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산(雲岩山, 605m)

 

산행일 : ‘11. 8. 14(토)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과 동상면의 경계

산행코스 : 새재→대아댐 전망대→암릉구간→운암산→591(巖)봉→뒷골말망이→산천마을회관(산행시간 : 3시간50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대아저수지에서 정상까지의 기암절벽(奇巖絶壁)은 군부대(軍部隊)의 암벽(巖壁)훈련장소로 이용될 정도로 험악하기 그지없다. 근처에 있는 하사관학교를 거쳤던 사람들은, 군(軍) 생활을 끝낸 후에도 오랫동안이 술자리에 앉을 때마다 이곳에서 고생했던 얘기들을 나눈다고 한다. 그것도 이빨을 악물며 내뱉다시피 할 정도이니, 얼마나 험악(險惡)한지를 떠올리는데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당연히 일반인(一般人)들이 이곳을 오를 때는 오금저리는 스릴(thrill)을 실컷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정상에서 고산방향으로 빠지는 남쪽 바위지대는 군부대의 산악훈련장으로 통제되어 있으나, 능선의 산행에는 지장이 없다.

 

 

산행들머리는 대아저수지의 새재 주차장

익산-장수고속도로 완주 I.C을 빠져나와 17번 국도(國道/ 옥천방향)을 따라 달리다가 삼기교차로(交叉路)에서 오른편의 732번 지방도(地方道/ 대아댐방향)로 바꿔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편에 대아저수지의 댐(dam)이 보이고, 고개를 돌아 새재 고갯마루로 오르면 주차장(駐車場)이 길손을 맞이한다.

 

 

차(車)에서 내리면 먼저 주차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매점(賣店)이 눈에 들어온다. 매점의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팔각정(八角亭)이 세워져있으니 한번쯤 들러보는 게 좋다. 팔각정의 2층에 오르면 대아저수지(貯水池)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아저수지는 인공(人工)으로 만들어진 저수지답지 않게 자연스럽고, 경관(景觀) 또한 자못 빼어나다. 잔잔한 수면(水面)위에는 기암절벽(奇巖絶壁)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운암산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 대아저수지(大雅貯水池), 1920년 축조(築造)되었으나, 그 수명(壽命)이 다하자 1990년에 기존 댐의 300m 하류에 새로운 댐(dam)을 건설하였다. 댐의 길이 255m에 높이는 55m로 만수(滿水)면적이 2.34㎢에 달하며, 인근 농경지(農耕地)의 농업용수뿐만 아니라 공업 및 생활용수로도 공급되고 있다.

 

 

 

산행은 주차장 앞 도로(道路)건너의 맞은편에 보이는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느낀 아쉬운 점 하나, 요즘 운암산을 찾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편이고, 그 대부분은 이곳을 산행들머리로 삼고 있는데도 산행안내도나 이정표(里程標) 등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차장에도 등산객들에게 필요한 산행안내도 대신에 완주군의 관광안내도(觀光案內圖)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따름이다.

 

 

입산통제 플래카드(placard)를 넘어서 산행을 시작한다. 가지 말라는 길을 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입산통제의 목적이 산불예방이기 때문에, 우리 일행에게 화기(火器)가 없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경사(傾斜)가 완만한 임도를 따라 얼마간 걷다가, 왼편에 보이는 오솔길로 올라서면 서서히 경사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산길의 주변은 온통 소나무, 비록 크거나 굵지는 않지만, 그 향기는 코끝을 자극하고도 남을 정도로 진하게 풍겨오고 있다. 물론 솔향기 속에는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도 듬뿍 담겨 있으리라. 왼편 산 아래에 보이는 소향마을이 무척 평화롭다.

 

 

 

오솔길에서 소나무 향기에 취해 걷다보면 거대한 원형시설물이 보인다. 어쩌면 저 아래에 보이는 정수장(淨水場)에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한 물탱크일 것이다. 시설물 너머로 고산면의 넓은 들판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있다.

 

 

 

물탱크를 지나면서 암릉이 시작된다. 비록 바위를 붙잡거나, 밧줄에 의지해야만 암릉을 오를 수가 있지만, 아직은 위험을 느낄 정도까지는 아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서서히 전망(展望)이 트이면서 대아댐과 팔각정이 내려다보인다. 산행을 시작한지 50분 정도가 지나서 첫 번째 암봉 위에 올라서게 된다. 암릉 위로 오르면 먼저 절벽의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명품(名品)소나무가 눈에 띈다. 소나무 아래에 은빛으로 빛나는 대아댐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고, 건너편에는 동성산과 계봉산, 그리고 서방산이 우뚝하다.

 

 

 

 

첫 번째 암봉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바위지대가 시작난다. 밧줄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바위를 부여잡고 용틀임을 해야만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경사(傾斜)가 가파르다. 그러나 오금이 저릴 정도로 위험스럽지는 않기 때문에, 스릴을 즐기며 바위에 매달릴 수 있는 멋진 코스이다.

 

 

 

 

 

 

 

 

 

계속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힘들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끔은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불어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펼쳐지는 대아저수지의 자태(姿態)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에 그 힘듦을 다소나마 잊게 해준다. 거기다 그 대아저수지가 아름다운 노송(老松)과 만나게 되면 조금 남아있던 힘듦까지도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만다. 당연히 걸음을 재촉할 필요가 없다. 여유롭게 걸으며 주위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광경(光景)을 차곡차곡 담아보자. 카메라가 아닌 내 가슴에...

 

 

 

 

 

 

 

 

 

두 번째 봉우리를 오른 후, 가파른 암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섰다가, 다시 밧줄을 잡고 힘들게 암봉(巖峰)위로 올라서면 또 다른 명품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소나무 아래에 펼쳐지고 있는 대아저수지가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왼편(북쪽)에는 봉수대산이 마치 누에가 꿈틀거리는 듯한 모양으로 누워있고, 그 뒤에 보이는 것은 아마 대둔산일 것이다.

 

 

 

 

급경사(急傾斜)의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면 봉우리 위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암릉을 따라 이어지는 길과, 왼편으로 우회(迂廻)시키는 길이다. 암봉 너머로 운암산의 정상이 보이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직진(直進)코스를 선택한다. 그러나 절반쯤 죽어가고 있는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 곳에서, 길이 끊겨버린다. 소나무 뒤편으로 운암산이 가깝지만 천애(天涯)의 낭떠러지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길은 이곳에서 거의 360도(度)로 방향을 바꾼 후, 이번에는 갈지(之)자를 만들면서 아래로 고도(高度)를 떨어뜨린다. 바위 틈새로 난 길에는 로프 등 안전(安全)시설이 전무(全無)하기 때문에, 손과 발을 한꺼번에 사용해야만 아래로 내려설 수 있다.

 

 

 

가파르기 짝이 없는 내리막길이 안부까지 이어지더니, 이번에는 다시 가파르게 위로 향하고 있다. 이곳 안부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운암산마을과 장수상회가 나온다. 안부에서 또다시 손과 발이 고생을 시작한다. 로프와 4개의 발(?)을 이용하지 않고는 위로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로프를 잡고 위로 오른 후, 조금이나마 가파름이 수그러진 능선을 따라 얼마간 걸으면 이내 운암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정상은 흙으로 이루어진 분지(盆地)이다. 오른편(남쪽)이 천인단애(千仞斷崖)의 암벽(巖壁)이지만, 왼편(북쪽)은 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서너 평 됨직한 정상의 한 가운데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봉화(烽火)를 올렸다는 봉수대(烽燧臺)의 흔적이 남아있는 돌무더기가 차지하고 있고, 그 옆에는 이 지역의 금융기관에서 세운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시 말뚝이 정상표시석을 대신하고 있다. 왼편 절벽 아래엔 대아저수지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건너편의 동성산, 서방산, 종남산 등이 잘 조망(眺望)된다.

 

 

 

 

산천리 마을회관을 산행 종료지점으로 잡을 경우, 하산(下山)은 702고지 방향의 능선을 따라 내려서야 한다. 702고지로 향하는 산길은 봉수대(烽燧臺) 돌무더기의 왼편으로 나 있으니 잘 살펴보고 내려서야 할 것이다. 운암산에는 이정표가 전무(全無)하기 때문이다. 하산길은 처음부터 급경사(急傾斜)로 시작된다. 잠깐 내려오면 오른편에 산길 하나가 희미하게 보인다. 아마 대아리로 내려가는 능선(稜線)일 것이다. 또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서 안부에 이르면 이번에도 오른편에 또렷한 산길이 나타난다. 엄청나게 많은 리본이 매달려있는 것을 보면 아마 후리후석골을 거쳐 산천상회로 내려가는 탈출로(脫出路)일 것이다. 주어진 산행 종료(終了)시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702고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첫 번째 안부에서 부드럽게 작은 봉우리(515봉) 하나를 넘으면 오른편에 산천상회로 내려가는 탈출로가 보이는 두 번째 안부를 만나게 된다. 체력(體力)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그만 탈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곳을 지나치면 어쩔 수 없이 암봉인 591봉을 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안부에 내려섰다가 다시 치고 오르면, 잠시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거대한 바위봉우리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길은 전면에 보이는 수직(垂直)의 절벽을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다. 그러나 절벽을 피한다고 해서 경사(傾斜)까지는 피할 수 없었던 듯, 오르막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숨이 턱에 차게 한참을 오르면 591봉에 이르게 된다.

 

 

 

 

591암봉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2만5천분의1 지도에 ‘뒷골말망이’라고 표기(標記)된 능선의 한 지점에 닿게 된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의 주능선(主稜線)을 따라가면 702고지로 가게 되고, 하산지점인 산천리로 내려가려면 오른편 지능선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산천리로 내려가는 능선은 흙길, 거기에다 경사까지 완만(緩慢)하기 때문에 내려서는데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다. 능선을 따라 10분쯤 내려오던 산길은, 갑자기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며 급하게 고도(高度)를 낮춘다. 물기 한 방울 없는 계곡의 너덜길을 잠깐 내려서면 만나게 되는 널찍한 임도(林道)를 따라 10분 정도 내려오면 이내 55번 지방도와 만나게 된다.

* 산을 내려오다 보면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임도(林道)에 군데군데 쌓여있는 두엄(퇴비) 더미(무더기)가 보인다. ‘임도에 왠 거름더미이지?’ 내 의문은 집사람이 던지는 힌트(hint) 한마디에 금방 해소되어버린다. ‘곁에 감나무가 보이잖아요.’ 자세히 보니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공터는 임도가 아니고, 한 줄로 나란히 감나무를 심어 놓은 과수원(果樹園)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씨 없는 감’은 곶감으로 만들어져 임금께 진상(進上)되었을 정도로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산행날머리는 산천리 마을회관

지방도를 따라 대아저수지 방향으로 조금만 더 걸어 내려가면 산행이 종료되는 산천리 마을회관에 이르게 된다. 마을회관 앞 냇가는 쑥이 지천(至賤)이다. 집사람이 20분 정도 채취(採取)했는데도 우리 가족의 아침 밥상은 일주일 내내 쑥국으로 입맛을 돋울 수 있었다.

 

 

 

대덕산(大德山, 875m)

 

산행일 : ‘12. 2. 19()

소재지 :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과 안천면, 동향면의 경계

산행코스 : 수동리 장전부락 고개산영치병풍바위대덕산(鼓山峰)감투봉빈질바위대덕산(가짜)대덕사 입구용평리 30번 국도(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우리나라에 대덕산(大德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여럿이다.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강원도 태백의 대덕산이고, 가깝게는 이웃 무주에도 1m가 넘는 대덕산이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푸는 산이라는 의미의 대덕산(大德山)은 모두 같은 특징(特徵)을 갖고 있다. 하나같이 밋밋한 흙산(肉山)이라는 점이다. 마치 아이를 여럿 낳은 여성의 풍만한 젖가슴을 연상케 할 정도로 풍요로운 외형(外形)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 대덕산 역시 동일한 특징(特徵)을 보여주고 있지만, 병풍바위와 빈질바위라는 빼어난 암릉을 보유하고 있는 점이 특이(特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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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들머리는 상전면 수동리 장전부락 고갯마루

익산-장수고속도로 진안 I.C을 빠져나와 30번 국도(國道/ 무주방향)를 타고 얼마간 들어가면 용담댐이 보인다. 오른편에 이어 왼편에다 호수(湖水)를 끼고 달리다가 호수가 끝날 즈음에 만나게 되는 언건교차로(交叉路)에서 내려와, 49번 도로로 옮겨서 동향면방향으로 들어가면 죽도유원지를 지나 산행들머리인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이 고갯마루에서 동향면 방향으로 조금 더 진행하면 장전(진밭)마을이 나온다. 산행은 구량천의 반대방향으로 나 있는 산길을 따라 올라서면서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깃대봉 5.2Km)와 산행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길머리를 혼동할 염려는 없을 것이다.

 

 

 

참나무 일색의 숲 아래를 뚫고 지나는 산길은 경사(傾斜)도 가파르지 않을뿐더러, 두 명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도 될 만큼 널따랗다. 호젓한 산길을 여유로운 걸음으로 10분 조금 넘게 걸으면 장전마을에서 올라오면 합류하게 되는 첫 번째 삼거리(이정표 : 깃대봉 4.6Km)에 닿게 되고, 산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지도에는 이곳을 산영치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산영치는 동향면()과 상전면()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무래도 지도(地圖) 표기에 뭔가 오류(誤謬)가 있었지 않나 싶다.

 

 

 

 

갈참나무 숲을 오르다보면 오른편이 시원스럽게 열려있는 것이 보인다. 조망(眺望)이 뛰어난 전망대이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죽도유원지 근처의 하천(河川, 구량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멋진 태극문양(太極文樣)을 만들어내고 있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봉우리 위로 올라서면, 진행방향에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 병풍바위가 보인다. 근처 고스락의 이정표가 정상까지는 아직도 3.6Km나 남아있음을 알려주고 있다(이정표 : 죽도 1.4Km, 장전1.6Km/ 외송 9.7Km, ()대구평 9.8Km, 깃대봉(고산) 3.6Km)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무사다리(참나무를 베어 철사로 엮어 만든)를 내려서면 암릉지대가 시작된다. 거대한 암벽(巖壁)으로 이루어진 병풍바위이다. 바위와 소나무가 잘 어울리고 있는 병풍바위는 양쪽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암릉에 올라서면 조망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무진장(無鎭長, 무주 진안 장수의 줄임말)의 산군(山群)들이 첩첩이 쌓여있고, 그 뒤에는 덕유산의 산릉(山稜)이 길게 하늘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양 옆으로 흐르는 멋진 사행천(蛇行川, meander)은 구불구불 똬리를 틀며 힘차게 꿈틀대고 있다.

 

 

 

 

 

 

암릉을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평범한 흙산으로만 여겨졌던 산에서 만나게 되는 암릉은 색다른 감흥(感興)을 주기 때문이다. 바위의 비중이 약해지나 싶더니 느닷없이 진행방향에 거대한 암벽(巖壁)이 나타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살짝 자세를 낮추어 릿지(ridge)를 활용하면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바위위로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바위 위로 올라서면 다시 한 번 시원스럽게 조망이 터진다. 조선시대 모반(謀反)으로 내몰린 정여립의 원혼(冤魂)이 깃들어 있다는 천반산과 육지 속의 섬이라는 죽도가 또렷하게 내다보인다.

 

 

 

 

 

 

 

암릉지대는 꽤 길게 이어진다. 조금 경사(傾斜)가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로프가 매어져 있지만, 순수한 암릉이 아니고 흙과 바위가 섞여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바위 사이나 흙길을 불문하고 온통 참나무 낙엽이 푹신하게 쌓여있다. 산이 온통 참나무들로 꽉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암릉이 끝나고 이어서 몇 개의 낮은 봉우리를 넘으면 드디어 고산봉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하지 2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5평쯤 되는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은 잡초와 잡목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조망은 시원스럽지 못하다. '진안 고산 876m'라고 쓰인 나무판자가 허리가 잘린 나뭇등걸에 매달려있고, 삼각점 옆에 세워진 철제(鐵製) 이정표(이정표 : 죽도 5.0km/ 고산골 2.6km, (구)대구평 6.2km, 외송 6.1km)에는 정상표시판과 함께 앙증맞은 등산안내도까지 부착되어 있다. 오늘 산행 중에 만난 이정표들은 하나같이 정상을 깃대봉이라고 표기하고 있어서 혼란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지도에는 고산봉이라는 지명(地名) 외에는 다른 표기가 일절 없기 때문이다.

* 대덕산의 정상은 고산(鼓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옛날 이 산에 있었던 절에서 북소리가 들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오늘 산행 내내 보아온 깃대봉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에 산꼭대기에다 깃대를 꼽고 측량을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감투봉으로 가려면 정상에서 왼편 능선으로 내려서야 한다. 오른편으로 내려서면 싸리재이지만 이정표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밋밋(緩慢)한 능선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널따란 헬기장에 닿게 된다. 만일 점심을 준비해 왔다면 이곳에서 자리를 펴는 것이 좋다. 대덕산 정상은 여럿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기에는 비좁고, 헬기장을 지나서도 마땅히 자리 잡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점심을 마치고 다시 내려서는 능선, 진행방향에 용담호와 함께 밋밋한 감투봉이 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헬기장을 출발한지 10분 조금 못되어 고산골로 내려가는 갈림길(이정표 : 깃대봉(고산) 0.7km, 죽도 5.7km/ 고산골(빈질바위) 1.2km/ 외송 5.4km, (구)대구평 4.5km)을 만나게 되고, 다시 10분 정도 거리의 로프지대를 통과하고 나면 두 번째로 고산골로 내려가는 갈림길(이정표 : 고산골 2.3km/ 깃대봉(고산) 1.7km/ 외송 4.4km, (구)대구평 3.5km)과 마주친다.

 

 

 

외송마을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 진행하다가, 가파른 오르막을 치고 오르면 이내 감투봉 꼭대기에 올라서게 된다. 감투봉은 봉우리의 모양이 탕건(宕巾)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흙봉우리 위에 그리 크지도 않은 바위 몇 개가 얹혀있을 따름인 봉우리에서 탕건을 유추(類推)해본다는 것은 애초에 어림없는 일일 것이다. 잡목으로 둘러싸인 정상은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정상적인 표식(標式)은 보이지 않고, 누군가가 서툰 글씨체로 ‘감투봉 838m’라고 쓴 나무판자만 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감투봉에서 외길 등산로를 따라 잠깐 내려오면 외송마을과 (구)대구평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이정표 : 외송 3.9km/ (구)대구평 4.0km, 깃대봉(고산) 2.2km, 죽도 7.2km)가 나온다. 용담호의 리아스식 호안(湖岸) 풍경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감투봉에서 대구평으로 내려가는 능선은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이다. 흙산에서 만나는 암릉이 신선하기도 하지만, 거대한 암벽은 차라리 외경(畏敬)스럽기까지 하다. 위험할 정도로 가파른 암릉도 보이지만 어김없이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느긋하게 걷다가, 전망바위가 나타나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올라보는 것이 좋다. 용담호의 멋진 호안(湖岸)이 호수에 가까워지는 것과 정비례(正比例)로 선명해 지기 때문이다.

 

 

 

 

 

 

 

바위 능선을 오르내리다 보면 갑자기 거대한 암봉이 앞을 가로막는다. 빈질바위이다. 산길은 거대한 암벽을 피해 우회(迂廻)를 택하고 있다. 산사면(山斜面)의 중간을 자르며 이어지는 우회로(迂廻路)는 눈까지 수북하게 쌓여 위험하기 짝이 없다. 우회하는 중에 고산골로 내려가는 갈림길(이정표 : 깃대봉 3.2km, 감투봉 2.8km, 외송 4.9km/ (구)대구평 3.0km/ 고산골 1.0km)에서 대구평으로 방향으로 잠시 올라서면 빈질바위의 뒤편이다. 빈질바위의 높다란 암벽(巖壁)위에서 아래까지 안전로프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빈질바위를 지나면 길은 편해진다. 암봉(巖峰)이라고 부르기는 보다는 너덜지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지대를 통과하고, 이어서 작은 무명봉 위에 올라서면 용담호 방향에 두루뭉술한 봉우리 하나가 보인다. 능선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도(地圖)에 대덕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봉우리일 것이다. 빈질바위에서 30분 조금 넘게 걸으면 고덕산 꼭대기에 이르게 된다. 대구평 하산길과 나뉘는 갈림길(이정표 : 대구평 1.0km/ 감투봉 3.0km, 외송 6.9km, 죽도 10.2km/ 고산골 0.7km)인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내려가면 고산골이다.

 

 

 

 

 

산행날머리는 용평리 30번국도(國道)

하산은 거대한 암벽(巖壁)사이로 난 엄청나게 가파른 협곡(峽谷)사이를 내려서야 한다. 등산로에는 낙엽이 두텁게 쌓여있는데다가 눈까지 덮여있기 때문에 무척 미끄럽다. 길게 로프가 매어져 있지만 경사(傾斜)가 너무 가파른데다가 미끄럽기까지 하기 때문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대덕산 고스락에서 20분 조금 넘게 내려서면 고산골 대덕사 진입로에 닿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에 용담호를 끼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저만치에 오늘 산행이 종료되는 용평리 30번 국도가 보인다.

 

 

 

 

삼봉산 (三峰山, 1,254m)

 

산행일 : ‘12. 1. 15(일)

소재지 : 전북 무주군 무풍면, 경남 거창군 고제면의 경계

산행코스 : 신풍령(빼재)휴게소→수정봉→된새미기재→호절곡재→삼봉산(정상)→챙이바위→748m봉→소사고개(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동강산악회

 

특징 : 嶺湖南의 경계를 이루며 달려오던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줄기가 덕유평전(平田)을 일궈놓는 시작점이 삼봉산이다. 그래서 지명(地名)도 ‘덕유 삼봉산’으로 불린다. 투구봉, 노적봉, 칠성봉의 세 봉우리(대간의 마룻금을 벗어나 있다)로 인해 삼봉산이라 불리며, 여러 바위들이 어우러진 정상부는 칼날같이 솟아있다. 주능선을 중심으로 동쪽이 절벽(絶壁)인 반면, 서쪽은 부드러운 흙산(肉山)으로 이어진 두 얼굴을 가진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신풍령(秀嶺 : 빼재) 고갯마루

대전-통영간고속도로 무주 I.C에서 빠져나와 무주시가지(市街地)를 통과한 후, 30번 국도(國道/ 성주방향)를 따라 달리다가, 나제통문휴게소에서 오른편 37번 國道(거창방향)로 바꾸어 들어가면 무주리조트 앞을 지나 거창군 고제면으로 넘어가는 빼재 고갯마루에 이르게 된다. 차창 밖에는 ‘무주 구천동 계곡’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원당천이 같이 달리고 있다. 빼재 고갯마루에는 정자(亭子) 등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거창방면으로 고개를 돌리면 발밑에 신풍령휴게소가 내려다보인다. 고갯마루에는 秀嶺(수령)’이라고 적힌 돌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 고개는 신풍령이나 삼오정고개라고도 불린다.

* 빼재는 원래 동물의 뼈가 많다고 해서 '뼈재(거창군에서 세운 이정표에는 뼈재로 표기되어 있다)'라고 부르다가 어감(語感)이 안 좋아서 빼재로 바꿔 부르게 되었고, 한자어(漢字語)로 옮기는 과정에서 '빼어난 고개' 즉 '수령'(秀嶺)이라고 변질되어버렸다고 한다. ‘세상을 망치는 사람들은 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고개가 끄떡거려진다. 또 다른 이름인 신풍령은 추풍령을 본 따 '바람도 쉬어 가는 새로 생긴 고개'라는 뜻으로 갖다 붙였다고 한다.

 

 

빼재에서 수정봉으로 오르는 초입(初入)은 가파른 오르막 계단길이다. 그러나 저 가파름은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흉터이다. 이곳에 자동차도로(車道)를 만드느라 백두대간을 두 동강으로 잘랐기 때문에 생긴 절개지(切開地)의 사면(斜面)인 것이다. 고갯마루에서 휴게소 방향으로 100m 정도 내려가다 보면 왼쪽 경사면(傾斜面)에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계단이 보인다. 이 나무계단을 오르면서 산행은 시작된다.

 

 

 

빼재에서 100m 정도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면 주능선(이정표 : 하산길 0.1km, 삼봉산 4km)이다. 빼재의 고도(高度)가 무려 1000m 가까이 되기 때문에 능선까지의 거리가 짧은 것이다. 능선에 올라서면 대간길은 수정봉까지 우측으로 크게 휘어진다. 능선을 구별하기가 어려운 구릉(丘陵)지대로서, 중간에 길이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곳이 보이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찾는 이들이 많은 백두대간의 겨울철 눈길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날 정도로 뚜렷하기 때문이다.

 

 

 

 

빼재에서 30분쯤 가면 수정봉이 나온다. 수정봉은 정상 표지석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별다른 볼거리도 없다. 다만 멀리 덕유산이 보이는데 그 풍광(風光)이 참 곱다. 수정봉을 지나면서 능선길은 고도(高度)를 낮추는데, 수정봉에서 조금 남으로 기울던 줄기가 북동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곳에서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이정표 : 신풍령 1.9km/ 삼봉산 정상 2.6km/ 거창 봉산리 1.9km). 봉산삼거리로서 이곳에서 직진(直進)하면 고제면 봉산리이다. 아마 이곳이 된새미기재라고 부르는 고갯마루인가 보다. 이곳에서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기 시작한다. 첩첩(疊疊)이 쌓인 준령들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수령봉에서 삼봉산으로 가는 길은 잡목(雜木)들 세상이다. 사람의 키를 넘길 정도로 웃자란 잡목들은 간혹 터널까지 만들어낸다. 만일 오늘 상고대(樹霜, air hoar)라도 만들어 낼 정도로 추웠더라면 아마 이 숲은 가히 환상적(幻想的)이었을 것이다. 상고대는 잡목 위에 얹힐 때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천상의 꽃'이라 부르는 상고대는 안개나 습기 따위가 나무에 얼어붙어 생긴 산호 같은 설화(雪花)다. 안개가 잦거나 습한 고지대(高地帶)에서 상고대를 관찰할 수 있는데, 삼봉산도 멋진 상고대로 소문난 곳 중의 하나이다. 서해(西海)의 습한 대기로 인해 삼봉산에서도 상고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되새미기재에서부터 열리기 시작하던 조망은 이제는 시원스럽다 못해 호쾌(豪快)하기까지 하다. 다들 가는 길을 멈추고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한 모습들이다.

 

 

 

 

 

산행중에 만나게 되는 이정표(里程標)는 두 가지, 하나는 거창군에서 세운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산림청(山林廳)에서 세운 것이다. 그러나 두 기관에서 세운 이정표에 적힌 거리표시가 서로 달라 혼란스럽다. 빼재에서 삼봉산 정상까지의 거리가 거창군에서는 4.1Km로 표기한 반면, 산림청에서는 4.5Km로 적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상에서 소사까지의 거리도 서로 다르다. 등산객들을 위한 고마운 배려(配慮)가 사소한 일로 인해 까먹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금봉암 뒷편의 암릉

 

 

호절골재에서 바라본 지나온 수령봉 능선

 

 

된새미기재에서 봉우리(수령봉) 하나를 올랐다가 급하게 고도를 떨어뜨린 후, 오른편으로 돌면 억새밭 안부인 호절골재에 닿게 된다. 호절골재는 거창군 고제면 봉산리에서 무주군 무풍면 삼거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다. 호절골재에서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산길은 조릿대 군락(群落) 사이를 뚫으며 지나가고 있다. 조릿대 밭에 금봉암을 가리키는 이정표(뼈재 3.8km/ 삼봉산 0.34km/ 금봉암 0.5Km)가 보인다. 호절골재에서도 금봉암을 가리키는 이정표((뼈재 3.6km/ 삼봉산 0.6km/ 금봉암 0.7Km)를 보았으니 벌써 두 번째이다. 호기심에 들러보고 싶은 충동(衝動)이 생기지만 꾹 참는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밭을 헤치며 다녀온 사람의 ‘볼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봉암 갈림길에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드디어 삼봉산 정상이다.

 

 

심심찮게 오른편으로 조망이 트인다.

 

금봉암 갈림길

 

▼ 금봉암 갈림길에서 바라본 삼봉산 정상

 

 

삼봉산 정상은 별로 넓지 않은 분지(盆地), 한 가운데에 돌무더기가 있고 그 위에 거창산악회에서 세운 ‘덕유 삼봉산’이라고 쓰인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상은 좁은데다가 조망(眺望)도 시원치 않기 때문에 다소 실망스럽다. 인증 사진(寫眞)만 찍고 가려다가 잠깐 쉬면서 준비해온 떡으로 요기를 한다. 부산에서 온 등산객들이 정상표지석을 둘러싼 채로 점심을 먹고 있어 사진촬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산행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제발 산에서 식사를 할 때에는 가급적 정상표지석 주위는 피해주었으면 좋겠다.

 

정상에서 바라본 덕유산, 스키장 슬로프가 우산살 처럼 펼쳐져 있다.

 

▼ 정상에서 바라본 금봉암 갈림길 능선

 

 

삼봉산의 백미(白眉)는 정상에서 소사재로 이어지는 북릉(北稜)이다. 정상에서 소사고개 방향으로 500m 정도 걸어가면 1250봉이라 부르는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부터 북릉의 암부(巖部)가 시작된다. 1250봉은 비록 정상보다 높이가 4m 낮지만, 오히려 이곳을 삼봉산의 정상으로 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상보다 한결 뛰어난 자태(姿態)를 보여주고 있다. 1250봉의 뒤로는 소사재와 너른 품의 대덕산이 보인다. 북릉에 들어서면 가지각색의 바위들로 이루어진 암릉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면서 능선을 걷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암봉인 1250봉

 

 

 

 

 

 

길은 바위봉우리 좌측으로 우회(迂廻)하도록 나 있지만 봉우리 쪽으로 발자국 몇 개가 보인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먹마디처럼 툭 튀어나온 바위 위로 올라서니, 예상치 못했던 진경(珍景)이 펼쳐진다. 앞뒤로 빼어난 암릉미(巖稜美)를 발산하는 능선이 이어지는데, 바위마다 머리위에 하얀 눈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 절벽(絶壁) 아래에는 소사마을이 다소곳이 앉아있다.

 

 

 

 

다랭이 논들이 정겹다.

 

 

 

암릉으로 연결되던 북릉이 갑자기 끝을 맺으면서(이정표 : 삼봉산 정상 0.8Km/ 소사고개 2.1Km)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 후, 마치 계곡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곳으로 급격(急激)하게 고도를 낮추고 있다. 경사(傾斜)가 60~70도(度)는 되어 보일 정도로 가파르기 짝이 없다. 1,200m 높이의 능선에서 소사고개(680m)까지 500m가 넘는 높이(高度)를 1Km정도의 구간에서 낮추다보니 가파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리막길 안전(安全)로프에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의 단골메뉴인 단체 줄다리기를 보는 것 같다. 암릉구간에서 시작되던 정체(停滯)현상이 이제는 아예 내려서는 시간보다 차례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을 지경이다. 내리막 구간마다 안전(安全)로프가 매어져 있지만 수북하게 쌓인 눈 때문에 중심을 잡기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스패츠에 아이젠까지 신었지만 미끄럽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소사고개

하산길은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서 오른쪽으로 휘어진다. 1Km 정도 가파른 산길을 내려서면 철조망으로 울타리가 쳐져있고, 그 가운데 자그마한 철문이 하나 보인다. 문을 넘어서면서 지겹도록 힘들었던 가파른 내리막길도 드디어 끝이 난다. 철문을 지나 솔숲을 통과하고 나면 이내 널따란 고랭지 채소밭이 보이고, 대간길은 황량한 채소밭의 두렁을 따라 이어진다. 광활(廣闊)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넓은 채소밭이 끝나갈 무렵이면 울창한 일본이깔나무(落葉松) 숲이 나타나고, 숲의 터널 건너편에서 소사고개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소사고개는 무풍면에서 거창군 고제면으로 넘어가는 포장도로이다. 그러나 고갯마루에 있는 소사동은 행정구역(行政區域)이 거창군 고제면이라고 한다. 도계(道界)는 이곳에서 무주방향으로 한참을 더 내려가야만 한다.

 

 

맞은편 산이 대덕산과 초점산

 

 

 

 

대덕산 (大德山, 1,291m)-초점산(焦點山, 1,274mm)

 

산행일 : ‘12. 1. 8(일)

소재지 : 전북 무주군 무풍면, 경남 거창군 고제면, 경북 김천시 대덕면의 경계

산행코스 : 덕산재→얼음골샘터→대덕산→헬기장→안부→초점산(三道峰)→1180봉→소사고개(산행시간 : 3시간 30분)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삼도봉(三道峰)은 전국에 4군데가 있다, 그중 전북, 충북, 경북이 만나는 민주지산의 삼도봉(1,248m)과, 전북, 전남, 경남이 만나는 지리산의 삼도봉(1,499m)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전북, 경북, 경남이 만나는 이곳(1,248m)과 강원, 충북, 경북이 만나는 어래산의 삼도봉(1,064m)은 아직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곳이 백두대간(白頭大幹) 위에 올라앉아있으면서도 사람들의 입에 덜 오르내리는 것은, 흙산(肉山) 특유의 포근함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심설(深雪)산행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은 겨울철이면 이곳을 자주 찾는다. 눈이 수북이 쌓인 밋밋한 능선을 걸으며 주변 산릉(山稜)을 조망하는 것이 자못 호쾌(豪快)하기 때문이다.

 

 

무주 쪽에서 들어가려면 ‘나제통문(羅濟通門)’을 지나게 된다. 높이 3m, 길이 10m의 인공동굴로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만들어진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삼국시대는 아닐 것이라는 게 다수설(多數說)이다. 이 통문이 있는 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신라 땅이고 서쪽은 백제 땅이었다고 한다. 현재 이 통문의 양쪽에 위치한 무풍방면의 이남(伊南)과 무주방면의 새말[新村]은 행정구역상으로는 무주군 소천리에 속하지만, 아직까지도 언어와 풍속은 판이하게 다르다고 한다.

 

 

 

 

산행들머리는 덕산재 고갯마루

대전-통영간고속도로 무주 I.C에서 빠져나와 무주시가지(市街地)를 통과한 후, 30번 국도(國道/ 성주방향)를 따라 달리면 설천면사무소와 무풍면사무소를 지나 백두대간(白頭大幹) 마룻금을 가로지르고 있는 덕산재 고갯마루에 닿게 된다. 해발 644m의 덕산재는 김천시 대덕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경계(境界)로 하는 고갯마루이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맨 먼저 ‘백두대간 덕산재’라고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이 눈에 띠고, 그 뒤에는 폐업(廢業)을 한 휴게소가 지금은 '대덕산 산삼 감정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있다. 표지석의 건너편에 대덕산 등산로 안내판과 이정표가 서 있다. 등산로는 안내판의 뒤에서 열리고 있다.(이정표 : 덕산재 3.5Km)

 

 

 

통나무 계단으로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대략 10분쯤 올라가면, 잠깐 내리막길로 변한다. 산길은 또다시 오르막길로 변하지만, 경사는 완만(緩慢)하다. 길옆에는 온통 소나무와 진달래 천지이다.

 

 

 

 

 

무덤을 지나면서 산길은 잠시 내리막길을 보여주다가, 이내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가파름과 완만(緩慢)함을 번갈아 가며 만나게 해준다. 문득 내려오는 차 속에서 들었던 산행대장의 산행안내 멘트를 떠올린다. ‘덕산재에에서 대덕산 정상까지는 2시간이 걸립니다.’ 이제 겨우 40분이 지났을 뿐이니 앞으로도 1시간20분을 더 가파른 오르막길과 싸워야한다. ‘오늘 난 죽었다.’ 내 얘기를 들은 친구 바우군(君)의 얼굴색이 노랗게 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어쩌면 나보다 그가 훨씬 더 힘들어할 것임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기업의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바쁜 회사 일정 때문에 몇 달간 산행을 하지 못했었고, 체력(體力)이 달릴 것을 우려해서 망설이고 있는 것을 내가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왔다.

 

 

 

산길은 산의 생김새에 따라 변하고 있다. 너무 급한 경사(傾斜)를 만나면 길은 능선을 벗어나, 산의 사면(斜面)을 따라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것도 안 될 경우에는 산길은 지그재그로 고도를 높인다. 지그재그 오르막길은 힘들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고도를 높여주기 때문에 차라리 반갑기까지 하다. 위를 향해 치닫던 산길은 파릇파릇한 조릿대가 장식하고 있다. 겨울에 만나게 되는 푸르름은 언제나 싱그럽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설량(積雪量)이 점점 많아지더니, 마침내 조릿대를 덮어버릴 정도에까지 이른다. 하얀 눈 위에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는 파란 잎사귀 몇 개,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조릿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15분 정도 오르면 얼음골 약수터이다. 호스를 타고 흘러나오는 물의 량(量)은 졸졸 흐르는 수준, 그러나 가뭄에도 결코 마르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명품약수(名品藥水)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약수터를 지나면서 길은 더욱 가팔라진다. 길은 비교적 잘 정비되어있다.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어느 정도 헐떡이다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이 보인다. 양쪽 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지만,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한 오른편 길로 방향을 잡는다. 2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왼편에 시야(視野)가 확 트이는 전망대에 올라서게 된다. 서북쪽에 덕산재를 뚫고 이어지는 30번 국도가 눈에 들어온다. 눈에 꽉 차오르고 있는 둥그런 봉우리는 대덕산 정상이다.

 

 

 

 

고도(高度)를 높여가면서 점점 밀도(密度)를 더해가던 눈은, 이제는 아예 설국(雪國)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눈이 제법 많이 쌓여있지만, 꼬리를 물고 찾아드는 백두대간 산꾼들이 깔끔하게 러셀(russell)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날씨는 그리 춥지 않은데도 입에서는 허연 입김이 솟구친다. 아무리 따뜻해도 겨울산은 겨울산인 것이다. 산길을 오르다보면 등산로 주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이 눈에 띈다. 1-1, 1-2, 1-3... 행정관청(行政官廳)에서 세운 팻말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구조신호를 보낼 때,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는 푯말이다. 아마 ‘1’은 덕산재에서 대덕산까지의 구간을 나타내는 숫자이고, 그 뒤의 숫자는 매 500m 마다 숫자를 하나씩 더해가고 있을 것이다. 숫자는 기쁨의 양(量)과 정비례(正比例)한다. 숫자가 늘어남은, 정상까지의 거리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만큼 고통의 시간도 정비례로 줄어드는 것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의 힘든 고행(苦行)길에서 잠시나마 위로를 삼아본다.

 

 

 

 

전망대(展望臺)에서 채 10분이 못되는 거리에 대덕산 정상이 있다. 예전에 다락산이라고도 불리었던 대덕산은, 부드러운 흙산(肉山)이나 규모가 커서 우직한 남성을 연상케 한다. 강원도 태백시에 위치한 대덕산(1,307m)과 이름뿐만 아니라, 산세까지도 비슷하다. 산의 이름에 걸맞게 정상은 넓고 평평한 헬기장이다.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시원스레 조망(眺望)이 트인다. 동남쪽에는 가야산이 있고, 서남쪽에 보이는 것은 덕유산의 향적봉이다. 오르는 도중에 쉬어가자는 투정을 부리기는 했지만, 친구 바우는 아직까지는 잘 따라와 주고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30분, 산행대장의 예고보다 30분이나 단축시키고 있다.(이정표 : 소사. 5.2Km/ 덕산재 3.5Km)

 

 

 

 

 

 

초점산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작은 헬기장을 지나고, 참나무 숲을 지나는가 싶으면 또다시 억새밭이다. 길의 양쪽을 억새가 뒤덮고 있어 마치 가르마 사이를 걷는 느낌이다. 가르마 사이의 길을 걷는 일은 제법 운치가 있을 법도 하건만 오늘은 영 ‘아니올시다.’ 이다. 눈이 녹은 흙길이 많이 질퍽대기 때문이다. 이건 운치가 아니라 숫제 짜증스러울 정도이다.

 

 

 

 

 

 

대덕산에서 초점산까지는 별로 힘들지 않는 산길, 경사가 완만(緩慢)한 내리막길에서 여유로운 산행을 즐기다보면 진행방향에 초점산이 보인다. 대덕산 정상에서 초점산 앞에 있는 안부까지는 대략 20분, 그리고 안부에서 10분정도 오르막길과 씨름하다보면 이내 초점산 정상이다.

 

 

 

 

초점산 정상은 거창군에서 세운 정상표지석과 이정표 두 개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에 왔을 때에는 삼도봉이라고 적힌 정상표지석이 보였는데 찾아볼 수 없다. 질퍽거리는 바닥에 부러진 대리석 두 개가 깔려있는데, 사라진 정상표지석의 잔해(殘骸)가 아닌가 싶다. 누군가의 몰상식이 안타깝기만 하다. 삼도봉 표지석이 보이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삼도봉이라는 지명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리지나 않을까하는 노파심(老婆心) 때문이다. 이곳 삼도봉은 정상을 기준으로 서쪽은 무주 땅, 남쪽은 거창 땅, 동쪽은 김천 땅이다. 참고로 대화합기념탑이 있는 또 다른 삼도봉은 이곳에서 북쪽방향으로 그리 멀지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이정표 : 대덕산 1.5Km/ 소사 3.2Km)

 

 

 

정상에 서면 서쪽 방향으로 덕유산과 삼봉산 그리고 향적봉과 월봉산, 금원산, 기백산 등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남쪽 거창쪽에는 금귀봉과 보해산 그리고 수도산, 가야산 등 거대한 산군들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다. 오늘 지나온 대덕산은 내달리면 금방 닿을 수 있을 정도로 코앞에 있다.

 

 

 

 

초점산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이 수도지맥의 분기점(分岐點)으로서, 왼편은 수도지맥인 국사봉으로 가게 되고, 우리가 가려고 하는 백두대간 마룻금은 오른편 능선(稜線)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수도지맥은 낙동강의 지류(支流)인 황강의 울타리를 만들면서 국사봉과 수도산, 우두산과 비계산, 오도산을 거쳐 황강 위에 놓인 청덕교에 이르게 되는 산줄기이다.(이정표 : 소사 2.8Km/ 초점산(삼도봉)0.4Km)

 

 

 

수도지맥 분기점에서 소사고개로 내려서는 길은 급경사(急傾斜), 가파르기 짝이 없을 정도이다. 대부분 경사가 심할 경우에는 지그재그로 길을 만들면서 고도(高度)를 낮추는 것이 보통인데, 이 능선은 갈지(之)자를 쓸 만큼의 공간(空間)도 제공해 주지 못하는가 보다. 눈이 쌓인 양이 별로 많지 않지만 아이젠을 벗지 못하는 것은, 가파름 때문에 맨땅에서도 중심 잡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이다.

 

 

 

 

길가에 매어놓은 로프에 의지해서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조심스런 발걸음이 지겨울 때 즈음이면 저 아래에 임도(林道)가 보이고, 이때부터 길은 오솔길과 임도, 그리고 밭두렁을 따라 이어진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오솔길에는 일본이깔나무(落葉松) 군락(群落)이 펼쳐지고, 밭두렁 길옆의 배추밭에는 배추들이 하얗게 얼어있다. 채소(菜蔬)가 과잉(過剩) 생산되어 수확을 포기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는데 사실인가 보다. 자식 같이 애지중지하며 키운 배추를 포기하며 가슴 아파했을 농부의 마음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음은 나 또한 시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소사고개

높낮이가 거의 없는 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인가(人家)가 가까워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다가 저만큼에 외딴 농가(農家) 한 채가 보이고, 소사고개로 내려가는 길은 시멘트로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내 소사고개에 닿게 된다. 소사고개는 동쪽 거창군 고제면 봉개리와 서쪽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를 잇는 1089번 지방도(地方道) 상의 해발 680m 고갯마루이다. 꽤 높은 고개지만 부근이 드넓은 분지(盆地)이고, 사방이 농토이기 때문에 높은 곳이라는 실감은 나지 않는다.

 

 

 

천등산(天燈山, 707m)

 

산행일 : ‘11. 12. 11(일)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행코스 : 원장선마을→빈덕바위→감투봉→천등산→산죽길→고산촌(산행시간 : 3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정산악회

 

특징 : 보통 천등산 하면 세 곳을 꼽는다. 전남 고흥의 천등산과, 충북 제천의 천등산, 그리고 이곳 완주의 천등산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노래에 나오는 제천의 천등산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산 자체로만 놓고 볼 것 같으면 고흥과 완주의 천등산에 비해 품격(品格)이 한참 떨어진다. 완주의 천등산은 괴목동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 대둔산의 유명세(有名稅)에 밀려 소외(疏外)되고 있지만, 우람한 근육질로 이우러진 암릉은 결코 대둔산에 뒤지지 않을 정도이다.

 

산행들머리는 운주면 장선리 원장선마을

익산-장수간고속도로 완주 I.C를 빠져나와 17번 국도(國道/ 대전방향)를 따라 들어가면 경천면소재지를 지나서 산행들머리인 운주면 장선리 원장선마을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대전통영고속도로 추부 나들목에서 17번 국도(전주방향)를 따라 들어오는 방법도 있다.

 

 

산행은 원장선 마을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골목길을 따라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동네를 통과하고 나면 농로(農路)가 나타난다. 왼편 언덕 위 대나무 숲은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얼음이 꽁꽁 어는 겨울철, 영동지방은 이미 폭설(暴雪)로 몸살을 앓고 있을 정도로 겨울의 한 가운데이다. 한 겨울에 만나게 되는 푸르름은 생각만 해도 싱그럽다. 세상이 온통 메말라있는데 뭔가 하나 정도는 삶의 기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농로가 끝나면서 길은 드디어 산으로 접어든다. 천등산은 바위산이라지만 아직은 순수한 흙길, 그곳도 빛깔 고운 황톳길이다. 산길은 서서히 정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고도(高度)를 높여가다가 갑자기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고 있다. 거대한 바위절벽이 마치 성벽(城壁)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바위벽을 피해 옆으로 우회(迂回)하는 길은 얼마 안가서 끝이 나고, 길은 두 갈래로 나뉘고 있다. 오른편으로 가면 신망터를 지나 정상으로 가게 되고, 곧바로 정상으로 가려면 왼편 오르막길로 진행하면 된다. 이곳에서는 기도터를 들렀다가 정상으로 향하는 것이 바람직한 선택일 것이다. 천등산은 기(氣)가 억센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천등산에는 유난히도 기도터가 많이 산재(散在)해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이곳은 ‘신망터’라는 이름으로 산행지도에까지 등재(登載)되었을 정도로 명소(名所)로 알려진 곳이니, 당연히 들러보아야 할 포인트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야속하게도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진행표시지(進行標示紙)는 왼편을 향하고 있다. 아쉽지만 왼편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으로 올라서면 얼마 안 있어 거대한 슬랩(Slab)을 만나게 된다. 스릴을 즐기는 등산객들이라면, 앞뒤 가릴 필요도 없이 환호성과 함께 달려들 만큼 멋진 슬랩이다. 그러나 오늘 같이 눈이 오는 날은 그저 그림의 떡(畵中之餠), 입맛만 다시면서 우회로(迂廻路)로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몇 번의 바위 오름길을 통과하고 나면 반반하고 널따란 바위 위로 올라서게 된다. 아마 빈덕바위라고 불리는 바위일 것이다. 빈덕의 어원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을뿐더러 특별한 외형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다만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여있어서, 남쪽 용계천 건너편의 써레봉과 불명산의 연릉이 뚜렷하고, 남으로 뻗어간 금남정맥(錦南正脈)의 마룻금이 아련하게 하늘과의 경계선(境界線)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바위위에 자라고 있는 노송(老松)이 멋스럽다. 고고(孤高)한 자태로 주변의 바위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고사목(枯死木), 죽어서도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음이라니...

 

 

 

빈덕바위를 지나 잠시 완만하던 암릉길은 위로 향할수록 투박해진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위험지역에는 어김없이 안전(安全)로프가 걸려있으니까. 힘들지만 큰 위험없이 첫 봉우리인 520봉에 올라선다. 진행방향의 감투봉과 산군(山群)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520봉에서 바라보는 감투봉의 모습은 바위와 소나무들이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는 모습이다. 자못 탁월한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520봉에서 감투봉까지 이어지는 암릉코스는 천등산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감투봉으로 가려면 먼저 수직(垂直)에 가까운 절벽을 내려와야 한다. 안전로프가 매어있다고는 하지만, 절벽이 까마득하게 높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움을 없애주지 못한다.

 

 

 

 

 

 

건너편 천등산의 아랫도리에 있는 거대한 바위 아래에 인적이 보인다. 저곳에도 석굴이 있는 모양이고, 움막이 보이는 것을 보면 아마도 기도꾼들이 상주(常住)하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천등산의 곳곳에는 기도터들이 널려있고, 수많은 기도꾼들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찾아든다고 한다.

 

 

 

감투봉으로 오르는 길은 주로 바위틈 사이로 나있다. 밧줄을 잡고 올라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서야만 한다. 아슬아슬하게 솟구치듯 절벽에 매달린 로프에 부대끼는 오르내림 끝에 감투봉에 올라선다. 520봉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선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천등산의 이름은 산의 형상(形象)이 옛날 시골집에서 쓰던 호롱같이 보인다고 해서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진산에서 운주로 넘어가는 배티재 마루에서 보면 그 호롱 꼭지는 더욱 분명해진다고 한다. 또한 견훤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진다. 천등산에 산성(山城)을 쌓고 있던 견훤이 한밤중 적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바위굴 안에 있던 용이 닭 울음소리를 내어 견훤과 군사들을 깨우고, 천등산 산신이 밝은 빛을 비춰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늘(天)이 불을 밝혀(燈) 준 산'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천등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성의 이름도 용계성(龍鷄城)이다.

 

 

 

오르는 길목 곳곳에는 기도(祈禱) 흔적들이 눈에 띈다. 저 돌탑에 쌓인 돌멩이 하나하나마다 등산객들의 염원이 담겨 있을 것이다.

 

 

 

바위위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한그루는 마치 분재(盆栽)작품을 보는 듯 아름답다. 저리도 척박(瘠薄)한 곳에서 삶을 영유해 나가고 있는 끈질긴 생명력, 우리네 삶도 저런 끈질김이 필요하지 않을까?

 

 

감투봉에 올라 지나온 능선을 바라보면 520봉과 521봉은 또 다른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온다. 바위절벽(絶壁)과 그리고 깎아지르듯이 서있는 봉우리는 아까 지나왔던 520봉이 아닌 또 다른 520봉이다. 오를 수가 없어 우회해야 했던 저 봉우리 주변의 산세(山勢)가 천등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寶石)일 것이다.

 

 

 

 

 

감투봉에서 이곳 사람들이 고깔봉이라고 부르는 정상까지는 완경사(緩傾斜)의 연속이다. 바위를 넘어가야하고 때로는 피해야 하는 전형적인 능선길이다 이런 아기자기한 능선길을 10분 정도 걸으면 드디어 천등산 정상이다.

 

 

 

 

천등산 정상은 특별히 치솟아 올라있는 곳이 아니라 능선에서 약간 높은 지점일 따름이다. 한 가운데에 아담한 정상표지석이 서있고, 그 뒤를 지역의 상호신용금고에서 세운 스테인리스로 만든 정상표시 쇠기둥이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도 천등산의 억센 기를 느낄 수 있다. 정상주변의 나무들에 매달린 깃발들에서까지 종교(宗敎)의 냄새가 흠씬 풍겨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 서면 남으로 금당리 용계천이 들녘을 가르며 흐르고 있고 그 너머로 운장산으로 뻗어나가는 금남정맥(錦南正脈)과 그 안쪽에 솟아오른 산봉과 산릉이 꿈틀거리고 있다.

 

 

정상에서 하산은 고산촌 방향으로 잡는다. 원장선에서 올라왔던 길과 반대방향으로 길이 또렷하니 혼동할 일은 없을 것이다. 고산촌 방향으로 50m쯤 진행하면 왼편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보인다. 바위는 한쪽 면(面)이 깊게 파여 있고, 그 아래를 반반한 돌들로 제단(祭壇)을 만들어 놓았다. 아마 이곳도 기도터로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산길의 즐거움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나뭇가지 사이로 가끔 그 모습을 드러내는 대둔산 바위봉우리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이다. '호남의 금강'이라고 불리는 대둔산(大芚山·878m)은 대둔산과 천등산 사이를 흐르는 괴목동천의 건너편에 있다. 대둔산은 이름에 걸맞게 능선과 골짜기 곳곳에 기암(奇巖)을 세워놓고 바위절벽을 늘어뜨린 채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둔산을 찾는 반면에, 상대적으로 이곳 천등산은 은둔(隱遁)의 산으로 소외(疏外)되고 있는 것이다.

 

 

 

고산촌 방향으로 300m정도 내려가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뉘고 있다. 진행표시지는 오른편을 가리키고 있다. 오른편 언덕을 오르면 나타나는 아찔한 수직(垂直)의 암벽(巖壁), 암벽에는 안전로프가 길게 메어져 있다. ‘무릎을 펴! 너무 바위에 들어붙지 말고’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로프에 매달린 사람이 겁(怯)을 잔뜩 먹었나보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대부분 바위에 찰싹 달라붙는 경향이 있으니까 말이다.

 

 

 

 

정상에서 대둔산의 허둥봉을 향하여 이어지던 하산길은 암릉을 지나면서 갑자기 오른편으로 급선회(急旋回)를 하게 된다. 이어서 어른들의 키만큼 웃자란 산죽군락지(山竹群落地)를 지나면, 산길은 협곡(峽谷)을 통과하게 된다. 양옆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협곡의 바닥은 너덜길, 까딱해서 발을 헛디딜 경우 다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산행 날머리는 고산촌

협곡(峽谷)을 빠져나오면 길은 고와진다. 가파른 경사(傾斜)를 배겨내지 못해 갈지(之)자를 그릴 수밖에 없는 내리막길도 길게 이어지지만 황토 흙으로 이루어진 산길은 대체로 걷기에 편한 편이다. 주변은 온통 참나무 일색, ‘사각사각’ 신발 밑에서 내지르는 낙엽(落葉)들의 신음소리가 마냥 경쾌하기만 하다. 참나무 아래로 흐르던 산길이 잔솔밭 속으로 숨어들면서 오솔길은 경사까지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고산촌 마을의 뒤뜰에 내려서게 된다. 마을 앞의 냇가에서 땀을 씻으며 돌아보면, 천등산이 다시 한 번 만나자며 손짓하고 있다.

 

 

 

 

하천을 건너 도로가에 세워진 산악회의 간이식당, 내가 제일 고대하던 시간이다. 오늘 다시 한 번 정회장님의 맛깔스런 음식솜씨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치를 비롯한 밑반찬이야 익히 그 솜씨를 알고 있지만, 돼지고기 송송 썰어 넣은 김치찌개도 맛깔스럽기는 매 한가지이다.

 

거기다 먹음직스런 과메기가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까만 김 한 장 손바닥에 깔고, 그 위에다 꼬들꼬들한 과메기 한 점 올린 후에, 물미역과 실파, 그리고 송송 썰어 놓은 청양고추 살짝 올려서 한 입에 쏘옥 집어넣는다.

 

이렇게 좋은 안주에 어찌 술이 한잔 들어가지 않을 수 있으리오... 한 잔, 두 잔, 그리고 세 잔... 그렇게 마시던 술의 양을 조절 못하고 난 또 술에 절고 말았다.

 

좋은 산 안내해 주고, 거기다 이렇게 맛난 음식까지 제공해주신 정산악회 운영진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적상산((赤裳山, 1,034m)

 

산행일 : ‘11. 11. 6(일)

소재지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과 무주읍의 경계

산행코스 : 안사내→안렴대→안국사→정상(기봉)→서문삼거리→향로봉 왕복→장도바위→서창마을(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곰바우산악회

 

특징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적상산의 산세를 ‘사면으로 고추선 벽이 층층이 험준하게 깎이어 마치 치마를 두른 것 같아, 옛사람들이 그 험준함을 가지고 성을 삼았다. 두 개 길이 겨우 위로 열리지만, 그 속은 평탄하고 넓어 시냇물이 사방에서 나니, 참으로 천연의 험소라 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적상산은 산의 전면에서 바라보면 상단과 하단에 유선형의 절벽을 드러내고 있어서 이중으로 성채를 쌓은 형상이다. 그러나 겉모습과는 달리 막상 산에 들어서면 전형적인 흙산(肉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이번 산행은 ‘곰바우산악회’의 1,000번째 산행이란다. 1년에 일요일이 60번 정도이니, 매 일요일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산행을 이어왔다고 해도, 16년 이상이 소요되었을 것이니, 참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산악회이다. 적상산 산행을 마치고, 식당에서 지낸 기념고사에 참여할 기회도 생겼고, 점심으로 맛난 매기 매운탕도 대접받는 행운도 누렸다. 점심상, 내가 앉은 점심상에 둘러앉은 네 분은 노익장이셨다. 산악회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산에 대한 연륜이 깊으신 노익장, 난 그분들의 열정과 젊음을 닮고 싶다. 80세가 넘어서도 1천 미터가 넘는 산을 오를 수 있는 체력과 열정을 말이다. 마지막으로 올해 74세시라는 젊은 회장님, 오래오래 80세, 아니 90세가 넘도록 ‘곰바우산악회’를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곰바우산악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산행들머리는 적상면 안사내부락

대전-통영간고속도로 무주 I.C를 빠져나와, 19번 국도(國道/ 장수읍 방향)를 따라 달리다가 적상면소재지에서 구(舊)도로로 내려와 적상삼거리에서 사내로로 들어서면 이내 사내교차로(交叉路)에 닿게 된다. 산행들머리인 들머리인 내사내길은 사내교차로서 약 100m쯤 못미처에 위치하고 있다.  

 

 

사람은 겉모습(外貌)만 보고 평가하면 안 된다. 들머리를 몰라 헷갈리던 회장님이 동네 주민을 붙잡고 산행들머리를 물어본다. ‘저 아래로 돌아서 들어가세요.’ 그러나 회장님은 그 분이 영 미덥지 않으신 모양이다. 그만큼 그분의 외양(外樣)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던 것이다. 결국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러 나오신 아주머니에게 물어본 후에야, 그분이 가르켜준 길이 아닌 동네 가운데로 들어선다. 동네를 지나 밭두렁 몇 개를 거치면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農路)를 만나게 된다. 이 길이 우리가 찾고 있던 올바른 길이었으며, 아까 그 아저씨가 가르쳐 주었던 바로 그 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외모만 보고 평가하지 마라’는 속담이 생겨난 모양이다.

 

 

 

나라를 온통 휩쓸었던 ‘구제역 파동’탓일까? 텅 빈 축사를 지나면 거대한 느티나무가 보인다. 굵기로 보아 수백 년은 되었음 직한데 보호수 안내판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인가가 없는 곳에 있기 때문에, 아마 중요도가 떨어지는 모양이다. 길가에는 가을 추수가 끝난 고추밭, 붉게 익은 고추가 아직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뉴스에서 보면 고추 값이 금(金)값이라던데 무슨 이유로 저렇게 남겨놓은 것일까?

 

 

 

 

 

산길은 산의 사면(斜面)을 옆으로 자르며 이어지다가 골짜기를 건너게 된다. 이어서 나타나는 오르막길을 오르면 이내 거대한 암반(巖盤)이 위협하듯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길은 그 사이를 뚫고 위로 향한다. 산 아래에서 볼 때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암벽(巖壁)에 갈라진 틈이 있는 것이다.

 

 

 

 

암반(巖盤)은 약간 경사(傾斜)가 있지만, 오르는데 그리 힘들지도 않을뿐더러 두려울 정도로 위태롭지도 않다. 이곳이 언제 토목공사(土木工事) 현장이었었나? 마치 시멘트콘크리트를 타설해 놓은 것 같이, 암반에 둥글둥글한 자갈들이 박혀있는 것이다. 이런 바위를 보고 퇴적암의 일종인 ‘역암(礫巖)’이라고 부른다. 오랜 옛날 강이나 바다의 바닥에 있다가 융기(隆起)작용에 의해서 솟구쳐 올라왔었을 것이다. 이런 바위들은 이곳 말고도 청량산이나 선운산에서도 볼 수 있다. 암반 위로 올라서면 안사내마을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시원스레 열린다. 적상산이 적색역암으로 이루어진 탓에 이곳의 흙들조차도 붉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다.

 

 

 

암반을 통과한 후부터, 등산로는 가파르게 변한다. 오르막길은 가파른 경사를 배겨내지 못하고, 갈지(之)자를 만들어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고 있다. 이곳은 비 정규등산로, 사람들이 다닌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오랫동안 쌓여온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내딛는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고 있다. 비탈길에 쌓인 낙엽을 밟으면 미끄러지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오르막길을 고난의 길로 만들고 버린다. 등산로 주변의 나무들은 이미 오래전에 서리를 맞은 듯, 잎들이 모두 떨어져 버렸고, 빈가지만 허공에 걸려있다. 대신 등산로는 낙엽과 솔가리로 덮여있어서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울려나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여간 듣기 좋은 게 아니다. 가을이 무르익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겁기 한량없다. 한걸음씩 겨우 내딛다시피 한다. 오르막길은 가파르기도 하지만 속이 상할 정도로 길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파른 오르막이 끝나면 거대한 암봉(巖峰)이 나타난다. 산행지도에 보면 전망바위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곳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곳에서는 암봉을 끼고 왼편으로 돌아 내려갔다가 다시 가파르게 올라서야 한다. 자갈이 깔린 가파른 오르막길은 오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빗물 때문에 자갈이 자꾸 밀리기 때문이다.

 

 

 

 

암봉을 우회하여 오르면 이번에는 멋진 바위문(巖門)이 나타난다. 이곳도 통천문 (通天門)이라고 불러야 하나? 다른 곳에서 보았던 통천문보다 더 잘생겼으면 잘생겼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멋진 바위 문이다. 그러나 이 문은 버젓이 이름을 갖고 있다. 바로 남문(南門)이다. 생김새에 비해 너무나도 평범한 이름이지만 그래도 어쩌랴 버젓이 지도에까지 올라가버린 이름인 것을...

 

 

 

거대한 암벽이 나타난다. 오른편에는 커다란 동굴(石窟)이 보이고, 그 왼편에 어른이 통과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좁은 바위틈(石門)이 보인다. 70Kg이 넘는 내가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달리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으므로 무작정 들어서고 본다. 바위 틈새에 끼어 고생은 했지만, 다행히 통과할 수는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온 바위 위가 안렴대(安廉臺)이다. 안렴대는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 말기 거란의 침공을 받았을 때 ‘삼도안렴사(三道 按廉使)’의 관속들이 조금 전 이곳에 올라오면서 보았던 동굴에서 피난을 했다고 해서 안렴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안렴대는 ‘덕유 전망대’라고 불릴 정도로 덕유산 능선과, 진안과 장수지역에 첩첩이 늘어선 산릉들이 잘 조망된다고 하지만,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구태여 오래 머물 필요가 없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정도 지났다.

 

 

 

 

 

지금은 가을 중에서도 늦가을, 주변의 말라 비틀어져버린 단풍나무 잎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가을이 무르익은 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내 이마에는 땀이 그칠 줄 모르고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아니라 숫제 ‘秋來不似秋’, 가을은 가을이되 결코 가을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리기 시작하던 는개(안개보다는 굵고 보슬비보다는 가는 비를 가리키는 순수한 우리 말)가 이제는 가랑비의 수준을 넘어선지 이미 오래이다. 안에서는 땀, 밖에서는 빗물, 등산복은 이미 팬티까지 젖어버렸다. 일기예보만 믿고 산을 찾은 난 욕지거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비가 온다고 해서 산행을 포기했던 어제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날씨가 맑을 것이라고 해서 마음 놓고 산을 찾아왔건만 일기예보와는 반대로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제법 많이 말이다. 우리의 ‘기상청’은 오늘도 날보고 마음 놓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라고 부추기고 있다.

 

 

 

적상산으로 향하는 능선을 잠깐 벗어나 안국사로 내려가기로 했다. 통신기지 안테나처럼 보이는 시설물 앞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곱게 마른 단풍나무 터널을 따라 내려서면 안국사이다.(갈림길 이정표 : 안렴대 0.15Km/ 안국사 0.45Km/ 향로봉 1.45Km)

 

 

 

 

안국사(安國寺) : 고려 충열왕 3년 월인(月印)화상이 창건한 것이라고도 하고, 조선 태조 때 자초(自超)가 적산산성(사적 146호)을 쌓으며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원래는 적상산의 분지(盆地)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본래의 위치가 양수발전소의 상부댐(적상호)에 잠기자(水沒)되자 1992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광해군 5년에는 사찰을 중수하여, 적상산 사고를 지키기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해 왔다. 이때에는 보경사 또는 상원사 등으로 부르다가 영조 47년에 법당을 중창한 후, 안국사라 고쳐 불렀다. 문화재(文化財)로는 보물 제1267호로 지정된 안국사괘불(영산회괘불탱)과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전이 있다. 대형 걸개그림인 ‘영산회괘불탱’은, 가뭄이 들었을 때 내다걸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 틀림없이 비가 온다니 영험(靈驗)하기가 이를 데 없다. 잘만 활용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가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텐데....

 

 

주말이라선지 안국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도 일어났나?’ 어느 분의 말마따나 안국사 경내는 말 그대로 발붙일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비에 젖어 추레해진 모습들은 아까 그분의 말대로 영락없이 피난민의 행색이다. 불공(佛供)을 드리러 오는 사람들보다는 산행을 왔다가 들른 사람들이 대부분인 듯, 모두들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이다. 종루(鐘樓) 아래나, 전각(殿閣)의 처마 밑은 빈틈없이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다. 비를 피하면서 점심을 먹을 만한 곳이 이곳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점심에 반주(飯酒) 한잔? 이곳이 아무리 사찰(寺刹) 경내라지만 그 정도야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전각의 처마 밑에서 라면을 끓이거나, 삼겹살을 굽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아닐까? 이곳은 취사행위가 금지되어 있을뿐더러, 만일 불이라도 난다면 소중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잃을 염려가 있으니까 말이다.

 

 

 

안국사에서 왼편 담벼락을 끼고 200m만 오르면 다시 능선위로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편 향로봉 방향으로 조금만 더 걸으면, 오른편에 머리 위에다 철탑을 얹고 있는 봉우리 하나가 보인다. 이곳이 적상산의 정상인 기봉이다. 능선이 큰 높낮이가 없이 평탄한데다가 등산로가 철탑이 자리한 정상을 살짝 비켜나기 때문에, 이곳이 적상산의 정상인줄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다. 시설물을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 아래에 희미하게 등산로가 보이지만 구태여 올라갈 필요는 없다. 정상은 흉물스런 통신시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능선안부 이정표 : 안렴대 0.3Km/ 안국사 0.2Km/ 향로봉 1.3Km)

 

 

 

 

정상에서 내려와 조금만 더 진행하면 서문(西門)갈림길이다. 이곳에서 향로봉까지는 0.5Km, 능선을 따라 곧장 진행하면 향로봉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에서 날머리로 잡은 서창마을로 내려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야 하기 때문에, 향로봉을 답사한 후에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서문갈림길에서 향로봉까지 이르는 길은 평탄한 능선길이다. 일행들이 함께 나란히 지나가도 될 정도로 넓어 여유가 넘친다. 서서히 걸어도 20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다.(갈림길 이정표 : 향로봉 0.5Km/ 서창 공원지킴터 2.8Km/ 안국사 1Km)

 

 

 

향로봉 정상, 한 가운데에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표지판에는 이곳의 높이가 1,034m라고 적혀있는데, 내가 알기로는(지도) 향로봉 높이는 1,025m이고, 적상산의 정상인 기봉의 높이가 1,034m이다. 아마 기봉 정상을 통신시설에 빼앗기고 이곳을 정상으로 삼았나 보다.

 

 

 

서문갈림길에서 잘 닦인 등산로를 따라 조금만 내려서면 성벽(城壁)이 조금 남아있는 서문 터를 지나게 된다. 성벽은 겨우 어른의 키를 웃돌 정도로 왜소하다. 적상산이 워낙 험준한 절벽을 두르고 있기 때문에 성벽을 그다지 높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략(戰略)상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이런 산성에 힘들게 올라올 만큼 우둔한 적군은 없었을 테니까...

 

 

 

적산산성(赤裳山城, 사적 제146호), 돌로 쌓은 성(石城)으로서 둘레는 약 3㎞에 이른다. 고려 말(末) 최영(崔塋)과 조선 세종 때의 체찰사 최윤덕(崔潤德)이 축성을 건의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산성은 고려 말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당시 성 안에 4개의 못과 23개의 우물이 있었다.’다고 적고 있을 정도로 산 가운데에는 넓은 분지(盆地)로 되어있다. 광해군 때 이곳에다 적상산 사고(赤裳山 史庫)를 설치하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왕실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보관하였다.

 

 

 

서문(西門)을 지나 서창마을로 내려오는 길은 계속해서 급경사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내려서기가 위험하지도 힘들지도 않은 것은 아마 국립공원관리소에서 공들여 등산로를 정비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갈지(之)자를 그리고 있는 등산로는 조금이라도 경사(傾斜)를 줄여보려는 듯, 되도록 크게 획을 그리며 방향을 틀고 있다.

* 서문(西門)을 나와 조금 더 내려가면 거대한 바위와 만나게 된다. 장도바위이다. 장도바위는 마치 칼로 두부를 자른 듯 반듯하게 세로로 갈라져 있는데, 이 바위는 최영장군과 관련된 전설(傳說)을 가지고 있다. 최영장군이 적상산을 오르는데 이 바위가 앞을 가로막기 때문에 장도로 갈라 길을 냈단다. 옛날에는 장도바위의 가운데로 길이 나 있었다고 하나, 길이 험한 탓에 요즘은 우회(迂廻)시키고 있다.

 

 

장도바위부터 단풍의 개체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단풍은 이보다 더 아래 발치까지 내려가 버렸는지 말라비틀어진 나뭇잎들만 매달려있다. 조금만 더 일찍 이곳에 왔었더라면, 사색(思索)을 안고 환상의 불꽃 터널을 통과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마지막 불꽃을 태운 후 장렬히 산화하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내 인생을 반추(反芻)해볼 기회를 말이다.

 

 

 

하산 길은 내내 아름다운 숲길이 이어진다. 그것도 아주 길게,,, 바위를 깎기도 하고, 돌을 쌓아 가면서 만든 아름다운 길. 맞은편 나뭇가지 사이에는 낮게 깔린 구름사이로 아름다운 산하(山河)가 내려다보인다. 바라보는 풍경마다 한 폭의 산수화다. 어떤 풍경화가 이곳만 할까? 마냥 걷고만 싶은 길. 마냥 바라보고만 싶은 곳이다.

 

 

 

 

산행날머리는 서창마을 대형버스 주차장

서창마을 공원지킴터를 지나면, 음식점과 팬션들이 여러 곳 보인다. 10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한산(閑散)하기만 하던 농촌마을이, 이제는 어엿한 관광지로 변해버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명품(名品) 소나무로 분류해도 좋을만큼 잘생긴 소나무가 수문장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의병장 장지현장군의 묘역을 지나서 잘 가꾸어진 도로를 따라 조금만 더 내려가면 대형버스 주차장이다. '적상산(赤裳山)'은 말 그대로 '붉은 치마 모양의 산'이다.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암벽(巖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절벽 주위에 유난히도 붉은 단풍이 많아서 가을철이면 마치 온 산이 빨간 치마를 두른 것 같다고 하여 적상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단풍터널을 지나 뒤를 돌아다보면 붉게 타오르는 숲 너머로 적상산의 거대한 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을 터인데, 빗속에 잠긴 적상산은 그 자태를 드러내 보이지 않고 있다.

 

 

 

삼정산(三丁山, 1261m)

 

 

산행일 : ‘11. 7. 2(토)

소재지 :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과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의 경계

산행코스 : 양정→영원사→빗기재→삼정산→상무주암→문수암→삼불사~삼정산능선→약수암→실상사(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지리산의 북쪽 주능선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알려진 산, 남쪽 주능선이 가장 잘 보인다는 삼신봉과 함께 ‘지리산의 양대 전망대(展望臺)’로 소문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지리산의 조망보다도 암자탐방을 위해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는 추세이다. 삼정산은 잘 알려진 실상사(實相寺)외에도 약수암(藥水庵), 삼불사(三佛寺), 문수암(文殊庵), 상무주(上無住), 영원사((靈源寺), 도솔암(道率庵) 등, 크고 작은 암자(庵子)와 절집들을 6개나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사암(寺庵)마다 천왕봉이나 수도산 또는 가야산을 바라보고 있어 전망이 매우 뛰어나다. 

 

 

 

산행들머리는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양정마을

88고속도로 지리산 I.C를 빠져나와 인월면소재지(面所在地)를 통과한 후, 60번 지방도(생초방향)를 따라 달리면 산내면사무소를 지나 함양군 마천면에 이르게 된다. 마천면사무소 소재지인 가흥리에서 오른편 엄천강을 가로지르는 가흥교(橋)를 건너 1023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양정마을에 다다르게 된다. 양정마을 입구에서 삼정산을 보며 얼마간 올라가면 영원사 등산로라는 팻말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들어서면 서정적인 마을을 통과한 후, 이내 영원사골로 들어서게 된다.

 

 

 

 

등산로는 왼편에 영원골을 끼고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왼편 발아래에는 크고 작은 담(潭)과 소(沼)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널따란 암반(巖盤) 위를 구르며 떨어지는 폭포수(瀑布水)가 내지르는 외침이 경쾌하게 산꾼들을 반긴다. ‘영원사 1.6Km’라는 이정표를 지나면서 오른편에 지리산에서 활동했다는 빨지산의 ‘굴(窟) 비트’가 보이더니, 산죽(山竹)이 우거진 곳에는 ‘산죽 비트’라고 적힌 안내판도 보인다. 우렁차게 울리던 물소리가 가냘퍼질 무렵이면 영원사로 가는 포장길이 나타나고(이정표 : 비트 굴1km/ 상무주암2.3km/ 영원사0.5km), 이내 새하얀 개망초 꽃들에 둘러싸인 영원사 표지석 뒤로 영암사의 전각이 보인다.

 

 

 

 

영원사((靈源寺) : 통일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45) 때 영원(靈源)이 창건하였다. 영원이 이곳에서 8년간이나 수도하였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산을 내려가다가, 물 없는 산 속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노인의 말을 듣고 다시 정진해 깨우침을 얻게 되어 그 자리에 영원사를 지었단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 선불교(禪佛敎) 고승들이 거쳐 간 수도 도량이다. 건물은 인법당만 남아있고, 문화재는 보유하고 있지 않다. 부속암자로 문수암(文殊庵)과, 상무주암(上無住庵), 도솔암(道率庵)을 거느리고 있다.

 

 

영원사를 둘러보고 사찰의 왼편에 우람하게 자리 잡고 있는 나무 아래를 지나 삼정산 정상으로 향한다. 국립공원 통제구역 표시판과 함께 싸리문이 설치되어 있지만,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면 완전한 통제는 아닌 모양이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있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경사가 심하지 않는 오르막길을 느긋하게 오르다보면 어느새 능선 안부인 빗기재에 올라서게 된다. 빗기재에서 삼정산으로 향하는 길은 아예 신작로(車道) 수준, 등산로 주변의 산죽들을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간혹 나타나는 바위지대에는 어김없이 지리산의 전망대가 나타나지만, 짙은 구름에 뒤덮인 지리산은 그 자태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빗기재 이정표 : 삼정산 정상 1.2Km, 상무주암 1.0Km/ 영원사 0.8Km)

 

 

 

 

 

 

 

 

 

 

 

아쉬운 마음을 갈무리하며 걷다보면 이내 삼정산이 보이고, 등산로는 정상을 향해 곧바로 뻗지를 못하고, 산의 허리를 돌아 상무주암으로 향하고 있다. 상무주암 가기 전 100m 앞(이정표 : 삼정산 정상 0.3Km/ 상무주암 0.1Km/ 영원사 1.7Km)에서 왼편으로 난 가파른 오르막길을 10여분 오르면 삼정산 정상이다. 함양군에서 세운 정상표지석 하나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는 정상은 잡목에 둘러싸여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조망을 허락한다고 해도 구름 때문에 볼 수도 없겠지만... 삼정산(三丁山)은 아랫쪽의 마을이름 음정(陰丁), 양정(陽丁), 하정(下丁)마을을 합쳐서 삼정리(三丁里)라고 부르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이 지났다.

 

 

 

 

 

삼정산 정상에 올랐다가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 나온 후, 100m 정도 걸어 내려가면 한국 선종(禪宗)의 중흥조(中興祖)인 보조국사 지눌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상무주암에 이르게 된다. ‘그 경치가 그윽하고 조용하기가 천하에 제일이라 참으로 참선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대오한 지눌은 상무주를 일컬어 ‘천하제일갑지(天下第一甲地)’라 하였다. 머물지 않는다는 ‘무주(無住)’... 법정스님도 늘상 무소유(無所有)를 외쳤었는데, 천하제일 甲地까지도 욕심내지 말고 선뜻 버리라는 의미일까?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라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상무주의 돌담에 기대어 지리산을 바라본다. 넉넉한 부처의 모습으로 다가와야 할 산은 짙은 구름에 잠겨 있다.(이정표 : 마천 8.5Km, 백무 7.3Km, 양정 3.2Km, 문수암 1.0Km /영원사 3.3Km, 삼정봉 0.4Km, 산문(초입) 1.2Km)

* 상무주암(上無住庵) : 영원사의 부속암자 중 하나. 보조국사 지눌이 이곳에서 ‘선종 결사운동’을 함으로써 유명해 진 암자이다. 지눌은 1, 2차에 걸친 결사운동에서 드러난 문제점 때문에 이곳에 들어왔고, 이곳에서 다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심기일전한 지눌은 1205년 지리산에서 송광사로 옮기고, 수선사 곧 오늘날 조계종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상무주암 입구 쉼터. 거대한 소나무 아래에 앉을 자리를 만들어 놓았고, 바위 위에는 수행을 위한 앉을 자리인 듯, 석판이 삼정산 정상을 향해 심어져 있다. 주변 나무에 매달린 팻말의 ‘아니 온 듯 다녀가시오’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상무주암에서 문수암까지는 짧은 거리지만, 수림이 울창하고 돌마다 짙은 이끼가 끼어 있는 등, 운치가 뛰어나다. 상무주암을 나서 너른 공터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서 평탄한 산길을 얼마쯤 걸으면, 밧줄이 드리어진 약간 비탈진 길이 나온다. 바위와 오래된 나무 그루터기에는 초록 이끼가 피어있고 고사리와 관중 같은 양치식물들이 한껏 습기를 머금고 있다. 내리막 숲길을 걷다보면 문득 바위에 바짝 붙여지은 법당과 그 앞의 요사체가 나타난다. 문수암이다. 문수암 뒤편의 거대한 벼랑아래에는 수십 명이 충분이 들어앉을 수 있을 만큼 넓게 동혈(同穴)이 파여 있고, 바위 틈새에서 약수가 흘러나오고 있다. 옹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약수는 달고도 얼음물처럼 시원했다. 지리산 8대(臺) 중 한 곳인 문수암의 마당에 선다. 저기는 마천면 마을들, 지리산과 금대산은 저기쯤, 친절한 스님께서는 이것저것 자세히도 알려주신다. 날씨만 좋으면 금대산 뒤로 첩첩이 쌓인 산들이 만들어내는 산그리매를 보는 눈의 호사(豪奢)까지도 누려볼 수 있으련만...

 

 

 

 

 

문수암(文殊庵) :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자’는 취지로 만든 ‘봉암결사’에 참여했던 스님들 중 한 분이며, 나중에 조계종 종정까지 지내신 혜암스님이 상무주암에서 정진하시다가 그 아래에 세운 암자로서 선학원(禪學院) 소속이다. 벼랑위에 바위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전각을 세웠다. 선방 앞 의자는 산자락이 끝없이 펼쳐지는 지리산 제일의 전망대, 긴 의자는 혜암스님의 상좌로서 지금 이곳에서 수행중인 도봉스님의 따뜻한 배려이리라...

 

 

 

천인굴(千人窟) : 이 석굴은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 1000명이 피난하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인용굴(千人用窟)이라 하여 천년동안(즉, 오랫동안) 사람들이 이 굴을 사용했다는 뜻이라는 얘기도 있다.

 

 

 

문수암을 나서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우거진 수림(樹林)아래로 난 산길을 따라 내려선다. 너덜길의 바위들은 짙은 이끼로 덮여 있어서 많이 미끄럽다. 조심조심 내려서며 산중의 삼매경에 빠져본다. 지리산의 품속에서 한껏 삶의 여유로움을 찾는다. 세속에서 옮은 번뇌(煩惱) 한 점 슬그머니 사라지고, 어느새 행복으로 차오르고 있다. 울창한 숲을 빠져나와 아담하게 지어진 새집 같은 초록색 해우소를 지나면 삼불사이다. 세 분의 부처가 머문다는 삼불사(三佛寺), 그 삼불(三佛)은 누구누구를 일컫는 것일까? 사찰에는 늙은 비구니보살님과 사나운 개 한마리가 산다고 들었는데, 인기척이 없고 문들마다 굳게 닫혀있다. 물로 개도 보이지 않는다. 주인 없는 절간의 문을 지키고 있는 자그만 판자만이, 오가는 길손에게 스님의 따스한 배려를 나눠주고 있다. 만일 50m 정도 내려가다가 왼편으로 방향을 잡으라는 그 안내판이 없었더라면 마천 마을로 내려서는 불상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삼불사에서 약수암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험하기 그지없다. 너덜길이라서 길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길가에 매어진 가느다란 포장끈을 따라 진행하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이끼낀 너덜길을 조심스럽게 걷다보면 이내 삼정산의 주능선과 만나게 된다.

 

 

 

삼정산 주능선과 만나면서 갑자기 길은 고와진다. 울창한 소나무에 둘러싸인 오솔길은 수북이 쌓인 소나무 잎들로 인해 마치 양탄자처럼 폭신폭신하다. 저절로 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왼편에 산내면 시가지가 바라보이고, 등산로 왼편에 둘러쳐진 담장용 로프 너머에 약수암이 숨어있다. 약수암이라는 이름을 얻게 만들었다는 물은 보광전 앞에서 맛볼 수 있다.

 

 

 

 

 

약수암(藥水庵) : 실상사의 부속암자 중 하나로서 1724년(경종 4)에 천은스님이 세웠고, 1918년에 예암대유 스님이 개인 재산을 모아 보광전을 다시 세웠다. 경내에 약수샘이 있어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나기 때문에 약수암이라 했다고 한다. 약수암에는 목조 팔작지붕으로 된 보광전이 있고, 보광전 안에는 1782년(정조 6)에 만든 보물 제421호인 아미타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약수암에 들러본 후, 사찰입구로 가지 않고 들어왔던 곳으로 되돌아 나와, 다시 방향표시를 따라 걸으니 약수암의 입구이다. 10m도 안 되는 거리를 포기하고 절을 한 바퀴 도는 고생을 사서 한 것이다. ‘뭐야 이게!’ 바닥에 깔린 진행표시지가 다소 원망스럽지만, 덕분에 고즈넉한 대나무 숲을 촬영한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산행날머리는 실상사 입구 주차장

약수암 입구에서 차량이 다니는 임도(林道)를 따라 내려가도 되지만, 명색이 산꾼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 약수암 입구를 나서자마자 오른편을 살펴보면 등산로 하나가 보인다. 이 길을 따라 얼마간 내려가면 아까 헤어졌던 임도와 다시 만나게 되지만, 또다시 임도와 헤어져 오솔길로 접어든다. 길게 이어지는 산길은 가파르나 하면 어느새 완만해지고, 조금 걷기가 편하다 싶으면 어느 사이엔가 자갈길로 변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적송 숲이 끝나면 텃밭이 나오고, 작은 개울을 건너면 저만큼 앞에 실상사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실상사 입구의 다리를 건너면 매표소가 보이고, 왼편으로 깔끔한 화장실을 갖춘 주차장이 있다.

 

 

 

실상사(實相寺) :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洪陟)이 세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 홍척이 흥덕왕의 초청으로 법을 강론함으로써 구산선문 중 으뜸 사찰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의 사찰이 대부분 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반해, 실상사는 들판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3층석탑, 보물 제33호인 수철화상능가보월탑(秀澈和尙楞伽寶月塔), 보물 제34호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보물 제36호인 부도(浮屠), 보물 제37호인 3층석탑 2기(基), 보물 제38호인 증각대사응료탑(凝寥塔), 보물 제39호인 증각대사응료탑비,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 보물 제41호인 철제여래좌상(鐵製如來坐像), 보물 제420호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靑銅銀入絲香爐), 보물 제421호인 약수암목조탱화(藥水庵木彫幀畵) 등, 단일사찰(單一寺刹)로는 국보급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초록의 이끼들로 가득한 가파른 산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디디고 올라서야 당도할 수 있는 암자에는 노스님들이 진공 같은 적막 속에서 불법을 닦고 있다. 비질 자국 선명한 암자에서 바위틈에서 솟는 달고 찬 샘물을 받아드는 맛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암자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노스님이 툭툭 던져주는 몇 마디 말을 곱게 싸들고 돌아올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으리라. 그러나 문수암에서 만난 도봉스님 외에는 스님들을 만나 뵐 수 없었다.

 

내동산(萊東山, 887m)-고덕산(高德山. 619m)

 

 

산행코스 : 봉서마을→동릉→내동산→남릉→장성동마을→506봉→535봉→고덕산(1~8봉)→고덕마을(산행시간 : 6시간20분)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과 진안군 백운면의 경계

산행일 : ‘11. 6. 12(일)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색 : 30번 국도(國道)를 따라 전북 임실군 관촌면에서 진안군 백운면으로 넘어가다보면 여덟 개의 봉우리들이 마치 병풍(屛風)처럼 펼쳐지고 있는 산이 보인다. 바로 고덕산이다. 고덕산은 남근바위, 산부인과바위, 통천문 등 특이한 바위가 많다. 고흥의 팔영산처럼 여덟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봉우리들을 잇고 있는 능선은 스릴 넘치는 암릉으로, 산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아직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산꾼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산행들머리는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 봉서마을 버스정류장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장수 I.C를 빠져나와 26번국도(진안/전주 방면)와 30번국도(임실/남원 방향)를 따라 달리다가 백운면 소재지 조금 못미쳐서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덕현리 봉서마을에 이르게 된다.

 

 

봉서마을 버스정류장(停留場)의 뒤편에 보이는 마을로 들어서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논에서 일하고 계시는 주민께서 우리 쪽을 바라보면서 뭐라고 외치고 있다. 설마 우리는 아니겠지 하며 동네로 들어서지만 이내 잘못 들어왔음을 알게 된다. 오늘 우리가 겪게 되는 여러 번의 알바 중 그 첫 번째이다. 다시 되돌아 나와 농로(農路)로 접어든다. 농로를 따라 5분여를 걸어 들어가면 하천(河川, 섬진강 상류인 정자천)의 커다란 巖盤(암반) 위에 운치 있게 앉아있는 멋스런 정자(亭子)가 보인다. 명마대(溟磨臺)이다.

 

 

명마대의 왼편으로 접어들어 얼마간 진행하면 물기 한 점 없는 자그마한 개울이 보인다. 희미한 길의 흔적을 따라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다. 얼마간 올라가면 이내 만나게 되는 임도(林道)를 따라 다시 왼편으로 진행, 그러나 임도는 슬며시 사라져 버리고 만다. 오늘 산행에서 두 번째로 겪게 되는 알바이다. 참고로, 여기서는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것보다, 차라리 능선을 치고 오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비록 정규 등산로는 아니지만, 산행거리도 짧아지고 산행시간까지도 많이 절약(약20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정규등산로는 멀리 돌아가는 수고뿐만 아니라, 등산로 주변의 경치나 조망 등 볼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시 되돌아 내려와 진행하다보면 이번에는 제법 큰 개울이 보인다. 길의 흔적을 찾아 건너편으로 들어선다(참고로 여기서는 계곡을 건너지 말고 그냥 왼편으로 치고 오르는 길이 정규등산로이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어느새 오른편 능선을 향해 급경사 오르막을 만들어 내고 있다. ‘길은 길이로되 결코 길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길‘... 길의 흔적은 있으나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지가 오래된 탓이지, 넘어져 길을 막고 있는 나무 등걸들이 썩어 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면 능선 안분에 닿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아마 알바에 꽤나 많은 시간을 빼앗겼나보다.

 

 

 

능선안부에서부터 길은 고와진다. 고저(高低)가 심하지 않은 흙길, 거기다 오랫동안 쌓여온 낙엽들이 두껍게 쌓여 걷는 이들의 발목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다. 등산로 주변의 참나무들이 내뿜는 맑은 공기를 맘껏 마시며 걷다보면 이정표 하나가 보인다(내동마을 1.36Km/ 내동산 1.6Km). 우리가 올라온 능선으로 방향표시가 없는 것을 보면, 우리가 치고 올라온 능선이 정규등산로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첫 번째 이정표에서 얼마간 치고 오르면 두 번째 이정표(방화마을 1.66Km/ 내동산 1.68Km=엉터리 이정표는 아까의 이정표보다 내동산이 더 멀다고 적어놓고 있다)가 보인다. 구수보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나뉘는 삼거리이다. 산악회 이대장께서 활짝 웃고 계신다. 예쁘장한 얼굴에 티 없이 밝은 미소, 언제나 봐도 좋은 인상이다. 아까 계곡을 건너지 않고 왼편 능선으로 치고 올라왔단다. 우리가 올라온 길이 정규 등산로가 아니었음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가야할 능선, 저 멀리 보이는 곳이 내동산이다.

 

 

 

구수보 마을 갈림길에서 능선은 암릉의 속살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거칠기는 하지만 별로 위험하지 않은 암릉, 거기다 조금만 경사가 심해도 쇠사슬로 양 옆을 매어 놓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걸어도 될 정도이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한참을 오르다보면 등산로 왼편이 훤하게 열리고 있다. 암반(巖盤) 위로 올라선다.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눈을 들어본다. 저 멀리 마이산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짙은 연무(煙霧, haze)까지도 자태를 완전히 가려버리지 못하는 것은, 가려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리라. 발 밑에는 바둑판 같은 백운 들녘이 손에 잡힐 것 같이 가깝다.

 

마이산

 

 

바위 전망대에서 조금 더 오르면 무인산불감시탑이 보이고, 암릉과 흙길이 번갈아 나타나는 오르막길을 500m쯤 치고 오르면 드디어 내동산 정상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아기자기한 암릉에서는 스테인리스 기둥에 쇠줄을 연결한 난간을 자주 만난다. 내동산으로 오르는 능선은 경사는 그리 심하지 않지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이마에서는 땀이 비가 오듯이 쏟아지고 있다. 걷기에 지장을 줄 정도로 이마의 땀을 자주 훔칠 수밖에 없다. 여름은 이미 오래전에 우리 곁에 와있었나 보다.

 

 

봉서마을에서 올라오는 능선(동릉)

 

 

내동산 정상은 서너 평 남짓한 바위봉우리이다. (방화마을 3.26Km/ 동산마을 2.3Km/ 상염복 2.5Km) 정상의 한쪽 귀퉁이에 네모로 각진 말뚝 모양의 정상석이 박혀있고, 그 뒤를 이정표가 지켜주고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두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원래의 내동산 정상은 거침없는 조망을 보여주지만 오늘은 짙은 연무(煙霧, haze) 때문에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동쪽의 선각산과 덕태산, 남쪽 팔공산(장수), 그리고 북쪽의 운장산과 구봉산이 만들어내는 하늘금들을 마음속으로 그려볼 따름이다.

* 내동산(萊東山), 원래는 백마산(白馬山)이었으나, 일제가 내동산으로 바꾼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적에 산 근처에 귀골이 장대한 장수가 태어났는데, 누군가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자, 산에서 백말이 울면서 뛰어와 백마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1914년 일제가 내동마을은 경작하지 않는 묵정밭을 뜻하는 명아주래(萊), 동녘동(東)으로 고치고, 산 이름도 내동마을 뒤에 있다는 이유로 내동산으로 바꿔버렸단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은 암릉길, 내동산은 밋밋한 육산처럼 보이지만 남쪽은 거대한 바위절벽들이 도사리고 있는 산이다.

 

 

고덕산을 가기 위해 동산마을 방향을 향해 남릉으로 내려선다. 남릉을 5분 정도 내려가면 내동 폭포 갈림길이 나오고, 그 다음부터는 사람의 발길을 찾기 힘든 암릉이 시작된다. 조금만 벼랑이 높아도 밧줄을 매어놓았기 때문에 별로 위험하지는 않다. 아름답다는 느낌 보다는, 거칠다는 느낌이 더 강한 암릉 길은 40분이 넘게 이어진다.

 

 

 

 

암릉이 끝나면서 길은 얼마간 고운 흙길로 변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야(視野)가 확 트인다. 오른편 사면(斜面)이 벌목이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벌목(伐木)이 진행 중인지라 산의 표면이 파헤쳐져 있어서 선두의 흔적을 놓쳐버린다. 몇 번을 두리번거리다가 앞에 보이는 고덕산을 목표로 삼고 이내 오른편 사면을 조심스레 내려선다. 엄청난 경사면(傾斜面), 만일이라도 미끄러질 경우에는 큰 부상을 입을 염려가 있으니 혹시 나중에라도 답사(踏査)하는 사람들이 내려서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벌목장(伐木場) 사면을 내려선 후,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장성동마을이다. 마을의 폐농가(廢農家)에 들어가 식수(食水)도 보충하고 뽕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오디도 따먹으면서 모처럼 여유를 부려본다. 장성동마을 앞을 2차선 아스팔트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5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30번 국도(國道) 너머로 우리가 가야할 고덕산과 삼봉산을 잇는 능선이 바라보인다.

 

 

 

국도(國道)와 개울을 가로지른 후, 건너편 능선을 향한다. 해 가파른 사면을 치고 오른다. 계곡을 따라 제법 넓은 농로(農路)가 나 있다. 농로의 주변의 밭들은 모두 묵밭,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었었는지 아직까지도 둑이 무너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묵밭 가운데 있는 커다란 뽕나무에는 시커멓게 익은 오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다들 가던 길을 멈추고 오디사냥에 매달린다. 묵밭을 지나면서 등산로는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참고로 개울을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능선을 치고 오르면 의미 없는 봉우리 하나를 생략할 수 있다.

 

 

 

 

506봉 부터는 서서히 바위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고덕산이 바위산이니만큼 고덕산에 가까워지고 있나보다. 흙으로 된 봉우리 위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얹혀있는 506봉에서 능선은 갑자기 고도(高度)를 낮추며 삼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삼봉리 갈림길이다.(이정표 : 고덕산 0.9Km/ 삼봉리 1.6Km)

 

고덕산 전위봉(535봉)

 

 

 

삼봉리 갈림길에서부터 본격적인 암릉길이 시작된다. 암벽을 기어오르다가, 옆으로 돌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바위 틈새를 넘다보면 고덕산 전위봉(前衛峰)인 535봉에 이르게 된다. 535봉 정상에 서면 진행방향으로 고덕산 정상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암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전위봉을 내려섰다가 다시 한 번 오르거나, 돌고, 또는 넘다보면 지능선 삼거리이다. 모처럼만에 만나는 흙길이 반갑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20분이면 고덕리에 이르게 된다. 오른편의 철제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사다리마냥 하늘을 향해 가파르게 서있다. 철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고덕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5시간20분을 훌쩍 넘겨버렸다.

 

전위봉에서 바라본 고덕산(8봉)

 

 

 

8봉의 정상은 서너 명이 앉으면 더 이상 남은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비좁은 암봉이다. 한쪽 귀퉁이에 ‘삼화상호신용금고’에서 세워 놓은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네모난(四角) 기둥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 요즘 한창 물의를 빚고 있는 부산저축은행의 한 축이 삼화신용금고이다. 부산저축은행에 매각되었기 때문이다. 고덕산의 정상인 8봉은 고덕산 봉우리들 중에서 가장 조망이 뛰어나다. 뒤돌아보면 지나온 성수지맥과 삼봉산, 내동산이 뚜렷하고, 진행해야할 방향에는 고덕산의 일곱 개 봉우리들이 올망졸망하게 늘어서 있대. 아쉬운 것은 남쪽 멀리에 있는 지리산의 능선과 덕태산, 선각산, 팔공산 같은 인근 명산들이 짙은 연무 때문에 그 자태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성수지맥(聖壽枝脈) : 호남정맥 팔공산(1,151m)에서 섬진강 본류와 그 지류인 요천을 가르며 서쪽으로 내려선 산줄기는 마령치 다음의 펑퍼짐한 봉우리에서 두 개의 산줄기로 나뉜다. 바로 개동지맥과 성수지맥이다. 이중 '성수지맥(聖壽枝脈)'은 오수천의 서쪽 울타리를 이루면서 삼봉산, 고덕산, 무량산을 거쳐 순창군 적성면에 있는 구남마을의 어은정에 이르는 도상거리 56.8km의 산줄기이다.

 

고덕산으로 오를 때 지나왔넌 능선, 좌측의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내동산이다.

 

 

8봉에서 바라본 7봉, 8봉에서 남쪽 암릉으로 10m 정도 내려가면 왼편에 7봉으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서면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뚫고 파란 하늘이 보인다. 바로 통천문이다. 구멍너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계단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 가세요. 향기가 너무 좋답니다.’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는 어느 여성 등산객의 조언, 그분 말씀대로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다. 갑자기 행복해진다. 아름다움은 곧 행복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마음씨에 아름다운 향기라니....

 

 

 

계단을 올라 6봉으로 가는 길에서 왼쪽으로 20m정도 비켜난 지점에 7봉이 있다. 등허리를 고추 세우고 있는 7봉의 남쪽은 수십 길 낭떠러지이다. 임실군에서 위험 경고판을 붙여 놓았으니, 경고를 따른다면 아무 탈 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7봉에 올라서면 정상인 8봉의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면서 쉬었다 가라는 배려인지 통나무 의자까지 설치해 놓았다. 경고판 뒤의 암벽(巖壁)을 잡고 내려서면 8봉으로 곧바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구태여 모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사이를 소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얼마나 끈질긴 생명력인가? 아님 고집불통(固執不通)? 조금만 아래로 비켜 내려선다면 질 좋은 토양을 만날 수 있을 터인데도, 구태여 이런 척박한 바위틈을 고집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여튼 불굴의 의지를 보이고 있는 소나무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7봉에서 4봉까지의 구간은 특별한 구경거리가 없는 구간이다. 특히 5봉과 6봉은 딱히 봉우리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능선과 구분이 잘 안 된다. 6봉에서 내려서서 제법 날카로운 바윗길을 올라서면 5봉이다. 5봉에서 조금만 더 내려서면 4봉이다. 4봉 정상에는 거대한 입석이 있다. 남성의 성기를 닮았다고 해서 남근석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결코 잘생긴 남근(男根)은 아닌 것 같다.

 

 

4봉을 넘어 3봉으로 가는 길목에 일명 해산굴이라고 부르는 곳이 나온다. 산부인과바위라고도 불리는데, 폭이 30Cm정도 되는 작은 바위틈이다. 배낭을 메고는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통과하기 위해 벗어야만 하는 배낭을 산모의 뱃속에 있는 태아에 비유하고 있나보다. 배낭뿐만이 아니다. 배가 나온 남자들은 숨을 내뿜어 배를 홀쭉하게 만든 후에야 통과할 수 있단다. 조금 전에 만났던 바위가 남근바위였으니 구색을 맞춘 작명(作名)일까? 남성과 여성의 상징이 맞서 있으니 지나는 이의 가슴 또한 두근거림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무생물에까지도 짝짓기를 즐기는 인간의 악취미(惡趣味)...

 

 

 

2봉에 올라서면 진행방향에 머리위에 산불감시초소를 이고 있는 1봉의 꼭대기가 환히 내려다보인다. 1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야 한다. 계단은 사다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다 싶을 정도로 하늘을 향해 서슬이 시퍼렇게 서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구간은 로프를 이용해야만 오를 수 있었단다. 다행이 임실군에서 계단으로 바꾸어 놓은 덕택에, 비록 가파르기는 하지만 수월하게 2봉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1봉에서 바라본 2봉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1봉으로 올라서면 탁 트인 전망이 일품이다. 산 아래쪽으로는 고덕마을과 덕풍사가 나란히 누워있고, 오른쪽으로는 거칠고 우람한 산릉이 이어지고 있다. 1봉을 내려서기 직전, 너럭바위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다. 경사가 얼마나 심한지 고덕마을의 집들이 서있는 발아래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숲속으로 들어서자마자 가파른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잠시 후 로프가 메어진 급경사 내리막길이 나타나더니 이내 통나무계단이 연이어 나타난다. 계단 등의 시설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급경사를 배겨낼 수 없기 때문인 모양이다.

 

 

 

산행 날머리는 고덕마을 주차장

통나무 계단이 끝나면서 고저(高低)가 없는 흙길이 나타나더니, 잠시 후 숲이 뚫리면서 고덕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고덕마을은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사방을 휘휘 둘러보아도 10가구가 채 안 되는 한적하기만 한 조그만 마을인데, 거기다 지붕은 60~70년대 새마을 운동 때 ‘지붕개량사업자금’으로 개량하였는지 모두가 슬레이트 지붕으로 통일 되어있다. 들에 일을 하러 나갔는지 아니면 주인이 도회지로 이사를 가버렸는지 낮인데도 불구하고 마을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그러나 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회관이 지어진지 오래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은 이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음이 확실할 것이다. 비록 몇 명 되지 않을지라도... 마침 마을회관에 수도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서 손발을 씻는 김에 등목까지 하는 호사(豪奢)를 누렸다. 정상에서 고덕마을까지는 1.3Km이다.

 

고덕마을에서 바라본 고덕산

 

쇠뿔바위봉(牛角峰, 475m)

 

 

산행코스 : 어수대→안부→비룡상천봉→성인봉→와우봉→서·동 쇠뿔바위봉→지장봉→새재→청림마을 (산행시간 : 쉬엄쉬엄 3시간)

 

소재지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과 하서면, 그리고 변산면의 경계

산행일 : ‘11. 4. 24(일)

함께한 산악회 : 산하들(을 좋아는 사람)

 

 

특색 : 의상봉, 쌍선봉, 관음봉 등 기암절벽을 끼고 있는 내변산과 울금바위, 경관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변산의 다른 산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뛰어난 절경을 갖고 있는 산이다. 이 山稜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쇠뿔바위봉은 두개의 봉으로 형성되어있으며 동봉은 서울의 인수봉과 흡사하게 생겼다. 그 동안 ‘내변산국립공원’에 가려 덜 알려졌지만, 최근에 山客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찾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는 중이다. 

 

 

 

산행들머리는 하서면 남선마을의 유통 영농법인 ‘청정 내변산’ 입간판

서해안 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서서, 30번 국도를 타고 부안읍을 경유한 후, 하서면에서 736번 지방도로 내려서서 왼편으로 들어서면 우슬재(야트막한 고개라서 지나칠 염려가 있으니 주의 필요)에 다다르게 된다. 쇠뿔바위봉은 이곳에서 올라가도 되지만, 이곳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남선동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서울에서 기나긴 시간을 투자하여 이곳까지 왔으니, 최소한 이곳의 소문난 기생이었던 매향이가 남긴 時調라도 한 수 읊어보는 낭만을 즐겨야 할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지도에 적힌 가든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장사가 안 되어서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으니까(지도만 믿고 찾아갔던 우리도 ‘청림 청소년 수련시설’ 앞에서 만난 이곳 주민의 조언을 듣고서 버스를 되돌리는 불상사를 초래하였다)

 

남선동에는 지도에 적힌 ‘00가든’은 물론 그 어떤 식당도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영농법인 ‘청정 내변산’의 표지판 옆에 아무런 상호가 없는 건물 하나가 덩그라니 도로변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이 건물 앞의 공터에 차를 주차시키고 건물 뒤편으로 보이는 우람한 바위벼랑을 향해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저 멀리 어수대 뒤로 보이는 絶壁은 비가 올 때면 절벽 전체가 폭포로 변한다고 한다. 어수대는 옛날 어떤 임금이 이곳의 물을 마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건물을 오른편에 끼고 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인적이 끊긴 빈 건물 한 동이 보인다. 아마 지도에 나온 식당인 모양인데 건물을 새로 보수하고 있는 지 자재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건물을 지나서 조금 더 들어가면 어수대이다. ‘부안댐으로 흘러드는 물의 시발점’이라는 어수대에 도착하면 아담한 연못가에 세워진 비석이 하나, 이 고장의 소문난 기생이었던 매창의 詩 한편을 감상할 수 있다. 아마도 옛날에는 이곳에 절이 있었나보다. ‘천년 옛 절에 님은 간데없고/ 어수대 빈터만 남아 있네/ 지난 일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바람에 학이나 불러 볼까나’

* 매창(梅窓. 1573~1610) : 조선시대 부안(扶安)의 명기(名妓)로 한시․가사(歌詞)는 물론, 가무․현금에도 능했으며, 황진이(黃眞伊)와 쌍벽을 이루는 여류 예술인으로 분류된다. 본명은 이향금(李香今)이며, 당대의 문사들이었던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분을 나눌 정도로 뛰어난 여류시인이었다. 작품으로는 가사와 한시 등 70여 수 외에도 금석문(金石文)까지 전해지고 있다.

 

 

 

御水臺에서 산으로 들어서자마자, 등산로는 하늘을 향해 치닫는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심한 경사를 이기지 못한 등산로는 갈지(之)자를 만들어내면서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가고 있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닿게 되는 능선이 숨통을 터준다. 서해의 변산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은, 이마를 살짝 스치기만 하는데도 청량한 기운이 스며들며, 땀과 함께 마음의 때까지 씻어내 버린다.

 

 

 

고진감래(苦盡甘來),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先賢들의 말마따나, 주능선으로 오르면서 고생을 치르고 나면, 이후부터는 편안한 산행이 시작된다. 주능선은 高低가 크지 않기 때문에 걷는데 부담이 없다. 왼편 멀리 바라보이는 멋진 우금산성이 우리와 함께 걷는 듯하고, 오른편으로는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리아스식 해안이, 이파리 없는 빈 나뭇가지 사이로 얼핏 드러나 보인다.

 

 

 

산은 언제나 포근하다. 肉山(흙산)이나 바위산을 막론하고 말이다. 언제 누가 찾아와도 어머니처럼 품에 안아주는 것이 정겨운 산이다. 산에 오르면 삶의 고단함과 괴로움이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의욕이 용솟음치는 기운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음일 것이고, 우리도 오늘 이곳 쇠뿔바위봉을 오르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왼편 저 멀리에 우금암이 바라보인다. 백제의 마지막 항거지 우금산성이 남아 있는 울금바위는 마치 성채처럼 서서 주변 경관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어 주고 있다.

 

 

 

 

비룡상천봉! 이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풍수적으로 보아 등룡에서 비룡을 거쳐 하늘로 거슬러 오르는 기운의 산세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이름만 들어도 한번쯤 찾아보고 싶다는 호기심과 열망이 자연스레 찾아드는... 그 흔한 천왕봉이나, 비로봉, 국사봉 등의 평범한 이름들에 식상해 온 내 가슴에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막상 찾아온 비룡상천봉은 어느 봉우리를 비룡상천봉이라고 부르는지조차 불분명하다. 그저 능선상에서 제일 높아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이겠거니 하고 추측해볼 따름,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한 봉우리에는 정상표지석은 커녕 그 흔한 이정표하나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봉우리일 뿐이었다. 멋진 이름을 作名한 멋지신 분이시여 그 귀한 이름을 어찌 이다지도 소홀하게 다루시나이까??

 

 

▼ 멀리 바라보이는 바위가 울금바위

 

 

능선을 걷다보면 등산로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진달래꽃 무리를 만나게 된다. 오늘은 산행시간도 짧으니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도 없다. 느긋하게 걸으면서 탐스럽게 핀 진달래를 실컷 감상해보자. 그래도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다면 진달래 가지로 꽃방망이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그 꽃방망이를 들고, 앞서가는 여인, 그러니까 시집못간 것이 보기에 안타까웠던 여인들의 등을 때려보자. 그러면 시집못간 처녀들이 사랑에 빠지게 되고, 시집가서 잘 살게 된다니 말이다. 여자의 등을 때리기가 두려운 사람들은 남자들의 머리를 때려보면 어떨까? 남성의 머리를 때리면 과거 급제하여 錦衣還鄕 한다는 說이 옛 古典에 있으니... 진달래 꽃다발로 사랑을 표현 했던 여의화장(如意花杖),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전통놀이인가.

* 송도 명기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낸바 있는 朝鮮의 멋쟁이 선비였던 임백호가 화전놀이에 대하여 읊은 詩가 있다. ‘개울가 큰 돌 위에 솥뚜껑 걸어놓고, 흰 가루 참기름에 꽃전 부쳐 집에 드니, 가득한 봄볕 향기가 뱃속까지 스며든다.’ 살포시 눈을 감고 읊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봄 향기 가득히 차오르지 않는가?. 남자들이 솥이나 그릇을 지게에 져다 취사준비를 마쳐주고 산을 내려가면, 그때부터는 여인들만의 오붓한 시간이 된다. 서로 詩를 지어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돌아가며 끝말을 이어가는 대구(對句)놀이도 하면서 여자들끼리만 하루를 즐기는 게 화전놀이이다. 이때 남자들이 옮겨준 솥뚜껑에 부치던 화전에 들어가는 꽃이 진달래이고, 진달래는 먹는 꽃이란 뜻으로 참꽃이라고도 불린다. 참꽃에 비하여 못 먹는 꽃은 개꽃(철쭉꽃)이라고 부르고...

 

 

변산 앞바다와 새만금 방조제

 

 

왠 생뚱맞은 성인봉? 비룡상천봉으로 추정되는 봉우리를 지나 조금 더 진행하면(쇠뿔바위봉과 비룡상천봉의 중간쯤 되는 지점), 성인봉이라는 이름표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봉우리가 나온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성인봉도 역시 약간 밋밋한 수준의 평범한 능선상의 봉우리일 뿐이다. 혹시 지도상의 와우봉과 같은 봉우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흙과 바위가 번갈아가며 나타나던 능선길은 저만큼 앞에 동쇠뿔바위봉이 보이면서 갑자기 완전한 암릉으로 변해버린다. 주능선에서 동쇠뿔바위봉 방향으로 커다란 암릉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데, 이름하여 고래등바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다 배낭을 벗어놓고 동쇠뿔바위봉에 다녀온다. 밧줄을 잡고 수직에 가까운 암벽을 오르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다. 쉬는 틈을 이용해 점심을 먹으면서 前面에 보이는 절벽을 바라보고 있다. 못 오르는데 대한 서운함을,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묘기로 대체하면서...

 

 

고래등바위 초입에서 바라보는 동쇠뿔바위봉은 쇠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루를 엎어 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청림마을에서 올려다보면 두 개의 쇠뿔이 나란히 서 있는 형상을 확실하게 만들어내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무튼 비룡상천봉이 풍수적으로 주봉이라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에는 단연 쇠뿔바위봉이 주봉이자 백미다.

 

 

고래등바위는 끝이 뭉툭한 절벽으로 이루어졌다. 그 절벽 끝으로 나서기 전 20m쯤 전, 오른쪽으로 내려서는 길이 희미하게 보인다. 왼편으로도 내려설 수 있으나 릿지산행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자제해야 좋을 정도로 경사가 꽤 심하다. 동쇠뿔바위봉으로 가기위해 좌우를 살피고 있는데. 이때 들려오는 청천벽력 같은 산행대장의 목소리 ‘시간이 부족하니 동쇠뿔바위봉을 오르는 것은 생략합니다.’ 자율적으로 다녀오면 안 되겠느냐는 질문에도 일언지하에 거절이다. ‘위험하니 산행대장의 통제에 따라야합니다’ 사실 난 웬만한 암벽은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오르내리는 경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단체생활에서 리더의 통제에 따르는 것은 필수이니 따를 수 밖에... 정상을 앞에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고래등바위로 내려서기 전 우측으로 등산로가 보인다. 서쇠뿔바위봉으로 가는 길이다. 서쇠뿔바위봉을 향해 조금 더 진행하다보면, 이번에는 오른편에 등산로가 보인다. 지장봉을 거쳐 새재로 내려가는 등산로이다. 이곳 삼거리에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헷갈릴 염려는 없다. 서쇠뿔바위봉을 오르려면 이곳에서 곧바로 직진해야한다. 그러나 조망이 끝나면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나와만 한다.

 

 

 

고래등바위에서 서쇠뿔바위봉으로 가는 길은 능선으로 연결된다. 바윗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조망은 일품으로, 오른편으로 투구봉과 사두봉의 암봉이 기기묘묘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그 너머에는 머리에 군부대 레이더기지를 머리에 이고 있는 의상봉이 바라보인다. 그리고 왼편으로는 동쇠뿔바위봉이 우뚝 솟아있고, 고래등바위 위에는 점심상을 차린 등산객들이 울긋불긋 꽃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서쇠뿔바위봉에서 바라본 지장봉, 투구봉, 의상봉 조망 - 최고의 백미이다

 

 

 

서쇠뿔바위봉에서의 고래등바위 조망

 

 

서쇠뿔바위봉을 구경하고 나면 고래등바위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 고래등바위 갈림길과 서쇠뿔바위봉의 중간어림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면 지장봉과 새재를 거쳐 청림 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 길을 걷다보면 부안湖와 어우러지는 투구봉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우각봉에서 지장봉으로 내려서는 길은 그야말로 급경사이다. 이곳 행정관청에서 등산로 곳곳을 정비하고 있지만, 이곳까지는 아직 손길이 미치지 못한 듯 싶다. 거기에다 주변에 붙잡을 나무도 변변히 없어 조심하지 않으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그래서일까? 등산로는 한적하고 고즈넉하기만 하다.

 

 

 

 

 

쇠뿔바위봉을 내려서서 10분 정도 더 걸으면 전면에 거대한 암봉인 지장봉이 나타난다. 등산로는 지장봉의 왼편으로 우회를 시킨 후, 경사가 진 암릉 사면위로 올려놓는다. 이곳 암릉의 중턱에서 바라보는 쇠뿔바위봉 일대의 풍광이 장관이다. 서쪽으로 의상봉 아래 투구봉의 기암능선과 부안호수 풍치도 매우 좋다. 지장봉은 전문 암벽장비를 갖춘 클라이머들이나 올라갈 수 있는 봉우리이다.

 

 

지장봉 등 부분에서 조망한 지장봉 정상 조망 - 정상은 위험하여 오를 수 없다)

 

지장봉에서는 부안호의 일부가 조망된다

 

 

 

암릉에서 내려서서 한참을 걸으면 능선 안부인 새재에 다다르게 된다. 능선을 이어가는 등산로는 이곳에서 끝을 맺는다. ‘출입금지’라는 안내판 앞에 세워진 이정표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청림마을로 내려가라고 지시하고 있다. 투구봉과 서운봉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나오는 마을을 통과해서 가야만 하는데... 무심한 산행대장은 새로운 길 탐색에 목말라하는 내 작은 소망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 ‘이곳에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며...

 

 

 

새재에서 제법 경사가 심한 등산로를 따라 잠깐 내려서면 조그만 계곡을 만나게 된다. ‘졸졸졸-’ 길가 계곡을 따라 흐르고 있는 물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산을 내려오면 누구나 물을 그리워한다. 산행 중에 흘린 땀을 씻기도 하고, 오르내리느라 고생한 무릎에게 안식도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쇠뿔바위봉에는 탁족을 할만한 양의 물이 보이지 않는다. 바위산에서 물을 찾음은 역시 지나친 호사(豪奢)인가? 청림마을로 이어주는 길 주변은 이미 연초록 풀들로 뒤덮인 지 오래이고, 나무들 또한 싱그런 애잎들을 슬그머니 내밀고 있다. 분명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늦바람난 추위가 제 아무리 용트림을 하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 봄의 기운은 이미 여러 곳을 점령하고 있는지 오래이다. 계곡이 끄트머리에는 산행안내판과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이내 오늘의 산행이 끝났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청림마을에서 본 쇠뿔바위봉, 참으로 절묘하게도 닮아있다.

 

 

 

계곡에서 이어지는 농로는 청림마을 동네의 한 가운데를 통과한다. 길가를 곱게 장식하고 있는 꽃잔디가 무척 곱다. 평소에는 구경하기 어려운 하얀색 꽃잔디에 반해 한참을 쭈그리고 앉은 채로 시선을 고정시켜 본다. 청림마을을 빠져나오면 저만큼 앞에 아담하게 생긴 祭閣을 둘러싸고 있는 밀밭이 보인다. 4월의 들녘,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밀밭이다. 얼마 있으면 5월, 그리고 6월, 그때쯤이면 저리도 푸른 밀들이 누렇게 익어가겠지? 우리 어린 시절에는 군것질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고, 굶주린 배에 채워 넣을만한 먹거리를 찾아 우린 늘상 바빴다. 저 밀도 우리가 선호하던 먹거리 중 하나, 구워서 후후 불며 까먹으면 맛있는 간식으로 충분했다. 제각 안마당을 지키고 있는 멋스런 소나무는 꽤나 값나가게 보인다. 世俗에 찌든 난, 언제부터인가 모든 사물을 금전으로 환산하는 못된 버릇이 생겨버렸다.

 

 

 

산행날머리는 청림부락 앞의 736번 地方道路

청림부락을 지나 도로변으로 나오면, 길 양 옆으로 벚꽃이 만개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만개한 벚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면서 파란 하늘에 수를 놓고 있다, 바닷바람이 육지바람보다 더 쌀쌀한 탓일까? 도시 근교의 벚꽃들은 스러진 지 벌써 오래되었건만 이곳은 이제야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다.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는 곳에서 도로변까지는 1Km가 조금 넘을 듯, 산행들머리인 하선마을 도로변에서 어수대까지가 1Km가 조금 못되었으니, 5Km의 本산행에 이 두 구간을 더하면 오늘 산행은 약 7Km를 걸은 샘이다.

 

모악산 (母岳山, 793m)

 

 

산행코스 : 구이(상학)→선녀폭포→대원사→수왕사→무제봉→정상→장근재 배재→청룡사→금산사→주차장 (산행시간 : 4시간10분)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과 김제시 금산면, 전주시 완산구의 경계

산행일 : ‘11. 4. 23(토)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색 : 모악산은 예로부터 논산시 두마면의 신도안(新都安), 영주시 풍기읍의 금계동(金鷄洞)과 함께 난리를 피할 수 있는 明堂으로 널리 알려져 왔으며, 현재에도 많은 신흥종교나 무속신앙들이 본거지로 삼고 있다. 특히 모악산은 예로부터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여겨져 인근에 증산교의 본부가 있다. 모악산은 전북권의 많은 산행 길 중 백미로 꼽힌다. 기(氣)를 품고 있으면서도 험하지도 그렇다고 만만치도 않다. 또한 마치 어머니의 아늑한 품안과도 같이 편안하고 정겨운 산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수많은 등산객들이 즐겨 찾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모악산관광단지 주차장

서전주 I.C에서 내려선 후, 21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완주군 구이교차로에서 27번 국도로 빠져 나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모악산 관광단지’의 들머리에 닿게 된다. 車에서 내려 상가들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들어서면 모악산 표지석과 모악산 詩碑, 그리고 등산 안내도가 있는 등산로 입구에 이른다. 모악산이 이정도로 有名한 산이었던가? 모악산 들머리에서 만난 수많은 인파에 놀라면서,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다. 서울 근교의 산들에서 볼 수나 있던 광경이 여기서도 再現되고 있다.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가득찬 등산로는, 말 그대로 人山人海를 이루고 있다.(주차장에서 모악산 정상까지는 3.5km)

 

 

들머리의 한 쪽에 있는 모태정을 지나서, 인파에 뒤섞여 곱게 깔린 돌길을 오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편으로 등산로 하나가 보인다. 상학능선으로 오르는 길이지만 이용하는 사람은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곧바로 대원사를 향해 걷다보면 이내 왼편 길 아래에 仙女瀑布가 보인다. 이곳 인근에서는 폭포를 구경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선녀폭포라는 멋진 이름까지 붙였겠지만, 폭포는 그야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다.

 

 

 

등산로는 계곡을 끼고 이어지다가, 木橋(나무다리)를 이용해서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모악산 정상 2,5km를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고, 나무다리를 건너면, 천일암 갈림길이다. 대원사 까지는 이제 300m가 남았다. 등산로 주변엔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스러져가는 봄을 아쉬워하고 있다.

 

 

 

 

 

 

천일암 갈림길에서 제법 가파른 오르막 돌계단을 오르면, 저 만큼에 대원사가 보인다. 절 앞의 대나무들은 온통 누렇게 말라 죽어가고 있다. 대나무는 죽기 바로 직전에 꽃을 피워낸다고 했는데(대나무가 60년에 한 번씩 꽃을 피워낸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유심히 살펴본다. 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죽지는 않았나 보다. 해탈교를 건너 절 경내로 들어서자, 단아한 모습의 석탑이 반긴다. 아담한 규모의 전각들은 흐드러지게 핀 벚꽃에 포위되어 있다.

* 대원사(大院寺) : 신라 문무왕 10년(670년) 백제로 귀화한 고구려의 승려인 보덕(普德)화상의 제자인 일승(一乘)이 심정(心正)·대원(大原) 등과 함께 창건한 절로서 금산사의 말사이다. 조선 말기 종교사상가로 유명했던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선생이 이 절에서 49일간 금식기도 중 깨달음을 얻고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다. 국보급 문화재는 없고, 전북유형문화재 21호와 215호인 용각부도와 대웅전 삼존불, 그리고 민속자료 제9호인 목각사자 등을 보유하고 있다.

 

 

 

 

 

잠시 대원사를 벗어나면 가파른 돌계단길이 계속 이어진다. 등산로는 아직도 사람들로 넘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 그보다 더 꼴불견인 것은 트랜지스터를 크게 틀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니, 제발 이어폰을 끼고 혼자서 들었으면 좋겠다. 아담한 정자가 세워진 쉼터를 지나, 오른쪽 지능선을 따라 오른다.

 

 

 

 

쉼터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왼편에 鐵난간이 세워진 돌계단이 보이고 그 끄트머리에 ‘먹거리 쉼터’가 보인다. 부침개 등 다양한 안주와 다양한 주류를 팔고 있는 쉼터는, 흡사 시골 장터를 연상케 할 정도로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먹거리 쉼터’에서 좌측으로 접어들어 50m정도 오르면 수왕사가 나온다. 사찰의 건물들은 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반 가옥에 더 가깝게 생겼고, 거기다 언제 허물어질지 모를 정도로 낡아있다. 그러나 水王寺란 이름값을 하려는지 산중턱에 위치한 절임에도 불구하고 청량한 감로수를 펑펑 내쏟고 있다. 수왕사의 마당에 서면 구이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 수왕사(水王寺) : 무량(無量)이 절, 물왕이 절이 변해서 水王寺가 되었단다. 절 앞 안내판에는 신라 문무왕 20년에 보덕화상이 창건했다고 적어 놓았으나, 옳지 않은 내용인 듯 싶다. 보덕화상의 제자들이 지었다는 요 아래의 대원사가 이보다 10년이 더 빠른 시기에 지어졌으니 말이다. 수왕사에 전래되어 오던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와 송죽오곡주(松竹五穀酒)는 벽암스님에 의해 대한민국 전통식품 명인 1호로 지정된바 있다.

 

 

수왕사에서 ‘먹거리 쉼터’로 되돌아 나와, 쉼터 뒤 능선으로 오른다. 경사가 심한 등산로를 힘들게 오르다보면 이정표가 있는 ‘주능선 안부 사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하면 정상으로 가게 된다. ‘오른편 봉우리에 안 다녀오세요?’ 정상까지 남은 거리가 짧다(정상까지 800m가 남았고, 주차장에서 이곳까지는 2.2Km)고 생각되었는지 집사람이 상학능선 방향에 보이는 봉우리를 가리킨다. 밋밋한 봉우리 정상은 온통 집체만한 커다란 바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이 장군봉일 것이다. 그럼 저 바위들은 장군이 가지고 놀던 공깃돌?

 

 

 

 

안부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잠깐 올라서면 무제봉(舞祭峰)이다. 넓은 분지로 이루어진 무제봉에 오르면 저 멀리 구이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진행방향으로는 정상의 송신탑이 허공에 더 있고...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무제봉은 옛날 무우제(舞雨祭=기우제)를 올리던 곳이다. 처음에는 몇 마을의 행사였으나, 조선조 중엽 에는 전주감영에서 감사가 산 돼지를 제물로 올리고 각 고을에서 준비한 제물과 아울러 祈雨祭를 올렸다고 한다.

 

 

 

무제봉에서 정상으로 오르다보면 오른편에 우람하게 서있는 바위봉우리가 눈에 띈다. 쉰길바위(?, 다른 분의 산행기에서 습득)이다. 어렵게 바위 위로 오르면 구이저수지와 전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KBS방송 송신탑'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쉰길바위에서 키 작은 산죽길을 지나면, KBS방송국에서 송신탑을 만들면서 새로이 조성한 전망대가 보인다. 예전의 모악산 정상석인 듯 싶은 오석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이 철창 너머에 다소곳이 숨어있다. 가능하면 밖으로 내 놓으면 어떨까? 명색이 정상표지석이니 말이다.

 

 

 

전망대에서 송신탑을 왼편으로 끼고 돌면 송신탑으로 오르는 철문이 보인다. 입구에는 KBC 직원들이 시원한 음료수 한잔과 ‘남자의 자격’과 ‘제빵왕 김탁구’, ‘추노’ 등 드라마 주제곡이 실린 OST-CD를 나누어 주고 있다. 정상 개방 3주년을 기념한 나눔 행사라고 한다. 건물 옥상인 정상으로 올라서면 사통팔달로 열려있어 구이저수지와 전주시가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저멀리 서남쪽 방향으로는 내장산과 백양산이 어렴풋이 바라보이고,,,

 

 

 

 

 

 

정상에서 내려와 중계탑을 왼편으로 끼고 돌아 내려갔다가, 나무계단을 밟고 다시 오르면 헬기장인 南峰 정상이다. 주변에 마땅히 점심상 차릴 장소가 없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식사들을 하고 있다. 헬기장을 가로지르면 진행방향의 전면에 제법 우람한 바위벼랑이 보이고, 그 위에 멎진 전망대 하나가 앙증맞게 앉아있다.

 

 

 

 

전망대를 지나면 본격적인 하산길이 시작된다. 경사가 심한 곳은 통나무 계단을 만들기도 하면서 등산로는 꾸준하게 고도를 낮추어간다. 고개를 만나면 오르고 또 다시 내려가기를 몇 번하면 어느새 배재이다. 등산로를 따라 내려서다보면 초록의 향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뭇가지들이 공들여 내밀고 있는 연초록 이파리들이 싱그럽기만 하고, 허리춤까지 차오르는 山竹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낙엽을 밟으며 내려서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배재에서 오른편으로 난 급경사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서면 청룡사이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의 구석구석은 봄기운으로 꽉 차 있다. 허공에 텅 빈 듯이 걸려있던 나뭇가지들에도 연초록 새순이 돋아 오르고, 지난날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낙엽 사이로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풀의 새싹들이 그렇게 앙증맞을 수가 없다. 사방에 차오르고 있는 연두빛 색깔들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부지런한 우리 집사람은 하산시간에 여유가 있다며 냉큼 주저앉는다. 내일 아침 국거리라도 장만하겠다면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에는 제법 큰 쑥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나물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걷가보면 어느덧 청룡사 입구이다. 마주치는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300m정도를 오르면 청룡사이다. 새로운 불사를 일으키고 있는 둣, 대웅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건물들을 새로 짓고 있는 중이다.

* 청룡사(靑龍寺) : 고려시대인 1079년(문종 33)에 금산사 주지인 혜덕왕사(慧德王師)가 용장사라나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그러다가 1954년 금산사 주지 용봉스님이 청룡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이 때 관음전을 건립하고 완주군에 있는 옛 봉서사에서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을 모셔와 관음전에 봉안하였다.

* 예전엔 모악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거르면 사금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80년대에 公職에서 ‘광업’에 관한 정책업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 청룡사 뒷산에서 금을 채굴하고 있던 鑛山(광산)과, 김제평야의 砂金광산을 몇 번인가 다녀갔을 정도로, 한때는 겨울만 되면 산자락 논밭마다 사금 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인근의 지명들도 금구, 금평, 김제, 금산 등 금과 관련된 이름들이 많다.

 

 

 

청룡사에서 금산사까지는 아스팔트도로이다. 도로 주변은 人家들의 흔적이 뚜렷한데, 공원으로 조성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듯, 나무들마다 지지대를 붙들고 있다. 진달래와 벚꽃들이 도로주변에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도로는 꽃들로 포위되어 있다. 꽃들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금산사 부도전을 지나 사찰의 담벼락을 끼고 난 길가의 벚꽃향 그윽한 길을 걸어 내려오면 오른편에 금강문이 보인다. 금산사 경내로 들어서면 경내의 고목들이 사찰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 金山寺 : 조계종 제17교구 본사로, 백제 법왕 1(599년)에 창건된 왕의 자복(自福)사찰이라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단다. 1069년(문종 23)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대가람(大伽藍)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이라는 대사구(大寺區)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大道場)이 되었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국보급 문화재를 제일 많이 보유하고 있다. 국보급만 해도 미륵전(국보 62) , 대적광전(보물 476), 대장전(보물 827), 5층석탑(보물 215), 6각다층석탑(보물 27), 석련대(石蓮臺:보물 23, 석종(石鐘:보물 26),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28),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보물 24) 등이 있다.

 

 

 

 

산행날머리는 금산사 주차장

금산사 경내를 벗어나 금산사계곡, 일명 눌연계곡(吶然溪谷)으로 알려진 산책로를 따라 걸어 내려오면 일주문과 매표소, 그리고 집단시설지구를 지나 주차장에 다다르게 된다. 일주문은 어디선가 읽은 대로 神과 俗을 구분 짓고 있다는 말이 맞는 듯 싶다. 일주문을 벗어나자마자 좌판을 펴 놓은 아주머니들이 눈에 띄고, 그들의 호객행위에서 사람 사는 세상의 냄새가 줄줄이 배어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금산사 뒷담에서 선을 보이던 벚꽃은 경내를 돌아 駐車場으로 다가갈수록 그 밀도를 더해간다. 滿開의 시기를 지나 듬성듬성 새순이 돋아 오르고 있지만, 늦부지런을 떨며 꽃몽오리를 활짝 열고 있는 나무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소문난 ‘모악산의 봄 경치’을 느껴볼 수가 있다. 호남사경(湖南四景) 가운데 제일로 꼽히는 모악춘경(母岳春景)을 말이다. 그만큼 이곳 금산사에서 4월에 피는 벚꽃과 배롱나무 꽃이 장관이란다. 호남사경은 두 번째가 변산반도의 하경(夏景)이요, 세 번째는 내장산의 단풍, 네 번째가 백양사의 설경(雪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