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자락길 중 첫째 자락 #2 : 구곡길과 달밭길
산행일 : ‘17. 6. 12(월)
소재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과 풍기읍 일원
산행코스 : 소수서원주차장→소수서원→금성단→선비촌→향교→죽계계곡→초암사→달밭재→달밭골→비로사→삼가주차장(소요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소백산 자락길‘은 경북 영주시․봉화군, 충북 단양군, 강원도 영월군의 3도 4개 시·군에 걸쳐져 있다. 영남의 진산(鎭山)이라 불리기도 하는 소백산자락을 한 바퀴 감아 도는데 전체 길이는 143km(360리)에 이른다. 올망졸망한 마을 앞을 지나는가 하면, 빨간 사과가 달린 과수원 안길을 통과하기도 한다. 또한 잘 보존된 국립공원 구간을 통과하게 되므로 따가운 햇볕에 노출되는 다른 곳의 걷는 길과는 많이 차별된다. 그런 점을 인정받았는지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고, 2011년에는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모두 열두 자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평균 거리가 12km(30리) 내외인 각 자락은 짧게는 1구간에서 길게는 4구간으로 다시 나누어 소단위 문화권으로 구분했다. 작은 문화적 특성에 따라 선비길, 구곡길, 달밭길 등의 작은 별칭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소백산 자락에는 모두 26개 소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즉 12자락 26소문화권으로 이루어진 360리길이라는 얘기이다. 아무튼 한 자락을 걷는데 대략 4~5시간이 소요되므로 하루에 한 자락씩 쉬엄쉬엄 걸을 수 있어 리듬이 느껴진다. 더구나 열두 자락 모두 미세한 문화적인 경계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자세히 살펴보면 자락마다의 특징이 발견되어 색다름 느낌의 체험장이 될 수 있다. 거기다 소백산 자락의 아름다운 풍경은 덤일 게고 말이다.
▼ 구곡길의 시작은 배점 주차장(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165 )
배점주차장을 벗어나면 ‘죽계구곡(竹溪九曲)’이라고 적힌 커다란 표지석이 길손을 맞는다. ‘소백산 자락길’의 ‘첫째 자락’ 가운데 두 번째 구간인 ‘구곡길’이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예로부터 성리학자들은 풍광이 고운 계곡에 이름을 붙이고, 시가(詩歌)를 짓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주세붕, 이황, 신필하, 이가순 등 이 지역 유현(儒賢)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선대 학자들의 명명과 시(詩)가 후대 사람들에 비해 보관되어 남겨지기가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선지 이곳 죽계구곡도 큰 혼란이 생겨버렸다. 퇴계가 명명했던 지명(地名)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대신 신필하가 명명한 지명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주자(주희:朱熹)의 명명 방식에 준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1곡, 2곡을 차례를 부여했는데 반해, 신필하는 물 흐르는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순서를 매기는 통에 스스로 혼란을 초래해 버렸다. 어쩌면 그는 이런 혼란을 미리 예견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문집(文集) 등에 겨우 이름을 적어두었을 때 그는 아예 구곡의 바위에다 깊게 각자(刻字)를 새겨버렸다. 게임 끝이 아니고 무엇이랴? 때문에 국립공원에서도 신필하가 명명한 ‘죽계구곡’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게다. 참고로 퇴계는 소수서원의 취한대(翠寒臺, 제1곡)에서 시작해서 죽계천을 거슬러 오르며 금성반석(金城盤石, 제2곡), 백우담(栢子潭, 제3곡), 이화동(梨花洞, 제4곡), 목욕담(沐浴潭, 제5곡), 청련동애(靑蓮東崖, 제6곡), 용추비폭(龍湫飛瀑, 제7곡), 금당반석(金堂盤石, 제8곡), 중봉합류(中峯合流, 제9곡)를 죽계구곡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홍수로 일부가 유실되자 영조 때 순흥부사로 부임한 신필하가 초암사 앞 금당반석(제1곡)에서 삼괴정 앞 이화동(제9곡)까지 2㎞ 물길을 따라 내려오며 다시 이름을 붙였다.
▼ 지금은 폐교(廢校)가 되어버린 ‘배점분교’ 앞을 지나면 길은 죽계구곡을 옆구리에 끼고 초암사까지 이어진다. 겨우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좁은 시멘트길 옆으로 사과밭이 펼쳐지고 죽계천은 수풀에 둘러싸여 물 흐르는 소리만 요란하다. 하지만 ‘구곡(九曲)’의 경승(景勝)을 찾아보는 데는 지장이 없다. 들머리마다 이정표와 안내판 등을 잘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다만 알아두어야 할 점은 하나 있다. 경승이거나 경승이 아닌 것들이 다 고만고만해서 주인공이 헷갈릴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하긴 모두가 다 절경(絶景)이니 구태여 주인공을 찾을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 ‘9곡’ ‘이화동(梨花洞)’은 위에서 얘기했던 표지석 근처에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길에서 약간 비켜나있으니 길가에 세워진 안내판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안내판에는 ‘죽계구곡 옛길’의 지도를 그린다음 그 위에다 각 곡의 위치를 표기했다. 그 하단에는 이화동에 대한 해설을 적어놓았다. 옥녀봉(玉女峯)과 이자산(利子山) 사이로 흐르는 죽계계곡이 이화동까지 이어지는데, 이화동 아래의 깊은 물을 용소(龍沼)라고도 부른단다. 이화동의 어원(語源)은 옛날 이곳에 배꽃이 많았다는데서 연유한다는데 지금은 배보다 사과밭 천지로 변해버렸다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변의 풍경 또한 변할 수 있음을 설명했다.
▼ 안내판에서 몇 걸음 더 걸으면 이화동(梨花洞)이다. 안내판은 이곳을 ‘9곡’으로 표기했다. 구곡의 마지막으로 삼은 신필하의 의견을 쫒았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퇴계는 이곳을 ‘4곡’이라 했다. 아무튼 다리 아래에 위치한 이화동은 허접하기 짝이 없다. 작은 바위협곡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정도라 여기면 되겠다. 그래선지 가장 좋은 조망처마저도 사유지(私有地)라는 이름으로 막아버렸다. 이런 풍경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시를 구상했을 선현들이 존경스러워진다. 하긴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보는 이의 마음자세도 달라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 이후로는 포장공사가 한창인 도로가 꽤나 오래 이어진다. 졸졸 흘러내리는 죽계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숲속에서 조잘대는 새소리까지 들려오지만 뙤약볕 아래를 걷다보니 흥겨워야할 소리까지도 그다지 반갑지가 않다. 10분쯤 지나 ‘초암매표소’를 지나면 협곡을 따라 길게 조성된 사과밭이 나타난다. 그리고 알알이 영글어가는 사과에 눈맞추다보면 어느덧 이정표(초암사→ 2.0Km/ 배점주차장↓ 1.4Km)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 이정표의 ‘초암사’ 방향표시 하단에 ‘6,7,8곡’이라고 적혀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죽계구곡’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두었다. ‘죽계’의 지도를 그리고 그 위에다 ‘구곡’의 위치와 함께 구곡에 대한 특징까지 적어 놓았다. 여기서는 큰 길을 버리고 오른편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라는 표시일 것이다.
▼ 다리를 건너 울창한 숲길로 들어선다. 가끔가다 시판(詩板)들을 만날 수 있는 멋진 길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년-1563)이 쓴 ‘서죽계입경후(書竹溪入景後)와 서창재(徐昌載)의 ‘등청운대(登靑雲臺)’ 등 다양한 시들을 만날 수 있다. 죽계구곡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이러한 시판들은 구곡이 끝날 때까지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 10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냇가로 툭 튀어나간 데크전망대(식사를 하고 있는 단체가 있어서 사진은 생략)가 나온다. ‘8곡’인 ‘관란대(觀瀾臺)’를 편하게 구경하라는 배려로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관란(觀瀾), 즉 눈앞에 펼쳐지는 여울목의 물줄기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아니나 다를까 되돌아 나오는 길에 입구의 안내판을 살펴보니 그런 내용을 적어 놓았다. 관수유술 필관기란(觀水有術 必觀其瀾,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나니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하느니라)은 ‘맹자(孟子)’의 ‘진심장구(盡心章句) 상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리고 그 주해(註解)에 관수지란즉지기원지유본의(觀水之瀾則知其源之有本矣), 즉 물의 여울목을 보면 곧 그(水源)의 근본을 알게 되니라’하고 풀어 놓았다. 8곡의 빠른 물살이 여울을 이루며 계속해서 흘러갈 수 있는 것은 그 근본이 확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흐름 속에서 도(道)를 찾아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렴 ‘도적(盜賊)에게도 도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득 장자(莊子)의 ‘도척편’에 나오는 도척(盜蹠)이 그의 제자와 주고받던 얘기가 떠오르는 게 분위기에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
▼ 길이 계곡을 따라 나있지만 데크나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놓아 걷는 데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 그저 숲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추임새삼아 건들거리며 걷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안내판을 찾아 눈만 크게 뜨면 될 일이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데크전망대가 나온다. ‘7곡’인 ‘탁영담(濯纓潭)’의 조망을 위한 대(臺)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가로 내려가는 통로는 보이지 않는다. 내려가는 길이 위태롭다는 의미일 텐데도 일부 사람들의 귀에는 당최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물가에서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보이는 게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 ‘7곡’은 특별히 눈에 담아 둘만한 경관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바위들 사이를 굽이도는 물굽이 자체는 괜찮은 편이다. 다만 그 규모가 어설프다는 얘기이다. 담(潭)자가 들어간 이름답지 않게 물의 흐름도 소(沼)나 담을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탁영담(濯纓潭)’은 초나라 굴원(屈原)의 시에서 차용한 구절로 물이 맑아 갓끈을 씻을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단다. 그렇다면 물이 많이 고여 있을 필요는 없겠다.
▼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이번에는 반듯한 규모의 담(潭)이 선을 뵌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나 되는데, 그중 아래의 것은 거의 소(沼) 수준이다. 이럴 때는 안내판을 살펴보는 방법 밖에 없다. ‘6곡’인 목욕담(沐浴潭)은 6곡 아래와 위로 선녀가 내려와 몰래 몸을 씻었을 듯한 바위와 숨겨진 소를 말한다고 적혀있다. 옛 선비들이야 그 물속으로 첨벙거리며 뛰어들었을 리 없었겠지만 자꾸 뛰어들고픈 충동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첨언까지 해두었다. 그렇다면 앞에서 거론했던 두 개의 담을 합쳐서 목욕담(沐浴潭)이라고 하는가 보다. 참고로 목욕담은 퇴계가 정한 9곡 중 5곡도 된다. 그만큼 의미 있는 장소라는 얘기일 것이다.
▼ 6곡이 지나 조금 더 오르면 탐방로는 숲을 벗어난다. 나무다리를 디딤돌 삼아 개울을 건너면 쉼터용으로 만들어 놓은 정자(이정표 : 초암사→ 0.9Km/ 배점주차장↓ 2.5Km)가 나온다. 갈길 바쁘다고 너무 서두르지는 말자. 다리의 위아래가 제법 볼만하기 때문이다. 숲 우거진 골짜기와 거무튀튀한 바윗덩이들, 그리고 그 사이로 투명한 옥빛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다. 저 물줄기는 모양과 소리를 바꿔가며 소수서원까지 흘러갈 것이다.
▼ 이제부턴 도로를 따른다. 조금 전의 옛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데크로 바닥을 깔아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길이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또 다른 안내판이 나타난다. ‘5곡’인 ‘풍영담(楓泳潭)’의 들머리이다. 그런데 안내판에는 퇴계가 정한 ‘6곡’인 ‘청련동애(靑蓮東崖)’이라고 적혀있다. 지금까지 줄곧 신필하의 주장을 따르다가 갑자기 퇴계의 주장으로 변경을 한 이유를 모르겠다.
▼ 계곡으로 내려서면 담(潭)이 하나 나온다. 담의 옆에 벼랑도 보이지만 풍광이 썩 뛰어나지는 않다. 퇴계가 말한 청련동애(靑蓮東崖)는 ‘청련암 동쪽의 바위’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청련암은 어디를 이른단 말인가. 이름까지 붙여줄만한 바위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못 이겨 안내판을 다시 살펴본다. <‘5곡’이 새겨진 바위 위에 인위적으로 판 홈이 보인다. 아무래도 안간교(安干橋)를 세웠던 흔적인 것 같다. 안간교 건너 동쪽 낭떠러지로 물이 흘러내린다. 바로 청련암 동쪽 벼랑이다. 하지만 서쪽 어딘가에 있어야할 청련암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안 읽은 것만도 못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청련동애(靑蓮東崖)라는 이름보다는 신필하가 지은 풍영담(楓泳潭)으로 고정을 시키는 게 옳은 것 같다.
▼ 이어서 얼마간 더 걸으면 ‘초암주차장’에 이른다. 일반인의 승용차가 올라올 수 있는 마지막 주차장이다. 참! 깍빡 잊을 뻔 했다. 초암주차장에 이르기 바로 전 왼편으로 길이 하나 열린다는 것을 말이다. 이정표(초암사 0.6Km/ 배점주차장 2.8Km) 하나만 덜렁 세워져 있을 뿐, 요 아래에 뭐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그 어떤 안내판도 보이지 않지만 일단은 내려가 봤다. 의미 없는 길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 내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계단 아래의 계곡은 여기까지 오면서 보았던 다섯 개의 명소보다 훨씬 더 고운 경관을 갖고 있었다. 비록 경사는 크지 않으나 와폭(臥瀑)이 흐르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다 물이 깊은 담(潭)까지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주차장을 지나면서 길은 더욱 좁아진다. 도로포장이 되어있는 것을 보면 스님들의 차량은 지나다니는 모양이다. 잠시 후 오른편으로 ‘죽계구곡 옛길’이 나뉜다. ‘4곡’으로 연결되는 들머리로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들머리에 이정표(초암사 0.1Km/ 순흥향교 6.0Km)와 ‘소백산 국립공원 안내도’와 ‘죽계구곡 안내도’만 세워져 있을 따름이지 4곡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후 고개를 쭉 내밀기라도 할라치면 그때서야 ‘4곡’인 ‘용추(龍湫)’ 안내판과 그 옆에 세워진 시판(詩板)이 보일 따름이다.
▼ 안내판 아래가 신필하의 ‘4곡’이자 퇴계의 ‘7곡’인 용추(龍湫)이다. 내려가기 전에 안내판부터 읽어보기로 한다. 용추는 죽계에서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한다. 아래위로 반석이 편편히 깔리고 좌우편이 깎아지른 듯한 암각(岩角) 가운데로 급한 여울이 성난 듯 쏟아져 드리워 비폭(飛瀑)이 되었단다. 그 아래에 검푸른 물굽이가 소용돌이치는 깊은 못을 이루고, 큰 바위가 못 가운데 누워, 마치 용이 꿈틀꿈틀 구름비를 뿜는듯하다 하여 ‘용추’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내려가 본 용추는 안내판의 설명과는 많이 달랐다. 암각이나 폭포는 그렇다 쳐도 담의 깊이는 어른의 허리는커녕 무릎도 채 넘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얕기 짝이 없는 다른 곳들에 견주다보니 깊게 보였고, 그러다가 용추라는 이름까지 얻었지 않나 싶다.
▼ 용추를 지나면 아직까지 단청(丹靑)도 마치지 못한 일주문이 중생을 맞는다. 초암사에 거의 다 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 그 옆에 위치한 화장실 끄트머리에서 화장실을 오른편에 끼고 내려가면 ‘3곡’인 ‘척수대(滌愁臺’이다. ‘온갖 근심을 씻어 낸다’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우인회숙(友人會宿)이란 시의 첫 구절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술 좋아하는 나를 보는 것 같아 평소에도 좋아하던 시인지라 전체를 옮겨본다. 옛 시름 씻으려고(滌蕩千古愁, 척탕천고수) 내리 백 병의 술을 마셨다네(留連百壺飮, 유연백호음) 이 좋은 밤 정담이나 나누세(良宵宜淸談, 양소의청담) 달이 밝은데 잘 수야 없지 않겠나(皓月未能寢, 호월미능침) 만일 취하거든 빈 산에 눕게나(醉來臥空山, 취래와공산) 하늘과 땅이 모두 이불과 베개가 아니겠는가(天地卽衾枕, 천지즉금침) 이 얼마나 좋은 시인가 ‘모처럼 말과 뜻이 통하는 친구가 찾아왔다. 세상사 고달픈 이야기가 아닌, 맑고 깨끗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당연히 술잔도 오고갈 것이다. 그러니 밤이 깊다고 해서 어찌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 취할 때까지 마시다가 그대로 누우면 될 일이다. 땅을 베개 삼고 하늘을 이불삼아 덮고서 말이다’
▼ 다리 위에서 바라본 척수대는 일품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다리 아래까지 내려가 볼 것을 권하고 싶다. 한층 더 뛰어난 풍광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럴 듯하게 생긴 암각(岩角)들 사이로 물이 흐르면서 만들어 내는 와폭(臥瀑)이 제법 규모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담(潭) 또한 제법 깊다. 구곡(九曲) 중에서 가장 깊다고 알려진 용추보다 오히려 한 수 위라고 보면 되겠다. 주변의 풍광 또한 용추 보다 뛰어났음은 물론이다.
▼ 삼거리로 빠져나와 조금만 더 걸으면 ‘죽계1교’가 나온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다리 옆에 또 하나의 다리를 더 세웠다. 보행자 전용이다. 여백이 조금 남으니 자락길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총 12자락(코스)으로 구성된 자락길 가운데 그 진면목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코스로는 1자락(12.6km)이 꼽힌다. 선비길(3.8km)과 구곡길(3.3km), 달밭길(5.5km)로 나뉘며, 역사와 문화, 생태 삼박자를 고루 갖췄다. 자락길의 ‘자락’은 ‘논밭이나 산 따위의 넓은 부분’을 가리키지만, 풍광이 뛰어난 1자락 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구곡길’이다. 소백산자락길안내소를 출발점 삼아 죽계구곡을 끼고 초암사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산책 삼아 걸어보기에 딱 좋다. 하지만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달밭길’을 더 선호한다. 아름다운 계곡을 계속해서 즐길 수 있는데다 달밭재로 오르는 적당히 가파른 구간까지 끼어있기 때문이다.
▼ 다리를 건너자마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오래 묵었을 뿐만 아니라 생김새까지도 괴이하게 생겼다. 돈 많은 졸부들이 침께나 흘리겠다. 정원수로 옮겨다 놓으면 그만일 것 같아서이다. 아무튼 이 부근에서 ‘2곡’인 ‘청운대(靑雲臺)’ 안내판을 만난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을 수가 없어서 대신 안내판에 적힌 내용을 옮겨본다. 주세붕은 소백산 구름이 비추이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백운대(白雲臺)라 불렀으나, 이황이 소수서원의 백운동과 구분해야 한다면 청운대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부딪쳐 휘감아 도는 물길 속에 우뚝 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나가는 바위 앞에서 스스로 청운의 꿈을 키운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 안내판에서 몇 걸음만 더 올라가면 초암사(草庵寺)이다. 깊은 산중에 위치한 절치고는 제법 큰 규모이다. 하긴 의상대사가 지었다니 이 정도의 크기는 유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세우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잠시 초막(草幕)을 짓고 머무르던 곳이란다. 그 자리에 세운 절이 초암사이고 말이다. 퇴계도 이 절의 이름을 알리는데 일조를 했다. 퇴계가 국망봉을 자주 오르내렸는데 그때마다 초암사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다는 것이다. 퇴계의 당시 나이는 48세, 가마를 타고도 올라갔다 오는데 이틀이나 걸렸다니 요즘 같으면 소도 웃을 일이다. 70대 후반의 노인들도 하루면 올라갔다 내려오고도 남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퇴계는 가마를 메는 하인들만 실컷 고생시킨 셈이다. 배점주차장에서 초암사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가 결렸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린 건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 초암사(草庵寺)는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는데, 이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676년(문무왕 16)에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기 위해 절터를 보러 다닐 때 이곳에 임시로 초막을 지어 수도하며 기거하던 곳이라는 설이다. 둘째는 의상이 지금의 부석사 터를 찾아서 불사(佛事)를 시작했는데, 서까래가 없어져 도력(道力)으로 살펴보니 이 절터에 떨어져 있었다. 의상은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라 믿고 여기에 초암을 짓고 한동안 수행한 뒤 부석사를 건립했다고 한다. 사찰의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지만 ‘순흥지(順興誌)’에 따르면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승려 김상호가 지었다는 토굴은 1950년 6.25전쟁으로 전소하였다. 승려 이영우와 민덕기가 연이어 이 사찰에 거처하였고, 이후 승려가 없어 폐사 직전에 있던 것을 1970년대 초반 비구니(比丘尼) 보원이 주석하면서 사찰을 다시 일으켰다. 1981년에는 대웅전 등의 전각을 중수하였다. 사찰 건물로는 대적광전과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염불당, 안심당 등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제작된 ‘3층 석탑(三層石塔)’과 ‘동·서 부도(東․西 浮屠)’가 있는데, 모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초암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소백산자락길은 한여름에도 햇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나무터널 속으로 스며든다. 입구에 아치형의 문을 만들고 ‘달밭골․국망봉 가는 길’이라고 쓰인 이름표까지 달아놨으니 길이 헷갈릴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국립공원이다 보니 입산하는 인원을 카운트(count)하기 위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이제부터 자락길의 셋째 자락인 ‘달밭길’이 시작된다. 초암사에서 시작해서 달밭재를 넘어 삼가탐방지원센터까지의 5.5km 구간이다. 선비길(3.8km)과 구곡길(3.3km)을 지나왔으니 벌써 절반 이상을 걸은 셈이다.
▼ 시작부터 울창한 숲길이 나타난다. 진정한 소백산의 품안으로 들어선 모양이다. 그렇게 200m쯤 들어갔을까 길가에 선 이정표(죽계1곡 0.1Km←)가 잠깐 왼쪽으로 들어갔다 오란다. 잠시 후 계곡에 이르면 옥빛 물이 잔잔하게 흘러내리는 널찍한 반석(盤石)이 펼쳐진다. 죽계계곡에서 가장 넓다는 금당반석(金堂盤石)이다. 초암사 대웅전 가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니 안내판에는 금당(金堂)이 절에서 석가모니를 모시는 본존을 의미하듯이, 이곳이 죽계구곡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적혀있다. 다른 한편으론 신필하가 볼 때에는 ‘1곡’이지만 퇴계가 골랐을 때는 ‘8곡’이 됨을 참조한다. 참고로 소(沼) 위쪽 폭포 우측 바위에 새겨진 ‘竹溪一曲’은 신필하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건너편 바위에는 신필하의 이름까지 적혀있다. 신필하가 이렇듯 금당반석을 제1곡으로 삼고 자신의 이름까지 새겨놓은 것을 보면 이곳이 죽계계곡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절경지라는 증거일 것이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지락길은 두 갈래(이정표 : 비로사(자락길)← 3.1Km/ 국망봉↗ 4.1Km/ 초암사↓ 0.3Km)로 나뉜다. 오른쪽 길은 석륜암터를 거쳐 국망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이다. 퇴계가 1549년에 ‘유소백산록’을 쓰기 위해 올랐던 길이라고 한다. 왼쪽 길은 달밭골을 거쳐 소백산 주봉인 비로봉에 오르는 산길로, 자락길은 왼편의 호젓한 숲길을 따른다. 비로봉으로 오르는 고갯마루인 성재로 연결되는 길이다. 성재를 넘어가면 비로사가 기다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 갈림목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자 잣나무가 하늘 높이 쭉쭉 자라고 있다. 어디선가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들려온다. 본격적으로 숲길에 들어선 것이다. 아무튼 ‘자락길’은 구경거리가 참 많은 길이다. ‘죽계구곡’이 끝나면서 읽을거리도 없어질 것이라고 여겼는데 다른 읽을거리가 수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죽령너머길이나 과수원길, 구곡길, 선비길, 달밭길, 죽령옛길, 승지길 등 ‘소백산 자락길’을 설명해놓은 여러 가지 안내판들은 물론이고, ‘문화생태 탐방로’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백산에서 서식하고 있는 각종 동식물들의 생태계를 설명해놓은 안내판 등 수많은 읽을거리들을 곳곳에 세워놓았다.
▼ 얼마간 더 걷자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오고,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데크로 만들어진 쉼터를 만난다. 둘레에 난간까지 만들어 둔 것으로 보아 전망대(展望臺)의 역할까지 겸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시야(視野)는 조금도 트이지 않는다. 하긴 이런 숲속에서 조망을 기대했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nonsense)일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가 ‘9곡’으로 꼽았다는 중봉합류(中峰合流)‘는 어디서 찾으란 말인가. 누군가 이쯤에서 비로봉과 국망봉 남사면에서 흘러드는 물이 하나가 되는 합수곡(合水谷)을 만날 수 있다고 했기에 하는 말이다. 계곡으로 내려가 찾아보는 수도 있겠지만 길이 보이지 않아 그저 여기쯤이려니 하고 생각해볼 따름이다.
▼ ‘데크쉼터’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또 다시 계곡을 따른다. 원시의 숲을 낀 골짜기는 더욱 깊어지고 자연미도 넘친다. 소백산국립공원 최고봉 비로봉과 2위인 국망봉은 능선 남쪽으로 깊고 수려한 골짜기가 여러 가닥이다. 그중 비로봉 동쪽으로 흐르는 골짜기는 월전계곡(月田溪谷, 하가동계곡)이요, 국망봉 남쪽 석륜암 터 부근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가 석륜암골(石崙庵溪谷)이다.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 조금 전에 지나왔던 데크쉼터 근처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월전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두 계곡이 합쳐진 물은 죽계(竹溪) 계곡을 이룬 뒤 죽계호(순흥지)로 스며들었다가 소수서원을 끼고 흘러내린 다음 영주를 지나 ‘서천’이란 이름으로 낙동강 수계(水系) 중 하나인 내성천으로 흘러든다.
▼ 월전계곡(月田溪谷)은 국망봉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있다. 한마디로 끝내주는 길이다. 계곡을 따라 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함께 산중 숲속에서 흘러나오는 새소리 덕분에 지루할 겨를조차 없다. 그 소리들에 흥을 맞추다보니 저절로 어깨춤이 추어진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흥얼거림은 보너스(bonus)라고 보면 되겠다. 그 흥얼거림에 맞춰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그런 내 모습이 산새들의 눈에라도 띄었나보다. ‘나도 여기 있다’며 열심히 지저귄다. 산으로 들어서는 길은 이래서 즐겁다.
▼ 산은 오를수록 푸르름의 극치를 이룬다. 냇물 또한 더 맑아졌다. 그래선지 돌에 낀 이끼까지 선명함을 더한다. 계곡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물, 울창한 숲, 그 사이로 보이는 흰 바위들. 이들이 함께 빚어지니 비록 죽계구곡은 벗어났지만 어디서든 발을 담그고 '무하지경(無夏之境)'에 빠지고 싶은 풍경들이다. 백운동서원,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도 이 길을 걸었을지 모르겠다. 만일 그랬다면 신재 주세붕과 퇴계 이황도 함께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은 세상 근심걱정 모두 털어버리고 해맑은 자연인이 되어 이 길을 걸었을 게 분명하다.
▼ 초암사를 출발한지 40분쯤 지나자 민가(民家) 몇 채가 보인다. 주변 경사지에 만들어져 있는 손바닥 같은 밭뙈기들로 보아 달밭골(이정표 : 비로사 1.74Km/ 초암사 1.66Km)이 아닐까 싶다. 배점리에 속하는 달밭골은 한자로 표기해서 월전곡(月田洞)이라고도 한다. 달밭이 있는 골짜기 마을을 말한다. 소백산 비로봉에서 원적봉으로 이어지는 남동방향의 능선이 있는데, 그 중간쯤의 달밭재 동서쪽의 완사면에 위치해 있다. 이 달밭골은 산중에 밭을 일구어 사는 마을인데, 완만한 경사지에 달뙈기 만한 밭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지명은 이 밭의 모습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달밭'이라는 '다락밭'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뒤에 와전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관련 지명으로 달밭재, 달밭고개 등이 있다. 다른 한편으론 화전민들이 달이 뜰 때까지 일했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 민가를 지나면서 산길은 조금 더 가팔라진다. 하지만 여전히 고운 편하다. 보드라운 황톳길에다 경사까지도 서두를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자박자박한 걸음 따라 ‘자락(自樂)’이 더해지는 길이다. 누군가 소백산 트레킹의 묘미는 부드러움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가 보다. 그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서 산길이 험하지 않고, 설악산이나 월악산처럼 뾰족뾰족 튀어나온 남성스런 산이 아닌 엄마 품처럼 포근하다고 했다. 그래서 웅장함보다 아기자기한 멋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이 나뉘는 고갯마루인 성재(이정표 : 비로사 1.0Km/ 초암사 2.1Km)에 올라선다. 초암사를 나선지 한 시간 만이다. 고갯마루에는 벤치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고개에 세워진 안내판은 이곳이 ‘달밭골’임을 표기해 놓았다. 비로사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달밭골 명품마을’이 나온다고도 적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달밭골은 성재를 중심으로 순흥과 풍기의 달밭골로 나뉘지만, 행정구역의 의미일 뿐이다. 그저 고개를 넘는 정도라고나 할까. 아무튼 달밭골은 국토순례를 하던 신라 화랑들이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며 유오산수(遊娛山水)하던 곳으로 6·25전쟁 때 북한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삶의 터전이란다. 달밭골의 ‘달’은 산(山)의 고어(古語)로, ‘달밭’은 ‘산에 있는 다락밭’을 뜻한다.
▼ 성재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 자락길은 아름드리 잣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다리쉼을 하고 가란다. ‘잣나무 숲 명상쉼터’를 조성해 놓은 것이다. 잣나무는 인간에게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가운데 하나이다. 그 좋은 기운을 실컷 담아가라며 아예 평상과 침대의자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것도 꽤나 많은 숫자이다.
▼ 쉼터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경사는 거의 없다. 선비처럼 휘적휘적 걷기에 딱 좋은 것이다. ‘대한민국 3대 아름다운 숲길’ 중 하나로 선정(2015년)되었을 정도라며 너스레를 떨던 지인의 말이 실감이 난다. 자락길 한 바퀴를 이미 다 돌아본 그는 이 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안전하게 돌아볼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락길 곳곳에 수많은 전설(傳說)과 스토리텔링(storytelling)들이 스며들어 있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 그렇게 12분쯤 내려오면 민박(民泊)에 주막(酒幕)을 겸하고 있는 ‘달밭골 나눔터’가 나온다. 간단하게 입주(立酒)라도 한잔 걸치고 가기에 딱 좋은 장소가 아닐까 싶다. 근처에 펜션도 보인다.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던 옛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관광업으로 직업 이동을 했던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에서 소백산(小白山)의 정상인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길(이정표 : 비로봉↖ 3.3Km/ 삼가주차장↓ 3.3Km/ 초암사↗ 3.0Km)이 나뉜다. 소백산(小白山)은 백두대간의 허리쯤에 솟은 산이다. 옛날의 풍수지리학자들은 소백산을 최고의 명당으로 꼽았다. 이름에 소(小)자가 들어 있어 작고 만만한 산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산악형(山岳形)의 국립공원 가운데 지리산, 설악산에 이어 세 번째로 품이 넓고 큰 산이 소백산이다. 우리 조상들은 신령스런 산에만 그 이름에 백(白)자를 넣었다고 하는데, 소백산의 이름도 이와 무관치 않다. 조선시대의 풍수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던 남사고 선생이 ‘우리나라의 명산 중에서 소백산의 기운이 가장 온화하고 아름답다’고 말했다니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 몇 걸음 더 걸어 내려오면 또 다른 집단시설지구(이정표 : 자락길 초입 0.1Km, 초암사 3.1Km/ 비로봉 3.4Km)를 만난다. 이번에는 ‘소백산 자락골’이라는 이곳의 지명이 적혀있는 커다란 입간판까지 세워놓았다. 길가에 여러 대의 승용차가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주민들의 숫자도 제법 되는 모양이다. 아까 성재의 안내판에 적혀있던 ‘달밭골 명품마을’은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 길가에는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토막을 내어 자른 통나무를 세운 다음 화전민들이 연상되는 상(像)을 양 옆에 세웠다.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여겨지는 여우와 다람쥐의 조형물을 함께 배치했음은 물론이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포토죤(photo zone)까지 꾸며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데크로 만든 좌대도 두어 개 보인다. 그중 하나는 천막까지 씌우고 의자를 놓았다. 홍보캠페인이나 음악회 등 뭔가 작은 행사를 개최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예비용 공간이 아닐까 싶다.
▼ 비로사로 향한다. 길은 둘이나 되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자동차길보다야 보행자용으로 만들어놓은 데크길이 훨씬 더 편할 게 뻔하니까 말이다. 거기다 바닥을 야자수 잎을 엮어 만든 방석까지 깔아놓았으니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다만 가끔 나오는 계단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라면 자동차길을 따라도 될 일이다.
▼ 그렇게 5분쯤 내려가면 비로사 입구(이정표 : 비로사→ 0.3Km/ 삼가주차장↑ 1.8Km/ 달밭골 명품마을↓ 0.4Km)이다. 달밭골 순흥 방면에 초암사가 있다면, 풍기 방면에는 비로사가 있다. 비로사 역시 이 일대 사찰처럼 의상조사의 발자취다. 그런 절간을 어찌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다는 이유로 들러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절의 산문 노릇을 하는 일주문을 지나면 경북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를 만나고 이어서 제법 긴 계단을 오르면 ‘범종각(梵鐘樓)’ 앞에 버티고 있는 ‘진공대사 보법탑비(眞空大師普法塔碑)’가 나타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승탑이 없이 홀로 서있는 것이 이 탑비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비로사를 중창(重創)한 진공대사는 라말․여초에 활약했던 고승(高僧)이다. 그가 죽자 태조는 ‘진공대사’라는 시호를 주고 ‘보법(普法)’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비문은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글씨는 자경(字徑) 2㎝의 구양순체(歐陽詢體) 해서(楷書)로 이환추(李桓樞)가 썼다.
▼ 비로사(毘盧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으로 통일신라 때 진정(眞定)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이다.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라고도 불리었다. 가난하여 장가도 들지 못한 채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진정은 의상이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가하여 의상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3년 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그 소식을 의상에게 전하였다. 진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소백산 추동으로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서 환생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때의 소백산 추동이 비로사로 추정된다. ‘비로사사적기(毘盧寺事蹟記)’에는 의상이 683년(신문왕 3)에 이 절을 개창하고 비로사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126년(인종 4) 인종이 김부식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468년(예종 1)에는 김수온이 사재를 들여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임진왜란(1592)과 1908년에 불에 탔으나 여러 번의 개․보수(改․補修)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비로나자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적광전(寂光殿)과 명부전(冥府殿), 반야실(般若室), 망월당(望月堂), 월명루(月明樓). 삼성각(三聖閣), 범종각(梵鐘樓), 염불당(念佛堂), 그리고 종무소와 공양간이 들어있는 보련당(寶蓮堂) 등 나름대로 규모를 갖추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하나 같이 새로 지은 냄새가 풀풀 난다. 아무래도 최근에 큰 불사가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절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996)과 진공대사보법탑비와 석조당간지주 등 신라 말 고려 초의 중요한 유물들이 남아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 절을 빠져나와 삼가주차장으로 향한다. 이젠 부담 없이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이곳도 역시 길은 둘이다. 허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테크길을 이용한다. 하긴 일부러 매연(煤煙)까지 맡아가며 걸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야자수 잎 방석을 깔아놓은 바닥은 폭신폭신하기 짝이 없고 두어 곳에는 벤치는 물론이고 그네까지 매어놓은 멋진 쉼터도 만들어 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데크길 가는 방향으로 계곡이 함께 따라온다. 깊은 골짜기 따라 흐르는 물소리 들으며,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바라보며, 이름 모를 새들의 조잘거리는 소리를 즐기며 한가로이 여유를 갖고 걷는다. 길을 걸으며 소백산 자락의 자연을 마음껏 향유해본다. 이런 게 바로 선비정신이 아닐까 싶다. 비록 비를 맞더라도 뛰지 않는다는...
▼ 그렇게 10분쯤 걸어 나오면 아까 초암사를 지나면서 보았던 아치형의 문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맞이길 탐방로’라는 새로운 이름표로 바꿔달았다. 이곳에서 ‘달밭골 명품마을’까지 데크길을 만들면서 붙여놓은 이름이란다.
▼ 다락길 탐방의 마무리는 삼가주차장
탐방로 문을 나섰다고 해서 걷기가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1.3Km를 더 걸어 나가야만 삼가주차장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의 여건도 더 나빠진다. 이제부터는 찻길에 기대어 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아까처럼 야자수 방석이 깔린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자동차의 매연까지 피할 수는 없다. 이쯤 되면 다시 속세로 내려온 신선의 마음처럼 다리가 묵직해진다. 초록빛 세상이 펼쳐지고 비취빛 옥수가 발아래 펼쳐지던 숲길을 그리워하며 15분 정도를 걸으면 야영장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삼가주차장(이정표 : 야영장 0.2Km, 달밭골 명품마을 2.2Km, 비로봉 5.5Km)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트레킹이 종료된다. 초암사에서 이곳까지는 2시간이 조금 못 걸렸다. 그렇다면 오늘 트레킹은 총 5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관광지를 구경하느라 소요된 시간을 감안할 경우 5시간 정도를 걸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