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조지아  카즈베기, 게르게티 츠민다 시메바 교회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카즈베기(Kazbegi 또는 스테판츠민다) : 조지아는 맛좋은 와인이 유혹하는 와인 천국이고 볼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트빌리시 북쪽 차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하는 산악지역 카즈베기가 단연 으뜸이다. ‘카즈베기는 구소련 시절에 부르던 이름이고, 현재는 스테판 츠민다로 불리고 있지만 그래도 현지에서는 카즈베기라는 지명이 더 쉽게 다가온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고산지대의 풍광에 젖다보면 어느덧 카즈베기에 도착한다. 인간을 위해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산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는 신화의 땅이다. 조지아인들의 정신적 고향인 게르게티 츠민다시메바(성 삼위일체) 성당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는 해발 1,870m쯤 된다는 게르게티(Gergeti)’마을 주차장에서 주어진 임무를 마친다. 이어서 사륜구동차량으로 갈아타고 츠민다시메바 교회로 올라간다. 포장까지 된 도로이지만 폭이 좁은데다 커브가 심하고, 거기다 경사까지 가파르기 때문이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흑해 연안에 위치한 조지아 제2의 도시/ 여행사에서 나누어준 지도에는 누락되어있다)’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자동차로 10분 남짓 올랐을까 상부주차장에 이른다. 교회 앞에 또 하나의 주차장이 있지만, ‘츠민다시메바 교회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니 잠시 쉬었다가겠단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을 보여주려는 택시기사의 배려라고 보면 되겠다.

 차에서 내리자 눈앞이 훤해진다. 푸름으로 젖은 초원 너머, 광활한 자연으로 둘러싸인 언덕에 조지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교회(Gergeti Tsminda Sameba Church)’가 다소곳이 앉아있는 것이다. ‘츠민다(Tsminda)’ 성스러운이라는 뜻이고, ‘사메바(Sameba )’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뜻이니 게르게티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쯤 되시겠다.

 교회는 거대한 산릉을 병풍삼아 오롯이 앉아있다. 교회 왼쪽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산은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는 샤니 산(Mt. Shani : 4,451m)’일 것이다.

 하도 높다보니 구름이 산허리에 걸려있다. 수천 미터의 산허리를 감싸며 제 모습을 시시때때로 바꾼다. 하늘 아래 구름이요 그 아래가 산이련만, 코카서스에서는 구름 위의 산이 일상인 모양이다. 그런 산의 꼭대기에는 6월 하순인데도 눈이 하얗게 쌓였다.

 반대편에는 카즈벡 산(Mt. Kazbek)’이 있다. 하지만 구름을 뒤집어쓴 채 속살 보여주길 거부한다. 그렇다고 트레킹까지 마다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민둥산을 오르고 있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는 걸 보면 말이다. 택시기사의 말로는 8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설마 Altihut, Bethlemihut(METEO)를 거쳐 카즈벡산 정상까지 다녀온다는 것은 아니겠지? 아무튼 트레킹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도 구해주지 않는다니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챙길 수밖에 없을 듯... 참고로 카즈벡 산은 조지아인들에게 성산(聖山)과 같은 존재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와도 연결된다. 제우스에게 벌을 받아 프로메테우스가 묶였다는, 지구를 받치고 있는 바위산이 카즈벡 산이라는 것이다. 제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프로메테우스에게 독수리가 간을 쪼게 하는 무서운 형벌을 내린다. 낮에 길어난 간은 밤마다 독수리에게 쪼여 먹혔고, 이런 고통은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사슬을 풀어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아손과 아르곤 원정대라는 또 다른 신화와도 관련이 있다. 아르곤이 황금양털을 취하러 찾아간 세상의 동쪽 끝이기도 하다.

 조망을 즐긴 다음 교회 아래에 있는 다른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택시를 타고 갔음은 물론이다.

 주차장에는 기념품판매점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지만 문은 열고 있지 않았다.

 일단은 주차장 뒤에 있는 언덕부터 올라보기로 했다. 꽤 많은 젊은이들이 서성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꼭대기에는 망원경까지 만들어놓았다. 뭔가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내 예상은 적중했다.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먼저 교회 쪽부터 눈에 담는다. 오른쪽 포장길은 교회로 올라가는 길. 왼쪽의 오솔길은 트레커들이 게르게티 마을에서 올라오는 산길일 것이다. 성질 급한 사람들도 꽤 되는 듯 교회로 곧장 올라다는 샛길도 눈에 띈다.

 푸른 언덕 위에 우직하게 서 있는 교회는 고풍스러운 자태가 돋보인다. 14세기에 건립된 이 교회는 조지아 케비(Khevy) 지방에서 교차식 돔 지붕 형식을 띠는 유일한 종교 건축물이란다. 본당을 포함해 종탑, 성직자들이 거주하던 건물들로 구성된 작은 복합단지를 이루고 있다. 워낙 높고 험준한 산세에 자리한 덕분에, 국가 재난 시 성 니노의 십자가를 비롯한 조지아정교회의 주요 성물들을 므츠헤타(Mtskheta)로부터 피신시키는 성소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구름 속에 갇혀있던 카즈벡 산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코카서스 산맥에서 일곱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첫 번째가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스(Elbrus : 5,642m). 조지아에서는 시카라(Shkhara : 5,193m)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수년 전까지 융가(Janga : 5,051m)가 두 번째였으나 2019년 조지아 정부의 실측 결과 5,053m로 밝혀져 순서가 바뀌었다. 카즈벡의 뜻은 그루지아어로 ‘Glacier Peak’ 또는 ‘Freezing Cold Peak’를 의미한다. ‘얼음산이나 만년설산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반대편에는 샤니 산이 있다. 조지아의 산간지역. ‘카프카스 산맥에 속하는 산봉우리들은 평균 높이가 4,600m를 넘길 정도로 높다. 때문에 항상 운무가 잔뜩 끼어있어 평상시 산봉우리를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샤니 산은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행운이라 하겠다.

 이제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교회로 올라가 볼 차례이다. 조지아 여행의 필수 코스이자 하이라이트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주차장에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담벼락은 투박하면서도 우람한 것이 영락없는 성벽이다. 맞다. 오스만투르크 전성기와 맞물린 14세기에 건립된 이 교회는 종교적 기능 말고도, 외세의 침입을 막는 요새의 역할까지 수행했다고 한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즈벡의 산자락에 교회를 지어놓고, 전쟁 때는 이곳으로 들어가 외적과 맞섰단다.

 교회는 돔이 있는 십자가 모양의 정사각형 건물이다. 이 교회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건축물의 아름다운 조화가 특징으로 꼽힌다. 한쪽을 바라보면 하늘 높이 솟은 카즈벡 산이 펼쳐지고, 또 다른 한쪽에는 보석처럼 알알이 박힌 카즈베기 마을의 전경이 품 안에 들어온다. 하늘과 맞닿은 산봉우리에 걸터앉은 교회도 빼놓을 수 없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을 풍경들이다.

 교회 건물은 남쪽과 서쪽에 출입문이 있다. 아래 사진은 서쪽 출입으로, 문 주위에 부조로 새겨진 화려한 장식이 있다. 하나 더. 교회의 출입문은 무척 작았다. 종탑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유사시 문을 폐쇄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아보려는 지혜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출입문 위쪽 벽에도 여러 장식이 있다. 부조로 새겨진 자그마한 십자가가 있고, 이 십자가에 매달 듯이 아치형 장식이 있는 좁고 긴 창문을 내놓았다.

 돔 아래의 톨로베이트(Tholobate : 돔이 세워진 건물의 직립 부분)에 좁고 긴 창들이 있다. 이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은은하게 실내를 비춘다.

 동쪽 벽면은 장식이 좀 복잡하다. 화려하게 장식된 사각형 틀이 있는 좁고 기다란 창을 냈다. 그 위에 커다란 십자가가 있는데, 이게 쉽게 볼 수 없는 십자가 형태다. 십자가 교차점의 네 구석에 정사각형 장식이 하나씩 붙어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형태의 십자가를 쿼드레이트 크로스(Quadrate Cross)’라고 했다. 마태(Matthew), 마가(Mark), 누가(Luke), 요한(John)  4대 복음이 이 땅의 사방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나?

 그밖에도 낙서에 가까운 부조들이 눈에 띈다. 인간, 동물, 십자가 등 다양한 형상을 보여준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다. 조지아 국민들이 정신적 고향으로 여긴다는 교회는 14세기 이후 한 번도 예배를 멈춘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선지 제약도 많았다. 민소매나 미니스커트, 반바지, 모자를 입거나 쓰지 못하는 것은 기본. 사진도 찍지 말란다. 인터넷에서 주워 모은 사진들로 내부를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내부 사진은 인터넷에서 얻어왔다). 동쪽 제대 앞에 있는 이코노스타시스(ikonostasis, ‘이콘을 거는 칸막이라는 뜻, 지성소와 회중석을 구분하는 칸막이로 여기에 이콘을 건다)가 눈에 띈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의 위쪽에 십자가를 들고 승천하는 예수를 하느님이 맞이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문에서도 가브리엘이 성모에게 예수를 가지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수태고지와 복음사가들이 예수의 생애와 말씀을 기록하는 장면들을 살펴볼 수 있다.

 성당의 돔. 화려하게 치장된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그림이나 장식이 전혀 없다. 돔은 열 개의 창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다섯 개는 벽으로 나머지 다섯 개는 유리창으로 되어 있다. 그 유리창을 통해 성당 안으로 빛이 들어오게 설계되었다.

 반면에 벽면은 성화들로 가득했다. 예수 그리스도, 성모자, 천사, 12사도 등등... 화풍이 같지 않은 것은 이들 성화의 만들어진 시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콘 앞에는 염원이 담긴 촛불이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성화 앞에서 십자 성호를 긋고 촛불을 밝히는 신자들도 눈에 띈다.

 밖으로 빠져나오니 또 다른 문이 보인다. 남쪽 출입문인 모양이다.

 암굴처럼 생긴 공간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이콘이 걸려 있었다. 이쯤에서 궁금증 하나. 교회 천정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디 있을까? 국가 재난 때 옮겨 온 보물들을 숨겨두던 비밀의 방이 교회 천정에 있다고 했는데...

 종탑은 교회 건물의 남쪽에 있다. 초기 교회의 부속 건물이나 본관보다는 약간 늦게 지어졌다고 한다. 종탑은 2층으로 되어 있다. 아래층은 사각형으로 문이 동쪽으로 나 있다. 위층은 6각형으로 6개의 창을 가지고 있다.

 민둥산의 꼭대기에 걸터앉은 교회는 시야를 막는 게 없다. 때문에 멈추는 곳마다 최고의 전망대가 된다.

 멍때리기 삼매경인 젊은이들이 부럽다. 그리고 하나라도 더 보고 싶어 한시도 멈추지 못하는 내 자신을 돌아본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흔적까지도 지워버리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내가 꿈꾸고 있는 세계일주도 하나의 집착일 수밖에 없겠다.

 이때 어렴풋이나마 카즈벡 산이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이게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카즈벡 산을 코카서스산맥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꼽고 있었다. 하나 더. 카즈베기는 평범한 사람을 사진작가로 만들어주는 곳이라고 했다. 카메라를 어디다 들이대도 작품이 된단다. 흔히 말하는 인생샷을 건져올 수 있는 곳이다. 스위스 알프스나 네팔 히말라야를 다녀온 사람들이 그 이상으로 꼽는 곳이 바로 카즈베기라면 대충 짐작이 갈지 모르겠다.

 교회 뜨락에는 아예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마을도 마을이지만 그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고산준봉들이 하얀 눈을 뒤집어쓴 채 멋진 풍경화 한 폭을 그려낸다.

 발아래로 카즈베기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정식 이름은 스테판 츠민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카즈베기로 더 익숙하다. 눈에 들어오는 마을은 제법 컸다. 맞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저 하나의 마을이던 곳이 이제는 게스트하우스와 호텔이 있고, 여름이면 버스를 타고 오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거대한 마을로 성장했단다. 관광객들에게는 트래킹과 산악자전거 타기를 위한 최고의 기지가 되어준다고 했다.

 1921년부터 2007년까지의 공식 지명이었던 카즈베기(Kazbegi)’는 이 지역 출신의 작가이자 농민가수였던 알렉산더 카즈베기(Alexander Kazbegi)’라는 원주민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했다. 마을에는 이 사람의 동상도 있단다. 현재 지명인 스테판 츠민다(Stepantsminda)’ 성스러운 스테판(Saint Stephan)’이라는 의미로 조지아정교회 수도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단다.

 집사람 눈높이에도 최고의 여행지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만세 삼창으로도 모자라 승리의 ‘V’자를 두 개나 더했다. 맞다. ‘카즈벡 산이 있는 북동부 코카서스 지역은 조지아 여행이 완성되는 곳이다. 만약 조지아에 왔다 가면서 카즈벡 산에 와보지 않으면 조지아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고 했다. 조지아인들은 유럽의 기원은 조지아다라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드는 것 중의 하나가 와인이 조지아에서 발원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그리스·로마 신화의 원천이 코카서스라는 것이다. 이곳 카즈벡 산은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묶여 있던 바고 그 산이다.



서해랑길 60코스(대천해수욕장  깊은골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4. 10. 12()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신흑동·남곡동·대천동 및 주교면·오천면 일원

여행코스 : 대천해변대천항대천천 노둣길대천방조제안산마을사당골토정묘역깊은골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7.2km, 실제는 사당골까지 14.63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0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다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3(전체 5)로 분류되나, 평지라서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들머리는 대천해수욕장(충남 보령시 신흑동)

서해안고속도로 대천 IC에서 내려와 36번 국도를 타고 대천해수욕장으로 들어오면 된다. 매년 열리는 보령 머드축제의 주 무대이자, 본격적인 휴가철에는 야간에도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즐기자 밤바다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패들보드, 수상 징검다리 등 다양한 미니게임이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단다.

 서해랑길(보령 60코스) 안내도는 머드광장의 바닷가 바다의 여인 조형물 옆에 세워져 있다.

 대천해수욕장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보령화력 입구(오천면 오포리)’까지 가는 17.2km짜리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대천해수욕장, 토정묘역 등이 꼽힌다. 하나 더, 물때를 못 맞춰 대천천의 노둣길을 못 건널 경우, ‘쇳개포구의 인도교까지 6km 이상을 더 걸어야만 한다.

 10 : 13. 해수욕장과 상가 사이로 난 도로(해수욕장10)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바닷가 해송 숲을 따라갈 수도 있다. 조금 구불대기는 해도, 하트모양의 예쁜 통로 등 눈에 담을만한 조형물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어 걷기 여행자들에게 더 선호되는 코스다. 솔숲 사이로 내다보이는 서해바다는 덤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삽시도(揷矢島)도 눈에 담을 수 있다. 화살()을 꽂아놓은() 활처럼 생겼다는 섬이다.

 10 : 22. 잠시 후 분수광장에 이른다. 노을광장, 머드광장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의 핵심을 이루는 광장 중 하나로 다양한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어 개성 넘치는 사진을 찍기에 딱 좋다. 여름철에는 음악분수가 운영되는데, 저녁이면 현란한 조명까지 가미된단다.

 로봇을 닮은 우체동은 커도 너무 크다. 간절곶의 우체통보다도 더 크다나? ‘감성이란 이름표까지 달았는데, 거짓말 좀 보태 원룸으로 개조하면 사람이 살아갈 수도 있겠다.

 10 : 24. 집트랙(Zip Trek) 탑승장. 바다로 돌진하는 듯한 오싹한 설렘을 선사해주는 집트랙은 액티비티 스포츠. 하지만 갈 길 바쁜 걷기 여행자들은 그저 눈으로 즐길 수밖에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트레킹을 마치려면 말이다.

 서해랑길은 바닷가를 따라 계속 직진한다. 스카이바이크 궤도와 함께 가는 멋진 구간이다. 대천해수욕장과 대천항을 오가는 전국 최초의 해상 레일 바이크로, 수면에서 8-15m 높이에 선로를 달아 바닷길을 달리게 했다.

 스카이 레일 위를 씽씽 달려가는 바이크, 40분간 2.3km를 왕복 운행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쌍쌍이다. 고로 스카이바이크는 연인끼리 즐기기에 딱 좋은 레저이다.

 집트랙은 왜 싱글을 고집했을까? 커플로 타는 곳도 있던데 말이다. 하나 더. 요 아래로는 보령 해저터널이 지나간다. 원산도까지 6,927m로 우리나라에서 가징 긴 해저터널이다. 원산도에서 안면도까지는 다리로 연결된다.

 아무튼 난 집트랙 탑승장에서 바닷가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천항로를 따르는 지름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아니 고갯마루에 있는 김성우장군전첩사적비(金成雨將軍 戰捷史蹟碑)’를 만나고 싶었다는 것이 더 옳겠다.

 10 : 27. 김성우(金成雨, 1327~1392)는 고려 말 전라우도 도만호로 보령지역을 황폐화시킨 왜구를 격퇴한 무장이다.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충청남도 보령에 사패지(賜牌地)를 하사 받아 광산김씨 입향 시조가 되었다. 이후 초토영전사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보령으로 돌아와 살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정에서 부르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거절하고 자결하였다. 김성우를 도운 신마가 나온 옥마봉, 보검이 나온 비도, 김성우의 군사가 들어온 군입포, 병사를 매복시킨 매복 등 김성우의 행적과 관련된 지명들이 아직까지 보령 곳곳에 남아있다. 보령을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대천항로는 고개를 넘어 대천항으로 이어준다. 곧장 직진하면 유람선 선착장에 이르게 된다.

 10 : 34. 꽃게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사거리(이정표 : 종점 15.6km/ 시점 1.6km)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대천항4을 따라 동진한다.

 도중에 대천항연안여객선터미널 대천항을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하도 여러 번 들렀던 곳인지라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10 : 52. 강당마을. 신흑동(新黑洞) 최북단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앞바다에 조개··소라 등 해산물이 풍부하여 옛날부터 군마루·절굴·거먹개 사람들이 넘어와 해산물을 잡아가고는 했단다. 현재도 김 양식 등 수산업에 종사하는 집이 많다고 한다.

 바닷가 외딴 마을은 현재 통나무 펜션단지로 변신해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지어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단다. 해안도로변에 위치해 아름다운 바다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계속해서 해안로를 따른다. 아니 도로변을 따라 내놓은 자전거길을 따라간다.

 이때 대천천의 하구역 풍경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 너머로 지금은 육지로 변해버린 송도(松島)’ 보령화력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11 : 06. 같은 신흑동인 군헌(軍軒)마을에는 어촌유치(귀어) 체험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농어촌 공동화(空洞化)’가 사회문제가 되어버린 요즘. ()라고 해도 바닷가 외진 마을은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추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체험장 옆 데크 전망대. 망원경 말고도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한 줄기 쇠줄로 얼굴을 그린 조형물도 배치했다. 덕분에 밋밋할 수도 있는 해변 길이 감상의 포인트가 됐다. 분명 인위(人爲)인데도 배경으로 삼은 자연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대천방조제와 보령화력발전소는 물론이고 죽도와 송도, 원산도 등 주변의 섬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눈만 좀 크게 뜨면 원산·안면대교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대천천의 하구역이 놓여있다. 대천방조제가 서해안고속도로의 대천2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탐방로는 이제 대천천(大川川)’을 거슬러 올라간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의 거대한 교각을 앞에 두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넝쿨장미로 치장된 터널을 지나기도 한다. 꽃이라도 필라치면 꽃 대궐에서 노니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겠다.

 오월의 장미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10. 장미가 있을 리가 없다. 대신 송엽국(松葉菊)’이 만발해 있었다. 솔잎과 닮은 잎에 국화를 닮은 꽃이 핀다는 상록 식물이다. 잎 모양과 무리 지어 피는 모습이 채송화와 비슷해 사철채송화라고도 한다.

 11 : 20. ‘밤골마을 해변은 해수욕장이 부럽지 않은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보령지역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해안 곳곳에 사빈이 잘 발달되어있는 현상 말이다. 그 대부분은 해수욕장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은 대천해수욕장과 가깝다보니 그냥 방치하고 있지 않나 싶다.

 남곡동(藍谷洞)’에 속한 자연부락인 밤골에는 리조트와 펜션, 카페, 음식점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유원지 수준이라고나 할까? 하긴 뻥 뚫린 시야로도 모자라 새하얀 모래사장까지 끼고 있으니 어찌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동화나라에서나 볼 법한 집도 눈에 띈다. 하지만 스머프가 이사를 가버렸는지 새로운 주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골마을 앞바다. 해망산 갯벌도 일반인에게는 금단의 땅인 모양이다. 어촌계에서 바지락 양식을 하고 있으니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단다. 저 벤치에 앉아 조개 캐는 주민들의 뒷모습이나 구경하다 가라는 모양이다.

 11 : 30  11 : 40. 이곳에는 자전거 라이더들을 위한 휴게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덕분에 벤치에 않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또 다른 스머프네 집. 노을이 곱다고 알려진 ‘357카페라는데, 이곳 역시 영업은 하고 있지 않는 듯 했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11 : 46. 내항동(內項洞)의 왕대골. 왕대산(王臺山, 122.7m) 자락의 마을인데, ‘밤골처럼 리조트와 음식점이 여럿 들어서 있다. 숫자는 작아도 규모는 밤골보다 훨씬 더 크다. ! 왕대산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천년사직을 넘기고 돌아오다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이때 느닷없는 간판 하나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のや라는 일본어 간판만 내걸려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저걸 토모노야로 읽고 있었다. ‘친구며···’라는 뜻이라나? 건물의 외벽도 검정과 흰색이 대비되며 일본 전통 건축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일본인들의 전용 호텔인가? 아니면 일본인이 운영하는 숙소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썩 흔치않은 풍경인데다, 얼마 전 광복절날 일장기를 내걸었던 지역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기에 심사는 편치 않았다.

 11 : 52. 서해랑길은 서해안고속도로의 대천2 앞에서 일단 멈춘다. 그리고는 잠수교(‘노둣길이라 부르기도 한다)를 이용해 대천천을 건넌다. 초입에 이정표(종점 9.8km/ 시점 7.4km)가 세워져 있다.

 초입에 만조(滿潮) 때는 우회도로를 이용하라는 안내판이 걸려있었다. 대천천을 따라 대천3동까지 올라가 대천천 인도교를 건넌 다음, ‘대천1에서 대천천의 제방을 걸어 저 건너(잠수교 북단)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6.1km나 더 걸어야 한다니 서해랑길 60코스는 때를 잘 맞추어 걷는 게 필수라 하겠다.

 잠수교는 영농철 농기계의 통행을 위해 개설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모든 차량의 통행을 금지한다는 경고판까지 입구에 붙여놓았다. 하지만 많은 차량들이 잠수교를 오가고 있었다. 덕분에 차량을 만날 때마다 다리 난간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켜 설 수밖에 없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 따깨비는 이 다리가 심심찮게 바닷물에 잠긴다는 증거다.

 ! 소라가 가득담긴 그물망이 바닷물에 잠겨있는 게 아닌가. 마침맞게 주위에는 사람도 없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했는데, 저걸 가져다가 산악회에 부탁해 삶아달라고 해?

 대천천 하구역(河口域). ‘대천천(大川川)’은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에서 시작하여 궁촌동을 거쳐 서해로 흘러드는 길이 13.8km의 지방하천이다. 보령지역의 옛 이름 중 하나인 큰내(한내)’를 한자로 고치면서 대천천이 됐다. 하천은 크게 2개의 지류가 있는데, 한 지류는 오서산(烏棲山) 동남쪽에서 발원하고, 다른 한 지류는 성주산(聖住山) 줄기인 성태산(星台山)과 백월산(白月山)에서 발원하여 흐른다.

 뒤돌아 본 잠수교. 그 뒤에는 아까 본 왕대산 말고도 해망산(海望山, 114.3m)’이 있다. 고려 말, 도만호(都萬戶) 김성우 장군이 병사로 하여금 왜구의 동태를 감시하게 했다는 산이다.

 11 : 59. 잠수교 북단(이정표 : 종점까지 9.4km)에 올라선 다음부터는 대천방조제의 제방을 따라간다. 둑 위에 우레탄을 깐 탐방로를 곱게 내놓았다. 참고로 대천1동에서 시작되는 대천방조제는 대천2동과 주교면의 주교리(舟橋里) 및 은포리(隱浦里)를 거쳐 같은 주교면의 송학리(松鶴里)까지 이어진다. 길이 6.2km 1952년에 착공하여 1960년에 준공되었다.

 둑길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왼쪽으로는 대천천의 하구역이 드넓게 펼쳐진다. 한껏 등치를 부풀린 물줄기를 서해바다가 집어삼켜버리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제방에 쌓아놓은 저 돌탑들은 대체 누구의 작품일까? 50m쯤 되는 간격으로 줄지어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공들여 쌓은 흔적이 역력했다.

 오른쪽으로는 봉당천 신대천 하구를 막아 조성한 거대한 간척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 뒤에서 솟아오른 봉대산(烽臺山, 233.3m)’은 동쪽으로 뻗어 태봉산(240m)’을 솟구친다. 군사시설인 봉수대 및 아현산성(我峴山城)을 각각 품고 있는 산들이다.

 12 : 16. 방파제가 90도에 가깝게 휜다. 대천1동과 송학리를 잇는 대천방조제는 이렇듯 중간쯤에서 크게 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농토를 만들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의 결과일 것이다. 하나 더. ‘대천동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주교면(보령시)’에 바톤을 넘겨준다.

 이곳은 대천천의 하구역이 거침없이 폭을 넓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륙을 휘젓고 내려온 냇물은 이곳에서 드넓은 바다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저 강태공들은 대체 뭘 잡고 있을까? 낚싯대는 망둥어 낚기에도 부담스러워 보이는데...

 이 뭣꼬?’ 스님의 화두가 아니라 도로변에 적치되어 있는 저 통들의 정체가 궁금해서 게시해봤다.

 코너를 돌아서자 해안도로에 꽤 많은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다. 화장실까지 갖춘 공영주차장이 마련되어있는가 하면 둑에는 무선방송장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 주교마을(허락 없이 갯벌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판을 세워놓았다)에서 뭔가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도로변에 조성된 공영주차장. 차선을 하나 더 만든 다음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을 만들어놓았다.

 반대편에는 바다를 향해 길게 줄을 매어놓았다. ‘해루질 나가는 누군가를 위한 안전시설이다. 둑 위의 방송장비 또한 저들을 위해 설치했다. 조개채취 중 방향을 잃는 갯벌 고립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하기 때문이란다.

 갯벌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조개를 캐고 있었다. ‘해루질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야외활동 중 하나로 꼽힌다. 거기다 조개까지 얻을 수 있으니 숫제 꿩 먹고 알 먹고이다. 하지만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물때와 지형을 미리 확인하고 안전장비를 착용하는 등 안전수칙을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방조제는 이후로도 꽤 오래 이어진다. 하지만 하늘거리는 억새꽃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12 : 42. 대천방조제는 주교배수갑문에서 끝을 맺는다. 둑길에서 내려선 탐방로는 대천방조제2를 건너 송학리로 들어간다.

 12 : 45. 다리를 건너 현장마을(버스정류장의 이름표)’로 올라선다. 송학리(3)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바지락마을이란다. 아니 황금이란 최상의 서술어까지 덧붙였다. 대체 바지락이 얼마나 많이 널려있기에 저런 표현까지 쓸 수 있을까?

 송학항도 이제껏 보아온 다른 포구들처럼 텅 비어있었다. 안내판에 그려진 배들은 마을 어디쯤에선가 출어의 날만 기다리고 있겠지? 경운기 꼬랑지에 매달려서...

 선착장 옆으로 나있는 갯길이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머드 맥스라고 일컬어지는 경운기의 행렬이 펼쳐지는 곳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버스정류장에서 그 사진을 볼 수 있다.

 계속해서 대천방조제로를 따라간다. 방조제의 둑길 구간이 끝났는데도 도로는 아직까지 같은 이름표를 달고 있다. 아무튼 좁고 긴 백사장을 옆구리에 끼고 가는 멋진 구간이다.

 이때 죽도(竹島)’가 눈에 들어온다. 시쳇말로 주먹만큼이나 작은 섬인데, 옛날엔 저 섬이 대나무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12 : 53. ‘송학2에 이른다. 마을 표지석은 이곳을 안산고내라고 적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밖산고내가 나온단다. ‘고내라는 마을이 안산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누어져 있는 모양이다.

 이 마을 갯벌도 귀어·학습 체험장을 열고 있었다. 허락받지 않은 사람들이 갯벌에 들어갈 수 없음은 물론이다. ! 이곳 송학리는 조선시대부터 바지락 양식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지금도 매년 5천 톤씩이나 생산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만큼이나 뛰어난 양식기술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품질 좋은 바지락을 시중에 내놓고 있단다.

 버스정류장을 치장하고 있는 사진이 눈길을 끈다. 한국관광공사의 홍보 영상 머드 맥스(Mad Max)’를 연상시키는 갯벌을 질주하는 경운기들의 행렬이다. 사진은 주민들이 갯벌에서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을 담았는데, 이게 광활한 갯벌과 어우러지며 자못 비장감까지 불러일으킨다.

 13 : 03. 잠시 후 도착한 ‘(안산·고내)버스정류장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서해랑길이 도로를 벗어나 마을길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마을안길은 누빈 다음 안산마을에서 다시 도로(대천방조제로)로 나온다. 오가는 자동차를 피할만한 공간(갓길)이 없는 협소한 도로를 피해 일부러 에둘러놓지 않았나 싶다.

 13 : 06  13 : 19. 우리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한 채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그 위험에 대한 보상은 컸다. ‘산고래 하늘공원이라는 멋진 공간을 만났기 때문이다. ‘산고내(散古乃)’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뼈를 상했을 때 약재로 쓰는 돌(산골)이 채취된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엉덩이 대기가 부끄러울 만큼 예쁜 의자. 공원은 정자에 벤치는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우린 10분 정도를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조망도 자랑거리라고 했다. 맑은 날에는 효자도, 삽시도, 원산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단다. 그래선지 바다 쪽으로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난간에 서자 죽도가 성큼 다가온다. 고려청자가 발견된 해저유물 매장해역(사적 제321)’의 중심에 놓여있는 섬이다.

 1983년경 고려청자 등의 유물이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1987년 수중발굴조사를 진행 32점의 상감청자를 비롯한 100여 점의 청자류를 수습했다. 13세기 또는 14세기, 전남 강진(대구면)이나 전북 부안(보안면)의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배로 운반하던 도중 이 부근에서 배가 난파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보령발전본부를 당겨봤다. 보령지역의 발전소에서 전국전기생산량의 7.3%를 만들어내고 있단다.

 13 : 27.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오가는 차량을 주의해가며 10분 정도를 걸어 안산마을에 이른다. 그리고 마을안길로 에돌아 온 서해랑길을 다시 만났다.

 13 : 30. 잠시 후, 서해랑길이 또 다시 도로(대천방조제로)와 헤어지란다. 이번에도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예쁜 풍경을 보여주는 기존의 탐방로를 따를 것을 권한다.

 탐방로는 해안길을 따라간다. 오른편의 농경지가 갯벌보다 낮으니 방조제의 둑길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해안길 구간은 잠깐이면 끝난다. 하지만 보여주는 풍광만큼은 만만치 않았다. 고운 모래사장이 발아래 놓여있고, 그 너머로는 검붉은 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13 : 33. 잠시 후, 탐방로는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파고든다. 또 다른 마을을 에돌아가는 길이다.

 볼거리도 그렇다고 이야깃거리도 없는 마을길이 싫은 우리는 논두렁을 이용해 자 형의 구간을 단축하기도 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송학천을 가로막은 방조제가 나타난다. 이 둑을 쌓음으로써 안쪽에 상당히 너른 간척지가 만들어졌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오던 고정리 주민들에게 넉넉함을 가져다 준 풍요의 상징이다.

 송학천 배수갑문의 밖. 즉 송학천의 하구역이었음직 한 갯벌에는 작은 포구가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충남의 바닷가에서 만났던 여느 포구들과는 달리 꽤 많은 배들이 갯벌에 기대어 쉬고 있다. 배를 올려둘만 한 공터가 없었나?

 13 : 40. 제방 끝에서 610번 지방도를 만났다. ‘토정로라는 이름이 토정 이지함 선생의 고향으로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사당골(고정2)’이 반긴다. 법정 동리인 고정리(高亭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사당골이란 한산 이씨 사당(祠堂)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래선지 마을 입구에 찬성공파(贊成公派)의 사당(高巒齋) 말고도 조상의 묘갈(墓碣)과 신도비(神道碑)가 즐비했다.

 13 : 46. ‘신보령발전본부 입구(화력발전소 폐기물처리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松島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초입에 위치한 보령시민체육공원 주차장에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종점인 깊은골에 주차 공간(점심상을 차릴 수 있는)이 없는 탓에 이곳에서 식사를 한 다음 잔여 구간은 버스로 이동하겠단다.

 종점으로 가는 도중 들른 토정선생 묘역’. 국수봉(187m)의 남쪽 산자락에 들어선 묘역에는 선생과 형제, ·비속 등 14기의 묘가 모셔져 있다. 선생의 학문과 전해지는 기이한 일화들로 인해 명당자리로 인식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단다.

 선생은 생전에 미리 를 정해두었다고 한다. 모친상을 당해 형제분들과 함께 선영의 묘를 이장할 자리를 찾다가 이곳이 명당임을 알았다나? ‘토정비결(土亭秘訣)’까지 지은 현인이니 어련하겠는가.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정초가 되면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낡은 토정비결을 펼쳐들고 저마다의 괘를 뽑아보면서 한 해의 길흉을 점쳤다. 누군가 좋은 점괘가 나오면 함께 기뻐했고 나쁜 점괘가 나오면 서로 격려하면서 새해의 첫날을 보냈다. 그 시절 토정비결은 힘겹게 살아가던 서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던 비밀의 열쇠였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조선중기 학자로 천문·지리·의약 등에 능통하였으며,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평생을 방랑하다 1573(선조6) 56세에 도덕과 학문이 뛰어난 선비로 추천되어 포천현감으로 백성의 가난해결을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지어 빈민구제에 힘썼다고 한다. 1713(숙종39)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한 곳에 얽매이거나 구속되는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남긴 대인설에 걸맞는 삶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안으로는 똑똑하고 강하기를, 밖으로는 귀하기를 바란다.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고, 욕심내지 않는 것보다 부유한 것이 없으며,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은 없고, 알지 못하는 것보다 똑똑한 것은 없다. 알지 못하면서 똑똑하고, 다투지 않으면서 강하고, 욕심내지 않으면서 부유하고, 벼슬하지 않으면서 존귀한 것은 실로 대인만이 할 수 있다>

 넓적바위(簿石). 연당자락 바닷가에 놓여 솔섬목을 오가던 사람들의 쉼터로 사용되던 바위였으나, 토정선생이 타고 다니던 돌배라는 설이 있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돌의 존재로 인해 항해의 영웅이라는 설화 속 선생의 또 다른 인물상이 생겨났다나?

 고개를 넘어온 탐방로는 보령화력발전소 입구에 있는 깊은골 버스정류장 앞에서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보령 61코스) 안내판은 버스정류장 곁에 세워져있다. 오늘은 본의 아니게 종점에서 1.7km 정도 못 미친 사당골에서 트레킹을 마쳤다. 그래선지 gpx트랙에 14.63km 3시간 20분에 걸었다고 나타난다.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하루 세끼를 차려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야외활동까지 함께 해주는 집사람. 이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현대는 무목적·무감동·무책임·무관심이라는 ‘4()’ 병이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건 무관심일 것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고 했다. 아름다움의 반대도 추함이 아닌 무관심이란다. 그러니 나에게 집사랑은 사랑이자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안동선비순례길 5코스(왕모산성길)

 

여행일 : ‘24. 10. 5()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가송마을 버스정류장고산정맹개마을백운지단천교(실제 출발지)항골 입구칼선대왕모당원천교(거리/시간 : 12km, 실제는 4.95km 2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가송마을 버스정류장(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로 영주까지 옵니다. 가흥교차로에서 36번 국도(봉화방면으로 19km), 금봉교차로에서 918번 지방도(청량산방면으로 15km), 도천삼거리에서 35번 국도로 옮겨 11km쯤 내려오면 가송리(佳松里)‘에 이르게 됩니다.

 고산정에서 낙동강을 따라 내살미 마을까지 내려가는 12km짜리 여정이랍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 낙동강은 왕모산을 넘지 못했고, 강을 건너지 못한 주변 산줄기들은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면서 맹개마을·단사마을 등 곳곳에 기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왕모산성길은 이런 기이한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걷는 여정이랍니다.

 차에서 내리자 강 건너에 위치한 고산정(孤山亭)’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옵니다.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의 단애 아래에 터를 잡았습니다. ‘금남수처럼 유유자적하기에 딱 좋은 자리라고나 할까요? 저곳은 최고 시청률 18.1%를 기록한 이병헌·김태리 주연의 24부작 tvN드라마 미스터션샤인(2018)’의 촬영지이기도 하답니다. 주인공 애신(김태리 분)과 유진(이병헌 분)이 배를 타고 오가던 아름다운 나루터 장면이 바로 고산정의 전경이랍니다.

 고산정은 정유재란 때 안동 수성장(守城將)으로 활약하여 좌승지에 증직된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지은 정자입니다. 금난수는 이황(李滉)의 제자로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는 데 힘썼으며, 1561(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봉화현감 등을 지냈습니다. 35세 때. 당시 선성현(宣城縣, 예안현의 별칭) 제일의 명승이던 가송협(佳松峽)에 고산정을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한 채 유유자적하였다는 선비입니다.

 삼 칸 겹집의 팔작지붕인데 3m 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자연석을 가공 없이 주춧돌로 사용)를 놓고 기둥을 세웠습니다. 조선시대 정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더군요.

 낙동강의 상류인 가송협의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고산(孤山)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룹니다. 그 아름다움에 푹 빠진 퇴계선생이 문인들과 함께 여러 차례 찾아와 영시유상(詠詩遊賞)을 즐겼다더군요.

 이 일대는 도산구곡  8곡인 고산곡(孤山曲)입니다. 협곡 모양새를 보여 가송협(佳松峽)’으로도 불린답니다. 고산정 주인장 금난수의 봉화금씨(奉化琴氏)’ 세거지인데, 퇴계의 후손인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 1755-1831) 도산구곡가에서 <팔곡이라 옥거울 같은 물가에 홀로 선 산(八曲山孤玉鏡開)/ 또렷또렷한 심법이 이 물가에 맴도는구나(惺惺心法此沿洄)>라며 그 아름다움을 읊었습니다.

 5코스(왕모산성길) 고산정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대형버스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마을 앞 버스정류장에서 종암종택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잠수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하나 더. 우리 부부는 다리를 건너는 대신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이육사문학관으로 이동합니다. 2주 전의 4코스(퇴계예던길)에 불참해서 3코스(청포도길)의 후반부를 못 걸었었거든요, 그 구간을 마치면 5코스의 중간쯤인 단천교에 이르기 때문에 5코스의 전반부는 답사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별 수 없이 몽중루 작가님과 허총무님 등 다른 도반들의 사진과 얘기를 종합해 빠뜨린 구간을 완성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가송리(佳松里)의 또 다른 자연부락. 이곳에서 왼쪽으로 400m쯤 올라가면 5코스(왕모산성길)‘가 시작되는 고산정입니다. 하지만 5코스의 잔여 구간이 오른쪽으로 나있으니 고산정을 둘러본 다음 되돌아와야 하겠지요?

 이후부터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갑니다. 고산구곡 중 고산곡을 이웃하며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구간이지요. 그런 길을 400m남짓 걸으면 월명정이란 정자가 나옵니다. 2020년에 지은 정자인데, 월명담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곳이라는 뜻이겠지요.

 이정표(칼선대 9.7km/ 고산정 0.8km)가 가리키는 칼선대 방향, 그러니까 낙동강의 강변으로 내려섭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深淵), 월명담(또는 월명소)은 그 푸른 색깔에서 조차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월명담 뒤의 저 절벽으로 길이 나있다는 점입니다.

 월명담(月明潭). 강물이 산줄기에 막혀 자 형태로 돌면서 벼랑 아래에 깊은 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보름달이 밝게 비춘다고 해서 월명담·월명소·월명당이라 했다나요? 용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가뭄이 들면 고을 수령이 기우제를 올렸다고 전해옵니다.

 월명담은 낙동강 상류의 명승 중 하나로 꼽히는데, 퇴계는 달빛 쏟아지는 월명담을 비가 오게 하는 연못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윽한 늪이 있는 골짜기는 수려하고 맑은데(窈然潭洞秀而淸)/ 음침한 그 속엔 나무와 돌로 만든 진혼비가 있다네(陰嘼中藏木石靈)/ 열흘 동안 수심 겨운 여름 장마가 그치고 말끔히 개고(十日愁霖今可霽)/ 석양빛을 안고 집에 돌아와 누우니 달빛이 그윽하다네(抱珠歸臥月冥冥)>

 길은 강가 바위절벽을 따라 나있답니다. 바위절벽인데도 길을 낼만한 공간은 있었나 봅니다. 그렇다고 안전까지 확보할 수는 없었겠지요. 위태위태한 곳이 하도 많아 바윗길이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니까요. 이런 길을 벼룻길이라고 한다나요? 아래가 강가나 바닷가로 통하는 벼랑길을 그렇게 부른다고 하네요. 아무튼 안전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지만 눈의 호사 또한 만만찮은 구간이랍니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일대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는 지형입니다. 때문에 물이 휘돌아나가는 곳마다 수십·수백 길의 단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길을 내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강안(江岸)의 바위절벽에 저렇게 벼룻길을 거쳐 놓았답니다. 치솟은 바위 벼랑을 에돌아가는 길로 딱 한사람이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랍니다.

 이즈음 벽력암(霹靂巖)과 학소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했습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편 절벽이 학소대, 그리고 왼쪽은 벽력암인데 저곳에는 전망대가 있답니다.

 벼룻길이 끝나면 다시 위로 올라가야만 한답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5코스 최고의 전망대 중 하나인 벽력암 전망대를 만나기 위한 수고로움이니 참아야하겠지요?

 벼룻길은 벽력암 위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에서 화룡점점(畵龍點睛)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가 하면, 거기에 강 건너 농암종택이 더해진다고 하네요. 농암종택은 원래 분천마을에 있었습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분천마을이 수몰되면서 저곳으로 옮겨졌다는군요. 그때 다른 곳에 있던 사당과 긍구당(肯構堂)도 함께 옮겨왔으며, 2007년에는 분강서원(汾江書院)도 재이건되었다고 하네요.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었음은 물론이지요.

 농암(聾巖)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호입니다. 연산군 시절 귀양을 갔다가 처형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죽음을 면했고, 중종반정으로 복직한 이후 주로 지방 수령으로 관료생활을 했습니다. 가끔은 중앙보직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지방 수령으로 봉직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는데, 중종 임금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탔는데 고작 화분(花盆) 몇 개와 바둑판 하나가 전부였다는 일화는 나 같은 공직자(은퇴했지만)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농암종택(聾巖宗宅)’. 안채·사랑채·대문채·별채·긍구당·명농당·사당 등 농암선생의 명성만큼이나 거대한 등치를 자랑합니다. 그중에서도 별당인 긍구당(肯構堂)’이 눈길을 끄는군요. 농암이 서경의 한 구절에서 취해서 당호를 지었는데,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훌륭한 업적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오래도록 이어 받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1542년 공직에서 물러날 때 경복궁과 한강의 제천정에서 전별연을 열어주었을 정도로 존경과 신망을 받던 자신을 닮으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이었다니까요.

 분강서원(汾江書院). 1699년에 후손과 사림이 농암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2007년 현재 위치로 이건했는데, 강당(흥교당)과 동·서재 외에도 한속정사의 안채와 바깥채, 농암의 위패를 모신 사당(숭덕사) 등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있습니다. 서원의 왼편에 있는 작은 건물은 농암 신도비입니다. 농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종 20(1566)에 신남리의 농암 묘소 앞에 세웠는데, 2006년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고 합니다. 신도비란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으로 무덤 앞에 있는 게 보통입니다.

 맨 왼쪽에는 애일당(愛日堂)’이 있습니다. 2코스(도산서원길) 답사 때 지도만 보고 잘못 찾아갔던 그 문화재입니다. 아무튼 농암은 1512년 부모를 위해 저 별당을 지었습니다. 분강마을의 집에서 400m쯤 떨어진 곳에 귀먹바위가 있었는데 농암이 이름을 한자로 옮겨 자신의 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계신 나날을 아낀다는 의미의 애일당을 지었습니다. 농암은 1533년에 당시 94세였던 부친을 포함해 9명의 노인을 모시고 저곳에서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를 열었습니다. 농암 자신이 67세의 노인이었는데 더 연로한 분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때때옷을 입고 춤을 췄다고 합니다.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것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강각(江閣)’인데 설명은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벽력암 전망대에서 내려선 길은 맹개마을로 이어집니다. 거칠게 내려오던 강줄기가 학소대를 돌아 완만해지면서 흙을 실어 놓는 곳에 맹개마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이 강 쪽으로 툭 밀려 나온 안쪽은 흡사 육지 속의 섬과도 같습니다. 그곳에 가족펜션인 소목화당(小木花堂)’이 있답니다. 휘돌아가는 낙동강 물길의 안쪽 예쁜 펜션이자, 주인 부부가 공들여 술을 담는 곳이랍니다. ‘진맥소주라는 브랜드의 전통주가 이곳에서 나온다더군요. ! gpx트랙을 살펴보니 월명담에서 맹개마을까지의 거리가 2.5km로 나타나고 있었답니다.

 술도가’. 주인장이 직접 재배한 100% 유기농 통밀로 소주를 만든다고 하네요. 자연 숙성실인 저 토굴로 들어가면 특유의 술 내음과 함께 오크통, 옹기 등에 담긴 술들이 한 눈 가득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진맥(眞麥)’은 밀의 옛말이랍니다. 그러니 진맥소주 맹개술도가에서 만든 소주의 브랜드이자, 유기농 밀로 만든 증류식 소주라는 자랑이기도 합니다. 가장 오래된 조리서로 알려진 수운잡방에 술 빚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 전통이 깊다고 합니다. 53도짜리가 자랑거린데, 미국 샌프란시스코 세계 증류주 대회에서 더블골드를 획득했을 정도라는군요.

 강 건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학소대(鶴巢臺)’라고 합니다. 건지산(577m)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로, 물길이 크게 휘어지는 바깥에 수직의 암벽으로 솟아있습니다. 예로부터 천연기념물인 오학(烏鶴. 먹황새)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살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가로 줄무늬 퇴적층이 선명한 절벽에 학까지 날아들었으니 학소대라는 이름과 꼭 어울립니다.

 경암(景巖). 퇴계는 학소대와 맹개마을 사이에 우뚝 솟은 바위를 경암이라 부르면서 버릇대로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합니다. 거센 물결 속에서도 천년 동안 변함없는 바위를 보면서 말이지요. <격한 물살 천년인들 다할 날 있으련만(激水千年詎有窮)/ 물살 가운데 우뚝 서서 기세를 다투누나(中流屹屹勢爭雄)/ 인생의 발자취란 부평초 줄기 같은지라(人生蹤跡如浮梗)/ 그 누군들 여기 서서 버틸 수 있으랴(立脚誰能似此中)>

 경암은 위가 상처럼 네모지게 평평한 바위입니다. 바위 주위로는 옥색 강물이 흐릅니다. 하지만 몽중루 작가님의 성에는 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특이할 게 없는 외모에 왜소하기까지 해서 퇴계선생님의 풍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맹개마을은 육지 속의 섬 같은 오지입니다. 산태극수태극의 지형이 마을 양옆을 수백 길 단애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농암종가에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네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소목화당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면 차고를 올려 튜닝한 SUV를 끌고 나오거나 트랙터에 손님을 실어 나른답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유인촌장관이 타고 있는 모습도 얼핏 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마저도 안 되면 배로 강을 건너게 해준답니다. 하나 더. 우리 도반(道伴)들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벼룻길을 통해 들어갈 수도 있기는 하답니다.

 맹개마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답니다. 늦은 여름에서 초가을이 특히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마을이 온통 매밀 밭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때쯤이면 하얀 메밀꽃이 소복이 피어나기 때문이랍니다. 그게 세외선경을 보는 듯 하다나? 맹개마을에서는 11월에 밀을 심어 이듬해 7월 수확하고, 밀을 수확한 땅에 메밀을 심어 가을에 수확하고 있다더군요.

 이렇게 고운 곳을 사람들이 그냥 놓아둘 리가 없습니다. 숙박예약이 힘들 정도로 인기랍니다. 하긴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이병헌과 김태리, 예능 인더숲의 세븐틴, 아마존TV ‘버터플라이의 대니얼 대 킴 등도 촬영차 찾았다가 한 눈에 반했다는데 어련하겠습니까.

 백운지로 넘어가는 길도 만만치가 않았던 모양이더군요. 끝없이 이어지는 통나무계단이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확 질려버립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요렇게 위험스런 벼랑길도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농암종택을 통해 맹개마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산자락을 빠져나온 길은 자연스럽게 백운지(白雲池)’로 이어집니다. 맹개마을에서 1.6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또 다른 오지마을이지요. 이곳은 몽중루님의 표현을 잠시 빌리겠습니다. ‘청량산을 내린 낙동강이 도산(陶山)에 이르러 큰 물굽이로 휘돌며 펼치는 작은 들녘 마을이라네요. 제방 따라 늘어선 대추와 밤나무 밭엔 붉은 대추와 알밤들이 툭툭대고, 모래땅 넓은 무밭에는 회전식 스프링클러가 돌며 연신 물을 뿌리고 있더라는 군요.

 백운지의 옛 이름은 백운동(白雲洞). 흰 구름이 넘나들며 청산과 녹수까지 세속의 기운을 넘어서버리게 만든다는 곳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흰 구름 대신 무의 푸른 잎으로 뒤덮여있습니다. <청산과 녹수는 이미 세속의 기운을 넘어섰고(靑山綠水已超氛)/ 그 사이로 희고도 흰 구름이 또 다시 밀려오네(更著中間白白雲)/ 고향의 소리 씻어내고 타고난 성품으로 돌아 가렸더니(爲洗鄕音還本色)/ 지령이 그 뜻을 알고 흔쾌히 허용하더라(地靈應許我知君)>

 백운지에서 1.5km쯤 걸어 나오면 단천교에 이릅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단사와 백운지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제가 5코스의 출발지로 삼은 지점이지요. 그래서 이후부터는 제 사진과 느낌, 기억으로 글을 적어가겠습니다.

 12 : 02. ‘단천교를 건너면서 ‘5코스(왕모산성길)’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단천교 앞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다리를 건너면 ‘5코스(왕모산성길)’, 즉 공민왕 어머니가 피신했다는 왕모산성으로 가는 길로 연결되고, 왼쪽은 4코스(퇴계예던길)로 퇴계가 13세 때부터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에게 학문을 배우러 청량산으로 다니던 길입니다.

 퇴계 오솔길은 예던길이라고도 하는데, ‘()’란 신발과 지팡이를 끌며 다니던 곳이란 뜻이라 하네요. 퇴계가 청량산에 가던 낙동강변의 길이기도 한데, ‘산태극수태극이란 말처럼 산이 굽이치는 형세에 따라 물도 S자로 굽이친다고 하네요.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학소대·월명담·고산정 등 수려한 풍경이 퇴계의 그림 속(畵圖中)’이란 표현처럼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한다고 알려집니다. 아쉽게도 저는 그런 풍경을 가슴은커녕 눈에조차 담지를 못했네요. 언젠가 다시 한 번 찾아와야 하는 이유이지요.

 다리를 건너다 바라본 상류쪽 풍경입니다. 백운지 근처이니 저 어디쯤에 미천장담(彌川長潭)’이 있을 것입니다. 고산을 지난 낙동강이 S자를 그리며 돌아가는 곳에 만들어진 깊은 못을 말하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험하고 물이 깊어 물고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퇴계가 어린 시절 낚시하던 때를 떠올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낚시하던 때를 돌이켜 보니(長憶童時釣此間)/ 삼십년 세월동안 벼슬 때를 묻히며 살았네 그려(卅年風月負塵寰)/ 이제 돌아와 보니 산수의 옛 모습을 알겠네 그려(我來識得溪山面)/ 그렇지만 산수는 내 늙은 얼굴 알란가 몰라(未必溪山識老顔)>

 반대편, 그러니까 하류쪽 풍경이겠네요. 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 왕모산이고 그 아래 산자락을 고산구곡  단사곡이 때리며 지나갑니다.

 12 : 06. 다리 건너는 묵시골 입구입니다. ‘급행버스가 다니는지 버스정류장에 노선도와 시간표까지 붙여놓았습니다.

 예던길 이정표인데 이름 모를 새가 방향을 알려줍니다. 옆에는 갓을 씌워놓은 선비순례길 이정표(왕모산주차장 4.9km/ 고산정 7.0km)도 세워져 있습니다.

 안동도 사과가 특산물인 모양입니다. ‘정일품(正一品)’이란 브랜드에서 그 자부심이 잔뜩 묻어납니다.

 탐방로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갑니다. 강변에 바짝 붙어서 길이 나있는데 항골로 연결된다고 해서 항곡길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12 : 13. 강변을 떠나 산골짜기로 파고듭니다. ‘왕모산의 뒤쪽에 위치한 오지마을(몇 가구 살지 않는 항곡마을일 것입니다)로 들어가는 길이랍니다. 이왕에 왔으니 왕모산에 대해 살펴볼까요? 1361년 겨울, 중국 원나라가 쇠퇴하여 기울어갈 때 생겨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와 수도 개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려 말기 공민왕 시절인데, 왕은 알콩달콩 사랑을 엮어가던 원나라 출신 노국공주와 어머니를 모시고 추위를 견디며 멀고 먼 후방 지역인 안동까지 피난을 오게 됩니다. 이때 모후(母后), 그러니까 공민왕의 어머니가 머물던 곳이라고 해서 왕모산(王母山)’이란 이름이 붙었답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꼬맹이 마을을 만났습니다. 두어 세대쯤 되는 규모인데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12 : 19. ‘항곡길과도 헤어졌습니다. 이제 산길이 시작된다는 얘기겠지요.

 이정표는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인 칼선대까지 2.7km가 남았다고 하네요. 아까 3코스를 걸어오면서 눈여겨보았던 풍경, 즉 깎아지른 산줄기와 낙동강 물줄기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놓은 수묵담채화의 그윽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퇴계선생 말마따나 그림 속으로 표현해도 나무랄 데가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곧 나타난답니다.

 임도는 가파르게 산속으로 파고듭니다. 꽤 힘들지만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조금만 속도를 떨어뜨리면 되니까요. 그런 다음 퇴계의 마음이 되어 걸어보면 어떨까요. 이곳은 퇴계선생님의 고향이니까요.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은 오솔길로 변합니다. 이후부터는 순수한 산길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지자체에서 정비를 잘 해놓아 보드라운 흙길이 널찍하기까지 합니다.

 탐방로가 산자락을 헤집으며 나있기 때문에 심심찮게 작은 골짜기를 건너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교가 놓여있어 장마철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곳은 산속. 위급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그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답니다. 곳곳에 국가지점번호판을 설치해놓아 신고전화만 하면 금방 찾아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무리 쉬워보여도 산길은 산길이랍니다. 그러니 체력이 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선지 곳곳에 벤치도 놓아두었군요.

 탐방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누빕니다. 향긋한 소나무 향기가 코끝을 스쳐갑니다. 그 속에는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가득할 것입니다. 조금도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정도로 소나무가 울창하니 틀림없이 송이버섯이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산길을 따라 줄지어 붙어있는 저 입산금지 표시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숲속에 들어가는 것은 삼가고 대신 길가에서 만날 수 있는 야생버섯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고사목이 심심찮게 나타났고, 그때마다 버섯들이 눈에 띕니다.  말발굽버섯도 그중 하나입니다. 혈당조절과 콜레스테롤 감소, 면역력 강화, 암 예방에 효능이 있다는 버섯입니다. 물론 눈에만 담아갑니다.

 요건 버터애기버섯? 가을철이면 눈에 띄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네요. 식용이라지만 이 또한 채취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12 : 49. 이런 첩첩산중에 웬 민가?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지 마당 아니 집 전체가 웃자란 잡초에 파묻혀 있습니다.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릅니다. 산길이니 계단이 주를 이룸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계단을 두지 않고 경사만 주는 곳도 많습니다. 길을 낼 말한 처지가 아니다보니 어쩔 수 없이 통째로 데크 로드를 만들었나 봅니다. 흡사 다리처럼 말입니다.

 가끔은 비탈진 산자락을 헤집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길고 가파른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길이 오솔길로 변합니다. 비탈지지만 길을 낼만은 했던지 통나무계단을 깔아놓았습니다.

 13 : 05.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다리 모양의 데크 로드로 변해버립니다. 그만큼 왕모산의 사면이 비탈지다는 얘기겠지요.

 13 : 16. 데크로드에서 오솔길 갈려나가고 있습니다. ‘왕모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랍니다.

 이곳에는 이정표 대신 안내지도를 세워놓았습니다.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는 모두 4개인데, 이곳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1코스로 출발지는 원천교라는군요.

 13 : 18. 몇 걸음 더 걸으면 오른편으로 작은 봉우리 하나가 나타납니다. ‘칼선대로 오르는 길이니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20m쯤 더 가면 또 다른 입구가 나타나고, 그곳에는 이정표까지 세워져 있어 무심코 지나칠 일은 없겠습니다.

 왕모산 능선이 내려와 낙동강으로 떨어지며 폭이 약 1km쯤 되는 병풍바위를 빚어 놓았습니다. 그 바위능선의 위, 한 지점에 칼선대가 놓여있습니다. 봉긋한 봉우리가 칼끝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갈선대라고도 부르더군요. 갈선(葛仙)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신선이 된 갈현(葛玄)을 말합니다. 도교에서는 갈선공(葛仙公)이라 존칭하며 태극좌선공(太極左仙公)으로 높여 부르는 인물이랍니다.

 칼선대는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집니다.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 너머로 건지산과 청량산의 축융봉이 한꺼번에 펼쳐집니다. 발아래로는 단사마을의 들녘이 깔려있습니다. 예천의 회룡포나 안동의 하회마을 만큼은 아니어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신선하면서도 아름답기 짝이 없습니다.

 갈선대 아래로는 단사협(丹砂峽)’이 흘러갑니다.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이 그 신비함을 묘사하기 위해 도교까지 끌어들인 곳이랍니다. <칠곡이라 휘감아 도는 한줄기 여울물(七曲縈迴一水灘)/ 갈선대와 고세대를 다시 돌아서 보네(葛仙高世更回看)/ 만 섬의 붉은 단사 하늘이 감춘 보배네(丹砂萬斛天藏寶)/ 푸른 절벽에 구름 일어 찬물이 서리네(靑壁雲生相暎寒)>

 하류 쪽 풍경입니다. 강 건너 저 능선에는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떠올렸다는 윷판대가 있을 것입니다. 낙동강은 그 아래를 휘돌면서 속도를 확 떨어뜨린 다음 안동호로 들어갑니다.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왕모산(王母山)’이 성큼 다가옵니다. 높이는 648.2m.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경사가 매우 급해 천연의 요새로 알려지는 산이랍니다. 천혜의 피난처라고나 할까요?

 전망대에는 이육사의 ‘절정(絶頂)’ 시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곳까지 올라 절정의 시상을 가다듬었나 봅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3 : 22: 다시 산행을 이어갑니다. 잠시 데크 길을 따르는가 싶더니 이내 흙길로 변하는군요.

 통행금지 안내판도 눈에 띄더군요. 안전을 위해 바위 벼랑 안쪽으로 길을 내놓았지만, 바위벼랑 위를 지나 칼선대로 올라가려는 무모한 사람들도 있었나봅니다.

 길이 무척 가팔라졌습니다. 침목계단이 놓여있지만 집사람처럼 무릎이 시원찮은 사람들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구간입니다.

 13 : 29  13 : 41. 지자체도 그게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안부삼거리(이정표 : 왕모산주차장 0.79km/ 천곡지 1.53km)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덕분에 우리 부부도 준비해간 치즈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답니다. 그러다 문득 이게 임하막걸리였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더군요. 안동쌀과 밀, 누룩으로 빚는다는 막걸리의 맛이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임하양조장은 무려 10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술을 빚어 왔다고 하지 않던가요.

 13 : 41. 선비순례길 이정표(왕모산주차장 1.1km/ 고산정 10.8km)가 가리키는 왕모산 주차장 방향으로 갑니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임도를 만납니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왕모당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하더니, 제물 등을 운반하기 위해 놓은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3 : 44. 공민왕의 어머니를 모시는 왕모당(王母堂)’이랍니다. 이 일대는 공민왕계 신을 모시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청량산 꼭대기에 좌정한 공민왕을 중심으로 내살미의 공민왕 어머니, 북고리와 높은데의 부인, 가송리와 정자골, 등자다리의 딸, 새터의 사위와 같이 청량산 일대 20여 개 마을에서 공민왕계 신을 동신으로 모시고 있답니다. 이 중에서도 내살미·가송리·산성마을은 공민왕 신앙의 핵심지역이라고 합니다.

 왕모당은 공민왕의 어머니가 기거하던 터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내살미왕모당이나 공민왕어머니당으로도 불리는데, 내살미마을(원천리)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기 위해 공동으로 동신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그래선지 당집 안에 신체로 남녀 목신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탐방로는 왕모당 뒤쪽 산봉우리로 올라갑니다.

 이 봉우리를 중심으로 왕모산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1361년 고려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왔을 때 축성했다는 전설 속의 성()입니다. 하지만 성은커녕 돌무더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전설은 그저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3. 50. 왕모산 등산안내도가 국가지점번호판과 함께 세워져 있네요. 뭔가 특이한 점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야가 툭 트이더니 낙동강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네요. 강폭을 한껏 넓힌 낙동강은 요 아래 내살미마을에서 안동호로 숨어듭니다.

 길이 또 다시 가팔라졌습니다. 어찌나 가파른지 그냥 떨어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면서 고도를 낮추어갑니다.

 울창한 숲 사이로 원천교가 내려다보이네요. 원천리의 단사마을과 내살미마을을 잇는 다리랍니다.

 이후로도 산길은 한참이나 계속됩니다. 하지만 길이 고와서 걷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니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솔숲 길이랍니다.

 14 : 06. 내살미 마을에 내려섭니다. ‘천사미(川沙美)’라고도 불리는데, 말 그대로 내()의 모래()가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얘기하고요. 중간의 모래 사()자만 억양이 들어가서 살이라는 말로 변하여 내살미가 되었답니다.

 14 : 08. 왕모산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됩니다. 주차장은 지자체에서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대학병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화장실에 유압식 흙먼지털이기까지 설치되어 있더군요. 이정표와 안내판은 기본이구요. 아무튼 오늘은 3코스 후반부와 5코스 후반부를 함께 걸었습니다. 소요시간은 3시간 10. 트랙이 8.96km를 찍고 있으니 느긋하게 걸었나봅니다. 아니 절반이 산길이었음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차장에 왕모산 등산로안내도가 세워져 있기에 게재해 봅니다. 5코스를 답사하면서 왕모산까지 다녀오시고 싶은 분들이 참조하면 되겠습니다.

 집사람의 표정이 오늘따라 더 활짝 피었습니다. 전 구간을 저와 함께, 거기다 느긋하게까지 걸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더 웃고, 더 떠들고, 그로 인해 더 행복했으니 그 표정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안동선비순례길 3코스(청포도길)

 

여행일 : ‘24. 9. 7()  10. 5()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퇴계종택수졸당이육사문학관(105일 출발지)목재고택단천리경로당단천교(거리/시간 : 6.3km, 실제는 7.89km 2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퇴계종택(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산악회의 코스 조정으로 인해 3코스 중 일부(이육사문학관까지) 2코스에 보태서 걷기로 했다. 나머지 구간은 2주 후, 4코스를 걸을 때 추가해서 걷게 된다. 참고로 퇴계종택(退溪宗宅)‘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살던 집이다. 원래의 종택은 동암(東巖) 이안도(李安道)가 한서암 남쪽에 세웠고, 1715년 정자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별도로 지었다. 이후 10세손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이 구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다. 그러나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고, 지금의 퇴계종택은 1926-1929 13세손 하정(霞汀) 이충호(李忠鎬)가 새로 지은 것이다.

 퇴계종택에서 시작되는 ‘3코스(청포도길)’는 이육사의 고향 원촌마을을 지나간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떠올리게 만드는 포도밭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으며, ‘윷판대에 이르면 육사의 또 다른 시 광야를 연상시키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거기에 퇴계묘역, 수졸당 등 퇴계와 관련된 유적들을 함께 둘러보며 걷는 여정이다.

 (97) 15 : 18. ‘토계천의 강변길을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15 : 20. 몇 걸음 걷지 않아 상계1에 이른다. 선비순례길은 이곳에서 다리를 건넌다. 하지만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100m 남짓만 더 걸으면 또 하나의 귀한 유적을 만날 수 있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15 : 22. 잠시 후 계상서당에 도착했다. 퇴계가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선생이 머물던 한서암을 중심으로, 우측 아래 계상서당, 좌측 아래는 기숙사로 사용한 계재(溪齋)’가 복원되어 있다. 하나 더. 문하생들의 숫자가 늘어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할 수 없게 되자,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에 도산서당을 새로 지었으나, 퇴계는 이곳을 없애지 않고 겨울이면 바람 센 도산서당을 떠나 이곳으로 왔단다.

 퇴계의 공부방인 계상서당(溪上書堂)’.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퇴계선생과 젊은 율곡의 만남이 이뤄졌던 곳이다. 1558년 약관 23세의 율곡은 58세의 퇴계를 찾아와 한껏 존경을 담은 시를 지어 바쳤고 퇴계도 화답했다. 두 사람은 사흘을 계상서당에서 함께 지냈고, 퇴계는 떠나는 율곡이 가르침을 청하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줬다고 한다.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일 만들기를 좋아함을 경계해야 한다(持心貴在不欺 立朝當戒喜事)>

 퇴계 선생이 기거하던 한서암(寒栖庵)’, 선생이 만년에 기거하다 숨을 거둔 곳이다. ‘퇴계(退溪)’라는 시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몸이 물러나니 내 분수에 편안하지만/ 학문이 퇴보하니 노년이 걱정스럽네/ 계상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고/ 흐르는 물 보면서 날마다 성찰하네>

 15 : 25.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다리(상계1)를 건넌다. 그리고는 928번 지방도(백운로)를 따라 남·동진 한다.

 다리에서 내려다본 토계천(土溪川)’. 도산면 북쪽 끝에 있는 월오현과 투구봉 아래서 시작되는 물이 모여 태자리 부근에서부터 토계천을 형성한다. 도산면 소재지를 거쳐 토계리에서 낙동강에 합류되는데, 하천을 따라 퇴계 이황의 태실·종택·묘역 등 선생과 관련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퇴계천(退溪川)’이라고도 불리는 이유이다.

 청포도길이란 브랜드답게 곳곳에서 포도밭을 만난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요즘은 포도밭도 과학이다. 과목 위에 비닐 천정을 씌우는 등 모든 과정을 과학적으로 하고 있다.

 15 : 29. 다리를 건너자마자 고성이씨 탑동파 파조 이적의 추모 공간인 산천정사로 들어가는 샛길이 왼쪽으로 나뉜다(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고계정(古溪亭)’으로 들어가는 샛길이 역시 왼쪽으로 갈려나간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고계정을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고계(古溪) 이휘령(李彙寧, 1788-1862)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했다. 퇴계의 10대 종손으로 1816(순조 16) 생원에 급제 호조좌랑·동복현감·영천군수·동래부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러니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향토문화대전은 또 건물이 정면 4,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라고도 했다.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는데, 1977년 안동댐에 물이 차면서 현재 위치로 이건했단다. ‘고계산방(古溪山房)’이란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써줬다나? 하지만 건물의 크기가 우선 달랐다. 위치도 이곳(도산면 토계리)이 아닌 온혜리(같은 도산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는 향토문화대전이 가리키는 고계정과 이곳은 이름은 같으나 건물은 다른 정자(同名異亭)’라는 얘기일 것이다.

 건물은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멋스런 정자가 맞다. 거기다 학식 높은 선비가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딱 좋아 보인다. 그러니 선비문화수련원 안내도에 정자(고계정)’로 표시해 놓았겠지? 그나저나 이런저런 궁금증은 해소할 수가 없었다. 안내판도 없는데다, 물어볼만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겠는가. 그저 퇴계종택의 부속건물쯤 되나보다 하며 발길을 돌렸다.

 오늘은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진다는 백로(白露)’. 고된 여름 농사를 다 짓고 추수까지 잠시 일손을 놓고 쉬는 때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길가 벼가 고개를 숙여가고 있다.

 15 : 33. ‘토계마을 쉼터는 걷기여행자들에게도 자신의 품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나무도 오래 묵다보면 신끼(神氣)를 띠는 법. 토계마을의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는 서낭당의 신목이 되었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보장해주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물레방아까지 배치했다. 요즘처럼 비가 잦은데도 돌지 않는, 아니 돌지 못하는 물레방아가 되었지만 말이다.

 15 : 45. ‘하계마을에 이를 즈음, 도로변에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들어가 보니 퇴계예던길 안내판과 함께 퇴계선생 묘소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退溪先生墓下라고 쓰인 돌 말뚝도 눈에 띈다. 퇴계 이황의 무덤()이 이 산자락 어디쯤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초입의 이정표는 퇴계선생 묘소까지 150m쯤 떨어져 있다고 했다. 이까짓 것쯤이야 하기에 딱 좋은 거리다. 하지만 우습게 볼 상황은 아니었다. 서있다시피 한 급경사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만하기 때문이다.

 15 : 48. 첫 번째 무덤은 퇴계의 며느리인 봉화 금씨(奉化琴氏)’ 것이다. 그녀가 남긴 유언(시아버님 살아계실 적에 내가 모시는데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사후에 다시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든 나의 시체는 반드시 아버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어 주기 바란다)에 따른 것이란다. ‘봉화 금씨는 선생이 돌아가신 이듬해인 1571 2월에 죽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불과 2개월만이다.

 퇴계의 무덤은 이곳에서도 100m쯤 더 올라가야 한다. 계단은 더 가팔라진다.

 15 : 52.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퇴계의 무덤에 올라설 수 있었다. 건지산(搴芝山)의 남쪽 봉우리 중턱쯤이다. 선생은 70세 되던 1570(선조 3) 12 8일 세상을 떠났다. ‘퇴계집(退溪集)’ 연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신축일 유시, 정침에서 돌아가다. 이날 아침에 모시고 있는 사람을 시켜서 화분에 심은 매화에 물을 주라 하였다. 유시 초에 드러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되어 일어나 앉아서 편한 듯이 운명하였다>

 무덤에는 묘비(墓碑) 대신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었다.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란다.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이며,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다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와 조상의 내력과 지행(志行출처(出處)를 쓰라고 했다나? 참고로 묘비와 묘갈은 경계가 모호하지만 네모진 것이 비이고 둥근 것이 갈로 보면 된다. 비의 체재를 웅혼전아(雄渾典雅 : 기운차고 원숙하며 고상함)하고, 갈의 체재는 질실전아(質實典雅 : 소박하고 고상함)하다는 학자도 있다. 하나 더. 당대(唐代)에 와서 관직이 4품 이상은 귀부이수(龜趺螭首)인 비를 세울 수 있고, 5품 이하는 방부원수(方趺圓首)인 갈을 세우도록 규제했다니 갈이 비보다 하대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퇴계는 갈()을 고집한 것이다. 이기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이 배워야할 점이 아닐까 싶다.

 무덤은 건지산(搴芝山) 남쪽 자좌오향(子坐午向 : 정남향)의 언덕에 써져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곳을 명당이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울창하게 자란 소나무 숲이 앞을 가려버린 것은 흠으로 보인다. 명당의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것이 더 좋다면 몰라도 말이다.

 묘역에서 내려오는 길. ‘수졸당이 내려다보인다. 요 어디쯤의 언덕에 양진암고지(養眞庵古址)’가 있을 것이다. 퇴계가 46세가 되는 1546년 벼슬에서 물러나 작은 집을 짓고 살며 양진암이라 이름 지었다는 곳이다. 빗돌까지 세워져 있다고 했는데, 시간에 쫓겨 발걸음을 서두르다 그만 놓쳐버렸다.

 16 : 00. ‘수졸당(守拙堂)’은 진성이씨 하계파의 종택이다.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 1559-1637)가 분가하면서 지어 하계종택 또는 동암종택이라고도 하나 동암의 장자 수졸당 이기(李技 1591-1654)의 호에서 이름을 따 수졸당이 되었다. ‘자 형의 본채와 정자,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퇴계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은 이영도는 임진왜란 때 안동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웠으며, 전쟁 중 군량미를 조달함으로써 큰 공을 세웠다.

 종택답게 현재도 종손이 기거하면서 동암선생의 불천위를 포함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별채에서는 한옥체험도 가능하다고 했다. ! 수졸당은 KBS 다큐멘터리 누들로드에 소개되기도 했었다. 전통을 한결같이 지켜가는 제례 행사와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으로 차려지는 종가음식들이 소개됐었다. 하지만 체험객들에게 제공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다.

 16 : 04. 수졸당 앞 삼거리. 이정표(단천교 4.7km/ 퇴계공원 1.6km)는 하계마을 쪽으로 가란다. 법정 동리인 토계리(土溪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퇴계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사는 마을이다. 마을로 내려가다 능선을 타고 윷판대를 거쳐 이육사문학관으로 넘어오라는 것이다.

 삼거리의 독립운동기적비’. 퇴계는 제자들에게 늘 배움과 실천을 함께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가르쳤다. 나라가 어려울 때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이 바로 선비정신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퇴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하계마을에는 구한말 의병활동과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독립유공자가 25명이나 나왔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기적비를 세워놓았다.

 그들의 애국충정에 동조라도 하려는 듯 주변의 무궁화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16 : 05. 계속해서 ‘928번 지방도(백운로)를 따르기로 했다. 폭염에 시달리느라 고갈된 현재의 체력으로는 윷판대 능선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선답자의 gpx트랙도 백운로를 따르라는데 고민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16 : 09. 길가에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 안쪽에는 애국지사 이동봉(李東鳳)의 묘비가 있었다. 하계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이동봉은 1919 3 17일 면민들과 함께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주동자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병세가 악화되어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20년 순국했다.

 도로 건너 이정표(건지산 3.5km/ 수졸당 0.4km)는 산속으로 들어가란다. ’퇴계 예던길의 안내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안동선비순례길을 걷다보면 코스와 맞지 않는 이런 이정표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두 길을 하나로 통합시키든지 아니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두 길에 차이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고갯마루를 넘자 데크 길이 이제 그만 탐방로로 올라오란다. 도로변에 보행자 전용의 탐방로를 별도로 내놓았다.

 이정표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윷판대를 다녀오란다.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떠올렸다는 곳이다. 하지만 지친 내 육신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신작로를 내면서 만들어진 인공의 능선 위로 길을 내놓았다.

 내려가는 길에 서낭당도 만날 수 있었다. 기도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는 듯 제단 위에 신주(神主)와 제사 용품, 그리고 소주 몇 병이 놓여있다.

 16 : 20  16 : 31. 고개를 넘자 이육사문학관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이육사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길이 전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의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들을 한 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정신관(전시관)과 생활관(연수원), 목우당(생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정(絶頂)’ 시비와 이육사(李陸史, 1904-1944). 육사는 시인이기 전에 독립운동가였다. 그것도 항일무장투쟁단체인 의열단 소속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 출신이다. 의열단에서 육사는 권총사격은 물론이고 폭탄 제조 및 투척, 심지어 변장술도 배웠다. 1927년 처음 옥살이를 한 뒤 1944년 중국 베이징의 감옥에서 쓸쓸히 숨을 거둘 때까지 무려 17번이나 감옥 생활을 했다. 하나 더. 본명은 원록(源祿). ‘육사(陸史)’는 필명이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배달사건에 연루돼 육사가 첫 옥살이를 할 때 수인번호가 ‘264’였다는 데서 연유했다.

 민족시인 이육사의 저항과 문학의 피는 부모 집안에서 물려받았다고 한다. 육사의 어머니 김해 허씨는 한말 의병장 허위의 조카이다. 퇴계 이황이 14대 할아버지이고, 그에게 한학을 가르친 조부 치헌 이중직은 일찍이 개화하여 노비를 풀어주고 땅을 나누어 준 사람이다.

 문학관은 이육사의 생애와 문학세계, 독립운동 자취를 다양한 방법과 매체로 구성해 놓았다. () 체험시설도 갖춰 놓았는데, 헤드폰을 쓰고 버튼을 누르면 육사의 시를 눈과 귀로 동시에 접할 수 있다.

 선생의 흉상과 육필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안경,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생활 모습 등을 재현해 놓았다.

 감방이 특히 눈길을 끈다. 1934년 이육사가 체포된 곳이 광화문에 있던 서울경찰국 본청이라며, 까마득한 날의 기억은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 여사의 증언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1943년 서울에서 베이징으로 끌려갈 때 이육사가 용수를 쓰고 있었다는 그녀의 증언을 더욱 실감나게 해주고 싶었던지 죄수를 이송할 때 사용하는 용수와 수갑, 밧줄, 쇠사슬 등을 진열해 놓았다.

 전시관 맞은편 언덕에 있는 목우당(六友堂). ‘여섯 형제의 우의를 지키는 집이라는 뜻으로 복원된 이육사의 생가이다. 육사와 원기·원일·원조·원창·원홍 6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저 집은 원래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원천리에 있었다. 그러다 안동댐에 물이 차면서 1976년 안동시 태화동으로 이건되었다. 이후 생가의 기능이 훼손되자, 현재 위치에 고증을 거쳐서 복원하였다.

 문학관 앞에 서면 평야지대가 드넓게 펼쳐진다. 넓은 들녘 너머로 강물이 흐르고 멀리 왕모산이 우뚝하다. 이육사가 태어난 곳으로, 육사는 윷판대를 위시한 이곳 원천리에서 광야의 시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105). 10 : 00. 928번 지방도(백운로)를 따라 걸으며 트레킹을 이어간다. 산악회에서는 오늘 5코스를 안내해준다. 하지만 작은아버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4코스 답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우리 부부는 산악회와 따로 떨어져 독자적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10 : 05. ‘원천마을 퇴계 이황의 후손들이 둥지를 튼 집성촌이자 이육사(이황의 14대손이란다)’가 태어난 곳이다. 본명은 이원록. 어린 시절 그는 이 마을의 전통대로 유학과 한학을 익혔다. 참고로 원천은 퇴계선생의 5대손인 원대처사(遠臺處士) 이구(李榘, 1681-1761)가 정착하면서 붙인 지명이다. 세간명리를 떠도는 구름처럼 여기고 속진과 치욕을 멀리한다()’는 뜻으로 원촌(遠村)’이라 부른 것이 마을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초가(草家)’라는 작품이 새겨진 이육사의 시비(詩碑). 하지만 마을에는 초가집이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이육사의 생가 터. 한때는 큰 마을을 이루었을 동네는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 지역이 되었고 시인의 생가(‘六友堂에 대해서는 위에서 얘기했다)도 그때 헐렸다. 그 집은 현재 문학관 언덕에서 만날 수 있다.

 생가 터의 청포도 시비. 작고 둥그런 7개의 화강암 위에 올라앉았다. 청포도 알갱이를 상징하는 모양이다.

 옆에는 목재고택(穆齋古宅)’이 들어앉았다. 조선 후기 문신인 목재(穆齋) 이만유(李晩由, 1822-1904)의 옛집으로, 그가 영해부사를 역임하였기에 영감댁(令監宅)’이라고도 부른다. 이황의 후손으로 형조참판을 지낸 이귀운(李龜雲,1681-1761)의 증손자로 영남만인소의 소두(疏頭) 이만손(李晩孫)의 친족이기도 하다. 1858(철종 9) 전시(殿試)에서 병과로 급제한 이후 승정원 승지, 영해부사, 사간원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고택은 문도 담도 없었다. 옛날에는 솟을대문을 가진 대문채(행랑채)가 있었지만 수몰로 유실됐다고 한다. 고택에서는 민박이 가능하단다. 안채로 통하는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 집을 관리하는 이육사 시인의 따님인 이옥비여사를 만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룻밤 머물 계획이 없는지라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목재고택의 오른편에는 원대구택(遠臺舊宅)’이 있다. 원촌마을이란 이름을 부여한 원대처사(遠臺處士)’ 이구(李榘)의 옛집이다. 이 고택 역시 대문채는 없고 정면 6, 측면 6칸 반 규모의 정침만 전한다.

 맨 오른쪽은 사은구장(仕隱舊庄)’ 차지다. 조선 정조·순조 때의 문신인 사은 이귀운(仕隱 李龜雲, 1744-1823)의 옛집이다. 이귀운은 이구의 증손으로 벼슬길에 있을 때는 의리와 신의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고 한다. 이름을 드러내기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호를 벼슬길에서 숨는다는 뜻으로 사은(仕隱)’이라 했단다. 1786(정조 10)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삼사 요직을 거쳐 형조참판까지 지냈다.

 이 집은 이원영(李源永, 1886~1958) 목사의 생가로 더 유명하다.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1919 3·1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인물이다. 목회자가 된 후 1930년대부터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등을 거부하면서 4차례 옥고를 치렀다.

 11 : 13. 도로(백운로)로 빠져나와 몇 걸음 더 걷자 이정표(퇴계공원 3.6km)가 세워져 있다. gpx 트랙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라며 경고를 보내오는 지점이다.

 도로변 언덕에 그럴듯한 한옥이 들어서있기에 올라가봤다. 그리고 원호정사(遠湖精舍)’를 만났다. 퇴계의 11세손인 교리(校理) 이만형(李晩鉉, 1832-1911)’과 그 형제들의 면학정신과 우애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4형제 후손들이 1977년에 지은 건물이다.

 요 아래 들녘에는 칠곡고택(漆谷古宅)’도 있었다고 한다. 퇴계선생 10대손인 이휘면(李彙冕, 1807-1858)의 고택인데, 2006년 안동시에서 성곡동 고건축박물관(Gurume 리조트) 경내로 이건했단다.(사료를 뒤져보다 눈에 띄기에 거론해봤다)

 11 : 14. 도로를 벗어나 들녘으로 들어간다. 이때 낙동강이 한 손에 잡히고, 왕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육사가 어린 시절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던 풍경이자 자라서는 광야의 시상을 떠올리던 풍경일 것이다. 그는 이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되리라 다짐하며 독립을 갈구하였다.

 안동댐 수몰로 인해 들녘은 황무지로 변해있었다. 이육사의 광야를 떠올리기에 딱 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를 쓰던 시인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독립투사였다. 그의 시는 시리고 아프지만 희망차다. 그러니 한 걸음 한 걸음 시인이 전하고자 했던 마음을 떠올리며 걸어보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길을 갈수록 거칠어졌다. gpx트랙이 없었더라면 헤쳐 나갈 엄두도 못 냈을 정도다. 대신 시심에 한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광야는 대한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염원하면서 지은 시로 평가 받는다. 과거부터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고, 수많은 침략에도 굴하지 않았던 한반도가 일제의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지만 자신은 저항의 씨앗인 이 시를 남기어 훗날 일어날 대한 광복을 기다린다는 저항시이다.

 새옹지마라 했던가? 한걸음 내딛기조차 힘들 정도로 길이 거칠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고왔다. 억새꽃 만발한 들녘 너머에는 왕모산, 그리고 뭉게구름 둥둥 떠다니는 파란 하늘. 이 아니 아름다울 손가.

 누군가는 가을 억새꽃을 일러 그 어느 꽃보다도 아름답다고 했다.

 11 : 33. 거칠기 짝이 없는 들길과의 전쟁은 농로를 만나면서 끝난다. 주변지역 농민들의 경작지가 원천들 안에 있는지 자동차 바퀴자국이 제법 또렷하다.

 11 : 36. 이번에는 도로(왕모산성길)로 올라선다. 오른편에 보이는 원천교를 건너면 5코스(왕모산성길)가 종료되는 내살미마을(원천리)’이다. 3코스(청포도)는 왼쪽 단천리쪽으로 간다.

 길가 야생 나팔꽃이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아침 일찍이 피었다가 낮이면 시들어버리는 불쌍한 꽃(‘morning glory’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일 것이다)이다. 그래선지 꽃말도 일편단심 사랑이란다. 탐관오리에 빼앗긴 아내를 그리다 죽은 남편의 애절한 전설까지 담았으니, 집사람을 향한 내 사랑을 쏙 빼다 닮았다고나 할까?

 오른쪽으로는 왕모산 자락의 험상궂은 바위절벽이 펼쳐진다. 낙동강변과 맞물린 저 벼랑의 꼭대기에 갈선대가 있고, 저 벼랑의 안쪽으로 5코스(왕모산성길)가 지나간다.

 ()도산청소년수련원을 리모델링했다는 안동영화예술학교’. 미인가 영화특성화 대안학교로 영화를 주제로 시나리오 작법, 카메라의 이해 등 특별과목과 윤리·국어·수학 등 일반과목을 가르친다고 했다. 하지만 문을 닫았는지 텅 빈 운동장에는 학생들 대신 잡초만 무성했다.

 단천리의 너른 들녘. 왕모산에 가로막힌 낙동강이 방향을 틀면서 만들어놓은 일종의 충적평야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이따가 갈선대에서 감상하게 된다.

 11 : 43. 잠시 후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건지산 4.8km/ 칼선대 2.1km)에서 왕모산성길과 헤어져 단사길로 들어선다. ‘단천리로 들어가는 길인데 2차선에서 1차선으로 바뀌었다.

 11 : 46. 단천리 경로당. 이정표(건지산 4.7km/ 칼선대 2.2km)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낙동강 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곧장 직진하기로 했다. 다음 블록에 있는 진성 이씨의 종택에 들러보기 위해서다.

 11 : 48. 네이버 지도는 진성이씨(眞城李氏)’ 가문의 종택(宗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주하리(안동시 와룡면)에 있는 주하동 경류정 종택’, 즉 국가민속문화재(291)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그 진성이씨 종택과는 어떤 관계일까?

 단천리(丹川里) 56가구 중 20가구가 진성이씨라고 했다. 그중 대부분이 이곳 단사(丹沙) 마을에서 살아간다고도 했다. 그러니 토계리(진성이씨의 원래 세거지)’에서 단사마을로 옮겨 온 이후의 종가(宗家) 쯤으로 보면 되겠지?

 100m쯤 떨어진 곳에는 퇴계선생의 8세손 이귀용이 지었다는 계남고택(溪南古宅, 경북 민속문화재)’도 있다고 했다. 행여나 놓칠세라 두리번거리는데 주민분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알려주신다. 현재 성곡동 고건축박물관(Gurume 리조트)에서 숙박 손님을 맞고 있단다.

 그는 인접해 있던 서운정(栖雲亭)’에 대해서도 얘기해줬다. 헌종(憲宗) 때 이조참판을 지낸 농와(聾窩) 이언순(李彦淳, 1774-1845)이 말년에 지은 정자인데, 이 또한 성곡동 고건축박물관(Gurume 리조트)로 옮겨졌다고 한다.

 11 : 51. 문화재 찾기를 끝내고 마을을 빠져나온다. 그리고는 탐방로가 있는 낙동강 쪽으로 간다.

 11 : 53. 강 너머로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큼지막한 움직임이 한꺼번에 정지되어버린 듯 요지부동의 단애가 아랫도리를 물에 담그고 있다. 단애의 색깔이 붉어 보이는 것은 단사마을의 유래를 떠올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붉은 점토질 산맥이 마을 뒤로 뻗어 있고, 강가의 자갈이 연분홍빛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니 말이다.

 이후부터는 제방(단사길)을 따라간다. 능수벚나무를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멋쟁이 둑길이다.

 12 : 02. 단천교에 이르면서 3코스(청포도길) 트레킹이 종료된다. 3코스는 걷는데 2시간 10분이 걸렸다. 앱이 7.89km를 찍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산악회는 ‘3코스의 길이가 짧다며 둘로 나눈 다음, 2코스(도산서원길) 4코스(퇴계예던길)에 포함시켜 진행했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작은아버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4코스(2주 전에 진행했다)에 참석을 못했고, 때문에 3코스의 후반부를 다른 걷기 여행자들과 헤어져 단 둘이 걸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더 많은 밀어들을 속삭일 수 있었지만...

 

서해랑길 59코스(춘장대해수욕장 - 대천해수욕장)

 

여 행 일 : ‘24. 9. 28()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서면 및 보령시 웅천면·남포면·신흑동 일원

여행코스 : 춘장대해변부사방조제소황사구황교리노인회관소황리노인회관독산해변(실제 출발지)무창포해변용두해변대천해변(거리/시간 : 28.1km, 실제는 14.80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9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28km라는 거리가 우습게 보였는지 별이 2(전체 5)로 분류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관광공사 직원들은 날아다니는 모양이다.

 

 들머리는 춘장대해수욕장(충남 서천군 서면 도둔리)

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서천방면으로 3km쯤 내려오다 비인교차로에서 607번 지방도로 옮겨 서면(춘장대해수욕장) 방면으로 7km쯤 들어오면 춘장대해수욕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보령 59코스)안내도는 중앙솔밭·백일 캠핑장의 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다.

 춘장대해수욕장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대천해수욕장까지 가는 28.1km짜리 긴 여정이다. ‘소황리 공군사격장 등 군사시설을 피해 내륙으로 에둘러가기 때문이다. 길기만 한 것이 아니다. 코스 대부분이 해변이나 제방을 따라 나있어 여름철에는 최악의 코스로 분류된다. 하지만 곱디고운 모래사장을 걷는 재미와 서해의 작은 섬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어 걷기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코스로 꼽힌다.

 산악회는 소황사구(小篁沙丘)’의 입구인 장안해변(이정표 : 종점 23.2km/ 시점 4.7km)’을 공식 출발지로 삼았다. 지난번 58코스 때 이곳까지 연장해서 걸었었기 때문이다. 춘장대해변에서 트레킹을 마친 우리부부는 유명 맛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그로 인해 생긴 자투리 시간을 보냈었지만...

 부사방조제(扶士防潮堤) 준공기념탑. 서천군(서면) 도둔리와 보령시(웅천읍) 독산리를 잇는 3,474m 길이의 긴 방조제이다. 1997년 축조될 당시만 해도 웅천읍 일대의 농경지 보호가 임무였으나, 최근에는 낚시터로 더 각광을 받는단다. 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바다낚시와 민물낚시를 동시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서해랑길은 ‘607번 지방도(부사로)’를 따라간다. 이어서 황교리 소황리를 지나 독산해변으로 나온다. 하지만 산악회는 소황사구의 탐방로로 인도하고 있었다. 군사시설 때문에 평소에는 막혀있지만 주말에는 통행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탐방로는 소황사구를 꿰뚫으며 나아간다. 생태·보전지역이선지 데크 길을 따로 만들어 자연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였다. 하나 더. 네이버지도는 이곳을 장안해수욕장으로 적고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이나 샤워장, 취사장 같은 편의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생태·보전지역에 따른 개발제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10 : 40. 실제 출발지는 독대섬 입구로 소황사구의 최북단이다. 첨부된 지도에서 부사호 위 역()으로 된 자의 상단, 뽈록하니 튀어나온 부분으로 보면 되겠다.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소황사구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탐방로를 걸으면서 관찰 가능한 동·식물들을 살아있는 모래언덕으로 포장해서 전해준다. 다만 평일 사격훈련 시간 때는 탐방로 진입이 불가능하다나?

 독대섬은 바다에 산 하나가 떠있는 형상이다. 섬이면서도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되는데, 이때 맛조개와 돌게, 골뱅이 등을 잡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단다. 독대섬 앞바다에는 직언도, 황죽도가 일렬로 가지런히 놓여있다. 평소에는 독대섬까지만 물이 빠지지만, 음력 보름과 그믐 전후로 직언도까지 물이 빠져 무창포의 석대도와 함께 신비의 바닷길이 연출된다.

 소황사구(장안해변). 다른 여행자들은 저 해안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참고로 소황사구는 길이 2.3km,  200m, 최고 높이 17.6m에 이르는 대규모 사구이다.

 독대섬을 가운데 두고 반대편에는 독산해수욕장(獨山海水浴場)’이 있다. 왼쪽은 소황사구, 오른쪽으로는 독산해변의 갯벌과 금빛 모래사장이 갈매기 날개처럼 좌우로 펼쳐지는 모양새이다. 해수욕장은 길이 1,500m,  100m의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산해변 글자 조형물. 독산해변은 바다에 홀로 있는 산이라 하여 홀뫼해변이라고도 불린다. ‘독대섬의 생김새에서 유래된 지명이 아닐까 싶다.

 10 : 42. ‘열린바다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주말이어선지 길가가 온통 주차장이다. 덕분에 우리를 실어다 준 버스가 회전을 못하고 후진으로 빠져나가느라 고생깨나 했다.

 해수욕장의 배후 숲에는 무료 캠핑장이 들어서있었다.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텐트가 꽉꽉 들어차있다.

 틈새를 마련 못한 사람들은 바닷가로 밀려난다. 하지만 조망만은 소나무 숲보다 한수 위다. 독산해변의 자랑거리인 낙조, 즉 잔잔한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사라지는 해를 바라보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다만 뜨거운 햇살에 고생깨나 해야겠지만...

 모터 카약까지 끌고 온 낚시꾼도 보인다. 그만큼 어종이 풍부하다는 애기일 것이다.

 대어의 꿈은 백사장에서도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파도를 가르며 지나가는 보트까지도 끌어올리겠다는 듯 낚싯대 크기가 만만치 않다.

 10 : 50. 해수욕장을 빠져나와서도 열린바다로를 탄다. 길가에 들어선 빌라나 카페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이다. 아니 라바 카페 부근에서는 꼬맹이 섬과 여가 꾸미고 있는 빼어난 풍광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하나 더. 독산해수욕장에서 시작된 열린바다로는 해안선을 따라 용두해수욕장까지 이어진다.

 서천에서 시작된 배롱나무 가로수길은 보령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여름 꽃 배롱나무, 그 붉은 유혹에 빠져본다. 가까이 다가가면 정열적이던 꽃이, 한발 물러서자 수줍은 아름다움으로 변해버리는 이중성의 꽃이다.

 11 : 04. ‘낙조공원이란다. 바닷가 쪽으로 작은 공간을 만들고 일몰을 상징하는 조형물 두어 점을 배치했다. 떨어지는 해를 편히 감상하라는 듯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하지만 정비를 하지 않아 웃자란 잡목·잡초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11 : 08. ‘독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편 무창포해수욕장으로 간다. 독산해변에서 무창포해변에 이르는 2km 구간도 군사시설을 피해 내놓은 우회로라고 보면 되겠다. 중간에 만났던 군의 해상침투훈련장 안내판이 그 증거일 것이다.

 11 : 13. 무창포해변에 도착하니 비체펠리스가 반긴다. 용평리조트가 처음 개발한 대형 해양리조트라고 한다, 참고로 무창포(武昌浦)’라는 지명은 무창(武昌)’의 서쪽에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세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던 갯가의 포구라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바닷가로 나가 닭벼슬섬으로 간다. 섬까지 탐방용 보행교가 놓여있다. 섬과 육지 사이 물길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놓은 생태탐방로이다.

 초입에는 갯벌생태계복원사업 안내판과 함께 한국 새우양식 6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1963년 국내 최초로 이곳 웅천지역에서 새우양식이 시작되었다나? ‘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배우고 간다.

 다리에서 본 무창포해수욕장’. 남북으로 뻗어나간 백사장 길이가 1.5km나 되는 기다란 해변을 끼고 있다. 경사가 완만한데다 물이 잔잔하고 배후에 울창한 숲까지 끼고 있어 천혜의 입지조건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인근 대천해수욕장에 비해 많이 한산하며, 주로 종교단체·교육기관·기업체나 가족단위의 야영지로 이용된다.

 시선을 조금 옮기자 담장처럼 생긴 돌무더기가 드러난다. 갯벌에 크고 작은 돌을 쌓아 고기를 잡던 전통 어구인 독살이 아닐까 싶다. 독살은 돌을 이용해 반원 형태로 쌓는 게 우선이다. 다음은 중앙에 대나무를 이용해 수문(水門)을 만들어 고인 물이 빠지도록 한다. 수문 앞은 물이 빠져도 고기들이 모여 놀 수 있을 정도로 물이 고여 있어서 물때에 무관하게 고기를 잡을 수 있다.

 왼쪽은 아까 지나왔던 독산쪽 해안이다. 바닷가에 널려있는 주먹만큼이나 작은 섬과 여(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들이 흡사 자갈밭을 보는 느낌이다.

 탐방로는 닭벼슬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낙조5 중 제5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서해바다와 무창포해수욕장은 물론 무창포타워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단다. 하나 더. 혹자는 독산해수욕장과 무창포해수욕장의 경계를 닭벼슬처럼 생겼다는 곶()으로 삼고 있었다. 독산 쪽에서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저곳(직전 사진 참조)을 이르는 말일 게다. ‘닭벼슬섬이라는 지명은 곶()의 생김새에서 따왔을 것이고 말이다.

 11 : 19. 바닷가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해안을 따라간다. 백사장과 배후 숲 사이에 포장길을 내놓았다.

 무창포의 빼어난 풍경화는 앞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 ‘석대도(石臺島)’가 완성시킨다. 섬의 모양이 돌로 된 좌대(座台), 즉 석대(石臺)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으로, 구전(口傳)에 따르면 아기장군이 죽었을 때 황새가 떼지어 나타나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매월 두 차례 간조 시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무창포 신비의 바닷길은 진도와 더불어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물때가 맞지 않아선지 바닷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아쉬움을 안내판의 사진으로 달래본다.

 그래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모세의 지팡이로 달래볼 일이다.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향하자 바다가 갈라지면서 길이 나타났다는 기적이자 구원의 지팡이다. ! 바닷가에 석대도 안내판과 함께 바닷길이 열리는 시기 및 시간을 적은 안내판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사리 때 열리는데, 5-6월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11 : 27. 중앙광장의 무창포를 상징하는 조형물은 이제 막 출범하려는 범선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았다. 리스본(포르투갈) 여행 때 만났던 대항해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 Descobrimentos)’를 축소시켜놓았다고나 할까? 대항해시대의 항해왕자 엔리케(Infante Dom Henrique)의 도움을 받은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항해를 떠난 자리에다 세운 기념물인데, 무창포의 것에는 세계를 호령했던 영웅들의 조각이 빠져있다.

 신비의 바닷길 조형물은 전설 속의 아기장군을 형상화 했다. 바닷길을 걸으며 주울 수 있는 해삼(·조개·게 등도 함께 잡힌단다)’과 함께이다. 참고로 아기장군은 석대도에서 살던 해룡과의 줄다리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을 정도로 힘이 센 인물이었다. 하지만 역적(다른 전설들처럼)으로 몰릴 것을 우려해 석대도에서 해룡과 함께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장사였다.

 무창포 해역은 쭈꾸미로도 유명한 모양이다. 맞다. 올해 3월엔가는 KBS-2TV ‘생생정보에서 이곳의 쭈꾸미 샤브샤브를 소개한 일도 있었다.

 물빛정원이라는 분수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특히 스크린처럼 떨어지는 분수의 가운데를 뚫은 게 눈길을 끈다. 그 사이로 징검다리를 놓음으로써 신비의 바닷길을 연상하게 만든다.

 홍완기(1932-2004) 시인의 시비도 세워져 있었다. 그의 작품 무창포의 사랑이 새겨진 빗돌, 이력과 예순 살의 색신이 적힌 또 다른 빗돌, 시비건립 취지문 빗돌이 떼지어 있다. 참고로 홍완기는 별난 이력의 소유자다. 이곳(궁촌리)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나뭇꾼·엿장수·뱃사공·철도국(임시직원지방신문(견습기자승려 등을 전전하다 등단했다.

 낙조5 중 제1경이라는 무창포타워는 곁눈질만 하고 간다. 서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오르면, 황홀한 일몰을 볼 수 있어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꼽힌다. 특히 해거름에는 노을 덕에 인생 사진을 남기기에 안성맞춤이란다. 하지만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으니 굳이 올라가볼 필요까지 뭐 있겠는가.

 무창포는 해마다 신비의 바닷길 축제가 열려왔다. 올해(24) 10 18일부터 20일까지 무창포해수욕장 일원에서 열린단다. 체험·공연·판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니 한번쯤 찾아볼 일이다. 풀에 들어가 전어나 대하를 맨손으로 잡아보는 체험도 해보면서 말이다.

 관광객들과 함께 바닷가를 누비고 다닐 꼬마 열차도 길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11 : 38. 이제 무창포항으로 간다. 해안길은 중앙광장을 지나서도 한참이나 계속된다.

 식당가를 끼고 나있어 구수한 음식냄새의 유혹을 참기 어려운 구간이기도 하다.

 음식점의 홍보는 백종원씨가 대세인가 보다. 그가 출연했던 SBS-TV ‘백종원의 삼대천왕에 대한 사진으로 식당 전체를 도배해 놓았다.

 11 : 43. 해변 끝에서 왼쪽(무창포항 방향)으로 간다. 이어서 외항과 내항 사이에 놓인 다리를 건넌다.

 동산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상화헌(尙和軒)’. 많은 이들이 죽도에 있는 상화원으로 오해하는 곳이다. 함께 걷고 있는 이석암 작가님도 이해를 못하겠다며 일단은 카메라부터 들이대고 본다. 하지만 상화헌 거품시대의 작가 홍상화가 집필할 때 머물렀던 곳으로, 한옥  ’, 그리고 만대루(안동 병산사원 것을 재현했단다), ‘작가의 집 등으로 구성된 일종의 북 카페이다.

 11 : 47. 수산물시장 앞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널찍한 주차장, 이어서 탐방로는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내항과 외항을 나누는 경계선으로, ‘낙조5 중 제3경이기도 하다. 고즈넉한 항구와 등대 3개를 한꺼번에 볼 수 있어 다채로운 풍경 속의 일몰을 줄길 수 있단다.

 다리 위에서 본 무창포항’. 무창포항은 원래 내만(內灣) 입구에 남북으로 방파제를 쌓아 항구를 만들고, 사구 위에 물양장(소형 선박이 접안하는 부두) 시설을 조성했었다. 하지만 간조 때 항구의 바닥까지 갯벌이 드러나 배를 댈 수가 없자, 방파제 시설을 새로 설치하고 항구를 서쪽으로 옮겼다. 덕분에 간조 때를 제외하면 입출항이 가능해졌지만 완전한 해결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현재까지 준설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덕분에 내항은 천혜의 대피항이 되었다. 연근해에서 광어와 쭈꾸미, 갑오징어 등을 잡는 소형어선의 정박지로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11 : 52. 배수갑문을 지나면서 무창포항과 이별을 고한다. 80m쯤 더 걸어 관동교에 이르자 이정표가 아직도 9.7km나 남았다며 속도를 올리란다. 오늘의 이벤트로 삼은 해물요리를 느긋하게 먹고 싶다면 말이다.

 이후부터는 열린바다로를 따른다. 왕복 2차선의 널찍한 도로인데도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안전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차량통행이 뜸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11 : 58  12 : 14. 충남수산자원연구소 뒤. 나지막한 고갯마루에는 쉼터를 겸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파고라 그늘에서 준비해온 간식에 막걸리 잔을 나누며 푹 쉬다갈 수 있었다.

 12 : 14. 다시 길을 나선다. 이즈음 대하양식장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방조제 안쪽 내수면에다 커다란 양식단지를 만들었다.

 12 : 23.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소공원. 이번에는 정자와 벤치는 물론이고 조각품까지 배치했다.

 조금은 조잡해보였지만(예술에 문외한이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원색적으로 표현된 탓인지 많은 여행자들의 소개 글에 올라오고 있었다.

 집사람이 부추꽃이란다. 선형으로 자라나는 잎사귀만 먹는 줄 알던 부추가 꽃도 피우는 모양이다. 그것도 저렇게나 예쁘게도 말이다.

 12 : 28. ‘월전교(이정표 : 종점 8.1km/ 시점 19.8km)’을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용두해수욕장(龍頭海水浴場)’에 이른다. 한적하지만 해수욕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해변을 갖고 있으며, 해변 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송림에는 숲속 야영장이 조성돼 있어 해수욕과 캠핑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캠핑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보령시 근로자종합복지관(동백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편리하게 숙박할 수도 있다.

 보령시 남서부 남포방조제의 남단에 위치한 용두해수욕장도 1,500m나 되는 기다란 백사장을 자랑한다. 미세한 입자의 알갱이로 이루어진 모래의 질도 뛰어나다. 거기다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까지 얕아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여행의 정석대로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

 백사장이 끝나갈 즈음 모래사장에 바위무더기가 널려있었다. 안내판이 신랑바위 각시바위임을 알려준다. 용두마을에 살던 처녀총각이 백년가약을 맺었는데, 앞바다에 살던 용이 처녀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던 모양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성주사의 무염스님에게 부탁했고, 용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용을 죽이고 총각과 처녀는 각시바위, 신랑바위가 되어 영원한 사랑을 하게 되었다나?

 장수바위 안내판도 눈에 띈다. 마을을 괴롭히던 탐욕스럽고 악덕한 용()을 물리친 장수의 말발굽 자국이 아직도 장수바위에 남아있단다. 하지만 어떤 게 장수바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신랑바위 각시바위와 이명동암(異名同岩)일지도 모르겠다.

 12 : 37. 해변 끝에서 웃자란 잡초더미를 헤치며 오솔길로 들어선다. 바닷가에 들어선 요트경기장에 번잡함을 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12 : 41. 오솔길을 빠져나와 남포방조제(藍浦防潮堤)’ 둑길로 올라선다. 남포면 월전리와 보령시 신흑동을 잇는 길이 3.7km의 둑으로, 서해로 유입되는 남포천을 막아 보령시 남서부 해안의 너른 간척지를 만들어냈다.

 시야가 툭 트이는 둑길은 일망무제의 조망을 보여준다. 조금 전 무창포 해안에서 눈여겨봤던 석대도가 요트경기장 뒤에서 고개를 내미는가 하면, 저 멀리 먼 바다에서는 호도, 녹도, ·소화시도 등 작은 섬들이 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풍경도 만만찮다. 광활한 남포평야 너머로 이름 모를 산들이 산그리메를 그리고 있다. 보령의 명산인 성주산과 옥마산, 오서산 등일 것이다.

 진행방향에는 과거 섬이었으나 방조제로 인해 육지로 연결된 죽도(竹島)’가 자리 잡고 있다. 죽도는 현재 섬 전체가 하나의 정원으로 꾸며졌다.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한국식 전통정원으로 조성하면서 상화원(尙和園)’이란 이름을 붙였다. 섬 둘레에 조성한 탐방로(2km)를 따라 걸으며 석양정원, 한옥마을, 전통혼례식장, 하늘정원 등을 구경할 수 있다.

 12 : 58. ‘상화원의 입구(이정표 : 종점 5.2km/ 시점 22.7km)를 지난다. 섬 전체에 올곧은 대나무가 울창했다는 죽도는 조개·꼬막·굴 등을 양식하면서 사는 전형적인 섬마을이었다. 그러나 육지와 연결되면서 민자 유치를 통한 죽도관광지 개발이 이루어져 각종 휴양시설을 갖춘 관광단지가 되었다. 2000년 죽도 섬 전체가 관광특구로 지정되었고, 2013 3 상화원을 개원했다. 소정의 입장료를 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이게 볼만했던 모양이다. 보령시에서 보령9경 더하기 중 제2으로 뽑아 놓았다.

 대천해변으로 가는 둑길은 멀고도 멀었다. 하긴 월전리에서 죽도 입구까지 걸어왔던 거리보다 배나 더 길다고 하니 어련하겠는가.

 13 : 29. 방조제 끝. 둑에서 내려오니 남포방조제 준공 기념비가 맞는다. 1999년 남포간척지 공사의 일환으로 방조제가 완공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빗돌일 것이다.

 배수갑문을 지나면서 남포방조제는 끝을 맺는다.

 방조제에 갇힌 남포천(藍浦川)은 거의 바다 수준이다. 남포천은 보령시(남포면) 읍내리에서 발원 남포저수지와 소송리를 지나 삼현리에서 서해로 합류되는 길이 4.5km의 지방하천이다.

 13 : 42. ‘갓배교차로에서 광장진입로를 따라 500m쯤 걷다 첫 사거리(이정표 : 종점 2.4km/ 시점 25.5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천해수욕장으로 간다.

 13 : 50. 해수욕장이 들어선 신흑동(新黑洞)’으로 들어선다. 길은 충남대 임해수련원과 국군복지단 대천콘도의 사이로 난 골목을 지나 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13 : 54. 이후부터는 해안산책로를 따라 머드광장으로 간다. 백사장과 배후 숲 사이로 포장길을 내놓았다. 하나 더. 보령시가지서 남서쪽으로 10km, 대천반도의 돌출부 끝에 위치한 대천해수욕장은 조개껍질로 덮여 있는 해안이 색다르다. 물은 그다지 맑지 않으나 수심이 얕고 수온이 알맞으며 밀썰물을 가리지 않고 어느 때나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이때 돌공원을 지나가니 전국 각지에서 모아온 돌들을 곁눈질이라도 하면서 걸어보도록 하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크고 작은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는 다보도부터 저 멀리 호도·녹도·삽시도·불모도까지 수많은 섬들이 흡사 돛단배라도 되는 양 파도에 밀려 둥둥 떠다니고 있다. 맞다. 보령시는 원산도, 삽시도 등 70여 개의 아름다운 섬을 가진 섬의 도시다. 법정기념일인 섬의 날 기념행사가 충청남도 주관으로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대천해수욕장(大川海水浴場)은 자타가 공인하는 서해안 최고의 해수욕장이다. 해변의 길이가 자그마치 3.5km를 넘는다. 해수욕장은 1932년 경남철도주식회사의 승객유치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됐다. 9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서해안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해수욕장이다. 최근에는 계절별 축제와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되고 있어 사계절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2022 8월 기준으로 연간 방문객 수가 1 200만 명에 이른다나? 특히 1998년부터 개최된 보령머드축제는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단다.

 대천해수욕장은 보령9경 더하기 중 제1경으로 꼽혀있다. 바다를 걸으며 힐링할 수 있는 곳이자 사계절 축제의 현장이란다. ‘보령9경 더하기의 나머지는 죽도 상화원(2), 성주산자연휴양림(3), 개화예술공원(4), 무창포해수욕장(5), 외연도(6), 충청수영성(7), 냉풍욕장(8), 보령호(9)에 플러스로 오서산을 더했다. 남들이 다하는 8경으로는 턱도 없다는 듯이 9경으로도 모자라 하나를 더 보탰다.

 14 : 00. 해변을 따라 10분 남짓 걷다가 시민헌장탑이 있는 노을광장으로 올라간다. ‘구광장인 머드광장과 대비해 신광장으로도 불리는데, 젊은 층들이 선호하는 공간이란다. 하지만 화장실과 야외샤워장만 있고 실내수영장은 없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노을광장이란 이름에 걸맞게 바다를 향해 스카이워크도 만들어 놓았다. 편하게 앉아 노을을 감상하라는 듯 다리 아래는 관람석까지 갖추었다.

 14 : 06. 이후부터는 도로변 소나무 숲을 따라간다. 해변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빼어난 해수욕장의 조건에 걸맞게 각종 휴양·편의시설, 문화예술 공간을 서해안에서는 으뜸으로 갖추었다. 최근에는 각종 서비스시설의 고급화도 병행되고 있단다.

 숲이나 노변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조형물들을 들어앉혔다.

 보통 송림이나 사구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해수욕장들의 자연 친화적인 경치에 비하면 대천해수욕장은 도시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해수욕장을 끼고 바로 도회지가 형성되어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아름다운 집과 높은 빌딩이 늘어서 있고, 곳곳에 광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갖가지 예술적인 조형물이 놓여 있다.

 14 : 13  15 : 13. 아무튼 우리가 바라던 대로 주어진 시간보다 1시간쯤 먼저 대천해변에 도착했다. 그 시간은 오롯이 먹는데 사용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박주를 나누면서 회포를 풀 수 있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특히 이곳 대천해수욕장은 키조개 삼합이라는 독특한 요리로 유명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해물상회’. ‘원조라는 수식어가 발길을 이끌어주었다.

 키조개 삼합은 바다와 육지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요리다. 대천 앞바다에서 잡은 키조개(관자)와 우삼겹(또는 차돌박이)에 채소를 섞음으로써 바다와 육지 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전복과 새우, 가리비 등 다른 해산물도 함께 나와 취향에 맞게 다양한 방법으로 조합해서 먹는 재미도 있다. 참고로 키조개는 아연과 칼슘, 철 등 미네랄 성분이 풍부해 피로 해소와 간장 보호에 효과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맛과 건강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해산물이라는 얘기다.

 15 : 15. 만남의 광장으로 빠져나와 종점인 머드광장으로 간다. 바닷가를 따라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조형물이 늘어서 있었다. 잘 단장된 조각공원을 구경하는 느낌으로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덕분에 곳곳에서 사진의 배경으로 삼기 딱 좋은 조형물들을 만난다. 그러니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고 카메라 앞에 서보자. 인생샷이라도 한 장 건질 지 누가 알겠는가.

 15 : 30. 구광장이라고도 불리는 머드광장에 도착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매년 열리는 보령 머드축제의 주 무대이자, 본격적인 휴가철에는 야간에도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즐기자 밤바다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패들보드, 수상 징검다리 등 다양한 미니게임이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단다.

 서해랑길(보령 60코스) 안내도는 바다의 여인 조형물 옆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4.80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걷기 버거울 정도로 여행자들을 괴롭히던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머드광장에서 바라본 바다. 저 멀리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보인다. 때로는 신기루 현상으로 아득한 중국대륙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오늘은 집사람 말고도 구우(舊友) 둘이 트레킹 후 소주라도 한잔 나누자며 함께 걸어주었다. 이런 게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겠는가. ‘장 바니에(Jean Vanier)’는 그의 저서 희망하는 사람들, 라르슈(Porte d'esperance)’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며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했다. <내 심장이 다른 사람의 심장 박동에 따라 고동치기까지, 그리하여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기까지 나 자신을 충분히 버리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니 몇 마디 담소를, 그것도 오가는 반주에 희석되어버릴 수도 있는 얘기 몇 마디를 나누기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시간을 써버린 저 친구들은 나에게는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거론한 책에는 1964년 파리 근교의 작은 집 라르슈(방주라는 뜻)’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필립, 라파엘 두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한 장 바니에. 그 집이 28개 나라에 103개의 공동체로 확산되기 까지, 고통 받는 많은 이들에게 바니에가 열어준 희망의 메시지가 따뜻하게 담겨 있다.

 

여행지 : 조지아  카즈베기 가는 길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카즈베기(Kazbegi 또는 스테판츠민다) : 조지아는 맛좋은 와인이 유혹하는 와인 천국이고 볼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카즈베기가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는데, 트빌리시 북쪽 차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하는 산악지역이다. ‘카즈베기는 구소련 시절에 부르던 이름이고, 현재는 스테판 츠민다로 불리고 있지만 그래도 현지에서는 카즈베기라는 지명이 더 쉽게 다가온다.

 

 조지아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자리매김한 카즈베기로 간다. 아나누리를 거쳐 카즈베기까지 갔다가 되돌아와 므츠헤타(Mtsheta)를 거쳐 바투미 쪽으로 넘어가는 일정이다. 카즈베기 가는 길은 소련 지배시절 군사도로로 개설되었기 때문에 도로가 험하기로 유명하다. ‘아라그비 강 왼쪽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야영장과 레스토랑, 호텔들을 만나기도 한다. 카누와 카약을 할 수 있는 시설도 보인다. 하나 더. 무슨 축일(오순절?)이라도 되는지 강가에는 먹고 마시고 춤추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조지아 여행은 시그나기를 거쳐 수도인 트빌리시로 들어온 다음, ‘아나우리 구다우리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돌아오는 길에 므츠헤타를 둘러본 다음, ‘바투미(흑해 연안에 위치한 조지아 제2의 도시)’를 거쳐 튀르키에의 리제로 넘어간다. 하나 더. 중간에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를 돌아본 다음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오기도 한다.

 차장을 스쳐가는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 한참을 달리다보면 진발리 호수(Zhinvali Reservoir)’에 이르게 된다. 카즈베기 고봉에서 흘러내려온 아라그비(Aragvi)’ 강이 잠시 머물다 가는 인공호수로, 빙하가 녹아내려 만들어진 저수지의 물빛이 에메랄드빛으로 무척 아름답다. 호반에는 전원주택들이 들어서있었다. 관광객이 호수를 바라보면서 쉬어갈 수 있는 커피숍이라는데 이게 또 호수와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저수지 위에는 아나누리 성채(Ananuri Fortress)’가 있다. 이 성은 13세기부터 이 지역을 통치했던 아라그리 영주의 성이다. 작은 규모의 성채는 하나의 성과 17세기에 세워진 두 개의 교회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건물 전체를 성벽이 빙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네 귀퉁이에 망루가 솟아있어 요새의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아나누리 성채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한 잠정목록에 올랐다고 한다. 그만큼 역사적인 의미가 깊고 그나마 원형을 많이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나누리 성채는 1200년에서 1249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라고 한다. 13세부터 이 지역을 통치했던 봉건 왕조 아라그비의 성채였던 아나누리 요새는 1739년 크사니(Ksani) 공국의 산쉐(Shanshe) 공작에 의해 함락된다. 4년 후 지역 농민들이 샨쉐 공작의 통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1746년부터는 카헤티(Kakheti) 왕국의 테이무라즈 2(Teimuraz ) 왕에게 통치를 받았다. 그 후 소련 시절 교회로서의 기능을 잃으며 지금과 같이 황폐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하나 더. 아나누리 성채가 포위되었을 때 물과 식량을 비밀통로를 통해 공급받았다고 한다. 그 역할을 하던 누리(Nuri) 출신의 아나(Ana)라는 여인이 사로잡혀 고문당했지만 죽음으로 항거하며 끝내 비밀통로를 알려주지 않아 그녀를 기리기 위해 아나+누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차에서 내리면 육중한 성곽이 길손을 맞는다. 정방형과 원통형으로 모양이 각기 다른 두 개의 망루와 함께 높은 성벽으로 둘러쳐져있다. 이곳은 카즈베기 주의 대주교가 머물던 곳으로 평상시에는 성당으로, 전시에는 시민들이 대피할 수 있는 비밀 요새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저 작은 성채에 5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채에는 2개의 교회와 3개의 탑이 남아 있다. 그중 슈포바리(Sheupovari)’라고 불리는 위쪽 성채의 탑은 1739년 샨쉐(Shanshe) 가문이 이곳을 침략하였을 때 아라그비(Aragvi) 가문이 마지막까지 방어하던 곳이라고 한다.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두 개의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왼쪽 조금 높은 곳, 크기가 작고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이 17세기 전반에 세워진 옛 성모성당(The older Church of the Virgin)’이다. 하지만 내부가 파괴되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이 성당의 벽은 돌과 흙으로 만들어져 더 오래된 느낌이 난다. 건물 내부에는 이곳 영주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성당의 붉은 지붕과 비잔틴 양식의 돔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쪽의 좀 더 크고 잘 보존된 건물이 큰 성모성당(The larger Church of the Mother of God)’이다. 성모승천성당(Curch of the Assumption Virgin Mary)으로도 불리는 이 성당은 1689년 이곳 영주 바르드짐 공작(Duke Bardzim)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내외부에 조각과 그림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성채에는 피라미드 모양의 지붕을 한 네모난 탑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교회에 바싹 붙어 있다. 성의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시설이지만, 성채의 터가 하도 좁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두 건물의 사이, 벽면에 포도나무로 여겨지는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와 관련된 부조가 아닐까 싶다. 이곳 조지아가 와인의 성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의미심장한 표현일 수도 있겠고...

 성당의 파사드(facade). 출입문 주위는 기하학적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파사드 상단에는 포도나무 장식이 있는 십자가를 새겨놓았다.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한 성녀 니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녀 니노가 조지아로 오게 된 데는 성모 마리아의 계시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꿈에 나타나신 성모가 포도나무 가지로 만든 십자가를 그녀에게 건네며 조지아로 갈 것을 명했다는 것이다. 조지아 교회에서 포도 나뭇가지 십자가를 들고 있는 여인의 초상화를 쉽게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십자가 양쪽에는 사자와 용 등의 동·식물이 새겨져 있다. 천국을 의미하는 것들이라는데, 그렇다면 눈매가 매서운 저 부조는 천사쯤 되시겠다. 맨발인 여느 천사들과는 달리 구두까지 신은 게 신기했지만 말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벽화와 그림들을 볼 수 있다. 조지아정교회, 아니 동방정교회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돔을 올려다보니 16개의 작은 창이 나 있다. 동서남북 사방을 각각 네 개씩으로 나누어놓았나 보다.

▼ 정면의 성화벽 이코노스타시스(eikonostasis)에는 예수와 성모 그리고 사도상이 그려져 있다.

 유화 형태의 벽화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반면, ‘템페라 기법(tempera painting : 달걀노른자와 아교를 섞은 불투명 안료인 템페라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제작한 벽화는 색이 많이 바래있었다.

 천국과 지옥을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저울’. 사람이 죽었을 때. 선행과 악행을 저울에 달아 심판한다는 내용이지 싶다.

 기둥의 그림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이콘 형태로 그려진 예수상과 사도, 성인은 하나같이 색이 바랬다.

 그림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갖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알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성채 안 풍경.

 성채 안 풍경.

 성채의 동쪽 끝으로 가면 종탑이 있다. 진발리 호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성채 앞 휴게소는 레스토랑과 기념품점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추운 지역이어선지 양모로 만든 기념품도 눈에 띈다. 모자와 양말, 옷 등 종류도 다양한데, 가격도 비싸지 않은 편이었다.

 구다우리로 가는 길. 멀게만 보이던 고봉이 차츰 가까워지고 길은 높은 산을 가로지르며 치고 들어간다. 승용차나 버스, 트럭 할 것 없이 높은 산 언덕길을 안간힘을 쓰며 오른다. 하지만 여행객에게는 신나는 구간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 십자가는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코카서스산맥을 넘어가는 이 험한 고갯길은 즈바리 패스(Jvari pass)’로 불린다. ‘즈바리(Jvari)’는 십자가를 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개이름을 형상화한 조형물일지도 모르겠다.

 점점 높아지는 고도를 따라 창밖 풍경도 점점 변해간다. 그러다 숙소인 구다우리에 가까워질 무렵, 가이드의 배려로 코카서스산맥의 속살을 엿볼 수 있는 전망대에 잠시 들렀다. 전망대의 이름까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구다우리 전망대가 어떨까? 구다우리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니 말이다.

 절벽 위의 전망대는 제비집처럼 벼랑에 매달려있는 모양새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보려주려는 듯 허공을 향해 툭 튀어나갔다.

 발아래가 허전할 만도 하겠건만, 관광객들은 누가 하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에 얼을 빼앗겨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난간에 서자 코카서스의 전형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높고 낮은 산이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산 아래 언덕에는 조지아의 전통가옥과 마을이 고즈넉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에서 홀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집도 있고 몇 채씩 옹기종기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천만리 먼 이국에서 한 폭의 동양화를 마주한 느낌이 든다.

 휴식 겸해서 들르는 여행객들의 숫자가 제법 되는지 매점까지 들어서 있었다. 과일주스와 꿀 같은 지역특산품들을 파고 있는데, 성수기가 아니어선지 식당은 문이 닫혀 있었다.

 구다우리(Gudauri)’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구다우리는 카즈베기(또는 스테판츠민다)로 가는 도중 거치는 작은 마을이다. 아나누리에서 북쪽으로 50km쯤 떨어진 즈와리 고개, 해발 2,200m의 남쪽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스키 리조트로 유명하다. 20개나 되는 스키 트랙을 갖고 있단다. 구다우리를 스키를 위해 태어난 곳(Born to ski)’이라고 홍보할 정도라나?

 숙소인 베스트 웨스턴 구다우리(Best Western Gudauri)’.

 고산지대인 구다우리는 여름에도 아침 기온이 10 이하일 정도로 서늘해서 에어컨이 필요 없다고 했다. 오히려 5월까지 난방을 할 정도란다. 거기다 풍광까지 뛰어나 스키 시즌이 아닌 여름에도 휴가를 보내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그래선지 옥외 수영장을 부대시설로 둔 리조트까지 눈에 띈다.

 날이 어둡기 전에 도착한 덕분에 흰 눈을 뒤집어 쓴 코카서스산맥의 아름다운 풍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즈바리 패스(Jvari pass)’를 지나 카즈베기로 간다. 카프카즈의 험준한 산들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차창 밖 생태계가 고산 식생대로 바뀐다. 그러다 해발 2379m 즈바리 고개(Tsvari Pass)’를 넘는다. 참고로 즈바리 패스는 코카서스산맥을 넘어가는 험한 고갯길이다. 구다우리에서 산 반대편에 있는 코비(Kobi) 마을까지 15km에 이르는 도로를 말한다. 즈바리(Jvari)는 십자가를 뜻한단다. 러시아제국 때 이 고갯길 정상에 거대한 대리석 십자가가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구다우리에서 10km쯤 달렸을까 산등성이에 멋진 조형물 하나가 세워져 있다. 조지아와 소련의 우호를 기념하는 벽화형 기념물인데, 1783년 러시아 케터린 2(Catherin II)와 카헤티 왕 에레클 2(Erekle II)가 서명한 조약의 200주년을 기념해 1983년에 세워졌다. 사람들은 조형물 앞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조형물(전망대)에 올라가 구다우리 협곡의 경치를 구경한다.

 조형물은 깎아지른 절벽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우정 전망대로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커다란 원통형 벽으로 이루어진 조형물 벽은 1,217개의 화려한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1783년의 -러 우호조약은 말이 우호조약이지 조지아가 외교적 자주권을 러시아 제국에 양도하는 불평등조약이었다. 그 때문에 조소 우호기념물에 대한 조지아 사람들의 감정은 좋은 편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이를 알 리가 없는 이방인들은 낯선 조형물이 마냥 신기한기만 하다.

 그림은 조지아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에서 자식을 지키는 어머니의 형상을 한 성모 마리아를 한가운데 두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조지아 역사에서 위대한 일을 한 왕들, 산업사회를 이끌어 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어머니로서 자식인 조지아를 보호하는 듯한 장면이 묘사되었다고 해서 조지아인들의 반감을 사고 있단다.

 성 조지가 용을 퇴치하는가 하면, 조지아 국민들이 포도주를 마시며 신나게 춤추는 장면도 있다. 총을 들고 전장으로 나가는 조지아 젊은이들도 보인다.

 난간에 서자 전망대라는 이름에 걸맞는 조망을 선사한다. 눈 덮인 코카서스산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 광경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발아래로는 아라그비강의 발원지인 악마의 계곡(Devil's Valley)이 펼쳐진다. 저 계곡은 죽음의 계곡으로도 불린다고 했다. ‘즈바리 패스가 험하고 굴곡이 심해 교통사고가 자주 나서란다. 때문에 도로확장과 터널굴착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여행의 묘미는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가 아니겠는가. 거기다 사랑까지 더해졌으니 이를 놓칠 집사람이 아니다.



여행지 : 조지아 - 트빌리시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트빌리시(Tbilisi) : 대카프카스 산맥 남쪽 기슭의 쿠라 강(Kura R.)’ 유역에 위치한 조지아의 수도. 5세기 사카르트벨로 왕 바흐탄그 1세 고르가살리(452-502)에 의해 세워져, 아랍인과 튀르크인들에게 점령당하기를 반복하다 1801년에는 러시아가 점령했다. 이후 그루지야 SSR의 수도를 거쳐 1991년 독립 조지아의 수도가 되었다.

 

 트빌리시 투어의 대미는 성 삼위일체 대성당(Holy Trinity Cathedral)’이 장식한다. 조지아 정교회의 총본산이자 트빌리시의 상징으로 예수 탄생 2000’, ‘조지아정교회 독립 1500주년’, ‘조지아공화국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 건축을 시작해 2004년 완공되었다. 설계는 건축가 아킬 마인디아스빌리(Archil Mindiashvili)’가 맡았는데, 정교회 중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라고 한다. 하나 더. ‘츠민다 사메바(Tsminda Sameba)’ 성당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성삼위일체 대성당이라는 뜻의 조지아어(그루지아어)를 영문 식으로 표기했다고 보면 되겠다.

 아블라바리(Avlabari) 지역 엘리아 언덕(Elia Hill)’에 위치한 대성당은 구도심에서 걸어서 20-30분이면 충분하다. 참고로 엘리아는 기원전 9세기 아합왕 통치 시기 이스라엘 북부에 살았던 선지자다.

 본당 앞. 조지아정교회를 지켜주는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열두 개의 기둥이 두 줄로 도열해있다. 각각의 기둥에는 조지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들이 부조되어 있다. 기독교를 승인해준 마리안 3, 트빌리시로 천도한 고르가살리 등등...

 계단 위, 그림처럼 서 있는 대성당은 보는 순간 완벽한 균형미에 감탄이 쏟아진다. 돔 위에 얹은 7.5m 높이 황금 십자가의 위용도 대단하다. 성당은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고 했다. 어둠이 내리고 대성당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이 들어오면 가슴에도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켜진단다.

 대성당은 길이가 70m, 폭이 65m, 높이가 87m에 이른다고 한다. 지하층의 깊이가 13m라고 하니, 지하로부터 따지면 높이가 100m나 되는 셈이다. 외관으로 볼 때 성당은 4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옷차림에 주의가 필요하다. 여자는 바지는 길고 짧고 간에 무조건 안 된다. 스커트도 길이가 짧으면 퇴자다. 민소매도 안 된단다. 남자라고 해서 봐주지는 않는다. 모자와 반바지. 민소매의 착용이 금지된다.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웅장함으로 시선을 압도하는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정교회 특유의 정갈함과 고즈넉함이 가득했다. 성당의 중심은 돔이다. 사방으로 뚫린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온 빛이 성당을 밝혀준다. 하지만 성화로 치장된 로마 가톨릭교회들과는 달리 텅 비어있어 고즈넉한 감을 준다.

 성화는 돔의 아래, 제단 뒤쪽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반원형 공간에 예수님이 의자에 앉아 오른손을 들어 신도들을 축복하고, 왼손에는 성경을 들어 가르침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그려놓았다. 예수님 아래는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12사도가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이들 성인의 두광 양쪽으로 이름이 적혀 있다. 12사도 아래 초상들은 나중에 성인으로 추대된 위대한 인물들이라고 한다.

 성당에는 모두 9개의 경당이 있다고 했다. 지하에 5, 1층에 4개가 있는데, 그중 둘은 조지아 정교와 직접 관련된 성녀 니노와 성 조지에게 바쳐졌다고 한다.

 다른 경당들은 돔은 물론이고 그 아래 벽면까지도 텅 비어 있었다.

 본당에서는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다들 무릎을 꿇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애초부터 없다. 그러니 미사 내내 무릎을 꿇었다 일어서기를 반복할 것이다. 정교회의 미사는 2~3시간씩 진행되기도 한다니, 웬만한 체력 갖고는 미사에 참석하기도 어렵겠다.

 사제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데, 하물며 신도들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는가.

 성당 내부는 다양한 이콘(icon, 성화)들로 가득했다.

 성화 속 인물들은 다양했다. 성모 마리아, 성녀 니노 같은 여성들이 있는가하면, 조지아 정교에서 떠받드는 사도 성 안드레아와 성 조지 같은 남성도 있다. 성녀 니노의 성화가 유독 많은 것은, 그녀가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했기 때문이란다.

 성녀 니노의 초상도 그중 하나인데, 그녀에 대한 얘기는 오마이 뉴스의 기사를 옮겨본다. 320년경 카파도키아 출신의 수녀 니노(Nino)가 이베리아 왕국 남부지역에서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324년경 왕국의 수도인 므츠헤타(Mtskheta)에 이르러 왕비인 나나(Nana)를 만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게 된다. 그러나 미리안(Mirian) 왕은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고, 왕비가 기독교를 버리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위협한다. 전승에 따르면 326년경 왕은 숲으로 사냥을 나간다. 그런데 갑자기 숲이 어두워졌고 왕은 길을 잃는다. 절망적인 상황에 당황한 왕은 나나가 믿는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자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면서 길이 나타났다. 므츠헤타의 왕궁으로 돌아온 미리안은 니노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 기독교 사상은 왕족과 관리들은 물론 국민들에게까지 전파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되었다. 이베리아 왕국은 아르메니아에 이어 두 번째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콘은 동방정교회에서 우상논쟁에 휩싸기도 했다. 그러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어 실재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림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 성상은 교회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되어 특별한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정교도 신자들은 기도할 때 성화에 손을 대고 하는 모양이다.

 그밖에도 다양한 이콘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금이나 은으로 입혀져 화려하기 짝이 없다. 다양한 보석으로 치장된 작품도 눈에 띈다. 조지아 정교회의 본산이라서 그런지 다른 교회들보다도 훨씬 더 화려하다는 느낌을 준다.

 밖으로 나오니 입장할 때 무심코 지나쳤던 종탑이 눈에 들어온다. 정문 쪽으로는 아까 거론했던 열두 개의 기둥들이 두 줄로 도열해있다.

 종탑. 9개의 종이 매달려 있다고 했으나 헤아려보지는 않았다.

 그밖에도 성당 주변에는 주교관, 신학대학, 세미나실, 휴게소 등 다양한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조지아정교회 총대주교가 주석하는 성당에 걸맞는 규모라 하겠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덕분에 성당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맞은편에 있는 Mother of Georgia와 오른쪽에 하늘 높이 솟은 므츠민다파크의 타워가 보인다. 트빌리시는 이렇듯 높은 건물들이 많지 않아서 좋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왕으로 여겨지는 흉상들을 세워놓았다. ‘타이무라즈 1의 흉상도 그중 하나인데, 그에 대한 내력은 오마이 뉴스의 기사를 인용해본다. 타이무라즈 1세는 1605년부터 1648년까지 바그라티의 왕으로, 이란의 사파비 제국으로부터 조지아의 독립을 쟁취하기 노력하다 1663년 죽었다. 그는 조지아 정교가 이슬람세력에 의해 유린되는 것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사파비 제국의 수도인 이스파한으로 끌려가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는 시인으로도 명성이 높다. 페르시아 시를 조지아어로 번역하면서 시작 능력을 키웠고, 1625년 자신의 어머니 케테반(Ketevan) 왕비의 수난과 순교를 시로 완성했다. 이 작품 속에서 시인은 삼위일체 신에게 바치는 어머니의 기도를 인용하고 있다. 그 때문에 성 삼위일체 대성당 정원에 그의 흉상이 모셔진 것 같다.

 다른 한 인물은 안내판이 없어 누구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조지아어를 모르니 있어봤자 그게 그거였겠지만...

 안내판이 붙어있는데도 그 내력을 알 수 없었던 이 빗돌이 그런 상황을 증명해준다고 하겠다.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정원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집사람 매의 눈에 뭔가가 걸렸던 모양이다. 후다닥 달려갔다 오더니 오디를 한 움큼 건네준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의 오디보다 훨씬 큰데다 새콤달콤하기까지 했다.

 길을 나서기 전 들른 화장실. 구분이 확실한 남녀 표시가 눈길을 끈다. 오래 전, 국내 어느 관공서 화장실에서 전통혼례복을 입혀놓은 남녀표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적이 있었다. 우리 문화를 조금이라도 더 소개하고 싶은 충정이었겠지만, 이를 본 외국인들로서는 남녀구분이 썩 편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여행지 : 조지아 - 트빌리시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트빌리시(Tbilisi) : 대카프카스 산맥 남쪽 기슭의 쿠라 강(Kura R.)’ 유역에 위치한 조지아의 수도. 5세기 사카르트벨로 왕 바흐탄그 1세 고르가살리(452-502)에 의해 세워져, 아랍인과 튀르크인들에게 점령당하기를 반복하다 1801년에는 러시아가 점령했다. 이후 그루지야 SSR의 수도를 거쳐 1991년 독립 조지아의 수도가 되었다.

 

 첫 방문지는 시오니 대성당’(Sioni Cathedral). 트빌리시의 올드 타운인 시오니 쿠차(시오니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 면은 쿠라 강의 오른쪽 제방에 접하고 있다. ‘시오니 안식성당(Sinoni Catheral of the dormition)’ 또는 시오니 성모 마리아 안식교회(Virgin Mary dormition church Sioni)’로도 불리는데, ‘시온(Sion)’이라는 이름은 예루살렘의 시온 산(Sion Mt.)’을 뜻하는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근처에 있는 시오니 쿠차(Sioni Kucha)’라는 거리에서 따왔다고 한다.(이하 두산백과에서 발췌 정리)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여행사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흑해 연안의 바투미(조지아 제2의 도시)’도 들렀다. 그리고 튀르키예의 리제로 넘어가 이스탄불(환승)을 거쳐 귀국했다.

 트리알레티 산맥과 카르틀리 산맥 사이를 흐르는 쿠라 강(Kura R.)’ 유역에 위치한 조지아의 수도. 관광지는 대부분 쿠라강 왼쪽의 올드 타운과 평화의 다리 근처 유로광장에 집중되어 있다.

 교회는 575년경 이베리아의 왕자 구아람(Guaram)이 세우기 시작해, 그의 후계자 아다르나제(Adarnase)의 재임시절인 639년에 완공되었다. 이후 아랍·몽골·티무르·페르시아 등 침략자들에게 수차례 파괴됐고, 그때마다 재건되었다. 현재의 교회는 1112년 데이비드 왕(King David)에 의한 복구 버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하나 더. 2004 성삼위일체대성당이 축성되기 전까지 조지아정교회 총대주교(Catholicos)의 주석(駐錫) 성당이었다. 총대주교와 유명인사의 유해가 묻혀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1917년 러시아 정교로부터 조지아 정교의 독립을 이룩한 성 키리온 2(St. Kyrion II)의 유해도 이곳에 묻혀있다.

 동방의 비잔틴 양식과 서방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결합한 중세 조지아 성당 건축의 전형이다. 서쪽에 입구가 있고, 동쪽 끝 반원형 공간에 제단을 중심으로 한 성소(聖所)가 있다. 건물은 트빌리시 남서쪽에 위치한 볼니시(Bolnisi) 마을에서 가져온 노란색 응회암을 사용해 건립했단다. 그래서 파스텔 톤의 노란빛을 띠는 모양이다.

 성당 북쪽 안뜰에는 알렉산더 1(King Alexander I)가 보내준 돈으로 세웠다는 독립형 3층 종탑(old bell tower)이 있다. ·터전쟁(Russo-Turkish War, 1806-1812)에서 러시아가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12년에 건립했단다.(내 사진은 구도가 맞지 않아 인터넷에서 빌렸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전체적으로 어둡다. 하지만 돔의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비치는 성소는 상대적으로 밝은 편이다. 그나저나 미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는 실례를 범하고 말았다.

 성당 내부는 원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복된 외세의 침입으로 훼손되었고, 지금의 벽화는 1850-1860년 러시아 화가 크나즈 그리고리 가가린(Knyaz Grigory Gagarin: 18101893)’이 그렸다고 한다. 이때 전통방식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모습을 띠게 되었단다. 1980년대에는 조지아의 예술가 레반 추츠키리즈(Levan Tsutskiridze)가 서쪽 벽화의 일부를 그리기도 했다.

 돔의 천정에는 근엄한 모습의 예수상이 상반부만 그려져 있다. 왼손에는 성경을 들고 오른손은 높이 들어 온 세상에 축복을 내린다. 머리 뒤에는 두광이 있고, 양쪽으로 IC XC라는 글자가 있다. 이것은 동방정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다. 그 아래로 성모자상, 천사상, 12사도상, 성인상 등이 그려져 있다. 그 중에는 성녀 니노상도 보인다.

 벽에는 예수와 성모마리아의 일생과 관련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조각은 대개 금물로 장식되어 있다.

 조지아의 상징이라는 성 니노(St. Nino)’ 포도나무 십자가(Grapevine Cross)’는 제단 왼쪽에 있었다. ‘조지아 십자가 성 니노의 십자가로도 불리는데, 전설에 의하면 4세기 초 꿈속에서 성모마리아로부터 조지아에 가서 기독교를 전파하라는 계시를 받은 성녀 니노가 저 십자가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었다고 전해진다.

 십자가는 마당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하단의 부조가 궁금해 살펴보다가 갈 길이 멀다는 가이드의 재촉에 쫓겨 그만두고 말았다.

 두 번째 방문지인 유럽광장으로 가는 길. 카페와 바, 레스토랑이 밀집되어 있는 좁고 아름다운 골목을 지난다. 길가에는 와인 전문점이 특히 많다. 나이트클럽도 여럿 보인다.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할 것 같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반갑다며 말을 건네 온다. ‘Alcohol may be man`s worst enemy, but be Bible says love your enemy’ 술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이지만, 성경은 적을 사랑하라고 말했다나?

 깐지를 든 타마다(Tamada)’를 이곳에서도 만났다. 조지아도 우리처럼 전통 건배 문화인 타마다(Tamada)’가 있다. 타마다는 저녁식사 혹은 연회를 뜻하는 말로, 수르파(Surpa)에서 건배를 제의하는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그는 깐지라 부르는 뿔잔을 들고 유머나 덕담을 하면서 행사를 이끌어간다. 행사의 리더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참고로 타마다 동상의 원형은 쿠타이시(Kutaisi) 서남쪽 바니(Vani)에서 발굴된 기원전 7세기의 청동조각상이라고 한다. 이게 흐르는 세월의 무게를 못 배기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하면서 저런 술주정꾼이 되어버렸다나?

 또 다른 조형물. ‘트빌리시의 어원은 따뜻하다라고 했다. 이는 나리칼라(Narikala) 요새 인근에 유황온천인 설퍼 바스(Sulphur Baths)’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저 여인은 지금 온천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좁고 아름다운 얀 샤르데니(Jan Shardeni)’ 거리를 빠져나오자, 육중한 성벽을 배경삼은 광장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박탕 고르가살리 광장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맞은편에 보이는 메테키 성당을 바라보며 쿠라 강(또는 무츠바리 강)’을 건넌다. 이때 이태리 건축가 미켈 데 루치가 설계했다는 평화의 다리(Bridge of Peace)’가 얼굴을 내민다. 금속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유리를 얹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무튼 강이 끊어놓은 트빌리시의 올드타운과 뉴타운을 다시 연결시켜 놓았으니 능히 평화라는 이름을 얻을 만하다.

 메테키 다리 건너, ‘쿠라 강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는 메테키 성당이 걸터앉아 있었다. 공식명칭은 메테키 성모승천 성당(Metekhi St. Virgin Church)’. 교회의 역사는 5세기 고르가살리왕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195년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타마르(Tamar) 여왕이 신발을 벗고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건물은 바그라티 왕조의 데메트리우스 2(Demetrius II) 때인 1278년부터 1289년 사이 지어졌다. 1600년대 이후 창고·수도원·성채·감옥 등으로 그 용도가 변화되기도 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예배공간으로 다시 되돌아온 것은 1988년이다.

 메테키 성당 앞 바위 언덕 위에는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 439~502) 의 동상이 있다. 고르가살리는 과거 이베리아(Iberia, 현재 조지아 동부) 지역을 통치하던 왕으로, 트빌리시라는 도시를 건설한 고대의 명군으로 유명하다.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그는 비잔틴제국과 동맹을 맺고, 사산조 페르시아와는 대립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잠시 후 도착한 유럽광장(Europe Square)’의 로터리(rotary). 하얀색 십자가를 한가운데 놓고, 빙 둘러서 조지아 국기와 EU국기가 번갈아가며 펄럭이고 있다. 러시아의 위협으로 부터 벗어나려면 EU가입이 최선이라나? 그래선지 조지아에서는 어디를 가나 EU국기가 펄럭인다. 하지만 아직은 EU회원국이 아니다.

 로터리 위쪽은 리케공원(Rike park)’. 청동으로 만든 나무 조형물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새와 곤충, 나무집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 흡사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 소설에라도 나올 법한 분위기다.

 리케공원 초입에는 해발 492m에 위치한 나리칼라 요새까지 실어다주는 케이블카의 승강장이 있었다. 높이 94m 길이 508m 1 42초 동안 운행한단다.

 케이블카의 장점은 스릴과 조망이다. 발아래로 쿠라 강(Kura R.)’이 내려다보인다. 튀르키에 북동부 카르스(Kars) 고원지대에서 발원해 조지아를 관통한 다음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카스피해로 들어간다. 길이는 1,515km. 강의 길이만큼이나 이름도 다양하다. 러시아와 유럽에서는 쿠라(Kura), 튀르키에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뀌르(Kür), 이란에서는 꼬르(Korr)라 부른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키루스(Cyrus)라 불렀단다.

 상부 승강장에 가까워지면 나리칼라 요새(Narikala Fortress)’가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5세기 고르가실리왕에 의해 피난과 방어용으로 만들어진 성채이다.

 상부 승강장에서 내리면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나리칼라 요새’. ‘조지아 어머니상을 보려면 기념품점이 늘어선 오른쪽으로 가야한다. 우린 조지아 어머니상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 승강장 근처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망원경도 눈에 띈다.

 난간에 서자 트빌리시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인구 124만을 자랑하는 트빌리시는 조지아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다. 트빌리시(Tbilisi)라는 이름은 1936년 공식화됐다. 그 전까지는 페르시아어에 근거한 티플리스(Tiflis)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반대 방향에도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솔로라키 언덕 남쪽에 있는 조지아 국립식물원(National Botanical Garden of Georgia)을 눈요기해보라는 모양이다.

 시간이 없어 식물원으로 내려가 보지는 못했다. 때문에 다른 이의 글로 대신해본다. 원래 이름은 성채(요새) 정원이었다. 1846년부터 티플리스 식물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데, 현재 97ha( 97만 평)의 면적에 3500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식물원 안에는 오렌지원, 장미원 등이 있으며, 폭포도 있고 종자은행도 있다. 그리고 6개의 과학연구부에서 식물의 생육과 품종개량, 토양보존과 자연보호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짚라인 탑승장도 눈에 띈다. 앉아서 탈 수 있도록 해놓아 겁이 많은 사람들도 시도해볼만하겠다.

 이곳 솔로라키 언덕은 조지아 여행의 필수 코스다. 그러니 오가는 사람들로 붐빌 것은 당연. 때문에 여행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상점들이 줄을 잇는다.

 그 끄트머리에서 조지아 어머니상(Mother of Georgia)’을 만났다. 높이가 20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조각상은 1958년 트빌리시 탄생 15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조각가인 아마슈켈리(Elguja Amashukeli)의 작품으로,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1963년 알루미늄으로 덧씌워졌으며, 1996년 현재의 모습으로 교체되었다.

 조지아 전통복장을 한 여인이 왼손에는 포도주를 담은 대접을, 반면에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친구에게는 와인을 선사하지만 적()에게는 칼을 쓴다는 의미다.

 뒤쪽에는 자그만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조지아의 어머니 상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하지만 트빌리시를 내려다보는 형상이라서 뒷모습만 가능하다.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쪽, 그러니까 나리칼라 요새쪽으로 간다. 하지만 금방 포기해버리고 만다. 요새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절벽 위 길이 만만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반평생을 산을 누비며 살아왔고, 심심찮게 암벽도 타봤지만 나이가 칠십을 넘긴 지금 무리해가며 올라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요새는 5세기 후반 고르가살리 1세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1100년 전후 다비드 4세 때 증축되었으며, 몽골족의 침입 때 작은 성채라는 뜻을 가진 나린칼라(Narin Qala)라는 이름을 얻는다. 16-17세기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1827년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성채 안에는 성 니콜라스 성당이 있다. ! 요새는 아라비아 양식이라고 했다. 때문에 7세기 이슬람제국 우마이야 왕조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단다.

 마지막으로 들른 자유광장은 구시가지의 중심에 해당한다. 첫 이름은 예레반 광장이었고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잠시 등장했던 조지아 공화국 시기에는 자유광장, 그 뒤 소련 시절에는 비밀경찰국장인 베리아의 이름을 딴 광장이 되었다가 이내 레닌 광장이 되었다.

 예전 레닌의 동상이 있던 자리는 시민 혁명 후 자유기념탑으로 바뀌었다. 높이 35m의 기둥 꼭대기에는 건국신화의 성 게오르기우스 황금빛 기마상이 있다. 참고로 성 게오르기우스는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이자 십사구난성인(十四救難聖人)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지아 국명의 어원이라고 한다. 악룡 퇴치 전설에 따라 주로 창이나 칼로 용을 무찌르는 백마 탄 기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광장 옆에 있는 캘러리아 쇼핑몰에 들러 아이스 와인 3병을 샀다. 세일 기간이라서 한 병에 15불 밖에 하지 않는다는 종업원의 말에 귀가 솔깃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구입 한도(1인당 1)를 넘길 경우 관세가 구입가와 거의 맞먹는다는 것도 앱으로 통관신고서를 작성하면서 처음 알았다. 덕분에 한 병은 이동 중에 마셔버렸고...

 해거름 무렵 유럽광장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하러 메테키 언덕 위에 있는 식당가로 올라간다. 이때 퀸 데레얀 궁전(Queen Darejan palace)’이 눈에 들어온다. 엘레클 2(Erekli )가 그의 왕비인 데레얀을 위해 1776년에 지었다고 한다.

 식사는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가 구워져 야채샐러드와 함께 나온다. 그리고 빵과 스프도 나온다. 조지아가 자랑하는 와인이 제공됨은 물론이다. 이 음식을 먹으면서 공연을 즐기면 된다. 조지아 전통춤은 마치 탭댄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경쾌하고 스페인 플라멩고처럼 정렬적이다. 전통음악(Polyphony)은 안데스산맥의 노래들처럼 멜로디가 신비롭다. 먼저 가수가 나와 전통음악부터 동시대 음악까지 불러준다. 다음에는 남녀 두 쌍이 나와 역동적인 춤을 보여주는데, 이들 공연이 식탁 사이 공간에서 이루어져 공연자와 관객이 하나가 되는 장점이 있다.

 트빌리시는 야간관광의 명소로 알려진다. 경관도 경관이지만 치안이 좋아 안심하고 관광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호텔방에서 소주잔이나 홀짝거리고 있겠는가. 하지만 예전의 조지아 경찰은 부패의 상징이었단다. 이를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이 대대적인 경찰개혁을 단행했다. 우리나라처럼 무늬만 해경 해체가 아니라 정말 경찰을 해체해 버렸다. 기존 경찰 조직을 전부 해체하고 새로 경찰을 뽑아서 조직을 재구성했다. 경찰서도 가장 화려한 건물로 새로 짓고 유리로 외벽을 지어 투명한 경찰임을 강조했다. 급료도 비약적으로 높여주었다. 이후 조지아에서는 경찰이 신랑감 1로 꼽힌다나?

 어둠이 내리자 주변의 역사적인 건축물과 현대적인 구조물에 조명이 들어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노란색으로 빛나는 메테키 성당은 더욱 신성해 보이고. 그 옆의 고르가살리 동상도 낮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리케 공원의 대형 애드벌룬. 흰색 바탕에 ‘M2’라고 적혀있는데, 날씨가 좋으면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했다.

 밝은 조명에 맨몸을 드러낸 조지아 어머니상은 더욱 강렬해졌다. 친구여 어서 오고, 적이면 물러가라.

 평화의 다리 LED로 조명해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 물고기의 뱃속을 거니는 셈이다. 참고로 다리를 트빌리시의 핫 플레이스로 만든 조명은 프랑스의 조명 디자이너 필립 마르티노(Philip Martinaud)가 설계했다. 난간에 미디어글라스가 설치돼 다양한 이미지와 영상을 연출한다. 덕분에 많은 여행자들이 다리 위에 몰려 인생샷을 찍느라 분주하다.

 버스킹이 한창인 거리의 악사.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는 게 미안해 1유로짜리 동전을 넣어주었다.

 저 멀리 나리칼라 요새는 조명을 받아 더 우뚝해 보인다. 원래는 저곳에서 트빌리시의 야경을 즐기려고 했는데, 일기불순으로 케이블카가 운행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용호도(龍虎島)

 

여행일 : ‘24. 9. 14()

소재지 :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용호리

트레킹 코스 : 용초선착장정자(수동산)갈림길저수지터(포로수용소 유적, 지도에서 양식장)용머리(수동산)갈림길수동산 정상용초항고양이보호분양센터(지도에서 학생수련장)호두선착장(소요시간 : 11.21km/4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통영에서 남동쪽으로 14km 지점에 위치한 동서로 길게 뻗은 섬으로, 최고봉은 섬의 중앙에 위치한 수동산(秀東山, 191.9m)이다. 해안선은 비교적 단조롭다. 남쪽은 암석해안을 이루며, 북쪽은 사빈해안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취락은 북서쪽에 위치한 용초(龍草) 마을과 북동쪽에 위치한 호두(虎頭) 마을에 집중해 있다. 이 두 마을의 이름을 따서 용호도(龍虎島)‘가 되었다.

 

 찾아오는 방법.

용초도로 들어가려면 일단 통영항 여객선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이곳에서 용호도(옛 용초도)로 들어가는 배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용호도말고도 연화도·욕지도·한산도·비진도·소매물도·두미도·노대도 등 남해바다의 수많은 섬을 오가는 배들이 통영항을 기항지로 삼아 운항하고 있다.

 용호도는 통영에서 남동쪽으로 14km, 면소재지인 한산도(閑山島)와는 2km쯤 떨어진 지점에 있다. 면적은 3.407(국내 섬 중 100번째로 크다)이고, 해안선 길이는 8.0km이다. 주위에는 비진도·죽도·추암도 등이 있으며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버스에서 내리니 새벽 4 30. 배를 타기 전 요기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터미널 앞에 있는 서호전통시장’, 홍합 까기에 여념이 없는 활어 점포들을 지나 훈이시락국으로 갔다. 이 시간에 문을 연 식당은 이 집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메뉴도 백반(6천원)’이 유일하다. 셀프코너에서 먹고 싶은 반찬(열 가지 정도가 준비되어 있었다)을 골라 접시에 담은 후 자리에 앉으면 주인장이 밥과 시래깃국을 가져다준다. 빨리 그리고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아무튼 난 멸치볶음과 어묵무침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 병까지 비운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추석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이른 새벽인데도 터미널은 고향 찾아가는 귀성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우리를 태우고 갈 한산농협 카페리2’. 하루에 세 번(7:00, 10:30, 14:30) 운항한다. 용호도에 있는 호두항 용초항 말고도 죽도·진두·비산도·화도 등 여러 항구들을 들른다.

 통영항을 출발한지 40분쯤 지나 용호도의 북서쪽 끄트머리쯤에 위치한 용초항에 도착했다. 용호도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섬에 있는 두 선착장 중 용초항에서 하선하여 섬을 돌아본 다음, ‘호두항에서 배를 타고 통영항으로 돌아온다.

 용초항에서 출발 붉은 선을 따라 (수동산)갈림길까지 올라간다. 먼저 용머리해안을 다녀온다. 갈림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수동산 정상을 다녀온다. 용초항으로 되돌아와 해안도로를 따라 호두항으로 간다. 호두산은 등산로를 찾을 수가 없어 포기했다.

 배에서 내리면 웬만한 운동장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널찍한 물양장이다. 그 너머 마을은 그다지 큰 편은 아니다. 그래선지 마을보다는 건물 외벽에 그려진 고양이가 더 눈길을 끌었다. 고양이가 꽃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길고양이들을 인간과 다름없이 보호해주는 이 섬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벽화라 하겠다.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 여행의 정석처럼 용초마을 표지석을 배경삼아 사진부터 찍고 본다.

 다음은 용초도 안내도(南北이 바뀌었다)’. 먼저 섬의 내력부터 읽은 다음, 등산로를 꼼꼼하게 살펴본다. 해안을 따라 철탑까지 간 다음, 능선을 따라 수동산과 호두산을 종주하란다. 하지만 이를 믿어서는 안 된다. 등산로 정비가 일절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잡초가 어른의 키에 육박할 정도까지 자라 길을 찾기는커녕 한 걸음 내딛기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포로수용소 안내판도 눈에 띈다. 6·25 포로수용소 유적 하면 사람들은 흔히 거제도를 떠올리지만, 용호도는 특히나 주의가 필요한 포로들을 수용했던 섬이다. 전쟁 당시 포로수용소를 짓기 위해 이곳 주민들은 인근 섬으로 강제이주를 당해야만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몇 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니, 그 상처로부터 회복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 쉬이 상상할 수 없다.

 7 : 42, 해안도로(용초1)를 따라 동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한산도와의 사이 해협을 왼쪽에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반짝이는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히면 맑은 빛이 용초도에 흩어진다나? 바닷물이 맑다는 자신감일 것이다. 그런 곳에서 자란 미역 등의 특산물들도 많이 좀 챙겨가라는 부탁일 게고.

 선착장은 꼬맹이 어선 서너 척이 전부였다. 용호도는 바다 양식 조건이 좋아 미역양식을 많이 해왔고, 채취한 미역은 생미역을 내다 팔기도 하고 말려서 팔기도 한단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더니 어선까지 숫자가 줄어든 것일까?

 용초 마을회관(경로당과 어촌계도 입주해 있다)의 담장도 고양이를 그려 넣었다. 하긴 KBS 1TV ‘다큐 인사이트에까지 나온 용호도이니 어련하겠는가. 당시 방송에서는 외로운 섬마을 소녀와 외톨이 길고양이의 따뜻한 우정 이야기를 담은 고양이 소녀가 방영됐었다.

 7 : 49. 그렇게 잠시 걷자 2층으로 된 정자쉼터가 반긴다. 남쪽 해안에 위치한 용머리(황금바위)’로 넘어가는 임도는 정자 오른쪽으로 열린다. 초입에 세워놓은 용초포로수용소 표지판의 방향표시를 따라가면 된다.

 이곳에서는 그림이 아닌 실제 살아있는 고양이들을 만났다. 고양이 십여 마리가 길에서 놀고 있는데, 방금 목욕이라도 하고 나온 듯 하나같이 깔끔한 모습들이다. 주민들의 관리 없이는 불가능한 풍경이 아닐까 싶다.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는 꽤나 가팔랐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걷는 속도를 조금 떨어뜨리고 산천경개를 즐기며 오르면 될 일이다.

 내 판단은 옳았다. 시선만 조금 옮기면 아름다운 섬 풍경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임도는 무척 좁았다. 승용차라도 지나갈라치면 보행자는 길섶으로 내려서야만 했다. 그래선지 일정 간격을 두고 교차(交叉) 장소를 만들어두고 있었다.

 선착장의 용초도 안내도에 나타나있던 능선으로, 114m봉과 161m봉을 거쳐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철탑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등산로 정비가 되어있지 않아 답사는 불가능하다.

 8 : 00. 능선에서 만난 ‘6·25 용초도 포로수용소유적 가는 길 팻말. 이때만 해도 이게 유적지 진입로를 나타내는 표식인 줄 몰랐다.

 때문에 유적지를 지나치고 나서야 잘못을 깨달았다. 주변 풍광을 살펴보다 문득 안내판까지 세워놓은 시멘트 구조물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유적지로 들어가는 길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길은 없었다. 어른의 키에 이를 정도로 웃자란 잡초가 길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행운일까? 주변을 서성이다 문득 벌초가 되어있는 길 하나를 찾아냈고, 방향은 약간 틀리지만 일단 내려가 보기로 했다.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기에 찾아갔더니, 행복은 그 다음 산 너머에 있다더라고 했던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길의 끄트머리에서 유적지 대신 벌초가 한창인 묘역을 만났다.

 8 : 05. 눈대중으로 방향을 잡은 다음, 웃자란 잡초를 헤치며 나가자 원형의 저수탱크가 나타났다. 6·25 때 수용자(포로) 및 국군에게 식수를 공급하던 저수조(貯水槽), 깊고(2.7m)도 넓은(직경 18.5m) 것이 당시 수용소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안내판은 이곳을 용초도 포로수용소 급수장(저수시설)’으로 적고 있었다. 참고로 1952 6월에 설치해 1954 4월까지 유지된 용초도 포로수용소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인원증가와 포로 집중관리를 위해 계획됐다. 섬에서 만난 주민들은 거제도에 수용된 포로 중에서 악질만 옮겨온 것이라고 했다. 아무튼 포로수용소는 모두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제1구역 작은마을은 4,  2구역 큰마을도 4, 비진도가 바라보이는 수동산 서쪽 사면에 8동 등 모두 16개 수용동이 만들어졌다. 하나 더. 이곳 용초도에는 북한인민군 장교 및 사병 8,040명이 수용됐었다.

 8 : 08. 몇 걸음 더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면 수동산 정상으로 간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용머리(황금바위)를 먼저 다녀오기로 했다. 하나 더. 이곳에도 포로수용소유적 가는 길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유적지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니 분명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어느 방향, 어디쯤에 어떤 유적지가 있다는 것까지 표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이곳에는 대일해운에서 만든 이정표도 세워져 있었다. 통영을 기항지로 삼는 여객선 운영회사인데 사회봉사 차원에서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황금바위 쪽으로 간다. 완만한 내리막길이라서 노약자들도 내려서는데 부담이 없다. 아니 소나무 숲속에서 보내오는 피톤치드 덕분에 오히려 심신이 상쾌해진다.

 8 : 14. 그렇게 잠시 내려서니 또 하나의 삼거리가 나타난다. 왼쪽으로 오솔길 하나가 갈려나가는 것이다.

 대일해운에서 만든 이정표가 잠시 들러보라며 유혹을 보내온다. 결론부터 말하면 호두초소라는 지명에 이끌려 다녀왔다. 포로수용소 시설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포장이 비포장으로 바뀌었을 뿐 길은 임도처럼 폭이 넓었다. 하지만 정비가 되어있지 않아 걷기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8 : 20. 포로수용소 유적지일지도 모르겠다는 내 예측은 옳았다. ‘작은솔등 삼여 사이 협곡에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 역시 포로수용소에서 사용하던 시설이란다.

 포로수용소 유적(저수지)’ 안내판. ! 인터넷에서 떠도는 지도들은 이곳을 양식장으로 적고 있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에는 폐() 가두리양식 시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닷가로 더 내려가 보기로 했다. 이 저수지가 한국군 주둔지에서 제3구역으로 가는 길에 있다는 안내판의 문구 때문이다. 아무튼 이후부터의 길은 무척 험했다;

 8 : 25. 웃자란 잡초무더기를 헤치며 내려서자 유적지 대신 아름다운 바닷가가 나왔다. ‘작은솔등 삼여 사이로, 바다가 열리며 매물도와 소매물도, 소지도 등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작은솔등 삼여 등 좌우로 펼쳐지는 곶부리()도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먼 바다에서 몰아쳐오는 파도에 씻기고 시달리며 기기묘묘한 모양새의 바위들을 만들어냈다.

 8 : 36.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황금바위 쪽으로 간다. 제법 가파른 포장임도가 계속된다.

 8 : 45. 임도 끝에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러자 용초도 제일 비경이라는 용머리해안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갯바위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용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왼쪽은 작은솔등이다. 이곳도 역시 바다를 향해 뻗어나갔는데, 용머리만큼은 아니어도 험상궂은 바위지대가 해안선을 감싸고 있다.

 그 험상궂음은 작은솔등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그리고는 더 이상 진행을 못할 정도로 날카로우면서도 높아져버린다. 발걸음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때 용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본섬과의 사이가 움푹 파인 게 별도의 섬처럼 보인다.

 물질하는 해녀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용머리 쪽으로 간다. 참고로 용호도의 옛 지명인 용초도(龍草島)’는 저 용머리에서 유래했다. 용의 머리를 닮은 바위 곶()과 다른 섬에 비해 유독 풀이 많다는 두 가지 특징을 살려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18년 용초(龍草)마을과 호두(虎頭)마을에서 한 글자씩을 따 용호도(龍虎島)로 개명했다.

 용머리는 쉽게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바위지대였다. 그래선지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안전 로프를 매달아 놓았다.

 작든솔등으로 이어지는 해안. 바다는 비취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문득 6년 전쯤 들렀던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이 떠오른다. 나폴리 앞바다에 있는 휴양지로 유명한 섬인데, 난 그곳에서 맑고도 푸른 바다색깔에 놀라 꺼이꺼이는 아니어도 눈물 몇 방울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바다 색깔을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많은 이들이 통영을 일러 한국의 나폴리라고 한다. 입소문이라는 게 그냥 생기지는 않는 모양이다.

 바다 건너에는 비진도가 있다. 하나인 듯 둘이고, 둘로 보면 어느새 하나가 되어버리는 요술쟁이 섬이다. 명성에 걸맞게 섬은 두 개로 나타나고 있었다.

 아득히 펼쳐지는 남쪽바다 저 멀리에서는 꼬맹이 섬들이 흡사 돛단배라도 되는 양 두둥실 떠다닌다. 매물도와 소매물도, 어유도, 소지도 등일 것이다.

 갯바위 끝. 납작하면서도 너른 저 바위는 낚시꾼들에게 인기라고 했다. 감성돔 낚시의 일급 포인트라나? 그래선지 서너 명의 강태공이 대어의 꿈을 풀어가고 있었다.

 용머리는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꼭대기에는 이 일대가 한려해상국립공원임을 알리는 말뚝을 세워놓았다. 전남 여수시에서 경남 통영시 한산도에 이르는 한려수도(閑麗水道)와 남해도·거제도의 해안 일부를 포함하는 국립공원이다. 360여 개의 섬들이 깔려 있어 해상 경관이 아름답다고 소문났다.

 말뚝에는 국립공원에서 하지 말아야 할 사항들을 적어놓았다. 그렇다면 저 갯바위 낚시꾼들도 불법행위를 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 저게 황금바위라고 했다맞다누렇게 생긴 게 영락없는 황금덩어리이다그러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꽤나 높고 험해 보이지만 못 올라갈 정도는 아니니 말이다.

 고생깨나 해서 오른 황금바위. 강태공 둘이 드러누워 있었다. 갈치 낚시를 왔는데 하도 더워서 해 넘어갈 때까지 낮잠이나 늘어지게 잘 거란다. 휴대용 선풍기까지 들고 왔지만 삼복더위 못지않은 폭염에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더라나?

 북쪽 바다에도 크고 작은 섬들이 널려있다. 오른쪽은 미륵산이 있는 충무의 산양읍, 그 왼쪽은 학림도가 아닐까 싶다.

 반대편 울등 해안 쪽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조금은 왜소하지만 용머리해안과 비슷한 풍경을 보여준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본섬과 용머리를 연결시키는 능선의 안부를 지난다. 그런데 이게 하도 낮아 파도가 조금이라도 높으면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아까 작은솔등에서 바라봤을 때 용머리가 섬으로 보였던 이유이다.

 9 : 56. ‘능선삼거리(수동산 갈림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수동산의 정상을 향해 간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임도만큼이나 널찍하다.

 10 : 04. 그렇게 잠시 걷자 포로수용소 유적지가 반갑다며 잠시 들렀다가란다. 이번에는 국군(또는 미군)이 사용하던 국기게양대이다.

 국기게양대는 대만 남아있었다. 그 옆에는 안내판 하나만 썰렁하니 놓여있다. 그럼 포로수용소 유적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공원화한다는 얘기는 공염불이었을까? 그동안 KBS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어갔는가 하면, 다른 방송사의 취재도 수차례 있었다고 했다. 안내판도 이곳이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알려준다. 그런데도 유적지 주변의 관리는 물론이고, 어디로 어디쯤 가야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는 이정표 하나 세워놓지 않았다. 이왕에 하는 일이라면 하나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근처에 또 하나의 포로수용소유적 안내판이 있었다. 저 아래 어디쯤에 한국군 초소 한국군 막사가 있을 것이다. 아니 배급저장소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난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급경사 내리막길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나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곳저곳 혼자서 쏘다닌다며 째려보는 집사람의 눈총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때문에 요 어디쯤에 있을 배급저장소의 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한 다른 분의 것을 올려본다. 그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콘크리트는 여전히 건재하다고 했다. 하지만 언제 설치한 것인지도 모를 양철지붕은 많이 부식되어 있더란다.

 잠시 후, 길이 오솔길로 변하는가 싶더니 웃자란 잡초를 헤쳐가야 할 정도로 거칠어져 버린다. 경사도 아까보다 많이 가팔라졌다.

 그러다 대운해운의 이정표(공동묘지에서 정상 방향을 가리키는)를 지나면서부터는 버겁다싶을 정도로 가팔라져버린다.

 10 : 22.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렵게 올라온 만큼이나 실망도 컸다. 볼거리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저 능선 상에서 뽈록하니 솟아오른 한 지점에 불과하다고나 할까?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탓에 조망마저도 트이지 않는다.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정상은 텅 비어있기까지 했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저 블랙야크 섬&에서 붙여놓은 정상표지판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대운해운의 이정표는 반대편으로 진행하란다. 선답자의 표지기들도 그쪽에 매달려 있었다. 호두마을로 내려가는 가장 빠른 길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름철 저 길은 개고생 길이라고 했다. 앞이 안보일 정도로 우거진 잡초무더기를 헤쳐 나가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유지랍시고 곳곳에 비닐망까지 쳐놓아 진행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11 : 05. 별수 없이 용초마을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는 해안도로(용초1)을 따라 호두마을로 간다.

 용초 어구보관창고의 벽에서도 고양이가 놀고 있었다. 섬 전체가 고양이 놀이터인 셈이다.

 마을 앞바다에는 커다란 양식장이 들어서 있었다. 바닷길을 거의 막아버릴 정도로 규모가 크다. 용초도 주민들의 주 수입원인 가두리 양식장이라고 한다.

 마을 앞 바닷가는 질 좋은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폭은 비록 좁지만 길이만큼은 웬만한 해수욕장 저리가라다.

 10 30분에 통영을 출발한 배가 용초항에 승객들을 내려주고 다시 길을 나서나보다. 배 뒤로 보이는 섬은 한산도(閑山島)’. 이순신 장군의 최대 전승지(한산대첩),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元均)의 참패로 폐진(廢陣)되었던 것을 1739년 통제사 조경(趙儆)이 중건하고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1963년에 이 일대가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바닷가를 따라가는 해안도로는 빼어난 경관을 보여준다. 곡선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갯바위들이 포개지면서 그림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이룬다.

 용초도 인근 해역은 물이 맑고 조류가 좋은 청정해역이다. 덕분에 이곳에서 생산되는 미역은 맛이 쫄깃쫄깃하기로 전국에 이름나 있다. 이곳에서 수확되는 자연산 도 유명하단다.

 한산도와 용초도 사이를 화물선 한 척이 지나간다. 이 해협이 뱃길로 이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11 : 21. 그렇게 바닷가를 따라가던 길이 느닷없이 능선을 횡단해버린다. 이때 한산도와 추봉도를 잇는 추봉교가 눈에 들어온다. 다리 뒤로 보이는 섬은 거제도일 것이다.

 11 : 25. 잠시 후 올라선 고갯마루. 전신주에 매달린 공공형 고양이보호분양센터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흔치않은 시설이니 한번쯤 꼭 들러보도록 하자.

 11 : 27  11 : 37. ‘공공형 고양이보호분양센터’. 용호도의 폐교( 한산초등학교 용호분교장)를 개보수해 2023년 문을 연 전국 최초의 길고양이를 위한 공공시설로, 한려해상국립공원에서 구조되어 질병검사와 중성화를 거쳐 입소된 수십 마리의 고양이가 안락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사람과 동물이 공존할 수 있는 반려동물 친화도시 통영을 표방한다고나 할까?

 내부는 연속극에서 본 펜트하우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다. 거기다 직원들의 친절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3시간도 넘게 걸어온 내 행색이 지쳐보였던지 얼음을 가득 채운 냉수부터 권하고 본다. 의자를 내주면서 커피까지 대접하겠단다. 도로변에서 기다리고 있을 집사람 때문에 사양할 수밖에 없었지만, 대신 집사람에게 줄 얼음물을 듬뿍 얻어올 수 있었다.

 입소 고양이들은 행복권이 보장되고 있었다. 통영시 소속 수의사가 정기적으로 건강상태를 체크해주는가 하면, 나아가 평생 가족을 만나 따뜻한 묘생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준단다.

 바다를 운동장으로 삼고 있는 옛 학교는 2003년 개봉한 국화꽃향기(장진영·박해일 주연)’에 등장하기도 했다. 죽음을 앞둔 연인이 마지막 여행지로 찾아왔었다. 하나 더. 지금 보이는 저 건물은 영화 속에 나왔던 그 건물은 아니다. 그해 태풍 매미가 원래 건물을 휩쓸어 간 탓이다. 이후 현대식 건물이 지어졌으나 결국 분교는 2012년 문을 닫았고, 지금은 고양이보호분양센터가 들어섰다. 하지만 영화 속 풍경을 찾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단다.

 분교장이던 시절 우리나라에서 바닷가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운동장이었다고 한다. 운동장이 곧 바다 모래사장이었다는 것이다. 밀물 때 파도가 일면 교실까지 바닷물이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나? 건물은 옛 모습을 잃었다. 용도도 바뀌었다. 운동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바닷가 늙은 해송은 아직도 푸름을 자랑한다. 그 아래 그네도 운동장 한쪽 귀퉁이를 차지한 채로 바람결 따라 한들거리고 있다.

 11 : 40. 고양이보호분양센터는 용초마을과 호두마을의 딱 중간 지점이다. 그러니 걸어온 만큼 더 가야 호두마을에 이를 수 있다.

 이때 바다 건너 추봉도가 자신도 한번쯤 봐 달란다. 6·25의 아픈 상처는 자신들도 품고 있다면서 말이다. 맞다. 당시 거제수용소의 포화 및 과밀화를 해소하기 위해 추가로 만든 수용소가 저 섬에도 있었다.

 11 : 56. 통영항으로 나가는 배를 타게 될 호두마을에 이른다. 용초마을과 비교하면 호두마을은 상당히 큰 마을로, 공중화장실과 편의점 등 시설들이 잘 갖춰져 있다. 매점을 겸한 섬안의 미자집에서는 백반(1만원)도 판다. 예약(010-3156-9826)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마을입구. ‘거리지신위(巨里之神位)’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기단은 2005년에 세웠음을 밝힌다. 용호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 호두이니,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번영과 풍어를 비는 굿판이 열리지 않았을까 싶다. ‘남해안별신굿이라도 펼치면서 말이다.

 마을은 하나같이 하얀 벽에 붉은 지붕을 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지중해 연안의 모습이다. 스페인·이탈리아·그리스·터키·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 등 지중해 연안을 돌아다니며 늘 감탄해오던 아름다운 풍경인데,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마을 뒤에서 송곳처럼 솟아오른 산이 호두산(200.9m)’이다. 하지만 여름철에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산으로 변한다. 가슴까지 차오른 잡초로 인해 길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같이 온 일행 한둘이 개척 산행이라도 하겠다며 당차게 도전해봤지만 옷만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왔었다.

 마을 내 골목길을 누비다 선착장으로 간다. 아니 식당에서 두 시간이나 버티다 나왔다. 식사를 끝내고 3만 원 짜리 전복구이를 시켜놓고 소주 1병에 맥주를 3병이나 마셨는데도 배의 출항시간까지는 아직도 멀었단다. 더 버티기도 뭐해서 동네를 돌아다니다 정자에서 동네 할머니들로부터 구수한 옛 얘기 두어 편을 듣고 난 뒤에야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도 언제나 헤어짐은 아쉬운 법. 배 난간에 기대서서 멀어지는 용호도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안동선비순례길 2코스(도산서원길)

 

여행일 : ‘24. 9. 7()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월천서당산림문화휴양촌경북산림과학박물관분천리마을회관도산서원퇴계종택(거리/시간 : 11.3km, 실제는 경북산림과학박물관부터 7.71km 2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월천서당(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타고 안동방면으로 내려오다, 지곡교차로에서 928번 지방도(녹전방면으로 28km), 녹전삼거리에서 935번 지방도(안동방면으로 8km), 서부교차로에서 35번 국도(태백방면)로 옮겨 1.8km쯤 올라가다 경북산림자원개발원입구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3.8km쯤 들어오면 2코스 들머리인 월천서당에 이르게 된다.

 월촌서당에서 시작되는 ‘2코스(도산서원길)’는 퇴계선생의 생애와 함께했던 길이다. 퇴계의 후손들이 청빈한 선비정신을 지키며 살아온 원촌마을까지 도산구곡 길 어느 구간보다도 퇴계의 숨결이 살아있는 길이다. 스승인 퇴계 이황과 제자인 월천 조목이 서로 오가며 만났다고 해서 사제의 길로도 불린다.

 월천서당(月川書堂)’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라고 한다. 안내판은 중종 34(1539)에 세웠다고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이 15세에 벌써 제자를 키웠다는 얘기인데 그게 사실일까? 아무튼 월천은 어려서부터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한 수제자로 알려지는 인물이다. 그래선지 현판을 스승인 이황이 직접 써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담장너머 먼발치에서 겨우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월천선생 고택(편액은 舊宅이라 적었다)도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조목(趙穆)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52(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경전 연구에 주력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이황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의 상덕사에 신주(神主)가 모셔져 있단다.

 월천서당에서는 도산구곡(陶山九曲)’  2곡과 3곡을 만날 수 있다. 서당 앞 도선장(渡船場)으로 나오면 제2곡인 월천곡(月川曲)’과 마주하게 된다. 참고로 도산구곡은 각 구간마다 명촌(名村)들이 세거해왔다는 점이 독특하다. 퇴계 선생의 직계 제자와 후손들이 거의 500년 세월 동안 이 도산구곡에 포진해 있었다. 그중 2곡에는 횡성조씨(橫城趙氏)’들이 살았다. 월천서당의 주인인 조목이 대표적이다.

 시선을 왼쪽으로 비틀면 제3곡인 오담곡(鰲潭曲)’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온전한 모습이 아닌 끄트머리에 불과하지만 입맛이라도 살짝 볼 수 있으니 행운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3곡에는 단양우씨(丹陽禹氏)’들이 세거했다. 퇴계가 존경하던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3-1342)’의 서원이 있었다.

 월천서당에서 안동호반자연휴양림까지는 데크 길이 이어진다. 길고 가파른 계단이 끝 간 데 없이 계속된다. 거기다 울창한 숲속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쉽게 말해 얻는 것 없이 고생만 잔뜩 하는 구간이라는 얘기다. 이게 싫은 나는 도반 몇 명과 함께 이 구간을 생략하고 대신 주변의 다른 명소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한국문화테마파크’. 2,000여개의 산성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지형 특성을 공간개념으로 설정해놓은 체류형 복합문화단지로, 산성마을과 연무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렉티브 체험시설, 어드벤처 챌린지시설, 상설 공연장 등도 갖추고 있단다,(사진은 트레킹 道伴이자 작가이신 몽중루님의 것을 빌려왔다. 평소에도 이분의 사진을 자주 빌려 쓴다)

 안에는 다양한 체험장과 놀이마당 등의 저잣거리가 꾸며져 있어 즐길거리·먹거리·볼거리로 넘친다고 했다. 선비체험관에서는 유교정신을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단다. 백발의 나이에도 부모를 위해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는 농암선생의 효(), 퇴계선생의 건강법과 자연관 등 자취를 따라가는 경(), 노령의 나이에도 나라를 위해 의병지원에 적극 협조한 월천 조목선생의 충()이다.

 하지만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3 Super Hiking in Andong(9.7~9.8)’이 열린다며 일반인의 입장을 막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론은 차치하더라도 홈페이지에는 이런 사실을 미리 알려야하지 않았을까?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건너편에는 안동국제컨벤션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최대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컨벤션홀, 동시 700명 수용 가능한 13개의 중소회의실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부대시설인 세계유교문화박물관은 컨벤션센터의 자랑거리. 라키비움 형식의 박물관으로 유교지식 디지털아카이브를 구축해 전 세계 이용객에게 세계유교지식 정보와 문화향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단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살펴보지 못한 유교문화의 아쉬움을 군자상으로 달래며 발길을 돌린다. <군자는 화합하나 동조하지 않고, 소인은 동조하나 화합하지 않는다.> 안동시의 미숙한 행정에 큰소리를 내지 않고, 쯧쯧 혀만 차는 선에서 발길을 돌리는 내 행동이 곧 군자가 아니겠는가.

 디지털 스포츠 테마파크인 놀팍의 현수막. 의병을 소재로 헬스케어시스템까지 갖춘 첨단시설로, 남녀노소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20종의 콘텐츠로 구성돼 있단다. 콘텐츠에 따라 근력·지구력·유연성·순발력·민첩성 등 다양한 신체적 기능을 필요로 하는 형태로 구성돼 있어 체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나?

 12 : 15. 두 번째로 찾은 곳은 경상북도 산림과학박물관’. 산림문화의 보존과 산림의 소중함을 체험하도록 설립한 박물관으로, 4개의 전시실에 산림의 역사, 산림 정책, 산림자원의 활용, 산림보호 등에 대해 전시하고 있다.

 입구의 조형물. ‘自然으로부터 산, , 이란 작품인데, 예술에 문외한이라선지 조형물이 품은 속뜻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멋진 인공폭포도 만들어놓았다. 이밖에도 영지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을 이용해 만든 습지산책로, 산촌의 가옥(너와집·귀틀집), 분수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상부의 분수대 옆에는 전국의 황장금표도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긴 돌계단. 양옆에 경상북도를 위시해 예하 시·군의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각 시군의 캐릭터와 꽃··나무 등을 일일이 소개해 준다.

 안동시의 꽃은 매화라고 한다. 맞다. 고결함이 군자와 같다는 꽃이니 안동시의 꽃으로 이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12 : 23. 박물관은 문이 닫혀 있었다. 박물관 휴관일은 월요일이 아니었나? 왜 문을 닫았는지는 알려주지도 않은 채, 건물 전체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적막강산이다. 아무튼 4600여점이나 된다는 유물을 하나도 보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12 : 25. 박물관 밖으로 나와 35번 국도(퇴계로)를 따른다. 북진하여 송티고개를 넘는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송티 600여 년 전부터 예안시장을 오가던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넘다 쉬던 고개로,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12 : 29. 첫 번째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 송티길로 들어간다. 초입에 분천리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확히는 송티(松峙)’ 마을이다. 넘티(‘넙티 廣峴으로도 불린다)과 함께 분천리를 이룬다.

 이곳에서 안동선비순례길과 만났다. 이정표는 월천서당에서 이곳까지를 6.0km로 적고 있었다. 내 앱은 0.63km를 찍는다. 5.4km.  11.3km 2코스의 절반을 생략해버린 셈이다.

 12 : 33. ‘분천리 마을회관. 고려 말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낸 이헌(李軒)이 붙인 지명이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을 떠나 돌과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분강(汾江) 굽이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는데, 마을을 둘러보니 낙동강 물이 맑게 흐르므로 부내라 하였다는 것이다. 분천(汾川)은 부내의 한자식 표기다.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했는데, 이현보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이 대를 이어 배출된 유서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임도를 따라 낙동강 쪽으로 간다.

 12 : 40. 그렇게 잠시 내려가자 삼거리가 나왔다. 이정표(퇴계종택 3.8km/ 월천서당 6.6km)는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오솔길을 따르란다.

 이정표가 퇴계예던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500년 전 퇴계가 사색에 잠겨 걷던 한국판 철학자의 길을 새롭게 복원해놓은 안동의 걷기 여행길이다. 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이게 안동선비순례길과 중복되는가 보다.

 우린 낙동강 쪽으로 조금 더 나가보기로 했다. 도산구곡 중 제4곡인 분천곡(汾川曲)’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강호가도(江湖歌道)라고 하는 영남 풍류의 창시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전후한 영천이씨들의 600년 세거지다. 하나 더. 예로부터 청량산에서 발원 도산서원을 거쳐 부내 외곽으로 흐르는 물을 낙강이라 했다. 분강촌 앞에서 강물이 두 줄기로 갈라졌으므로 분수(分水분천(分川)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강에 농암이 자신의 호로 삼은 농암(聾巖)’이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12 : 43. 하지만 농암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안동댐 수위가 낮아질 때 모습을 드러낸다니, 조금 더 물이 빠져야 드러날 모양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벼슬을 버리고 부내에 살던 이현보(李賢輔, 1467-1555)가 이황(李滉)을 비롯한 지기들을 불러 배를 띄우고 노닐던 풍경을 떠올려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되돌아 나왔다.

 12 : 47. 삼거리로 돌아와 이번에는 오솔길을 따라간다. 인적이 뜸한 산길이지만 누군가의 희생으로 깔끔하게 벌초가 되어 있었다.

 저게 사랑나무로 보이는 것은 내가 속물이라서 일까? 아니 함께 걷던 도반께서도 사랑나무가 분명하다고 했다. 사랑을 나누는 몸짓이 분명하다면서...

 12 : 53. 건너편에는 영지산(443.4m)이 우뚝하니 솟아올랐다. 그 아래 작은 마을이 있었다. 네이버 지도에 애일당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이다. 애일당(愛日堂)이란 1533년 농암 이현보가 94세의 아버지 이흠(李欽) 92세의 숙부, 82세의 외숙부 김집(金緝)을 중심으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소일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경로당이다. 그러니 어찌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애일당은 없었다. 그 자리에는 여염집으로 보이는 한옥 한 채가 있었을 따름이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은 애일당은 애초부터 없었고, 왜 그런 표시가 되어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그저 안동호에 물이 채워지던 무렵 잠시지만 영천이씨(이현보의 본관)’의 제사(祭舍)가 있었을 뿐이란다.

 주민분이 멀리서 온 길손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집으로 초대했다.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우리 일행을 막무가내로 끌고 가다시피 한다. 그리고는 넝쿨에 매달려 있는 참외를 실컷 따먹으라 하신다. 아니 손수 따주며 농암선생과 퇴계선생 등 지역에서 배출한 선현들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셨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주인장은 부산에서 사업을 해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하지만 7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마을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문중 땅 3만 평을 사서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그리고는 광운사(光運寺)’라는 절을 짓고, 자신의 법명을 아난이라 했다나? 모든 사람이 마음의 눈을 떠주기를 빌면서...

 13 : 09. 마을을 빠져나와 도산서원길(이정표 : 퇴계공원 3.6km/ 월천서당 7.2km)’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도산서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광현고개이다. 이현보의 농암가비(聾巖歌碑)’가 세워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농암가(聾巖歌)’ 1665년에 간행된 이현보의 농암문집(聾巖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관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울리는 기쁨을 노래한 작품으로, 작자가 서울에서 오래 머물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농암에 올라 산천을 두루 살피니 옛 자취가 너무나 의연함에 기뻐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광현고개를 기점으로 길은 내리막으로 변한다. 2차선 도로지만 울창한 숲속을 요리조리 헤집으며 내놓은 덕분에 숲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길섶에서 노닐던 귀한 손님을 만났다. 독일은 사슴벌레의 머리를 재산을 모아들이는 행운의 장식으로 여기며, 터키인들은 악을 물리치는 호패로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알려진다. 그러니 이 아니 행운이겠는가.

 도산서원(매표소)에 가까워질 무렵 오른쪽 물가에서 간석대 답청(磵石臺 踏靑)’이란 시비를 만날 수 있었다. 퇴계 이황이 62세이던 1562년 요 아래에 있는 석간대(石澗臺)’에 와서 예전에 농암 이현보선생을 모시고 노닐던 감회를 읊은 시라고 한다. 뒷면에는 제자인 구암(龜岩) 이정(李楨, 1512-1571)과 헤어지면서 써 준 당나라 시인 유상(劉商)의 시를 새겼다. 원래는 석간대에 새겨져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석간대가 물에 잠기게 되자 저렇게 모사(模寫)해 옮겨놓은 모양이다.

 13 : 30. 도산서원의 집단시설지구에 도착했다. 도산서원의 입구로, 매표소를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편의점과 분식점은 물론이고 특산물판매점에 서점까지 눈에 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답게 서원은 관람권을 사야만 입장이 가능했다. 그렇게 소중한 문화유산이니 무턱대고 들어가 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먼저 하마비(下馬碑)가 걸어갈 것을 지시한다. 다음은 입구에 설치해 놓은 각종 안내판을 꼼꼼히 살펴보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서원으로 가는 길은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은 걷기에 딱 좋고, 곳곳에 설치해놓은 각종 조형물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서원은 문화해설사와 함께 둘러볼 수 있다고 했다. 저곳에서 신청하면 해박한 지식으로 꼼꼼하게 안내해 준단다.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의 후손 공덕성(孔德成)이 쓴 글을 새긴 빗돌이라고 한다.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을 이르는 사자성어다. 1981년 공자의 77세손인 공덕성 박사가 도산서원을 찾아와 참배한 후 퇴계선생의 가르침이 5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음에 감동하여 적은 글이라나?

 서원 마당에 이르기 직전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가 반긴다. 퇴계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주자(朱子)가 지은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 나오는 하늘의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天光雲影共排徊)’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곳은 시사단(試士壇)’를 바라보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시사단은 정조 때 별시가 열렸던 곳이다. 1792년 정조가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해 퇴계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신설하여 안동 지역의 인재를 선발토록 한 데서 비롯된다. 당시 응시자가 너무 많아 강 건너 들판으로 시험장을 옮겼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의 글로 비문을 새기고 시사단을 세웠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10m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비각과 비를 옮겨 놓았단다.

 반대편 절벽으로도 산책로가 나있다. 500년 전 퇴계가 사색에 잠겨 걷던 한국판 철학자의 길이다.

 그 끄트머리에는 천연대(天淵臺)’가 있었다. 시경(詩經)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 漁躍于淵)’라는 구절에서 하늘  연못 자를 따서 지었다.

 천연대는 도산구곡의 제5곡인 탁영담곡(濯纓潭曲)’이 가장 잘 조망되는 곳이다. ‘갓끈을 씻는다는 뜻의 탁영(濯纓)은 굴원(屈原) 어부사(漁父詞)’에서 유래했다. 강남으로 귀양 온 굴원이 거기서 만난 어부에게 다른 이는 틀리고 자신만의 곧음을 내세우자, 어부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며 노래했다는 고사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에 있어서 크게 퇴계가 생전에 건축한 서당 구역과 사후에 조성된 서원 구역으로 구분된다. 도산서원은 1561년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강학과 수행을 위해 건립한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기반으로 지어졌다. 사후에 그의 문인이었던 권호문(權好文), 금난수(琴蘭秀) 등이 발의하여 서당이 있던 자리 위쪽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했다. 1574년 서원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 다음 해인 1575년 사액되어 석봉 한호가 쓴 편액을 하사받는다. 1615년에는 월천 조목의 위패를 함께 모신다. 성덕사와 삼문, 전교당, 농운정사, 도산서당 등 4곳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 앞 광장, 땅에 닿을 듯이 길게 누워있는 왕버들나무가 오랜 세월 서원과 함께 해왔음을 알려준다. 안동댐에 수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당을 5m 가까이 성토하는 과정에서 나무의 아랫부분이 대부분 땅속에 묻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나무들이 기기묘묘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열정(冽井). 서당에서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 주역(周易)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井冽寒泉食)’에서 이름을 따왔다. 퇴계는 서당의 남쪽에 맑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書堂之南 石井甘冽)’는 시를 짓기도 했다.

 서원 구역으로 올라가는 긴 돌계단. 서원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대가 조금씩 높아지고 남북으로 길게 축을 형성하면서 좌우에 건물을 들어앉혔다. 정문으로 들어가기 전 왼쪽에 역락서재(亦樂書齋)가 있고,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도산서당, 왼쪽에는 농운정사가 있다.

 계단의 끄트머리, 진도문(進道門)으로 들어서자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이 반긴다. 서원의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도산서원이란 사액 현판은 1575년 선조가 내려주었으며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고 하고 당시 선조가 마지막 글자부터 쓰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내삼문(內三門) 너머에는 상덕사(尙德祠, 보물 제211)’가 있다. 퇴계선생과 월천 조목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데, 일반인에게 개방을 않는지 문이 닫혀 있었다.

 도산서당(陶山書堂, 보물 제2015). 퇴계선생이 4년에 걸쳐 지은 건물로 기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기거하던 방은 완락재(玩樂齋, 완상하여 즐긴다), 마루는 암서헌(巖栖軒, 바위에 깃들어 작은 효험을 바란다)이란 현판을 달았다. 둘 모두 주자의 글에서 따온 것으로 학문의 즐거움과 겸손한 마음을 담았다. 서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건물도 고치고 문도 새로 냈지만 퇴계 선생이 거처하던 도산서당만큼은 손끝 하나 안 대고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역락서재(亦樂書齋). 퇴계가 61세에 완공을 본 도산서당은 선생의 공부방인 서당과 학생의 기숙사인 농운정사(隴雲精舍, 보물 제2016)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자 기숙사가 포화상태가 되었고, 이에 어린 나이에 입학한 제자 정사성(鄭士誠)의 부친이 기숙사를 따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당호는 벗이 있어 스스로 먼 길을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왔다.

 옥진각(玉振閣). 1970년 보수를 할 때 지은 퇴계선생의 유물전시관이다. ‘집대성 금성옥진(集大成 金聲玉振)’의 줄임말로 집대성했다는 것은 금소리에 옥소리를 떨친 것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단다.

 안에는 퇴계선생에 관한 각종 자료가 전시되고 있었다. 덕분에 선생의 철학을 주마간산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선생의 각종 유품도 전시해 놓았다. 자리·베개 등의 실내 비품과 매화연(梅花硯옥서진(玉書鎭) 같은 문방구, 그밖에 청려장(靑藜杖투호(投壺혼천의(渾天儀) 등도 눈에 띈다.

 서원 마당에서는 목판인출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퇴계 이황의 좌우명을 목판으로 직접 인출해보는 프로그램이다. 선생이 그렇게나 그리워했다는 매화를 읊은 시도 인출해 볼 수 있다니 한번쯤 도전해 볼 일이다.

 퇴계선생은 사무사(思無邪, 간사한 생각을 품지 마라), 무불경(毋不敬, 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라), 무자기(無自欺,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신기독(愼其獨, 혼자 있을 때도 행동을 바로 하라) 등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이 글귀들을 나무판에 새겨 방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쳐다보며 몸과 마음을 다스렸단다.

 14 : 34. 매표소 광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도산서원길을 따라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올라가다 도산십이곡 시비를 만났다. 도산십이곡은 퇴계가 도산서당을 짓고 4년이 지난 1565, 나이 65세 때 지은 시조이다. 오른쪽에 전 6(마음이 사물과 자연에 접하여 일어나는 감흥), 그리고 왼쪽에 후 6(학문과 덕행을 실천하는 내용)을 새겨 넣었다.

 14 : 40. 고갯마루에 닿기 전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임도(이정표 : 퇴계종택 1.2km/ 도산서원 0.9km)로 내려선다.

 이정표는 이 구간을 퇴계명상길로 적고 있다. 계상서당 앞 퇴계종택에서 도산고개를 넘어 도산서원에 이르는 구간으로 퇴계선생이 생전에 걸었던 길이란다. 관직에서 물러난 퇴계선생은 자신의 학문을 정진시키는 한편, 가르침을 받으려고 찾아오는 선비들을 위해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을 지었다. 그리고는 추운 겨울에는 계상서당에서, 반면에 무더운 여름에는 도산서당에서 강론을 했단다. 이때 도산고개를 넘어 왕래한 길이 퇴계명상길이다.

 길은 꽤 가파른 오르막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버겁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생전에 이 길을 걸었을 퇴계선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선비걸음으로 걸어볼 일이다.

 14 : 52. ‘도산고개에 올라선다. 걷기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인지 고갯마루에 평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고갯마루에서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계속해서 임도(선비문화수련원길)를 따를 수도 있고, 비탈을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퇴계명상길을 따라가도 있다. 그렇다고 너무 고민하지는 말자. 잠시 후 다시 만나게 되니 말이다.

 15 : 02. 도산서원의 부설기관인 선비문화수련원 2001년 퇴계 선생의 16대 종손인 이근필(2024년 작고) 옹의 제안으로 설립됐다. 이후 수련생이 급증하자 2014 2원사를 착공 2016년 완공했다. 선비문화체험 프로그램이 윤리경영을 내세우는 기업의 경영전략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공직자·기업·임직원 등 다양한 계층에서 찾아오고 있단다.

 수련원의 아침은 5시 반에 퇴계명상길 산책으로 시작된다고 했다. 새벽 산책코스는 퇴계가 머물던 한서암에서부터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도산서원까지 가는 왕복 1.5km 남짓한 산길이란다. 새벽공기 감도는 초록빛 세상을 걸으며, 퇴계선생이 지은 도산십이곡을 읊조려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나?

 수련원 앞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퇴계의 육우(六友 : ·····自身)로 꾸며진 동산, 군자못(君子塘)이라는 연못, 산책로 등의 조경은 물론이고, 퇴계의 시를 새긴 빗돌 십여 기를 세워놓았다. 한자를 모르는 이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한글로 번역된 시를 석판에 새겨 빗돌 앞에 놓아두었다.

 자명(自銘). 퇴계의 마지막 작품으로 자신의 평생을 성찰하면서 삶을 회고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선생이 지은 2,300여 수의 시들 가운데 자신을 주제로 읊은 유일한 시라고 했다.

 15 : 11  15: 17. 퇴계종택(退溪宗宅)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아니 3코스 중 일부를 앞당겨 진행하겠다는 산악회의 결정에 따라 이육사문학관까지 더 걸어야 한단다. 아무튼 2코스는 2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은 7.71km를 찍는다. 코스 대부분이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고 보면 되겠다.

 조선시대 중기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살던 집이다. 원래의 종택은 동암(東巖) 이안도(李安道)가 한서암 남쪽에 세웠고, 1715년 정자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별도로 지었다. 이후 10세손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이 구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다. 그러나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두 곳 종택이 모두 불타 버렸고, 지금의 퇴계종택은 1926-1929 13세손 하정(霞汀) 이충호(李忠鎬)가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은 5칸 솟을대문과 자형 정침(正寢 : 주택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집 또는 방)이 있는 영역(아래 사진), 같은 규모와 양식의 5칸 솟을대문과 추월한수정으로 이루어진 영역, 추월한수정 영역 뒤쪽에 접한 솟을삼문과 사당이 있는 영역으로 이루어졌는데, 세 영역은 각각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1715년 조선 중기의 문신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1654-1725)이 퇴계의 정신을 기리며 세운 정자다. 이름은 중국 남송의 주자(朱子)가 지은 시 재거감흥(齋居感興)’  공손히 생각건대, 성인의 심법은 천년의 시공을 넘어(恭惟千載心) 차가운 물에 비치는 가을 달빛이라(秋月照寒水)’에서 유래했다. 옛 성인의 마음이 가을 달빛이 비치는 차고 맑은 물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다.

 하지만 1896년 일제의 방화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러다 1926년 이충호에 의해 종택 본채와 함께 복원되었다. 정면 5.5(측면 2.5) 자형 평면을 이루는 기거(起居)형 정자로 보면 되겠다. 지금도 수련생들의 강의나 문중 모임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단다. 그래선지 관리인으로 보이는 분이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며 소매를 이끌기도 했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부부의 계명(誡命)을 잘 따라주었다고나 할까? 부부(夫婦)란 결혼한 남편과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지아비와 지어미라는 뜻으로, 여기서  짓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한집에 사는 두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니 부부는 하나의 짝이라는 생각으로 누구 한 사람이 앞서나가지 않고 늘 함께 나란히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이해하고, 채워주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