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옹치 바다향기로

 

산행일 : ‘18. 5. 21()

소재지 :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조양동·대포동

산행코스 : 7번 국도(하나님의 교회 앞)속초해수욕장데크로드외옹치항(소요시간 : 30)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바다향기로'는 속초의 외옹치 해안에 올해 들어 새로 난 둘레길이다. 속초해수욕장에서 시작해 외옹치 해안을 거쳐 외옹치항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조성됐다. 외옹치 해안은 1953년 휴전 이후 사실상 민간인 출입이 통제돼 온 곳으로 1970년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겪은 후부터는 해안경계 철책이 설치되면서 완전히 차단됐었다. 65년 동안 막혀있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2014년 롯데가 외옹치에 리조트 건설을 추진한 데 이어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관광특구 활성화 지원사업'에 속초시가 신청한 '바다향기로 조성사업'이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개방 작업이 진행됐다. 1.74에 이르는 구간 가운데 속초해수욕장 구간 850m는 속초시가, 나머지 구간은 외옹치에 리조트를 운영 중인 롯데가 맡아 공사를 진행했다. 탐방로에는 전망대와 벤치 등 편의시설과 함께 공연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들어섰다. 특히 해안경계 철책 일부를 남겨 과거 무장공비 침투지역이라는 점을 관광객들이 알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트레킹의 시작은 하나님의 교회맞은편(속초시 조양동 1383-6)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 속초 IC에서 내려와 56번 지방도를 이용해서 시내로 들어오면 ‘7번 국도를 만나게 된다. 교동지하차도로 들어가지 말고 오른편으로 국도를 올라타고 양양방면으로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속초 고속버스터미널앞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3층짜리 속초 하나님의 교회건물 앞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트레킹이 시작되는 속초해수욕장에도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나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한 탓에 이곳에서 내려줄 수밖에 없다는 운전기사의 전언이었다.




교회의 맞은편으로 난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들머리 왼편의 ‘design Blue i’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단층짜리 건물을 참조하면 될 것 같다. 아니면 전신주에 매달려 있는 새마을 3이라는 표지판을 참조해도 될 일이고 말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오른편에 한신아파트가 보인다. 이젠 안심해도 된다는 얘기이다.




5분쯤 걸었을까 길 건너에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1976년에 처음 개장한 외옹치 해수욕장으로 속초에서는 하나뿐인 해수욕장이란다. 아니 아까 지나왔던 7번 국도에 걸려있던 이정표에는 속초해수욕장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이밖에 설악산해수욕장으로도 불린단다. 아무튼 청호동에서 조양동을 거쳐 대포동까지 이어지는 길이 2km에 넓이가 75m인 이 해수욕장은 투명하고 맑은 바닷물과 고운 모래가 자랑거리다. 한여름엔 해수욕은 물론이고 각종 수상레포츠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해송(海松) 숲을 가운데 두고 해수욕장의 반대편에는 작은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산책로 외에도 벤치와 조형물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으나 그늘이 없는 탓에 효용가치는 많이 떨어질 것 같다.




공원과 모래사장 사이에는 해송(海松)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 길이가 무려 600m나 된다니 꼭 여름철이 아니더라도 속초 시민들에게는 최상의 쉼터가 될 수도 있겠다. 벤치나 운동기구 등을 만들어놓은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해송의 싱그러움이 가슴속까지 파고든다. 도심에서 움츠렸던 세포조직이 시원하게 열리는 느낌이다. 좋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일 것이다.



송림(松林)을 통과하자 널따란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그 뒤로 보이는 에메랄드빛 바닷물은 이국적인 기분마저 들게 한다. 넘실대는 파도 위에는 속초8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조도(鳥島)가 두둥실 떠있다. ‘새들이 많이 찾는 섬조도는 일출이 장관인 곳이다. 아니 굳이 새벽녘이 아니더라도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에메랄드빛 수평선과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풍경이 잘 그린 한 폭의 그림 같기 때문이다. 섬이 흔하지 않은 동해안의 특성 때문에 더욱 돋보이지 않나 싶다.




아직 물놀이 철이 아닌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백사장에서 노닐고 있다. 그만큼 속초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 속초시내에서 가까운 지리적 이점 덕분일 것이다. 또한 외지인들에게도 이곳은 휴가철이나 비수기를 불문하고 친숙한 방문지라고 한다. 설악산과 가까워 내설악 쪽에서 대청봉을 거쳐 설악동으로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코스라는 것이다. 인근에 위치한 대포항이나 외옹치항에서 값싸고 싱싱한 활어회로 배를 채운 다음 산책삼아 들른단다.



탐방로는 모래사장의 뒤편, 그러니까 소나무 숲과의 경계선을 따라 만들어 놓았다. 널찍하게 보도블럭을 깔아 서너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걸어도 충분할 정도이다. 이 탐방로를 따라 오른편으로 향한다. 진행방향에 롯데리조트의 고층빌딩이 보이면 제대로 길을 들어선 셈이 되겠다. 쏴아쏴아 소리 내며 밀려오는 잔잔한 파도와 시원한 바닷바람이 해변 산책을 더없이 즐겁게 해준다.



모래사장에는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유독 많아 보인다. 앞에서도 설명 했듯이 그만큼 속초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쩌면 저들은 그네들의 앞마당쯤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닷가인데 낚시꾼이 없을 리가 없다. 선상(船上)은 고사하고 갯바위도 아닌 곳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풍경이 낯설기는 하지만 사람마다 개성이 있는 법이니 어쩌겠는가. 어쩌면 저네들은 세월을 낚는다는 진정한 강태공(姜太公)’들 일지도 모르겠다.




외옹치천을 가로지르는 목교(木橋)를 건너면 잘 지어진 팔각정이 나타난다. 휴양지에 걸맞는 시설이라 하겠다. 하지만 또 다른 면도 있다. 아직도 이곳은 군()의 경계 작전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안보에 중요한 지역인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서슬 시퍼런 경고판을 세우고 오전 6시에서 자정까지라는 개장시간 안내문 외에도 군의 경계 작전 지역에서 해서는 아니 되는 행위들을 줄줄이 적어 놓았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대문 하나를 만난다. ‘외옹치 바다향기로의 외옹치해수욕장 방면의 출입문이라 보면 되겠다. 그러니까 총 1.74에 이르는 바다향기로가운데 롯데에서 조성했다는 950m 구간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그래선지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탐방로 외에도 롯데리조트의 안내도까지 그려 넣었다. 어쩌면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주차장과 워터파크 등 리조트 내의 시설들까지 상세하게 표기해놓은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네들이 만든 탐방로이니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지 않겠는가.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군사지역으로 묶여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되어 있다가 56년 만에 일반인에게 개방했다는 바다향기로외옹치 해안구간이다. 그렇지만 24시간 내내 열려있는 것은 아니란다. 아직은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로 운영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4월부터 9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며 10월부터 3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란다. 참고로 외옹치 바다향기로는 외옹치 해변외옹치 항등 두 곳을 통해 입장할 수 있으며 두 곳 모두 주차장이 완비되어 있다.




눈을 들면 망망대해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잘게 부서지는 파도는 맑고도 투명하다. 그 물결에 기대어 바람이 불어온다. 시원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바람이다. 겨울 등산복을 입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5, 그것도 하순이다. 어느새 여름의 문턱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해안가를 따라 데크로 길을 내었단다. ’데크 로드인 셈이다. 덕분에 새로 낸 950m의 산책로를 발끝에 모래 한 톨 묻히지 않고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이 길은 길고 깊게 뛰는 하얀 파도를 따라 걷게 된다.



탐방로를 따라 잠시 걸으면 얼마 전에 완공했다는 롯데리조트 속초가 눈에 들어온다. 173개의 호텔 객실과 콘도 219실을 갖췄는데, 로켓 블라스터와 볼슬라이드, 바디 슬라이드가 있는 워터 파크가 가장 입소문을 많이 탔다고 한다. 또한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내츄럴 소울 키친과 투숙객 전용 인피니티풀, 찜질방, 루프톱 등을 운영한다고 한다.




탐방로는 여러 번에 걸쳐 갈림길을 만든다. 하나 같이 롯데리조트로 연결되는 길들인데, 들머리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조금만 유의한다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이다.



시원한 푸른 바다가 산책로 바로 아래로 펼쳐진다. 기암괴석에 닿아 부서지는 상쾌한 파도소리가 귀에 와 부딪친다. 바다를 따라 걷는 길이라는 뜻으로 지어졌다는 바다향기로에 걸맞는 풍광이라 하겠다. 힐링(healing)이란 정녕 이런 곳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바닷가 쪽에는 군()의 경계용 철조망이 그대로 남아있다. 3층짜리 경계초소도 보인다. 60여 년간이나 민간의 출입이 금지된 군 경계지역이었으니 군의 시설물들이 널려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다향기로는 그런 기존의 군 경계 철책 일부를 살리면서 그 옆에다 흙길을 내어 걸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벙커나 초소는 전망대로 활용했다고 한다. 안보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셈이다. 남북화해 무드가 한창 무르익어 간다고는 하지만 분단되어 있다는 현실까지는 뛰어넘지 못했나 보다.





그래선지 철책에다 수상한 사람, 물건, 선박을 발견하면 적극 신고해 줄 것을 요구하는 안내문을 붙여 놓았다. ‘국가 안보’, 그게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는가.




탐방로 곳곳에는 쉼터를 겸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잠시 쉬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감상하라는 배려일 것이다. 가끔은 속초 인근 해안을 따라 운행하는 유람선이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멋진 풍경도 만날 수 있다. 서로서로 손을 흔들어주는 것을 보면 바라보는 사람이나 바라보이는 사람들 모두 즐거운 모양이다. 하긴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이렇게 고운데 어느 누가 행복하지 않겠는가.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뷰파인더(viewfinder)에 들어오는 외옹치의 풍경이 눈부신 건 무슨 이유일까. 어쩌면 65년 만에 엿보게 되는 속살에 대한 야릇한 기대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탐방로를 따라 해안선에 펼쳐져 있는 기암괴석과 그 기암괴석들에 부셔지면서 만들어지는 하얀 포말, 그리고 절벽 쪽의 바위들 사이에 들어서서 푸르름을 자랑하는 해송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 외옹치 해안을 명품 바닷길로 만들어 내는 게 아닐까 싶다.



데크가 깔려 있어서 걷기에는 편했다. 전체 구간의 난이도도 낮은 편이다. 덕분에 남녀노소 누구라도 쉽게 이용할 수 있으니 큰 장점이라 하겠다. 하지만 오르내릴 때마다 생기게 되는 계단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들인데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낑낑대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데크 로드아래로는 맑고 깨끗한 동해바다가 출렁인다. 그게 바닷가의 바위들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모퉁이 몇 개를 돌아서니 진행방향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대포항이 눈에 들어온다. 속초항보다도 훨씬 이전에 개항된 오래된 항구이다. 하지만 요즘은 어선 몇 척이 드나드는 한적한 포구일 따름이란다. 1937년 양양군 도천면 대포리에 있던 면사무소가 속초리로 옮겨갔고, 이어 청초호 주변을 다듬어 속초항이 태어나면서는 대부분의 화물선과 어선들이 속초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란다. 그래선지 요즘은 어항으로서의 대포보다는 관광지로서의 대포로 더욱 더 각광을 받고 있단다. 설악산에 몰려온 관광객들이 한번쯤은 꼭 들렀다가는 필수코스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정치망에 걸려드는 광어, 넙치, 방어 등의 고급 생선들이 반드시 대포항을 통하여 처리되기 때문이란다. 신선한 물을 찾아 생선들이 몰려들 듯이, 사람들은 신선한 생선을 찾아 횟집으로 몰려든다. 자연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비록 삼척의 '정동심곡 바다부채길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옥빛 바닷물과 기암절벽 등 이곳 나름대로의 볼거리는 많다. 이곳 역시 바닷가 해벽을 따라 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국내 유일의 해안단구(천연기념물 제437)라는 바다부채길에 버금가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이일 것이다.




그렇게 조금 더 걷자 바다향기로의 마지막인 외옹치항이 나온다. 이곳에도 역시 대문이 만들어져 있다. 출입시간 제한을 위해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시설물일 것이다. 참고로 외옹치란 툭 튀어나온 지형이 항아리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외옹치는 속초에서는 유일하게 장승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단다. 3년에 한 번씩 장승을 새롭게 깎아 세우는데, 남녀 한 쌍의 장승이 마을 입구에서 지키고 있단다.




대문을 나서면 외옹치 항이다. 작고 아담한데다 비교적 한산하고 조용한 항구라 하겠다. 바로 옆에 위치한 대포항의 유명세에 밀린 탓일 것이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선지 항구에 들어선 집들이 하나같이 횟집 일색이다. 매일 드나드는 고기잡이배에서 싱싱한 횟감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일 게다. 아무튼 횟감이 넘치는데도 대포항처럼 붐비지 않아서 편안하고 조용하게 횟감을 고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에필로그(epilogue), ‘해안 비경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탐방로의 개방이 강원도의 새로운 트렌드가 아닐까 싶다. 수십 년 동안 출입이 통제되어온 해안을 잇따라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걷게 되는 바다향기로도 그중 하나이다. 지난해 6월에 해안단구 탐방로인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정동진~심곡 2.86)'이 개통되었으니 이곳 바다향기로는 두 번째로 열린 셈이다. 이 외에도 새로운 곳에서 개통을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동해시 한섬 일원에 2020년 개통을 목표로 '감성 바닷길' 조성사업이 추진되고 있는가 하면, 삼척시 근덕면의 용골 촛대바위를 중심으로 '해안녹색경관길(640m)'이 올해 개통을 앞두고 있단다.

남도 여행

 

여행일 : ‘18.4.1()-4.3()

소재지 : 전남 진도군, 해남군, 강진군 일원

산행코스 : 진도타워대흥사두륜산 고계봉강진 가우도강진 회진포구강진 금곡사 벚꽃 길

 

함께한 산악회 : 가족여행

 

특징 : 꽃피는 춘사월 첫째 주 일요일은 우리 집안의 시사(時祀)가 있는 날이다. 시사란 4대 봉사(奉祀)가 끝나 기제(忌祭)를 잡수시지 못하는 조상을 위하여 사당이나 집안이 아닌 묘()에서 5대조 이상의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이다. 여기에다 난 행사를 하나 더 추가했다. 4대조까지의 제사까지 가족 납골당에서 지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고모님과 시집간 여동생들까지도 참석하게 되는 큰 가족행사가 되어버렸다. 그냥 모임을 파해 버릴 수 없었던 이유이다. 그래서 매년 시사가 끝난 후에는 23일간의 가족여행을 떠났었고, 올해는 그 대상지를 남도의 끝자락으로 잡았다. 진도의 국립자연휴양림에다 숙소를 정하고 진도와 해남, 그리고 강진에 있는 유명 관광지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 지방의 대표적인 먹거리도 빠짐없이 맛보았음은 물론이다. 힐링여행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23일 여정의 본부는 팽목항의 뒷산에 위치한 '국립진도자연휴양림이다. 산림청이 작년(2017)에 문을 열었는데 산림문화휴양관(114)과 숲속의 집(88)을 비롯해 남도소리 체험관 1, 방문자 안내센터, 잔디광장, 산책로, 다목적 운동장 등을 갖췄다. 특히 거북선 모양으로 지어진 산림문화휴양관과 판옥선을 벤치마킹한 숲속의 집이 눈길을 끈다. 아무튼 산책삼아 밖으로 나오니 볼에 스치는 바람이 차갑다. 봄의 한가운데라는 춘분(春分)이 지난지도 벌써 2주가 다 되어 가는데도 말이다. 꽃피는 춘사월인데도 느낌은 봄 같지가 않다는 얘기이다. 왕소군(王昭君)의 마음이 설마 이러기야 했겠는가마는 문득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난다. 왕소군(王昭君, 본명은 왕장王嬙, ’소군이란 칭호는 사흘 밤낮을 그녀와 함께 즐긴 황제가 내려준 시호이다)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소군원(昭君怨)‘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한()나라 원제(元帝) 때 궁녀였던 왕소군이 남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單于)‘의 왕후가 되어 흉노 땅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처량한 심정을 읊었다는 싯귀(詩句)이다. ’오랑캐 땅엔 꽃과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는 것이다. 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녀나 나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녀가 꽃과 풀이 없어 봄을 느끼지 못하는 대신, 난 날씨가 추워 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숙소인 국립진도휴양림으로 들어가는 길에 진도 타워부터 들러보기로 한다.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명량해협이 한눈에 조망되는 망금산의 정상에 지어졌는데, 진도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빠져나가면 된다. 2013년 같은 자리에 있던 녹진전망대를 허물고 타워(tower)를 새로 세우면서 진도의 랜드마크(landmark)로 탈바꿈했다. 높이 60에 지하 1, 지상 7층의 규모로 1층에는 안내데스크와 티켓부스가 있고, 진도의 특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특산물 판매장이 마련되어 있다. 3층부터 5층까지는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 다목적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주차장의 한쪽 귀퉁이에 만들어 놓은 계단을 오르자 널따란 광장이 나타난다. ’승전광장이란다. 광장에는 여섯 개의 이순신장군 어록비(語錄碑)와 당시 해전의 장면을 연출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우리 조상과 진도군민들의 호국정신을 계승하자는 의미에서 조성된 광장에 걸맞는 조형물이지 싶다.





7층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진도대교와 울돌목 해협, 우수영 관광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울돌목 방향에는 명랑대첩 해전도를 세워놓아 눈앞에 펼쳐지는 울돌목해협과 비교해가며 보는 재미를 더하게 했다. 반대방향으로는 진도의 들녘이 펼쳐진다. 널고 반반한 것이 섬 같아 보이지 않는다. 풍요로워 보인다는 얘기이다. ! 한쪽 귀퉁이에 만들어놓은 명랑대첩 승전관에 들어가 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명랑대첩 해전도로 부족했던 부분을 메꿔주고도 남을 것이다.






진도의 관문의 진도대교이다. 옛날 이곳 진도는 해남에서 철부선(鐵艀船)을 타야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84년 저 다리가 놓임으로써 한반도의 최남단 지역이 된 이후, 외국인을 포함하여 연간 약 260만여 명이 찾는 국제적 관광명소가 되었다.



2층은 전시관 구역이다. ’진도군 역사관옛 사진관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꼭 들어가 보자. 이왕에 진도에 왔으니 하나라도 더 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진도의 역사와 주민들의 삶, 그리고 진도의 명소들을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진도는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 승전지만 있는 게 아니다. 고려시대 이 땅을 침략해온 몽고에 끝까지 항거한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용장성(龍藏城)이 있는가 하면, 한국의 동양화를 이끌어왔던 소치 허련선생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운림산방과 수평선 넘어 황금빛을 띄우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세방 낙조(細方 落照)‘, 그리고 바다를 바라다보며 등산할 수 있는 동석산과 남망산, 첨찰산, 여귀산 등 볼거리가 참 많은 섬이다. 특히 우리민족의 혼과 한을 담은 진도아리랑 등 진도에는 문화(동양화 및 소리)가 섬 전체에 배어있는 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 진도를 일러 보배의 섬이라 한다.




밖으로 빠져나오니 들어갈 때 무심코 지나쳤던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순신장군과 함께 싸웠던 장수들의 초상화와 함께 그의 약력을 적어 넣었다. ! 이왕에 진도에 왔으니 최근에야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어란(於蘭)‘이라는 충기(忠妓)에 대해 알아보자. 정유재란 당시 1597916’13133‘이라는 절대 불리의 여건에서 이루어진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승인의 한편에는 어란이라는 충기(忠妓)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왜군은 어란진에 주둔한 채로 출정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 포로로 잡혀가 왜장 칸마사가게(管正陰)의 연인으로 있던 어란이 왜군의 출정 기밀을 이충무공에게 알림으로써 명랑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자신의 첩보로 인해 칸마사가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명량이 바라보이는 여낭터 벼랑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나라에는 충절을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 평양의 계월향, 진주의 논개와 함께 정유재란의 ’3대 의녀로 꼽고 있던데, 그 말에 공감이 간다.



둘째 날은 대흥사부터 찾았다. 해남군 삼산면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로 대둔사(大芚寺)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20개 시군에 말사 50여 곳을 거느린 종찰(宗刹)에다가 사적 제508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명소를 어찌 찾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흥사에 이르는 길의 이름은 장춘(長春) 숲길. ’봄이 오래 머무는 숲이라는 뜻이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는 길에 스님의 끝에다 자까지 붙여가며 흉을 보는데 집사람이 눈치를 준다. 혹시라도 부처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매주 등산을 다니면서 쌓여온 내 반감은 남의 눈치를 볼 정도로 약하지가 않았다. 절간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은 채로 입장료를 꼬박꼬박 물어야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그렇게 내뱉던 불만의 결과는 참담했지만 말이다. 부처님 앞에서 합장을 하고 있는 고모님을 보고 난 어찌할 줄을 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말을 해야겠다.



숲길은 1923년에 지어졌다는 유선여관앞을 지난다. 간판은 유선관(遊仙館)’으로 달고 있다. 안마당에 조그만 정원을 지닌 운치 있는 한옥(韓屋)으로 90년대 초의 정화사업 때 모든 여관과 식당이 대흥사매표소 아래쪽 집단시설지구로 이사했는데도 이 여관만은 본래의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다. 아무튼 지금도 구들장을 장작불로 데우기 때문에 옛것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단골로 찾는단다. 또한 이 여관이 지닌 전통 한옥의 미는 영화 서편제에도 등장한 바 있다. 2009년에는 KBS-2TV의 인기프로그램인 해피선데이-12에 나오는 등 각종 TV프로그램에도 자주 등장했음은 물론이다. 이곳은 소리꾼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한다. 임방울(1905-1961)과 김연수(1907-1974) 등 해방을 전후하여 이름난 소리꾼 가운데 이곳을 다녀가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잠시 후 대흥사(大興寺)의 경내로 들어선다. 창건 설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사찰이다. 426년 신라의 승려 정관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한 만일암(挽日庵)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544(진흥왕 5)에 아도(阿道)가 창건했다는 설과 508(무열왕 8)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승이 중창하였다고도 한다. ’혜장선사(惠藏禪師)‘가 엮은 대둔사지(大芚寺誌)‘에 나와 있는 얘기들이다. 하지만 이는 절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더 끌어올려 보려는 욕심에서 나온 얘기들이 아닐까 싶다. 당시 이곳은 백제 땅이었을 텐데, 신라의 승려들이 구태여 이곳까지 찾아와서 절을 세웠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긴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았던 혜장(惠藏)까지도 이들 기록이 창건자의 활동시기와 맞지 않는다며 신빙성이 없다고 보았는데,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그래선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절의 역사가 전해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이곳에 승군(僧軍)의 총본영을 두면서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서산이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전한 후 크게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의심(義諶삼우(三遇도안(道安문신(文信추붕(秋鵬) 13인의 대종사(大宗師)와 원오(圓悟광열(廣悅영우(永愚) 13인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시킨 명찰이 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보전·침계루(枕溪樓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백설당(白雪堂천불전·용화당(龍華堂도서각(圖書閣표충사·서원·서산대사기념관·대광명전(大光明殿만일암 등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응진전(應眞殿) 앞의 ’3층 석탑‘, 북미륵암(北彌勒庵) ’3층 석탑이 있고 국보로 지정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있다.


대흥사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대흥사는 유학자들과 스님들의 교유의 장이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조 500년의 사상사는 유학과 불교의 대립 속에서 유학이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이 귀족계층인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다면 불교는 서민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반사대부가와 불교의 교유가 쉽지 않았음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하지만 이곳 대흥사는 조선후기 유학자들과 승려들의 활발한 교유의 장이 되었던 곳이다. 18세기를 전후 한 대흥사는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선사가 기거하고 있었고 초의를 중심으로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추사 김정희, 그리고 강진에 유배와 있던 다산 정약용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대흥사를 중심으로 활발한 교유를 가졌다. 이뿐만 아니라 추사의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 또한 대흥사에서 그 인연의 끈을 맺어 예술가로서의 길을 가게 된다.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추구하며 차를 중흥시킨 초의선사가 그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차를 매개로 하여 이러한 교유를 가능하게 하였지만 이를 통해 유학과 불교가 사상적으로도 교유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마디로 대흥사는 18세기 이후 학문과 예술의 중심 도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웅전으로 가기 전, 종루의 옆에 거대한 나무 두 그루가 보인다. 그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연리근(蓮理根)‘이라고 적어놓았다. ’천년의 인연, 만남, 약속이라는 부제까지 달았다. 가까이 있는 두 나무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것을 연리(蓮理)라 하는데, 뿌리끼리 만났으니 뿌리 근()‘자를 붙여 연리근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연리목(蓮理木)이나 연리지(連理枝)는 많이 보아왔으니 연리근은 처음이어서 신기하기까지 하다.



대흥사를 둘러보고 난 뒤에는 근처에 있는 두륜산 케이블카탑승장으로 이동한다. ’명승(66)‘으로 지정되었다는 두륜산을 올라보기 위해서이다. 마침 두륜산의 여러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고계봉의 꼭대기까지 케이블카가 놓여있다니 힘들이지 않고도 두륜산 일대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탑승장 아래에 조성된 널따란 주차장에 이르니 사방에 벚꽃잔치가 벌어져 있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벚꽃나무들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는 것이다. ’명승에 걸맞는 풍경을 보여주려는 모양이다.




케이블카의 선로는 1.6km로 국내에서 두 번째로 긴 거리이다. 하지만 속도가 제법 빨라서 10분이 채 안되어 해발 638m에 있는 상부역사(上部驛舍)까지 편하게 오를 수 있다. 역사 안에는 매점이 있어 컵라면 등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술은 팔지 않는단다. 음주로 인한 안전사고를 막아보려는 예방조치가 아닐까 싶다.



상부 역사에서 고계봉(高髻峰) 정상까지는 길고 긴 나무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286개의 계단을 10분 이상 올라야 하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속도를 조금만 떨어뜨리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길가에 세워놓은 명언들을 읽어가며 오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도 힘들다면 중간에 만들어놓은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가 오르면 될 일이고 말이다.




계단의 끝에는 관광홍보관이 만들어져 있다. 전라남도와 해남군에서 공동으로 만든 모양인데 관광포스터 몇 장을 붙여 놓았을 뿐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일기가 좋지 않을 때 비나 눈 등을 피하는 장소로나 이용하면 딱 좋겠다. 그래선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아예 의자를 붙인 채로 벽면(壁面)을 만들어 놓았다. 홍보관의 옥상은 전망대로 꾸몄다. 한가운데에는 하늘, 바람, 사람이라는 주제의 조형물도 세워놓았다. 조형물을 가운데 두고 여덟 곳으로 나눈 다음 그쪽 방향에 있는 나라들의 이름을 적어 놓기도 했다.




전망대에 오르면 이웃한 강진과 완도, 진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내려다보인다. 이제 막 푸름으로 물들어가는 너른 들판이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 놓는다. 누군가는 멀리 제주도의 한라산까지도 시야에 잡힌다고 우기지만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는가. 아무튼 케이블카 덕분에 발품을 크게 팔지 않고서도 남도 땅의 아름다운 산세를 한눈에 아우르는가 하면, 푸른 다도해 위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섬의 오밀조밀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두륜산(頭輪山)의 여러 봉우리들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오심재 너머로 우뚝 솟은 바위봉우리는 능허대(凌虛臺)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노승봉(老僧峰, 685m)이다. 그 외에도 가련봉(迦蓮峰, 703m)과 두륜봉(頭輪峰, 630m) 등 눈에 들어오는 봉우리마다 그 자태가 자못 빼어나다. 고계봉의 왼편에 보이는 바위봉우리는 호준암(虎蹲巖)일 것이다. 오심재에서 바라보면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과 흡사하다는 바위이다.



정상표지석은 전망대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다 세워놓았다. 고계봉은 두륜산의 네 번째 봉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난 2008년 연말 KBS 2-TV 12일 프로그램에서 강호등과 이승기 등 출연진들이 케이블카를 타고 고계봉에 올라 두륜산의 설경을 소개한 뒤로 다른 봉우리들보다 오히려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나저나 정상에서의 또 다른 볼거리는 진달래가 아닐까 싶다. 그 범위는 넓지 않지만 무리지어 피어난 진달래가 사진의 배경으로 삼을 만은 하다.




대흥사 근처의 유명 맛집에서 닭 코스요리로 점심을 먹은 뒤 강진만(康津灣)에 있는 가우도(駕牛島 : 강진군 도암면 신기리)’로 이동한다. 강진만은 영어 대문자 ‘A’로 표현된다. 어떤 이는 빨래집게 모양이라고도 하는데, 사선으로 갈라진 두 지형을 연결하는 지점에 가우도(駕牛島)’가 자리 잡고 있다. 강진읍 뒤편 보은산이 소의 머리라면 가우도는 멍에에 해당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단다. 강진만의 8개 섬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섬이 육지와 연결되면서 강진만의 심벌인 ‘A’자가 완성된단다. 아무튼 면적 0.32에 해안선의 길이가 2.5인 이 섬이 이젠 육지나 다름없게 되었다. 섬의 양쪽에다 망호 출렁다리(716m)’저두 출렁다리(438m)’라는 두 개의 해상 인도교를 놓아 하시라도 드나들 수 있게 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량은 들어갈 수가 없고, 오로지 사람들만 통행이 가능하다.



도암면에 있는 망호마을 주차장에다 차를 대놓고 망호 출렁다리를 건넌다. 다리의 이름을 듣고 출렁거리는 다리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함께 걷는 여성들을 놀려주려고 말이다. 특히 길이가 716m나 된다니 오랫동안 그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오해이다. 다리의 대부분이 쇠기둥 교각(橋脚)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리가 출렁거리는 현수교(懸垂橋)’는 중간에다 만들어놓았는데, 이마저도 짧은 탓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스릴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재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다리의 중간쯤에 바닥에다 강화유리를 깔아 바다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넘실거리는 파도를 내려다보며 스릴을 만끽해 보라는 모양이다.



중간지점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에 서면 너른 강진만(康津灣)의 서정적인 풍경이 굳어있는 감성을 일깨워준다. 강진군의 중앙부까지 깊숙이 만입(灣入)되어 군의 전체적인 모습을 사람 인()’ 자 형태로 만들어 놓은 바다이다. 영암에서 발원한 탐진강이 장흥을 거쳐 바다와 만나는 강진읍부터 남해와 접한 마량면까지, 직선거리 약 20km에 달하는 강진만이 길다란 ()’ 자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의 안에는 8개의 섬이 있는데 유인도는 이곳 가우도뿐이란다.



건너편으로는 가우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우도는 강진만(康津灣) 안에 들어앉은 작은 섬으로 후박나무와 편백나무 군락지 및 곰솔 등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주변의 무인도들을 바라보는 재미 또한 쏠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섬 정상에 있는 청자타워(높이25m)에서는 해상을 나는 친환경 레저시설인 짚트랙을 즐길 수도 있다.



오른편 다리의 아래에는 푸른 물결 위에다 둥그렇게 좌대(座臺)를 만들어 놓았다. 가우도 마을회에서 운영하는 복합낚시공원이라는데 공원(公園)이란 글자가 들어가 있는 게 특이하다. 낚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진만의 비경도 함께 즐길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단다. 아무튼 5월부터 11월까지 운영하는 유료 낚시터인데, 감성돔 등 다양한 어종이 잡힌다니 세월을 낚는다고 너스레만 떨 것이 아니라 한번쯤은 찾아봄직도 하다.



다리를 건너면 종합안내판가우도 안내판’, 이정표(가우마을0.4Km, 청자타워 짚트랙 0.4Km, 북쪽산책로 1.7Km/ 남쪽산책로0.8Km, 영광나루쉼터 0.4Km)와 함께 가우도 함께해()안내도가 길손을 맞는다. 트레킹코스를 그려놓았으니 꼭 살펴보고 길을 나서는 게 좋다. 해안선을 따라 한 바퀴 도는 외곽코스와 전망대까지 갔다 오는 안쪽코스가 있다. 그다지 길지도 않은 외곽코스도 부담스럽다면 가우도마을 앞으로 내놓은 사잇길을 이용해 전체거리를 단축시킬 수도 있다.



오른편(남쪽)으로 향한다.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2.5km 길이의 생태탐방로, 함께해()이라는 이름의 둘레길이다. 남쪽산책로는 코스의 대부분을 데크로 만들어놓았다. 그만큼 바다 가까이로 길을 내놓았다는 얘기이다. 이 코스는 산과 바다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그래선지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해안가로 난 데크로드를 잠시 걷자 첫 번째 쉼터가 나온다. 명랑나루 쉼터라는데 이 또한 데크로 만들어 놓았다. 바다 쪽의 난간 앞에다 벤치를 놓고 그 위에 강진이 낳은 시인인 김영랑의 동상(銅像)을 앉혔다. 사진 찍기 딱 좋은 곳이라 할 수 있겠다. 해맑게 웃고 있는 영랑의 동상 주변으로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등 아름다운 서정시 세 편이 걸려 있다. 영랑은 강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살이를 했고, 6·25전쟁 때 당한 부상으로 47세에 세상을 등졌다.



반대편에는 저두출렁다리가 놓여있다. 이웃인 저두리(대구면)로 연결되는 길이 438m의 다리이다. 이 다리도 역시 튼튼한 철제 교량이다. 바람이 세고 물살이 거친 바다 위를 가로지르기 때문이란다. 삐죽 솟은 교각은 쇠뿔을 형상화했다. ‘가우도(駕牛島)’라는 섬의 이름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섬에는 여러 채의 펜션이 지어져 있는가 하면, 이정표에는 마을식당도 표기되어 있다. 저두출렁다리 근처의 경치 좋은 곳에는 휴게실도 만들어 놓았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지난해(2017)에만 89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저두출렁다리를 지나면서 산책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맨발로 걸어도 괜찮을 정도로 바닥이 고운 흙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바닷가 풍경이 잠깐씩 눈에 들어올 뿐 볼거리는 별로 없다. 누군가 특별히 예쁜 것도 그렇다고 꼭 봐야 할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닌 섬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그는 또 작은 섬 마을의 고즈넉함에 육지와 연결됐다는 달뜬 분위기가 조금 겹칠 뿐이라고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5분쯤 더 걷자 왼편으로 청자타워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짚라인을 탈 계획이 없으니 그냥 직진한다.



그렇게 얼마를 걷자 가우마을을 100m쯤 남겨둔 지점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해안산책로 0.4Km)는 해안가를 따라 난 산책로임을 알려준다. 갈림길을 무시하고 곧장 직진하니 잠시 후 가우마을이 나타난다. 섬의 서쪽 편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마을에 이르면 청자타워로 올라가는 길이 또 다시 나뉜다. 고려청자 모양으로 지은 25m 높이의 타워인데 대구면 저두해안까지 집트랙을 설치해 아찔함과 짜릿함을 즐기려는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25천원이면 973m의 와이어에 매달려 바다 위를 가로지를 수 있다니 한번쯤 시도해볼 만도 하겠다. 거기다 5천원은 강진사랑 상품권으로 되돌려 주어 강진에서 이용할 수 있게 했다니 꿩 먹고 알 먹고가 아니겠는가.



마을 앞에서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아까 그냥 지나쳐버렸던 해안산책로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이때부터 강진만 건너편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만덕산의 바위 능선이 우람하게 펼쳐진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품고 있는 만덕산은 해발 408m로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험준한 바위산이어서 등산은 만만치 않다.



마을 앞 해변에는 다산 정약용 쉼터가 만들어져 있다. 갯벌에는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이 장남 학연을 만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품을 세워놓았다.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이 1802년에 이 섬을 찾았던 인연 때문이지 싶다. 당시 다산은 섬의 생태계와 어부들의 삶을 목민심서경세유표에 기록했다고 한다. 아무튼 학자 이전에 지아비이자 아버지였던 이유로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다산은 아들에게 나는 벼슬을 하지 않아 너희에게 남겨줄 게 없다. 오직 두 글자의 놀라운 부적을 줄 테니 소홀하게 여기지 마라. 한 글자는 근()이요 또 한 글자는 검()’이라는 글을 적어 보냈다고 전해진다. 아들을 유배지에서 맞이하던 다산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리고 한평생을 공직에 머무르며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았던 나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져본다.



강진만의 너른 갯벌이 눈앞에 펼쳐진다. 만으로 흘러드는 탐진강(耽津江)을 비롯하여 장계천(長溪川강진천·도암천 등 여러 하천들이 만들어놓은 갯벌이다. 이로 인해 주위의 해역보다 염도가 낮아 영양염도(營養鹽度)2.4, 평균수온이 17.8로 해조류 및 어패류의 서식에 적합하단다. 강진만은 1978년에 청정수역으로 선포되었으며, 대합·꼬막··갯장어·새우·낙지·숭어·농어 등의 산지이다. 특히 칠량면 봉황리에서는 양식 바지락이 많이 생산된다.



다리 건너 저두마을 쪽에도 화장실을 갖춘 널따란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가우도 출렁다리 저두장터라는 이름표를 단 상가도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물고기 조형물이다. 강진만 주변의 바다 쓰레기와 생활 쓰레기들을 주워 모아 만들었다는데, 쓰레기의 종류가 참으로 다양하기도 하다. ! 아쉽게도 가오리빵은 맛볼 수가 없었다. 관광객들이 뜸한 월요일이라서 빵 굽는 아저씨도 쉬는가 보다. 참고로 강진 쌀과 단호박으로 만든 '노랑 가오리빵'은 앙증맞은 생김새와 그 안에 들어있는 팥 앙금의 부드러움으로 인해 인기 메뉴로 꼽힌다. KBS-2TV생생정보'에까지 나왔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저녁식사를 위해 찾은 곳은 강진만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량항(馬良港), 수심이 깊은데다 전면에 위치한 고금도(古今島)와 조약도(助藥島)가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어 해상교통의 요지로 꼽힌다. 조선 초기 태종 때인 1417년에는 마두진이 설치되어 만호절제도위가 관장하였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을 당시에는 거북선 1척이 상시 대기하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유서 깊은 만호성터가 남아있고, 까막섬이 수묵화처럼 떠있는 등 아름다운 주변경관으로 인해 천혜의 미항으로도 꼽힌다.



해질녘 금빛 햇살을 머금은 바다는 잊지 못할 풍광을 선사한다. 하루 일을 끝내고 들어온 고깃배들은 한가롭기만 한데, 바닷가를 오가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볼거리를 찾아온 관광객들일 것이다. 이왕에 마량에 왔으니 포구 풍경에 대해 한걸음 더 나가보자.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강진을 대표하는 청자 조형물은 물론이고, 제주와 관련된 조형물(, 돌하르방)까지도 눈에 띈다. 바로 이곳이 조선 시대 때 제주에서 실려 온 제주 말들이 육지에 처음 발을 디딘 곳이어서란다. 탐라에서 뱃길을 따라 실려 온 말들이 육지에 처음 내려 먹이를 먹었던 곳 이라 마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마량에서 내린 말들은 일정 기간 동안 육지 적응 훈련을 받고 한양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마량항 인근에는 말들이 쉬어가던 쉼터인 신마 마을이 아직까지도 자리하고 있단다.



포구에는 까막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다. 숲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섬은 큰까막섬과 작은 까막섬으로 부르는 두 개의 작은 섬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썰물 때는 바닷길이 열려 걸어서도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섬은 천연기념물 제172호로 지정된 상록수림으로 유명하다. 섬 전체에 상록수들이 고루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높이 1012m의 후박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그밖에도 사철나무와 돈나무, 육박나무, 참식나무, 사스레피나무 등 열대성 난대리 120여 종이 우거져 자란다고 한다. 상록수림의 보호를 위해 현재는 공개 제한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관리 및 학술 목적 등으로 출입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마량항은 최근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됐다. 야외공연장과 목조 산책로 등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만한 시설들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방파제를 따라 청자 가로등과 형형색색의 조명을 설치했는가 하면, 각종 대형 행사가 가능한 200m 길이의 중방파제와 폭 40m의 대형 야외공연장을 새로 만들었다. 고금도를 잇는 대교(大橋)가 완성되면서 철부선이 오가던 마량항의 기능이 상실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추진된 마량항 미항사업의 결과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을 예상했는지 회센터는 물론이고 횟집도 많이 보인다. 오늘 저녁 메뉴는 회정식’, 싱싱한 회를 기본으로 수십 가지의 반찬들이 올라오는 백반 차림상이다. 남녘의 해안 도시들에서나 만날 수 있는 별미라고 해서 들렀지만, 낮에 먹은 닭 코스요리가 소화가 덜 되었던지 엄지 척까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맛이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입맛이 덜 돌아온 와중에서도 중간 점수 이상을 줄 수는 있었으니까 말이다.



마지막 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강진에 있는 금곡사에 들렀다.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하는 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때 밀종(密宗)의 승려 밀본(密本)이 성문사(城門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해남의 대흥사에서 얘기했던 대로 신라의 승려가 백제의 영토까지 찾아와서 절을 세웠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승군의 훈련장으로 활용하다가 왜군의 침습으로 소실되는 등 한때는 폐사(廢寺)되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절터에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829호인 삼층석탑이 있다. 그나저나 이곳은 절보다는 절 앞으로 난 도로가 더 유명하다. 군동면 호계리에서부터 작천면을 거쳐 풀치재까지 나있는 지방도 827호선의 길가에 벚꽃 길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이가 무려 삼십 리에 달하는데, 봄이면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이 주변을 온통 환상적인 분위기로 바꿔놓는다. 강진군에서는 이런 점을 살려 올해부터 벚꽃축제를 개최한단다. 그 날이 바로 3일 후이니 우리가 때를 맞춰 잘 찾아온 셈이다. 아무튼 아름답기 짝이 없는 풍경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좋아할 수만도 없는 게 솔직한 내 마음이다. 온 나라가 벚꽃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자칫 일본인들이 봄놀이를 하러 한국으로 여행 온다는 기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에필로그(epilogue),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강진을 남도답사 1번지로 꼽았다.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갖춘 이 땅이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학자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 생활 동안 600여 권의 명작을 남겼고,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영랑 김윤식은 이 땅에서 탯줄을 끊었다. 고려청자의 고향도 강진이고, 칠량옹기의 유명세도 대단하다. 그래선지 나 역시 강진을 여러 번 찾았었다. 다산이 머물렀던 초당은 백련사와 묶어서 네 번이나 찾아봤고, 김영랑의 생가도 두 번을 찾았다. 그러나 고려청자의 흔적들은 아직까지도 찾아보지를 못했다. 하다못해 사당리 41청자가마와 여러 출토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청자박물관이라도 둘러봐야 했지만, 그마저도 실행에 옮기지를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그냥 지나쳐버릴 수밖에 없었다. 가족모임이기에 내 취향만을 고집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청자박물관(대구면 소재)’ 앞을 지나왔으면서도 말이다. 아무튼 대구면과 칠량면 일대에는 고려 초기부터 도자기를 만들던 가마터가 188개나 발견된 청자의 보고다. 바다와 가까워 해상 운송에 편리하고, 무엇보다 도자기의 주원료인 고령토와 규석이 산출돼 청자를 빚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란다.

남지 개비리길

 

여행일 : ‘18. 4. 16()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남지읍 일원

걷기코스 : 창나루주차장마분산마분산갈림길영아지전망대개비리길 종점야생화쉼터창나루주차장유채꽃단지남지철교(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남지 개비리길은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와 신전리를 잇는 낙동강의 강변을 따라 난 길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벼랑길이다. 여기서 '비리''벼루'에서 온 말로 벼랑, 즉 절벽을 뜻하며, ''는 강가를 뜻하는 '갯가'의 줄임말이다. 고로 '강가 벼랑 위에 난 길'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라 여기면 되겠다. 길이가 2.4쯤 되는데 창녕군에서는 이게 짧다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2015년 마분산의 산길을 연결해 6.4짜리 순환코스를 만들어 놓았다. 인공적인 길이 아니라 본디부터 지녀온 서정적 정서를 보여주겠다면서 말이다. 둘레길마다 사연을 담고 있지만 유독 남지개비리길은 토속적인 이름만큼이나 가슴 뭉클한 민담과 임진왜란, 6·25전쟁 등 상흔을 담은 이야기 길이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음강전투가 있었던 역사적 현장이며, 한국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등록문화재 제145호인 남지철교와 함께 우리민족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거기다 낙동강의 뛰어난 풍광이 더해지면서 등산객들 사이에 입소문을 탔다. 그 덕분에 인근 마을을 오가는 주민 외에는 찾는 이가 거의 없던 한적한 오솔길이 요즘은 찾는 이들로 붐빈다고 한다.


 

트레킹의 들머리는 창나루주차장(창녕군 남지읍 용산리 144-1)

중부내륙고속도로 창녕 IC에서 내려와 TG를 빠져나오자 우회전하여 1022번 지방도를 타면 중간에 남지읍 시가지를 지나서 창나루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주차장에서 강둑 위로 오른 뒤, 100m 정도만 더 걸으면 먼지 털이용 에어 컴프레서(air compressor)’까지 설치되어 있는 남지 개비리길의 시작점이 나온다. 이정표(창나루 전망대0.36Km, 마분산정상 갈림길 1.69Km/ 마분산 갈림길()2.21Km/ 창날마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길이 이곳에서 둘로 나뉘나 두 방향 모두 남지 개비리길이니 마음 내키는 대로 진행하면 될 일이다. 어느 방향으로 가던지 개비리길을 한 바퀴 돌고 난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오게끔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 남지수변공원에 만들어놓은 전망대부터 먼저 둘러보기로 한다. 남지수변공원은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생겨난 남지읍 남지리와 용산리 사이의 낙동강 둔치 1768000에 조성됐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60%에 해당하는 드넓은 공원이다. 그 북쪽 귀퉁이에 만들어놓은 게 남지 수변 억새전망대이다. 이 일대는 물씬 풍기는 가을 정취로 유명한 곳이다. 창녕군에서 주차장 앞 낙동강 둔치에 수만의 억새밭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수변 억새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이다. 억새와 수변공원, 낙동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라는 것이다. 억새 명소로 손꼽히는 화왕산의 억새를 낙동강 변으로 옮겨, 그 명성을 잇고 있는 셈이다.




전망대는 두 개의 전망타워를 세우고 두 타워와 강둑을 데크로 연결시켰다. 가운데에 생겨난 공터에는 스테인리스로 제작된 예쁜 조형물을 배치했다. ‘억새라는 이름의 작품인데, 억새축제로 유명한 화왕산(火旺山)’과 인접한 남지에 낙동강 4()’이자 억새를 주제로 한 테마공원을 조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단다. 그러고 보니 억새를 형상화한 작품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억새 위에서 날개짓을 하고 있는 저 나비는 무슨 의미일까? 인근에 유채꽃 단지까지 조성해 놓았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전망대에 오르면 두물머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지금은 억새를 볼 수 없지만, 남강이 낙동강에 합쳐지는 지점이 넓게 펼쳐지는 것이다. 강과 강의 섞임은 자연스러울 따름이지 요란스럽지는 않다. 사람과 사람의 섞임도 이와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침목 계단을 오르면서 남지 개비리길의 트레킹이 시작된다. 계단이 놓인 산길은 경사가 가팔라서 거의 등산에 가까울 정도다. ! 들머리에 이정표 외에도 낙동강 남지 개비리길안내도가 세워져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 했다. 발길을 재촉하지 말고 찬찬히 살펴본 뒤에 출발하는 지혜를 발휘해 보자. 그리고 붉은색의 탐방로가 마분산을 비켜가고 있음을 머리에 기억해 놓자. 그래야만 마분산의 정상을 올라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그러니까 트레킹을 시작한지 10분이 지났을 즈음이면 벤치 두 개를 놓아둔 첫 쉼터를 만난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잠시 쉬었다 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옆에는 마분산(馬墳山)과 창나리(倉津) 마을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세워 놓았다. 그 내용은 조금 있다 거론해 보기로 하자.



몇 발작 더 걷자 이층으로 지어진 팔각정이 길손을 맞는다. ‘창나루 전망대란다. 정자의 앞에는 '곽재우 장군의 토성과 말 무덤'에 대한 안내판을 배치했다.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이 마분산에 토성(土城)을 쌓아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왜적을 맞아 백전백승했다는 것이다. 이 토성은 작은 규모이나 정상에 공간을 두어 강에서는 보이지 않게 설계되었으며, 산을 힘들게 올라온 적과의 육탄전에서 유리하게끔 정상 안쪽에 흙으로 성을 쌓았는데, 430여 년의 풍상에 토성은 허물어졌고 이젠 그 흔적만을 겨우 남기고 있단다. 마분산으로 이름이 변한 이유도 적혀있으나 그 내용은 이따가 오르게 될 마분산의 정상에서 다시 거론해 보겠다.



정자에 오르면 낙동강과 남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 전에 만났던 안내판의 내용을 떠올리며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을 정리해 본다. 저 강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거기다 물길 두 개가 합쳐지는 지점이었으니 전략적 요충지였음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그러니 이곳에 신라군(新羅軍)이 주둔했었을 것이고, 그들이 먹을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도 있었을 게 분명하다. 요 아래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 창나리(倉津)’가 된 이유이다. ‘창고가 있는 나루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탐방로는 소나무로 뒤덮인 능선을 따른다. 남지개비리길의 절반을 차지하는 마분산 능선은 6·25전쟁 당시 최후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박진지구의 한 곳이기도 하다. 195086일부터 104일까지 미군 제2사단과 제24사단은 북한군 제4사단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등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고 한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경사 또한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완만하다. 거기다 바닥까지도 보드랍기 짝이 없는 흙길이다. 편안한 산길을 걷게 된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얼마간 진행하자 안내판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다섯 갈래로 갈려나간 소나무에 대해 설명을 해놓았는데 ‘6남매 나무라는 특이한 이름표를 달았다.



다섯 주간(柱幹), 즉 줄기가 다섯 개로 갈려나간 소나무의 밑동 한가운데에 산벚꽃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수종은 다르지만 소나무의 밑동을 통해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소나무와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해서 ‘6남매 나무(六男妹樹)‘라는 이름을 붙였단다. 그렇다면 양자를 들인 셈이다. DNA가 완전히 다른 남매이니 말이다. 그게 아니면 소나무 엄마가 바람이라도 피웠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능선을 따른 지 15분 여, 앞서가던 일행들이 서성이고 있는 게 보인다. 길이 둘로 나뉘는데 이정표(영아지 전망대 1.48Km/ 창나루 주차장 1.57Km)는 한 방향만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분산 정상 갈림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렇다면 들머리로 다시 돌아가 보자. 붉은 색 탐방로가 마분산을 살짝 비켜나있는 게 보일 것이다. 이젠 들머리에 세워진 안내도를 꼼꼼히 살펴보라고 했던 이유를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고 창녕군에서 잘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명색이 마분산 정상 갈림길이란 이름표까지 달아놓은 이정표라면 마분산 정상의 방향표시를 해놓는 것은 기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이를 빼먹은 행위는 질책을 받아도 싸다.



왼편에 보이는 오솔길로 들어선다. 방향표시도 되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의 흔적까지 희미해서 망설일 수도 있겠지만 의심하지 말고 일단은 들어서고 보자. 몇 걸음 걷지 않아 묘역(墓域)이 나타나고, 그 뒤에 봉긋하니 솟아오른 마분산 정상이 보일 것이다. 참고로 이곳 마분산의 정상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곽재우장군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이름 없는 병사들이 합장되어 있는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무덤의 둘레가 20m에 높이는 5m, 기단부는 돌을 쌓아 둘렀으며 내부에는 석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4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도굴꾼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전면에는 개인 무덤이 들어서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30분 남짓 걸렸다.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하긴 이정표에 방향표시까지 빼먹은 창녕군청에서 그런 생각까지 폭을 넓혔을 리가 없다. 그저 누군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마분산 179.9m)’ 코팅지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국제신문 근교산행 팀의 산행대장을 역임했던 최남준씨가 매달아 놓은 표지판도 보인다. 하지만 이곳이 마분산의 정상이라는 것은 빼먹었다. 해발고도가 180m인 화왕지맥의 한 지점으로 표기해 놓았을 따름이다. 참고로 마분산의 원래 이름은 창진산(倉津山)’이었다고 전해진다. ‘창나루 뒤에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이곳 마분산 일대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왜병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곳이다. 왜적에 비해 수적으로 불리했던 곽 장군은 말꼬리에 벌통을 매달아 적진을 향해 달리게 했고 벌떼로 적진을 교란해 승리를 거뒀다. 그 와중에 말이 죽자 곽 장군은 말의 사체를 거두어 산에 묻고 장사를 지냈단다. 이를 계기로 산의 이름이 마분산(馬墳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몇 걸음 내려서면 아까 정상으로 올라오면서 헤어졌던 탐방로(이정표 : 마분산 갈림길()0.3Km/ 창나루 전망대1.02Km)와 만난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목동의 이름을 새긴 돌이란 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주변에 널린 납작한 돌들의 표면에 글자들이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는데 60년대 이곳이 민둥산이었을 당시 소를 치던 목동(牧童)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적은 것이란다. 주변에 널려있는 포탄의 파편과 철갑탄의 탄두를 도구로 이용했음은 물론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삼거리봉 갈림길’(이정표 : 영아지 쉼터1.0Km/ 도초산1.7Km/ 창나루 주차장 1.4Km)을 지났다 싶으면 또 다른 안내판이 고개를 내민다. 이번엔 전설의 마분송(馬墳松)’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마분송(馬墳松)이란 마분산에 널려있는 소나무들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한 그루의 소나무가 밑동에서 여러 갈래의 줄기로 나뉘어 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장군이 이 나무들에 옷을 입혀 허수아비로 만들어 의병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고 한다. 이름표에 전설(傳說)이라는 낱말을 붙인 이유일 것이다.



잠시 후 마분봉 갈림길()’이라는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그런데 이정표(임도0.08Km/ 마분봉 정상 갈림길0.3Km)가 보는 이를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그동안 목표 지점으로 삼아오던 영아지라는 지명 대신에 임도라는 생소한 지명이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이다. 확신이 서지 않기에 왼편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앞선 일행의 뒤를 일단 따르고 본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덕분에 우린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내려갔다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다시 되돌아오는데 20분 가까이나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알바구간에서 물웅덩이를 만났다. 흙탕물이 일고 있기에 멧돼지의 공중목욕탕이 아닐까 궁금했었는데, 잠시 후 멧돼지와 마주쳤을 때의 대처 요령을 적어놓은 안내판을 보고나서는 내 추측이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20분 만에 마분봉 갈림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임도 방향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몇 발작 더 걷지 않아 임도(이정표 : 영아지 쉼터0.77Km/ 마분산 갈림길()0.08Km)에 이른다. 깔끔하게 시멘트포장이 되어있는 걸 보면 ‘MTB마니아들을 위해 길을 내었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임도를 따를 필요는 없다. 임도와는 별로로 능선에다 탐방로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오르내리는 것이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햇볕을 피할 수 있어 탐방객들에게는 오히려 낫지 않나 싶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하자 아까 헤어졌던 임도와 다시 만나게 되는 지점인 개뚜골고개(이정표 : 영아지 쉼터0.3Km/ 우슬봉1.0Km/ 도초산2.5Km/ 마분산2Km)’에 내려선다. 이곳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뉘지만 다 무시하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를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길가에 세워놓은 팔각정을 만나는데, 이정표에 나와 있던 영아지 쉼터가 바로 이곳이다.



이정표(영아지 전망대0.21Km/ 영아지 마을0.89Km/ 영아지 앞산0,3Km/ 임도 입구0.77Km)가 가리키고 있는 영아지전망대 방향으로 향한다. 중간에 방향을 틀기도 하지만 영아지전망대 가는 길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두어 곳에 세워져 있으니 찾는 데는 불편이 없을 것이다. 아무튼 잠시 후에는 영아지전망대에 이른다. 이층으로 지어진 팔각정이다.



명색은 전망대이지만 조망은 별로이다. 낙동강이 내다보이기는 하지만 주변에 들어찬 나무들로 인해 전체 풍경의 반()의 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쉼터로나 이용하면 제격이 아닐까 싶다. 눈에 담을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정자 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이라도 살펴보자. 이곳이 낙동강전투의 최후 방어선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적어 놓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물밀 듯이 쳐내려오는 북한군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을 이곳에다 치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했다는 것이다. 이 전투로 인해 아군은 전체적인 전세(戰勢)를 역전시킬 수 있었고, 압록강까지 북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젠 내려왔던 길의 반대방향으로 진행한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영아지 목제계단 갈림길’(이정표 : 영아지 주차장0.32Km/ 영아지 전망대0.12Km)이 나오고, 곡선이 아름다운 나선형의 목제계단을 잠시 내려서면 영아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화장실은 물론이고 원두막까지 지어 쉼터의 역할까지 겸하도록 했으니 잠시 쉬면서 주변 경관을 감상해보면 어떨까 싶다. 지형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흐르는 낙동강의 면모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본래의 개비리길‘, 즉 옛길을 따른다. 경상도 지역의 지명에 종종 등장하는 '개비리'''는 강가를 말하며 '비리'는 벼랑이란 뜻의 벼루에서 나온 사투리로 강가 벼랑을 따라 조성된 길을 의미한다. ‘남지 개비리길은 새끼를 향한 애틋한 모정(母情)이 찾아낸 가슴 뭉클한 길이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민담(民譚) 하나를 옮겨본다. 개비리길이 발견되지 않았던 먼 옛날 영아지(현재 신전리) 마을에 살던 황씨 할아버지의 어미 개가 새끼 11마리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다른 새끼들에게 밀려 어미젖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유독 약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인 용산마을로 시집간 딸이 친정에 들렀다가 병약한 새끼를 키우겠다며 시댁으로 데려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며칠 후 친정의 어미 개가 와서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미 개가 매일 젖을 주려고 산을 넘어 두 마을을 오간 것이다. 그런 일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여전히 용산마을에 나타났고, 하루에 꼭 한 번씩 새끼 개에게 젖을 먹이고 가더라는 것이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어미 개가 어느 길로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따라가 보니 눈이 없는 낙동강 절벽을 따라 다니더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높은 산 고개를 넘는 수고로움 대신 어미 개가 다니던 이 길을 이용하게 됐으며, 길의 이름 또한 '개비리'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벼랑길 아래에 꼬맹이 배 몇 척이 정박해 있다. 그래서 이곳을 영아지 나루터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아무튼 이곳은 개비리옛길의 끝이며 돌아가야 할 반환점이기도 하다.



길은 절벽 위로 나있다. ’개비리길의 들머리에서 만났던 안내판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길이라고 했다. 안내판은 또 수십 미터의 절벽 위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고도 했다. 하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걸어도 될 정도로 폭이 넓었고, 강과 맞닿는 벼랑은 서슬이 시퍼럴 정도로 높지도 않았다. 옳은 표현도 있기는 했다. 길을 걸으며 낙동강의 눈부신 풍광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개비리길은 강물이 산을 안고 돌면 같이 돌고, 휘어져 들어오면 깊숙이 함께 물러난다. 물길 따라 산과 강을 거스르지 않고 난 길이라는 얘기이다. 원래 이 길은 지금보다 산 위쪽에 있었다는데 행인들이 가파른 산길을 버거워하면서 강가로 길이 형성됐다. 덕분에 벼랑 따라 낙동강을 발아래 두고 걷는 아찔함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걷는 매력이 합쳐지는 개성 넘치는 길이 되었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걷자 야생화 쉼터가 나온다. 강을 향해 파고드는 강기슭에다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낙동강의 강줄기를 실컷 구경해보라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쉼터라기보다는 전망대라는 이름표를 달았어야 옳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야생화를 심어놓은 듯한 공터의 가에다 벤치 두어 개를 놓아두었다. ’야생화 쉼터라는 이름이 붙게 된 근거이지 싶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높게 자란 왕대들은 햇살을 몰아내고 충충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대숲 안으로 간신히 이어진 길은 길이 아니라 근근이 이어지는 흔적처럼 희미해 선뜻 들어서기가 무서울 정도다. 그래선지 탐방로는 대숲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서 나있다. 대숲의 가장자리, 낙동강과 맞닿은 강변에는 죽림쉼터란 간판을 달고 있는 팔각정이 지어져 있다. 낙동강물이 휘돌아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위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그 곁에는 하트 모형을 배치해 젊은 연인들이 좋아 할만한 포토 죤(photo zone)’으로 꾸며놓았다.





대나무를 소재로 한 여러 시설들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강바람에 못 배긴 울음소리가 그립기라도 한 듯이 대나무 대롱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았는가 하면, 눕는 의자도 서너 개 놓여 있다.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을라치면 바람에 대숲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아니 새소리까지 보태져서 들려온다. 천지간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그래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된다는 곡우(穀雨)가 나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뱃살 측정기가 아닐까 싶다. 8개의 대나무 기둥을 세우고 20(17)에서 시작해 10년 간격으로 60(23)까지, 그리고 빅 사이즈답 없음7개 공간을 만들었다. 자신의 나이에 해당되는 공간을 통과해보라는 것이다. 시험의 결과는 성공이었다. 60대인 나와 집사람은 각각 50(21)30(19)에 해당되는 공간을 너끈히 통과했기 때문이다.



대나무 쉼터를 지나자 길은 조금 더 넓어진다. 길이 자연스러워 걷기에 편하다. 길을 정갈하게 닦아놓았을 뿐 인공적으로 조성된 흔적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낙동강 쪽에다 안전용으로 밧줄난간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산길이란 게 원래는 이랬을 것이다. 뜻이 발길을 재촉하고 발길이 쌓이고 쌓여 길을 내는 것 말이다.



주변 경관에 취해 쉬엄쉬엄 걷다보니 어느덧 옹달샘 쉼터이다. 하지만 옹달샘은 눈에 띄지 않고 탐방로 옆 언덕에 화단만 덩그러니 조성되어 있을 뿐이다. <옛날 제 자식에게 젖을 물려주러 다니던 황씨 할아버지네 개가 이 길을 오가며 목을 축이던 옹달샘이 이곳에 있었다. 이후 이곳을 지나다니던 동네 사람들도 자연스레 이용하게 되었지만, 세월이 흘러 신작로가 뚫리면서 인적이 끊기자 옹달샘 또한 자연스레 메꾸어져 버렸단다.> 이런 스토리텔링(storytelling) 하나쯤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다.



탐방로는 이제 차량이 다녀도 좋을 정도로 확연히 넓어졌다. 그렇게 12분쯤 걸으면 용산정수장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도로나 다름없는 널따란 길을 따라 15분 남짓 더 걸으면 아까 트레킹을 시작했던 남지수변 억새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개비리길의 트레킹이 종료되는 것이다.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 10분이 걸렸다. 길을 잘못 들어 허비한 시간과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2시간 30분을 걸은 셈이다. ! 이 구간의 특징을 깜빡 잊을 뻔했다. 길가에 처음 보는 가로수가 쭉 늘어서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수양벚꽃이란다. 꽃은 이미 지고 없지만, 능수버들처럼 가지를 축 늘어뜨린 게 여간 운치 있는 게 아니다.



길이 6.4Km개비리길이 짧다고 생각된다면 남지철교까지 2Km 정도를 더 연장할 수 있다. 이 구간은 둑방 위로 난 도로를 따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둔치로 내려가 볼 것을 권한다. 10년 전 낙동강 제방공사로 인해 생긴 둔치인데, 관할 지자체에서 이를 정비해 수변공원이란 이름으로 탈바꿈 시켜놓았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담아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조경은 물론이고 조형미를 가미한 산책로까지 깔끔하게 내놓은 것이다. 이 산책로를 이용할 경우 눈요기까지 즐길 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길 양편으로 유채 꽃밭이 펼쳐진다. 그런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유채꽃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주도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고성의 솔섬과 완도의 청산도, 부여의 백마강변 등 전국에는 제주 못지않은 유채꽃 명소들이 즐비하다. 이곳 남지에 조성된 유채꽃밭도 그중 하나이다. 아니 그 면적이 110에 달한다니 단위면적으로는 국내 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찌나 넓은지 유채 밭을 돌아보는 순환 셔틀버스가 있을 정도라는 기사가 떴을 정도이니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게 너른 유채단지에 샛노란 꽃이 활짝 피었다고 상상해보라. 거기다 거울처럼 잔잔한 낙동강이 꽃길 가로 흐른단다. 황홀함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노란색으로 물든 들녘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어느 기사에선가는 이곳의 유채꽃 만개시기를 15일부터 20일 사이로 보았었다. 오늘이 16일이니 우리가 때를 맞춰 잘 찾아온 모양이다. 그나저나 온통 노란색으로 물든 유채 꽃밭이 낙동강의 푸른 물결과 더불어 한 폭의 대형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다.




유채꽃은 그렇게 화려하진 않다. 하지만 유채꽃의 노란 군무(群舞)는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지녔다. 아니 완상(玩賞)의 조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벚꽃과는 달리 서서히 왔다가 서서히 가기 때문이다. 축제를 보려고 온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사진 찍고 유영하면서 유채의 바다를 휘젓고 다닌다. 시원한 낙동강 강바람이 간간이 불어와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가 폐부를 파고든다. 꿀에 맛들인 벌들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꿀을 모으려고 사람들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사람들 정도는 성에 차지도 않는 모양이다.



유채 꽃밭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이면 축제장에 닿게 된다. ‘자연과 사람의 만남을 주제로 한 13회 창녕 낙동강 유채축제인데 지난 13일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7일까지 5일간 열리는 이번 축제는 군민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낙동강 용왕대제를 시작으로 열린 콘서트와 군수배 농악경연대회, 다문화가정 전통혼례식, 유채꽃 한복 패션쇼, 낙동강 가요제, 유채꽃 라디엔티어링, 미술대회 등의 특색 있는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불꽃놀이와 전국 직장인 밴드 페스티벌, 유채 가래떡 뽑기, 프러포즈 음악회, 다문화가족 노래자랑, 예술단 공연 등의 다양한 행사가 열린단다. 그나저나 행사장에는 붐비는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조차 없다. 하긴 지난해 4월 한 달에만 124만 명이 다녀갔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행사장에는 대형풍차와 초가집, 가축 등 여러 가지 조형물들을 설치해 탐방객들이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쌓도록 했다. 한반도 튤립 정원, 태극기 정원 등 이름도 예쁜 공간들도 여럿 만들어 놓았다. 쉬엄쉬엄 행사장을 둘러볼 수 있도록 원두막 쉼터 등을 곳곳에 마련해 놓았음은 물론이다. ! 깜빡 잊을 뻔했다. 자전거를 대여해서 유채꽃 단지를 둘러볼 수도 있다고 한다.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전동차도 보인다.




유채의 바다를 빠져나올 즈음이면 국가등록문화재 제145호인 남지철교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1933년 개통한 남지철교는 창녕군 남지읍과 함안군 철서면 사이의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근대식 트러스 구조의 철교(鐵橋). 길이 391m 너비 6m 높이 6m. 교각 부분의 트러스를 높이 설치해 물결치는 듯한 모습이 일품이며, 한강철교와 압록강철교에 이어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세 번째 강철 교량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다리는 6·25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9509월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 전투 과정에서 철교의 중간 부분 25m가량이 폭파됐다. 미군이 북한군의 도하를 막으려고 폭격기로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당시의 전투는 남지철교 아래의 낙동강 물이 붉게 물들었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전투의 승리로 전세가 역전돼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됐다. 전쟁이 끝난 1953년 복구돼 교량 기능을 되찾았으며, 1994년 차량 통행이 금지되기까지 60여 년간 사용됐다. 그 뒤 2007년 비슷한 모양의 새로운 남지철교가 가설돼 차량이 통행하고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의 눈엔 나란한 옛 남지철교와 새 남지철교가 헷갈릴 수도 있다. 옛 남지철교가 너무 깨끗하게 단장된 반면 새 남지철교는 더 고풍스러운 외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색이 옛 남지철교이고, 붉은색이 새 남지철교다.


고성 상족암(床足巖) 공룡길트레킹

 

산행일 : ‘18. 2. 26()

소재지 : 경남 고성군 하일면과 하이면 일원

산행코스 : 신기마을장춘교맥전포항임암마을제전마을상족암(床足巖)상족암 유람선선착장(소요시간 : 2시간)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고성의 상족암은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는 해안으로 유명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닷가에 넓게 깔린 암반과 암반 위로 솟아오른 바위 절벽들이 있어 경치 또한 아름답기 때문이다. 고성군에서는 이런 장점들을 살려 멋진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탁 트인 바다풍경과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병풍바위, 그리고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면서 조성된 주상절리 등을 볼 수 있는 멋진 산책로이다. 산책로를 따라가면 파도가 드나드는 퇴적 암반 곳곳에 공룡발자국이 눈에 띈다. 암반지대를 지나면 수 천 권의 책을 쌓아 놓은 듯한 층층 단애도 나온다. 그 중심에는 밥상다리를 닮았다는 상족암(床足巖)’이 있다. 오랜 세월 침식되어 형성된 가파른 절벽과 기암괴석의 단애로 이루어진 세계 3대 공룡유적지 중 하나이다. 산책로의 이름이 상족암공룡길로 지어진 이유이다. 참고로 이곳 고성군은 미국 콜로라도, 아르헨티나의 서부해안과 함께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꼽힌다. 천연기념물(411)로 지정된 이유이다. 이 공룡화석지는 백악기인 약 1~12천만 년 전의 공룡 흔적들을 보여주는데, 12종의 공룡 발자국과 공룡알, 공룡알 둥지, 새발자국 화석 등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상족암과 주상절리 등 자연이 빚어낸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혹시라도 어린이들과 함께 왔다면 공룡박물관도 꼭 둘러봐야 할 것이다. 단 매주 월요일은 박물관이 문을 닫는 다는 걸 잊지말아야 한다.


 

트레킹의 시작은 신기마을(고성군 하일면 춘암리)

해안누리길 공룡화석지해변길의 트레킹은 맥전포항에서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그럼 이곳 신기마을에서 맥전포항까지는 어떻게 이동하면 좋을까. 다른 산악회들은 보통 타고 온 전세버스로 이동을 시켜준다. 하지만 그런 편의제공이 없었던 우린 오가는 차량을 피해가며 도로가를 걷는 수밖에 없었다.




신기마을 안길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 걸어도 된다는 얘기이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게 시간도 훨씬 더 절약이 된다. 걷는 게 싫다면 군내버스를 기다렸다가 타고 가는 방법도 있다. 단 버스가 띄엄띄엄 다니기 때문에 시간을 맞춰야 한다는 애로점이 있다는 것은 참조해야 한다.



신기(新基) 마을은 춘암리(春岩里)에 속한 작은 단위마을이다. 하지만 그 역사는 오래인 모양이다. 엄청나게 오래 묵은 당산나무가 마을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마을을 지나면 용암포(龍岩浦)가 있는 작은 만()이 나온다. 길은 바닷가에서 끝나버린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농로(農路)를 이용해 1010번 지방도로 연결시킨다. 결과적으로 빙 돌아서 다시 지방도로 나온 셈이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걸어 나오는 길에 좌이산의 전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용암포(龍岩浦)의 원래 이름은 입암(立岩)’이라고 한다. 마을 앞 바닷가에 있는 병풍처럼 생긴 바위가 마치 서있는 것 같다는 데서 연유된 이름이란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후에야 1010번 지방도 상에 있는 장춘교에 이를 수 있었다. 춘암리(春岩里)의 또 다른 단위 마을인 장춘(長春)’에서 이름을 따왔다. 참고로 춘암이란 지명은 이 지역이 사계절 기후가 온화한 봄과 같다고 해서 봄 춘()’자와, 선바위가 있다 하여 바위 암()’자를 따서 붙였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마을이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당시 합쳐졌던 장춘(長春)과 신기(新基), 입암(立岩) 등의 마을 이름에서 두 글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지방도를 따른다. 인도(人道)가 따로 없는 도로라서 위험스럽기만 할 뿐 눈요깃거리는 하나도 없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길이라는 얘기이다. 이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터덜터덜 걷고 있는 우리들이 안쓰럽게 보였던지 맥전포항까지 태워다준다는 것이다. 고성군청 소속의 소독용으로 보이는 트럭을 몰고 가시던 분인데, 자신이 할 일을 뒤로 미룬 채로 우리의 편의를 보아주신 것이다. 글을 빌어서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려본다.



맥전포항에서는 곧장 상족암 공룡길즉 산책로로 들어선다. 들머리에 세워놓은 맥전포항 종합안내도에 음악분수대와 노래탑 등의 볼거리가 주차장 근처에 조성되어 있다고 되어있지만 현재는 가동이 중단된 걸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룡길은 깔끔하게 보이는 데크길로 시작된다. 하지만 첫 인상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 세워진 상족암 군립공원 안내도가 지도와 그림이 다 떨어진 채로 방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교체를 하지 않을 바에는 치워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맥전포(麥田浦)의 원래 이름은 보리밭개였다. 이 일대가 유독이도 보리밭이 많은 갯마을이었다는 데서 연유한 이름이란다. 그러던 것이 지명을 한문화(漢文化)하는 과정에서 맥전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산책로를 따라 잠시 걷자 군부대의 담벼락 아래서 길이 두 갈로 나뉜다. ‘공룡길은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난 길로도 한번쯤 내려가 볼 것을 권한다. 다리로 연결된 작은 바위섬, 솔섬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지나쳐버릴 게 뻔하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상족암 공룡길이라 불린다. 하이면 덕명마을부터 하일면 맥전포항까지 편도 약 4Km 구간에 걸쳐 조성되어 있는데, 상족암 주변의 해안길을 따라 데크로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청정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들의 발자국과 주상절리의 병풍바위, 층층이 쌓인 퇴적암 등을 구경할 수 있어 산책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렇다고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조금 더 진행하면 바위벼랑 위에 만들어 놓은 데크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도 솔섬이 잘 바라보이기 때문이다. 머리에 곰솔을 이고 있는 섬의 자태가 자못 빼어나다.




데크길이 끝나면 이번에는 보드라운 흙길이 나온다. 왼편에 바다를 끼고 이어지나 소나무가 꽉 들어차있어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이 지역은 창녕 조씨문중의 소유인 모양이다. 길가에 고성군수 명의로 안내판을 세워둔 걸 보면 말이다. 소유주인 창녕 조씨선암문중의 사전 승인 하에 해안길이 조성 되었으니 깨끗이 사용하자고 적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으면 병풍바위 전망대(이정표 : 상족암 1.6km/ 맥전포항 0.8km)’이다. 이 전망대는 절벽 위에서 바다를 향해 공중으로 7m 정도 나와 있어 마치 바다 위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아찔함을 준다.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바닥의 일부는 유리로 만들었다. 발아래 양옆으로 병풍바위의 주상절리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그 아래는 수정처럼 맑은 물이 넘실거린다. 물속에는 노닐고 있는 물고기까지 보인다 싶을 정도로 투명하기 짝이 없다. 고개라고 들라치면 바다 건너에 있는 상족암과 공룡박물관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다음에 만나는 곳은 입암(立岩)’ 마을이다. 마을 앞 바닷가에 있는 병풍처럼 생긴 바위가 마치 서있는 것 같다는 데서 연유된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선착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방파제와 음식점 두어 곳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마을은 정작 내륙에 들어앉아 있음이리라. 그래도 운동기구 몇 점을 갖춘 마을쉼터는 바닷가에다 만들어 놓았다.



공원으로 향하는데 바위벼랑 아래에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다가가보니 주상절리(柱狀節理)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뜨거운 용암 또는 지표 가까이까지 올라온 마그마가 냉각되면서 그 부피가 수축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질서정연하게 암체에 생긴 틈새로 인해 육각형의 긴 기둥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 기둥은 지표면에 수직으로 만들어지므로 기둥과 같은 모양을 보이는데, 이 부근에서는 3개의 암체에서 주상절리가 관찰된단다. 병풍바위나 입암(立岩)마을의 이름도 기둥모양의 주상절리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안내판까지 세워놓은 걸 보면 뒤에 보이는 바위벼랑이 주상절리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모양인데, 그 생김새는 썩 뛰어나지가 않다. 제주도의 서귀포나 경주 등지에서 보아오던 모양새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펑퍼짐한 암반(巖盤)이 왼편 바닷가에 널따랗게 펼쳐진다. 건열(乾裂, mud crack)아닐까 싶다. 건열이란 지표면에 퇴적된 점토나 실트(silt) 또는 이토(泥土, mud)가 수분이 증발하고 퇴적물이 수축되면서 나타나는 균열현상이다. 이런 건열은 이토 퇴적물에서 잘 나타나는데 빗방울 자국과 거품 자국, 척추동물의 발자국 등과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이곳 상족암 일대의 암반에서 공룡의 발자국 화석들이 발견된 원인일 것이다. 참고로 건열은 밑으로 향하여 쐐기모양으로 나타나며 이를 통해 지층의 상하판단이 가능하다.



제전마을로 가는 길은 해수욕장의 가를 따라 나있다. 리아스식 해안선을 따라 500m쯤 되는 은빛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그 뒤로 조수에 씻겨 닳을 대로 닳은 조약돌이 깔려있는 게 눈길을 끌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인도(人道)에 새겨놓은 문양이 더 눈길을 끈다. 발자국을 따라 가도록 디자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곳이 공룡발자국화석산지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제전마을은 몽돌과 은빛모래가 어우러지는 해수욕장과 함께 켜켜이 층을 이룬 수성암(水成巖, 지표면의 암석이 상온·상압에서 풍화작용으로 분해·이동되면서 지구 표면에 쌓이는 퇴적작용으로 생긴 암석)의 단애(斷崖)가 아련히 먼 시간 속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을이다. 또한 상족암군립공원공룡테마파크가 있어 유명관광지의 반열에 올린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해양수산부에서 아름다운 어촌으로 선정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장점을 살리려 했는지 오토캠핑장까지 만들어 놓았다. 잔디밭에 티라노사우루스(폭군 도마뱀, Tyrannosaurus)’의 조형물까지 만들어 놓은 걸 보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어린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몇 곳의 민박집과 식당이 있음은 물론이다.




마을 방파제로 가는 길 오른편에 절리로 이루어진 바위벼랑이 보인다. 부안의 적벽에서 보았던 형상, 즉 켜켜이 쌓아올린 시루떡의 모양으로 생긴 절리(節理, joint)’이다. 절리란 암석에 규칙적으로 생긴 금을 말하는데, 지표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암석에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이런 절리들은 일반적으로 수직적인 방향성을 갖는다. 참고로 절리는 화성암(火成岩, igneous rock)에서는 용암이 냉각할 때 생기는 수축으로 인해 생기게 되며, 퇴적암(堆積岩, sedimentary rock)이나 변성암(變成岩, metamorphic rock) 따위에서는 지각변동으로 인해 생긴다.



공룡의 놀이터는 한가롭기만 하다. 공룡들이 사라져버린 빈 공간은 이제 어부의 아낙네가 차지했다. 사위(四圍)가 모두 한가로운데 그물을 손질하는 그녀의 손길만이 바쁘다.



마을방파제를 지나면서 데크로드가 시작된다. 바다와 바위벼랑이 맞닿아 있기 때문에 절벽의 아래에다 데크로 길을 내놓은 것이다. 들머리에는 여러 개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임을 알리면서 공룡이란 무엇인지와 공룡발자국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이 발자국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지에 대해서 적어놓았다. 다시 말해 공룡화석에 대한 교육장인 셈이다. 그 외에도 발자국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놓은 안내판들이 여럿 설치되어 있으니 한번쯤은 꼭 읽어볼 일이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널따란 암반 위에 공룡의 발자국들이 또렷하다. 공룡은 몸집이 크기 때문에 어디를 걸어 다니든 발자국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옳은 추론(推論)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룡 발자국 화석은 흔치 않다. 주로 공룡이 진흙을 밟았을 때만 남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고성은 어땠을까? 과거 이곳은 거대한 호수였다고 한다. 호수나 늪지대의 진흙 위를 공룡이 걸어 다녀 발자국이 남았던 것이다. 진흙에 남겨진 발자국 위에 흙이 쌓이며 돌로 굳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땅속에 있던 돌이 지상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남해의 바닷물이 그 돌 위를 들어오고 나가며 흙을 씻어내자 마침내 공룡 발자국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무튼 이 일대에는 공룡 한 마리가 세 발자국 이상 걸은 보행렬이 250개 이상 있다고 한다. 무리 지어 있는 발자국은 초식 공룡이고, 홀로 찍혀있는 삼지창 모양의 발자국은 육식 공룡의 것일 확률이 높단다.



공룡(恐龍)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공룡은 골반 모양에 따라 파충류와 비슷한 구조의 용반류, 새와 비슷한 골반을 가진 조반류로 나뉜다. 또한 발자국에 따라 뭉툭한 삼지창 모양의 조각류, 삼지창 모양에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수각류, 뭉툭한 발가락에 타원형의 발자국을 가진 용각류로 분류한다. 참고로 공룡은 중생대 트라이아스기(Triassic Period)에 출연해 중생대 마지막인 백악기(白堊紀, Cretaceous Period)에 그 수가 최대에 달했다. 경남 고성과 전남 해남·화순·여수 등 우리나라 남쪽에서는 백악기 공룡 화석지로 유명하다. 특히 경남 고성은 군 전역에 걸쳐 약 5100여 개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나왔다고 한다. 공룡은 발자국 모양에 따라 세 분류로 나뉘는데, 고성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은 조각류가 60%, 용각류가 35%, 수각류가 5%란다. 미국 콜라라도, 아르헨티나 서부 해안과 더불어 세계 3대 공룡 화석지로 불리는 규모다. 또한 죽은 공룡의 골격 화석이 아닌, 살아있을 때 공룡이 걸어 다녔던 발자국이라니 한층 더 소중하다 하겠다.




거대한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이 바다 건너편으로 펼쳐진다. 이곳 상족암군립공원의 명물 중 하나인 병풍바위이다. 그런데 그 자태가 자못 빼어났다. 비취빛으로 물든 남해바다와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이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관광유람선 한 척이 사량도 사이로 물보라를 가르며 지나가면서 그 그림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는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모퉁이 두어 개를 돌자 저만큼에 경남 청소년수련원건물이 나타난다. 경남 도내 청소년들의 심신 단련을 위해 설립된 시설로 현재 한국스카우트 경남연맹에서 위탁운영해오고 있다. 수련원은 4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 외에도 대강당과 야외공연장, 캠프파이어장, 운동장, 족구장, 배구장, 모험개척활동장, 수상활동장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청소년 수련원 앞에는 고성 공룡테마파크라고 적힌 기둥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별다른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청소년수련원에서 갖고 있는 부대시설들을 통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공룡박물관과 공룡공원 등 이곳 상족암군립공원 일대를 아우르는 말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아무튼 수련원 너머로 공룡(恐龍)을 닮은 조형물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게 보인다. 공룡박물관 광장에 만들어놓았다는 브라키오사우루스(brachiosaurus)’ 조형물일 것이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공룡탑으로 높이가 무려 24m에 이르고 길이 34m에 너비도 8.7m나 된단다. 참고로 쥐라기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지금까지 알려진 공룡 중에서 가장 크고 긴 공룡이다.



수련원 앞의 해수욕장 역시 은빛의 고운 모래로 덮여있다. 그 뒤에 몽돌이 널려있음은 물론이다.



수련원을 지나면서 또 다시 데크로드가 이어진다. 산책로의 해안 쪽은 평탄하게 층을 이룬 퇴적암에 파도가 넘실거린다. 육지 쪽으로는 수 천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 수성암 해식애(海蝕崖)가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다.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층리라고 적혀있는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하단에는 영어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Stratification’라고 적혀있다. 학명(學名, scientific name)인가 보다. 층리(層理)란 퇴적물이 수평하게 쌓여 굳어져서 지층이나 암석이 만들어질 때 나타나는 나란한 줄무늬를 말한다. 퇴적물이 운반되어 퇴적되고 다져져서 단단한 암석으로 변한 것을 지층이라고 하는데, 지층은 각 층마다 퇴적물의 종류와 색깔, 알갱이의 크기, 퇴적 시간 등이 다르기 때문에 줄무늬, 즉 층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오른편에 보이는 바위벼랑이 층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벼랑의 아래를 따르던 데크길이 잠시 위로 오른다. 그리고 고개 위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계속해서 오르면 공룡박물관후문을 거쳐 유람선선착장으로 연결된다. 오늘 트레킹의 목적지라 할 수 있는 상족암은 데크계단을 이용해 바닷가로 내려서야 만날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서면 널따란 암반(巖盤)지역이 나타난다. 이곳이 상족암군립공원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상족암(床足巖), 즉 천연기념물 제411호로 지정된 '고성 덕명리 공룡''새발자국 화석산지'이다. 하지만 아까처럼 또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얼핏 볼 경우 바닷가 바위에 살짝 팬 구덩이에 불과하니 꼼꼼히 살펴봐야만 공룡의 발자국임을 알아 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나저나 사람들의 관심은 공룡발자국 보다는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에 쏠려있나 보다. 바닥을 살펴보는 사람들보다는 해벽동굴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이렇게 고운 풍경화가 펼쳐지는데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눈에 익은 모양의 절벽들이 해안으로 펼쳐진다. 아까 데크로드를 따라 오면서 보던 모양들이 훨씬 더 정교해졌다. 그리고 이내 부안의 적벽에서 보았던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있던 그런 모양새들을 찾아낸다. 판상절리(板狀節理, sheeting joint)란다. 절리란 암석이나 지층이 갈라지거나 쪼개지는 것을 말하는데 그 모양에 따라 주상절리와 판상절리, 방상절리(方狀節理, rectangular joint)로 나뉘게 된다. 이중 수평방향으로 발달된 절리를 판상절리라고 한다. 기둥모양으로 형성된 수직형의 절리를 주상절리, 그리고 두 방향 또는 여러 방향의 절리들이 교차하여 거대한 장방형이나 육면체로 잘리게 되는 방상절리라고 부름은 물론이다.



상족암(床足巖)은 층암단애(층층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로 이루어져 있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여간 범상스러운 게 아니다. 암벽 깊숙이 동서로 되돌아 돌며 암굴이 뚫어져 있는 것이 밥상다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족(床足)’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이다. 또한 여러 개의 다리모양 같다 하여 쌍족또는 쌍발이라고도 불린다. 높고 낮으며, 넓고 좁은 굴 안에는 기묘한 형태의 돌들이 많은 전설을 담고 있다. 태고에 선녀들이 내려와 석직기를 차려놓고 옥황상제에게 바칠 금의를 짜던 곳이 상족굴이고 선녀들이 목욕하던 곳은 선녀탕이라 불려오고 있다. 지금도 돌 베틀모양의 물형과 욕탕모양의 웅덩이가 굴 안에 존재하고 있다니 관심을 갖고 살펴볼 일이다.





해식동굴은 거의 직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동굴이 앞뒤로 뚫려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이 동굴에서는 여느 바다 사진과는 다른 사진을 찍어 볼 수 있으니 한번쯤은 꼭 시도해 볼 일이다. 이왕에 시작한 김에 동굴 촬영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동굴은 우선 빛이 매우 부족하고 장소가 한정되어 있다. 동굴사진은 대체로 입구의 윤곽을 이용한 촬영을 많이 한다. 적당한 위치에서 동굴 외각을 잡고 바깥 경치를 촬영하는 것이다. 이때 노출은 주제에 맞추고 동굴 외곽은 노출 부족을 시켜 어둡거나 검게 처리한다. 동굴 안의 모델은 실루엣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얼굴이 보이게 할 수도 있다. 얼굴을 보이게 할 때는 보조광을 이용해야 한다.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공룡박물관으로 향한다. 잠시 후 오른편에 공룡박물관으로 연결되는 후문이 나타난다. 하지만 월요일인 오늘은 전국의 모든 박물관들이 문을 닫는 날이다. 이곳 역시 문이 굳게 닫혀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5개 전시실과 영상실로 구성된 공룡박물관은 중생대 백악기(1억년 전)의 공룡 골격 진품 4, 복제품 10, 일반화석 55점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국내 최초의 공룡전문박물관으로써 공룡화석을 보다 흥미롭게 즐길 수 있도록 오비랩터(Oviraptor)와 프로토케라톱스(Protoceratops) 진품 화석을 비롯하여 클라멜리사우루스 (Klamelisaurus)와 모놀로포사우루스 (Monolophosaurus)와 같은 아시아 공룡, 그리고 세계의 다양한 공룡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박물관의 경계선을 따라 난 산책로에서 두어 번 오르내리다보면 바닷가에 내려서게 된다. 한적하기 짝이 없는 곳이나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 있었나보다. 크고 작은 돌을 이용해서 돌탑을 쌓아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의 소망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저리도 정교하게 쌓았을까 싶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덕명리(하이면 덕명리)

박물관 후문에서 20분 남짓 더 진행하자 저만큼에 덕명마을이 나타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유람선 선착장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선착장은 지금 텅 비어있다. 주민들 말로는 운행을 안 한지가 꽤 되었단다. 아까 상족암에서 보았던 유람선이 이곳에서 출발했으려니 했더니만 아니었던가 보다. 화장실을 갖춘 널따란 주차장은 물론이고 식당과 카페까지 보이는 걸 보면 한때는 꽤 번창했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아무튼 신기마을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는 2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하지만 큰 의미는 부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쉬지 않고 걷기는 했지만 중간에 트럭을 얻어 타기도 했기 때문이다.


안면도 해솔길, 6코스(샛별길)

 

여행일 : ‘18. 2. 18()

소재지 : 충남 태안군 안면읍 일원

트레킹 코스 : 황포항망재쌀썩은여전망대샛별해변병술만곰솔림리솜리조트꽃지해변(소요시간 : 3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이번엔 자연을 벗 삼아 즐겨보는 걷기 여행이다. 난이도(難易度)가 코스마다 다르다는 게 트레킹의 특징이니 재미삼아 내 자신의 체력을 테스트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마침 날씨까지 영상으로 돌아왔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태안에도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태안해안국립공원사무소에서 조성한 태안해변길인데 황홀한 풍광의 낙조(落照)와 안면송(安眠松)이 가득한 해변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코스들로 짜여있다고 한다. 굽이굽이 리아스식 해안선을 따라 곰솔 방풍림과 염전, 사구(모래언덕), 해넘이 등 지역을 대표하는 장관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태안 해안국립공원의 해안가를 따라 만들어진 태안해변길은 총 7개의 코스, 120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안면도를 돌아보는 코스는 다섯 번째 코스인 노을길’(백사장항에서 꽃지해변까지의 12Km)과 여섯 번째인 샛별길’(꽃지해변에서 황포항까지 13Km), 그리고 마지막 코스인 바람길’(황포항에서 영목항까지 17Km)이다. 오늘은 이 가운데 샛별길을 걷게 된다. 낙조의 명소인 꽃지해변과 곰솔길, 그리고 쌀썩은여전망대와 병술만 등 경관 좋은 해안들을 끼고 있다.



들머리는 황포항(태안군 안면읍 신야리 354-4)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를 빠져나와 32번 국도를 타고 태안읍까지 일단 온다. 남문교차로(태안읍 장산리)에서 좌회전하여 77번 국도를 타고 들어가면 안면도(安眠島)가 나온다. 이어서 안면읍 소재지인 승언리를 지나 조금 더 들어가다 장곡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곧이어 황포항에 이르게 된다.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원래는 해안길 5구간과 6구간의 경계인 꽃지해변에서 시작하려고 했으나 식사 등의 편의성을 감안해서 반대방향인 이곳 황포항에서 역방향(逆方向)으로 출발하게 됐다. 황포항은 무척 한적한 모습이다. 인기척은 쉬이 찾아볼 수 없고, 그저 햇볕에 말리고 있는 어구들만이 낯선 여행자를 반기고 있다. 작은 포구에 닻을 내린 어선 몇 척이 낮잠을 청하고, 그 위를 갈매기 두어 마리가 원을 그리며 활공하고 있다. 마치 샛별길 트레킹의 시작을 환영한다는 듯이 말이다.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와 날머리가 바뀐 이유이기도 하다. 트레킹을 마친 뒤에는 점심을 사먹어야 하는데, 이런 한적한 곳에서 식당을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이정표(병술만/ 영목항 16.5Km/ 버스정류장0.2Km)가 가리키고 있는 병술만 방향으로 향하면서 오늘의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정표 옆에는 이곳 황포항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황포(黃浦)는 홍수로 인해 개(갯벌)에 누런 물이 흐르고 있어 누런개라고 부르던 것이 황개, 다시 황포로 바뀌면서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해안을 따라 방조제로 설치되었고, 이로 인해 민물의 유입이 줄어들면서 황톳물의 흐름은 보기 힘들다고 한다.



이정표는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방향에다 샛별길이라 표기해 놓았다. 오늘 걷게 되는 코스가 태안해안길의 여섯 번째 코스인 샛별길이라는 얘기이다. 이왕에 나온 김에 태안해안길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1978년 우리나라에서 13번째로 지정된 태안해안국립공원은 리아스식 해안과 독특한 해양생태계가 아름다운 해상공원이다. 공원의 관리기관인 태안해안국립공원사무소에서는 이러한 이점을 살려 우리나라 서해를 대표하는 트레일 중 하나인 태안해변길을 만들었다. 원유 유출사고로 침체된 태안지역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지속적인 탐방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란다. 태안반도 최북단의 학암포에서 최남단의 영목항까지 120를 잇는데, 각 지역 특징에 따라서 바라길과 솔모랫길, 노을길, 바람길 등 7개 코스로 구분된다. 오늘은 그중 여섯 번째 코스인 샛별길(13)’을 걷게 된다. 2013년에 새롭게 개통되었는데, 인적이 뜸해서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코스로 알려져 있다.



왼편으로 널따란 갯벌이 펼쳐진다.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갯벌에서 노닐고 있는 아이들은 갯벌체험이라도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 뒤편 물이 머무르는 곳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마치 돛단배라도 되는 것처럼 둥둥 떠다닌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은 삽시도와 고대도, 장고도 등일 것이고, 그 뒤에 있는 섬들은 아마 호도와 녹도, 추도, 분점도, ··소길산도 등일 것이다.



해안길은 잠시 후 임도(林道)로 올라선다. ’태안해안길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길을 새로 낸 것이 아니라 기존의 도로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위에서 얘기했던 태안해안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태안해변길은 오늘 걷고 있는 6코스(샛별길) 외에도 같은 안면도에 있는 노을길(5코스, 백사장항~꽃지해변 12)’바람길(7코스, 황포항~영목항 17Km), 그리고 태안반도에다 바라길(1코스, 학암포신두리 12)‘소원길(2코스, 신두리만리포 22)’, ‘파도길(3코스, 만리포파도리 13)’, ‘솔모랫길(4코스, 몽산포드르니항 13)’을 만들었다. 또한 정식 코스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장애인, 노약자, 어린이, 임산부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부 태안 해변길 구간을 편하고 즐겁게 이용할 수 있도록 구성된 1004m8코스(천사길)도 운영되고 있다.



임도로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길가에 세워진 안내도 하나가 눈에 띈다. 행여나 국사봉으로 올라가는 길이라도 그려져 있을까봐 살펴보지만 위치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고 길을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삼거리에 세워놓은 이정표(쌀썩은여 뷰포인트 2.4Km/ 황포항 0.6Km)도 역시 마찬가지다. 산자락을 헤집으며 올라볼까도 생각했지만 참기로 한다. 길 찾기가 만만찮다는 누군가의 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안내판의 특징에 관한 설명을 깜빡 잊을 뻔했다. 트레킹을 시작했던 황포항에서 안면읍으로 나가는 버스의 시간표를 적어놓은 것이다. 택시를 이용할 경우 8천원이 든다는 설명까지 첨언해 두었다.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한 노력이 돋보이는 시설물이라 할 수 있겠다.



임도를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걷자 마을이 나타난다. 신야리를 구성하고 있는 작은 마을 중 하나일 것이다. ‘둘레길은 마을 앞 해안가를 따른다. 왼편으로 바다가 펼쳐지는데 아까 황포항에서 보았던 풍경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이왕에 안면도(安眠島)에 있는 둘레길이니 섬에 대한 내력이라도 좀 알아보자. ’편안할 안()‘잠잘 면()‘자를 쓰는 안면도는 글자 그대로 직역을 할 경우 편하게 잠이 들 수 있는 섬.‘이 된다. 하지만 조수가 편안히 누워 쉴 수 있다는 의미의 범조수지언식(凡鳥獸之偃息)‘이란 말도 전해지고 있다며 안면도가 숲으로 우거져 있는 자연 환경을 나타내는 지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8개 야산의 산림이 우거져 많은 새들이 깃들고 학의 무리가 서식했다는 팔학(八鶴)골의 전설과 조선시대 조정의 건축용재와 조선건조용 홍송(紅松)을 조달하는 봉산(封山)으로 관리되어 온 점을 주장의 근거로 들고 있다.



마을을 지난 해안길은 또 다시 임도로 연결된다. 이번에는 15분 정도나 걸릴 정도로 길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임도가 지겨워지기 시작할 즈음이면 사거리가 나타난다. 이정표(쌀썩은여 뷰포인트0.2Km/ 샛별해변0.7Km, 꽃지해변 9.2Km/ 망재0.5Km/ 황포항2.8Km)해변길 안내도외에도 어수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잡다한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신야2리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유어장(遊漁場, 해상낚시터)’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물론이고, 방문객들이 해서는 안 되는 행위들을 적어놓은 경고판도 세워두었다. 임도에서 금지되는 행위를 적은 안내판과 긴급구조 및 구조요청 요령을 적어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오른편 산자락에 또 다른 이정표(샛별해수욕장0.4Km/ 국사봉 정상1.2Km/ 황포항 가는 길2Km)가 세워져 있다. 생김새로 보아 국립공원관리소에서 설치한 시설물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선지 국사봉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곳이 국사봉의 들머리라는 것이다. 다녀와야 할지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발길을 돌리고 만다. 1.2Km쯤 되는 거리야 대수겠는가 마는 똑 같은 길을 왕복한다는 게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있다. 나와 다른 방향에서 산행을 시작했다면 이곳에서 산길을 타고 국사봉으로 갔다가 황포마을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황포에서 이곳까지는 임도가 대부분이라서 특별히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느니 조망이 좋은 곳으로 알려진 국사봉을 들렀다가 황포항으로 곧장 내려가는 코스를 이용하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아서이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망재 방향으로 진행하는 게 옳다. 직진하면 만나게 되는 쌀썩은여 뷰포인트(전망대)’에서도 망재를 조망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망재로 방향을 잡는 게 옳다. 망재를 둘러본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필요도 없다. 산자락을 헤집으며 난 오솔길이 쌀썩은여 전망대까지 이어주기 때문이다. 참고로 망재쌀썩은여전망대를 둘러보는 데는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잠시 후 진행방향 저만큼에 작은 섬 하나가 나타난다. 보통 때는 섬이지만 썰물로 물이 빠져나가면 육지로 변하는 양면성(兩面性)을 가진 무인도, ’망재란다. ()의 초소였다가 최근에 개방되었다는데, 해안절벽이 높은 곳은 40미터 이상이나 된단다. 해식동굴도 있다고 하지만 다가가보는 건 사양하기로 한다. 아무리 봐도 가슴에 담아둘만한 경관은 아닐 것 같아서이다.



망재의 오른편으로는 끝없이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그 바다 위에는 외도와 내파수도, 나치도 등 크고 작은 섬들 몇 개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너른 바다 때문인지 한가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다.



작은 봉우리처럼 생긴 섬, 망재를 구경한 뒤에는 쌀썩은여 전망대로 가야한다. 망재를 처음으로 볼 수 있었던 지점에 세워진 이정표(쌀썩은여 뷰포인트0.2Km/ 망재0.2Km)를 따르면 된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무장공비가 출몰하던 시기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참호를 따라 오솔길이 나있다.



잠시 후 쌀썩은여 전망대에 이른다. ‘쌀썩은여는 태안군 안면읍 신야리의 바닷물 속에 잠겨있는 암초인데 여()는 썰물 때에는 바닷물 위에 드러나고 밀물 때에는 바다에 잠기는 바위를 말한다. ‘쌀섞은여란 이름은 호남 지방의 세곡을 바닷길로 운송하던 시절, 배가 암초에 부딪혀 파선되자 싣고 있던 쌀이 물속에 유출되고 쌓여 썩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무튼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곳 안면도, 즉 안면곶(安眠串)이 우리나라 해운(海運)의 중요한 항로였다고 기록한 문헌들을 증명하는 곳이라 할 수도 있겠다.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삼남(三南)지방에서 거둔 세곡(稅穀)을 서해안의 해로를 이용해 서울로 운송하던 조운(漕運)상 거점항(據點港)으로써 중요한 위치였다는 기록 말이다. 그러다가 조운의 편의를 위해 인조 때(1645~1647년경) 판목(창기리와 남면 신온리 접경)을 굴착하여 운하를 만든 뒤로 안면곶이 섬으로 변하면서 안면도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도선(渡船)에 의해 태안 및 서산의 육지와 교통하는 불편을 겪게 되었으나, 대신 육지로부터 고립됨으로써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음을 참조한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멀리 고대도와 장고도, 삽시도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가까이에는 작은 봉우리 같은 망재와 암초가 보인다. 그런데 이름에 걸맞지 않게 암초(暗礁)의 크기가 왜소하다. 아무래도 쌀썩은여라는 이름에 얽힌 또 다른 주장이 옳은 모양이다. 세곡을 운송하던 감독관들이 쌀을 빼내 착복했는데 남은 양이 부족하자 이곳에서 일부러 배를 파선시키고 보고했다는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 말이다.



아까 망재로 들어가던 길에 만났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샛별해변으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잘 지어진 펜션들이 늘어서있는 샛별해변으로 들어선다. 이정표(꽃지해변 8.7Km/ 황포항 3.3Km)와 함께 세워진 입구의 안내판에는 해변에서의 주의사항을 적어 놓았다. 밀물시 해수에 잠기는 곳이니 반드시 물때를 확인한 후 통행하라고 적혀있다. 그 아래에는 물때를 확인할 수 있는 ARS 전화번호까지 적어놓았다. 아무래도 아까 지나왔던 망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태안해안길6코스인 샛별길이란 이름은 이곳에서 나왔다. ’샛별해안일대는 자연방파제로 바다를 막아 형성된 간척지라고 한다. 그래서 새벌‘, ’샛벌로 불리다 지금의 샛별이 되었단다. 다른 주장도 있다. 과거 이 일대가 자염(煮鹽, 바닷물을 끓여서 만든 소금)의 생산지로 새벗이라 불렸는데 새뻘이 되었고 다시 샛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란 염전에 가마를 걸고 소금을 굽는 시설을 해놓은 집인 벗집의 준말이란다. 그러니 새벗새롭게 형성된 염전이 됨은 당연하다.



그 유래야 어찌됐든 해안 풍경은 예쁘다. 샛별해수욕장의 길이는 1.5km, 모래와 자갈이 혼합된 지역으로 푸른 바닷물은 마치 동해의 해변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 바다 건너편에는 섬() 속의 섬인 외도가 자리 잡았다. 사람이 살고 있는 작은 섬이다.



꽤나 긴 제방을 걷다보면 해안길은 또 다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태안해안길을 만들면서 새로 낸 오솔길로 보이지만 또렷하게 잘 나있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거기다 더해 오솔길 곳곳에는 이정표를 겸한 표지판까지 매달아 놓았다. 전신주에 매달아놓은 이정표나 팻말처럼 땅에다 꽂아놓은 이정표 등 이번 트레킹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이정표들 가운데 하나이다.




바닷가를 따라 난 비탈길은 가끔은 경관 좋은 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펜션들이 자리 잡았다. 바닷가 모래사장이 바로 코앞이니 여름철이면 사람들로 붐빌게 분명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빠져나간 지금은 정물화의 한 부분처럼 정적 속에 잠겨있을 따름이다. 그래 아직은 추위가 물러가지 않았다.



해안을 지났다싶으면 또 다른 산자락, 이곳도 역시 길은 또렷하다.



이어서 또 다른 펜션지역이 나타난다. 이곳 역시 조망이 시원스럽다. 그래선지 외도가 바라보이는 전경이라는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바다풍경을 담은 사진을 첨부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외도와 내파수도를 파도 위에 띄우고 있는 바다가 한 폭의 풍경화로 나타나는 멋진 조망처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말이다. 참고로 외도(外島)라는 이름은 (장고도) 밖의 외딴 섬이라는 뜻으로 붙여졌다고 한다. 샛별해변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8분쯤 더 걷자 병술만에서 조금 못 미치는 곳에 전망대 하나가 마련되어 있다. 이정표(신야1리 회관 2.0Km/ 샛별해수욕장 2.4Km)에다 연방죽이라는 문패를 걸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그 옆에다 연방죽에 대한 설명을 적은 안내판까지 세워두었다. 죽밭머리 끝자락을 돌아서면,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에 갯골 사이로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사리 때만 물이 들어오고 조금 때는 물이 들어오지 않아 자연 연못이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그 연못에 연꽃이 많이 피자 방죽을 쌓게 되었는데 그것이 기원이 되어 마을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방죽은 없어지고 그 이름을 딴 마을만 남은 셈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병술만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려원종 11년인 1279년에 고려정부가 몽고와 화해하고 개경으로 수도를 옮기자 삼별초의 지휘관이었던 배중손은 개경 환도를 거부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몽고에 반하는 무인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아산만의 영흥도를 거쳐 이곳 병술만에 잠시 주둔하였다는 것이다. 둔두리 일대는 삼별초군이 둔을 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던 곳이란다. 그런 연유로 이곳을 병술만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가설(假說)이다. 그동안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겨갔다는 얘기만 들어왔기에 그 스토리가 낯설지만 어쩌겠는가. 얘기는 그저 얘기일 따름이 것을 말이다. 아무튼 삼별초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중장1리에 주둔했기 때문에 안면도 주민들은 그를 왕으로 생각하고 유왕맞이로 불렀다고 한다. 주변에는 검을 뽑았다는 발검배, 말을 기르는 계곡인 목축곡, 망을 보던 언덕 망재, 부대의 진을 친 곳이라는 둔두리, 군사훈련장인 별술안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단다. 사람들이 삼별초와 연관시키는 근거들이다.



병술만 전망대로 가는 길,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에 배 몇 척이 정박해 있다. 모래언덕 사이를 휘돌며 만들어진 물길은 자연이 만들어 낸 천혜의 포구가 되었다. 바다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니 태풍이 불어와도 끄떡없겠다.



잠시 후 줄밭머리라는 지명에 대해 설명해 놓은 안내판(이정표 : 병술만전망대 1.0Km/ 샛별해변 2.7Km)이 보인다. 옛날 간척 등 농지를 개간하는 과정에서 야생 줄(부추의 충청도 사투리)이 많이 돋아나면서 돌밭에 줄이 지천으로 널리자, ’줄밭이 좋은 바닷가 머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줄밭머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곳에서 돌칼과 돌도끼 등 신석기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얘기도 적혀있다. 그 유물들은 지금 이웃마을이랄 수 있는 고남리의 패총박물관(古南貝塚博物館, 2002년 개관)‘에 전시·보관되고 있단다. 패총이란 석기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질이 쌓여 만들어진 유적으로 그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그런 패총(貝塚)‘들이 고남 인근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발굴된 토기와 석기, 뼈 연모, 조가비 장신구, 야외 화덕자리 등의 유적과 유물들을 상설 전시하고 있는 곳이 패총박물관인 것이다. 이는 그만큼 가치 있는 유물들이 이 부근에서 많이 출토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곳 신야리(新野里)‘ 또한 그 유적지 무리() 가운데 하나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줄밭머리안내판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해변길은 소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숲으로 들자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자란 안면송들로 가득 차 있다. 안면읍 승언리와 중장리 일대에 천혜의 적송군락이 분포되어 있다고 하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인가 싶다. 아무튼 내딛는 걸음마다 솔향기와 함께 바닷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최상의 산책코스라 할 수 있겠다.



솔숲을 지나는데 바닷가에 세워진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자연이 선물해 준 화려한 꽃밭, 해당화 군락지라고 적혀있다. 이 근처 모래밭에서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는데, 5~7월이면 붉은 색의 화사한 꽃을 피워낸다는 것이다. 해당화가 만개하는 지역이 꽃지해변만이 아니었나보다. 그렇다면 이곳 병술만의 해변도 꽃지라는 이름을 얻어야 하는 게 아닐까? ‘꽃지가 본디 해변에 해당화가 많이 피어 마치 못을 이룬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니까 말이다. 그런 연유로 화지(花池)’로 불리어오다가 언제부턴가 자가 우리말 자로 변했다는 것이다.



병술만으로 들어서니 울창한 솔숲 아래에 캠핑장이 자리했다. 캠프사이트는 모두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서해에서 이처럼 운치 있는 캠핑장도 드물 것 같다. 이곳은 어촌체험마을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가족 단위의 캠핑족들 사이에 인기가 좋다고 한다. 참고로 병술만은 만() 지형 안쪽에 있던 병술안마을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병술(兵戌)’()’라는 뜻 외에도 지키다라는 의미도 품고 있다. 따라서 병사가 수자리(나라의 변방을 지킴) 한다는 병수( 兵守)‘에서 한자가 동화된 말로 추정해볼 수도 있다. 그래선지 안내판에다 고려시대 이곳에서 삼별초가 몽고군에게 항거했던 역사를 가진 호국영령의 혼이 깃든 군사요충지라고 적어놓았다.



해안가에는 이층으로 전망대를 지어놓았다. 수족관과 식탁 등의 시설이 갖춰진 걸로 보아 여름철엔 횟집으로 이용되고 있지 않나 싶다. 해안의 모래사장은 규사(硅砂)로 이루어져 있다. 유리의 원료로 쓰이는 모래이다. ‘개발지상주의가 만능이던 시절 저 모래는 채취가 허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보호가 우선이 되었다. 채취의 금지는 물론이고 해수의 침식작용으로 모래가 유실되는 것까지 신경을 쓰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전망대 뒤에 설치해놓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모래포집기가 아닐까 싶다. 파도에 휩쓸려나가는 모래를 집적시키기 위한 시설이다.



전망대에 오르니 바다 저 멀리에 있는 섬 밖의 외딴 섬외도(外島)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어렴풋하지만 수평선까지 드러나고 있으니 오늘은 무척 운이 좋은 날이라 할 수 있겠다.



해안길은 병술만을 왼편에 끼고 도는 모양새이다. 바닷물이 치고 들어와 육지 사이에 갯벌을 만든 지형을 감싸듯이 도는 것이다. 아무튼 군사요충지라는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과거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라는 얘기이다. 물 빠진 그곳엔 그저 때 묻지 않은 갯벌이 이어지고 있을 따름이다.



다소 지루한 해변길이 끝나면 꽃지로 향하는 넓으면서도 긴 제방(堤防)이 이어진다. 제방 왼편은 물이 빠져나간 너른 바다가 펼쳐지고, 오른편은 담수(潭水)가 잔잔하다. 담수 지역은 습지(濕地)처럼 변해 억새와 풀이 겨울빛을 품어 낸다. 그렇다면 바다는 무슨 빛일까? 물 빠진 바다 역시 누런 것이 겨울빛이 완연하다. 아무튼 제방에서 보면 병술만의 지형이 일목요연하게 나타난다. 천혜의 군사요충지라는 말이 실감난다. 조수가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만() 특유의 지형을 가진 이곳에다 군대를 숨겨두고 훈련시키기 좋았을 것이니 병술만(兵戌灣)이란 지명이 그럴 듯하다.



제방의 왼편으로 널따란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아니 높낮이가 제법 크니 사구(砂丘)라고 불러도 되겠다. 물론 같은 태안군(원북면)에 위치한 신두리 사구(천연기념물 제431)’나 신안군 우이도의 풍성 사구(風成砂丘)’에는 못 미치겠지만 말이다. ‘버기카(buggy car)’를 타고 모래사장을 달리는 젊은이들이 보인다. 유명 사구가 아닌 것이 젊은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의 놀이터가 되었나 보다. 각종 규제에 묶여 있는 유명 사구들이었다면 어찌 꿈이나 꿔볼 수 있었겠는가.



제방을 통과한 후, 해안가를 따라 조금 더 걷자 길은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들머리에는 아치(arch)형 문()을 만들고 이곳이 샛별길임을 알리는 문패를 걸어 놓았다. 이정표(꽃지해변 2.9Km/ 병술만 전망대 1.9Km, 황포항 9.1Km)와 안내도를 따로 세워 이곳이 어디쯤인지까지도 알려준다. 지도에 녹색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숲으로 들어선다는 얘기일 게다. 그렇다면 이곳 태안해안길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곰솔 숲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안면송(安眠松)이 가득한 능선으로 들어선다. 중간쯤에 소사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잠깐일 뿐이고, 대부분은 해송(海松)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곰솔림에서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멋진 길이다.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없다는 게 조금은 아쉽지만 잠시 후면 널따란 꽃지해안에 내려설 수 있으니 무엇이 대수이겠는가. 아무튼 산길은 두텁게 쌓인 솔잎이 노랗게 변하며 푹신한 바닥을 만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솔방울은 그 모양새가 왜 이리도 예쁜지 모르겠다. 걷는 내내 소나무 사이로 펼쳐진 바다도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를 반복한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솔향에 취하다보면 곰솔 숲을 벗어나게 된다. 인근 리조트 중 다연 으뜸인 리솜오션캐슬의 맞은편인 이곳에도 아치형 문을 세워놓았다. 이정표(꽃지해변 1.6Km/ 황포항 10.4Km)와 안내도도 빼먹지 않았다. 이제부터 길은 꽃지해변을 따라 나있다. 주변에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고 해서 '꽃지'라는 지명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해변이다.



드디어 트레킹이 끝나가는 모양이다. 오늘 트레킹의 날머리가 꽃지해변에 위치한 방포항이기 때문이다. 이곳 리솜오션캐슬에서 방포항까지는 1.6Km, 해안도로를 따라도 되고, 만일 아스팔트 도로가 삭막하다고 생각된다면 모래사장을 걸으면 될 일이다. 마침 모래사장이 단단하니 걷는데 아무런 불편도 없다. 이 모래사장은 여름철엔 해수욕장으로 변한다. 그것도 안면도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이다. 넓은 백사장과 완만한 수심, 맑고 깨끗한 바닷물, 알맞은 수온과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여름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꽃지해수욕장은 예쁜 이름만큼이나 주변 경관과 잘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길이 3.2, 400m에 달하는 넓은 해변의 백사장은 규사(硅砂)로 되어 있으며, 해변의 경사가 완만하고 물빛이 깨끗하여 아름다운 해변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해안가에 나란히 서있는 할미·할아비 바위가 가장 우세한 경관요소를 이룬다. 바닷물이 빠져 할미·할아비 바위와 육지가 연결되는 때에는 멋진 산책코스가 되기도 하는데, 내륙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찾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다.



모래사장 위를 17분 정도 걷자 할미·할아비 바위앞에 이른다. 충남 태안 하면 안면도, 안면도 하면 '꽃지해변'을 먼저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그만큼 즐길거리와 볼거리, 편의시설 등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꽃지해변이란 예쁜 이름도 호기심을 자아내지만 꽃지가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해변에 우뚝 솟은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 때문이다. 두 바위의 사이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낙조도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이 바위들에는 애달픈 설화(說話)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신라 흥덕왕 때인 838년 해상왕 장보고는 안면도에도 기지를 두었는데 기지사령관이었던 승언과 아내 미도는 부부 금실이 유난히 좋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승언장군이 출정을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미도가 죽어서 할미바위가 되었단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할미바위 옆에 솟아오른 바위가 할아비바위로 불리게 됐음은 물론이다.



할미·할아비 바위2009년에 명승 제69호로 지정되었다. 이 바위는 만조 시에는 섬이 되고, 간조 시에는 육지와 연결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경관을 보여준다. 이곳은 태안팔경 중의 하나이며, 변산의 채석강, 강화의 석모도와 함께 서해의 3대 낙조로 꼽히는 명소이다.



할미바위의 위에는 키 작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다. 누군가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일부러 심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묘한 곳에 자리 잡았다. 언젠가 들렀던 분재전시장(盆栽展示場)에서 만났던 어느 작품을 쏙 빼다 닮았다. 그만큼 기이하게 생겼다는 얘기이다.



할아비바위는 흙으로 이루진 것이 바위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이다. 그래선지 섬에는 소나무와 곰솔들이 자라고 있다.



썰물 때면 두 바위까지 바닷길이 열려 산책이 가능하다. 게나 조개, 해초 등을 직접 잡거나 채취해 볼 수 있는 멋진 코스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들면 모두가 다 동심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손길과 발길을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할미·할아비 바위주변 갯바위는 굴 껍질들이 다닥다닥 들어붙어 있다. 바위에 빈틈없이 들러붙은 모습이 신기하다 못해 경이롭다. 어쩌면 굴이 쌓이고 쌓여 화석이 되고 바위를 형성한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런 굴 껍질을 모아 누군가는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기까지 했다. ‘할아비바위의 비탈에다 끈에 뀌거나 고사목(枯死木)의 가지에 꽂아놓았는데 그게 숫제 예술작품에 못지않아 보이는 것이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방포항(안면읍 승언리)

할미·할아비 바위를 둘러보고 난 다음, ‘꽃다리를 건너면서 오늘 트레킹이 종료된다. 이 다리는 꽃지해안과 방포항 사이를 잇고 있는데 꽃지해변의 일몰(日沒)을 구경할 수 있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 50분을 걸었다. 사진을 찍느라 멈칫거린 것 외에는 쉬지 않고 걸었으니 오롯이 걷는 데만 걸린 시간이다. 물론 할미·할아비 바위를 둘러보는 시간은 뺐으니 참조한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바닷가까지 물이 들어와 있다. 내륙의 산처럼 보이던 할미·할아비 바위는 이제 외딴 섬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 자태가 참으로 아름답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우리나라의 3대 낙조로 손꼽히는 할미·할아비 바위의 일몰(日沒)을 감상할 수 있겠지만 이젠 돌아갈 시간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에 맞춰 서울에 도착해야 하니 말이다.


한탄강 얼음 트레킹’ 2구간(고석정에서 순담계곡까지)

 

산행일 : ‘18. 1. 30(화)

소재지 : 경기도 철원군 동송읍과 갈말읍 일원

산행코스 : 고석정부교순담계곡(소요시간 : 50)

 

함께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한탄강은 북한의 평강에서 발원한 수계(水系)가 철원, 포천, 연천을 거쳐 임진강에 다다르는 전장 110km의 큰 강이다. 이 강은 27만 년 전 신생대(新生代) 때 북한 평강 서쪽 5km 지점에 위치한 오리산(452.2m)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 생성된 국내 유일의 화산강(火山江)’이다. U자형 계곡으로 거센 물결과 바람이 만든 현무암 협곡과 30~50m의 수직절벽으로 이뤄졌다. 덕분에 송대소의 주상절리와 직탕폭포 고석정, 순담계곡 등 곳곳에 수많은 명소들을 만들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을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고석정에서 순담계곡까지 이어지는 계곡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길은 물살이 세고 깊은 탓에 여름철에도 통행이 불가능한 금단(禁斷)의 길이었다. 그 길이 이번 겨울에 처음으로 열렸다. ‘한탄강 얼음트레킹축제를 위해 물길에다 부교(浮橋)를 가설(假設)한 것이다. 덕분에 여름철 래프팅을 즐기며 스치거나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던, 억겁의 시간이 빚은 자연 예술을 이번 겨울에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석정으로 들어선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한탄강 물길의 위로 섶다리가 하나 놓여있다. ‘섶다리는 경북 청송 땅에 살던 청송 심씨문중에서 1428(세종 10)에 최초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청송 심씨시조묘(始祖墓)가 덕리(청송읍)의 보광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마로 인해 불어난 용전천 강물 때문에 혹시라도 제사(祭祀)를 지내려고 온 자손들이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걱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섶나무(잎나무와 풋나무 등)를 엮어 만들었다는 이 다리는 한때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1996년에 청송군에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복원하면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바 있다. 아무튼 이 복원사업은 꽤나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았고, 이를 본 전국의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섶다리를 놓았다. 이곳 철원군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다리에 올라서면 강 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고석(孤石) 바위와 건너편 언덕에 걸터앉은 고석정 정자(亭子)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그렇다. 그동안 사진에서 보아오던 고석정의 풍경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섶다리는 바로 이런 풍경들을 놓치지 말라고 놓았던 모양이다. 참고로 고석정(孤石亭)은 철원팔경 중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로 꼽힌다. 한탄강 한복판에 치솟은 10여 미터 높이의 거대한 기암(奇巖)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양쪽으로는 한탄강물이 휘돌아 흐른다. 여기에 신라 진평왕 때 축조된 정자(亭子)와 고석바위 주변의 계곡을 통틀어 고석정이라 한다. 하지만 고석정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조선시대 명종 때 임꺽정(林巨正, ?-1562)의 배경지로 알려지면서부터이다.



맞은편 언덕에 정자(亭子) 하나가 마치 제비집처럼 걸터앉아 있다. 그동안 드라마나 다큐, 또는 사진에서 자주 접하던 고석정(孤石亭)이다.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이 찾아와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그 외에 고려 승려 무외(無畏)의 고석정기와 김량경의 시() 등에서도 고석정이 나타난다. 정자는 고석바위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난간에 기대어서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다보면 누구라도 시 한수는 절로 읊게 될 것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직접 올라가보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작년에 이미 흥얼거려 보았었기 때문이다. 원할 경우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되지 않겠는가. 참고로 지금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71년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다. 19711216일 강원도의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정자의 앞, 강의 한가운데에는 20m 높이로 우뚝 솟은 화강암 봉우리가 그 빼어난 자태를 한껏 자랑하고 있다. 거대한 화강암이 층층이 쌓인 바위와 그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 군락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고고하다. 이곳 고석정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고석바위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적 임꺽정이 저 기암(奇巖)의 큰 구멍 안에 숨어 지냈다고 하는데, 고석바위의 정상에는 성지(聖地)와 도력(道力)이라는 글자, 그리고 구멍 안의 벽면에는 유명대(有名坮)와 본읍금만(本邑金萬)이라는 글자가 음각(陰刻)되어 있다고 한다. 건너편 벼랑에는 임꺽정이 웅거(雄據)했다는 석성(石城)의 흔적도 남아있단다.



고석정 부근은 임꺽정이 활동했던 무대로 알려져 있다. 임꺽정은 황해 봉산에서 갈대를 꺾어 고리를 만드는 고리백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황해 일원에는 왕실과 명문거족들 소유의 토지가 많았는데 조선 중기부터 대대적인 개간사업이 진행되었다. 개간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음은 당연했을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도 황해도 개간사업에 대한 백성들의 고통과 불만이 상세하게 묘사되니 참조한다. 아무튼 임꺽정은 생계 터전인 갈대밭이 개간되어 더 이상 고리백정 노릇조차 할 수 없게 되자 그 참담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황해도와 경기도 경계에 있는 재약산 청석골로 들어가 화적패가 된다.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열어 약탈물들을 인근 백성들에게 나눠주면서 민심(民心)을 얻은 임꺽정은 점차 세력을 키워 반란군(叛亂軍)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역사학자들이 이 사태를 임꺽정의 난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끝내는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던 남치근 장군이 지휘하는 정예 부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측근이었던 서림의 밀고로 체포되어 참수(斬首)가 되었지만, 민초(民草)들의 가슴에는 영웅으로 남아있다. 영웅에 대한 민초들의 기대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모양이다.



젊은 연인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드나들었을 나루터는 현재 텅 비어있다. 고석정의 명물인 통통배가 부지런히 드나들었으련만 강물이 얼어붙었으니 배가 움직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고석바위 앞에도 얼음폭포가 만들어져 있다. 역시 강 건너 산자락이다. ’메인 행사장에서 보았던 것보다 높이는 다소 낮아졌지만 단()을 둘로 나눔으로써 조형미(造形美)를 더했다. 한결 더 아름다워졌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게다. 그 누가 이렇게 뛰어난 포토죤(photo zone)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강가에 만들어놓은 부교(浮橋)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저런 부교는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길어봤자 50m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곳 고석정에서 순담계곡으로 이어지는 강가에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것이다. 부교의 공식 명칭은 한탄강 물윗길’, ‘한탄강의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부교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하긴 강물이 꽁꽁 얼어붙으면서 얼음길을 내놓았으니 걷기에 불편한 부교를 일부러 이용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원군청 관계자들에게는 고마움을 전해본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고석정에서 순담계곡까지의 트레킹 구간이 올해부터 새로이 열렸기 때문이다.



순담계곡(蓴潭溪谷)으로 향한다. 이 구간은 올해 새로 얼음트레킹 코스에 포함됐다. 물살이 빠르고 경관이 수려해 래프팅 명소로 꼽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물살에 닳은 웅장한 화강암 바위들이 계곡 양편으로 포진하고 있어 상류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꽁꽁 얼어붙은 강물 위를 걸으며 겨울 정취 속으로, 자연의 시간으로 천천히 빠져든다. 참고로 순담계곡(蓴潭溪谷)은 작게는 한탄강펜션이 있는 군탄리 일원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고석정(孤石亭)까지의 구간을 통칭하기도 하는데, 한탄강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알려져 있다.



고석정 일대는 양 옆이 천 길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바위 협곡(峽谷)이다.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白堊紀, Cretaceous Period)에 암석을 뚫고 들어온 마그마(magma)에 의해 만들어진 화강암이 고석 주변의 기반암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 부근은 용암대지 형성 이전의 원지형(原地形)을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지형·지질 유산이란다.




화산암이 빚어놓은 특이한 문양(文樣)이 눈에 띈다. 여수 앞바다에 위치한 사도(沙島)‘에서 보았던 용미암(龍尾岩)‘을 떠올리게 만드는 문양이다. 문양의 생김새가 용()의 꼬리와 흡사하다는 그 바위 말이다. 용미암이 있던 곳은 용암(熔岩, lava)이 바다로 흘러내리다 급격하게 식으면서 형성된 지형이라고 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 고석정 일대도 역시 화산암지대이다. 사도와 같은 지형인 것이다. 그래서 같은 문양이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강의 양 옆이 수직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일대는 철원용암대지의 일부로서 추가령열곡(楸哥嶺裂谷)을 따라 분출한 용암이 평평한 대지를 만들었다.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이 그 용암대지를 침식(侵蝕)하며 흐른다. 이 용암대지는 신생대 말에 해당하는 제4기에 평강에서 남서쪽으로 3km에 위치한 오리산(454m)을 중심으로 분출한 현무암이 구조선을 따라 분출되어 이른바 철원ㆍ평강 용암대지를 형성하였으며, 이 용암은 열곡을 따라 북쪽으로는 남대천을 따라 북한의 강원도 고산군 북부일대까지, 남쪽으로는 한탄강과 임진강을 따라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일대까지 흘러내렸다. 이후 침식력이 작용하면서 용암대지를 수직으로 계곡을 형성하며 깎아내렸기 때문에 한탄강은 깊이 40m에 이르는 협곡을 형성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부근의 좁은 골짜기를 미국의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구간에도 역시 농업기반시설인 양수장(揚水場)이 보인다. 하지만 벽화(壁畫)가 그려져 있던 아까의 것들과는 천양지차의 외관(外觀)이다.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어야할 그림들은 보이지 않고, 그저 볼썽사나운 건물 하나만이 덩그러니 서있는 것이다. 전편에서 얘기했던 리모델링(remodeling) 사업에 포함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강을 건너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비록 임시로 만들었지만 철재(鐵材)로 단단하게 만들어 튼튼하기 그지없다.




강변의 바위 위에 수백, 아니 수천 개도 넘을 것 같은 돌탑(石塔)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작은 돌들을 쌓아올렸는데, 작은 것은 두세 개, 개중에는 십여 개나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도 보인다. 얼마나 소망이 간절했으면 저리도 많이 쌓았을까. 그 간절함이 전이(轉移)라도 되었는지 내 마음 또한 숙연해진다. 그리고 나 또한 두어 개의 돌을 쌓아 올려본다. 내 작은 소망을 담아서 말이다.




조금 묘하게 생긴 돌들도 보인다. 제주도에서나 볼법한 구멍이 숭숭 뚫린 새까만 현무암(玄武岩, basalt)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다. 현무암은 화산과 마그마(magma)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화성암(火成巖)에 속한다. 검은색 또는 회색으로 알갱이의 크기가 매우 작으며 표면이 매우 거칠거칠하다. 또한 겉 표면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있다. 화산이 분출할 때 가스 성분이 빠져나간 자리이다. 가스가 빠져나간 자리를 다른 마그마가 메우기도 전에 굳어 버리기 때문에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아무튼 이곳 한탄강 일대는 화산활동이 있었던 곳이라 돌하루방을 만드는 제주도의 화산석이 강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하지만 제주도의 현무암이 화산재인 것과 달리 이곳 철원은 용암이 바로 굳은 것이라 훨씬 무겁고, 철 성분이 포함되어 불그스름한 빛깔을 띤다는 것을 참조한다.



이제 길은 강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있다. 강폭이 좁아지면서 물살이 빨라지자 맹추위에도 불구하고 강물이 얼어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어떠한 추위에도 얼지 않은 곳인지도 모르겠다. 화천군청에서 강물 쪽으로의 접근을 막기 위해 애초부터 ()을 쳐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강가의 바위들이 눈요기로 삼아도 좋을 만큼 예뻐지기 시작한다. 화산이 만들어낸 화강암(花崗岩, granite)들이다. 간간이 눈에 띄던 현무암들은 언제부턴가 사라졌고 이젠 화강암 천지가 되어버렸다. 화강암과 현무암 모두 화산활동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암석이니 특이할 게 뭐가 있겠는가마는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다른 모양이다. 검은 표면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는 현무암과는 달리 화강암은 대체로 밝은 색깔이며 표면이 매끈한 편이다. 그러다보니 기괴한 모양의 바위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이곳 순담계곡 주변을 절경으로 꼽는 이유일 것이다.




가장자리로도 길을 낼 수 없는 곳에는 부교(浮橋)를 설치해 놓았다. 양안(兩岸)이 모두 날카로운 절벽으로 이루어졌다. 강폭이 좁고 깊은 협곡을 이루니 물의 낙차가 크며 물살이 셀게 분명하다. 그러니 소()와 연(), ()이 곳곳에 널려있을 것이다. 이곳 순담계곡은 여름철에도 트레킹을 할 수가 없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다. 이렇게 발붙일 곳도 없는 곳을 어떻게 지나다닐 수 있겠는가.






얼어붙은 강물의 위를 걷게 되는 곳도 가끔 나온다. 이곳도 역시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다. 하지만 절벽이나 바위에 가까운 곳, 물살이 센 곳, 숨구멍 주변은 얼음 두께가 얇은 경우가 많다. 그런 곳은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행여 그런 곳이 나올라치면 철원군에서 금줄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결빙 상태를 못 믿겠다면 한 사람씩 천천히 지나가는 것이 원칙이다. 가능하면 여러 사람들이 다닌 흔적을 찾아 발을 디디도록 한다.




한탄강은 오래전 화산 분출로 인해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이다. 골짜기를 메우며 흐른 용암이 세월이 지나면서 강물에 침식되어 기묘한 풍광을 만들어냈다. 수직 절벽으로 이루어진 협곡 속에 갇힌 강줄기의 속에는 화강암과 현무암이 속살을 드러내며 숨어 있다. 트레킹 길은 그 속살 사이를 헤집으며 나있다. 평소 가까이하기 힘든 절묘한 강변 풍광을 바로 앞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길을 내놓은 것이다. 한탄강 얼음트레킹이 드러내놓고 자랑해도 괜찮을 매력이 아닐까 싶다.




강가 암반(巖盤) 위에 한탄강댐 No 603’이라고 쓰인 지표석이 세워져 있다. ‘한탄강 댐은 임진강 하류지역의 수해방지를 위해 쌓아올린 길이 705m에 높이가 85m인 홍수조절용 댐(dam)이다. 한탄강의 양안(兩岸)인 연천군 연천읍 고문리와 포천시 창수면 신흥리를 둑을 쌓아 연결시켰다. 댐이 만수위(滿水位)를 보여도 이곳까지는 물길이 미치지 못하는데도 왜 이곳에다 세워놓았을까. 근처 어딘가에 물높이 등 강물의 상황을 측정할 수 있는 시설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기묘묘한 모양새의 바위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상류와 같이 주상절리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암석이 뒤섞여 침식된 절벽의 모습이 장관이다. 강물이 깎아낸 다양한 형상의 바위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바위구경에 시간을 빼앗기다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순담계곡(蓴潭溪谷)이 나타난다. 좁은 의미의 순담계곡인데, 한탄강 물줄기가 이룬 계곡 중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곳이다. 기기묘묘한 바위와 깎아내린 듯한 벼랑, 맑은 물의 소()와 담(), 천연의 하얀 모래밭이 어우러져 경치가 뛰어나다. ‘순담(蓴潭)’이란 조선 정조 때 김관주가 거문고 모양의 연못을 파고서 제천 의림지에서 구해온 순이라는 약초(蓴藥草 : 순채蓴菜)’를 이 연못에서 길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트레킹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한탄강펜션이 보인다. 웬만한 절벽보다도 더 높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다 3층짜리 건물을 얹어놓았다.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지며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의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건물의 옆에는 몽골텐트 몇 동이 지어져 있다. ‘글램핑(glamping)’ 시설이 아닐까 싶다. 글램핑이란 화려하다(glamorous)와 캠핑(camping)의 합성어로, 고가의 장비나 서비스가 포함된 캠핑을 뜻하는 신조어이다. 전통적인 캠핑과는 달리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편의시설과 서비스를 즐길 수 있다고 보면 되겠다. 경관이 뛰어난 바닷가나 숲 등에 텐트를 설치하고 야영객들에게 대여하는데, 순담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다 텐트를 쳐놓은 모양이다.



트레킹이 끝나는 순담계곡은 바위 사이를 급하게 흐르던 물살이 강이 넓어지며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뽀얗게 닳은 바위가 주위를 감싸고 있어 풍광이 넓고도 아늑하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이 천렵을 즐기거나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런 점이 부담되었던지 건너편 강가에다 물높이를 재는 막대를 세워놓았다. 사람들이 많이 찾다보니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을 게다.



트레킹을 끝내고 한탄강을 벗어나려면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한탄강이 지표면(地表面) 아래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평지에서 갑자기 수직으로 툭 내려앉았기 때문에 지표면에서 20~30m쯤 내려서야 물줄기와 만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제방(堤防)이 없으니 다리를 지날 때가 아니면 가까이서도 강이 있으리라 짐작하기 어려운 지형이다. 이곳 철원평야가 화산활동이 만들어낸 특이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한탄강은 오리산의 화산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진 현무암 사이로 물이 스며들면서 틈이 커지고, 거기에 물이 굽이쳐 흐르면서 만들어진 강이다. 빠른 물살에 바위가 깎이고 파여 좁고 깊은 협곡과 수직의 절벽이 형성됐다.



트레킹의 마무리는 순담계곡 주차장

길에 올라서니 한탄강 글램핑이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다양한 편의시설과 서비스를 갖춘 고급스러운 캠핑을 뜻하는 말이다. 올라오는 도중에는 래프팅연합회간판을 걸고 있는 건물도 보였었다. 그만큼 래프팅(rafting)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숙박시설과 간이음식점, 주차장 등의 편의시설도 함께 늘었을 것이다. 오지(奧地)를 이미 벗어나 유원지로 변해있을 거라는 얘기이다. 아무튼 도로를 따라 잠시 걷다가 길가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서면 화장실이 따린 널따란 순담계곡 주차장을 만나게 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트레킹을 마무리 지으면서 한탄강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짚어본다. 한탄강은 '크다넓다높다'는 뜻의 '()''여울'의 뜻인 '()'이 조합된 순수한 우리말이며, 이를 한자로 음차(音叉)한 것이다. 625 전쟁 중 다리가 끊겨 후퇴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탄하며 죽었다'고 해서 불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냥 흘려 넘겨버려도 괜찮다는 얘기이다.



한탄강 얼음트레킹을 마치고 난 뒤에는 구철원에 있는 노동당사로 이동했다. ‘소이산에 올라갔다 오라는 것이다. 서울에서 가깝다보니 시간이 남아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노동당사 주변을 둘러보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다. 작년에 이미 소이산을 올라봤기 때문이다. 참골 이곳 노동당사를 기점으로 해서 북쪽방향으로 철원경찰서, 도립병원, 철원군청, 철원공립보통학교, 철원역에 이르는 3km의 거리는 일제강점기 철원의 중심가였다. 경원선 기찻길이 생기고 금강산 전기철도가 건설되면서 철원군은 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었고 각종 농수산물의 집산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6.25전쟁은 인구 2만의 철원읍 시가지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조차 모두 떠나게 만들어 버렸다.



노동당사는 1946년 공산치하에서 지역주민들의 강제 동원과 모금에 의하여 완공된 지상 3층의 철근이 들어가지 않은 콘크리트건축물이다. 1946년 연건평 580평으로 건축되었는데, 성금이란 명목으로 하나의 리()마다 백미 200가마씩의 자금과 인력 또는 장비를 동원시켰다고 한다. 당시 이곳은 러시아의 영향을 받는 북한정권의 관할 아래 있어서 많은 건축물들이 러시아의 기술적 지원과 러시아가 추구하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realism) 건축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노동당사 역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건축적 특징과 시대성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언덕을 이용한 기단의 설정과 대칭적 평면, 비례가 정돈된 입면의 사용으로 공산당사로서의 권위를 표현하고 있다. 전쟁 중 내부 벽체가 대부분 파괴 되었으나 외부의 형태가 남아 있어 원래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일부 구조체에서 철근 콘크리트의 사용과 벽식 구조의 혼용, 화강석과 콘크리트, 벽돌 및 목재의 혼용은 당시 건축의 일면을 엿보게 하고 있다. 현재 이 건물은 근대건축문화재 제22호로 등록되어 있다. 분단의 비극과 전쟁의 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건물 외벽의 포탄과 총탄 자국이 한국전쟁과 민족 분단의 현실을 떠오르게 한다.




노동당사를 둘러보고 난 뒤에도 시간이 남기에 도로로 나가본다. 길가에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해발 362m의 소이산은 노동당사 맞은편에 있는 아담한 산이다. 지뢰밭과 민통선으로 60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2012년에야 일반에게 개방됐다. 이때 만들어진 게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다. 지뢰꽃길(1.3km)과 생태숲길(2.7km) 그리고 봉수대오름길(0.8km)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정상에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철원평야가 시원스레 펼쳐지기 때문이다. 문득 작년에 느꼈던 감흥이 떠올라 그때 적었던 글을 잠시 옮겨본다. <철원평야는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과 그의 아들 세종, 손자 문종이 자주 찾던 사냥터였다. 사냥이 끝나면 신하들과 인근지방 관료들을 임진강가의 정자 고석정(孤石亭)에 초대하여 잡은 동물과 술을 베풀며 위무했다고 전한다. 저 멀리로는 평강고원도 조망된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내의 삼자매봉과 그 뒤로 백마고지가 보인다. 산명호(山明湖) 뒤로는 피의능선이 나타나고 더 멀리로는 김일성고지(고암산)와 낙타고지 등이 희미하게 조망되고 있다.>



또 다른 안내판도 보인다. 옆에 세워져있는 네모난 돌기둥, 구 철원군 도로원표를 설명하고 있는데, 도로원표(道路元標)란 도로의 기점(起點)과 종점(終點) 또는 경과지(經過地)를 표시한 것이다. 당시 이곳 철원이 어느 정도로 번화했던 곳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는 시설물이지 않을까 싶다. 도로원표가 도청·시청·군청 등 행정의 중심지나 교통의 중심지 또는 역사·문화적 중심지에 설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맞다. 옛날 이곳은 농축산물이 모이고 경원선을 통하여 금강산 관광객이 북적대던 곳이었다. ‘철원군지(鐵原郡誌)’에 실려 있는 1930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그 당시 소이산 주변으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방 때만 해도 철원읍의 인구는 8만 명이나 되었고, 은행 2개소와 도립병원까지 있었단다. 농산물 검역소 등 과거의 추억들은 근대문화유적으로 남았다. 하지만 농가와 논밭의 상당수는 습지와 숲으로 바뀌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고려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의 싯귀(詩句)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그건 그렇고 도로원표에는 평강 16.8Km, 김화 28.5Km, 원산 181.6Km, 평양 215.1Km, 이천 51.4Km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포천은 총탄 자국으로 인해 숫자 파악이 불가능하다. 남북분단이 만들어낸 한국전쟁의 아픈 추억이 아닐까 싶다.


한탄강 얼음 트레킹’ 1구간(직탕폭포에서 고석정까지)

 

산행일 : ‘18. 1. 30(화)

소재지 : 경기도 철원군 동송읍과 갈말읍 일원

산행코스 : 직탕폭포태봉대교송대소얼음축제장승일교고석정(소요시간 : 2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한탄강은 은하수 한()’자에 여울 탄()’자를 써서 우리말로 큰 여울이라는 뜻이다. 200~1만 년 전 10여 차례 이어진 오리산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철원 일대를 평평하게 뒤덮었다. 용암이 굳어진 현무암 사이로 물이 스며들면서 틈이 커지고, 거기에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게 한탄강이다. 빠른 물살에 바위가 깎이고 파여 좁고 깊은 협곡과 주상절리, 수직 절벽 등이 형성됐다. 한마디로 아름답다는 얘기이다. 철원군에서는 이런 장점을 살려 특성에 맞는 축제(祝祭)를 만들어냈다. 바로 철원 한탄강 얼음트레킹이다. 태봉대교를 출발해 송대소 주상절리와 마당바위를 거친 후, 승일교와 고석정, 순담계곡 등을 둘러보는 코스로 짜여 있어, 신비로운 풍광을 만나게 됨은 물론이고, 축제장에 들러 신나는 겨울 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특히 거센 물살에 막혀 다른 계절에는 볼 수 없는 한탄강의 진면목을 마주할 수 있다. 여행객들의 발길을 유혹하는 이유이다.


 

트레킹의 시작은 금비펜션 주차장(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393-57)

43번 국도를 타고 철원군 동송읍까지 온다. 이평사거리(동송읍 이평리)에서 좌회전하여 이평로를 타고가다 오덕교를 건너면 오덕사거리(동송읍 오덕리)이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463번 지방도로를 타다가 장흥3를 지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곧이어 금비펜션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축제기간(120일부터 28일까지 9일간) 동안 축제 참가자들에게 개방하고 있는 모양이다.



트레킹은 첨부된 지도와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점심상을 차려야만 하는 산악회의 여건상 대형버스를 댈만한 곳이 순담계곡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주차장을 빠져나오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한탄강으로 향한다. 볼에 스쳐가는 바람이 차다. 아니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춥다. 트레킹을 함께 가자는 내 제안에 친구 형우군은 이곳의 추위 때문에 싫다고 했다. 이곳에서 군대생활을 했기에 그 추위만 생각하면 지금도 진저리가 쳐진다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궁예가 망한 이유를 아느냐고 물어왔다.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의 수도가 바로 이곳 철원이었는데, 추위에 떨며 눈을 치우다 화가 난 왕건과 그 부하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우스갯소리에 불과하겠지만 그만큼 이곳의 추위가 지독하다는 방증(傍證)이 아닐까 싶다. 불침번을 서다보니 온도계의 수은주가 빨간 점만 보이더라니, 야외에서 소변을 보았더니 금방 노란 빙판이 되더라는 얘기들도 이곳 철원에서 근무한 예비군들 사이에 회자(膾炙)되던 얘기들이다.



한탄강에 내려서자 2m 조금 넘어 보이는 얼음벽이 나타난다. 직탕폭포(直湯瀑布)이다. 직탄폭포(直灘瀑布)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으니 참조한다. 갑자기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문득 한국의 나이아가라폭포라는 누군가의 표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했다. 고작 이 정도를 갖고 나이아가라폭포에 견주다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공의 물막이가 아닌 자연스럽게 형성된 단애(斷崖)에서 물이 떨어져 내린다는 점이다. 참고로 이곳 직탕폭포는 여름철 수량이 많을 때는 강폭과 넓이가 같은 아름다운 폭포를 볼 수 있고, 갈수기(渴水期)엔 강바닥의 주상절리가 선명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닮은 점이 있기는 하다. 밑으로 긴 다른 여느 폭포들과는 달리 이 폭포는 옆으로 길기 때문이다. 높이는 3m에 불과하지만 너비는 80m에 이르는 것이다. 나이아가라폭포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옆으로 퍼진 게 아니겠는가. 아무튼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형태의 ''자형 폭포가 아닐까 싶다. 거기다 거대하지는 않지만 폭포가 만들어내는 경치 또한 나무랄 데가 없다. 떨어지는 물줄기가 얼어붙으면서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긴 아무 이유 없이 철원 8가운데 하나로 뽑아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쩡쩡거리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물이 얼면 부피가 늘어난다.’는 것쯤은 초등학생도 아는 진리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수면(水面)이 넓은 강이나 호수는 이 늘어나는 부피를 견디지 못해 얼음에 금이 가게 된다. 이때 쩡쩡거리는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안심하고 얼음의 위를 걸어도 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집사람은 내 설명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얼음이 녹는 소리라면서 소리가 날 때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쭈그리고 앉는 것이 아닌가. 올해는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는 공식이 무너져 버렸을 정도로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오늘만 해도 영하 20, 이런 추위에서는 얼음 위에서 널을 뛴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태봉대교로 향한다. 물론 꽁꽁 얼어붙은 강물의 위를 걷는다. 만일 빙질(氷質)까지도 투명했더라면 예수님이 갈릴리호수에서 행했다는 기적을 흉내내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집사람처럼 겁을 집어먹은 사람들이 많았던지 사람들이 걸어간 자국들이 모여 아예 길이 되어 버렸다. 얼음이 만들어놓은 숨구멍만 피한다면 온 빙판을 다 길로 삼아도 될 텐데 말이다.



길을 나서자마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태봉대교(泰封大橋)‘가 나타난다. 아치형으로 생긴 외형에 시선을 빼앗기게 만드는 멋진 다리이다. 이 다리는 원활한 교통소통을 통한 주민들의 불편해소와 지역 간의 균형발전, 그리고 교량의 관광자원화를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길이는 240m이고 폭이 17.8m이다. 유려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는 생김새는 물론이고, 전체적으로 한탄강 계곡과 잘 조화를 이루어 철원 탐방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궁예(弓裔)가 건국한 태봉국(泰封國)의 이름을 딴 태봉교는 국내 최초로 건설된 다리형 번지점프(bungee jump)의 명소이다. 2002년에 문을 열었는데 현재도 도전과 스릴을 원하는 많은 이용객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50m 높이에서 흐르는 강물을 향해 몸을 내던지면서 그동안 바쁜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스릴을 경험해보려는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한탄강을 향해 떨어지는 광경이 마치 뉴질랜드 남섬 퀸스타운의 카와라우 다리(Kawarau River Bridge)’의 번지점프를 보는 것 같다고 알려져 있다.



송대소로 향한다. 길은 대부분 강의 가장자리를 따라 내놓았다. 안쪽 방향은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리본(ribbon)으로 막아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따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요즘의 맹추위를 예상치 못하고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사람들은 모두 두서없이 걷는다. 강 전체를 길로 삼아버리는 것이다.




물의 흐름이 급한 곳은 얼음의 두께가 얇다. 아니 아예 얼지를 않은 곳도 있다. 이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강변에다 길을 내놓았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수도 없이 널브러져 있기 때문에 걷기가 무척 힘든 구간이다. 아무튼 강바닥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구멍을 보며 자연의 신비를 느껴본다. 영하 10이하로 떨어지는 날이 보통인 요즘의 맹추위에도 얼지 않았으니 말이다. ‘정중동(靜中動)’이란 말이 있다. 문자로 풀면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는 모습이라고 풀이된다. 그러나 그 속뜻은 목적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의도나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효율의 극치를 함축성 있게 표현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동()이 정()을 이겼다고 봐야 하겠다. 물의 흐름이 강하다보니 얼려고 하는 속성을 갖고 있는 영하의 맹추위까지도 힘을 쓰지 못한 것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환호성을 지른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치켜드니 멋진 그림 하나가 그려지고 있다. 철새들이 아름다운 문양을 수놓으면서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만다. 맞다. 이곳 철원은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였다. 겨울이면 시베리아와 몽골 등에서 사는 수천 마리의 철새가 찾아온다. 그만큼 이곳 철원이 철새한테 좋은 쉼터를 제공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먹이가 넉넉하고, 느긋하게 쉬면서 맞잡이한테서 몸을 지킬 만한 곳이라는 얘기이다.



철원은 눈에 보이는 산하가 모두 분단의 아픔을 품고 있다. 눈에 담을 만한 풍경들이 모두 남북분단이 만들어낸 산물들인 것이다. 쏟아지는 포탄으로 인해 높이가 1m나 낮아졌다는 백마고지나 포격으로 인해 산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 후고구려의 궁예가 나라를 세우며 진산으로 삼은 '고암산 (김일성 고지)' 남방 한계선이자 한반도의 녹색지대인 DMZ 등 어느 것 하나 분단의 아픔을 품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서울면적(605)보다 훨씬 넓은 약 650(2억 평)에 달하는 거대한 철원평야의 풍요로움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분단의 현실을 삶의 현장으로 여기는 것들도 있다. 우리에겐 아픔이지만 철새들에겐 행운이기 때문이다. 분단은 사람의 간섭이 없는 비무장지대와 민간인통제구역을 만들었다. 드넓은 철원 평야 농경지는 먹거리인 낙곡을 제공하였고, 한탄강의 여울과 곳곳에 자리 잡은 대형 저수지는 잠자리로 최적이다. 이런 환경 덕분에 철원은 멸종위기 종()인 두루미와 재두루미, 독수리를 비롯해 수많은 철새의 월동지가 되었다. 오늘 여행을 즐기면서 끊임없이 마주치게 될 풍경들이다.



태봉대교에서 약 1km 아래에 있는 송대소(松臺沼)는 현무암 협곡의 특징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거친 강물이 수직 절벽을 만나 S자로 휘돌아가면서 깊이 30m의 소()를 형성한 곳으로 꽁꽁 얼어붙은 비취색 강 양편으로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가 선명하다. 참고로 이곳 송대소는 송도(개성)에 사는 삼형제가 이곳에 왔다가 둘은 이무기에 물려 죽고 살아남은 한 사람이 그 이무기를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쩡쩡거리는 얼음 울음에 살짝 긴장하면서도 쏟아져 내릴 듯한 다각형 바위기둥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100m에 이르는 거대하고 검붉은 바위 절벽을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는 건 겨울이 주는 선물이다. 자신이 최고라는 주상절리와 적벽(赤壁)들이 전국에 많다. 하지만 이렇게 코앞에까지 다가가서 진한 감동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참고로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란 지표로 분출한 용암이 식을 때 수축작용에 의해 수직의 돌기둥 모양으로 갈라진 절리(節理)를 말한다. 용암이 식을 때는 수축하면서 갈라지게 되는데 이 때 용암 표면에는 수축 중심점들이 생기고, 이러한 점들이 고르게 분포하는 경우 용암은 6각형의 무수한 돌기둥으로 갈라지게 된다. 마치 여름철에 가뭄이 들면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현상과 같다. 그러나 돌기둥의 단면이 반드시 6각형은 아니며 4각형, 5각형 등 다양하다.



막대기 같은 바위덩어리가 바닥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위로 뻗어 올랐다. 수심(水深)30m도 넘는다는 소()에서 이런 바위기둥을 만져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하지만 건드리기라도 할라치면 자칫 부서질 듯 위태롭다. 아무튼 제주에서 보던 주상절리와는 또 다른 멋을 자랑한다. 아름다움은 조금 떨어지지만 웅장함은 훨씬 더 뛰어나다는 얘기이다.




왼편에 현수교(懸垂橋)로 여겨지는 다리도 보인다. ‘송대소바로 아래에서 한탄강과 합쳐지는 지류(支流)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지는 못했지만 주상절리길을 조성하면서 만들어 놓지 않았나 싶다.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은 침식력(浸蝕力), 특히 하방침식(下方浸蝕, 강물이 하천의 바닥을 깊게 깎는 작용)이 활발하여 무려 40m 깊이에 이르게 깎아내린 수직단애(垂直斷崖)를 만들었다. 그런 단애들은 용암대지의 유년기(幼年期) 지형을 보이는 특이한 경관을 만들어내며 그 하나하나가 천혜의 관광지를 만들어낸다.



강변의 모래사장에는 주막(酒幕)도 들어서 있다. 축제기간에 맞춰 임시로 만든 시설인데, 아주머니 한 분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로 보아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축제야 이미 이틀 전에 끝이 났지만 한탄강 트레킹을 즐기려는 여행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가끔 한탄강 얼음트레킹을 홍보하는 현수막(懸垂幕)도 보인다. 그림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직탕폭포에서 출발해 태봉대교와 송대소, 마당바위, 승일교 메인행사장과 고석정을 거쳐 순담계곡에 이르는 코스로 거리는 7Km가 된단다. 이중 고석정에서 순담계곡에 이르는 1.5Km의 구간은 올해부터 새로이 개설되었다. 강물이 깊은 탓에 통행이 불가능했는데, 강물에 부교(浮橋)를 띄움으로써 통행이 가능해졌다.





강의 양안(兩岸), 언덕위에 데크로드가 보인다. 곳곳에 정자(亭子)까지 지어 놓았다. 요즘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있는 주상절리길이 아닐까 싶다. 주상절리길은 강원도와 경기도가 공동자원인 주상절리를 효율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협력 사업이다. 강원도의 철원에서 경기도의 포천·연천까지 총 119km를 잇는 생태탐방로인데, 철원 43.15km, 포천 53km, 연천 23.5km의 구간을 각 지자체 별로 추진하고 있다. 이중 철원구간은 2012년에 시작해서 이미 40.25km를 완료하고 이제 2.9km만 더하면 사업이 종료된다고 한다. 겨울철에는 얼음트레킹을 통해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러지 못하는 여름철에는 주상절리길을 걸으며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탄강의 주상절리는 이제 계절에 관계없이 구경할 수 있는 관광자원으로 변한 셈이다.



강안(江岸)의 바위절벽이 소름끼칠 정도로 날카롭다. 그런데 그 위에 반듯하게 지어진 하얀색 건물들이 올라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 풍경이 어딘가 눈에 익다. 그렇다. 2년 전에 스페인에 들렀을 때 말라가 주에 있는 론다(Ronda)’라는 소도시에서 절벽 위에 지어진 저런 마을을 보았었다. 스페인 근대 투우의 창설자인 프란시스코 로메로가 태어난 곳이다. 그곳도 역시 안달루시아 특유의 하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푸에블로 블랑코(하얀 마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론다 산맥에 위치한 탓에 깊은 엘타호데론다 계곡이 도시가 자리 잡은 두 구릉(丘陵)을 가르고 있는데, 계곡으로 과다레빈강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한탄강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사실 앞에서 말한 론다는 협곡을 가로지르고 있는 누에보다리’(스페인어: Puente Nuevo)‘로 더 유명해진 관광지이다. 과다레빈 강을 따라 형성된 120m 높이의 협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소설가 헤밍웨이가 이 다리의 근처에 있는 호텔에 머물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난 절벽위에 걸터앉은 건물들에 더 감명을 받았었다. 론다의 절벽은 보면 볼수록 서슬이 시퍼랬었다. 그런데 그 위에 하얀 마을이 누군가 일부러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었던 것이다. 난 당시의 감회를 거대한 절벽이 등에 작은 마을을 지고 있고, 뜨거운 열기에 마을은 더 하얘진다.’란 구절을 빌려다 썼었다. 그만큼 감동적이었다는 얘기이다. 그런 감동이 어디 나뿐이었겠는가. tv-N의 여행프로그램 꽃보다시리즈의 할배들도 감탄사를 늘어놓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말이다.



강변에 자리 잡은 양수장(揚水場) 건물에 벽화(壁畫)가 그려져 있다. 얼마 전 한탄강의 양수장을 리모델링(remodeling) 한다는 언론 보도를 본 것 같은데 그 사업이 완료되었나 보다. 당시 기사(記事)는 한탄강에서 농업용수를 끌어올리는 농업기반시설인 문혜양수장 등 7곳의 양수장 벽면을 삼부연폭포와 직탕폭포, 고석정, 주상절리 등 철원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채운다고 했다. 또한 건물 외관에는 두루미와 오대쌀 등의 상징 조형물들을 설치해 건물의 투박함과 생경함을 지우겠다고 했다.



이 근처 어딘가에 마당바위가 있다고 했다. 현무암이 모두 깎여 그 아래 있던 넓은 화강암이 드러나 형성된 곳이라는데, 어디를 말하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바위들이 모두 눈으로 덮여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송대소를 지나면서 강폭은 눈에 띄게 넓어진다. 덕분에 야트막한 강변 풍광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절벽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주상절리도 언제부턴가 뒷면으로 사라졌다.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설치한 양수장 시설들이 연이어 나타나는 구간이다.



송대소에서 대략 3km쯤 내려왔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철원 한탄강 얼음트레킹행사장이 보인다. 꽁꽁 얼어붙은 한탄강에서 겨울 장관에 푹 빠져볼 수 있도록 축제놀이터를 꾸몄다. ‘철원 한탄강 얼음트레킹은 얼음의 위를 걷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트레킹 행사와 함께 진행되는 축제의 놀이마당을 이곳 승일교 근처에다 만들어 놓았다. 행사(120일부터 28일까지 9일간)는 이틀 전에 끝났지만 시설물들은 아직까지 그대로 놓아두었다. 축제의 기분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이다. 아니 인파에 시달리지 않으니 한결 더 낫다고 볼 수도 있겠다. !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철원 한탄강 얼음트레킹의 흥미로운 점은 다른 계절에는 래프팅(rafting)을 하면서나 곁눈질로만 훔쳐볼 수 있었던 기암절벽과 주상절리 등의 절경을 직접 눈앞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행사장의 볼거리는 얼음마을이다. 얼음마을에서는 얼음터널과 얼음기둥, 고드름 초가집, 얼음나무, 얼음폭포가 만들어져 장관을 이룬다. 최상의 포토존(photo zone)이니 놓치지 말고 이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두자. 두고두고 즐거운 추억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평창올림픽의 성공개최를 기원하기 위해 만든 공간도 보인다. 쌓아올린 눈에다 평창 동계올림픽과 관련된 모형들을 만들거나 조각해놓았다. 또한 아이스하키, 컬링 등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개최를 기원하는 특별 얼음놀이도 체험도 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평창올림픽 마스코트와 함께 하는 눈썰매장에선 신나게 미끄러져 내려오는 재미에 푹 빠져볼 수도 있다.





그 옆에는 승복(僧服)을 입은 궁예(弓裔)의 상반신도 조각해 놓았다. 궁예는 통일 신라 후기에 후고구려(후에 태봉으로 국호 변경)를 건국한 인물이다. 후고구려는 통일 신라, 그리고 견훤(甄萱)이 세운 후백제와 더불어 후삼국 시대를 열었다. 그는 이곳 철원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후고구려를 새로 열면서 이곳 철원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궁예를 일러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는 과대망상에, 포악한 성품으로 학정을 일삼았던 군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궁예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연 고려의 관점에서 그려진 것이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오히려 무능력한 신라 지도층에 반기를 들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했으며, 고려라는 새 왕조가 탄생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졌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강 건너 산자락에는 얼음폭포를 만들어 놓았다. 폭포 위의 나무들도 하나같이 얼음으로 둘러싸여있다. 얼음나무인 셈이다. 이곳 또한 최고의 포토죤(photo zone)이다. 산 전체가 폭포로 이루어져 그 거대한 생김새부터가 장관일 뿐만 아니라 고드름 모양으로 뻗어 내린 얼음줄기들이 하나 같이 그 빼어난 자태를 자랑한다.




행사장을 벗어나면 곧이어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26승일교(承日橋)’가 나타난다. 갈말읍 내대리와 동송읍 장흥리 사이의 한탄강 협곡(峽谷)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한탄강 주변의 풍광과 아치형의 다리 모습이 영화 콰이 강의 다리에서 나오는 다리와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애칭(愛稱)이란다. 현재 승일교는 도보로 건널 수 있으며, 차량은 옆에다 새로 놓은 한탄대교로 운행한다. 한탄대교 옆에 도로 확장을 위해 다리 하나가 완공 단계에 이르렀는데, 승일교와 비슷한 디자인이라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승일교(承日橋)는 북한이 착공했으나 남한이 완성했다고 해서 이승만의 ()와 김일성의 ()를 따서 다리의 이름을 만들었다. 남한과 북한이 번갈아 공사해서 완성시킨 교량이라는 얘기이다. 승일교가 있는 철원 땅은 해방이후 북한에 속해 있었다. 1948년 북한이 동송읍 쪽에서 다리를 건설하던 도중에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이 끝나자 이곳은 남한 땅이 되었다. 이후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다리를 갈말읍 방향에서 다시 시작해 완공시킨 것이다. 또 다른 주장도 있다. 6·25 당시 철원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우다 평북 덕천 전투에서 전사한 고() 박승일 연대장의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박승일 연대장의 이름을 따 승일교라 명명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한 탓에 다리는 아치형과 사각형의 구조물이 뒤섞인 형태가 됐다. 6·25 한국전쟁이 만들어 낸 남북 합작의 역사가 구조물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면 되겠다.




트레킹을 이어간다. 승일교를 지난 한탄강은 고석정과 순담계곡을 향해 굽이치며 흐른다. 그런데 주변의 풍경이 많이 변해있다. 강폭이 넓고 유속(流速)이 느리던 이제까지와는 달리 급류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강물이 얼지 않은 곳이 많다. 그래선지 길 또한 강변을 따라 나있다. 그렇다고 트레킹이 재미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강변에 늘어선 화강암들이 해골을 닮는 등 기기묘묘(奇奇妙妙)한 형상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양새들을 눈요기삼아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그렇다고 결빙(結氷) 구간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도 춥다보니 조금만 유속이 느리다싶으면 꽁꽁 얼어붙었다. 다만 상류에 비해 결빙상태가 좋지를 않고, 아예 얼지 않은 구간도 상당히 많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일 따름이다.



고석정(孤石亭) 직전의 물이 좁아지는 곳도 강변의 자갈길을 이용해야 통과할 수 있다. 이때 진행방향의 단애(斷崖) 위에 올라앉은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한탄리버 스파호텔일 것이다. 지상 3, 지하 1층 등 연면적 9,917.468개의 객실과 최신시설이 완비된 연회장 및 세미나실, 게르마늄 온천, 워터파크, 찜질방, 웰빙 다이어트 푸드(닥터로빈), 헬스클럽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는 종합 휴식공간이다. 특히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고석정의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로 인근에 한탄강 컨트리클럽이 있으니 라운딩이 끝난 후에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화산온천욕이나 수영 등으로 몸을 풀어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감지해변산책로와 태종대(太宗臺)

 

여행일 : ‘18. 1. 23()

소재지 : 부산시 영도구

산행코스 : 반도보라아파트부산체육고중리해안감지해변 산책로(2.1km)감지해안태종대 주차장전망대등대자갈마당주차장(소요시간 : 2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오륙도와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암석해안의 명승지로, 영도의 남단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면적 532390평에 최고지점인 태종산의 높이가 250m쯤 되는데, 산 전역이 수십 년 된 울창한 송림(松林)으로 싸여 있으며, 바다에 면한 돌출부는 기암절벽(奇巖絶壁)으로 이루어졌다. 태종대라는 이름은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전국의 명승지를 다니던 중 이곳 영도의 절경에 도취되어 쉬어갔다는 데서 연유한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태종에 얽힌 얘기도 전해진다. 1419년 큰 가뭄이 들었는데, 그해 5월에 태종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음력 5월 초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그 이후로 동래 부사도 태종을 본받아 가뭄이 들 때마다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는데, 이로 인해 태종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해금강(海金剛)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을 정도로 여러 모양의 바위와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 숲이 푸른 바닷물과 잘 조화를 이루며, 태종대에 이르는 산 중턱에는 4.3의 순환관광도로가 나있다. 1972626일 부산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111일에는 국가 지정 문화재 명승 제17호로 지정되었다.


 

▼ 봉래산의 산행이 끝나면 다음은 태종대 투어로 이어진다. 버스로 태종대주차장까지 이동시켜주는데 후미그룹이 산에서 내려오려면 30분 이상을 더 기다려야 한단다. 그러느니 차라리 태종대까지 걸어보기로 한다. 물론 먼저 도착해 있던 일행 서너 명과 함께이다. 산에서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도로(함지로)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 후, 얼마간 걸으면 부산 체육중·고등학교가 나온다.



부산체고의 담장을 따르다가 영도여고가 보였다싶으면 담장을 오른편에 끼고 90도를 돌아 중리북로 21번길을 따른다. 잠시 후 부산남고삼거리를 만났다싶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중리해안이 나타난다. 해안으로 내려가는 들머리에 중리 맛집거리라고 적힌 표지판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 오는 길에 보물섬 영도의 이야기를 적은 안내판도 만날 수 있었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통해 영도의 옛 이야기 100개를 전하고 있는데, 그중 23번째 이야기인 절영도진(絶影島鎭)’을 설명한 안내판을 길가에 세워놓은 것이다. 안내판이 전하는 얘기는 이렇다. 개항(開港)으로 일본인의 숫자가 늘자 그들이 사용할 신탄(薪炭 ,장작과 숯)이 부족해졌던 모양이다. 이에 일본에서 절영도의 나무를 베어 충당하겠다고 조정에 청원했는데, 조선 정부가 이를 거부하고 무분별한 벌채(伐採)를 막기 위해 포이포진과 개운포진 그리고 서평포진을 통합하여 절영도진(絶影島鎭)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1881(고종 18)에 설치되어 1895년까지 15년간 운영되었다고 한다. 진의 최고책임자는 첨사(僉使)였는데 이곳으로 발령이 난 사람들은 두 번을 울었다고 한다. 부임해 섬에 들어오면서 울창한 숲으로 인해 귀양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울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섬 주위 어장에서 받아들이는 두둑한 세수입을 두고 떠나는 것이 아까워 울었다는 것이다.



주차장에는 인근의 맛집들을 소개하는 갈맷길 중리맛집 특화거리안내판 외에도 갈맷길 안내도가 따로 세워져 있다. 잠시 후 걷게 될 길이니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이다. 갈맷길 3-3구간(10Km)을 지도에 그린 다음 절영해안산책로, 중리해녀촌, 감지해변산책로, 태종대전망대 등 각 지점의 주요한 포인트들을 표기해 두었다. 또한 이곳 갈맷길 영도코스가 전국 5대 해안누리길에 선정되었다는 자랑도 빼먹지 않고 늘어놓았다. 참고로 부산 갈맷길이란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의 합성어로 사포지향(四抱之鄕 : 바다, , , 온천)인 부산의 지역적 특성을 담고 있는 부산판 올레길로 보면 되겠다. 2009년과 2010, 정부의 일자리 창출사업희망근로사업의 일환으로 그린웨이(greenway, 산책로)를 조성했는데, 해안길과 숲길, 강변길, 도심길로 이루어진 길이 278.8km의 둘레길이 9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해녀촌이 있다는 중리포구는 텅 비어있다. 선착장에 대여섯 척의 어선이 매어져 있을 따름이다. 정비공사가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곳에 있던 해녀촌도 이곳에서 200m쯤 떨어진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중리해녀촌은 일제 때 제주에서 올라온 해녀들이 자리 잡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검은 햇빛가림막 아래서 나이 든 해녀들이 물질해 잡아 온 해산물을 바로 손질해 내놓는 풍경이 특징이라고도 했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사투리와 함께 말이다. 그녀들이 차려주는 해산물을 안주 삼아 간단하게 한잔하고 길을 나서려고 했던 내 계획이 일거에 어긋나버리는 순간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갈맷길의 입구에는 길이 폐쇄되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공사 때문이라며 우회(迂回)를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라는 안내는 보이지 않는다. 경고판을 무시하고 곧장 갈맷길을 따르는 이유이다. 우리 같은 초행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공사구간을 통과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 거리가 짧을 뿐만 아니라,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공사구간이 끝나는 지점의 산자락에서 갈맷길의 들머리를 만나게 된다. 들머리에 봉래산 숲길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14코스인 감지해변산책로로 총 거리는 2.1Km라고 한다. 난이도(難易度)()’급으로 표기되어 있다.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산책로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 말을 증명리라도 하려는 듯 산길은 무척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거기다 일행과 함께 담소를 하면서 걸어도 충분할 만큼 길의 폭도 널찍하다. 안전성도 확보되어 있으니 안심해도 좋다. 산비탈의 경사가 조금만 심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밧줄난간을 매어 놓았다.




15분쯤 진행했을까 널찍한 포장임도(이정표 : 감지해변 1.58Km/ 중리해녀촌 0.47Km)가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올라왔던 방향에 갈맷길 폐쇄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임도를 계속 따르라는 얘기일 것이다. 왼편 감지해변 방향으로 향한다. 이제부터 길은 걷기가 한결 더 편해진다. ! 이곳으로 오는 길에 삼거리(이정표 : 감지해변1.78Km/ 중리산삼거리0.4Km/ 중리해녀촌0.2Km)를 만났다는 걸 깜빡 잊을 뻔 했다. 그곳에도 역시 갈맷길 폐쇄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임도에 들어서면서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대형 선박들이 두둥실 떠있는 바다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런 풍광을 즐기면서 걷다보면 이내 헬기장에 올라선다. 엄청나게 널따란데, 헬기장의 특징대로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드넓은 바다로 눈길을 돌리니 화물선과 원양어선 등 대형 선박들이 섬처럼 무리를 이루며 떠 있다. 수리나 급유를 위해 부산항을 찾아오는 배들이 잠시 닻을 내리고 머무는 곳, 묘박지(錨泊地)란다. 그 오른편에는 봉래산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흙산인줄만 알았더니 곳곳에 바위지대가 파고들었다.




또 다시 길을 나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감지해변1.13Km/ 경마장0.92Km/ 중리해녀촌0.99Km)를 보니 갈려나가는 길이 경마장으로 연결된다고 표기되어 있다. 이곳 부산에도 서울과는 별도로 경마장이 만들어져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조금 더 걸으면 오른편 벼랑 위에 걸터앉은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는 조망을 돕기 위해 망원경까지 설치해 놓았다. 망원렌즈를 통해 나타나는 풍경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아까 헬기장에서 보았던 것과 거의 비슷하다. 봉래산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빼면 말이다.




얼마간 더 걷자 또 다른 전망대가 나타난다. 이곳에도 역시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 앞에는 갈매길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영도의 지형도에다 갈맷길 3-3구간과 함께 영도에서 천혜의 절경으로 꼽히는 15개 경관이 있는 위치를 그려 넣었다. 그 경관의 사진까지 개제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전망대에 오르니 조금 전의 전망대와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아니 발아래에 잘 지어진 팔각정자가 보인다는 게 아까와는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옆에 보이는 건물은 외관으로 보아 공중화장실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감지해변산책로는 공중화장실까지 갖춘 명품 둘레길이 분명하다.




눈요기를 즐기며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예쁜 외형의 정자(亭子)가 길손을 맞는다. 정자의 해안 쪽으로는 데크를 둘렀다. 전망대의 역할을 겸하라는 모양이다. 이곳에서의 조망 역시 아까의 전망대들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아니 확실히 다른 점도 있다. 감지해안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다. 몽돌해안의 끝에는 작은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다. 태종대 일대의 경관을 배를 타고 둘러보는 유람선들이 출발하는 곳이라고 한다. 유람선을 탈 경우 등대와 자살바위, 신선바위, 망부석, 아치섬, 태종대의 해안절벽, 해송 숲 등 태종대가 품은 천혜의 절경들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한다.




잠시 해안길을 따른다. 왼편에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점심때라선지 호객을 하는 아주머니들도 보인다. 하지만 우린 한눈을 팔 겨를이 없다. 태종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는데 주어진 시간이 고작 2시간 반 뿐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점심을 먹을 시간까지고 그 안에 포함이 되어 있으니 어찌 서두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널찍한 도로를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널찍한 주차장이 나온다. ‘대한민국 명승 제17로 지정된 태종대(太宗臺)의 주차장이다. 걷기를 시작하고 45분이 걸렸다. 태종대는 삼면이 첨예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해식애(海蝕崖)로서 19691월에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한국의 해안지형 가운데 관광지로서 개발이 가장 잘 된 곳으로 1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주차장 앞에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커다란 태종대 표지석(太宗臺)이 세워져 있다. 태종대를 찾는 사람들이 인증사진을 찍는 곳이다. 태종대 안으로 들어가면 이곳이 태종대입네 하는 표지석을 따로 만들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태종대 노래비도 세워져 있다. 정귀문 작사, 김리학 작곡에 노래는 약사가수로 잘 알려진 황원태가 불렀단다. 노랫말을 읽어보니 아름다운 태종대를 노래하면서도 그곳이 부산의 영도에 있다는 점을 유난히도 강조하고 있다. 이왕에 나온 김에 영도에 대해서도 좀 알아보자. 영도는 따뜻한데다 먹을거리가 많아서 신석기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 흔적은 동삼동 패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시대부터 조선조 중기까지는 나라에서 국마장(國馬場)을 경영할 만큼 명마 사육의 최적지였다. 원래의 이름이 절영도(絶影島)’였던 이유이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명마가 빨리 달리면 그림자가 못 따라올 정도라는 의미로 끊을 절()’, ‘그림자 영()’ 자를 붙였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후 섬을 비우는 공도책(空島策)에 따라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절도(無人絶島)가 되었고, 1981년에야 절영도진(絶影島陣)이라는 첨사영(僉使營)이 들어섰다. 초라한 갯가에 지나지 않던 영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개항의 파고에 휩싸인 뒤 일본에게 군사적 요충지로 삼켜진다. 영도에서 길러진 군마가 만주 등지로 가서 침략 전쟁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렇게 영도는 개화기의 한국에서 수탈과 근대 문명의 1번지라는 이중적인 이름을 숙명처럼 껴안았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면 영도가 부산 내륙을 방위한 병풍이었다는 의미도 된다. 영도가 없었다면 부산은 태평양의 거친 물살과 매서운 해풍에 고스란히 노출됐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부산이 받을 풍파를 먼저 받아 삭혀냈고, 부산이 감당해야 할 시련의 많은 부분을 혼자 짊어져 온 곳이라는 부산 출신 최영철 시인의 시선을 꼭 빌리지 않더라도 조갑상 작가 말대로 영도야말로 부산 역사의 축소판이다.’로 요약해 볼 수 있다.



태종대를 둘러보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두 발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태종대를 즐기는 방법이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시간이 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두 번째는 유람선을 타고 바다 위에서 태종대의 속살을 엿보는 방법이다. 배 삯이 좀 비싸기는 하지만 유람선을 따라 쫓아다니는 갈매기들과 새우깡 하나를 가운데 놓고 겨뤄보는 이색적인 경험도 할 수 있다. 마지막 방법은 유원지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다누비 열차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태종대표지석에서 태종대 방향으로 150m쯤 올라가면 열차의 승강장이 있다. 옆에 있는 매표소에서 1인당 3천 원짜리 승차권을 사면된다.



우린 '다누비 열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해안산책로를 걸어오는데 걸린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기 때문이다. 허나 조금 더 여유를 갖고 태종대의 숨은 비경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는 것도 구태여 숨길 필요는 없겠다. 15분마다 출발하는 이 열차는 전망대와 등대, 그리고 태종사입구 등 3번을 멈춘다.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유원지를 둘러보면 된다.




태종대 광장에서 시작되는 산책로는 둥글게 연결되기 때문에 좌우 어느 방향으로 출발하든 따라 진행하면 광장으로 돌아올 수 있다. 승강장에서 태종대유원지에 있는 전망대까지는 대략 1.8Km 정도, 느림보 다누비 열차10분쯤 달리더니 전망대 앞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다음 정류장인 등대까지는 거리가 가까우니 걸어서 이동하는 게 편리하다는 멘트로 빠뜨리지 않는다. ! 깜빡 잊을 뻔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열차 안의 스피커를 통해 태종대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전망대는 멀리 수평선이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순환도로 서남쪽 끝 부근에 지어져 있다. 까마득한 단애(斷崖)의 위에 지어진 3층짜리 건물에는 전망대와 레스토랑, 간이매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전망대가 건립된 자리는 본래 자살바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바위가 있던 곳이다. 1970년대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극심한 생활고나 실연 등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이곳 낭떠러지에서 아래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사회문제를 불러일으키곤 했었다.



전망대에 서면 자그만 등대 하나를 머리에 이고 있는 생도(生島)‘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 뒤로는 한없이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생도(生島)는 물결이 칠 때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생김새가 마치 주전자를 엎어놓은 형상과 같다 하여 '주전자섬'으로도 불린다. 유분도(鍮盆島)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으니 참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섬은 우리나라 13개 영해기점(領海起點) 무인도서(無人島嶼) 가운데 하나로, 생도에서부터 3해리(5.56)까지의 바다가 우리나라의 영해(領海)에 속한다. 대부분의 영해기점 무인도서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생도는 태종대에서 1.4km 가량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유일하게 육지에서도 쉽게 관찰할 수가 있다.



전망대 앞에는 석상(石像) 하나가 서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두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인데, ’모녀상(母女像)‘이라는 의젓한 이름까지 갖고 있단다. 이 석상이 세워진 이유가 참 갸륵하다. 전망대 옆의 자살바위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을 막아보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을 이용해 그들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숫자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전망대에서 산책로를 따라 잠시 걸으면 다누비열차승강장을 만나고, 이어서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도 등대입구가 나타난다. 숲이 만들어놓은 터널에다 나무계단을 깔았다. 누군가 이곳 태종대에는 생달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등 200여 종의 수목이 자라고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그는 60여 종의 새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새의 자태는커녕 지저귀는 소리까지도 들려오지 않는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이라 다들 따뜻한 남쪽나라라도 찾아갔나 보다.




수목이 우거진 가파른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문처럼 생긴 조형물을 만난다. 세 곳에서 올라온 기둥이 위에서 한곳으로 모이는 모양새이다. 바닥에는 영도등대 해양문화공간이라고 적혀있다. 5년쯤 전인가 국토해양부에서 해안경관이 수려한 등대 가운데 연간 1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8개 유인등대(有人燈臺)'등대 해양문화공간'으로 지정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당시 기사에서는 이들 등대는 주변 자연경관과 역사성 등 지역 특성이 감안된 주제에 맞춰 스토리텔링 등 각기 차별화된 콘텐츠가 가미돼 개발된다고 했다. 또한 지자체와의 협력을 통해 등대 주변지역의 관광시설을 확충하고 올레길 등 지역 탐방로에 등대를 주요 경유지로 포함시켜 등대 가는 길 등을 조성하는 한편 인터넷카페 등 방문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갖출 계획이라고도 했다. 당시 선정된 8개의 유인등대 중 하나가 이곳 영도등대였던가 보다.




몇 걸음 더 내려가니 해마(海馬)가 인사를 하고 있는 자그마한 광장이 나온다.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황동과 스테인리스를 재질로 사용한 지름 3.2m, 높이 6.9m의 탑()이 세워져 있다. 김성용 한남대교수의 작품인데 중앙 원형의 키를 바닥의 패턴으로 하여 그 위에 닻의 형상을 표현하고, 닻의 아래 모습 부분은 바이킹과 판옥선의 이미지를 해학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우리 겨레의 유구한 해양의 역사를 지키고 민족을 보호하는 수호자를 표현했다고 하는데 난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뒤에 있는 공간은 10여 개의 흉상(胸像)들을 빙 둘러 배치했다. ‘해기사 명예의 전당이란다. 그렇다면 저 흉상들은 뭔가 역사에 남을 공적들을 남긴 해기사(海技士)들일 게다.




오른편에 그늘막 쉼터도 만들어져 있다. 외형으로 보아 야외 공연장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지 않나 싶다. 맞다. 위에서 얘기했던 기사에서는 조성된 등대 해양문화공간에서는 지역 문화예술단체 및 교육기관과 연계한 바다미술학교, 해양문학교실 등 바다사랑 함양교육과 함께 음악공연 및 미술전시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질 계획이라고 했었다.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녀의 석상(石像)도 보인다. ‘바다의 날’ 10주년을 기념해 만든 바다의 헌장 탑이란다. 화강암을 소재로 쓴 김오성작가의 지름 1.8m, 높이 3m의 작품으로 '남녀가 돌고래가 미는 선박을 타고 노를 저어 파도를 헤쳐 나아가는 형상'을 새긴 것이란다. 조형물의 양측에는 바다헌장이 국문과 영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바다를 개척하는 인간의 노력을 형상화한 작품 속에 바다헌장 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바다와 인간의 삶을 찬미하고 노래할 수 있도록 예술적 표현을 화강석에 옮겨 아름다운 미감을 최대한 높이고 세월의 풍화에도 영구히 보존될 수 있도록 창작됐다고 한다.



'무한의 빛'이라는 조형물도 등장한다. 절벽에 위태롭게 달린 뾰족한 바늘 모양의 철심이 아찔한 느낌을 자아낸다. 빛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어떤 숨은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영도등대 100주년을 기념하여 등대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세운 무한의 빛은 등대의 빛과 해양국가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단다. 조형물의 푸른색은 바다 또는 하늘을 의미하며 붉은색은 태양과 동백꽃을 상징함으로서 바다와 하늘을 뚫고 더욱 더 도약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단다.




조형물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영도 등대를 만날 수 있다. 이 등대는 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06년에 일제의 대륙 진출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선박의 안전을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아픈 시기에 태어났을 뿐 등대에 무슨 죄가 있으랴. 아직도 부산항의 길목에서 영롱한 불빛을 밝혀오고 있다. 또한 지난 2004년에는 새로운 등대 시설물로 교체되어 부산지역의 새로운 해양관광 명소로 거듭났다. 새로 건립된 영도등대는 등대시설, 예술작품 전시실 그리고 자연사 박물관 등 3개동(연면적 720)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대시설은 기존 등대와 같이 백색의 원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높이가 35m이며 불빛은 40km까지 나간다. 참고로 영도등대의 처음 이름은 목장이라는 뜻의 목도등대(牧島燈臺)‘였다. 영도가 본디 목장지(牧場地)였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이후 1948년에 절영도 등대(絶影島 燈臺)‘로 변했고, 1974영도등대(影島燈臺)‘를 거쳐 1988년 현재의 이름인 영도항로표지관리소가 되었다. 등대의 내부 관람은 생략하기로 한다. 주어진 시간이 빠듯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신 다른 이의 글로써 이를 대신해 본다. <영도등대의 전시실(see&sea 갤러리)은 시민들과 방문객을 위해 미술작품을 소개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으며 자연사 박물관은 등대 바로 옆 신선바위 등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과 백악기 공룡서식지로 추측되는 이곳을 기념하는 공룡화석 등을 전시하고 있다.>



난간 아래로 태종대 최대의 볼거리인 기암절벽이 펼쳐진다. 태종대의 파식대(波蝕台, wave-cut platform), 즉 암석 해안이 침식 작용을 받으면서 해식애 아래에 형성되는 평평한 침식면의 단구애(段丘崖, 단구면 끝에서 떨어지는 가파른 절벽)는 이처럼 수직에 가깝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의 기반암이 전체적으로 육지 쪽으로 기울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수직방향으로 금(절리)이 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종대에서 동삼동까지만 분포하는 이곳의 퇴적암 암반은 약 1억년부터 8천만 년 전 사이(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것이란다.



등대에서는 계단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다. 아치형의 돌터널까지 만들어 나름대로 운치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런 풍경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양이다. 터널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실루엣(silhouette)‘으로 처리되는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니 포토죤‘(photo zone)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아치형 터널을 통과하자 멋지게 지어진 2층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커피와 과일주스, 스무디(smoothie) 등의 음료수와 토스트나 컵라면 등 간단한 식사를 파는 곳이니 카페라고 보면 되겠다. 이 카페의 옆으로 신선대 진입로가 나있다.



건너편에 신선들이 놀았다는 신선대(神仙臺)가 보인다. 그 위에는 왜구에게 끌려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여인이 돌로 변하였다는 망부석이 있다. 가파른 절벽의 절리(節理)를 따라 내놓은 비좁은 길이 위태롭기 짝이 없다. 그나마 바깥쪽에 철봉(鐵棒) 난간을 만들어 보행자들의 위험성을 제거했다. 하지만 저 길은 이제 금단(禁斷)의 길이 되어버렸다. 경주 지진 등의 여파로 낙석 및 붕괴가 우려돼 진입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보강작업이 완료될 때까지로 기한을 잡고 있지만 그 때가 언제 올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무튼 신선대 위에서 바라보는 파도의 절경을 당분간 볼 수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선대(神仙臺)는 해안단구(海岸段丘, marine terrace)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단구란 과거 해수면 근처에서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해식절벽이나 평평하게 깎인 계단모양의 지형이 지반이 융기하거나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태종대 해안단구의 특징은 이렇게 파도에 침식된 계단꼴의 바위들이 해안곳곳에서 발견되는 융기 파식대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젠 자갈마당만 남았다. 바닷가 암반 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꽤나 긴 시멘트계단을 내려서야만 한다. 쉴 새 없이 파도가 들었다가 나가며 자갈들이 휩쓸리고 부딪치며 '사르르' 낮은 소리를 내는 물가에 허름한 가건물 식당 두어 채가 들어서 있다. 건물 앞에는 각종 해산물을 담은 그릇들 10여 개가 진열되어 있다. 손님이 고르면 요리를 해주는 방식인 모양이다.



자갈마당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천막촌에 들어가 조개구이 등의 해산물을 안주삼아 한잔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점심을 먹을 시간이 나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냥 멍게나 해삼만 먹을까도 해봤지만 집사람이 고개를 흔든다. 빨리 주차장으로 되돌아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하자는 것이다.



자갈마당에서의 조망도 괜찮은 편이다. 해식애로 이루어진 왼편 절벽너머로는 오륙도(五六島)가 위치한 부산만 일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동남쪽에는 일본의 대마도(對馬島)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 거리가 56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날씨가 맑은 날에는 대마도가 시야에 들어온단다. 다른 일행들의 말로는 오늘도 보였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른편 바다에서는 생도(生島)가 나도 여기 있다면 고개를 내민다. 생도는 인근의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이 심해질 때면 피신처로 이용했다는 섬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단다. 섬을 훼손하거나 야생 동·식물을 포획·채취하는 행위, 야영·취사 등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무인도서의 보전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절대보전 무인도서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란다.



자갈마당에서 투어는 끝을 맺는다. 이제는 돌아갈 일만 남았다는 얘기이다. 뒤돌아서니 하얀색 등대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아까 내려올 때보다 훨씬 더 우람한 모습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등대로 오르는 계단이 지그재그로 만들어져 운치를 더하고 있다.


소백산 자락길 중 첫째 자락 #2 : 구곡길과 달밭길

 

산행일 : ‘17. 6. 12()

소재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과 풍기읍 일원

산행코스 : 소수서원주차장소수서원금성단선비촌향교죽계계곡초암사달밭재달밭골비로사삼가주차장(소요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소백산 자락길은 경북 영주시봉화군, 충북 단양군, 강원도 영월군의 34개 시·군에 걸쳐져 있다. 영남의 진산(鎭山)이라 불리기도 하는 소백산자락을 한 바퀴 감아 도는데 전체 길이는 143km(360)에 이른다. 올망졸망한 마을 앞을 지나는가 하면, 빨간 사과가 달린 과수원 안길을 통과하기도 한다. 또한 잘 보존된 국립공원 구간을 통과하게 되므로 따가운 햇볕에 노출되는 다른 곳의 걷는 길과는 많이 차별된다. 그런 점을 인정받았는지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고, 2011년에는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모두 열두 자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평균 거리가 12km(30) 내외인 각 자락은 짧게는 1구간에서 길게는 4구간으로 다시 나누어 소단위 문화권으로 구분했다. 작은 문화적 특성에 따라 선비길, 구곡길, 달밭길 등의 작은 별칭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소백산 자락에는 모두 26개 소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12자락 26소문화권으로 이루어진 360리길이라는 얘기이다. 아무튼 한 자락을 걷는데 대략 4~5시간이 소요되므로 하루에 한 자락씩 쉬엄쉬엄 걸을 수 있어 리듬이 느껴진다. 더구나 열두 자락 모두 미세한 문화적인 경계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자세히 살펴보면 자락마다의 특징이 발견되어 색다름 느낌의 체험장이 될 수 있다. 거기다 소백산 자락의 아름다운 풍경은 덤일 게고 말이다.

 

구곡길의 시작은 배점 주차장(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165 )

배점주차장을 벗어나면 죽계구곡(竹溪九曲)’이라고 적힌 커다란 표지석이 길손을 맞는다. ‘소백산 자락길첫째 자락가운데 두 번째 구간인 구곡길이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예로부터 성리학자들은 풍광이 고운 계곡에 이름을 붙이고, 시가(詩歌)를 짓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주세붕, 이황, 신필하, 이가순 등 이 지역 유현(儒賢)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선대 학자들의 명명과 시()가 후대 사람들에 비해 보관되어 남겨지기가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선지 이곳 죽계구곡도 큰 혼란이 생겨버렸다. 퇴계가 명명했던 지명(地名)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대신 신필하가 명명한 지명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주자(주희:朱熹)의 명명 방식에 준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1, 2곡을 차례를 부여했는데 반해, 신필하는 물 흐르는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순서를 매기는 통에 스스로 혼란을 초래해 버렸다. 어쩌면 그는 이런 혼란을 미리 예견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문집(文集) 등에 겨우 이름을 적어두었을 때 그는 아예 구곡의 바위에다 깊게 각자(刻字)를 새겨버렸다. 게임 끝이 아니고 무엇이랴? 때문에 국립공원에서도 신필하가 명명한 죽계구곡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게다. 참고로 퇴계는 소수서원의 취한대(翠寒臺, 1)에서 시작해서 죽계천을 거슬러 오르며 금성반석(金城盤石, 2), 백우담(栢子潭, 3), 이화동(梨花洞, 4), 목욕담(沐浴潭, 5), 청련동애(靑蓮東崖, 6), 용추비폭(龍湫飛瀑, 7), 금당반석(金堂盤石, 8), 중봉합류(中峯合流, 9)를 죽계구곡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홍수로 일부가 유실되자 영조 때 순흥부사로 부임한 신필하가 초암사 앞 금당반석(1)에서 삼괴정 앞 이화동(9)까지 2물길을 따라 내려오며 다시 이름을 붙였다.




지금은 폐교(廢校)가 되어버린 배점분교앞을 지나면 길은 죽계구곡을 옆구리에 끼고 초암사까지 이어진다. 겨우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좁은 시멘트길 옆으로 사과밭이 펼쳐지고 죽계천은 수풀에 둘러싸여 물 흐르는 소리만 요란하다. 하지만 구곡(九曲)의 경승(景勝)을 찾아보는 데는 지장이 없다. 들머리마다 이정표와 안내판 등을 잘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다만 알아두어야 할 점은 하나 있다. 경승이거나 경승이 아닌 것들이 다 고만고만해서 주인공이 헷갈릴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하긴 모두가 다 절경(絶景)이니 구태여 주인공을 찾을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9’ ‘이화동(梨花洞)’은 위에서 얘기했던 표지석 근처에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길에서 약간 비켜나있으니 길가에 세워진 안내판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안내판에는 죽계구곡 옛길의 지도를 그린다음 그 위에다 각 곡의 위치를 표기했다. 그 하단에는 이화동에 대한 해설을 적어놓았다. 옥녀봉(玉女峯)과 이자산(利子山) 사이로 흐르는 죽계계곡이 이화동까지 이어지는데, 이화동 아래의 깊은 물을 용소(龍沼)라고도 부른단다. 이화동의 어원(語源)은 옛날 이곳에 배꽃이 많았다는데서 연유한다는데 지금은 배보다 사과밭 천지로 변해버렸다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변의 풍경 또한 변할 수 있음을 설명했다.



안내판에서 몇 걸음 더 걸으면 이화동(梨花洞)이다. 안내판은 이곳을 ‘9으로 표기했다. 구곡의 마지막으로 삼은 신필하의 의견을 쫒았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퇴계는 이곳을 ‘4이라 했다. 아무튼 다리 아래에 위치한 이화동은 허접하기 짝이 없다. 작은 바위협곡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정도라 여기면 되겠다. 그래선지 가장 좋은 조망처마저도 사유지(私有地)라는 이름으로 막아버렸다. 이런 풍경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시를 구상했을 선현들이 존경스러워진다. 하긴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보는 이의 마음자세도 달라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후로는 포장공사가 한창인 도로가 꽤나 오래 이어진다. 졸졸 흘러내리는 죽계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숲속에서 조잘대는 새소리까지 들려오지만 뙤약볕 아래를 걷다보니 흥겨워야할 소리까지도 그다지 반갑지가 않다. 10분쯤 지나 초암매표소를 지나면 협곡을 따라 길게 조성된 사과밭이 나타난다. 그리고 알알이 영글어가는 사과에 눈맞추다보면 어느덧 이정표(초암사2.0Km/ 배점주차장1.4Km)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이정표의 초암사방향표시 하단에 ‘6,7,8이라고 적혀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죽계구곡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두었다. ‘죽계의 지도를 그리고 그 위에다 구곡의 위치와 함께 구곡에 대한 특징까지 적어 놓았다. 여기서는 큰 길을 버리고 오른편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라는 표시일 것이다.



다리를 건너 울창한 숲길로 들어선다. 가끔가다 시판(詩板)들을 만날 수 있는 멋진 길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쓴 서죽계입경후(書竹溪入景後)와 서창재(徐昌載)등청운대(登靑雲臺)’ 등 다양한 시들을 만날 수 있다. 죽계구곡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이러한 시판들은 구곡이 끝날 때까지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10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냇가로 툭 튀어나간 데크전망대(식사를 하고 있는 단체가 있어서 사진은 생략)가 나온다. ‘8관란대(觀瀾臺)’를 편하게 구경하라는 배려로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관란(觀瀾), 즉 눈앞에 펼쳐지는 여울목의 물줄기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아니나 다를까 되돌아 나오는 길에 입구의 안내판을 살펴보니 그런 내용을 적어 놓았다. 관수유술 필관기란(觀水有術 必觀其瀾,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나니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하느니라)맹자(孟子)’진심장구(盡心章句) 상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리고 그 주해(註解)에 관수지란즉지기원지유본의(觀水之瀾則知其源之有本矣), 즉 물의 여울목을 보면 곧 그(水源)의 근본을 알게 되니라하고 풀어 놓았다. 8곡의 빠른 물살이 여울을 이루며 계속해서 흘러갈 수 있는 것은 그 근본이 확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흐름 속에서 도()를 찾아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렴 도적(盜賊)에게도 도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득 장자(莊子)도척편에 나오는 도척(盜蹠)이 그의 제자와 주고받던 얘기가 떠오르는 게 분위기에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



길이 계곡을 따라 나있지만 데크나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놓아 걷는 데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 그저 숲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추임새삼아 건들거리며 걷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안내판을 찾아 눈만 크게 뜨면 될 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데크전망대가 나온다. ‘7탁영담(濯纓潭)’의 조망을 위한 대()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가로 내려가는 통로는 보이지 않는다. 내려가는 길이 위태롭다는 의미일 텐데도 일부 사람들의 귀에는 당최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물가에서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보이는 게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7은 특별히 눈에 담아 둘만한 경관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바위들 사이를 굽이도는 물굽이 자체는 괜찮은 편이다. 다만 그 규모가 어설프다는 얘기이다. ()자가 들어간 이름답지 않게 물의 흐름도 소()나 담을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탁영담(濯纓潭)’은 초나라 굴원(屈原)의 시에서 차용한 구절로 물이 맑아 갓끈을 씻을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단다. 그렇다면 물이 많이 고여 있을 필요는 없겠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이번에는 반듯한 규모의 담()이 선을 뵌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나 되는데, 그중 아래의 것은 거의 소() 수준이다. 이럴 때는 안내판을 살펴보는 방법 밖에 없다. ‘6인 목욕담(沐浴潭)6곡 아래와 위로 선녀가 내려와 몰래 몸을 씻었을 듯한 바위와 숨겨진 소를 말한다고 적혀있다. 옛 선비들이야 그 물속으로 첨벙거리며 뛰어들었을 리 없었겠지만 자꾸 뛰어들고픈 충동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첨언까지 해두었다. 그렇다면 앞에서 거론했던 두 개의 담을 합쳐서 목욕담(沐浴潭)이라고 하는가 보다. 참고로 목욕담은 퇴계가 정한 9곡 중 5곡도 된다. 그만큼 의미 있는 장소라는 얘기일 것이다.




6곡이 지나 조금 더 오르면 탐방로는 숲을 벗어난다. 나무다리를 디딤돌 삼아 개울을 건너면 쉼터용으로 만들어 놓은 정자(이정표 : 초암사0.9Km/ 배점주차장2.5Km)가 나온다. 갈길 바쁘다고 너무 서두르지는 말자. 다리의 위아래가 제법 볼만하기 때문이다. 숲 우거진 골짜기와 거무튀튀한 바윗덩이들, 그리고 그 사이로 투명한 옥빛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다. 저 물줄기는 모양과 소리를 바꿔가며 소수서원까지 흘러갈 것이다.



이제부턴 도로를 따른다. 조금 전의 옛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데크로 바닥을 깔아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길이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또 다른 안내판이 나타난다. ‘5풍영담(楓泳潭)’의 들머리이다. 그런데 안내판에는 퇴계가 정한 ‘6청련동애(靑蓮東崖)’이라고 적혀있다. 지금까지 줄곧 신필하의 주장을 따르다가 갑자기 퇴계의 주장으로 변경을 한 이유를 모르겠다.



계곡으로 내려서면 담()이 하나 나온다. 담의 옆에 벼랑도 보이지만 풍광이 썩 뛰어나지는 않다. 퇴계가 말한 청련동애(靑蓮東崖)청련암 동쪽의 바위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청련암은 어디를 이른단 말인가. 이름까지 붙여줄만한 바위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못 이겨 안내판을 다시 살펴본다. <‘5이 새겨진 바위 위에 인위적으로 판 홈이 보인다. 아무래도 안간교(安干橋)를 세웠던 흔적인 것 같다. 안간교 건너 동쪽 낭떠러지로 물이 흘러내린다. 바로 청련암 동쪽 벼랑이다. 하지만 서쪽 어딘가에 있어야할 청련암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안 읽은 것만도 못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청련동애(靑蓮東崖)라는 이름보다는 신필하가 지은 풍영담(楓泳潭)으로 고정을 시키는 게 옳은 것 같다.



이어서 얼마간 더 걸으면 초암주차장에 이른다. 일반인의 승용차가 올라올 수 있는 마지막 주차장이다. ! 깍빡 잊을 뻔 했다. 초암주차장에 이르기 바로 전 왼편으로 길이 하나 열린다는 것을 말이다. 이정표(초암사 0.6Km/ 배점주차장 2.8Km) 하나만 덜렁 세워져 있을 뿐, 요 아래에 뭐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그 어떤 안내판도 보이지 않지만 일단은 내려가 봤다. 의미 없는 길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 내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계단 아래의 계곡은 여기까지 오면서 보았던 다섯 개의 명소보다 훨씬 더 고운 경관을 갖고 있었다. 비록 경사는 크지 않으나 와폭(臥瀑)이 흐르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다 물이 깊은 담()까지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차장을 지나면서 길은 더욱 좁아진다. 도로포장이 되어있는 것을 보면 스님들의 차량은 지나다니는 모양이다. 잠시 후 오른편으로 죽계구곡 옛길이 나뉜다. ‘4으로 연결되는 들머리로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들머리에 이정표(초암사 0.1Km/ 순흥향교 6.0Km)소백산 국립공원 안내도죽계구곡 안내도만 세워져 있을 따름이지 4곡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후 고개를 쭉 내밀기라도 할라치면 그때서야 ‘4용추(龍湫)’ 안내판과 그 옆에 세워진 시판(詩板)이 보일 따름이다.



안내판 아래가 신필하의 ‘4이자 퇴계의 ‘7인 용추(龍湫)이다. 내려가기 전에 안내판부터 읽어보기로 한다. 용추는 죽계에서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한다. 아래위로 반석이 편편히 깔리고 좌우편이 깎아지른 듯한 암각(岩角) 가운데로 급한 여울이 성난 듯 쏟아져 드리워 비폭(飛瀑)이 되었단다. 그 아래에 검푸른 물굽이가 소용돌이치는 깊은 못을 이루고, 큰 바위가 못 가운데 누워, 마치 용이 꿈틀꿈틀 구름비를 뿜는듯하다 하여 용추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내려가 본 용추는 안내판의 설명과는 많이 달랐다. 암각이나 폭포는 그렇다 쳐도 담의 깊이는 어른의 허리는커녕 무릎도 채 넘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얕기 짝이 없는 다른 곳들에 견주다보니 깊게 보였고, 그러다가 용추라는 이름까지 얻었지 않나 싶다.



용추를 지나면 아직까지 단청(丹靑)도 마치지 못한 일주문이 중생을 맞는다. 초암사에 거의 다 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옆에 위치한 화장실 끄트머리에서 화장실을 오른편에 끼고 내려가면 ‘3척수대(滌愁臺이다. ‘온갖 근심을 씻어 낸다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우인회숙(友人會宿)이란 시의 첫 구절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술 좋아하는 나를 보는 것 같아 평소에도 좋아하던 시인지라 전체를 옮겨본다. 옛 시름 씻으려고(滌蕩千古愁, 척탕천고수) 내리 백 병의 술을 마셨다네(留連百壺飮, 유연백호음) 이 좋은 밤 정담이나 나누세(良宵宜淸談, 양소의청담) 달이 밝은데 잘 수야 없지 않겠나(皓月未能寢, 호월미능침) 만일 취하거든 빈 산에 눕게나(醉來臥空山, 취래와공산) 하늘과 땅이 모두 이불과 베개가 아니겠는가(天地卽衾枕, 천지즉금침) 이 얼마나 좋은 시인가 모처럼 말과 뜻이 통하는 친구가 찾아왔다. 세상사 고달픈 이야기가 아닌, 맑고 깨끗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당연히 술잔도 오고갈 것이다. 그러니 밤이 깊다고 해서 어찌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 취할 때까지 마시다가 그대로 누우면 될 일이다. 땅을 베개 삼고 하늘을 이불삼아 덮고서 말이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척수대는 일품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다리 아래까지 내려가 볼 것을 권하고 싶다. 한층 더 뛰어난 풍광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럴 듯하게 생긴 암각(岩角)들 사이로 물이 흐르면서 만들어 내는 와폭(臥瀑)이 제법 규모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담() 또한 제법 깊다. 구곡(九曲) 중에서 가장 깊다고 알려진 용추보다 오히려 한 수 위라고 보면 되겠다. 주변의 풍광 또한 용추 보다 뛰어났음은 물론이다.



삼거리로 빠져나와 조금만 더 걸으면 죽계1가 나온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다리 옆에 또 하나의 다리를 더 세웠다. 보행자 전용이다. 여백이 조금 남으니 자락길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12자락(코스)으로 구성된 자락길 가운데 그 진면목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코스로는 1자락(12.6km)이 꼽힌다. 선비길(3.8km)과 구곡길(3.3km), 달밭길(5.5km)로 나뉘며, 역사와 문화, 생태 삼박자를 고루 갖췄다. 자락길의 자락논밭이나 산 따위의 넓은 부분을 가리키지만, 풍광이 뛰어난 1자락 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구곡길이다. 소백산자락길안내소를 출발점 삼아 죽계구곡을 끼고 초암사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산책 삼아 걸어보기에 딱 좋다. 하지만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달밭길을 더 선호한다. 아름다운 계곡을 계속해서 즐길 수 있는데다 달밭재로 오르는 적당히 가파른 구간까지 끼어있기 때문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오래 묵었을 뿐만 아니라 생김새까지도 괴이하게 생겼다. 돈 많은 졸부들이 침께나 흘리겠다. 정원수로 옮겨다 놓으면 그만일 것 같아서이다. 아무튼 이 부근에서 ‘2청운대(靑雲臺)’ 안내판을 만난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을 수가 없어서 대신 안내판에 적힌 내용을 옮겨본다. 주세붕은 소백산 구름이 비추이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백운대(白雲臺)라 불렀으나, 이황이 소수서원의 백운동과 구분해야 한다면 청운대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부딪쳐 휘감아 도는 물길 속에 우뚝 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나가는 바위 앞에서 스스로 청운의 꿈을 키운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안내판에서 몇 걸음만 더 올라가면 초암사(草庵寺)이다. 깊은 산중에 위치한 절치고는 제법 큰 규모이다. 하긴 의상대사가 지었다니 이 정도의 크기는 유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세우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잠시 초막(草幕)을 짓고 머무르던 곳이란다. 그 자리에 세운 절이 초암사이고 말이다. 퇴계도 이 절의 이름을 알리는데 일조를 했다. 퇴계가 국망봉을 자주 오르내렸는데 그때마다 초암사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다는 것이다. 퇴계의 당시 나이는 48, 가마를 타고도 올라갔다 오는데 이틀이나 걸렸다니 요즘 같으면 소도 웃을 일이다. 70대 후반의 노인들도 하루면 올라갔다 내려오고도 남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퇴계는 가마를 메는 하인들만 실컷 고생시킨 셈이다. 배점주차장에서 초암사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가 결렸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린 건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초암사(草庵寺)는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는데, 이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676(문무왕 16)에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기 위해 절터를 보러 다닐 때 이곳에 임시로 초막을 지어 수도하며 기거하던 곳이라는 설이다. 둘째는 의상이 지금의 부석사 터를 찾아서 불사(佛事)를 시작했는데, 서까래가 없어져 도력(道力)으로 살펴보니 이 절터에 떨어져 있었다. 의상은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라 믿고 여기에 초암을 짓고 한동안 수행한 뒤 부석사를 건립했다고 한다. 사찰의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지만 순흥지(順興誌)’에 따르면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승려 김상호가 지었다는 토굴은 19506.25전쟁으로 전소하였다. 승려 이영우와 민덕기가 연이어 이 사찰에 거처하였고, 이후 승려가 없어 폐사 직전에 있던 것을 1970년대 초반 비구니(比丘尼) 보원이 주석하면서 사찰을 다시 일으켰다. 1981년에는 대웅전 등의 전각을 중수하였다. 사찰 건물로는 대적광전과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염불당, 안심당 등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제작된 ‘3층 석탑(三層石塔)’·서 부도(西 浮屠)’가 있는데, 모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초암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소백산자락길은 한여름에도 햇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나무터널 속으로 스며든다. 입구에 아치형의 문을 만들고 달밭골국망봉 가는 길이라고 쓰인 이름표까지 달아놨으니 길이 헷갈릴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국립공원이다 보니 입산하는 인원을 카운트(count)하기 위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이제부터 자락길의 셋째 자락인 달밭길이 시작된다. 초암사에서 시작해서 달밭재를 넘어 삼가탐방지원센터까지의 5.5km 구간이다. 선비길(3.8km)과 구곡길(3.3km)을 지나왔으니 벌써 절반 이상을 걸은 셈이다.



시작부터 울창한 숲길이 나타난다. 진정한 소백산의 품안으로 들어선 모양이다. 그렇게 200m쯤 들어갔을까 길가에 선 이정표(죽계10.1Km)가 잠깐 왼쪽으로 들어갔다 오란다. 잠시 후 계곡에 이르면 옥빛 물이 잔잔하게 흘러내리는 널찍한 반석(盤石)이 펼쳐진다. 죽계계곡에서 가장 넓다는 금당반석(金堂盤石)이다. 초암사 대웅전 가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니 안내판에는 금당(金堂)이 절에서 석가모니를 모시는 본존을 의미하듯이, 이곳이 죽계구곡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적혀있다. 다른 한편으론 신필하가 볼 때에는 ‘1이지만 퇴계가 골랐을 때는 ‘8이 됨을 참조한다. 참고로 소() 위쪽 폭포 우측 바위에 새겨진 竹溪一曲은 신필하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건너편 바위에는 신필하의 이름까지 적혀있다. 신필하가 이렇듯 금당반석을 제1곡으로 삼고 자신의 이름까지 새겨놓은 것을 보면 이곳이 죽계계곡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절경지라는 증거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락길은 두 갈래(이정표 : 비로사(자락길)3.1Km/ 국망봉4.1Km/ 초암사0.3Km)로 나뉜다. 오른쪽 길은 석륜암터를 거쳐 국망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이다. 퇴계가 1549년에 유소백산록을 쓰기 위해 올랐던 길이라고 한다. 왼쪽 길은 달밭골을 거쳐 소백산 주봉인 비로봉에 오르는 산길로, 자락길은 왼편의 호젓한 숲길을 따른다. 비로봉으로 오르는 고갯마루인 성재로 연결되는 길이다. 성재를 넘어가면 비로사가 기다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갈림목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자 잣나무가 하늘 높이 쭉쭉 자라고 있다. 어디선가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들려온다. 본격적으로 숲길에 들어선 것이다. 아무튼 자락길은 구경거리가 참 많은 길이다. ‘죽계구곡이 끝나면서 읽을거리도 없어질 것이라고 여겼는데 다른 읽을거리가 수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죽령너머길이나 과수원길, 구곡길, 선비길, 달밭길, 죽령옛길, 승지길 등 소백산 자락길을 설명해놓은 여러 가지 안내판들은 물론이고, ‘문화생태 탐방로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백산에서 서식하고 있는 각종 동식물들의 생태계를 설명해놓은 안내판 등 수많은 읽을거리들을 곳곳에 세워놓았다.



얼마간 더 걷자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오고,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데크로 만들어진 쉼터를 만난다. 둘레에 난간까지 만들어 둔 것으로 보아 전망대(展望臺)의 역할까지 겸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시야(視野)는 조금도 트이지 않는다. 하긴 이런 숲속에서 조망을 기대했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nonsense)일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가 ‘9으로 꼽았다는 중봉합류(中峰合流)‘는 어디서 찾으란 말인가. 누군가 이쯤에서 비로봉과 국망봉 남사면에서 흘러드는 물이 하나가 되는 합수곡(合水谷)을 만날 수 있다고 했기에 하는 말이다. 계곡으로 내려가 찾아보는 수도 있겠지만 길이 보이지 않아 그저 여기쯤이려니 하고 생각해볼 따름이다.



데크쉼터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또 다시 계곡을 따른다. 원시의 숲을 낀 골짜기는 더욱 깊어지고 자연미도 넘친다. 소백산국립공원 최고봉 비로봉과 2위인 국망봉은 능선 남쪽으로 깊고 수려한 골짜기가 여러 가닥이다. 그중 비로봉 동쪽으로 흐르는 골짜기는 월전계곡(月田溪谷, 하가동계곡)이요, 국망봉 남쪽 석륜암 터 부근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가 석륜암골(石崙庵溪谷)이다.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 조금 전에 지나왔던 데크쉼터 근처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월전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두 계곡이 합쳐진 물은 죽계(竹溪) 계곡을 이룬 뒤 죽계호(순흥지)로 스며들었다가 소수서원을 끼고 흘러내린 다음 영주를 지나 서천이란 이름으로 낙동강 수계(水系) 중 하나인 내성천으로 흘러든다.



월전계곡(月田溪谷)은 국망봉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있다. 한마디로 끝내주는 길이다. 계곡을 따라 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함께 산중 숲속에서 흘러나오는 새소리 덕분에 지루할 겨를조차 없다. 그 소리들에 흥을 맞추다보니 저절로 어깨춤이 추어진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흥얼거림은 보너스(bonus)라고 보면 되겠다. 그 흥얼거림에 맞춰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그런 내 모습이 산새들의 눈에라도 띄었나보다. ‘나도 여기 있다며 열심히 지저귄다. 산으로 들어서는 길은 이래서 즐겁다.



산은 오를수록 푸르름의 극치를 이룬다. 냇물 또한 더 맑아졌다. 그래선지 돌에 낀 이끼까지 선명함을 더한다. 계곡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물, 울창한 숲, 그 사이로 보이는 흰 바위들. 이들이 함께 빚어지니 비록 죽계구곡은 벗어났지만 어디서든 발을 담그고 '무하지경(無夏之境)'에 빠지고 싶은 풍경들이다. 백운동서원,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도 이 길을 걸었을지 모르겠다. 만일 그랬다면 신재 주세붕과 퇴계 이황도 함께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은 세상 근심걱정 모두 털어버리고 해맑은 자연인이 되어 이 길을 걸었을 게 분명하다.



초암사를 출발한지 40분쯤 지나자 민가(民家) 몇 채가 보인다. 주변 경사지에 만들어져 있는 손바닥 같은 밭뙈기들로 보아 달밭골(이정표 : 비로사 1.74Km/ 초암사 1.66Km)이 아닐까 싶다. 배점리에 속하는 달밭골은 한자로 표기해서 월전곡(月田洞)이라고도 한다. 달밭이 있는 골짜기 마을을 말한다. 소백산 비로봉에서 원적봉으로 이어지는 남동방향의 능선이 있는데, 그 중간쯤의 달밭재 동서쪽의 완사면에 위치해 있다. 이 달밭골은 산중에 밭을 일구어 사는 마을인데, 완만한 경사지에 달뙈기 만한 밭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지명은 이 밭의 모습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달밭'이라는 '다락밭'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뒤에 와전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관련 지명으로 달밭재, 달밭고개 등이 있다. 다른 한편으론 화전민들이 달이 뜰 때까지 일했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민가를 지나면서 산길은 조금 더 가팔라진다. 하지만 여전히 고운 편하다. 보드라운 황톳길에다 경사까지도 서두를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자박자박한 걸음 따라 자락(自樂)’이 더해지는 길이다. 누군가 소백산 트레킹의 묘미는 부드러움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가 보다. 그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서 산길이 험하지 않고, 설악산이나 월악산처럼 뾰족뾰족 튀어나온 남성스런 산이 아닌 엄마 품처럼 포근하다고 했다. 그래서 웅장함보다 아기자기한 멋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이 나뉘는 고갯마루인 성재(이정표 : 비로사 1.0Km/ 초암사 2.1Km)에 올라선다. 초암사를 나선지 한 시간 만이다. 고갯마루에는 벤치 몇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고개에 세워진 안내판은 이곳이 달밭골임을 표기해 놓았다. 비로사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달밭골 명품마을이 나온다고도 적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달밭골은 성재를 중심으로 순흥과 풍기의 달밭골로 나뉘지만, 행정구역의 의미일 뿐이다. 그저 고개를 넘는 정도라고나 할까. 아무튼 달밭골은 국토순례를 하던 신라 화랑들이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며 유오산수(遊娛山水)하던 곳으로 6·25전쟁 때 북한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삶의 터전이란다. 달밭골의 은 산()의 고어(古語), ‘달밭산에 있는 다락밭을 뜻한다.



성재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 자락길은 아름드리 잣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다리쉼을 하고 가란다. ‘잣나무 숲 명상쉼터를 조성해 놓은 것이다. 잣나무는 인간에게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가운데 하나이다. 그 좋은 기운을 실컷 담아가라며 아예 평상과 침대의자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것도 꽤나 많은 숫자이다.



쉼터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경사는 거의 없다. 선비처럼 휘적휘적 걷기에 딱 좋은 것이다. ‘대한민국 3대 아름다운 숲길중 하나로 선정(2015)되었을 정도라며 너스레를 떨던 지인의 말이 실감이 난다. 자락길 한 바퀴를 이미 다 돌아본 그는 이 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안전하게 돌아볼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락길 곳곳에 수많은 전설(傳說)과 스토리텔링(storytelling)들이 스며들어 있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12분쯤 내려오면 민박(民泊)에 주막(酒幕)을 겸하고 있는 달밭골 나눔터가 나온다. 간단하게 입주(立酒)라도 한잔 걸치고 가기에 딱 좋은 장소가 아닐까 싶다. 근처에 펜션도 보인다.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던 옛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관광업으로 직업 이동을 했던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에서 소백산(小白山)의 정상인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길(이정표 : 비로봉3.3Km/ 삼가주차장3.3Km/ 초암사3.0Km)이 나뉜다. 소백산(小白山)은 백두대간의 허리쯤에 솟은 산이다. 옛날의 풍수지리학자들은 소백산을 최고의 명당으로 꼽았다. 이름에 소()자가 들어 있어 작고 만만한 산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산악형(山岳形)의 국립공원 가운데 지리산, 설악산에 이어 세 번째로 품이 넓고 큰 산이 소백산이다. 우리 조상들은 신령스런 산에만 그 이름에 백()자를 넣었다고 하는데, 소백산의 이름도 이와 무관치 않다. 조선시대의 풍수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던 남사고 선생이 우리나라의 명산 중에서 소백산의 기운이 가장 온화하고 아름답다고 말했다니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몇 걸음 더 걸어 내려오면 또 다른 집단시설지구(이정표 : 자락길 초입 0.1Km, 초암사 3.1Km/ 비로봉 3.4Km)를 만난다. 이번에는 소백산 자락골이라는 이곳의 지명이 적혀있는 커다란 입간판까지 세워놓았다. 길가에 여러 대의 승용차가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주민들의 숫자도 제법 되는 모양이다. 아까 성재의 안내판에 적혀있던 달밭골 명품마을은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길가에는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토막을 내어 자른 통나무를 세운 다음 화전민들이 연상되는 상()을 양 옆에 세웠다.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여겨지는 여우와 다람쥐의 조형물을 함께 배치했음은 물론이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포토죤(photo zone)까지 꾸며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데크로 만든 좌대도 두어 개 보인다. 그중 하나는 천막까지 씌우고 의자를 놓았다. 홍보캠페인이나 음악회 등 뭔가 작은 행사를 개최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예비용 공간이 아닐까 싶다.



비로사로 향한다. 길은 둘이나 되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자동차길보다야 보행자용으로 만들어놓은 데크길이 훨씬 더 편할 게 뻔하니까 말이다. 거기다 바닥을 야자수 잎을 엮어 만든 방석까지 깔아놓았으니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다만 가끔 나오는 계단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라면 자동차길을 따라도 될 일이다.



그렇게 5분쯤 내려가면 비로사 입구(이정표 : 비로사0.3Km/ 삼가주차장1.8Km/ 달밭골 명품마을0.4Km)이다. 달밭골 순흥 방면에 초암사가 있다면, 풍기 방면에는 비로사가 있다. 비로사 역시 이 일대 사찰처럼 의상조사의 발자취다. 그런 절간을 어찌 탐방로에서 약간 비켜나 있다는 이유로 들러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절의 산문 노릇을 하는 일주문을 지나면 경북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를 만나고 이어서 제법 긴 계단을 오르면 범종각(梵鐘樓)’ 앞에 버티고 있는 진공대사 보법탑비(眞空大師普法塔碑)’가 나타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승탑이 없이 홀로 서있는 것이 이 탑비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비로사를 중창(重創)한 진공대사는 라말여초에 활약했던 고승(高僧)이다. 그가 죽자 태조는 진공대사라는 시호를 주고 보법(普法)’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비문은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글씨는 자경(字徑) 2의 구양순체(歐陽詢體) 해서(楷書)로 이환추(李桓樞)가 썼다.



비로사(毘盧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으로 통일신라 때 진정(眞定)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이다.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라고도 불리었다. 가난하여 장가도 들지 못한 채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진정은 의상이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가하여 의상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3년 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그 소식을 의상에게 전하였다. 진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소백산 추동으로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서 환생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때의 소백산 추동이 비로사로 추정된다. ‘비로사사적기(毘盧寺事蹟記)’에는 의상이 683(신문왕 3)에 이 절을 개창하고 비로사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126(인종 4) 인종이 김부식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468(예종 1)에는 김수온이 사재를 들여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임진왜란(1592)1908년에 불에 탔으나 여러 번의 개보수(補修)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비로나자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적광전(寂光殿)과 명부전(冥府殿), 반야실(般若室), 망월당(望月堂), 월명루(月明樓). 삼성각(三聖閣), 범종각(梵鐘樓), 염불당(念佛堂), 그리고 종무소와 공양간이 들어있는 보련당(寶蓮堂) 등 나름대로 규모를 갖추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하나 같이 새로 지은 냄새가 풀풀 난다. 아무래도 최근에 큰 불사가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절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996)과 진공대사보법탑비와 석조당간지주 등 신라 말 고려 초의 중요한 유물들이 남아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절을 빠져나와 삼가주차장으로 향한다. 이젠 부담 없이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이곳도 역시 길은 둘이다. 허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테크길을 이용한다. 하긴 일부러 매연(煤煙)까지 맡아가며 걸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야자수 잎 방석을 깔아놓은 바닥은 폭신폭신하기 짝이 없고 두어 곳에는 벤치는 물론이고 그네까지 매어놓은 멋진 쉼터도 만들어 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데크길 가는 방향으로 계곡이 함께 따라온다. 깊은 골짜기 따라 흐르는 물소리 들으며,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바라보며, 이름 모를 새들의 조잘거리는 소리를 즐기며 한가로이 여유를 갖고 걷는다. 길을 걸으며 소백산 자락의 자연을 마음껏 향유해본다. 이런 게 바로 선비정신이 아닐까 싶다. 비록 비를 맞더라도 뛰지 않는다는...



그렇게 10분쯤 걸어 나오면 아까 초암사를 지나면서 보았던 아치형의 문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맞이길 탐방로라는 새로운 이름표로 바꿔달았다. 이곳에서 달밭골 명품마을까지 데크길을 만들면서 붙여놓은 이름이란다.



다락길 탐방의 마무리는 삼가주차장

탐방로 문을 나섰다고 해서 걷기가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1.3Km를 더 걸어 나가야만 삼가주차장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의 여건도 더 나빠진다. 이제부터는 찻길에 기대어 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아까처럼 야자수 방석이 깔린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자동차의 매연까지 피할 수는 없다. 이쯤 되면 다시 속세로 내려온 신선의 마음처럼 다리가 묵직해진다. 초록빛 세상이 펼쳐지고 비취빛 옥수가 발아래 펼쳐지던 숲길을 그리워하며 15분 정도를 걸으면 야영장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삼가주차장(이정표 : 야영장 0.2Km, 달밭골 명품마을 2.2Km, 비로봉 5.5Km)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트레킹이 종료된다. 초암사에서 이곳까지는 2시간이 조금 못 걸렸다. 그렇다면 오늘 트레킹은 총 5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관광지를 구경하느라 소요된 시간을 감안할 경우 5시간 정도를 걸은 셈이다.


소백산 자락길 중 첫째 자락 #1 : 선비길

 

산행일 : ‘17. 6. 12()

소재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과 풍기읍 일원 

산행코스 : 소수서원주차장소수서원금성단선비촌향교죽계계곡초암사달밭재달밭골비로사삼가주차장(소요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소백산 자락길은 경북 영주시, 봉화군, 충북 단양군, 강원도 영월군의 34개시·군에 걸쳐져 있다. 영남의 진산이라 불리는 소백산자락을 한 바퀴 감아 도는데 전체 길이는 143km(360)에 이른다. 올망졸망한 마을 앞을 지나는가 하면, 빨간 사과가 달린 과수원 안길을 통과하기도 한다. 또한 잘 보존된 국립공원 구간을 통과하게 되므로 따가운 햇볕에 노출되는 다른 곳의 걷는 길과는 많이 차별된다. 특히 국립공원 구역이 많아 원시상태가 잘 보존된 숲의 터널에서 삶의 허기를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돌돌 구르는 시냇물과 동행할 수 있어 신선함도 함께 느낄 수 있다. 거기다 소백산이란 명산에 걸맞게 부석사를 위시해 성혈사, 초암사, 비로사, 희방사, 구인사 등의 불교유적지를 탐방하는 재미까지도 쏠쏠하다. 독자적인 3(三道)의 생활문화 감상은 보너스(bonus)로 여겨도 되겠다. 자락길은 모두 열두 자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 걷게 되는 첫째 자락은 가족여행객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길이다. 100살은 족히 넘어 보이지만 선비의 곧은 마음만큼이나 높게 뻗은 소수서원 소나무숲길에서 시작되며, 조선 500년을 관통하는 유학이념이 자락 곳곳에 위치한 문화유산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한양으로 모여들던 선비들이 한번쯤 지나쳤을 법한 이곳은 아직도 까마득한 숲길이고 보드라운 흙길로 보존되어 있다. 산수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예로부터 신성시되고 명당으로 여겨져 수많은 명현을 배출한 이곳에서 옛 선비가 된 듯 선비걸음으로 천천히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며, 생생한 역사를 만나보면 어떨까.


 

트레킹의 시작은 소수서원 주차장(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중앙고속도로 풍기 IC에서 내려와 931번 지방도를 타고 풍기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풍기읍을 통과한 부석사 방면으로 9Km쯤 더 들어가면 소수서원 주차장이 나온다. 오늘 트래킹의 들머리이다. 참고로 소수서원 지역(서원과 선비촌, 향교, 금성단)을 둘러보고 버스를 이용해 배점주차장까지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아니 여름철에는 필수일 수도 있겠다. 3Km를 훨씬 넘기는 먼 거리를 뙤약볕 아래에서 걸을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첫째 자락(1구간)의 가장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 제55)이다. 경내 관람을 빼먹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3천원의 입장료가 아깝지 않으니 일단은 들어가고 보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賜額) 서원이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고려시대 성리학자인 안향이 어릴 적 놀던 곳인 옛 숙수사(순흥면 내죽리) 자리에다 세웠다. 그는 이곳에 안향을 배향하는 회헌사당을 세우고 사당 동쪽에 서원을 건축했다. 이후 1544년 안축(安軸)과 안보(安輔), 그리고 1633(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건축당시 이름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중국 송나라 때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따왔다고 한다. ’여산에 못지않게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이며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다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였단다.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된 결정적 역할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했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을 통해 백운동 서원에 조정의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했다. 신광한은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으로 소수서원이라 이름하고 편액을 내렸다. 이와 함께 사서오경(四書五經)’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影幀: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강학당으로 가다보면 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59)‘가 나온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절의 위치를 알리는 조형물로, 말 그대로 당(, 불화를 그린 )을 매달던 깃대다. 그러니 숙수사라는 절의 당간지주라는 뜻으로 보면 되겠다. 아무튼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서원에서 불교의 유적을 만나는 매우 독특한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높이 3.65m의 이 당간지주는 59의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지주 하나의 너비는 53이고, 두께는 36이다. 윗부분은 올라갈수록 약간 가늘어지고, 맨 꼭대기는 둥그렇게 만들어졌다.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았고, 바깥면 가운데에 세로로 띠선을 새겼다. 앞뒷면의 테두리에는 너비 7인 선을 팠으며, 그 가운데에 다시 능선(稜線) 모양의 띠를 새겼다. 지상에서 1.7m 쯤 되는 안쪽면 윗부분에는 네모나면서 넓은 홈이 얕게 오목새김 되었는데, 이것은 당간을 고정시키는 장치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들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당간지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서원의 배치는 강당인 강학당(講學堂)을 중심으로 뒤쪽에 일신재가 자리하고 오른편에 동서재의 기능을 수행한 학구재와 지락재가 위치하고 왼편에는 제향공간이라 볼 수 있는 문성공묘가 일각문을 두고 방형 담장 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굳이 배치법의 이름을 붙인다면 동묘서학(東廟西學)이라 할 수 있겠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물은 물론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학당이다. 정면 4, 측면 3칸의 굴도리 초익공(서까래를 받치는 도리가 둥근 것)‘ 건물로 평면구성은 마루방 3칸과 온돌방 1칸이고 사면에는 퇴(退. 툇마루의 준말)를 두었다. 강당의 입구에는 백운동(白雲洞)‘이라는 주세붕선생이 처음으로 지은 이 서원의 이름이 적힌 편액(扁額)이 걸려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재의 이름이 적힌 편액은 강당의 내부에 걸려있다.



강학당의 바로 옆에는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가 있다. ’()‘가 들어간 건물은 오늘날의 기숙사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강학당의 북쪽에서 강학당을 바라보고 있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는 원장, 교수 및 유사(有司)들의 집무실 겸 숙소로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닌 연속된 한 채로 이루어졌으며 편액으로 구분하고 있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소수서원 창건 이후 263년이 지난 1805(순조5)에 건축되었으며 다른 서원의 동서재(東西齋)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먼저 서재(西齋)에 해당하는 직방재는 건물이 자리한 방향의 우측에 있는 2칸을 말하며주역(周易)‘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말에서 각각 ()’()’자를 취했다. 이어 동재(東齋)에 해당하는 일신재는 직방재 좌측에 있는 2칸을 말하며 일신(日新)’‘(인격도야가) 나날이 새로워져라(日日新又日新)’라는 뜻으로 대학(大學)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사진은 생략했지만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스승의 처소인 직방재와 일신재(直方齋, 日新齋)의 동북쪽에 자로 배치되었다. 학구재란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하며 지락재는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 유생들이 학문에 정진하는 공간인 학구재와 지락재는 온돌방과 온돌방 사이에 진리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둘 다 3칸으로 꾸며졌으며, 건물 입면 역시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로 공부(工夫)’자 형태로 지어졌다. 또한 학구재와 지락재는 스승의 거처인 직방재, 일신재보다 한자(一尺) 낮게 뒷물림하여 지어졌는데 이는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윤리의식이 건축구도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건물 배치에서부터 예()를 염두에 둔 선인의 인간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이 구도를 마주하게 되면 글선생은 만나기 쉬워도 사람 만드는 스승은 드물다(經師易遇 人師難逢)’는 말이 무색해진다.



옛날 소수서원의 선비들은 경내(境內) 정자인 경렴정(景濂亭)에서 경전을 읽고, 취한대(翠寒臺)로 건너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취한이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죽계의 맑은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의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온 이름이라 전해진다. 퇴계가 조성했다는 취한대의 아래 죽계천은 맑은 물 위에 연잎이 두둥실 떠 있고, 물가에 숲을 이룬 수초가 수채화 분위기를 자아내는 개울이다. 취한대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경자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붉은 색으로 ()’자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하얀색으로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자가 각자(刻字) 돼 있다.‘은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이 새겼고 백운동은 이황이 썼다. ‘경이직내 의이방외 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따왔다고 한다.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다.



소수서원을 둘러봤다면 이젠 금성단으로 향할 차례이다. 길가에 단종애사 대군길(端宗哀史 大君路)’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2015년엔가 경북 정체성선양 홍보사업에 선정되어 영주 선비길을 조성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공사가 벌써 종료되었던 모양이다. 기사에서는 선비길은 우국충정 삼봉길회헌안향 도동길그리고 단종애사 대군길3개 구간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중 단종애사 대군길은 금성대군신단을 출발해 취한대와 사현정을 거쳐 피끝마을에 이르게 되는데 총길이는 8.7Km에 이른다. 이곳 주민들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도모한 단종 복위운동(1456)’이 발각되어 순흥도호부가 폐지되는 등 초토화가 되었으나 그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금성대군신단을 세워 제향(祭享)하고 성황제(城隍祭)를 통해 그의 충정을 민간신앙으로 승화시켰다고 한다. 그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던 죽계천 물줄기를 따라 걸으면서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던진 충절(忠節)’의 역사를 되새겨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잠시 후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참고로 계속해서 도로를 따를 경우 선비촌순흥향교로 연결된다. 금성단을 둘러본 뒤에는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방향을 틀어 마을로 들어서면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돼 순흥에 유배됐다 살해된 세종의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을 모신 금성단(錦城壇)이 쓸쓸한 표정으로 맞는다. 금성단(錦城壇)은 단종 복위 사건으로 유배된 뒤 처형당한 왕숙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제단이다. 순흥읍지에 의하면 홍천현감 이대근이 선영을 다녀오던 중 순흥 청달리를 지날 때 그가 탄 말이 길을 피하여 비껴가는 곳이 있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겨 하마 후 살펴본 뒤 이곳이 금성대군이 피 흘린 곳이라 생각하여 의심을 품은 채 지나갔다. 그날 밤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그 곳은 자신이 피 흘린 곳임을 말함으로써 곧 부사와 함께 사람을 시켜 조사한 후 이 곳을 봉축하고 단을 쌓았다고 한다. 아무튼 정축지변(丁丑地變)으로 알려진 당시 사건으로 인해 금성대군은 죽임을 당하고 순흥부는 폐부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로부터 127년이 지난 1683(숙종 9) 순흥부가 복원되고 순절의사들이 신원(伸寃)되자 1719(숙종 45)에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주창해 그 유허지(遺墟地)에다 단소(壇所)를 설치했다. 1742(영조 18)에는 경성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단소를 정비하면서 위()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워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내오고 있다.




신단(神壇)3단으로 조성돼 있다. 상단은 금성대군, 우단은 이보흠, 좌단은 모의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여러 의사들의 단소(壇所)이며,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하지만 퇴계 이황이 죽계천 유역의 아홉 경승을 골라 각각의 이름을 붙였다는 죽계구곡중 제2곡인 금성반석(金城盤石)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금성단 부근 순흥향교 앞 죽계천 바위나 금성단을 금성반석으로 추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퇴계가 선정했다는 죽계구곡1곡 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 2곡 금성반석(金城盤石), 3곡 백자담(栢子潭), 4곡 이화동(梨花洞), 5곡 목욕담(沐浴潭), 6곡 청련동애(靑蓮東崖), 7곡 용추비폭(龍湫飛瀑), 8곡 금당반석(金堂盤石), 9곡 중봉합류(中峯合流) 등이다.



신단을 빠져나와 오른편으로 돌면 거대한 은행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금성대군의 죽음을 지켜본 증인으로 수령(樹齡)1200년이나 되었단다. 잎사귀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고 해서 압각수(鴨脚樹)로도 불리는 이 은행나무는 고을이 폐부될 때 스스로 고사했다가 200년 후 순흥부가 복권되자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정축지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가히 신목(神木)인 셈이다. 나무에 앉은 매미들이 목청 높여 서럽게 울어대고 있다. 저리도 서러운걸 보면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선비촌을 들러보기 위해서는 청다리로도 불리는 제월교를 건너야 한다. 지금은 시멘트다리로 변했지만 청다리는 우는 아이 주워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젊은 유생들이 기생을 불러 풍류를 즐기다 아이를 낳으면 서로 기를 형편이 못돼 이곳에 버렸다고 전해진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죽계천은 핏물로 물들었던 슬픈 역사가 흐르는 곳이다. 1457(세조 3) 10,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그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은 반대하다가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금성대군이 세조복위를 추진하다 관노에 의해 탄로 나자 이 고을 유생들과 주민들이 참화를 당하고 만다(丁丑之變). 그때 죽임 당한 주민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듯 죽계천에 수장되었고, 그 핏물이 10여 리나 흘러내린 뒤 멎었다 한다. 지금도 피가 멎은 곳에 자리한 마을을 피끝마을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제월교를 건너자마자 길은 두 갈래(이정표 : 선비촌0.3Km/ 순흥향교0.4Km/ 금성대군 신단0.2Km)로 나뉜다. 선비촌으로 가려면 도로를 따라 계속해서 직진해야 한다. 이정표에 나와 있진 않지만 오른쪽으로 난 도로는 소수박물관과 영주시청소년수련원으로 연결된다.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후문으로 빠져나올 경우 이 도로로 나오게 됨은 물론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선비촌이라고 적힌 커다란 빗돌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조선시대 주요 고택을 재현한 우리 고유의 전통마을인 선비촌이 나온다.



광장을 겸하고 있는 주차장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건물들 앞에는 커다란 동상(銅像) 하나가 세워져 있다. ‘영주 선비상이란다. ‘선비란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순 우리말이다. 이곳 영주는 예로부터 학문과 예()를 숭상했던 선비문화의 중심지로 자부해왔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性理學者)라 할 수 있는 고려 말의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 선생의 고향이다. 그런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동상까지 세워놓은 모양이다.



그 옆에는 옛날 풍으로 안내판을 만들고 선비촌의 조성 경위를 적어 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선비의 정신과 태도를 새롭게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장으로 활용하고자 위에서 얘기한 바 있는 안향 선생의 고향에다 조성했단다. 이를 위해 영주 선비들이 실제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복원하였으며 선비촌답게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무구안(居無求安),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 4구역으로 조성해 놓았다. 선비의 정신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들이다. 부자가 아니어도 좋다. 가난해도 자기 수양이 먼저다. 벼슬길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사 편리함만 추구해서도 안 되며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안내판의 뒤로 들어서면 선비촌이 나온다. ‘선비촌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유교사상을 조선시대 선비정신을 통해 재무장하고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오늘날 사회를 되짚어 볼 수 있게 재현해 놓은 곳이다. 해우당고택(김상진), 두암고택(인동 장씨 종가), 만죽재(김문기) 등 영주지역의 대표적인 반촌 무섬마을의 고택을 이곳에 재현한 기와집 7채와 초가(草家) 5, 그리고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정자, 누각, 디딜방아, 대장간, 저자거리, 주막, 외양간 등 사라져간 모습들을 고스란히 보고 체험할 수 있게 해놓았다. 아무튼 옛 모습 재현에 신경을 많이 썼는지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단다.




이곳 선비촌은 영주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마을공동체 형태로 구성하여 옛 영주 선비들의 생활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각 가옥별로 거주했던 사람들의 신분에 맞는 가옥규모에 여러 가구와 생활도구를 전시하였다. 또한 한옥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한옥스테이 프로그램도 있다. 조선시대 선비와 상민의 삶을 체험해볼 수 있는 일종의 테마파크로 보면 되겠다. 윷놀이 제기차기 장작패기 등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것은 물론이고, 기와집과 초가집에서 숙박까지 가능하니까 말이다. 참고로 숙박체험은 김상진가(기와), 해우당 고택(기와), 가람집(초가), 김문기가(기와), 만죽재(기와), 김세기가(기와), 김뢰진가(초가), 장휘덕가(초가), 김구영가(초가), 김규진가(초가), 두암 고택(기와) 등에서 할 수 있다.



저잣거리라고 안 만들었을 리가 없다. 아예 하나의 테마(theme)로 조성해 놓았다. 저잣거리는 숙박이 가능한 마을 울타리 밖에다 배치했다. 영주지역의 오랜 특산물인 묵밥과 산채비빔밥 등을 먹을 수 있는 우진’, 영주 불고기를 파는 수라간’, 인삼곰탕과 청국장을 먹을 수 있는 인삼주막’, 구이정식, 뚝배기 불고기를 파는 종가집등 집집마다 솜씨자랑에 듣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 장터다. 그밖에도 찻집과 소나무로 만든 도마와 소품 가구를 살 수 있는 소나무도마, 은장도를 파는 도우공방 등이 있다.




저잣거리를 빠져나오니 영주시청소년수련원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나온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2004922일 개관했다는 소수박물관에 이를 수 있다. 선사시대에서부터 유교문화, 서원과 향교 등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전시해 놓은 공간이라지만 들러보는 것은 생략한다. 그보다는 순흥향교에서 새로운 뭔가를 찾아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 같아서이다.



이번에는 순흥향교로 향한다. 거리도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주요 기점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큰 어려움 없이 찾아갈 수 있다. 가는 길에 백산계 숭모비(白山 稧 崇慕碑)’가 보인다. 지역민들이 결성한 모임인 모양인데 비석의 크기로 보아 그 규모가 꽤 큰 모양이다.



잠시 후 삼거리(이정표 : 순흥향교0.1Km/ 삼괴정(배점)3.2Km/ 선비촌0.4Km)를 만난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다싶으면 산기슭에 호젓하게 들어앉은 순흥향교를 만나게 된다. 향교를 들르지 않고 곧장 자락길을 따르고자 할 경우에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면 된다.




순흥향교(順興鄕校,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7)는 조선시대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니 공립학교인 셈이다. 창건 시기는 미상(고려 충렬왕 30년이라는 설도 있다)이며, 처음에 순흥부(順興府) 북쪽 금성(金城)에 창건되었다가 1718(숙종 44) 동쪽 위야동으로 이건하였다. 1750(영조 26) 남쪽 석교리(石橋里), 1770(영조 46)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971년에 중수하고 1975년에 누각과 단청을 보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7칸의 대성전, 6칸의 명륜당, 5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4칸의 동재(東齋), 7칸의 문루(門樓), 삼문(三門협문(夾門주사(厨舍) 등이 있다.




대성전(大成殿)에는 5(五聖), 10(十哲)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송조6(宋朝六賢), 우리나라 18(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교육시켰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대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현재 전교(典校) 1인과 장의(掌議) 수인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선지 향교는 한적하기만 하다. 한때는 대학자 안향의 영정을 모시던 큰 향교였으나 예전과 같진 않은 듯, 맞은편에 자리한 소수서원과 비교하면 쓸쓸함이 묻어나기만 한다.



향교에서는 순흥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소백산 큰 줄기에 기대어 있는 순흥(順興)’은 이름만큼이나 아늑한 풍경을 지닌 땅이다. 그러나 땅이 품은 역사는 만만치가 않다. 이곳 순흥은 여말선초(麗末鮮初) 한강이남 제일의 도시였다는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터를 잡았던 곳이다. 하지만 정축지변(丁丑地變)으로 인해 순흥도호부는 폐부(廢府)됐고, 모반(謀反)의 땅으로 버림 받았다. 순흥의 비극은 조선 세종의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에서 비롯된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영월로 유배시켰을 때, 순흥에 유배됐던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뜻을 모아 단종복위 거사를 추진했으나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금성대군을 비롯해 순흥의 65개 크고 작은 집안의 자손 300여 명이 역모로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흘린 피가 죽계를 타고 20리를 흘러 멈춘 곳엔 피끝이란 지명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200년 뒤 숙종에 의해 단종이 복위되면서 순흥 또한 명예를 되찾았지만 새로 생겨난 영주군의 한 개 면에 만족해야 할 정도로 왜소해져 버렸다. 지금의 영주는 물론이고 강원의 영월 태백 삼척과 경북의 봉화 울진 예천 안동, 그리고 충북 단양에까지 이르렀다던 순흥의 영화는 그렇게 세월에 묻혀버린 것이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며 읊던 과거에 대한 회한의 정이 과연 이랬을까?



선비촌으로 되돌아 나온다. 향교 앞 삼거리에서 곧바로 자락길을 탈 수도 있지만 선비촌에서 기다리고 있을 집사람을 내버려두고 혼자서 길을 나설 수야 없지 않겠는가. 집사람을 픽업해서 함께 금성단을 둘러본 다음 본격적인 트레킹을 나선다. 압각수(鴨脚樹)를 지난 자락길은 배점마을로 들어가는 아스팔트도로로 이어진다. 길지 않은 이 길은 정겨운 걷기 길이다. 길가에 심어진 뽕나무는 아직까지도 연한 이파리를 매달고 있다. 그 이파리를 따고 있는 집사람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난다. 초여름의 풍요로움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도로에 이르기 전 단종 복위운동이 발각된 이후 금성대군이 갇혀 살았다는 위리안치지(圍離安置地)’를 만나게 된다고 했는데 확인할 수는 없었다.



길 양편에는 사과와 복숭아 과수원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수줍음 타는 시골처녀 얼굴처럼 발그레한 사과는 전국 생산량의 14%를 차지하는 영주 특산물. 기하학적으로 뻗은 굵은 가지에 수십 개의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모양새가 하늘을 떠받치는 소백산처럼 기운차다. 사람들은 이런 길을 일러 카멜레온(chameleon)’ 같다고 한다. 봄마다 사과꽃이 만발하던 하얀길이 여름엔 녹음 짙은 녹색길로 변했다가, 가을철만 되면 빨간 사과길로 바뀐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사과밭은 초암사 들머리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나타난다. 영주의 사과생산량이 전국 최고라는 말이 실감난다. 눈이 닿는 곳마다 전부 사과밭이기 때문이다. 사과는 배수가 잘 되고, 일교차 크고, 일조량 많고, 비가 적은 지역이 당도가 높고 맛있다고 한다. 영주가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것이 그 원인이란다.




저만큼에 소백산이 나타난다. 조선 중기의 풍수가인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말을 타고 가다가 산을 보고는 즉시 말에서 내렸다는 전설(傳說)의 산이다. 그리고는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며 넙죽 절을 했다는 것이다.



길가 이정표(삼괴정 2.8Km/ 선비촌 0.8Km)의 상단에 고인돌 고분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다. 이름표까지 내걸어놓은 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일단은 들어서고 본다. 논두렁을 타고 잠시 들어가자 커다랗고 너른 바위를 괴어놓은 듯한 형태의 돌무덤이 나타난다. 무덤의 앞에다 안내판을 세우고 돌방무덤에 대한 설명을 해놓았다.



돌방무덤은 석실분(石室墳) 또는 석실묘(石室墓)라고도 불리는데 강력한 권력이 나타난 삼국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돌방무덤은 짜임새와 묻는 방식(葬制)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주검을 널방에 넣는 방식에 따라 벽을 만든 뒤 천장돌을 얹는 구덩식(竪穴式)과 천장돌을 얹은 다음 한쪽 벽을 여는 굴식(橫穴式)으로 구분된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유행하던 굴식 돌방무덤의 영향을 받았지만 기존의 돌덧널무덤(石槨墳)의 전통을 이어오다가 7세기쯤 널길이 앞 벽의 한쪽에 치우치거나 가운데에 있고, 나들이문이 있는 굴식 돌방무덤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이곳 순흥에는 비봉산을 중심으로 돌방무덤이 산재해 있는데, 읍내리고분군과 바느래고분군이 있다고 적고 있다.



자락길은 고인돌 근처에서부터 햇빛에 노출된다. 그늘을 만들어줄만한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완전한 땡볕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배점마을로 향하는 도로에 올라선다. 주말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평일 오전은 한갓지기만 하다. 이 길은 도로를 향해 늘어뜨린 단풍나무가 특징이다. 요즘 관광지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길가에다 벚꽃나무를 심는다. 내 눈에는 무척 거슬리는 풍경 중의 하나이다. 그래선지 몰라도 단풍나무 가로수길이 유난히도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단풍나무 그늘 아래를 더운 줄 모르고 걷는데 도로 곳곳에 여우 출현 주의안내판이 내걸려 있다. ‘로드킬 위험구간이라는 현수막도 보인다. 소백산이 여우 방사지역이라 점프력이 뛰어난 여우들이 방사장 울타리를 뛰어넘어 도로로 내려올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멸종위기 종이라니 조심해서 운전해 볼 일이다.



도로에 올라서자 소백산자락길안내판이 걸려있다. 하단에는 자락꾼의 품격은 길바닥에 널려진다라는 글귀를 적어놓았다. 쓰레기를 흘리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튼 이 소백산자락길은 영남의 진산이라 불리는 소백산자락(단양·영주·봉화·영월 총 143)을 한 바퀴 감아 도는 숲길이다. 구간은 모두 12자락으로 매 자락마다 평균 거리가 12내외다. 2009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생태탐방로, 2010년에는 한국형 생태관광10대 모델에 선정됐고 2011년에는 국내 관광부분 최고의 영예인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되기도 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길가에 쉼터를 겸한 작은 공원(公園)이 만들어져 있다. 그 옆에는 죽계별곡(竹溪別曲)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죽계별곡은 고려말 순흥(順興) 사현정마을 출생인 안축(安軸, 1287-1348)이 지은 경기체가(景幾體歌)로 모두 5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적인 내용은 그의 고향 순흥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1연은 죽령(竹嶺)의 남쪽, 영가(永嘉)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小白山) 앞에 위치한 죽계의 경관을, 2연은 죽계의 숙수루(宿水樓복전대(福田臺승림정자(僧林亭子) 등에서 취해 노는 모습을, 3연은 향교(鄕校)에서 학자의 제자들이 육경(六經)에 심취해 있는 정경을, 4연은 좋은 시절이 돌아와 꽃이 만개하는 모습을 보며 천리 밖의 왕을 그리는 신하의 정을, 5연은 꽃·방초·녹수(綠樹) 등이 어우러진 운월교광(雲月交光)의 경치를 읊었다. 고려 신흥 사대부의 자신감 넘치는 생활 정서가 담겨 있으며, 문학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당시 한문체 가사에서 널리 유행했다고 한다. ‘관동별곡과 함께 근재집(謹齋集)’에 실려 있다.



빗돌을 지나면서 순흥저수지(竹溪湖)가 내다보이기 시작한다. 퇴계가 꼽은 제3곡 백자담(栢子潭)은 저 저수지물에 잠겨 버렸다고 한다. 덕분에 하계 이가순(霞溪 李家淳·17681844)소백구곡시송림곡(松林曲)을 통해 위치를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란다.



길가에는 예쁘게 지어진 집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하나같이 모두 펜션과 음식점등의 영업을 하고 있다. 그만큼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누군가는 이곳 죽계구곡(竹溪九曲)을 일러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한 죽계천이 선비의 고장에서 빚은 아홉 폭 두루마리 산수화나 다름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조선 명종 때 퇴계 이황이 중국 송나라 유학자인 주희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 따 죽계구곡이라 명명했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또한 고려 문장가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의 배경지로도 유명하다.



아스팔트길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소백산자락길은 600년생 느티나무 세 그루가 다정한 배점마을을 만난다. ‘배점은 배순의 무쇠점(대장간)이 있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배점(裵店)’ 마을의 원래 이름은 평장동이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배순의 학문과 충··덕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각을 세우면서 배순(裵純, 1548~1610, 행적기록이 있는 기간)자와 점방(店房) ‘자를 따서 배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을 뒷산에는 배순의 묘가 있으며, 이 마을주민들은 배순을 마을신(洞神)으로 모시고 매년 음력 정월 14일 밤 자시(子時, 23:00~01:00)에 삼괴정(三槐亭) 배순의 정려각(旌閭閣)에서 동제(洞祭)를 지내오고 있단다. 그는 비록 스스로 선비라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 선비 이상으로 여겼다는 증거일 것이다.



배점마을에는 배순정려비(裵純旌閭碑,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9)’가 세워져 있다. 정려비는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위에서 얘기했던 철장인(鐵匠人) 배순(명종광해군)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4각 방형의 대좌 위에 올라앉은 비()는 소박한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넓어지는데 이수(螭首)가 없는 게 특징이다. 1615(광해군 7)에 정려(旌閭)되어 1649(인조 27) 손자 배종(裵種)이 비석을 세웠고, 1755(영조 31) 그의 7대 외손(外孫)인 임만유(林晩維)가 비석에 충신이란 말을 넣어 고쳐 세웠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배순은 천민인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탓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소수서원까지 매일같이 걸어와 강학당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마당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퇴계 선생이 이를 가상히 여겨 유생들과 같이 글을 읽게 하였고, 그로 인해 배순은 성리학의 거성 퇴계 선생의 유일한 천민 제자가 되었다. 퇴계의 제자 309명을 수록한 급문제현록(及門諸賢錄)’에도 배순의 이름이 올라 있다. 배순은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철()로 상()을 모시고 삼년상복(三年喪服)을 입었으며 선조대왕이 승하했을 때에는 매월 삭망(朔望)에 국망봉에 올라 궁성(宮城)을 향해 곡제사(哭祭祀)3년이나 지냈다고 한다. 그 소문이 궁 안에까지 들리자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잠시 후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널따란 주차장에 들어선다. 선비촌을 출발한지 1시간 만이다. ‘배점주차장이란 지명을 알리는 표지판 외에도 이정표(초암사 3.2Km/ 선비촌 3.6Km)와 낙동강이 이곳 소백산에서 시작된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 앞에서 자락길’ 12자락(코스)이 오른편으로 나뉘니 주의할 일이다. 1자락은 주차장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다. 참고로 이곳은 삼괴정(三槐亭)’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배점마을 입구에 수령이 600년이나 된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무튼 해발이 230m인 선비촌에서 1시간을 걸은 끝에 50m의 고도(高度)를 높였다. 평지를 걸어온 셈이다. 이곳 주차장의 해발은 280m, 초암사의 높이가 500m이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그 거리가 3.3Km나 되니 서둘러서 고도를 높여야 할 이유는 없다.



주차장에는 소백산 국립공원 안내도외에도 소백산 자락길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게 없느니 만도 못하다. 달밭길(5.5km) 구간이 빠진 채로 선비길(3.8Km)과 구곡길(3.3Km) 구간만 그려져 있는 것이다. ‘소백산 자락길답사를 위해서 찾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 구간을 한꺼번에 걸어보길 원할 테니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지도가 되어버렸다. ‘CS(customer satisfaction)’라는 단어가 일상적인 용어가 되어버린 요즘이다. 고객만족, 고객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게 그리도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명색이 공공기관일진데 말이다.



주차장에는 아주 멋진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데크로 좌대(座臺)를 만든 다음 백보드(backboard)를 세우고 예쁜 글씨체로 소백산 자락길이라고 적었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울 정도로 멋진 포토죤(photo zone)이 아닐까 싶다. 포즈를 취하고 있는 집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하긴 이런 멋진 자리에 앉았는데도 즐겁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게다. 자락길이란 이름에 걸맞게 잘 만들어 놓은 장소라는 얘기이다. 소백산자락길을 만든 ()영주문화연구회에서는 자락길을 自樂이라고 칭했다. ‘스스로 즐기며 걷는 길이라는 의미다. ‘걷는다는 그 자체가 스스로 하는 행위다. 즐거움 없이 할 수 없다. 길에서는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사색과 즐거움이 교차한다. 그렇다, 길은 과거를 보여 주며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사색의 공간이다. 과거와 미래를 공유한 가치의 결과가 현재 방향을 정하고 걷는 길이다. 길에서 묻고 길에서 답을 구하며 길을 걷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