로 들어서면 목탑(木塔) 형의 3층짜리 불전(佛殿)이 중생(衆生)들을 맞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높은 불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목탑형 건물로는 쌍봉사와 법주사 팔상전 등을 들 수 있으나 사람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신영훈씨가 지었다는 이곳 보탑사의 목탑불전은 사람이 올라갈 수 있게 지어졌다. 목수로서 역사서에 나오는 신라의 황룡사 구층탑을 재현해 보고자 하던 그가 목탑건축으로 후대에 남을 오늘의 절집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 목탑의 높이는 42.7m이다. 일층은 사방불을 안치했다. 석가여래, 비로자나불, 약사여래, 아미타여래다. 2층에는 가운데에 윤장대가 있고 그 안에는 대장경을 봉안했다. 윤장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경서와 석경이 비치돼있다. 삼층은 남향한 미륵불을 모시고 있다. 아무튼 보탑사의 목탑은 불전양식의 신기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통불사에 충실하여 오로지 목재로만 결구된 중층식 건물은 가로로 퍼진 대웅전식 불전에는 없는 장엄함과 웅장함 속에 함유된 경건함을 덤으로 느낄 수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단청이며 기왓장의 색깔, 하늘을 찌르고 있는 보주의 형상도 하늘에 닿고 땅에 이르는 목탑의 외형적 완성도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절을 한 바퀴 둘러보다가 요사(寮舍)‘로 보이는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이곳 보탑사는 비구니(比丘尼) 스님들이 정진(精進)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소박하게 지어진 외형이나, 친근함이 묻어나는 삼소당(三笑堂)이란 편액에서 여성스러움이 물씬 풍긴다. 그리고 그네들의 청정을 방해할까봐 얼른 절 밖으로 빠져나온다. 그러다가 천려일실(千慮一失)을 범해버렸다. 절의 뒤편에 있는 연곡리 석비(蓮谷里石碑)‘에 들러보는 것을 깜빡해버린 것이다. 보물 404호로까지 지정된 중요 문화재인데 아쉬운 일이다. 아무튼 이 석비는 거북받침위에 몸을 세우고 머리를 얹은 일반형 석비로 비문이 없어 일명 백비(白碑)‘라고 불려 더욱 유명하다. 처음부터 글을 새기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쓴 글을 지워 버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단다. 이 비의 주인공 또한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거북모양 받침돌의 머리 형태와 비의 규모에 비해 얇은 몸, 옆으로 긴 네모꼴의 머리 형태 등 고려 초기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성불산(成佛山, 520m)-도덕산(道德山, 456m)


산행일 : ‘16. 12. 3()

소재지 : 충북 괴산군 괴산읍과 감물면, 칠성면의 경계

산행코스 : 성불산자연휴양단지 주차장사방댐소나무감상로123성불산점골(휴양림)도덕산임도도덕사휴양단지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50)

 

함께한 사람들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두 산은 곁에 붙어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다른 산세(山勢)를 보여준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골산(骨山)인 성불산과는 달리 도덕산은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포근한 육산(肉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등산객들의 대부분은 성불산을 찾는 편이다. 이때의 코스가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도덕산까지 종주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인간의 기본심리가 작용했지 않았나 싶다. 그만큼 성불산은 뛰어난 볼거리가 많다. 성불산의 암릉은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위태롭지도 않다. 그저 아기자기 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런 왜소함이 등산객들에게는 더 좋은 볼거리로 작용하나 보다. 마음 턱 놓고 아름다운 경관에 빠져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산을 뒤덮고 있는 소나무들 또한 성불산의 뛰어난 자랑거리이다. 분재(盆栽)를 연상시킬 정도로 잘생긴 소나무들이 산릉을 온통 점령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소나무들이 기암괴석들과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風景畵)를 만들어 낸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아무튼 한번쯤 다시 찾고 싶을 정도로 잘 생긴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성불산자연휴양림 주차장(괴산군 괴산읍 검승리)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I.C에서 내려온다. 19번 국도를 타고 괴산방면으로 달리다가 기곡마을(괴산읍 검승리)‘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1Km 정도를 들어가면 성불산자연휴양림 주차장이 나온다. 삼거리에 마을표지석외에도 자연휴양림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휴양림의 시설지구로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2~3분쯤 올라갔을까 왼편에 사방댐이 나타난다. 산길은 이 사방댐의 둑 위로 놓인 나무다리를 건너도록 되어 있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를 경우에는 성불산 자연휴양 단지의 시설 중 하나인 생태공원으로 연결된다. 이곳 자연휴양 단지는 괴산군에서 255억 원을 들여 만들어낸 종합휴양단지로 그 규모와 볼거리, 즐길거리가 모두 중부권 최대를 자랑한다. 최근에 운영을 시작했는데 138ha에 이르는 널따란 부지에는 숙소(숲속의 집)를 갖춘 자연휴양림과 생태공원. ’숲 관광 메가시티‘, ’도덕산 생태 숲‘. ’미선향 테마파크‘ ’산림문화 휴양관‘, ’한옥체험관등 다양한 테마(thema)와 주제가 어우러져 있다.



다리를 건너면 안내판 하나가 나타난다. 여기부터 성불산 소나무 감상로란다. ’감상로(感想路)‘라는 공식적인 이름을 붙일 만큼 괴산군에 공을 들여 가꾸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거기에 산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유치해 보려는 괴산군의 속셈이 보태졌음을 부인하지는 못하리라. 구태여 정상까지 갈 필요도 없이 품질이 보증된 소나무 감상로만 걸으면 본전은 뽑은 셈이 될 테니까 말이다.



안내판을 지나면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상당히 가파른 편이나 버거울 정도는 아니다. 조금 있다가 만나게 될 무지막지한 오름길의 예고편쯤으로 보면 되겠다. 조금은 여유가 있기에 눈길을 돌려본다. 주위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하지만 특이할 게 하나도 없는 평범한 나무들뿐이다. ’소나무 감상로라는 안내판을 세워 놓은 이유가 궁금해진다.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게 되지만 말이다.



얼마쯤 올랐을까. 산행을 시작하고 20분 남짓 지났을 즈음에 이정표(소나무 감상로0.85Km) 하나가 나타난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소나무 감상로가 나타난단다. 아까 들머리에서 보았던 그 감상로(感想路)로 가는 길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소나무 감상로는 아직까지 시작도 안 했다는 얘기가 된다. 아무튼 능선으로도 길의 흔적은 보인다. 아마 우회(迂回)를 하지 않고 능선을 따라 곧장 위로 치고 오를 수도 있는 모양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길은 거대한 바위절벽의 아래로 나있다. 바위절벽에 기대어 만든 데크길이 자못 멋스럽다. 바위에 기대어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의 자태가 실로 빼어나기 때문이다. 서두를 필요 없이 여유롭게 걸으며 주변 풍광에 눈 맞추어보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하지만 데크길은 그다지 길지가 않다. 아쉬운 일이지만 능선으로 다시 올라서야 한다.




데크길이 끝나면서 산길은 다시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러다 끝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팔라져 버린다. ‘흙냄새가 난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함께 걷고 있는 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 이석암선생께서 언젠가 하신 말씀이다. 산길의 경사(傾斜)가 너무 심할 경우,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상체를 최대한 앞으로 숙일 수밖에 없는데, 그 정도가 코가 거의 땅바닥에 닿을 정도까지 된다는 얘기이다. 지금 오르고 있는 산길에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라는 얘기이다. 이런 길은 일반적으로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면서 위로 향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나는 오름길은 거의 일직선으로 위로 향하고 있다. 더 힘들어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숨이 턱까지 차고 오를 즈음에야 쉴만한 곳이 나타난다.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갖가지 시설들이 촘촘하게 들어선 휴양단지가 발아래에 펼쳐지는데,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산은 도덕산이 분명하다. 그리고 오른편에서는 괴산읍이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데크길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15분 정도가 걸렸다.




전망대를 지나서도 산길의 형편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던지 길가에 굵직한 밧줄을 매달아 놓았다. 버거울 경우 붙잡고 오르라는 배려일 것이다. 그래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길가에 늘어선 소나무들의 자태가 사뭇 범상치가 않기 때문이다. 눈이 호사를 누리다보면 힘들다는 것까지도 잃어버릴 정도이다.



소나무들만 눈요깃거리가 되는 건 아니다. 심심찮게 조망도 트인다. 조금 전 전망에서 보았던 괴산읍 방향의 경관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렇게 7분쯤 즐기다보면 방향만 표시된 이정표(성불산/ 사방댐)와 자그만 돌무더기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돌무더기 꼭대기에 세워놓은 돌맹이에 성불산이라고 썼던 흔적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곳이 지도에 나와 있는 ‘1쯤 되는 모양이다.



1봉에서의 조망(眺望)도 역시 뛰어나다. 괴산군의 서쪽 지역이 거침없이 펼쳐진다. ‘35 명산(名山)’을 내세우는 지역의 특성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1봉에서부터는 능선을 따른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반반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구간이지만 능선은 결코 그럴 여유를 주지 않는다. 능선에 늘어선 명품소나무들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거기다 조망까지도 한 수를 더한다. 오른편 방향에 자리 잡고 있는 군자산의 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다. 안개에 역광(逆光)까지 겹친 탓에 사진촬영에는 실패했지만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가 아닐까 싶다.



1봉에서 8분쯤 더 걷다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이정표 하나를 만나게 된다. 진행방향 0.32Km 지점에 ‘2이 있다고 표기가 되어 있을 뿐 다른 방향은 아예 비어있다. 1봉의 표지판 아래에 붙어있는 표지판도 글씨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이다.



이정표에서 5분쯤 더 걸으면 2봉의 정상이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곳이 2봉의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할만한 표시가 일절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이정표에 적혀있는 거리표시와 선답자들의 기록을 감안해서 이곳이 ‘2이려니 짐작해볼 따름이다. 2봉에서의 조망 또한 뛰어나다. 오른편 발아래 계곡에 위치한 자연휴양단지가 한눈에 쏙 들어오고, 반대편 그러니까 왼편의 시야도 넉넉하게 트인다.




능선을 따라 걷는다. 능선은 온통 소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하나같이 잘 다듬어 놓은 정원수를 연상시킨다. 아니 분재(盆栽)를 닮았다고 하는 표현이 더 옳겠다. 그만큼 그 자태가 빼어나다는 얘기이다. 마침 길까지도 순하다. 심심찮게 바윗길이 나타나긴 하지만 조금도 위험하지 않을뿐더러 경사까지도 완만한 편이다. 그저 눈요기나 즐기면서 걸으면 된다.



얼마쯤 더 걸었을까 깊게 파인 안부가 나타난다. 내려가는 길은 제법 가파른 슬랩(slab)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굵직한 밧줄이 매어져 있으니 등산화의 마찰력을 못 믿겠다는 사람들은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가면 되기 때문이다.



반대편 능선으로 오른다. 바위로 이루어졌지만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는 얘기이다.



예쁜 능선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잘생긴 명품소나무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는가 하면, 시야 또한 시원스럽게 열린다. 능선은 오로지 소나무들뿐이다. 다른 나무는 일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는 소나무만 남기고 나머지 잡목들을 모조리 제거한 결과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가 보다. 한다. 아무튼 아기자기한 바위들과 소나무들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풍경이 자못 빼어나다. ’소나무 감상로라는 공식적인 이름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 싶다.



그렇게 눈요기를 즐기며 걷다보면 어느덧 3봉의 정상이다. 2봉에서 18분쯤 걸렸다.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3봉의 정상에는 데크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3봉에서의 조망(眺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남쪽으로 시선을 맞추면 성불산자연휴양단지가 잘 조망되고, 가야할 북동쪽에서는 암릉으로 이루어진 성불산 정상이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그 오른편에 보이는 산은 아마 박달산일 것이다. 그리고 휴양단지의 뒤에는 도덕산을 중심으로 왼편에 군자산의 능선이 또렷하다



성불산 정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산행을 이어간다. 명품소나무들이 길손을 맞는 예쁜 산길이다. 아까와는 달리 가끔은 잡목(雜木)들도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진행방향의 표시가 지워져 버린 낡은 이정표(점골0.8Km/ 이탄1.9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부사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왼편은 이탄마을, 그리고 오른편은 휴양단지가 있는 점골을 지나 도덕산으로 연결된다. 성불산의 정상은 곧장 능선을 타면 된다. 도덕산까지 종주산행을 이어가려면 성불산의 정상을 둘러본 후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능선으로 올라서자마자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고 싶다면 밧줄을 잡고 오르면 된다. 밧줄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왼편으로 우회(迂回)를 하면 된다. 하지만 바위벼랑이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그냥 올라도 무방할 듯 싶다. 조금만 고생을 한다면 탁 트인 조망이 충분한 보상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산행을 이어간다. 정상으로 가는 길의 우측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 전망은 좋지만 자칫 추락의 위험이 있으므로 유의하며 진행한다. 그렇게 잠시 진행하면 ’4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봉우리의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코팅(coating)지가 눈에 띈다. 서래야 박건석선생 작품인데 서귀바위봉이라고 적혀있다. 새로 지어진 이름에 거부감을 느낀 누군가가 떼어버린 모양이다.



이어지는 능선도 역시 뛰어난 볼거리를 제공한다. 바윗길을 걷지 않고서도 뛰어난 암골미를 느껴볼 수 있는 구간이다. 산길 또한 순한 편이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될 뿐만 아니라 정상 즈음에서 나타나는 마지막 오름길 또한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주변 풍광을 즐기며 산행을 이어가면 될 일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하나가 있다. 정상의 바로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난 희미한 길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방향으로 보아 점골에서 올라오는 길로 보이지만 자신은 없다.





4봉에서 8분쯤 더 걸으면 드디어 성불산 정상이다. 예닐곱 평이나 됨직한 정상에는 충청북도 특유의 검은 오석(烏石)으로 된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옆에다 돌탑(cairn) 하나를 공들여 쌓아올렸다. 기곡(점골) 방향만 남아있는 이정표도 보인다. 나머지 매전과 이탄 방향은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정상석의 아랫부분에다 방향과 거리를 표시해 이정표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해놓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성불산의 원래 이름은 송명산(松明山)이었단다. 소나무가 많은 산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산 아래에 있었다는 성불사에 따온 새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25분이 지났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난 편이다. 인근에 가리는 것이 없어 멀리까지 시야(視野)가 트이기 때문이다. 동쪽으로는 맹이저수지와 그 너머로 박달산이 보이고 월악산의 영봉과 신선봉, 조령산, 덕가산, 보개산도 눈에 들어온다. 남으로는 군자산과 비학산이 보인다.



사거리 안부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도덕산으로 가려면 일단은 점골방향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초반은 무척 가파른 사면길이 이어진다. 벼랑에 가까울 정도로 비탈진 사면(斜面)을 따라 길이 나있기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거기다 참나무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굵은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가파름을 자랑하던 산길은 낙엽송(일본이깔나무) 숲을 만나면서 사납던 그 기세를 뚝 떨어뜨린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면 성불산 자연휴양단지상단의 생태공원에 도착한다. 안부 이정표 상의 점골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성불산의 산행이 끝났다고 보면 된다. 2시간에도 못 미치는 산행시간이 짧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진행방향에 보이는 도덕산을 연계하면 된다. 1시간30분 정도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점골은 널따란 분지(盆地)이다. 성불산의 1·2·3봉과 남쪽 도덕산의 사이에 위치한 넓고 평평한 골짜기로 보면 된다. 괴산군은 이곳에 자연휴양림을 조성해 놓았다. 아니 괴산군에서 산림휴양 단지(團地)‘라고 명명했으니 이를 따르는 게 옳겠다. 아무튼 이곳 휴양단지에는 생태 숲에 필수인 산책로와 야영장 외에도, 숙박동과 체험관, 세미나 실, 숲속캠핑장, 생태공원, 수석전시관 등 종합시설을 차려 놓았다. 가족단위 휴양객들이 자연에서 생태 숲을 걸으며 삼림욕과 치유를 할 수 있는 휴양단지를 모토(motto)로 내걸었다니 한번쯤 찾아볼 만도 하겠다.



도덕산까지 산행을 이어가기로 한다. 도덕산으로 가려면 우선은 생태공원을 가로질러야 한다. 반대편 산자락에 도덕산 등산 안내도와 이정표(정상 1.45Km)가 세워져 있으니 들머리를 찾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올라선다. 나선형으로 만들어진 통나무계단이 제법 멋스런 오르막길이다. 4분 정도를 걸어 능선에 올라서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정상1.3Km/ 갈읍/ 검승리)로 나뉜다. 고개를 넘을 경우 갈읍리(칠성면)로 연결된다. 도덕산 정상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을 타면 된다  




능선을 따라 난 산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다 바닥은 보드라운 흙길, 서두르지만 않는다면 어렵지 않게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면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해가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아니 짧은 내림과 긴 오름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거기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 구간도 나타난다. 그 거리가 짧지만 말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바위가 선을 보이는가 싶더니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밀도(密度)를 높여간다. 당연히 볼거리도 늘어난다. 기억에 남을 만큼 괴상하게 생긴 바위들이 심심찮게 나타나는 것이다.




조망이 트이기도 한다. 두어 곳에서 만나게 되는 전망바위가 바로 그곳이다. 칠보산과 군자산, 남군자산, 사랑산 등 괴산의 명산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다.



바위들이 만들어내는 괴이(怪異)의 절정(絶頂)큰 바위 얼굴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이 바위의 생김새가 사람의 얼굴을 쏙 빼다 닮았다고 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로댕(Auguste Rodin)생각하는 사람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는 보는 사람들에 따라 각기 다른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특징이 있기에 괴이함의 절정이라는 표현을 써봤다.



잠시 후 또 다른 볼거리를 만난다. 이번 바위는 뫼 산()’를 만들어내고 있다. 실물(實物)은 탄성을 내지르게 만들 정도로 자를 빼다 닮았는데, 사진으로 보니 엉성하기 짝이 없다. 디지털카메라의 한계가 아닐까 싶다.



눈요기가 끝났다싶으면 이내 도덕산의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들머리에서 50, 성불산에서는 1시간 30분 만이다. 숲속에 들어앉은 정상은 육산(肉山)의 특징대로 평범하기 짝이 없다. 정상표지석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정표(검승리/ 두천리/ 둘레길) 하나와 삼각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군가가 도덕산 456m’라고 쓰인 코팅(coating)지를 이정표의 기둥에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아니었으면 이곳이 도덕산의 정상인지도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망도 트이지 않는 정상에서 오래 머무를 이유는 없다. 하산을 서두르는 이유이다. 가파르게 시작되는 검승리 방향의 하산 길은 미끄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내려서는 게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느 산에서나 만날 수 있는 보통의 내리막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내려서면 임도(이정표 : 도덕사/ 두천리/ 정상0.8Km)에 내려선다. 타고 온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성불산 자연휴양단지주차장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임도를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12분 후 도덕사에 이른다. 대한불교법화종 소속의 사찰인데 역사가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라기보다는 새로 지었다는 느낌이 강한 사찰이다. 삼간짜리 대웅전과 산신각, 그리고 시중의 여염집이나 다름없는 요사채가 모두이니 절간의 규모도 단출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석탑(石塔)과 석불(石佛)은 그 규모나 생김새가 반듯하다. 이끼하나 끼어있지 않을 정도로 그 역사가 일천하지만 말이다.



절을 빠져나와 타고 온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휴양림 주차장으로 향한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최대한으로 속도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쉼 없이 사방을 살펴본다. 혹시라도 성불사에 관한 안내판이라도 찾아볼까 해서이다. 이곳 성불산(成佛山)은 부처형상의 바위가 있다는 전설로 화제가 되고 있는 명산이다. 그래서 산의 이름이 성불산으로 붙여졌고, 산 아래에는 성불사(成佛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이 절이 요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직지심체요절)가 태어난 곳이라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서울대 규장각 소장(所藏)'청구도(靑邱圖·제작연도 미상)''成佛山(성불산)', 그리고 서울대 규장각 소장의 '동여도(東輿圖·19세기 중엽)''成佛寺(성불사)'를 각각 괴산군에 위치하고 있다고 표기해 놓았기 때문이다. ’대한불교천태종에서 절을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총무원장인 도정스님 등 관계자들까지 다녀갔다기에 그에 대한 기록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눈에 뜨지 않았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50분이 걸렸다. 쉼 없이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덕대산(德垈山, 573m)-금적산(金積山, 652m)

 

산행일 : ‘16. 11. 12()

소재지 : 충북 옥천군 수한면과 안내면, 삼승면의 경계

산행코스 : 문티재전망대덕대산금능김씨묘안부사거리삼면봉금적산전망바위원남리삼승면사무소(산행시간 : 3시간 5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보은군에는 보은 삼산(三山)’이라 불리는 세 개의 명산(名山)이 있다. ‘지아비 산(夫山)’이라 불리는 속리산(천왕봉)지어미 산(婦山)’인 구병산, 그리고 그 둘을 부모로 둔 아들 산(子山)’금적산이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이라는 설정에 어울리지 않게 금적산의 지닌바 산세(山勢)는 완전히 딴판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위로 이루어진 두 산과는 달리 금적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기 때문이다. 덕대산 역시 같은 모양새라고 보면 된다. 덕분에 내세울만한 산세(山勢)는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정상 어림에서 터지는 조망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면 된다. 등산로 또한 정비가 잘 안되어 있는 편이다. 속리산과 구병산에 비하면 그냥 내버려졌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좋은 점도 많다. 육산의 특징대로 보드라운 흙길은 폭신폭신하기 짝이 없고, 거기다 경사(傾斜)까지도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부담 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모든 걸 포용해줄 것 같은 넉넉한 품성의 능선을 걸으며 사색을 즐겨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산으로 분류하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문티재(보은군 수한면 거현리)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상주 구간)의 보은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영동방면으로 잠시 진행하다 송죽사거리(보은군 삼승면 송죽리)에서 우회전하여 군도(郡道 : 거현송죽로)로 옮겨 들어오면 ‘37번 국도상의 거현사거리(보은군 수한면 거현리)가 나온다. 이곳 사거리에서 옥천방면으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문티재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문티재는 보은군의 수한면 거현리 상문치에서 옥천군 안내면 가래치로 넘어가는 해발 320m의 고갯마루이다. ‘조선지지자료<문치(文峙)는 수한면 문치리에 있다.>거나 '문치주막(文峙酒幕)'이란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이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많았었음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하긴 지금도 이 고개는 사람들의 통행이 잦다. 다만 차량을 이용해서 넘나들지만 말이다. 당시 주막(酒幕)이 있던 자리는 지금도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동진휴게소가 들어서서 오가는 행인들의 쉼터역할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이 고개를 '문치(文峙)'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 쓰는 한자가 틀리기도 한다. ‘1872년 지방지도의 보은편에는 '문치령(文峙嶺)'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반해, 같은 고지도의 옥천군에는 '문치(問峙)'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표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한편으론 한국지명총람처럼 '문티령'이란 지명을 쓰기도 한다.




휴게소의 맞은편으로 난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아니 산자락아래에서 길이 없어져 버린 것을 보면 밭의 가장자리를 따라 난 농로(農路)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아무튼 등산로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입간판이 들머리에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00m쯤 걸었을까 오솔길 하나가 오른편으로 열린다. 특별한 표식은 보이지 않으나 길이 제법 또렷하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잠시 후 무덤이 있는 능선에 올라선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길었지만 한순간으로 보면 된다. 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 기껏해야 5분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능선을 따르게 된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아니 완만하거나 내리막인 구간도 있기는 하다. 다만 그 거리가 아주 짧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길고 가파르게 올랐다가 짧게 내려서기를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산행은 수월한 편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대부분이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다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는 솔향까지 짙다. 들이키는 숨결이 거칠어질수록 온몸으로 느끼는 청량감도 비례해서 높아만 간다.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이다.




가끔은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왼편 사면(斜面)을 깔끔하게 벌목(伐木)해 놓은 덕분이다. 보은군을 대표하는 속리산과 구병산의 산줄기가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오르면 무인산불감시탑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535m봉에 올라서게 된다. 두세 평도 되지 않은 비좁은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보이지 않고 대신에 전망대라고 쓰인 팻말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커다란 통나무 두 개를 걸친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느긋하게 조망을 즐겨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하지만 조망(眺望)은 썩 뛰어난 편이 아니다. 전망대라는 팻말까지 세워 놓은 곳 치고는 말이다. 오른편(서쪽) 방향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겹을 이룬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가재봉과 왕재봉이 들어앉은 산줄기가 분명하지만 어느 산인지는 알아차릴 수가 없다. 산에 대한 내 앎이 그만큼 일천한 탓일 게다. 반대편에도 속리산과 구병산이 나타나기는 한다. 그러나 숲이 더욱 짙어진 탓에 아까 능선을 타고 올 때만도 훨씬 못하다.



잠시 아래로 떨어지던 능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오름으로 변한다. 하지만 경사(傾斜)는 것의 없는 편이다. 급할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것이다. 하긴 40m 정도만 높이면 되니 서두를 이유가 없었을 게다.



산행을 하다보면 금적지맥을 종주하시는 산님들 힘내세요.‘라고 적힌 팻말이 눈에 띄기도 한다. 국제신문의 근교산 취재팀산행대장을 지냈던 최남준 씨가 .라는 아명( 雅名 )으로 매달아 놓은 팻말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걷고 있는 이 능선이 금적지맥(金積枝脈)이었나 보다. 금적지맥이란 속리산 천황봉에서 안성의 칠장산으로 이어지는 한남금북정맥이 구룡산 직전의 분기점(450m봉 부근으로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과 수한면의 경계에 있음)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쳐 충북 옥천군 청성면 합금리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45.5km의 산줄기다. 이 산줄기를 따라가면 구룡산, 노성산, 국사봉, 거멍산, 덕대산, 금적산, 국사봉 등을 만날 수가 있다. 아울러 이 산줄기의 동쪽에는 불로천과 항건천, 거현천, 오덕천, 보청천 등이 금강으로 흐르고 있고, 이 산줄기의 서남쪽에는 대청호가 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오르면 덕대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45분 만이다. 덕대산(德垈山)의 원래 이름은 '덕대산(德大山)'이다. ‘해동지도(海東地圖)’ (보은)에 보은군 서니면과 옥천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라는 설명과 함께 '덕대산(德大山)'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게 근거이다. 또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한국지명총람(韓國地名總覽)’에도 덕대산(德大山)은 안내면 도율리에 있다.’'덕대산(德大山)'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근래에 이르러 '()' 자를 '()'로 표기한 기록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꽤나 너른 정상에는 아담한 정상표지석 말고도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그 안내도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지도(地圖)에 옥천군 지역의 등산로와 그에 따른 지명만 표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보은군 쪽 방향은 텅 비어 있다는 얘기이다. 어설픈 이기주의(利己主義)가 아닐 수 없다. 이곳 덕대산은 보은군과 옥천군의 경계에 놓여있는 산이다. 두 지자체간에 약간의 배려만 있었어도 저런 반쪽짜리 안내도는 태어나지 않았었을 것이다. 같은 도()에 속한 지자체들 사이에도 저렇게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더 큰 화합을 이루어낼 수 있겠는가.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보잘 것이 없다. 겨우 거현리(보은군)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리지만 그나마 한 뼘 정도의 넓이 밖에 되지 않는다. 짙은 연무(煙霧) 탓에 그마저도 시원치가 않다. 겹겹이 쌓인 산릉들이 실루엣(silhouette) 처리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허투루 넘길 일은 아니다. 채색(彩色)이 안 된 산하가 잘 그린 한 폭의 수묵화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름답다는 얘기이다.



금적산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서면 김녕 김씨(金寧 金氏)’ 묘역(墓域)이 나타난다. ‘우리 문중(門中)이여~’ 뒤에서 들려오는 김진수선배의 목소리가 들떠 있다. 무척 반가우신 모양이다. 아니 묘비(墓碑)와 석등(石燈)에다 망주석(望柱石)까지 갖춘 의젓한 문중 묘를 만났으니 자랑스러웠을 만도 하겠다. 하지만 요즘은 피보다 더 가까운 물도 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길이 두 갈래로 나뉘기 때문이다. 길은 묘역의 앞에서 양쪽 귀퉁이로 하나씩 나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하나로 다시 합쳐진다.




우린 오른편 길을 택했다. 그것도 왼편으로 내려가다 다시 되돌아와서 선택한 결과이다. 왼편으로 내려가다 보니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쪽으로 진행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얼마쯤 그렇게 내려가다가 오른편으로 방향을 꺾는다고 했다. 아무튼 우린 험하기 짝이 없는 길을 내려서야만 했다. 경사가 가파른데다가 잡목(雜木)들까지 우거져서 진행하기가 영 사나웠기 때문이다. 시간은 조금 절약되겠지만 권하고 싶은 코스는 아니다.



잠시 후 왼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왼편 산자락을 깔끔하게 벌목(伐木)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연무(煙霧)로 인해 또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금적산과 함께 보은군의 삼대 명산을 형성하고 있는 속리산과 구병산의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진행방향에는 통신시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금적산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구간에서의 길 찾기도 수월한 편은 아니다. 구불구불한데다, 잡목(雜木)들 때문에 길의 흔적 또한 또렷하지가 않다. 웬만하면 헤치고 나아갈 만도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잡목들의 대부분이 아카시아나무이기 때문이다. 가시를 피하다보면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얘기이다. 이럴 때의 해법은 딱 한 가지뿐이다. 그저 능선을 따른다고 생각하고 진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진행하면 안부사거리에 이르게 된다. 물론 덕대산 정상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아무튼 이곳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거현리, 그리고 오른편은 동대리로 연결된다.



또 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하지만 곧장 오르지를 않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다. 누군가 이곳을 일러 서낭당고개라 하면서 지금도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8분 정도 워밍업(warming up)을 하고 나면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시간상으로 보아 425m봉이 아닐까 싶다. 이후로는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다음에 오르게 될 ‘531m과의 고도차(高度差)100m 이상이나 되기 때문에 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18분 정도를 더 치고 오르면 오래 묵은 묘역(墓域)이 나오고, 이어서 몇 발걸음 더 걷지 않아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산봉우리인데도 광주의 산악인인 백계남씨가 리본(531m)을 매달아 놓았다. 그러고 보니 지도에 나와 있는 ‘534m이 바로 이곳인 모양이다.



‘534m을 지나면서 산길은 제법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진다. 하지만 그다지 깊지는 않다. 떨어지는 거리가 짧다는 얘기이다.



지금 걷고 있는 능선은 군()의 경계이다. 오른편은 옥천군, 그리고 왼편은 보은군이다. 우리야 그저 흔하디흔한 하나의 능선에 불과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모양이다. ‘2차 보은 군계종주라는 리본이 매달려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안부로 떨어지던 산길이 다시 위로 향한다. 그리고 10분 후에는 무명봉에 올라선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밋밋한 봉우리로 그저 낡은 리본 몇 개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곳을 삼면봉(三面峰)’이라 부른다. 옥천군 안내면과 보은군 수한면, 삼승면 등 세 개의 면이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된다. 좌측 수한면과 삼승면 경계를 이루는 지능선으로도 제법 또렷하게 산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마루금은 우측 안내면과 삼승면이 경계를 이루는 능선으로 이어진다.




삼면봉에서는 아래로 내려가기 않은 채로 그냥 위로만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그것도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이곳도 역시 다음에 오르게 될 봉우리까지의 고도차(高度差)100m나 된다. 이를 극복하려면 별 수 없었을 게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치고 오르면 쇠파이프로 울타리를 쳐놓은 묘역(墓域), 즉 지도에 634m봉으로 표기된 봉우리에 올라선다. 등산객들의 출입을 막으려고 둘러친 금()줄인 모양인데, 다행이도 양쪽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닐만한 틈새를 열어놓았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묘역을 통과하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금적산의 정상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이후부터는 경사가 거의 없는 능선으로 이어진다. 로프까지 매어져 있는 내리막으로 시작되지만 몇 걸음 내려서지 않아 끝나버리고, 이후부터는 평탄한 길의 연속이다. 거의 힘들이지 않고도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이정표(원남리 2.5Km/ 서원21.9Km, 서원12.8Km)를 만난다. 왼편으로 나있는 길은 서원리에서 올라오는 길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정표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조금 후에 오르게 될 금적산에 대한 표기를 빼먹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눈요깃거리가 나타난다. 선돌(立石)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두꺼비를 닮기도 했다. 보은 들녘을 오가는 곤충들을 채기라도 하려는 모양으로 말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무인산불감시탑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있는 금적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감시탑뿐만이 아니다. 정상에는 충북 남부지역을 수신범위로 하는 TV, FM라디오, DMB방송 등을 서비스하는 방송 송출 중계소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고 한다. 옥천군 청산의 박달라산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용산점 봉수대로 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봉수대였단다. 지금 그 자리에는 KBSMBC의 방송 송신탑(送信塔)들이 들어서 있다. 세월이 지났어도 똑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봉수대나 송신탑 모두 소식을 받아서 전하기는 매한가지이니 말이다. 덕대산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45분이 지났다.



금적산에는 애처로운 옛 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주인공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여느 전설(傳說)과는 달리 비극적인 결말이 특이한 이야기이다. 먼 옛날 이곳에는 금송아지의 정성어린 구애 끝에 결혼한 금송아지와 금비들기 부부(夫婦)가 금슬 좋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인 금송아지가 밭을 갈다가 넘어져 두 눈을 잃고 말았다. 아내인 금비들기는 눈먼 금송아지를 위하여 열심히 봉양하였으나 엄청난 금송아지의 식욕을 충족시키기에는 힘이 겨웠다. 해가 거듭될수록 금비들기는 지쳐갔고 끝내는 혼자 떠나 버리고 말았다. 홀로 남은 금송아지는 금비들기를 찾아 헤매다가 지친 나머지 쓰러져 죽고 말았단다. 후세 사람들이 금송아지가 죽은 산이라고 해서 금적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금송아지가 죽을 때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꼬리는 남쪽으로 향하였는데, 지금도 꼬리 쪽인 옥천군 안내면 오덕리에는 사금(砂金)이 많이 나오고, 머리를 두었던 북쪽인 보은군 삼승면 서곡리에는 부자(富者)가 많이 난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상표지석과 삼각점(보은 11)KBSMBC의 송신탑(送信塔) 사이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정상석의 옆에는 평상을 놓아 쉼터와 전망대를 겸하도록 했다. 아무튼 이곳 금적산에는 전 국민이 3일간 먹을 수 있는 보배가 묻혀 있다고 전해온다. 정상에 올랐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한없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들녘이다. 심심산골로 알려진 보은 땅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너른 들녘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동쪽으로는 속리산의 주봉인 천왕봉과 구병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웅장한 대청호반과 장계국민관광지, 북쪽으로는 보은군의 넓은 평야지대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하산을 시작한다. 하지만 산을 내려서기 전에 길 찾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곳에서 금적지맥이 나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려가고자 하는 원남리는 올라왔던 곳의 반대방향으로 열린다. 지맥은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꺾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이 길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심심찮게 바위지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암릉은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날카롭지도 않다. 하지만 바위지대에서의 방심은 금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오면 전망바위를 만난다. 아까 정상에서 바라보던 보은 방향의 들녘과 높고 낮은 산들이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전망대를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냥 내려서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았다. 바닥이 흙길이지만 안전에 신경을 써야하는 구간이다.



능선이 잠시 편해지는가 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위지대로 바뀌어버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흙길로 변한다. 능선은 그렇게 바윗길과 흙길을 번갈아가며 선보인다. 흙길이라고 해서 다 편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안전로프까지 매어 놓아야 할 정도로 가파른 구간도 나타난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내려서면 또 다른 전망바위를 만난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은 아까 보았던 것보다는 한참이나 뒤떨어진다.



잠시 후 전망 좋은 묘역(墓域)에 내려선다. 삼승면 소재지인 원남리가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수많은 묘()들을 만난다는 점이다. 그것도 하나 같이 능선의 정중앙(正中央)을 차지하고 있는 묘들이다. 그만큼 이곳 금적산과 덕대산에 명당(明堂)이 많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이는 금적산에 전해져 내려오는 금송아지와 금비들기전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묘역을 지나서도 가파른 내리막길은 계속된다. 굵직한 안전로프 까지 매어져 있을 정도라고 하면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아무튼 더 이상의 위험한 구간은 없을 거라며 챙겨온 위스키를 꺼내놓던 김선배님의 바램이 무참하게 깨져버리는 순간이다. 하산 구간이 위험하다 싶어 꾹 참고 내려오다가 이젠 안심해도 되겠거니 하고 주저앉은 곳이 방금 전의 전망 좋은 묘역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로프에 매달려 조심스럽게 얼마간 내려서면 이정표(금적산 제3등산로 입구0.6Km/ 금적산 정상1.5Km)를 만난다. 산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방향을 튼 산길은 다시 한 번 로프에 의지하게 만든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와진다. 경사가 거의 없이 느긋하게 고도를 낮추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능선을 따르던 산길이 느닷없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능선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화광사로 내려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방향표시지는 곧장 능선을 따르란다. 능선에다 금()줄까지 쳐놓았는데도 막무가내로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 더 진행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민가(民家)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삼송면 소재지인 원남리이다. 본격적인 산행은 이쯤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면사무소까지는 아직도 20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한다.



산행날머리는 삼승면사무소(충남 보은군 삼승면)

잠시 후 시멘트포장 임도를 만났다싶으면 곧이어 저수지가 나온다. 강태공(姜太公) 두어 명이 한가롭게 앉아 있는 걸 보면 입질은 제법 있나 보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아까 임도에서도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었다. 아무튼 마을을 통과해서 502번 지방도와 만날 때까지는 여러 번에 걸쳐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일일이 방향을 나열할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그저 자동차도로까지 나간다고 생각하며 걸으면 된다. 그러다가 방향이 헷갈릴 경우에는 주민들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진행하다 502번 지방도를 만나면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잠시 후 면사무소를 만나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끝을 맺는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4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고 50분 가까이나 푹 쉬었으니 순수하게 걸은 시간은 3시간 50분쯤 되는 셈이다.


해맞이산(297m)-철봉산(鐵峰山, 449.5m)-서발산(西鉢山, 308m)

 

여행일 : ‘16. 6. 25()

소재지 : 충북 옥천군 동이면

산행코스 : 금강2교 입구해맞이산(고수봉)전망봉철봉산(큰단우리)팔음지맥 갈림길헬기장서발산우산보건진료소(산행시간 : 3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경부선 하행선을 타고가다 옥천군 관내에 이르면 금강휴게소를 만나게 된다. 이 휴게소에서 바라볼 때 거의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산이 시선을 끈다. 이 산이 바로 철봉산이다. 하지만 산은 겉보기와는 다르다. 막상 산에 들고나면 산은 순하기 짝이 없다. 바위다운 바위 한번 구경할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인 것이다. 때문에 기암괴석 등 시선을 붙잡아 둘만한 볼거리는 일절 없다. 특징 없는 산행이 계속된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해맞이산과 철봉산 정상에서의 조망(眺望)만은 뛰어나다. 유장하게 흐르는 금강은 물론이고, 서대산과 월이산 그리고 천성장마(天聖壯馬 : 天台山·大聖山·壯龍山·馬城山) 능선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다시 찾아보는 것은 몰라도 한번쯤은 올라볼만한 가치가 있는 산으로 분류하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옛 경부고속도로의 금강2(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17-1)

경부고속도로 금강 T.G(금강휴게소 안에 있다)를 빠져나와 우산로(郡道)를 타고가다 구() 금강3교를 건넌다. 이어서 옛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잠시 달리면 구() 금강2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기 바로 직전이 오늘의 산행들머리이다.




금강2바로 못미처에서 왼편 산자락으로 올라붙으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철봉산 건강운동정보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철봉산의 등산코스를 4개로 나눈 다음. 각 코스별로 소요되는 칼로리의 양을 표기해 놓은 안내판이다. 잠시 후 언덕 위에 있는 민가(民家)의 마당을 스치듯 통과하게 되니 참조한다. 또 하나, 보초를 서고 있는 개가 짖는다고 해서 겁먹을 필요도 없다. 단단히 묶여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길은 거칠다. 잡목(雜木)과 넝쿨식물들이 등산로까지 밀고 들어와 갈 길 바쁜 산꾼들의 발걸음을 자꾸만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지 않는 코스라는 의미일 것이다.



10분 후 능선에 올라선다. 이제부터는 팔음지맥(八音枝脈)을 따른다. 요 아래 금강이 팔음지맥이 숨을 다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팔음지맥이란 백두대간의 봉황산(740.8m)에서 분기하여 남서진하면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낮은 지대를 지나다가 천택산(683.9m)과 팔음산(762.3m), 천금산(464.9m), 천관산(445.4m), 철봉산, 해맞이산(일명 고수봉) 등을 일군 후 옛 경부고속도로 금강2교 부근의 금강에서 그 숨을 다하는 도상거리 57.7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부드러운 능선길을 따라 10분 쯤 걸었을까 군()이 사용하던 벙커가 나타난다. 생김새로 보아 포()가 놓여있던 자리인 모양이다. 그만큼 이곳 철봉산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앞서가던 김선배가 열변(熱辯)을 토하고 계신다. 6.25전쟁 당시 사단장 한명이 전쟁포로가 되었었는데, 그가 잡혔던 곳이 바로 이 부근이라는 것이다. 혹시 미() 육군의 24사단장이었던 윌리엄 딘(William Dean)’ 소장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알기론 6.25전쟁 때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던 장성(將星)윌리엄 딘소장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론 그는 이 부근이 아닌 진안에서 포로가 되었었다. 그것도 길을 안내해주겠다는 젊은이를 믿고 따라갔다가 공산당 자위대에 붙잡혔을 게다. ‘포로가 된 유일한 장성이라는 오점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홀로 낙오가 된 이유가 바로 부하를 아끼는 마음에서 생긴 사고였기 때문이다. 부상당한 부하에게 물을 떠다 주려고 어두운 밤에 산속을 헤매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이다. 옛날 삼국지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의로운 이를 어느 누가 흉볼 수 있겠는가. 오늘은 6.25전쟁이 일어난 지 정확히 66년이 되는 날이다. 의미 있는 날에 의미 있는 사람을 떠올리게 해준 김선배께 감사를 드려본다.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도 완만(緩慢)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파른 구간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날 뿐이고 거기다 그 거리까지 짧기에 그런 표현을 썼을 따름이다.




얼마쯤 올랐을까 길가에 매어진 로프가 보인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 곳에 매어진 것으로 보아 난간용으로 만들어 놓은 게 분명하다. 오른편이 벼랑이니 더 이상 나가지 말라는 경고용으로 말이다.



이 즈음에서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며 나뭇가지 사이로 적하리 일대의 금강(錦江) 여울목이 얼굴을 내민다. 적하리는 최상품의 올갱이가 잡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그 올갱이로 만들어 낸 올갱이국은 이곳 옥천고을의 대표적인 토속음식이다. 또한 저곳은 여름 휴가철이면 피서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올갱이가 서식할 정도로 물이 맑은데다가 수심(水深) 또한 너무 깊지 않아 안심하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란다.



조망을 즐기다가 이내 정상으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후 해맞이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37분 만이다.



해맞이산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산이다. ‘해맞이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도 확실하지가 않다. 그저 정상표지석에 적혀있는 이름이 해맞이산이기에 그저 그러려니 할 따름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곳을 고수봉이라고도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괜찮은 편이다. 동쪽으로만 트이는 것이 다소 아쉽지만 금강휴게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풍광이 나타난다. 산을 비집고 관통하며 직선으로 달리는 경부고속도로와 조령리와 우산리를 지나며 휘돌아 나가는 금강줄기가 묘한 대조를 이루는 풍광이다.



철봉산으로 향한다.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낭떠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경사가 가파르다.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안전로프가 길게 매어져 있다. 로프에 온 몸을 실어가며 조심조심 내려선다.



7분 후 안부사거리에 내려선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를 보면 분지벌고개라는 지명(地名)이 나오는데, 위치로 보아 이 고개를 이르는 지명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설 경우 금강유원지로 연결될 것 같은데, 오른편은 민가(民家)가 없는 것으로 알기에 감이 잡히지 않는다.



맞은편 능선으로 향한다. 오르막구간 임에도 불구하고 산길은 고운 편이다. 마음씨가 곱다는 얘기이다. 봉우리 끼리 연결시키는 능선만을 고집하지 않고 우회로(迂廻路)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불필요한 봉우리를 올라가지 않고도 정상으로 향할 수가 있다.



편안한 산길에 고마워하며 10분 정도 오르면 또 다시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왼편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공간이 만들어진다. 거기에는 철봉산을 에돌아 흐르는 금강이 들어있다. 강은 마치 멈춰진 것처럼, 그리고 한편의 산수화처럼 보인다. 그 아름다움에 반해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금강휴게소와 금강유원지가 눈에 들어온다. 덤인 모양이다.



능선은 가파른 편이다. 하지만 미리부터 주눅 들어 할 필요까지는 없다. 곳곳에 로프가 매어져 있으니 힘이 들 경우에는 붙잡고 오르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헉헉 거리며 오른다. 그렇다고 너무 힘들어 하지는 말자. 그리고 가끔가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금강의 물굽이가 눈앞에 펼쳐진다. 지렁이처럼 구불거리고 있다. 혹자는 소금 맞은 미꾸라지가 꿈틀 거리 듯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표현이 어떻든 간에 강여울이 만들어내는 그 아름다움만은 변함이 없다. 누군가는 한강의 상류인 동강의 줄기와 절경이 아름답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이곳 금강의 풍경도 그에 못지않다는 생각이다. 강변에 위치한 금강휴게소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 앞은 물론 금강유원지이다. ‘도리뱅뱅이가 입소문을 타면서 미식가(美食家)들의 발걸음이 요즘 부쩍 늘었다는 곳이다.



10분 후 밋밋한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 전망봉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오른편, 그러니까 동이면 방향으로 시야가 뻥 뚫려있다. 동이면과 옥천읍내가 한눈에 잘 들어오면서 멋진 풍광을 만들어 낸다.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산들은 아마 서대산과 식장산, 그리고 대성산 등일 것이다.




철봉산으로 향하는 길, 잠시 아래로 내려서던 능선이 오르막으로 변하면서 가파르게 변한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그리고 12분 남짓 후에는 철봉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8분 만이다. 참고로 철봉산의 옛 이름은 달우리산이었다. 달이 뜨기 직전과 직후 그 빛이 우린다(희미하게 비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정월대보름 망월일에 이 산의 어느 봉우리에서 달이 뜨느냐에 따라 그 해의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만난 바위, 하도 바위가 귀한 곳이라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옛말에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고 했다. 이 바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산이었더라면 눈에 띄지도 않았을 정도로 초라한 바위에 불과하지만 자리를 잘 잡은 덕분에 산행기에까지 올라오는 영광을 누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널따란 정상은 헬기장을 겸하고 있다. 정상에는 말뚝 모양의 정상표지석과 삼각점 말고도 또 다른 표지석이 두 개나 더 세워져 있다. 하나는 철봉산의 유래를 적어 놓았다. 그런데 다른 하나가 좀 낯설다는 느낌이다. ‘철봉산을 찾아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말이 적혀있기 때문이다. 20년 이상 산행을 해오면서 수많은 종류의 빗돌들을 보아왔지만 저런 내용이 적힌 빗돌이 정상에 세워진 것은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산에 쇠말뚝이 박혀있다는 데서 철봉산이란 이름이 유래됐다고 비석에 적혀있다. 임진왜란(1592) 때 원군(援軍)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 중에는 풍수지리에 밝은 장수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전란의 와중에서 조선의 빼어난 산세(山勢)가 그들의 눈에 띄게 되었고, 결국에는 명나라에 해가 될 수도 있는 인재(人才)들이 태어날 것을 우려한 그들의 해코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국의 명산(名山)들을 찾아다니며 인위적으로 산맥을 끊어 놓기도 하고, 불로 지지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는 쇠말뚝을 박아서 그 정기를 죽이는 등 이른바 명산 기()죽이기 사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곳 철봉산도 당시에 피해를 입은 산 중의 하나란다. 철봉을 박은 것으로도 모자라 불로 떠서 그 지기(地氣)를 쇠퇴시켰다고 전해지며, 그런 이유로 산의 이름 또한 철봉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빼어나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이기 때문이다. 옥천과 영동이 자랑하는 명산 월이산을 마주보는가 하면 서쪽으로는 대성산과 장령산이 조망되고, 그 너머에는 충남의 최고봉인 서대산이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있다. 그리고 마성산과 삼성산, 식장산도 조망되며 북쪽으로는 군북면의 환산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서발산으로 향한다. 하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아까 해맞이산에서 내려올 때에 비하면 이건 애들 장난 수준이다. 아무런 안전시설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7분 후 안부삼거리에 내려선다. 왼편으로 난 길은 한국불교 여래종(如來宗)’의 총본산이라는 대약사사(大藥師寺)에서 올라오는 길인 모양이다. 서발산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함은 물론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능선의 소나무들이 제법 굵어진 것 외에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구간이다. 아니 곳곳에 지어진 폐 벙커를 볼거리로 삼으며 걸어도 되겠다.




다행이도 길은 곱다. 보드라운 흙길만 해도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닌데, 거기다 솔가리들까지 수북하게 쌓여있다. 이건 숫제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여기에 볼거리까지 더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어쩌겠는가. 현실에 만족하며 산행을 이어간다.



그렇게 30분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왼쪽 방향이 옳은데도 능선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침 누군가가 커다란 통나무로 직진방향을 막아 놓았다. 무리하게 넘지만 않는다면 길을 잘못 들 염려는 없을 것 같다.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길은 변함없이 곱다.



6분 후 흔적만 있는 사거리를 지난다.



다시 5분 정도를 더 걸으면 생뚱맞은 풍경과 맞닥뜨린다. 깊고 깊은 산중에 플라스틱 의자가, 그것도 두 개나 놓여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산불감시요원이 갖다 놓았으려니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산불감시요원이 있을 만한 장소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질적인 풍경까지도 반가운 것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눈이 너무 한가로웠다는 증거일 것이다.



잠깐 가파르게 내려서면 산길은 둘로 나뉜다. 팔음지맥과 헤어지는 지점이다. 서발산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갑자기 길이 거칠어진다. 잡목(雜木)들이 등산로까지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등산객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코스라는 의미일 것이다. 얼마쯤 갔을까 왼편이 철망으로 막혀있다. 지역 주민들이 약초라도 재배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구간도 역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그러면서 능선은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진행하면 헬기장을 만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폐 벙커가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서발산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봉우리이다. 하지만 서발산은 이곳에서 조금 더 걸어야 만날 수 있다.



벙커 근처에서 시야가 열린다. 철봉산을 지난 뒤 처음으로 열리기에 반갑기 짝이 없다.



능선을 따라 걷는다. 약간 경사가 진 오르막길을 5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서발산 정상이다. 철봉산에서 출발한지 1시간30분 만이다. () 벙커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정상은 한마디로 좁다. 거기다 봉우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밋밋하기 까지 하다. 독립된 산의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서발산은 발음부터가 괴이쩍은 이름이다. 자칫 욕설로 오해를 할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하필이면 왜 그런 이름을 지었을까가 궁금하다. 그러다가 문득 가설(假說) 하나가 머릿속을 맴돈다. 김선배의 말로는 6.25전쟁 당시 이 부근이 피아간에 사투(死鬪)를 치른 격전지였다고 했다. 연대 병력이 몰살을 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에이 十八이라는 욕설을 내뱉으면서 죽어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게 산의 이름으로 굳어졌을 수도 있겠고 말이다. 웃자고 한 얘기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서발산이 나와 있지 않다. 또한 팔음지맥에서도 비켜나 있다. 해맞이산이나 철봉산보다 그 격이 한참 떨어진다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산세(山勢)가 뛰어난 것도 아니다. 조망(眺望) 또한 꽉 막혀있다. 그래서 버려졌나보다. 다른 산들과는 달리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제는 하산이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리고 중간에 폐 안테나를 만나는 것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 하나 없이 줄곧 내려서기만 한다.



납골묘역(納骨墓域)을 만나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눈의 호사가 이루어지는 구간이다. 흐드러지게 핀 망초꽃밭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망초의 어원(語原)망할 놈의 풀이라는 데서 찾는다. 아무리 뽑아내도 또 다시 무성해지는 잡초를 보고 내뱉은 농부의 넋두리가 망초의 어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망할 놈의 풀도 어딘가에는 쓰임새가 있을 게 틀림없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창조주께서 아무 생각 없이 허투루 만들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쓰임새라는 게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그렇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세상에 나올 가치는 충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순(蘇洵)의 변간론(辨姦論), 간신을 변별하는 의론事有必至(사유필지) 理有固然(이유고연)’이란 구절이 나온다. ‘일이 꼭 그렇게 된 데는 반드시 그렇게 된 이유가 있다.’ 뜻이다. 소순이 얘기하고자 했던 논지(論旨)에서는 어긋나겠지만, 망초가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의 주장이 떠오른 건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했던 아름다움과 마주친데 대한 놀라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구간에서는 먹는 즐거움도 누리게 된다. 길가가 온통 산딸기 밭인 것이다. 그리고 빨갛게 익은 산딸기들이 사방에 지천으로 널려있다. 그저 손과 입만 부지런히 놀리면 된다. 달다. 새콤하다. 아니 미치도록 맛있다.



산행날머리는 우산보건진료소의 위, ()경부고속도로의 페()차선(동이면 우산리)

눈과 입의 호사를 누리며 얼마쯤 걸었을까 저만큼에 옛 경부고속도로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왕복 4차선이던 고속도로는 이제는 2개 차선만 사용하고 나머지 2개 차선은 그냥 비워놓았다. 하산지점에 버스를 세워 놓아도 충분한 이유이다. 하지만 버스는 이곳에서 7~8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하는 우산보건진료소 근처에다 세워 놓았단다.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한 모양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4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 20분이 걸린 셈이다.



도로 아래는 우산리, 토속음식점들이 자리하고 있는 강변마을이다. 이곳 사람들은 풍부한 어족자원 덕에 어부로 살아 온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특히 피라미가 많이 잡히는데, 그 크기가 너무 작아 매운탕 거리도 안 된다고 해서 고기잡이의 목록에 포함되지도 않았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피라미가 이 마을 토속음식의 주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도리뱅뱅이라는 음식으로 식도락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도리뱅뱅이는 기름에 노릇노릇하게 적당히 튀긴 후 고추장과 갖은 양념을 발라 비린 맛을 없애고 맛을 내는데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또한 매운탕의 귀족으로 불리는 쏘가리 매운탕과 어죽도 별미로 알려져 있다.


옥계산(玉鷄山, 754m)-둔지미산(655m)

 

여행일 : ‘16. 2. 11()

소재지 :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과 영춘면, 가곡면의 경계

산행코스 : 노은치수리봉(전망바위)옥계산푯대봉(727.8m)삼거리봉(650m)둔지미산노갈봉(555m)문화마을 갈림길가대생태습지 주차장(산행시간: 4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산두레


특징 : 소개를 시작하기에 앞서 호사가들이 늘어놓은 옥계산에 대한 소개부터 옮겨볼까 한다. 단양군 어상천면과 영춘면의 경계를 이루는 노은치를 사이에 두고 삼태산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산이 옥계산이다. 그 둘은 억만 년 세월을 그렇게 바라보며 살아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산의 관계를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다. 조금 더 높으면서도 산세(山勢)까지 가파른 삼태산이 남자 산이고, 옥계산은 여자 산으로 친다. 긴 능선을 갖고 있지만 낮은 산 높이와 부드러운 산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실제로 올라본 옥계산은 생각보다는 훨씬 더 사나운 산이었다. 아니 남자 산이라는 삼태산보다도 오히려 더 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육산(肉山)과 골산(骨山)이 적당하게 섞여 있다고는 하지만 그 둘의 장점을 버리고 단점(短點)으로만 조합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볼거리가 거의 없는 암릉은 스릴(thrill)을 기대할 수준도 못 되었고, 크고 작은 돌로 뒤덮인 흙길은 자칫 한눈이라도 팔다간 발목을 접질리기 십상이었다. 거기다 오랫동안 방치된 등산로는 온통 넝쿨식물과 잡목(雜木)들로 가득해 발목을 휘감기 일쑤였다. 개활지(開豁地) 몇 군데와 노갈봉 등에서 터지는 조망(眺望)까지도 없었더라면 아마 최악의 산행이 되었을 것이다. 하여간 두 번 찾을 만한 산은 아닌 것 같다. 단양군에서 등산로 정비를 하기 전까지의 단서를 달겠지만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노은치(단양군 어상천면과 영춘면의 경계)

중앙고속도로 북단양 I.C에서 내려와 우회전, 532번 지방도를 타고 연곡삼거리(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까지 온다. 이곳에서 522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영춘면 방면으로 달리면 얼마 후 어상천면소재지(임현리)에 이르게 된다. 계속해서 영춘면 방면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노은치(露銀峙)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임현삼거리에서 519번 지방도가 갈려나가니 헷갈리지 말고 계속해서 522번 지방도를 타도록 한다. 노은치는 그 높이가 370m나 된다. 고개가 높다보니 늘 이슬이 맺힌다고 해서 노운재 또는 농우재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노은치로 변했다는 것이다.




옥계산과 삼태산은 능선으로 연결된다. 그 중간쯤에 노은치(露銀峙)가 있다. 522번 지방도가 능선을 가르고 지나가면서 생긴 고갯마루이다. 아니 옛날부터 나있던 오솔길을 신작로(新作路)로 넓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옥계산을 오르려면 노은치 고갯마루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산행은 고갯마루에서 동쪽, 그러니까 영춘면 방면으로 3~4분 정도 내려서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도로를 내면서 생긴 절개지(切開地)에 펜스(fence)를 쳐놓아 사람의 통행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널찍한 공터로 이루어진 들머리에 옥계산 등산안내도를 세워 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면(斜面)을 따라 길게 쳐진 펜스를 따라 능선으로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임산물 생산단지 기반서설이라며 펜스를 쳐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7분쯤 오르면 능선에 올라선다. 비록 도로로 인해 끊겼지만 삼태산에서 옥계산으로 연결되는 주능선이다. 이정표(옥계산 2.6Km, 수리봉 1.8Km/ 노은재 0.5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그리고 1.8Km 떨어진 곳에 있다는 수리봉을 머리에 새겨둔다.



능선을 따르면 잠시 후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능선이 길기는 하지만 부드럽다는 사전지식이 무색해질 정도로 가파르다. 곧바로 위로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고 나서야 겨우 위로 오를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힘든 구간은 오래지 않아 끝을 맺는다. 그리고 18분 후이면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첫 번째 봉우리에서 능선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능선은 아래로 제법 길게 떨어졌다가 다시 위로 향한다. 왼편 산비탈이 텅 비어있다. 뭔가를 위해 나무들을 몽땅 베어낸 모양이다.



아래로 내려섰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올라서고 나서야 두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오르막길의 가파름은 생각보다 심한 편이다. 거기다 비탈진 사면(斜面)으로 길이 나있어 자칫 잘못하다간 굴러 떨어질 수도 있겠다. 위험할 정도는 아니지만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첫 번째 봉우리에서 두 번째 봉우리까지는 15분이 걸렸다.



나무를 제거된 개활지(開豁地)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첨봉처럼 솟아오른 누에머리봉과 삼태산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두 번째 봉우리에 이른 능선은 이번에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작은 봉우리들을 계속해서 오르내리며 산행을 이어간다. 이후부터는 거의 같은 풍경이다. 왼편은 나무들을 모두 잘라낸 개활지, 산길은 그 개활지와의 경계선을 따라 나있다. 덕분에 왼편은 계속해서 시야(視野)가 열린다. 태화산과 소백산 등 높고 낮은 산들이 파노라라처럼 펼쳐진다.






조망을 즐기며 20분쯤 걷다보면 산길은 제법 깊게 파고 들어간 안부까지 떨어졌다가, 또 다시 긴 오르막길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번 오르막길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안부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던 바위들이 그 밀도(密度)를 늘려가더니 정상에 이르러서는 완연한 바위봉우리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 암봉이 수리봉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곳이 수리봉 정상이라는 그 어떤 표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봉우리의 생김새나 아까 이정표에서 보았던 수리봉까지의 거리(1.8Km)를 보고 미루어 짐작했을 따름이다.




암봉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그 동안은 왼편으로만 시야가 트였는데 이번에는 오른편까지 시원스럽게 열려버리기 때문이다. 가까이는 삼태산과 태화산(太華山), 용산봉이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풍광으로 다가오고, 그 뒤로 소백산(小白山)의 웅장한 산세가 외성처럼 둘러쳐져 있다.




바윗길은 수리봉을 지나서도 10분 정도 더 계속된다. 짜릿한 스릴(thrill)을 만끽할 정도는 아니지만 손맛을 즐기기에는 충분한 바위들이 줄지어 이어진다. 바위를 오르내리며 나아가다 그게 힘들 땐 에돌아간다. 경거망동만 하지 않는다면 위험할 것까지는 없는 바윗길이다. 바윗길의 특징인 볼거리들에 눈을 맞추면서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아름드리 소나무들 또한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팔을 활짝 펼친 나무, 양다리를 벌린 듯한 나무, 온몸을 비비 꼬고 있는 나무 등등, 제멋대로 생긴 소나무들이 이미 봄기운이 무르익어버린 바람결 따라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다.




바윗길이 끝나면 능선은 또 다시 육산으로 변한다. 왼편은 잠시 개활지가 계속된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산길은 숲속으로 파고든다. 덕분에 따분한 산행이 시작된다. 육산의 특징대로 볼거리가 없는데다가 조망까지도 딱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봉우리 두어 개를 넘다보면 드디어 옥계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수리봉에서 30분 정도의 거리이다. 두세 평쯤 되는 좁다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충북 특유의 작고 검은 오석(烏石)으로 된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영월318, 2004 복구)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주변 나무에 가려 조망은 보잘 것이 없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40분이 지났다.




둔지미산으로 향한다. 펑퍼짐하게 생긴 능선은 전형적인 육산의 형태이다. 때문에 별다른 특징이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산길이 계속된다. 길고 가파른 오르내림이 없는 두루뭉술한 산길이 이어진다는 얘기이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중간에 두어 곳에서 커다란 바위를 만나기도 하지만 카메라에 담아둘만한 풍경은 보여주지 못한다.



15분 후 이정표(장발리 뒷방골 2.6km/ 옥계산 0.8km)가 있는 둔덕을 지나고, 또 다시 그만큼(15)을 더 걸으면 또 다른 이정표(장발리 뒷방골 1.8km/ 옥계산 1.6km)를 만난다. 그리고 10분 후에는 푯대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남봉이라고도 불리는 봉우리이다. 옥계산 정상에서 40분 만이다.



작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외로운 삼각점(영월466, 2004 복구) 하나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저 가끔 산행을 같이 하고 있는 박건석 선생이 붙여 놓은 정상표시코팅(coating)가 이곳이 푯대봉의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 현재의 위치까지 꼼꼼하게 표시해 놓은 코팅지가 하나 더 매달려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소백의 아침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에서 만든 모양인데 아마 인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등산동호회가 아닐까 싶다. 이곳도 역시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능선은 푯대봉을 지나면서 왼편이 벼랑으로 변한다. 그리고 간간이 바윗길도 나타난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아기자기한 바윗길이다. 그저 바위를 오르내릴 때 손끝으로 전해오는 짜릿한 촉감만 즐기면 될 일이다. 그것도 싫다면 에돌아가면 될 일이고 말이다.







벼랑 덕분에 시야(視野)가 열린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왼편 나뭇가지 사이로 남한강이 내다보인다. 태화산 자락을 에돌아 흘러나와 충주호로 향하는 물줄기이다. 그 물줄기의 양쪽 가장자리가 하얗게 빛나고 있다. 포근한 날씨에 얼어있던 강물이 풀려가는 증거이리라.



바윗길이 끝나면 잠시 후 송전탑(送電塔)이 서있는 안부에 내려서게 되고, 이어서 맞은편 능선을 잠깐 치고 오르면 6분 후에는 이정표(가대리/ 장발리 뒷방골(수광사)0.9Km/ 옥계산2.5Km)가 세워진 삼거리봉(650m)’에 올라서게 된다. 물론 정상표지석은 없다. 박건석 선생의 정상표시코팅지가 이정표 아래에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종궁산이라고 지명표시를 해놓았다. 당치도 않은 이름을 붙여놓았다고 누군가가 떼어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옳았을 수도 있다. 가곡면사무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종궁산이라는 지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안말 북쪽에 있는 산으로 향산리의 투구봉과 연결된 큰 산이란다. 투구봉이 어디에 있는 봉우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 650m봉이 안말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기에 하는 말이다.




둔지미산으로 향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가대리 방향이다. 몇 걸음 걸었을까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는 없지만 둔지미산은 곧장 직진해야 한다. 하지만 산행날머리인 가대리는 왼편 방향이다. 둔지미산을 둘러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삼거리에서 7~8분 정도 더 진행하면 둔지미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밋밋하게 생긴 것이 흡사 둔덕을 닮은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물론 이번에는 삼각점까지도 없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정상표지판만 아니었다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둔지미는 이 지역에서는 언덕빼기를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지역 사람들은 둔지미산 정도는 산으로 치지도 않았다는 말이 된다. 하긴 1천미터를 넘나드는 높은 산들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이정도 쯤이야 언덕으로 보았을 만도 하겠다. 푯대봉에서 이곳 둔지미산까지는 40분이 조금 못 걸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온 능선들이 내다보인다. 그 뒤에서 나도 있다는 듯이 고개를 내미는 봉우리들은 삼태산과 누에머리봉일 것이다. 겨울철에만 나타나는 조망이 아닐까 싶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노간봉을 지나 가대리로 연결되는 길이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그런 길은 노간봉에 이를 때까지 16분 정도를 계속해서 이어진다. 내려서는 길만 가파른 게 아니다. 언제부턴가 왼편이 벼랑으로 변해있다.



가파르게 떨어지던 산길은 막바지에서 잠깐 오름세로 변한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노간봉이 있다. 노갈봉이라고 불리는 봉우리이다. 노간봉의 왼편, 그러니까 남한강 방향은 까마득한 단애(斷崖)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서슬에 놀랐나 보다. 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전망데크까지 절벽을 피해 안쪽에다 들어앉힌 것을 보면 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특히 남한강의 물굽이가 압권이다. 강줄기 너머에는 용산봉(龍山峰), 그리고 그 뒤에는 소백산의 거대한 산줄기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노간봉에서 내려가는 길 역시 가파르다. 아니 무지막지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그 정도가 심해졌다. 거기다 왼편은 수직의 절벽, 그저 조심조심 내려갈 수밖에 없다. 그것도 될 수 있는 대로 안쪽으로 바짝 들어서서 말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곳곳에서 시야가 터지는 것이다. 왼편 발아래에는 남한강 물줄기가 아껴두었던 속살을 드러내고, 진행방향 저 멀리에는 소백산의 산줄기가 또렷하다.




왼편은 수백 길의 수직(垂直)으로 된 단애, 절벽이니 추락을 주의하라는 경고판까지 길가 곳곳에다 세워놓았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겠지만 너무 걱정할 것까지는 없다. 길이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1m쯤 안쪽으로 나있기 때문에 일부러 절벽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은 안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10분 조금 넘게 내려오면 벤치까지 놓아둔 삼거리를 만난다. 왼편은 가대리 문화마을’, 비록 이정표(가대리 문화마을1.6Km/ 노갈봉0.7Km)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산행날머리인 가대생태습지주차장으로 가려면 곧장 능선을 따라야 한다.



이어지는 산길도 가파르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더 내려오고 나서야 조금 반반해지고, 이어서 6~7분 정도를 더 걸으면 밭두렁에 내려서게 된다. 이후에는 농로(農路)를 따르게 되니 이쯤에서 산행이 끝났다고 봐도 될 것이다.




주차장으로 나가는 길 주변의 밭에 말라비틀어진 배추포기들이 널려있다. 작년 가을 공중파에서 배추수확을 포기하는 농민들이 많다는 뉴스들을 심심찮게 내보냈었다. 풍작으로 인해 가격이 폭락한 탓에 인건비도 못 건질 정도라면서 말이다. 그 가슴 아픈 현장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가대생태습지주차장(단양군 가곡면 가대리)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농막에서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그리고 10분쯤 더 걸으면 널따란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10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이 채 10분을 넘기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순전히 걷는데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될 것이다. 총무님이 권하는 막걸리 두어 잔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마셔버리고 생태습지(生態濕地)로 향한다. 저수구역으로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곳이었지만 다양한 수생동식물이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2011년 단양군에서 생태습지로 조성했다고 한다. 관찰데크, 목교 등의 탐방시설과 쉼터, 산책로, 다목적 광장 등 편의시설을 고루 갖춘 총면적 44774규모의 생태습지에는 창포, , 갈대, 어리연, 물억새 등 10여종의 수생식물과 개구리, 두꺼비를 비롯해 붕어, 미꾸라지, 물장군 등 수십 여종의 습지생물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마침 인근에 천연염색 체험장도 들어서 있으니 어린 손자, 손녀들과 함께 한번쯤 놀러와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옥녀봉(玉女峰, 455.7m)-무제봉(武帝峰, 574m)-백석봉(白石峰, 468.1m)

 

산행일 : ‘16. 1. 5()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이월면과 백곡면의 경계

산행코스 : 동암교동암마을옥녀봉송전탑장군봉(480m)정자전망대무제봉백석봉명암산촌생태마을(산행시간 : 3시간 45)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옥녀봉과 장군봉, 무제봉, 백석봉은 하나의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종주산행이 가능하다. 거기다 산들이 말발굽(U자형)을 뒤집어 놓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원점회귀 산행도 가능하다. 4개의 산들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는 점이다. 산행 내내 바위다운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을 정도이다. 때문에 특별한 볼거리는 보여주지 못한다. 무제봉 정상과 그 근처를 빼 놓고는 조망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 육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500m 전후의 산봉우리들로 연결되는 능선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황톳길은 폭신폭신하기까지 하고 봉우리들 사이의 골이 깊지 않은 덕분에 산행을 하는데 힘도 별로 들지 않는다. 거기다 4시간이면 산행을 마칠 수 있으니 시간 또한 적당하다. 한마디로 괜찮은 산이란 얘기이다. 하지만 이는 한 가지를 빼 놓았을 때에 해당되는 말이다. 바로 백석봉 구간이다. 이 구간은 찾는 사람들이 드문 탓인지 황폐하기 짝이 없다. 잡목(雜木)들로 가득한 능선은 걷기조차 쉽지가 않을 정도이다. 산행을 하는 중에 싸대기 몇 대쯤 맞을 각오는 해야 할 것이다. 원점회귀 산행 보다는 백석봉을 뺀 산행코스를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동암교(진천군 이월면 명암리 동암마을)

중부고속도로 진천 I.C에서 내려와 좌회전하여 21번 국도를 타다, 잠시 후 신성사거리(진천읍 성석리)에서 우회전하여 계속해서 21번 국도를 따른다. 이어서 벽암사거리(진천읍 벽암리)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이번에는 34번 국도를 따르다가 백곡저수지의 상류에 있는 건송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군도(명암길)을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동암교에 이르게 된다  

 

 

 

동암마을로 들어가는 동암교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무제봉 6.5km, 장군봉 3.4km, 옥녀봉 1.8km, 사지 마을 4.9km/ 명심리 0.7Km, 발레시수녀원 2.4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마을 안길을 짧게 지난다.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잘 지어진 집의 앞에서 왼편 계곡길로 들어선다. 산길은 밭과 골짜기 사이로 나있다. 그리고 밭을 지나자마자 왼편 산자락으로 들어붙는다. 들머리에 등산로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혹시라도 길을 못 찾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산길은 초반부터 가파르게 시작된다. 처음으로 오르게 될 옥녀봉의 높이는 기껏해야 400m 중반에 불과하다. 그런데 뭐가 급하다고 처음부터 서둘러 고도(高度)를 높여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걱정할 것까지는 없다. 5분이면 옥녀봉에서 동암 마을로 이어지는 서남릉에 올라서게 되면서 가팔랐던 오르막길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별 어려움 없이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

 

 

능선에 올라서서 10분 쯤 지나면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면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무제봉에서 갈라져 나온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저 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백석봉일 것이다.

 

 

무명봉에서 짧게 내려선 산길은 평탄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6~7분쯤 지나면서 서서히 가팔라지더니 끝내는 버겁다싶을 정도로 가팔라져 버린다. 하지만 이번에도 5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오르막길이 끝나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끝나면 ‘T'자형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는 세워져있지 않지만 옥녀봉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장군봉과 무제봉은 왼쪽 방향이다. 옥녀봉을 둘러본 후에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는 얘기이다.

 

 

 

삼거리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옥녀봉 정상이다. 상당히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삼각점, 이정표(장군봉 2Km, 무제봉 4.5Km/ 장수굴 1.8Km, 사곡마을 2.4Km)외에도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하지만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옥녀봉은 옥녀(玉女)가 금비녀를 꽂고 거문고를 타는 생김새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상석의 뒷면에는 또 다른 사연이 적혀있다. 궁골마을에 살던 기옥녀(奇玉女)란 여인이 중국 원나라 황제의 비()가 되었다고 해서 그녀의 이름을 딴 이름이라는 것이다. 한때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기황후가 태어났던 곳이 바로 요 아래에 있는 궁동마을(이월면 노원리)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궁골마을은 궁동마을의 또 다른 이름일 게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아래로 내려선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봉우리들 사이의 골이 깊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경사가 거의 없는 산길은 걷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다. 거기다 보드라운 흙길에는 낙엽들까지 수북하게 쌓여있다. 여간 폭신폭신한 게 양탄자가 따로 없을 정도이다.

 

 

 

부담 없는 산길은 꽤 오랫동안 이어진다. 그러다가 옥녀봉을 출발한지 30분 정도가 지나면 송전탑(送電塔)이 나타나면서 오른편 잡목(雜木)들 사이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리고 진천과 음성의 너른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날씨가 받쳐주지 못한 탓에 모든 것이 희뿌옇게 나타날 뿐이다.

 

 

송전탑을 지나면서 산길은 제법 가팔라진다. 그리고 6분 후에는 장군봉에 올라서게 된다. 장군봉의 정상도 역시 제법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쉼터를 겸하고 있는 것 또한 옥녀봉과 같다. 정상표지석과 이정표(무제봉 2.5Km/ 옥녀봉 2Km, 장수굴 3.8Km, 사곡마을 4.4Km) 외에도 벤치를 놓아둔 것이다. 조망도 역시 트이지 않는다.

 

 

 

무제봉으로 향하는 능선 역시 곱기는 매한가지이다. 아니 아까보다 더 고와졌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참나무들이 주종을 이루던 능선이 언제부턴가 소나무들로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진한 솔향에 취하면서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장군봉에서 내려서면 잠시 후 송전탑을 만나게 되고, 이어지는 작은 오르내림을 몇 번 반복하고 있는데 갑자기 능선이 뚝 끊겨버린다. 장군봉에서 20분 조금 못되는 지점인데, 임도(林道)를 새로 내느라 산허리를 싹둑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되돌아 나와 왼편으로 우회(迂廻)한 후 맞은편 능선으로 오른다. 새로 제작한 듯이 보이는 이정표(무제봉 정상 2.5Km/ 산림문화휴양관 900m)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길가에 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임도를 새로 뚫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능선으로 올라 산행을 이어가면 잠시 후 또 다른 임도를 만난다. 명암리에서 옥정현으로 이어지는 임도이다. 이번에는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게 적힌 이정표(전망대0.1Km, 무제봉 1.0Km, 신계리(어당이) 5.6Km, 성대리(상봉) 6.0Km/ 장군봉1.6Km, 옥녀봉 3.4Km, 송림저수지 3,9Km, 명암리 2.7Km, 장수골 5.0Km, 사지마을 5.8Km/ 휴양관800m) 외에도 산행안내도와 벤치, 운동기구에다 정자(亭子)까지 갖춘 반듯한 쉼터로 조성해 놓았다. 산길은 임도를 가로지른 후 맞은편 능선으로 향한다. 능선으로 오르는 사면(斜面)에는 목제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임도를 내느라 산허리를 잘라버린 미안함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려 했던 모양이다.

 

 

 

계단에 올라서면 장군봉에서 옥녀봉까지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 뒤에도 높고 낮은 산들이 천지이다. 조금 후에 실컷 보게 될 너른 들녘과는 완벽하게 상반되는 풍경들이다.

 

 

계단을 오르면 삼거리(이정표 : 무제봉950m/ 전망대30m)이다. 무제봉으로 곧장 진행해도 되겠지만, 지척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면 뭔가 볼만한 게 있다는 얘기일 테니까 말이다. 목재 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만난다. 전망대에 오르면 시야가 뻥 뚫린다. 그리고 시원스런 조망이 눈앞에 펼쳐진다. 진천과 음성의 들녘이 얼마나 너른지 가히 끝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그게 다 짙게 낀 연무(煙霧)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다보니 그 뒤에 솟아있어야 할 가섭산과 두타산 등 인근의 산들은 아예 나타날 생각조차 않고 있다.

 

 

 

전망대에서 무제봉으로 가는 길은 능선을 따른다. 왼편은 임도를 확장하느라 산자락을 헤집은 탓에 거의 벼랑 수준이다. 안전을 위해 목제난간까지 설치했을 정도이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른편으로는 막힘이 없이 시야가 열린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산자락의 나무들을 모조리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 덕분에 눈은 즐겁다. 조금 전에 전망대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거의 같은 모습으로 다시 한 번 펼쳐진다.

 

 

무제봉에서 뻗어나간 산자락에 뭔가가 보인다. 천룡 C.C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확실히는 모르겠다. 온 천지가 누렇게 변해버린 겨울철에는 골프장의 필드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의 잔디밭인지가 구분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얼마간 올랐을까, 전망대를 나선지 20분쯤 지나면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몇 기의 무덤()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무제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10분 만이다. 무제봉(武帝峰)은 제사(祭祀)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가뭄을 해소하기 위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기우제를 또 다른 표현으로 무우제(舞雩祭)라고 하는데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무제봉으로 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가설(假說)에는 문제가 있다. 무우제(舞雩祭)의 무제와 무제봉(武帝峰)의 무제는 완전히 다른 뜻이기 때문이다. 한자의 음() 또한 완벽하게 다른 것은 물론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중국 한()나라 때의 군주이자 정복전쟁으로 유명했던 무제(武帝)와 연관되는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이라도 하나 만들어보는 게 어떨까 싶다.

 

 

 

비교적 넓은 무제봉 정상에는 충청북도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라 할 수 있는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아랫도리에 상봉 마을 4.5km/ 발레기 마을 2.4km/ 어당이 마을 4.5km/ 송림 안산 3.0km라고 표기해 이정표의 기능을 겸하도록 했다) 말고도 정상석이 두 개나 더 세워져 있다. 인근의 산악회들이 세운 모양인데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과하면 부족함만도 못하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정상에는 무덤도 보인다. 옛날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고 해서 무제봉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된 점을 감안한다면 의외의 상황일 수밖에 없다. 내 기억에 기우제를 지내던 산봉우리에는 무덤을 못 쓰는 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무덤이 있을 경우에는 파헤쳐버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괜찮은 편이다. 마침 벤치를 갖춘 쉼터까지 겸하고 있으니 차분히 쉬어가면서 조망을 즐겨볼 일이다. 진천과 음성의 너른 들녘이 한 눈에 보이고, 칠장산에서 서운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의 마루금도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백석봉으로 향한다. 이번에도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하지만 무제봉으로 오를 때 보다는 조금 더 경사(傾斜)가 가팔라졌다. 그리고 오르막길 보다는 내리막길이 조금 더 길어졌다는 것 또한 다른 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길이 험해졌다는 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일 것이다. 능선이 온통 잡목(雜木)으로 우거져 있어 길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나뭇가지에 싸대기를 얻어맞기 일쑤이다. 그만큼 이 코스를 이용하는 등산객들이 적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욕설을 겨우겨우 참아가며 25분쯤 걸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길의 흔적이 양쪽 모두 희미하기 때문에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하는 게 옳다. 산악회들이 매달아 놓은 리본(ribbon)들 또한 오른편에 매달려 있다. 하지만 느낌만으로는 왼편이 더 옳아 보이기에 주의하라는 말을 썼다. 백석봉 정상으로 가는 길이니 응당 위로 올라야만 한다는 느낌으로 산행을 하고 있는데. 막상 오르막길은 왼편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백석봉을 건너 뛴 채로 명암마을에 내려서게 되니 참조할 일이다. 갈림길에서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두어 번 하고 나면 8분 후에는 송전탑(送電塔)을 만나게 된다.

 

 

 

송전탑을 지난 능선은 제법 깊은 골을 만든다. 거기다 경사(傾斜)도 아까보다는 조금 더 가팔라졌다. 그렇게 두어 번을 내려섰다가 올라서면 12분 정도 후에는 드디어 백석봉 정상이다. 무제봉에서 백석봉까지는 55분이 걸렸다.

 

 

백석봉 정상이 산봉우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다이지 않나 싶다.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대로 아무런 볼거리가 없다는 얘기이다. 삼각점(진천 435)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좁다란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도 찾아볼 수 없다. 새마포산악회와 서울마운틴 등 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들 마저 없었더라면 자칫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뻔 했다. 조망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 정상이 숲속에 갇혀있는 탓이다.

 

 

정상 근처에서 하얀색의 바위를 만난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널브러져있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총무님으로부터 백석봉이라는 이름에 얽힌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말로는 하얀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막상 정상에는 바위가 하나도 없기에 궁금했었는데 바로 저런 바위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보다. 하긴 맞는 말이다. 비록 봉우리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정상 어림에 하얀 바위들이 널브러져 있긴 하니까 말이다.

 

 

하산을 시작한지 5분쯤 지나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흐르는 주능선을 계속 탈 경우에는 백곡저수지로 내려가게 된다. 날머리로 계획하고 있는 명암(명심)마을의 회관으로 내려가고 싶을 경우에는 왼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하산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거기다 참나무 낙엽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미끄럽기까지 하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엉덩방아를 찧기 십상이다. 집사람 역시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서너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손목이 시큰거린다는 하소연까지 했을 정도이다. 그런 내리막길은 꽤나 오랫동안 계속된다. 내려가는 중간에 여러 기의 무덤들이 보인다. 이제는 길이 좀 수월해지려니 해보지만 가파르기는 매한가지이다. 다만 길에 잡목(雜木)들이 사라진 점은 확실히 달라졌다.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설 수 있다.

 

 

산행날머리는 명암마을회관

25분 정도의 가파른 내리막길과의 싸움이 끝나면 농로(農路)에 내려서게 된다. 이어서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명암마을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끝을 맺는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5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 45분이 걸린 셈이다. 이곳 명심(明心)마을은 산림청으로부터 산촌생태(山村生態)마을로 지정 받아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선지 아니면 원래부터 몸에 배인 것인지는 몰라도 주민들은 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잠시 점심을 먹고 가려는 등산객들에게 마을회관 안으로 들어오라며 선뜻 자리를 내어줄 정도였다. 이런 인심을 가진 마을이라면 마음 놓고 아이들을 맡겨도 되지 않을까 싶다. 마침 체험학습을 위한 시설들까지 최신으로 갖추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이곳 명심마을의 행정단위는 명암리(明岩里)이다. 이곳 명심(明心) 마을과 아침에 산행을 시작했던 동암(東岩)을 합친 후, ‘자와 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란다. 명암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밝아져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붙인 이름이라는데, 주민들의 친절함을 보니 이름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