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도(南海島) 가족나들이

 

여행일 : ‘19. 3. 31()~4. 2()

여행지 : 경상남도 남해군(독일마을, 가천마을, 보리암, 상족암)

 

함께한 사람들 : 가족여행

 

특징 : 일 년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한 형제들 모임. 올해는 남해도를 돌아보기로 했다. 남해의 별명은 일점선도(一點仙島), '한 점 신선의 섬'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경관이 아름답다. 볼거리 많고 먹거리가 넘쳐나서 보물섬이라고도 불린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 한껏 달아오르는 중이다. 사천에서 창선대교를 건너 남해도로 들어선다. 다리 아래 바다색이 다르고,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이 다르다. 참고로 남해는 행정지명이지만 한반도의 남쪽바다를 아우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부르는 산과 섬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췄고, 그 덕분에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넘친다.

 

이번 여행의 베이스캠프는 국립 남해편백자연휴양림’(삼동면 봉화리 산 553-1)

이름 그대로 남해 인근에 위치하며, 편백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멀리 있는 벗을 찾아가듯 넉넉한 마음으로 차를 몰아 남쪽으로 내려가면 남해와 육지를 연결하는 삼천포대교에 다다른다. 다리를 건넌 다음 3번 국도를 계속 타고 가다가 동천리삼거리(삼동면 동천리)에서 우회전해 잠시 들어가면 봉화삼거리(삼동면 봉화리)’. ‘남해편백자연휴양림이정표를 따라 7km쯤 더 가면 휴양림에 도착하게 된다. 1998년 개장한 휴양림은 다양한 숙박 시설을 갖췄다. 독채형 숲속의집 20, 콘도형 산림문화휴양관 객실 13, 단체 방문객을 위한 숲속수련장 객실 14실에 연립동 8실까지 합하면 모두 55실로 국립자연휴양림 중 가장 많은 객실을 자랑한다. 이밖에도 산림복합체험센터, 야영장, 산림욕장, 야외교실, 특산물판매장 등 위락 편의시설들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편백자연휴양림이란 이름에 걸맞게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부터가 달라진다. 하늘로 치솟은 편백의 물결.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 또한 물결을 이룬다. 편백은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방출하는 나무로 알려지는데, 이 물질은 특유의 살균효과 덕분에 아토피를 비롯한 피부 질환에 효험이 있고, 신경계를 안정시켜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정신을 맑게 해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은 황사와 미세 먼지에 찌들어온 우리 일행에게는 힐링의 시간이 되어줄 것 같다.

 

 

첫 번째 방문지인 독일마을로 가는 길에 거대한 느티나무가 보여 잠시 차를 멈췄다. 나이가 270살이나 먹은 보호수로 나무 아래에 돌탑을 쌓고 제단까지 만들어놓았다. 이곳 봉화마을에서 신목(神木, 당나무)으로 모시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신목은 하늘과 땅,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거룩한 곳으로 여겨진다. 그래선지 나무와 탑, 제단 할 것 없이 모두 금줄을 둘러놓았다.

 

 

남해 여행의 시작은 독일마을이다. 때는 바야흐로 상춘지절(常春之節). 산하가 꽃으로 뒤덮이고 그 향기가 더 없는 낙원으로 인도하는데 어찌 길을 나서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하물며 이곳 독일마을은 명품 관광지로 소문난 곳. 마을 주차장은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아랫동네인 봉화마을에 차를 대고 1Km 이상을 걸은 다음에야 관광안내소에 이를 수 있었다. 독일마을 투어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 투어를 시작하기 전 점심 겸해서 남해도의 명물인 멸치쌈밥을 맛봤다. 남해 멸치는 어른 손가락만큼 크고 통통해서 쌈밥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모든 게 입이 짧은 내 탓이겠지만 말이다.

 

 

뮌헨,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베를린, 하노버. 독일어를 몰라도 이 정도 지명은 익숙하다. 구텐베르크, 괴테, 베토벤 등도 친숙하다. ‘독일로(Deutsche Straße)’를 사이에 두고 늘어선 40채의 주택엔 이런 이름들이 붙었다. 거기다 외형도 하나같이 하얀 벽에 주황색 지붕이다. 유럽풍으로 꾸며진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관광안내소 정면으로 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독일마을 여행의 시작과 끝이랄 수 있는 도이치 플리츠(Deutscher Platz)’, 즉 마을의 중심축인 독일 광장이 그쪽 언덕에 있기 때문이다. 광장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유럽의 마을을 벤치마킹이라도 했는지 파독 기념관과 식당, 기념품 판매점 등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그러니 동화 같은 풍경에 이끌려 마을로 내려가기 전에 먼저 파독전시관에 들러 마을의 역사부터 알아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

 

 

반대편은 원예 예술촌으로 연결된다. 17명의 원예인들이 모여 만든 예쁜 마을로 프랑스풍, 지중해풍, 미국풍, 호주풍, 스위스풍, 멕시코풍의 여러 정원들이 꾸며져 있으며 산책길도 벚꽃길, 매화길, 장미 터널 등으로 다양하게 꾸며졌다. 하지만 직접 찾아보지는 못했다. 5천원의 관람료가 부담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이곳 독일마을과 가천 다랑이마을까지 둘러봐야 하는 오후 일정이 너무 빠듯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원예예술촌은 단순한 테마 마을이 아니라 원예 전문가들이 거주하는 곳이자, 직접 가꾸는 정원이다. 대다수 주민이 카페나 아이스크림 가게 등을 운영하는데, 운이 좋으면 남해 출신 배우 박원숙·맹호림 씨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박씨는 이곳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맹씨는 핀란드 통나무 주택 핀란디아에 산단다.

 

 

들머리에는 정착 1세대의 명단이 새겨진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독일마을1960년대 독일(당시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로 파견되었던 독일거주 교포들이 대한민국에 재정착할 수 있도록 조성해놓은 공간이다. 2003년 입주 이래 광부 출신 12, 간호사 출신 28명이 터를 잡았다. 독일인 남편 6명도 아내를 따라왔단다. 그들은 독일에서 재료를 수입해와 이곳에다 독일식 전통주택을 지었다. 그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젠 연 100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다.

 

 

옥토버 페스트(Oktoberfest)’라고 적힌 행사용 대문도 보인다. 매년 9월 열리는 뮌헨의 축제로 도시 전체가 맥주 향기에 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 독일마을에서 열린다는 맥주축제에서 이를 벤치마킹이라도 한 모양이다. 아무튼 옥토버페스트는 뮌헨 시장이 대형 오크롱 마개를 나무망치로 따면 그 순간 12발의 축포가 터지면서 시작된다. 이때 뮌헨 시장이 개봉하는 맥주를 메르첸비어(Märzenbier)라 부르는데 '3월의 맥주'라는 뜻을 갖고 있단다. 옥토버페스트를 위해 그해 3월 홉을 많이 넣고 5개월 이상 숙성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독일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독일 공방이다. 공방(工房)이라고 해서 단순히 공예품이나 만드는 곳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 이곳에서 만드는 공예품 외에도 와인이나 초콜릿 등 다양한 상품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공방의 옆에는 독일 현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바이로이트(Bayreuth)’가 들어서 있다. 독일 전통방식으로 만든 수제 맥주와 함께 독일식 족발인 슈바인학세(Schweinshaxe)’의 바삭함, 역시 독일의 전통 소시지인 브랏부어스트(Bratwurst)’의 탱탱함을 맛볼 수 있는 독일식 레스토랑이다. 이밖에도 독일맥주와 음료, 식료품을 팔고 있어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받을 수 있다.

 

 

오늘도 집사람은 대한민국 만세!’. 언젠가도 얘기했듯이 외국에만 나가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애국자가 된다. 집사람에게 세계 일주를 시켜주겠다며 시작된 해외여행이 벌써 6년째. 나라로 쳐도 40개국에 가까워졌다. 거기다 이곳은 하얀 벽면에 주황색 지붕을 한 전형적인 유럽풍의 분위기. 이 정도면 만세삼창이 절로 나와야하지 않겠는가.

 

 

광장 한켠에는 파독 전시관이 들어서 있었다. 지하 1,200m 갱도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파독 광부와 외롭고 고된 생활을 이겨 낸 파독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곳. 즉 이곳 주민들이 살아온 길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독일 생활의 향내를 간직한 실제 유물과 영상이 독일 생활의 흔적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곳이니, ‘글릭아우프(Glück Auf)!’ 살아서 돌아오라는 인사로 시작된 그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꼭 방문해 보자. 남과 북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1960년대. 뼈저리게 가난했던 나라에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있었다. 196312월에 광부 247명이 서독행 비행기에 올랐고 1966년에는 젊은 간호사들이 서독으로 떠났다. 이후 1977년까지 광부 7,936, 1976년까지 간호사 11000여 명이 비행기를 탔다. 이들은 먼 타향에서 열심히 일했고, 그 대가로 받은 돈을 한국에 보냈다. 그 돈으로 나라에서는 다리를 놓고 공장을 세웠다. 고향집에서는 동생들이 공부를 했고, 아버지는 막걸리를 마셨다.

 

 

먼저 눈에 띄는 건 탄광에서 쓰던 물건들. 외화를 벌기 위해 멀리 독일로 떠났던 파독 광부들의 노고가 담겨있다. 1963년 부자나라에서 운명을 바꿔보겠다며 광부들은 독일 땅을 밟았다. 광부를 지원한 사람 중에는 대학 졸업자도 많았는데 손이 고우면 뽑히지 않을 것 같아 몰래 손등에 검정 칠을 하는 사람도 있었단다. 동방에서 온 작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다. 몸집이 큰 독일인들이 착용했던 작업복을 입고 지하 1000m에서 석탄을 캤다. 장비가 무거워 허리가 휘어졌다.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무조건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잠을 청하기도 했단다.

 

 

머나먼 타국에서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했던 파독 간호사들의 애환 역시 들여다볼 수 있다. 1966년에 독일 땅을 밟은 한국의 딸들도 말이 통하지 않아 처음에는 청소나 빨래 같은 허드렛일을 했다. 시간이 지나자 손끝이 야무지고 매사에 헌신적인 간호사들은 동방에서 온 천사로 불렸다.

 

 

간단하나마 유럽식 노천카페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전시관 옆에 마을주민들이 운영한다는 간이식당 도이체임비스(Deuche Imbiss)’가 문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독일식으로 만든 전통 소시지를 맛볼 수 있다. 독일에서 직접 공수해 온 다양한 맥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니 맥주 마니아인 내가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독일식 그릴 소시지를 안주 삼아 마이셀(밀맥주) 한 잔. 아니 나는 석 잔이나 마셔버렸다.

 

 

맥주하면 또 독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선지 이곳에서는 조형물까지도 오크통이다. 아니 마차에 실어놓은 것이 매년 10월에 열린다는 독일마을 맥주축제때 사용하는 소품일지도 모르겠다. 세계 3대 축제의 하나인 독일 뮌헨의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를 벤치마킹해 독일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정통 독일맥주와 소시지를 맛볼 수 있다는 그 이색적인 축제 말이다.

 

 

남해 스몰비어 파티라는 이름표를 단 오크통 마차도 보인다. ‘스몰비어 파티가 맥주축제 때 독일맥주와 소시지, 학센 등 독일음식을 비롯한 다양한 음식부스가 설치되는 광장의 이름일지니 이 또한 축제 때 사용되는 소품이 분명하다.

 

 

광장을 모두 둘러봤다고 해서 끝난 게 결코 아니다. 남쪽 끄트머리에 독일마을과 물건마을은 물론이고 드넓은 남해바다까지 한꺼번에 조망되는 멋진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맞다. 남해를 바라보는 언덕바지에 지어진 수십 채의 예쁜 독일식 주택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볼거리다.

 

 

전망대 앞에는 전경사진을 담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독일마을이 생겨난 배경과 함께, 이 주택들이 독일 교포들의 주거지임과 동시에 관광객들을 위한 민박으로도 활용되고 있다는 특수성을 적고 있다. 2006년 최고의 인기를 누린 MBC 드라마 환상의 커플KBS-2의 인기 버라이어티 ‘12의 촬영지였다는 자랑도 늘어놓았다.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에 깔린 독일마을은 물론이고 그 아래 바닷가에 터를 잡은 물건마을(勿巾里)’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물건마을은 마음의 독까지 빼준다는 소박한 마을. 아름다운 어촌으로 선정된 마을답게 그 풍경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거기다 지중해풍의 빨강 지붕이 더해지면서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에 행복을 안겨준다. 그렇다면 저 가운데 하나는 철수네 집일 것이다. 촬영 당시 가정집을 임대해서 사용했다니 지금쯤은 원상으로 복구되어 있을 것이고 말이다.

 

 

물건마을은 팽나무와 말채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을 촘촘하게 심은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 천연기념물 제150)’으로 유명하다. 500m 길이의 바닷가를 따라 조성된 초승달 모양의 저 숲은 약 300년 전 마을사람들이 방풍과 방조를 목적으로 심었는데, 마을에는 숲을 해치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그 덕분에 한 가지의 나무도 함부로 베는 일 없이 숲을 지켜오고 있단다. 그건 그렇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해안은 여인의 허리처럼 한껏 휘어진 게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가지를 뻗은 나무들은 남해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당당한 모습이다. 남해 12경중 10경으로 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또 하나. 물건방조어부림은 다른 세 가지 이름이 있다. 거칠고 거센 바닷바람을 막아준다고 하여 방풍림(防風林)이며, 쉴새없이 달려드는 파도에 의한 해일이나 염해·조수를 막아준다고 하여 방조림(防潮林), 숲의 초록빛이 남해를 떠도는 물고기떼를 불러들인다 하여 어부림(魚付林)이다.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두 번째 방문지는 독일마을과 함께 남해도 마을관광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가천마을(加川里)’이다. ‘좁고 작은 논배미를 뜻하는 다랭이 마을로 더 알려져 있는데 바다를 끼고 있지만 배 한척 없는 마을이다. 마을이 해안절벽을 끼고 있는 탓이다. 방파제는 고사하고 선착장 하나도 만들 수 없다보니 주민들은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고, 설흘산과 응봉산의 가파른 비탈을 개간해 논으로 만들었다. 걷어낸 돌로 논둑을 쌓고 물이 쉬 빠져나가지 않도록 점토나 흙으로 마감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올린 계단식 논이 108. ‘다랭이 논(명승 제15)’은 그렇게 태어났다.(아래 사진은 내가 찍은 게 마땅찮아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도로변에 만들어놓은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니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바다와 도로 사이는 벼랑에 가까운 비탈진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벼랑에 걸려있는 마을이 바로 다랭이 마을이다. 이 마을의 참맛은 남해인의 억척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다랭이 논을 돌아보는 것이다. 경사가 심한 바닷가 비탈진 곳에 마을과 손바닥만한 논들이 층층이 산을 이루는 모습은 이색적인 파노라마 풍광이다.

 

 

다랭이마을의 장점은 우리 고유의 문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을은 하얀 벽에 주황색 지붕을 인 독일마을과는 외관부터가 사뭇 다르다. 주황이나 파랑 등도 보이지만 검정색 기와지붕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담벼락도 마을의 일상을 묘사한 각종 벽화로 장식해 탐방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또한 독일식 소시지와 맥주 대신에 이곳에서는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내놓는다.

 

 

마을로 들어서자 '다랭이 마을안내도'가 길손을 맞는다. 안내도는 마을회관과 두레방 등 공공시설 외에도 민박·맛집·슈퍼·카페 등의 편의시설, 그리고 밥무덤과 암수바위 같은 볼거리까지 다양하게 그려 넣었다. 거기다 지명마다 버튼이 있어 누르면 위치를 표시해 준다고 한다. 하지만 고장이 나 있어 무용지물이라는 귀띔이 있어 대충 위치만 보고 그냥 통과한다.

 

 

경운기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골목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마을 담벼락은 그네들의 지난했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주름 가득한 할아버지의 얼굴, 좁다란 논밭을 갈고 있는 소. 모두 이곳의 일상을 담은 그림들이다. 모를 내고 가꾸어 거두어들이는 논농사는 오로지 농부들 몫. 소의 도움을 받아 쟁기질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런 악조건까지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슬기롭게 헤쳐 나온 것도 농부들이었다. 새참으로 나온 막걸리 한잔으로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키면서 말이다. 다랭이마을은 2천 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에서 가장 소득이 낮은 지역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선조의 땀이 밴 한 뼘의 역사가 희망이 되어 2002년 환경부의 '자연생태보존우수마을'에 선정됐고, 2005년 문화재청은 명승 제15호로 마을 전체를 포함한 다랭이 논을 지정했다. 농림수산식품부도 다랭이마을을 '색깔 있는 마을'로 선정했다. 이뿐이 아니다. CNN에서 운영하는 ‘CNN GO’'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50' 중 하나로 이곳 다랭이마을을 선정한바 있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민박으로 생계용 직종을 바꾼 지 오래되었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며 좌절과 숙명론에 빠지는 대신 약점을 특색과 장점으로 살리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천형'의 땅에서 '천혜'의 땅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을 훼손하거나 망가뜨리지는 않았다.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다랭이마을의 원천적인 경쟁력이자 매력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먼 옛날 농토 한 뼘이 아쉬워 산비탈을 깎아 만들었다는 계단식 논과 마을의 풍광은 여전하고, 남쪽 바다는 변함없이 새파랗다.

 

 

마을 곳곳에 세워놓은 이정표도 민박집 일색이다. 그런데 적혀있는 이름들이 재미있다. 해가 뜨는 돋을양지에 있는 해뜨는집’, 느티나무 아래에 있어 느티나무집’, 그밖에도 마을안길을 걷다보면 샘(우물) 옆에 있는 새미끌집’, 비파나무가 있는 비파나무집’, 가파르게 경사진 곳에 있는 까꾸막’, 돌담을 길게 쌓아놓은 긴돌담집등 무척 정겹고 재미나는 이름들을 만날 수 있다.

 

 

가파른 비탈 사이로 구석구석 골목길은 마치 미로와 같다. 그 길을 헤매다보면 옛 우물들도 만나게 된다. 바닷가 비탈진 곳에 마을이 들어섰으니 우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가랑모샘이다. 지금은 눈요깃거리 삼아 안내판까지 세워놓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다랭이마을의 주 식수원이었다.

 

 

또 하나의 샘은 아랫모샘이다. 1970대 새마을운동 이전에는 고랑모샘과 더불어 다랭이마을의 주 식수원이었다.

 

 

옛 우물이라서 두레박으로 물을 직접 길어보는 재미도 있다. 그렇다고 123가구 720여 명이 마시던 생명의 샘이었다는 것까지 잊어서는 결코 안 된다.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밥무덤이라는 특별한 민속자료도 만날 수 있다. 매년 음력 1015일 풍작과 풍어를 기원하는 동제(洞祭)를 지낸 후 제사에 올린 밥을 묻는 구덩이로 마을 중앙(아래 사진)과 동·서쪽 등 세 곳에 설치되어 있다. 이 가운데 마을 중앙의 것은 삼층탑 모양의 구조물이고 동서쪽의 것은 돌담 벽에 감실을 만들어 밥 무덤으로 쓰고 있다. 밥을 묻을 때는 밥을 정갈한 한지에 서너 겹으로 싸서 정성껏 묻고 흙으로 덮은 다음 그 위에 반반한 덮게 돌을 덮어둔다. 이는 제물로 넣은 밥을 고양이나 쥐 등의 짐승이 해치면 부정한 일이 생기거나 신에게 바친 밥의 효력이 없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귀한 제물인 밥을 땅속에 넣는 것은 마을을 지켜주는 모든 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풍요를 점지해 주는 땅의 신, 즉 지모신(地母神)에게 밥을 드림으로써 그 기운이 땅속에 스며들어 풍요를 되돌려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다고 한다. 항해 등에 나갔다가 목숨을 잃어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혼령들을 위해 밥을 묻어둔다는 의미도 있단다.

 

 

우리네 시골마을에도 마을회관정도는 필수다. 2016년에 지어진 지상 2층의 건물에는 이장 집무실과 회의실, 그리고 남·여 경로당 등이 들어서 있다. ! 마을회관 옥상이 가천마을 최고의 전망대로 알려져 있으니 한번쯤 올라가보는 것도 괜찮겠다. 잠깐 앉아 쉬면서 아픈 다리품도 달래고, 맑고 잔잔한 겨울바다를 보면서 번거로운 일상을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마을은 그동안 국내외를 통해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그리고 이제는 해마다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조상 대대로 가난을 면치 못하던 좁은 다랭이 논을 하나의 상품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에는 주민들의 노력도 크게 한몫을 했단다. 허물어져 가던 집을 고쳐 펜션과 민박 시설로 탈바꿈하고 마을의 주변 볼거리를 코스로 엮었으며 다랭이 만들기, 농사 체험 등 사계절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몰려드는 관광객을 맞았다. 그 현장이 바로 체험관인 다랭이 두레방이다. ‘두레란 농촌에서 농민들이 농사일이나 길쌈 등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만든 노동조직을 말하는데, 이 마을에는 다랭이논보존회라는 두레가 조직되어 있다. 이들은 일부 다랭이 논에 벼를 심어 가을 농촌경관을, 10월에는 유채를 파종해 이듬해 봄에 유채꽃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고 있단다.

 

 

 

다랭이마을에서는 꼭 맛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유자 잎 막걸리인데 그 유래가 독특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집에서 만든 막걸리를 관광객들에게 건네기 시작했는데, 그 맛에 반한 이들이 주변에 전하면서 입소문을 탔고, 이후 다랭이 마을을 찾는 여행자들은 너나없이 할머니의 막걸리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열흘 익힌 막걸리에 유자 잎을 넣고 나머지 사흘을 숙성시켜 거른 유자잎막걸리는 그렇게 다랭이 마을의 명물이 되었다. 유자 향이 솔솔 풍겨오는 것은 물론이고 달큼한 맛이 함께 혀끝을 타고 넘어오는 것이 특징. 현재 이 막걸리는 할머니의 유지를 이어받은 시골할매 막걸리라는 음식점에서 팔고 있다. 해물된장 정식과 해물칼국수 등 다양한 음식이 있지만 막걸리와 함께하는 해물파전이 가장 인기라고 한다. 투어를 끝낸 다음, 해물파전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 사발 걸쭉하게 마셔볼 일이다.

 

 

골목길을 누비다가 박원숙씨가 운영한다는 커피&스토리를 만났다. 독일마을 앞 예술촌에 그녀가 운영하는 앤티크 커피숍이 있다고 했으니, 이곳은 2호점쯤 되는 모양이다. 2008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모친과 함께 남해도에 눌러앉았다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워낙 많아 사랑방 같은 커피숍을 만들었단다. 그게 또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지 최근에는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라는 버라이어티 예능프로의 무대가 되고 있는 중이다.

 

 

고소한 빵 냄새에 홀려 따라가다 다랭이 빵집을 만났다. 육쪽마늘빵과 치즈고로께, 꽈베기, 팥도너츠, 수제햄버거에 아메리카노 커피까지 판단다.

 

 

전망 좋은 곳에는 울 마더라는 카페도 들어서 있다. 층층이 쌓여있는 다랭이논과 함께 남해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쏙 들어오니 커피한잔의 여유를 권해본다. 그러다가 색색의 머그잔을 소품삼아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둘 일이다. 낭만 가득한 인생샷이라도 건질지 누가 알겠는가.

 

 

마을 끄트머리에 이르자 사람의 성기를 닮은 커다란 한 쌍의 바위가 서있다. 다랭이마을의 자랑거리인 암수바위(경남 민속문화재 제13)’이다. 이 바위들은 조선 영조 27(1751) 남해 현령 조광진의 꿈에 나타난 노인의 계시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에서는 미륵불(彌勒佛)’로 불리는데, 5.8m(둘레 2.5m) 높이의 숫미륵은 귀두와 힘줄까지 나타나는 등 남성의 성기를 영락없이 빼다 닮았고, 3.9m(둘레 2.3m) 크기의 암미륵은 여인이 잉태하여 만삭이 된 모습을 한 채로 비스듬히 누워있다. 성기 모양으로 돌을 깎아 자식을 많이 낳고 농사의 풍요로움을 빌던 대상이 마을전체의 수호신으로 바뀌고, 다시 불교의 미륵불로 이어지는 민간신앙의 한 예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바위들은 간절히 소원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득남을 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고 한다. 또한 마을 주민들은 욕심을 부려 바위 가까이에 작물을 심거나 바위에 손가락질을 하면 화를 입는다고 믿는단다. 그 믿음은 매년 음력 1023일 풍농과 풍어를 비는 동제(洞祭)로 발전했다. 배를 가지고 있는 어민들이 개별적으로 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처음 잡는 고기를 바위에 걸어 놓으면 고기도 많이 잡히고 사고도 방지된단다. ! 숫미륵의 모양새에 대비되는 암미륵을 찾다가 헷갈리고 말았다. 남성의 성기에 대비되는 여성의 성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의문은 안내문을 읽어보고서야 풀렸다. 1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인데 여성의 성기가 아니라 임신하여 만삭이 된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습이란다.

 

 

마을을 다 둘러봤다면 이제 주변을 둘러볼 차례이다. 바닷가로 내려가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일명 삿갓논, 삿갓배미라고도 불리는 다랭이논의 논두렁을 걸어볼 수도 있다. 옛날에 어떤 농부가 논을 갈다가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어보니 그 안에 논이 하나 더 있더라는 데서 유래된 삿갓논은 자투리땅도 소중히 활용한 남해 사람들의 억척스러움을 대변한다. 그처럼 작은 논은 다른 이름으로도 나타난다. 죽이나 밥 한 그릇과 바꿀 정도로 작다고 해서 죽배미밥배미로도 불린다.

 

 

개울가를 따라 잠시 내려가니 바래길이정표가 보인다. '바래'라는 말은 남해 어머니들이 가족의 먹거리 마련을 위해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에 맞춰 갯벌에 나가 파래나 조개, 미역, 고둥 등 해산물을 손수 채취하는 작업을 일컫는 토속어이다. 그러니 바래길은 마을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갯벌로 가던 길을 이어 만든 남해도판 올레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다랭이마을은 19개 코스(본선 16+지선 3) 231km로 이루어진 바래길지겟길앵강다숲길에 속해 있다. 지겟길은 조상들이 지게를 지고 땔감과 곡식을 나르던 길이고, 반대편인 앵강다숲길은 조용한 호수 같은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앵강만(鶯江灣)을 중심으로 남면, 이동면, 상주면 9개 마을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이다. ! ‘바래길가운데 11개 코스는 남해안 전체를 잇는 '남파랑길'36~46코스와 노선이 일치되기도 한다.

 

 

남해 바래길을 따라 잠시 걸어보기로 했다. 들쭉날쭉 제 멋대로 생긴 논들이지만 그 사이사이로 산뜻한 산책로와 전망대가 마련돼 있어 편안히 돌아볼 수 있다. 이 길은 옛날 다랭이마을의 조상들이 지게를 지고 땔감과 곡식을 나르던 길이라고 해서 다랭이 지게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남해 바래길’ 1코스(평산항에서 가천초교까지 16)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데, 해안선을 따라 나있기 때문에 줄곧 한쪽으로 남해의 비경을 안고 숲과 바다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아름다운 길이다. ! 다랭이 마을의 논두렁길은 또 소를 몰고 다니면서 소에게 풀을 뜯게 했다는 뜻을 지닌 소몰이살피길’, 마을과 다랭이 논 사이를 걷는 상수리길’, 고기 떼가 들어오는지 망을 보던 망수의 발자취를 재현한 망수길등으로 나뉘기도 했다.

 

 

이곳 남해도는 500년 전부터 '꽃밭(花田)'이란 별칭으로 불렸던 아름다운 보물섬이다. 바래길은 그런 꽃밭 사이를 누비면서 시작되고 있었다. 유채꽃이 흐드러진 꽃밭은 기본, 공들여 가꾼듯한 라벤더도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거기다 길이 스며드는 산자락에서는 하얀 벚꽃이 꽃비를 내리고 있다. 이야기꾼들이 풀어놓는 500년 전의 남해도가 이런 풍경이 아니었을까?

 

 

바래길은 가천마을 바닷가가 가장 잘 조망되는 핫 플레이스이기도 하다. 4월의 다랭이 마을은 유채꽃이 한 몫을 톡톡히 수행한다. 가을걷이를 끝낸 논은 물론이고 길가 빈터에도 어김없이 유채꽃이 피어났다. 맞다. 어느 여행전문가는 다랭이 마을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를 유채꽃이 만발하는 봄철로 꼽고 있었다. 친절하게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서 다랭이마을과 마주하면 어떻게 저런....정말 신기하다라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게 된다면서 말이다. 그는 또 모내기를 끝낸 6월과 추수를 앞두고 누렇게 벼가 익는 무렵인 가을도 좋기는 매한가지라고 했다.

 

 

맨 마지막은 바닷가 탐방이다. 비탈과 갯바위에 데크길과 다리, 심지어는 출렁다리까지 놓아가며 길을 냈다. 다랑이 논들이 올려다 보이는 이 산책로는 한마디로 절경이다. 아래로는 아찔한 기암절벽이 뻗어나가고 뒤돌아보면 금빛 다랑이 논이 눈부시다. 한려수도 청정해역의 푸른 바다는 기본이다. 그 가운데서도 백미는 출렁다리. 호들갑스런 여성들의 비명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곳이다.

 

 

바닷가에서 올려다보는 마을 풍경도 일품이다. 첩첩이 쌓여있는 논들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맞다. ‘다랭이 마을은 손바닥만 한 논이 언덕 위에서부터 마을을 둘러싸고 바다까지 이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45도 경사 비탈에 108개 층층 계단, 10제곱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것부터 1,000제곱미터에 이르는 것까지 680여 개의 논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길, , 논 등 모든 것이 산허리를 따라 구불거리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곡선 위의 오선지 같은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바닷가에 이르자 갯바위지대가 펼쳐진다. 그런데 조각배 하나 정박할 공간이 보지지 않는다. 맞다. 이곳 다랭이마을은 남해에서 선착장이 없는 유일한 갯마을이라고 한다. 더구나 이곳 남해도는 태풍이 잦은 곳. 거친 바위와 거센 파도로 인해 배의 쉼터가 되지 못하니 고기잡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산비탈에라도 기댈 수밖에 없었을 게고. 손바닥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은 논이나마 층층이 만들어가며 고단한 삶을 이어왔을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문득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이라던 법정스님의 게송(偈頌)이 생각난다. 이 가운데 마지막 구절은 수주작처 입처개진(隨主作處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니라라는 당나라 임제(臨濟) 선사의 말씀을 인용했다. 이 말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현재 살아가는 이곳이 가장 행복한 세상이라는 삶의 진리를 담은 글이다. 말하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운 이 말씀이 하필이면 지금 머리에 떠오른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가천마을 주민들의 삶에서 그 진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며 좌절과 숙명론에 빠지는 대신 약점을 특색과 장점으로 살리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천형'의 땅에서 '천혜'의 땅으로 변화시킨 그네들의 삶 말이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지금 머무르고 있는 이곳에서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삶을 영위해 나간다면 세상은 모두 참된 진리로 채워질 것이고, 다랭이마을 앞바다의 맑고 푸른 바다처럼 마음은 온통 행복으로 가득 차오를 것이라 믿는다.

내 고향 순창 나들이

 

여행일 : ‘20. 10. 17(토)~19(월)

여행지 : 전라북도 순창군(책여산, 강천산), 임실군(국사봉)

 

함께한 사람들 : 가족여행

 

특징 : 손아래 남동생이 아들을 결혼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예식장이 머나먼 광주 땅이다. 거기다 코로나가 난리까지 치지만, 그렇다고 집안 행사인데 가보지 않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일산에 사는 여동생이 자기네 차로 편히 모시겠다니 말이다. 가타부타 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2박3일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숙소 예약은 첫째 여동생이 이미 해놓았고, 현지에서의 안내는 광주에서 살고 있는 둘째 여동생 내외가 맡았다. 평생 직업이던 교편생활을 조기에 접고 여행 다니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부부이니 나머지 네 가족은 그냥 따라만 다니면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내 고향 순창 여행은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굽어 흐르는 섬진강의 청류로 순창을 읽을 수도 있고, 곳곳에 숨어있는 명당으로도 순창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배롱나무 붉은 꽃으로 담을 삼은 정자의 풍류로 순창을 볼 수도 있다. 그윽한 자연을 앞세운 산들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니 비어있는 종이 위에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순전히 우리들의 몫이다.

 

▼ 여행의 시작은 회문산 자연휴양림(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예식이 저녁시간(17:30)에 있다 보니 혼주 측에서 제공하는 식사가 아예 만찬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모처럼 만나본 풍성한 상차림이었다. 넉넉하게 배를 채우고 난 뒤에는 미리 예약해놓은 순창의 회문산으로 직행. 88고속도로 순창 IC에서 내려와 27번 국도를 타고 전주방면으로 올라가다 장암교차로(임실군 덕치면 장암리 624-5)에서 ‘회문산로’로 옮긴다. 이어서 구림방면으로 2㎞쯤 들어가다 자연휴양림의 입구 삼거리에서 이정표(휴양림→1.7㎞)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1993년에 문을 연 회문산 자연휴양림은 우리가 머물게 될 숙박시설(16개 동) 외에도 강의동과 야영장, 임간수련장, 물놀이장, 산책로 등 다양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특히 회문산에 서식하는 곤충들을 표본으로 활용하는 생태교육장은 흔치않은 자랑거리다.

▼ 휴양림의 가장 큰 볼거리는 ‘회문산 역사관(回文山歷史館)’이다. 역사관은 ‘빨치산사령부 벙커’에서의 생활모습을 구현하면서 2000년 시작됐다. 그러다가 2011년 빨치산 사령부를 철거한 다음, 그 자리에 역사관을 새로 짓고 회문산과 관련된 내용들을 벽화 형태로 전시하고 있다. 회문산의 명소인 천근월굴(天根月窟) 등에 대한 소개, 회문산 자락에 위치한 천주교 성지에 대한 설명, 만일사(萬日寺)와 순창 전통 고추장에 대한 이야기, 순창을 지킨 사람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순창의 항일 의병 활동, 풍수지리와 순창의 풍수지리, 1950년 6·25 전쟁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회문산 지역은 1846년(헌종 12) 천주교 병오박해 때 삼족(三族)을 멸하는 화를 피해 김대건 신부의 일가친척들이 피신한 곳이며, 한말에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임병찬(林炳瓚), 양윤숙(楊允淑) 등의 의병대장이 일제와 치열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인 곳이다. 6·25 전쟁 당시에는 남부군 사령부 터로 700여 명의 빨치산이 주둔하였으며 사령부 막사가 설치되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회문산은 조선의 건국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민족 종교인 갱정유도(更正儒道)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 최근에는 ‘6·25 양민 희생자 위령탑(六·二五良民犧牲者慰靈塔)이 추가로 세워졌다. 탑은 중앙에 높이 10여m의 화강암 돌기둥을 두고, 그 앞쪽에 양손을 하늘로 뻗은 여인이 서있다. 그 왼편에 여인이 쓰러진 사람을 안고 있는 상(像), 그리고 우측에는 철모를 쓴 사람이 쓰러진 사람을 안고 있는 상을 배치했다. 참고로 회문산의 빨치산 활동은 1948년 여순사건에서 패퇴한 패잔병 가운데 일부가 회문산으로 숨어들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50년 9월 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연합군의 북진으로 갈 길을 잃은 좌익 동조세력이 회문산에 모여들면서 활동은 더욱 거세진다. 이후 국군의 소탕작전에 밀려 지리산으로 옮겨가기까지 이 지역에서는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갔다. 이때 희생된 수많은 양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0년 이 위령탑을 세우게 되었단다. 참고로 이곳은 6.25 전쟁 당시 빨치산의 ‘남부군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제목에서 말한 고추장 색깔의 첫 번째로 사상적인 빨강과 관련된 곳이라 하겠다.

▼ 이왕에 왔으니 회문산의 정상을 밟아봐야 하겠지만 수년 전에 이미 올랐던 것을 핑계 삼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당시 끄적거렸던 글을 올려본다. <정상은 열 평 조금 못되는 盆地, 북서쪽은 바위 벼랑을 이루고 있어 시야가 잘 열린다. 많은 산들이 그 머리위에 TV중계탑이나 헨드폰 기지국들을 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도 어김없이 흉물스런 鐵製塔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본 회문산은 그 모습이 회문봉을 중심으로 깊은 계곡을 좌우로 뒤집은 U자 형상이다. 그 말발굽의 끄트머리를 출렁다리로 연결해 놓았고...>

▼ 당시 가장 의미 있게 보았던 풍경도 올려본다. 정상에서 10여분 정도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천근월굴(天根月窟)’이라는 바위다. 집체만한 바위의 한쪽 면에 적힌 상형문자가 ‘천근월굴’로 판독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천근은 陽으로 남자의 性을 그리고 월굴은 陰으로 여자의 性을 나타내어, 陰陽이 한가로이 왕래하니 소우주인 육체가 모두 봄이 되어 완전하게 된다는 뜻이란다. 陰陽調和. 아니 調和로운 男女合宮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하나 더, 묘에 대한 당시의 내 기록이 있어 잠깐 옮겨본다. <회문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다른 유명한 산들에 비해 墓가 무척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는 회문산 정상 바로 옆에도 묘가 있었고, 등산로 주변에 조그만 틈만 보여도 어김없이 묘들이 자리 잡고 있을 정도이다. 이곳 회문산은 우리나라 5대 明堂중의 하나로서 예로부터 靈山으로 알려져 왔다. 홍문대사(홍성문)가 이곳에서 道通한 후, 墓穴과 관련된 책자를 적었는데, 이 책에서 회문산 정상에 24혈이 있다하며, 오선위기혈에 묘를 쓰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代까지 간다고 했다니, 어느 누가 조상의 묘를 이곳에 쓰지 않고 배겨내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정상과 주면을 수많은 묘들이 차지하고 있을 수밖에...>

▼ 다음 날 아침, 이동 중에 ‘인계초등학교’에 들렀다. 고학년이 되면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전주로 유학을 떠났지만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추억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당시 나는 동급생들보다 2살 정도가 어렸다. 거기다 작달막한 유전자까지 더해진 내 키는 동급생들보다도 머리 하나쯤은 낮았다. 그러니 오리(2㎞)나 되는 등굣길이 가뜩이나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중간에 만나는 공동묘지나 문둥이가 산다는 골짜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귀신은 물론이고 어린이 간을 떼어간다는 문둥이를 무서워하지 않을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행여 놓치기라도 할세라 동급생들 뒤꽁무니를 쫄쫄 따라다닐 수밖에... 그나저나 반백년을 넘겨 다시 만난 운동장은 엄청나게 작았다. 가장자리를 따라 빙 둘러 심어진 벚나무 고목들도 역시 작달막하다는 느낌이다. 작았던 내 키가 그만큼 자랐다는 얘기일 것이다.

▼ 첫 번째 방문지는 순창(적성면·동계면·유등면)에 위치한 ‘책여산’이다. 책여산은 두 개의 정상을 갖고 있다. 순창과 남원을 잇는 24번 국도를 경계로 남쪽의 ‘순창 체계산’과 북쪽의 ‘남원 책여산’으로 나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둘 모두 ‘순창 책여산’이다. 특히 북쪽의 봉우리를 ‘남원 책여산’으로 부르는 것은 턱도 없는 오류이다. ‘순창 책여산’은 남쪽 능선(책암마을 들머리↔무량사 위 능선)에서 남원 땅과 잠시 어깨를 맞대고 있을 따름이고, 북쪽의 ‘남원 책여산’은 그 경계가 아예 산자락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 고려사(高麗史)에 <적성현(赤城縣)은 본래 백제 역평현(礫坪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순화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유래는 잘 모르겠지만 적성(赤城)이란 지명이 ‘붉음(赤)’을 가리키고 있으니 이 또한 고추장 색깔이 아니겠는가.

▼ 제1주차장 근처의 들머리(이정표 : 출렁다리 295m, 어드벤처전망대 560m)에는 환영인사와 함께 ‘채계산(釵笄山)’에 대한 안내문을 적어놓았다. 적성강변 일대에서 바라보면 비녀를 꼽은 아름다운 여인이 누워서 달을 보며 창(唱)을 읊는 월하미인(月下美人)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래선지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르는 소리꾼들이 많이 나왔다면서, 그 중에서도 조선말기의 명창인 이화중선(李花中仙)이 유명하다는 자랑까지 빼놓지 않았다. 이밖에도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 같아 ‘책여산(冊如山)’, 적성강을 품고 있다고 해서 ‘적성산(赤城山)’이라고도 부르며, ‘화산(華山)’이란 또 다른 이름은 화산옹 바위를 품고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단다. 참고로 이화중선은 장재백(張在伯, 순창 출신의 명창으로 남원에서 활약했다)의 조카 장득진의 첩으로 들어가 이곳 적성에서 머물며 5년 동안 판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 계단을 오르려는데 오른편 편백나무 숲속에 작은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라는데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일단은 들어서고 보는 이유이다. 그렇게 들어선 숲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하지만 나무가 내뿜는 향기는 결코 작지가 않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이 여간 진한 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문득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행복이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는 속설이 사실이었던가 보다.

▼ 중간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출렁다리는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순창 고추장을 닮은 강렬한 빨간색이 인상적인 다리. 두 산등성이를 잇는 높이 90m의 다리 아래로 만물을 품은 세상이 갇혀있다. 그림치고는 조금 어색한 그림이 되어버렸지만 뭐가 대수겠는가. 상식을 벗어난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게 요즘사람들이다. 최근 이곳이 순창 여행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이유일 것이다.

▼ 들머리에서 출렁다리까지는 295m.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지만 전 구간이 나무계단으로 되어있어 오르는 게 만만치만은 않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올라선 출렁다리의 초입에는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다리 중간에서 보는 조망이 더 나을 것 같아 다리부터 먼저 건너기로 한다. 2020년 봄, 순창책여산과 남원책여산이라 불리던 두 봉우리 사이의 협곡에 최근 새로 놓인 이 다리는 길이가 270m나 된다. 높이는 90m, 가장 낮은 곳도 75m에 이른다. 국내에서 무주탑 현수교 가운데 가장 길다고 한다. 진안 구봉산의 구름다리 보다 170m. 파주 감악산에 들어선 출렁다리보다도 50m가 길고, 한국기록원이 국내에서 가장 긴 현수교로 인정한 청양군의 천창호에 비해 63m나 더 길다.

▼ 다리를 건너다보면 섬진강의 상류인 ‘적성강(赤誠江)’의 물줄기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채계산을 휘돌아가는 저 물줄기는 광양만에서 남해로 흘러드는데, 조선시대에는 복흥의 도자기와 적성의 옥 등을 실어 나르기 위해 중국 상선들이 드나들 정도로 붐비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저 강에는 물이 넘실거렸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금은 비록 운암댐의 건설로 인해 물의 흐름이 김제평야 쪽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 반대편에도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방금 건너온 출렁다리와 건너편 ’남원책여산‘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이다. 특히 남원책여산(아래 사진에서 맞은편 산봉우리)의 정상어림에 조성된 ‘어드벤처전망대’도 한번쯤을 들러볼만한 곳으로 꼽힌다. 책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암릉은 물론이고, 적성 고을의 들녘이 발아래로 널따랗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 전망대는 출렁다리를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포토죤이기도 하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구름다리를 건너는 일은 수월치만은 않다. 주탑(柱塔)이 없는 현수교라선지 위아래는 물론이고 좌우로까지 큰 폭으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40층 높이의 다리를 건너는 것을 상상해 보라. 거기다 상하좌우로 흔들리기까지 한다면 이건 숫제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채계산의 출렁다리를 건너는 일은 짜릿한 스릴. 한여름에도 온몸이 오싹오싹해지는 공포 체험이 된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고 난간을 붙잡은 손과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 능선을 따라 놓인 나무계단(이정표 : 한옥정자↑ 62m/ 하산로1← 350m/ 하산로2→ 271m)을 오르면 회문산 및 강천산과 함께 ‘순창의 3대 명산’으로 불리는 ‘채계산’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6년 전에 다녀온 것을 핑계로 이번에는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당시에 찍었던 사진을 올려본다. 책여산의 남쪽 정상인 송대봉(松薹峰)은 하도 위태로워 새들조차 앉기를 꺼려했다는 날카로운 바위봉우리이다. 특히 남원 책여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은 마치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옮겨놓기라도 한듯 서슬 시퍼런 바윗길이 이어진다. 짜릿한 스릴을 맛볼 수 있는 매력 넘치는 구간이다.

▼ 책여산 등정을 포기했으니 이젠 내려갈 일만 남았다. 주차장이 있는 괴정리 방향(하산로1)이다. 이 구간은 엄청나게 경사가 심하다. 하지만 나무계단이 놓여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보기 드문 기경(奇景)들을 눈에 담으며 시나브로 내려가면 된다.

▼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를 놓칠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날머리와 주차장 사이에다 ‘농·특산물 판매장’을 배치했다. 그리곤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만드는 농산물을 팔고 있었다. 참고로 내가 태어난 마을은 이곳에서 4㎞도 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적성강이 내 어릴 적 물장구치며 다슬기 잡던 놀이터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물놀이가 싫증이라도 날라치면 어김없이 ‘채계산(釵笄山)’에 올랐었다. 중턱에 있는 ‘금돼지굴’이 우리들의 또 다른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금돼지굴’에는 적성원님으로 부임만하면 부인이 실종되자 궁리 끝에 한 원님이 부인의 허리에 명주실을 달아놓고 부인을 끌고 가는 금돼지를 쫓아가서 죽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판매장 안에서는 감과 밤, 버섯, 고구마 등의 농산물을 팔고 있었다. 꿀처럼 약간의 손질을 거친 특산품도 보였다. 관광객들로부터는 커피나 토스트, 아이스크림 등 주전부리가 더 인기를 누렸지만 말이다.

▼ 두 번째로 찾은 곳은 강천산이다. 순창의 옛 이름은 옥천(玉川), 그리고 오산(烏山)이었다. 그 어원을 세세히 따져보지 않더라도 순창이 예로부터 물과 산이 아름다운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빼어난 자연 덕분일까, 순창은 예로부터 장수의 고장이었으며, 지금도 순창의 산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랑받는 게 강천산이다. 우리나라에서 제1호로 지정된 ‘군립 공원’으로 들머리에 집단촌이 들어서있으니 하루를 묵어가기에도 좋으며, 역사가 얽혀 있으니 이야기 듣기에도 좋은 곳이다. 그건 그렇고 강천산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처연할 정도로 붉은 단풍이다. 이곳 강천산이 고추장 색깔을 닮은 내 고향에서의 마지막 여행지가 되는 이유이다.

▼ 국내 최초의 군립공원이란 명성에 걸맞게 공원은 잘 꾸며져 있다. 애기단풍 숲 사이로 이어지는 왕복 5km의 탐방로(매표소↔구장군폭포)를 맨발로도 걸을 수 있도록 황토모랫길로 조성했는가 하면, 곳곳에 산림욕장을 배치해 목재데크를 따라 숲속 공기를 흠뻑 들이킬 수 있도록 했다.

▼ 매표소를 조금 지나면 ‘병풍폭포’가 눈에 띈다. 병풍처럼 넓게 펼쳐져 쏟아지는 물주기가 장관인 폭포이다. 강천산은 예로부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어왔다. 산을 끼고도는 계곡과 바위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멋진 풍경에다 사람의 손길을 더한 곳이 바로 ‘병풍폭포’다. ‘병풍바위’라는 자연에다 인공의 폭포를 만들어 넣은 것이다. 그러나 지자체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보다. ‘병풍바위 밑을 지나온 사람은 죄진 사람도 깨끗해진다.’는 전설을 적은 안내판까지 세워가며 관광객들의 관심을 끄는걸 보면 말이다.

▼ 전형적인 ‘스토리텔링’도 보인다. 길가에 있는 평범한 바위에다 ‘거라시바위’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너스레까지 덧붙였다. 걸인들이 이 굴(사실은 굴도 아니다)의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받아 강천사 스님들에게 시주를 하고 부처님께 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하루에 한 명 지나가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런 외진 곳에서 과연 시주를 받을 수 있었을까? 이야기는 이야기일 따름이니 그냥 넘어가자.

▼ 다음은 ‘천우폭포’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자연적으로 폭포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아무래도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지 싶다. 누군가는 순창을 일러 ‘화장기 없는 여자’와 같다고 했다. 수더분한 데다 다양한 매력이 있어서 화장을 하는 대로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볼 수 있는 곳이라면서 말이다. 그는 또 ‘강천산’을 여기저기 손을 대서 만든 경관이지만 그윽한 자연이라고 평했다. 천우폭포가 그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 메타세쿼이아 길도 운치가 넘친다. 참! 그러고 보니 아까 강천산으로 들어오는 도중에도 메타세쿼이아 길을 지났었다. 메타세쿼이아라 하면 사람들은 보통 담양의 것을 최고로 꼽는다. 하지만 이곳 팔덕면이 고향인 제수씨의 말로는 순창의 것도 이에 못지않단다. 특히 가로수 길을 걷는다고 담양처럼 야박스럽게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란다. 아무튼 담양은 거기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있다는 걸 알고 가는 곳이지만, 순창은 모르고 문득 만나는 것이어서 더 반갑고 감격적이다.

▼ 강천산(剛泉山)의 또 다른 매력은 계곡이다. 오죽했으면 소금강을 나타내는 ‘강(剛)’자 다음에 ‘샘 천(泉)’를 붙여 놓았을까. 물은 비록 많지는 않지만 기암괴석과 어우러지며 곳곳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낸다. ‘용소(龍沼)’도 그런 풍경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명주실 한 타래가 들어갈 정도로 깊은 웅덩인데 윗용소에는 숫용이, 그리고 이곳 아랫용소에는 본처인 암용이 살았었단다. 안내판에는 풍산면 향가에 살던 소첩용과의 다툼도 적혀있었으나, 첩이 본처를 이기는 내용이 귀에 거슬려 옮기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일주문(一柱門)을 만났다. 그런데 문에 걸린 편액(扁額)이 조금 이상하다. 일주문이라는 게 본디 절에 들어서는 산문 중 첫 번째의 문일지니, ‘강천산 강천사(剛泉山 剛泉寺)’라고 적어야 정상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앞뒤 다 빼고 ‘강천문(剛泉門)’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어쩌면 군립공원을 정비하면서 지자체에서 세우지 않았나 싶다. 맞다. 강천산의 입장료도 절이 아닌 지자체에서 받고 있었다.

▼ 강천사로 오르는 길가에는 작은데다 볼품까지 없는 돌탑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오가는 길손들이 바라는 바를 담아 하나씩 쌓아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못생긴 외모라고 해서 품은 염원까지 비하시키진 말자.

▼ 30분쯤 걸었을까 가파른 산자락에 터를 잡은 강천사(剛泉寺)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887년(진성여왕 1) 도선이 창건한 사찰로 고려시기에는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로 천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이르러 쇠락해졌고 몇 차례 재건하였으나 임진왜란과 6·25전쟁으로 불에 훼손되었다가 이후 신축한 뒤 비구니의 도량으로 전승되고 있다. 창건자 도선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빈찰(貧刹)이 부찰(富刹)로 바뀌고 도량이 정화된다’는 예언이 적중했는지도 모르겠다. 도선은 한국 최고의 풍수지리가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매표소에서 이곳 강천사까지는 1.65Km이다.

▼ 강천사의 풍경소리를 뒤로하자 개울 건너로 ‘삼인대(三印臺,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가 나타난다. 1506년의 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즉위하나 그의 부인인 ‘신씨(愼氏)’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라는 이유로 축출된다. 10년 뒤, 새로 맞이한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무안현감 유옥(柳沃) 등이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 축출된 신씨를 왕비로 복위시키자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한다. 이때 목숨을 건 결의용으로 관인(官印)을 걸어놓았던 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불러오다, 1739년(영조 15년)에야 신씨가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복위되면서 그들의 뜻을 기리는 비각과 빗돌을 세우게 된다. 참! 근처에는 ‘절의탑’이라고 쓰인 돌탑도 세워져 있었다. 2004년 순창군내 300여 개가 넘는 각 마을들에서 돌 2개씩을 가져와 쌓았다고 한다. 순창의 모든 기(氣)를 품었을 것은 당연한 노릇. 그러니 순창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볼 수 있겠다.

▼ 근처에는 수피가 아름다운 300년이 넘은 ‘모과나무(전라북도기념물 97)’도 있다. 외형은 늙고 보잘 것 없지만 해마다 연분홍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며, 특히 못생긴 모과 몇 알에서 풍기는 향기는 온 마을을 덮는다고 한다. 이 나무를 보고 세 번 놀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먼저 저처럼 너무 못생긴 외모에, 그리고 못생겼는데 향기가 너무 좋아서, 마지막은 향기로운데 너무 뜹뜰해서 놀란다는 것이다.

▼ 주변 풍경은 수년 전 들렀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특히 꽃무릇(石蒜)이 눈길을 끈다. 최근에 새로 식재한 모양인데 산자락이나 길가 공터 등 제법 무성하게 나라나있었다. 2006년 문화관광부 주관 ‘전국 최우수 관광자원’,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뽑혔을 만큼 이미 아름다운 자연경관에다 다른 하나의 옷을 더 입히려는 모양이다. 하긴 매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니 그 정도의 공은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 석산(石蒜). 즉 꽃무릇은 가정에서도 흔히 가꾸지만 사찰 근처에서 주로 발견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이 식물에서 추출한 녹말로 불경을 제본하고, 탱화를 만들 때도 사용하며, 고승들의 진영을 붙일 때도 썼기 때문이란다. 또 하나. 꽃무릇은 상사화와 자주 혼동된다. 언뜻 보면 두 꽃이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특히 잎과 꽃이 함께 달리지 않는 것이 똑같다. 그러나 꽃 색깔이 달라서 석산은 붉은색이고 상사화는 홍자색이다. 상사화가 여름꽃인데 반해 꽃무릇은 가을꽃이라는 점도 다르다. 하지만 국내의 상사화 축제를 찾아가 보면 상사화보다 더 많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꽃무릇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눈에 거슬리는 풍경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자생동물도 아닌, 특히 이곳 강천산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판다’ 조형물이 바로 그것이다. 포토죤으로 만들어놓은 모양인데, 이왕이면 신토불이를 살려 ‘반달곰’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야생동물로 바꿔 세웠으면 어떨까 싶다.

▼ 강천산은 애기단풍부터 노랑단풍까지 숨겨진 단풍 명소이다. 특히 현수교 조금 못미처부터 구장군폭포까지 800m가량의 아기단풍이 장관이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만 저 단풍나무들이 순창고추장처럼 붉은 옷으로 갈아입기라도 할라치면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 이 부근은 잎이 아기 손바닥처럼 작아 흔히 애기단풍으로 부르는 단풍나무가 주를 이룬다. 타오르듯 새빨간 단풍잎이 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보기 좋다.

▼ 단풍으로 곱게 물든 풍경을 떠올리며 걷다보면 어느새 ‘구장군폭포(매표소에서 2.65Km 거리)’에 도착해 있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풍광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데, 바로 앞에 팔각정과 벤치 등 쉴 자리가 많고, 폭포가 잘 보이는 곳에 데크를 만들어 사진 찍기도 좋다. 구장군폭포는 옛날 마한시대 혈맹을 맺은 아홉 명의 장수가 전장에서 패한 후 이곳에 이르러 자결하려는 순간 ‘차라리 자결할 바에는 전장에서 적과 싸우다 죽자’는 비장한 각오로 마음을 다지고 전쟁에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 구장군폭포는 병풍폭포와 마찬가지로 인공폭포이다. 하지만 병풍폭포가 소담한 여성의 미를 간직했다면, 구장군폭포는 웅장한 남성미가 돋보이는 폭포다. 용이 꼬리치듯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용천산(龍天山)이라 부르던 강천산은 산세가 수려하다. 그 산세에다 사람의 손으로 세 줄기의 폭포를 만들었으니 그 높이가 무려 120m에 이른다. 거기다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던지 떨어지는 물줄기가 하도 자연스러워 원래 있던 폭포처럼 느껴진다.

▼ 고개라도 들라치면 허공에 걸린 출렁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1980년에 완공된 80m(폭 1m) 길이의 현수교로 철계단을 따라 다리 위로 오르면 50m 아래의 골 바닥이 까마득하게 펼쳐진다. 설치될 당시만 해도 담력 약한 사람은 섣불리 올라서지 말라는 너스레도 있었지만, 요즘은 이 보다 더 높은 곳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니 이젠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 강천산까지 둘러봤으니 배가 출출해질 건 당연한 노릇. 이젠 먹거리를 찾아 나설 차례이다. 내 고장 순창은 고추장으로 유명하다. 그뿐 아니다. 십여 년 전, 나를 초대했던 군수님은 순창의 맛이 남도의 맛이라며 걸쭉한 밥상을 내놓았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특별한 메뉴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순창 땅을 잠시 벗어나 이웃 동네인 담양으로 가잔다. 죽통밥에 곁들인 떡갈비가 먹을만하다면서 말이다. 거기다 안내를 맡은 여동생 내외는 담양의 새로운 명물이라면서 청둥오리 전문점인 ‘유진정’ 카드까지 내놓는다. 그네들의 말대로 청둥오리전골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오리의 머리와 뼈를 이틀 동안 푸욱 삶아냈다는 육수가 끓으면, 대바구니에 수북이 담긴 부추와 깻잎 등 신선한 야채를 살짝 익혀 먹는 방식인데, 담백하며 깊은 맛이 나는 육수에 몸을 푼 야채의 향이 코끝에서 향기롭다. 거기다 ‘동의보감’에는 오리가 정력 강장제, 해독작용,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고 성인병에 특효가 있다고 했다. 뛰어난 맛에 건강까지 챙겼으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다음 날, 늦은 아침을 먹고 지척에 있는 임실군의 옥정호(玉井湖)로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옥정호 제일의 경관인 ‘붕어섬’을 조망할 수 있는 ‘국사봉’이다. 내비게이션으로도 검색이 가능한 ‘국사봉 전망대’의 초입에 카페까지 들어선 주차장이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어 차를 대기도 좋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산자락에 놓인 긴 나무계단을 따라 ‘국사봉 전망대’로 향한다. 참! 차에서 내리면 100m쯤 떨어진 아래쪽 언덕에 지어놓은 누각 형태의 전망대가 눈에 띈다. 하지만 일부러 가볼 필요는 없다. 그곳에서는 ‘붕어섬’이 조망되지 않기 때문이다.

▼ 주차장 옆 꽃밭에는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가을색(秋色)’하면 사람들은 울긋불긋 눈을 휘황하게 하는 단풍이나, 맑은 햇살을 눈부신 은빛으로 부숴 내는 억새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곱고 그윽한 그 빛. 푸른 밤 달빛을 닮은 꽃, 가을 안개처럼 분분이 피어나는 꽃, 순백의 구절초가 전하는 색 역시 가을색이다. 구절초는 5월 단오에 줄기가 5마디였다가 음력 9월9일(중양절)이면 아홉 마디가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 흔히 들국화로 부르는 그 꽃이다. 무릇 꽃이란 한 송이만으로도 아름답지만 무리를 지으면 더욱 큰 감동을 선사하는 법이다. 구절초 또한 마찬가지인데 마침 이 근처에는 ‘구절초 테마공원’도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임실 치즈마을’에 들를 예정(코로나 때문에 문이 닫혀 못 들어갔지만)인 우리 일행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새색시처럼 소박한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구절초가 큰 군락을 이뤄 피어난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비탈진 산자락을 파고드는 계단은 가파르다. 거기다 제법 길기까지 하다. 그러니 다리품을 팔아도 한참을 팔아야 능선에 올라설 수 있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통신사 기지국시설이 있는 능선에 오른다. 이곳에 붕어섬을 조망할 수 있는 첫 번째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 붕어섬은 상수원 보호구역이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다. 원래 이 근방 산군을 이루던 봉우리가 섬진강댐 건설로 물이 채워지면서, 고향을 잃은 수몰민처럼 본모습인 산을 잃고 섬이 되어버린 곳. 그나마 바위 절벽으로 연결되어 있던 것을 옥정호 관리선의 운항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폭파하면서 진짜 섬이 되어버렸다. 옛 주민들은 외따로 떨어진 산이라며 ‘외얏날(외안날)’이라고 불렀다. 강줄기가 바깥 날과 안 날을 빙돌아 S자를 그리며 흘러가기 때문이란다. ‘날’은 산등성이를 말한다. 더 오래 전에는 ‘섬까끔’이라고 불렸다. ‘까끔’은 전라도 방언으로 ‘벼랑’이다. 외안날의 북동쪽 날이 깎아지른 벼랑처럼 생긴 데서 연유했다. 그러다가 옥정호에 물이차면서 물안개를 찍으려는 많은 사진작가들이 이곳을 찾게 되었고, 예술성 짙은 그들의 눈에 섬이 (금)붕어로 비쳐지면서 ‘붕어섬’으로 불리게 됐다. 전망에서 바라보는 붕어섬은 이름만큼이나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금붕어. 그것도 화려한 지느러미를 펼치고 유유자적 헤엄치는 중이다. 치렁치렁한 꼬리와 불룩한 배, 툭 뛰어나온 눈까지 금붕어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붕어섬 주변 옥정호의 옥빛 속살도 제대로 보인다. 담백한 수채화 같은 풍경에 눈과 마음이 취한다.

▼ 옥정호 풍경의 절반은 물안개의 몫이다. 새벽녘 물안개가 호수를 감쌀 때면 그야말로 선경이 따로 없단다. 하지만 해가 중천에 떠오른 뒤에야 올랐던 우린 물안개를 만나지 못했다. 호수면으로부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아침햇살을 받으면 마치 신선이나 노닐 법한 풍경을 그려낸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1년 만에 만난 형제, 자매들이니 나눌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아래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 웬만큼 조망을 즐겼다면 정상을 향해 또 다시 길을 나설 차례이다. 길은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가에 밧줄난간을 만들어 붙잡고 오를 수 있도록 했는가 하면, 너무 가파른 곳에는 어김없이 나무계단을 놓았다. 그것도 경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좌우로 몸을 비틀어가면서 말이다.

▼ 정상으로 오르는 도중에 두 번째와 세 번째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둘 모두 붕어섬이 잘 조망되는 곳에 설치했는데, ‘높이 오를수록 풍경은 깊어진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순번이 높아질수록 나타나는 붕어 또한 생동감을 더해간다. 참! 세 번째 전망대에는 이야기판도 걸려있었다. 조선 중기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머지않아 맑은 호수, 즉 옥정(玉井)이 되겠구나.’라고 예언한데서 ‘옥정리’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훗날 각색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호수가 됐다.

▼ 전망대에 서자 더욱 또렷해진 금붕어가 꼬리를 친다. 그런데 그 금붕어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게 아닌가. 옷 벗은 나무들이 숭숭 솟은 붕어의 비늘처럼 보이는데, 그 사이사이에 길을 내고 정자를 세우는 등 공사가 한창인 것이다. 관할 지자체인 임실군에서 ‘섬진강 에코뮤지엄 사업’의 일환으로 잔디마당과 숲속도서관, 꽃이 가득한 정원 등을 갖춘 휴식공간을 만드는 중이란다. 하나 더. 먼발치에서 눈으로만 바라보던 저 섬을 앞으로는 누구나 찾아갈 수 있게 된단다. 국사봉 전망대 부근에서 붕어섬까지 출렁다리를 놓고 짚라인까지 설치한단다.

▼ 또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얼마간 올라가자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국사봉(475m)을 거치지 않고 곧장 오봉산(513m)으로 가는 길이다. 오봉산은 높지 않고 주변 풍경이 좋아 주말이면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그렇다고 5분만 더 투자하면 ‘국사봉’을 넘을 수 있으니 누가 이용하겠는가마는 그쪽 길도 제법 또렷하다. 아니 등산로 정비까지도 잘 되어 있다. 하긴 장삼이사의 마음이 어찌 똑 같을 수 있겠는가.

▼ 바위벼랑에 기대어 만든 나무계단을 오르자 드디어 국사봉(國士峰) 정상이다. 20~30평은 족히 됨직한 정상은 온통 데크로 도배되어 있다. 그렇다고 눈에 거슬린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무나 바위 등 기존 지형지물을 그대로 살려놓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국사봉이 품고 있는 기(氣)를 헤치지 않으려는 노력일지도 모르겠다. 동쪽 아래 잿말에서 12명이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진사 벼슬을 했다니 말이다. 이는 또 국사봉(國士峰)이라는 지명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난 편이다. 드넓은 옥정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운암대교까지 시야에 잡힌다. 옥정호를 포위하고 있는 오봉산, 묵방산, 회문산도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진안 마이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은 ‘요산공원’일 것이다. ‘붕어섬 주변 생태공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생태공원이다. 호수 쪽에는 임진왜란 때 공신인 최응숙(崔應淑)이 지었다는 ‘양요정(兩樂亭, 전북 문화재자료 제137호)’과 고향을 잃은 수몰민들의 아픔을 위로하고자 세운 ‘망향탑’도 들어서 있다. 봄이면 갓꽃, 튤립, 수선화, 팬지 등 아름다운 꽃들이 넓은 대지를 형형색색으로 수놓아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는데, 이때를 기해 ‘옥정호 꽃걸음 빛바람 축제’가 열려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 굴곡이 이어지는 리아스식 호숫가에는 도로가 보일 듯 말 듯 연결된다. 저 도로를 지나는 여정도 하나의 여행코스가 된다. 옥정호를 삶의 터로 삼고 있는 운암리와 마암리를 잇는 저 도로(749번 지방도)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도로의 아래 호반에는 ‘옥정호 물안개길 마실길’이 조성되어 있다. 들쭉날쭉한 강변길을 따라 걸으며 옥정호의 아름답고 고즈넉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명품 둘레길이다.

▼ 국사봉(國士峰)은 해발 475m의 작은 산이다. 하지만 등산객들 사이에는 인기가 높은 편이다. 옥정호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교차가 심한 날 새벽에 산에 오르면 옥정호를 감싸고 있는 운해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 섬진강(蟾津江)의 젖줄인 ‘옥정호’는 1965년 섬진강댐을 건설하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물을 배수하면서 그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이기도 하다.

▼ 산을 내려오니 배가 출출해져 있다. 마침 옥정호 근처는 민물고기를 주재료로 한 음식점이 많고 유명하다. 과거 깨끗한 물에서 어업을 주로 삼았던 주민들 덕분이리라. 머리만 채울 게 아니라 배도 채워야겠다며 찾아간 곳은 운암면사무소의 소재지인 상운암마을. 아까 주차장에서 눈여겨봤던 민물요리 전문점(상운암 전주식당)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집의 주요 메뉴는 빠가사리(동자개)와 메기, 민물새우를 넣은 매운탕. 그밖에도 다양한 사이드메뉴를 내놓는데 우리는 이 재료들을 한꺼번에 넣고 끓인 ‘빠·새·메탕’을 주문했다. 매운탕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다슬기탕’을 선택했는데 부재료로 아욱이나 부추를 넣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애호박을 넣고 있었다. 맛은 물론 좋았다. 매운탕을 먹은 일행들도 맛과 양이 훌륭하다는 평이다. 거기다 밑반찬으로 나온 채소튀김과 도토리묵도 별미였다. 식당 외벽에 걸어놓은 KBS, MBC, SBS, JTV 등 ‘언론이 극찬한 대한민국 대표 맛집’이라는 자랑이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남도 여행

 

여행일 : ‘19. 5. 11()~12()

여행지 : 전라남도 순천시(낙안읍성, 국가정원, 순천만습지), 보성군(차밭). 여수시(오동도, 해상 케이블카), 곡성군(기차마을)

 

함께한 사람들 : 가족여행

 

 

특징 : 큰 처남의 둘째 아들이 얼마 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직장이 위치한 순천에다 새 둥지를 틀었단다. ()가 센 자매 셋이 머리를 맞대고 숙덕거리더니 집들이 겸해서 신혼집을 다녀오잔다. 멀고 먼 남녘의 끝자락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지만 까짓 신경 쓸 그녀들은 아니다. 다음은 대리운전 해줄 남편들. 요것들도 늘 해오던 대로 통보만 하면 끝이다. 당사자나 마찬가지인 처남댁까지도 끽소리 못하고 따르는 형편인데 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해서 12일짜리 주말여행이 시작되었다. 현지에서의 안내는 물론 처조카 내외가 맡았다. 여행전문가나 마찬가지인 내 조언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둘째 날 일정은 순천만(順天灣) 습지부터 시작했다. 아니 일반 대중들에게는 갈대밭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순천만의 갈대밭은 무려 15만평에 달한다. 순천 시내를 관통하는 동천과 순천시 상사면에서 흘러 온 이사천의 합수 지점부터 하구에 이르는 3쯤의 물길양쪽이 죄다 갈대밭으로 뒤덮여 있다. 그것도 드문드문 떨어져 있거나 성기게 군락을 이룬 여느 갈대밭과는 달리, 사람의 키보다 훨씬 더 웃자란 갈대들이 빈틈없이 들어찬 갈대밭이다. 갈대 군락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란다. 39.8의 해안선에 둘러싸인 27(갯벌 21.6+ 갈대밭 5.4)에 이르는 순천만 일대에 갈대밭만 무성한 게 아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물억새, 쑥부쟁이등이 곳곳마다 크고 작은 무리를 이루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하구의 갈대밭 저편에는 불그스레한 칠면초 군락지도 들어서 있다. 또한 이곳은 흑두루미, 재두루미, 황새, 저어새, 검은머리물떼새 등 국제적인 희귀조이거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11종이 날아드는 곳으로 전세계 습지 가운데 희귀 조류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희귀조류 이외에도 도요새, 청둥오리, 혹부리오리, 기러기 등을 포함해 약 140종의 새들이 이곳 순천만 일대에서 월동하거나 번식한단다.

 

 

 

입장권(성인 기준 8천원)을 사서 안으로 들어서면 천문대가 탐방객들을 맞는다. 그 옆에는 자연 생태관이 들어서 있다. 낮에는 흑두루미, 청둥오리 등 다양한 철새들을 보고, 밤에는 달과 멀리 있는 별 등을 관찰해 보라는 모양이다. 아니 이곳 순천만이 하루해가 짧을 정도로 넓다보니 아예 저녁 일정까지 포함시켜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연 생태관은 순천만의 다양한 생태 자원을 연구하고, 학생 및 일반인들의 생태 학습을 돕기 위해 만들어놓은 공간이다. 내부에는 실제보다 5배나 큰 흑두루미조형물이 만들어져 있고, ‘갯벌철새’, ‘텃새등을 탐구할 수 있는 공간도 여럿 들어서 있다.

 

 

천문대와 자연생태관 앞은 글라스 가든(grass garden)’이라는 이름으로 꾸며져 있었다. 순천만의 바람을 품고 빗물을 마시며 살아가는 갈대와 억새들의 소개하는 공간이란다. 그린라이트, 모닝라이트, 몰리니어무어, 무늬새그라스, 무늬억새, 수크렁, 제브리너스, 털수염풀, 팜파스글라스(흰색), 팜파스글라스(빨강), 흰갈풀, 흰줄무늬갈대 등 총 124,749본의 벼과(禾本科, Poaceae)와 사초과((莎草科, Cyperaceae) 식물들이 군락별로 식재되어 있다고 한다. 덕분에 난 갈대와 억새가 벼과의 식물인 걸 처음 알았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 했다. 이미 육십 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널따란 잔디밭은 물론이고 꽃밭과 분수, 그리고 게와 짱뚱어를 형상화한 조형물도 세워놓았다. 액자형 네모 프레임까지 세워놓을 걸로 보아 인생샷이라도 건져보라는 모양이다. 장승 모양으로 만든 안내판도 보인다. 이곳 순천만의 자랑거리인 2.3갈대밭22.2갯벌’, 그리고 멸종위기조류 25종을 포함한 230여 종의 철새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 쉼터도 들어서 있었다. 순천만 인근 주민들이 직접 생산하고 가공한 차와 음료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이란다.

 

 

글라스 가든 근처에는 찾아오는 철새들의 생태계를 엿볼 수 있도록 탐조대(探鳥臺)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철새는 눈에 띄지 않고 그저 갈대만 눈에 한가득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망원경으로 살펴본 일이 있었기에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이젠 순천만습지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갈대밭을 살펴볼 차례이다. 습지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아치형 다리(무진교)를 건너자 푸르른 갈대밭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이 갈대밭의 사이사이로 데크 탐방로를 놓았는데, 이 길은 용산 전망대(아래 사진의 건너편에 보이는 산)’까지 이어진다. 탐방로는 쭉쭉 곧게 뻗어나가는 데다, 들어가는 방향과 나가는 방향까지 모두 안내되어 있어 길이 헷갈릴 일은 없다. 느긋하게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감상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행여 다리라도 아플라치면 군데군데 만들어놓은 쉼터에서 쉬어가면서 말이다. ! 갯벌 생태계를 살펴보고 싶다면 탐방로 가에 따로 만들어 놓은 관찰 데크를 이용하면 된다.

 

 

위에서 말한 관찰 데크에서는 생물들이 살아 숨 쉬는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순천만의 상징인 짱뚱어가 진흙 바닥에서 구멍을 뚫고 기어 나오는가 싶더니 다른 놈들과 영역 다툼을 치열하게 벌인다. 그러다가 인기척에 놀랐는지 후다닥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생긴 모양이 우스꽝스러운 짱뚱어는 겨울잠을 자는 동면 어류로 잠둥어라 불리기도 한다. 건강한 갯벌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습지의 또 다른 주인은 게다. 사다리꼴 모양의 칠게는 새의 먹잇감으로 유명하며, 도둑게는 벽을 잘 타고 동작이 재빠르다. 바닷가에 있는 민가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훔쳐 먹기도 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습지에서 한주먹하는 놈은 단연 농게다. 암놈은 몸집이 작고 두 다리도 짧지만 수놈은 한쪽 다리가 크고 길어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분명 기형의 모습인데 힘센 한쪽 다리를 치켜들며 갯벌을 주름잡는 듯한 자세다. 이밖에도 갯벌에는 맛조개, 낙지, 키조개, 갯지렁이 등이 서식한다. ! 혹시라도 갯벌에 사는 생물을 보기 어려운 궂은 날에 방문했다면 자연생태관에 들러 이들의 모습을 살짝 엿보면 된다.

 

 

 

순천만습지를 즐길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갈대밭 산책이다. 갈대밭 사이사이에 여러 갈래로 내놓은 목재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된다.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녹색 물결이 일렁인다. 잎을 비비며 서걱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습지를 구경한다고 하지 않고 즐긴다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이다. 가을이면 저 바다는 은빛 물결로 바뀐다고 한다. 갈대의 북슬북슬한 꽃(실제는 털 달린 씨앗 뭉치)이 햇살의 기운에 따라 은빛 잿빛 금빛 등으로 채색되는 모습이 아주 장관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갯바람이라도 불어올라치면 갈대숲 전체가 일제히 흐느적거리면서 흡사 망망한 바다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장엄하게 변한단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바람결 따라 서걱서걱 흔들리는 갈대를 접하게 된다. 사람들은 줏대 없는 사람을 일러 갈대 같다고 한다. 바람에 쉽게 흔들린다고 해서이다. 하지만 갈대만큼 유익한 식물도 드물다. 줄기는 문 앞에 걸어두는 발이나 돗자리 등을 엮는 데 썼다. 또한 빗자루 재료와 종이를 만드는 펄프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특히 뿌리는 해독(解毒) 능력이 뛰어나서 농약 중독이나 식중독, 중금속 중독 등을 고치는 민간요법으로 많이 쓰인다.

 

 

탐방로의 끝에는 용산전망대가 있다. 갈대밭 관광의 중심지인 대대포구 건너편, 길게 뻗은 산줄기의 남쪽 끝 해발 80m 지점에다 전망대를 만들고 길이 1.3km의 탐방로로 연결시켜 놓았다. 하지만 다음 일정에 쫒기는 우리는 다녀오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왕복 40분 정도 걸린다지만 두 처제의 허약한 체질로는 1시간 갖고도 부족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이의 사진과 글로 전망대의 분위기를 전해본다. <전망대에서 보는 순천만습지는 또 다른 모습이다. 갈대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서식물(水棲植物)이 갯벌에 원을 그리며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사이로 휘감아 도는 물길이 신비롭고도 평온하다.> 일몰 시간에 맞추면 그 풍경화는 더욱 황홀하게 변한단다. 사진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일몰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갈대밭 사이를 걸어봤다면 다음은 생태체험선을 타볼 차례이다. 갈대밭 입구, 그러니까 무진교아래에 있는 다대동 선착장으로 가면 된다. ‘생태체험선선상투어는 1960년대를 대표하는 이 지역 출신 소설가 김승옥의 작품 무진기행의 주 배경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다. 배를 타고 광활한 갈대밭과 갯골을 지나 드넓은 순천만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코스인데, 아침엔 피어오르는 안개를, 그리고 저녁엔 노을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해서 순천만습지를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한 번씩은 꼭 타보는 인기가 높은 코스이다.

 

 

12톤급의 평갑판선인 생태체험선은 해가 뜬 후부터 일몰까지 수시로 운행한다. 순천만의 유명한 S자 물길을 따라 왕복 6km30분 정도 운항하는데 요금은 성인 기준 7,000원이다. 배에 탄 사람(정원 36)들은 동승한 해설사로부터 순천만에 대한 흥미로운 여러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 승선권을 끊을 때 승선신고서를 작성해야 하므로 신분증을 꼭 지참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눈만 들면 사방이 갈대다. 갈대는 순천만의 상징과 같다.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서도 갈대가 자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순천만처럼 거창하고 우아하며 매혹적인 곳은 없다. 여름에는 초록빛의 대향연이 펼쳐지고, 겨울에는 탈색된 줄기들만이 바람에 춤추는 곳이다. 너른 들판에 펼쳐진 갈대가 바람에 움직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참고로 5.4크기의 저 갈대밭은 22.6의 갯벌과 함께 순천만습지를 만들어낸다. 그 덕분에 철새와 갯벌 생물들이 살기 좋은 자연 조건을 두루 갖추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연안습지 가운데서는 처음(2006)으로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는 영예를 얻었다. 연안 습지란 만조 때와 간조 때 바닷물이 들어가고 나오는 경계 사이의 지역을 말한다. 강에서 실려 온 흙이 넓게 쌓이면서 만들어진 삼각주나 해안 갯벌이 대표적인데, 다양한 생태계의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자연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이다.

 

 

배는 순천만습지의 특징인 ‘S’자형 물길을 누빈다. 갈대밭 사이사이로 나있는 길이다. 갈대는 이른 새벽에는 몽롱한 안개에 젖어 흐느적대고, 맑은 날 오후에는 햇살을 묻혀 흩날리며, 머릿결조차 날리지 않을 미풍에도 살며시 춤을 춘다. 이런 풍경을 마주대하면 갈대는 이미 식물이 아닌 감성의 언어로 변한다. 그런 감성이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문체와 구성으로 문단에 충격파를 던진 무진기행을 만들어냈지 않나 싶다. 김승옥의 대표작 무진기행은 무진(霧津)으로 훌쩍 떠나온 주인공의 1인칭 서술 작품이다. 무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안개가 자욱한 듯 몽롱한 느낌을 주고, 작품이 의도하는 일탈과 도피의 무대로 더없이 어울려 보인다. 그런 무진의 무대가 바로 순천만 갈대밭 일대다.

 

 

얼마쯤 나아갔을까 한 무리의 새떼가 눈에 들어온다. 순천만의 진객은 뭐니 뭐니 해도 철새다. 우리나라 새 종류 540종 가운데 250여종이 이곳 순천만에서 관찰되고 있단다. 이곳 순천만이 조류가 살 수 있는 천혜의 환경 조건을 갖췄다는 증거이자 람사르 협약(Ramsar Convention)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나저나 새들의 대표선수는 역시 흑두루미다. 순천시의 상징새, 시조(市鳥)이기도 하다. 흑두루미는 과거에 시베리아를 출발해 북한 낙동강을 거쳐 겨울을 나고 일본 이즈미로 날아갔는데 2013년부터는 시베리아, 북한, 서산, 순천만을 거친다. 낙동강 대신 순천을 선택한 것이다. 낙동강에 보를 만드는 바람에 모래톱이 사라지면서 월동지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낮에 농경지에서 먹이활동을 하다 밤이 되면 천적을 피해 모래톱에서 잠을 자야하는 흑두루미의 특성 때문이다.

 

 

두 번째 여행지는 여수의 오동도이다. 아니 그냥 오동도만 둘러본 게 아니고, 해상 케이블카가 포함된 일정으로 꾸며봤다. 그래서 찾은 곳이 돌산도에 있는 돌산공원(突山公園)‘. 오동도의 입구에 위치한 자산공원으로 가는 해상케이블카가 이곳 놀아정류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곳 돌산공원은 여수시와 돌산도를 잇는 돌산대교를 건설하면서 함께 조성된 공원이다. 사방이 툭 트여있어 주변 해양경관을 조망하기에 좋고, 특히 뷰포인트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여수 밤바다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돌산대교 준공기념탑여수시 타임캡슐’, ‘어업인 위령탑등의 기념물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케이블카는 돌산()과 자산(육지) 사이의 바다를 잇는다. 캐빈(cabin)은 총 50.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칠해진 게 일반 캐빈(40, 8인승)이고, 크리스탈 캐빈(10, 5인승)은 은색이다. 이 가운데 크리스탈은 투명한 바닥으로 발밑의 바다를 관망할 수 있어 시각적인 즐거움과 함께 짜릿한 스릴감을 느낄 수 있다. 케이블카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30분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우천 시에도 운영된다. 다만 바람이 심하거나 정비가 필요한 경우에는 공지 후 운영이 중단될 수 있다. 요금은 성인 왕복 기준으로 13,000, 크리스탈은 이보다 7,000원을 더 내야한다.

 

 

케이블카의 최고 높이는 98m이고 바다를 지나는 구간 길이는 650m. 바다 위를 날다보면 케이블을 따라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기분이 마치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하다. 아니 그보다는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더 일품이다. 거북선대교(아래 사진)와 돌산대교, 이순신광장, 여수해양공원 등의 명소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데, 이게 요즘은 여수를 대표하는 관광콘텐츠가 됐다고 한다.

 

 

여수의 트레이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하멜등대도 눈에 들어온다.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이 여수에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무인등대로 푸른 바다를 배경 삼아 이른바 사진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방파제 안쪽에는 하멜전시관도 들어서 있다. 하멜이 여수에 머무르게 된 과정과 여수에 살면서 겪었던 일을 연대기로 설명해 놓은 공간이다. 그나저나 저 풍경은 밤에 더 아름답다고 한다. ‘여수 밤바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이 케이블카를 야간에 타면 그런 여수 밤바다의 매혹적인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는데 귀경시간에 쫓겨 포기할 수밖에 없으니 아쉬운 일이다.

 

 

1.5km의 거리를 13분 만에 날아간 케이블카는 자산공원(紫山公園)에 위치한 해야정류장에 도착한다. 이곳에도 역시 전망대와 함께 여수를 주제로 한 미디어아트를 전시하는 자그마한 미술관이 운영되고 있었다. 각종 요깃거리를 판매하는 매점에서 시장기를 때울 수도 있다. 참고로 자산의 정상에 자리한 자산공원(여수시 종화동)은 오동도는 물론이고 여수항과 여수의 구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공원이다. 또한, 새해 첫날에는 일출을 보고자 전국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자산(紫山)’이란 아침 일출 때 산봉우리가 아름다운 자색으로 물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공원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이충무공 동상과 충혼탑, 팔각정 등의 시설이 들어서 있다. 거북선 모양으로 지은 여수해상교통관제센터도 주요 볼거리이다.

 

 

이젠 오동도로 가볼 차례이다. ‘해야정류장전방에 지어진 주차타워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로로 내려서면 된다. 이 엘리베이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행하며 이용 요금은 무료이다. 단 강풍주의보나 경보가 발효되거나 정비가 필요할 경우 운행이 중지된다는 점은 기억해두자. ! 오동도 쪽으로 나있는 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이 계단은 일출정에 접근하기 위해 놓은 것으로 케이블카가 있기 전부터 존재했단다.

 

 

주차타워를 빠져나와 ‘Sono calm Hotel(구 엠블호텔)’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목적지인 오동도(梧桐島)로 들어가는 길목인 방파제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동도로 들어가는 옵션은 세 가지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그냥 걷는 것이다. 조금 편하게 가고 싶다면 자전거를 빌리면 된다. 일반(1시간 5천원)과 커플(1시간 1만원) 뿐만 아니라 유모차(1시간 5천원)까지 준비되어 있다. 1시간을 더 빌리려면 3천원과 5천원, 3천원을 추가로 더 내야한다. 체력이 약한 노약자들에게는 동백열차(성인기준 1천원)’를 권한다. ! 모터보트를 이용해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팁 하나 더. 근처에 유람선 선착장도 있었다. 거북선대교와 진남관, 장군도, 돌산도, 오동도 등을 돌아오는데 요금은 12천원을 받고 있었다.

 

 

 

1933년에 준공된 서방파제(섬 반대편에는 445m 길이의 동방파제도 있다)의 길이는 768m나 된다. 방파제치고는 꽤 길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생동감을 더해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수에 사는 시인과 화가들이 공동으로 작업했다는데, 물고기가 유영하는 바다 속 풍경과 돌산대교, 무술목, 거북선 등이 보는 이의 눈길을 끈다. 거기다 중간에 다리를 놓아 운치를 더했는가 하면,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전망데크까지 만들어 놓았다. 삭막할 게 뻔한 방파제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으로까지 선정된 이유일 것이다.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탐방로를 따라 투어를 시작한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 길은 햇빛 한 점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동백나무가 울창하다. 맞다. 오동도는 동백꽃으로 유명한 섬이다. 오죽하면 여수하면 오동도, 오동도하면 동백꽃이 연상되겠는가. 섬 전체를 덮고 있는 3,000여 그루의 동백나무는 이르면 10월부터 한두 송이씩 꽃이 피기 시작하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붉은 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2월 중순경에 약 30% 정도 개화되다가 3월 중순경에 절정을 이룬단다. 이밖에도 섬에는 시누대 등 200여 종의 각종 상록수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다.

 

 

유명 관광지답게 섬 전체가 잘 꾸며져 있었다. 시판(詩板)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 중에 강영은 시인의 시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바람을 품에 안은 여수에서는 바람이 바다보다 먼저 보인단다. 젖을 물고 있는 섬들과 근육으로 다져진 해안들도 모두 바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용굴이라는 안내판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 봤다. 아니 전설을 따랐다는 것이 더 옳을 수도 있겠다. 전설에 의하면 비가 오는 날이면 이곳 오동도에 사는 용이 지하 통로를 이용해 연동천 용굴로 가서 빗물을 먹고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마을 사람들이 연동천의 용굴을 막았나 보다. 그런 다음부터 새벽 2시경이 되면 이 용이 자산공원 등대 아래에 있는 샘터로 이동을 했다니 말이다. 바다로 흘러내리는 물을 마시기 위해서인데, 그로인해 파도가 일고 바닷물이 갈라지는 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쳤다는 내용이 안내판에 적혀있었다.

 

 

동백이 지는 날 소중한 사람의 손을 잡고 걷기에 딱 좋은 산책길은 옆구리에 암석해안을 끼고 이어진다. 오동도는 1968년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지정됐다. 그래선지 섬은 대부분 해식애가 발달한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해식동과 풍화혈, 해식아치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음은 당연하다. 소라바위, 코끼리바위, 용굴, 병풍바위, 지붕바위 등 기암괴석의 생김새만큼이나 그 이름도 다양하다.

 

 

오동도의 정상은 등대가 차지했다. 1952년에 불빛을 밝힌 이래 지금까지도 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등대이다. 처음 지어질 당시는 8.48m 높이에 백색원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었으나, 2002년 높이 27m의 백색 8각형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등탑 내부는 8층 높이의 나선형 계단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외부에 전망대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등대를 찾는 관광객에게 여수, 남해, 하동 등 남해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사무동 2층에 전시실을 마련하고 등대와 바다에 대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등대 옆에는 여수의 일출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는 해돋이전망대가 있다. 하지만 동백터널 너머에 살포시 숨어있어 잘 살펴봐야만 찾아갈 수 있다. 울창한 동백나무 숲속으로 들어서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명색이 오동도(梧桐島)인데도 오동나무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대신 동백나무만 저렇게 울창한 이유를 말이다. 지명처럼 옛날 이 섬에는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 공민왕 때의 승려 신돈이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단다. 전라도의 전()자가 사람 인()’자 밑에 임금 왕()’자를 쓰고 있는데다, 남쪽 땅 오동도라는 곳에 서조(瑞鳥)인 봉황새가 드나들어 고려왕조를 맡을 인물이 전라도에서 나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봉황새의 출입을 막기 위해 오동나무를 베어버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얘기도 있다. 아리따운 한 여인이 도적떼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벼랑 창파에 몸을 던졌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오동도 기슭에 정성껏 무덤을 지었는데 북풍한설이 내리는 그해 겨울부터 하얀 눈이 쌓인 무덤가에 동백꽃이 피어나고 푸른 정절을 상징하는 시누대가 돋아났단다. 그런 연유로 동백꽃을 '여심화' 라고도 부른다는 전설이다.

 

 

전망대에 서면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여수 근해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인 점을 감안할 때 의외의 풍경이라 하겠다. 하긴 저런 바다에서 해가 솟아오르니 어찌 일출 명소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전망대 근처에는 시누대 터널도 있었다. 산죽의 일종인 시누대가 하늘을 가리면서 둥그런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수군연병장으로 오동도를 사용하던 시절, 저 시누대는 화살대로 만들어져 이순신 장군이 10만 명의 왜군을 쓰러뜨릴 때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오동도 섬 전체는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북쪽 해안가가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는 세계박람회의 여수유치를 위해 세워진 동백관(세계박람회홍보관)과 음악분수(아래 사진)가 들어서 있다. 음악분수는 3월에서 11월까지 매시 정각과 30분에 각각 15분씩 공연한다. 또한 종합상가의 횟집에서는 인근 남해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을 맛볼 수 있다.

 

 

또한 거북선과 판옥선의 모형도 전시되고 있었다. 앞에는 若無湖南 是無國家이라고 적힌 빗돌도 세워놓았다. 1592414, 일본이 우리 땅으로 넘어온다. 임진왜란이다. 이때 임금은 나라를 팽개쳐 버렸다. 임금은 죽더라도 천자의 땅에서 죽겠노라 지껄이면서 말이다. 임금마저 내버린 나라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여수에서 거북선을 만든다. 당시 왜적은 전라도를 휩쓸고 군량을 채워 서울로 가고자 하였다. 그러니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이 왜적에게 넘어가는 순간 나라는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본영과 휘하 각 진의 전선을 이끌고 호남으로 넘어오는 길목인 한산도 앞바다에 진을 쳤고, 여수 앞바다로 넘어가는 왜적을 모조리 도륙해버렸다. 1593년 사헌부 현덕승에 보낸 편지글인 若無湖南 是無國家(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을 것이다)’는 국보 76호 서간첩으로 보존되고 있다.

 

 

 

바다 건너 여수 엑스포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여수는 지난 2012'여수 세계박람회'를 유치했다. 행사는 끝났지만 박람회장은 지금도 여수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인기 짱인 아쿠아리움을 비롯해 엑스포 디지털갤러리(EDG), 빅 오(Big-O) 등 명물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빅 오 쇼'는 장관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47m 원형 조형물 '디 오(The O)'에 분수를 이용해 워터 스크린을 만들고, 형형색색의 조명과 레이저, 홀로그램을 쏘아 화려한 볼거리를 연출한단다.

 

 

여수의 명물 돌게장으로 늦은 점심을 때운 후 곡성으로 향했다. ‘칙칙폭폭으로 대변되던 60~70년대의 기차여행을 떠올리게 만드는 명품 관광지가 이곳 곡성에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천-완주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다 황전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로 갈아타고 남원방면으로 달린다. 섬진강을 끼고 달리는 서정미 넘치는 길이다. 오곡면 소재지를 지나서 읍내로 들어가기 직전 오른편에 섬진강 기차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증기기관차나 철로자전거 타기, 영화세트장 관람 등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역사(驛舍)는 맞배지붕을 얹은 전형적인 시골 기차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내부도 기둥과 천정 등 1933년 지어질 당시의 목조구조가 여실히 드러난다. 등록문화재로까지 지정(2004)된 이유일 것이다. 이 역사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등장한바 있단다. 지금껏 남아있는 옛 역사들 중 꽤 큰 규모이기도 하지만, 흰색 담벼락에 박공지붕 형태라 군더더기 없이 담박한 분위기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옛 곡성역은 현재 기차를 테마로 한 섬진강기차마을의 입구로 사용된다. 반세기 넘도록 곡성 사람들은 이 역사를 통해 타지로 떠나고 또 돌아왔다. 그렇게 켜켜이 쌓여온 추억들 속에서 명품마을이 출발한 셈이다. 입장료는 성수기인 4월에서 10월까지는 3000원이며, 비수기에는 2500원이다. 이 입장료는 장미공원 등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료로 기차마을 안에 입장한 후 증기기관차나 레일바이크 등을 타보려면 따로 이용료를 내야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플랫폼에 전시해놓은 증기기관차다. 산업혁명의 결과물이자 19세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기차는 이 증기기관차에서 시작됐다. 기차가 한자로 물 끓는 김을 뜻하는 기()자를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왔던 칙칙폭폭이란 표현도 증기기관에서 고압의 증기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흉내 냈다. 우리나라에선 1899년 경인선 개통과 함께 증기기관차인 모갈1가 처음 운행됐다. 당시 신문은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며 흥분된 어조의 시승기를 전하기도 했다. 당시 증기기관차의 평균시속은 20km, 지금의 고속철도가 최고시속 305km를 달리는 것과 비교하면 턱없는 속도다. 하지만 당시 모갈1호가 달리던 인천에서 노량진 구간은 배로는 9시간 30, 걸어서는 12시간이 소요됐었다. 이 거리를 1시간 30분 만에 이동했으니 나는 새도 따르지 못할속도라고 느꼈던 게 당연하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증기기관차 운행은 1967년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기차마을의 특징은 옛 곡성역 및 남아있는 철길을 이용해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만든 점이다. 근대문화유산 건축물로 지정된 옛 곡성역을 폐선 철로와 함께 철도청으로부터 매입해 기차마을이라는 이름의 관광지로 꾸몄다. 1998년 전라선 복선화 공사로 버려진 옛 전라선 철길에는 추억의 증기기관차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달리고, 철도공원으로 조성된 옛 곡성역 구내는 사람이 두 발로 동력을 내야 이동할 수 있는 철로자전거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한국관광 100'에까지 선정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올해(2019)는 경주 불국사, 전주 한옥마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4년 연속해서 선정되었단다.

 

 

기차마을은 한마디로 예쁘고 아기자기하다. 곳곳에 화원을 조성해 봄부터 가을까지 꽃밭과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앙증맞은 연못 옆에 우뚝 선 풍차도, 바람개비 언덕도 볼거리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화려한 조명이 수놓는 음악 분수 역시 포인트이다. 그 유명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 세트장도 이곳에 있다. 토지, 사랑과 야망, 야인시대도 이곳에서 촬영이 이뤄졌단다.

 

 

놀이시설인 드림랜드도 들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곡성 읍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대관람차는 젊은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섬진강 기차마을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의 하나는 바로 레일바이크이다. 철길 위를 달리는 자전거인 레일바이크는 곡성역 기차마을 내 순환형으로, 1.6구간의 장미원을 돌며 20분 정도를 탈 수 있다. 조금 더 길게 타고 싶다면 침곡역(寢谷驛)에서 가정역까지의 코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5.1로 조금 멀기는 하지만 슬렁슬렁 페달을 밟다 보면 어느새 가정역이다. 막판 오르막 구간이 조금 힘들긴 해도, 섬진강의 허리를 끼고 도니 풍광만큼은 전국 최고라고 한다.

 

 

또 다른 탈거리인 미니열차는 기차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이용대금은 성인기준 5천원이다.

 

 

섬진강 기차마을의 또 다른 볼거리는 장미공원이다. 넓이가 4나 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장미공원에는 1004종의 다양한 장미가 식재돼 있다고 한다. 품종마다 다른 모양과 색깔을 띠는 장미들은 독일, 영국, 프랑스 등지의 장미들로 향기 또한 다양하단다. ‘천만송이 세계 명품 장미, 그 향기 속으로라는 이름으로 장미축제까지 열릴 정도라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꽃망울을 열지 않아 그런 장관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장미는 5월부터 6월까지가 장관이라는데 아쉽게도 올해는 철이 늦은 모양이다.

 

 

이젠 이곳 기차마을의 트레드마크인 증기기관차를 타볼 차례이다. 기차마을에서는 옛날 실제로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여 옛 곡성역(섬진강 기차마을)에서 가정역까지 10km 구간을 2시간 간격으로 왕복 운행하고 있다. 이 기차는 디젤기관차에 증기기관차의 외관만 덧씌운 것이다. 6·25전쟁 당시 작전에 투입되었던 참전열차 미카3129의 외관을 재현했다. 그렇지만 둔중한 검은색에 옛 비둘기호를 흉내 낸 좌석 등은 시간을 건너 뛰어 증기기관차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운행속도도 30~40km/h에 불과하다. 때문에 종점인 가정역까지 다녀오는데 30분의 정차시간을 포함해 90분이나 소요된다. 이용요금은 성인이 6000원이다.

 

 

증기기관차는 원래 칙칙폭폭달린다. 하지만 기차마을의 열차는 무늬만 증기기관차라서 그런 소리는 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까지는 없다.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옛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기차여행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삶은 달걀과 사이다인데, 추억의 교련복을 입은 아저씨가 옛날과 똑 같은 멘트를 풀어가며 팔고 있었다. 색다른 별미이니 이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한 꾸러미씩 사들더니 상대편 머리를 향해 그대로 돌진이다. 삶은 계란은 누가 뭐래도 상대편, 특히 연인의 이마로 깨서 먹어야 제맛이기 때문이다.

 

 

기차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섬진강을 왼편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 그러니 기차가 달리는 동안 창밖으로 흘려 지나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나루터는 물론이고 잔디광장과 원두막, 디딜방아, 수차, 꽃길 등 환상의 섬진강변이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같은 봄날에는 섬진강을 따라 봄의 신록과 도로 변의 꽃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느린 속도로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국도 17호선과 전라선 철도, 섬진강 등 3선이 진풍경을 이루는 이 구간을 호남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한마디로 압권이다. `택리지`의 이중환도 섬진강을 끼고 도는 이 날렵한 S자 명품 선로를 `천하 절경`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었다. 여기서 팁 하나. 기차에서 가장 좋은 관람 포인트는 기차와 기차 사이 난간이다. 철쭉이나 코스모스 등 철마다 달리 피는 꽃은 물론이고, 섬진강변 구석구석을 빼놓지 않고 볼 수 있는 명품 뷰가 가정역까지 닿는 동안 내내 이어진다.

 

 

기차의 회차지(回車地)인 가정역도 운치가 있다. 전체가 나무로 제작돼 따뜻한 느낌을 준다. 가정역에 도착한 증기기관차는 약 30분 동안 정차하게 되는데, 이때 자전거를 빌려 타고 섬진강변을 여유롭게 달려볼 수도 있다. 이곳 가정마을은 전라남도가 뽑은 여름휴가지에 선정되기도 했다. 체험, 휴식, 역사문화탐방이란 3가지 테마로 각각 2개소씩을 선정했는데, 가정마을은 다양한 레포츠와 체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았단다. 맞다. 이곳 가정마을은 관광열차가 다니는 가정역말고도 섬진강 래프팅 체험과 천문대 별자리 관측, 짚라인, 자전거 하이킹 등 이색적인 체험거리가 많은 곳이다.

 

 

 

역 앞의 섬진강 출렁다리를 건너면 섬진강의 은빛 물결을 보다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 이왕이면 차가운 물살에 손도 한번 담가보고 강변을 따라 잠시 여유로운 산책을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진안에서부터 흐르는 섬진강은 곡성에 이르러서는 곡성과 어울리는 자연경관을 품어낸다. 철로와 조화를 이룬 섬진강변 경관은 독특한 강의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남도 여행

 

여행일 : ‘19. 5. 11()~12()

여행지 : 전라남도 순천시(낙안읍성, 국가정원, 순천만습지), 보성군(차밭). 여수시(오동도, 해상 케이블카), 곡성군(기차마을)

 

함께한 사람들 : 가족여행

 

 

특징 : 큰 처남의 둘째 아들이 얼마 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직장이 위치한 순천에다 새 둥지를 틀었단다. ()가 센 자매 셋이 머리를 맞대고 숙덕거리더니 집들이 겸해서 신혼집을 다녀오잔다. 멀고 먼 남녘의 끝자락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지만 까짓 신경 쓸 그녀들은 아니다. 다음은 대리운전 해줄 남편들. 요것들도 늘 해오던 대로 통보만 하면 끝이다. 당사자나 마찬가지인 처남댁까지도 끽소리 못하고 따르는 형편인데 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해서 12일짜리 주말여행이 시작되었다. 현지에서의 안내는 물론 처조카 내외가 맡았다. 여행전문가나 마찬가지인 내 조언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여행의 시작은 낙안읍성(사적 제302,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281-2)

남해고속도로(순천-부산) 서순천 IC에서 내려와 22번 국도를 이용 순천시내로 일단 들어온다. 호현삼거리(순천시 덕월동)에서 2번 국도로 갈아타고 여수방면으로 내려가다 연동삼거리(순천시 교량동)에서 우회전하여 민속마을길(58번 지방도)‘을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낙안면 소재지인 동내리에 이르게 된다. 옛 낙안현의 근거지인 읍성(邑城)이 있던 곳으로, 그 역사는 마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 시대에는 분차(分嵯), 분사(分沙), 부사(夫沙)라고도 불리는 파지성(波知城)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분령군(分嶺郡)이었다. 고려 시대에 들어오면서 양악(陽岳) 또는 낙안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참고로 읍성이란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의 상대개념으로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곳이다. (((() 등 행정 구역의 등급에 따라 크기에 차이가 있었고, 크기는 주민의 수와 관계있었다.

 

 

읍성은 성문을 잇는 도로를 기본으로 하여 동서와 남북이 T자형 축이다. 남북은 의전을 위한 축이고 동서는 일상생활의 축이라고 한다. 과거에 주민들은 동문인 낙풍루를 통해 성 안팎을 드나들었고 동문 밖으로 쭉 내려가면 낙안향교를 거쳐 벌교로 갈 수 있었다. 동서 축은 길가에 건물들이 즐비했고 길에는 5일장이 서서 사람들로 붐볐단다. T자형 간선로를 제외한 길은 자유 곡선형의 좁은 골목길이다. 주택들은 대부분 좁은 골목길에서 연결된다.

 

 

성곽(城廓)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편에는 장승(벅수)과 솟대(짐대)가 세워져 있다. 이곳뿐만 아니라 서문과 남문 등 다른 성문 앞에도 세워져 있었다. 성문의 앞에 세운 이유는 장승이 마을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솟대는 긴 장대 위에 기러기 또는 오리가 있는 형태다. 기러기는 태양신의 사자로 죽은 영혼을 하늘로 인도한다고 믿은 데서, 오리는 물에 살며 알을 많이 낳으므로 화재 예방을 기원하고 물의 부족함 없이 해마다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데서 유래했다.

 

 

탐방은 동문(東門)낙풍루(樂豊樓)‘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이 문은 동··남의 세 출입구 가운데 하나로 1987년에 복원됐다. 동문은 본디 봄을 상징한다(경복궁의 동문도 建春門이다). 거기에 풍년에 대한 염원을 더함으로써 봄에 씨앗을 뿌려 풍년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완성시켰다. 현판은 서예가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이 썼다고 한다. ! 읍성은 소정의 입장료를 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이 가운데 40%는 문화재관리비 명목으로 주민들에게 돌아간단다. 읍성 안의 식당에 당직까지 서는 등 주민 전체가 똘똘 뭉쳐 마을 지키기에 앞장서는 이유일 것이다.

 

 

낙풍루 앞에는 석구(石狗)’ 조각상 세 개가 서 있다. 읍성 축성 당시 낙안고을과 낙안읍성의 수호신으로 삼기 위해 돌로 개 모양의 조각상을 세운 것이란다. 왜구(倭寇)로부터 지역과 주민들을 보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면 되겠다. 실제로 낙안읍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봉산 일대에서 다수의 왜구가 참살되었는데, 이때 죽은 자들의 귀신이 낙안읍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석구상을 세웠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입구에는 ’2019년 순천 방문의 해라는 입간판을 세우고 읍성의 사계를 그려 넣었다. ’세계 속의 문화유산, 낙안읍성이란 입간판도 보인다.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2011)된 것을 홍보하고 있나보다. 한편 이곳 낙안읍성은 CNN 선정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16위로 선정된 바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19 한국 관광의 별'에 꼽히기도 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풍경에 이끌린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감독들이 이런 마을을 그냥 두었을 리가 없다. 드라마 대장금‘, ’허준을 비롯해 영화 아름다운 시절‘, ’춘향전‘, ’태백산맥‘, ’취화선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안으로 들어서자 저잣거리가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기념품 가게와 소품용 농기구를 파는 공방이 주머니 푼돈을 넘보는가 하면 향토음식점에서 흘러나오는 구수한 냄새는 식욕을 북돋운다. 참고로 낙안읍성에는 과거로부터 유명한 먹을거리가 전해져 내려온다. ’팔진미라고 하는데 낙안 땅에서 나오는 여덟 가지의 재료로 만든 것이란다. 남내리의 미나리, 서내리의 녹두묵, 진산인 금전산의 석이버섯, 좌청룡인 오봉산의 도라지, 우백호인 백이산의 고사리, 남동쪽 제석산의 더덕, 성북리의 무, 불재(금전산 동쪽 고개) 아래의 용추에서 잡히는 민물고기 등이다.

 

 

산삼 막걸리를 판다는 가게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기껏해야 인삼 몇 뿌리 집어넣었을 것 같은데도 산삼(山蔘)‘을 사용했다며 너스레를 떠는 게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홍어삼합과 육전, 해물파전, 간재미초무침 등 안주도 무궁무진하게 준비되어 있단다. 국수류의 식사는 물론이고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는 커피 같은 음료수도 제공된다니 웬만한 휴게소 수준이라 하겠다.

 

 

마을에 있는 집들은 너나없이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읍성은 1910년 일본의 철거령으로 인해 대부분 철거되었다. 현재 비인읍성과 해미읍성, 동래읍성, 보령읍성, 진도읍성 등 십여 개의 읍성이 남아있는 정도인데 그중에서도 이곳 낙안읍성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라고 한다. 관광용으로 세트화한 민속촌이 아니라 실제로 남도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동문 길가에 위치한 최창우 가옥(崔昌羽家屋 : 중요 민속자료 제97)’인데 큰길가 쪽의 점포 옆 대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안채가 있다. 안채는 부엌··헛간의 순으로 배열되었으며, ''자로 꺾여서 다시 작은방을 두어 점포와 연결시킨다. 옛 모습을 지닌 점포라는 점과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자형 평면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집이다. 이밖에도 멋을 잔뜩 부린 박의준 가옥(이방의 집, 중요 민속자료 제92)’ 및 양규철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93), 이한호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94), 김대자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95), 주두열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96), 최선준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98), 김소아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99), 곽형두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100) 등이 있다.

 

 

읍성의 관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조선시대 호랑이 장군으로 유명한 임경업을 기리는 비각(碑閣, 전남 문화재자료 제47)이 있다. 낙안 군수로 1626년부터 2년간 봉직하면서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기 위해 1628년 군민들이 세웠다고 한다. 그가 낙안읍성을 보수한 기록도 이 비석에 적혀있단다. 동문 밖 낙안향교 입구에는 임경업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민사(忠愍祠)도 있다. 임경업은 병자호란 당시 역모죄로 몰려 조정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도 이런 환대를 받는 것은 그만큼 많은 덕행을 베풀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임경업과 같은 용맹한 장수가 순천 앞바다에 출몰하는 왜구로부터 읍민들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을지도 모르겠다. ! 이왕에 시작했으니 낙안읍성을 쌓고 왜구들로부터 향토를 지켰던 김빈길 장군도 한번 살펴보자. 그의 위패는 충민사에서 남의집살이를 하고 있다. 원래는 삼현사라는 사당에서 별도로 모셨는데 일제 때 폐쇄시켜버렸단다. 자기들 조상을 수없이 무찌른데 대한 보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몇 걸음 더 걷자 관아(官衙)가 나온다. 낙안읍성의 기본은 행정도시다. 세조 12(1466) 낙안군이 편제된 이래 1910년 폐지될 때까지 군 청사가 있던 고을로 현재의 벌교읍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그러니 관청이 기본이고 객사와 동헌, 부속 건물이 필수다. 동헌(東軒, 아래 사진 오른편)은 고을 수령이 업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군청에 해당한다. 1990년 복원된 이 건물은 정면 5,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객사보다 다소 작다. 동헌은 지방 관아의 안채이자 내동헌이라 부르는 내아(內衙)‘와 협문으로 연결된다. 왼편에 보이는 이층 누각은 낙민루樂民樓)‘로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함께 호남의 명루로 꼽힌다. 정면 3,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집으로 1986년 낙안읍성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두 그루의 굵은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는 낙민루 앞마당은 구정뜰이다. 나주 부사가 각 군을 순회할 때 아홉 번째로 들러 쉬며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그 오른편에는 낙안객사(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170)‘가 있다. 매월 삭망(朔望)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 예를 올리고 사신의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군수 이인이 세종 32(1450)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앞면 7칸 옆면 3칸 규모로 앞면 3칸짜리 건물을 중심으로 부속 건물이 대칭으로 붙어 있다. 앞뒤로 간략하게 맞댄 맞배지붕이며 부속 건물은 팔작지붕이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한 후 조선총독부령 제1호를 통해 조선 역사의 상징인 관아와 성곽들을 헐어버리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했다. 이때 낙안객사도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해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다행히 헐리는 것은 면했다. 덕분에 1986년 학교를 이전하고 내부를 보수해 원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조금 더 걸으면 서문(西門)이 나온다. 악추문(樂秋門)이란 현판을 달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그나저나 낙안읍성의 매력은 성벽 위를 걸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 출발점이 서문인데, 이곳에서 쌍청루로 가는 성벽 구간이 최고의 풍광을 자랑한다. 성벽 양편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 모습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뒤에 보이는 산은 낙안읍성의 진산인 금전산(金錢山)‘이다. 정상부의 서쪽, 그러니까 낙안읍성 방향이 모두 바위로 뒤덮여 있어 그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들이 사시사철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젠 성벽(城壁)의 위를 걸어볼 차례이다. 낙안읍성의 성벽 둘레는 1.385m. 이 가운데 서문에서 출발해 중간지점인 남문을 거쳐 동문까지 성벽의 위로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지만 대략 4~5m라고 한다. 성벽의 두께는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데 아랫부분은 7~8m로 윗부분 3~4m2배다. 성벽은 큰 돌을 양쪽 바깥에 쌓아 틀을 만들고 잔돌을 사이에 채우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아래쪽부터 커다란 깬돌을 올리면서 틈마다 작은 돌을 쐐기로 박았으며,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석재의 크기를 줄였다. 핵심방어시설이라 할 수 있는 옹성(甕城)은 남문터와 서문터에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적대(敵臺)도 동문터 좌우와 동북쪽·동남쪽 모서리에 각각 하나씩 있다.

 

 

성벽의 양옆에는 민가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하나같이 초가 일색인 것은 구성원대부분이 민초들이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다. 낙안은 양반들보다는 관에 출입하는 아전들이나 가난한 서민들이 주로 살았다. 굳이 2년 임기의 지방관들과 어울릴 이유가 없는 양반들이 관아가 있는 읍성에서 벗어나 향촌에 터를 잡았기 때문이란다. 한편 이곳 낙안읍성에는 깊은 우물이 없다고 한다. 풍수지리의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해서 성내에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을 금했기 때문이란다. 배라는 게 본디 물에 떠다니는 것이니 언제 가라앉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면 식수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마을 중앙에 1미터 정도의 낮은 천연 샘이 있어 식수 공급은 걱정 없었단다. 이를 배 안에 고인 물로 인식했으니 배 안에 들어 온 물은 퍼내야 안전하므로 천연 우물을 사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남쪽으로는 널따란 들녘이 펼쳐진다. 남해 여자만(汝自灣)의 해풍을 받는 낙안 들판으로 해발 50미터의 분지형이다. 나머지 삼면은 모두 겹겹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곳 낙안의 지형은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라고 한다. 멀리 부용산을 넘어 말봉이 있고, 금전산을 넘어 동북쪽에 옥녀봉(520미터)이 있는데, 산자락이 금전산까지 이어져 옥녀가 머리를 감아 빗고 장군에게 투구와 떡을 드리기 위해 거울 앞에 단정히 앉아 화장하는 모습 같다는 것이다.

 

 

성벽투어 도중 만나게 되는 남문, 즉 쌍청루(雙淸樓)도 동문과 마찬가지로 누각식 성문이다. 정면 3칸에 측면이 2칸인 건물은 1987년에 복원되었다. 남문은 여름을 상징한다. 그래선지 무더운 여름철 이곳에 올라서면 남다른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단다. ! 남문 근처에는 2002년에 복원한 옥사(獄舍)가 있다. 팔작지붕으로 된 다른 관청들과는 달리 우진각지붕으로 지어진 게 특이한데, 안에는 칼을 쓴 죄인을 비롯한 다양한 모형들을 전시해 놓았다.

 

 

 

성곽을 걷다보면 아래 사진과 같은 계단도 만난다. 평야지대에 들어섰지만 완벽한 평지는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잠시 후 낙풍루에 이르면 낙안읍성 투어는 끝난다. 조금 더 찬찬히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읍성의 역사를 회상하며 달래본다. 낙안읍성은 우리나라 3대 읍성(고창읍성, 서산 해미읍성) 중 하나이자 읍성 안에 100여 가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유일한 읍성이기도 하다. 대지와 사람이 두루 평안하다는 낙토민안(樂土民安)’에서 유래된 마을답게 낙안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이자 땅이 기름져 곡식이 늘 풍성해 백성들이 부족함 없이 잘 살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왜구들의 침입이 빈번했던 곳이기도 하다. 백성들을 보호하고 왜국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 태조 6(1397) 낙안 출신의 김빈길 장군이 부민들을 거느리고 토성을 쌓은 게 바로 낙안읍성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토성이다 보니 각종 풍수해와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고을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어려움이 따라 세종 6(1424)부터 석성으로 쌓기 시작해, 1626~1628년 임경업 장군이 이곳 군수로 역임하면서 석성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 점이 인정받아 국내 최초로 성과 마을 전체가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다.

 

 

두 번째 방문지는 보성군의 차밭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차 생산지일 뿐만 아니라 산자락에 기대어 늘어선 차밭의 아름다운 곡선미가 일품이라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은 봉산리(보성읍)’에 위치한 한국차 문화공원이다. 널디 너른 차밭 외에도 한국차박물관과 세계차나무식물원, 천문과학관 등의 시설이 들어서있는 복합문화단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맞게 45회 보성 다향대축제(茶香大祝祭)’가 열리고 있었다. 이 축제는 한국차문화공원 및 보성차밭에서 열리는 지역 축제다. 1975년 보성다향제를 시작으로, 명칭이 변경돼 오다가 2015년부터 보성다향대축제라는 이름으로 개최되고 있다. 축제는 국제차문화교류전, 국제차요리 페스티벌, 국제명차선정 페스티벌, 다례 시연, 차 체험 및 시연 등 70여 가지 행사가 진행된다. 뿐만 아니라 한국 차박물관, 보성녹차 큰장터, 보성로컬푸드마켓, 보성녹차 전시판매장, 농특산품 전시판매장 등에서는 질 좋은 녹차를 구입할 수도 있다.

 

 

공원주차장에 차려놓은 몽골텐트촌을 벗어나 주행사장으로 가볼 차례이다. 그 중심인 한국차박물관까지 전동차가 운행되고 있지만 줄이 길어 그냥 걷기로 했다. 아니 차밭만 둘러보려는 우리로서는 굳이 전동차를 탈 필요가 없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 이곳 주차장에서 왼편으로 가면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는 대한다원이 나온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50여만 평에 이르는 너른 차밭과 삼나무, 편백나무 등의 조경수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는 곳이다. 소정의 입장료를 내야 입장이 가능하지만 한번쯤은 꼭 찾아볼 만한 곳이다.

 

 

10분쯤 걸었을까 비탈진 산자락에 터를 잡은 널디 너른 차밭이 나타난다. 그 한가운데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한옥이 커다랗게 지어져 있다. 처마에 걸어놓은 한국 명차 선발대회현수막에 적힌 보성차품평관이 이 건물의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차는 은은한 향이 있고 마시면 정신을 맑게 한다고 해서 옛날부터 스님이나 선비들이 즐겨 마셨다. 특히 차를 좋아했던 정약용은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하고, 차를 즐겨 마시는 민족은 흥한다.’고까지 했다. 강진군 백련사에서 혜장선사(1772-1811)를 만나 차를 마시면서 나누었다는 나는 요즘 차를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라는 또 다른 대화도 있다. 얼마나 차를 좋아했으면 한 잔의 차에다 인생과 국가의 미래를 담았을까? 그런 멋진 차를 마셔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보성이다. 거기다 지금 열리고 있는 다향대축제에서는 차밭의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공짜로 차를 마셔볼 수도 있다.

 

 

그 위에는 정자도 지어져 있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온 시인묵객들에게 하룻밤 잠자리라도 제공하려는 듯 가운데에 방까지 들여놓았다. 맞다. 겨울에도 보성 녹차 밭은 천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사계절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산등성이를 따라 물결처럼 펼쳐진 녹차 밭은 드라마, 광고, 영화 할 것 없이 모든 영상 매체가 애용하고 있어 보성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녹차하면 보성 녹차밭의 초록물결을 떠올린다. 이영애, 이정재가 주연을 맡은 영화 선물의 촬영 장소였던 차밭은 30여만 평의 규모.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장관이 스크린에서 펼쳐졌다. 2003년 송승헌, 손예진이 출연한 KBS드라마 여름향기도 보성 녹차밭이 주요한 배경이었다.

 

 

정자에 오르자 널디 너른 차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차밭의 이랑이 흡사 능구렁이가 구불텅구불텅 기어가는 듯하다. 이런 풍경에 반한 미국 CNN 방송은 2012년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로 꼽기도 했다. 당시 CNN은 지역소개 사이트인 ‘CNN Go’를 통해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50(50 beautiful places to visit in Korea)'을 선정했는데 보성 차밭이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 당시 CNN대한민국의 40%정도 되는 녹차가 보성의 차밭에서 자란다무성한 차밭은 드라마나 광고 또는 영화의 촬영지로 애용되어 왔으며 사진작가들의 명소로도 알려져 온 곳이라고 밝혔다. 또한 녹차 아이스크림이나 녹차 삼겹살처럼 녹차와 관련된 음식과 물건들이 주를 이루긴 하지만 인기가 있는 이유는 바로 끝없이 펼쳐진 차밭 때문이다라면서 매해 5월에는 녹차 축제가 열린다고 소개했다. 참고로 보성은 동국여지승람세종실록지리지에도 기록됐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차를 생산해 왔던 지역이다. 차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해양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함께 나타나야 하고, 사질양토이며 강수량이 많아야 하는데, 보성은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포토죤도 여러 곳에 만들어 놓았다. 특히 하트 형상의 리마인드 웨딩포토존은 결혼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서로에게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는 장소라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결혼기념일에 또 한 번의 프로포즈를 함으로써 아내에게 사랑을 받는 남편이 되는 장소이기도 하고, 사귀고 싶거나 결혼하고 싶은 여성분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단다. ‘가족애를 담은 인생샷을 건져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장소라 하겠다.

 

 

아래 사진은 축제장의 입구라 할 수 있는 한국차 문화공원주차장이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보성종합관광안내센터인 붓재이다. 1층과 3층은 보성의 역사와 문화, 예술 그리고 날로 변화되고 있는 차산업과 차문화를 보여주는 전시장으로 꾸며졌다. 그리고 2층에는 보성의 핫플레이스로 자리 잡은 티 하우스 그린다향과 보성 특산품을 판매하는 그린마켓이 들어서 보성차를 원료로 한 다양한 블렌딩차와 청정 보성에서 생산된 농특산물을 만나볼 수 있다.

 

 

축제 기간에는 1천여 명의 관광객이 한복을 입고 찻잎을 따는 한복입고 찻잎 따기퍼포먼스(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도 열렸다고 한다. 2018년 보성의 계단식 차밭이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1호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고, 2020년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를 기원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또한 이 행사는 찻잎 따기기네스에 도전하는 의미도 지녔단다.

 

 

첫 날의 마지막 여행지로 조카의 아파트 근처에 위치한 순천만국가정원(順天灣國家庭園)’을 찾았다. 요즘 외지에까지 입소문을 타고 있는 유명 횟집이 정원과 아파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결정 요인이었다. 그렇게 결정된 순천만국가정원은 순천시 풍덕동과 오천동 일원에 조성된 우리나라의 첫 번째 국가정원이다. 20134,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개최된바 있다. 국제원예생산자협회(AIPH)의 승인(2009.9.16)하에 열린 이 박람회는 총 23개국이 참가했으며, 34만 평의 행사장에는 83개 정원(세계정원 11, 참여정원 61, 테마정원 11)이 조성되었다. 박람회가 대 성공을 거두게 되자, 이에 힘을 얻은 순천시에서는 2014420순천만정원이란 이름으로 영구적 개장을 선포한다. 이에 공감한 정부에서도 수목원·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순천만 정원을 제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2015.9.5.)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온전하게 보전되고 있는 습지 가운데 하나인 순천만습지는 자연이 만든 정원(庭園, Garden)’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인간이 덧칠을 해 순천만정원을 조성했고, 생태 도시로 완성된 모습을 박람회라는 이름을 빌어 세계인들에게 내보였다. 사람과 자연, 도시와 습지가 공존하면서 만들어낸 아름다움과 가치를 함께 누리고 나누자며 말이다.

 

·서로 나누어진 두 개의 문 가운데 하나인 서문으로 들어서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서문 구역은 순천만국제습지센터와 순천만WWT습지, 한국정원, 하늘정원, 수목원전망지, 나무도감원, 야생동물원, 물새놀이터, 늘푸른정원, 철쭉정원, 분재예술테마파크, 에코지오온실, 꿈의광장과 수목지역 등이 조성되어 있다. ‘순천만국제습지센터(아래 사진)’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의 주제관 역할을 하던 곳으로, 순천만의 생태적 중요성을 비롯하여 종합적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국제습지센터의 물새놀이터에는 홍학 수십 마리가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터키의 소금호수에서 엄청난 규모의 홍학 군무를 보면서 염분이 있는 물에서 사는 새인가 보다 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아무튼 쉽게 만날 수 없는 귀한 눈요깃거리였다. 그러나 센터 지붕에 잔디를 깔아 조성했다는 하늘정원은 둘러보지 못했다. 친환경으로 단열효과를 높였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이다.

 

 

서문구역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순천만WWT습지에서는 수생식물과 야생 조류가 어울려 살아가는 습지의 생태를 관찰할 수 있다. 습지 뒤로 보이는 곳은 수목원 전망지철쭉동산이다. 수목원전망지는 편백나무와 소나무 등으로 둘러싸인 산꼭대기에 조성되어 국가정원의 전체 경관과 순천시 일대까지 조망할 수 있다.

 

 

한국정원은 한민족 고유의 오래된 정원을 재현한 곳으로, 경복궁 후원을 기본으로 하여 조성한 궁궐의 정원과 군자(선비)의 정원, 서민의 정원에 해당하는 소망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복궁 교태전 뒤뜰에 있는 것을 재현해놓은 연휘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아미산 굴뚝, 정면에 창덕궁 후원인 부용지와 부용정, 어수문 등이 조성되어 있다. 이 밖에도 가을이면 노란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경북 영양의 서석지, 담양을 대표하는 별서정원인 소쇄원 광풍각, 남명 조식 선생을 기리는 덕천서원 앞 세심정 등이 차례로 이어진다.

 

 

·서문 지역을 연결시키는 꿈의 다리로 가는 광장은 전국 16개 도시의 명산과 강에서 옮겨온 흙과 물로 조성한 소통을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그 광장의 오른편에는 스카이큐브(Sky Cube)’의 정원역이 있다. 스카이큐브는 순천만정원 꿈의 다리에서 순천만생태공원까지 약 4.6구간을 왕복 운행하는 소형 궤도열차로 순천만정원의 정원역과 순천만습지의 문학관역을 상공에 설치된 레일에 따라 운전자 없이 자동 운행한다. 높게는 10m 상공을 가로지르는 스카이큐브에 오르면 발아래 펼쳐지는 순천만정원과 동천의 풍경을 내려다볼 수다고 한다. 특히 문학관역에서 내리면 무진기행(霧津紀行)’을 쓴 김승옥 작가 및 동화 오세암의 작가 정채봉 등 순천이 배출한 걸출한 문학인을 기리는 문학관까지 둘러볼 수 있단다.

 

 

꿈의 다리는 동천을 가운데 두고 둘로 나누어진 동·서 구역을 사람의 힘으로 연결시킨 가교(架橋)이다. 지난 2010년 중국 상해엑스포에서 한국관을 디자인한 세계적인 설치미술 작가 강익중의 작품으로 '자원의 재생과 순환'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디자인되었다고 한다. 컨테이너 30여 개를 활용해 생태 도시를 지향하는 순천의 꿈과 희망을 담았다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세계 최초의 물 위에 떠 있는 다리 미술관으로도 불린다.

 

 

길이 175m의 다리 외부는 오방색을 띠는 유리타일 1만여 개를 붙였고, 내부에는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이 희망을 담아 정성껏 그린 3인치 그림 145천 점이 빼곡히 걸려 있다. 작가는 그림에 담긴 모든 꿈이 바람에 함께 섞이고 모두의 꿈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원했단다. 아무튼 하나하나 다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유리타일에 새겨진 재미있는 글과 재치 넘치는 어린이들의 작품을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꿈의 다리를 건너면 동문구역이다. 이곳에는 세계정원과 순천호수정원, 한방체험센터와 약용식물원, 갯지렁이 도서관 및 갤러리, 생태체험교육장, 참여정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문구역에 들어서니 주위가 온통 꽃들 세상이다. 아니 공원 전체가 꽃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하긴 매년 봄 봄꽃 향연이란 축제가 열릴 정도라니 오죽하겠는가. 축제 기간에는 정원 곳곳에 심어진 벚꽃·튤립·유채·철쭉·작약·장미 등 봄꽃 1억 송이가 꽃망울을 활짝 열면서 각자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단다. 고품격 퍼포먼스와 다양한 문화예술 공연도 함께 즐길 수 있음은 물론이다. 올해는 330일에 열렸다는데 아쉽게도 지난주에 끝나버렸단다. 뮤직 서바이벌과 코미디 서커스 쇼 등 다양한 볼거리가 펼쳐졌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이밖에도 매년 7월에서 8월 사이의 야간에는 물빛축제가 열린다. ··음악·호수정원 경관이 어우러진 워터라이팅쇼와 라이트가든(빛 조형물 포토존 등)이 연출되며, 축제 기간에는 어린이 물놀이장도 문을 연다. 특히 올해는 ‘DJ 치맥 페스티벌도 열린다니 나 같은 생맥주 마니아들에게는 천국일 수도 있겠다. 또한 가을철에는 갈대축제’, 그리고 겨울철에는 별빛축제도 열린단다.

 

 

동문구역은 많이 넓다. 다리품을 팔아가며 둘러보기가 부담스럽다는 얘기이다. 그래선지 동문 일대를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 전기관람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한번에 20명쯤 탈 수 있는데, 프랑스정원에서 출발해 네덜란드 정원, 독일정원, 메타세콰이어길, 실내정원, 흑두루미 미로정원과 호수정원 등을 20분 동안 운행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대한 해설까지 제공되니 3천원(성인 기준 이용료)의 행복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젠 다리품을 팔아볼 차례이다. 그 첫 번째는 프랑스 정원이다. 프랑스 왕 루이 14(1638-1715)’가 베르사유 궁전에 꾸며놓은 정원을 아담하게 재현시켰다. 유난히도 출장이 잦았던 프랑스’, 고즈넉한 풍경을 좋아하는 나는 일정이 주말을 낀 경우에는 어김없이 중세 유적들을 찾았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그리곤 우리나라에도 이런 정원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소원을 이제야 푸는 모양이다. 너무 왜소한 게 다소 흠이겠지만 말이다.

 

 

다음은 봄철의 백미(白眉)인 튤립과 풍차의 조화가 아름다운 네덜란드정원이다. 튤립은 네덜란드의 국화이자 상징이다. 이밖에도 세계정원에서는 이탈리아와 미국, 멕시코, 중국, 일본 등 각 나라별 특성과 환경에 따라 조성된 정원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소박하지만 정감이 넘치는 독일정원과 오렌지나무가 식재된 스페인정원, 덥고 습한 아열대 기후를 이겨내기 위한 태국정원 등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정원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식재되어 있었다. 순천만정원이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오게 된 나무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순천시 용암마을 묘지에서 자라던 수령 90년 된 소나무는 지구정원의 ‘1번 나무'가 되었다. 무게가 5t이나 되는 이 나무를 옮기기로 한 날, 헬리콥터가 아무리 들어 올리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던 나무가 막걸리 한 잔을 부어 주자 거짓말처럼 번쩍 들렸다고 한다. 이밖에도 5분만 늦었어도 잘려나갈 뻔한 '5분 전 은행나무', 두 번이나 벼락을 맞고도 100년이 넘도록 한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는 근심 먹는 은행나무’, 혼자 사는 할머니의 생명을 구하는 등 세 번이나 감동을 주었다는 나이가 300이나 되는 기막힌 모과나무등 사연도 가지가지이다. ! 나무도감원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흔히 만나는 느티나무, 팽나무를 비롯해 이야기가 있는 나무들도 만날 수 있다. 특히 나무에 부착된 QR코드에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그 나무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어 말 그대로 도감 역할을 한단다.

 

 

이젠 순천만정원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호수정원을 둘러볼 차례이다. 세계적인 정원 디자이너인 영국의 찰스 젱스(Chales Jencks)’가 순천에 머무르면서 직접 디자인한 정원으로 순천의 지형과 물의 흐름을 잘 살려 산과 호수가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형태로 조성했다고 한다. 6개의 언덕은 각 언덕마다 인재, 포용, 성공과 명예, 성취, 사랑, 부부애의 뜻을 담고 있단다. 이왕에 왔으니 차례로 오르며 그 의미를 한번쯤 새겨볼 일이다.

 

 

호수공원을 구성하는 여러 언덕 가운데서도 백미는 단연 봉화언덕이다. 이 언덕은 순천 도심(都心)에 터를 잡고 있는 봉화산(365m)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호수는 도심을, 그리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독특한 형태의 다리는 순천의 젖줄인 동천을 상징한단다. 탐방로는 데크 다리를 건넌 다음 나선형 산책로를 따라 꼭대기까지 오르는 구조로 되어 있다.

 

 

호수의 중심에 있는 봉화언덕은 높이가 16미터로 순천만국가정원에서 고도(高度)가 가장 높다고 한다. 그래선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올라야만 정상에 이를 수 있도록 길을 내놓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오르거나 내려오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언덕의 정상에도 입구와 출구를 따로 만들어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부딪치지 않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얼핏 영국의 스톤헨지(설계자가 영국인이라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를 연상시키던 정상은 막상 특이한 게 없었다. 패널 모양의 조형물들로 둘러싸인 자그만 광장의 한가운데에 나무 한그루가 달랑 심어져 있는 게 전부이다. 아니 다리품을 팔고 올라온 사람들을 배려한 돌 의자 몇 개도 보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순천만정원의 멋진 풍광에서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순천만정원과 순천호수공원의 각기 다른 풍경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해룡언덕, 앵무언덕, 인제언덕처럼 순천 도심을 둘러싼 산에서 이름을 따온 언덕들은 물론이고 호수 주변에 조성해놓은 바위정원, 무궁화정원, 장미정원 등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래 사진은 순천만언덕이다. 그 왼편에는 앵무언덕, 그리고 오른편은 해룡언덕이 터를 잡았다.

 

 

아래 사진은 인제언덕이다. 순천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이라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이수는 동천이사천을 의미하며, 삼산은 인제산(麟蹄山 : 남산), 봉화산(烽火山), 해룡산(海龍山)을 일컫는다.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을 모두 호수공원에 재현해 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인제언덕의 오른편에는 프랑스정원 및 난봉산(鸞鳳山)을 재현한 난봉언덕과 함께 갯지렁이 도서관, 갯지렁이 갤러리 등 갯지렁이를 주재로 한 구역이 들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영국 첼시 플라워 T의 금상 수상자인 정원 디자이너 황지해가 설계했다는 갯지렁이 다니는 길은 관심을 가져볼만 하다. 갯지렁이가 지나간 길처럼 밑으로 푹 꺼진 공간에 다양한 오브제(objet)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잔디마당에는 가설무대가 차려져 있었다. 야외공연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잔디마당의 왼편에 위치한 흑두루미 미로정원소망언덕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이중 소망언덕은 지난 2013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조성됐다. 언덕에 올라 순천만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서있다 보면, 자신의 마음 속 소망 한 가지는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이 절로 드는 공간이다.

두타연(頭陀淵) 평화누리길 트레킹

 

여행일 : ‘19. 6. 23()

소재지 : 강원 양구군 방산면 고방산리

여행코스 : 주차장양구 전투위령비조각공원두타정평화누리길금강산 가는 길입구징검다리 회귀출렁다리지뢰체험장두타연주차장(소요시간 : 4시간)

 

 

특징 : 두타연(강원도 양구)의 금강산 가는 길목에 위치한 평화누리길은 청정한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생태 누리길이다. ‘민간인 통제구역(DMZ)’이라서 6.25전쟁 이후 50년이나 출입이 통제되어 오다가 2004년에야 개방된 덕분에 원시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목정 안내소에서 비득 안내소까지 이어지는 12km 코스로 두 안내소에서 모두 출입 신청을 하고 출발할 수 있다. 안내소에서 민통선 출입신고를 하고 허가가 나면 GPS가 내장된 출입증을 목에 걸고 군부대 초소를 들어가게 되므로, 출입신고를 위해 신분증을 준비해야 한다. 요즘은 더욱 편해졌다. 버스로 두타연주차장까지 들어간 다음 생태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된다. 참고로 두타연 입장은 하절기(3~10)엔 오전 9~오후 5, 동절기엔 오전 9~오후 4시까지 가능하다. 매주 월요일과 11, 설날엔 문을 닫는다. 입장료는 대인 3,000, 소인(7~12) 1,500원이다.

 

들머리는 두타연 안내소주차장(양구군 방산면 고방산리 825-1)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춘천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와 46번 국도를 연이어 타고 양구까지 온다. 이어서 31번 국도를 이용해 북쪽으로 올라가다 도사삼거리(양구군 양구읍 도사리 516-5)에서 왼편 460번 지방도로 바꿔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고방산교차로(양구군 방산면 고방산리 227-5)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잠시 후 이목정이 나오는데, 이곳에 설치된 두타연 안내소에 들러 민간인통제구역으로 들어가기 위한 제반 절차를 밟아야 한다. 참고로 두타연(頭陀淵)민간인통제구역(民間人統制區域)’ 안에 들어있다. 비무장지대(DMZ)남방한계선(南方限界線)’으로부터 520밖에 설정해놓은 민간인 통제선(民統線 : Civilian Control Line)’에서 남방한계선까지의 지역을 말하는데, 이 지역은 휴전협정에 의해 설정된 비무장지대(DMZ)’와는 달리 군 작전과 보안유지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민간인의 영농을 위한 토지 이용이 허가되고 있다. 다만 지역 내의 출입과 행동, 경작권을 제외한 토지 소유권의 행사 등 일부 개인의 자유와 국민의 기본권이 통제된다.

 

 

두타연 일대를 둘러보며 기념사진까지 찍는 데 한 시간 남짓,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느긋하게 즐겨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걷기 여행자라면 두타연 평화누리길을 따라 금강산 가는 길입구까지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두타연에서 3.6km쯤 되는 지점으로, 금강산으로 연결되는 31번 국도는 이곳에서 끊긴다. 종점 아닌 종점인 셈인데 이곳까지 다녀오려면 2시간 정도를 더 할애해야만 한다.

 

 

두타연 생태탐방로로 들어가려면 이목정안내소또는 비득안내소에서 출입신청서와 서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런데 비득안내소 코스는 양구군 식수전용 저수지 신설사업으로 2020228일까지 운영하지 않고 있어 이목정안내소에서만 출발이 가능하다. 신청서를 제출하면 태그(위치추적목걸이)를 나누어주는데 이를 패용해야만 민간인통제구역(民間人統制區域)’으로의 출입이 가능하다. 양구문화관광과 홈페이지에서 사전예약을 하면 절차를 단축할 수 있다.

 

 

안내소에서 출입절차를 마치면 21사단 위병소를 통과해야 한다. ‘민간인통제선을 넘어야만 두타연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총을 멘 군인과 이중 삼중으로 놓인 철책 앞에 서면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되고, 우리나라가 아직 휴전국가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어서 비포장도로를 약 3.7km를 올라가면 두타연 주차장이 나온다. 관광안내소와 매점이 들어선 이곳은 전면을 도배하고 있는 사진들이 눈길을 끈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두타연의 사계를 담았다. 열목어를 닮은 우체통도 시선을 끌기에 손색이 없다. ‘내 인생의 여정 속, DMZ 두타연의 추억이라는 글귀가 누군가에게 엽서 한 장 띄워볼까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차에서 내리자 문화해설사가 맞는다. 그리고는 두타연 관광인내도앞에다 모아놓고 두타연의 내력과 생태계는 물론이고 사방에 널려있는 볼거리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는 방법 등을 설명해준다. 해박한 지식에 유머까지 섞어가며 진행하는 것이 쉽게 만날 수 없는 고수였다.

 

 

관광안내도곁에는 소지섭 길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양구군에서 두타연과 파로호를 중심으로 한 비무장지대(DMZ)에 내놓은 길이 51트레킹 로드로 모두 6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소지섭 갤러리로 리모델링된 옛 백석전투기념관에서 시작하는 1코스(십년장생 길)가 이곳 두타연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지섭 길은 소지섭이 2010DMZ일대를 여행하면서 쓴 '소지섭의 길'이라는 포토에세이집에서 발단되었다고 한다. 소지섭이 철원, 양구, 인제, 고성 등 DMZ을 비롯한 강원도 일대를 여행하면서 느낀 감상을 담은 책이다. ‘51’이란 거리는 소지섭이 평소에 좋아하는 숫자란다.

 

 

두타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열목어(熱目魚)’를 머리에 인 두타연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역사와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는 부제를 살았다. 맞다. 이곳 두타연은 열목어의 국내 최대서식지라고 한다. ‘졸티또는 고드라치라고도 불리는 연어과의 이 물고기는 물이 아주 맑고 수온이 낮은 상류지역에서 작은 물고기나 곤충의 유충 등을 먹고 산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식지 두 곳을 천연기념물(73호 및 74)로 지정하고 있고, 환경부 야생동식물로도 보호되고 있다.

 

 

하지만 우린 안내판이 지시하는 ‘1코스부터 걷기로 했다. 1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투타연 기본코스를 안내판에 적힌 숫자(1~10) 대로 걸어볼 것을 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길은 오래전 금강산, 정확히는 북한 지역 속사리와 현리, 그리고 내금강의 장안사로 향하던 길이었다. 공식 명칭은 국도 31. 부산에서 출발해 울산~청송~영양~태백~평창~인제를 거쳐 양구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길은 이따가 들르게 될 하야교 삼거리에서 끊겨있다. 남북분단의 현장인 셈이다.

 

 

자갈길을 따라 잠시 걷자 사거리가 나온다. 직진은 평화누리길, 가장 먼저 찾아보고자 하는 양구전투 위령비는 왼편에 위치하고 있다. 오른편 방향은 조각공원으로 연결된다.

 

 

이 일대는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백석산지구 전투’, ‘도솔산지구 전투’, ‘도솔봉지구 전투등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으로 시작되는 비목(碑木 : 한명희가 지었다)의 구절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불타는 젊음을 초개와 같이 던졌다. 민족상잔의 비극은 끝났고 세월도 많이 흘렀다. 하지만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에 백두산 부대 장병들이 1994년 이 위령비를 세웠다고 한다. ! ‘길 가소서라는 추모시(追慕詩)’를 적은 패널도 함께 세워 보는 이의 가슴을 얼얼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거리에서 이번에는 오른편 조각공원으로 향한다. 코스 안내도도 역시 조각공원을 향하고 있다. 이어서 만나는 널따란 잔디광장에는 전쟁과 평화를 담은 수많은 조각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2013년에 열린 ‘DMZ를 말하다전시회 때 출품된 작품들이란다. ! 누군가는 이곳을 산양의 보금자리라고도 했다. 잔디광장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어먹고, 커다란 조형물인 소원이 이뤄지는 항아리를 요새삼아 낮잠을 자기도 한단다.

 

 

 

오른편에는 한국전쟁 때 양구에서 벌어진 9개 전투를 소개하는 팻말과 함께 전차, 미사일 등 군사무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조각공원 한켠에 깨어진 백자 사발 2개를 겹쳐서 엎어 놓은 듯한 작은 건물 크기의 조형물이 보인다. 굽과 손잡이까지 달린 이 백자사발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항아리로 불린다. 이성계가 조선왕조 개국의 염원을 담아 금강산 월출봉에 묻었다는 방산 백토로 만든 발원 사리구에서 모티브를 삼았지 않나 싶다.

 

 

내부에는 뻥 뚫린 하늘을 향해 올라가려는 나무들이 뿌리를 내렸고. 절 처마 끝에 매다는 풍경들이 원을 그리며 달려 있다. 뭘 의미하는 걸까?

 

 

공원에는 탐방객들을 위한 시설도 여럿 만들어 놓았다. 두타연 폭포를 그려 넣은 트릭아트도 그중 하나이다. 이곳이 두타사(頭陀寺)’가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안내판도 보인다. 금강산 송라암에서 수행·정진하던 회정선사(1678~1738, 호는 설봉)’와 두타연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는데, 내가 아는 두타사의 창건연대와 맞지 않아 소개는 생략하겠다. 내가 알기로는 1530년에 편찬한 관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두타사가 등재돼 있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가 조선 중기의 학자 이만부(1664~1732)가 방문했던 1723년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난 탐방로는 이제 두타정으로 향한다. 이곳 두타연의 탐방로는 한마디로 잘 닦여 있다.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데크 로드는 기본. 어떤 곳은 판석을 깔아놓기도 했다. 위험한 곳에 밧줄난간이나 지뢰철조망을 치는가 하면, 시야가 트이는 곳에는 전망대도 설치했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자연은 최대한 살렸다. 생태탐방로라는 이름에 걸맞다 하겠다.

 

 

가는 도중 길 하나가 왼편으로 나뉜다. ‘두타사 옛터라는 명찰을 단 입구에는 두타에 대한 의미와 함께 두타사의 보덕굴이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의 하나라고 적어 넣었다. ‘전설 속으로 가는 길이라면서 말이다. 두타연과 보덕굴의 풍경 속에 영험한 힘을 불어넣는 그 전설은 대강 이러하다. 금강산 송라암에서 수행하며 천일관음기도를 드리던 회정선사는 관세음보살을 직접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천일기도를 하루 앞둔 날, 그의 꿈에는 한 여인이 나타나 관세음보살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친히 일러주었다. 양구의 방산 건솔리에 사는 몰골옹이라는 노인을 찾아가 해명방이라는 어른의 행방을 물으면 관세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급히 길을 떠난 회정은 보름 후 양구에 도착해 몰골옹을 만났고, 그가 일러준 곳으로 가서 다시 해명방을 만났다. 해명방은 회정에게 자신의 딸인 보덕과 부부의 연을 맺으라고 권유했는데, 관세음보살을 보기 위해 일심으로 기도하던 회정은 그의 말을 따라 보덕과 부부로 3년 넘게 살며 숯을 팔아 생활했다. 그런데 아무리 믿고 기다려도 관세음보살의 현신을 마주하지 못해 낙담한 그는 어느 날, 부녀에게 이별을 전하고 몰골옹을 찾아가 자신의 답답함을 토로했다. 몰골옹은 지긋이 웃으며 그 부녀가 바로 보현보살과 관세음보살이라고 전하며, 자신은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일깨웠다. 이 말을 들은 회정이 급히 돌아가 봤지만 함께 살던 집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회정이 실망하고 자책하며 다시 몰골옹을 찾았지만 그 집도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회정은 자신의 우매함과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하늘을 보며 관세음보살을 목놓아 부르자, 관세음보살이 허공에 나타나 산 중턱으로 그를 이끌었다. 회정은 쫓아갔지만 관세음보살의 형상은 멀리 사라지고, 그곳엔 두건이 벗겨진 관세음보살의 형상을 한 바위가 서 있을 따름이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한 회정은 송라암으로 갔다가, 다시 양구로 돌아와서 두타연 바위굴에서 7일 낮과 밤 동안 계족정신으로 두타행을 실천했다. 고행을 하던 그의 앞에는 어느 순간 바위굴이 커다란 거울이 돼 나타났고, 맑은 거울엔 보덕과 자신의 모습이 뚜렷이 비춰졌다. 회정선사는 이 바위굴 맞은편에 터를 잡고 사찰을 세웠으니 그 이름을 두타사라고 하였다.

 

 

탐방로의 끄트머리에 이르자 두타정(頭陀亭)’이 지어져 있다. 두타연의 바위벼랑에 걸터앉아 수입천(水入川)의 물줄기가 만들어놓은 두타라는 이름의 폭포와 소를 오롯이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亭子)이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을 구성하고 있는 총석정이나 월송정처럼 역사를 품지는 않았지만 바라보이는 풍경만큼은 전국의 어느 정자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정자의 앞. 20m 높이의 암벽 위에는 전망데크를 만들었다. 폭포와 소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게 하려는 배려이다.

 

 

전망대에 오르자 우렁찬 물소리와 함께 바위 사이로 끊임없이 떨어져가는 물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던 물줄기는 암벽에 막혀 이리저리 용틀임하다 10m 아래 검푸른 웅덩이로 쏟아져 내려간다. 누군가는 저 물줄기에서 한반도를 찾아냈다고 했다. 암반 위를 흐르는 계곡물이 한반도 모양새를 만들어내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런 모양새가 만들어지지 않으니 문제다. 조선 초기 승려인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라고 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육십이 넘도록 닦아온 내 수양은 아직도 멀었나 보다.

 

 

물줄기는 여러 단의 폭포가 되어 아래로 떨어지면서 매우 깊은 못(深淵)’을 만들어낸다. 못은 둘레가 50m는 족히 넘어 보인다. ‘두타연(頭陀淵)’은 금강산에서 내려온 물이 빚어놓은 두타폭포와 그 아래의 소()를 아우른다. 폭포의 높이는 10m. 하지만 그 폭포가 빚은 두타소의 수심은 무려 12m에 이른다고 한다. ‘두타라는 고유명사 뒤에 못 연()’자를 붙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두타정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이제 수입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곧이어 나타나는 삼거리에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정표가 징검다리로 표기한 오른편 방향은 평화누리길 탐방을 마친 다음 출렁다리로 내려갈 때 이용하게 되니 기억해 두자. 참고로 두타연 탐방로는 십년장생 길의 첫 번째 길이며 소지섭길혹은 산소(O2)이라고도 불린다. 다양한 애칭들만큼이나 두타연 탐방로가 가진 매력은 언제, 무엇을 위해 찾는가에 따라 다르다.

 

 

 

통나무계단을 따라 잠시 오르자 이번에는 널찍한 도로(이정표 : 두타연 주차장0.35/ 두타연·생태탐사로0.178)가 나온다. 아까 양구 전투위령비앞에서 헤어졌던 양구 평화누리길이다. 금강산 가는 길목인 이곳은 6,25전쟁 이후 50여 년간이나 출입이 통제되어 왔다. 그러다가 지난 2004년에 민간에 개방되어 원시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DMZ 생태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이곳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평화누리길이 아닌 양구만의 평화누리길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DMZ 접경지역이라는 점은 같지만 전자는 김포시와 고양시, 파주시, 연천군 등 경기도 관내 4개의 시·군만을 잇고 있다.

 

 

평화누리길을 따라 잠시 걷자 예술과 사색의 길의 입구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길손을 맞는다. ‘숲속 1이라는 부제까지 달았다. 탐방로로 들어서자 길 양옆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다. ‘지뢰(mine)’라고 적힌 빨간색 삼각 팻말도 매달아 놓았다. 아까 이목정의 21사단 검문소에서 우리를 검색하던 군인들이 절대 넘어가지 말라고 누차 강조하던 금단의 구역이다.

 

 

'예술과 사색의 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길가에는 박수근 화백을 위시한 여러 작가들의 그림과 서예, 시 등 다양한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갇혀있는 미술관이 아니고 예술작품이 자연 속으로 찾아든 셈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호젓한 길을 한가롭게 걸으며 작품에 담겨있는 의미를 찾아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또한 작품들을 감상하며 자연 속에서 사색의 향기에 잠겨보는 호사도 누릴 수 있었다.

 

 

사색이 끝나자 길은 또 다시 속세로 인도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쉼터로 데려다놓는다. 쉼터이니 정자는 기본, ‘평화누리길 준공 기념비도 이곳에 세워놓았다. 두 손으로 뭔가를 감싸려는 듯한 은빛 조형물도 보인다.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을 저렇게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두타연은 이름부터 속삭임을 품고 있는 곳이다. 탐방로를 걷는 내내 폭포의 물소리는 속삭임이 되어 귓가를 감싸 안는다. 탐방로 곳곳에는 벤치와 평상을 놓아두었다. 벤치에 앉아 쉬다 다시 걷는다. 평상 위에 슬며시 걱정과 욕심을 놓아둔 채 와도 챙겨가라며 재촉하는 이는 누구도 없다. 두고 온 무게만큼 여행에서 돌아온 뒤의 걸음은 가벼워져 있을 것이다.

 

 

군사도로로 쓰이던 거친 비포장 길 중간에는 나무로 난간을 장식한 두타1두타2라는 멋들어진 다리도 놓아두었다. 똑 같이 생긴 이 쌍둥이 다리는 계곡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트레킹하는 사람들의 쉼터 노릇도 톡톡히 수행한다.

 

 

다리의 중간은 폭을 넓혀 포토죤의 역할을 겸하도록 했다. 다리 주변의 풍경을 배경삼아 인생샷을 건지려는 사람들로 늘 분주한 곳이다. 또한 바닥에 강화유리를 대 스카이워크의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꾸미기도 했다. 소름끼치는 스릴까지는 아니더라도 긴장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하겠다.

 

 

이 구간은 힐링 숲길(숲속2)’로도 불린다. 울창한 숲속을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산림욕을 하는 효과를 얻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 숲길을 걷다보면 눈동자모양의 조형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힐링과의 관계가 모호해서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타2교를 건너자 탐방로는 또 다시 평화누리길과 합쳐진다. 날머리에 이정표(월운저수지9.7/ 두타연2.4/ 숲속2)를 세워 우리가 숲속2길을 지나왔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평화누리길은 양구군의 또 다른 둘레길인 ‘10년 장생 길의 첫 번째 구간인 나를 정화하는 1년 길이기도 하다. ‘소지섭 길처럼 소지섭 갤러리에서 출발하나 두타연에서 끝나지 않고, ‘금강산 가는 길입구, 비득고개를 거쳐 월운저수지까지 연장시킨다. 국토정중앙에 위치한 양구는 한반도의 배꼽이라 할 수 있다. 배꼽은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고 인간의 오장육부를 형성하는 태()와 연결된 곳이다. 그러니 10년 장생 길은 한반도의 거대한 배꼽인 양구에서 음양오행이라는 거대한 기운을 탯줄로 이어받아 이 길을 걷는 모든 이의 오장육부를 튼튼히 하고, 건강하게 꿈을 갖고 사는 장생(長生)의 삶을 누리게 하는 길로 보면 되겠다. 특히 두타연소지섭갤러리가 있는 1년길은 음양오행의 기운 중 수()의 기운이 강한 곳이라고 한다. ()는 인간의 오장육부 중 신장을 튼튼히 하는 힘이 있어서, 1년 길을 걸으면 건강한 신장을 갖게 된단다.

 

 

얼마쯤 더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하야교가 손짓한다. 금강산에서 흘러온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하나가 아니고 두 개다. 기존의 도로 말고도 탐방객들을 위한 보도용 다리 하나를 더 놓은 것이다. 이 다리 아래에서 금강산에서 흘러 온 물이 남쪽의 물길과 자연스레 합류한다. ‘남북통일이라고나 할까?

 

 

수려한 산세에 둘러싸인 하야교도 아름다움을 뽐내는 곳이다. 암반 위를 흘러가는 물길은 바닥이 투명하게 다 비칠 정도로 맑다. 이미 수질검사까지 마친 곳이라 바로 떠 마셔도 된단다.

 

 

상류 쪽의 풍경은 하류만은 못하다. 하지만 금강산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이라는 데서 의미를 갖는다. 저 물줄기처럼 도 금강산까지 연결되었으면 좋겠다. 루쉰(魯迅)은 자신의 단편소설 고향에서 땅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될 따름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니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발원을 모아보면 어떨까? 그러면 통일이라는 길이 보일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하야교를 지나자마자 삼거리가 나온다. 두타연에서 한 시간(3.6km)쯤 되는 곳으로 옛 국도 31호선의 종점 아닌 종점이다. 이곳에서 곧장 직진하면 비득 안내소에 이르게 되지만, 왼편 취수장 옆으로 금강산 가는 길이 열린다. 그러나 지금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다. 대신 그곳에 소망을 전할 수 있도록 희망의 메시지 전화기를 설치해 놓았다. 참고로 금강산으로 가는 이 길은 32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에 개통된 금강산 전기철도가 놓이기 천 수백 년 전부터 서쪽에 살던 사람들이 금강산으로 가던 옛길이다. 양구읍에서 5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금강산 장안사로 가는 길은 한양에서 내금강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현재 막혀 있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이라도 걸어갈 수 있을 듯 아련하다. ‘금강산으로 가는 옛길, 문을 활짝 열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삼거리 오른편은 포토존으로 조성되어 있다. 비교적 널찍한 광장의 초입에는 나라꽃인 무궁화을 형상화시킨 듯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하얀 조형물을 바라보며 하루 빨리 무궁화를 국화로 사용하는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곱씹어 본다.

 

 

금강산 가는 길에서 발길을 되돌린다. 그리고는 아까 얘기했던 징검다리로 되돌아 나온다. 징검다리 주변은 아름다운 경관에 더해 깨끗함까지 자랑하고 있었다. 사실 관광지에 가면 사람들이 제 멋대로 남기고 간 흔적에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다. 그런데 이곳엔 계곡의 돌 사이나 숲속 등 어디에서도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동안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이 자연을 따뜻하게 배려해준 덕분이 아닐까 싶다.

 

 

출렁다리로 가는 도중에도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었다. 두타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겠거니 하는 기대를 갖게 만드는 위치이다. 하지만 주변의 울창한 숲은 그런 기대를 무참히도 짓밟아버린다. 두타연과 폭포는 푸른 숲속으로 몸을 사려버렸고, 물길 건너에 지어놓은 두타정과 전망데크만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짙은 숲은 이마저도 못마땅했던지 정자의 형태를 겨우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조금 더 걸으면 두타교라는 출렁다리가 나온다. 케이블에서 줄을 늘어뜨리고 그 줄이 다리상판을 잡아주는 현수교(懸垂橋)이지만, 건널 때마다 출렁출렁 거린다고 해서 보통 '출렁다리'라고 부른다. ! 오는 도중에 징검다리도 놓여있었으나 출렁다리를 이용하기 위해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출렁다리라 불리는지는 다리에 오르자마자 알아차리게 된다. 행여나 떨어질세라 살금살금 걷는데도 다리가 흔들대는 것이다. 이걸 기회로 여기고 중간쯤에서 다리를 구르는 사람들도 있다. 고객은 물론 여성들,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가 차라리 신음에 가깝다. 하지만 나무라는 이는 눈에 띄지 않는다. 골리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들 모두가 즐겁기 때문일 것이다.

 

 

다리에 오르면 수입천(水入川)의 지류라는 사태천(沙汰川)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상류에는 징검다리 하나가 앙증맞게 물길을 건너고 있다. 하지만 폭포와 소는 숲속에 꼭꼭 숨어버렸다. 하류에 있다는 선녀탕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래도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자 호젓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오솔길이 다시 나타난다. 이제 막 여름의 문턱에 들어섰는데도 숲길은 벌써 녹음이 짙다. 철조망 사이사이에 숨은 듯 피어난 야생화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원초적인 아름다움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렇게 걸어가는 숲길에는 양구 10년 장생길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 ‘1년 장생길을 걸으면 신장이 튼튼해진단다.

 

 

안내판은 또 ‘DMZ에 묻힌 박수근 그림 항아리라는 이야기를 적어 넣어 방문자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양구가 낳은 민초들의 화가, 박수근의 초기 작품 수백 점을 부인 김복순 씨가 피난 중 항아리에 담아 중동부 DMZ 일대 어딘가에 묻었다는 것이다. 최근 호당 수억 원을 호가하는 박수근의 그림 가격을 고려할 때 만약 그 항아리가 온전히 묻혀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항아리가 될 것 같다. 안내판에는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염원도 빠뜨리지 않고 적었다. 비록 박수근의 그림 항아리를 찾기 위해서라는 인간의 욕념을 전제로 삼았지만 말이다.

 

 

근처에는 지뢰 체험장이 들어서 있었다. 각종 지뢰의 파괴력을 설명하는 안내문과 함께 요란한 폭발음을 담은 음향 장치와 사람이 직접 올라타고 폭발의 진동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처럼 안전하게 이곳을 둘러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이곳을 뒤덮고 있던 지뢰를 모두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시설을 만들어 놓은 것은 지뢰라는 흉악한 무기 자체를 체험하는 것을 통해 그것이 매설되고 다시 걷어진 이 땅의 역사와 아픔을 오래오래 기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한 이를 미래 세대에게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주차장으로 나가다 보면 또 하나의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두타연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전망대에 올라 두타연을 조망한다. 그리고 꽃을 받아들고 향기를 맡듯 깊이 숨을 들이 마신다. 몸 안에 새로운 힘이 고인다. 두타연은 두타연만이 아닌 주변의 모든 것과 어울려 완전한 풍경임을 깨닫는다. 일상 속에서도 그런 풍경을 기대하게 만드는 힘을 두타연은 가지고 있었다.

 

 

숲길을 대표하는 풍경의 주인은 두타연이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만든 3단폭포와 그 밑의 널찍한 물웅덩이를 일컫는데, 오래전 주민들은 드렛소(드래소) 또는 용소라 불렀다. 이곳의 예전 지명인 건솔리 드렛골에서 따온 이름이다. 현재 이름은 소 위쪽에 있었던 절집 두타사에서 비롯됐다.

 

 

징검다리로 내려가자 두타연(頭陀淵)’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두타연에서의 두타(頭陀)’는 속세의 번뇌, 망상, 탐욕을 버리고 불도를 닦는 수행을 일컫는다. 원래 이 말은 버리다, 씻다, 닦다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dhuta’의 음역어인데, 부처의 으뜸 제자들 중 한 명인 마가가섭(摩訶迦葉)’을 수식하는 두타제일(頭陀第一)이란 말로 널리 알려졌다. 이 말은 이후 음차한 한자의 의미가 더해져 머리를 흔들며 번뇌를 떨쳐 내고 청정하게 정진한다는 불가의 두타행(頭陀行)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엄격히 의식주를 절제하는 두타의 수행법 12가지는 십이두타행으로 불리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재아난야처(在阿蘭若處)’, 즉 마을과 떨어진 조용한 산림 속에서 사는 것이다.

 

 

 

두타연 오른쪽의 넓은 입구를 가진 움푹한 천연동굴은 보덕굴로 불린다. 입구 지름이 10m, 길이는 20m쯤 되는 저 동굴은 동쪽의 낙산사 홍련암, 서쪽의 강화도 보문사, 남쪽의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예로부터 ‘4대 관음성지로 북쪽의 이름난 도량터라고 한다. 두타사의 창건 설화는 두타연이라는 이름의 연원뿐만 아니라, 그토록 만나고 싶던 관세음보살의 현신과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았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한 어느 수도승의 이야기에서 그 자체로 불도의 깨달음을 전해준다.

다산길 6코스 트레킹

 

여행일 : ‘20. 6. 27()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산행코스 : 소래비고개능선매봉산머재고개모란 추모공원달뫼고개삼각점봉금남산임도답내초교 입구(거리 및 소요시간 : 11/ 4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다산길은 남양주시의 올레길이다. 남양주는 총면적의 70%가 산림이다. 그러나 산만 높은 게 아니다. 물길도 있다. 북한강이 남양주를 따라 흘러와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마침내 한강이 된다. 이처럼 남양주는 서울 도심에서 지척이지만 산과 강이 어울려 특별한 걷기를 즐길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조선말의 위대한 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실학정신이 깃들어 있어 역사의 향기도 높다.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곳이 바로 두물머리(남양주시 조안면)이기 때문이다. 13개 코스(169.3)로 이루어진 다산길은 남양주 전역에 걸쳐 있다. 이 가운데 6코스인 머재고개길은 피아노폭포에서 시작해 금남산과 모란공원 등을 지나 소래비고개에 이르는 길이 6.5의 코스이다. 이 구간은 중간에 모란미술관민주화 묘역을 만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가슴 시릴만한 조망도 보여주지 못한다. 길이까지도 짧다. 그래서 우리는 금남산에서 피아노폭포로 가지 않고 금남저수지로 내려감으로써 총 길이를 10로 늘려보았다.

 

트레킹 들머리는 소래비고개(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리)

2주 전부터 계획해왔던 두류산(강원도 화천군)의 인근에 많은 양의 소나기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어, 이른 새벽에 부랴부랴 최군에게 전화를 걸어 집 근처에 위치한 다산길 6코스로 산행지를 바꿨다. ’다산길 6코스의 기점인 소래비고개로 가기 위해서는 알단 경춘선 마석역으로 와야 한다. 소래비고개로 가는 시내버스(8-9, 30-29)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버스의 배차 간격이 너무 멀다고 생각될 때 이용하게 되는 택시도 이곳에서 타는 게 유리하다.

 

 

 

마석역 앞에는 조지훈시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었다. 조지훈은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로 시작되는 승무(僧舞)‘를 지은 시인이다. 그는 1940년대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우리나라 서정시를 대표하는 청록파 시인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마석역 뒤편 송라산 기슭에 시인의 만년유택이 자리 잡은 인연으로 세워진 이 비석에는 1956년에 발표된 풀잎 단장(斷章)‘이 새겨져 있었다. 참고로 그의 시비는 영양 주실마을(빛을 찾아 가는 길)과 남산 시비(파초우), 고려대학교 시비(승무)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택시는 우릴 소래비 고개에다 내려놓는다. 같은 남양주시지만 화도읍과 수동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이다. ’수동면축령산자연휴양림표지판이 세워진 고갯마루 조금 못미처의 오른편에 공터가 보이는데 이곳이 다산길 6코스의 들머리다.

 

 

공터의 끄트머리에 이르니 다산길 6코스의 운영을 201810월부터 종료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래선지 5년 전 송라산에서 내려오면서 눈여겨보았던 다산길 안내도도 보이지 않는다. 이후로도 이정표 등 다산길과 관련된 시설물들은 일절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 운영을 종료하면서 제반 시설물까지 모두 철거해버린 모양이다. 그 덕분에 우린 여러 곳에서 알바를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현수막 앞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널찍한 임도는 곧장 가라지만 우리는 능선으로 향하는 비탈진 오솔길을 택했다. 그렇게 4분쯤 치고 오른 능선에는 길이 곱게 나있었다. 보드라운 흙길이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거기다 산길의 흔적까지 또렷하니 헷갈릴 일도 없다. 참고로 오늘 걷게 되는 구간을 한북천마송라단맥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전문 산악인들에게나 필요한 용어이겠지만 지면을 빌어 잠깐 옮겨본다. ‘한북정맥의 수원산에서 분기한 한북천마지맥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까지 이어진다. 이 지맥의 천마선(남양주시 마석)에서 동쪽으로 분기한 잔맥이 한북천마송라단맥인데, 너구내고개에서 송라산을 일구고 소래비고개로 자지러들었다가 46번 경춘국도 머재고개와 모란공원묘지가 있는 390봉을 넘은 다음 북한강변 샛터유원지에서 그 숨을 다한다는 것이다.

 

 

능선은 온통 참나무 세상이다. 참나무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이다. 너무 흔한 탓인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나무의 숨은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도토리 열매가 예로부터 구황식물의 첫 번째 자리로 꼽혀왔는가 하면, 시대가 변하면서 요즘은 여름철 산책로에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특히 이 나무는 고사목이 된 뒤에 진가를 발휘한다. 약용버섯(영지)과 식용버섯(능이, 느타리, 표고, 뽕나무)의 보고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사진과 같이 눈요기로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버섯들도 셀 수 없이 많다. 참고로 참나무는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로 나뉜다.

 

 

섣부른 자만은 길을 놓치는 우()를 자초하게 만들었다. 능선을 따라 4분쯤 걸으면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일어났는데, 다산길은 오른편인데도 우린 왼편으로 진행해버린 것이다. 길이 워낙 또렷했기에 오른편으로 길이 나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우린 엉뚱한 곳을 20분 이상이나 헤매야만 했다.

 

 

참나무 천국이던 산길의 주인이 갑자기 잣나무로 바뀌었다. 가평 옆 동네답다는 농담을 던지며 산행을 이어가는데, 느닷없 밭일을 하면서나 주고받을 법한 대화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마을 근처까지 내려와 버렸다는 얘기다. 이런 때 안내산악회의 산행대장 출신인 최군의 진가가 발휘된다. 내가 건네준 지도(산행지를 변경한 내가 출력해왔다) 위에 나침판을 올려놓더니 무조건 되돌아가잔다. 지금은 비록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하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속담을 증명해주는 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되돌아온 삼거리.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그런데 잘못 들어섰던 조금 전의 길보다 훨씬 더 널찍하고 또렷한 게 아닌가. 상황이 이런데도 왜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일까? 어쩌면 선두를 담당하던 집사람이 산나물에 정신을 쏟느라 길을 놓쳤던 게 아닐까 싶다. 잠시 후 임도를 만났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헤어졌던 임도일 것이다. 내 예측이 옳다면 옛날 이곳에는 다산길 이정표(6코스 시점, 피아노화장실5.9km/ 6코스 종점, 소래비고개 0.6km)’가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임도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옛 다산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정표는 없어졌지만 다산길로 운영할 당시 만들어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통나무 벤치가 두어 개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아예 임도 수준으로 변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정성들여 가꾸어 놓은 문중 묘역도 지난다. 임도처럼 잘 닦인 산길은 모두 이 묘역 덕분이 아닐까 싶다.

 

 

묘역 근처에서 시야가 열린다. 월산리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한껏 부풀린 몸집을 자랑하는가 하면 북한강변 너머의 산릉들도 눈에 들어온다. 뾰루봉과 화야산, 고동산일 것이다.

 

 

산길은 이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고도를 높여간다. 그러고는 이내 매봉산(243m) 정상에다 올려놓는다. 매봉산은 이성계가 함흥에 있다가 귀환하는 도중에 매사냥을 한 산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경희대 사학과의 신용철(국사편찬위원) 교수는 여덟배미와 태조 이성계에서 '이태조가 사냥꾼을 따라 내려오다가 여덟 밤을 머무른 곳은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이며, 매사냥을 한 산은 인근 포천군 내촌면 음현리 매화동 뒤의 매봉산(梅峯山)'이라 적고 있다. 사실 팔야리에서 이곳까지는 거리가 먼데다 중간에 철마산과 천마산, 축령산, 송라산 등 커다란 산들이 가로막고 있어 이태조의 매사냥과 연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겠다. 그래선지 요즘은 매봉산의 유래를 순수 우리말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산의 옛 이름인 '매산, '매봉', '매봉산'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머재, 달뫼산, 맷돌모루(마석우리 磨石隅里) 등 순수한 우리말로 지어진 인근 지명들을 근거로 들면서 말이다. 그건 그렇고 서너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돌탑이 주인이다. 네모반듯한 정상석은 그 위에 고이 모셔져 있다. 누군가 꽂아놓은 태극기 두 개도 함께 섬기고 있는 모양새이다. ! 돌탑의 바로 뒤에는 지적삼각점(경기 118)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매봉산까지 오는 데는 무려 38분이냐 걸렸다. 핸드폰의 앱은 1.55를 표시하고 있다. 선답자가 20(0.6km) 만에 도착했다고 적은 것을 보면 알바를 꽤 길게 했던 모양이다.

 

 

매봉산을 지나니 또 다시 시야가 열린다. 이번에는 고층아파트들이 성냥갑처럼 늘어선 화도읍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 뒤를 천마산과 매봉산, 갑산이 마치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잠시 후 길이 나뉘는 곳에서 우린 또 다시 실수를 했다. 길의 상태는 두 방향 모두 비슷했지만 마석 시가지가 바라보이는 오른편 방향으로 진행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길을 잘못 들어선 줄도 모른 채 30분 가까이나 진행해버렸다.

 

 

그렇게 내려선 곳은 마석우리(磨石隅里)’의 자연부락인 산성마을이다. 화도읍의 주축을 이루는 마석우리는 맷돌이 많이 생산되는데다 부락의 길이 돌아서 생겼다 하여 맷돌머루라 불리다가 한자로 변환시키면서 마석우리가 되었다. 또한 산성마을은 마을 중앙이 깊숙하고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것이 흡사 성()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는 만덕사(萬德寺)’란 절이 들어서 있었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석조 전각과 3층 석탑, 약사여래불이 전부인 자그만 사찰이다. 소속 종단은 관음종(觀音宗)’. 한국불교 27개 종단의 하나로 법화경을 중심으로 대중 불교운동을 지향하는 종단이다. 그래선지 사원을 시중에 설치하고 건물양식도 현대화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만덕사가 마을 중심에 들어선 이유가 아닐까 싶다. 거기다 전각까지 현대식이니 관음종의 정체성과 부합한다고 보겠다.

 

 

몇 걸음 더 걸으니 마석역에서 소래비고개로 올라가는 2차선 도로가 나온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곳에서 우린 발길을 되돌렸다. 그렇다고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 마을길을 거슬러 올라가다 건너편 산자락으로 파고들었다.

 

 

과수원과 채소밭 때문에 길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으려고 그물망을 쳐놓은 탓에 밭두렁을 이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머뭇거릴 최군이겠는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민가의 앞마당과 과수원 사이의 빈 틈새를 이용해 건너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그리곤 길을 내가며 산비탈을 치고 오르자 본래의 다산길이 그 모습을 나타난다. 이곳에서 길을 찾느라 소비한 시간은 10(0.5)이다. 매봉 정상을 출발한지는 40분 가까이나 되었다.

 

 

나지막한 봉우리 하나를 넘으니 능선 오른편에 철망 울타리를 쳐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선답자의 후기에서 보았던 낯익은 풍경이다. 철망이 끝나갈 무렵 이번에는 능선 왼편에다 철조망을 쳤다. 이번에는 아예 위험, 접근금지라는 경고문까지 떡하니 붙여놓았다.

 

 

봉우리 하나를 더 넘자 경춘로(46번 국도)가 지나는 머재고개.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0분 만인데 핸드폰 앱은 4.17를 찍고 있다. 선답자는 이곳까지의 거리를 1.3km(45분 소요)로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린 알바를 하느라 2.8나 더 걸은 셈이다. 시간도 1시간 가까이나 더 써가면서 말이다. 참고로 머재도 역시 마석우리에 속하며 아까 길을 잘못 들어선 덕분에 억지춘양으로 들렀던 산성마을의 외곽에 위치한다. 성같이 생긴 산성마을 외곽의 문()과 같은 고개라고 해서 머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4차선 도로인 경춘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모란공원의 입구, 그 왼편은 모란미술관(木蘭美術館)’이다. 1990‘21세기를 향한 조각의 새 표현 전을 개최하면서 현대조각전문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전문 장르가 조각인 만큼 이곳의 백미는 야외 조각공원이다. 8,600평의 잔디밭에 '모란 국제조각 심포지엄'에 출품했던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조각 작품 11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는 길에 만나는 파란색 대문도 페루 출신 조각가 알베르토 구즈만의 작품인 이란다.

 

 

 

미술관을 지나면 모란공원이 시작된다. 그 시작은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부터 시작된다. 19701118일 전태일 열사의 유해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인 모란공원에 안장되면서 민족민주열사묘역의 역사는 시작됐다. 이후 19715월 노동조합 활동 중 살해된 김진수 열사, 197310월 안기부의 고문으로 사망한 최종길 열사가 이어서 안장됐다. 그러나 모란공원이 본격적으로 열사들의 안식처가 된 것은 19864월 박영진 열사의 장례 투쟁부터이다. 열사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막으려던 정권과의 투쟁 끝에 이곳에 안장되면서 노동운동, 학생운동, 의문사, 산업재해 등으로 희생된 이들이 묻히는 민족민주열사모역이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스러져 간 모든 분들의 삶에 고개를 숙이며 요즘 세태를 살짝 꼬집어볼까 한다. 독립운동이건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이건 우리나라의 형성과 발전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하지만 그들이 살았던 삶이나 그 가족들의 삶은 결코 녹녹치가 않다. 그들이 추구했을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고 살려나가는 것이 진정한 나라일 텐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엔 이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집단을 일러 보수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다르게 생각한다. 나라를 생각하는데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보수를 빙자한 정치세력, 그 가운데서도 극단적인 일부 세력이 아니고서야 어찌 진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민주열사묘역과 대문 하나로 연결된 모란공원에 들어서자 박영효의 묘 입구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그는 태극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이다. 표석에 태극기를 그려 넣은 이유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그대로 비운의 대한제국 말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나라를 문명개화로 이끌려는 개화파의 주역 박영효와 조선을 병탄한 일본의 후작이자 중추원고문 박영효, 이 같은 아이러니가 역사에서 연출된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에게서 울분과 자괴감은 느낀다. 거기다 더해 침을 뱉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를 통해 근대한국사에서 반성의 자료를 찾아 역사의 거울로 삼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1966년에 조성을 시작한 모란공원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설 공동묘지다. 17,000여 기의 묘소가 들어서있다는데, 아래 사진처럼 묘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지형지물을 이용해 널찍하게 들어선 묘들도 많이 보였다. 그러다보니 공원묘지라기보다는 차라리 문중 묘역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관리비 꽤나 내야할 것 같다는 최군의 말마따나 그동안 보아온 공원묘지 가운데 가장 호화스러운 유택(幽宅)이었다.

 

 

도로를 따르면 1주차장’, ‘마음 담긴 父母 공경, 子女가 따라 한다.’라는 팻말을 매단 빨강색 정자가 눈길을 끈다. ‘관리사무소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서는 곧장 직진(왼편)한다. 이어서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니 삼거리에 달뫼고개라고 적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는 추모관방향(왼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 풍운의 구한말(舊韓末)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흥선대원군의 묘역을 둘러보고 싶다면 관리사무소 앞 삼거리에서 오른편(관리사무소 방향)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추모관(追慕館)’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널따란 공터가 만들어져 있다. 차선은 그려놓지 않았지만 소주차장이란다. 이곳에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추모관의 찾아온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 모양이다. ! 주차장 한켠에는 민족민주열사·희생자묘역도가 세워져 있었다. 아까 입구에서 보았던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는 터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당신이 간절히 염원했던 세상을 위해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겠습니다.’라는 부언대로 그런 세상이 꼭 이루어지기를 빌어본다.

 

 

정자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월산리 일대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더 멀리로는 송라산과 천마산 등 남양주의 명산들이 즐비하게 펼쳐진다. 혹자는 축령산과 오독산, 운두산, 두리봉까지 보인다고 했지만 시야가 흐려서인지 분간은 되지 않았다.

 

 

소주차장에서부터가 문제였다. ‘다산길이정표가 모두 철거되어 버린 데다 길 찾기에 참고할만한 지형지물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그저 방향만 보고 진행할 수밖에 없다. 주차장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다 돌계단을 이용해 축대 위로 올랐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산자락으로 향했다. 선두는 물론 나침판을 손에 든 최군이 맡았다. ‘머재고개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 걸렸다.

 

 

그렇게 이른 금남산 자락에는 등산로가 또렷했다.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도 다산길과 관련된 시설들을 모두 철거해버린 지자체의 처사가 못내 아쉽다. ‘다산길의 흔적을 꼭 지울 수밖에 없었다면 대신 다른 이정표라도 세워놓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공무원의 진정한 가치는 국민에 대한 봉사이다. 봉사하는 자세로 일 처리를 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발생하기 않았을 것 같기에 넋두리를 늘어놔봤다.

 

 

 

짙은 숲 그늘에서 호사를 즐기며 걷는다. 그렇게 30분쯤 걷자 산불감시초소가 나온다. 하지만 녹이 잔뜩 슬은 채로 방치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설치한 목적을 이미 마쳤나 보다.

 

 

조금 더 걸으면 한전의 송전철탑이 나온다. 시원스럽지는 않지만 유일하게 조망이 터지는 구간이다.

 

 

송전탑을 지나면서 길은 거의 임도 수준으로 변한다. 송전탑을 설치하면서 자재 운반용으로 내놓은 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암도는 오른편으로 갈려나간다. 등산로는 물론 계속해서 능선을 따른다.

 

 

그렇게 조금 더 걸으면 대여섯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삼각점봉에 이른다. 산불감시탑에서 20분 거리이다. ‘삼각점(양수 441)’이 터를 잡은 정상에는 삼각점에 대한 안내판도 함께 세워놓았다. 봉우리의 높이인 ‘387.9을 제키고 삼각점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이다.

 

 

이어지는 산길은 무척 곱다. 널찍한 것은 기본, 경사가 없는 데다 황톳길은 마치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여간 폭신한 게 아니다. 거기다 울창한 숲은 오뉴월 햇볕까지도 완벽하게 차단해준다. 이런 곳에서는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더디게 걷는 대신 호흡의 양은 최대한으로 늘린다. 이런 걸 보고 웰빙, 아니 힐링 산행이라고 할 것이다.

 

 

숲에 동화되어 걷다보면 화도 물재생센터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우린 처음으로 이정표(금남리/ 환경사업소/ 월산리)를 만났다.선답자의 후기에 다산길 이정표(시점, 2.10)’가 세워져 있다는 지점이다. 다산길은 이곳에서 오른편(환경사업소 방향)으로 향한다. 금남산의 정상은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 만날 수 있다.

 

 

산길은 아주 조금씩 고도를 높여간다. 그리고는 잠시 후 금남산(琴南山, 412m) 정상에 올려놓는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이 산은 지명에 대한 유래도 전해지지 않는다. 산자락에 있는 금남리 마을에서 이름을 따왔지 않나 싶다. 머재에서 이곳까지는 2시간이 걸렸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 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아름드리 소나무에 매달아놓은 정상판(금남산 정상)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남양주 월산초등학교에서 설치한 모양인데 해발 412m’라고 적힌 또 다른 표지판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하산길은 아까 올라왔던 상황과는 반대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낮추어간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의 상태는 여전히 곱다.

 

 

그렇게 10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느닷없이 능선이 막혀있다. 동국선원에서 내 땅이니 비켜 지나가라며 금줄을 쳐놓은 것이다. 불가(佛家)의 최대 덕목이 보시(布施, dana)’인데도 자기 땅을 지나가는 것조차 막아버린 절간 인심이 참 고약하다. 김삿갓이 문전걸식을 하며 지었다는 시() 한 편이 떠오르는 것은 나 또한 고약한 중생의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면기둥 붉게타/ 석양행객 시장타/ 네절인심 고약타/ 지옥가기 꼭좋타>

 

 

능선을 벗어난 길은 이제 산비탈을 따를 수밖에 없다. 엄청나게 가팔라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걸 감안했던지 안전용 밧줄을 매어 놓았지만 그렇다고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자칫 빗길에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 상당히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구간이다.

 

 

밧줄에 의지해 내려오다 보니 능선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살짝 보인다. 그 길의 끄트머리에는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입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留璃世界)라는 정토에 계시면서 모든 중생의 몸과 마음의 병을 다스리고, 재앙을 소멸시키는 부처님이니 말이다.

 

 

약사여래상에서는 월산리와 답내리 일대가 조망된다.

 

 

정규 등산로로 되돌아올까 하다가 월산리 방향의 임도를 따르기로 했다. 새로운 루트를 개발해 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개설하다 그만 둔 임도라서 길이 엄청나게 거칠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가시나무로 가득 찬 구간도 있어 등산로로는 최악의 상태였다. 그런 길에서 30분 가까이를 소모했으니 엄청난 낭비가 아니겠는가.

 

 

거친 임도가 끝나면 과수단지가 나오는데 부근에는 몇 동의 물류창고도 지어져 있다. 그 덕분에 임도는 포장도로로 바뀌어 있다.

 

 

이어서 화도(월산) 푸른물센터가 나온다. 푸른물센터는 기존 하수종말처리장(下水終末處理場)’에 대한 주민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낸 새로운 명칭이다. 최근에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주민친화형으로 시설을 바꾸어가는 중이다. 하루 17천 톤을 처리할 수 있는 이곳 월산푸른물센터도 축구장과 배드민턴장, 생태연못, 수변산책로, 전망대 등의 시설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산행날머리는 답내초교 입구(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223-2)

푸른물센터에서 지나 ‘46번 국도의 교각 아래를 통과하면 경춘로(46번 국도)가 나오면서 오늘 트레킹이 막을 내린다. 마석역으로 나가는 시내버스는 답내교옆의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미니스톱 남양주답내점 앞(답내초교입구 정류장)에서 타면 된다. 일반버스는 물론이고 광역버스까지 정차하는 정류장이니 입맛대로 골라 타면 되겠다. 그나저나 오늘은 총 114시간 40분에 걸쳐 걸었다. 꽤나 더디게 걸었다고 봐야 하겠다. 보통 속도도 낼 수 없을 만큼 습하고 더웠던 날씨 때문일 것이다.

대간령(大間嶺) 옛길 트레킹

 

여행일 : ‘20. 2. 8()

소재지 :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토성면 일원

여행코스 : 박달나무쉼터작은새이령마장터새이령(대간령)주막터고성 향도원마을(쇼요시간 : 11km/ 3시간45)

 

함께한 사람들 : 가보기 산악회


특징 : 그 옛날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 문경 새재를 넘었다면 영동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 대간령(새이령)을 넘었다고 한다. 오늘은 그 옛날 보부상들이 큼직한 등짐을 지고 오가던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박달나무쉼터를 들머리로 해서 마장터를 거처 대간령를 지나 도원계곡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은 험준한 산세를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도 이 길은 대간령에서 도원계곡으로 내려서는 구간을 제외하고는 완만한 숲길이 대부분이다. 또한 탐방로가 대부분 계곡을 따라 나있기 때문에 지루하지도 않다. 숲의 전매특허인 싱그러움에다 계곡에서 보내오는 시원한 냉기를 더해지니 여름철이 제격인 코스라 하겠다. ! 오늘 걷는 코스를 대관령(大關嶺, 해발 832m)’을 잘못 얘기한 게 아닐까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대간령은 엄연히 다른 해발 641m의 고갯마루다. 대관령은 강릉과 평창군 사이에 놓여 있고, 대간령은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간성읍을 잇는 고개이기 때문이다. 설악산의 북단 마산봉(해발 1052m)과 신선봉(해발 1183m) 사이 안부를 관통한다. ‘진부령과 미시령의 사이라는 뜻에서 샛령또는 새이령이라고도 불리었고,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소파령(所坡嶺)’ ‘석파령(石破嶺)’으로 기록돼 있다.


 

들머리는 박달나무 쉼터(인제군 북면 용대리 126)

양양고속도로 동홍천 IC를 나와 인제·속초방면 44번 국도를 탄다. 인제읍을 지난 다음 한계관광단지삼거리에서 46번 국도로 옮겨 용대삼거리까지 온다. 미시령터널로 가기 전에 진부령 가는 길로 진입해 박달나무쉼터로 들어오면 된다. 내비게이션에서는 박달나무쉼터나, 야영장으로 검색하면 편리하다. 참고로 박달나무쉼터는 약초 전문집이다. 주인장은 설악산에서 캔 약초를 팔며 새이령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박달나무쉼터 오른쪽에 있는 넓은 공터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예전 군부대 유격훈련장으로 이용되던 곳인데 공터가 끝나는 지점에서 개울을 건너면 된다. 오늘은 백두대간을 넘는 일정이다. 이곳 박달나무 쉼터를 출발해 작은 새이령을 지난 다음 마장터를 거쳐 대간령 정상까지 간다. 그리곤 고개 너머 주막터를 거쳐 도원마을로 내려서는 11쯤 되는 코스이다. 보통 때면 3시간도 채 걸리지 않을 짧은 거리지만 눈밭을 헤치고 가는 까닭에 4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잠시 후 북설악의 최고봉인 마산봉과 신선봉에서 흘러내리는 창암계곡이 앞을 가로막는다. 들머리의 박달나무 쉼터 주인장께서 주의를 주던 지점이다. 얼음이 얇으니 그보다 조금 위에 놓아둔 널판을 딛고 건너라는 얘기였는데, 그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낭패를 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등산로 주변을 살펴본다는 그가 고맙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옛길은 초입부터 눈 세상이다. 코스를 조금만 벗어나면 눈이 허벅지까지 차오른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봄이 들어선다는 입춘(立春)이 지났지만 강원도는 여전히 겨울왕국인 것이다. 겨울이 가기 전에 눈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백두대간을 찾았는데 대간령(大間嶺) 옛길은 그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행운이라 하겠다.



산길은 작은 계곡을 옆구리에 끼고 이어진다. 가끔은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규모는 비록 작지만 지닌바 풍모만은 결코 작지 않은 폭포를 만나기도 한다.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개울은 세상과 동떨어진 고요한 세상이다. 적막함 속에서도 눈밭 밑으로 흐르는 계류만은 쉼 없이 재잘거린다. 상큼하다. 산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리라.



산길은 한마디로 순하다. 계곡을 따라 난 때문인지 급한 경사나 내리막이 없다. 그렇다고 오르막이 아주 없는 아니다. 산길은 가끔, 아니 아주 가끔은 갈 지()’자를 써가며 고도를 높이기도 한다. 그게 비록 두어 번의 지그재그를 했을 따름이지만 말이다.




쉼터도 만들어 놓았다. 절반으로 쪼갠 통나무로 벤치를 만들고, 그 옆의 돌무더기 속에는 옹달샘을 숨겨 놓았다. ! ‘인제천리길이라고 적힌 팻말도 보인다. 개발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수몰과 수용, 그것도 부족해 차길과 물길을 내면서 끊어졌던 걷는 옛길을 다시 이어놓은 인제군판 올레길이다. 33개 코스, 403km로 이루어졌는데 지금 우린 7-2코스인 마장터 가는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길은 벼랑에 가까운 사면(斜面)의 허리춤을 꿰뚫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의 폭이 오가는 사람이 비켜지나갈 수 있을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산은 텅 비었다. 우리 일행 말고는 인적이 끊겼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겨울 산에 취해 45분쯤 걷자 작은 새이령이라 부르는 소간령(小間嶺)’에 도착했다. 새이령은 한자로 간령(間嶺)이라 표기했고 대간령과 구분해 소간령이 됐다. 고갯마루에는 당산나무 한 그루와 작은 서낭당, 족히 수백년이 흘렀을 돌무더기가 반긴다. 당산나무 밑동에 붙여 만든 서낭당은 텅 비어있었다. 아니 제물이 담겨있었을 그릇만 썰렁하니 놓여있었다. 추위가 소원을 빌고 싶은 이들의 발걸음까지 묶어버렸던 모양이다.




이젠 마장터로 향한다. ‘대간령 옛길의 백미로 알려진 이 구간의 길이는 대략 1. 숲은 낙엽송(일본이깔나무) 차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나무가 병정처럼 늘어선 것이 여간 볼만한 게 아니다.




산악구보 3지점이라고 적힌 팻말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오는 도중에도 11.5지점 팻말을 볼 수 있었다. 인근 군부대에서도 이 옛길을 산악구보 코스로 활용하고 있나보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15분 조금 못되게 걷자 개울이 나오고, 이어서 탐방로는 민가 몇 채가 들어앉은 숲속으로 들어선다. 그 옛날 동서 교역이 이뤄졌던 마장터(馬場垈)’로 영동지방의 수산물과 영서지방의 농산물이 이곳에서 물물교환 됐고, 말과 소가 거래됐던 장터다. 진부령이나 미시령이 산세가 험해 넘기가 힘든 반면 대간령은 비교적 완만해 말등에 짐을 싣고 넘거나 보부상들이 쉽게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고성과 속초 사람들은 소금과 고등어, 이면수어, 미역 등을 지게로 날라 왔다. 내륙지역인 인제 사람들이 좋아하는 해산물이다. 반대로 인제 사람들은 감자와 콩, 팥 등 곡물을 날랐다. 그러니 마장터는 수산물과 농산물이 오가던 길인 셈이다.




마장터(馬場垈)란 이름도 마방(馬房)과 주막(酒幕)이 있던 데서 유래한다. 예전에는 말을 이용해 짐을 운반했다. 고개를 넘다 이곳에서 여장을 풀고 말들을 쉬게 해 그런 지명이 붙었을 것이다. 동서교역이 활발하던 옛 장터에는 한때 30여 가구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첩첩산중임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규모다. 하지만 화전민 정리사업 과정을 거친 뒤 지금은 3가구가 살 뿐이다. 거기다 오늘은 인적까지 끊겨 있었다. 한 집은 제주도식으로 문을 걸어놓았고, 다른 두 집은 발자국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겨울철에는 집을 비워놓는지도 모르겠다. ! 귀틀집으로 지어진 화장실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통나무를 자 모양으로 귀를 맞추고 쌓아올려 벽을 만든 후 그 위에 너와·굴피·화피 등으로 지붕을 이은 건축물인데 느낌이 좋지 않아 사진은 올리지는 않았다.



잠시 발품을 쉰 후 길을 나선다. 길은 여전히 곱다. 그러니 체력안배나 안전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저 수시로 변화하는 주변 풍경을 가슴에 담는 일만 남았다. 장대 같은 나무들이 새하얀 눈밭과 어우러지는 겨울 산이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내고 있다.



완만한 숲길이 길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개울을 만났다. 이렇게 높은 고원지대에 개울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물이 굽이굽이 돈다고 해서 물굽이계곡이라 불리는데 수량까지도 많지 않은가. 맞다. 이렇게 너른 분지(盆地)에 물까지 갖추었으니 30가구가 아니라 300가구라고 못 살았겠는가.



비박(野營, bivouac)하기 딱 좋은 움막도 눈에 띈다. 과거 대간령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무역 통로였다. 하지만 진부령과 미시령에 길이 뚫리면서 발길이 뜸해졌고, 지금은 비박 마니아들이나 찾는 잊혀진 옛길로 변했다. 조금 전에도 자신의 등치보다 더 큰 배낭을 짊어지고 내려오는 등산객을 만났었다. 이 부근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고 했는데 저곳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눈사람도 보인다. 산에 들면 누구나 동심(童心)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그런 마음들이 한데 모여 저런 눈사람으로 승화되었을 것이다.



보부상의 사랑을 받던 대간령 옛길은 자동차도로가 뚫리면서 적막한 '비밀의 숲'으로 바뀌었다. 깊숙한 골짜기에 터를 잡았던 마장터 주민들도 집터의 흔적만 남기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리고 그 길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다시 원시적인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자연으로 돌아갔다.



마장터를 출발한지 40분 남짓 되었을까 산자락이 날을 세운다. 스틱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고 숨도 가팔라진다. 대간령 정상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10분 조금 못되게 헐떡였을까 드디어 대간령(大間嶺) 정상에 오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5분만이다. 고갯마루에는 정상임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돌탑이 수문장처럼 우뚝우뚝 서 있다. 산행에 나선 이들이 나름대로의 바램을 담아 쌓아 올렸을 것이다. 대간령(새이령)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함께 이정표(도원리6/ 마산봉3/ 마장터2)도 세워놓았다. 오른편으로 가면 신선봉인데 이정표에는 방향표시가 아예 없다. 입산이 통제되는 구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아주 오래 전, 백두대간을 하면서 강행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던 구간 중의 하나이다. ! 벤치도 놓여 있었다. 가풀막을 치고 오르느라 고생했을 다리품이라도 풀고 가라는 모양이다.



대간령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등허리를 넘는 고갯마루다. 지리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은 도도한 흐름을 내달려 미시령을 지나 신선봉을 넘고 마산봉을 지나 진부령에 이른다. 이 고갯마루는 신선봉과 마산봉의 중간에 있는 사잇길로 이름 그대로 대간령이고 새이령(샛령)이다. 인제에서 고성으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자 가장 빠른 길이었다.




이젠 하산할 차례이다. 날머리인 도원마을은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면 된다. 그동안의 폭설에 설국(雪國)으로 남아 있는 옛길은 눈 속에 묻혀 고요했다. 그 순백의 자연으로 들어선다. 순간 내 마음은 연꽃처럼 맑아진다. 앞서가는 집사람의 뒷모습이 유난히도 예뻐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옛길은 이제 고성갈래구경(九景)을 따른다. 제주도에 올레길이 있다면 고성에는 고성갈래구경(九景)이 있다. 산에서 호수, 호수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천혜의 자연을 도보여행을 통해 구석구석 만끽할 수 있도록 마련해놓은 힐링 코스다. 총 길이가 400쯤 되는 길을 아홉 갈래로 나누어 놓았는데 오늘 우리는 여덟 번째 구경길인 새이령(璽爾嶺) 가는길의 일부를 걷게 된다.



고개를 넘자 길이 험해진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기에 조심해야 한다. 그래선지 가장자리에 밧줄 난간을 둘렀고, 그도 모자라 낭떠러지 주의라는 팻말까지 곳곳에 세워놓았다. 하지만 난간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묵었던지 밧줄이 삭아서 떨어진 곳이 대부분이고, 지지대(支持臺)도 심심찮게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경사까지도 엄청나게 가파르다. 지그재그로 방향을 틀면서 경사를 죽였는데도 가파르기는 매한가지다. 덕분에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가야만 하는 곳도 있었다.



아이젠을 신었는데도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때문인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스틱을 움켜쥔 손아귀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고, 그게 어깨 근육까지 긴장을 주었던지 며칠 후까지도 어깨가 뻐근했다.



경사가 누그러진 곳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다. 오른쪽 사면이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슴 졸이며 내려서길 30분 여, 험한 길을 열 구비쯤 돌아드니 드디어 주막터. 그 옛날 대간령 옛길을 넘던 보부상들이 탁배기로 목을 축이던 장소다. 이 주막은 술맛이 좋기로 소문났었다고 한다. ‘참샘물내기라는 물맛이 좋은 샘물로 빚었기 때문이다. 농수산물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을 주막은 이젠 터만 남아있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았다는 샘은 아예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길재의 시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길가 바위 위에 작은 돌멩이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작은 성황당인 셈이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집사람이 돌멩이 하나를 얹어놓는다. 하지만 그녀에게 격식은 금물이다. 돌무더기에 돌멩이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하고 세 번 침을 뱉으면 재수가 좋아진다는 속설이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녀에겐 남의 나라 얘기일 따름이다. 내친 김에 나도 무사안녕을 기원해봤다.



대간령(大間嶺) 옛길은 너덜길도 여러 곳에서 만난다. 돌이 많은 고갯길이란 뜻의 석파령(石坡嶺)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탐방로 주변은 거대한 고목(古木)들 세상이다. 보부상들이 오가던 대간령 옛길은 진부령과 미시령 길이 뚫리면서 발길이 뜸해졌다. 그리곤 소로(小路)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보다. 그 덕에 백두대간의 원시 자연을 온전히 품고 있으니 말이다.



대간령에서 내려선지 50분 만에 임도에 내려선다. 대간령 안내판과 이정표(도원14/ 도원1리 순환도로 10)가 세워진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조자 없는 갈림길이다. 똑 같은 임도인데 구태여 멀리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임도의 특성 상 지루할 수밖에 없는 구간이지만 이곳 대간령 옛길만은 예외이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백두대간의 헌걸찬 산릉들이 거침없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내려가는 길 내내 원터골천 계곡이 품고 있는 비경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4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자 삼거리(이정표 : 선녀폭포 400m, 주차장 1.4/ 새이령 2.4)가 나온다. 안내판은 이곳에서 왼편(아래 사진으로 봤을 때는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옛날 고을의 원이 있었다는 원터굴바위가 나온다고 했으나 다녀오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7~8분쯤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나무다리(木橋)가 원터골천을 가로지르고 있다. 별다른 특징을 갖고 있지 않기에 그냥 지나치려는데 오른편으로 자못 빼어난 바위지대가 펼쳐지는 게 아닌가. ‘선녀폭포이다.



폭포는 한마디로 장관이다. 병풍처럼 계곡을 감싸고 있는 결이 고운 바위가 거센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와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참고로 선녀폭포라는 이름은 폭포 근처의 바위에 찍힌 화강암 무늬의 여자 발자국에서 기인했단다. 목욕하러 내려온 선녀가 남긴 발자국이라는 의미일 게다. 선녀폭포의 또 다른 이름은 신방소이다. 옛날 이 근처에 있던 신방사라는 절에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트레킹이 종료되는 주차장까지 이젠 1밖에 남지 않았다. 길도 물론 곱다. 하지만 고슴도치며 담비며 오소리, 수달, 삵과 같은 여러 귀한 동물들이 사는 곳이라는 푯말이 부담 없이 내딛던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만든다. 대간령 옛길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야생동물들이다. 대간령을 오가던 보부상들이 사라진 뒤에도 이곳은 귀한 동물들의 삶터였다. 그러니 남의 터전을 밟고 지나가는 우리가 어찌 함부로 나댈 수 있겠는가.



원터골천의 풍광은 자못 빼어나다. 널찍한 암반에 수량까지 많으니 여름철 피서지로 제격이겠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우리가 지켜야할 소중한 자연유산이다. 금강모치며 밀어, 버들개, 산천어, 열목어 등의 귀한 어류들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레킹 날머리는 향도원 산림힐링센터(고성군 토성면 도원리 495-9)‘

선녀폭포를 출발한지 20분이 조금 못되어 향도원 산림 힐링센터에 도착했다. 대간령에서 내려선지 정확히 2시간 만이다. 2층으로 지어진 산림힐링센터는 행안부의 접경지역 특화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시설이다. 주민소득사업으로 건립된 이 건물 말고도 도원경 치유숲길이 함께 조성됐다. 센터 1층에 들어서있다는 농특산물전시판매장과 홍보실이 궁금했으나 겨울철이선지 문은 열려있지 않았다.



근처에 향도원 힐링마을에 대한 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향도원(香挑院)’ 마을은 지명에서부터 복숭아 향기가 듬뿍 풍기는 곳이다. 실제로도 마을 주변의 산자락에 복숭아나무가 많았단다. 향도원은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근방에서 가장 번창했다고 한다. 마방(마굿간을 갖춘 주막)이 세 군데나 있었고, 양조장과 담배판매소도 있었단다. 대간령을 넘나들던 보부상들이 이 일대에서 가장 크던 교암장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시령과 진부령에 신작로가 뚫리면서 대간령의 기능도 급격히 상실되었다. 장사꾼들을 상대로 생계를 이어가던 이곳 주민의 삶도 급격히 어려워졌을 것은 뻔하다. 현재 한적한 산골마을로 남아있는 이유이다.


담양호 용마루길

 

여 행 일 : ‘19. 11. 3()

소 재 지 : 전남 담양군 용면 일원

산행코스 : 추월산주차장데크로드수행자의 길과녁바위산부흥정비네산 왕복용마루길 종점용마루길추월산주차장(거리 및 소요시간 : 9.47,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추월산(秋月山)은 가을에 더 빛을 발한다는 산이다. 추월산 자락에 물길을 가두어놓은 호수가 담양호(潭陽湖)인데, 담양군청에서 그 호반(湖畔)용마루길이란 둘레길을 조성해 놓았다. 위에서 내려다본 담양호 모습이 용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용마루길은 담양호의 수려한 전경은 물론이고 추월산·금성산성의 경관까지 함께 느껴볼 수 있다고 해서 최근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수변산책 코스이다. 길이는 3.9. 이 가운데 나무데크가 2.2이고 흙 산책로는 1.7이다. 용마루길의 가장 큰 매력은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힐링 길이란 점이다. 하지만 거리가 짧은데다 똑같은 길을 왕복해야 하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만들어 놓은 것이 수행자의 길‘. 과녁바위산과 용마루길을 연결시켰다. 그래도 짧다고 생각된다면 비네산까지 둘러보는 방법도 있다.


 

트레킹 들머리는 담양호국민관광단지 주차장(담양군 용면 추월산로 983-5)

호남고속도로 정읍 IC에서 내려와 29번 국도를 타고 담양방면으로 30분 정도를 내려오면 담양호국민관광단지가 나온다. 단지 내에 있는 주차장이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호수 건너편 바위절벽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다. ’담양호 둑 높이기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인공폭포라고 한다. 수중펌프 2대로 호수의 물을 절벽 위까지 끌어올린 다음 아래로 떨어뜨리는 방식인데, 최근 개설된 용마루 길과 함께 담양의 새로운 랜드 마크(land mark)로 떠오르고 있단다.




용마루 길은 추월산의 반대편 산자락에 조성되었다. 담양호를 건너야만 이를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면 위로 예쁘장하게 생긴 나무다리를 놓았다. 오르락내리락 부드러운 곡선미를 살렸는가 하면 중간에는 전망대까지 배치했다.




목교에서 바라보는 풍광들이 아득하다. 건너편 절벽에 매달려있던 폭포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가 하면, 높아만 보이던 다리 아래로는 담양호의 푸른 물살이 찰랑거린다. 담양호는 영산강 본류의 최북단에 자리한 인공호수이다. 영산강 발원지 용소(龍沼)에서 흘러내린 물은 이곳으로 모여든다. 댐 건설은 1973년 영산강의 본류를 차단하는 물막이 공사로 시작됐다. 담양호가 만들어진 건 19769월이었다. 높이가 46m에 이른다. 길이는 305m로 비교적 짧다. 그동안 자연재해를 예방하고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뒤돌아보면 가을에 제 값을 발한다는 추월산이 눈에 들어온다.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에 보리암(菩提庵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이 제비집처럼 둥지를 틀고 있다. 옛날에는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오를 수 있었다는 암자(庵子)이다. 고려(高麗)시대 지눌(知訥)스님이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나무로 만들어서 날려 보낸 매가 내려앉은 곳(불좌복전 : 佛座福田)에 창건하다보니 저렇게 날이 서있는 바위절벽에 들어앉을 수밖에 없었단다. 나머지 두 마리는 순천의 송광사와 장성의 백양사에 내려앉았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용마루길은 길이 2.2Km테크 로드(deck road)‘로부터 시작된다. 호수와 산자락의 접점, 즉 수변(水邊)을 따라 길을 내다보니 다리모양의 길을 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울창한 숲과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담양호 경관을 양 옆에 끼고 걷게 된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볼거리는 두 나무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연리지이다. 갈참나무()와 상수리나무()가 하나로 뒤엉켜 있는데, 두 줄기가 두 번이나 합쳐진데다 갈참나무 가지가 상수리나무의 몸을 뚫고 나와 마치 두 나무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단다. 그래선지 어깨동무 사랑나무라는 부제를 달아놓았다.



길을 걷다보면 가끔 전망대도 만나게 된다. 지붕을 씌웠을 뿐만 아니라 잠시 앉아서 쉬어갈 수 있는 나무의자까지 놓아둔 걸 보면 쉼터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설계된 모양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쯤 지나자 또 다른 전망대가 나타난다. 그 옆에는 오솔길 하나가 나있다. 용마루길과 연계시키기 위해 개설한 등산로인 수행자의 길이다. 입구에는 등산 지도와 함께 등산로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산행이 인생과 많이 닮아있다면서 수행자의 길을 삶의 변곡점을 마주하듯 13개 구간으로 나누어 놓았단다. 그리고 각 구간마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해 직업을 갖고, 가족을 이루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인생여정(人生旅程)‘과도 같은 스토리를 담았단다. 그러니 수행자의 길을 걸으면서 나는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치유하는 힐링의 시간,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보란다. 그렇다면 이 안내판은 조금 더 가면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들머리로 옮겨 놓아야 할 것 같다. 그쪽에서부터 인생이 시작되는 것으로 등산로가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길은 시작부터 많이 가파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왔다갔다 갈지()’자를 쓰며 위로 오르도록 길은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좌우의 폭을 하도 많이 벌려놓아 가파름을 완전히 누그러뜨려 버렸다.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경사를 줄이려는 노력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는가 하면 그래도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위험한 곳을 그냥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밧줄 난간을 매어놓았다.



시야가 트였다 싶으면 어김없이 담양호가 나타난다. 아까 목교(木橋)에서 바라볼 때보다 훨씬 넓어졌는데도 호수의 물살은 여전히 잔잔하다. 일렁임도 없다. 그 물속에 또 다른 추월산이 들어앉았다는데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역광(逆光)이 빛의 반사를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가의 바위들이 마치 콘크리트를 타설해 놓은 것 같이 암반(巖盤)에 둥글둥글한 자갈들이 박혀있다. 퇴적암의 일종인 역암(礫巖)’일 것이다. 이로보아 이곳 과녁바위산은 오랜 옛날 강이나 바다의 바닥에 있다가 융기(隆起)작용에 의해 솟구쳐 올라왔었다는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바위능선에 오르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담양호에 발을 적시고 있는 추월산(729m)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전체적으로는 육산(肉山)이 분명한데 봉우리 부분만 우락부락한 골산(骨山)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모양새이다. 그 때문인지 능선이 부처님이 누워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바위절벽은 물론 한 올의 머리카락도 없는 스님의 대머리이다. 다른 한편으로 추월산은 깊은 산세만큼이나 마디 굵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금성산성과 함께 임진왜란 때 치열한 격전지였다. 동학혁명 농민군의 항전지이기도 했다. 수많은 백성들의 피로 물들었던 산인 셈이다.




곳곳에 벤치도 놓아두었다. 올라오느라 고생한 사람들에게 한숨 돌리고 가라는 모양이다. 능선은 온통 참나무 세상이다. 졸참나무와 떡갈나무가 대부분이고 단풍나무와 소나무가 어쩌다 하나씩 눈에 띌 따름이다.



길가에 세워놓은 안내판이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해탈의 길임을 알려주고 있다. 인생이란 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오래 웃는 자라면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이 끝나면 알아서 내려간다고 전하란다. 괄호 안에 적어 넣은 ’120~‘라는 문구에 해당되는 얘기인 모양이다. 아까 등산로로 들어서면서 보았던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즉 한번쯤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의미 있는 줄거리들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던가 보다.



잠시 후 또 다른 안내판을 만난다. 이번에는 110세에 해당되는 비움의 길이란다. 정상에 올라봤으니 이제 내려갈 차례라면서 정일랑 미련일랑 두지 말잔다.



11번째 능선인 성찰의 길(100)‘를 지나면서 산길은 많이 가팔라진다. 왔다갔다 갈지()’자를 쓰면서 위로 오르도록 만들어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 끄트머리 봉우리에는 여유의 길(90)’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젠 조금 서서히 걸어도 된단다. 등산로에 들어선지 25분만이다.



이후로도 지혜의 길(80)’, ‘극복의 길(70), ’성취의 길(60)‘ 등의 안내판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리고 고난의 길(50)‘이 뒤를 잇는데 이곳이 과녁바위산(371.4m)‘ 정상이다. 정상에는 이정표(수행자의 길/임도/수행자의 길)와 등산로안내도 외에도 과녁바위산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추월산 아래로 난 도로의 맞은편에 보이는 과녁바위(또는 가낙바우)에서 따온 이름이란다.




임도방향으로 5m쯤 덜어진 곳이 조금 더 높아 보이기에 다가가 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알만한 산꾼들의 리본이 흡사 무당집 처마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을 만() 개 이상이나 올랐다는 사람들이니 이곳이 진정한 정상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또 다른 연리지나무를 만난다. 안내판에는 연리지가 두 몸이 한 몸이 된다하여 부부의 영원한 사랑과 비유된다면서 이 나무에 소원을 빌면 세상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적어놓았다.



잠시 후 신념의 길(40)‘ 안내판이 세워진 삼거리를 만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비네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수행자의 길을 벗어나야만 하는데 이정표(수행자의 길/ 임도/ 수행자의 길)에는 비네산이란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정표의 임도방향에 비네산이란 매직글씨가 써진 걸 보면 나혼자만 길이 헷갈린 것은 아니었나보다.



임도방향으로 20m쯤 나갔을까 갑자기 길이 험악해져 버린다. 벼랑에 가까울 정도로 비탈진 사면(斜面)으로 길이 나있는 것이다. 그러니 길이 가파를 수밖에 없다. 거기다 폭까지 좁다보니 미끄러지기라도 할라치면 최소한 중상이겠다. 선두대장에게 확인을 해보고 나서야 진행했을 정도였다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5분이 채 되지 않아 산길은 다시 부드러워진다. 주변 경관도 많이 고와졌다. 철 이른 단풍나무들이 예쁜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덕분이다.




참나무 일색이던 능선이 언제부턴가 소나무로 바뀌어 있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심신이 맑아진다. 피톤치드(phytoncide)의 영향일 것이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소나무 아니겠는가.



과녁바위산을 출발한지 30분 만에 부흥정(復興亭)에 도착했다. 삼칸겹집으로 지어졌으니 제법 큰 규모라 하겠다. 하지만 그다지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누가 언제 어떤 연유로 지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 부흥정은 노루목전망대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망은 전망대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보잘 것이 없었다.




이젠 비네산으로 갈 차례이다. 반대방향의 능선으로 난 산길은 많이 거칠다. 그만큼 사람들이 찾지 않는 산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고 길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니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하자 비네산(278.4m)’ 정상이다. 잡목들로 가득한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도 없다. 그저 알만한 산꾼들이 매달아놓은 리본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부흥정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용마루길의 종점에 이른다. 들머리인 국민관광단지에서 3.9, 용마루길은 이곳을 반환점으로 삼는다. 같은 길을 다시 한 번 걸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게 싫은 사람들이라면 내가 왔던 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아니면 되돌아나가다가 수행자의 길로 들어서서 자신의 인생이라도 반추해 볼 일이다.





이후부터는 용마루길을 걷게 된다. ‘사르륵~ 사르륵~’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깔아놓은 쇄석(碎石)들이 비명을 질러대는 멋진 길이다. 길을 가다보면 담양호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조망처도 나타난다. 눈앞에 펼쳐지는 호수의 풍경이 한 폭의 문인화를 연상케 한다.





용마루길은 담양호의 수변을 따라간다. 지난 2012년부터 길을 만들기 시작해 201412월에 마무리된 이 길은 수려한 호수의 경관을 보며 뉘엿뉘엿 걷는 길이다. 추월산과 강천산, 과녁바위산, 금성산성 등 크고 작은 산과도 눈을 맞출 수 있다. ! 담양호의 물 위로 길을 내다보니 이에 대한 대비도 필요했나 보다. 곳곳에 플라스틱 튜브를 매달아놓은 걸 보면 말이다.



조금 더 걷자 또 다른 수행자의 길들머리가 나온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수행자의 길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이곳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하는 게 옳다.




길은 이제 1.7Km의 흙길과는 이별을 고하고 데크로드로 옮긴다. 동시에 주변 풍광이 한층 더 멋스러워 졌다. 싸목싸목 걸으며 바라보는 호수와 산자락의 풍경도 운치 있다. ! 용마루길은 화장실까지 멋지다는 것을 빼먹을 뻔했다. 언뜻 펜션을 연상시킬 정도로 귀엽게 지어놓았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도 만났다. 들국화 꽃밭에 꽃을 피워드릴께요. 뽑아가지 마세요라고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일부러 심어놓은 들꽃들을 뽑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다시 돌아온 국민관광단지에는 어느새 장이 열려있다.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들이 대부분인데 가끔은 붕어빵이니 엿장수 등 먹거리도 눈에 띈다. 그건 그렇고 오늘 트레킹은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하지만 용마루길이라는 게 본디 보고 느끼고 즐기는 코스임을 감안할 때 소요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화진포 소나무 숲 트레킹

 

여행일 : ‘18. 6. 18()

소재지 :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일원

걷기코스 : 화진포 해나무교삼각점봉응봉임도전망대화진포의 성화진포 콘도화진포 해양박물관(소요시간 : 2시간 40) 이동 중 하늬라벤더팜 탐방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산과 호수, 바다를 모두 걷기 때문에 고성 지역의 지리와 역사적 특성을 두루 느낄 수 있는 코스이다. 우선 동해안에 기대어 선 산릉(山陵)은 짙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꼭대기(응봉)에서 만나게 되는 화진포 일대의 조망은 거의 환상적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 석호(潟湖 : 바다 가운데로 길게 뻗어나간 모래톱이 발달됨으로써 해안의 만이 바다로부터 떨어져서 생긴 호수)이자 담염호(淡鹽湖 : 민물과 바닷물이 섞인 호수)화진포 호수는 아름답기로 이미 정평이 나있고, 지나가는 길에 들르는 화진포의 성(옛 김일성 별장)’에서는 우리의 아픈 역사까지 되돌아 볼 수 있다. 소나무 숲에 만들어진 산림욕장에서의 힐링(healing)에다 눈이 호사를 누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 그리고 지식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으니 가족 여행지로 이만한 곳이 없을 듯 싶다.


 

트레킹의 들머리는 화진포 해나무다리(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480-3 )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IC에서 내려와 성산교차로(인제군 북면 한계리)에서 오른쪽 속초·인제 방면으로 44번 국도를 탄다. 인제를 지나 한계교차로에서 간성(고성속초방면으로 좌회전해 46번 국도로 갈아타고 진부령을 넘어 간성읍까지 온다. 이어서 상리교차로(간성읍 신안리)에서 7번 국도로 옮겨 거진읍까지 올라가다 자산교차로(거진읍 자산리)에서 오른편 거탄지로로 옮기면 거진읍 해안길을 지나서 산길로 접어들고, 잠시 후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해맞이교()가 놓여있는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참고로 이 다리는 고성 일원에서 경북 울진의 월송정까지 330의 도보길을 발굴·조성하는 정부의 광역권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거진 해맞이봉 산림욕장화진포 소나무숲 산림욕장을 잇는 보행자 전용의 다리쯤으로 보면 되겠다.




화진포 해맞이교로 연결되는 나무계단을 오르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초입에 거진 해맞이봉·화진포 소나무숲 산림욕장 종합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고운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은 널찍할 뿐만 아니라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하지만 공군부대의 담벼락을 지나고 나서는 가팔라진다. 그것도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다고 지레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왔다갔다 갈 지()’를 써가면서 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탐방객들의 수고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배려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10분쯤 지날 즈음 첫 번째 봉우리를 만난다. 탐방로는 이를 우회(迂廻)시키지만 난 고집스레 오르고 본다. 뭔가 볼거리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내 결정은 옳았다. 쉼터용으로 놓아둔 평상 앞에 삼각점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판독은 비록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만 계속된다. 걷는 게 조금도 부담스럽지가 않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주변은 온통 소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무한정으로 뿜어내는 게 소나무라고 하지 않는가. 이런 곳에서는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마침 주어진 시간까지도 여유롭다. 모처럼 느림보 미학을 시도해 볼 기회다. 사실 도회지의 시간에 익숙한 사람에게 느린 시간여행을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것도 평지가 아닌 좁고 굽어진 옛길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느릿느릿 뒷짐 지고 길을 걷다 보면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생명을 싹틔우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게 될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5분 만에 응봉 정상에 올라선다. 화진포 호수 동쪽에 위치한 높은 산이 매가 앉은 형상과 같다고 해서 매 응()' 자를 써 '응봉'이라고 불렀단다. 기껏해야 해발이 122m에 불과한 산을 굳이 높은 산이라고 했는지 궁금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근에는 이만한 높이의 산도 없기 때문이란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봉우리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관목원 400m, 화진포의 성 1.5) 외에도 통나무의자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그 옆에 조망도(眺望圖)까지 세워둔걸 보면 조망을 즐기면서 푹 쉬었다 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한쪽 귀퉁이에는 정성들여 쌓아올린 케언(cairn)도 보인다. 그렇게 쌓아올린 하나하나의 돌맹이들에는 그 누군가의 절실한 바램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화려하다. 물안개가 아른거리는 화진포해수욕장은 물론이고 화진포 호수가 그 화려한 자태를 마음껏 자랑하고 있다. 화진포호는 송지호와 함께 강 하구와 바다가 만나 형성된 석호(潟湖 : 바다 가운데로 길게 뻗어나간 모래톱이 발달됨으로써 해안의 만이 바다로부터 떨어져서 생긴 호소)이자 담염호(淡鹽湖 : 민물과 바닷물이 섞인 호수)이다. 또한 둘레가 16에 달하는 동해안에서 가장 큰 호수이며 국내에 있는 8개 석호 가운데 가장 많은 생물개체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산을 시작한다. 화진포 호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 내려오면 된다. 임도에 가까울 정도로 널찍한 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면 이번에는 진짜 임도(이정표 : 화진포의 성1.2/ 관목원100m/ 응봉200m)를 만난다. 왼편에 보이는 데크길은 관목원과 습지원을 거쳐 생태박물관으로 연결된다. 화진포의 성은 물론 직진, 그러니까 맞은편 능선을 타면 된다.



몇 걸음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봉우리의 위에 올라있다. 이곳에는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화진포 호수를 바라보라는 모양이지만 아까 정상에서의 조망에 비하면 한참이나 뒤진다. 같은 풍경화이지만 이곳의 그림은 잡목들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트레킹을 이어간다. 잠시 가파른 내리막길이 이어지더니 안부에 이르자 또 다시 임도를 만난다. 아까 만났던 임도를 따랐을 경우 이곳에서 다시 만났지 않았나 싶다. ! 그러고 보니 이미 우린 화진포 소나무숲 산림욕장에 들어서있다. 이 산림욕장은 산림 테라피원, 관목원, 습지원, 명상숲길 등 다양한 테마로 꾸며져 있다고 한다. 우린 응봉에서 시작해 화진포의 성까지 계속해서 소나무숲길을 따를 계획이다. 숲길은 비교적 평탄하고 완만하여 걷기에 무척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도를 무시하고 또 다시 맞은편 능선을 따른다. 안개가 자욱한 것이 자못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로인해 울창한 소나무 숲 외의 다른 경관은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을 음미하며 걸어볼 일이다.



길은 무척 곱다. 널찍하게 난 보드라운 흙길은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꼬불꼬불 시나브로 돌아가는 옛 고갯길의 전형적인 모양새가 아닐까 싶다. 이런 곳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조금도 없다. 아무리 속도전이 만연한 시대라지만 문명의 속도를 내려놓고 느리게 가는 시간손대지 않은 풍광에 빠져볼 일이다. 새로운 삶이 동행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속도를 뚝 떨어뜨린다. 그러자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생명감을 주는 아름다운 자연이 도시의 삶에 찌든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에 이런 길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는 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난 이미 성숙해져 있음을 느낀다.




길게 놓은 나무계단을 내려서자 진행방향의 솔숲사이로 이층짜리 석조건물 하나가 내다보인다. ‘김일성 별장으로도 불리는 화진포의 성이다. 이 건물은 1937년 독일의 웨버 선교사가 건축하여 교회로 쓰다가 1945년부터는 김일성이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김일성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유이다. 한국전쟁 때 크게 훼손되었는데 1964년 육군이 본래의 건물을 철거하고 재건축하여 군인휴양소로 이용해오다가 1995년부터 안보전시관 형태로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물론 유료(有料)이다.



먼저 옥상으로 올라가본다. 이곳에서의 조망이 자못 빼어나기 때문이다. 톱니바퀴 같은 성벽사이로 화진포 일대의 해안선과 동해바다, 그리고 배후에 있는 맑은 호수가 그 아름다움 자태를 한껏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짙게 낀 해무(海霧)가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 배가(倍加)시키고 있다.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안개가 바다 가운데에 있다는 금구도와 해금강을 가려버린 것은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 하겠다. 그래도 방문객을 위해 만들어 놓은 시설들은 한번쯤 이용해보자. 조망도(眺望圖)는 물론이고 망원경까지 꼭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운이라도 좋아 북한 땅에 있는 해금강을 눈에 담아볼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건물의 내부에는 옛 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를 비롯해 김일성 가족이 사용했던 응접세트 등 각종 유품이 모형물로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다. 또한 북한의 만행 등을 알리는 안보교육에 관한 내용과 화진포 지명유래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북한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조국과 함께!! 국민과 함께!!’라는 코너(corner)가 아닐까 싶다. 남북 장관급회담과 남북 철도연결구간 열차 시험운행, 그리고 각종 남북협력 사례를 전시하고 있는데 이는 남북화해 무드가 절정에 달하고 있는 요즘 분위기에 나 또한 한껏 들떠 있음이리라.





화진포의 성을 빠져나오면 민간인의 출입이 허용되는 해수욕장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 잡았다는 화진포해수욕장이다. 화진포와 바다 사이의 사주가 성장함에 따라 호수와 바다 사이에 형성된 길이 1.7의 백사장으로, 호수의 출구에 의해 호안(湖岸)과 해안이 구분된다. 해안은 수심(水深)이 얕은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단다. 거기다 송림(松林)까지 끼고 있으니 해수욕장의 조건을 고루 갖추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이 해수욕장은 백사장이 깨끗할 뿐만 아니라 주위경관까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모래는 눈과 같이 희다. 조개껍질과 바위가 부서지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데,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이 모래를 택리지(擇里志)에다 울 명()'자와 모래 사()'자를 써서 '명사'라고 기록했다. 모래에서 쇳소리가 난다고 해서 명사라고도 불렸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아무튼 저 모래에는 모나즈(monaz) 성분이 많다고 한다. 때문에 감촉이 부드러우며 개미와 곤충도 들끓지 않는단다.



해안가 언덕에는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사랑의 열쇠를 매달 수 있도록 하트 모양의 걸개판을 내걸었는가 하면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인 수호랑(Soohorang)과 반다비(Bandabi)의 조형물도 세워놓았다. 그 옆에 보이는 쇠기둥 위에는 명태(明太) 두 마리가 올라 앉아있다. 고성군의 군어(郡漁)임을 알리려는 목적일 것이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거북이모양으로 만든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화진포의 또 다른 볼거리인 바위섬, 금구도(金龜島)를 형상화한 것이란다. 화진포 쪽에서 바라볼 때 거북이의 형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경관이 뛰어나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별장이 많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금구도는 광개토왕의 릉()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그래선지 조형물의 옆에다 이와 관련된 근거들을 적어 놓았다. ’고구려 연대기를 살펴보니 광개토대왕 때 이곳에 왕릉축조를 시작했으며 대왕이 직접 둘러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들인 장수왕 때 시신을 안장했으며 이후 신라의 군사와 릉의 수비대가 잦은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단다. 하지만 이는 고성문화포럼의 주장일 따름이므로 공인을 받으려면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을 뒤엎을만한 획기적인 발견이 필요할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이 섬에는 축성연대와 사용목적을 알 수 없는 길이 60m, 높이 170230m의 돌로 쌓은 성벽이 남아 있는 것을 비롯해 건축물의 주초석, 기와조각과 토기파편들이 발견된 바 있다고 한다.



모래사장의 뒤편에는 화진포콘도가 들어서있다. 육군휴양소로 지어졌지만 군인전용은 아니란다. 콘도에는 군부대의 피엑스 기능을 하는 마트는 물론이고 식당과 노래방까지 들어서 있다고 한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날머리인 해양박물관에는 식당이 없으니 이곳에서 요기를 때우고 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마침 자연산 회를 시중보다 저렴하게 판매하는데다 물회는 맛까지 뛰어나다니 안성맞춤이 아니겠는가. 근처에 화진포 생태박물관이 있다는 것도 빼먹을 뻔했다. 화진포 생태박물관은 잠시 후에 들르게 될 해양박물관‘, ’송지호 철새관망타워등과 함께 고성군의 핵심 생태전시장으로 환경보전을 위한 교육박물관이다. 우리처럼 날머리를 해양박물관으로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자칫 날머리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거론해봤다.



콘도를 지나자 이번에는 더 고운 모래사장이 나타난다. 백사장 뒤편에는 군대의 막사처럼 생긴 건물들 몇 동이 늘어서 있다. 콘도의 별관이라는데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으로 보아 성수기 때만 문을 여나 보다. 이쯤해서 백사장을 빠져나와 소나무 숲길을 타본다. 그 유명한 화진포호수 금강소나무 숲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길이 끊겨있었기 때문이다.



콘도까지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콘도의 정면으로 난 길을 따른다. 백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소나무들이 꽉 들어찬 기분 좋은 숲길이다. 사람들은 이 일대 4ha의 송림(松林)'화진포호수 금강소나무 숲'이라고 부른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구불거림이 적고 대체로 하나의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와 나무 자체만으로도 보기에 좋다. 나무의 키는 15m 내외이고 직경도 20~40로 크진 않지만 울창하게 덮여있어 여간 상큼한 게 아니다. 하긴 ‘()생명의 숲 국민운동과 산림청 그리고 유한킴벌리가 공동으로 주최한 1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까지 수상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아무튼 금강소나무(金剛松)는 강송(剛松), 미인송(美人松), 춘양목(春陽木), 황장목(黃腸木) 등으로도 불리는데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상북도 등 동해안에 분포되어 자란다. 또한 줄기가 곧고 붉은색을 나타내며 나무껍질이 얇고 재질이 우수하여 가구재, 문화재, 건축용재로 사용되는 소중한 나무라고 한다.



숲길을 지나면 자연풍광이 수려하기로 소문난 화진포(花津浦) 호수가 나온다. 원래는 동해 바다였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바다와 격리되면서 형성된 석호(潟湖), 면적이 72만평에 달할 정도로 광활하며 호수 주위로는 울창한 송림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 호수는 얕고 폭이 좁은 수로(수심 80, 50)로 연결된 2개의 호수(내호, 외호)로 이루어졌으며, 이 가운데 외호(外湖)는 평상시에는 닫혀있는 좁은 통로로 동해와 연결된다. 하지만 장마 또는 폭풍 때에는 바다와 연결되면서 해수유입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담염호(淡鹽湖 : 민물과 바닷물이 섞인 호수)로 분류되는 이유이다. 한편 이 호수는 비무장지대와 인접한 탓에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 지역이었다. 이로 인해 자연생태계가 비교적 잘 보전되었고,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과 갈대 숲속의 풍부한 먹이를 찾아온 철새들의 휴식처가 되어왔다.



호숫가에 이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내호(內湖)와 외호 사이에 놓인 화진포교를 건너 이승만별장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가려는 해양박물관은 물론 오른편 방향이다. 이 길은 바람과 파도와 모래가 물을 가둬놓은 석호(潟湖)인 화진포 호수를 왼편에 끼고 이어진다. 갈대숲이 운치를 더하는 길이다. 참고로 전설에 의하면 화진포 호수의 옛 이름은 열산호(烈山湖)’였다고 한다. 화진포 건너 마을에 열산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어느 해 큰 비가 내려서 마을이 송두리째 물에 떠내려갔다. 그리고 마을이 있던 곳이 차차 물에 잠기기 시작하여 지금의 호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곳 사람들은 열산동 산쪽으로 마을을 옮겼다고 하는데 날씨가 좋고 바람이 잔잔하여 물결이 일지 아니할 때에는 그 옛날 촌락이 있던 터와 담장을 쌓았던 자취가 보인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고운 빛깔의 해당화도 한몫을 톡톡히 한다. 해당화는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연인의 숨결'이라는 꽃말을 갖고 있는 꽃이다. 옛날 연인이 바닷가를 노닐고 있는데 갑자기 큰 파도가 밀려와 두 사람을 덮치자, 남자는 여인을 물 밖으로 밀어내고 자신은 물에 휩싸여 죽고 만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여인의 눈물이 남자의 시신에 닿자, 그 자리에서 짙은 분홍빛 애잔한 꽃이 피어났단다. 그게 바로 해당화인데 화진포란 이름은 이 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호숫가에 해당화가 만발한다고 해서 화진포(花津浦)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해안길을 따라 얼마간 걷자 아치(arch)형으로 생긴 예쁜 다리가 나타난다. 화진포 호수와 동해가 만나는 지점에 놓인 금구교(金龜橋)인데, 근처에 있는 금구도(金龜島)에서 이름을 따온 모양이다. 입구의 난간에는 고니 조형물이 앉아있다. 화진포 호수에서 노니는 새하얀 고니떼가 '백조의 호수'를 연상케 한다더니 이를 형상화 시켜놓지 않았나 싶다.



트레킹 날머리는 화진포 해양박물관(고성군 현내면)

다리를 건너자마자 배 모양으로 생긴 건물 하나가 짙게 낀 해무(海霧) 속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관동별곡 백리, 답사 번지 高城이라고 쓰인 거대한 비석이 자리 잡고 있는 마당으로 들어서자 조개 모양의 조형물이 눈에 띈다. ’거인조개(Giant Clam)‘라고 하는데 해양박물관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듯 싶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해양박물관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화진포 관광지구 내에 위치한 화진포 해양박물관은 패류박물관과 어류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패류박물관에서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각종 조개류와 갑각류, 산호류, 화석류, 박제 등 1,500여종 40,000여점을 전시하고 있으며, 어류전시관에서는 수중생물 1253,000여 마리를 각각의 서식 환경과 컨셉에 따라 보여준다. 그건 그렇고 이번 트레킹은 총 2시간 40분이 걸렸다. 화진포성 내부를 둘러본 것 말고는 한눈을 팔지 않았으니 오롯이 걷는데만 걸린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이동 중에 하늬 라벤더 팜에 들르기로 했다. 고성군 간성읍 어천3꽃대마을’. 진부령 아래에 위치한 라벤더 농장이다. 이곳은 라벤더 전도사로 불리는 하덕호씨가 33000에 라벤더를 심어 조성한 곳이다. 경기도 의왕시에서 허브 숍을 운영하던 그는 허브제품의 원료가 되는 라벤더를 직접 재배하려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가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는 이곳 고성의 기후조건이 라벤더 주산지인 유럽과 비슷했기 때문이란다. 라벤더는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해양성 기후에 서식하는 방향성 식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싹이 트는 이른 봄에 충분한 수분이 제공될 수 있도록 겨우내 눈이 많이 내린다는 점도 작용했다. 매년 이맘때면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라벤더를 이용한 다양한 체험행사는 물론이고, 주말에는 라벤더정원에서 향기음악회도 연단다. 하지만 올해는 건너뛰기로 했단다. 작년 겨울의 혹독한 추위로 인해 라벤더의 작황이 좋지 않아서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농장은 상시로 개방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 아니겠는가. 조금은 어설프겠지만 아름다운 꽃밭을 구경할 수는 있으니까 말이다.



안으로 들자 너른 언덕이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어있다. 라벤더가 만개하면서 누구나 동경했을 법한 보랏빛 언덕을 만들어 냈다. 보라색의 라벤더는 초여름 딱 보름 동안 만개해 비현실적인 색감의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꽃이다. 그 꽃들이 너른 언덕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름답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꽃만 보는 우()는 범하지 말자. 이 꽃밭은 한 사내가 뿌린 13년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찾아온 이들에게는 그저 낭만적인 꽃밭일 따름이지만, 가꿔낸 이에게 꽃밭은 고된 노동과 거듭되는 실패, 포기에 대한 망설임의 긴 행로를 거쳐 비로소 이룬 성취인 것이다.




정원의 한켠에 꽃양귀비도 심어 놓았다. 꽃양귀비는 유럽원산의 귀화식물로서 전국의 공원이나 하천 변에서 자라는데 줄기 끝에 꽃이 1개씩 달리는 한해살이 풀로 전체에 털이 무성하다. 아무튼 꽃밭 전체가 화려한 꽃들로 가득하다. 온통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다. 5~8월이 꽃들을 피워내는 시기이니 때를 제대로 맞춰온 셈이다. 그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는데 양귀비꽃을 이렇게 키워도 되느냐?’는 소곤거림이 들려온다. 양귀비꽃에서 추출되는 아편(阿片)의 심각한 부작용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제배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음일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꽃양귀비(Papaver rhoeas L.)에는 양귀비(Papaver Somniferum L.)와는 달리 진통작용, 진해작용, 탐닉작용, 중독작용을 일으키는 알칼로이드 성분인 모르핀이나 코데인이 없기 때문이다.




메밀꽃밭도 보인다. ‘이효석 선생이 노래한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글의 배경인 봉평 만큼은 아니어도 흐드러지게 핀 꽃밭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하겠다. 메밀꽃은 다른 꽃들처럼 화려하지는 않다. 하지만 푸른 풀밭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풍경은 수수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하등 화려한 꽃들에 뒤질 게 없겠다는 얘기이다.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은 게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런 그렇고 메밀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바로 '막국수'. 화전민들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을 심어 국수를 만들어 먹은 데서 유래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다. 막국수의 시초는 화전민들이 끼니를 때우려고 '마구' 뽑은 거친 국수였다. '금방 막 눌러 바로 먹는다'고 해 막국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과거 특별한 손님이 오면 맷돌에 메밀을 갈아 국수를 뽑아 대접했는데 한국전쟁 이후 생활고를 해결하려고 국수를 만들어 팔던 게 대중화의 시초라고 한다.



누군가는 꽃밭을 가꾸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일과 매한가지라고 했다. 붓으로 물감을 찍어 그리듯 색색의 꽃을 심어 꽃밭을 가꾼다는 것이다. 솜씨란 갈수록 좋아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꽃밭도 올해보다 내년이 한결 더 좋아질 것이다. 보라색 라벤더와 붉은 꽃양귀비, 흰 메밀꽃, 갈색 호밀 말고도 또 어떤 색깔의 꽃들이 이 언덕을 채우고 있을지가 미리부터 궁금해진다.



농장에서는 라벤더 제품과 기념품을 파는 매장도 운영하고 있다. 메스퀘타이어 숲에서 시화전이 열고 있는가 하면, 체험학습장에서는 라벤더의 역사와 세계적인 재배지, 그리고 라벤더 향기의 추출방법과 오일의 효능 등을 판넬(panel)로 만들어 홍보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아이스크림이 아닐까 싶다. 한입 배어먹을라치면 라벤더 향이 입안에 가득해진다. 거기다 시원함까지 더해지니 오늘 같이 무더운 날에는 제격이라 하겠다.


소똥령 옛길 트레킹

 

여행일 : ‘18. 6. 18()

소재지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일원

걷기코스 : 등산로 입구출렁다리소똥봉우리소똥령 1~3칡소폭포생태체험학습장소똥령마을(소요시간 : 1시간 50)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인제와 고성을 잇는 진부령은 일제 강점기에 난 길이다.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지만 경사를 낮춰가며 길은 낸 탓에 인제와 고성 양쪽에다 16에 이르는 구절양장 굽잇길을 풀어놓는다. 진부령을 넘었다고 해서 고개를 다 넘은 것은 아니다. 진정한 고갯길은 따로 있다. 이름만 들어도 입가에 웃음이 흘러나오는 소똥령이다. 소똥령의 본래 이름은 소동령(小東嶺)이라고 한다. ‘작은 동쪽 고개라는 뜻이다. 하지만 백두대간의 고개 중에서 작다는 뜻이지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다. 아무튼 이 고개를 넘어가는 약 3.4의 트레킹 코스는 천연 그대로의 숲길이자 자연 생태의 보고(寶庫)이다. 아직까지 사람의 손을 많이 타지 않아 수목(樹木)들이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똥령 옛길이 어린이들에게도 부담이 없을 정도로 순한 편이니 트레킹에다 소똥령마을에서의 팜 스테이까지 끼워서 가족단위 행사지로 추천할만하다.


 

트레킹의 들머리는 46번 국도변(고성군 간성읍 진부리 산 3-1)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IC에서 내려와 성산교차로(인제군 북면 한계리)에서 오른쪽 속초·인제 방면으로 44번 국도를 탄다. 인제를 지나 한계교차로에서 간성(고성속초방면으로 좌회전해 46번 국도로 갈아탄 뒤, 용대육교(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는 진부령 방면 오른쪽 길을 선택한다. 이어서 진부령을 넘어 고성 방향으로 5분가량 내려가면 오른쪽에 소똥령 입구표지판이 나타난다.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소똥령 숲길 입구라고 쓰인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길가에 세워진 안내판 몇 개가 보인다. 그 가운데 하나는 소똥령 숲길 종합 안내판이다. 인근의 지도를 그려놓고 그 오른편에다 소똥령의 유래를 적었다. ‘소똥령은 옛날 한양으로 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청운의 꿈을 품은 선비가 괴나리봇짐 메고 과거 보러 가던 길이기도 하고 소와 비단을 물물교환하기 위해 넘다가 산적을 만나기도 하던 고개였단다. 이름의 유래도 재미있다. 고개 정상에 주막이 있었는데 원통장으로 팔려가는 소들이 주막 앞에다 똥을 하도 많이 누어서 소똥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연유야 어떻든 이름에서 풍기는 해학적이고 진한 고향의 향기가 포근하면서도 정겹기 짝이 없다. 그 옆에는 진부리 생명의 숲길안내판도 보인다.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을 보면 예전부터 있어왔던 소똥령말고도 다른 숲길들을 새로 개설한 모양이다.



숲길로 들어서자 북천계곡을 가로지르는 길이 58m, 1.5m의 구름(출렁)다리가 기다린다. ‘소똥령 옛길의 랜드마크(landmark)이다. 그렇다고 원주의 소금산 출렁다리나 파주의 마장호수 출렁다리처럼 길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리의 높이까지도 별로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안전만은 예외가 아니다. 일방통행과, 다리를 건널 때는 한번에 20명 이내로 건너고, 뛰거나 흔들거나 장난을 삼가는 등 다리를 이용할 때 지켜야 할 안전수칙을 적은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출렁거린다. 바르게 서서 걷기가 힘들 정도이다. 한 번에 20명 이상 건너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비로소 이해된다. 그래도 집사람은 마냥 좋은가 보다. 다리를 더욱 흔들리게 만든다며 장난을 걸어온다. 얼굴에 인 웃음기 또한 사라질 줄 모른다.




구름다리는 속살을 내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개울을 가로 지른다. 개울 너머로 설악의 헌걸찬 연봉들이 길게 펼쳐진다. 매봉산 줄기가 아닐까 싶다.



다시 트레킹을 이어간다. 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전해오는 숲 내음이 촉촉하면서도 싱그럽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주변 전나무 숲에서 보내오는 선물이라 하겠다.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들어있다는 솔향 속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푸름을 잔뜩 머금은 숲 내음이 코끝으로 전해져 온다. 꼬불꼬불 시나브로 옛 고갯길로 들어서자 조그만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에까지 푸름이 내려앉았다. 가뭄만 아니었으면 아름다운 물소리까지 벗 삼으며 걸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주어진 여건에 순응하며 느긋이 걷는 게 트레킹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길을 나선지 13분쯤 되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오른편은 진부리 유원지로 가는 길이고, 소똥령은 물론 왼편이다. 하지만 아까 초입에서 만났던 소똥령 숲길 종합 안내판은 어느 곳으로 진행해도 소똥령 마을로 갈 수 있다고 표기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더라도 첫 번째 임도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소똥령마을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정표(칡소폭포2.4, 소똥령 생태체험학습장 2.9/ 장신리 임도980m, 진부리 유원지 1.3)가 세워져 있으니 마음에 내키는 방향을 골라서 진행하면 될 일이다.

 



잠시 후, 그러니까 길을 나선지 15분쯤 지나자 소똥봉우리라는 푯말이 앞을 가로막는다. 옆에 봉긋한 한 무더기의 흙무덤이 내가 소똥봉우리요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긴 세월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넘다 보니 자연적으로 길이 패이면서 만들어진 봉우리란다. 그 생김새가 소똥을 닮았다고 해서 소똥령이라는 고개의 이름이 되었다는데 한마디로 앙증맞기 짝이 없다. 아무튼 길가에서 탐방객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해주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길이 움푹 파여 있는 게 보인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깊은 곳도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으면 저렇게 깊이 파였을까 싶다. 지금으로 치면 국도 1호선쯤은 되었겠다. 하긴 소똥령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근원을 그런 점에서 찾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오죽하겠는가. 하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다보니 자연스레 길이 파였고, 그로 인해 생겨난 작은 봉우리들의 모양새가 마치 소똥처럼 생겼다는 주장 말이다.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있는 편이다. 길은 널찍하게 잘 닦여있고 행여 산비탈이라도 지날라치면 어김없이 밧줄난간을 설치해 안전을 도모했다. 2015년엔가 소똥령 등산로를 정비해서 새로 열었다고 하더니 이렇게 변했는가 보다. 당시 기사는 3.34의 탐방로에 데크다리를 비롯 목계단, 안전로프 난간, 목책, 종합안내판 등을 설치했다고 전했었다.



옛길을 막아놓기도 했다. 원래의 탐방로는 산으로 곧바로 치고 오르거나 경사진 곳을 지났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고성군이 탐방로를 정비하면서 새 길을 냈다. ‘갈 지()’ 자를 쓰면서 지그재그로 위로 오르도록 했다. 위험한 곳에는 밧줄난간을 매어두었음은 물론이다. 그만큼 경사가 가파르면서도 위험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긴장할 필요는 없다. 기껏해야 10분 남짓이면 완만해진 길을 또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가파른 오르막을 벗어나자 길가의 숲은 고요해진다. 정상으로 다가갈수록 숲은 더욱 원시적으로 울창해진다.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는가 싶더니 이내 열어 푸른 하늘을 내려놓는다.



쉬엄쉬엄 산길을 따라 34분쯤 걷자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으나 이곳에서는 곧장 직진하는 게 옳다. 바로 위가 소똥령 1이기 때문이다. 능선을 따라 밧줄난간이 매어져 있으니 참조한다. 오른편으로 우회해도 위로 오를 수는 있다. 하지만 구태여 돌아서 올라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정확히 35분 만에 숲속에 들어앉은 소똥령(1) 정상에 섰다.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소똥령 1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칡소폭포 1.7, 소똥령 생태체험학습장 2.2/ 소똥령 구름다리 1.1) 하나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힘들게 올라온 길손들을 반긴다고나 할까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벤치도 하나 놓여있다. 옛날 지친 나그네의 발길을 잡던 주막의 흔적은 간데없지만 나무의자 하나만으로도 그 당시 나그네들의 편안함을 오롯이 느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2봉으로 향한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능선을 따라 5분쯤 진행하자 2봉 정상이다. 물론 느린 걸음이다.




‘2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도 역시 소똥령 2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칡소폭포 1.6, 소똥령 생태체험학습장 2.0/ 소똥령 구름다리 1.2)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조망 또한 트이지 않는다. 벤치까지 놓여있지 않은 것은 구태여 머무를 필요 없이 그냥 지나치라는 암시일 수도 있겠다.



‘2의 볼거리는 누가 뭐래도 나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묵은 소나무라 하겠다. 소똥령을 지켜주는 신장(神將)이라도 되는 양 거대한 몸뚱이를 비스듬히 누인 채 정상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 집사람에게는 일개 소나무일 수밖에 없나보다. 예쁜 자태에 반했는지 나무 위로 냉큼 오르고 본다.



‘3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제법 가파르게 떨어졌다가 다시 오른다. 그렇다고 두 봉우리의 사이가 길다는 얘기는 아니다. 5분이 채 안되어 정상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3의 정상도 앞서의 두 봉우리와 마찬가지 풍경이다. 정상표지석 대신에 이름표를 단 이정표(칡소폭포 1.4, 소똥령 생태체험학습장 1.9/ 소똥령 구름다리 1.4)가 세워져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앞서의 봉우리들과는 달리 조망이 트이기 때문이다. 멋진 자태의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북쪽 하늘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준다.




이젠 하산할 차례이다. 하산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나선형의 나무계단이 놓여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그렇다고 그런 내리막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잠시 후에는 또 다시 완만해지기 때문이다. 이 구간에서의 특징은 원시의 숲이 아닐까 싶다. 나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된 갈참나무들이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14분쯤 내려왔을까 굴참나무 지대라고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이 온통 굴참나무들다. 아니 소똥령은 굴참나무가 대부분이다. 오래 묵은 소나무들은 양념 삼아 들어앉았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 부근에서는 그런 소나무들조차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고고한 품위를 자랑하는 소나무들이다보니 아랫자리는 아랫것들에게 내어주겠다는 심사일까?



소똥령 보물찾기 지점이라는 팻말도 보인다. 소똥령마을 인근에 어린이들의 숲속 놀이터인 소똥령 유아숲 체험원을 만들었다고 하더니 그 시설의 일부인가 보다.



길가에 멧돼지 물먹은 자리라고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다. 그렇다면 근처의 땅을 헤집어 놓은 흔적들은 요즘도 멧돼지들이 이용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서두름으로 변한다. 요즘 멧돼지는 유해동물이라고 하니 어찌 한가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는 산적(山賊)’을 조심했겠지만 요즘은 저적(猪賊)’이 두려운 세상이 되었다.



이어서 나타나는 건 옛날 묘자리’. 팻말의 하단에 석비, 석부, 석상을 찾아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석상(石像)만 보일 따름이다. 이 또한 소똥령 유아숲 체험원에서 하고 있는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인 보물찾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편안하게 이어지던 길이 갑자기 가파르게 변한다. 침목계단을 놓아야 할 정도로 가팔라졌다.



그런 내리막길이 끝났다싶으면 곧이어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정표(장신리 유원지1.5/ 소똥령 구름다리2.7, 진부리 유원지 4.2)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칡소폭포로 가는 길이 왼편으로 나뉘는 지점이니 유념한다. 하긴 들머리에 소똥령 숲길 안내도국가지점번호 표시목외에도 칡소폭포 안내판이 별도로 세워져 있으니 눈을 감고 가지 않은 이상 놓칠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3봉에서 하산을 시작한지 30,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20분 정도가 지났다.



폭포는 마을로 향하는 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100m 조금 못되게 들어섰을까 웅장한 굉음에 휩싸인 칡소폭포에 이른다. 예전엔 고급관료들이 비밀스레 자주 찾아와 신선놀음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높이 3m에 불과한 폭포는 엄청난 물을 쏟아내며 주변의 푸른 숲과 함께 수려함을 자랑하고 있다. ! 이왕에 시작했으니 칡소폭포에 대해 한걸음 더 나가 보자. 예로부터 칡넝쿨로 그물을 짜서 폭포의 양쪽 바위에다 걸쳐놓으면 희귀성 어종인 연어나 송어 등이 산란을 위해 폭포를 뛰어넘다가 칡넝쿨 그물에 걸려 손쉽게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칡소폭포라는 이름이 붙게 된 원인이 아닐까 싶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평지나 다름없는 길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중간에 작은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목교 아래로 내려가 땀을 씻고 가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그렇게 25분 조금 못되게 걷자 넓게 펼쳐지는 소나무 숲속에 자리 잡은 자연() 생태체험 학습장이 나온다. 소똥령 마을의 우수한 자연생태계를 보다 잘 보전·관리하는 한편 자연생태환경을 활용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조성한 곳으로 탐방로와 생태습지, 야생화단지 등을 갖추었다. 또한 해설용 안내판들을 여럿 설치했음은 물론이고 정자와 파고라(pergola의 일본식 발음), 그네, 의자 등의 편의시설도 배치했다. 안내판에는 2001년에 만들었다고 적혀있지만 주변에 건설자재들이 널브러져 있는 걸로 보아 공사는 아직까지도 진행형인 모양이다.



소똥령마을은 여기서도 한참을 더 내려가야만 한다. 이후부터는 도로나 다름없는 임도를 따른다. 길가에는 군()에서 사용하고 있는 듯한 시설도 보인다. 일반에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민통선에서 가깝다보니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렇게 6분 정도를 진행하자 소똥령 마을에 이른다. 칡소와 멍덕소, 명주소, 소팽이골 등 크고 작은 계곡을 많이 지닌 아름다운 마을로 지난 2003년 농촌 전통 테마마을로 지정된 이래 많은 관광객(휴양객)들이 일 년 내내 즐겨 찾는다고 한다. 하루 정도 느긋하게 머물 수 있는 펜션부터 농촌체험관, 자연생태체험학습장, 교육농장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머물면서 쑥·민들레·미나리 등 산야초 채취와 효소 만들기, 천연 염색, 소먹이 꼴베기와 여물주기 등 자연생태체험학습의 프로그램들을 실제로 경험해 볼 수 있단다.




소똥령 마을의 또 다른 명물인 돌배나무를 둘러보기로 한다. 수령(樹齡)300년이나 되었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골목길을 따라 100m 남짓 들어가자 우람하기 짝이 없는 노거수(老巨樹)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돌배나무가 저렇게 굵은 것을 보면 수령을 300년으로 추정하는 게 옳을 것도 같다. 누군가는 조선 영조(재위 : 17241776) 때 강민첨장군의 후손이 공조참판 품계를 받은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경상북도의 기념물(119)로 지정되어 있는 청도의 상리 돌배나무나이 추정치가 기껏해야 200년이라니 그보다 100년이나 더 묵은 이 나무를 하루빨리 기념수로 지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트레킹 날머리는 장신유원지주차장(고성군 간성읍 장신리 512)

마을에서 조금 더 내려가니 계곡유원지로 조성되어 있는 너른 주차장이 나온다. 향로봉과 진부령 정상에서 시작된 계곡수가 칡소폭포를 경유 이곳 소똥마을 끝자락으로 흐르는데, 그 개울가에다 유원지를 만들어 놓았다. 유원지는 피서객들의 편의시설인 주차장과 샤워장, 식수대, 수세식 화장실, 야외캠핑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계곡 물놀이는 물이 눈이 시릴 정도로 맑고 깨끗한데다 수심까지 얕아 가족단위 피서객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오늘 트레킹은 총 2시간 10분이 걸렸다. 칡소폭포의 경관에 빠져 20분 정도를 놀았으니 실제로는 1시간 50분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모처럼 느림보의 미학을 즐기며 걸었음을 감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