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산(彌勒山, 429.6m)-용화산((龍華山, 341m)
산행일 : ‘13. 11. 24(일)
소재지 : 전북 익산시 금마면, 삼기면, 낭산면, 여산면, 왕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미륵사지주차장(유물전시장)→사자암입구(사자암왕복)→미륵산(장군봉)→미륵산성→우제봉→다듬재→용화산→서동공원(순수 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송암산악회
특징 : 미륵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따란 들녘인 호남평야(湖南平野)의 한가운데 위치한 작은 산이다. 높이라고 해봐야 고작 400m 초반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지만 이 산에다 옛이야기를 포함시킬 경우에는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어버린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간직한 미륵사지(彌勒寺址)와 사자암(獅子庵)이 있고, 마한(馬韓)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산성(彌勒山城)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상에 서면 주변이 온통 평야지대 이기 때문에 거칠 것 없는 조망(眺望)을 자랑한다.
▼ 산행들머리는 미륵사지주차장
호남고속도로 익산 I.C에서 내려와 722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된다. 지방도는 금마사거리(금마면 동고도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금마면소재지(面所在地 : 동고도리)를 통과한 후, 금마면 기양리(119-4)에 위치한 미륵사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산행은 **)미륵사지(彌勒寺址)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먼저 미륵사지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미륵사는 전각(殿閣)이 없는 사찰(寺刹)이다. 그래서 사찰의 이름 끝에 지(址)자가 하나 더 붙어 있는 것이다. 백제시대에 그렇게 번성했던 미륵사는 폐사(廢寺)가 되어 없어지고 일부 흔적만이 남아 그 시대의 번창했던 과거를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 미륵사지(彌勒寺址 : 사적 제150호), 미륵사는 601년(백제 무왕 2)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說話)로 유명한 사찰이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百濟) 무왕(武王)이 된 서동이 어느 날 왕후인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는데 용화산 아래 큰 연못에서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더니 미륵 삼존불(彌勒 三尊佛)이 나타났단다. 그 뒤 무왕은 그곳에 탑을 건립하고 미륵사(彌勒寺)를 세우게 되었다. 또한 무왕 때 백제의 도읍을 용화산 주변으로 잠시 옮겼다고 전한다. 익산에는 지금도 왕궁(王宮)이라는 지명(익산시 왕궁면)이 있으며 해마다 서동축제가 열린다. 사찰지에는 국보 제11호인 동양 최대 석탑인 미륵사지 서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되었다. 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되어 있다.
▼ ‘웬 절터가 이렇게 넓지요?’ 미륵사의 경내에 들어가자마자 같이 간 일행이 내뱉는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회랑을 따라 이어진 미륵사 절터는 그야말로 엄청나다. 2개의 연못 뒤로 멋진 회랑이 펼쳐지고 2개의 당간(보물 제236호)이 양옆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복원(復元)된 동탑, 서탑(西塔 : 미륵사지석탑, 국보 제11호))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다. 천년이 넘은 세월의 자국을 다듬기 위하여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가림막 안은 탑의 기반(基盤)을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 미륵사지를 둘러보고 동탑 옆으로 철망(鐵網) 사이를 통해 절터 밖으로 나간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철망을 왼편에 끼고 잠깐 걸으면 이정표(구룡마을 2.1Km/ 미륵사지 0.6Km)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대나무 숲길’, ‘둘레길’ 등이 적혀있는 것을 보면 등산객을 위한 이정표가 아니고 둘레길 탐방객(探訪客)들을 위한 이정표인가 보다. 이정표를 보면 이 둘레길은 미륵사지에서 출발해서 미륵사지에서 끝을 맺고, 총 길이는 15.4Km인 모양이다. 입구에서 300m만 더 걸으면 삼거리(이정표 : 구룡마을 1.8Km/ 미륵사지 0.9Km/ 등산로)를 만나게 되는데, 등산로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크게 휘는 둘레길과 헤어지게 된다. 이제부터 순수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미륵산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산이다. 90년대 초반 이곳 익산시에 있던 ‘수출자유지역관리소’에서 부서책임자로 근무한 일이 있었다. 그때 1년 이상을 새벽마다 미륵산에 올랐었다. 가족과 떨어져서 관사(官舍)에서 혼자 살고 있던 터라서 아침에 따로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미륵사지에 차를 주차시킨 후에 정상까지 다녀오는 데는 넉넉잡아 1시간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아침운동 삼아 하기에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 둘레길과 헤어지고 나면 잠시 후에 ‘뜬바위’로 가는 방향을 표시한 낯선 이정표(뜬바위 2.4Km/ 미륵사지 1.2Km) 하나가 보인다. ‘뜬바위’는 구룡마을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큰 바위 두 개가 포개져 있는 생김새가 마치 떠 있는 형상(形象)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뜬 바위’는 바위의 생김새보다는 바위에 새겨진 ‘윷판’ 도형(圖形)을 보려는 사람들이 간혹 찾는 편이다. 아래편의 바위 위에 새겨 놓은 ‘윷판 도형(28개의 구멍)’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이 도형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새겼는지 이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북두칠성의 운행을 도안화 했을 것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농경(農耕)과 관련한 계절의 변화가 반영된 도형 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형을 그린 사람은 북두칠성의 위치 변화와 계절의 바뀜이 일률적으로 이루어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뜬바위 갈림길을 지나면서 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그 가파른 경사(傾斜)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듯 돌계단과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힘들기는 매 한가지이다. 그 계단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계단을 밟으며 400m쯤 힘겹게 오르면 왼편으로 난 길(이정표 : 정상 0.98Km/ 연수원주차장 0.96Km) 하나가 보인다. 기양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 사자사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傾斜)가 매우 가파르다. 그 가파름을 배겨내지 못한 산길은 돌계단과 나무계단을 이용해서야 겨우 고도(高度)를 조금씩 올려놓고 있을 정도이다. ‘기양리갈림길’에서 400m 남짓 더 오르면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이정표 : 정상 0.558Km/ 사자암 100m/ 연수원주차장 1.384Km). 100m쯤 들어갔을 즈음 가파른 벼랑에 마치 제비집처럼 들어붙어있는 암자(庵子)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사자암이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다 사찰을 세웠을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조금 전에 올라왔던 길고 긴 계단을 떠올려보니 한숨부터 나온다. 옛날에 이곳까지 올라 다녔을 스님들과 신자들의 고생이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이다. 스님들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사찰에서 도를 닦고 수양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찰까지 오르는 고행(苦行)만으로도 해탈(解脫)을 경험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일반 처사들은 산을 힘겹게 오르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들을 가졌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부처님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으리라. 참고로 사자암 오름길의가파른 정도는 사찰 입구에 설치된 삭도(索道)와 궤도차(軌道車)가 잘 말해주고 있다.
▼ 사자암(獅子庵 : 전라북도 기념물 제104호), 지금은 비록 금산사(金山寺)에 딸린 작은 절집(末寺)이지만, 그 역사(歷史)는 너무나도 오래된 천년고찰(千年古刹)이다. 백제 무왕 때 지어졌다는 미륵사보다도 더 오래되었다는 것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무왕조(武王朝) 편’에는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知命法師)를 찾았다고 적혀있다. 사자사로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오래된 절의 역사(歷史)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절 마당에는 엄청나게 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사자암은 미륵사 창건의 계기를 만든 절이었기에 백제 불교사상 연구에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그동안 사자사의 위치에 대해 논란이 있어왔다. 그러나 1992년 법당(法堂)을 확장하기 위한 발굴조사에서 기와조각들이 발견됨으로써 백제불교사적 의미를 가진 사자사 터임이 확인됐다.
▼ 사자암갈림길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가면, 또 다시 가파른 산길이 길손을 맞는다. 그 오름길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나무계단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가파른 계단을 힘들게 오르느라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즈음이면 연동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정상 0.39Km/ 약수터 0.605Km/ 연수원주차장 1.552Km)에 이르게 된다.
▼ 연동리 갈림길에서부터 산길이 바윗길로 변한다. 덕분에 곳곳에서 조망(眺望)이 트이기 시작한다. 바위 난간에 만들어진 첫 번째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 아까 지나왔던 미륵사지가 일목요연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 내려다보인다. 이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바위무더기, 그런데 그 바위의 생김새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그렇다. 무등산의 서석대에서 본적이 있는 주상절리(pillar-shaped joint , 柱狀節理)를 쏙 빼다 박았다. 그러나 진짜 주상절리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만일 진짜 주상절리였다면 최소한 안내판(案內板) 하나라도 세워 놓았을 것이다.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싶어 하는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서 주상절리라는 관광상품(觀光商品)을 그냥 놓쳤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 주상절리를 닮은 바위를 지나면 등산로 왼편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조망(眺望)이 트일 것 같아 바위 위로 냉큼 올라선다. 그러나 사실은 오르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바위의 높이가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높고, 거기다가 잡고 오를 수 있는 크랙(crack)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암벽등반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오르는 것을 삼가 해야 할 것이다. 바위 위로 올라서면 조망은 둘째고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10개 정도 되는 성혈(性穴)이다. 성혈이란 바위그림의 한 종류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성혈은 주로 고인돌(支石墓)의 덮개돌(上石)이나 자연 암반(巖盤)에 새겨진다. 홈구멍이 새겨진 바위는 대체로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 후대에 계속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조성 시기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보성 동촌리 고인돌처럼 땅속에 묻힌 하부 구조에서 홈구멍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만들어졌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홈구멍 바위그림(岩刻畵)은 농경사회(農耕社會)에서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기원하는 신앙적(信仰的) 의식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
▼ 성혈이 있는 바위 부근은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선(視線)을 끄는 것은 금마저수지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널따란 들녘으로 나아가는 초입에 있는 익산 저수지의 생김새가 특이해서이다. 그 생김새가 흡사 한반도(韓半島)의 지형을 쏙 빼다 박은 것이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한반도를 닮은 지형은 여러 곳에서 봤다. 그러나 하나 같이 강이나 저수지에 둘러싸인 땅이었고, 물의 생김새가 한반도를 닮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 신기하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 조망을 즐기다보면 금방 미륵산 정상이다. 장군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정상은 비록 평평하지는 않지만 널따란 분지(盆地)형태로 되어 있다. 분지의 가장 높은 곳에 돌탑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돌탑 앞에는 삼각점, 그리고 정상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는 이정표(약수터 0.99Km, 기양리 연못 2.41Km, 연수원주차장 1.94Km/ 심곡사 0.60Km/ 아리랑고개 1.5Km)는 한쪽 가장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외에도 산불감시초소와 ‘익산시소재 산악회의 산행지 게시판’, 미륵산성 안내판 등이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잡다(雜多)하게 세워져 있다. 좀 정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난 편이다. 부근에 높은 산이 없는 편이라서 호남평야의 너른 들녘이 끝없이 펼쳐지고, 그 가운데에 앉아있는 익산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25분 정도가 지났다.
▼ 정상에서 다듬재로 방향을 잡고 내려서면 요상한 묘 1기(基)를 만나게 된다. 보통의 묘들은 평평하거나 봉긋한 곳에다 무덤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움푹 꺼진 지점에 무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일부러 가분묘(假墳墓)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이 묘를 못 쓰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일행의 설명을 듣고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설마 어느 후손(後孫)이 배수(排水)도 안 되는 곳에다 조상을 모시겠는가.
▼ 묘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우제봉에 이르게 된다. 우제봉에서의 조망(眺望)은 한마디로 빼어나다. 오른편에는 조금 전에 올랐던 미륵산 정상이 올려다 보이고, 그 왼편에는 호남평야의 너른 들녘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리고 전면에는 가야할 용화산과 천주교 성지(聖地)로 유명한 천호산, 멀리로는 대둔산까지 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도 조망은 뛰어나다. 비록 짧은 거리지만 숲길을 잠깐 통과해야만 시야(視野)가 열리지만 말이다. 심곡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인 숲길로 들어서면 채 2분도 되지 않아 시야가 뻥 뚫리면서 건너편에 거의 암봉 수준의 산봉우리 하나가 불쑥 솟아오른다. 그러나 산봉우리 대부분은 등산객들의 출입이 통제된다. KT중계소 등 통신시설들이 정상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제봉을 지나면서 등산로가 갑자기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위험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설프게나마 안전로프가 매달려 있을 정도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허물어진 성터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산길은 복원된 성곽(城郭) 위를 걷게 된다. 미륵산성(彌勒山城)이다. 미륵산성은 미륵산의 옛 이름인 용화산을 따서 용화산성(龍華山城), 또는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이 이곳에 도읍(都邑)을 정했다고 하여 기준산성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기준의 도읍설(都邑說) 보다는 마한(馬韓)의 여러 나라 중의 하나가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산성도 그 때부터 축성(築城)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산성은 후백제와도 끈끈한 연(緣)을 갖고 있다. 후백제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왕인 신검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곳이 마성(馬城)인데, 그 마성이 바로 미륵산성인 것이다. 참고로 산성은 남북으로 뻗은 주능선과 우제봉, 그리고 남쪽에서 동쪽으로 뻗은 두 줄기 지맥을 이용하여 성곽(城郭)을 형성한 것이다. 총 길이 1,822m, 석축 둘레 3,900척, 높이 8척으로 계곡과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지방기념물 제 12호로 지정되고 있다.
▼ 10분 조금 못되게 성곽을 걷다가 성곽 아래로 내려서면 산길은 둘레길(이정표 : 장암마을 3.4Km/ 구룡마을 1.2Km)로 나뉜다. 둘레길/ 등산로)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는 장암마을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구룡마을 방향은 미륵사지로 내려가는 탈출로이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장암마을로 방향을 잡고 100m쯤 들어가면 다시 갈림길(이정표 : 장암마을 3.3Km/ 미륵산성 100m/ 등산로) 하나가 더 나타난다. 왼편에 보이는 길(등산로라고 적혀있는)은 아까 지나왔던 미륵산성의 성곽 아래를 따라 왔을 경우에 만나게 되는 길이다. 이곳 삼거리에서도 역시 장암마을 방향으로 내려가면 된다. 장암마을로 가는 둘레길의 이름은 ‘김정렬명창길’, 아마도 익산이 낳은 국악인의 이름인 모양이다.
▼ 성곽을 벗어나면 산길은 고와진다. 내리막길의 경사(傾斜)도 그다지 가파르지 않을뿐더러, 길바닥이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폭신폭신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이 구간의 특징은 등산로의 오른편이 철조망(鐵條網)으로 막혀있다는 것이다. 군(軍)의 훈련지역으로서 사격 및 폭파훈련이 이루어지므로 출입을 금지(禁止)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판(警告板)이 곳곳에 붙어있다. 이러한 군의 철조망은 다듬재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 미륵산성에서 500m쯤 내려오면 다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장암마을 2.9Km/ 미륵산성 0.5Km)로 나뉜다. 이곳에서 둘레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등산로와 헤어진다. 둘레길과 헤어지고 조금만 더 내려오면 다듬재이다. 아리랑재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는 다듬재는 익산시 금마면과 낭산면을 잇는 15번 군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이다. 용화산은 도로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붙으면 된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다.
▼ 용화산으로 가는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분명히 용화산으로 올라가고 있는데도 경사가 가파르지 않는 것이다. 용화산이 미륵산보다 100m정도가 더 낮기 때문에 고도(高度)를 가파르게까지 높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거기다 부드러운 흙길 위에는 솔가리(소나무 落葉)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서 마치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용화산 산길을 걷다보면 아까 미륵산 산길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음을 알게 된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던 철조망(鐵條網)이 사라진 것이다. 가끔가다 길가에 세워진 ‘정찰감시’나 ‘접근금지’ 등 군(軍)관련 안내판이 보이지만 철조망은 눈에 띄지 않는다.
▼ 다듬재에서 45분쯤 걸으면 갈림길 하나를 만나게 된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으나 지도(地圖)를 볼 때 용리산(306.2m)으로 가는 길이다. 30분 정도면 용리산까지 다녀올 수 있지만, 이내 마음을 접어버린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봉우리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다녀오고 싶은 사람들은 삼거리에 쌓아놓은 돌탑을 이정표로 삼으면 될 것이다. 돌탑갈림길 가까이에서 트이기 시작하던 조망(眺望)이 돌탑을 지나면서 더 선명하게 트인다. 오른편에 익산의 널따란 들녘이 끝없이 펼쳐지고, 뒤로 고개를 돌리면 아까 지나왔던 미륵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미륵산 자락을 하얗게 브이(V)자로 파고 있는 산성(山城)의 모습이 마치 반달곰을 연상시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겠다.
▼ 돌탑 갈림길에서 10분 조금 넘게 오르면 드디어 용화산 정상이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용화산 정상은 안내판 비슷하게 생긴 정상표시목이 정상석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정표(서동공원 2.6Km/ 아리랑고개 2.6Km)와 장의자 하나,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잠시나마 쉬어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별로이다. 나뭇잎이 다 져버린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주변 풍경(風景)이 어렴풋이 내다보이는 정도이다. 참고로 용화산은 일명 군입산(軍入山)이라고도 불리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대를 주둔시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 용화산 정상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걸으면 헬기장, 비록 이정표는 없지만 금남기맥을 타려면 이곳에서 쑥고개가 있는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금남기맥은 금남정맥의 왕사봉에서 분기하여 군산의 울명산에서 그 숨을 다하는 약97Km의 산줄기이다. 물론 서동공원은 잘 닦여진 산길을 따라 곧장 내려가면 된다. 헬기장을 출발한 산길은 잠깐 가파르게 떨어지다가 이내 경사(傾斜)가 밋밋한 흙길로 변한다. 무릎이 약한 사람들도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을 정도로 산길이 순해진 것이다.
▼ 산행날머리는 서동공원(公園)
하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 없으니 그야말로 마음씨 고운 길인 것이다. 거기다가 편백나무 숲길을 걷게 되는 행운까지도 누리게 된다. 편백나무 향에 그득하게 실린 피톤치드(phytoncide)를 음미하며 걷는 속도를 뚝 떨어뜨린다. 꼭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이런 웰빙구간에서는 구태여 속도를 높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처럼 느긋하게 걷다보면 40분 후에 산행이 종료되는 서동공원(公園)에 이르게 된다. 서동공원은 10년 전쯤 용화산 주변을 관광지(觀光地)로 개발하면서 산기슭에 만든 조각공원(彫刻公園)이라고 한다. 나중에 백제의 무왕(武王)이 된 서동이 용화산 부근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그런 연유로 해서 서동공원이라는 이름을 얻었나 보다. 공원입구에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동상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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