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 1코스(심도 역사문화길)

 

여행일 : ‘22. 3. 13(일)

소재지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일원

여행코스 : 강화버스터미널→동문→성공회강화성당→용흥궁→고려궁지→강화향교→은수물약수터→북문→대산2리 마을회관→해온마을 입구→연미정(월곶진)→6.25참전용사기념공원→갑곶순교성지→갑곶돈(거리/시간 : 18km/ 실제는 16.69km를 4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수많은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 나들길’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산과 벌판,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310.5Km(20개 코스) 길이의 역사·문화·자연 트레일이다. 그러니 ‘나들(이)’란 이름처럼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들’듯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담아가면 되겠다. 오늘은 첫 번째 코스인 ‘심도 역사문화길’을 걷는다. 심도(沁都)는 강화의 옛 지명. 여기서 ‘도(都)’는 39년간 한 나라의 도읍이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브랜드로 내걸었을 정도로 수많은 유적들을 품은 코스라는 얘기가 된다.

 

▼ 들머리는 강화버스터미널(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222)

88올림픽도로로 김포까지 온 다음, ‘국도 48호선’으로 갈아타고 강화대교를 건넌다. 강화대교교차로에서 빠져나와 강화읍내로 들어서면 곧이어 ‘알미골사거리’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100m쯤 들어가면 트레킹이 시작되는 강화버스터미널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출발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관광안내소(대합실에 있다)에서 여권처럼 생긴 ‘도보여권(강화 전도·코스별 개념도·여행포인트·버스노선이 적혀있다)’을 무료로 나눠주니 챙겨가라는 얘기다. 이때 완주 도장을 찍어두는 것도 놓치지 말자.

▼ 전쟁이 날 때마다 늘 피난처가 되어준 강화도. 그러다보니 수많은 유적과 다양한 문화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런 강화의 유구한 역사와 빼어난 자연을 구석구석 둘러보는 길이 ‘강화 나들길’이다. ‘나들’은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드는 것처럼 대대로 사람들이 왕래했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아름다운 강화를 ‘나들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총 20개 코스에 310.5km로 이루어져 있다.

▼ 1코스의 이름은 ‘심도문화 역사길’이다. 강화터미널에서 출발해서 갑곶돈대에서 끝나는 길이 18km의 이 코스는 이름 그대로 강화의 문화와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길이다. 용흥궁과 고려궁지, 연미정, 갑곶돈대 등 수많은 문화유적들을 만나게 된다.

▼ 동북방향의 ‘알미골사거리(강화읍 갑곳리)’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버스가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나간다고 보면 되겠다. 참! 오늘 걸으려는 ‘강화나들길’은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이 쓴 ‘심도기행’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2005년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심도기행 강독’ 모임이 시작됐고, 거기서 선비가 나귀를 타고 다녔던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게 오늘의 강화나들길을 있게 한 시초란다.

▼ 나들길은 풍물시장 앞에서 도로를 건넌다. 그렇다고 어찌 강화의 명물 풍물시장을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강화특산물(순무·속노랑고구마·인삼·사자발약쑥·화문석)도 구경하고, 밴댕이회에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고 길을 나설 요량으로 시장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어선지 문을 연 집이 하나도 없다. 참고로 강화 풍물시장은 상설 전통시장이 있지만, 날수로 2일과 7일에 오일장이 서서 또 다른 볼거리를 보여주기도 한단다.

▼ 노점 구역을 빠져나면 ‘알미골사거리’. 앱이 탐방로를 벗어났다며 난리다. 그렇다고 당황할 필요는 없다. 서쪽(강화군청)으로 방향을 틀어 ‘강화우체국’으로 가면 된다. 참! 이번 코스는 앱의 도움을 유난히도 많이 받았다. 둘레길 도반인 ‘즐산’님의 도움으로 지도를 다운 받아놓지 않았더라면 여러 곳에서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 사거리에서 우체국을 오른편에 두고 직각으로 꺾으면 탐방로는 오르막길로 변한다.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길을 나서기 전 생수 한 병과 간식은 필수.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면 근처 편의점을 이용하는 게 좋다. 코스 중간에서는 식당을 찾기도 힘들고, 상점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 고갯마루로 올라서면 견자산(見子山, 아래 사진)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뉜다. 고려시대 고종이 몽골에 인질로 잡혀간 왕자를 그리워하며 저 산에 올라 북녘을 바라보았단다. 아무튼 올라가는 것까지는 사양했지만 저곳은 1907년의 군대 해산 때 강화진위대가 의병운동을 일으킨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현충탑(한국전쟁 때 전몰한 강화출신 군경 및 유격대원들을 추모)이 들어서 옛 사람들의 구국의지를 전해주고 있다.

▼ 길을 나선지 20분. 고개를 넘어서자 망한루(望漢樓)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비해 1232년(고종 19년) 고려궁지를 중심으로 둘러싼 강화산성의 동문(東門)이다. 몽고의 제2차 침입에 대비해 축조한 강화산성에는 안파루(남문), 첨화루(서문), 망한루(동문), 진송루(북문)의 4대문과 암문, 수문, 장대 등의 방어시설이 있다.

▼ 동문을 빠져나와 용화궁으로 향한다. 강화나들길을 가리키는 작은 팻말과 전봇대에 매달린 꼬리표를 따라 예스런 맛을 퐁퐁 풍기는 고샅길을 따르노라면 어느덧 잔디광장에 이른다. 광장의 주인은 700살이나 먹은 느티나무(강화군 보호수). 나잇값이라도 하려는 듯 한껏 부풀린 거대한 등치를 자랑한다.

▼ 잔디밭은 강화성당(성공회)의 옛터란다. ‘통제영 학당(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의 영국인 교관이 살던 관사였으나, 1897년 갑곶나루에 있던 ‘성 니콜라회당’을 이곳으로 이전하고 한국성공회 선교본부로 삼았단다. 이후 한옥성당이 신축되면서 ‘성 미카엘신학원(현 성공회대학교)’이 되었다가, 대학을 서울로 이전하면서 터만 남았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국가지정 문화재(사적 제424호)인 강화성당은 서구 기독교가 토착화되면서 나타난 산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성당이다. 1890년 조선에 첫발을 디딘 ‘고요한(Charles John Corfe)’ 주교는 강화도에서 첫 조선인 세례신자가 나온 것을 기념해 1900년 이곳에 한옥성당을 지었다. 뗏목을 이용해 두만강과 서해를 통해 운반해 온 백두산 소나무를 목재로 썼는가 하면,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목수와 솜씨 좋은 중국 석공까지 데려와 지었단다.

▼ 본당인 ‘천주성전’은 방주를 형상화했단다. 하지만 추녀마루 위에 용두(龍頭)가 올라간 것이 영락없는 사찰이다. 조선의 전통 한옥에 서양의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절충했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외부는 절간을 연상시키지만 내부에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의 예배공간을 갖췄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세심한 배려와 토착화노력이 엿보이는 걸작이라 하겠다.

▼ 강화성당 옆에 위치한 용흥궁(龍興宮, 인천 유형문화재 제20호)으로 들어선다. 강화도령이라 불리던 조선 25대 왕 철종(1849-1863)이 왕이 되기 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철종이 왕위에 즉위하자 강화 유수 정기세가 초가집을 허물고 기와집을 세운 뒤 ‘용이 승천한 궁’이라는 의미로 ‘용흥궁’이라 이름 지었단다.

▼ 안으로 들어서면 ‘궁’이라는 이름이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긴 왕이 되기 전에 잠시 살았던 곳이니 어련하겠는가.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왕의 장자가 물려받는 정상적 법통이 아닌, 추대된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했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과 어의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다.

▼ 용흥궁을 빠져나오면 ‘심도직물 터’다. 김상용(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순절했다)선생의 순절비각 바로 뒤에 공장 굴뚝처럼 생긴 조형물 하나가 우뚝 서있다. 옛날 심도직물이 있던 자리인데, 공장건물은 오래전 헐리고 굴뚝만이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참고로 인천의 직물산업은 ‘넉살좋은 강화년’으로부터 시작됐다. 여자들이 중심이 된 가내수공업이 대규모의 직물공장으로 발전했고, 1960~70년대 전성기에는 5천여 명의 종업원이 21개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단다.

▼ 심도직물의 옛터는 현재 ‘용흥궁 공원’으로 바뀌었다. 잔디광장과 야외무대, 바닥분수, 연못(mirror pond) 등을 설치해 주민을 위한 쉼터로 꾸며놓았다. 공원에는 삼일독립운동 기념비도 세워놓았다. 3월18일에 시작된 강화지역의 삼일독립운동은 전국적인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읍내 장터에서 1만 명에 달하는 규모로 시작되고, 이후 모든 면과 리로 확산되어 4월초까지 지속되었단다.

▼ 공원은 울타리까지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려 고종황제의 ‘강도(江都) 행차’를 그림으로 그려 넣었는가 하면, 강화도의 옛 지도와 사진 등을 게시해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 고려궁지로 가는 도중 ‘진무영 순교성지’에 잠시 들렀다. 진무영(鎭武營)은 조선 시대에 해상 경비의 임무를 맡던 군영으로, 병인양요(1866년)를 촉발시킨 서울 애오개 회장인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주기(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 장치선,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형 박서방, 조서방 등이 이곳 진무영에서 순교했다. 이중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로 수많은 성직자 및 신자가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명인 리델(Ridel) 신부를 배로 천진으로 탈출시키고, 상해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 오르막길의 끝 언덕배기(개성처럼 ‘송악산’이라 불렀다)에는 ‘고려궁지(사적 제133호)’가 올라앉았다. 승평문(昇平門)으로 들어서면 넓고 휑한 부지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했던 외세 침략의 흔적으로 점철된 이곳은 아픔의 장소이다. 고려왕조가 몽골에 대항하면서 39년(1232-1270)이나 머물렀으나 1270년 몽고와 강화조약을 맺은 후 임금은 개성으로 환도했고 궁궐은 허물어졌다. 조선 인조 9년에 행궁이 다시 지어졌으나 병자호란과 병인양요로 고려궁지는 또다시 제 모습을 잃었다. 현재 승평문, 강화유수부 동헌(인천시 유형문화재 25호, 아래 사진), 외규장각, 이방청, 종각 등이 복원되어 있다.

▼ 동헌인 명위헌(明威軒, 편액의 글씨는 영조 때의 명필인 윤순이 썼단다)에 서면 밀랍인형들이 옛 관청의 위엄을 되살려준다.

▼ 궁궐은 조선 인조 9년(1631)에 다시 지어졌다. 행궁(왕의 행차 시 머무는 별궁) 말고도 장녕전(長寧殿)을 지어 태조와 세조의 영정을 모셨다. 나라의 장서와 문서를 보관하는 ‘외규장각(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은 정조 때 지어졌다. 하지만 235년이 지난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탄압을 빌미삼은 프랑스함대가 침범(병인양요)해 많은 책과 서류를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살라 버렸다.

▼ 건물의 내부는 현재 전시관으로 꾸며졌다. 고려궁지와 외규장각의 역사, 기록문화의 꽃 ‘의궤(국가나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일종의 보고서)’, 빼앗긴 보물 ‘외규장각 도서’로 나눠 전시함으로써 의궤의 제작과 보관, 의궤의 뜻과 자료적 가치 등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 의궤(모두 297권)는 145년 만에 프랑스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5년 단위 임대’ 형식이란다.

▼ 종각도 들어서있다. 강화산성의 성문을 여닫을 때 치던 종인데, 안에 매달려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1711년에 만들어진 ‘강화 동종(보물11호)’은 현재 강화역사박물관 1층에 전시되어 있단다.

▼ 고려궁지를 나와 궁지 담벼락을 오른편에 끼고 돈다. 이후부터는 수많은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이렇듯 1코스(심도역사문화길)는 도심 골목길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때문에 길은 휘어졌다 꺾어지고, 또 어떤 곳에서는 갈라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때마다 이정표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두어 차례나 길을 잃었다. 이정표의 방향표시(걷고 있는 사람을 그려놓았다)가 애매했던 게 원인이다.

▼ 그렇게 8분쯤 더 걸으면 ‘강화여자고등학교’가 나온다. 앞 건물은 ‘유림회관’. 나들길은 두 건물 사이를 지나간다.

▼ 강화여고를 지나면 학교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강화향교(인천시 유형문화재 34호)’가 길손을 맞는다. 향교(鄕校)라는 게 본디 공립 교육기관일지니 신구(新舊)의 교육기관이 나란히 붙어있는 모양새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케이스라고나 할까? 참고로 강화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처음 세워졌다. 고려산 남쪽에 세워졌던 것을 갑곶리와 서도면 등으로 이전했다가 173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 나들길은 향교의 담장을 따라 나있다. 그리고 두 번째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난 이곳에서도 길을 잃었다. 이정표의 방향표시만 믿고 첫 번째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들어가니 엉뚱하게도 강화여고 기숙사(갑비랑 학사)가 나왔던 것이다.

▼ 조금 더 들어가니 강화여고 기숙사의 축대 밑에 ‘은수물 약수터’가 있다.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길어다 쓴 우물로 은가루를 풀어놓은 듯 은빛을 띈다 해서 은수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우물은 넘치는 물까지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자세가 돋보인다. 아래쪽에 빨래터를 만들었는데,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는 족욕 좌대로 안성맞춤이겠다.

▼ 약수터를 지나 산길로 들어선다(이정표는 종점까지 12.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처음 등장하는 숲길이지만 긴장할 필요는 없다. 비교적 평탄한 길이 쭉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산길은 기숙사 뒤 산자락을 옆으로 짼다. 이어서 4분 후쯤 만나는 토성(土城, 이정표 : 북문 1.05km/ 서문)을 잠시 따르다가, 곧이어 나타나는 삼거리(이정표 : 북문 920m/ 서문 900m)에서 또다시 오른쪽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크게 그리고 거꾸로 ‘갈 지(之)’자를 쓴다고 보면 되겠다.

▼ ‘이 뭣꼬?’. 나들길 이정표가 반사경을 달았다. 시도 때도 없이 성범죄 관련 뉴스가 도배를 하더니, 이젠 등산로에까지 저런 시설이 필요했던가 보다.

▼ 사부작사부작 밟히는 나뭇잎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진송루(鎭松樓)’, 즉 강화산성의 북문(北門)에 다다른다. 북문은 고려 고종 19년(1232)에 강화로 천도한 뒤 대몽 항쟁을 위하여 축조한 내성(당시 토성)에 연결되었던 문이다. 개경환도와 동시에 헐렸던 내성은 조선 초기에 토성으로 개축했다. 하지만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때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효종 3년(1652)에 이중 일부를 개축했다.

▼ 성문 앞에는 꽤 많은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북문’이라는 시판이 유독 눈길을 끈다. <진송루 성문 아래서 한참을 머물러 보니/ 산은 고려산에서 굽이쳐 흘러왔고/ 눈 아래는 일천 채의 초가집과 기와집/ 연기 그림자 속에 절반이 티끌이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은 강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역사와 문화, 풍물을 담은 ‘심도기행(沁都記行)’을 남겼다. 그러니 어찌 북문에 대한 노래가 빠졌겠는가.

▼ 탐방로는 성벽을 따라 북장대(北將臺)로 향한다. 하지만 난 이를 따르지 않고 그냥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북장대까지의 구간이 15코스와 중복된다는 얘기를 후미대장으로부터 귀띔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1코스 최대 난이도를 자랑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러니 ‘똑 같은 길을 두 번 걷지 않겠다’는 핑계가 어찌 나오지 않겠는가.

▼ 북장대를 생략한 덕분에 1구간에서 가장 빼어난 숲길을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편안함에 도취되어 오읍약수(아래 사진은 허총무님 것을 빌려왔다)를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했다. 가뭄에 시달리던 주민과 몽골군을 피해 피난 온 이들이 향수를 달래며 마셨다는 그 유명한 물을 마셔보지 못했으니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참고로 오읍약수는 ‘다섯 오(五)’에 ‘울 읍(泣)’ 자를 쓴다. 당시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했던지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신(神)이 울고, 임금이 울고, 그리고 강화 백성 모두가 울었다고 전해진다.

▼ 호젓한 산길을 10분 조금 못되게 걷자 산골마을이 나온다. 이후부터 나들길은 마을길과 들길, 산길 등 다양한 형태의 길을 따른다. 때문에 심심찮게 길이 나뉘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형태의 표식들이 진행방향을 알려준다. ‘강화 나들길’이라고 적힌 나무판은 허리춤 높이에서 갈 방향을 가르쳐주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초록·노란 색 끈은 탐방로의 든든한 벗이다.

▼ 군내버스가 다니는 도로(대월로)로 나오자 ‘황선신 정려문’의 위치를 알리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황선신(黃善身, 1570-1637)은 병자호란 때 68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강화부중군을 맡아 100여명의 군사와 함께 갑곶진을 지키다 중과부적으로 전사한 충신이다.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까지 제향(祭享)된 분이니 한번쯤 들러보았으면 좋았으련만 그곳(조금 전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만난 갈림길에서 마을로 들어가면 된다)에 있는 줄조차 몰라 그냥 지나쳐버렸다. 

▼ 나들길은 도로를 건넌다. 그리고 교회의 첨탑이 우람한 마을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나는 ‘대산리 고인돌(인천시 기념물 31호)’이라는 또 하나의 유적을 놓쳐버렸다.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이라기에 더욱 아쉽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줄도 몰랐으니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새로 놓인 듯한 48번 국도의 아래를 통과하자 이번에는 ‘대산2리’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50분 만이다. 나들길은 마을회관 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 간간히 나타나는 민가를 만나가며 10분 정도 걷다가 산길로 들어선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는 착한 구간이다. 하지만 이 부근에서 길이 많이 헷갈렸다. 탐방로가 변경됐는지 지도와 이정표가 다를 뿐만 아니라, 앱으로도 방향 찾기가 애매할 때가 더러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다. 길을 가다 나들길 표식(이정표나 리본)이 안보이면 되돌아 나오면 그만. 그 표식들이 하도 촘촘히 설치되어 있어 금방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 그렇게 10분쯤 더 걸으면 산길이 끝나면서 ‘해온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하지만 민가는 두어 채가 전부다. 거기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참! 강화읍을 벗어난 뒤로는 주민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인연과 만남도 또 하나의 여행일진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왼쪽으로 방향을 꺾은 탐방로는 잠시 도로를 따른다. 하지만 50m쯤 떨어진 고갯마루에 이르자 다시 산등성이로 올라붙는다. 초입의 이정표가 종점까지는 아직도 8.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 이후부터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호젓한 산길이 이어진다. 시야가 막혀 조망도 별로다. 대신 길은 고운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기 때문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30분(‘해온마을’에서는 18분). 산길 구간을 끝낸 나들길은 ‘월곶마을’로 내려선다. 그런데 축구가족을 그려 넣은 저 벽화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 350년이나 묵은 향나무(보호수)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향나무를 울안에 둔 민가는 텅 비어있다. 강화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로 넘쳐난다는 점이다. 사연 많은 젊은 날을 보내고, 이제 강화를 두 번째 고향으로 삼아 터를 잡은 이들이다. 그런데도 이 집의 주인장은 일상화된 불편이 싫었던 모양이다.

▼ 이후부터는 아스팔트 포장길(연미정길)을 따른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돈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연미정이 얼굴을 내민다. 마을 끝에 왕릉처럼 솟아오른 곳이 월곶돈대(月串墩臺)요, 그 위에 올라앉은 정자가 연미정(燕尾亭)이다.

▼ 주차장과 관광안내소를 연거푸 지나자 ‘월곶 돈대’ 앞에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 이곳이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黃衡, 1459-1520)의 옛 집터(향토유적 3호)라는 것이다. 황형은 삼포왜란(중종 5년) 때 왜적을 무찔렀고, 중종 7년에는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의 반란을 진압했다. 왕이 그 업적을 찬양하여 ‘연미정’을 하사했단다.

▼ 아치형 암문(暗門)을 들어서자 느티나무(540년 된 보호수란다) 그늘 아래 연미정(燕尾亭)이 앉아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아름답다. 하긴 강화10경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저곳은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참고로 연미정이란 정자 아래로 한강과 임진강 물이 합쳐졌다가 한 줄기가 서해로 흘러들고 또 한 줄기가 김포와 강화를 가르는 염하(鹽河)로 흘러드는 모습이 마치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하지만 나무는 죽어서 그루터기를 남기나 보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링링 그날의 상처’라는 브랜드로 포장까지 해놓았다. 맞다. 누군가의 ‘전환의 발상’이 있었기에 저런 볼거리가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 흐린 날씨 탓에 북녘의 풍경은 언감생심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현 정국과 같다고나 할까? 그러니 북한 땅(황해도 개풍군 일대)은 고사하고 연무정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인다는 유도(留島)까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한국전쟁 이전에는 농가 2가구가 거주했고, 주막과 선착장까지 있었다는 섬 말이다.

▼ 연미정은 임시완, 임윤아, 홍종현 주연의 MBC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의 촬영지라고 한다. 고려 충렬왕으로부터 충선왕 대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아름다우면서 슬픈 우정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인데, 이곳에서 이별 장면이라도 찍었나 보다.

▼ 보이지도 않는 북녘 땅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때 가야할 나들길과 함께 ‘조해루’가 발아래로 펼쳐진다. 저 대문을 나서면 ‘월곶진’일 게다. 예전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가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리다 물때에 맞춰 한강으로 들어갔다는 곳. 뱃사람들의 사랑방이다.

▼ 조해루(朝海樓)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강화 외성(江華 外城)’의 문루 중 하나로 강화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옛날 이곳은 남으로 염하, 북으로는 조강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는 해상로의 요충지였다)하는 초소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참고로 강화외성(사적 452호)은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고려 23대 왕)이 1233년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적북돈대’에서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축조한 성이다. 성에는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했단다.

▼ 이제 나들길은 겹겹의 철조망이 드리워진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다. 자동차도로의 가장자리에 내놓은 자전거도로를 따르는데, 접근은 물론이고 사진촬영까지 금지한다는 날선 경고 문구에 살짝 쫄게 되는 구간이다. 볼거리가 없으니 지루할 것은 당연. 그게 싫다면 연미정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 나고 드는 게 자유로워 나들길이라는 강화 걷기에 시작과 끝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 10분쯤 걸었을까 이정표가 오른편을 가리킨다. 도로를 벗어나 들녘의 둑길과 야산의 숲길을 걸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후미대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데 구태여 에둘러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 또한 같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 연미정을 출발한지 45분. 테니스장이 들어선 작은 고갯마루를 넘자 국궁장과 ‘대산기계공업’이 연이어 나온다. 그리고 공장 근처에서 아까 갈라져나갔던 나들길을 다시 만난다.

▼ 몇 걸음 더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에는 접경지역의 특성을 살린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있던 자리(강화읍 용정리)에 그들의 뜻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조성했단다. 국난극복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호국충절의 고장이자 호국보훈 성지인 강화군의 지리적 여건에 걸맞는 시설이라고나 할까?

▼ 상단은 공원의 주인공인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자리한다. 그밖에도 강화특공대의적불망비와 한반도를 형상화한 조각물을 등을 설치하여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 하단에는 6.25 전쟁 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우리나라에 병력을 지원해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6개국의 참전 규모 등을 상세히 적은 안내판을 설치하여 6.25 전쟁의 실상을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안보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 경계용 울타리도 버려두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광복과 혼란기, 참담했던 6·25전쟁, 정전협상 등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사진 벽화로 만들어 분단의 현실을 담았다.

▼ 공원을 빠져나오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강화대교’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한옥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강조한 아치가 눈길을 끄는 강화도의 관문이다.

▼ 강화대교 아래 ‘갑곶성지’의 후문으로 들어서자 ‘진해루(鎭海樓)’가 길손을 맞는다. ‘강화외성’의 6개 문루 중 하나로, 염하를 건너와 갑곶나루에서 내린 사람들이 강화읍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문을 통과해야만 했단다. 강화도의 관문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저 문루는 최근에야 복원되었다. 완전히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세기 말 제작한 지도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 성문 밖으로 나가자 김포반도를 향해 두 개의 다리가 뻗어나간다. 왼쪽은 1997년 개통된 신(新) 강화대교(길이 780m)로 갑곳리(甲串里, 강화읍)와 포내리(浦內里, 김포시 월곶면)를 연결한다. 그리고 오른편은 1970년 개통되어 27년 동안 강화도를 육지와 연결시켜주던 구(舊) 강화대교이다. 그 임무를 새로운 다리에 넘겨주고 지금은 폐쇄된 상태다.

▼ 진해루 앞 광장에는 ‘통제영학당(인천시 기념물 49호)’이 있었다고 한다. 통제영학당은 조선 고종 30년(1893년)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사관생도 38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한 통제영은 영국 장교들까지 교관으로 부임시켰으나,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1896년 영국군 교관들이 귀국하면서 학교도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당시 사용하던 우물만이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하나의 너른 광장이 나온다. 공터의 뒤는 ‘갑곶성지’. 성지로 오르는 길목에는 하얀 예수님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신다. 쇄국정책과 종교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이 품었을 전교에 대한 염원을 내륙에 전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 나들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데크계단을 오르니 ‘구)강화대교’다. 1970년에 개통된 이 다리는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로서는 경남 충무교와 전남 완도교에 이어 국내 3번째라고 한다. 1997년 새로운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폐쇄되었으나 다리가 평화누리자전거길로 활용되면서 낮 시간에 한해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 몇 걸음 더 걷자 ‘갑곶 순교성지’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된 우윤집·최순복·박상손 등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천주교(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 그들이 처형된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 매입하고, 지금의 순교성지를 조성했다. 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예수님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가장 높은 곳은 갑곶진두(나루터)에서 처형된 순교자 세 분을 기리는 ‘순교자 삼위비’ 차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해역에 미국 군함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다.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면서 군사 충돌이 빚어졌고, 고종은 이를 빌미로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를 박해했다. 그 결과 제물진두(현재 화수동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는 세 분이 순교했다.

▼ 광장의 오른쪽 끝은 기도하는 예수상이 자리 잡았다. 그 앞에는 장궤틀(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틀)이 놓았다. 예수님을 마주보도록 해놓은 것은, 그만큼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 순교성지를 빠져나오는데 ‘開國의 聖域, 江華’이라고 적힌 커다란 빗돌이 시선을 붙잡는다. 단군왕검이 마니산 참성단(塹城壇, 사적 제136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것을 홍보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곳 강화는 단군신화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곳으로 상고시대엔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하다가 고구려 때에는 혈구군(穴口郡), 신라 때에는 해구군(海口郡)이라 하였다. 현재의 지명 강화는 940년(고려 태조 23) 이래의 것으로,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와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는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면서 강도로 승격되기도 했다. 수도의 관문에 위치하기 때문에 근세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신미양요·운요호사건 등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죽산 조봉암선생의 추모비가 맞는다. 죽산은 강화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다. 1889년 강화도 선원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죽산은 독립운동으로 두 차례(9년)나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이후 초대 농림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 그가 만든 진보당의 정강 정책이 북한의 주장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유명을 달리했다.

▼ 죽산추모비 앞에서 왼편으로 들어서면 너른 주차장을 지나 전쟁박물관으로 연결된다.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보존·수집하기 위해 설립된 시설이다.

▼ 2코스의 스탬프보관함은 관광안내소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들은 왜 줄을 서있을까? 2코스인 ‘호국돈대길’은 2주 후에나 걷게 될 텐데 말이다.

▼ 경내로 들어서자 엄청나게 많은 비석들이 늘어서 있다. 강화유수·판관·군수를 지낸 이들의 선정비가 대부분이지만, 삼충신을 기리는 삼충사적비(三忠事蹟碑)나 말에서 내리라는 개하마비(皆下馬碑) 같은 특이한 비들도 보인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비석은 금표비(禁標碑)다. 가축을 방생한 자는 곤장 100대, 재를 버린 자는 곤장 80대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세운 시기는 계축년(1733년). 그렇다면 당시에도 자연보호가 사회문제화 되었다는 얘기일까?

▼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 기념비’도 눈여겨 볼만하다. 기념비는 고려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견해 문명의 발전을 앞당겼음을 강조한다.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앞서는 금속활자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의미하는데, 이 활자는 진위논란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고려가 강화로 도읍을 옮겼던 강도시기(1232-1270)에 제작됐다는 사실이다. 빗돌을 살펴보다 문득 연수차 들렀던 독일의 ‘쿠텐베르그 박물관’이 떠오른다. 당시 나를 안내해주던 박물관장은 우리 한국이 자신들보다도 200년 가까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개발했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뿌듯했던지...

▼ 바닷가 언덕에는 ‘갑곶돈대(사적 제306호)’가 있다. ‘돈대’란 해안가·접경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의 관측·방어시설을 말한다.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이 돈대는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상륙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참고로 ‘갑곶’이란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 (甲比古次)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며 한탄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 돈대에 서면 강화해협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저 아래 어디쯤엔가는 ‘갑곶나루’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과 강화를 오가던 길목 말이다. 정묘호란(1627) 때 인조 임금이 난리를 피해 건너왔던 나루였으며,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군이 쳐들어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를 지닌 갑곶나루도 강화대교가 놓이면서 역사의 저 너머로 물러났다.

▼ 1977년 보수·복원되었다는 돈대에는 소포(小砲)와 불랑기(佛狼機)를 놓아두었다. 대포(大砲)는 아예 전각까지 지어 전시하고 있었다. 돈대와 대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증거가 아닐까?

▼ ‘전쟁박물관’은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임시 휴관이란다.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관련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돈대에서 내려오다 커다란 ‘탱자나무’도 만날 수 있었다. 나이가 400살이나 먹었다는 저 나무는 피침(被侵)의 역사를 전해주는 산증인이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섬 주위에 성벽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 적의 접근을 막았다니 말이다. 국토방위 유물로서의 역사성과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라는 특이성이 인정되어 천연기념물(78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 트레킹을 마치고 근처 특산물 가게를 찾았다. 모처럼 강화에 왔으니 특산물 하나쯤은 사가지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강화의 특산물로는 섬쌀과 순무, 속노랑고구마, 인삼, 사자발약쑥, 화문석 등이 꼽힌다. 그중 내 지갑을 열게 한 것은 ‘순무김치(2만5천원/1통)’. 갑장인 차사장이 일러준 흥정비법을 살려 꽤 많은 양의 ‘속노랑고구마’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영주 무섬마을

 

여행일 : ‘22. 2. 6(일)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산행코스 : 주차장→무섬마을→제2외나무다리→산길(전망대)→외나무다리→환학암→주차장(거리/ 소요시간 : 의미 없음)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섬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예천 회룡포’, ‘영월 선암마을’처럼 마을의 3면이 물로 둘러싸인 대표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영주천을 보탠 내성천이 마을의 삼면을 감싸듯 휘감아 돌면서 육지속의 섬을 만들어놓았다. 마을의 삼면을 내성천이, 나머지 한 면은 소백산에서 이어져온 산줄기가 외부와의 접촉을 끊어버린 것이 영락없이 섬(島)인 것이다. 고립이 역설적으로 보존을 낳았다. 문화재로 등록된 집만 해도 만죽재와 해우당 등 아홉 채나 된다. 특히 ‘ㅁ’자형 가옥, 까치구멍 집, 겹집, 남부지방 민가 등 다양한 구조의 가옥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다고 한다. 국가 중요민속문화재(제278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들머리는 무섬마을 외곽주차장(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돗밤실둘레길에 이은 탐방이기에 이산면사무에서 출발한다. ‘이산로’를 이용해 용암교차로(영주시 하망동)까지 온 다음, 좌회전하여 조암교차로(영주시 조암동)로 온다. 이어서 ‘조암교’로 원당천을 건넌 다음 문수로(초입부분은 ‘간운로’란다)로 옮겨 10km쯤 들어가면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다리(수도교)가 보인다. 다리를 건널 수 없는 대형버스를 위해 도로 오른편에 널따란 주차장을 마련해 놓았으니 이를 이용하면 된다.

▼ 탐방로는 마을길(녹색)과 트레킹길(점선)로 나뉜다. 하지만 길이란 길을 모두 걸어도 2시간이 채 안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볼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수도교를 건너가 마을을 둘러본 다음, 제2무섬외나무다리(오른편)를 건너 트레킹길을 따라 원점회귀 하는 것을 추천한다. 집결지로 돌아오는 도중에는 무섬외나무다리(왼편)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춰 ‘인생샷’을 건져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 주차장을 빠져나와 동쪽(왼쪽), 그러니까 내성천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 무섬마을로 들어가려면 ‘수도교’를 건너야 한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콘크리트 다리지만 이 다리는 마을 주민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라고 한다. 30년 전, 이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외나무다리가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였다니 말이다. 장마철만 되면 다른 지역과의 길이 끊기다가 다리가 놓이면서 그게 해소되었으니 어찌 보배롭지 않겠는가.

▼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편(왼편으로 갈려나와 다리 아래를 통과한다) 방향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탐방객들을 위해 내놓은 ‘트레킹 길’로 탐방을 마친 다음 저 길을 이용해 원점회귀하게 된다.

▼ 다리에서 내려다본 내성천(乃城川, 내성은 봉화의 옛 이름이다)의 물 흐름은 고즈넉하다. 소백산 줄기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마을 뒤편에서 서천(영주천)을 만나 무섬마을을 한 바퀴 휘돌아 나간다. 그 물길은 환학정(喚鶴亭) 앞에 이르러 물살을 살짝 죽이고 모든 흐름을 안으로 감춘다. 한없이 고즈넉하게 보이는 이유다.

▼ 다리를 건너자 잡다한 안내판이 길손을 반긴다. 이 가운데 무섬마을에 대한 설명판과 가옥배치도는 꼭 살펴보고 길을 나설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면 개념도 정도는 머릿속에 담아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 무섬마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이라고 한다. ‘반남 박씨’인 ‘박수’가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이후 조선 영조 때 그의 증손녀 사위인 ‘예안 김씨’ ‘김대’가 들어왔으며, 지금까지도 반남 박씨와 예안 김씨 두 집안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단다. 마을은 현재 약 48가구 1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38동이 전통가옥이고, 그중에서도 16동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 이정표는 34.6km나 떨어진 ‘소수서원’까지 표기하고 있었다. 이왕에 왔으니 주변 관광지까지 두루두루 보고 가라는 모양이다. 그래선지 시 단위의 관광안내판도 두엇이나 세워놓았다.

▼ 정보가 더 필요하다면 안내판 뒤에 있는 ‘관광안내소’로 가볼 일이다. 무섬마을뿐만 아니라 영주권역의 자료까지 얻어 볼 수 있다.

▼ 기초 자료를 얻었다면 이제 마을을 둘러볼 차례다. 마을의 왼편 끄트머리에는 ‘아도서숙(亞島書塾)’이 있다. ‘아세아 조선의 섬인 수도리의 서당’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데, 김화진 주도로 1928년 문을 열어 1933년 일제가 강제로 폐쇄할 때까지 무섬마을의 교육기관이자 항일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문맹퇴치와 민족교육, 민족정신 고양 등 농민계몽활동과 독립운동을 동시에 펼쳤다고 한다. 이들은 일제 감시와 탄압으로 검거와 투옥을 되풀이하고도 끝까지 영주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단다.

▼ 김희규 가옥으로 여겨지는 초가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치류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그 뒤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 치류정(峙流亭)은 앞면 2칸 규모의 작은 정자와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서당이었던 아도서숙과 함께 마을사람들이 후학을 양성하고 교류하는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저나 ‘치류정’이 ‘예안 김씨’의 입향조인 ‘김대’의 호라서 문화재가 아닐까 살펴봤지만 그에 대한 안내판이나 기록은 눈에 띄지 않았다.

▼ 마을에는 ‘무섬식당’이란 음식점도 들어서 있었다. 메인 메뉴는 ‘무섬정식’. 하지만 청국장이 더 인기가 높단다. 주인이 직접 재배한 콩으로 메주를 띄우고 청국장을 만들어 식사를 내놓는데, 손님의 대부분은 야외 식탁에서 밥을 먹어야하는 구조이다. 요즘 같은 팬데믹 시대에 딱 맞는 시스템이라 하겠다. 마침 맛까지 훌륭하다니 끼니때라도 되었다면 출출해진 배를 채워볼 일이다.

▼ 무섬마을은 전통을 이어가는 마을이다. 그러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음식 하나쯤 없겠는가. 한옥민박을 겸하고 있는 ‘김갑진 가옥’인데, 메주와 된장, 부석태청국장 등 전통식품을 팔고 있었다.

▼ ‘김영석 가옥’의 옆 공터에는 꽤 많은 장독이 오와 열을 맞추며 늘어서 있었다. 이 마을에서 팔고 있는 제품이 제법 입소문을 탔다는 얘기일 것이다.

▼ 근처에는 주실고택(김한직 가옥)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안내판이 없어 가옥에 대한내력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고택 숙박체험이 가능한 민박집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뿐.

▼ 마을의 맨 안쪽에는 김기현가옥이 들어서 있었다. 백송당(白松堂)이라고도 부르는데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았다는 의미인 듯.

▼ 입구에서 마당까지 공간에는 눈길을 끄는 조형물과 분재 같은 희귀식물들로 꾸며져 있었다. 주인장의 고상한 취미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라 하겠다.

▼ 강변으로 되돌아오면 이번엔 ‘해우당 고택(海愚堂 古宅, 경북 민속문화재 제92호)’이 반긴다. 무섬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 ‘만죽재’라면 가장 큰 집은 ‘해우당’이다. 수도교를 건너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ㅁ’자 형의 집인데, 이는 남녀를 구분하는 유교의 생활 원리를 반영한 구조란다. 개방적인 공간인 사랑채는 남성, 폐쇄적인 공간인 안채는 여성이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 해우당 고택은 1830년 예안김씨 입향조 김대(金臺, 1732-1809)의 셋째 손자 김영각(1809-1876)이 짓고, 1876년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海愚堂) 김낙풍(金樂灃, 1825-1900)이 중수했다. 경북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ㅁ’자 형 기와집으로 중앙에 안마당. 앞쪽에 ‘―’자 모양의 사랑채, 뒤쪽에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다. 해우당이란 편액은 그의 정치적 조언을 받던 흥선대원군이 쓴 것으로 알려진다.

▼ 해우당의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청퇴정(淸退亭)이 나온다. 오헌(吾軒) 박제연(朴齊淵, 1807-1890)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돌로 지은 정자는 무섬마을이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마을로 지정되면서 단청을 입혔는데, 이게 시멘트로 지었다. 중국 냄새가 난다는 등 꽤 구설수를 탔던 모양이다. 그게 억울했던지 처음 지었을 당시의 사진을 대문 앞에 걸어놓고 있었다.

▼ 정자 아래에 세운 시비에는 오헌의 한시 오헌유거(吾軒幽居, 조용한 나의 삶)가 새겨져 있었다. <평온한 시냇가 한 구비 물가에다/ 조용한 나의 살 곳 정했도다/ 초원 모래톱엔 송아지 잠들고/ 맑은 모래밭엔 해오라기 평온하네/ 산 빛은 마땅히 나의 집 비추고/ 물굽이 감기는 곳 난간이 떠 있는 듯/ 어부와 나무꾼 이야기도 끝나기 전/ 어느새 둥근달 누각 위에 떠 있네>

▼ 만운고택(晩雲古宅)으로도 불리는 ‘김뢰진 가옥(金賚鎭 家屋, 경북 민속문화재 제118호)’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 살림집의 변화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라는데 아쉬운 일이다.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다. 입구에 ‘김성규 가옥’이라는 안내판 하나를 더 세워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 것이다. 김성규는 일제강점기 김화진과 함께 아도서숙을 세우고 농촌계몽과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또한 그는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김성규가옥은 현재 무섬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가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꼬불꼬불한 마을길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정도로 고즈넉했다. 고택이라 하여 큰길을 차지하지 않고, 가옥이라 하여 막다른 골목에 있지도 않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자연의 고즈넉함을 닮은 길과 집을 만날 수 있다. 어느 지역신문 기자는 이런 풍경을 ‘고즈넉함의 미학’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무섬의 고즈넉함은 느림의 미학을 넘어선다면서 말이다.

▼ 수춘재(壽春齋)라는 편액을 단 ‘김태길 가옥은 고택 숙박체험이 가능하다.

▼ 수춘재 옆은 비교적 큰 규모인 ‘일계고택(逸溪古宅)’이다. 이 집은 조금 특이하다. 다른 집들과는 다르게 사랑채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툇마루를 넓게 만들어 누마루 같은 느낌을 준다.

▼ 다음은 ‘섬계고택(剡溪古宅)’이다. 섬계는 무섬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히는 박제익(朴齊翼, 1806-1841)의 호이다. 지금은 ‘김동근 가옥’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집에서도 고택 숙박체험이 가능하다.

▼ 섬계고택 안쪽에는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만죽재 고택(晩竹齋 古宅. 경북 민속문화재 제93호)’이 있다. 병자호란 후 출사를 단념한 ‘반남 박씨’ 입향조 박수(朴檖, 1641-1709)가 1666년(헌종 7년)에 지은 집으로 지금도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지을 당시는 섬계초당(剡溪草堂)이었으나, 박수의 8대손 만죽재 박승훈(1865-1924)이 중수하고 당호를 만죽재로 고쳤다. 이 집도 역시 ‘ㅁ’자 형의 구조로 되어있으며, 웅장하지는 않지만 종택답게 간결하면서도 격식을 갖추었다.

▼ 무섬마을은 농지, 우물, 담과 대문, 사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예외가 없겠는가. 아래 사진처럼 예쁜 담이 이웃에 정과 옛집이야기를 실어 나르기도 한다.

▼ 무섬마을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까치구멍집’이다. 지붕 용마루 아래에 까치집처럼 작은 구멍(공기를 통하게 하는 용도)이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경상북도 북부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는 유형인데, 대문만 닫으면 맹수의 공격을 막을 수 있고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혀도 집안에서 모든 생활을 할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앞부분의 봉당(封堂)을 중심으로 좌측에 사랑을 두고, 우측에 부엌을 두었다. 뒷부분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상방을 두고 우측에 안방을 두었다.

▼ ‘박천립 가옥(경북 문화재자료 제364호)’은 카페로 성업 중이었다. 간판은 집의 외형을 담아 ‘초가 카페’라 내걸었다. 우리네 재래 차와 커피를 팔고 있는데, 대부분이 3천원이고 비싸봐야 5천원(대추차)이니 가격도 저렴한 편. 배라도 출출할라치면 사발면(2천원) 한 그릇 비우고 가면 될 일이다.

▼ 다음에 만날 곳은 ‘무송헌 종택(撫松軒 宗宅)’이다. 무송헌이란 당호는 세종 때의 천문학자인 김담(金淡, 1416-1464)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집은 1923년에 지어졌으며, 당호는 문중에서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있는 김담의 아호에서 따왔다. ‘김광호 가옥(金光昊 家屋)’이라고도 부르는데, 오랫동안 빈 채로 있다가 얼마 전 김담의 종손인 주인장 내외가 집을 보수한 뒤 살기 시작했단다.

▼ 마을 안내도는 이집을 ‘종택(宗宅)’이라 적고 있었다. 그래선지 마당 한켠에 사당으로 여겨지는 건물이 별도로 지어져 있었다. 이 또한 무섬마을 사무(四無)의 예외라 할 수 있겠다.

▼ 병조참판을 역임한 박제연(朴齊淵, 1807-1890)의 고택은 그의 호를 따 ‘오헌(吾軒)’이 되었다. 오헌이란 바로 우리 집이란 뜻. 내 집에 내가 산다는 의미인데 원래는 도연명이 ‘새들도 깃들 곳을 기뻐하듯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편액의 글씨는 구한말 개방파 관료인 박규수가 썼다. 현 거주자인 후손의 이름을 따 ‘박정우 가옥’으로도 불린다.

▼ 맨 끄트머리 산자락에는 섬계 박제익이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교류하던 ‘섬계초당(剡溪草堂)’이 있다. 박제익은 영남일대에 널리 알려진 문장가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탓에 후학의 계보는 잇지 못했으나 후대에 미친 글의 영향은 지대했다고 전해진다. 그나저나 건물을 눈앞에 뻔히 두고도 찾아보지는 못했다. ‘만죽재’의 부속 건물인데도 다른 곳에서 접근을 시도했으니 어찌 그게 가능했겠는가.

▼ ‘아석 고택(我石 古宅, 경북 문화재자료 제117호)’은 1885년에 ‘반남 박씨’ 가문에서 지었다고 한다. 1910년대 ‘예안 김씨’인 김낙기(입향조 김대의 증손)가 매입하면서 소유주가 바뀌었다. ‘김덕진 가옥’으로도 불리는데 ‘아석’이란 당호는 김낙기의 손자인 ‘김원규’의 호에서 따왔단다.

▼ ‘김위진 가옥’은 ‘조은 구택(釣隱 舊宅, 경북 문화재자료 제360호)’이라고도 불린다. 1893년 이 집을 지은 김휘윤의 호를 당우의 이름으로 삼았다.

▼ 월미산 초당(月美山 草堂)이라고도 불리는 ‘김규진 가옥(경북 문화재자료 제361호)’은 까치구멍집이다. 원래의 집이 수해로 떠내려가 1930년대에 새로 지은 6칸(앞3×옆2) 집으로, 방을 앞뒤 2열로 배치한 게 특징이라고 한다.

▼ 무섬마을의 집들은 하나같이 장작을 두둑이 쌓아놓고 있었다. 집집마다 겨울에 장작불을 때기 때문이란다.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좋아해서라는데, 하긴 겨울 난방으로 온돌만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

▼ 돌담이 예쁜 ‘금강초당’은 담장 너머로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쁘게 꾸며진 내부가 무척 궁금했지만 주인이 싫어하니 참을 수밖에...

▼ 고색창연한 고택들은 현재 전통을 이어가는 후손들이  기거한다. 그래서 집집마다 오랜 삶의 향기가 배어나고, 동네는 친근한 고향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선지 주말이면 고택에서 하룻밤을 지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조용한 마음의 힐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마을 끄트머리에는 마을의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다. 이중 한옥체험수련관은 무섬마을의 문화체험 프로그램과 행사운영, 단체손님의 숙박을 위한 시설이다. 80-100명이 숙박할 수 있는 공간과 현대식화장실, 샤워시설, 족구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도자기와 염색체험 및 사군자체험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단다.

▼ ‘무섬자료전시관’도 있다. 조선 후기에 반남 박씨와 예안 김씨가 터를 잡고 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온 내력을 설명해 주는 곳이다.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내부에는 마을이 배출한 주요 인물들이 남긴 글, 국가로부터 받은 교지, 집에 걸었던 현판 원본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 전시관 앞에는 조지훈의 시비(詩碑)도 세워져 있었다. 처가 앞 강변을 한없이 거닐며 마음껏 시정 펼쳤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인 모양이다. 시비에는 별리(別離)라는 시를 새겨놓았는데 아내를 무섬에 남기고 서울로 공부하러 떠나는 애틋한 마음을 담았다. 참고로 조지훈이 무섬마을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9년 이곳으로 장가를 오면서부터다. 혜화전문학교 시절 무섬 출신 김위남(필명 김난희)과 결혼한 그는 방학 때마다 내려와 시심(詩心)을 일구었다고 한다.

▼ 자료전시관 앞에서 이번에는 냇가로 내려선다. 이곳 무섬마을을 세상에 알리는데 일조한 ‘외나무다리’를 만나보기 위해서이다. 무섬마을의 가장 큰 볼거리는 단연 외나무다리다. 마을과 강 건너를 잇고 있는데, 시집올 때 가마 타고 한 번, 죽어서 상여 타고 한 번 지나간다는 애환이 서린 다리다.

▼ 저 외나무다리는 콘크리트로 새로운 다리를 놓을 때까지 300년 넘게 바깥세상을 잇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보따리장수나 다른 곳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이기도 했다. 수도교 건설(1983년)과 함께 사라졌던 외나무다리는 최근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단다. 참! 저런 다리는 옛날 3개가 있었다고 한다. 영주시장 갈 때 이용하던 게 하나고, 지금 수도교 쪽에 있던 다리는 학교 갈 때 건너던 길이었단다. 나머지 하나는 들에 일하러 갈 때 주로 이용하던 ‘놀기미다리’라고 한다. ‘놀기미논’으로 가는 다리라는 뜻이란다.

▼ 저렇게 좁은데 오가는 사람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외나무다리 중간마다 마주 오는 이를 피해갈 수 있도록 여분의 짧은 다리인 ‘비껴다리’를 놓았다. 마주 보고 건너던 사람들은 비껴다리에서 서로 길을 양보했단다. 그렇다고 어느 누가 쉽게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마는. 오죽했으면 ‘무섬마을에 시집오면 죽어서야 상여를 타고 나갈 수 있다’는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 다리는 폭이 30센티에 불과하다. 때문에 긴 장대에 의지한 채 건널 수밖에 없었단다. 그마저도 익숙하지 않은 외지인들은 다리를 건너다 심심찮게 빠지곤 했단다. 그래서 무섬을 드나들 때는 마음 수양부터 하고 건너야 한다고 했다나? 그렇다면 함께 투어를 하고 있는 이석암 선생은 양팔을 쫙 벌린 채로 심신수양을 하는 모양이다.

▼ 강 건너에 이르러서는 ‘둘레길’을 따르기로 했다. 내성천 건너의 산줄기를 따라 내놓은 이 둘레길은 ‘문수지맥 트레킹길’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문수지맥(文殊枝脈)이란 백두대간 옥돌봉(1,244m)에서 서남쪽으로 분기하여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을 가르며 문수산·복두산·학가산·보문산·나부산 등을 일구고 내성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대하는 도상거리 약 114.5 km의 산줄기이다. 그러니 무섬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을 지나간다. 그런데도 문수지맥이란 이름표를 달아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 잠시 후 무섬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최고의 조망처를 만났다.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이 만들어내는 멋진 비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하긴 선두를 맡고 있는 윤대장이 ‘둘레길’을 놓치지 말라는 전화연락까지 해왔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과 물이 태극 모양으로 서로 안고 휘감아 돌아가는 멋진 모양새이다. 마을은 파란 물과 하얀 모래밭이 빙 둘러 감싸고 있는 것이 흡사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풍수에서는 저런 지형을 연화부수(蓮花浮水,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 또는 매화낙지(梅花落地,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모습)로 꼽으며 길지 중의 길지로 친단다.

▼ 유연하게, 그것도 상큼한 솔향기까지 맡아가며 걷는 호사스런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과 함께 끝을 맺는다.

▼ 탐방로는 이제 강변을 따른다. 그리고 오른편에 무섬마을을 두고 걷는다. 무섬의 옛 지명은 ‘섬계(剡溪)’다. 마을이 안도라는 선비가 살던 중국의 섬계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고을 이름 섬(剡)’ 자이니 물가에 가깝게 있는 동네가 아니겠는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딱 어울리는 지명이라 하겠다.

▼ 둑에서 내려다보면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모래사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굽은 초승달 모양의 모래사장이 마을을 삼면에서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내성천이 ‘C‘자 모양으로 굽으며 마을 앞을 널찍하게 흘러가면서 만들어낸 현상이라는데, 그 안쪽에서 잠든 듯 조용히 엎드려 있는 게 바로 무섬마을이다.

▼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외나무다리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는 정자와 벤치를 갖춘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무섬마을 가옥배치도와 함께 문수지맥트레킹길 안내도를 세워 이방인들의 길 찾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 쉼터 주변에는 시판(詩板)을 세워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안도현의 ‘우물’과 박노해의 ‘너의 하늘을 보아’, 나희덕의 ‘어느 봄날’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이름과 시도 여럿 보인다. 그 가운데 권서각 시인의 ‘꽃은 피고 물은 흐르고’라는 작품을 올려본다. 술과 안주, 거기에 인심까지 좋다니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 강변으로 내려가면 내성천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황금빛 모래가 흐르는 강. 저 내성천이 휘감아 돌면서 마을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저 강은 무섬마을 사람들에겐 지난한 삶의 현장일 수밖에 없었다. 외부로 나가기 위해 나무다리를 놓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또 물길에 순응하도록 뱀이 움직이는 모양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장마철이면 불어난 물에 다리가 떠내려가는 탓에 해마다 새로 놓기까지 했다.

▼ 다리는 절반으로 쪼갠 통나무를 하천 위에 얹어 만들었다. 통나무를 가로로 잘라 하천 바닥에 깊숙이 박은 게 교각이다. 하지만 폭이 좁아 건너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도 이 다리를 건너 학생들은 학교에 다녔고, 외지로 시집가는 처녀들은 꽃가마를 탔다.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는 딸의 고된 시집살이보다도 가마가 물에 떨어지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했을 것이다. 주민들 생의 마감도 이 다리였다. 평생 섬마을에 살다 눈을 감은 어르신들을 실은 꽃상여도 이 다리를 건너갔단다.

▼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올라가 걸어도 전혀 흔들리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리 곳곳에 교행이 가능하도록 쪼갠 통나무 한쪽을 덧붙여놓아 길이 막히는 일도 없다. 여름철에는 저 대피 공간에 앉아 양말을 벗고 내성천 흐르는 물에 다리를 적실 수도 있겠다.(사진은 허총무님 것을 빌려왔다)

▼ 이번에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되돌아 나온다. 그리고는 둘레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한다. 아까와는 달리 이 구간에는 데크로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길을 내지 못할 정도로 비탈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무섬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는다. 그렇게 잠시 걷자 시야가 툭 트이는 곳에 ‘환학암(喚鶴菴)’이라는 옛집 하나가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이름만 듣고 절집(庵子)으로 판단하지는 마시라. ‘가릴 엄(奄)’자가 ‘풀 초(艹/艸)’를 뒤집어썼으니 ‘우거질 암(菴)’자가 된다. 푸른 숲에 가린 집. 즉 경관 좋은 곳에 들어선 정자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 ‘환학(喚鶴)’은 박경안(朴景顔, 1608-1671)의 아호(雅號)라고 한다. 무섬마을의 입향조인 박수(朴檖)의 아버지인데, 후손들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그를 추모하고 있단다. 자신의 후손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잘못된 점이라도 있을라치면 꾸짖어달라는 바람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 정자 앞에 서자 내성천이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널따란 모래사장이 겨울 햇살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데, 문득 아까 시비에서 보았던 별리의 싯구가 떠오른다.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에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메아리...>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하지만 무섬마을은 1970년대에 쌓았다는 제방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버렸다. 사시사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살펴보던 조상의 눈을 가려버렸다고나 할까?

▼ 날머리는 무섬마을 외곽주차장(원점회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잠시 후 수도교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다리 아래를 통과해 도로로 올라서면 무섬마을 탐방은 끝을 맺는다. 모든 일상을 뒤로하고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어진다는 무섬마을을 모두 둘러본 것이다. 결론은 대만족이다. 한껏 여유로운 풍경을 머금은 천혜의 자연경관. 드넓은 모래사장과 그 위를 유유히 흐르는 맑은 내성천의 은은한 풍광을 실컷 눈에 담았으니 이보다 더한 호사가 어디 있을까?

영주 돗밤실 둘레길

 

여행일 : ‘22. 2. 6(일)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산행코스 : 이산면사무소→망월봉→약수봉→출렁다리→제비봉→흑석사→명학봉→묘봉→이산면사무소(거리/소요시간 : 5.81km/ 2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영주의 트레일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소백산 자락길’로 대변된다. 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고을 단위의 둘레길도 여럿 나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이곳 ‘돗밤실둘레길’이다. 돗밤실의 어원은 마을주변에 졸참나무가 많다는데서 유래했다. 굴밤(도토리)은 돼지밤이라고도 불리며 윷판에도 나오는 도(돗)는 돼지의 옛말이다. 이게 마을 이름(꿀밤마을)을 거쳐 둘레길로 변한 것이다. 둘레길은 이산면사무소에서 출발해 망월봉·약수봉·흑석사·제비봉·명학봉·묘봉을 거쳐 이산치안센터로 이어지는 약 5㎞ 남짓의 가벼운 트레킹 코스다. 탐방로도 무척 곱다. 전형적인 육산의 보드라운 흙길에다 나지막한 산봉우리들을 오르내리다보니 경사 또한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중간에 출렁다리가 둘이나 있어 스릴까지 더할 수 있다. 항간에 입소문이 퍼지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들머리는 이산면사무소(영주시 이산면 원리 445)

중앙고속도로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이용 가흥교차로(영주시 가흥동)까지 온다. ‘영주로’로 옮겨 시내 중앙시장 앞 사거리까지 간 다음 우회전하여 농어촌공사 앞 사거리로, 이곳에서는 좌회전하여 935번 지방도를 탄다. 시내를 빠져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국제조리고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 ‘영봉로’를 따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산면소재지인 원리에 이르게 된다. 면사무소 주차장이 둘레길의 들머리이다.

▼ 둘레길은 면사무소(지도의 ‘현위치’ 지점)를 기점으로 하는 순환형 코스이다. 이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단축코스를 보탰다.

▼ 산비탈에 기대놓은 계단을 오르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초입에 둘레길 안내도를 세워놓았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서는 게 좋겠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계단의 맨 위는 종탑으로 장식했다. 종이 달려있음은 물론이다. 1950년대 말 지서에서 의용소방대를 소집할 때 치던 종이었다니 면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온 일등공신인 셈이다. 그런 소중한 내력을 그냥 내버려둘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면사무소에서 보관해오다 돗밤실둘레길이 완공되면서 ‘행복의 종’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 이 종을 울리면 맑고 은은한 종소리가 행복·건강·사랑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안내판은 종소리를 ‘한 번 울리면 장수, 두 번 울리면 건강, 세 번 울리면 부자, 네 번 울리면 출세, 다섯 번 울리면 자손번창’이라 적고 있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한 번도 아니고 다섯 번씩이나 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줄을 서는 게 싫은 나는 그냥 통과해버리고...

▼ 탐방로는 무척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경사가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나무계단을 놓았다.

▼ 명품 둘레길이 어디 그리 쉽게 만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주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탐방로는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길을 깔끔하게 닦은 것은 기본. 갈림길은 물론이고 중요한 포인트마다 이정표를 세웠는가 하면, 조그만 공터라도 나올라치면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심지어는 꽃밭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런 정성들이 모여 만들어 낸 둘레길이니 저런 경고판이 아니더라도 심어놓은 꽃을 꺾거나 뽑아가서는 아니 될 일이다.

▼ 그렇게 얼마간 걷다가 만난 삼거리. 이석암 선생(‘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의 제안에 따라 왼편으로 들어서 본다. 이정표(망월봉/ 이산면사무소)에는 방향표시가 없지만 뭔가가 있기에 앞서가는 사람들이 다녀오지 않겠느냐며...

▼ 그의 말대로 멋진 조형물을 만날 수 있었다. 달을 형상화한 의자인데, ‘달맞이 포토존’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조형물에 앉아 느긋하게 일몰을 감상해보라는 모양이다. 참! 조형물 뒤로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공원 너머의 '이산문화마을'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둘레길은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를 잇는 능선길이다. 하지만 경사가 거의 없는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착한 길이다.

▼ 길을 나선지 20분 만에 망월봉(望月峰, 232m)에 올라선다. 쉼터를 겸하고 있는 정상은 도톰하게 솟아오른 것 말고는 특별할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정표(약수봉 0.7㎞/ 면사무소 0.6㎞)와 함께 세워둔 정상표지판이 그 흠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 망월봉은 ‘은혜를 갚은 토끼’를 위한 봉우리이다. 올가미에 걸린 토끼를 구해준 효자 성진이가 토끼의 도움으로 좋은 집을 짓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달님에게 드릴 떡을 만들며 소원을 빌던 곳이라고 해서 망월봉이란 이름이 붙었다나? 엉성한 스토리텔링이지만 이만치라도 만들어내느라 얼마나 고민했겠는가.

▼ 망월봉을 지난 탐방로는 민가가 있는 바닥까지 뚝 떨어진다. 이 근처 ‘돗밤실’ 마을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했다. 공자가 노(魯)나라 사람이고, 맹자가 추(鄒)나라 사람인 데서 유래한 말로 학문과 교육이 흥성한 지방을 가리킨다. 그래선지 안동 권씨의 세거지인 마을에는 경북도 문화재자료(632호)인 ‘도율종중고택(道栗宗中 古宅)’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앱을 아무리 검색해도 돗밤실이나 도율종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능선이 평지나 마찬가지기에 시간을 내어 다녀오려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민가(컨테이너 가건물)를 지나 건너편 산자락으로 들어붙는데 귀엽게 생긴 팻말이 눈에 띈다. ‘맥문동’의 특성과 효능을 적는 등 가족나들이 삼아 찾아올 수 있도록 하려는 아이디어일 수도 있겠다.

▼ ‘돗밤실둘레길’이 항간의 입소문을 탔다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았기에 저렇게 나무뿌리까지 속살을 드러내놓고 있을까.

▼ 망월봉에서 12분이면 약수봉(藥水峰, 261m) 정상이다. 이곳도 역시 봉우리답지 않은 봉우리다. 그저 밋밋한 능선에 약간 솟아오른 정도라고나 할까? 이정표(조개재 0.5㎞/ 망월봉 0.7㎞)와 정상표지판 말고도 벤치 서너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한 것도 망월봉과 똑 같다.

▼ 약수봉은 ‘병을 낫게 하는 신비의 옹달샘’이 있다는 봉우리다. 옛날 어느 여인이 이 봉우리에서 찾아낸 약수로 아들의 피부병을 고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일 동안 약수를 마시고 몸을 씻으면 신선이 된다는 얘기에 솔깃해 샘물을 막아 가둔 탓에 마을에 물난리가 났다나? 그래서 산신령은 두 모자를 거북바위로 만들어버렸단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이 다시 물길을 텄다는 우물과 거북바위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 끊임없이 솔숲을 걷는다는 것도 ‘돗밤실둘레길’의 특징 중 하나다. 그러니 숨을 들이킬 때마다 향긋한 솔내음이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건 당연. 피로가 쌓일 틈도 없다. 솔향은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품은 향기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 완주 인증을 위한 스탬프보관함도 눈에 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니 스탬프는 들어있지 않았다. 작은 흠이라 하겠다.

▼ 길은 또 다시 긴 내리막길로 변한다. 평지에 가까운 안부로 내려선다는 얘기일 것이다.

▼ 약수봉에서 내려선지 10분 만에 ‘조개재(蛤峴)’에 닿았다. 면소재지인 원리(오른쪽)와 석포리(왼쪽)를 잇는 고갯마루로 ‘흑석고개(이정표 : 흑석사↑ 0.6㎞/ 흑석쉼터→ 0.2㎞/ 이산면사무소↓ 2㎞)’라고도 불리는데, 이 근처에 ‘검은색 바위(黑石)’가 많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고개에는 최근 출렁다리가 놓였다. 현수교 양식의 보행자 전용 다리로 길이는 65m(폭은 2.6m)라고 한다.

▼ 출렁다리의 재미는 누가 뭐래도 출렁거림이다. 스릴로 인한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또 다리 위에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짜릿함은 늘어난다. 그렇다면 이 출렁다리는 별로다. 출렁거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 출렁다리 아래로는 차도(2차선 郡道)가 지나간다. 저 길(흑석사 옛길)은 또 흑석사로 연결된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능선을 따르기로 했다. 선두를 맡고 있는 윤대장으로부터 전화 안내를 받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진행하면 흑석사로 내려가는 산길을 만나게 된다는데 삭막하기 짝이 없는 포장도로를 일부러 걸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출렁다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비록 잠시지만 ‘자개지맥(紫蓋枝脈)’을 따른다. 이 지맥은 명학봉에서 둘레길과 헤어진다. 참고로 자개지맥이란 백두대간의 고치령(소백산) 동남쪽 1.1km 지점의 ‘920m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해서 자개봉(紫蓋峰 858.7m)·천마산·국모봉·박봉산·유릉산 등을 일구고 문수면(영주시)의 승문리 서천(西川)과 내성천(乃城川) 합수점(무섬교)에서 그 맥을 다하는 48.4km 길이의 산줄기이다.

▼ 출렁다리에서 10분쯤 걸었을까 흑석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이산치안센터↑ 2.3㎞/ 흑석사← 0.3㎞/ 흑석쉼터↓ 0.7㎞)’가 나왔다. 아까 윤대장이 전화로 알려주던 지점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제비봉(268m)’을 만났다. 윤대장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봉우리다. 이곳도 이정표와 정상표지판, 벤치 등의 편의시설을 배치했다.

▼ 제비봉은 ‘사람의 이마에 집을 지은’ 제비의 이야기다. 제비집을 이마에 얹고도 좋아했다는 노인은 어쩌면 성인군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가 제비의 집터로 점찍어 준 곳이 바로 이곳이란다. 그래서 이 봉우리는 재물의 기운이 넘쳐난단다.

▼ 흑석사로 내려가는 능선은 꽤 길었다. 왼편 발아래에 흑석사를 놓아두고도 빙 돌아가는 모양새이다.

▼ 그게 조금은 미안했던 모양이다. 중간에 쉼터까지 만들어놓은 걸 보면 말이다. 거기다 그네까지 매달아 도리어 멋진 구간으로 바꾸어버렸다.

▼ 산길이 끝나는 곳은 돌탑이 지키고 있었다. 정성들여 쌓은 흔적이 역력한 저 탑은 산행의 안전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절간을 찾는 이들의 소원성취를 위한 것일까?

▼ 산에서 내려서니 일주문이 반긴다. 그런데 이게 영 낯설다. 자랑스럽게 매달려 있어야 할 편액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옆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기에 살펴봤으나. 절의 내력과 보유 문화재(국보 1점, 보물 1점, 지방문화재 1점)에 대한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

▼ 몇 걸음 더 걷자 흑석사(黑石寺)가 그 전모를 드러낸다. 흑석사는 신라 때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 사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나올 뿐이다. 이후 1945년 상호스님(1895-1986)이 초암사의 부재를 옮겨와 중건하였으며, 1950년에는 정암산 법천사(法泉寺)에 있던 아미타불좌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 흑석사는 총 세 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아래는 종무소와 요사. 두 번째는 본당과 극락전, 그리고 맨 위에 석조여래좌상을 모신 전각이 들어섰다. 볼거리가 있는 두 번째 단부터 투어를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썰렁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편액이 붙어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치나 크기로 보아 본당(本堂)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 내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부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맞다. 이 절은 현재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짓는 중이라고 했다. 법천사에서 옮겨왔다는 아미타여래좌상의 배 안에서 나온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시기 위해서란다. 그러니 부처님의 형상을 따로 만들어 모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극락전(極樂殿)은 본디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 곳이다. 그래서 이상향인 극락이 서쪽에 있으므로 보통 동향으로 배치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이 서쪽을 향하도록 되어있다.

▼ 이곳은 정암산 법천사(동명의 사찰이 많아 정확한 위치는 불명)에서 옮겨왔다는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셨다. 한국전쟁을 피해 잠시 초암사로 옮겼다가 다시 이 절로 옮겨 모시고 있단다. 저 부처님은 복덩어리라 할 수 있다. 개금불사 때 불상의 배 안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되었다니 말이다. 이 진신 사리와 사리함, 경전과 유품은 현재 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국보 제282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 아미타여래좌상(신발 벗기가 싫어 패스한 뒤 문화재청의 것을 빌려왔다)은 목조불상으로, 함께 발견된 기록들에 의해 조선 세조 4년(1458)에 법천사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단종과 세종의 여섯째 왕자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했는데, 금성대군을 아들처럼 보살폈던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와 효령대군, 왕실종친, 장인, 스님 등 275명이 시주자로 이름을 올렸단다. 불상은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와 팔, 배 주변에 나타난 옷의 주름에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중국에서 새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명나라 불상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란다.

▼ 맨 위는 석조여래좌상을 모신 전각이 올라앉았다. 전각의 좌우에는 소조산신상과 소조불상이 시멘트로 만든 감실 안에 모셔져 있다. 산신각과 칠성각이 아닐까 싶다.

▼ 전각에 모신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호, 내 사진이 별로여서 문화재청의 것을 옮겼다)’은 흑석사 부근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발굴하여 옮겨놓았다고 한다. 통일신라 후기 작품이라는데, 예술에 문외한인지라 문화재청의 글을 옮겨본다. <얼굴은 양감이 적절하고 전체적으로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신체는 안정감이 있어 보이지만 어깨가 약간 움츠려 들었고, 무릎 폭이 좁아진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이 나타난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얇은 옷은 자연스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양 발 앞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 석불의 뒤, 자연암벽에 새겨놓은 마애삼존불도 경상북도의 문화재(355호)이다.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을 돋을 기법으로 새겼는데, 본존불은 가슴 이하를 그리고 두 협시보살은 목 부분 이하를 생략해버린 특이한 모습이다. 신체 일부분만 새겨져 있지만 원형이 대체로 잘 유지되어 있으며,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단다.

▼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게 싫어 무작정 산자락을 치고 올라봤다. 그리고 100m도 되지 않는 지점에서 희미하나마 산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 잠시 후 봉우리답지 않은 봉우리에 올라섰다. 그런데, 도톰하게 솟아오른 한 지점일 뿐인데도 낯익은 표지기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게 아닌가. 세상의 봉우리란 봉우리는 모두 올라보겠다는 그네들도 이곳을 다녀간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비봉’을 잘못 찾았다. 아까 삼거리에서 흑석사로 내려가는 초입에 관청에서 만든 정상표지판이 버젓이 버티고 있었으니 말이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둘레길을 따른다.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난 돗밤실둘레길 특유의 산길이다.

▼ 그렇게 잠시 걷자 또 다른 출렁다리인 ‘송천교(松泉橋)’가 나온다. 소나무(松) 밭에 샘(泉)이라니. 이 부근에 아까 약수봉에서 거론하던 그 영험한 옹달샘이라도 있다는 얘기일까?

▼ 다리는 거짓말 좀 보태 넓이 뛰기 한 번이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짧다. 밧줄에 매달아 놓았으니 외형도 보잘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출렁거림만큼은 전국의 내로라하는 출렁다리들에 비해 조금도 뒤질 게 없었다.

▼ 다시 길을 나서는데 밋밋한 능선을 걷는 게 지루했던지 함께 걷던 이가 말을 건네 온다. 이곳 이산면(伊山面)에서 큰 인물이 많이 났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거론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맞다. 옛 문헌에 보면 ‘山伊의 이(伊)자 ‘尹’은 천하를 다스림이며, ‘人’을 덧붙여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니 ‘伊’는 ‘훌륭한 인재가 태어나는 곳’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박봉산 갈림길(이정표 : 명학봉↑/ 박봉산←/ 제비봉↓)’이다. 높이 389m의 박봉산(璞峰山)은 영주지역에서 해돋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또한 정상에서의 조망이 좋아 새해 첫날에는 해맞이 행사가 열리기도 한단다.

▼ 삼거리에서 6분. 자개지맥과 다시 헤어지는 지점인 명학봉(鳴鶴峰, 278,7m)에 올라섰다. 이곳도 이정표(묘봉 1㎞/ 제비봉 0.8㎞)와 정상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명학봉은 ‘돌을 물어 나르는 학’의 지혜에 대한 이야기다. 산속의 새들이 자신들의 소리를 내느라 다들 바쁜데, 학만은 묵묵히 돌을 물어다 탑을 쌓더란다. 그때 독수리가 나타나 새 사냥을 시작했는데도 학만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시끄러울 때일수록 묵묵히 자신의 일에 매진해야 한다나?

▼ 자개지맥과 헤어진 둘레길은 이제 묘봉으로 향한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는 착하디착한 구간이다. 이런 곳에서는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마침 주어진 시간까지 느긋하니 모처럼 ‘느림의 미학’이라도 시도해보면 어떨까?

▼ 원목으로 만든 벤치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엉덩이가 조금 불편하겠지만 얼마나 낭만스러운가.

▼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로 흑석고개 출렁다리가 나 여기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 명학봉에서 14분쯤 진행했을까 임도(이정표 : 묘봉/ 명학봉)를 만났다. 원리(오른쪽, 면소재지)와 휴천동(왼쪽)을 잇는 고갯마루다.

▼ 묘봉으로 가는 길은 원리 방향으로 50m쯤 내려가다 열린다. 가파른, 그러나 높지는 않은 산비탈에 나무계단이 놓여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임도로 내려서느라 엄청나게 고도를 낮추었던 모양이다. 능선이지만 농경지와 맞물려있으니 말이다. 그런 길은 묘봉의 아래까지 꽤 길게 이어진다.

▼ 능선이 하도 낮다보니 민가를 스치듯 지나기도 한다. 사람 사는 냄새를 맡아가며 걷는 구간이라 하겠다.

▼ 길은 묘봉 앞에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산은 굴곡진 인생과 같아 오르내림이 반복된다고 했다. 그러니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이에 상응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날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그래 쉬운 산이 어디 있으랴.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겠는가.

▼ 임도에서 13분을 걸어 맨 마지막 봉우리인 묘봉(猫峰, 209m)에 올라선다. 이곳도 이정표(면사무소 0.7㎞/ 명학봉 1㎞)와 정상표지판, 벤치 등 다른 봉우리들과 똑 같이 차려놓았다.

▼ 묘봉은 ‘거미처럼 살고 싶은 고양이’의 이야기이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놓고 무엇을 먹고 살이 쪘냐고 물었단다. 참새와 사마귀를 거쳐 거미에 이른 결론은 훔치거나, 뺏거나 싸우지 않고도 행복하게 잘 살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아등바등하면 살지 말라는 얘기기 아닐까 싶다.

▼ 이젠 내려갈 일만 남았다. 급할 것 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고도를 낮추어가는 산길을 8분쯤 걷자 탐방로는 이산파출소로 내려선다. 그런데 날머리의 게이트에도 행복의 종이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 아까 들머리에서 종을 울리지 않고 지나친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이산파출소 옆으로 내려서니 오른편 언덕에 ‘사모바위(紗帽岩)’라는 그럴 듯한 바위 하나가 놓여있었다. ‘사모’란 관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던 비단실로 짠 모자를 말한다. 출세·벼슬·큰인물 등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네 선조들은 부처가 바위 속에서 나왔다 바위 속으로 사라진다는 보편적 상상력을 가졌었다. 그런 상상력이 만들어 낸 하나의 단면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마을을 보살피는 상징물로 삼았을 게고 말이다.

▼ 날머리는 이산면사무소(원점회귀)

사모바위 앞에서 도로를 건너면 이산면사무소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둘레길은 한 바퀴 도는데 정확히 2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은 5.81km를 찍고 있다. 아무리 둘레길이라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능선을 걸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빨리 걸은 셈이다. 그만치 탐방로가 고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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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괴곡성벽길’(청풍호 자드락길 6코스)

 

산행일 : ‘22. 1. 2(일)

소재지 :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일원

산행코스 : 옥순봉출렁다리 주차장→괴곡능선→사진찍기 좋은 명소→청풍호 전망대→다불암→두무산(시무산)→다불암→지곡리 마을회관(거리 및 시간 : 9.9㎞, 실제는 8.11km를 3시간20분에)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제천의 ‘청풍호 자드락길’은 상표권 등록까지 된 명품 둘레길이다. 자드락길이란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에 난 좁은 길’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이름처럼 둘레길도 청풍호 주변의 산기슭 58Km를 7개 코스로 나누어 길을 냈다. 자드락길의 가장 큰 특징은 빼어난 조망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청풍호의 아름다운 풍경과 금수산 등의 수려한 산세를 걷는 내내 눈에 담을 수 있다. 오늘은 그 가운데 7코스인 ‘괴곡성벽길’을 걷는다. 이 코스는 ‘두무산’의 꼭대기를 올라야하니 산행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등산’ 하면 따라붙기 마련인 ‘인내’란 단어는 필요 없다. 자드락이란 이름대로 야트막한 산기슭을 따라 설렁설렁 걷기만 하면 된다. 그저 눈의 호사만 실컷 누리면 된다.

 

▼ 들머리는 ‘옥순봉 출렁다리’의 제2주차장(제천시 수산면 괴곡리 78-2)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단양 I.C에서 내려와 36번 국도를 이용 충주방면으로 달리다가 원대삼거리(제천시 수산면 원대리)에서 오른편 옥순봉로를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옥순봉출렁다리가 나온다. 출렁다리 입구의 주차장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청풍호 자드락길’의 7코스인 ‘괴곡 성벽길’은 옥순대교에서 시작해 두무산 정상을 거친 다음 지곡리에 이르는 9.9km짜리 둘레길이다. 이 코스는 드넓게 펼쳐지는 청풍호(淸風湖)와 옥순봉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걷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괴곡성벽 길’이란 이름을 얻었다. 청풍호의 호반을 따라 이어지는 산줄기가 삼국시대 때 자연의 성곽 역할 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 주차장 옆의 나무계단을 오르면서 자드락길 나들이가 시작된다. 길을 나서기 전 ‘옥순봉 출렁다리’를 먼저 둘러보는 게 우선이지만, 새벽에 내린 눈 때문에 출렁다리의 출입을 막아버렸으니 어쩌겠는가. 그나저나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초입의 안내판 정도는 살펴보고 길을 나서자. 붉은색의 자드락길 외에도 측백나무 숲길(푸른색)을 내놓았다니 시간나면 들러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 계단을 올라서니 비닐움막이 쳐져있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시설인 듯 ‘마스크가 코로나-19의 백신’, ‘마스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리본을 매달아놓았다. 맞다. 요즘은 호흡이 거칠 수밖에 없는 산행 중에도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흠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 오른편으로 청풍호가 긴 강처럼 펼쳐지는 산자락을 오른다. 그 길에 겨울이 무르익었음을 알리는 눈이 살어름처럼 깔렸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길임에도 조심조심 걸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 아무리 고와도 산길은 산길인가 보다. 이 길의 자랑거리인 청풍호의 풍경보다도 먼저 ‘국가지점표지판’이 얼굴을 내미는 걸 보면 말이다. 다만 ‘둘레길’의 특성을 살린 듯 식물도감을 보탰다. 지치(紫根)가 이곳 청풍호 주변에서 자생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 첫 번째 포인트인 ‘쉼터(이정표 : 사진찍기 좋은명소 1.4㎞/ 옥순대교 1.6㎞)’에 이른다. 하지만 판자를 깐 공간만 만들어져 있을 뿐 의자 등 앉아서 쉴만한 편의시설을 눈에 띄지 않는다.

▼ 대신 청풍호와 옥순대교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다만 잡목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버린 게 흠이랄까? 괴곡성벽일은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청풍호의 풍광을 시선에 달고 다닌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덕분에 청풍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구경하게 된다. 그것도 평면이 아닌 3D로 입체화 된 그림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 ‘에이! 둘레길이 아니라 완전히 산길이네’ 누군가의 입에서 한숨 섞인 넋두리가 흘러나온다. 동네 마실길을 걷듯이 걸으면 된다는 이대장의 안내와는 달리 계단을 설치했을 정도로 능선이 가파른 것이다. 거기다 잡목이 숲을 이룬 탓에 호수 쪽의 시야까지 막혔다. 이래저래 자드락길은 시작부터 타박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첫 번째 삼거리(이정표 : 다불암← 1.4㎞/ 사진찍기 좋은명소→ 0.2㎞/ 옥순대교↓ 2.4㎞)를 만났다. 우리가 가야할 ‘다불암’은 왼편, 그렇다고 오른편을 생략할 수는 없다. 청풍호 조망의 일번지로 소문난 ‘청풍호 전망대’가 그쪽에 있는 데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 이정표 하단에 매달린 ‘내리사랑길’ 안내판이 심상치 않아 카메라에 담아봤다. ‘사랑의 어부바’. 서로 등에 없고 걸어보라는 메시지다. 번갈아 업어주다 보면 더욱 가까워진 서로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가 곁에 없는 이내몸은 어쩔까나. 무릎이 고장 난 탓에 지난 목요일부터 산행을 거르고 있으니 말이다.

▼ 삼거리에서도 청풍호가 조망된다. 이를 본 일행 중 한명이 ‘와! 충주호다’를 외친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도 말이다. 이곳은 제천. ‘청풍호’라 하지 않고 ‘충주호’라 했다가는 곧바로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몰지의 대부분이 제천시 땅이고, 그중 핵심지가 청풍면이니 댐은 충주댐일망정 호수는 청풍호가 마땅하다는 게 제천 사람들 주장이다. 하지만 내 설명을 들은 그는 고개를 내두른다. ‘댐’이나 ‘호’이나 도진개진이 아니냐면서.

▼ 백종원씨를 안내원으로 삼았나? 유머러스한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이 길로 올라가셔야 수월하데유~ 믿어봐유^^’. 이 얼마나 애교스러운 어감인가. 이밖에도 ‘내려가는 길이여유~ 미끄럼 주의해유^^’, ‘전망대 가는 길이여유~’ 등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 ‘괴곡성벽 길’은 진짜 성벽을 따라 나있지는 않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패권을 다투던 삼국시대. 세 나라는 청풍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고 한다. 당시 이곳 괴곡능선은 그 자체가 천혜의 요새이자, 자연이 만들어준 성벽이었단다. 언제부턴가 그게 능선의 이름으로 굳어졌고, 오늘에 와서는 자드락길을 대표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 찾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돌탑하나 없을까? 그것도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절묘하게 쌓아올렸다. 흡사 돌멩이들이 아크로바트라도 하는 듯, 나뭇등걸의 위 좁은 공간에서 몸을 세우고 포개가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 몇 걸음 더 걷자 정자와 함께 ‘전망 데크’가 세워져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사진 찍기 좋은 명소’란다. 청풍호와 금수산, 옥순대교를 한 장의 사진에다 담을 수 있다는 곳인데, 벤치를 여럿 놓아 쉼터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했다. 조형물로 삼은 솟대는 이곳 괴곡능선의 역사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솟대라는 게 본디 ‘삼국지 마한전(馬韓傳)’에 나오는 소도(蘇塗)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 이름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병풍처럼 펼쳐지는 금수산 자락과 푸른 청풍호가 멋진 배경이 되어주는데, 망덕봉, 금수산, 가은산, 구담봉, 옥순봉 등 하나하나 꼽아가며 난간의 조망도와 대조해보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특히 옥순대교 부근은 그중에서도 백미다. 비취빛 청풍호를 수반(水盤) 삼아 명품 산수경석으로 승화되고 있다.

▼ 옥순대교를 바라보며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떠올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충주댐 수몰 전 저곳에 있었다는 ‘괴곡나루’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천시에서 이런 점을 간과했을 리가 없다. 저 어림에 있었다는 한벽루(보물 528호)와 찻배, 나룻배의 사진이 들어간 안내판을 세워 옛날을 회상할 수 있도록 했다. 통행량이 많았던 탓에 차도선과 나룻배가 오가며 차량과 승객을 실어 날랐단다.

▼ 50m쯤 더 나가면 ‘청풍호 전망대’가 우뚝 솟아오른다. 막다른 길이 청풍호에 맞닿아갈 무렵, 언덕배기 끝자락에 4~5층 높이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들어앉혔다. 맨 꼭대기에 있는 조망대는 나선형의 무장애 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도록 했다.

▼ 전망대의 주제는 ‘사랑을 외치다’이다. 함께 길을 걷다보면 마음의 빗장이 풀리면서 속마음을 고백하고 싶어질 것이란다. 이때 상대방의 이름을 덧붙여 크게 외쳐보라는 것이다. ‘000씨 사랑합니다’, ‘000님 존경합니다’.

▼ 전망대에 서면 시야는 주변의 숲을 훌쩍 벗어나버린다. 그리고는 청풍호의 전경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이곳에도 조망도가 설치되어 있으니 꼼꼼히 살펴가면서 하나하나 가슴에 담아가자. 가장 왼편은 호수를 가운데 두고 비봉산과 작성산이 좌우로 펼쳐진다.

▼ 오른편은 청풍호와 옥순대교를 중심에 담은 멋진 풍경화로 그려진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윗덩어리 말목산과 가은산, 구담봉, 옥순봉으로 덧칠된 그림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조물주이기에 저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 그 사이에는 금수산이 들어앉았다. 망덕봉과 곰바위, 기와집바위, 새바위, 둥지봉 등 서슬 시퍼런 바위봉우리들을 품었는데, 아쉽게도 정상은 구름이 삼켜버렸다.

▼ 절경은 호수 쪽만 있는 건 아니다. 수학여행 나온 학생들처럼 호들갑을 떨며 전망대를 빙글빙글 돌다가 반대편에 서면 이번에는 두무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줄기가 아닌 ‘길줄기’가 시선을 붙든다. 산줄기 사이사이로 난 구절양장의 길이 흡사 그림이라도 되는 양 예쁘게 다가온다.

▼ 오랜만에 만난 멋진 전망대라고 해서 무작정 노닐 수는 없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났다. 이곳에서 50m쯤 비켜난 지점에 ‘백봉 산마루주막’이 있다. 하지만 난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곧장 능선을 타버리는 우를 범해버렸다. 부침개나 두부두루치기 등을 안주삼아 마시는 막걸리가 일품인 주막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임도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또렷했다. 자락길에서 이정표까지 세워놓아 어렵지 않게 두무산까지 찾아갈 수 있었다.

▼ 이곳도 역시 탐방객들의 부주의로 인해 피해를 보는 농민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추억은 가슴 속에! 쓰레기는 배낭 속에!’라는 구호를 입으로만 외칠게 아니라 우리 같은 트레커들이 앞장서서 실천해보면 어떨까?

▼ 요즘 뜨고 있는 작물인 호두나무 농장도 만날 수 있었다. 호두가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해 두뇌 건강과 피부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최근 호두나무를 심는 농가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란다. 초기 투자비용이 적은데다 호두나무의 경제수명이 70~80년이나 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작목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 수요까지 대폭 늘어나고 있다지 않는가.

▼ 트레킹을 시작한 90분. 임도사거리(이정표 : 두무산전망대↑/ 다불리·지곡리→/ 괴곡리←/ 청풍호전망대↓)에 내려선다. 산꼭대기에 있는 두무산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이곳에서 곧장 수산면소재지(다불리·지곡리)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 잠시 후 ‘다불암(多佛庵)’의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 보니 여염집보다도 더 허술한 대웅전이 나온다. 참배를 드리려는 일행의 뒤를 따라 들어가 본 법당도 탱화를 배경삼아 자그만 부처님을 모시고 있을 따름이다.

▼ 초라하기 짝이 없는 절간이지만 ‘목탑’만은 눈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요즘이야 찾아보기 힘들지만 목제가 흔한 우리나라에서는 경주의 황룡사 구층탑이나 법주사의 팔상전처럼 불탑의 주축이 목탑이 아니었겠는가.

▼ 다불암은 절 자체보다 절간을 감싸고 있는 산세가 더 일품이다. 기기묘묘한 모양새의 바위들로 둘러싸인 풍경만큼은 전국의 어느 사찰에도 뒤지지 않는다.

▼ 자드락길로 되돌아와 몇 걸음 더 오르니 ‘측백나무숲길’이 나뉜다. 하지만 그보다 하단의 글귀가 더 눈길을 끈다. ‘경청이 최고의 칭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이 여성분은 최고의 파트너가 되겠다. 은퇴한 이들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호시절의 무용담을 싫다는 내색도 없이 모두 들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 고개를 들자 거대한 암릉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두무산을 명품산의 반열에 올려놓은 주인공이다. 참! 두무산의 옛 이름은 다불산(多佛山)이라고 했다. 저 바위들 하나하나가 ‘부처(佛)’처럼 보였다는 얘기일 것이다.

▼ 그 가운데서도 백미는 단연 ‘독수리바위’다. 하늘을 향해 머리를 치켜든 독수리를 닮았는데 목을 한껏 젖히고 올려다보아야 머리 부분까지 다 보일 정도로 우람하다. 정성껏 빌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속설도 전해지니 한번쯤 빌어볼 일이다.

▼ 오른편으로 돌자 ‘촛대바위’가 우뚝 솟아오른다. 하얀 촛농이 흘러내린 듯한 독특한 모양새의 명품바위다. 다불암의 스님들은 저 바위를 ‘칠성바위’로 고쳐 부른단다. 그들의 눈에는 저 바위가 북두칠성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 요건 ‘형제봉’이 아닐까 싶다. 커다란 두개의 바위가 좁은 틈새를 두고 나란히 서있는데, 이름이 조금 어색하다. 크기로 보아 ‘봉(峰)’보다는 ‘암(岩)’자가 더 어울릴 것 같다.

▼ 바위지대를 지나면 이번에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두무산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인데 얼마나 가파른지 통나무계단으로도 모자라 몸까지 비틀면서 고도를 높여간다. 많은 탐방객들이 두무산전망대의 탐방을 생략하는 이유일 것이다.

▼ 올라가는 도중 ‘호랑이굴’도 만날 수 있었다. 50년 전 어느 한의사가 다불리의 찍개바위 앞에서 호랑이를 만났다고 전해지는데, 그렇다면 저 굴은 그 호랑이가 살던 곳일지도 모르겠다.

▼ 호랑이는 이미 옛이야기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존재. 호랑이 떠난 골에 늑대가 왕이라고 했는데, 이곳은 늑대도 아니고 염소들 차지가 되었나보다. 바닥이 온통 염소 똥으로 덮여있었다.

▼ 조금 더 오르면 일출의 명소라는 ‘두무산 전망대’. 자드락길에서는 ‘절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생겨났을 정도로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아름다운 경관에 빠져 한정 없이 늘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지 않고서는 주어진 시간 안에 트레킹을 마칠 수 없다면서 말이다. 이정표에 적힌 ‘사진찍기 좋은 명소’가 그 증거다. 하지만 눈에 들오는 풍경은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긴 청풍호 전망대에서의 기분 좋은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데 다른 풍경이 어찌 들어올 수 있겠는가.

▼ 안내판은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화백에 얽힌 일화를 적고 있었다. 풍수로 당대를 호령하던 연서 정상용이 장우성의 할아버지 묘지를 잡아주면서 10년 뒤에 훌륭한 화가가 태어난다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붉은색 실선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놓았다. 장우성의 할아버지 묘가 있다는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의 화필봉이 저곳이라는 얘기일까?

▼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헬기장이 나온다. 이정표는 이곳을 일몰(日沒)의 명소로 적고 있었다. 남서쪽에 있는 월악산으로 넘어가는 해가 일품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선지 이곳에는 영봉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 헬기장에서의 조망도 빼어나다. 수산면소재지 뒤로 월악산의 산줄기가 기다랗게 펼쳐진다. 뾰쪽하게 솟아오른 게 주봉인 영봉(靈峰). 달이 뜨면 저 봉우리에 걸린다고 해서 ‘월악’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광경을 이곳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얘기일까?

▼ 산에서 내려오는데 앞서가던 이대장이 신호를 보내온다. 이는 뭔가 볼거리가 있다는 신호.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바위에 부처가 새겨져 있었다. 이 미륵불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형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또한 아기를 갖지 못한 어느 불자가 지극정성으로 기도한 끝에 소원을 이루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단다. 하지만 안내판은 문화적 의의에 대한 내용은 적지 않고 있었다.

▼ 조금 더 내려오니 와불(臥佛)이 조성되어 있었다. 옆으로 누워서 한 쪽 팔로 머리 옆을 괴는 자세인데, 부처님이 열반하는 모습을 본뜬 것이란다. 이런 형태의 불상은 동남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풍경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 앗! 난장에 웬 편액(扁額)? 그것도 본전 불상을 모시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란다. 다불암에서 대웅전 건립을 발원했다더니 저 와불을 주불로 삼으려는지도 모르겠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0분, 임도로 내려서니 대승불교 조계종(大乘佛敎 曹溪宗) 소속이라는 다불암의 종무소가 길손을 맞는다. 자락길은 저 종무소 왼편으로 올라서서 능선을 탄다. 들머리에 이정표(지곡리 나루터 3.2㎞/ 사진찍기 좋은명소 1.4㎞)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절간 앞에는 두무산의 등산안내도를 세워놓았다. 그 옆에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다불리(多佛里)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보인다.

▼ 이후부터는 북쪽 방향의 능선을 탄다. 이 구간은 경사가 거의 없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고도를 낮추어간다. 괴곡성벽길은 이렇듯 자드락에서 시작해 자드락으로 끝난다. 하지만 그 사이는 제법 날카로운 묏등도 있다. 다만 숨이 가빠지는 된비알은 두무산으로 오를 때 잠깐이며, 나머지 구간은 순한 경사로 이어진다.

▼ 조망 좋은 곳은 쉼터로 만들었다. 벤치에 앉으면 청풍호의 리아스식 호안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내려오는 도중 이런 풍광은 한두 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심심찮게 시야가 트이면서 청풍호의 풍광이 거침없이 눈으로 파고든다.

▼ 얼마쯤 내려왔을까 잘생긴 노송 두 그루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지곡리 상부(이정표 : 흙길↑ 1.2㎞/ 포장길→ 1.4㎞/ 사진찍기 좋은명소↓ 3.2㎞)’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포장길로 가도 지곡리에 이르게 되지만 우린 흙길을 따르기로 했다. 모처럼 찾은 자락길인데 일부러 포장길을 걸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 능선은 곳곳에서 청풍호가 조망된다. 리아스식 호안의 청풍호는 흡사 가오리가 넙죽 엎드린 모양새이다. 그런데 그게 만만찮게 아름답다. 금수산의 준수한 산봉들이 겹치면서 멋진 호안선을 그려내는 덕분이다.

▼ 유연하게 흐르던 능선이 뚝 끊기는가 싶더니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안내판도 ‘내려가는 길이여유~ 미끄럼 주의해유^^’라며 너스레를 떨고 있다. 6자락의 날머리가 다와 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 날머리는 ‘지곡리 마을회관’(제천시 수산면 지곡리)

다불암을 출발한지 1시간 10분. 청풍호반에 들어앉은 지곡리의 마을회관에 이르면서 괴곡성벽길의 트레킹은 막을 내린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8.11km를 찍고 있으니 자드락길인 점을 감안하면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고 보면 되겠다.

▼ 마을 앞에는 지곡리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청풍호 자드락길’을 위주로 한 제천관광지도도 보인다. 총 58km의 이 둘레길은 작은동산길 19.7km(청풍 만남의광장-능강교), 정방사길 1.6km(능강교-정방사), 얼음골 생태길 5.4km(능강교-얼음골), 녹색마을길 7.3km(능강 야생화단지-상천 민속마을), 옥순봉길 5.2km(상천민속마을-옥순대교), 괴곡 성벽길 9.9km(옥순대교-지곡리), 약초길 8.9km(지곡리-말목장) 등 7개 구간으로 나뉜다. 오늘은 이 가운데 괴곡성벽길을 걸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 마을 앞 호숫가에는 꼬맹이 배 몇 척이 정박되어 있었다.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지곡리의 대부분이 청풍호로 인해 수몰되었지만, 고향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호수에서 소일거리, 아니 주업을 찾고 있나보다.

▼ 자드락길 트레킹을 마친 뒤 ‘옥순봉 출렁다리’를 다시 찾았다. 우리가 트레킹을 하는 동안 눈에 녹아 출렁다리를 개방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 ‘옥순봉 출렁다리’는 출렁다리를 중심으로 종합안내소와 카약체험장, 데크산책로, 옥순봉생태탐방로로 구성되어 있다.

▼ 출렁다리는 저 지난 달 22일에 개통됐다. 현재는 무료로 개방하고 있지만 내년 3월부터는 3천원의 입장료를 받을 예정이란다. 하지만 2천원은 지역화폐로 돌려준다니 실제 요금은 천원인 셈이다. 참! 매표소 옆에는 지역 특산물을 파는 편의점이 들어서 있었다. 되돌려주겠다는 지역화폐의 사용처로 제격이라 하겠다.

▼ 출렁다리로 가기 전 먼저 전망대부터 둘러봤다. 청풍호(淸風湖)의 수려한 풍광을 눈에 담기 위해서이다.

▼ 전망대 앞 호수에는 카누·카약 체험장이 들어서 있었다. 옥순봉과 출렁다리를 또 다른 각도에서 제대로 보고 싶다면 일단은 배를 빌리고 보자. 그런 다음 노를 저어 청풍호로 나가면 된다.

▼ 메인광장 출입구에서 코로나19 발열체크와 소독을 마친 다음 본격적인 탐방에 나선다. 출입구에서 출렁다리까지는 산뜻한 데크산책로로 연결된다.

▼ 산책로를 따라 한 구비 돌자 청풍호를 배경으로 떠 있는 출렁다리 전망대가 나온다. 청풍호의 수면에 닿을 듯 아래로 축 쳐진 출렁다리의 전모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출렁다리를 배경으로 넣을 수 있는 멋진 포토죤이기도 하다.

▼ 전망대에 서면 출렁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괴곡리(수산면) 마을과 옥순봉 바로 아래 산자락을 연결하는 길이 222m의 걷기 전용의 다리로, 통과하는 동안 이름에 걸맞게 좌우로 심하게 출렁거린다.

▼ 산책로의 왼편 전망 좋은 언덕에는 ‘안단테 펜션’이 걸터앉았다. 청풍호가 삼면을 둘러싼 반도지형이라서 아무데서나 아름다운 호수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나그네들에겐 이집에서 파는 어묵과 부침개가 더 매력적이다. 그걸 안주삼아 더덕출렁주나 옥수수출렁주로 목까지 축일 수 있다니 이 아니 좋을 손가.

▼ 출렁다리의 와이어를 매어놓은 축대는 광고판으로 장식했다. ‘출렁이는 제천, 일렁이는 관광’이란 이름으로 인근의 관광 명소들을 사진으로 소개하고 있다.

▼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는 광고도 빼먹지 않는다. ‘실패 없는 먹방 여행’이란 제목으로 제천의 요리들을 소개하고 있다. 큐알코드를 찍을 경우 맛집을 바로 찾아갈 수 있는 아이디어도 더했다.

▼ 출렁다리의 초입. 왼편에서 옥순대교가 눈길을 잡아맨다. 충주댐이 건립되기 전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던 조용한 나루터(괴곡나루)가 있던 자리에 놓인 다리다. 나루터가 없어지면서 생긴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놓았는데, 그게 주변의 기암절벽과 어우러지면서 절경을 이뤄 지금은 제천 관광의 명소로 자리매김 됐다.

▼ 출렁다리의 매력은 역시 출렁거림이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기존의 출렁다리들에 비해 폭(1.5m)이 조금 좁았지만, 대신 흔들림은 더 커진 것 같다. 그래선지 중간지점으로 가면 걷기조차 힘들어진다.

▼ 다리 중간에는 강화유리를 깔아 짜릿함을 더했다. 공포감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난간을 붙잡고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질러댄다거나 엉금엉금 되돌아 나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출렁다리를 걷는 게 이골들이 났다는 증거가 아닐까?

▼ 물이 약간 빠져나간 호반(湖畔)은 하얀 테를 둘렀다. 그게 수직의 바위절벽이선지 비취빛 호수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산수화로 그려진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다만 여러 겹으로 우뚝 솟은 바위봉우리가 비 온 뒤 죽순 같다는 ‘옥순봉’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점은 흠이라 하겠다.

▼ 반대편도 역시 청풍호이다. 1985년 충주댐으로 내륙의 바다가 된 청풍호는 호수를 중심으로 금수산·옥순봉·구담봉 등 아름다운 바위봉우리들로 꾸며졌다. 그 명산대호(名山大湖)의 풍광은 한국의 스위스로도 불린다.

▼ 다리를 건너면 옥순봉 기슭으로 408m 길이의 생태탐방로가 나있다. ‘단양팔경’에 포함될 정도로 수려한 용모를 뽐내는 옥순봉(玉筍峰)으로 이어질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발걸음을 돌리기로 한다. 출출해진 뱃속을 달래는 게 더 이상은 어려워졌으니 이제 그만 식당가를 찾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한탄강 물윗길

 

여행일 : ‘21. 12. 5(일)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과 갈말읍 일원

여행코스 : 주차장→은하수교 남단→한여울길→태봉교→물 윗길→은하수교 북단→전망대→주차장(소요시간 : 1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전국에는 수많은 걷기 길이 있다. 한탄강 또한 강의 특징을 살려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이 일대는 수십만 년 전인 신생대 4기에 용암이 분출하면서 지대가 생성됐는데, 강물이 흐르면서 땅을 깎아 30∼50m 높이의 깊은 협곡이 만들어졌다. 덕분에 학술적 또는 미적 가치가 높은 다양한 지형과 지물들을 품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남의 나라 얘기였을 따름. 카약을 타고 가거나 추운 겨울에 강물이 꽁꽁 얼면 그 위를 걸어가는 것 외에는 구경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철원군에서 2017년부터 매년 10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한탄강 위에 부교를 띄워 관람객들이 강물 위를 걸으며 한탄강과 협곡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름 하여 ‘한탄강 물윗길’이다.

 

▼ 들머리는 ‘송대소 주차장’(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구리·포천고속도로 신북 IC에서 내려와 국도 43호선을 타고 철원·김화방면으로 올라가다 문혜교차로(철원군 갈말읍 문혜리)에서 좌회전하여 463번 지방도로 바꿔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장흥(4)리에 이르게 된다. 마을 앞 고석정주유소(GS칼텍스)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엄청나게 넓은 송대소 주차장이 나타난다.

▼ 주차장에서 태봉대교까지는 한탄강의 왼편 언덕 위로 난 ‘한여울길’을, 태봉대교에서부터는 물위에 놓인 부교(浮橋)를 따라 한탄강을 내려오는 여정이다. 코로나 방역을 위해선지 역방향의 진입을 막고 있어 우연찮게 원점회귀가 될 수 있었다.

▼ 주차장을 빠져나와 은하수교 쪽으로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참! 물윗길만 걸을 요량이라면 차량을 이용해 태봉대교 매표소까지 곧바로 가면 된다. 그쪽에도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송대소의 전체적인 모습을 눈에 담는 건 포기해야 한다.

▼ 주차장에서 태봉대교까지는 ‘한여울길’을 따른다. ‘한여울길’은 큰 강인 한탄강을 따라가는 명품 산책로이다. 이 길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 유일의 화산강이라는 한탄강의 기암절벽을 따라 걸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도로가 협곡의 상부지점으로 나있어 다소 먼발치에서 한탄강의 비경을 내려다봐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구경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이야기가 있는 문화 생태탐방로’로 선정한 이유일 것이다.

▼ 길을 걷다보면 새로 지은 건물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주상절리길이 열리면서 지역경제에 크게 도움이 됐다는 기사가 사실이었나 보다. 당시 기사는 지난해 행사(‘20.11-`21.4)에 9만 여명이 다녀가면서 수십억 원의 지역경제 유발 효과가 생겼다고 했었다.

▼ 자전거 거치대에는 ‘드라마틱 철원’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하늘길이나 물윗길을 걸으며 한탄강지질공원의 속살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구경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 강을 따라 걷다보니 하얀색 다리인 은하수교가 눈에 들어온다. ‘별들로 이뤄진 길’이란 뜻의 은하수교는 두루미를 형상화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뿐인 저 주탑(主塔)이 두루미의 머리?

▼ ‘은하수교’는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 상사리를 잇는 길이 180m에 폭이 3m인 보행자 전용 현수교(懸垂橋)다. 교각을 세우고 다리 상판을 케이블로 연결했는데, 여느 다리들과는 달리 비대칭(非對稱)으로 만들어졌다.

▼ 물윗길로 진입하기 위해 은하수교를 건넌다. 다리는 주상절리를 이룬 양안(兩岸)의 수직 절벽을 이어준다. 때문에 다리 한가운데에 서면 강 이쪽저쪽의 주상절리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 다리는 바닥을 격자형 강철소재로 만들어 백여 길 아래 강물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것이 특징. 중간 부분 100m는 아예 폭이 1m인 투명유리를 깔아 강물 위에 떠있는 듯한 짜릿함을 느끼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은 주상절리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다. 하지만 경관보다도 오금이 먼저 저리니 문제다. 35m 높이에서 유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강물이 어찌 아찔하지 않겠는가. 오가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가운데를 피해 양옆으로 다니는 이유일 것이다.

▼ 은하수교는 조망의 명소다. 먼저 왼편(북쪽)부터 살펴보자. 철원9경 가운데 하나라는 송대소의 주상절리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널따란 소(沼)에는 부표를 연결시켜놓은 길이 기다랗게 나있다. 잠시 후에 걷게 될 ‘물윗길’이다. 한탄강의 절경을 ‘한시적 물고기 시점’에서 본다는 안구정화 트레킹 코스이기도 하다.

▼ 반대방향(남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고석정으로 이어지는 물줄기가 내려다보인다. 그런데 이 방향의 물윗길은 강물의 위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아래 사진처럼 강변을 따라 내려가기도 한다. 맞다. 태봉대교에서 출발해 순담에 도착하는 물윗길 트레킹 코스는 물윗길(2.4㎞)과 강변길(5.6㎞)이 적절하게 섞여있단다.

▼ 은하수교에서 잠시 머물다가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윗길이 일방통행이라서 ‘태봉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니 어쩌겠는가.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덕분에 우린 아까 얘기했던 ‘한여울길’을 잠시나마 걸어볼 수 있었다. 원래 자전거길로 만들어졌으나 걷기 붐이 일면서 걷기 길로 이용되고 있단다.

▼ 태봉교로 가는 도중 두세 곳에서 ‘전망대’를 만났다. 하나같이 벼랑에 걸터앉은 것으로도 모자라 강을 향해 툭 튀어나가도록 설계됐다. 한탄강의 비경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게 해주려는 배려가 아닐까 싶다.

▼ ‘송대소(松臺沼)’ 안내판은 ‘알록달록 주상절리 팔레트’를 말머리 삼아 송대소의 특징을 설명한다. 현무암 주상절리가 지층에 따라 붉은색, 검은색, 회색 등 다양한 색깔을 띠는데, 이게 마치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처럼 화려한 색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난간에 서면 안내판의 문구를 실감하게 된다. 30여m 높이의 기암절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오랜 세월 물과 바람에 깎인 현무암이 절단면을 따라 덩어리째 수직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생긴 현상이란다.

▼ 주상절리길(한여울길)의 안내판도 눈에 띈다. 승일교에서 출발해 고석정·송대소·태봉대교·직탕폭포를 거쳐 양지리통제소에 이르는 길이 11km의 트레일(trail)이란다. 철원이 자랑하는 둘레길인 ‘한여울길’의 첫 번째 코스로 한탄강지질공원을 끼고 있다고 해서 지오트레일(Geotrail)이란 멋진 이름을 붙였다.

▼ 두 번째 전망대에서는 ‘태봉대교’가 잘 조망된다. 한탄강 물줄기와 조화를 이루며 흡사 한 폭의 동양화처럼,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 길은 따로 살펴볼 필요가 없었다. 홍보용으로 내건 깃발이 물윗길이 시작되는 태봉대교 매표소까지 데려다 준다.

▼ 그래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현수막까지 걸어놓았다. 깃발을 따라가면 태봉대교 매표소가 나온다니, 이 정도면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겠다.

▼ 이정표도 여러 가지다. 말뚝 모양은 기본, 요런 벽걸이형도 심심찮게 매달려 있다.

▼ 세 번째 전망대도 역시 강을 향해 툭 튀어나갔다. 다만 아까 것들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을 따름이다.

▼ 이번에는 송대소의 양쪽 절벽이 한꺼번에 다가온다. 수직의 현무암 협곡을 휘돌아가는 거대한 물줄기는 비밀스럽기도 하고 장엄하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탄강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주상절리 가운데서도 첫 손가락에 꼽는다.

▼ 이곳에도 송대소에 대한 안내판을 세웠다. 송대소의 경관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하긴 ‘철원9경’ 가운데 하나라는데 이를 말이겠는가.

▼ 철원 평야의 너른 들녘을 기웃거리며 ‘한여울길’을 따르다보면 펜션이나 카페를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여름철 한탄강 래프팅 손님들이 주로 찾는다고 한다.

▼ 펜션촌을 지나자 이번에는 아치형의 붉은 다리가 얼굴을 내민다. ‘태봉대교’로 후삼국시대 궁예가 세웠던 나라 태봉(泰封)에서 이름을 따왔다. 태봉국의 수도가 이곳 철원이라는 점에 착안해서다. 매년 10월 초 ‘태봉제’라는 축제까지 열린다니 고도(古都)에 대한 애착이 강한 지자체임이 분명하다.

▼ 240m 길이에 폭이 17.8m인 이 다리는 상사리(갈말읍)와 장흥리(동송읍)를 잇는 철제다리다. 지역주민들의 교통 불편을 해소하고자 2002년에 건설했다는데, 높이가 50m나 되는 협곡의 양안을 서로 연결시켰다고 보면 되겠다.

▼ 다리 중간에는 번지점프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코로나의 여파로 운영을 중단하고 있지만 52m 높이의 저 상설 ‘점프장’에서 뛰어내리려면 3만5천원을 내야 한단다. 점프는 허리번지. 발목번지, 커플번지(웨딩점프)로 나뉘는데, 주어지는 시간은 5분이며 제한 시간 안에 못 뛰어내리더라도 돈은 돌려주지 않는단다.

▼ 태봉대교에서의 조망도 뛰어나다. 저 물길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직탕폭포’가 나온다. 일반적인 폭포와는 달리 강 횡단면 전체를 따라 형성됐다. 높이 약 3m, 길이 약 80m로 규모면에서는 크지 않다. 다만 침식에 상대적으로 약한 상부 현무암이 계속 깎여 폭포의 시작점이 상류 쪽으로 밀려나는 두부침식을 보인다는 점에서 한국의 나이아가라폭포로 불리기도 한다.

▼ 물윗길이 시작되는 태봉대교 매표소는 다리 건너에 있다. 오전에 걸었던 하늘길과 이곳 물윗길은 별개로 운영된다. 1만원의 입장료를 별도로 내야한다는 얘기이다. 이곳도 역시 5천원은 지역화폐로 되돌려 준다.

▼ 이곳도 마스크와 발열 체크, 안심 콜은 기본. 손 소독은 선택이다. 아니 드르니 매표소와는 다른 풍경도 눈에 띈다. 손목에 띠를 메어주는 것이다. 트레킹을 마치고 이곳 태봉교매표소로 되돌아올 때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증표란다.

▼ 게이트를 통과하자 ‘물윗길’ 걷기가 시작된다. ‘물윗길’은 말 그대로 물위로 난 길이다. 부교(浮橋)를 띄워 만든 길이 물의 위로 나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물윗길은 태봉대교에서 시작해 송대교(은하수교)와 마당바위, 승일교, 고석정을 차례로 거쳐 순담에 이르는 총 길이 8km의 둘레길이다. 코스가 하도 길다보니 구간을 나누어 순차적으로 개방하고 있다는데, 은하수교까지 450m 구간은 이미 길이 열렸다. 산악회의 일정에 ‘물윗길’이 포함된 이유이다.

▼ 비취빛 강물과 그 위에 놓은 ‘물윗길’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그렇다면 양안의 바위절벽을 잇는 태봉대교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일지도 모르겠다.

▼ 탐방로는 반원(半圓)을 그리며 강을 헤집는다. ‘물윗길’의 이름값을 톡톡히 수행한다고나 할까? 그런데 양옆에서 따라오고 있는 저 팔랑개비는 무슨 의미일까. 바람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는 부교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소도구일지도 모르겠다. 돌아가는 속도로 다리의 위험도를 판단하라는...

▼ 한숨이라도 돌리려는 듯 올라선 뭍에는 젊은 연인들이 쭈그리고 앉아 뭔가에 삼매경이다.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눈치다. 뭔가 바라는바가 지극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과거의 나는 ‘천만 번 윤회를 거듭해도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라는 자작시로 집사람을 감동시켰었는데...

▼ 강변에는 작은데다 볼품까지 없는 돌탑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오가는 길손들이 바라는 바를 담아 하나씩 쌓아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못생긴 외모라고 해서 품은 염원까지 비하시키진 말자.

▼ 개중에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절묘하게 쌓아올린 것도 보인다. 얼마나 간절한 염원이었으면 저리도 오묘하게 쌓아올렸을까.

▼ 물길을 걷다보면 짜릿한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온다. 물의 위를 걷는다는 게 어디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중국 무술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 하지만 소림사 고승들도 저렇게 긴 거리를 두 발로 내달리지는 못했었다. 그런데도 난 이렇게 물위를 걷고 있는 것이다.

▼ 내려가는 도중 두어 번 강변에 발을 딛긴 하지만, 물 위에 떠 있는 부교가 주된 길이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술 취한 사람처럼 몸이 휘청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다리가 꽤 육중하기 때문에 살짝 출렁거리긴 해도 안정감이 있으니 말이다.

▼ 강의 한가운데로 길이 놓였으니 안전은 필수다. 그래선지 오전에 걸었던 ‘하늘 길’과는 달리 부교의 시작점과 끝나는 지점들마다 초소를 세우고 몇 곳은 안전요원까지 배치했다. 부교의 난간 곳곳에 비상용 튜브를 매달아놓았음은 물론이다.

▼ 세 번째 부교에 올라서자 물윗길은 송대소(松臺沼)로 들어선다. 개성 송도에 살던 삼형제가 이무기를 잡겠다며 깊은 소(沼)에 들어갔다가 둘은 죽고 한명은 결국 이무기를 죽였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송대소란 이름은 소나무가 병풍처럼 서 있고 강물이 깊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하지만 한탄강의 특성이 집약된 명소로 더 유명하다. 오랜 세월 물과 바람에 깎인 현무암이 절단면을 따라 덩어리째 수직으로 떨어져 나가 30여m 높이의 주상절리 기암절벽을 이뤘다.

▼ 물윗길의 가장 큰 매력은 물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느긋하게 걷다보면 기암절벽이 첩첩이 겹쳐진 비경이 눈앞에 나타난다. 굽이지는 강을 따라 병풍처럼 접혀 있던 협곡이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물에 침식되면서 드러난 주상절리가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 제주도나 경주만큼 예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한 멋을 자랑하는 주상절리가 협곡의 양안에 가득하다. 지금으로부터 27만 년 전 분출된 용암이 한탄강을 따라 흐르면서 현무암질의 기암괴석과 주상절리 등을 만들며 웅장한 비경을 품게 되었다. 국가지질공원(제7호)에 이어 2020년에는 ‘유네스코(UNESCO) 세계지질공원’으로까지 등재된 이유다. 이곳 철원에다 연천·포천을 보탠 공원은 여의도 면적(2.9㎢)의 약 400배에 달하는 크기란다. 참고로 세계지질공원 44개 나라의 161곳이 지정됐다. 한국은 여기 한탄강을 포함해 제주와 청송, 무등산 등 모두 4곳이다.

▼ 물윗길은 그냥 길만 내놓은 게 아니다. 주상절리가 있는 곳에서는 조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유네스코(UNESCO)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 받은 한탄강의 주상절리 비경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 조망대로 다가가자 흔치 않은 풍경이 펼쳐진다. 협곡의 양쪽으로 숨어 있던 주상절리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뜨거운 용암이 식으면서 부피가 줄어 수직으로 쪼개지며 만들어진 게 주상절리다. 육각형 돌기둥들이 비취색 한탄강 수면에 비쳐 만든 풍경은 가히 절경이었다.

▼ 강물은 잔잔한 것이 비췻빛을 띤 호수 같다. 그 위로 주상절리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수직의 기둥 모양 이외에도 옆으로 기울어진 부채꼴 등 모양도 가지가지다.

▼ 한탄강의 특징은 기암절벽을 비롯한 많은 지질자원을 가지고 있어 그림 같은 장관을 이룬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어느 강보다도 변화무쌍하고 풍광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이곳 철원 일대는 현무암으로 된 용암지대를 관류하기 때문에 곳곳에 수직 절벽과 협곡이 형성되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 이 구간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 더 각광을 받는다. 수면이 꽁꽁 얼어붙으면 얼음트레킹이 시작되는데, 이때 부교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서 주상절리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정쩡한 시기다. 물줄기가 얼어붙지 않았으니 주상절리를 관찰하는 것까지는 불가능, 그저 고드름이 얼어붙은 계곡을 보는 재미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반대편에도 조망대를 만들어놓았다. 한탄강은 기암의 절리가 병풍을 치는 곳이다. 억겁의 시간이 조각한 바위미가 신비롭다. 수직절벽에 놓인 주상절리의 모습이 경이롭다. 때론 포도송이 같고 때론 바나나 같다. 절리 예술의 경연장이다.

▼ 이곳의 주상절리는 조금 특이하다.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인 게 아니라 절벽 상단에서 부챗살처럼 퍼지며 흘러내릴 듯한 모양이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마그마가 응고하면서 생기는 다각형 기둥인 주상절리는 흔히 6각형으로 가지런한데, 이곳의 주상절리는 오각형 사각형 등 다양한 형태를 띠는 것이다.

▼ 고개를 들자 은하수교가 허공에 걸려있다. 저 다리는 밤에 더 아름답다고 한다. 은은한 조명이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움을 업그레이드시킨다는 것이다. 그게 또 연인들에게는 두고두고 간직할만한 낭만까지 선사해준단다.

▼ 송대소가 끝나는 지점에서 물윗길은 둘로 나뉜다. 직진은 은하수교, 오른편은 계속해서 하류로 내려간다.

▼ 물윗길의 잔여 구간은 마당바위와 승일교, 고석정을 거쳐 순담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길은 조금 더 추워져야 온전하게 열린단다. 또한 내년 3월까지만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란다.

▼ 강변에서 바라본 송대소 풍경이다. ‘S’자 형의 길이 우리가 걸어왔던 ‘물윗길’. 길이 나뉘는 곳에서 왼편으로 가면 고석정으로 연결된다.

▼ 한탄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에는 구름다리가 놓여있었다. 하지만 통행을 금한지 이미 오래인 듯 낡은 계단은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이고 다리도 진입부분을 끊어버렸다.

▼ 물윗길에서 벗어나 은하수교로 올라선다. 길은 왔다갔다 ‘갈지(之)’자를 써가며 탐방객들을 다리 위로 올려놓는다. 한탄강의 가장 큰 특징. 즉 사람이 사는 땅 저 아래에 강이 있다 보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 다리 위로 올라왔지만 곧장 다리를 건너지는 않았다. 다리 뒤 언덕 위에 시야가 툭 트이는 전망대(정확히는 부지이다)가 있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 잠시 후 올라선 전망대에는 ‘세계지질공원 스카이전망대’의 조감도가 세워져 있었다. 어쩐지 넓다했더니 스카이전망대가 들어설 부지였던 모양이다. 철골구조의 이 전망대 높이는 46.3m. 익스트림 액티비티를 경험할 수 있는 상부 전망데크가 자랑거리란다. 외형도 화합의 불꽃을 품은 성화대를 형상화했다니 완공되면 철원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될 게 분명하다.

▼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은하수교는 한마디로 환상적이었다. 눈에 익지 않은 비대칭형인데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아니 수태극(水太極)의 한탄강 물줄기와 어우러지면서 오히려 한 수 위의 풍경으로 승화되어 버린다.

▼ 다리 건너에는 수확을 마친 철원 평야가 드넓게 펼쳐진다. 너른 평야를 넉넉히 감싸고 있는 걸출한 산은 금학산이다. 궁예의 태봉국 시절 얘기가 전해지는 산이기도 하다. 도선국사가 금학산을 태봉국의 주산으로 삼으라고 건의했으나 궁예가 이를 묵살하고 고암산을 주산으로 정해 왕조가 단명했다는 것이다.

▼ 우리가 탐방했던 한탄강도 내려다보인다. 들녘의 틈에서 푹 꺼져 흐르는 한탄강에는 길이 셋이다. 왼편 언덕(西岸)은 ‘한여울길’ 1코스. 그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물윗길’이다. 반대편 언덕(東岸)은 한여울길의 2코스로 군탄교에서 시작해 승일교와 은하수교, 태봉대교, 직탕폭포를 거쳐 윗상사리까지의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폐쇄된 상태. 여울의 영향을 크게 받아 협곡 하단의 강변길이 훼손됐는가 하면, 구름다리도 일부가 끊겼기 때문이란다.

▼ 눈앞에 펼쳐지는 철원평야는 엄청나게 넓다. 전국에서 밥맛 좋기로 소문난 철원 오대쌀이 저곳에서 난다. 10세기 궁예의 태봉국 수도였던 곳으로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저 들녘은 추위를 무릅쓰고 철원을 찾아오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이곳 철원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철새들의 중요한 기착지로 두루미·독수리·기러기를 비롯해 다양한 새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날머리는 ‘송대소 주차장’(원점회귀)

전망대에서 내려와 은하수교를 건너면 아까 트레킹을 시작했던 주차장이다. 한여울길을 따라 태봉대교까지 갔다가 물윗길을 이용해 출발지점으로 되돌아 온 셈이다. 그건 그렇고 주차장에는 ‘철원 DMZ마켓(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이 열리고 있었다. 가판대에 정성껏 키운 농작물과 손수 만든 치즈와 떡, 그리고 정성을 가득 품은 수공예품 등 가지각색의 물건들을 펼쳐놓았다. 요거트, 팥죽, 메밀전병까지 먹거리 또한 빠질 수 없다. 그러니 아까 입장료를 구입하면서 되돌려 받은 지역상품권은 이곳에서 사용하면 된다.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의미에서 조금 더 보태 구입하면 금상첨화일 테고 말이다.

한탄강 주상절리길(하늘 길)

 

여행일 : ‘21. 12. 5(일)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여행코스 : 드르니매표소→전망쉼터→드르니 스카이전망대→잔도→한탄강 스카이전망대→샘소전망쉼터→잔도→순담 스카이전망대→순담매표소(소요시간 : 3.6km/ 2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전국에는 수많은 걷기 길이 있다. 한탄강 또한 강의 특징을 살려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릴 길을 만들었다. 바로 ‘한탄강 주상절리길’이다. 한탄강의 특징은 강의 양쪽이 화산암의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화강암, 즉 주상절리가 한탄강의 대표적인 비경이기 때문에 한탄강을 따라 조성된 걷는 이 길의 이름이 되었다. 아무튼 덕분에 여행 마니아들은 철원·연천·포천 지역을 평화롭게 흐르는 한탄강을 따라 걸으며 해맑은 강안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들머리는 ‘드르니 매표소’(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산 174-3)

구리·포천고속도로 신북 IC에서 내려와 국도 43호선을 타고 철원·김화방면으로 올라가다 드르니교차로(철원군 갈말읍 군탄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드르니 매표소’에 이르게 된다. ‘드르니’는 ‘들르다’라는 뜻을 가진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한다. 후삼국 시대 왕건에 쫓기던 궁예가 이곳에 들렀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왠지 정겹다 싶었는데 그게 이유였던가 보다.

▼ 마땅한 지도를 찾을 수 없어 입구에 세워놓은 지도를 옮겨봤다. 길이가 3.6km에 이르는 ‘하늘 길’의 입구는 둘(순담 및 드르니). 탐방객이 마음 내키는 곳에서 시작하면 된다. 주말 및 공휴일에 한하지만 40분 간격으로 셔틀버스(무료)가 운행되고 있으니 되돌아 올 걱정도 없다.

▼ 코로나19 팬데믹의 화두는 누가 뭐래도 ‘사회적 거리두기’다. 11월부터 ‘위드 코로나(with Corona)’로 바뀌었다지만 방역수칙까지 어디 가겠는가. 입·출구를 달리하는 것은 기본. 마스크에 ‘열 체크’. ‘안심 콜’은 필수, 손 소독은 선택이다. 다만 줄을 선 사람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있다는 게 흠이랄까?

▼ 입장권(1만원을 내면 5천원을 지역화폐로 되돌려준다)을 보이고 안으로 들어서자 ‘드루니 전망대’가 길손을 맞는다. 전망대에 서면 한탄강만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다. 평지보다 푹 꺼진 협곡, 그것도 양 옆이 수직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로 쪽빛 강물이 흐르고 있음은 물론이다.

▼ 탐방로는 푹 꺼지면서 시작된다. ‘하늘길’은 이곳 ‘드루니매표소’에서 ‘순담매표소’까지 한탄강의 바위협곡을 따라 나있다. 길이는 3.6㎞. 50~60m 높이의 바위절벽에 잔도(棧道)와 출렁다리를 설치해가며 길을 만들었다. 한탄강의 자랑거리인 주상절리를 볼 수 있도록 곳곳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음은 물론이다.

▼ 미끄러우니 뛰지 말라는 경고판은 엄포용이 결코 아니다. 특히 오늘처럼 서리라도 내린 날에는 금과옥조가 된다. 빙판보다도 더 미끄럽기 때문이다. 실제로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들도 여럿, 개중에는 손목을 다친 사람도 있었다.

▼ ‘하늘 길’에는 쉼터를 겸한 전망대를 꽤 여럿 만들어 놓았다. 첫 번째 만남은 ‘맷돌랑 전망쉼터’다. 요 아래에 넓적한 맷돌바위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하지만 어느 바위를 이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강안에 펼쳐진 예쁜 모래톱이 눈길을 끈다는 것뿐.

▼ 바위절벽에 기댄 탐방로는 쉼 없이 오르내린다. 지형에 알맞게 놓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릎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힘든 여정이 될 수도 있겠다.

▼ 낡아빠진 데크 로드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기도 한다. 옛 탐방로로 여겨지는데, 발길이 끊긴지 한참이나 되었나 보다.

▼ 트레킹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다. 수직절벽 아래로 흐르는 하얀 계류가 일품이다. 한탄강은 50만 년 전 화산활동이 만든 희귀한 지형을 지녔다. 그동안은 지형이 험해, 먼발치에서만 한탄강의 경치를 지켜봐야 했는데, 협곡을 따라 보행로가 놓이면서 주상절리의 신비스런 속살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게 됐다.

▼ 눈을 들자 높이가 35m에 이른다는 협곡이 펼쳐진다. 카메라의 줌을 끌어당기자 이번에는 협곡을 병풍처럼 둘러싼 주상절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 조금만 더 가면 ‘민출랑’이라는 또 다른 전망쉼터가 나온다. ‘민출랑’은 깎아지른 절벽의 전라도 사투리라고 한다. 말 그대로 깎아지른 단애가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주상절리(절벽)의 조망과 함께 현무암을 비집고 흘러가는 우렁찬 강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 이쯤에서 여담 하나. ‘한탄강’은 흔히 6·25전쟁 중 다리가 끊겨 후퇴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탄하며 죽었다’고 해서 붙여졌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정답은 ‘큰 여울의 강’이란 뜻이다. ‘크다·넓다·높다’는 뜻의 ‘한(漢)’과 ‘여울·강·개’의 뜻인 ‘탄(灘)’이 어울린 순수한 우리말이며, 이를 한문으로 음차(音借)한 것이다.

▼ 세 번째 만남은 ‘너른바위 전망쉼터‘로 강변까지 거의 다 내려간 지점에 설치되어 있다. 이렇듯 눈에 띌만한 지형 앞에는 어김없이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잔도를 조금 더 넓힌 다음 벤치를 놓아두었는가 하면, 강의 한가운데까지 툭 튀어나가는 허공 다리를 놓기도 했다. 경승의 구석구석을 두루두루 살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 전망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바위가 ’너른바위‘인 모양인데, 그보다는 그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바위들이 더 눈길을 끈다.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게 마치 우리가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기라도 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 전망대에는 요런 돌출부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주상절리의 신비로운 풍광을 담아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주상절리를 배경삼아 인생샷이라도 건져보려는지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제법 길었다.

▼ 등산에 가까운 오름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곳 ’하늘 길‘의 가장 큰 특징은 ’잔도(棧道)‘. 바위절벽에 선반을 걸치듯 내놓은 길이다. 그런데도 이곳은 바위절벽을 넘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암벽의 강도가 잔도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일까?

▼ ’하늘길‘은 13개의 교량이 곳곳을 잇는다. 협곡의 갈라진 틈들을 이 다리로 연결해가며 길을 내놓은 것이다. 가장 먼저 선을 보이는 건 현수교의 형식을 취한 ’주상절리교‘. 양 옆에 기둥을 세우는 여느 현수교와는 달리 가운데 돌출부분에 기둥을 세우고 양 옆의 절벽에 쇠밧줄을 맨 다음 그에 의지해 출렁다리를 놓았다. 한가운데, 그러니까 가운데 돌출부분에는 스카이전망대가 들어앉았다. 그게 아름다웠던지 하늘길을 꾸미고 있는 다리들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 ’하늘 길‘은 3개의 ’스카이 전망대‘도 품고 있다. 그 가운데 첫 만남은 ’드르니 스카이전망대‘로 ’주상절리교‘의 교각에 매달려 있는 모양새이다. 스릴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도일 것이다. 그래선지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꽤나 붐비고 있었다.

▼ 전망대에 서면 양 옆으로 뻗어나간 ‘주상절리교’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다리 위를 오가는 탐방객들의 표정이 마치 소풍 나온 어린이들처럼 들떠있다. 미지 세계의 경이로움이 저들을 동심으로 되돌려 놓았나보다.

▼ 시선을 깔자 한탄강이 성큼 다가온다. 그런데 쪽빛 심연을 떠돌고 있는 저 괴물체는 정체가 뭘까? 모래톱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갈수기에나 모습을 드러내는 암초처럼 보이기도 한다.

▼ 이때 가로로 깨진 바위가 켜켜이 쌓여 있는 게 보인다. 저걸 ‘수평절리’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땅속에 숨어 있던 화강암이 자신을 덮고 있던 미지의 암석이 제거되면서 밖으로 튀어나온다. 이때 화강암의 연약한 부분이 깨지면서 생긴 것이 수평절리다.

▼ 다리를 건너다 뒤돌아본 ‘드르니 스카이전망대’. 전망대의 바닥이 허공으로 약간 튀어나갔다고 해서 ’스카이‘란 멋진 단어를 집어넣은 모양이지만 다른 스카이전망대들 만큼의 스릴은 느껴지지 않는다.

▼ 전망대 아래에 터를 잡은 ‘쌍자라 바위’가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자라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내 눈에는 ‘짱뚱어’의 머리에 더 가까워 보였다. 또 다른 어떤 이는 하마를 닮았다고 했다.

▼ 한탄강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 물줄기가 시원한 여름, 단풍이 어우러진 가을, 얼음왕국으로 변하는 겨울까지, 계절마다 색다른 매력을 지닌다고 했다. 하지만 어정쩡한 시기이어선지 단풍도 아니고 그렇다고 설화도 아닌 풍경만 보여준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갖가지 문양으로 치장된 주상절리가 그 모든 것을 보상해주고도 남는다.

▼ 결코 앞만 보고 걷는 우는 범하지 말자. 같은 사물일지라도 앞뒤가 서로 다른 풍경으로 다가올 테니까 말이다.

▼ 이틀 후면 눈이 많이 내린다는 대설(大雪).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이게 또 인생샷을 건지려는 이들의 멋진 배경이 되어주기도 한다.

▼ 또 다른 출렁다리인 ‘쌍자라교’를 지나면 이번에는 출렁거리지 않는 고정식 다리가 나온다. ‘돌단풍교’라는데 곁에 전망쉼터까지 끼고 있었다. 아무튼 이 근처에서 한탄강의 자랑거리인 돌단풍을 만난 수 있다고 해서 이를 이름으로까지 삼았다니, 주상절리와 바위틈에 숨어있는 돌단풍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듯.

▼ 눈에 들어오는 한탄강은 다른 강과는 사뭇 다르다. 거의 대부분 구간에서 바닥이 푹 꺼진 주상절리의 직벽 아래로 흐른다. 사람이 사는 땅 저 아래에 강이 있는 것이다. 강안 풍경을 보기 위해 가끔은 ‘내려가야’하는 이유다.

▼ 길은 서서히 ‘하늘 길’이란 이름에 걸맞아진다. 바위벽으로부터 점차 거리를 두어간다는 얘기다. 하지만 잔도(棧道)에 미치려면 아직은 멀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긴장감이 읽히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 절벽의 위(산봉우리로 생각되겠지만 사실은 평지다)로는 비상통로를 놓았다. 입구를 막아놓은 걸로 보아 건설공사 때 사용하던 구급용 시설이지 싶다.

▼ 주변에 현무암과 화강암이 공존한다는 현화교(순담 2.1㎞/ 드르니 1.5㎞)와 현무암교(주상절리가 발달된 현무암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단다)라는 두 개의 고정식 다리를 지나자 ‘동주 황벽쉼터(순담 1.9㎞/ 드르니 1.7㎞)’가 나온다. 황토빛깔의 주상절리가 바라보이는 곳으로, 원래는 아래쪽이 검은색, 위쪽은 황토색과 암갈색을 띄고 있지만 햇볕을 받으면 전체가 황토 빛으로 물든단다. ‘동주’는 철원의 옛 이름이다.

▼ 동주황벽쉼터를 지나면서 ‘하늘 길’의 자랑거리인 잔도가 시작된다. 잔도(棧道)란 수직의 바위 벼랑에 선반을 매달아 놓듯 만든 길이다. 중국에서나 볼 수 있던 풍경인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하나 둘 선을 보이고 있다.

▼ 수직의 바위절벽이다 보니 자그만 물줄기만 있어도 저런 멋진 폭포가 된다. 추위가 더 기승을 부리면 얼음폭포(氷瀑)라는 또 다른 볼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 강에는 꽤 많은 철새들이 노닐고 있었다. 맞다. 이곳 철원은 철새 관광지이기도 하다. ‘한탄강 얼음 위 트래킹과 DMZ철새 두루미 여행’이란 상품을 파는 여행사도 있을 정도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두루미(제202호), 재두루미(제203호), 독수리(제243호) 등이 해마다 겨울철이면 이곳 철원을 찾아온단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하늘 길’의 스릴이 절정을 이루는 ‘한탄강 스카이전망대(순담 1.6㎞/ 드르니 2.0㎞)’에 도착했다. 제비집처럼 매달린 잔도로도 모자라 아예 허공을 향해 툭 튀어나가도록 설계됐다. 반원형의 다리를 교각 대신 와이어로 매달아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 허공을 걷는 스릴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아예 강화유리 위에서 포즈를 잡기까지 한다. 사진으로나마 자신의 강심장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걷는 것조차 힘든 듯 난간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었다.

▼ 삼풍백화점·성수대교·와우아파트 등은 기억 속의 아픈 단어들이다. 하지만 남의 나라 얘기가 된지도 이미 오래다. 다리 위를 무심히 걷고 있는 저 탐방객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와이어로 묶였을 따름인 허공다리의 안전도가 의심도 되련만, 탐방객들의 얼굴에서는 그런 표정이 조금도 읽혀지지 않는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터널처럼 생긴 출렁다리가 길손을 맞는다. ‘2번홀교’. 생긴 것만큼이나 이름도 특이하다.

▼ ‘2번 홀교’는 안전에 특화되었다고 한다. 요 위에 있는 한탄강 CC의 2번 홀에서 날아오는 골프공을 피하기 위한 설계란다. 그래선지 이름부터가 골프장 용어인 ‘홀’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쪽빛소 전망쉼터(순담 1.2㎞/ 드르니 2.4㎞)’ 근처에서 바라본 풍경이니, 저게 ‘쪽빛소’일지도 모르겠다. 한탄강 물길이 잠시 멈추었다 가는 곳으로, 소(沼)의 물이 깊고 쪽빛을 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 ‘바위그늘교(순담 1.1㎞/ 드르니 2.5㎞)’는 아예 축 처져있는 모양새이다. 출렁임도 당연히 더 커졌다. 다리의 길이가 짧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참고로 이 부근에서는 화강암의 안쪽이 양파껍질처럼 벗겨지는 박리현상이 눈에 띈단다.

▼ 강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검은색 현무암의 수직절벽은 주상절리의 연속이다. 아름다운 주상절리가 쉼 없이 이어지는데, 그 절리의 모양새도 다채롭다. 뜨거운 용암이 식으면서 만들어놓은 걸작(傑作)이란다.

▼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한 폭의 풍경화로 그려진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이다.

▼ 한탄강의 협곡은 사람이 사는 땅 저 아래에 강이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래 사진과 같은 풍경이 심심찮게 펼쳐진다. 마을이 바위절벽의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것이다. 문득 스페인 여행 때 세외지경으로 받아들였던 론다(Ronda)의 풍경을 떠올렸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누에보 다리’로 유명한 곳인데 4~5층 높이의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는 것만 다를 뿐, 론다 역시 바위절벽 위에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샘소 전망쉼터(순담 0.9㎞/ 드르니 2.7㎞)’는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중요한 포인트이다. 하늘길 유일의 화장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다른 쉼터들 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다.

▼ 쉼터 앞의 ‘샘소’는 기묘한 암석들로 둘러싸인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는 신비한 곳이란다.

▼ 이제 중국에나 가야 보던 잔도(棧道)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수직 절벽에 파이프를 박아 선반 매달 듯 내놓은 길이다. 중국에 기원을 둔 잔도는 전쟁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촉(蜀)의 제갈량이 위(魏)를 치기 위해 사천성의 험준한 산악 지형에 길을 냈다. 그 길을 걸어본 시인 이백은 촉도난(蜀道難)이란 시에서 ‘촉 가는 길의 험난함, 하늘 오르기보다 힘들다’고 했다. 그런 잔도가 한국에도 놓인 것이다. 다만 목숨을 건 병사가 아닌 산천경개를 구경나온 장삼이사가 희희낙락 걷는다.

▼ 고정식 다리인 ‘수평절리교’에 이르면 아까 얘기하던 수평절리가 보다 광범위하게 펼쳐진다. 가로로 깨진 화강암이 마치 시루떡처럼 쌓여있는 모양새이다. 이렇듯 하늘길에 놓인 다리들은 주변 지질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이를테면 '돌개구멍교' 옆에는 원통 모양의 구멍이 난 바위가 있었고, 이곳 '수평절리교' 건너편에는 저렇게 가로로 깨진 바위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 다음은 출렁다리인 ‘화강암교’이다. 화강암은 땅 속 깊은 곳에서 마그마가 서서히 식어서 생긴 암석으로 대체로 색이 밝고 검은 반점을 띤다. 한탄강의 기반암으로 볼 수 있는데, 다리 부근에서 다양한 형태의 화강암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 영락없는 돼지의 머리다. 무학대사는 부처와 돼지의 눈을 빌어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그렇다면 나도 돼지가 되는 것일까?

▼ 다른 각도에서 본 ‘화강암교’이다. 저렇듯 절벽과 절벽 사이를 출렁다리로 연결시키는데 이게 만만치가 않다. 출렁이는 게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방이 뚫려있어 눈길이 닿는 곳마다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다.

▼ 눈을 들자 순담계곡을 향해 놓인 잔도가 눈에 들어온다. 중국의 장가계나 태행산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 길은 극한의 공포 그 자체였다. 까마득한 절벽에 걸쳐진 길은 구멍이 숭숭 뚫렸는가 하면, 심지어는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유리가 깔려있기도 했었다. 덕분에 난 되돌아가겠다며 투정을 부렸었고, 이를 본 집사람은 서슴없이 ‘겁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 물소리가 거세지는가 싶더니 ‘한여울교(순담 0.7㎞/ 드르니 2.9㎞)’가 나타난다. ‘여울’이란 하천 바닥이 급경사를 이루어 물의 흐름이 빨라지는 곳을 이른다. 물살이 거치니 산소를 많이 발생시킬 것은 당연. 그래서 사람들은 여울을 강의 허파라고도 한다. 그 여울에 크다는 뜻의 ‘한’자를 붙였다.

▼ 출렁다리인 ‘돌개구멍교(순담 0.6㎞/ 드르니 3.0㎞)’이다. 돌개구멍은 하천의 암반 바닥에 생긴 원통 모양의 깊은 구멍을 말한다. 자갈이 물과 함께 회전하며 바위를 갈아내면서 만들어지는데, 이 근처에 그런 돌개구멍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구리소 전망쉼터’가 얼굴을 내민다. 한탄강의 여울이 이 근처에서 가마솥 끓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아니나 다를까 한탄강의 물 흐름이 이 근처에서 빨라지고 있었다. 맞다. 이곳 순담계곡은 철원 래프팅의 메카로 알려진 곳이다. 물이 불어나는 여름철에는 저 계곡에 젊은이들의 함성으로 가득하단다.

▼ ‘선돌교(순담 0.5㎞/ 드르니 3.1㎞)’는 구리소 쉼터의 바로 곁에 있었다. 다리 근처에 있는 ‘선돌’에서 이름을 차용했다는데, 한탄강의 거센 물살에 깎여나간 화강암이 선돌을 빼다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선돌을 카메라에 담는 건 실패했다. 사전 준비가 부실해 그런 바위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 잔도는 수직의 바위절벽에 제비집처럼 매달려 있는 흥미진진한 길이다. 하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하다. 대개의 디딤판이 밑이 훤히 보여, 고소공포증이 심한 이들엔 자책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말자. 조심조심 몇 걸음 내딛다보면 주변 경관에 취해 고소공포증 따위는 금방 사라져버릴 테니까 말이다.

▼ 화강암 절벽의 단층이 볼거리라는 ‘단층교(순담 0.4㎞/ 드르니 3.2㎞)’를 지나자 ‘순담 스카이전망대’가 얼굴을 내민다. 스카이라는 이름처럼 허공을 향해 툭 튀어나간 스릴 만점의 다리다. 탐방객들의 표정이 극명하게 갈리는 곳이기도 하다. 신나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난간을 붙잡은 채 오도가도 못하는 사람도 보인다.

▼ 반원형의 길이 허공을 떠돈다. 때문에 느끼는 고도감은 상상 초월이다. 사방으로 터진 개방감에 공포가 배가된다. 투명 유리의 스릴까지 더해진다.

▼ 스카이전망대는 강을 향해 툭 튀어 나가도록 설계됐다. 때문에 교각을 세울 수가 없다. 똑 같이 교각이 없는 출렁다리와도 다르다. 양쪽 지지대를 케이블로 연결하는 출렁다리와는 달리 스카이전망대는 지지할 수 있는 곳이 한 곳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바위절벽의 상단에 철심을 박고 행어케이블을 연결해 상판을 지탱하고 있었다.

▼ 촉나라의 잔도는 절벽에 구멍을 내고 나무를 꽂아 만든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모양새만 취했을 뿐 철심을 튼튼하게 박았다. 안심하고 걸어도 된다는 얘기이다.

▼ 뒤돌아보면 이제껏 걸어온 길이 그 전모를 드러낸다. 하늘길은 주상절리의 벼랑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표정의 길이다. 수직의 단애에 선반처럼 매달아놓은 잔도는 기본. 아찔한 출렁다리를 건널 수도 있고, 심지어는 아찔한 허공을 거닐기도 한다.

▼ 순담계곡은 하천을 에워싼 협곡의 암벽이 기암괴석을 이루는 데다, 보기 좋은 모래밭까지 끼고 있어 한탄강 일대에서 경승이 빼어난 곳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지자체에서 이를 놓칠 리가 없다. 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전망대를 만들었으니 곧 ‘순담 전망쉼터’이다. 각양각색 바위로 이루어진 순담계곡의 경치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해서 아예 계곡의 이름을 통째로 넣어버렸다.

▼ 계곡의 물길에는 부교(미 개통)가 놓여있었다. 주상절리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이곳 순담계곡은 조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관주가 이름을 붙였다. 관직에서 은퇴한 후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20여 평의 연못을 파고 제천의 의림지에서 순(蓴)이란 약초를 옮겨다 심고는 순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 날머리는 ‘순담 매표소’(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전망대에서 빠져나오면 곧이어 순담매표소에 이르게 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만이다. 기껏해야 3.6km 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2시간이나 걸었다는 것은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하긴 수십 만 년 전의 신비 속을 걸었으니 오죽했겠는가.

소백산 자락길, 2자락

 

여행일 : ‘21. 12. 11(토)

소재지 : 경북 영주시 풍기읍 일원

여행코스 : 삼가동주차장→금계저수지→금선정→금계중학교→정감록촌→풍기소방서→남원천 둑길→창락역 쉼터→무쇠다리 옛터→희방사역(거리 및 시간 : 15.6km/ 실제는 금계저수지에서 시작해 12.16km를 3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소백산자락길은 영남의 진산이라고 불리는 소백산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약 160㎞(12개 구간)의 문화생태 탐방로다. 3개 도(충북·경북·강원)의 4개 시·군(단양군·영주시·봉화군·영월군)을 아우르는데, 미세하지만 문화·생태적 경계로 각 자락길이 구분되어 있어 같은 듯 조금씩 다른 뛰어난 경치와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오늘은 2009년에 1·3자락과 함께 최초로 개통된 2자락을 걷는다. 금계저수지와 금선정 등 아름다운 경관에 더해 천하명당이라는 정감록의 십승지(十勝地)까지 함께 둘러볼 수 있는 코스이다.

 

▼ 들머리는 ‘소백산 삼가주차장’(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265)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931번 지방도를 타고 일단 풍기읍내로 들어온다. 동양대학교(영주캠퍼스) 앞 사거리(금계교를 건너자마자)에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백산국립공원 삼가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의 매표소가 2자락의 들머리이다.

▼ 2자락은 2개의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방금 전 달려왔던(차량을 이용했지만) 도로를 되돌아나가는 원래의 코스(붉은색 선)가 그 하나. 풍기 읍내를 통과하는 원래의 코스로 남원천의 둑길을 따라 종점인 희방사역으로 연결되는데, 길이가 15.6km나 되는데다 도로를 많이 걷는다는 단점이 있다. 이게 싫다면 새로 만든 코스(검정색 선)를 이용하면 된다. 해발 765m의 곰내미고개를 넘는 호젓한 산길로 거리도 9.5km로 줄어든다. 하지만 금계저수지와 금선정, 정감록의 십승지 마을 등 2자락이 품고 있는 명승들을 모두 포기해야만 한다.

▼ 우리 부부는 금계저수지 상류의 전망대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도로를 3km 남짓이나 걷는다는 게 무의미하다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전망대에 서면 ‘금계저수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 아니겠는가. 맞다. 아랫도리를 물속에 담그고 있는 모양이 주산지의 나무들을 영락없이 빼다 닮았다. 지금은 비록 맨몸을 드러내고 있지만, 저 나무에 녹음을 입힌 다음 새벽 물안개로 덧칠 해보자, 자못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겠는가.

▼ 탐방로는 이차선의 도로가를 따른다. 그렇다고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호반에 다리를 놓듯 ‘데크 로드’를 별도로 만들어 놓았다.

▼ 7분쯤 걸었을까 욱금리(이정표 : 금선정← 1.2㎞/ 삼가동↓ 3.6㎞) 앞에서 왼편으로 크게 휜 다음 금계저수지의 호반을 따른다. 자락길은 이 구간(펜션마을→풍기소방서)을 ‘승지길’이라 부른다. 학교길(3.7㎞)과 승지길(4.0㎞), 방천길(7.9㎞)로 이루어지 2구간의 두 번째 구간이다.

▼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선생의 느낌만은 아닌 모양이다. 금계저수지의 호반에 저리도 많은 펜션들이 들어선 걸 보면 말이다. 하긴 청산이 절로인 것만으로도 부족해 녹수까지 절로이니 속세에 찌든 인간들이 어찌 찾아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 방향을 알려주는 자락길 특유의 ‘스티커’다. 파랑색(정방향)과 빨강색(역방향)으로 색깔을 구분해 놓았는데, 문제는 그림이 지시하는 방향이 어디인지가 애매모호하다는 게 문제다. 아래 사진처럼 아래로 향하고 있는 등 중구난방으로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 금계저수지는 제법 큰 규모인데도 불구하고 물결은 한없이 잔잔했다. 산자락 깊숙이 들어앉은 때문이겠지만 금계(錦溪)라는 이름에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 ‘소백산자락길’이 종합병원이고, 우리의 두 다리는 의사란다. 맞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 교수는 ‘걷기 예찬’이라는 책에서 정신적인 시련은 걷기라는 육체적 시련을 통해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과 다 손을 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종합병원에서 나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 걸어보자. 이왕이면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 ‘길이 참 예쁘다!’ 앞장서 내려가던 집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른다. 그 대상이 계단임을 나는 금방 알아차린다. 이만하면 호흡이 척척 들어맞는 찰떡궁합 부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계단은 턱이 무척 낮아서 무릎이 좋지 않은 노인네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 좋았다.

▼ 올려다 본 금계저수지는 우람하기 짝이 없다. 저 둑은 길이 182m에 높이가 40.7m나 된단다. 그나저나 금계저수지는 지역주민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어주는 모양이다. 호반을 따라 내놓은 산책로로도 모자라 둑 아래에 정자와 벤치에 운동기구까지 갖춘 소공원을 만들어놓았다. 실제로 산책 나온 여자들 몇이 망중한을 즐기는 게 보이기도 했다.

▼ 10분 조금 못되게 걸어 ‘장선마을(금선정교를 경계로 ’웃장시이‘라 부르기도 한다)’로 들어서자 ‘계양정(桂陽亭)’이란 정자가 길손을 맞는다. 마을 주민들의 휴식을 위해 최근에 세운 듯한데, 정자보다는 정자 앞에서 몸을 한껏 기울여 자라는 굵은 소나무가 더 멋있다. 이곳 금선계곡은 골짜기 양 옆으로 늘어선 노송이 명품으로 꼽힌다. 하지만 정자 앞의 이 소나무야 말로 ‘명품 중의 명품’이 아닐까 싶다.

▼ 50m쯤 더 걸었을까 또 다른 정자가 고개를 내민다. 이곳 금선계곡을 세상에 알린 일등공신 ‘금선정(錦仙亭)’이다. 물가에 터를 잡은 정자는 빼어난 풍모를 자랑한다. 계곡 건너로는 굵고 힘찬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계곡 아래로는 옥수가 흘러내린다. 금선정은 그 물을 내려다보는 바위 금선대(錦仙臺) 위에 올라앉아 있다.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1517-1563)이 ‘금선대’란 이름을 붙였고, 1756년 부임한 풍기군수 송징계(宋徵啓)가 바위벽에 새겼다.

▼ 금선정은 1781년 풍기군수 이한일(李漢一)이 황준량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조선시대의 소박하고 조촐한 건축미를 그대로 보여주는데, 벽체가 없이 네 면이 개방된 전형적인 정자 양식이다. 이 정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둥의 길이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암반의 굴곡을 그대로 살려 기둥의 길이를 달리했기 때문이란다.

▼ 정자에는 풍기군수 이대영이 당시 성주목사이던 조윤형의 글자를 받아 걸었다는 편액(扁額) 말고도 꽤 많은 시판(詩板)이 걸려있었다. 황준량은 물론이고 그의 스승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도 시를 남겼다. 하긴 명망 있는 선비들이 앞 다투어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시를 짓고 즐겼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 정자를 스치듯 흘러가는 계곡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했다. 그리고 난 고작 이 정도의 풍광에 반해 시를 읊어댔을 선현들의 감성을 비웃듯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금계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여기서부터 삼가리까지 솔숲과 바위로 이어진 ‘십리 길’이었음을 기억해 낸다. 당연히 아름답지 않았겠는가.

▼ 장선마을은 부티가 철철 넘치고 있었다. 하긴 1500년대 초 예언가 남사고가 ‘이 땅이 명당이자 길지로세’를 외쳤다고 하지 않았던가. 1987년 마을 위에 금계저수지가 생겼고, 그로인해 마을 사람들의 삶은 풍성해졌다. 남사고가 예언이 적중한 셈이다.

▼ 마을 앞에서 길을 잃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이정표(희방사역 9.1㎞/ 삼가리 5.2㎞)를 따랐으면 되었을 것을, 가로등에 붙여놓은 자락길 스티커를 참조하다가 엉뚱하게도 ‘금선정교’를 건너버린 것이다. 그렇거나말거나 자락길 도반인 뚜벅이님은 동영상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이 부럽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고나 할까?

▼ 다리 건너 마을 비보림(裨補林)에는 ‘팜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금선계곡과 굵직굵직한 송림을 테라스 삼았으니 위치하나는 끝내주게 잡았다. 참고로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면 ‘장생이 녹색농촌체험마을’이 나온다. 각종 체험은 물론이고 숙식까지 가능하다니 짬을 내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KBS의 인기 프로그램인 ‘한국인의 밥상’에서 선보였다는 맛있는 음식이라도 맛볼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 카페에서 내건 간판은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정성 장록삼 수(秀)’에 ‘씨를 뺀 사과 36.5’를 더했다. 이 카페에서 아홉 번 찌고(蒸, 찔 증) 아홉 번 햇볕에 말린(曝, 쬘 폭) 인삼을 판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한번 찌고 한번 말린 게 ‘홍삼’인데, 그러하면 저 장록삼의 약효는 대체 얼마나 될까?

▼ 송림을 벗어나면 들길. 그런데 자락길의 표식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으니 문제다. 그렇다고 되돌아 갈수야 없는 노릇. 부리나케 핸드폰을 꺼내들고 앱의 도움을 받아가며 길을 찾아나간다.

▼ 건너편 금선마을(조금 전의 ‘웃장시이’와 구분해 ‘아랫장시이’라 부른다)은 교회의 첨탑이 가장 높았다. 정감록촌을 찾아온 반세기 전의 신경림 시인이 만난 풍경도 저랬을까? 인삼·인견직·사과와 함께 교회를 ‘풍기의 4대 기적’으로 꼽았었다니 말이다.

▼ 마음이 급하니 도로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대충 방향을 잡고 묵밭을 가로지르는데 웃자란 잡초가 훼방을 놓는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50분. ‘장생이 녹색농촌체험마을’ 입간판이 세워진 사거리(이정표 : 희방사역 8.6㎞/ 삼가리 4.4㎞)로 올라섰다. 15분을 엉뚱한 데서 헤매다가 본래의 자락길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곳은 장선마을(금계2리)의 입구이기도 하다. 장승(長生)이 있던 마을이라고 해서 장생이, 지형이 긴 배 모양 같다하여 장선(長船)이, 착한 사람이 많이 나서 번성하라는 뜻에서 장선동(長善洞)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 사거리에는 물레방아가 복원되어 있었다. 오래 전 이곳 장생이마을에는 금선계곡의 풍부한 물을 이용한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산업화에 밀려 그동안 사라졌다가 관광용으로 되살아난 모양이다.

▼ 장승도 복원되어 있었다. ‘장생이’란 지명과 연관된 조형물이지 싶다. 참고로 이곳의 장승은 여지도서(輿地圖書, 영조 때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엮은 전국 지리지)에까지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2008년에 복원한 장승에는 동국의 명승이요 세상을 기다리는 보배로다. 첫 번째가 금계이니 좋은 운이 천년동안 이어지리라(東國名勝 待世至寶 一曰金鷄 運吉千年)고 적었다. 풍기 인삼과 영주 사과의 홍보도 함께 하고 있었다.

▼ 금계로를 따라 풍기 시가지로 들어가는데 속도관리구역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2차선 도로인데도 40km까지만 허용하는 걸로 보아. 풍기도 이젠 시골티를 완전히 벗어버렸나 보다.

▼ 금계천 너머 언덕에는 동양대학교가 들어앉았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재직하던 학교이자, 세상을 일희일비(一喜一悲) 시켰던 최성해 총장으로 인해 유명해진 대학교이기도 하다.

▼ 1950년에 문을 열었다는 ‘금계중학교’는 이색적인 정문을 갖고 있었다.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조형물을 세우고 ‘월계문(月桂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설립자의 호가 ‘월계’가 아닐까?

▼ 잠시 후 금계로와 헤어진 자락길은 무릉길로 들어선다. 정감록촌의 중심지인 ‘임실’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인데,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이정표(희방사역→ 8.0㎞/ 삼가리↓ 4.9㎞) 말고도 ‘풍기읍’과 ‘금계1리’에 대한 안내판 등을 세워놓았다.

▼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거대한 표지석도 세웠다. 이곳 금계1리가 정감록(鄭鑑錄)의 제1승지(第一勝地)이자 풍기 인삼(豐基人蔘)의 시배지(始培地)란다. 참고로 십승지(十勝地)란 삼재(三災), 즉 전쟁이나 흉년, 전염병 등이 돌아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으로, 일상 생활터전과는 달리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는 대표적인 열 곳을 말한다.

▼ 풍기의 연혁을 적은 안내판에는 ‘풍기인삼 개삼터길’이 그려져 있었다. 맞다. 이곳 금계1리의 ‘부계밭’ 마을은 그 유명한 풍기인삼의 시초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1542년 풍기군수이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의 권유로 인삼을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길이 7km의 개삼터길은 십승지의 특징을 살리고 관광객에게 걷는 재미와 신비로움을 더하도록 꾸며놓았단다.

▼ 십승지(十勝地)에서는 마을 이름마저도 ‘무릉(武陵)’이다. 무릉이 본디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줄임말일지니, 무릇 모든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온갖 산새들이 우짖는 곳, 배고픔과 시름을 잊은 채 글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곳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10분. 무릉길로 들어서고 7분 만에 다다른 ‘임실마을’에는 이정표(희방사역← 7.6㎞/ 삼가리↓ 5.4㎞)와 함께 이곳이 십승지지의 제1승지임을 알리는 입간판을 세웠다.

▼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가 보다. 금계촌이 전국 제일승지라며 너스레까지 떨고 있다. 아쉬운 점도 있다. 리사이클 박스는 제발 다른 곳에 갖다 놓았으면 좋겠다.

▼ 왼편으로 방향을 꺾어 50m쯤 내려가자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터가 좁은 제방의 특성을 살려 하천에 뚜껑을 덮은 다음 정자를 올려놓았고, 운동기구 등의 나머지 시설들만 제방 위에다 설치했다.

▼ 제방에는 십승지, 실향민, 풍수 등 이곳 금계촌의 역사를 풀어 넣은 비석들을 줄줄이 세워놓았다. 바닥의 판석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전국의 ‘십승지’들을 지도 위에 그려 넣었다.

▼ 정씨가 도읍하기까지 난세를 피해 유유자적 살아가는 이들과 이별을 고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 자락길은 개울가를 따른다. 그리고 풍기읍 시가지로 향한다.

▼ 이때 연화봉과 도솔봉 등 소백산이 품은 여러 군봉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 풍경화에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는 점을 업데이트시키면 또 다른 뭔가를 가슴에 담아갈 수 있지 않을까?

▼ 10분쯤 더 걸어 도착한 ‘공원산 마을(이정표 : 희방사역 6.7㎞/ 삼가리 6.3㎞)’은 널따란 주차장이 눈길을 끈다. 여느 지자체나 할 것 없이 요즘은 ‘귀농·귀촌’을 화두로 내거는 추세다. 그러면서 정주(定住) 여건 개선에 심혈을 기울인다. 저 주차장도 그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 자락길은 중앙선 철로의 아래를 통과한다. 이 굴다리를 경계로 금계리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백리가 시작된다. 시내로 들어섰다고 보면 되겠다.

▼ 시내로 들어서자 건물이 굵직굵직해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영주소방서 풍기119안전센터. 자락길은 이곳을 경계로 ‘승지길’과 ‘방천길’이 나뉜다. 이제껏 걸어온 승지길 대신 방천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 고개를 돌리자 주택가 너머에서 풍기역의 급수탑이 고개를 내민다. 열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저 탑은 전국 최대를 자랑했었다고 한다. 그러니 풍기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왔을 게 자명하다. 증기기관차가 사라지면서 옛 물탱크는 풍기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가 지금은 ‘풍기인삼 홍보탑’이 되었다.

▼ 소방서와 예수재림교회(제칠일안식일)의 사이로 난 길을 3분쯤 걸으면 남원천(이정표 : 희방사역 6,2㎞/ 삼가리 7.7㎞)이 얼굴을 내민다. 이제 자락길은 ‘방천길’이라는 구간 이름에 걸맞게 남원천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했던가. 앞서가던 이대장이 길을 잃고 허둥댄다. ‘풍기1교’ 아래로 나있는 탐방로를 놓치고 도로 위로 올라선 게 발단. 보행자길(步道)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산행대장의 오랜 경력이 어디 가겠는가. 잠시 후 5번 국도가 지나가는 풍기교 아래에서 제 길을 찾아냈다.

▼ 이후부터는 소백산을 진행방향에 놓고 걷는다. 물길이 만들어놓은 주변 들녘이 제법 넓다. 대신 단조로운 풍경이 계속해서 펼쳐진다는 단점이 있다.

▼ 탐방로는 중앙고속도로와 중앙선 철도(청량리-경주)를 좌우에 끼고 이어진다. 때문에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잘 생긴 외모의 KTX 열차를 눈에 담을 수도 있다. 함께 걷던 이대장의 말로는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최신형이란다.

▼ 방천길의 가장 큰 아쉬움은 햇볕을 가려줄만한 나무가 일절 없다는 것이다. 길이도 7km나 된다. 여름철 최악의 코스로 꼽히는 이유이다. 지자체도 그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두어 곳에 숲을 낀 쉼터를 만들어 놓았는데 ‘습지 생태쉼터’도 그 가운데 하나다. 굵직한 능수버들 숲속에 정자와 파고라를 짓고, 벤치를 놓아 쉬어가기 딱 좋도록 했다.

▼ 둑길 오른편은 온통 사과밭 세상이다. 사과가 인견 및 인삼과 함께 풍기를 대표한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이는 배수가 잘 되는 토양과 일교차가 심한 기후 덕분이란다. ‘사양토’가 생육에 도움을 주고, 큰 일교차는 과일의 육질을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까치밥’이 감나무만의 전유물은 아닌 모양이다. 사과나무에도 저렇게 몇 개의 열매를 남겨놓은 걸 보면 말이다. 하긴 날짐승이 어디 ‘감’만 먹고 살겠는가. 아무튼 우리네 선조들은 씨앗을 심어도 셋을 심었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새)이, 둘은 땅(벌레), 나머지 하나만 내가 먹겠다는 뜻에서였단다.

▼ 하천 생태를 복원하고 천변 둔치를 재정비하는 등 명품하천으로 바뀐 하류와는 달리 상류는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다. 참고로 남원천은 소백산 죽령에서 발원해 수철리를 지나 풍기를 관통한다. 여행객들이 숙식하던 남원(南院)에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 길을 가다보면 ‘풍기온천리조트’가 눈에 들어온다. 불소가 함유된 알칼리성 온천으로 지하 800m 심층에서 분출하는 100% 천연원수에 몸을 담글 수 있단다. 하지만 온천보다는 그 뒤로 보이는 고개를 소개하기 위해 카메라에 담아봤다. 새로 난 자락길(2구간)이 저 두 산봉우리 사이 ‘곰내미 고개’를 넘어오기 때문이다.

▼ 남원천변으로 내려선지 1시간 남짓. 창랑역(昌樂驛)이 있었다는 널따란 옛터는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역(驛)이란 나라의 통신 및 운송기관으로 공문서의 전달, 출장하는 관리나 외국 사신의 숙박, 마필공급(馬匹供給), 공물·관물의 수송 등을 돕던 기관이다. 전국을 40개 구역(538개 역)으로 나누고 그 중심에 찰방(종6품)을 두어 주변 역들까지 관리시켰는데, 이곳 창락역은 죽동(순흥), 평은(영주), 안교(안동) 등 9개 역을 거느린 중심 역이었다고 한다.

▼ 역(驛)에 걸맞게 조형물은 안장을 올린 말이다. 다리 근육이 튼실한 것이 참 잘 달리게 생겼다. 이밖에도 선정을 베풀었음직한 찰방의 공적비와 역사의 주춧돌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유적지 옆의 거대한 느티나무는 쉼터로 활용했다. 그늘에 평상과 벤치를 놓았는가 하면, 이름표(창락역 쉼터)를 단 이정표(소백산역 0.9㎞/ 풍기읍사무소 5.5㎞)까지 세웠다.

▼ ‘방천길’은 남원천의 제방 위로 나있다. 때문에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별로 없다. 그저 도솔봉과 연화봉 등 소백산의 군봉들과 사과밭이 다라고나 할까?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걷는 자 말고도 타는 자. 즉 자전거 라이더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 했다. 볼거리가 드물다보니 고속도로의 교각까지도 멋진 풍경화로 둔갑한다.

▼ ‘이 뭐꼬!’. 성철스님이 던졌다는 화두가 아니고, 아라베스크 문양을 떠올리게 만드는 담벼락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저런 형이상학적인 문양으로 포장된 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지만 담벼락 안은 텅 비어 있었다.

▼ 창랑역에서 20분. 희방사역에 가까워질 무렵 화장실까지 갖춘 작은 공원을 만났다. 이정표(소백산역 0.1㎞/ 풍기읍사무소 6.75㎞)는 이곳을 ‘무쇠다리 쉼터’로 적었다. 삼국시대에 놓은 ‘무쇠다리’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의 무쇠다리는 사라진지 이미 오래, ‘둑다리’로 남아 있다가 1940년대 초 중앙선 철도가 놓이면서 이마저도 없어졌단다. 그렇다면 1m 남짓한 저 다리는 쉼터를 조성하면서 함께 복원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지자체는 돌탑을 세워 무쇠다리에 대한 역사를 알려준다. 신라시대 동굴에서 참선하던 두운스님이 목구멍에 비녀가 걸린 호랑이를 구해준다.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호랑이는 큰 멧돼지를 잡아왔지만, 육식을 금하는 스님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또 어느 날은 아름다운 여인을 물어왔고, 깜짝 놀란 스님은 연고를 물어 경주의 집까지 데려다 준다. 여인의 부친인 호장은 고마운 마음에 스님이 거처할 암자를 짓고, 편히 다닐 수 있도록 계곡에 무쇠다리를 놓아 준다. 그 암자가 기쁠 희(喜)자에 두운 스님이 참선하던 방을 상징하는 방(方)자를 딴 ‘희방사’라고 전해진다.

▼ 자락길은 옛 중앙선 철도로 인해 생긴 굴다리를 지난다. 이 굴다리는 원래 반은 사람이, 반은 물이 지나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고쳐졌고, 조명까지 달아가며 한껏 멋을 부렸다. 이로 인해 철길이 나면서 끊어졌던 농로가 다시 이어졌는가 하면, 삭막하기 십상인 시멘트 벽면의 단점은 스리슬쩍 사라졌다.

▼ 터널을 통과하면 ‘수철리’. 방금 전 보았던 무쇠다리가 ‘무쇠달’로 바뀌고 수철리가 되었다. 철길이 마을을 가로질러 지나는 이 마을은 민박과 게스트하우스에 식당까지 들어선 어엿한 관광타운이다. 또한 이름난 세 개의 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희방사 옛길’과 1900년의 역사를 지닌 ‘죽령 옛길’, 그리고 우리가 걷고 있는 소백산 12자락길 중 3자락길이 여기서 시작된다.

▼ 잠시 후 만난 희방사역은 현재 문이 닫혔다. 중앙선 복선화로 인해 지난해 12월 이곳을 지나는 구간이 폐선(廢線)되면서 희방사역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해 5만여 명의 승객이 오고 갈 정도로 활기찬 역이었다. 역사를 기점으로 하는 둘레길이나 소백산등산로를 체력에 맞게 탐방하고 마을 식당에서 막걸리 한잔과 간단한 안주로 요기를 한 후 막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당일치기 코스가 나름 인기 있었기 때문이다.

▼ 희방사역은 현재 열차가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만큼은 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로 새롭게 태어났다. 잠시 앉아 원두커피의 향과 함께 지나온 자락길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다. 특히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은 무조건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한다니 한번쯤은 꼭 들러볼 일이다.

▼ 희방사역 마당에는 화방사와 무쇠다리의 설화를 적은 안내판과 함께 ‘무쇠달 마을’ 방문을 환영하는 장승을 세워놓았다. 행복한 ‘마실’을 우리 함께 가자면서 말이다.

▼ 날머리는 희방사역 주차장(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역사 옆 주차장에는 열차펜션(카라반 형식)이 들어서 있었다. 마을 공동체인 ‘무쇠달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시설인데, 문이 닫혀있었지만 여행의 운치를 더해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12.16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치악산 둘레길 8코스(거북바우길)

 

여행일 : ‘21. 9. 25(토)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일원

여행코스 : 용소막성당→한국사 입구→구학산 전망대→거북바우→구학산주차장→방학동 정류장→구학리 희망캠핑장(거리 및 시간 : 11.4km/ 실제는 11.53km를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치악산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총 길이 140㎞의 둘레길로 치악산국립공원을 넘나든다. 치악산이 거느린 작은 산도 오르고, 원주혁신도시와 작은 산골 마을도 지난다. 11개의 코스로 나누어져 있는데 관할지자체도 세 곳이나 된다. 하여 원주시가 길 조성을 주도했고, 횡성군과 영월군이 거들었다. 치악산은 험하기로 소문난 산이다. 정상을 오르다 보면 ‘치’가 떨리고 ‘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는 낱말풀이까지 생겨났을 정도이다. 하지만 치악산둘레길은 다채로운 풍광을 감상하며 걷기 좋은 순한 길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은 104.5㎞에 이르는 원주 권역의 ‘거북바우길(8코스)’을 걷는다. 신령스러운데다 잘 생기기까지 한 ‘거북바우’를 중간에 만날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보다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구학산 숲길을 걷는다는 매력이 더 뛰어난 구간이다.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곧 힐링으로 승화되는 코스라고 보면 되겠다.

 

▼ 들머리는 ‘용소막 성당’ 앞 주차장(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719-2)

중앙고속도로 신림 IC에서 내려와 제천방향 88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신림삼거리에서 좌회전 해 5번 국도를 따르면 금방 용암삼거리다. 이곳에서 우회전 해 작은 다리를 건너면 용소막성당의 첨탑이 바로 보인다. 성당 앞에 마련된 널따란 주차장이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 치악산둘레길의 종합안내판은 주차장 한켠에 세워져 있다. 종합안내도를 가운데에 두고 왼편에 8코스(거북바우길), 오른편에는 7코스(싸리치옛길)을 배치했다. 이곳이 7코스와 8코스의 경계지점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 코스지도 보관함 옆에 세워놓은 7코스의 스탬프보관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9.8km나 되는 코스의 중간에 저것 하나 세워놓을 공간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 8코스인 ‘거북바우길’은 신림면의 용소막성당에서 출발해 역시 신림면인 석기동에서 끝을 맺는다. 거리는 11.4km. 중간에 구학산을 넘기도 하나 중턱쯤에서 횡단을 해버리는데다, 조금이라도 경사가 심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기 때문에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저 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풍광들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8코스 안내판에서도 ‘구학산 둘레 숲길’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 먼저 ‘용소막 성당(강원도 유형문화재 106호)’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다소 낯선 장소겠지만, 풍수원성당과 원주성당(현 원동주교좌성당)에 이어 강원도에 세 번째로 설립된 역사가 깊은 성당이다. 역사만큼이나 생김새도 고상하다. 고딕양식의 벽돌 건물로 서울 명동대성당을 쏙 빼다 닮았다. 두메산골인 이곳에 신앙이 전파된 것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 때문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첩첩산중이던 용소막 인근에 흩어져 살았다. 이후 1893년부터 용소막으로 신자들이 이사를 왔고, 1898년 풍수원본당 전교회장으로 활발히 전교활동을 하던 최도철(바르나바)까지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됐다. 그는 1898년 대여섯 명의 교우들과 신부 방이 포함된 초가 열 칸의 아담한 경당을 지었고, 원주본당 관할의 ‘용소막 공소’ 초대 회장을 맡았다. 1904년 용소막은 본당으로 승격됐고, 교세가 커지자 3대 주임이던 시잘레 신부는 성당 신축에 나서 1915년 가을 현재의 성당을 완공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성당 또한 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원형을 거의 보존할 수 있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제106호)로 지정됐다.

▼ 본당 왼쪽에는 선종완(라우렌시오) 신부의 유물관(오른쪽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물은 ‘피정의 집’이다)이 있었다. 그가 사용하던 낡은 책상을 비롯한 유품 380여점과 각종 서적류 300여권을 전시하는 곳이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문을 닫았기에 그의 약력이나 살펴보기로 한다. 이곳(성당 앞에 그의 생가 터가 있다)에서 나고 자란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히브리어와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의 원문을 번역한 성경학자다. 그는 또 1960년에 ‘성모영보수도원’을 설립했는데 당시 수녀원 지원 시 필수 조건이었던 ‘학력’에 대한 제한을 없앴다고 한다. 그의 이념은 노동에 근거한 철저한 자립과 봉사였단다.

▼ 낡은 종탑이 예스러움을 전하는 사제관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올라가 볼 수 없었다. 언덕 아래에 조성된 성체조배실(聖體朝拜室)도 문이 닫혀있어 그냥 통과다. 그저 성모상 앞에서 오늘 트레킹을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빈 것이 전부라고나 할까? 거기다 덧붙인 내 가족과 이웃의 건강과 행복은 덤이고 말이다.

▼ 성당의 앞마당에는 수령 160년이 훌쩍 넘은 느티나무 다섯 그루(보호수)가 성당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어 고즈넉한 운치를 더한다. 숲속에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글귀가 새겨진 빗돌도 세워져 있었다. 1989년 서울에서 열렸던 제44차 세계성체대회의 주제(당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너희는 이를 행하라’,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라는 부제도 갖고 있었다)인데 이를 되새기자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뿐만 아니라 성당 설립 일백주년을 맞아 신도들의 신앙고백을 적어 넣은 빗돌도 눈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성당을 모두 둘러봤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트레킹을 나설 차례이다. 백운방면의 지방도(597번)를 걷다가 200m쯤 떨어진 곳(이정표 : 석동종점 11.2㎞)에서 도로를 벗어나 농로로 들어선다.

▼ 구학천(이정표 : 석동종점 11.0㎞/ 용소막성당 0.4㎞)에 이른 탐방로는 이제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다가 용암교(이정표 : 석동종점 10.7㎞)를 건너 이번에는 개울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이어진다.

▼ 이때 용암리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데, 너른 들녘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한 가득이다. 보릿고개로 허리를 졸라매는 게 익숙할 자연환경에서 풍요로움이라니 이 얼마나 난데없는 풍경인가. 하지만 그렇게 놀랄 일 만은 아니다. 관정을 뚫고 지하수를 모터로 끌어 올려 물의 양을 측정하는 시험이 전국 최초로 이 일대(신림 마지들)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964년의 일인데 천수답을 수리안전답으로 바꾸는 사업의 효시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 식량증산도 다른 곳보다 먼저 이루어지지 않았겠는가.

▼ 길을 나선지 13분. 용암리의 자연부락 가운데 하나인 ‘당뒤(‘당후’라고도 하는데 서낭당 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마을에 이르니 마을 어귀에 작은 숲(이정표 : 석동종점 10.5㎞/ 용소막성당 0.9㎞)이 조성되어 있다. 범위가 크지는 않지만 비술나무와 느티나무, 시무나무 등 200년 가까이나 묵은 노거수들이 집단으로 자라고 있어 마을 숲으로 손색이 없는 풍광을 보여준다. 그래선지 마을 주민들은 이 숲을 신성시 여긴다고 한다. 숲속에 서낭당을 짓고 매년 음력 9월9일마다 제사를 지내오고 있단다.

▼ 보호수인 시무나무 그늘 아래에는 당집 말고도 정자가 들어앉았다. 이 공간이 마을 주민들의 커뮤니티(community)로 이용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쯤에서 튀어나오는 의문 하나. 이 마을의 커뮤니티는 혈연공동체일까 아니면 지연공동체일까? 아니 이 둘은 대개 중첩되고 있으니 그게 무는 대수겠는가. 그저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삶에 중요한 위치를 점해왔다는 점만 알아두면 될 것을.

▼ 오늘의 꽃은 한국사로 가는 개울가에서 만난 ‘망초’를 꼽아봤다. 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이라는데 오늘따라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하긴 망초가 밭에 자라면 농사를 망치고, 농사를 망치면 나라가 기운다고 해서 ‘망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까지 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 제방을 따라 조금 더 걷다보면 ‘탑골’마을 입구(이정표 : 석동종점 9.9㎞/ 용소막성당 1.5㎞)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나무 아래에 서낭당이 지어져 있는 걸 보면 탑골마을을 지켜주는 당목(堂木)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눈물을 흘리는 신비한 부처님 계시는 도량, 구인암’이라는 문구가 특이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구인암의 돌부처(약사여래 좌불상)가 나라의 길흉이 있을 때 마다 어김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과 기각이 확정될 때, 대구 지하철 참사와 태풍·폭설 때도 며칠 전부터 어김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1km라는 거리도 부담스러웠지만, 설사 가본다고 해도 눈물이 멈춰진 부처야 다 그게 그거 아니겠는가.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한국사’라는 사찰이 반긴다. 탐방로는 이 절의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산길로 올라선다. 들머리에 이정표(석동종점 9.8㎞/ 용소막성당 1.6㎞)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길가에 있는 사찰이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용무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에도 불구하고 살짝 엿보기로 했다. 하지만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라는 것 외에는 그 어떠한 정보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저 대웅전과 그 뒤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작은 전각, 그리고 요사채만 눈에 담았을 뿐이다.

▼ 길가 철망에 뱀·벌·멧돼지·독충을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이 총 망라되었으니 조심 또 조심할 일이다.

▼ 산속으로 들어서자마자 임도(이정표 : 석동종점 9.6㎞/ 용소막성당 1.8㎞)와 맞닥뜨린다. 탐방로는 임도를 가로질러 산자락을 파고든다.

▼ ‘8코스(거북바우길)’의 게이트는 임도의 바로 위에 있었다. 치악산둘레길의 특징대로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오르게 될 ‘구학산(九鶴山)’은 원주시 신림면과 충북 제천시 백운면에 걸쳐 있는 높이 983m의 산이다. ‘구학’이란 지명은 옛날 이 산에 살던 학 아홉 마리가 사방으로 날아갔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학들이 날아간 아홉 곳(신림지역의 황학동·상학동·선학동과 봉양지역의 구학리·학산리, 그리고 충북 영동의 황학동, 백운면의 방학리·운학리와 송학면의 송학산)도 역시 ‘학’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 구학산으로 오르는 길은 오뉴월 뙤약볕이라도 내리쬘 경우 고생 깨나 해야만 하는 구간이다. 산 사면을 간벌한 탓에 그늘 한번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좋은 점도 있다. 오르는 내내 시야가 열리면서 용암리의 들녘과 첩첩이 쌓여있는 강원도의 산들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 산자락은 엄청나게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흡사 뱀이라도 되는 양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위로 오르기 때문이다. 그것도 좌우의 간격을 길게 해서 경사를 최대한으로 누그러뜨렸다.

▼ 게이트를 통과한지 20분 만에 ‘구학산전망대(이정표 : 석동종점 8.8㎞/ 용소막성당 2.6㎞)’에 올라섰다. 구학산(九鶴山, 983m)의 5부 능선, 그러니까 해발이 483m쯤 되는 곳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이다. 이곳은 또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한 이들을 위해 쉼터가 되어주기도 한다. 참! 8코스(거북바우길)의 두 인증지점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깜빡 빼먹을 뻔했다.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으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

▼ 명색이 전망대이니 일단 조망부터 살펴보자. 발아래로는 조금 전 끙끙거리며 올라왔던 탐방로가 ‘갈 지(之)’자를 쓰고 있다. 오르는 도중 ‘전망대’로 오인하고 둘러봤던 쉼터도 보인다. 아니 오인할 일도 아니다. 저곳에서도 시야가 툭 트이기 때문이다.

▼ 오른편으로 시선을 옮기자 이번에는 용암리(신림면)의 들녘이 펼쳐진다. 치학산과 구학산, 감악산 등 높은 산들이 감싸고 있는 산간마을이지만, 구학천이 서쪽에서 흘러와 동쪽의 주포천으로 유입되면서 하천 주변으로 제법 널따란 충적평야를 만들어내고 있다. 들녘 뒤로는 감악산의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어낸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 전망대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울창한 숲속으로 파고든다. 이삼십 년쯤 묵은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난 산길은 걷는 자체만으로 행복해진다. 코끝을 스쳐가는 짙은 솔향기가 심신을 맑게 해주니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저 솔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도 듬뿍 들어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길은 웰빙, 아니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행복한 길이다.

▼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오른 낙엽송(일본잎갈나무) 군락지를 지나기도 한다. 언젠가도 얘기했다시피 낙엽송은 초봄의 연두색 신록과 가을의 황금빛 단풍이 특히 아름답다고 알려진다. 아직은 제철이 아니지만 한 달쯤 뒤에 찾아온다면 더욱 풍성한 색감으로 물든 숲을 눈에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참! 낙엽송은 침엽수(소나무류) 가운데 겨울에 낙엽이 지는 유일한 수종이기도 하다.

▼ 잠시 후 눈에 익은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5코스(서마니강변길)에서 만났던 그 구절강장(九折羊腸)의 산길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이런 길을 그냥 놓아두는 것은 낭비라 여겨진다. 길가의 나무를 관목(灌木)으로 바꾸는 등 조금만 더 치장을 한다면 세상에 내놓을만한 풍경으로 바뀔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에도 장가계의 통천대도(通天大道: 하늘로 통하는 길) 같은 명소가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 낮과 밤이 같다는 추분이 그제였으니 이젠 완연한 가을이다. 오늘 새벽 집밖으로 나서면서 바람막이 옷을 하나 더 걸쳤던 게 그 증거라 하겠다. 그 증거는 산속에도 있었다. 부지런을 떠는 것들에 한해서지만 간간히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최근 비가 많이 내렸었는지 골짜기마다 물소리가 거세다. 이렇게 높고 깊은 산골짜기에서 듣는 물소리는 언제 들어도 청량하다.

▼ 전망대에서 출발한지 15분 만에 임도(이정표 : 7.8㎞/ 용소막성당 3.6㎞)에 내려섰다. 어디서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몰라도 길이 너른데다 정비까지 잘되어 있다. 임도의 기능을 아직까지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평지와 다름없는 완만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원시의 숲을 연상시키는 울창한 숲속을 지난다.

▼ 잠시 후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석동종점 7.6㎞/ 용소막성당 3.8㎞)는 이곳이 ‘자작골 삼거리’라고 알려준다. 자작나무 군락지가 주면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 오른편에 위치한 박달정으로 오르다보면 울창한 자작나무 숲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흡사 분칠이라도 한 듯 하얗게 치장을 한 나무들이 무리를 이뤄 하늘로 치솟고 있단다.

▼ 이곳에는 ‘구학산둘레숲길’의 이정표도 세워져 있었다. 맞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원주 굽이길’의 26개 코스 가운데 하나(순환코스)인 ‘구학산둘레숲길’을 역방향으로 빌려 쓴다. ‘원주굽이길’은 원주시청을 기점으로 신림면 황둔리까지 연결된 17개의 편도 코스와 9개의 순환코스 등 26개로 조성돼 있다. 시는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26개 코스 360㎞를 개설한 데 이어 올해 4개 코스 40㎞를 추가해 총 30개 코스 400㎞의 굽이길 전 구간을 개통했다.

▼ 임도는 자동차가 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아래 사진처럼 사유지가 많고, 그곳에 뭔가를 재배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잠시 후 돌을 쌓아올린 축대가 눈에 띈다. 아니 들녘을 연상시킬 정도로 널따란 분지 곳곳에는 이런 축대가 겹겹이 둘러쳐져 있었다. 자그만 개울까지 있는 걸 보면, 옛날 이곳에 화전민 마을이라도 들어서 있었을지 모르겠다.

▼ 다시 나타난 솔숲.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는 짙은 솔향기가 배어있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고 듬뿍 들어있을 것이다. 그러니 코로나19-펜데믹에 매몰되어 너무 ‘방콕’만 하지 말고 이런 ‘에코 힐링 산소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그동안 잊어왔던 상쾌한 공기도 실컷 마시면서 말이다. 다만 어울려 걷지는 말고, 혼자서 유유자적 할 것을 권한다.

▼ 둘레숲길로 들어선지 20분 조금 못되어 ‘보릿고개 개발두렁’에 올라섰다. 우리네 어릴 적에는 매년 ‘보릿고개’라는 힘든 기간이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보리를 거두기 전까지 먹을 것이 부족하여 다들 힘들어하던 시기다. 당시 먹거리를 얻기 위해 산을 계단식으로 개간하여 농작물을 재배했는데, 이 근처가 그 현장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구학산둘레숲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곳곳에 안전대피로를 만들어두었다는 점이다. 걷다가 자신의 체력이 달린다고 생각될 때에는 이 안전대피로를 이용해 코스를 단축하면 된다.

▼ ‘보릿고개 개발두렁’을 지나자 또 다시 오르막 구간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갈지자를 크게 쓰는 덕분에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도 올라설 수 있다.

▼ 지자체인 원주시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둘레길, 그것도 둘(치악산둘레길과 구학산둘레숲길)이 함께 지나가는 길목인데 어찌 점심상 차릴만한 곳 하나 없겠는가. 누군가가 땀 흘린 덕분에 우린 저런 멋진 쉼터를 만날 수 있다.

▼ 길가는 초록의 물결로 출렁거린다. 하지만 연초록이 아닌 진초록이다. 그만큼 가을이 깊어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도 귀가를 맴도는 새소리는 청량하기 짝이 없다. 이런 숲길을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상쾌함이 가슴 속 깊이 파고든다.

▼ 유비무환(有備無患)의 풍경도 엿볼 수 있었다. 물기 한 점 없는 작은 개울에 징검다리를 놓아둔 것이다. 장마철 폭우를 대비한 안전장치이다.

▼ 구학산 숲길에서는 야생화를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대신 이끼로 뒤덮인 연녹색 바위와 고비 같은 양치식물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만큼 습기가 많은 산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치악산둘레길의 구학산 구간은 원주굽이길과 같이 운용된다. 그래선지 이정표와 안내판 등 시설물들이 중첩되어 있어 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 ‘보릿고개 개발두렁’을 출발한지 20분 만에 ‘구학정’에 올라섰다. 구학산둘레길의 이정표(철쭉동산 0.4㎞/ 보릿고개밭두렁 1.0㎞)는 이곳을 ‘층층나무골’로 적고 있었다. 조금 전에 지나왔던 ‘자작나무골’과 마찬가지로 이 근처에 층층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나무는 최근 공원의 조경수로 각광을 받는 추세라고 한다. 계단을 연상시킬 정도로 층을 이루는 나무의 기하학적인 모양새에 만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란다.

▼ ‘구학산둘레숲길 종합안내판’이 세워져 있기에 살펴봤다. 먼저 각 지점을 숫자로 표시한 게 눈길을 끈다. 그 순서에 따라 진행하면 길을 잃을 염려가 없을 게다. 또 다른 특징은 탐방객의 체력에 맞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구간마다의 거리와 함께 출발지점인 구학산주차장에서부터 걸어온 거리를 적어놓았으니 자신에 체력을 감안해 산책코스를 조정하면 된다.

▼ 두 번째 스탬프보관함은 ‘거북바우’에 이르기 바로 직전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쉼터용으로 놓아둔 벤치에서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막걸리 한 잔을 불쑥 내민다. 선두를 맡고 있는 윤대장이 술꾼인 나를 위해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 어찌 윤대장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쉼터의 바로 곁에서 만나게 되는 ‘거북 바우(바위의 방언)’는 8코스의 주인공이다. 오죽했으면 ‘거북바우길’이란 이름까지 얻어냈겠는가. 바위는 거북이가 구학산을 향해 머리를 들고 기어오르는 듯한 모양새라고 한다. 예로부터 구학산에는 아홉 마리의 학과 함께 거북이(龜)가 살고 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는데, 그게 저 바위로 나타났는지도 모르겠다.

▼ 아래 사진은 반대방향에서 촬영한 ‘거북바우’다. 더 확실한 모양새가 나온다는 윤대장의 귀띔에 따른 것인데, 내 눈에는 그게 그거로 보일 따름이다. 그나저나 저 바위는 길조를 상징하는 학(鶴)에 장수를 의미하는 거북이(龜)가 더해진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걸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잠깐이나마 멈춰 서서 그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가 보자.

▼ 탐방로는 길을 새로 내느라 고생한 흔적들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허리를 바짝 곧추세운 산비탈을 헤집으며 길을 내다보니 절벽의 위를 걷는 모양새가 되었다. 지자체는 그게 위태로워 보였던 모양이다. 산비탈 쪽에 밧줄난간을 설치해 안전을 도모했다.

▼ 걷기 딱 좋은 산길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그리고 철쭉동산(이정표 : 석동종점 5.2㎞/ 용소막성당 6.2㎞)과 산오리나무골(이정표 : 석동종점 4.7㎞/ 용소막성당 6.7㎞), 삼형제나무(이정표 : 석동종점 4.0㎞/ 용소막성당 7.4㎞) 등 주요 포인트를 지나자 아치형 게이트(이정표 : 석동종점 3.1㎞/ 용소막성당 8.3㎞)가 이제 산행이 끝났다며 길손을 맞는다. 반대편 게이트에서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40분만이다.

▼ 게이트를 벗어나 마을을 만나는가 싶으면, 이어서 잠시 후에는 구학산주차장에 내려선다. 이곳은 ‘구학산둘레숲길’의 출발지이자 도착지이다. 그래선지 주차시설 말고도 정자를 지어 내방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탐방을 마치고 내려오는 이들을 위해 ‘먼지 털이기’까지 설치하는 배려가 돋보인다. 안내도도 ‘치악산둘레길’이 아니라 ‘구학산둘레숲길’을, 그것도 비슷한 내용으로 두 개나 세워놓았다. 그저 외로운 이정표(8-3 : 석동종점 2.6㎞/ 용소막성당 8.8㎞) 하나만이 이곳이 치악산둘레길의 중요한 포인트 가운데 하나(구학산주차장)임을 알려준다.

▼ 주차장을 벗어난 탐방로는 이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른다. 느티나무가 숲의 터널을 만들어주는 걸으면 걸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구간이다.

▼ 그래선지 주변의 건물들까지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도 너와로 지붕을 인 구학산방(펜션)이 특히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래 사진은 ‘칠부능선’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는데, 구학산방에 포함된 시설이 아닐까 싶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전형적인 시골길(방학동길)을 걷게 된다. 개울가를 따라 내려가는데 중간에 두어 채의 전원주택(펜션일지도 모르겠다)을 만날 뿐, 길은 오롯이 산자락과 개울 사이를 헤집으며 나있다. 참! 중간에 갈림길을 두어 번 만났으나 이정표가 잘 되어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 구학마을경로당(이정표 : 석동종점 0.9㎞/ 용소막성당 10.5㎞)과 구학교회를 스치듯 지나면 ‘방학동버스정류장’이다. 주차장에서 25분쯤 떨어진 지점인데, 탐방로는 이곳에서 597번 지방도와 만난다. 그건 그렇고 이곳에는 비각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염신식(廉信植)의 처 ‘정선 전씨(旌善 全氏)’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해 면민(面民)이 건립한 비각으로 안에는 열녀비(烈女碑)가 모셔져 있다. 함경도 출신의 부부로, 이곳 신림면 구미동으로 이주하여 단란하게 살다가 남편이 병들어 죽자, 절개가 굳은 아내가 남편이 죽은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은 채 식음을 전폐하다가 9일 만에 남편을 따라 죽었단다.

▼ 8코스의 날머리는 ‘석동 버스정류장(22번 버스 종점, 방학동정류장에서 0.7km 떨어진 지점)’이다. 방학동버스정류장에서 ‘백운’ 방면의 597번 지방도를 따라 잠시 걷다가 첫 번째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들어서면 된다. 하지만 윤대장의 발걸음은 반대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석동 종점에 대형버스를 주차시킬 만한 공간이 없어 부득이 날머리를 변경했단다.

▼ 트레킹 날머리는 ‘구학리 희망캠핑장’(원주시 신림면 구학리 273)
신림방면으로 200m쯤 내려왔을까 도로변에 ‘희망캠핑장’이 들어서있다. 1996년 폐교된 구학분교(신림초등학교)의 시설을 보수해 문을 연 캠핑장이다. 구학리 마을청년회에서 운영한다는데, 마음씨 좋게도 캠핑장 시설의 이용을 허용해주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을 걸었다. 물론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은 뺐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1.53km. 코스의 대부분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빨리 걸은 셈이다. 그만큼 걷기가 편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치악산 둘레길 5코스(서마니강변길)

 

여행일 : ‘21. 8. 28(토)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과 영월군 무릉도원면 일원

여행코스 : 황둔 찐빵마을→초치→중골 전망쉼터→서마니등산로 정상→송계교→서마니표지석→황둔 찐빵마을(거리 및 시간 : 10.4km/ 실제는 12.92km를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치악산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총 길이 140㎞의 둘레길로 치악산국립공원을 넘나든다. 치악산이 거느린 작은 산도 오르고, 원주혁신도시와 작은 산골 마을도 지난다. 11개의 코스로 나누어져 있는데 관할지자체도 세 곳이나 된다. 하여 원주시가 길 조성을 주도했고, 횡성군과 영월군이 거들었다. 치악산은 험하기로 소문난 산이다. 정상을 오르다 보면 ‘치’가 떨리고 ‘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는 낱말풀이까지 생겨났을 정도이다. 하지만 치악산둘레길은 다채로운 풍광을 감상하며 걷기 좋은 순한 길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은 104.5㎞에 이르는 원주 권역의 ‘서마니 강변길’을 걷는다. 경관이 빼어난 서마니 강변을 따라 걷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보다는 매봉산과 희봉산을 잇는 능선의 일부분을 걷는 게 주를 이룬다. 이때 자작나무, 소나무, 낙엽송 등이 어우러진 명품 숲길을 따라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들머리는 황둔초등학교 앞 주차장(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350)

중앙고속도로 신림 IC에서 내려와 88번 지방도를 타고 영월방면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신림터널이 나오고, 계속해서 주천면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찐빵으로 유명한 ‘황둔마을’에 이르게 된다. 마을로 들어가기 직전 왼편에 황둔초등학교가 보이는데, 학교 앞에 조성해놓은 커다란 주차장이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 5코스인 ‘서마니 강변길’은 찐빵으로 유명한 ‘황둔마을’이 들머리와 날머리를 겸한다. 원래의 들머리는 ‘초치 고갯마루’. 초치를 출발해 황둔마을에 이르는 10.4km짜리 구간이지만, 초치 고갯마루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곳 황둔마을에서 40분 정도를 올라가야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고도를 260여m나 높여야만 한다.

▼ 학교 앞은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각종 놀이기구를 배치했는가 하면,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특히 목책까지 둘러놓은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한 줄기에서 여러 개의 가지가 갈려나오는 만지송(萬枝松)을 쏙 빼닮았는데, 명품송의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겠다. 전국의 유명 명품송들에 조금도 뒤질 게 없어 보이니 말이다.

▼ 들머리는 주차장의 오른쪽 귀퉁이에서 열린다. 황둔초등학교 울타리를 따라가다 자그만 인도교를 건너면 황둔중학교 앞. 이후부터는 마을안길인 ‘중골길’을 따르면 된다.

▼ 마을을 벗어나자 강원도의 풍경이 여과 없이 펼쳐진다. 강원도의 특산물 하면 감자와 옥수수를 꼽는 게 보통이다. 예로부터 죽으로 끓여먹고 떡으로 빚어먹고 부침개로 해먹었을 정도로 자주 상에 올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하나를 더하라면 비탈에서도 잘 자라는 고추가 아닐까 싶다. 그 가운데 옥수수와 고추가 길 양쪽에서 자라고 있으니 이만하면 전형적인 강원도 풍경이 아니겠는가.

▼ 길은 개울을 따라 나있다. 웃자란 잡초에 가려 드러나진 않지만 물소리가 제법 사납다. 연일 계속되는 장마에 물이 불어났다는 증거일 것이다.

▼ 길을 나선지 15분쯤 지났을까 산비탈에 들어선 한옥 몇 채가 눈에 들어왔다. ‘한림한옥’이라는 펜션인데 저런 한옥들 말고도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너와집에서도 하룻밤 머물 수 있단다.

 

▼ 길은 점차 경사도를 높여간다. 길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개울도 이에 뒤질세라 낙차를 부풀린다. 그리고는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폭포를 만들어낸다. 단조로울 수밖에 없는 골짜기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둔갑하는 순간이다.

▼ 한림한옥에서 10분쯤 더 걸으면 탐방로가 임도를 벗어나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그렇다고 오솔길은 아니다. 비포장이라서 조금 거칠어지기는 했지만 널찍한 것이 임도나 다름없다.

▼ 길은 고운 편이다. 산속으로 들어섰는데도 여전히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둔초등학교에서 초치까지의 거리가 2.6km나 되다보니 260m 정도의 고도는 느긋이 끌어올려도 되는 모양이다.

▼ 오르는 도중 컨테이너와 움막집 등 사람이 살았음직한 흔적도 만날 수 있었다. 산을 내려오고 있는 동네 주민들도 몇 눈에 띄었다. 손에 들린 버섯자루가 제법 묵직한 걸 보면 얻을 게 제법 많은 산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0분. 5코스(서마니 강변길)가 시작되는 ‘초치(初峙·620m)’에 올라섰다. 옛날 송계·황둔마을 주민들이 안흥장을 보러 다닐 때 넘어 다니던 고갯마루이다. 참! 반대편 4코스(노구소길)의 ‘두산임도’에는 중치와 말치라는 2개의 고개가 더 있다고 했다. 이곳 초치를 포함해서 넘어가는 순서에 따라 붙여진 지명이라고 보면 되겠다.

▼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한 고갯마루에는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이정표(황둔 하나로마트 10.4㎞/ 태종대 26.5㎞). 순방향(5코스, 푸른색)과 역방향(4코스, 붉은색)의 색깔을 각기 다르게 입힌 게 눈길을 끈다. 둘레길 지도도 눈에 띈다. 종합안내도를 가운데에 두고 양옆에 4·5코스의 지도를 배치했으니 꼼꼼히 살펴보는 지혜를 발휘해보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5코스(서마니강변길)’는 원주굽이길(총 30개 코스 400㎞)의 16코스인 ‘황둔쌀찐빵길’과 겹친다. 다만 황둔찐빵길의 출발지가 ‘초치’가 아닌 황둔리의 ‘소야버스정류장’이라는 게 다를 뿐이다. 서마니강변길에다 황둔마을에서 초치까지의 어프로치구간을 합친 것이 ‘황둔찐빵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 아치형 대문으로 들어서면서 5코스가 시작된다. 그동안 만나왔던 문들은 어김없이 산길이 시작되거나 끝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니 5코스는 시작부터 산길인 셈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자작나무와 나란히 걷는다. 자작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길을 내놓은 것이다. 조림한지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환한 자작나무를 바라보며 걷다보면 마음마저 밝아지는 기분이다.

▼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낙엽송(일본잎갈나무)도 나도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땅속에 진흙과 잔모래가 많이 섞여 있을수록 자람이 좋다고 했으니 저 나무들은 자리를 잘 잡은 셈이다. 하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 낙엽송 군락지를 지나자 또 다시 얼굴을 내미는 자작나무 숲. 이 구간에는 야자매트를 깔아놓았다. 그런데 계단 모양의 생김새가 눈길을 끈다. 궁여지책(窮餘之策).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가파른 경사가 만들어놓은 지혜가 아닐까 싶다.

▼ 초치를 출발한지 15분 만에 ‘중골전망대’에 올라섰다. 5코스의 산길 구간에서 유일하게 시야가 열리는 곳이다. 쉼터를 겸한 전망대를 만들어놓은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이 구간은 매봉산(1,095m)에서 회봉산(回峰山·764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별도의 이름이 붙었지만 모두 치악산이라는 명산의 테두리이다. 5코스가 ‘치악산둘레길’에 포함된 이유일 것이다. 이런 명산에 나있는 둘레길이라면 더러는 속으로 깊이 들어와 걸어야 제 맛일 것이다. 거기에 땀 한 방울과 거친 숨소리 한 번 더해지면 금상첨화일 게고 말이다. 걷는 길에 노고가 더해져야만 볼 수 있는 그런 풍광을 이 구간에서는 걷는 내내 감상할 수 있다.

▼ 전망대에서 휘둘러보는 조망은 그야말로 첩첩산중 한가운데에 갇혀 있는 기분이다. 발아래로는 아까 올라왔던 중골계곡, 그 뒤로 감악산을 비롯한 강원도의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주천강에 에워싸여 반도 모양을 만들어낸다는 ‘서마니’까지 내려다보이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그런 풍광은 산행이 끝날 때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이곳은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낯익은 표지기가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둘레길 도반인 허총무. 총무가 직업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여러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명 산꾼이다. 또 다른 이는 그녀와 항상 붙어 다니는 여성분인데 표지기까지 매달고 다니는 걸 보면 보통 산꾼은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로 나타나는 탐방로는 대부분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면서 능선을 오르내린다. 그런데 그 폭이 하도 크다보니 경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맞다. 둘레길은 봉우리를 향해 가열차게 오르지 않는다는 게 등산로와 다른 점이다. 그러니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을 감상하거나 길벗과 담소 나누며 느긋하게 걸으면 되겠다. 그 벗이 오늘은 외씨버선길 도반이었던 ‘갑장(甲長)’이 되어주었다. 거의 모든 스냅 사진에 등장하는 분인데 챙겨온 소주 한잔 권하겠다며 초반부터 속도를 나에게 맞추고 있었다.

▼ 탐방로는 능선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길을 넓게 내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능선은 오른편(동쪽)은 원주시(신림면 송계리). 그리고 왼편(서쪽)은 영월군(무릉도원면 두산리)을 끼고 이어진다. 이 능선을 두고 원주산꾼들은 시계(市界), 영월군 산꾼들은 군계(郡界) 종주코스로 이용하고 있단다.

▼ 중골전망대를 출발한지 25분 만에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났다. 이정표(골안골정상 0.8㎞/ 황둔하나로마트 8,2㎞/ 초치 2.2㎞)의 방향표시는 왼편.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은 계야마을(송계리)로 연결되는 임도이다. 곧이어 나타나는 다른 삼거리(이정표 : 물안골정상 0.7㎞/ 초치 2.3㎞)에서는 오른편 방향이다.

▼ 산허리를 돌아가자 나타나는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골안골정상 0.4㎞/ 초치2.6㎞). 앞장서서 걷던 도반이 갑자기 걸음을 멈춰버린다. 산악회에서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이상하다면서 말이다. 며칠 전 이대장이 다른 산악회를 따라왔다가 우리를 위해 깔아놓은 모양인데 이게 독이 되어 버린 셈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나 할까?

▼ 조금 더 걷자 외딴집이 나타났다. 해발 600m의 고지대, 그것도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긴 이런 오지에 사람이 살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집 앞까지 뚫린 임도 덕분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탐방로는 외딴집 앞(이정표 : 골안골정상 0.2㎞, 황둔하나로마트 7.6㎞/ 초치 2.8㎞)에서 180도에 가깝게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 중골전망대를 출발한지 45분 만에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은 ‘골안골 정상’에 올라섰다.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2시간이 지났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고도는 717m. 5코스 전 구간을 통틀어 가장 높은 지점이라선지 이곳에도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덕분에 함께 걷던 갑장, 그리고 뒤따라온 후미대장과 함께 준비해간 술로 여독을 달랠 수 있었다. 특히 후미대장이 내놓은 연태고량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이런 맛에 트레킹을 나서는 모양이다.

▼ 펑퍼짐한 게 산봉우리는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5코스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라는 것까지 부정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서마니등산로 정상’이라고 적힌 팻말을 걸어놓은 이유일 것이다.

▼ 이곳에도 스탬프보관함이 세워져 있었다. 이정표(송계교 2.5㎞, 황둔 하나로마트 7.4㎞/ 초치 3.0㎞)는 걸어온 거리보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거리가 두 배나 더 길다고 적고 있는데도 말이다. 치악산둘레길이 갖고 있는 특징 중 하나라 하겠다. 여느 다른 둘레길들과는 달리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스탬프 보관함을 설치해 놓은 것이다.

▼ 쉴 만큼 쉬었으니 또 다시 길을 나설 차례. 송계교 방향으로 잠깐 내려서니 발아래로 ‘구절양장(九折羊腸)’의 산길이 펼쳐진다. 양의 창자처럼 이리저리 꼬부라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풍경이 아닌가. 맞다. 8년 전 은퇴기념으로 떠난 장가계에서 만났던 통천대도(通天大道: 하늘로 통하는 길)가 꼭 저랬었다. 하늘과 연결된다는 ‘천문동’으로 올라가는 아흔아홉 구비의 차도인데, 길의 양쪽이 천애절벽이라는 것만 빼면 눈앞에 펼쳐지는 저 생김새와 비슷했었다.

▼ 깊은 산속이니 산짐승의 놀이터 하나쯤 없겠는가. 옹달샘이 아니라 탐방로를 만들면서 우연히 생긴 웅덩이이나 산짐승 친구들이 목을 축이기에는 충분하다 하겠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 잠시 후 또 다른 구절양장의 도로가 나타난다. 아까 것만은 못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경이의 눈초리로 바라보기에는 충분하다. 아니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놓아두기에는 아까운 풍경이다. 길가의 나무를 관목(灌木)으로 바꾸는 등 조금만 더 치장을 한다면 세상에 내놓을만한 풍경으로 바뀌지 않을까 싶다.

▼ ‘갈 지(之)’자 행보를 끝낸 산길은 이제 한없이 부드러워 진다.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널따란 임도가 이어지는데, 가끔가다 개울을 만나기도 하지만 물이 적어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다. 이런 길은 일행들과 도란도란 얘기라도 나누며 걸으면 최상이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원시에 가까운 숲이 만들어내는 정취에 흠뻑 취해보면 될 일이고 말이다.

▼ 하산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대교펜션’에 도착했다. 서마니 강변 말고도 희봉산의 들머리가 되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꽤 입소문을 탄 펜션이다. 널따란 뒷마당에서 족구에 열중인 젊은이들이 그 증거이겠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411번 지방도와의 접점에는 치악산둘레길의 이정표(황둔 하나로마트 4.9㎞/ 초치 5.5㎞) 말고도 ‘숲속트레킹길’ 팻말 등 잡다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 이곳은 원주굽이길(16코스인 황둔쌀찐빵길)의 완주 인증지점이기도 하다. 치악산둘레길과는 달리 원주굽이길은 도로변에다 스탬프보관함을 설치해놓은 것이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살짝 맛만 보고 완주했다며 우겨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마니 관광안내판도 보인다. 4.1km 길이의 산책로가 들어간 지도에다 눈여겨 볼만한 풍경과 함께 숙박업소들을 그려 넣었다.

▼ 다리 건너는 ‘무릉도원면(영월군)’이다. 이름처럼 산천경개가 빼어나다고 알려진 지역인데, 특히 도안지(桃安地)라는 곳은 한번쯤 꼭 찾아볼만 하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로 시작되는 ‘회고가(懷古歌)’의 저자인 원천석(元天錫, 1330~?)의 피신처이기 때문이다. 태종대에 머물던 그는 자신을 찾는 왕을 피해 학산천마을의 도안지로 몸을 숨겼다고 전해진다.

▼ 송계교(kakaomap은 ‘두학교’로 표기하고 있다) 앞에서 도로를 횡단한 탐방로는 이제 411번 지방도를 따른다. 통행량이 제법 많은 도로이나 목제 탐방로를 별도로 만들어 놓았으니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꽃망울을 활짝 연 코스모스나 구경하면서 걸으면 될 일이다. ‘아름답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kosmos’에서 유래된 꽃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눈이 호사를 누릴 테니 말이다.

▼ 그래서 오늘의 꽃은 ‘코스모스’로 꼽아봤다. 요즘처럼 아침저녁으로 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꽃이기 때문이다. 소슬바람에 하늘하늘 움직이는 모습이 예쁜 꽃. 그게 소녀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꽃말도 ‘소녀의 순정’이란다. 한 송이 꺾어 사랑하는 이의 머리에 꽂아주기 딱 좋은 꽃이라 하겠다.

▼ 왼편에서 ‘서마니강’이 함께 보조를 맞춘다. 5코스는 ‘서마니 강변길’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서마니 강변은 전체 구간의 1/4에도 못 미친다. 그런데도 이름을 삼았다는 것은 그만큼 볼거리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너른 너비의 빠른 물살이 단애를 끼고 통쾌하게 흐르는 풍경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 이렇게 아름다운 경관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그런 심정을 눈치라도 챘나보다. 강가에 전망대를 만들고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전천후 전망대인 셈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서마니강은 주천강(酒泉江)의 일부분이다. 이왕에 나왔으니 주천의 내력도 살펴보자. 옛날 주천면 지역에 술이 솟는 바위샘이 있었는데, 양반이 잔을 들이대면 청주(淸酒)가, 천민이 잔을 들이대면 탁주(濁酒)가 솟았다. 어느 날 한 천민이 양반 복장을 하고 잔을 들이대며 청주를 기대했지만, 바위샘이 이를 알아채고 탁주를 쏟아 냈다. 천민이 화가 나서 샘을 부숴 버리자 이후부터는 술 대신 맑은 물만 흘러나와 강이 되었다 한다.

▼ 전망대 앞은 야외 수영장으로 개방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수영장이 또 있을까 싶다. 강물에 깎이고 세월이 쌓여 형성된 기암괴석과 흰 모래톱 사이로 미끄러지듯 흐르는 강물만 해도 충분하련만 그 뒤를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기 때문이다. 호사스런 물놀이란 바로 저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 잠시 후 ‘섬안교’에 이른다. 다리를 건너면 영월군의 ‘무릉도원면’인데, 저 길을 따라 들어가면 신선이 놀았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요선정(邀仙亭)과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인 법흥사(法興寺)를 만날 수 있다.

▼ 다리 근처에도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물놀이장의 출입구 역할까지 겸하는 모양이다. 코로나-19 팬데믹(COVID-19 pandemic)이 만들어낸 새로운 풍속도. 즉 출입자 명부와 손 소독제가 놓여있는 걸 보면 말이다.

▼ 아니나 다를까 강물에 부표를 띄워 깊은 곳으로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근처 도로변에는 ‘다슬기’를 판다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또한 이 부근에서는 다슬기잡이 체험도 가능하단다. 서마니강의 물이 그만큼 맑다는 증거일 것이다. 다슬기라는 게 본디 중·상류지역의 깨끗하고 유속이 빠른 곳에 서식하지 않겠는가.

▼ 도로변에는 꽤 많은 숙박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것도 도시 근교의 별장들처럼 하나같이 잘 지어놓았다.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야 만날 수 있었던 오지마을이 지금은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증거일 것이다.

▼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서마니 표지석’이 환영한다며 길손을 맞는다. kakaomap에 ‘서마니강 수변공원(이정표 : 황둔 하나로마트 3.7㎞/ 송계교 1.2㎞, 초치 6.7㎞))’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하지만 정자와 간이화장실 외에는 이렇다 할 시설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아직 완공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웃자란 잡초들이 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표지석 뒤에서 서마니강은 황둔천의 물길을 보탠다. 그리고는 회돌이를 치면서 돌아나간다. 이게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그려내는데, 그 모양새가 흡사 산을 섬처럼 안고 있는 형상이란다. ‘섬 안이 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이다. 소리 나는 대로 부르다 보니 ‘서마니강’이나 ‘서만이강’으로 변하기도 했다. 아무튼 저런 특이한 모양새로 인해 인근에 펜션이나 캠핑장이 많이 들어섰고, 여름철이면 피서를 나온 야영객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 잠시 후 의외의 곳에서 아치문을 만났다. 다른 코스들은 산길 구간의 들머리와 날머리에서만 만났었는데, 5코스는 강가에다 세워놓았다.

▼ ‘두물머리’부터는 서마니강과 헤어져 황둔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 황둔천과 411번 지방도의 사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그러다가 ‘계야강’ 버스정류장을 지나자마자 도로와 헤어져 강둑(이정표 : 황둔 하나로마트 3.1㎞/ 초치 7.3㎞)으로 올라선다. 송계교에서 30분쯤 걸리는 지점이다.

▼ 유치교(이정표 : 황둔 하나로마트 2.8㎞/ 초치 7.6㎞)과 정자쉼터(이정표 : 황둔 하나로마트 2.4㎞/ 초치 8.0㎞)를 차례로 지난다. 송계리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계야(桂野)’마을인데, 원주의 또 다른 명산인 감악산(紺岳山, 945m)을 바라보며 걷는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한 구간이다. 강원도에서는 보기 힘든 송계리의 널따란 들녘도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

▼ 특이하게 생긴 물막이가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가뭄이나 홍수에 관계없이 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도록 물고기 전용의 계단식 수로를 만들었다. 물고기들의 삶의 현장인 저 물길은 서만이강물과 합쳐 풍성해지면서 주천강이 되고, 평창강과 합쳐져 서강을 이룬다. 서강이 다시 동강과 합쳐져 남한강으로 흘러들어가 한강이 시작된다.

▼ 둑방길로 들어선지 35분. 솟대로 둘러싸인 물놀이장을 만났다. 첨부된 지도에 정자쉼터(이정표 : 황둔 하나로마트 0.6㎞/ 초치 9.8㎞)로 표기된 지점인데, 정자와 풋살장까지 갖춘 게 영락없는 유원지다.

▼ 물놀이장을 지난 탐방로는 또 다시 411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송계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삼송(三松)’마을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황둔·삼송마을 농촌체험관은 황토로 치장된 일종의 펜션이 아닐까 싶다. ‘팜스테이’라는 간판도 내걸고 있는 걸 보면 황토방에서 머물면서 이 마을에서 제공되는 각종 프로그램을 직접 체험해보는 공간이 분명하다. 찐빵마을이니 찐빵 만들기 체험은 필수. 그밖에도 식물원 관람과 농작물 수확, 맨손으로 숭어잡기 등의 다양한 체험이 제공된단다.

▼ 날머리는 황둔초등학교(원점회귀)

황둔삼거리에 들어서자 찐빵집 간판을 내건 점포들이 꽤 여럿 보인다. 찐빵하면 사람들은 ‘안흥’을 떠올리는 게 보통이지만 요즘은 이곳 황둔마을도 찐빵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특히 이곳은 문을 연 찐빵집마다 고유한 맛과 향기를 뽐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각기 다른 반죽재료와 찐빵 속 앙금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쌀·흑미·잡곡·검은깨·단호박·고구마·옥수수·쑥·백년초 등 사용되는 재료에 따라 찐빵의 색깔이 달라지므로 이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단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선물용 한 상자를 챙겨들고 날머리인 황둔초등학교로 향한다. 그나저나 오늘 트레킹은 3시간 50분이 걸렸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2.92km를 찍고 있다. 대부분의 구간이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 귀경길, 산악회 배려로 원주 시내에 있는 ‘박경리 문학공원’에 들를 수 있었다. 박경리 선생이 18년간 살았던 공간을 공원으로 꾸몄는데, 한국문단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칭송받고 있는 소설 ‘토지’가 이곳에서 완성됐단다. 공원은 옛집과 정원을 원형대로 보존함으로써 박경리 선생의 생활 자취를 엿볼 수 있게 했으며, 주변은 소설 토지의 배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3개의 테마공원(홍이동산·평사리마당·용두레벌)으로 꾸몄다.

▼ 박경리 선생의 생활모습을 재현해 놓았다는 생가를 둘러보는 것은 시간이 없어 생략. 손자를 위해 손수 만든 연못과 그녀가 직접 가꾸었다는 텃밭도 함께 통과다. 대신 그녀의 작품들을 적어 넣은 팻말 몇 개를 읽어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 ‘소설 토지학교’라는 교육과정도 있나보다. 서간문 형식을 빌려 쓴 수료생의 작품을 프린팅한 깃발들이 여럿 바람결에 나부끼고 있었다.

 

예산 느린 꼬부랑길

 

여행일 : ‘21. 8. 1(일)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대흥면

여행코스 : 옛고을 마당→의좋은 형제공원→대흥동헌→방문자센터→봉수산휴양림→애기폭포→대흥향교→교촌2리→교촌3리→예당호 느린호수길→생태공원(소요시간 : 11.21km/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슬로시티는 말 그대로 느림 속에서 자연과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행복한 삶의 질을 추구하는 활동을 말한다. 지난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현재는 전 세계 30개국 266개 도시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는 2007년 12월 담양군(창평면)·장흥군(유치면)·신안군(증도)·완도군(청산도)이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현재는 16개 고을로 늘었는데, 이곳 예산군(대흥면)도 그중 하나이다. 이에 예산군에서는 자연생태를 보존하고 고유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며 활발한 지역민의 커뮤니티 활동을 펼치는 다양한 슬로시티운동 및 프로그램을 대흥면에서 전개하고 있다. 2011년 조성된 느린 꼬부랑길도 그중 하나다. 총 3개 코스로 운영되는데, 각 코스마다 대흥의 삶과 자연,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이어진다. 한없이 꼬부랑거리는 길을 걸으며 고즈넉한 시골풍경 속에서 ‘느리게 사는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자연이 주는 건강한 기운을 담아가면 되겠다.

 

▼ 들머리는 옛고을 마당(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당진·영덕고속도로(당진-대전) 예산수덕사 IC에서 내려와 국도 21호선을 타고 홍성방면으로 내려오다 응봉사거리(예산군 응봉면 노화리)에서 좌회전하여 619번 지방도로 바꿔 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교촌삼거리(예산군 대흥면 교촌리)에서 우회전 616번 지방도(예당호 방면)로 옮기면 채 5분이 걸리지 않아 슬로시티 대흥이다. 마을과 예당호중앙생태공원의 사이 도로변에 주차장을 갖춘 옛고을 마당이 널따랗게 조성되어 있다.

▼ 옛이야기길, 느림길, 사랑길 등 3개 코스로 나눠진 느린 꼬부랑길은 각각 1시간에서 1시간30분 코스로 가족들과 함께 걷기에 딱 좋다. 3코스 모두가 시점이자 종점으로 삼는 대흥면 상중리는 옛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진한 형제애를 보여주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실제 무대이기도 하다. 길 중턱에는 예당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봉수산 자연휴양림도 있다.

▼ 도로변에 위치한 ‘의좋은 형제 공원’부터 들르기로 했다. 1964년 간행된 초등학교 국어교과서(2학년 2학기)에 실렸던 ‘의좋은 형제’. 형과 아우가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밤에 몰래 볏단을 옮겨놓다가 달이 밝은 가을밤에 서로를 알아보고는 얼싸안았다는 미담의 주인공들은 동화 속 인물이 아니라고 한다. 조선 세종 때 이곳 대흥면에서 호장(戶長, 향리직의 우두머리)을 지낸 실존인물이라는 것이다. 이성만과 이순 형제가 나눈 이 우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소개되고 있다.

▼ 2011년에 개장되었다는 테마공원에는 형제의 집 2동과 연못 등이 복원되어 있었다. 연자방아와 디딜방아, 지게, 우마차 등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기구들도 여럿 전시해놓았다.

▼ 형제의 옛집 복원에 고증까지야 거쳤을까마는 방안과 부엌에는 밀랍인형을 배치했다. 밥상머리에서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가라며 포토죤으로 만들었다. 이게 ‘의좋은 형제’와 맥이 닿는 스토리텔링까지 담고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지 못한 게 아쉬움이랄까?

▼ 쟁기질하는 농부는 형일까? 아니면 아우일까? 옛날, 무슨 일이든 서로 도우며 함께하는 형과 아우가 살았다. 형제는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추수를 했는데 볏단을 쌓아 보니 형과 아우의 낟가리 더미가 똑같았다. 그 것을 본 아우는 ‘식구가 많은 형님은 나보다 쌀이 더 필요할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고, 형은 형대로 ‘새살림을 시작한 아우에게 벼가 더 필요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늦은 밤, 형과 아우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볏단을 덜어 서로의 낟가리로 옮겨 놓았다. 다음날 조금도 줄지 않은 자신들의 낟가리를 본 형과 아우는 이상히 여기고 밤이 되자 또다시 자신의 볏단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날도 줄지 않은 자신들의 낟가리를 보며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생각했다. 밤이 깊어 형과 아우는 또 다시 볏단을 나르다가 밝은 달빛 아래에서 마주치게 됐고, 형제는 볏단을 내던지고 얼싸안았다. 그 후로 이들 형제는 더욱 더 서로 돕고 양보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너무도 유명한 의좋은 형제 이야기다.

▼ 길가에는 수많은 비석들이 나란히 서있었다. 1578년 세워진 대흥현감 유몽학의 선정비를 비롯해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김육의 영세불망비 등 대흥과 연관을 맺은 관리들의 치적을 기리는 비이다. 예당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수몰 위기에 놓인 비석들을 이곳으로 옮겨놓았다는데, 덕분에 거리의 이름까지도 ‘비석거리’가 되었다. 비석거리의 뒤편은 ‘의좋은 형제장터’이다. 매월(4~11) 둘째 토요일에 찾을 경우 마을 주민들이 직접 키운 농산물이나 수공예품을 구매할 수 있다. 장터라는 이름답게 먹거리나 공연도 함께 즐길 수 있음은 물론이다.

▼ ‘의좋은 형제’를 기리기 위한 축제도 열리는 모양이다. 테마공원 근처에 이를 기념하는 조형물을 세워놓은 걸 보면 말이다. 하긴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소재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소원터널도 만들어 놓았다. ‘의좋은 형제장터’나 ‘느린 손공방’에서 파는 모빌에 소원을 적어 걸어놓는 곳이란다. 하지만 일본에서 본 에마(繪馬)가 떠올라 그냥 지나쳐버렸다. 설사 일본의 풍속을 베껴왔다 해도 개인의 사랑과 행복을 기원하는 나무판에 불과하니 이게 무슨 대수겠는가 마는.

▼ 소원터널을 지나자 ‘대흥초등학교’가 얼굴을 내민다. 요즘 저 학교는 화려한 외모만큼이나 활기에 넘친다고 한다. 입학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곳 대흥이 ‘슬로시티’로 선정되면서 외지로 떠났던 주민들이 대거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함께 돌아 온 자녀들이란다.

▼ ‘느린 꼬부랑길’의 출발점인 ‘슬로시티 방문자센터’는 초등학교 앞에 있다. 옛이야길(1코스 5.1km)과 느림길(2코스 4.6km), 사랑길(3코스 3.3km)이 모두 이곳을 시점과 종점으로 삼는다. 센터에는 슬로시티에 대한 자료 외에도 느린 꼬부랑길과 손바닥 정원길 등에 대한 각종 자료가 비치되어 있다고 한다. 지도 한 장쯤 얻어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볼거리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방문자센터 옆에는 ‘슬로시티 대흥’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느린 걸음으로 소박한 삶과 자연, 역사의 숨결을 담다’라는 부제 아래 임존성과 향교, 동헌, 망태할아버지, 배맨나무 등 이곳 대흥의 주요 볼거리들을 설명한다. 그 옆에 ‘느린 꼬부랑길’의 지도를 그리고 그 위에다 해당 볼거리들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 대흥초등학교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대흥형옥원(大興刑獄圓)을 만나게 된다. 죄수를 가두고 형별을 가하는 곳이니 응당 대흥 관아의 부속시설이다. 하지만 모든 이정표는 천주교의 ‘봉수산순교성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광장이나 옥사의 내부도 천주교에 관한 전시물 일색이다. 천주교 순교성지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이곳 대흥은 예산·홍주·아산·공주·청양 지역에 전해지는 길목이었으며 박해의 땅이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방문 당시 시복된 124명의 순교자 중 49명이 내포지역에 살았고, 그 가운데 29명은 예산 출신이었다고 한다.

▼ 형옥원은 죄인들을 가두는 옥(獄)과 고신과 형벌을 가하는 환토(圜土)로 구분된다. 대흥군의 옥은 원래 상중리 일원의 ‘옥담거리’. 그리고 처형장은 예당호에 수몰된 내천변에 있었다고 한다. 이 시설이 조선시대 대흥군의 위상과 역사·문화는 물론이고 초기 천주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여겨 대흥봉수산순교성지인 이곳에 재현해 놓았단다. 모든 이정표가 ‘천주교 순교성지’를 가리키고 있었던 이유이다.

▼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놓은 옥사 안으로 들어서자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는 문구가 특히 눈길을 끈다. 이곳 출신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김정득 베드로와 김광옥 안드레아가 처형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던 중 예산과 대흥의 갈림길에서 손을 마주잡으며 나눈 작별인사라고 한다. 벽면에 걸린 초상화의 주인공이 김정득 베드로가 아닐까 싶다. 다른 방에 적혀있는 ‘대흥고을을 다 주어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나 ‘주님을 따르겠나이다.’라는 문구까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나 또한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광장에는 오석에 부조한 순교자들의 수난과 처형도, 그리고 외곽에는 17처로 구성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 풍속화가 그려진 담벼락을 지나자 ‘이성만형제효제비(李成萬兄弟孝悌碑)’가 나온다. 안내판은 대흥호장 이성만·이순 형제가 모두 지극한 효자라 적고 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형은 어머니, 동생은 아버지의 묘소를 지켰다. 3년의 복제를 마치고도 아침에는 형이 아우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연산군 3년(1497) 왕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173자를 기록한 효제비(孝悌碑)를 세웠다. 이 비는 원래 가방교 옆에 있었는데 1964년 예당저수지에 물이 채워지면서 수몰되었다가 1978년 극심한 가뭄으로 예당저수지의 물이 빠지면서 우연히 발견됐다고 한다.

▼ 조선시대 대흥군의 현청(縣廳). 즉 대흥고을의 수령(지금의 군수)이 집무를 보던 ‘대흥동헌(大興東軒,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은 효제비각의 오른편에 자리 잡았다. ‘여지도서’는 정청과 동대청, 은사정, 서헌방, 하마대 등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동헌 및 임성아문(任城衙門)만 남아있을 뿐이다. 1914년부터 대흥면사무소로 사용해오다가 1979년 해체·복원했단다.

▼ 조선 초인 태종 7년(1407)에 창건된 동헌은 예산에서 유일하게 남은 관아 건물이다. 대흥지역의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한 건축물이라는 얘기이다. 그나저나 동헌의 뒤에 있다는 ‘흥선대원군 척화비’와 조선 영조대왕의 11녀인 ‘화령옹주(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의 조카며느리)의 태실’은 살펴보지 못했다. 아니 그게 있는 줄도 몰랐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초등학교에서 뒤쪽 골목을 따라가면 ‘이한직 가옥’이 나온다. 조선 후기에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1796-1870)이 기거했던 집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287호)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문화재청의 자료를 옮겨본다. <현재 가옥은 각각 ㄱ자형 안채와 행랑채, 대문이 딸린 다른 건물 1동이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정면은 행랑채·대문 건물로 앞면 6칸·옆면 1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안채 지붕도 팔작지붕이며, 건물 중앙에 마루가 있다.>

▼ 현대와의 두 번째 만남은 ‘대흥면사무소(행정복지센터)’이다. 대흥이 행정지명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 말부터라고 한다. 당시 예산은 예산현·덕산현·대흥현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대흥현은 남부지역(광시·신양·응봉면)을 관장했다. 조선 숙종 때는 대흥군으로 승격했는데, 일제강점기 예산군으로 편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예산보다 상위 행정단위였다고 한다. 하지만 1964년 예당저수지가 건설되면서 대부분의 농토와 마을이 물에 잠겼고, 대흥은 봉수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호수마을에 불과해졌다.

▼ 이한직 고가를 찾아가다 작은 공원을 만났다. 달팽이를 닮은 조형물을 세워놓은 것이 이곳이 슬로시티(slow city)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안내판도 슬로시티의 지향점과 지정현황 등 슬로시티에 대해 적고 있다.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의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i)’에서 출발했다. 위협받는 달콤한 인생의 미래를 위래 슬로푸드와 느리게 살기를 실천하자며 ‘치따슬로(cittaslow)’, 즉, 슬로시티 운동을 출범시켰다. 슬로시티의 철학은 성장에서 성숙, 삶의 양에서 삶의 질로, 속도에서 깊이와 품위를 존중하는 것이다. 느림의 기술(slowware)은 느림(Slow), 작음(Small), 지속성(Sustainable)에 둔다. 현재 이탈리아에 국제슬로시티본부가 있으며 전 세계 30개국에서 266개 도시가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16개의 도시가 가입되어 있다.

▼ 옛 대흥보건지소를 개조했다는 달팽이미술관도 눈길을 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전시공간이자 느린 생활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으며, 대흥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회가 자주 열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 방문자센터로 되돌아와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선다. ‘느린 꼬부랑길’의 제1코스. 소소한 마을 풍경과 옛이야기를 만나는 ‘옛이야기길’은 솟대로 가득 채워진 벽화골목부터 시작된다. 벽화는 황량한 골목길을 생동감 넘치게 변신시킨다. 때론 한적한 미술관을 벽에 녹여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로 벽화가 갖는 매력이다. 동헌으로 가는 담벼락을 장식하는 풍속화, 배맨나무 근처의 컬러풀한 솟대그림 등 ‘느린 꼬부랑길’은 이런 벽화골목을 여러 번 지난다.

▼ 초입에 ‘느린 꼬부랑길’ 및 ‘옛이야기길’의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한번쯤 살펴보는 게 좋겠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꼬부랑길이 자랑하는 볼거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주워 담아가려면 그만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 예산농협을 지나 실개천 옆의 소로를 따라 걷는다. 잠시 후에 들르게 될 봉수산에서 흘러오는 개천의 옆으로 탐방로가 나있는데, 전국 어느 명품 소나무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잘 생긴 노송이 나타나는가 하면, 비록 작지만 아름다움만큼은 작지 않은 정원을 품은 집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슬로시티 대흥이 야심차게 만들어놓은 또 다른 둘레길. 즉 ‘손바닥 정원길’이 겹치기 때문이란다.

▼ 이정표의 머리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달팽이’가 눈길을 끈다. ‘Slow dawn and enjoy the garden’. 손바닥정원을 나타내는 이정표에다 슬로시티(slow city)의 로고를 덧칠했다. 위에서 말한 ‘손바닥 정원길’의 시설물인데, 이 길은 마을 사람들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알려진다. 집 앞에 달팽이 모양의 조형물이 있으면 정원에 들어와도 좋다는 의미란다. 정원의 주인장과 차 한 잔 나누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 실개천에 조성된 다슬기체험장을 지나자 이번에는 엄청나게 큰 노거수가 멋들어지게 가지를 펼치고 있다. 대흥의 역사를 단숨에 백제시대로 연결하는 나무다. 옛날에는 서해 바닷물이 아산만과 삽교천을 통해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한다(한때는 우물을 파면 갯벌과 짠물이 섞여 나오기도 했단다). 당시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이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임존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왔던 모양이다. 그때 타고 온 배들을 이 나무에다 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배를 맨 나무. 이걸 줄여보니 ‘배맨나무’가 되었다.

▼ ‘느린 꼬부랑길’은 마을길과 들길, 거기다 산길까지 지나다닌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숱하게 많은 갈림길들은 만나게 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길이 나뉘는 곳마다 이정표가 세워져있으니 이를 참조해가며 걷기만 하면 된다. 그나저나 이 부근은 온통 사과밭 천지였다. 사과가 이곳 예산의 특산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고나 할까?

▼ 방문자센터를 출발한지 15분. 약간 가팔라진 포장도로를 따라 얼마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편은 ‘봉수산자연휴양림’. 그런데 둘레길 표지기(백제부흥군길 3코스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나 의좋은 형제공원과 임존성만 표기되어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가 왼편으로 가란다. 하지만 난 이를 무시하고 그냥 자연휴양림으로 올라갈 것을 권하고 싶다. 두 길은 잠시 후 자연휴양림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구태여 에둘러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특히 돌아가는 구간이 거리만 멀 뿐, 가슴에 담아둘만한 얘깃거리나 눈에 넣을만한 볼거리가 일절 없다는 데야.

▼ 50m쯤 내려가자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갈려나가는 임도로 들어서란다. 그런데 산사태 보수공사라도 하는 듯 주변을 온통 헤집어버렸고, 탐방로는 그 여새를 빌어 덤불 속으로 숨어버렸다. 한참을 헤매다가 공사장 초입에서 오른편으로 난 임도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우리 부부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구간이다.

▼ 웃자란 잡초에 묻혀버리다시피 한 임도를 따라 잠시 올라가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봉수산자연휴양림’이 얼굴을 내민다. 대흥마을과 예당저수지의 조망이 일품이라고 알려지는 곳이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오늘만은 예외다. 때문에 다른 이의 글을 빌려 그 풍광을 전해본다. <호수는 잔잔하고 고층건물 없이 나지막한 마을은 평화롭다. 저수지 맞은편엔 부드럽게 산 능선이 이어져 호수마을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 이후부터는 고난. 아니 고민의 연속이었다. 휴양림 입구의 갈림길에서부터 보이지 않던 ‘느린 꼬부랑길’의 이정표는 차치하더라도, 언제부턴가 표지기조차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눈대중으로 숙박시설(숲속의 집) 사이를 헤매며 잠시 올라서니 또 다른 갈림길. 왼편은 어디로 연결되는지도 모르는 임도. 오른편은 휴양림관리소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 사이에는 봉수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도 나있다. 고민 끝에 우리 부부는 ‘관리사무소’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길을 가리켜줄 누군가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 그렇게 해서 관리사무소를 찾았다. 하지만 길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관리소 앞 삼거리에 느린 꼬부랑길의 이정표(애기폭포 1.3㎞/ 슬로시티 방문자센터 2.2㎞)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 산림문화휴양관(객실)의 오른편으로 난 임도(임존성길)를 따라 걸으며 탐방을 이어간다. 길을 찾느라 휴양림을 15분이나 누볐으니 조금은 서둘러야지 싶다. 참! 가보지는 않았지만 왼편 산자락 너머에는 백제 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임존성(任存城, 사적 제90호)이 있다고 했다. 660년 7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되자 흑치상지 등 백제 왕족과 장군들이 이 성으로 들어와 660년 8월부터 663년 말까지 3년 여 동안 나당연합군에 맞서 싸운 곳이다.

▼ 이 구간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기도 한다. 솔향기로 넘치는 숲에는 수령이 수십 년은 족히 넘겼을 아름드리 소나무들로 가득하다. 하긴 명성이 자자한 자연휴양림이 들어선 곳인데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탐방로는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벤치나 평상을 놓은 쉼터를 곳곳에 만들어 놓았는가 하면, 물레방아까지 배치해가며 한껏 멋을 부렸다. 임존성이 있다는 봉수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도 잘 인도하고 있었다.

▼ 그렇게 걷길 17분. 길이 둘로 나뉜다. 첨부된 지도에 ‘애기폭포’라고 표시된 지점으로 ‘옛이야기길(1코스)’이 시작되는 방문자센터에서 3.49km쯤 떨어졌다. 이곳은 또 1코스와 2코스가 나뉘는 지점이기도 한데, 2코스인 ‘느림길’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느림길’이란 자연의 지혜로움에 귀 기울이며 느리게 사는 삶의 의미를 만나는 길이다. 참! 대흥관아로 이어지는 직진 코스는 옛이야기길과 느림길이 중복되는 구간이라는 것도 알아두자.

▼ 그런데 ‘느림길’의 진행방향을 알리는 이정표(대흥향교 은행나무 2.4㎞, 슬로시티 방문자센터 2.8㎞)가 보는 이를 헷갈리게 만든다. 왼편으로 가야 만날 수 있는 대흥향교의 은행나무를 상단의 방향표시와는 달리 오른편으로 표시해놓은 것이다.

▼ ‘애걔. 저게 폭포야?’ 앞서가던 집사람이 탄성에 가까운 질문을 던져온다. 갈림길에서 2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애기폭포’인데, 내가 보기에도 폭포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다. 맞다. 아까 휴양림에서 만난 직원도 ‘애기폭포’의 위치를 묻는 내게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었다.

▼ ‘느림길’은 이름 그대로 ‘느림의 미학’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구간이다. 일렬로 늘어선 단풍나무가 만들어내는 터널이 하도 예뻐서 일부러라도 천천히 걷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전국을 누비며 벚나무 가로수에 식상해왔던 나로서는 두고두고 기억될만한 아름다운 숲길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 구간은 ‘사색의 길’이자 ‘보부상의 길’이라고 했다. 그러니 패랭이를 쓴 채 홍성과 예산을 오가며 행상하던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보부상)의 마음이 되어 걸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참고로 예산은 조선시대 후기 부보상 근거지다. 이런 이유로 인근 덕산면에 내포 부보상촌이 조성되고 있다.

▼ 한껏 여유를 부리며 걷기를 35분, 하늘이 열리는가 싶더니 1405년에 건립되었다는 대흥향교(大興鄕校, 충남 기념물 제136호)가 얼굴을 내민다. 조선시대 각 지방에 설립 되었던 관립 교육기관으로 대흥동헌과 함께 마을의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 건축물이다. 현재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삼문 등이 남아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공자와 맹자 등 5명의 성인)·10철(十哲, 자공과 자로 등 공자의 뛰어난 제자 10명)·송조6현(宋朝六賢, 주희와 정호 등 송나라의 최고유학자 6명)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十八賢, 최치원·안향·조광조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학자들로 해동18현이라 부르기도 한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교촌1리(향교말)’ 경로당이 나온다. 근처에는 ‘은행정’이란 지명도 보인다. 맞다. 이곳에는 나이가 600살도 넘었다는 은행나무(충남 기념물 제160호)가 있었다. 거대한 몸집(높이 40m에 가지넓이 40m)을 자랑하는 이 나무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한 몸이 되어 자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생하는 느티나무를 가운데에 놓고 외부를 숙주(宿主)인 은행나무가 둘러싸고 있어 마치 한 그루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게 신령스럽게 보였던지 마을에서 매년 성황제를 올리고 있단다. 이 나무를 베면 마을이 피해를 입는다는 터부 하나쯤 만들어두었음은 물론이다.

▼ ‘효도(孝道) 시범마을’이라는 간판까지 내걸고 있는 경로당 앞에는 마을 풍경과 주민들의 일상을 홍보하는 사진게시판이 세워져 있었다. 야생화박물관, 옛살림박물관, 바느질박물관 등 인근에 있는 또 다른 볼거리들도 나 여기 있다며 손짓을 한다.

▼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100m쯤 되는 지점에서 갈림길을 만났다. 2코스인 ‘느림길’과 3코스인 ‘사랑길’이 만나는 지점이다. 아니 만나자마자 헤어지니 나뉘는 지점이라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느린 꼬부랑길의 이정표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원홍장둘레길에서 만든 이정표(원홍장 쉼터← 0.9㎞/ 이한직가옥↑ 0.6㎞/ 효사랑방↓ 0.1㎞)가 세워져 있으나 지도에 나오는 지명과 틀려 길 찾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원홍장 쉼터 방향으로 향하면서 ‘사랑길’로 들어선다. 3개로 나누어진 ‘느린 꼬부랑길’의 마지막 코스로 ‘사랑길’이란 이름은 조금 전에 만났던 은행나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어느 날 은행나무의 몸속에 느티나무가 뿌리내리더니 150년 넘게 한 몸으로 살고 있다고 해서 ‘사랑나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논두렁이나 샘터 등이 시골 정취를 그대로 전해준다.

▼ 슬로시티에서는 쓰레기통도 남다르다. 쇠나 플라스틱 등으로 만든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원목을 사용했다. 맞다. 슬로시티라는 게 본디 자연환경과 전통문화를 보호하고 여유와 느림을 추구하며 살아가자는 국제운동이 아니겠는가.

▼ ‘교촌2리’ 마을회관에 이어 나타나는 버스정류장에서는 도로를 벗어나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참깻대로 둘러싸인 민가를 스치듯 지나 언덕에 올라선다. 3코스로 들어선지 15분 만이다. 언덕은 한마디로 환상적이다. 붉은 빛을 띠는 암괴가 널려있는데 그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만만찮게 기괴한 것이다. 이런 풍광으로도 부족했던지 돌탑과 솟대로 구색까지 갖췄다. 팔각정과 전망대까지 배치한 것을 보면 쉼터의 기능까지 겸하는 모양이다. 맞다. 안내도는 현재 위치를 ‘원홍장 쉼터’로 적고 있었다.

▼ 쉼터에는 ‘원홍장 이야기’를 담은 ‘원홍장둘레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원홍장은 관음사적기(觀音寺積記)의 ‘충청도 대흥에 원량이라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살았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쓰인 설화의 주인공이다. 원홍장은 백제 때 여인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용모가 뛰어나고 효심이 지극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성심을 다해 봉양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매일 관세음보살께 기도를 드리던 원홍장은 효심과 불심으로 자신을 봉양하여 진나라로 건너가 황후가 되었고, 착한 마음씨로 진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원홍장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불상과 나한상을 만들어 백제로 보냈다. 한편, 홍장이 떠난 뒤 슬피 울던 아비 원량은 앞을 볼 수 있게 되어 평안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가 아닌가. 맞다. 우리가 익히 알던 ‘심청전’을 닮아도 너무 닮았다. 다만 또 다른 효의 마을인 ‘곡성’과는 달리 심청이를 공식적으로 불러내지 않았을 따름이다.

▼ 쉼터에서 연결되는 언덕의 끄트머리로 나가자 전국 최대 규모의 저수지라는 예당호가 눈앞에 펼쳐진다. 둘레가 40km나 되는 예당호는 대륙의 바다처럼 넓고 푸른 인공 호수다.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나 낚시꾼들 사이에서나 입소문을 타다가 2009년 대흥면이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비로소 널리 알려졌고, 지금은 출렁다리와 음악분수, ‘느린 호수길’ 등 비대면 시대 인기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 첨부된 지도(방문자센터 앞의 안내도 말고는 대부분의 지도들도 이와 같다)와는 달리 3코스는 예당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끝나고 있었다. 되돌아가야 한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우린 그대로 진행해보기로 했다. 밭두렁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예당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예상은 옳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촌3리(校村이란 ‘鄕校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향교와는 너무 많이 떨어져 있다)로 내려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언덕을 내려선지 10분 만에 만난 616번 지방도를 건너자 데크 로드가 길게 놓여있다. 예당호의 아름다운 호반을 따라 내놓은 ‘느린 호수길’이다. 지난해 ‘아시아 도시 경관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길이 7㎞의 둘레길로 ‘수문 둘레길’과 ‘수변 테마길’, ‘농촌 테마길’, ‘생태 테마길’ 등이 비순환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 ‘느린 호수길’은 가히 독보적이다. 전국적으로 호수나 강, 바다에 놓인 데크 로드가 적지 않지만 이곳처럼 긴 길은 거의 없다. 예당호 둘레가 40km쯤 되니 1/5 넘게 길이 놓였다. 그러다보니 농경지 위를 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호숫가를 따른다. 호수에 사는 동식물을 관찰하며 느릿느릿 걷기에 제격이라는 얘기다. 특히 호수에 잠겨 사는 나무 사이를 지날 때는 외국에서나 볼 법한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된다.

▼ 탐방로는 예당저수지를 왼편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이때 대륙의 바다처럼 넓고 푸른 호수가 언뜻언뜻 고개를 내미는데, 물에 반쯤 잠긴 버드나무와 낚시꾼이 머무는 좌대의 풍경이 도심에서 살아온 나에게는 이색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 그렇게 10분 남짓 걸었을까 배롱나무 꽃이 만발하는가 싶더니 데크길이 복잡해진다. 폭이 넓어졌는가 하면, 길이 여럿으로 나뉘고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곳곳에 전망대를 만들었는가 하면 벤치를 갖춘 쉼터에는 조형물을 설치해 숫제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맞다. ‘느린 호수길’이 종료되는 ‘예당호 중앙생태공원’에 이른 것이다.

▼ 부지면적이 2,098평에 달한다는 생태공원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누가 뭐래도 대규모 연꽃단지다. 옆 고을에 위치한 ‘신정호’의 연꽃단지 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넓게 심어져 있었다. 덕분에 홍련, 백련 등 다양한 연꽃들이 꽃망울을 열며 찾아온 이들을 화사하게 반긴다.

▼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에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 인생샷 하나쯤 건져가라며 맨 위의 조망대에다 사과돌이 조형물(아래 사진은 아래 조망대의 ‘사과돌이’다)을 만들어 놓았다. 예산군 제일의 특산품으로 사과가 꼽힌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비옥한 황토와 풍부한 일조량 등 최적의 재배환경에서 생산된 예산사과는 당도와 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다. 2007년에는 한국표준협회로부터 로하스(LOHAS) 인증을 받기도 했다.

▼ 트레킹 날머리는 ‘옛고을 마당’

타고 온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옛고을 마당’으로 돌아오면서 트레킹은 종료된다. 그렇다고 616번 지방도를 이에 두고, ‘옛고을 마당’ 맞은편에 있는 ‘망태할아버지 석상’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망태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엄마 말 안 듣고 거짓말하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공포를 떨게 하며 버릇을 바로잡게 하도록 사용하던 상상 속 존재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망태할아버지를 마을의 상징물이자 정신적 지주로 삼아왔다고 한다. 매년 2월 초하루 동제(洞祭)를 올리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