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느린 꼬부랑길

 

여행일 : ‘21. 8. 1(일)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대흥면

여행코스 : 옛고을 마당→의좋은 형제공원→대흥동헌→방문자센터→봉수산휴양림→애기폭포→대흥향교→교촌2리→교촌3리→예당호 느린호수길→생태공원(소요시간 : 11.21km/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슬로시티는 말 그대로 느림 속에서 자연과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행복한 삶의 질을 추구하는 활동을 말한다. 지난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현재는 전 세계 30개국 266개 도시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는 2007년 12월 담양군(창평면)·장흥군(유치면)·신안군(증도)·완도군(청산도)이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현재는 16개 고을로 늘었는데, 이곳 예산군(대흥면)도 그중 하나이다. 이에 예산군에서는 자연생태를 보존하고 고유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며 활발한 지역민의 커뮤니티 활동을 펼치는 다양한 슬로시티운동 및 프로그램을 대흥면에서 전개하고 있다. 2011년 조성된 느린 꼬부랑길도 그중 하나다. 총 3개 코스로 운영되는데, 각 코스마다 대흥의 삶과 자연,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이어진다. 한없이 꼬부랑거리는 길을 걸으며 고즈넉한 시골풍경 속에서 ‘느리게 사는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자연이 주는 건강한 기운을 담아가면 되겠다.

 

▼ 들머리는 옛고을 마당(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당진·영덕고속도로(당진-대전) 예산수덕사 IC에서 내려와 국도 21호선을 타고 홍성방면으로 내려오다 응봉사거리(예산군 응봉면 노화리)에서 좌회전하여 619번 지방도로 바꿔 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교촌삼거리(예산군 대흥면 교촌리)에서 우회전 616번 지방도(예당호 방면)로 옮기면 채 5분이 걸리지 않아 슬로시티 대흥이다. 마을과 예당호중앙생태공원의 사이 도로변에 주차장을 갖춘 옛고을 마당이 널따랗게 조성되어 있다.

▼ 옛이야기길, 느림길, 사랑길 등 3개 코스로 나눠진 느린 꼬부랑길은 각각 1시간에서 1시간30분 코스로 가족들과 함께 걷기에 딱 좋다. 3코스 모두가 시점이자 종점으로 삼는 대흥면 상중리는 옛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진한 형제애를 보여주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실제 무대이기도 하다. 길 중턱에는 예당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봉수산 자연휴양림도 있다.

▼ 도로변에 위치한 ‘의좋은 형제 공원’부터 들르기로 했다. 1964년 간행된 초등학교 국어교과서(2학년 2학기)에 실렸던 ‘의좋은 형제’. 형과 아우가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밤에 몰래 볏단을 옮겨놓다가 달이 밝은 가을밤에 서로를 알아보고는 얼싸안았다는 미담의 주인공들은 동화 속 인물이 아니라고 한다. 조선 세종 때 이곳 대흥면에서 호장(戶長, 향리직의 우두머리)을 지낸 실존인물이라는 것이다. 이성만과 이순 형제가 나눈 이 우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소개되고 있다.

▼ 2011년에 개장되었다는 테마공원에는 형제의 집 2동과 연못 등이 복원되어 있었다. 연자방아와 디딜방아, 지게, 우마차 등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기구들도 여럿 전시해놓았다.

▼ 형제의 옛집 복원에 고증까지야 거쳤을까마는 방안과 부엌에는 밀랍인형을 배치했다. 밥상머리에서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가라며 포토죤으로 만들었다. 이게 ‘의좋은 형제’와 맥이 닿는 스토리텔링까지 담고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지 못한 게 아쉬움이랄까?

▼ 쟁기질하는 농부는 형일까? 아니면 아우일까? 옛날, 무슨 일이든 서로 도우며 함께하는 형과 아우가 살았다. 형제는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추수를 했는데 볏단을 쌓아 보니 형과 아우의 낟가리 더미가 똑같았다. 그 것을 본 아우는 ‘식구가 많은 형님은 나보다 쌀이 더 필요할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고, 형은 형대로 ‘새살림을 시작한 아우에게 벼가 더 필요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늦은 밤, 형과 아우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볏단을 덜어 서로의 낟가리로 옮겨 놓았다. 다음날 조금도 줄지 않은 자신들의 낟가리를 본 형과 아우는 이상히 여기고 밤이 되자 또다시 자신의 볏단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날도 줄지 않은 자신들의 낟가리를 보며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생각했다. 밤이 깊어 형과 아우는 또 다시 볏단을 나르다가 밝은 달빛 아래에서 마주치게 됐고, 형제는 볏단을 내던지고 얼싸안았다. 그 후로 이들 형제는 더욱 더 서로 돕고 양보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너무도 유명한 의좋은 형제 이야기다.

▼ 길가에는 수많은 비석들이 나란히 서있었다. 1578년 세워진 대흥현감 유몽학의 선정비를 비롯해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김육의 영세불망비 등 대흥과 연관을 맺은 관리들의 치적을 기리는 비이다. 예당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수몰 위기에 놓인 비석들을 이곳으로 옮겨놓았다는데, 덕분에 거리의 이름까지도 ‘비석거리’가 되었다. 비석거리의 뒤편은 ‘의좋은 형제장터’이다. 매월(4~11) 둘째 토요일에 찾을 경우 마을 주민들이 직접 키운 농산물이나 수공예품을 구매할 수 있다. 장터라는 이름답게 먹거리나 공연도 함께 즐길 수 있음은 물론이다.

▼ ‘의좋은 형제’를 기리기 위한 축제도 열리는 모양이다. 테마공원 근처에 이를 기념하는 조형물을 세워놓은 걸 보면 말이다. 하긴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소재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소원터널도 만들어 놓았다. ‘의좋은 형제장터’나 ‘느린 손공방’에서 파는 모빌에 소원을 적어 걸어놓는 곳이란다. 하지만 일본에서 본 에마(繪馬)가 떠올라 그냥 지나쳐버렸다. 설사 일본의 풍속을 베껴왔다 해도 개인의 사랑과 행복을 기원하는 나무판에 불과하니 이게 무슨 대수겠는가 마는.

▼ 소원터널을 지나자 ‘대흥초등학교’가 얼굴을 내민다. 요즘 저 학교는 화려한 외모만큼이나 활기에 넘친다고 한다. 입학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곳 대흥이 ‘슬로시티’로 선정되면서 외지로 떠났던 주민들이 대거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함께 돌아 온 자녀들이란다.

▼ ‘느린 꼬부랑길’의 출발점인 ‘슬로시티 방문자센터’는 초등학교 앞에 있다. 옛이야길(1코스 5.1km)과 느림길(2코스 4.6km), 사랑길(3코스 3.3km)이 모두 이곳을 시점과 종점으로 삼는다. 센터에는 슬로시티에 대한 자료 외에도 느린 꼬부랑길과 손바닥 정원길 등에 대한 각종 자료가 비치되어 있다고 한다. 지도 한 장쯤 얻어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볼거리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방문자센터 옆에는 ‘슬로시티 대흥’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느린 걸음으로 소박한 삶과 자연, 역사의 숨결을 담다’라는 부제 아래 임존성과 향교, 동헌, 망태할아버지, 배맨나무 등 이곳 대흥의 주요 볼거리들을 설명한다. 그 옆에 ‘느린 꼬부랑길’의 지도를 그리고 그 위에다 해당 볼거리들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 대흥초등학교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대흥형옥원(大興刑獄圓)을 만나게 된다. 죄수를 가두고 형별을 가하는 곳이니 응당 대흥 관아의 부속시설이다. 하지만 모든 이정표는 천주교의 ‘봉수산순교성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광장이나 옥사의 내부도 천주교에 관한 전시물 일색이다. 천주교 순교성지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이곳 대흥은 예산·홍주·아산·공주·청양 지역에 전해지는 길목이었으며 박해의 땅이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방문 당시 시복된 124명의 순교자 중 49명이 내포지역에 살았고, 그 가운데 29명은 예산 출신이었다고 한다.

▼ 형옥원은 죄인들을 가두는 옥(獄)과 고신과 형벌을 가하는 환토(圜土)로 구분된다. 대흥군의 옥은 원래 상중리 일원의 ‘옥담거리’. 그리고 처형장은 예당호에 수몰된 내천변에 있었다고 한다. 이 시설이 조선시대 대흥군의 위상과 역사·문화는 물론이고 초기 천주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여겨 대흥봉수산순교성지인 이곳에 재현해 놓았단다. 모든 이정표가 ‘천주교 순교성지’를 가리키고 있었던 이유이다.

▼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놓은 옥사 안으로 들어서자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는 문구가 특히 눈길을 끈다. 이곳 출신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김정득 베드로와 김광옥 안드레아가 처형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던 중 예산과 대흥의 갈림길에서 손을 마주잡으며 나눈 작별인사라고 한다. 벽면에 걸린 초상화의 주인공이 김정득 베드로가 아닐까 싶다. 다른 방에 적혀있는 ‘대흥고을을 다 주어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나 ‘주님을 따르겠나이다.’라는 문구까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나 또한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광장에는 오석에 부조한 순교자들의 수난과 처형도, 그리고 외곽에는 17처로 구성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 풍속화가 그려진 담벼락을 지나자 ‘이성만형제효제비(李成萬兄弟孝悌碑)’가 나온다. 안내판은 대흥호장 이성만·이순 형제가 모두 지극한 효자라 적고 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형은 어머니, 동생은 아버지의 묘소를 지켰다. 3년의 복제를 마치고도 아침에는 형이 아우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연산군 3년(1497) 왕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173자를 기록한 효제비(孝悌碑)를 세웠다. 이 비는 원래 가방교 옆에 있었는데 1964년 예당저수지에 물이 채워지면서 수몰되었다가 1978년 극심한 가뭄으로 예당저수지의 물이 빠지면서 우연히 발견됐다고 한다.

▼ 조선시대 대흥군의 현청(縣廳). 즉 대흥고을의 수령(지금의 군수)이 집무를 보던 ‘대흥동헌(大興東軒,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은 효제비각의 오른편에 자리 잡았다. ‘여지도서’는 정청과 동대청, 은사정, 서헌방, 하마대 등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동헌 및 임성아문(任城衙門)만 남아있을 뿐이다. 1914년부터 대흥면사무소로 사용해오다가 1979년 해체·복원했단다.

▼ 조선 초인 태종 7년(1407)에 창건된 동헌은 예산에서 유일하게 남은 관아 건물이다. 대흥지역의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한 건축물이라는 얘기이다. 그나저나 동헌의 뒤에 있다는 ‘흥선대원군 척화비’와 조선 영조대왕의 11녀인 ‘화령옹주(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의 조카며느리)의 태실’은 살펴보지 못했다. 아니 그게 있는 줄도 몰랐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초등학교에서 뒤쪽 골목을 따라가면 ‘이한직 가옥’이 나온다. 조선 후기에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1796-1870)이 기거했던 집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287호)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문화재청의 자료를 옮겨본다. <현재 가옥은 각각 ㄱ자형 안채와 행랑채, 대문이 딸린 다른 건물 1동이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정면은 행랑채·대문 건물로 앞면 6칸·옆면 1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안채 지붕도 팔작지붕이며, 건물 중앙에 마루가 있다.>

▼ 현대와의 두 번째 만남은 ‘대흥면사무소(행정복지센터)’이다. 대흥이 행정지명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 말부터라고 한다. 당시 예산은 예산현·덕산현·대흥현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대흥현은 남부지역(광시·신양·응봉면)을 관장했다. 조선 숙종 때는 대흥군으로 승격했는데, 일제강점기 예산군으로 편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예산보다 상위 행정단위였다고 한다. 하지만 1964년 예당저수지가 건설되면서 대부분의 농토와 마을이 물에 잠겼고, 대흥은 봉수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호수마을에 불과해졌다.

▼ 이한직 고가를 찾아가다 작은 공원을 만났다. 달팽이를 닮은 조형물을 세워놓은 것이 이곳이 슬로시티(slow city)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안내판도 슬로시티의 지향점과 지정현황 등 슬로시티에 대해 적고 있다.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의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i)’에서 출발했다. 위협받는 달콤한 인생의 미래를 위래 슬로푸드와 느리게 살기를 실천하자며 ‘치따슬로(cittaslow)’, 즉, 슬로시티 운동을 출범시켰다. 슬로시티의 철학은 성장에서 성숙, 삶의 양에서 삶의 질로, 속도에서 깊이와 품위를 존중하는 것이다. 느림의 기술(slowware)은 느림(Slow), 작음(Small), 지속성(Sustainable)에 둔다. 현재 이탈리아에 국제슬로시티본부가 있으며 전 세계 30개국에서 266개 도시가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16개의 도시가 가입되어 있다.

▼ 옛 대흥보건지소를 개조했다는 달팽이미술관도 눈길을 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전시공간이자 느린 생활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으며, 대흥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회가 자주 열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 방문자센터로 되돌아와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선다. ‘느린 꼬부랑길’의 제1코스. 소소한 마을 풍경과 옛이야기를 만나는 ‘옛이야기길’은 솟대로 가득 채워진 벽화골목부터 시작된다. 벽화는 황량한 골목길을 생동감 넘치게 변신시킨다. 때론 한적한 미술관을 벽에 녹여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로 벽화가 갖는 매력이다. 동헌으로 가는 담벼락을 장식하는 풍속화, 배맨나무 근처의 컬러풀한 솟대그림 등 ‘느린 꼬부랑길’은 이런 벽화골목을 여러 번 지난다.

▼ 초입에 ‘느린 꼬부랑길’ 및 ‘옛이야기길’의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한번쯤 살펴보는 게 좋겠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꼬부랑길이 자랑하는 볼거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주워 담아가려면 그만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 예산농협을 지나 실개천 옆의 소로를 따라 걷는다. 잠시 후에 들르게 될 봉수산에서 흘러오는 개천의 옆으로 탐방로가 나있는데, 전국 어느 명품 소나무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잘 생긴 노송이 나타나는가 하면, 비록 작지만 아름다움만큼은 작지 않은 정원을 품은 집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슬로시티 대흥이 야심차게 만들어놓은 또 다른 둘레길. 즉 ‘손바닥 정원길’이 겹치기 때문이란다.

▼ 이정표의 머리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달팽이’가 눈길을 끈다. ‘Slow dawn and enjoy the garden’. 손바닥정원을 나타내는 이정표에다 슬로시티(slow city)의 로고를 덧칠했다. 위에서 말한 ‘손바닥 정원길’의 시설물인데, 이 길은 마을 사람들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알려진다. 집 앞에 달팽이 모양의 조형물이 있으면 정원에 들어와도 좋다는 의미란다. 정원의 주인장과 차 한 잔 나누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 실개천에 조성된 다슬기체험장을 지나자 이번에는 엄청나게 큰 노거수가 멋들어지게 가지를 펼치고 있다. 대흥의 역사를 단숨에 백제시대로 연결하는 나무다. 옛날에는 서해 바닷물이 아산만과 삽교천을 통해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한다(한때는 우물을 파면 갯벌과 짠물이 섞여 나오기도 했단다). 당시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이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임존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왔던 모양이다. 그때 타고 온 배들을 이 나무에다 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배를 맨 나무. 이걸 줄여보니 ‘배맨나무’가 되었다.

▼ ‘느린 꼬부랑길’은 마을길과 들길, 거기다 산길까지 지나다닌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숱하게 많은 갈림길들은 만나게 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길이 나뉘는 곳마다 이정표가 세워져있으니 이를 참조해가며 걷기만 하면 된다. 그나저나 이 부근은 온통 사과밭 천지였다. 사과가 이곳 예산의 특산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고나 할까?

▼ 방문자센터를 출발한지 15분. 약간 가팔라진 포장도로를 따라 얼마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편은 ‘봉수산자연휴양림’. 그런데 둘레길 표지기(백제부흥군길 3코스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나 의좋은 형제공원과 임존성만 표기되어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가 왼편으로 가란다. 하지만 난 이를 무시하고 그냥 자연휴양림으로 올라갈 것을 권하고 싶다. 두 길은 잠시 후 자연휴양림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구태여 에둘러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특히 돌아가는 구간이 거리만 멀 뿐, 가슴에 담아둘만한 얘깃거리나 눈에 넣을만한 볼거리가 일절 없다는 데야.

▼ 50m쯤 내려가자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갈려나가는 임도로 들어서란다. 그런데 산사태 보수공사라도 하는 듯 주변을 온통 헤집어버렸고, 탐방로는 그 여새를 빌어 덤불 속으로 숨어버렸다. 한참을 헤매다가 공사장 초입에서 오른편으로 난 임도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우리 부부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구간이다.

▼ 웃자란 잡초에 묻혀버리다시피 한 임도를 따라 잠시 올라가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봉수산자연휴양림’이 얼굴을 내민다. 대흥마을과 예당저수지의 조망이 일품이라고 알려지는 곳이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오늘만은 예외다. 때문에 다른 이의 글을 빌려 그 풍광을 전해본다. <호수는 잔잔하고 고층건물 없이 나지막한 마을은 평화롭다. 저수지 맞은편엔 부드럽게 산 능선이 이어져 호수마을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 이후부터는 고난. 아니 고민의 연속이었다. 휴양림 입구의 갈림길에서부터 보이지 않던 ‘느린 꼬부랑길’의 이정표는 차치하더라도, 언제부턴가 표지기조차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눈대중으로 숙박시설(숲속의 집) 사이를 헤매며 잠시 올라서니 또 다른 갈림길. 왼편은 어디로 연결되는지도 모르는 임도. 오른편은 휴양림관리소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 사이에는 봉수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도 나있다. 고민 끝에 우리 부부는 ‘관리사무소’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길을 가리켜줄 누군가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 그렇게 해서 관리사무소를 찾았다. 하지만 길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관리소 앞 삼거리에 느린 꼬부랑길의 이정표(애기폭포 1.3㎞/ 슬로시티 방문자센터 2.2㎞)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 산림문화휴양관(객실)의 오른편으로 난 임도(임존성길)를 따라 걸으며 탐방을 이어간다. 길을 찾느라 휴양림을 15분이나 누볐으니 조금은 서둘러야지 싶다. 참! 가보지는 않았지만 왼편 산자락 너머에는 백제 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임존성(任存城, 사적 제90호)이 있다고 했다. 660년 7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되자 흑치상지 등 백제 왕족과 장군들이 이 성으로 들어와 660년 8월부터 663년 말까지 3년 여 동안 나당연합군에 맞서 싸운 곳이다.

▼ 이 구간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기도 한다. 솔향기로 넘치는 숲에는 수령이 수십 년은 족히 넘겼을 아름드리 소나무들로 가득하다. 하긴 명성이 자자한 자연휴양림이 들어선 곳인데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탐방로는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벤치나 평상을 놓은 쉼터를 곳곳에 만들어 놓았는가 하면, 물레방아까지 배치해가며 한껏 멋을 부렸다. 임존성이 있다는 봉수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도 잘 인도하고 있었다.

▼ 그렇게 걷길 17분. 길이 둘로 나뉜다. 첨부된 지도에 ‘애기폭포’라고 표시된 지점으로 ‘옛이야기길(1코스)’이 시작되는 방문자센터에서 3.49km쯤 떨어졌다. 이곳은 또 1코스와 2코스가 나뉘는 지점이기도 한데, 2코스인 ‘느림길’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느림길’이란 자연의 지혜로움에 귀 기울이며 느리게 사는 삶의 의미를 만나는 길이다. 참! 대흥관아로 이어지는 직진 코스는 옛이야기길과 느림길이 중복되는 구간이라는 것도 알아두자.

▼ 그런데 ‘느림길’의 진행방향을 알리는 이정표(대흥향교 은행나무 2.4㎞, 슬로시티 방문자센터 2.8㎞)가 보는 이를 헷갈리게 만든다. 왼편으로 가야 만날 수 있는 대흥향교의 은행나무를 상단의 방향표시와는 달리 오른편으로 표시해놓은 것이다.

▼ ‘애걔. 저게 폭포야?’ 앞서가던 집사람이 탄성에 가까운 질문을 던져온다. 갈림길에서 2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애기폭포’인데, 내가 보기에도 폭포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다. 맞다. 아까 휴양림에서 만난 직원도 ‘애기폭포’의 위치를 묻는 내게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었다.

▼ ‘느림길’은 이름 그대로 ‘느림의 미학’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구간이다. 일렬로 늘어선 단풍나무가 만들어내는 터널이 하도 예뻐서 일부러라도 천천히 걷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전국을 누비며 벚나무 가로수에 식상해왔던 나로서는 두고두고 기억될만한 아름다운 숲길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 구간은 ‘사색의 길’이자 ‘보부상의 길’이라고 했다. 그러니 패랭이를 쓴 채 홍성과 예산을 오가며 행상하던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보부상)의 마음이 되어 걸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참고로 예산은 조선시대 후기 부보상 근거지다. 이런 이유로 인근 덕산면에 내포 부보상촌이 조성되고 있다.

▼ 한껏 여유를 부리며 걷기를 35분, 하늘이 열리는가 싶더니 1405년에 건립되었다는 대흥향교(大興鄕校, 충남 기념물 제136호)가 얼굴을 내민다. 조선시대 각 지방에 설립 되었던 관립 교육기관으로 대흥동헌과 함께 마을의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 건축물이다. 현재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삼문 등이 남아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공자와 맹자 등 5명의 성인)·10철(十哲, 자공과 자로 등 공자의 뛰어난 제자 10명)·송조6현(宋朝六賢, 주희와 정호 등 송나라의 최고유학자 6명)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十八賢, 최치원·안향·조광조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학자들로 해동18현이라 부르기도 한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교촌1리(향교말)’ 경로당이 나온다. 근처에는 ‘은행정’이란 지명도 보인다. 맞다. 이곳에는 나이가 600살도 넘었다는 은행나무(충남 기념물 제160호)가 있었다. 거대한 몸집(높이 40m에 가지넓이 40m)을 자랑하는 이 나무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한 몸이 되어 자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생하는 느티나무를 가운데에 놓고 외부를 숙주(宿主)인 은행나무가 둘러싸고 있어 마치 한 그루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게 신령스럽게 보였던지 마을에서 매년 성황제를 올리고 있단다. 이 나무를 베면 마을이 피해를 입는다는 터부 하나쯤 만들어두었음은 물론이다.

▼ ‘효도(孝道) 시범마을’이라는 간판까지 내걸고 있는 경로당 앞에는 마을 풍경과 주민들의 일상을 홍보하는 사진게시판이 세워져 있었다. 야생화박물관, 옛살림박물관, 바느질박물관 등 인근에 있는 또 다른 볼거리들도 나 여기 있다며 손짓을 한다.

▼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100m쯤 되는 지점에서 갈림길을 만났다. 2코스인 ‘느림길’과 3코스인 ‘사랑길’이 만나는 지점이다. 아니 만나자마자 헤어지니 나뉘는 지점이라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느린 꼬부랑길의 이정표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원홍장둘레길에서 만든 이정표(원홍장 쉼터← 0.9㎞/ 이한직가옥↑ 0.6㎞/ 효사랑방↓ 0.1㎞)가 세워져 있으나 지도에 나오는 지명과 틀려 길 찾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원홍장 쉼터 방향으로 향하면서 ‘사랑길’로 들어선다. 3개로 나누어진 ‘느린 꼬부랑길’의 마지막 코스로 ‘사랑길’이란 이름은 조금 전에 만났던 은행나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어느 날 은행나무의 몸속에 느티나무가 뿌리내리더니 150년 넘게 한 몸으로 살고 있다고 해서 ‘사랑나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논두렁이나 샘터 등이 시골 정취를 그대로 전해준다.

▼ 슬로시티에서는 쓰레기통도 남다르다. 쇠나 플라스틱 등으로 만든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원목을 사용했다. 맞다. 슬로시티라는 게 본디 자연환경과 전통문화를 보호하고 여유와 느림을 추구하며 살아가자는 국제운동이 아니겠는가.

▼ ‘교촌2리’ 마을회관에 이어 나타나는 버스정류장에서는 도로를 벗어나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참깻대로 둘러싸인 민가를 스치듯 지나 언덕에 올라선다. 3코스로 들어선지 15분 만이다. 언덕은 한마디로 환상적이다. 붉은 빛을 띠는 암괴가 널려있는데 그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만만찮게 기괴한 것이다. 이런 풍광으로도 부족했던지 돌탑과 솟대로 구색까지 갖췄다. 팔각정과 전망대까지 배치한 것을 보면 쉼터의 기능까지 겸하는 모양이다. 맞다. 안내도는 현재 위치를 ‘원홍장 쉼터’로 적고 있었다.

▼ 쉼터에는 ‘원홍장 이야기’를 담은 ‘원홍장둘레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원홍장은 관음사적기(觀音寺積記)의 ‘충청도 대흥에 원량이라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살았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쓰인 설화의 주인공이다. 원홍장은 백제 때 여인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용모가 뛰어나고 효심이 지극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성심을 다해 봉양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매일 관세음보살께 기도를 드리던 원홍장은 효심과 불심으로 자신을 봉양하여 진나라로 건너가 황후가 되었고, 착한 마음씨로 진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원홍장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불상과 나한상을 만들어 백제로 보냈다. 한편, 홍장이 떠난 뒤 슬피 울던 아비 원량은 앞을 볼 수 있게 되어 평안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가 아닌가. 맞다. 우리가 익히 알던 ‘심청전’을 닮아도 너무 닮았다. 다만 또 다른 효의 마을인 ‘곡성’과는 달리 심청이를 공식적으로 불러내지 않았을 따름이다.

▼ 쉼터에서 연결되는 언덕의 끄트머리로 나가자 전국 최대 규모의 저수지라는 예당호가 눈앞에 펼쳐진다. 둘레가 40km나 되는 예당호는 대륙의 바다처럼 넓고 푸른 인공 호수다.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나 낚시꾼들 사이에서나 입소문을 타다가 2009년 대흥면이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비로소 널리 알려졌고, 지금은 출렁다리와 음악분수, ‘느린 호수길’ 등 비대면 시대 인기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 첨부된 지도(방문자센터 앞의 안내도 말고는 대부분의 지도들도 이와 같다)와는 달리 3코스는 예당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끝나고 있었다. 되돌아가야 한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우린 그대로 진행해보기로 했다. 밭두렁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예당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예상은 옳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촌3리(校村이란 ‘鄕校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향교와는 너무 많이 떨어져 있다)로 내려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언덕을 내려선지 10분 만에 만난 616번 지방도를 건너자 데크 로드가 길게 놓여있다. 예당호의 아름다운 호반을 따라 내놓은 ‘느린 호수길’이다. 지난해 ‘아시아 도시 경관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길이 7㎞의 둘레길로 ‘수문 둘레길’과 ‘수변 테마길’, ‘농촌 테마길’, ‘생태 테마길’ 등이 비순환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 ‘느린 호수길’은 가히 독보적이다. 전국적으로 호수나 강, 바다에 놓인 데크 로드가 적지 않지만 이곳처럼 긴 길은 거의 없다. 예당호 둘레가 40km쯤 되니 1/5 넘게 길이 놓였다. 그러다보니 농경지 위를 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호숫가를 따른다. 호수에 사는 동식물을 관찰하며 느릿느릿 걷기에 제격이라는 얘기다. 특히 호수에 잠겨 사는 나무 사이를 지날 때는 외국에서나 볼 법한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된다.

▼ 탐방로는 예당저수지를 왼편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이때 대륙의 바다처럼 넓고 푸른 호수가 언뜻언뜻 고개를 내미는데, 물에 반쯤 잠긴 버드나무와 낚시꾼이 머무는 좌대의 풍경이 도심에서 살아온 나에게는 이색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 그렇게 10분 남짓 걸었을까 배롱나무 꽃이 만발하는가 싶더니 데크길이 복잡해진다. 폭이 넓어졌는가 하면, 길이 여럿으로 나뉘고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곳곳에 전망대를 만들었는가 하면 벤치를 갖춘 쉼터에는 조형물을 설치해 숫제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맞다. ‘느린 호수길’이 종료되는 ‘예당호 중앙생태공원’에 이른 것이다.

▼ 부지면적이 2,098평에 달한다는 생태공원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누가 뭐래도 대규모 연꽃단지다. 옆 고을에 위치한 ‘신정호’의 연꽃단지 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넓게 심어져 있었다. 덕분에 홍련, 백련 등 다양한 연꽃들이 꽃망울을 열며 찾아온 이들을 화사하게 반긴다.

▼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에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 인생샷 하나쯤 건져가라며 맨 위의 조망대에다 사과돌이 조형물(아래 사진은 아래 조망대의 ‘사과돌이’다)을 만들어 놓았다. 예산군 제일의 특산품으로 사과가 꼽힌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비옥한 황토와 풍부한 일조량 등 최적의 재배환경에서 생산된 예산사과는 당도와 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다. 2007년에는 한국표준협회로부터 로하스(LOHAS) 인증을 받기도 했다.

▼ 트레킹 날머리는 ‘옛고을 마당’

타고 온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옛고을 마당’으로 돌아오면서 트레킹은 종료된다. 그렇다고 616번 지방도를 이에 두고, ‘옛고을 마당’ 맞은편에 있는 ‘망태할아버지 석상’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망태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엄마 말 안 듣고 거짓말하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공포를 떨게 하며 버릇을 바로잡게 하도록 사용하던 상상 속 존재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망태할아버지를 마을의 상징물이자 정신적 지주로 삼아왔다고 한다. 매년 2월 초하루 동제(洞祭)를 올리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