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14구간(대축-원부춘)

 

여행일 : ‘22. 10. 31()

소재지 : 경남 하동군 악양면·화개면 일원

여행코스 : 대축마을(1.8km)동정호(2.2km)평사리입석마을(2.3km)윗재아랫재(3.6km)원부춘마을(거리 및 시간 : 10.7km/ 실제는 11.04km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4구간(원부춘-가탄)을 걷는다. 7개 코스(68km)로 이루어진 하동 권역의 다섯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8.5km(평사리 최참판댁을 둘러볼 경우 10.7km로 늘어난다) 밖에 되지 않으나 높이가 750m나 되는 고개를 오롯이 넘어야하기 때문에 난이도는 으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토지의 주무대인 평사리를 둘러볼 수 있으니 능히 도전해 볼만하다.

 

 들머리는 대축마을(하동군 악양면 축지리 945)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면으로 내려온다. ‘악양교차로에서 빠져나와 악양동로를 타고 올라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축마을에 이르게 된다.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원부춘 8.5㎞←대축삼화실 16.7)는 버스정류장 근처 느티나무 아래에 세워져 있다.

 14구간의 특징은 코스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하나는 입석마을을 거쳐 아랫재로 곧장 올라가는 방법으로 길이가 8.5km쯤 된다. 다른 하나는 소설 토지(박경리가 썼다)’의 무대인 평사리에 들렀다가 아랫재로 올라가는 방법인데 이때는 길이가 10.7km로 늘어난다. !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은 평사리에서 고소산성으로 오른 다음 형제봉능선을 타고 윗재로 가는 방법을 추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GPX트랙을 찾을 수 없어 두 번째 방법으로 걷기로 했다.

 악양천 쪽, 그러니까 백운산을 마주보며 걸어 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곳 악양면은 2009년 세계에서 111번째, 국내 5번째로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그러니 서둘지 말고 느긋하게 걸어볼 일이다. 자연과 더불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동구 밖 소공원의 마을 표지석은 한 길도 더 넘는다. ‘악양 대봉감 정보화마을이라는 입간판도 눈에 띈다. 대축마을은 대봉감의 시배지로 전해진다. 마을에서 생산되는 대봉감과 대봉곶감은 전국 그 어떤 대봉감보다 우수한 크기와 맛을 자랑한단다. 하긴 조선시대 임금님께 진상을 올렸을 정도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매년 11월 축제까지 열린다나?

 소공원 앞에서 축지교를 건넌다. 초입에 벅수(원부춘 8.3/ 대축 0.2)가 세워져 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악양천은 거사봉과 시루봉 자락에서 시작해 하류 즈음에서 악양 들녘을 만들고 나서 섬진강으로 합류되는 길이 10.5km의 물줄기다. 천은 들녘 한가운데를 지나는 건 아니고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 느긋하게 흐른다.

 다리를 건너면 정면에 이정표와 둘레길 안내판이 있다. 길은 여기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은 동정호와 최참판댁을 거치며 에두르는 길이고, 오른쪽은 입석마을을 향해 강둑으로 간다.

 벅수의 방향표시도 둘이 아니라 이다. 기본인 빨강색 방향은 강둑을 따라 입석마을로 향한다. 우회로인 녹색은 평사리의 너른 들녘을 에둘러 간다. 두 길은 입석마을 바로 위에서 다시 만난다.

 둘로 나뉘는 둘레길 상황은 안내판으로도 만들어 내걸었다. 지도는 그 거리까지 적었다. 너른 들녘을 에두르는 왼쪽 길이 4km로 오른쪽보다 1.7km 더 길다. 하지만 동정호와 토지의 산실인 평사리를 눈에 담을 수 있으니 다리품을 조금 더 팔만하지 않겠는가.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길은 또 다시 나뉜다. 이때 직진 방향에 놓인 평사리가 아름다운 풍경화를 만들어 놓는다. 들녘과 산등성이가 풍경을 위아래로 나눈 것이나, 반듯하고 질서정연한 논과 산등성이가 만드는 자연스러운 곡선의 대비도 느낌이 좋다. 널디너른 들녘에는 벼 대신 마시멜로처럼 생긴 곤포 사일리지만 곳곳에 쌓여 있다.

 둘레길은 악양천의 둑길을 따라 농업용수 공급 취수장까지 간다. 아니 공사 중이어선지 제방의 아래로 길이 나있었다.

 취수장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이번에는 평사리 들녘을 가로지른다. 평사리는 변한 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단다. 마을 앞 섬진강에 배가 오가던 시절에는 외부와 문물을 교류하는 창구의 역할도 수행했단다. 특히 지리산의 품에 아늑하게 안긴데다, 마을 앞에 엄청나게 너른 들녘이 펼쳐져 있어, 큰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다.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물이 넘나든다고 해서 무딤이들이라고도 불리는 널디너른 들녘이다. 저 들녘은 또 섬진강 500리 물길이 부려놓은 가장 너른 들이기도 하다. 이 너른 들이 사람을 불러들였고,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촌락을 이루며 문화를 만들어냈다. 추수가 끝나 텅 비어버린 들녘은 83만평이라는 수치보다도 훨씬 더 넓어져 있었다.

 동정호에 가까워지자 형제봉 능선이 더욱 또렷해진다. 신선대에 놓인 출렁다리가 그 자태를 드러내는가 하면, 맨 왼쪽에서는 하동의 또 다른 명소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스타웨이 스카이워크가 자신도 보아달라며 얼굴을 내민다.

 들녘 한가운데, 키 작은 잡목 숲이 섬처럼 자리한 곳에 소나무 두 그루가 사이좋게 우뚝 서있다. 토지 속 주인공 서희와 길상이를 연상시킨다는 부부송(夫婦松)’이다. 가을이면 누런 들녘과 푸른 소나무의 조화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고 해서 사진작가들의 단골 모델이 되기도 한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5, 허수아비의 할 일이 사라져버린 빈 들녘을 따라 걷다보면 그 끄트머리에서 동정호(洞庭湖)’와 만난다. 동정호는 자연 습지를 복원한 생태공원의 호수다. 하동군 악양면(岳陽面)이 중국(호남성)에 있는 악양(岳陽)과 지명이 같은데 착안해 그 동네 호수의 이름을 살짝 빌려왔다. 옛날 나당 연합군을 이끌고 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곳을 보고 고향 땅에 있는 못과 닮았다며 동정호라 불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호숫가 느린 우체통은 하동을 상징하는 두꺼비 조형물이 지킨다. 언뜻 보면 개구리처럼 보이는데 사실 동정호 주변은 두꺼비 서식지로 유명한 곳이란다. 이렇듯 동정호는 각종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진다. 이런 점에 착안한 하동군은 동정호 일대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했다. 호수 중앙에 인공 섬을 만들었는가 하면, 수변 덱과 전망대, 사랑의 출렁다리 등을 만들어 산책할 수 있는 힐링공간으로 조성했다. ! 혹자는 악양루에 앉아 푸른 가을하늘 아래 동정호 물가에 내려앉은 가을을 즐겨보라고 했다. 소상팔경(瀟湘八景) 중 하나인 동정추월(洞庭秋月), 즉 가을 날 동정호에 휘영청 떠오른 하늘의 달과 수면에 비친 달을 떠올리면서...

 이제 평사리로 갈 차례다. 동정호를 빠져나오는데 들녘 너머 악양면을 둘러싼 산세가 선명하다. 신성봉·형제봉·거사봉·시루봉 등 1000m 수준의 봉우리들이 어깨동무를 한 것처럼 길게 이어지면서 파노라마를 펼쳐놓는다. 그 사이 잘록한 부분이 묵계로 넘어가는 회남재일 것이다.

 조금 더 걸어 ‘1003번 지방도로 올라서면 최참판댁 버스정류장이 반긴다. 둘레길은 저곳에서 차도를 타고 입석마을로 간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곧장 직진해 볼 것을 권한다. 우리나라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토지의 주무대인 평사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도로를 건너 평사리로 향했다. 그러자 최참판댁으로 들어가는 길목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길손을 맞는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주무대라는 부제를 달고서. ‘토지는 박경리 작가가 26년간의 집필기간을 걸쳐 완성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대문학이다. 소설은 대한제국이 수립되는 1897년부터 1945 8 15일까지를 배경으로 하여 역사적 흐름을 폭넓게 가져간다. 작품 속 시간적 배경이 길다보니 공간적 배경도 장대하다. 최참판댁이 위치한 이곳 평사리 일대에서 시작해 진주·통영·경성과 만주의 용정신경하얼빈 및 일본 동경 등으로 확대돼 간다. 우리나라 근대사 속 민초들의 삶과 사회경제적 변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살려냈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앞 주차장에는 지역 특산품들을 펼쳐놓았다. 그중에서도 대봉이 단연 눈길을 끈다. 악양의 대봉감은 굵기로 유명하다. 최상품은 감 하나에 460g이 넘고, 제일 작은 것도 250g이나 나간다고 한다. 수확한 지 10일에서 20일이면 홍시로 먹을 수 있고, 곶감으로도 인기가 있는데 비타민 A C가 풍부한 영양 간식이란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여느 유명 관광지에 못지않다. ‘토지가 국민 애독서를 넘어 드라마로까지 제작되자, 그 현장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러자 하동군은 소설 속의 최참판댁을 실제인 양 지어놓았다. 마을에서 살던 이들의 초가삼간도 가상을 벗어나 현실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최참판댁은 하나의 마을로 구성되어 구경거리와 먹거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소정의 돈을 내야만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만큼 찾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조금 한산하지만 예전에는 연 입장객이 2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실존이 아닌 소설 속 공간에 불과한데도 찾아오는 이유는 대체 뭘까? 길에서 만난 어느 여행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 속 스토리가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러자 그 공간이 어떻게 펼쳐져 있는지를 한번쯤 보고 싶어졌다나?

 소설이 현실이 된 평사리는 평일인데도 꽤 많은 관광객들이 오가고 있었다. 옷이나 기념품, 특산품 등을 파는 가게는 물론이고 식당들도 손님맞이에 분주한 모습이다.

 상호는 대부분 서희 길상이 등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대신 음식점은 사랑채 별채 같은 최참판댁 건물들을 간판으로 내걸고 있었다.

 저 우물은 길상이를 흠모하던 불쌍한 봉순이가 물을 깃던 우물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먼저 들러볼 곳은 박경리문학관이다. 소설 토지의 모티브가 된 평사리에 마련된 작가를 기리는 공간이다.(작가의 고향인 통영과 토지 4·5부를 집필한 원주에서도 이와 비슷한 공간을 만나볼 수 있었다) ‘토지를 집필한 박경리 작가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의 위대한 작가이다. ‘토지외에도 불신시대’,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 등 수많은 작품들을 집필했는데, 부조리한 사회의 비판, 인간소외에 대한 저항, 인간의 존엄과 사랑에 대한 절대적 믿음 등을 담아냈다고 평가된다.

 지리산 자락을 배경삼은 문학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오른쪽으로 섬진강을 끼고, 앞으로는 누런 들녘이 넉넉하게 펼쳐진다. 풍요의 상징이어야 할 저 들녘을 소설(토지)은 수탈의 공간으로 그려놓는다. 다른 한편으론 그것을 이겨내며 해방을 맞이하는 이미지로 그려진다. 독자들이 이곳 평사리를 꼭 한번 와보고 싶은 곳으로 꼽는 이유이다.

 내부는 박경리 작가의 삶에 초점을 맞춘 전시로 기획됐다고 한다. 작가가 생전에 집필 할 때 사용하던 유품과 그가 남긴 글귀 등이 전시되어 있단다. 하지만 난 마당에 펼쳐놓은 작가의 원고지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평사리를 들르지 않고 입석마을로 곧장 진행해버린 다른 일행들을 쫓아가려면 뛰어가도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서이다.

 다음 방문지는 최참판댁이다. 구중궁궐을 연상시킬 정도로 커다란 저택이지만, 사실 토지 속 최참판은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다. 그러니 저 집도 소설을 극화시키기 위해 꾸며놓은 가상의 공간일 따름이다. 그렇다고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소설 속 얘기지만 주인공들이 살아가며 흩뿌려놓은 삶의 편린(片鱗)이 녹아있는데...

 저 사랑채는 최치수가 기거했다. 서희의 아버지이자 최참판가의 당주였던 그는 매사에 냉소적이고 신경질적이며 여자를 믿지 않는다. 별당아씨가 김환과 도망가자 추적했고, 최참판가의 재산을 차지하려 유혹하는 귀녀의 음모를 눈치 채고 강포수와 결혼시키려하나 김평산에게 살해되고 만다.

 안채는 여성들의 공간으로 안주인인 안방마님과 며느리, 여자 하인 등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최치수의 어머니이자 서희의 할머니인 안방마님 윤씨부인은 최참판가의 실질적 가장이다.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낳은 김환을 하인으로 곁에 두며, 별당아씨와의 불륜을 용인한다. 조준구의 장기 거주에 불안을 느껴 비밀리에 서희에게 금·은괴를 남겨주고 호열자로 죽는데, 이 자금이 서희가 재기하는데 발판을 만들어준다.

 뒷채는 연로하신 부모가 안채와 사랑채를 아들 부부에게 넘겨주고 은퇴하며 머무르는 공간으로 부엌과 서고 등이 딸려 있다.

 별당채는 그 집안 딸들이 기거하며 신부수업을 받는 공간이다. 별당아씨는 최치수의 둘째 부인이자 서희의 생모로 냉정한 남편에게 외면당하다가 이부 시동생 김환과 사랑에 빠져 도피한 후 묘향산 근처에서 죽는다. 그녀의 딸인 서희는 가족을 모두 잃고 조준구에게 재산을 빼앗기자 길상 등과 함께 용정으로 이주, 길상과 결혼해 두 아들 환국·윤국을 얻고 귀향하여 평사리 땅을 되찾는다. 그리고 은밀하게 항일운동을 하면서 지리산의 젊은이들을 돕고, 평사리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살아간다.

 별당 앞은 연못 차지다. 별당아씨를 연모한 구천의 마음과 구천을 향한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간절함이 녹아 있는 별당아씨의 연못이다. 신분은 달랐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이를 극복하고 사랑의 연을 맺은 스토리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모양이다. 사랑·소망·무병장수를 염원하며 던진 동전이 절구통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토지의 첫 장면은 평사리 들판에서 8월 한가위에 사물놀이하며 가을 추수를 주민들이 즐기는 걸로 시작된다. 마지막 장면은 최참판댁이 장식한다. 별당에서 주인공 서희가 일제로부터 독립 해방 소식을 들으며 소설을 끝을 맺는다. 소설처럼 별당을 마지막으로 최참판댁을 빠져나와 소설 속 마을을 둘러봤다. 마을은 칠성이네, 김평산네, 김훈장댁 등 14동의 한옥으로 구성됐다. 초가집은 TV 드라마 세트장으로도 활용된단다. 그래선지 용이네·두만네·월선네 등의 집들이 실제 사람이 살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지어졌다. ! 김훈장댁과 김평산네는 한옥스테이도 할 수 있다고 했다. 1일 숙박료(평일 기준 30,000원에서 35,000원 사이)도 쌈지막하니 여유가 있다면 하룻밤 묵어가도 좋겠다.

 최참판댁 입구는 최참판댁과 마을에서 촬영됐던 드라마나 영화로 도배되어 있었다. 하나, ... , 스물까지 헤아리다 지쳐 그만두었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조선총잡이·해를 품은 달·옥룡이 나르샤·꽃들의 전쟁·구름이 그린 달빛·역적 등등

 토지장터를 횡단해 마을을 빠져나왔다. 초가인 주막과 대장간 난전 등의 상가가 줄지어 있지만 평일이어선지 장이 서지 않아 한산했다. 참고로 평사리를 둘러보는 데는 20분이 걸렸다.

 평사리를 둘러봤으니 이제 둘레길로 되돌아가야 한다. 아까 평사리로 들어오면서 횡단했던 1003번 지방도이다. 하지만 난 장터를 지나 마을 뒤편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앱의 도움을 받아가며 탐방로를 찾아나간다.

 그렇게 4분쯤 걸어 대촌마을 근처(벅수 : 입석 0.9/ 대축 3.1)에서 둘레길을 만났다.

 둘레길은 감나무 밭 사이를 헤집는다. 어른 주먹보다도 큰 감이 나뭇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대봉감은 과실 중의 으뜸은 감이요, 감 중의 으뜸은 대봉감이라 할 정도로 색깔과 모양이 아름답고 감칠맛이 난다. 악양면은 삼면이 둘러싸인 분지형으로 바람의 피해가 적고, 겨울이 따뜻해서 품질이 우수한 대봉감을 생산하기 적격이란다. 감칠 나는 맛과 색깔, 아름다운 모양이 뛰어나 조선시대 임금님께 진상까지 됐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 감나무 사이로 한참을 오르면 입석마을에서 올라오는 길과 다시 만난다. 이곳도 지리산둘레길 안내도를 세워놓았다. 하지만 벅수(원부춘 6/ 대축 2.3)는 평사리로 가는 방향을 빼먹었다. 역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헷갈리기 딱 좋은 곳이다.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보문사 표지석이 서 있는 Y자 갈림길에서는 오른쪽 위로 간다.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섬진강이 살짝 얼굴을 내민다. ‘입석 상저수지 부근에서는 평사리 들녘과 칠성봉, 섬진강 건너 광양 백운산과 억불봉까지도 눈에 담을 수 있다.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형제봉(1115.5m)이 우뚝 선 모습으로 나타난다. 최근에 새로 놓았다는 출렁다리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둘레길에서 조금 비켜나 있으나 한번쯤 들러볼만한 곳이다. 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 들녘과 섬진강 비경, 섬진강 건너 우뚝 솟은 백운산의 자태까지 한꺼번에 눈에 담는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저 감밭은 제주도처럼 긴 막대기로 입구를 막았다. 제주도의 막대기(정낭)는 그 숫자로 주인의 근황을 나타낸다. 막대기 하나는 금방 돌아오고, 둘은 저녁, 셋은 멀리 여행을 떠났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나저나 감에 손대지 말라는 메시지일 거라는 내 설명에, 함께 걷던 이가 요즘 누가 농작물에 손대냐며 언성을 높인다. 내 생각도 같다. 하지만 아무리 당부해도 꼭 손을 대는 이들이 있으니 문제 아니겠는가. 언젠가 농작물 절취에 견디다 못한 마을주민들이 둘레길을 막아버린 곳도 만나지 않았던가.

 가파른 콘크리트 임도가 계속된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지형이지만,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최참판댁에서 35. 쉼터(벅수 : 원부춘 4.9/ 대축 3.6)를 만났다. 굵은 서어나무 그늘에 평상과 벤치를 놓았는가 하면, 바로 아래엔 화장실까지 들어앉혔다. ! 완주 인증을 위한 스탬프보관함도 이곳에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 일이다.

 100m쯤 더 올라가면 삼거리(벅수 : 원부춘 4.8), 둘레길은 이곳에서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고단한 행군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핸드폰의 앱은 이곳의 높이를 245m로 찍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고도를 500m나 높여야 한다.

 산책로 수준으로 이어오던 둘레길이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산길로 변한다. 그러니 가파를 수밖에 없다. 곳곳에 침목계단을 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토지 속 최참판댁 별당아씨는 구천이와 함께 지리산으로 숨어든다. 그렇다면 숨 헐떡이며 오르던 그네들이, 이 길 어디쯤의 바위 턱에 앉아 가쁜 숨을 내 쉬었을 수도 있겠다.

 산길은 울창한 서어나무 숲을 지난다.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저 숲은 고단한 행군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르겠다. 다음 주면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立冬). 이파리를 다 떨구어버린 북녘의 나무들은 빈가지만 허공에 매달렸지만, 남녘의 지리산은 이제야 단풍이 무르익는다.

 서어나무의 하얀 뿌리가 맹수의 발톱처럼 대지를 파고든다. 남세스럽게도 아랫도리를 뽀얗게 드러낸 것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저 바위는 말바위라고 했다. 그런데 요리조리 살펴봐도 말의 형상이 만들어지지 않으니 문제다. 무학대사는 부처와 돼지의 눈을 빌어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지천명을 넘긴지 스무 해나 지났건만 아직도 내 수양은 멀었나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길은 허리를 곧추세운다. 산길 주변의 바위도 그 숫자를 늘려간다. 그러다가 사면에 길게 누워 있는 상사바위를 지나면 하늘이 살짝 열리면서 형제봉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쉼터에서 50(트레킹을 시작한지는 2시간 20)만에 형제봉 능선의 안부인 윗재(해발 621m)’에 올라섰다. 이곳은 지리산둘레길과 지리산등산로가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오른쪽 능선을 타면 신선대를 거쳐 형제봉, 왼쪽은 신성봉을 거쳐 고소산성으로 연결된다. 둘레길은 직진하다 오른쪽으로 형제봉의 북서면 능선을 휘감아 돈다.

 이름표까지 떡하니 단 벅수는 이제 날머리까지 3.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산행을 이어간다. 하지만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하산은 아니다. 이후로도 산 사면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 윗재 부근에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좁새바위 전망대가 있다고 했는데 찾아보지는 못했다. 아니 당시는 그런 전망대가 있는 줄도 몰랐다.

 바위의 숫자가 부쩍 늘었다. 몸집도 아까보다 훨씬 더 부풀렸다. 산길은 그런 바위의 아랫도리를 에도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사이를 헤집는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위태롭게 걷기도 한다. 하지만 위험한 곳은 돌로 쌓아 길을 넓혔으니,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40분쯤 오르다보면 어느덧 아랫재에 이른다. 옛날 입석마을과 원부춘마을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라고 했다. 글쎄다. 조금만 에두르면 되는데 구태여 이렇게 높은 고개를 넘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번의 벅수(원부춘 2.4)는 이름표가 없었다. 어디로 뻗어나가는 능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14코스(대축-원부춘)에서 가장 높은 지점(해발 747m)임은 분명하다.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하지만 저 길은 칠순을 넘긴 나에게는 버티기 힘든 고역이다. 퇴행성관절염으로 신음하는 내 무릎으로서는 가파른 경사의 너덜길이 길어도 너무 길기 때문이다.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주변 풍광이 그나마 위안이 되어준다고나 할까?

 숲은 단풍이 한창이다. 14구간(대축-원부춘) 전체로 보면 단풍이 많지 않은데 이곳은 노랗고 빨갛게 물오른 단풍이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가을의 진수라는 단풍이 올라올 때보다 훨씬 더 짙어진 것이다. ‘가을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단풍이니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핏빛에 풍덩 빠져보면 어떨까?

 숲은 잎이 아기 손바닥처럼 작아 흔히 애기단풍으로 부르는 단풍나무가 주를 이룬다. 타오르듯 새빨간 단풍잎이 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보기 좋다.

 단풍 숲이 끝나자 주변의 풍광도 볼품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돌너덜길도 함께 끝나면서 이후부터는 흙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다.

 아랫재에서 1시간. 드디어 원부춘 마을에 도착했다. 뒤로는 형제봉이 받쳐주고 아래쪽으로는 섬진강이 굽이쳐 흐르며 강 건너 백운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 잡아 이름 그대로 풍요롭고() 따뜻한 봄날() 같은 동네다. 다른 한편으론 고려 때 한유한(韓惟漢)이 최충헌에게서 벗어나 숨어 두문불출한 곳이라 하여 불출동(不出洞)’, (원강사)이 있고 부처가 날만 하다 하여 불출동(佛出洞)’ 또는 부처동’, 형제봉에 붙어 있다고 부치동 등 이름도 다양한 산골마을이다.

 하늘 아래 첫 집은 실용성 위주로 꾸며져 있었다. 식수는 계곡에서 뽑아온 듯하고, 작은 박스들을 연결해 텃밭을 만들었다. 한 평의 땅이 아쉬울 수밖에 없는 산골마을의 형편을 보는 듯하다.

 마을에 들어섰는데도 길은 여전히 기세가 사납다. 가파르기 짝이 없는 산비탈에 마을이 들어서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원부춘마을 주민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나 보다. 산 중턱. 그것도 가파른 비탈에 들어앉은 지형에 맞게 높다랗게 축대를 쌓은 다음 그 위에다 건물을 올렸다.

 날머리는 원부춘마을(하동군 화개면 부춘리 326-2)

마을안길을 빠져나오면 트레킹이 종료되는 마을회관이다. 구간의 시·종점을 알리는 엠블럼(emblem)은 벅수(대축 8.7㎞←원부춘가탄 13.2)와 함께 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11.04km를 걸었다. 소설 토지의 산실인 평사리 최참판댁을 다녀오느라 2km 남짓 더 걸었다. 소요시간은 4시간 10. 높이가 750m나 되는 형제봉 능선을 넘느라 고생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14구간(대축-원부춘)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평사리이다.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토지의 배경지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60년에 가까운 시간과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지역을 펼쳐놓지만 시작과 끝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박경리 작가는 작품을 탈고할 때까지 평사리를 방문한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단 한번 진주여고 시절 이곳 출신 선배와 함께 평사리를 방문했던 기억이 머릿속 한켠에 남아있을 뿐이었단다. ‘토지를 구상하던 중 공간적 배경에 만석꾼이 있어야할 정도로 넓은 평야가 있어야 한다는 점, 작품에 사투리(작가에게 익숙한)와 같은 문화적 요소를 녹여내야 한다는 점 등을 고려하다가, 넓은 논밭이 있던 평사리를 기억해내고 토지의 배경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후 최참판댁에서 열린 행사 때 평사리를 찾았다가 상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지역의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나?

지리산둘레길 21구간(산동-주천)

 

여행일 : ‘22. 7. 2(토)

소재지 : 전남 구례군 산동면과 남원시 주천면 일원

여행코스 : 산동면사무소(1.9km)→현천마을(1.8km)→계척마을(5.2km)→밤재(2.7km)→지리산유스호스텔(4.3km)→지리산둘레길 주천센터(거리 및 시간 : 15.9km/ 실제는 ‘지리산유스호스텔’까지 13.14km를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21구간(산동-주천)을 걷는다. 6개 코스(68km, 목아재-당재구간은 폐쇄됐다)로 이루어진 구례권역의 마지막 구간이자, 지리산둘레길 걷기 대장정이 끝나는 구간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높이가 490m나 되는 ‘밤재’를 오롯이 넘어야만 한다. 하지만 지리산의 영봉인 노고단을 바라보며 걷는 즐거움도 있다. 거기다 현천마을과 계척마을에서는 구례의 자랑거리인 산수유를 실컷 눈에 담는 재미도 있다. 봄철에 걸어야 제격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면에 무더운 여름철에는 지옥의 행군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 들머리는 산동면사무소(구례군 산동면 원촌리)

완주-순천고속도로 북남원 TG를 빠져나와 동남원로를 타고 남원교차로까지, 17번 국도(오수방면)로 방자교차로(남원시 광치도). 이어서 산업로(19번 국도)를 타고 구례방면으로 24km쯤 내려오다 원촌교차로(구례군 산동면 계천리)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산동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내비게이션에 ‘산동면사무소’를 입력하고 찾아와도 된다. 참고로 이곳 산동면 일대는 ‘다른 날의 생일’이 ‘같은 날의 제사’로 환치되는 슬픔의 현장이라고 한다. 어느 쪽이기도 했고, 또는 어느 쪽도 아니었던 사람들이 목숨줄을 놓지 않으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해야 했단다. 사람들은 면사무소 뒤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노고단 골짜기에서 개별로 죽고 집단으로 죽어갔다.

▼ 구례군 산동면사무소와 주천면(남원시)의 지리산둘레길안내센터를 잇는 15.9km 길이의 둘레길로 난이도는 ‘중(주천에서 출발할 때는 ’상‘)’으로 분류된다. 370m나 고도를 높여야한다는 어려움은 있지만 오르막구간의 길이가 길어(8,9km)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감안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난 ‘상’으로 꼽고 싶다. 높이 490m의 ‘밤재’말고도 ‘꼭두마루재(해발 338m)’라는 또 하나의 재를 오롯이 넘어야만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처럼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여름날에는 ‘상’으로도 부족해 ‘상상상’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건각을 자랑하는 도반들도 6시간이 다 되어서야 트레킹을 마칠 수 있었다.

▼ ‘원촌길(북쪽 방향)’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출발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면사무소 앞 담벼락에 우리네 어버이들의 삶이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두부를 만드는 과정은 물론이고, 그 두부를 안주삼아 구례막걸리를 마시는 어르신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행복으로 넘치고 있었다. ‘어즈버 태평세월이런가...’

▼ 그림과는 달리 마을은 텅 비었다. 사람들이 모두 벽화 속으로 들어가 버리기라도 한 걸까? 두부를 만들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먹고 마시며 정담을 나누던 어르신들까지도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인구가 나날이 줄어가는 시골 마을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 대한뉴스 제725호에는 ‘어린이는 ’나라의 새싹‘으로 등장한다. 그런 소중함을 대접이라도 하려는 듯 ’원촌초등학교‘ 앞 담벼락은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꾸며놓았다. 말뚝박기·구슬치기·딱지치기·고무줄놀이 등 추억 속에서 소환된 어린이들로 한 가득이다. 놀다보면 하루가 너무도 짧다나?

▼ 마을을 빠져나오자 ‘19번 국도’ 진출입로,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갈림길(벅수 : 주천 15.3㎞/ 산동 0.8㎞)이 나온다. 오른편은 벽화로 입소문을 탄 삼성마을. 그것도 19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한번쯤 들어가 볼만도 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이 계척마을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찌 한눈을 팔 수 있겠는가.

▼ 개울 건너 ‘삼성마을’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저 마을은 벽화로 꽤 유명세를 탔다. 담벼락에다 마을 유래와 연관된 그림을 그려 넣었다. 뿐만 아니라 벽화와 어우러지는 미니 정원까지 만들어 찾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마을에 거주하는 화백의 재능기부로 벽화의 유지관리는 물론이고 벽화거리 확장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란다.

▼ 둘레길은 ‘19번 국도(산업로)’의 우측 아래로 난 옛 도로를 따른다. 모내기를 끝낸 논이 오른편에서 함께 걷는다.

▼ 고개를 들자 산동을 둘러싸고 있는 ‘지리산’ 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산동’의 특징으로, 이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산동애가’의 탄생 배경이 된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한 채로/ 까마귀 우는 골에 병든 다리 절며절며 달비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 없이 쓰러졌네...이하 생략>. ‘산동애가’는 오빠 대신 처형장으로 끌려간 백부전(본명은 ‘白順禮’이나 노리개처럼 예쁘다고 하여 부전이라 불렀단다)이 지어 불렀다고 전해지는 애달픈 노래다. 큰오빠가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죽고, 둘째 오빠는 여수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됐다. 셋째 오빠(여순사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마저 끌려갈 상황에 처하게 되자, 그녀는 가문을 잇도록 하기 위해 대신 죽음을 자청하고 나선다.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의혹만으로 양민을 총살시키던 암흑의 시절, 산수유 꽃처럼 아리따운 열아홉 살 처녀가 형장에 끌려가면서 불렀던 가슴 저린 ‘산동애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6분, ‘계천교’ 앞 버스정류장(현천마을)에 이르자 벅수(주천 14.7㎞/ 산동 1.2㎞)가 방향을 틀라며 왼쪽을 가리킨다. 19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인데, ‘현천마을’의 커다란 표지석이 초입에 세워져 있었다.

▼ MBN의 예능 프로그램 ‘자연스럽게’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눈길을 끈다. ‘자연스럽게’는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 세컨드 하우스를 분양받은 셀럽들이 전원생활에 적응해 가며 도시인들의 로망인 휘게 라이프(Hygge Life)를 찾는 ‘소확행’ 힐링 예능 프로그램(2019.8.3.-2020.5.30 방영)이다. 그 베이스캠프가 현천마을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현천마을로 들어가는 길가는 산수유나무 천지다. ‘산수유 마을’이라는 입소문을 증명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사과나 복숭아처럼 구획된 단지를 이루지는 않는다. 맞다. 산동네인 산동면은 논과 밭이 적어 생계유지에 필요한 작물을 재배할 땅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족한 경작지를 피해 집 주변·돌담·개울 등에 산수유를 심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에 융화되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그걸 보려는 사람들은 또 전국각지에서 몰려오고...

▼ 굴다리를 지나 10분쯤 걷자 노고단과 시각적 눈높이를 마주하는 현천(玄川)’ 마을에 이른다. 대표적인 산수유마을이다. 봄에는 노란 산수유꽃이 핀 돌담과 저수지에 비친 노란 산수유꽃 반영이, 겨울에는 흰 눈이 덮인 빨간 산수유 열매가 아름답다는 마을이다. 참고로 ‘현천’이란 지명은 견두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현(玄)자를 닮았다는 데서 시작된다. 마을 앞으로는 내(川)가 흘러내린다. 그 내에서 옥녀가 매일같이 빨래하는가 하면, 늙은 선비는 고기를 낚는(魚翁水釣)단다. 순 한글로는 ‘개머내’라나?

▼ 동구 밖 당산나무 아래는 정자(玄溪亭)가 들어앉았다. 340년이나 묵다보니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중심축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 공동체가 공동체다움을 향유하게 만드는 구심체 역할이라고나 할까?

▼ 광장 한켠에는 노란 산수유꽃으로 뒤덮인 현천마을 종합안내도와 함께 ‘산수유길’ 안내도를 세워놓았다. 봄이면 산수유의 화려함과 향이 길을 가득 메운다는 13.8km 길이의 둘레길이다. 얼굴마담인 꽃담길·꽃길을 위시해 산수유 군락지와 소박한 마을이 있는 사랑길, 산동면의 조망과 생활 속 산수유농업을 엿볼 수 있는 풍경길, 천년 역사의 할아버지 나무를 볼 수 있는 천년길, 그리고 산수유와 지리산 둘레길이 만나는 둘레길로 구성되어 있다.

▼ 벅수(구례 163)는 현계정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라 이른다. 하지만 이를 간과한 우리 일행은 곧장 마을로 들어섰다. 이때 ‘현천저수지’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수면에 비친 노란 산수유꽃 반영이 무척 아름답다고 알려지는 호수다.

▼ ‘자연스럽게’는 도시에서의 지친 생활에서 벗어나 시골의 빈집을 수리해 자연과 함께 힐링의 시간을 보낸다는 콘셉트로 진행됐다. 방송의 효과일까? 방송 이후 현천저수지 위쪽에 마을에서 운영하는 ‘카페 자연스럽게’와 특산물 판매장이 오픈됐다.

▼ 카페에서라도 호숫가로 내려가야 했건만 우리는 계속에서 마을안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번에는 ‘산수유길 5코스’ 이정표에 적힌 ‘둘레길’이란 문구에 홀렸다. 아무튼 길을 잘못 들어섰는지도 모르고 올라가다 느티나무 쉼터를 만났다. 풍속화로 치장된 축대를 쌓고, 위에는 벤치에 식수대까지 마련해놓았다.

▼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잘못 들어섰는지를 알게 된다. 느닷없이 ‘견두산 등산로’ 이정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맨 후미에서 둘레길 도반들을 따라가는 입장으로 바뀌어버렸다.

▼ 카페로 되돌아와 호숫가로 내려서자 ‘전인화네 집’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셀럽으로 참여한 전인화가 촬영기간 동안 머무르던 주택이다. 이곳 말고도 김종민이 머물던 ‘비엔비하우스’와 허재의 ‘코재하우스’도 있다는데 위치를 몰라 찾아보지는 못했다. 참고로 ‘자연스럽게’는 셀럽들의 시골 마을 정착기를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은 이 마을에 머물며 자연의 시계에 따라 움직이는 ‘내추럴리즘 힐링라이프’에서 행복을 찾아간다.

▼ ‘카페 자연스럽게’는 호숫가에서 올려다봐야 제멋이다. 러브마크까지 단 저곳에 앉아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겨보면 어떨까? 현천저수지 너머 지리산 능선의 아름다운 풍경이 가미될 테니 ‘자연스럽게’ 힐링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쉽지만 차를 파는 이가 보이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 저수지 끝,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명당자리에는 정자를 들어앉혔다. 노란 옷으로 갈아입은 호숫가 풍광을 가슴에 담아가라는 배려이지 싶다.

▼ 현천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아스팔트를 벗어난다. 그리고는 논과 밭 사이의 논두렁·밭두렁을 걷는다. 이때 ‘농작물에 손을 대지 말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농부들이 애써 가꾼 작물에 손을 대는 짓궂은 나그네들이 있나 보다.

▼ 오늘도 다양한 야생화를 만날 수 있었다. ‘개망초’도 그중 하나. 뽑고 뽑아도 또 다시 자라나는데 질린 농부가 ‘에이 망할 놈의 풀’이라고 외친 게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서글픈 식물이다. 망초 중에서도 가장 못났다고 해서 ‘개망초’라나? 하지만 무리지어 피어나면 상황은 확 달라진다. 보라! 저 꽃밭을 보고 어느 누가 못생겼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들꽃들에 눈 맞추며 5분쯤 걸었을까 신목(연관마을의)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느티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거대한 등치를 자랑하는 나무는 만들어내는 그늘도 그에 못지않게 풍성했다. 둘레길 나그네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어놓은 이유일 것이다.

▼ 벅수(주천 13.6㎞/ 산동 2.3㎞)는 연관마을로 들어가지는 말고 스치듯 지나가란다. 대신 ‘마을 유래비’를 세워 미안한 마음을 전해준다. 조선 중엽 고씨가 남원으로 가던 중 산 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길조라 여기고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나? ‘연관’이란 지명은 설촌 당시 산 밑에서 연기가 피어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마을의 수문장 노릇을 했음직한 동구 밖 첫 농가는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곳 구례도 귀농·귀촌이 낯설지 않은 요즘이다. 사연 많은 젊은 날을 보내고, 지리산 기슭에서 자연의 속살을 누비기 위해 찾아온다. 그들은 세척된 채소를 문 앞에서 받는 편리함 대신, 가축 분뇨 섞인 흙에서 살아있는 먹거리를 마련하려고 밤낮으로 힘을 쏟는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이 싫어 도회지로 떠나는 이들의 숫자도 만만찮은 게 요즘의 현실이다.

▼ 마을 근처라선지 길이 시멘트포장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노고단에서 만복재를 거쳐 정령치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룻금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비포장으로 바뀐다.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산속으로 들어서는가 싶던 둘레길은 작은 고갯마루(벅수 : 주천 12.9㎞/ 산동 3.1㎞)를 넘는다. 266m에 불과한 높이지만 무더운 날씨 탓인지 땀을 한바가지나 쏟고 나서야 겨우 오를 수 있었다.

▼ 고개를 내려와 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정자 하나가 오롯이 나타난다. 저렇듯 산수유 마을들은 자리가 좋아 보이는 길목에는 어김없이 정자를 세워놓았다. ‘손님’을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라고나 할까?

▼ 정자 앞에는 지리산둘레길(산동-주천) 안내판을 배치했다. 구간의 특징을 들먹인 다음, 산수유 시목과 편백나무 숲, 원촌마을 오일장 등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다.

▼ 며칠 전 내린 비로 물이 찰랑거리는 저수지를 지나 ‘계척마을’로 들어선다. 구례군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수유의 시목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집집마다 돌담 너머로 산수유나무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참고로 계척마을의 원래 이름은 ‘계천(溪川)’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계수나무(桂樹)를 닮은 개울의 생김새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베틀바위 안에서 베를 짜서 자(尺)로 쟀다는 설화에서 한 자씩을 따서 계척(桂尺)이 되었단다.

▼ 계척마을을 지켜주는 거대한 느티나무는 390년이나 묵었다. 그러니 어찌 신령스럽지 않겠는가. 밑동에 제단을 꾸렸다. 계척마을의 지킴이 신, 즉 신목(神木)으로 삼은 것이다.

▼ 어르신들 쉼터를 지나자 이번에는 ‘산수유 시목(始木)’이 반긴다. 이 나무는 중국 산둥(山東)성의 한 처녀가 구례로 시집을 오면서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는 전설과 함께 1,000년의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이후 산수유나무는 마을 전역으로 퍼졌고 가난한 산촌의 생계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산수유를 팔아 자녀를 대학에 보냈다고 해서 ‘대학나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참고로 새댁이 심었던 묘목은 ‘할머니 나무’로 불리며 전남 중요농업유산 제1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지금도 봄이 되면 노란 꽃을 활짝 피우는데, 매년 3월 하순에 열리는 ‘구례 산수유축제’는 이 할머니 나무에 풍년을 비는 ‘시목제’를 올리면서 시작된다.

▼ 시목지 앞은 테마파크로 조성해 놓았다. 성을 쌓아올렸는가 하면, 폭포와 분수까지 만들었다.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해서 ‘이순신 성’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참고로 정유재란 중이던 1597년, 이순신은 구례로 가기 위해 이곳을 지난다. 온갖 고문으로 피폐해진 몸과 모친을 잃은 찢어지는 마음에도 임금의 명으로 백의종군 길에 나섰다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순천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 이곳은 ‘백의종군로, 남도 이순신길’의 출발점이다. 그래선지 축대에 이순신의 어록인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를 주제로 장군이 걸었던 ‘백의종군’의 발자취를 설명과 함께 그려 넣었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어지니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저 결의는 결국 ‘명랑해전’이라는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대첩을 이루어낸다.

▼ 성벽 앞은 홍보의 장으로 활용했다. 구례군의 관광안내도를 중심으로 ‘구례의 길’과 ‘남도이순신길’의 안내도를 배치했다.

▼ 시목지에서 100m쯤 내려오는 곳에서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벅수(주천 11.8㎞/ 산동 4.1㎞)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남도이순신길’의 이정표는 곧장 직진해 산동면사무소로 가란다. 두 길이 이곳에서 헤어진다는 얘기다.

▼ 둘레길은 이제 ‘밤재’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산동면의 논과 밭 사이로 난 길이 정겨운 구간이다.

▼ 5일 후면 소서(小暑).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로, 온갖 과일과 소채가 풍성해진다. 저 사과처럼...

▼ 시목지에서 17분쯤 걸었을까 잘 꾸며진 체육공원이 나왔다. 다양한 종목의 경기장에다 깔끔한 화장실까지 갖췄다. 계척마을 주민들을 위해 조성해놓은 모양이데,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시설은 방치되어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운동장에는 사람 대신 잡초만 가득하고 입구의 이정표는 썩을 대로 썩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 체육공원을 지나자마자 임도를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선다. 길가 벅수(주천 10.8㎞/ 산동 5.1㎞)가 방향을 일러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참! 이곳에서 집사람과 합류했다. 산수유 시목지에서 출발했으니 한참이나 더 갈 수 있었으련만, 서방님이 길이라도 헷갈릴까봐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 집사람을 앞세우고 산자락을 파고든다. 이쯤에서 팁 하나. 산속으로 들어서기 전 기상(氣象) 상태부터 확인해 볼 일이다. 두어 번이나 개울을 건너야만 하는 이 구간은 폭우가 내릴 경우 통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입구에 ‘우회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일기가 불순할 경우 참조하면 되겠다.

▼ 이제부터는 본격 산길이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통나무계단을 놓았으니 속도를 조금만 떨어뜨리면 그만이다.

▼ 산속으로 들어선지 20분. 편백나무 숲속으로 들어선다. 70년대 민둥산 가꾸기 일환으로 구례군에서 조성했다는데, 수령 40년 이상의 편백나무 수만 그루가 자라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보아오던 다른 편백나무 숲들과는 느낌이 약간 달랐다. 다른 곳들이 예쁘게 화장한 숲이라면 이곳의 숲은 맨얼굴이다. 가꾼 듯 가꾸지 않은 듯, 몇 개의 산책로와 벤치, 평상, 화장실 등 힐링을 얻으며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갖추었다.

▼ 편백나무 숲은 한 점 햇살까지도 쉽게 통과시키지 않는다. 울창한 숲은 한낮인데도 해를 삼켜버렸다. 그건 그렇고 편백나무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다. 숲길을 걸으며 머리가 맑아진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좋은 길을 열어준 주민들에게 감사드리고 싶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 조붓한 길을 따라 살짝 오르내리며 편백나무 숲을 벗어나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벅수(주천 9.7㎞/ 산동 6.2㎞)는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란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곧장 가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이곳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여겨지는 길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우린 아래로 내려섰다. 지레짐작만으로 방향을 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얕은 계곡과 만났다. 우린 너나없이 흐르는 물에 세수부터 하고 본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는가 하면, 심지어는 여자가 곁에 있는데도 웃통까지 벗어젖히고 땀을 씻는다. ‘더위야 물러가라!’에 예의까지도 묻혀갔다 보다.

▼ 또 하나의 개울을 건넌 둘레길이 이번에는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바닥을 드러내던 2주 전과는 영 딴판이다. 넘치지는 않지만 졸졸 물소리까지 내면서 잘도 흘러간다.

▼ 길가에 널브러진 고사목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말은 저 나무에도 해당되는 걸까? 굵디굵은 게 천년은 족이 살았음 직한데, 삭을 대로 삭은 게 이 또한 천년에 가까울 것 같다.

▼ 그렇게 15분 정도를 올라가던 길은 또 다시 개울을 건넌다. 그리고는 시멘트포장 임도(벅수 : 주천 9.1㎞/ 산동 6.8㎞)로 올라선다. 아까 개울로 내려가면서 헤어졌던 임도로 여겨지는데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 봄꽃이 다 졌다고는 하지만 무공해 산골에 벌통 하나 없겠는가. 그런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올 봄이던가? 언론을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꿀벌 연쇄 실종사건’의 연장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아인슈타인은 지구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4년 밖에 없을 것이라 경고하지 않았던가.

▼ 임도로 올라선지 10분. 숲속 길을 빠져나오자 외딴집(벅수 : 주천 8.8km/ 산동 7.1km)이 보이고, 밤재로 향하는 길이 시작된다는 팻말이 서 있다. 지금은 차량들이 터널을 이용해 오가지만, 옛 사람들은 남원으로 가기 위해서 저 길을 걸어서 넘어야만 했다.

▼ 이정표(밤재↑ 1.9㎞/ 밤재터널→ 0.2㎞)는 요 아래에 ‘밤재터널’이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저 터널을 이용해 남원으로 갈 생각은 말자. 사람의 통행이 금지되는 자동차 전용도로이니 말이다(하지만 더위에 지친 일행 몇은 터널을 이용하기도 했다). 참! 이곳은 ‘구례의 길(지리산둘레길+남도이순신길+섬진강둑방길)’의 중요 포스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00km쯤 되는 전 구간을 완주하면 인증서와 기념메달, 기념품 등을 주는데, 그 첫 번째 스탬프가 이곳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밤재로 오르는 오르막 옛길은 걷기 좋은 흙길과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반복되는 구간이다. 숲이 주는 싱그러움과 시골 풍경이 주는 소박함이 어우러지며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든다는 입소문까지 탔다. 하지만 오늘처럼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여름날에는 지옥의 구간이 될 수밖에 없다. 무더위에 시달린 몸이 장마철 낙수처럼 땀을 흘려내는데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 산자락을 몇 번이나 돌아 드디어 ‘밤재’에 올랐다. 밤재는 주천면 ‘배덕리’와 산동면 ‘원달리’를 잇는 고개이다. 남원시와 구례군을 나누는 경계이자 전남과 전북의 도계(道界)이기도 하다. 또한 백두대간의 ‘만복대’에서 서쪽으로 분기해 견두산을 거쳐 천마산으로 뻗어나가는 산릉의 한 지점도 된다. 그래선지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시설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견두산(犬頭山)까지의 거리 및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위시해, 구례와 해남을 잇는 ‘남도 오백리 역사숲길’ 안내도, 생명평화경이란 부제까지 단 ‘지리산둘레길’ 안내도 등 종류도 다양하다.

▼ 한자로는 ‘율치(栗峙)’가 된다. 밤나무가 얼마나 많았으면 이름으로까지 굳어졌을까. 하지만 고갯마루 근처에는 밤나무가 없었다. 아니 고개를 올라올 때나, 내려가는 도중에도 눈에 띄지 않았다. ‘밤나무 없는 밤재’라고나 할까?

▼ 밤재(벅수 : 주천 7.0㎞/ 산동 8.9㎞)는 지리산둘레길 순례자들에게는 중요한 포스트이기도 하다. 21구간(산동-주천)의 완주를 증명해주는 스탬프가 고갯마루에 보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의 스탬프보관함도 매달려 있었다.

▼ 도법스님이 만든 생명평화경은 기독교의 성서, 불교의 불경, 천도교 교리, 현대 과학 이론 등 인류 역사에서 창조된 위대한 사상과 정신들을 모아 경전처럼 연기송으로 만든 것이다.

▼ 해발 490m의 ‘밤재’는 지리산의 서북능선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노고단을 시작으로 고리봉, 묘봉치, 세걸산 등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런 장점을 살리려했는지 조망이 툭 터지는 곳에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오늘처럼 뙤약볕이 쏟아지는 여름날에는 무용지물이었지만...

▼ 과거에는 19번 국도가 이 고개를 넘어갔다. 1988년 밤재터널이 뚫리면서 옛길이 되어버렸지만. 그 길을 따라 걷는데 ‘왜적 침략길 불망비’가 자신도 좀 읽어주고 가란다. 밤재는 정유재란, 동학 농민혁명, 일제 식민시대 등 뼛속에 새겨야 할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고개다. 이 고개를 넘은 왜적이 남원성을 포위·공격 1만여 명의 민관을 도륙했으며, 갑오년(1894)에는 동학농민군의 토벌군이 되어 토끼몰이를 하면서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공식적인 반성이나 사과는 고사하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겨가며 우리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비문이 ‘극일(克日)과 평화의 새로운 다짐을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눈앞에 펼쳐지는 남원시 산하를 바라보다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런데 오른쪽으로도 길이 나뉘는 게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면 21구간(산동-주천)은 왼편이다. 하지만 안내도는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지리산둘레길(앞밤재-주천) 순환코스를 이용해도 됨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정식코스도 아닌데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또 다른 안내판도 숙성치 방향의 통행을 막고 있었다.

▼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뒷짐 진 채 걸어도 돌부리에 채이지 않을 만큼 임도는 넓고, 넓은 산길은 무심했다. 마음을 짓누르는 버력더미를 하나씩 내려놓고 걷기에 제격이라 하겠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내려놓기가 과했던 나는 모자까지 내려놓는 우를 범해버렸다. 뒤따라오던 일행이 고맙게도 주워다 주었지만...

▼ 밤재에서 내려오는 길은 지루한 편이다. 올라오던 길만큼이나 긴데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숲 사이로 간혹 나타나는 남원의 산하가 그나마 볼거리라면 몰라도 말이다.

▼ 밤재를 출발한지 20분 만에 임도(벅수 : 주천 6.4㎞/ 산동 9,5㎞)에 내려섰다. 그러자 길은 더 편안해진다.

▼ 하지만 따가운 햇볕에 노출된다는 단점도 있다. ‘밤재를 오르내릴 때는 햇볕을 가려줄 모자와 무심을 채울 화두 하나쯤은 꼭 챙겨두어야 한다’던 누군가의 귀띔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 내려오는 도중 버려진 자동차가 눈에 띈다. 도둑의 짓거리로 보이는데, 칡넝쿨로 뒤덮인 게 오래전에 버려진 모양이다. 그나저나 훔친 놈은 그게 귀찮아져 버렸겠지만 그걸 잃은 주인은 얼마나 애를 태웠을꼬.

▼ 25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널찍한 도로(벅수 : 주천 4.5㎞/ 산동 11.4㎞)를 만난다. 둘레길을 겸한 임도는 밤재 터널로 연결되는 19번 국도의 옆구리에 매달려 따라간다.

▼ 5분 후, 이번에는 19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 굴다리를 빠져나오자 ‘박물관주유소’가 반긴다. 옛 국도(19호선)에 들어선 주유소는 극히 한갓진 풍경이다. 하긴 차량 통행이 끊기다시피 한 옛길의 주유소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 도로를 따라 50m쯤 내려갔을까 지리산유스호스텔이 보이는가 싶더니 벅수(주천 4.1㎞/ 산동 11.8㎞)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란다. 하지만 집사람은 택시부터 부르라며 성화다. 이 무더운 날씨에 더 이상의 진행은 불가능하다면서. 345m나 되는 꼭두마루재를 어떻게 오르겠냐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남필종부(男必從婦)로 생색을 내고 있는 내 삶이니 택시를 부를 수밖에...

▼ 생략한 구간의 중요 포인트는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사진을 빌려왔다. 첫 번째 풍경은 ‘꼭두마루재(해발 338m)’이다. 지리산유스호스텔에서 시작되는 오르막 산길이 저렇게나 가파른데 어찌 집사람이 겁을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두 번째는 꼭두마루재를 넘으면 만나게 되는‘감모재(感慕齋)’다. ‘서산류씨’의 제실로 뜨락에서 자라는 300년 수령의 배롱나무가 얼굴마담이다. 아니 조선 성종 때의 효자 류익경(柳益逕)의 ‘정려비각’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단지를 하거나 자신의 허벅지 살을 삶아 드리는 게 보통인 다른 효자들과 달리. 류익경은 어머니의 똥 맛을 보고 사생(死生) 여부를 가늠했단다. 존속 폭행으로도 모자라 살인까지 저지르는 등 불효의 뉴스가 판치는 요즘이기에 더욱 귀감이 되는 효행이라 하겠다.

▼ 마지막 풍경은 ‘용궁마을’이다. 아니 내·외로 나뉘는 마을 중 ‘내용궁’이다. 용궁마을은 해발 1,050m의 영제봉에서 보는 풍경이 마치 바다 속 용궁과 같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위에서 내려다 볼 수는 없지만 마을을 지나면서 물길을 따라 자라는 산수유 군락지를 만날 수 있단다. 색이 진하고 꽃이 크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용궁 산수유축제’까지 열리고 있단다.

▼ 날머리는 지리산둘레길 주천안내센터(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21구간(산동-주천)의 날머리이자 21개 구간으로 이루어진 지리산둘레길 대장정이 막을 내리는 주천안내센터까지는 택시를 이용했다. 목이라도 축일까 해서 들어간 안내센터에는 먼저 도착한 이들이 ‘완주증’을 발급받고 있었다. 아니 정식 명칭은 ‘지리산둘레길 순례증’이다. 산길과 들길을 이으며, 생명과 마을을 만나고, 나를 찾아 떠났던 순례 여행, 한걸음 한걸음 깃든 생명평화의 숨결이 완주를 한 사람의 삶과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나?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3.14km. 500m에 가까운 밤재를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나게 더딘 속도다.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무더운 날씨 탓에 속도를 낼 수 없었던 게 원인이다.

▼ 이곳 주천안내센터는 기나긴 지리산 둘레길의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곳이다. 출발점에 다시 서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기나긴 여정의 추억들을 소환해가며 지리산둘레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참!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이들도 소환해볼까 한다. 기행산문집 ‘지리산둘레길’의 저자 조영석씨와 네이버 블로그 ‘sheenbee의 느린 걸음 이야기’의 운영자인데 그들의 경험이 내 여행기를 적어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지리산둘레길 20구간(방광-산동)

 

여행일 : ‘22. 6. 18(토)

소재지 : 전남 구례군 광의면과 산동면 일원

여행코스 : 방광마을(4.2km)→난동갈림길(3.7km)→구리재(3.7km)→탑동마을(1.4km)→산동면사무소(거리 및 시간 : 13km/ 실제는 ‘당동마을’부터 11.54km를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20구간(방광-산동)을 걷는다. 6개 코스(68km, 목아재-당재구간은 폐쇄됐다)로 이루어진 구례권역의 다섯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13km에 불과하다. 하지만 난이도는 ‘중’으로 분류된다. 중간에 ‘구리재’라는 높다란 고개를 넘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볼거리는 꽤 많은 편이다. 구리재를 오르내리며 만나는 구례생태숲과 구례수목원에서 지리산의 생태계를 직접 확인해볼 수 있는가 하면, 당동마을에서는 현대적으로 한껏 멋을 부린 예술인마을에 더해 문화유적(석불입상 및 남악사터)까지 함께 둘러볼 수 있다.

 

▼ 들머리는 참새미계곡 쉼터(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TG를 빠져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방면으로 1km쯤 내려오다 첫 교차로(용방면 용정리)에서 내려 광의면소재지(연파리)로 온다. 광용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 100m쯤 더 가다 좌회전하여 광의초교길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참새미골 쉼터(자그만 유원지이다)’에 이르게 된다. 내비게이션에 ‘지리산참새미계곡쉼터’를 입력하고 찾아와도 된다.(‘방광-산동’구간의 시점은 방광마을회관이나 ‘둘레길 엠블럼’은 참새미골쉼터 입구에 세워져 있다)

▼ 광의면 방광마을과 산동면 원촌마을을 잇는 13km의 둘레길로 지리산국립공원을 이웃하며 걷는 임도와 마을을 잇는 옛길로 구성된다. 이 구간은 구리재(해발 487m)라는 만만찮은 고개를 넘는다. 때문에 오늘처럼 불볕더위가 내리쬐는 여름철에는 지옥의 행군이 될 수밖에 없다. 생태숲이나 수목원 같은 볼거리도 있긴 했지만 오늘처럼 무더운 날에는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오죽 힘들었으면 탈진해 쓰러진 여성분까지 나왔겠는가.

▼ 실제 출발지는 ‘구례 예술인마을’ 앞 삼거리(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오늘도 코스를 약간 조정해서 걸었다. 집사람의 불편한 무릎을 감안한 내 작은 배려로, 초반부 2.5km 정도를 생략하고 당동마을부터 걸었다. 19구간(오미-난동)의 종점인 난동마을부터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역사유적지인 ‘대전리 석불입상’과 당동마을의 ‘남악서터’까지 빼먹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난동마을과 당동마을의 중간쯤인 이곳 삼거리에는 ‘지리산 정원’의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구례군이 지리산 자락에 조성한 전국 최대 규모의 산림 휴양단지다.

▼ 당동마을 쪽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100m쯤 걷자 ‘예술인마을’로 연결되는 삼거리. 잠시지만 이곳에서 집사람과 헤어지기로 했다. 여기서 대전리의 ‘석불입상’까지는 대략 2km(왕복). 역사유적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그녀로서는 예술가의 보금자리 카페에서 커피 한 잔으로 여유를 즐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 100m쯤 더 걷자 이번에는 ‘당동(堂洞)’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마을의 원래 이름은 ‘탑동(塔洞, 또는 남악사당이 있다 해서 ’당몰‘)’. 마을 근처에 ‘미륵탑’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고려 때만 해도 100여 호가 살던 큰 마을이었지만, 조선시대에 국태민안을 비는 남악사(南岳寺)가 들어섰고, 봄가을 제례 때 남원부사와 인근 수령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피해가 늘자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작아졌단다.

▼ 고샅길을 지나 동네 뒤로 나가니 둘레길 나그네들이 한둘 눈에 띄기 시작한다. 둘레길이 당동마을을 피하듯 지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 방광마을 방향으로 50m쯤 걷자 이름표(당동마을)까지 단 벅수(산동 10.3㎞/ 방광2.7㎞)가 길손을 맞는다. 나에겐 마을을 벗어나는 지점이겠지만, 방광마을에서 출발한 이들에게는 이제 당동마을로 들어섰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표식이다.

▼ 둘레길은 ‘대전저수지’의 호숫가를 스치듯 지나간다. ‘미륵골’이라고도 불리는 상대마을(대전리)의 북쪽에 있는 평범한 저수지다. 둑에서 바라보는 ‘구례분지’를 볼거리로 친다면 몰라도.

▼ 몇 걸음 더 걷자 울창한 숲속에서 전각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3분 만이다. 전각 안에는 전남도 유형문화재(186호)인 ‘대전리 석불입상’이 모셔져 있었다. 지권인(바른손으로 왼손 검지의 윗부분을 감싸는 형태를 취하는데, 이와 반대의 경우도 간혹 있다)을 한 불상과 무릎을 꿇고 차를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로 구성되어 있다.

▼ 석불은 인의(仁義)에 따라 중생을 다스린다는 ‘비로자나불’이다. 눈·코·입이 훼손되긴 했지만 양쪽 볼이 풍만하고, 기교가 없지만 예스러우면 서도 소박한 미소를 띠고 있다. 고려 초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가 트레킹을 이어간다. 잠시 후 당동마을 뒤 사거리(벅수 : 산동 10㎞/ 방광 3㎞)에 이르니 ‘예술인마을 지도’가 그려진 안내판이 반긴다. 예술인의 이미지를 살리고 싶었던지 봉황 형상의 조각품이 뒤를 받친다. 구례지역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예술인 마을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그렇다고 예술인마을의 이미지에 너무 혹하지는 말자. 이 근처에 ‘남악사지(南岳寺址, 향토문화유산 제32호)’라는 또 다른 볼거리가 소재하니 말이다. 예술인마을 쪽으로 20m쯤 떨어진 곳에 이를 알리는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지리산 남악제례가 열리던 곳인데, 여기서 말하는 남악이란 신라의 오악(五岳)에서 비롯됐다. 중국의 오악 사상을 본떠 동악(토함산), 서악(계룡산), 남악(지리산), 북악(태백산), 중악(팔공산)을 정해 국가차원의 제사를 올렸다.

▼ 비탈을 오르니 지표조사가 한창인 ‘남악사지(옛날에는 ’궁안‘ 또는 ’궁터‘로 불렸단다)’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지리산 신제를 모시던 곳이다. 신라시대에는 천왕봉.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세조(2년)까지 노고단에서 지내다가 1456년 이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폐사되었고, 1969년 화엄사 자장암 옆에 10여 평 규모로 새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 만에 예술인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은 둘레길을 걸어오며 익히 보아오던 전통가옥이 아닌 현대의 건축물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건물 하나하나가 개성이 또렷할 뿐만 아니라 그 모양새까지 예뻐 기념사진의 배경으로 모자람이 없겠다.

▼ 예술과 예술가를 만날 수 있는 이 마을은 화가·조각가·도예가·옻칠공예가 등 은퇴를 앞둔 30여 명의 예술가들이 거주와 작업·전시를 함께하기 위해 모여 살면서 조성됐다. 현재 토요일마다 집을 개방하는 ‘토요오픈스튜디오’를 운영 중인데, ‘Open 예술 In’ 깃발이 걸린 집의 문을 두드리면, 갤러리를 감상하거나 작가와 차 한 잔 나누며 이야기도 할 수 있단다. 하지만 이번 주는 예외인가 보다. 토요일인데도 깃발이 내걸린 집이 눈에 띄지 않으니 말이다.

▼ 사진 찍기 딱 좋은 뜨락도 보인다. 피크닉용 식탁 주변에 그네 등 각종 소품들을 배치해 일류의 포토죤으로 꾸며놓았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이 또한 화중지병(畵中之餠)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벅수(산동 9.6㎞/ 방광 3.4㎞) 옆 이정표는 ‘구례의 길’에서 만들었다. 구례군 관내에 있는 3개의 둘레길(지리산둘레길·남도이순신길·섬진강둑방길)을 말하는데, 100km쯤 되는 전 구간을 완주하면 인증서와 기념메달, 기념품 등을 받을 수 있단다. 인증용 수첩에다 이정표에 매달려 있는 저 스탬프를 찍어 와야 함은 물론이다.

▼ 마을안길을 빠져나온 둘레길은 숲속으로 들어선다. 이때 구례분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노고단(동쪽), 만복대·견두산(북쪽), 천마산·깃대봉·형제봉(서쪽), 봉두산·계족산(남쪽) 등이 사방에서 솟아오르며 한가운데다 널따란 들녘을 만들어놓았다. 지리산지에서 공급된 퇴적물이 쌓여 비옥하기까지 하단다.

▼ 산자락을 빠져나와 2차선 도로(벅수 : 산동 9.3㎞/ 방광 3.7㎞)로 올라선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했던 삼거리에서 난동마을 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이다. 둘레길 접점을 근처에 두고도 2.26km나 돌아온 셈이 됐다. 새로운 앎(남악사지 및 석불입상)에 대한 내 열망의 정도를 알려주는 척도가 아닐까 싶다.

▼ 사흘 후면 ‘하지(夏至)’이다. 낮이 가장 길며, 일사 시간과 일사량도 가장 많은 날이다. 곡식이 무럭무럭 자라고, 햇과일은 알차게 여물어가는 건 당연. 붉은 빛을 띄어가는 저 사과가 그걸 증명한다고 하겠다.

▼ 둘레길은 이제 난동마을로 향한다. 그렇다고 난동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마을을 감싸듯이 내놓은 도로를 따라간다. 그리고 마을 뒤편에서 토지면 오미마을에서 갈라졌던 19구간(오미-난동)을 다시 만난다. 이렇듯 난동마을은 19구간의 종점이자 20구간(난동-산동)의 중간지점이기도 하다. 참고로 예술인마을에서 이곳까지는 14분(트레킹을 시작하고 39분)이 걸렸다.

▼ 두 구간이 만나는 곳답게 ‘지리산둘레길’ 안내도를 세워놓았다. 86km 길이의 구례구간을 설명하고 있는데, 자신들 손으로 폐쇄시킨 곁가지 구간(목아재-당재)을 아직까지도 품고 있다. 늦장 행정의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 다리(벅수 : 산동 8.8㎞/ 방광 4.2㎞)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이어서 구리재로 올라가는 임도를 탄다.

▼ 이후 구리재까지 고도를 350m가까이나 높여야 한다. 사람들은 이곳을 쉬운 코스로 꼽는다. 오르막이 계속되지만 완만하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날에는 남의 집 얘기일 따름이다. 뜨거운 태양열에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시멘트 임도가 건식사우나로 변해있는데, 쉬운 코스라니 소도 웃을 노릇이다.

▼ 무덤도 저렇게 변신할 수 있나보다. 억새에 가깝게 웃자란 띠가 하얗게 꽃을 피우면서 작은 꽃동산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 둘레길 도반인 ‘뚜벅이’님은 오늘도 바쁘시다. 80을 넘기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변 풍광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그 풍광들은 동영상으로 변해 ‘팔로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 임도갈림길(이정표 : 생태숲←/ 난동마을↓/ 직진방향은 비었다)에서 왼편으로 들어서자 환경부와 국립생태원에서 세운 ‘국가 장기생태연구시스템’ 안내판이 나타난다. 하지만 측정시설(강우량·기온·풍향·풍속·토양호흡측정)이라는 설명과는 달리 온상 안에서는 작은 묘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 임도로 들어선지 30분쯤 지나 ‘칡대밭골 삼거리’에 이른다. 왼편은 아까 트레킹을 시작할 때 눈에 띄던 ‘지리산 정원’으로 가는 길이다. 둘레길은 벅수(산동 7.4㎞/ 방광 5.6㎞)가 가리키는 오른쪽이다. 참고로 지초봉(해발 601m)의 남서쪽에 조성해놓은 ‘지리산 정원’은 크게 ‘야생화 생태공원’과 ‘산림휴양타운’으로 나뉜다. ‘야생화 생태공원’은 야생화 테마랜드와 지리산자생식물원·구례생태숲·숲속수목가옥, ‘산림휴양타운’은 숲속휴랜드와 유아숲체험원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 더. 국내 최초의 숲정원 조성을 위해 별빛숲정원, 어울림정원, 하늘정원, 와일드정원, 프라이빗정원 등 5개 주제 정원을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 그래선지 길가에 ‘지리산 구례생태숲 안내도’를 세워놓았다. 생태계의 교란과 훼손을 방지하고자 조성한 생태친화적 공간으로, 편의시설 말고도 철쭉·소나무·산수유·노각나무·층층나무·신갈나무·구상나무 등 240여 종의 식물자원이 함께 어우러져 자라고 있단다.

▼ 지리산둘레길은 3대 ‘구례의 길’ 중 하나다. 그러니 잘 가꾸었음은 자명한 일. 비탈진 길가에 난간을 둘러 안전을 도모했고, 쉼터도 곳곳에 만들어놓았다.

▼ 쉼터도 쉼터 나름. 여느 쉼터와는 또 다른 멋을 풍긴다. 돌 의자 마다 명심보감용 글귀를 새겨 읽는 재미까지 더했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다’, ‘여기에 보이는 건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등등 가슴에 와 닿는 명구들이 줄을 이어 나타난다.

▼ 쉼터도 여러 가지다. 예스런 멋을 퐁퐁 풍기는 요런 정자풍의 쉼터도 들어앉혔다.

▼ 가고 또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임도는 자칫 지루해지기 쉽다. 이럴 때는 주위를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다보면 주전부리용 산딸기가 눈에 띌 것이다. 조금 못생겼지만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니겠는가. ‘애걔! 그것도 산딸기야?’ 고개를 내두르며 지나친 집사람도 내가 건네준 산딸기를 맛보고는 조금 더 따오라고 졸랐을 정도다.

▼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야생화도 쉼 없이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나리꽃’. 지나 번 서시천변에서의 내 아쉬움을 둘레길이 눈치라도 챘는지 활짝 핀 나리꽃이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 ‘큰까치수염’도 심심찮게 나타나는 꽃 가운데 하나다. 꽃의 모양이 까치의 흰 목덜미 부분을 닮았다고 해서 큰까치수염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중국에서는 ‘진주채’라 부르며 이뇨제나 월경불순의 치료제로 사용한단다.

▼ 편백나무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다. 그런 편백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을 지자체에서 그냥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다. 벤치 등의 편의시설들을 배치해 일류의 쉼터로 가꾸었다.

▼ 이번에는 전망대를 겸한 쉼터가 반긴다. 이곳에는 ‘누가 수천 수백만 개의 별들 중에서 하나밖에 없는 어떤 꽃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거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전망대의 분위기에 딱 맞는 내용이지 싶다. 별들 대신에 구례 들녘을 바라보면 되니까...

▼ 난간으로 다가가자 협곡 사이로 구례분지가 나타난다. 난간에 기대어 서시천변의 너른 전답과 좌측 멀리 구례읍을 가늠해 본다.

▼ 임도로 들어선지 1시간 7분(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6분) 만에 ‘구리재(해발 487m)’에 올라섰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서쪽으로 갈래 친 작은 산줄기에 있는 안부인데, 광의면과 산동면을 잇는 임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벤치는 물론이고 팔각정(계단이 낡아 이층으로 오를 수는 없었다)까지 들어앉혀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정표도 벅수(산동 5.2㎞/ 방광 7.8㎞) 말고도 둘(#1 : 지초봉← 0.72㎞, #2 : 납재삼거리→ 1㎞, 간미봉 1.5㎞)이나 더 있다.

▼ 20구간(방광-산동)의 완주를 인증 받게 해줄 스탬프보관함은 팔각정의 아래층 기둥에 매달아놓았다. 참고로 이곳 구리재는 구렁이를 뜻하는 '구리'에서 가져온 이름으로, 재에 오르는 길의 생김새가 구렁이가 움직이는 것처럼 구불구불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임도로 들어선 뒤 열두세 차례나 휘어지고 꺾어진 뒤에야 고갯마루에 올라섰으니 그럴 만도 하다.

▼ 구리재에서 좌측으로 0.7km쯤 빗겨나 있는 ‘지초봉(芝草峰. 601m)’은 다녀오지 않았다. 대신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것을 빌려다 올려본다. 지초봉은 진도 홍주를 빚는 원료로 잘 알려진 지초(芝草)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제의 명을 받은 서불이 불로장생약을 찾기 위해 찾았다는 전설도 지녔다.

▼ 지초봉에서의 조망은 설명까지 몽중루님의 것을 빌린다. 동쪽은 구리재 건너 갈미봉, 시암재를 잇는 능선을 따라 노고단(老姑壇)과 반야봉이 우뚝하고, 북쪽은 지리산 서북능선에 우뚝한 만복대가, 서쪽엔 만복대에서 갈래 친 견두지맥(犬頭支脈)이 밤재를 지나 천마산 깃대봉 천왕봉을 이으며 구례읍을 감싸며 남쪽 오산(鰲山) 앞 섬진강으로 내려선다. 그리고 발치의 남쪽 자락에는 지리산 정원이, 북쪽엔 지리산 자연휴양림이 녹림을 이루고 있다.

▼ 구리재를 지나면서부터 이정표는 뉘앙스를 살짝 바꾼다. ‘지리산 정원’을 의미하는 ‘야생화 테마랜드’ 대신 ‘지리산 수목원’으로 얼굴마담을 바꿨다. 맞다. 두 시설은 지리산줄기인 간미봉(728.4m)과 지초봉(601m)을 잇는 능선을 기준으로 남북의 사면에 위치한다. 이 능선의 안부인 구리재를 넘었으니 북쪽 면에 들어앉은 수목원으로 얼굴마담을 바꾸는 게 정상이지 않겠는가.

▼ 종점인 산동까지는 이제 5km가량 남겨놓았다. 내려가는 길은 임도답지 않게 경사가 무척 가팔랐다. 그러다보니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써가면서 내려갈 수밖에 없고, 어떤 곳에서는 360도에 가까울 정도로 방향을 틀기도 한다. 저렇기에 ‘구리재’라는 이름까지 얻었을 것이다.

▼ 산동면 쪽에도 편백나무 숲이 들어서 있었다. 피톤치드 향으로 가득한 숲속에서 힐링할 수 있도록 쉼터를 만들어두었음은 물론이다.

▼ 임도는 차량통행이 허용되나 보다. 하긴 구례수목원과 지리산정원을 잇는 도로이니 막는 게 더 이상하겠다. 특히 지초봉에는 활공장까지 들어서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내려가는 도중 심심찮게 시야가 트인다. 진행방향 저 멀리로 만복대에서 견두산을 거쳐 천마산으로 흘러내리는 산줄기가 펼쳐진다. 그 산자락을 19번 국도가 꿰뚫고 지나간다. 다음 구간인 21구간(산동-주천)은 저 능선의 안부인 ‘밤재’를 넘는다.

▼ 하산을 시작한지 26분. 또 다른 팔각정을 만났다. 능선은 남북 사면을 대칭이라도 이루려는 듯이 편백나무 쉼터에 팔각정까지 공평하게 들어앉혔다. 하지만 북쪽 사면에서는 돌 의자는 물론 명심보감용 글귀도 찾아볼 수 없었다.

▼ 팔각정은 20구간의 중요 포인트 중 하나다. 둘레길이 임도를 벗어나 왼쪽 숲속으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초입을 지키는 벅수(산동 3.4㎞/ 방광 9.6㎞)의 방향표시를 참조하면 되겠다. 참! 숲길이 싫다면 계속해서 임도를 타도 무방하다. 구례수목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 이후부터는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내려간다. 1km쯤 되는 숲길은 계곡과 함께 흐른다. 그래선지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바닥에 잔뜩 깔렸다. 하지만 경사가 거의 없어 속도감 있는 산행을 즐길 수 있다.

▼ 골이 제법 깊건만 계곡은 허옇게 속살을 드러냈다. 가뭄이 그만큼 심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사흘 후면 하지(夏至). 옛날에는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임금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라도 나서서 제관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 내려가는 도중 옛 멋을 느끼게 해주는 통나무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구리재를 넘어오면서 흘린 땀이라도 씻을까 해서 다리 아래로 내려갔지만 개울은 바짝 말라있었다.

▼ 숲속으로 들어선지 19분, ‘구례수목원’이 얼굴을 내민다. 다양한 자생나무와 꽃들이 이색적인 공간을 제공하는 전라남도의 1호 공립수목원이다. 수목원 내에 1148종 13만본의 식물을 심었는데, 특히 목련(39종)·수국(93종)·비비추(69종)·붓꽃(39종)·단풍나무(13종)·층층나무(12종) 등을 특화식물로 식재해 지리산 야생화와 어우러지도록 했단다. 또한 수목원을 봄향기원, 진달래원, 계류생태원, 테라피원(숲속 그늘마당), 서어나무원, 지리산종보존원, 겨울정원 등 11개의 주제정원으로 나누어 놓았단다.

▼ 수목원도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원래의 둘레길은 저 수목원을 관통한 다음 탑동마을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코스가 변경되었고, 지금은 수목원의 진입로를 따라 ‘탑동교’로 내려간다.

▼ 내려가는 도중 ‘문화예술촌’을 만날 수 있었다. 동화 속 꼬마 요정이 살았을 법한 집이 지어져 있는가 하면,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통나무집도 두 동이나 들어섰다. 예술인들의 작업실이었을 게다. 하지만 인적이 끊긴지 이미 오래인 듯 건물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 둘레길은 호동마을을 마주보며 간다. 구례의 명물인 산수유나무가 무더기로 나그네를 맞는 구간이다. 누군가는 구례를 일러 ‘산수유가 있었기에 구례답고, 산수유답다’고 했다. 그러면서 산수유가 없는 구례는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다고까지 했다. 그만큼 구례와 산수유가 서로 잘 어울린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구례는 우리나라 산수유 생산의 70%를 차지하며 산수유의 조상 나무인 시목을 모시는 곳이다. 그러니 잘 어울릴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 개울 너머에는 ‘탑동마을’이 있다. kakaomap의 20구간(방광-산동)은 저 마을을 관통한다. 먼저 다녀간 이들의 발자취도 저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둘레길은 언제부턴가 수목원 진입로로 옮겨졌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둘레길 나그네들의 쉼터고 되어주는가 하면, 한옥체험을 겸해 하룻밤 묵어가기 딱 좋았다는데, 코스를 옮겨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 구리재 너머 첫 마을인 ‘탑동(塔洞)’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삼층석탑’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현재의 석탑(코스 설명을 위해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왔다)은 무너져 있던 것을 주민들이 다시 세워놓았다고 한다.

▼ 그렇게 18분쯤 내려왔을까 천주교 산동공소(구례성당 소속)가 나오는가 싶더니 곧이어 ‘지리산온천로’로 내려선다. 길가에는 ‘산동약수탕’이 들어서 있었다. 1호 온천의 감성숙소란다. 먹고 자고 씻고를 한꺼번에 할 수 있다나?

▼ 소나무를 감싸 안고 있는 저 여인의 화두는 무엇일까? 모성애를 발휘해 세상의 모든 고민을 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탑정교를 건너자마자 도로를 횡단하면 ‘효동마을’ 표지석이 길손을 맞는다. 둘레길은 맞은편 효동마을을 향해 나아간다. 참고로 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지리산 온천랜드’가 나온다. 지리산 만복대와 노고단을 바라보며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노천온천 테마파크, 대온천탕, 찜질방, 호텔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지리산온천수는 게르마늄과 탄산나트륨이 다량 함유돼 피부병·신경통·관절염 등 성인병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 잠시 후 ‘효동교’를 건너자 ‘지산정(智山亭)’이란 국궁장.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효동(孝洞)’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법정 마을인 내산리(內山里)에 속한 3개의 자연부락(수평·삼성·효동) 중 하나로 게르마늄 성분을 듬뿍 품은 샘물(‘산수려’라는 브랜드로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로 유명한 곳이다. 참!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소동굴’이었다고 전해진다. 소의 배를 의미한다나? 이후 마을 뒷산이 ‘청용고지(靑龍高地)’의 지세라서 효자가 많이 나온다며 ‘효동’으로 바꾸었단다.

▼ 효동마을은 다른 전통마을과는 달리 구획이 분명하고 길이 모두 일직선이다. 이는 70-80년대에 시행됐던 주거환경개선사업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런 마을 앞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들어앉아 있었다. ‘바우배기들’이란 지명까지 만들어냈을 정도로 유명한 바위인데, 지금은 아이들의 놀이터로만 제몫을 다한단다.

▼ 효동마을의 ‘무더위 쉼터’는 둘레길 순례자들에게도 최고의 쉼터가 되어준다.

▼ 마을 앞을 지나다보면 노고단이 서쪽으로 갈래 쳐놓은 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산동약수탕의 뒤 움푹 파인 곳은 아까 넘어왔던 ‘구리재’이다. 그 오른편에 지초봉이 불끈 솟아올랐고...

▼ 효동마을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저 건물은 ‘화충법단(和衷法壇)’이란 편액을 달았다. 간판은 ‘재단법인 국제도덕협회 일관도 산동지부’로 걸었다. ‘일관도(一貫道)’란 유불선(儒佛仙)을 융합하여 ‘일관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건너온 종교로 신앙 대상은 명명상제(明明上帝)와 미륵불이다. 명명상제는 우주의 최고 주재자로 만령(萬靈)을 낳는 모체이고, 미륵불은 석가의 뒤를 이어 앞으로 올 부처(미래불)다. 그 밖에도 유교·불교·도교·기독교·이슬람교의 제불제성(諸佛諸聖)을 공경한단다. ‘다 모아 교’라고나 할까?

▼ 화충법단 앞 ‘Y’자 갈림길에서는 오른편이다. 잠시 후 ‘원효교(벅수 : 산동 0.2㎞)’를 건너 ‘원촌(院村)’마을로 들어섰다. 산동면의 소재지로 산동원(山洞院)이란 관청이 있었기 때문에 ‘원굴’ 또는 ‘원동’이라 불리었다. 그러므로 원촌은 산동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 원효교에서 날머리인 산동면사무소까지는 100m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둘레길은 면사무소로 곧장 가지를 않고 서시천의 개울가를 따라 마을을 에둘러서 간다.

▼ 길을 걷다 범상치 않은 풍광을 만났다. 서시천이 몸집을 부풀리는 두물머리 한가운데서 거대한 정자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장마철 큰물 때마다 물에 잠길까 걱정이겠건만, 나무 그늘에 예쁜 정자까지 들어앉혔다. 그나저나 큰물 걱정은 주민 몫일 테고, 지나가는 나그네로서는 눈을 즐겁게 해주는 멋진 풍경이었다.

▼ ‘원촌교’에 이르니 이름표(원촌마을)까지 단 벅수가 이제 그만 시가지로 들어가란다. 지시대로 방향을 트니 산동농협. 무더위에 땀 깨나 흘린 나그네에게는 구세주일 수밖에 없는 ‘하나로마트’가 반긴다. 뛰다시피 들어가 맥주와 아이스크림부터 챙겨드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코코빈 다방’은 별관에다 문을 열었다. 대신 본관은 70-80년대의 다방 풍경을 그려 넣어 홍보용으로 활용했다. 뮤직 박스나 차 배달만으로도 옛 추억을 되살리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의자에 앉은 청춘남녀는 사랑까지 속삭인다.

▼ 날머리는 산동면사무소(구례군 산동면 원촌리)

100m쯤 더 걸어 산동면사무소에 도착하면 20구간(방광-산동)은 종료된다. 오늘은 11.54km를 3시간 20분에 걸었다. 구리재라는 만만찮은 고개를 넘었다고는 하지만 꽤나 더딘 속도다. 무더위에 속도를 낼 수 없었던 게 원인이었다. 참! 산동면은 백제시대에는 ‘구차례현’에 속한 고을이었다. 신라시대(통삼이후)에는 곡성군, 고려시대에는 남원부에 속했다. 조선시대인 1906년(광무10년) 구례군에 편입되면서 내산면과 외산면으로 분할되었으나 1932년에 다시 ‘산동면’으로 합병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지리산둘레길 19구간(오미-난동)

 

여행일 : ‘22. 6. 4(토)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마산면·구례읍·용방면·광의면 일원

여행코스 : 오미마을(0.9m)→원내마을(0.8km)→수달보호구역(1.5km)→용호정(2.9km)→서시교(0.9km)→지리산둘레길 구례센터(6.0km)→연파마을(2.1km)→구만마을(3.8km)→난동마을(거리 및 시간 : 18.9km/ 실제는 ‘옥지교’부터 16.94km를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9구간(오미-난동)을 걷는다. 6개 코스(68km, 목아재-당재구간은 폐쇄됐다)로 이루어진 구례권역의 네 번째 구간으로 거리가 18.9km나 된다. 그런데도 난이도는 ‘하’란다. 농로나 둑방길 등 평지를 걷는다는 특징 때문이겠지만, 나는 ‘중’과 ‘상’의 중간쯤으로 꼽고 싶다. 무더운 여름철에 18.9km를 걷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걷는 내내 갈대로 뒤덮인 섬진강(서시천 포함)의 아름다운 풍경과 꽃길, 그리고 지리산의 주능선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랄까?

 

▼ 들머리는 오미마을 앞 정자쉼터(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34)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면으로 내려온다. 용두갈림길교차(토지면 용두리)를 지나자마자 ‘지리산구례명차가공공장’을 왼편에 끼고 돌아 들어가면 잠시 후 오미마을에 이른다. 마을 앞 정자쉼터가 19구간(및 18구간)의 출발점이다.

▼ 18.9km 길이의 구간으로 거의 대부분 서시천 및 섬진강과 함께한다. 덕분에 갈대로 치장된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갈대숲에서 노니는 수달과의 만남은 덤이다. 특히 서시천에서는 꽃길을 걷는 행운도 누리게 된다. 벚꽃과 코스모스, 원추리, 꽃(개)양귀비 등이 철따라 곱게 피어난다.

▼ 하지만 난 19번 국도의 ‘옥지교(마산면 사도리)’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구례읍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집사람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서다.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과 처음부터 보조를 맞출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갈대로 가득한 섬진강·서시천 풍경과 경술국치의 애환을 품은 ‘용호정’을 생략할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 마산천((馬山川, 섬진강 방향)을 따라 내려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사성암(四聖庵, 명승 111호)을 품은 오산(鼇山, 530.8m)이 우뚝 솟아올랐다면 길을 제대로 들어선 셈이다. 참고로 사성암은 글자 그대로 4명의 고승(원효·의상·도선·진각대사)이 수도한 곳이다. 절벽에 기둥을 받쳐 세워놓은 암자가 볼만한데, 이를 두고 사성암을 ‘구름 위의 암자’라고도 부른다.

▼ 3분쯤 걸어 마산천이 섬진강과 만나는 두물머리(구례군 환경사업소의 모퉁이이기도 하다)에 이르자 냇가로 내려가는 목책길(벅수 : 난동 15.3㎞/ 오미 3.7㎞)이 나타난다. 오미에서 출발한 둘레길은 저 목책길을 거쳐 이곳으로 올라온다. 그리고는 둑방길을 따라 구례읍으로 향한다.

▼ ‘이야기가 있는 구례 문화생태탐방로’란 안내판이 눈에 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역사·문화자원이 뛰어난 길 중, 특히 도보 여행객들이 가볼만한 곳을 지정해 지원하는 사업인데, 섬진강의 구례구간(섬진강천문대-토지면사무소)이 포함되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종점인 난동은 이곳에서 오른편 둑길을 따른다. 하지만 난 ‘용호정’을 먼저 둘러보기 위해 목책길로 내려섰다. 강변에는 갈대가 한가득이다. 이곳은 ‘수달서식지 생태·경관 보존지역’. 이 정도는 되어야 수달(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 및 천연기념물 제330호)이 서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수달을 눈에 담을 수 있을까 해서 기웃거리다 이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에게 집사람은 수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니까.

▼ 용호정으로 이어주는 대숲에는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마을로 들어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대숲이 만들어놓은 터널을 지나자 ‘용두(龍頭)’ 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둘레길은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 ‘용호정’ 이름표를 단 벅수(난동 17.3㎞/ 오미 1.7㎞) 앞에서 방향을 트니 ‘용호정(龍湖亭, 구례향토문화유산 3호)’이 반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1분 만이다. 용호정은 망국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경술국치에 자결한 ‘매천 황현’선생의 제자 및 유림인사들이 매천을 추모하고 항일 울분을 달래기 위해 시계(詩契)를 조직하면서 세운 정자다. 1917년 일본이 구례읍성(봉성)을 허물자 북을 걸어 두던 고각루(鼓角樓)라는 누각 건물을 옮겨와 증·개축했단다.

▼ 용호정은 황현의 문하에서 한시를 배운 제자들의 모임인 ‘용호정 시계(龍湖亭 詩契)’가 중심이 되어 건립했다. 그들은 시를 읊으며 항일정신을 고취했고, 나라 뺏긴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우국충정의 선현을 추모하고, 후진에 대한 계도도 병행했음은 물론이다. 처마에 매달린 수많은 저 시판들은 그들이 남긴 울분의 시가 아닐까 싶다.

▼ 마산천으로 되돌아오니 제방으로 올라가는 목책길이 아까 내려올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다. 그 왼편에는 전망대가 걸터앉았다. 뭔가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전망대에 서자 섬진강이 그 속살까지 내보여준다. 강은 군데군데 풀등을 만들어 쉬어가고, 우거진 갈대숲은 한여름 뙤약볕 햇살에 지친 몸을 그 강물에 의탁한다.

▼ 둘레길은 이제 섬진강 둑길을 따라 구례읍으로 간다. 함께 가는 섬진강의 저 갈대밭은 새들이 놀이터라고 한다. 물 위에 내려앉아 평화롭게 먹이를 찾는 풍경이 일품이라는데 오늘은 눈에 띄지 않는다.

▼ 걷다보면 ‘남도 이순신길’에서 만들어놓은 각종 시설물(이정표 및 쉼터)을 만나게 된다. ‘남도 이순신길’의 7코스인 ‘석주관 가는 길(구례공설운동장-석주관)’과도 겹치기 때문이다. 이정표는 ‘섬진강길’도 겸한다고 적고 있다. 이렇듯 구례지역 섬진강은 여러 둘레길이 오간다. ‘조선수군 재건로’도 그중 하나다.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7년, 당시 관직에서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군사·무기·군량·병선을 모아 명량대첩지로 이동한 구국의 길을 ‘조선수군 재건로’로 명명하여 역사스토리 테마길로 조성했다.

▼ 둑길로 올라선지 13분. 또 다른 조망처를 만났다. 이번에는 취수문(取水門)의 상부를 개조해 전망대로 만들었다. 섬진강과 서시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아름다운 풍경에 흠뻑 취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 전망대에 올라서자 섬진강이 치마폭처럼 펼쳐진다. 서시천(西施川)의 물줄기를 보태면서 등치를 한껏 부풀리는 것이다. 그 너른 강에 맑은 하늘이 담겼다. 그래서 강물은 더욱 푸르러졌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냉천 수문’에서도 조망이 가능하다. 하지만 특별히 눈에 담을 것은 없다.

▼ 이 구간의 특징은 지리산의 주능선을 바라보며 걷게 된다는 점이다. 마산천을 지나자 월령봉·형제봉 능선에 가려있던 노고단이 우람한 몸집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 구례읍은 섬진강과 서시천을 양쪽에 끼고 있다. 때문에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꽤 많이 놓여있다. 트레킹 도중 이 다리들을 두루두루 만나게 됨은 물론이다. 그중 첫 만남은 ‘서시1교’다. 이 다리는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인도가 없다. 다리 아래를 그냥 통과해버리는 이유이다.

▼ 두 번째 다리는 ‘서시교(벅수 : 난동 13.8㎞/ 오미 5.2㎞)’. 둘레길은 이 다리를 이용해 ‘서시천’을 건넌다(반대편은 광의면과 마산면으로 이어진다). 건넌 다음에는 다리 아래를 통과해 둑길로 올라선다. 서시천의 오른쪽 둑길을 따르다가 서시교를 건넌 다음 왼쪽 둑길을 따라 서시천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 서시교를 건넌 둘레길은 시내로 들어선다. 그리곤 잠시지만 서시천 옆 도로변을 따른다. 이때 시간이 허락된다면 근처 오일장(3·8일)도 둘러볼만 하다. 지리산에서 나는 약재와 산나물이 지천이기 때문이다. 원산지가 훤히 내다보이는 할머니들로부터 한바구니 듬뿍 사가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 도로변 작은 공원에는 이 지역이 배출한 애국지사 ‘왕재일(王在一, 1904-1961)’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인 1926년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 조직했고,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및 1932년 전남농민협의회 농민항일운동을 주동하다 체포되어 그때마다 옥고를 치렀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잠시 후 도로변을 벗어나 ‘서시천 체육공원’으로 들어섰다. 벚나무가 가득한 서시천변에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에 걸맞게 농구장과 게이트볼장이 들어서있는가 하면, 정자(西施亭)를 세우고 돌탑을 쌓아 미적인 감각까지 더했다. 그중에서도 어린이 놀이시설인 ‘자연아이 꿈 놀이터’가 가장 잘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다.

▼ 공원을 지나는 도중 ‘연하교(煙霞橋)’라는 아름다운 다리를 만날 수 있었다. 서시천을 건너는 보행자 전용의 다리인데, ‘연하’란 이름은 지리산이 제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연하반(煙霞伴, 등산모임)’에서 따왔다고 한다. 참! 사장교의 주탑을 반달곰 형상으로 만들었다니 한번쯤 살펴보는 것도 괜찮겠다.

▼ 실내체육관 뒤편에는 ‘물놀이장’이 들어섰다. 바닥분수와 워터 폴이 시설의 전부라서 어설픈 듯 했지만, 놀이터의 크기만은 장난이 아니다. 까짓 부족한 시설이야 서서히 채워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 물놀이장의 그네는 예뻐도 너무 예뻤다. 이를 본 집사람이 어찌 동심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카메라 앞에 나타난 그녀는 아직도 열여섯의 꽃다운 방심(芳心)이 분명했다.

▼ 서시교를 건넌지 17분 만에 구례종합운동장 옆에 위치한 ‘지리산둘레길 구례센터’에 도착했다. 센터로 연결되는 다리(봉북2교)에는 사자가 수십 마리나 된다. 하필이면 왜 사자였을까? 지리산에 반달곰을 방사한지도 어언 18년. 증손주까지 본 놈도 있다니 이젠 지리산의 터줏대감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저 사자는 반달곰으로 바꿔주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 마당으로 들어서자 지리산둘레길 구례구간의 안내도가 반긴다. 가탄(하동군 화개면)에서 구례를 거쳐 주천(남원시 주천면)까지 81.1km를 총 6개 코스로 나누었다. 이중 오늘 걷고 있는 19구간(오미-난동)은 순환코스이다. 참! 운영을 중단한 지선(목아재-당재)이 빠져있는 걸 보니 최근에 업데이트시켰나 보다.

▼ 남도 이순신길(백의종군로)의 안내판도 보인다. ‘백의종군로’란 이순신이 간신배의 모함에 의해 투옥(1597년)되었다가 출옥한 후, 의금부를 출발하여 경기·충청·전북·전남을 거쳐 율곡면(합천군)에서 권율 도원수를 만날 때까지의 행로(670km)를 말한다. 전라남도에서는 구례와 순천 구간(76.5km)을 총 7개 코스로 나누고 ‘남도 이순신길’이란 이름으로 재포장 이야기가 있는 둘레길로 조성했다.

▼ 센터를 지나면서부터는 서시천의 고수부지를 따르기로 했다. 천변에 지리산 종주코스를 모티브로 한 공원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주능선을 입체적으로 만든 후, 천황봉을 주봉으로 하는 주요 봉우리들의 상징 표지석과 함께 자생 수종(樹種)의 안내판을 세웠다. 지리산을 축소시켜 놓은 미니어쳐라고나 할까?

▼ 이 공원은 1967년에 만들어졌다. 지리산의 국립공원(제1호) 지정 50주년을 기념하면서 서시천 생태하천 복원사업과 병행해 조성했다.

▼ 지리산의 주능선은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25.5km 구간을 말한다. 이 여정은 노고단에서 시작해 반야봉·삼도봉·토끼봉·형제봉·칠선봉·영신봉·촛대봉·연하봉·제석봉을 거친 다음 천왕봉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생태공원을 걸으며 간접적으로나마 지리산 종주의 기분을 만끽해보자.

▼ 생태공원의 중간쯤에서 만나는 ‘정장교’의 교각은 트릭아트 포토존으로 꾸몄다. 실물 대체효과로 그만이니 정상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 장쯤 꼭 남기고 갈 일이다.

▼ 공원에는 서시천의 유래를 적은 빗돌도 세워놓았다. 2200년 전 중국의 진시황이 동방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지리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서불(서복이라고도 불림)에게 명하자, 서불(徐市)이 동남동녀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이곳 하천을 건너 지리산에 올랐다 하여 ‘서불천’이라 불리다가 불(市)과 시(市)의 한자가 같아 ‘서시천(徐市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여인들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중국의 4대 미인 중 서시(西施)를 닮은 여인들이 많다'하여 서시천(西施川)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온단다.

▼ 천왕봉 표지석을 마지막으로 ‘생태공원’에서의 지리산 종주는 끝을 맺는다. 이에 둘레길 역시 둑길로 다시 올라선다. 이어서 아름드리 벚나무를 벗 삼아 트레킹을 이어간다. ‘서시천 벚꽃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광의대교(벅수 : 난동 11.4㎞/ 오미 7.6㎞)’도 다리 아래를 통과한다. 서시천변을 따라 이어지는 19구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도로 횡단이라는 ‘편의’보다는 다리 아래로 돌아가는 ‘안전’을 고집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 고수부지에는 ‘꽃(개)양귀비’가 만발해 있었다. 이곳은 서시천(西施川). ‘강물의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도 잊고 강바닥으로 가라앉을 만큼 아름다웠다’는, 그리하여 ‘침어(沈魚)’라고도 불리는 서시(西施)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그런 서시천에 당나라의 양귀비가 꽃으로 변해 들어앉았다니... 아서라! 아름다운 곳에 아름다운 꽃 좀 심었기로서니 무에 문제가 되겠는가.

▼ 아쉽게도 서시천이 자랑하는 ‘원추리꽃’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구례군이 노고단에서 자생하는 노랑원추리를 서시천변에 심었고, 이게 자라 3월의 ‘산수유꽃’과 5월의 ‘벚꽃’에 이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때를 맞추지 못한 내 나들이 탓이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원추리 꽃말은 ‘기다리는 마음’. 꽃말처럼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 광의교(벅수 : 난동 10.6㎞/ 오미 8.4㎞) 아래를 통과하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했을 유채꽃밭이 이제 시든 장다리만 남았다. 아니 다음에 피어날 꽃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줄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이 일대는 ‘생활환경 숲’이란다. 벚나무가 도열해있는 길로도 모자라 고수부지에 꽃양귀비와 노랑원추리, 코스모스를 심었단다. 그러니 철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날 게 분명하다.

▼ 이 부근은 tvN 1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지리산(극본 김은희·연출 이응복)’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수해(이때 구영의 연인 양선이 죽는다)가 끝나고 일해(조한철)와 구영(오정세)이 이곳으로 캠핑을 왔었다.

▼ 건너편 둑길은 메타세쿼이아로 장식되어 있다. 색동옷으로 갈아입는 가을철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할 게 분명하다. 그건 그렇고 메타세쿼이아 너머 지리산 주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온 굵은 산줄기는 만복대와 성삼재를 거쳐 노고단으로 치솟는다.

▼ 산성봉(362m) 앞 ‘사림(四林)’마을의 들녘에는 우리밀이 누렇게 익어간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우리밀은 수입 밀에 비해 가격이 4배나 비싼 귀하신 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 곡물 수급에 문제가 생겼다지만 아직도 2배나 비싸다. 하지만 ‘우리 밀’ 자급률은 0.8%에 불과하다. 채산성이 떨어져서겠지만 요즘 같은 시국에서는 ‘안보 식량’이라는 개념도 한번쯤 챙겨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 광의교를 지나 30분 남짓. 자동차 전용도로인 ‘서시2교(벅수 : 난동 7.9㎞/ 오미 11.1㎞)’는 어쩔 수 없이 다리 아래를 통과한다. 그 전에 만나게 되는 죽정천은 아치형 목교로 건넌다. 물이 불어나는 장마철에는 통행이 불가능할 것 같다.

▼ 죽정천(사진)과 두물머리 일대의 드넓은 갈대숲을 바라보다 문득 수달은 떠올린다. 수달은 ‘수(水)환경 건강도’를 판단할 수 있는 지표종으로 수달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은 섬진강의 물이 그만큼 물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나저나 서시천 둑방길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 구간이 끝나기 전 귀하신 수달을 곁눈질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 벚나무 숲길은 이후로도 꽤 오래 지속된다. 가는 길 내내 오른쪽으로는 서시천 너머에서 노고단 능선이 뻗어 내려오고, 왼쪽에서는 널따란 들녘을 지나 순천-완주 고속도로가 견두산 줄기의 허리쯤에서 숨 가쁘게 달린다.

▼ 둑길 양쪽에는 꽤 많은 매실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누렇게 익은 모양새가 ‘살구’로만 알았는데, 집사람이 주워주는 낙과는 분명 살구 맛이 아니다. 캔맥주라도 살까 해서 들른 연파마을 슈퍼에서 물어보니 ‘황매실’이란다. 우리에게 익숙한 ‘청매실’이 익으면 저렇게 변한다나?

▼ 좌우로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20분쯤 걸었을까 ‘선월마을(벅수 : 난동 7.9㎞/ 오미 13.1㎞)’이다. 1820년경 ‘안동권씨’가 정착하면서 생겨난 마을인데, 갱변가라 하여 ‘갱변뜸’ 즉 강변촌(江邊村)이라 부르다가 1930년대에 마을 지형이 ‘배(船)’처럼 생겼다고 해서 ‘선월(船月)’로 바꾸었다고 한다.

▼ 용방면의 ‘선월마을’과 광의면의 ‘연파마을’은 사시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모양새이다. 둘레길은 사시천에 가로놓인 ‘광용교’를 건너 연파마을로 들어선다.

▼ 늦은 감은 있지만 ‘서시천(西施川)’에 대해서도 한번쯤 살펴보자. 지리산의 만복대에서 발원하여 섬진강으로 스며드는 구례분지의 젖줄로 산동면·광의면·마산면 일대의 들녘을 적셔준다. 대두천·수락천·천은천·마산천 등 여러 소하천을 중간 중간에서 합류시키며 몸집을 부풀려나가는데, 유역에 발달된 너른 갈대숲은 청둥오리·흰뺨 검둥오리·왜가리·백로 등 수많은 철새와 텃새의 낙원이 되어준다.

▼ 나들가게(대형마트에 대항하기 위해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지원하는 동네슈퍼)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천변을 따르다가 이번에는 ‘장정교(천은천에 놓인 다리)’를 건넌다. 그 사이에서 우린 광의면소재지인 ‘연파(煙波)’마을을 만나게 된다. 연화도수(蓮花倒水)와 같은 서시천이 흐르는가 하면, 물 흐름의 파도가 연기(波土盤龍)처럼 흐른다고 해서 연파(蓮波)로 불리었으나 언제부턴가 연꽃이 연기로 바뀌었단다.

▼ 다리를 건너면 광의면사무소(벅수 : 난동 5.7㎞/ 오미 13.3㎞). 면의 중심지답게 대형 현수막게시대가 세워져 있는가 하면, 퍼걸러가 주민들의 쉼터노릇을 한다. 안내판도 여럿 보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지리산둘레길 안내도’. ‘남도 이순신길(백의종군로)’의 안내판과 이정표도 ‘2구간(서시천 꽃길따라 뚝방마실길)’의 안내도와 함께 길손을 맞는다.

▼ 490년이나 묵었다는 느티나무(보호수) 아래서 잠시 머물다 다시 길을 나선다. 둘레길은 아직도 서시천을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 다만 오른편 옆구리에 끼던 것을 이번에는 왼편 옆구리에 옮겨달았을 따름이다.

▼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서시천은 구례분지의 젖줄이다.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중 심심찮게 수중보(水中洑)를 만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저 보에서 모인 물은 산동면·광의면·마산면 일대의 너른 들녘을 적셔준다.

▼ 광의면사무소에서 25분 거리에 있는 구만마을 입구(벅수 : 난동 4.4㎞/ 오미14.6㎞). 백의종군로에서 세워놓은 아주 특별한 이정표(산수유시목지 9.9㎞/ 광의면사무소 1.9㎞)를 만났다. 구만마을 방향에 ‘산수유시목지’가 있다는 것이다. 산동면 계척마을에 있다는 산수유나무를 이르는 모양이다. 산수유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의 산동반도로 알려진다. 약 1000년 전 산동성 여인이 지리산 자락으로 시집을 오면서 산수유나무를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진다.

▼ ‘구만(九灣)’마을은 1580년대 삭녕최씨(朔寧崔氏)가 일군 마을로 5대에 걸쳐 5현(五賢)을 배출했을 정도로 번성했다고 전해진다. 도승의 저주로 패망한 슬픈 얘기와 함께이다. 그건 그렇고 마을에는 엄청나게 큰 사일로가 들어서 있다. 전남·북과 경남지역에서 생산되는 우리밀의 대부분(연간 2천800t, 7만 가마)을 수매·가공하여 전국에 유통시키는 ‘우리밀 가공공장’이란다. ‘안보식량’이라는 개념이 대두되는 요즘 특히 주목을 받는 제조시설이다.

▼ 3분 후 만나게 되는 ‘구만교’ 앞에서 잠시지만 고민에 빠져들었다.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다리를 건너라는 벅수(난동 4.1㎞/ 오미 14.9㎞)의 방향표시를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개울가 숲속에서 빼꼼이 내다보는 뭔가가 있는 데야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리를 건넌 다음 개천가를 따라 올라가니 수풀에 가려있던 정자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 세심정(洗心亭)은 남원 출신으로 1589년에 증광시 문과에 합격하여 한림(翰林)을 거쳐 임란 때 권율장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한 최상중(崔尙重, 1554-1604)이 말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은 정자다. 선생이 시서를 읽고 향풍교화의 장소로 삼은이래,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李景奭)을 비롯해 최연(崔葕)·최온(崔蘊)·최시옹(崔是翁) 등이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했단다. ‘세심’이란 역경(易經) 계사상전에 ‘성인은 마음을 씻고 은밀한 곳에 물러나 은거한다(聖人以此洗心 退藏於密)’에서 따왔단다.

▼ 길은 세심정의 앞을 통과한다. 이어서 19구간 유일의 산길을 지나 구만저수지로 향한다. 둑 아래서는 지리산호수공원 오토캠핑장 가는 길과 헤어져 오른편으로 간다.

▼ 구만저수지 아래에 이른 둘레길이 이번에는 수로를 따라 위로 올라간다. 저수지의 부대시설이라는 ‘소수력발전소’는 눈에 띄지 않았다. 주업인 영농급수를 하는 와중에 전기까지 생산한다는 효자시설이라는데 말이다.

▼ 구만저수지는 스치듯 지나간다. 1973년 축조된 저수지로 전국적으로 보면 중급 정도의 규모지만 구례지역 저수지 가운데서는 유역면적(광의면·용방면·구례읍 들녘에 농업용수 공급)이 가장 넓다. 이런 여건을 지자체에서 내버려둘 리가 없다. 저수지에 ‘호수공원’을 비롯한 레저단지를 떡하니 들어앉혔다.

▼ 잠시 후 ‘농업체험교육관’에 이른다. 우연히 만난 직원의 말로는 숙박시설이라는데 대문을 겸한 빗돌은 우리밀의 홍보문구를 적고 있었다. 맞다. 이곳은 우리밀 영농으로 유명한 구만마을이 아니겠는가. ‘우리밀’은 쌀에 이어 우리나라 제2의 식량으로 불린다. 지금은 값싼 수입밀에 밀려 외면 받는 신세가 됐지만, 구만리의 우리밀 농가는 꿋꿋이 땅을 일구고 씨앗을 심어 밀을 생산하고 있다. 참고로 1983년 정부가 수매를 폐지하면서 우리밀은 생산기반이 파괴됐다. 하지만 우리밀을 되살리려는 이들이 행동에 나서 1989년 어렵게 우리밀 종자 한 가마를 구입했다. 그걸 전남도와 전북도, 경남도에서 14㎏씩 나눠 제배를 시작했고, 그게 우리밀 살리기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 둘레길은 교육관 앞마당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반대편은 구만저수지의 호반을 따라 이평리(산동면)로 연결된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다녔던 ‘방산서원(方山書院)’이 있는 곳이다. 방산서원은 조선전기 문신인 추계(楸溪) 윤효손(尹孝孫)을 기리기 위해 숙종 28년인 1702년 건립됐다. 추계는 박원형(朴元亨, 예종 때 영의정)에게 쓴 시로 유명한 우리 집안의 할아버지이시다. <정승님 해 높도록 단잠 자는데 / 문 앞에 명함은 만지고 만져 털이 났소 / 만일 꿈속에 주공을 뵙거든 / 밥을 토하고 머리 쥔 채 손님 만나던 일 어떻든가 물으소서> 12살 소년은 이 시가 인연이 되어 훗날 박원형의 사위가 된다. 하나 더, 서원 옆 할아버지의 묘에는 크고 하얀 신도비가 서있다. 보물 제584호다. 사대부 묘역의 신도비 중에서 유일한 국가문화재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우리밀체험로’를 따라 날머리인 난동마을로 향한다. 이때 만나게 되는 물 빠진 ‘온동저수지’는 허옇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둑을 새로 쌓는 모양이다.

▼ 세연정에서 35분. 매화나무와 대봉감나무가 나열해 있는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어느덧 ‘온동(溫洞)’마을(벅수 : 난동 1.6㎞/ 오미 17.4㎞)이다. 마을은 1500년경 전주이씨가 들어와 살면서 형성됐다.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100여 호의 큰 마을로 발전했단다. 하지만 여순사건과 6.25난을 겪으며 마을은 피폐되었고 주민들은 떠나갔다. 극단적인 이념대결이 만든 서글픈 단면이라고나 할까? 온동이란 지명은 이 마을 뒤쪽 '골롱계(谷籠溪)'라는 골짜기에서 온수가 솟아 나온 데서 유래했단다.

▼ 100m쯤 더 올라가자 팔각정 옆에 마을의 유래를 적은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온천수가 피부병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의 피부병(나병) 환자들이 몰려들었던 모양이다. 이에 혐오감을 느낀 주민들이 솥뚜껑으로 샘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온천수의 근원까지 막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온천은 현재 산 하나를 넘어 산동에서 솟는다. 온동의 매정한 전설이 온천을 산동으로 쫓아버렸다고나 할까?

▼ 난동마을까지는 아직도 10분쯤 더 걸어야 한다.

▼ 이때 18구간을 걷는 내내 함께 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서시천을 따라 구례분지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이번 구간과는 달리,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례분지를 말이다.

▼ 그렇게 도착한 ‘난동(蘭洞)’ 마을(벅수 : 난동 0.8㎞/ 오미 18.2㎞)은 1500년 경 마을 뒤에 있던 고려 고찰인 난야사(蘭若寺)라는 절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형성됐다고 한다. 마을 근처에 난초가 많아 ‘난초골’, ‘난죽골’로 불리다가 한자어로 고치면서 난동으로 변했단다.

▼ 이제 둘레길은 마을안길을 통과한다. 이때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두 번이나 만나게 된다. 두 나무 모두 아래에 유리문을 두른 정자를 두었다. 이렇듯 구례의 정자들은 들일하던 농부들이 폭염이나 폭우를 피해 잠시 쉴 수 있도록 유리문이나 대나무발을 두른 것이 특징. 선풍기와 차를 끓여먹을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정자도 있다. 구례의 정자가 마을의 커뮤니티 공간은 물론 둘레꾼들을 위한 쉼터로 각광 받는 이유다.

▼ 난동마을에는 ‘둘레길안내소’가 들어서 있었다. 현재 지리산둘레길에는 지자체별로 5개 안내센터와 3개 안내소가 있다.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 느티나무 아래 터를 잡은 ‘난동마을 갤러리’는 ‘심정서각 연구실’이란 부제를 달았다. 하지만 이 또한 문이 굳게 닫혀있어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꿩 대신 닭이랄까? 옆 건물의 벽화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박용래’라는 분이 지은 시로 배경을 깔았다. <모과차/ 앞산에 가을 비/ 뒷산에 가을 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모과차를 마시면/ 가을 빗소리>

▼ 날머리는 난동마을 뒤 도로변(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328-3)

마을회관을 지나 7분쯤 더 걸으면 2차선 도로인 ‘난동길’에 올라선다. 그리고 길고 길었던 19구간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6.94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산동 8.8㎞/ 방광 4.2㎞)는 19구간(오미-난동)과 20구간(방광-산동)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이곳이 19구간의 종점이지만, 동시에 20구간의 중간 지점이기도 하다는 증거다. 

지리산둘레길 18구간(오미-방광)

 

여행일 : ‘22. 5. 21(토)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과 마산면, 광의면 일원

여행코스 : 오미마을(1.1km)→용두갈림길(1.6km)→상사마을(5km)→지리산탐방안내소(3.2km)→수한마을(1.4km)→방광마을(거리 및 시간 : 12.3km/ 실제는 12.84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8구간(오미-방광)을 걷는다. 7개 코스(68km)로 이루어진 구례권역의 세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12.3km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만 한다. 지리산 서남쪽 자락의 볕 바른 농촌마을 7곳을 꼬박꼬박 들어갔다가 나와야만하기 때문이다. 운조루와 곡전재, 쌍전재 등 천하 명당에 들어앉은 고택들이 즐비한데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들머리는 오미마을 앞 정자쉼터(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34)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면으로 내려온다. 용두갈림길교차(토지면 용두리)를 지나자마자 ‘지리산구례명차가공공장’을 왼편에 끼고 돌아 들어가면 잠시 후 오미마을에 이른다. 마을 앞 정자쉼터가 18구간의 출발점이다.

▼ 12.3km 길이의 18구간은 전통마을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구간으로 알려진다. 출발지 부근의 운조루와 곡전재는 물론이고, 둘레길에서 약간 비켜나있는 상사마을에라도 들어가면 ‘구례 3대 고택’ 가운데 하나인 ‘쌍산재’도 만날 수 있다. 난이도는 ‘중’. 숲길이 대부분이지만 고저가 심하지 않아 평지나 다름없다는 점이 감안되지 않았나 싶다.

▼ 구간의 경계임을 알리는 벅수는 버스정류장(운조루) 맞은편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거리표시(방광 12.3㎞←오미→송정 10.4㎞)와는 달리 진행방향(붉은색 화살표)이 둘이다. 오늘 걷게 될 18구간(오미-방광)말고도 2주 후로 예정된 19구간(오미-난동)도 이곳에서 출발하게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구례 방향(서쪽 ‘五美亭’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오른편으로 한옥 체험마을이 보인다면 제대로 길을 들어선 셈이다.

▼ 오미마을은 40여 채의 한옥이 있는데 민박을 할 수 있는 집들이 많다. 가족단위로 묵을 수 있는 고급 한옥스테이가 있는가 하면, 시골 할머니집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도 여럿 있다. 특히 개인 단위로 잠시 쉴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산에사네)와 식당(들녘밥상)까지 들어서있어 둘레길 순례자들에겐 성지로 꼽힌다.

▼ 3분쯤 걸었을까 둘레길은 도로(벅수 : 방광 12.0㎞/ 오미 0.3㎞)를 벗어나 ‘오미저수지’의 둑길로 올라선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도 되지만, 지리산둘레길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보려는 의도일 것이다.

▼ 제방의 끝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렇듯 지리산 둘레길은 좋은 길을 놓아두고도 고난(苦難)한 숲길을 고집한다.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자락의 네 남자, 그러니까 실상사의 도법·수경스님, 박남준·이원규 시인이 45일 동안 지리산 둘레를 걸어서 한 바퀴 돈 생명평화탁발순례가 발단이 됐다. 그래선지 이 길에는 순례를 나서는 탁발승의 마음이 곳곳에 깔려있다. 제주도의 올레길보다 훨씬 고생스러운 이유이다.

▼ 나무계단을 올라서자 길은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산비탈에 낸 길이지만 폭은 제법 넓다. 잠시 후 벅수(방광 11.5㎞/ 오미 0.8㎞)를 만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침목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 저수지에서 숲길로 들어선지 5분 남짓, ‘GS칼텍스 토지주유소’ 앞 19번 국도로 내려선다. 날머리에는 ‘삼밭재등산로’의 안내판과 이정표(삼밭재 3.2km)가 세워져 있었다. 조금 전 내려온 능선을 탈 경우 천황재·삼밭재·월령봉·형제봉을 거쳐 노고단으로 연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잠시 후 ‘용두리 갈림길(벅수 : 방광 11.2㎞/ 오미 1.1㎞)’을 만났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은 이곳을 ‘배틀재’라 부르고 있었다. 고개라 여겨지지 않겠지만 지리산(노고단)에서 분기해 구례의 토지면과 마산면을 나누며 남서쪽으로 내려오던 능선이 형제봉·월령봉·삼밭재·바람재를 일군 다음 섬진강에서 그 숨을 다하는데, 19번 도로와 만나는 이곳이 마지막 고개라는 것이다. ‘삼인행 필요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 셋이 걸어가면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모르는 게 없다.

▼ ‘당몰샘로’를 따라 하사마을로 향한다. 잠시 후 면경계지(마산면/토지면)를 지난다. 이어서 단풍나무 가로수가 고운 길을 조금 더 걷자 하사마을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하사저수지를 품은 채 넓은 들녘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 정경이 무척 아름답다. 그 역사가 신라 흥덕왕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마을인데,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그 규모도 크다.

▼ 안내판은 하사마을을 ‘모래그림 마을’로 풀었다. 맞다. 상사마을과 하사마을로 나뉘어있는 ‘사도리(沙圖里)’의 역사는 모래그림으로부터 시작된다. 도선국사(827~898)가 오산(鰲山)의 사성암(四聖庵)에서 수행을 하던 중 한 이인(異人)을 만났다. 그는 풍수지리에 대한 이치를 얘기하고 홀연히 사라지더니, 훗날 마을 앞 강변에 다시 나타나 모래(沙)로 산천을 그리(圖)고 다시 사라졌다 한다. 도선이 그 그림의 산천지세(山川地勢)를 보고 풍수의 원리를 깨달았다 하여 이 마을을 사도리라 하였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 마을(벅수 : 방광 10.4㎞/ 오미 1.9㎞) 초입에는 작은 샘이 있었다. ‘작은등샘’이라는데 둘레길 순례자들에게는 감로수라 할 수 있겠다. 물이 흘러넘치니 청정할 것은 당연, 이물질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지붕까지 씌웠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한 모금 마셔볼 일이다. 마침맞게 음용에 적합하다는 관청의 수질검사 성적표까지 붙어있다.

▼ 길가로 나온 경로당은 ‘여성 전용’이란다. 노소를 가리지 않고 튀어나오는 ‘성추행’. 바람직하지 못한 세태이건만 이런 시골마을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나보다.

▼ 길가 홍살문(紅─門)이 무심코 걷던 발길을 붙든다. 홍살문이라는 게 본디 충신·열녀·효자 등을 배출한 집안이나 마을에 세우던 게 아니겠는가. 서원이나 향교 그리고 능과 묘에도 설치했었다. 그러니 저 안에 뭔가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50m쯤 들어갔을까 ‘효헌사(孝憲祠, 구례군 향토문화유산 1호)’가 얼굴을 내민다. 조선 정조대왕의 12번째 왕자인 도평군과 두 부인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왕인 정종이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한탄하자 ‘제가 하늘에서 천도복숭아를 따다가 아버님께 바치고 싶습니다.’라는 시를 남겼다고 해서 ‘복숭아 도(桃)’자를 넣은 ‘도평군(桃平君)’이란 시호를 받았다. 1901년 고종은 이런 도평군의 일화에 감탄하여 다시 ‘효헌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또 하나의 효행을 만난다. 이번에는 ‘이규익지려(李圭翊之閭, 구례군 향토문화유산 제21로)’다. 그는 부친의 병 치료를 위해 자신의 살을 베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드려 병든 부친을 3일간 더 살게 하였고, 6년간이나 시묘살이를 하여 그 효성이 하늘에 닿아 꿩이 묘막에 들어오고 호랑이가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이에 고종이 동몽교관(童蒙敎官,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각 군현에 둔 벼슬)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 안내판은 마을 앞 당산의 정자를 ‘유산각’이라 적고 있었다. ‘모정(茅亭)’이나 ‘시정(市亭)’이라 부는 게 보통인데, 이 마을은 유산각을 고집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하사마을은 정자까지도 남녀를 구분하고 있었다. 유리문이 달린 단정한 정자가 ‘어머님 것’, 벽 없는 맨몸 정자는 아버님 것이란다.

▼ 둘레길은 이제 상사마을을 향해 간다. 이때 왼편으로 사도 들녘이 널찍하게 펼쳐진다. 그 너머에서는 구례읍 시가지의 고층건물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 하사마을은 드넓은 들판이 인상적이다. 섬진강이 만들어낸 들판은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맞다. 오늘은 소만(小滿). 모내기가 시작되는 절기이다. 소만이란 게 본디 여름 기분이 나기 시작하면서 식물이 성장하는 시기이니 말이다.

▼ 트레킹을 시작하고 35분 만에 상사마을 앞 삼거리(벅수 : 방광 9.6㎞/ 오미 2.7㎞)에 도착했다. 둘레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향한다. 하지만 우린 왼편, 그러니까 쌍산재가 있는 상사마을로 들어간다. 둘레길에서 벗어나 있지만 또 다른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유명한 쌍산재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 상사마을에도 효자가 있었다. 이 동네에 살던 ‘오형진’의 효행은 하늘도 감동했던 모양이다. 병이 든 아버지의 약을 지어오던 길에 큰 비를 만났으나 상류에서 떠내려 오던 나무뭉치를 붙들고 건널 수 있었고, 아버지의 시묘 살이 때 일어난 산사태에도 화를 피했단다. 이를 가상히 여긴 나라에서 고종 30년(1893년)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 종4품)의 벼슬과 정려를 내렸다.

▼ 상사마을에 이르자 널따란 주차장과 함께 이곳이 ‘한국제일장수촌’임을 알리는 빗돌이 길손을 맞는다. 맞다. 이곳 상사마을은 20년쯤 전 한국 제일의 장수마을로 이름이 높았었다. 평균 수명이 91세, 그것도 무병장수로 살고 계신단다. 그게 모두 영험한 효력의 ‘당몰샘’ 덕분이라니, 지리산 약초 뿌리가 녹은 물이 흘러나온다는 속설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 그 유명한 ‘당몰샘’은 쌍산재의 대문 앞에 있었다. 당몰샘은 약천(藥泉)으로 유명하다. 지리산의 온갖 약초에서 흘러나온 물이라서 신비한 효능을 지녔다는 것이다. 2004년 한국관광공사에서 전국 10대 약수터 중 하나로 지정했을 정도란다. 그래선지 지존지미(支存至味)라는 편액과 함께, ‘천년고리 감로영천(千年古里 甘露靈泉)’이라고 새긴 석판이 담장에 붙어있었다. ‘최고의 맛을 지닌 물’이며, ‘천년 마을에 이슬처럼 달콤하고 신령한 샘’이란 뜻이다. 때문에 멀리서 찾아와 물을 길어가는 사람들이 많단다. 당초 집안에 있던 우물을 담장을 새로 쌓으면서까지 대중에 개방한 이유이다. 그러니 모든 걸 제쳐두고 물맛부터 볼 일이다.

▼ 우물 뒤는 ‘구례 3대 고택(古宅)’ 중 하나인 ‘쌍산재(雙山齋)’다. 현 ‘해주오씨(海州吳氏, 문양공 진사공파)’ 주인장의 6대조 할아버지가 처음 터를 잡은 뒤 200년 넘게 살고 있는 고택이다. 고조부 때 서당채인 쌍산재(고조부의 아호인 雙山에 ‘집 齋’를 더했다)가 세워진 이후 현재 이름이 됐다. 1만6500㎡(약 5000평) 남짓한 터에 살림채와 별채, 서당채 등의 부속 건물, 대숲, 잔디밭 등이 들어서 있다. 100여종의 각종 수목초본이 어우러져 계절별로 색채를 달리하는 전통 정원도 쌍산재의 자랑거리다. 현재 한옥 민박을 운영 중인데 가격은 꽤 비싼편이다.

▼ 쌍산재는 오감으로 구경하는 오래된 집이다. 옛 집의 정취, 대숲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그러다보면 외갓집 할머님의 온기가 전해진다.

▼ 담장 사이 소박한 대문을 들어서면 관리동이 나온다. 입장료(1만원)를 내면 커피나 음료를 주는데, 쌍산재를 둘러보다 마음에 드는 곳에 앉아 마시면 된다. 건네받은 커피를 들고 투어를 시작한다. 가장 먼저 맞닥뜨린 곳은 살림집 공간. 마당을 두고 안채와 사당, 건너채, 사랑채가 있다. tvN의 ‘윤스테이’에서 봤던 익숙한 풍경이다. ‘윤스테이’에서 관리동은 손님맞이방과 주방, 안채와 사랑채 등은 식당으로 사용됐다. 그나저나 대나무 숲을 배경 삼은 안채(아래 사진)는 중후하다. 주인마님의 절대적 권위가 배인 장독대는 안채 곁을 지키고, 돌확과 소쿠리·키·다듬돌·쟁기 등 전통 생활도구들도 손만 뻗으면 쉽게 닿는 자리에 놓였다. 생활도구였겠지만 지금은 고택의 운치를 살려주는 소품 역할을 하고 있다.

▼ 안채 마루에는 다과상과 함께 방석을 놓아두었다. 마당에는 카메라용 삼각대도 세워놓았다. 여기서 팁 하나. 안채 대청에서 햇살을 받으며 차를 마시는 장면을 연출할 경우 인생샷을 건질 수도 있다니 기억해두자. 참! 안채의 오른쪽 끝에서 독특한 세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춘궁기에 곡식을 채워두고 어려운 이웃에게 빌려주던 ‘나눔의 뒤주’란다. 운조루의 ‘타인능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가산이 넉넉지 않던 쌍산재의 사정을 감안하면 더불어 살며 베풀고자 한 주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 이제 비밀의 공간으로 떠날 차례이다. 주거 공간 너머로 울창한 대숲이 펼쳐지는데, 그 사이로 서당으로 이어주는 ‘죽노차밭길’이 나있다. 대숲 초입에 누각을 연상시키는 별채(거서당)가 있고 돌계단이 이어진다. 울창한 대숲에 야생 차나무가 어우러지고 대숲을 비집고 햇살이 들어오는가 하면, 불어오는 바람에 대숲이 일렁이며 운치있게 사각거린다. 다른 공간으로 인도하는 대숲 길은 쌍산재 최고의 비경으로 알려진다.

▼ 최근에 지어진 듯한 호서정(壺西亭)을 지난다. 굵은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는가 싶더니 양쪽으로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지고 파아란 하늘이 온전히 드러난다. 좁다란 돌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서당채로 향하는 ‘가정문(嘉貞門)’이 등장한다. 길과 문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서로 어긋난 게 특징이다.

▼ 가정문 안에는 서당채인 ‘쌍산재(雙山齋)’가 들어앉았다. 문지방을 넘으면 동백나무 터널, 스승을 대하는 제자의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쌍산재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대들보와 서까래, 회칠한 흰 벽이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하게 앉아있는 선비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집안의 자제들이 학문을 배우던 곳이라는 선입감 때문일까?

▼ 쌍산재는 집안의 자재들이 학문을 나누던 곳이다. 쌍산재 외에 사락당(四樂堂), 염수실(念修室), 서소헌(舒嘯軒) 등의 현판이 곳곳에 걸려있다. 사락(四樂)은 당시 주인에게 사형제가 있었는데 이 형제들이 모두 우애하면서 행복하게 함께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염수(念修)는 조상의 음덕을 잊지 말고 덕을 잘 닦으라는 뜻이다. ‘서소(舒嘯)’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마지막 부분인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맑은 물가에 다가서 시를 짓노라(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에서 따왔단다.

▼ 쌍산재 옆에는 경암당(絅菴堂)이 있다. 쌍산재의 9채 한옥 중 하나로 서당을 운영하던 선조들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란다. 참! 사람들은 이 일대, 그러니까 대숲 이후의 공간을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별서정원이란 사람들이 머물지만, 최대한 자연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성한 공간을 뜻한다.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던 곳이라고나 할까? 참고로 이곳은 2018년 ‘전남도 민간정원(제5호)’으로 등재돼 전국 31개 민간정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 쌍산재와 경암당 사이에는 ‘청원당(淸遠塘)’이라는 연못이 있다. 네모 형태의 연못 안에 둥근 섬이 있는 구조인데 네모는 땅(음)을 원은 하늘(양)을 의미한단다. 편액을 대신하는 비석에는 ‘獨行不愧影(독행불괴영), 獨寢不愧衾(독침불괴금)’이란 글자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혼자 걸어 다녀도 내 그림자에게 부끄럽지 않고, 혼자 잠을 자도 이불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라는데 중국 남송시대 채원정(蔡元定)의 글에서 따왔단다.

▼ 쌍산재 서쪽으로 오솔길이 나있다. 그 끝에 이르면 자그만 문 하나를 만난다. 짙푸른 벽색(碧色)을 비춘다는 뜻의 ‘영벽문(映碧門)’이다. 문밖은 ‘사도저수지’다. 대문의 이름처럼 저수지는 물 안에 벽색을 담고 있었다.

▼ ‘종골(화엄사 종소리가 계곡을 타고 들려온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에 쌓아올린 이 저수지는 일제강점기에 인근 들녘의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쌍산재의 운치를 더해주는 뒷마당 큰 호수 역할을 한다. 저수지는 이른 아침이나 해질녘이 제격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풍경이나 금빛처럼 빛나는 수면을 바라보며 호젓하게 걸어볼 것을 권하고 있었다.

▼ 쌍산재를 둘러본 뒤 원점회귀 대신 마을안길을 따라 진행했다. ‘상사마을’은 1524년에 해주오씨가 남원으로부터 입촌하여 터를 잡고, 그 후 1780년 무렵 순천에서 영천이씨가 들어와 살게 되면서 두 성씨의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요즘엔 지리산 자락으로 귀농한 외지인이 이 마을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들은 오래 된 돌담도 함께 고쳐 쌓으며 터줏대감들과 어울려 구순히 살아간단다.

▼ 마을회관 한쪽에는 마을카페 ‘단새미’도 있었다. 주인 없는 무인카페로 운영된다는데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리사무소와 남·녀 경로당은 물론이고, 게스트하우스와 제빵체험실에 탁구장까지 들어섰다. 녹색농촌체험마을,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마을’로도 모자라, ‘행복마을’로까지 지정되어 있다더니, 그에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 지방선거가 이제 두 주도 채 남지 않았다. 뚜렷한 강자가 없어선지 이 지역은 출마자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누가 당선되던지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익을 먼저 챙기는 선량한 공직자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 잠시 마을안길을 걷는다.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돌담이 옛 멋을 퐁퐁 풍기는 멋진 골목길이다. 이어서 아까 동구 밖에서 헤어졌던 둘레길을 다시 만나게 된다.

▼ 마을을 빠져나온 둘레길이 이번에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곳에 ‘상사마을’의 이름표를 단 벅수(방광 8.8㎞/ 오미 3.5㎞)가 세워져 있었다. 천황치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나뉘는 지점임을 알리는 이정표(천황치 1.3㎞/ 상사마을 0.3㎞)도 보인다. 천황치와 삼밭치, 월령봉, 형제봉을 거쳐 노고단으로 연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오솔길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산죽터널을 지나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야생 차나무가 자라는 산자락을 헤집기도 한다. 지리산을 등에 업고 섬진강을 앞에 둔 상사마을은 예로부터 차나무가 많았었다고 한다.

▼ 숲길로 들어선지 8분. 몇 동의 펜션(벅수 : 방광 8.2㎞/ 오미 4.1㎞)을 만나는가 싶더니 잠시지만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른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종골삼거리(이정표 : 상사마을 뒷길 260m/ 상사마을 갈림길 417m)’에서 길은 또 다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들머리에 벅수(구례 76-1)를 세워 진행방향을 알려주고 있으나 거리표시는 없었다.

▼ 이 구간에서는 작은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이때 낯선 풍경과 마주쳤다. 플라스틱 바가지가 매달려있지만 막상 물을 떠먹을 샘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봄 가뭄이 옹달샘까지 감춰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임(林)자 사랑해’. 산림청의 올바른 산림 이용문화 확산 캠페인이란다. 산을 사랑하는 모든 국민이 산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나무와 풀을 함부로 꺾지 않고, 정해진 숲길과 등산로 이외의 아무 곳이나 다니지 않고, 허용된 장소가 아닌 곳에서 취사나 야영을 하지 않고, 산림 내 불법행위를 목격할 시 이를 말리거나 신고하자는 실천운동이라나?

▼ 그렇게 15분쯤 진행하자 길은 또 다시 임도(벅수 : 방광 7.7㎞/ 오미 4.6㎞)로 내려선다. 이후부터는 시멘트포장 임도가 계속되는데, 숲을 벗어나 있어 오뉴월 뙤약볕에는 지옥의 구간이 될 수도 있겠다.

▼ 대신 좋은 점도 있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기 때문에 구례고원의 풍경을 실컷 눈에 담아가며 걸을 수 있다.

▼ 임도로 내려선지 5분. 나지막한 언덕에 팔각정이 지어져 있다.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우리 역시 막걸리와 과일로 요기를 때울 수 있었다.

▼ 팔각정 근처에서 빼어난 풍광을 만날 수 있었다. 길가는 매실나무 과수원, 그 위는 야생 차밭이 들어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편백나무 숲이 감싸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 하동과 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비교적 규모가 큰 차밭이었다. 하지만 차밭은 텅 비어있었다. 지난 달 16구간(가탄-송정)을 걸을 때만해도 찻잎을 따는 사람들로 붐볐는데 말이다. 어쩌면 때 이른 무더위가 6월까지라는 ‘녹차의 계절’까지 앞당겨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임도를 따라 10분쯤 걸었을까 둘레길은 또 다시 숲길을 고집한다. 마산면소재지를 저만큼에 내려다보는 지점(벅수 : 방광 6.8㎞/ 오미 5.5㎞)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이어서 뭔가로 분주한 공사현장을 지난다. 전원주택단지라도 만들려는 모양인데, 선답자들은 이곳에 ‘섬곡농장(蟾谷農場)’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고 적었었다.

▼ 공사현장을 빠져나가니 나무다리가 타나나고, 둘레길은 다리 너머 산속으로 파고든다. 이어서 나지막한 안부까지 올랐다가 다시 내려간다.

▼ 산자락을 빠져나오자 ‘청내골 둠벙’이 반긴다. 둠벙(생태연못에 가깝게 보여 ‘둠벙’이란 표현을 썼다)은 물 반에 갈대가 반이다. 제비꽃 무리 흐드러진 제방을 걷는데, 저수지 뒤에서 ‘형제봉’의 서쪽 능선이 자신도 좀 봐달란다.

▼ 저수지에서 내려오면 화엄사의 아랫동네인 ‘황전(黃田)’ 마을이다. 하지만 쉽게 들어갈 수는 없다. 화엄사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흐르는 ‘마산천’을 건너야만하기 때문이다. 개울에 제법 모양새를 갖춘 징검다리가 놓여있지만, 장마철에 물이라도 불어날 경우 우회노선(안내판이 세워져 있다)을 이용해야만 한다.

▼ 징검다리를 건넌 둘레길은 이제 마산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차량을 피하고 싶었던지 천변에 데크로드를 별도로 내놓았다. 그건 그렇고 봄 가뭄에 시달린 ‘마산천’은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여름철이면 저곳은 피서객들로 넘쳐날 것이 분명하다.

▼ 개울가 돌담 아래 터를 잡은 ‘돌나물(또는 돗나물, 돈나물)’이 소담스럽게 꽃을 피웠다. 냉이·달래와 함께 봄나물 3총사로 꼽히는데, 특히 돌나물 나박김치는 봄의 미각을 돋우는 ‘엄지 척’의 별미다. 그동안 집사람이 담아주는 나박김치의 재료로만 알아왔는데 저렇게 예쁜 꽃을 피워낸다는 게 무척 신기롭다.

▼ 잠시 후 도로(벅수 : 방광 5.0㎞/ 오미 7.3㎞)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지리산국립공원 남부사무소’ 앞에서 화엄사 방향으로 올라간다.

▼ 지리산풍경펜션 앞(벅수 : 방광 4.7㎞/오미 7.6㎞)에 이른 둘레길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지리산 탐방안내소’의 마당으로 올라선다. 지리산은 ‘반달곰 방사’ 프로젝트로 유명한 산이다. 지금은 그게 70~80마리까지 늘어났단다. 안내소 마당 한복판에 반달곰 조형물을 커다랗게 세워놓은 이유일 것이다.

▼ 둘레길은 토박이식당과 지리각식당 사이 도로로 이어진다. 다른 식당도 몇 보이니 끼니때라도 되었다면 요기를 해결하고 길을 나서도 될 일이다. 하지만 시간에 쫒긴 우리 부부는 캔맥주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챙겨들고 남은 길을 서둘러야만 했다. 그러니 언제 지리산역사문화관을 들러보고, 또 언제 종복원센터로 가서 반달곰까지 만나볼 수 있겠는가. 아쉬운 일이다.

▼ 100m쯤 더 걸으면 ‘월등파크호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둘레길이 호텔을 오른편으로 끼고 돌기 때문이다. 이어서 오르막 콘크리트길을 지나 산자락(벅수 : 방광 4.3㎞/ 오미 8.0㎞)으로 파고든다.

▼ 솔숲을 헤집으며 난 오솔길은 상당히 가파르게 시작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경사가 무뎌지더니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거기다 코끝을 스쳐가는 향긋한 솔내음.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 그렇게 25분쯤 걷자 산자락을 벗어나는 지점에 벅수(벅수 : 방광 3.2㎞/ 오미 9.1㎞)가 세워져 있었다. ‘당촌(唐村)’ 마을이라는 이름표까지 달았다. 하지만 둘레길에서 벗어나있는 마을을 겉모습조차도 보여주지 않는다. 둘레길과 어깨를 맞대고 있다는 ‘KT수련관’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20분쯤 계속되는 이 길은 봇도랑(水路)과 함께한다. 구례는 물 부족을 고민하는 지역으로 분류된다. 지난 구간에서도 얘기했듯이 노고단에 있는 큰 바위의 방향을 조절해 전북 남원으로 갈 물을 구례로 이동시켰다가 지역간 '물싸움'이 벌어졌을 정도다. 그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선지 구례의 길은 대부분 봇도랑과 함께하고 있었다.

▼ 임도를 따르던 길이 수한마을을 200m쯤 남겨놓은 지점(벅수 : 방광 1.8㎞/ 오미 10.5㎞)에서 다시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오후의 나른한 햇빛에 반사된 대나무 이파리가 바다에 빛나는 잔물결 같아 보인다. 감동의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릴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 그렇게 5분 남짓 내려왔을까 숲이 열리면서 ‘수한마을’이 반긴다. 수한마을은 길이 지나는 7개 마을 중에서 가장 예쁜 마을이다. 여행자를 위해 아기자기한 조형물을 설치한 정성도 고맙지만, 낮은 돌담을 가득 덮은 덩굴만 바라봐도 걸음이 가벼워진다. 참고로 ‘수한(水寒)’이란 지명은 물이 차갑다는 뜻의 ‘물한이’에서 유래했다. 깊은 산중에서 내려오는 물과 암반 속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이 이 마을을 장수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 마을로 내려서자 이름표까지 단 벅수(방광 1.6㎞/ 오미 10.7㎞)가 반긴다. 여정에 지친 순례꾼들을 환영하려는 듯 또 다른 표지목도 세웠다. ‘솔밭에 숨어 우는 바람소리’, 서두르지 말고 은근히 읊조려보자. 가슴시리는 뭔가가 치고 올라오지 않는가.

▼ 마을의 초입. 깨알 같은 글씨들로 가득한 커다란 보드가 벽면을 대신하고 있다. 이 길을 지나간 순례꾼들이 남긴 흔적들일 게다. 누군가를 위해 매달아놓은 매직펜을 챙겨들었다가 슬며시 내려놓는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인생인데 삶의 찌꺼기 남겨서 뭐하겠는가.

▼ 마을의 이름처럼 차가운 샘물로 목을 축이고 나니 멋진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송죽정(松竹亭), 내려오는 도중 울창한 솔숲에 이어 대나무 터널까지 지나왔으니 둘레길 풍경에 딱 맞는 이름이라 하겠다. 응접세트와 작은 소품들로 치장된 정자 내부의 꾸밈새도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덕분에 우리 일행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다리품을 풀 수 있었다.

▼ 정자의 아랫도리는 아예 문학관으로 꾸며놓았다. 서두는 수한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전한다. 이왕에 오셨으니 아름다운 추억 만들어 온 가슴에 듬뿍 담아가시란다. 언제 어느 때고 아무렇게나 오라면서... 글을 읽어가다 그네들의 마음에 동화되어가는 나 자신을 느낀다.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둘레길은 수한마을의 고샅길을 따라 이어진다. 마을회관에서 방향을 틀어 540년이나 묵었다는 당산나무 아래를 지나자 산골마을 답지 않게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 마을을 벗어나려는데 누렇게 익은 밀밭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수입 밀에 비해 가격이 4배나 비싼 귀하신 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 곡물 수급에 문제가 생겼다지만 아직도 2배나 비싸다. 하지만 ‘우리 밀’ 자급률은 0.8%에 불과하단다. 그만큼 채산성이 떨어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 잠시 후 수한마을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방광리교차로(벅수 : 방광 0.9㎞/ 오미 11.4㎞)’에 이른다. 왼편은 구례읍 방향. 오른편은 통행료로 물의를 빚던 ‘천은사’를 거쳐 성삼재로 연결된다. 둘레길은 물론 직진이다. 여기서 팁 하나. 구례방향으로 600m만 들어가면 ‘매천사(梅泉祠)’를 만날 수 있다. 한일합병 소식에 국치를 원통해 하며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한 애국지사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을 모시는 사당이다.

▼ 100m쯤 더 걷자 이번에는 ‘용전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엇갈린 사거리인 이곳에서 방광마을은 오른편으로 향한다. 벅수(방광 0.7㎞/ 오미 11,6㎞)는 물론이고 마을 표지석까지 세워놓았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농경지 사이로 난 들길을 따라 5분 조금 못되게 걷자 18구간이 종료되는 ‘방광(放光)’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방광마을은 남원에서 구례로 들어오는 들머리다. 때문에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주막이 성시를 이루고 국가의 농지인 둔전을 두었을 정도로 번화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은 돌담이 멋스런 골목길에서 옛날의 영화를 더듬어 볼 따름이다. 옛 멋을 퐁퐁 풍기는 녹슨 양철지붕의 정미소는 덤이고...

▼ 방광마을 어귀에서 540년 수령의 느티나무 3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당산나무 그늘에는 ‘종석정(種石亭)’이라는 정자가 들어앉았다. 그 기둥에 매달린 주련(柱聯)에서 마을 이름이 ‘방광’인 이유를 찾아냈다. ‘지리정기수방광(智異精氣受放光)’.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 빛을 내뿜는다나?

▼ 날머리는 참새미계곡 입구(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481-2)

마을안길이 끝날 즈음 ‘참새미마을 계곡쉼터’가 나오면서 18구간(오미-방광)이 끝을 맺는다. 천은사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을 이용한 쉼터로 야외수영장은 물론이고 계곡에서도 물놀이가 가능한 곳이다.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산동 13.0㎞←방광→오미 12.3㎞)는 쉼터로 내려가는 초입에 세워놓았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2.84km. 큰 고개가 없었다고는 하나 숲길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날머리 근처에는 방광마을이 자랑하는 세 가지 보물 중 하나인 ‘소원바위’가 있었다. 지리산 산신이 참새미마을 계곡에 반해 놀러왔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낙네의 간절한 소망에 감복하여 노고단 정상에서 가져다주었다는 바위다. 아낙네가 이 바위를 품고 소원을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나머지 둘은 소원바위에 빌어 아들을 얻은 아낙네가 감사의 표시로 심었다는 ‘100년 묵은 감나무’와 마을 중앙에 있는 540년 묵은 두 그루의 ‘당산나무(느티나무)’라고 한다.

지리산둘레길 17구간(송정-오미)

 

여행일 : ‘22. 5. 7(토)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일원

여행코스 : 송정마을(1.8km)→송정계곡(1.4km)→원송계곡(2.7km)→노인요양원(4.5km)→문수저수지→오미마을(거리 및 시간 : 10.4km/ 실제는 10.78km를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7구간(송정-오미)을 걷는다. 7개 코스(68km)로 이루어진 구례권역의 두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10.4km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구간도 역시 난이도가 ‘상’으로 분류된다. 342m 높이의 ‘의승재’를 오롯이 넘어야하는데다 나머지 구간도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산길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섬진강의 아름다운 풍광과 다채로운 형태의 숲들을 만날 수 있어 지루하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 들머리는 송정마을 ‘둘레길 주차장’(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산 82-22)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면으로 내려온다. ‘한수교’ 직전에서 좌회전 ‘토지·송정길’로 들어서 1km 조금 못되게 올라오면 둘레길 순례자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꼬맹이 주차장이 나온다.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가탄 10.6㎞←송정→오미 10.4㎞)는 내한마을 쪽으로 100m쯤 올라간 곳(‘별밤펜션’입구 근처)에 설치되어 있다. 17구간도 그곳에서 시작됨은 물론이다.

▼ 15구간의 거리는 10.4km. 숲길·임도·농로·마을길 등 다채로운 길을 걸으며 토지면의 전경과 섬진강을 눈에 담아가는 여정이다. 조선의 선비정신도 엿볼 수 있다. 오미마을에서 만나는 운조루는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noblesse oblige’의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타인능해(他人能解)’. 자신의 쌀독을 열어 굶주린 이웃을 구제한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 내한마을 쪽으로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둘레길이 100m쯤 올라간 지점을 횡으로 째며 지나가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곳 송정마을은 한국전쟁 때 소실의 아픔을 겪었던 마을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별장과 펜션이 계곡을 따라 줄지어 들어섰다.

▼ 곧바로 숲으로 들어서면서 돌계단을 오른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가 않다. 가팔라도 너무 가파른 것이다. 시작부터 기를 확 죽이는 것이 명색이 지리산인데 섣불리 덤비지 말라는 경고라도 하는 것 같다.

▼ 10분쯤 올랐을까 첫 번째 벅수(오미 10.1㎞/ 송정 0.3㎞)가 보이는가 싶더니 길은 산모퉁이를 돌아 우측으로 완만하게 이어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대나무 숲속에서 집터의 흔적을 찾아낸다. 뒤란 밖으로는 잡풀에 뒤덮인 묵밭이 상당한 넓이로 펼쳐진다. 오래 전 누군가가 살았음이리라.

▼ 묵밭을 지나자 길은 또 다시 가파르게 변한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그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다. 잠깐 쉬며 타월을 쥐어짜니 쏟아지는 땀방울이 한 됫박은 될 성 싶다. 그러고 보니 그제가 입하(立夏). 절기는 겨우 여름의 문턱을 넘어섰건만 날씨는 이미 삼복으로 들어서버린 느낌이다.

▼ 그렇게 15분쯤 더 오르자 두 번째 벅수(오미 9.7㎞/ 송정 0.7㎞)를 만나고, 이 부근에서 우린 산불의 흔적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소방헬기 17대가 이틀간이나 물을 뿌리고 나서야 겨우 불길이 잡혔다는 현장이다. 11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숲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푸르러졌다. 하긴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지 않았던가.

▼ 호흡이라도 가다듬으려는 듯 길은 완급을 조절해가며 이어진다. 그러다보면 어른의 허리통만큼이나 굵은 편백나무 사이를 지나기도 한다. 이렇듯 이 구간에서 만나는 숲은 다채롭다. 산불에 데였는가하면 조림을 위해 벌거벗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새 생명이 지란다. 속살이 차가면서 지리산은 예전처럼 아름다워져 간다. 자연과 인간의 상생이랄까?

▼ 10분(들머리에서 35분)쯤 더 오르자 ‘의승재’이다. 17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해발 342m)으로, ‘의승’이란 지명은 정유재란 때 구례 사람들이 의병을 모아 왜군을 물리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 고갯마루에는 이름표(의승재)까지 단 벅수(오미 9.3㎞/ 송정 1.1㎞)말고도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라도 쉬어가라는 모양이다.

▼ ‘고진감래’랄까? 의승재로 오르면서 겪었던 고생은 고갯마루를 넘자마자 씻은 듯이 사라져버린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어 오른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온 산자락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심신안정과 피로회복에 그만이라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들로 가득한 산길을 걷는데 까짓 피로쯤이야 어찌 줄행랑치지 않겠는가.

▼ 가뿐하게 내려서는데 편백나무의 은은한 피톤치드 향이 느껴진다. 순식간에 온몸에 퍼져 있던 피로감이 덜어졌음은 물론이다.

▼ 편백나무 숲을 지나자 길이 가파르게 변한다. 올라왔던 만큼 떨어지는 대신 길은 다채로움을 더한다. 굽어졌다 펴졌다 하는 길, 돌계단, 얕은 축대로 막은 비탈 그리고 그 아래 흙길. 우두커니 서있는 나무들 사이로는 햇살이 비치고 나뭇잎은 햇살에 반짝인다.

▼ 휘파람 불어가며 15분쯤 내려섰을까 둘레길은 ‘송정계곡’이라는 작은 개울을 건넌다. 수량은 많지 않지만 숲에서 만난 귀하신 몸이다. 발을 담글 수 있는 유일한 계곡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먼저 도착한 이들 몇이 물가에서 쉬고 있었다. 오솔길을 오르내리며 땀에 젖은 몸을 식히기 위해 얼굴을 씻고 발을 담그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 봄 가뭄 탓이지 물이 흐르지를 못하고 곳곳에 웅덩이만 만들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커다란 바위들로 뒤덮인 것이 여름철에는 피서지로 제 몫을 다할 수도 있겠다.

▼ 조금 더 걷자 갈림길 하나가 나타난다. 벅수(오미 1.9㎞/ 송정 8.5㎞)는 ‘석주관 갈림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이 길을 따라가면 국도변에 ‘석주관(石柱關)’이 있다. 석주관은 마한과 진한의 경계였고, 백제와 신라의 경계였으며, 지금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길목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쌓은 성터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1598년 정유재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이곳을 사수하다 장렬히 전사한 ‘일곱 의사의 무덤(七義士墓, 사적 제106호)’과 사당이 있다.

▼ 둘레길은 이곳에서 ‘남도 이순신길’과 만난다.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7년, 당시 관직에서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군사·무기·군량·병선을 모아 명량대첩지로 이동한 구국의 길을 ‘조선수군 재건로’로 명명하여 역사스토리 테마길로 조성했다. 그런데도 이정표는 ‘백의 종군로’라고 우긴다. ‘백의종군로’는 이순신이 간신배의 모함에 의해 투옥(1597년)되었다가 출옥한 후, 의금부를 출발하여 경기·충청·전북·전남을 거쳐 율곡면(합천군)에서 권율 도원수를 만날 때까지의 행로(670km)를 말하는데도 말이다.

▼ 이후부터 둘레길은 ‘남도 이순신길’을 보탠다. 그리고는 또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하지만 고개나 산을 넘어가는 것은 아니고 그저 산허리를 에둘러 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 길은 산허리를 째며 이어진다. 가끔 오르막도 있지만 주로 산허리를 돌아가는 완만한 길이라 걷기에 편안하다.

▼ 산허리를 에돌다보니 조망이 트이기도 한다. 발아래 섬진강변에는 ‘어류생태관’이 들어섰고, 그 뒤는 2016년에 올라봤던 계족산(鷄足山, 705m)이 버틴다.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 위로 난 바윗길에서의 스릴과 툭 터진 조망을 핑계 삼아 다시 가고 싶다고 꼽았던 산이기도 하다.

▼ 산모롱이를 돌아 임도로 내려선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지그재그로 산허리를 감아나간다. 경사로를 내려가다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풍경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내가 무릎이 불편한지 거꾸로 내려가고 있는데, 남편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부부애의 자연스런 표출이 아닐까 싶다.

 송정계곡에서 33분(들머리에서는 1시간25분). 밤나무단지(벅수 : 오미 7.2㎞/ 송정 3.2㎞)에 내려서니 둘레길이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왼편으로 내려가면 섬진강변에 위치한 ‘원송마을’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작은 개울을 만난다. 첨부된 지도에 나와 있는 ‘원송계곡’일 것이다.

▼ 개울을 건넌 둘레길은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산허리를 에돌아가며 위로 향한다. 이때 밧줄난간을 매어놓아야 했을 정도로 가파른 구간을 지나기도 한다.

▼ 산모롱이에 올라서자 눈이 즐거워진다. 편백나무 조림지가 발아래로 펼쳐지는가 하면, 섬진강 건너에는 간전면의 하천산이 우뚝하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다른 밤나무단지(벅수 : 오미 6.8㎞/ 송정 3.6㎞)가 나온다. 이 부근의 길은 수없이 갈라지고 또 합쳐진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벅수(이정표)’를 만나게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길을 잃었다면 하나만 기억해 두자.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 놓친 벅수를 다시 확인해보는 것이다. 벅수가 촘촘히 세워져 있기 때문에 금방 옳은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35분. 육각정(벅수 : 오미 6.7㎞/ 송정 3.7㎞)이 걸터앉은 언덕에 올라섰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이다. 아니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를 안주삼아 박주 한잔 나누기에 더 좋은 장소다.

▼ 육각정을 지나면서 또 다시 임도를 따른다. 가슴에 담을만한 특별한 볼거리는 없으나, 그렇다고 지루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그렇고 그런 구간이다.

▼ 작은 고갯마루를 넘는데 젊은이들 몇이 쉬고 있었다. 이처럼 지리산둘레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저런 싱싱한 청춘들 말고도 부모를 모시거나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 보는 이들까지 가슴 설레게 만드는 연인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 조금 더 걷자 시야가 열리면서 ‘토지면(파도리)’의 들녘이 눈에 들어온다. 섬진강이 넓은 치마폭을 펼쳐 보이는가 하면, 그 뒤편으로는 오산이 걸려있다. 맞다. 이렇듯 17구간(송정-오미)은 토지면의 들녘과 굽이굽이 섬진강을 걷는 내내 바라보게 된다.

▼ 강 안쪽 습지가 발달된 곳에는 수달 보호로 유명한 ‘섬진강어류생태관’이 들어섰다. 섬진강 민물고기의 생태전시관과 민물고기학습장, 생태연못 등으로 꾸며졌는데, 멋진 스카이워크 전망대를 새로 지으면서 또 다른 진화를 예고하고 있다.

▼ 굽이굽이 섬진강이 더욱 또렷해졌다. 구례에서 잠시 들판을 적신 섬진강은 간전교를 지나면서 골짜기로 접어든다. 그 물줄기가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유연하다. ‘그림 같은 풍경’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런 풍경에 반한 집사람의 발걸음은 자꾸만 더뎌지고 말이다. 그걸 본 나 또한 즐거우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시야를 열어주며 20분쯤 이어지던 둘레길이 또 다시 숲속(벅수 : 오미 5.8㎞/ 송정 4.7㎞)으로 들어섰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예쁘장한 나무다리가 길손을 맞는다.

▼ 이름 없는 개울이지만 다리 아래 물길은 상당히 넓었다. 지도에까지 나오는 송정계곡이나 원송계곡보다 오히려 넓을 듯. 봄 가뭄으로 인해 갇혀버린 물웅덩이의 규모가 제법 큰 것이 여름철에는 물놀이 장소로 제격이겠다.

▼ 이를 놓칠 지자체가 아니다. 개울가에 평상을 놓고 그늘막까지 쳐 의젓한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 쉼터에는 ‘남도수군재건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과정은 구례에서 황대중 등 군관 9명과 병사 6명으로 시작해 곡성·순천·보성으로 이어진다. 일본군이 뒤쫓아 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군사와 군기·군량·군선을 복원하는 과정이었다.

▼ 쉼터를 끝으로 숲길을 빠져나온다. 이어서 복숭아와 대봉감이 주류를 이루는 과수단지를 지난다.

▼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모 가구회사의 명품 광고다. 그런데 과학은 침대뿐만이 아닌가보다. 길가 과수원의 대봉감이 하나같이 어른 키 높이로 자라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일손을 확 줄여줄 수 있으니 저게 바로 ‘과학 영농(科學 營農)’이 아니겠는가?

▼ 누군가는 토지면 일대를 남한의 ‘3대 길지’ 중 하나로 꼽았었다. 그래선지 잘 써진 묘원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아래 묘역도 그 가운데 하나. ‘左靑龍右白虎, 背山臨水’이니 아마추어인 내가 봐도 명당의 기본을 갖췄다. 그런데 뒤로 도로가 나면서 맥을 잘라버린 모양새이니 이 일을 어찌할꼬.

▼ 이후부터 둘레길은 ‘등평들’의 농로를 따른다. 마을 뒤 산비탈에 형성된 논과 밭을 다니며 이용하는 길이다. 이때 토지면과 간전면의 산과 들녘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의 구례 땅을 내려다보며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그렇게 18분쯤 진행했을까 구례양로원 앞에서 또 하나의 쉼터를 만났다. 쉼터이니 사각의 정자는 기본. 거기에 지리산둘레길의 시설물인 벅수(오미 4.8㎞/ 송정 5.6㎞)와 구례구간(7개 구간, 86km)안내도, 그리고 ‘남도 이순신길’의 시설물(안내도, 이정표)까지 더했다.

▼ 벅수가 지시대로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면 ‘구례군 노인전문요양원’이 나온다. 백세시대를 향해 달려가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시설이다. 구례군에서 운영하는 이 요양원은 치매와 같은 중증 노인성 질환으로 고통 받는 노인들에게 다양한 복지혜택을 주고 있단다.

▼ 둘레길은 요양원을 옆에 끼고 돌아가 임도로 연결된다. 그런데 홀로 가는 것이 무료했던가 보다. 가다가 휘고, 휘었다가는 내리받이로 달리고, 다시 치고 오르는가 하면, 쉬엄쉬엄 평지로 늘어지며 장난치듯 십리 가까이의 길을 그렇게 간다.

▼ 하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일절 들지 않는다. 아니 가로수로 심은 단풍나무가 저렇게 숲을 이루고 있는데 지루해 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길은 단풍이 붉게 물든 가을이 제격이겠지만 청초를 자랑하는 여름도 결코 그에 못지않다.

▼ 콧노래 흥얼거리며 18분쯤 걸었을까 시야가 툭 터지는 언덕 위에 ‘파고라’형의 정자가 들어앉았다. 파도리의 너른 들녘이 발아래로 펼쳐지는 조망의 명소다. 그 뒤의 국사봉과 계족산 능선, 그리고 백운산 자락까지 한눈에 쏙 들어옴은 물론이다.

▼ 평상에 걸터앉자 섬진강이 성큼 다가온다. 지리와 백운을 양 옆에 둔 섬진강은 늘 봐도 눈이 시리게 정겹다. 사성암을 품은 오산을 굽이돌아 섬진강이 흐르고, 구례읍 뒤로는 견두산-천마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완만하게 이어진다.

▼ 조망을 즐기다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렇다고 조망이 끝나지는 않는다. 쉼터에서 보던 풍경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참! ‘파도마을’ 앞 섬진강은 다슬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물속의 웅담’이라 불리는 다슬기는 간의 열과 눈의 충혈, 황달을 제거하고 이뇨작용을 촉진시켜 체내 독소를 배출하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술을 좋아하는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다슬기탕’의 주원료다.

▼ 10분쯤 더 걸었을까 또 다른 쉼터로 조성된 작은 공원이 반긴다. 이번에는 체육시설까지 갖췄다. 주민들을 위한 시설로 보이는데 이곳까지 찾아와 몸을 푸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 부지런한 나무는 벌써부터 붉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니 저건 사시사설 붉은 홍단풍이 분명하다. 봄단풍 혹은 노무라단풍으로도 불리며 정원수로 각광을 받는 품종 말이다. 그나저나 모든 잎새가 꽃으로 피어난다는 가을. 그 계절에 다시 찾아와보고 싶다. 그리고 ‘붉었도다 붉었도다 청산에 단풍이 붉었도다…’나 ‘시월 단풍 꽃밭이요 꽃밭 속에 동자가 놓여 꽃밭 속에 신선이 논다…’ 같은 단풍의 예찬론을 읊조리며 걸어보고 싶다. 그만큼 마음에 쏙 드는 둘레길이란 얘기다.

▼ 단풍나무도 꽃을 피우나보다. 맞다. ‘오매 불나부렀네’로 단풍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다소 생경스럽겠지만, 단풍나무도 4~5월에 꽃을 피워낸단다. 꽃말은 ‘사양, 은둔, 자제’. 잎새 아래서 숨은 듯 피어나는 꽃의 형태와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 단풍의 매력에 빠져 걷길 25분. ‘솔까끔’이라는 별장촌(벅수 : 오미 2.5㎞/ 송정 7.9㎞)을 지난다. 산등성이를 깎아 만든 단지에 예쁘게 지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았다.

▼ ‘까끔’은 동산의 전남지방 사투리이다. 그러니 ‘솔+까끔 마을’은 소나무가 그득한 동산에 들어앉은 마을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 조금 더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문수저수지의 높은 둑이 보이는가 싶더니 저수시 아래에다 터를 잡은 ‘내죽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명당으로 알려진 마을이다. 하늘에 사는 선녀가 경치 좋은 이곳에 하강 하다가 손가락에 낀 반지를 구름 위에서 잃어버렸다고 전하며, 이 반지가 묻힌 곳에 터를 잡으면 부귀영화가 뒤따른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내죽마을의 배후 산인 ‘왕시루봉’은 출입을 금한단다. 비법정탐방로라는 얘기일 것이다. 나 같은 산꾼들에게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생태계 복원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일지니 어쩌겠는가.

▼ 단풍으로 치장된 임도는 문수저수지(벅수 : 오미 1.7㎞/ 송정 8.7㎞)를 마주하면서 끝난다. 노고단은 형제봉능선과 왕시리봉능선을 만들고, 두 능선 사이에 문수골(덕은내)을 형성했다. 그 문수골 하류에 댐을 막았으니 곧 문수저수지이다. 참고로 구례는 물 부족을 고민하는 지역으로 알려진다. 한때 지리산 노고단에 있는 큰 바위의 방향을 조절해 전북 남원으로 갈 물을 구례로 이동시켰다가 지역간 '물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단다. 문수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쌓아올린 농업용 저수지이다. 썩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풍광만은 전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 저수지 둑에는 샤스타데이지가 만개해 있었다. 미국의 육종학자 ‘루터 버뱅크’가 프랑스의 들국화와 동양의 섬국화를 교배하여 만든 개량종으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꽃말은 인내, 순진, 평화라고 한다.

▼ 문수저수지에서 크게 방향을 튼 둘레길은 ‘내죽마을(벅수 : 오미 0.8㎞/ 송정 9.6㎞)’로 내려선다. 대나무가 온 마을에 울창하여 이를 상징하는 대(竹)와 문수천의 시냇물(내)를 따서 ‘대내’라 부른다는 마을이다. 오미동 뒷산의 대밭 골을 중심으로 안쪽에 있다 하여 ‘안대내’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내죽(內竹)’으로 개칭했단다.

▼ 마을회관 앞에 마을의 유래를 적은 빗돌을 세워놓았다. 1500년경 진주하씨와 김해김씨, 경주이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고, 후에 문화이씨, 진주정씨, 밀양손씨 등이 입촌하면서 큰 마을을 이루었단다.

▼ 마을회관 옆 담벼락은 벽화로 채워졌다. 목화를 재배하여 솜을 만들고, 물레로 실을 뽑아 베틀에서 무명베를 짜는 일련의 과정을 상세히 묘사했다.(내가 찍은 사진이 시원치 않아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 마을에는 한때 세상을 쩡쩡 울리던 ‘소망교회’가 들어서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교회 맞은편에 있는 ‘안곡수퍼’가 더 반갑다. 더위에 지친 몸이 뭔가 시원한 것을 간절히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원한 캔 맥주 하나를 단숨에 비우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후식 삼으며 다시 길을 나섰다.

▼ 마을 앞 수로에는 빨래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둘레길 순례자들에게는 발 담그는 장소로 더 어울리겠다. 주민들이 이해만 해준다면 또 하나의 둘레길 명소가 되지 않을까?

▼ 정원수처럼 잘 정돈된 향나무들을 가로수삼아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 ‘하죽마을(벅수 : 오미 0.4㎞/ 송정 10.0㎞)’이 길손을 맞는다. 선비 정신이 살아 숨 쉰다는 이 마을은 조선 영조 때 경주 출신의 이기명(李基鳴)이 이곳을 길지로 여겨 정착하면서 형성됐다. 뒤에 경주최씨 등이 합류하면서 큰 마을을 이루었으며, 이후로도 풍수지리설의 길지를 찾아 각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단다.

▼ 하죽 마을의 수문장인 250년 된 보호수(서어나무)를 지나자 드디어 ‘오미마을’이다. 날머리를 코앞에 둔 지점. 오른편에 국가민속문화재(제8호)인 ‘운조루 고택(雲鳥樓 古宅)’이 있다.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1776)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柳爾胄)가 세운 것으로, 조선 시대 양반가의 대표적인 구조의 집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집터는 남한 3대 길지(지덕이 있는 좋은 집터)의 하나로 금환락지(金環落地)의 형세와 국면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참! 대문밖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적힌 커다란 나무통(진품은 유물관에 있다)이 놓여있었다. 베푸는 자의 마음이 담긴 뒤주인데 자세한 얘기는 뒤에 거론하겠다.

▼ 안으로 들어가기 전 연당부터 살펴본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의 원칙대로 네모 난 연못 가운데에 둥글게 섬을 만들었다. 원래는 약 200평 되던 것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는데,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五峰山) 삼태봉(三台峰)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해 연못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이 연못은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 즉 금환락지의 혈(穴)이라고 한다.

▼ 집은 ‘一’자형의 하인들 방(행랑채)과 ‘T’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가 있고, 안채의 뒷면에는 사당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안채의 보수공사(일부는 헐어내고 아예 새로 짓는단다)가 한창이어서 행랑채와 사랑채 외에는 살펴볼 수가 없었다. 아무튼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나타난다. 그런데 건물을 받친 기단이 꽤 높다. 하지만 마당이 넓은 탓에 보는 이를 압도하지는 않는다. 높이를 강조하는 영남 한옥과 개방감을 강조하는 호남 한옥의 혼합. 즉 영남출신 유이주가 호남 땅에 터를 잡으면서 만들어낸 새로운 형식이란다.

▼ 사대부의 로망이 담긴 ‘누마루’의 난간에는 연꽃을 새겨 넣었다. 송나라 주돈이(周敦頤)가 연꽃을 군자에 비유한 이후 유학자에게 연꽃은 군자를 상징해왔다. 그래선지 이곳 운조루도 세한삼우(歲寒三友)인 소나무·대나무·매화를 주변에 심어 그 의미가 누마루의 연꽃에서 하나가 되게 했단다. 지조 굳은 군자의 삶을 꿈꾸면서.

▼ 이번엔 운조루 남쪽 300m 지점에 위치한 ‘곡전재((穀田齋, 구례군향토문화유산 9호)’로 향했다. 1929년 승주군 황전면에 살던 7천석의 부호 박승림(朴勝林)이 명당을 찾기 위해 십여 년을 돌아다니다가, 옛 비기에 나오는 금환락지(金環落地)라 여겨지는 이곳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터의 기운이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락지 모양의 담장을 높이 쌓았단다.

▼ 안으로 들자 ‘삼락당(三樂堂)’이라는 중간채. 오래된 농기구와 요즘 보기 어려운 옛 물건이 정갈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다. 이어서 ‘一’자형의 안채가 나타난다. 1900년대 초 영호남 지역에서 발견되는 부농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이란다. 1940년에 이교신(택호인 ‘穀田’은 그의 호이다)이 집을 인수하여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는 그 후손으로 보이는 여인이 마루에서 빨래를 개키고 있었다.

▼ 현재 민박(고택체험)으로 운영되고 있는 곡전재는 대문 옆 사랑채와 중간채(삼락당), 동·서 행랑채, 안채로 구성돼 있다. 삼락당의 누각(춘해루)에서 돌아서면 세연이라는 이름의 연못과 함께 동·서 행랑채, 그리고 안채 마당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이 가운데 서쪽 행랑채는 ‘자율 녹차방’으로 개방되어 있다한다. 주인장이 직접 키우고 집에서 덖어낸 전통방식 수제차라니 한번쯤 이용해봄직도 하다.

▼ 마지막으로 ‘운조루유물전시관’에 들렀다. 운조루에 소장되어 온 유물들이 여러 차례 도난당하자 이를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 새로 세웠는데, 할아버지와 손자가 100년 동안 썼다는 생활일기부터 운조루 현판, 생활민속품 등 운조루의 삶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 유물전시관의 가장 큰 볼거리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붙은 나무통이다. 쌀이 3가마쯤 들어가는 뒤주인데, ‘누구나 열 수 있다.’는 글귀대로 운조루의 주인은 마을의 배고픈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뒤주를 열어 필요한 만큼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단다. 1년 소출의 1/5에 해당하는 쌀 36가마를 그렇게 썼다니 ‘noblesse oblige’의 진정한 발로라 하겠다. 각종 민란·동학·여순사건·6.25 전쟁 등 힘든 역사의 시간 속에서도 운조루가 230여 년 동안 건재했던 이유란다.

▼ 전시관은 운조루의 삶과 역사를 펼쳐놓았다. 100년 동안 쓴 생활일기부터 그들이 사용하던 생활민속품 등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렇다고 유물에 너무 집착하지는 말자. 그보다는 ‘noblesse oblige’을 실천한 그네들의 삶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중 하나가 운조루의 굴뚝이다. 가난한 이웃이 밥 짓는 연기를 보면서 배고파할 것을 생각해 굴뚝을 툇마루 아래에 만들었다는...

▼ 날머리는 오미마을 앞 정자(五美亭)

오미마을은 한옥 체험(민박)을 위해 지어진 새로운 집이 여러 채 있어 하룻밤 묵어가기 안성맞춤이다. 그 마을의 어귀 정자나무 그늘아래에 자리한 오미정(五美亭)이 17구간과 18구간의 경계지점이다. 엠블럼과 벅수도 이곳에 세워져 있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완주인증을 위한 스탬프보관함도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0.78km를 찍고 있으니 엄청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지리산둘레길 16구간(가탄-송정)

 

여행일 : ‘22. 4. 30(토)

소재지 : 경남 하동군 화개면과 전남 구례군 토지면 일원

여행코스 : 가탄(0.7km)→법하(1.2km)→작은재(1.9km)→기촌(3.4km)→목아재(3.4km)→송정(거리 및 시간 : 10.6km/ 실제는 10.1km를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6구간(가탄-송정)을 걷는다. 7개 코스(68km)로 이루어진 구례권역의 첫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10.6km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구간도 난이도가 ‘상’으로 분류된다. 400m 내외의 고개를 2개나 넘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섬진강과 지리산 주능선에 대한 조망을 즐길 수 있어 그 고단함은 상당히 감소된다. 특히 깊숙한 숲길 사이사이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 청류의 굽이굽이는 자랑거리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 들머리는 가탄마을 앞 길가슈퍼(하동군 화개면 탑리 321-2)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면으로 내려온다. ‘남도교차로(화개면 탑리)’에서 빠져나와 쌍계로(쌍계사 방향)를 따라 올라가면 잠시 후 가탄마을에 이르게 된다. 마을 앞 길가슈퍼가 16구간의 출발점이자 15구간의 종점이다.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송정 10.6㎞←가탄→원부춘 13.2㎞)도 슈퍼 건너편에 세워져 있다. 참! 슈퍼 앞에 있는 완주 인증 스탬프보관함도 놓치지 말자.

▼ 15구간의 거리는 10.6km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간에 400m급의 고갯마루를 2개나 넘어야 한다. 그것도 해발이 50m에도 못 미치는 바닥에서부터 오롯이 올라야만 한다. 경사가 버거울 정도는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벅수의 붉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트레킹을 시작한다. 화개천 너머 녹색지붕은 ‘화개중학교’ 교정이다.

▼ ‘가탄교’ 아래로는 ‘화개천’이 흐른다. 영신봉에서 발원한 저 하천은 이곳까지 16km를 흘러오며 불일폭포나 용추폭포 같은 아름다운 경관을 수없이 만들어낸다. 하지만 섬진강에 가까워지면서 그 풍광은 밋밋해져 버린다. 대신 ‘십리벚꽃길’이라는 또 다른 볼거리를 품는다.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두 손을 맞잡고 걸으면 백년해로한다는 속설까지 지녔으니 화개(花開)라는 지명에 딱 어울리는 풍경인 셈이다.

▼ 가탄마을도 역시 차밭으로 유명하다. 그래선지 파릇파릇 새순을 자랑하는 차밭마다 주민들로 한 가득이다. 덕분에 난 찻잎을 따느라 정신없는 그네들의 손끝에서 무르익은 봄날을 찾아낸다. 그래!!! 모든 곡물이 잠에서 깨어난다는 곡우(穀雨)가 지난 주중에 있었다.

▼ 가탄교를 건너자 벚꽃나무로 뒤덮인 도로(벅수 : 송정 10.2㎞/ 가탄 0.4㎞)가 나타난다. 탐방로는 쌍계사로 연결되는 이 도로를 횡단해 위로 오른다. 이어서 나타나는 도로도 물론 횡단해버린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0분 만에 ‘법하마을’에 들어섰다. 1632년의 기록인 진양지(晉陽誌, 성여신이 편찬한 진주 읍지)에 화개의 10개 마을 중 하나인 ‘법가촌(法柯村)’으로 기록되는데, 이는 부처님의 법(法) 아래에 있는 마을, 즉 사하촌(寺下村)을 의미한단다. 마을 일대가 수많은 사찰이 있는 ‘불국토’라는 것이다. 천년고찰 쌍계사를 바로 이웃에 둔 형편을 잘 표현했다고 보면 되겠다.

▼ 탐방로는 황차(黃茶)의 명가(1호집)라는 ‘오죽헌’ 앞에서 마을을 빠져나간다. 문 앞의 벅수는 이제 겨우 0.9㎞를 걸었음을 알려준다.

▼ ‘한국예술 문화명인’이란다. ‘황차’의 ‘1호집’이란 자랑까지 늘어놓았다. ‘불 발효차(중국차의 6대 분류 중 하나)’의 일종인 ‘황차’를 가장 잘 만든다는 자랑일지도 모르겠다. ‘황차’란 누런빛이 그대로 나도록 말린 찻잎. 또는 그 찻잎을 우린 물을 말한다. 인체의 냉기를 빼주고 위의 부담을 덜어주는가 하면 기혈을 풀어주고 보한다고 해서 ‘장군수’라고도 불린다. 또한 감기에 좋다 하여 ‘고뿔차’, 달빛에 만들었다고 해서 ‘달빛차’로도 불린다.

▼ 마을을 벗어나자 달갑지 않은 팻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농작물에 손대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눈살을 찌푸릴 일만은 아니었다. 꽤 많은 여자들이 팻말의 옆에서까지 고사리를 채취하고 있었으니까. 오죽했으면 동네 할아버지가 산짐승을 쫓을 때 사용하는 호루라기까지 불어댔을까? 아무튼 그런 이들과 함께 둘레길을 순례하고 있는 나 자신까지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는 하루였다.

▼ 길은 비좁은 골짜기로 파고든다. 이때 산비탈에 기댄 다락논과 밭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돌로 축대를 쌓았는데 그 높이가 만만찮다. 저건 우리네 조상들이 흘린 땀의 흔적들이다.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던 시절, 우리네 어버이들은 돌멩이 하나하나 쌓아올려 다락 논밭을 만들었고, 그 밭에서 나온 잡곡으로 겨우겨우 보릿고개를 넘겼다. 다락 논밭은 지금 차나무가 자란다. 주민들 삶의 질을 높여주는 고마운 나무다.

▼ 고개를 돌리자 산촌의 목가적인 풍경이 확 다가온다. 다락처럼 달아낸 논에는 차밭이 들어섰고, 그 뒤편으로는 법하마을과 가탄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초록빛으로 덧칠된 세상은 한마디로 장관이다.

▼ 아주 잠깐이지만 편백나무 숲속을 지나기도 한다. 숲에 들자 빽빽이 줄지은 40-50년생 편백나무들이 일상에 지친 심신을 달래준다.

▼ 숲속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편백나무는 피톤치드라는 천연 항균물질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다. 건강한 심신을 위해 떠나온 여행길이니 산림욕까지 해보고 가라는 모양이다.

▼ 울창한 산죽이 만들어내는 터널을 지나기도 한다.

▼ 각양각색의 산길을 전시하는 박람회장이라도 되는 양. 이번에는 침목 계단이 길게 놓여있다. 그런 길들은 하나같이 가파르다. 하지만 버겁지는 않다. 피톤치드가 뿜어내는 향기로 인해 오히려 상쾌한 기분까지 들 정도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법하마을에서는 35분)만에 ‘작은재’에 올라섰다. 신작로가 놓이기 전 구례(토지면) 사람들이 하동의 화개장에 장을 보러 다니던 옛길로, 하동과 구례의 경계이자 경상도와 전라도를 나누는 경계이기도 하다. 옛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길을 다시 찾아내 둘레길로 만든 것이다.

▼ 고갯마루에는 벅수(송정 8.8㎞/ 가탄 1.8㎞) 말고도 2개의 이정표가 더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이곳이 삼도봉에서 내려뻗은 ‘불무장등 능선’상의 한 지점(이정표 : 기촌마을↑ 1.9㎞/ 황장산→ 4.9㎞/ 법하마을↓ 1.2㎞)임을 알려준다. 이 능선을 탈 경우 촛대봉과 황장산을 거쳐 16-1구간(목아재~당재)의 끝 지점인 ‘당재’로 연결된다.

▼ 짓궂은 어느 누군가가 ‘촛대봉’에서 획 하나를 떼어버렸다. 장난기가 동한 내 입에서는 ‘촛대봉 셋을 주어도 저 봉우리 하나와 안 바꾼다’는 농담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 고생고생 해가며 올라왔건만 고갯마루에는 쉼터의 기능이 없었다. 그 흔한 벤치 하나 놓아두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다리품을 풀고 갈만 곳을 만날 수 있으니까.

▼ ‘넘어진 김에 쉬어 가라’고 읽을거리까지 준비했다. 꽃창포·노루발풀·대홍란·물봉선·산수국 등 둘레길에서 만날 수 있는 야생화를 그려 넣었다. ‘다우니(P&G)와 함께하는 지리산둘레길 들꽃보호 캠페인’. 다우니(섬유유연제)와 페브리즈(방향제)로 유명한 ‘한국 P&G’가 ‘사단법인 숲길’과 함께 지리산둘레길의 들꽃 보호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얘기일 것이다.

▼ 고갯마루를 기점으로 둘레길은 전라도로 접어든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살짝 건너뛰자 전라도 땅이다. 이어서 2-3분쯤 더 걸었을까 마을 터로 여겨지는 돌 축대가 나타난다. 작은재 근처에 있었다는 ‘어안동’이 아닐까 싶다. 하동 어안동과 구례 어안동이 공존했었다니 이곳은 ‘구례 어안동’쯤 되겠다. 그렇다면 당시의 작은재는 ‘이음의 길’이었던 셈이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소통시키는 역할을 했을 테니 말이다.

▼ 옛터는 쉼터로 꾸몄다. ‘어안동’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하지만 마을에 대한 안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 자체도 축대 외에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참고로 옛날 ‘어안동’에서 남쪽을 보면 겨울에 항상 기러기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기러기가 산다는 뜻으로 ‘어안(御雁)’이라 했단다.

▼ 자잘한 통나무를 엮어놓은 의자는 ‘배’를 닮았다. 어안동에서 바라보인다는 섬진강. 그 강을 오가는 나룻배를 형상화했을지도 모르겠다.

▼ 둘레길은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이어진다. 이 부근은 산나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우산나물과 취나물이 특히 많아 산나물 밭으로 착각했을 정도다. 참! 법하마을의 녹차밭 위에서는 군락을 이루고 있는 야생의 머위들을 만나기도 했었다.

▼ 아래 사진처럼 바위들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탐방로는 대부분 흙길을 지난다.

▼ 그렇게 20분쯤 내려왔을까 수십 그루의 고사목이 무리지어 있는 언덕빼기에 올라섰다. 이때 시야가 툭 트이면서 섬진강의 물줄기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그뿐만이 아니다. 아래로 굽어보면 내서천과 주변 마을 풍경이 이국적으로 다가오고, 시선을 올리자 금방이라도 지리산의 우람한 능선에 닿을 듯하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 말로는 ‘왕시루봉 능선’이라고 했다.

▼ 산비탈에 들어앉은 펜션촌은 특히 이색적이다. 알프스에서나 볼법한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서있는 것이다. ‘한국의 알프스’라는 문구가 자연스레 연상되는 풍경이라 하겠다. 저런 멋진 풍광은 어디에 배치해도 ‘인생사진’이 된다.

▼ 다시 들어선 숲길. 언제부턴가 집사람의 손에 비닐봉지가 들렸다. 걷는 도중 틈틈이 우산나물과 참나물을 뜯는데, 나물이 지천이다 보니 금방 한 끼의 상차림으로 충분해졌다. 이중환(1690-1753)이 1751년에 쓴 ‘택리지’가 현실이 된 셈이다. <중이나 세속 사람들이 대를 꺾고 감과 밤을 주워서 수고하지 않아도 생계 꾸리기가 족하며, 농부와 장인들이 또한 많이 노력하지 않아도 충족하다.>

▼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서자 밤나무 단지가 나타난다. 그것도 엄청나게 넓다. 사실 밤나무는 하동을 먼저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밤나무 재배면적이 넓은 곳이니 말이다. 하지만 기촌마을의 밤나무단지도 그에 못지않아 보인다.

▼ 밤나무단지는 ‘머위’의 군락지이기도 하다. 널디 너른 군락을 이루며 큰 잎을 뽐낸다. 주인인 밤나무보다 객인 머위가 주인노릇을 한다고나 할까? 참! 아무리 지천이라고 해도 머위를 채취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울타리는 비록 없지만 마땅히 주인이 있는 땅이기 때문이다.

▼ 작은재를 출발한지 45분 만에 ‘기촌마을’에 내려설 수 있었다. ‘19번 국도’에서 피아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형성된 마을로,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서천(특히 섬진강에 합류되는 지점)’은 여름철이면 피서객들로 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참고로 기촌이란 지명은 마을을 개척한 ‘행주기씨(幸州奇氏)’에서 유래했다. 그의 성씨를 따 기촌(奇村, 기씨촌)이라 부르다가, 그가 조동(現 중기)으로 이사하고 타 성씨들이 입주하면서 기촌(基村)으로 개칭했단다.

▼ 첨탑이 예쁜 ‘외곡교회’ 앞 담벼락은 벽화로 채워졌다. 지리산으로 가는 버스가 인상적인데,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소금이라면/ 희망과 꿈은 인생의 사탕이다/ 꿈이 없다면 인생은 쓰다>라는 ‘바론 리튼(바론 남작 : 영국의 소설가이자 정치가인 ’에드워드 불워리턴‘ 남작)’의 경구였다.

▼ ‘865번 지방도(피아골로)’로 내려선 탐방로는 피아골(오른편) 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100m쯤 올라가다 ‘외곡청소년수련원’ 앞(벅수 : 송정 6.7㎞/ 가탄 3.9㎞)에서 ‘추동교’를 건넌다.

▼ 개울 건너의 ‘은어마을’은 피서객들을 위해 새로 들어선 펜션단지이다. 그러니 그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빠질 수 있겠는가. 개울가 공터에 작은 공원까지 만들어놓았다.

▼ 다리 아래로는 내서천(內西川)이 흐른다. 반야봉(般若峰, 1,732m)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10.2km를 흐르다가 외곡리의 연곡교 아래에서 섬진강으로 빠져나가는 지방하천이다. 상류에서 단풍으로 유명한 피아골과 천년고찰 연곡사(鷰谷寺)를 지난다.

▼ 다리를 건너면 유럽풍의 건물들로 가득한 ‘은어마을’이다. 피아골에서 흘러나온 ‘내서천’을 가운데 두고 기촌마을과 마주보고 있는 펜션단지인데, 물놀이도 할 겸해서 찾아온 피서객들을 위해 새로 생겨난 마을이란다. 참! 내서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연곡나루터 일원은 ‘은어’로 넘쳐난다고 했다. 내서천의 피서객들을 위해 들어선 마을답게 이 연어에서 이름을 따왔지 않나 싶다.

▼ 추동교를 건너면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지만 그 가파름은 만만치가 않다. 이곳(추동교)은 해발고도가 33m에 불과하다. 반면에 우리가 올라야 할 능선은 높이가 462m나 된다. 2km 남짓의 구간에서 고도를 400m 이상 높여야 하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 이곳도 역시 차밭 일색이다. 엊그제 내린 비 덕분인지 차나무는 참새 혓바닥 같은(크기도 참새 혓바닥만큼이나 작다) 여린 잎들을 내밀었다. 그런 풍경에 동화된 난 ‘우설차’란 얼토당토않은 차 이름을 내뱉고 말았다. 작설차(雀舌茶)가 잘못 나와 버린 것이다. 이때 찻잎을 따고 있던 노인장이 ‘우전(雨前)’이라고 지적해준다. 곡우(穀雨, 4월20일) 전에 딴 새잎으로 만들었다나? 명전(明前)이란 차도 있다고 했다. 곡우보다 한 절기 앞선 청명(4월5일) 전에 수확한 찻잎으로 너무 귀해 임금님께도 진상하지 않았단다. 참고로 입하(5월5일) 전 펴지지 않은 잎이 ‘세작(細雀)’, 이후 펴진 잎은 ‘중작(中雀)’이라 부른다. 녹차의 계절은 이렇게 6월까지 이어진다.

▼ 그렇게 얼마쯤 걷자 추동마을(벅수 : 송정 6.1㎞/ 가탄 4.5㎞)이 나타난다. 그런데 첫 만남이 폐가가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주민이 도시로 떠나버린 탓에 지금은 집이 4채 밖에 남아있지 않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남은 집들이 옛날 그대로 남아 도시인들의 향수를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조금 더 오르자 제대로 된 가옥이 나온다. 얼기설기 엮은 나무 위에 황토를 발라놓은 벽과 슬레이트 지붕이 우리 할아버지·할머니가 살던 그 집 그대로다. 지난 2011년 KBS 인간극장(지리산 두 할머니의 약속)에 등장한바 있는 이상엽할머니(2018년 작고)의 집일 것이다. 그런데도 댓돌에는 신발이 놓여있었다. 방송에 함께 출연했던 최상엽할머니(86세)가 형님이 살아계신 듯 아침마다 빈집을 쓸고 닦는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동서지간으로 서로를 만나 행복이 두 배였다는 할머니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 얘기인가.

▼ 마을의 맨 위는 ‘숭모재(崇慕齋)’가 차지했다. 격식을 갖춘 제각은 물론이고 솟을대문(永守門)까지 거느렸지만 누구를 모시는지, 아니 어느 집안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함께 걷던 이석암 선생(‘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과 함께 전각의 주련(柱聯)들까지 꼼꼼히 살펴봤지만 정체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 숭모재를 지나면서 길은 더 가팔라진다. 대신 전망이 트이면서 섬진강 청류의 굽이굽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추동교에서 25분. 지루하게 이어지던 시멘트길이 드디어 끝을 맺는다. 벅수(송정 5.6㎞/ 가탄 5.0㎞)는 이쯤에서 흙길로 들어서라며 왼편을 가리킨다. 참! 이곳을 지나면서 반대편에서 내려오고 있는 순례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 산악회라서 근처에 식당이 있는 가탄을 종점으로 잡았나보다.

▼ 이제 산으로 들어선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227m. 앞으로 250m의 높이를 오롯이 치고 올라야만 한다. 그러니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고생문이 활짝 열린다고나 할까? 하지만 카메라 앞에 선 ‘몽중루’님의 표정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 맞다. 고진감래(苦盡甘來)로 보답해주는 경관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전망이 확 트이면서 섬진강 줄기가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언제 봐도 유려하고 아름다운 강이다.

▼ 다시 길을 나선다. 밧줄난간까지 매어놓아야 했을 정도로 가파른 구간이지만 버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5월의 신록이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으리라. ‘연록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 않겠는가.

▼ 저건 또 뭐란 말인가. 옛길을 복원하면서 새로 낸 길인데 철망으로 경계를 삼았다. 위험스러울 정도로 비탈진 곳이지만 생김새로 보아 안전시설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약초 재배지로 들어오지 말라는 울타리가 분명하다. 하도 비탈진 탓에 들어오라고 해도 들어갈 수 없겠지만.

▼ 산길로 들어선지 20분.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쉼터(벅수 : 송정 5.2㎞/ 가탄 5.4㎞)를 만났다. 그리고 준비해간 막걸리와 과일로 요기를 했다.

▼ 이후부터는 걷기 편한 솔숲길이 이어진다. 아니 고운 길이라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보드라운 흙길인데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다. 이건 숫제 황제 산행이다.

▼ ‘구례 010’ 벅수(송정 4.9㎞/ 가탄 5.7㎞)는 지리산학생수련장의 이정표(6번 지점)를 목에 걸고 있었다. ‘인간은 교육의 산물이다’라는 캐치플레이즈 아래 독도법(讀圖法) 훈련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 앗! 작은 오르내림만 반복하던 길이 또 다시 올라간다. 경사도 제법 가파르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오름짓을 계속하던 길은 462m의 고도를 찍고 난 다음 다시 아래로 향한다. 탐방로는 공들여 닦은 흔적이 역력했다. 기억에서 사라져가던 옛길을 찾아내 다시 복원해놓은 이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려본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분(기촌마을에서는 1시간 20분)만에 ‘목아재’에 내려섰다. 목아재는 섬진강에서 피아골로 넘어가는 옛 고갯길이며, 왕시루봉 하산길 중의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구례에서 화개로 통하는 큰 길로 물물교환을 했다는 고개이기도 하다. 참! 이곳에도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으니 놓치지 말자.

▼ 고갯마루에는 쉼터용 정자와 지리산둘레길 안내판 같은 시설물들이 여럿 들어서있었다. 이름표까지 단 벅수(송정 3.4㎞/ 가탄 7.2㎞)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벅수가 조금 이상하다. 이곳은 16구간(가탄-송정)의 한 지점이다. 또한 곁가지 구간(목아재-당재)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벅수에는 당재로 가는 방향표시가 매달려있지 않은 것이다. 둘레길 엠블럼도 눈에 띄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 그렇다면 곁의 둘레길안내도에서 확인해 보자. 86km 길이의 구례구간은 모두 7개로 나누어져 있다. 그중 첫 번째 구간(가탄-송정)을 오늘 걷는 중이고, 나머지 5개 구간이 뒤를 이으면서 주천(남원시 주천면)으로 연결시킨다. 곁가지인 16-1구간(목아재-당재)은 맨 아래에 적혀있다. 지도에는 현위치 표시까지 해놓았다. 아직까지는 운영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헷갈린다. 길을 찾다가 오히려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셈이 됐다.

▼ 목아재에서의 조망도 괜찮은 편이다. 노고단을 중심에 둔 지리산의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지형에 어두운 나로서는 구분이 안 됐지만 누군가는 왕시루봉과 황장산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노고단과 삼도봉에서 남쪽으로 내달리던 2개의 능선이 각각 왕시루봉과 황장산으로 솟은 뒤 섬진강으로 스며드는 지형이라고도 했다.

▼ 둘레길은 임도를 가로지른다. 그리고는 ‘봉애산’을 향해 오르막 능선을 탄다. 하지만 일행 몇은 임도를 따라 내려가기도 했다. 연속되는 고갯길에 지쳤음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부부는 어땠을까. 이 고개만 넘으면 종점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수행삼아 묵묵히 넘기로 했다.

▼ 앗! 이곳도 반달곰이 출몰하는가 보다. 그것도 꽤나 사나운 모양이다. 동물을 보호하자던 하동지역과는 달리 이곳 구례는 곰을 피해 도망갈 것을 권하고 있다.

▼ 탐방로는 주능선인 ‘봉애산(611.7m)’ 정상의 바로 아래까지 오르고 나서야 내리막길로 변한다. 이젠 정말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 이 구간은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산의 남서쪽 허리를 감아 도는 모양새다. 그러다보니 여러 곳에서 섬진강이 조망된다.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이 완만한 곡선을 선명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자랑한다.

▼ 눈에 담아둘만한 기형의 바위들도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스타섬의 모아이 석상을 쏙 빼다 닮았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 작은재에서 만났던 안내판. 즉 ‘들꽃정원’이란 이름처럼 이번 구간은 걷는 내내 다양한 들꽃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덜꿩나무’를 게시해 본다. 별 모양의 흰 꽃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게 너무 예쁘지 않는가.

▼ 참! 이 부근에 두꺼비가 또 다른 두꺼비를 등에 업고 섬진강을 바라보는 형상의 바위가 있다고 했다. 노모와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죽어 이 바위로 환생했다는데, 내 효성이 부족했던지 눈에 담을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때부터 모래가 많아 다사강(多沙江)으로 불리던 강이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蟾津江)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 그렇게 50분쯤 진행했을까 시야가 트이는가 싶더니 길은 급전직하로 떨어져 버린다. 시간과 힘을 절약할 수 있기에 나에게는 고마운 구간이지만, 반면에 무릎이 성치 않은 집사람으로선 최악의 구간이다.

▼ 다행인지 그런 내리막길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편백나무’ 조림지 사이로 난 임도로 내려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애산에서 내려오는 길이 집사람에겐 무리였던가 보다. 무릎이 부담스럽다며 거꾸로 돌아서서 내려가고 있다.

▼ 조림지 아래 첫 민가(벅수 : 송정 0.4㎞/ 가탄 10.2㎞)에 이르니 바둑이가 반긴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드문 탓인지 짓는 대신 오히려 꼬리를 흔들어 댄다. 그래 나도 반갑단다.

▼ 종료를 앞둔 곳에서는 요런 징검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하지만 개울(한수천)의 물이 불면 이곳은 폐쇄된다. 우회하라는 안내판을 세워두었으니, 그려진 그림을 숙지한 다음 이를 따르면 되겠다. 그게 조금 애매해 난감하겠지만...

▼ 개울(한수천) 건너 별밤펜션을 스치듯 지나치자 내한마을(송정리)에서 내려오는 ‘안한수내길’로 올라선다. 탐방로는 이곳(벅수 : 송정 0.1㎞/ 가탄 10.5㎞)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참고로 ‘송정리’는 4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 한수내(川) 안쪽에 위치했다 해서 ‘안한수내(내한)’, 바깥쪽에 있다 하여 ‘바깥한수내’, 새로 생긴 동네이므로 ‘신촌’, 사적 제106호로 지정된 ‘석주관 칠의사묘’ 옆 ‘원송’이다. 원래는 4개 마을을 합쳐 내한이라 부르다가 한수내 근처에 쉬어가기 좋은 큰 정자가 있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송정리로 개칭했단다.

▼ 날머리는 별밤펜션 입구 도로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산 82-10)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가탄 10.6㎞←송정→오미 10.4㎞)는 섬진강 방향으로 50m쯤 내려오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 정확한 위치 대신 ‘별밤펜션 입구 도로변’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1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10.1km를 찍고 있으니 꽤나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힘든 여정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지리산둘레길 15구간(원부춘-가탄)

 

여행일 : ‘22. 4. 16(토)

소재지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일원

여행코스 : 원부춘(4.1km)→형제봉임도삼거리(2.5km)→중촌마을(1.2km)→정금차밭(1.5km)→대비마을(1km)→백혜마을(1.1km)→가탄마을(거리 및 시간 : 13.2km/ 실제는 정금차밭에서 탐방로를 벗어나 가탄마을로 직진 10.79km를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5구간(원부춘-가탄)을 걷는다. 7개 코스(68km)로 이루어진 하동 권역의 여섯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13.2km 밖에 되지 않으나 높이가 800m나 되는 고개를 오롯이 넘어야하기 때문에 난이도는 ‘상’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화개골 차밭의 정취를 고스라니 맛볼 수 있으니 그 고단함을 능히 감수해볼 만하다.

 

▼ 들머리는 원부춘마을(하동군 악양면 축지리 945)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면으로 내려온다. ‘부춘교차로’에서 빠져나와 가파른 오르막 도로(부춘길)을 잠시 오르면 15구간의 출발점인 원부춘 마을회관에 이르게 된다.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원부춘 대축 8.7㎞←원부춘→가탄 13.2㎞)도 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 15구간의 거리는 13.2km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간에 800m도 넘는 고갯마루를 오롯이 넘어야 한다. 무릎이 성치 않은 집사람에게 무리일 게 당연. 때문에 대미·백혜마을을 생략하고 정금차밭에서 정금마을로 내려간 다음 ‘십리벚꽃길’을 이용해 종점인 가탄마을(길가슈퍼)로 갔다.

▼ 마을회관은 꽃 대궐을 이루고 있었다. 벚꽃이 지고나면 핀다는 왕벚꽃은 지금이 제철인 모양이다. 만개한 꽃이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두툼한 터널을 이루고 있다. 투명한 꽃잎 뒤로 햇살이 반짝이자 그 화사함이 한층 더 돋보인다.

▼ 벅수의 빨강색 화살표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형제봉 활공장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임도이다.

▼ 누군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신선대 능선에 구름다리가 걸려있다. 지리산둘레길(14구간)에서 조금 비켜나 있으나 한번쯤 들러볼만한 곳이다. 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 들녘과 섬진강 비경, 섬진강 건너 우뚝 솟은 백운산의 자태까지 한꺼번에 눈에 담는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시멘트로 포장이 된 임도는 무척 가팔랐다. 시작부터 버겁다는 얘기다. 길 왼편의 계곡에서 들려오는 청량한 물소리가 그나마 위안이랄까?

▼ 임도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수량이 풍부한 개울은 맑은 물이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 원부춘마을 주민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나 보다. 산 중턱. 그것도 가파른 비탈에 들어앉은 지형에 맞게 높다랗게 축대를 쌓은 다음 그 위에다 건물을 올렸다.

▼ ‘한국의 알프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하동. 약삭빠른 현대인들이 이렇게 빼어난 경관을 그냥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다. 곳곳에 잘 지어진 펜션이 들어서 있다. ‘부춘골 펜션’도 그중 하나인데, 이곳은 다원도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군에서 세워준 팻말에 ‘녹차체험장’이라고 적혀있는 걸 보면 말이다. 맞다. 하동의 차 농가는 2000여 가구나 된다고 한다. 이 가운데 300여 곳이 자체 브랜드를 붙인 차를 생산하는데, 그 대부분은 가내 수공업 형태로 운영된단다.

▼ 가파른 오르막길은 변할 줄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더 가팔라졌다. 하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발아래 펼쳐지는 심산의 절경이 피로를 잊게 해준다.

▼ 길은 곳곳에서 나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 까지는 없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벅수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거기다 ‘형제봉 활공장’ 이정표까지 곳곳에 세워놓아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가파른 산자락에 들어앉은 ‘수정사(秀精寺)’가 얼굴을 내민다. ‘청화선사’의 상좌였다는 장우스님이 수행해 온 토굴이 업그레이드된 사찰이란다. 청화선사 큰 스님의 약발이라도 받았는지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대웅전과 적멸보궁, 약사전, 관음전, 산신각, 조사전 등 꽤 많은 전각을 거느리고 있었다.

▼ 절은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듯 약사전과 극락전의 목재는 색깔도 변하지 않았다. 관음전으로 올라가는 길도 아직 덜 마무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이 절과 연관이 있는 청화선사는 방에 눕지 않은 채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종식(一種食), 깊은 산속 토굴정진으로 일관한 불교계의 참 스승이시다.

▼ 산자락에는 산벚꽃이 한창이다. 벚꽃은 나뭇가지를 안개로 뒤덮듯이 일제히 꽃을 피웠다가 일제히 구름처럼 사라지기 때문에 구름을 닮았다고들 한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 일찍 사라져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나무라며 우긴다. 하지만 나는 그 화사함에 반해 벚꽃을 볼 때마다 꿈결을 헤매는 기분이니 어쩐다?

▼ 이밖에도 수많은 야생화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봄 여기저기 온 산하를 아름답게 수놓은 꽃무리. 그런 분위기속에서 덧없지만 아름다운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운 꿈을 마음껏 꾸어 보면 좋겠다.

▼ 해발 600m에 가까운 고지대인데도 펜션이 들어섰다. 펜션 앞 도로변에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바위가 놓여있었는데, ‘feel’이라는 저 브랜드는 그걸 감상해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 걷기에도 힘든 이런 오르막길을 자전거로 오르는 저 라이더는 과연 어떤 심경일까? 나는 인상까지 써가며 겨우겨우 오르고 있는데...

▼ 하동 지역의 반달곰은 양순한 모양이다. 반달곰으로부터의 피해를 우려하던 산청지역의 현수막과는 달리 반달곰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았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앱은 3.89km를 찍고 있다). 왼편 암릉에서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허총무님이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는 한참을 단축시킬 수 있다며 그냥 치고 올라오란다. 그 소리를 들은 집사람의 표정이 저렇게나 밝아지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찔리고 할퀼 것을 각오하고 울창한 잡목사이로 들어섰다. 하지만 따귀까지 맞고 나서야 능선에 올라설 수 있었다.

▼ 거리가 단축되는 즐거움은 중요한 포인트 하나를 놓쳐버리는 불상사를 초래했다. ‘형제봉 갈림길’인데 이 구간은 허총무님 등 다른 분들의 사진과 기억을 빌어 적어본다. 부춘리와 정금리의 경계인 ‘형제봉 삼거리(활공장 갈림길, 벅수 : 가탄 9.2㎞/ 원부춘 4.1㎞)에서 왼쪽의 임도를 따른다. 참고로 형제봉은 활공장이 있는 곳이다. 행글라이더를 즐기는 사람들은 이곳에 올라가 바람을 이용해서 탄다.

▼ 곧이어 나타나는 임도사거리(정금리)에서는 왼편으로 내려서서 수박산(812m)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탄다. 초입에 벅수(가탄 9.0㎞/ 원부춘 4.3㎞)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전형적인 산길을 따른다. 그것도 고도가 800m를 훌쩍 넘기는 고산이다. 바닥이 흙길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긴 ‘(사)숲길’에서까지 이 길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니 오죽했을까. ‘이게 길이냐, 등산로지’와 ‘평탄한 길만 길이냐’로 대립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숲이 있는 평탄한 흙길이 길게 돌아가는 황량한 임도보다는 낫다’는 의견이 우세해 이 길로 결정됐다고 한다.

▼ 다음 주 수요일이 곡우(穀雨). 곡식이 자라는 데 도움이 되는 봄비가 내린다는 날이다. 그 봄비에 목이라도 축였는지 산릉의 진달래는 꽃망울을 활짝 열어 제켰다. 덕분에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는 꽃놀이 산행을 즐길 수 있었다.

▼ 가팔라진 오르막길을 잠시 올라서니 고도계(헨드폰의 앱)가 801m(네이버 지도는 806m)를 찍는다. 지도에 나타나있는 헬기장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굽이구비 치마폭처럼 펼쳐진다는 지리산의 주능선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806m봉(수박산으로 연결되는 산길이 나뉘는 지점이기도 하다)을 기점으로 하산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가 않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침목계단과 돌계단을 놓았으나 이마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긴 1.6km를 내려오면서 550m나 되는 고도를 까먹어야 하니 오죽 가팔랐겠는가.

▼ 무성하게 우거진 숲속 가파른 능선을 따라 길은 내리꽂힐 듯 한없이 계속된다. 능선이 허리를 곧추세웠다면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내리막길임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특히 무릎이 좋지 않은 집사람에게는 지옥의 구간이었다. 엉금엉금 기어 내려가다시피 했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는가.

▼ 가끔은 완만해진 구간이 나타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가파르게 변해버리지만 말이다.

▼ ‘이 뭣꼬!’ 가파른 내리막길을 고생고생하며 내려오는데 ‘山’이라고 새겨진 작은 시멘트 기둥이 길가에 서있다. 삼각점을 연상시키는 ‘十’자 표시가 윗면에 그려진 저 시설물의 정체는 과연 뭘까?

▼ 철망을 길게 두른 지역도 지난다. 철망 너머에서 산삼 같은 약초라도 재배하는 모양인데, 이때부터 산길은 그 사나운 기세를 상당히 누그러뜨린다.

▼ 그렇게 얼마를 내려왔을까 벅수(가탄 6.8㎞/원부춘 6.4㎞)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농작물에 손대지 말라는 안내판까지 붙어있는 걸로 보아 ’중촌마을‘에 이르렀음이리다. 그나저나 능선에서 이곳까지 내려오는데 무려 60분이나 걸렸다. 그 거리가 2km남짓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가팔랐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불편한 집사람의 무릎을 추가로 감안하더라도.

▼ 잠시 후 오두막처럼 지어진 작은 쉼터에 내려선다. ‘하늘호수 차밭’이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이곳에서 운영하는 쉼터는 25년의 역사만큼이나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이들에게 유명하다. 간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고, 하동 차는 물론 커피도 내려준다. 하지만 오늘은 재료가 떨어져서 매식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 안으로 들어가면 주인이 손수 나무를 깎아 만든 탁자며 의자가 정겹다. 먼 풍경 방향으로 나란히 놓인 투박한 안락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면 말 그대로 딴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 된다.

▼ 쉼터는 둘레길 순례자들에게는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완주를 인증해주는 스탬프가 이곳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 다시 길을 나서자 중촌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산 중턱, 그것도 비탈에 들어앉은 오지마을이다. 고샅길을 걸으며 ‘어떤 계절이든 고립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을까?

▼ 마을 앞에는 하동군에서 일괄적으로 주문제작한 듯한 ‘광고판’이 세워져 있었다. 방금 전 들렀던 ‘하늘호수 차밭’을 얘기하는 모양인데, 전통 수제차의 다인 ‘배윤천’과 함께 차를 만들어 볼 수도 있고,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가능하단다.

▼ 중촌마을부터는 시멘트포장길을 따른다. 하지만 집사람에게는 이마저도 부담스러웠던가 보다. 산길을 내려오느라 시달린 무릎에 조금이다 부담을 덜 준다면서 아예 뒷걸음으로 내려가고 있다.

▼ 심심찮게 눈에 띄던 금낭화. 금낭화는 봄을 만끽할 수 있는 핑크빛 보물이다. 복주머니를 닮은 꽃 속에 황금빛 꽃가루가 들어 있어서 금주머니(금낭), 즉 금낭화가 되었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저 꽃은 ‘여필종부’를 품고 사는 내 집사람을 쏙 빼다 닮았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꽃말인가.

▼ 갈 길이 바빠도 집사람에게는 남의 일일 수밖에 없다. ‘단오 이전의 녹색 식물은 독성이 없다’고 믿는 집사람은 오늘도 손놀림이 바쁘다. 그렇게 뜯은 고춧잎나물과 민들레 등은 향기로운 봄나물로 변해 내일 아침 밥상에 올라올 것이다.

▼ 중촌마을을 지나면서 차밭의 규모가 커지는가 싶더니 어느덧 산비탈 전체를 차지해버렸다. 그런데 바위와 차나무가 묘하게 어우러지는 것이 영락없는 야생 차밭이다. 재배 차밭에서도 비료를 주지 않기 때문에 야생차와 품질이 큰 차이가 없다지만 말이다.

▼ 봄꽃이 만발한 곳에 어찌 벌통이 없겠는가. 그런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꿀벌 연쇄 실종사건’의 연장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아인슈타인은 지구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4년밖에 없을 것이라 경고하지 않았던가.

▼ 계곡의 풍경은 빼어나다. 층층의 바위지대가 곳곳에 들어앉았는가 하면 그 암반에서 떨어지는 물은 어김없이 폭포를 만들어낸다. 하동 사람들은 자신의 고장을 ‘알프스’로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산 좋고, 물 좋아 어딜 가나 한 폭의 수채와 같은 풍광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게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 이렇게 아름다운 계곡을 그냥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다. ‘알프스 동화’. 주변 풍광이 알프스를 닮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지중해 연안에서나 볼 법한 붉은색 지붕에 하얀 벽으로 된 집들까지 들어앉혔다.

▼ 하늘정원 쉼터를 출발한지 30분. 제실(齋室) 앞의 삼거리(벅수 : 가탄 5.4㎞/ 원부춘 7.9㎞)’와 마주쳤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향한다. 오른편은 도심마을을 거쳐 신촌마을로 연결된다. 그리고 ‘쌍계로’를 따라 15구간의 종점인 가탄마을로 나갈 수 있다.

▼ 이정표(신촌차밭 0.8㎞/ 정금차밭 0.5㎞)와 함께 세워놓은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지리산둘레길과 별개로 지리산국립공원을 그린 다음, 그 위에다 ‘녹차 시배지’를 표기해놓았다. 이왕에 왔으니 녹차시배지까지 둘러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참고로 ‘차 시배지’는 이름대로 한국에서 차를 처음 재배한 곳이다. 신라 흥덕왕 3년(828) 당나라 사신으로 간 대렴공이 차 씨앗을 가져와 왕명으로 처음 심은 곳이란다. 쌍계사와 켄싱턴리조트 사이의 얕은 언덕에 위치하는데, 듬성듬성 바위가 섞인 차밭을 거닐 수 있도록 산책로가 나있고, 차와 관련한 글귀 25수를 새긴 조형물까지 세워놓았다니 그 뜻을 음미하며 걸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아닐까 싶다.

▼ 정금차밭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124m까지 떨어졌던 고도(高度)는 차밭에 가까워질수록 다시 높아져간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도심마을(정금리)의 전원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천년 차나무’라고 불리었는데 높이만 4.2m에 달했단다)’가 자라던 마을이다. 2013년의 동해(凍害)로 나무는 고사했지만, 그 밑동에 어린 차나무들이 자라면서 그 명맥을 잇고 있단다.

▼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걸으니 고개사거리다. 고갯마루 옆 언덕은 일류의 조망처다. 발아래로 흘러가는 화개천은 물론이고 저 멀리 섬진강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리고 잘 정돈된 차밭. 임도를 걸어오면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풀려버리는 멋진 풍광이다. 지자체에서 그런 장점을 놓칠 리가 있겠는가. 이층으로 된 팔각정을 전망대 삼아 지어놓았다. 마을 이름에서 빌려온 듯 ‘정금정(丼琴亭)’이란 현판이 매달려 있다.

▼ 고갯마루의 시설물은 ‘천년 차밭 길’이 이곳에서 시작됨을 알려준다. 하동 야생차의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에 맞춰 차시배지 일원의 야생차밭을 걷기명소로 키우고자 조성한 힐링 탐방로다. 탐방로는 이곳 정금차밭에서 신촌차밭을 거쳐 쌍계사 인근 차시배지로 이어지는 2.7㎞ 구간. 산자락의 푸른 야생차밭을 조망하고 깨끗한 공기도 마시며 심신을 정화시키도록 짜여있다.

▼ 쉼터용 정자는 나들이 나온 가족의 차지다. 젊은 부부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이. 곁에는 음식물을 챙겨온 듯한 광주리가 놓여있다. 한갓진 토요일 오후,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일가족이 한없이 행복해 보인다. 참! 가끔은 이곳에서 차밭을 배경으로 지역 예술인들이 공연도 한단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 선율 아래서 차를 마셔보는 것도 가능하단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을 손가. 모처럼 왔으니 ‘인생샷’만 찍지 말고 차와 풍경을 음미하는 것도 꼭 해볼 일이다.

▼ 정금정 부근은 차밭으로 조성해 놓았다. 오래된 차밭 특유의 푸근한 능선과 가지런한 차나무 사이 산책이 즐거운 곳이다. 눈을 들자 사방이 온통 차밭이다. 차를 눈으로 한 번, 그리고 입으로 한 번 마신다는 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눈앞에 펼쳐지는 저 풍경만으로도 차 서너 잔은 충분히 마신 기분을 냈을 것 같다.

▼ 하동 차는 최고로 꼽힌다. 고려·조선시대에는 조정에 진상되며 ‘왕의 녹차’라는 타이틀까지 붙었다. 이유가 있다. 차 품질의 관건은 일조량. 화개천과 섬진강이 만나며 만들어지는 안개로 햇빛과 습도가 잘 조절되는 화개골은 차 재배의 최적지다. 여기에 집집마다 대대로 이어진 덖음 기술(제다법)이 더해져 ‘명차’가 탄생했다. 선인들도 한몫 했다. ‘차의 성인’으로 불리는 초의선사는 하동의 차를 바탕으로 ‘초의다신전’을 썼고, 추사 김정희 역시 ‘중국 최고 차인 승설차보다 낫다’며 이곳 차를 극찬했다.

▼ 지대가 높아서인지 참새 혓바닥만 하게 솟아난다는 새순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선지 찻잎을 따는 주민들로 붐벼야 할 차밭도 텅 비었다. 녹차 가운데서도 최고로 치는 우전(雨前)은 곡우 전에 딴 찻잎으로 만든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참고로 일찍 딴 찻잎이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은 햇빛을 그만큼 덜 받아 떫은맛이 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곡우보다 한 절기 앞선 청명 전에 수확한 찻잎은 ‘명전(明前)’이라 부르며 너무 귀해 임금님께도 진상하지 않았단다.

▼ 남해의 다랑논처럼 산비탈에 기대앉은 차밭 사이를 지난다. 하동은 우리나라 최대 야생차 생산지다. 국내 생산량의 30%가 하동에서 생산된다. 특히 이곳 정금마을 차밭은 국가중요농업유산에도 등재됐다. 2018년에는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오래된 차나무, 우수한 경관, 1200년 전의 재배방식을 그대로 이어오는 전통이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 정금차밭이 끝나면 삼거리(벅수 말고도 지리산둘레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대비마을과 정금마을로 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이다. 탐방로는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다시 오르막을 탄다. 하지만 체력적으로 부치거나 시간이 빠듯한 사람은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간 뒤 하동으로 나가는 교통편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

▼ 우리부부는 후자를 선택했다. 집사람의 체력이 방전된 탓에 대비마을과 백혜마을을 둘러볼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정에는 내 컨디션도 한몫을 했다. 고질병인 꽃가루 알레르기로 인해 눈물·콧물이 범벅인데 사진 찍고 메모할 정신이 어디 있겠는가.

▼ 단풍나무 가로수가 멋진 길(정금대비길)을 따라 잠시 내려가자 정금마을이 나온다. 마을 지형이 풍수지리상 옥녀가 가야금을 타는 형국이어서 탄금(彈琴)이라 하였는데 언제부터인지 정금(停琴)으로 바뀌고 다시 ‘정금(井琴)’이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정금동·대비동(大比洞)·중촌동(中村洞)·도심동(道心洞)이 통합되어 정금리가 되었다.

▼ 이후부터는 벚꽃나무가 도열해있는 도로(쌍계로)를 따른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화개천의 물줄기가 맑고 시원한 생명수를 공급해가며 수십 년간을 키워낸 굵직한 나무들이다. 꽃길은 화개천을 따라 4km쯤 이어진다. 길의 이름이 ‘십리벚꽃길’이 된 것도 이유이다.

▼ 아쉽게도 화사한 벚꽃 잔치는 구경할 수 없었다. 봄 햇살이 쏟아지면서 잠들었던 꽃봉오리가 톡톡 빗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연다는 그 연분홍 꽃잎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철 지난 줄도 모르고 이제야 꽃망울을 연 지각생들 두엇이 그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을 뿐.

▼ 십리벚꽃길은 화개천을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이어진다. 김동리는 그의 단편 ‘역마’에서 이 길을 ‘아무리 걸어도 길멀미가 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길은 또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해 ‘혼례길’로도 불린다. 그만큼 이 길은 봄 최고의 낭만 데이트 장소다. 그런 길 위에서 마음을 열지 않을 이, 누구인가.

▼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벚꽃에 대한 아쉬움으로 힘없이 걸어가는데 난데없는 풍경이 동공을 활짝 열어 제치게 만든다. 길가에 조성해놓은 꽃밭에서 영산홍이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 차밭은 위치나 형태가 제각각이다. 아까처럼 섬마을 다랑논처럼 산기슭에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아 만든 차밭이 있는가 하면, 저처럼 물길 옆 너른 평지에 자리한 차밭도 꽤 많이 보인다.

▼ 카페 ‘티스토리’는 벚꽃 나들이를 나온 이들을 위해 포토죤까지 만들었다. 3층 정도의 계단을 만들어, 그 위에서 벚꽃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을 수 있도록 했다.

▼ 정금마을에서 25분 가탄마을에 도착했다. 선경과 같은 아름다운 여울이라는 가여울(가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지금도 주민들은 가여울 또는 개롤이라 부른단다. 그러다가 신선이 살면서 아름다운 여울에 낚싯대를 담갔다 하여 가탄이 되었단다. 여기서 신선은 ‘수옹(睡翁)’으로 정여창(鄭汝昌)의 별호이다. 정여창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배소에서 사망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까지 되었다.

▼ 15구간의 종점은 마을 앞 도로변이다. 하지만 난 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뭔가 가슴에 담아둘만한 얘깃거리라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들어선 마을 앞 당산나무 아래에는 ‘만수정(萬壽亭)’이란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야생차밭의 깨끗한 공기를 마셔가며 천년만년 오래오래 살아가라는 모양이다.

▼ 날머리는 길가슈퍼(하동군 화개면 탑리 321-2)

마을안길을 빠져나오면 ‘쌍계로’. 도로변에 ‘길가슈퍼’가 들어서 있다. 지리산둘레길 15구간의 종점이자 16구간의 시점이 되는 곳이다. 그나저나 이 슈퍼의 간판이 눈길을 끈다. 도로변에 붙어있는 형편(길가의 슈퍼)을 표현한 상호로 여겼는데, ‘길할 길(吉)’자에 ‘아름다울 가(佳)’자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 재치에 반한 난 캔맥주 하나 챙겨들 수밖에 없었다. 집사람에겐 시원한 아이스크림.

▼ 구간의 시·종점을 알리는 엠블럼(emblem)은 벅수(가탄 0.0㎞/ 원부춘 13.3㎞)와 함께 슈퍼 건너편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완주인증 스탬프는 슈퍼 앞에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10.79km를 걸었다. 대비마을과 백혜마을을 건너뛰고 곧장 날머리로 이동한 덕분에 2.5km 정도가 단축됐다. 소요시간은 4시간10분. 거리에 비해 엄청나게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길이 험했다는 얘기도 된다.

▼ 실제로는 1.2km를 더 걷고 나서야 트레킹을 끝낼 수 있었다. 가탄마을에는 대형버스를 주차할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착한 화개면사무소. 조금만 더 내려가면 그 유명한 ‘화개장터’가 나온다. 화개장터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건 가수 조영남의 영향이 크다. 노래 속 화개장터는 아랫말 하동 사람, 윗말 구례 사람에 삐걱삐걱 나룻배를 타고 섬진강을 건너온 광양 사람, 부릉부릉 버스를 타고 산을 넘은 산청 사람까지 어우러져 시끌벅적하고 정겨운 시골장터 분위기가 연상된다. 하지만 지금의 화개장은 오일장이 아니다. 그 명성 때문에 관광객을 위한 시장에 더 가까워졌다.

지리산둘레길 12구간(삼화실-대축)

 

여행일 : ‘22. 3. 19(토)

소재지 : 경남 하동군 하동읍과 적량면, 악양면 일원

여행코스 : 서당마을(3.3km)→신촌마을(2.7km)→신촌재(1.9km)→먹점마을(1km)→먹점재(1.8km)→미점마을(2.7km)→대축마을(거리 및 시간 : 13.4㎞/ 실제는 13.49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2구간(삼화실-대축)을 걷는다. 16.7km에다 높다란 고개를 3개를 넘어야하는 험난한 여정이지만, 지난 번 13구간 때 12구간의 일부(삼화실-서당)를 추가시켰기 때문에 오늘은 나머지(서당-대축)만 걸으면 된다. 이 구간은 걷는 시기에 따라 난이도가 바뀐다고 보면 되겠다. 고개를 2개나 넘어야하는 고단한 일정이지만, 때를 잘 맞춰 봄날에라도 찾는다면 걷는 내내 만나게 되는 매화꽃의 향기에 취해 힘들다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 들머리는 서당 마을회관(하동군 적량면 우계리)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50km쯤 내려오면 하동읍이 나온다. 하동읍내 ‘GS-섬진주유소’ 앞 회전교차로에서 12시 방향 ‘경서대로’로 옮겨 ‘횡천(하동군)’방면으로 잠시 들어가다, 적량면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서당마을에 이르게 된다.

▼ 12구간은 원래 삼화실(적량면)에서 대축마을(악양면)까지다. 거리가 16.7km나 되는데다 높다란 고개를 3개나 넘어야하는 탓에 난이도가 ‘상’으로 꼽힌다. 하지만 지난번 13구간 때 그 일부(삼화실↔서당, 3.3km)를 미리 걸었기 때문에 오늘은 13.4km만 걸었다. 덕분에 코스 난이도도 ‘중’ 정도로 낮추어졌다.

▼ 마을회관의 처마 밑 벅수(서당 0,2㎞/ 하동읍 6.8㎞)는 12구간에서 곁가지(초록색)인 13구간이 갈려나감을 알려준다. 이제껏 보아오던 빨강색(진행방향)과 검정색(반대방향) 대신 빨강색과 초록색으로 되어있다. 역방향이 없다보니 검정색 표시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 벅수의 빨강색 화살표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괴목마을’로 올라가는 도로(군내버스가 다닌다)로, 길을 나서자마자 우계저수지의 높다란 제방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 도로를 따라 8분쯤 이어지던 길은 우계저수지의 둑길로 올라선다. 둑에는 갈대가 무성하다. 가을이 무르익을 때 찾으면 호수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멋진 풍광을 눈에 담을 수도 있겠다.

▼ 모자를 쓸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거센데도 저수지의 물은 잔잔하기만 하다. 그만큼 규모가 작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저수지는 산골마을의 중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해주는 젓줄과도 같다. 저수지 아래 갓논(논의 크기가 '갓만큼 작다'는 뜻)들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 고개를 돌리자 그동안 지나온 마을들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차오른다. 넓은 평원에 옹기종기 이웃한 갓논(다랑논)을 기반으로, 서당마을과 상우마을, 원우마을, 공월마을 등이 발아래로 쭉 펼쳐진다. 모두 우계리의 자연부락들이다.

▼ 반대편에 이른 둘레길은 이제 우계저수지를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다. 그리고 12구간의 특징을 여과 없이 내보여 준다. 눈길 닿는 곳마다 매화꽃이 만발한 것이다.

▼ 다랑논 너머로 ‘괴목(槐木)’ 마을이 나타난다. 하늘색과 주홍빛 슬레이트 지붕을 인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은 게 여간 멋스럽지 않다. ‘괴목’이란 동구 밖 ‘기목나무(귀목나무의 방언)’에서 유래된 지명인데, ‘기목정(기목+정자나무)’ 또는 ‘기먹징이’로 불리다가 한문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현재의 ‘괴목’으로 굳어졌다.

▼ 둘레길은 괴목마을을 들르지는 않는다. 초입(벅수 : 대축 11.8㎞/ 삼화실 4.9㎞)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더니 이내 산비탈로 들어붙는다. 그렇다고 산속으로 들어선다는 얘기는 아니다. 밭의 가장자리와 산자락의 경계를 따라 길이 나있다고 보면 되겠다.

▼ 눈을 들면 사방이 온통 매화꽃 천지다. 그렇다면 이번 구간도 역시 ‘탐매(探梅)’ 나들이가 되겠다. 옛 선비들이 이른 봄 도포 자락을 날리며 매화를 찾아나서는 여행을 ‘탐매’라 했으니 말이다.

▼ 잠시 후 산자락을 벗어난 둘레길은 또 다시 농로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다랑논 사이를 헤집으며 신촌마을로 향한다.

▼ 마을표지석이 신촌마을에 이르렀음을 알린다. ‘애향(愛鄕)’이라 적힌 빗돌도 보인다. 금의환향(錦衣還鄕)이란 고사성어까지 덧붙인걸 보면 이 마을 출신 아무개가 성공해서 돌아왔다는 얘기일 것이다. 돌에 새겼을 정도로 마을에 큰 기여를 했고 말이다.

▼ 신촌마을(벅수 : 대축 10.5㎞/ 삼화실 6.2㎞)은 고지(해발 231m)가 꽤나 높다. 덕분에 우리가 걸어온 우계저수지며 논·밭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발아래로 펼쳐진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신촌마을로 들어선다. 적량면과 악양면 사이에 솟아오른 구재봉 아래 깊숙이 들어간 마을이다. 하지만 방앗간까지 있었을 정도로 산골치고는 꽤나 큰 규모를 자랑한다.

▼ 삭막했을법한 마을 담벼락은 언제부턴가 꽃밭으로 변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어머니를 그리는 애틋한 마음도 담겨있었다. <당신이 그리워, 당신이 따뜻해서, 당신이 사랑스러워>

▼ ‘앗! 술 익는 마을이다’ 하지만 집사람을 아랑곳조차 않는다. 길가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매실무덤(매실엑기스 짜고 난 찌꺼기)에서 나는 냄새인데 웬 호들갑이라며 말이다. 그렇다면 저 풍경은 생과 사의 공존으로 변한다. 무덤 옆의 매화나무는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그게 더욱 탐스럽게 느껴짐은 둘 사이에서 윤회의 과정을 떠올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둘레길은 까마득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때 길가 다랑논이 눈길을 끈다. 지리산둘레길에서 흔하디흔한 게 다랑논이니 뭐 그리 대수겠는가 만은 돌로 쌓아올린 축대가 높아도 너무 높다. 저건 우리네 조상들이 흘린 땀의 흔적들이다.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던 시절, 우리네 어버이들은 돌멩이 하나하나 쌓아올려 다랑이 밭을 만들었고, 그 밭에서 나온 잡곡으로 겨우겨우 보릿고개를 넘겼다.

▼ 간판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뒷마당에 돌부처까지 들어 않은 것이 분명 사찰이다. 공터에 BMW까지 주차되어있는 걸로 보아 들어오는 시주도 만만찮은 모양이다.

▼ 남의 것에 욕심 내지 말자는 현수막은 이제 통과의례가 되어버렸다. 문득 떠오르는 의문점 하나. 내일 아침 밥상에 올리겠다며 집사람이 뜯고 있는 달래와 냉이도 저 금지품목에 해당될까?

▼ 길(임도)은 끊임없이 산속으로 파고든다. 지리산 칠성봉에서 분기해 구재봉을 거쳐 분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하지만 경사가 심하지는 않다. ‘갈 지(之)’자, 그것도 큰 폭으로 써가면서 고도를 높여가는 덕분이다. 걸어야할 거리가 그만큼 늘어난다는 건 단점이겠지만.

▼ 신촌마을을 통과한지 40분. 돌의자 몇 개를 놓아둔 작은 쉼터를 만났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신촌재’보다도 오히려 더 높은 곳이다. 해발이 474m나 되는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 쉬다가라는 모양이다.

▼ ‘앗! 호랑이굴’이다. 그러나 함께 걷던 둘레길 도반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하긴 집사람까지도 생뚱맞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하지만 신촌마을에는 ‘여수(여우의 방언)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그러니 그 여우가 살던 굴일지 누가 알겠는가.

▼ 8분쯤 더 걸으면 ‘신촌재(해발 458m)’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만인데, 이곳은 신촌·괴목마을과 먹점마을을 잇는 고개이자 적량면과 하동읍의 경계이기도 하다. 고갯마루에는 벤치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간이화장실도 설치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곳은 또 지난번 13구간 때 만났던 ‘삼신지맥(三神枝脈)’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래선지 벅수(빨강/녹색/검정) 말고도 이정표(먹점↑/ 구재봉→ 2.0㎞/ 분지봉← 0.5㎞/ 신촌↓)를 따로 세웠다. 참! 우회로를 이용하라는 현수막도 걸려있었다. 2020년의 산불 피해지의 벌목작업으로 인해 구재봉을 경유하는 곁가지길(녹색으로 표시한다)의 일부가 막혀있다는 것이다.

▼ 잠깐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턴 경사가 거의 없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 그렇게 10분쯤 내려왔을까 소나무 숲이 끝나가는 곳에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가 소나무가 아니라 몸체가 울퉁불퉁한 서어나무라는 게 특이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벤치 뒤 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바위 위에 바위, 그것도 힘을 조금만 주어도 굴러가버릴 것 같은 바위가 한 폭의 멋진 정물화를 그려낸다.

▼ 내려오는 길. 진행방향 저만큼에 백운산이 놓여있다. 좌우로 펼쳐진 산자락이 긴 눈썹처럼 드넓게 펼쳐진다.

▼ 쉼터를 서어나무에 빼앗긴 한풀이일까? 잠시 후 잡티 하나 없는 소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에 심신까지 맑아지는 기분이다.

▼ 숲이 끝나면 둘레길은 ‘먹점마을’로 내려선다. 구재봉 중턱 해발 400m의 산골에 위치한 이 마을은 섬진강 매실의 원조라고 한다. 마을을 뒤덮은 매화나무는 봄이면 황홀한 매화꽃으로 절경을 이루고, 초여름에는 열매를 맺어 고단한 농촌살림에 보탬을 준다. ‘효자나무’인 셈이다.

▼ 마을은 초입부터 매화나무가 빼곡하다. 그 시작은 ‘산골매실’. 이곳 먹점마을의 농가 대부분은 매실농장을 열고 있다. 그리고 최상품의 매실을 생산한다. 때깔 고운 매실은 향이 짙고 잡티 하나 없을 정도로 맑고 깨끗하단다. 청정 고랭지의 주변 환경 덕에 병충해가 적고 친환경·유기농으로 재배되는 까닭이란다.

▼ 농원이 들어선 공간은 순백의 꽃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봄의 시작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매화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는데, 그게 마음마저 잔잔한 일렁임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겨울의 끝자락에 꽃을 피운 저 매화는 4월부터 열매를 맺고 6월 중순께 본격적인 수확에 들어간다.

▼ 매화나무 아래에 서자 향긋한 내음이 코를 찌른다. 그렇게 봄은 시작되나 보다.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했다는 화가 김홍도는 그림을 팔아 만든 돈을 몽땅 써가며 매화나무를 샀고 그 아래서 매화음(梅花飮)을 외치며 술을 마셨다. 퇴계 이황은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만큼 옛 선비들은 매화를 좋아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매화에 도취된 나 역시 행복하다.

▼ 지리산 자락에 넉넉하게 안긴 마을은 골짜기와 밭두렁으로도 부족했던지 마을 고샅길까지 온통 매화나무다. 백매화와 홍매화가 마치 금슬 좋은 부부처럼 행복해하며 마주보는 모양새다. 그런데 이게 또 축 늘어져있는 게 아닌가. 능수버들에 능수벚꽃은 들어봤어도 능수매화는 오늘 처음으로 봤다.

▼ 매화마을의 대미는 역시 ‘홍매화’가 장식한다. 하얀 매화 속 홍매화는 절세미인을 닮았다. 추운 겨울을 견뎌낸 고귀한 인내가 저렇게 예쁜 꽃을 피웠나보다. 그 아름다움에 도취된 집사람이 홍매화 꽃 속에 자신의 얼굴을 넣는다. 그러자 집사람의 얼굴도 꽃이 된다. 꽃 중의 꽃이라고나 할까?

▼ 광양에 ‘청매실농원’이 있다면 섬진강을 사이에 둔 하동에는 ‘먹점마을’이 있다. ‘먹점(묵점)’은 그 옛날 검은 흙이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섬진강을 등지고 지리산의 산기슭에 기대어 10호 남짓한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이곳은 하동에서도 오지로 분류된다. 하지만 ‘지리산둘레길’이 트이고 난 뒤부터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나그네들이 마을안길을 지나다닌다.

▼ 마을로 들어서는가 싶던 둘레길이 갑자기 방향을 확 틀어버린다. 그리고는 또 다른 능선을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이정표는 이 길이 구제봉(활공장)으로 연결됨을 알려준다.

▼ 양지바른 곳에서 폭죽처럼 피어난 꽃은 벌써부터 거센 바람에 꽃잎을 흩뿌리고 있다.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니는 하얀 꽃잎이 여간 멋스런 게 아니다. 그게 ‘서편제’의 한 장면을 기억의 저 끄트머리에서 끄집어냈다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건너편 산자락에 들어앉은 소나무 한 쌍이 눈에 들어온다. 훤칠한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 맞보고 있는데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12구간의 명물은 물론 ‘문암송’이다 하지만 저 나무도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잘 생겼다.

▼ ‘시골원’이란 의미 모를 가판에 이끌려 발길을 멈췄다. 그리고 매화나무 그늘 아래 터를 잡고 준비해온 막걸리에 매화 꽃잎을 띄웠다. 이왕에 온 매화꽃 마을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잔을 입에 대니 막걸리의 시금털털한 맛은 사라지고 대신 달달하고 향기로운 매화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암행어사 이몽룡이 읊었다는 ‘금준미주 천인혈(金樽美酒 千人血)’의 금준미주는 이런 술을 일렀을지도 모르겠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분(‘먹점마을’에서는 25분). ‘먹점재(벅수 : 대축 4.8㎞/ 삼화실 12.1㎞)’에 올라섰다. 먹점마을과 미동마을을 잇는 고개이자 하동읍과 악양면의 경계이기도 하다. 고갯마루는 구재봉의 행글라이딩 활공장으로 올라가는 임도가 나뉘는 지점이기도 하다.

▼ 미동마을로 내려가는 임도도 역시 경사가 거의 없다.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다는 것도 ‘신촌재’와 대동소이하다.

▼ 하지만 이곳은 ‘시크릿 가든’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을 막아버렸다. 출입(임산물채취) 금지 팻말로도 부족했던지 군대에서나 볼법한 윤형철조망으로 겹겹이 둘러쳐놓았다.

▼ 그렇게 10분쯤 내려가면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바로 섬진강이다. 모래가 많아 다사강(多沙江)이라고도 불리는 섬진강의 모래톱이 하얀 맨살을 드러낸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거기에 새하얀 매화꽃 가득한 마을이 보태지며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진다. 강 건너 광양 땅도 아른거린다.

▼ 미동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면 지리산과 백운산을 굽이돌면서 흘러가는 섬진강이 성큼 다가온다. 타원형을 이루는 강줄기는 강가에 삼각주 형태의 모래밭을 만들었고, 모래는 강물과 다정한 벗이 돼준다.

▼ 조금 더 내려오자 벌거벗은 민둥산이 얼굴을 내민다. 그 아래는 잘라낸 목재가 한 가득이다. 아까 신촌재에서 만났던 현수막이 거론하던 ‘벌목 작업장’이다. 2020년에 발생했던 산불 피해지를 정리한다는 것이다. 참! 저 작업장으로 인해 둘레길이 또 다시 막힌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설치예술에 가깝게 생긴 저 바람개비는 무슨 용도일까?

▼ 먹점재에서 25분. 미동마을로 내려가던 둘레길이 갑자기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오르막길로 변해 산자락으로 향한다. 하지만 우린 벅수(대축 2.8㎞/ 삼화실 13.9㎞)의 방향표시를 따르지 않기로 했다.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미동마을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목작업이 한창이어서 둘레길을 고집할 경우 자칫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단다.

▼ 이젠 진행방향 저 아래에 섬진강을 깔아놓고 걷게 된다. 이때 눈앞에 펼쳐진 풍광이 여간 멋스런 게 아니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다랑이논과 야트막한 돌담, 거기에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도 마냥 정겹다.

▼ 10분쯤 걸었을까 산중턱, 그것도 비탈에 들어앉은 ‘미동마을’에 이른다. 법정마을인 ‘미점리(美店里)’의 자연부락(미동·미서·개치) 중 하나로, 고지대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마을이다. 특히 오늘처럼 매화꽃으로 치장되었을 때가 가장 빼어나단다. ‘미동(美東)’이란 미점리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길은 이제 섬진강을 향해 치닫는다. 길가는 아직도 매화꽃 천지다. 누군가는 하동의 매화를 화려하지 않다고 했었다. 이곳의 매화나무는 매실을 수확하기 위해 전지를 하는 탓에, 키가 작은데다 나무 사이의 간격까지 넓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눈높이에 맞춰 매화꽃을 즐길 수 있으니 나로서는 더 좋아보였다.

▼ 우리나라 매화꽃은 섬진강을 사이에 둔 광양과 하동으로 대변된다. 하지만 매화를 즐기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고 한다. 광양의 매화꽃이 화려한 비단과 같다면 하동의 매화는 목화솜처럼 보드랍고 수수하단다.

▼ 20분 남짓 더 내려가자 청동기시대(BC 5000년)에 이미 촌락이 형성되었다는 ‘개치(開峙)’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국가 형성기인 변한(弁韓) 때(BC 108년)는 이미 대외연락의 중요한 지점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저 마을은 또 오랜 역사만큼이나 큰 시장이 열리던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오래 전 폐장되었지만 신라시대에 범포(帆浦),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개치장’으로 불리던 큰 시장이 2일과 7일에 열렸다고 한다.

▼ 잠시 후 길은 19번 국도의 ‘악양교차로’로 내려선다. 얼마 전까지 악양루(마을표지석 뒤편 언덕에 있었으나 현재는 동정호로 이전했다)가 있었던 곳이다.

▼ 도로변의 마을표지석은 ‘개치’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미점리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나저나 이곳 개치마을은 악양의 소상팔경 중 원포귀범(遠浦歸帆)에 해당되는 마을이다. 이는 마을에서 열리던 오일장을 상징하는 말로 멀리서 돛단배가 돌아오는 먼 포구라는 뜻이란다. 그 배가 가득 싣고 온 다른 지역의 산물을 받아서 도부상인들이 물물교환을 했다는 것이다.

▼ 이후부턴 차도인 ‘악양동로’를 따른다. 교통량이 제법 많지만 둘레길이 아니라선지 보행로를 따로 만들어놓지는 않았다. 그러니 오가는 차량을 잘 살펴가며 걸을 일이다. 참! 벚꽃 개화시기(3.26-4.17)의 번잡함이 엿보이는 풍경도 만날 수 있었다. 간이정류소인데, 개치와 악양 정류소에서는 이 기간 동안 승차가 불가능하단다.

▼ ‘알프스 아니에요. 지리산이에요’라는 현수막이 눈길을 끈다. 하동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하동 알프스 프로젝트’에 대한 반대일 것이다. 형제봉에 산악열차와 케이블카, 모노레일 등 3종 세트와 함께 5성급 관광호텔에 미술관까지 건설한다는 계획인데, 스위스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가 본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구태여 막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 ‘악양삼거리’에는 악양동천(岳陽洞天)이라는 거대한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평사리를 비롯해 악양면의 대부분은 산남강북(山南江北)의 지형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은 이런 지형을 동천(洞天)이라 불렀으니, 악양동천(岳陽洞天)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 부지런을 조금 떨면 아래 사진처럼 예쁜 대나무 숲길도 걸어볼 수 있다. 울창한 대숲은 한낮인데도 해를 삼켜버렸다.

▼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미서(美西)’ 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마을을 둘러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고 날머리인 대축마을로 향한다.

▼ 대축마을로 향하다보면 감나무 밭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악양면을 대표하는 대봉감일 것이다. 하동 생산량의 80% 이상이 이곳 악양면에서 난다니 말이다. 매년 ‘대봉감축제’까지 열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 악양천 너머에는 형제봉(성제봉) 능선이 헌걸차게 솟아올랐다. 줌으로 당겨보면 신선대의 출렁다리까지 눈에 들어온다.

▼ 개치마을에서 25분. 드디어 대축마을에 도착했다. 임금님 진상품으로 잘 알려진 하동 대봉감의 주산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때 지질조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감나무 제배에 가장 좋은 토질과 환경을 지녔다고 해서 이곳에 감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또 시인묵객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은 문암송(文岩松)으로도 유명하다.

▼ 마을을 자랑은 표지석 하나만으론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 옆에 작을 빗돌을 세우고 마을의 내력을 적었다. 마을의 역사는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단다. 변한시대 이곳에 락노국(樂奴國)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진주목 악양현 소속의 ‘둔위(屯危)’로 향교(鄕校)가 있었고, 1633년에는 ‘축촌(丑村)’이란 기록으로도 나타난단다. 숙종 28년(1702년)에 하동군에 편입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축(大丑, 큰 둔이)과 소축(小丑, 작은 둔이)을 합쳐 축지리(丑只里)가 되었다.

▼ 날머리는 대축마을(하동군 악양면 축지리)

100m쯤 더 걸어 마을로 들어서자 커다란 당산나무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3.49km. 집사람의 불편한 다리를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원부춘 8.5㎞←대축→삼화실 16.7㎞)는 느티나무 아래에 세워놓았다. 아무튼 불편한 무릎 때문에 시작부터 힘들어하던 집사람이 오늘도 끝까지 함께 했다. 천만 번의 윤회를 거치더라도 그녀 곁에 머물고 싶다는 내 의지가 그녀의 가슴에까지 닿았음일까? 말로는 표현을 않지만 그녀는 부창부수(夫唱婦隨)를 가훈처럼 여기며 항상 내 곁을 지켜준다.

▼ 대축마을의 랜드마크인 ‘문암송(文岩松, 천연기념물 제491호)’은 가보지 못했다. 길이 막힌 둘레길 대신 다른 코스를 이용했던 탓에, 이 소나무를 900m나 우회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진까지 포기할 수야 없는 노릇.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께 양해를 구하고 빌려다 올려본다. 참고로 ‘문암송’이란 거대한 너럭바위 사이를 꿰뚫고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600년의 세월을 괴석과 함께하며 저 멀리 섬진강과 드넓은 악양 들녘을 내려다보고 있단다.

지리산둘레길 13구간(서당-하동읍)

 

여행일 : ‘22. 3. 5(토)

소재지 : 경남 하동군 적량면과 하동읍 일원

여행코스 : 하동읍(2.6km)→바람재(1.5km)→율곡마을(0.8km)→관동마을(1.5km)→상우마을(0.6km)→서당마을(1.8km)→버디재(0.9km)→이정마을(0.8km)→삼화실(거리/시간 : 7.0km+3.5km/ 실제는 10.04km를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3구간인 하동읍-서당 구간과 12구간의 일부(서당-삼화실)를 걷는다. 늘린 구간을 합쳐도 거리가 10km에 불과하니 다들 쉽게 생각하겠지만, 고개를 두 개나 넘는데다가 고도를 상당히 높여야(오늘처럼 역방향으로 걸을 경우)하기 때문에 난이도를 ‘중·상’ 정도로 꼽아야 한다. 주요 볼거리로는 널따란 들녘을 품은 풍요로운 마을들과 섬진강, 그리고 걷는 내내 만나게 되는 매화꽃을 꼽을 수 있다.

 

▼ 들머리는 ‘7-eleven’ 앞(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428-3)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50km쯤 내려오면 하동읍사무소가 나온다. 사무소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7-eleven’ 앞 도로가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 13구간은 원래 서당마을에서 하동읍까지다. 그런데 거리가 7km밖에 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대신 삼화실에서 대축마을까지 이어지는 12구간은 16.9km나 되다. 이런 불균형을 해소시키기 위해 12구간의 일부(삼화실↔서당, 3.5km)를 13구간에 포함시켜 걸었다. 대신 다음 12구간은 서당마을에서 대축까지 13.4㎞만 걸으면 된다.

▼ 편의점과 회영루(중국음식점) 사이의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골목 끄트머리에 ‘하동지역 자활센터’의 주황색 간판을 보았다면 길을 제대로 찾은 셈이다.

▼ 언덕을 향해 50m쯤 올라가면 ‘지리산둘레길 하동센터’가 있다. (사)숲길 사무소도 함께 들어서있어 지리산둘레길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그러니 길을 나서기 전에 필요한 지역정보를 얻어 보는 게 어떨까? 운 좋으면 함께 걸을 길동무라도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

▼ 앞마당에 놓인 돌멩이에는 실상사 주지인 해강스님의 말씀이 적혀있었다. <사회문제의 책임이 양심의 소리를 따르지 않는 자신, 종교인, 지식인에 있음을 바로 봅니다.> 어느 글에선가 양심이란 이렇다고 적고 있었다. 조작되지 않고 거짓 없는 진리의 소리이자 신의 소리라고. 그런 마음으로 지리산둘레길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 몇 걸음 더 오르면 나타나는 갈림길. 하동지역자활센터로 오르는 길목의 벅수는 한쪽 방향만 가리킨다. 이곳에서부터 지리산둘레길(하동-서당 구간)이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주황색 간판의 자활센터를 왼편에 끼고 돈다. 도중에 갈림길도 만난다. 이렇듯 13구간의 초입은 도심 골목길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때문에 길은 휘어졌다 꺾어지고, 또 어떤 곳에서는 갈라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때마다 벅수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 ‘기쁜소식 하동교회’를 스치듯 지나면 2차선 도로(산복1길)로 올라선다. 이어서 고층아파트(금화마을)를 향해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때 왼편 언덕(길을 사이에 두고 금화마을 맞은편)에 ‘하동독립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니 잠시 들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공원은 일제강점기 하동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과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4년 조성됐다.

▼ 발아래로 내려다보는 하동시가지 풍경도 이 구간만의 자랑거리다. 그 풍경은 오르면 오를수록 더 넓어진다. 시가지 뒤 ‘너뱅이들(‘넓은 벌’이라는 뜻)’ 너머로는 섬진강의 물줄기가 아스라하다.

▼ 공원입구에서 50m쯤 떨어진 곳(이곳의 벅수는 방향만 지시한다)에서 둘레길은 도로를 버린다. 그리고는 더 높은 언덕을 향해 치고 오른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삼거리. 곧장 직진하면 하동중학교가 나온다. 하지만 둘레길은 왼쪽으로 빠져나가 산자락을 파고든다. 이 구간은 돌계단을 놓는 등 인위적이 색체가 짙다. 대신 매화나무로 가득한 멋진 능선을 가로지른다. 볼거리를 찾아 길을 새로 내었지 않나 싶다.

▼ 이곳의 벅수(서당 6.5㎞/ 하동읍 0.5㎞)도 눈여겨 볼만하다. 정 방향(빨강색)과 역 방향(검정색)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양쪽 모두를 녹색으로 칠해놓았다. 13구간(서당-하동읍)이 지리산둘레길의 곁가지다보니 시·종점을 따로 둘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 산자락으로 들어서자 주변이 온통 매화 꽃밭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탐매(探梅)’ 나들이가 될 수도 있겠다. 옛 선비들이 이른 봄 도포 자락을 날리며 매화를 찾아나서는 여행을 ‘탐매’라 했으니 말이다.

▼ 매화는 봄을 알리는 꽃이다. 매서운 추위를 뚫고 피어 강인함과 지조를 상징한다. 기품 있는 자태로 고고함을 대표하며,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옛 선비들은 또 사군자(四君子) 중에서도 매화를 맨 앞에 두었다. 이는 혹독한 겨울을 지나 도도하고 단아한 자태를 드러낸 매화 한 송이가 고매한 군자를 대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란다.

▼ 작은 고갯마루를 사뿐히 넘어서자 섬진강 물줄기가 눈앞에 펼쳐진다. 유구한 세월을 흘러온 ‘섬진청류(蟾津淸流)’를 만나는 기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굽이굽이 모래톱에 의지한 섬진강의 하얀 백사장이 정겹게 다가온다.

▼ 양지의 봄은 이미 무르익었다. 부지런한 매화는 이미 꽃잎 몇 개를 거센 바람결에 흘려보낸다. 하동 땅은 그렇게 봄날을 보내고 있었다. 인생무상이랄까? 선승들의 열반송(涅槃頌)에는 봄날의 꿈이나 허공 꽃, 아침 이슬, 물거품이란 단어들이 유독 많다. 이승과의 인연을 다하고 떠나는 그들의 눈에는 지나간 인생이 공(空)하고 무상(無常)한 시간으로 비쳐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저 꽃잎처럼 말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 또 다른 고갯마루(벅수 : 서당 6.1㎞/ 하동읍 0.9㎞)에 올랐다. 길가 이정표는 곧장 직진하면 중앙중학교가 나옴을 알려준다. 하지만 둘레길은 산자락을 향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 이후부터는 능선을 탄다. 함께 걷던 ‘몽중루’님께서 귀띔해주신 이름은 ‘삼신지맥’. 삼신지맥(三神枝脈)이란 낙남정맥상의 삼신봉(지리산)에서 남쪽으로 분기해 관음봉과 칠성봉, 구제봉, 분지봉을 일구고 횡천강이 섬진강에 합수되는 하동읍 신기리에서 그 숨을 다하는 길이 36km의 산줄기이다. 동서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지리산의 조망이 자랑거리인데 그 산줄기를 지금 걷고 있다는 것이다.

▼ 앗! 우리나라에도 저런 곳이 있었나? 공동묘지의 한가운데에 민가가 들어서있는 것이다. 묘역과 가옥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 외국에서야 흔한 풍경이지만, 묘역을 경외(敬畏)시 하는 우리나라에서야 어디 그리 흔한 풍경이겠는가.

▼ ‘지리산둘레길’의 특징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그 길이었다. 그런 길들을 모아 지리산 둘레를 둥글게 연결했을 뿐이다. 그런데 13구간만은 예외인 모양이다. 초반. 그러니까 중앙중학교 입구부터 바람재까지의 산길은 새로 낸듯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축대나 계단을 만드느라 쌓아올린 돌멩이들은 아직까지도 이끼 하나 피어나지 않았다.

▼ ‘어머낫!’ 호들갑스런 집사람의 외침에 달려가 보니 두꺼비 한 마리가 나들이를 나왔다. 맞다. 오늘은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절기 경칩(驚蟄)이다. 저 두꺼비는 우리네 선현들이 허투루 절기를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이곳 하동은 누가 뭐래도 차(茶)의 고장이다. 차 시배지(始培地, 삼국사기는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일대에 심었다고 전한다)도 이곳 하동(쌍계사 근처)에 있다. 그런 인연으로 2023에는 ‘세계 차 엑스포’까지 열 계획이란다. 그래선지 둘레길 주변까지 녹차나무로 도배했다. 차나무가 길 양옆에 무성하게 자라는 이런 차밭 길은 ‘바람재’까지 쭉 이어진다.

▼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던 산길은 어느덧 ‘바람재’에서 한숨을 돌린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만이다. 그런데 이름과는 달리 고개를 넘어오는 바람은 의외로 잔잔하다. 아니 그렇게나 심하게 불던 바람이 어느새 사그라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해발 182m의 이 고갯마루에서 길은 셋으로 나뉜다. 직진은 분지봉을 거쳐 구제봉. 왼편은 ‘율동(하동읍에 있다 해서 ’하동 밤골‘이라고도 한다)’로 이어진다. 나머지 하나는 물론 둘레길로 연결되는 ‘적량 밤골’이다.

▼ 바람재는 ‘삼신지맥’의 중요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벅수(서당 4.4㎞/ 하동읍 2.6㎞)말고도 등산용 이정표(분지봉↑ 4.5㎞/ 적량밤골→/ 중앙중학교↓ 1.7㎞)와 ‘구재봉 등산로 안내판’을 따로 세워두었다.

▼ 삼신지맥과 헤어진 둘레길은 오른편(적량 밤골)으로 방향을 틀어 포장 임도를 따른다. 이후부터는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 모퉁이 하나를 돌아서자 발아래로 적량면의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자로 잰 듯 경지정리 된 계단식 논들이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첩첩 산중에 갇혀있다.

▼ 바람재에서 10분쯤 내려왔을까 삼거리(벅수 : 서당 3.7㎞/ 하동읍 3.3㎞)가 나오기에 오른편으로 들어가 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뒷밤골’로 여겨지는 작은 마을을 만났다. 하지만 이름(밤골)과는 다르게 대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다.

▼ 조금 더 내려오면 이번에는 ‘율곡마을’이 길손을 맞는다. 구재봉에서 남쪽으로 줄기차게 뻗어 내린 산줄기가 감싸고 품은 산골마을이다. 그 산자락에 얼마나 많은 밤나무가 자라면 동네 이름까지 ‘밤골(栗谷)’로 지었을까? 참고로 하동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밤나무 재배면적이 넓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밤나무가 많은 곳이 율곡마을이라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 마을회관 뒷벽은 마을 주민들이 직접 그린 둘레길 벽화로 채워졌다. 조선시대의 지도를 연상시키는 그림은 원색의 화려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뭘 의미하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로 시작되는 하여가(何如歌)를 연상시키기에 딱 좋다.

▼ 마을 주민의 심성을 엿볼 수 있는 풍경도 눈에 띈다. 의자를 놓아 둘레길 나그네가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 율곡마을부터는 평지 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늘이 없어 오뉴월 뙤약볕이라도 내려쬔다면 최악의 코스가 될 수도 있겠다. 대신 시원스레 트이는 적량들판의 모습에서 넉넉한 농촌의 삶을 오롯이 느끼며 걷게 된다.

▼ 오른편은 널디너른 적량들판이 펼쳐진다. 하동읍의 너뱅이들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산골에 펼쳐지는 보석 같은 황금 들녘이다. 들녘은 분지(盆地) 지형이다. 구재봉과 분지봉에서 뻗어 나온 높이 200~400m의 산줄기가 첩첩이 감싼 모양새이다. 때문에 이곳은 난이 있을 때마다 피난지로 선호되었다고 한다.

▼ 그렇게 7분쯤 걸었을까 삼거리(벅수 : 서당 2.8㎞/ 하동읍 4.2㎞)가 나오는데, 적량면소재지에서 들어온 길이 둘(율곡 및 관동)로 나뉘는 지점답게 마을 표지석도 둘이다. 이곳에서 둘레길은 관동마을로 향한다.

▼ 소담제(笑談齊). ‘우스운 이야기가 오가는 곳’답게 이 집은 장승까지도 익살스럽다. 머리도 모자 대신에 솥뚜껑과 솥단지를 뒤집어썼다. 참고로 장승은 무서운 형상이 보편적이다. 역병이나 잡신·잡귀들을 막아내기 위해 강한 능력을 가진 무서운 장수나 제왕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집의 장승이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의 이름표를 달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 소담제 뜨락에는 홍매(紅梅)가 활짝 피어났다. ‘홍매가헌(紅梅佳軒)’이랄까? 그런데 이게 붉다 못해 검붉다. 입바른 사람들은 흑매화(黑梅花)라고 고집부릴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봄의 전령’ 홍매화는 보통 2월 중순부터 개화한다. 그런데 연일 계속되던 맹추위로 인해 이제야 꽃망울을 열어 제켰나보다.

▼ 잠시 후 관동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이 언제 생겼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관리(館里)의 4개(죽치·금강·율곡·관동) 자연부락 중 가장 오래된 것만은 확실하단다. 옛 이름이 ‘나우래’였던 이곳은 구한말까지만 해도 하동에서 진주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고 한다. ‘관동(館洞)’이란 지명은 당시 관리들의 관사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 마을회관 앞 벅수(하동지선 011, 거리표시는 없다)에는 코스가 변경되었음을 알리는 코팅지가 매달려 있었다. 캠핑장과 개사육장 대신 마을 안길을 통과하란다. 덕분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는 개사육장은 보지 않아도 되었지만 개가 떼를 지어 울부짖는 소리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 마을안길로 들어서자 잘 지어진 정자가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13구간에서 만난 마을들은 너나없이 정자를 지어놓고 있었다. 최근의 화두가 되고 있는 ‘정주여건 개선’의 일환이지 싶다. 하지만 저렇게 잘 지어놓고도 편액을 달지 않은 건 흠이라 하겠다. 함께 걷던 이석암 선생(‘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의 말마따나 하다못해 ‘관동정(마을 이름을 따서)’이라고만 해도 한층 돋보일 텐데 말이다.

▼ 조금 더 걷자 둘레길이 직각으로 방향을 튼다. 무심코 걷다가는 지나쳐버리기 딱 좋은 지점이다. 실제 그냥 지나쳐버린 사람들도 몇 있었다. 그러니 길가에 세워놓은 벅수(서당 2.1㎞/ 하동읍 4.9㎞)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마을을 빠져나오면 아까 마을회관 앞에서 헤어졌던 옛 탐방로(벅수 : 서당 1.9㎞/ 하동읍 5.1㎞)와 다시 만난다.

▼ 상우마을로 넘어가는 도중에 만난 ‘황금농원’. 어떤 과일을 재배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무 하나만은 눈에 담기에 충분했다. 하나같이 한쪽 방향으로만 가지를 뻗으면서 기괴한 풍경을 연출한다.

▼ 관동마을을 출발한지 30분, 상우마을에 도착했다. 법정 단위인 ‘우계리(牛溪里)’에 속한 자연부락의 하나로 마을 앞이 확 트인 들녘인데다, 우계천의 여러 보(洑)와 우계저수지의 수로로 인해 관개(灌漑)가 원활하다. 농사짓기에 알맞은 천혜의 땅이라고나 할까? 참! 이 마을도 역시 밤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아직까지도 ‘밤밭촌’이라는 옛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니 말이다.

▼ 들녘 너머는 우계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원우마을’이다. 6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우계리의 중심마을이기도 하다.

▼ 길은 농로를 따라 이어지는데 부지런한 산골 농부는 일 년 농사 준비로 분주하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 서당마을과 상우마을은 본래 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상우마을을 빠져나오자마자 서당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서 강화천을 건너자 늙은 당산나무 아래 작은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당산나무가 이팝나무라는 게 이채롭다. 하긴 가난했던 시절, 신기루처럼 나타난 쌀 꽃에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었을 수도 있었겠다. 참고로 옛날 우리네 선조들은 이팝나무를 ‘쌀나무(친근하게는 쌀낭구)’라고 불렀다. 이팝나무 꽃이 백미(白米, 도정한 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늙은 몸으로 길손을 맞는 이팝나무는 300년 전부터 이곳을 지키는 영목(靈木)이라고 한다. 옛날 저 나무는 인근 주민들에게 한해의 기상과 농사일까지 예측해주었단다. 이른 봄, 꽃이 아래쪽에 많이 피면 비가 적게 와서 물이 안 차는 물아래 들녘에 풍년이 들고, 위쪽에 많이 피면 비가 자주 와서 물위 들판이 풍년이 들었다나? 특히 계묘년 보리 흉년에는 일 년 내내 잎이 피지 않았고, 임진왜란 때는 이 나무에 옷과 밥이 매달려있기도 했단다. 하지만 얘기는 얘기일 따름. 믿고 말고는 자신의 몫이다. 참! 봄마다 하얀 꽃으로 장관을 이루는 서울 청계천의 이팝나무 가로수가 저 나무의 자손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씨를 받아 키운 묘목을 옮겨 심었다.

▼ 몇 걸음 더 걸어 서당마을에 도착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만이다. ‘서당’이란 지명은 ‘서당(書堂)이 있던 마을’에서 유래했다. 함덧거리(마을회관 근처)에 오래전부터 서당이 있었고, 뒷골 큰 대밭에도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1947년경 한학자인 의령사람 현산 남정이 이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단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가없다.

▼ 13구간(하동-삼화실)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엠블럼(emblem)은 마을회관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하단에는 아까 관동마을에서 보았던 지도. 즉 둘레길의 일부가 변경되었음을 알리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 엠블렘 옆에 세워놓은 벅수(서당 0,2㎞/ 하동읍 6.8㎞)도 눈여겨 볼만하다. 붉은색(진행방향)과 검정색(역방향)으로 나타내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이곳에는 검정색 대신 녹색(정과 역의 구분이 필요 없는)으로 표현했다. 끝과 끝을 잇는 순환형의 지리산둘레길이 아닌, 곁가지 노선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추가된 구간(서당-삼화실), 그러니까 12구간의 시점인 삼화실로 가려는데 ‘지리산둘레길 서당마을안내소’가 눈에 띈다. 지리산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옛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한 ‘갤러리’이자 ‘새참사랑방’이다. 스탬프북이나 지도, 손수건(둘레길 지도가 그려진) 등의 소품들 말고도 간단한 요깃거리(컵라면)와 음료(술 포함)를 덤으로 판매한다. ‘주막갤러리’로 더 잘 알려진 이유일 것이다.

▼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참새가 들른 주막. 내부 벽면은 추억의 사진들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마을주민이 가지고 있던 옛 사진을 연도별, 사연별로 정리했단다. 그래서 주막은 ‘갤러리’를 보탰고, 이곳을 찾은 나그네들은 마을의 옛 모습과 풍습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 옛 멋이 퐁퐁 넘쳐나는 지도도 정겹다. 서당과 학교를 함께 묶은 재치가 돋보이고, 함덧(덛)거리’나 피목과 같은 낯선 지명도 눈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래 전 이곳 서당마을에는 지리산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마을주민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그 호랑이들을 잡기 위해 지금의 마을회관 아래에 엄청 큰 구덩이(함덧거리)를 파놓았다나?

▼ 둘레길 나그네들의 사랑방답게 안은 먼저 온 손님들로 꽉 차있다. 생명평화운동(지리산둘레길의 모태인 것 같은데)을 추구한다는 단체인데 순례길 떠나기 전 요기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궁여지책으로 캔맥주나 하나 챙겨가려는데 마침 냉장고까지 텅 비었다. 허탈해 하는 내 표정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리더로 보이는 이가 하동읍에서 구입해왔다며 막걸리 한 병을 선뜻 내주는 게 아닌가. 악양 지역의 프리미엄 막걸리인 ‘정감’이란다. 글을 빌어서나마 그들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 새참사랑방에서 새참을 즐기다가 불콰해진 얼굴로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가파르다. 술기운을 빌어 오르기에 딱 좋은 상황이라고나 할까?

▼ 오르는 도중 물레방아를 연상시키는 조형물을 만났다. 하지만 리어카 바퀴처럼 생긴 물레방아는 작동을 멈추었고, 물을 떨어뜨리는 호스도 메마른지 오래다.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니 벽면에 상황에 맞지 않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물레야 너는 한곳에서 계속 돌고 있구나. 나는(우리는) 먼 길을 돌고 간다. 머나먼 둘레길>

▼ 앞서가던 집사람이 탐방로를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내려간다. 얼떨결에 따라가니 꽃망울을 활짝 연 홍매화가 피어있는 게 아닌가. 이해인 수녀님의 ‘매화 앞에서’처럼 먼 길을 걸어온 어여쁜 봄이 마침내 그곳에 앉아 있었다.

▼ 꽃을 좋아하는 집사람. 나들이삼아 나간 지난 장날에도 달랑 화분 두 개만 챙겨들었을 정도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홍매화 뒤로 숨었다. 이를 보고 술을 떠올린 난 대체 무슨 심보일까. 아니다. 그림 의뢰비로 받은 3천량에서 2천량으로 매화나무를 사고, 나머지 8백량(2백량은 쌀과 나무를 샀다)으로는 술을 사서 친구들과 함께 마신 ‘김홍도’도 있지 않겠는가. 김홍도는 그 술자리를 ‘매화음(梅花飮)’이라 했다나?

▼ 그렇게 눈요기를 즐기며 걷는 나들이에 질투라도 났을까 편안하게 이어지던 둘레길이 갑자기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드디어 버디재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참고로 버디재는 ‘밥봉’ 능선에 놓인 고갯마루다. 달이 밥봉의 위로 뜨면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이후는 전형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그것도 꽤나 가파르다. 아래처럼 중간에 쉼터를 만들어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다시 출발한 산길은 한술 더 떴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고도를 높일 수 있었을 정도로 버거운 구간도 만난다.

▼ 서당마을을 출발한지 50분. 해발 261m의 버디재(벅수 : 삼화실 2.2㎞/ 대축 14.7㎞)에 올라섰다. 서당마을과 이정마을을 잇는 고갯마루로 옛날 농우(農牛)를 가보로 여기던 시절에는 우계와 삼화 젊은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단다. 버디재 먼당(산마루의 방언)을 경계삼아 이쪽저쪽에다 소를 풀어먹이고, 자신들은 편을 갈라 잔디위에서 씨름도하고 만세놀이도 하면서 정을 키워왔단다. 하지만 그럴만한 터가 눈에 띄지 않으니 이 또한 믿거나 말거나이다.

▼ 이젠 내려갈 일만 남았다. 하지만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집사람에겐 내려가는 게 더 고통이니 어찌할까나.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가파르지 않는가. 아예 거꾸로 돌아서서 내려가고 있는 그녀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마음 같아서는 업어서라도 내려다주고 싶은데...

▼ 7부 능선쯤으로 내려오자 임도를 만난다. 그 접점에 돌 의자 몇 개를 놓아 작은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아픈 무릎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한 집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랄까?

▼ 지리산둘레길(삼화실-대축)의 안내판도 눈에 띈다. 이 구간은 마을을 많이 지나고 논·밭·임도·숲길 등 다양한 길들이 계절별로 다른 모습을 선사한단다. 봄에는 꽃동산을, 그리고 가을이면 황금으로 물든 풍요로움이 지리산 자락을 펼쳐놓는다며 너스레까지 떨고 있다.

▼ 임도를 따라 잠시 내려오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이정마을’이 나타난다. 마을회관 앞의 우뚝한 느티나무가 장관인 산골마을이다. 법정 단위인 ‘동리’의 3개 마을 중 하나로 원래 이름은 ‘배나무정’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삼’으로 변했다가 1995년 하동군 조례에 의해 현재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 마을엔 ‘창녕 조씨’의 제실인 ‘동화제(東花齊)’가 있었다. 출입문(三樂門)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이정마을이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라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 마을 앞 느티나무는 대소사와 굿은 일 좋은 일 가리지 않고 지켜보며 150여 년 동안이나 마을을 지켜온 ‘수호목’이다.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이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세월이 흘러 요즘은 한술 더 떴다. 정자(梨花亭)를 지었는가 하면 커다란 TV에 냉장고까지 갖췄으니 초호화 쉼터라 할 수 있겠다.

▼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커다란 빗돌도 눈에 띈다. 지리산둘레길이 복권기금(산림청 녹색자금)으로 조성되었음을 알려주는데,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지원했기에 저렇게나 클까나.

▼ 삼화실로 가는 길. 왼편으로 꽤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구제봉과 칠성봉에서 흘러내린 ‘남산천’이 만들어놓은 들녘이다. 그런데 눈이라도 내린 듯 온통 하얀색 일색이다. 이 지역 특산물인 취나물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일 것이다.

▼ 이정마을에서 모퉁이 하나를 돌아서면 트레킹이 종료되는 ‘삼화실’이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삼화초등학교 주변 세 개의 마을(이정, 상서, 중서)을 합한 지명이 삼화실(三花實)이다. 배꽃의 이정마을, 복숭아꽃의 도장골(지금의 상서마을), 매화꽃의 중서마을에다 과실(實)을 붙였다.

▼ 날머리는 ‘삼화실 에코하우스’

구간의 시·종점을 알리는 엠블럼(emblem)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삼화실 에코하우스’ 앞에 세워져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찍은 거리가 10.04km인 점을 감안하면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코스의 난이도가 그만큼 높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거기다 덜 나은 집사람의 무릎도 속도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