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산(禹金山, 331.5m)

 

산행일 : ‘15. 7. 28()

소재지 : 전북 부안군 상서면

산행코스 : 개암산천305m우금산성우금산묘련재우금바위원효굴개암사개암사주차장(산행시간 : 2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특징 : 변산반도국립공원 동북부 지역에 위치한 산으로서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나 특이하게도 거대한 두 개의 바위봉우리가 솟아올랐다. 마치 주변의 있었어야할 바위의 기세(氣勢)들이 한 곳으로 모여 위로 솟구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봉우리들이 우람스럽다. 거기다 생김새까지 뛰어나다보니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하나 사람들을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산자락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고찰(古刹) 개암사와 아름다운 호수 개암저수지이다. 거기다 우금바위를 파고 들어간 원효굴이나 배틀굴, 그리고 원효방까지 더하면 어느 유명 관광지에 못지않은 볼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개암산천(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567-17)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부안읍 방향 30번 국도를 탄다. 잠시 후 봉황교차로(交叉路 : 부안읍 동진면 봉황리)에서 좌회전 23번 국도를 타고 줄포(부안군) 방향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봉은삼거리(상서면 감교리)에 이른다. 이곳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우회전하여 개암사 방향으로 들어가면 개암저수지 바로 아래에 있는 개암산천이라는 음식점 앞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길가에 커다란 음식점 입간판에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닭과 오리요리 전문식당인 개암산천입간판의 오른편 뒤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힘겨운 오르막길이 제법 오래 이어질 것이라던 산행대장의 말이 맞는 모양이다. 그녀도 아직 가보지 못한 코스라고 해서 틀려주기를 간절히 빌었는데도 말이다. 오늘 같이 무더위와 습기(濕氣)가 한꺼번에 높은 날에는 훨씬 더 힘들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가파른 오르막길은 5분도 채 되지 않아 끝을 맺는다. 고맙게도 산행대장의 말이 틀려준 것이다.

 

 

 

능선은 온통 소나무들이 차지하고 있다. 아까부터 짙은 솔향이 코끝을 스치고 있는 이유이다. 그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묻어 있을 것이다. 소나무가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이니까 말이다. 이런 길에서는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발걸음은 더디게 그리고 호흡은 크게 하면서 느긋하게 걸어본다. 코끝을 맴돌던 솔향이 온몸으로 펴져나간다. 그리고 심신(心身)은 한없이 맑아진다. 피톤치드의 효과가 아닐까 싶다. 피톤치드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이 각종 병충해(病蟲害)에 저항하기 위해 배출하는 분비물(分泌物)을 말한다. 이 물질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균작용은 물론이고, 장과 심폐기능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스트레스 해소에도 뛰어난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능선을 걷다보면 납작 엎드려야만 겨우 길을 열어주는 곳도 만나게 된다. 이 근처에 부안 마실길9코스인 반계 선비길이 지나간다더니 벌써부터 예절교육을 시키고 있나보다. 누군가 높이 오를수록 자세를 낮추라고 했다. 자세를 낮추는 것은 꼭 높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예절교육은 자세를 낮추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나면 왼편으로 난 갈림길이 보인다. 아마 묘련골에서 올라오는 길인 모양이다. 개의치 않고 능선을 탄다. 산길은 산길을 하나 더 합치고 나서도 변함이 없다. 길 찾기가 힘들 정도로 잡목(雜木)과 웃자란 잡초들이 능선에 가득한 것이다.

 

 

이어지는 산길은 완만(緩慢)한 오르막길이다. 물론 내려가는 구간도 있다. 그러나 그 거리가 짧은데다가 경사(傾斜)까지 약하기 때문에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다. 그저 계속해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산이 낮다보니 급하게 고도(高度)를 올릴 필요가 없었나보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이 지나면 번갈아가면서 좌우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오른편으로는 상서면의 들녘이 펼쳐지는데, 그 가운데에 보이는 물빛은 아마 청림제일 것이다. 그리고 저 멀리 거대한 바위봉우리도 하나 보인다. 주위가 온통 흙산인지라 큰 바위를 찾아볼 수 없는데 유독 저 바위만이 거대하게 솟아올랐다. 일대의 바위들을 모두 모아다가 하나로 뭉쳐 놓은 모양이다. 아니면 근방의 지기(地氣)가 모여 하나의 바위로 솟구쳤던지 말이다. 자 바위가 바로 우금산의 명물인 우금바위이다. 그 명물을 오늘 처음으로 조우(遭遇)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우금바위를 옆에 끼고 걷는 산행이 이어진다.

 

 

 

산에 들어섰고, 그리고 능선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오감(五感)을 일깨우는 산 향기, 숲을 스치는 바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지쳤던 마음이 회복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 모든 게 산길이 편한 덕분이 아닐까 싶다. 비록 잡목(雜木)과 웃자란 잡초가 갈 길을 더디게 만들고 있지만 능선은 완만하고 흙길은 걷기에 딱 좋다. 이런 산행이 바로 힐링(healing)산행일 것이다.

 

 

 

조망을 즐기면서 걷다보면 잠시 후에는 지도상의 305m봉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한 시간 만이다. 305m봉은 정상석이나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없는 보잘 것 없는 산봉우리에 불과하지만 조망(眺望)만은 괜찮은 편이다. 부안군 일원의 산들이 마치 키 재기라도 하려는 듯이 올망졸망하게 늘어서 있다. 비록 연무(煙霧)에 가려 어느 산이 어느 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305m봉에서 산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지는 산길도 거칠기는 매한가지이다. 능선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잡목과 잡초들이 자꾸만 갈 길을 더디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걷다보면 본래의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는 옛 성곽(城郭)을 만난다. 지방기념물 제20호인 우금산성(禹金山城)이다.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백제가 멸망(660)하고 난 뒤,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僧侶) 도침, 왕자 부여풍(扶餘豐)’은 백제유민을 이끌고 백제 부흥운동을 펼쳤다. 그 마지막 근거지가 개암사를 품고 있는 주류성, 즉 우금산성이다. 4년에 걸친 백제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백제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 망국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우금산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 영조 때에 엮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곽(城郭) 부안조'우진고성(禹陣古城)은 우금성이라고도 부르는데 변산에 있다. 우진암으로부터 산을 따라 양쪽 기슭을 타고 내려와 골짜기에 합쳐지는데 둘레는 10리요, 민간에 전하기로는 삼한시대에 우() () 두 장군이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지금은 모두 퇴폐하였는데 그 골짜기에 묘암사가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100m쯤 되는 성벽구간은 끝나갈 즈음 산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능선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우금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공터를 만들어내지 못할 정도로 비좁은 정상의 한가운데에는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石塔)이 점령하고 있다. 앙증맞게 생긴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은 돌탑의 앞에다 자리를 잡았다. 돌탑의 뒤를 지키고 있는 국기봉이 여간 듬직한 게 아니다. 봉에 매달린 태극기가 온전하지 못한 게 흠이지만 말이다. 참고로 우금산은 한국의 신종교(新宗敎) 중 하나인 증산교(甑山敎)를 창시했던 강증산(姜甑山)의 자취가 서린 곳이다. 그가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했던 곳이 바로 우금산에 자리 잡은 개암사라는 것이다. 증산교는 1902년 강일순(姜一淳)이 창시한 종교로서 창시자의 호(甑山)를 따라 증산교라고 부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신도들이 외는 주문인 태을주(太乙呪)훔치훔치…….’로 시작하는 것을 본떠 훔치교(吽哆敎)라고도 불리었다. 증산교에서 말하는 천지공사란 강일순이 구천상제의 권능으로 천지의 운도를 뜯어고쳐 말세의 재앙과 불행을 제거하고 후천세계를 개벽한다는 것을 말한다. 증산교는 강일순의 사후(死後) 수없이 많은 지파로 갈라졌으며, 대표적인 교단으로는 현재 증산도와 대순진리회, 태극도 등이 있다.

 

 

정상에서의 시야(視野)는 넓다. 사방으로 막힘이 없는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멋진 바위줄기도 보이고 골짜기 건너에 있는 쇠뿔바위와 의상봉 등 변산의 아름다운 기암괴봉(奇巖怪峰)들도 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른편으로도 올망졸망한 산들이 수없이 널려있다. 이곳 부안 땅이 서해안에 자리 잡은 평야지대라고 예상했던 내 앎이 순식간에 허사가 되는 순간이다.

 

 

정상에서 우금암으로 가는 길은 즐거움의 연속이다. 빼어난 자태의 우금암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마치 시루떡 모양의 바위가 곳곳에 자리를 잡은 282봉을 넘으면 이내 묘련재에 이르게 된다. 우금산 정상에서 20분이 조금 못 걸린 지점이다. 이곳에서 왼편은 묘련골로 내려서는 길, 우금바위로 가려면 곧장 능선을 따르면 된다.

 

 

 

묘련재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거대한 암벽을 만난다. 산길은 그 벼랑을 피해 오른쪽으로 우회로(迂廻路)를 만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우금바위를 파고 들어간 작은 동굴 앞에 이르게 된다. 베틀굴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동굴로서 비록 규모는 작으나 깊이는 제법 된다.

 

 

 

 

 

베틀굴에서 왼편 비탈길로 올라선다. 입구에 세워진 출입금지를 알리는 현수막(懸垂幕)은 잠깐 무시하기로 한다. 우금바위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바라 싶다는 욕망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이다. 2~3분쯤 올라섰을까 두 암봉의 사이에 있는 안부에 이른다. 누군가 우금산이라고 쓰인 정상표지판을 매달아 놓았다. 그러나 이 정상판은 자리를 잘못 잡았다. 이곳은 우금바위, 우금산의 정상은 이곳이 아니라 아까 지나왔던 331m봉이다.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지도 역시 자리를 잘못 잡았기는 매한가지이다.

 

 

 

왼편 벼랑으로 접근해 본다. 바위의 갈라진 틈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길이 나있다. 잠깐 오르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안부에서 바라보고 있는 집사람의 표정이 여간 사나워보였기 때문이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더 이상은 진행이 불가능 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만큼 오르는 길이 아슬아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확실한 안전장비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접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안부에서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10m쯤 되는 절벽에 로프가 매달려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전성을 생각해 오르는 것을 포기했지만 난 올라보기로 한다. 매어져 있는 로프가 생각보다는 굵은데다가 매듭까지 만들어져 있어 오르는 것이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먼저 오른 일행들 몇 사람이 둘러앉아 간식을 먹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참고로 우금바위는 위금암, 우금암, 우진암, 울금바위 등 여러 가지의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또 이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물론이다. 이 바위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고려 무신정권 때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17에 나온다. '위금암은 신라 장군 위금이란 이가 이 바위에 와서 석성을 쌓고 적을 막았는데 아직도 흔적이 남아있다. 따라서 위금암이라 부른다.'는 기록이다. 또한 조선시대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1432년 맹사성 등이 편찬)' 부안현 산천 조에는 '우진암(禹陣巖)'으로 나와 있고, '변산의 고스락에 있다. 몸통이 둥글고 높고 크며 눈처럼 하얗게 보인다. 바위 아래 굴이 세 개 있고, 각각 그 굴에 중이 거처하고 있으며, 바위 위는 평평하여 올라가 조망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론 이 바위에서 김유신 장군과 당나라의 소정방이 만났다고 해서 우금바위라는 얘기도 있지만 그냥 흘려버려도 괜찮을 듯 싶다.

 

 

 

우금바위에 오르면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위용을 자랑하는 건너편 암봉은 보면 볼수록 위엄으로 넘치고,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벼랑 아래 푸른 숲 속 한가운데에는 개암사가 다소곳이 들어앉아 있다. 그리고 서쪽에는 변산의 산자락이 너울너울 물결을 친다. 개암사를 품속에 안은, 시원한 바람이 맴도는 이 공간에 재미난 옛이야기들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다.

 

 

 

 

다시 베틀굴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나가면 잠시 후 삼거리에 이른다. 벤치를 갖춘 쉼터를 겸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오늘 처음으로 이정표(개암사 800m/ 월정약수터 2.53Km)를 만나게 된다. 아쉽게도 우금바위 방향은 나타나있지 않았다. 반질반질하도록 길이 잘 닦여있는데도 말이다. 아마 위험하니 그쪽 방향으로는 얼씬도 하지마라는 모양이다. 베틀굴 앞에 세워져 있던 출입금지플레카드(placard)가 그 증거였을 것이다. 이정표의 기둥에 부안 마실길이라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부안판 둘레길로 보면 된다. 그중 9코스(반계선비길)이 이곳을 지나간다고 해서 이정표에다 이를 표기해 놓은 모양이다. 예로부터 부안은 맛과 풍경, 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어 변산삼락(邊山三樂)’이라 불려왔다. 이러한 삼락(三樂)을 직접 느껴볼 수 있도록 꾸민 길이 부안 마실길이다. 총 길이가 163Km인데, 변산 마실길 66km(8개 코스)와 내륙 마실길 97km(6개 코스)로 구성돼 있다. 부안의 맛과 멋을 느껴볼 겸 해서 한번쯤은 걸어볼만한 길이지 않나 싶다.

 

 

삼거리에서 왼편 개암사 방향으로 내려서서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도록 웃자란 산죽(山竹) 숲길을 잠시 걸으면 우금바위의 벼랑 아래에 자리 잡은 커다란 두 겹의 굴이 나온다. 우금바위의 랜드마크(land mark)라 할 수 있는 원효굴이다. 원효굴은 반달 모양으로 높이 20~30m, 20~30m에 깊이 역시 20~30m 될 것 같다. 마치 큼직한 실내체육관의 반쪽처럼 보인다. 그 안쪽의 굴은 높이 7~8m, 10m, 깊이 6~7m쯤 되어 수도하기에 매우 좋을 듯싶다.

 

 

 

원효굴에서 우린 원효와 의상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원효와 의상이 마지막 백제의 땅에 와 개암사를 중창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누군가는 백제 유민의 망국의 한을 위로하고 그들의 패배의식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고 말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물리적인 통일이 아닌 정신적인 통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개암사는 백제의 마지막이자 삼국통일의 진정한 시작점이 된다. 믿거나 말거냐는 본인 마음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굴에 앉아 바깥쪽을 내다보면 거대한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보는 기분이다. 과연 원효대사는 이곳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또 무엇을 생각했을까. 창 없는 창을 통해 나타나는 세상이 원효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내 눈에는 과연 무엇이 보일까. 결과는 뻔했다. 세파(世波)에 부대끼며 살아가기 바쁜 중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셈이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는 얘기이다. 그저 천정의 바위틈에서 거꾸로 매달려 자라고 있는 작은 나무들만이 눈에 들어왔을 뿐인 것이다. 하긴 물기가 전혀 없는 데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라고 있는 나무들을 보고 끈질긴 삶의 의지를 읽기는 읽었다.

 

 

원효굴 앞에 세워진 이정표(개암사 0.7Km/ 만석동 5.7Km) 곁에는 우금산성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백제 의자왕 20(660) 무렵 복신(福信)장군이 백제의 유민을 규합하여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다가 패한 유서 깊은 곳으로서 그 길이만 해도 3Km가 넘는단다. 그러나 사실 이 부근에서는 성터의 흔적을 볼 수 없다. 우리야 305m봉에서 우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성곽(城郭)을 보았지만, 처음으로 이곳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시설물일 수도 있겠다.

 

 

이정표 근처에서 희미한 길의 흔적이 하나 왼편으로 나타난다. 이곳에도 역시 출입을 금()하는 서슬 시퍼런 현수막(懸垂幕)이 걸려있다. 그냥 들어서고 본다. 비록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을망정 원효대사가 암자(庵子)를 지었다는 원효방을 멀리서라도 기웃거릴 수 있을까 해서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출입금지 현수막을 만난다. 이번엔 위험해서 출입을 금()한단다. 현수막의 바로 옆은 우금바위가 빚어 놓은 수직(垂直)의 바위벼랑이다. 원효방으로 가는 길은 그 벼랑의 중간쯤에 아슬아슬하게 나있다. 만일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에는 최소한 중상은 각오해야 한다. 벼랑을 부둥켜안다 시피해서 굴 쪽으로 다가가보면 원효방이 나타난다. 바위절벽에 커다란 굴이 두 개가 뚫려있다. 반반한 동굴의 앞마당 끝에는 난간이 만들어져 있다. 스님들이 수행했던 흔적이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저 동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괸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면서부터 샘이 솟아났단다.

 

 

원효방을 먼발치에서 구경하고, 아니 겉모습만 힐끗 보고나서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 나온다. 그리고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가는 길 초반은 제법 가파르다. 그냥 내려서지를 못하고 갈지()자로 길을 만들고서야 내려설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런 구간은 금방 끝을 맺는다. 산이 본래 낮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산길은 곱다고 볼 수 있다. 경사(傾斜)가 완만한데다가 바닥 또한 흙으로 이루어져 고른 편이기 때문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15분 남짓 걸었을까 저만큼에 개암사(開巖寺)가 나타난다. 절 마당에 서자 대웅전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대웅전의 지붕 위에는 우금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이 절을 위해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만큼 개암사와 잘 어울린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울금바위에서 좌우로 나뉜 산줄기는 마치 사찰을 호위라도 하려는 듯 빙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만다. 그리곤 대뜸 내뱉는 한마디는 참 기가 막힌 곳에 들어앉았구나.’이다. 풍수에 문외한(門外漢)인 내가 보기에도 천하의 명당(明堂)으로 보였던 것이다.

 

 

개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백제 무왕 35(634) 묘련(妙漣)이 창건하였다 전한다. 삼국통일 후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우금암(禹金巖) 밑의 굴속에 머물면서 중수(676)하였고, 고려 충숙왕 1(1314)에는 원감국사(圓鑑國師)가 조계산 송광사에서 이곳 원효방(元曉房우금굴)으로 와서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창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단다. 이후로도 조선 정조7(1783)의 승담(勝潭) 등 여러 번의 중수(重修)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하여 인등전, 응향각, 응진전, 일주문과 월성대 및 요사가 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대표적인 조선 중기 건물이다. 이 외에도 보물 제1269호인 영산회괘불탱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인 석조지장보살 좌상(123)’, ‘개암사 동종(126)’이 있다. 참고로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와 진()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조선시대에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로 장중함을 느끼게 한다. 자세히 보면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적힌 현판이 건물에 비해 유난히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현판 뒤 2개의 도깨비 모양의 귀면상(鬼面像)을 가리지 않기 위함이란다. 대웅전 정면에 귀면상을 내건 사찰은 흔치 않은데, 이런 점을 살리기 위한 결과라는 것이다. 대웅전 안에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보면 또 한 번 놀란다. 오밀조밀한 조각들이 마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정교하게 조각된 용()들이 몸부림치고, 연꽃 위에선 봉황(鳳凰)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부처 머리 위의 닫집의 화려함도 놀랍다. 그 작은 닫집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용이 무려 5마리나 된단다. 그러나 확인해 보는 것까지는 생략하고 발길을 돌린다. 불심(佛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난, 그저 상황을 제대로 인식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절을 막 빠져나오려는데 특이한 다리 하나가 눈에 띈다. 평범하게 생긴 것이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양새이지만, 다리의 이름에다 불이교((不二橋)라고 붙인 경우는 난생 처음으로 본다. 불이(不二)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뜻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그리고 절에서는 보통 본당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에다가 그 이름을 붙인다. ‘불이문(不二門)’이라고 말이다. 이는 이 문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부처와 중생이 본디 하나이고, ()과 사(), 그리고 만남과 이별 또한 알고 보면 그 근원은 하나이니 이 같은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이문은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왜 이런 다리에다 불이(不二)’란 이름을 붙였을까. 본당에서 멀리 떨어져있고, 거기다 일반 대중이 수시로 건너다니는 이런 곳에다 말이다. 무릇 해탈이 스님들만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닐지니 진리를 깨닫는 자 누구라도 해탈에 이를 수 있고, 불국토에 들 수 있음을 알려주려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산행날머리는 개암사주차장

불이교에서 절 밖으로 빠져나오는 길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치솟은 전나무들은 그 생김새만 갖고도 눈요깃감으로 부족함이 없고 거기다 코끝을 스쳐가는 짙은 솔향은 산행에 지친 육신(肉身)을 원위치로 되돌려 놓는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순간이다. 그렇게 흥얼거리며 얼마간 걷다보면 일주문이 나온다. 그런데 일주문의 현판이 좀 이상하다. 개암사의 뒷산이 우금산으로 알았는데 능가산(楞伽山)으로 적혀있는 것이다. 개암사를 중창하여 대사찰로 만들었다는 원감국사(圓鑑國師)가 능가경(楞伽經)을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했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것을 이유로 능가산이란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일주문을 나서 사바세계로 들어서면 저만큼에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가 보이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30분이 걸렸다. 그러나 소요 시간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눈요기를 즐기는데 얼마만큼 시간을 할애하느냐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저것 다 빼고 순수하게 걷는 시간만 헤아린다면 2시간30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무량산(無量山, 586.4m) - 용궐산(龍闕山=龍骨山, 645m)

 

산행일 : ‘15. 2. 7()

소재지 : 전북 순창군 동계면

산행코스 : 구미저수지각시봉무량산 정상어치계곡용골산장구목재장구목가든(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무량산과 용골산은 접근성이 떨어진 탓에 찾는 이들이 드물던 오지(奧地)의 산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순창군에서 관광객(觀光客) 유치를 위해 대대적으로 등산로와 관광도로 등을 정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주요 원인은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장구목 근처의 풍경(風景)이 아닐까 한다. 두 산의 아래를 휘감아 돌며 흐르는 섬진강 상류인 장구목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천혜(天惠)의 수석공원(壽石公園)으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구미리(순창군 동계면) 구미저수지

순천-완주 고속도로 오수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國道/ 옥과·담양방향)를 타고 달리면 임실군 삼계면을 거쳐 순창군 동계면소재지(所在地)인 현포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현포리에 있는 연산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1번 국도의 인계·정읍방면으로 10(4Km) 남짓 들어가면 구미리이다. 또한 전주에서 27번 국도를 타고 강진면(임실군)소재지인 갈담리까지 온 후, 이곳에서 717번 지방도를 타고 들어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참고로 청마산악회의 버스는 후자를 택했다. 산행은 구미리 조금 못미처에 있는 구미저수지에서 시작된다.

 

 

 

 

구미저수지 근처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올라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이곳에서 500m쯤 더 들어가면 **)구미리이다. 들머리에 등산로안내도와 이정표(무량산 2.54Km/ 용동마을 0.5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자락에 작달막한 과일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것을 보면 과수원으로 가꾸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6~7분쯤 지나면 능선 위에 올라서게 되면서 임도(林道)를 만난다. 임도는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인데다가 경사(傾斜)까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 구미(龜尾)마을, 조선의 태조가 등극할 무렵 남원 양()씨가 마을 터를 닦은 곳으로 이후 600여 년간 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 마을 앞에 있는 거북모양의 바위(일명 거북바위라 불림)의 꼬리가 마을로 향해 있다고 해서 구미(龜尾)’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한편으로는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빠져드는 금구몰미(金龜沒尾)의 형상을 줄인 것이라는 설()도 있다. 밤나무가 농가의 주 소득원(所得原)이며, 마을에는 고려 홍패(1981713일 보물로 지정)2점이 보존되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은 농촌진흥청장이 선정하는 건강 장수마을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구미마을은 세 개의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졌는데, 중앙에 위치한 마을을 중동이라고 부르며, 동쪽은 용동, 그리고 서쪽에 있는 마을을 주서동이라고 부른다.

 

 

임도를 따라 다시 6~7분쯤 걸으면 갈림길(이정표 : 무량산정상 2.0Km/ 용동마을 0.5Km/ 구미저수지 0.54Km)을 만나게 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구미리 용동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삼거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 난 한참동안을 용동마을 방향에다 시선을 고정시킨다. 하고 싶은 뭔가를 못한 서운함 때문이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는 집사람에게 용동마을에 있는 새사도교회(New Apostolic Church)라는 우리에게 낯선 교파(敎派)에서 세운 교회를 구경시켜 주려고 했는데 들머리가 변경된 덕분에 그 계획이 어긋나 버린 서운함이다. 새사도교회는 본부를 프랑크푸르트의 암마인에 두고 있는 교인의 수()라고 해봐야 전 세계에 걸쳐 고작 100만 명이 채 안 되는 조그만 교파로서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죽은 사도들을 대신하여 교회를 이끌어갈 만한 새로운 사도(Apostle)들이 임명되어야 한다고 믿던 '가톨릭 사도교회(Catholic Apostolic Church)‘의 회원들이 만들었다. 새사도교회라는 현재의 명칭은 1906년에 채택했으며, 교리(敎理)는 가톨릭과 비슷하나 예배의식과 성향은 가톨릭보다 개신교(改新敎)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갈림길을 지나서도 산길은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된다. 다른 점이라면 경사가 조금 가팔라졌다는 점이다. 갈림길에서 얼마간 오르면 슬랩(slab)구간이 나온다.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바위구간이지만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겨울철에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서 미리 대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찾는이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순간이다. 난간에 서면 용동마을이 잘 내려다보인다. 마을 앞에는 수많은 산군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저 어디쯤에 책여산도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슬랩지역을 지나면 조금 후에 앙증스런 나무다리(木橋)가 놓인 작은 개울을 건너게 된다. 산길이 능선을 따라 난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개울을 건너 약간의 된비알을 치고 오르면 또 다시 기분 좋은 소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폭신폭신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럽기 한량없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솔가리(소나무 落葉)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운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 산길이 가팔라지더니 갑자기 바윗길로 변해버린 것이다.

 

 

일단 바윗길이 시작되면 주변은 눈요깃거리들로 넘쳐난다. 기기묘묘(奇奇妙妙)하게 생긴 바위들은 물론이요. 조망까지도 시원스럽게 터지는 것이다. 그 범위는 아까 슬랩에서 바라볼 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용봉마을에서 구미리 전체로 시야(視野)를 넓히더니, 끝내는 섬진강 줄기까지 한눈에 들어오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갈림길을 지난 지 30분 남짓 지나면 부처손이 예쁘게 자라고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을 만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이 바위를 각시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제멋대로 자라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꽉 들어찬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을 작은각시봉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은데 이 역시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을뿐더러 생김새 또한 특이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 부근에서 또 다시 시원스런 조망이 열린다. 조금 전 암릉을 지나올 때 보았던 풍경과 별반 다르지는 않지만, 아까보다 고도(高度)가 높아진 탓인지 산들의 형상이 한층 더 또렷해졌다. 정확히는 짚어낼 수 없지만 책여산과 풍악산, 그리고 노적봉들일 것이다.

 

 

 

작은각시봉으로 추정되는 봉우리에서 큰각시봉은 금방이다. 봉우리를 내려와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바위를 왼편으로 우회하여 오르면 이번에는 철계단이 나타난다. 철계단을 오르면 널찍한 암반(巖盤)이다. 너럭바위의 한가운데에는 거북이를 닮은 바위 하나가 놓여있다. 우주선을 닮았다고도 하는 이들도 있는 것을 보면 모든 사물은 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모양이다. 암반에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은 분재(盆栽)처럼 예쁜 소나무이다. 그런데 나무의 등걸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날 정도로 닳아져 있다. 너도나도 나무에 걸터앉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을 찍으려고 그리 했을 것이 뻔하다.

 

 

 

 

 

 

너럭바위에서 또 다른 철계단 하나를 더 오르면 산불감시초소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해발(海拔) 506m의 큰각시봉(이정표 : 무량산 정상 0.93Km/ 용동마을 1.57Km/ 구미저수지 1.7Km)이다. 큰각시봉을 지키고 있는 또 다른 명품소나무의 가지에 풍장봉(큰각시봉)’이라고 쓰인 낯익은 코팅(coating)지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서래야 박건석선생의 작품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이곳이 큰각시봉인지도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는데 고마운 일이다. 큰각시봉에서의 조망은 아까보다 한결 더 뛰어나다. 이번에는 동쪽 방향이 열리면서 산행을 시작했던 구미저수지는 물론이고, 동계면 소재지까지 내다보인다. 아 깜빡 잊을 뻔했다. 무량산 정상에서 볼 수 없는 용골산 정상을 이곳에선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산행들머리에서 큰각시봉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말이 있다. 가면 갈수록 경치(景致)가 더해진다는 뜻인데 오늘 산행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만큼 멋진 볼거리들로 넘쳐난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그런 볼거리는 큰각시봉을 지나며서 이별을 고한다. 바윗길로 이어지던 산길이 큰각시봉을 지나면서 갑자기 흙길로 변한 탓이다. 각시봉에서 5~6분 정도를 상당히 가파르게 내려서면 안부에 이르는데 양 옆으로 난 오솔길이 제법 또렷하게 나타난다. 안부에 세워진 이정표(무량산정상 0.76Km/ 구미저수지 1.78Km/ 용동마을 1.74Km)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동심 또는 추동마을과 구미를 잇는 고개이다.

 

 

안부를 지나 작은 오름짓을 하다보면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산길의 날이 시퍼런 바위벼랑 위로 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험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벼랑 쪽에다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저 조망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동심마을과 세 개의 저수지, 그리고 동계면소재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에는 풍악산과 책여산, 고리봉 등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안부사거리에서 20분쯤 더 가면 드디어 무량산 정상이다. 큰각시봉에서 25분 남짓, 산행들머리에서는 1시간20분이 조금 못 걸렸다. 무량산 정상은 의외로 보잘 것이 없는 평범함 그 자체이다. 대여섯 평 남짓안 분지에는 무인산불감시탑이 세워져 있을 뿐, 도무지 정상이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마 정상 576m’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이정표(어치임도 1.0Km/ 용동마을 2.5Km, 구미저수지 2.54Km)만 아니었으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정상에서 10m쯤 위에 세워진 또 다른 이정표(어치마을 2.4Km, 용굴산 4.3Km/ 전망대 1.2Km, 구미저수지 3.0Km)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 이정표에 낯익은 정상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대구의 산꾼 김문암선생 작품이다. 덕분에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무량산(無量山)'한량이 없는 산'이라는 의미인데 인근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傳說)과 관련되어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산 아래 마을에 활을 잘 쏘는 소년이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엔가 그 소년이 산돼지를 잡았는데, 산돼지의 창자에서 무량(無量)이란 글자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량(無量)이란 글자에 자극을 받은 소년은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끝내는 문과(文科)에 급제했을 뿐 아니라 대대손손에 걸쳐 과거에 급제(及第)하게 되었다고 한다. 산 아래에 무량사라는 절이 있어, 그곳에 공부하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어 산에 대한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산의 생김새가 금거북을 닮았다고 해서 구악(龜岳)으로 불리기도 했었다니 참고할 일이다.

 

 

무량산에서 산길은 제법 가파르게 떨어진다. 거기다 눈까지 수북하게 쌓여있는데도 안전시설이라곤 눈에 띄지 않는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도대체 눈길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집사람의 분위기에 홀려 아이젠도 착용하지 않은 채로 내려서고 본다. 그러나 그 댓가는 혹독했다. 엉덩방아를 두 번이나 찧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15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오른편으로 산길 하나가 갈려나간다. 이정표에 어치고개로 연결된다고 표기되어 있는 섬진3지맥갈림길이다. 산경표의 원리대로 물을 건너지 않고 무량산에서 용골산을 이으려면,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서 북쪽의 원치 방향으로 가다가 시루봉 못미처에서 용궐()산으로 가야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맥답사를 하고 있지 않은 우린 당연히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갈림길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이정표(어치임도 0.76Km/ 무량산정상 0.7Km)가 지시하고 있는 어치임도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능선을 따르던 산길이 갑자기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능선의 끝자락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탓이다. 길가에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을 정도로 가파르게 떨어진 산길은 중간에 석문(石門)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그러다가 17분 정도 후에는 어치임도’(이정표 : 어치임도 0.1Km/ 섬진강 1.2Km, 용골산 2.7Km/ 무량산정상 1.0Km)에 내려서게 된다. 무량산 정상에서 임도까지는 30분 남짓 걸렸다.

 

 

시멘트포장 임도는 어치계곡을 건너자마자 두 갈래로 나뉜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놓고 고민을 해야만 하는 지점이다.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용궐()산 정상을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왼편으로 갈 경우 섬진강변까지 내려갔다 다시 산을 올라야만 하기 때문에 곧장 용궐()산으로 가게 되는 오른쪽 길보다는 시간이 더 걸릴뿐더러 힘도 더 많이 든다. 대신 달구벼슬능선이 슬랩(slab)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짜릿한 스릴(thrill)과 끝내주는 조망(眺望)을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산행시간이 빠듯한 우리는 곧장 용궐()산으로 오르는 코스를 선택한다. 임도를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이곳에서 산길은 왼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임도와 헤어진다. 남근바위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잘생긴 선돌(立石)이 소나무 곁을 지키고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긴 들머리에 세워진 용궐()산의 개명에 대한 안내판만 보아도 쉽게 눈치 챌 수 있으니 걱정할 일은 아니다.

 

 

 

산자락으로 들어선 산길은 곧장 위로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산의 사면(斜面)을 옆으로 째면서 이어진다. 산비탈의 경사(傾斜)가 너무 가파르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산길은 급할 것이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러다가 15분 후에는 느진목에 올라서게 된다. 삼거리인 느진목에서 왼편에 보이는 길은 섬진강변에서 달구벼슬능선을 타고 올라오는 길이다. 아까 어치계곡에서 헤어졌던 두 길은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느진목에서 잠시 가팔랐던 산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밋밋해진다. 그래서 조금 전에 지나왔던 고개의 이름을 느진목이라고 지었나 보다. ‘느진목이란 낱말이 완만하게 늘어진 고개라는 뜻이라고 하니 말이다. 능선을 타다보면 초록색의 커버로 뒤덮여 있는 뭉텅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이 보인다. ‘소나무 재선충(材線蟲) 방제막인 모양이다. 요즘 재래종 소나무들의 개체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라는데 재선충병(材線蟲病)까지 설치는 광경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느진목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바윗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전망 좋은 바위 위에 올라서게 된다. 양옆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어 좌우 양쪽이 모두 조망되는 뛰어난 조망처이다. 오른편에는 두루뭉술한 무령산과 뾰족하게 솟아오른 큰각시봉이 또렷하고 왼편에는 섬진강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내려갈 장구목 근처의 강변에 보이는 성냥갑 같은 집들은 내룡마을, 강과 산의 사이에 만들어진 좁디좁은 들녘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산골마을이다. 아니 강촌마을이라고 해야 맞나? 내룡마을 앞을 사람들은 장구목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장구목 근처의 물길은 섬진강 중에서도 가장 향토적이며 자연미 넘치는 풍경을 연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섬진강은 이 부근에서 적성강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서 강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지역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전망바위를 지나면 능선은 또 다시 흙길로 변한다. 그러다가 10분쯤 후에는 묘역(墓域)이 자리 잡은 된목에 올라서게 된다. 물론 느진목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된목에 이르면 오른편으로 난 산길이 하나 눈에 띈다. 이 길도 역시 어치임도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다만 아까 산자락으로 들어섰던 선돌 근처에서 5분 정도 더 임도를 따를 경우 왼편으로 열리는 또 다른 들머리이다.

 

 

된목을 지나면서 산길은 상당히 가팔라진다. 그리고 꽤 길게 이어진다. ‘오르기 힘든 고개라는 뜻을 지닌 된목이란 고개이름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그러다가 20분 가까이 되면 바윗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위험을 느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릿지(ridge)로 올라도 충분할 경사인데,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았으니 초보자들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조망까지 탁 트이니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다.

 

 

 

조망을 즐기면서 바윗길을 치고 오르면 드디어 용궐()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무량산에서 1시간40, 산행을 시작한지는 3시간이 조금 못 걸렸다. 널찍한 마당바위(신선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전망데크가 하나 더 눈에 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조망이 좋은 곳에다 왜 별도의 전망대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용골산(龍骨山)은 용이 승천하려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용궐산(龍闕山)으로 고쳐 불러야 맞다. 국토해양부 산하 국토지리정보원이 2009년에 주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산의 이름을 개명(改名)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기존의 '용골산(龍骨山)'이라는 지명이 혐오스럽고 빈약한 메시지를 전달해 지역 주민의 진취적 기상을 꺾고 지역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고 하여, ()이 거처하는 산()이라는 의미의 '용궐산(龍闕山)'으로 지명을 변경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참고로 용궐()산 정상에 있는 신선바위에는 바둑판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에 용궐()산에서 수도하던 스님이 가끔 무량산에 기거하는 스님을 불러 바둑을 두었는데, 그 연락을 호랑이의 입에 편지를 물려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6.25전쟁 때 국군(國軍)이 적군을 토벌하기 위한 막사를 설치하면서 그 자리에 쇠말뚝을 박아버린 탓이라고 한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용궐()산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한마디로 뛰어나다. 우선 천 길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서쪽의 바위벼랑 위에 선다. 마치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요강바위 등 수많은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을 품고 있는 섬진강이 장구목마을과 함께 아슬아슬하게 내려다보인다. 그 물줄기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아까 지나왔던 무량산이 반갑다고 손짓하는데, 그 뒤에서 책여산이 나도 있다는 듯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가곡리의 협곡(峽谷)너머로 백련산과 원통산이 또렷하고, 그 왼편에 보이는 회문산(장군봉)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氣勢)이다. 물론 동쪽에도 산들 천지이다.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남원의 천황봉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지리산의 제2봉인 반야봉일 것이다.

 

 

 

정상 근처에는 돌을 둥그렇게 쌓아놓은 구축물이 보인다. 높이가 1m 정도인 석축(石築)은 순창군에서 용골산을 정비하면서 일부러 쌓아놓은 모양인데, 안내문이 보이지 않아 궁금증만 불러일으키게 만들고 있다. 다른 산에 가보면 저렇게 생긴 터에는 어김없이 봉수대(烽燧臺)’ 터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그러나 이곳 용골산은 봉수대가 있었다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으니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석축은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한 꼴이 되어버렸다.

 

 

하산은 정상의 맞은편 봉우리(이정표 : 내룡고개 1.5Km, 기산 2.0Km/ 어치계곡 2.1Km, 무량산 3.8Km) 뒤로 열린다. 정상에서 내려선 산길은 잠시 완만(緩慢)하게 이어지다가 바위봉우리 위로 오른다. 그리고 다음에는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생각보다 가파르기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으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안전로프나 계단 등 안전시설들을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저 탁 트이는 조망(眺望)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맞은편에 나타나는 원통산과 지초봉은 물론이고 내려오는 길에 뒤돌아 본 용궐()산 자체도 제법 뛰어난 볼거리로 나타난다.

 

 

일단 암봉에서 내려서면 이후부터 능선은 흙길로 변한다. 그러다가 10분쯤 후에는 또 다시 거대한 바위가 나타난다. ‘삼형제바위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바위 세 개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하산 길을 서둘다보면 거대한 바위가 나타난다. 산길은 바위를 피해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다. 이 부근에서 또 다시 조망이 터진다. 건너편으로 조망(眺望)이 트이며 발아래에 섬진강 줄기가 사행천(蛇行川)을 만들며 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강변과 함께 꿈틀대고 있는 717번 지방도(강진에서 동계로 연결)가 유난히도 하얗게 빛나고 있다. 물론 강() 건너편에 우뚝 솟아있는 산은 백련산일 것이다.

 

 

 

삼형제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완전한 흙길이다. 그러나 내려서는 게 만만치는 않다. 생각보다 경사(傾斜)가 심하기 때문이다. 이게 부담스러웠던지 순창군에서는 곳곳에 통나무계단을 만들고, 그도 부족하다싶으면 안전로프까지 촘촘히 매어 놓았다. 가파른 내리막길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래 계속된다. 용궐()산 정상에서 장구목재까지 55분이나 걸리기 때문이다. 거기다 삼형제바위 이후로는 조망 등 볼거리까지 없기 때문에 지루해지기 쉽다는 표현을 썼다.

 

 

산행날머리는 내룡마을(동계면 어치리)

오거리인 장구목재(이정표 : 내룡마을 0.8Km, 요강바위 1.1Km/ 귀룡정 1.5Km/ 기산 0.5Km/ 석전마을 1.6Km/ 용궐산 1.5Km)에서는 장구목이 있는 내룡마을로 향한다. 이곳까지 와서 섬진강의 명물인 장구목을 둘러보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룡마을까지는 시멘트포장 임도로 연결된다. 왼편으로 또렷이 나타나는 용궐()산을 감상하며 느긋이 걷다보면 12분 후에는 내룡마을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4시간이 걸렸다. 물론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은 결과이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구미리까지 40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산악회 황회장의 배려로 이곳까지 버스가 들어온 덕분에 무의미한 시간을 줄일 수가 있었다. 친절을 베풀어 주신 황회장께 감사를 드려본다.

 

 

강줄기를 가로지르는 현수교(懸垂橋)에 오르면 발아래 거대한 암반(巖盤)이 꿈틀댄다. 수위(水位)를 낮춘 강물 위로 공룡이 밟고 지나간 것처럼 움푹움푹 패인 바위가 지천이다. 이곳이 바로 순창 제일의 명당 터로 불리는 장구목이다. 장구목은 용궐()산과 무량산의 두 봉우리가 마주 서 있는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이라는 데서 얻은 이름. ‘적장의 목을 쳐 떨어진 자리라는 설()도 있다. 원래는 장군목으로 불렸으나 언제부턴가 장구목으로 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섬진강 물줄기는 수만 년 동안 다듬어 놓은 바위들을 장구목 근처에다 흩뿌려 놓았다. 풍화로 깎이고 패인 모양이 기묘하다. 마치 용틀임하는 것처럼 살아 움직인다. 한마디로 천혜(天惠)의 수석공원(壽石公園)이라 할 수 있다. 장군목 근처의 물길은 섬진강 중에서도 가장 향토적이며 자연미 넘치는 풍경을 연출한다. 누군가 섬진강(蟾津江)을 보고 누이 같고 어머니 같은 강이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섬진강이 친근하면서도 포근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말이 가장 합당한 곳이 섬진강의 중류인 이곳 장군목 어림일 것이다. 강물은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하다. 그리고 강물 따라 이어지는 낭만적(浪漫的)인 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의 한 장면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당연히 연출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고, 그래서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배경이 되었다. 20년 만에 들러본 장군목은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변해 있다. 여행 메니아(mania)들에게나 입소문을 탔을 정도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강촌마을이 언제부턴가 관광지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이다. 순창군에서 섬진강문화생태탐방로를 조성하면서 이곳 장군목을 유원지(遊園地)로 개발한 모양이다.

 

 

장군목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묘(奇妙)하게 움푹 파인 바위들이다. 요강처럼 생긴 요강바위를 비롯해 천태만상(千態萬象)의 바위들이 강줄기를 따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서 있다. 장군목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요강바위는 요강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높이 2m에 폭 3m 쯤 되는데, 어른이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로 깊은 웅덩이가 패여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네들이 장군목을 찾아 요강바위 위에 앉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전국의 수많은 여인네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한 때 이 바위는 도난을 당했지만 16개월 만에 제 자리를 찾았고, 계속해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지켜주고 있단다.

 

 

에필로그(epilogue), 이곳 장군목은 물론이려니와 이곳에서 한참 더 내려가야 하는 구미마을까지는 수심(水深)이 비교적 얕아 여름철에는 가족단위 물놀이코스로 제격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이곳에서 10여리쯤 떨어진 곳이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산을 몇 개 넘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어릴 때부터 이곳을 심심찮게 찾았었다. 방학 때만 되면 이모님 내외가 살고 계시던 구미리(오늘 산행의 들머리)에 놀러 왔었고, 그때마다 이 부근에서 멱도 감고 다슬기를 잡으며 며칠씩 놀다가곤 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전주로 유학을 떠났던 나는 신동(神童, 자칭자찬일지도 모르겠다)으로 소문이 자자했었는데, 그런 나를 이모님 내외는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난 공부에 지칠 때마다 시골 풍경을 그리워했고, 특히 멱을 감을 수 있는 강물과 다슬기라는 멋진 먹거리가 있는 이곳이 특히 좋았다. 움푹움푹 파인 바위 틈새에 손을 넣을 때마다 한웅큼씩 잡혀 올라오던 다슬기의 촉감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동심(童心)어린 강물에 발을 담가본다. 그리고 강물이 들려주는 메시지(message)에 귀 기울여 본다. 사랑, 환호, 탄식 등등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만들어내는 모든 소리들을 다 품고 있다는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나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놓아버렸나 보다. 집사람의 짜증스러운 채근을 듣고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으니 말이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내가 늦장을 부린다는 것이다. 하기야 추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어찌 같겠는가. 집사람의 손에 이끌려 산악회에서 준비한 점심상에 둘러앉으니 ‘Mr. 홍주김사장께서 준비해 오신 진도 홍주를 권하신다. 비록 그 양은 많지 않았지만 알코올(alcohol) 도수가 강했었나 보다.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잠만 퍼질러 잔걸 보면 말이다.

고성산(古城山 546.7m)-고산(高山, 526.7m)

 

산행일 : ‘14. 12. 14()

소재지 : 전북 고창군 대산·성송면과 전남 영광군 대마면, 장성군 삼계면의 경계

산행코스 : 깃재고성산가래재촛대봉고산암치(산행시간 : 3시간4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고산이나 고성산은 덕유산이나 무등산 등 전라도에 소재한 다른 산들에 미치지 못하는 높이지만, 평야지대에서 우뚝 솟아오른 모습은 자못 웅대(雄大)하다. 때문에 인근 주민들은 예로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추앙해오고 있다. 두 산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흙산)이지만 정상어림은 천혜의 바위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외적(外敵)을 방어하는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 중의 하나가 백제 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산성(高山城)이다. 그리고 고성산 또한 고성(古城)이라는 산의 이름으로 보아 산의 아랫자락에 있었다는 산성의 규모가 제법 컸지 않았나 싶다.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산의 정상어림이 바위군()으로 이루어져 있는 덕분에 뛰어난 눈요깃감을 제공하며, 조망(眺望) 또한 사방팔방으로 시원스럽다. 거기다 근처에 선사시대의 고인돌들이 몰려있는 유적지(遺跡地 : 대산면 상금마을)까지 끼고 있으니 한번쯤은 찾아봐야 할 산들이다.

 

산행들머리는 깃재(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이용하여 고창방면으로 달리면 홍교교차로(交叉路 : 영광군 대마면 홍교리)가 나온다. 교차로에서 빠져나와 우회전, 734번 지방도를 타고 장성방면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영광군(대마면 성산리)과 장성군(삼계면 부성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인 깃재에 이르게 된다.

 

 

 

고갯마루의 삼거리에서 장성방향으로 50m쯤 내려오는 지점에서 왼편에 보이는 임도(林道)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734번 지방도 외에 또 하나의 도로는 장성군 추모공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이니 참조할 일이다. 오늘 걷게 되는 구간은 **)영산기맥(榮山岐脈의 일부구간이다. 찾아볼만한 명산들이 많기로 소문난 영산기맥을 따라 걷게 되는 것이다.

(**)영산기맥(榮山岐脈)은 호남정맥(湖南正脈)이 백암산의 상왕봉에서 북으로 순창새재에 이르렀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려는 분기점(分岐點), 즉 백암산과 내장산의 중간(새재 부근)에서 가지를 쳐나와 영산강(榮山江)의 북쪽 벽을 이루며 입암산. 방장산. 고산, 고성산, 태청산. 불갑산. 승달산 등을 거쳐 목포 유달산에 이르는 도상거리 157.4Km의 산줄기이다. 비록 높이가 800m를 넘는 산이나 봉우리들은 없으나 일대에서 알려진 명산들이고, 산마다 특징이 있어 찾아볼 만한 산들이 많다는 게 영산기맥의 매력이다.

 

 

구불구불 뱀이 똬리를 틀듯이 왔다 갔다를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임도는 지루할 정도로 오래 계속된다. 그러나 지루할 틈은 없다. 눈으로 뒤덮인 길가의 나무들이 훌륭한 눈요깃감으로 시시각각(時時刻刻) 다가오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가까이 되면 산길은 임도를 벗어나 왼편 산자락으로 접어든다. 산으로 들어선 후에도 산길은 당분간 임도와 거의 같은 수준의 밋밋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산길의 풍경도 임도와 별반 다른 게 없다. 눈을 수북이 뒤집어쓰고 있는 나무들을 구경하면서 걷는 산행이 계속된다는 얘기이다.

 

 

 

10분쯤 걸었을까 능선에 바위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니 않아 거대한 바위무리로 변해버린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치고 오르기 어려운 곳은 어김없이 우회로(迂廻路)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다만 가파른 경사(傾斜)가 부담스러워 난간(欄干)형식으로 매어 놓은 로프에 의지해서 올라야하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길가의 바위들이 여러 가지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동물 모양으로 생긴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마치 탑()을 쌓아올린 형상이다. 이러한 바위들이 정상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나타나면서 등산객들에게 훌륭한 눈요깃거리로 제공된다.

 

 

능선으로 올라선지 25분쯤 되면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서서히 농도(濃度)를 높여가던 능선의 바위들이 드디어 완전한 암릉을 만들어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첫 작품에 전망대(展望臺)가 만들어져 있으니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고 잠깐 쉬었다 가면 어떨까. 마침 벤치(bench) 까지 놓여 있으니 말이다. 장성 삼계면과 영광 대마면의 논밭과 저수지들, 그리고 주변의 높고 낮은 산들이 마치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진다.

 

 

 

 

일단 전망대를 지나고 나서는 서면 서는 곳 마다, 그리고 멈추면 멈추는 곳 마다 뛰어난 전망대로 변한다. 그러나 바라보이는 풍경은 아까의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고도(高度)가 높아질수록 그 범위만 넓어질 따름이다. 그렇게 16분쯤 오르면 드디어 고성산 정상인 깃대봉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10분이 조금 못 걸렸다.

 

 

 

 

별로 넓지 않은 고성산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대구의 산꾼 김문암씨가 제작해서 걸어놓은 정상표지판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한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철제(鐵製) ‘등산로 안내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으나 하도 낡아서 글씨는 물론이고 그림조차 나타나지 않으니 있으나 마나일 뿐이다. 참고로 고성산의 4부 능선 어림의 남쪽 사면(斜面)에는 빙 둘러 산성(古城)이 축조(築造)되어 있다. 비록 지금은 대부분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지만 고성산의 고성(古城)이라는 이름은 이 산성으로 인해 얻게 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정상에서는 오른쪽 그러니까 남쪽 방향으로만 시야(視野)가 열린다. 아까 올라올 때 보았던 풍경들, 그러니까 장성 삼계면과 영광 대마면의 논밭과 저수지들, 그리고 주변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다만 아까보다는 고도(高度)가 높기 때문에 더 넓게 펼쳐지는 게 다를 뿐이다. 그 펼쳐지는 산봉우리들 중, 오른편에 보이는 산들은 어쩌면 고성산과 함께 영산기맥을 이끌고 있는 태청산과 장암산이 아닐까 싶다.

 

 

 

고산으로 가는 길은 정상에서 북쪽으로 열린다. 능선은 억새가 가득한 널따란 평원으로 이어진다. 이 구간에서 낯선 경고판(警告板)을 만나게 된다. 육군보병학교장의 명의로 된 경고판에는 이곳이 고폭탄 사격장 피탄지역이니 출입을 금()한단다. 억새밭을 지나면 생애(상여)바위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위 위에서의 조망(眺望)이 뛰어나다고 하나 구태여 올라갈 필요는 없을 듯 싶다. 조금 후에 만나게 되는 능선의 끝자락도 훌륭한 조망처이기 때문이다.

 

 

 

생애바위에서 조금만 더 가면 분지(盆地)의 끄트머리, 곧 고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이곳에 서면 아까 고성산의 정상에서 놓쳤던 고창군의 풍경들이 펼쳐진다. 바둑판 모양으로 반듯반듯한 들녘이 정겹기만 하고, 주위를 감싸고 있는 산군(山群)들은 평야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우람하기까지 하다.

 

 

 

 

고성산에서의 하산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심심찮게 바윗길이 나타나고, 또 어떤 곳은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높기도 하다. 그런데 그 바윗길에 안전장치라곤 일절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조심조심 내려서는 수밖에 없다. 특히 오늘 같이 눈이라도 수북이 쌓인 날에는 아이젠(eisen)을 신었다고 할지라도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설설 기어 내려오는 게 상책(上策)이다. 체면이고 뭐고 안전보다 더 우선인 것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바윗길이 아니라고 해서 길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인적이 없어 묵은 산길이다 보니 산길이 거의 버려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 때문에 잡목(雜木)들이 갈 길을 방해하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는 쓰러진 나무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아래로 기어서 나가거나 아니면 넘어서 통과해야하는 모험까지도 감수해야만 한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군사시설보호구역'이라고 적힌 빗돌이 심심찮게 보이는데, 고성산 정상에서부터 가래재 근처까지 길이 거의 없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험난한 내리막길이 끝나면 이번에는 행복한 산행이 기다린다. 햇볕 한 점 통과하기 힘들 정도로 울창한 편백나무 숲속으로 산길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숲은 끝도 없이 계속된다. 비록 몇 년 전에 다녀온 인근의 축령산에 비하면 수령(樹齡)이 어리지만 숲의 범위나 울창함만은 결코 뒤지지 않을 것도 같다. 편백나무는 건강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이런 길에서는 구태여 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모처럼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며 느긋하게 걸어보자. 그리고 숨은 크고 깊게 쉬어보자. 오늘 산행이 힐링(healing)산행이 될 게 분명하다.

 

 

 

고성산 정상을 출발한지 1시간10분쯤 되면 능선의 안부에 이르게 된다. 물론 오른편은 편백나무 숲이다. 이곳 양쪽으로 길의 흔적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어쩌면 가래재가 아닐까 싶다. 고산과 고성산 사이에 있는 가래재는 옛날 바닷가인 법성포와 내륙(內陸)인 장성을 잇는 보부상(褓負商)들의 물물교환(物物交換) 통로 역할을 하던 중요한 고개이자, 서민들의 애환(哀歡)이 깃든 곳이다. 옛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을 고갯마루엔 옛길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 인적이 끊겨버린 지 오래이다. 하긴 시원스럽게 뚫린 신작로(新作路)를 놔두고 굳이 옛길을 고집할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전설(傳說)에 의하면 옛날 두 형제가 북쪽의 고산성은 아우가 쌓고, 남쪽의 고성산성(古城山城)은 형이 쌓기로 하면서, 약속한 날짜까지 성을 쌓지 못하거나 가래재에 늦게 도착한 사람이 목숨을 내 놓기로 했단다. 그 후 아우가 약속한 날짜에 공사를 끝내지 못하자 형이 아우를 가래()로 쳐 죽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우가 명천수(明天水)가 솟아나는 용추굴 주변을 이용하여 약속보다 갑절이나 더 길게 산성을 쌓느라 늦은 것을 알고 후회한 나머지 자신도 동생을 따라 자살했다고 한다. 그때 자살에 사용했던 것 또한 가래였기에 후세(後世) 사람들이 이 고개를 가래재라 불렀다는 것이다.

 

 

 

가래재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왼편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된다. **)‘상금리 고인돌군(上金里 支石墓)’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그리고 갈림길에서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아까 고성산에서 내려올 때에 비하면 애기들 장난에 불과할 정도이지만 흙산에서의 이정도 경사(傾斜)는 사실 만만한 게 아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길가에 로프로 난간(欄干)을 만들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상금리 고인돌군은 상금마을 입구에서 가리재를 오르는 구릉(丘陵)의 중턱까지 집중적인 분포를 보인다. 2.7km 구간에 걸쳐 고인돌과 고인돌 덮개돌로 추정되는 석재돌 약 250기가 확인되고 있다. 주로 남방식으로 낮은 언덕에 세워 한쪽에만 굄돌을 놓아 덮개돌의 수평이 맞춰지도록 했다. 그러나 덮개돌이 밀려나가고 파괴된 고인돌이 많아 그 수()나 형태(形態)를 파악하기 어려워 보존상태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촛대봉으로 오르는 길에 오른편의 나뭇가지 사이로 고산의 정상이 내다보인다. 밋밋한 생김새의 봉우리 위를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정상으로 오르는 길까지 선명하게 나타난다.

 

 

갈림길에서 10분 남짓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촛대봉이다. 촛대봉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으로 갈 경우 따구리봉(3)과 깃대봉(2), 각시봉(1)으로 연결되고, 고산(1) 정상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촛대봉은 비록 흔적도 찾아보기 힘드나 **)고산성(高山城)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지점이다. 이곳 지자체에서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는지 삼거리에 이정표(고산 오봉 0.4Km/ 차동임도/ 가랫재 0.9Km)와 산성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옛날 촛대봉에서 숯을 굽기 위해 불을 피우면 구황산 넘어 장성 수연산에서 연기가 나왔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나 믿거나 말거나이다.

(**) 고산성(高山城)은 축성 양식이 포곡형(包谷形 :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둘러 쌓는 형식)으로 내탁법(內託法)이라는 석축공법을 사용해 외면은 석축이고 내면은 흙과 잡석으로 다져서 축성(築城)됐다. 외면은 자연석을 수직 또는 물림 쌓기로 아랫돌에 비해 윗돌을 5-6cm씩 안쪽으로 물려 쌓은 방식을 활용했으며 문헌에 따르면 내유3(內有三泉)이라는 기록이 있어 성내에는 용지와 서봉사, 수고암 등이 있었으며 성의 둘레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산성의 총 길이가 81백 척, 높이 20척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현재는 기껏 600m 정도가 길가에 흩어져 있는 돌무더기 수준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오늘 같이 눈이라도 쌓여있을 경우에는 눈에 띄지도 않는다.

 

 

 

촛대봉에서 왼편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꼭대기가 바위로 이루어진 따구리봉(3)이 건너다보인다. 세 겹으로 이루어진 저 바위가 바로 따구리봉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했던 치마바위일 것이다. 참고로 따구리봉은 나무꾼들이 지게에 나무를 지고 다닐 때 사용하던 끈(나뭇짐을 매던)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5분 정도를 더 따구리봉으로 향하다 이내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사실 바위봉이라는 게 멀리서 바라볼 때가 멋있지 막상 봉우리 위에 올라서면 조망(眺望)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것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망이라는 것도 조금 후에 오르게 될 고산의 정상이 훨씬 더 나을 것이 분명할 테니까 말이다.

 

 

 

다시 촛대봉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고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고산으로 가는 능선길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5분쯤 후에 임도를 만나게 된다. 이 임도는 잠시 후에 만나게 될 해맞이 기원제단(祈願祭壇)’이 있는 공터까지 연결된다. 매년 11일이면 고창군민의 새해소망을 담은 해맞이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는데, 아마 행사에 참여하는 차량들이 올라올 수 있도록 임도를 개설해 놓은 모양이다.

 

 

 

기원제단의 바로 위, 그러니까 고산의 정상 바로 아래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하산지점인 암치로 내려가는 길, 왼편에 있는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갈림길에서 몇 발작 걷지 않으면 고산 정상이다. 정상은 고창 방향으로 약간 휘면서 늘어진 모습이고, 그 중간쯤에 있는 바위 앞에 정상표지석이 놓여있다. 정상석의 뒤편 바위에도 고산(高山)이라 새겨진 걸 보면 현재의 정상석이 세워지기 전엔 이 바위가 정상석을 대신했던 모양이니, 어찌 보면 정상석이 두 개나 되는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고창군청에서 세운 정상석이 다른 곳에서 보아온 것들과는 사뭇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산 이름 아래에다 등산지도를 새겨 놓은 것이다. 멋진 아이디어 (idea)가 아닐 수 없다. 촛대봉에서 고산 정상까지는 13, 산행을 시작한지는 3시간 남짓 걸렸다.

 

 

정상에 서면 사방이 탁 트여 일망무제(一望無題)로 조망(眺望)이 터진다. 우선 서쪽에다 시선을 맞추면 끝없이 너른 고창들녘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 들녘이 그려내는 바둑판 모양의 무늬가 의외로 신선하다. 그리고 북쪽엔 옥녀봉이 삼각형으로 솟아올랐고, 그 옆에는 구황봉과 문수산이 얼굴을 내민다. 고성산. 월랑산. 태청산이 남쪽에 자리 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뒤에 아스라이 보이는 산들은 추월산과 무등산이 아닐까 싶다.

 

 

 

 

정상에서 암치로 내려가는 길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정상에서 내려서서 얼마 후에 만나게 되는 바위를 오른편으로 돌면 조금 후에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거리는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짧다. 이어지는 산길은 다시 평범하면서도 밋밋한 경사(傾斜)의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산행날머리는 암치(바위고개)

정상에서 내려선지 20분 조금 못되면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 왼편으로 향한다. 이어서 약간 가파른 산길을 잠깐 내려서면 또 다시 평지 같은 길이 나타난다. 평원(平原) 느낌이 들 정도로 반반하면서서도 너른 능선을 따라 걸으며 왼편에 나타나는 고창들녘을 구경하다보면 전북(고창군 성송면)과 전남(장성군 삼계면)의 경계인 893번 지방도상의 암치(바위고개)에 내려서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고산의 정상에서 30분 남짓, 산행을 시작한지는 4시간10분이 지났다. 중간에 라면을 안주삼아 술을 마신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40분이 걸린 셈이다.

화시산((火矢山, 403.2m)

 

산행일 : ‘14. 10. 4()

소재지 : 전북 고창군 아산면과 부안면, 고창읍의 경계

산행코스 : 소굴치시루봉거북바위화시봉백운재옥녀봉행정치고인돌유적지(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화시산은 웬만큼 산에 이골이 난 사람들조차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꼭꼭 숨어있던 산이다. 주변에 있는 선운산이나 방장산 등의 명성에 철저하게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부쩍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화시산의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유적지를 끼워 넣은 산행계획을 짜는 산악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시산은 고인돌유적지가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찾아볼만한 산이다. 투구바위나 촛대바위, 상여바위 등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솟아오른 산세(山勢)가 다른 유명산들에 뒤지지 않을뿐더러 능선에서 바라보는 조망(眺望) 또한 일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산을 오르고 나면 짜증이 날 수도 있으니 미리 염두에 둘 일이다. 관할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서 산을 그냥 버려둔 탓에 산행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백운재에서 고인돌유적지를 향해 능선을 타고 가는 코스는 잘못하면 욕설까지 튀어나올 정도이니 이용하지 말 것을 권한다.

 

산행들머리는 소굴치(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I.C에서 내려와 22번 국도를 타고 영광방면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용산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교차로에서 빠져나와 734번 지방도를 타고 자 모양을 그리면서 진행하면 소굴치고갯마루가 나타난다. 설명이 조금 복잡한 것 같지만 퍼블릭코스(public course)인 선운산골프장(골프존 카운티 선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고갯마루라고 생각하면 된다.

 

 

 

소굴치는 고창군 아산면(용계리)과 부안면(용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이다. 용계리를 정면에 놓고 왼편의 절개지를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길의 흔적이 희미하다고 하지만 들머리에 용산리라고 쓰인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이를 참조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의 흔적을 찾아가며 가파르게 5분 정도를 치고 오르면 능선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지는 산길은 또렷해지면서 경사(傾斜) 또한 완만해진다.

 

 

산길 주변은 소나무 숲 사이로 나있다. 간간이 잡목(雜木)이 섞여있을 뿐 비록 굵지는 않지만 온통 소나무들 천지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 진한 솔향이 물씬 풍겨오는데, 그 솔향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잔뜩 배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행운이 분명하다. 산행과 겸해서 힐링(healing)까지 함께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 산길까지 평탄하다보니 자연스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가끔 열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오른편에는 선운산골프장, 그리고 왼편에는 복분자 농공단지(農工團地)’가 내다보인다. 농공단지 뒤에 버티고 있는 산은 얼마 전에 다녀온 수월봉과 소요산이 아닐까 싶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쯤 지나면 아무런 특징이 없는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잠깐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맞은편 능선으로 향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거기다 바윗길까지 빈도(頻度)를 높이다보니 위로 향하기가 다소 부담스러웠나보다. 산길이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얼마쯤 올랐을까 또렷하지는 않지만 오른편에 봉우리 위로 향하는 산길이 하나 보인다. 왼편으로 난 길이 훨씬 더 또렷한데도, 집사람은 오른편으로 들어서고 본다. 그녀의 선택에는 조그만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집사람도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의미를 알아가는 모양이다. 힘들고 위험한 곳에 올라야만 더 많은 눈요깃감을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말이다. 이 산봉우리가 바로 투구봉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이 조금 더 지났다.

 

 

투구봉은 사전에 알고 있던 봉우리의 생김새와는 완전 딴판이다. 멀리서 봤을 때는 으스스한 바위봉우리인데 막상 오르고 보니 그저 밋밋한 흙봉우리에 불과한 것이다. 다만 화시산 방향이 수직의 암벽(巖壁)으로 이루어져 있을 따름이다. 하여튼 투구봉에 오르면 시야(視野)가 활짝 열린다. 진행방향에는 화시산이 우뚝하고 왼편에는 부안면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투구봉에서 내려서서 5분쯤 지나면 안부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8분쯤 더 오르면 첫 번째 전망대에 올라서게 된다. 전망대에 서면 투구봉의 전모(全貌)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투구봉보다 시루봉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은 것 같지 않나요?.’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이 동의를 구해온다. 그의 말마따나 봉우리의 모양이 흡사 시루를 뒤엎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 투구를 얹어 놓은 형상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스토리텔링(storytelling)과정에서 만들어 낸 이름이 아닐까 싶다. 말이 나온 김에 투구봉에 전해지는 옛이야기 한 토막을 적어볼까 한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옛날 어느 왕자가 난을 피해 이곳으로 왔다가 후일을 준비할 곳으로 화시산을 잡았단다. 그는 소굴치에서 가마를 타고 화시봉으로 오르다가 덥고 힘들어서 쓰고 잇던 투구를 벗어 놓았는데 이때 벗어 놓은 투구가 바위로 변한 것이 투구바위라는 것이다.

 

 

 

 

 

 

 

첫 번째 전망대를 지나 조금 더 진행하면 안부같이 푹 꺼진 곳에서 송곳니처럼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하나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가파른 철계단을 밟고 오르면 촛대봉이다. 촛대봉은 이름에 걸맞게 뛰어난 조망(眺望)을 보여준다. 촛대처럼 뾰쪽하다 보니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는 것이다. 조금 전에 보았던 투구봉이 조금 더 멀어졌지만 훨씬 넓게 보이고, 오른편의 부안면 들녘 한 가운데는 서해안고속도로가 일직선으로 뚫으며 지나가고 있다.

 

 

 

일단 촛대봉에 올라섰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는 곳곳이 전망대이다. 가는 길에 자그만 바위봉우리들이 곳곳에 나타나는데 봉우리마다 뛰어난 조망(眺望)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요 포인트는 물론 투구봉이다. 투구봉을 가운데에 두고 왼편에는 선운산골프장, 그리고 오른편에는 부안면의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골프장의 필드(field) 위에는 골프마니아(mania)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조망뿐만이 아니다 숲을 헤치며 위로 솟아오른 기암괴석들도 아름다운 풍경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촛대바위와 가마바위는 물론이고 이름 모를 바위들조차 예사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아까 위에서 얘기했던 그 왕자 일행이 밤이 되자 촛불을 밝히고 요기와 휴식을 취하게 되었는데 그 초가 촛대바위로 변했고, 화시산으로 오르는 길이 너무 가팔라서 버리고 간 가마가 가마바위(상여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자를 수행했던 장수가 호랑이를 몰아내고 왕자를 모셨던 왕자굴도 있다지만 낡고 어설픈(글씨가 잘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이정표 덕분에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혹시 거북이바위가 아닐까? 조금 옹색하긴 하지만 또 다른 거북이 모양의 바위를 발견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또 다시 나타나는 거대한 바위를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돌아 오르면 언덕 같은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무재등(이정표 : 화시봉 0.3Km/ 고인돌 유적 6.2Km/ 용흥리 3.0Km)이다. 그런데 이정표의 방향표시가 화시봉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지워져 있다. 아마 방향표시를 헷갈리게 표시했다고 해서 누군가가 지워버린 모양이다. 하여간 화시봉 정상에 오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무재등에서 숲길을 따라 5분 정도를 더 걸으면 화시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작은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정상은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삼각점 하나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이정표가 정상표지석을 대신하였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있으나 마나이기 때문에 삼각점만이 외롭게 지킨다는 표현을 썼다. 이정표가 하도 낡아서 글씨가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내내 이곳 지자체인 고창군에서 산을 버려두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등산로의 상태는 물론이고 이정표 등 시설물 들이 하나같이 방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갈수록 심해지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등산로의 상태가 더욱 더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빼어난 산세를 지녔음은 물론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까지 낀 귀한 관광 상품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은 죄악이나 마찬가지이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관광객(觀光客)들이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 요즘의 추세인데도, 이왕에 찾아온 사람들까지 발걸음을 돌리게 만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열 명이 하는 칭찬보다, 한 명이 하는 흉의 파장이 더 크다는 진리를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먼저 이정표 뒤에 있는 바위 위에 올라서면 골프장이 빤히 내려다보인다. 오늘은 시계(視界)가 좋은 덕분에 필드(field) 위를 오가는 골퍼(golfer)들까지도 환히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신림면 일대와 방장산, 그리고 고창읍시가지 일부와 두승산이 보이고, 서북쪽엔 소요산과 배풍산이 우뚝하다. 물론 들녘을 지나는 서해안고속도로도 또렷하게 나타난다. 참고로 화시산에는 재미난 설화(說話)가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화실봉에 오래전부터 불귀신(火神)들이 살고 있어 밤만 되면 신림면 임리 마을을 자꾸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자 주민들이 선인(仙人)에게 가르침을 구했고, 그의 말에 따라 오리 솟대를 세우고 매년 정월 열나흘에 당산제를 지냈는데, 지금도 이 마을의 풍습으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것이다.

 

 

 

무재등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편 길로 진행한다. 산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급경사(急傾斜)로 변하더니 이내 바위벼랑으로 끝마무리를 지어버린다. 벼랑위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은 안전로프에 의지해야만 하고, 왼편은 나무 등걸을 붙잡아야만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어렵기는 매 한가지이나 난 오른편 길을 권하고 싶다. 오른편이 조금 더 위험하지만 힘은 덜 들기 때문이다. 다만 조심할 것은 안전로프에 모든 체중을 다 싣지는 말라는 것이다. 두 가닥의 로프 중 한 가닥이 끊어져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처럼 위험한 곳에 매어놓은 로프를 끊어진 채로 방치하고 있는 지자체의 무관심을 다시 한 번 질책해 본다.

 

 

 

 

다행이 서슬 시퍼런 내리막길은 10분 정도면 끝을 맺고 이어지는 산길은 평탄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무재등에서 내려선지 20분 남짓 지나면 안부에 이르게 된다. 아무래도 이곳이 된재가 아닐까 싶은데 삼태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은 보이지 않는다. 된재는 고갯마루를 넘나들던 나무꾼들이 고되다는 뜻으로 붙였다는 이름이다. 그러나 길이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것을 보면 요즘은 이 길을 지나다닐 나무꾼들이 사라져버린 탓이 아닐까 싶다. 산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세월의 변화에 발맞춰 변해버린 모양새이다.

 

 

안부(된재)에서 다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나지막하게 쌓아올린 석축(石築)이 보인다. 크고 작은 돌들을 담처럼 쌓아올렸는데 얼핏 보면 예비군훈련 때나 사용하는 참호(塹壕)를 닮았다. 그러나 지도에는 한국전쟁 방어진지라고 표기되어 있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partizan)들을 막기 위해 쌓았던 방어진지라는 것이다.

 

 

방어진지에서 다시 5분쯤 더 걸으면 널따란 임도(林道)가 지나가는 안부에 내려서게 된다. 바로 백운재이다. 화시산 정상에서 백운재까지는 40분이 조금 더 걸렸다. 오래전 백운재에는 운곡과 운양을 오가던 길손들의 목마름을 달래주던 주막(酒幕)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너른 분지(盆地)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정자(亭子)가 느티나무 아래를 차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백운재에 세워진 이정표가 또 다시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앞으로 가야할 범바위가 직진인 것은 맞다. 그리고 오른편이 운곡서원인 것도 맞다. 그런데 왼편 방향이 백운재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백운재가 아니고 어디란 말인가? 아마 백운마을의 표기가 잘못되었지 않았나 싶다. 만일 고인돌유적지로 가려면 이곳 백운재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하산할 것을 권하고 싶다. 능선을 타게 되는 범바위코스를 탈 경우 여러 번에 걸쳐 후회를 하게 될게 뻔하기 때문이다. 잡목(雜木)과 명감나무 등 가시넝쿨로 가득 찬 능선코스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백운재에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오름길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다.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니다. 산길을 꽉 채우고 있는 잡목들이 자꾸만 진행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길을 20분 남짓 오르면 운곡저수지와 부안면 들녘 등 좌우로 시야(視野)가 열리고, 곧이어 바위봉우리인 범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참고로 운곡저수지는 영광원자력발전소의 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84년에 축조(築造)된 담수용량 600만 톤의 커다란 인공호수(人工湖水)이다. 한때 고창군의 상수도원으로도 활용되었으나 부안댐의 물이 공급되면서 상수도보호구역의 지정이 해제되었다.

 

 

 

 

범바위는 오봉(五峰)의 하나일 것이다. 이곳 오봉에서 화시산까지의 다섯 봉우리를 일컬어 오봉이라고 한다니 말이다. 범바위에 올라서면 왼편, 그러니까 동쪽으로의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발아래에는 고인돌휴게소가 내려다보이고, 서해안고속도로의 건너편에는 호남의 명산인 방장산이 우뚝하다.

 

 

 

범바위에서 화암봉까지 연결되는 능선은 작은 봉우리들을 반복적으로 오르내리면서 이어진다. 범바위를 지나면서 고난(苦難)의 행군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범바위까지 오는 산길이 좋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이제부터 만나게 되는 산길의 상태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산길은 비록 희미하지만 길의 흔적을 못찾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잡목(雜木)들이 산길을 가득 매우고 있어서 한걸음 내딛기조차 여간 사납지 않다. 잡목만 해도 그나마 나은 편이다. 명감나무가 유난히도 많다보니 잡목에 싸대기를 맞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가시에 찔리기 일쑤다. 에이 ××’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들의 입에서 쌍소리가 심심치 않게 새나온다. 맞다. 욕을 얻어먹어도 싼 산이다. 아니 욕을 얻어먹어야 하는 것은 이 산이 아니고 이 산을 관할하고 있는 지자체여야 한다. ‘화시산과 고인돌유적지를 하나로 묶을 경우 뛰어난 관광자원이 될 것인데도, 이렇게 내버려두고 있다면 욕을 얻어먹어도 싸다 할 것이다.

 

 

거친 산길과 싸우면서 30분 정도 진행하다보면 회안재(回雁)에 이르게 된다. 누군가의 글을 보니 요 아래에 있는 운곡저수지에 겨울철새인 기러기가 다녀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기러기가 찾아 올 것을 어떻게 알고 기러기가 돌아오는 고개라는 지명을 지었단 말인가. 참으로 지혜로운 우리네 조상들이다. 당시에는 기러기가 먹이를 찾을만한 운곡저수지도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마냥 욕설만 튀어나오는 산길은 아니다. 산길이 간혹 암릉을 만나면서 시야(視野)를 활짝 열어주기 때문이다. 부처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전망바위 위에 서면 고창의 너른 들녘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고창시가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그 왼편에 버티고 있는 산은 물론 방장산이다.

 

 

회안재를 지나고서도 산길은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면서 계속된다. 산행을 이어가다보면 언제부터인가 산길이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거리상으로 보아 부안읍 경계에서부터이지 않을까 싶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회안재를 출발한지 1시간 정도가 지나면 또 하나의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아마 옥녀봉일 것이다. 옥녀봉에서 다시 15분 조금 못되게 내려가면 송전탑(送電塔)이 있는 행정치에 이르게 된다. 예전에 산내면과 고창을 오가던 고갯마루인 행정치는 운곡저수지가 축조(築造)된 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으나 수종갱신사업으로 임시도로가 났다. 산행은 이 임시도로를 따른다. 원래 예정했던 코스는 맞은편의 화암봉을 오르내린 후 작업고개에서 고인돌유적지로 내려가도록 되어있는데 이상한 일이다. 산행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화암봉으로 오르는 길이 얼마나 거칠던지 도무지 헤치고 올라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행정치에서 임도를 따라 왼편으로 10분 남짓 내려서면 송암마을에 내려서게 되고, 마을 안길을 통과한 후 마을 진입로를 따라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길게 걸으면 드디어 고인돌(支石墓,dolmen)군락지이다. 사적 제391호인 고창고인돌유적(,Gochang Dolmen Sites)은 고창읍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 1,764m 범위에 44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남방식, 북방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과 크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한국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락지이다.

 

 

 

 

고인돌유적은 사방에 널린 고인돌 외에도 화장실이나 정자(亭子), 벤치, 그리고 인공연못, 코스모스 꽃밭 등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춘 공원(公園)으로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하긴 유네스코(UNESCO : United Nations Educational,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200012)되었을 정도로 빼어난 선조들의 유산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유적은 기원전 20003000년의 장례 및 의식 유적으로 선사시대의 기술 및 사회발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유적지의 들머리 근처에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다.

 

 

산행날머리는 고인돌유적지 주차장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유적지를 둘러보고 나면 매표소에 이르게 된다. 이 매표소는 왼편에 보이는 건물, 즉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파는 곳이다. 들어가 볼까 하다가 그냥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주차장의 한쪽 모퉁이에 벌여 놓았을 점심상이 자꾸만 구미를 당겼기 때문이다. 그만큼 오늘 따라나선 청마산악회의 점심상은 맛있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꼭 음식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에 도통했던 아버님을 늘 옆에서 보아온 난 비록 사학자들에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는 다다라 있는 편이다. 당연히 옛사람들의 유물이나 유적은 꽤나 많이 둘러본 편이고, 이에 대한 지식 또한 어느 정도는 머릿속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미련 없이 음식상으로 직행했던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40분이 걸렸다. 그러나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볼 수 있다.

안수산(安峀山, 554.6mm)

 

산행일 : ‘14. 7. 8(화)

소재지 : 전북 완주군 고산면 경계

산행코스 : 안수사 주차장안수사달걀봉안수산고산 자연휴양림(산행시간 : 2시간40)

 

함께한 산악회 : 형제들과 함께

 

특징 :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 가면 자연휴양림(自然休養林)이 있다. 완주군에서 운영하고 있는 휴양시설인데 도심(都心 : 전주시)에서 가깝지만 깊은 산골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인기가 좋은 편이다. 고산면소재지(面所在地)에서 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편에 바위로 이루어진 산봉우리 하나가 보인다. 이 산이 바로 안수산이다. 작지만 서슬 시퍼런 암릉을 끼고 있는 안수산은 천년고찰(千年古刹)인 안수사까지 끼고 있어 여느 다른 명산에 결코 뒤지지 않는 풍치(風致)를 자랑한다. 다만 산이 작은 탓에 산행시간이 너무 짧은 것이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같은 능선에 있는 서방산과 연계해서 산행을 이어갈 수도 있겠으나 이럴 경우에는 차량회수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안수산으로 가는 길목의 고산천, 이른 새벽이어선지 물안개가 자욱하다. 도심(都心)에 사는 사람들은 쉽게 접하지 못하는 진풍경이 아닐까 싶다. 하긴 시골에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저렇게 몽환적(夢幻的)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풍경은 쉽게 접하지 못할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안수사 주차장(고산면 성재리)

익산-장수고속도로 완주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대전·옥천방면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고산면(완주군) 소재지인 읍내리에 이르게 된다. 읍내리 시내를 통과한 후 고산천을 가로지르는 오성교()를 지나자마자 안수사라고 적힌 이정표가 세워진 갈림길에서 강변도로를 따라 오른편으로 들어간다. 강변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금방 또 다른 안수사이정표를 만나게 되는데, 이번에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강변도로를 벗어나면 된다. 이후는 일사천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행들머리로 삼는 성재고시원을 만나게 되더라도 계속 직진한다. 이어서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오른편 도로를 따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안수사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안수사 주차장은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승용차 십여 대 정도는 주차시킬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산행에 나서도 될 것이다. 단 참고할 것은 대형버스는 오성교 이후부터 진입이 불가능하다.

 

 

주차장의 가건물(삭도 엔진관) 옆으로 난 산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서 6~7분쯤 오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두 길은 얼마 후에 다시 만나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만일 헤어지는 길이라면 절을 찾는 신자(信者)들을 위해서라도 안수사에서 그냥 놔두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짐작되는 것은 왼편길이 조금 더 가파를 것이라는 점이다. 왼편길이 지능선을 타고 올라가는 길로 보이는데, 지능선으로 난 길이 돌아서 오르는 길보다 더 가파른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 산악회의 시그널들은 왼편의 지능선길에 더 많이 매달려있다. 그러나 우린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시간은 조금 더 오래 걸리겠지만 그에 비해 경사(傾斜)는 더 완만(緩慢)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코스도 역시 만만찮은 가파름이 계속되는 오르막길이었다. 거기다 바닥까지 너덜로 이루어져 있어서 발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쉽지 않다.

 

 

 

주차장에서 가파른 오르막길과 힘겨운 싸움을 하다보면 25분쯤 후에는 능선으로 올라서게 되면서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안수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다. 이곳에도 역시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다. 그러나 눈치로 보건데 왼편의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아까 요 아래에서 헤어졌던 길일 것이다.

 

 

이곳 능선갈림길 근처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이정표 하나를 만나게 된다. ‘저절로 가는 길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왜 저런 문구(文句)를 적어 놓았을까? 그때 문득 뭔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여기까지 오르는 데는 엄청나게 힘이 들었다. 너무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 지금 걷고 있는 구간은 평지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힘을 쏟지 않아도 저절로 가게 될 정도이다. 어쩌면 내 추론(推論)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나은 추론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갈림길에서 조금만 더 가면 나무계단이 나타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안수사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을 출발한지 35분쯤 후이다. 안수사에 이르면 깔끔하게 단청이 된 전각 하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외형으로 보아 요사채인 모양이다. 그 뒤에는 절간을 병풍(屛風)처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암벽, 아마추어(amateur)인 내가 봐도 명당(明堂)으로 보일 정도로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 안수사에는 이 명당에 얽힌 옛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아주 오랜 옛날 고산고을에 부임하는 원님들마다 계속해서 비명(非命)에 죽어나갔다고 한다. 그러자 나라에서는 어차피 죽어도 좋다고 생각되는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원님으로 내려 보냈단다. 그렇지 않아도 욕심이 많은 원님의 눈에 명당자리가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바로 안수사 자리이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손들의 부귀영화(富貴榮華)까지 바라던 원님이 이런 명당자리를 놓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조상 묘()를 이곳에 쓰려고 했단다. 그런데 그날 밤 하얀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그 자리에 절을 짓는 꿈을 꾸게 되었고, 이에 뭔가를 느낀 원님이 조상의 묘를 쓰는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 절이 바로 안수사란다. 그 원님이 자신의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선정(善政)을 베풀었음은 물론이다.

 

 

절로 들어서는데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라고 적힌 현수막(懸垂幕)이 눈에 띈다. 이 얼마나 좋은 글귀인가. '좋은 날그리 큰 바람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바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 스님들도 날마다 성불하소서.’ 나도 몰래 부처님 계신 곳을 향해 두 손을 모아본다.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인 안수사는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동안 수차례 화재를 겪은 흔적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전라관찰사와 관청이 중창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지만 자세한 연혁(沿革)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삼한시대에는 불교가 전래되기 전이므로 신빙성은 떨어진다. 신라 말기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현재 대웅전과 산신각 및 요사채 등의 건물과, 후불탱화와 칠성탱화 및 독성탱화 등의 유물(遺物)이 있으나 문화재(文化財)로 지정받을 정도는 아니다. 한편 이 사찰은 전주부(全州府)가 지네의 형상을 하고 있어 봉황이 닭으로 변한 형상의 계봉산에 절을 지어 산의 기세(氣勢)를 눌러 주어야만 지역이 평안하고 나라가 평화롭다고 해서 창건을 하였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위에서 말한 고산원님과 관련된 전설과 다르나 어차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일 따름이니 그다지 신경 쓸 일은 아닐 것이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묵은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다. 이 절의 역사는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역사책에 보면 삼한시대에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되기도 전이다. 믿을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삼한시대 때까지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절의 역사가 오래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저렇게 오래 묵은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는 절이 어떻게 역사가 일천할 수 있겠는가. 느티나무 아래에 서면 고산시가지(市街地)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멋진 전망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절 구경을 마치고나서 비닐을 칭칭 감고 있는 전각(殿閣)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위로 오르면 널따란 헬기장이 나타난다. 헬기장에서 다시 한 번 조망(眺望)이 터진다. 조금 전에 안수사에서 보았던 고산시가지는 물론이고, 이번에는 봉동읍의 고층건물들까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조망을 즐기고 있는데 낯선 개()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언제부터 우리를 따라왔는지는 몰라도 아마 안수사에서 기르고 있는 개인 모양이다. 그리고 나머지 산행은 이 개와 함께 하게 된다. 불교에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개와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봉동읍 방향

 

 

 

헬기장의 한쪽 귀퉁이, 그러니까 거대한 암벽(巖壁)의 아래쪽에 알루미늄으로 지어진 간이건물 하나가 보인다. 안수다헌(安峀茶軒)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데 문은 굳게 닫혀있다. 누군가의 글에 이곳에 오면 무료로 차 맛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찾아온 시간이 이른 아침인지라 아직 문을 열기 전인가 보다.

 

 

안수산으로 오르는 산길은 안수다헌의 옆, 산의 사면(斜面)으로 난 길을 따라야 한다. 길은 초반에는 별 어려울 것 없이 시작되지만 갈수록 경사(傾斜)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끝내는 안전로프에 의지해야만 오르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험해져 버린다. ‘개가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 같아요선두에서 걷고 있던 둘째 매제(妹弟)가 하는 말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앞장서서 가던 개가 혹시라도 매제가 안보이기라도 할라치면 다시 되돌아왔고, 매제가 보이면 다시 앞장서서 걷는 일을 반복하더라는 것이다. 이정도면 완벽한 안내견(案內犬)이라 할만하다.

 

 

 

 

 

 

 

로프에 의지해가며 힘겹게 싸우다보면 암봉 위에 올라서게 된다. 지도에 계란(鷄卵:달걀)봉으로 표기된 지점으로 오늘 산행에서 가장 조망이 잘 터지는 곳이다. 안수산 정상은 물론이고, 아까 보았던 봉동읍 방향에는 이번에는 화정저수지까지 확연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고산자연휴양림은 보너스로 생각하면 된다. 전망 좋은 장소에 앉아 담소를 즐기는데 우리 곁에는 아까의 개가 점잖게 앉아있다. 그 광경을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아마 우리가 집에서부터 데리고 온 개로 알았을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안수산 정상으로 향한다. 조금 전에 계란봉에 올라올 때보다는 훨씬 편한 산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정상 조금 못미처에 이르면 경고판(警告板)’ 하나가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보인다. ‘추락의 위험이 있으니 정상에 올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올라가지 않을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을까? 정상을 코앞에 두고 말이다. 우리도 역시 그냥 올라가기로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잘 되었음은 금방 알게 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곳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수산 정상은 서너 평 정도로 비좁은 공간만을 제공한다. 그 좁은 공간에다 정상표지석과 삼각점 그리고 이정표(서래봉 4.05km/ 산림문화휴양관/ 안수사)까지 세워놓았을 정도이면 아주 좁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정상도 조망(眺望)이 잘 터지기는 매 한가지이다. 아까 보았던 풍경들이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고, 서래봉이나 더 먼 곳에 있는 산군(山群)들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나타날 정도이다. 남쪽으로 종남산, 서방산이 보이고, 서북쪽엔 천호산과 미륵산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건 아마 천등산과 대둔산일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이 지났다. 그러나 조망을 즐기느라 곳곳에서 걸음을 멈추었으니 소요시간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정상에서 바라본 암봉인 계란(달걀)

 

 

 

정상에서 조망을 즐기다가 하산을 서두른다. 아침을 먹을 시간이 이미 지난 탓인지 다들 시장기를 느낀 표정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의 하산코스는 세 가지이다. 그중에 가장 바람직한 코스는 자연휴양림으로 내려가는 코스라고 볼 수 있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량을 생각한다면 아까 올라왔던 코스를 다시 거슬러 내려가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기만 같은 길을 두 번 걷는 일은 산꾼들이 가장 싫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서래봉방향으로 진행할 경우 차량회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된다.

 

 

자연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그러나 흙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내려서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는 편한 길이다. 그러나 조망(眺望)이 일절 터지지 않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완벽하게 시야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그저 앞사람의 등짝만 보며 걷는 산행이 계속된다. 우리를 정상까지 안내했던 개는 아직도 우리와 함께 걷고 있다. 다만 아까는 선두에서 우리를 인도했는데 이번에는 앞에 섰다가 어떤 때는 뒤를 따르기도 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20분쯤 내려서다보면 자연휴양림의 앞산이 잘 조망(眺望)되는 전망대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산림문화휴양관과 웰빙휴양관으로 나뉘나 어디로 가야할지를 갖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두 휴양관이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산림문화휴양관 쪽으로 내려선다.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가 산림휴양관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엔 웰빙휴양관으로 옮겨 묵을 것이다.

 

 

 

먹을 거라도 좀 줘야하는 거 아냐?’ 아까 정상에서부터 우리들끼리 나누었던 이야기이다. 이렇게 신통방통한 개에게 뭔가를 주고는 싶은데 다들 빈손이라서 입으로만 품들을 팔고 있다. 나지막한 산이라서 간단히 다녀올 요량으로 나서다보니 다들 빈손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뭔가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간절해지는 모양이다. 하긴 정상에서 자기 집인 안수사로 내려가야 하는데도 계속해서 안내를 자청하고 있으니 어찌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은 자연휴양림, 자기가 살고 있는 집과는 정 반대방향에 있는데도 말이다.

 

 

산림휴양관 방향으로 내려서면 조금 후에 시야(視野)가 툭 터지는 암릉지대가 나타난다. 전망대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곳이다. 암릉에서는 계곡을 타고 길게 이어진 휴양림 시설이 한눈에 잘 내려다보인다. 물을 저장하기 위해 군데군데 계곡을 막은 보()와 숲속에 자그맣게 움을 튼 그림 같은 산막의 조화가 보기 좋다.

 

 

산행날머리는 고산자연휴양림

암릉을 내려서서 얼마간 더 걸으면 드디어 자연휴양림의 시설들을 연결시키는 경내(境內) 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정상을 출발한지 1시간 만이다. ‘매점이 문을 열었을지 모르겠네?’ 이곳까지 따라온 개에게 뭔가 조그만 것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은 다들 같은 모양이다. 이심전심으로 매점을 찾고 있는데, 개는 또 한 번 영물(靈物)임을 증명해 보인다. 도로에 내려서서 우리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더니 쏜살같이 왔던 길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좋은 산에서 맺은 좋은 인연이었다. 오늘 산행에 걸린 시간은 총 2시간 40분 정도, 조망을 즐기느라 쉬엄쉬엄 걸은 점을 감안하면 산행시간은 큰 의미가 없다.

 

소요산(逍遙山, 444.2m)-수월봉(363m)

 

산행일 : ‘14. 7. 20()

소재지 : 전북 고창군 부안면

산행코스 : 용산마을건기봉(200.1m)수월봉사자봉(344.6m)연기재소요사소요산연기교()선운사삼거리(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소요산 하면 대부분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을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전라북도 고창 땅에도 또 하나의 소요산이 있다. 그것도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에 결코 뒤지지 않는 산세(山勢)를 지닌 채로 말이다. 그런데 이곳의 소요산을 아는 사람들은 겨우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바로 인천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위치한 선운산(경수봉)이 너무나 유명해서 그 위세(威勢)에 철저하게 눌려버린 탓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 고창군에서 소요산 등산로를 개설하고 미당시문학관을 연계하는 <이야기가 있는 천리길 탐방로>를 조성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곰소만 일대의 조망(眺望)이 뛰어나고, 거기다 산행날머리인 연기다리() 근처는 풍천장어로 소문난 곳이니 맛도 볼 겸해서 한번쯤은 시간을 내어 찾아볼 만한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용산마을(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I.C에서 내려오자마자 좌회전 22번 국도 법성포방면으로 달리다보면 용산1교차로(交叉路 : 부안면 용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와 첫 번째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용산마을에 이르게 된다(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는 옛() 22번 국도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 도로변에 있는 마을종합회관의 주차장이 엄청나게 넓으니 자동차는 이곳에다 주차해 놓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산행들머리는 종합회관의 주차장에서 부안면소재지 방향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서 열린다. 산길이 열리는 일제(日帝) 때 최판사가 거주했었다는 고택(古宅)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 최판사댁의 앞마당을 통과한 후,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50m쯤 들어가면 오른편 산자락으로 산길이 열린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척 거칠다는 느낌이다. 길의 흔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평소에는 거의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산길을 가득 메운 잡목(雜木)들을 헤치며 15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용산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북쪽에는 조금 후에 오르게 될 소요산이 우뚝 솟아있고, 남쪽에는 화시산이 또렷하다. 전망바위에서 건기봉 정상까지는 금방이다. 건기봉 정상은 아무런 특징이 없는 그저 평범한 하나의 산봉우리에 불과하다. 물론 정상표지석도 없다. 그저 새마포산악회에서 붙여 놓은 정상표지판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조망(眺望)도 터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건기봉에서 수월봉으로 가는 길은 수월봉을 향해 일직선을 그은 다음 선의 오른쪽에서 찾아보는 게 좋다. 잡목(雜木)들을 베어낸 흔적을 쫒아 약간 왼쪽으로 내려섰던 난 한참을 고생하고 나서야 잘못됐음을 알아차리고 되돌아 나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다시 찾은 산길은 의외로 또렷하다. 조금만 신경을 더 썼더라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도 성급한 판단이 화를 불러왔던 것이다.

 

 

건기봉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안부에 이르게 되고, 산길은 다시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서면서 반대편의 산봉우리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수월봉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가끔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터지는 암릉지대를 지나게 된다. 바윗길의 입맛만 보여주는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로 나타나는 암릉은 제법 거창하다. 곧바로 치고 오를 수 없을 정도로 우람한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돌아 위로 오르면 20~30명이 족히 둘러앉아도 될 만큼 널따란 암반(巖盤)이 나타난다.

 

 

 

 

두 곳의 암릉 모두 뛰어난 조망을 자랑하지만 위편에 위치한 암반이 한층 더 뛰어나다. 조금 전에 지나온 건기봉이 마치 삿갓을 엎어 놓은 것처럼 뾰쪽하게 솟아있다. ‘그래서 건기봉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건기의 건()두건 건자이거든요’. 건기봉을 그 생김새대로 삿갓봉이라고 고쳐 부르면 좋겠다는 내 말을 듣고 같이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이 건네 오는 말이다. 그러나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 검색해본 결과에 의하면 건기봉(建祺峰 : 일명 노적봉, 건지봉)은 깃발()을 꽂다()는 뜻으로서 굴치(掘峙 : 일명 굴재, 구을치, 구을현) 북쪽 장군봉의 장군이 이곳에 기를 꽂을 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으론 이곳은 일제 때 깃대를 꼽고 측량을 했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암반에서 조망을 즐기다가 눈을 돌리는데 문득 안타까운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너럭바위의 한쪽 귀퉁이에 몸을 기대고 있는 멋지게 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누렇게 말라죽어 있는 것이다. 만일 살아있을 경우에는 명품소나무(名品松)로 불리어도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생김새인데도 말이다. 문득 몇 년 전에 이곳을 답사했던 어느 등산객의 말이 생각난다. 푸르고 싱싱한 잎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루빨리 적절한 치료를 하여 줄 것을 간절히 바라던 그의 심정이 내게 전해지면서 나도 몰래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수월봉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가끔 봉우리 같은 것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산봉우리라 부르기에는 좀 난감한 수준이다. 꼭대기에서 내려서지를 않고 잠시 반반했다가 이내 다시 오르막길로 변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너럭바위(두 번째암릉)에서 5분쯤 더 가면 전위봉, 수월봉 정상은 이곳에서도 5분 정도를 더 걸어야 나온다. 건기봉에서 수월봉까지는 45,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5분 정도가 지났다. 수월봉 정상은 아까 지나온 건기봉과 마찬가지로 정상표지석이 없다. 나무기둥에 매달린 새마포산악회의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에는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매달아놓은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가 하나 더 보이는 것이 건기봉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건기봉과 마찬가지로 조망(眺望)까지도 터지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수월봉 정상에서 조망(眺望)이 터지지 않는 것을 갖고 서운해 할 필요까지는 없다. 조금 후에는 눈터지는 조망을 맘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사자봉 방향으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나오는 너럭바위가 바로 그곳이다. 수십, 아니 수백 명이 둘러앉아도 충분할 널따란 암반(巖盤)위로 올라서면 일망무제(一望無題)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진행방향에 수월봉과 소요산이 또렷하고 왼편에는 비록 희미하지만 선운산이 우뚝하다.

 

 

 

 

 

조망을 즐기다가 능선을 내려서면 17분 후에는 매봉재에 내려서게 된다. 매봉재는 오른쪽의 쇄점마을과 왼쪽에 있는 연기저수지에서 올라올 경우 서로 만나게 되는 고갯마루이다. 그러나 고갯마루에서 양편으로 나있는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이용을 하지 않은 탓에 잡목(雜木)과 웃자란 잡초(雜草)들이 산길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구간의 주변 풍경은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편이다. 그저 주변에 곱게 핀 야생화들이나 구경하면서 묵묵히 걷는 게 일이다.

 

 

 

매봉재를 지나면서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수월봉에서 내려오며 까먹었던 고도(高度)를 다시 올려놓느라 용트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산길은 오산저수지가 잘 내려다보이는 바윗길을 한 차례 지난 후에 사자봉 정상에다 올려놓는다. 사자봉 정상도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새마포산악회서래야 박건석선생의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물론 조망(眺望)도 일절 터지지 않는다. 조금 전에 올라온 일행 한분이 벗어든 윗옷을 비틀며 땀을 짜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늘 날씨가 그만큼 무덥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내 배낭에 매달린 타월(towel)에서도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물론 내가 흘린 땀방울이다. 짜고 짜도 끊임없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짜는 것을 포기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사자봉에서 연기재로 향하다보면 오른편에 전망 좋은 바위가 하나 보인다. 바위 위로 올라서면 오산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뒤에는 수강산(壽崗山)이 우뚝하다. 수강산은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산이다. 한말(韓末)의 의병장이었던 강대영(姜大榮)선생이 의병들을 훈련시키던 장소였고, 동학(東學 : 천도교)의 대접주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손화중(孫華仲)선생의 피체지(被逮地)로 알려진 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산이 안타깝게도 흉측하게 잘려나간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산비탈이 온통 하얗게 까발려져 있는 것이다.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서 채석장(採石場)으로 허가를 내준 모양인데, 내 좁은 소견으로는 지자체의 수익(收益)도 중요하겠지만 저 정도의 역사흔적을 품은 산들은 자연그대로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자봉에서 연기재로 내려가는 길은 의외로 또렷하다. 산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이제까지와는 다른 모습이었기에 의외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날머리로 삼고 있는 연기마을에서 이곳 수월봉과 소요산을 거쳐 다시 연기마을로 내려가는 원점회기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니면 고창군에서 소요산의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이곳 수월봉 코스를 포함해서 정비했던지 말이다. 걷기 좋은 산길을 따라 15분 정도 내려서면 밤나무 단지에 이르게 되고, 단지의 가장자리를 잠깐 통과하고 나면 이윽고 연기재에 이르게 된다.

 

연기재는 사각의 정자(亭子)와 이정표, 그리고 간이화장실까지 갖춘 쉼터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 연기재에서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우선 왼편의 연기마을과 오른편의 검산리를 잇는 임도(林道)가 좌우(左右)로 흐르고, 또 다른 임도 하나는 소요사로 향한다. 그 외에도 우리가 내려온 산길과 질마재로 넘어가는 산길이 더 있으니 오거리이다. 한마디로 교통의 요충지인 셈이다. 그러나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미당시문학관 2.91Km/ 고인돌박물관 20.13Km)는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창군에서 새로 만든 둘레길인 고인돌 질마재따라 100리길용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100리길의 제4코스인 질마재길이 연기마을에서 이곳을 거쳐 질마재고개로 넘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질마재는 산 아래 바닷가인 좌치 나루터에서 생산한 소금을 부안 알뫼 장터에서 곡물과 교환하기 위해 지고 넘던 고개인데, 고개의 생김새가 소나 말의 안장인 길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한 미당시문학관은 고창이 낳은 한국문학계의 거목 미당 서정주의 작품과 생애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시설이다. 육필원고, 사진자료, 15천점이 전시되고 13세까지 살았던 생가(生家)도 복원해 놓았다.

 

 

 

연기재에서는 시멘트로 포장된 널따란 임도(林道)를 따라 올라가야만 한다. 장승이 들머리를 지키고 있는 오른편의 산길로 들어서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이 길은 '미당문학관'으로 넘어가는 길마재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요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소요산 정상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는 천년고찰이라는 소요사의 탐방은 생략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연기재에서부터 더위와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된다. 임도의 주변에 큰 나무들이 없어서 따가운 햇볕에 온통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멀기까지 하니 죽을 맛이다. 특히 오늘은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는 여름날, 며칠 전에 초복이 지났으니 얼마나 무덥겠는가. 이런 날에는 이 길을 지옥의 길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하등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널따란, 그러나 아무 특징도 없는 시멘트 포장길을 걷다보면 의외의 풍경이 나타나기도 한다. 느닷없는 기암절벽(奇巖絶壁)이 길가에 나타나는 것이다. 마침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기에 길가 바위 위로 올라서본다. 흡사 제비집처럼 바위벼랑의 좁은 틈새에 비집고 들어선 소요사가 눈에 들어온다.

 

 

 

길고 긴 시멘트 포장길이 신물이 날 즈음이면 저만큼 앞에 어마어마하게 높이 치솟은 바위벼랑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누각(樓閣) 하나가 오롯이 앉아 있다. 바로 소요사의 범종각(梵鐘閣)이다. 절간의 일주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은 바위벼랑 아래에는 오래된 부도가 하나 있다. 이 부도는 도선국사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니 참조할 일이다. 그 곁에 최근에 세운 듯한 기념비 두 개가 더 있으나 큰 의미는 없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그런데 부도를 돌아보다가 의외의 풍경에 눈살을 찌푸리고 만다. 바위벽에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은 이름들 위에다 감실(龕室) 모양의 지붕까지 새겨 놓았다. 과연 그렇게까지 보호를 받아야할 이름들일까 싶어 한숨을 짓게 만든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풍경들인 것이다.

 

 

벼랑을 돌면 의외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오래된 사찰(寺刹)이려니 하고 기대했는데 막상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온통 최근에 지어진 것들뿐이다. 그것도 절간과는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 정도의 하얀색의 시멘트건물과 조립식 건물들로 말이다. 그러나 2~3층 높이의 시멘트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주변 풍경이 일시에 변한다. 거대한 암벽(巖壁)의 틈새마다에 들어서있는 대웅전과 종각, 산신각, 칠성각, 요사채 등은 제법 고풍(古風)스런 외모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종각 옆의 느티나무를 보면 이 절의 역사가 범상치 않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어른들 두세 명이 팔을 펼쳐야만 서로 손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밑동이 굵은 느티나무가 이 절의 역사가 오래 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느티나무 아래에 놓인 평상에 앉아 뻥 뚫린 조망(眺望)을 즐기는데, 문득 난간에 매달려 있는 판자(板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내 것이라 할 것이 있는가? 내 아들인데, 내 재산인데 하면서 어리석은 자는 괴로워한다. 참으로 그 자신도 그의 소유가 아닌데, 어찌 아들이나 재산의 그의 소유겠는가그리고 맨 아래에는 常笑僧 金輪刻이라고 적혀있다. 소요사가 태고종 사찰로 알고 있는데 이 절의 주지스님의 법명(法名)이 아마 윤각(輪刻)인 모양이다. 요사채 곁에서 감로수(甘露水)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이고 돌아서는 길에 뵌 스님은 상소승(常笑僧)’.이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할 정도로 넉넉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참고로 소요사(逍遙寺)신선과 동승이 노니는 산에 들어앉은 절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절을 누가 지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백제 위덕왕 때 소요(逍遙)라는 스님이 지었다는 설과, 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의 스님이었던 연기(烟起)가 인근에 연기사를 세운 후에 현재의 소요사 자리에 부속 암자(庵子)를 세웠다는 설, 그리고 나머지 또 하나는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는 설 등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의 설()에 불과할 뿐 어느 것 하나 고증된 것은 없다. 소요사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진묵대사(震黙大師)와 혜감선사(慧鑑禪師)등 수많은 유명 스님들을 배출하였으나 정유재란과 6.25때 소실(燒失)되었고, 현재의 전각(殿閣)들은 소실 이후 여러 번의 재건을 거듭하며 새로 지은 것들이라고 한다.

 

 

 

 

소요사를 빠져나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소요산 정상으로 가는 산길의 들머리는 소요사의 돌계단 아래에서 오른편 50m쯤 위의 직각으로 꺾이는 지점(이정표 : 소요산 정상 0.3Km)에서 열린다. 쓰러져있는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들어서자마자 산길은 정상을 향해 마지막 몸부림을 친다.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거리는 짧다. 15분 정도만 고생하면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바위봉에 올라서게 된다.

 

 

 

무인산불감시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위봉(이정표 : 부안면 선운리 2.0Km)은 얼핏 보아 정상으로 오인하기 딱 좋겠지만 사실 정상은 이곳이 아니다. 비록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이지만 하여튼 몇 걸음 더 걸어야만 하는 곳에 정상이 따로 있는 것이다. 감시탑 근처에는 벤치 몇 개를 갖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마침 시야(視野)까지 열리니 쉬면서 망중한(忙中閑)이라도 즐겨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의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미당 서정주의 시문학관이 있는 북쪽방향으로는 부안면 일대의 들판과 갯벌이 넓게 펼쳐지고,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만 그 뒤에는 곰소만과 내변산의 산봉(山峰)들까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선운산은 물론이고 화시산까지 내다보인다.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내장산과 입암산 그리고 방장산까지 볼 수 있다지만 오늘은 박무(薄霧, mist) 때문에 그저 마음속으로나 그려볼 따름이다.

 

 

 

 

한동안 조망을 즐기다가 산불감시탑 앞을 지나 몇 발짝 더 오르면 전북의 산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특유의 스테인리스(stainless)로 만든 사각(四角)막대 모양의 정상표지판과 동판(銅版)으로 만든 대삼각점(大三角點)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요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에 서면 다시 한 번 시원스럽게 조망(眺望)이 터진다. 아마 경수봉을 위시한 선운산의 산봉들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일 것이다. 소요산은 고창의 젖줄인 인천강()을 사이에 두고 높이가 같은 선운산 경수봉과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형제봉, 또는 걸출한 문장가(文章家)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의미로 문필봉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보천교(普天敎 : 증산교 계열의 신종교)의 창시자인 차경석, 인촌 김성수, 미당 서정주 등이 이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소박할 정도로 좁은 정상에서의 머무름을 포기하고 하산 길을 재촉한다. 몇 사람만 들어서도 빈 공간이 없어져버릴 정도로 정상이 비좁았기 때문이다. 아까 무인산불감시탑이 있던 곳에다 쉼터를 만들었던 이유가 모두 이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산은 북릉으로 잡는다. 정상에서 잠깐 내려서면 암릉이 나타나면서 다시 한 번 조망(眺望)이 터진다. 또 다시 부안면 뜰과 곰소만이 나타나는데,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워져 있다.

 

 

 

 

암릉을 내려서서 조금만 더 걸으면, 그러니까 정상을 내려선지 15분 정도가 지나면 미당시문학관 갈림길’(이정표 : 부안면 선운리 1.5Km/ 소요산 정상 0.5Km)을 만나게 되고, 날머리인 연기마을로 내려가려면 이곳에서 왼편 길로 진행해야 한다. 산길은 한마디로 순하다. 내리막길이 가파르지 않고 거기다 보드라운 흙길이다 보니 내려서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다. 산이 낮은데다 날머리까지의 거리까지 멀다보니 급하게 고도(高度)를 떨어뜨릴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까 산을 오를 때와는 딴판으로 잘 닦인, 그러나 호젓한 산길을 편안하게 걷다보면 연기저수지의 아래에 있는 검은 기와집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서 농로(農路)를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연기재로 올라가는 임도(‘고인돌 질마재따라 100리길의 제3코스인 질마재길’)와 만나게 된다. ‘미당시문학관 갈림길에서 이곳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아마 무더위 때문에 속도가 많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연기다리 건너의 삼인교차로

질마재길을 따라 10분쯤 내려오면 미당시문학관 갈림길’(이정표 : 미당시문학관 5.09Km/ 도솔암 5.93Km/ 소요사입구 3.77Km)을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고인돌 질마재따라 100리길의 제4코인 보은길(소금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잠시 후에는 산행이 종료되는 연기다리()에 이르게 된다. 오늘 걸은 거리는 대략 8.5Km정도, 산행시간은 총 4시간20분이 걸렸다. 하산 길에 몸을 씻느라 멈춘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오늘 산행에서는 질마재라는 낱말을 유난히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질마재하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미당 서정주시인(詩人)이다. 그가 길마재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노년에 고향 질마재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질마재 신화라는 시집을 발간(1975)했다. 그 시집에 수록된 신부라는 제목의 시() 한편을 소개해볼까 한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와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에필로그(epilogue)

주진천(일명: 인천강)을 가로지르는 연기교 다리를 건너면 선운사 입구인 삼인 교차로가 나온다. 도로변에는 온통 풍천장어라는 낱말이 들어간 음식점의 간판들뿐이다. 하긴 복분자에 곁들인다는 고창의 풍천장어는 웬만한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을 정도이니 저런 간판들을 달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풍천은 단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을 일컫는 낱말일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고창에 있는 냇가의 이름쯤으로 알고 있다. 복분자와 자연산장어의 끈질긴 인연이 풍천이라는 낱말을 고유명사(固有名詞)’로 둔갑을 시켜버린 것이다. 그러나 난 풍천장어라는 간판에 눈 한번 팔지 않고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식이 결코 풍천장어에 뒤지지 않을 것임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가 가까워지자 이대장이 달려오더니 마지막 남은 것이라며 캔맥주 하나를 슬그머니 쥐어준다. 시원하다. 아니 달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만큼 더위에 지쳤다는 증거이다. 버스에 도착하니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오늘의 메뉴는 옻닭이란다. 나 같이 옻닭을 못먹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자상하게도 삼계탕이 따로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에피타이저(appetizer)인 막걸리와 소주, 맥주는 얼음에 재워져 있고,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디저트(dessert)인 수박은 지난번보다 하나가 더 많다. 오늘도 역시 앞자리에 앉은 김진수선배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오늘 산행을 마감한다. 그리고 다음 주말의 오대산 산행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문필봉(文筆峯, 625m)-사달산(士達山, 634m)-럭키산(608.4m)

 

산행일 : ‘14. 4. 20()

소재지 : 전북 완주군 동상면

산행코스 : 충혼비문필봉사달산쇠다리봉헬기장럭키산분기봉거인마을(산행시간 : 3시간15)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문필봉 등 오늘 오른 산들은 모두 바위산들이다. 그러나 바위 위가 흙으로 덮여있기 때문에 막상 산행은 흙산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렇다고 산을 오르내릴 때까지 암벽(巖壁)을 피할 수는 없다. 때문에 바윗길의 특징인 조망(眺望)에다 암벽을 오르내리며 짜릿한 손맛까지 느낄 수 있다. 당연히 괜찮은 산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막상 이 산들은 이정표나 정상표지석 하나 없이 철저하게 외면을 받고 있다. 대둔산이나 운장산, 연석산 등 이름난 산들이 많은 고장에 자리 잡고 있어, 그들의 유명세(有名稅)에 밀린 탓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충혼비(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1105-2)

익산-장수고속도로 소양 I.C에서 내려와 26번 국도를 타고 진안방면으로 잠깐 달리다가 화심교차로(交叉路 :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에서 좌회전 55번 지방도를 따라 울치를 넘어가면 동상면사무소 1.5Km 못 미치는 지점의 왼편에 ‘12이라고 쓰인 커다란 입간판 보인다. 이 간판에 가기 50m쯤 전 오른편에 충혼비가 있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충혼비 뒤에 SK중계탑이 보이니 참조하면 된다.

 

 

 

충혼비(忠魂碑)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그래서 비()를 세운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歷史的) 사실을 기초로 하여 당시에 순국(殉國)한 이들을 기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이 고장에는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 궁금해 하며 안내판을 살펴본다. ‘6.25참전 전사자와 자유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투쟁하다 순직한 선현들’. 그야말로 두루뭉술한 표현이다. 특정하게 누구를 지칭하지 않고 위에서 적은 목적을 위해 순직한 선현(先賢)들 모두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충혼비 왼편으로 난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충혼비 바로 뒤편 ‘SK텔레콤 동성 기지국정문 앞을 지나게 되는 너른 길을 2~3분 걸으면 오른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이 나타난다. 오솔길은 처음부터 제법 가파르다. 그러나 힘들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4분 정도 후에 올라서게 되는 능선까지의 거리가 짧은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산길이 울창하게 우거진 잣나무 숲 아래로 나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거친 숨결을 따라 들어오는 짙은 솔향에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들어있을 테니까 말이다.

 

 

능선을 따라 잠시(2) 걸으면 임도(林道)를 만나게 되고, 산길은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나있다. 임도를 가로질러 7분 정도를 걸으면 여기저기 파헤쳐진 흔적이 역력한 너른 공터가 나타난다. 아마 묘()를 이장(移葬)해간 모양이다. 산길은 점점 경사(傾斜)가 가팔라져가더니 6분 후에 또 다른 묘역(墓域)이 나타난다. 주위는 온통 연록(軟綠)의 물결, 누군가 오월의 연록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했다. 5(五月)은 얼마 더 있어야 찾아오겠지만, 올해는 철이 이를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남쪽의 산들은 연록의 옷으로 갈아입은 지 이미 오래이다. 이런 길에선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코를 킁킁거려본다.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내음, 봄내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두 번째 묘역(墓域)에서 9분 정도 더 걸으면 마지막으로 묘 하나가 더 나타난다. 이번의 무덤은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있다. 그나저나 이곳 문필봉은 풍수(風水)가 뛰어난 산인 모양이다. 수 없이 많은 묘들이 능선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마지막 묘에서 2~3분 더 오르면 높다란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는다. 무작정 오르기가 다소 부담스럽게 보이지만 그냥 치고 오르는 게 좋다. 암벽을 피해 오른쪽으로 우회(迂廻)를 할 수도 있지만 경사(傾斜)가 가파른 게 거의 낭떠러지 수준이라서 오히려 더 힘이 들기 때문이다.

 

 

암벽 위로 오르면 시야(視野)가 툭 터진다. 건너편에 있는 대부산이 손으로 잡으면 금방 잡힐 것 같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구불구불 대부산을 넘어가는 산길까지 눈에 들어올 정도로 선명하다. 저 길은 완주군에서 만든 둘레길인 고종시 마실길이다. 고종시라고 하면 완주군에 있는 행정구역의 이름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시의 ''는 도시(都市)를 의미하는 '()'가 아닌 감나무 '()'. 고종시란 조선시대 고종 임금이 동상곶감을 즐겨 먹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니 고종시 마실길은 동상곶감의 생산 과정을 보고 직접 체험도 해볼 수 있는 생태문화 탐방로인 셈이다. 학동마을에서 대부산을 넘어 거인마을로 이어지는 구간은 마실길의 2구간으로 거리는 6.5Km라고 한다. 하여튼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 모양이다. 그동안 미세(微細)먼지로 인해 제대로 된 조망(眺望)을 즐길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은 거칠 것 없는 조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전망 좋은 바위를 지나면 잠시 가파르기 짝이 없는 너덜길이 나타나고, 이어서 나타나는 바위벼랑은 왼편으로 우회(迂廻)하여 오른다. 이후부터는 널찍한 암반(巖盤)이 계속해서 나타나면서 조망(眺望)이 터지기 시작한다. 시야(視野)가 열리는 곳마다 최고의 전망대(展望臺)가 되는 것이다. 오른쪽 그러니까 남동쪽에는 운장산과 연석산이 장쾌한 능선이 눈길을 떼지 못하게 만들고, 고개라도 돌려볼라치면 대부산과 원등산을 잇는 긴 능선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바윗길은 제법 험하다. 그러나 걱정할 것 까지는 없다. 비록 안전시설은 갖추어져있지 않지만 조금만 조심하면 큰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조망이 너무 시원스럽게 터진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주변 풍경(風景)에 정신을 쏟다보면 발을 헛디딜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산행을 하다보면 앞서가던 사람들이 몇 명씩 모여 있는 것이 자주 눈에 띈다. 그리고 하나 같이 넋을 잃은 채로 앞을 바라보고 있다. 그만큼 조망이 좋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른편에는 운장산과 연석산이 우람한 산세(山勢)를 자랑하고,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면 조금 후에 오르게 될 사달산과 럭키산의 범상치 않은 암릉들이 어서 오라며 겁을 주고 있다.

 

 

 

 

눈터지는 조망(眺望)을 즐기며 산행을 이어가다보면 드디어 문필봉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1시간이 지났다. 어렵게 올라온 문필봉 정상은 의외의 풍경이다. 죽어라하고 바윗길을 올라왔는데 그 꼭대기는 막상 흙으로 이루어진 밋밋한 분지(盆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 정상은 철저하게 버려진 듯한 느낌, 대구의 산악인(山嶽人)인 김문암씨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만이 외롭게 정상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인 탓에 조망까지 트이지 않으니 구태여 머무를 이유가 없다.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인 듯 그냥 지나쳐 버린다. 참고로 문필봉(文筆峯)은 붓끝같이 뾰쪽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문필봉에서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된다. 오른편으로 가면 운장산으로 가게 되므로 사달산으로 가려면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야하기 때문이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얼핏얼핏 나타났다 사라지는 운장산에서 구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구경하면서 걷다보면 10분 후에는 TV ()안테나가 방치되고 있는 사달산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 사달산 정상도 버림받기는 역시 문필봉과 마찬가지이다. 이정표나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김문암씨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사달산 정상도 역시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탓에 조망(眺望)은 터지지 않는다. 하필이면 이름이 사달일까? ‘사달이란 사고나 탈의 뜻을 지닌 별로 상서롭지 못한 낱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금방 해소되었다. 함께 산행을 하고 있던 일행이 사달산이 돌산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마치 그 모양이 사다리를 펼쳐 놓은 것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사달산 정상이 조망(眺望)이 터지지 않는다고 해서 발길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오른편에 보이는 오솔길을 따라 조금만 나아가면 오늘 산행 중 최고의 전망대(展望臺)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서면 왼편에 럭키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오른쪽 사면(斜面)이 내다보이는데, 천 길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바위벼랑이 서슬이 시퍼렇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성봉에서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바위능선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사달산에서 럭키산으로 향하면 초반에 잠깐 바윗길을 걷게 된다. 아까 사달산 전망대에서 왼편에 보이던 그 벼랑 위를 걷게 되는 것이다. 산길은 벼랑에서 제법 안쪽으로 붙어서 나있기 때문에 위험성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망(眺望)만은 뛰어나다. 오른편에는 조금 전에 감탄사를 연발했던 성봉에서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바위능선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왼편으로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어김없이 대부산이 또렷하게 눈에 잡힌다. 그것도 모자라게 느꼈던지 지금 걷고 있는 능선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바위벼랑의 기암괴석(奇巖怪石)들까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한마디로 눈터지는 조망을 자랑하는 구간이다.

 

 

 

 

사달산에서 8~9분 정도 진행하면 산죽(山竹)이 무성한 삼거리가 나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무심코 산행을 하다보면 능선을 따라 계속해서 직진하기 쉽다. 그러나 이 길은 신성리로 하산하는 길로서 슬랩(slab)구간이 있어 초심자(初心者)들이 통행을 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시간에 여유가 있어 슬랩 방향으로 진행해 보니 얼마 안 있어 위험 경고 플래카드(placard)’가 눈에 띄었다. 삼거리에서는 왼편의 사면(斜面)길로 내려서야 한다.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많이 붙어 있는 방향이 럭키산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길 찾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럭키산 방향으로 내려서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솔길 하나가 오른편에 나타난다. 아마 슬랩구간을 우회(迂廻)하는 길인 모양이다. 이어서 경사(傾斜)진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진 내리막길이 잠깐 나타난다. 주변은 온통 흙인데 산길만 암반으로 이루진 것이 오늘 답사(踏査)하고 있는 산들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나, 그 바위 위를 흙이 둘러싸고 있는 특성 말이다. 내려가는 길에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뭇가지 사이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슬랩(slab)이 어렴풋이 내다보인다.

 

 

 

슬랩 우회길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이번에는 거인마을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왼편에 보이고, 이어서 왼편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구간을 통과한 후, 오르막길을 잠깐 치고 오르면 한양조씨 묘()’가 있는 510봉이다. 봉우리 위에 오르면 쇠다리봉(510m)’이라고 쓰인 코팅(coating)지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박건석선생의 작품이다. ‘그 분이 봉우리 이름을 또 하나 지었나 보네요.’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조(自嘲) 섞인 목소리. 그러나 산행 후에 네이버(naver) 지도(地圖)’를 검색해 본 결과 510봉은 쇠다리봉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려면 그가 자기 멋대로 봉우리의 이름을 지을 리 있겠는가. 차라리 그가 붙여 놓은 정상표시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길을 찾는데 도움을 받고 있음에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다. 사달산에서 쇠다리봉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린다.

 

 

 

 

 

 

쇠다리봉에서 평지(平地) 같은 길을 잠시 걸으면 왼편에 다시 거인마을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나타나고, 이어서 울창한 참나무 숲길을 잠깐 치고 오르면 헬기장이다. 헬기장의 한쪽 귀퉁이에 보도블럭이 수북이 쌓여있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갑자기 그 용도가 궁금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헬기장에 깔려는 것일까 아니면 헬기장이 폐지되어서 필요가 없어진 것들을 모아 둔 것일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의문까지 머릿속에 맴도는 것을 보면 오늘 산행이 여유로워도 많이 여유로운 모양이다.

 

 

 

헬기장에서 럭키산으로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러나 그 구간이 짧고 중간에 바윗길까지 나타나기 때문에 지루하다거나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헬기장에서 10, 쇠다리봉에서는 20분 정도가 지나면 드디어 럭키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럭키(lucky)는 곧 행운(幸運)을 뜻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행운을 가득 안고 귀가(歸家)하는 셈이 될 것이다.

 

 

럭키산 정상은 흙으로 이루어진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도 역시 아까 지나왔던 문필봉이나 사달산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버려진 느낌이다. 아니 오히려 버려졌다는 느낌은 더욱 강하게 든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가 없는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이곳에는 김문암씨의 정상표지판까지도 눈에 띄지 않는 탓이다. 그의 빈자리를 인천 우정산악회의 회원님들이 매우고 있다. 매직펜(magic pen)으로 럭키산 608m'라고 서툴게 쓴 자연석(自然石)을 삼각점 앞에 세워 놓은 것이다.

 

 

 

럭키산에서 하산하는 길은 서북쪽 능선을 따른다. 잠깐 가파르게 떨어졌다가 맞은편에 보이는 작은 바위 봉우리를 왼편으로 우회(迂廻)한 후 10분 남짓 더 진행하면 또 다른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기봉(分岐峰)으로 표기하고 있는 지점이다. 거인마을로의 하산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면서 시작된다. 내려가는 길은 제법 또렷하고 산악회의 시그널들도 심심찮게 보이기 때문에 길이 헷갈릴 염려는 없다.

 

 

 

 

앞서가던 일행이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데 여념이 없다. 그가 사랑나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고 한다. 두 개의 나무줄기가 서로의 몸통을 비비꼬며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것이 꼭 사랑행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이 맞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오는 표현은 그렇다면 근친상간(近親相姦)이네요’. 두 줄기의 나무기둥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것이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마 내 심성(心性)은 바르지 못한 모양이다. 사물(事物)의 내면(內面)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에 음심(淫心)이 가득하니 말이다.

 

 

산행날머리는 거인마을 마을회관

거인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 길은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진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길가에 붙잡을 만한 나무들이 촘촘히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나무들조차 없었더라면 이 길은 사람들이 통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험한 산길은 이제 그만을 수도 없이 외친 다음에야 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순해진다. 그러나 왼편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잡목(雜木)이 울창한 전면으로도 희미하게나마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잡목 사이를 헤치고 나오면 거인마을이 내려다보이고, 임도를 따라 잠시 더 걸으면 이내 55번 지방도에 내려서게 된다. 산행이 종료되는 거인마을 마을회관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200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럭키산 정상에서 정확히 1시간이 걸렸다.

 

 

 

 

귀경 길에 들른 화심 손두부

산행을 끝내고 돌아오니 단체로 식사를 할 계획이란다. 가려는 곳은 화심손두부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곳이다. 이곳을 알게 된 연유는 전주에서 학교를 오래 다닌 이유도 있겠지만 과천에서 근무할 당시 전주로 출장을 오게 되면 현지에서 안내해 주던 식당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전주는 맛과 창()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는 유네스코(UNESCO)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전주에서 만드는 모든 음식이 다 맛있는 것만은 아니다. 당연히 맛이 있었던 음식점만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그 맛있었던 음식 중의 하나가 화심순두부였던 것이다. 집사람이 싸준 도시락을 냉큼 감추어버리고 일행에 합류한다. 진안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전주로 가는 길에 순두부가 들어가는 간판이 달려있는 식당이 여럿 나오는데 이곳이 순두부로 유명한 화심마을이다. 이곳은 강릉시 초당동, 속초시 노학동 학사평과 함께 전국적으로 유명한 순두부마을이다. 이곳의 순두부는 얼큰 매콤한 것이 특징. 순두부라고 하면 양념장으로 간을 맞춰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화심순두부는 매콤하게 다진 양념을 듬뿍 넣고 팔팔 끓여 상에 올린다. 그 안에 바지락 등 해물(海物)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다. 얼큰한 국물과 부드러운 두부가 어우러진 뚝배기에 밥 한 숟가락 살살 말아 먹는 맛이 일품이다. 식사용으로 시킨 순두부도 맛이 있었지만, 이곳의 또 다른 음식인 손두부도 술안주로 제격이었다.

                                                         

 

책여산(冊如山, 342)

 

산행일 : ‘14. 3. 27()

소재지 : 전북 순창군 적성면·동계면과 남원시 대강면의 경계

산행코스 : 책암마을 버스정류장무수재금돼지굴봉당재순창 책여산(송대봉)황굴왕복장군봉칼바위능선괴정교(24번국도)남원 책여산(361m)밤나무단지송정체육공원(산행시간 : 3시간40)

같이한 산악회 : 산두레

 

특색 : ‘물 맑은 섬진강(蟾津江)을 배경삼아 강변에 우뚝 솟아오른 책여산은 마치 여덟 폭 병풍을 펼쳐놓은 것처럼 빼어난 풍광(風光)을 자랑하는 바위산(石山)이다. ‘! 이렇게 괜찮은 산을 지금까지 모르고 지냈네요.’ 함께 산행을 하고 있던 일행이 내뱉는 말이다. 꼭 그만이 아니다. 다른 일행들도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빼어난 산이라고 극찬(極讚)들이다. 산의 형상이 마치 책을 쌓아 놓은 것 같이 생겼다는 책여산(冊如山)은 화산(華山)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여자의 비녀처럼 섬세하고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찾는 이들마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을 보면 화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책암마을 버스정류장

완주-순천고속도로 오수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 담양·옥과 방면으로 달리면 삼계면과 동계면을 지나 평촌삼거리(남원시 대강면 평촌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730번 지방도를 따라 유등·순창방향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책암마을에 닿게 된다. 옥택천()을 가로지르는 책암교() 건너기 바로 전에 있는 88고속도로의 교각(橋脚) 아래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행은 교각 옆 절개지(切開地)에 놓인 시멘트계단을 이용하여 ‘88고속도로로 올라가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고속도로 순찰용 점검로(點檢路)’를 따라 잠깐 더 올라가면 이내 능선으로 올라서게 된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고 나면 산길은 순해진다. 급할 것이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솔가리(소나무 落葉)가 수북하게 쌓인 길바닥은 부드럽다 못해 폭신폭신한 느낌까지 줄 정도이다.

 

 

 

능선은 온통 소나무들이 점령하고 있다.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는 진달래가 가끔 눈에 띌 뿐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소나무들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당연히 웰빙(well-being)산행이다. 마침 산행코스까지 짧으니 모처럼 느림보의 미학을 시험해 보자. 서서히, 그리고 느긋이 발걸음을 옮기며 깊게 숨을 들이쉰다. 솔향 가득한 청량한 바람이 폐를 가득 채운다. 그 바람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가득할 것이다. 이런 게 바로 행복 아니겠는가. 고만고만한 작은 오르내림을 몇 번 반복하면서 30분 정도 걷다보면 무수재(이정표 : 금돼지굴 1.9Km/ 입암 0.7Km/ 무수리 1.0/ 유촌(책암) 2.8Km)에 이르게 된다. 무수재는 남원시 대강면 입암리와 순창군 적성면 무수리를 잇는 고갯마루이다. 한때는 두 동네 사람들이 심심찮게 넘나들었을 이 고개는 지금은 인적이 끊긴 지 오래다. 하긴 널찍한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린 요즘에 이런 고개를 넘으려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무수재에서 잠깐 가파르게 올라서면 또다시 완만(緩慢)한 산길이 이어지지만 산길의 풍경은 아까와는 딴판으로 변한다. 능선에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조망(眺望)이 트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능선에서 바라보는 좌우(左右) 풍경은 사뭇 다르다. 오른편의 남원 방향은 산릉(山稜)들이 첩첩이 쌓여있는데 반해, 반대편의 순창 땅은 너른 들판,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돈된 들녘이 보는 이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심심찮게 터지는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고만고만한 작은 오르내림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22분 후에는 금돼지굴봉(이정표 : 당재/ 금돼지굴봉 정상/ 책암)에 올라서게 된다. 산길은 금돼지굴봉 아래에서 짧게나마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아마 반전(反轉)이 없는 진행이 미안하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어느 곳이고 옛이야기 한 토막 품지 않은 곳이 있을까마는 이곳 금돼지굴봉도 전설(傳說) 하나를 지니고 있다. 옛날 요 아래에 있는 적성현()에 부임한 원님들이 하나같이 모두 부인(婦人)들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던 끝에 머리 좋은 원님이 한명 부임하게 됐고, 그는 자기 부인의 치마허리에 명주실을 달아 놓고 사라지길 기다린다. 다음날 아침 날이 새고 보니 어김없이 부인은 사라졌고, 명주실을 따라 굴에 도착한 원님이 우여곡절 끝에 금돼지를 죽이고 자기 부인을 구출했다는 이야기이다. ()을 한번 찾아볼까 했지만 굴의 위치를 알려주는 어떤 표시도 발견할 수가 없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양 허씨()가 있는 금돼지굴봉의 정상에서는 오른편 남원방향의 시야(視野)가 열린다. 문덕봉에서 삿갓봉을 거쳐 고리봉에 이르는 능선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리고 북동방향에는 조금 후에 올라갈 송대봉이 눈에 들어온다.

 

 

금돼지굴봉에서 당재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 가파름이 못내 거북했던지 길가에 안전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고, 로프로도 버티지 못하는 구간에는 철()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당연히 위험도는 제로(zero), 맞은편에 불끈 솟아오른 송대봉(순창책여산)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내려서도 좋을 일이다. ‘계단이 71개이네요.’ 오늘 산행이 여유롭기는 여유로운 모양이다. 계단의 숫자까지 헤아리며 내려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면 말이다.

 

 

금돼지굴봉에서 짧게 내려서면 입암마을 갈림길(이정표 : 당재/ 입암/ 금돼지굴봉), 이어서 널따란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능선 안부인 당재(이정표 : 송대봉 0.2Km8/ 황굴 0.48Km/ 등산로 입구 0.44Km, 책암마을 5.1Km)에 닿게 된다. 금돼지굴봉에서 10분 조금 못되는 거리이다. 운동시설과 장의자를 갖춘 쉼터로 조성된 당재에는 저렇게 커야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커다란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크기만 했지 거리표시가 없어 산행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오늘 산행에서 꼭 봐두어야 할 황굴을 가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능선을 따라가다 안부에서 황굴로 내려갈 수도 있고 또 다른 방법은 산의 사면(斜面)을 따라 우회(迂廻)를 해도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오른편 능선을 따르는 것이 옳다. 사면을 따라 우회를 할 경우에는 황굴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안부와 당재 사이에 있는 책여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을 빼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재에서 통나무계단을 밟고 10분 정도 오르면 순창책여산 정상(이정표 : 송대봉 0.02Km/ 장군바위 0.20Km, 등산로입구 1.34Km/ 당재 0.27Km)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식탁까지 설치해 놓았다. 이곳 지자체에서 책여산에 쏟고 있는 정성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책여산 정상은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암봉이라고 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철제 빔(beam)으로 구조물을 세우고 나무계단을 만들어 바위 위로 올라가도록 해 놓았다. 물론 그 위에는 나무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찾는 이들이 마음 편히 주변 경관(景觀)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신경을 써준 순창군청에 감사를 드려본다. 허나 아쉬운 것은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상을 전망대(展望臺)로 개조하면서 지역 산악회에서 세워 놓았던 정상표지석을 치워버린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송대봉은 최영 장군과 인연이 깊은 산봉우리이다. 최영장군이 장수군 산서면에 있는 치마대(馳馬台)에서 화살을 날린 후 말을 달려 이곳에 도착했는데 화살이 눈에 띄지 않더란다. 말 위에서 활의 시위를 당기고 말을 달리면 말이 화살보다 먼저 가거나 표적에 거의 동시에 도착하는 것이 예사였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늦어빠진 말은 필요 없다며 자신이 타고 온 용마(龍馬)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그러나 말의 목을 벤 후에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자신의 경솔함을 크게 후회했다는 것이다.

 

 

 

 

순창 책여산은 화산(華山=花山)이나 채계산(釵笄山), 또는 송대봉(松薹峯)이라고도 불린다. 책여산에다 굳이 순창이라는 지역 이름을 넣은 이유는 반대편에 또 하나의 책여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 순창과 남원이라는 지역 이름을 각각 붙여 놓은 것이다. 참고로 남원 책여산1937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는 남원군이었지만 지금은 순창군 적성면이다.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는 정상에 서면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푸근한 섬진강이 발아래 흐르고, 그 건너에는 적성면의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들녘이 온통 푸른 것을 보면 봄은 우리 곁에 이미 와 있었던 모양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장군봉

 

 

책여산 정상에서 내려와 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잠시 후에 능선 안부(이정표 : 황굴 0.235Km/ 송대봉 0.165Km)에서 오솔길 하나가 왼편으로 갈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황굴()로 가는 길로서 정상에서 5분 조금 못되는 거리이다. 이곳에서 일단 황굴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황굴에서 느긋하게 조망(眺望)까지 즐기다 돌아와도 20분이면 충분한 거리이니 꼭 들러볼 일이다.

 

 

 

 

침목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또 하나의 갈림길(이정표 : 당재 0.365Km/ 황굴 0.115Km/ 송대봉 0.285Km)이 나온다. 아까 당재에서 우회(迂廻)했을 경우에는 이 길로 오게 된다.

 

 

 

당재갈림길에서 황굴은 지척이다. 그러나 그 길은 제법 스릴(thrill)이 넘친다. 문경의 토끼비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길은 바위절벽의 중간어림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난간이다. 테라스(terrace)처럼 생겼다고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수백 길 높이의 단애(斷崖)를 피해 가급적 안쪽으로 발걸음을 바짝 붙이며 걷다보면 금방 황굴에 이르게 된다.

 

 

오래전에 이곳에는 꽤 큰 사찰(寺刹)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시험을 보려는 많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니 영험 또한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의 영화(榮華)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널따란 공터만이 덩그런데, 옛날 뜨락이 있었을 성 싶은 곳에 장의자 하나만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황굴은 적성면 들녘을 조망(眺望)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눈을 크게 뜨면 한창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는 청보리의 줄기까지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들녘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다시 능선으로 되돌아 나와 철계단을 밟고 맞은편 봉우리로 올라선다.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스릴 넘치는 이 구간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온통 바윗길이기 때문에 옛날에는 초보자들은 오를 엄두도 못 내던 구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부담 없이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로프가 매달려 있던 구간들을 모두 철()계단으로 바뀌었고, 칼날처럼 날카롭던 암릉 위에는 철로 다리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철 구조물 덕분에 안전도는 높아졌지만 반면에 간을 졸이던 스릴을 더 이상 느껴볼 수 없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왼편에 보이는 바위벼랑이 책여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했다. 이 벼랑을 산 아래에서 바라보면 수직(垂直)의 절벽(絶壁) 위에 겹겹이 얹혀 있는 암벽층이 마치 책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좌우로 터지는 조망(眺望)을 즐기며 긴 철제구조물을 건너면 드디어 장군봉이다. 황굴갈림길에서 12분이 걸렸다. 장군봉에 오르면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정상에는 집채처럼 커다란 바위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철계단을 밝고 바위 위로 올라서면 다시 한 번 시야(視野)가 탁 트인다.

 

 

 

장군봉을 지나서도 짜릿한 바윗길은 계속된다. 조금 전에 지나왔던 철제구조물 설치구간보다는 암릉이 덜 날카롭지만 스릴(thrill)은 더욱 뛰어나다. 이곳에는 아무런 안전시설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길은 안전지대로 나 있지만 짜릿한 쾌감을 느껴보려면 바위벼랑 가까이로 바짝 다가서서 걸으면 된다. 새들도 위태로워서 앉기를 꺼려했다는 아슬아슬한 칼바위와 소나무 숲(松林)이 한데 어우러진 암릉이 눈앞에 펼쳐진다. 게다가 바위끝 벼랑에라도 서면 발아래에는 도도하게 흐르는 섬진강이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바둑판같은 들녘,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곳을 용아장성의 축소판이라고 표현했다. 조금 과장된 면은 있지만 크게 어긋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기이한 형상의 바위와 섬진강, 그리고 푸른빛이 넘실거리는 들녘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고 있다.

 

 

 

 

바윗길이 끝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내려가는 길에 마치 산사태가 난 것처럼 산의 사면(斜面)이 무너져 내린 곳이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광산개발이 만들어낸 흉물스러운 몰골이 아닐까 싶다. 내 기억으로는 이 근처에 규석광산(硅石鑛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길도 어김없이 안전시설을 잘 갖추어 놓았다.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안전로프나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장군봉 정상을 내려선지 25분쯤 지나면 이정표(송대봉 1.36Km/ 황굴 1.43Km)와 산행안내도가 세워진 24번 국도에 내려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2시간10분이 지났다. 참고로 괴정교는 남원과 순창 적성을 잇는 24번 국도와 적성과 동계(오수)를 잇는 21(13) 국도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두 개의 도로가 교차하면 사거리가 되어야 하는데도 삼거리로 불리는 이유는 남원방향으로 잠시 동안 두 도로가 겹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이곳은 독집삼거리로 불렸다. 교차지점 근처에 돌로 지어진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원책여산 아래에 자리잡은 독집은 아직도 예전모습 그대로이지만 피서철에만 문을 여는지 지금은 문이 굳게 닫혀있다.

 

 

 

 

 

24번 국도를 따라 남원방향으로 향하는 괴정교를 건너면 왼편으로 산길이 열린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있지 않지만 남원 책여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산길로 들어서면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 길손을 맞는다. 그리고 그 오르막길은 길게 이어진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일 것이다.

 

 

 

남원책여산을 오르는 길에 돌아본 순창책여산, 산봉우리가 섬진강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잘 그린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처음부터 간간히 보이기 시작하던 바위들이 고도(高度)를 높여가면서 점점 그 숫자를 늘려가더니 정상에 가까워지면 아예 암릉으로 변해버린다. 그러나 그 날카로움은 순창책여산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래서 순창군청에서도 남원책여산까지는 등산로를 정비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둔 모양이다. 그러나 눈요깃거리는 순창책여산보다 차라리 더 낫다. 순창책여산은 커다란 한 묶음의 암릉으로 되어 있어서 그 생김새가 거의 천편일률적(千篇一律的)이었는데, 이곳 남원책여산의 바위들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의 형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두꺼비 모양으로 생긴 바위들은 자신도 몰래 웃음을 짓게 만든다.

 

 

 

길가에 늘어선 바위들을 구경하면서 걷다보면 이내 남원책여산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괴정교를 출발한지 40분 남짓 지났다. 남원책여산의 정상은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산봉우리에 불과하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에 바위 몇 개가 올라앉은 형상이라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군가 자연석에 굵은 글씨로 책여산 361m'라고 써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바위 위에도 누군가가 책여산이라고 써놓은 돌맹이를 올려놓았다.

 

하산길에 바라본 동계면 들녘

 

 

산행이 종료되는 동계면 서호리의 구송정유원지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곳곳에 나타나는 바위벼랑은 우회(迂廻)하면 되고, 이마저도 안 되는 곳에는 굵직한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기 때문이다. 정상을 내려선지 25분쯤 되면 밤나무단지에 이르게 된다.

 

 

 

일단 밤나무단지에 내려서면 산행이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 산행이 종료되는 구송정공원까지는 아직도 15분 이상을 더 걸어야 하지만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임도(林道)라서 걷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느긋하게 걸으며 주의의 풍광(風光)을 즐겨도 좋을 일이다.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는 매화나무 아래서 코끝을 쫑긋거리며 매화꽃 향기에 취해보는 것도 좋고, 길가에 퍼질러 앉아 봄나물을 뜯어보는 것도 하나의 행복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구송정(九松亭)공원 주차장

봄나물을 뜯느라 정신이 없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다보면 오수천()이 나오고, 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산행이 종료되는 구송정공원 주차장이다. 구송정(九松亭)은 조선 숙종 때 당시 서호마을에 살고 있던 70세 이상 된 노인들이 소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들의 모임이 구송회(九松會)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문(詩文)과 서예(書畵) 그리고 창() 등에 능했던 노인들은 이곳에 모여 세상을 등지고 풍류를 즐겼다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서호주민들이 뜻을 모아 1975년 구송정(九松亭) 공원을 세웠는데, 매년 여름철이면 울창한 숲과 물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산행이 끝나면 늦은 점심, 오늘은 무슨 음식을 제공해줄까 많이 궁금해진다. ‘산두레는 그 지역의 토속음식(土俗飮食)을 제공해주기로 유명한 산악회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섬진강(현지에서는 적성강이라고 부른다)에서 많이 잡히는 민물고기를 이용한 매운탕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화탄매운탕집은 전국의 미식가(美食家)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소문나 있을 정도이다. 물론 나도 10여 년 전에 들러본 일이 있었다. ‘()’ 개정을 위한 공청회(公聽會)’를 몇몇 도시에서 개최하면서 지나가는 길에 들렀었는데 기대에 못지않게 그 맛이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늘의 점심은 남원의 오수면소재지(面所在地)에서 한단다. 오수의 명품 음심은 보신탕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곳의 보신탕도 먹어본 일이 있었고 그 맛도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수(獒樹)라는 마을은 개()와 관련된 전설(傳說)을 갖고 있는 마을이다. 장날 술에 취한 주인이 돌아오는 길에 풀밭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그때 마침 불이 났던 모양이다. 그러자 데리고 다니던 개가 냇가에서 자신의 몸에 물을 적신 후 주인이 잠들어있는 곳의 주변을 뒹굴면서 불이 번져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충견(忠犬) 덕분에 주인은 목숨을 건졌지만 기르던 개는 끝내 불에 타 숨졌다고 한다. 주인이 개를 땅에 묻고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표시를 해 두었는데 그 지팡이에서 순이 돋아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자 사람들이 개 오()자에 나무 수()자를 붙여 오수(獒樹)라는 지명을 붙였다는 것이다. 개와 관련된 아름다운 이야기를 갖고 있는 고장에서 개를 이용한 음식이 유명하다니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산악회에서 준비한 음식은 소머리국밥’, 생각보다 음식 맛은 뛰어났다. 주문을 받고서야 만들기 시작한다는 파김치, 갓김치, 겉절이김치 등은 싱싱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었고, 특히 검은 깨로 만든 묵은 일품이었다. 장안집(642-5268)이니 오수에 들를 일이 있다면 한번쯤 들어가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에필로그(epilogue)

사실 책여산은 내가 어릴 때에 몇 번 올라본 기억이 있는 산이다. 이곳에서 4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중산리라는 작은 마을이 내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등산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탓에 섬진강변에서 물장난을 치고 놀다가 심심하면 금돼지굴까지 다녀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 고향을 떠나 전주로 유학을 갔으니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 때문일까? 산의 지형(地形)이 눈에 익지를 않다. 내 기억으로는 지금의 황굴이 그때 금돼지굴로 알고 올라왔던 굴()로 보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금돼지굴을 찾아봤지만 그 어디에도 금돼지굴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시를 찾아볼 수 없었다.

 

풍악산(楓嶽山, 600m)-노적봉(露積峯, 551m)

 

산행일 : ‘14. 2. 15()

소재지 : 전북 남원시 대산면, 사매면과 순창군 동계면의 경계

산행코스 : ()흙농마애여래좌상풍악산노적봉동능선닭벼슬봉(565m)노적봉마애불혼불문학관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청산수산악회

 

특징 : 풍악산은 가을풍광(風光)이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풍악산은 금강산의 가을 이름이다. 그만큼 암벽(巖壁)을 병풍처럼 두른 암릉이 수려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풍악산에서 노적봉으로 가는 능선과 닭벼슬봉(鷄冠峯) 근처의 암봉에서 절정(絶頂)을 이룬다. 또 하나의 특성은 암릉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의 포근함이다. 단일 수종(樹種)으로 이루어진 소나무 숲길은 솔가리(소나무 落葉)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것처럼 한없이 폭신폭신하다. 거기다 산행 중에 만나게 되는 마애불(磨崖佛)들과 날머리에 있는 혼불문학관이라는 문화유적까지 두루 갖추었으니 명산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흙농 주차장(남원시 대산면 신계리)

완주-순천고속도로 북남원 I.C에서 내려와 T.G를 빠져나오자마자 대산면소재지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대산초등학교 끝자락에서 다시 우회전, 천변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4번째 다리인 대산교(: 운교리)를 건너면 금방 신촌마을이다. 보통 이곳 신촌마을에서 산행들을 시작하지만, 오늘 우리가 산행을 시작하려는 흑농의 주차장은 이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야 한다. 신천마을을 지나 순천-완주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자마자 오른편으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산자락 아래에 들어앉은 흙농의 공장건물이 보인다. 공장의 정문 조금 못미처에 있는 주차장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참고로 흙농은 친환경 농자재(農資材)를 만드는 회사라고 한다. 

 

 

 

풍농 앞에 있는 주차장에서 산자락을 향해 난 시멘트포장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비록 이정표는 없으나 흙농 뒤에 보이는 산을 방향삼아 진행하면 된다. 임도를 따라 5분 조금 못되게 올라가면 임도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이정표(신계리마애여래좌상 800m)가 가리키고 있는 오른쪽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후, 비포장 임도를 따라 5분 정도를 걸으면 마애여래좌상 이정표(마애여래좌상 450m)가 보이면서 왼편 산자락으로 들어가는 돌계단이 나타난다. 이정표에 적혀있는 거리표시(450m)를 누군가가 긁어놓은 것을 보면 아마 거리표시가 틀렸다는 얘기일 것이다.

 

 

돌계단을 올라서자마자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산길로 들어서자마자 짙은 소나무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역시 듣던 대로 주위가 온통 소나무 천지이다. 적당한 크기의 소나무들이 제멋대로 구불구불 몸을 비틀면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 숲길을 6~7분 정도 오르면 소나무들 사이로 커다란 바위 하나가 내다보인다.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이다. 자연석(自然石)을 정교하게 다듬어 만든 부처님이 신계리마애여래좌상(南原新溪里磨崖如來坐像 : 보물 제423)이다. 도선국사가 하룻밤 만에 만들었다고 하는 높이 3.4m의 이 마애불(磨崖佛)은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큼직하고 원만한 얼굴에 부풀어 오른 뺨, 꽉 다문 입에서 자비로운 미소가 넘쳐 보이며, 귀는 짧고 둥글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것이 한마디로 잘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마애불 앞에는 반듯한 제단(祭壇)이 마련되어 있고, 주변 또한 정갈하게 청소가 되어 있다. 평소에도 관리를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마애여래좌상에서 산길은 왼편으로 꺾인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느 산들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윗길로 변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윗길이라고 해도 암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위로 오르는 산길 주변에 바위가 많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덕분에 산길은 고인돌을 닮은 바위 등 꽤 많은 볼거리를 선물해준다.

 

 

 

마치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산비탈을 마지막으로 치고 오르면 드디어 능선 위에 올라서게 된다. 마애불에서 25분쯤 걸렸다. 능선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1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왼편에 길이 하나 나타나면서 산악회 시그널(signal)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비홍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이어서 산길은 오른편으로 운교리 갈림길(이정표 : 운교리임도 1.0Km)을 분가시키고 정상으로 향한다. 비홍재갈림길에서 8분 정도 되는 지점이다.

 

 

 

 

운교리 갈림길을 지나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길을 마지막으로 치고 오르면 풍악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10분이 지났다. 정상에는 뫼산()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커다란 삼각형의 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풍악산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이다. 정상표지석은 이 바위의 앞에 놓여 있고, 그 옆에 이정표(혼불문학관 6.2Km/ 차일봉 3.0Km/ 비홍재 7.5Km)가 세워져 있다. 정상은 사방이 탁 트여 조망(眺望)이 좋은 편이다. 남쪽은 암봉으로 이루어진 문덕봉, 고리봉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무등산이 아스라하다. 동쪽은 교룡산(蛟龍山)이 지척이다. 북쪽에 보이는 산은 아마 팔공산일 것이다.

 

 

 

 

하산은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혼불문학관 방향의 능선을 타기로 한다. 능선은 시작부터 조망(眺望)이 터진다. 바로 풍악산의 특징 중 하나이다. 아마도 섬진강 옆의 평지에 우뚝 솟아올라 시야(視野)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정상에서 안부(이정표 : 노적봉 2.5Km/ 풍악산 0.3Km)로 잠깐 내려섰다가 다시 반대편 능선으로 오르면서 산행을 이어간다. 안부부터가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아기자기한 바윗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바윗길의 특성인 시원스런 조망은 차지하고라도 길가에 널린 기암괴석(奇巖怪石)은 눈을 호사(豪奢)시켜주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제멋대로 자란 노송들이 구색을 갖추니 그야말로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山水畵)가 아니라할 수 없다.

 

 

 

 

 

 

 

경관이 빼어난 바윗길에서 눈의 호사를 누리다보면 산길의 형세가 변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바윗길이 갑자기 흙길로 변해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안부에서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신재사거리이다. 이 고개는 예전에 동계면 사람들이 남원장터를 오가던 제법 큰 고개다. 풍악산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30분 정도가 걸렸다. 신재를 지나서도 산길은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된다. 산길은 작은 봉우리들을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이어지는데, 길가는 온통 소나무 천지이다. 풍악산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소나무 외의 다른 수종(樹種)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길 위에 솔가리(소나무 落葉)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마치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이 폭신폭신하기 이를 데가 없다. ‘재수만 좋으면 산길을 벗어나지 않고도 송이버섯을 캘 수가 있어요.’ 같이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의 말마따나 송이버섯이 많이 자라는 산인 모양이다. 길의 양쪽으로 길게 매어져 있는 금()줄이 그 증거일 것이다.

 

 

처녀의 가슴과 비슷하죠?’ 길가의 바위를 보고 집사람에게 물어본다. 돌아오는 대꾸는 저렇게 위로 솟구친 가슴은 없단다. 오늘 산행은 이런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많이 만들어 준다. 곳곳에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엉덩이를 닮았네요.’ 산길을 가다가 기묘(奇妙)하게 생긴 바위를 보며 집사람이 하는 말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여자의 사타구니로 보이니 문제다. 대꾸가 없다는 집사람의 지청구에 시달리다 못해 내 느낌을 그대로 얘기 했더니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문득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라고 말한 무학대사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부드러운 흙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또 다시 나무데크로 무장한 바윗길이 나타난다. 신재에서 18분 정도 걸리는 지점이다. 데크계단을 올라서면 또 다시 기암괴석들과 송림(松林)이 어우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까 지나왔던 암릉만은 못하지만 자못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물론 눈터지는 조망(眺望)은 보너스다.

 

 

 

바윗길이 끝나고 다시 10분 정도 더 걸으면 노적봉에 올라서게 된다. 널따란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노적봉은 군자(君子)다움과 풍요로움의 상징이다.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혼불문학관 3.4Km/ 계동마을 교룡산성 5.4Km/ 풍악산 2.8Km)는 북쪽 끄트머리에 세워져 있다. 노적봉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한마디로 뛰어나다. 동쪽으로 용골산, 회문산, 무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남쪽 지척에는 교룡산이 있고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만행산이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노적봉에서부터는 전형적인 흙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끔은 소나무 외에 참나무들도 하나 둘 그 모습을 보이는 구간이다. 노적봉에서 5분쯤 걸으면 수동마을 갈림길(이정표 : 혼불문학관 3.2Km/ 수동마을 2.5Km/ 노적봉 0.2Km)이 나오고, 이어서 다시 5분쯤 더 걸으면 혼불임도 갈림길(이정표 : 혼불문학관 2.9Km/ 혼불임도 0.5Km/ 노적봉 0.5Km)이다.

 

 

 

소나무 혹도 전염이 되는 모양이지요?‘ 집사람의 말을 듣고 보니 근처의 소나무들마다 큼직한 혹들을 하나 이상 매달고 있다. 아마도 전염성이 강한 병인 모양이다.

 

 

혼불임도 갈림길에서 10분 조금 넘게 걷다보면 오른쪽이 깎아지른 바위절벽(絶壁)으로 이루어진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닭벼슬봉 즉 계관봉(鷄冠峯)이다. 늙은 소나무들이 점령하고 있는 정상은 흙으로 이루어진 것이 의외이다. 옆면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진 탓에 바위봉우리이려니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정상에는 조금 전에 우리를 추월했던 이상엽선생이 붙여 놓은 정상표시 코팅지가 나무기둥에 매달려 있다. 그런데 만든 이의 이름을 다른 때와 다르다. 보통은 기분좋은 산행 사나이라고 적는데 반해 오늘은 그냥 사나이로만 적어 놓았다. 오늘 산행은 청산수산악회를 따라왔기 때문일 것이다.

 

 

 

 

닭머리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순해진다. 별로 높지 않은 산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산불로 인해 황폐화가 된 능선이 나오고, 이어서 15분 후에는 심계석문 갈림길(이정표 : 혼불문학관 2.1Km/ 심계석문 3.7Km/ 노적봉 1.3Km)에 이르게 된다. 이곳 갈림길에서는 혼불문학관 방향으로 내려선다.

 

 

 

 

심계석문 갈림길에서 내려서며 바라보는 사매면의 너른 들녘은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 남성의 심벌(symbol)을 닮았네요.’ 길가에 서있는 선돌 모양의 바위를 보고 부르짖는 데도 집사람의 표정은 시큰둥하다.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같은 사물일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와 집사람의 눈에는 같은 형상으로 비쳐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중간에 만나게 되는 이정표(혼불문학관 1.7Km/ 노적봉 1.7Km)에서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면서 산길은 마애불로 향한다.

 

 

 

울창한 산죽 숲을 지나면 노적봉마애여래좌상(露積峰磨崖如來坐像 :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46)이 나온다. 거대한 바위 면에 4.5m 높이의 미륵불(彌勒佛)이 새겨져 있는데, 양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연꽃을 받쳐 든 채 명상에 잠겨 있는 형상이다. 고려 때 작품으로서 국내의 마애불(磨崖佛) 중에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작품이라고 한다. 마애불의 앞은 넓은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 호성암이라는 암자(庵子)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호성암은 어느 도승이 호랑이에게 물려 간 아이를 구해주고 그 아이의 부모로부터 시주받은 돈으로 세운 암자였으나 지금은 터만 자리하고 있다. 산행을 시작할 때 만났던 신계리마애불은 불상 앞에 제단(祭壇)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반해 이곳에는 제단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국보(國寶)급 문화재와 지방문화재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마애불이정표 : 혼불문학관 1.5Km/ 노적봉 1.9Km)

 

 

 

마애불을 지나서도 내리막길은 꽤 길게 계속된다. 그러나 완만(緩慢)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내려서는데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다. 중간에 별 의미 없는 이정표(혼불문학관 1.0Km/ 노적봉 2.4Km)를 지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쉼터로 조성된 임도(이정표 : 혼불문학관 0.8Km/ 수동 2.0Km/ 노적봉 2.6Km)에 내려서게 된다. 아까 능선을 걷다가 수동마을이나 혼불임도로 탈출했을 경우에는 오른편에 보이는 임도를 통해 이곳으로 오게 된다. 마애불에서 15분 정도 되는 지점이다.

 

 

 

산행날머리는 혼불문학관 주차장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길가에 거대한 느티나무들이 보인다. 보호수(保護樹)로 지정한다 해도 충분할 정도로 굵은 것을 보면 오래전 이곳에 마을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저런 나무들은 마을의 어귀에 있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임도는 순천-완주고속도로를 만나면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고, 이어서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혼불문학관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임도에서 15분이 걸렸다.

 

 

 

 

날머리에는 혼불문학관이 있다. 이미 남원의 유명한 관광명소로 자리 잡은 혼불문학관은 1990년대 최고의 대하소설(大河小說)혼불의 작가인 고 최명희 선생의 작품들과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관(展示館)이다. 마침 관람료까지도 무료이니 잠시 들렀다가 가는 것이 좋다. 평소 국어사전을 시집처럼 읽었다는 작가는 혼불에서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운율을 살려 국어의 감미로움과 미려함, 풍성함을 돋보이게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귀때기가 시려서 문을 잠갔으니 아까 들어왔던 문으로 돌아나가 주시오관리인이 써 놓은 듯한 메모지를 보고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전시관을 빠져 나온다. 참고로 혼불은 최명희 작가가 19804월부터 199612월까지 17년 동안 혼신을 바친 대화소설로, 20세기 말 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혼불은 일제 강점기 때 사매면 매인 마을의 양반가를 지키려는 3대의 며느리들과 거멍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숨결과 손길, 염원과 애증을 우리말의 아름다운 가락으로 생생하게 복원하여 형상화 했다.

 

 

 

 

 

만행산(萬行山, 909.6m)

 

산행일 : ‘14. 2. 13()

소재지 : 전북 남원시 보절면, 산동면, 그리고 장수군 번암면의 경계

산행코스 : 용평저수지 주차장계곡삼거리작은 천황봉만행산상서바위큰재852봉 앞 갈림길능선용호계곡보현사 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

같이한 산악회 : 산두레

 

특색 : 만행산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입소문을 탄지 꽤 오래된 산이다. 산이 마치 하늘을 찌를 듯이 삼각추처럼 뾰족하게 솟아올라서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원사람들로부터 새해 해맞이 장소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만행산의 또 하나 볼거리는 상서바위이다. 아래에 있는 조망바위에서 바라보는 상서바위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일 정도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는 것도 이 산의 특징이다. 흙으로 이루어진 능선들은 밋밋하기만 하고, 산이 만들어낸 계곡들도 깊지()도 그렇다고 물의 양()이 많지도 않다. 대신 이 산은 산행을 마치고 지리산의 맑은 물에서 자란 추어탕을 맛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산행을 시작하는 도룡리 용평마을(추어마을) 부녀회에 예약을 할 경우에는 인공조미료가 일절 들어가지 않은 맛난 추어탕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용평저수지 주차장(남원시 보절면 도룡리 추어마을)

순천-완주고속도로 오수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 장수방면으로 달리다가 이룡삼거리(장수군 산서면 이룡리)에서 우회전하여 721번 지방도를 타고 남원방면으로 들어가면 오래지 않아 도룡천을 가로지르는 황벌교()를 만나게 된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좌회전(보현사 방향)하여 들어가면 금방 산행들머리인 용평저수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보현사 앞에도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니 마음에 드는 곳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하면 된다.

 

 

 

 

도룡리 용평(추어)마을에는 용평저수지가 있다. 그다지 크지 않지만 농어촌공사에서 관리하고 있는 저수지이다. 그 저수지 옆에 만행산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본격적인 산행은 용평저수지 주차장에서 보현사 방향으로 200m쯤 들어간 곳에서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천왕봉 2.2Km/ 보현사 0.3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널따란 임도(林道)로 시작된다. 임도는 너적골이라고 불리는 별로 깊지 않은 계곡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중간에 별 의미 없는 이정표 하나를 지나고, 산행을 시작한지 20분쯤 되면 두 번째 이정표(천왕봉 1.5Km/ 보현사 1.0Km)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임도는 끝을 맺는다.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임도가 끝나고 그늘 속으로 들어서면 계곡이 나타난다. 흐르는 물이 거의 없이 바닥을 드러낸 채로이다. 아마 겨울철이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계곡을 건너면서 숲길은 원시(原始)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보인다. 무성하게 뻗어나간 가지들을 온통 말라비틀어진 넝쿨식물들이 뒤덮고 있는 것이다. 함께 걷던 사람들이 아이젠(Eisen)을 신느라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인다. 엊그제 내린 눈이 계곡의 바위들을 덮고 있어서 미끄럽기 때문일 것이다.

 

 

 

계곡을 따라 15분 정도 올라가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천왕봉 0.8Km/ 작은 천왕봉 0.5Km/ 보현사 1.7Km)로 나뉜다. 이곳에서 곧장 천황봉으로 오를 수도 있지만 오른편 작은 천왕봉방향으로 진행한다. 오늘 산행이 그다지 길지 않기  때문에 시간에 여유가 있기도 할뿐더러 작은 천왕봉으로 오르는 능선에서의 조망(眺望)이 자못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너덜겅 구간으로 자칫 잘못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는 구간이다. 특히 오늘 같이 눈이 쌓인 겨울철에는 더욱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바닥에 깔린 암괴류가 험하기도 할뿐더러 경사(傾斜) 또한 만만치 않게 가파르기 때문이다. 오르막길은 그 가파름을 이기지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15분 정도 기다시피 오르면 드디어 능선 위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 올라서면 조망(眺望)이 터지기 시작한다. 아까 올라올 때 나뭇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상서바위가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다.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은 한마디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는 구간이다. ‘밀양 손씨()를 지나면 얼마 안 있어 바윗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바윗길의 특성대로 시원스럽게 조망이 터지는 것이다.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고 가끔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자. 남서쪽으로 보절면의 들녘이 광활하게 펼쳐지고, 아까 산행을 시작했던 용평저수지는 발아래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바윗길 구간이 지나면 포근한 흙길이다. 암릉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흙길을 거칠게 만들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는 작은 천왕봉(815m)’에 올라서게 된다. ‘작은 천왕봉은 의외로 초라하다. 오르막 능선에 자그마하게 솟아오른 그저 그렇고 그런 봉우리일 따름인 것이다. 그 때문인지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거기다가 조망(眺望)까지도 보잘 것이 없다. 정상이 잡목(雜木)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능선에 올라서서 15분 정도 지난 지점이다.

 

 

작은 천왕봉을 지나서도 보드라운 흙길은 계속된다. 그렇다고 그 경사(傾斜)까지 누그러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힘들다는 느낌은 결코 들지를 않는다. 위로 오르면 오를수록 그만큼 조망이 더 넓게 트이기 때문이다.

 

 

작은 천왕봉에서 23분쯤 오르면 드디어 만행산의 정상인 천왕봉이다. 천왕봉 정상은 나무데크로 말발굽 모양의 전망대(展望臺)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말발굽의 양 끄트머리 중간어림에다 정상석을 세워 놓았다. ‘만행산 천황봉보절면발전협의회에서 세운 정상석에 적힌 글이다. 만행(萬行)은 만 가지 고행(苦行)을 몸소 체험해야 비로소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교리를 담은 불교(佛敎) 용어다. 한편 천황산(天皇)은 높은 곳에서 군림(君臨)하는 절대자를 말한다. 높은 곳에 임하는 자()와 낮은 곳에서 고행을 하는 자가 함께 하는 산이 곧 만행산이라는 이야기이다.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정상의 이정표 : 상서바위 1.9Km/ 보정사 1.7Km) 한편 만행산 정상은 보절면 사람들의 해맞이 장소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나무데크에 줄을 매달아 놓고 소원을 적은 글들을 적은 리본들을 덕지덕지 매달아 놓은 것이 보인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한마디로 일망무제(一望無題)이다. 사방으로 시야(時夜)를 가로막는 장애물(障碍物)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동으로 지리산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지리연봉과 정령치, 고남산, 백운산, 덕유산이 한눈에 잡힌다. 북쪽은 호남금남정맥의 팔공산, 서로는 보절 방면의 들녘, 남쪽은 남원 교룡산 풍악산 문덕봉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높고 낮은 산들이 춤을 춘다.

 

 

 

하산은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북쪽의 상서바위 방향으로 진행한다. 오른편 산동면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정표 : 귀정사2.5km/ 하늘별마을 만행산천문 체험관2.5km)이 보이나 이는 무시하면 된다. 내려서는 길은 한마디로 가파르기 짝이 없다. 나무데크로 만든 계단을 내려서도 그 가파름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는다. 그 기세(氣勢)에 놀랐음인지 길가에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았다. 정상에서 200m쯤 내려오면 왼쪽으로 갈림길(이정표 : 상서바위1.8km/ 보현사2.3km/ 천황봉0.2km) 하나가 보인다. 아까 올라올 때 계곡의 끄트머리에서 나뉘었던 왼편 길로 올라왔을 경우 이곳으로 올라오게 된다.

 

 

 

 

갈림길을 지나서 다시 한 번 가파르게 내려서고 나면 산길은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그렇다고 오르막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비록 낮을망정 작은 봉우리들을 계속해서 오르락내리락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을 출발한지 15분쯤 되면 벤치가 단출하게 놓여 있는 쉼터(지도에 벤치쉼터로 표기)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15분쯤 더 걸으면 또 다시 보현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정표 : 상서바위 0.8Km/ 보현사 2.4Km/ 천왕봉 1.2Km) 하나를 더 만나게 된다.

 

 

 

 

 

상서바위로 향하는 산길은 폭신폭신하기 이를 데가 없다. 길 위에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양지쪽이라서 눈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산길은 걷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집사람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며 산행을 이어간다. 갈림길에서 얼마간 걸으면 조망이 뛰어난 묘역(墓域)이 나오고, 이어서 능선에 바위들의 밀도(密度)가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다. 만행산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인 상서바위에 가까워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상서바위는 이곳에서도 잠시 더 걸어야 한다.

 

 

 

보현사 갈림길에서 22분쯤 더 걸으면 자그만 봉우리 위에서 커다란 상서바위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하늘 별 마을 만행산 천문체험관 5Km/ 보현사 3Km)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정표의 다리에 상서바위봉이라고 쓰인 코팅지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서래야 박건석선생의 작품이다. 나는 이분의 산에 대한 열정에 존경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러나 구태여 이런 곳에까지 봉우리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에는 동의를 하지 않는다.

 

 

 

상서바위는 이정표 근처(이정표 : 보현사 2.9Km/ 천왕봉 2.0Km)에 있다. 비록 이정표에는 상서롭다는 의미의 상서(祥瑞)바위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사실 이 바위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즉 상을 준다는 의미의 상사바위(賞賜巖)와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는 상소(上疏)바위, 그리고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는 상사(相思)바위 등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뭔가 하나로 통일을 시켜야하지 않을까 싶다. 조심조심 바위에 올라서 본다. 바위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이다. 바위에 올라서면 용호계곡이 발아래이고, 그 끄트머리에 용평저수지가 앉아있다.

 

상서바위에서 바라본 천황봉 방향

 

 

상서바위에서 빠져나와 보현사방향으로 내려선다. 급경사 비탈길을 짧게 내려서면 왼편 숲 사이로 바위 하나가 얼핏 나타난다. 숲을 헤집고 들어서면 상서바위가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100m가까이 되는 깎아지른 듯이 서있는 바위절벽은 한 폭의 잘 그린 동양화(東洋畵)를 연상시킬 정도이다. 전망(展望)바위에서 빠져 나오면 또 하나의 전망바위가 눈에 띈다. 이번에는 들어가는데 장애물도 없다. 지도(地圖)조망바위라고 표기된 지점이다. 이곳에 서면 아까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상서바위가 그 자태(姿態)를 드러내 보인다.

 

 

 

 

 

조망바위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안부이다. 안부에서는 왼편으로 길 하나가 나뉜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용호계곡을 거쳐 보현사로 내려가게 되는 큰재 갈림길이다. 보현사로 내려가는 들머리에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을 보면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이곳에서 보현사로 하산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큰재 갈림길에서 하산을 하면 편하겠지만 산행시간이 너무 짧을 것 같아 맞은편 능선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다음에도 보현사로 하산하는 길이 두 곳이 더 있기 때문이다.

 

 

맞은편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風景)을 연출한다. 참나무 일색이던 능선이 어느새 소나무 군락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상서바위를 출발한지 23분쯤 지나면 자그만 봉우리 위에서 이정표(천황봉 2.7Km, 상서바위 0.7Km) 하나를 만나게 된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왼편에 산길하나가 보인다. 보현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조금 더 길게 산행을 이어가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길의 상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포기하고 하산길로 접어든다.

 

 

 

하산을 시작하면 맨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다. 길은 희미하고 가파르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회는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진다. 참나무 천지였던 가파른 내리막길은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나고 이어지는 산길은 곱기 그지없는 소나무 숲길이기 때문이다. 산길은 솔가리(소나무 落葉)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어서 마치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코끝을 간질이는 짙은 소나무 향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새 용호계곡에 내려서게 된다. 갈림길에서 하산을 시작한지 30분이 지났다. 이어서 물이 그다지 많지 않은 계곡을 두어 번 가로지르면 임도(이정표 : 천황봉 2.7Km/ 상서바위 2.0Km)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임도를 따라 왼편으로 오를 경우에는 상서바위를 거치지 않고 곧장 천황봉으로 오르게 된다.

 

 

 

 

산행날머리는 보현사주차장

임도를 따라 이어지는 하산길은 꽤 길게 이어진다. 널따란 임도를 따라 곧장 내려오면 용호저수지가 눈에 들어오면서(이정표 : 천황봉 3.6Km/ 상서바위 2.9Km) 보현사 앞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산행이 종료되는 지점에 있는 보현사(寶賢寺)는 고려 충숙왕 원년(1314)에 창건하여 한때는 대가람(大伽藍)이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화재로 소실되어 빈터로 남아 있다가 1973년에 법당과 요사채를 지어 재건하였다. 그러다가 1991년 태고종 승려 정봉한 이절을 인수하면서 한국불교태고종소속의 사찰(寺刹)이 되었다고 한다.

 

 

 

입을 즐겁게 해주려고 찾아간 천황봉 방문자센터

즐거운 산행이 끝났다면 이번에는 입이 즐거워야 한다. 이곳 만행산을 찾았다면 당연히 추어탕 한 그릇쯤은 먹고 가야 할 것이다. 서울의 거리를 걷다보면 심심찮게 남원추어탕이라는 간판을 볼 수가 있다. 그만큼 남원의 추어탕이 유명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곳 용평마을은 추어마을로 지정을 받았을 정도로 알아준다고 한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었을까 산악회에서 추어탕을 주문해 놓았다고 한다. 미리 며칠 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회원들을 위해 고생을 해준 임원진에게 이 글을 빌어 고마운 마음을 전해본다. 추어탕은 천황봉 방문자센터에서 맛볼 수 있다. 왜 식당이 아니고 방문자센터일까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센터에 구내식당도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면 음식은 누가 만들까? 마을 부녀회에서 준비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결코 맛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식탁에 앉으면 우선 밑반찬이 나온다. 도토리묵이나 김치 등은 여느 식당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자연산 뽕잎으로 만든 장조림과 무침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음식, 거기다가 모든 음식은 자연산 조미료를 사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하나 더 좋았던 점은 음식에 대한 위생 상태이다. 행여 탈이라도 날까봐 보건진료소장이 센터에 나와 대기하고 있을 정도로 위생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게 추어탕이다. 추어탕이 남원의 별미로 자리 잡은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지리산 맑은 계곡에서 자란 미꾸라지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신선한 미꾸라지에 갖은 채소와 양념을 가미하고. 지역 주민들의 정성까지 깃들였으니 추어탕의 맛이 뛰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