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돗밤실’ 둘레길
여행일 : ‘22. 2. 6(일)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산행코스 : 이산면사무소→망월봉→약수봉→출렁다리→제비봉→흑석사→명학봉→묘봉→이산면사무소(거리/소요시간 : 5.81km/ 2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영주의 트레일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소백산 자락길’로 대변된다. 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고을 단위의 둘레길도 여럿 나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이곳 ‘돗밤실둘레길’이다. 돗밤실의 어원은 마을주변에 졸참나무가 많다는데서 유래했다. 굴밤(도토리)은 돼지밤이라고도 불리며 윷판에도 나오는 도(돗)는 돼지의 옛말이다. 이게 마을 이름(꿀밤마을)을 거쳐 둘레길로 변한 것이다. 둘레길은 이산면사무소에서 출발해 망월봉·약수봉·흑석사·제비봉·명학봉·묘봉을 거쳐 이산치안센터로 이어지는 약 5㎞ 남짓의 가벼운 트레킹 코스다. 탐방로도 무척 곱다. 전형적인 육산의 보드라운 흙길에다 나지막한 산봉우리들을 오르내리다보니 경사 또한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중간에 출렁다리가 둘이나 있어 스릴까지 더할 수 있다. 항간에 입소문이 퍼지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들머리는 이산면사무소(영주시 이산면 원리 445)
중앙고속도로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이용 가흥교차로(영주시 가흥동)까지 온다. ‘영주로’로 옮겨 시내 중앙시장 앞 사거리까지 간 다음 우회전하여 농어촌공사 앞 사거리로, 이곳에서는 좌회전하여 935번 지방도를 탄다. 시내를 빠져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국제조리고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 ‘영봉로’를 따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산면소재지인 원리에 이르게 된다. 면사무소 주차장이 둘레길의 들머리이다.
▼ 둘레길은 면사무소(지도의 ‘현위치’ 지점)를 기점으로 하는 순환형 코스이다. 이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단축코스를 보탰다.
▼ 산비탈에 기대놓은 계단을 오르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초입에 둘레길 안내도를 세워놓았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서는 게 좋겠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계단의 맨 위는 종탑으로 장식했다. 종이 달려있음은 물론이다. 1950년대 말 지서에서 의용소방대를 소집할 때 치던 종이었다니 면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온 일등공신인 셈이다. 그런 소중한 내력을 그냥 내버려둘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면사무소에서 보관해오다 돗밤실둘레길이 완공되면서 ‘행복의 종’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 이 종을 울리면 맑고 은은한 종소리가 행복·건강·사랑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안내판은 종소리를 ‘한 번 울리면 장수, 두 번 울리면 건강, 세 번 울리면 부자, 네 번 울리면 출세, 다섯 번 울리면 자손번창’이라 적고 있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한 번도 아니고 다섯 번씩이나 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줄을 서는 게 싫은 나는 그냥 통과해버리고...
▼ 탐방로는 무척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경사가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나무계단을 놓았다.
▼ 명품 둘레길이 어디 그리 쉽게 만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주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탐방로는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길을 깔끔하게 닦은 것은 기본. 갈림길은 물론이고 중요한 포인트마다 이정표를 세웠는가 하면, 조그만 공터라도 나올라치면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심지어는 꽃밭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런 정성들이 모여 만들어 낸 둘레길이니 저런 경고판이 아니더라도 심어놓은 꽃을 꺾거나 뽑아가서는 아니 될 일이다.
▼ 그렇게 얼마간 걷다가 만난 삼거리. 이석암 선생(‘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의 제안에 따라 왼편으로 들어서 본다. 이정표(망월봉/ 이산면사무소)에는 방향표시가 없지만 뭔가가 있기에 앞서가는 사람들이 다녀오지 않겠느냐며...
▼ 그의 말대로 멋진 조형물을 만날 수 있었다. 달을 형상화한 의자인데, ‘달맞이 포토존’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조형물에 앉아 느긋하게 일몰을 감상해보라는 모양이다. 참! 조형물 뒤로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공원 너머의 '이산문화마을'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둘레길은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를 잇는 능선길이다. 하지만 경사가 거의 없는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착한 길이다.
▼ 길을 나선지 20분 만에 망월봉(望月峰, 232m)에 올라선다. 쉼터를 겸하고 있는 정상은 도톰하게 솟아오른 것 말고는 특별할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정표(약수봉 0.7㎞/ 면사무소 0.6㎞)와 함께 세워둔 정상표지판이 그 흠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 망월봉은 ‘은혜를 갚은 토끼’를 위한 봉우리이다. 올가미에 걸린 토끼를 구해준 효자 성진이가 토끼의 도움으로 좋은 집을 짓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달님에게 드릴 떡을 만들며 소원을 빌던 곳이라고 해서 망월봉이란 이름이 붙었다나? 엉성한 스토리텔링이지만 이만치라도 만들어내느라 얼마나 고민했겠는가.
▼ 망월봉을 지난 탐방로는 민가가 있는 바닥까지 뚝 떨어진다. 이 근처 ‘돗밤실’ 마을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했다. 공자가 노(魯)나라 사람이고, 맹자가 추(鄒)나라 사람인 데서 유래한 말로 학문과 교육이 흥성한 지방을 가리킨다. 그래선지 안동 권씨의 세거지인 마을에는 경북도 문화재자료(632호)인 ‘도율종중고택(道栗宗中 古宅)’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앱을 아무리 검색해도 돗밤실이나 도율종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능선이 평지나 마찬가지기에 시간을 내어 다녀오려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민가(컨테이너 가건물)를 지나 건너편 산자락으로 들어붙는데 귀엽게 생긴 팻말이 눈에 띈다. ‘맥문동’의 특성과 효능을 적는 등 가족나들이 삼아 찾아올 수 있도록 하려는 아이디어일 수도 있겠다.
▼ ‘돗밤실둘레길’이 항간의 입소문을 탔다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았기에 저렇게 나무뿌리까지 속살을 드러내놓고 있을까.
▼ 망월봉에서 12분이면 약수봉(藥水峰, 261m) 정상이다. 이곳도 역시 봉우리답지 않은 봉우리다. 그저 밋밋한 능선에 약간 솟아오른 정도라고나 할까? 이정표(조개재 0.5㎞/ 망월봉 0.7㎞)와 정상표지판 말고도 벤치 서너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한 것도 망월봉과 똑 같다.
▼ 약수봉은 ‘병을 낫게 하는 신비의 옹달샘’이 있다는 봉우리다. 옛날 어느 여인이 이 봉우리에서 찾아낸 약수로 아들의 피부병을 고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일 동안 약수를 마시고 몸을 씻으면 신선이 된다는 얘기에 솔깃해 샘물을 막아 가둔 탓에 마을에 물난리가 났다나? 그래서 산신령은 두 모자를 거북바위로 만들어버렸단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이 다시 물길을 텄다는 우물과 거북바위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 끊임없이 솔숲을 걷는다는 것도 ‘돗밤실둘레길’의 특징 중 하나다. 그러니 숨을 들이킬 때마다 향긋한 솔내음이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건 당연. 피로가 쌓일 틈도 없다. 솔향은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품은 향기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 완주 인증을 위한 스탬프보관함도 눈에 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니 스탬프는 들어있지 않았다. 작은 흠이라 하겠다.
▼ 길은 또 다시 긴 내리막길로 변한다. 평지에 가까운 안부로 내려선다는 얘기일 것이다.
▼ 약수봉에서 내려선지 10분 만에 ‘조개재(蛤峴)’에 닿았다. 면소재지인 원리(오른쪽)와 석포리(왼쪽)를 잇는 고갯마루로 ‘흑석고개(이정표 : 흑석사↑ 0.6㎞/ 흑석쉼터→ 0.2㎞/ 이산면사무소↓ 2㎞)’라고도 불리는데, 이 근처에 ‘검은색 바위(黑石)’가 많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고개에는 최근 출렁다리가 놓였다. 현수교 양식의 보행자 전용 다리로 길이는 65m(폭은 2.6m)라고 한다.
▼ 출렁다리의 재미는 누가 뭐래도 출렁거림이다. 스릴로 인한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또 다리 위에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짜릿함은 늘어난다. 그렇다면 이 출렁다리는 별로다. 출렁거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 출렁다리 아래로는 차도(2차선 郡道)가 지나간다. 저 길(흑석사 옛길)은 또 흑석사로 연결된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능선을 따르기로 했다. 선두를 맡고 있는 윤대장으로부터 전화 안내를 받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진행하면 흑석사로 내려가는 산길을 만나게 된다는데 삭막하기 짝이 없는 포장도로를 일부러 걸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출렁다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비록 잠시지만 ‘자개지맥(紫蓋枝脈)’을 따른다. 이 지맥은 명학봉에서 둘레길과 헤어진다. 참고로 자개지맥이란 백두대간의 고치령(소백산) 동남쪽 1.1km 지점의 ‘920m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해서 자개봉(紫蓋峰 858.7m)·천마산·국모봉·박봉산·유릉산 등을 일구고 문수면(영주시)의 승문리 서천(西川)과 내성천(乃城川) 합수점(무섬교)에서 그 맥을 다하는 48.4km 길이의 산줄기이다.
▼ 출렁다리에서 10분쯤 걸었을까 흑석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이산치안센터↑ 2.3㎞/ 흑석사← 0.3㎞/ 흑석쉼터↓ 0.7㎞)’가 나왔다. 아까 윤대장이 전화로 알려주던 지점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제비봉(268m)’을 만났다. 윤대장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봉우리다. 이곳도 이정표와 정상표지판, 벤치 등의 편의시설을 배치했다.
▼ 제비봉은 ‘사람의 이마에 집을 지은’ 제비의 이야기다. 제비집을 이마에 얹고도 좋아했다는 노인은 어쩌면 성인군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가 제비의 집터로 점찍어 준 곳이 바로 이곳이란다. 그래서 이 봉우리는 재물의 기운이 넘쳐난단다.
▼ 흑석사로 내려가는 능선은 꽤 길었다. 왼편 발아래에 흑석사를 놓아두고도 빙 돌아가는 모양새이다.
▼ 그게 조금은 미안했던 모양이다. 중간에 쉼터까지 만들어놓은 걸 보면 말이다. 거기다 그네까지 매달아 도리어 멋진 구간으로 바꾸어버렸다.
▼ 산길이 끝나는 곳은 돌탑이 지키고 있었다. 정성들여 쌓은 흔적이 역력한 저 탑은 산행의 안전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절간을 찾는 이들의 소원성취를 위한 것일까?
▼ 산에서 내려서니 일주문이 반긴다. 그런데 이게 영 낯설다. 자랑스럽게 매달려 있어야 할 편액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옆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기에 살펴봤으나. 절의 내력과 보유 문화재(국보 1점, 보물 1점, 지방문화재 1점)에 대한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
▼ 몇 걸음 더 걷자 흑석사(黑石寺)가 그 전모를 드러낸다. 흑석사는 신라 때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 사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나올 뿐이다. 이후 1945년 상호스님(1895-1986)이 초암사의 부재를 옮겨와 중건하였으며, 1950년에는 정암산 법천사(法泉寺)에 있던 아미타불좌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 흑석사는 총 세 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아래는 종무소와 요사. 두 번째는 본당과 극락전, 그리고 맨 위에 석조여래좌상을 모신 전각이 들어섰다. 볼거리가 있는 두 번째 단부터 투어를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썰렁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편액이 붙어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치나 크기로 보아 본당(本堂)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 내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부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맞다. 이 절은 현재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짓는 중이라고 했다. 법천사에서 옮겨왔다는 아미타여래좌상의 배 안에서 나온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시기 위해서란다. 그러니 부처님의 형상을 따로 만들어 모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 극락전(極樂殿)은 본디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 곳이다. 그래서 이상향인 극락이 서쪽에 있으므로 보통 동향으로 배치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이 서쪽을 향하도록 되어있다.
▼ 이곳은 정암산 법천사(동명의 사찰이 많아 정확한 위치는 불명)에서 옮겨왔다는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셨다. 한국전쟁을 피해 잠시 초암사로 옮겼다가 다시 이 절로 옮겨 모시고 있단다. 저 부처님은 복덩어리라 할 수 있다. 개금불사 때 불상의 배 안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되었다니 말이다. 이 진신 사리와 사리함, 경전과 유품은 현재 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국보 제282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 아미타여래좌상(신발 벗기가 싫어 패스한 뒤 문화재청의 것을 빌려왔다)은 목조불상으로, 함께 발견된 기록들에 의해 조선 세조 4년(1458)에 법천사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단종과 세종의 여섯째 왕자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했는데, 금성대군을 아들처럼 보살폈던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와 효령대군, 왕실종친, 장인, 스님 등 275명이 시주자로 이름을 올렸단다. 불상은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와 팔, 배 주변에 나타난 옷의 주름에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중국에서 새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명나라 불상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란다.
▼ 맨 위는 석조여래좌상을 모신 전각이 올라앉았다. 전각의 좌우에는 소조산신상과 소조불상이 시멘트로 만든 감실 안에 모셔져 있다. 산신각과 칠성각이 아닐까 싶다.
▼ 전각에 모신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호, 내 사진이 별로여서 문화재청의 것을 옮겼다)’은 흑석사 부근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발굴하여 옮겨놓았다고 한다. 통일신라 후기 작품이라는데, 예술에 문외한인지라 문화재청의 글을 옮겨본다. <얼굴은 양감이 적절하고 전체적으로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신체는 안정감이 있어 보이지만 어깨가 약간 움츠려 들었고, 무릎 폭이 좁아진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이 나타난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얇은 옷은 자연스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양 발 앞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 석불의 뒤, 자연암벽에 새겨놓은 마애삼존불도 경상북도의 문화재(355호)이다.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을 돋을 기법으로 새겼는데, 본존불은 가슴 이하를 그리고 두 협시보살은 목 부분 이하를 생략해버린 특이한 모습이다. 신체 일부분만 새겨져 있지만 원형이 대체로 잘 유지되어 있으며,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단다.
▼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게 싫어 무작정 산자락을 치고 올라봤다. 그리고 100m도 되지 않는 지점에서 희미하나마 산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 잠시 후 봉우리답지 않은 봉우리에 올라섰다. 그런데, 도톰하게 솟아오른 한 지점일 뿐인데도 낯익은 표지기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게 아닌가. 세상의 봉우리란 봉우리는 모두 올라보겠다는 그네들도 이곳을 다녀간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비봉’을 잘못 찾았다. 아까 삼거리에서 흑석사로 내려가는 초입에 관청에서 만든 정상표지판이 버젓이 버티고 있었으니 말이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둘레길을 따른다.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난 돗밤실둘레길 특유의 산길이다.
▼ 그렇게 잠시 걷자 또 다른 출렁다리인 ‘송천교(松泉橋)’가 나온다. 소나무(松) 밭에 샘(泉)이라니. 이 부근에 아까 약수봉에서 거론하던 그 영험한 옹달샘이라도 있다는 얘기일까?
▼ 다리는 거짓말 좀 보태 넓이 뛰기 한 번이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짧다. 밧줄에 매달아 놓았으니 외형도 보잘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출렁거림만큼은 전국의 내로라하는 출렁다리들에 비해 조금도 뒤질 게 없었다.
▼ 다시 길을 나서는데 밋밋한 능선을 걷는 게 지루했던지 함께 걷던 이가 말을 건네 온다. 이곳 이산면(伊山面)에서 큰 인물이 많이 났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거론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맞다. 옛 문헌에 보면 ‘山伊의 이(伊)자 ‘尹’은 천하를 다스림이며, ‘人’을 덧붙여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니 ‘伊’는 ‘훌륭한 인재가 태어나는 곳’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박봉산 갈림길(이정표 : 명학봉↑/ 박봉산←/ 제비봉↓)’이다. 높이 389m의 박봉산(璞峰山)은 영주지역에서 해돋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또한 정상에서의 조망이 좋아 새해 첫날에는 해맞이 행사가 열리기도 한단다.
▼ 삼거리에서 6분. 자개지맥과 다시 헤어지는 지점인 명학봉(鳴鶴峰, 278,7m)에 올라섰다. 이곳도 이정표(묘봉 1㎞/ 제비봉 0.8㎞)와 정상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명학봉은 ‘돌을 물어 나르는 학’의 지혜에 대한 이야기다. 산속의 새들이 자신들의 소리를 내느라 다들 바쁜데, 학만은 묵묵히 돌을 물어다 탑을 쌓더란다. 그때 독수리가 나타나 새 사냥을 시작했는데도 학만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시끄러울 때일수록 묵묵히 자신의 일에 매진해야 한다나?
▼ 자개지맥과 헤어진 둘레길은 이제 묘봉으로 향한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는 착하디착한 구간이다. 이런 곳에서는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마침 주어진 시간까지 느긋하니 모처럼 ‘느림의 미학’이라도 시도해보면 어떨까?
▼ 원목으로 만든 벤치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엉덩이가 조금 불편하겠지만 얼마나 낭만스러운가.
▼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로 흑석고개 출렁다리가 나 여기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 명학봉에서 14분쯤 진행했을까 임도(이정표 : 묘봉/ 명학봉)를 만났다. 원리(오른쪽, 면소재지)와 휴천동(왼쪽)을 잇는 고갯마루다.
▼ 묘봉으로 가는 길은 원리 방향으로 50m쯤 내려가다 열린다. 가파른, 그러나 높지는 않은 산비탈에 나무계단이 놓여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임도로 내려서느라 엄청나게 고도를 낮추었던 모양이다. 능선이지만 농경지와 맞물려있으니 말이다. 그런 길은 묘봉의 아래까지 꽤 길게 이어진다.
▼ 능선이 하도 낮다보니 민가를 스치듯 지나기도 한다. 사람 사는 냄새를 맡아가며 걷는 구간이라 하겠다.
▼ 길은 묘봉 앞에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산은 굴곡진 인생과 같아 오르내림이 반복된다고 했다. 그러니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이에 상응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날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그래 쉬운 산이 어디 있으랴.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겠는가.
▼ 임도에서 13분을 걸어 맨 마지막 봉우리인 묘봉(猫峰, 209m)에 올라선다. 이곳도 이정표(면사무소 0.7㎞/ 명학봉 1㎞)와 정상표지판, 벤치 등 다른 봉우리들과 똑 같이 차려놓았다.
▼ 묘봉은 ‘거미처럼 살고 싶은 고양이’의 이야기이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놓고 무엇을 먹고 살이 쪘냐고 물었단다. 참새와 사마귀를 거쳐 거미에 이른 결론은 훔치거나, 뺏거나 싸우지 않고도 행복하게 잘 살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아등바등하면 살지 말라는 얘기기 아닐까 싶다.
▼ 이젠 내려갈 일만 남았다. 급할 것 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고도를 낮추어가는 산길을 8분쯤 걷자 탐방로는 이산파출소로 내려선다. 그런데 날머리의 게이트에도 행복의 종이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 아까 들머리에서 종을 울리지 않고 지나친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이산파출소 옆으로 내려서니 오른편 언덕에 ‘사모바위(紗帽岩)’라는 그럴 듯한 바위 하나가 놓여있었다. ‘사모’란 관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던 비단실로 짠 모자를 말한다. 출세·벼슬·큰인물 등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네 선조들은 부처가 바위 속에서 나왔다 바위 속으로 사라진다는 보편적 상상력을 가졌었다. 그런 상상력이 만들어 낸 하나의 단면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마을을 보살피는 상징물로 삼았을 게고 말이다.
▼ 날머리는 이산면사무소(원점회귀)
사모바위 앞에서 도로를 건너면 이산면사무소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둘레길은 한 바퀴 도는데 정확히 2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은 5.81km를 찍고 있다. 아무리 둘레길이라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능선을 걸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빨리 걸은 셈이다. 그만치 탐방로가 고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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