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둘레길 3코스(수레너미길)

 

여행일 : ‘21. 7. 24(토)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과 일원

여행코스 :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수레너미교→잣나무숲→수레너미정상→점터골삼거리→태종대(거리 및 시간 : 14.9km/ 실제는 12.77km를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치악산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총 길이 140㎞의 둘레길로 치악산국립공원을 넘나들며 치악산이 거느린 작은 산도 오르고, 주변의 작은 산골 마을도 지난다. 11개의 코스를 관할하는 지자체도 셋이나 된다. 하여 원주시가 길 조성을 주도했고 횡성군과 영월군이 거들었다. 오늘은 104.5㎞에 이르는 원주 권역에서 시작해 횡성권역에 이르는 ‘수레너머길’을 걷는다. 해발이 732m나 되는 고갯마루를 넘어야하기 때문에 잣나무 숲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으나, 옛날 스승을 찾기 위해 태종 이방원이 수레를 타고 넘었던 산길을 거닐어본다는 의미를 갖는다. 높은 고갯마루라고 해서 올라갈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고개까지의 거리가 3.6km나 되기 때문에 300m도 채 되지 않는 마지막 구간을 제외하고는 가파름도 거의 느낄 수 없다.

 

▼ 들머리는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900-1)

영동고속도로 새말 IC에서 내려와 국도 42호선을 타고 원주방면으로 들어오다 학곡삼거리(소초면 학곡리)에서 좌회전 학곡천을 거슬러 올라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구룡탐방지원센터를 겸하고 있는 이 건물의 앞에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 3코스인 ‘수레너미길’은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를 출발 수레너머고개를 넘어 태종대에 이르는 길이 14.9km의 자드락길이다. 이 구간의 특징은 높은 고갯마루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 부근을 빼면 가파른 구간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지만 산길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태종대에 이르기까지 6.8km의 마지막 구간이 대부분 포장길을 따르기 때문에 햇볕에 노출된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여름철의 무더위, 특히 오늘처럼 폭염 경보라도 내리는 날에는 최악의 코스가 될 수도 있다.

▼ 코스의 출발점은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이지만, 실제로는 ‘수레너미교(이정표 : 태종대 13.0㎞/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1.9㎞)’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원래의 출발점에서 이곳까지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도로가를 걷는다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2km 가까이나 줄여 걸을 수 있다는 귀띔이 더 매력적이었다. 오늘처럼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에 이보다 더 고마운 제안이 어디 있겠는가. 서슴없이 따라나선 이유이다.

▼ 오늘 걷게 될 ‘수레너미길’은 치악산 능선의 매화산과 천지봉 사이를 넘어가는 고갯길로 조선 태종 이방원이 스승을 만나고 싶어 수레를 타고 넘어갔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래선지 다리 초입에 수레 조형물을 배치했다. 하지만 왕이 탔다기보다는 여염집 농부들에게나 어울리는 허름한 마차다. 고증까지야 바라지는 않겠지만 누가 봐도 왕이 타고 다녔을 법한 마차를 놓아두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 출발 전에 인증사진부터 한 컷. 카메라 앞에 선 집사람의 표정이 무척 밝다. 하긴 ‘폭염 경보’까지 내려진 무더운 날씨에 2km나 덜 걷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 다리 아래는 ‘학곡천’이 흐른다. 아니 정확히는 구룡사를 거쳐 흘러온 학곡천과 수레너미재에서부터 흘러온 한다리골이 합수하는 지점이다. 그 뒤로 보이는 산은 물론 치악산이다.

▼ 탐방로는 마을길을 지난다. 길가에는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하나같이 민박이나 펜션의 간판을 내걸었다. 휴식을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 3코스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유난히도 자주 마을길을 지난다는 점이다. 때문에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갈림길을 만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이 나뉘는 곳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갈려나가는 길이 어디인지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오직 들머리(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와 날머리(태종대)의 방향과 거리만 표기해놓았다.

▼ 영락없는 ‘연초건초장(煙草乾燥場)’이다. 20세기와 함께 우리네 시야에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저런 풍경을 만나다니 행운이라 하겠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한해 땀 흘려 지은 담뱃잎을 저곳에서 말렸다. 잎을 널면서 아이들의 수업료를 걱정했을 테고, 반면에 쌀가마니나 연탄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초록 꿈’도 꾸었을 게다. 하지만 지금은 담뱃잎 대신에 사람이 머무는 모양이다. 그것도 멋진 방갈로형의 주택으로 변해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한다리골 야영장’ 간판이 눈에 띈다. 치악산 자락에서 발원해 학곡저수지로 흘러드는 ‘한다리골’의 냇가에 위치한 덕분에 캠핑장의 삼박자(숙박, 먹을거리, 즐길거리)를 다 갖추었다는 입소문을 탄 곳이다. 캠핑사이트 외에도 펜션까지 들어서있다니 가족단위 캠핑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춘 작은 주차장. 이어서 탐방로는 잠수교를 건너 또 다른 마을길로 들어선다. 이곳에서도 우린 잘 지어진 펜션 두어 채를 만날 수 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수레너미길’ 문패를 내건 아치문이 길손을 반긴다. 산길이 시작됨을 알려주는 치악산둘레길 특유의 시설물인데, 대문 앞 이정표(태종대 11.8㎞/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3.1㎞)는 ‘수리너미 고개’까지의 거리를 3.6km로 적고 있다. 이곳의 해발이 264m이니 앞으로 3.6km를 걸으면서 수직 450m를 치고 올라가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만도 고마운데 야자매트까지 깔아 비가와도 질척거릴 염려가 없다. 산을 보호하려는 노력도 엿볼 수 있었다. 길가 양옆에 나지막한 난간을 둘러 사람의 통행을 막는다.

▼ 명색이 국립공원인데 편의시설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곳곳에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시설은 벤치와 통나무의자 뿐으로 단순한 편이다. 하지만 쉼터의 상황에 따라 배치를 다르게 하면서 같은 듯 같지 않은 쉼터를 만들었다. 통나무의자만 따로 놓았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이를 둘로 나누는 재치도 부린다.

▼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5분쯤 걷자 나무다리(이정표 : 수레너미재 3.1㎞, 태종대 11.3㎞/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3.6㎞)가 얼굴을 내민다. 한다리골에 놓인 7개의 다리 가운데 첫 번째 다리인 ‘수레너미 1교’다. ‘1’에서 시작한 이 다리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숫자를 부풀려간다.

▼ 국립공원의 자랑거리인 ‘구호지점 표시목’이다. 구호지점(치악 11-01)과 국가지점번호 라사 5057-3601), 신고처 전화번호는 기본. 다른 지역의 것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산행에 꼭 필요한 해발(328m)을 적어 넣었다. 그동안 얼마만큼 올라왔고, 앞으로 얼마나 더 고도를 높여야 할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를 말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2교’는 입구에 만들어놓은 쉼터의 기교가 돋보이는 다리다. 벤치와 통나무의자를 양옆으로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조형미를 더했다.

▼ ‘3교(이정표 : 수레너미재 2.7㎞, 태종대 10.9㎞/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4.0㎞)’는 계곡에 들어가지 말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냇가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 그렇다고 이를 지킬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오늘, 그것도 맑으면서도 차가운 물이 저렇게 찰랑찰랑 흐르는데 말이다. 까짓 물놀이·목욕·취사·흡연 등 금지사항만 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는가.

▼ ‘3교’를 건너자 곧이어 잣나무 숲이 나타난다. 그런데 솔향기 그윽한 숲보다도 먼저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한 거리두기’. 코로나(COVID-19) 팬데믹이 만들어낸 새로운 풍경이다. 사실 산에서 만난 등산객들 대다수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스크를 가슴부위에 매달고 다니며 다른 사람과 교차할 때마다 탈착을 반복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서도 방역수칙을 지키는 우리 국민들을 보니 코로나바이러스가 물러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 탐방로는 울창한 잣나무 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숲에는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잣나무들이 한 가득이다. 그 사이를 걷고 있노라면 온몸으로 퍼지는 송진 내음에 황홀함마저 느끼게 된다. 잣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효과 덕분일 것이다. 피톤치드는 나무와 식물이 해충이나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스스로 만들어내는 휘발성 물질이다. 각종 감염 질환이나 아토피 질환 등은 물론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잣나무가 자연의 명의인 셈이다.

▼ 숲에는 ‘작은 숲속놀이터’도 조성되어 있었다. 미니 짚라인 같은 하늘다람쥐 기구와 거미줄처럼 생긴 해먹, 꼬맹이 숲속오두막 등 어린이들을 위한 기구가 설치되어 있어, 가족단위 트레커들에게는 최상의 쉼터가 될 수도 있겠다.

▼ 2km를 덜 걸어도 된다는 안도감이 집사람을 동심으로 돌려놓았나 보다. ‘하늘다람쥐’라는 기구에 매달리더니 나이도 잊은 채로 씽씽 난다. 하긴 해외여행 때 수십 미터도 더 되는 높은 곳에서 짚라인에 매달려 날아본 경험이 있으니 이까짓 정도야.

▼ 잣나무 숲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살짝 가팔라진다. 돌멩이가 널린 너덜길을 지나기도 한다. 그런데다 울창한 수목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구간이다. 그런 길을 25분 정도 걷자 ‘4교(이정표 : 수리너미재 1.0㎞, 태종대 9.2㎞/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5.1㎞)’가 나온다. 그나저나 이곳의 해발은 534m. 앞으로도 고도를 200m나 더 올려야한다. 수리너미재까지 1km밖에 남지 않았는데 걱정이다.

▼ 아니나 다를까 탐방로가 더 가팔라졌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 탐방로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한다리골’이 동행한다. 자연 속의 여유로움을 느끼기에 제격이라 하겠다. 그런 감정을 우리 부부라고 느끼지 않겠는가. 앞서가던 집사람이 냇가로 내려가더니 세수부터 하고 본다. 그래. 오늘 같은 무더운 날에는 저게 바로 신선놀음이다.

▼ 한다리골의 지류에 걸쳐놓은 ‘5교’와 해발 595m지점에 있는 ‘6교(이정표 : 수레너미재 0.5㎞/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6.2㎞)’를 지나자 ‘이름 없는 동굴’이라는 안내판이 얼굴을 내민다. 안내판에서 계곡 건너편을 유심히 보면 찾을 수 있는데, 안에서 노래를 부르면 행복을 주는 목소리를 얻게 된다는 동굴이다. 하지만 따라서 해보지는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사랑스런 목소리가 오고가는데 더 이상 바랄게 뭐가 있겠는가.

▼ ‘7교’를 마지막으로 나무다리와는 이별을 고한다. 굳이 나무다리가 아니어도 물길을 건널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 아니나 다를까 다시 만난 한다리골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 징검다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아니 많이 가파르다. 그 가파름을 배겨내지 못해 계단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데크계단에 돌계단, 침목계단 등 종류도 다양하다.

▼ 계단은 끝없이 이어진다. 데크 계단이 끝났다싶으면 돌계단, 경사가 더 심한 곳에는 침목계단을 놓았다. 이쯤에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이런 곳에서 과연 마차가 실제로 다녔을까? 내 생각엔 분명 아니다. 그래서 옛 얘기는 얘기일 따름인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에 해발 732m의 ‘수레너미재’에 올라섰다. 학곡리 한다리골(원주시 소초면)과 강림리(횡성군 안흥면)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로, 조선의 세 번째 왕인 태종 이방원이 그의 스승인 운곡 원천석을 만나기 위해 수레를 타고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가 멸망하자 새로운 나라의 관직을 거부한 원천석이 개성을 떠나 요 아래 강림리로 은거했기 때문이다.

▼ 이곳은 치악산 능선의 매화산과 천지봉 사이의 안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알리는 표식을 일체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방향의 능선이 모두 비법정탐방로이기 때문이다. 사라져버린 등산로에 대한 아쉬움은 ‘치악산둘레길’이 대신하고 있었다. 거대한 엄나무 그늘 아래에 둘레길의 ‘스탬프보관함’을 설치했다.

▼ 빠른 것을 중요시 여기는 21세기. 기다림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느린 우체통’은 동면(冬眠), 아니 여름철 휴가라도 갔나보다. 비닐로 꽁꽁 둘러싸놓은 것이 여간 흉물스럽지가 않다. 운영을 재개하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거라는 신호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이. 그것도 그리운 이로부터 편지가 날아드는 행운을 얻게 될 사람들의 숫자도 그만큼 줄어들 게 분명하다.

▼ 고갯마루를 넘은 탐방로는 이제 횡성(강림면)으로 향한다. 길은 순하기 짝이 없다. 가끔은 침목계단이 나오기도 하지만 경사가 거의 없는 흙길이 대부분인 것이다. ‘치’가 떨리고 ‘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는 치악산의 산세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라 하겠다. ‘수레너미 길’이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완만한 경사. 그래서 태종도 이 구간을 수레에 앉은 채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오른 낙엽송(일본잎갈나무) 군락지를 지나기도 한다. 언젠가도 얘기했다시피 낙엽송은 초봄의 연두색 신록과 가을의 황금빛 단풍이 특히 아름답다고 알려진다. 숲을 더욱 풍성한 색감으로 물들인다는 것이다. 참! 낙엽송은 침엽수(소나무류) 가운데 겨울에 낙엽이 지는 유일한 수종이기도 하다.

▼ 하늘은 빽빽이 들어찬 낙엽송 가지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하다. 비좁은 공간 사이를 볕이 겨우 비집고 들어오는 형국이다. 가지 사이로 비스듬히 내리쬐는 한 줌의 볕이 마치 금빛 쇠창살 같다.

▼ 횡성구간의 특징은 징검다리라 하겠다. 목교로 넘나들던 한다리골과는 달리 이곳 ‘수레너미골’은 징검다리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징검다리 옆에다 나무다리를 새로 놓고 있는 공사 현장도 눈에 띄었다. 사시사철 탐방이 가능하도록 꾸며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내려가는 길에는 또 다른 형태의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숲길 두어 곳에 데크로 제작된 대(臺) 모양의 쉼터를 만들어 땀을 식히며 자연경관을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 나무다리도 만났다.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계절을 가리지 않고 찾을 수 있는 탐방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라 하겠다. 맞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2006년 건설교통부가 주관한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에 선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 수레너미재를 출발한지 28분(계곡에서 발 담그고 간식을 먹은 시간은 뺐다) 만에 또 다른 아치문(이정표 : 태종대 6.8㎞/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8.1㎞)을 만났다. 이번 것은 산길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거꾸로는 산길의 시작이다. 치악산국립공원안내도와 함께 태종과 운곡선생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적은 안내판을 세운 이유일 것이다. ‘수레너미재’에 대한 설명이 되니 말이다.

▼ 이후부터는 마을길을 따른다. 계곡을 벗어나 태종대까지 가는 이 구간은 대부분 포장된 길이라 발의 피로도가 높고 햇볕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해발 500m를 넘나드는 고지대의 마을길은 색다른 정취를 보여준다.

▼ 이곳도 역시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이 즐비했다. 공사가 한창인 현장도 눈에 띈다. 하지만 원주 구간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펜션이나 민박집 간판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주말에나 머물다가는 별장형의 주택들일지도 모르겠다.

▼ 걷는 도중 산딸기 밭을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사랑꾼인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두 손 가득이 따더니 내 입에다 넣어준다. 그러자 새콤달콤한 기운이 입안에 가득해진다. 행복하다. 이런 게 사랑인가 보다.

▼ 마을길을 따라 2km 정도 내려오면 큼지막한 수레너미길 안내도와 함께 갈림길이 나타난다. ‘점터골 삼거리’로 주천강을 낀 마을길을 따라 태종대로 갈 수 있는 ‘강림마을길’과 치악산둘레길 3코스의 정식 루트로 나뉘는데, 둘레길 완주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오른편의 ‘수레너미길’을 따라 간다. 참! 이정표는 이곳에서 수레너미재까지의 거리를 3.6km로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날머리인 태종대까지는 아직도 4.6km나 더 걸어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후부터는 농로 느낌이 강한 마을길을 따른다. 오뉴월 뙤약볕에 노출된다는 악조간만 있을 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밋밋하기 짝이 없는 구간이다. 그렇다고 역사 여행을 온 듯한 즐거움까지야 어디로 가겠는가. 고려의 멸망에 상심한 원천석이 조선의 관직을 거부하고 은거한 곳이 이곳 강림이다. 또한 임금의 자리에 등극한 이방원이 스승에 대한 그리움에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재가 ‘수레너미재’이다. 우리는 지금 태종이 지나갔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마차 대신에 우린 걷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

▼ 강림삼거리를 출발하고 15분쯤 흘렀을까 개울을 건너는가 싶더니 이내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올라서는 고갯마루는 ‘웃고사리재’일 것이다. 이 구간에서 우린 따가운 햇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봤자 15분이 채 되지 않았고, 길은 또 다시 따가운 뙤약볕 속으로 되돌아가버리지만 말이다.

▼ 오늘의 꽃은 ‘도라지꽃’으로 꼽아봤다. 강원도의 상징으로 ‘도라지꽃’만한 꽃이 없겠기에 말이다. 거기다 그 귀하다는 ‘백도라지’인 것이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 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에 철철 넘친다.’라는 노래도 있지 않는가. 그 귀하다는 ‘백도라지’를 만났으니 행운이라 하겠다.

▼ 오뉴월 불볕에 버티다 못한 집사람이 드디어는 양산을 펼쳐들었다. 숙부님 문병 차 지방에 내려갔을 때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매제가 선물한 우산이다.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것이라선지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트레킹 때마다 양산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 이 구간은 아래 사진과 같은 풍경의 연속이다. 마을을 지났다싶으면 언덕이 나오고, 그 언덕을 넘었다싶으면 또 다른 마을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 그래선지 강원도의 속살도 심심찮게 엿볼 수 있었다. 푸르름으로 뒤덮인 강원도의 들녘을 옥수수밭과 감자밭이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감자밭에는 오가는 농부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하지만 눈에 익은 풍경은 아니었다. 옛날처럼 직접 캐면서 주워 담는 게 아니라 트랙터가 갈아놓은 땅에서 사람들은 그저 주어 담기만 하면 된다.

▼ 새로운 풍경도 만날 수 있었다. 감자나 옥수수 등 조상 대대로 해오던 밭작물 대신에 특용작물이라 할 수 있는 인삼을 재배하고 있는 것이다. 정겨운 풍경이 사라져버린 게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공산주의 사회도 아닌데 농가소득을 나라에서 보전해 줄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 두어 곳의 목장도 스치듯 지난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아오던 목장들과는 달리 깔끔한 외모를 지녔다. 식품의 ‘안전관리인증기준(HACCP SYSTEM)’ 적용 사업장임을 자랑하는 안내판에 고개가 끄떡거려지는 이유이다. 아니나 다를까 ‘롯데백화점’의 횡성한우 지정농장이라는 입간판도 눈에 띄었다.

▼ 삼복 뙤약볕에 노출된 채로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탐방로가 드디어는 숲속으로 들어선다. 강림삼거리에서 1시간 15분쯤 떨어진 지점인데, 널찍한 임도지만 울창한 소나무 숲이 햇볕을 가려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새로운 기분으로 조금 더 걷자 치악산국립공원 ‘부곡 공원지킴센터’로 들어가는 2차선도로가 나오고, 우린 이곳에서 ‘횡지암(橫指岩)’이라는 의미 있는 안내판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임도 곁의 가래골을 거슬러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바위로, 조선 세 번째 임금인 태종과 그의 어릴 적 스승인 운곡 원천석에 얽힌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원천석이 이 바위에 올라앉아 제자인 태종을 잘못 가르쳐서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빗길로 횡(橫)’자에 ‘가르칠 지(指)’자를 쓰는 이유란다. 안내판은 또 태종이 원천석을 만나러 왔을 때 노구소(老嫗沼)에서 만난 노파가 원천석이 간 방향을 ‘빗 가리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얘기도 적고 있었다.

▼ 날머리는 ‘태종대(太宗臺,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 2116)’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100m쯤 내려가자 ‘치악산국립공원’이 시작됨을 알리는 입간판이 나타난다. 건너편 길가에는 구간안내도와 이정표(4코스 초치 26.5㎞/ 3코스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14.7㎞) 등 ‘수레너미길’이 종료되었음 알리는 각종 시설물들이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3시간 5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은 12.77km를 찍고 있다. 오늘처럼 폭염 경보까지 내려진 무더운 날, 그것도 해발이 700m를 훌쩍 넘기는 고갯마루를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오르내리는 경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완만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 ‘태종대(太宗臺)’에 대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안내판의 뒤가 ‘태종대’로, 원천석(元天錫) 선생의 강직하고 굳은 선비의 절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장소다. 이방원이 왕위(태종)에 오른 후, 옛 스승인 운곡(耘谷)에게 다시 관직을 맡기고 정사를 의논하고자 이곳을 찾았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에 방원이 운곡을 찾아왔을 때 머물던 곳이라고 하여 처음에는 ‘주필대(駐蹕臺)’라 부르다가 후일 방원이 죽은 뒤 그의 시호(諡號)를 따 ‘태종대’로 고쳐 부르게 됐다. 그래선지 ‘태종대’라는 비각(碑閣)의 현판에도 불구하고 안에는 ‘駐蹕臺’라고 적힌 빗돌이 모셔져 있었다.

▼ ‘태종대(太宗臺)’라는 휘호는 비각 너머의 벼랑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10길쯤 되어 보이는 바위벽에 ‘太宗臺’라 음각한 뒤 붉은색으로 채색했다. 그밖에도 자잘한 글씨가 여럿 적혀있었으나 읽어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