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조지아  므츠헤타,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므츠헤타(Mtskheta) :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도시로 BC 3세기~AD 5세기 이베리아(Iberia) 왕국의 수도였다. 므츠바리(Mtkvari)와 아라크비(Aragvi),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 잡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덕분에 고대 무역로가 지나가던 흔적들이 종종 유물로 발견된다. 5세기에 조지아의 수도는 트빌리시로 이전됐지만 므츠헤타는 여전히 조지아 사람들에게 정신적 수도다.

 

 즈바리 수도원에서 내려다본 므츠헤타 시가지. 마을 뒤로 높고 낮은 산들이 겹겹이 모여 마을을 감싸고 있다. 앞으로는 강과 강이 만나 평야를 이뤄 풍요로운 조지아의 천년고도 므츠헤타를 이루고 있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흑해 연안에 위치한 조지아 제2의 도시/ 여행사에서 나누어준 지도에는 누락되어있다)’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10분 정도(‘즈바리 수도원에서) 걸려서 도착한 므츠헤타 역사지구 주차장. 차에서 내리자 조금 전에 들렀던 즈바리 수도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치형 대문을 지나 마을로 들어간다. 길바닥은 유럽의 중세 도시들처럼 규격화된 돌을 깔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을까, 옛 왕도답게 바닥이 반질반질하다.

 주차장에 관광안내도로 보이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조지아어를 모르니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스베티 츠호벨리 성당으로 간다. 므츠헤타는 천년고도(千年古都)답지 않게 규모가 작았다. 번화가라고 해봐야 성당으로 가는 길을 따라 양쪽으로 200~300미터 정도 가게들이 모여 있는 게 전부다.

 유명 관광지답게 여러 가게들이 손님을 맞는다. 기념품가게가 대부분인데 간혹 게스트하우스나 호텔, 레스토랑도 눈에 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추첼라(Churchkhela)’. 추첼라는 포도에 각종 견과류를 섞어서 만든 조지아의 달콤한 국민 간식이다. 붉은 색깔이 나는 등 색상까지 먹음직스러우니 하나쯤 사들고 곶감 빼먹듯이 먹으며 걸어볼 일이다. 그것 또한 여행의 낭만이 아니겠는가.

 성당의 담벼락은 카페트, 코스터 같은 양모제품의 전시장으로 변신했다. 덕분에 고풍스러우나 우중충할 수밖에 없었던 벽면이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예쁘게 단장됐다.

 골목길이 끝나자 널따란 광장과 성벽에 둘러싸인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Svetitskhoveli Cathedral)’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한 눈에 봐도 위엄이 느껴진다. ‘스베티 츠호벨리 둥근 기둥을 뜻하는 스베티(Sveti)’ 생명을 주는 또는 사람을 살리는이라는 의미인 츠호벨리(tskhoveli)’의 합성어이다. ‘사람을 살리는 성당이란 뜻으로 성당의 건립 신화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성당은 요새처럼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것도 여느 왕궁의 성곽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져 있었다. 외세의 침입이 그만큼 빈번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성당 입구에 있는 관광안내소’.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석조 건물이 눈길을 끈다. 하느님을 모시는 성당의 안내소를 하필이면 신전처럼 지어놓았을까? 묘한 이중성이 보는 이를 헷갈리게 한다.

 출입문은 서쪽 성벽에 커다랗게 만들어져 있다. 아치형 문의 2/3쯤 까지 철문이 올리어져 있고, 그 위 양옆에서 두 개의 소머리(牛頭) 장식이 탐방객을 맞는다. 5세기에 건립된 교회의 잔존물이라는데, 당시만 해도 기독교와 민간신앙이 융합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단다.

 출입문 앞에 대성당의 미니어처가 설치되어 있었다. 성당의 내력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음을 알린다.

 경내로 들어가자 붉은 벽돌로 지은 비잔틴 양식의 대성당이 반긴다. 남북보다 동서의 길이가 훨씬 긴 모양새인데 서쪽으로 출입문이 나있다. 성당은 4단 정도의 층위로 나누어졌다. 가장 앞쪽에 서문, 이어서 출입구, 본당, 돔의 순서로 높아진다.

 고딕 양식의 종탑은 출입문 옆 성벽에 올라앉았다. 비상시에는 망루 역할까지 겸했던 모양이다.

 성당의 담벼락은 성벽을 연상시킨다. 에렉클 2(King Erekle II)가 통치하던 1787년 외부침입을 막기 위해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로인해 성당의 탑은 한때 무기고로도 사용되었다. 성벽에는 원통형으로 된 탑 6개와 정사각형 모양으로 된 탑 2개가 있다.

 조지아의 성당 중 가장 아름답다는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은 트빌리시의 사메바 성당과 함께 조지아정교회의 총본산이라고 했다. 왕의 대관식이나 장례식 같은 국가의 중대한 행사가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그만큼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선지 웨딩 촬영을 하고 있는 신혼부부들이 여러 쌍 보였다.

 성당 주변에 무덤으로 여겨지는 돌판(石板)들이 여럿 보였다. 평장을 하고 그 위에 글씨를 써놓은 것 같은데 내용은 알 수 없었다. 하긴 조지아 왕들과 주교들이 이곳에 묻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 중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들의 무덤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 지역 출신의 유력 인사들일지도 모르겠고...

 북쪽에서 본 대성당 전경. 앞서 다른 장에서도 얘기했듯이 조지아정교의 역사는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카파도키아 출신의 수녀 니노(Nino)에 의해 나나(Nana) 왕비에 이어 미리안(Mirian) 왕까지 기독교로 개종, 337년 조지아 국교로 공인되었음도 이미 거론했다. 379년 미리안 왕의 명을 받은 니노에 의해 이곳에 이베리아 왕국 최초의 목조(木造) 교회가 세워진다. 하지만 아랍·페르시아·티무르 등 외세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했고, 지진으로 파괴되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기오르기 1(Giorgi I)’가 통치했던 11세기(1010-1029)에 조지아의 건축가 아르수키드제(Arsukisdze)’에 의해 십자형 돔 형태의 교회로 재건된 것이다. 이후 지진으로 인해 성당이 일부 파괴되자, 1970-1971년 친차체(V. Tsintsadze)의 주도로 바실리카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바실리카 양식은 5세기 말 바흐탕 고르가사리 왕(King Vakhtang Gorgasali) 때 성행했던 조지아교회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이란다.

 성당 건축을 완공했던 건축가 아르수키드제에 관한 흔적은 북쪽의 외부 벽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석공을 상징하는 끌을 쥔 팔과 손의 형상이 새겨져있는데, 이게 아르수키드제의 손이라는 것이다. 알아볼 수는 없지만 아르수키드제의 손, 하느님의 종, 그의 용서를 바라며이라는 글귀도 끌에 적혀있다고 했다. 조지아의 소설가 콘스탄티네 감사쿠르디아는 이 소재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해 소설을 썼단다. 게오르기 왕이 아르수키드제의 연인으로 미모가 뛰어난 쇼레라를 흠모했고, 아르수키드제의 후원자였던 사제가 아르수키드제의 성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에게 거짓을 고해 그의 손을 자르게 했다나? 왕의 질투심에 휘발유를 부었다는 얘긴데, 얘기는 얘기일 따름이다.

 동쪽 벽은 아치형 상부에 공작 꼬리 장식이 있다. 그 위 왼쪽에도 뭔가를 새겼는데, 날개를 편 독수리와 사자라고 했다. 독수리는 하늘을, 사자는 땅을 대표하는 동물이니 뭔가 큰 의미를 지녔겠지만 더 이상의 추론은 불가능 했다. 하나 더. 창문 아래에는 멜키체덱 1세에 의해 이 성당이 만들어졌음을 알리는 명문이 적혀있단다.

 서쪽으로 난 문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출입문 안쪽 위에는 천사의 호위를 받는 성모자상이 그려져 있다.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양 옆의 두 천사로부터 경배를 받는 모양새이다.

 성당은 돔 형태의 천정이 높게 올라가있고, 그 아래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내부의 가장 높은 곳에는 예수님이 앉아계신다. ‘가장 높은 곳에 영광(Glory In The Highest)’이라고나 할까?

 성당의 벽면은 각종 성화(이콘)와 프레스코화들로 가득하다. 조지아정교의 성지답게 그 하나하나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이곳의 이코노스타시스(ikonostasis, ‘이콘을 거는 칸막이라는 뜻,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는 칸막이로 여기에 이콘을 건다)도 역시 화려했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의 좌우에 예수님,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열두 제자 등을 그린 이콘이 걸려있다. 그런데 왼쪽의 그림은 누구를 나타내고 있을까? 미리안 왕과 성녀 니노 같은데, 가운데 인물은 도대체 모르겠다.

 제대(맞는지는 모르겠다)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하긴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그려져 있는데, 어찌 경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치형 문과 사모지붕을 가진 구조물, 키보리움(ciborium.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 부르고도 있었다)이 눈길을 끈다. 저곳에 예수님의 윗도리가 시도니아와 함께 묻혀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1세기경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할 당시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 있었던 므츠헤타 출신의 유대인 엘리아스(Elias)가 로마 군인에게서 받은 예수의 옷을 가지고 조지아로 돌아왔다. 그때 예수의 옷을 만진 그의 여동생 시도니아(Sidonia)가 감정이 격해져 즉사했다. 그녀가 죽은 후에도 그 옷을 손에서 놓지 않자, 그 옷을 그녀와 함께 매장했고, 훗날 그녀의 무덤 옆에서 거대한 백향목 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즈바리 수도원에서 보았던 성화, 즉 천사가 나무 기둥을 들고 있는 그림(‘이베리아의 영광이라고 했다)이 이곳에도 있었다. 전설은 미리안 3(Mirian )’가 성녀 니노에게 성당 건립을 명했다고 전한다. 이에 니노는 시도니야의 무덤 자리를 성당 부지로 정하고, 그 무덤에서 자라고 있던 나무를 성당 기둥으로 세우고자 일곱 토막으로 잘랐는데, 일곱 번째 나무토막이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해 하늘나라까지 올라갔단다. 이에 니노가 밤을 새워 기도를 했고, 다음날에야 땅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 나무 기둥으로부터 성유(聖油)가 흘러나왔고, 병든 사람들 모두를 치유해 주었다고 한다. ‘살아 있는 기둥 또는 생명을 주는 기둥이란 뜻의 스베티츠호밸리라는 성당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다. 그 얘길 1880년대의 작가 미하일사비닌이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나나 왕비와 미리안 왕도 그림 아랫부분 좌우에 그려져 있다. 그루터기와 나무 기둥 사이에서는 사도 안드레아(Saint Andrew)와 성녀 니노가 십자가를 들고 성스러운 장면을 바라본다. 하늘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모 마리아, 천사들과 함께 나무 기둥을 두 손 들어 환영한다.

 현지의 꼬마 아가씨가 뭔가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런 풍경을 통째로 담아 집사람도 포즈를 취해본다. 뒤에 보이는 십자가가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성녀 니노(St. Nino)는 최초 교회를 지으면서 예수님의 옷을 묻은 곳에서 자라난 백향목 나무를 베어냈고, 그걸로 교회의 기둥을 삼았다. 저 십자가 속에 당시의 나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십자가 전체가 백향목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은과 보석으로 만들어졌고, 백향목은 아주 작은 조각으로 남아 맨 밑에 들어있다. 이걸 신자들이 볼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내놓았다.

 별도의 작은 경당도 만들어져 있었다. 얼핏 선지자인 엘리야의 망토가 보관되어 있다고 들을 것 같은데, 메모를 해놓지 않아 구체적인 내력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12제자 중 한 명인 안드레아의 유골이 담긴 성물도 보관되어 있다는 얘기도 귓가를 맴돈다.

 경당 내부의 성화(이콘). 경당의 내력을 모르니 저 귀한 성화도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특히 유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지하 보관함에 대한 궁금증은 지금까지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13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프레스코화라고 했다. 별자리 인물도와 요한계시록(Apocalypse)의 짐승들(beast)’을 그렸단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바다와 땅에서 짐승들이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들 짐승은 용과 거짓 예언자와 동맹을 이뤄 인간세계를 파멸시키려 한다. 기독교 종말론에서는 이들 짐승과 용 그리고 거짓 예언자를 불경의 삼위일체(The Unholy Trinity)라 부른다.

 성당은 뛰어난 성화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진품은 조지아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성당에는 모사품이 걸려있다고 했다.

 기독교를 조지아의 국교로 공인한 미리안 3(Mirian )’일 것이다. 참고로 미리안 왕은 자신처럼 죄가 많은 사람은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에 거하거나 다닐 자격이 없다며, 자신을 위한 작고 검소한 성당을 새로 짓게 할 정도로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을 성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에게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은 성당 중에 성당이었단다.

 요건 그보다 먼저 기독교로 개종한 나나 왕비일 것이고...

 그밖에도 미리안 왕과 나나 여왕의 생애를 그린 장면, 비잔틴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콘스탄틴 1(Constantine I)의 초상화, 그의 어머니 헬레나(Helena)의 초상화 등 기억해둘만한 성화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가이드의 도움을 받지 못해 어떤 것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프레스코화는 삼나무 십자가를 미리안 왕과 나나 왕비가 들고 있다.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은 조지아 최대의 성지순례 장소답게 그 어느 곳보다 사람들이 많은데 단체로 온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 카르틀리와 카헤티의 왕인 에라클 2 고르가살리 왕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고 했다. 에라클 2세의 석관 상판에는 ‘1720-1798’이라는 연도가, 그리고 바흐탕 고르가살리의 무덤에는 검을 든 용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단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이제는 마을을 돌아볼 차례이다. 조지아의 천년고도라는데, 어찌 둘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퇴락한 므츠헤타는 올드 시티라고 말하기에는 마을이 많이 작았다.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여유를 부린다고 해도 1시간이면 족할 것 같았다. 아무튼 마을은 주민들이 거주하는 집들이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해준다.

 므츠헤타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러니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 것은 당연하다. 골목길 양옆으로 빼곡히 들어선 저 상점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는 물건도 다양했다.

 와인의 나라답게 차차(Chacha)’를 시음해 볼 수 있는 식당이 눈에 띈다. 입구에는 제조기까지 전시해놓았다. ‘차차는 크베브리 항아리 바닥에 침전된 포도씨·껍질·줄기 등 찌꺼기를 증류하여 만든 조지아 전통술인데 프랑스 코냑맛과 비슷한 알코올 도수가 40~52도인 독주다. 70도까지도 있단다. 우리나라 밀주처럼 집에서도 담가 먹는데, ‘그루지아 브랜드 또는 그루지아 보드카라고도 부른다. 조지아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집에서 담근 차차를 환대의 의미인 웰컴주로 준다고 한다. 이때 시원한 오이나 장아찌 같은 것을 안주삼아 같이 먹는단다.

 마을 외곽으로 나오자 중세풍의 건물들이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동방정교회의 검정 예복을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안쪽에 관사로 여겨지는 건물까지 있는 걸 보니 수도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전체적인 외양은 그다지 선기(禪氣)가 어려 보이지는 않는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건물들도 눈에 띈다. 아예 부서진 채 잔해로 남아있는 것도 있다. 왕국은 떠나고 왕들도 사라진 지 오래인 낡은 도시에서 문득 길제(吉再)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를 떠올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숙소와 식당으로 여겨지는 저 건물들을 보고 수도원을 떠올렸다. 가톨릭 신자인 난 꽤 여러 번 피정(避靜)에 들어갔었고, 언젠가 한번은 저런 풍경의 수도원을 만났었기 때문이다.

 마을 끝에서 바라본 즈바리 수도원’. 가파른 경사의 산봉우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므츠헤타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흡사 천년고도의 무사안녕을 지켜주기라도 하려는 듯...

 마을과 접한 꽈리강에는 작은 유원지가 들어서 있었다. 참고로 꽈리강은 튀르키에 북동부 카르스(Kars) 고원지대에서 발원해 조지아를 관통한 다음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카스피해로 들어간다. 길이가 1515km나 되는 긴 강으로, 카프카스 산맥 남부지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지류로 아라그비, 데베드, 알라자니, 아라스 등이 있다. 이 강의 명칭은 나라마다 다르게 불린다. 러시아와 유럽에서는 쿠라(Kura)라고 부른다. 튀르키에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뀌르(Kür), 이란에서는 꼬르(Korr),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키루스(Cyrus)라 불렸다.



여행지 : 조지아  므츠헤타, 즈바리 수도원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므츠헤타(Mtskheta) :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도시로 BC 3세기~AD 5세기 이베리아(Iberia) 왕국의 수도였다. 므츠바리(Mtkvari)와 아라크비(Aragvi),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 잡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덕분에 고대 무역로가 지나가던 흔적들이 종종 유물로 발견된다. 5세기에 조지아의 수도는 트빌리시로 이전됐지만 므츠헤타는 여전히 조지아정교회의 정신적 수도다.

 

 트빌리시를 떠난 버스는 아라그비강(Aragvi river)이 쿠라강(Kura river, 조지아에서는 꽈리강으로 부른단다)에 합류되는 지점에 이른다. 그곳에 고대 도시 므츠헤타(Mtskheta)’가 있다. 기원전 4세기부터 약 천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던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흑해 연안에 위치한 조지아 제2의 도시/ 여행사에서 나누어준 지도에는 누락되어있다)’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즈바리 수도원(Jvari Monastery)’은 가파른 산 정상에 있었다. 자동차가 아니면 접근하기 쉽지 않은 위치다. 그런 곳에 걸터앉아 천년고도 므츠헤타를 보호라도 하려는 듯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1994년 므츠헤타의 다른 역사적 유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수도원 바로 아래에 있는 주차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올라오는 도로는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완만했다. ‘즈바리 수도원 4세기 초 기독교가 전파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십자형으로 세웠다고 한다. 중세 말에는 성벽과 입구를 돌로 쌓아 요새화하기도 했으며, 이 시기에 축조되었던 건물 일부가 현재도 보존되어 있다. 참고로 조지아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은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온 성녀 니노. ‘즈바리는 조지아어로 포도나무라는 뜻. ‘니노 성녀가 포도나무로 된 십자가를 가져온 것을 기념하여 지었다는 얘기다. 니노의 포도나무 십자가로 기적이 행해지자, 이 교회는 순례자들의 필수코스가 됐단다.

 수도원은 미리안 3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세운 나무 십자가 위에 지었다고 했다. 334년 성녀 니노의 노력으로 미리안 3세가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즈바리 언덕에 나무 십자가를 세웠다는 것이다(성녀 니노가 세웠다는 설도 있단다). 그러다 585-604년 카르틀리의 공작 스테파노즈 1가 십자가가 있던 자리에 수도원을 세웠으니 이게 지금의 즈바리 수도원이다. ‘즈바리는 조지아어로 십자가’, 그러니 십자가 수도원이란 뜻이 되시겠다. 참고로 전설은 사냥을 나간 미리안 왕이 짙은 안개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되면서 시작된다. 미리안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드렸으나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다급해진 그는 니노가 믿는 신에게 기도를 드려본다. 그러자 순식간에 안개가 걷혔다. 이를 신의 계시로 받아들인 미리안은 그 즉시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세례를 해 줄 수 있는 사제를 보내줄 것을 청하였단다.

 건물은 본당을 중심으로 사방에 반원형 돌출부가 있으며,  4개의 돌출부 사이에는 본당과 부속 예배당을 연결해 주는 원형모양의 통로가 있다. ‘테트라 콘 양식이라 불리는 이 건축양식은 조지아 교회의 건축 양식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남 코카서스 전 지역에 있는 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무척 낡아보였다. 비바람에 부식된 채로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나 혼자만의 오해일까? 명색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는데 말이다. 아니 그런 내 추측은 옳았다. 조지아 정부의 부실한 관리를 지적받은 이 유적은 2004년 세계 유적재단(World Monuments Fund: WMF)에 의해 관리해야 하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되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단다.

 풍광 좋은 수도원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수도원이 모두에게 개방된 것은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라고 했다. 소련 시절에는 군사기지로만 사용되었었기 때문이다.

 성당 입구. 누렁이 한 마리가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개의치 않고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코카서스 여행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익숙한 풍경이다. 모든 개들을 국가가 관리해주기 때문일 것이다(개들의 귀엔 그 증표로 단추만 한 표지가 붙어 있다). 문득 그늘 한 점 없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낮잠을 자던 이집트 개들이 생각난다. 거기에 비하면 조지아 개들은 천국에서 사는 셈이다.

 파사드 외부는 얕게 새긴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 헬레니즘과 사산왕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남쪽 정문 입구에 있는 팀판(그리스식 건축의 지붕에 의해서 구획된, 박공지붕 윗부분의 벽)은 십자가의 영광을 표시하는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파사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장식한 양각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십자가가 낯선 이방인을 반긴다. 중앙에 천장까지 높이 솟은 커다란 나무십자가를 세워놓았다. 미리안 3세가 세웠다는 십자가이다. 십자가 앞에 서니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제단 위 십자가에 닿으면서 내 마음까지 포근하게 감싸준다. 저 빛과 함께 성령께서 찾아왔었나 보다.

 십자가의 좌대는 이콘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만큼 신성시되는 십자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성화에 손을 댄 채로 기도드리고 있는 조지아 여성. 저 성화는 이곳 즈바리 수도원의 십자가가 하늘나라까지 이어짐을 나타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경배를 드리는 신자들의 마음도 하느님에게까지 전해질 것이고...

 이코노스타시스(ikonostasis, ‘이콘을 거는 칸막이라는 뜻,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는 칸막이로 여기에 이콘을 건다)인 듯.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의 주위에는 이콘 몇 점이 걸려 있었다.

 꽃으로 치장된 작은 경당도 눈에 띈다.

 성녀 니노(Saint Nino : 280-332)’의 이콘. 조지아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4세기 경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카파도키아의 난민 출신 수녀인 성녀 니노는 계시를 받고 조지아 땅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고생 끝에 조지아의 남부 아할치헤주의 자바헤티를 거쳐 어버니시에 도착했고, 이어서 상인들 틈에 끼어 므츠헤타로 들어왔다. 니노는 므츠헤타의 유대인 지구에 머물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돌보면서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이때 여러 기적을 행하였는데 특히 당시 카르틀리를 다스리던 미리안 3세의 왕비 나나의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행했다고도 전해진다.

 벽에 걸린 성화 몇 점 외에 성당 내부에는 별다른 장식물이 없었다. 나무십자가의, 나무십자가에 의한, 오롯이 나무십자가만을 위한 수도원이라고나 할까?

 또 다른 이콘.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앞에는 꽃이 바쳐져 있다. 누군가가 촛불까지 켜 놓았다.

 즈바리 수도원을 있게 한 미리안 3(Mirian )’ 나나(Nana)’ 왕비의 이콘이 아닐까 싶다.

 수도원 입구의 언덕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즈바리수도원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발아래로 쿠라강과 아라그비강이 하나의 물줄기로 합해져 흘러간다. 두물머리에 들어앉은 므츠헤타가 강줄기에 녹아들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웅장한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라고나 할까?

 꽈리강은 조지아의 젖줄이다. 그것은 조지아의 중심도시 대부분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지아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꽈리강으로부터 얻는다. 그러므로 4500년 전부터 꽈리강을 따라 주민들이 거주하며 문명과 문화를 이룩해 왔다.

 두 강의 물 색깔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꽈리강이 흙탕물인데 반해 카프카스 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아라그비 강의 색깔은 훨씬 더 맑고 깨끗하다.

 건너편 언덕은 청춘남녀들로 가득했다. 결혼식을 막 끝내고 왔는지 하나같이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어떤 상태일지가 궁금해 줌을 당겨봤다. 문득 결혼식 날 500리터(한 사람당 1.5리터) 이상의 와인을 준비한다는 조지아 신부 아버지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 누구에서도 술 취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행지 : 조지아  카즈베기, 게르게티 츠민다 시메바 교회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카즈베기(Kazbegi 또는 스테판츠민다) : 조지아는 맛좋은 와인이 유혹하는 와인 천국이고 볼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트빌리시 북쪽 차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하는 산악지역 카즈베기가 단연 으뜸이다. ‘카즈베기는 구소련 시절에 부르던 이름이고, 현재는 스테판 츠민다로 불리고 있지만 그래도 현지에서는 카즈베기라는 지명이 더 쉽게 다가온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고산지대의 풍광에 젖다보면 어느덧 카즈베기에 도착한다. 인간을 위해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산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는 신화의 땅이다. 조지아인들의 정신적 고향인 게르게티 츠민다시메바(성 삼위일체) 성당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는 해발 1,870m쯤 된다는 게르게티(Gergeti)’마을 주차장에서 주어진 임무를 마친다. 이어서 사륜구동차량으로 갈아타고 츠민다시메바 교회로 올라간다. 포장까지 된 도로이지만 폭이 좁은데다 커브가 심하고, 거기다 경사까지 가파르기 때문이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흑해 연안에 위치한 조지아 제2의 도시/ 여행사에서 나누어준 지도에는 누락되어있다)’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자동차로 10분 남짓 올랐을까 상부주차장에 이른다. 교회 앞에 또 하나의 주차장이 있지만, ‘츠민다시메바 교회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니 잠시 쉬었다가겠단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을 보여주려는 택시기사의 배려라고 보면 되겠다.

 차에서 내리자 눈앞이 훤해진다. 푸름으로 젖은 초원 너머, 광활한 자연으로 둘러싸인 언덕에 조지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교회(Gergeti Tsminda Sameba Church)’가 다소곳이 앉아있는 것이다. ‘츠민다(Tsminda)’ 성스러운이라는 뜻이고, ‘사메바(Sameba )’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뜻이니 게르게티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쯤 되시겠다.

 교회는 거대한 산릉을 병풍삼아 오롯이 앉아있다. 교회 왼쪽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산은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는 샤니 산(Mt. Shani : 4,451m)’일 것이다.

 하도 높다보니 구름이 산허리에 걸려있다. 수천 미터의 산허리를 감싸며 제 모습을 시시때때로 바꾼다. 하늘 아래 구름이요 그 아래가 산이련만, 코카서스에서는 구름 위의 산이 일상인 모양이다. 그런 산의 꼭대기에는 6월 하순인데도 눈이 하얗게 쌓였다.

 반대편에는 카즈벡 산(Mt. Kazbek)’이 있다. 하지만 구름을 뒤집어쓴 채 속살 보여주길 거부한다. 그렇다고 트레킹까지 마다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민둥산을 오르고 있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는 걸 보면 말이다. 택시기사의 말로는 8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설마 Altihut, Bethlemihut(METEO)를 거쳐 카즈벡산 정상까지 다녀온다는 것은 아니겠지? 아무튼 트레킹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도 구해주지 않는다니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챙길 수밖에 없을 듯... 참고로 카즈벡 산은 조지아인들에게 성산(聖山)과 같은 존재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와도 연결된다. 제우스에게 벌을 받아 프로메테우스가 묶였다는, 지구를 받치고 있는 바위산이 카즈벡 산이라는 것이다. 제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프로메테우스에게 독수리가 간을 쪼게 하는 무서운 형벌을 내린다. 낮에 길어난 간은 밤마다 독수리에게 쪼여 먹혔고, 이런 고통은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사슬을 풀어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아손과 아르곤 원정대라는 또 다른 신화와도 관련이 있다. 아르곤이 황금양털을 취하러 찾아간 세상의 동쪽 끝이기도 하다.

 조망을 즐긴 다음 교회 아래에 있는 다른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택시를 타고 갔음은 물론이다.

 주차장에는 기념품판매점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지만 문은 열고 있지 않았다.

 일단은 주차장 뒤에 있는 언덕부터 올라보기로 했다. 꽤 많은 젊은이들이 서성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꼭대기에는 망원경까지 만들어놓았다. 뭔가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내 예상은 적중했다.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먼저 교회 쪽부터 눈에 담는다. 오른쪽 포장길은 교회로 올라가는 길. 왼쪽의 오솔길은 트레커들이 게르게티 마을에서 올라오는 산길일 것이다. 성질 급한 사람들도 꽤 되는 듯 교회로 곧장 올라다는 샛길도 눈에 띈다.

 푸른 언덕 위에 우직하게 서 있는 교회는 고풍스러운 자태가 돋보인다. 14세기에 건립된 이 교회는 조지아 케비(Khevy) 지방에서 교차식 돔 지붕 형식을 띠는 유일한 종교 건축물이란다. 본당을 포함해 종탑, 성직자들이 거주하던 건물들로 구성된 작은 복합단지를 이루고 있다. 워낙 높고 험준한 산세에 자리한 덕분에, 국가 재난 시 성 니노의 십자가를 비롯한 조지아정교회의 주요 성물들을 므츠헤타(Mtskheta)로부터 피신시키는 성소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구름 속에 갇혀있던 카즈벡 산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코카서스 산맥에서 일곱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첫 번째가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스(Elbrus : 5,642m). 조지아에서는 시카라(Shkhara : 5,193m)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수년 전까지 융가(Janga : 5,051m)가 두 번째였으나 2019년 조지아 정부의 실측 결과 5,053m로 밝혀져 순서가 바뀌었다. 카즈벡의 뜻은 그루지아어로 ‘Glacier Peak’ 또는 ‘Freezing Cold Peak’를 의미한다. ‘얼음산이나 만년설산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반대편에는 샤니 산이 있다. 조지아의 산간지역. ‘카프카스 산맥에 속하는 산봉우리들은 평균 높이가 4,600m를 넘길 정도로 높다. 때문에 항상 운무가 잔뜩 끼어있어 평상시 산봉우리를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샤니 산은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행운이라 하겠다.

 이제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교회로 올라가 볼 차례이다. 조지아 여행의 필수 코스이자 하이라이트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주차장에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담벼락은 투박하면서도 우람한 것이 영락없는 성벽이다. 맞다. 오스만투르크 전성기와 맞물린 14세기에 건립된 이 교회는 종교적 기능 말고도, 외세의 침입을 막는 요새의 역할까지 수행했다고 한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즈벡의 산자락에 교회를 지어놓고, 전쟁 때는 이곳으로 들어가 외적과 맞섰단다.

 교회는 돔이 있는 십자가 모양의 정사각형 건물이다. 이 교회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건축물의 아름다운 조화가 특징으로 꼽힌다. 한쪽을 바라보면 하늘 높이 솟은 카즈벡 산이 펼쳐지고, 또 다른 한쪽에는 보석처럼 알알이 박힌 카즈베기 마을의 전경이 품 안에 들어온다. 하늘과 맞닿은 산봉우리에 걸터앉은 교회도 빼놓을 수 없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을 풍경들이다.

 교회 건물은 남쪽과 서쪽에 출입문이 있다. 아래 사진은 서쪽 출입으로, 문 주위에 부조로 새겨진 화려한 장식이 있다. 하나 더. 교회의 출입문은 무척 작았다. 종탑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유사시 문을 폐쇄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아보려는 지혜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출입문 위쪽 벽에도 여러 장식이 있다. 부조로 새겨진 자그마한 십자가가 있고, 이 십자가에 매달 듯이 아치형 장식이 있는 좁고 긴 창문을 내놓았다.

 돔 아래의 톨로베이트(Tholobate : 돔이 세워진 건물의 직립 부분)에 좁고 긴 창들이 있다. 이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은은하게 실내를 비춘다.

 동쪽 벽면은 장식이 좀 복잡하다. 화려하게 장식된 사각형 틀이 있는 좁고 기다란 창을 냈다. 그 위에 커다란 십자가가 있는데, 이게 쉽게 볼 수 없는 십자가 형태다. 십자가 교차점의 네 구석에 정사각형 장식이 하나씩 붙어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형태의 십자가를 쿼드레이트 크로스(Quadrate Cross)’라고 했다. 마태(Matthew), 마가(Mark), 누가(Luke), 요한(John)  4대 복음이 이 땅의 사방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나?

 그밖에도 낙서에 가까운 부조들이 눈에 띈다. 인간, 동물, 십자가 등 다양한 형상을 보여준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다. 조지아 국민들이 정신적 고향으로 여긴다는 교회는 14세기 이후 한 번도 예배를 멈춘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선지 제약도 많았다. 민소매나 미니스커트, 반바지, 모자를 입거나 쓰지 못하는 것은 기본. 사진도 찍지 말란다. 인터넷에서 주워 모은 사진들로 내부를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내부 사진은 인터넷에서 얻어왔다). 동쪽 제대 앞에 있는 이코노스타시스(ikonostasis, ‘이콘을 거는 칸막이라는 뜻,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는 칸막이로 여기에 이콘을 건다)가 눈에 띈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의 위쪽에 십자가를 들고 승천하는 예수를 하느님이 맞이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문에서도 가브리엘이 성모에게 예수를 가지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수태고지와 복음사가들이 예수의 생애와 말씀을 기록하는 장면들을 살펴볼 수 있다.

 성당의 돔. 화려하게 치장된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그림이나 장식이 전혀 없다. 돔은 열 개의 창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다섯 개는 벽으로 나머지 다섯 개는 유리창으로 되어 있다. 그 유리창을 통해 성당 안으로 빛이 들어오게 설계되었다.

 반면에 벽면은 성화들로 가득했다. 예수 그리스도, 성모자, 천사, 12사도 등등... 화풍이 같지 않은 것은 이들 성화의 만들어진 시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콘 앞에는 염원이 담긴 촛불이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성화 앞에서 십자 성호를 긋고 촛불을 밝히는 신자들도 눈에 띈다.

 밖으로 빠져나오니 또 다른 문이 보인다. 남쪽 출입문인 모양이다.

 암굴처럼 생긴 공간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이콘이 걸려 있었다. 이쯤에서 궁금증 하나. 교회 천정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디 있을까? 국가 재난 때 옮겨 온 보물들을 숨겨두던 비밀의 방이 교회 천정에 있다고 했는데...

 종탑은 교회 건물의 남쪽에 있다. 초기 교회의 부속 건물이나 본관보다는 약간 늦게 지어졌다고 한다. 종탑은 2층으로 되어 있다. 아래층은 사각형으로 문이 동쪽으로 나 있다. 위층은 6각형으로 6개의 창을 가지고 있다.

 민둥산의 꼭대기에 걸터앉은 교회는 시야를 막는 게 없다. 때문에 멈추는 곳마다 최고의 전망대가 된다.

 멍때리기 삼매경인 젊은이들이 부럽다. 그리고 하나라도 더 보고 싶어 한시도 멈추지 못하는 내 자신을 돌아본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흔적까지도 지워버리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내가 꿈꾸고 있는 세계일주도 하나의 집착일 수밖에 없겠다.

 이때 어렴풋이나마 카즈벡 산이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이게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카즈벡 산을 코카서스산맥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꼽고 있었다. 하나 더. 카즈베기는 평범한 사람을 사진작가로 만들어주는 곳이라고 했다. 카메라를 어디다 들이대도 작품이 된단다. 흔히 말하는 인생샷을 건져올 수 있는 곳이다. 스위스 알프스나 네팔 히말라야를 다녀온 사람들이 그 이상으로 꼽는 곳이 바로 카즈베기라면 대충 짐작이 갈지 모르겠다.

 교회 뜨락에는 아예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마을도 마을이지만 그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고산준봉들이 하얀 눈을 뒤집어쓴 채 멋진 풍경화 한 폭을 그려낸다.

 발아래로 카즈베기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정식 이름은 스테판 츠민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카즈베기로 더 익숙하다. 눈에 들어오는 마을은 제법 컸다. 맞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저 하나의 마을이던 곳이 이제는 게스트하우스와 호텔이 있고, 여름이면 버스를 타고 오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거대한 마을로 성장했단다. 관광객들에게는 트래킹과 산악자전거 타기를 위한 최고의 기지가 되어준다고 했다.

 1921년부터 2007년까지의 공식 지명이었던 카즈베기(Kazbegi)’는 이 지역 출신의 작가이자 농민가수였던 알렉산더 카즈베기(Alexander Kazbegi)’라는 원주민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했다. 마을에는 이 사람의 동상도 있단다. 현재 지명인 스테판 츠민다(Stepantsminda)’ 성스러운 스테판(Saint Stephan)’이라는 의미로 조지아정교회 수도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단다.

 집사람 눈높이에도 최고의 여행지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만세 삼창으로도 모자라 승리의 ‘V’자를 두 개나 더했다. 맞다. ‘카즈벡 산이 있는 북동부 코카서스 지역은 조지아 여행이 완성되는 곳이다. 만약 조지아에 왔다 가면서 카즈벡 산에 와보지 않으면 조지아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고 했다. 조지아인들은 유럽의 기원은 조지아다라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드는 것 중의 하나가 와인이 조지아에서 발원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그리스·로마 신화의 원천이 코카서스라는 것이다. 이곳 카즈벡 산은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묶여 있던 바고 그 산이다.



여행지 : 조지아  카즈베기 가는 길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카즈베기(Kazbegi 또는 스테판츠민다) : 조지아는 맛좋은 와인이 유혹하는 와인 천국이고 볼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카즈베기가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는데, 트빌리시 북쪽 차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하는 산악지역이다. ‘카즈베기는 구소련 시절에 부르던 이름이고, 현재는 스테판 츠민다로 불리고 있지만 그래도 현지에서는 카즈베기라는 지명이 더 쉽게 다가온다.

 

 조지아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자리매김한 카즈베기로 간다. 아나누리를 거쳐 카즈베기까지 갔다가 되돌아와 므츠헤타(Mtsheta)를 거쳐 바투미 쪽으로 넘어가는 일정이다. 카즈베기 가는 길은 소련 지배시절 군사도로로 개설되었기 때문에 도로가 험하기로 유명하다. ‘아라그비 강 왼쪽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야영장과 레스토랑, 호텔들을 만나기도 한다. 카누와 카약을 할 수 있는 시설도 보인다. 하나 더. 무슨 축일(오순절?)이라도 되는지 강가에는 먹고 마시고 춤추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흑해 연안에 위치한 조지아 제2의 도시)’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차장을 스쳐가는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 한참을 달리다보면 진발리 호수(Zhinvali Reservoir)’에 이르게 된다. 카즈베기 고봉에서 흘러내려온 아라그비(Aragvi)’ 강이 잠시 머물다 가는 인공호수로, 빙하가 녹아내려 만들어진 저수지의 물빛이 에메랄드빛으로 무척 아름답다. 호반에는 전원주택들이 들어서있었다. 관광객이 호수를 바라보면서 쉬어갈 수 있는 커피숍이라는데 이게 또 호수와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저수지 위에는 아나누리 성채(Ananuri Fortress)’가 있다. 이 성은 13세기부터 이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그리 영주의 성이다. 작은 규모의 성채는 하나의 성과 17세기에 세워진 두 개의 교회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건물 전체를 성벽이 빙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네 귀퉁이에 망루가 솟아있어 요새의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아나누리 성채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한 잠정목록에 올랐다고 한다. 그만큼 역사적인 의미가 깊고 그나마 원형을 많이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나누리 성채는 1200년에서 1249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라고 한다. 13세부터 이 지역을 통치했던 봉건 왕조 아라그비의 성채였던 아나누리 요새는 1739년 크사니(Ksani) 공국의 산쉐(Shanshe) 공작에 의해 함락된다. 4년 후 지역 농민들이 샨쉐 공작의 통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1746년부터는 카헤티(Kakheti) 왕국의 테이무라즈 2(Teimuraz ) 왕에게 통치를 받았다. 그 후 소련 시절 교회로서의 기능을 잃으며 지금과 같이 황폐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하나 더. 아나누리 성채가 포위되었을 때 물과 식량을 비밀통로를 통해 공급받았다고 한다. 그 역할을 하던 누리(Nuri) 출신의 아나(Ana)라는 여인이 사로잡혀 고문당했지만 죽음으로 항거하며 끝내 비밀통로를 알려주지 않아 그녀를 기리기 위해 아나+누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차에서 내리면 육중한 성곽이 길손을 맞는다. 정방형과 원통형으로 모양이 각기 다른 두 개의 망루와 함께 높은 성벽으로 둘러쳐져있다. 이곳은 카즈베기 주의 대주교가 머물던 곳으로 평상시에는 성당으로, 전시에는 시민들이 대피할 수 있는 비밀 요새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저 작은 성채에 5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채에는 2개의 교회와 3개의 탑이 남아 있다. 그중 슈포바리(Sheupovari)’라고 불리는 위쪽 성채의 탑은 1739년 샨쉐(Shanshe) 가문이 이곳을 침략하였을 때 아라그비(Aragvi) 가문이 마지막까지 방어하던 곳이라고 한다.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두 개의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왼쪽 조금 높은 곳, 크기가 작고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이 17세기 전반에 세워진 옛 성모성당(The older Church of the Virgin)’이다. 하지만 내부가 파괴되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이 성당의 벽은 돌과 흙으로 만들어져 더 오래된 느낌이 난다. 건물 내부에는 이곳 영주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성당의 붉은 지붕과 비잔틴 양식의 돔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쪽의 좀 더 크고 잘 보존된 건물이 큰 성모성당(The larger Church of the Mother of God)’이다. 성모승천성당(Curch of the Assumption Virgin Mary)으로도 불리는 이 성당은 1689년 이곳 영주 바르드짐 공작(Duke Bardzim)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내외부에 조각과 그림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성채에는 피라미드 모양의 지붕을 한 네모난 탑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교회에 바싹 붙어 있다. 성의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시설이지만, 성채의 터가 하도 좁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두 건물의 사이, 벽면에 포도나무로 여겨지는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와 관련된 부조가 아닐까 싶다. 이곳 조지아가 와인의 성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의미심장한 표현일 수도 있겠고...

 성당의 파사드(facade). 출입문 주위는 기하학적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파사드 상단에는 포도나무 장식이 있는 십자가를 새겨놓았다.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한 성녀 니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녀 니노가 조지아로 오게 된 데는 성모 마리아의 계시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꿈에 나타나신 성모가 포도나무 가지로 만든 십자가를 그녀에게 건네며 조지아로 갈 것을 명했다는 것이다. 조지아 교회에서 포도 나뭇가지 십자가를 들고 있는 여인의 초상화를 쉽게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십자가 양쪽에는 사자와 용 등의 동·식물이 새겨져 있다. 천국을 의미하는 것들이라는데, 그렇다면 눈매가 매서운 저 부조는 천사쯤 되시겠다. 맨발인 여느 천사들과는 달리 구두까지 신은 게 신기했지만 말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벽화와 그림들을 볼 수 있다. 조지아정교회, 아니 동방정교회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돔을 올려다보니 16개의 작은 창이 나 있다. 동서남북 사방을 각각 네 개씩으로 나누어놓았나 보다.

▼ 정면의 성화벽 이코노스타시스(eikonostasis)에는 예수와 성모 그리고 사도상이 그려져 있다.

 유화 형태의 벽화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반면, ‘템페라 기법(tempera painting : 달걀노른자와 아교를 섞은 불투명 안료인 템페라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제작한 벽화는 색이 많이 바래있었다.

 천국과 지옥을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저울’. 사람이 죽었을 때. 선행과 악행을 저울에 달아 심판한다는 내용이지 싶다.

 기둥의 그림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이콘 형태로 그려진 예수상과 사도, 성인은 하나같이 색이 바랬다.

 그림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갖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알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성채 안 풍경.

 성채 안 풍경.

 성채의 동쪽 끝으로 가면 종탑이 있다. 진발리 호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성채 앞 휴게소는 레스토랑과 기념품점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추운 지역이어선지 양모로 만든 기념품도 눈에 띈다. 모자와 양말, 옷 등 종류도 다양한데, 가격도 비싸지 않은 편이었다.

 구다우리로 가는 길. 멀게만 보이던 고봉이 차츰 가까워지고 길은 높은 산을 가로지르며 치고 들어간다. 승용차나 버스, 트럭 할 것 없이 높은 산 언덕길을 안간힘을 쓰며 오른다. 하지만 여행객에게는 신나는 구간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 십자가는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코카서스산맥을 넘어가는 이 험한 고갯길은 즈바리 패스(Jvari pass)’로 불린다. ‘즈바리(Jvari)’는 십자가를 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개이름을 형상화한 조형물일지도 모르겠다.

 점점 높아지는 고도를 따라 창밖 풍경도 점점 변해간다. 그러다 숙소인 구다우리에 가까워질 무렵, 가이드의 배려로 코카서스산맥의 속살을 엿볼 수 있는 전망대에 잠시 들렀다. 전망대의 이름까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구다우리 전망대가 어떨까? 구다우리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니 말이다.

 절벽 위의 전망대는 제비집처럼 벼랑에 매달려있는 모양새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보려주려는 듯 허공을 향해 툭 튀어나갔다.

 발아래가 허전할 만도 하겠건만, 관광객들은 누가 하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에 얼을 빼앗겨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난간에 서자 코카서스의 전형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높고 낮은 산이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산 아래 언덕에는 조지아의 전통가옥과 마을이 고즈넉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에서 홀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집도 있고 몇 채씩 옹기종기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천만리 먼 이국에서 한 폭의 동양화를 마주한 느낌이 든다.

 휴식 겸해서 들르는 여행객들의 숫자가 제법 되는지 매점까지 들어서 있었다. 과일주스와 꿀 같은 지역특산품들을 파고 있는데, 성수기가 아니어선지 식당은 문이 닫혀 있었다.

 구다우리(Gudauri)’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구다우리는 카즈베기(또는 스테판츠민다)로 가는 도중 거치는 작은 마을이다. 아나누리에서 북쪽으로 50km쯤 떨어진 즈와리 고개, 해발 2,200m의 남쪽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스키 리조트로 유명하다. 20개나 되는 스키 트랙을 갖고 있단다. 구다우리를 스키를 위해 태어난 곳(Born to ski)’이라고 홍보할 정도라나?

 숙소인 베스트 웨스턴 구다우리(Best Western Gudauri)’.

 고산지대인 구다우리는 여름에도 아침 기온이 10 이하일 정도로 서늘해서 에어컨이 필요 없다고 했다. 오히려 5월까지 난방을 할 정도란다. 거기다 풍광까지 뛰어나 스키 시즌이 아닌 여름에도 휴가를 보내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그래선지 옥외 수영장을 부대시설로 둔 리조트까지 눈에 띈다.

 날이 어둡기 전에 도착한 덕분에 흰 눈을 뒤집어 쓴 코카서스산맥의 아름다운 풍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즈바리 패스(Jvari pass)’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카프카즈의 험준한 산들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차창 밖 생태계가 고산 식생대로 바뀐다. 그러다 해발 2379m 즈바리 고개(Tsvari Pass)’를 넘는다. 참고로 즈바리 패스는 코카서스산맥을 넘어가는 험한 고갯길이다. 구다우리에서 산 반대편에 있는 코비(Kobi) 마을까지 15km에 이르는 도로를 말한다. 즈바리(Jvari)는 십자가를 뜻한단다. 러시아제국 때 이 고갯길 정상에 거대한 대리석 십자가가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구다우리에서 10km쯤 달렸을까 산등성이에 멋진 조형물 하나가 세워져 있다. 조지아와 소련의 우호를 기념하는 벽화형 기념물인데, 1783년 러시아 케터린 2(Catherin II)와 카헤티 왕 에레클 2(Erekle II)가 서명한 조약의 200주년을 기념해 1983년에 세워졌다. 사람들은 조형물 앞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조형물(전망대)에 올라가 구다우리 협곡의 경치를 구경한다.

 조형물은 깎아지른 절벽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우정 전망대로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커다란 원통형 벽으로 이루어진 조형물 벽은 1,217개의 화려한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1783년의 -러 우호조약은 말이 우호조약이지 조지아가 외교적 자주권을 러시아 제국에 양도하는 불평등조약이었다. 그 때문에 조소 우호기념물에 대한 조지아 사람들의 감정은 좋은 편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이를 알 리가 없는 이방인들은 낯선 조형물이 마냥 신기한기만 하다.

 그림은 조지아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에서 자식을 지키는 어머니의 형상을 한 성모 마리아를 한가운데 두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조지아 역사에서 위대한 일을 한 왕들, 산업사회를 이끌어 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어머니로서 자식인 조지아를 보호하는 듯한 장면이 묘사되었다고 해서 조지아인들의 반감을 사고 있단다.

 성 조지가 용을 퇴치하는가 하면, 조지아 국민들이 포도주를 마시며 신나게 춤추는 장면도 있다. 총을 들고 전장으로 나가는 조지아 젊은이들도 보인다.

 난간에 서자 전망대라는 이름에 걸맞는 조망을 선사한다. 눈 덮인 코카서스산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 광경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발아래로는 아라그비강의 발원지인 악마의 계곡(Devil's Valley)이 펼쳐진다. 저 계곡은 죽음의 계곡으로도 불린다고 했다. ‘즈바리 패스가 험하고 굴곡이 심해 교통사고가 자주 나서란다. 때문에 도로확장과 터널굴착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여행의 묘미는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가 아니겠는가. 거기다 사랑까지 더해졌으니 이를 놓칠 집사람이 아니다.



여행지 : 조지아 - 트빌리시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트빌리시(Tbilisi) : 대카프카스 산맥 남쪽 기슭의 쿠라 강(Kura R.)’ 유역에 위치한 조지아의 수도. 5세기 사카르트벨로 왕 바흐탄그 1세 고르가살리(452-502)에 의해 세워져, 아랍인과 튀르크인들에게 점령당하기를 반복하다 1801년에는 러시아가 점령했다. 이후 그루지야 SSR의 수도를 거쳐 1991년 독립 조지아의 수도가 되었다.

 

 트빌리시 투어의 대미는 성 삼위일체 대성당(Holy Trinity Cathedral)’이 장식한다. 조지아 정교회의 총본산이자 트빌리시의 상징으로 예수 탄생 2000’, ‘조지아정교회 독립 1500주년’, ‘조지아공화국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 건축을 시작해 2004년 완공되었다. 설계는 건축가 아킬 마인디아스빌리(Archil Mindiashvili)’가 맡았는데, 정교회 중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라고 한다. 하나 더. ‘츠민다 사메바(Tsminda Sameba)’ 성당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성삼위일체 대성당이라는 뜻의 조지아어(그루지아어)를 영문 식으로 표기했다고 보면 되겠다.

 아블라바리(Avlabari) 지역 엘리아 언덕(Elia Hill)’에 위치한 대성당은 구도심에서 걸어서 20-30분이면 충분하다. 참고로 엘리아는 기원전 9세기 아합왕 통치 시기 이스라엘 북부에 살았던 선지자다.

 본당 앞. 조지아정교회를 지켜주는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열두 개의 기둥이 두 줄로 도열해있다. 각각의 기둥에는 조지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들이 부조되어 있다. 기독교를 승인해준 마리안 3, 트빌리시로 천도한 고르가살리 등등...

 계단 위, 그림처럼 서 있는 대성당은 보는 순간 완벽한 균형미에 감탄이 쏟아진다. 돔 위에 얹은 7.5m 높이 황금 십자가의 위용도 대단하다. 성당은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고 했다. 어둠이 내리고 대성당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이 들어오면 가슴에도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켜진단다.

 대성당은 길이가 70m, 폭이 65m, 높이가 87m에 이른다고 한다. 지하층의 깊이가 13m라고 하니, 지하로부터 따지면 높이가 100m나 되는 셈이다. 외관으로 볼 때 성당은 4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옷차림에 주의가 필요하다. 여자는 바지는 길고 짧고 간에 무조건 안 된다. 스커트도 길이가 짧으면 퇴자다. 민소매도 안 된단다. 남자라고 해서 봐주지는 않는다. 모자와 반바지. 민소매의 착용이 금지된다.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웅장함으로 시선을 압도하는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정교회 특유의 정갈함과 고즈넉함이 가득했다. 성당의 중심은 돔이다. 사방으로 뚫린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온 빛이 성당을 밝혀준다. 하지만 성화로 치장된 로마 가톨릭교회들과는 달리 텅 비어있어 고즈넉한 감을 준다.

 성화는 돔의 아래, 제단 뒤쪽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반원형 공간에 예수님이 의자에 앉아 오른손을 들어 신도들을 축복하고, 왼손에는 성경을 들어 가르침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그려놓았다. 예수님 아래는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12사도가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이들 성인의 두광 양쪽으로 이름이 적혀 있다. 12사도 아래 초상들은 나중에 성인으로 추대된 위대한 인물들이라고 한다.

 성당에는 모두 9개의 경당이 있다고 했다. 지하에 5, 1층에 4개가 있는데, 그중 둘은 조지아 정교와 직접 관련된 성녀 니노와 성 조지에게 바쳐졌다고 한다.

 다른 경당들은 돔은 물론이고 그 아래 벽면까지도 텅 비어 있었다.

 본당에서는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다들 무릎을 꿇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애초부터 없다. 그러니 미사 내내 무릎을 꿇었다 일어서기를 반복할 것이다. 정교회의 미사는 2~3시간씩 진행되기도 한다니, 웬만한 체력 갖고는 미사에 참석하기도 어렵겠다.

 사제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데, 하물며 신도들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는가.

 성당 내부는 다양한 이콘(icon, 성화)들로 가득했다.

 성화 속 인물들은 다양했다. 성모 마리아, 성녀 니노 같은 여성들이 있는가하면, 조지아 정교에서 떠받드는 사도 성 안드레아와 성 조지 같은 남성도 있다. 성녀 니노의 성화가 유독 많은 것은, 그녀가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했기 때문이란다.

 성녀 니노의 초상도 그중 하나인데, 그녀에 대한 얘기는 오마이 뉴스의 기사를 옮겨본다. 320년경 카파도키아 출신의 수녀 니노(Nino)가 이베리아 왕국 남부지역에서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324년경 왕국의 수도인 므츠헤타(Mtskheta)에 이르러 왕비인 나나(Nana)를 만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게 된다. 그러나 미리안(Mirian) 왕은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고, 왕비가 기독교를 버리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위협한다. 전승에 따르면 326년경 왕은 숲으로 사냥을 나간다. 그런데 갑자기 숲이 어두워졌고 왕은 길을 잃는다. 절망적인 상황에 당황한 왕은 나나가 믿는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자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면서 길이 나타났다. 므츠헤타의 왕궁으로 돌아온 미리안은 니노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 기독교 사상은 왕족과 관리들은 물론 국민들에게까지 전파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되었다. 이베리아 왕국은 아르메니아에 이어 두 번째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콘은 동방정교회에서 우상논쟁에 휩싸기도 했다. 그러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어 실재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림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 성상은 교회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되어 특별한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정교도 신자들은 기도할 때 성화에 손을 대고 하는 모양이다.

 그밖에도 다양한 이콘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금이나 은으로 입혀져 화려하기 짝이 없다. 다양한 보석으로 치장된 작품도 눈에 띈다. 조지아 정교회의 본산이라서 그런지 다른 교회들보다도 훨씬 더 화려하다는 느낌을 준다.

 밖으로 나오니 입장할 때 무심코 지나쳤던 종탑이 눈에 들어온다. 정문 쪽으로는 아까 거론했던 열두 개의 기둥들이 두 줄로 도열해있다.

 종탑. 9개의 종이 매달려 있다고 했으나 헤아려보지는 않았다.

 그밖에도 성당 주변에는 주교관, 신학대학, 세미나실, 휴게소 등 다양한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조지아정교회 총대주교가 주석하는 성당에 걸맞는 규모라 하겠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덕분에 성당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맞은편에 있는 Mother of Georgia와 오른쪽에 하늘 높이 솟은 므츠민다파크의 타워가 보인다. 트빌리시는 이렇듯 높은 건물들이 많지 않아서 좋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왕으로 여겨지는 흉상들을 세워놓았다. ‘타이무라즈 1의 흉상도 그중 하나인데, 그에 대한 내력은 오마이 뉴스의 기사를 인용해본다. 타이무라즈 1세는 1605년부터 1648년까지 바그라티의 왕으로, 이란의 사파비 제국으로부터 조지아의 독립을 쟁취하기 노력하다 1663년 죽었다. 그는 조지아 정교가 이슬람세력에 의해 유린되는 것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사파비 제국의 수도인 이스파한으로 끌려가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는 시인으로도 명성이 높다. 페르시아 시를 조지아어로 번역하면서 시작 능력을 키웠고, 1625년 자신의 어머니 케테반(Ketevan) 왕비의 수난과 순교를 시로 완성했다. 이 작품 속에서 시인은 삼위일체 신에게 바치는 어머니의 기도를 인용하고 있다. 그 때문에 성 삼위일체 대성당 정원에 그의 흉상이 모셔진 것 같다.

 다른 한 인물은 안내판이 없어 누구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조지아어를 모르니 있어봤자 그게 그거였겠지만...

 안내판이 붙어있는데도 그 내력을 알 수 없었던 이 빗돌이 그런 상황을 증명해준다고 하겠다.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정원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집사람 매의 눈에 뭔가가 걸렸던 모양이다. 후다닥 달려갔다 오더니 오디를 한 움큼 건네준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의 오디보다 훨씬 큰데다 새콤달콤하기까지 했다.

 길을 나서기 전 들른 화장실. 구분이 확실한 남녀 표시가 눈길을 끈다. 오래 전, 국내 어느 관공서 화장실에서 전통혼례복을 입혀놓은 남녀표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적이 있었다. 우리 문화를 조금이라도 더 소개하고 싶은 충정이었겠지만, 이를 본 외국인들로서는 남녀구분이 썩 편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여행지 : 조지아 - 트빌리시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트빌리시(Tbilisi) : 대카프카스 산맥 남쪽 기슭의 쿠라 강(Kura R.)’ 유역에 위치한 조지아의 수도. 5세기 사카르트벨로 왕 바흐탄그 1세 고르가살리(452-502)에 의해 세워져, 아랍인과 튀르크인들에게 점령당하기를 반복하다 1801년에는 러시아가 점령했다. 이후 그루지야 SSR의 수도를 거쳐 1991년 독립 조지아의 수도가 되었다.

 

 첫 방문지는 시오니 대성당’(Sioni Cathedral). 트빌리시의 올드 타운인 시오니 쿠차(시오니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 면은 쿠라 강의 오른쪽 제방에 접하고 있다. ‘시오니 안식성당(Sinoni Catheral of the dormition)’ 또는 시오니 성모 마리아 안식교회(Virgin Mary dormition church Sioni)’로도 불리는데, ‘시온(Sion)’이라는 이름은 예루살렘의 시온 산(Sion Mt.)’을 뜻하는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근처에 있는 시오니 쿠차(Sioni Kucha)’라는 거리에서 따왔다고 한다.(이하 두산백과에서 발췌 정리)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여행사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흑해 연안의 바투미(조지아 제2의 도시)’도 들렀다. 그리고 튀르키예의 리제로 넘어가 이스탄불(환승)을 거쳐 귀국했다.

 트리알레티 산맥과 카르틀리 산맥 사이를 흐르는 쿠라 강(Kura R.)’ 유역에 위치한 조지아의 수도. 관광지는 대부분 쿠라강 왼쪽의 올드 타운과 평화의 다리 근처 유로광장에 집중되어 있다.

 교회는 575년경 이베리아의 왕자 구아람(Guaram)이 세우기 시작해, 그의 후계자 아다르나제(Adarnase)의 재임시절인 639년에 완공되었다. 이후 아랍·몽골·티무르·페르시아 등 침략자들에게 수차례 파괴됐고, 그때마다 재건되었다. 현재의 교회는 1112년 데이비드 왕(King David)에 의한 복구 버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하나 더. 2004 성삼위일체대성당이 축성되기 전까지 조지아정교회 총대주교(Catholicos)의 주석(駐錫) 성당이었다. 총대주교와 유명인사의 유해가 묻혀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1917년 러시아 정교로부터 조지아 정교의 독립을 이룩한 성 키리온 2(St. Kyrion II)의 유해도 이곳에 묻혀있다.

 동방의 비잔틴 양식과 서방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결합한 중세 조지아 성당 건축의 전형이다. 서쪽에 입구가 있고, 동쪽 끝 반원형 공간에 제단을 중심으로 한 성소(聖所)가 있다. 건물은 트빌리시 남서쪽에 위치한 볼니시(Bolnisi) 마을에서 가져온 노란색 응회암을 사용해 건립했단다. 그래서 파스텔 톤의 노란빛을 띠는 모양이다.

 성당 북쪽 안뜰에는 알렉산더 1(King Alexander I)가 보내준 돈으로 세웠다는 독립형 3층 종탑(old bell tower)이 있다. ·터전쟁(Russo-Turkish War, 1806-1812)에서 러시아가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12년에 건립했단다.(내 사진은 구도가 맞지 않아 인터넷에서 빌렸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전체적으로 어둡다. 하지만 돔의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비치는 성소는 상대적으로 밝은 편이다. 그나저나 미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는 실례를 범하고 말았다.

 성당 내부는 원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복된 외세의 침입으로 훼손되었고, 지금의 벽화는 1850-1860년 러시아 화가 크나즈 그리고리 가가린(Knyaz Grigory Gagarin: 18101893)’이 그렸다고 한다. 이때 전통방식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모습을 띠게 되었단다. 1980년대에는 조지아의 예술가 레반 추츠키리즈(Levan Tsutskiridze)가 서쪽 벽화의 일부를 그리기도 했다.

 돔의 천정에는 근엄한 모습의 예수상이 상반부만 그려져 있다. 왼손에는 성경을 들고 오른손은 높이 들어 온 세상에 축복을 내린다. 머리 뒤에는 두광이 있고, 양쪽으로 IC XC라는 글자가 있다. 이것은 동방정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다. 그 아래로 성모자상, 천사상, 12사도상, 성인상 등이 그려져 있다. 그 중에는 성녀 니노상도 보인다.

 벽에는 예수와 성모마리아의 일생과 관련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조각은 대개 금물로 장식되어 있다.

 조지아의 상징이라는 성 니노(St. Nino)’ 포도나무 십자가(Grapevine Cross)’는 제단 왼쪽에 있었다. ‘조지아 십자가 성 니노의 십자가로도 불리는데, 전설에 의하면 4세기 초 꿈속에서 성모마리아로부터 조지아에 가서 기독교를 전파하라는 계시를 받은 성녀 니노가 저 십자가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었다고 전해진다.

 십자가는 마당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하단의 부조가 궁금해 살펴보다가 갈 길이 멀다는 가이드의 재촉에 쫓겨 그만두고 말았다.

 두 번째 방문지인 유럽광장으로 가는 길. 카페와 바, 레스토랑이 밀집되어 있는 좁고 아름다운 골목을 지난다. 길가에는 와인 전문점이 특히 많다. 나이트클럽도 여럿 보인다.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할 것 같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반갑다며 말을 건네 온다. ‘Alcohol may be man`s worst enemy, but be Bible says love your enemy’ 술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지만, 성경은 적을 사랑하라고 말했다나?

 깐지를 든 타마다(Tamada)’를 이곳에서도 만났다. 조지아도 우리처럼 전통 건배 문화인 타마다(Tamada)’가 있다. 타마다는 저녁식사 혹은 연회를 뜻하는 말로, 수르파(Surpa)에서 건배를 제의하는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그는 깐지라 부르는 뿔잔을 들고 유머나 덕담을 하면서 행사를 이끌어간다. 행사의 리더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참고로 타마다 동상의 원형은 쿠타이시(Kutaisi) 서남쪽 바니(Vani)에서 발굴된 기원전 7세기의 청동조각상이라고 한다. 이게 흐르는 세월의 무게를 못 배기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하면서 저런 술주정꾼이 되어버렸다나?

 또 다른 조형물. ‘트빌리시의 어원은 따뜻하다라고 했다. 이는 나리칼라(Narikala) 요새 인근에 유황온천인 설퍼 바스(Sulphur Baths)’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저 여인은 지금 온천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좁고 아름다운 얀 샤르데니(Jan Shardeni)’ 거리를 빠져나오자, 육중한 성벽을 배경삼은 광장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박탕 고르가살리 광장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맞은편에 보이는 메테키 성당을 바라보며 쿠라 강(또는 무츠바리 강)’을 건넌다. 이때 이태리 건축가 미켈 데 루치가 설계했다는 평화의 다리(Bridge of Peace)’가 얼굴을 내민다. 금속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유리를 얹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무튼 강이 끊어놓은 트빌리시의 올드타운과 뉴타운을 다시 연결시켜 놓았으니 능히 평화라는 이름을 얻을 만하다.

 메테키 다리 건너, ‘쿠라 강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는 메테키 성당이 걸터앉아 있었다. 공식명칭은 메테키 성모승천 성당(Metekhi St. Virgin Church)’. 교회의 역사는 5세기 고르가살리왕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195년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타마르(Tamar) 여왕이 신발을 벗고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건물은 바그라티 왕조의 데메트리우스 2(Demetrius II) 때인 1278년부터 1289년 사이 지어졌다. 1600년대 이후 창고·수도원·성채·감옥 등으로 그 용도가 변화되기도 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예배공간으로 다시 되돌아온 것은 1988년이다.

 메테키 성당 앞 바위 언덕 위에는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 439~502) 의 동상이 있다. 고르가살리는 과거 이베리아(Iberia, 현재 조지아 동부) 지역을 통치하던 왕으로, 트빌리시라는 도시를 건설한 고대의 명군으로 유명하다.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그는 비잔틴제국과 동맹을 맺고, 사산조 페르시아와는 대립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잠시 후 도착한 유럽광장(Europe Square)’의 로터리(rotary). 하얀색 십자가를 한가운데 놓고, 빙 둘러서 조지아 국기와 EU국기가 번갈아가며 펄럭이고 있다. 러시아의 위협으로 부터 벗어나려면 EU가입이 최선이라나? 그래선지 조지아에서는 어디를 가나 EU국기가 펄럭인다. 하지만 아직은 EU회원국이 아니다.

 로터리 위쪽은 리케공원(Rike park)’. 청동으로 만든 나무 조형물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새와 곤충, 나무집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 흡사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 소설에라도 나올 법한 분위기다.

 리케공원 초입에는 해발 492m에 위치한 나리칼라 요새까지 실어다주는 케이블카의 승강장이 있었다. 높이 94m 길이 508m 1 42초 동안 운행한단다.

 케이블카의 장점은 스릴과 조망이다. 발아래로 쿠라 강(Kura R.)’이 내려다보인다. 튀르키에 북동부 카르스(Kars) 고원지대에서 발원해 조지아를 관통한 다음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카스피해로 들어간다. 길이는 1,515km. 강의 길이만큼이나 이름도 다양하다. 러시아와 유럽에서는 쿠라(Kura), 튀르키에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뀌르(Kür), 이란에서는 꼬르(Korr)라 부른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키루스(Cyrus)라 불렀단다.

 상부 승강장에 가까워지면 나리칼라 요새(Narikala Fortress)’가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5세기 고르가실리왕에 의해 피난과 방어용으로 만들어진 성채이다.

 상부 승강장에서 내리면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나리칼라 요새’. ‘조지아 어머니상을 보려면 기념품점이 늘어선 오른쪽으로 가야한다. 우린 조지아 어머니상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 승강장 근처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망원경도 눈에 띈다.

 난간에 서자 트빌리시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인구 124만을 자랑하는 트빌리시는 조지아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다. 트빌리시(Tbilisi)라는 이름은 1936년 공식화됐다. 그 전까지는 페르시아어에 근거한 티플리스(Tiflis)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반대 방향에도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솔로라키 언덕 남쪽에 있는 조지아 국립식물원(National Botanical Garden of Georgia)을 눈요기해보라는 모양이다.

 시간이 없어 식물원으로 내려가 보지는 못했다. 때문에 다른 이의 글로 대신해본다. 원래 이름은 성채(요새) 정원이었다. 1846년부터 티플리스 식물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데, 현재 97ha( 97만 평)의 면적에 3500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식물원 안에는 오렌지원, 장미원 등이 있으며, 폭포도 있고 종자은행도 있다. 그리고 6개의 과학연구부에서 식물의 생육과 품종개량, 토양보존과 자연보호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짚라인 탑승장도 눈에 띈다. 앉아서 탈 수 있도록 해놓아 겁이 많은 사람들도 시도해볼만하겠다.

 이곳 솔로라키 언덕은 조지아 여행의 필수 코스다. 그러니 오가는 사람들로 붐빌 것은 당연. 때문에 여행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상점들이 줄을 잇는다.

 그 끄트머리에서 조지아 어머니상(Mother of Georgia)’을 만났다. 높이가 20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조각상은 1958년 트빌리시 탄생 15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조각가인 아마슈켈리(Elguja Amashukeli)의 작품으로,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1963년 알루미늄으로 덧씌워졌으며, 1996년 현재의 모습으로 교체되었다.

 조지아 전통복장을 한 여인이 왼손에는 포도주를 담은 대접을, 반면에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친구에게는 와인을 선사하지만 적()에게는 칼을 쓴다는 의미다.

 뒤쪽에는 자그만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조지아의 어머니 상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하지만 트빌리시를 내려다보는 형상이라서 뒷모습만 가능하다.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쪽, 그러니까 나리칼라 요새쪽으로 간다. 하지만 금방 포기해버리고 만다. 요새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절벽 위 길이 만만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반평생을 산을 누비며 살아왔고, 심심찮게 암벽도 타봤지만 나이가 칠십을 넘긴 지금 무리해가며 올라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요새는 5세기 후반 고르가살리 1세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1100년 전후 다비드 4세 때 증축되었으며, 몽골족의 침입 때 작은 성채라는 뜻을 가진 나린칼라(Narin Qala)라는 이름을 얻는다. 16-17세기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1827년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성채 안에는 성 니콜라스 성당이 있다. ! 요새는 아라비아 양식이라고 했다. 때문에 7세기 이슬람제국 우마이야 왕조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단다.

 마지막으로 들른 자유광장은 구시가지의 중심에 해당한다. 첫 이름은 예레반 광장이었고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잠시 등장했던 조지아 공화국 시기에는 자유광장, 그 뒤 소련 시절에는 비밀경찰국장인 베리아의 이름을 딴 광장이 되었다가 이내 레닌 광장이 되었다.

 예전 레닌의 동상이 있던 자리는 시민 혁명 후 자유기념탑으로 바뀌었다. 높이 35m의 기둥 꼭대기에는 건국신화의 성 게오르기우스 황금빛 기마상이 있다. 참고로 성 게오르기우스는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이자 십사구난성인(十四救難聖人)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지아 국명의 어원이라고 한다. 악룡 퇴치 전설에 따라 주로 창이나 칼로 용을 무찌르는 백마 탄 기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광장 옆에 있는 캘러리아 쇼핑몰에 들러 아이스 와인 3병을 샀다. 세일 기간이라서 한 병에 15불 밖에 하지 않는다는 종업원의 말에 귀가 솔깃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구입 한도(1인당 1)를 넘길 경우 관세가 구입가와 거의 맞먹는다는 것도 앱으로 통관신고서를 작성하면서 처음 알았다. 덕분에 한 병은 이동 중에 마셔버렸고...

 해거름 무렵 유럽광장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하러 메테키 언덕 위에 있는 식당가로 올라간다. 이때 퀸 데레얀 궁전(Queen Darejan palace)’이 눈에 들어온다. 엘레클 2(Erekli )가 그의 왕비인 데레얀을 위해 1776년에 지었다고 한다.

 식사는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가 구워져 야채샐러드와 함께 나온다. 그리고 빵과 스프도 나온다. 조지아가 자랑하는 와인이 제공됨은 물론이다. 이 음식을 먹으면서 공연을 즐기면 된다. 조지아 전통춤은 마치 탭댄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경쾌하고 스페인 플라멩고처럼 정렬적이다. 전통음악(Polyphony)은 안데스산맥의 노래들처럼 멜로디가 신비롭다. 먼저 가수가 나와 전통음악부터 동시대 음악까지 불러준다. 다음에는 남녀 두 쌍이 나와 역동적인 춤을 보여주는데, 이들 공연이 식탁 사이 공간에서 이루어져 공연자와 관객이 하나가 되는 장점이 있다.

 트빌리시는 야간관광의 명소로 알려진다. 경관도 경관이지만 치안이 좋아 안심하고 관광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호텔방에서 소주잔이나 홀짝거리고 있겠는가. 하지만 예전의 조지아 경찰은 부패의 상징이었단다. 이를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이 대대적인 경찰개혁을 단행했다. 우리나라처럼 무늬만 해경 해체가 아니라 정말 경찰을 해체해 버렸다. 기존 경찰 조직을 전부 해체하고 새로 경찰을 뽑아서 조직을 재구성했다. 경찰서도 가장 화려한 건물로 새로 짓고 유리로 외벽을 지어 투명한 경찰임을 강조했다. 급료도 비약적으로 높여주었다. 이후 조지아에서는 경찰이 신랑감 1로 꼽힌다나?

 어둠이 내리자 주변의 역사적인 건축물과 현대적인 구조물에 조명이 들어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노란색으로 빛나는 메테키 성당은 더욱 신성해 보이고. 그 옆의 고르가살리 동상도 낮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리케 공원의 대형 애드벌룬. 흰색 바탕에 ‘M2’라고 적혀있는데, 날씨가 좋으면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했다.

 밝은 조명에 맨몸을 드러낸 조지아 어머니상은 더욱 강렬해졌다. 친구여 어서 오고, 적이면 물러가라.

 평화의 다리 LED로 조명해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 물고기의 뱃속을 거니는 셈이다. 참고로 다리를 트빌리시의 핫 플레이스로 만든 조명은 프랑스의 조명 디자이너 필립 마르티노(Philip Martinaud)가 설계했다. 난간에 미디어글라스가 설치돼 다양한 이미지와 영상을 연출한다. 덕분에 많은 여행자들이 다리 위에 몰려 인생샷을 찍느라 분주하다.

 버스킹이 한창인 거리의 악사.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는 게 미안해 1유로짜리 동전을 넣어주었다.

 저 멀리 나리칼라 요새는 조명을 받아 더 우뚝해 보인다. 원래는 저곳에서 트빌리시의 야경을 즐기려고 했는데, 일기불순으로 케이블카가 운행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지 :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대성당 & 즈바르노츠 성당 유적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에치미아진(Etchmiadzin) : 예레반에서 서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종교도시. 공식 지명은 파르티아 제국의 바가르시 1(117-140)가 붙여준 바가르샤파트(Vagharshapat)’라고 한다. 예레반이 아르메니아의 행정 수도라면, 에치미아진은 아르메니아의 종교적 수도로 알려진다. 아르메니아정교회의 총본산인 에치미아진 성당을 비롯해 성 흐립시메(St. Hripsime)·성 가야네(St. Gayane)·쇼하카트(Shoghakat) 교회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성당이 4개나 이곳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근처의 기둥만 남은 즈바르노츠(Zvartnots) 성당(유적)도 문화유산에 함께 등재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에치미아진 대성당’.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는 뜻을 지닌 도시 에치미아진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학자들 사이에서 이곳을 아르메니아 왕국에서 지은 첫 번째 대성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 병사의 사모창과 노아의 방주에서 떼어 왔다는 돌판 위의 십자가도 소장돼 있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2001년에 만들었다는 정문의 위,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두 인물이 손을 내밀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수호성인인 계몽자 성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 이하 그레고르’)가 기독교를 공인한 티리다테스 3세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이라고 한다.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이가 성 그리고르이며, 이를 공인한 국왕이 티리다테스 3이다.

 뒤돌아 본 정문. 뒷면에도 부조가 되어 있었다. 햇빛을 등지고 있는 탓에 잘 타나나지 않지만 두 사람이 창과 칼을 각각 들고 있다. 1세기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하다 순교한 타데우스()와 바르톨로메우스()라고 한다.

 정문의 성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님이 뭔가를 축복해주는 모양새이다. 성모님의 손이 향하는 곳에 아라라트 산 에치미아진 대성당을 위시한 성당들, 포도, 경전 등을 배치해놓은 것으로 보아, ‘아르메니아를 싸잡아 축복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똑바로 길이 나있다. 그 끝에 높다란 돔이 우뚝한 성당 건물이 나타난다. 가는 길 왼쪽으로는 최근에 세워진 필사본 도서관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1874년에 세워진 고보르키안(Govorkian) 신학대학이 있다. 그리고 길가로 하츠카르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다.

 성당으로 가는 길. 왼쪽 저 멀리 담장 너머로 또 다른 교회가 얼굴을 내민다. 에치미아진 성당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3개의 교회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에치미아진은 일종의 교회 콤플렉스. 주교좌인 성모교회를 위시해 세례 요한교회’, 대주교관, 사제관, 출판인쇄소, 필사본도서관, 신학대학 등 다양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성모교회) 301년에서 303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했다. 티리다테스 3세의 명을 받은 성 그레고르가 당시 왕궁 인근에 있던 조로아스터교 신전 위에 세웠단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던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성당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483년부터 다음 해까지 현재와 비슷한 사각형으로 재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중앙의 돔을 가운데 두고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모양새이다.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총주교가 주재하는 본당답게 성모교회는 웅장했다. 길이 33m에 폭이 30m, 돔의 높이도 34m에 이른다고 한다. 벽은 회색과 붉은색이 주를 이룬다. 원래는 회색이었으나 17세기에 수리하면서 붉은색 계열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돔은 12각 원당형으로 올라가다 원뿔형 꼭지점으로 수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12각 하단부에는 창문을 내고, 상단부에는 원 안에 12사도(또는 성인)로 추정되는 조각을 새겨 넣었다. 북쪽 벽에는 4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도 바울과 성녀 테클라(Thekla)의 부조도 있다고 하나,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정면에서 바라본 성당. 종탑에 가려 돔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각의 성당은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로마네스크 양식도 찾아볼 수 있단다.

 종탑. 십자가를 든 예수 그리스도상이 있다. 십자가의 모양으로 봐서 1500년대 나타난 로랭(Lorraine)의 십자가로 여겨진단다.

 성당의 파사드(facade). 내부 수리중이라서 안은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대신 파사드의 장식과 부조를 살펴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슬람 사원을 보는 듯한 이 느낌은 대체 뭘까? 아라베스크 문양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꽃과 새, 당초문과 격자문 문양도 보인다.

 이슬람 사원이 아니라는 것은 저 문양이 확인해준다. 사람의 얼굴이 들어간...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같은 콤플렉스 안에 있는 다른 성당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마침맞게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작은 성당이 위치하고 있었다. 하나 더. 탑처럼 생긴 저 하치카르는 무슬림에 의해 제노사이드로 희생당한 아르메니아 인을 추모하기 위해 1965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일종의 추모비인 셈인데, ‘R. Israelyan’이 현무암으로 만들었단다.

 하지만 성당은 텅 비어있는 모양새이다. 청빈, 정결, 순종을 서약한 수사들에게나 어울린다고 할까?

 주교관.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듯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주교관의 문이 열리면서 긴 행렬이 나타났다. 깃발을 앞세우고 50명도 더 되는 수도사들이 줄지어 걸어 나오는데, 그중에는 총주교로 보이는 인물도 들어있었다. 이들은 정문 밖으로 나가 어딘가로 향했는데, 뭔가 중요한 의식이라도 있었나 보다.

 박물관의 내부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미리 예약한 사람들만 입장이 가능하다는데, 여행사 일정에 내부관람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의 백미는 대성당 및 박물관의 내부 관람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둘 모두를 보여 주지 않으려면 구태여 이곳까지 찾아올 이유가 있었을까? 여행사의 마땅찮은 일정에 아쉬움을 토로해본다.

 입구에 (롱기누스)창 등 유물과 성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들을 담은 앨범과 기념품을 팔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중요 유물 몇 점은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게시해본다. 박물관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 왕관, 채색된 책(illuminated manuscripts), 행렬용 십자가 등 눈이 휘둥그레지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관람객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집중시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있을 때, 옆구리를 찌른 창이라고 한다. 금박 상자에 보관된 이 성스러운 창(Holy Lance) 게하르트 수도원에서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란다. 코카서스가 기독교의 성지라는 걸 알려주는 퍼포먼스라고나 할까? 조지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입고 있던 옷자락을, 반면에 이곳 아르메니아는 당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노아의 방주에서 떼어온 돌판(나뭇조각 화석) 위에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십자가를 덧씌웠다고 한다. 여기서 전설 하나. 4세기 경, 아르메니아의 수도사 한 사람이 아라라트 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 한 천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잠에서 깨어나시오. 당신의 손 위에 나뭇조각이 있을 것이요. 이것은 노아의 방주에서 떼어낸 것이라오.’라고 했다. 수도사가 잠에서 깨어보니 진짜로 나뭇조각(화석)이 놓여 있더라나?

 아르메니아가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게 했던 성 그레고르의 손 부분이 보관되어 있는 성물함이란다. 손가락 모양이 특이한데, 엄지와 약지를 마주하게 하여 원을 그린다. 동방정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때 나머지 펴진 세 개의 손가락은 삼위일체(성부·성자·성령)를 나타낸단다.

 이곳에서도 다양한 하츠카르(Khachkar)’를 만날 수 있었다.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각각 다르다. 이렇듯 하츠카르는 사람들의 기도를 실질적으로 가시화시켜 놓은 징표가 될 수도 있고, 마을의 이정표나 기념비가 되기도 한다.

 하츠카르의 역사는 1천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최근에 세워진 것들도 심심찮게 만난다. 참고로 하치카르가 처음 아르메니아에 등장한 것은 9세기경이라고 했다. 외세에 시달리는 나라가 평안해지기를 기원하며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정을 쪼아가며 기도하듯 만들었단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 879년에 만든 하치카르가 가장 오래되었고, 현재 전국에 약 4만여 개의 하치카르가 있으며,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단다.

 하츠카르는 돌을 십자가 모양으로 깎아 만든다. 십자가 모양이 새겨진 비석이나 기념비로 사용되기도 한다. 요것은 분수 노릇까지 겸하고 있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을 처삼촌 벌초하듯이 둘러본 다음, 3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즈바르츠노츠(Zvartnots)’로 왔다. 이곳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에치미아진의 교회와 성당, 즈바르트노츠의 고고 유적지(Cathedral and Churches of Echmiatsin and the Archaeological Site of Zvartnots)’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즈바르노츠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길. 길섶에 여러 종류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었다. 즈바르노츠 유적(Zvartnots Historical-cultural monument)에 대한 설명과 사원단지의 복원공사(Restorative works of Zvartnots Temple complex)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북경(중국) 천단공원의 기년전(祈年殿)’을 연상시키는 성당 조감도가 가장 눈길을 끈다.

 성당은 현재 폐허가 된 채 기둥만 남아있다. 하지만 이곳은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인 성스러운 장소로 전해진다. 301년 티리다테스 3세가 성 그레고르와 만나 기독교를 공인한 장소라는 것이다. 그게 즐거운 역사였다면서 아르메니아어로 기쁨(Joyfulness) 또는 환희의 장소라는 뜻의 즈바르트노츠(Zvartnots)’라 이름 지었다.

 그런 성스러운 장소에 650년에서 659년 사이, 네르세스(Nerses) 3세 주교에 의해 성당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10세기에 이르러 지진(또는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1900년대 초에서야 발굴이 시작되었고, 1905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기둥과 벽 일부만 남은 유적은 성당이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없애버린다. 둥그렇게 늘어선 기둥들이 오히려 그리스 신전 같은 느낌을 준다. 기둥의 양식이 이오니아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당 내부는 동서남북 사방에 반원형의 경당을 만들고, 안쪽으로 사각형의 예배와 기도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그 중 북쪽 경당 앞쪽으로 제단을 만들어 주벽으로 삼았을 것이다.

 성당 주변은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벽에 새겼던 일부 조각들도 확인된다. 석류, 포도와 포도잎, 독수리, 사람과 동물 부조가 눈에 띈다.

 벽면만 남은 건물지도 보인다. 사제관 등 성당의 부속건물들일 것이다.

 독립된 돌로 만들어진 해시계도 눈에 띈다. 네모난 돌 하단에는 눈금과 12개의 동심원이, 상단에는 아르메니아어 표기가 있다.

 기둥머리(柱頭)에 새겨진 독수리 문양. 이들은 두 개가 약간의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다.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데, 머리 모양으로 봐서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도록 만들어놓았지 않았을까 싶다.

 성당 터를 지나면 길은 자연스럽게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1990년대 초 이곳에서 발굴된 자료를 보관하는 장소로 처음 만들어졌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기 위해 전시물의 보완이 있었고, 2012년 역사문화박물관 겸 유물창고로 확장되었다.

 박물관은 고고학 전시실, 역사전시실, 성당 건축전시실 등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의 전시 상황은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추려서 옮겨본다.

 고고학 전시실은 성당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도기와 자기 그리고 청동기와 철기 등이 보인다. 도기로는 크베브리와 흑갈색 토기가 눈에 띈다. 백색과 흑색이 섞인 도기도 보인다. 청동검과 철제 마구로 여겨지는 물건도 있다.

 읽기 삼매경인 아르메니아 정교회 사제. ‘즈바르노츠 사적지가 품은 역사가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역사전시실은 패널을 활용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 성당의 역사를 사진 중심으로 설명해준다.

 성당의 역사와 건축을 보여주는 전시실이 가장 중요하고 내용도 풍성한 편이다.

 원래 모습을 가상해 만들어 놓은 성당 미니어처. 원형으로 되어 있어 바실리카 양식이 보통인 성당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3층의 원통형 건물로 되어 있고 위로 올라가면서 지름이 줄어드는 형태를 취한다.

 미니어처는 내부를 볼 수 있게 가운데를 잘라 양쪽으로 떼어 놓았다. 이를 통해 원통형으로 보이지만, 정확히 32면으로 이루어진 원당형임을 알 수 있다. 1층은 벽을 하단과 상단으로 구분해, 하단에는 32개의 아치형 창을, 상단에는 원형의 광창(光窓)을 만들었다. 출입문은 모두 8개로 되어 있다. 1층 원당의 지름은 37.75m라고 한다.

♧ 아르메니아 여행을 마치면서 :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아르메니아를 위험지역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2020년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이 있었고, 최근에도 두 나라간의 다툼이 심심찮게 기사로 뜨기 때문이다. 물론 두 나라는 전쟁이 끝난 지금도 앙숙이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와도 사이가 나쁘다. 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제국이 터키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을 사막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100만 명 이상 희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크게 걱정할 게 없다. 다만 두 나라를 직접 왕래할 수는 없고, 조지아라는 제3국을 경유해야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여행지 : 아르메니아  예레반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예레반(Yerevan) : 아르메니아의 수도로 인간이 살아온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하지만 러시아 건축가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yan)’이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 지배하에 있을 때 설계한 계획도시이기도 하다. 포인트는 공화국 광장에서 자유 광장을 거쳐 캐스케이드에 이르는 구간으로, 거리 전체가 신고전주의풍 건물들로 장식되어 있어 마치 파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행객들이 잃어버린 예레반을 낭만을 되찾아줄 것만 같은 분홍색 빛을 띤 도시라며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캐스케이드에서 바라본 예레반 시가지. 시가지 너머로 아라라트 산의 위용이 선명하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신들의 태생과 역사가 시작했다고 믿는 민족의 성산으로, 아라라트가 자리 잡은 아나톨리아 평원의 동쪽은 오랫동안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던 저 영산은 1920년 튀르키예의 영토로 변했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한창이던 1993년 터키가 경제봉쇄와 함께 국경까지 폐쇄한 후 더욱 멀어졌다.(날씨 탓인지 아라라트 산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아, ‘나무위키에서 사진을 빌려왔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예레반은 격자형 가로망을 원형 순환로가 감싸는 형태의 계획도시다. 그래선지 눈요깃거리들은 예레반 중심부에 모두 몰려있다.

 차에서 내리니 낯선 문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뜻은 고사하고 읽기조차 불가능한. 다른 낯선 나라에 발을 디뎠음을 눈이 가장먼저 알아차린 셈이다. 담벼락을 장식하고 있는 저 문자들은 아르메니아 알파벳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방인이 인식하기에는 너무 낯설다. 아래 오른쪽에 러시아어와 영어로 발음이 적혀 있는 것 같은데,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다.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창제 문자를 가진 뿌리 깊은 문화국가라고 했다. 문자가 만들어진 것은 405,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성직자 마슈토츠(Mesrop Mashtots)’에 의해서다. 브람샤푸(Vramshapuh)왕과 사학(Sahak)대주교의 지원을 받아 36자의 아르메니아 알파벳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아르메니아 문학의 시작을 의미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또한 언어를 통한 민족 통합과 종교적 일체감을 갖는 일이 가능해졌다.

 어찌 보면 한글을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마슈토츠가 최초로 옮겼다는 솔로몬의 잠언서 첫 문장은 대충 이렇다. <이것은 지혜와 가르침을 인식하도록 하고 위대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을 알게 한다(Ճանաչել զիմաստութիւն եւ զխրատ, իմանալ զբանս հանճարոյ)>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고문서박물관(Matena daran)’을 찾아보라고 했다(하지만 시간이 없어 다녀오지는 못하고,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게시한다). 안에는 17천여 점의 필사본과 10만권이 넘는 고문서가 보존·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고대·중세 시대의 필사본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필사본도 있단다. 그중 가장 큰 필사본은 무슈의 설교집으로 크기가 가로 55.3cm에 세로가 70.5cm나 되며 무게는 27.5kg이라고 한다. 필사본 중 가장 작은 것은 1434년도에 제작된 교회 달력으로 가로 3cm에 세로가 4cm인데, 무게는 19g에 불과하단다.

 캐스케이드로 가는 길. 해외 유명 브랜드숍과 유럽풍 분위기의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이다. 예레반은 이런 길들이 광장과 광장을 연결해준다.

 벽에 붙은 명패가 눈길을 끌기에 사진부터 찍고 본다. 귀국해서 알아보니 아라 사르그샨(Ara Sargsyan, 1902-1969)’이었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걸출한 조각가로. 라피크 카차트리안(1937-1993)과 같은 수많은 아르메니아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데, 그의 생가(명패에는 ‘1945-1959’로 적혀있다)였던 모양이다. 이사하키안 거리에 있는 그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개조해놓았다니 말이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예레반 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캐스케이드(Cascade Complex)’에 이른다. 예레반의 북쪽 언덕과 도심을 연결시키고 했던 알렉산더 타마니안이 구상한 계단형 구조물이다. 하지만 착공되지 못하고 설계도로만 남아 있던 것을 1970년대 말 예레반의 도시계획위원회 위원장 짐 토로스얀이 부활시켰다. 타마니안의 원안을 기초로 내부에 공간들을 만들어 연결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으며 전면에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예술품들로 치장한 정원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1988년 대지진과 1991년 독립, 전쟁 등으로 중단되었고, 2002년에야 아르메니아 출신 디아스포라의 후손이자 미국의 사업가인 카페스지안이 재산을 출연해 2009년 미술관으로 마침내 문을 열었다.

 캐스케이드의 초입. 캐스케이드를 설계한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ian, 1878-1936)’이 예레반의 도면을 살펴보고 있다. 러시아 출신인 그는 러시아에서 건축가로서의 명성이 정점을 향하던 마흔다섯에 아르메니아로 이주해 이후 반생을 보냈고 또 예레반에서 숨을 거두어 아르메니아의 건축가로 남았다. 그는 예레반의 오페라하우스, 공화국 광장과 주변의 건물 등을 설계하는 등 아르메니아의 건축사와 도시사에 일획을 그었다.

 캐스케이드는 외부의 카페지안 조각공원과 내부의 미술관(art gallery)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 모두 예술작품들로 꾸며졌는데, 조각공원에 조금 더 큰 조각품들이 50m 폭의 녹지와 보행로를 따라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콜롬비아 작가 보테로(Fernando Botero)’가 만들었다는 둥글둥글 오동통통한 여인이 인상적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것이 담배를 피우는 여인에 대한 뭔가를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바로 위에 게시된 로마 전사(Roman warrior)’도 보테로의 작품이라고 한다.

 영국작가 구하(Saraj Guha)’는 도약하는 임팔라를 만들었다. 한 마리의 임팔라가 도약하는 모습을 네 개 장면으로 보여준다.

 한국 예술가 지용호가 만든 정크아트 사자도 전시되어 있었다.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으로 역동성과 용맹성이 두드러진다. 2008년 작품으로 스텐레스와 타이어를 활용해 만들었다.

 그밖에도 포르투갈 출신의 바스콘셀로스(Joana Basconcelos)’, 중국작가 위민준(Yue Minjun), 미국 작가 워이툭(Peter Woytuk) 등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출품한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 작품들을 눈에 담다보면 어느덧 캐스케이드 앞에 이르게 된다. 언덕을 향해 놓인 계단식 정원으로, 572개의 대리석 계단을 6개 층으로 나누고 각 층마다 물이 흐르는 수직적 정원을 들어앉혔다. 작고 아름다운 분수(폭포)와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캐스케이드를 둘러보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밖에 놓인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기본, 그게 힘들다면 내부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면 된다. 이 또한 5개 층으로 나뉘어져 있으니 층이 바뀔 때마다 밖으로 나가 야외정원을 살펴보면 된다.

 내부는 5개 층의 테라스 공간을 만들고 에스컬레이터로 각층을 연결했다. 여기에 기부자의 이름 딴 카페스지안 아트센터를 들어앉혔다. 경사면과 각층의 평면에 흙·유리·금속·목재·폴리우레탄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공예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영국작가 크리스티(Maylee Christie)’가 만든 거대한 저 난()은 유리와 도자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천처럼 느껴지는 것은 색상과 문양이 동양적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는 유리로 만든 보라색 초롱꽃과 쇠로 만든 나비와 꽃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목공예품 의자도 보이는데, 예술이라기보다는 생활용품에 가깝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자동차도 한 대 놓여 있었다.

 ‘Khanjyan Hall’은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다기에 입구의 그림만 찍어왔다. ‘Gregor Khanjyan(1926-2000)’가 그렸다는데, 아르메니아인들의 삶, 투쟁, 역사를 담았다고 한다. 그림에는 아르메니아의 역사적 인물들 얼굴이 수십 명 그려져 있다고 했다.

 밖으로 나오면 작은 공원을 만난다. 벽면에서 물이 떨어지는 인공폭포(분수로 볼 수도 있겠다)와 마름모꼴의 연못으로 이루어진 앙증맞은 공간은 각종 조각품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예레반 시가지를 눈에 담아보는 즐거움은 덤이다. 1층과 2층에서는 조각공원과 오페라하우스를 눈앞까지 끌어당겨 볼 수 있다.

 야외 공원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안성맞춤인 모양이다.

 예레반 풍경은 층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고도를 높인 만큼 시야도 역시 넓어지기 때문이다.

 5층 분수대에는 마틴(David Martin)’의 다이버들이 놀고 있었다. 이들은 물에 뛰어들기 직전 몸의 균형을 잡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 2층에서는 영국작가 브로이어-웨일(David Breuer-Weil)’의 방문객(visitor)도 만날 수 있었다. 물속에 잠겨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청동으로 표현했다.

 에스컬레이터는 5층까지만 운행한다. 그러므로 맨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6층으로 올라서자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50주년 전승기념탑이 반긴다. 아르메니아의 소비에트 시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아르메니아는 주변국인 터어키와 아제르바이잔과는 적대관계이고, 러시아와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나라이다. 그래선지 1991년 소련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했지만, 저런 조형물까지 세워가며 우호를 과시하고 있다. 1945년에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했으니 50주년이면 1995년이 된다. 이 탑이 가지는 의미와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6층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 그 자체다. 예레반 시가지가 가장 넓어진 모습으로 펼쳐지는가 하면, 저 멀리 아라라트 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운이라도 좋으면 신기루처럼 다가온 아라라트 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단다.

 캐스케이드는 현재진행형인 모양이다. 맨 위쪽(6) 뒤에 철근을 드러낸 채로 멈춰있는 공사장이 눈에 띈다. 맞다. 캐스케이드를 조금 더 확대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와 예술작품 수집·기증에 어려움이 있어 사업이 진척되지 않고 있단다.

 전승기념탑으로 가려면 공사장을 에둘러 내놓은 통로를 따라가야 한다. 이어서 경사진 도로를 한참이나 더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이쯤에서 캐스케이드를 내려가기로 한 이유다. 그보다는 예레반 시가지를 조금 더 걸어보는 게 낫지 않겠는가.

 자유 시간을 이용해 시내 중심가를 걸어보기로 했다. 예레반은 격자형 가로망을 원형 순환로가 감싸는 형태의 계획도시라고 했다. 그래선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직각의 널찍한 도로가 인상적이다. 이 도시계획은 알렉산더 타마니안이 담당했다고 한다. 러시아 출신이나 아르메니아에 귀화한 그는 정부청사와 오페라하우스 등을 설계해 국민 건축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첫 만남은 놀이동산’.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다양한 놀이기구들을 갖췄다. 하지만주인인 어린이들 대신 데이트 중인 어른들만 눈에 띌 따름이다.

 옆에는 인공호수도 만들어놓았다. 오리배도 여러 척 띄어놓았으나 움직임은 없었다. 그저 어른들 몇 무리가 맥주잔을 앞에 놓고 담소를 즐기고 있을 따름이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호숫가를 라운지로 삼은 모양이다.

 거리 곳곳에 고급스런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거리에 의자를 내어놓은 야외카페가 있는가하면 실내를 개방해서 카페로 꾸민 곳도 많았다.

 예레반도 교통체증이 심한가 보다. 신호를 기다리는 차량들이 끝없이 늘어섰는데, 그 뒤에서 아르메니아 어머니상이 얼굴을 내민다. 원래 저곳에는 스탈린의 동상이 있었는데, 아르메니아 병사들에 의해 파괴되고 그 자리에 받침대 포함 52m의 거대한 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어머니상까지 다녀오지는 못하고,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올려본다. 어머니상은 칼집에서 칼을 빼는 듯 넣는 듯 거대한 칼을 들고 도시 너머 터키국경을 노려보고 있다. 터키와의 아픈 역사로 지금은 평화시기이지만 언제라도 칼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시가지 풍경. 건물들 대부분이 약간 어두운 핑크빛을 띤다. ‘알렉산더 타마니안이 설계한 건물들은 저보다 더 확실한 핑크빛을 띠고 있었다. 대부분이 응회암(凝灰巖)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 석재는 화산이 분출할 때 재와 모래가 엉겨서 굳어진 돌로 연한 분홍색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레반을 가리켜 핑크도시라고 부른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백조의 호수(Swan Lake)’라는 인공호수가 잠시 쉬었다가란다. 자그마한 호수인데 깨끗하게 물관리가 되어있고, 물가에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의 아르노 바바자니얀(Arno Babajanyan)’의 동상까지 세워놓았다.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호수 앞 도로를 건너면 보행자 전용 거리인 ‘Tashir Street’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즈음 우린 방향을 잃어버렸고, 우여곡절 끝에 ‘Grand Hotel’을 찾아냈다. 중세 유럽풍의 외관을 지닌 이 호텔은 골든 튜립상을 여러 번 받았을 정도로 명성이 높단다. 호텔 앞에 있는 근린공원풍의 샤를 아즈나부르 광장(Charles Aznavour Square)’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작은 분수에 조형물들까지 설치해 놓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광장의 분수였다. 쉽게 볼 수 없는 ‘Zodiac Sign’을 형상화 한 조형물들을 빙 둘러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띠처럼 서양 사람들은 12가지의 별자리(양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등)에 생일을 대비해 운세를 본다.

 분수쇼가 펼쳐진다는 공화국 광장으로 간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가는데, 하나같이 친절하게 가르쳐줘서 별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요 삼부자도 그 친절한 시민들 중 하나다. 이렇듯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방인을 위해 기꺼이 손길을 내민다. 국민소득이 낮은 국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문화적 품격이 돋보인다고 할까? 무엇을 흉내 낸 가벼움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만의 자연스러움과 자존감이 스며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에 다시 가고 싶어 하고, 예레반을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공화국 광장에 이르니 식수대가 반긴다. 맑은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데 지나다니는 시민들이 스스럼없이 물을 마신다. 맞다. ‘아자트 계곡 주상절리에서도 얘기했듯이 아르메니아에서는 마음 놓고 물을 마셔도 된다고 했다.

 예레반 투어의 귀결은 공화국 광장’. 이곳에 광장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20년대 알렉산더 타마니안에 의해서다. 1940년부터 레닌광장으로 불렸고, 1942년 광장 주변에 정부청사가 들어서기 시작해, 1950년대에는 네오클래식 건물들이 사방을 꽉 채우게 된다. 광장 북쪽으로 국립미술관 및 역사박물관, 북동쪽 방향으로는 국토관리부와 정부청사, 남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중앙우체국, 북서쪽으로는 외무성 건물과 에너지 및 천연자원 공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1990년 레닌광장에서 공화국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1년 아르메니아공화국 설립 후 행정부 건물에 대한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공화국광장은 무엇보다 주변의 붉은빛 건물이 인상적이다. 정열적인 붉은빛이 아니고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붉은빛이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이 건물들은 모두 현무암으로 된 기반 위에 다공질 탄산석회의 침전물인 붉은빛의 아르메니아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국립미술관과 역사박물관이라고 했다.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아르메니아 미술품 4만 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중 가치 있는 것들을 56개 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단다. 또한 아르메니아 최대 국립박물관인 역사박물관은 고고학, 인류학, 화폐, 현대사 관련 유물들을 보유 전시하고 있다.

 광장의 자랑거리는 음악분수이다. 야간에 조명을 하고 클래식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춘다. 우리 부부 역시 이 쇼를 보려고 찾아왔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9시부터 펼쳐지는 분수쇼를 보기 위해 예레반 시민들과 관광객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분수쇼는 유럽의 클래식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추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프랑스 국제수상쇼(Aquatique Show International) 회사의 제작으로 2007년부터 운영되고 있는데, 기계·전기·수리 공학적 토대 위에 물 분사, 빛 발사, 음악연주가 결합된 멀티미디어 분수이다.

 음악성, 예술성, 오락성을 갖춘 분수로도 유명하다. 현재는 컴퓨터 공학을 활용해 물과 빛 그리고 음악과 춤이 자동으로 결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단다.

 시간이 없어 가보지는 못했으나,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하는 곳으로 꼽히는 2곳은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게시해본다. 먼저 아르메니아 대학살 기념탑이다. 이왕에 왔으니 이 나라의 아픈 상처도 한번쯤은 보듬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터키인들이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이 사건은, 1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했다. 1915 4 24, 250여 명의 아르메니아인 지도자를 체포하여  앙카라로 연행한 후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를 필두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진행되었는데, 이때 희생된 희생자 수가 최소 80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추산된단다이 참화는 1973년 유엔에 의해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규정됐다. 제노사이드 때 학살을 피한 난민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교포)를 형성했다. 현재 해외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 80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 인구보다 많다.

 다른 하나는 아라라트사에서 운영하는 꼬냑박물관이다. 꼬냑은 프랑스 꼬냑(Cognac) 지방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증류하여 만든 브랜디의 일종으로 꼬냑 지역에서 생산된 술에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다. 바로 아르메니아 아라라트 꼬냑이다. 199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브랜디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워낙 맛이 뛰어나 프랑스 꼬냑협회의 승인을 받아 유일하게 꼬냑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한번쯤 들러 맛이라도 봐야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를 시행에 옮기지 못한 난 면세점에 들러 선물용으로 세 병을 챙겨왔다. 이중 한 병은 여행 중 마셨음은 물론이다.

 아르메니아 여행 중 머물렀던 ‘Ani Central Inn’. 근처에 지하철역과 대형 쇼핑센터 타시르(Tashir)가 있고 예레반의 중심인 공화국 광장까지 걸어서 10분이 채 안될 정도로 시내 중심에 있는 호텔이다. 덕분에 저녁 식사 후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이른 새벽, 아침 입맛도 돋울 겸해서 근처 시가지를 둘러봤다. 이른 아침부터 활기에 넘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편의점조차도 문이 닫혀있어 전체적으로 한적한 풍경을 보여준다. 빵집이 유일하게 문을 열고 있었다고나 할까? ! 아르메니아의 빵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으니 여기서는 음식 전반에 대해 살펴보자.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음식에서도 라이벌이다. 사실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은 조지아다. KBS 음식 다큐멘터리 요리 인류에서도 소개된바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아르메니아 음식이 조지아 음식보다 더 입에 맞는 편이다. 특히 간이 한국인 입맛에 맞는다. 고기를 익힐 때도 그렇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모두 샤슬릭 스타일의 돼지고기 꼬치구이가 유명한데 조지아식은 살코기 위주라 좀 퍽퍽하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꼬들꼬들한 식감을 살리고 비계 부위를 중시해 한국인에게 친숙하다.

 

여행지 : 아르메니아  가르니 신전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가르니 신전Garni Temple) : 예레반에서 남동쪽으로 32km쯤 떨어진 코타이크(Kotayk) 지방에 있는 신전. BC 3세기 요새로 지어졌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BC 1세기 아르메니아 왕 트리다테스 1(Tiridates I)’가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태양신 미트라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했다.

 

 아자트 협곡 위에 형성된 가르니 마을에서 투어를 시작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10분쯤 걷자 목적지인 가르니 신전이 나온다. 참고로 가르니 지역이 역사에 나오는 것은 기원전 8세기 우라르트(Urart) 왕국 때부터라고 한다. 이후 기원전 3세기 오론트(Oront) 왕국 때 이곳에 왕의 여름궁전이 지어졌다.

 수도인 예레반에서 가깝기 때문에 당일치기 투어가 가능하다. 7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신전이 걸터앉은 아자트 협곡의 세상에서 가장 큰 주상절리를 한데 묶어 투어를 진행하는 게 보통이다.

 입장권을 사서 안으로 들어온다. 저렇게 견고한 성벽(지금은 성문에 문짝도 없지만)이 있었기에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평을 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기원후 1세기 이베리아(Iberia) 왕조의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 AD 32-51) 왕과 그의 가족이 양자이자 조카였던 라다미스투스(Rhadamistus)에 의해 암살당한 후부터 이곳은 왕궁보다는 성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신전은 동··남이 절벽으로 차단되고, 북쪽으로만 접근이 가능한 천연의 요새다. 높이 6-8m(두께 2-3m)에 길이 374m인 성벽에는 14개의 망루 겸 탑까지 있었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원형을 너무 많이 상실했다는 이유로 등재에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래 문장을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떡 거린다. 유네스코에서 선정하는 문화경관의 보호와 관리를 위한 그리스 멜리나 메르쿠리 국제상(Greece Melina Mercouri International Prize for the Safeguarding and Management of Cultural Landscapes)’을 수상했다는 것이다. 대상자는 가르니 역사문화박물관(Historical and Cultural Museum-Reservation of Garni)’이고 말이다. 참고로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 1920-1994)’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정치활동가로 문화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약탈문화재 반환 등 문화재보호 활동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다른 안내판은 1945년 가르니 마을의 공동묘지에서 발견했다는 비문을 소개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 화가 마르티로스 사얀(Martyros Saryan)’이 발견한 이 비문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리다테스 1(66-88, 재위 년도인 듯)’가 기원후 77년에 난공불락의 요새(복원이었을 게다)와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안내판이 전하는 헬라어 비석은 북쪽 성벽의 문(조금 전 들어온) 맞은편에 놓여있었다. 빙 둘러 쳐놓은 금줄에서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이 유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꼬맹이의 호기심까지 막을 수 있겠는가. 아니 저 소년은 지금 음각되어 있는 메시지와 교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르메니아의 위대한 왕인 티리다테스가 즉위 11년 만에 신전과 함께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었다.’...

 탐방로를 야외 박물관으로 삼은 모양이다. 출토된 유물들을 좌대까지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복원 과정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들이지 싶다. 그렇다고 허투루 대할 수는 없었을 테고.

 찰떡궁합을 이루는 것들도 눈에 띈다. 성곽이니 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을 게다. 그러니 어디선가 물을 끌어왔을 테고, 성 안에는 크고 작은 물길이 거미줄처럼 퍼져있었을 것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천 길 낭떠러지에 위태롭게 걸터앉은 가르니 신전이 얼굴을 내민다. 1세기 후반 아르사스 왕조의 티리다테스(Tiridates) 1가 지었다는 태양신 미르(Mihr)에게 바치는 이오니아식 신전이다. 왕은 신전과 함께 왕비를 위한 궁전 겸 성채도 건축했다고 한다.

 신전은 아르메니아가 로마에 속하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태양신 미트라(Mitra, 혹은 Mihr)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했다. 때문에 가르니 태양신전으로 불리기도 한다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닮은 신전은 아르메니아 장인들이 어떻게 전통적인 그리스·로마식 신전 디자인을 변형해 받아드렸는가를 보여준다고 했다. 신전 외부는 둥근 기둥으로 둘러싼 이오니아 양식의 그리스·로마 사원 형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만든 반면, 건축자재는 대리석 대신 현무암을 사용했다. 내부 장식은 이 지역이 로마의 문화를 수용했다는 증거로 포도와 석류 등의 장식을 풍부하게 사용했으며, 로마 이전 시기에 성행했던 황소와 사자의 모티브 장식도 많이 나타나고 있단다.

 신전은 기독교가 공인된 4세기 초반 티리다테스 3세 때 호스로비둑트의 여름궁전으로 변신했단다. 그러다 8-9세기경에는 궁전과 교회(Saint Sion), 목욕탕이 들어선 복합단지로 변한다. 하지만 1386년 티무르제국의 침입과 1679년의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고, 이후 동서로 분열된 아르메니아가 이란과 튀르키에의 지배를 받으면서 잊혀졌다. 그러다 20세기 초·중엽의 발굴과정을 거쳐, 1968-1976년 건축가 사히냔(Sahinyan)의 주도로 발굴 부자재를 활용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본래 것이 66%가 되지 않아 세계문화유산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정면 6개 측면 8개의 원형 기둥이 우뚝하다. 기둥의 상부 주두(柱頭)는 이오니아식으로 되어 있다. 그 위로 면석과 장식벽 그리고 천장받침이 있다. 식물문양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 벽은 프리즈 형태로 연결된다. 천장받침 위로 삼각형 모양의 박공과 지붕이 보인다. 박공은 민무늬이다. 부조장식이 있었을 게 확실하지만 이에 맞는 부자재를 찾아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대신 용마루에는 화려한 장식의 조각품을 올려놓았다.

 신전 파사드(facade). 주워 모은 부자재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어나간 흔적들이 감탄보다는 오히려 짠하게 느껴졌다면 나 혼자만의 오해였을까?

 내부에는 전실이 있고, 그 안쪽에 신과 만나는 기도공간을 만들었다. 지붕과 벽이 있는 건물 형태로 만들어진 신실(神室)이다. 제단과 지성소는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아르메니아 교회당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천장을 뚫어 만든 구멍, 즉 예르디크(Yerdik)를 꼽을 수 있다. 이 구멍은 환기와 더불어 내부를 밝히는 역할까지 해준다. 그런데 그리스·로마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가르니신전도 천정에 구멍을 뚫어놓지 않았겠는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로마의 판테온에서도 저런 구멍을 봤다는 기억을 소환해내면서 그만 수긍하기로 했다.

 신전을 빠져나오자 건물 터가 나온다. 역사는 AD 897년 신전 근처에 2층으로 된 여름 궁전을 추가로 지어졌다고 전한다. 아니 목욕탕과 교회 등이 함께 들어선 커다란 복합지구를 형성했단다. 하지만 모진 세월을 이겨내지 못한 채 지금은 저렇게 터만 남아있다.

 원통형으로 생긴 이 터에 성 시온교회(St. Sion Church)’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완전히 파괴된 탓에 원형의 벽과 내부 구조만 확인해 볼 수 있다.

 안내판은 이 일대를 왕궁으로 적고 있었다. 아치형의 큰 홀을 가진 2층 건물이었을 것이란다. 그밖에도 꽤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나, 술을 좋아하는 내 관심은 포도주를 만들던 시설에 대한 설명에 꽂히고 있었다.

 지대가 조금 높은 곳으로 가면 목욕탕 유적이 나온다. 3세기에 지어진 로마식 목욕탕으로 왕실 여름궁전의 부속시설이지 싶다. 목욕탕은 바닥의 모자이크화와 난방시설 일부가 남아 있어, 아르메니아 왕실의 목욕문화와 목욕탕의 역사를 알려준다.

 목욕탕은 건물 상부가 없어져 정확한 외관은 알 수 없다. 현재의 지붕은 복원과정에서 유적지 보호를 위해 씌워놓은 것이다.

 하지만 일부 벽과 배관, 바닥의 모자이크화가 남아 있기 때문에, 목욕 시스템과 평면구조는 어느 정도 짐작된다고 했다.

 목욕탕은 네 개의 연속된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 쪽 방이 탈의실 겸 전실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은 열탕과 온탕으로 여겨진다.

 방은 한쪽 벽에 반원형의 공간을 할애해 보일러 시설을 만들었다. 지면 위에 지름이 20-25cm 되는 원통형의 배관 기둥을 세우고, 배관을 통해 뜨거운 물과 증기를 목욕탕으로 공급하는 구조다. 때문에 목욕탕은 배관 위에 평평하게 만들어졌다.

 네 번째 방의 바닥에는 1953년에 발견되었다는 2.9x2.9m 크기의 모자이크화가 있다. 그래선지 전문가들은 이곳을 휴게실로 분류하고 있었다.(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 인터넷에서 빌려왔다)

 모자이크화는 사각형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Oceanus)’와 바다의 여신 탈라사(Thalassa)’로 추정되는 두 신을 그려 넣었다. 남신은 뿔이 달린 댕기 머리를 하고, 여신은 긴 머리에 아름다운 눈을 갖고 있다. 머리 위에 적힌 두 줄의 헬라어는 우리는 열심히 일했지만 얻은 게 없다로 번역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건축에 동원된 예술가들이 보수를 받지 못한데 대한 항의 표시로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Thetis)’라고 했다. 그 아래에는 돌고래가 그려져 있다. 이들 주변으로 물고기나 굴 같은 바다생물과 그물을 던지는 어부와 선원이 묘사되어 있다. 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와 반인반어인 인어도 보인다. 하나 더, 누군가는 이 모자이크를 설명하면서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의 실생활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모자이크를 만든 이들이 지중해 도시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안내판은 이곳이 가르니 왕실목욕탕이었음을 알려준다. 가르니 왕궁의 다른 건물들과 같은 재료와 기술로 지어졌으며,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천장 회반죽의 파편들로 보아 둥근 형태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그밖에도 목욕탕의 제작시기, 구조, 가열방법, 모자이크에 대한 설명 등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가르니 요새는 난공불락이라고 했다. 북쪽의 성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이 천 길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요새(가르니 신전) 곳곳에서 멋진 조망을 즐길 수 있다. 발아래로 아까 둘러봤던 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가 광활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다리품만 조금 더 팔면 계곡으로 내려가 볼 수도 있다.

 

 절벽위에 들어선 마을이 보기만 해도 아찔하게 만든다. 문득 스페인을 여행하다 만났던 절벽 위의 도시 론다(Ronda)’가 생각난다. 당시도 건너편 절벽 위에 위태위태하게 들어선 하얀색 일색의 구시가지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하긴 소설가 헤밍웨이는 그런 풍경에 반해 호텔 론다 파라도르(Parador de Ronda)’에 머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지만...

 ‘wines upona time’. 조망을 즐기며 돌아다니다 와인역사박물관에 대한 안내판도 만날 수 있었다. 와인의 역사를 노아의 방주까지 끌고 올라가며 와인 종주국임을 고집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안내판이라고나 할까?

 옆에는 가르니 요새(The fortress of Garni)’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기원전 3세기에 지어졌을 것이라며, 요새가 소개되어 있는 각종 문헌의 저자와 내용 및 성곽의 구조에 대해 자세히 전하고 있었다.



여행지 : 아르메니아  아자트 계곡(Azat Valley)의 주상절리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아자트계곡 주상절리(Azat Valley-columnar joint) : 예레반에서 동쪽으로 23km쯤 떨어져 있는 가르니 마을’. 이 마을 바로 아래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 아자트(또는 가르니) 협곡이 있다. 골짜기를 따라 현무암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늘어섰는데, 중력에 맞서 매달린 기둥이 오르간을 닮았다고 해서 현무암 오르간으로도 불린다. 여기에 협곡의 물줄기가 보내주는 사운드트랙을 보태면 협곡은 돌의 교향곡(Symphony of stone)’으로 승화된단다.

 

 버스가 멈춘 가르니 마을에서 주상절리가 있는 아자트계곡까지는 사륜구동차로 이동했다. 가는 길이 좁은데다 구불거리기까지 해서 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차를 바꿔 타는 것으로도 모자라 돈까지 따로 내야하는 불이익이 따르지만, 이를 생계수단으로 살아가는 현지인들도 있으니 당국으로서는 길을 넓히려고 서두를 일은 없겠다.

 수도인 예레반에서 가깝기 때문에 당일치기 투어가 가능하다. 7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게하르트 수도원과 이 협곡의 절벽위에 걸터앉은 가르니 신전을 한데 묶어 투어를 진행하는 게 보통이다.

 아자트 계곡(Azat Valley)’으로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양옆이 거대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골짜기, 즉 협곡(峽谷)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멀리서 봐도 그 암벽이 주상절리로 이루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체력에 자신이 없거나,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둘러보고 싶은 사람들은 익스프레스라고 하는 전동차를 타면 된다.

 말을 타고 돌아보는 방법도 있다. 물론 최소한의 균형감각은 필요하겠지만.

 굽이진 계곡길을 잠시 내려가면 주상절리 지대가 펼쳐진다. 주상절리(柱狀節理)는 마그마의 냉각과 응고에 따른 부피 수축에 의해 생기는 다각형의 돌기둥이다. 그나저나, 여러 곳에서 주상절리를 만났던 적이 있지만 아자트(또는 가르니) 협곡에 들어서는 순간 그 위용과 규모에 할 말을 잊고 만다. 하긴 세계 최대 규모라니 어련하겠는가.

 ! 여행자들은 너나없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나 또한 다를 게 없었다. 제주도 중문이나 서귀포에서 경이롭게 바라보던 돌의 향연. 그 주상절리의 최대치를 이곳 아자트 계곡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절리(節理, joint)’란 암석에 나타나는 쪼개짐 현상이다. 이게 주상(柱狀), 즉 기둥 모양으로 쪼개지면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현무암질 용암이 급하게 굳을 경우 부피가 줄어들면서 같은 간격의 수축 중심점을 향해 수축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가장 효율적인 육각형 형태로 갈라지는 현상이다. 아니 육각형으로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지만 다른 형태도 있다.

 눈앞에 있는 다각형 돌기둥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자 점점 허리가 젖혀지더니 현기증이 날 듯했다. 작은 계곡에 거대한 절경을 만들어낸 자연의 경이에 감탄만 나올 뿐이다. 맞다. 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는 규모나 크기, 다양함에서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위용이 압도적이었다.

 주상절리의 기둥모양 쪼개짐은 잘 부서지기 때문에 절벽 형태로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제주도의 정방폭포도 그 때문에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폭포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판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절벽을 따라 다각형 돌기둥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그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제주의 중문·대포 해안 주상절리대가 전체 길이 3.5km에 기둥 높이 최대 20m인데 비해 여기는 길이가 5배 이상이고 높이도 2.5배 이상이나 된단다.

 

 주상절리는 대체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건조한 기후를 꼽는다. 나무들이 잘 자라지 않은 덕분에 바위의 균열을 막을 수 있었다나?

 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는 돌들의 교향곡(Symphony of Stones)’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상절리대의 현무암 기둥들이 마치 파이프 오르간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낭만파 글쟁이들은 이 돌의 교향곡이 협곡을 흐르는 아자트 강의 물소리가 내는 물의 교향곡과 앙상블을 이룬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 오르간은 50m도 넘는 거대한 대칭형 육각형 또는 오각형 현무암 기둥으로 되어 있다그런데 이게 명장이 만든 조각품처럼 하나하나가 정교하기 이를 데가 없다.

 동굴 형태를 이룬 곳도 있다. 덮개로 가려져있어 그 아래서 제비들이 집을 짓고 살기도 한다. 또 주상절리 사이로 물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요건 벌집을 쏙 빼다 닮았다. 아래 부분이 떨어져나간 것일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은 어느 하나 경이롭지 않은 게 없다. 문득 외계의 외딴 행성을 탐험하고 싶다면 굳이 태양계의 행성들로 여행할 필요가 없다.’던 모 일간지의 르포(reportage) 기사가 떠오른다. 맞다. 창조주가 선사해준 주상절리가 마치 외계의 어느 행성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다.

 용암이 식을 때 수축되면서 갈라지게 되는데, 이때 아짜트 계곡을 흐르는 충분한 물이 있어, 용암이 빠르게 냉각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로인해 저처럼 멋진 주상절리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짜트계곡의 주상절리는 세계 최대 규모라고 했다. 그게 생김새까지 경이롭다. 고개라도 들라치면 신비롭기 짝이 없는 풍경이 광범위하게 펼쳐진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돌기둥들이 직각과 직선을 이룬다. 그 대단한 규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김새만은 우리나라의 것이 더 뛰어나지 않나 싶다. 그동안 세상 곳곳을 돌아다녀봤지만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경주(양남)의 주상절리보다 더 예쁜 것을 보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반대편, 그러니까 아자트 강(Azat river)’ 건너 절벽에도 주상절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쪽보다 상대적으로 덜 발달되어 있다.

 

 주상절리는 단면이 육각형으로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이는 용암의 표면에 냉각·수축의 중심이 되는 점들이 고르게 분포할 때, 각 수축 중심점들을 중심으로 수축이 균등하게 일어나면서 형성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사각형이나 오각형 등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하나 더. 단면의 크기는 작은 것은 수 센티미터에서 크게는 수 미터에 이르기도 한다. 기둥의 길이도 수 미터에서 길게는 수십·수백 미터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 주상절리는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다그 모양도 기기묘묘하다파이프 오르간처럼 돌기둥이 상하로 길게 이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말뚝처럼 땅에 박힌 것도 있다심지어는 물결처럼 일렁이는 것도 눈에 띈다사람들이 돌들의 향연이라며 탄성을 터뜨리는 이유이다.

 눈이 호사를 누리며 내려가길 20분 여. 오른쪽으로 오솔길이 하나 갈려나간다. ‘가르니신전으로 올라가는 길이라는데, 메인 탐방로도 이곳부터 거칠어지고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주상절리는 이후로도 계속된다고 했다. 하지만 격이 떨어진다는 귀띔도 있었다. 이쯤에서 발길을 돌려야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그곳에서 석간수를 만났다. 아르메니아나 조지아에서는 식수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해외여행을 오래 해오면서 습관화되어버린 물에 대한 의심은 마셔보는 걸 망설이게 만든다. 그러자 현장학습이라도 나온 듯한 학생들이 시범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덕분에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생수, 그것도 감로수에 가까운 석간수를 마셔볼 수 있었다.

 누군가는 아르메니아에서 꼭 먹어볼 음식으로 가재와 철갑상어를 꼽고 있었다. 특히 철갑상어는 캐비어가 아닌 그릴에 구운 육질이 제공된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 철갑상어를 연상시키는 물고기가 길가 둠벙에서 놀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등치까지 제법 큰 놈이 말이다.

 점심상이 차려진 가르니 마을의 식당에서는 라바쉬를 굽는 시연을 해주고 있었다. 이스트를 넣지 않은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구워 만드는 아르메니아의 전통 빵이다. 밀가루··소금을 혼합한 반죽을 나무로 만든 밀대로 얇고 평평하게 밀어 만든 후 뜨겁게 달구어진 화덕이나 오븐에 넣어 30초에서 1분정도 굽는다. 반죽이 얇기 때문에 오븐에 넣는 과정에서 찢어지지 않도록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구운 직후에는 부드럽지만 시간이 지나면 수분이 증발하여 딱딱해진다. 건조된 라바쉬는 장기적으로 6개월까지 저장이 가능하며 다시 먹을 때는 물을 뿌려 부드럽게 만들거나 깨끗한 헝겊을 물에 적셔 건조된 라바쉬를 싸서 촉촉해지도록 한 후 먹는다. 장기 저장이 가능하여 가정에서 한 번에 대량으로 구운 후 저장해 놓고 먹기도 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