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 1코스(심도 역사문화길)
여행일 : ‘22. 3. 13(일)
소재지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일원
여행코스 : 강화버스터미널→동문→성공회강화성당→용흥궁→고려궁지→강화향교→은수물약수터→북문→대산2리 마을회관→해온마을 입구→연미정(월곶진)→6.25참전용사기념공원→갑곶순교성지→갑곶돈(거리/시간 : 18km/ 실제는 16.69km를 4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수많은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 나들길’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산과 벌판,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310.5Km(20개 코스) 길이의 역사·문화·자연 트레일이다. 그러니 ‘나들(이)’란 이름처럼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들’듯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담아가면 되겠다. 오늘은 첫 번째 코스인 ‘심도 역사문화길’을 걷는다. 심도(沁都)는 강화의 옛 지명. 여기서 ‘도(都)’는 39년간 한 나라의 도읍이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브랜드로 내걸었을 정도로 수많은 유적들을 품은 코스라는 얘기가 된다.
▼ 들머리는 강화버스터미널(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222)
88올림픽도로로 김포까지 온 다음, ‘국도 48호선’으로 갈아타고 강화대교를 건넌다. 강화대교교차로에서 빠져나와 강화읍내로 들어서면 곧이어 ‘알미골사거리’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100m쯤 들어가면 트레킹이 시작되는 강화버스터미널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출발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관광안내소(대합실에 있다)에서 여권처럼 생긴 ‘도보여권(강화 전도·코스별 개념도·여행포인트·버스노선이 적혀있다)’을 무료로 나눠주니 챙겨가라는 얘기다. 이때 완주 도장을 찍어두는 것도 놓치지 말자.
▼ 전쟁이 날 때마다 늘 피난처가 되어준 강화도. 그러다보니 수많은 유적과 다양한 문화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런 강화의 유구한 역사와 빼어난 자연을 구석구석 둘러보는 길이 ‘강화 나들길’이다. ‘나들’은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드는 것처럼 대대로 사람들이 왕래했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아름다운 강화를 ‘나들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총 20개 코스에 310.5km로 이루어져 있다.
▼ 1코스의 이름은 ‘심도문화 역사길’이다. 강화터미널에서 출발해서 갑곶돈대에서 끝나는 길이 18km의 이 코스는 이름 그대로 강화의 문화와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길이다. 용흥궁과 고려궁지, 연미정, 갑곶돈대 등 수많은 문화유적들을 만나게 된다.
▼ 동북방향의 ‘알미골사거리(강화읍 갑곳리)’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버스가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나간다고 보면 되겠다. 참! 오늘 걸으려는 ‘강화나들길’은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이 쓴 ‘심도기행’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2005년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심도기행 강독’ 모임이 시작됐고, 거기서 선비가 나귀를 타고 다녔던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게 오늘의 강화나들길을 있게 한 시초란다.
▼ 나들길은 풍물시장 앞에서 도로를 건넌다. 그렇다고 어찌 강화의 명물 풍물시장을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강화특산물(순무·속노랑고구마·인삼·사자발약쑥·화문석)도 구경하고, 밴댕이회에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고 길을 나설 요량으로 시장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어선지 문을 연 집이 하나도 없다. 참고로 강화 풍물시장은 상설 전통시장이 있지만, 날수로 2일과 7일에 오일장이 서서 또 다른 볼거리를 보여주기도 한단다.
▼ 노점 구역을 빠져나면 ‘알미골사거리’. 앱이 탐방로를 벗어났다며 난리다. 그렇다고 당황할 필요는 없다. 서쪽(강화군청)으로 방향을 틀어 ‘강화우체국’으로 가면 된다. 참! 이번 코스는 앱의 도움을 유난히도 많이 받았다. 둘레길 도반인 ‘즐산’님의 도움으로 지도를 다운 받아놓지 않았더라면 여러 곳에서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 사거리에서 우체국을 오른편에 두고 직각으로 꺾으면 탐방로는 오르막길로 변한다.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길을 나서기 전 생수 한 병과 간식은 필수.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면 근처 편의점을 이용하는 게 좋다. 코스 중간에서는 식당을 찾기도 힘들고, 상점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 고갯마루로 올라서면 견자산(見子山, 아래 사진)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뉜다. 고려시대 고종이 몽골에 인질로 잡혀간 왕자를 그리워하며 저 산에 올라 북녘을 바라보았단다. 아무튼 올라가는 것까지는 사양했지만 저곳은 1907년의 군대 해산 때 강화진위대가 의병운동을 일으킨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현충탑(한국전쟁 때 전몰한 강화출신 군경 및 유격대원들을 추모)이 들어서 옛 사람들의 구국의지를 전해주고 있다.
▼ 길을 나선지 20분. 고개를 넘어서자 망한루(望漢樓)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비해 1232년(고종 19년) 고려궁지를 중심으로 둘러싼 강화산성의 동문(東門)이다. 몽고의 제2차 침입에 대비해 축조한 강화산성에는 안파루(남문), 첨화루(서문), 망한루(동문), 진송루(북문)의 4대문과 암문, 수문, 장대 등의 방어시설이 있다.
▼ 동문을 빠져나와 용화궁으로 향한다. 강화나들길을 가리키는 작은 팻말과 전봇대에 매달린 꼬리표를 따라 예스런 맛을 퐁퐁 풍기는 고샅길을 따르노라면 어느덧 잔디광장에 이른다. 광장의 주인은 700살이나 먹은 느티나무(강화군 보호수). 나잇값이라도 하려는 듯 한껏 부풀린 거대한 등치를 자랑한다.
▼ 잔디밭은 강화성당(성공회)의 옛터란다. ‘통제영 학당(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의 영국인 교관이 살던 관사였으나, 1897년 갑곶나루에 있던 ‘성 니콜라회당’을 이곳으로 이전하고 한국성공회 선교본부로 삼았단다. 이후 한옥성당이 신축되면서 ‘성 미카엘신학원(현 성공회대학교)’이 되었다가, 대학을 서울로 이전하면서 터만 남았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국가지정 문화재(사적 제424호)인 강화성당은 서구 기독교가 토착화되면서 나타난 산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성당이다. 1890년 조선에 첫발을 디딘 ‘고요한(Charles John Corfe)’ 주교는 강화도에서 첫 조선인 세례신자가 나온 것을 기념해 1900년 이곳에 한옥성당을 지었다. 뗏목을 이용해 두만강과 서해를 통해 운반해 온 백두산 소나무를 목재로 썼는가 하면,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목수와 솜씨 좋은 중국 석공까지 데려와 지었단다.
▼ 본당인 ‘천주성전’은 방주를 형상화했단다. 하지만 추녀마루 위에 용두(龍頭)가 올라간 것이 영락없는 사찰이다. 조선의 전통 한옥에 서양의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절충했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외부는 절간을 연상시키지만 내부에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의 예배공간을 갖췄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세심한 배려와 토착화노력이 엿보이는 걸작이라 하겠다.
▼ 강화성당 옆에 위치한 용흥궁(龍興宮, 인천 유형문화재 제20호)으로 들어선다. 강화도령이라 불리던 조선 25대 왕 철종(1849-1863)이 왕이 되기 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철종이 왕위에 즉위하자 강화 유수 정기세가 초가집을 허물고 기와집을 세운 뒤 ‘용이 승천한 궁’이라는 의미로 ‘용흥궁’이라 이름 지었단다.
▼ 안으로 들어서면 ‘궁’이라는 이름이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긴 왕이 되기 전에 잠시 살았던 곳이니 어련하겠는가.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왕의 장자가 물려받는 정상적 법통이 아닌, 추대된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했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과 어의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다.
▼ 용흥궁을 빠져나오면 ‘심도직물 터’다. 김상용(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순절했다)선생의 순절비각 바로 뒤에 공장 굴뚝처럼 생긴 조형물 하나가 우뚝 서있다. 옛날 심도직물이 있던 자리인데, 공장건물은 오래전 헐리고 굴뚝만이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참고로 인천의 직물산업은 ‘넉살좋은 강화년’으로부터 시작됐다. 여자들이 중심이 된 가내수공업이 대규모의 직물공장으로 발전했고, 1960~70년대 전성기에는 5천여 명의 종업원이 21개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단다.
▼ 심도직물의 옛터는 현재 ‘용흥궁 공원’으로 바뀌었다. 잔디광장과 야외무대, 바닥분수, 연못(mirror pond) 등을 설치해 주민을 위한 쉼터로 꾸며놓았다. 공원에는 삼일독립운동 기념비도 세워놓았다. 3월18일에 시작된 강화지역의 삼일독립운동은 전국적인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읍내 장터에서 1만 명에 달하는 규모로 시작되고, 이후 모든 면과 리로 확산되어 4월초까지 지속되었단다.
▼ 공원은 울타리까지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려 고종황제의 ‘강도(江都) 행차’를 그림으로 그려 넣었는가 하면, 강화도의 옛 지도와 사진 등을 게시해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 고려궁지로 가는 도중 ‘진무영 순교성지’에 잠시 들렀다. 진무영(鎭武營)은 조선 시대에 해상 경비의 임무를 맡던 군영으로, 병인양요(1866년)를 촉발시킨 서울 애오개 회장인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주기(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 장치선,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형 박서방, 조서방 등이 이곳 진무영에서 순교했다. 이중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로 수많은 성직자 및 신자가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명인 리델(Ridel) 신부를 배로 천진으로 탈출시키고, 상해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 오르막길의 끝 언덕배기(개성처럼 ‘송악산’이라 불렀다)에는 ‘고려궁지(사적 제133호)’가 올라앉았다. 승평문(昇平門)으로 들어서면 넓고 휑한 부지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했던 외세 침략의 흔적으로 점철된 이곳은 아픔의 장소이다. 고려왕조가 몽골에 대항하면서 39년(1232-1270)이나 머물렀으나 1270년 몽고와 강화조약을 맺은 후 임금은 개성으로 환도했고 궁궐은 허물어졌다. 조선 인조 9년에 행궁이 다시 지어졌으나 병자호란과 병인양요로 고려궁지는 또다시 제 모습을 잃었다. 현재 승평문, 강화유수부 동헌(인천시 유형문화재 25호, 아래 사진), 외규장각, 이방청, 종각 등이 복원되어 있다.
▼ 동헌인 명위헌(明威軒, 편액의 글씨는 영조 때의 명필인 윤순이 썼단다)에 서면 밀랍인형들이 옛 관청의 위엄을 되살려준다.
▼ 궁궐은 조선 인조 9년(1631)에 다시 지어졌다. 행궁(왕의 행차 시 머무는 별궁) 말고도 장녕전(長寧殿)을 지어 태조와 세조의 영정을 모셨다. 나라의 장서와 문서를 보관하는 ‘외규장각(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은 정조 때 지어졌다. 하지만 235년이 지난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탄압을 빌미삼은 프랑스함대가 침범(병인양요)해 많은 책과 서류를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살라 버렸다.
▼ 건물의 내부는 현재 전시관으로 꾸며졌다. 고려궁지와 외규장각의 역사, 기록문화의 꽃 ‘의궤(국가나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일종의 보고서)’, 빼앗긴 보물 ‘외규장각 도서’로 나눠 전시함으로써 의궤의 제작과 보관, 의궤의 뜻과 자료적 가치 등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 의궤(모두 297권)는 145년 만에 프랑스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5년 단위 임대’ 형식이란다.
▼ 종각도 들어서있다. 강화산성의 성문을 여닫을 때 치던 종인데, 안에 매달려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1711년에 만들어진 ‘강화 동종(보물11호)’은 현재 강화역사박물관 1층에 전시되어 있단다.
▼ 고려궁지를 나와 궁지 담벼락을 오른편에 끼고 돈다. 이후부터는 수많은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이렇듯 1코스(심도역사문화길)는 도심 골목길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때문에 길은 휘어졌다 꺾어지고, 또 어떤 곳에서는 갈라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때마다 이정표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두어 차례나 길을 잃었다. 이정표의 방향표시(걷고 있는 사람을 그려놓았다)가 애매했던 게 원인이다.
▼ 그렇게 8분쯤 더 걸으면 ‘강화여자고등학교’가 나온다. 앞 건물은 ‘유림회관’. 나들길은 두 건물 사이를 지나간다.
▼ 강화여고를 지나면 학교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강화향교(인천시 유형문화재 34호)’가 길손을 맞는다. 향교(鄕校)라는 게 본디 공립 교육기관일지니 신구(新舊)의 교육기관이 나란히 붙어있는 모양새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케이스라고나 할까? 참고로 강화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처음 세워졌다. 고려산 남쪽에 세워졌던 것을 갑곶리와 서도면 등으로 이전했다가 173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 나들길은 향교의 담장을 따라 나있다. 그리고 두 번째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난 이곳에서도 길을 잃었다. 이정표의 방향표시만 믿고 첫 번째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들어가니 엉뚱하게도 강화여고 기숙사(갑비랑 학사)가 나왔던 것이다.
▼ 조금 더 들어가니 강화여고 기숙사의 축대 밑에 ‘은수물 약수터’가 있다.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길어다 쓴 우물로 은가루를 풀어놓은 듯 은빛을 띈다 해서 은수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우물은 넘치는 물까지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자세가 돋보인다. 아래쪽에 빨래터를 만들었는데,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는 족욕 좌대로 안성맞춤이겠다.
▼ 약수터를 지나 산길로 들어선다(이정표는 종점까지 12.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처음 등장하는 숲길이지만 긴장할 필요는 없다. 비교적 평탄한 길이 쭉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산길은 기숙사 뒤 산자락을 옆으로 짼다. 이어서 4분 후쯤 만나는 토성(土城, 이정표 : 북문 1.05km/ 서문)을 잠시 따르다가, 곧이어 나타나는 삼거리(이정표 : 북문 920m/ 서문 900m)에서 또다시 오른쪽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크게 그리고 거꾸로 ‘갈 지(之)’자를 쓴다고 보면 되겠다.
▼ ‘이 뭣꼬?’. 나들길 이정표가 반사경을 달았다. 시도 때도 없이 성범죄 관련 뉴스가 도배를 하더니, 이젠 등산로에까지 저런 시설이 필요했던가 보다.
▼ 사부작사부작 밟히는 나뭇잎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진송루(鎭松樓)’, 즉 강화산성의 북문(北門)에 다다른다. 북문은 고려 고종 19년(1232)에 강화로 천도한 뒤 대몽 항쟁을 위하여 축조한 내성(당시 토성)에 연결되었던 문이다. 개경환도와 동시에 헐렸던 내성은 조선 초기에 토성으로 개축했다. 하지만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때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효종 3년(1652)에 이중 일부를 개축했다.
▼ 성문 앞에는 꽤 많은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북문’이라는 시판이 유독 눈길을 끈다. <진송루 성문 아래서 한참을 머물러 보니/ 산은 고려산에서 굽이쳐 흘러왔고/ 눈 아래는 일천 채의 초가집과 기와집/ 연기 그림자 속에 절반이 티끌이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은 강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역사와 문화, 풍물을 담은 ‘심도기행(沁都記行)’을 남겼다. 그러니 어찌 북문에 대한 노래가 빠졌겠는가.
▼ 탐방로는 성벽을 따라 북장대(北將臺)로 향한다. 하지만 난 이를 따르지 않고 그냥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북장대까지의 구간이 15코스와 중복된다는 얘기를 후미대장으로부터 귀띔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1코스 최대 난이도를 자랑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러니 ‘똑 같은 길을 두 번 걷지 않겠다’는 핑계가 어찌 나오지 않겠는가.
▼ 북장대를 생략한 덕분에 1구간에서 가장 빼어난 숲길을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편안함에 도취되어 오읍약수(아래 사진은 허총무님 것을 빌려왔다)를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했다. 가뭄에 시달리던 주민과 몽골군을 피해 피난 온 이들이 향수를 달래며 마셨다는 그 유명한 물을 마셔보지 못했으니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참고로 오읍약수는 ‘다섯 오(五)’에 ‘울 읍(泣)’ 자를 쓴다. 당시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했던지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신(神)이 울고, 임금이 울고, 그리고 강화 백성 모두가 울었다고 전해진다.
▼ 호젓한 산길을 10분 조금 못되게 걷자 산골마을이 나온다. 이후부터 나들길은 마을길과 들길, 산길 등 다양한 형태의 길을 따른다. 때문에 심심찮게 길이 나뉘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형태의 표식들이 진행방향을 알려준다. ‘강화 나들길’이라고 적힌 나무판은 허리춤 높이에서 갈 방향을 가르쳐주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초록·노란 색 끈은 탐방로의 든든한 벗이다.
▼ 군내버스가 다니는 도로(대월로)로 나오자 ‘황선신 정려문’의 위치를 알리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황선신(黃善身, 1570-1637)은 병자호란 때 68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강화부중군을 맡아 100여명의 군사와 함께 갑곶진을 지키다 중과부적으로 전사한 충신이다.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까지 제향(祭享)된 분이니 한번쯤 들러보았으면 좋았으련만 그곳(조금 전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만난 갈림길에서 마을로 들어가면 된다)에 있는 줄조차 몰라 그냥 지나쳐버렸다.
▼ 나들길은 도로를 건넌다. 그리고 교회의 첨탑이 우람한 마을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나는 ‘대산리 고인돌(인천시 기념물 31호)’이라는 또 하나의 유적을 놓쳐버렸다.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이라기에 더욱 아쉽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줄도 몰랐으니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새로 놓인 듯한 48번 국도의 아래를 통과하자 이번에는 ‘대산2리’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50분 만이다. 나들길은 마을회관 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 간간히 나타나는 민가를 만나가며 10분 정도 걷다가 산길로 들어선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는 착한 구간이다. 하지만 이 부근에서 길이 많이 헷갈렸다. 탐방로가 변경됐는지 지도와 이정표가 다를 뿐만 아니라, 앱으로도 방향 찾기가 애매할 때가 더러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다. 길을 가다 나들길 표식(이정표나 리본)이 안보이면 되돌아 나오면 그만. 그 표식들이 하도 촘촘히 설치되어 있어 금방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 그렇게 10분쯤 더 걸으면 산길이 끝나면서 ‘해온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하지만 민가는 두어 채가 전부다. 거기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참! 강화읍을 벗어난 뒤로는 주민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인연과 만남도 또 하나의 여행일진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왼쪽으로 방향을 꺾은 탐방로는 잠시 도로를 따른다. 하지만 50m쯤 떨어진 고갯마루에 이르자 다시 산등성이로 올라붙는다. 초입의 이정표가 종점까지는 아직도 8.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 이후부터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호젓한 산길이 이어진다. 시야가 막혀 조망도 별로다. 대신 길은 고운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기 때문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0분(‘해온마을’에서는 18분). 산길 구간을 끝낸 나들길은 ‘월곶마을’로 내려선다. 그런데 축구가족을 그려 넣은 저 벽화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 350년이나 묵은 향나무(보호수)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향나무를 울안에 둔 민가는 텅 비어있다. 강화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로 넘쳐난다는 점이다. 사연 많은 젊은 날을 보내고, 이제 강화를 두 번째 고향으로 삼아 터를 잡은 이들이다. 그런데도 이 집의 주인장은 일상화된 불편이 싫었던 모양이다.
▼ 이후부터는 아스팔트 포장길(연미정길)을 따른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돈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연미정이 얼굴을 내민다. 마을 끝에 왕릉처럼 솟아오른 곳이 월곶돈대(月串墩臺)요, 그 위에 올라앉은 정자가 연미정(燕尾亭)이다.
▼ 주차장과 관광안내소를 연거푸 지나자 ‘월곶 돈대’ 앞에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 이곳이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黃衡, 1459-1520)의 옛 집터(향토유적 3호)라는 것이다. 황형은 삼포왜란(중종 5년) 때 왜적을 무찔렀고, 중종 7년에는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의 반란을 진압했다. 왕이 그 업적을 찬양하여 ‘연미정’을 하사했단다.
▼ 아치형 암문(暗門)을 들어서자 느티나무(540년 된 보호수란다) 그늘 아래 연미정(燕尾亭)이 앉아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아름답다. 하긴 강화10경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저곳은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참고로 연미정이란 정자 아래로 한강과 임진강 물이 합쳐졌다가 한 줄기가 서해로 흘러들고 또 한 줄기가 김포와 강화를 가르는 염하(鹽河)로 흘러드는 모습이 마치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하지만 나무는 죽어서 그루터기를 남기나 보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링링 그날의 상처’라는 브랜드로 포장까지 해놓았다. 맞다. 누군가의 ‘전환의 발상’이 있었기에 저런 볼거리가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 흐린 날씨 탓에 북녘의 풍경은 언감생심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현 정국과 같다고나 할까? 그러니 북한 땅(황해도 개풍군 일대)은 고사하고 연무정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인다는 유도(留島)까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한국전쟁 이전에는 농가 2가구가 거주했고, 주막과 선착장까지 있었다는 섬 말이다.
▼ 연미정은 임시완, 임윤아, 홍종현 주연의 MBC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의 촬영지라고 한다. 고려 충렬왕으로부터 충선왕 대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아름다우면서 슬픈 우정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인데, 이곳에서 이별 장면이라도 찍었나 보다.
▼ 보이지도 않는 북녘 땅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때 가야할 나들길과 함께 ‘조해루’가 발아래로 펼쳐진다. 저 대문을 나서면 ‘월곶진’일 게다. 예전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가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리다 물때에 맞춰 한강으로 들어갔다는 곳. 뱃사람들의 사랑방이다.
▼ 조해루(朝海樓)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강화 외성(江華 外城)’의 문루 중 하나로 강화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옛날 이곳은 남으로 염하, 북으로는 조강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는 해상로의 요충지였다)하는 초소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참고로 강화외성(사적 452호)은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고려 23대 왕)이 1233년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적북돈대’에서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축조한 성이다. 성에는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했단다.
▼ 이제 나들길은 겹겹의 철조망이 드리워진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다. 자동차도로의 가장자리에 내놓은 자전거도로를 따르는데, 접근은 물론이고 사진촬영까지 금지한다는 날선 경고 문구에 살짝 쫄게 되는 구간이다. 볼거리가 없으니 지루할 것은 당연. 그게 싫다면 연미정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 나고 드는 게 자유로워 나들길이라는 강화 걷기에 시작과 끝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 10분쯤 걸었을까 이정표가 오른편을 가리킨다. 도로를 벗어나 들녘의 둑길과 야산의 숲길을 걸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후미대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데 구태여 에둘러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 또한 같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 연미정을 출발한지 45분. 테니스장이 들어선 작은 고갯마루를 넘자 국궁장과 ‘대산기계공업’이 연이어 나온다. 그리고 공장 근처에서 아까 갈라져나갔던 나들길을 다시 만난다.
▼ 몇 걸음 더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에는 접경지역의 특성을 살린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있던 자리(강화읍 용정리)에 그들의 뜻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조성했단다. 국난극복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호국충절의 고장이자 호국보훈 성지인 강화군의 지리적 여건에 걸맞는 시설이라고나 할까?
▼ 상단은 공원의 주인공인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자리한다. 그밖에도 강화특공대의적불망비와 한반도를 형상화한 조각물을 등을 설치하여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 하단에는 6.25 전쟁 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우리나라에 병력을 지원해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6개국의 참전 규모 등을 상세히 적은 안내판을 설치하여 6.25 전쟁의 실상을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안보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 경계용 울타리도 버려두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광복과 혼란기, 참담했던 6·25전쟁, 정전협상 등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사진 벽화로 만들어 분단의 현실을 담았다.
▼ 공원을 빠져나오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강화대교’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한옥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강조한 아치가 눈길을 끄는 강화도의 관문이다.
▼ 강화대교 아래 ‘갑곶성지’의 후문으로 들어서자 ‘진해루(鎭海樓)’가 길손을 맞는다. ‘강화외성’의 6개 문루 중 하나로, 염하를 건너와 갑곶나루에서 내린 사람들이 강화읍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문을 통과해야만 했단다. 강화도의 관문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저 문루는 최근에야 복원되었다. 완전히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세기 말 제작한 지도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 성문 밖으로 나가자 김포반도를 향해 두 개의 다리가 뻗어나간다. 왼쪽은 1997년 개통된 신(新) 강화대교(길이 780m)로 갑곳리(甲串里, 강화읍)와 포내리(浦內里, 김포시 월곶면)를 연결한다. 그리고 오른편은 1970년 개통되어 27년 동안 강화도를 육지와 연결시켜주던 구(舊) 강화대교이다. 그 임무를 새로운 다리에 넘겨주고 지금은 폐쇄된 상태다.
▼ 진해루 앞 광장에는 ‘통제영학당(인천시 기념물 49호)’이 있었다고 한다. 통제영학당은 조선 고종 30년(1893년)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사관생도 38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한 통제영은 영국 장교들까지 교관으로 부임시켰으나,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1896년 영국군 교관들이 귀국하면서 학교도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당시 사용하던 우물만이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하나의 너른 광장이 나온다. 공터의 뒤는 ‘갑곶성지’. 성지로 오르는 길목에는 하얀 예수님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신다. 쇄국정책과 종교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이 품었을 전교에 대한 염원을 내륙에 전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 나들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데크계단을 오르니 ‘구)강화대교’다. 1970년에 개통된 이 다리는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로서는 경남 충무교와 전남 완도교에 이어 국내 3번째라고 한다. 1997년 새로운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폐쇄되었으나 다리가 평화누리자전거길로 활용되면서 낮 시간에 한해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 몇 걸음 더 걷자 ‘갑곶 순교성지’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된 우윤집·최순복·박상손 등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천주교(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 그들이 처형된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 매입하고, 지금의 순교성지를 조성했다. 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예수님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가장 높은 곳은 갑곶진두(나루터)에서 처형된 순교자 세 분을 기리는 ‘순교자 삼위비’ 차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해역에 미국 군함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다.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면서 군사 충돌이 빚어졌고, 고종은 이를 빌미로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를 박해했다. 그 결과 제물진두(현재 화수동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는 세 분이 순교했다.
▼ 광장의 오른쪽 끝은 기도하는 예수상이 자리 잡았다. 그 앞에는 장궤틀(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틀)이 놓았다. 예수님을 마주보도록 해놓은 것은, 그만큼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 순교성지를 빠져나오는데 ‘開國의 聖域, 江華’이라고 적힌 커다란 빗돌이 시선을 붙잡는다. 단군왕검이 마니산 참성단(塹城壇, 사적 제136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것을 홍보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곳 강화는 단군신화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곳으로 상고시대엔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하다가 고구려 때에는 혈구군(穴口郡), 신라 때에는 해구군(海口郡)이라 하였다. 현재의 지명 강화는 940년(고려 태조 23) 이래의 것으로,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와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는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면서 강도로 승격되기도 했다. 수도의 관문에 위치하기 때문에 근세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신미양요·운요호사건 등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죽산 조봉암선생의 추모비가 맞는다. 죽산은 강화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다. 1889년 강화도 선원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죽산은 독립운동으로 두 차례(9년)나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이후 초대 농림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 그가 만든 진보당의 정강 정책이 북한의 주장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유명을 달리했다.
▼ 죽산추모비 앞에서 왼편으로 들어서면 너른 주차장을 지나 전쟁박물관으로 연결된다.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보존·수집하기 위해 설립된 시설이다.
▼ 2코스의 스탬프보관함은 관광안내소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들은 왜 줄을 서있을까? 2코스인 ‘호국돈대길’은 2주 후에나 걷게 될 텐데 말이다.
▼ 경내로 들어서자 엄청나게 많은 비석들이 늘어서 있다. 강화유수·판관·군수를 지낸 이들의 선정비가 대부분이지만, 삼충신을 기리는 삼충사적비(三忠事蹟碑)나 말에서 내리라는 개하마비(皆下馬碑) 같은 특이한 비들도 보인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비석은 금표비(禁標碑)다. 가축을 방생한 자는 곤장 100대, 재를 버린 자는 곤장 80대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세운 시기는 계축년(1733년). 그렇다면 당시에도 자연보호가 사회문제화 되었다는 얘기일까?
▼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 기념비’도 눈여겨 볼만하다. 기념비는 고려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견해 문명의 발전을 앞당겼음을 강조한다.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앞서는 금속활자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의미하는데, 이 활자는 진위논란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고려가 강화로 도읍을 옮겼던 강도시기(1232-1270)에 제작됐다는 사실이다. 빗돌을 살펴보다 문득 연수차 들렀던 독일의 ‘쿠텐베르그 박물관’이 떠오른다. 당시 나를 안내해주던 박물관장은 우리 한국이 자신들보다도 200년 가까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개발했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뿌듯했던지...
▼ 바닷가 언덕에는 ‘갑곶돈대(사적 제306호)’가 있다. ‘돈대’란 해안가·접경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의 관측·방어시설을 말한다.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이 돈대는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상륙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참고로 ‘갑곶’이란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 (甲比古次)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며 한탄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 돈대에 서면 강화해협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저 아래 어디쯤엔가는 ‘갑곶나루’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과 강화를 오가던 길목 말이다. 정묘호란(1627) 때 인조 임금이 난리를 피해 건너왔던 나루였으며,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군이 쳐들어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를 지닌 갑곶나루도 강화대교가 놓이면서 역사의 저 너머로 물러났다.
▼ 1977년 보수·복원되었다는 돈대에는 소포(小砲)와 불랑기(佛狼機)를 놓아두었다. 대포(大砲)는 아예 전각까지 지어 전시하고 있었다. 돈대와 대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증거가 아닐까?
▼ ‘전쟁박물관’은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임시 휴관이란다.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관련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돈대에서 내려오다 커다란 ‘탱자나무’도 만날 수 있었다. 나이가 400살이나 먹었다는 저 나무는 피침(被侵)의 역사를 전해주는 산증인이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섬 주위에 성벽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 적의 접근을 막았다니 말이다. 국토방위 유물로서의 역사성과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라는 특이성이 인정되어 천연기념물(78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 트레킹을 마치고 근처 특산물 가게를 찾았다. 모처럼 강화에 왔으니 특산물 하나쯤은 사가지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강화의 특산물로는 섬쌀과 순무, 속노랑고구마, 인삼, 사자발약쑥, 화문석 등이 꼽힌다. 그중 내 지갑을 열게 한 것은 ‘순무김치(2만5천원/1통)’. 갑장인 차사장이 일러준 흥정비법을 살려 꽤 많은 양의 ‘속노랑고구마’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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