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상산((赤裳山, 1,034m)
산행일 : ‘11. 11. 6(일)
소재지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과 무주읍의 경계
산행코스 : 안사내→안렴대→안국사→정상(기봉)→서문삼거리→향로봉 왕복→장도바위→서창마을(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곰바우산악회
특징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적상산의 산세를 ‘사면으로 고추선 벽이 층층이 험준하게 깎이어 마치 치마를 두른 것 같아, 옛사람들이 그 험준함을 가지고 성을 삼았다. 두 개 길이 겨우 위로 열리지만, 그 속은 평탄하고 넓어 시냇물이 사방에서 나니, 참으로 천연의 험소라 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적상산은 산의 전면에서 바라보면 상단과 하단에 유선형의 절벽을 드러내고 있어서 이중으로 성채를 쌓은 형상이다. 그러나 겉모습과는 달리 막상 산에 들어서면 전형적인 흙산(肉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이번 산행은 ‘곰바우산악회’의 1,000번째 산행이란다. 1년에 일요일이 60번 정도이니, 매 일요일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산행을 이어왔다고 해도, 16년 이상이 소요되었을 것이니, 참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산악회이다. 적상산 산행을 마치고, 식당에서 지낸 기념고사에 참여할 기회도 생겼고, 점심으로 맛난 매기 매운탕도 대접받는 행운도 누렸다. 점심상, 내가 앉은 점심상에 둘러앉은 네 분은 노익장이셨다. 산악회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산에 대한 연륜이 깊으신 노익장, 난 그분들의 열정과 젊음을 닮고 싶다. 80세가 넘어서도 1천 미터가 넘는 산을 오를 수 있는 체력과 열정을 말이다. 마지막으로 올해 74세시라는 젊은 회장님, 오래오래 80세, 아니 90세가 넘도록 ‘곰바우산악회’를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곰바우산악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 산행들머리는 적상면 안사내부락
대전-통영간고속도로 무주 I.C를 빠져나와, 19번 국도(國道/ 장수읍 방향)를 따라 달리다가 적상면소재지에서 구(舊)도로로 내려와 적상삼거리에서 사내로로 들어서면 이내 사내교차로(交叉路)에 닿게 된다. 산행들머리인 들머리인 내사내길은 사내교차로서 약 100m쯤 못미처에 위치하고 있다.
▼ 사람은 겉모습(外貌)만 보고 평가하면 안 된다. 들머리를 몰라 헷갈리던 회장님이 동네 주민을 붙잡고 산행들머리를 물어본다. ‘저 아래로 돌아서 들어가세요.’ 그러나 회장님은 그 분이 영 미덥지 않으신 모양이다. 그만큼 그분의 외양(外樣)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던 것이다. 결국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러 나오신 아주머니에게 물어본 후에야, 그분이 가르켜준 길이 아닌 동네 가운데로 들어선다. 동네를 지나 밭두렁 몇 개를 거치면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農路)를 만나게 된다. 이 길이 우리가 찾고 있던 올바른 길이었으며, 아까 그 아저씨가 가르쳐 주었던 바로 그 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외모만 보고 평가하지 마라’는 속담이 생겨난 모양이다.
▼ 나라를 온통 휩쓸었던 ‘구제역 파동’탓일까? 텅 빈 축사를 지나면 거대한 느티나무가 보인다. 굵기로 보아 수백 년은 되었음 직한데 보호수 안내판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인가가 없는 곳에 있기 때문에, 아마 중요도가 떨어지는 모양이다. 길가에는 가을 추수가 끝난 고추밭, 붉게 익은 고추가 아직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뉴스에서 보면 고추 값이 금(金)값이라던데 무슨 이유로 저렇게 남겨놓은 것일까?
▼ 산길은 산의 사면(斜面)을 옆으로 자르며 이어지다가 골짜기를 건너게 된다. 이어서 나타나는 오르막길을 오르면 이내 거대한 암반(巖盤)이 위협하듯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길은 그 사이를 뚫고 위로 향한다. 산 아래에서 볼 때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암벽(巖壁)에 갈라진 틈이 있는 것이다.
▼ 암반(巖盤)은 약간 경사(傾斜)가 있지만, 오르는데 그리 힘들지도 않을뿐더러 두려울 정도로 위태롭지도 않다. 이곳이 언제 토목공사(土木工事) 현장이었었나? 마치 시멘트콘크리트를 타설해 놓은 것 같이, 암반에 둥글둥글한 자갈들이 박혀있는 것이다. 이런 바위를 보고 퇴적암의 일종인 ‘역암(礫巖)’이라고 부른다. 오랜 옛날 강이나 바다의 바닥에 있다가 융기(隆起)작용에 의해서 솟구쳐 올라왔었을 것이다. 이런 바위들은 이곳 말고도 청량산이나 선운산에서도 볼 수 있다. 암반 위로 올라서면 안사내마을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시원스레 열린다. 적상산이 적색역암으로 이루어진 탓에 이곳의 흙들조차도 붉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다.
▼ 암반을 통과한 후부터, 등산로는 가파르게 변한다. 오르막길은 가파른 경사를 배겨내지 못하고, 갈지(之)자를 만들어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고 있다. 이곳은 비 정규등산로, 사람들이 다닌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오랫동안 쌓여온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내딛는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고 있다. 비탈길에 쌓인 낙엽을 밟으면 미끄러지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오르막길을 고난의 길로 만들고 버린다. 등산로 주변의 나무들은 이미 오래전에 서리를 맞은 듯, 잎들이 모두 떨어져 버렸고, 빈가지만 허공에 걸려있다. 대신 등산로는 낙엽과 솔가리로 덮여있어서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울려나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여간 듣기 좋은 게 아니다. 가을이 무르익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겁기 한량없다. 한걸음씩 겨우 내딛다시피 한다. 오르막길은 가파르기도 하지만 속이 상할 정도로 길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파른 오르막이 끝나면 거대한 암봉(巖峰)이 나타난다. 산행지도에 보면 전망바위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곳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곳에서는 암봉을 끼고 왼편으로 돌아 내려갔다가 다시 가파르게 올라서야 한다. 자갈이 깔린 가파른 오르막길은 오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빗물 때문에 자갈이 자꾸 밀리기 때문이다.
▼ 암봉을 우회하여 오르면 이번에는 멋진 바위문(巖門)이 나타난다. 이곳도 통천문 (通天門)이라고 불러야 하나? 다른 곳에서 보았던 통천문보다 더 잘생겼으면 잘생겼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멋진 바위 문이다. 그러나 이 문은 버젓이 이름을 갖고 있다. 바로 남문(南門)이다. 생김새에 비해 너무나도 평범한 이름이지만 그래도 어쩌랴 버젓이 지도에까지 올라가버린 이름인 것을...
▼ 거대한 암벽이 나타난다. 오른편에는 커다란 동굴(石窟)이 보이고, 그 왼편에 어른이 통과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좁은 바위틈(石門)이 보인다. 70Kg이 넘는 내가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달리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으므로 무작정 들어서고 본다. 바위 틈새에 끼어 고생은 했지만, 다행히 통과할 수는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온 바위 위가 안렴대(安廉臺)이다. 안렴대는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 말기 거란의 침공을 받았을 때 ‘삼도안렴사(三道 按廉使)’의 관속들이 조금 전 이곳에 올라오면서 보았던 동굴에서 피난을 했다고 해서 안렴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안렴대는 ‘덕유 전망대’라고 불릴 정도로 덕유산 능선과, 진안과 장수지역에 첩첩이 늘어선 산릉들이 잘 조망된다고 하지만,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구태여 오래 머물 필요가 없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정도 지났다.
▼ 지금은 가을 중에서도 늦가을, 주변의 말라 비틀어져버린 단풍나무 잎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가을이 무르익은 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내 이마에는 땀이 그칠 줄 모르고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아니라 숫제 ‘秋來不似秋’, 가을은 가을이되 결코 가을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리기 시작하던 는개(안개보다는 굵고 보슬비보다는 가는 비를 가리키는 순수한 우리 말)가 이제는 가랑비의 수준을 넘어선지 이미 오래이다. 안에서는 땀, 밖에서는 빗물, 등산복은 이미 팬티까지 젖어버렸다. 일기예보만 믿고 산을 찾은 난 욕지거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비가 온다고 해서 산행을 포기했던 어제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날씨가 맑을 것이라고 해서 마음 놓고 산을 찾아왔건만 일기예보와는 반대로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제법 많이 말이다. 우리의 ‘기상청’은 오늘도 날보고 마음 놓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라고 부추기고 있다.
▼ 적상산으로 향하는 능선을 잠깐 벗어나 안국사로 내려가기로 했다. 통신기지 안테나처럼 보이는 시설물 앞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곱게 마른 단풍나무 터널을 따라 내려서면 안국사이다.(갈림길 이정표 : 안렴대 0.15Km/ 안국사 0.45Km/ 향로봉 1.45Km)
▼ 안국사(安國寺) : 고려 충열왕 3년 월인(月印)화상이 창건한 것이라고도 하고, 조선 태조 때 자초(自超)가 적산산성(사적 146호)을 쌓으며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원래는 적상산의 분지(盆地)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본래의 위치가 양수발전소의 상부댐(적상호)에 잠기자(水沒)되자 1992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광해군 5년에는 사찰을 중수하여, 적상산 사고를 지키기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해 왔다. 이때에는 보경사 또는 상원사 등으로 부르다가 영조 47년에 법당을 중창한 후, 안국사라 고쳐 불렀다. 문화재(文化財)로는 보물 제1267호로 지정된 안국사괘불(영산회괘불탱)과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전이 있다. 대형 걸개그림인 ‘영산회괘불탱’은, 가뭄이 들었을 때 내다걸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 틀림없이 비가 온다니 영험(靈驗)하기가 이를 데 없다. 잘만 활용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가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텐데....
▼ 주말이라선지 안국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도 일어났나?’ 어느 분의 말마따나 안국사 경내는 말 그대로 발붙일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비에 젖어 추레해진 모습들은 아까 그분의 말대로 영락없이 피난민의 행색이다. 불공(佛供)을 드리러 오는 사람들보다는 산행을 왔다가 들른 사람들이 대부분인 듯, 모두들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이다. 종루(鐘樓) 아래나, 전각(殿閣)의 처마 밑은 빈틈없이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다. 비를 피하면서 점심을 먹을 만한 곳이 이곳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점심에 반주(飯酒) 한잔? 이곳이 아무리 사찰(寺刹) 경내라지만 그 정도야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전각의 처마 밑에서 라면을 끓이거나, 삼겹살을 굽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아닐까? 이곳은 취사행위가 금지되어 있을뿐더러, 만일 불이라도 난다면 소중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잃을 염려가 있으니까 말이다.
▼ 안국사에서 왼편 담벼락을 끼고 200m만 오르면 다시 능선위로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편 향로봉 방향으로 조금만 더 걸으면, 오른편에 머리 위에다 철탑을 얹고 있는 봉우리 하나가 보인다. 이곳이 적상산의 정상인 기봉이다. 능선이 큰 높낮이가 없이 평탄한데다가 등산로가 철탑이 자리한 정상을 살짝 비켜나기 때문에, 이곳이 적상산의 정상인줄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다. 시설물을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 아래에 희미하게 등산로가 보이지만 구태여 올라갈 필요는 없다. 정상은 흉물스런 통신시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능선안부 이정표 : 안렴대 0.3Km/ 안국사 0.2Km/ 향로봉 1.3Km)
▼ 정상에서 내려와 조금만 더 진행하면 서문(西門)갈림길이다. 이곳에서 향로봉까지는 0.5Km, 능선을 따라 곧장 진행하면 향로봉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에서 날머리로 잡은 서창마을로 내려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야 하기 때문에, 향로봉을 답사한 후에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서문갈림길에서 향로봉까지 이르는 길은 평탄한 능선길이다. 일행들이 함께 나란히 지나가도 될 정도로 넓어 여유가 넘친다. 서서히 걸어도 20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다.(갈림길 이정표 : 향로봉 0.5Km/ 서창 공원지킴터 2.8Km/ 안국사 1Km)
▼ 향로봉 정상, 한 가운데에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표지판에는 이곳의 높이가 1,034m라고 적혀있는데, 내가 알기로는(지도) 향로봉 높이는 1,025m이고, 적상산의 정상인 기봉의 높이가 1,034m이다. 아마 기봉 정상을 통신시설에 빼앗기고 이곳을 정상으로 삼았나 보다.
▼ 서문갈림길에서 잘 닦인 등산로를 따라 조금만 내려서면 성벽(城壁)이 조금 남아있는 서문 터를 지나게 된다. 성벽은 겨우 어른의 키를 웃돌 정도로 왜소하다. 적상산이 워낙 험준한 절벽을 두르고 있기 때문에 성벽을 그다지 높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략(戰略)상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이런 산성에 힘들게 올라올 만큼 우둔한 적군은 없었을 테니까...
▼ 적산산성(赤裳山城, 사적 제146호), 돌로 쌓은 성(石城)으로서 둘레는 약 3㎞에 이른다. 고려 말(末) 최영(崔塋)과 조선 세종 때의 체찰사 최윤덕(崔潤德)이 축성을 건의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산성은 고려 말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당시 성 안에 4개의 못과 23개의 우물이 있었다.’다고 적고 있을 정도로 산 가운데에는 넓은 분지(盆地)로 되어있다. 광해군 때 이곳에다 적상산 사고(赤裳山 史庫)를 설치하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왕실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보관하였다.
▼ 서문(西門)을 지나 서창마을로 내려오는 길은 계속해서 급경사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내려서기가 위험하지도 힘들지도 않은 것은 아마 국립공원관리소에서 공들여 등산로를 정비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갈지(之)자를 그리고 있는 등산로는 조금이라도 경사(傾斜)를 줄여보려는 듯, 되도록 크게 획을 그리며 방향을 틀고 있다.
* 서문(西門)을 나와 조금 더 내려가면 거대한 바위와 만나게 된다. 장도바위이다. 장도바위는 마치 칼로 두부를 자른 듯 반듯하게 세로로 갈라져 있는데, 이 바위는 최영장군과 관련된 전설(傳說)을 가지고 있다. 최영장군이 적상산을 오르는데 이 바위가 앞을 가로막기 때문에 장도로 갈라 길을 냈단다. 옛날에는 장도바위의 가운데로 길이 나 있었다고 하나, 길이 험한 탓에 요즘은 우회(迂廻)시키고 있다.
▼ 장도바위부터 단풍의 개체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단풍은 이보다 더 아래 발치까지 내려가 버렸는지 말라비틀어진 나뭇잎들만 매달려있다. 조금만 더 일찍 이곳에 왔었더라면, 사색(思索)을 안고 환상의 불꽃 터널을 통과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마지막 불꽃을 태운 후 장렬히 산화하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내 인생을 반추(反芻)해볼 기회를 말이다.
▼ 하산 길은 내내 아름다운 숲길이 이어진다. 그것도 아주 길게,,, 바위를 깎기도 하고, 돌을 쌓아 가면서 만든 아름다운 길. 맞은편 나뭇가지 사이에는 낮게 깔린 구름사이로 아름다운 산하(山河)가 내려다보인다. 바라보는 풍경마다 한 폭의 산수화다. 어떤 풍경화가 이곳만 할까? 마냥 걷고만 싶은 길. 마냥 바라보고만 싶은 곳이다.
▼ 산행날머리는 서창마을 대형버스 주차장
서창마을 공원지킴터를 지나면, 음식점과 팬션들이 여러 곳 보인다. 10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한산(閑散)하기만 하던 농촌마을이, 이제는 어엿한 관광지로 변해버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명품(名品) 소나무로 분류해도 좋을만큼 잘생긴 소나무가 수문장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의병장 장지현장군의 묘역을 지나서 잘 가꾸어진 도로를 따라 조금만 더 내려가면 대형버스 주차장이다. '적상산(赤裳山)'은 말 그대로 '붉은 치마 모양의 산'이다.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암벽(巖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절벽 주위에 유난히도 붉은 단풍이 많아서 가을철이면 마치 온 산이 빨간 치마를 두른 것 같다고 하여 적상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단풍터널을 지나 뒤를 돌아다보면 붉게 타오르는 숲 너머로 적상산의 거대한 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을 터인데, 빗속에 잠긴 적상산은 그 자태를 드러내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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