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 3코스(고려왕릉 가는 길)
여행일 : ‘22. 3. 13(일)
소재지 :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과 양도면 일원
여행코스 : 탑재삼거리→가릉→가톨릭대→석릉→곤릉→이규보묘→성공회 은수성당→은수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6.2km/ 실제는 14.45km를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수많은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 나들길’은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산과 벌판,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310.5Km(20개 코스) 길이의 역사·문화·자연 트레일이다. 그러니 ‘나들(이)’란 이름처럼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들’듯이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담아가면 되겠다. 오늘은 세 번째 코스인 ‘고려왕릉 가는 길’을 걷는다. 이름처럼 강화도에 있는 4개의 고려왕릉 중 3개에다 고려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명릉 하나. 그리고 고려의 문신 이규보의 무덤까지 만나게 되니 무덤에 특화된 코스라 하겠다.
▼ 들머리는 탑재삼거리(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88올림픽도로와 ‘국도 48호선’을 연이어 타고 오다 서김포·통진 IC에서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로 올라선다. 첫 번째 나들목인 대곶 IC에서 빠져나와 356번과 84번 지방도를 연이어 타고 초지대교를 건너면 잠시 후 길상면 소재지인 온수리에 닿는다. 이곳 온수리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마니산로, 곧이어 나타나는 회전교차로에서 1시 방향의 강화남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탑재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 ‘고려왕릉 가는 길’이라는 이름처럼 고려의 왕릉들을 둘러보는 코스이다. 남한에 있는 5개의 고려왕릉 중 4개가 강화도에 위치한다. 3코스는 이 가운데 진강산 자락에 들어앉은 3개를 둘러보는 여정이다. 그러다보니 코스의 대부분이 산속 숲길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오르내림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길라잡이(이정표 및 리본)가 잘 설치되어 있어 그저 무덤에 얽힌 스토리나 가슴속에 담으며 걸으면 된다.(산악회 버스의 주차여건 때문에 역방향으로 걸었다)
▼ 탑재삼거리 부근 ‘강화 고기국수’ 앞에서 하천변 농로를 따라 동쪽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진행방향에 냉면전문점인 ‘유진면옥’이 보였다면 길을 제대로 들어선 셈이다. 아니, 초입의 이정표(가릉← 700m)를 참조해도 큰 문제는 없다.
▼ 200m쯤 들어간 곳에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차량회수가 어려워, 종주꾼들보다는 ‘가릉’만 다녀올 요량으로 온 사람들이나 이용할 듯. 참! ‘강화 나들길’ 스탬프보관함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다.
▼ 탐방로는 ‘능내마을’ 골목길을 통과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길을 나선지 10분 만에 소담하고 아늑한 ‘가릉(嘉陵, 사적 제370호)’에 데려다 놓는다. 가릉의 주인은 고려 제24대 원종의 비(妃)인 ‘순경태후(順敬太后)’다.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김약선(金若先)의 딸이자, 무신정권 집권자 중 한 명인 최우(崔瑀)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1235년(고종 22년) 원종이 태자로 책봉될 때 궁에 들어왔고, 강화천도 초기인 1236년에 충렬왕을 낳고 1244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가 강화 천도기(1232~1270)라서 능이 이곳 강화에 있다.
▼ 능은 봉분 북동쪽과 북서쪽 모서리에 석수(石獸)가 있으며, 석실 전면에 석인상이 석실을 중심으로 동서로 마주 보고 있다. 봉분 서편에는 하대석 및 옥개석, 동자주가 진열되어 있다. 참! 무덤에는 석실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울타리를 쳐놓아 가까이 다가가 볼 수가 없었다. 부장대나 벽화의 흔적이라도 찾아볼까 했는데...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의 ‘가릉’이란 시도 만날 수 있었다. ‘강화나들길’이 고재형이 쓴 ‘심도기행’에서 출발했다니 그도 이곳을 지나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2005년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심도기행 강독’ 모임이 시작됐고, 거기서 선비가 나귀를 타고 다녔던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었단다. 그게 오늘의 강화나들길을 있게 한 시초란다.
▼ 4코스의 시점임을 알리는 이정목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가릉주차장에 3코스의 완주지점이자 4코스 시작지점임을 알리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스탬프보관함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 조금 더 오르니 이번에는 ‘능내리석실분(陵內里石室墳, 인천시 기념물 제28호)이 얼굴을 내민다. 능으로 여겨지나 주인을 알 수 없어 ‘능’이라는 호칭 대신 동내 이름에 ‘석실분’이란 접미사를 붙였다.
▼ 국가급 문화재가 아니어선지 이곳은 울타리를 쳐놓지 않았다. 덕분에 가까이 가 볼 수 있었다. 고분은 4단으로 구획 되었고, 봉분구조물과 등이 양호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고려 왕릉으로 추정하는 이유다. 그것도 아래쪽에 위치한 가릉의 순경태후보다는 지체가 높은 인물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단다.
▼ 이제 ‘석릉’을 만나러갈 차례다. 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는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나무가 빼곡한 오솔길이다. 그러다가 마주친 청솔모는 도망도 가지 않는다. 둘레길 나그네들이 자기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음이리라.
▼ 강화군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둘레길이니 어찌 정자(鎭江亭) 하나쯤 없겠는가. 읽을거리까지 보탠 일류의 쉼터이니 잠시 쉬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다만 겨울철에 아이젠을 신은 채로 올라가는 건 삼가야 한다.
▼ 이곳은 ‘진강산(해발 443m)’ 자락. 진강산은 강화도에서 세 번째로 높을 정도로 산세가 만만찮다. 특히 왕릉을 4개나 품었을 정도로 풍수가 뛰어난 산이다. 그러니 찾는 사람들 또한 만만찮을 것이다. 그래선지 서너 곳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갈려나가고 있었다.
▼ 저건 어린이용 쉼터? 격식을 차려가며 꾸며놓았지만, 초등학생들이나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앙증맞다. 그것도 저학년에서나...
▼ 나들길은 보이는데 만족하지 않고 생각까지 하며 걸을 수 있도록 꾸몄다. ‘사랑은 곡선이다. 곡선의 씨앗은 하트(♡)다’ 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인가.
▼ 때는 바야흐로 춘삼월. 사위가 온통 꽃 잔치다. 그중에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진달래, 강화의 진달래꽃 명산인 ‘고려산’만은 못해도 이만하면 꽃놀이 삼아 들르기에 충분하겠다.
▼ 진강산의 봄날은 전남혁 시인의 ‘진달래꽃’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꽃 필 때/ 그미 눈빛에 치여/ 떨어진 꽃잎 같은 약속이/ 생각나는 꽃
구차한 변명 같아/ 미운 꽃
꽃술에 취하듯/ 내 머리에 꽂고 싶은/ 히죽 꽃
봄날 저기/ 연분홍 삐딱 구두/ 또각또각 들리지만/ 기다리다 맥이 빠져/ 주저앉은 꽃>
▼ 요렇게 예쁜 꽃을 보면서, 느닷없이 침샘이 고여 오는 건 무슨 이유일까? 화전(花煎)과 두견주(杜鵑酒)로 신선놀음에 푹 빠졌었던 옛 추억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포근한 봄날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 아니겠는가.
▼ 탐방로는 산자락의 하단을 따라 나있다. 그래선지 논두렁 비슷한 길을 걷기도 한다. 이처럼 나들길은 논과 밭을 지나고 마을을 또 지나 산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간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산이 있고 물이 있고 들이 있으며 그 곁에 사람이 있다.
▼ 가릉을 지나 30분쯤 더 걸었을까 ‘철문’이 앞을 막는다. 인천가톨릭대학의 사유지라 출입을 제한한단다. 그렇다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른 ‘출입금지’안내판에 적힌 ‘학생들의 기도처이니 조용히 통과해주기 바란다’라는 글귀를 읽었음이리라.
▼ 가톨릭대학은 목책을 둘러 출입을 막고 있었다. 영계(靈界)과 속계(俗界)의 경계선이라고나 할까? 오래 전, 피정을 위해 심심찮게 찾았던 수도원. 난 그곳에서 군사정권에 대한 불만을 기도로서 버텨낼 수 있었다. 비겁한 자의 회피수단이었을 수도 있지만...
▼ 목책 너머로 잘 가꾸어진 정원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 ‘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e)’총독 관저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Golgotha)에 이르기까지의 14가지 중요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바치는 기도다. 최근 십자가의 길에 예수님 부활을 포함시켜 15처로 바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어쩐지 모르겠다.
▼ ‘이 뭣꼬?’. 목책이 반사경을 달았다. 시도 때도 없이 성범죄 관련 뉴스가 도배를 하더니, 이젠 등산로에까지 저런 시설이 필요했던가 보다.
▼ 어렵게 길을 내주었으니 이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건 어쩌면 당연. 신학생들을 위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진강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려드릴 테니,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다만 입은 닫고서.
▼ 가톨릭대 구간이 끝나면 요런 오르막 구간이 나오기도 한다. 3코스에서 가장 가파른 오르막길이라면 믿을 수 있을라나?
▼ 이번에는 쉼터가 시판을 달았다. ‘신이여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졸지에 신이 되어버린 저 의자가 어찌 보면 부럽기도 하다.
▼ 가톨릭대에서 18분쯤 더 걸어 쉼터를 겸하고 있는 ‘지릉마루’사거리에 내려섰다. 나들길은 진강산에서 내려와 석릉방향으로 간다. 직진은 길정리, (괄호)속에 ‘곤릉’이 적혀있는 걸 보면, 곤릉으로 가는 지름이지 싶다. 오른편은 어두마을이라는데 굳이 알아두어야 할 필요는 없을 듯.
▼ ‘석릉’ 방향으로 간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숲길이 계속된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이정표는 종점에서 4.9m가 떨어진 지점이란다. 그 옆의 팻말은 왼편으로 30m만 올라가면 ‘석릉’이 나온다고 적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걸어야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돌 깔린 흙길과 돌계단을 오르니 ‘석릉(碩陵, 사적 제369호)’이 얼굴을 내민다. 희종(재위 1204-1211)의 ‘석릉’은 강화도의 고려왕릉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왕릉이다. 희종은 무신 세력이 정권을 잡고, 최충헌을 중심으로 전횡을 휘둘리는 상황 속에서 왕위에 즉위해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왕이다. 하지만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해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와 영종도를 돌아다니다 고종 24년(1237) 결국 유배지에서 죽었고 이곳에 안식처가 마련됐다.
▼ 패자의 설움인지 고려의 왕릉은 조선의 왕릉에 비교가 안 된다. 석축이 3단으로 남아있고, 나름 햇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다는 게 그나마 왕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고나 할까? 참! 어느 전문가는 사진의 석인상에 대해 거론하고 있었다. 곤릉이나 홍릉, 가릉의 석인상과 조각 수법이 다른 점을 들어 다른 곳에서 있던 석인상을 석릉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 ‘석릉’에서 내려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지는 탐방로는 이런 갈림길을 가끔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길을 잠시 잃어도 괜찮다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걸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편해진다. 리본이 촘촘히 매달려 있어 길을 잃을 염려도 없지만.
▼ 정겹기 짝이 없는 산길을 걷는다. 중간 중간에 설치된 이정표와 나뭇가지에 매달린 노란 색 나들길 리본을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거기다 길이 널찍한데다 정비까지 잘 되어 있으니 걷는 것 그 자체를 실컷 즐겨보자.
▼ 샘터도 만날 수 있었다. 아쉽게도 흔적만 남았지만... 하지만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자. 약수는 없어도 쉬어갈 수는 있으니까.
▼ 10분 남짓 더 걸으니 ‘강화 흙 전원마을’이 나온다. 인간의 오랜 염원 가운데 하나는 병 없이 오래도록 사는 것 즉, 무병장수다. 전원생활의 주된 목적 중 하나도 건강하게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산수가 어우러진 시골은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을 갖추고 있어 건강한 생활을 가능하게 해준다.
▼ 마을을 빠져나와 5분쯤 더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권능감리교회’가 고개를 내민다. 탐방로는 교회 조금 못미처에서 왼편 마을 안길로 들어선다.
▼ 잠시 후, 하얀색 건물이 지키고 있는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종점에서 6.2km지점)는 이곳에서 직진하란다. 그렇다고 무작정 믿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이곳에서 곤릉으로 가는 길이 나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곤릉에 대한 안내가 없어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화를 입는 곳이기도 하다.
▼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떴다. ’나들길‘이 아니니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앱을 믿고 헤매기를 3~4분, 민가에 들어가 가는 길을 여쭤보니 자세히 알려주신다. 나 같은 나그네들이 심심찮게 나타날 텐데도 개의치 않고 알려주시는 그 아주머니께 글로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 아주머니가 일러준 대로 100m쯤 올라갔을까 이번에는 숲속으로 들어가란다. 하지만 철조망과 함께 사유지이니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앞을 딱 막아서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어찌 되돌아가란 말인가. 벌어진 철조망 틈으로 빠져나가 숲길로 들어섰다. 길은 막아놓아선지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길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었다.
▼ 그렇게 150m쯤 더 올라가자 소나무 숲속에 숨어있던 ‘곤릉(坤陵, 사적 제371호)’이 얼굴을 내민다. 고려 22대 강종(康宗)의 비인 원덕태후(元德太后) 유(柳)씨의 능이다. 강종의 태자 시절, 제1비인 사평왕후 이씨(思平王后 李氏)가 아버지 이이방(李義方)이 살해된 뒤 폐출되자, 태자비로 책봉되어 입궁하였다. 고종(高宗)을 낳았으며, 1239년(고종 26)에 별세하였다.
▼ 곤릉은 왕릉이라 부르기가 어색할 정도로 초라했다. 조선시대의 웬만한 정승 무덤보다도 못할 정도다. 가릉은 그나마 묘역이 넓어 왕릉으로서 최소한의 위엄이라도 있었지만 여기는 초라한 봉분만 남아있는 모양새였으니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봉분이 붕괴되고, 석축이 무너져 있던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한 것이란다.
▼ 능에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다보면 어느덧 도로에 내려서고, 이후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교통량은 많지 않으나 인도가 따로 마련되어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을 잘 살펴가며 걸어야 하는 구간이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느티나무가 볼만한 ‘해나무 버스정류장’이다. 3그루 정도가 붙어있어 마치 웅장한 노거수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인삼은 강화도의 가장 중요한 특산물 중 하나다. 그래선지 나들길을 걷는 중 심심찮게 인삼재배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풍경이 내게는 고역이었지만... 인삼밭에서 ‘인삼막걸리’를 떠올리게 되고, 순무를 안주삼아 목을 넘어가던 그 감칠맛이 자꾸만 떠오르니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 조금 더 가면 만나게 되는 ‘예비군훈련장’은 사진 생략, 다만 이곳은 길이 나뉘는 지점이라는 것만 기억해두자. 삼거리인 이곳에서 오른편은 ‘길정저수지’를 거쳐 들머리(오늘은 날머리다)로 연결된다. 강화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선두포와 가능포 앞바다를 메워 만든 들에 물을 대는 역할을 하는데, 탐방로는 이 저수지의 제방 길을 따라 걷게 된단다.
▼ 도로로 내려선지 17분. ‘길직리입구’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나들길은 ‘보니파시오’란 카페가 있는 이곳에서 도로를 벗어나 ‘까치골’마을로 향한다. ㈜엠테크놀러지의 축대 아래를 지나...
▼ ‘까치골(도로명 표지판에 ’까치골‘이란 지명이 보였다)로 여겨지는 마을을 지난다. 물론 직진했다. 하지만 정규코스는 이곳 어디선가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자그마한 동산을 에두른 다음 연등국제선원으로 간다. 보호수로 지정된 ’큰나무‘ 근처인 것 같은데,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걷던 난 곧장 직진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에두르는 코스를 쏙 빼먹어버린 것이다.
▼ 마을안길을 통과해 올라선 고갯마루에서도 길을 잘못 들었다. 왼편으로 가야하는데도 둘레길 리본에 홀려 그만 오른편으로 진행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이 길이 탐방로가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다. 아까 길을 잘못 들어섰던 탓에 탐방로의 중간지점에 닿게 되었고, 상황파악이 안된 탓에 지금 역방향으로 걷고 있는 것이다.
▼ 첨부된 지도의 ‘나들길 흙집(버섯모양의 특이한 외형을 지녔는데 펜션일 게다)’에 이르러서야 길을 잘못 들어선걸 알아차렸다. 반대방향에서 걸어오는 일행 몇을 만났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흙집 건너편으로 이규보의 묘역이 내다보이니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논두렁을 따라 곧장 묘역으로 진행해버렸다. 덕분에 우린 외국인들이 한국 선(禪)을 수행하는 곳이라는 연등국제선원을 둘러보지 못했다.
▼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이규보의 묘역. 고려 최고의 문장가라지만 이규보 묘역은 왕릉은 아니다. 하지만 고려시대 묘지 중 빼놓을 수 없는 유적지다. 교과서에도 수록된 ‘국선생전’으로 유명한 이규보는, 신라의 최치원, 조선의 박지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힌다. 이규보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천재였지만 관직을 얻지 못하여 불우하게 지냈다고 한다. 32세에 비로소 최고 권력자인 최충헌의 눈에 들어 관직에 올랐고, 강화 천도 시기에는 벼슬이 재상까지 이른다.
▼ 이규보의 묘(인천시 기념물 제15호)는 상부에 모셔져 있었다(하단의 묘는 이규보의 후손으로 추정될 뿐 신원은 확인되지 않는단다).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었다. 참! 돌하루방을 연상시키는 유머러스한 문무석은 무신정권 당시의 유풍을 알 수 있는 귀한 조각이라고 하니 참고하시길.
▼ 묘역의 재실은 ‘사가재(四可齋)’란 편액을 달았다. 이규보가 개경에 있을 당시의 별장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그는 그곳에서 ‘농토가 있어 가히 양식을 공급할 수 있고, 뽕밭이 있어 누에를 쳐서 가히 옷을 지을 수 있고, 샘물이 있어 가히 마실 수 있고, 나무가 있으나 가히 땔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하였단다. 안쪽에 걸려 있는 백운재(白雲齋)란 현판은 윤보선 대통령이 1983년에 쓴 글씨라고 한다.
▼ 따스한 봄날, 잔디밭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일가족이 부럽기 짝이 없다. 한국전쟁 때 태어나 4.19에 5.16, 10.26. 12.12... 혼동의 시대에 고단한 세월을 살아온 나로서는 그저 먹고 사는 일에 모든 것을 쏟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이규보의 묘역에 왔으니 그의 시라도 읊어보자. <...앞 부분은 생략, 응련금일악(應戀今日樂), 욕위후일망(欲爲後日忘), 금일극환학(今日極歡謔)> ‘즐거웠던 오늘을 그리워하리/ 훗날 오늘을 잊지 않으려거든/ 오늘 한껏 즐기자꾸나.’ 이 얼마나 좋은 내용인가. 덕분에 난 준비해 간 술과 안주를 그의 묘역에서 깡그리 비우고 나서야 다시 길을 나설 수 있었다.
▼ 다시 길을 나선지 15분, ‘길직1리’에 들어섰다. 이 마을의 ‘회관’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오른쪽이 신촌마을을 거쳐 길정저수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갑장과의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곧장 직직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덕분에 ‘강화초대교회’에서 3.1독립만세운동 유적지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됐지만...
▼ 요즘도 허수아비가 통하나? ‘유전의 법칙’에 따라, 진화를 거듭한 날짐승들이 요즘은 웬만한 것에는 놀라지도 않는다는 기사가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당시 기사는 까치 종류는 가짜 총까지 알아본다고 했었다.
▼ 길직리에서 13분, 농사준비에 한창인 들녘을 구경하며 걷다보면 강화초대교회(옛 길직교회)에 이른다. 감리교단 소속의 교회인데, 그보다 이곳은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으로 더 유명하다. 강화군은 3.1운동 당시 경인지역에서 가장 많은 약 2만 4천여 명이 참여한 대표적인 만세운동 발상지 중 하나다. 그 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논의된 곳이 이곳 ‘길직(피뫼)교회’인 것이다.
▼ 마당에는 옛 예배당 건물이 복원되어 있었다. 독립지사 유경근과 조종환 선생 등은 일본경찰의 감시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강화 남부지역에서 ‘강화 3.1만세운동’을 시작하자고 결의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재학생 황도문이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피뫼(길직)교회’ 담임목사 이진형과 장윤백·황도문·황유뷰·유봉진 선생 등이 이곳에서 회동하여 구체적인 시위 계획을 세우고, 1919년 3.18일 유봉진 대장을 필두로 강화읍 장터에서 2만 여명의 군중과 함께 강화 3.1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위로 63명이 체포됐고, 43명이 제판에 회부돼 상당수가 옥고를 치른다. 이들 중 길상면 주민이 24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 앗! 저게 뭐꼬?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산꼭대기에 걸터앉은 도시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포토 스팟’으로는 최고이나 막상 찾아가보면 식수나 교통 등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풍경이다. 그래도 이색적인 멋에 끌려 기회 있을 때마다 찾았었는데, 그런 풍경을 우리나라에서 보게 된 게 신기롭다고나 할까?
▼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목련꽃이 활짝 핀 어느 이른 봄날, 사색에 젖었을 박목월 시인과는 달리, 난 강화나들길을 뚜벅뚜벅 걷는다. 느림의 미학을 한껏 추구하면서...
▼ 온수리에 가까워지자 진행방향 저 멀리로 정족산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천년고찰 전등사(傳燈寺)가 들어앉은 명산이다. 나들길 3코스는 1시간쯤 더 투자해 전등사를 들렀다가기도 한다. 하지만 내 체력은 16.2km인 기본코스만으로도 벅차다. 절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눈팅으로 끝내버리는 이유다.
▼ 이규보 묘역을 출발한지 50분 만에 온수리(길상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마니산과 전등사가 있는 남쪽의 중심지로, 강화읍에 이어 강화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동네다. 조금 뒤 들러보게 될 ‘성공회 온수리성당’ 말고도 9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양조장 건물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 시내로 들어가자 ‘면사무소’가 손님을 맞는다. 강화도 최남단에 위치한 ‘길상면’은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지역으로 분류된다. 주요 볼거리로 보물을 3점이나 보유한 전등사, 단군의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사적 130호), 지방기념물인 이규보 선생의 묘, 사적 225호인 초지진, 지방 유형문화재인 온수리 성공회성당을 꼽을 수 있다.
▼ 온수리 성공회성당은 시가지를 지나야 하는 탓에 찾는 게 만만치 않았다. 결국 길가는 이를 붙들고 물어 찾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웬 뚱딴지같은 풍경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는 게 아닌가. 서양풍의 건물을 예상했는데 난데없이 ‘솟을대문’이 나타난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정에 종이 매달려 있다. 고단한 삶의 위로를 받고 싶은 이들은 저 종소리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일을 마감하지 못한 가난한 농부들은 종소리를 듣고 두 손을 모았을 것이다. 밀레의 ‘만종’처럼...
▼ 본당인 ‘성 안드레성당(유형문화재 52호)’도 역시 전통 한옥이다. 1906년에 지은 이 건물은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교회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서양 종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발과 저항감을 없애려고 일부러 한옥으로 지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9칸의 본당과 1칸의 문루(종탑)으로 이루어졌다. 참! 솟을대문 앞에 있는 한옥 사제관도 유형문화재 41호로 지정·보호되고 있었다.
▼ 외형은 한국의 전통 양식으로 이루어진 반면, 내부 공간은 유럽의 교회 건축양식을 사용해 동서의 조합을 이룬 것이 특징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이곳에서 집무하던 관할 사제들의 사진이 성당의 오랜 역사를 이야기해 준다.
▼ 옆에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성베드로성당’이 있다. 2004년에 새로 지었다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스테인드글라스가 풍성하다고 알려져 있다.
▼ 뭔가 볼거리가 더 있을까 해서 마당을 둘러보는데 150살이나 묵었다는 소나무가 기형적인 외모를 자랑하며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성당이라면서도 ‘성모상’이 눈에 띄지 않는 건 무슨 이유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혼을 원하는 영국 왕 ‘헨리 8세’가 이를 반대하는 로마 교황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새로 세운 교회가 ‘성공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겠지?
▼ 이곳에서도 독립유공자의 기념물을 만날 수 있었다. ‘조광원 노아신부 독립운동 기념비’와 ‘김여수마태 독립운동순국비’이다. 1931년 사제품을 받은 조광원 신부(1897-1972)는 하와이에서 목회 활동과 함께 박용만이 설립한 조선독립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김여수 마태’는 독립운동가로 항일운동을 펼치다 22살의 나이에 옥중에서 유명을 달리한 분이다. 1991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 성당을 둘러봤다면 이제 온수리 버스승강장을 갈 일만 남았다. 이때 온수리의 속살을 엿볼 수 있다. 강화읍이 강화도 북쪽의 중심축이라면 온수리는 남쪽의 중심지이다.강화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동네라는 얘기다. 하지만 강화도 자체의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아선지 한가로운 시골 읍내의 풍경을 보여준다.
▼ 날머리는 온수리버스승강장(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예스런 멋이 퐁퐁 풍기는 간판을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어느새 ‘온수리 버스승강장’에 이른다. 고층빌딩(기껏해야 4층이지만)이 즐비한 것이 온수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모양이다. 참! 스탬프보관함은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5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이 14.45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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