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馬耳山, 673m)

 

산행일 : ‘12. 4. 15()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진안읍과 마령면의 경계

산행코스 : 강정리광대봉(609m)고금당비룡대(527m)암마이봉 밑탑사은수사금당사남부주차장(산행시간 : 5시간20)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마이산은 산의 대부분이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런데 마이산의 흙과 바위는 보통 산과는 다르다. 바위와 절벽을 이루고 있는 암석(巖石)들이 콘크리트와 같은 모양이다. 이를 수성암(水成岩)이라고 부른다. 1억년 전에 이곳은 거대한 호수(湖水)였다고 한다. 계곡과 강을 따라 흘러온 자갈과 모래가 쌓였다가, 땅이 솟아오르면서 현재와 같은 암석층을 이루게 된 것이다. 마이산은 암릉으로 이루어진 산세(山勢)도 빼어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세보다는 이 산에 있는 탑사(塔寺)라는 사찰(寺刹)을 둘러보려고 찾아온다. 그만큼 탑사에 세워진 탑()들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눈요깃거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 마이산은 계절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르다. 봄에는 안개를 뚫고 나온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고 해서 돛대봉, 여름에는 울창한 수목이 용의 뿔처럼 보인다고 해서 용각봉, 겨울에는 마치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고 해서 문필봉이다. 마이산은 가을에 부르는 이름이다.

 

산행들머리는 마령면 강정마을

익산포항고속도로를 통해 진안 I.C를 빠져나와 30번 국도(國道/ 임실방향)을 따라 달리다가 마령사거리(마령소재지)에서 오른편의 임진로로 접어들어 약 1Km정도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강정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강정리 도로에서 오른편 산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 입구에 산행안내도(案內圖), 그리고 들머리 초입의 묘지(墓地) 옆에 이정표(里程標 : '합미산성 0.5km, 광대봉 3.1km, 보흥사 3.8km, 고금당 5.5km)가 세워져 있으니 길을 혼동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 이정표는 다른 곳에서 본 이정표들과는 색다르다. 이정표의 아랫단에 산행지도(地圖)를 매달고 있는 것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세심한 배려(配慮)를 해준 진안군청 관계자들에게 심심한 사의(謝意)를 표해본다.

 

 

 

 

산길에 들어서면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길가의 나무들이 활짝 기지개를 켜고 있는 정경(情景)이 눈에 들어온다. 연록(軟綠)의 빛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나뭇가지들마다 표피(表皮)를 뚫고 나온 새로운 생명(生命)들이 의젓한 이파리의 형태를 띠어가고 있다.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落葉)들이 뒹굴고 있는 산길은, 사이사이를 헤집고 나온 연약한 새싹들이 기존(旣存)의 낙엽들을 가려버릴 정도로 제법 많이 자랐다. 아름다운 정경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사방을 푸르게 만든 연록의 새 생명들로 인해 내 마음까지도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이런 게 바로 봄 산행의 멋이요 매력(魅力)이다.

 

 

 

들머리에서 합미산성터까지는 500m 정도, 대략 20분 정도 오르면 합미산성터에 닿게 된다. 보통 때 같으면 15분이면 족하겠지만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제 속도(速度)를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능선으로 올라서기 바로 전에 산성(山城)의 흔적인 듯 돌무더기들이 흩어져 있다. 그러다가 능선의 정점을 넘어서면 아직까지 원형(原形)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성벽(城壁)을 만날 수 있다.

 

 

 

합미산성터를 지나 30분 정도 더 걸으면 수성암질로 된 바위봉인 495m봉을 밟게 된다. 495m봉에 이르면 섬진강이 내려다보이고, 마령면 뜰 뒤로 내동산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마이산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서울 근교(近郊)에 있는 산 아닌가요?’ 산에 들어서면서 어느 일행이 한숨과 함께 내뱉는 질문이다. 서울근교의 도봉산이나 북한산에서 보았던 인파(人波)들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로 빼곡한 산길은 혼잡(混雜)하기 이를 데 없다. 늘어선 사람들로 인해 제 속도(速度)를 낼 수 없을 때에는 짜증을 내는 것 보다는 다른 소일거리를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위로 시선(視線)을 돌려본다. 주변은 암릉을 바라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할 뿐더러, 반듯이 정리된 마령면의 앞뜰이 서서히 녹색(綠色)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광경도 눈에 들어온다.

 

 

등산로 주변에 간간이 보이는 바위들이 우리가 흔히 봐온 바위들과는 완연히 차이가 난다. ‘! 옛날에도 콘크리트(concrete)가 있었던 모양이네?’ 어느 등산객의 말마따나 영락(零落)없이 콘크리트를 부어 놓았다. 모래와 자갈, 그리고 시멘트가 적절하게 배합된 콘크리트 모양으로 생긴 것이다. 마이산은 중생대(中生代, Mesozoic era) 백악기(白堊紀, Cretaceous period), 1억 년 전까지 담수호(潭水湖)였으나 큰 홍수 때 모래, 자갈 등이 물의 압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수성암(水成岩)으로 쌓였다가 약 7천만 년 전 지각변동(地殼變動)으로 솟아올라 지금의 신비한 바위산이 되었다고 한다.

 

 

 

495봉에서 봉우리 몇 개를 지나 안부에 떨어지면 낡은 철조망(鐵條網)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그 곁을 출입금지(出入禁止)’ 팻말이 지키고 있다(낡은 이정표 : 합미산성 2.3Km/ 대광봉 0.2Km/ 고금당 2.6Km). 대광봉을 거치지 말고 우회(迂廻)하여 곧바로 고금당으로 가라는 모양이다. 그러나 우선 이정표가 낡은 것을 보면, 대광봉을 오르내리는 안전(安全)시설이 만들어지기 전에 세워진 것 같고, 등산로를 폐쇄(閉鎖)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지나쳐버린다. 철조망을 넘자마자 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가파른 능선을 숨 가쁘게 오르다가, 마지막 철()난간을 잡고 길게 용틀임을 하다보면 이내 광대봉 정상에 닿게 된다. 정상에서는 사방으로 막힘없이 조망(眺望)이 터지는데, 특히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이 장관(壯觀)을 이룬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보흥사와 마령면이 자리하고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30분이 조금 더 지났다.

 

 

 

 

광대봉에서 급경사(急傾斜) 바윗길을 철난간과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선다.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내려서는 발걸음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아까 광대봉으로 오를 때에는 길 양쪽에 설치된 철()난간을 밖에서 잡고 오르는 사람들도 보였지만, 반대편 내리막길은 위험해서 결코 그러한 모험(冒險)을 시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광대봉을 내려서서 3분 정도 더 걸으면 오른편에 보흥사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보인다. 보흥사 갈림길을 지나쳐 맞은편 봉우리에 오르면 길 오른편에 널따란 암반(巖盤)이 보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들러보자. 이곳에 서면 광대봉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광대봉에서 철난간을 잡고 내려서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울긋불긋한 색깔들이 바위에 길게 띠를 만들고 있다. 바라보이는 광경은 비록 아름답지만 지금 저기를 내려오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니 지독한 패러독스(paradox)가 아니겠는가.

 

 

 

 

광대봉에서부터 마이산의 두 봉우리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은 마이산을 종주(縱走)하는 산행이다. 마이산을 단번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두 봉우리를 향하여 뻗어 있는 능선(稜線)을 따라 걸어가면서,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봉우리의 모습을 차곡차곡 담아보는 색다른 산행이다. 아직도 붐비는 사람들로 인해 제 속도(速度)를 낼 수가 없다. 길가에 단체로 식사를 하고 있는 무리들을 수도 없이 지나쳤건만 사람들의 숫자는 결코 줄어들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별수 없이 주변 풍경(風景)을 구경하는 것으로 소일(消日)을 삼아본다. 지금은 연록(軟綠)의 새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숲에 내려앉은 햇빛마저 한가롭게 느껴지는 정오(正午)무렵이다. 길가의 나무들은 굴참나무와 소나무가 알맞게 섞여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드는 바람 한 줄기는 능선을 오르느라 이마에 흘렀던 땀방울을 식혀주기에 넉넉하다. 사라져가는 땀방울 속에 한 주간(週間) 동안 도심(都心)에서 부대끼며 쌓인 번뇌(煩惱) 한 자락 슬그머니 놓아본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나오는 것은 잎사귀뿐만 아니다. 중간 중간에 연분홍 점()들도 찍혀 있다. 며칠 전에 올랐던 영취산의 진달래처럼, 봉우리 가득 펼쳐진 연분홍의 물결은 아니지만, 나뭇가지 사이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나를 보라며 추파(秋波)를 보내고 있다. 저렇게 방심(芳心)을 흔들고 있는 진달래를 보고도, 가슴 들뜨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지금은 스쳐가는 바람결에도 미소를 짓게 되는 봄이 아닌가..

 

 

광대봉을 출발해서 다시 봉우리 몇 개를 넘으면 고금당이다. 고금당으로 가는 길은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진행방향에서 마이산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금당 가까이에 이르면 너른 분지(盆地)가 보이고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 길은 고금당, 왼편으로 가면 비룡대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고금당(古金塘)100m도 채 되지 않으므로 고금당을 구경하고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비룡대로 가면 된다. 고금당은 아래에 있는 금당사와 연관이 있는 사찰이다. 무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원래의 금당사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금당사를 지으면서 이곳은 옛 고()’자를 붙여서 고금당(古金塘)이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는 대웅전 앞 난간에서 내려다보면 금당사와 남부주차장이 보이고, 진행방향으로 비룡대와 암마이봉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아직 숫마이봉은 보이지 않는다. 금당을 둘러보고 그냥 아래로 내려서도 비룡대 가는 길과 만날 수 있으니, 일부러 산허리를 밟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구태여 돌아 나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금당 뒤 삼거리로 돌아 나와 비룡대 방향으로 진행하자마자 우물이 보인다. 우물에 호스(hose)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고금당에 물을 공급하고 있는 모양이다. 샘터주변에는 몇몇 여인들이 나물을 뜯고 있다. 갈 길까지 멈춘 채로 나무을 뜯고 있는 여심(女心)에는 오로지 가족 사랑이라는 단 하나만의 생각만으로 꽉 차있지 않을까 싶다. 샘터를 뒤의 봉우리에 올랐다가 내려서면 오른편에서 오는 길 하나가 보인다. 아까 지나왔던 고금당에서 오는 지름길이다. 또 다시 작은 봉우리 몇 개를 오르내리면서 점점 비룡대에 가까워진다.

 

 

 

 

고금당을 출발한지 30분쯤 지나면 바위 봉우리 위로 오르는 긴 철계단(鐵階段)을 만난다. 이곳에서 주의할 점은 곧바로 계단을 오르지 말라는 것이다. 계단을 지나쳐 조금 더 바위능선을 밟으면 바위 봉우리 위로 오르는 철계단의 멋진 모습이 보이고, 그 위에 팔각정(八角亭)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팔각정은 산행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진안군청에서 지어놓은 정자(亭子)란다. 뾰쪽하게 치솟은 바위봉우리 위에 세워진 정자는 나름대로 멋을 자아내기 때문에 이제는 마이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名所)가 되었다.

 

 

 

비룡대도 역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잠깐 2층에서 마이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 본다. 암마이봉의 오른편으로 숫마이봉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왼편에는 공깃돌을 닮은 다섯 개의 암봉들이 연이어 늘어서서 아름다운 자태(姿態)를 뽐내고 있다. 삿갓봉이다. 삿갓봉에 오르면 마이산의 다른 면모(面貌)를 볼 수 있다는데, 사전준비(事前準備)가 부족했던 탓에 그냥 지나쳐 버리는 우()를 범해버렸다. 준비부족은 또다시 봉두봉을 그냥 지나쳐버렸고, 그 덕분에 난 멋진 수묵화(水墨畵)를 두 장이나 머릿속에 담아올 수 없었다.

▼ 암마이봉의 왼편에 보이는 봉우리가 삿갓봉이다.

 

 

팔각정을 내려와 봉우리 두어 곳을 지나면 암마이산 앞에 이르게 된다. 높이 솟은 마이산 봉우리가 눈앞에 우뚝 서 있다. 올려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솟아 있는 바위 봉우리들이 길손을 압도한다. 암마이봉의 거대한 암벽(巖壁)의 직전(直前)에 있는 사거리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막혀있다. 자연보호(自然保護)를 위해 2014년까지 휴식년제(休息年制 : 천왕문에서 암마이봉까지 0.9구간과, 천왕문에서 물탕골까지의 0.6구간)를 운영하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오른쪽의 탑사(塔寺)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왼편은 북부(北部)주차장으로 넘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20분 정도가 지났다.

 

▼ 지나온 능선, 비룡대와 팔각정이 아스라이 보인다.

 

 

산 아래 남부주차장에는 많은 차들이 눈에 띈다. 화사(華奢)하기로 두 번째 가라면 서운하다는 이곳 벚꽃이 피려면 아직 두어 주()가 남았는데도, 성급한 사람들은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에서 이곳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마는... 남부주차장에서 탑사를 잇는 1.5km의 길에 벚꽃이 만발하면, 하얗게 펼쳐진 꽃구름이 산위에까지 올라온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사거리에서 올려다본 마이산 봉우리는 여기저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저렇게 쉽게 바스라지면서 표면(表面)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현상을 타포니(Tafoni)지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타포니(Tafoni)는 벌집 모양의 자연 동굴을 뜻하는 코르시카(Corsica)지방의 방언(方言)이다.

 

 

암마이봉을 오르지 못한 아쉬운 마음으로 터벅거리며 탑사(塔寺 : 300m 거리)로 내려서는데, 무더기로 몰려있는 사람들 때문에 정체(停滯)현상을 빚고 있는 곳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른바 포토 존(Photo Zone)’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암마이봉의 우람한 바위벽()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야 뭐라고 하겠는가마는, 그로 인해 통행(通行)에 지장을 주는 일은 지양(止揚)해 주었으면 좋겠다. 더욱 눈살을 찌부리게 만드는 것은, 술에 취했는지 커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들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탑사에 들어서면서 문득 아수라장(阿修羅場)’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불교에서 아수라장이란 아수라왕이 제석천(帝釋天)과 싸운 마당을 말한다. 이곳은 사찰(寺刹)이 분명할진데, 그럼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아수라장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탑사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그들이 내뿜는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들이 내뱉는 말들은 고함에 가까운 수준이다. 함께 걷고 있는 일행이 건네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탑사는 그 이름도 탑에서 얻어왔고, 탑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니 당연히 이 절의 탑들은 그 숫자도 많을뿐더러, 생김새 또한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탑사에 있는 탑들은 모두 80여기(), 이 탑을 쌓은 이갑용처사가 1885년부터 30년에 걸쳐 쌓았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108()가 있었다고 한다. 이 탑들은 돌들을 다듬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맨 위에는 전국의 명산에서 한 두 개씩 주어온 돌을 얹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했다고 한다. 탑을 쌓은 이갑용처사의 정성이 돌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것이다.

* 탑사의 탑들을 살펴볼 것 같으면, 대웅전(大雄殿)의 뒤편 맨 윗자락에 가장 큰 2()의 천지탑(天地塔)을 세우고, 그 아래에다 동···북과 중앙을 의미하는 오방탑(五方塔)을 세웠다. 그리고 대웅전 아래에는 돌 하나씩을 층층이 쌓아올린 중앙탑을 앉히고, 맨 앞에 일광탑(日光塔)과 월광탑(月光塔)을 쌓았다. 탑사의 모든 것은 천지탑에서 시작되고, 천지탑으로 모아지는 형국(形局)이다. 그래서 이름 또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천지탑일 것이다.

* 탑사(塔寺), 1885년 이갑용(李甲用 1860~1957)이 마이산에 들어와 수도하면서 탑을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1935년에 목조함석지붕의 인법당과 산신각을 지어 부처님을 모셨으나, 당시에는 절 이름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평생 동안 쌓아온 탑들로 인해 언제부턴가 탑사(塔寺)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이갑용의 손자 이왕선이 한국불교태고종에 사찰등록을 하면서 정식으로 탑사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탑사의 탑들은 마이산탑(馬耳山塔)’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북도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 천지탑

 

 

탑사에서 천황문 방향으로 300m 정도 올라가면 은수사(銀水寺)가 있다, 절의 규모는 별로 크지 않으나 숫마이봉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모습은 자못 의젓하다. 전각(殿閣)의 뒤로 보이는 숫마이봉은 거대한 원추형의 돌기둥이다. 인간이 가까이 하려면 경외감(敬畏感)부터 드는 성스러운 산, 그래서 숫마이봉의 정상은 아직까지도 일반인들의 내왕(來往)을 허락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 은수사(銀水寺), 창건에 대한 기록이 분명하지 않은 태고종 소속의 사찰(寺刹)이다.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물을 마시고 물이 은()과 같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전해지지만 이것도 분명하지는 않다고 한다. 은수사의 마당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줄사철나무와 청실배나무가 있는데 청실배나무는 태조 이성계가 심은 나무라는 설이 전해지며 겨울에는 역()고드름 현상으로 유명하다. 청실배나무 아래에 물을 담아두면 고드름이 거꾸로 솟아오른다고 한다.

▼ 은수사

 

 

은수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요란스런 북소리가 들려온다. 마침 법고(法鼓)를 울리는 시간인 모양이다. 이 법고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樂器匠)인 윤덕징이 제작한 것으로서 그 길이가 무려 1.95m에 이르는 대형 법고이다

▼ 탑영제

 

 

남부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가에는 수십 년 묵은 벚꽃나무들이 양옆으로 도열(堵列)해 있다. 이곳으로 내려오는 버스 속에서 산행대장이 오늘의 산행일정을 소개하던 중에 벚꽃이 전국에서 가장 늦게 피는 곳이라고 알려주었는데,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벚꽃나무들은 아직까지도 꽃봉오리조차 열지 않고 있다. 이곳에 벚꽃터널이 만들어질 경우, 벚꽃과 마이산이 함께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를 만들어낸다는데, 그 절경(絶景)을 구경하는 것은 아무래도 다음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화려(華麗)함이 전국 최고라고 알려져 있으니 언제이고 간에 한번쯤은 조우(遭遇)해야 하지 않겠는가.

 

 

벚꽃 대신에 마이산 봉우리가 물그림자로 드리운다는 탑영제(塔影堤) 위에 떠다니는 보트를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호수를 지나면 곧이어 건물 전체를 금()으로 덧입힌 사찰(寺刹)이 오른편에 보인다. 천년고찰(千年古刹)이라는 금당사이다. 아까 산행중에 보았던 고금당(古金塘)이라는 금빛으로 빛나던 암자(庵子)는 이 금당사의 부속 암자인 모양이다.

* 금당사(金塘寺), 금당사(金堂寺)라고도 하는 김제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한다. 백제 의자왕10(65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11제자 중 한 사람인 무상(無上)이 그의 제자인 금취(金趣)와 함께 세웠다고 한다. 당시 위치는 지금보다 약 1.5떨어진 곳이었으며, 그래서 예전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조선 숙종1(1675)의 일이다. 문화재(文化財)로는 금당사 괘불(掛佛 :보물 제1266)과 나한전에 봉안된 6척의 목불좌상(木佛坐像 :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8), 대웅전 앞 돌탑(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2)이 있다.

 

 

산행날머리는 마이산 남부주차장

금당사를 벗어나자마자 세속(世俗)의 한 복판으로 들어선 느낌이 든다. 음식점으로부터 고기 익는 냄새가 넘쳐흐르고, 술 취한 등산객들이 쏟아내는 소음(騷音)들로 거리는 가득하다. 길의 좌우에 길게 늘어선 음식점마다 좌판(坐板)에서 돼지고기를 굽고 있다. 다른 유원지(遊園地)에서는 흔하지 않은 광경이다. 음식점들의 좌판마다 금방 구워낸 목등심과 등갈비가 수북하고, 그 곁에는 소주와 맥주 등 오만가지의 술들이 빼곡히 숲을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거리인 것이다. 그 환락의 거리 끝을 사찰(寺刹)의 일주문(一柱門)이 지키고 있다. 부처님이 주지육림의 거리를 품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진안군청(郡廳)에 바래본다. 일주문 밖에 집단시설지구(集團施設地區)를 마련하고 음식점들을 이주시키면 어떻겠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