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산(角山, 416m)

 

산행일 : ‘18. 7. 9()

소재지 : 경남 사천시 대방동·선구동·동서동·동림동 일원

산행코스 : 사천시 문화예술회관약수터송신탑각산전망대봉수대각산정상각산산성대방사대방 케이블카정류장(산행시간 : 2시간1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산이다. 특별히 눈에 담을 만한 산세를 갖고 있지 않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높이가 416m에 불과해서 종주를 한다고 해도 3만 걸으면 끝이다. 그저 정상에서의 조망과 보드라운 흙길이 장점이라고 보면 되겠다. 전국에 있는 산을 다 올라보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구태여 찾아볼 필요가 없겠다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이 산이 뜨고 있다고 한다. 전국에서 가장 길다는 케이블카가 이 산의 정상까지 연결된 이후로는 정상이 아예 저잣거리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천시에서는 산을 아예 도심공원(都心公園)으로 바꾸어버렸다. 전망대와 데크로드 등 등산로 정비는 물론이고, 봉수대와 각산산성도 복원해 놓았다. 곳곳에 체육시설을 들어앉혔음은 물론이다. 그러다보니 운동 삼아 수시로 오르는 사천시민들 말고도 외지에서 찾아오는 등산객들의 숫자가 차츰 늘어가고 있는 추세란다.

 

산행들머리는 사천문화예술회관(사천시 동림동 190)

남해고속도로 사천 IC에서 내려와 3번 국도를 타고 남해방면으로 달리다가 대방교차로(사천시 대방동)에서 77번 국도로 옮긴 다음, 조금 더 들어가면 각산사거리(사천시 대방동)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삼천포대교로를 타면 잠시 후 사천문화예술회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아래 사진은 들머리 근처의 쉼터에 세워진 등산안내도이다. 이 부근에서 시작되는 6개 코스 가운데 5개의 코스가 이곳 문화예술회관에서 출발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1코스는 각산약수터와 전망대를 거쳐 정상을 찍은 후, 대방사로 내려오는 총 길이 3.12의 종주코스이다. 소요시간은 1시간40분으로 적혀있다. 등산치고는 너무 짧지 않나 싶다.



주차장의 뒤편의 계단을 잠시 오르자 산자락으로 연결되는 돌계단이 나온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로 보면 되겠다.



가파른 계단을 잠시 오르자 운동기구 몇 점을 갖춘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엄청나게 큰 노거수(老巨樹) 아래에는 자그만 샘까지 파놓았다. 바가지까지 놓여 있는 걸로 보아 마시라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냉큼 들여 마실 수는 없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게 왠지 께름칙했기 때문이다. 이정표(약수터 0.92, 송신탑 1.37, 정상 1.97)와 등산안내도 외에도 등산시 유의사항과 등산로마다의 보행수 및 소요되는 칼로리의 양까지 적어 놓았다. 사천시에서는 이곳 각산을 도심(都心)의 체육공원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시작부터 조망이 터지는 걸 보면 오늘 산행은 복이 있나 보다. 삼천포 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이곳도 역시 아파트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양새이다.



산길은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육산의 전형적이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거기다 등산로의 정비까지도 잘 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경사가 가팔라졌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만들어놓았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갈림길에는 이정표가 빠짐없이 세워져 있음은 물론이다.




도심의 산답게 꽤나 많은 갈림길을 만들어낸다. 그 첫 번째는 동림보호수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정상1.67/ 동림보호수0.25/ 문화예술회관0.3). 이어서 관음사갈림길‘(이정표 : 용운사0.85/ 관음사0.65/ 문화예술회관0.65)용운사갈림길‘(이정표 : 약수터0.22, 정상 1.27/ 용운사0.64/ 문화예술회관0.7), ’임도변체육시설 갈림길‘(이정표 : 약수터0.13, 정상 1.17/ 임도변체육시설0.5/ 문화예술회관0.8) 등이 줄줄이 나타난다.



그렇게 잠시 올라가니 각산 약수터(이정표 : 정상 1.06, 송신탑 0.5/ 문화예술회관 0.92)가 나온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만이다. 거대한 체육단지의 안에 들어앉은 약수터는 두 개의 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쇠파이프를 통해 물줄기를 내뿜고 있는 상부는 식수용이 분명하고 하부는 대야를 놓아둔 것으로 보아 운동을 하고 난 뒤에 땀을 씻는 곳인 모양이다. 아무튼 약수터 주변은 먼지 한 톨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청소가 잘되어 있다. 많은 시민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약수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아니 버거울 정도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가파른 곳마다 계단을 깔아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는 속도만 조금 떨어뜨리면 된다.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이까짓 것 정도야 어디 힘들다는 축에나 들어가겠는가. ! 약수터의 바로 위에서 용운사방면 갈림길‘(이정표 : 정상0.97, 송신탑 0.37/ 용운사방면0.78/ 문화예술회관1.03)을 만난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길을 가다보면 돌탑도 보인다. 오가는 사람들이 하나씩 올려놓았을 돌맹이들이 제법 큰 규모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작은 바램들이 모여 만들어낸 큰 소망이랄까. ’티끌 모아 태산이란 속담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송신탑으로 연결되는 임도(이정표 : 송신탑(종점) 0.1/ 삼소원 5.7)에 올라선다. 약수터를 출발한지 20분 만이다. 임도의 오른편에는 헬기장이 만들어져 있다. 송신탑 근처에 터가 나지 않아 이곳에다 만들어놓았나 보다.



임도는 송신탑(送信塔)들이 무리지어 있는 곳에서 끝을 맺는다. 짙은 안개 사이로 나타나는 송신탑들이 나름대로 멋진 풍광을 자아낸다. 올라오는 내내 괴롭히던 빗줄기가 좋은 일도 하는가 보다. 보통 때였다면 흉물로 보였을 수도 있는 철제 괴물들을 저리도 예쁜 모습으로 둔갑을 시켰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지사(人生之事)를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이곳에는 각산 MTB 도로가 그려진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5.2에 이르는 임도를 MTB와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송신탑 근처에는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다. 정자에 올라서도 조망은 터지지 않는다.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했으니 잠시 쉬어가라는 배려용인가 보다.



이후부터는 능선을 탄다. 경사가 거의 없는 편안한 산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작은 언덕 하나를 넘자 산불감시초소가 나온다. 산 전체를 감시할 수 있는 곳에 세우는 시설이니 이곳의 조망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런 이점을 살리려는지 한켠에 타워(tower) 모양으로 생긴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나무로 만들다보니 튼튼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안전을 위해 35명 이상은 한꺼번에 오르지 말라는 경고판이 세워진 걸 보면 말이다.




전망대에 오르니 전망안내도가 세 개나 세워져 있다. 창선·삼천포대교를 낀 삼천포 앞바다가 그려진 안내도를 가운데에 놓고 왼편에는 와룡산이 조망되는 그림, 그리고 오른편에는 남해대교와 지리산이 그려져 있다. 망원경도 보인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조금 더 꼼꼼히 살펴보라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짙게 낀 구름으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숲길/ 데크킬)로 나뉜다. 산허리를 따르는 숲길을 버리고 데크길을 따르기로 한다. 능선을 따른다는 게 마음에 들어서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난 길은 상큼하기 짝이 없다. 하도 울창하다보니 우중인데도 불구하고 솔향이 짙은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길은 다시 합쳐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대방사 갈림길’(이정표 : 봉화대0.20/ 대방사1.01/ 문화예술회관1.85)을 만든다. 사각의 정자가 지어진 것 말고는 특별한 게 없으나 대방사로 내려가는 길이 갈린다는 것만큼은 꼭 기억해 두자. 정상에서 각산산성으로 내려가는 길의 들머리를 찾지 못했을 경우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 대방사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으로 향한다. 200m쯤 진행했을까 진행방향에 거미줄처럼 얽힌 모양새의 데크계단이 나타난다. 그래선지 초입에 세워진 이정표들까지도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나타나있는 지명들이 중구난방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계단의 곳곳에는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의자는 물론 탁자까지 세팅한 멋진 쉼터이다.



계단의 끄트머리쯤에 이르자 초가(草家)가 나타난다. ‘각산봉수대를 관리하던 봉수군(烽燧軍)의 생활상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복원(2017) 해놓은 봉수군 막사 터라고 한다. 아궁이 시설을 갖춘 막사 외에도 창고로 여겨지는 건물 한 동을 더 지어놓았다. 발굴조사에서 실제로 확인된 곳에다 지었다는데 다른 봉수대 건물지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아무튼 당시 봉수군. 즉 조선시대 일곱 가지 천대받는 구실아치인 칠반천역(七般賤役) 중 하나로 알려진 봉수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아닐까 싶다.



문헌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봉수제(烽燧制)가 군사적 목적으로 시행된 것은 삼국시대였다. 하지만 그 제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시대로 봐야 한다. 1149(의종 3)부터 법으로 정하여 실시했기 때문이다. 봉수대(烽燧臺)에서 기거하면서 후망(候望)과 봉수(烽燧)를 수행하는 요원들이 봉수군(烽燧軍)이다. 봉화군(烽火軍) 또는 봉졸(烽卒봉군(烽軍봉화간(烽火干간망군(看望軍후망인(候望人)이라고도 불리었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봉수군(烽燧軍)의 정원을 10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내지봉수(內地烽燧)와 경봉수(京烽燧)의 정원은 조금씩 차이가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봉수군(烽燧軍)은 신량역천(身良役賤)으로 봉수대 부근에 사는 사람을 차정(差定)하였다. 그들은 대개 단한(單寒노약(老弱우혹(愚惑)한 사람이었으므로 보강할 조치(賞典)를 취하도록 한 바도 있었으나, 성종초(成宗初)에는 그 역()이 다른 천역(賤役)에 비하여 부담이 적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자원했다고 전해진다. 공부(貢賦) 외 일체의 잡역(雜役)을 면제받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두어 개의 포토죤도 보인다. 조형물의 생김새에 맞춰 포즈라도 잡아볼 일이다.




정상에는 마당처럼 널따란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아까 들렀던 전망대와 마찬가지로 세 개의 조망도(眺望圖)가 세워져 있다. 셋 모두 바다에 떠있는 섬들로 채워진 게 다를 뿐이다. 그만큼 바다에 대한 조망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이다. 구름이 내려앉으면서 세상을 온통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다른 이의 글로 보는 즐거움을 대신해 본다. ’전망대에 서면 남해의 풍경이 장쾌하게 펼쳐져 숨이 탁 트인다. 사천에 속한 섬뿐만 아니라 사량도, 수우도, 두미도 등 아름답기로 유명한 통영의 섬들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지족해협의 바다 곳곳에 V자 모양의 나무를 꽂은 전통어업인 죽방렴도 보인다. 그 사이로 작은 고깃배들이 소리 없이 미끄러진다.‘ 다른 이의 느낌도 살펴보자. ’각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섬들은 아득하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듯한 아련함을 동반하는 아득함. 그 아득함은 삼천포 앞바다의 빼어난 풍광을 완성하는 중요 요인이다. 아득해서 아름다운 풍경이다.‘



전망대 한켠에는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그래야만 각산산성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를 놓칠 경우에는 전망대의 왼편에 꼭꼭 숨겨진 하산 길을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정상표지석은 사천바다케이블카의 각산정류장 방향으로 조금 더 나아가야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눈으로만 즐겨야 할 일이다. 다가가지 못하도록 나무난간으로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정상석을 배경삼아 인증사진을 찍어가고 있는 마니아들에게는 난감한 일일 수도 있겠다. 넘지 말라는 금줄을 부득이 넘어가야만 할 테니까 말이다. 사천시청에 물어보고 싶다. 요즘 화두(話頭) 가운데 하나가 규제의 해제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다가갈 수 있는 곳으로 정상석을 옮겨놓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그들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는 게 옳지 않겠는가. 참고로 각산(角山)이란 이름은 엎드린 용의 뿔처럼 생겼다는 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정상표지석의 뒤쪽, 그리니까 각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봉수대(烽燧臺)가 복원되어 있다. ’각산봉수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6)‘인데 수많은 자연돌을 모아 둥그렇게 쌓아올린 모양새이다. 널찍하고 둥그런 단위의 중앙에 또다시 둥근 단을 쌓아올렸는데 아랫단보다 높직한 모습이다. 2개의 단에는 불을 지피기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이는 사각의 뚫린 공간이 남아 있으며, 아랫단 한쪽에는 위로 오르는 계단을 두기도 하였다. ’각산봉수는 남해 금산에 있는 구정봉에서 올린 봉화를 창선 대방산을 통해 이어받아 사천 용현면(침지봉수)과 곤양면(우산봉수)으로 전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세종 때는 봉수망의 정비로 침지봉수와 서낭당봉수를 폐지하고 용현의 안점봉수를 설치하여 연락했다. 또한 사량도의 공수산봉수를 고성의 좌이산봉수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참고로 봉수는 봉화라고도 하며 봉(:횃불)과 수(: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연락방식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평시에는 횃불 1, 적이 나타나면 2,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 국경을 넘어오면 4, 접전을 하면 5개를 올렸다. 만약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어서 연락이 안 될 때에는 봉졸(烽卒)이 차례로 달려서 보고했다고 한다.



하산을 시작한다. 전망대의 왼편 끄트머리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놓여있으나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으니 유념해 둘 일이다.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가는 산길을 따라 잠시 걷자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는 케이블카가 보인다. 초양도와 각산의 정상을 왕복하는 사천 바다 케이블카일 것이다. 산길은 케이블카를 지지하고 있는 철탑의 아래로 나있다. 그런데 케이블카가 철탑을 지나가는데도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새들(Saddle) 구간인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 사천케이블카는 모든 구간이 무진동(無振動)으로 운행된다는 기사를 읽은 것도 같다. 그만큼 쾌적한 관람이 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정상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자 각산산성(角山山城 : 경남 문화재자료 제95)이 나온다. 삼천포항을 서남 방향으로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각산의 8부 능선에 돌로 쌓은 길이 242m의 산성이다. 산성의 유래는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05년 백제의 제30대 왕인 무왕이 축성했다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진주가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음을 전하고, 일본서기는 6세기 중엽에 백제가 섬진강을 건너 진주지역을 압박하고 있음을 전한다. 백제가 가야지역 진출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쌓았지 않나 싶다. 이후 고려왕조가 삼별초의 난을 평정할 때도 이용되었고, 1350(공민왕 9) 왜구의 대대적으로 침략으로 각산 마을이 불탔을 때에는 지역의 주민들이 이 성에서 돌팔매로 항전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남쪽 성문은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성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져 1991년과 1993, 1995년 등 세 차례에 걸쳐 복원했다고 한다.




조금 가팔라진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를 더 걷자 서너 개의 벤치가 놓여있는 삼거리(이정표 : 실안마을 갈림길0.3/ 대방사/ 각산산성0.4)가 나타난다. ‘실안·대방 갈림길인데 대방사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하지만 이정표에는 왼쪽 방향의 지명이 빠져 있으니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왼편으로 방향을 튼 산길은 갑자기 가팔라진다. 그것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팔라졌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곳도 역시 통나무계단이 곱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 같이 질척거리는 날에도 미끄러지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9분 정도를 내려서자 숲속에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작은 암자가 나타난다. 대방사의 부속 암자인 서암(西庵)’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의 8대 종정(宗正)을 지냈던 서암(西庵)’ 큰스님이 직접 이름을 짓고 수생(修生)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자신의 법명에서 따왔는지 아니면 암자가 각산의 서쪽에 자리 잡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법당보다도 더 커 보이는 요사(寮舍)를 거느린 특이한 암자이다. 하긴 종정까지 지낸 큰스님이 머물렀던 곳이니 그를 추모하는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 것이고, 그들이 머물려면 최소한 이 정도 규모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암자를 빠져나오니 시야가 열리면서 남해바다가 나타난다. 언젠가 서암에서의 조망을 거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를 두고 하는 얘기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남해바다에 떠 있는 여러 크고 작은 섬들이 삼존불(비로자나부처님, 아미타부처님, 석가모니부처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중생들을 모두 구원하신 뒤 도솔천으로 다시 승천하기 위해 잠시 누워서 쉬고 있는 모양새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바다 풍경에 불과할 따름이다.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 개국초기의 승려인 무학대사가 썼던 어휘인데,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의미이다. 아무래도 내 수준으로는 그런 현학적(衒學的)인 풍경을 그리기에 무리였던가 보다.



잠시 후 더딘 발걸음을 대방사(大芳寺)에 내려놓는다. 언제 누가 무슨 연유로 지었는지는 몰라도 대웅전과 선원, 조사당, 요사 등 자그맣지만 나름대로 규모를 갖춘 사찰이다. ! 절의 입구에다 성지사찰 대방사라고 적힌 표지석과 함께 대방사의 연혁이 적힌 안내판을 세워놓기는 했다. 하지만 글씨를 판독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낡아도 너무 낡았다. 그저 ‘1941이라는 숫자 등 몇 문장이 보일 따름인데 혹시 이 절의 창건년도 일지도 모르겠다. 경내로 들어서자 대웅전이 눈길을 끈다. 여느 사찰들과 달리 지붕에 청기와를 얹은 것이다. 창덕궁의 선정전을 산에서 보는 것 같아 신기할 따름이다. 법당의 현판도 대웅전(大雄殿)’ 대신에 큰 법당이라고 한글로 적었다. 문득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외치던 명창(名唱) () 김동진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여느 절들보다는 훨씬 많은 불상들이 옥외에 늘어서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대웅전의 왼편에 커다란 바위로 축대를 쌓고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모셨다.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태자시설 나무 아래서 오른쪽 다리를 왼편 무릎위에 올려놓고 깊은 사색에 잠긴 모습을 담고 있는 불상을 말한다. 높이가 12m에 이르는 이 반가사유상은 세계 최대를 자랑한단다. 축대의 아래에는 인위적으로 동굴법당을 만들고 그 안에 수없이 많은 작은 불상들을 모셨다.



대방사를 빠져나오자 시야가 툭 터지면서 사천 앞바다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슬슬 산행이 끝나가나 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삼천포대교 사거리에 내려선다. 길가에 산행안내도를 세워놓은 걸 보면 이곳이 오늘 산행의 날머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산악회의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사천 바다 케이블카정류장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만 한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삼천포대교로를 따른다. 왕복 4차선의 널따란 차도이지만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으니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길가 축대를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난 능소화나 감상하면서 걸어볼 일이다. 어쩌면 오늘 산행의 대미(大尾)를 능소화가 장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답기 짝이 없는 꽃들이 저렇게 무리지어 피어난 걸 보면 말이다. 누군가는 여름을 일러 초록의 바다라고 표현했었다. 하지만 그 푸름도 오래가다보면 신물이 나게 된다. 이럴 즈음 나타나는 게 능소화로, 담쟁이덩굴처럼 빨판이 나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달라붙어 아름다운 꽃 세상을 연출하는 소중한 꽃이다.



산행날머리는 사천 바다케이블카 대방정류장

10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사천 바다 케이블카대방 정류장이 얼굴을 내민다. 오늘 산행은 2시간 10분 정도가 걸렸다. 산행안내도에 적혀있던 시간보다 30분이나 더 걸린 셈이다. 아무래도 이것저것 둘러보느라 많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사천 바다 케이블카는 산과 바다 그리고 섬을 잇는 국내 최초의 케이블카이다. 초양도와 사천 바다 그리고 각산을 지나는 선로의 길이가 2.43km나 되니 국내 최장이란 타이틀(title)까지 얻었다. 올해 4월에 개통한 케이블카는 두 종류의 캐빈(cabin)이 운행되는데 이 가운데 크리스탈 캐빈은 바닥이 투명 유리로 되어있기 때문에 발아래로 산과 바다의 풍경을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816m 길이의 바다 구간을 최고 높이 74m(아파트 30층 높이)에서 내려다볼 수 있어 아찔함을 더해준단다.



남은 시간이 하도 많아 바닷가를 둘러보기로 한다. 3번 국도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너자 널따란 광장이 나타난다. ‘작은 미술관이 들어있는 사천문화재단건물이 보이는가 하면 공원의 옆에는 작은 선착장까지 마련되어 있다. 고성의 상족암까지 둘러보는 유람선이 이 부근에서 출발한다고 하던데, 혹시 그 유람선을 대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사천팔경의 제1경인 창선ㆍ삼천포대교가 바로 코앞이어선지 포토죤(photo-zone)도 만들어져 있다.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라는 배려일 것이다. 하트 모양으로 생긴 포토죤도 보인다. 그 옆에 삼천포아가씨의 실화 러브스토리를 적은 놓은 것으로 보아 함께 온 연인들에게 삼천포아가씨의 사랑까지 듬뿍 받아가라는 모양이다.



바닷가에 이르면 창선ㆍ삼천포대교(昌善三千浦大橋)’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사천시의 대방과 남해군 창선을 연결하는 총연장 3.4에 너비가 14.5m인 연륙교(連陸橋)이다. 삼천포대교와 초양대교, 늑도교, 창선대교, 단항교 등 다섯 개의 다리가 순수 국내 기술로 각각 다른 공법에 의해 시공되어 교량전시장으로도 불린다. 중간에 초양도와 늑도, 모개섬을 지나게 되는 이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에도 올랐을 만큼 도심의 불빛과 어우러진 멋진 야경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유채꽃이 만발할 때면 그 아름다움은 더욱 짙어진다고 한다. 한려수도의 청량한 장관과 함께 유채꽃의 노란 빛깔을 품은 섬의 모습은 가히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단다. 사천팔경 가운데서도 제1경으로 꼽힌 이유가 아닐까 싶다.


송산(松山, 801.8m) - 매봉산(805m)

 

산행일 : ‘18. 5. 24()

소재지 : 경남 거창군 고제면과 웅양면의 경계

산행코스 : 군암재송산송산재매봉산하구송봉산리보건진료소(산행시간 : 3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큼지막한 바위 몇 개가 능선에 흩어져 있을 뿐인 전형적인 육산(肉山)들이다. 눈에 담을만한 산세를 갖고 있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거기다 외진 곳에 위치한 탓인지 인적 또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보니 길이 제대로 나있을 리가 없다. 잡목들로 가득 차있는 산길은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특히 산초나무가 하도 많아 길을 헤쳐 나가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산 모두를 올라보겠다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찾아올 필요가 없겠다는 얘기이다. 특히 초심자들은 꼭 피해야할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군암재(거창군 웅양면 군암리 산 85-8)

광주-대구고속도로 거창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3번 국도를 이용해 김천방면으로 달리다 도평교차로(거창군 주상면 도평리)‘에서 ’1089번 지방도로 옮겨 고제·무풍방면으로 들어가면 궁항리 삼거리(고제면 궁항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고웅길을 따라 들어가면 잠시 후 산행들머리인 궁항리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고제면과 웅상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이다. 대전-통영고속도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무주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를 타고 성주방면으로 달리다가 무풍사거리(무주군 무풍면 철목리)에서 ’1089번 지방도로 옮겨 거창방면으로 내려오면 된다. 실제로 강송산악회의 버스도 이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고갯마루의 군암봉 방향, 그러니까 우리가 가려는 송산의 반대 방향에 군암재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송산2.1Km/ 군암마을880m/ 고제면 군항리1.7Km)가 세워져 있다. 이정표의 방향표시는 맞은편에 보이는 절개지(切開地) 사면을 그냥 치고 오르라고 지시하는 모양새이다.



도로를 새로 내면서 만들어진 절개지의 비탈을 치고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동쪽, 그러니까 절개지의 웅양면 쪽 끄트머리라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고 길이 나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방향만 보고 무작정 치고 올라야만 한다. 이쯤에서 이정표까지 세워진 곳에 설마 들머리가 없겠느냐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0분 정도를 찾아보아도 눈에 띄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길을 새로 만들어가는 개척 산행이다. 잡목들이 가득 찬데다가 넝쿨식물들까지 우거져있어 길을 내는 게 만만치 많다. 많은 곳에서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그런 곳에서는 좌우를 오가며 헤쳐 나갈만한 조그만 틈새라도 찾아본다. 이어서 또 다른 악전고투가 시작된다. 경사까지 가파른 산비탈인지라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그 비탈이 짧은 게 그나마 다행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헤매고 난 뒤에야 능선에 올라선다. 능선에는 희미하게나마 길이 나있다. 이때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왼편에 보이는 지능선이 옳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른편, 즉 웅양면 방향이 주능선임을 명심해야 한다.



50m쯤 걸었을까 시야가 트이더니 산길은 벌목(伐木)을 끝낸 사면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다. 덕분에 조망이 시원스럽다. 건너편에 있는 군암봉은 물론이고, 흰데미산과 수도산, 봉우산, 월매산 등 인근의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개활지(開豁地)를 지나자 산길은 까다로워진다. 희미한 흔적을 찾아나가야 하는 것만 해도 힘든데, 거기다 능선을 점령해버린 잡목들 탓에 숲을 헤집어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더해진 것이다. 오늘 산행은 고생문이 훤한 것 같다.



능선은 작은 오래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그런데 능선을 따라 녹슨 철조망이 쳐져있다. 뭔가 약용식물이라도 재배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철조망과 너무 가까이 붙어서 산길이 나있는데다 철조망이 웃자란 잡초에 가려있기까지 하니 주의해서 진행해야 할 일이다. 자칫 방심하다간 가시에 찔리거나 옷이 찢길 수도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소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아니 온통 소나무 일색인 곳도 있다. 송산이란 이름이 붙게 된 이유가 아닐지 모르겠다. 그래봤자 송산의 정상 부근에는 소나무가 드물었지만 말이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임에도 불구하고 바위다운 바위들이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선바위나 두꺼비바위 등의 이름을 붙여도 좋을 만큼 생김새 또한 또렷하다.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는 얘기이다.



오르내림을 반복하던 산길이 이번에는 봉우리를 피해 우회(迂廻) 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난 일일이 올라가보는 번거로움을 택한다. 송산의 정상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인가 보다. 엉겁결에 올라선 봉우리에서 송산의 정상임을 알려주는 삼각점(무풍 429)을 만났기 때문이다. 정규 등산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었기에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는데 행운이라 하겠다. 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매봉산으로 향한다. 산길은 길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거칠다. 웃자란 잡목들이 길까지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의 숫자가 그만큼 적다는 증거일 것이다.




길가 나무에 구멍이 뚫려있는 게 보인다. 그 안에는 새끼 새 서너 마리가 짹짹거리고 있다. 산에 이골이 난 일행분 말로는 딱따구리란다.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인지라 사진을 찍어볼까 하다가 플래시(flash)에 놀랄까봐 그만두기로 한다. 잠깐의 호기심으로 인해 어린 생명에게 피해를 줄 수야 없지 않겠는가.




원시의 숲을 방불케 하는 능선이지만 사람들의 숨결은 있다. 묘역(墓域)이 조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벌초(伐草) 등의 손질까지 해놓은 흔적이 보이는 것이다. 자손들의 지극한 효심을 엿볼 수 있는 풍경이지 싶다. 우리 다음 세대에서 어찌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묘역을 지나자마자 산길은 또다시 험악해진다. 갈 길을 방해하는 잡목들에 싸대기 서너 대쯤은 각오해야 하는 구간으로 변한 것이다. 하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대부분이 이런 상황이었다.



송산을 내려선지 1시간여 만에 벌목이 끝난 개활지(開豁地)가 나타나면서 시야가 활짝 트인다. 건너편 산자락에는 성냥갑 같은 꼬마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았다. ‘용초마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뒤에 보이는 산은 무주군 무풍면과 경계를 이루는 삼봉산이 분명하다. 진행 방향에도 산이 보인다.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매봉산일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을 조금 더 넓게 펼쳐보자. 두류봉을 가운데에 놓고 볼 때 그 왼편 뒤에서 키재기를 하고 있는 산들은 갈미봉과 호음산이지 싶다. 오른편에 보이는 건 삼봉산일 게고 말이다. 갈미봉과 호음산은 거창군 북상면과, 그리고 삼봉산은 삼봉산은 무주군 무풍면과의 경계에 놓인 산들이다.




벌목지역으로 난 능선을 따른다. 봉산마을을 바라보며 내려간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내려가면 갈수록 능선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디로 가야 옳았는지를 얘기할 수는 없다. 애초부터 길을 잃었는데 어쩌겠는가. '(application)‘이라도 미리 깔아두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을 듯 싶다.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우린 산허리를 그냥 가로지르기로 한다. 능선까지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거리를 내려와 버렸기 때문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오른 낙엽송 숲을 헤쳐 나가며 올라가야할 능선에서 가장 낮은 부분을 헤아려본다. 어차피 지나가게 될 고갯마루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헤매길 15분 만에 송산재고갯마루에 내려선다. 고제면의 봉산마을과 웅양면의 송산동마을을 잇는 고갯마루로 길이 제법 또렷하게 나있다. 오늘 산행에서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귀하디귀한 이정표(구름재(신촌) 1.4Km/ 고제면 구송 1.4Km)까지 보인다. 그만큼 중요한 지점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정표는 이곳의 지명을 송산재로 적고 있으나 소사재 또는 소징이재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매봉산으로 향하는 능선으로 올라서자 능선은 또다시 거칠어진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훨씬 좋아졌다. 눈여겨보면 길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경사 또한 적당히 가팔라서 기분 좋은 산행이 이어진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하자 널따란 헬기장이 나타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잘 다듬어진 가족 묘역(墓域)이 나온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손길이 부지런해진다. 다가가보니 이제 막 솟아오른 고사리가 지천이다. 올 제사(祭祀) 때도 고사리를 사는 일은 없겠다.




묘역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하지만 길을 찾는데 어려움은 없다. 능선이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잡목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20분이 지나자 드디어 매봉산의 정상이다. 송산재에서 30, 그리고 송산에서는 1시간 50분이 걸렸다. 정상은 두세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졌는데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나 삼각점도 역시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새마포산악회에서 매달아놓은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잡목들에 둘러싸인 탓에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에서 봉산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곧장 왼편 지능선을 타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의 방법은 계속해서 주능선을 타고가다 구덤재에서 왼편으로 하산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두 방향 모두 길의 흔적이 확실하지가 않다. 이곳도 역시 '(application)‘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핸드폰을 보며 열심히 길을 찾고 있는 일행분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결론부터 얘기해서 우린 왼편 지능선을 탔다. 잠시 후 삼봉산 방향이 얼핏 나타나는가 싶던 산길은 이내 잡목들 속으로 잠겨버린다. 그리고 오늘 산행에서 만났던 난관들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상황과 마주쳐버린다. 길을 가로막는 잡목들이 하나 같이 산초나무인 것이다. 어찌나 자주 가시에 찔렸던지 아까 맞은 싸대기가 차라리 그리워질 정도였다.



그런 악전고투는 3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거리에 비해 오래 걸린 셈이다. 산초나무 천지인 산길이 그만큼 힘들게 만들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옛말이 있다.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으로,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옴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산초길이 끝나자마자 산길은 개할지 사이로 난 임도를 따른다. 이 길은 집사람의 손놀림이 엄청나게 빨라지는 구간이다. 길가에 취나물이 지천으로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편해지니 시선도 여유로워지나 보다.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난 찔레꽃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말이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지쳤던 육신에 생기가 되돌아온다. 몸은 비록 땀에 찌들었지만 마음만은 행복하다. 이런 맛에 사람들은 산을 찾는가 보다.



마을이 가까워짐에 따라 사과나무들도 그 숫자를 늘려가고 있다. 이제 막 묘목을 심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오래 묵은 고목(古木)들도 즐비하다. 그러고 보니 이곳 고제지역의 특산품이 사과였다. 이곳의 사과는 당도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맛도 일품이란다. 해발 500m~800m의 고원지역인데다 모래와 점토가 적당히 섞여있는 질 좋은 토양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란다.




산행날머리는 송산보건지료소(거창군 고제면 봉산리)

사과밭이 끝나면 하구송 마을이 나오고 이어서 봉산보건진료소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실제로 걸을 시간은 3시간 40분이 된다. 하지만 마음에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산나물을 채취하느라 지체된 시간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도착지에 있는 보건진료소 건물이 눈길을 끈다. 입구에 철제 그늘막을 만들었는데 지붕을 태양열집열판으로 덮었다. 요즘 대세가 클린 에너지임을 감안할 때 신선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좌이산(佐耳山, 415.8m)

 

산행일 : ‘18. 2. 26()

소재지 : 경남 고성군 하일면

산행코스 : 가리미배정상23능선삼거리신기마을(산행시간 : 2시간)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의 해안가에 위치한 산이다. ()을 상징한다는 사천(泗川) 와룡산(臥龍山)의 왼쪽 귀를 닮았다고 해서 좌이산(左耳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모산(母山)인 북쪽 향로봉(578m)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상의 바닷가에 우뚝 솟은 산이다. 이 산의 특징은 육산(肉山)임에도 불구하고 울퉁불퉁한 암릉을 여러 곳에다 숨겨놓고 있어서 심심찮게 조망이 터진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해발고도가 500m를 훌쩍 넘기는 연화산이나 거류산, 무량산, 무이산, 수태산 등 고성에 있는 다른 유명산들에 비해 한참이나 낮지만 가까이에는 산이 없어 시야가 툭 터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할 산으로 꼽고 싶은 산이다. 단 짧은 산행시간이 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좌이산의 산행계획에다 인근에 있는 공룡들의 놀이터였던 상족암을 함께 끼워 넣는 방안을 권해본다.


  

산행들머리는 가리미고개(고성군 하일면 오방리 산 110-1)

남해고속도로 사천 IC에서 내려와 사천 쪽으로 가다가 사천공항 직전 삼거리에서 고성·통영 방면 33번 국도를 탄다. 상리면 소재지 고인돌공원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2가량 가면 나오는 삼거리에서 하일·상족암군립공원 방향으로 좌회전해 가면 하일면 사무소가 나온다. 여기서 삼천포 방향 77번 국도를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가리미고개에 닿는다. 도로변에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으니 이곳에서 장비를 꾸린 뒤에 산행을 시작하면 되겠다.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임도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좌이산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산행을 출발하기 전에 한번쯤 살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등산로가 너무 단순한 탓에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상족암 트레킹코스와 가장 쉽게 연결시킬 수 있는 신기마을로 내려가는 등산로를 아예 빼먹어버렸단 얘기이다. 하지만 막상 산행을 하다보면 길이 또렷하게 나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콘크리트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헬기장이 나온다. 왼편에 있을 좌이산의 정상부를 가늠해보는데 집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보인다. 바닥에 쓰여 있는 글자가 ’H’자가 분명한데도 헬기장이 맞느냐는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생뚱맞은 곳에 들어앉은 것은 분명하다.



헬기장을 지나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가면 삼거리이다. 오른편은 동산선원 일윤사에서 올라오는 길, 좌이산은 왼쪽 방향의 콘크리트길이다.



콘크리트길은 잠깐이면 끝나버린다. 이어서 두어 곳에서 길이 나뉘나 왼편으로만 진행하면 되겠다. 아니 어디로 갈지를 놓고 고민할 필요도 없겠다. 반질반질할 정도로 길이 잘 나있는 방향으로 들어서면 될 테니까 말이다.




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은 솔가리까지 쌓여 아예 폭신폭신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고,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통나무로 계단을 놓았다. 통나무를 깔 수 없는 너덜구간에는 돌까지 쌓아가며 계단을 만들었다. 관할 관청이 고성군에서 심혈을 기울여 정비해오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쯤 되었을까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설악산이나 월출산 등 소문난 골산(骨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뛰어난 조망터를 곳곳에 만들어 놓을 정도는 된다. 짜릿한 손맛까지는 아니지만 조망을 즐기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는 얘기이다.



길은 잘 정비되어 있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고 조그만 공터라도 생길라치면 벤치를 놓아 쉼터로 조성했다. 이곳 좌이산이 고성 10대 명산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더니 그에 어울리는 대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10대 명산의 나머지는 벽방산(碧芳山, 650.6m)과 적석산(積石山, 497m), 무량산(無量山, 583m), 와룡산 향로봉(臥龍山 香爐峰, 578m), 거류산(巨流山, 570.5m), 구절산(九節山, 565m), 무이산(武夷山, 546m), 연화산(蓮華山, 524m), 선유산(仙遊山, 418m) 등이다.



첫 번째 전망바위는 8분 후에 만난다. 아니 바위 위에다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으니 전망대라고 부르는 게 옳겠다. 오른편 발아래에 하일면 소재지와 비취빛 자란만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 왼편, 그러니까 북쪽에는 향로봉, 그리고 그 왼편에는 와룡산이 버티고 있다.





전망대를 지난 산길은 또 다시 흙길로 변한다. 이래서 좌이산을 전형적인 흙산으로 분류하는 모양이다. 잠시 후 돌탑 한 기와 벤치가 놓여있는 공터에 올라선다. 남쪽에서 좌이산 정상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꼭대기에 쌓아올린 돌담까지 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 보인다.





살짝 내려가던 산길이 또 다시 위로 향한다. 그렇게 3~4분쯤 진행하면 자란만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전망대에 올라선다. ‘솔섬과 죽섬, 육섬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둥둥 떠다니는 멋진 바다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만()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란도(紫蘭島)일 것이다. 붉은 난초가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자란도’(紫蘭島)라 불리기도 하고, 섬의 생긴 형세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과 같다 하여 자란도’(自卵島)라 불리는 등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지는 섬이다. 섬에는 고을개’(읍포)모래치’(사포) 2개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고을개는 옛 고을 원님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모래치는 모래사장이 있다 하여 불리었다 한다. 아무튼 저 섬은 가깝고도 먼 섬으로 알려져 있다. 뱃길로 5분이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지만 섬을 오가는 여객선이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사각의 정자(亭子)를 만난다. 이곳 역시 전망대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자란만이 발아래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아마 해바라기 꽃섬으로 알려진 솔섬이 아닐까 싶다. 섬에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바로 곁에 위치한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는 작은 솔섬으로 나뉘어져 있다. 두 섬은 300m에 이르는 데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모양새가 이곳 정자에서도 확인된다.



정자를 지났다싶으면 정상 직전에서 이정표(명덕고개 2.5Km/ 가리미고개 1.4Km)가 세워진 삼거리를 만난다. 정상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올라서야 한다. 이정표에는 정상으로 가는 길을 표시해 놓지 않았지만 길이 워낙 또렷하니 놓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정상을 둘러보고 난 뒤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45분 정도가 걸렸다.



오른편에 보이는 철계단을 오르면 곧바로 좌이산 정상이 나온다.



봉수대가 자리 잡은 정상의 바로 아래, 자란만이 내려다보이는 쪽에 산불감시초소가 지어져 있다. 그 앞을 배회하고 있는 감시요원의 모습이 문득 옛날 이곳을 지키던 봉수군(烽燧軍)을 떠올리게 만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밝음과 어두움도 초월한 채 나라위한 일편단심으로 망을 보고 봉홧불을 밝혔을 봉수군과 행여 불이라도 날까봐 두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지켜보고 있는 저 감시요원이 하나도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봉홧불 지피는 수고로움 대신에 지금은 다만 핸드폰이나 무전기 등의 최첨단 장비를 이용하고 있다는 게 다르다면 다를 뿐이 아니겠는가.



정상에는 돌담을 쌓아 옛날 이곳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그 아래에다 안내판을 세워두었음은 물론이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좌이산봉수대(경상남도기념물 제138)‘는 전체면적 240.5에 둘레가 73m 정도였으나 현재는 36m(높이 1.6-2.2m, 두께 30-50cm)의 석축만 남아있단다. 석축의 안에서 화덕자리와 막사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고 전해지나, 내 안력(眼力)으로는 그게 어디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아무튼 이곳 좌이산봉수대는 남해안에 위치한 연변봉수 중 간봉(間烽)의 하나로서 거제시 가라산봉수대(경상남도기념물 147)에서 시작하여 통영시 미륵산, 우산, 사량도 직봉, 진주시 각산봉수대로 연결되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통영의 우산봉수대에서 연락을 받아 사천의 각산봉수대와 사량진봉수대, 하일면 바닷가의 소을비포 진영에 전달하는 중계기지 역할을 했다는 얘기이다. 당시 이 봉수대에는 오장(伍長) 2명과 봉수군(烽燧軍) 10명이 교대로 근무했으며, 봉수대의 역할 외에도 인근에 있는 하일면 소을비포(所乙非浦) 진영(鎭營)의 망대(望臺) 역할까지 겸했었다고 한다.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은 봉수대의 한가운데에다 세워놓았다. 이왕에 거론했으니 봉수대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봉수(烽燧)란 나라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이나 해당 진영에 알려 적의 침략을 분쇄하는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수단이다. 경봉수(京烽燧)와 연변봉수(沿邊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 등 세 가지 종류의 봉수대가 있었는데, 경봉수는 서울의 남산에 설치된 중앙봉수로 화덕이 다섯 개였으며, 연변봉수는 국경선이나 바닷가 근처 등 최 일선에 설치된 봉수를 말한다. 내지봉수는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던 중간봉수였음은 물론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봉수대에서 봉화를 올릴 때는 연기를 하늘높이 올리기 위해 땔감에 소똥 등의 짐승 똥을 섞어 불을 지피는데, 평상시에는 횃불 한 개, 적이 나타나면 두 개, 적이 국경이나 경계선에 접근하면 세 개, 적이 침범하면 네 개를, 적과 아군이 싸우기 시작하면 다섯 개를 올렸다고 한다. 그럼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올 때에는 어떻게 했을까?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서 보고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좌이산(左耳山)이란 지명은 고성군 하이면에 있는 와룡산(향로봉)에서 바라볼 경우 산의 형상이 남해바다를 향해 누워 있는 와룡(臥龍)의 왼쪽 귀()와 흡사하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전해진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동남쪽에 위치한 자란만 앞바다와 통영시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서쪽으로는 고성군의 세계적인 자랑거리인 공룡화적지로 유명한 상족암이, 그리고 그 너머로는 삼천포화력발전소가 있는 삼천포 앞바다까지 내다보인다. 그 오른편에는 와룡산 주봉인 향로봉과 민제봉, 상사바위봉이 버티고 있다. 북쪽에서는 보현사와 약사불이 있는 수태산과 천년고찰인 문수암이 까치둥지처럼 둥지를 튼 아름다운 청량산(무이산)이 다가온다.




하산을 시작한다. 삼거리에서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명덕고개, 즉 남쪽 방향의 능선을 따른다. 바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잠시 내려서면 청룡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안부 삼거리(이정표 : 명덕고개2.32km/ 청룡사입구1.2km/ 정상 0.2km, 가리미고개1.7km)가 나온다.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곧이어 거대한 암벽이 길을 가로막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른편으로 살짝 돌아 위로 오를 수 있도록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밧줄까지 매어놓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면 첫 번째 봉우리(2)이다. 정상에서 10분이 조금 못되는 거리이다. 아무튼 이때 주의할 게 하나 있다. 정상에 오르기 직전 왼편으로 약간 튀어나간 지점에 있는 전망바위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보았던 자란만의 풍경이 한결 더 또렷이 나타남은 물론이고, 조금 전에 올랐던 좌이산 정상도 정상석까지 보일 정도로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잠시 가파르게 아래로 내려선 산길은 이내 솔가리가 수북이 쌓인 보드라운 흙길로 변한다. 작은 오르내림이 두어 번 나타나지만 걷기에 딱 좋을 정도로 순한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했을까 두 번째 봉우리(3)에 올라선다. 바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조망이 좋은 곳이다. 일 년 내내 관광객들로 붐비는 사량도와 수우도가 있는 한려해상공원은 물론이고 오른편으로는 삼천포 앞바다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거기다 바윗길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철제난간을 두른 나무계단을 놓아 위험성을 완전해 제거했기 때문이다. 이 구간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싶다. 명덕고개까지 이어지는 내리막능선이 한눈에 들어옴은 물론이고 사량도와 수우도 등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널려있는 한려해상이 아예 한 폭의 풍경화로 나타난다. 그곳도 잘 그린 그림이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곶의 끝자락에 움푹 들어온 자그마한 만()이 하나 보인다. 천혜의 항구가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옛날 저곳에는 군진(軍陣)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 왜구(倭寇)의 침입에 대비해 설치한 소을비포(所乙非浦 : 경남 기념물 139)이다. 현재는 옛 성터만 남아있는데 좁은 만의 안에서도 바다 쪽으로 툭 튀어 나간 낮은 야산에 해안의 경사를 이용해 타원형으로 쌓은 산성(山城)이다. 이곳 좌이산의 봉수대와 연결돼 비상시 적을 막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어서 나타나는 보드라운 흙길을 밟으며 조금 더 내려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두 번째 봉우리에서 24, 정상에서는 44분이 걸리는 지점이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명덕고개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하지만 우리 일행은 신기마을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 행선지인 상족암에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지점으로 내려가기 위해서이다.



6분쯤 더 걸었을까 전주 이씨들의 가족 묘원(墓園)이 나온다. 이곳에서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묘원을 조성하면서 내놓은 모양인데 깔끔하게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있다.



산행날머리는 신기마을(고성군 하일면 춘암리)

임도를 따라 5분쯤 내려가면 1010번 지방도가 나오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5분쯤 더 걸으면 신기마을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멈추지 않고 걸었으니 오롯이 걷든 데만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봉래산(蓬萊山, 397m)

 

산행일 : ‘18. 1. 23()

소재지 : 부산시 영도구 신선동과 청학동, 동삼동 일원

산행코스 : 신선동 주민센터신선초교복천사봉래산(祖峰)자봉(子峰, 387m)손봉(孫峰, 361m)고신대 뒤편목장원 방향 둘레길반도보라아파트(산행시간 : 1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영도 주민들의 뒷동산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래선지 산 전체를 도심(都心)의 공원처럼 잘 꾸며 놓았다. 원뿔형의 산을 나선형(螺旋形)으로 한 바퀴 도는 총 길이 6.0의 둘레길 뿐만이 아니라 정상으로 데려다주는 6개의 등산로가 사방으로 가지를 치고 있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경사가 거의 없는데, 길가에 벤치나 평상을 놓아 주민들이 산책삼아 오르내리기에 딱 좋게 조성했다. 거기다 부산항과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조망(眺望)까지 선사한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이 산을 일러 삼박자를 갖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순한 길에 완벽한 조망, 그리고 시원한 물과 바람까지 갖췄다는 것이다. 그 말에 공감하면서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할 산으로 꼽고 싶은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신선동 주민자치센터(영도구 신선동384-3)

중앙고속도로(삼락-대동) 삼락 IC에서 내려와 관문대로를 타고 부두사거리(동구 좌천동)까지 온다.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충장대로를 따라 세관사거리(북구 중앙동 4)까지 온 다음, 좌회전하여 대교로를 따르면 부산대교를 건너게 된다. 오른편 차창 너머로 그 유명한 영도대교가 보일 것이다. 잠시 후, 봉래교차로(영도구 봉래동)에서 좌회전하여 잠깐 달리다가 부산지방경찰청 교통순찰대를 지나자마자 오른편 봉래언덕길로 갈아탄다. 이어서 덕수목욕탕 앞에서 우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신선동주민센터 앞에 이르게 된다.



아래 지도는 부산일보&틤이 답사했던 코스가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우린 반대방향으로 진행했다. 또한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손봉에서 곧장 내려오지를 못하고, 엉뚱한 방향인 고신대 쪽으로 내려가다가 둘레길을 이용해 날머리인 반도보라아파트까지 오게 됐다.



주민자치센터의 맞은편 도로변은 축대(築臺)로 이루어져 있다. 이 축대의 위로 오르는 길이 양 옆으로 나있으니 참조한다. 두 길이 하나로 합쳐져 신선초등학교로 이어지는데,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잠시 후 신선초등학교의 담벼락이 나타난다. 축대를 겸하고 있는 걸로 보아 학교 부지의 경사(傾斜)가 심했던 모양이다. 길은 학교를 왼편에 끼고 나있다. 차량이 다닐 정도로 넓으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5분쯤 되었을까 자그만 공원 하나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길은 임도로 변한다. ‘복천사(福泉寺)’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그 옆에 복천사의 일반현황과 보유 문화재를 설명해놓은 안내판을 세워두었으니 시간이 나면 한번쯤 읽어볼 만도 하겠다.



소공원 앞에 또 다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봉래산 숲길을 설명하고 있으니 시간에 쫒기지만 않는다면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우리가 오르고자 하는 코스를 ‘4코스(복천사-정상)’로 분류하면서 지도에 그려 넣었다. 난이도(難易度)는 중급인데 거리는 0.8Km, 시간은 대략 30분에서 50분이 걸린단다. 이밖에도 이곳까지 올 수 있는 방법도 적어 넣었다. 들머리인 신선동 주민자치센터까지 오는 버스의 노선 번호는 물론이고, 승용차를 가져올 경우 주차할 수 있는 장소까지 지도에 그려 넣었다. 전통시장 및 횟집촌에 대한 안내도 빼먹지 않았다. 산행을 마친 후 배를 채우고 가라는 모양이다. 배가 출출해진 등산객들에게도 필요한 정보일 뿐만 아니라, 상인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정보일 테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발상이 아닐까 싶다.



임도를 따라 5분쯤 더 오르면 산자락에 철망이 둘러쳐진 게 보인다. 이곳까지 오는 길의 양편에도 역시 철망 쳐져 있었다. 산짐승의 민가 방문을 막아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본격적인 산행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먼지 털이기까지 설치해 놓은 것을 그 증거로 보면 되겠다. 아무튼 이곳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복천사로 올라가는 널찍한 길 말고도 양 옆으로 오솔길 형태의 둘레길이 나있다.



들머리에는 이정표(봉래산 정상 0.83Km, 둘레길 목장원 1.86Km) 외에도 봉래산 안내도가 세워져있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꼭 살펴보고 나설 일이다. 봉래산의 등산로를 ‘A’에서 ‘G’까지 총 7개로 나누고 이를 지도에 그려 넣은 다음 각각의 거리를 표기해 놓았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곳이 복천사 입구이니 ‘A 코스(0.8Km)’의 들머리인 셈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E 코스(1.4Km)’를 권하고 싶다. 이곳 봉래산의 명물 중 하나인 산제당(山祭堂)’을 들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왼편에 아치형으로 생긴 문() 하나가 보인다. 천정에 둘레길이라고 적힌 이름표를 매달고 있는 걸로 보아 봉래산 둘레길로 연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E 코스로 가려면 이 문으로 들어서야 한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집사람이 정상으로 올라가버린 지 이미 한참이나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평소부터 절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온 집사람인지라 국보급 문화재 한 점 보유하지 않은 복천사까지 들러볼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미 ‘A코스로 올라가버린 그녀를 놔두고 나 혼자 다른 코스를 이용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쉬운 마음에 다른 분의 산제당(山祭堂)’ 사진을 올려본다. 공식 명칭은 산제당(山祭堂)과 아씨당(阿氏堂)’,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절영도(絶影島)에 유배된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의 첩이었던 선녀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절영도(영도의 옛 이름)는 예로부터 국마(國馬)를 키우던 곳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말이 육지로 건너가면 이유 없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진 첨사로 내려온 정발(鄭撥, 1553~1592) 장군의 꿈에 선녀가 나타나 나는 본래 탐라(지금의 제주)의 여왕이었는데, 고려의 최영장군이 탐라를 점령하자 그의 첩이 됐다가 헤어졌다. 그가 영도로 유배됐다는 말을 듣고 찾아 왔지만 장군은 없었고, 결국 나는 영신이 되고 말았다. 사당을 지어 내 고혼을 위로해주면 군마가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정발은 조정에 이 사실을 아뢰었고, 조정에서는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명해 산제당과 아씨당을 짓고 해마다 두 번(음력 115, 915) 제사(祭祀)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유지된단다. 이는 결과적으로 영도 원주민들의 뿌리가 제주도로부터 건너온 이주민(移住民)들이라는 것을 전해주는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



복천사(福泉寺)부터 일단 들러보기로 한다. 도해선사(道海禪師)의 부도(浮圖)를 지나자마자 절간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3층으로 된 요사(寮舍)와 절의 대문 노릇을 하고 있는 2층짜리 천왕문(天王門)이 비탈진 산자락에 기대듯 지어져 있다. 경남 남해군에 있는 금산(錦山)이나 전남 담양군 소재 추월산(秋月山)의 보리암(菩提庵)처럼 절벽에 기댄 제비집 모양은 아니지만 높다랗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다 건물을 올린 모양새가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경내로 들어서면 5칸짜리 대웅전이 중생(衆生)을 맞는다. 비탈진 산자락에도 전각(殿閣)이 여럿 보인다. 조그만 틈새이라도 날라치면 어김없이 전각을 들어앉혔다. 말사(末寺)치고는 규모가 제법 큰 절이라 할 수 있겠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인 복천사는 고려 말기 나옹 선사(懶翁禪師)가 창건했다고 구전(口傳)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 시대 해운암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해 왔으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 억불 정책과 함께 왜적이 자주 침입한다는 이유로 절영도에 마을이 폐쇄되고 목마장으로 운영되는 동안 사찰은 명맥만 유지하다가 1800년대에 직지사의 승려 김선주가 옛 명맥을 살펴 이곳에 토굴을 만들고 수행 정진하면서 다시 수행 승려들의 발길이 머물기 시작했다고 한다. 1921년 영남 지역 전통불교 미술의 대불모(大佛母)이며 조각가였던 양완호(梁玩虎) 화상이 계곡에 흐르는 물이 좋다고 하여 복천암으로 개명하였고, 전통 불교 미술의 계승 발전을 위해 불화소(佛畵所)를 운영하면서 옛 대웅전을 중창하였다. 1973년 월공당 도해가 하안거(夏安居)부터 주지로 주석하면서 조계종 복천사로 다시 개명하고 명부전과 칠성각, 산신각, 용왕단, 요사 3, 종각, 주지실 등 중창에 버금가는 제반 불사를 원만하게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유 문화재로는 화기(畵記)를 통해 1892(고종 29)에 제작된 그림임을 알 수 있는 복천사 지장 시왕도(福泉寺地藏十王圖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61)복천사 아미타 극락회상도(福泉寺阿彌陀極樂會上圖,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62),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66), ’복천사 석가 영산회상도(福泉寺釋迦靈山會上圖,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36), ‘복천사 현왕도 및 복장 유물 일괄(福泉寺現王圖服藏遺物一括,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39)’ 등이 있다.




요사(寮舍)의 난간에 서면 북쪽 방향으로 조망이 트인다. 부산남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랄 수 있는 남항대교와 남항방파제는 물론이고, 서구 일대의 시가지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서구 주민들의 산책코스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천마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뒷동산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보니 제법 높아 보인다.



절 입구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봉래산 정상 방향의 둘레길로 진행한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둘레길에 들어서자마자 산불감시초소를 만나고, 산길은 이곳에서 상당히 가팔라진다. 하지만 그 거리가 짧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 구간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길이 둘로 나뉜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이다. 잠시 후면 둘은 다시 하나로 합쳐지기 때문이다.



둘레길로 들어선지 7분쯤 지나면 복천사 약수터가 나온다. 곱게 다듬어진 바윗돌로 축대를 쌓고 하단에 꽂아놓은 수도꼭지를 통해 물이 나오도록 했다. 그 옆에는 수질검사 성적표도 게시해 놓았다. 분기에 한 번씩 검사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음용수(飮用水)로 적합하단다. 약수터 아래의 작은 공터에는 운동기구 몇 점을 배치했다. 약수를 뜨러온 주민들이 이왕에 온 김에 몸까지 풀고 내려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이곳 약수터에서 길은 두 갈래(봉래산 정상0.6Km/ 목장원1.06Km/ 복천사0.23Km)로 나뉜다. 목장원으로 이어지는 둘레길과 헤어진다는 얘기이다.




조금 더 오르니 오른편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시멘트 계단을 오르니 바위 표면에 양각(陽刻) 기법으로 뭔가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제단(祭壇)도 만들어져 있다.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영험한 것이 새겨져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자세히 살펴보니 무장(武將) 차림을 한 남자가 새겨져 있는데, 투구와 갑옷을 착용한 채로 오른손으로 힘찬 도약을 의미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왼손이 아령을 들고 있는 게 아닌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드는 마애상(磨崖像)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마애상(磨崖像)의 높이는 대략 3,5m, 폭은 2m가 조금 넘겠다. 이쯤 해서 전문가의 글을 옮겨본다. ‘제작 시기는 일제 강점기~6.25전후로 추정이 되며 사회적 혼란기에 자식의 무운장구와 가문의 번성을 기원하면서 조성한 마애신상(磨崖神像)이라고 추정을 할 수가 있으며, 바위 아래에 남근을 상징하는 듯한 바위가 받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기자상(祈子像)이라 볼 수도 있다



이후부터는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도 힘들 경우에는 잠시 쉬어가면 된다. 마침맞게 부산남항 쪽으로 조망(眺望)까지 트이니 망설이지 말고 발걸음을 멈춰보자.



그렇게 15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능선 삼거리(이정표 : 봉래산 정상0.23Km/ 백련산1.5Km/ 복천사0.64Km)에 올라선다. 오른편은 이곳 봉래산을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이라 쓰고 있는 백련사(白蓮寺)로 연결된다. 정상으로 가려면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함은 물론이다.



능선에 오르자 바위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다. 흙산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산 치고는 그 밀도(密度)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 바위들 사이로 난 길을 잠시 걸으니 이번에는 사거리(봉래산 정상0.13Km/ 산제당1Km/ 함지골 청소년수련원1.1Km/ 복천사0.74Km)가 나온다. 왼편은 들러보지 못함을 것을 아쉬워했던 산제당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사거리를 지나면서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부산 남항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자갈치시장과 영도대교, 남항대교가 둥그렇게 둘러싼 부산 남항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해전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승리를 거듭해 한산도와 안골포해전을 통해 제해권을 장악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일본군의 근거지인 부산을 공격해서 일본 주둔군과 본국의 연락을 두절시키기 위해 824일 부산포로 향했다. 부산포해전은 부산포와 절영도 앞바다에 정박해있던 일본군 함대를 기습하여 대파한 전투이다. 이 승리로 조선군은 남해상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때가 1592105일이다. 부산시는 이 날을 시민의 날로 정하고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능선에 오른 지 8분이 지나면 큼지막한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어서 조봉(祖峰), 즉 봉래산의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45분 만이다. 참고로 봉래산은 절영진의 3대 첨사인 임익준(任翊準)이 산세가 마치 봉황이 날아드는 것 같다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봉래산은 본래 도교(道敎)에서 신선이 살고 있는 산으로, 중국 전설에 나타나는 삼신산(三神山 :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가운데 하나다. 동쪽 바다의 가운데 있으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산을 신성시 여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고갈산 또는 고깔산이라 불리었다. 산의 형태가 고깔을 닮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지만 한자명 표기는 목이 마른 산을 뜻하는 고갈산(枯渴山)이었다. 향토사학자들이 땅의 기()를 없애고자 인위적으로 붙여진 지명으로 추정하는 근거이다. 해방 이후에도 산 모양을 따서 붙은 지명으로 알아 고갈산으로 불리다가, 부정적 의미가 알려지면서 봉래산으로 개칭되었다. 고갈산이 봉래산으로 바뀐 시기는 확인되지 않으나, 1980년대 초반의 지형도에서 고갈산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정상은 두세 평쯤 되는 공터를 바위가 빙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반석(盤石)을 깔아놓은 공터에는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이정표(봉래산 손봉 0.85km, 목장원 1.61km, 백련사 1.48km, 봉래산체육공원 0.46km)도 보인다. ‘봉래산 영도할매 전설을 적은 안내판과 함께 정상으로 오르는 입구에다 세워놓았다. 아무래도 비좁은 정상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 그 옆에는 봉래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참고로 정상에 설치된 삼각점은 우리나라 토지 측량의 기준점인 '대삼각 본점'이다. 19106월에 일본 토지국이 설치했는데, 이 삼각점을 기준으로 한반도 전체에 삼각 본점과 소 삼각점을 만들었다. 삼각점의 시조인 셈이다.



정상석 뒤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답답한 북쪽 방향의 조망(眺望)이 조금이라도 트일까 해서 바위 위로 오르려는데 주민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나무라신다. 영도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는 할매바위라서 올라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 할매바위는 영도에서 살던 주민이 외지로 나가면 망하게 한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섬이다 보니 사람이 귀해 외지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나온 얘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나만은 아닌가 보다. 할매바위가 온통 빤질빤질하게 윤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부산의 산과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오른편은 감만동과 영도를 잇는 부산항대교를 중심으로 왼쪽에 용두산공원부터 오밀조밀한 도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쪽으로는 신선대부두에서 육지 끝자락의 오륙도까지 시원하게 펼쳐진다. 한없이 복잡하기만 한 부산 원도심의 지형과 바다물길도 대충 파악이 된다. 왼편의 남항 쪽도 눈에 들어오기는 한다. 하지만 주변의 나무들 때문에 온전한 모습은 아니다.




나같이 부산에 문외한인 사람들을 위해서는 조망도를 만들어 두었다. 북서쪽(남항 방향)과 남동쪽(부산만 방향)에 산과 바다, 그리고 주요시설 등을 꼼꼼히도 표시해놓았다. 실경(實景)을 눈앞에 펼쳐놓고 지명을 대비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산행을 이어간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손봉방향의 능선이다. 작은 바위들이 듬성듬성 뿌려져있는 곳을 지나니 느닷없이 시야가 활짝 열린다. 드넓은 바다로 눈길을 돌리니 화물선과 원양어선 등 대형 선박들이 섬처럼 무리를 이루며 떠 있다. 수리나 급유를 위해 부산항을 찾아오는 배들이 잠시 닻을 내리고 머무는 곳, 묘박지(錨泊地)란다. 그 오른편에는 영도구 영선동과 서구 암남동을 잇는 남항대교가 사선을 그으며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다. 바다 위 뭍으로 진정산, 천마산, 아미산이 사이좋게 산줄기를 이뤘다.




잠시 후 산불감시초소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안부에 내려선다. 어지러울 정도로 갈림길이 많이 나있는 안부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정표(손봉 0.68km/ 광명고등학교 0.71km/ 불로초공원 0.55Km/ 복천사 0.84Km/ 목장원 1.46km/ 봉래산 정상 0.2km)도 방향을 여섯 곳으로 나누고 있다. ‘육거리인 셈이다. 이곳에는 봉래산 둘레길 안내도와 이정표 외에도 정자를 짓고 평상과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여러 곳에서 올라오는 주민들이 함께 모이는 만남의 광장으로 봐도 되겠다.



안부를 지나자 편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그 범위는 비록 넓지 않지만 나무가 내뿜는 향기는 결코 작지가 않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이 여간 진한 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문득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이런 곳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하는 속설이 사실이었던가 보다.



잠시 후 아들 봉우리인 자봉(子峰) 정상에 올라선다. 할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는 조봉(祖峰), 즉 봉래산 정상을 출발한지 10분 만이다. 이층으로 지어진 정자(亭子)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너른 공터에는 정상표지석 말고도 산불감시초소가 지어져 있다. 옆에는 산불조심깃발이 서너 개나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이런 풍경은 봉래산의 곳곳에서 눈에 띈다. 산불 방지에 심혈을 기울이는 영도구청의 노력을 보여주는 한 단면(斷面)이라 할 수 있겠다.



정자에 오르고 본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망이 시원찮다. 오른편(서쪽)을 보면 멀리 낙남정맥의 불모산, 용지봉이 어슴푸레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남항대교와 부산시가지는 주변의 나무들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렸다. 부산만과 오륙도 방향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저 다대포 앞바다만이 제대로 나타날 따름이다. 몰운대 앞바다에 떠있는 취섬과 동섬, 모섬 등이 바다여행에 나선 돛단배처럼 파도 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손봉으로 향한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이 능선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수도 없이 널려있다. 얼핏 보면 암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진행방향에 보이는 봉우리를 오른편으로 우회(迂回)하자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송도해안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해안의 뒤에는 진정산과 장군산이 사이좋게 산줄기를 이루고,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뭍의 끝자락에는 두도(頭島)’가 나도 있다며 손짓을 한다. 갈매기 등 바닷새가 많이 서식한다고 해서 갈매기의 천국이라 불리는 섬이다.




손봉(孫峰)의 정상은 전망바위의 바로 옆이다. 자봉에서 손봉까지는 8분이 걸렸다. 정상에는 작은 돌들을 쌓아 높이가 1m쯤 되는 대()를 만들었다. 자칫 봉화대의 흔적이 아닐까 오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 봉화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는 것을 참조해둔다.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은 그 아래에 세워져 있다. 앞뒤 사진들과 중복되기에 게재는 생략했지만 손봉에서의 조망은 빼어난 편이다. 널따랗게 펼쳐지는 바다를 실컷 볼 수 있다. 날이 좋으면 일본 대마도까지 보인다기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평선 끝까지 시야를 넓혀봤지만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참고로 부산을 '삼포지향(三抱之鄕)'의 도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산과 강, 그리고 바다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는 이곳 봉래산이 삼포지항을 가장 속속들이 조망할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마침 시간까지 느긋하니 서둘 필요 없이 조망을 즐겨보자. 손봉 이후로는 그런 전망대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손봉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목장원으로 내려가는 길과 다른 하나는 고신대로 내려가는 길이다. 일단은 고신대 방향으로 코스를 잡는다. 진행방향으로 시야가 활짝 열리면서 한국해양대학교가 있는 조도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한마디로 멋진 하산길이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길은 또 다시 둘로 나뉜다. 고신대로 내려가는 왼편 길 말고도 바위지대로도 길이 하나 더 나있는 것이다. 이곳도 역시 이정표는 없다. 상황도 알아볼 겸해서 바위지대로 나아가니 시야가 확 열리면서 태종대 방향이 눈에 들어온다. 그 왼편에는 부산만과 신선대부두에서 육지 끝자락인 오륙도까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태종대로 이어지는 능선의 오른편에는 중리바닷가가 자리 잡고 있다. 참고로 이 바위의 아래로도 희미하게나마 길이 나있다. 하지만 길이 위험하니 초심자들에게는 금물이라 하겠다.




하산을 시작한다. 고신대 방향이다. 길은 처음부터 가파르기 짝이 없다. 거기다 너덜구간까지 겹치다보니 여간 위험스러운 게 아니다. 지자체에서도 이런 점이 부담스러웠던가 보다. 길 양편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이를 의지해가며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10분 남짓 내려섰을까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고신대는 곧장 내려가야 하지만 오른편으로 난 길을 잠시 따라본다. 넓게 펼쳐진 너덜지대에 뭔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다가가보니 돌탑들이 여럿 세워져 있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정성들여 쌓아올린 흔적이 역력한 탑들이다. 저 탑들 하나하나에는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 차곡차곡 쌓여있을 것이다. 그 위에 내 소원 하나 살짝 얹어본다. 우리 가족의 믿음과 소망, 사랑, 그리고 건강을 담아서 말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고신대방향으로 곧장 직진한다. 잠시 후 이름 모를 아파트의 울타리 옆 삼거리(이정표 : 목장원/ 해돋이배수지/ 봉래산 정상)에서 해돋이배수지로 연결되는 길이 왼편으로 갈려나간다.



목장원으로 방향을 잡아 조금 더 내려가면 산불감시초소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거리(이정표 : 고신대학교/ 목장원/ 해돋이배수지/ 봉래산 정상)를 만난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목장원으로 향한다. ‘봉래산 둘레길을 따르는 것이다. 참고로 봉래산 둘레길은 영도 동삼동 목장원에서 출발해 원뿔형의 봉래산을 나선형으로 한 바퀴 도는 6.0의 길로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본래 옛 등산로의 오래된 길을 정비하고 하늘전망대, 삼림욕장, 안내 푯말 등을 세워 트레킹 코스를 조성했다. 길의 70% 이상이 나무 그늘이며 약수터가 곳곳에 있어 명품 둘레길 중 하나로 손꼽힌다.



둘레길은 봉래산의 산자락을 옆으로 꿰며 나있다. 그러다보니 오르내림이 있을 리가 없다.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면서 걸어도 될 만큼 길의 폭도 넓다. 거기다 가끔은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는 공간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만큼 잘 가꾸어 놓았다는 얘기이다. 여느 유명 둘레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국가지점번호(마라 4225 7649)가 적혀있는 이정표(목장원/ 반도보라아파트/ 봉래산 정상/ 해돋이배주지)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2분쯤 내려오면 산불감시초소가 보인다. 초소 뒤에는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놓았다.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복천사 앞에서 보았던 풍경이다.



산행날머리는 반도보라아파트 옆 도로(영도구 동삼동)

울타리에 난 문을 통과하면 3분쯤 후 반도보라아파트 옆 도로에 내려서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중간에 포켓볼(pocket billard) 경기장으로 보이는 체육시설을 지났음은 물론이다. 날머리에도 봉래산 숲길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곳 절영공원에서 정상에 이르는 구간이 ’11코스인데 거리는 1.5Km라고 한다. 그런데 난이도를 ()‘으로 표기해 놓았다. 아까 우리가 내려온 고신대에서 정상으로 연결되는 길만 험한 줄 알았는데 이 코스도 무척 험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1시간 50분이 걸렸다. 중간에 감안할 만한 멈춤도 없었으니 오롯이 걷는 데만 소요된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다만 급할 것 없이 서서히 걸었음은 참조해야 한다.



군지산(白屛山, 534.9m)

 

산행일 : ‘18. 1. 15()

소재지 : 경남 양산시 명곡동과 동면의 경계

산행코스 : 주차장치유의길 분기점법기전망대군지산(운봉산)하늘농장 갈림길MTB임도수원지방향 둘레길법기수원지(산행시간 : 2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누군가는 군지산을 일러 그런 산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얼마나 입소문을 타지 않았으면 그런 말까지 나돌겠는가. 그 말은 볼거리가 너무 빈약하다는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 낙동정맥이 천성산을 지나 뻗어 내린 지능선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산이기 때문이다. 조망 또한 보잘 것이 없다. 그러니 낙동정맥 마룻금을 종주하는 산꾼들을 제외하고는 찾는 이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입소문을 타지 않은 이유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람으로 넘친다고 한다.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법기수원지가 완공된 지 79년 만인 1911년에 금단(禁斷)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수원지를 찾아온 사람들이 이왕에 온 김에 군지산까지 오른다는 것이다. 양산군의 개발노력도 힘을 보탰다. 능선과 산자락을 따라 법기치유의 길양산 누리길이라는 명품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산행들머리는 법기수원지 주차장(양산시 동면 법기리)

경부고속도로 양산 IC에서 내려와 35번 국도를 이용해 양산시내로 들어온 다음, 북부천을 가로지르는 신기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60번 지방도를 타고 정관(부산시 기장군)방면으로 달리다보면 법기교차로(양산시 동면 개곡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빠져나와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법기수원지(法基水源池) 바로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이 주차장은 유료주차장이니 참조한다.



주차장 앞에 법기 치유의 길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꼼꼼히 살펴보고 출발하는 게 좋겠다. 둘레길이 여러 갈래로 나있어 자칫 방심하다가는 엉뚱한 곳으로 진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2014년엔가 법기치유의 길조성사업을 시작한다는 기사(記事)를 읽은 것 같은데, 그 사업이 마무리가 되었나 보다. 당시 기사는 누리길 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사업이라고 했다. 국토부의 개발제한구역 내 문화경관 사업으로 선정됨으로써 확보된 7억 원의 사업비를 이용해, 법기수원지와 천성산 주변 등산로와 연계해 명품 치유의 길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8Km의 누리길 조성 및 정비와 쉼터, 전망대 등의 주요 사업내용도 함께 전했었다. 참고로 법기치유의 길은 코스만 다를 뿐 주변 산세와 경관은 비슷하다. 따라서 어느 코스를 선택하든 법기 치유의 길 특유의 절경과 건강한 숲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주차장 입구에서 오른편은 법기수원지로 가는 길이다. 법기수원지로 들어가지 않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건너편 산자락에 놓인 데크길이 보인다. ‘법기 치유의 길A코스인 법기 조망길이다. 이 길을 따라 0.5Km정도 오르면 수자원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군지산(운봉산)으로 가려면 안내소의 반대방향으로 내려가야 한다. 20m쯤 내려가면 본법마을 특산물 공동판매장 앞에서 오른편으로 길(자동차용 도로)이 하나 나뉘는데 이 길로 들어가면 된다. 20m쯤 더 들어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치유의 길로 연결되는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이정표(법기치유의 길/ 법기수원지)가 세워져 있다는 것을 참조하면 되겠다.



잠시 후 본법(本法) 마을이 나온다. 본법마을의 역사는 5세기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인근에 위치한 법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및 고분의 축조 형태에서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후 주거 상황 및 마을의 명칭에 대한 구전이나 문헌적 자료는 현재 전하지 않고 있어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본법마을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조선 철종 때이다. 1860(철종 11) 이전에는 본법마을을 본의곡(本義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본의곡이란 ()를 본()으로 하는 곳이다란 뜻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어 추정만 할 뿐이다. 1872(고종 9)에는 본의리(本義里)로 되었다가 본법으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마을 안길이 운치가 있어 보인다.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돌담이 고풍스럽기까지 하다. 담장은 집 둘레를 둘러막아 벽처럼 쌓은 것으로 대지경계를 이룬다. 도난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부속 공작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외담(한 줄로만 쌓아올린 담)과 맞담(돌멩이를 겹으로 마주 놓아 쌓은 돌담)으로 구분되나 담장의 대부분은 맞담으로 보면 되겠다. 이곳 역시 맞담인데, 삐뚤삐뚤하고 불규칙적이며 비정형적이고 아무렇게나 쌓은 것 같지만, 그 자연스러움 안에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하지만 돌담에 매달려 있는 경고판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이 길이 기존 ‘B코스 진입로이지만 개인의 사유지이니 통행을 말라는 것이다.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조금 손해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또 다른 측면의 이기심일까?



마을의 끄트머리쯤에 이르자 철문(鐵門)이 하나 나타난다. 문 뒤의 산죽(山竹) 사이로 길이 보이기에 텃밭에서 일하고 있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지나가도 된단다. 고맙게도 둘레길로 연결된다는 설명까지 꼼꼼히 해주신다. 하지만 이 문은 평소에는 닫혀 있는 게 분명하다. 손잡이 부분이 반질반질 윤이 나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산죽 숲을 지나자 삼나무(杉木) 한 그루가 외롭게 길손을 맞는다. 그런데 그 굵기가 자못 거대하다. 이곳 둘레길의 이름이 치유의 길이라고 하더니 맛보기로 보여주는 게나 아닌지 모르겠다. 삼나무 역시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나타나는 밭두렁을 지나자 편백나무(扁柏, Japanese false cypress) 숲이다. 그다지 넓지 않은 범위이지만 코끝을 스쳐가는 향기는 무척 짙다. 편백나무 숲길을 걷노라면 온몸으로 퍼지는 송진 내음에 황홀함마저 느끼게 된다. 천국이 따로 없다. 세상 시름 다 잊고 솔향기에 취해 그저 천천히 걷고 또 걷고 싶다. 더구나 저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가득 들어있을 게 분명하지 않는가. 피톤치드는 나무와 식물이 해충이나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스스로 만들어내는 휘발성 물질이다. 편백나무의 피톤치드는 다른 나무에 비해 월등한 효과가 있어 각종 감염 질환이나 아토피 질환 등은 물론 면역력을 좋게 해줄 뿐 아니라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편백나무가 자연의 명의(名醫)인 셈이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자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지만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아까 들머리에서 보았던 안내도를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방향을 틀자마자 이번에는 대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바람에 부대낀 대나무들이 서로간의 몸을 비벼대며 내는 소리가 무척 고운 구간이다.



대나무 숲을 지나자마자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이정표( 법기수원지 분기점0.1Km/ 임도방향 둘레길2.0Km/ 편백숲길(법기전망대)1.0Km) 외에도 안내판 하나가 더 세워져 있다. 둘레길인 법기치유의 길중에서도 편백 숲길을 콕 찍어서 설명해주고 있는 안내판이다.



안내판은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편백 숲길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아까 만났던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진행할 경우 원두막도 나오는 모양이다. 참고로 법기 치유의 길은 왕복 40분부터 4~5시간이 소요되는 곳까지 총 3가지 코스로 구성돼 있다. ‘명장정수사업소 법기수원지소에서 수원지 전망대 간 A코스(0.5)와 법기 편백 숲길 B코스(1.3), 그리고 법기 둘레길 C코스(6.5) 3곳이다. A코스는 왕복 40, B코스는 왕복 1시간 30, C코스는 4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개인 취향과 체력에 따라 코스를 고르면 된다.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이다. 그런데 이정표(낙동정맥(운봉산)1.4Km/ 법기수원지0.38Km)에는 오른편 방향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아니 거기다 더해 숲길의 통행을 제한한다는 안내판까지 따로 세워두었다. 그 이유를 사유지로 들고 있는 걸로 보아 아까 마을 입구에서 보았던 안내판과 같은 맥락인 모양이다. 이곳에는 또 다른 안내판도 보인다. 수도법에 따라 수원지 내의 진입을 금지한단다. 이를 어길 시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서슬 시퍼런 경고까지 하고 있다.



이제부터 능선을 따른다. 오른편에는 철조망이 길게 처져있다. 수원지(水源池)로의 진입을 막고 있는 모양이다. 누군가 법기수원지의 물은 소독을 하지 않고도 먹을 수가 있다고 했다. 하긴 저 정도로 통제를 하고 있기에 그런 얘기가 나돌 수 있었을 것이다.



길은 엄청나게 가파르다. 문득 코에서 땅 냄새가 난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버거울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라는 얘기이다. 통나무 계단이 놓여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또한 그 오르막이 15분이 채 안되어 끝난다는 것도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길은 서두를수록 손해다. 그저 서서히, 최대한으로 속도를 줄이면서 오르고 볼 일이다.



숨이 턱에 차게 치고 오르면 법기전망대이다. 데크로 만든 전망대와 이정표(낙동정맥 운봉산1.1Km/ 법기 치유의 길/ 법기수원지0.7Km) 외에도 법기수원지에 관한 제반 정보를 적어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부산에 사는 일본인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1927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5년 후인 1932년에 준공한 저수지(貯水池)라고 한다. 현재는 양산시 창기마을 및 금정구 선동, 남산동 등 부산시 일원의 7천 세대에 물을 공급하고 있단다.



전망대에 오르면 법기수원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런데 저수지가 바닥을 통째로 드러내놓고 있다. 물기 한 점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아까 흙을 가득 실은 트럭이 수원지 진입로를 들락거리더니 준설공사(浚渫工事)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밋밋하던 산길인가 싶던 산길이 또 다시 가팔라진다. 아까보다는 못하지만 만만히 볼만한 경사는 아니다. 이곳도 역시 쉬엄쉬엄 오르는 게 옳은 방법일 것 같다. 그래도 힘들다면 뒤돌아서 주변 경관이라도 살펴보자. 법기수원지 건너편에 있는 천성산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올 것이다.



느긋하게 5분쯤 오르니 굵직한 바위들 옆에 오두막 한 채가 지어져 있다. 커다란 오두막 옆에는 통나무 의자와 벤치까지 겹으로 놓아두었다. 느긋하게 쉬면서 조망을 즐겨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오두막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잡목(雜木)들에 가린 법기수원지가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조금은 아쉽지만, 그 뒤에 있는 천성산은 아까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시야(視野)에 잡힌다. 그런데 천성산의 송전탑(送電塔)이 유난히 크게 보인다. 거리가 꽤 먼데도 선명하다. ‘대못을 박은 듯 산의 정기를 막았다는 누군가의 넋두리를 그냥 흘려들었었는데 오늘 보니 허투루 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길을 5분쯤 걸으면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봉우리 위에 오르게 되고, 이어서 나타나는 돌탑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MTB임도 갈림길’(이정표 : 낙동정맥 운봉산0.47Km/ MTB임도1.3Km/ 법기수원지1.3Km)을 만난다. 그런데 이정표를 바라보던 집사람이 코웃음을 치는 게 아닌가.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이정표의 거리표시가 500m나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은 ‘119 구호지점 표시목(운봉산 1-12)’이 증명해 주었다. 50m쯤 더 걸었는데도 운봉산까지의 거리가 600m로 오히려 130m가 늘어나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잠시 후,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낙동정맥 다람쥐캠프장1.9Km/ 법기치유의 길0.3Km/ 법기수원지1.8Km)를 만난다. 이번의 이정표도 쓸모없기는 매한가지이다. 말도 안 되는 거리표시는 그냥 넘긴다고 해도, 그동안 쪽 표기해오던 운봉산의 방향까지 빼먹어버렸다. 국민의 혈세(血稅)로 만든 시설일진데 조금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잠시 아래로 떨어지던 산길이 또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가파르기 짝이 없는 것이 맨입으로 정상을 내주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입에서 단내를 내야만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르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16분쯤 오르자 드디어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이다. 정상은 서너 평쯤 됨직한 공터로 이루어졌는데 시멘트 기둥 모양의 작고 오래된 정상표지석과 삼각점, 그리고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사각의 아크릴판도 보이지만 글씨가 다 지워져버린 탓에 용도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정상석이 이상하다. ‘군지산이 아니라 운봉산으로 표기가 되어있는 것이다. 국토지리 정보 업무를 총괄하는 국립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군지산으로 등재가 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하긴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시설물들, 즉 양산시가 만든 '양산누리길 종합안내도'와 이정표, 그리고 양산소방서의 '구호지점 표지목'에도 하나 같이 운봉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느닷없이 자신들의 이름을 붙여버렸다는 부산의 어느 산악회를 나무랄 일도 아니라는 얘기이다. 이런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관할 지자체인 양산시에서 나서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국립정보원의 지명(地名 : 군지산)을 따르던지, 아니면 국립정보원에 요청해 군지산운봉산으로 바꿔놓는 요식행위(要式行爲)를 해줄 것을 지면을 통해서나마 요청해본다.



눈에 익은 팻말 하나가 눈에 띈다. ‘·라는 아호(雅號)를 쓰고 있는 최남준씨가 매달아놓은 것인데, ‘낙동정맥 군지산 634.9m’라고 산의 이름과 높이를 제대로 적었다. 국제신문의 근교산행 팀산행대장을 역임했던 분답다. 덕분에 정상석으로 인해 심란해져 있던 마음이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 같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보잘 것이 없다. 나무들에 포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까보다 훨씬 좁아진 천성산 방향의 시계(視界)는 그나마 조금 낫다. 그 반대방향은 나뭇가지가 허용해주는 조금만 틈새로만 조망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백운산과 망월산, 그 뒤로 달음산과 동해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어느 산을 지칭하는지는 모르겠다. 연무(煙霧) 때문일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다람쥐캠프장 분기점1.9Km/ 법기임도0.6Km/ 법기치유의 길(수원지방향)1.7Km)가 가리키고 있는 다람쥐캠프장 방향이다. 비록 이정표에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지만 낙동정맥의 마룻금을 잠시나마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일단 곱다. 두세 명이서 얘기를 나누면서 걸어도 될 만큼 널찍할 뿐만 아니라 경사까지 완만하다. 거기다 길가에는 억새까지 무리를 지어 피어나있다. 눈요깃거리까지 될 것 같다는 얘기이다. 낙동정맥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낙동정맥(洛東正脈)이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구봉산(九峰山 : 강원도 태백시)에서 분기(分岐)하여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에서 숨을 다하는 약 370의 산줄기를 말하며, 주요 산으로는 백병산과 주왕산, 가지산, 취서산, 금정산 등이 있다.



5분쯤 걷다가 발길을 돌리기로 한다. 느닷없이 법기치유의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느긋한 산행을 즐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보는 게 옳겠다. 정상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법기임도 방향으로 향한다. 양산 시내로 빠지는 능선이다. 이 코스도 역시 낙동정맥 마룻금이지만 주변 풍경은 반대편 능선과는 사뭇 다르다. 임도처럼 넓던 산길이 전형적인 오솔길로 변해있는 것이다. 그렇게 4분쯤 걷자 하늘농장 갈림길’(이정표 : 낙동정맥 남락고개0.35Km/ 하늘농장1.4Km/ 운봉산0.4Km)이 나온다.



왼편 낙동정맥 마룻금을 따라 남락고개로 향한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파르다. 지자체에서도 그 가파름이 못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길가에 밧줄난간을 설치해 밧줄에 의지해 오로내리도록 했다. 고마운 일이다.



밧줄에 매달려 5분쯤 낑낑대다 보면 너럭바위에 내려선다. 서너 개의 바위들이 무리를 지었는데 하나 같이 위가 반반한 것이, 일행들끼리 점심상 차리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다. 이런 좋은 장소를 그냥 지나칠 집사람이 아니다. ‘식탁바위라는 이름까지 떡 하니 붙이더니 쪼르르 바위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본다. 마침 조망까지 트이니 준비해온 간식을 먹고 가자는 것이다.



꿀맛 같은 휴식을 마친 후 산행을 이어간다. 나머지 구간도 역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밧줄난간을 만들어 놓은 것 역시 같다.



그렇게 15분쯤 내려서면 아스팔트 포장 임도를 만나게 된다. ‘법기치유의 길C코스인 법기둘레길이 교차되는 곳이다. 길이 다섯 개로 나뉘는 이곳이선지 이정표가 3(#1 : 낙동정맥 남락고개 5.1Km/ 운봉산 0.6Km, #2 : 솔향둘레길/ 하늘마루길 650m/ 법기방향 임도, #3 : 수원지방향 둘레길 2.3Km/ 법기터널 방향 둘레길 3.5Km)나 세워져 있는가 하면 안내도도 2개가 보이는데, ‘법기치유의 길양산 누리길에 대한 안내를 각각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걸어내려왔던 길이 양산누리길이었던 모양이다.



#3의 이정표가 지시하고 있는 수원지방향 둘레길을 따른다. 산허리를 헤집으며 나있는 산길은 한마디로 잘 다듬어져 있다.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새로 낸 오솔길이 아닐까 싶다. 길 주변의 산자락에는 어린 편백나무묘목(苗木)이 널따랗게 심어져 있다. ‘치유의 길이라는 둘레길의 이름에 걸맞게 숲을 가꾸어나가고 있나보다.



편백나무 조림지(造林地) 아래에도 오두막이 한 채 지어져 있다. ‘법기치유의 길안내판도 보인다. ‘명품 자연생태 숲길이라며 잔뜩 자랑을 늘어놓고 있다. 하단에는 이곳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줄줄이 적어놓았다.



산행을 이어간다. 아니 이제부터는 산책이라고 하는 게 더 옳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딱 걷기 좋을 만큼의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기분 좋은 산길이다. 언제부턴가 나무들까지 소나무로 변해있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이 짙다. 행복하다. 이래서 치유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나 보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중간에 운봉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수원지방향 둘레길1.8Km/ 운봉산0.8Km/ 임도방향 둘레길0.5Km)를 만난다는 것을 말이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삼나무(杉木) 숲이 넓게 펼쳐진다. 삼나무(Japanese cedar)의 기원은 일본의 고대 역사책 일본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대(神代)’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鳴尊)’라는 신이 나오는데,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라고 하여 자신의 수염을 뽑아 흩어지게 하니 삼나무가 되었으며, 가슴의 털을 뽑아 흩으니 편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보아 삼나무는 일본의 고유종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 대량으로 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00년대 초부터다. 곧게 빨리 자라는 나무이니 재목을 생산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다만 추위를 싫어하므로 경남과 전남의 해안지방에서부터 섬 지방에 주로 심었다. 하지만 삼나무는 꽃가루가 심한 알레르기를 불러일으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렇게 산책 삼아 걷기를 25분여, 삼거리(이정표 : 수원지방향 둘레길0.84Km, 편백숲길 쉼터 0.5Km/ 법기전망대0.17Km/ 임도방향 둘레길1.5Km)를 만난다. 왼편은 아까 정상으로 오를 때 만났던 법기전망대로 오르는 길이다.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수원지방향 둘레길0.8Km/ 편백숲길 쉼터0.46Km/ 법기전망대0.21Km)가 나온다. 편백숲길과 둘레길이 만나는 지점이다. 어디로 갈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수원지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편백숲길을 잠시 따라보니 수원지와는 정 반대방향으로 길이 나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린 편백 숲길의 진면모를 볼 수 없었다.



▼ 10분쯤 더 걷자 눈에 익은 풍경이 나타난다. 아까 정상으로 오를 때 지나갔던 길이다. 삼거리에서 마을 안길로 연결되는 길을 막아 놓은 처사에 대해 다시 한 번 눈살을 찌푸리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아까 올라왔던 코스를 거꾸로 내려가면 10분 후에는 법기수원지 입구에 이르게 된다. 산행이 끝났다는 얘기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 20분이 걸린 셈이다.



법기수원지에 이르니 키 낮은 철 대문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 사람이 들고 나는 쪽문에는 청년들이 지키고 서 있다. 짊어지고 있는 배낭을 맡기고 들어가라고 한다. 분실할 염려도 없다면서 관리실 옆 보관함을 보여준다. 그래, 열쇠까지 달려있으니 안심해도 되겠다. 아무튼 어떠한 소소한 음식물도, 돗자리도 금지란다. 때문에 안에는 화장실 하나와 음수대 하나가 있을 뿐 휴지통 하나 없다.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나가는 곳인 셈이다. ‘유원지가 아니라 수원지법기수원지의 특징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수원지는 1932년에 축조된 이래 상수원 보호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이 차단되어 오다가, 79년 만인 20117월에야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비록 개방은 시켰지만 옛날처럼 깨끗하게 보존해가고 싶다는 의지일 것이다. 참고로 법기수원지는 흙댐(土堰堤)으로, 관리 면적은 토지 136필지(681)이며, 최고 수위 197.23m, 수심 14.7m, 높이 21m, 길이 260m, 둘레 6m이다. 총저수량 157만 톤(유호 저수량 1442000 ), 유역 면적 6.85, 만수 면적 191000, 만수위 197.25m(해수면 기준)이다. 상수 원수의 공급 능력은 하루 8,000+5%라고 한다. 부산광역시 상수도사업본부에서 관리하며 수원지의 물은 범어사 정수장으로 보내어 정수된 뒤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노포동, 청룡동, 남산동 일대 약 7,000여 세대에 공급되고 있단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주변 풍광에 압도되어 버린다. 거대한 히말라야시다들이 빙 둘러서 길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숲 앞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그러나 어느 곳으로 가야할 지를 놓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한 바퀴를 돌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길이 나뉘는 곳에 말라죽은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 앞에는 벼락 맞은 나무라고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다. 문득 도장(圖章)의 재료로 최고라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 음지쪽 가지가 생각나 팻말을 살펴본다. 하지만 주변의 나무들과 함께 심었던 히말라야시다가 벼락에 맞아 죽은 것이란다. 괜히 헛물만 켰나보다.



왼편은 푸름으로 짙게 물든 숲속으로 들어서는 길이다. 침엽수림인 편백나무를 비롯해 높이 30~40m에 달하는 히말라야시다(개잎갈나무) 등이 꽉 들어찬 숲이다. 양 옆으로 히말라야시다가 하늘을 찌르며 도열해 있다. 너무 높고, 너무 굵고, 너무 곧아서 혹시 동화나라에라도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그들 뒤 좌우 숲속에는 편백나무가 총총히 들어서 있다. 역시 너무 높고 너무 곧다. 숲은 빽빽한 긴 그림자로 어둑어둑하고 서늘한 기운이 짐승처럼 감돌고 있다. 그러나 길은 넉넉히 넓어 한 걸음 물러선 압도다.



이곳의 나무들은 댐 건설 당시 심어진 것으로 수령이 80년에서 130년 이상이다. 7644그루의 나무가 숲을 이루었는데 편백나무 413그루, 히말라야시다 59그루, 벚나무 131그루, 추자(가래)나무 25그루, 반송 14그루, 그리고 은행나무와 감나무가 각각 1그루 있다. 규모가 대단한 것도 아니고, 나무 둥치들 사이로 댐 사면이 언뜻언뜻 보이는데도 숲은 깊다.




난 오른편으로 향한다. 벚나무 숲길이다. 봄이면 환한 연두 빛을 자랑하겠지만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다. 조금은 쓸쓸해 보이지만 어쩌겠는가. 보다 큰 감탄은 조금 뒤로 미루고 싶으니 말이다. 아무튼 전면에 높게 쌓아올린 법기수원지의 댐이 보인다. 법기수원지는 일제강점기 때 축조된 저수지로 1927년 착공해 32년에 완공되었다. 당시에는 국가적 규모의 토목공사였다고 한다. 완공과 동시에 상수원 보호를 위해 문이 잠겼고, 20117월 개방되기까지 79년간 철저하게 금단의 땅이었다.



길은 저수지 댐(dam)의 오른쪽 아래에 닿는다. 그곳에 석조 구조물이 만들어져 있다. 상방을 아치모양으로 꾸민 입구에 철문이 단단히 잠겨 있다. 법기수원지의 취수터널이다. 문의 상부에 테두리까지 조각한 석판이 부착되어 있고 거기에 원정윤군생(源淨潤群生)’이라는 글자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깨끗한 물은 많은 생명체를 윤택하게 한다는 뜻이다. 댐 완공 때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쓴 글이라고 한다. 그는 일제시대 제3대와 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람, 독립투사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에도 살아남았던 인물이며, 우리 민족문화의 말살 정책을 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법기수원지는 비록 일제의 주도하에 건설되었지만 건설의 주역은 강제 동원되었던 우리의 선조들이다. 맨손으로 흙을 돋우고 맨손으로 저 나무들을 심었을 그들이다. 나무들이 하늘만 보며 자라는 동안 우리는 독립을 이루었고 사이토 마코토는 1936년 일본 군부의 급진파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었다.



취수시설의 오른편에 놓인 나무계단을 오르면 댐(dam)의 위이다. 댐의 위에는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다. 판석(板石)으로 바닥을 깔고 길의 양 옆은 목책 난간(木柵 欄干)을 둘렀다. 이 댐은 흙으로 쌓았단다. 높이 21m, 길이 260m, 둘레 6, 총저수량은 1507t에 달한다.



댐 마루 둑길에는 밑동에서부터 줄기가 여럿으로 갈라져 자라는 반송(盤松) 일곱 그루가 자라고 있다. 수령 130년 정도 된 법기 반송 칠형제다. 저수지 축조 당시에 심어놓은 것으로 나무를 얽어맨 밧줄에 몽둥이를 꿰어 어른 20명이 어깨에 메고 여기 마루까지 옮겨왔다고 한다. 햇살 고스란한 둑길에 반송이 그늘을 드리운다. 우듬지는 좀 더 하늘과 가까워지려 부쩍 솟았고, 아래 가지는 좀 더 물과 가까워지려는 듯 길고 낮게 드리워져 있다. 굵은 가지가 낮아 허리를 숙이고 지나가야 한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가 무척 달다.




저수지(貯水池)는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다. 아까도 얘기 했듯이 준설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를 잘 맞추었더라면 고요하게 고인 물 위에 그려지는 예쁜 풍경화라도 구경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 안에는 하늘색 취수탑(取水塔)이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취수탑이다. 나이 많음을 생색이라도 내려는 듯 자신의 맨몸을 통째로 보여주고 있다. 아무튼 법기수원지는 현재 전체 68중 댐과 수림지 2만 개방되어 있다. 원래는 저수지 둘레길 약 3.42차로 개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개방 이후 하루 방문객이 최대 3만 명을 넘어서면서 차량 정체와 주차문제, 생태계 위협 등 여러 문제가 대두되었고 결국 둘레길의 개방은 보류되었다고 한다. 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원시림, 아주 옛날에는 호랑이가 살았다는 저 골짜기가 손에 잡힐 듯하다. 그러나 저곳은 여전히 금단의 땅으로 남아있다. 하긴 이렇게 관리를 해왔기에 천연기념물 제327호인 원앙 70여 마리가 서식하고 있을 것이다.


망룡산(望龍山, 442m)-천황산(345m)-방갓산(381m)

 

산행일 : ‘17. 11. 4()

소재지 : 경남 의령군 대의면·칠곡면과 진주시 미천면·대곡면의 경계

산행코스 : 머리재망룡산천황산방갓산덕촌마을회관(산행시간 : 2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세 산들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방갓산을 지날 즈음 만난 바위를 제외하고는 바위다운 바위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시선을 끌만한 볼거리는 일절 없었다. 망룡산 정상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 또한 트이지 않는다. 아무런 볼거리가 없는 무미건조한 산행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흙산의 특징대로 산길이 곱기 때문이다. 보드라운 흙으로 이루어진 산길은 폭신폭신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고, 능선 또한 완만하기 짝이 없다. 잡목들의 방해만 받지 않는다면 산악마라톤코스로 이용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아무리 그래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갈 필요는 없는 산으로 분류하고 싶다. 혹시 지맥 종주를 해오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머리재(의령군 칠곡면 산북리 959-1)

대전-통영고속도로 단성 IC에서 내려와 20번 국도를 타고 의령방면으로 달리다가 죽전교차로(의령군 대의면 다사리)에서 빠져나와 구() 도로로 갈아타면 잠시 후 머리재(대의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의령군 대의면(다사리)과 칠곡면(산북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이다.




대의고개 쉼터의 너른 주차장은 텅 비어있다. 그러니 사람인들 보일 리가 없다. 그저 누렁이 한 마리가 오랜만에 보는 인기척이 반가운지 쪼르르 달려 나와 꼬리를 흔들어 줄 따름이다. 맞은편에 있는 망경휴게소와 ‘S-Oil’의 행복가득주유소 역시 하나도 다를 게 없는 풍경이다. 아니 이곳은 문을 닫아 건지 이미 오래인 모양이다. 요 아래에 터널이 뚫리고 나서부터는 이 고개를 넘나드는 차량이 뚝 끊겼다는 증거일 것이다.



머리재 고갯마루 정중앙의 북쪽, 그러니까 칠곡면을 정면으로 볼 때 오른편 사면(斜面)을 치고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그동안 이용해오던 주유소 뒤편의 쪽문이 주유소가 문을 닫으면서 함께 폐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머리재라는 지명(地名)'머리'·'마루(산마루)'·'높다'라는 뜻으로 험하고 가파르면서도 외진 고갯길이라 그 재를 넘다가 돈도 털리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생기다보니 머리가 잘리기 쉬운 잿길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칠곡 사람들은 '머리재', 대의 사람들은 '한티재'라고 부른다. '한티''큰재'·'높은 고개'란 의미의 고유어이며 한자로 대현(大峴)이라고 한다. 이 일대에 대현원(大峴院)이라는 역참까지 있었다고 하니 옛날에는 꽤나 알아줄 정도로 험한 고갯마루 중 하나였나 보다.



산행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새로 개척해가는 길이라서 흔적도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고개를 만들면서 생긴 절개지(切開地)의 사면만 통과하면 경사가 거의 없는 능선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고 나면 길은 수월해진다. 폭이 넓어진데다가 고도(高度) 또한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높여간다. 그렇다고 속도까지 빠르게 낼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정비하지 않은 채로 버려둔 틈을 노려 산길까지 비집고 들어선 잡목들이 갈 길 바쁜 나그네들의 발길을 붙잡기 때문이다.



그렇게 14분 정도를 올랐을까 눈앞이 훤해지는가 싶더니 커다란 철 구조물 하나가 눈앞에 나타난다. ‘KBS-TV’의 송신시설이란다.



길은 시설물을 둘러싼 펜스 왼편을 지나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이 구간에서 처음으로 조망(眺望)이 열린다. 자굴산과 한우산이 왼쪽 소나무 숲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가 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는 망룡산의 정상부가 얼핏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한갓지게 걷고 있는데 코끝을 스쳐가는 향 내음이 곱다. 그러고 보니 능선이 온통 소나무 천지이다. 부담 없는 산길에 솔향까지 음미하며 걸을 수 있다니 오늘 산행은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곳 지자체 사람들에게는 그게 못마땅했나 보다. 능선을 따라 길게 벚나무를 심어놓은 걸 보면 말이다. 저 벚나무가 식상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도로에서 마주치는 것도 모자라 산에서까지 벚나무를 보게 된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단풍나무 등 산을 아름답게 해주는 나무들이 많은데도 굳이 벚나무를 심었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완만하던 산길이 서서히 경사도(傾斜度)를 더해간다. 그러다가 끝내는 버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팔라진다. 하지만 다른 높은 산들에 비길 정도는 아니니 겁먹을 필요까지는 없다. 거기다 그 구간이 짧기까지 하다.



지금 걷고 있는 이 능선은 진양기맥(晋陽岐脈)의 일부 구간이다. 진양기맥이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덕유산에서 동쪽으로 분기해 월봉산과 금원산, 기백산, 매봉산, 소룡산, 황매산, 철마산, 한우산, 자굴산, 광제봉을 지나 진양호로 빠져드는 도상거리 약 159km의 산줄기를 말한다. 경상도 지역의 유일한 기맥인 이 산줄기는 하동을 제외한 서부경남의 전 지역인 함양, 거창, 합천, 산청, 의령, 진주 등 6개 시·군을 지나며 서쪽의 남강과 동쪽의 낙동강 사이를 가른다.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치고 오르자 반갑지 않는 풍경이 또 다시 나타난다. 이곳에도 벚나무를 심어 놓은 것이다. 그것도 봉우리 전체를 아예 벚나무 숲으로 바꿔놓아 버렸다.



망룡산 정상은 벚나무 숲의 바로 옆에 있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한국통신(KT)SK텔레콤의 기지국이 자리 잡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TV의 송신시설로 보이는데 어느 방송사 것인지는 모르겠다. 옛날에는 이것들 말고도 다른 시설들이 또 있었나보다. 대문의 기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시설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걸 보면 말이다. 망룡산까지 오는 데는 40분이 걸렸다.



망룡산(望龍山)’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서 처음 나타난다. 산의 이름은 이 산의 아래쪽에 있는 '미리섶'이라는 천연 샘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원래부터 물이 맑고 수량도 풍부해서 산북 앞 들녘의 논물로 넉넉할 정도의 샘이었는데, 여기에 살던 큰 용()이 큰비가 내리는 어느 날 뇌성벽력과 함께 하늘로 솟구쳐 오르다가 잠시 망룡산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샘물은 더 맑고 수량도 많아져서 식수만이 아니라 농경지 관개용수로 이용하였다고 전한다. 이런 인연으로 용천(龍泉), 용동 등의 지명이 생겨났고, '미리섶'도 미리샘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이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별도의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정상표지석이나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얘기이다.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진주의 산꾼으로 보이는 사람이 제작한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가 송신시설의 펜스에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참 서툰 글씨로 망룡산이라 적어놓은 판자도 하나 매달려 있다.



시멘트포장 임도(林道)가 나있는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향한다. 임도의 초입에는 사각의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다. 시원스럽게 트이는 조망을 실컷 즐기다 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왼편에는 아까 보았던 자굴산과 한우산이 또렷하고 맞은편에는 남해바다 방향임에도 불구하고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벽화산(522m)과 월아산(470m), 연화산(531m) 등이 아닐까 싶다.





천황산으로 가는 길을 제대로 찾으려면 주의가 필요하다. 무심코 임도를 따르다가는 엉뚱한 곳으로 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방법은 임도를 따라 100m 조금 못되게 내려가다가 배나무 과수원이 나오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는 않지만 산악회의 리본 몇 개가 매달려 있으니 조금만 주의를 기우린다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10m쯤 들어가면 오른편에 평분(平墳)으로 된 의령 여씨 가족묘역(家族墓域)’이 나오니 이를 들머리의 기준으로 삼아도 될 것 같다. 봉분(封墳)도 없이 종횡으로 열을 맞춰 눕힌 비석들만 있는 특이한 묘역이니 쉽게 눈에 띌 것이다.



산길은 배나무 과수원을 왼편에다 끼고 반 바퀴를 돈다. 그런데 수확을 이미 끝낸 위쪽 나무들과는 달리 아래쪽 나무들은 아직까지도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생각하고 다가가 보니 일반의 배들보다는 그 알맹이가 훨씬 작다. 우리나라의 중부 이남에서 자생한다는 돌배나무(학명 : Pyrus pyrifolia)’가 아닐까 싶다. 약배로 불릴 만큼 해열과 건위(위를 보호함), 지갈(갈증해소), 이뇨, 항당뇨, 지방분해 등에 좋다고 하더니 이젠 이렇게 대규모로 재배하고 있는 모양이다. 서리라도 맞힐 요량으로 놔둔 걸 보면 아마 과일처럼 먹으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메타세쿼이아 숲이 나타났다며 호들갑을 떤다. 그녀의 말마따나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 나무들이 밭두렁을 따라 길게 심어져 있다. 비록 우리 고향마을 근처에 있는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만큼은 아니어도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배나무 과수원을 돌아 나가면 또 다시 마룻금과 연결된다. 하지만 길의 형편을 그다지 좋지가 않다. 사람들의 왕래가 적었던지 잡목(雜木)들이 길까지 잠식해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좋은 점도 있기는 하다. 아래 사진처럼 고운 옷으로 갈아입은 억새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10분쯤 지났을까 산악회의 리본들이 흡사 무당집 처마처럼 덕지덕지 매달려 있는 봉우리(387m봉이 아닐까 싶다)가 나오고, 조금 더 진행하면 조망이 트이는 또 다른 봉우리에 올라선다. 오른편 잡목 너머로 상미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그 뒤에 보이는 산은 아마 광제산(420m)이 아닐까 싶다. 왼편에 자굴산과 한우산이 버티고 있음은 물론이다.




조망을 보여주던 산길이 이번에는 아래로 향한다. 경사는 급할 것이 없으나 발길을 부여잡는 잡목들 때문에 진행하기가 썩 편치 않은 길이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진행하면 자 안부에 내려선다. 양쪽으로 희미하게 샛길이 나뉘고 있으나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다.




안부를 지난 산길은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흡사 방화선을 연상시킬 정도로 널찍하나 그 경사는 상당히 가파른 편이다. 그렇게 5분쯤 치고 오르면 산악회의 리본 몇 개가 매달려 있는 밋밋한 봉우리에 올라선다. 어느 선답자가 ‘327m라고 표기했던 곳이 아닐까 싶다. 그는 이곳을 1:5만 영진 지도에 천황산으로 잘못 표기 되어 있는 지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거론했던 ·(최남준 선생의 약칭)’ 님이 매달아 놓았다는 팻말은 눈에 띄지 않았다.




327m봉을 지난 산길은 잠시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위로 향한다. 아까 327m봉을 오를 때의 형세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부드러운 풀들이 수북하게 자라있는 것이 여름철에는 흡사 양탄자의 위를 걷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길의 곳곳에는 아래 사진과 같이 나지막한 축대를 쌓아 놓았다. 토사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잠시 후 천황산 정상에 올라선다. 진양기맥에서 방갓산 능선이 갈라져 나가는 봉우리이다. 327m봉을 내려선지 11, 망룡산에서 이곳까지는 48분이 걸렸다.



울창한 숲속에 들어앉은 정상에는 정상판이 부착된 이정표(설매소공원7.2Km/ 덕촌마을4.8Km/ 망왕산2.0Km)가 세워져 있다. 정상표지석의 대체용으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이곳에서 눈여겨 볼 게 하나 있다. 이정표에 표기되어 있는 망왕산이라는 지명이다. 아까 지나왔던 망룡산망왕산으로 표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곳 천황산이 바라보이는 산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천황(天皇)’이 아니라 천왕(天王)’인 것은 우리나라에 있는 천황산이 대부분 천왕산으로 이름을 바뀐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방갓산으로 향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설매소공원방향이다. 하산지점이 덕촌마을인데도 왜 설매소공원으로 가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덕촌마을로 가는 방법이 두 가지인데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덕촌마을은 진양기맥을 따라 50분 남짓 더 걷다가 용당재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는 방법이고, 만일 방갓산을 올라볼 요량이라면 설매소공원 방향으로 진행하여 방갓산에 오른 다음에 덕촌마을로 내려가면 된다. 아무튼 산길의 상황은 썩 좋지 않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탓에 잡목들이 산길까지 비집고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찾아 나가는데 어려움은 없다.



천황산에 이른 진양기맥은 동남 방향으로 산줄기 하나를 분기시킨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능선인 진양벽화단맥(晋陽碧華短脈)’이다. 길이가 24.7km쯤 되는 이 산줄기는 방갓산과 벽화산(碧華山), 박대산, 남산 등을 일구고 난 후에 의령천이 남강을 만나는 곳에서 그 숨을 다한다. 그러니까 천황산에서 방갓산까지의 구간은 진양벽화단맥을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낮추어가던 산길은 20분이 조금 못되어 안부에 내려서고, 이어서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암릉구간도 만나게 된다.



그렇게 15분쯤 치고 오르면 드디어 방갓산 정상이다. 방갓산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삼각점도 보이지 않는다. 천황산과 마찬가지로 이름표(방갓산 해발 381m)를 단 이정표(설매소공원6.0Km/ 용암리1.1Km/ 천황산1.2Km)가 이들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지도 앱(application)이 자꾸만 이곳은 정상이 아니니 조금 더 진행하라고 채근하는 것이다. 지도에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삼각점봉을 정상으로 표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도가 잘못된 것이니 개의치 않아도 된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이곳 방갓산에는 최남준씨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도 보인다. 천황산에서 방갓산까지는 35분 정도가 걸렸다.



방갓산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방갓산이 막아주는 덕분에 칠곡면(七谷面)이 길지(吉地)가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질 따름이다. 그런 이유로 막을 방()’자를 썼다는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용암리 방향인데, 덕촌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잠시 후 커다란 바위 몇 개가 능선에 놓여있는 게 보인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바위들일 뿐만 아니라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도 충분할 정도의 자태까지 지니고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이후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중간에 잠깐잠깐 밋밋한 구간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몸을 가누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다. 흙산의 특징대로 볼거리도 없다. 그저 조심조심 내려오는 게 전부인 구간이다.



그렇게 20분 남짓 내려서면 임도가 나타난다. 산길은 임도를 가로질러 건너편 능선으로 연결된다.



이어지는 산길도 가파르기는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유연해졌다. 그렇게 13분 정도를 더 내려가면 들녘이 나오면서 산행은 끝을 맺는다. 오늘 산행은 2시간 5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 40분이 걸린 셈이다.



이후부터는 농로(農路)를 따른다. 군내버스가 다니는 널찍한 아스팔트 포장도로이다. 그렇게 10 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아까 이정표에서 보았던 용암마을이 나온다. 그다지 커 보이지 않은 마을이지만 주민들의 쉼터노릇을 해주고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진주시 보호수)의 나이(樹齡)320년이나 되었단다. 마을의 역사가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길가는 온통 감나무천지이다. 나뭇가지마다 커다란 대봉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 자칫 가지라도 부러질까 걱정이 될 정도이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가 대봉의 주산지(主産地)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나보다. 예로부터 과실의 왕은 감이요, 감의 왕은 대봉이라 했다. 임금님에게 진상되었을 정도로 그 맛과 향이 뛰어나다는 것을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저 감들은 11월경에 수확을 해서 홍시(연시)나 곶감으로 만든다.



산행날머리는 덕촌 마을회관(진주시 대곡면 월암리)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덕촌마을 회관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만 한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커다란 대봉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인심 좋은 주민들과 얘기를 나누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집 앞에서 햇볕을 쏘이고 있는 주민들이나 감을 따고 있는 주민들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따뜻한 인사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트럭이 멈춰서더니 가는 곳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호의를 베풀 정도였다. 땀을 씻으라고 자기 집 수돗물을 내어준 할아버지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주민들 모두가 하나같이 인정이 넘쳐흐르는 마을이었다.


소남봉(小南峰, 867m)시루봉(959.9m)-호음산(虎陰山, 929.8m)

 

산행일 : ‘17. 8. 19()

소재지 : 경남 거창군 북상면과 위천면, 고제면의 경계

산행코스 : 칡목재소남봉시루봉호음산원농산갈림길모전갈림길홍골황산저수지수승대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산들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산행 내내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었다고 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 덕분에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제공하지 못한다. 호음산 정상을 제외하면 조망(眺望)까지도 꽉 막혀있다고 보면 된다. 흙산의 일번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대신 좋은 점도 있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부담 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잡목들의 방해가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산행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 하산 지점인 황산리에는 수승대라는 경승지가 있다. 산행에서 못한 눈요기는 수승대에서 하면 될 일이다. 한번쯤은 올라 봐도 좋을 산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하산 코스를 잡는 데는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황산저수지로 내려가는 임도를 따를 경우 자칫 지옥구경을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산지점을 원농산마을로 잡던지 아니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고 수승대관광지까지 내려가는 코스를 권하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칡목재(거창군 북상면 소정리 산 2-13)

대전-통영고속도로 지곡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타고 안의면(함양군) 소재지까지 온다. 안의교차로(안의면 석천리)에서 3번 국도로 바꿔 타고 거창방면으로 달리다가 지동교차로(거창군 마리면 말흘리)에서 이번에는 37번 국고로 옮긴다. 이어서 무주방면으로 방향을 잡아 들어가다 신기교차로(거창군 고제면 개명리)에서 좌회전하여 1001번 지방도로 바꾼 다음 조금 더 들어가면 칡목재고갯마루에 올라선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무주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와 37번 국도를 연이어 타고 신기교차로까지 역방향으로 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오늘 타고 온 산악회 버스도 후자를 택했다.




고제면을 뒤에 두고 고갯마루의 왼편 절개지(切開地) 사면(斜面)을 치고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경사가 무척 가파르지만 굵직한 밧줄이 매어져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다 부여잡기 쉽도록 매듭까지 만들어 놓았다. 밧줄이 끝나자마자 칡넝쿨이 길손을 맞는다. 앞이 안보일 정도로 우거져 있는 것이 칡목재라는 이름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6분 정도의 고투(苦鬪)를 치루면서 능선에 올라서면 또렷한 산길이 나타난다. 하지만 웃자란 잡목들이 등산로까지 비집고 들어와 있어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걸음을 자꾸만 부여잡는다. 그래도 그 잡목(雜木)들 사이에 가시넝쿨 부류가 끼어있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아니 길고 가파른 오르막길과 짧고 완만한 내리막길이라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다만 가파른 오르막길이라고 해봐야 다른 산들에서 보아왔던 가파름에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긴 평탄지(平坦地)가 끼어있다는 것도 이 산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능선안부에 내려선다. 다른 이들이 아랫 칡목재라고 표기하고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자신은 없다. 아무리 살펴봐도 길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웅덩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야생동물이 헤집어 놓은 흔적일 것이다. 아니 저 정도의 크기라면 멧돼지의 작품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조금 피곤할 수도 있겠다. 어디서 튀어나올 지도 모를 멧돼지까지 걱정해가며 걸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난 지점에서 삼거리를 만난다. 왼편은 하수내 마을(고제면 개명리)‘로 연결된다. 이정표(시루봉2.6km, 호음산 4.9km/ 하수내1.6km/ 윗칡목재1.3km)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은 소정마을(북상면 소정리)로 연결되지 않나 싶다. 국제신문에서 이용했다는 그 답사로(踏査路) 말이다.



이어서 짧은 오름짓을 한 번 하고나면 4분 후에는 소남봉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35분 만이다. 국제신문 근교산행팀은 이곳 호음산에 대한 취재기사에서 키가 큰 축인 900급의 연봉이지만 초입지점의 고도(高度) 자체가 워낙 높아 어느새 능선에 올라붙었다고 적고 있다.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이곳 소남봉의 높이가 870m나 되지만 산행을 시작했던 칡목재의 높이가 이미 700m에 이르다보니 그 차이인 180m만 높이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1.5Km나 되는 긴 구간에서 올리다보니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소남봉에 올라설 수 있었다.



두세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석이나 삼각점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다 산길까지도 정상을 가운데에 놓고 살짝 돌아서 나간다. 만일 ’3000산 오르기의 주인공인 한현우 선생의 정상표시 코팅(coating)마저 보이지 않았더라면 이곳이 정상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12109일에 이곳을 다녀갔는데 3009번째 산이란다. 가끔 산행을 함께 하면서 산에 대한 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던 분이었는데 지금은 그리할 수 없어 안타깝다. 이미 고인(故人)이 되셨기 때문이다.



잡목으로 둘러싸인 정상은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출발을 재촉하는 이유이다. 소남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더욱 편안해진다. 오르내림의 차가 한층 더 작아진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바닥은 보드라운 황톳길이다. 산악마라톤 코스로 이용해도 충분하겠다.



언제부턴가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확성기를 통해 내보내고 있는지 소리가 온 산을 찌렁찌렁 울리고 있다. 완전한 소음(騷音) 그 자체라는 얘기이다. 집사람이 울렁증이 난다고 불평을 토로할 지경이라면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자 숲속에 들어앉은 민가(民家)가 한 채 나타난다. 소음의 근원지인 모양이다.



능선을 따라 길게 철망(鐵網)이 쳐져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그 앞에다 윤형철조망(Concertina wire)’까지 깔아 놓았다. 안에 귀한 약초라도 재배하고 있나보다. 이중의 보안장치에다 확성기까지 틀어 외인(外人)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산길은 철조망을 따라 계속 직진하면 된다. 그렇게 7분쯤 진행하면 어느 이름 없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산악회의 리본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첨부된 지도에 ’853m으로 표기된 지점이 아닐까 싶다.



산길은 또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등산로까지 비집고 들어온 잡목들이 갈 길을 방해하는 것 빼놓고는 순탄한 산행이 계속된다.



얼마쯤 걸었을까 왼편 굴참나무 사이로 시루봉이 살짝 나타난다. 뾰쪽한 것이 흡사 삿갓을 빼다 닮았다. ’나 같으면 시루봉이라는 이름보다는 차라리 삿갓봉으로 짓겠다.’는 내 넋두리를 듣던 일행이 저 아래 마을에서 바라볼 때에는 시루처럼 생겼다면서 개명(改名)은 꿈도 꾸지 말란다. 그럴 것이다. 우리네 조상들이 어디 허투루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겠는가.



소남봉을 출발한지 35분쯤 지나면 갈림길이 없는 안부에 내려서게 되고, 이어서 나타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대략 10분쯤 치고 오르면 시루봉 정상이다. 소남봉을 출발한지 45분 만이다.



대여섯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지 않다는 얘기이다. 그저 사제(私製) 이름표(시루봉 960m)를 매달고 있는 이정표(호음산 2.3Km/ 칡목재 3.9Km)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원형 대삼각점(무풍24)’도 설치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정상은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제신문의 근교산행팀은 금원산과 덕유산 방향이 잘 조망된다고 적었었다. 그동안에 잡목들이 쑥쑥 자라버린 모양이다.



호음산으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이 구간도 역시 부담 없이 걷기에 딱 좋다.



지금 걷고 있는 능선을 백두호음지맥(白頭虎陰支脈)’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백두대간 갈미봉에서 분기(分岐)해 동남쪽 칡목재를 거쳐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짧은 산릉이 시루봉과 호음산을 올려 세우고 나서 수승대(搜勝臺)가 자리한 위천천(渭川川)에서 그 맥을 빠트린다고 한다.



산길은 능선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오르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 봉우리는 심심찮게 우회(迂廻)를 시켜버린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래의 사진보다 훨씬 더 높은 봉우리까지 우회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 산행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시루봉을 출발한지 38분쯤 되면 안부사거리(이정표 : 호음산0.7km/ 온곡1.7km/ 삼층석탑2.9km/ 칡목재5.2km)에 내려서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온곡마을(고제면 농산리)로 연결된다. 2014년엔가 1호 천사마을로 지정되었다는 기사가 떴던 마을이다. ‘천사마을이란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는 캐치플레이즈(catch phrase)하에 조직된 거창 아림천사(1004)운동 본부에서 지정을 해주는데, 대부분의 마을 구성원들이 1구좌에 ’1004씩 정기적으로 기부를 했을 때 마을 단위로 지정을 해준다고 한다. 십시일반으로 모아 사회적 약자들을 돕기 위한 운동인 모양인데 천사라는 칭호를 듣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을 것 같다.



안부를 지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상당히 가팔라져버린다. 오늘의 주인공답게 마지막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6분쯤 치고 오르면 호음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기점인 칡목재를 출발한지 2시간10분만이다. 칡목재까지의 거리가 6.2Km인 점을 감안해 본다면 얼마나 산길이 편했는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1시간에 3Km 가까이를 걸은 셈이기 때문이다.



굵은 나무가 일절 없는 정상은 밋밋한 구릉(丘陵)의 형태이다. 그래선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황산5.5Km, 원농산 4.1Km/ 갈계3.5Km/ 칡목재6.2Km) 외에도 삼각점(무풍 316)과 산불감시초소, 무인산불감시탑 같은 시설물들이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호음산(虎陰山)’은 한자 그늘 음()’을 써서 산의 형세가 호랑이를 닮았다는 것을 표현했다. ‘소리 음()’을 쓰기도 하는데 호랑이 울음소리가 많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산기슭 큰골에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호음동(虎音洞)이란 지명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단다. 백두대간의 덕유산이나 지리산과 연결된 기맥으로 호랑이가 특히 많이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또 재미있는 것은 인근에 개밥말산이라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반도의 제왕 호랑이에게 쫓긴 개가 겁에 질려 옴짝 달싹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형국을 뜻한단다. 이로보아 호음산은 호랑이 산이 분명하다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화강암으로 만든 호랑이상이다. 거창군에서 관내의 몇몇 산봉우리에다 그 봉우리의 특성을 연상시키는 조형물들을 세웠다고 들었는데 그중 하나인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이곳 호암산은 응당 호랑이가 되었을 게고 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一望無題)로 펼쳐진다. 시야(視野)를 가로막는 장해물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다. 국지성 호우(局地性 豪雨)가 내릴 거라는 기상청의 일기예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사위가 온통 안개 속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방금 지나온 시루봉과 소남봉까지도 희미하게 보일 따름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비를 맞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 아쉬움을 다른 이의 글로써 대신해 본다. <동쪽 끝에 덕유산이 보인다. 남덕유산에서 삿갓봉과 무룡산, 향적봉이 울처럼 조망된다. 그리고 위천천 너머에는 월봉산과 금원산, 현성산, 기백산이 조망된다.> 또 다른 글도 있다. <금원산과 남덕유산 그 뒤로 덕유산 서봉(장수덕유산)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까지 희미하게나마 실루엣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계속 조망이 가리는 숲속 능선길을 걷다가 천지사방으로 뚫린 봉우리로 올라서는 기분은 산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뭉클함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진행방향에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위풍당당하게 서있으니 참조한다. 하지만 선두대장을 맡았던 정사장의 말로는 이곳에서는 오른편 갈계방향의 능선을 타는 게 옳단다. 능선을 잠시 타다가 사면(斜面)을 따라 내려서면 지루할 수밖에 없는 임도 구간을 상당히 줄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방향표시지를 따르지 않았냐는 지청구까지 함께 던졌으니 일종의 꾸중으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보다 조금 앞서 가던 사람들이 방향표시지를 소나무가 서있는 방향으로 돌려놓아 버린 것을 말이다. 돌려놓은 사람들도 사연은 또렷하다. 산악회에서 나누어준 지도에 그려진 코스는 물론이고, 산행을 시작하기 전 윤대장이 코스를 설명할 때에도 분명이 그리로 가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산길이 편하지만은 않다. 길은 또렷하지만 잡목들이 꽉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가끔은 산초나무까지 섞여있어 가시에 찔리기까지 한다. 경사가 거의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8분 정도를 내려서면 삼거리(이정표 : 황산5.1Km/ 넘터3.4Km, 원농산 3.7Km/ 호음산0.4Km)가 나타난다. 산악회에서 나누어준 지도에 표시된 대로 황산 방향으로 진행한다.



황산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 코스 보다는 원농산 방향으로 내려갈 것을 권하고 싶다. 지긋지긋하게 긴 임도에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경사가 거의 없는 산길이 계속된다. 잡목들의 방해만 아니라면 곱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만한 구간이다.



길가에 취나물이 꽃망울을 피워 올렸다. 아니 무리지어 피어났다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취나물 천지라는 집사람의 말마따나 산행을 시작하면서부터 심심찮게 참취 꽃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도 여러 번 만났음은 물론이다.



삼거리에서 내려선지 14분 만에 임도에 내려선다. 그런데 이정표(황산저수지3.0Km/ 모전4.5Km/ 무월3.5Km/ 호음산0.9Km)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으니 문제다. 별 수 없이 우리가 내려온 방향에다 호음산을 맞추고 방향을 가늠해 본다. 그리고 오른편 방향의 임도를 따른다. 하지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application)에서 보내오는 경고음은 옳은 길이 아니란다. 되돌아와 이번에는 계속해서 능선을 타기로 한다. 이정표를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은 잠시 후에 알게 되었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정표의 방향은 이해가 안 된다. 어쩌면 임도를 새로 내면서 옛길들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능선을 따라 3분 정도 진행했을까 또 다른 임도가 나타난다. 그리고 우린 제대로 내려왔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지만 오른편 방향으로 난 임도를 따른다. 핸드폰의 앱(application)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다. 임도는 포장이 이미 끝난 구간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시멘트 타설(打設)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 차량이나 가설물들을 피해가야 하는 등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임도의 경사를 누그러뜨리려고 구간의 길이를 엄청나게 늘려놓은 게 문제다. 그렇다고 옛길을 따를 수도 없다. 임도를 새로 내면서 옛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무작정 걸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날씨라도 흐린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늘이 되어줄만한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데 만일 해라도 떴더라면 어땠을까 소름이 끼친다. 아무튼 이 코스는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35분을 걷고 나서야 황산저수지를 만난다. 가뭄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수지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놓고 있다. 아니 임도 개설공사를 위해 물을 빼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저수지 제방에 호음산등산안내도와 이정표(호음산 3.9Km)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정표의 거리표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호음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는 1시간 20분이 걸렸다. 임도에서 길을 찾느라 헤맨 시간을 감안해도 1시간10분 동안을 오롯이 걸은 셈이다. 그런데도 3.9Km밖에 되지 않는다니 어찌 수긍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속보(速步)로 걸어왔는데 말이다. 어쩌면 옛길의 거리표시가 아닐까 싶다.



제방(堤防) 옆 웃자란 잡초(雜草)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비석 하나가 보인다. 초서(草書)로 적혀있어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이 지방의 정치인이었던 구암(龜岩) 신도성(愼道晟, 1918-1999)이 글을 쓴 것만은 분명하다. 이 지역의 명문인 거창 신씨출신으로 관선 경남지사와 국토통일원장관, 그리고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산행날머리는 수승대주차장(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이정표의 거리표시는 저수지에서 끝을 맺지만 산행을 마치려면 아직도 멀었다. 이미 지긋지긋해져 버린 포장도로를 20분 남짓 더 걸어야만 산행 날머리가 되는 수승대 주차장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1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쯤 걸렸다고 보면 되겠다. 수승대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고택이 즐비하다는 황산마을은 들러보지 못했다. 한 시간을 훌쩍 넘겨버릴 정도로 오랫동안 시멘트도로에 시달린 내 무릎이 이를 허락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 마을을 대변한다 할 수 있는 수승대로 그 아쉬움을 달래보기로 한다. 사람들은 거창(居昌)’을 흔히 산고수장(山高水長)’, 즉 산은 높이 솟고 물은 길게 흐르는 땅이라고 말한다. 뛰어난 명소를 많이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중에서도 으뜸 명소는 단연 수승대(搜勝臺)가 아닐까 싶다. 주차장의 으리으리한 대문이 이를 증명한다 할 것이다. 아무튼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이곳에서 구연(龜淵)이라는 맑은 소를 이루는 위천의 물줄기는 다시 너럭바위를 넘고 거북바위를 적시며 비경을 빚어낸다. 참고로 명승 53호로 지정된 수승대의 원래 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다. 이곳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이었다. 여기서 쇠락해가던 백제가 신라로 가는 사신을 근심하며 보냈다고 해서 근심 수’()보낼 송’()자를 썼다. 그러다 1543년 유람차 거창 일대를 찾은 퇴계 이황이 이 내력을 듣고는 절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시를 지어 바꿔 부른 이름이 명승지를 찾는다는 의미의 수승대(搜勝臺). 퇴계는 그러나 급한 정무로 상경했고, 생전에 한 번도 이곳을 직접 찾지는 못했다고 한다.



수승대로 향한다. 위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이태 사랑바위에 관한 내용인데 맞은편에 보이는 커다란 바위(척수대라고도 불린다)에 얽힌 유이태(劉以泰, 1652-1715)’라는 명의(名醫)의 얘기를 적어놓았다. 또한 안내판의 하단에다 MBC-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나왔던 '유의태'가 이 인물을 모티브(motive)로 삼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아무튼 젊은 '유이태'에게 여인이 나타나 입마춤을 하면서 구슬을 건네주었던 모양이다. 이로 인해 건강을 해칠 정도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말이다. 이를 눈치 챈 훈장의 지시대로 구슬을 삼켜버리자 여인이 백여우로 변해 산으로 도망가 버렸고 이후 총기를 되찾은 유이태는 명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태사랑바위에서 소원을 빌면 연인은 사랑이 이루어지고, 자식은 훌륭한 인재로 성장한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고 첨언해 두었다. 참고로 이태 사랑바위의 또 다른 이름인 척수대(滌愁臺)‘는 삼국 시대 신라와 백제 사신이 각기 다른 나라에 가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근심을 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조금 더 올라가니 동네 어귀에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높이가 32m에 둘레가 6m에 이르며 수령(樹齡)500년이나 묵었단다. 그만큼 이 동네가 오래 묵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거창군에서 보호수로 지정관리하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이 마을에서는 약 10여 가구가 민박을 운영하고 있단다. 옛 선조들의 주거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잠시 후 이번에는 물놀이장이 나타난다. 위천에 둑을 막아 물을 가두고 야외 수영장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수백, 이니 수천 명이 뛰어들어 놀아도 충분하겠다. 거기다 풀장의 중간쯤에 걸쳐놓은 현수교(懸垂橋)는 가히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 않아도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경승지에 아름다운 외모의 다리까지 더했으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수승대관광단지로 조성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는 봄에서 가을까지는 오리 배와 보트를 탈 수 있는 유선장을 운영하며 사계절 썰매장도 가동한다니 참조한다.



요수신선생장수지지(樂水愼先生藏修之地)’라는 편액(扁額)을 달고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서 수승대(搜勝臺)’ 탐방이 시작된다. ‘요수 신선생(樂水愼先生)’이란 이곳에 요수정(樂水亭)이란 정자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요수 신권(愼權, 1501~1573)’을 나타낸다. 그의 호인 요수(樂水)’란 요산요수(樂山樂水)로 공자사상의 핵심이 되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인자한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인자한 사람은 장수한다(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에서 유래한다.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걸어온 처사(處士) 신권의 인품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아호(雅號)가 아닐까 싶다. 하긴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직접 지어준 호라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깜빡 잊을 뻔 했다. 대문 옆에 수승대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느니 꼭 읽어보고 경내로 들어서는 지혜를 발휘해 보자.



대문에 들어가기 전 오른편에 청송당(聽松堂)이 있다. 솔바람 소리를 듣는 집이라는 뜻으로 청송(聽松) 신복행(愼復行 1533~1624)이 공부하던 곳이다. 신복행은 요수 신권(樂水 愼權)선생의 셋째 아들로 효행이 지극하고 우애가 남달랐으며 학문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북상면 농산리의 사라산 아래에 있었는데 유지관리를 위해 1987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청송당의 오른편, 돌로 지어진 비각(碑閣)의 안에는 신동건 정려비(愼東建 旌閭碑)’가 들어앉아 있다. 신동건이라는 사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고종이 내렸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섰다 싶으면 저만큼에 자연암반 위에 세워진 이층의 누각이 나타난다. 요수정(樂水亭), 수송대거북바위와 함께 수송대 일원의 명승을 압도하는 트리플 크라운의 하나인 관수루(觀水樓)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계자난간을 두른 관수루는 구연서원(龜淵書院)의 문루(門樓)이다. 구연서원을 짓고도 한참이 지난 1740년에 건축됐는데, () 아래는 출입문인 외삼문 역할을 하고 누 위의 마루는 주변경관을 감상하며 휴식을 하거나, 시회를 열고 강학하는 곳이다. 여기서 관수(觀水)’맹자(孟子) 진심장구(盡心章句)’ 상편의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觀水有術 必觀其瀾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학문을 관수’, 즉 물의 흐름으로 보고 군자(君子)의 학문은 이와 같이 맥락을 읽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아무튼 맹자의 이 아포리즘(Aphorism, 격언)은 의성의 관수정 등 다른 누정의 현판들에서도 자주 보인다. ‘관수외에도 관란’, ‘영과와 같은 현판이름들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되겠다.



관수루를 지나 안으로 들면 강학당(講學堂)’이 나타난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의 본 건물인 강학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다. 좌우에 각각 방 한 칸을 두었고 나머지는 마루다. 강학당의 오른편에는 전사청(典祀廳 : 춘추 제향 시에 제수를 차리던 곳)이 그리고 마당에는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고 적힌 비()석곡성선생유적비(石谷成先生遺蹟碑)’, ‘황고신선생비(黃皐愼先生遺蹟碑)’가 남아있다. 이중 산고수장(山高水長)’산은 높고 물은 유유(悠悠)히 흐른다는 뜻으로, 군자의 덕이 높고 끝없음을 산과 냇물에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구연서원이 군자를 양성하고 기르는 장소라는 뜻이기도 하단다. 참고로 신권은 요수정을 건축하기 2년 전인 1540(중종 35) 이곳에 구연재(龜淵齋)를 짓고 제자를 양성했다. 신권이 죽고 100년이 더 지난 1694(숙종 20)에 지방 유림이 구연재 자리에 구연서원을 창건하고 신권을 배향(配享)했다. 이후 석곡(石谷) 성팽년(成彭年, 효행이 뛰어나다고 해서 동몽교관에 천거되었으나 취임은 하지 않은 조선중기 문인)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 조선 영조 때의 노론계 학자)‘를 추가 배향한 뒤 이 지역 유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서원의 한켠에 있는 전사청(典祀廳 : 춘추 제향 시에 제수를 차리던 곳)을 둘러보고 나오니 관수루 옆에 요수신선생장수동(樂水愼先生藏修洞)’라는 문구가 각자(刻字)'욕기암(浴沂岩)‘이라는 바위가 누워있다. ‘요수선생이 몸을 감추고 마음을 닦던 곳이라는 뜻이다. 그밖에 낯선 글자들도 보인다. 이 지역의 두 명문인 은진 임씨(恩津 林氏)’ 문중과 거창 신씨(居昌 愼氏)’ 문중이 차곡차곡 새겨온 조상들의 이름이란다. 그렇다면 저 바위는 집단 묘비명인 셈이다. ‘물의 흐름을 봐야한다는 관수루에서 수승대 바위를 전쟁터 삼아 시와 이름을 하나라도 더 새겨 넣어 주도권을 쥐어보겠다는 두 문중의 혈투를 요수 신권은 어떻게 봤을까. 그의 상대로 맞세워 놓은 갈천(葛川) 임훈(林薰, 1500-1584)’은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처남이 아니었겠는가.



구연서원을 빠져나오자마자 왼편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이 경승지(景勝地)의 이름을 낳게 한 수승대(搜勝臺)’라는 바위인데 거북바위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수승대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이면서 빚어놓은 커다란 천연 바위 대(). 높이는 약 10미터, 넓이는 50제곱미터에 이르며 생김새가 마치 거북 같아 구연대(龜淵臺)’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도 한다. 거북바위에는 한시(漢詩)와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그중 가장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은 수승대로 이름이 바뀌게 만든 퇴계 이황의 개명시와 갈천(葛川) 임훈(林薰)의 화답시라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들은 이 지역의 두 명문(名門)인 거창신씨와 은진임씨의 주도권 쟁탈전의 흔적들이란다. 대표적인 예로 신씨 문중이 바위에 요수장수지대(樂水藏修之臺)’라는 글자를 새겼다. 신권이 숨어서 수양하던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임씨 문중이 나섰다. 퇴계의 시와 임훈의 화답시를 새겼다. 퇴계 시 옆에는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라 새기고 임훈 시 옆에 갈천장구지소(葛川杖屨之所)’라 새겼다. 갈천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끌던 곳이라는 뜻이다. 신씨문중이 숨을 장’ ‘장수지대라고 하자, 임씨문중은 지팡이 장장수지소라고 다소 시니컬(cynical)하게 대응한 것이다.



수승대 앞은 너럭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로 위천이 흐르는데 그 물길 위에다 다리를 놓았다. 구연교((龜淵橋)라는 돌다리인데 외관으로 보아 최근에 들어 설치한 것 같다. 아무튼 이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세필짐(洗筆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연반석은 거북이가 입을 벌린 장주암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루를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다. ‘장주암의 한쪽에는 오목한 모양의 웅덩이인 장주갑(藏酒岬)도 있단다. 이곳에 막걸리를 한 말 넣었다가 스승의 물음에 대답하면 막걸리 한 사발씩을 받아먹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볼 수는 없었다. 근처에서 거북바위를 배경으로 선 집사람을 카메라에 담다가 3m가까이 되는 축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후부터는 주마간산(走馬看山)이 되어버렸다.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되었으니 어찌 가슴에 담아볼 여력이 있었겠는가.



구연교를 지나면 요수 신권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요수정(樂水亭)이 나타난다. 정면 3, 측면 2칸 규모로 자연 암반을 그대로 초석(礎石)으로 이용했다. 정자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고 사방에 계자 난간을 둘렀다. 마룻보가 있는 5량가로 가구의 짜임이 견실하고 네 곳의 추녀에 정연한 부채살 형식의 서까래를 배치했다. 세부 장식의 격조가 높으며 양반을 위한 정자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추운 산간 지역의 기후를 고려해 정자 내부에 방을 놓기도 하는 등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거창의 대표 건축물이란다. 혹자는 이 정자가 수승대의 경관을 동천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구연대와 그 앞으로 흐르는 물,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수정에서 몇 걸음 더 내려가자 오래 묵은 한옥(韓屋)이 한 채 나타난다. ‘함양재(涵養齋)’라는데 신권선생이 세운 서고(書庫) 겸 강학당(講學堂)이란다. 신권은 요수정을 건축하기 2년 전인 1540(중종 35)에 구연재(龜淵齋)를 짓고 제자를 양성했다. 다음해에는 함양재(涵養齋)를 짓고 그 다음해에 요수정을 지었다. 그만큼 제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물가 바위벼랑에 함양재(涵養齋)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에필로그(epilogue), 잠깐의 방심으로 인해 화를 입은 불운한 하루가 되어버렸다. 절경에 취해 사진촬영을 하다가 그만 발을 헛딛고 만 것이다. 그만큼 빼어난 절경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아니 반주로 마신 술이 과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난 산우(山友)와 술잔을 나누다가 그만 소주를 한 병 가까이나 마셔버렸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경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취하기 마련인데 거기다 술까지 얼큰하게 취해버렸으니 어찌 사고를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억울하지는 않다. 당분간의 불편함 또한 기쁘게 참을 수 있다. 그 절경의 앞에 서있는 집사람을 카메라에 담다가 당한 사고였으니 말이다. 다만 함께 산행을 했던 일행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내 사소한 부주의가 여러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함께 했던 모든 분들에게 글로서나마 미안한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우방산(牛芳山, 494m)-수양산(首陽山, 538.2m)-소두방산(小斗芳山, 521m)

 

산행일 : ‘17. 4. 18()

소재지 : 경남 하동군 옥종면과 산청군 시천면단성면의 경계

산행코스 : 두양리우방산함박산(咸朴山, 624.7m)수양산(首陽山, 538.2m)옥동고개소두방산안부중태경로당(산행시간 : 4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오늘 걸으려고 했던 코스는 정개산(520m)을 한가운데 두고 부챗살처럼 한 바퀴 도는 산길이었다. 우방산을 시작으로 함박산과 수양산, 소두방산(함미봉)을 거쳐 비룡산과 두방산까지 다녀올 요량이란 얘기이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애초부터 불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길이 거친 탓에 진행속도가 한없이 더뎌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흔적도 보이지 않는 길은 일단 제켜두자. 다른 산들에서도 간혹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과 같이 처음에서 끝까지 길이 없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거기다 산은 온통 벌목(伐木)으로 인한 상처투성이였다. 잘려진 나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탓에 어느 곳 하나 곧장 치고나갈 수가 없었다. 잡목 사이를 뚫으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그러다보니 산행 내내 가시넝쿨이나 잡목들과의 힘겨운 싸움이 계속되었다. 싸대기는 아예 맡겨 놓은 채로 말이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 어쩌겠는가. 그저 조금이라도 덜 긁히고 덜 찔리려고 조심하는 게 상책이었다. 덕분에 산행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지체되었고 결국에는 비룡산과 두방산은 답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산행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길 없는 길에서 길을 찾다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이런 산들은 봉우리 따먹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상석도 없는데다 그저 잡목들만 무성한 이런 야산들을 일부러 찾아올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산행들머리는 두양리 마을입구(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486-2)

통영-대전고속도로 단성 I.C에서 내려와 20번 국도를 타고 중산리(산청군 시천면) 방면으로 달리다가 창촌삼거리(산청군 단성면 창촌리)에서 1005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옥종면(하동군) 방향으로 들어오면 잠시 후 두양리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이르게 된다. 들머리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두양리라고 적은 다음에 그 옆에다 두양과 두방이라는 지명을 따로 적었다. 두양리가 두방마을두양마을이라는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두양리는 숲촌마을이라는 또 다른 자연부락을 포함하고 있다. 이곳 삼거리에서 옥종면소재지 방향으로 조금만 더 가면 만나게 되는데, 이 마을 근처(정개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민무늬 토기조각(無文土器片)’들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기억해 두도록 하자.




버스에서 내려 들어왔던 방향, 그러니까 단성면(산청군) 방향으로 되돌아 나간다. 100m쯤 걸으면 또 다시 왼편으로 길이 나뉜다. 아래 사진에서 트럭이 주차되어 있는 부근인데 이 길도 역시 두양리로 들어가는 길이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50m쯤 걷자 저수지가 하나 나타난다. ‘두양소류지(沼溜地)’란다.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작은 규모의 저수지라고 보면 되겠다. 저수지 뒤편에는 두양(斗陽) 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두방산(斗芳山) 아래 양지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데 아래사진을 보면 마을의 주택들과 함께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수령이 900여년이나 되었다는 은행나무(경상남도기념물 제69)가 아닐까 싶다.



소류지의 둑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자마자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곧이어 무덤 몇 기가 모여 있는 묘역(墓域)이 나타난다.



묘역을 지나자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저 능선으로 오른다 생각하고 잡목(雜木)들을 헤쳐 가며 위로 오를 수밖에 없다. 나뭇가지에 싸대기 두어 대 정도는 맞을 각오를 하면서 말이다.



8분쯤 걸려 작은 봉우리에 살짝 올라서니 묘목(苗木) 재배지가 나온다. 나무의 종류는 알 수 없지만 야자나무 묘목들도 보이는 걸로 보야 여러 종류의 나무들을 재배하고 있지 않나 싶다.



묘목재배지를 지나면 산길은 또 다시 산자락을 파고든다. 이번에도 역시 무덤 두어 기가 길손을 맞는다. 아무래도 오늘은 무덤과 인연이 많은 산행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순간이다.



무덤을 지나면서 산길이 가팔라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산행이 계속될수록 점점 더 거칠어진다. 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음은 물론이다. 엊그제 산행준비를 하면서 먼저 이곳을 다녀간 이가 써놓은 기록을 본 일이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일러 토끼가 다녔음직한 흔적뿐인 길이라고 적었었다. 맞는 말이다. 사람이 어찌 이런 길을 다닐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길을 만들어가며 진행할 수밖에 없다. 잡목(雜木)이나 가시넝쿨이 발길을 부여잡지만 어쩌겠는가. 헤쳐 나가다 그도 안 되면 에돌아간다. 싸대기 두어 대는 기본, 이제는 찔리거나 할퀴는 것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런 처절한 싸움은 40분 가까이나 이어진다. 그리고 자잘한 바위들이 하나 둘 보이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전형적인 바윗길로 변해있다. 그렇다고 길이 좋아졌다는 것은 아니다. 바위의 틈새마다 잡목들이 들어차있어 헤치고 올라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미끄러운 급경사 너덜을 통과한 후 험한 암릉 사이를 나뭇가지를 의지해가며 오른다. 긴장이 요구되는 구간이다. 아무튼 바위와의 한판 힘겨루기를 하다보면 주체 못할 정도로 많은 땀이 흘러내린다. 모자의 채양을 타고 흐르는 폼이 흡사 오뉴월 장맛비에 낙숫물 떨어지듯이 한다. 산길이 무척 힘들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초여름에 가까운 무더위까지 겹쳤으니 말이다. 준비해온 2리터의 물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시작된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바윗길의 특징대로 곳곳에서 조망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르는 바위마다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옥종면 일대가 발아래에 펼쳐지고 저 멀리 낙남정맥의 산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또한 구불거리며 진향호로 향하고 있는 덕천강 물줄기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바윗길이 끝나면서 산길은 조금이나마 나아진다. 잡목이 갈 길을 방해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가파름은 그 기세를 뚝 떨어뜨렸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4분 정도를 더 걸으면 드디어 우방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이다. 정상에 오르자 두 기의 케언(cairn)이 길손을 맞는다. 하나하나 쌓아올린 돌들에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을 담았나 보다.



대여섯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자그마한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진주 봉산산악회에서 세운 것이란다. 이렇게 험한 곳까지 정상석을 둘러매고 올라왔을 이들에게 감사를 표해본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인증사진 하나 제대로 찍을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함박산으로 향한다. 산길은 아직도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대충 방향을 잡고 내려설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내려서면 안부에서 임도를 만난다. 자동차가 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널찍한 길이다. 거기다 경사까지 거의 없다. 편안한 산행이 시작되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흠()도 있다. 햇빛을 가려줄 숲이 없기 때문이다. 오뉴월 뙤약볕이라도 내려쏜다면 쉽지 않은 산행이 될 것 같다.



사면(斜面)을 따라 난 임도를 15분 정도 걸었을까 능선에 올라선다. 임도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초입만 보면 오솔길로 바뀌는 것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와 같은 넓이의 길로 되돌아간다.



능선을 따르던 임도의 앞에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임도는 봉우리를 피해 오른편 사면을 따라 우회(迂回)를 시킨다. 하지만 경사까지는 누그러뜨리지를 못했나 보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봉우리인가 하고 지나치려는데 그게 아니었다. 능선으로 올라선지 15분쯤 지났을 즈음 표지기 하나가 매달려 있는 곳에 산악회의 방향표시지가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우회를 했던 봉우리가 함박산이었던가 보다.



방향표시지의 지시를 따른다. 물론 길은 보이지 않는다. 능선에 가득 찬 잡목들을 헤치며 나갈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그 길은 짧았다. 2분 후에 함박산의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올라선 정상은 텅 비어 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선답자들이 매달아 놓은 표지기(ribbon)들을 보고 이곳이 함박산의 정상이려니 해볼 따름이다. 우방산에서 이곳 함박산까지는 45분이 걸렸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선답자의 기록을 보면 이곳에 삼각점(산청 27/ 1991재설)이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다.




다시 임도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경사는 또다시 누그러졌다. 대신 길의 폭은 많이 좁아졌다. 눈요깃거리가 전혀 없는 답답한 산행이 잠시 이어진다. 그렇다고 지나온 구간에 별다른 볼거리가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아까는 걸음을 옮기며 취나물을 뜯는 재미는 있었다.



얼마 후 진행방향을 또 다른 봉우리가 가로막는다. 이번에도 산길은 봉우리를 피해 우회를 시킨다.



그렇게 5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또 다른 방향표시지가 보인다. 방금 우회를 했던 왼편의 봉우리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고속도로처럼 널따란 길은 곧장 직진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갈림길에서 바라본 직진방향의 길, 이건 숫제 고속도로이다. 이런 좋은 길을 버리고 길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는 곧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라는 얘기이다.



왼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Car navigation system)을 통해 주행안내를 받다보면 진행방향을 나타내는 기호로 시간을 이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7시 방향이라 하면 거의 반 바퀴를 빙 돌아 반대방향으로 간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의 상황이 딱 그와 같기에 거론을 해봤다. 그만큼 크게 방향을 꺾는다는 얘기이다.



또 다시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 산행이 시작된다. 아무래도 오늘 산행의 특징인가 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고역이 잠깐이면 끝이 난다는 점이다. 2분이 채 안되어 몸통만큼이나 굵직한 노송(老松)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623m봉에 올라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도 역시 정상석이나 이정표 등 아무런 표시가 없다. 하긴 함박산처럼 이름이 있는 봉우리까지도 그런 표식이 없었는데 이런 무명봉에 누가 그런 표식까지 해놓겠는가.



623m봉에서는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이번에도 역시 길은 없다. 그저 방향표시지를 찾아가며 아래로 내려갈 따름이다.




그렇게 7~8분쯤 내려갔을까 안부에 이르게 되고 또 다시 작은 오름짓을 하다보면 수양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함박산을 출발한지 18분 만이다. 수양산의 정상은 전망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뛰어난 조망을 보여주는 바위이다.



수양산 정상도 역시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는 물론이고 이곳이 수양산의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 어떤 표식도 없다. 심지어 이곳에서는 표지기(ribbon)마저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게 서운했던 모양이다.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 한분이 현장에서 급조(急造)정상표시지를 붙여 놓았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북서쪽으로 시천면 소재지를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그 뒤에는 구곡산이 우뚝하다. 중앙 멀리로는 보이는 것은 물론 지리산의 천왕봉과 중봉이다. 정북 쪽에는 소리당 계곡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시무산과 또 다른 수양산, 깃대봉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벌목봉과 화장산 등이 도열해 있다. 백운산과 석대산까지 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보면 볼수록 화려한 조망이 펼쳐진다.




소두방산으로 향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이곳도 역시 길이 보이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가시넝쿨들은 보이지 않는다. 잡목들만 헤치면 되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지만 이 구간은 간벌(間伐)로 인해 발생한 나무들이 이곳저곳에 널려있어 진행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는 애로가 있다.




그렇게 30분 가까이 내려서면 임도가 나있는 옥동고개이다. 이제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비록 잠시지만 말이다.



소두방산으로도 임도가 나있다. 가파른 곳에는 밧줄을 매어놓는 배려까지 해놓았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편의시설이 아닐까 싶다. 모처럼 밝은 마음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런 호사는 오래가지 못한다. 중간에 무덤을 만나면서 또 다시 산길이 끊겨버리기 때문이다. 기분 좋게 올라왔던 산길은 이 무덤을 위해 조성한 길이었던 모양이다.



또 다시 개척 산행이 이어진다. 방향을 잡을 수도 없다. 그저 가장 높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향해 오를 뿐이다.



그렇게 고생을 치르다보면 잠시 후에 소두방산 정상에 올라선다. 인근 주민들은 할미봉또는 함미봉으로 부른단다. 이곳도 역시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이다. 선답자들의 표지기(ribbon)도 역시 보이지 않는다. 아까 수양산과 마찬가지로 함께 걷고 있는 일행이 급조해서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지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수양산에서 소두방산까지는 1시간 10분 정도가 걸렸다.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1시간이나 걸린 셈이다. 간벌지역을 통과하느라 많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잡목으로 둘러싸인 탓에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별로이다. 하지만 몇 걸음만 옮기면 좁게나마 시야가 트인다. 그리고 지리산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비록 웃자란 소나무들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버렸지만 말이다.



비룡산으로 향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올라왔던 길로 100m쯤 되돌아 나가서 다시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급사면(急斜面)의 내리막길이 마중 나오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대가는 혹독했다. 경사가 가파른 것 정도야 문제가 될 수 없다. 길가의 굵은 소나무나 잡목들을 부여잡고 내려서면 되기 때문이다. 그보다 훨씬 더 큰 복병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간벌(間伐)이 아니라 온전한 벌목(伐木)지대이다. 바닥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모든 나무들을 베어 넘겼다. 때문에 쓰러진 굵은 나무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어서 통과 자체가 불가능해져 버렸다. 그런데 범위까지 넓으니 문제다. 빙 돌아서 내려가는데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肉頭文字)가 튀어나오고 만다. 벌목을 했으면 그로 인해 생긴 부산물을 치워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느 글에선가 이 산들을 웬만한 꾼들에게서조차 외면을 받는다고 했다. 그 말이 실감이 난다. 내 생각에도 이 산들은 그저 원시림을 헤집으며 수많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렸다는데서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40분 이상 악전고투를 치른 후에야 우리 일행은 안부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다지 길지 않은 코스 임에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만큼 길이 험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비룡산으로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중태리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산악회에서 공지한 하산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그것도 시멘트로 포장까지 되어있다. 서두를 필요 없이 길가에 보이는 예쁘장한 전원주택들을 구경하면서 서서히 걸으면 될 일이다.



20분쯤 내려가다 길이 나뉘는 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제법 너른 개울을 만난다. 중태천(中台川)이다. 산행에 지친 다리도 풀어볼 겸 물속으로 들어가 본다. 맑으면서도 차갑다. 역시 지리산 줄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답다.



산행날머리는 중태마을 경로당(산청군 시천면 중태리 826)

개울에서 빠져나와 5분 정도 더 걸으면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에 자리 잡은 중태마을 경로당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경로당 앞에는 지리산둘레길을 탐방하는 사람들에게 스탬프를 찍어주면서 팸플릿(pamphlet) 등을 판매하는 지리산둘레길 중태마을안내소가 설치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지리산 둘레길을 안내하겠다는 취지로 만든 것이란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정확히 4시간 30분이 걸렀다.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4시간 20분이나 걸린 셈이다.


미타산(彌陀山, 663m)

 

여행일 : ‘17. 4. 6()

소재지 : 경남 합천군 적중면청덕면과 의령군 부림면의 경계

산행코스 : 유학사묵방마을410m488사거리상사바위(왕복)미타산미타산성단상암불관사대나무밭유학사(산행시간 : 3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미타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정상 근처에서 바위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 정도의 바위도 없는 산이 어디 있겠는가. 덕분에 산길은 편하기 그지없다. 보드라운 흙길은 폭신폭신하기만 한데, 그 위에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 아예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할 지경이다. 거기다 산길은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노약자들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을 만큼 편하다는 얘기이다. 흙산 치고는 조망까지도 빼어나다. 정상과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게 되는 바위지대에서의 조망은 다른 바위산들에 비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장점도 있다. ’유학사라는 천년고찰과 미타산성이라는 문화유산까지 갖추고 있다. 이만하면 가족 산행지로 부족함이 없을 듯 싶다. 웰빙과 힐링을 즐기면서 조상의 빛난 얼까지 되새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산행들머리는 유학사(의령군 부림면 묵방리 49)

중부내륙고속도로(옛 구마고속도로) 현풍 I.C에서 내려와 달성 제2차 일반산업단지를 통과한 후 67번 지방도를 따라 이남삼거리(창녕군 이방면 현창리)까지 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20번 국도로 갈아타고 적포교()를 이용 낙동강을 건넌 후 의령방면으로 달리다가 여배삼거리(의령군 부림면 여배리 166-6)‘에서 우회전하여 여배로(郡道)를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유학사에 이르게 된다. 유학사의 입구에 제법 너른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산행은 첨부된 지도와는 반대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부산일보의 &취재팀이 걸었던 코스와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걸은 셈이다.



오른편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다리 난간에 유학사라고 쓰인 팻말이 붙어있으니 들머리를 찾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다만 부산일보의 산행기사를 참조하려는 사람들이라면 주의할 게 하나 있다. 기사대로 코스를 잡을 경우 들머리 찾기가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기사대로라면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계곡을 따라 50m쯤 올라가다가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게 문제다. 그렇다고 길이 또렷하게 나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눈치껏 들어서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다만 70m쯤 올라가면 제법 너른 임도(林道)를 만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일 수 있겠다. 



유학사로 오르는 돌계단 옆에 두꺼비의 머리 모양으로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 돌그릇 아래에는 돌로 만든 표주박도 보인다. 생김새로 보아 우물이 분명하다. 두꺼비 입에서 떨어져 내린 물이 돌그릇을 통과해 표주박까지 흐르도록 설계된 샘 말이다. 하지만 가뭄 탓인지 물은 흐르지 않는다.



등산로는 유학사(留鶴寺)를 오른편에 끼고 나있다. 산행을 서두르는 일행들과 헤어져 유학사로 들어선다. 천년고찰(千年古刹)이라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은 규모이다. 남향으로 자리 잡은 극락전(極樂殿)을 중심으로 맞은편에 만세루, 왼편에는 종각(鐘閣)을 배치했다. 그리고 요사(寮舍) 두 동은 극락전의 오른편에다 두었다. 칠성각은 요사 뒤쪽의 계단 위쪽에 살포시 숨어있다. 절의 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만세루(萬世樓)는 말만 루()이지 실제로는 누각(樓閣)이 아니다. 단층 건물인데다가 누문도 없으며 툇마루가 달린 요사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건물의 뒤편에 걸려있는 편액에도 유학사라고 적혀있다. 그저 절에서 부르는 이름이 만세루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절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으련만 인기척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절의 이름에서 나타나는 학()이라도 날아들기 딱 좋은 풍경이다. 하지만 찾아오지 않는지 이미 오래란다. 유학사에 날아들었다는 학은 이제 전설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모양이다.



유학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누가 세웠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절의 위치도 원래는 이곳이 아니었다. 창건 당시에는 미타산의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조선 초기의 왕사(王師)였던 무학(無學)이 사찰의 위치가 풍수지리상으로 맞지 않는다면서 1399(정종 1)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서 중창하였다는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 부근의 형세가 날아가는 학의 형상인데 이전의 절터는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자리였으므로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학이 절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을 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그 뒤 1780(정조 4) 4월에 승통(僧統) 치유(緇裕)가 시주하여 전각(殿閣)을 중수하였으며, 190010월에는 경룡(敬龍초해(楚海정선(正善) 등이 대웅전을 중수하고 단청하였다. 1927년에는 금호(錦湖)가 칠성각을 신축하였고, 혼명(混溟)이 요사채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을 빠져나와 산행을 이어간다. 묵방마을로 이어지는 임도이다. 임도는 산허리를 자르며 나있다. 기암절벽으로 이루진 산자락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훌륭하다. 거기다 길가에는 고추나물나무가 지천이다. 잎의 생김새가 고춧잎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봄나물로 인기가 있다. 여린 잎을 뜨거운 물에 데쳐내어 양념에 무쳐놓으면 그 맛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임도는 계곡을 왼편에 끼고 나있다. 길 옆 계곡은 작지만 절경이다. 기암절벽을 옆구리에 끼고 있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내린 비 때문인지는 몰라도 흐르는 물의 양 또한 제법 된다. 이쪽으로 하산을 할 경우 몸을 씻고 내려가기 딱 좋을 것 같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으면 묵방마을에 이르게 된다. 서너 가구(家口)쯤 살고 있는 작은 산골마을이다. 묵방마을은 이곳 본마을칠공마을로 나뉜다. 하지만 두 마을은 걸어서 산길을 넘거나 아니면 자동차로 한참을 돌아가야만 서로 만날 수 있다. 문득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란 노래 제목이 떠오른다. 이광조가 불렀던 노래인데 이곳 묵방마을에 딱 어울리는 글귀가 아닐까 싶다.



마을 앞에는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다. 이런 심심산골에도 여름철 뙤약볕을 피할 곳은 필요했나 보다. 등산로는 정자의 뒤로 나있다. 경운기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지만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다. 100m쯤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집수장까지 연결시키기 위해서 내놓은 모양이다.



집수장 근처에서 내려다본 묵방마을. 지금은 비록 산골짜기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지명이 통일신라 때 묵(·벼루)을 만든 장인이 자리 잡았다는데서 유래한다고 전할만큼 유서 깊은 마을이다.



능선을 향해 오르는 산길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급하게 고도(高度)를 높여야 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산길은 가끔 골짜기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골짜기를 따라 오르기도 한다. 골짜기라고 해봐야 물기 한 점 없는 마른 땅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웅덩이 모양의 습지(濕地)들이 보이는 것을 보면 물이 많이 나는 산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산에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흐드러지게 피어난 진달래꽃 무리가 길손을 맞는다. 그런데 아름답게만 보여야할 연분홍 꽃무리가 서글프게 다가오는 건 무슨 이유일까? 어쩌면 부산일보의 취재기사가 그 원인이지 싶다. 당시 기사는 미타산을 일러 '칼부림의 산'이라고 하면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글귀를 부언(附言)했었다. 고려 무인정권 시대에 세력을 떨친바 있는 천민(賤民) 출신의 장군 이의민이 이곳 미타산에 숨어들었다가 최충헌 형제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기사는 권불십년(權不十年)‘, ’칼 든 자는 칼로 망한다.‘는 우리가 명심해야할 글귀까지 첨언(添言)했었다.



그렇게 20분 남짓 진행하면 무덤 한 기가 나온다. 이곳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옳은 방향은 오른편이다. 하지만 왼편으로도 길이 나있다. 국제신문의 근교산행 취재팀이 시루봉이라고 했던 봉우리로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시루봉을 다녀올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시간을 내어가면서까지 다녀올만한 가치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파악해본 바에 의하면 조망이나 산세 등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다는 얘기이다.



무덤을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거기다 길 주변엔 진달래꽃이 무리를 지어 피어났다. 기웃거리다보면 오르는 길이 힘들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7분쯤 헐떡거리다보면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첨부된 지도에 410m봉으로 표시된 지점일 것이다. 이곳에도 무덤 한 기가 자리 잡고 있다. 산행을 하다보면 이곳 말고도 꽤나 많은 무덤들을 만나게 된다. 누군가 미타산 인근에 명당(明堂)이 많다고 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곳 미타산의 정기(精氣)가 두 명의 대통령을 낳았다고 했다.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10Km쯤 떨어진 율곡면에 전두환대통령의 생가(生家)가 있는가 하면, 반대편으로 그만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청덕면에는 노무현대통령의 윗대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두곡리 송기마을이 있다는 것이다.



410m봉에서 내려서는 길도 역시 진달래군락지이다. 아니 그 농도(濃度)가 아까보다 훨씬 더 짙어졌다. 주변이 온통 연분홍 진달래꽃들로 둘러싸여 있다. 꽃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4분쯤 내려서면 안부에 내려선다. 미타산은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한다. 하지만 왼편으로도 길이 나있다. 첨부된 지도에 불관사로 연결되는 길이 나있는데 이곳을 이르는 모양이다.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아니 아까보다 훨씬 더 가팔라졌다. 그리고 거리 또한 더 길어졌다. 아까의 배 정도는 더 고생해야만 다음 봉우리에 올라설 수 있다는 얘기이다. 오르는 길에 진달래꽃 무리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헐떡이다보면 다음 봉우리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 488m봉으로 표기된 지점일 것이다. 이곳에는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분지(盆地)처럼 펑퍼짐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을 따름이고 이곳이 어디라는 표시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산악회의 리본들이 마치 무당집 처마처럼 덕지덕지 붙어있을 따름이다.



또 다시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사가 거의 없다. 전형적인 능선 길로 봐도 되겠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진달래꽃이나 기웃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코스이다. 그렇게 내려서던 산길이 언제부턴가 오름길로 변해있다. 이번에도 역시 가파르지는 않다.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20분 남짓 진행했을까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도 제법 굵은 바위들이다. 그렇다고 바윗길을 걷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산길이 바위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잘도 나있기 때문이다.




바위가 많은 덕택에 전망 좋은 곳 또한 많다. 올라서는 바위들마다 시야(視野)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을 경우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지겠는데 오늘은 날씨가 받쳐주지 않는다. 비온 뒤끝인지라 아직까지도 안개가 두텁게 끼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15분쯤 진행하면 제대로 된 널찍한 산길을 만난다. 왼편은 미타산성으로 연결된다. 정상으로 가려면 당연히 오른편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곧장 정상으로 향하지 말고 오른편을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잠시 후 또렷한 오솔길 하나가 나타날 것이다. 오봉산과 성선으로 연결되는 능선길이다. 그리고 그 길로 들어섰다싶으면 송전탑(送電塔)이 나타나면서 그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바위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상사덤‘, 즉 상사바위이다.



상사덤은 상사병에 걸린 처녀가 뛰어내려 죽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바위이다. 쉽게 말해 바위무덤인 셈이다. 끔찍한 일이라 할 수 있으나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사연을 갖고 있는 바위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모든 사랑이 다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픔의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인연이 찾아오는 법이다. 서투른 결단은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또한 상사덤은 생각보다는 우람하지가 않다. 뛰어내린다고 해서 모두 다 죽을 것 같지는 않다는 얘기이다. 자칫 몸만 상할 수도 있으니 무모한 짓은 삼가는 게 좋겠다.



아까의 갈림길로 되돌아와 정상으로 향한다. 거의 평지에 가까운 길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이제 막 꽃망울을 열기 시작하는 진달래군락지로 들어서는가 하면, 굵직한 소나무들이 그득한 솔밭을 지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짙게 낀 안개가 만들어내는 풍광이 더 멋지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자못 신비롭기까지 하다.



잠시 후 미타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표지석을 세워놓았는데,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커다란 게 인상적이다. 삼각점(창녕 24, 1991재설)은 그 앞에다 만들어 놓았다. 참고로 미타산이라는 이름은 서방 극락정토에 산다는 아미타불의 '미타'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미타는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의 지혜 광명을 상징하는 부처를 말한다. 그렇다면 미타산은 깨달음의 산이라 할 수도 있겠다. 부처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그런 산 말이다.



정상은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조망이 뛰어나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아침까지 내리던 비가 몰고 온 안개가 아직까지도 걷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신문의 근교산행 취재팀의 글로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광활한 조망에 숨이 멎을 지경이다. 정상석 옆에서 발걸음 하나 떼지 않고 제자리에서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보자. 서북쪽에 오도산과 장군봉 남산제일봉 가야산이, 동북쪽으로 넘어가면 대구 현풍 비슬산이 보인다. 동남쪽으로 돌아서면 창녕 화왕산과 영취산이 보이고 서쪽으로 돌면 멀리 지리산 천왕봉과 그 오른쪽 황매산 둥근 봉우리, 가깝게는 이웃 산인 천황산과 국사봉 대암산까지. 특히 황매산 봉우리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의 풍광은 비경 중 비경이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이정표(상홍사 2.5Km, 큰고갯길 7.2Km/ 송림재 8Km)를 만난다. 두 방향으로 길을 나누고 있는 이정표는 미타산 정상이라는 이름표까지 달고 있으니 나름대로 격식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방향의 지명이 모두 다 낯설다는 게 문제이다. 상홍사는 합천군 적중면(누하리)에 있다는 작은 절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렇지만 송림재는 어디에 있는 곳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고객 편의주의‘, 세간(世間)의 화두(話頭)가 된지 이미 오래이다. 이왕에 만들 거라면 이용하는 사람들, 즉 등산객들의 입장에서 만들었더라면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큰고갯길 방향이다. 정상으로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가다가 상사바위로 가는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하지만 똑 같은 길을 두 번 걷고 싶지 않아서 방향을 달리 잡아봤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잘 지어진 정자(亭子)를 만난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게 조망(眺望) 보다는 쉼터의 기능을 갖고 있는 듯 싶다.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 내려서면 널따란 초지(草地)가 나타난다. 미타산성(이정표 : 공설운동장 6.0Km/ 미타산 정상 0.3Km/ 미타산 정상 0.2Km)이다.



미타산성(彌陀山城 : 경상남도기념물 231)은 미타산의 북쪽 방향 능선에서 남서 방향으로 2정도에 이르는 토석 혼축으로 된 성곽(城郭)이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성으로 성곽의 둘레가 2에 이른다. 높이 3.5m에 폭은 3m인데 그 축성(築城) 규모로 보아 군사적 요충지였음이 분명하다.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의 김유신(金庾信:595673) 장군이 미타산성에서 백제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합천 대야성(大耶城)과 함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추정된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문루(門樓)가 없는 성문을 빠져나가면 곧이어 헬기장이 나온다. 잔디가 손질이 잘되어 있는데다 헬기장을 뜻하는 ’H’자가 또렷한 것이 요즘도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성곽으로 되돌아 올라가야 한다. 유학사로 가려면 성곽을 따라 왼쪽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타산성은 미타산(표고 662m) 정상부를 성내로 삼고 그 주변 9부 능선에 성채(城寨)를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성내에서 북쪽으로 초계분지가 내려 보이고 남동쪽에는 신반, 동쪽으로는 멀리 창녕, 서쪽으로는 천황산(표고 656m)과 국사봉(표고 688m), 남쪽으로 봉산(표고 563m)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은 지세에 맞추어 축조하였으므로 평면이 곡선적이다. 성내는 북쪽과 서쪽은 급경사지이며 동쪽과 남쪽은 비교적 평탄하다. 성 바깥 역시 남쪽과 동쪽은 평탄하나 북쪽과 서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성의 서북쪽 최정상부에서 동쪽으로 약 300m쯤 떨어진 평탄지에서 봉수대가 발견되었으며, 방호벽과 연조,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건물터에는 현재 초석과 샘물터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아무튼 이 성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초축된 이래 2~3번 이상의 수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하나의 산성에서 다양한 형태의 축성양식을 볼 수 있다고 하며, 조선시대의 군사방어시설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성곽의 위는 초지(草地)로 조성되어 있다. 성벽의 돌들도 역시 반듯하게 잘 쌓아 올렸다. 아마 최근에 정비를 마친 모양이다.



200m정도 내려가자 가건물 몇 동()이 나타난다. 문화재청에서 이곳 미타산성을 소개하면서 성()의 안에 민가(民家)가 있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한쪽 귀퉁이에는 작은 연못도 보인다. 산의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 이로운 점이 있어 이곳에다 산성을 쌓았을 것이고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극락전(極樂殿)’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그리고 건물의 벽면에는 미타산 단상암(彌陀山 斷想庵)’이라고 적힌 또 다른 편액도 걸려있다. 부처님을 모시는 절간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외견으로 보아서는 일반 여염집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단상암에는 작은 굴들이 몇 개 뚫려있는 거대한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올랐다. 그 바위의 아래에 제단(祭壇)을 만들고 미타산왕대신지위(彌陀山王大神之位)’라고 쓰인 빗돌(碑石)을 세워놓았다. 보통의 절간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지 싶다. 부처님을 모시는 절간이 아니라 무속신앙(巫俗信仰)을 믿는 곳으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올 봄에 계룡산 줄기인 향적산에 오르면서 보았던 풍경들과 많이 닮았기에 거론해봤다.



단상암 앞에서 성곽을 빠져나온다. 성벽 아래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다. 부산일보 취재기사에서 성곽으로 들어서기 전에 산꾼들이 토굴집이라고 부르는 민가를 만난다고 했는데 저 집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산성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인지 말끔하게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다. 덕분에 진달래가 곱게 핀 산길임에도 불구하고 삭막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그렇게 30분쯤 내려가면 잘 지어진 전원주택이 나타난다. 아니 집 주변의 경작지가 제법 너른 것이 농가(農家)로 보는 게 더 옳겠다. 농가의 위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마치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오가는 이들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계속해서 임도를 탄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지루하다는 느낌이다. 여름철에 이곳을 찾았을 경우에는 무더운 뙤약볕에 고생깨나 하겠다. 그렇게 20분 가까이 걸으면 또 다른 민가가 나타난다. 그리고 진행방향 저만큼에 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묵방마을을 이루고 있는 마을 중 하나인 칠공마을(묵방리)이 아닐까 싶다. 옻나무가 많이 자생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그 칠공마을 말이다. 아무튼 이곳 칠공마을에는 논을 일굴 땅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이곳 사람들은 외지에서 농사를 지어 지게로 져왔단다. 나락을 다섯 번 지고 오는 동안 밥은 여섯 번을 먹었을 정도라니 혹독한 세월을 어찌 말로 다 표한할 수 있겠는가.



마을에는 절간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불관사이다. 심심산골에 들어앉은 사찰치고는 제법 큰 규모이지만 누가 언제 어떤 사연을 갖고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절 앞에 표석을 세워놓았지만 어느 종단에 속해있는지도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쉽게 말해 정체불명의 사찰이라는 얘기이다. 참 이곳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하나 있다. 불관사에 이르기 전에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무조건 절이 있는 방향으로 진행하라는 것이다.



유리 너머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시멘트 벽면에 뚫려있는 세 개의 구멍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다. 그 아래에는 다섯 개의 수도꼭지가 매달려 있다. ’용천약수(龍泉藥水)‘란다. 냉큼 한 모금 마시고 본다. 미적지근한 것이 물맛은 별로이다. 물통의 물을 보충하려다 뚜껑을 도로 닫아버린 이유이다.



불관사를 빠져나오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왼쪽이 옳은 방향이다. 동네로 들어서는 골목길로 보여 의아해 할 수도 있으나 옳은 방향이니 의심하지 말도록 하자. 방향을 틀자마자 오른편으로 비좁은 길이 하나 나뉜다. 등산로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 길로 들어서는 게 옳다. 잠시 후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타나면 옳게 진행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말은 쉽게 했지만 길 찾기는 말처럼 쉽지가 않다. 우리 부부 역시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타난 구세주는 동네 주민들이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유학사로 내려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주는 게 아닌가. 길을 못 찾고 헤매는 등산객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물론 주민들의 친절한 마음씨가 없었더라면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산길은 울창한 대나무밭 한가운데로 나있다. 햇빛이 스며들지 못해 어두컴컴한 것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거기다 시체처럼 드러누운 대나무들이 자꾸만 길을 막는다. 사람들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나무 밭이 끝났다 싶으면 다 쓰러져가는 움막이 하나 나탄다. 어두컴컴한 주변 풍경 탓인지 귀신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흉흉한 모습이다.



대나무밭 근처에서 멋진 풍광을 만난다. 각진 바위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하도 바위가 귀한 산이다 보니 웬만한 바위들은 모두가 다 눈에 쏙쏙 들어온다.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임도처럼 널따란 길로 이어진다. 유학사에서 칠공마을로 이어진다는 옛길인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낙엽만이 수북하다. 하긴 칠공마을까지 자동차 길이 나있는데도 일부러 이 길을 걸을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유학사(원점회귀)

그렇게 10분 정도를 걸었다싶은데 갑자기 임도가 끝나버린다. 이어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서면 유학사 앞 계곡에 내려서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계곡은 봇물 터진 듯 요란스럽게 물을 뿜어내고 있다. 간밤에 내린 비의 양이 제법 되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산행 내내 길이 미끄러웠었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4시간 정도가 걸렸다. 하지만 실제로 걸은 시간은 그보다 훨씬 적다. 나물을 캐느라 중간에 멈추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고 보면 되겠다.


옥산(玉山, 615m)-천왕봉(天王峰, 602m)

 

산행일 : ‘17. 3. 11()

소재지 : 경남 하동군 북천면

산행코스 : 옥종주유소옥산샘옥산헬기장임도천왕봉567청수 삼거리청수마을입구 도로(산행시간 : 2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두 산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을 정도라면 대충 짐작이 갈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산길은 한없이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버거울 정도로 가파른 구간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여느 흙산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 옥산과 천왕봉은 다른 흙산들이 갖지 못한 특징을 보여준다. 흙산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조망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지리산의 주능선과 남해방향의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정상어림의 나무들을 완전해 제거해 놓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날씨가 좋을 때 다시 한 번 찾아오고 싶은 산이다. 기왕이면 가족과 함께 말이다. 그때는 짙은 솔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소나무 숲길을 느긋하게 걸어보는 느림보의 미학에 도전해보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옥종주유소(하동군 옥종면 양구리 29-3)

남해고속도로 곤양IC에서 내려와 우회전하여 58번 지방도를 타고 곧장 가다가 2번 국도를 만나면 좌회전 한다. 북천면으로 가는 길인데 곳곳에 지리산 이정표가 보인다는 게 특징이다. 그리고 1005번 단성 옥종 이정표를 따라 죽 들어가다 보면 배토재를 지나 산행들머리인 옥종주유소에 이르게 된다.



산행은 첨부된 지도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청수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한 부산일보와는 달리 옥종주유소(양구마을) 앞에서 시작해서 옥종샘을 거쳐 옥산 정상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지도에 표시된 등산로를 그대로 따랐다.




옥종주유소(Oil-bank)에서 북천면 방향으로 50m 남짓 떨어진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난 농로(農路)를 따라 들어가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옥산까지의 거리가 3.5Km라고 적힌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농로로는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길가에 멋진 정자(亭子)를 지어놓았다. 그런데 몇 가지의 운동기구까지 갖춘 풍경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주민의 대부분이 노인들인 점을 감안한 발상인 것 같아서이다. 그냥 쉬기만 할 것이 아니라 건강도 챙기면서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인 것 같아서이다.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내 고향 도랑 살리기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었다고 적혀있다. 도랑을 복원하고 청결하게 관리함으로써 마을을 행복하고 즐거운 삶의 터전으로 만들려는 클린마을 만들기 운동이란다.



일직선으로 나있던 농로가 좌우로 나뉜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조금 더 넓은 길을 따른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렇게 15쯤 진행하자 매실과수원이 길손을 맞는다. 온도계의 수은주가 영하(零下)를 가리키고 있는 서울지역과는 달리 이곳 하동은 이미 봄이 무르익었나 보다. 매화나무가 모든 가지마다 하얀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 코끝을 찡긋거려 보지만 향내는 맡아지지 않는다. 매화꽃에도 꿀벌들이 모여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다.




과수원 근처에는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무늬만 안내도이다. 등산안내도가 빼먹어서는 결코 안 되는 등산로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저 옥산면의 관내지도라고 보는 게 옳겠다. 그러니 지도의 하단에 적어놓은 여러 곳의 들머리에서 옥산정상까지의 거리와 소요시간들도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시작지점이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으니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4분쯤 더 걸으면 산길은 농로(이때쯤에는 임도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와 헤어진다. 그리고 왼편 산자락으로 향한다. 이곳에도 역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지명과 거리, 거기다 방향까지도 모두 지워져버렸지만 등산로의 진행방향을 추정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등산로는 잘 정비가 되어 있는 편이다. 경사(傾斜)가 조금이라도 심한 곳에는 어김없이 통나무계단을 놓았다. 길가의 잡초도 깔끔하게 제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 않아도 널따란 등산로가 훨씬 더 넓어 보인다



9분쯤 더 진행하자 또 다시 임도를 만난다. 아까 길이 나뉘던 지점에서 계속해서 임도를 탔을 경우 이곳으로 연결되지 않나 싶다. 아무튼 임도는 이곳에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등산로는 이곳에서부터 오솔길로 변한다. 들머리에 이정표(옥산 3.0Km)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염려는 없을 것이다.



산길이 능선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않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사면(斜面)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경사가 없는 평지와 다름없는 산길이 계속된다.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트이면서 옥종면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런데 그 색깔이 온통 하얀색이다. 흡사 눈이라도 내린 것 같다. 이곳도 역시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영농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까 오늘 길에 만났던 비닐하우스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딸기를 제배하고 있었다. 겨울딸기를 재배하느라 비닐하우스를 지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이곳 덕천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옥종딸기는 풍부한 영양과 높은 당도를 자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향기까지도 뛰어나단다. 그래선지 많은 양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단다.



조망을 즐기면서 7분쯤 걷다보면 옹달샘 하나를 만난다. 첨부된 지도에 옥산샘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이다. 샘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을 정사각형으로 쌓아올려 주변의 흙이 샘으로 밀려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지붕까지 씌워 놓았다. 플라스틱 바가지 몇 개가 걸려있음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마셔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한다. 물이 고여 있는 듯한 모양새가 구미(口味)를 잃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옥산샘의 주변은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다. 나무의 굵기나 숲의 면적 등으로 보아 유명세를 타고 있는 다른 편백나무 숲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왜소하다. 하지만 속세에 지친 육신이 잠시 쉬어가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겠다. 숲의 곳곳에 평상이 놓인 것을 보면 그게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치유(治癒)의 효능을 갖고 있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편백나무라는데, 그런 좋은 조건을 그대로 놓아둘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편백나무 숲의 끄트머리에서 산길은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이어서 정상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탄다. 오른편으로도 길의 흔적이 희미하게 나타나지만 어디로 연결되는 지도 모르겠기에 그냥 무시하기로 한다. 능선으로 올라선 후에도 산길은 큰 변화를 주지 않는다.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되고, 경사도 변함없이 완만하다. 그러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기는 여느 오름길과 매한가지이다. 아무리 경사가 약하다고 해도 그 오르내림이 평지 같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주는 아늑한 편안함 덕분이 아닐까 싶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잔뜩 취해버린 머릿속에 어떻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올 틈이 생겨나겠는가.



옥산샘을 나서고 15분 남짓 지났을까 급할 것 없어하던 산길이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정상을 내주기 싫은 옥산이 투정이라도 부리는 모양이다. 왔다갔다 갈지()자를 쓰고 나서야 위로 오를 수 있게 만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아직도 계속된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그마저 없었더라면 훨씬 더 힘든 산행이 되었을 것 같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다시 한 번 시야가 열린다. 이번에도 역시 옥종면 방향이다. 다만 그 범위가 아까보다 조금 더 넓어졌을 따름이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잠시 숨을 고르던 산길은 정상 바로 아래에서 둘로 나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왼편은 청수마을(의양)로 연결될 것이다. 하지만 의미를 둘 일은 아니다. 어차피 정상을 찍지 않은 채로 하산을 감행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옥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하고 정확히 1시간이 걸렸다. 구릉(丘陵)처럼 생긴 정상은 고운 잔디로 뒤덮여있다. 그래선지 산의 꼭대기라기보다는 차라리 이웃집 안마당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것도 잘 가꾸어진 마당이다. 그 마당에는 두 개의 정상석과 옥종면의 관광안내도로 보이는 지도, 삼각점, 그리고 산불감시초소가 세워져 있다. 벤치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옥산은 봉황새가 양 날개를 벌리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품안에 든 어린 새끼를 보호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산세(山勢) 또한 어머니의 치마폭같이 부드럽다는 것이다.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올라오는 내내 참으로 포근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옥산의 정상에는 검은 오석(烏石)으로 된 정상표지석 말고도 옥산봉, 지리산 정맥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하나 더 세워져 있다. 아니 정상석 보다도 훨씬 더 크게 만들어 놓았다. 2000년에 간행된 옥종면지(玉宗面誌)‘의 기록과 연관이 있는 시설물이 아닐까 싶다. 면지(面誌)에서 옥산을 지리산의 한 줄기가 뻗어 나와 정수리 앞산 줄기를 따라서 북천면과의 경계인 백토재를 건너가서 한 줄기는 멀리 사천과 고성을 만들고, 더 나아가서 통영시를 건너서 미륵도까지 갔으며, 또 한 줄기는 함안·김해까지 갔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옥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옛적 옥황상제가 남도의 명산들은 아무 날 아무 시까지 지리산으로 모이시오.’라는 명령을 내렸단다. 당시 진주 근방에서 우쭐대던 옥산도 이에 합류하고자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런데 옥종에 이르렀을 무렵 통샘에 물을 길러 가던 청수마을 처녀의 눈에 띠었던 모양이다. 이에 놀란 처녀가 ! 저기 산이 걸어가네.’라고 외치자 움찔한 옥산은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리산에 가지 못한 그 산은 옥종면의 진산(鎭山)이 되었고 말이다.



산불감시초소는 청수마을(의양) 방향에다 배치했다. 초소라는 게 원래 시야(視野)가 가장 넓게 열리는 곳, 즉 산꼭대기에다 만드는 게 보통이기에 의외가 아닐 수 없다. 하도 예쁘게 가꾸어 놓은 정상의 경관을 헤치기 싫었던 게 그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세세한 것에 까지 신경을 쓴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드려본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한마디로 빼어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리산의 천왕봉이다. 감시초소에서 일하는 분이 저것이 천왕봉이고 그 옆이 중봉이라며 봉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가리켜 주신다.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돌려본다. 천왕봉의 옆에는 제석봉이 서있고, 조금 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잘록한 곳에 장터목, 그리고 고개를 다시 들면 촛대봉이 반갑게 맞는다. 그 오른편에는 영신봉과 칠선봉, 그리고 연하천이 있을 것이다.



반대방향의 산들도 반갑게 맞는다. 영신봉에서 갈라져 나와 삼신봉과 거사봉을 거쳐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또렷하고 그 왼편 섬진강 너머에는 백운산이 우뚝하다. 그보다 더 왼편에서도 수많은 산들이 나도 여기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남해바다 근처의 금오산과 연화산 등으로 보이지만 점점 짙어져가는 연무(煙霧) 때문에 어느 산인지는 구분이 안 되고 있다.



정상은 도심(都心)의 공원(公園)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 간간이 보이는 소나무들은 누구네 집 정원수처럼 깔끔하게 전지(剪枝)를 해놓았고, 이정표나 옥종면관광도 등의 시설물에는 수많은 솟대를 꽂아 두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곳곳에 쇠파이프를 꽂고 그 위에다 솟대를 올렸다. 감시초소에서 일하는 분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튼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우린 멋진 풍광을 가슴에 담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정상에서 산길은 둘로 나뉜다. 산불감시초소 옆에 이정표(백토재, 돌고지재/ 의양 3.0Km/ 양구 3.5Km)가 세워져 있으니 잘 살펴보고 출발하는 게 좋겠다. 물론 백토재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천왕봉으로 향한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내려설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그저 그 거리가 짧다는 게 다행일 따름이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 내리막길이 끝나기 때문이다.



내리막길이 끝났다싶으면 곧이어 헬기장이 나온다. 보도블럭으로 표시한 ‘H’자가 아직까지도 또렷한 것으로 보아 계속해서 정비를 해온 모양이다. 이곳 헬기장 근처에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백토재4.0Km/ 의양3.2Km/ 옥산0.5Km)로 나뉜다. 천왕봉으로 가려면 백토재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왼편은 수정암을 거쳐 하산하는 길이니 주의한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널따란 길이 눈에 거슬릴 만도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괜찮은 편이다. 주변이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서까래로 써도 충분할 만큼 굵게 잘 자라있다.



얼마쯤 걸었을까 아마 7분쯤 걸었을 게다. 주변이 낙엽송(일본이깔나무) 군락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왼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나뉜다. 이정표(돌고지재 3.5Km/ 백토재 3.7Km/ 옥산 0.8Km)가 세워져 있지만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눈에 익은 지명인 백토재가 왼편으로 진행할 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돌고지재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옳다. 물론 백토재 방향으로 올라가도 천왕봉에 이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천왕봉을 둘러보고 난 후에는 올라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만 하는 단점이 있다.



계속해서 임도를 탄다. 물론 돌고지재 방향이다. 8분쯤 더 걷자 삼거리가 나온다. 천왕봉으로 가려면 이정표(백토재4.4Km/ 돌고지재2.7Km/ 옥산1.7Km)가 가리키고 있는 백토재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계속해서 직진할 경우 돌고지재로 연결되니 주의한다. 돌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그 돌고지재 말이다. ! 잊고 지나갈 뻔 했다. 섬진기맥(蟾津岐脈)을 말이다. 돌고지재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546m봉에서 분기하는 지맥이 바로 섬진기맥인데 이 산줄기는 낙동강과 섬진강의 수계(水界)를 가르며 황치에서 계명산 이명산으로 맥을 있다가, 그중 하나가 하동 금오산에서 마지막으로 솟아올랐다가 남해대교 앞 바다로 잦아든다.




삼거리에서 오름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경사는 거의 없는 편이다. 사륜구동형의 차량이 아니라 일반 승용차가 올라 다녀도 되겠다. 천왕봉의 정상에 있다는 활공장으로 연결시키는 임도라서 경사를 뚝 떨어뜨려 놓은 모양이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낙남정맥(洛南正脈)을 따른다. 낙남정맥이란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끝나는 지리산(智異山)의 영신봉(靈神峰)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하여, 진주와 하동·사천 사이로 이어지다가, 마산·창원 등지의 높이 300800m의 산들을 일구어 낸 후 김해의 분성산(盆城山, 360m)에서 끝을 맺는 총 길이가 200쯤 되는 산줄기이다. 서쪽에서는 섬진강 하류와 남강 상류를 가르고, 동쪽에서는 낙동강 남쪽의 분수령(分水嶺)이 되는데, 연결되는 주요 산으로는 옥녀산(玉女山)과 천금산(千金山), 무량산(無量山), 여항산(餘航山), 광로산(匡盧山), 구룡산(九龍山), 불모산(佛母山) 등이 있다.



10분쯤 올라서니 천왕봉 정상이다. 천왕봉도 역시 잔디로 뒤덮여 있다. 옥산만은 못해도 관리를 해온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옛날에 있었다는 활공장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잘 지어진 육각정 하나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상표지석은 맨 꼭대기에다 세워놓았다. 천왕봉을 사랑하는 양천 사람들이 설치했다는데, 그 앞에다 제단(祭壇)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아 뭔가 행사를 치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참고로 낙남정맥을 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곳을 옥산이라는 이름과 함께 병기(倂記)하기도 한다. 원래의 옥산이 정맥에서 살짝 비켜나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곳 천왕봉과 옥산봉을 하나의 산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 옥종면민들의 생각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아까 옥산의 정상에서 보았던 면민(面民)들이 세웠다는 표지석이 그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지리산 줄기에 있는 노고단노고산이라고 부르지 않듯이 그들은 옥산을 옥산봉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천왕봉에서의 조망(眺望)도 탁월하다. 사방이 확 트여있기 때문이다. 북쪽의 주산과 구곡산 뒤에는 지리산의 천왕봉이 우뚝하고, 서쪽으로는 칠성봉과 구재봉, 분지봉이, 그리고 북서쪽에는 삼신봉이 또렷하다. 남쪽에 이명산과 금오산이 도열해 있음은 물론이다. 누군가 남해바다가 보인다고 외친다. 약간 희게 나타나는 지점이 바다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곳에서는 옥종마을 뒤편에 있는 진양호는 물론이고, 산 너머에 있는 남해바다까지 조망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비록 연무(煙霧)로 인해 또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옥종면의 대평 평야지대를 바라보면서 하산을 시작한다. 신라시대 한다사군에 속해있던 옥종면은 옥동면(玉東面)자와 가종면(加宗面)자를 따서 만들어낸 이름이다. 1929년에 두 개의 면이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이다. 가야시대의 청동기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옥종면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와 담계(澹溪) 정온(鄭蘊) 등 유학자가 많이 배출된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그 때문인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덕행을 기리는 옥산서원(玉山書院)과 진양 하씨 문중 사당인 경현사(景賢祠), 하홍도를 기리는 서원인 모한재(慕寒齋), 정온(鄭蘊)을 기리는 재실인 원모재(遠慕齋), 그리고 강민첨(姜民瞻)의 신도비와 재실인 두방재(斗芳齋) 등 유학과 관련된 문화재들이 산재해있어 현세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옛 선인들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다.



오늘 산행에는 유난히 많은 청미래 넝쿨들이 눈에 띈다. 꽃이 귀한 계절이라선지 청미래의 빨강 열매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비록 윤기가 흐르는 빨강은 사라졌지만 말이다.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 겨울철의 혹한(酷寒)에 많이도 시달렸나 보다. 아무튼 늦겨울, 봄의 문턱에서 바라보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작은 것에도 소중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숲속의 작은 속삭임에도 눈과 귀가 솔깃해진다. 봄을 생각하니 어느새 마음은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른다.



솔숲을 헤집으며 난 산길은 편안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 길에는 솔향기로 가득하다. 이런 길은 혼자 걸어도 좋지만 둘이 걸을 때 제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주고받으며 걷기에 딱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뺨을 스쳐가는 바람결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길에는 은방울꽃이 만발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10분쯤 내려서면 삼거리(이정표 : 백토재3.5Km/ 옥산1.0Km/ 돌고지재3.6Km)를 만난다. 왼편은 아까 임도를 따라 진행하다가 길 찾기에 주의를 하라고 했던 지점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산길은 완만한 오르내림으로 반복하고 있다. 중간에 2(567m)3(505m)을 지나게 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분간할 수가 없다. 그만큼 오르내림이 많이 반복되는데다 두 개의 봉우리 또한 특별히 내세울만한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중간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시야(視野)가 열리기도 한다. 나뭇잎을 다 떨구어버린 빈 나뭇가지 사이로 옥산이 빼곰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 오른편에는 옥종면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이는 겨울철에나 가능한 풍경이 아닐까 싶다. 날씨가 풀려 나뭇잎이라도 돋아난다면 기대조차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내리막길이 약간 가팔라진다. 하지만 산길은 여전히 고운 편이다. 그렇지 않아도 보드라운 흙길에는 솔가리(소나무 落葉)가 수북하게 쌓여 마치 융단을 깔아놓은 것 같다. 그래선지 해빙기(解氷期)임에도 불구하고 질척거림이 조금도 없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게 만드는 기분 좋은 산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아니 오늘 산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산길이 계속된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리 걸어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산길이다.



정상을 출발한지 35분 만에 청수삼거리’(이정표 : 청수1.2Km/ 백토재1.5Km/ 옥산3.0Km)를 만난다. 산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낙남정맥과 헤어진다.



산길은 여전히 곱다. 보드라운 흙길이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낮은 산이라서 급하게 고도를 떨어뜨릴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거기다 능선에는 송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어루만지듯이 볼을 스쳐가는 온화한 바람결에는 솔향으로 가득 찼다. 이건 숫제 삼림욕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소나무 숲길은 이곳까지 오는 내내 이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그만큼 소나무로 가득 찬 산이라는 얘기이다. 오늘 산행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바닥에 거의 떨어졌다싶은데 커다란 바위 몇 개가 나타난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바위라선지 반갑기까지 하다. 마침맞게 바위의 위가 평평하게 생겼다. 아직 덜 먹은 간식이 남아있다면 비워버리고 가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다.



산행날머리는 청수마을 입구(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삼거리에서 내려선지 20분 남짓 지나자 숲이 활짝 열리면서 저만큼에 청수마을이 나타난다. 산악회의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청수마을 입구의 도로변은 10분 정도를 더 걸어야 하지만 이쯤에서 산행을 끝내기로 한다. 그리고 산자락에 만들어진 밭으로 들어가 냉이를 캐기로 한다. 순전히 집사람의 우김이었지만 그렇게 캔 냉이는 우리 부부의 밥상을 일주일 내내 지켜주었다. 향긋한 봄내음을 듬뿍 품고서 말이다. 그만큼 많은 양을 캤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정확히 3시간이 걸렸다. 준비해온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해본다면 2시간 50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청수리로 내려가는 길에 올려다본 옥산과 천왕봉은 지리산의 일원답게 우람한 기세를 자랑한다. 거기다 지리산의 특징이랄 수 있는 푸근한 산세를 함께 지니고 있는 모양새이다. 옥종면의 진산(鎭山)으로서 갖춰야 할 품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