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산(彌勒山, 429.6m)-용화산((龍華山, 341m)

 

산행일 : ‘13. 11. 24()

소재지 : 전북 익산시 금마면, 삼기면, 낭산면, 여산면, 왕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미륵사지주차장(유물전시장)사자암입구(사자암왕복)미륵산(장군봉)미륵산성우제봉다듬재용화산서동공원(순수 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송암산악회

 

특징 : 미륵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따란 들녘인 호남평야(湖南平野)의 한가운데 위치한 작은 산이다. 높이라고 해봐야 고작 400m 초반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지만 이 산에다 옛이야기를 포함시킬 경우에는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어버린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간직한 미륵사지(彌勒寺址)와 사자암(獅子庵)이 있고, 마한(馬韓)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산성(彌勒山城)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상에 서면 주변이 온통 평야지대 이기 때문에 거칠 것 없는 조망(眺望)을 자랑한다.

 

 

산행들머리는 미륵사지주차장

호남고속도로 익산 I.C에서 내려와 722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된다. 지방도는 금마사거리(금마면 동고도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금마면소재지(面所在地 : 동고도리)를 통과한 후, 금마면 기양리(119-4)에 위치한 미륵사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산행은 **)미륵사지(彌勒寺址)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먼저 미륵사지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미륵사는 전각(殿閣)이 없는 사찰(寺刹)이다. 그래서 사찰의 이름 끝에 지()자가 하나 더 붙어 있는 것이다. 백제시대에 그렇게 번성했던 미륵사는 폐사(廢寺)가 되어 없어지고 일부 흔적만이 남아 그 시대의 번창했던 과거를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 미륵사지(彌勒寺址 : 사적 제150), 미륵사는 601(백제 무왕 2)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說話)로 유명한 사찰이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百濟) 무왕(武王)이 된 서동이 어느 날 왕후인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는데 용화산 아래 큰 연못에서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더니 미륵 삼존불(彌勒 三尊佛)이 나타났단다. 그 뒤 무왕은 그곳에 탑을 건립하고 미륵사(彌勒寺)를 세우게 되었다. 또한 무왕 때 백제의 도읍을 용화산 주변으로 잠시 옮겼다고 전한다. 익산에는 지금도 왕궁(王宮)이라는 지명(익산시 왕궁면)이 있으며 해마다 서동축제가 열린다. 사찰지에는 국보 제11호인 동양 최대 석탑인 미륵사지 서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8월 원광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되었다. 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되어 있다.

 

 

 

웬 절터가 이렇게 넓지요?’ 미륵사의 경내에 들어가자마자 같이 간 일행이 내뱉는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회랑을 따라 이어진 미륵사 절터는 그야말로 엄청나다. 2개의 연못 뒤로 멋진 회랑이 펼쳐지고 2개의 당간(보물 제236)이 양옆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복원(復元)된 동탑, 서탑(西塔 : 미륵사지석탑, 국보 제11))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다. 천년이 넘은 세월의 자국을 다듬기 위하여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가림막 안은 탑의 기반(基盤)을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미륵사지를 둘러보고 동탑 옆으로 철망(鐵網) 사이를 통해 절터 밖으로 나간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철망을 왼편에 끼고 잠깐 걸으면 이정표(구룡마을 2.1Km/ 미륵사지 0.6Km)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대나무 숲길’, ‘둘레길등이 적혀있는 것을 보면 등산객을 위한 이정표가 아니고 둘레길 탐방객(探訪客)들을 위한 이정표인가 보다. 이정표를 보면 이 둘레길은 미륵사지에서 출발해서 미륵사지에서 끝을 맺고, 총 길이는 15.4Km인 모양이다. 입구에서 300m만 더 걸으면 삼거리(이정표 : 구룡마을 1.8Km/ 미륵사지 0.9Km/ 등산로)를 만나게 되는데, 등산로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크게 휘는 둘레길과 헤어지게 된다. 이제부터 순수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미륵산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산이다. 90년대 초반 이곳 익산시에 있던 수출자유지역관리소에서 부서책임자로 근무한 일이 있었다. 그때 1년 이상을 새벽마다 미륵산에 올랐었다. 가족과 떨어져서 관사(官舍)에서 혼자 살고 있던 터라서 아침에 따로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미륵사지에 차를 주차시킨 후에 정상까지 다녀오는 데는 넉넉잡아 1시간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아침운동 삼아 하기에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둘레길과 헤어지고 나면 잠시 후에 뜬바위로 가는 방향을 표시한 낯선 이정표(뜬바위 2.4Km/ 미륵사지 1.2Km) 하나가 보인다. ‘뜬바위는 구룡마을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큰 바위 두 개가 포개져 있는 생김새가 마치 떠 있는 형상(形象)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뜬 바위는 바위의 생김새보다는 바위에 새겨진 윷판도형(圖形)을 보려는 사람들이 간혹 찾는 편이다. 아래편의 바위 위에 새겨 놓은 윷판 도형(28개의 구멍)’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이 도형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새겼는지 이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북두칠성의 운행을 도안화 했을 것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농경(農耕)과 관련한 계절의 변화가 반영된 도형 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형을 그린 사람은 북두칠성의 위치 변화와 계절의 바뀜이 일률적으로 이루어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뜬바위 갈림길을 지나면서 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그 가파른 경사(傾斜)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듯 돌계단과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힘들기는 매 한가지이다. 그 계단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계단을 밟으며 400m쯤 힘겹게 오르면 왼편으로 난 길(이정표 : 정상 0.98Km/ 연수원주차장 0.96Km) 하나가 보인다. 기양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사자사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傾斜)가 매우 가파르다. 그 가파름을 배겨내지 못한 산길은 돌계단과 나무계단을 이용해서야 겨우 고도(高度)를 조금씩 올려놓고 있을 정도이다. ‘기양리갈림길에서 400m 남짓 더 오르면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이정표 : 정상 0.558Km/ 사자암 100m/ 연수원주차장 1.384Km). 100m쯤 들어갔을 즈음 가파른 벼랑에 마치 제비집처럼 들어붙어있는 암자(庵子)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사자암이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다 사찰을 세웠을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조금 전에 올라왔던 길고 긴 계단을 떠올려보니 한숨부터 나온다. 옛날에 이곳까지 올라 다녔을 스님들과 신자들의 고생이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이다. 스님들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사찰에서 도를 닦고 수양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찰까지 오르는 고행(苦行)만으로도 해탈(解脫)을 경험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일반 처사들은 산을 힘겹게 오르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들을 가졌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부처님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으리라. 참고로 사자암 오름길의가파른 정도는 사찰 입구에 설치된 삭도(索道)와 궤도차(軌道車)가 잘 말해주고 있다.

 

 

 

 

사자암(獅子庵 : 전라북도 기념물 제104), 지금은 비록 금산사(金山寺)에 딸린 작은 절집(末寺)이지만, 그 역사(歷史)는 너무나도 오래된 천년고찰(千年古刹)이다. 백제 무왕 때 지어졌다는 미륵사보다도 더 오래되었다는 것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무왕조(武王朝) 에는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知命法師)를 찾았다고 적혀있다. 사자사로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오래된 절의 역사(歷史)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절 마당에는 엄청나게 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사자암은 미륵사 창건의 계기를 만든 절이었기에 백제 불교사상 연구에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그동안 사자사의 위치에 대해 논란이 있어왔다. 그러나 1992년 법당(法堂)을 확장하기 위한 발굴조사에서 기와조각들이 발견됨으로써 백제불교사적 의미를 가진 사자사 터임이 확인됐다.

 

 

 

 

 

사자암갈림길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가면, 또 다시 가파른 산길이 길손을 맞는다. 그 오름길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나무계단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가파른 계단을 힘들게 오르느라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즈음이면 연동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정상 0.39Km/ 약수터 0.605Km/ 연수원주차장 1.552Km)에 이르게 된다.

 

 

 

 

연동리 갈림길에서부터 산길이 바윗길로 변한다. 덕분에 곳곳에서 조망(眺望)이 트이기 시작한다. 바위 난간에 만들어진 첫 번째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 아까 지나왔던 미륵사지가 일목요연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 내려다보인다. 이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바위무더기, 그런데 그 바위의 생김새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그렇다. 무등산의 서석대에서 본적이 있는 주상절리(pillar-shaped joint , 柱狀節理)를 쏙 빼다 박았다. 그러나 진짜 주상절리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만일 진짜 주상절리였다면 최소한 안내판(案內板) 하나라도 세워 놓았을 것이다.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싶어 하는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서 주상절리라는 관광상품(觀光商品)을 그냥 놓쳤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주상절리를 닮은 바위를 지나면 등산로 왼편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조망(眺望)이 트일 것 같아 바위 위로 냉큼 올라선다. 그러나 사실은 오르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바위의 높이가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높고, 거기다가 잡고 오를 수 있는 크랙(crack)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암벽등반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오르는 것을 삼가 해야 할 것이다. 바위 위로 올라서면 조망은 둘째고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10개 정도 되는 성혈(性穴)이다. 성혈이란 바위그림의 한 종류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성혈은 주로 고인돌(支石墓)의 덮개돌(上石)이나 자연 암반(巖盤)에 새겨진다. 홈구멍이 새겨진 바위는 대체로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 후대에 계속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조성 시기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보성 동촌리 고인돌처럼 땅속에 묻힌 하부 구조에서 홈구멍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만들어졌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홈구멍 바위그림(岩刻畵)은 농경사회(農耕社會)에서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기원하는 신앙적(信仰的) 의식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

 

 

 

성혈이 있는 바위 부근은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선(視線)을 끄는 것은 금마저수지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널따란 들녘으로 나아가는 초입에 있는 익산 저수지의 생김새가 특이해서이다. 그 생김새가 흡사 한반도(韓半島)의 지형을 쏙 빼다 박은 것이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한반도를 닮은 지형은 여러 곳에서 봤다. 그러나 하나 같이 강이나 저수지에 둘러싸인 땅이었고, 물의 생김새가 한반도를 닮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더 신기하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조망을 즐기다보면 금방 미륵산 정상이다. 장군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정상은 비록 평평하지는 않지만 널따란 분지(盆地)형태로 되어 있다. 분지의 가장 높은 곳에 돌탑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돌탑 앞에는 삼각점, 그리고 정상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는 이정표(약수터 0.99Km, 기양리 연못 2.41Km, 연수원주차장 1.94Km/ 심곡사 0.60Km/ 아리랑고개 1.5Km)는 한쪽 가장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외에도 산불감시초소와 익산시소재 산악회의 산행지 게시판’, 미륵산성 안내판 등이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잡다(雜多)하게 세워져 있다. 좀 정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난 편이다. 부근에 높은 산이 없는 편이라서 호남평야의 너른 들녘이 끝없이 펼쳐지고, 그 가운데에 앉아있는 익산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25분 정도가 지났다.

 

 

 

 

 

정상에서 다듬재로 방향을 잡고 내려서면 요상한 묘 1()를 만나게 된다. 보통의 묘들은 평평하거나 봉긋한 곳에다 무덤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움푹 꺼진 지점에 무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일부러 가분묘(假墳墓)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이 묘를 못 쓰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일행의 설명을 듣고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설마 어느 후손(後孫)이 배수(排水)도 안 되는 곳에다 조상을 모시겠는가.

 

 

묘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우제봉에 이르게 된다. 우제봉에서의 조망(眺望)은 한마디로 빼어나다. 오른편에는 조금 전에 올랐던 미륵산 정상이 올려다 보이고, 그 왼편에는 호남평야의 너른 들녘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리고 전면에는 가야할 용화산과 천주교 성지(聖地)로 유명한 천호산, 멀리로는 대둔산까지 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도 조망은 뛰어나다. 비록 짧은 거리지만 숲길을 잠깐 통과해야만 시야(視野)가 열리지만 말이다. 심곡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인 숲길로 들어서면 채 2분도 되지 않아 시야가 뻥 뚫리면서 건너편에 거의 암봉 수준의 산봉우리 하나가 불쑥 솟아오른다. 그러나 산봉우리 대부분은 등산객들의 출입이 통제된다. KT중계소 등 통신시설들이 정상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제봉을 지나면서 등산로가 갑자기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위험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설프게나마 안전로프가 매달려 있을 정도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허물어진 성터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산길은 복원된 성곽(城郭) 위를 걷게 된다. 미륵산성(彌勒山城)이다. 미륵산성은 미륵산의 옛 이름인 용화산을 따서 용화산성(龍華山城), 또는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이 이곳에 도읍(都邑)을 정했다고 하여 기준산성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기준의 도읍설(都邑說) 보다는 마한(馬韓)의 여러 나라 중의 하나가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산성도 그 때부터 축성(築城)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산성은 후백제와도 끈끈한 연()을 갖고 있다. 후백제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왕인 신검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곳이 마성(馬城)인데, 그 마성이 바로 미륵산성인 것이다. 참고로 산성은 남북으로 뻗은 주능선과 우제봉, 그리고 남쪽에서 동쪽으로 뻗은 두 줄기 지맥을 이용하여 성곽(城郭)을 형성한 것이다. 총 길이 1,822m, 석축 둘레 3,900, 높이 8척으로 계곡과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지방기념물 제 12호로 지정되고 있다.

 

 

 

 

 

 

10분 조금 못되게 성곽을 걷다가 성곽 아래로 내려서면 산길은 둘레길(이정표 : 장암마을 3.4Km/ 구룡마을 1.2Km)로 나뉜다. 둘레길/ 등산로)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는 장암마을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구룡마을 방향은 미륵사지로 내려가는 탈출로이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장암마을로 방향을 잡고 100m쯤 들어가면 다시 갈림길(이정표 : 장암마을 3.3Km/ 미륵산성 100m/ 등산로) 하나가 더 나타난다. 왼편에 보이는 길(등산로라고 적혀있는)은 아까 지나왔던 미륵산성의 성곽 아래를 따라 왔을 경우에 만나게 되는 길이다. 이곳 삼거리에서도 역시 장암마을 방향으로 내려가면 된다. 장암마을로 가는 둘레길의 이름은 김정렬명창길’, 아마도 익산이 낳은 국악인의 이름인 모양이다.

 

 

 

 

성곽을 벗어나면 산길은 고와진다. 내리막길의 경사(傾斜)도 그다지 가파르지 않을뿐더러, 길바닥이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폭신폭신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이 구간의 특징은 등산로의 오른편이 철조망(鐵條網)으로 막혀있다는 것이다. ()의 훈련지역으로서 사격 및 폭파훈련이 이루어지므로 출입을 금지(禁止)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판(警告板)이 곳곳에 붙어있다. 이러한 군의 철조망은 다듬재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미륵산성에서 500m쯤 내려오면 다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장암마을 2.9Km/ 미륵산성 0.5Km)로 나뉜다. 이곳에서 둘레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등산로와 헤어진다. 둘레길과 헤어지고 조금만 더 내려오면 다듬재이다. 아리랑재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는 다듬재는 익산시 금마면과 낭산면을 잇는 15번 군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이다. 용화산은 도로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붙으면 된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다.

 

 

 

용화산으로 가는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분명히 용화산으로 올라가고 있는데도 경사가 가파르지 않는 것이다. 용화산이 미륵산보다 100m정도가 더 낮기 때문에 고도(高度)를 가파르게까지 높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거기다 부드러운 흙길 위에는 솔가리(소나무 落葉)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서 마치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용화산 산길을 걷다보면 아까 미륵산 산길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음을 알게 된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던 철조망(鐵條網)이 사라진 것이다. 가끔가다 길가에 세워진 정찰감시접근금지등 군()관련 안내판이 보이지만 철조망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듬재에서 45분쯤 걸으면 갈림길 하나를 만나게 된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으나 지도(地圖)를 볼 때 용리산(306.2m)으로 가는 길이다. 30분 정도면 용리산까지 다녀올 수 있지만, 이내 마음을 접어버린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봉우리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다녀오고 싶은 사람들은 삼거리에 쌓아놓은 돌탑을 이정표로 삼으면 될 것이다. 돌탑갈림길 가까이에서 트이기 시작하던 조망(眺望)이 돌탑을 지나면서 더 선명하게 트인다. 오른편에 익산의 널따란 들녘이 끝없이 펼쳐지고, 뒤로 고개를 돌리면 아까 지나왔던 미륵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미륵산 자락을 하얗게 브이(V)자로 파고 있는 산성(山城)의 모습이 마치 반달곰을 연상시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겠다.

 

 

 

 

돌탑 갈림길에서 10분 조금 넘게 오르면 드디어 용화산 정상이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용화산 정상은 안내판 비슷하게 생긴 정상표시목이 정상석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정표(서동공원 2.6Km/ 아리랑고개 2.6Km)와 장의자 하나,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잠시나마 쉬어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별로이다. 나뭇잎이 다 져버린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주변 풍경(風景)이 어렴풋이 내다보이는 정도이다. 참고로 용화산은 일명 군입산(軍入山)이라고도 불리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대를 주둔시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용화산 정상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걸으면 헬기장, 비록 이정표는 없지만 금남기맥을 타려면 이곳에서 쑥고개가 있는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금남기맥은 금남정맥의 왕사봉에서 분기하여 군산의 울명산에서 그 숨을 다하는 약97Km의 산줄기이다. 물론 서동공원은 잘 닦여진 산길을 따라 곧장 내려가면 된다. 헬기장을 출발한 산길은 잠깐 가파르게 떨어지다가 이내 경사(傾斜)가 밋밋한 흙길로 변한다. 무릎이 약한 사람들도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을 정도로 산길이 순해진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서동공원(公園)

하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 없으니 그야말로 마음씨 고운 길인 것이다. 거기다가 편백나무 숲길을 걷게 되는 행운까지도 누리게 된다. 편백나무 향에 그득하게 실린 피톤치드(phytoncide)를 음미하며 걷는 속도를 뚝 떨어뜨린다.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이런 웰빙구간에서는 구태여 속도를 높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처럼 느긋하게 걷다보면 40분 후에 산행이 종료되는 서동공원(公園)에 이르게 된다. 서동공원은 10년 전쯤 용화산 주변을 관광지(觀光地)로 개발하면서 산기슭에 만든 조각공원(彫刻公園)이라고 한다. 나중에 백제의 무왕(武王)이 된 서동이 용화산 부근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그런 연유로 해서 서동공원이라는 이름을 얻었나 보다. 공원입구에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동상이 서있다.

 

 

 

 

 

운장산(雲長山, 1,125.9m)

 

산행일 : ‘13. 11. 17()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주천면, 정천면, 부귀면과 완주군 동상면의 경계

산행코스 : 피암목재활목재서봉(칠성대 1,122m)운장산동봉(상장봉 1,133m)앞산날배기내처사동(산행시간 : 3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송암산악회

 

: 운장산은 호남지방에 있는 금남정맥(錦南正脈)중 가장 높은 산이다. 산의 주릉에는 동과 서, 그리고 가운데 등 세 봉우리가 있는데, 가운데 봉우리가 운장산의 이름표를 달고 있다. 그러나 높이로만 보면 동봉(東峰)이 가장 높고, 산세(山勢)로 볼 것 같으면 서봉(西峰)이 가장 뛰어나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서봉은 깎아지른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오성대를 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운장산의 조망은 동()과 서(西)가 확연히 구분된다. 동쪽은 덕유산 등 거대한 산군(山群)들이 하늘금을 그려내고 있는 반면에, 서쪽은 나지막한 산들이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참고로 운장산은 산수조화(山水調和)의 극치라 일컬어지는 명승(名勝) 운일암반일암을 품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피암목재

익산-장수고속도로 소양 I.C에서 내려와 26번 국도를 타고 진안방면으로 방향을 잡으면 잠시 후에 화심교차로(交叉路 : 소양면 화심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55번 지방도를 따라 용담댐 방면으로 들어가면 동상저수지를 지난 도로는 구불구불 산허리를 돌고 돌아서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완주군 동상면과 진안군 주천면의 경계를 이루는 피암목재이다.

 

 

 

 

피암목재의 널따란 주차장 끄트머리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칠성대 2.1Km, 운장대 2.6Km)와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들머리의 오른편에는 느린마을 양조장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건물이 보인다. 이곳 주차장이 동상휴게소이었던 시절, 사람들이 쉬어가던 휴게소 건물이었을 텐데 지금은 양조장(釀造場)으로 변한 모양이다. 산길은 초반부터 날카롭게 허리를 곧추세우면서 길손을 맞는다. 그 날카로움에 기가 죽을 법도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10분이 못되어 능선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산길은 급한 오름이 없이 순해진다. 그렇다고 1m가 넘는 산인데 가파른 오르막이 없을 리는 없다. 다만 가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지만 대부분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한 산길이 길게 이어진다는 얘기이다.

 

 

 

산죽(山竹 : 조릿대)이 우거진 산길을 걷다가, 바위들이 날카롭게 서있는 나지막한 바위벼랑을 치고 올라서면, 이어지는 능선은 경사(傾斜)가 누그러지면서 조망(眺望)이 터지기 시작한다. 들머리에서 20분 정도 지난 지점이다. 연석산 등 진안 일원의 산봉(山峰)들이 좌우로 솟구치고 있고, 고개를 돌려보면 진안과 금산 일원의 산군(山群)들이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광경이 보인다.

 

 

 

 

피암목재에서 서봉까지의 구간은 산꾼들 사이에 정맥산행(錦南山行)의 꽃이라고 불리는 금남정맥(錦南正脈)의 일부구간을 지나게 된다. 금남정맥이 유명한 산들을 많이 지나기도 하지만 도로보다는 산줄기(능선)를 밟으면서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고 해서이다. 그 중의 일부구간, 그러니까 피암목재에서 서봉까지의 구간이 바로 금남정맥인 것이다. 이 정맥은 서봉 정상에서 운장산 정상으로 향하지 않고 오른편으로 휘며 연석산으로 이어진다. 참고로 금남정맥은 호남금남정맥의 분기점(分岐點)인 마이산에서 시작해서 북으로 치달아 운장산 서봉, 대둔산, 천호산, 계룡산 등을 거친 후, 부소산의 조룡대에서 그 숨을 다하는 124Km의 산줄기이다.

 

 

 

몇 군데 바위지대를 통과한 산길은 잠시 내리막길을 만들다가 널찍한 안부에 이르게 된다. 피암목재에서 50분 남짓 되는 거리에 있는 이 재가 활목재이다. 활목재는 삼거리(이정표 : 칠성대 0.6Km, 운장대 1.2Km, 구봉산 9.4Km/ 독자동 1.6Km/ 동상휴게소 1.6Km)로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독자동을 거처 내처사동이나 외처사동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내처사동에서 원점회귀 산행을 할 경우 이 코스가 자주 이용된다. 참고로 동상휴게소이란 지명(地名)은 피암목재 주차장을 일컫는다.

 

 

 

활목재를 지나면 상당히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조리대 사이로 난 길은 가파른데다가 계단까지 무너져 있는 탓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활목재에서 10분 남짓 치고 오르면 산길은 왼편(이정표 : 칠성대 0.4Km, 운장대 1.0Km, 구봉산 9.2Km/ 독자동 1.8Km, 동상휴게소 1.8Km)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이곳에서 오성대로 가려면 연석산 방향인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이정표에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탓에 그냥 통과하는 우()를 범해 버렸다. 하긴 오성대를 들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성대에 은거했었다는 송익필, 중상모략의 아이콘(icon)으로 알려진 그의 흔적은 차라리 안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오성대 갈림길에서 다시 한 번 거친 오르막길을 20분 정도 치고 오르면 능선안부(이정표 : 운장대 0.6Km, 운장산휴양림 12.5Km, 구봉산 8.8Km/ 정수암 3.1Km/ 동상휴게소 2.2Km, 독자동 2.2Km, 내처사동 4.4Km)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 사거리(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서봉 뒤에서 연석산(2.2Km)으로 가는 길이 연결된다.)에서 우측에 보이는 바위봉우리가 바로 서봉(1,122m)이다. 구봉 송익필이 이곳에서 매일 임금에게 문안을 올렸다고 해서 독제봉(獨帝峰)이라고도 불리는 서봉은 정상을 이룬 세 개의 봉 가운데 풍광(風光)이 가장 빼어나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20분이 지났다.

 

 

 

 

 

 

거대한 바위봉우리인 서봉에 올라서면, 맨 꼭대기에 세워진 정상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정상석에 서봉이 아니라 칠성대라고 적혀있다. 2007년에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운장산(서봉)’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최근에 봉우리 고유의 이름을 되찾아주었나 보다.

 

 

 

 

운장산(雲長山)하면 성리학자 송익필(宋翼弼)을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송익필의 호()는 구봉인데 오성대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매일 아침 서봉에 올라 임금 계신 쪽을 향하여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운장산의 서봉을 독제봉(獨帝峰)이라 부르기도 한다또한 운장산이라는 이름도 그의 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천반산에는 그의 정적(政敵)이었던 정여립(鄭汝立)의 일화(逸話)와 얽힌 전설(傳說)이 전해진다. 전주출신인 정여립이 역모(逆謀)로 몰려 자살한 곳도 천반산 부근에 있는 죽도(竹島)이다. 호남인의 배척을 몰고 온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 선조 22)와 관련된 두 인물이 지근거리에 있었단 얘기다.

 

 

 

서봉 정상에 서면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북에는 금남정맥의 대둔산, 그리고 동으로는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白頭大幹)과 그 안쪽의 고산준령(高山峻嶺) 들이 가슴 벅차게 펼쳐진다. 물론 마이산이 두 개의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도 보인다. 그리고 서쪽의 올망졸망한 산군(山群)들 너머로는 호남평야까지도 조망이 되는 것이다.

 

 

 

서봉에서 운장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바윗길로 시작된다. 바윗길이 가파르면서도 긴 탓에 내려서기가 제법 까다롭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쇠파이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바윗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서 안부에 이른 다음, 별 특징이 없는 상여바위를 지나면 이번에는 부드러운 흙길이 나타난다. 흙길이 끝나면 책을 쌓아 놓은 듯한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데, 이 바위를 돌아 위로 오르면 운장잔 정상이다. 서봉에서 20분이 걸렸다. 아래 사진은 서봉에서 운장대로 가는 바윗길이다. 건너편에 보이는 산봉우리가 운장산 정상이고 그 오른편에 보이는 것이 동봉이다.

 

 

운장대 가는 길에 바라본 서봉 방향 능선, 오른편에 보이는 바위가 어쩌면 상여바위일 것이다.

운장대 가는 길에 바라본 서봉

 

 

 

흙과 바위가 섞인 10평 남짓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운장산 정상(1,126m)은 운장대, 혹은 동봉과 서봉의 중간에 있다고 해서 중봉이라고도 불린다. ‘이동통신 중계탑이 세워져 있는 정상에 오르면, ‘운장대라고 쓰인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진안11 2003), 그리고 이정표(상장봉 0.6Km, 내처사동 3.4Km, 구봉산 8.3Km/ 칠성대 0.6Km, 동상휴게소 2.8Km)가 눈에 들어온다. 운장대 정상에서의 조망(眺望)도 뛰어난 편이다. 지나온 서봉과 가야 할 동봉이 조망되고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까 서봉에서 보았던 조망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정상 근처에 성을 쌓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확인이 불가능 했다.

운장대를 내려서는 길도 역시 바윗길로 시작된다.

 

 

 

운장산에는 산죽(山竹 : 조릿대)이 많이 자라고 있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만나게 되는 산죽은 산행을 마칠 때까지 줄곧 등산객들과 함께 한다. 운장산의 특징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산죽들이 우거져 있는 것이다.

 

 

어른의 가슴 높이까지 차오르는 산죽(山竹) 숲길을 치고 오르면 또 다시 바위구간이 나타난다. 안전로프에 의지해서 바윗길을 치고 오르면 동봉 정상이다. 운장대에서 중봉까지는 25분 정도가 걸렸다.

 

 

 

 

동봉 정상(1,133m)은 정상표지석 하나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고, 이정표(구봉산 7.7Km, 상양명주차장 10.8Km/ 운장대 0.6Km)는 정상석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동봉의 정상석에도 역시 동봉대신에 삼장봉이라고 적혀 있다. 동봉 정상도 암봉으로 이루어진 탓에 시야(視野)가 잘 트이기는 앞서의 두 봉우리와 매 한가지이다. 그러나 서봉을 오를 때 내리던 눈발이 다시 내리려는지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아쉽게도 눈의 호사(豪奢)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동봉을 뒤로하고 하산길에 들어서면 금방 삼거리(이정표 : 내처사동 2.8Km/ 복두봉 5.0Km, 구봉산 7.6Km/ 칠성대 1.2Km, 운장대 0.7Km, 동상휴게소 3.5Km)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는 어느 방향을 선택해도 하산지점인 내처사동으로 갈 수가 있다. 그러나 왼편의 짧은 코스를 선택한다. 복두봉 방향의 오른편 능선을 따르다가 30분 거리에 있는 각우목재에서 내처사동으로 하산할 수도 있으나 눈이 쏟아질 것 같은 날씨에 춥기까지 하니 구태여 긴 코스를 선택할 이유가 없어서이다. 거기다 그 코스에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삼거리에서 내처사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밋밋한 산길이 이어진다. 운장산의 특징대로 짙게 우거진 참나무 숲 아래로 산길이 나있고, 길의 양편은 산죽들이 둘러싸고 있다. 때문에 딱 한번 곱게 물든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군락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조망(眺望)은 일절 허락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산길은 순한 흙길이 대부분이다. 가끔 가파른 구간도 나오고 바위구간도 나타나지만 어김없이 계단이나, 로프 등 안전시설을 만들어 놓았으므로 별 어려움 없이 내려설 수 있다.

 

 

 

 

 

산행날머리는 내처사동 주차장

삼거리를 출발해서 1시간 남짓 내려오면 산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이정표 : 내처사동 0.6Km/ 삼장봉 2.1Km, 구봉산 9.6Km, 동상휴게소 5.5Km) 능선을 벗어난다. 밋밋한 경사의 산길은 울창한 낙엽송 군락지를 지난 다음 골짜기로 내려선다. 골짜기(이정표 : 내처사동 0.2Km/ 삼장봉 2.5Km, 운장대 3.1Km)에서 내처사동 주차장까지는 금방이다 동봉에서 주차장까지는 1시간15분이 걸렸다.

 

 

 

 

 

 

 

주차장으로 가다보면 길가의 감나무에 붉게 물든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감은 운장산이 갖고 있는 특징(特徵) 중의 하나이다. 이곳의 감은 씨가 없고 맛이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10년쯤 전에 진안군수님의 초청으로 이곳 운장산을 찾은 일이 있었다. 당시 군수님의 말로는 이곳의 감나무는 이 지역에 존재(存在)할 때에만 그 의의(意義)가 있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이곳의 감나무를 다른 지역에 옮겨 심을 경우에는 다시 씨가 생겨버린다는 얘기이다. 당시 또 하나의 특산물(特産物)이라며 흑돼지를 통째로 잡아 대접을 해주셨는데 그 맛 또한 일품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내처사동 주차장에는 좌판(坐板)을 늘어놓고 감식초를 팔고 있었다.

 

명도봉(明道峰 , 863m)

 

산행일 : ‘13. 7. 21()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주천면

산행코스 : 운일암반일암관리사무소무지개다리능선갈림길명도봉전망대너덜지대살롬수양관입구칠은교팔각정협곡관리사무소(산행시간 : 3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명덕봉은 산 자체보다는 산이 만들어 놓은 **‘운일암반일암(雲日巖半日巖)’이라는 협곡(峽谷)으로 인해 외부에 알려진 산이다. 협곡을 구경하려고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왕에 온 김에 명도봉까지 올랐다가 돌아간다. 힘들게 낳은 자식이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일단 명도봉을 올라보면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져버린다. 스릴(thrill) 넘치는 암릉과 정상에서의 뛰어난 조망(眺望) 등은, 꼭 운일암반일암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올라봐야 할 산세(山勢)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산행시간이 짧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 운일암반일암(雲日巖半日巖), 명도봉과 명덕봉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협곡(峽谷)과 함께 이어지는 55번 지방도는 옛날 전라감영인 전주와 용담현을 오가는 지름길이었다. 이 길과 나란히 달리는 계곡이 깎아지른 절벽에 하늘과 돌 그리고 나무만 있을 뿐, 오가는 것이라곤 구름()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운일암(雲日巖), 그리고 계곡이 깊어 반나절(半日)밖에 햇빛을 볼 수 없다고 해서 반일암(半日巖)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호사가(好事家)들은 또 다른 설()도 들먹인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수십 길 아래 깎아지른 절벽 위를 가자니 너무 겁이 나 울면서 기어갔다 하여 운일암, 또는 공물을 지고 가던 관리가 이 길이 어찌나 험했던지 불과 얼마가지 못하고 해가 떨어진다 하여 '떨어질 운()' 자를 써 운일암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그러나 앞의 설에 공감이 더 가는 이유는 왜일까. 어쩌면 호사가들이 주장하는 설에는 반일암에 대한 내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운일암반일암 관리사무소 앞 주차장

대전-통영간고속도로 금산 I.C를 빠져나와 금산읍을 통과한 다음 13번 국도(國道/ 장수읍 방향)를 타고 용담호() 방향으로 들어가다 봉황천() 위로 난 음대교()를 건너기 바로 직전 용수목삼거리(금산군 남일면 신천리 : 용수목휴게소 참조)에서 우회전하여 55번 지방도를 타면 얼마 안 있어 주천면소재지(所在地/ 주양리)에 이르게 된다. 55번 지방도는 주천면소재지를 지나서 동상면(완주군)으로 연결되는데, 가는 도중에 운일암반일암 협곡(峽谷)을 지나게 된다. 협곡의 초입에 위치한 운일암반일암관리사무소(주천면 주양리)가 명도봉 산행의 들머리이다.

 

 

 

 

 

산행은 전주산장(식당)의 뒤편에 있는 무지개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전주산장은 운일암반일암 관리사무소에서 조금만 더 계곡 상류(동상면 방면) 쪽으로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주차장을 출발할 때 관리소 건물 뒤편에 바라보이는 산봉우리가 바로 명도봉이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면 곧이어 오른편 산비탈로 오르는 철계단이 보인다. 등산로와 산책로가 나뉘는 갈림길(이정표 : 등산로 입구. 명도봉 1.4Km. 산책로 입구, 칠은교 1.0Km)이다.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50m쯤 더 진행하면 오른편으로 오솔길이 열린다. 들머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는 않으나. 첫 번째로 열리는 오솔길이라는데 유의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솔길 주변은 온통 산죽(山竹)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죽은 크기가 어른의 가슴께나 차기 때문에. 울창하게 우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경관을 보는 데는 지장을 주지 않는다. 산죽길이 끝나면 너덜지대가 나타나는데 오르기가 여간 사납지 않다. 바닥에 깔린 돌들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데다가, 심지어는 밟을 때마다 움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근처 바위들이 잔뜩 이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을 보면, 햇빛 한 점 스며들기 힘들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거대한 암벽이 앞을 가로막으면서 너덜길은 드디어 끝을 맺는다. 산길은 절벽을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더니 이번에는 왼편으로 거의 180도로 방향을 틀고 있다. 이 모든 게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벼랑 탓이다. 아까 산행을 시작할 때 바라보이던 암릉이 투정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다. 산길이 비록 가파른 경사(傾斜)에다 거칠기까지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길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만일 길까지 희미했더라면 낭패를 면치 못했을 정도로 힘든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바위벼랑 아래를 따라 이어지는 산길은 거칠기 그지없다. 안전시설물이나 길가의 나뭇가지 등 뭔가의 도움 없이는 결코 오르내릴 수가 없을 정도로 힘든 구간이 반복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돌과 나무뿌리 등이 미끄럽기까지 해서 한 발자국 내딛기도 어려울 정도인 것이다. 거기다 산죽과 다래넝쿨 등이 마구 뒤엉켜 있어서 헤치고 나가는 것도 여간 고역(苦役)이 아니다.

 

 

 

바위벼랑을 피해 이리저리 꿈틀대던 산길은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수직(垂直)으로 날카롭게 선 거대한 바위절벽아래를 지나게 만든다. 바위절벽은 여러 곳을 움푹하게 파 놓았다. 10여명 이상이 충분하게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널따란 게 이방인(異邦人)을 위한 산신령의 배려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 동혈(洞穴)은 천장에서 제법 많은 양의 물방울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지니고 간 물에 여유가 있지만 두 손으로 받아 마셔본다. 암반수(巖盤水)의 맛을 음미해 보기 위해서이다. 내 기대를 무너뜨리기 아쉬웠던지 물맛은 시원하면서도 달았다.  

 

 

 

바위절벽 지대를 통과한 산길은 짧게 아래로 내려섰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다시 오르막길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경사(傾斜)가 심하게 가팔라진다. 누군가는 이런 길을 보고 코에서 흙냄새가 날 정도라고 했다. 그만큼 코가 땅에 가깝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오르고 있는 길은 너덜길, 흙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이 뒤따르는 것은 불행임이 분명하다. 너덜길이 미끄럽기 때문에 위로 오르는데 힘이 배나 더 들기 때문이다. 너덜길에는 쇠사슬을 매어 놓았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위험한 곳에서는 어김없이 쇠사슬을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오늘 같이 땀을 많이 흘리는 날에는 쇠사슬을 잡다가는 자칫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가 있다. 땀이 묻은 손으로 쇠사슬을 잡을 경우에는 물기로 인해 미끄러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행정당국에서는 이런 점을 유의해서 안전시설을 설치해주시길 바래본다. 사실 경사(傾斜)가 심한 구간에서는 땀에 젖지 않았을지라도 쇠사슬을 붙잡고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너덜길이 끝나면 드디어 주능선삼거리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가까이 지났다. 산행을 시작한 전주산장까지의 거리가 0.9Km이니 예상외로 시간이 많이 걸린 샘이다. 그만큼 힘든 구간이었음을 반증(反證)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명도봉 0.6km/ 주차장 1km/ 전주산장 0.9km)에 주차장이 표기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운일암반일암관리사무소 주차장보다 조금 아래쪽에 위치한 널따란 주차장을 말하는 모양이다. 비록 전주산장보다 100m 정도 더 먼 거리이지만, 들머리를 주차장으로 잡는 것이 보다 더 쉬웠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안부삼거리에서 명도봉으로 가려면 진행방향의 주능선을 피해 왼편으로 우회(迂廻)해야 한다. 주능선이 거대한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사람이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윗길은 짧게 아래로 내려서더니 이번에는 경사(傾斜)가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비록 흙길이지만 낙엽(落葉)이 수북하게 쌓여있어서 오르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

 

 

 

 

비탈길을 올라서면 또 다시 암릉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회(迂廻)를 시키지 않고 바위벼랑을 그냥 기어오르라고 한다. 초보 등산객들이 가장 애를 먹는 구간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위 앞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바위에 매달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아낙네들이 그 원인이다. 바위벼랑에는 굵직한 쇠사슬이 매달려있다. 그리나 튼튼한 쇠사슬 대신에 다들 옆에 보이는 가냘픈 로프에 매달려 벼랑을 오르고 있다. 땀에 젖은 손으로 쇠사슬을 잡을 경우 손이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바위구간이 끝나서도 가파른 오르막길은 계속된다. 5분 정도 오르니 안부에서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갈라진다. 이정표가 없어서 어디서 올라오는 길인지 알 수 없지만 오늘 들머리로 삼았던 무지개다리에서 그리 멀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 근처에 용담호()와 건너편 명덕봉이 잘 조망(眺望)되는 전망대가 있다고 하는데, 더위에 지쳐버린 탓인지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안부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더 오르면 드디어 명도봉 정상이다. 비좁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작은 정상표지석 하나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다.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조망(眺望) 또한 트이지 않는다. 정상이 비좁아서인지 이정표(칠은이골 1.3Km/ 복두봉 5.5Km/ 주차장 1.6Km)와 산행안내판은 정상을 조금 비켜난 곳에 세워 놓았다.

 

 

 

 

명도봉 정상은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시야(視野)가 트이지 않는다. 만일 탁 트인 조망(眺望)을 즐기고 싶다면 바로 아래에 있는 경주 이씨(慶州 李氏) ()로 내려가면 된다. 묘 앞에 서면 구봉산과 복두봉, 그리고 운장산 등 1000m급 고산준령(高山峻嶺)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구봉산의 암릉들은 상어이빨처럼 날카롭게 돌기하고 있고, 구봉산과 운장산 사이에 뽈록하게 돌출된 복두봉은 어느 분의 말마따나 여성의 젖꼭지를 쏙 빼다 박았다. 행여 배라도 고플 경우에는 무덤으로 내려가는 게 좋다. 명도봉 정상에는 여러 사람이 둘러앉을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분(묘지에 잠들고 계신 분)은 일 년 내내 배가 고프지 않겠네요.’ 점심을 먹으며 너스레를 떨고 있는 어느 아낙네의 말에 나도 몰래 고개가 끄떡여진다. 하긴 이곳에 장지(葬地)를 만드느라 고생했을 자손(子孫)들을 생각해서라도 그 정도의 발복(發福)은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칠은교 쪽으로 하산을 시작하면 비록 길지는 않지만 능선을 따르게 된다. 능선은 왼편이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탓에 간간히 시야(視野)가 열린다. 그러다가 맞닥뜨리게 되는 전망바위에 올라서면 아까 묘()에서 보았던 조망이 또 다시 펼쳐진다. 진안 일대의 웬만한 봉우리들이 죄다 확인될 정도로 조망(眺望)이 환상적이다.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구봉산과 복두봉, 그리고 운장산은 동봉과 주봉, 서봉이 일렬로 서있다.

 

 

 

 

 

 

전망바위에서 칠은교 방향으로 내려서는 하산길은 한마디로 고난(苦難)의 길이다. 사납고도 드센 너덜길이 계속되는데, 힘들게 내려가는 사람들을 위로라도 하려는 양 산죽들이 길 양편에 길게 도열해 있다. 너덜길은 축축하고 음습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당연히 바닥에 깔린 돌들도 잔뜩 습기를 머금을 수밖에 없고, 그런 악조건을 헤쳐 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한마디로 말해 최악의 조건인 것이다. 다행이 바람이라도 한 점 불어주면 좋으련만 야속한 바람은 흉내조차 내주지 않는다.

 

 

 

 

 

3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에 산악회 리본들이 더 많이 매달려 있지만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너덜길이 계속되는 왼편보다는 오른편에 보이는 길이 한결 나아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른편 길도 부담스럽기는 매 한가지였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 할 정도로 울창한 숲길을 걸으며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거대한 다래넝쿨에 감탄하다 보면 어느덧 도로(살롬수양관 입구)에 내려서게 된다. 정상을 출발한 지 50분 정도가 지났다. ‘! 타잔이 타고 다녀도 되겠다.’ 앞서가고 있는 부산 아지매가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넝쿨이 무슨 넝쿨인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봄내 향긋한 다래순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모르는 아낙네가 분명하다.

 

 

 

 

 

도로에 내려서서 아스팔트도로를 따라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10분이 채 안되어서 칠은교()에 이르게 된다. 칠은교는 주자천(朱子川)을 가로지르는 다리이다. 주자천이라는 이름은 고려(高麗) 때 주자의 종손인 주찬이 다녀갔다 하여 명명됐다고 전해온다. 지금도 인근 주천사에서는 주찬 선생을 추모하는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칠은교()를 건너면 55번 지방도이다. 이곳에서 왼편은 동상면(완주군)으로 넘어가는 길이니 관리사무소로 가려면 오른편 주천면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길은 운일암반일암(雲日巖半日巖) 협곡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양편이 기암절벽(奇巖絶壁)으로 이루어진 협곡(峽谷)의 왼편으로 도로가 나 있는 것이다. 운일암반일암은 북쪽의 명덕봉(해발 846m)과 남쪽의 명도봉(해발 863m)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기나긴 협곡이다. 이 계곡을 흐르는 물(주자천)은 국내에서 다섯 번째로 크다는 용담호()를 거쳐 금강 상류로 이어진다.

 

 

 

 

계곡의 백미(白眉)는 누가 뭐래도 협곡 옆의 자그마한 암봉 위에 새워놓은 도덕정이라는 정자(亭子)이다. 암봉 위에 오롯이 올라앉은 정자의 자태만으로도 멋진 풍광(風光)을 빚어내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것은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팔각정 주변에는 크고 작은 기암과 절벽이 저마다 다른 모습을 자랑하고 있고, 계류를 딛고 일어선 절벽에는 풍상을 이긴 소나무들이 절벽과 어우러지며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山水畵)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깎아지른 기암절벽 아래를 옥수(玉水)가 휘감아 돌면서 곳곳에 작은 폭포(瀑布)와 소()를 연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다. 대자연이 만들어 낸 절경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운일암반일암관리사무소 앞 주차장(원점회귀)

팔각정에서 내려가다 오른편으로 잠깐 고개를 돌리면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깎아지른 절벽(絶壁)이 아찔하게 다가온다.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거대한 바위 하나가 걸터앉아 있다. 바로 대불바위이다. 대불바위에는 쌍고도덕 대명일월(雙高道德 大明日月)’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하지만, 내 시력(視力)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조선(朝鮮) 후기의 학자 김중정(1602~1700)이 새겼다고 하는데 그는 주천 산간오지(山間奧地)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낙향의 한을 시와 거문고를 통해 달랬고, 후학(後學)들에게는 충효와 근검정신을 일깨운 인물이라고 한다. 대불바위를 지나 조금만 더 걸어내려오면 산행을 시작했던 운일암반일암관리사무소이다. 살롬수양관 앞에서 관리사무소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린다. 산행을 끝내고 주차장으로 돌아오자마자 근처 냇물로 뛰어들고 본다. 물론 옷을 입은 채다. 무더위에 지친 몸은 옷을 벗을 시간조차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커다란 기암(奇巖)들 사이를 휘감으며 흐르는 물은 투명할 정도로 맑음에도 불구하고 차지가 않다. 의외이지만 땀에 절은 몸을 씻기에는 냉천수(冷泉水)보다 더 안성맞춤이 아닐까 싶다.

 

                                                     

 

바래봉(1,165m)

 

산행일 : ‘13. 5. 12(일)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운봉면과 산내면의 경계

산행코스 : 산덕마을→임도→능선→1123봉→철쭉군락지→팔랑치→바래봉 삼거리⟷바래봉→임도→운지암→용산마을 철쭉축제장(산행시간 : 여유로운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고원산악회

 

특징 : 원래 발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바래봉은 백두대간(白頭大幹)에 있는 고리봉(1,304.8m)에서 분기(分岐)한 지맥(支脈)상의 한 봉우리로서 세걸산(1,220m)과 덕두산(1,152m)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전형적인 흙산으로 그 생긴 모양이 흡사 승려들이 밥그릇으로 사용하는 바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바래봉은 원래 숲이 울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에 추진된 한국-호주간 면양시범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에 면양목장을 조성하면서, 초식동물인 면양(綿羊)들이 독성이 있는 철쭉만 남기고 잡목(雜木)과 풀을 모두 먹어 버린 탓에 자연스럽게 철쭉 군락지(群落地)가 되었다는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철쭉군락지라는 입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철쭉이 만개하는 5월이면 철쭉꽃보다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산행들머리는 산곡마을

88고속도로 지리산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 남원방면으로 달리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게 운봉읍이다. 운봉읍사무소 앞에서 좌회전하여 바래봉길을 따라 짧게 들어가다가, 운봉천(川)을 가로지르는 통천교(橋)를 50m쯤 지나서 오른편에 보이는 운봉남길을 따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산곡마을(운봉읍 산곡리)’에 이르게 된다. 마을 앞 도로변에 화장실을 갖춘 널찍한 공터가 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산곡마을의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마을 안길과 농로(農路)를 이어가다보면 길은 산자락 아래(이정표 : 용산마을 1.8Km/ 산덕마을 0.4Km)에 이르면서 임도(林道)로 바뀐다. 임도를 따라 5분 정도, 그러니까 산덕마을을 출발한지 15분 정도가 지나면 시멘트로 포장된 제대로 된 임도를 만나게 된다(이정표 : 바래봉/ 용산마을 1.8Km/ 산곡마을 0.7Km). 이곳에서 왼편으로 갈 경우에는 용산마을이 나오므로, 바래봉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는 차량이 다녀도 될 정도로 넓다. 도로변에 주막(酒幕)까지 열어놓은 것을 보면 산덕마을에서 팔랑치로 올라가는 코스도 찾는 이들이 제법 많은 모양이다. 주막에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철쭉축제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더덕과 두릅, 그리고 취나물 등 산나물을 이용한 각종 안주와 술을 팔고 있는데, 산촌의 맛을 느껴보려면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산지점인 ‘용산리 철쭉축제장(祝祭場)’은 음식점의 숫자는 이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나 산골 특유의 음식은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전국의 어느 축제장에 가더라도 그 지역의 독특한 음식은 찾아보기 힘든 게 요즘의 현실이다. 축제장마다 빼놓지 않고 찾아다니는 음식점들이 따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삼거리에서 임도를 따라 10분 정도를 걸으면 차량(車輛)의 진입을 막고 있는 차단기(遮斷機)가 설치되어 있는 지점(이정표 : 부운치 3.1Km)에 이르게 된다. 등산로는 이곳에서 왼편에 보이는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임도를 따라 계속 진행할 경우에는 부운치에 이르게 된다.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처음에는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완만(緩慢)한 산길이 이어진다. 산길 주위에는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쳐오르고 있다. 아마 경제림(經濟林)으로 조성된 모양이다. 보이는 나무마다 새봄의 기운을 만끽이라도 하려는 듯이 연초록 푸름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걷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도 티 한 점 없는 동심(童心)의 세계로 돌아간 듯 밝고 또 밝다.

 

 

산길이 계곡과 헤어지고 능선에 붙으면서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오늘 산행에서 유일하게 힘든 구간이다. 산길 주변은 굵은 소나무들이 군락(群落)을 이루는가 싶더니, 어느 틈엔가 참나무들 천지로 바뀌어버린다. 그러다가도 어느 때는 좌우(左右)로 사이좋게 늘어서기도 한다. 산길의 색깔도 나무들의 변화에 따라 연초록과 진초록이 번갈아 나타나고 있다.

 

 

 

무릎께까지 차오르는 산죽(山竹)군락을 지나면 앞이 뻥 뚫리면서 마치 목장의 푸른 초지(草地)를 연상시키는 민둥산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팔랑치 옆 봉우리인 1123봉이다. 산덕마을을 출발한지 1시간20분이 지났다.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있는 바래봉 철쭉은 이곳 1123봉에서부터 팔랑치까지 구간에서 절정을 이룬다. 산덕마을에서 올라선 곳은 1123봉의 부운치방향 사면(斜面), 비록 군락을 이루고는 있지 않지만 철쭉들이 곳곳에 무리를 짓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나 아쉽게도 철쭉들은 아직까지도 꽃봉오리를 열고 있지 않은 채로다.

 

 

 

1123봉에서 바라본 정령치방향 능선, 수많은 사람들이 바래봉을 향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다. 다들 활짝 핀 철쭉들을 상상하며 한창 달콤한 상상에 젖어 있을 것이다. 저 사람들이 이곳에서 도착했을 때 과연 어떤 표정들을 지을지가 궁금하다.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르겠지만 이 정도에라도 만족 해 하는 표정을 짓는 게 가장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속을 끓인다고 해서 갑자기 꽃이 피어주는 것도 아니니, 그래봐야 마음에 상처를 입는 사람만 손해일 테니까 말이다.

 

 

1123봉에서 팔랑치까지의 구간은 나무 한그루 눈에 띄지 않는 말 그대로 민둥산이다. 나무라고는 오로지 철쭉이 전부인 셈이다. 1970년대에 조성된 면양목장(綿羊牧場)에서 기르던 양들이 잡목(雜木)과 풀은 모두 먹어버리고 독성(毒性)이 있는 철쭉만 남겨 놓은 탓에 이처럼 군락지가 생성됐다고 한다.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자란 면양들이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보은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인과응보(因果應報)는 꼭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사자성어(四字成語)는 아닌 것이다. 바래봉 철쭉은 철쭉으로 소문난 다른 산들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다른 산들의 철쭉은 대부분 키 높이가 제멋대로인 나무에 듬성듬성 꽃이 달리고, 그 꽃이 연분홍 색깔을 띠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바래봉의 철쭉은 다르다. 나무의 높이가 어른의 허리 정도로 일정하고, 그 생김새가 빽빽하게 무리를 지으면서도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가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리고 꽃들도 다른 산들에 더 붉은 게 특징이다.

 

 

 

1123봉에서 시작된 철쭉군락지는 산의 사면(斜面)을 온통 꽃밭으로 만들며 팔랑치 안부삼거리까지 계속된다. 산길의 양편으로 어른 키만큼 자란 철쭉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는 그 산길에다 나무테크로 계단을 만들어 철쭉군락의 훼손(毁損)을 막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이곳 팔랑치는 지대가 높고 사계가 뚜렷하기 때문에 다른 철쭉 명산(名山)들에 비해 꽃의 색깔이 더 붉고 진하다고 한다. 만일 일주일만 늦게 이곳에 왔었더라면 붉게 타오르는 꽃불에 내 몸을 던져보았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다.

 

 

 

 

 

 

아쉬운 마음을 가득 안고 나무계단을 내려오면 안부삼거리(이정표 : 바래봉 1.5Km/ 팔랑마을 2.0Km/ 부운치 1.5Km)이다. 나무계단이 설치된 이 구간을 사람들은 ‘자연이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傑作)’ 또는 ‘천상(天上)의 화원(花園)’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곳의 철쭉을 보며 ‘오매! 불 나부렀네!’라는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만큼 이곳의 철쭉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철쭉들은 아직까지도 꽃망울을 열지 않고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팔랑치 부근에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아니 팔랑치 어림뿐만 아니다. 사람이 서있을 만한 공간만 보이면 어김없이 사람들이 빽빽이 차 있는 것이다. 어느 누가 ‘사람의 숫자가 꽃의 숫자보다 더 많다’고 적었던 글이 생각난다. 어느새 나도 그의 글에 공감(共感)하고 만다.

 

 

 

팔랑치삼거리에서 바래봉 아래 샘터까지는 능선의 위로 난 너른 임도를 걷게 된다. 능선은 한마디로 말해서 유순하다. 소의 등허리처럼 부드러운 산길이 능선을 따라 바래봉까지 이어진다. 발치 아래 왼편에는 운봉읍의 너른 들녘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지리산의 장쾌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감동적인 풍경(風景)은 철쭉으로 못다 채운 사람들의 서운한 마음을 충분히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이런 맛에 사람들은 또 다시 산을 찾게 되는 모양이다.

 

 

 

저 멀리 있던 바래봉이 가까워지면서 능선 주변에는 구상나무 군락지가 점점 그 면적을 넓혀간다. 가로세로 줄이 곧은 것을 보면 누군가가 일부러 조림(造林)한 모양이다. 구상나무는 얼핏 보면 주목나무처럼 생겼다. 전나무뿐만이 아니라 전나무나 가문비나무와도 비슷하기 때문에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다. 한껏 숨을 들이켠다. 상큼하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하다.

 

 

 

팔랑치에서 능선을 따라 대략 1Km, 천천히 30분 남짓 걸으면 바래봉삼거리(이정표 : 바래봉 0.6Km/ 운봉 4.5Km/ 정령치 3.8Km)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왼쪽은 용산마을로 내려가는 임도이고, 바래봉 정상은 오른편 길로 진행해야 한다. 이곳 삼거리에서 용산마을까지 이어지는 4Km가 넘는 임도는 면양의 방목(放牧)을 위해서 낸 길이라고 한다. 등산객들은 이 임도를 따라 내려가는 게 보통이다. 중간에 운지사로 곧장 내려가는 지름길이 있으나, 임도 주변의 꽃무리를 구경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임도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바래봉삼거리에서 바래봉으로 가다보면 오른편에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 숲이 보인다. 연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낙엽송 아래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국적(異國的)인 풍경(風景)을 자아내고 있다. 녹음 짙은 전나무 아래 마치 누군가가 공들여 가꾼 듯이 잘 자란 초지(草地)가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바래봉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샘터가 있다. 물맛이 좋다고 알려진 탓인지 샘터에는 물을 마시려는 사람들이 늘어서서 길게 줄을 만들고 있다. 비록 줄은 길지만 물맛을 보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제법 많은 양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시원하고 달콤한 물맛은 소문대로 뛰어났다.

 

 

 

 

샘터를 지나면 곧이어 산길은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면서(이정표 : 바래봉 250m/ 정령치 9.15Km, 운봉 4.9Km) 전면에 바래봉이 클로즈업(close-up)된다. 바래봉은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둥그스름하고 순하게 생긴 봉우리가 영락(零落)없이 밥그릇을 뒤엎어 놓은 형상이다. 바래봉의 정상 주위는 나무 한그루가 없는 순수한 초지(草地)로 되어 있다.

 

 

 

살짝 가파르다고 느껴지는 오름길을 300m 쯤 오르면 드디어 바래봉 정상이다. 정상에는 정상석 대신에 정상표지목과 이정표(바래봉삼거리 0.6Km/ 월평마을 3.8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 반대편으로 곧장 나아가면 월평마을로 내려가게 되므로 철쭉축제 행사장으로 내려가려면 바래봉삼거리까지 다시 되돌아 내려가야 한다.

 

 

 

정상에 서면 일망무제(一望無題)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팔랑치에서 부운치, 그리고 세걸산과 고리봉을 잇는 서북 능선이 뚜렷하고, 가스로 인해 비록 희미하지만 노고단, 반야봉, 촛대봉, 멀리 지리산 주봉인 천황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을 50m쯤 남겨 놓은 지점에 조망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니 한번쯤 산과 비교해가며 짚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바래봉삼거리에서 운봉으로 방향을 틀면 먼저 박석(薄石)이 깔린 임도로 시작된다. 바닥에 깔린 돌은 구간마다 다양하게 바뀌어간다. 넓고 얇은 돌들이 이어지다가, 어느 땐 제법 멋을 낸 돌들이, 그리고 또 어떤 구간은 막돌을 바닥에 깔아 놓기도 했다. 임도는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지만 숲 그늘은 찾아볼 수가 없다. 양산(陽傘)을 쓰고 산을 오르는 여인들이 가끔 눈에 띄는 이유일 것이다. 고속도로 수준으로 널찍한 임도는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저들은 과연 오늘 산행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혹시 나처럼 아직 꽃망울을 열지도 않은 철쭉에 대한 실망감만 가득 안고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모두의 얼굴이 해맑은 것을 보면 나처럼 속 좁은 사람들은 없는가 보다.

 

 

 

 

길가에는 철쭉들이 곳곳에서 무리를 지으며 가로수 역할을 하지만 이곳도 역시 덜 피기는 매 한가지이다. 차라리 철쭉 무리에 섞여있는 조팝나무가 피워낸 꽃들이 더 화사하게 보이는 것은 철쭉에 대한 실망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가 아닌지 모르겠다. 내려오는 길에는 가끔 널따란 운봉들녘이 눈에 들어오는 전망대를 만나기도 한다.

 

 

 

 

 

 

돌길로 이어지던 임도가 그냥 맨땅으로 변하더니 얼마 안 있어 ‘황산대첩비 갈림길(이정표 : 황산대첩비 2.8Km/ 운지사 0.9Km/ 바래봉)’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길 아래에 펼쳐지는 광활한 철쭉평원(平原)이 내려다보인다. 아마 팔랑치에 있는 철쭉군락지보다 더 넓었으면 넓었지 결코 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곳의 철쭉은 제철을 넘겨버렸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꽃들은 이미 져버리고, 게으름쟁이들만 남아서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사르고 있다. 팔랑치의 철쭉들은 꽃망울을 열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이곳의 꽃들은 만개시기가 한참이나 지나버린 것이다. ‘꽃 산행’에서 만개(滿開)시기를 맞추기는 어렵다. 특히 주말에나 시간을 낼 수 있는 직장인들이라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나마 군데군데 남아있는 철쭉들에 위안을 삼으며 하산을 서두른다.

 

 

 

 

임도 아래에 펼쳐진 철쭉화원을 카메라에 담으며 10분 정도 걷다보면 음식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각종 안주와 술들을 파는 음식점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떠드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철쭉꽃의 만개시기를 맞추지 못한 아쉬움을 술로나마 달래고 있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임시 주막(酒幕)을 지나면 길은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산악회에서 주어진 시간에 여유가 있어 맞은편에 보이는 산길로 접어든다. 안쪽에 있다는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인 운지사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운지사는 한마디로 조그마한 절간이다. 대웅전과 종루 그리고 요사채가 전부인 조그마한 절이 요즘 불사(佛事)가 한창이다. 새로 짓는 대웅전과 종루에 변화를 주고 싶었는지 지붕 색깔이 밝은 구릿빛을 띠고 있다. 초파일을 일주일 앞에 둔 운지사는 연등(燃燈)들로 둘러싸여 있고, 절간 옆으로 흐르는 계곡은 진짜 속살은 들어내지 않는 채로 가녀린 물소리만 들려준다.

 

 

 

 

 

운지사에서 다시 되돌아 나와 축제장으로 향하면 오른편에 제단(祭壇)처럼 반듯하게 쌓아올린 돌무더기가 보인다. 주변 조망(眺望)이 트일 것 같아 위로 올라보니 내 예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철쭉평원이 빠짐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철쭉평원 아래에 보이는 건물은 아마 허브 밸리(herb valley) 아닌가 싶다. 남원시에서 이 부근에 허브를 주제로 테마파크(theme park)를 조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허브밸리에는 매발톱과 기린초 등 화초류 300여종과 라벤더 등 30여종의 허브를 식재(植栽)해 놓았다고 한다.

 

 

 

 

산행날머리는 바래봉철쭉 축제장

철쭉평원이 끝나면서 축제장(祝祭場)이 얼굴을 내민다. 축제장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허브를 주제로 한 체험 및 제품 판매지역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각종 토산품을 비롯한 각종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과 식당이 뒤섞인 먹거리촌이다. 음식점은 술잔을 나누며 산행을 마무리하고 있는 등산객들로 넘쳐나고 있다. 먹을 만한 음심이 있을까 해서 메뉴판을 살펴보며 걷지만 내가 바라는 메뉴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찾는 더덕이나 두릅 등 야생 산나물을 이용한 안주 대신에, 돼지고기 바비큐(barbecue)나 새우튀김 등 전국 어디에서나 흔하게 눈에 띄는 메뉴가 대부분인 것이다. 바래봉 정상에서 축제장까지는 생각보다는 시간이 많이(1시간30분) 걸린다. 5Km가 넘는 거리도 만만찮을뿐더러 철쭉구경에 한눈을 파는 시간이 쏠쏠하기 때문이다.

▼ 축제장 옆의 개울에 족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공간이 신선하게 보였다.

 

 

 

 

내장산((內藏山, 763,2m)

 

산행일 : ‘13. 2. 23(토)

소재지 : 전북 정읍시 내장동과 순창군 복흥면의 경계

산행코스 : 추령→유군치→장군봉→연자봉→신선봉→까치봉→금선계곡→내장사→집단시설지구 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40분)

함께한 산악회 : 뫼솔산악회

 

특징 : 월영봉(月影峰 : 1봉), 서래봉(西來峰 : 2봉), 불출봉(佛出峰 : 3봉), 망해봉(望海峰 : 4봉), 연지봉(蓮池峰 : 5봉), 까치봉(6봉), 신선봉(神仙峰 : 7봉), 연자봉(燕子峰 : 8봉, 일명 문필봉), 장군붕(將軍峰 : 9봉) 등 아홉 개 봉우리로 이루어진 호남 5대 명산(名山 : 지리산, 월출산, 내변산, 천관산, 내장산)중 하나이다. 산천(山川)이 붉게 물드는 가을 단풍철에 내장산이 보여주는 풍광(風光)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바위로 이루어진 7개 봉우리들 사이사이에 가득 찬 단풍나무들이 붉게 물드는 경관(景觀)은 한마디로 풍광명미(風光明媚)를 자랑한다. 그러나 여름날의 푸르름과 겨울날의 흰 눈으로 뒤덮인 산하(山河)도 결코 가을철 단풍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우니 놓치지 말고 찾아볼 일이다.

 

산행들머리는 정읍에서 순창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인 추령

호남고속도로 내장산 I.C에서 내려와 708번 지방도로를 따라 정읍방향으로 잠깐(5분도 채 안 걸림) 달리다가, 신정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신경교(橋)와 내장산터널을 지나 내장저수지에 이르게 된다. 이곳 내장저수지에서 49번 지방도로 옮겨 내장산 방향으로 들어가면 ‘내장산 집단시설지구(集團施設地區)’이다. 49번 도로는 집단시설지구를 왼편으로 우회(迂廻)한 후, 산사면(山斜面)을 절개하여 만든 구절양장(九折羊腸) 도로를 치고 올라 추령이라는 고갯마루에 이른다. 오늘 산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산행은 추령의 주차장 뒤편 철망(鐵網)의 끄트머리에 보이는 쪽문을 통과하면서 시작된다. 길은 그다지 가파른 편은 아니지만 힘들기는 매 한가지이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운동을 게을리 한 탓이리라. 산행을 시작하고 한 10분쯤 지나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길이 널찍하게 잘 닦여 있지만, 이곳에서는 오른편 능선으로 올라가는 것이 옳다. 왼편은 전북산림박물관에서 만들어 놓은 산책로(散策路)이기 때문이다.

 

 

 

 

왼편의 산책로를 따라가도 7분쯤 후에는 다시 능선으로 올라설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능선으로 가는 것보다 2~3분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이 차이점일 것이다. 산책로가 능선과 다시 만나는 지점은 뛰어난 전망대(展望臺)이다. 내장산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景觀)을 자랑한다는 서래봉 능선이 멋진 하늘금을 만들면서 창공을 가르고, 오른편에는 바위봉우리인 추령봉, 그리고 왼편에는 오늘 오르게 될 장군봉이 크게 클로즈 업(close up)되고 있다.

장군봉

 

 

 

이어지는 능선은 고저(高低)의 차이가 별로 없는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길가에는 키 작은 산죽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심심하다 싶으면 국립공원 표지판이 얼굴을 내민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30분 후에는 유군치(留軍峙)에 이르게 된다. 유군치(留軍峙)에 이르면 처음으로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설치한 시설물(施設物)들을 만나게 된다. 지명의 유래를 알려주는 해설판과 등산안내도, 그리고 이정표(장군봉 0.9Km/ 동구리 1.1Km)가 바로 그것이다. 안내판에는 ‘임진왜란 때 망군정(望軍亭)에 진을 치고 공격해온 왜군(倭軍)을 승군장(僧軍將) 희묵대사(希默大師)가 이곳으로 유인하여 대파한 사실이 있었다.’고 해서 유군치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표지판이 서 있다. 참고로 유군치는 사거리로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내장사, 이정표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왼편으로 내려가면 화양리에 이르게 된다.

 

 

 

 

 

유군치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장군봉 오름길이 시작된다. 올라야 할 고도차(高度差)는 약 250m 정도다. 통나무 계단 길과 산죽(山竹) 길, 그리고 암릉 길을 차례로 지나며 경사(傾斜)는 점점 가팔라진다. 유군치에서 30분 조금 못되게 가파른 오르막길과 싸우다보면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장군봉(將軍峰, 696m)에 올라서게 된다. 장군봉 역시 안내판과 이정표(연자봉 0.99Km/ 유군치 0.97Km)가 세워져 있다. 급경사(急傾斜)의 험준한 봉우리인 장군봉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승병대장 희묵대사(希默大師)가 이곳에서 승병(僧兵)을 이끌고 왜군과 싸웠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장군봉은 의외로 조망(眺望)이 좋지 않다. 그러나 너무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연자봉 방향으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만나게 되는 오른편 바위절벽이 장군봉의 조망을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절벽 위에서 바라본 내장산의 전경은 가히 일품이다. 내장산은 굵은 몸을 빙 둘러 거대한 성곽(城郭)처럼 보인다. 서래봉에서 시작해서 불출봉과 망해봉, 연지봉, 까치봉 ,신선봉 그리고 연자봉까지 이어지는 봉우리들이 어깨를 맞대고 우람한 산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 안이 움푹 파여 혹자들은 흡사 말발굽을 닮았다고 한다. 성곽 속의 계곡은 유난히도 포근하게 보인다. 저 안에 깃든 모든 생명들은 추운 겨울에도 잘 견디어 낼 것 같다.

 

 

장군봉을 출발하면 능선은 갑자기 고도(高度)를 뚝 떨어뜨린다. 내려가는 길이 음지(陰地)인지 아직도 눈이 덜 녹은 탓에 곳곳에서 빙판(氷板)을 만들고 있다.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다음에는 바윗길이 선을 보인다. 덕분에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남동쪽으로 펼쳐지는 순창벌판과 내장사지구가 잘 내려다보이는 암릉길에서는 다른 걱정 다 털어버리고 그저 조망만 즐기면 된다. 비록 암릉길이지만 쇠난간과 철계단으로 안전시설을 잘 갖추어 놓았기 때문이다.

 

 

 

 

산행을 하다보면 늘 보아오던 다른 산들과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다. 전국의 산들을 오르다 보면, 어디서나 소나무 숲을 만나게 된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소나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곳 내장산에서는 그 흔한 소나무 대신에, 눈에 띄는 나무들이 모두 활엽수(闊葉樹)뿐이다. 어느 통계에서 활엽수가 95%를 차지한다고 발표했을 정도이니 소나무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장산은 그 특이함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졌다. 산을 꽉 메우고 있는 활엽수들이 노란색이나 주황색 등 색감(色感)의 뛰어난 조화가, 아름다운 단풍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밀집한 지역의 크기, 여러 단풍나무과(科)의 수목(樹木)이 어울려 빚어내는 가을색의 현란함은 다른 지역 명산들이 결코 따라올 수 없다고 한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바윗길에서 짜릿한 쾌감을 즐기다보면 어느새 두 번째 봉우리인 연자봉(燕子峰, 675m) 위에 올라서게 된다. 연자봉은 산봉우리가 붓끝 같다고 하여 일명 문필봉(文筆峰)이라고도 불린다. 풍수지리상 서래봉 아래 위치한 백련암을 연소(燕巢, 제비의 보금자리)라 부르는데 이 봉우리와 백련암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 연자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장군봉에서 연자봉까지는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연자봉에 이르자 갑자기 사람들의 숫자가 불어난다. 단체로 왔는지 외국인(外國人)들까지 섞여서 가뜩이나 협소(狹小)한 봉우리가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아무래도 이 봉우리 아래에 설치된 케이블카 때문일 것이다. 걸어서 오르기 싫은 사람들이 내장사 앞의 우화정(羽化停) 지구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할 경우, 이곳으로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연자봉 이정표 : 신선봉 1.13Km/ 케이블카 0.7Km)

 

 

 

 

연자봉에서 신선봉으로 향하자마자 산길은 갑자기 고도(高度)를 뚝 떨어뜨린다. 긴 나무계단을 한차례 내려서면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길가는 역시 키 작은 산죽(山竹)들이 지키고 있다. 혹시라도 누군가 내장산에서 가장 흔하게 눈에 띄는 게 무엇인가 물어본다면, 난 망설이지 않고 참나무와 바위에다 산죽을 포함시킬 것이다. 그만큼 산죽은 산행 내내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완만(緩慢)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안부에 이르러 오른편에 내장사로 내려가는 갈림길(금선계곡)을 만들어 낸 후에, 다시 오르막길로 변한다(신선봉에서 0.5Km 지점). 오르막길은 이내 가파른 너덜길이 길게 이어진다. 너덜길은 길의 양편에 로프를 매어 놓았지만 오르기가 여간 사납지 않다. 보폭을 맞추기가 어려울 정도로 돌의 규모나 간격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다. 사나운 너덜길이 끝날 즈음 오른편에 거대한 암벽(巖壁)이 나타난다. 바로 내장사지구가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금선대이다. 이곳은 선인(仙人)들이 하늘나라에서 내려와 놀 때 선녀들이 시중을 들었던 곳이라고 한다.

 

 

 

금선대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신선봉(神仙峰, 763m)도 역시 헬기장을 겸하고 있다. 이곳도 안내판과 산행 안내지도 그리고 이정표(까치봉 1.44Km/ 대가 1.82Km/ 연자봉 1.1Km)가 세워져 있는 것은 다른 봉우리들과 마찬가지이나. 이곳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하나 더 있다. 아마도 신선봉이 내장산의 9개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것에 대한 예우가 아닌가 싶다. 정상에 서면 북쪽에 늘어선 서래봉과 망해봉. 연지봉, 까치봉 등의 봉우리 들이 잘 조망된다. 연자봉에서 신선봉까지는 대략 40분 정도 걸린다. 참고로 내장산탐방지원센터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해 연자봉에 오른 후 이곳으로 오거나, 순창군 복흥면 대가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 신선봉에 이르는 가장 짧은 등산로다.

 

 

 

까치봉으로 향하는 길도 역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안부로 떨어졌다가 다시 오름길로 변하고서도 산길은 한동안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산죽 길을 지나면 꽤 높은 바위절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밧줄을 이용해서 바위 위로 오르면 시원스럽게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방금 지나온 신선봉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어서 헬기장을 지나면 까치봉의 전위봉인 530봉에서 길은 두 갈래(까치봉 0.3Km/ 소등근재 2.0Km/ 신선봉 1.2Km)로 나뉜다. 이곳에서 까치봉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왼편 길은 소둥근재로 내려가는 호남정맥 마룻금이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보면 지나온 길이 아득하고, 그 길을 걸어온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상당히 긴 코스를 돌아오는 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초조감, 긴장감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이다. 사실 산행이라는 것은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산행을 시작할 때 느꼈던 긴장감은 곧 육체적 고통으로 이어지고, 그 고통과 함께 완주(完走)할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이 찾아오지만, 어느새 산행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전위봉에서 까치봉으로 가는 길은 암릉길이다. 암릉길의 특징대로 스릴이 있고 조망(眺望) 또한 뛰어나다. 산길은 한차례 안부로 깊게 떨어졌다가. 다시 가파르게 암릉길을 오른 후에 까치봉(717m)의 바위봉우리 위에 올려놓는다. 정상에는 산행안내도가 이정표를 대신하고 있는데, 옆에는 ‘내장산 서쪽 중심부에 2개의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봉우리의 형상이 까치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까치봉이라 한다. 내장산 제2봉으로 백암산을 연결하는 주봉이며, 내장 9봉이 까지봉을 중심으로 대체로 동쪽을 향해 이어지면서 말굽형을 이루고 있다.’고 적혀있는 해설판이 보인다. 신선봉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50분 정도가 걸렸다.

 

 

 

 

 

 

까치봉에서 금선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한마디로 가파르다. 그 가파름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보려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고심(苦心)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여느 가파른 내리막길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돌계단이나 통나무계단이 계속되지만, 계단만으로는 경사(傾斜)를 죽일 수 없었던지 이리저리 갈지(之)자를 만들거나 심지어는 둥그렇게 원을 그리면서 고도(高度)를 낮추고 있는 것이다.

 

 

 

 

산길의 주변에는 오래 묵은 참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때문에 일절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다. 가뜩이나 힘든 내리막길에다 눈요깃거리까지 없다보니 하산길이 여간 지루하지가 않다. 아무래도 내장산의 산신령께서도 이점이 못내 미안했던 모양이다. 잠깐이나마 왼편의 숲을 빼꼼히 열고서, 서래봉의 멋진 암릉을 선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조망을 즐겨본다. 주변의 참나무들이 가지마다 겨우살이들을 탐스럽게 매달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항암(抗癌)효과가 탁월하다고 해서 각광을 받고 있는 식물이다. 남쪽 산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은데 의외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30분 남짓 내려가면 금선계곡이다. 오른편에서 보이는 길은 내장산 최고봉인 신선봉에서 금선폭포(瀑布)를 거쳐 내려오는 길로서,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내장산에 **역사적(歷史的)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용굴’이 나온다.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용굴(龍窟)은 임진왜란 당시 태조 영정과 왕조실록(王朝實錄)을 1년간 보관한 곳으로 알려진 덕분에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 내장산(內藏山)은 산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先祖)들은 뛰어난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내장산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소중한 보물(寶物)이 사라질 뻔 했었으니까 말이다. 조선(朝鮮)은 전국에 4개의 사고(史庫 : 춘추관, 전주, 충주, 성주)를 두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국보 제151호)을 보관했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주를 제외한 나머지 사고의 실록들은 모두 소실(燒失)되었다고 한다.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들을 이곳 내장산(용굴)으로 옮겨 보관했던 덕분에 무사했던 것이다. 선조들은 내장산이 능히 보물을 품을 만한 산세(山勢)를 지녔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실록들을 이곳으로 옮겼을 것이다.

 

 

 

삼거리에서 계곡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오면 주막(酒幕)을 겸한 휴게소가 나온다. 주막에서 손수 담갔다는 동동주 몇 병이 평상에 진열되어 있고, 주막 안의 테이블에는 나그네 몇 명이 술잔을 나누고 있다. 술동이 속에서 익어가고 있는 동동주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 병 챙기고 난 후에야 다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내장사로 가는 길은 ‘겨울 숲’의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다. 키 큰 활엽수들 사이로 난 산길이 계곡물과 나란히 흐른다. 삭막한 지금보다는 ‘봄 숲’이나 ‘여름 숲’으로 만나고 싶은 숲이다. 주막을 출발해서 5분 남짓 걸으면 내장사의 뒷담이 보이고, 오른편에 케이블카의 상부 도착지인 전망대(展望臺)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이 부근은 **굴거리나무 군락지(群落地)이다.

**)내장산 굴거리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91호), 굴거리는 난대성 상록활엽 교목(喬木)으로, 가지가 굵고 잎이 가지 끝에 총총히 달리며, 높이는 5m까지 자란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분포하므로 한일난대구계(韓日暖帶區系)를 구분하는 표지종(標識種)이 된다고 한다. 내장산의 군락(群落)은 굴거리나무가 자생하는 북쪽 한계지역(北方限界線)이라는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참고로 한자어로는 교양목(交讓木)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새잎이 난 뒤에야 지난해의 잎이 떨어져 나간다는, 즉 자리를 물려주고 떠난다는 뜻이라고 한다. 정원수나 가로수로 많이 애용되고 있다.

 

 

 

 

개울을 건너 **내장사(內藏寺) 경내(境內)로 들어서면 뭔가 하나가 빠진 듯 허전한 생각이 든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전각(殿閣) 너머로 서래봉의 암릉이 알뜰하게 눈 들어오는데도 말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절 마당에 이르면 곧 이유를 알아차리게 된다. 사찰(寺刹)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인 대웅전(大雄殿) 자리가 허전한 것이다. 전각(殿閣)이 있어야할 자리를 온통 가림막으로 가려 놓았다. 지난해에 대웅전이 불에 탔다는 뉴스를 접했는데, 그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었는데, 막상 눈으로 직접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 내장사(內藏寺), 백제 무왕 37년(636)년에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영은사(靈隱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1539년(중종 34)에 내장산에서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나자, 중종은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절을 소각시켰다. 이때 내장산에는 내장사와 영은사라는 독립된 2개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1557년(명종) 희묵(希默)이 영은사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으나, 정유재란 때 전소(全燒)되었다. 이후 중창(重唱)과 중수(重修), 이전(移轉)과 개명(改名), 그리고 6.25동란으로 인한 소실(燒失) 및 중건(重建) 등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사건들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 관음전, 정혜루(定慧樓)등 다른 유명한 사찰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수많은 전각(殿閣)들을 보유하고 있으나, 지어진지 오래지 않아 역사적(歷史的) 가치는 없으며, 동종(銅鐘)과 부도(浮屠)만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곳 내장사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250m 길이의 도로는 가을이 제격이다. 100년 가까이 자란 108그루의 굵은 단풍나무 터널이 만들어내는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아름다움 때문에 ‘박대통령 고개’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이다. 옛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도로를 달려가는데, 갑자기 비행기 타는 기분이 들었나 보다. 그래서 뒤로 후진(後進)시킨 후, 다시 달려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의 끄트머리인지라 그렇게도 아름답다는 단풍을 마음속으로만 그려볼 수밖에 없다. 참고로 이곳 단풍나무는 100여 년 전 내장사 스님들이 깊은 골짜기에서 자라는 단풍나무를 캐다가 심었다고 한다. 그 수가 108그루라니 아마도 이 터널을 걷는 사람들 모두 백팔번뇌(百八煩惱)를 벗어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산행날머리는 내장사 제1주차장

내장사 일주문에서 매표소까지는 대략 3Km정도, 산행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걷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거리이다. 행여 가을철이라면 단풍이라는 구경거리라도 있겠지만, 지금같이 삭막한 계절에는 걷는 게 짜증스러운 여정일 수밖에 없다. 여독도 풀겸 길가의 벤치에 주저앉아 아까 주막에서 산 막걸리로 목을 축인다. 산행이 종료되는 제1주차장은 매표소에서도 1Km정도를 더 걸어 내려가야만 한다. 참고로 내장사에서 주차장까지 왕복 운행하는 셔틀버스는 단풍철에만 운행한다고 한다.

 

 

 

 

상두산(象頭山, 575.3m)

 

산행일 : ‘12. 12. 25(화)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금산면과 정읍시 산외면의 경계

산행코스 : 상두마을→상두사→능선안부→상두산→기재→개터마을→진개저수지→상두마을(산행시간 : 3시간40분)

함께한 산악회 : 청산수산악회

 

특징 : 상두산은 주변 산군(山群) 중에서 가장 높다고는 하지만, 별다른 볼거리를 보여주지 못하는 그저 평범한 흙산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모든 산봉우리는 다 올라보겠다는 이들이나, 또는 ‘산이 있어서 산을 오른다.’는 등산 마니아(mania)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는 산이다. 참고로 상두산 정상에서 기고개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가파르면서도 의지할만한 지지대가 없기 때문에 겨울산행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산행들머리는 원상두마을(정읍시 산외면 상두리 소재)

호남고속도로 태인 I.C에서 내려와 1번 국도(國道 : 전주방향/ 왕림교차로에서 30번 국도로 옮김)와 30번 국도(임실방향)을 이용하여 와우교차로(交叉路 : 정읍시 칠보면 와우리)까지 온다. 이어서 좌회전하여 49번․55번 지방도(地方道 : 신덕면·관촌면 방향)로 옮겨 들어가면 산외면소재지(面所在地)를 지나자마자 도원교차로(交叉路 : 산외면 정량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도원교차로에서 왼편에 보이는 군도(郡道 : 원정1길)로 들어가다가, 삼두천을 건너면 만나게 되는 4거리(상두리)에서 왼편으로 접어들어 1Km쯤 들어가면 산행이 시작되는 원상두마을이다. 참고로 원상두마을까지 군내버스가 운행되므로, 대형버스를 가지고 갈 경우에는 마을회관 앞에 주차시키면 된다.

 

 

 

 

산행은 원상두(元象頭)마을회관의 오른편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들머리에 ‘상두사(象頭寺)’라는 커다란 빗돌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돌담을 왼편에 끼고 100m정도 걸어 올라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상두산으로 올라가려면 왼편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잠깐 짬을 내어 오른편으로 들어가 보자. 요란하게 짖어대는 개들을 외면하고 50m정도를 걸어가면 오른편에 텃밭이 보인다. 바로 상두사지(象頭寺址)이다. 텃밭의 뒤편 언덕 아래에 3기(基)의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동서(東西)로 나란히 서 있다. 원래는 4기(基)였는데, 1920년대에 서쪽의 1기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당간지주의 뒤편, 그러니까 언덕 위에 보이는 건물의 터(建物址)의 흔적을 이곳 마을 사람들은 법당밭(法堂밭), 법당터(法堂터)라 부른다고 한다.

 

 

 

상두산(象頭山)은 산이 코끼리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본래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상두산이라 함은 석가가 고행 길에 6년 동안 설법(說法)을 했다는 인도 불교의 성지(聖地)에서 비롯된 지명(地名)이다. 따라서 이곳 정읍 땅의 상두산이 그만큼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 증거의 하나가 이곳 상두사터가 아닐까 한다. 지금은 비록 당간지주(幢竿支柱 : 불화를 그린 깃발을 걸었던 장대,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기둥)만 남아있는 빈터로 남아있지만, 당간지주가 4개나 될 정도였다면 꽤나 큰 규모를 자랑하는 사찰(寺刹)이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참고로 상두산 자락 남쪽의 정읍시 산외면은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월주스님 등의 고승(高僧)들이 배출되었는데, 이 또한 상두산과 연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뭣 하러 이런 외진 곳까지 찾아 온다요? 겨울에는 버스도 못다는 곳인디...’ 귀한 손님이라도 되는 양 동네 아주머니들이 살갑게 말을 건네 온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외지인(外地人)들이 드물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긴 상두산 정상을 올라본 동네 사람들이 드물 정도라고 하니, 외지인들이 상두산을 찾는 일은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실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얘기를 주고받으며 동네 골목길을 통과한다.

 

 

 

잘 지어진 전원주택(農家로 보기에는 너무 번듯하게 지어졌다)를 마지막으로 골목길은 끝을 맺고, 이후에는 농로(農路)로 이어진다. 농로로 들어서서 얼마 안 있으면 오른편으로 나뉘는 길이 보이지만, 개의치 말고 곧장 나아가면 된다. 갈림길에서 바라보면 맞은편 산비탈 아래에 산행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으니 참고하면 될 것이다.

 

 

 

산행안내판에서 조금 만 더 걷다가 왼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면 편백나무 숲길이 마중 나온다. 코끝을 스치는 저 향은 솔향일까 아니면 피톤치드(phytoncide)향일까? 하긴 어느 향이든 무슨 대수겠는가. 저 편백나무가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내품는 나무임이 확실하니, 오늘 산행은 확실한 웰빙(well-being)산행이 되는 것이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또 다시 전원주택 한 채가 보이고, 농로는 이곳에서 끝을 맺는다. 이후부터는 임도(林道)가 등산로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오늘의 목표는 땀을 흘리지 않고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다. 산행종료까지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여유로운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겨울산행에 5시간 산행은 무리’라는 집사람의 의견을 쫒다보니 3시간짜리로 코스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지 산길은 의외로 순한다. 흙길은 부드러운데다가 넓기까지 하다. 거기다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더라도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산행을 시작해서 40분 정도가 지나면 능선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안부에서 산길은 90도 이상을 오른편으로 꺾으며 이어진다. 여기부터가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눈의 천국(天國)’에 들어선 것이다. ‘상고대가 아니라 눈꽃입니다’ 상고대를 보게 된 행운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날 보고 집사람이 바로잡아준다. 오늘은 집사람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인 모양이다. 하는 것 마다 트집을 잡는 것을 보면 말이다. 눈꽃이면 어떻고, 또 상고대면 어떻겠는가. 날 황홀하게 만들면 그게 바로 눈꽃이고, 또 상고대가 아니겠는가.

 

 

 

 

 

 

 

집사람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고 조심하다보면 느닷없이 이정표(국사봉 5.4Km/ 산수동 3.6Km/ 정읍 산외면) 하나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 이정표의 표기(表記)를 이해할 수가 없다. 왼편으로 가면 김제시 금산면 산수동이 나온다는 것은 알겠는데, 곧장 직진하면 국사봉이란다. 국사봉은 상두산 정상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만 하니 이정표에는 당연히 상두산을 표기해야 할 것이고, 굳이 국사봉을 적고 싶을 경우에는 상두산과 함께 쓰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정표를 지나서 얼마간 더 진행하면 커다란 바위 무더기가 보인다. 상두산 정상이 바위로 이루어진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에 정상 근처인가 보다 했지만, 정상은 이곳에서도 한참을 더 진행해야만 했다. 고도(高度)를 높일수록 더 짙어져 가는 상고대 아래를 걷다보면 어느덧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20분이 조금 못 되었다.

 

 

 

 

상두봉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바위 바로 아래의 제법 너른 분지(盆地)는 돌맹이 하나 보이지 않는 맨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상두봉을 암봉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흙봉우리 위에 커다란 바위 몇 개가 올라 앉아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말뚝 모양의 정상표지석은 바위 봉우리 위에 보이고, 바위 봉우리 옆에는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상두산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주변의 산들 보다는 더 높기 때문에 조망(眺望)이 좋은 편이다. 오늘은 눈이 내리기 때문에 비봉산과 독금산 등 가까운 산들만 시야(視野)에 들어오지만, 날씨가 맑을 경우에는 서쪽으로는 광활(廣闊)한 호남평야와 서해 바다가 굽어보이고, 북쪽으로는 모악산, 운장산이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덕산과 경각산, 그리고 국사봉과 오봉산, 나머지 추월산과 회문산은 각각 북동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에서 하늘금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정상에서 지재(고개)로의 하산은 정상으로 올라올 때의 반대편으로 내려서면서 시작된다. 하산길 들머리에 선 집사람이 내려가질 않고 멈칫거리고만 있다. 너무 가파른데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는 하얀 눈길이 두려웠던가 보다. 지재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와는 달리 무서우리만큼 경사(傾斜)가 가파르다. 거기다가 몸을 의지할만한 지지대(支持臺)도 눈에 띄지 않아 내려서기가 무척 조심스럽다.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다가 완만(緩慢)해지기를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하산 하는 중에 몇 개의 봉우리를 넘게 되는데, 그 봉우리를 오르거나 봉우리 정상 부위에서 잠깐 경사(傾斜)가 밋밋해지다가도 내리막길만 만나면 어김없이 경사가 가팔라지는 것이다. 한 발짝도 마음 놓고 내려서기가 어려운 비탈길을 걷다보면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다. 행여 헛발이라도 디딜 경우에는 큰 부상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혹 발걸음을 멈추는 이유는, 가끔가다 왼편으로 조망(眺望)이 시원스레 트이기 때문이다. 진행방향 맞은편에 있는 국사봉과 화율봉 등 산릉(山稜)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왼편 발아래에는 복호마을, 그리고 그 너머에 보이는 촌락(村落)은 아마 상화마을 일 것이다.

 

 

 

 

 

정상에서 조심스럽게 50분 가량을 내려오면 능선 안부인 기재에 내려서게 된다. 사통팔달로 임도(林道)가 시원스럽게 뚫린 이곳 기재(이정표 : 국사봉 3.6Km/ 상두봉 1.8Km/ 복호동 0.6Km)에서는 오른편 임도로 방향을 틀어야 상두리로 원점회기(原點回歸)할 수 있다.

 

 

 

 

기재에서는 오른편에 보이는 임도(林道)로 접어들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임도를 따라서 곧장 진행해서는 안 된다. 임도의 최종 도착지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계속해서 고도(高度)를 높여가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부부도 무턱대고 임도로 들어섰다가 놀라서 되돌아 나왔다. 고도를 높여가는 임도가 정상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재의 아래에 있는 개터마을로 내려가려면 기재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오솔길로 내려서야 한다. 잡목(雜木)과 사람의 눈높이까지 자란 들풀들이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오솔길을 따라 10여분 정도 내려오면 돼지농장 등 축사(畜舍)들이 자주 눈에 뜨이는 개터마을이다.

 

 

 

 

산행날머리는 상두마을(원점회귀)

개터마을에서부터 상두마을까지는 차도(車道)로 이어진다. 개터마을에서 차도를 따라 40분 쯤 걸으면 진개저수지에 이르게 되고, 저수지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만나게 되는 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올라가면 20분 후에는 아침에 산행을 시작했던 상두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기재에서 하산할 경우에 유념(留念)해 두어야 할 것은, 상두마을로의 원점회기가 꽤나 힘들다는 것이다. 상두마을까지의 거리가 꽤나 먼데다가, 차도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다니는 차량(車輛)들이 드물어서 얻어 탈수도 없기 때문이다. 기재에서 상두마을까지는 1시간20분 정도가 소요된다.

 

 

 

오봉산(五峰山, 513.2m), 국사봉(國師峰, 475m)

 

산행일 : ‘12. 12. 16()

소재지 : 전북 임실군 운암면과 완주군 구이면의 경계

산행코스 : 백여리 현대주유소소모마을1~4오봉산4국사봉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새싹산악회

 

특징 : 산만 놓고 볼 때에는 일부러 올라야할 의미를 찾기 힘든 산이다. 그러나 아름답기로 소문난 옥정호를 전체적으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오봉산이나 국사봉에 올라가야만 한다. 옥정호의 붕어섬을 사진 촬영할 수 있는 최적의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비경(秘境)으로 알려진 옥정호의 붕어섬은 4계절마다 그 풍경(風景)을 다르게 보여주기 때문에 사진작가뿐만 아니라 일반사람들도 많이 찾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백여리의 현대오일주유소

호남고속도로 서전주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國道/ 순창방향, 일부구간 1번국도와 겹침)를 이용하여 구미면 두현리까지 온 후, 구이교차로(交叉路/ 두현리 소재)에서 27번 국도로 옮겨 순창방향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구이면 백여리에 있는 상용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구이로(전주방향)로 들어서면 오늘 산행이 시작되는 현대오일주유소(백여리 소재)까지는 금방이다.

 

 

 

주유소에서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15분쯤 걸으면 소모마을의 오봉산정(음식점)에 닿게 되는데, 음식점 앞 다리() 건너에 이정표(오봉산 2.44Km/ 오봉산 2.69Km)가 서있다. 그런데 양쪽이 거리만 다를 뿐 행선지가 오봉산으로 같기 때문에 헷갈린다. 어디로 갈까 망설여지겠지만 만일 1봉부터 오르려면 고민할 필요 없이 왼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이곳 소모마을에서 어느 길로 접어들더라도 오봉산 능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이다.

 

 

 

 

 

첫 번째 이정표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100m쯤 더 걸으며 또 하나의 이정표(10.75Km, 22.0Km/ 오봉산 2.58Km)가 나타난다. 1봉은 은행나무와 감나무가 있는 왼편(북쪽) 길로 들어서면 된다. 폐가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산길로 들어서게 된다. 길가 여기저기에 벌통들이 널려있다. 아마 소모마을이 한봉(韓蜂)단지가 아닌가 싶다.

 

 

 

한봉지역을 지나면서 산길은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25, 한봉(韓蜂)지역에서는 7분쯤 산비탈을 치고 오르면 이정표(10.46Km/ 소모마을 0.4Km)가 있는 능선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 안부에서 1봉까지는 금방인데, 경사(傾斜)가 그리 심하지 않은 능선길이 계속된다. 소나무 향이 짙은 숲길을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꼭대기 위에 무덤() 하나가 올라 앉아 있는 1봉 정상이다. 1봉 언저리는 소나무들의 낙원(樂園)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는 기분은 마치 휴양림을 산책하는 느낌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5분이 조금 못되었다.

 

 

 

1봉에서 2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게 된다. 내려서는 골이 깊기 때문에 1봉과 2봉이 연결되는 게 아니라 마치 독립된 산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산길은 안부(이정표 : 21.1Km/ 10.2Km/ 소모마을 1.9Km)까지 길게 내려왔다가 반대편 능선을 향해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1봉에서 2봉까지는 의외로 멀다. 거리는 불과 1.3Km에 불과한데도 유독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남석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정표 : 20.5Km/ 소모마을 2.5Km/ 남석사 1.2Km)을 지나고, 잘 가꾸어진 묘역(墓域)을 지나면 소모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올라서게 된다. 왼편에 보이는 2봉의 바위봉우리가 우람하다. 건너편에는 오봉산이 보이고, 그 뒤 멀리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은 아마 회문산일 것이다.

 

 

 

 

 

바위전망대에서부터는 바윗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바윗길이라고 해서 지레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다. 바위가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위험을 느낄 정도로 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쇠사슬을 매달아 놓았다.

 

 

 

 

 

 

 

바윗길의 특색인 조망을 즐기면서 걷다보면 이윽고 2봉에 올라서게 된다. 널따란 헬기장인 2봉 정상에 올라서며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올려다본 2봉은 분명히 바위봉우리였는데, 막상 2봉에 올라와보니 밋밋한 흙산인 것이다. 아마 서쪽 사면(斜面)만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졌나 보다. 1봉에서 2봉까지는 대략 50분 정도가 걸렸다.

 

 

 

2봉 정상은 정상석 대신에 이정표(31.2Km/ 11.1Km/ 염암)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정표의 맞은편 나무에는 서래야 박건석씨가 붙여놓은 코팅지(coating)가 매달려 있다. 그런데 그 높이(520m)가 이정표(485m)와 달라서 헷갈리게 만든다. '5만분의 1 지도(地圖)‘를 만드는데 관여하는 사람입니다.’ 함께 걷던 등산객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여 보이지만, 아무래도 난 행정관청에 더 신뢰가 간다. 어쩔 수 없는 공무원 출신이라서 그럴까?

 

 

 

2봉에서 3봉까지는 1봉에서 보다 더 먼 1.2Km이지만 훨씬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고저(高低)의 차가 거의 없는 능선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거칠 것 없는 진행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능선의 길은 아주 부드러워져 거의 양탄자 위를 걷는 기분이다. 참고로 2봉부터 5봉까지는 **호남정맥이 지나가는 길이다. 2봉을 출발해서 20분 남짓 걸으며 소모마을 갈림길을 두 번(이졍표 #1 : 31.0 Km/ 20.1Km/ 소모마을 2.5Km, 이정표 #2 : 30.1Km/ 21.0Km/ 소모마을 3.0Km) 지나면 드디어 3봉에 이르게 된다. 3봉 정상에는 정상석이나 이정표는 보이지 않고 박건석씨의 코팅지(518m)만 나무에 매달려있다.

(**) 호남정맥(湖南正脈), 백두대간(白頭大幹)에 있는 영취산에서 분기하여 서쪽으로 뻗어 조약봉에서 끝나는 산줄기가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이다. 금남호남정맥은 조약봉에서 다시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으로 나뉜다. 이중 조약봉에서 시작된 호남정맥은 호남 내륙(湖南 內陸)을 관통하여 백운산과 망덕산을 거쳐 광양만 외망포구(浦口)에서 그 맥()을 다하는 약 430km의 산줄기이다. 참고로 9개의 정맥(正脈) 중에서 가장 길며, 주요 산으로는 내장산, 추월산, 강천산, 무등산, 제암산, 조계산, 백운산 등 명산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3봉에서 4봉은 500m에 불과하다. 4봉 까지는 밋밋한 능선길로 이어지다가, 봉우리 아래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짧게 올라서면 4봉 정상이다. 봉우리 아래에서 갈림길(이정표 : 40.1Km/ 30.4Km/ 소모마을 3.7Km)을 만나게 되니 오봉 정상을 다녀서 국사봉으로 진행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오른편의 소모마을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오봉산 정상으로 곧장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4봉에서 5봉까지의 거리는 500m, 4봉과 5봉 사이의 안부(이정표 : 50.4Km/ 30.5Km/ 40.2Km)까지 짧고 가파르게 떨어졌다가 다시 그만큼 치고 오른 후, 나머지 구간은 완만(緩慢)한 능선으로 연결된다. 갈림길에서 10분 정도를 걸으면 널따란 헬기장을 지나 5봉 정상에 이르게 된다. **옥정호가 가장 잘 바라보인다는 오봉산 정상에는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심어져 있고, 구이면 둘레의 산 현황도가 세워져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가까이 지났다.

(**)옥정호(玉井湖), 섬진강 상류에 있는 인공호수(人工湖水)로서,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본다고 할 정도로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있다. 전북 임실군 운암면에서 정읍시 산내면에 걸쳐 있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운암호, 섬진호, 산내호 등으로도 불린다. 정읍시와 김제시에 수돗물을 공급해 주는가 하면, 호남평야의 목을 축여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수력발전(水力發電)으로 전기도 만드니 다목적 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을 가득 담으면 43000t이나 된다고 한다. 본래는 섬진강의 물을 끌어다가 호남평야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1925년에 만든 저수지(貯水池)였다. 그러던 것을 1965년에 농업용수 공급과 전력생산을 위한 섬진강 다목적댐으로 개축하면서 수위(水位)를 높여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호남정맥에 놓여있는 오봉산은 주변 산군(山群)들은 물론이려니와 옥정호에 대한 전망이 뛰어나다. 정상의 남쪽방향, 그러니까 옥정호 방향이 벼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정상에 서면 일명 **붕어섬이라 불리는 호수 속 섬()'외앗날'이 옥정호의 전경(全景)과 함께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외앗날이라는 지명(地名)은 섬이 되기 이전부터 그리 불리었다는데, 어쩐지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아무튼 섬이 되기 이전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산간오지(山間奧地)이었음은 분명할 것이다. 옥정호를 내려다보면 대한민국은 참 아름다운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산과 물이 만들어내는 저런 멋진 풍광(風光)을 이곳 말고도 전국의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설마 외앗날이라는 이름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섬이 되기 이전보다 훨씬 더 외로운 호수(湖水) 속에 갇힌 섬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붕어 섬이라는 예쁜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나마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다. 귀족금붕어를 기막히게 빼다 박은 덕분에 얻게 된 이름이란다. 섬에서 눈을 떼지 말고 오랫동안 바라보라. 눈앞이 흐려지며 붕어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고, 끝내는 수면(水面)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꼬리에서 분사(噴射)되는 물방울 따라 내 스트레스도 깔끔하게 사라져 버린다. 참고로 붕어섬에는 2, 3가구 주민이 들락거리며 산다고 한다. 보통 땐 호수를 건너 가까운 동네에서 살다가 농사철에만 한동안 머문단다. 급한 볼일이 있거나 장보러 뭍으로 나올 땐 작은 배를 이용한다고 하니, 붕어섬은 작은 왕국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4(이정표 : 국사봉 1.0Km/ 50.5Km/ 30.5Km)으로 다시 돌아와 이번에는 국사봉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4봉에서 국사봉까지는 1Km의 능선으로 연결되고 있다. 능선은 봉우리 두어 개를 넘으면서 이어지다가, 가끔 만나는 바위구간에서는 옥정호가 잘 조망(眺望)되는 전망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4봉을 출발한지 30분 가까이 되면 국사봉 바로 아래의 능선 안부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이정표(학암리 마실길/ 국사봉 마실길)는 그간 지나오면서 보았던 이정표와 많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마실길의 이름과 방향만 표기되어 있을 뿐 거리표시가 없는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국사봉 주차장까지의 구간은 임실군에서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옥정호 마실길의 일부 구간이다. 한국은 길의 나라다. 마실길, 둘레길, 올레길 등등, 별의 별 길이 다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학암리 갈림길에서 국사봉 정상까지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 가파름이 얼마나 심했던지 길고 긴 나무계단을 이용해서 정상으로 오르도록 만들어 놓았다. 별로 넓지 않은 바위봉우리인 **국사봉에서는 옥정호와 옥정호 순환도로만 내려다보일 뿐, 막상 붕어섬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능선의 봉우리가 시야(視野)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가까이 지났다.

(**)국사봉은 475m에 불과한 자그마한 봉우리이다. 그러나 사진 찍는 사람치고 이 봉우리에 안 올라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난 봉우리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바로 옥정호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일교차(日較差)가 큰 날에는 옥정호를 감싸고 있는 운해(雲海)를 볼 수가 있는데, 이때 운해사이로 내비치는 붕어섬은 한마디로 장관(壯觀)이라고 한다(사실 붕어섬은 정상에서는 조망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은 불운한 날이다. 기대했던 운해는 보이지 않고, 원하지 않은 안개만이 자욱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역광(逆光)까지 더하니 옥정호 속의 붕어는 활력을 잃고 죽은 듯이 드러누워 있을 따름이다.

 

 

 

 

국사봉 정상에서 내려와 조금 전에 시야(視野)를 가로막고 있던 바위봉우리를 우회(迂廻)하면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대(展望臺)에 서면 옥정호와 붕어섬이 바로 눈앞에 있다. 소문이 무성했던 붕어섬의 전망대는 정상이 아니고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이곳 옥정호는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철님이 아름다움을 노래하던 섬진강 바로 그 자체이다.

(**)김용택(金龍澤)시인, () ‘섬진강을 연작함으로써 유명해진 탓에 일명 '섬진강 시인'으로 불린다. 자신의 모교(母校 : 임실 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 그는 모더니즘(modernism : 현대문학의 여러 경향 중에서 특별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유파)이나 민중문학(民衆文學) 등의 문학적 흐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또한 대상일 뿐인 자연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절제(節制)된 언어로 형상화하는 데 탁월하여 김소월과 백석을 잇는 시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의 글에는 언제나 아이들과 자연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묘사하며, 그들이 자연을 보는 시선과 교감(交感)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섬진강’, ‘누이야 날이 저문다’, ‘강 같은 세월등의 수많은 시집과 산문집, 그리고 동시집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Daum 백과사전에서 인용>

 

 

 

 

첫 번째 전망대를 지나 긴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서면 오른편에 또 하나의 전망대가 보이고, 붕어섬은 아까보다 더 가까이에 다가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른편 위에는 아까 지나왔던 전망대가 마치 제비집처럼 벼랑에 매달려 있다. 역광(逆光)에 숨어버린 붕어섬을 **아쉬워하며 하산길을 재촉하다보면 마지막 전망대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긴 나무계단 아래 저만큼에 오늘 산행이 종료되는 주차장이 보인다.

(**)오봉산에서 본 붕어섬이 내심 못마땅했다. 옅은 안개로 인해 섬의 자태(姿態)가 흐릿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사봉에서 본 붕어섬은 아까만도 못하다. 아까 오봉산 정상에서 볼 때에는 장애물(障碍物)이 안개뿐이었는데, 지금은 안개에 더하여 역광(逆光)이라는 더 큰 장애가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여쁜 금붕어는 어디서 찾아봐야 한단 말인가.

 

 

 

 

 

 

 

 

 

산행날머리는 국사봉주차장

산행이 종료되는 주차장에 내려서면 맞은편에 3층으로 지어진 정자(亭子) 하나가 보인다. 붕어섬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하고 찾아봤지만, 붕어섬에 대한 조망(眺望)은 실망 그 자체이다. ‘저 벼랑 위에다 지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네요.’ 다들 주차장 맞은편에 있는 봉우리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있다. 도로공사 때 능선을 절개하는 과정에서 인위적(人爲的)으로 생긴 맞은편 봉우리의 위가 전망대를 앉히기에 그만이라는 얘기이다.

 

 

 

명덕봉(明德峰, 845.5m)

 

산행일 : ‘12. 10. 28(일)

소재지 :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산행코스 : 운일암1주차장 건너편→북측지능선→가마봉갈림길→정상→서남지능선→625봉→삼거리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

 

함께한 산악회 : 곰바우산악회

 

특징 : 명덕봉은 운장산의 한 줄기에 자리 잡은 나지막한 산이다. 산 자체는 작고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평범한 산이지만, 이 산이 빚어 놓은 ‘운일암반일암계곡’으로 인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명덕봉을 찾는 등산객들 대부분이 기암괴석(奇巖怪石)과 명경지수(明鏡止水)로 소문난 ‘운일암반일암계곡’을 필히 산행코스에다 끼워 넣기 때문이다. 주자천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명도봉(863m)과 마주보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주양리

대전-통영간고속도로 금산 I.C를 빠져나와 금산읍을 통과한 다음 13번 국도(國道/ 장수읍 방향)을 타고 용담호(湖)까지 들어간다. 용담면소재지(所在地/ 송풍리)를 지나 신용담교(橋)를 건너기 직전에 만나게 되는 송풍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795번 지방도로 진입한다. 795번 지방도를 이용 용담호를 여러 번에 걸쳐 가로지르면서 달리다가 영강교를 건넌 후 오른편(정주천로)으로 접어들면 주천면소재지이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55번 지방도(완주군 동상면 방향)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주양리에 이르게 된다.

 

산행은 운일암1주차장의 건너편에 보이는 지방도에서 오른편으로 난 임도(林道)로부터 시작된다. 들머리에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들머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고개를 돌려보면 주자천 건너에 명도봉이 우뚝 솟아있는 것이 보인다. 그 아래가 운일암1주차장이다. 임도의 입구에서 왼편에 보이는 개울을 건너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물론 안내도 뒤로 나있는 아스팔트 포장 임도는 무시해야 한다.

 

 

 

 

 

 

계곡을 건너 급경사(急傾斜)로 이루어진 능선으로 붙으면 얼마 뒤 널찍한 묵밭 지대를 만난다. 다른 사람들의 후기에는 묵밭이라고 적고 있지만, 내 눈에는 차라리 잘 가꾸어진 정원(庭園)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묵밭에 있는 무덤 사이를 통과해서 능선으로 올라서면, 완만(緩慢)하게 이어지던 산길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이더니 울퉁불퉁한 암릉길로 변해버린다. 등산로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참나무들도 암릉을 만나면서 소나무들로 바뀌더니, 얼마 안가 두 나무들이 골고루 섞이게 된다. 암릉으로 들어서면 등산로를 약간 비켜난 곳에 그다지 높지 않은 바위들이 심심찮게 보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번쯤 바위 위로 올라가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르는 바위마다 뛰어난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전망바위는 산행을 시작한지 15분 정도 지나서 만나게 된다. 갑자기 시야(視野)가 뻥 뚫리면서 명도봉과 구봉산을 포함한 산군(山群)들이 나뭇가지 위로 떠오르고 있다.

 

 

 

 

 

 

 

첫 번째 전망바위를 지나면서 산길은 급경사(急傾斜)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러나 걷는 데는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길 위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落葉)들로 인해 길이 무척 폭신폭신하기 때문이다. 바닥에 깔린 낙엽은 대부분 솔가리(말라서 땅에 떨어져 수북이 쌓인 솔잎)인데 참나무 낙엽들이 약간 섞여있다. 솔가리로 인해 한층 더 폭신폭신한 것이다. 첫 번째 전망바위에서 20분 가까이 오르면 또 하나의 전망바위에 이르게 된다. 이번에는 구봉산의 산군들 외에도 용담호의 호반(湖畔)까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분재(盆栽)처럼 멋지게 자란 소나무들 감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능선을 어느새 참나무들이 독점해버렸기 때문이다. 비록 분재를 감상하는 즐거움은 없어졌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신 제철을 만난 단풍나무들이 울긋불긋 색동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풍경(風景)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햇빛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았던 지난 여름철의 고단함을 보상(報償)이라도 받으려는 듯, 단풍나무 잎들은 온갖 색으로 치장하고 있다. 이 세상의 여인들이 즐겨하는 화장의 그 어느 색조(色調)도, 가을 산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색깔을 결코 그려내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전망바위를 지나서 다시 30분 정도가 지나면 750봉에 올라서게 된다. 나뭇가지 사이로 명덕봉 정상이 빼꼼이 내다보이는 750봉에는 이정표(명덕봉 0.6Km/ 운일암1주차장 1.24Km)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정표 뒤편으로 희미하게 산길이 보이지만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다. 에로스산장(영불암)에서 가마봉을 거쳐 올라오는 길인데 너무 험하기 때문에 이용하지 말라는 경고(警告)의 의미인 모양이다.

 

 

 

 

750봉에서 잠깐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폐(廢)헬기장에 이르게 된다. 억새 등 웃자란 잡초(雜草)들만 무성하게 우거진 헬기장은 조망(眺望)이 뛰어나다는 선답자(先踏者)들의 후기(後記)와는 달리 조망이 일절 트이지 않고 있다. 헬기장에서 다시 10분 조금 못되게 더 오르면 산죽군락(山竹群落)을 통과하게 된다. 운장산 인근(隣近)의 산들을 오르다보면 산죽군락을 자주 만나게 된다. 운장산의 바로 이웃에 있는 이곳 명덕봉에서도 산죽군락이 자주 눈에 띈다. 이곳의 산죽들은 너무 웃자라지도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은 정도, 산행을 하는데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인 어른의 키만큼 알맞게 자라있다.

 

 

 

 

산죽군락을 지나면 금방 명덕봉 고스락 아래에 이르게 된다. 고스락 아래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오른쪽으로 길의 흔적(痕迹)이 뚜렷한데도, 봉우리를 향해 곧게 뻗은 바위 능선에도 산악회 리본이 매달려 있는 것이다. 잠깐의 갈등 끝에 오른편의 정규등산로를 버리고 곧장 능선을 치고 오른다. 그러나 나중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오른편 길로 진행하라고 권하고 싶다. 직등 코스는 길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뿐더러, 경사(傾斜)가 가파르고 바위 틈새마다 비집고 들어선 잡목들 때문에 오르기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거친 능선을 힘들게 치고 오르면 왼편의 나무숲이 빠끔히 열리면서 너럭바위 하나가 펑퍼짐하게 펼쳐져 있다. 너럭바위 위는 뛰어난 전망대(展望臺), 일망무제(一望無題)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남쪽에 마주보고 서있는 명도봉이 손이라도 내밀 듯이 희희낙락(喜喜樂樂)거리고, 그 너머에는 구봉산에서 복두봉, 운장산을 걸쳐 연석산까지 산군(山群)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따스한 햇살에 반짝이고 있는 산줄기가 참으로 아름답다. 왼편에 낮게 펼쳐져 있는 용담호(湖)를 배경삼아, 옅게 깔린 연무(煙霧)속에서 잠긴 듯 솟아오른 봉우리들은 잘 그린 한 점의 수묵화(水墨畵)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봉우리들의 굴곡(屈曲)이 유난히 깊은 구봉산 아홉 봉우리의 자태(姿態)가 가장 빼어나다. 조금 전에 고생하면서 올라온데 대한 보답치고는 너무나 훌륭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를 만들어 냈나 보다.

* 공자(孔子)는 논어(論語)에서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사용했다. 옛날 중국에 문방구도 살 형편이 못되는 농부가 있었다. 농부는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숯으로 붓을 삼고, 나뭇잎으로 종이를 삼아 열심히 공부한 끝에 크게 성공했다는 얘기에서 유래된 고사성어(故事成語)이다.

 

 

 

전망바위에서 정상까지는 금방이다. 잡목(雜木) 사이를 헤치고 나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수십 명이 너끈히 쉬고도 남을 만큼 널따란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고, '명덕봉 정상‘이란 이름표를 이마에 붙이고 있는 이정표(삼거리주차장 1.94km/ 운일암 1주차장 1.84Km)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나무판자(板子)로 만들어진 정상표시판 하나와, 코팅(coating)된 정상표시지(紙) 한 장이 매달려 있다. 정상임을 알려주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산봉우리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들임을 감안할 때 명덕봉의 이정표를 세운지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정표 아래에는 ‘국방부 지리연구소’에서 동판(銅版)으로 만들어 놓은 대삼각점이 보인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의외로 별 볼일 없다. 잡목(雜木)들이 정상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구봉산을 위시한 주변 산군(山群)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겨우 내다보이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능선을 치고 올라온 선택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명덕봉에서의 조망(眺望)은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그 느낌 또한 보나마나 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산은 삼거리주차장으로 정하고 이정표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내려선다. 이곳에서 선봉(峰) 방향으로 진행하다 송전탑(送電塔)이 있는 지점에서 삼거리주차장으로 내려서는 방법도 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선봉까지 갔다고 되돌아오지 않을 바에는 이정표가 지시하고 있는 능선코스가 더 볼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남서쪽 능선위로 난 길을 걸어 10분쯤 내려오면, 능선을 가로지르고 있는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좌우로 산사면(山斜面)을 따라 이어지고 있는 임도(林道)가 제법 또렷하나 개의치 말고 건너편 능선으로 붙어야 한다. 임도로 내려설 경우 거리도 멀뿐더러 길 또한 험하기 때문이다.(산악회장님 말씀)

 

 

 

 

임도를 가로지르면 능선길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지는데, 짧게 올랐다가는 이내 길게 떨어지고 있다. 급하게 고도(高度)를 떨어뜨리려면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등산로 주위에 낙엽(落葉)이 두텁게 쌓여있어서 산객(山客)들의 발걸음을 가뜩이나 더디게 만들고 있다. 낙엽 밑에 깔려있는 바위들이 보이지 않아서 돌부리에 걸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산을 시작한지 30분 정도가 지나면 길가에 이정표(명덕봉 0.90Km/ 삼거리주차장 1.04Km) 하나가 보인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떨어지는 길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이나 이정표에는 방향표시가 없다. 에로스산장(영불사)으로 내려가는 길인데도 표기(表記)를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길이 무척 험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정표를 지나서도 산길은 계속해서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다만 오르고 내림의 차가 조금 커졌을 따름이다. 아마 능선의 막바지에 있는 625봉까지는 큰 변화를 주지 않다가 625봉에서 갑자기 고도(高度)를 떨어뜨릴 심사(心思)인 모양이다. 능선의 위는 폭이 4~5m정도로 상당히 넓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무덤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와~ 명당이네요. 자연스럽게 발복(發福)이 되겠네요.’ 같이 걷고 있는 일행의 말이 아니더라도, 풍수(風水)에 문외한(門外漢)인 내 눈에까지 명당으로 들어올 정도로 능선과 어울리고 있는 묘역이 시원스럽다. 명당(明堂)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묘역(墓域)을 꾸미고 있는 망주석(望柱石)과 상석(床石)들도 심상치 않다.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묘역에 저런 석물(石物)들을 채워 넣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조심하라우!’. 엉거주춤 내려서는 부인에게 던지는 서방님의 멘트(announcement)이다. 남편이 전라도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왜 함경도 사투리가 튀어나올까? 전라도 남자가 경상도 여자를 만날 경우에는 사용언어가 함경도 방언(方言)으로 변하는 것일까? 사실 그가 보살피고 있는(?) 그의 부인은 경상도 현지(現地)에서나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완벽한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산악회에 나올 때마다 그 부부를 만날 수 있었고, 산악회의 잔심부름은 물론이고, 술과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다가 일행들과 나눠먹는 모습이 인상에 남아서 그들의 고향까지 기억하게 된 것이다. 좋은 의미로 웃자고 적어본 글이니 나무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625봉을 넘어서 왼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 산길은 갑자기 급하게 고도(高度)를 떨어뜨린다. 얼마나 가파르던지 허리를 세우고는 내려설 수가 없을 정도이다. 조심스럽게 내려서는데 바닥에 수북하게 깔린 낙엽으로 인해 산길의 흔적을 잃어버리고 만다. 오른편 지능선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길이 보이지 않은 탓에 왼편 지능선으로 내려서버린 것이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산길은 잡목과 가시넝쿨들로 인해 내려서기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런 개척 산행에는 의외의 부수입(副收入)도 누릴 수 있다. 사람들의 때를 덜 탄 탓에, 눈이 밝은 사람들은 알토란같은 약초(藥草)들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행이 시작되고 또 끝을 맺는 주양리에는 주자천(朱子川)이 흐르고 있다. 고려 때 송나라의 대유학자였던 주자(朱子)의 종손인 주찬(朱瓚)이 다녀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주자천 협곡(峽谷) 안의 비경(秘境)을 ‘운일암 반일암(雲日巖半日巖)’이라고 부르는데 계곡의 주위가 온통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첩첩이 쌓여 있다. ‘운일암(雲日巖)’이란 해와 구름이 바위에 가려진다는 뜻이고, 반일암(半日巖)이란 해가 바위에 가려서 낮의 길이가 반(半)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 용담현에서 전주로 가는 길이 이 계곡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 반나절이면 어두워지니 주의하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주자천 건너편 명도봉이 붉게 불타오르고 있다. 명덕봉의 단풍은 이미 끝물인데도 저렇게 한창인 걸 보면 명도봉의 주자천 방향은 아마 음지(陰地)쪽인가 보다.

 

 

 

산행날머리는 삼거리주차장

길이 아닌 길에서 나무줄기나 나무뿌리를 잡고 힘들게 내려서다보면 55번 지방도로(地方道路)에 내려서게 된다. 소양호로 넘어가는 55번 지방도는 주자천을 끼고 이어지는데, 개울 건너에는 야영장을 갖춘 공원(公園)시설이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비록 텐트 1동만 덩그러니 쳐져있지만, 여름철이면 저곳에는 한 평의 빈 땅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여름 휴양지로 소문난 ‘운일암반일암’계곡,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 때문이다. 주자천에서 땀에 찌든 몸을 씻고 소양호방향으로 100m쯤 올라가면 산행이 종료되는 삼거리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에 도착하면 한쪽 귀퉁이에 산행날머리가 보인다. 아까 길을 잘못 들지 않았더라면 이리로 내려오게 되었을 것이다.

 

 

 

 

성지산(成芝山, 992m) - 대호산(大虎山, 592m) - 백운산(白雲山, 559m)

 

산행일 : ‘12. 6. 17(일)

소재지 : 전라북도 설천면과 적상면의 경계

산행코스 : 괴목마을 버스정류소→대호산→전망바위→성지산→명품바위→안부→암봉 왕복(알바구간)→백운산→무주호(산행시간 : 6시간)

함께한 산악회 : 곰바우산악회

 

특징 : 전인미답(前人未踏)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람의 발길이 뜸한 오지(奧地)의 산, 전형적인 흙산(肉山)으로 어쩌다가 한 그루씩 보이는 소나무들을 제외하면 산에는 온통 참나무와 철쭉나무 등 활엽수(闊葉樹 일색(一色)이다. 어쩌다가 나타나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덕유산과 적상산의 조망(眺望) 외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으므로, 오지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찾아볼 필요가 없는 산이다. 또한 이 산은 정상표지석은 커녕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없이 철저하게 버려진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적상면 괴목마을

대전-통영간고속도로 무주 I.C를 빠져나와 19번 국도(國道)를 따라 안성방향으로 가다가 사신교차로(交叉路 : 적상면 사신리)에서 49번 지방도(地方道)로 바꿔 탄다. 치목터널 지나 조금 더 가다가 하조사거리(괴목리 하조마을)에서 727번 지방도를 만나 좌회전하면 곧 괴목마을이다. 괴목마을에 이르면 우람한 느티나무 한그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느티나무의 한자음(漢字音)이 곧 괴목(槐木)일지니, 이 마을의 이름이 저 느티나무에서 유래(由來)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느티나무 몸통 아래를 빙둘러가며 원형으로 나무의자를 만들어 놓았고, 나무 옆에는 정자(亭子)까지 세워서 느티나무와 함께 멋진 쉼터를 조성(造成)해 놓았다. 이를 보면, 마을의 역사(歷史)가 적혀있는 빗돌의 뒷면을 굳이 읽어보지 않더라도, 느티나무와 이 마을에 얽힌 얘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마을을 관통하는 골목길을 이용해서 동네를 벗어난 다음, 시멘트포장 농로(農路)를 따라 뒤편 언덕으로 오른다. 느티나무에서 출발한지 10분쯤 지나면 농로의 오른편이 야산(野山)의 경사면(傾斜面)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맨 먼저 올라야할 대호산의 들머리인 것이다. 오른편에 보이는 지능선으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막상 산에 들어섰지만 등산로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 산행의 주제가 ‘오지(奧地) 산행’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들머리부터 길의 흔적(痕迹)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산행대장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도, 잠시의 멈춤도 없이 잡목(雜木)사이를 잘도 헤쳐 나가고 있다. 그야말로 오지산행으로 이골이 난 ‘곰바우산악회’의 관록(貫祿)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뭇가지에 걸려 땅에 떨어진 모자를 다시 쓰고, 심심찮게 따귀까지 맞아가며 10분 정도 진행하다보면 삼각점안내판이 세워진 낮으막한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부터 등산로의 흔적(痕迹)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걷기에 편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일 년에 한두 명이나 다닌 듯한 산길은 있으나마나 이기 때문이다.

 

 

 

 

곁가지를 헤쳐야만 하는 산길을 40분 정도 치고 오르면 대호산에 이르게 된다. 커다란 호랑이가 자주 출몰(出沒)했다는 대호산을 과연 산(山)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표현일까? 대호산은 볼록하게 돋은 능선 상의 한 지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돋아 오른 높이가 너무나 얕기 때문에 나뭇가지에 매달린 정상표시판이 아니라면 아무도 이곳이 정상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이다. 산과 산 사이는 보통 깊은 골로 나뉘는 것이 보통이지만, 대호산과 성지산은 아무런 구분이 없이 밋밋한 능선으로 연결되고 있을 따름이다. 대호산 정상에는 국방부(國防部) 지리연구소에서 설치한 둥근 삼각점이 있다.

 

 

 

 

대호산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오늘은 30도가 넘는다는 무더운 날씨, 이마에서 흐르던 땀방울은 이미 등산복 상의를 다 적셔버리고. 이제는 아랫도리를 향해 내닫고 있다. 숨이 턱에 차게 능선길을 올라가다보면 거대한 바위벼랑이 길을 막아선다. 오른쪽으로 돌아 바위벼랑 위로 오르면 시원스레 시야(視野)가 트인다. 아름드리 노송(老松)이 햇빛을 가려주고 있는 뛰어난 전망대(展望臺)이다.

 

 

 

까마득히 깎아 세운 벼랑 끝에 서면, 지나온 괴목마을이 발아래에 펼쳐지고, 치목마을과 치목터널도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에는 적상산이 금방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다가와 있다. 오른쪽에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것은 아마 무주호일 것이다. 이곳 전망대가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이다. 사실 오늘 산행의 대부분을 짙은 숲속을 걷게 되기 때문에 특별한 볼거리도 없을뿐더러, 조망(眺望) 또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망바위에서 다시 한 번 바윗길을 돌아 오르면 또 하나의 전망바위가 기다리고 있다. 조금 전의 전망바위만은 못하지만 이곳에서는 덕유산의 전모(全貌)를 엿볼 수 있다.

 

 

 

 

두 번째 전망바위를 벗어나면 오른쪽으로 능선길이 이어진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드문 탓에 웃자라버린 곁가지를 헤치며, 산길을 나아가다보면 곳곳에서 짐승의 배설물(排泄物)들이 눈에 띈다. 아마 멧돼지가 남긴 흔적일 것이다. 능선의 경사(傾斜)가 가파름과 완만(緩慢)해지기를 반복하다 보면 이내 성지산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정도가 지났다.

 

 

 

 

능선상에 뾰쪽하게 솟구친 봉우리인 성지산 정상은 우선 좁다. 나무들을 베어내고 만들어 낸 공간(空間)의 한 가운데에는 삼각점이 놓여있다. 이곳도 역시 행정기관에서 만든 정상표시 빗돌은 보이지 않고, 어느 등산객이 정성들여 제작한 정상표시목만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이 정도의 산을 방치(放置)하고 있다는 것은 덕유산이나 적상산 등 이곳에는 사람들을 끌어 모을만한 산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상에서는 덕유산의 향적봉과 스키장이 보이지만 주변의 나뭇가지에 가린 탓에 그 형상만 간신히 내다보일 따름이다.

 

 

 

백운산으로 가려면 북쪽(왼편)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을 따라 진행해야 한다.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가다 중간지점에서 왼편 지능선으로 내려서야 하는 것이다. 주능선은 참나무 고목과 바위들이 적당히 어울린 인적 없는 산길이다. 늙은 아름드리 참나무들이 온 힘을 다해 새잎을 내밀고 있다. 그 정성이 통했음일까? 간혹 고사목(枯死木)이 보이기도하지만 등산로는 한줄기 빛의 스며듬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짙은 녹음을 자랑하고 있다.

 

 

주능선은 조금은 특이한 양태(樣態)를 보여주고 있다. 산길이 능선을 벗어나 우회(迂廻)를 해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대한 바위들을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데, 연결되는 바위들이 하나도 없이 모두가 각각으로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날아와서 뚝 떨어진 것 같이, 흙으로 이루어진 능선 위에 각양각색(各樣各色)의 형상으로 널려있다. 그렇다고 카메라에 담을 만큼 멋지게 생긴 바위는 눈에 띄지 않는다.

 

 

 

 

능선을 따라 50분 정도를 진행하면 왼쪽으로 적상산이 잘 조망(眺望)되는 바위 위에 올라서게 된다. 바로 명품바위다. 능선을 걷는 동안 혹시라도 명품바위를 못보고 지나치기라도 할까봐 노심초사(勞心焦思)했던 것이 우스워지는 순간이다. 명품바위는 바위가 잘생겨서가 아니고, 바위 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명품(名品)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명품바위에서 다시 북쪽의 청량산 방향을 향해 산행을 계속한다. 그런데 명품바위에서 15분 정도 더 걸으면 보인다는 ‘국립공원 경계석’이 보이지 않으니 문제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국립공원 빗돌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걸어보지만 30분이 지나도록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능선은 갑자기 가파르게 고도(高度)를 낮추더니, 안부를 정점으로 맞은편 능선을 향해 다시 가파르게 오르막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가파르게 오르막길을 올라가다 보면 왼편에 제법 또렷한 산길이 보인다. 백운산으로 가는 지능선이다. 당연히 왼편 갈림길로 내려서야 하는데도, 능선을 따라 계속해서 올라갈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개념도(槪念圖)에 나와 있는 ‘국립공원 경계석’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알바가 시작되었다.

 

 

갈림길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시 치고 오르면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국립공원 경계석’이 길가에 누어있는 것이 보인다. 다시 한 번 개념도(槪念圖)를 꺼내보고 방향을 잡는다. 이곳의 높이가 대략 910m정도 되니, 개념도에 나와 있는 빗돌의 지점과 일치한다. 당연히 백운산 갈림길은 앞으로도 한참을 더 가야만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한 결과로는 우리가 못보고 지나친 빗돌이 있는 지점의 높이는 960m로 확인(다른 사람의 산행기) 되었다. 개념도(槪念圖)가 잘못 작성되어 있는 것이다.

 

 

 

빗돌이 누워있는 910봉 근처는 오늘 산행에서 유일한 암릉구간이다. 당연히 암릉구간의 특징대로 시야(視野)가 열리는 곳이 자주 눈에 띄는데, 바위 위로 올라서면 무주호가 잘 조망된다. 암릉의 바위들을 넘거나 우회하다보면 날카롭게 갈기를 세우고 있는 봉우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선두그룹들이 봉우리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왼편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찾고 있는 중이란다. 그렇다고 무작정 청량산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없기 때문에, 발길을 돌려 아까 지나쳤던 갈림길까지 되돌아 나온다. 가파른 오르막길과 힘겨운 싸움을 벌인 알바구간에서 40분 가까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백운산 갈림길에서 백운산으로 향하는 하산길은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길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큰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 비탈길을 따라 50분 가까이 내려서면 안부에 이르게 되고, 산길은 610봉을 향해 다시 가파르게 위로 향하고 있다.

 

 

 

 

610봉에 올라서면 오늘 우리가 지나온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대로 걸어온 능선은 물론이고, 이빨을 악물로 올랐던 암릉구간(알바)도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610봉 정상은 아무런 표시가 없이 산악회들 리본 몇 개만이 바람에 팔랑이고 있다.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데 뭔가가 시선(視線)을 끈다. 뜬금없이 ‘백운산 559m'라고 쓰인 리본 하나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갈림길에서 내려온 누군가가 아무리 걸어도 백운산이 나오지 않자 심술을 부린 모양이지만, 산이라는 게 혼자만 오르는 것이 아닐 것이므로, 이런 장난은 삼가는 게 좋을 것 같다.

 

 

 

610봉에서 삼각점이 있는 백운산까지는 20분이면 충분하다. 백운산 정상도 오늘 지나온 산들의 정상과 마찬가지로 좁다란 분지(盆地)의 중앙에 삼각점이 심어져 있고, 나뭇가지에는 개인이 만든 정상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정상은 잡목(雜木)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다.

 

 

 

산행날머리는 무주호(湖)의 한국전력홍보관

백운산에서 하산은 서쪽능선을 따른다. 하산길은 초반에는 제법 또렷하게 나타나다가 내리막길이 가파르게 변하면서 길의 흔적(痕迹)이 희미해지므로 주의해서 진행해야 한다. 백운산에서 20분 조금 넘게 내려오면, 갑자기 넓어진 산길은 급하게 오른편으로 돌아 계곡으로 들어선다. 물기 한 점 없는 건천(乾川)을 따라 잠깐 동안 내려가면 이내 727번 지방도이다. 무주호반(湖畔)을 따라 난 지방도를 따라 오른편으로 5분 정도 걸으면 오늘 산행이 종료되는 무주양수발전소 홍보관이다. 홍보관 주변의 위락단지에는 음식점과 민박집이 꽤 많이 들어서 있으므로, 산행 후의 뒤풀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이산(馬耳山, 673m)

 

산행일 : ‘12. 4. 15()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진안읍과 마령면의 경계

산행코스 : 강정리광대봉(609m)고금당비룡대(527m)암마이봉 밑탑사은수사금당사남부주차장(산행시간 : 5시간20)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마이산은 산의 대부분이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런데 마이산의 흙과 바위는 보통 산과는 다르다. 바위와 절벽을 이루고 있는 암석(巖石)들이 콘크리트와 같은 모양이다. 이를 수성암(水成岩)이라고 부른다. 1억년 전에 이곳은 거대한 호수(湖水)였다고 한다. 계곡과 강을 따라 흘러온 자갈과 모래가 쌓였다가, 땅이 솟아오르면서 현재와 같은 암석층을 이루게 된 것이다. 마이산은 암릉으로 이루어진 산세(山勢)도 빼어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세보다는 이 산에 있는 탑사(塔寺)라는 사찰(寺刹)을 둘러보려고 찾아온다. 그만큼 탑사에 세워진 탑()들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눈요깃거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 마이산은 계절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르다. 봄에는 안개를 뚫고 나온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고 해서 돛대봉, 여름에는 울창한 수목이 용의 뿔처럼 보인다고 해서 용각봉, 겨울에는 마치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고 해서 문필봉이다. 마이산은 가을에 부르는 이름이다.

 

산행들머리는 마령면 강정마을

익산포항고속도로를 통해 진안 I.C를 빠져나와 30번 국도(國道/ 임실방향)을 따라 달리다가 마령사거리(마령소재지)에서 오른편의 임진로로 접어들어 약 1Km정도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강정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강정리 도로에서 오른편 산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 입구에 산행안내도(案內圖), 그리고 들머리 초입의 묘지(墓地) 옆에 이정표(里程標 : '합미산성 0.5km, 광대봉 3.1km, 보흥사 3.8km, 고금당 5.5km)가 세워져 있으니 길을 혼동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 이정표는 다른 곳에서 본 이정표들과는 색다르다. 이정표의 아랫단에 산행지도(地圖)를 매달고 있는 것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세심한 배려(配慮)를 해준 진안군청 관계자들에게 심심한 사의(謝意)를 표해본다.

 

 

 

 

산길에 들어서면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길가의 나무들이 활짝 기지개를 켜고 있는 정경(情景)이 눈에 들어온다. 연록(軟綠)의 빛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나뭇가지들마다 표피(表皮)를 뚫고 나온 새로운 생명(生命)들이 의젓한 이파리의 형태를 띠어가고 있다.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落葉)들이 뒹굴고 있는 산길은, 사이사이를 헤집고 나온 연약한 새싹들이 기존(旣存)의 낙엽들을 가려버릴 정도로 제법 많이 자랐다. 아름다운 정경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사방을 푸르게 만든 연록의 새 생명들로 인해 내 마음까지도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이런 게 바로 봄 산행의 멋이요 매력(魅力)이다.

 

 

 

들머리에서 합미산성터까지는 500m 정도, 대략 20분 정도 오르면 합미산성터에 닿게 된다. 보통 때 같으면 15분이면 족하겠지만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제 속도(速度)를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능선으로 올라서기 바로 전에 산성(山城)의 흔적인 듯 돌무더기들이 흩어져 있다. 그러다가 능선의 정점을 넘어서면 아직까지 원형(原形)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성벽(城壁)을 만날 수 있다.

 

 

 

합미산성터를 지나 30분 정도 더 걸으면 수성암질로 된 바위봉인 495m봉을 밟게 된다. 495m봉에 이르면 섬진강이 내려다보이고, 마령면 뜰 뒤로 내동산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마이산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서울 근교(近郊)에 있는 산 아닌가요?’ 산에 들어서면서 어느 일행이 한숨과 함께 내뱉는 질문이다. 서울근교의 도봉산이나 북한산에서 보았던 인파(人波)들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로 빼곡한 산길은 혼잡(混雜)하기 이를 데 없다. 늘어선 사람들로 인해 제 속도(速度)를 낼 수 없을 때에는 짜증을 내는 것 보다는 다른 소일거리를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위로 시선(視線)을 돌려본다. 주변은 암릉을 바라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할 뿐더러, 반듯이 정리된 마령면의 앞뜰이 서서히 녹색(綠色)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광경도 눈에 들어온다.

 

 

등산로 주변에 간간이 보이는 바위들이 우리가 흔히 봐온 바위들과는 완연히 차이가 난다. ‘! 옛날에도 콘크리트(concrete)가 있었던 모양이네?’ 어느 등산객의 말마따나 영락(零落)없이 콘크리트를 부어 놓았다. 모래와 자갈, 그리고 시멘트가 적절하게 배합된 콘크리트 모양으로 생긴 것이다. 마이산은 중생대(中生代, Mesozoic era) 백악기(白堊紀, Cretaceous period), 1억 년 전까지 담수호(潭水湖)였으나 큰 홍수 때 모래, 자갈 등이 물의 압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수성암(水成岩)으로 쌓였다가 약 7천만 년 전 지각변동(地殼變動)으로 솟아올라 지금의 신비한 바위산이 되었다고 한다.

 

 

 

495봉에서 봉우리 몇 개를 지나 안부에 떨어지면 낡은 철조망(鐵條網)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그 곁을 출입금지(出入禁止)’ 팻말이 지키고 있다(낡은 이정표 : 합미산성 2.3Km/ 대광봉 0.2Km/ 고금당 2.6Km). 대광봉을 거치지 말고 우회(迂廻)하여 곧바로 고금당으로 가라는 모양이다. 그러나 우선 이정표가 낡은 것을 보면, 대광봉을 오르내리는 안전(安全)시설이 만들어지기 전에 세워진 것 같고, 등산로를 폐쇄(閉鎖)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지나쳐버린다. 철조망을 넘자마자 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가파른 능선을 숨 가쁘게 오르다가, 마지막 철()난간을 잡고 길게 용틀임을 하다보면 이내 광대봉 정상에 닿게 된다. 정상에서는 사방으로 막힘없이 조망(眺望)이 터지는데, 특히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이 장관(壯觀)을 이룬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보흥사와 마령면이 자리하고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30분이 조금 더 지났다.

 

 

 

 

광대봉에서 급경사(急傾斜) 바윗길을 철난간과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선다.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내려서는 발걸음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아까 광대봉으로 오를 때에는 길 양쪽에 설치된 철()난간을 밖에서 잡고 오르는 사람들도 보였지만, 반대편 내리막길은 위험해서 결코 그러한 모험(冒險)을 시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광대봉을 내려서서 3분 정도 더 걸으면 오른편에 보흥사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보인다. 보흥사 갈림길을 지나쳐 맞은편 봉우리에 오르면 길 오른편에 널따란 암반(巖盤)이 보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들러보자. 이곳에 서면 광대봉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광대봉에서 철난간을 잡고 내려서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울긋불긋한 색깔들이 바위에 길게 띠를 만들고 있다. 바라보이는 광경은 비록 아름답지만 지금 저기를 내려오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니 지독한 패러독스(paradox)가 아니겠는가.

 

 

 

 

광대봉에서부터 마이산의 두 봉우리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은 마이산을 종주(縱走)하는 산행이다. 마이산을 단번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두 봉우리를 향하여 뻗어 있는 능선(稜線)을 따라 걸어가면서,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봉우리의 모습을 차곡차곡 담아보는 색다른 산행이다. 아직도 붐비는 사람들로 인해 제 속도(速度)를 낼 수가 없다. 길가에 단체로 식사를 하고 있는 무리들을 수도 없이 지나쳤건만 사람들의 숫자는 결코 줄어들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별수 없이 주변 풍경(風景)을 구경하는 것으로 소일(消日)을 삼아본다. 지금은 연록(軟綠)의 새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숲에 내려앉은 햇빛마저 한가롭게 느껴지는 정오(正午)무렵이다. 길가의 나무들은 굴참나무와 소나무가 알맞게 섞여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드는 바람 한 줄기는 능선을 오르느라 이마에 흘렀던 땀방울을 식혀주기에 넉넉하다. 사라져가는 땀방울 속에 한 주간(週間) 동안 도심(都心)에서 부대끼며 쌓인 번뇌(煩惱) 한 자락 슬그머니 놓아본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나오는 것은 잎사귀뿐만 아니다. 중간 중간에 연분홍 점()들도 찍혀 있다. 며칠 전에 올랐던 영취산의 진달래처럼, 봉우리 가득 펼쳐진 연분홍의 물결은 아니지만, 나뭇가지 사이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나를 보라며 추파(秋波)를 보내고 있다. 저렇게 방심(芳心)을 흔들고 있는 진달래를 보고도, 가슴 들뜨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지금은 스쳐가는 바람결에도 미소를 짓게 되는 봄이 아닌가..

 

 

광대봉을 출발해서 다시 봉우리 몇 개를 넘으면 고금당이다. 고금당으로 가는 길은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진행방향에서 마이산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금당 가까이에 이르면 너른 분지(盆地)가 보이고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 길은 고금당, 왼편으로 가면 비룡대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고금당(古金塘)100m도 채 되지 않으므로 고금당을 구경하고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비룡대로 가면 된다. 고금당은 아래에 있는 금당사와 연관이 있는 사찰이다. 무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원래의 금당사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금당사를 지으면서 이곳은 옛 고()’자를 붙여서 고금당(古金塘)이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는 대웅전 앞 난간에서 내려다보면 금당사와 남부주차장이 보이고, 진행방향으로 비룡대와 암마이봉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아직 숫마이봉은 보이지 않는다. 금당을 둘러보고 그냥 아래로 내려서도 비룡대 가는 길과 만날 수 있으니, 일부러 산허리를 밟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구태여 돌아 나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금당 뒤 삼거리로 돌아 나와 비룡대 방향으로 진행하자마자 우물이 보인다. 우물에 호스(hose)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고금당에 물을 공급하고 있는 모양이다. 샘터주변에는 몇몇 여인들이 나물을 뜯고 있다. 갈 길까지 멈춘 채로 나무을 뜯고 있는 여심(女心)에는 오로지 가족 사랑이라는 단 하나만의 생각만으로 꽉 차있지 않을까 싶다. 샘터를 뒤의 봉우리에 올랐다가 내려서면 오른편에서 오는 길 하나가 보인다. 아까 지나왔던 고금당에서 오는 지름길이다. 또 다시 작은 봉우리 몇 개를 오르내리면서 점점 비룡대에 가까워진다.

 

 

 

 

고금당을 출발한지 30분쯤 지나면 바위 봉우리 위로 오르는 긴 철계단(鐵階段)을 만난다. 이곳에서 주의할 점은 곧바로 계단을 오르지 말라는 것이다. 계단을 지나쳐 조금 더 바위능선을 밟으면 바위 봉우리 위로 오르는 철계단의 멋진 모습이 보이고, 그 위에 팔각정(八角亭)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팔각정은 산행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진안군청에서 지어놓은 정자(亭子)란다. 뾰쪽하게 치솟은 바위봉우리 위에 세워진 정자는 나름대로 멋을 자아내기 때문에 이제는 마이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名所)가 되었다.

 

 

 

비룡대도 역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잠깐 2층에서 마이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 본다. 암마이봉의 오른편으로 숫마이봉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왼편에는 공깃돌을 닮은 다섯 개의 암봉들이 연이어 늘어서서 아름다운 자태(姿態)를 뽐내고 있다. 삿갓봉이다. 삿갓봉에 오르면 마이산의 다른 면모(面貌)를 볼 수 있다는데, 사전준비(事前準備)가 부족했던 탓에 그냥 지나쳐 버리는 우()를 범해버렸다. 준비부족은 또다시 봉두봉을 그냥 지나쳐버렸고, 그 덕분에 난 멋진 수묵화(水墨畵)를 두 장이나 머릿속에 담아올 수 없었다.

▼ 암마이봉의 왼편에 보이는 봉우리가 삿갓봉이다.

 

 

팔각정을 내려와 봉우리 두어 곳을 지나면 암마이산 앞에 이르게 된다. 높이 솟은 마이산 봉우리가 눈앞에 우뚝 서 있다. 올려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솟아 있는 바위 봉우리들이 길손을 압도한다. 암마이봉의 거대한 암벽(巖壁)의 직전(直前)에 있는 사거리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막혀있다. 자연보호(自然保護)를 위해 2014년까지 휴식년제(休息年制 : 천왕문에서 암마이봉까지 0.9구간과, 천왕문에서 물탕골까지의 0.6구간)를 운영하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오른쪽의 탑사(塔寺)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왼편은 북부(北部)주차장으로 넘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20분 정도가 지났다.

 

▼ 지나온 능선, 비룡대와 팔각정이 아스라이 보인다.

 

 

산 아래 남부주차장에는 많은 차들이 눈에 띈다. 화사(華奢)하기로 두 번째 가라면 서운하다는 이곳 벚꽃이 피려면 아직 두어 주()가 남았는데도, 성급한 사람들은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에서 이곳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마는... 남부주차장에서 탑사를 잇는 1.5km의 길에 벚꽃이 만발하면, 하얗게 펼쳐진 꽃구름이 산위에까지 올라온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사거리에서 올려다본 마이산 봉우리는 여기저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저렇게 쉽게 바스라지면서 표면(表面)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현상을 타포니(Tafoni)지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타포니(Tafoni)는 벌집 모양의 자연 동굴을 뜻하는 코르시카(Corsica)지방의 방언(方言)이다.

 

 

암마이봉을 오르지 못한 아쉬운 마음으로 터벅거리며 탑사(塔寺 : 300m 거리)로 내려서는데, 무더기로 몰려있는 사람들 때문에 정체(停滯)현상을 빚고 있는 곳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른바 포토 존(Photo Zone)’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암마이봉의 우람한 바위벽()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야 뭐라고 하겠는가마는, 그로 인해 통행(通行)에 지장을 주는 일은 지양(止揚)해 주었으면 좋겠다. 더욱 눈살을 찌부리게 만드는 것은, 술에 취했는지 커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들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탑사에 들어서면서 문득 아수라장(阿修羅場)’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불교에서 아수라장이란 아수라왕이 제석천(帝釋天)과 싸운 마당을 말한다. 이곳은 사찰(寺刹)이 분명할진데, 그럼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아수라장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탑사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그들이 내뿜는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들이 내뱉는 말들은 고함에 가까운 수준이다. 함께 걷고 있는 일행이 건네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탑사는 그 이름도 탑에서 얻어왔고, 탑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니 당연히 이 절의 탑들은 그 숫자도 많을뿐더러, 생김새 또한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탑사에 있는 탑들은 모두 80여기(), 이 탑을 쌓은 이갑용처사가 1885년부터 30년에 걸쳐 쌓았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108()가 있었다고 한다. 이 탑들은 돌들을 다듬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맨 위에는 전국의 명산에서 한 두 개씩 주어온 돌을 얹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했다고 한다. 탑을 쌓은 이갑용처사의 정성이 돌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것이다.

* 탑사의 탑들을 살펴볼 것 같으면, 대웅전(大雄殿)의 뒤편 맨 윗자락에 가장 큰 2()의 천지탑(天地塔)을 세우고, 그 아래에다 동···북과 중앙을 의미하는 오방탑(五方塔)을 세웠다. 그리고 대웅전 아래에는 돌 하나씩을 층층이 쌓아올린 중앙탑을 앉히고, 맨 앞에 일광탑(日光塔)과 월광탑(月光塔)을 쌓았다. 탑사의 모든 것은 천지탑에서 시작되고, 천지탑으로 모아지는 형국(形局)이다. 그래서 이름 또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천지탑일 것이다.

* 탑사(塔寺), 1885년 이갑용(李甲用 1860~1957)이 마이산에 들어와 수도하면서 탑을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1935년에 목조함석지붕의 인법당과 산신각을 지어 부처님을 모셨으나, 당시에는 절 이름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평생 동안 쌓아온 탑들로 인해 언제부턴가 탑사(塔寺)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이갑용의 손자 이왕선이 한국불교태고종에 사찰등록을 하면서 정식으로 탑사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탑사의 탑들은 마이산탑(馬耳山塔)’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북도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 천지탑

 

 

탑사에서 천황문 방향으로 300m 정도 올라가면 은수사(銀水寺)가 있다, 절의 규모는 별로 크지 않으나 숫마이봉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모습은 자못 의젓하다. 전각(殿閣)의 뒤로 보이는 숫마이봉은 거대한 원추형의 돌기둥이다. 인간이 가까이 하려면 경외감(敬畏感)부터 드는 성스러운 산, 그래서 숫마이봉의 정상은 아직까지도 일반인들의 내왕(來往)을 허락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 은수사(銀水寺), 창건에 대한 기록이 분명하지 않은 태고종 소속의 사찰(寺刹)이다.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물을 마시고 물이 은()과 같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전해지지만 이것도 분명하지는 않다고 한다. 은수사의 마당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줄사철나무와 청실배나무가 있는데 청실배나무는 태조 이성계가 심은 나무라는 설이 전해지며 겨울에는 역()고드름 현상으로 유명하다. 청실배나무 아래에 물을 담아두면 고드름이 거꾸로 솟아오른다고 한다.

▼ 은수사

 

 

은수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요란스런 북소리가 들려온다. 마침 법고(法鼓)를 울리는 시간인 모양이다. 이 법고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樂器匠)인 윤덕징이 제작한 것으로서 그 길이가 무려 1.95m에 이르는 대형 법고이다

▼ 탑영제

 

 

남부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가에는 수십 년 묵은 벚꽃나무들이 양옆으로 도열(堵列)해 있다. 이곳으로 내려오는 버스 속에서 산행대장이 오늘의 산행일정을 소개하던 중에 벚꽃이 전국에서 가장 늦게 피는 곳이라고 알려주었는데,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벚꽃나무들은 아직까지도 꽃봉오리조차 열지 않고 있다. 이곳에 벚꽃터널이 만들어질 경우, 벚꽃과 마이산이 함께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를 만들어낸다는데, 그 절경(絶景)을 구경하는 것은 아무래도 다음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화려(華麗)함이 전국 최고라고 알려져 있으니 언제이고 간에 한번쯤은 조우(遭遇)해야 하지 않겠는가.

 

 

벚꽃 대신에 마이산 봉우리가 물그림자로 드리운다는 탑영제(塔影堤) 위에 떠다니는 보트를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호수를 지나면 곧이어 건물 전체를 금()으로 덧입힌 사찰(寺刹)이 오른편에 보인다. 천년고찰(千年古刹)이라는 금당사이다. 아까 산행중에 보았던 고금당(古金塘)이라는 금빛으로 빛나던 암자(庵子)는 이 금당사의 부속 암자인 모양이다.

* 금당사(金塘寺), 금당사(金堂寺)라고도 하는 김제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한다. 백제 의자왕10(65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11제자 중 한 사람인 무상(無上)이 그의 제자인 금취(金趣)와 함께 세웠다고 한다. 당시 위치는 지금보다 약 1.5떨어진 곳이었으며, 그래서 예전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조선 숙종1(1675)의 일이다. 문화재(文化財)로는 금당사 괘불(掛佛 :보물 제1266)과 나한전에 봉안된 6척의 목불좌상(木佛坐像 :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8), 대웅전 앞 돌탑(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2)이 있다.

 

 

산행날머리는 마이산 남부주차장

금당사를 벗어나자마자 세속(世俗)의 한 복판으로 들어선 느낌이 든다. 음식점으로부터 고기 익는 냄새가 넘쳐흐르고, 술 취한 등산객들이 쏟아내는 소음(騷音)들로 거리는 가득하다. 길의 좌우에 길게 늘어선 음식점마다 좌판(坐板)에서 돼지고기를 굽고 있다. 다른 유원지(遊園地)에서는 흔하지 않은 광경이다. 음식점들의 좌판마다 금방 구워낸 목등심과 등갈비가 수북하고, 그 곁에는 소주와 맥주 등 오만가지의 술들이 빼곡히 숲을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거리인 것이다. 그 환락의 거리 끝을 사찰(寺刹)의 일주문(一柱門)이 지키고 있다. 부처님이 주지육림의 거리를 품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진안군청(郡廳)에 바래본다. 일주문 밖에 집단시설지구(集團施設地區)를 마련하고 음식점들을 이주시키면 어떻겠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