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고원길 12구간(고개너머 동향길)

 

여행일 : ‘24. 6. 15()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안천면 및 동향면 일원

여행코스 : 안천소운동장노채마을긴재(인증)상노마을가래재(인증)상능마을추동교외금마을동향면사무소(거리/시간 : 16.7km, 실제는 노채마을부터 14.66km 4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안천소운동장(진안군 안천면 노성리)

통영-대전고속도로 무주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장수방면으로 4km쯤 내려오다 적상교차로에서 30번 국도(진안방면)로 옮겨 12km쯤 들어오면 안천면 소재지인 노성리에 이르게 된다. 진안고원길(12구간) 조형물은 안천소운동장 앞에 조성해놓은 길거리장터의 캐노피(canopy) 아래 설치되어 있다.

 용담호반에 자리한 안천면소재지를 출발 용담댐의 수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긴재, 가래재 등 600m도 넘는 높은 고갯마루를 넘어야만 금강 상류의 동향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고개넘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때문에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 수고로움은 필수, 눈에 들어오는 풍경도 단조로운 편이다. 대신 진안에서만 볼 수 있는 고원지대 특유의 풍광을 마주할 수 있다. 난이도는 으로 분류된다.(지도는 광주송아산악회의 것을 빌려왔다. 궤적이 올바르게 그려진 유일한 지도였기 때문이다)

 10 : 27. 실제 출발지는 노채마을’. 5km 전방의 상노마을에서 기다리기로 한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나도 2.2km를 단축해서 걷기로 했다. 기껏해야 2.8km를 더 걷는 셈이지만, 이게 높이 600m 남짓의 산 하나를 오롯이 넘어야하는 험난한 여정이라 시작부터 심난하다. 물론 서서히 걷는다면야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상노마을에서 내가 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집사람을 생각하면 어찌 속도를 늦출 수 있겠는가.

 뒤돌아본 노채마을’. 문헌에는 유채리(鍮債里)’로 적혀있기도 한데, 이는 옛날 이곳에서 놋그릇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놋쇠라는 한자어 ()’가 우리말 놋으로 변해 놋채가 되었다가 한자화 과정에서 노채(魯埰)’로 변했다는 것이다. 놋그릇 제조가 부()를 가져다주었던지 옛날에는 천석지기가 한둘이 아니었을 정도로 부촌이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을 빠져나오다 눈물겹도록 반가운 풍경을 만났다. 그렇게나 귀한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봉지로 싸놓은 것은 출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비록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과나 배가 아닌 복숭아였지만 말이다

 10 : 35. 한성양계장 앞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그런데 농장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소독기가 설치되어있는 게 아닌가. 저렇게까지 외부로부터의 병원(病源)을 차단시키기고 있는데, 설마 걷기 여행자들에게 길을 내주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왼쪽으로 갔고, 덕분에 나는 무지막지하게 가파른 임도를 한참이나 오르다가 되돌아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하나 더. 사실은 갈림길에 고원길의 방향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섣부른 상황판단 때문에 이를 챙겨보지 못해 당한 참사였다.

 한성양계장에는 ‘()하림의 안내판(알차고 건강한 자연이야기 자연실록’)이 세워져 있었다. ‘자연실록 ()하림의 친환경 닭고기 브랜드이다. 그러니 이 농장에서는 닭을 기르면서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덕분에 우린 건강한 밥상을 차릴 수 있고...

 농장을 지나면서 길은 엄청나게 가팔라진다. 사람을 스틱, 차량은 사륜구동을 준비해야만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10 : 48. 그러니 찾는 사람들이 드물 것은 당연. 민가(이정표 : 동향면사무소 13.1km/ 안천소운동장 3.6km) 앞에서 놀던 개도 낯선 이방인이 오히려 반가웠던 모양이다. 짖어대는 대신 자신의 은밀한 속살까지 선뜻 보여주며 반긴다

 10 : 53. ‘어디서 오셨나요?’ 주인장도 내가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다. 걷기 여행자들이 잊을만하면 한둘씩 지나간다며, 조금 더 올라가면 조망 좋은 곳이 있으니 꼭 들어가 보란다. 아니 말만으로는 못 미더웠던 모양이다. 차량으로 나를 앞지르더니 탐방로를 약간 벗어난 지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10 : 54. 그의 말마따나 용담댐과 구봉산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는 관광해설사 역할까지 자진해서 해줬다. 용담댐과 구봉산이 품은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꼼꼼하게도 들려주셨다. 지면을 빌어서나마 그분께 감사드려본다.

 그런 풍경을 줌으로 당겨봤다. 용담호의 아름다운 자태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 끝에 걸려있어야 할 구봉산은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버린다. 그러니 4봉과 5봉 사이에 놓여있는 구름다리를 보는 건 언감생심이 되어버렸다.

 10 : 58. 그와 헤어져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산길로 들어선다.

 산길 초입에 모던(modern)한 벤치가 놓여있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전 잠시 숨을 고르라는 모양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은 덤이다. 하지만 조금 전 농부의 안내로 눈에 담던 조망에 비할 바는 아니다. 구봉산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용담댐도 주변 잡목들이 시야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산길은 무척 가팔랐다. 곧장 올라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를 써가면서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간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곳곳에 침목계단을 깔아놓았으니 속도만 조금 떨어뜨리면 될 일이다.

 첩첩산중, 그것도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오르지 못할 산비탈도 인간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으니 산길을 벋어나지 말란다.

 설마 저 취나물까지도 재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나저나 12구간은 걷는 내내 저런 산나물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고개너머라는 브랜드 수식어답게 높은 고개를 넘는 탐방로 주변에는 드릅, 취나물, 당귀, 머위 등 산나물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11 : 15.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긴재에 올라섰다. 왼쪽으로는 형제봉(658.9m)를 거쳐 지장산(773.6m)로 연결되며, 오른쪽으로는 싸리재와 고산(875.8m)을 지나 금강에서 숨을 다하는 능선상의 한 지점이다. 높이는 610m(산길샘 앱). 아까 오르막길이 시작되던 한성농장의 해발이 320m이었으니 290m를 치고 오른 셈이다.

 이곳은 12구간의 첫 번째 인증지점이기도 하다. 완주에 인증을 더하고 싶은 여행자라면 이정표(동향면사무소 12.4km/ 안천소운동장 4.3km)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둘 일이다.

 반대편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안천면(노성리)으로부터 바톤을 넘겨받은 고원길은 이제 동향면(자산리)로 들어간다. 그나저나 내려가는 길도 무척 가팔랐다. 곧장 내려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를 써가며 겨우겨우 고도를 낮추어간다.

 잠시 후 내려선 계곡은 원시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길은 또렷하게 나 있었다. 표지기 또한 촘촘하게 매달려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11 : 25. ‘상노마을로 내려선다. 법정 동리인 자산리(紫山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대야·상노·용암·중노·하노·후고산·고산골) 중 하나로 해발이 456m나 되는 첩첩산중에 하늘 아래 첫 동네인양 들어앉았다. 진안군(안천면)과 무주군(부남면)의 경계에 놓여있기도 한데, 산천경개를 유람하던 창령 성씨’(昌寧成氏)가 마을 뒷산인 국사봉(國士峯,756.8m)의 아름다움에 반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마을회관 앞에서 길이 좌우로 나뉘고 있었다. 이정표(동향면사무소 11.7km/ 안천소운동장 5.0km)는 왼쪽을 가리킨다.

 군내버스 정류장, 회차(回車) 지점이어선지 꽤 넓은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대형버스도 넉넉하게 차를 돌릴 수 있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를 몰랐던 나는 산악회장에게 13번 국도변에 있는 하노마을(이곳으로 들어오는 1차선 도로의 초입)’까지만 집사람을 실어다 줄 것을 부탁했고, 덕분에 집사람은 2.5km나 더 걷는 수고로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을 벗어나면 길은 임도로 연결된다. 산허리를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 상노마을은 갈골로도 불린다고 했다. 자하리(紫霞里)와 합쳐지기 전의 지명인 노산리(蘆山里)’도 주위 산이 비안함로형(飛雁含蘆形 : 기러기 갈잎을 물고 나른다)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이 마을에 갈대가 많았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갈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눈에 들어오는 공터마다 망초만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망초(亡草)가 밭에 자라면 농사를 망치고, 농사를 망치면 나라가 기운다고 했다. 뽑고 또 뽑아도 없어지지 않는데 질린 농부가 에이! 망할 놈의 풀이라 투덜댔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농부, 아니 온 나라가 싫어한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추억속의 옛 얘기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어린잎은 봄나물이 되어 식탁으로 올라가고, 초여름이면 산하를 온통 하얗게 물들이며 여심을 자극한다.

 집사람과 만난 다음부터는 걷는 속도를 뚝 떨어뜨렸다. 새순으로 돋아난 드룹을 채취하느라 부산을 떠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다. ‘단오가 지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으니 웬만한 산나물은 다 먹을 수 있다며 참취 당귀의 연한 잎도 함께 따고 있다.

 그렇다고 방심을 끼고 사는 그녀의 눈에 꽃이 들어오지 않겠는가. 꽃이 화려하고 예뻐서 나리꽃 중 으뜸으로 치는 참나리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으니 말이다. 꽃말은 순결, 깨끗한 마음, 존엄. 아름다운 꽃만큼이나 고귀한 의미를 품었다.

 11 : 51. 하노마을에서 시작되는 메인 임도와 만난다. 이곳을 기점으로라도 삼으라는 듯 이정표(동향면사무소 10.5km/ 안천소운동장 6.2km) 삼거리라는 이름표까지 달아놓았다.

 임도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풍경. 발아래는 하노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 그 뒤는 아까 노채마을에서 넘어왔던 형제봉 능선이다. 그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고산(875.8m, ‘깃대봉으로도 불리는데 암릉을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이 아닐까 싶다.

▼ 임도는 가래재를 향해 올라간다. 500m를 걸어가는 동안 50m쯤 고도를 높이는 정도이니 별 어려움 없이 올라갈 수 있는 구간이다.

▼ 12 : 00 – 12 : 05. 두 번째 인증지점인 가래재(이정표 동향면사무소 10.0km. 안천소운동장 6.7km)’에 올라선다덕유지맥 봉화산(885.6m)에서 국사봉(757.7m)을 지나 두억봉(503.5m)으로 가는 능선상의 고개로 높이는 해발 557m쯤 된다.

▼ 고갯마루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덕분에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차려놓은 다양한 과일들로 갈증을 다스리다 갈 수 있었다.

▼ 쉼터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시야가 툭 트이면서 덕유산의 주능선이 호쾌하게 드러난다.

▼ 이후부터는 벌목을 마친 산비탈을 따라 난 임도를 따른다덕분에 최고의 조망을 즐길 수 있다하지만 오뉴월 뙤약볕을 가려줄만한 그늘이 없어 죽음의 행진이 될 수도 있겠다.

▼ 임도는 국사봉(757.7m)의 7부쯤 되는 능선의 산비탈을 헤집으며 나아간다. ‘고원으로 대변되는 진안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걷는 멋진 구간이다.

 고원길은 백두대간을 앞이나 옆에 놓고 이어진다. 남덕유산. 무룡산. 중봉.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덕유 능선이 백두대간과 궤를 같이하며 아슴푸레하게 산그리메를 그리고 있다.

 그런 조망을 즐기라는 듯 중간쯤(이정표 : 동향면사무소 9.4km. 안천소운동장 7.3km)에 쉼터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굴곡진 임도를 걸으며 만나는 풍경들이 더 또렷하니 일부러 쉬어갈 필요는 없겠다.

 이렇듯 덕유산의 주능선을 앞에다 두고 걷기도 한다.

 눈을 들면 사방이 첩첩산중이다. 그것도 1천 미터를 훌쩍 넘기는 고산준령들이다. 문득, 진안출신 동료에게 간짓대 걸쳐놓고 턱걸이 하다 왔느냐며 놀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네 고향 순창도 오십보백보라는 되받아치기가 이어졌지만 이곳 진안 출신은 너나없이 촌놈으로 놀림 받던 시절이었다.

 벌목으로 얻은 통나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구도만 잘 잡으면 인생사진 하나쯤 거뜬히 건질 수 있는 풍경이다.

 벌목은 현재진행형이었다. 덕분에 먼지가 폴폴 나는 임도를 한참이나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0분쯤 걸었을까 임도가 숲속으로 파고든다. 울창한 골짜기 숲에서 품어져 나오는 피톤치드와 청량한 공기를 마셔가며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안내판은 이 구간이 자산리 하노마을과 능금리 상능마을을 잇는 길이 8.20km의 임도임을 알려준다. 지도에 현재 위치를 표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나 혼자만의 넋두리일까?

 12 : 38. 곁가지 임도가 갈려나가는 삼거리. 이정표(동향면사무소 7.5km/ 안천소운동장 9.2km)는 이곳도 삼거리라고 적고 있었다.

 임도는 계속해서 울창한 숲속을 헤집는다. 하지만 가끔은 조망이 트이면서 덕유산능선을 보여주기도 한다.

 12 : 44. 또 다른 임도안내판을 지나자 이번에는 작은 소류지가 얼굴을 내민다. 해발 400m를 훌쩍 넘기는 진안고원의 천수답은 저런 소류지가 있었기에 논농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12 : 49. 임도를 벗어나자 상능마을(이정표 : 동향면사무소 6.7km/ 안천소운동장 10.0km)’이 얼굴을 내민다. 아니 능금마을의 윗뜸쯤으로 보면 되겠다.

 국내 자급률이 1% 미만인 우리밀 신토불이의 또 다른 축이 된다. 그런데도 서해랑길에서는 심심찮게 눈에 띄었었다. 하지만 진안고원에서는 누렇게 익은 밀밭은 보기드믄 풍경이 된다.

 코스를 단축한 여유로움이랄까 느림의 미학을 즐겨보기로 했다. 먼저 천천히 걷는다. 다음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하지만 고원길에서 만난 주민들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그리고 하나같이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시고 안전을 응원해 주셨다. ! 상노마을에서 만난 할머니께 보리수를 한웅큼이나 얻어먹었다는 것을 깜빡 빠뜨릴 뻔했다.

 마을을 지나다가 살구나무를 만났다. 하지만 집사람을 그냥 지나쳐버린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 탓일 것이다. 하긴 홍천의 농막에 심어놓은 과일나무들 중에도 살구나무가 있지만 다른 과일들에 밀려 동네사람들 몫으로 남겨둔지 이미 오래됐다.

 13 : 16. 시시각각 변하는 능금리 풍경들을 눈에 담다보면 어느덧 상능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린 능금리(能金里) 5개 행정부락(상능·하능·추동·외금·내금) 중 하나로 ()’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마을이다. 거기에 마을이 번성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능길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풍요가 넘치는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13 : 20. 49번 지방도(진성로)를 횡단한다(이정표 : 동향면사무소 5.0km/ 인천소운동장 11.7km). 그리고는 마을회관과 정자 사이를 지나 능길교를 건넌다. 이때 머리에 를 얹고 있는 마을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이 마을에서 소를 많이 키운다는 얘기일 것이다. 안내판은 그밖에도 고추, 인삼, , 마늘, 기장 등의 밭작물들을 특산물로 꼽고 있었다.

 도로변에서 바라본 상능마을(능길+웃담)’. ‘국사봉 자락이 동남쪽으로 뻗어내려 버덩(좀 높고 평평하며 나무가 없는 들)을 이루는데, 이 버덩의 위가 상능마을, 그리고 아래에 하능마을이 위치한다. 하나 더. 상능마을에는 벼슬바위가 있다고 했다. 이를 관바우, 관암이라고도 하는데, 이 바위가 떨어지면 마을에서 벼슬하는 분이 나온단다. 마을 어귀에는 밀양 박씨 열녀비 분성 김씨 열녀문도 있다고 했지만 찾아보지는 못했다.

 능길교를 건넌다. 이때 구량천(九良川)’의 물줄기가 내려다보이지만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것은 없다. 아니 물가에 걸터앉은 정자는 나름대로 멋진 풍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의 생존에 있어 물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무릇 물은 생명을 살리며, 어디 한 곳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순리를 일깨워준다. 그래서 고대 왕들은 물길을 다스리는 일을 가장 주요한 정사로 여겼다. 그 물길은 주요 이동수단이 되기도 한다. 물길이 사나우면 뗏목이 지나가고, 그게 수그러지면 나룻배를 띄운다. 그 길을 나는 지금 걸어서 간다. 물길이 아닌 물가로...

 그러다 앵두나무를 만났다. 때깔 좋은 과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참기로 했다. 맞은 편 민가에서 일부러 심어놓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그네에게 길을 내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민폐까지 끼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13 : 29. 징검다리로 구량천을 건넌다. 우리네 기억속의 징검다리. 즉 제멋대로 생겨먹은 돌들이 아닌 게 흠이기는 하지만 종종거리며 건너다니던 옛 추억을 소환시키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풍경이다.

 징검다리를 건넌 다음, 이번에는 구량천을 왼쪽에 끼고 간다. 이 구간은 검붉은 오디를 주렁주렁 매단 뽕나무가 함께 해준다. 집사람이 가다서기를 반복하며 오디를 따먹느라 여념이 없었던 구간이기도 한다. 아무튼 작년 이맘 때 코카서스 3을 여행하면서 따먹던 오디처럼 새콤달콤하지는 않았지만 간식거리로는 이만한 것도 없었다.

 탐방로 오른편으로 심심산골에서는 보기 드믄 풍경이 펼쳐진다. 구량천의 감입곡류(嵌入曲流)가 만들어놓은 충적평야(沖積平野)이다.

 건강 밥상이 대세인 요즘이다. 이곳은 우렁이 농법으로 친환경 쌀을 생산하는가 보다. 뿌리를 내린 벼 포기마다 우렁이 알들이 매달려 있었다.

 감입곡류의 물길은 저렇게 멋진 바위절벽들을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그게 훌륭한 눈요깃거리가 된다.

 들녘 너머에는 능금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추동마을이 있다. 옛 이름은 가래골’. 가래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걸 한자화하면서 추동(楸洞)’이 되었다. 저 마을은 또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아래서 지내는 당산제가 볼만하다고도 알려져 있다.

 진안은 인삼의 고장이다. 하지만 수박도 이에 못지않은 모양이다. 들녘 곳곳을 수박밭이 점령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맞다. 인터넷은 진안 수박을 명품으로 꼽고 있었다. 20 이상의 일교차가 큰 고랭지 기후의 영향으로 아삭한 식감과 12brix 이상의 높은 당도를 자랑한단다.

 13 : 48. 2차선 도로인 능금로를 가로지른다. 이때 추동교를 장식하고 있는 한우가 눈길을 끈다. ‘진안하면 흑돼지가 연상될 정도로 진안에서의 흑돼지는 독보적인 존재다. 그런데 저런 조형물을 스스럼없이 내걸 정도면 한우도 그에 못지않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길은 계속해서 구량천을 옆구리에 끼고 간다. 이즈음 큼지막하게 들어선 사과밭을 만날 수 있었다. 사과는 진안의 또 다른 특산품이다. 청정 고랭지에서 맑은 이슬을 머금고 자란 진안 사과는 큰 일교차와 비옥한 토양성분으로 당분과 유기산, 펙틴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알려진다.

 오뉴월 뙤약볕에 알알이 여물어간다. 하지(夏至)를 코앞에 두어선지 어떤 것은 붉은 빛깔까지 띠고 있었다. 제발 무럭무럭 잘 자라서 올 가을에는 부담 없이 사과를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감입곡류의 구량천이 아름다운 자태로 다가온다. 구량천은 하천 생태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자연의 보고로 알려진다. 청정 1급수에서만 자라는 다슬기와 쉬리, 쏘가리, 모래무지 등 어패류는 물론이고 갈대와 억새풀 등 수생식물도 만날 수 있다. 회색빛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이 잠시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이다.

 이후부터는 구량천의 물길을 돌리게 만든 산자락을 따라 걷는다. 산비탈과 구량천 사이에 도로를 만들었는데, 양옆으로 굵직한 벚나무가 도열하고 있어 나름대로의 풍치를 자랑한다. 하지만 구간의 양쪽을 철망으로 막아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이 구간의 간식거리는 산딸기가 되어 주었다. 걷기 여행을 해오면서 따먹던 것들보다 작고, 새콤달콤한 맛도 약간 떨어졌지만 잠깐의 주전부리로는 충분했다. 거기다 산딸기를 장복하면 오줌줄기까지 굵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딸나무도 붉고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열매가 우리가 흔히 먹는 딸기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과실은 식용이 가능하고, 달달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산딸기가 지천인데 그보다 맛이 떨어지는 것을 일부러 먹을 필요가 있겠는가.

 14 : 10. 금곡교를 건너온 49번 지방도(진성로)로 올라선다. ‘외금마을의 군내버스정류장(이정표 : 동향면사무소 1.9km/ 안천소운동장 14.8km)이기도 하다.

 탐방로는 도로(진성로)’를 만나자마자 다시 헤어진다. 그리고는 능금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외금마을로 들어간다. 고려시대까지는 금구사로 불리었는데, 언제부턴가 바깥 쇠실로 바뀌었고, 이걸 한자화하면서 외금(外金)’이 되었다고 한다.

 외금마을 안내판. 저 조형물의 정체는 과연 뭘까? 아까 상능마을의 것에서는 뿔이 달려있어 한우를 유추해낼 수 있었는데, 요것에는 그마저도 없으니 정체불명의 짐승이 되어버렸다. 안내판이 마을 특산물로 꼽고 있는 한우가 맞겠지?

 탐방로는 마을회관(경로당)을 기점으로 삼아 유턴(U turn)을 한다. 그리고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자락을 에둘러간다. 지도에 나오는 말고개로 연결시키기 위해 일부러 마을로 이끈 게 아닐까 싶다. ‘고개넘어 동향길이란 브랜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시답잖은 고개 하나를 추가했을 테고...

 14 : 19. 잠시 후 49번 지방도(진성로)와 다시 만났다. 웬만한 왕릉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큰 고분이 눈길을 끄는 고갯마루(이정표 : 동향면사무소 1.5km/ 안천소운동장 15.2km)이다. 묘역에 창령 성공 양세 효자비가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창령성씨(昌寧 成氏) 문중의 지체 높으신 분이 묻혀있지 않을까 싶다.

 탐방로는 이제 도로(진성로)를 따라간다. 도로 확포장공사로 인해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데, 오가는 차량이 드물어 먼지라도 덜 일으킨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14 : 24  14 : 29. 용담향교의 홍살문이 잠깐 들렀다가란다. 그것도 말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오란다. 그런데 용담향교가 왜 동향면에 있지? 이유는 간단했다. 원래는 용담면 옥거리(龍潭縣 邑治)에 있었으나 용담댐 수몰로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했단다. 다른 군에 병합된 옛 군현, 나중에는 옛 고을마저 물에 잠겨버렸다. 그러니 향교라고 해서 옛 터를 고집할 수 있었겠는가.

 향교로 들어가는 길가는 향교이건비, 헌성비, 공적비, 기적비 같은 빗돌들이 차지했다. 그중 용담향교 600주년 기념비가 가장 눈길을 끈다. 2017년 향교 중건 626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미를 다지기위해 세웠다는데, 당시 행사에 정세균 국회의장까지 참석했단다. 향교에 대한 진안군민들의 자부심을 살짝 엿볼 수 있는 귀띔이었다.

 고려 초에 설립된 용담향교(龍潭鄕校, 전북 문화재자료 17) 1391(공양왕 3)에 현령 최자비(崔自俾)의 발의로 중건(重建)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남은 건물을 이듬해 박지술이 동쪽으로 약간 옮겨지었고, 1664(현종 5) 현령 홍석(洪錫)이 개축했는데 원래는 옥거리의 용강산 남쪽기슭에 있었으나 용담댐 수몰로 지금의 자리로 이건했다. 참고로 이 일대는 백제의 물거현(勿居縣)’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청거(淸渠)’로 이름을 고쳤다가 고려 충선왕 5년부터 용담(龍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는 독립된 군현이었으나 현재는 진안군에 포함된 상태다. 진안군 용담면·주천면·안천면·정천면 일대를 관할하였고 용담면 옥거리가 읍치(邑治)였다.

 주말이어선지 외삼문(外三門)은 굳게 닫혀있었다(박물관이나 미술관 등 대부분의 관람시설은 주말에 문을 열고 대신 월요일에 쉰다). 아쉽지만 대문 앞에 있는 비각을 살펴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용담향교 공적비(진안군 유형 향토문화유산 제2)’, 안에는 정유재란 당시 공자 등 다섯 성인의 위패를 옮긴 고계춘과 구순의 공적이 기록된 빗돌 두 기를 모셔놓았다. 화재의 위급함속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성현들의 위패를 지켜냈다나?

 14 : 31. 몇 걸음 더 걸어 도착한 동향체련공원’. 수박축제 등 동향면의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풋살장으로 여겨지는 전천후 경기장과 널찍한 잔디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 더. 요즘은 파크 골프가 대세라고 하더니 이곳에서도 파크골프장을 만드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천변도로를 따라간다. ‘능금리를 달려온 고원길도 이즈음 대량리로 바톤을 넘겨준다.

 구량천은 바닥이 암반으로 되어있어 물놀이하기에 딱 좋겠다. 거기다 오는 도중 양악천 등을 합치면서 등치까지 한껏 부풀렸다. 그런 풍경에 반해 잠시 내려가 탁족이라도 할까하다 그만두기로 했다. 인근에 건설 현장이라도 있는 듯 강물이 온통 흙탕물이었기 때문이다.

 14 : 38. ‘창령 성씨 집성촌이라는 대량리(大良里) 양지(陽地)마을에 이르니 지역 특산물인 수박을 벽화로 그려 넣었다. 맞다. 동향면에서 수박은 매년 수박축제를 개최해 올 정도로 자부심이 크단다. 축제기간에는 수박화채를 상시 시식할 수 있으며, 깜짝 수박경매, 수박왕 선발대회, 수박 빨리먹기 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단다.(작년은 폭우로 인해 취소됐다)

 구량천을 사이에 두고 양지마을은 둘로 나뉜다. 오른쪽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큰 마을, 구량천 건너에도 면사무소와 농협을 중심으로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두 마을은 파출소 앞에서 아치형의 인도교로 이어진다.

 다리는 장애인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계단 말고도 무장애 통로를 따로 만들어놓았다.

 두 마을은 인도교로만 잇는 것은 아니다. 차량통행이 가능한 구량교(양지길)과 동향교(49번 지방도)가 인도교 좌우에서 두 마을을 이어준다.

 14 : 47.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을 방향을 튼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면사무소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진안고원길(13구간) 조형물은 버스정류장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4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이 14.66km를 찍고 있으니 무던히도 더디게 걸은 셈이다. 길가에 널리다시피 한 간식거리를 따먹느라 지체했던 게 원인이지 싶다.

 

진안고원길 11구간(금강 물길)

 

여행일 : ‘24. 6. 1()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용담면·안천면 일원

여행코스 : 용담면사무소신용담교 동단섬바위(11-1, 감동벼룻길)용담가족테마공원(인증)공도교용담댐 조각공원구곡마을장등마을도라마을중리마을오얏고개(인증)안천 망향의 동산안천소운동장(거리/시간 : 16km, 실제는 신용담교부터 15.30km 4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용담면사무소(진안군 용담면 송풍리)

통영-대전고속도로 금산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를 타고 장수 방면으로 18km쯤 내려오다 용담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곧이어 용담면사무소에 이른다. 진안고원길(11구간)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 화단에 설치되어 있다.

 용담호에 담긴 금강 본류를 따라 안천면소재지에 이르는 길이다. 지난번 10구간이 용담호의 북쪽 호숫가를 걸어 왔다면, 이번 11구간은 동쪽 호숫가를 따라 가는 여정이다. 용담호의 리아스식 호안과 섬들, 그리고 용담가족테마공원과 용담댐에 조성해놓은 조각공원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난이도는 로 분류된다.

 10 : 06. 실제 출발지는 신용담교 동단. 11구간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섬바위를 둘러보기 위해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초반부 2,5km 정도를 생략했다. 16km도 벅찬 집사람에게 추가로 2km나 더 걷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0 : 06. ‘금강 표지판 옆으로 난 길로 내려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차단봉으로 입구를 막아놓았으나 장마철 집중호우 때만 아니라면 개의치 않아도 된다. 하나 더. 이 구간은 11구간(금강 물길)이 아닌 11-1구간(감동벼룻길)이다. 길이가 4.6km(다녀오려면 왕복 9.2km를 더 걸어야만 한다)에 불과하기 때문에 걷기 여행자들은 11구간에 추가해 걷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청마산악회가 허용한 5시간으로는 다녀올 수가 없어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섬바위만 둘러보기로 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강변에 내려설 수 있었다. 길은 따로 나있지 않고 그저 자갈밭을 걷는 모양새이다. 장마 때면 물이 넘실댈 수밖에 없는... 그래서 차단봉으로 초입을 막아놓았던 모양이다. 하나 더. 진안고원길은 이곳 감동벼룻길(11-1구간)’ 1구간, 9구간과 함께 전북천리길에 포함시켜 놓았다.

 10 : 13. 잠시 후 금강 물길이 S자로 휘도는 감입곡류의 지점 이르자 깊이를 알 수 없는 소()가 드넓게 펼쳐진다. 산과 강이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데, 그 안에 커다란 바위섬 하나가 오롯이 앉아있다. 참고로 이 부근은 사방이 막혀 일조 시간이 짧다고 해서 어둔이라고도 불린다.

 물 위로 10m 정도 솟아 있는 저 바위가 섬바위(島岩)’라고 한다. ‘지주석(砥柱石)’이라고도 하는데, 지주는 황하(중국) 중류에 있는 산으로 격류 속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하나 더. 섬바위는 위에서 독야청청 자라고 있는 천년송으로 인해 한결 더 돋보인다. 그래선지 이 지역에서 영재와 학자가 많이 나온다는 전승이 전해지기도 한다. ! 천년송을 품은 저 섬바위가 한때 애국가의 배경화면에 등장했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물멍 때리기 딱 좋은 모래톱은 유원지를 겸하는 모양이다. 간이화장실을 갖추었는가 하면, 주차되어 있는 차량도 꽤 많다. 물놀이를 하거나 준비 중인 보트도 여럿 눈에 띈다. 맞다. kakaomap은 이곳을 용담 섬바위관광농원 캠핑장으로 적고 있었다.

 10 : 22. 출발지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신용담교를 건넌다. 13번 국도를 따라 용담댐조각공원으로 곧장 갈 수도 있지만, 11코스의 주요 볼거리인 용담가족테마공원을 거를 수야 없지 않겠는가. 물론 1km쯤 더 걷는 수고는 감수해야만 한다.

 이때 용담댐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높이 70m에 길이가 498m나 되는 댐은 흡사 전설속의 거대한 괴물이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이다. 혹자는 저 댐의 하이라이트로 수문에서 물이 쏟아지는 때를 꼽고 있었다. 물을 내뿜고 있는 괴물을 쏙 빼다 닮았더라는 것이다. 참고로 용담댐의 만수위는 263.5m. 홍수기 제한수위인 261.5m에 근접할 경우 수자원공사에서 방류를 시작한다.

 10 : 24. 다리 건너(오른쪽)에는 용담체련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국제규격의 축구장을 육상 트랙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그 뒤로는 배드민턴장 등도 있다고 한다.

 파크골프장도 조성되어 있는 모양이다. 골프채도 그렇다고 게이트볼채도 아니 요상하게 생긴 채를 든 사람들이 4명씩 조를 이루어 이동하고 있었다. ‘굿 샷!’은 만국 공통어인지 채를 휘두를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환호성을 내지른다.

 10 : 26. 왼쪽으로는 가족테마공원이 드넓게 펼쳐진다.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여가를 즐기며 쉬어갈 수 있도록 각종 조형물, 분수, 실개천, 놀이터, 전망대 등을 배치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봤을 때 의 문양이 나타나도록 시각화한 디자인에다(공원에 용이 꿈틀대는 형상으로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가족단위 여행객들에게 특화된 시설을 갖추었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지 않나 싶다.

 공원을 지키는 여러 조형물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이다. 여의주를 입에다 무는 여느 용들과는 달리 이곳은 등에다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럿이서 단체로 둘러멨다.

 십이지상은 볼거리를 넘어 즐길거리로도 충분하다. 띠마다 재미난 해설을 담아놨기 때문에 가족들의 함께 읽어보며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거기다 세련되고 지적이고 우아한 말들만 늘어놨으니 밑져야 본전 아니겠는가.

 11구간의 첫 번째 인정지점은 테마공원의 시설 중 하나인 팔각정이다. 정자 앞에 인증 마크를 단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10 : 35. 795번 지방도(진용로)를 따라 용담댐으로 간다. 그런데 이게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핸드폰의 트랙을 살펴보니 인증지점인 팔각정 뒤에서 길을 찾아보란다. 다시 되돌아가기도 뭣해 도로변의 잡목을 헤치고 나가 탐방로와 만났다.

 10 : 38. 탐방로를 따라 잠시 걸으니 댐으로 올라가는 긴 계단이 나타난다.

 10 : 43. 길고 긴 계단과의 씨름이 끝나고 용담댐 정상부(이정표 : 안천소운동장 12.5km/ 용담면사무소 3.5km)로 올라선다. 이어서 나타나는 공도교(관리하는 공도에 놓은 다리)’는 초입에 출입 통제용 차단기를 놓아두었다.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까지만 개방하고 있단다.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통행도 금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 수문(공도교 초입)을 지나자마자 만나는 토끼생태체험학습장도 한번쯤 들러보자. 방생하고 있는 토끼들에게 먹이를 주면서 쓰다듬어볼 수도 있다니 말이다. 다만 지정된 먹이(외부 음식은 절대금지)만 줄 것과, 토끼 휴식시간(12:0013:00)은 방문을 자재해 주기를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토끼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아트디렉터이자 귀촌 작가인 이웅휘씨의 조각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구는 인간과 동식물간의 자연유지 공존의 땅이다(사진)’ 말고도 목신의 분노 등 많은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10 : 47. 이젠 용담댐의 상부(‘공도교라고 불린다)를 걸어볼 차례이다. 이곳도 역시 문화의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왼쪽에는 수백 개의 항아리(각기 다른 돌 조형물을 올려놓은)가 줄지어 늘어섰고, 오른편 난간에는 산···나무··물고기 등 용담호의 사계와 자연생태계를 타일 모양으로 그려 넣었다.

 저 범종 조형물은 대체 뭘 전하고 싶은 것일까? 상단에는 청룡과 황룡을 매달았다. 용이 살고 있다는 용담호의 전설을 형상화했나보다. 하지만 범종과의 관계가 연상되지 않아 궁금증만 자아낼 따름이다.

 한강다리에나 볼 법한 팻말을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지금 힘든 것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고/ -중략- / 불행한 것은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맞고요.

 눈에 들어오는 용담호는 바다를 닮았다. 1990년 착공해 2001년에 완공한 다목적 댐으로 총저수량은 8 1500t. 소양강댐·충주댐·대청댐·안동댐에 이어 국내 5번째 규모라니 어련하겠는가.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용담면의 행정 중심인 송풍리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전편에서도 얘기했듯이 용담댐이 축조되기 전까지 용담면사무소는 옥거리에 있었다. 그러니 저곳은 용담댐이 만들어낸 신도시인 셈이다.

 저건 도수터널의 입구일지도 모르겠다. 길이 21.9km의 도수(導水) 터널을 뚫어 전주·익산·군산·김제와 군산·장항 산업기지 등 서해안 지역 300만여 명의 주민과 공장·농지에 연간 4 9200t의 생활용수·농업용수·공업용수를 공급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참고로 용담댐은 발전·용수공급·홍수조절 등을 위한 다목적댐이다. 그중에서도 전북·충남 지역의 고질적인 물 부족 해결이 가장 큰 기능이라고 보면 된다. 전주·익산·김제·완주·충남 서천 등 4개 시와 2개 군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10 : 55. 용담면을 달려온 고원길은 댐의 중간쯤에서 안천면으로 바톤을 넘겨준다. 이어서 댐을 건너자 한국수자원공사 용담댐 관리단이 길손을 맞는다.

 맞은편에는 물 문화관이 있다. 물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고 용담댐 건설과 관련한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2002년 문을 열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든 나로서는 보초를 서고 있는 조형물에 더 관심이 간다. ‘돈키호테의 시작여행(이웅휘 작)’이라는데, 말을 이용한 과거에서 바퀴시대 문명으로 넘어오는 과정과, 환경과 생명들이 공생공존하며 살아가는 여정을 담았다나?

 안으로 들어가면 문명, 자연 그리고 물이라는 주제로 전시된 공간을 만난다. ‘지구의 탄생과 태초의 물’, ‘지구촌의 물’, ‘물의 순환, ‘고통 받는 물 등 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새롭게 얻어갈 만한 내용은 썩 눈에 띄지 않았지만.

 11 : 00. 물문화관 옥상에서도 용담호를 구경할 수 있다. 망원경까지 설치해 조망을 돕고 있지만, 아까 댐의 상부에서 보던 풍경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었다. 대신 밖으로 빠져나오면 다양한 볼거리를 만날 수 있다. 호안을 따라 드넓은 공원 겸 광장을 조성해놓았다. 잔디와 소나무, 자연석 등으로 깔끔하게 조경되어 있으며, 용담호를 조망하기 좋도록 벤치가 죽 놓여 있다.

 용담호 준공기념탑’. 용담호를 상징하려는 듯 용을 형상화 했다.

 푸른 잔디밭은 일상생활 속에서 발생한 폐품을 활용해서 만든 수많은 조각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용담조각공원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그런데 저 작품들도 이웅휘 작가가 만들었단다. 환경파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담았다? 아무튼 토끼체험학습장에서 공도교, 물문화관을 거쳐 이곳까지 오면서 만난 모든 작품들을 이웅휘 작가가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수많은 세월을 오로지 작품 활동에만 매달렸어야 가능했을 터, 대단한 열정이라 할 수 있겠다.

 11-1구간인 감동벼룻길은 금강 물줄기를 따라 감동마을에 다녀오는 코스다. 이곳 물문화관을 출발 벼룻길(강가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로 통하는 비탈길) 4.1km쯤 걸어 감동마을까지 갔다가 같은 길로 되돌아오는데, 중간에 아까 둘러본 비경 섬바위를 만난다. ! 이정표는 출발지인 용담면사무소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4.3km로 적고 있었다. 반면에 코스를 약간 변경한 내 앱은 3.34km를 찍고 있다. 집사람의 체력을 핑계 삼아 1km쯤 단축해서 걷는 셈이다.

 시판(詩板)도 눈에 띈다. 유리에다 시를 써놨는데 예쁘장한 것이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예술품이 된다. 그건 그렇고 허호석 시인의 그리운 山河가 왜 귀향으로 둔갑을 해서 실려 있을까?

 11 : 10. 이후부터는 ‘13번 국도(안용로)’를 따라간다. 이정표(안천소운동장 10.9km/ 용담면사무소 5.1km)를 살펴본 다음 몇 걸음 더 걷자 삼락교가 반긴다. 참고로 용담댐은 1·5면의 68개 마을을 수몰시켰다. 마을과 마을을 잇던 길도 함께 물에 잠겼음은 물론이다. 이후 댐 주위에 11개 노선 64.4의 이설도로를 냈고, 그 길이 기존의 마을들과 새로 조성된 마을들을 이어준다.

 오월은 장미의 계절이라고 했다. 오월 말에서 유월 초는 전국 곳곳에서 장미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트레킹 도중 꽃 무게에 겨워 가지를 휘휘 늘어뜨리고 있는 장미꽃 무리를 심심찮게 만나는 이유이지 싶다.

 호안을 따라 난 도로는 심심찮게 시야가 열린다. 그때마다 용담호가 자태를 드러내는데, 만수위보다 한참을 내려가 있는 모양새이다. 여름철 강우를 대비해 물을 빼놓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그로인해 만들어진 풍경은 걷기 여행자들에게 좋은 사냥거리가 된다. 작은 섬들을 매단 리아스식 호안 풍경이 선명하면서도 멋진 산수화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싶어 하단에 꽃을 깔고 사진을 찍어봤다.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함께 돌아다녔던 모 종합병원 과장의 조언이 생각나서이다. 결혼보다 여행이 더 좋다는 50대 후반이었는데, 아마추어인 내 솜씨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가 말하던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

 11 : 23. ‘삼락쉼터(이정표 : 안천소운동장 10.2km/ 용담면사무소 5.8km)’도 만날 수 있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무인 셀프카페인데 용담호의 속살을 훔쳐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핫플레이스로 알려진다.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멋진 풍경화를 걸어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용담호의 풍경이 창밖으로 펼쳐진단다.

 삼락쉼터 근처에서 바라본 용담호 풍경.

 도로주변으로도 부족해 호숫가까지 온통 금계국 천지다. 그게 일제히 꽃망울을 터트리며 용담호의 푸른 물빛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봄날의 용담호 도로변은 이렇듯 개나리를 시작으로 벚꽃과 철쭉, 금계국 등 형형색색의 꽃들이 산자락의 신록과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11 : 36.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왼편 산자락으로 임도(이정표 : 안천소운동장 9.4km/ 용담면사무소 6.6km) 하나가 갈려나간다. 초입에는 지장산 등산로안내도가 세워져있었다. 2018년 딱 이맘 때 근처 지소산과 연계해서 산행을 했는데, 이곳에서도 올라가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당시 우리 부부는 아까 용담댐조각공원을 빠져나오자마자 만났던 삼락교에서 왼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올라갔었다. 임도는 정상에서 불과 600m밖에 떨어지지 않는 지점까지 이어진다.

 지장산(774m)’은 지리산의 지혜 지()’와 내장산의 품을 장()’을 쓰는 산이다. 지혜로움을 가득 품은 산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내가 본 지장산은 일부러 시간을 쪼개가며 찾아볼 필요가 없는 산으로 기억된다. 산세도 볼품이 없는데다 등산로(정상에서 지소산을 거쳐 유평마을로 내려가는)까지도 정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포근한 모양새의 육산에서 지장산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던 게 다였다고나 할까?

 11 : 40. 오가는 차량이 내지르는 굉음에 소름끼치는 위압감을 느끼며 걷기를 한참(‘삼락교부터). 민가가 보이는가 싶더니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다. 민가와 민가를 잇는 길을 따로 낼 수가 없었음이리라. 그 덕분에 우린 구곡마을까지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다.

 11 : 46. 구곡(九谷) 마을의 버스정류장을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마을회관이 반긴다. 이때 이정표(안천소운동장 8.6km/ 용담면사무소 7.4km)가 도로를 벗어나 오른편 오솔길로 빠져나가란다. 하긴 인도가 다시 없어져버린 도로보다 조금 에돌지만 오솔길을 따르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길은 호숫가까지 바짝 고도를 낮춘다. 덕분에 가장 낮은 자세로 호수를 조망하게 된다. 더 나아가 마음만 내키면 호숫물에 손까지 담가볼 수 있다.

 11 : 56. 하지만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0분 만에 다시 도로(이정표 : 안천소운동장 7.9km/ 용담면사무소 8.1km)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 13번 국도(안용로)의 가장 큰 특징을 깜빡 빼먹을 뻔했다. 내가 혹시 일본 땅에 와있는 게 아닐까 헷갈릴 정도로 전국의 도로는 지금 벚꽃나무 가로수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이곳 용담호의 호안도로는 우리나라의 토종 단풍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수십 년은 족히 묵었을 굵직한 단풍나무들이 도로변 양쪽에서 줄줄이 얼굴을 내민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도로변은 금계국으로 장식되어 있다. 가끔은 루드베키아(Rudbeckia)’도 눈에 띈다.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데, 국화과인데도 해바라기를 쏙 빼다 닮았다. 꽃말이 영원한 행복이라니 집사람에게 바치는 내 밀어라고나 할까?

 12 : 03. ‘장등마을에 이른다. 조금 전 지나온 구곡마을과 함께 법정 동리인 삼락리(三樂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이다. 두 부락 모두 용담댐에 수몰되었으나 국도 13호선을 따라 옛 이름을 빌린 취락이 새로 조성되었다. 아무튼 탐방로는 장등마을로 들어가지는 않고 스치듯 지나간다. 참고로 장등(長登)’이란 지명은 진등이라는 마을 뒷산에서 유래했다. 옥황상제의 아들이 그곳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 마을을 만들고 하늘로 다시 올라갔단다. 그게 세월이 흐르면서 장등으로 변했다나?

 12 : 08. 이정표(안천소운동장 7.0km/ 용담면사무소 9.0km)가 이제 그만 국도와 헤어지란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1차선 도로(백삼로)를 가리킨다.

 길은 산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새이다. 해발이 400m에 이르는 도라마을까지 가려면 고도를 130m나 높여야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게다. ! 도중에 지소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안천소운동장 5.8km/ 용담면사무소 10.2km)도 만났다. 백화리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모양인데, 민가는 눈에 띄지 않았다.

 골짜기는 갈수록 깊어진다. 그래선지 도로변의 꽃들도 산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들로 바뀌었다. 세뱃돈을 넣는 복주머니를 닮은 금낭화(錦囊花)’도 그중 하나다. 사람들은 저 꽃이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서 겸손과 순종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꽃말도 당신을 따르겠습니다이다.

 산이 깊어서인지 MBN 나는 자연인이다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도 눈에 띈다. 텐트로 숙소를 삼고 있는 듯. 하지만 취사도구는 모두 밖으로 나와 있다. 땔감에서 나오는 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꽃벵이 농장이란다. ‘청춘회복이란 부연설명까지 달았다. 궁금증을 못 이겨 부리나케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흰점박이꽃무지 애벌레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굼벵이. 혐오의 아이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눈물겨운 노력이라고나 할까? 인구가 줄어든다며 아우성인 작금의 우리나라. 하지만 세계는 아직도 꾸준히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식량도 생산량을 꾸준히 늘려야만 한다. 하지만 공산물의 생산량을 늘리듯 식량 생산량을 늘릴 순 없는 일. 우선 곡물이나 가축을 더 키우기 위해선 땅과 물이 충분치 않고, 이때 발생되는 온실가스 등도 골칫거리다. 때문에 유엔식량농업기구(FAO)도 곤충을 유망한 미래 식량으로 꼽았다. 식용 곤충에 대한 전문가들의 회의 및 연구를 거친 결과다.

 12 : 41. ‘도라마을(이정표 : 안천소운동장 4.9km/ 용담면사무소 11.1km)’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백화리(白華里, 배꽃이 땅에 떨어지는 梨花落地 형국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진다)’를 구성하는 7개 행정부락(율현·구례·상리·중리·하리·도라·교동) 중 하나로 지장산 자락에 들어앉은 첩첩산중 오지마을이다.

 도로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2차선으로 변해 안천면소재지로 간다. 하지만 고원길은 마을회관이 있는 쪽으로 더 올라간다. 봄이면 복숭아꽃이 비단처럼 흐드러지게 핀다는 도라마을(挑羅谷,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복숭아처럼 생겼단다. ‘돌아가는 곳에 있는 마을이란 설도 있다.)’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신선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만났다. 집 앞에 작은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정자를 들어앉혔다. 옆에서는 물레방아까지 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부럽지 않은 풍경이라 하겠다. 복숭아꽃 만발한 도라마을은 도연명이 도화원기에서 그린 이상향,  세외도원’(世外桃源)이 될 테고, 저 정자에서 벗과 함께 술이라도 한잔 나눈다면 그 행복을 어찌 이태백의 풍류에 비하겠는가.

 12 : 46. 도라골의 끄트머리쯤에서 360도에 가깝게 방향을 튼다. 표고는 383m. 지장산에서 쌍계봉을 잇는 능선, 즉 장수군과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 바로 아래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고 보면 되겠다.

 이후부터 길은 도라마을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동네 이름처럼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복숭아나무가 군락을 이루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검디검은 오디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 뽕나무가 자신도 있다며 곳곳에서 얼굴을 내민다.

 작년 딱 이맘 때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 15일 정도 여행했었다. 당시 심심찮게 뽕나무를 만날 수 있었고, 집사람과 나는 새콤달콤한 맛에 반해 틈날 때마다 따먹고 다녔다. 그런데 도라마을의 오디가 딱 그런 맛을 내고 있지 않은가. 같은 고지대(실제는 500m이상 차이가 나지만)에다 일조량까지 좋다보니 맛까지 비슷해졌나 보다.

 반환점을 돌아섰지만 고도는 오히려 더 높아졌다. 그러면서 산중턱에 들어앉은 양계농장의 아래쪽을 지나간다.

 12 : 57. ‘도라마을에서 나오는 2차선 도로(이정표 : 안천소운동장 3.9km/ 용담면사무소 12.1km)로 내려서고, 몇 걸음 더 걸어 고갯마루를 넘으면 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도라마을의 표고가 그만큼 높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13 : 08. 10분쯤 내려갔을까 이정표(안천소운동장 3.1km/ 용담면사무소 12.9km)가 또 다시 도로를 벗어나란다. 그리고는 백화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중리마을로 연결시켜 준다.

 탐방로는 마을 고샅을 따라간다. 길을 터준 주민들을 위해 정숙보행이 요구되는 구간이다. ! ‘중리(中梨)’라는 지명은 마을 북쪽의 산(지선봉)에 울창하던 배나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거기서 배꽃이 떨어진 삼락지 중 중간마을이라 해서 중리(中梨)라 칭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언제부턴가 독거노인(獨居老人)’은 우리가 해결해나가야 할 최대의 화두가 되었다. 언론은 농어촌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고 전했었는데, ‘독거노인 행복방이란 간판을 달고 있는 저 건물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13 : 17. 고샅을 빠져나오면 마을회관이 맞는다. 맞은편에 쉼터를 겸한 정자가 들어서있는데, 탐방로는 정자 앞으로 흘러가는 개울의 둑길을 따라 하리마을로 간다. 하지만 난 안천면소재지로 나가는 2차선 도로(백삼로)로 조금 더 가보기로 했다.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이 근처에 문화재 한 점이 있다는 정보를 얻어왔기 때문이다.

 마을 정자는 이화정(梨華亭)’이란 현판을 달았다. 배꽃이 활짝 핀다는 마을의 이미지를 브랜드로 내건 모양이다. 맞다. 이 마을은 초기 배나무가 많다고 해서 배실(梨谷)’로 불리었다. 그러다 행정구역 개편 때 상··하리로 나뉘었는데, 정자 옆 이정표는 아직도 중배실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100m 남짓 걸었을까 화산서원(華山書院)’이 나온다. 조선 전기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黃喜, 1363-1452)’의 영정을 모시는 장수 황씨 문중의 사당이다. 그의 차남 황보신(黃保身, 역사는 그를 극도로 부패했던 인물로 꼽는다) 5대손 황징(黃澄, 장수 황씨의 입향조)을 함께 배향하고 있는데, 1922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담 너머로 살짝 엿볼 수밖에 없었다. 전북유형문화유산인 황방촌영정(黃尨村影幀)’은 맨 안쪽 건물(사당)에 모셔져 있다고 했다. 서원의 필수 시설인 강당은 위의 전경 사진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낡은 건물이란다.

 황방촌영정(黃尨村影幀,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은 설명을 위해 인터넷에서 얻어왔다. 화산서원에 모셔둔 황희(黃喜, 1363-1452)의 초상화로, 방촌(尨村)은 황희의 호()이며, 경북 상주의 옥동서원에 소장되어 온 것을 1844년 옮겨 그린 것이다. 모사본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아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서원 맞은편에는 열부 옥천육씨 정려 烈婦 沃川陸氏 旌閭)’가 있었다. 육씨(陸氏) 부인은 임진왜란 때 남편 황대성(黃大成)이 의병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자 몸종인 천개(天介)와 함께 상배실 앞 구례마을로 피난했으나, 왜군에 잡혀 욕을 당하게 되자 적을 꾸짖으며 몸종과 함께 자결하였다고 한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1699년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본래 하배실 앞동산에 있었으나 1980년쯤 농로를 내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단다. 참고로 남편인 통정대부(通政大夫) 황대성은 임진왜란 때 수백 명을 이끌고 각지에서 왜군과 싸웠던 의병장으로, 일본에 포로로 압송된 뒤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부인 옥천 육씨가 순절한 것을 알고 뒤따라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효자 황민찬 정려(孝子 黃玟燦 旌閭)’는 서원 왼쪽에 있다. 황민찬(1876-1905)은 현령 황동규(黃東奎)의 아들로, 품성이 순하고 후덕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에 우애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 자신의 손가락을 상하게 하여 피를 내고, 이를 어머니의 입에 흘려 넣었는데, 이에 하늘이 감동하여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었다고 한다. 이후 황민찬이 요절(夭折)하게 되자 고을에서 애석하게 여겼고, 이에 용담향교 유림들이 청원하여 1905년 정려가 내려졌으며, 동몽교관에 추증되었다.

 13 : 27. ‘이화정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하리마을로 간다.

 13 : 30. 하리마을에 들어서니 낙안 김씨 문중의 사당인 화천사(華川祠)’가 반긴다. 화천사는 1801년 충장공 정분(鄭苯), 충민공 임경업(林慶業), 양혜공 김빈길(金贇吉, 낙안읍성을 쌓은 분이다)을 향사하기 위해 세운 삼충사(三忠祠)로 시작된다. 1868(고종 5) 훼철되었다가 1926년에 사당을 다시 세우고 김빈길의 영정을 안치했다. 1961년 사우를 중건하면서 화천사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른다.

 진안군 향토문화유산(유형) 14호인 학륜당(學倫堂)’은 화천사에 딸린 부속건물이다. 낙안 김씨 문중에서 덕망 있는 학자들을 초빙해 인재를 양성하던 강당이라고 보면 되겠다.

 13 : 33. 동구 밖에는 엄청나게 굵은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진안군에 있는 54수의 보호수 중 유일한 버드나무라는데, 안내석은 수령을 194(`82년 지정시 152)으로 적고 있었다. 한돌쇠라는 이름을 가진 하인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으로 식재하였다는 전승이 있다.

 13 : 36. 하배실을 빠져나와 ‘13번 국도(안용로)’와 개울을 차례로 건넌다.

 13 : 42. 잠시 개울을 따르던 탐방로가 느닷없이 숲속으로 들어선다. 11구간에서 만나는 유일한 숲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 이즈음에서 뽕나무 군락을 또 만났다는 걸 깜빡 빠뜨릴 뻔했다. 점심 생각이 사라져버릴 정도로 배부르게 오디를 따먹었는데도 말이다.

 13 : 49. 앞서가던 집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어버린다. 남의 집 안마당이라는 것이다. 개까지 사납게 짖어대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주인장이 나와 길을 안내해주는 게 아닌가. 자기네 마당이지만 탐방로가 맞다면서 말이다. 길을 내준 주민들에게 지면을 빌어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고마운 마음에 눈에 띄는 사람마다 감사 인사를 드리며 동네(두 집이 다였지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오얏고개를 향해 올라간다.

 13 : 52. 오얏고개의 이정표(안천소운동장 1.3km/ 용담면사무소 14.7km)가 이곳이 두 번째 인증 지점임을 알려준다.

 13 : 57.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용담호를 다시 만나고, 호수에 발이 묶인 길은 방향을 틀어 11구간(금강물길) 종점인 보한마을로 간다. 하지만 곧장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이왕에 왔으니 수몰지역 주민들의 애환도 한번쯤 느껴보라며 망향의 동산으로 나그네를 안내한다.

 14 : 02. 잠시 후 망향의 동산(이정표 : 안천소운동장 0.6km/ 용담면사무소 15.4km)’에 올라선다. 수몰된 실향민들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수자원공사가 조성한 것으로 조망이 좋은 둔덕 위에 꾸며져 있다. 전망대를 겸한 팔각정과 주차장, 화장실, 자판기 등 나름대로의 시설도 갖추고 있다.

 구곡마을에서 옮겨왔다는 지석묘(支石墓)’도 눈에 띈다. 출토된 토기편과 흠자귀, 반달칼, 돌화살촉 등으로 보아 이 고인돌이 2500여 년 전인 기원전 4-5세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전문가들은 고인돌의 크기가 그 부족의 세력과 비례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법 큰 부족이 이곳 용담지역에서 웅거하고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망향의 동산은 용담호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졌다. 그러니 망향탑(望鄕塔)’은 그 주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터다. 먼 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점지해준 터전에서 그 마음과 그 핏줄을 이어받아 가꿔오던 11개 마을, 505세대, 2,225명이 용담댐으로 인해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적고 있다.

 망향탑 뒤에는 수몰지역에서 옮겨온 빗돌들을 나란히 세워놓았다. 역대 면장들의 송덕비가 대부분인데, 지역 인사들에 대한 추모비도 몇 섞여있다. 그 하나하나에 주인공들에 대한 칭송이 담겨있겠지만, 실향민들은 이제 저 빗돌에서 물에 잠긴 고향 마을에 대한 그리움을 찾아내는 게 우선일 것이다.

 봉우리 꼭대기엔 콘크리트 팔각정을 3층으로 세웠다. 호수를 조금이라도 더 넓고 깊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전망대로 오르자 안천면 소재지인 보한마을과 시장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용담호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인근 주민들이 새롭게 둥지를 튼 마을이다. 그래선지 마을은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했고, 집들도 부잣집 전원주택에 못지않게 잘 지어져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웃자란 주변 나무들로 인해 용담호의 아랫도리가 잘려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물속에 잠겨버린 고향을 떠올리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큰 실망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14 : 04.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반대편에서 찾아보면 된다. 마을을 향해 침목계단이 기다랗게 놓여있다.

 이곳 보한마을은 용담댐으로 인해 생긴 마을이다. 고향을 차마 떠나지 못한 주민들이 인근에다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그런 고향 사랑은 마을 담벼락에 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운일암반일암, 섬바위 등 용담호 주변의 풍경을 담은 그림들을 벽화로 그려 넣었다.

 14 : 16. 노성리(魯城里)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보한마을 6세기 말 임진왜란 때 창녕 성씨가 외약고개 아래 서당 터에 자리 잡고 살면서 시작됐다. 당시 이름은 보성(保城)’. 이후 죽산 안씨가 들어오면서 보안이 됐고, 1700년경 청주 한씨가 들어오고 나서는 보한(保韓)’으로 변했다. ‘한씨를 보필한다.’는 뜻이라나? 주력 성씨에 따라 마을 이름이 오락가락하는 세태에서 우리 국회를 떠올리는 게 나 혼자만의 오해였으면 좋겠다.

 탐방로는 안천 소운동장을 가로지른다. 다목적실내구장에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으니 소규모 스포츠 컴플렉스라고나 할까?

 14 : 18. ‘안천소운동장 앞에 조성해놓은 길거리장터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12구간(고개너머 동향길) 조형물은 길거리장터 그늘막 아래에 세워져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나 15.30km를 찍고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볼거리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오디를 따먹느라 발걸음이 많이 더뎌졌던 게 원인일 것이다.

 

진안고원길 10구간(용담호 보이는 길)

 

여행일 : ‘24. 5. 18()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주천면·용담면 일원

여행코스 : 주천면사무소성암마을옛광석(인증)와룡마을옥거마을용강산(인증)회룡마을용담면사무소(거리/시간 : 15.4km, 실제는 성암마을부터 12.86km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주천면사무소(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통영-대전고속도로 금산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를 타고 용담호 방면으로 내려오다 용수목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55번 지방도. ‘흑암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주천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진안고원길(10구간)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 화단에 설치되어 있다.

 주천면사무소에서 출발 용담면사무소에 이르는 코스로, 주자천과 용담호의 풍광을 눈에 담으며 걷는 여정이다. 천태산 능선 및 용강산을 넘는 산길이 다소 힘들지만 용담호의 조망이 이를 상쇄시켜 준다. 난이도는 으로 분류된다.

 와룡암(臥龍庵)’ 앞 주자천. 용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와룡바위 주변은 소()를 이룬다. 징검다리 사이를 지난 물이 바위를 만나 휘돌면서 못에 가까운 담()을 만들었다. 그게 온몸에 청량함을 전해주고, 숲속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은 몸속 깊이 자연의 숨결을 불어 넣어준다.(사진은 지난 9구간 때 찍은 것인데, 일행들 말로는 오늘은 물까지 맑아져 그 풍경이 한결 돋보이더라고 했다)

 와룡암(臥龍庵, 전북문화유산자료)’은 긍구당(肯構堂) 김중정(金重鼎, 1602-1689)이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효종 때인 1650년 지은 정자이다. 건너편에 있는 주천서원(朱川書院)의 강당 노릇도 했단다. 참고로 김중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하자 할아버지인 김충립(金忠立)과 함께 진안 용담(주천)으로 내려와 후학들을 가르치다 생을 마쳤다.

 와룡암의 저 이정표(인증용 이정표는 따로 만들어져 있다) 9구간 답사 때 알바를 하게 만들었던 주범이다. 이곳에서 주천면사무소까지는 9구간과 10구간이 겹친다. 주천면사무소가 9구간의 종점이자 10구간의 시점이기 때문에 일단은 주천면사무소까지 갔다가, 10구간을 걸을 때 다시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얘기다. 이정표에 노랗고 빨간 표시판이 2개씩 붙어있는 이유다. 그런데도 난 순()방향을 나타내는 노란색 표지판만 보고 진행했다가 1.5km나 더 걷는 낭패를 당하고 말았었다.

 금평마을’. 신양리(新陽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광석·성암·금평·봉소) 중 으뜸마을로 10구간의 시점인 주천면사무소에서 1.1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옛 이름은 영남촌’. 물에 뗏목을 띄워 놓은 형국의 길지인지라 일찍이 경상도에서 송씨와 김씨 집안이 피난을 와 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금평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마을이 들녘의 가운데 있는가 하면 남쪽에서 쇠붙이까지 생산되었다나?

 10 : 36. 실제 출발지인 성암(星岩)’마을. ‘신양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주자천을 사이에 두고 금천마을과 마주하고 있다.

 웃자 성암마을이란다. 주민들은 물론이고 이 마을을 찾는 모든 이들이 함께 웃어보자는 얘기일 것이다. 가끔은 마을축제도 열린다더니 그 일환일지도 모르겠다. 시화전과 공연, 마을탐방 등 유익하면서도 의미를 새길 수 있는 시간으로 구성하여 주민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축제를 즐긴다나?

 마을 앞에는 십일거사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십일거사의 정체는 물론이고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세웠는지도 알 수 없었다. 주민이라도 눈에 띄었으면 후다닥 뛰어가 물어보겠는데 아쉽게도 마을은 텅 비어있었다.

 10 : 36. ‘성암길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주자천의 천변을 따라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길이 나있다.

 이즈음 구봉산(,002m)의 헌걸찬 암릉이 눈에 들어온다. 눈만 조금 크게 뜨면 4봉과 5봉을 잇는 길이 100m의 구름다리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이미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한때는 국내 최장을 자랑하던 산악 현수교였다.

 10 : 46. 성암마을은 상·하 두 개로 나누어진다. 조금 전 트레킹을 시작했던 곳이 윗마을이고, 이곳은 아랫마을인 하성암이다.

 이정표에서 오늘의 여정을 가늠해본다. 이정표는 시점(주천면사무소)까지의 거리를 2.1km로 적고 있다. 반면에 내 핸드폰() 0.48km를 찍는다. 그렇다면 10구간(15.4km)에서 지난번 9구간 때 걸었던 1.6km를 뺀 13,8km가 오늘의 여정이다.

 10 : 52. ‘주천 공공하수처리시설은 스치듯 지나간다. 도로 아래 등 공공 하수로를 통해 유입된 오염수를 정화한 다음 자연으로 되돌려주는 시설일 것이다.

 고원길을 걷는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진안고원길이 그만큼 인기가 많은 둘레길이란 증거일 수도 있겠다.

 5월이면 전국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찔레꽃이다. 한국의 토종 야생화는 무리지어 피어날 때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길가 비탈진 언덕을 하얗게 도배하고 있는 저 찔레꽃이 그 증거다. 그런데 흘러간 옛 노래는 왜 찔레꽃이 붉게 핀다고 했을까?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우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그밖에도 꽤 많은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자주닭개비도 그중 하나다. ‘닭이 장풀에 비해 꽃의 색이 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꽃말은 존경하지만 사랑할 수는 없어요라고 한다. 매혹적인 색깔과 외모를 지녔으면서도 서글픈 사연을 품었다. 아침 일찍 피어 저녁이면 지기 때문일까?

 11 : 07. ‘옛 광석에 이른다. 요 아래가 용담호에 물을 담기 전 광석이란 마을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혹자는 광석이란 지명의 유래를 광산(鑛山)에서 찾기도 한다. 신양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금평마을이 남쪽에서 생산되는 쇠붙이에서 유래된 지명이라면서 말이다. 금평마을의 남쪽이 이곳 광석마을이니 얼토당토않은 추정은 아닐 듯 싶다. 참고로 진안(동향면 대량리)에는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동유적(製銅遺蹟)도 있다.

 이정표(용담면사무소 11.6km/ 주천면사무소 3.8km)가 하늘색 모자를 썼다. 10구간의 두 인증지점 중 하나라는 표시다.

 호수 건너는 신 광석’, 즉 새로운 광석마을이다. 수몰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전주나 대전으로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대처의 각박한 삶이 싫은 사람들은 근처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신광석 마을이다.

 어느 문중의 제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럴듯하게 잘 지어놓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흔한 편액 하나 달지 않았다.

 11 : 12. 호반을 따라가던 길이 느닷없이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용담호에 발을 담근 능선이 너무 비탈진 탓에 길을 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와룡마을을 잇던 옛길이야 용담호의 물속에 잠겨버린 지 오래일 것이고.

 이정표(용담면사무소 11.0km/ 주천면사무소 4.4km)에 매달린 QR코드가 눈길을 끈다. ‘OTT Find’라는 문구가 눈에 띄는가 하면, 진행요원으로 여겨지는 젊은이들이 포스트를 지키고 있다. ‘OTT Find’란 정해진 여러 포스트를 찍고 점수를 획득하는 MZ 세대들의 레포츠이다. 수많은 포스트들이 넓게 산재되어 있기 때문에 전략을 잘 짜는 것이 중요하단다.

 MZ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틀에 억매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즉 남과는 다른 이색적인 경험을 추구한단다. 정규 탐방로를 벗어나 물가로 다가가고 있는 저 젊은이처럼...

 잠시 후, 이번에는 산길로 들어선다.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오솔길이 나있다. 피톤치드 가득한 솔향을 코끝에 흘리며 걸을 수 있는 멋진 구간이다.

 하지만 산길은 많이 고달팠다. ‘작은 능선 하나쯤이야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섰지만 산길은 시작부터 가팔랐다. 통나무계단을 놓고 밧줄난간을 매어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렇다고 힘든 것 자체까지 덜 수야 없는 노릇. 지자체도 걷기 나그네들이 느낄 고통을 눈치 챘던 모양이다. 두어 곳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쉼터의 자랑거리는 다른데 있었다. 벤치에 앉자마자 동공을 부풀리게 만드는 멋진 풍광이 펼쳐지는 것이다. ()에서 보()로 변신한 주자천이 풍만해진 자신의 몸매를 한껏 자랑하고 있다.

 길은 요런 상황과도 맞닥뜨린다. 낭떠러지 같은 비탈길을 밧줄난간을 부여잡고 오른다. 나뭇가지와 돌부리를 붙잡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1 : 26.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능선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정표(와룡마을 1.05km/ 천태산 0.7km/ 신양리)는 이 능선이 천태산(648.5m)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임을 알려준다. 진안에도 천태산이 있었나? 영국사로 유명한 영동의 천태산이야 다들 알 것이고, 양산·공주·금산·정읍·화순·장흥 등 내가 올라본 것만도 십여 곳에 가깝다. 그런데 이곳에도 하나가 숨어있었던 모양이다.

 내려가는 길은 무척 순했다. 가끔은 가파른 구간도 나타났지만 대부분은 완만하게 내려선다. 그것도 꽃보다 아름답다는 연록의 숲속을 헤집으면서. 힐링을 덤으로 얻어가는 구간이라 하겠다.

 11 : 37. ‘용담호까지 내려왔다 싶으면 이번에는 호반의 산비탈을 헤집으며 내놓은 길을 따라 간다.

 이즈음 나뭇가지 사이로 시야가 열리기도 한다. 댐으로 발이 묶인 주자천의 물길이 몸집을 부풀려 용담호로 변해있다. 그 위로 와룡교 다리가 지나간다.

 11 : 46. 오솔길을 벗어나 2차선 도로인 와룡길로 내려선다.

 초입에는 이정표(용담면사무소 9.3km/ 주천면사무소 6.1km)와 함께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내려온 곳이 천태산이 아니라 성치산으로 표기되어 있는 게 아닌가. 금산과 진안의 경계에 놓여있는 성치산(648m, ‘금산 8에 꼽힐 정도로 산세가 뛰어나다)’이 진안에 위치한 천태산과 한 능선으로 연결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이후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그런데 이게 또 새로운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 하도 흔해서 식상해져버린 벚나무 가로수가 아니라 이팝나무를 심어놓은 것이다.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것이 소원이던 조선 시대. 벼슬을 해야 비로소 이씨인 임금이 내리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쌀밥처럼 생긴 새하얀 꽃을 가지마다 소복소복 뒤집어쓰고 있는 저 나무를 이팝나무라 불렀다고 한다. 넷으로 갈라지는 꽃잎 하나하나가 마치 뜸이 잘든 밥알같이 생겼고, 이들이 모여서 이루는 꽃 모양은 멀리서 보면 쌀밥을 수북이 담아 놓은 흰 사기 밥그릇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11 : 49. 200m쯤 걸었을까 또 다른 2차선 도로인 주용로를 만난다. 삼거리에는 버스정류장이 지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도심의 것보다도 훨씬 더 스마트하다. 건물 형식으로 지어 눈·비는 물론이고 추위까지도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태양광 패널이 눈에 띄는 걸 보면 조명은 물론이고 난방시설까지 갖추었을지도 모르겠다.

 건너편에는 리용미술관이 들어앉았다. 개인 미술관인 것 같은데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탐방로는 이제 주용로를 따라간다. 왼쪽 호수 너머는 와룡마을이다. 천태산으로 여겨지는 원뿔형의 산봉우를 배경삼은 산골마을은 앞마당에 용담호라는 절경까지 펼쳐놓았다. 그게 한데 잘 어우러지며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11 : 52. 이후부터는 용담호에 놓인 다리를 연이어 건너면서 이어간다. 첫 번째 다리인 신정교는 인간의 삶이 담긴 반도(半島)’로 이어준다. 인간은 자신들의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높다란 댐을 쌓아 물길을 막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커다란 호수는 주변 산릉들을 집어삼킨다. 매봉산(490.3m)도 그중 하나다. 자신의 꼬리를 용담호에 담그면서 저런 내륙의 반도를 만들어놓았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좌우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산행에 이골이 난 어느 분은 이곳에서 천태산과 명도봉. 구봉산. 봉화산 등이 조망된다고 했다. 하지만 난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어느 하나 올라보지 않은 정상이 없건만... 참고로 1990년에 착공 2001년에 완공된 용담호(龍潭湖)’는 진안군의 1 5면을 수몰시키며 만들어진 거대한 담수호이다. 유역변경식 댐으로 금강 상류의 물을 하루 135만 톤씩 도수터널을 통해 완주군(고산면 소향리) 쪽의 망경강 상류로 흘려보내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농업용수 및 전주권의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리아스식으로 변한 호안의 아름다운 풍광에 눈도 맞추어가며 다리를 건넌다.

 11 : 55. 신정교 건너에서 만난 빗돌. 자신들의 노고를 역사로 남겨보려는 장삼이사도 꽤 많은 모양이다. 수몰된 옛 도로를 대신하는 신작로를 내면서 기념비를 만들고 공사에 참여했던 이들의 면면을 일일이 적어놓았다.

 휴게소(이정표 : 용담면사무소 8.5km/ 주천면사무소 6.9km)도 하나 들어서있었다. ‘좋은 동네라는 멋진 이름까지 달았다. 하지만 문을 열어본 적도 없는 듯. 내부는 인테리어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문득 장사 천재라는 백종원씨가 떠오른다. 장사를 하려면 수요조사부터 제대로 하라던 어느 예능 프로와 함께...

 11 : 57. 두 번째 다리는 선화교이다. 담수가 시작되면서 용담호는 진안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게 다 지금 지나고 있는 이런 다리들 덕분이다. 다리를 놓아 댐 일주도로를 연결시키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조금 더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용담호의 빼어난 풍광을 맘껏 즐길 수 있다. 맞다. 용담호는 그 이름처럼 용이 꿈틀대는 듯한 형상을 자랑한다고 했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경관을 선보이는데, 특히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을과 겨울에는 더욱 더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단다.

 12 : 02. 다리 건너에서 만난 삼거리(이정표 : 용담면사무소 8,0km/ 주천면사무소 7.4km). 이팝나무 꽃무리가 한층 더 흐드러지게 피어나는가 싶더니 이젠 꽃향기까지 코끝을 간지럽힌다. 하지만 내 눈은 옥천암(玉泉庵)’의 입구임을 알리는 빗돌에 더 관심이 간다. 신라 진성왕 6(892) 정현선사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이다. 거기다 물놀이하기 딱 좋은 폭포까지 끼고 있다니 어찌 들어가 보고 싶은 욕념이 생기지 않겠는가.

 요런 멋진 풍광도 만난다. 그 아름다움에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를 외치시던 고() 박동진 명창의 흉내를 내본다. ‘작은 것이 더 예쁜 것이여!’

 12 : 15. 세 번째 다리는 도실교이다.

 다리에서 만난 용담호는 요런 모습으로 변했다. 용담호가 관광지로 매력이 높은 것은 멀찌감치에서 호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푸른 호수면 위를 직접 가로지르며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 건너에는 용담호 우리팬션이 있었다. ‘가 있는 쉼터로 알려지면서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다는 곳이다.

 12 : 19. 네 번째 다리인 용강교’. 이 다리까지, 지나온 다리 하나하나가 호수와 육지가 넘나들이하는 지점을 연결하고 있었다.

 기세를 부풀려온 용담호가 이제는 거의 바다 수준으로 몸집을 키웠다. 맞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호수라고 했다. 그런데도 수면은 거울처럼 잔잔했다. 그 위에 진안고원의 높은 산줄기가 그림자처럼 비친다.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온 반도에는 펜션이 들어앉았다. 조용하게 물멍’ ‘산멍 하기 딱 좋은 풍경이다. 저런 곳에서는 해질 무렵이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노을이 물든다. 그리고 그리움에 멍드는 곳이 된다.

 12 : 24. 발걸음은 어느덧 옥거마을(이정표 : 용담면사무소 6.0km/ 주천면사무소 9.4km)’에 이른다. 고원길은 버스정류장 뒤 포장길을 따라 올라간다. 참고로 옥거리는 용담댐이 축조되기 전까지 면사무소가 있던 용담면의 행정 중심지였다. 삼국시대 때 백제가 물거현을 설치했고, 고려 때부터는 용담현청이 있어왔다. 하지만 용담호에 물이 차면서 이젠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60m쯤 올라갔을까 마을회관을 지나자마자 등나무로 만든 터널 앞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때 용담호반에 터를 잡은 옥거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가 있다고 해서 도랑 거()’자를 붙여 거리(渠里)’. 그 물이 또 옥처럼 맑기에 맑은 내라는 뜻의 옥거(玉渠)’가 되었다는 산골마을이다. 하지만 용담호에 물이 차면서 터를 옮겼고, 이젠 어촌 아닌 어촌이 되어버렸다.

 산길은 무척 순했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완만하다. 거기다 주변 소나무들이 피톤치드까지 보내오니 힐링이 따로 없는 구간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가팔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것도 곧바로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를 쓰고 나서야 겨우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르다.

 12 : 52  13 : 02. 그렇게 한동안 몸부림을 치고 나서야 산불감시탑이 보초를 서고 있는 용강산 정상에 이를 수 있었다. 성치지맥에서 분기 봉화산(670.6m)을 거쳐 온 능선에 걸터앉은 봉우리다. 정상에는 올라오느라 고생한 이들에 대한 보상인 듯 벤치를 놓아두었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온 간식을 먹으며 느긋이 쉬다 갈 수 있었다.

 정상은 텅 비어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정상석은커녕 그 흔한 표지기(산악인들이 매달아 놓은)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고원길 이정표(완주 인증지점)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게 못내 안타까웠던지 누군가 이정표에 높이(420.3m)를 적어 넣었다. 하지만 내 앱은 434m를 찍는다. 이곳이 용강산의 정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얘기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구불구불 드넓게 펼쳐진 용담호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파른 산길에서의 고달픔을 완벽하게 해소시켜버리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13 : 02. 하산을 시작한다. 그렇다고 내리막길만 걷지는 않는다. 짧은 오름과 긴 내림이 반복되면서 고도를 낮추어간다.

 산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간다. 솔향기가 코끝을 스쳐가는 멋진 오솔길이다. 소나무는 그렇게나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 하나다. 그러니 오늘은 웰빙에다 힐링을 덤으로 얻어가는 셈이다. 이 아니 행복할 손가!

 13 : 17. ‘금봉재에 이른 산길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인터넷을 검색해본다. 주요 포인트의 유래를 알아두면 다음에 만나게 될 풍경들에 대한 설명을 해나기가 훨씬 편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 진짜 용강산(420.3m)’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면 5분이 채 안되어 이를 수 있는 거리다. 그렇다면 아까 이정표가 세워져 있던 곳은 용강산이 아니고 용강산 능선에 있는 한 지점이었던 셈이다.

 해발 383m인 금봉재(이정표 : 용담면사무소 4.4m/ 주촌면사무소 11.0km)는 용담면 송풍리와 옥거리를 잇는 고개이다. 과거 용담면 사람들이 금산이나 서울지역으로 가기위해 넘던 고갯마루 중 하나였다. ‘금봉(錦鳳)’이란 지명은 고개를 낀 지형이 부인들이 머리에 꽂는 금비녀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길이 더 고와졌다. 경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평탄한 길이 계속된다.

 13 : 27. 자갈이 깔린 임도로 내려섰다.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산모롱이를 살짝 돌자 이정표가 종점인 용담면사무소까지 3.8km 밖에 남지 않았다며 힘을 내란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시멘트포장길인데 햇빛을 가려줄 나무가 없어 오뉴월에는 뙤약볕에 고생깨나 할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하긴 걷기 여행자들에게 양산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하지 않았던가.

 길을 걷는 여행자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둘레길은 지역 주민의 생활 터전을 지나기 때문에 농작물을 따거나 논밭에 함부로 들어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주인 있는 임산물 채취도 마찬가지다. 지역 주민에게 농작물이나 임산물은 소중한 재산이자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 다슬기 닷!’ 앞서가던 집사람이 호들갑을 떤다. 그녀의 말마따나 꽤 많은 다슬기가 송사리 떼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그만큼 물이 맑다는 얘기일 것이다.

 13 : 57. ‘옥수마을을 앞둔 삼거리(이정표 : 용담면사무소 2.1km/ 주천면사무소 13.3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묘역이 들어서있는 고개로 올라간다.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고개인데 여정의 막바지라서인지 의외로 힘들었다.

 나그네의 그런 고달픔을 가엽게 여긴 듯, 노송 그늘에 식탁용 벤치를 놓아두었다. 덕분에 얼음물로 갈증을 달랜 다음 다시 길을 나설 수 있었다.

 14 : 04. 고개를 기점 삼아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14 : 19. 고개를 넘으면 회룡마을(이정표 : 용담면사무소 1.3km/ 주천면사무소 14.1km). 법정 동리인 송풍리(松豊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다.

 이 마을은 살기 좋은 마을로 유명하다. 2010년도 그린빌리지 사업을 시작으로 2011년 참살기 좋은 마을가꾸기사업을 진행하면서 꽃길과 벽화 등 마을경관을 조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결과다.

 경운기를 모는 아버지나 짐칸에서 재롱을 부리는 딸내미가 부러울 정도로 행복해 보인다. 요즘 귀농·귀촌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라던데, 저런 정겨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누가 저리도 고운 글을 지었을까? <네가 나오게 오늘 길/ 네가 너에게 가는 길/ 서로의 길이 맞닿아/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자국을 남긴다.>, <날마다/ 희망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주는 오늘>

 고원길은 회룡마을을 그냥 벗어나지 않는다.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더 넘으란다.

 정자가 지어져 있는 고갯마루는 장태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의 들머리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봉화산(670.6m) 산줄기의 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야트막한 봉우리이지 싶다.

 14 : 24. 고개를 넘으면 송풍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문화마을이다. 면사무소와 파출소, 우체국, 학교가 들어서는 등 용담면의 행정중심을 이루나 용담댐 건설로 새로 면소재지가 되면서 생긴 마을이라서 농촌도 그렇다고 도시도 아닌 어정쩡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14 : 29. 문화마을을 관통해온 탐방로는 용담중학교 앞에서 23번 국도(안용로)와 방화천(노온교)을 연이어 가로지른다. 하나 더. 면소재지답게 문화마을에는 음식점과 마트 등 편의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주말이어선지 문은 열려있지 않았다. 캔맥주를 사려고 들렀던 편의점도 주인장이 외출 중이었다.

 14 : 33. 몇 걸음 더 걷자 용담면사무소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10구간이 종료됨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 화단에 세워져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은 12.86km를 찍는다. 중간에 산을 두 개나 넘었음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오늘도 집사람과 함께 했다. 그리고 걷는 내내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아니 십중팔구는 내가 얘기를 하고 집사람이 들어준다. 그것도 감정 이입을 해가며. 한자 들을 청()’에는 듣는 것이 왕처럼 중요하고 열 개의 눈으로 보듯 상대방에게 집중해 상대와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니 집사람은 듣기의 기본을 제대로 실천한 셈이다. 덕분에 난 마음 놓고 웃고 떠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진안고원길 9구간(운일암반일암 숲길)

 

여행일 : ‘24. 5. 4()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주천면 일원

여행코스 : 운일암반일암 주차장구름다리국민여가캠핑장닭밭골 산림욕장와룡암주천면사무소(거리/시간 : 9.0km, 실제는 알바 포함 12.66km 3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운일암반일암 주차장(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통영-대전고속도로 금산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를 타고 용담호 방면으로 내려오다 용수목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55번 지방도. ‘주천삼거리에서 다시 우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삼거마을에 있는 운일암반일암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천면 삼거에서 출발 주천면사무소에 이르는 코스로, 운일암반일암의 계곡을 따라 조성해놓은 8.8km의 숲길을 따라 걷는다. 명덕봉과 명도봉을 잇는 구름다리와 무지개다리에서 운일암반일암의 빼어난 자태를 바라보고, 천변을 따라 조성한 산책로에서는 숲속의 속삭임을 듣는다. 진안고원길 13구간 중 가장 짧으나 난이도는 ’. 구름다리까지 올라가려면 땀깨나 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1 : 03. 주차장 앞. 주자천에 걸쳐놓은 노적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정면에 보이는 산은 노적봉으로 운일암반일암 28경 중 26경이라고 한다.

 국내 유일의 홍삼특구답게 다리의 조형물까지도 인삼을 내걸었다. 평균 해발 400m의 남한 유일 고원지대에서 재배되는 진안인삼은 사포닌과 진세노사이드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최상의 품질을 자랑한단다. 그 지리적 특성으로 2005년 홍삼한방특구로 지정된 바 있다.

 다리 아래로는 주자천이 흐른다. 천길단애와 쪽두리·천렵·대불바위 등 크고 작은 기암괴석이 계곡을 따라 5km 거리의 와룡암까지 이어지는데, 이곳을 따로 운일암반일암계곡이라 부른다. 골이 워낙 깊어 오가는 것은 구름밖에 없는 데다 햇빛은 반나절밖에 들지 않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9구간(운일암반일암 숲길)의 출발지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다리 건너에 세워져 있다. 마침 코스 지도까지 그려져 있으니 머릿속에 기억해 둔 다음 출발하도록 하자. 하긴 나는 GPX트랙까지 깔아놓고도 종점을 놓치고 한참이나 더 걸었지만...

 탐방로는 주자천을 따라 내려간다. 산자락에 들어앉은 노적봉 쉼터의 울타리와 냇가 사이로 길이 나있다. 쉼터에는 농구·족구 코트와 오토·글램핑(Glamping) 캠핑장이 들어서 있었다.

 쉼터를 지나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간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연록’. 그 속으로 길이 나있다. 길가에 늘어선 돌탑들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 수백 기가 늘어섰는데, 개중에는 아크로바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슬아슬함을 보이기도 한다.

 11 19. ‘칠은교에 이른다. 이름처럼 7명의 도인이 은둔하여 살면서 인삼씨를 심고 가꾸었다는 곳이다. 하지만 요즘은 물놀이 장소로 더 유명하다. 지자체에서 수인성 전염병 예방을 위한 수질검사를 수시로 해오고 있을 정도로...

 탐방로는 칠은교에서 오른쪽 명도봉 방향 산길을 올라간다. 대불바위 주변 바위벼랑에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운일암반일암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매김한 구름다리로 인도하려는 의도가 더 크다고 하겠다.

 안내판은 이곳이 구름다리로 올라가는 길임을 알려준다. 구름다리를 건넌 탐방객들이 내려올 수는 없다는 얘기다. 구름다리가 일방통행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도중 내려오는 사람들을 만났다면 명도봉을 다녀오는 등산객들로 보면 된다.

 탐방로 입구는 지자체에서 나온 관리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기상악화(강우·강설·강풍·결빙) 때나 탐방 허용시간(하절기 기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을 못 맞춘 탐방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구름다리로 오르는 길은 꽤 가팔랐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40(90m 높이) 아파트를 걸어 올라간다고 여기면 되겠다. 그 거리가 400m밖에 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1 : 32. 숨이 턱까지 차오를 즈음에야 운일정(雲日亭)에 올라설 수 있었다. 시야가 툭 트이는 바위벼랑 위에 팔각의 정자를 지어놓았다. 협곡에서 부는 바람하며, 바라보이는 뷰가 장난이 아닌 곳이니 정자에 꼭 올라보도록 하자.

 정자는 조망의 명소다. 구름다리를 놓으면서 함께 세운 듯, 난간에 서자 구름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운일정에서 구름다리까지는 300m. 걷기 딱 좋은 내리막길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11 : 39. 잠시 후 도착한 구름다리는 운일암반일암의 새로운 명소로 이미 자리매김 됐다. 명도봉과 명덕봉을 잇는 길이 220m,  1.5m의 다리가 높이 80m의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구름다리는 교량기술의 결정체라고 했다. 우선 바위를 철근콘크리트(앵커리지)로 단단히 보강한 다음 양쪽 앵커리지 위에 2개의 기둥(주탑)을 세우고 케이블 두 가닥을 빨랫줄처럼 길게 늘어뜨린다. 이어서 앵커리지 뒤쪽을 단단히 잡아당겨 고정시킨 케이블 사이사이에 세로로 뻗은 강철선(행어케이블)을 내린 다음 상판을 연결해서 고정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높이와 길이는 물론이고, 풍력·장력·하중 등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계산한단다.

 다리를 걷는다. 마치 허공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거기다 상판 바닥이 송송 구멍 뚫려 있어서 까마득히 지상이 내려다보이니 소름끼치는 스릴감까지 만끽할 수 있다. 하나 더. 구름다리는 일방통행이라서 명도봉쪽에서 명덕봉쪽으로 건너는 것만 허용된단다. 그래선지 오고가는 사람들로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는 여느 출렁다리들과는 달리 다리가 뻥 뚫렸다. 전환의 발상이 만들어낸 비현실적 풍경이 아닐까 싶다.

 발아래로 운일암반일암의 비경이 펼쳐진다. 70여 년 전만 해도 깎아지른 절벽에 길이 없어 오로지 하늘과 돌과 나무와 오가는 구름뿐이어서 운일암(雲日岩)’이라 했고, 또한 깊은 계곡이라 햇빛을 하루에 반나절 밖에 볼 수 없어 반일암(半日岩)’이라 불렸다고 한다.

 반대 방향으로는 무지개다리가 내려다보인다. 또 다른 출렁다리이다.

 11 : 43. 하산을 시작한다. 길은 산비탈을 옆으로 째며 이어진다. 까마득한 바위절벽이라서 내려가는 길을 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진안의 랜드 마크로까지 대접받는다는 구름다리’. 그런 명소와의 이별이 못내 아쉬웠던지 산비탈에 멋진 전망대 하나를 만들어놓았다.

 난간에 서자 조금 전 건너왔던 구름다리가 그 전모를 드러낸다. 그런데 화려한 붉은색 위주인 여느 구름다리들과는 달리, 이곳은 온통 은빛이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저 모습을 보고 은빛갈치가 우아한 비늘을 움직이며 하늘을 나는 형상이라고 했다.

 내려가는 길은 계단의 연속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나무계단이 갈 지()’자를 써가며 아래로 향한다.

 11 : 52. 길고 긴 계단의 끝나고 55번 지방도(동상주천로)로 내려선다. 이곳도 역시 지자체에서 나온 관리원이 지키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이니 진입을 금지한다는 팻말도 눈에 띈다.

 공중화장실과 식수대 등의 편의시설도 만들어져 있었다. 구름다리를 다녀오느라 참았던 인간 본능을 해결하라는 모양이다.

 고원길은 도로를 횡단해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주자천을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운일암반일암이 자랑하는 비경이 저 위에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진안고원길은 그 비경을 살짝 비켜 지나간다).

 도로의 왼쪽 가장자리, 그러니까 주자천의 천변을 따라 나무 덱 길을 따로 내놓았다. 운일암반일암의 은밀한 속살을 눈에 담으며 걷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아니 국가지질공원으로까지 지정되어 있다니 꼼꼼히 살펴보며 걷도록 하자.

 운일암반일암은 진안·무주 국가지질공원 영역 안의 지질명소다. 중생대(中生代)의 마지막 지질시대인 백악기(白堊紀), 8,000만 년 전의 흔적으로 화산폭발로 용암이 여러 차례 분출하고 쌓이기를 반복하며 만들어졌다. 그게 또 침식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처럼 변했다.

 크고 작은 기암과 절벽이 저마다 다른 모습을 자랑하고, 계류를 딛고 일어선 절벽에서는 풍상을 이긴 소나무들이 절벽과 어우러지며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를 만들어낸다.

 깎아지른 기암절벽 아래를 옥수가 휘감아 돌면서 곳곳에 작은 폭포와 소()를 연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다. 대자연이 만들어 낸 절경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운일암반일암의 얼굴마담격인 대불바위는 높이가 40인데 말뚝바위에다 공깃돌을 올린 모습이 부처님을 닮았다. 바위에 새겨진 쌍고도덕 대명일월(雙高道德 大明日月)’이란 글씨는 조선 후기의 학자 김중정(1602~1700)이 썼다고 전해진다. 주천 산간오지에서 안빈낙도하며 낙향의 한을 시와 거문고를 통해 달랬고 후학들에게 충효와 근검정신을 일깨운 인물이다.

 운일암반일암 28 중 하나이기도 한 대불바위 2019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됐다. 생태·경관·문화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유·무형의 자산으로 꼽혔다는 얘기일 것이다. 백제가 망할 때 열두 장군이 은거하며 충절과 패기로 신라의 침공을 막으려 했다는 열두 굴도 함께 지정되었다는데, 어디를 얘기하지는 알 수 없었다.

 계곡은 감입곡류의 하천이 펼쳐지면서 장관을 이룬다. 집채만 한 바위들이 계곡 안에 줄지어 들어앉아 있기도 하고, 기괴한 형상의 바위가 뜬금없이 솟구쳐 하천 자락을 붙들고 서 있기도 한다.

 숫제 야외에 만들어놓은 수석(壽石)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각양각색의 기암괴석들이 곳곳에 흩어져 각자의 빼어난 몸매를 자랑한다. 족두리바위, 천렵바위 등 저마다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데 일일이 구분해 낼 수는 없었다.

 산자락에서 흐르는 맑고 시원한 물이 크고 작은 폭포와 소를 형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물이 깊지 않아 계곡 전체가 물놀이에 적당한 조건을 갖췄다.

 12 : 03  12 : 09. 400m쯤 거슬러 올라갔을까 자그만 바위봉우리에 도덕정(道德亭)’이란 정자가 걸터앉았다. 운일암반일암의 백미로 꼽히는 명소인데, ‘도덕이란 이름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명덕봉(明德峰, 846m)과 명도봉(明道峰, 863m)에서 한 글자씩 따왔지 않나 싶다.

 정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멋진 풍광을 빚어내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것은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정자에 앉아 산수를 굽어본다. 크고 작은 기암과 절벽이 저마다 다른 모습을 자랑한다.

 주자천 상류. 55번 지방도가 산골짜기를 파고든다. 저 골짜기는 옛날 용담현에서 전주(전라도 감영)로 가던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하지만 길이 너무 험해서 공물을 지고 가다 보면 얼마가지 못하고 해가 떨어진다 해서 떨어질 운()자를 써서 운일암(隕日岩)’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새파란 물이 흐르는 깎아지른 절벽 위를 가자니 너무 겁이나 울면서 기어갔다 하여 운일암이라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런 지명들은 해동지도와 지방지도, 호남지도 등에 표기되어 있다.

 고원길로 되돌아가는데 한 무리의 라이더들이 지나간다. 운장산의 고갯마루를 넘어오느라 지쳤을 텐데도, 젊음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힘차게 페달을 밟고 있다.

 이때도 구름다리를 만날 수 있었다. 명덕봉과 명도봉의 사이를 지나는 좁고 긴 협곡, 이 골짜기를 흐르는 물길(주자천) 위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다리가 걸려있다.

 12 : 16. ‘고원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무지개다리란 양쪽 끝은 처지고 가운데가 무지개처럼 휘어져 높이 솟게 만든 다리를 말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다리 어디서도 그런 모양새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다리의 난간을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로 칠했을 따름이다.

 무지개다리도 역시 현수교이다. 양쪽에 주탑을 세우고 케이블로 연결한 다음, 상판을 매달았다. 아까 건넜던 구름다리와 같은 형식이다. 하지만 까마득히 높은 위치가 아니니 구름다리라는 이름은 어불성설. 그렇다고 그 흔한 출렁다리로 놓아둘 수는 없었던지 일곱 색깔 페인팅의 수고로움을 더해 무지개라는 예쁜 이름을 만들어냈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면서 위를 쳐다보면 방금 전에 건너온 구름다리가 보인다. 두 다리를 오버랩 시켜봤다. 그러자 직선과 곡선의 절묘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다리 아래 주자천은 고려 때 송나라에서 온 주자의 종손 주찬이 다녀갔다는 이름부터가 걸쭉한 하천이다. 운장산 북쪽 골짜기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굽어 주천면과 용담면을 거친 다음 용담면 월계리에서 금강 상류에 합류된다.

 이후부터는 숲길 산책로를 따른다. 계곡과 나란히 산자락으로 이동하는 길로, ‘운일암반일암이란 이름처럼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서늘한 숲길이다. 군락을 이루는 참나무와 소나무, 서어나무가 차양막이 되고, 길가 바닥에는 조리대가 빼곡하게 뒤덮여 있다. ! 중간에 명도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도 만날 수 있었다.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목재 덱 산책로는 곳곳에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잠시 쉬어가기에 딱 좋다는 얘기다. 아니 잠시 물가로 내려가 보면 어떨까? 시원한 물속에 발 담근 채로 주변 풍광에 푹 빠질 테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12 : 30. 길은 생태 숲(이정표 : 주천면사사무도 5.5km/ 삼거 3.5km)’으로 인도한다. ‘운일암반일암 국민관광지의 엄청나게 큰 주차장 옆에 만들어놓은 일종의 힐링 공간이다. 숲속에서 자연을 즐기며 힐링할 수 있다나?

 숲에는 체험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짚라인, 통나무 건너기, 통나무 오르기, 터널 통과하기, 흔들마루 등 어린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각종 운동기구들을 배치했다.

 생태 숲 안내도. 다수를 위한 공간이니 타프(tarp) 설치나 야영·취사를 금지한다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차량이나 자전거의 출입도 금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12 : 35.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는 국민여가캠핑장이 들어섰다. 운일암반일암의 아름다운 풍광 곁에서 머물 수 있다는 입지 덕분에 개장 전부터 캠퍼들의 많은 관심을 모았던 곳이다.

 시설은 자동차야영장 78면과, 일반야영장 32면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샤워장 및 취사장, 화장실, 잔디광장 등 편의시설과 전기시설 등을 갖추고 있단다.

 안내도는 글램핑(glamping) 시설도 갖추고 있음을 알려준다. 침대가 딸린 침실과 욕실이 있는가 하면, 주방에는 냉장고·오븐·밥솥·커피포트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주방기구를 갖췄다고 한다. TV에 에어컨까지 있다니 웬만한 호텔이 부럽지 않겠다.

 12 : 40. 고원길은 캠핑장을 가로지른 다음 명도교(이정표 : 주천면사무소 5.0km/ 삼거 4,0km)’를 건넌다. 이어서 55번 지방도를 따라 주천면소재지로 간다. 도로 가장자리에 덱 산책로를 따로 내놓았다.

 주자천은 보를 막아 노천 수영장을 만들었다. 주자천에 어깨를 맞대고 있는 캠핑장의 인지도를 한결 업그레이드시켰다고 보면 되겠다. 1-2급수에만 사는 민물고기 꺽지와 함께 물놀이하는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12 : 49. 200m쯤 도로를 따르다가 숲속으로 들어간다(12 : 43). 그리고 운치 있는 소나무숲길을 400m쯤 더 걸어 주양교에 이른다.

 이정표(주천면사무소 4.3km/ 삼거 4.7km)가 다리를 건너란다. 그런데 공식 안내지도보다 구간거리를 0.1km 늘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면서 만난 모든 이정표가 구간거리를 9km로 적고 있었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다. 사소한 것이지만 바로잡아야하지 않을까?

 다리 건너에서 만난 멋들어진 주택. ‘목가촌이라는 식당인데 유럽의 산간지역에서나 볼 법한 통나무집이 이국적인 멋을 퐁퐁 풍기고 있다.

 다리를 건넌 고원길은 닥밭골 골짜기 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는 개울 오른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1km쯤 올라가다가, 반대편 임도를 따라 되돌아온다. 여기서 팁 하나. 울창한 숲속을 걷는다는 것을 빼놓고는 이렇다 할 볼거리가 없는 구간이다. 그러니 완주를 목표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주양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도로로 살짝 빠져나가도 될 일이다.

 12 : 53. 매번 얘기했듯이 진안고원길은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난 길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 8구간까지 이어오면서 처음으로 방향표지판이 없는 갈림길을 만났기 때문이다. 길을 인도하고 있는 산행대장이 바닥에 방향표시지를 깔아놓고 갔지만 사진 촬영에 바쁜 내 눈에까지 들어오지 못했던 모양이다.(사진은 길을 제대로 찾고 난 다음 찍은 것이다)

 무단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에도 나는 초연했다. 울타리 옆으로 가면 되니까. 하지만 정점을 찍고 되돌아오던 다른 일행들이 내지르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외침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진안고원길을 걸어오면서 처음으로 겪은 알바였다.

 길을 잃었던 지점으로 되돌아와 방향표시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간다. 오솔길을 따라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몇 걸음 걷지 않아 진안 특산물인 인삼과 홍삼을 상징한다는 노란색과 분홍색 묶음 리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올라가는 도중 반대편 임도(내려올 때 걷게 된다)로 연결되는 갈림길도 만난다. 개울에 잘 생긴 다리까지 놓았다. 볼거리도 없는 산길을 걷는 게 지겨워졌다면 이제라도 저 다리를 건너면 된다.

 잠깐이지만 요런 오르막길을 걷기도 한다. 길은 널찍하게 나 있었다. 질퍽거릴만한 곳에는 야자매트를 깔았고,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자갈길(지압 길)도 눈에 띈다. 거기다 졸졸거리는 물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제각으로 여겨지는 한옥을 스치듯 지나기도 한다. 후손들이 일 년에 한두 번이나 찾아오는지 마당에는 웃자란 잡초와 잡목들만 가득했다.

 닥밭골 닥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했다. 진짜로 닥나무가 많은지는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지금 그 숲은 산림욕장으로 변신해 있다. 정자와 평상, 벤치에 운동기구까지 갖춘 힐링 공간이다. 하지만 찾는 사람들이 드문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13 : 06. 오솔길을 빠져나오니 진안고원길 이정표(주천면사무소 3.4km/ 삼거 5.6km)가 반긴다. 이곳은 9구간의 첫 번째 인증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니 완주를 목표로 하는 나그네라면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13 : 10- 13 : 20. ‘주자천으로 되돌아간다. 이 구간도 탐방객들을 위한 다양한 시설들을 품었다. 단체 모임을 위한 무대(공연장)가 보이는가 하면 정자와 평상까지 배치했다. 덕분에 우리부부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느긋하게 쉬다 갈 수 있었다.

 길을 가다 멋진 삶을 영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한갓지게 살아가는 모습이 컨테이너에 딸린 널찍한 잔디밭에서 그려진다. 더울 때 이용하려는 듯 개울로 내려가는 길을 냈는가하면, 취미생활을 위한 간이 골프연습시설까지 만들어놓았다.

 인삼의 고장답게 곳곳에서 인삼포가 얼굴을 내민다.

 큰꽃 으아리라고 한다. 줄기가 약해 쉽게 끊어질 것 같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고 오히려 살로 파고들어 으아~’하는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나? 아무튼 꽃말이 아름다운 당신의 마음, 고결이라니 우리 집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꽃이라 하겠다.

 13 : 48. 725번 지방도(정주천로)를 횡단한다. 횡단보도가 따로 나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건너야 한다. 참고로 이곳을 먹고개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9구간의 종점인 주천면사무소는 이곳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도로를 따라가면 금방 이를 수 있다. 하지만 탐방로는 반대편 348봉 아래를 돌아가는 오솔길(초반은 농로)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주자천을 만난다.

 이곳도 만만찮은 풍경을 보여준다. 문득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생각난다. ‘이 세상/ 우리 사는 일이/ 저물 일 하나 없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변으로가/ 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팍팍한 마음 한끝을/ 저무는 강물에 적셔/ 풀어 보낼 일이다’. ‘섬진강 5’에 나오는 시 구절이다.

 13 : 59.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만난 또 다른 비경. 조선 시대에 지어졌다는 정자, 와룡암이 주자천의 풍치를 더해준다. 용이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의 와룡바위를 걸터앉은 저 정자는 원래 이쪽에서 주천서원의 강당(講堂) 역할을 수행했었다. 그러다 물 때문에 왕래가 불편하자 순조 때인 1827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단다.

 돌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이 온몸에 청량함을 전해주고, 숲속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은 몸속 깊이 자연의 숨결을 불어 넣어준다. 물이 흙탕물이라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속세에서 살다보면 비일비재한 게 공사판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풍치에 반해 무턱대고 징검다리를 건너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오른편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조금 전 거론한 주천서원이 있으니 말이다. 사당과 홍살문, 외삼문인 월요문(月要門)으로 이루어진 주천서원(朱川書院) 1924년 김대현(金大鉉)이 전국의 유림과 광산김씨 문중의 협조를 받아 세웠다. 초기에는 주천사(朱川祠)라 불리다가 1975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서원은 주자를 중심으로 여대림과 주잠,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인 이황과 이이, 여기에 광산김씨인 김충림과 김중정 등 7인을 모신다고 했다.

 징검다리를 건너자 와룡암(臥龍庵, 전북문화유산자료)’이 반긴다. 긍구당(肯構堂) 김중정(金重鼎, 1602-1689)이 병자호란 때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효종 때인 1650년 건축한 암자이다. 김중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지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항복하자 할아버지인 김충립(金忠立)과 함께 진안 용담(주천)으로 내려와 후학들을 가르치다 생을 마쳤다.

 건물은 도리 기둥에 난간을 갖추고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앞면 3, 옆면 3칸의 누각이다. 루에는 기정(起亭와룡암(臥龍菴와룡암기(臥龍菴記와룡암중수기(臥龍菴重修記주천사중수기(朱川祠重修記주천서원기(朱川書院記) 등 많은 편액과 시액(詩額)이 걸려 있다. 기정과 와룡암은 도암(陶菴) 이재(李縡 :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가 직접 썼다고 한다.

 와룡암 이정표가 이곳이 두 번째 인증지점임을 알려준다. 그러니 이정표와 본인의 얼굴이 한꺼번에 나오는 사진을 꼭 찍어두도록 하자. 그래야만 완주를 인증해준다니 말이다.

 와룡암 부근에서 만난 이 빗돌 때문에 알바를 하고 말았다. 1965년 겨울 와룡보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다 물에 빠진 두 어린이를 구하고 나머지 한 명을 더 구하려다 어린이와 함께 세상을 떠난 김영덕님의 행적을 기리는 빗돌이다. 아무튼 이 빗돌의 뒤로 보이는 이정표가 길고 긴 알바의 단초를 제공했다. 진행방향을 가리키는 노란색 표지판이 주신교를 건너라고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구간의 이정표인데도 이를 모르고 따라버리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14 : 11  14 : 41. 덕분에 우리 부부는 1.5km나 더 걷다가 성암마을에 이르러서야 잘못된 것을 알고 돌아올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온 와룡암’. 진행방향 저만큼에 주천면소재지가 놓여있다.

 14 : 47. 식당과 상점 등이 늘어선 중심가를 지나 주천면사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10코스의 시작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 화단에 설치되어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알바시간을 포함해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2.66km를 찍고 있으니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진안고원길 6구간(전주가는 길)

 

여행일 : ‘24. 3. 16()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부귀면 일원

여행코스 : 장승삼거리장승마을메타세쿼이아길(실제 출발지, 인증)모래재휴게소모래재주화산(조약봉, 인증)임도사거리부천마을원봉암마을부귀면사무소(거리/시간 : 15.8km, 실제는 메타세쿼이아길부터 12.22km 3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완주) 소양 IC에서 내려와 26번 국도를 타고 진안·장수 방면으로 19km쯤 내려온다. ‘서판사거리(진안군 부귀면 신정리)’에서 우회전 모래재로로 옮겨 3km쯤 들어오면 원세동 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500m쯤 더 올라가면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장승삼거리에서 출발해 메타세쿼이아길 따라 전주를 넘나들던 모래재로 오른다. 이어서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인 주화산(조약봉)을 넘은 다음, 금남정맥 아래 임도를 따라 부귀면사무소로 오는 전형적인 고원길이다. 해발 500m도 넘는 산줄기를 탄다고 해서 난이도는 ’. 구간 거리도 15.4km나 되지만, 지난 5구간 때 추가로 걸었건 거리를 빼고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부터 걷기 시작했다.

 10 : 40. ‘메타세쿼이아길을 따라가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양옆으로 늘어서있는 이 길은 모래재휴게소까지 이어진다. 1986년부터 2004년까지 잠동-큰터골의 1km 구간에 메타세쿼이아가 집중적으로 식재됐고, 2008년에는 모래재휴게소까지 구간이 확장되었다. 초기에 조성된 가로수는 수령 40년이 되어가면서 어른의 몸통보다도 더 굵어졌다. 줄기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덕분에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우뚝우뚝 솟아 삼각형을 이루는 메타세쿼이아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드라마 보고 싶다에서 주인공 박유천과 윤은혜가 아픈 상처를 잊고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던(네티즌들이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기도 했단다), ‘내 딸 서영이에서 서영이 엄마 아빠가 젊은 시절 걸었던 추억의 길이다. 영화 국가 대표에서도 이 길이 등장했었다. 주인공 하정우 등 스키선수들이 성동일 코치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렸었다.

 10 : 42. 몇 걸음 더 걸어 이른 테크길 입구. 이정표가 이름표(메타세쿼이아)를 달았다. 6구간의 2개 인증지점 중 하나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모자까지 썼다. 그러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바깥에 데크 탐방로를 새로 내놓았다. 이정표의 방향표시도 저 길을 따르라고 한다. 그러니 탐방로를 따라가다 오가는 차량이 없을 때 잠깐 도로로 나가 사진을 찍으면 된다. 참고로 메타세쿼이아길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즐겨 찾는 장소 중 하나이다.

 들녘 너머에는 신덕마을(웅치골)이 그림처럼 앉아있다. 야생화를 키우고 유기농산물을 재배한다는 산골마을이다. 마을 뒤 편백나무 숲에는 산책로가 만들어져있고, 숙박시설과 마을사람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도 있단다. 그래선지 고원길 트랙은 저 마을을 들렀다가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새로 만든 데크길을 따르다가 그만 진입로를 놓쳐버렸다.

 10 : 50. 잠시 후 도착한 웅치골 사거리’. ‘모래재로(옛 국도 26호선)’에서 옛 웅치길이 갈려나가는 지점이다. 호랑이와 도둑떼가 출몰하던 시절, 이 길은 전주를 연결되던 유일한 길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전주로 향하던 왜군이 이 재(熊峙 또는 곰티재)를 넘었다. 관군과 의병이 왜군에 맞서 대격전을 벌였고, 고갯마루에는 현재 이를 알리는 웅치전적비가 서있다. 한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았던 산길은 1910년 신작로가 되었다. 하지만 99굽이의 비포장 길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모래재가 뚫리면서 기억너머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비포장 산길로서의 기능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길은 이제 트레킹족의 차지가 되었다.

 웅치골 입구. 코너에 백곰 한 마리가 서 있다. 곰은 제 몸만 한 마을 표지석을 껴안고 웃는다. 충렬의 혼이 깃들어있는 곳이니 잠시 들렀다가라는 듯. 아무튼 옛 웅치(熊峙, 곰티재) 길은 신덕마을의 한가운데를 관통해 산골짜기로 숨어든다. 모래재길이 생기기 전 진안과 전주를 연결하던 아주 오래되고 유일한 고갯길이었다.

 안내도는 임진왜란 웅치전적에 대해 간락하게나마 알려준다. 1592 7 8, 왜군은 웅치방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전장에는 의병장 황박이 최전방을, 나주판관 이복남이 제2선을, 김제군수 정담이 정상에서 최후 방어를 담당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 무렵 화살이 떨어진 조선군이 안덕원으로 후퇴하면서 일단락된다. 하지만 김제군수 정담과 휘하의 병력은 웅치에 남아 끝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정담을 비롯해 종사관 이봉·강운 등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하고 웅치는 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들의 용맹에 감동한 왜군은 전사한 아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국의 충성스런 넋을 위로한다(弔朝鮮國忠肝義膽)’라고 적은 푯말을 세우고 지나갔다고 한다. 아무튼 웅치를 넘은 왜군은 7 9일 전주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웅치전투에서 입은 피해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남원에서 돌아온 동복현감 황진이 그런 왜군을 안덕원 인근에서 격파했다. 하나 더. 이 전투의 승리와 한산대첩이 있었기에 호남지방이 보전될 수 있었고, 이는 임진·정묘 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고원길은 사거리에서 큰터골 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세동리(細洞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신덕·적천·큰터골·원세동·우정·부암) 중 하나로 메타세쿼이아길 1차 조림지의 끝이라는 것 외에는 귀가 솔깃할 얘깃거리는 전해주지 않는다.

 이정표는 6구간의 시점(始點) 장승삼거리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4.4km로 적고 있었다. 핸드폰의 트랙은 현재 0.85km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6구간의 시점이 아닌 메타세콰이어길에서 출발(생략구간은 지난 5구간 답사 때 이미 걸었다)한 덕분에 3.9km를 단축한 셈이 됐다.

 큰터골 마을회관. 고원길은 회관 앞 고샅길을 따라간다.

 당산나무 아래 철망울타리는 걷기 여행자들이 매달아놓은 리본들로 빈틈이 없을 정도다. 울긋불긋한 게 흡사 무당집 처마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10 : 54. 마을을 빠져나오면 다시 모래재로이다. 그런데 가로수가 은행나무로 바뀌어있는 게 아닌가. 느닷없이 수종이 바뀐 게 조금 어색했지만. 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철이면 메타세쿼이아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도 있겠다.

 10 : 57. ‘큰터골 버스정류장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마을주민들보다는 송어요리 전문점인 진미가든의 단골손님들에게 더 유용할 듯. 예약이 필수일 정도로 인기가 높은 로컬 맛집이라니 말이다.

 11 : 02. 노거수 두 그루가 수문장을 자처하는 수목원 가든 찻집을 지나자 이번에는 적천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세동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버스정류장(적천마을) 맞은편에는 시조시인 구름재 박병순의 생가가 있었다. 박병순(朴炳淳, 1917-2008)은 스승인 가람 이병기에 이어 한국현대문학사에 시조의 가치와 의미를 대중적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정열을 쏟은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시절 시조집을 몰래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최초의 시조 전문지 신조를 발간하고, ‘가람동인회로 활동하면서 시조시인으로서 한국시조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박병순의 생가. 1917년에 태어나 1939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나라사랑도 남달랐는데, 집 둘레에 무궁화를 심고 한글보급운동에도 힘을 쏟았다고 한다.

 마당에는 박병순의 흉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봄눈. 앵도, 속금산, 무궁화 등 그의 대표작들을 새겼는데, 이중 속금산과 무궁화는 이 집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생가를 빠져나와 도로를 건넌다. 그리고는 농로를 따라 북진한다. 특별한 의미는 없으나 억새가 무성한 것이 가을철에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겠다.

 길가 부지런한 산골 농부는 일 년 농사 준비로 분주하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11 : 09. 도로(모래재로)로 올라서자 또 다시 메타세쿼이아가 반긴다. 아까보다는 굵기나 크기가 작아졌지만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들이 명품 파크 웨이(Park-Way)’로 꼽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파크 웨이란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드라이브하는 길로서 주변자연과 문화자원을 활용한 휴양활동의 전초기지를 말한다.

 11 : 13. 길은 좀 더 가팔라지고 좀 더 급하게 굽이진다. 그리고 적천저수지라는 자그마한 저수지를 호젓이 지난다.

 11 : 17. 그러자 고갯길이 갑자기 활짝 열리면서 모래재 휴게소가 길손을 맞는다. 26번 국도가 새롭게 놓이면서 모래재길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져 간다. 그러다 느리게 달리기 위해, 천천히 걷기 위해, 그리고 잠시 멈추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길로 변했고, 모래재 휴게소도 그들이 찾는 쉼터로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모래재 휴게소. 아침마다 토종 계란과 향 짙은 원두커피를 준비한다는 곳이다. 휴게소에서 아침을 시작하고 재를 넘는 직장인들도 있단다. 하나 더. 어떤 이는 휴게소의 약수를 첫 손가락에 꼽기도 했다. 해발 480m의 지하 73m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찾아 뽑아 올린 건강한 물인데, 진안군에서 1년에 한 번씩 수질검사까지 해준단다.

 맞은 편, 도로 건너에는 전주공원(공원묘지)이 위치하고 있다.

 11 : 19. ‘모래재 휴게소 광장의 끄트머리쯤에서 왼쪽으로 난 임도로 올라간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를 경우는 모래재 터널로 연결된다. 참고로 모래재는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진안과 장수, 무주 등 이른바 전북의 지붕으로 불리는 무진장 주민들이 전주를 오가려면 꼭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도로는 1972 11월 개통됐다. 1997 4차로의 도로가 보룡고개에 나기 전까지 차량통행이 가장 많았으나, 한편으론 심한 굴곡으로 인해 대형 사고가 많이 일어났기도 했다.

 임도는 제법 가파르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다 거리까지 짧다.

 11 : 25. 잠시 후 이번에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트레킹이 끝나고 산행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이정표는 산행구간의 핵심인 주화산(조약봉)까지의 거리를 0.81km로 적고 있다.

 고원길은 이제 산길을 탄다. 느리게 오르는 반듯한 산길은 고운 편이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진안고원의 경계에 놓인 산들이 갖는 특징이지 싶다. 진안과 다른 지역의 고도 차이가 300m나 되다보니 능선까지 오르는데 드는 힘도 그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다. 진안지역에서는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11 : 29. 덕분에 4분 만에 모래재에 올라설 수 있었다.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인 주화산에서 시작해 내려온 호남정맥의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고개이다. 높이는465m, 진안에서 보면 그다지 높지 않으나 전주시 방향으로는 매우 높은 고도를 갖고 있다.

 모래재라는 지명은 고갯마루 왼편에 위치한 신촌리(완주군 소양면)의 골짜기 모사골에서 유래했다. 모사가 모새(모래)로 발음됐고, 이게 또 표준어가 되면서 지명으로 굳어졌다. 아무튼 탐방로는 이정표(주화산 0.6km/ 곰티재 4.7km/ 모래재휴게소 0.31km)가 가리키는 주화산 방향의 능선을 따라간다.

 이후부터는 호남정맥(湖南正脈)의 마루금을 따라간다. 호남지방을 동서로 크게 갈라놓은 이 산줄기는 서쪽은 해안의 평야지대이고, 동쪽은 남원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대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이 산줄기를 경계로 농경과 산업은 물론이고 현격히 다른 생활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

 능선의 나무 가지마다 노란색과 붉은색의 리본이 매달려 고원길을 안내한다. 이 리본은 진안의 특산물인 홍삼과 인삼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 산길을 올라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 잠시 쉬어가라며, 천천히 돌아가라며 여행길을 함께하는 동반자 같다.

 나뭇가지 사이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멋지게 꼬부라진 도로가 내다보인다. 한때 위험하기로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던 모래재이다. 진안은 산이 8할이다. 때문에 마을과 마을이 고개로 연결되고 다른 고장을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만 한다. 가늠도 어렵게 많은 고개들. 그 중 모래재는 노령산맥의 호남정맥에서 제일 먼저 산을 넘어 진안과 전주를 연결시킨 중요한 고개였다.

 ! 아까 모래재로 올라올 때와는 달리 산길이 많이 가팔라졌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하긴 명색이 백두대간 다음으로 큰 산줄기인 정맥(正脈)이니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1 : 39. 도중에 편백나무 숲이 적힌 이정표(주화산/ 편백나무 숲/ 곰티재)를 만났다. 요 아래 소양면의 어디쯤에 편백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후부터 능선은 사납던 기세를 확 누그러뜨린다. 덕분에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편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11 : 45.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헬기장이다. 아니 실질적인 주화산일수도 있겠다. 고도계가 3정맥분기점인 주화산(조약봉)보다 3m나 더 높은 570m를 찍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출발지인 메타세쿼이아길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5분이 걸렸다.

 널찍한 공터의 서쪽 가장자리에는 전망대가 들어섰다. 산비탈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대를 만들었다.

 난간에 서자 시원스런 조망이 펼쳐진다. 묵방산과 응봉산 등 완주의 산들은 물론이고 저 멀리 전주시가지의 고층빌딩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11 : 48. 공터를 지나자 곧이어 주화산(조약봉, 563.5m)이 길손을 맞는다. 진안군(부귀면 세동리)과 완주군(소양면 신원리)의 경계에 있는 높이 563.5m의 산으로 산악인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주화산(珠華山)을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시작한 금남·호남정맥의 마지막 지점으로 상정하고, 이를 기점으로 북쪽으로 금남정맥, 남쪽으로 호남정맥이 갈려나간다고 본다. ‘주화산이란 이름도 2000년대 이후 산악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정상석은 없다. 육산의 특징대로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그저 건건산악회에서 세운 ‘3정맥 분기점 표시봉이 이들을 대신한다고나 할까? 아니 주화산을 기점으로 강 3개의 수계가 나뉘는 점은 특별한 의미일 수도 있겠다. 동남쪽에 섬진강(부귀천), 동북쪽으로 금강(정자천), 서쪽으로 만경강(소양천)의 분수령이 된다. 하나 더, 진안고원길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6구간의 두 번째 인증지점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이정표가 정맥 3개가 나뉘고 있음을 알려준다. 참고로 진안고원은 정맥 종주산악인들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이다. 장수군 영취산에서 시작되는 금남·호남정맥이 팔공산부터 주화산(조약봉)까지 41.5km, 이곳 주화산에서 갈라진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각각 26.3km, 10.5km 진안고원을 지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부귀산 방향, 즉 금남·호남정맥의 능선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서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지자체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침목계단을 놓아 내려서는 부담을 덜도록 했다.

 11 : 53. 그렇게 내려서다보면 어느덧 조약치이다. 이정표(모래재휴게소 1.15km/ 주화산(조약봉) 0.22km)는 이곳이 금남호남정맥에 있는 고갯마루 중 하나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막상 금남호남정맥의 부귀산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없었다.

 이후부터는 세봉임도(細鳳林道)를 따른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모래재휴게소의 반대방향인데, 입봉(638.7m)을 거쳐 연석산(928.2m)로 넘어가는 금남정맥의 8부쯤 되는 산허리를 따라 임도가 나있다고 보면 되겠다. 편백나무로 옷을 갈아입은 산자락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기도 하다.

 임도는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봉암리 산골짜기(kakaomap 봉호재골 연애골로 적고 있었다) 써미트 골프장이 들어서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퍼팅그린이나 페어웨이, 인공호수 등 골프장에서 만들어놓은 시설들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작용해주기 때문이다.

 임도는 골프장의 바로 위를 지나기도 한다. ‘굿 샷’, ‘나이스 버디 등 서로를 응원해주는 목소리는 물론이고, 골퍼들이 내쉬는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 했다.

 도중에 거리표시가 있는 이정표(#1 : 부귀면사무소 7.6km, #2 : 부귀면사무소 6.3km)를 두 번이나 만날 정도로 임도는 길게 이어진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한참이나 오르기도 한다. 탐방로가 주화산보다도 높은 입봉(立峰, 638.7m) 9부 능선을 넘도록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2 : 23 - 12 : 32. 진안군도 그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길가에 벤치를 놓아 지친 발걸음을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우리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떨어진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12 : 39. 임도가 끝나면서 산길로 들어선다. 저 벤치는 미리 체력을 보충해놓은 다음 산길을 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는 오르막길이 나오지도 않았지만...

 12 : 41. 잠시지만 입봉에서 봉암리로 뻗어나가는 능선(이정표 : 부귀면사무소 5.1km/ 장승삼거리 10.7km)을 타기도 한다. 아니 능선(해발 583m)을 넘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산비탈을 옆으로 째며 길이 나있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집사람처럼 무릎이 시원찮은 이들에게는 마의 구간이다.

 12 : 58. 두충나무재배지와 산죽군락을 연이어 지나 농로로 내려선다.

 임도를 따라 부천마을(봉암리)’로 향한다. 이렇듯 고원길은 굽이굽이 들어앉은 마을들을 지난다. 덕분에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추억에 남을 길이 되어준다. 그렇다고 길 따라 걷기만 하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놓쳐버린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13 : 02. 마을 안길을 지나는데 정자(富泉亭)가 이 마을의 유래를 궁금하게 만든다. ‘부천(富泉)’. 물이 넉넉하니 농사가 잘 되었을 게고, 주민들의 삶도 풍요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마실 나온 동네 주민은 내()가 없어 샘()을 썼다는 뜬구름 잡는 얘기로 갈음해버린다. 마을의 유래라도 건져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소규모 주택단지도 눈길을 끈다. 하나의 대지에 세 가구가 들어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양새이다.

 고원길은 이제 들길을 탄다. 굽이마다 마을과 자연이 반겨주는 길이다.

 이때 보령고개로 올라가는 골짜기가 눈에 들어온다. 모래재를 넘어 전주로 가던 26번 국도가 지금은 4차선으로 변해 저 고개를 넘는다. 1997 1월 전주와 무주에서 열린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개통됐다.

 13 : 20. 부천마을에서 출발한 들길은 10분쯤 지나 2차선의 부귀로를 만난 다음 원봉암(元鳳岩)’ 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봉암리(鳳岩里) 4개 행정부락(원봉암·소태정·부천·미곡) 중 하나로 천주교 교우촌(‘공소도 있다)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정표(부귀면사무소 2.7km/ 장승삼거리 13.1km) 신촌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원봉암이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13 : 27. 도로(부귀로)를 따라가다 만난 봉암교’. 이정표(부귀면사무소 2.2km/ 장승삼거리 13.6km)가 다리를 건너지 말란다. 보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피해 정자천의 둑길을 따르란다. 진안고원길은 이렇듯 자연과 함께 하는 길로 인도하는 게 특징이다.

 이후부터는 정자천(程子川)을 따라 내려간다. 운장산 골짜기(부귀면 궁항리)에서 발원하여 거석리와 정천면 월평리를 거쳐 용담호로 흘러드는 길이 20km의 하천으로, ‘정자란 지명은 하천 주변에 정자가 많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하지만 이웃한 주천면과 용담면 지역에 주자천(朱子川)’이 흐르므로 이에 견주어 중국의 현인인 정자(程子)에 맞추어 이름을 고친 듯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정자천은 예로부터 풍광이 아름답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이는 용담댐에 수몰되어버린 하류의 얘기고, 상류는 충적지를 만들면서 생긴 곡선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그 충적지를 지나다 만난 요런 길이라도 볼거리로 꼽으면 몰라도...

 13 : 40. 26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굴에서 바깥쪽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으면 명암 대비가 확실한 작품이 나오기도 하는 곳이다.

 굴다리 근처 부귀교차로에서 잠시 49번 지방도(귀상로)로 올라선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부귀로로 다시 내려선다.

 13 : 44. ‘오산교로 정자천을 건너면 이번에는 사인암 마을이 맞는다. 법정 동리인 거석리(巨石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상거석·신거석·사인암·하거석·금평·금계곡) 중 하나로 사인암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사자 형국이고 큰 바위가 있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그러다 고려 때 사인 벼슬을 하던 사람이 살았었다며 요즘은 사인암(舍人岩)’으로 고쳐 부른단다. 하지만 마을 정자는 아직도 사인암(獅仁岩)이란 지명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새롭게 단장된 신작로를 따라간다. 보도가 따로 나있어 오가는 차량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13 : 50. 배구·족구·풋살 경기가 가능한 다목적구장이란다. 우천 시에도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경기장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 육상 트랙까지 만들어 놓았다.

 다목적구장 옆에는 충혼탑이 있었다. 안내판은 한국전쟁 때 이 지역을 지키다가 숨진 주민자치대 및 의용경찰대원들의 거룩한 혼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9.28 수복으로 퇴로가 막힌 공산당이 운장산 일대로 몰려 무고한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만행을 일삼자, 이들이 목숨 받쳐 이 지역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6구간이 끝나는 신거석 마을로 간다. 거석리의 중심 마을이자, 부귀면 소재지로 면사무소·파출소·우체국·보건지소·농협 등 부귀면의 행정기관이 모두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 이 무슨 생소한 풍경이란 말인가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공중전화가 버젓이, 그것도 대로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썩 편치 않은 풍경도 눈에 띈다. 친일잔재라 할 수 있는 윤치호 시혜 불망비 윤치호 흥학 불망비 시혜불망비는 부귀면에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소작료를 경감해 준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29년 소작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흥학불망비는 부귀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부귀면 초대 면장이 건립했다. 윤치호는 한때 독립협회를 비롯해 만인공동회 등 애국 계몽활동을 지도하고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1915년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특사로 석방돼 변절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안내판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不忘) 할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니 이 빗돌들은 잘못된 역사적 사실의 행적을 밝히고 현재를 살아가는 후대에게 교훈과 경계를 삼기 위한 역사 교육의 생생한 증거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14 : 03. 부귀면사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은 12.22km를 찍는다. 코스의 절반 정도가 500m 안팎의 능선과 임도를 오르내렸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눈에 익은 진안고원길 특유의 조형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7구간(황금폭포 하늘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을 면사무소 앞마당에 세워놓았다.

진안고원길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

 

여행일 : ‘24. 3. 2()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성수면·마령면·부귀면 일원

여행코스 : 오암마을황소마재(인증)장재동추동가래울재신동내동재내동판치재서촌전옥례 묘(인증)외판치서판교장승삼거리(5구간 종점)장승마을메타세쿼이아길(거리/시간 : 12.3km+3km, 실제는 장재동 마을부터 12.47km 3시간 1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오암마을(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임실 방면으로 11km쯤 내려온다. ‘병암교차로(임실군 관촌면 관촌리)’에서 745번 지방도로 옮겨 10km쯤 달리다가 양화3(성수면 좌포리)’에서 좌회전, 중길로를 따라 2km쯤 들어오면 오암마을에 이르게 된다. 5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마을 앞 정자에 문패처럼 세워놓았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고갯마루 넷을 오르내린다. 골짜기마다 자리한 마을과 저수지를 만나고, 멀리 마이산을 시야에 두다 보면 어느새 종점(부귀면 장승삼거리)에 닿는다. 난이도는 보통’. 코스 길이(12.3km)는 짧지만 고개를 네 개나 넘는다는 게 반영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중 하나(황소마재)를 생략하고 장재동마을에서 출발했다. ‘메타세쿼이아 길까지 연장해 걷겠다는 산악회의 결정 때문이다. 집사람의 체력으로는 15km를 걷는다는 게 무리이니 어쩌겠는가.

 10 : 29. 실제 출발지인 장재동마을 어귀. 차도는 장재동마을을 지나 추동마을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넓이가 들쭉날쭉한 도로사정을 감안해 이쯤해서 차를 돌리기로 했다. 자칫 길이 좁아지기라도 하면 장축의 산악회버스를 돌릴 수조차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재동마을로 이어지는 추장길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만덕산 줄기의 골짜기, 남동쪽으로 트인 곳에 장재동과 추동 마을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추장(추동+장재동)’이란 도로명이 이를 증명해준다.

 10 : 32. 잠시 후 도착한 장재동 마을은 천주교 신자촌으로 보면 되겠다. 구한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로 어은동(魚隱洞, 1888년에 공소가 설립된 진안의 유서 깊은 천주교 신자촌)과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하천(추동천)의 최상류, 오지에 위치하고 있어 관군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고, 남쪽으로는 성수면 중길리와 접하고 있어 유사시 피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기 이주자들은 생업으로 옹기를 굽고 살았다 한다.

 삼노운동을 하자는 팻말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부연설명을 보며 실없는 미소로 마무리 짓는다. 버리지도 태우지도 묻지도 말자는 운동의 자 대신 (NO)’자를 넣은 것이다. 하긴 요즘은 글로벌이 대세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을회관 앞에서 고원길(고개너머 마령길)을 만났다. ‘황소마재를 넘어온 고원길이 마을회관 앞(덕천2)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다리(덕천2) 옆 이정표가 반갑다 눈인사를 보내온다. 방향표지판의 노란색과 붉은색은 진안의 특산물인 인삼과 홍삼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노란색은 순방향, 붉은 색은 역방향이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진안고원길을 한 바퀴 돌게 되어 있다.

 10 : 36. 몇 걸음 더 걸으면 천주교 장재동공소. 진안지역의 공소(公所, 본당보다 작아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공동체)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설립됐다. 1883년에 인근의 가래올(추동)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고, 1890년도에는 장재동에도 신자들이 이주해 와 공소가 설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4년 본래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추동마을로 간다. 마을로 들어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따로 나있지만, 고원길은 추동천의 둑길을 따라 간다. 참고로 만덕산(765.5m)’의 북서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은 덕천저수지에 모였다가 추동마을 앞으로 흘러간다. 추동천 또는 덕천천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추동마을 어귀(동남향)에는 엄청나게 굵은 노거수 네 그루가 흡사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방수나 방풍보다는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조성한 비보(裨補林) 숲이 아닐까 싶다. 마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10 : 45. 마을 숲을 지났다싶으면 이내 추동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덕천리(德川里)를 구성하는 10개 자연부락(신덕·대동·신동·대동·신동·장재동·추동·안방리·판치·안골) 중 하나로, 마을 형성시기에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다고 해서 가래울 또는 가래골로 불리다가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추동으로 변했단다. 하나 더. 추동마을도 역시 천주교 신자촌이라고 한다. 진안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1801) 무렵이란다. 고산(완주군) 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데, 추동마을은 1883년경 형성됐다고 한다.

 이정표는 5구간 시점인 오암마을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3.7km로 적고 있다. 반면에 내 앱은 1.15km를 찍는다. 그러니 집사람과 함께 걷는다는 핑계로 2.5km쯤 단축해서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안내판은 이곳이 십승지지(十勝之地)에 버금가는 피난처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진안 사람들 사이에 동비서추(東飛西楸)’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큰 난리가 나면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동쪽의 비사랑마을(백운면)과 함께 이곳 추동마을이 꼽힌다는 것이다.

 마을을 지나 두 번째 고개(첫 번째 고개인 황소마재는 생략했다) 가래울재로 간다. 고개가 높지 않은데다 큰 커브를 그려가며 올라가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올라설 수 있다.

 10 : 59. 컨테이너가 반기는 가래울재(해발 370m)’에 올라선다. 고원길은 움푹 파인 능선의 안부를 꿰뚫듯 지난다. ! 왼쪽 개활지를 향해서도 길이 나있었다. 하지만 벌목과 경제림 조성을 위해 내놓은 임도이니 헷갈리지 말 일이다.

 이정표(장승삼거리 7.7km/ 오암 4.6km)가 이곳이 가래울재임을 알려준다. 진안고원길은 이렇듯 주요 지점마다 이름표가 달린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산길은 인생과 같다고 했다. 그러니 오르막길 다음에는 내리막길이 나타날 수밖에... 하지만 실제의 상황은 인생과는 딴판이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하는 내리막길 삶과는 달리 산길에서의 내리막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진행 방향 저 아래에 신동저수지와 신동마을이 놓여있다. 그 뒤로 보이는 고개가 잠시 후 넘어야 할 내동재이다.

 저수지 위 골짜기에는 엄청나게 넓은 묘목원이 들어서 있었다. 육묘의 수종도 국·공립 수목원에 못지않게 다양했다.

 길가 두어 곳에 쉼터용 정자를 지어놓았다. 묘목원에서 세운 모양인데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도 아낌없이 자리를 내어준다.

 신동저수지. 구글지도는 소류지로 적고 있었다. 경작지에 공급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둑을 쌓았지만 그 규모가 작다는 얘기일 것이다.

 11 : 15. 신동마을에 내려선다. 덕천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옛 이름은 놋점이었다고 한다. 예전 이 마을에서 놋그릇을 만들어 전주 등지로 반출했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놋점터 또는 유기점리로 불리다가 놋점이 없어진 후 1800년경부터 나뭇골이라는 뜻의 신동으로 불린다고 한다.

 신동은 산골마을 치고는 규모가 꽤 컸다. 그래선지 들어선 교회도 선교 수양관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고 신자가 늘어나면서 사라졌단다.

 신동마을의 벽화는 풍물놀이를 담았다. 하지만 깃발은 농자천하지대본 대신 마을의 특산품을 적었다. ‘명품 고사리가 생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마을을 지나 비스듬히 내동재를 넘는다. 작은 고개라서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다. 거기다 숲까지 깊으니 뒷짐이라도 지고 사색하며 걸어보면 어떨까?

 고개너머 마령길은 고개를 하나 넘고, 휘어지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뒤돌아보면 또 다른 풍경이 오롯이 떠오른다. 내가 걸어온 길이다.

 11 : 25. 내동재에 올라섰다. 신동마을과 (내동·판치)마을 주민들이 왕래하던 고개로 마을 간의 왕래와 논밭에 가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하나 더. 내동재에서 북서쪽 능선을 따라가면 부귀면 방각마을로 이어지는 방각이재·깃대봉·장구목재 등을 거쳐 만덕산에 이른다. 남쪽은 덕천리 중심 산지를 이루다가 안방마을 앞 갈모봉(354m)에서 정리된다.

 고갯마루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내동재 이정표(장승삼거리 5.7km/ 오암 6.6km). 앱은 해발 362m를 찍는다. 내동마을의 해발이 310m이었으니 고도를 50m 밖에 올리지 않은 셈이다. 그만큼 수월하게 올라왔다는 얘기다.

 이제 내동마을로 내려갈 차례다. 익산·포항고속도로를 정면에 놓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저 멀리 마이산이 조망된다. 크게 보이는 암마이산 뒤에서 숫마이산이 삐쭉이 고개를 내민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의 모양새라고나 할까?

 11 : 35.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새 내동마을이다. 큰 마을인 판치마을의 안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안골이라 부르다가 한자화 되면서 내동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은 집이 5채가 채 되지 않았다.

 내동마을 이정표(장승삼거리 5.0km/ 오암 7.3km)도 이름표를 달았다.

 고원길은 이제 판치마을로 간다. 아니 판치마을까지는 가지 않고 판치저수지 아래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판치재로 올라간다.

 부지런한 집사람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던 모양이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더니 손놀림이 바빠진다. 그렇게 채취한 봄나물은 다음 날 아침상에 냉이된장국이 되어 올라왔고, 나머지는 친지들에까지 나누어줄 수 있었다.

 11 : 53. 내동과 판치 마을 사이에는 판치저수지가 있다. 덕천리 일대의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제법 큰 저수지(담수량이 24만 톤이나 된다고 했다)이다.

 고원지대에서 저수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러니 강우량의 변화가 농업용수의 확보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간이 기상대가 그 증거라 하겠다.

 11 : 58. 저수지 아래서 만난 삼거리. 직진하면 판치마을이 나온다. 하지만 고원길은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참고로 널티로도 불리는 판치마을은 마을 입구에 동서로 길게 조성된 숲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때 베었다가 생사람이 죽는 등 변고가 많이 생기자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

 12 : 02. 잠시 후 고원길은 익산·포항고속도로 아래(이정표 : 장승삼거리 3.4km/ 오암 8.9km)를 지난다. 높고 긴 교량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구간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판치재의 높이는 357m. 조금 전 지나왔던 판치마을 갈림길의 표고가 288m이었으니 1.2km를 걸어가면서 70m의 고도를 높이는 셈이다.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임도는 차량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했다. 바닥에 바퀴자국이 또렷한 것이 차량통행이 제법 많은 모양이다.

 12 : 14.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는 판치재(또는 널재)에 올라선다. 과거 백운이나 마령 사람들이 전주로 나갈 때 넘던 고개이다. ‘널재라는 지명은 널재마을의 뒷산이 널빤지처럼 판판하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널재  으로도 해석되는데, 이는 넓은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단다.

 느티나무 그늘에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정표(장승삼거리 2.5km/ 오암 9.8km) 아름다운 순례길의 팻말도 눈에 띈다. 그런데 저 달팽이는 뭘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느림의 미학을 음미하며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걸어보라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 태양광발전소의 썩 편치 않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트레킹을 이어간다판치재는 마령면과 부귀면의 경계에 해당한다북쪽 신정리(부귀면방향으로 들어선 고원길은 서촌마을·외판치마을·장승마을을 연이어 들른다.

▼ 12 : 20.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작은 분지에 들어앉은 서촌’ 마을이다소박한 규모만큼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마을로 서학(천주교신자들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마을 어귀에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숲이 조성되어 있으며정월 열나흘 날 저녁에는 거리제도 지낸단다.

 마을 뒤로 올라가면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노거수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서촌마을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게 마을 당산목으로 삼아도 충분하겠다. 맞다. 그늘에 놓여있는 저 의자가 그 증거일 수도 있겠다.

 서촌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살짝 거칠어진다. 왕래하는 사람들이 적은 탓인지 잡초로 무성한데다 질척거리기까지 한다.

 11 : 29. 그렇게 잠시 걸어 전옥례 묘역에 닿았다. 아니 묘역에 들어가기 전, 이정표(장승삼거리 1.6km/ 오암 10.7km)가 먼저 길손을 맞는다.

 전옥례 묘소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 2개 인증지점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우리 부부가 생략한 구간에 있는 황소마재에 세워져 있다). 자신의 얼굴과 이정표가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전옥례 묘역은 사유지이다. 그래선지 울타리를 둘러놓았다. 하지만 고맙게도 둘레길 나그네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작은 문을 내놓았다. 글을 빌어서나마 묘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후손들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전옥례(全玉禮)’ 할머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장녀라고 한다.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 부모를 잃은 그녀는 천애고아로 유랑하다 마이산 금당사에 들어가 김옥련으로 이름을 바꾸고 공양주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23세에 이찬영씨와 결혼해 52녀를 두었다. 우여곡절 끝에 진안군 부귀면 희망목장으로 왔을 때 전봉준장군의 딸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숨어살던 때라 숨기고 지냈지만, 어느 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야기가 실린 것을 보고 이제는 자신이 전봉준의 딸인 것을 알려도 되겠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출생내력을 밝혔단다.

 묘역에는 묘비 말고도 전옥례 할머니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1970년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란다. 이후 정읍동학농민혁명사 등 각종 서적과 논문에 이런 사실이 실리면서 세상에 전해졌다.

 묘역에서 내려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거기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자칫 엉덩방아라도 찧을 수 있으니 조심해서 내려갈 일이다.

 12 : 34. ‘서촌재길로 내려선다. 서촌마을로 이어지는 진입로 겸 농로로, 고원길은 이 길을 따라 서판마을로 간다.

 12 : 38. 서판마을(이정표 : 장승삼거리 1.1km/ 오암 11.2km). 법정 동리인 신정리(新亭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가정·신리·서판·승각) 중 하나이다. 신정천변 들판의 자연부락 판치이기도 하다.

 12 : 49. ‘서판교로 세동천(신정리 앞을 흐를 때는 신정천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2차선 도로인 모래재로’. 고원길은 200m쯤 이 도로를 따른다.

 12 : 52. 세동천의 둑길로 내려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세동천이 휘돌아가면서 만들어놓은 자그만 들녘을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렇듯 진안고원길은 기계음으로 찌든 속세의 길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연결시킨다.

 4분쯤 걸어 만난 작은 개울. 앞이 막힌 고원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장승삼거리가 얼굴을 내민다. 5구간(고개너머 마령길)이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12 : 58. 장승삼거리에 이른다. ‘진안고원길 5구간의 종점이자 한국고갯길 TOUR in 진안’ 23일 코스(78일 종주팀, 34일 하프팀도 있다)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한국고갯길(KHT : Korea Hills Trail)은 한국형 하이킹·백패킹 문화를 통해 지역을 살리는 공정여행 시스템으로 국내의 다양한 트레일(trail)을 걷는 투어(TOUR)를 이어오고 있다. 먹고 싶은 곳에서 먹고, 구경하고 싶은 곳을 구경하면서 나만의 걷기 여행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나?

 장승삼거리는 버스정류장을 겸한다. 작은 슈퍼마켓도 하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한적한 풍경을 보여준다. 6구간(전주가는 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은 버스정류장 앞에 세워져 있다.

 2차선 도로인 모래재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을 이어간다. 6구간(전주가는 길)을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산악회의 결정이지만). 거리가 먼데다 높은 산까지 올라야하는 다음 구간의 힘든 여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한 결단이다.

 13 : 04. ‘장승2를 건너자 세동천의 둑길로 내려선다. 최근에 정비를 끝냈는지 둑 위로 난 시멘트포장길 양 가장자리에 야자매트까지 깔아놓았다.

 오른편에 세동천을 끼고 걷는 모양새이다. 부귀면 세동리에서 발원한 세동천은 신정리를 거쳐 연장리(하평마을)에서 정곡천과 합친 다음 강정리(월운마을)에서 제룡강(섬진강 상류)에 합류되는 섬진강의 지류이다. 상류인 세동천에 이어 신정천, 연장천 등 지나는 지역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기도 한다.

 둑길을 걷다보면 물길이 깎아 만든 바위절벽도 만난다.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기묘하지도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13 : 11. ‘장승마을 앞에서 또 다시 모래재로를 만났다.

 모래재로를 따라가면 코스를 꽤 단축할 수 있다. 메타세쿼이아길 입구에서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실제 그렇게 걷는 이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고원길은 신정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장승마을로 들어선다. 해발 300m를 훌쩍 넘기는 산간지방을 고원길은 혼자 즐기며 걷기에는 산이 깊거나 한적하다. 그래도 잃어가는 우리 농촌의 삶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추억에 남을 길이다. 하지만 길 따라 걷기만 한다면 진안고원 마실길의 제맛을 모른다. 뜨문뜨문 마을이 나타나면 둘러보고, 말 한마디 건네고 또 한마디 답해야 마실길의 맛이다.

 마을 담벼락은 예쁜 벽화 대신 속 깊은 글귀를 담았다. ‘나눌 수 있는 봄 향기. 당신이 있어 나는 늘봄이다’. 문득 영춘(永春)’이란 예쁜 이름을 지어주신 할아버지의 당부가 떠오른다. 네 이름이 늘봄이니. 봄 향기 사위에 퍼져나가 듯. 아름다운 마음을 세상과 공유하라는...

 13 : 14. ‘곰티로를 따라 방각마을(같은 신정리)쪽으로 가다보면 장승초등학교가 나온다. 1946년에 문을 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이다. 1954년 장승국민학교로 승격했고, 1982년에는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2010년 학생 수가 13명으로 줄어들면서 폐교위기에 몰렸으나, 인근 지역(전주)에서 학생을 유치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으로 2021년 학생이 57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사회가 살아난 대표 사례로 꼽힌다나?

 교정에는 장승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이 아니 장승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하나 더. 고원길은 초등학교 교정을 통과한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으로 지나가도록 하자. 특히 평일에는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정숙보행이 요구된다.

 고사리손으로 가꾸어가는 텃밭. 학교는 전주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했다. 인구 65만의 대도시에서 살아온 어린이들로서는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맞다.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자연과 벗하며 자라는 아이들에게서 길러지는 감성,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서로를 살리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 필요한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초등학교를 지난 고원길은 개울로 몸을 움츠린 세동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13 : 21. 그러다 우정천과의 합수지점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정천을 거슬러 오른다. 개울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찾아서이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250m쯤 에돌아갈 수밖에 없다.

 12 : 26. ‘U’자 형으로 커브를 돌아온 길은 세동천과 다시 만난다. 하지만 다리(우정교)를 건너지 않고 세동천의 왼쪽 둑길을 따라 간다.

 우정교에는 우정마을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법정 동리인 세동리(細洞里) 6개 행정마을(신덕·적천·큰터골·원세동·우정·부암) 중 하나로 풍수상 소가 물을 마시는 지형이라고 해서 우정(牛井)’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피난처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던 오지마을이다.

 세동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오른쪽 산자락에 원세동마을이 들어앉았다. 보건진료소까지 들어서있는 규모가 제법 큰 마을이다.

 13 : 35. 그렇게 잠시 걷다보면 부귀면의 자랑이자 진안군 명물 중 하나인 메타세쿼이아길을 만나게 된다.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길게 뻗어나가는 풍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참고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세동리(부귀면) 원세동마을에서 큰터골마을까지 1.5km구간에 곧게 뻗은 긴 다리를 외투 자락으로 살짝 가린 팔등신 미인들처럼 나란히 도열해 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유명하기로는 담양이 으뜸이다. 모래재 가로수 길은 나무의 굵기나 가로수 구간의 길이가 짧아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쭉 뻗은 길이 살짝 여유 있게 돌아가는 등 비교를 거부할 만큼 묘한 매력을 자랑한다.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13 : 42. 트레킹은 메타세쿼이아길 주차장에서 끝난다(사진은 5구간 출발지점의 조형물을 담았다). 이랑마을 입구에서 100m 남짓 더 나아간 지점이다. 오늘은 3시간 15분을 걸었다. 앱은 12.47km를 찍는다. 고만고만한 고개를 3개나 넘은데다, 걷는 도중 냉이까지 채취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진안고원길 4구간(섬진강 물길)

 

여행일 : ‘24. 2. 17()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성수면 일원

여행코스 : 성수면사무소반용재반용마을포동마을성수체련공원양화마을오암마을(거리/시간 : 12.8km, 실제는 12.98km 3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성수면사무소(진안군 성수면 외궁리)

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 IC에서 내려와 17번 국도를 타고 임실 방면으로 11km쯤 내려오다 병암삼거리(관촌면 덕천리)’에서 49번 지방도로 옮겨 8km쯤 들어오면 성수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4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뜨락에 세워져 있다.

 이름(섬진강 물길)처럼 섬진강의 물길을 눈요깃거리 삼아 걷는 12.4km짜리 구간. 초반의 반용재와 중반의 가장골을 빼면 섬진강 본류와 지류(달길천)를 따라 걷게 된다. 난이도는 보통’. 코스의 길이가 짧지만 반용재의 가파른 오르막 구간을 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0 : 23. 남서쪽 방향의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관촌으로 이어지는 49번 지방도(관진로)이다.

 10 : 24. 80m쯤 걷다 성수파출소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농로를 겸한 임도를 따라 반용재골로 들어간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 섬진강변의 용포리 주민들이 성수면소재지인 외궁리로 갈 때 넘나들던 고갯마루이다. 그렇다고 왕래가 잦던 길은 아니었다고 한다. 용포리가 성수면보다 강 건너 임실군 관촌면에 속한 생활권이었기 때문이다.

 반용재로 올라가는 길. 용포리(반용·포동·산막) 주민들이 이용하던 숲길은 신작로가 뚫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다 고원길을 내면서 골짜기를 에돌아 올라가는 숲길을 조성했다. 가파른 구간에는 통나무계단도 깔았다. 그런데 이게 길고 가팔라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덕분에 나그네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간다.

 그런 오르막이 10분이면 끝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다음부터는 평탄한 숲길이 이어진다.

 10 : 36. 트레킹을 시작한지 14. 군도 1호선(가외반로)으로 올라선다. 핸드폰의 앱이 해발 335m를 찍고 있으니 10분여 동안 고도(高度) 75m나 높인 셈이다. 참고로 이 도로(郡道)는 반용마을과 포동마을을 거쳐 745번 지방도(관마로)로 연결된다.

 이정표(오암 12.0km/ 성수면사무소 0.8km)는 이곳이 인증 지점임을 알려준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과 이정표가 겹치게 사진을 찍어두도록 하자.

 이후 고원길은 도로를 따라 반용재(해발 348m)’를 넘는다. 성수면 외궁리(안평마을)와 용포리(반용마을)를 잇는 거리 1.2km, 높이 348m의 고개이다. 남북으로 흐르는 능선을 동서로 가르는데, 북쪽에는 성수면의 이름 유래가 된 성수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병풍바위를 지나 방미산에 이른다.

 반용재의 왼편(서쪽) 바로 아래로는 섬진강이 흐른다.

 세월은 결혼 상대마저도 변화시키는가 보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라때 시절. 배우자감은 이웃마을 처자 말고는 없었다. 그게 글로벌 시대를 맞아 동남아 여성으로 폭을 넓혔는가 싶었는데, 언제부턴가 북한여성으로 바뀌어 있다.

 이 구간도 역시 산자락이 온통 복분자 넝쿨로 가득 차 있었다. 오뉴월에 찾아와야 제격이겠다는 얘기다.

 10 : 43. 요것조것 기웃거리며 600m쯤 걷다보면 이정표가 이제 그만 오솔길로 들어가란다. ‘진안고원 길의 참맛을 다시 느껴보라는 모양이다.

 고원길 이정표는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 구간 정보(오압 11.4km/ 성수면사무소 1.4km)를 기본에 깔고, 근처 주요 포인트에 대한 정보(포동마을 2.5km/ 원외궁마을 2.3km)를 보탰다. ‘야생동물 주의 안내는 팁이다.

▼ 탐방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가장자리 잡목을 깔끔이 제거해 임도처럼 널찍하게 만들어 놓았다거기다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내리막길이다.

 산자락을 빠져나오니 잘 지어진 고택 한 채가 얼굴을 내민다. 뜨락도 정성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했다. 이곳 반용마을은 성수산을 병풍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섬진강까지 앞마당에 두었다. 그러니 돈 많은 이들이 찾아들 만도 하겠다.

 10 : 51. 몇 걸음 더 걸어 도로(가외반로)로 올라선다. 고원길의 뭉툭한 방향표지판은 오른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십중팔구(十中八九)는 왼쪽으로 가고 있었다. 30m만 가면 반용교(고원길이 지난다)’가 나오는데 굳이 600m나 에돌아갈 필요가 없다면서.

 10 : 53. 도로를 따라 150m쯤 올라가다 마을표지석 앞에서 반용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용포리(龍浦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반용·포동·송촌) 중 하나로 진안군과 임실군 사이의 협곡에 기다란 형태로 놓여있다. 성수산을 베개 삼고, 섬돌 아래 섬진강을 둔 지형이다.

 탐방로는 마을을 관통한다. 예쁜 돌담길을 낀 고샅길이 가슴까지 설레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너무 호들갑떨지는 말자. ‘둘레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지역 주민이 낯선 나그네에게 그런 길을 열어주었고, 우린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생활리듬을 깨뜨리는 소음까지 발생시켜서야 되겠는가.

 소박한 골목길은 강변으로 이어진다. 강변으로 나오니 구중심처(九重深處)에서나 볼 법한 예쁜 고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아까 봤던 한옥이 양반집이었다면 소슬지붕까지 얹은 이건 사대부 가문에서나 지을 법한 형식이다.

 강변의 정자(盤龍亭)’. 주위를 야외박물관으로 꾸몄다고 한다. 빗돌까지 세워가며 자랑하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설마 요 장승이 전부는 아니겠지? 아무튼 반용마을은 귀농귀촌 우수마을이라고 했다. 배산임수의 수려한 경관에다 마을을 가꾸려는 노력들이 더해져 그런 결과가 만들어졌지 않나 싶다. 원주민과 이주민의 화합이 높아 정월 대보름날에는 달집태우기 행사까지 성대하게 열린다고 했다.

 강변의 느티나무 거목 두 그루가 옛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옛날 저곳에는 사람만 건너다니던 낮은 다리(잠수교)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저 느티나무는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을 게고. 하지만 2000년 새 다리가 놓이면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작은 쉼터를 조성했다. 한때 나룻배(1970년대 잠수교가 놓이기 전까지는 나룻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까지 놓아두었으나 그것마저도 지금은 옛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11 : 00. 마을을 빠져나와 반용교로 섬진강을 건넌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마을을 에둘러오느라 10분이나 걸렸다.

 다리를 건너다 바라본 상류 쪽 풍경. 섬진강을 품은 반용마을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임을 알려준다. 아름다운 풍광만큼이나 주민들 간의 정 또한 돈독한 살기 좋은 마을이란다.

 반용교 아래에는 보()가 설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반용마을 앞 강물은 일정한 수량을 유지한다. 하나 더. 저 보를 지난 섬진강 물길은 90도로 방향을 튼다. 앙칼진 산릉이 섬진강을 남쪽에서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다리 건너. 안내판은 반용(盤龍)’이란 지명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풍수상 마을이 초중반사(草中盤蛇)의 낙원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초중반사란 야초·인삼·약초가 우거진 속에 뱀이 소반처럼 사리고 있는 형국을 이른다나? 초중반사의 명당에 뱀이 사리고 있으면 반룡(蟠龍)’이 된다. 이게 언제부턴가 반룡(盤龍)으로 변했나보다. ! 그 옆에는 섬진강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 두었다.

 11 : 05. ‘명산휴게실을 지나자마자 지방도를 벗어나 강변 둑길로 내려선다.

 고원길은 이제 섬진강 둑길을 따라간다. 강 건너에서는 감입곡류의 물줄기가 만들어놓은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나그네와 함께 간다. ‘섬진강 물길이라는 이름값을 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데미샘을 출발한 물줄기는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과 만나 수량을 늘린다. 백운면을 적시며 흐르던 강물은 마령면과 성수면을 지날 때까지 섬진강 최상류를 이룬다. 그러다 진안군 남부지역 산골오지를 지나 임실 땅으로 흘러가면서 어느 정도 강의 면모를 갖춘다.

 ! 봄이닷! 봄이 유독 늦게 찾아온다는 진안 땅이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서는 구경조차 못해본 푸른 초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하긴 요 며칠, 언론은 남녘의 꽃소식을 연일 전해주고 있었다.

 포동마을로 가는 강변길 안쪽에는 경작을 기다리는 논이 자리한다. 그 속에 임마누엘 냉천수양관이 있다. 노인복지센터와 요양원까지 갖춘 큼지막한 시설이지만, 수양관 근처로 도로가 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부지를 사는가 하면, 선교비 마련을 위해 하느님이 장사를 시켰다는 등 받아들이기가 썩 편지 않는 종교시설이다.

 강 건너 비탈진 산자락에도 민가가 들어섰다. 맞다. 사람들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아왔다. 그게 한집 또 한집 늘어나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그렇게 조상대대로 살아왔다. 그러니 강가 사람들에게 섬진강은 어머니 같은 존재다. 강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고,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거나 물놀이를 즐겼다.

 11 : 24. 그렇게 걷다보면 포동2에 이른다. 메인 도로나 마을을 잇는 우리가 익히 아는 교량이라기보다는, 강 건너 산자락에 만들어놓은 다랑이 논·밭에 일하러 다닐 때나 이용하는 것 같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가파른 절벽과 평평한 농경지가 대조를 이룬다. 강변 둑길은 계속해서 그 사이를 가른다. 그리고는 큰 원을 그리면서 포동교로 간다. 참고로 포동교는 성수면 용포리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흘러내려온 회초천이 섬진강에 합류되는 두물머리에 있다. 회초천을 보탠 섬진강은 포동교 아래서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임실군 관촌면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고원길 이정표(오암 8.3km/ 성수면사무소 4.5km)은 이제 그만 섬진강과 헤어지란다. 그러면서 포동마을로 인도한다. 동북쪽 좌포리에서 흘러온 섬진강은 반룡마을 앞에서 동쪽으로 휘감아 돌면서 꽤 넓은 충적지 들판을 만들어냈다. 포동마을은 그 들판의 안쪽 가장자리에 있다.

 11 : 27. 250m쯤 더 걸어 군도(1호선, 용포로)로 올라선다. 이어서 포동마을을 향해 왼쪽으로 간다. 참고로 이 길은 745번 지방도를 만난 다음 관촌면(임실군)으로 간다. 관촌(館村)’은 삼례·전주를 지나온 통영대로 옛길이 통과하는 길목으로 출장관원 등이 묵을 수 있는 관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1 : 29. 잠시 후 도착한 포동마을(이정표 : 오암 7.7km/ 성수면사무소 5.1km)’. 용포리(龍浦里)에 속한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큰 물가에 위치한 탓에 예전에는 나룻배로 건너다녀야만 했던 오지이다. 그래서 나루터라는 뜻을 가진 포동(浦洞)’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안내판은 그런 사연을 적었다. 면소재지와 멀리 떨어진데다 강과 산으로 가로막혀 교통이 매우 불편했단다. 반면에 강변으로 이어진 임실군 관촌면은 다니기가 수월했다나? 그래서 주민들은 학교도 관촌으로 갔고, 시장을 보기위해서도 관촌으로 갔다.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관촌이 생활권인 셈이다.

 마을회관 앞 광장. 포동마을은 그 역사만큼이나 큼지막했다. 맞다. 포동마을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 근처 유물산포지에서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발굴된바 있다.

 정자는 풍류정(風遊亭)’이란 현판을 달았다. 바람 솔솔 불어오는 섬진강변에서 풍치 있고 멋스럽게 놀아보라는 모양이다. 아무튼 난 이곳에서 15분을 머물다 갔다. 산악회 회장님의 실수로 버스에서 잘못 내려, 아직까지도 길을 헤매고 있는 집사람을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마을에는 카페와 식당까지 들어서 있었다. 샤워장까지 갖춘 물놀이장도 보인다. 맞다. 이 마을은 녹색농촌체험마을이라고 했다. ‘바람도 쉬어간다는 수식어까지 달았다. 그러니 저 정도의 부대시설쯤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 주민의 시가 적힌 카페 외벽이 눈길을 끈다. <바람 따라 돌고 돌아 한참을 돌다가/ 바람도 쉬어가는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봄이면 강에는 물안개 피고... -이하 생략-> 읽는 것만으로도 마을 풍경이 그려지는 멋진 표현력이다.

 고원길은 고샅길을 누비다가 마을 뒤편으로 빠져나간다. 아까 반용마을에서도 얘기했듯이 주민들의 생활리듬을 깨뜨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이 뭣꼬? ‘기러기 조형물을 문설주에 매달아놓았다. 기러기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한 새다. 짝짓기를 한 암수는 한쪽이 죽어도 다른 기러기와 짝짓기를 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전통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 인형을 주는 풍습이 있다. 이로보아 기러기가 쌍으로 걸린 저 집은 부부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외기러기가 걸린 옆집에서는 홀아비나 홀어미가 살고 있을 것이고...

 11 : 51. 마을 뒤. 포장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임도로 올라가려는데,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던 주민이 오른쪽으로 나있는 샛길(비닐하우스를 오른편에 끼고 도는 모양새이다)로 가라고 알려주신다. 길이 나뉘는 지점이지만 방향표지판이 없기에 응당 직진이겠거니 했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11 : 52. 몇 걸음 더 걸어 농로(용포로)로 내려선다. 이어서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넘는다.

 길가 사과나무는 가지치기를 이미 끝냈다. 맞다. 이틀 후면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雨水).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나무는 꽃망울을 활짝 터뜨릴 것이다.

 11 : 59. 잠시 후 만난 삼거리(이정표 : 오암 7.1km/ 성수면사무소 5.7km). 성벽이라도 되는 양 곤포사일리지가 앞을 턱 가로막는다. 그리고는 방향을 틀어 왼쪽으로 가란다.

 12 : 03. 이후부터는 임도를 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기장골에 있는 또 다른 삼거리를 만난다. 이때 진안고원 길의 참모습이 느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둥글고 한가로운 길, 그래서 고원길에서는 경쟁이나 도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길을 걸으며 만나는 풍경을 오롯이 즐기기만 하면 된다.

 기장골 이정표(오암 6.6km/ 성수면사무소 6.2km)는 이곳이 두 번째 인증지점임을 알려준다.

 임도는 기장골 고갯마루를 향해 오름짓을 한다. 이때 잘 생긴 노송 한 그루가 힘내라며 격려의 손짓을 보내온다.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를 외치며...

 고개 너머. 고원길 이정표가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집사람은 지름길이라며 오른쪽으로 간다. 다른 둘레길 도반들도 오른쪽으로 갔다면서 말이다. 고랭지채소밭의 밭두렁 끝에서 두 길이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밭두렁 끝에서 길이 사라지면서 숲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가시나무 넝쿨이 우거진 원시림을 헤쳐 나가며 찔리고 할퀴는 것으로도 모자라 따귀까지 맞아가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규 탐방로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고원길은 이제 침목계단이 깔린 숲길을 따라 또 다른 임도로 간다.

 12 : 13. 임도를 따라 이번에는 이차선 도로인 용포로를 만나러 간다.

 12 : 20. ‘용포로(이정표 : 오암 5.6km/ 성수면사무소 7.2km)’로 내려선 다음 도로를 따라 북진한다. 이 길은 양산교차로에서 745번 지방도(관마로)와 만난다. 참고로 용포로 745번 지방도 포동교차로(성수면 용포리)에서 시작해 포동마을과 반용마을(강 건너)을 거친 다음 양산교차로(성수면 좌포리)에서 745번 지방도와 다시 만나는 2차선 도로이다.

 건너편에는 성수산(492.5m)이 있다. 그리고 성수산과 용포로 사이로 섬진강이 흐른다. 다시 만난 섬진강은 아까 지나온 반용마을과 포동마을 방향으로 흘러간다. 섬진강이 포동마을 뒷산을 가운데 두고 180도 휘돌아가는 모양새이다. 고원길로 풀어보면,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포동마을에서 고개를 넘어 (반용교에서 800m쯤 떨어진) 섬진강의 상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섬진강변 아랫삼막들에서는 물놀이가 가능하다고 했다. 깊지 않은 곳에서는 물고기와 다슬기도 잡을 수 있단다. 매운탕에 소주를 곁들인 다음 날. 다슬기 해장국으로 속을 풀 수 있다니 이 아니 좋을 손가.

 왼쪽 산자락에는 마이산 풍혈냉천 캠핑장이 들어서 있었다. 데크 사이트로 조성된 오토캠핑장 36면과 글램핑 시설 5동이 들어서있는데, 공간이 넓은데다 소나무 사이마다 사이트가 배치되어 있어 그늘에서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단다.

 12 : 29. 벚나무 가로수의 호위를 받으며 걷다보면 어느덧 널따란 둔치에 이른다. 섬진강 물줄기가 휘돌면서 만들어놓은 충적지인데, 연습구장 2면과 덕 아웃, 백넷, 내외야 그물망과 펜스 등을 갖춘 전용야구장을 조성해놓았다. 지금 그곳에서는 젊은 동호인들이 훈련에 한창이다. 덕분에 우린 산골의 적막을 깨뜨리는 그들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12 : 32. ‘산막교로 섬진강을 건넌다. 초입의 이정표(오암 4.8km/ 성수면사무소 8.0km)가 양화마을까지 2.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다리 아래로는 섬진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강의 최상류라 수량이 많지 않고 강폭도 넓지 않다. 이곳을 지난 섬진강은 수많은 산과 들, 그리고 마을을 돌고 돌면서 남해로 흘러간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이곳 진안을 시작으로 임실과 순창을 지나 전라남도 곡성과 구례 땅을 거친 다음, 경상남도 하동과 전라남도 광양을 가르면서 흐르다가 광양만에 닿는다.

 상류 쪽 풍경. 강 오른쪽 둔치로 탐방로가 나있다. 길가에는 둔치 특유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었다. 지대가 낮으니 태풍이나 집중호우 때는 차량을 옮기라고 적었다. 물이 깊은데다 유속의 변동까지 심하니 물놀이도 삼가주란다.

 강 건너 산비탈은 기암절벽을 이뤘다. 산태극수태극을 이루며 흐르던 물줄기가 산줄기를 휘돌아나가면서 깎아 만든 절경이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감입곡류의 섬진강은 곳곳에 크고 작은 충적지 들판을 만들어놓았다. 그중 하나에 성수체련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1만평쯤 되는 부지에 잔디운동장과 족구·배구·농구·인라인스케이트장 등 야외시설과 샤워실·취수대·스트레칭 장소 등 부대시설을 갖추었다. 매년 개최되는 면민의 날을 비롯한 각종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는데, 작년에는 진안홍삼배 유소년축구대회로 열기가 달아오르기도 했단다.

 12 : 43. 체련공원의 끝(이정표 : 오암마을 4.1km/ 성수면사무소 8.7km). 고원길은 야외화장실 뒤로 간다. 그리고는 745번 지방도(관마로) ‘양산교의 교각 아래를 지난다. 참고로 관마로는 양산교 건너에서 관촌면을 향해 터널로 들어간다. 터널이 뚫리기 전 양화마을 사람들이 관촌에 가기위해서는 말궁구리재라는 고개를 넘어야만 했단다. 말이 고개를 넘다가 구르는 일이 하도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나? 이 지역이 그만큼 오지였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둔치를 따른다. 745번 지방도의 왼쪽 아래로 길이 나있다. 그런 인연으로 집중호우 때는 지방도가 고원길이 되어준다.

 12 : 52. 지방도의 교각 아래를 다시 한 번 지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잠수교(이정표 : 오암 3.2km/ 성수면사무소 9.6km)가 놓여있다.

 잠수교는 장마철마다 물속에 잠겨버리는 반쪽짜리 다리다. 하지만 이게 풍경화로 변하면 온전한 다리보다도 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거기에 철 지난 갈대라도 강물과 어울릴라치면 그 경관을 훨씬 더 고와진다.

 사람들은 이 일대의 물줄기를 오원천(五院川)’이라 부른다. 섬진강 상류인 제룡강이 서천·신정천과 합류하여 성수면 좌포리와 용포리를 지나는 구간을 일컫는다. 섬진강은 이렇게 구간에 따라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오원이란 지명은 관촌면 철도역 근처에 있던 조선시대의 교통로를 관할하던 오원역(五院驛)에서 비롯됐다. 삼례도찰방(三禮道察訪)이 관할하던 호남평야의 12개 역들 가운데 하나이다.

 다리 건너에서 만난 또 다른 이정표(양화마을 350m/ 풍혈냉천 600m/ 포동마을 4.8km)가 짬을 좀 내면 진안의 또 다른 볼거리인 풍혈냉천을 볼 수 있다며 유혹한다. 하지만 다녀오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앞서 걷던 도반이 풍혈의 문이 닫혀있더라는 상황을 전화로 알려왔기 때문이다.

 들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그분이 보내준 사진으로 달래본다. 양화마을의 풍천도 밀양 얼음골처럼 냉장고 같은 찬바람이 솔솔 나온다고 했다. 풍혈(風穴)은 바깥 공기가 틈새 많은 돌 틈 사이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순간 단열 팽창하면서 급격히 열기를 빼앗겨 찬바람이 나오는 현상이다. 도반은 찬바람이 나오는 동굴이 사유지라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문을 닫아버린 것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닐까 싶다.

 섭씨 3의 석간수가 솟아나는 냉천(冷泉)은 구경할 수 있었다나?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피서를 겸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12 : 56. 고원길은 745번 지방도를 횡단해 양화마을로 들어간다. 법정동리인 좌포리(佐浦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원좌·봉좌·내좌·산수동·양화·증자) 중 하나로, 섬진강을 뜨락에 두고 달길천을 늘상 옆구리에 끼고 살아가는 강촌마을이다. 강변 사람들은 섬진강과 함께 살아간다.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섬진강을 바라보며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달랜다. 강변 느티나무 아래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삶의 여유를 누리기도 한다.

 달길천의 둑길에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보림(裨補林)이 분명해 보인다. 풍수지리상 길지 또는 명당의 조건에 부족할 경우 숲과 나무를 심어 좋은 마을을 만들고자 했던 조상들의 유산이다.

 수령이 21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 보호수’. 매년 정월 초사흘에 당산제까지 지내주는 고목이다. 그래선지 나이만큼이나 품도 넓어 보인다. 그늘에 정자는 물론이고 마을회관까지 품었다.

 안내판은 예로부터 볕이 잘 들어 눈이 잘 녹는다고 해서 양화(陽化)’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마을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마을의 자랑거리인 풍혈냉천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준다.

 양화마을(이정표 : 오암 2.7km/ 성수면사무소 10.1km)부터는 둑길을 따라 달길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섬진강 본류를 벗어나 지류로 들어선 셈이다. 참고로 달길천은 성수면 중길리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흐르다가 양화마을 앞에서 섬진강에 합류되는 7km 길이의 하천이다.

 아름다운 순례길 이정표는 이 근처에 대산종사의 탄생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대산은 원불교 세 번째 종법사(宗法師, 원불교 교단의 최고 지도자)인 김대거(金大擧, 1914-1998)의 법호이다. 2대인 정산종사에게서 바톤을 받아 교조인 소태산대종사의 법통을 이은 인물인데, 이곳 좌포리에서 태어나 11살 때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출가했다. 하나 더. 대산종사는 내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니 그가 남긴 게송에 반해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

 지류이어선지 강폭이 많이 좁아졌다. 수량도 뚝 줄어들었다. 하지만 강변이 보여주는 풍광은 여전히 고왔다.

 달길천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넓지 않은 농경지가 길게 펼쳐진다. 하천가에 자리한 농경지는 낮은 산들로 감싸여있다. 가는 길에 그런 풍경 속에 들어앉은 중길교(오암 1.5km/ 성수면사무소 11.3km)를 지나기도 한다.

 13 : 36. 4구간의 종점인 오암마을에 도착했다. 두 개의 하천(만덕산 오두재에서 흘러내린 중길천과 이 마재골에서 발원한 물줄기)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자리한 작고 소박한 자연부락이다. 고원길(5구간) 조형물은 마을 앞, 두물머리에 놓인 다리에 세워져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이 12.98km를 찍고 있으니 시간당 4km를 걸은 셈이다. 반용재라는 결코 쉽지 않은 고개를 넘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진안고원길 3구간(내동산 도는 길)

 

여행일 : ‘24. 2. 3()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백운면 및 성수면 일원

여행코스 : 백운면사무소산림환경연구소구신치원구신마을염북마을염북재쉼터점촌마을원외궁마을성수면사무소(거리/시간 : 18.5km, 실제는 산림환경연구소부터 16.18km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백운면사무소(진안군 백운면 동창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진안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를 타고 임실·남원 방면으로 10km쯤 내려오다 백운3교차로에서 1시 방향의 임진로로 들어오면 곧이어 백운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이름(내동산 도는 길)처럼 내동산을 가운데 놓고 반 바퀴쯤 돌아가는 18.5km짜리 구간이다. 덕분에 내동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여러 마을을 지나고, 주민들이 소통했던 고개도 여럿 넘는다. 난이도는 중간’. 하지만 난 12km를 목표로 걷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산림환경연구소부터 걸었다.

 3구간의 출발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 화단에 세워져 있다.

 10 : 25. 실제 출발지인 전북산림환경연구소. 임업에 관한 연구와 기술보급, 우량종묘 생산, (산림박물관·수목원·휴양림)운영관리 등을 위해 설치된 전북특별자치도청 소속기관이다. 특히 지역 적응력이 뛰어난 신품종을 개발하는데, 이곳에서 육종 개발한 왕방울은행나무는 상표등록까지 되어있으며, 무궁화 신품종도 국립종자원에 품종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연구소는 내동산(887.9m)의 허리쯤에 들어앉았다. 덕분에 지대가 높아 시야가 툭 트이는데, 이를 놓치지 않고 청사 앞 잔디밭을 전망대 삼아 조망도까지 설치해 놓았다. 백운면의 들녘너머로 지나가는 금남호남정맥을 사진과 대조해가며 감상해보라는 모양이다.

 1천 미터를 훌쩍 넘기는 고봉들이 파노라마를 이루며 좌우로 펼쳐진다. 가운데서 우뚝 솟아오른 게 선인무수(仙人舞袖)와 장군대좌의 천하명당을 숨기고 있다는 선각산(仙角山·1,142m)이다. 왼쪽은 덕태산(1,113m), 그리고 오른쪽 저 멀리로 보이는 게 팔공산(1,151m)이다.

 이곳은 고원화목원’. 그럴듯한 이름에 이끌려 단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청사 근처에서 한국 전통정원을 만났다. 하지만 손바닥만 한 연못과 정자가 전부인 풍경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겨울철이니 야외 식물원은 더 초라할 게 분명하다. 나머지 구역의 구경을 포기해버린 이유다.

 정원의 뒤. 산림욕장으로 오르는 나무계단 앞에서 진안고원길 이정표(성수면사무소 16km/ 백운면사무소 2.5km)를 만났다.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다보니 2.5km를 단축한 셈이 됐다.

 2017년 문을 연 고원화목원은 식물연구소로 우리나라 식물 종 다양성 확보와 보전을 위한 곳이다. 전문 원() 23개와 아열대식물원, 자연학습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1,150종류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고원지역에서 볼 수 있는 구름국화·한라구절초·구상나무 등 우리나라 특산종도 보호되고 있단다.

 반달곰 가족이 손님을 맞는 아열대식물원은 피라미드형으로 지어졌다. 오전 9 30분부터 오후 5 30분까지 문을 여는데, 동절기(10-2)에는 이보다 30분 늦게 문을 열고, 30분 먼저 문을 닫는다.

 온실 내부엔 260여 종 7,000여 본의 열대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1 365일 언제든 활짝 피운 다채로운 꽃을 만나볼 수 있다.

 겨울에 보는 꽃은 호사(豪奢). 웰빙을 넘어선 힐링이다.

 고원화목원은 내동산(萊東山)의 품에 안겨있는 모양새다. 참고로 내동산은 백마산으로도 불린다. ‘원구신(성수면 구신리)’ 마을의 노적바위가 갈라지면서 백마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백마가 거닐어 백마산이 됐다고 한다. 내동산의 명칭은 선인이 노닐었다고 해서 중국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蓬萊)에서 ()’자를 따왔다고 한다. 고지도인 해동지도 광여도에는 내동산(內東山)으로, ‘여지도서에는 내동산(萊東山)으로 표기 돼 있다고 했다.

 10 : 44. 단지를 빠져나와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선다. 이정표(성수면사무소 15.1km/ 백운면사무소 3.1km) 고원화목원을 통과하는 구간이 900m임을 알려준다. 내 앱은 1km를 찍고 있다. 볼거리가 없다며 투어를 생략했지만 탐방로를 벗어나 두어 곳을 기웃거렸더니 어느새 그만큼의 거리를 걸었던 모양이다.

 10 : 46. ‘상서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덕현리(德峴里)’ 5개 행정부락(원덕·상서·윤기·동산·내봉) 중 하나이다. 그런데 마을 앞 이정표는 상덕현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행정 단위인 상서마을도 2개의 자연부락(상덕현·서촌)으로 나뉘는데, 그중 상덕현 마을이란 얘기일 것이다.

 탐방로는 이제 원덕(또는 원덕현)’ 마을로 간다. 예전 마을 어귀에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고 해서 장승백이로도 불리는 덕현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이때 백운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흘러가는 반송리·동창리·운교리 일대는 300-500m의 넓은 충적지가 발달되어, 다른 곳에 비해 평야지대가 넓은 편이다.

 10 : 49. 원덕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마을 뒤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구신치로 간다. 초입의 이정표가 다음 들르게 될 원구신 마을까지 1.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구신치로 올라가는 길. 버거울 정도는 아니지만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논두렁에는 세 떼를 쫓던 허수아비가 올 가을 찾아올 새로운 풍요를 기다리며 다랑논을 지키고 있었다.

 가슴 아픈 현장도 눈에 띈다. 규모가 제법 큰 축사지만 안은 텅 비어있었다. 가축을 기를 수 없는 뭔가의 이유가 생겼을 것이고, 이를 헤쳐 나가지 못한 농부는 눈물을 머금고 축사의 문을 닫아야만 했을 것이다.

 고원지대의 가장 큰 특징은 겨울 한파가 매섭다는 점이다. 바람도 거셀 게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주택의 외벽을 두껍게 돌로 쌓았다. 저 정도면 그 어떤 추위도 무서울 게 없겠다.

 11 : 02. 낙엽송 숲속에 들어앉은 구신치를 넘는다. 백운면의 덕현리와 성수면의 구신리를 잇는 고개로 덕고개라고도 불린다. 예전 백운면 사람들이 임실장이나 관촌장을 오갈 때 넘나들던 고개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오랜 세월 발길에 닳고 닳은 고갯마루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움푹 파여 있었다.

 고갯마루의 이정표(성수면사무소 13.8km/ 백운면사무소 4.7km)는 이곳이 3구간의 인증 장소임을 알려준다. 참고로 진안고원길은 각 구간마다 두 곳의 인증지점이 있다.

 고개 너머에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침목으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통나무 의자를 배치했다. 구신리 쪽의 시야까지 툭 트이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원구신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한시라도 빨리 따라잡아야하기 때문이다.

 원구신마을로 내려가는 길. 잠시지만 전형적인 산길을 걷는다. 맞다. 진안고원길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을 되살려냈다고 했다.

 길을 걷는 여행자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둘레길은 지역 주민의 생활 터전을 지나기 때문에 농작물을 따거나 논밭에 함부로 들어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주인 있는 임산물 채취도 마찬가지다. 지역 주민에게 농작물이나 임산물은 소중한 재산이자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11 : 07. ‘742번 지방도로 내려선다. 임실군에서 들어와 진안군 성수면과 백운면을 거친 다음 장수군으로 넘어가는 지방도이다.

 도로를 80m쯤 걷다가 마을표지석 앞에서 농로로 접어들어 원구신 마을로 간다. 법정 동리인 구신리(求臣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원구신·염북·장성·시동) 중 하나로 원구신(元求臣)’이란 지명은 구신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11 : 11. 잠시 후 도착한 원구신 마을. ‘구신리라는 지명은 고려 말 이성계가 운봉에서 왜구를 격퇴한 후 개성으로 돌아가다 이곳의 지형을 보고 신하를 구하는 형국이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사진은 마을회관 앞 정자이다. 공동 우물 위에 정자를 올린 게 특이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마을 어귀. 길을 가운데 두고 왼쪽은 동뫼라는 나지막한 동산(저 위까지 올라가본 둘레길 도반은 꼭대기에 묘가 있더라고 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모정(茅亭)이 들어앉았다.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다. 이 일대의 지명을 낳게 한 기념물이 바로 저곳에 있기 때문이다.

 마을 안내판은 모정 옆에 노적바위가 있다고 적었다. 모정보다도 더 커다란 저 바위를 이르지 않나 싶다.

 저 바위가 벼락을 맞아 갈라지면서 백마가 나왔다고 한다. 그 백마가 거닐어 백마산(지금의 내동산)이 됐으며, 백마가 산에서 내려와 마령면의 마령이 됐단다.

 동뫼 아래에는 열부 경주김씨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전태익의 처라는 것 말고는 다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에서 흘러내려온 물길은 제법 너른 들녘을 만들어냈다. 탐방로는 그 물길을 따라 간다. 하나 더. 안내판은 또 원구신 사람은 송장도 무겁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물이 풍부한 마을이란다. 덕분에 농작물의 수확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품질도 뛰어나다나?

 이즈음 집사람을 만났다. 출발지인 원구신마을에서 5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나는 3km쯤 걸어왔다). ‘혼자가 아닌 함께를 추구하는 그녀답게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11 : 23. 탐방로는 구신천(求臣川)’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간다. 그렇게 10분쯤 걷다가 다리(이정표 : 하염북마을 1.6km/ 원구신마을 550m)를 건넌다. 이후부터는 구신천을 왼쪽으로 바꿔 차고 간다. 참고로 구신천은 구신리의 내동산 남쪽에서 시작되어 관촌면 방현리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합류되는 길이 11km의 하천이다. 이게 운수·신기리를 지나면서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지류들을 보태 몸집을 부풀린 다음 좌산리에 이르면 좌산천(佐山川)’으로 이름을 바꾼다.

 11 : 27. ‘구신천(求臣川)’을 경계로 진안군과 임실군이 나뉜다. 때문에 임실군(관촌면)의 산골마을로 들어가는 구암교(이정표 : 하염북마을 950m/ 원구신마을 1.1km)’를 만나기도 한다. 그 너머 산골짜기에는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있다는 구암마을(운수리)’이 들어앉았다.

 구신천은 공존의 현장이라고 하겠다. ()에 물길(魚道)을 따로 만들어 물고기의 이동을 자유롭게 했다. 덕분에 하천에서 서식하는 회유성(回遊性) 어류가 인공구조물로 막힌 공간을 쉽게 오르내린다.

 11 : 35. 또 다시 742번 지방도(성백로)로 올라선다. 이어서 도로를 따라 100m쯤 걷는다. 짧은 거리지만 보행로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을 조심해가며 걸어야 한다. 도로를 횡단할 때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하염북마을 앞을 지나는 이 도로는 옛날 고창에서 장수까지 등짐으로 소금을 나르던 행상 길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이곳 하염북에 주막이 3개나 있었단다.

 11 : 37. ‘하염북마을 앞 삼거리에서 관촌으로 향하는 742번 지방도(성백로)를 버리고, 성수 방면으로 가는 오른쪽 염상로로 옮긴다. 단풍나무와 철쭉을 가로수 삼은 멋진 구간이다. 하지만 이 구간도 역시 보행로가 따로 나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을 피해가며 걸어야 한다.

 인삼 재배단지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진안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인삼이 재배됐다. 기록상으로도 370년쯤 전, 지금의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하나 더. 진안은 인삼과 사과가 주요 소득원이다.

 11 : 46. 이정표(‘하염북마을에서 650m)가 이제 그만 상염북마을로 들어가란다. ‘구신리(求臣里)’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자연부락(행정단위)으로 아까 지나온 하염북과 이곳 상염북을 합쳐 염북(念北)’이라 하는데, 마을 앞에서 수문장을 자처하고 있는 충성스런 느티나무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자나 깨나 임금이 계시는 북쪽만을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마을 앞은 10여 그루의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370년이나 묵었다는 느티나무(진안군 보호수)가 눈길을 끈다. 국난을 맞아 군왕을 생각하여 쓰러졌다가 소생했다는 나무다. 임진왜란이 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자 나무가 스스로 북쪽으로 엎드려 꽃을 피우지 않다가 선조가 환궁하자 스스로 일어나 꽃을 피웠는가 하면, 1910년 경술국치 때도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쓰러졌다가 3년 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후 주민들은 이 나무를 충목(忠木)’이라 불렀고, 그늘에 충목정(忠木亭)’이란 정자를 지어 그 충정을 기려오고 있다고 했다.

 마을 담벼락은 벽화로 채워 넣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암시하는 풍물놀이와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몸짓에서 산골마을의 이상향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농로가 나그네의 발길을 인도한다. ‘염북터널로 이어지는 좁은 골짜기에 손바닥만 한 다랑논들이 오밀조밀 들어앉았다.

 이런 골짜기에서의 둠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조상들은 논·밭의 한가운데나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파고 물을 저장했다. 이 웅덩이가 바로 둠벙이다.

 11 : 57. 농로는 2차선 도로인 염상로와 연결되고 있었다. 하지만 탐방로는 100m쯤 전방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를 따른다. 초입의 이정표(성수면사무소 9.6km/ 백운면사무소 8.9km) 3구간의 절반 조금 넘게 걸었음을 알려준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구신리(백운면) 염북마을과 도통리(성수면) 중평마을을 잇는 6.42km 길이의 임도로 중간에 해발이 543m나 되는 염북재를 넘어야 한다.

 안내판은 차량통행 때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나열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폭이 넓은데다 정비까지 잘 되어있어 안심하고 다녀도 되겠다. 차량통행이 빈번한 탓인지 길도 반질반질하게 나 있었다.

 진안고원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이정표나 리본, 화살표(페인트) 등이 촘촘히 설치되어 있어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저런 안내판은 옥의 티라 하겠다. 진안고원길의 산악구간을 재구성한 풍경이라는데 얼룩이 져서 애초에 그림이 있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임도는 완만한 편이다. 가끔 가파른 구간도 나오지만 대부분은 이처럼 평탄하게 이어진다. 임도 초입에서 염북재까지의 거리는 3km. 반면에 높여야 할 고도는 200m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서둘러 고도를 높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산이 깊으니 야생동물이 많을 것은 당연. 멧돼지를 주의하라는 안내판까지 세워둔 이유일 것이다. 멧돼지를 만났을 때의 대처요령을 적어두는 배려가 돋보인다.

 야생동물 포획 틀도 눈에 띈다. 하나 더. 누군가는 인적이 드문 진안고원길은 사람보다 동물을 더 많이 만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갑자기 풀숲에서 날아오르는 꿩을 보고 놀란 게 전부였다.

 잠시 쉬었다가라는 듯 벤치도 놓아두었다.

 외길이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런데도 시·종점까지의 거리가 적힌 이정표를 곳곳에 세워놓았다. 덕분에 얼마를 왔고, 또 얼마가 남았는지를 감안해가며 걷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 좋았다.

 가끔은 요런 경사로가 나오기도 한다. 아무튼 길은 굽이굽이 잘도 휘돌아간다. 이래서 내동산 도는 길이라는 3구간의 브랜드가 생겨났지 않나 싶다.

 겨울철 트레킹의 가장 큰 단점은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빈 가지만 남은 길가 나무들이 심심찮게 시야를 열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 45.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염북재 쉼터에 이른다. 조망이 툭 터지는 곳에 데크로 대를 쌓고 그 위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조성했다. 참고로 이곳은 임도구간에서 해발이 가장 높은 지점이다. 핸드폰의 앱은 548m를 찍고 있었다.

 이정표(성수면사무소 6.4km/ 백운면사무소 12.1km)가 이곳이 인증 지점임을 알려준다. 3구간의 두 번째 인증지점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니 완주를 인증받기 위해서는 이정표와 본인의 얼굴이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두어야 한다.

 쉼터에서의 조망은 화려했다.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손바닥만 한 농경지. 그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 뒤로는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저래서 이곳 (··)지역을 첩첩산중이라고들 하는 모양이다.

 잠시 후 능선의 한 지점을 넘는다. 생김새로 봐서는 염북재이지 싶다. 하지만 해발은 쉼터보다 약간 낮은 536m를 찍는다.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벌목이 끝난 개활지를 눈에 담아가며 걷는 구간이기도 하다.

 12 : 58. 두 번째로 만난 임도 안내판. 이정표(성수면사무소 5.5km/ 백운면사무소 13.0,km)가 종점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산이 이렇게 깊은데 심마니가 없겠는가. 산자락을 누비고 있는 심마니들을 만났고, 또 그들이 캤다는 더덕과 도라지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초에 문외한 나에게는 더덕이나 도라지 보다 길가에 널리다시피 한 복분자가 더 관심을 끈다. 이곳뿐만 아니라 임도를 걷다보면 곳곳에서 복분자 숲을 만난다. 그러니 진안고원길 3구간은 오뉴월에 찾아야 제격이겠다.

 13 : 27. 첫 삼거리를 만나 오른편으로 간다. 같은 임도(중평-염북)이지만 중평안길이란 고유의 이름까지 갖고 있는 구간이다. 이정표는 이제 3.4km만 더 걸으면 종점인 성수면사무소에 이른다고 알려준다.

 13 : 28. 100m쯤 더 걷다가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든다. 초입에 방향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도보 여행자의 약속을 되뇌어본다. 먼저 길을 허락해주신 마을과 숲속 생명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이렇듯 사유지까지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신 주민들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는가.

 오솔길은 꽤 가파르게 이어진다. 하지만 폭신폭신한 흙길이라서 내려서는데 부담은 없다.

 13 : 34. 잠시 후 도착한 점촌마을(이정표 : 백운면사무소 3.0km). 법정 동리인 외궁리(外弓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원외궁·안평·신고) 중 하나인 신고마을. 이게 또 신리와 고미동, 점촌으로 나뉜다. ‘점촌(店村)’이란 지명은 이 마을에 있었다는 도요지(陶窯址)로부터 유래되었지 않나 싶다. 고려 때 청자를 생산했었고, 120년쯤 전에는 옹기(甕器) 가마가 들어섰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마을을 스치듯 지나 건너편 산자락으로 향한다. 이때 귀여운 소품들로 치장된 민가를 지나기도 한다.

 이후부터는 전형적인 산길을 걷는다.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을 되살려냈다는 진안고원길이다. 하지만 이 구간을 걸으며 묵은 길이란 표현이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게 나만의 오해일까? ‘진안고원길이란 브랜드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억지로 땔감이나 약초를 구하러 다니던 산길로 코스를 돌려놓은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높이 326m의 능선을 가로지른 다음에는 가파르게 내려선다. 통나무계단이 끝 간 데 없이 놓여있는 구간이다.

 13 : 53. 신리저수지 제방으로 내려선다.

 13 : 54. 건너편 관진로(이정표 : 성수면사무소 2.1km)로 올라서서, 종계장(種鷄場)으로 여겨지는 시설물을 전면에 두고 걷는다.

 14 : 04. 그렇게 10분쯤 걷다가 만난 삼거리(이정표 : 성수면사무소 1.6km)에서는 오른편으로 간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원외궁마을이 놓여있다. 고개를 넘어가면 한 마을이 나오고, 또 산자락 모퉁이를 돌아서면 다른 한 마을이 나오는 게 진안고원길의 특징이다. 추억 속의 내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14 : 12. ‘원외궁(元外弓) 마을에 이른다. 외궁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외궁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이 활등성이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렇게 생긴 이름이 활목’, 마을의 위치가 그 활목의 바깥쪽이라고 해서 외궁(外弓)’이 되었다. 여기에 으뜸 원()’자를 보탰으니 외궁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동구 밖에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원외궁 마을이 풍수적으로 배의 형국이라서 배가 떠나가지 않도록 마을에 샘을 파지 못하게 했고, 재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수구막이 역할을 해줄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2차선 도로인 가외반로를 따라 안평마을(성수면소재지)’로 간다.

 14 : 21. 외궁초등학교를 오른편에 끼고 직각으로 방향을 튼다. 1934년에 문을 열었다는 학교는 현재 20명의 학생이 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건물은 도회지 학교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날이 갈수록 주민이 줄어들고 있는 농촌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 하겠다.

 종점인 성수면사무소로 가는 길. 중간에 서바이벌 훈련장을 연상시키는 놀이터가 들어서있었고, 화장실도 눈에 띈다. 하지만 문이 잠겨있어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쯤에서 팁 하나. 화장실을 찾아 면사무소 문을 두드렸는데, 당직자로 보이는 여직원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맞다. 현대는 공공 업무도 서비스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14 : 26. 조금 더 걸어 성수면사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6.18Km을 찍고 있다. 절반 이상이 임도나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마주보지 말고 같은 방향을 보자는 집사람. 그런 그녀가 함께 해주었기에 오늘도 행복한 여정이 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집사람을 만나 결혼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진안고원길 2구간(들녘길)

 

여행일 : ‘24. 1. 20()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마령면 및 백운면 일원

여행코스 : 마령면사무소원평지마을계남마을방화마을백마교평장마을영모정신전마을상백마을중백마을백운면사무소(거리/시간 : 14.7km, 실제는 원평지마을부터 12.21km 3시간 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마령면사무소(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진안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를 타고 임실·남원 방면으로 9km쯤 내려오면 마령사거리에 이른다. 좌회전해 200m쯤 들어오면 마령면사무소이다. 2구간(들녘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다.

 진안에서 가장 넓다는 마령 들녘과 그 들녘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들을 지나고, 주민들이 소통했던 고개를 넘는 14.7km짜리 구간이다. 운치 있는 계곡에 자리한 옛 정자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톡톡하다. 난이도는 보통’. 하지만 난 12km를 목표로 걷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원평지 마을에서 걷기 시작했다.

 10 : 28. 실제 출발지인 원평지마을’. 마령면 청사 소재지인 평지리(平地里)를 구성하는 5개 행정 부락(사곡·석교·송내·원평지·평산) 중 하나로 면사무소(평산마을 소재)에서 동남쪽으로 1.6km쯤 떨어진 들녘에 위치한다.

 첫 만남은 의사둔암오기열기적비(義士遯菴吳基烈紀蹟碑)’. 소중한 현충(顯忠) 시설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자신을 희생해가며 나라를 지킨 저런 이들이 아니었다면, 웰빙·힐링을 외쳐가며 전국의 산하를 누비고 있는 우리 또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둔암(遯菴) 오기열(吳基烈) 선생은 진안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한 달 후인 4 6일 전영상·김구영·황해수 등과 함께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독려하는 격문을 작성·게시하였으며, 장날에 다시 시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8·15 해방 후 제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때 북한군에 체포되어 전주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커다란 은행나무 그늘에는 영풍정(迎豊亭)’이란 정자가 들어앉았다. ‘풍년을 맞이한다는 이름대로 발아래로 펼쳐지는 너른 들녘에서 해마다 풍년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10 : 32. 마을 앞 도로변(국도 30호선)에는 효자 오성복(吳成福, 1795~?)의 정려(旌閭)가 있었다. 오성복은 1871(고종 8) 정려를 받았다. 정려는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오성복 지려(孝子 贈 童蒙敎官朝奉大夫吳成福之閭)’라 새겨져 있다. 그의 조상인 오빈(吳玭)의 정려도 눈에 띈다.

 진안군사(鎭安郡史)’ 친상(親喪)에 여묘(廬墓)했기에 마령면 평지리에 7세조 오빈과 함께 정려했다고 적었다. 참고로 오빈(吳玭, 1547~1593)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1590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일하다 고경명(高敬命)의 휘하로 들어가 싸웠고, 1593년 고종후(高從厚)와 함께 의병을 모아 진주성으로 들어가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절간의 일주문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대문도 눈길을 끈다. 어느 대갓집(마을 앞 너른 들녘에 걸맞는)에서 위세삼아 짓지 않았을까 싶다.

 10 : 35. 마을 앞 원평지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운계로를 따라간다. ‘진안고원길은 영풍정에서 농로를 이용해 섬진강변으로 가지만, 정자까지 다시 돌아가는 게 싫어 곧장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이때 마령면의 너른 들녘이 좌우로 펼쳐진다. 이곳 평지리는 평지를 이루는 넓은 분지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름대로 평지리는 농경지가 산지보다 많은 군내 유일한 지역이다. 섬진강 상류 지역으로 강 주변에 높이 300m의 충적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10 : 42. ‘계남교를 건너기 직전. 둑길을 타고 온 진안고원 길을 다시 만났다.

 진안고원 길의 뭉툭한 화살표가 다리를 건너란다. 노란색은 순방향, 분홍색은 역방향을 가리킨다. 하나 더. 이정표는 마령면사무소(2구간 시점)에서 이곳까지를 3km로 적고 있다. 내 핸드폰의 앱은 1km를 찍는다. 그러니 14.7km에서 2km를 단축해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다리 아래로는 섬진강의 본류가 흘러간다. 백운면 신암리 대미셈에서 발원해 백암리에서 백운동천’, 운교리에서 상표천 마치천을 합쳐 몸집을 불린 다음 이곳으로 왔다. 그래선지 상류인데도 강폭이 넓고 수량도 풍부했다.

 천변에는 길이가 140m쯤 되는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마을에서 보이는 마이산의 광대봉이 화산 형국이라 이를 가리기 위해 조성했다는데, 강줄기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도 톡톡히 수행한단다.

 불교는 민간신앙과 불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부분에서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태고종은 특히 더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사천왕상 대신 장승이 대문을 지키고 있는 광명사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었다.

 마을 앞에는 전행권(全幸權)의 처 동래 정씨의 효열비와 김상섭의 처 열녀 김해 김씨의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네들의 행적도 적혀있었지만 읽어보지는 않고 그냥 지나친다.

 10 : 49. 탐방로를 겸한 도로(운계로)는 강변과 헤어져 내동산쪽으로 방향을 튼다. 잠수 후 만나는 정자(‘望雲亭이란 편액을 달고 있었다) 앞에서는 계남마을로 들어간다. 하지만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볼 것을 권한다. 진안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로 알려진 계남정미소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로변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계남정미소는 녹슨 함석지붕에 허름한 벽체가 예전 정미소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쌀 대신 추억을 찧는다며 공동체 박물관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옛날 정미소가 마을의 사랑방 구실을 했듯 이곳이 마을의 기억을 보존하고 나누는 공간이 되기를 원해서라나? 이름 그대로 농촌마을에서 대부분 사라져가는 오래된 정미소를 새롭게 복원해 문화체험과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마을 주민들의 묵은 앨범에서 꺼낸 빛바랜 사진과 집안 깊숙이 처박혀 있던 오래된 물건들을 모아 전시해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계남정미소는 전주에 사는 사진작가 김지연씨의 개인 소유라고 한다. 2005년 다 쓰러져가는 작은 정미소를 사들여 수리한 다음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김씨는 구식 이발관, 정미소, 새마을운동의 유산인 근대화상회(구멍가게) 등 사라져 가는 것들을 카메라로 기록해 온 사람이란다.

 10 : 52. 정자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마을로 들어간다. 첫 만남은 농업인건강관리실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계남마을 경로당. 법정 동리인 계서리(溪西里) 4개 행정 부락(방화·계남·오동·서비산) 중 하나인 계남마을의 원래 이름은 스님이 암자를 짓고 불도를 닦았다고 해서 신앙골이었다. 그러다 큰 시냇물이 남쪽으로 흐른다는 이유로 계남(溪南)’으로 바꿨다고 전해진다.

 마을 고샅을 횡단한 탐방로는 내동산 방향으로 오름짓을 한다.

 10 : 55- 10 : 59. 잠시 후 도착한 또 다른 자연부락(계남마을의 윗뜸 정도로 치부해두자). 작은 저수지를 발아래 두고 예닐곱 채의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탐방로는 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간다. 하지만 몇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어떨까? ‘래산사라는 또 하나의 현충시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래산사(萊山祠)’는 수당(修堂) 정종엽(鄭鐘燁.1885-1940) 선생을 모시는 사당이다. 항일의병결사인 임자밀맹단에서 활동한 일제강점기 유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유림회가 지난 1957년에 세웠다. 시설로 사위동, 서원동, 수당선생 유적비, 관리사, 도장각(강당), 외삼문 등을 두고 있다.

 앙지문(仰止門, 시경에 나오는 문구로 큰 산을 우러르며 큰 뜻을 따르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을 들어서면 사당(萊山祠)이 나온다. 참고로 수당 정종엽은 이석용 의병장과 항일의병 활동에 동참했다. ‘임자동밀맹단(임자년인 1912년 겨울에 만들어진 비밀단체)’에 가담,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할 것을 결의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경에 체포됐다. 그 후 창씨개명 반대 및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 1940년 사망하였다. 2003년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도장각(道長閣)’이 있다. 선생이 근방의 학동들을 모아 가르치던 강당으로 1932년에 건립했다.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유형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당 앞에는 애국지사수당정선생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10 : 59. 사당을 빠져나와 다시 길을 나선다. ‘방화마을까지는 농로를 따른다.

 11 : 01. 잠시 후 울창한 소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최근에 지은 듯 시쳇말로 잉크도 안 마른 정자도 잠시 쉬었다가라며 손짓한다. 방화마을에서 내동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들머리이다.

 이곳은 마이산으로 대변되는 진안 땅. 그래선지 마이산의 핫 플레이스인 탑사에서나 볼 법한 돌탑을 쌓아놓았다.

 이왕에 왔으니 내동산 등산로 안내판도 한번쯤 살펴보자. 내동산은 백마산으로도 불린다. 성수면 구신리 원구신마을의 노적바위가 갈라지면서 백마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백마가 거닐어 백마산이 됐으며, 백마가 산에서 내려와 마령면의 마령(馬靈)’이 됐다고 전해진다.

 13 : 03. ‘방화마을에 이른다. 계서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자연부락으로 옛 이름은 방아다리였다. ‘교리(橋里)’라고도 불리었는데 침교(砧橋)’라는 택지가 있다고 해서다. 그러다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방아다리 방아가 방화(訪花)가 되었단다.

 이 마을에도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첨부된 지도에 표기된 수많은 정자 중 하나다. 이렇듯 2구간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정자를 만나게 된다. ‘쌍계정·만취정·영모정·미룡정처럼 강가 풍치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들어섰고, 마을에도 주민들의 쉼터를 겸한 정자를 어김없이 지어놓았다.

 마을 담벼락은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쯤에서 아쉬운 점 하나. 이곳 방화마을은 1구간에서 만났던 마이산 부부공원의 주인공, 즉 부부의 생년월일이 같은 시인인 담락당 하립 삼의당 김씨 부부가 살던 곳이다. 그러니 저 담벼락은 부부의 시와 관련된 벽화로 채워 넣었어야 하지 않을까?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진안고원 길이란 이름에 걸맞게 내동산의 산자락을 헤집으며 길이 나있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걸어온 길과 마령의 풍성한 벌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11 : 17. 호젓한 산길을 걷다보면 삼거리(이정표 : 백운면사무소 9.9km/ 마령면사무소 4.8km). 탐방로는 임도를 버려두고 들녘을 향해 방향을 튼다. 이어서 2차선 도로(운계로)를 건넌 다음(11 : 23) 널찍한 들녘을 가로지른다.

 11 : 27. 들녘의 끝에서 섬진강(데미샘에서 흘러내려오는 본류다)을 만났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멋진 바위벼랑을 가슴에 담는다. ‘진안·무주 국가지질공원의 지질 명소인 운교리 삼각주퇴적층이다. 1억 년쯤 전, 자갈·모래·진흙 등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암이라는데, 절벽의 줄무늬(층리)가 한쪽 방향으로 경사진 것이 눈에 띈다. 진안 분지에 퇴적물을 공급한 환경과 역사를 알려주는 소중한 지질자원이다.

 그 절벽에 처마의 제비집처럼 쌍계정(雙溪亭)’이 매달려 있었다. 1886년 오도한(吳道漢), 이우우(李友禹) 등이 발의해 세운 누정으로 쌍계동 천현계(雙磎洞天賢稧)의 계원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naver 지식백과는 쌍계정이란 이름의 유래를 백운천과 남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는 데서 찾고 있었다. 하지만 합수지점은 이곳에서 800m쯤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넷에서 얻어 온 '쌍계정' 사진.

 탐방로는 이제 삼계석문천변길을 따라 백마교로 간다. 강변 너른 모래톱에서는 무성한 갈대의 누렇게 바랜 잎새와 갈꽃이 비바람에 출렁인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삼각주 퇴적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망대를 만난다.

 지질공원의 안내도와 함께 운교리 삼각주 퇴적층에 대한 설명판도 세워놓았다. 덕분에 강 너머의 거대한 바위절벽을 이룬 삼각주 퇴적층을 설명판과 비교해가며 관찰할 수 있다. 참고로 진안무주 국가지질공원에는 진안의 마이산·운일암반일암·구봉산·천반산·운교리삼각주퇴적층 등 5, 무주의 외구천동·적상산천일폭포·오산리구상화강편마암·용추폭포·금강벼룻길 등 5곳이 포함되어 있다.

 절벽에 걸터앉은 정자 한 채가 보인다. ‘만취정(晩翠亭)’이다. ‘송객정(送客亭)’으로도 불리는데, ‘진양 하씨의 오형제인 하호(河灝하선(河璿하욱(河昱하식(河湜하봉(河鳳)이 순조 연간에 방화 마을로 이사 온 뒤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1970년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나그네를 환송한다는 의미의 송객정은 다섯 형제의 선조인 하연(河演, 1376~1453)이 놓아주었다는 다섯 마리 잉어에서 유래했단다. 조선 초기 영의정을 지낸 문신인데, 전라도관찰사 때 지방순시를 하다가 황룡 꿈을 꾸었고, 다음 날 하인이 잡아 온 다섯 마리의 잉어를 놓아주었다는 설화이다. 하연은 이 다섯 마리 잉어가 용으로 변신해 승천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황룡오리출상원도(黃龍五鯉出象源圖)’라는 그림으로 남겼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넷에서 얻어 온 '만취정' 사진.

 11 : 36. 백마교(白馬橋)로 섬진강(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8.6km)을 건넌다. 다리 이름은 내동산의 별칭인 백마산에서 따왔지 않나 싶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내동산의 산줄기가 요 어디쯤에서 섬진강 물속으로 잠긴다니 말이다. 하나 더. 백마교를 경계로 마령면에서 백운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섬진강 너른 모래톱에는 비바람에 출렁이는 갈대만 무성했다. 하지만 가을철 갈꽃이 만발할 무렵이면 또 하나의 눈요깃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탐방로는 잠시 2차선 도로(운계로)로 올라선다. 아니 가장자리를 따라 따로 길이 나있다. 하나 더. 그 사이 공간에는 전영태라는 옛 면장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전영태씨는 백운면장 말고도 매사냥으로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 20호로 지정된 분이다. 백운에서 시작된 물줄기와 노촌에서 영모정을 거쳐 오는 물이 합수되는 곳에 모운정(慕雲亭)’이라는 정자를 짓기도 했다.

 11 : 40. 2차선 도로인 운계로 원운1를 건넌다. 하지만 탐방로는 다리를 건너기 직전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즈음 정면(동쪽)으로 우뚝우뚝 서있는 1m가 넘는 산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지만 때 아닌 비바람이 눈에 들어올 만한 것을 모두 삼켜버린다.

 이후부터는 마치천(馬峙川)’의 둑길을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백운면의 북쪽에 있는 성수산에서 발원한 마치천(상류의 천변에 있던 마치라는 마을의 이름을 빌렸다나?)은 노촌리·평장리 들녘을 적신 뒤, 운교리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합류된다.

 11 : 43. 3분쯤 더 걸어서 만난 다리(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8.1km).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진안고원 길의 정체성에 부합시킨다며 최근 코스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옛 코스는 이곳에서 다리를 건너 원운마을로 간다. 하지만 새로운 코스는 계속해서 마치천의 강둑을 따른다. 덕분에 코스는 12.9km에서 14.7km로 늘어났다.

 11 : 54. 마치천을 건너(11 : 46), 이번에는 널디너른 평장리 들녘을 가로지른다. 이어서 30번 국도를 건너면 잠시 후 하평장(또는 평가)’ 마을(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7.1 km)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평장리(平章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상동·정동·평가) 중 하나로, ‘평장이란 지명은 고려 시대 평장사를 지낸 이거(李据)와 그의 증손인 이행전(李行典) 두 사람이 태어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마치천과 세동천이 만들어놓은 충적평야가 저리도 넓으니 그만한 인물이 능히 태어날 만도 하겠다.

 탐방로는 마을을 횡단한다. 요즘에야 누리기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우리네 선조들은 자연 속에 집을 지었다. 정자나무가 길손을 맞고, 실개천을 따라 올라가 집으로 들어가는 고샅에는 작은 꽃들이 대문 앞까지 안내해주었다. 실개천이나 꽃들은 없지만 구불구불 휘어지며 이어지는 고샅길을 걸으며 옛 풍치를 소환해 본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2차선 도로인 평노길이 길손을 맞는다. 탐방로는 이 길을 따라 동진한다.

 지난 1992년 문을 닫은 옛 평장초등학교 건물은 2018 진안고원학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새로운 시도를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소규모학교 시설을 지어 드론체험관(드론교육, 드론체험, 드론스포츠)을 만든단다. 잘 보존되어 있는 소나무 숲을 활용해 자연 숲 놀이공간도 조성한다나?

 12 : 04. ‘상평장(또는 상동)’ 마을에는 보건진료소가 들어서 있었다. 그만큼 큰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12 : 05. 보건진료소 바로 위에서 도로를 벗어나 오른편 소로(상평장길)으로 들어간다. 노촌리의 하미마을로 들어가는 샛길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그 중간어림에서 영모정이라는 고풍스런 정자를 만날 수 있고...

 영모정으로 가는 길. 낙락장송 몇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이어서 울창한 숲길이 우리를 영모정으로 안내한다. 이 숲은 2008 9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누리상(네티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길 아래로는 섬진강의 제1지류인 상표천(또는 미재천)’이 흐른다. 백운면 노촌리 덕태산 줄기에서 발원한 상표천 물줄기는 노촌호에서 머물렀다가 평장리와 운교리를 거쳐 당산마을 앞에서 섬진강에 합류된다.

 12 : 12. 숲길은 신의련(愼義連, 1546-1606)’의 유적지로 길손을 인도한다. 신의련은 임진왜란 때 병든 아버지를 왜적의 손에서 지켜낸 효자로 유명하다. ‘거창 신씨를 중심으로 원노촌(元蘆村) 마을 사람들이 홍수를 방지할 목적으로 조성한 숲속에 정려를 모시는 효자각(孝子閣), 추모비를 비롯한 비석군(碑石群). 영모정(永慕亭) 등이 들어서 있다.

 1801(순조 1)에 세운 효자각(孝子閣)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주위에 담장을 둘렀다. 안에는 비석은 보이지 않고 대신 현판이 걸려 있었다. 효자각 내 현판은 증수의부위 효자 신의련지려(贈修義副尉 孝子愼義連之閭)’라고 쓴 다음 신의련의 사적을 자세히 서술했다. 당시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글을 지었으며, 전 사헌부 지평 황기천(黃基天)이 글을 썼다.

 신의련은 임진왜란 때 자신의 집에까지 쳐들어 온 왜적들의 손에서 병든 아버지를 지켜냈다고 한다. 아버지 대신 자기를 죽여 달라는 신의련의 효성에 감동한 왜장이 이곳은 효자가 사는 곳이다(孝子所居之地)’라는 방을 동구 밖에 써 붙이고 부하들에게 절대 침범하지 말라고 명하고는 물러갔단다. 덕분에 1만여 명이 무사히 난을 피할 수 있었고, 정유재란 때는 그 수가 5만에 이르렀다나? 이로 인해 난을 피한 사람들의 수를 따 동네 이름이 만인동(萬人洞)’을 거쳐 오만동(五萬洞)이 됐고, 들녘은 면화평(免禍坪), 앞산은 덕태산(德泰山)으로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효자각에서 내다보는 계곡은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그런 미재천의 천변, 계류를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영모정(永慕亭)이 들어섰다. 미계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9(고종 6)에 세운 정자로 1984년 전북 문화재자료(15)로 지정됐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아담한 누정은 지붕이 특징이다. 일반기와를 쓰지 않고 이 지역에서 나는 너새(돌기와)를 얹었다.

 영모정 근처에서 길이 갈라진다. 들판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길은 원노·신기·마치, 천 따라 물길 거슬러 나아가는 길은 하미·비사 등의 부락으로 연결되다.

 12 : 17. 하미마을 쪽 숲길을 따라 200m 남짓 더 올라가면 미재천의 천변에 자리한 미룡정(美龍亭)’을 만난다. 미계 신의련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또 다른 정자이다. 정자에 오르면 미재천이 내려다보이고, 느티나무 숲의 운치도 즐길 수 있다.

 정자 주변에는 미계덕산고(美溪德山高)와 미계장구지소(美溪杖屨之所) 등 신의련을 칭송하는 선돌 서너 개가 세워져 있었다. 신의련의 영모비(永慕碑)와 마을의 화재막이 역할을 하는 돌탑도 눈에 띈다.

 미룡정 앞 미재천은 개울 수준의 작은 계곡이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바위들과 울창한 숲이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진안고원 길(2구간)’의 완주를 인증해 줄 이정표는 미룡정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만날 수 있다. 매 구간마다 이런 이정표를 2개씩 설치했는데, 2구간의 첫 번째 인증용 이정표는 남악제의 둑에 세워져 있다.

 탐방로는 미룡정 뒤로 난 농로를 따른다. ‘간짓대 걸쳐놓고 턱걸이하기 딱 좋다는 농담을 떠올리게 만드는 좁은 산골짜기. 손바닥만 한 논밭도 버려두기 아깝다는 듯, 길을 그것도 시멘트포장까지 해놓았다.

 12 : 24. 농로를 버리고 숲길(이정표 : 백운면사무소까지 5.2km)로 들어선다. 산길은 통나무계단을 놓아야 했을 정도로 가파르게 시작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평평하게 변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두 번의 계단 구간을 올라 임도로 들어선다. 이후는 휘파람이 저절로 나오는 걷기 딱 좋은 길이 계속된다. 오르내림이 없는데다 보드라운 흙길에는 낙엽까지 수북해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다.

 산길의 동반자는 리본이 되어준다. 목의 나무 가지마다 노란 색과 붉은 색의 리본이 매달려 고원길을 안내한다.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도 돋보인다.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12 : 40. 덕태산의 동북쪽 능선 끄트머리 안부인 닥실고개에 올라선다. 2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앱은 444m를 찍는다)으로 백운면의 운교리와 노촌리를 연결하는 고갯마루다. 북쪽 노촌리에 하마치마을과 원노촌마을이 있고, 남쪽은 운교리 신전마을이 있다. 하나 더. 이곳은 그간 묵어 있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신작로가 뚫리면서 인적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진안고원길이 조성되면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 온전한 고개의 기능을 되찾고 있다.

 이정표(백운면사무소 4.3km/ 마령면사무소 10.4km)가 이곳이 닥실고개임을 알려준다. ‘닥실이란 지명은 고개 서쪽에 있는 양계봉(493.7m)’에서 얻어왔다고 한다. 고개 양쪽 골짜기의 이름도 닥실골이란다.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른다. 신전 방향은 정상까지 고랭지채소밭으로 활용하고 있어 농로가 개설되어 있다. 산중이라서 경작지에 멧돼지 등의 접근을 막기 위해 쳐놓은 전기선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하지만 길은 엉망이었다. 이틀을 연이어 내린 겨울 장마로 인해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12 : 50. 고랭지채소밭 사이로 난 길을 10분쯤 걸으면 신전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운교리(雲橋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원운·원산·주천·신전) 중 하나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이다. 조금 전 넘어온 닥실고개와 잠시 후 넘게 되는 배고개를 통해서만 다른 세상과 마날 수 있는 벽지이기도 하다.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별천지라고나 할까?

 안내판은 신진마을의 옛 이름이 가루손이였음을 알려준다. 마을 지형이 소가 가로로 누운 와우혈이기 때문이란다. 볼거리로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비보풍수림 송림원을 내세운다. 하지만 어떤 걸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주민이 눈에 띄지 않아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정자가 있는 동구 밖, 당산나무는 수령이 3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당산제를 지내기도 한단다. 진안군에서 보호수로 지정해 놓았다.

 다음 행선지인 상백운 마을로 나가는 길은 구불구불 곡선으로 이어진다. 거기다 오르막이다. 하긴 알을 깨고 나가는 일이 어디 그리 수월하겠는가. 아니 바깥세상과 연결해주는 또 다른 통로인 닥실고개에 비하면 숫제 고속도로나 마찬가지다. 자동차까지 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13 : 09. 별천지를 떠나는 아쉬움을 보듬고 배고개(383m)’를 넘는다. 신전마을과 상백암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이다. 명찰(배고개)까지 단 이정표가 2.9km만 더 걸으면 종점인 백운면사무소에 닿는다며 힘을 내란다.

 상백암마을로 가는 길가도 역시 농경지가 펼쳐진다. 그 사이에 비닐망이 튼튼하게 쳐져있다.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아보려는 힘겨운 투쟁의 한 산물이다.

 수문장처럼 길목을 지키고 있는 저 조형물은 대체 뭘까? 이 근처에 사슴목장이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길가의 모정(茅亭)은 농부들의 쉼터이다. 하지만 진안고원길이 지나가면서부터는 걷기 여행자들이 더 많이 찾는다. 준비해간 간식을 나누는 참새방앗간으로 사용하기 딱 좋은 곳이다.

 13 : 12. ‘상백암 마을은 스치듯 지나간다. 법정 동리인 백암리(白岩里)’를 구성하는 5개 행정부락(원촌·번암·중백·상백·백운동) 중 하나로 백암이란 지명은 마을 주변에 차돌바위(흰 바위)가 많은데서 유래했다. 그 백암마을의 맨 위에 위치한 부락쯤으로 보면 되겠다.

 13 : 19. ‘백운동로로 내려선다. 상백암마을 주민들은 변화가 필요했던가 보다. 논이었음직한 들녘이 온통 사과나무로 가득하다. 최근에 심은 듯한 어린 사과나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 사이로 난 길(상백암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면 2차선 도로인 백운동로를 만난다.

 도로 아래로는 백운계곡이 흐른다. 백암리를 감싸고 있는 선각산(1,105m)과 덕태산(1,113m)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인데, 이게 제법 빼어난 풍경을 만들어낸다. 여름철이면 피서객들로 붐빌 수도 있겠다.

 13 : 26. 이후부터는 내동산을 전면에 놓고 걷는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백암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중백암마을에 이른다.

 13 : 32. 중백암마을 정자에서 트레킹을 끝내기로 했다. 백운면사무소까지는 아직 400m쯤 더 가야하지만 산악회버스가 점심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어쩌겠는가. 특히 겨울비까지 주룩주룩 오는 데야 고민해 볼 필요조차도 없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5분을 걸었다. 앱은 12.21km를 찍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가 하면, 일부 구간에서 푹푹 빠지는 진흙탕과의 싸움까지 치렀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 빨리 걸은 셈이다.

진안고원길 1구간(마이산길)

 

여행일 : ‘24. 1. 6()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진안읍 및 마령면 일원

여행코스 : 진안 만남쉼터마이돈 테마파크연인의길통천문은수사탑사화전삼거리원동촌마을마령면사무소(거리/시간 : 12.9km, 실제는 14.51km 4시간 25)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들머리는 진안 만남쉼터’(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진안 TG를 빠져나와 30번 국도(진무로)를 타고 진안으로 온다. 진안로터리에서 오른쪽으로 100m쯤 들어가면 월랑체육공원’, 그 입구에 진안 만남쉼터가 있다. 참고로 월랑체육공원은 성묘산 일대에 조성해놓은 근린공원이었으나 공설운동장·문예체육회관·테니스장·게이트볼장 등 각종 체육시설을 갖추면서 2010년 체육공원이 되었다. 하나 더. 월랑(月浪)은 백제 때 이곳에 있었다는 난진아현(難珍阿縣)’이란 고을의 별칭이다(三國史記  高麗史). 마이산 자락을 비추는 달빛이 물결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카메라 조작 실수로 사진이 잘못 나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려왔다)

 고샅길·논둑길·밭둑길·숲길·물길·고갯길 등으로 이루어진 진안고원 길은 길목마다 자연의 속살이 숨어 있다. 14개 구간(총 길이 209km) 모두를 이으면 둥근 원 모양이 되는데, 길은 평균 고도 300m 100개 마을 그리고 40개의 고개를 지난다.

 1구간인 마이산 길은 읍내에 위치한 진안만남쉼터에서 출발,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의 한가운데를 넘고, 은수사와 탑사를 지나며 마이산을 둘러보는 길이다. 산을 직접적으로 오르지 않아 부담은 적으면서도 마이산의 핵심 지역을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하지만 최근 진안고원 길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며 코스를 변경했다. 마이산 초입에서 능선으로 올라 금남·호남정맥을 따르다가 탑재를 거쳐 마령면사무소까지 간다.

 길을 나서기 전 ‘6.25참전호국영웅기념탑에 묵념부터 드려본다. 우리가 웰빙·힐링을 외치며 전국의 산하를 누빌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저 분들이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켜주신 덕분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이곳 진안과 인연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 옆의 진안사랑가도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10 : 19.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도로(진무로)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자용 길을 내놓았다.

 10 : 22. 잠시 후 내려선 사양천의 둑길. 이곳에서 만나는 성산수풀은 수백 년 전부터 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하도 숲이 짙다보니 마을 이름까지도 수풀이 되었다나? 이곳은 진안시가지가 진안천의 물길을 마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홍수 때 물길이 진안 읍내로 직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제림(防災林)’으로 보면 되겠다.

 10. 26. 진안 읍내를 스쳐가는 초반. ‘근하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길이 자로 휘기도 한다. 자칫 길이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붙들어 매도 되겠다. 주요 포인트마다 진안고원 길의 뭉툭한 화살표가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노란색은 순방향, 분홍색은 역방향을 가리킨다.

 10 : 30. 또 다시 만난 하천. 아까보다 많이 가늘어졌다. 이름도 진안천에서 사양천으로 바뀌었다. 보여주는 풍광도 180도로 바뀐다. 밋밋한 시가지 대신 진안의 얼굴마담인 마이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걷는다. 진안에서는 월랑팔경(月浪八景)’ 가운데 으뜸으로 마이귀운(馬耳歸雲)’을 꼽는다. 구름이 감도는 마이산의 자태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마이산이 오늘은 구름 대신 안개에 갇혀버렸다. 그렇다고 마이귀운까지 내팽개칠 필요야 있겠는가. ‘꿩 대신 닭이라고, 구름을 허리에 두른 마이산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산속으로 파고든다. 참고로 월랑팔경(또는 진안팔경)’의 나머지 일곱은 羌嶺牧笛(강령목적, 강령 목동들의 피리소리), 富貴落照(부귀낙조, 부귀산 저녁노을), 古林暮鐘(고림모종, 고림사 저녁종소리), 鶴川魚艇(학천어정, 학천 고기잡이 배), 牛蹄細雨(우제세우, 가랑비 내리는 우제들 풍경), 南樓曉角(남루효각, 남루의 새벽 고동소리), 羽化齊月(우화제월, 우화산에 둥실 솟은 밝은 달)’로 하나같이 진안읍의 아름다운 풍경을 강조한다.

 탐방로는 사양천을 끼고 올라간다. 탐방로 곳곳에는 파고라나 벤치를 설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읍민들을 위한 체육공원도 눈에 띈다. 참고로 마이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은 사양저수지에 모인 다음, 사양천이 되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진안천에 합류된다.

 탐방로 바닥은 홍보의 장으로 활용했다. 홍삼과 고추 등 진안의 특산물들을 그 효능과 함께 소개한다. 구입할 수 있는 시기까지 덧붙였음은 물론이다.

 10 : 40. 새만금·포항고속도로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이때 길가 마이산 태극길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트레킹을 마칠 때까지 같은 이름의 이정표를 심심찮게 만났지만 그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태극무늬를 그리며 마이산을 넘도록 길을 내놓지 않았나 하고 추측해볼 따름이다.

 10 : 45. 잠시 후 내사양마을에 이른다. 원래 이름은 사양골’. 골짜기가 많은 곳, 즉 심심산골의 오지마을이라는 뜻일 게다. 그러다 해도 명산인 마이산을 비켜간다고 해서 비킬 사()’ 볕 양()’자를 써 사양동이 되었다고 한다. 해질 무렵 서산에 걸친 해가 이 마을을 비추는 사양낙조(斜陽落照)의 아름다움에서 유래를 찾는 이들도 있다.

 마을로 들어가기 전, 왼쪽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힐링하기 딱 좋은 공원이 걸터앉았다. 마이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니 한번쯤 꼭 올라가보자.(산악회의 배려로 귀경길에 들렀기에 일정이나 소요시간에서 제외시켰다)

 미로공원 돌담공원으로 나누었는가 하면, 곳곳에 억새와 핑크뮬리 등을 심어 한껏 멋을 부렸다. 하지만 그보다는 마이산에 대한 조망으로 더 유명하다. ‘·수 마이루 정자에 오르면 마이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이산(馬耳山)은 조선 태종이 이 지역을 지나다가 산의 모양새가 말의 귀와 같다고 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신라시대에는 서대산, 고려 때는 용출산,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속금산으로 불렸다. 계절마다 이름도 달라진다. 봄에는 안개를 뚫고 나온 두 봉우리가 쌍돛대를 닮아 돛대봉’, 여름에 수목이 울창해지면 용의 뿔 같다 해서 용각봉(龍角峰)’, 가을은 단풍 든 모습이 말의 귀 같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文筆峰)’이 된다.

 마이산이 멀게 보인다는 것은 흠. 하지만 흐드러지게 핀 억새꽃을 가슴에 담다보면 그 아쉬움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하나 더. ‘단단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차분하게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등 위로를 주는 표지판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이산 북부에 위치한 내사양 마을은 관광예술단지로 조성되어 있었다. 상가를 포함해 식당(대부분 진안의 명물 흑돼지를 판다)과 숙박업소가 주를 이룬다.

 집사람은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집단시설지구는 우리 부부처럼 다른 장소에서 각각 출발한 일행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기 딱 좋은 곳이다.

 10 : 54. 집단 시설지구를 빠져나오면 마이돈 테마파크’. 이름대로 돼지를 주제로 한 공원으로 곳곳에 개성 있는 돼지 조형물들이 있어 사진 찍기 딱 좋다. 돼지체험관에라도 들르면 소시지 만들기, 불고기피자 만들기, 홍삼 아이스크림 만들기 등의 체험도 해볼 수 있단다. 탐방로는 이 공원을 횡단한다.

 공원 입구. 흑돼지 가족이 길손은 맞는다. 진안군은 깜도야라는 브랜드까지 만들었을 정도로 자신들이 기르는 흑돼지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고원지대의 맑은 물과 낮과 밤의 일교차로 사육되기 때문에 육질의 맛과 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20년쯤 전인가? 진안 흑돼지를 자랑하겠다는 이 고장 인사의 초대를 받았었고, 운장산 산행을 마친 후 회사 직원들과 함께 가마솥에서 통째로 끓인 흑돼지를 맛볼 수 있었다. 아무튼 그때의 기억만 떠올려도 침이 자르르 흐른다면 짐작이 갈지도 모르겠다.

 활짝 웃는 황금 돼지도 눈에 띈다. ‘웃으면 복 돼지라나? 그래 오늘 저녁에는 저 돼지를 꼭 끌어안고 잠들어보자. 돼지 자체만으로도 복덩어린데, 황금까지 뒤집어썼으니 로또’ 1등의 번호라도 알려줄지 누가 알겠는가.

 천사금척지향(天賜金尺之鄕)이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하늘이 금으로 된 자를 내려주신 고장 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꿈속에서 선인(仙人)으로부터 받았다는 금척(金尺)이 마이산을 뜻한다는 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조선 개국 후 궁중무용 1호인 금척무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11 : 03. 공원 상부는 사양저수지‘. 1957년에 착공해 1962년에 준공한 시쳇말로 손바닥만 한 저수지이다. ‘사양(斜陽)’ '햇빛이 비켜간다'는 뜻. 북쪽으로 트인 골짜기라서 빛 드는 시간이 짧았나 보다. 그 방죽은 지금 데크 산책로가 수면을 수놓고 있다. 하지만 난 바람개비가 팽팽 도는 둑길을 걷는다.

 저수지는 생각보다 작았고, 수면은 명경처럼 잔잔했다. 이런 특징 덕분에 사양저수지는 마이산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그나저나 두 귀를 쫑긋 세운 마이산이 물속에 잠기면서 커다란 꽃으로 변했다. 그것도 꽃봉오리를 활짝 열면서... ! 누군가는 저 모양을 보고 수풀 속에 몸을 반쯤 감추고 날개를 펼친 한 마리의 나비와도 같다고 했다.

 제방의 끝. ‘포룡대(鉋龍臺)’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이 저수지에서 지낸다는 용왕제(龍王祭)’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일 년에 두 번 음력 정월과 7월 백중날에, 제방에 오방기를 세우고 4개의 호롱불을 켜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정오에 제를 올렸다니 말이다.

 11 : 08. 저수지에서 100m쯤 내려오면(마이산의 반대 방향) ‘연인의 길이 시작되는 만남의 광장을 만난다. 과거 마이산 구 도로로 불리던 길이 1.5km의 이 길은 2002년 경 연인의 길로 리모델링되었고, 마이산의 북부 진입로로 변했다. 또한 차를 타고 마이산 중턱까지 올라 다니던 길은 지금 오롯이 산책용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길 아래는 진안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구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진안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용담댐 건설로 사라진 마을들과 이주민, 실향민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이밖에도 관광예술단지에는 진안홍삼스파, 산약초타운, 가위박물관 등 진안의 대표 관광시설이 밀집해 있다.

 150m쯤 더 걸으면 연인이라는 간판을 내건 잘 지어진 이층집이 얼굴을 내민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진안고원길(1구간)’ 코스가 최근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코스는 이곳에서 연인의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간다. 100만 관광지이자 입장료가 있는 탑사를 경유하는 것보다, 숲길이 좋은 마이산옛길로 변경하는 게 진안고원길의 정체성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하나 더. 거리도 12.9km에서 13.2km로 늘어났다.

 연인의 길은 마이산을 모티브로 삼았다. 수마이봉과 암마이봉이 동·서로 솟아오른 마이산은 마치 부부가 나란히 서있는 모양새라고 한다. 세계 유일의 부부 봉이라는 애칭을 얻게 된 연유이다. 그런 부부 봉의 모습을 착안해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리모델링했다.

 탐방로 곳곳에 만들어놓은 연인을 테마로 한 다양한 조형물이 설렘과 재미를 선사한다. ‘만남의 광장에는 연인의 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조형물(하트트리, 핑거하트)이 세워졌고, 잠시 후 만나는 스마일 Zone’에서는 처음 만났을 때의 환한 미소가 펼쳐진다. 이후로도 연인의 발전단계를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다음은 포옹 Zone’이다. 연인으로 만난 두 남녀, 서로 사귀기로 했으니 포옹쯤이야 허용되지 않겠는가.

 뽀뽀 Zone’을 지나면 키스 Zone’이 기다린다. 남녀 간의 사랑도 애교 수준의 뽀뽀를 넘어 이제 진한 애정 표현으로 변한다.

 도중에 마이산 북부전망대로 오르는 길이 나뉘기도 했다. 하지만 왕복 460m라는 거리, 특히 눈앞에 나타난 가파른 나무계단이 부담스러워 다녀오지는 않았다. 게시된 사진은 마이귀운(馬耳歸雲)’의 풍경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지만...

 11 : 35. ‘하트 Zone(하나 된 마음으로 사랑을 약속하는 형상)’을 지나자 마이 열차(만남의 광장에서 이곳까지 왕복하는 전기차로 편도 3천원, 왕복 5천원의 탑승료를 받는다)’의 종점(상부 승강장)이다. 탑승시설 말고도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사랑이 결실을 맺는 사랑마당 프로포즈 Zone’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꽃다발을 주며 미래를 약속하는 프로포즈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이성계와의 인연은 조형물로 전한다. 마이산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신선이 나타나 금척을 주며 삼한의 영토를 잘 다스려보라고 했다는 전설이 깃든 산이다. 조선시대 왕의 의자 뒤에 있던 일월오봉도도 마이산을 남쪽에서 보고 그렸다고 전해진다.

 마이산 story’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조선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 ‘연인의 길 안내, 등 다양한 정보를 담았는데, 그중에서도 돼지를 닮은 마이산 등산로가 눈길을 끈다.

 이후부터는 비포장 산책로를 따른다. 이어서 100m 남짓 더 걸으면 사양저수지에서 계단을 따라 곧장 올라오는 사람들을 만난다.

 탐방로는 이제 210개쯤 되는 나무계단을 오른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 협곡을 향해 길고 긴 오름길이 펼쳐진다.

 11 : 42.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천왕문이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을 가로지르는 이곳은 은수사와 탑사로 통하는 관문이라 건물이 없어도 천왕문이라 불린다. ‘산태극수태극의 명당으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금남·호남정맥의 주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섬진강 두 물줄기가 마이산을 중심으로 태극을 이루기 때문이다.

 숫마이봉과는 달리 암마이봉은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안전사고를 예방한다며 입구를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매년 11월 초부터 다음 해 3월 초까지 출입을 금지한단다.

 반대편에 있는 화엄굴 역시 문이 닫혀있었다. 숫마이봉의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석간수라도 한 모금 마셔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반대방향(남쪽)으로 내려간다. 이 구간 역시 길고 긴 나무계단이 펼쳐진다. 누군가는 계단의 수가 508개나 된다고 했다.

 11 : 53 - 12 : 02. 계단을 내려서면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은수사(銀水寺)’가 반긴다. 조선 초기 상원사라 했는데 숙종 무렵 터만 남아 있다가 누군가에 의해 정명암(正明庵)’이 지어졌다. 하지만 이마저도 없어졌다가 1920년 사양동(진안읍 단양리)에 살던 이규헌(李圭憲)이 다시 지었는데, 이때 은수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은수사란 이름은 이성계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

 천연기념물 제386호인 청배실나무는 은수사의 자랑거리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데, 지형의 특성상 산 밑에서 위로 바람이 불면 청실배나무의 잎이 흔들리며 서로 마찰하여 형용하기 어려운 소리가 난다고 한다. 또한 겨울철 청실배나무 밑동 옆에 물을 담아두면 가지 끝을 향해 역() 고드름이 생기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단다. 하나 더. 은수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제380호인 줄사철나무 군락도 있다.

 마이산(암마이봉) 절벽을 보면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타포니(taffoni : 풍화혈)라고 불리는 이 구멍들은 역암에서 자갈 사이를 메우고 있는 물질인 매트릭스가 자갈보다 빨리 풍화되는 차별침식으로 자갈이 빠져나가면서 생겼다. 타포니는 벌집 모양의 자연동굴을 지칭하는 프랑스 코르시카 섬의 방언으로 세계적으로 진귀한 지질 현상이다.

 이제 돌탑으로 유명한 탑사로 갈 차례이다. 은수사가 탑사 보다 가파른 위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아래로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12 : 09  12 : 28. 잠시 후 이갑용(李甲用, 1860~1957)이 세웠다는 탑사(塔寺)’에 이른다. 1885년 마이산에 들어온 그는 솔잎을 생식하면서 탑을 쌓았다고 한다. 1920년대 초반 초가에 돌미륵불을 안치하고 불공을 드리다가, 1935년 목조함석지붕의 인법당과 산신각을 지으면서 정식으로 부처님을 모셨다. 이갑용이 98세의 나이로 죽은 뒤, 손자 이왕선이 한국불교태고종에 사찰등록을 하면서 정식으로 탑사라는 이름을 쓰게 됐단다. 1986년 인법당을 대웅전으로 고쳐 짓고, 1996년 나한전(현재의 영신각)을 지었으며, 1997년 종각과 요사채를 지어 오늘에 이른다.

 탑사는 이갑용 처사가 쌓은 돌탑으로 유명하다. 돌탑들의 형태는 일자형과 원뿔형이 대부분이고 크기는 다양하다. 이 돌탑들은 1800년대 후반 이갑용 처사가 혼자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 모두 108기의 탑을 만들었다는데, 100여 년이 지난 현재도 80여 기에 달하는 탑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나 더. 탑사의 석탑은 섬세하게 가공된 돌들로 쌓은 여느 탑들과는 달리 가공되지 않은 천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막돌허튼식'이라는 조형 양식으로 음양의 이치와 팔진도법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거센 강풍이 불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그래선지 미국 CNN에서는 마이산 탑사를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사찰 33에 포함시켰다.

 암굴에 모셔놓은 이갑용 처사 상(). 복전(福田)과 촛불 공양을 드릴 수 있도록 해놓았다. ‘내 마음이 미혹하면 중생이고, 깨우치면 부처라고 했다. 그러니 이갑용 처사를 공양을 받을 만한 법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참고로 이갑룡은 25세 되던 해에 유··선 삼교에 바탕을 둔 용화세계 실현을 꿈꾸며 이곳에 들어왔다. 이어 사람들의 죄를 빌고 창생(蒼生)을 구할 목적으로 30년을 한결같이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탑을 쌓았다고 한다.

 섬진강의 발원지는 진안군(백운면 신암리) 원신암마을 상추막이골에 위치한 데미샘이다. 이 데미샘이 있는 봉우리를 천상데미라 부르는데, ‘섬진강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봉우리란 뜻이다. 그런데 마이산의 탑사에 있는 용궁도 섬진강의 발원지 중 하나로 꼽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이 물은 탑영제에서 잠시 머물다가 은천을 이루며, 데미샘에서 흘러 온 물과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에서 만나 옥정호로 흘러간단다.

 108개 탑은 하나같이 백팔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한다. 대웅전 뒤, 가장 높은 곳에는 천지탑(天地塔, 전라북도 문화재 제35)’이 있었다. 이갑룡처사가 만 3년의 고행 끝에 완성(1917)시켰는데, 기공법과 축지법에 가장 많은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부부탑(왼쪽이 음이고 오른쪽이 양)으로,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면서 축조했다. 천지탑 주변 일자형의 33개 탑은 신장탑으로 천지를 감싸고 우주의 33천 세계를 의미한다나?

 탑의 보존에 대한 무한의 의지를 담았다. 탑을 만지지도 말 것이며, 탑신에 돌을 올리지도 말라며 읍소를 한다. 소원을 올리려다가 자칫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 앞에는 오방탑(五方塔)’이 있다. 사각모성에 서있는 5기의 일자형 신장탑으로 오행과 오방을 상징한단다. 이밖에도 약사탑, 월광탑, 일광탑, 중앙탑(흔들탑)과 이 탑들을 보호하는 주변의 신장탑들이 제각기 이름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절간을 빠져나오는데 허호석의 마이산이란 시비가 눈에 띈다. 참고로 1억 년 전, 진안고원은 호수였다. 호수로 쓸려온 모래와 자갈 따위가 물속에서 쌓여 2m 두께의 역암층이 됐고 7천만 년 전쯤이 됐을 때 땅이 크게 흔들려 역암층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것이 마이산이다. 두 봉우리 중 풍만한 쪽이 암마이봉(해발 686m), 뾰족한 쪽이 수마이봉(680m)이다.

 마이산은 역암층이다. () 자갈 역자다. 지각변동으로 자갈, 모래, 퇴적층이 뒤섞여 바위로 굳어지고 풍화로 자갈이 빠져나가면서 큰 구멍이 생겼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석탑을 쌓아올렸다. 저리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을까?

 마이산과의 첫 만남인 집사람. 덕분에 마이산을 3번이나 답사한바 있는 나까지 진안고원 길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겠다며 세계 일주까지 이어오고 있는 마당에 그녀를 위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탑사 아래는 작은 사하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불교용품 판매점은 물론이고 식당까지 들어섰다.

 12 : 28. 탑사는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지나야 한다는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가람 수호를 하는 천왕문(天王門)이나 불국토로 들어간다는 불이문(不二門)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사찰 3문이 통째로 없는 것이다. 환영의 문구를 담고 있는 저 입석 두 개가 그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탑사를 빠져나오면 길이 둘로 나뉜다. 아스팔트 포장도로 말고도 데크길이 숲속을 헤집는데 이용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튼 탐방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곳곳에 쉼터용 벤치가 놓여있는가 하면, 마이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안내판도 세웠다.

 12 : 38.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마이산 부부공원에 이른다. 조선 중기 한마을에서 한날한시에 태어나 부부가 되었다는 조선시대 유일의 부부 시인 담락당(湛樂堂) 하립(1769~1830) 260여 편의 시를 남겨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꼽히는 삼의당(三宜堂) 김씨(1769~1823)를 기리는 공원이다. 남원 서봉방(捿鳳坊)에서 태어나고 생활하던 부부가 이곳 진안(마령)에서도 오래 살았다고 한다.

 공원에는 부부의 시비가 여럿 세워져 있었다. 몰락한 양반가 집안의 부부가 과거를 포기하고 진안 산골에서 자영농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집에 돌아가면 청계천 헌책방이라도 한번 들러봐야겠다. 그들의 시집이라도 찾아낼지 누가 알겠는가.

 초입에는 부부의 영정을 모신 명려각(明麗閣)이 들어섰다. ()은 낮과 밤의 음양. 즉 부부를 의미하고 려()는 삼의당 시인의 시문이 너무나 미려(美麗)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옆에는 부부의 시비(詩碑)도 세워놓았다. 참고로 김삼의당과 하립은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둘은 18세 되던 해 백년가약을 맺었다. 하립은 과거를 위해 한양으로 떠나 오랜 시간 공부에만 매진했고(급제는 못했지만), 김삼의당은 그런 남편을 위해 남원에 머물며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를 조선의 전형적인 여성상으로 추켜세우는 이들도 있다.

 돌탑을 쌓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덕분에 동심으로 돌아가 돌멩이 하나 살짝 올려볼 수 있었다.

 12 : 49. 공원을 벗어나면 탑영제(塔影堤)가 길손을 맞는다.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서천으로 유입되기 전 잠시 머물다 가는 인공호수로 오리배를 탈 수 있는 유원지로 개발되어 있다. 수채화 같은 아름다움이 몽환적이기까지 한 호수에는 가장자리의 물 위로 떠 있는 데크길도 내놓았다.

 이후부터는 벚꽃 길을 따른다. 전국에서 가장 늦게 피는 벚꽃으로도 유명한 마이산 벚꽃은 이산묘와 탑사를 잇는 2.5km 구간에 식재되어 있다. 진안고원의 독특한 기후로 인해 수천 그루의 벚꽃이 일시에 개화하여 그 화려함은 전국 최고의 명성을 자랑한다. 수령 20~30년의 마이산 벚꽃은 재래종 산벚꽃으로 깨끗하면서 환상적인 꽃 색깔로 유명하다.

 탑영제 둑에서 바라본 풍광. 앞산이 암마이봉이고 뒤쪽에 상부만 보이는 봉우리가 수마이봉이다. 암수 한 쌍의 봉우리가 솟아있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탑영지는 탑 그림자가 드리우는 곳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대로 마이산 봉우리가 호수에 거울처럼 비추는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곳은 2012 KBS-2TV에서 방영된 내 딸 서영이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주인공 서영이의 부모 고향이 진안군으로 설정되어, 진안의 다양한 명소가 촬영 장소로 활용되었다. 안내판은 MBC-TV의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적고 있었다.

 날씨가 포근한 탓에 역 고드름 현상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참고로 마이산은 신비스러운 곳으로 알려진다. 그 신비 중 하나가 역 고드름 현상이다. 겨울철 탑사와 은수사 주변에 물을 그릇에 담아 놓아두면 물이 하늘을 향해 자라면서 기둥이 되어 언다는 것이다.

 그 아쉬움을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으로 달래본다. 보라! 신기하지 않는가.

 13 : 05. ‘금당사(金塘寺)’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금당사(金堂寺)라고도 하는데, 650년 고구려에서 건너온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무상(無上)이 자신의 제자 금취(金趣)와 함께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고금당(古金塘)’이라는 원래의 터는 이곳에서 1.5km쯤 떨어져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은 후 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했다. 하나 더. 814년 중국에서 온 혜감(慧鑑)이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문화재로 금당사 괘불탱(보물 제1266)와 목불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을 갖고 있다.

 13 : 10 - 13 : 45. 탐방로는 주차장에 닿기 전 집단시설지구부터 들른다. 등갈비를 숯불로 직접 굽는 모습으로도 부족해 코로는 그 냄새까지 솔솔 들어오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반주삼아 소주 한 병을 냉큼 비우고 일어서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마이산의 또 다른 명물인 대왕꽈배기. 페이스트리로 되어 있어서 고소한 맛이 일품이라는데 이 또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꽈배기에 도너츠, 거기다 인삼튀김까지 두둑하게 챙기니 보는 즐거움에 먹는 즐거움까지 더해진다. 이런 맛에 트래킹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집단시설지구를 벗어나자 탐방로는 도로를 따라간다. 왕복 2차선의 도로는 통행량이 많은 편.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자 전용의 탐방로를 따로 내놓았다. 쉼터를 겸한 소공원을 여럿 만들었는가 하면, 마이산의 볼거리를 자랑하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했다.

 14 : 00  14 : 10. 남부주차장에서 조금 더 걸으면 이산묘(駬山廟, 전라북도 기념물 제120)’가 나온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제자들이 친친계(親親契, 송병선 제자)와 현현계(賢賢契, 최익현 제자)를 구성하여 스승의 뜻을 기리고자 1925 이산정사(駬山精舍)’를 건립했다. 1900년대 의병활동 근거지였던 곳이다. 후에 단군과 조선의 태조·세종·고종을 비롯해 을사년 이후 순국한 애국선열, 조선의 명현들을 포함한 79위를 배향하면서 이산묘가 됐다.

 이산묘에는 단군과 조선의 태조·세종·고종을 모시는 회덕전(懷德殿), 을사늑약 이후의 순국선열 34위를 모신 영광사(永光祠), 조선시대 명현 40위를 모신 영모사(永慕祠)가 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김구, 신익희 등의 친필 휘호를 새긴 비석과 편액, 암각서 등이 있다.

 이산묘 입구, 거대한 바위절벽(용바위)은 암각서군(巖刻書群,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6)으로 불린다. 용암(龍岩), 주필대(駐蹕臺), 마이동천(馬耳洞天), 비례물동(非禮勿動), 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 大韓乾坤)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들로 평가받는다.

 마이동천(馬耳洞天)과 주필대(駐蹕臺). 주필(駐蹕)은 임금이 거둥할 때 잠시 머물거나 묵고 간다는 뜻으로 이성계가 왔다 간 것을 기념해 새긴 것이다.

 구한말 항일지사인 송병선과 그 문인들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다. 연재 송병선의 제자가 이산정사 설립을 발의한 후에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 더. 이곳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새겨진 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 大韓乾坤)은 해방 후 백범 김구선생이 쓴 글로 대한민국이 해와 달처럼 오래오래 밝게 빛나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절벽 앞에는 호남의병창의동맹단결성지(湖南義兵倡義同盟團結成址)’란 빗돌도 세워져 있었다. 1907년 이석용 의병장이 이곳에서 항일 의병을 결성하면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란 단을 쌓고 고천제(告天祭)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정재 이석용을 중심으로 진안·임실·순창·장수·남원 등에서 일어난 1000명 호남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기 위한 빗돌로 보면 되겠다. 참고로 이석용은 동지들과 진안, 영광, 고창 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지만 일경에 체포돼 191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4 : 10  14 : 14, 이산묘 맞은편 충혼의 다리 너머에는 독립유공자추모탑이 세워져 있었다.

 독립유공자추모탑 뒤편에서도 암각된 글자를 찾아볼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비례물동(非禮勿動)’, 고종이 호남 유림에 내린 글씨로,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뜻이란다.

 하지만 고종이 의병 창의를 독려한 의미로도 해석된다.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자본을 되찾는 일이 곧 예의이니, 이천만 동포는 분연히 일어나 빼앗긴 조국을 되찾자는 뜻이란다.

 탐방로는 마이산남로를 따라간다. 아니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보행자 전용의 길을 따로 내놓았다.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배려도 돋보인다. 곳곳에 쉼터와 소공원을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마이산 타포니’, ‘마이산 백악기 역암’, 호남의병창의동맹단 터인 용암 등 마이산과 관련된 풍물들을 소개하는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14 : 24. 엄청나게 넓은 주차장도 만난다. 남부주차장에서 이곳까지는 1km. 마이산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거리다. 어쩌면 벚꽃 구경을 온 상춘객들을 위한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14 : 34. ‘화전교를 건너면 화전삼거리이다. ‘마이산도립공원의 입구이기도 한데, 아까 연인의 길 초입에서 헤어졌던 진안고원 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새로이 개설한 코스가 한남·금남정맥과 탑재를 넘고, 은천마을을 거친 다음 은천을 따라 이곳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후부터는 은천천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도로를 따른다. 강둑 위로 시멘트포장길이 나있다.

 오른쪽으로는 맑은 은천(隱川)’이 흐른다. 진안읍 가림리에서 발원하여 마령면 강정리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10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원래 이름은 음천(陰川)’, 냇물이 그늘진 곳으로 흐른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조선 말엽에 은천으로 바뀌었다. 아무튼 수량이 풍부한데다 타포니 현상의 벼랑까지 자주 만나 아름다운 풍광을 곳곳에서 연출해준다.

 마이산의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에 발달한 역암이다. 내부 팽창에 의한 차별침식으로 바위 표면에 움푹 파인 부분이 많다. ‘타포니 현상이다. 그런데 저 바위는 움푹움푹 파인 것으로도 모자라 칼로 내리치기라도 한 듯이 반듯하게 잘려나갔다.

 14 : 42. ‘중동촌교 다리를 건너면 길은 잠시 은천의 천변을 떠난다. 그리고는 사행천이 만들어놓은 자그마한 들녘의 가장자리를 따라 원동촌마을로 간다.

 14 : 49. ‘원동촌마을’. 법정 동리인 동촌리(東村里)’를 구성하는 3개의 행정마을(원동촌·서촌·화금) 중 하나로 마을의 역사는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경덕왕 때 화전동(花田東)’으로 불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1413년 진안감무(鎭安監務)가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촌으로 바꿨다고 한다. 하나 더. 마을 앞에는 마을의 오랜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듯 굵직한 나무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마을 숲으로 불리는 방풍림이 아닐까 싶다. 아니 마을의 약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한 비보림(裨補林)일지도 모르겠다.

 마을은 어딘가 먼 곳에서 꿈꿔오던 풍경을 보여준다. 담벼락은 마을 이야기와 문화를 담은 민화로 가득했고, 이끼가 가득 올라온 노거수들은 신령스러움까지 전해준다. 정월 초사흘에 찾아오면 당산제도 구경할 수 있단다.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숨은 명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동촌 양곡정미소이다. 마을 단위치고는 제법 큰 규모이지만 현재 가동을 멈춘 상태다. 그런데 그게 더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소음 하나 없는 교요함이 시간이 멈춘 듯한 평화로움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르겠다.

 14 : 54. 마을 앞 동촌교 다리를 건너 30번 국도(진무로)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진안고원 길이 국도를 따르지는 않는다. 또 다시 은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국도를 따라가기로 했다. 주어진 시간보다 10분이라도 먼저 도착하려면 은천의 둑길로 에돌아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산악회 운영진으로부터 어디쯤 오고 있느냐는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지만...주어진 시간보다 15분 정도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12 : 14. 날머리인 마령면사무소는 들러볼 수 없었다. 산악회버스가 면소재지 입구인 마령사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도착했다지만 식사까지 마친 회원들이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한가하게 면사무소까지 다녀올 수 있겠는가. 하는 수 없이 사진은 둘레길 도반의 것을 빌려왔다. 아무튼 오늘은 4시간 25분을 걸었다. 앱이 14.51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