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자락길, 2자락
여행일 : ‘21. 12. 11(토)
소재지 : 경북 영주시 풍기읍 일원
여행코스 : 삼가동주차장→금계저수지→금선정→금계중학교→정감록촌→풍기소방서→남원천 둑길→창락역 쉼터→무쇠다리 옛터→희방사역(거리 및 시간 : 15.6km/ 실제는 금계저수지에서 시작해 12.16km를 3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소백산자락길은 영남의 진산이라고 불리는 소백산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약 160㎞(12개 구간)의 문화생태 탐방로다. 3개 도(충북·경북·강원)의 4개 시·군(단양군·영주시·봉화군·영월군)을 아우르는데, 미세하지만 문화·생태적 경계로 각 자락길이 구분되어 있어 같은 듯 조금씩 다른 뛰어난 경치와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오늘은 2009년에 1·3자락과 함께 최초로 개통된 2자락을 걷는다. 금계저수지와 금선정 등 아름다운 경관에 더해 천하명당이라는 정감록의 십승지(十勝地)까지 함께 둘러볼 수 있는 코스이다.
▼ 들머리는 ‘소백산 삼가주차장’(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265)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931번 지방도를 타고 일단 풍기읍내로 들어온다. 동양대학교(영주캠퍼스) 앞 사거리(금계교를 건너자마자)에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백산국립공원 삼가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의 매표소가 2자락의 들머리이다.
▼ 2자락은 2개의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방금 전 달려왔던(차량을 이용했지만) 도로를 되돌아나가는 원래의 코스(붉은색 선)가 그 하나. 풍기 읍내를 통과하는 원래의 코스로 남원천의 둑길을 따라 종점인 희방사역으로 연결되는데, 길이가 15.6km나 되는데다 도로를 많이 걷는다는 단점이 있다. 이게 싫다면 새로 만든 코스(검정색 선)를 이용하면 된다. 해발 765m의 곰내미고개를 넘는 호젓한 산길로 거리도 9.5km로 줄어든다. 하지만 금계저수지와 금선정, 정감록의 십승지 마을 등 2자락이 품고 있는 명승들을 모두 포기해야만 한다.
▼ 우리 부부는 금계저수지 상류의 전망대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도로를 3km 남짓이나 걷는다는 게 무의미하다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전망대에 서면 ‘금계저수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 아니겠는가. 맞다. 아랫도리를 물속에 담그고 있는 모양이 주산지의 나무들을 영락없이 빼다 닮았다. 지금은 비록 맨몸을 드러내고 있지만, 저 나무에 녹음을 입힌 다음 새벽 물안개로 덧칠 해보자, 자못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겠는가.
▼ 탐방로는 이차선의 도로가를 따른다. 그렇다고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호반에 다리를 놓듯 ‘데크 로드’를 별도로 만들어 놓았다.
▼ 7분쯤 걸었을까 욱금리(이정표 : 금선정← 1.2㎞/ 삼가동↓ 3.6㎞) 앞에서 왼편으로 크게 휜 다음 금계저수지의 호반을 따른다. 자락길은 이 구간(펜션마을→풍기소방서)을 ‘승지길’이라 부른다. 학교길(3.7㎞)과 승지길(4.0㎞), 방천길(7.9㎞)로 이루어지 2구간의 두 번째 구간이다.
▼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선생의 느낌만은 아닌 모양이다. 금계저수지의 호반에 저리도 많은 펜션들이 들어선 걸 보면 말이다. 하긴 청산이 절로인 것만으로도 부족해 녹수까지 절로이니 속세에 찌든 인간들이 어찌 찾아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 방향을 알려주는 자락길 특유의 ‘스티커’다. 파랑색(정방향)과 빨강색(역방향)으로 색깔을 구분해 놓았는데, 문제는 그림이 지시하는 방향이 어디인지가 애매모호하다는 게 문제다. 아래 사진처럼 아래로 향하고 있는 등 중구난방으로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 금계저수지는 제법 큰 규모인데도 불구하고 물결은 한없이 잔잔했다. 산자락 깊숙이 들어앉은 때문이겠지만 금계(錦溪)라는 이름에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 ‘소백산자락길’이 종합병원이고, 우리의 두 다리는 의사란다. 맞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 교수는 ‘걷기 예찬’이라는 책에서 정신적인 시련은 걷기라는 육체적 시련을 통해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과 다 손을 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종합병원에서 나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 걸어보자. 이왕이면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 ‘길이 참 예쁘다!’ 앞장서 내려가던 집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른다. 그 대상이 계단임을 나는 금방 알아차린다. 이만하면 호흡이 척척 들어맞는 찰떡궁합 부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계단은 턱이 무척 낮아서 무릎이 좋지 않은 노인네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 좋았다.
▼ 올려다 본 금계저수지는 우람하기 짝이 없다. 저 둑은 길이 182m에 높이가 40.7m나 된단다. 그나저나 금계저수지는 지역주민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어주는 모양이다. 호반을 따라 내놓은 산책로로도 모자라 둑 아래에 정자와 벤치에 운동기구까지 갖춘 소공원을 만들어놓았다. 실제로 산책 나온 여자들 몇이 망중한을 즐기는 게 보이기도 했다.
▼ 10분 조금 못되게 걸어 ‘장선마을(금선정교를 경계로 ’웃장시이‘라 부르기도 한다)’로 들어서자 ‘계양정(桂陽亭)’이란 정자가 길손을 맞는다. 마을 주민들의 휴식을 위해 최근에 세운 듯한데, 정자보다는 정자 앞에서 몸을 한껏 기울여 자라는 굵은 소나무가 더 멋있다. 이곳 금선계곡은 골짜기 양 옆으로 늘어선 노송이 명품으로 꼽힌다. 하지만 정자 앞의 이 소나무야 말로 ‘명품 중의 명품’이 아닐까 싶다.
▼ 50m쯤 더 걸었을까 또 다른 정자가 고개를 내민다. 이곳 금선계곡을 세상에 알린 일등공신 ‘금선정(錦仙亭)’이다. 물가에 터를 잡은 정자는 빼어난 풍모를 자랑한다. 계곡 건너로는 굵고 힘찬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계곡 아래로는 옥수가 흘러내린다. 금선정은 그 물을 내려다보는 바위 금선대(錦仙臺) 위에 올라앉아 있다.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1517-1563)이 ‘금선대’란 이름을 붙였고, 1756년 부임한 풍기군수 송징계(宋徵啓)가 바위벽에 새겼다.
▼ 금선정은 1781년 풍기군수 이한일(李漢一)이 황준량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조선시대의 소박하고 조촐한 건축미를 그대로 보여주는데, 벽체가 없이 네 면이 개방된 전형적인 정자 양식이다. 이 정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둥의 길이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암반의 굴곡을 그대로 살려 기둥의 길이를 달리했기 때문이란다.
▼ 정자에는 풍기군수 이대영이 당시 성주목사이던 조윤형의 글자를 받아 걸었다는 편액(扁額) 말고도 꽤 많은 시판(詩板)이 걸려있었다. 황준량은 물론이고 그의 스승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도 시를 남겼다. 하긴 명망 있는 선비들이 앞 다투어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시를 짓고 즐겼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 정자를 스치듯 흘러가는 계곡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했다. 그리고 난 고작 이 정도의 풍광에 반해 시를 읊어댔을 선현들의 감성을 비웃듯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금계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여기서부터 삼가리까지 솔숲과 바위로 이어진 ‘십리 길’이었음을 기억해 낸다. 당연히 아름답지 않았겠는가.
▼ 장선마을은 부티가 철철 넘치고 있었다. 하긴 1500년대 초 예언가 남사고가 ‘이 땅이 명당이자 길지로세’를 외쳤다고 하지 않았던가. 1987년 마을 위에 금계저수지가 생겼고, 그로인해 마을 사람들의 삶은 풍성해졌다. 남사고가 예언이 적중한 셈이다.
▼ 마을 앞에서 길을 잃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이정표(희방사역 9.1㎞/ 삼가리 5.2㎞)를 따랐으면 되었을 것을, 가로등에 붙여놓은 자락길 스티커를 참조하다가 엉뚱하게도 ‘금선정교’를 건너버린 것이다. 그렇거나말거나 자락길 도반인 뚜벅이님은 동영상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이 부럽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고나 할까?
▼ 다리 건너 마을 비보림(裨補林)에는 ‘팜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금선계곡과 굵직굵직한 송림을 테라스 삼았으니 위치하나는 끝내주게 잡았다. 참고로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면 ‘장생이 녹색농촌체험마을’이 나온다. 각종 체험은 물론이고 숙식까지 가능하다니 짬을 내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KBS의 인기 프로그램인 ‘한국인의 밥상’에서 선보였다는 맛있는 음식이라도 맛볼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 카페에서 내건 간판은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정성 장록삼 수(秀)’에 ‘씨를 뺀 사과 36.5’를 더했다. 이 카페에서 아홉 번 찌고(蒸, 찔 증) 아홉 번 햇볕에 말린(曝, 쬘 폭) 인삼을 판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한번 찌고 한번 말린 게 ‘홍삼’인데, 그러하면 저 장록삼의 약효는 대체 얼마나 될까?
▼ 송림을 벗어나면 들길. 그런데 자락길의 표식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으니 문제다. 그렇다고 되돌아 갈수야 없는 노릇. 부리나케 핸드폰을 꺼내들고 앱의 도움을 받아가며 길을 찾아나간다.
▼ 건너편 금선마을(조금 전의 ‘웃장시이’와 구분해 ‘아랫장시이’라 부른다)은 교회의 첨탑이 가장 높았다. 정감록촌을 찾아온 반세기 전의 신경림 시인이 만난 풍경도 저랬을까? 인삼·인견직·사과와 함께 교회를 ‘풍기의 4대 기적’으로 꼽았었다니 말이다.
▼ 마음이 급하니 도로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대충 방향을 잡고 묵밭을 가로지르는데 웃자란 잡초가 훼방을 놓는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50분. ‘장생이 녹색농촌체험마을’ 입간판이 세워진 사거리(이정표 : 희방사역 8.6㎞/ 삼가리 4.4㎞)로 올라섰다. 15분을 엉뚱한 데서 헤매다가 본래의 자락길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곳은 장선마을(금계2리)의 입구이기도 하다. 장승(長生)이 있던 마을이라고 해서 장생이, 지형이 긴 배 모양 같다하여 장선(長船)이, 착한 사람이 많이 나서 번성하라는 뜻에서 장선동(長善洞)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 사거리에는 물레방아가 복원되어 있었다. 오래 전 이곳 장생이마을에는 금선계곡의 풍부한 물을 이용한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산업화에 밀려 그동안 사라졌다가 관광용으로 되살아난 모양이다.
▼ 장승도 복원되어 있었다. ‘장생이’란 지명과 연관된 조형물이지 싶다. 참고로 이곳의 장승은 여지도서(輿地圖書, 영조 때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엮은 전국 지리지)에까지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2008년에 복원한 장승에는 동국의 명승이요 세상을 기다리는 보배로다. 첫 번째가 금계이니 좋은 운이 천년동안 이어지리라(東國名勝 待世至寶 一曰金鷄 運吉千年)고 적었다. 풍기 인삼과 영주 사과의 홍보도 함께 하고 있었다.
▼ 금계로를 따라 풍기 시가지로 들어가는데 속도관리구역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2차선 도로인데도 40km까지만 허용하는 걸로 보아. 풍기도 이젠 시골티를 완전히 벗어버렸나 보다.
▼ 금계천 너머 언덕에는 동양대학교가 들어앉았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재직하던 학교이자, 세상을 일희일비(一喜一悲) 시켰던 최성해 총장으로 인해 유명해진 대학교이기도 하다.
▼ 1950년에 문을 열었다는 ‘금계중학교’는 이색적인 정문을 갖고 있었다.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조형물을 세우고 ‘월계문(月桂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설립자의 호가 ‘월계’가 아닐까?
▼ 잠시 후 금계로와 헤어진 자락길은 무릉길로 들어선다. 정감록촌의 중심지인 ‘임실’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인데,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이정표(희방사역→ 8.0㎞/ 삼가리↓ 4.9㎞) 말고도 ‘풍기읍’과 ‘금계1리’에 대한 안내판 등을 세워놓았다.
▼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거대한 표지석도 세웠다. 이곳 금계1리가 정감록(鄭鑑錄)의 제1승지(第一勝地)이자 풍기 인삼(豐基人蔘)의 시배지(始培地)란다. 참고로 십승지(十勝地)란 삼재(三災), 즉 전쟁이나 흉년, 전염병 등이 돌아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으로, 일상 생활터전과는 달리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는 대표적인 열 곳을 말한다.
▼ 풍기의 연혁을 적은 안내판에는 ‘풍기인삼 개삼터길’이 그려져 있었다. 맞다. 이곳 금계1리의 ‘부계밭’ 마을은 그 유명한 풍기인삼의 시초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1542년 풍기군수이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의 권유로 인삼을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길이 7km의 개삼터길은 십승지의 특징을 살리고 관광객에게 걷는 재미와 신비로움을 더하도록 꾸며놓았단다.
▼ 십승지(十勝地)에서는 마을 이름마저도 ‘무릉(武陵)’이다. 무릉이 본디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줄임말일지니, 무릇 모든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온갖 산새들이 우짖는 곳, 배고픔과 시름을 잊은 채 글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곳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10분. 무릉길로 들어서고 7분 만에 다다른 ‘임실마을’에는 이정표(희방사역← 7.6㎞/ 삼가리↓ 5.4㎞)와 함께 이곳이 십승지지의 제1승지임을 알리는 입간판을 세웠다.
▼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가 보다. 금계촌이 전국 제일승지라며 너스레까지 떨고 있다. 아쉬운 점도 있다. 리사이클 박스는 제발 다른 곳에 갖다 놓았으면 좋겠다.
▼ 왼편으로 방향을 꺾어 50m쯤 내려가자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터가 좁은 제방의 특성을 살려 하천에 뚜껑을 덮은 다음 정자를 올려놓았고, 운동기구 등의 나머지 시설들만 제방 위에다 설치했다.
▼ 제방에는 십승지, 실향민, 풍수 등 이곳 금계촌의 역사를 풀어 넣은 비석들을 줄줄이 세워놓았다. 바닥의 판석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전국의 ‘십승지’들을 지도 위에 그려 넣었다.
▼ 정씨가 도읍하기까지 난세를 피해 유유자적 살아가는 이들과 이별을 고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 자락길은 개울가를 따른다. 그리고 풍기읍 시가지로 향한다.
▼ 이때 연화봉과 도솔봉 등 소백산이 품은 여러 군봉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 풍경화에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는 점을 업데이트시키면 또 다른 뭔가를 가슴에 담아갈 수 있지 않을까?
▼ 10분쯤 더 걸어 도착한 ‘공원산 마을(이정표 : 희방사역 6.7㎞/ 삼가리 6.3㎞)’은 널따란 주차장이 눈길을 끈다. 여느 지자체나 할 것 없이 요즘은 ‘귀농·귀촌’을 화두로 내거는 추세다. 그러면서 정주(定住) 여건 개선에 심혈을 기울인다. 저 주차장도 그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 자락길은 중앙선 철로의 아래를 통과한다. 이 굴다리를 경계로 금계리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백리가 시작된다. 시내로 들어섰다고 보면 되겠다.
▼ 시내로 들어서자 건물이 굵직굵직해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영주소방서 풍기119안전센터. 자락길은 이곳을 경계로 ‘승지길’과 ‘방천길’이 나뉜다. 이제껏 걸어온 승지길 대신 방천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 고개를 돌리자 주택가 너머에서 풍기역의 급수탑이 고개를 내민다. 열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저 탑은 전국 최대를 자랑했었다고 한다. 그러니 풍기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왔을 게 자명하다. 증기기관차가 사라지면서 옛 물탱크는 풍기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가 지금은 ‘풍기인삼 홍보탑’이 되었다.

▼ 소방서와 예수재림교회(제칠일안식일)의 사이로 난 길을 3분쯤 걸으면 남원천(이정표 : 희방사역 6,2㎞/ 삼가리 7.7㎞)이 얼굴을 내민다. 이제 자락길은 ‘방천길’이라는 구간 이름에 걸맞게 남원천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했던가. 앞서가던 이대장이 길을 잃고 허둥댄다. ‘풍기1교’ 아래로 나있는 탐방로를 놓치고 도로 위로 올라선 게 발단. 보행자길(步道)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산행대장의 오랜 경력이 어디 가겠는가. 잠시 후 5번 국도가 지나가는 풍기교 아래에서 제 길을 찾아냈다.

▼ 이후부터는 소백산을 진행방향에 놓고 걷는다. 물길이 만들어놓은 주변 들녘이 제법 넓다. 대신 단조로운 풍경이 계속해서 펼쳐진다는 단점이 있다.

▼ 탐방로는 중앙고속도로와 중앙선 철도(청량리-경주)를 좌우에 끼고 이어진다. 때문에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잘 생긴 외모의 KTX 열차를 눈에 담을 수도 있다. 함께 걷던 이대장의 말로는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최신형이란다.

▼ 방천길의 가장 큰 아쉬움은 햇볕을 가려줄만한 나무가 일절 없다는 것이다. 길이도 7km나 된다. 여름철 최악의 코스로 꼽히는 이유이다. 지자체도 그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두어 곳에 숲을 낀 쉼터를 만들어 놓았는데 ‘습지 생태쉼터’도 그 가운데 하나다. 굵직한 능수버들 숲속에 정자와 파고라를 짓고, 벤치를 놓아 쉬어가기 딱 좋도록 했다.

▼ 둑길 오른편은 온통 사과밭 세상이다. 사과가 인견 및 인삼과 함께 풍기를 대표한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이는 배수가 잘 되는 토양과 일교차가 심한 기후 덕분이란다. ‘사양토’가 생육에 도움을 주고, 큰 일교차는 과일의 육질을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까치밥’이 감나무만의 전유물은 아닌 모양이다. 사과나무에도 저렇게 몇 개의 열매를 남겨놓은 걸 보면 말이다. 하긴 날짐승이 어디 ‘감’만 먹고 살겠는가. 아무튼 우리네 선조들은 씨앗을 심어도 셋을 심었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새)이, 둘은 땅(벌레), 나머지 하나만 내가 먹겠다는 뜻에서였단다.

▼ 하천 생태를 복원하고 천변 둔치를 재정비하는 등 명품하천으로 바뀐 하류와는 달리 상류는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다. 참고로 남원천은 소백산 죽령에서 발원해 수철리를 지나 풍기를 관통한다. 여행객들이 숙식하던 남원(南院)에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 길을 가다보면 ‘풍기온천리조트’가 눈에 들어온다. 불소가 함유된 알칼리성 온천으로 지하 800m 심층에서 분출하는 100% 천연원수에 몸을 담글 수 있단다. 하지만 온천보다는 그 뒤로 보이는 고개를 소개하기 위해 카메라에 담아봤다. 새로 난 자락길(2구간)이 저 두 산봉우리 사이 ‘곰내미 고개’를 넘어오기 때문이다.

▼ 남원천변으로 내려선지 1시간 남짓. 창랑역(昌樂驛)이 있었다는 널따란 옛터는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역(驛)이란 나라의 통신 및 운송기관으로 공문서의 전달, 출장하는 관리나 외국 사신의 숙박, 마필공급(馬匹供給), 공물·관물의 수송 등을 돕던 기관이다. 전국을 40개 구역(538개 역)으로 나누고 그 중심에 찰방(종6품)을 두어 주변 역들까지 관리시켰는데, 이곳 창락역은 죽동(순흥), 평은(영주), 안교(안동) 등 9개 역을 거느린 중심 역이었다고 한다.

▼ 역(驛)에 걸맞게 조형물은 안장을 올린 말이다. 다리 근육이 튼실한 것이 참 잘 달리게 생겼다. 이밖에도 선정을 베풀었음직한 찰방의 공적비와 역사의 주춧돌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유적지 옆의 거대한 느티나무는 쉼터로 활용했다. 그늘에 평상과 벤치를 놓았는가 하면, 이름표(창락역 쉼터)를 단 이정표(소백산역 0.9㎞/ 풍기읍사무소 5.5㎞)까지 세웠다.

▼ ‘방천길’은 남원천의 제방 위로 나있다. 때문에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별로 없다. 그저 도솔봉과 연화봉 등 소백산의 군봉들과 사과밭이 다라고나 할까?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걷는 자 말고도 타는 자. 즉 자전거 라이더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 했다. 볼거리가 드물다보니 고속도로의 교각까지도 멋진 풍경화로 둔갑한다.

▼ ‘이 뭐꼬!’. 성철스님이 던졌다는 화두가 아니고, 아라베스크 문양을 떠올리게 만드는 담벼락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저런 형이상학적인 문양으로 포장된 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지만 담벼락 안은 텅 비어 있었다.

▼ 창랑역에서 20분. 희방사역에 가까워질 무렵 화장실까지 갖춘 작은 공원을 만났다. 이정표(소백산역 0.1㎞/ 풍기읍사무소 6.75㎞)는 이곳을 ‘무쇠다리 쉼터’로 적었다. 삼국시대에 놓은 ‘무쇠다리’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의 무쇠다리는 사라진지 이미 오래, ‘둑다리’로 남아 있다가 1940년대 초 중앙선 철도가 놓이면서 이마저도 없어졌단다. 그렇다면 1m 남짓한 저 다리는 쉼터를 조성하면서 함께 복원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지자체는 돌탑을 세워 무쇠다리에 대한 역사를 알려준다. 신라시대 동굴에서 참선하던 두운스님이 목구멍에 비녀가 걸린 호랑이를 구해준다.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호랑이는 큰 멧돼지를 잡아왔지만, 육식을 금하는 스님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또 어느 날은 아름다운 여인을 물어왔고, 깜짝 놀란 스님은 연고를 물어 경주의 집까지 데려다 준다. 여인의 부친인 호장은 고마운 마음에 스님이 거처할 암자를 짓고, 편히 다닐 수 있도록 계곡에 무쇠다리를 놓아 준다. 그 암자가 기쁠 희(喜)자에 두운 스님이 참선하던 방을 상징하는 방(方)자를 딴 ‘희방사’라고 전해진다.

▼ 자락길은 옛 중앙선 철도로 인해 생긴 굴다리를 지난다. 이 굴다리는 원래 반은 사람이, 반은 물이 지나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고쳐졌고, 조명까지 달아가며 한껏 멋을 부렸다. 이로 인해 철길이 나면서 끊어졌던 농로가 다시 이어졌는가 하면, 삭막하기 십상인 시멘트 벽면의 단점은 스리슬쩍 사라졌다.

▼ 터널을 통과하면 ‘수철리’. 방금 전 보았던 무쇠다리가 ‘무쇠달’로 바뀌고 수철리가 되었다. 철길이 마을을 가로질러 지나는 이 마을은 민박과 게스트하우스에 식당까지 들어선 어엿한 관광타운이다. 또한 이름난 세 개의 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희방사 옛길’과 1900년의 역사를 지닌 ‘죽령 옛길’, 그리고 우리가 걷고 있는 소백산 12자락길 중 3자락길이 여기서 시작된다.

▼ 잠시 후 만난 희방사역은 현재 문이 닫혔다. 중앙선 복선화로 인해 지난해 12월 이곳을 지나는 구간이 폐선(廢線)되면서 희방사역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해 5만여 명의 승객이 오고 갈 정도로 활기찬 역이었다. 역사를 기점으로 하는 둘레길이나 소백산등산로를 체력에 맞게 탐방하고 마을 식당에서 막걸리 한잔과 간단한 안주로 요기를 한 후 막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당일치기 코스가 나름 인기 있었기 때문이다.

▼ 희방사역은 현재 열차가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만큼은 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로 새롭게 태어났다. 잠시 앉아 원두커피의 향과 함께 지나온 자락길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다. 특히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은 무조건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한다니 한번쯤은 꼭 들러볼 일이다.

▼ 희방사역 마당에는 화방사와 무쇠다리의 설화를 적은 안내판과 함께 ‘무쇠달 마을’ 방문을 환영하는 장승을 세워놓았다. 행복한 ‘마실’을 우리 함께 가자면서 말이다.

▼ 날머리는 희방사역 주차장(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역사 옆 주차장에는 열차펜션(카라반 형식)이 들어서 있었다. 마을 공동체인 ‘무쇠달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시설인데, 문이 닫혀있었지만 여행의 운치를 더해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12.16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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