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둘레길 3코스(수레너미길)

 

여행일 : ‘21. 7. 24(토)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과 일원

여행코스 :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수레너미교→잣나무숲→수레너미정상→점터골삼거리→태종대(거리 및 시간 : 14.9km/ 실제는 12.77km를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치악산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총 길이 140㎞의 둘레길로 치악산국립공원을 넘나들며 치악산이 거느린 작은 산도 오르고, 주변의 작은 산골 마을도 지난다. 11개의 코스를 관할하는 지자체도 셋이나 된다. 하여 원주시가 길 조성을 주도했고 횡성군과 영월군이 거들었다. 오늘은 104.5㎞에 이르는 원주 권역에서 시작해 횡성권역에 이르는 ‘수레너머길’을 걷는다. 해발이 732m나 되는 고갯마루를 넘어야하기 때문에 잣나무 숲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으나, 옛날 스승을 찾기 위해 태종 이방원이 수레를 타고 넘었던 산길을 거닐어본다는 의미를 갖는다. 높은 고갯마루라고 해서 올라갈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고개까지의 거리가 3.6km나 되기 때문에 300m도 채 되지 않는 마지막 구간을 제외하고는 가파름도 거의 느낄 수 없다.

 

▼ 들머리는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900-1)

영동고속도로 새말 IC에서 내려와 국도 42호선을 타고 원주방면으로 들어오다 학곡삼거리(소초면 학곡리)에서 좌회전 학곡천을 거슬러 올라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구룡탐방지원센터를 겸하고 있는 이 건물의 앞에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 3코스인 ‘수레너미길’은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를 출발 수레너머고개를 넘어 태종대에 이르는 길이 14.9km의 자드락길이다. 이 구간의 특징은 높은 고갯마루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 부근을 빼면 가파른 구간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지만 산길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태종대에 이르기까지 6.8km의 마지막 구간이 대부분 포장길을 따르기 때문에 햇볕에 노출된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여름철의 무더위, 특히 오늘처럼 폭염 경보라도 내리는 날에는 최악의 코스가 될 수도 있다.

▼ 코스의 출발점은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이지만, 실제로는 ‘수레너미교(이정표 : 태종대 13.0㎞/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1.9㎞)’부터 트레킹을 시작했다. 원래의 출발점에서 이곳까지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도로가를 걷는다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2km 가까이나 줄여 걸을 수 있다는 귀띔이 더 매력적이었다. 오늘처럼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에 이보다 더 고마운 제안이 어디 있겠는가. 서슴없이 따라나선 이유이다.

▼ 오늘 걷게 될 ‘수레너미길’은 치악산 능선의 매화산과 천지봉 사이를 넘어가는 고갯길로 조선 태종 이방원이 스승을 만나고 싶어 수레를 타고 넘어갔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래선지 다리 초입에 수레 조형물을 배치했다. 하지만 왕이 탔다기보다는 여염집 농부들에게나 어울리는 허름한 마차다. 고증까지야 바라지는 않겠지만 누가 봐도 왕이 타고 다녔을 법한 마차를 놓아두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 출발 전에 인증사진부터 한 컷. 카메라 앞에 선 집사람의 표정이 무척 밝다. 하긴 ‘폭염 경보’까지 내려진 무더운 날씨에 2km나 덜 걷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 다리 아래는 ‘학곡천’이 흐른다. 아니 정확히는 구룡사를 거쳐 흘러온 학곡천과 수레너미재에서부터 흘러온 한다리골이 합수하는 지점이다. 그 뒤로 보이는 산은 물론 치악산이다.

▼ 탐방로는 마을길을 지난다. 길가에는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하나같이 민박이나 펜션의 간판을 내걸었다. 휴식을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 3코스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유난히도 자주 마을길을 지난다는 점이다. 때문에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갈림길을 만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이 나뉘는 곳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갈려나가는 길이 어디인지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오직 들머리(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와 날머리(태종대)의 방향과 거리만 표기해놓았다.

▼ 영락없는 ‘연초건초장(煙草乾燥場)’이다. 20세기와 함께 우리네 시야에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저런 풍경을 만나다니 행운이라 하겠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한해 땀 흘려 지은 담뱃잎을 저곳에서 말렸다. 잎을 널면서 아이들의 수업료를 걱정했을 테고, 반면에 쌀가마니나 연탄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초록 꿈’도 꾸었을 게다. 하지만 지금은 담뱃잎 대신에 사람이 머무는 모양이다. 그것도 멋진 방갈로형의 주택으로 변해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한다리골 야영장’ 간판이 눈에 띈다. 치악산 자락에서 발원해 학곡저수지로 흘러드는 ‘한다리골’의 냇가에 위치한 덕분에 캠핑장의 삼박자(숙박, 먹을거리, 즐길거리)를 다 갖추었다는 입소문을 탄 곳이다. 캠핑사이트 외에도 펜션까지 들어서있다니 가족단위 캠핑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춘 작은 주차장. 이어서 탐방로는 잠수교를 건너 또 다른 마을길로 들어선다. 이곳에서도 우린 잘 지어진 펜션 두어 채를 만날 수 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수레너미길’ 문패를 내건 아치문이 길손을 반긴다. 산길이 시작됨을 알려주는 치악산둘레길 특유의 시설물인데, 대문 앞 이정표(태종대 11.8㎞/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3.1㎞)는 ‘수리너미 고개’까지의 거리를 3.6km로 적고 있다. 이곳의 해발이 264m이니 앞으로 3.6km를 걸으면서 수직 450m를 치고 올라가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만도 고마운데 야자매트까지 깔아 비가와도 질척거릴 염려가 없다. 산을 보호하려는 노력도 엿볼 수 있었다. 길가 양옆에 나지막한 난간을 둘러 사람의 통행을 막는다.

▼ 명색이 국립공원인데 편의시설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곳곳에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시설은 벤치와 통나무의자 뿐으로 단순한 편이다. 하지만 쉼터의 상황에 따라 배치를 다르게 하면서 같은 듯 같지 않은 쉼터를 만들었다. 통나무의자만 따로 놓았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이를 둘로 나누는 재치도 부린다.

▼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5분쯤 걷자 나무다리(이정표 : 수레너미재 3.1㎞, 태종대 11.3㎞/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3.6㎞)가 얼굴을 내민다. 한다리골에 놓인 7개의 다리 가운데 첫 번째 다리인 ‘수레너미 1교’다. ‘1’에서 시작한 이 다리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숫자를 부풀려간다.

▼ 국립공원의 자랑거리인 ‘구호지점 표시목’이다. 구호지점(치악 11-01)과 국가지점번호 라사 5057-3601), 신고처 전화번호는 기본. 다른 지역의 것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산행에 꼭 필요한 해발(328m)을 적어 넣었다. 그동안 얼마만큼 올라왔고, 앞으로 얼마나 더 고도를 높여야 할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를 말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2교’는 입구에 만들어놓은 쉼터의 기교가 돋보이는 다리다. 벤치와 통나무의자를 양옆으로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조형미를 더했다.

▼ ‘3교(이정표 : 수레너미재 2.7㎞, 태종대 10.9㎞/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4.0㎞)’는 계곡에 들어가지 말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냇가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 그렇다고 이를 지킬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오늘, 그것도 맑으면서도 차가운 물이 저렇게 찰랑찰랑 흐르는데 말이다. 까짓 물놀이·목욕·취사·흡연 등 금지사항만 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는가.

▼ ‘3교’를 건너자 곧이어 잣나무 숲이 나타난다. 그런데 솔향기 그윽한 숲보다도 먼저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한 거리두기’. 코로나(COVID-19) 팬데믹이 만들어낸 새로운 풍경이다. 사실 산에서 만난 등산객들 대다수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스크를 가슴부위에 매달고 다니며 다른 사람과 교차할 때마다 탈착을 반복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서도 방역수칙을 지키는 우리 국민들을 보니 코로나바이러스가 물러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 탐방로는 울창한 잣나무 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숲에는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잣나무들이 한 가득이다. 그 사이를 걷고 있노라면 온몸으로 퍼지는 송진 내음에 황홀함마저 느끼게 된다. 잣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효과 덕분일 것이다. 피톤치드는 나무와 식물이 해충이나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스스로 만들어내는 휘발성 물질이다. 각종 감염 질환이나 아토피 질환 등은 물론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잣나무가 자연의 명의인 셈이다.

▼ 숲에는 ‘작은 숲속놀이터’도 조성되어 있었다. 미니 짚라인 같은 하늘다람쥐 기구와 거미줄처럼 생긴 해먹, 꼬맹이 숲속오두막 등 어린이들을 위한 기구가 설치되어 있어, 가족단위 트레커들에게는 최상의 쉼터가 될 수도 있겠다.

▼ 2km를 덜 걸어도 된다는 안도감이 집사람을 동심으로 돌려놓았나 보다. ‘하늘다람쥐’라는 기구에 매달리더니 나이도 잊은 채로 씽씽 난다. 하긴 해외여행 때 수십 미터도 더 되는 높은 곳에서 짚라인에 매달려 날아본 경험이 있으니 이까짓 정도야.

▼ 잣나무 숲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살짝 가팔라진다. 돌멩이가 널린 너덜길을 지나기도 한다. 그런데다 울창한 수목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구간이다. 그런 길을 25분 정도 걷자 ‘4교(이정표 : 수리너미재 1.0㎞, 태종대 9.2㎞/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5.1㎞)’가 나온다. 그나저나 이곳의 해발은 534m. 앞으로도 고도를 200m나 더 올려야한다. 수리너미재까지 1km밖에 남지 않았는데 걱정이다.

▼ 아니나 다를까 탐방로가 더 가팔라졌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 탐방로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한다리골’이 동행한다. 자연 속의 여유로움을 느끼기에 제격이라 하겠다. 그런 감정을 우리 부부라고 느끼지 않겠는가. 앞서가던 집사람이 냇가로 내려가더니 세수부터 하고 본다. 그래. 오늘 같은 무더운 날에는 저게 바로 신선놀음이다.

▼ 한다리골의 지류에 걸쳐놓은 ‘5교’와 해발 595m지점에 있는 ‘6교(이정표 : 수레너미재 0.5㎞/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6.2㎞)’를 지나자 ‘이름 없는 동굴’이라는 안내판이 얼굴을 내민다. 안내판에서 계곡 건너편을 유심히 보면 찾을 수 있는데, 안에서 노래를 부르면 행복을 주는 목소리를 얻게 된다는 동굴이다. 하지만 따라서 해보지는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사랑스런 목소리가 오고가는데 더 이상 바랄게 뭐가 있겠는가.

▼ ‘7교’를 마지막으로 나무다리와는 이별을 고한다. 굳이 나무다리가 아니어도 물길을 건널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 아니나 다를까 다시 만난 한다리골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 징검다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아니 많이 가파르다. 그 가파름을 배겨내지 못해 계단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데크계단에 돌계단, 침목계단 등 종류도 다양하다.

▼ 계단은 끝없이 이어진다. 데크 계단이 끝났다싶으면 돌계단, 경사가 더 심한 곳에는 침목계단을 놓았다. 이쯤에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이런 곳에서 과연 마차가 실제로 다녔을까? 내 생각엔 분명 아니다. 그래서 옛 얘기는 얘기일 따름인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에 해발 732m의 ‘수레너미재’에 올라섰다. 학곡리 한다리골(원주시 소초면)과 강림리(횡성군 안흥면)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로, 조선의 세 번째 왕인 태종 이방원이 그의 스승인 운곡 원천석을 만나기 위해 수레를 타고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가 멸망하자 새로운 나라의 관직을 거부한 원천석이 개성을 떠나 요 아래 강림리로 은거했기 때문이다.

▼ 이곳은 치악산 능선의 매화산과 천지봉 사이의 안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알리는 표식을 일체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방향의 능선이 모두 비법정탐방로이기 때문이다. 사라져버린 등산로에 대한 아쉬움은 ‘치악산둘레길’이 대신하고 있었다. 거대한 엄나무 그늘 아래에 둘레길의 ‘스탬프보관함’을 설치했다.

▼ 빠른 것을 중요시 여기는 21세기. 기다림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느린 우체통’은 동면(冬眠), 아니 여름철 휴가라도 갔나보다. 비닐로 꽁꽁 둘러싸놓은 것이 여간 흉물스럽지가 않다. 운영을 재개하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거라는 신호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이. 그것도 그리운 이로부터 편지가 날아드는 행운을 얻게 될 사람들의 숫자도 그만큼 줄어들 게 분명하다.

▼ 고갯마루를 넘은 탐방로는 이제 횡성(강림면)으로 향한다. 길은 순하기 짝이 없다. 가끔은 침목계단이 나오기도 하지만 경사가 거의 없는 흙길이 대부분인 것이다. ‘치’가 떨리고 ‘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는 치악산의 산세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라 하겠다. ‘수레너미 길’이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완만한 경사. 그래서 태종도 이 구간을 수레에 앉은 채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오른 낙엽송(일본잎갈나무) 군락지를 지나기도 한다. 언젠가도 얘기했다시피 낙엽송은 초봄의 연두색 신록과 가을의 황금빛 단풍이 특히 아름답다고 알려진다. 숲을 더욱 풍성한 색감으로 물들인다는 것이다. 참! 낙엽송은 침엽수(소나무류) 가운데 겨울에 낙엽이 지는 유일한 수종이기도 하다.

▼ 하늘은 빽빽이 들어찬 낙엽송 가지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하다. 비좁은 공간 사이를 볕이 겨우 비집고 들어오는 형국이다. 가지 사이로 비스듬히 내리쬐는 한 줌의 볕이 마치 금빛 쇠창살 같다.

▼ 횡성구간의 특징은 징검다리라 하겠다. 목교로 넘나들던 한다리골과는 달리 이곳 ‘수레너미골’은 징검다리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징검다리 옆에다 나무다리를 새로 놓고 있는 공사 현장도 눈에 띄었다. 사시사철 탐방이 가능하도록 꾸며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내려가는 길에는 또 다른 형태의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숲길 두어 곳에 데크로 제작된 대(臺) 모양의 쉼터를 만들어 땀을 식히며 자연경관을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 나무다리도 만났다.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계절을 가리지 않고 찾을 수 있는 탐방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라 하겠다. 맞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2006년 건설교통부가 주관한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에 선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 수레너미재를 출발한지 28분(계곡에서 발 담그고 간식을 먹은 시간은 뺐다) 만에 또 다른 아치문(이정표 : 태종대 6.8㎞/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8.1㎞)을 만났다. 이번 것은 산길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거꾸로는 산길의 시작이다. 치악산국립공원안내도와 함께 태종과 운곡선생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적은 안내판을 세운 이유일 것이다. ‘수레너미재’에 대한 설명이 되니 말이다.

▼ 이후부터는 마을길을 따른다. 계곡을 벗어나 태종대까지 가는 이 구간은 대부분 포장된 길이라 발의 피로도가 높고 햇볕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해발 500m를 넘나드는 고지대의 마을길은 색다른 정취를 보여준다.

▼ 이곳도 역시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이 즐비했다. 공사가 한창인 현장도 눈에 띈다. 하지만 원주 구간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펜션이나 민박집 간판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주말에나 머물다가는 별장형의 주택들일지도 모르겠다.

▼ 걷는 도중 산딸기 밭을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사랑꾼인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두 손 가득이 따더니 내 입에다 넣어준다. 그러자 새콤달콤한 기운이 입안에 가득해진다. 행복하다. 이런 게 사랑인가 보다.

▼ 마을길을 따라 2km 정도 내려오면 큼지막한 수레너미길 안내도와 함께 갈림길이 나타난다. ‘점터골 삼거리’로 주천강을 낀 마을길을 따라 태종대로 갈 수 있는 ‘강림마을길’과 치악산둘레길 3코스의 정식 루트로 나뉘는데, 둘레길 완주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오른편의 ‘수레너미길’을 따라 간다. 참! 이정표는 이곳에서 수레너미재까지의 거리를 3.6km로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날머리인 태종대까지는 아직도 4.6km나 더 걸어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이후부터는 농로 느낌이 강한 마을길을 따른다. 오뉴월 뙤약볕에 노출된다는 악조간만 있을 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밋밋하기 짝이 없는 구간이다. 그렇다고 역사 여행을 온 듯한 즐거움까지야 어디로 가겠는가. 고려의 멸망에 상심한 원천석이 조선의 관직을 거부하고 은거한 곳이 이곳 강림이다. 또한 임금의 자리에 등극한 이방원이 스승에 대한 그리움에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재가 ‘수레너미재’이다. 우리는 지금 태종이 지나갔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마차 대신에 우린 걷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

▼ 강림삼거리를 출발하고 15분쯤 흘렀을까 개울을 건너는가 싶더니 이내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올라서는 고갯마루는 ‘웃고사리재’일 것이다. 이 구간에서 우린 따가운 햇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봤자 15분이 채 되지 않았고, 길은 또 다시 따가운 뙤약볕 속으로 되돌아가버리지만 말이다.

▼ 오늘의 꽃은 ‘도라지꽃’으로 꼽아봤다. 강원도의 상징으로 ‘도라지꽃’만한 꽃이 없겠기에 말이다. 거기다 그 귀하다는 ‘백도라지’인 것이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 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에 철철 넘친다.’라는 노래도 있지 않는가. 그 귀하다는 ‘백도라지’를 만났으니 행운이라 하겠다.

▼ 오뉴월 불볕에 버티다 못한 집사람이 드디어는 양산을 펼쳐들었다. 숙부님 문병 차 지방에 내려갔을 때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매제가 선물한 우산이다.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것이라선지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트레킹 때마다 양산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 이 구간은 아래 사진과 같은 풍경의 연속이다. 마을을 지났다싶으면 언덕이 나오고, 그 언덕을 넘었다싶으면 또 다른 마을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 그래선지 강원도의 속살도 심심찮게 엿볼 수 있었다. 푸르름으로 뒤덮인 강원도의 들녘을 옥수수밭과 감자밭이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감자밭에는 오가는 농부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하지만 눈에 익은 풍경은 아니었다. 옛날처럼 직접 캐면서 주워 담는 게 아니라 트랙터가 갈아놓은 땅에서 사람들은 그저 주어 담기만 하면 된다.

▼ 새로운 풍경도 만날 수 있었다. 감자나 옥수수 등 조상 대대로 해오던 밭작물 대신에 특용작물이라 할 수 있는 인삼을 재배하고 있는 것이다. 정겨운 풍경이 사라져버린 게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공산주의 사회도 아닌데 농가소득을 나라에서 보전해 줄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 두어 곳의 목장도 스치듯 지난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아오던 목장들과는 달리 깔끔한 외모를 지녔다. 식품의 ‘안전관리인증기준(HACCP SYSTEM)’ 적용 사업장임을 자랑하는 안내판에 고개가 끄떡거려지는 이유이다. 아니나 다를까 ‘롯데백화점’의 횡성한우 지정농장이라는 입간판도 눈에 띄었다.

▼ 삼복 뙤약볕에 노출된 채로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탐방로가 드디어는 숲속으로 들어선다. 강림삼거리에서 1시간 15분쯤 떨어진 지점인데, 널찍한 임도지만 울창한 소나무 숲이 햇볕을 가려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새로운 기분으로 조금 더 걷자 치악산국립공원 ‘부곡 공원지킴센터’로 들어가는 2차선도로가 나오고, 우린 이곳에서 ‘횡지암(橫指岩)’이라는 의미 있는 안내판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임도 곁의 가래골을 거슬러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바위로, 조선 세 번째 임금인 태종과 그의 어릴 적 스승인 운곡 원천석에 얽힌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원천석이 이 바위에 올라앉아 제자인 태종을 잘못 가르쳐서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빗길로 횡(橫)’자에 ‘가르칠 지(指)’자를 쓰는 이유란다. 안내판은 또 태종이 원천석을 만나러 왔을 때 노구소(老嫗沼)에서 만난 노파가 원천석이 간 방향을 ‘빗 가리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얘기도 적고 있었다.

▼ 날머리는 ‘태종대(太宗臺,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 2116)’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100m쯤 내려가자 ‘치악산국립공원’이 시작됨을 알리는 입간판이 나타난다. 건너편 길가에는 구간안내도와 이정표(4코스 초치 26.5㎞/ 3코스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14.7㎞) 등 ‘수레너미길’이 종료되었음 알리는 각종 시설물들이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3시간 5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은 12.77km를 찍고 있다. 오늘처럼 폭염 경보까지 내려진 무더운 날, 그것도 해발이 700m를 훌쩍 넘기는 고갯마루를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오르내리는 경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완만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 ‘태종대(太宗臺)’에 대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안내판의 뒤가 ‘태종대’로, 원천석(元天錫) 선생의 강직하고 굳은 선비의 절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장소다. 이방원이 왕위(태종)에 오른 후, 옛 스승인 운곡(耘谷)에게 다시 관직을 맡기고 정사를 의논하고자 이곳을 찾았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에 방원이 운곡을 찾아왔을 때 머물던 곳이라고 하여 처음에는 ‘주필대(駐蹕臺)’라 부르다가 후일 방원이 죽은 뒤 그의 시호(諡號)를 따 ‘태종대’로 고쳐 부르게 됐다. 그래선지 ‘태종대’라는 비각(碑閣)의 현판에도 불구하고 안에는 ‘駐蹕臺’라고 적힌 빗돌이 모셔져 있었다.

▼ ‘태종대(太宗臺)’라는 휘호는 비각 너머의 벼랑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10길쯤 되어 보이는 바위벽에 ‘太宗臺’라 음각한 뒤 붉은색으로 채색했다. 그밖에도 자잘한 글씨가 여럿 적혀있었으나 읽어보지는 않았다.

치악산 둘레길 2코스(구룡길)

 

여행일 : ‘21. 7. 10(토)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일원

여행코스 : 제일참숯→둘래길 카페→새재골→정상쉼터→구룡야영장→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거리 및 시간 : 7.2km/ 실제는 6.62km를 2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치악산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총 길이 140㎞의 둘레길로 치악산국립공원을 넘나든다. 치악산이 거느린 작은 산도 오르고, 원주혁신도시와 작은 산골 마을도 지난다. 11개의 코스로 나누어져 있는데 관할지자체도 세 곳이나 된다. 하여 원주시가 길 조성을 주도했고, 횡성군과 영월군이 거들었다. 치악산은 험하기로 소문난 산이다. 정상을 오르다 보면 ‘치’가 떨리고 ‘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는 낱말풀이까지 생겨났을 정도이다. 하지만 둘레길은 다르다. 다채로운 풍광을 감상하며 걷기 좋은 순한 길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은 104.5㎞에 이르는 원주 권역의 첫 번째 구간인 ‘꽃밭머리길’에 이어 두 번째 구간인 ‘구룡길’을 연속해서 걷는다. 이 구간은 해발 660m의 고갯마루를 넘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물 맑은 새재골을 거슬러 올라가는가 하면, 울창한 잣나무 숲을 거닌다는 특징도 있다. 시간이 나면 천년고찰 구룡사도 함께 둘러보길 권한다.

 

▼ 들머리는 제일 참숯 주차장(원주시 소초면 흥양리 766)

영동고속도로 원주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 원주·제천 방면으로 내려오다 흥양교차로(소초면 흥양리)에서 빠져나와 ‘노루고개길’로 옮긴다. 곧이어 만나는 ‘흥양성결교회’ 앞 삼거리에서 왼편 ‘하초구길’을 타고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상초교(橋)’에 이르게 된다. ‘하초구 버스정류장’이 있는 이곳이 들머리가 된다. 실제 들머리인 ‘제일 참숯’은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2코스인 ‘구룡길’은 제일참숯을 출발 물 맑은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 ‘새재’를 넘은 다음 구룡사계곡을 거쳐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에 이르는 길이 7km의 둘레길이다. 다른 코스들에 비해 무척 짧은 거리라고 봐야겠다. 이는 해발이 600m도 넘는 고개를 오롯이 넘어야만 하는 힘든 여정이 감안되지 않았나 싶다.

▼ 1코스와 2코스의 경계임을 알려주는 시설물은 주차장의 한켠에 설치되어 있다. 치악산둘레길의 종합안내도를 가운데에 두고 가야할 방향에 구룡길안내판, 그리고 반대편에는 꽃밭머리길의 안내판을 배치했다. 이정표(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7.0㎞/ 국형사 11.2㎞)와 코스지도를 넣어두는 보관함도 보인다.

▼ 이정표가 가리키는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띄엄띄엄 전원주택들이 들어서있는 한적한 시골길이다.

▼ 대체 어떤 고양이이기에 사례금이 저리도 많을까? 집사람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명료했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반려묘도 있다는 것이다. 반려동물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민가가 하도 예뻐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집 안팎이 온통 항아리로 치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일일이 구멍을 뚫어놓아 뭔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치장의 수준을 뛰어넘어 하나의 예술 장르로 승화되었다는 느낌이다.

▼ 아니나 다를까 뒤편에 카페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둘래길’이란다. 장난삼아 틀리게 적었는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둘레길’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잠깐의 일탈이 주는 낭만이랄까?

▼ 본격적인 트레킹은 ‘둘래길 카페’ 근처에서 열린다. 화장실이 딸린 작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2코스(구룡길)의 산길 구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아치형 대문은 이 화장실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이정표(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6.0㎞/ 제일참숯 1.0㎞)도 보인다. 새재의 정상에 마련된 쉼터까지는 2.3km, 계속해서 오르막길일 테니 고생깨나 해야겠다.

▼ 대문의 뒤로는 ‘흥양천’의 지류가 흐른다. 그 개울에 다리가 놓여있다. 새재골에 놓인 10개의 다리 가운데 하나인 ‘구룡길 1교’로 이들 다리는 상류로 올라갈수록 그 숫자를 부풀려간다.

▼ 때는 바야흐로 삼복더위를 향해 달리고 있다. 아니 이미 무더위의 한복판에 와있다. 시원한 물놀이가 곧 천국이 되는 시기인 것이다. 그러니 모처럼 물을 만난 집사람이 그냥 있을 리가 없다. 쪼르르 냇가로 내려가더니 신발부터 벗고 본다. 족탕에 세수 정도는 하고 가야하지 않겠느냐면서 말이다.

▼ 두 번째 다리는 아예 이름표까지 매달고 있었다. 다리가 멋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탐방로에 꼭 필요한 필수시설이다. 만일 다리가 놓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저 물길을 건널 수 있었겠는가. 장마철에는 아예 통행이 불가능했을 테고 말이다.

▼ 새재골은 길이가 2km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골짜기다. 하지만 흐르는 물만큼은 부족함이 없다. 크고 작은 바위틈을 힘차게 휘돌아 흐르는데, 옛 사람들이 시로나 읊어대던 그 옥수다. 아직은 입소문을 덜 탔는지 청정함을 잃지 않았다.

▼ 탐방로는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개울가인데도 불구하고 걷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길을 닦았고, 그게 불가능한 곳에는 데크 로드를 설치했다.

▼ 개울의 바닥이 암반으로 이루어진 곳이 의외로 많이 눈에 띈다. 널찍한 반석위로 옥류가 흐르니 물놀이하기에 이만한 곳도 없겠다. 깨끗한 암반위에 앉아 거울처럼 미끄러져 가는 물줄기를 보면서 가족끼리 도란도란 얘기라도 나누다 보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정도 돋아나지 않을까?

▼ 쏠쏠한 계곡미와 풍부한 수량, 거기다 경사가 거의 없는 평탄한 천변에 잘 다듬어놓은 탐방로, 울창한 수목이 햇볕까지 가려주니 여름철 코스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 ‘구룡길 3교’는 꼬맹이 다리다. 본류가 아닌 세류에 걸쳐놓았기 때문이다.

▼ 물줄기의 계곡 곁을 잠시도 벗어나지 않는 탐방로는 시원하여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철 코스로는 제격이다.

▼ 계곡물은 급류일수록 깨끗하다. 저처럼 암반 위 옥류수라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래선지 물놀이 나온 젊은이들이 더러 보였다.

▼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돌멩이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도 난 작은 돌멩이 하나 얹어본다. 그리고는 오늘따라 부쩍 힘들어하는 집사람에게 힘을 실어줄 것을 간절히 바래본다.

▼ 암반이 좋다보니 탁족을 하는 트레커(trekker)들이 종종 보였다. 탁족은 발의 고단함만 씻는 것이 아니라 발을 지탱해준 산의 수고로움도 함께 씻는 일이다. 나를 받아준 산에 대한 예의라고나 할까? 참! 수풀로 가려진 곳에서 ‘알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계곡물에 온몸을 풍덩 던지고 전신에 절어 있는 먼지와 피로를 계곡물에 말끔히 흘려보내는 일종의 정화활동이다.

▼ 치악산둘레길은 투박한 곳도 많다. 제주올레길이나 해파랑길, 남파랑길, 서파랑길, 부산갈맷길 등이 바다를 낀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길이라면, 치악산둘레길은 거칠고, 투박한 길로 평가된다. 덕분에 사계절이 뚜렷한 팔색조 매력을 보여준다고 한다.

▼ ‘6교’까지 왔는데도 탐방로는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씩이라도 고도를 높여가는 게 우리에겐 유리한데도 말이다.

▼ 2코스의 얼굴마담은 나리꽃으로 꼽아봤다. 여름 숲속 그늘에 핀 나리꽃처럼 강렬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순결’이라는 꽃말 또한 마음에 쏙 든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지키려 노력했던 화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 길이 험하지도 않은데, 덕분에 힘들 일이 없는데도 쉼터는 쉬었다가라고 손짓을 한다. 그게 무료하면 둘레길에서 서식하는 조류들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가란다.

▼ 다리를 걸칠 수 없는 곳에는 징검다리를 놓았다. 그나저나 아직도 해발은 423m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고도를 200m 이상 더 높여야만 정상쉼터에 올라설 수 있다. 남은 거리가 1.3km이니 얼마 안 있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걱정이다.

▼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낙엽송 숲을 지나기도 한다. 울창한 숲이 조그만 틈을 열자 그 사이로 햇빛 한 점 슬며시 찾아든다. 오락가락하던 여우비가 잠시 물러갔나 보다. 참고로 낙엽송은 목재용도로 활용이 많이 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림 수종이다. 초봄 연두색 신록과 가을의 황금빛 단풍이 아름다워 숲을 더욱 풍성한 색감으로 물들이는 나무이기도 하다.

▼ 탐방로의 경사가 약간 가팔라졌다. 하지만 아직은 초급 수준이다.

▼ 물이 풍부한 골짜기인지라 곳곳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걷다보면 작은 폭포와 소(沼), 담(潭)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한 침엽수림 사이에 꽤 많은 단풍나무가 섞여 있다. 치악산은 단풍이 아름답다고 해서 예로부터 ‘적악산’으로 불리어왔다는데, 그 연원을 이 골짜기에서 찾아도 될 것 같다. 지금은 비록 파릇파릇하지만 가을이면 화려한 자태를 뽐낼 테니 말이다.

▼ 골짜기는 두어 곳에서 ‘두물머리’를 만들기도 한다. 고만고만한 물줄기가 합쳐지는데, 탐방로는 이 가운데 하나를 골라 새재 고갯마루로 향한다.

▼ 그렇게 얼마를 올랐을까 안내판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화전민들이 생계수단으로 운영하던 ‘숯가마터’가 이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다.

▼ 탐방로는 숯가마터(이정표 : 정상쉼터 0.8㎞,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4.5㎞/ 제일참숯 2.5㎞)를 지나면서 가팔라진다. 그래선지 이후부터 침목계단이 심심찮게 나타난다.

▼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는 구간도 있었다. 때문에 탐방로는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고도를 높여간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치악산은 ‘치가 떨리고 악에 받쳐 올라간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농담도 있다. 그만큼 가파르다는 얘기일 것이고, 죽을 고생을 하고나서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부부의 현재 상태가 딱 그와 같으니 문제다. 설마 정상으로 오르는 탐방로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이미 지쳐버린 우리의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니 어쩌겠는가. 집사람의 발걸음이 자꾸만 더뎌지는 이유일 것이다.

▼ 들머리인 제일참숯을 출발한지 1시간 만에 ‘구룡길 10교’에 도착했다. 다리가 아닌 평범한 데크로 보이는데도 ‘구룡길 10교’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아니 다리 아래에 작은 개울이 있기는 하다. 한 걸음에 뛰어 넘을 수 있을 정도로 작지만 개울은 개울이 아니겠는가.

▼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는 해발이 600m나 되는 산중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감염 예방을 위해 거리두기를 지켜주라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스크를 쓴 채로 거친 호흡을 어떻게 배겨내란 말인가. 패닉(panic)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 정상에 가까워지자 길은 또 다시 고와진다. 널찍한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집사람의 발걸음은 갈수록 더뎌질 따름이다. 갈 길은 아직도 먼데 걱정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 만에 ‘새재’ 정상(해발 689m)에 올라섰다. 왼골 또는 무너미로도 불리는데, 옛날 학곡리 주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넘나들던 고갯마루다. 장날이면 고개를 넘어 장에 갔고, 학생들은 매일 같이 이 고개를 넘어 학교를 오갔다. 지친 다리를 이끌며 인생사 쓴 맛을 주저리던 옛사람들의 얘기가 들리는 듯하다.

▼ 정상은 현재 쉼터로 조성되어 있다. ‘심장안전쉼터’란다. 심장을 위해 휴식을 취하라며 ‘조금 늦어도 괜찮아요. 남들보다 더 많이 볼 수 있거든요’라는 사족까지 달았다. 널따란 공터에는 통나무를 세워 의자를 만들었는가 하면, 구호지점표시목(10-95)과 구급함까지 배치했다. 방금 올라온 코스가 둘레길치고는 많이 힘들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 이곳은 2코스(구룡길)의 첫 번째 인증지점이기도 하다. 스탬프 찍는 과정을 거르는 우를 범하지 말자.

▼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날머리인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까지는 3.7km.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무척 편했다. 널찍한 길은 바닥까지 보드랍다. 거기다 경사 없는 길엔 굵은 소나무들까지 울울창창한 숲을 이룬다. 그야말로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숲길이다.

▼ 기묘하게 생긴 소나무도 만났다. ‘차마 말로는 못하겠다’던 어느 보양강장제의 TV광고에 딱 어울리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뭔가를 쏙 빼다 닮았는데 차마 말로는 표현 못하겠다.

▼ 하산을 시작한지 30분 남짓 되었을까 탐방로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는 울창한 잣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 숲에는 아름드리 잣나무가 가득하다. 잣나무 군락도 꽤 너른 편이다. 거기다 산책로는 물론이고 벤치 등의 편의시설들도 곳곳에 설치했다. 요즘처럼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는 치유와 힐링의 공간으로 최적일 수도 있겠다. 팬데믹(pandemic)’ 때는 언텍트(untact) 여행이 대세라고 하지 않았던가.

▼ 꼬불꼬불 S자형으로 내놓은 길은 한마디로 멋지다. 이런 정도의 경사라면 곧바르게 치고 올라가도 되련만 한껏 멋을 부렸다. 모처럼 만나는 잣나무 숲이니 조금이라도 더 숲속을 거닐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하긴 건강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가운데 하나가 잣나무가 아니던가.

▼ 2코스의 두 번째 스탬프 보관함은 이곳 잣나무 숲에 설치되어 있었다. 1만원을 주고 구입한 패스포드를 스탬프 밑에 밀어 넣고 누르면 이곳을 지나갔다는 인증표식이 찍힌다.

▼ 10분 남짓 거닐던 잣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는 탐방로의 산길 부분이 끝났음을 알리는 아치형 출구가 만들어져 있었다. 탐방로는 이곳(이정표 :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1.2㎞/ 정상쉼터 2.5㎞, 제일참숯 5.8㎞)에서 ‘구룡마을길’로 내려선다. 이제 도로를 따라 날머리인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까지 내려가면 된다.

▼ 산자락을 빠져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구룡계곡은 널찍한데다 흐르는 물까지 충분했다. 물놀이하기에 이만한 곳도 없겠다. 하지만 산행 삼락(三樂) 가운데 최고라는 ‘계곡물에 씻기로 마무리하기’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락가락하던 여우비가 조금 전부터 국지성 호우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앞이 안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지는데 물놀이라니 언감생심이다.

▼ 국립공원관리사무소로 내려가는 길. 길가에 세워놓은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우리에게 익숙한 황장금표가 아니라 ‘황장외금표’였기 때문이다. 황장금표란 본디 왕과 왕비의 관(棺)인 재궁(梓宮)과 궁궐 등의 건축 재료로 쓰인 황장목(黃腸木)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금표다. 그렇다면 이곳은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한 바깥쪽 경계선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이곳 치악산에는 이곳 말고도 2개의 황장금표(학곡리, 비로봉)가 더 있다.

▼ 몇 걸음 더 걷자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1.0㎞/ 제일참숯 6.0㎞)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오른편(아래 사진에서는 왼편)은 구룡사로 올라가는 길이다. 치악산 하면 구룡사(龜龍寺)를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부부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게릴라성 집중 호우가 몰아치는데다 집사람의 체력까지 방전되어 버렸으니 절구경은 언감생심이 아니겠는가.

▼ 이어서 잠시 후에는 ‘구룡 자동차야영장’을 만난다. 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야영장이어선지 조경이나 관리상태가 양호하다고 입소문을 땄다. 하지만 예약은 조금 힘들다고 한다. 1박에 1만5000원(카라반은 6만원)이라니 얼마나 인기가 높겠는가.

▼ 야영장에는 카라반들이 늘어서 있었다. 타고 온 차량을 바로 옆에다 주차할 수 있는 편리성까지 갖췄다. 준비해 온 먹거리를 이고지고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편한 휴식을 취하고 돌아갈 수 있겠다.

▼ 탐방로는 이제 도로(구룡사로)를 따라 내려간다. 길가에 보도(步道)를 따로 만들어놓았는데, 가로수용으로 심어놓은 굵직한 느티나무들을 살려놓은 채로 데크를 깐 것이 눈길을 끈다.

▼ 5분쯤 더 걸으면 아치형 다리가 나온다.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로 연결시키는 보행자용 다리이니 망설이지 말고 건너도록 하자.

▼ 날머리는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900-1)

다리를 건너자 음식점 두어 곳과 편의점이 보이고, 그 옆에 치악산국립공원소가 들어서 있다. 구룡지구의 탐방지원센터이다. 지원센터 앞 널따란 주차장에는 치악산체험학습관도 들어서 있었다. 그나저나 2코스를 걷는 데는 2시간 30분(물놀이 시간을 뺐다)이 걸렸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6.62km를 찍고 있다. 1코스(10.45km)를 2시간 50분에 걸었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힘든 코스였다는 얘기일 것이다. 거기다 1코스와 2코스를 함께 탔으니 그 피로감이 오죽했겠는가.

▼ 2코스(구룡길)와 3코스(수레너미길)의 경계임을 알리는 이정표(태종대 14.9㎞/ 제일참숯 7.0㎞)는 탐방지원센터 앞에 세워져 있었다.

치악산 둘레길 1코스(꽃밭머리길)

 

여행일 : ‘21. 7. 10(토)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과 소초면 일원

여행코스 : 국형사주차장→성문사→관음사→원천석 묘역→황골삼거리→하초교→제일참숯 주차장(거리 및 시간 : 11.2km/ 실제는 10.45km를 2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치악산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총 길이 140㎞의 둘레길로 치악산국립공원을 넘나든다. 치악산이 거느린 작은 산도 오르고, 원주혁신도시와 작은 산골 마을도 지난다. 11개의 코스로 나누어져 있는데 관할지자체도 세 곳이나 된다. 하여 원주시가 길 조성을 주도했고, 횡성군과 영월군이 거들었다. 치악산은 험하기로 소문난 산이다. 정상을 오르다 보면 ‘치’가 떨리고 ‘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는 낱말풀이까지 생겨났을 정도이다. 하지만 둘레길은 다르다. 다채로운 풍광을 감상하며 걷기 좋은 순한 길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은 104.5㎞에 이르는 원주 권역의 첫 번째 구간인 ‘꽃밭머리길’을 걷는다. 이 구간은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길이 나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 숲속에는 국형사와 관음사, 보문사 같은 사찰들이 여럿 들어앉았다. 고려 말의 충신인 운곡 원천석의 얼도 함께 느껴볼 수 있다.

 

▼ 들머리는 국형사 주차장(원주시 행구동 98)

영동고속도로 원주 IC에서 내려와 국도 5호선 원주·제천 방면으로 내려오다 행구교차로(원주시 행구동)에서 빠져나와 ‘행구로’로 옮긴다. 곧이어 만나는 ‘이마트24’ 앞 삼거리에서 오른편 ‘고문골길’을 타고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국형사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시간이 없어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국형사(國亨寺)는 신라 경순왕 때 무착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원래의 이름은 고문암(古文庵). 조선 태조 때 국형사로 세를 확장했다. 창건연대가 신라시대라고 하지만 이를 증명하는 당시의 유물이나 유적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는 것도 알아두자.

▼ 한반도 중부의 내륙산간에 위치한 치악산은 16번째로 지정(1984년)된 국립공원이다. 면적은 175.668㎢, 주봉인 비로봉(1,288m)을 중심으로 동쪽은 횡성군과 영월군, 서쪽은 원주시와 접하고 있다. 이 치악산의 둘레를 한 바퀴 돌며 역사·문화·생태자원을 직접 느껴볼 수 있도록 내놓은 길이 ‘치악산둘레길’이다. 2019년 4월 1단계(1~3코스)로 33.2㎞의 개통한데 이어, 2021년 5월 2단계(4~11코스)로 106.0㎞를 추가 개통함으로써 전체 11개 코스, 총연장 139.2㎞가 완성됐다.

▼ 1코스인 ‘꽃밭머리길’은 국형사를 출발 성문사와 관음사, 꽃밭머리, 원천석 묘역, 황골마을을 거쳐 제일참숯에 이르는 11.2km 거리의 둘레길이다. 이 구간의 특징은 마을길과 산길은 번갈아가며 걷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덕분에 보기만 해도 머물고 싶어지는 전원주택들과 솔향기 풀풀 넘치는 소나무 숲을 번갈아가며 만나게 된다. 두어 개의 사찰과 절개의 상징인 원천석의 묘역은 덤으로 쳐도 되겠다.

▼ 들머리는 주차장의 한쪽 귀퉁이에서 열린다. 아치형 대문 앞에 이정표(제일참숯 11.2㎞)와 함께 ‘치악산둘레길 종합안내도’ 및 ‘꽃밭머리길 안내도’를 세워놓았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한번쯤 살펴보는 지혜를 발휘해보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대문 너머의 바닥은 나무 데크를 깔아 장애인들도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널찍한 쉼터도 만들어두었다. 쉬엄쉬엄 걸으며 산천경개를 감상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 하지만 데크 로드는 오래가지 않는다. 갈림길이 나오자마자 오솔길로 변해버린다. 이런 갈림길을 유난히도 자주 만나는 게 ‘치악산둘레길’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길 찾기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빠짐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으니 ‘제일 참솣’ 방향으로만 진행하면 된다.

▼ 무장애 길은 맛보기였던 모양이다. 오래지 않아 개울이 나타나는가 하면 침목계단이 가지런히 놓여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비탈진 곳은 계단을 놓고 질척거리는 곳에는 야자매트를 깔아 남녀노소가 큰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도록 했다.

▼ 개울을 지나면서 탐방로는 순수한 오솔길로 변한다. 산자락의 아랫도리를 따라 내놓은 구불구불한 산길이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힘들이지 않고도 걸을 수 있는 수월한 구간이지만 이마저도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는 작은 쉼터도 여럿 만들었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벤치를 놓아 최대한 자연에 동화되도록 했다.

▼ 언제부턴가 길가에 수령이 수십 년은 족히 넘었음직한 노송들이 수두룩해졌다. 치악산둘레길의 또 다른 특징이 아닐까 싶다. 오늘 1코스와 2코스를 함께 답사했는데, 트레킹을 마칠 때까지 이와 비슷한 풍경들이 계속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 성문사에 가까워질 무렵 시야가 툭 터지는 곳을 만났다. 이 일대는 치악산 국립공원을 등지고 앉아 광활한 원주 벌을 내려다보는 형세이다. 원주공고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그 뒤로는 원주 혁신도시의 고층아파트들이 마치 성냥갑을 세워놓은 것처럼 각을 지어 늘어서 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소나무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성문사(星門寺)’를 만났다. 대한불교 천태종 소속의 사찰로 첫 법회를 연 1971년만 해도 이 사찰은 원주시 학성2동에 있었다고 한다. 태장2동과 단계동 회관을 거쳐 2002년에 이곳으로 신축 이전했단다. 하지만 사찰에서 세운 안내판에는 1970년에 낙성했다고 적고 있었다. 이 골짜기가 예로부터 ‘설당밭골(說堂田골)’로 불려오고 있었는데, 이는 ‘설법을 하는 집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늦게나마 이곳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카페 ‘울산 금강불교대학’에서 게시한 ‘천태종 사찰방, 원주 성문사’편에서 발췌했다.)

▼ 전각은 의외로 단출했다. 단청이 고운 ‘대불보전’과 현대식 건물 한 동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크기만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동자승이 애교를 부리고 있는 ‘성무유치원’은 3층. 7칸이 이층으로 올라간 대불보전은 양 옆에 누각까지 거느리고 있다. 50년의 짧은 역사를 감안하면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실상묘법연화경(實相妙法蓮華經)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천태종은 종조로 천태지자대사(중국인)를 그리고 개창조로 대각국사 의천, 중창조로 상월원각대종사를 모시며,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밤에 수행·정진함을 신행의 바탕으로 삼는다.

▼ 절간의 역사와 종파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 옆으로 난 시멘트계단을 오르면 탐방로는 또 다시 산속으로 파고든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사가 조금 심하다. 이를 못 버틴 탐방로가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고도를 높이기도 한다.

▼ 능선에 올라서자 길이 둘(이정표 : 관음사→ 1.8㎞, 제일참숯 9.5㎞/ 성문사↓ 0.5㎞, 국형사 1.7㎞)로 나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오른편으로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 표지목(1-9-1)은 이곳에서 기존의 둘레길 대신에 새로 내놓은 왼편 길을 따르란다.

▼ 안내판과 현수막까지 걸어놓았다. 고둔치솔가를 거쳐 세명선원으로 내려오는 기존 둘레길을 안전사고 예방을 이유로 막아놓았다는 것이다.

▼ 남은 거리가 부담스러운 우리로서는 편해져서 더 좋았다. 위로 오르지 않고 내려가는 길이 계속되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거기다 길가 풍경도 심심찮게 변해준다.

▼ 오늘의 꽃은 ‘산수국’으로 삼아봤다. 너무 흔한 개망초 말고는 가장 많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변하기 쉬운 마음’이라는 꽃말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뭐가 대수겠는가. 꽃이라는 게 본디 아름다우면 그만인 것을.

▼ 탐방로는 아래 사진과 같은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다리가 보이지 않으니 장마철 물이라도 불 때는 통행에 제한을 받을 수도 있겠다.

▼ 잠시 후 탐방로는 마을길(이정표 : 관음사 1.3㎞, 제일참숯 9.0㎞/ 성문사 1.0㎞, 국형사 2.2㎞)로 내려선다. ‘하늘금(다른 사업자를 기다리고 있었다)’을 시작으로 ‘웰 2000’, 코발트, 토우커피 등 카페와 음식점들이 여럿 들어서 있어 여유라도 있으면 노닥거리기 딱 좋은 거리이다.

▼ ‘BREEZE’란 간판이 걸린 예쁜 건물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니 건물보다도 외벽에 적어놓은 글귀가 더 마음에 들었다고 봐야겠다. <우리는 아침이 올 때마다 사랑할 하루를 선물 받는다> 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얘기인가.

▼ 한국불교 조계종 소속이라는 ‘세명선원’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얘깃거리를 만나지 못해 그냥 스치듯 지나기로 했다.

▼ ‘길카페촌’을 지나 ‘꽃밭머리교(橋)’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자 길이 둘(이정표 : 관음사↖ 0.2㎞, 제일참숯 7.9㎞/ 곧은재 탐방로↗/ 관음사 2.1㎞, 국형사 3.3㎞)로 나뉜다. 오른편은 곧은재 탐방지원센터를 거쳐 곧은재로 연결되는 치악산의 정규 탐방로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관음사(觀音寺)는 토담도 일주문도 두고 있지 않아 세상을 향해 문을 닫지 않는 사찰이다. 1971년 창건되었다니 역사도 일천하다. 규모까지도 작다. 하지만 매우 특이한 볼거리로 인해 사람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절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108염주’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 염주의 유명세 때문인지 아니면 크기 때문이지는 몰라도 염주를 모시는 전각을 따로 지었다. 염주는 재일교포 3세인 임관지(林寬至, 한국명 임종구)씨가 모국에 대한 그리움과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아프리카에서 자생하는 수령 2000년짜리 ‘부빙가(Bubinga)’ 원목을 깎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흩어져 있던 108개의 염주 하나하나가 실로 꿰어지고 묶여져 온전한 하나로 이어지듯, 갈라지고 흩어진 민족이 평화의 염원으로 다시 하나가 되는 그 날을 기약하면서 만들었단다.

▼ 한 벌의 무게가 무려 7.4톤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염주다. 가장 큰 구슬인 모주는 지름 74㎝에 240㎏이나 되고, 모주 좌우로 지름 45㎝, 45㎏짜리 구슬 108개가 동아줄로 연결돼 있다. 2000년 5월에 똑같은 염주 3벌이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일본의 ‘화기산 통국사’에 있고, 각 1벌씩 남북한에 봉안할 예정이었으나 현재 두 벌 모두 이곳 관음사에 소장돼 있다. 북한의 봉안 예정지는 ‘묘향산 보현사’이다.

▼ 관음사는 둘레길 완주의 인증지점이기도 하다. 명부전의 뒤에 이정표(꽃밭머리삼거리 1.0㎞, 제일참숯 7.7㎞/ 국형사 3.5㎞)와 함께 스탬프 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으니 미리 구입한 ‘스탬프 북’에 날인하면 된다.

▼ 토담이나 일주문이 없어선지 탐방로는 절간을 횡단해 버린다. 이때 삼성각으로 오르기 직전 약수터를 만날 수 있다. 물의 양도 풍부한데다 물맛까지 좋으니 실컷 마시고 물병도 가득 채워가자. 무더운 여름철, 특히 오늘처럼 습기까지 가득한 날에는 한모금의 물이 감로수가 되고 또한 생명을 살리는 약수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 산신각 뒤편에는 남성의 성기를 닮은 것 같기도 한 자연석이 서 있었다. 표면에 뭐라고 적힌 것 같기도 한데 마모가 심해 글자는 판독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한 안내도 없다. 그저 양옆에서 돌탑이 호위하고 있을 정도로 고귀한 내력을 지녔나보다 여기면서 스치듯 지나가는 이유이다.

▼ 관음사를 지나자 활엽수로 뒤덮인 울창한 숲이 펼쳐진다. 이어서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탐방로는 작은 고갯마루(이정표 : 꽃밭머리삼거리 0.7㎞, 제일참숯 7.4㎞/ 관음사 0.3㎞, 국형사 3.8㎞)를 넘는다.

▼ 잠시 후 탐방로는 ‘꽃밭머리길(이정표 : 제일참숯← 7.1㎞/ 연암사→ 0.4㎞/ 국형사↓ 4.1㎞)’로 내려선다. 관음사를 출발한지 8분 만이다. 이어서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낙엽송 아래를 조금 더 걷자 이내 마을로 들어선다.

▼ ‘꽃밭머리’는 길카페 ‘엘레아(ELEA, 하단에 Italy가 적혀있는 걸 보면 이태리 음식도 판다는 얘기일 것이다)’와 치마바위, 꽃밭머리전망대 등 입소문을 탄 카페들이 여럿 들어서 있는 곳이다. 하지만 탐방로는 카페가 몰려있는 지역을 피하기라도 하려는지 첫 삼거리(꽃밭머리삼거리가 아닐까 싶다)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래봤자 치올라 같은 또 다른 카페들 앞을 지나가게 되지만 말이다.

▼ 능소화가 곱게 핀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이번에는 숲속에 숨어있던 예쁜 황토집(이정표 : 제일참숯 6.3㎞/ 국형사 4.9㎞)이 길손을 반긴다. ‘황토가든 펜션’이라는데, 앞 건물은 황토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너와지붕으로 마무리까지 했다. kakaomap은 ‘전가네 황토집’으로 적고 있었다. 온천표시가 그려진 걸로 보아 찜질방까지 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숲속에 들어앉은 펜션이어선지 작은 계곡까지 품위 있게 꾸몄다. 작은 폭포 앞에 테이블을 놓아둔 것이다. 찜질방에서 땀을 흘리고 난 뒤에 저곳에 앉아 생맥주라도 한 잔 마신다면 천국이 따로 없겠다.

▼ 펜션의 앞마당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바위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오고가는 길손들이 보시한 돌멩이들을 잔뜩 얹은 채로이다. 나 역시 작은 돌멩이 하나 얹어본다. 오늘의 여정도 무사히 끝마칠 수 있게 해주소서.

▼ 조금 더 들어가자 사람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다. 맞다. 이제부터 원주시에서 야심차게 조성한 ‘운곡 솔바람 숲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명품 길은 명품 길인 모양이다. 저렇게 반려견의 출입까지도 막았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치악산둘레길’을 걷는 여행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점도 있었다. 이정표에서 국형사나 제일참숯 같은 눈에 익은 지명들이 사라지기도 하니 말이다. 참고로 이곳(덕성골삼거리일)에서는 돌개삼거리와 솔바람삼거리를 거쳐 운곡고개로 진행하면 된다.

▼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개삼거리에서 제대로 된 이정표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운곡삼거리에는 이정표와 함께 안내도까지 세워 길 찾기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고마운 일이지만 이런 시설물은 솔바람숲길과 처음 만나게 되는 지점인 ‘덕성골삼거리’에 설치하는 것이 더 옳았지 않나 싶다.

▼ 안내도(사진은 주차장의 것을 사용했다)는 주요지점에 번호를 붙였다. 이 번호는 2.7km쯤 된다는 산책로 곳곳에 세워놓은 이정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운곡고개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솔바람 숲길’이 시작된다. 숲이 온통 소나무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솔향기 가득한 이 길은 맨발로도 걸을 수 있는 황톳길이다. 맨발로 걸으면 혈액순환이 촉진되어 피로와 스트레스, 우울증, 두통, 불면증 해소 등에 효능이 높다니 한번쯤 시도해 볼 일이다. 걷다가 발바닥이라도 불편해질라치면 곳곳에 마련해놓은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 가면 될 일이고 말이다.

▼ 숲 속은 솔바람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불어오는 바람에 땀이 금방 식는다. 여우비는 그쳤지만, 빗물에 젖은 솔잎들이 흔들리면서 습기 머금은 소리를 전달한다. ‘송운(松韻)’ ‘송성(松聲)’.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솔바람 소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하지만 그런 호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운곡고개’에서 ‘치악산둘레길’이 원주얼교육관으로 내려가 버리기 때문이다.

▼ 황토펜션을 출발한지 12분 만에 ‘원주얼교육관’ 주차장에 내려섰다. 이 일대는 고려 말의 혼란한 정치를 개탄하며 치악산에 들어가 은거했던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1330~미상)의 묘역(강원도기념물 제75호)이 있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밝아 목은 이색(李穡) 등과 함께 성리학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태종 이방원의 어릴 적 스승으로, 조선 개국 후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거절하고 태조가 찾아왔을 때에도 만나지 않으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 원천석 묘역(강원도 기념물 제75호)에는 무학대사가 터를 잡아주었다는 그의 무덤과 시비, 그리고 재사(齋舍)인 모운재(慕耘齋)와 창의사(彰義祠)라는 사당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그냥 통과하기로 한다. 탐방로는 원천석선생 회모시비(懷慕詩碑)의 옆(이정표 : 제일참숯 5.3㎞/ 국형사 5.9㎞)으로 열린다. 참! 이곳에 둘레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1코스(꽃밭머리길)의 두 번째 보관처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숲속을 걷다가 ‘치악산 둘레길’을 한눈에 보여주는 풍경이 있기에 카메라에 담아왔다.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세우는 것으로는 부족했던지 나무에까지 매달아놓았다. 길이 아닌 곳에는 이를 알리는 팻말을 세웠다. 여기에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이정표가 세워졌고, 길을 걷다보면 나뭇가지에 매달아놓은 ‘길잡이띠’가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 길 잃을 염려 없이 오롯이 걷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 울울창창한 숲속을 헤집고나온 탐방로는 이제 황골마을로 내려선다.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펜션형의 커다란 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나저나 마을길과 만나는 지점에는 아치형 대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1코스가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이곳에다 만들어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 몇 걸음 더 걷자 ‘황골삼거리(이정표 : 제일참숯 3.3㎞/ 원주얼광장 2.1㎞, 국형사 7.9㎞)’다.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에 쉼터가 조성되어 있는데, 식혜를 판다는 입간판이 눈길을 끈다. 맞다. 이곳 황골마을은 엿과 조청으로 유명한 곳이다. 일반적으로 엿은 식혜를 먼저 만들고, 이를 고아서 조청과 엿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식혜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식혜 만드는 과정이 생략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식혜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래서 편의점 할머니께서 맛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 마을 경로당의 앞을 통과한 탐방로는 계속해서 마을길을 따른다. 하지만 번화가로는 들어가지 않고 마을의 외곽을 고집한다. 이렇듯 치악산둘레길은 기존의 걷기 좋은 길들을 연결하면서 교통량이 많은 도로와 포장길을 가급적 피하고, 걷기 편한 흙길, 숲길, 물길, 마을안길 등을 최대한 많이 걸을 수 있도록 했다.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길은 또 다시 산자락을 파고든다. 아니 작은 고갯마루를 넘는다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 고갯마루는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집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숫제 ‘산딸기 밭’이다. 산딸기는 복분자(覆盆子)라 불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또 이걸 장복하고 소변을 보면 오강이 뒤집힌다고도 했다. 그래서일까? 집사람이 딴 산딸기가 그녀의 입보다는 내 입으로 더 많이 들어온다. 아무렴 어떻겠는가. 새콤달콤한데다 정력까지 증진시켜준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고갯마루를 넘자 또 다른 마을(행정구역은 흥양리지만 단위부락 이름은 알 수 없었다)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가뭄에 콩 나듯이 띄엄띄엄 민가가 들어앉은 전형적인 산촌이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농로와 마을길을 번갈아가며 걷는다.

▼ 잘 가꾸어진 민가가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옛 돌담을 그대로 살렸을 뿐만 아니라 조그만 여백이라도 보일라치면 어김없이 꽃으로 장식했다.

▼ 이 마을은 또 전형적인 강원도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옥수수 밭인 것이다. 나머지 여백은 감자밭이 차지하고 있었다.

▼ 황골삼거리를 출발한지 30분 만에 하초교(이정표 : 제일참숯 1.3㎞/ 하초구 버스정류장 0.4㎞/ 국형사 9.9㎞). 이어서 13분 후에는 또 다른 다리(작은 개울이선지 이름도 없었다)를 만난다. 이정표(제일참숯 0.3㎞/ 하초구 버스정류장 0.3㎞/ 국형사 10.9㎞)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라고 한다.

▼ 실개천을 따라 잠시 올라가자 길이 또 나뉜다. 천하장군과 여장군이 길목을 지키는데, 이정표(제일참숯 0.2㎞/ 국형사 11.0㎞)는 갈려나가는 길에 개의치 말고 왼편으로 진행하란다.

▼ 왼쪽으로 들어서자 이번에는 사당 하나가 길손을 반긴다. ‘숭조예원(崇祖禮園)’. 남양홍씨 예사공파에서 세운 모양인데 내력은 파악할 수 없었다.

▼ 날머리는 제일참숯 주차장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50분. 드디어 날머리인 제일참숯 주차장에 도착했다. 숯을 구워내는 가마가 있던 곳인데 2000년 무렵부터 숯가마 찜질방을 열었다고 한다.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날에야 남의 집 얘기겠지만, 추위로 뭉친 근육을 푸는 데는 찜질방에서 땀 빼기만한 게 없다. 그 찜질방으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뜨겁다 못해 따가운 숯가마로 간다. 황토 가마에서 숯을 만들고 그 가마에 남은 열기로 찜질을 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가마에 들어가 ‘하나, 둘, 셋’을 세고 나오기를 반복하는데, 섭씨 200도에 가까운 온도에선 혈이 뭉쳐있던 몸 곳곳에 열꽃이 핀다고 해서 ‘꽃탕’이라고도 한다. 열기가 더 식으면 중탕, 약탕이 된다. 1000도를 오르내리는 숯가마에서 구워낸 삼겹살도 별미로 알려진다.

▼ 1코스와 2코스의 경계임을 알려주는 시설물은 주차장의 한켠에 설치되어 있었다. 치악산둘레길의 종합안내도를 가운데에 두고 가야할 방향에 구룡길안내판, 그리고 반대편에는 꽃밭머리길의 안내판을 배치했다. 이정표(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 7.0㎞/ 국형사 11.2㎞)와 코스지도를 넣어두는 보관함도 보인다. 그건 그렇고 1코스를 걷는 데는 2시간 5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0.45km. 공식 거리인 11.2km보다 조금 짧게 나왔다. 성문사 뒷산에서 새로 내놓은 탐방로를 따랐던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신정호(神井湖) 둘레길

 

여행일 : ‘21. 6. 26(토)

소재지 : 충남 아산시 영인면

여행코스 : 공원관리소→옥련암→수변산책로→연꽃단지→느티나무쉼터→안산→남산터널↔남산(왕복)→조각공원(소요시간 : 8.48km/ 2시간 45분)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신정호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담수면적 92ha의 인공호수다. 해방 이후 관광지로 사랑받던 저수지는 관광트렌드의 변화로 한때 침체를 겪기도 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지금처럼 아름다운 호수로 다시 태어났다. 현재의 호수는 한마디로 잘 가꿔놓은 정원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하다. 아름다운 호수는 기본. ‘장미터널’이나 ‘능소화터널’처럼 꽃을 주제로 한 터널들이 연이어 나타나는가 하면, 꽃망울을 활짝 연 연꽃단지도 드넓게 펼쳐진다. 물놀이장과 염소와 토끼 등을 사육하는 ‘작은 동물원’을 만들어놓아 어린이들에게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거기다 접근성까지 뛰어나서 사시사철 탐방객들로 넘친단다.

 

▼ 들머리는 신정호수 공원관리소(아산시 영인면 신화리 산 3-7)

평택·파주고속도로(평택-화성) 오성 IC에서 내려와 국도 38번과 39번을 연이어 타고 아산까지 내려온다. 시내로 들어가기 전 국교교차로(아산시 염치읍 곡교리)에서 국도 45호선, 행목교차로(신창면 행목리)에서는 623번 지방도로 갈아탄다. 마지막으로 킹스베리카페(아산시 초사동)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정호관광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이게 번거롭다고 생각할 경우 내비게이션에 ‘신정호생활체육공원 주차장’을 찍고 오면 된다.

▼ 호반을 따라 내놓은 4.8km의 둘레길은 접근성이 좋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호수가 넓은데다 호반을 따라 도로가 나있기 때문에 마음 내키는 지점을 골라 트레킹을 시작하면 된다. 산책로 곳곳에 주차공간이 조성되어 있어 차를 대기도 좋다. 하나 더. 신정호둘레길이 너무 짧다고 생각될 때는 저수지를 감싸고 있는 능선을 걸어볼 수도 있다. 호반에서 시작해 안산(183m)과 남산(145m)를 오른 뒤 다시 호반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두 봉우리를 잇는 능선을 따라 둘레길(청댕이길 및 남산길)이 산뜻하게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편 능선에도 ‘치학산’이 있다고 했으나 올라가보지는 못했다.

▼ 호수로 다가가자 ‘신정호수 수상레저&커피’가 눈에 들어온다. 수상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인데, 수상스키 마니아들을 위한 카페도 겸하고 있단다. 넓은 호수를 가르며 수상스키를 즐기는 청춘들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스키 지나간 자리가 파도 되어 일렁이고, 그 물결을 따라 햇빛이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풍경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오른편, 그러니까 제방(堤防)이 있는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공원에서 권장하는 코스의 역방향이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안산과 남산을 올라가보려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어버렸다. 산길의 날머리가 이곳 조각공원으로 연결된다니 어쩌겠는가. 참! 이곳은 걸음기부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빅워크 APP’를 내려 받고 걸으면 10m당 1원씩이 적립된단다. 걸음이 모이면 삼성디스플레이에서 독서문화 활성화를 통해 충남지역 청소년들에게 기부한다니 기왕에 걷는 김에 한번쯤 참여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수상각’으로 여겨지는 건물은 텅 비어있었다. 이름 그대로 물 위에다 지어놓은 저 집은 한때 신정호 관광의 중심축이었다고 한다. 60~80년대만 해도 이곳 신정호는 서울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던 신혼 여행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이 분위기 잡고 목을 축이던 유흥음식점이 바로 저 수상각이고 말이다.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수정궁’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무튼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길재의 시는 바로 저런 풍경들 두고 읊었을지도 모르겠다.

▼ 꽃망울을 활짝 연 연꽃방죽 너머는 ‘충남 조종면허시험장’이다. 예당호나 탑청호 등 충남지역의 커다란 저수지들을 제키고 면허시험장이 들어서있다는 것은 그만큼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여기서 팁 하나. 해상에서 모터보트, 제트스키, 요트 등 동력수상레저기구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해양경찰청에서 실시하는 동력수상레저기구 조종면허증을 취득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아두자.

▼ 잠시 후 ‘다솜다리’에 올라선다. 신정호의 옛 유원지에서 ‘보물섬(전에는 이곳에 라이브카페가 있었다고 한다)’으로 건너가는 다리이다. 2011년엔가 다리가 준공될 때 아산시에서 우리말 이름을 공모했고, 이때 제안된 여러 이름들 가운데 ‘다솜’이 선택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다솜’이란 애틋한 사랑이란 뜻을 갖고 있단다. 이 다리를 건너는 연인들에게 그 사랑을 꼭 이루고 지켜나가라는 격려차원에서 지어놓은 이름일까?

▼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이제 저수지의 제방을 따른다. 시멘트로 포장을 해놓은 탓에 조금은 삭막해질 수도 있으나, 길가를 코스모스 꽃밭으로 가꾸어 그런 느낌을 없애버렸다.

▼ 둑에는 가을의 전령이라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하지만 입추(立秋)는 아직도 한 달도 더 남았다. 세상이 하수선하다보니 꽃들마저도 이젠 계절감각을 잃어가나 보다.

▼ 제방 위를 걷다보면 예스런 풍경 하나가 눈에 띈다. 1920년대 후반 신정호를 축조하면서 함께 만들어진 취수탑이라고 한다. 놀라운 건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저 시설물이 일본인들이 만들 당시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 일본인들은 싫어도 그들의 기술력에는 탄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취수탑 너머로는 신정호가 기다랗게 펼쳐진다. 원래의 명칭은 ‘마산저수지’.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수몰된 ‘마산’이란 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후 ‘신정관’이란 온천과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경남철도주식회사가 저수지에 수상각을 지었는데, 신정호라는 이름은 저수지가 신정관의 부속시설로 이용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제방의 끄트머리에 있는 ‘연춘’이라는 장어구이 전문집을 왼편 옆구리에 끼고 모퉁이를 돌아서자 ‘옥련암’의 표지석이 얼굴을 내민다. 저곳은 ‘치학산’으로 올라가는 들머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답사는 그만두기로 했다. 정상을 철망울타리로 둘러쳐 진입을 못하도록 해놓았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듯해서이다. 신도리코 선대 회장의 묘가 있어 산 전체에 철망이 쳐져 있더라는 것이다.

▼ 둘레길은 탄성도가 가장 높다는 ‘우레탄’을 깔았다. 그러니 오래 걷는다고 해서 무릎에 부담갈 일도 없다. 우리처럼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걷기에 딱 좋은 환경이라 하겠다. 참! 수변산책로의 일부 구간은 나무데크를 깔기도 했단다. 하지만 나머지 반을 등산로를 이용한 탓에 직접 걸어보지는 못했다.

▼ 둘레길의 총 길이는 4.8km. 성인을 기준으로 할 때 빠른 걸음으로 1시간이면 족하다. 만일 천천히 걷겠다면 거기다 30분 정도만 더하면 되겠다. 1km 간격으로 안내판을 세워져있어 자신이 얼마큼 왔는지, 또 앞으로 얼마를 더 걸어야하는지 길잡이가 되어준다.

▼ 이곳은 ‘신정호 국민관광단지’. 이름에 걸맞게 둘레길은 잘 꾸며져 있었다. 호숫가를 따라 숲을 조성하고 그 사이로 오솔길을 냈다. 정자와 벤치, 심지어는 화장실까지도 곳곳에 배치했다. 쉬엄쉬엄 걸으며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가슴에 담아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 유실수 단지도 들어서 있었다. 사과나무와 복숭아나무로 보이는데 나무마다 어린이 주먹만 한 크기의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기분 좋은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팻말 하나가 과목 밑에 세워져 있는 게 아닌가. ‘당신의 양심을 믿습니다.’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몰래 따가는 몰지각한 탐방객들이 꽤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정기적으로 소독을 하고 있다’는 경고판까지 세워놓았다.

▼ 제법 큰 복숭아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오뉴월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과는 달리 쨍쨍 내리쪼이는 햇빛을 속속 빨아들이며 탐스러운 결실을 준비하고 있다. 맞다. 얼마 안 있으면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 시작된다.

▼ 신정호 가꾸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다리를 새로 놓은 등 곳곳에서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도 만났다. 탐방로에 로터리클럽이나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같은 단체들의 표지석을 여럿 세워놓은 것이다. 국민관광단지를 조성하는데 도움이라도 받았다면 차라리 그 내역을 적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 둘레길 주변에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카페나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개중에는 미식가들에게 호평을 받는 곳도 여럿 있단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호수가 다시 한 번 전모를 드러낸다. 이번에는 꼬맹이 섬까지 품은 채로다. 이렇듯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이 신정호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둘레길을 따라 걷다보면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출발지점의 반대편에서 연꽃단지를 만났다. 저수지 상류의 2만 평(66,115㎡)이나 되는 너른 부지에 총 11,082본(백연 1000, 수련 700, 홍연 7732, 황연 1650)의 연꽃을 심었는가 하면 전통정자와 원두막, 통나무벤치, 등의자 등 탐방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곳곳에 배치했다. 특히 LED등으로 꾸민 조명은 신정호관광의 백미로 알려진다. 조명 덕분에 한밤중에도 물가에서 은은한 미소를 비추는 연꽃의 자태를 엿볼 수 있단다.

▼ 연꽃이 넘실거리는 방죽의 가운데는 데크로드가 지나간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연꽃을 감상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 신정호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연꽃’이다. 연꽃으로 유명한 다른 관광지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연꽃이 많이 심어져 있다. 홍련, 백련, 황련, 수련 등 다양한 연꽃들이 꽃망울을 열며 찾아온 이들을 화사하게 반긴다. 덕분에 사진촬영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자리매김 됐단다.

▼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 일곱 걸음을 걸을 때마다 연꽃이 피어났다고 할 정도로 연꽃을 신성시한다. 불교라는 게 본디 자기 스스로 깨우쳐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연꽃의 피는 과정이 이와 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진흙 속에서 꽃이 피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맑고 깨끗한 꽃을 피우므로 불교에서는 교리를 설명하는 귀중한 꽃으로 여긴다.

▼ 연꽃단지에서 꽤 많은 시간이 지체됐다. 저렇듯 푸르른 연잎과 저리도 화사하게 피어난 연꽃들을 놓아두고 어찌 쉬이 발걸음이 떼이겠는가. 그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연꽃의 무리는 끝까지 나를 따라왔다.

▼ 주말이라선지 탐방객들이 무척 많았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부터 휠체어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온 효녀, 나 홀로 걷기에 열중인 사람들. 사랑 뿅뿅 날리며 뛰고 있는 부부 등 다양한 형태의 삶들이 길 위에 묻어난다.

▼ 곱게 핀 연꽃에 눈 맞추며 걷던 집사람이 화들짝 놀라는 게 아닌가. 궁금해서 다가간 나는 더 놀라 도망까지 쳐버린다. ‘뱀 조심’. 이곳에도 뱀이 있는 모양이다.

▼ 신정호자연생태공원의 중심축인 ‘생태학습관(코로나로 문이 닫혔다)’이다. 생태공원은 저 학습관말고도 퀼리티 높은 숲속놀이터와 야생초화원, 습지연못, 생태수로, 식생천이원 등을 포함한다.

▼ 넝쿨장미나 등나무, 능소화 등으로 뒤덮인 터널도 여럿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가 만만찮은 풍광을 만들어낸다. 가로수 대용으로 심어놓은 메타세쿼이아를 배경삼아 한 폭의 풍경화로 승화되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 ‘신정호’의 사계를 담은 사진틀이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도 만났다. ‘마산정(馬山亭)’. 호수의 옛 이름인 ‘마산저수지’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정자에 올라 신정호의 자연경관을 편안하게 감상하며 심신을 치유해보라는 안내판의 문구가 무색하게도 입구를 막아놓았다. 못된 코로나라는 놈이 잠깐 여유까지도 막아버렸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나무 그늘 아래에 쉼터를 만들어 놓았는데,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안산·남산으로 올라가는 탐방로가 이곳에서 나뉘기 때문이다.

▼ 쉼터를 빠져나와 ‘신정호 자전거길’과 이차선도로인 ‘신정로’를 연거푸 가로지르면 또 다른 둘레길인 ‘청댕이길’이 시작된다. 산자락으로 파고드는 초입에 이정표(남산정상 1.6㎞/ 느티나무쉼터 0.1㎞)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 산길인 ‘청댕이길’을 선택한 덕분에 우린 물속에 아랫도리를 담그고 있다는 버드나무 숲을 구경하지 못했다. 청송의 주산지에 못지않은 풍경화가 그려진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예쁜 포토죤을 갖춘 수변산책로와 미로원, 수생식물전시장 등도 만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 참! 도로를 건너기 전 ‘아산 둘레길’의 안내도를 한번쯤 살펴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아산시가지 지도에다 남산길과 온천천길, 신정호둘레길 등 여러 둘레길들을 그려 넣었는데 잠시 후에 걷게 될 ‘청댕이길’도 이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산’을 ‘남산’으로 잘못 표기해놓은 아쉬움도 있다. ‘남산’은 남산터널에서 조금 더 가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산속으로 들어서면서 ‘청댕이길’이 시작된다. 느티나무쉼터 앞에서 시작하는 이 둘레길은 매봉산을 지나고 청댕이고개를 넘은 다음 이순신종합운동장으로 이어지는데 숲길을 걷다보면 아산의 대표 관광지인 신정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청댕이길’이란 이름은 시부모님에 대한 며느리의 효(孝) 전설이 깃든 ‘청댕이고개’에서 따왔다.

▼ 산속으로 들어선지 15분이면 첫 번째 삼거리(이정표 : 남산터널← 1.9㎞/ 623지방도로→ 0.9㎞/ 느티나무쉼터↓ 0.55㎞)를 만난다.

▼ 이번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반긴다. 탐방로는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다. 거기다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 폭신폭신한 것이 여간 걷기에 좋은 게 아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산책코스라 하겠다.

▼ 그렇게 10분쯤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남산터널← 1.4㎞/ 갓바위→ 0.56㎞/ 느티나무쉼터↓ 1.02㎞)가 나온다. 2기의 돌탑으로도 모자라 태극기까지 휘날리는 곳인데, 돌탑에 적힌 문구가 눈길을 끈다. <날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 은혜, 보답을 못해드린 선생님 은혜, 밥 먹고 살게 해준 직장의 은혜, 내조에 늙어버린 내 아내의 은혜>. 이 얼마나 구구절절 옳은 얘기인가. 참! 이곳에서 오른편은 갓바위(갓쓴 바위)로 연결된다. 조강지처를 버려 벌을 받아 돌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서린 바위이다.

▼ 이후로도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그러다가 10분쯤 지난 곳에서 4각의 정자를 만났다. 벤치까지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는데, 이곳이 안산의 정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이 안산의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시설물은 일절 눈에 띄지 않았다. 조망 또한 꽉 막혀있다.

▼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선답자의 표지기(리본) 조차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가 남산공원 이용수칙 안내판에다 ‘안산(183m)’라고 끄적거려 놓았을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공공시설물에다 낙서를 한 몰지각한 행위까지 나무랄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이곳이 안산의 정상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렸을 게 뻔하니 말이다.

▼ 이제 남산으로 갈 차례이다.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따라 8분쯤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이정표(남산터널↖ 0.9㎞/ 이순신종합운동장(청댕이둘레길)↗ 3.1㎞)는 이곳에서 기존의 ‘청댕이길’과 헤어짐을 알려준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남산길’을 따른다.

▼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지던 탐방로가 갑자기 뚝 떨어진다. 무릇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히 비긴다. 오르내림의 길을 모두 지나고 나서 뒤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평해지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오르막길이 나타날 것이란 얘기이다. 그건 그렇고 이 부근에 ‘남산길’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쉼터전망대’가 있다고 했다. 안산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전망대라는데 아쉽게도 우린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이를 알리는 이정표 하나 세워놓지 않았으니 초행자인 우리 부부야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잠시 후 내려선 안부는 정자와 벤치로도 모자라 먼지 털이기까지 갖춘 명품 쉼터로 조성되어 있었다. 이정표(남산↑ 650m/ 신정호관광지← 0.17㎞/ 안산↓ 1.1㎞)의 꼭대기에 매달린 이정표가 이곳이 남산터널의 위임을 알려준다. 참! 신정호관광지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두자.

▼ 능선은 다시 가파른 오름짓을 시작한다. 아까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가야할 테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모아미래도아파트단지가 보이는 등 눈요깃거리가 있어 꼭 힘들지만은 않은 구간이다.

▼ 잠시 후 정자가 지어져 있는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남산↑ 0.2㎞/ 방축동←/ 남산터널↓ 0.4㎞)를 만났다. 이따 되돌아올 때 행여 이곳으로 해서 신정호관광지로 내려가 볼까를 고민해서는 안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 남산터널 위를 통과한지 15분 만에 남산(145m)의 정상에 올랐다. 서너 평이나 됨직한 정상은 상운각(祥雲閣)이란 정자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1943년 세종대왕이 온궁(溫宮)에 내려왔을 때 호종한 문신 이숙치(李叔畤)가 지은 ‘교전상운합(郊殿祥雲合) 영천난류청(靈泉暖溜淸)’이란 싯귀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정자이다.

▼ 정자에 올라 잠시 조망을 즐겨본다. 발아래로 아산시의 서쪽 외곽이 펼쳐지는데, 그 중앙에는 아산환경과학공원의 그린타워전망대가 놓여있다. 그린타워는 쓰레기 소각장 굴뚝을 활용한 전망대다. 150m 높이의 굴뚝에 1층은 전망대(망원경 6대), 2층은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으며, 주변에는 생태곤충원과 장영실과학관, 배미수영장, 풋살경기장 등 아산환경과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남산도 정상석은 세워져 있지 않았다. 그저 ‘남산 정상(145m)’란 이름표를 매단 이정표(팔각정 0.8㎞/ 남산터널 0.6㎞)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남산터널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이어서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따라 잠시 내려서자 조각공원이 길손을 맞는다. 공간이 무척 넓어서 별빛축제 등 아산의 대규모 주요행사가 주로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널따란 잔디밭에는 음악분수와 야외음악당, 인공암장, 항일민족운동자료전시관, 캠핑장 등 꽤 많은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중 잔디밭 곳곳에 세워놓은 조각품들을 공원의 이름으로 삼은 모양이다.

▼ 조각공원의 얼굴은 음악분수가 아닐까 싶다. 직경 43m의 분수대에다 파워앰프와 스피커 등을 설치해 음악소리에 맞춰 분수가 뿜어지도록 했단다. 하지만 음악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시원한 물소리만 실컷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160여개의 조명이 만들어낸다는 빛의 잔치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 건강을 위한 ‘지압보도’도 설치되어 있었다. 발은 신체의 축소판이자 제2의 심장이라고 했다. 신발을 벗어들고 한번쯤 걸어볼 일이다.

▼ ‘조각공원’이란 이름에 걸맞게 꽤 많은 조각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술에 문외한인 내게는 모두가 다 그게 그거다. 처삼촌 벌초하듯이 대충 곁눈질로 살펴보며 지나치는 이유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신정호둘레길 탐방이 끝났다. 한 바퀴 도는데 걸린 시간은 2시간 45분. 핸드폰의 앱은 8.48km을 찍고 있다.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들이 제법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성흥산(聖興山, 260.1m) 가림성 솔바람길

 

여행일 : ‘21. 3. 29(월)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코 스 : 덕고개→구교리길 합류점→가림성길 합류점→가림성 사랑나무→성곽길→유금필장군 사당→대조사→임천면사무소(소요시간 : 약 7km/ 2시간 40분)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높이 260m의 나지막한 성흥산 산자락에 내놓은 ‘가림성 솔바람길’은 덕고개에서 시작해 한고개에서 끝나는 5km 길이의 둘레길이다. 중간에 백제시대 도성 수비의 요충지였던 ‘가림성’을 지난다고 해서 ‘가림성’이란 브랜드로 포장됐다. 이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순하게 이어진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전형적인 육산인지라 바닥도 보드라운 흙길이다. 거기다 이름 그대로 ‘소나무’가 많아서 솔가리까지 수북이 쌓여있다. 길이 아니라 흡사 양탄자 위를 걷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이다. 그런데도 탐방객들의 관심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있다고 한다. 가림성의 성벽 위에 올라앉은 ‘사랑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드라마 ‘서동요’의 촬영지로 인기를 끌면서 ‘육룡이 나르샤’, ‘호텔 델루나’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단다. 잠깐 짬을 내어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가 있는 대조사도 한번쯤 들러볼 것을 권한다.

 

▼ 들머리는 덕고개(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4-6)

서천-공주고속도로 부여 IC에서 내려와 국도 29호선을 타고 서천방면으로 내려오다 군사삼거리에서 빠져나오면 임천면소재지인 ‘군사리’이다. 이어서 성홍로를 이용해 마을을 빠져나가면 오래지 않아 ‘덕고개’에 이른다. 고갯마루 조금 못미처에 있는 삼거리가 산행들머리이다. 코너에 영호추모공원과 해촌성결교회, 성불사(점집이 아닐까 싶다)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성흥산에는 다양한 걷기 코스가 나있다. 성곽길(1.55㎞), 솔바람길(4.63㎞), 대조사1·2길(1.1㎞·0.5㎞), 구교리길(0.4㎞), 가림성길(1.8㎞), 호리동길(0.8㎞), 지토리길(2.3㎞)이 성흥산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찢어지고 만난다.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 산바람 맞으며 슬렁슬렁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 추모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솔바람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통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이번에는 이정표(성흥산성 2.97㎞)가 길손을 맞는다.

▼ 산길은 한없이 곱다. 길이 널찍한데다 경사까지 거의 없다. 거기에 보드라운 흙길에는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 지자체의 노력도 엿보인다.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는가 하면, 심심찮게 나타나는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다.

▼ 아무리 나지막한 산이라고 해도 가파른 오르막길 하나 없겠는가. 드물기는 하지만 밧줄까지 매어놓은 구간도 만나게 된다.

▼ 성흥산은 역시 산책삼아 오르는 산이다. 저렇게 원탁형의 벤치까지 놓아둔걸 보면 말이다.

▼ 이정표가 참 예쁘다. 아니 마음에 쏙 든다는 표현이 더 옳겠다. 지명과 거리는 물론이고 지도까지 매달았다. 그 지도의 위에다 지금 내가 서있는 위치까지 표시해 놓았으니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겠다.

▼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꽤 많은 무덤을 만나게 된다. 그만큼 풍수가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맞다. 이곳 성흥산 자락에는 무덤 숫자만큼은 아니어도 꽤 많은 절간이 들어서있다. 명당을 가장 잘 꿰찬다는 게 본디 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만에 첫 번째 갈림길(이정표 : 성흥산성↑ 1.42㎞/ 대조사← 0.7㎞/ 덕고개↓ 1.65㎞)을 만났다. 왼편은 첨부된 지도의 ‘구교리 길’. 즉 대조사에서 올라오는 길일 것이다.

▼ 능선은 온통 소나무 세상이다. 찬 기운을 살짝 머금은 바람도 살랑살랑. 그래 이곳은 ‘솔바람길’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름 그대로 솔과 바람으로 가득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는 짙은 솔향기가 묻어난다. 그리고 그 향기는 일상에 지쳐있는 내 심신을 다시 깨워준다. 힘차게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라며.

▼ 두 번째는 임도(이정표 : 성흥산성↑ 0.62㎞/ 새터골→ 2.3㎞/ 덕고개↓ 2.5㎞)와 만난다. 새터골에서 올라오는 ‘지토리길’이다.

▼ 이제 솔바람길은 임도를 따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이정표는 왼편에 대조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따가 대조사로 내려갈 때 이 길을 이용하게 되니 꼭 기억해 두자.

▼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성흥산성→ 0.42㎞/ 임천면사무소← 1.3㎞/ 대조사↓ 0.7㎞). 이번에는 임천면사무소로 연결되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이다. 참! ‘솔바람길’은 여행자들에게는 즐거운 트레킹코스가 되어주지만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운동코스란다. 그래선지 이곳 삼거리에는 작은 체육공원도 만들어져 있었다.

▼ 잠시 후 문이 닫혀있는 매점에 도착했다. 그런데 몽골텐트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자신에게 오라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다짜고짜 체온기부터 들이댄다. 맞다. 세상은 지금 패닉 상태다. ‘코로나19 팬데믹’인데 이 정도 불쾌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 너른 광장에는 꽤 많은 스틸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 성흥산성이나 사랑나무를 배경으로 촬영된 영화나 드라마를 액자 모양의 조형물로 만들어 놓았다. 지난 2006년 방영된 ‘서동요’의 촬영지로 유명해지면서 각종 예능은 물론이고 드라마 세종대왕, 신의, 육룡이 나르샤, 엽기적인 그녀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흥부’ 등의 촬영지로 활용되었단다. 특히 2년쯤 전인가 tvN에서 재미있게 보았던 ‘호텔 델루나’가 눈길을 끌었다.

▼ 주차장으로 여겨지는 공터 위에는 ‘충혼사(忠魂祠)’가 지어져 있었다. 백제 부흥운동 당시 나·당연합군에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을 위해 세운 사당이란다. 맞다. 산세가 만만찮은 가림성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단숨에 정복할 엄두가 나지 않던 산성이다. 막강한 나·당연합군도 이곳을 피해 부여로 진격했으며,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왕자 풍이 이 성에 들어와 웅거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꿈은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때 스러져간 병사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솔바람길은 이제 가림성(加林城) 구간으로 접어든다. 숲을 빽빽이 메웠던 소나무들은 사라지고, 아찔한 높이의 암벽이 앞을 막는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 가파르다싶을 뿐 길은 바위를 피해가며 위로 잘도 오른다.

▼ 절벽의 앞. 가림성(사적 제4호)의 안내판이 보이기에 집사람을 불러 세웠다. 가림성의 지도에다 설명을 덧붙인 게 전부였지만 정상석이 없는 산에서 이만한 인증물이 또 어디 있겠는가.

▼ 절벽의 위로 오르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반긴다. 바위를 뚫고 우뚝 서있는 나무는 우선 거대하다. 나이도 백 년은 족히 넘을 것 같다. 거기다 잘 생기기까지 했다. 그래선지 나무 아래에 벤치를 놓아두었다. 나무의 자태는 물론이고 빼어난 주변 풍광까지도 즐기다 가라는 모양이다.

▼ 하지만 주변 풍광은 눈에 담지 못했다. 자욱한 미세먼지가 시야를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하긴 미세먼지가 주의도 아닌 ‘경보’까지 내려진 날에 아름다운 풍경화를 기대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 몇 걸음 더 오르자 이번에는 가림성(加林城)이 얼굴을 내민다. 성벽의 위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걸터앉았다. 오늘의 주인공인 ‘사랑나무’다. 400년 전 누군가가 심었다는 높이 22m에 둘레 1.25m의 고목으로 2006년 방영되었던 SBS드라마 ‘서동요’에서 서동과 선화공주가 이 나무 밑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그런데 다소 생경스럽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일까? 우리에게 고정관념화 되어버린 마을 어귀가 아닌 산성 꼭대기에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덕분에 먼 곳에서도 잘 보이고, 반대로 나무 옆에 서면 전망이 탁 트인다는데 말이다.

▼ 남문 터라지만 우리들 눈에 익숙한 성루나 성문은 보이지 않고 그저 성벽만 좌우로 늘어서있을 뿐이다. 성흥산성(聖興山城) 또는 가림성(加林城)으로 불리는 이 산성은 사비성 천도 이전인 서기 501년, 백제 시대에 쌓았다고 한다. 둘레 1,350m에 높이는 4m 가량 되는데 성 내부에는 우물터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남문과 동문, 서문의 문터가 확인된다고 한다. 백제의 성곽 가운데 쌓은 시기가 가장 확실해서 백제시대의 성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단다.

▼ 사랑나무 앞에 섰다. 나무는 성의 중앙이 아닌, 그렇다고 성흥산 꼭대기도 아닌, 성 안의 끝부분, 그러니까 주변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서있다. 나무 주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랑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대부분 여자들이 아니면 커플이다. 그런데 줄이 좀 길다는 게 문제다. 하지만 사랑나무를 배경으로 인생샷을 건지려는데 까짓 20~30분쯤 못 기다리겠는가.

▼ 요즘 젊은이들은 사진을 조합까지 하는 모양이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눈에 띄기에 빌려온 사진인데 사진을 어떻게 합성했는지 아예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버렸다. 맞다. 누군가는 사랑나무 사진은 최소한 두 컷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두 컷 가운데 한 컷을 반전해서 편집하면 하트 모양의 와이드 컷이 완성된다면서 말이다. 그 안에 사랑하는 커플이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사랑나무’라는 별칭이 붙여진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옛날 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직한 널찍한 터를 지나 오른편으로 향한다.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이다. 그렇다고 성곽 위를 걷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성곽의 복원공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저 정도로 가파른 비탈이라면 별도의 성벽이 없어도 적을 막아내기에 충분했을 것 같다. 하긴 얼마나 난공불락이었으면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성이 험하고 견고해 공격하기가 어렵다’고까지 했을까.

▼ 그렇게 잠시 걷자 ‘동문지’다. 우리부부가 한참을 헤맨 곳이기도 하다. 이정표(서문↑ 0.6㎞/ 성곽길 지장골→/ 대조사↓ 1.25㎞)가 지시하는 성곽길(지장골)을 따랐더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아니겠다는 생각에 되돌아가 확인해보니 ‘서문’ 방향에도 ‘성곽길’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런데 글씨의 크기가 지장골 방향보다 너무 적다. 무심코 지나쳤던 이유이다.

▼ 서문을 향해 방향을 틀자 곧이어 공사장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어수선한 현장이 나타난다. 안내판은 ‘제7차 가림성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복토가 진행 중인지라 지반이 약하니 출입을 금한단다. 가림성의 발굴조사는 아직까지 ‘진행형’인 모양이다.

▼ 이 구간도 역시 성곽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우리들 눈에 익숙한 성벽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옛 병사들이 지나다녔음직한 길을 따라 10분 조금 넘게 걷자 ‘서문지’이다. 세 방향을 지시하는 이정표(성곽길/ 한고개/ 성곽길)는 날머리인 ‘한고개’까지 1.16㎞가 남아있다고 알려준다.

▼ 날머리인 한고개는 오른편으로 가야한다. 계속해서 성곽길을 걷고 싶다면 직진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왼편으로 향했다. 이정표에는 빠졌지만 그쪽으로 가야만 성흥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른 정상은 너른 분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운데는 평평한 것이 영락없는 건물터이고, 그 너머에는 현세에 지은 팔각장이 자리를 틀었다.

▼ 봉화제단(烽火祭壇)이 설치된 끄트머리로 나가자 눈앞이 훤해진다. 성흥산은 해발고도가 240m 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주변에 이렇다 할 높이의 산이 없다 보니 사방이 훤하게 열린다. 가림성을 쌓아올린 이유일 것이다. 발아래로 인간 지형은 물론이고, 적군의 움직임까지 한 번에 볼 수 있으니 이보다 저 좋은 방어진지가 어디 있겠는가. 맞다. 당시 이곳은 사비성과 외곽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없는 지금은 부여의 절경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자연의 전망대가 되었고 말이다.

▼ 정상에서 내려오는데 고색창연한 사당이 고개를 내민다. 유태사지묘(庾太師之廟). 고려의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그는 왕건이 태봉왕 궁예의 장수였을 때 박술희·신숭겸과 함께 의형제를 맺은 인물이다. 그런데 황해도 평주 사람인 유금필의 사당이 왜 이곳에 있을까? 그 이유는 1929년 발행된 ‘부여지’의 ‘성흥산성 실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태조 때 유금필이 송도로 가던 도중 이 성에 올라 주민 가운데 빈궁한 자를 진휼했는데, 그 후 주민들이 은덕을 잊지 못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 아까 거론했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대조사로 향한다. 이 구간 역시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를 낮춰가는 전형적인 오솔길이다.

▼ 그렇게 잠시 내려서자 천년고찰 ‘대조사(大鳥寺)’다. 대조사는 성흥산성이 축성되고 26년 뒤인 527년 인도 유학승 겸익(謙益)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진다. 이름 그대로 이 절은 새와 관련된 창건 설화를 갖고 있다. 겸익 스님이 성홍산 큰 바위 아래에서 기도를 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관음조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바위 위에 앉더란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큰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해 있어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조사’라 했다는 것이다. 주불전인 ‘원통보전’은 바로 그 ‘관세음보살’을 모셔놓은 불전이라고 한다. 원통보전 앞의 석탑도 사연이 있다. 1970년대 이곳에 머물던 스님들이 지붕 하나 달랑 남아있던 석탑을 보고 신도들과 함께 주변 숲을 샅샅이 뒤진 끝에 몸통을 발견했단다. 우여곡절 끝에 기도처. 아니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 원통보전 왼쪽으로 ‘불유정(佛乳井)’이란 약수터가 하나 있다. 대조사는 풍수 상 명당에 위치하면서도 좋은 물길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들은 예산 성당의 ‘장 크랭캉(Jean Crinquand)’ 신부가 대조사를 찾아와 이 약수를 찾아주었단다. 약수터 뒤로는 명부전과 산신각이 있었다. 이밖에도 범종각과 스님이 머무는 요사채도 눈에 띈다.

▼ 절간을 돌아 위로 오르면 대조사의 명물이자 보물 217호인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大鳥寺石造彌勒菩薩立像)’이 묵직하게 서있다. 하나의 돌을 다듬어 조각한 불상인데 높이가 무려 10m에 둘레도 4.8m나 된다. 미래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이 보살상은 균형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후덕하고 인자한 얼굴 표정이 인상적이다.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12세기)로 추정된다.

▼ 작은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대조사는 일주문이 없었다. 해탈문이나 천왕문도 보이지 않는다. 절간을 빠져나왔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절을 빠져나와 잠시 오르니 삼거리(이정표 : 임천면사무소← 0.7㎞/ 성흥산성→ 1.1㎞, 각시바위 50m/ 대조사↓). 이젠 산악회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임천면사무소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 이정표에 나타나있는 ‘각시바위’가 궁금해서 성흥산성 방향으로 올라가봤다. 하지만 더 이상의 표식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니 어떤 게 ‘각시바위’인지 알 수 없는 노릇. 그저 이정표에 표시된 거리(50m) 쯤에서 나타난 ‘호서제일경(湖西第一景)’이라 적힌 빗돌과 그 앞에 깔려있는 바위가 전부였다.

▼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만나게 되는 ‘산장가든’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니 정확히는 ‘사랑나무 찻집’이다. 임천면사무소를 200m쯤 남겨놓은 지점인데 시를 적어 넣은 항아리들로 조경을 해놓은 게 여간 멋지게 보였기 때문이다.

▼ 마을로 들어서니 사당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고려 말 문신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을 모시는 영당이란다. 원래 홍산면 북촌리에 있었으나 홍산 관아터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2010년 후손들에 의해 이곳 군사리로 옮겨왔단다. 그런데 고려 삼은(三隱) 가운데 하나인 이 분의 영정이 무슨 연유로 이곳, 아니 이전에 있었다는 홍산에 있었을까? 궁금했지만 영당의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알아 볼 수는 없었다.

▼ 산행날머리는 임천면사무소

대조사 앞 삼거리에서 출발한지 10분 만에 날머리인 ‘임천면사무소’에 도착했다. 임천은 백제시대에는 가림군, 고려시대에는 가림현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까지도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하는 큰 고을이었다. 면사무소는 당시 관아가 있던 자리이다. 하지만 지금은 청사로 쓰이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앉았을 따름이다. 관아의 정문이던 ‘배산루’는 일제강점기에 백마강변의 부소산성으로 옮겨진 뒤 ‘사자루’로 현판을 바꿔 달았고, 임천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객사 건물도 해체돼 대조사 경내의 원통보전(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짓는 데 쓰였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성흥산 산행은 총 3시간이 걸렸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2시간 40분을 걸은 셈이다.

▼ 면사무소 옆에는 360년이나 묵었다는 소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자못 괴이하다. 높이는 4m에 불과하지만 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져있는 것이다. 그게 흡사 온몸을 뒤틀며 가지들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 금강 자전거 길로 이동하는 도중 잠시 ‘유왕산(留王山)’에 들렀다. 백제가 패망하고 당으로 끌려가던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이 잠시 머물다 떠났다고 전해지는 산이다. 인근 망배산은 의자왕이 타고 떠나가는 배를 향해 백제 백성들이 절을 올렸다는 전설도 함께 전해진다. 정상에는 유왕정(留王亭)이란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 정자에 오르자 금강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의자왕과 귀족, 백성 등 1만 2천여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실은 배도 저 무심한 강물을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 제단(祭壇)도 만들어 놓았다. ‘백제유민정한불망비(百濟流民情恨不忘碑)’.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백제 유민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유왕산 추모제’가 열린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이를 위한 장소가 아닐까 싶다. 당시 기사는 위령제는 물론이고 당군이 백제포로를 끌고 가는 모습을 재연한 15척의 포로선단 행렬, 금강변 상여놀이, 씻김굿 등 백제 유민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고 했다.

▼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서천군. 대청댐에서 출발해 군산·장항 사이 하굿둑까지 이어지는 ‘금강종주 자전거길(146km)’의 마지막 구간을 자전거가 아닌 다리로 직접 걸어보기 위해서이다. 서천군의 금강하구에 있는 조류생태전시관부터 신성리 갈대밭까지 이어지는 총 14km의 이 ‘금강하구 자전거길’은 은빛 물결이 넘실대는 금강을 배경으로 맑은 공기와 갈대밭을 누비며 힐링 할 수 있는 명소로 알려진다. 오늘 걷게 되는 구간은 이 가운데서도 맨 마지막 4㎞이다.

▼ 갈대는 신성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갈대의 굵기나 분포된 면적은 신성리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이곳에서도 넘실대는 황금물결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둑으로 막힌 금강의 아랫자락은 현재 바다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선창하나 없겠는가. 하지만 그 유명한 철새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작은 점이 모이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만들어내는 군무가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공연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긴 미세먼지로 뒤덮인 산하가 온통 뿌옇기만 한데 어디서 어떻게 철새 때를 찾아내겠는가.

▼ 금강하굿둑으로 이어지는 자전거길 주변은 철새들의 세상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둔치에 널따란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탐조대는 물론이고 철새 조형물도 곳곳에 배치했다.

▼ 공원으로 단장한 갈대밭을 S자로 달리던 자전거길은 금강하굿둑과 인접한 서천조류생태전시관에서 대장정을 마친다. 금강과 서해바다의 경계인 이곳은 금강에서 폭이 가장 넓은 곳으로 가창오리를 비롯해 청둥오리, 흰빰검둥오리, 흰죽지, 알락오리, 큰고니, 개리 등 온갖 겨울철새들의 보금자리다. 조류생태전시관이 이곳에 자리한 이유이다.

▼ 조류생태전시관은 ‘금강자전거길’ 종주의 기점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이를 알리는 여러 조형물들을 철새 조형물과 함께 세워두었다. 자전거 대여소도 만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공간도 공원으로 꾸몄다. 그런데 황금물결의 갈대밭 속에 들어앉은 움막이 눈길을 끈다. 패총의 유적으로나 알아낼 수 있는 오랜 옛날, 원시인들이 이곳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탑정호 소풍길

 

여행일 : ‘21. 5. 13(목)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부적면과 가야곡면 일원

코 스 : 수변생태공원→수변 데크길→출렁다리→제방→탑정호 광장→봉황산→조정서원→수변산책로→평매마을 전망데크→병암마을 쉼터(소요시간 : 12.36km/ 3시간)

 

함께한 산악회 : 산두레

 

특징 : 논산에 소재한 탑정호는 예산의 예당저수지에 이어 충남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이다. 대략 여의도 면적의 두 배(152만 2100평)에 달한다니 엄청난 크기라 하겠다. 이 인공호수는 1944년에 축조된 이래 논산시민의 휴식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변했다고 한다. 2012년부터 시작된 수변개발 사업이 큰 결실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수변생태공원이라는 아늑한 공원을 조성했는가 하면, 이 수변생태공원에서 시작해 탑정리 석탑까지 이어지는 3km의 수변 나무데크길도 완성시켰다. 거기다 양쪽 호반을 잇는 국내 최장의 출렁다리까지 놓았으니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지 않고 어찌 배겨내겠는가.

 

▼ 들머리는 탑정호 수변생태공원(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287-8)

논산-천안고속도로 서논산 IC에서 내려와 국도 1호선 계룡시 방면으로 달리다가 외성삼거리(논산시 부적면 외성리)에서 우회전하여 군도(충곡로)를 따라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탑정호반에 조성된 수변생태공원에 이르게 된다. 차에서 내리면 수생 식물원과 자연 학습원, 분수, 팔각정 등이 줄줄이 나타난다. 참고로 ‘탑정’이란 저수지 이름은 탑정리란 마을 지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수몰된 저수지 한 가운데 ‘어린사(魚鱗寺)’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에 정자 형상의 탑이 있다고 해서 ‘탑정(塔亭)’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 탑정호는 충남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이다. 담수면적이 축구장 909배 크기인 636만㎡나 된다고 한다. 그런 저수지의 주변에 ‘소풍길’이란 이름으로 24㎞ 길이의 둘게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 산책로는 탑정호 둘레와 주변 산을 잇는 걷기 코스이다. 하지만 둘레길에 포함된 산들이 높지 않아서 운동 삼아 오르내릴 수 있다.

▼ 주차장에서 내리자 ‘딸기 조형물’이 반갑게 맞는다. 이곳 논산이 ‘딸기산업 특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조형물일 것이다. 맞다. 논산의 농가소득 1위는 ‘딸기’라고 한다. 100여년의 딸기재배 역사를 가진 전국 최대의 생산단지이기도 하다. 1988년 청정딸기 생산을 위해 국내 최초로 천적 농법을 도입했으며, 현재 전체 딸기재배 농가의 43%에 해당하는 900여 농가에서 고설 수경재배 시설을 이용해 딸기를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100만 불($) 딸기 수출을 달성하기도 했다.

▼ 행복감을 폴폴 풍기는 조형물이 있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가족나들이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다는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조형물 뒤로 보이는 공간은 중앙광장이다. 버스킹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려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하모니를 선사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 지난 2010년에 조성된 수변생태공원은 아래 사진의 자연학습원 외에도 들꽃원과 연꽃원, 잠자리연못, 잔디마당, 억새길, 전망대 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부대시설로는 팔각정, 수중분수 그리고 수변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자연학습장으로 가족과 연인들에게는 산책 또는 데이트 코스로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 연못 속에 들어앉은 물레방아는 포토존으로 변해 관광객들이 기념을 남기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곳은 물속에서 노는 잉어도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발길을 서둘렀던 탓인지 잉어는 눈에 띄지 않았다.

▼ 공원은 꽃잔치가 한창이다. 숙근성 다년초인 ‘샤스타데이지’가 가슴 설레는 하얀 꽃물결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작약과 팬지, 꽃잔디 등의 봄꽃들이 활짝 피어나 상춘객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 이렇게나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찌 포토죤 하나 없겠는가. 콘셉트는 ‘사랑’. 언제나 함께 한다는 ‘하트’ 조형물은 키스가 한창인 남녀를 형상화 했다. 그리고 이를 축복이라도 해주려는 듯 주변을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했다.

▼ ‘인간시장’을 쓴 김홍신 작가의 시판(詩板)도 보인다. 천년 동안 내린 빗방울만큼 사랑한단다. 바보같이... 집사람을 향한 내 마음을 읊은 것 같아 카메라에 담아봤다. 하지만 내 사랑은 바보가 아니라 현명한 선택의 결과이다. 천년만년 억겁의 세월에 다시. 또 다시 태어나도 그대와 함께 하고 싶다는...

▼ 공원을 다 둘러봤으면 이젠 트레킹을 나설 차례이다. 수변공원의 한쪽 귀퉁이에 ‘수변데크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으니 이를 따르면 된다. 수변생태공원에서 물막이 둑까지 이어지는 이 데크길은 길이가 무려 3㎞에 달한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수변데크길이 아닐까 싶다.

▼ ‘수변 데크길’은 인공적인 직선이 아니라 자연을 닮은 곡선의 형태를 그대로 살렸다. 들고 나는 모양새가 사람의 들숨과 날숨을 닮아서인지 편안하다는 느낌이다. 거기다 눈에 들어오는 경관마저 빼어나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눈요기로 끝나는 게 아니라 힐링까지 얻어갈 수 있는 산책이 되는 이유이다.

▼ 그 옆으로는 탑정호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탑정호는 일제강점기인 1944년 완공된 농업용 인공 저수지다. 대둔산 계곡의 맑은 물이 운주와 양촌을 거쳐 흘러 일 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청정호반 역할을 한다.

▼ 눈앞에 펼쳐지는 호반은 그야말로 달력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다. 물가와 닿을 듯 늘어진 능수버들은 보기만 해도 시원한 기분이 든다. 아침저녁이면 저 풍경화는 물안개로 덧칠된다고 한다. 하지만 낮에 찾아온 나로서는 상상으로만 그런 몽환적 풍경화를 그려볼 따름이다.

▼ 호수의 한가운데에는 출렁다리가 놓여있다. 저 다리는 저녁이 되면 그 진가가 더욱 드러난다고 했다. 다리에 설치해 놓은 LED가 스크린 역할을 하면서 저녁이면 다리 전체가 거대한 ‘미디어 도화지’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낮에 찾아간 우리에게 그런 행운은 찾아올 리가 없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산책로에는 두세 곳의 포토죤도 만들어 놓았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인물과 함께 액자에 담아 보라는 모양이다. 혹시 인생샷 하나쯤 얻어갈지 누가 알겠는가.

▼ 호수는 빙 둘러 도로가 지나간다. 그러다보니 산책로는 심심찮게 도로를 만난다. 그렇다고 황량한 풍경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주변을 온통 꽃밭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특히 흐드러지게 핀 샤스타데이지가 눈길을 끌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탑정호 관광의 백미인 ‘출렁다리’에 이른다. 가야곡면 종연리와 부적면 신풍리를 잇는 저 다리는 다른 지역의 출렁다리들이 갖지 못한 여러 가지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우선 길이가 600m(폭 2.2m)로 동양에서 가장 길다. 이 타이틀은 그동안 예산 ‘예당호 출렁다리(402m)’가 갖고 있었으나 이번에 탑정호에서 빼앗아왔다. 출렁다리에 미디어 파사드(LED 자체 발광 방식)가 구현된 것도 국내에서 처음이란다. 2만여 개의 LED등이 출렁다리(보행현수교)의 세로로 뻗은 행어케이블(현수재)을 중심으로 가로 50, 세로 30cm 간격으로 배열돼 거대한 스크린 역할하면서 각양각색의 장면을 연출한단다. 또 하나. 다리 상판이 나무데크와 격자형 철망으로 이뤄져 있어 호수 아래를 직접 내려다볼 수도 있단다.

▼ 출렁다리는 입구를 막아놓았다. 코로나-19로 인해 개장이 늦춰지고 있단다. 그렇다고 이게 오래갈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아시아 최장’이라는 타이틀을 빼앗아갈 출렁다리가 다른 지역(경북 안동시)에서 건설 중이라니 말이다. ‘최장’이라는 매력에 이끌려 찾아올 수많은 인파를 놓칠 지자체가 어디 있겠는가. 참! 이것 하나는 알고 넘어가자.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는 포르투갈 북부 아로카(Arouca)에 있는 ‘아로카 다리(Arouca 516)’라고 한다. 길이가 무려 516m에 이르는 이 보행자 전용 다리는 파이바 협곡(Paiva gorge)의 위 175m나 되는 높이에 놓여있다. 작년에 완공되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개통을 미루고 있다는데 지금쯤은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소풍길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중간 중간에 주차장과 화장실을 배치해 방문객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주전부리나 음료수를 파는 푸드 트럭도 가끔 만날 수 있었다. 믿고 사는 세상을 꿈꾸기라도 하는 듯 음료수를 파는 무인판매대도 보였다.

▼ 조금 더 걷자 소풍길의 백미(白眉)라는 ‘솔섬’이 나온다. 호수를 향해 외따로 뻗어나간 자그마한 물가의 동산이자 전망대로 28그루의 소나무가 아름다운 원형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사진촬영의 명소다. 참고로 저 솔섬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노을을 배경으로 바라볼 때라고 한다. 몽글몽글 피어 오른 안개로 인해 몽상적인 풍경으로 보일 때의 솔섬도 아름답다는 입소문을 탔다.

▼ 산책로는 혼자 걷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저 호수는 갖가지 수생식물들과 계절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철새들이 주인공이라고 한다. 특히 겨울에는 국제보호종인 가창오리와 고방오리, 알락오리, 쇠오리 등 4만이나 되는 철새들이 찾는단다.

▼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꽃을 수면 위에 띄워봤다. 그러자 눈까지 즐거워진다. 아카시아 향기에 홀릭된 코와 더불어 눈까지 호사를 누린다는 얘기이다.

▼ 물가의 울창한 숲은 보기만 해도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다 새소리까지 더해지니 이 아니 즐거울손가. 아래 사진에서 툭 튀어나온 곳은 ‘솔섬’이다. 멀리서 보니 마치 새싹 여러 개를 모아 놓은 것 같아서 한 주먹만으로도 쥐고 남을 것 같은 풍경이 된다.

▼ 조금 전에 스쳐왔던 ‘출렁다리’도 눈에 들어온다. 저 다리는 분명 ‘현수교’이다. 현수교(懸垂橋)란 높은 양쪽 기둥에 쇠밧줄이나 쇠사슬 등을 건너 매고 그에 의지하여 매달아 놓은 다리를 말한다. 그런 다리를 어떻게 600m나 놓았는지가 내내 궁금했는데, 이곳에서 보니 금방 이해가 된다. 말굽쇠(U) 모양으로 우뚝 솟은 주탑 2개가 교각 역할을 하고, 그 사이에 교각 하나를 더 세워 상판의 무게를 받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만에 올라선 ‘물막이 둑(堤防)’. 난간에는 ‘AR 낚시터’란 팻말이 붙어있었다. ‘AR 낚시’란 진짜 낚시가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하는 낚시를 말한다. ‘상상이상 논산’이라는 앱을 다운받은 다음 순서대로 실행하면 된다. 한 때 엄청 유행했던 '포켓몬GO'을 연상시키는 게임이니 시간에 여유라도 있다면 한번쯤 시도해 볼 일이다. 아름다운 경관에 더해 손맛까지 즐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울손가.

▼ 제방의 한쪽 귀퉁이는 ‘석탑’ 하나가 외롭다. 이 석탑은 탑정호의 수몰된 지역에 위치한 '어린사(漁鱗寺)'라는 절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탑은 기단과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1층만 남아 있어 원래 몇 층의 석탑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단다. 그저 기단의 양식에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안내판은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 이곳에 주둔하여 '어린사'라는 절을 지었다는 설화를 적고 있었다. 거기에 후백제 때 대명스님의 부도라는 설도 추가했다.

▼ 저수지의 규모만큼이나 취수탑의 위용도 대단하다. 하지만 저 취수탑은 날이 어두워졌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단다. 조명시설에 불이 들어오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업그레이드되기 때문이다.

▼ 일자로 쭉 뻗어나간 제방을 걷다보면 가슴에 새겨둘만한 문구가 적힌 팻말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가슴에 와 닿는 하나를 게시해 본다. 등으로 짊어지면 짐이 되지만, 가슴으로 안으면 사랑이 된다면서 ‘오늘도 얼굴엔 미소, 가슴엔 사랑, 마음엔 여유’를 가져보란다. 우리 부부에게 딱 어울리는 문구라 할 수 있겠다.

▼ 둑 아래는 주차장이 널따랗게 조성되어 있었다. 국제 규격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축구장도 두 면이나 들어서 있다. 참!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둑 아래에는 ‘소수력발전소’가 들어서있다고 했다. 탑정호의 물을 흘러내려 보내면서 그 낙차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시설이다. ‘소’자가 붙었음은 발전량이 미미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제방의 끄트머리에 이를 즈음 또 다른 취수탑이 얼굴을 내민다. 이번에는 2개. 그렇다면 이곳 탑정호는 취수탑을 3개나 갖고 있는 셈이다. 저수지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이 3개 취수탑의 외관은 각기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북쪽 취수탑은 오천 군사의 방패, 남쪽은 계백장군의 창과 방패를 상징한단다. 그리고 탑정 취수탑은 삼진을 나타낸다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제방이 끝나는 지점에도 석탑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아까 살펴봤던 ‘탑정리 석탑’을 쏙 빼다 닮은 게 아닌가. 다만 아까의 탑보다 선이 더 또렷할 뿐이다. 맞다. 이 탑은 반대편에 있는 탑을 복제해 놓은 것이란다.

▼ 논산농지개량조합에서 1989년에 세웠다는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빗돌도 보인다. 그 옆의 ‘풍수제민’이라고 적힌 낡은 빗돌은 일제강점기에 저수지를 만들면서 세운 석비로 ‘풍부한 물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한다’라는 뜻이란다. 참고로 논산시 가야곡면(可也谷面)과 부적면(夫赤面)에 걸쳐 있는 탑정호(塔亭湖)는 1941년에 착공해서 1944년에 준공된 저수지로 제방의 길이 573m에 높이가 17m이다.

▼ 출렁다리가 조망되는 전망 좋은 곳에는 초승달 모양의 조형물을 배치했다. 이를 본 집사람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만든 이의 마음을 쫒는다며 포즈부터 잡고 본다.

▼ ‘탑정호광장’은 제방과 수문 사이에 조성되어 있었다. 백제의 영웅 계백장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음악분수, 포토죤 같은 시설들이 들어선 호숫가의 작은 공원이다. 또한 유동아 작곡·작사의 ‘탑정호 사랑’이란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가 하면, ‘물빛과 하늘빛이 담겨있는 논산’이란 안내판도 보인다. ‘노을 물빛 꽃으로 물들다’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야경 명소로 출렁다리와 계백장군 상징 동상, 노을섬 등 7곳을 꼽고 있었다.

▼ 광장에는 계백장군상이 투각(透刻)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주변이 계백장군의 마지막 전투지인 황산벌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계백장군이 이끄는 백제의 5천 결사대가 신라 김유신의 5만군과 맞서 싸운 곳. 기울어진 국가 운명을 말해주듯 결사항전으로 싸웠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 광장에는 두어 개의 포토죤도 만들어놓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호수를 담을 수도 없게 배치되어 있었지만 까짓 신경 쓸게 뭐 있겠는가. 또 다른 화폭에다 마음에 드는 풍광을 꽉 채워 넣으면 될 일을.

▼ 공연장 분위기의 쉼터형 데크도 만들어놓았다. 탑정호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 잡은 음악분수를 편히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 탑정호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 잡게 될 ‘음악분수’이다. 날이 어두워질라치면 장엄한 음악에 맞춰 물보라를 하늘 높이 내뿜어 올리는 분수이다. 그 뒤는 출렁다리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조명이 받쳐준다고 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하늘 높이 솟구치는 물보라와 하늘을 수놓은 화려한 불빛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멋들어진 볼거리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 광장 주변은 물론 꽃밭으로 가꾸었다. 그런데 살아있는 꽃나무만 심은 게 아니다. 조화를 심어놓은 것이다. 사이사이에는 전구도 꽂혀있다. 야경을 위한 조명 시설이 아닐까 싶다.

▼ 소풍길은 이제 포장도로를 따른다. 도로가에 따로 인도를 만들어놓아 걷는데 지장은 없다. 수문(水門)을 겸하고 있는 ‘탑정호교’를 건너 조금 더 걷다가 이정표(봉황산 정상 0.63km, 탑정호 광장 0.34km)가 가리키는 ‘봉황산 정상’ 방향으로 들어선다. ‘산수정(식당)’의 입간판이 세워진 골목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를 따른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없어 힘들이지 않고도 정상까지 올라설 수 있다.

▼ 산을 오르는 도중에 만난 무덤이 하도 괴이해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웅덩이를 파듯 땅을 움푹하게 파낸 다음 그 안에다 봉분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무덤이란 게 본래 물을 피하는 게 원칙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가묘(假墓)일지도 모르겠다. 맞다. 이곳 봉황산의 산신령은 영험하기로 소문나있지 않는가. 전설에 의하면 아들을 위해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공부에 매진하는 아들이 살고 있었단다. 그들은 매일같이 서로를 위해 봉황산에 기도를 드렸는데, 그 결과 아들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참한 아내를 얻어 함께 아버지를 잘 모셨음은 물론이다.

▼ 10분 만에 올라선 봉황산(126m)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줄 그 어떤 표식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봉황산 정상’으로 진행방향을 표시해오던 이정표(박범신작가 집필관 1.06㎞, 탑정호 광장 0.97㎞m)가 갑자기 ‘박범신 작가 집필관’으로 바뀐 것을 보고 이곳이 봉황산의 정상이려니 유추해 볼 따름이다. 참고로 봉황산은 산의 생김새가 봉황을 닮았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 이후부터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박범신 작가 집필관’ 방향을 따른다. 그렇게 잠시 내려서면 자그만 마을(종연1리, 높은댕이)이 나오고, 이어서 탐방로는 탑정호를 또 다시 만나게 된다. 호반에는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가 습성에 맞게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흔한 풍경이 아니어선지 열대 우림에서나 볼 수 있는 맹그로브 숲을 떠올리게 만든다.

▼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다음 호반도로(탑정로)를 따라 5분 정도 걷다보면 조정산(125.3m)의 들머리(이정표 : 박범신작가 집필관↑ 0.2㎞, 조정산 정상→ 0.73㎞, 탑정호 광장↓ 2.29㎞)가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박범신작가의 집필관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아니 아무런 볼거리가 없었던 봉황산에 대한 실망감도 그리 결정하게 된 원인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 하지만 그 결정은 큰 실수였다. 인도가 사라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걷는 내내 뙤약볕에 온 몸을 노출시켜야만 하는 죽음의 행진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보다 더 큰 실망은 이정표에서 ‘박범신작가 집필관’이란 방향표지판이 스리슬쩍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중간에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소풍길이 도로변을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섰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 걷는 도중에 잠시 들렀던 ‘탑정호가’에서 아래 사진처럼 예쁜 ‘꼬꼬마 하우스’를 만났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고나 할까. 참! 심심찮게 탑정호의 풍광을 엿볼 수 있었으니 볼거리가 아주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 조금 더 걷다가 만난 ‘아이비’라는 펜션 겸 카페의 홍보판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자기네 시설이 들어선 곳에 남녀얼굴바위, 아나콘다바위, 악어바위, 코끼리바위, 처녀음부바위, 남근석바위 같은 기암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왕성골’이란 지명을 얻게 된 사연과 함께 이곳에서 기도를 올릴 경우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도 적었다. 꽤나 유명한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공공의 장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곳에 사유시설을 짓게 해준 지자체의 행위가 못내 안타깝다.

▼ 뙤약볕과의 싸움에 지쳐갈 무렵 오른편 길가에서 이정표(조정서원 0.75㎞/ 조정산 정상 0.55㎞/ 박범신작가 집필관 1.4㎞) 하나를 찾아낸다. 조정산의 날머리를 만난 것이다. 들·날머리의 이정표에서 우린 조정산 탐방로의 길이가 1.28㎞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넉넉잡아 30분 정도면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린 무려 50분이나 걸었다. 그것도 때 이르게 찾아온 오뉴월 뙤약볕 아래서. 이 구간을 ‘죽음의 구간’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잠시 후 탐방로는 ‘조정서원(논산시 향토문화유산 23호)’에 이른다. 익안대군 방의(태종 방원의 둘째 형)의 증손자 이현동(李賢童)을 추모하기 위해 노성, 연산, 은진향교 유림들의 발의로 1978년에 건립된 사원이다. 하지만 굳게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참고로 이현동은 단종 폐위를 반대하고는 스스로를 농맹아라 칭하며 낙향하여 생을 마친 분이다.

▼ 서원의 옆에는 비각(碑閣) 하나가 지어져 있었다. 여염집에 가까운 외모를 지닌 서원에 비해 옛 모습이 풀풀 풍기는 멋진 전각이다. 안에는 ‘월파 이항’ 선생에 대한 기록이 적힌 빗돌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 또다시 길을 나서면 ‘조정2교’.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다리인 ‘산노교’가 나온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탐방로가 이곳에서 도로를 벗어나 호반산책로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아니 들머리에 이정표(탑정관리소 5.3㎞/ 산책로 입구 2.0㎞)와 ‘수변산책로 안내도’가 세워져있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 호숫가에 매어있는 나룻배가 정겹다. 그런데 작아도 너무 작다. 저런 조각배를 타고 고기라도 잡을 수 있을까? 아니 타고 나갈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 지중해풍의 멋진 건축물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펜션인줄 알았는데 brunch cafe인 ‘알바노(ALBANO)’라고 한다. 이탈리아 음식이 전문인데 이곳 논산에서는 꽤 소문난 맛집이란다.

▼ 산책로의 왼편은 온통 습지로 이루어져 있다. Daum이 제공하는 지도에 ‘탑정호 습지’로 표기된 지역일 것이다..

▼ 탑정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왼편 옆구리에 차고 한참을 더 걷자 드디어 ‘평매마을 전망데크’다. 이정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지점이지만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그저 탑정호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을 따름이다.

▼ 전망데크 말고도 데크탐방로를 별도로 만들어 주변 경관을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탑정호의 수면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탑정호는 여느 호수와는 다른 풍경이다. 물속에서 솟구쳐 나온 듯한 작은 섬들이 눈에 띄는 것이다. 맞다. 탑정호는 인공호수다. 때문에 계곡을 이루던 주변 산세가 수면위로 펼쳐지면서 다도해 같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 전망대 근처에는 몇 개의 낚시 사이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세월을 낚고 있는 강태공들의 장비가 만만찮다. 10개 가까이나 되는 낚싯대는 물론이고, 비바람에 햇볕까지 막아줄 텐트까지 갖췄다. 전문 낚시꾼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곳 탑정호는 강태공들에게 인기 많은 낚시터라고 한다. 물이 맑은데다 고기까지 많기 때문이란다.

▼ 이런 곳에서는 하찮은 지게마저도 그림이 된다. 아니 세상이 바뀐 요즘 지게 보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 이후로도 수변산책로는 꽤 오래 지속된다. 탑정호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 덕분에 눈이 호사를 누리는 구간이다. 아니 그늘을 만들어줄 숲이 없기 때문에 뙤약볕 아래서 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20분쯤 더 걷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병암리 쉼터(이정표 #1 : 산책로 종점 3㎞, 이정표 #2 : 평매마을 조망대 1.38㎞/ 병암유원지 0.95㎞)’가 나타나면서 ‘탑정호 트레킹’이 종료된다. 때 이른 무더위 탓에 나머지 구간을 포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3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가 12.36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늠내길 2코스(갯골길)

 

여행일 : ‘21. 3. 13(토)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장현동, 장곡동, 월곶동, 방산동, 포동 일원

산행코스 : 시흥시청역→시흥시청→장현교차로→군자갑문→갯골생태공원→섬산캠핑장→미생의 다리→포동펌프장→갯골습지센터→흥부배수갑문→군자갑문→쌀연구회→시흥시청역(소요시간 : 4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집사람과 함께

 

특징 : 시흥시(始興市)는 서울에 인접하면서도 해안을 끼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 시의 대부분이 200m 내외의 구릉지와 침식저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암봉·마산·소래산·성주산 등이 동·남·북쪽의 시 경계를 따라 솟아있으며, 서쪽은 서해바다(경기만)에 접한다. 이런 특징들을 연결시켜 놓은 트레일(trail)이 바로 ‘늠내길’이다. 산길과 들길은 물론이고 바닷길까지 시가 품고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들을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늠내’라는 이름은 ‘뻗어 나가는 땅’, ‘넓은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시흥의 옛 지명에서 따왔다. 고구려 장수왕 시절 백제의 영토였던 이곳을 차지한 고구려가 붙여놓은 ‘잉벌노(仍伐奴)’의 당시 표현인 늠내에서 유래됐다. 시흥시청에서 출발해서 높지 않은 숲과 산봉우리로 이어지면서 다시 시청으로 돌아올 수 있는 숲길(1코스길)과 시흥시청에서 출발해 갯골생태공원을 가운데 두고 갯벌을 한 바퀴 돌아 원점회귀 하는 갯골길(2코스), 옛날 시흥사람들이 걸어 다녔다는 산자락과 고갯길들을 이은 옛길(3코스), 옥구공원에서 오이도와 옥구천 일대를 둘러볼 수 있는 바람길(4코스) 등 모두 4개의 코스로 조성됐다.

 

▼ 트레킹 들머리는 지하철(서해선) 시흥시청역(시흥시 장현동)

요즘은 내가 갈만한 산을 답사하겠다는 산악회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긴 그동안 오르내린 산들이 이미 2,000개를 넘겼으니 답사를 못한 산들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그렇다고 우리 부부 단독으로 오지 산을 찾기에는 아직도 능력부족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노릇. ‘꿩 대신 닭’이라고 둘레길이라도 걸어보자고 나선 이유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이 ‘늠내길’이다. 관광공사가 선정하는 ‘11월에 걷기 좋은 여행길 5곳’ 가운데 하나로 꼽혔을 정도이니 눈에 담을만한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마침 지하철역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갖추었다.

▼ 2코스인 ‘갯골길’은 시흥시청에서 출발해서 군자갑문과 갯골생태공원을 지나, 갯골길을 따라 걷다가 ‘미생의 다리’를 건넌 다음 시흥시청으로 되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이다. 돌아올 때는 포동 빗물펌프장과 갯골습지센터 등을 거치도록 길이 나있지만, 갯골생태공원에서 군자갑문까지는 같은 길을 또 다시 걷기도 한다. 총 거리는 16km. 경기도 유일의 내만(內灣)인 갯골과 지금은 사라졌지만 국내 최대 규모의 염전 터와 습지생태를 둘러볼 수 있는 코스로, 갯골생태공원에서는 염전체험도 가능하며, 전망대에 올라 넓은 들을 조망할 수도 있다.

▼ 3번 출구로 나와 ‘시청공원로’를 따라 시가지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장현천 건너로 보이는 ‘시흥시청’. 즉 ‘갯골길’의 들머리는 이 도로 말고도 장현천의 천변을 이용해 갈 수도 있으니 참조한다.

▼ 첫 번째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곧이어 ‘시흥시청’의 후문에 이른다. 참! 사거리의 한쪽 귀퉁이에 정자까지 갖춘 작은 공원이 꾸며져 있었다. 장현동의 유래를 적은 빗돌도 눈에 띄었다. 1912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곳 ‘새재(鳥峴)’ 마을과 이웃마을인 장상(長上)을 합친 다음 두 마을에서 한 글자씩을 따와 ‘장현(長峴)’이란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 시청부터는 ‘시청로’를 따른다. 이 길을 따라 장현교차로까지 가게 되는데, 이 구간 아니 갯골길을 통틀어서 유일한 편의점(하모니마트)이 NH농협은행의 다름 블록(block)에 있으니 식수나 간식 등을 미리 준비하는 게 좋겠다.

▼ 급하게 떠나오느라 핸드폰에 앱(카카오앱에 ‘늠내길갯골길’로 치면 되는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을 깔지 못했다. 그러니 길을 찾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하지만 막상 찾아와보니 그럴 필요는 없었다. 빨갛고 파란 늠내길 리본이 길을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을 정도로 가로수나 전봇대 등에 촘촘히도 매달아놓았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8분 만에 ‘장현교차로’를 만났다. 동서로(목감에서 월곶까지 시흥시의 동·서 축을 잇는 중요한 도로이다)와 ‘시청로’가 만나는 삼거리이다. 참! 오는 도중에 ‘신혼 희망타운’ 건설현장이 눈에 띄었다. 지하철역에서 10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이니 장차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의 보금자리치고는 참 좋은 위치라 하겠다. 시흥시도 ‘아동친화도시’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이들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왼쪽 방향으로 50m쯤 걷다가 오른편으로 난 샛길로 내려선다. 들머리의 벚나무에 이정표가 매달려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10m쯤 내려섰을까 샛길은 농로(農路)와 연결된다. 언덕 위의 ‘동서로’와 나란히 나있는 농사용 길인데, 이곳에서는 왼쪽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농로를 따라 걷다보니 물기를 머금은 땅에 새파란 기운이 감도는 것이 눈에 띈다. 이를 본 집사람이 미나리꽝이란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곳에서 생산되는 미나리가 제법 유명하단다. 논농사 보다 특수작물 재배가 소득이 몇 배나 높다보니 많은 농가가 미나리로 작목을 바꿨다는 것이다. 아무튼 미나리 하면 전주나 청도쯤으로 알고 있었기에 새로운 지식의 축적이라 하겠다.

▼ 살림꾼인 집사람의 촉이 오늘도 발동했다. 덜렁이인 내 눈에도 띄는 냉이가 그녀의 안테나를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저렇게 하나둘 주워 담은 냉이는 된장찌개로 변해 내일 아침쯤이면 우리 집 밥상 위에 올라올 것이다.

▼ 농로로 내려선지 17분(냉이 캐기에 바쁜 집사람 때문에 조금 더디게 걸었다). 동서로 아래로 뚫린 첫 번째 굴다리를 만난 지점에서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널따란 평야지대의 한가운데로 향한다. 이때 진행방향 왼편에서 동산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육지 속의 섬처럼 다가오는 의외의 풍경이 참 신선하다.

▼ 제3경인고속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창곡천교)를 통과하니 이정표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방향이 고작 둘(갯골생태공원/ 시청)뿐이니 썩 필요해보이지 않는 시설물이다. 거리 표시라도 해 두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 갈대가 무성한 수로를 따라 8분(동서로에서는 17분)쯤 걷자 첫 번째 포인트인 ‘군자 갑문(군자양수장)’이 나타난다. 방조제로 인해 해수와 내수가 차단된 지역에서 내수를 바다 쪽으로 흘려보내기 위한 일종의 배수(排水) 시설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은 이따가 되돌아나가는 길에 길 찾기에 필요한 지점이니 기억해 두자.

▼ 늠내길 이정표는 또 하나의 굴다리를 지나가라고 지시한다. 이번에는 ‘마유로(시흥시 장곡동과 하중동을 잇는다)’의 아래로 내놓은 터널이다. 이곳에서는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몇 만났다. 그러고 보니 날씨가 화창한 것이 달리기에 딱 좋은 날이다.

▼ 굴다리를 빠져나가니 널찍한 물길이 갈 길을 막는다. 저런 풍경, 즉 바닷물이 육지로 파고들어 형성된 자그마한 개울이 ‘갯골길’이라는 2코스의 이름을 만들어냈지 않나 싶다. 갯가의 고랑을 뜻하는 말이 '갯골'이니 말이다. 

▼ 저 너른 수로를 건너 뛸 수야 없는 노릇. 순리를 따르려는 듯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더니 물길을 따른다. 이때 진행방향 저만큼에 나타는 거대한 시설은 ‘흥부배수갑문’이다. 이따 되돌아 나올 때 우연찮게 만나게 되는 시설이다.

▼ 흥부배수관문부터는 오솔길을 따라 걸을 수도 있다. 수로와 자전거길 사이의 좁디좁은 공간에 숲을 만들고 오솔길을 냈다. 식재된 식물을 설명해놓은 안내판들을 읽으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군자갑문을 지난 지 20분 만에 도착한 ‘갯벌생태공원’. 이층짜리 정자가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아치형의 다리가 또 다시 검문을 하잔다.

▼ 다리를 건너자 널따란 잔디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잔디밭 곳곳에 텐트가 쳐져있는 걸로 보아 가족단위의 나들이 장소로 자리 잡았나 보다. 참고로 이 일대는 1930년대 중반 일제가 조성한 소래염전이 있던 곳이다. 갯벌 사이로 난 수로를 통해 소래포구로 부터 바닷물을 끌어들여 소금을 생산하면서 천일염 생산지로 이름을 떨쳤지만 채산성이 악화되며 1996년에 폐쇄됐다. 약 145만평의 부지의 염전에서 소금생산이 중단되자 일대는 예전 자연습지에서 자라던 동식물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생태환경이 복원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넓은 습지와 갯벌이 독특한 생태환경을 연출한데다 인근 지역이 도시화되면서 명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생태환경 1등급 지역으로 국가 해양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공원의 면적은 약 45만평이며 갯골을 따라 탐방코스가 마련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발췌하여 정리했다)

▼ 공원입구에는 ‘안내지도’가 세워져 있었다. 각종 체험장과 전망대, 습지센터 등의 주요시설 및 편의시설들을 표시해 놓았는가 하면, 30분에서 1시간, 2시간, 3시간까지 4개의 탐방코스를 선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나처럼 ‘늠내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시설물이기도 하다.

▼ 잔디밭 사이로도 길이 나있었지만 우린 늠내길 리본이 매어져 있는 벚꽃터널을 따랐다. 이때 데크로드에 전망대까지 갖춘 갈대숲체험장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새봄맞이를 위해 갈대를 베어낸 탓에 빈 터만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 조금 더 걸으면 해수체험장이 기다린다. 그런데 외관만 보아서는 여느 야외수영장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아무래도 풀에 민물 대신 바닷물을 넣는다고 해서 ‘해수’라는 접두사를 붙였나 보다.

▼ 벚꽃터널이 끝나는 곳에는 갯골생태공원의 랜드마크인 ‘흔들 전망대’가 들어앉았다. tvN의 드라마 ‘남자친구’에서 주인공의 사랑지수가 100% 충전되던 ‘바람 불어 좋은 곳’이다. 극중에서 박보검이 송혜교를 데려가던 곳. 즉 ‘바람 불어 좋은 곳’은 바로 저 ‘흔들 전망대’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저 전망대는 10.741㎜나 움직인다고 한다. 6층 높이가 다소 부담은 되지만 허용치인 42㎜에는 한참이나 못 미치니 안전은 기본. 그저 짜릿한 흥분만 즐기면 된다. 박보검이 ‘바람 불어 좋은 곳’이란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 나선형 구조의 전망대는 갯골에 부는 바람이 휘돌아 오르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 원형의 나무계단을 따라 빙글빙글 돌다보니 어느새 꼭대기에 올라섰다. 높이가 22m나 되는, 그것도 나무로 만든 전망대라 그런지 걸음을 뗄 적마다 이름처럼 흔들거리는 기분이 들었는데 무섭기보단 오히려 흥미진진했다. 그렇게 올라선 꼭대기는 갯골생태공원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최고의 조망처이다. 시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았나보다. 사방에 망원경을 배치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을 한참이나 더 당겨놓았다.

▼ 맨 처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갯골생태공원의 시설지구이다. 염전, 갈대. 해수 등 각종 체험장들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염전을 제외하고는 길이 대부분 갯골을 닮은 듯 굽이졌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한없이 여유로워 보이는 건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자연을 거슬리지 않으려는 노력이 곳곳에 배어있는 이곳 갯골생태공원에서는 사람도 자연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 반대 방향에는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순천만 갈대밭 못지않은 풍광을 지닌 곳이지만 갈대를 베어낸 곳도 많이 보인다. 새로운 갈대가 잘 자라나게 하려는 조치라고 한다. 불에 태우기도 한다는데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아무튼 생태계는 돌고 도는 법. 새 생명이 꿈틀거리는 계절에 갈대는 새롭게 자라나 저 들판을 가득 채울 것이다.

▼ 전망대에서 내려서자 널따란 염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토판(土板, 1955년 이전의 흙으로 바닥을 깐 염전)과 옹패판(1955-1980년 초의 깨진 옹기조각으로 바닥을 깐 염전), 타일판(1980년 초-현재) 등을 시대별로 복원시켰는가 하면, 교육관 옆의 벽면에는 소금이 생산되는 전 과정을 타일화로 그려놓았다.

▼ 염전 앞에는 ‘소금놀이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박스형의 바닥에 소금을 채워놓았는데 아쉽게도 금줄이 쳐져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이 어린이 놀이터에까지 미친 모양이다.

▼ 수차(水車) 같은 소금 생산을 위한 옛 기구들도 눈에 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다. 그래선지 ‘엄마 없는 하늘아래’란 영화를 이곳에서 촬영했다는 안내판도 세워 놓았다.

▼ 시흥갯골역과 가릉가릉거리며 달렸다는 ‘가시렁차’도 복원되어 있다. 시흥은 소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한다. 시흥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염전'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나라 전체 소금 생산량의 30%가 생산되었을 정도로 이곳 시흥 일대가 온통 염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경제성을 잃은 염전들이 하나둘씩 사라졌고, 이제는 시흥 역사의 일부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그런 흔적 가운데 하나가 갯골생태공원이고, 그 핵심은 소금을 실어 나르던 ‘가시렁차’이다.

▼ 세월의 흔적은 소금창고로도 남아있었다. 옛날 이곳에는 40여 동의 소금창고가 갯골을 중심으로 들어서 있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2동만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쓸쓸하게 남아있을 따름이다. 그나저나 창고는 엄청나게 튼튼한 모양새이다. 지금이야 값싼 소금을 훔치려는 사람이 없겠지만, 옛날에는 고가의 전매품을 보관하는 보물창고였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생태공원을 모두 구경했으면 이제 갈대숲 탐방로를 걸어볼 차례이다. 방산대교로 연결되는 제방길인데 ‘솔트베이 골프클럽’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게 된다.

▼ 오른편은 물론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갈대밭이다. ‘시흥갯벌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 너른 갈대밭에는 갯골을 내려다볼 수 있는 생태관찰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야자매트를 깔았는가 하면 물기가 있는 곳에는 데크다리를 놓아 무장애 탐방로로 가꾸었다. 하지만 걸어보지는 않았다. 방게와 농게가 서식한다지만 아직은 갯골 깊숙이 숨어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 그렇게 잠시 걷자 아름다운 다리 하나가 갈대밭 사이에서 고개를 내민다. 다리의 이름은 ‘바라지’. 바라지란 '돌보다, 돕는다, 기원하다'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이다. 시흥에서는 방죽·논·간척지를 ‘바라지’라 불러오기도 했단다. 그렇다면 간척지에 놓인 다리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그게 아니라면 갯골생태공원의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는 다리일 게고 말이다.

▼ 염전을 나선지 25분. 작은 갯골을 가르는 다리가 나오는가 싶더니. 탐방로는 이 다리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섬산캠핑장으로 연결되는 오솔길인데 지도는 이 구간을 ‘아카시길’로 표시하고 있었다. 길의 양편에서 가로수 역할을 하고 있는 아카시아나무에서 따온 이름이 아닐까 싶다.

▼ 아카시길을 따라 들어가는데 ‘나이스 샷!’이라는 골프장에서나 쓸 법한 환호성이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보니 골프장 하나가 아름다운 갈대밭을 독차지하고 있다. 폐염전 부지에 건설된 ‘솔트베이 골프클럽’으로 서해안의 바람, 환상적인 일몰, 염전 갈대 등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알려진 퍼블릭 골프장이다.

▼ 4분쯤 더 걷자 농경지 가운데 외로이 솟아 있는 작은 동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너른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을 쏙 빼다 닮았다. ‘섬산’이란 지명이 붙여진 이유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갈대밭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현재 ‘캠핑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 섬산에서 되돌아 나와 방산대교 방향으로 향한다. 탐방로는 이제 제방(堤防) 위로 난 길을 따른다. 갯벌과 평야지대(염전이 있던 곳이 아닐까 싶다)를 나누는 경계선이라도 되는 양 지평선을 향해 끝없이 뻗어나가는 모양새이다. 참! 이 구간의 초입에는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공원 이용객의 안전을 위해서라는데 무엇에 대한 안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바닷물이 넘친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 제방길을 따라 걷다보면 드넓은 갈대밭과 그 속에 파묻혀있는 ‘미생의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갯골생태공원의 끝단에 자리한 자전거 모양의 아름다운 다리로 시흥시가 지향하는 '미래를 키우는 생명의 도시'를 줄여서 만든 이름이고 한다. 늠내길의 반환점이기도 한데 일출 및 일몰 때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알려지면서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 섬산에서 빠져나온 지 40분. 방산대교에 다가갈 즈음에 갯벌이 있는 오른편으로 샛길 하나가 나뉜다. 탐방로는 이 갈림길을 따른다. 낚시와 취사, 동식물 채취 등을 금한다는 ‘시흥갯벌 습지보호지역’ 안내판에 늠내길의 리본이 묶여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잠시 후 갯벌이 속살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늠내길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미생의 다리’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펄이 두툼하게 쌓인 갯골의 물길 위에 커다란 자전거의 뼈대처럼 서 있는 오묘한 형상의 이 다리는 잘 만들어진 앤티크 철제소품처럼 예쁘다. 그런 독특한 디자인(이걸 찍은 사진이 지난 2015년 올해의 토목구조물 사진공모전에서 ‘포토제닉상’을 수상하기도 했단다)으로 인해 멀리서도 눈에 띄는 시흥갯벌의 명물이 되었다. 아무튼 눈에 들어오는 다리는 그 구성미 자체만으로도 절경을 이룬다. 그렇다고 주변 경관을 빼놓을 수는 없다. 갈대밭이 우거진 넓은 평원과 구불구불한 갯골, 그리고 갈대밭을 헤집으며 난 늠내길 산책로 또한 그 절경의 한 축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 다리에 올라서면 방산대교 너머로 전형적인 도심 풍경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한적한 바닷가의 작은 어천마을 소래포구와 월곶포구는 이제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른 마천루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 다리에서 내려와 또 다시 제방길을 따른다. 갯골길의 북쪽 노선으로 아까 걸어오던 제방의 반대편 제방이라고 보면 되겠다. 두 제방 사이에는 ‘갯골’이 흐른다. 갯골이란 바닷물이 육지로 파고들어 형성된 자그마한 개울을 말한다. 대개는 강물이 하구까지 흘러가다 바다에 합류하는데 반해 갯골은 거꾸로 바닷물이 육지까지 밀려들어온다는 게 특징이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현상인데, 이곳 시흥에 그런 갯골이 잘 발달되어 있단다.

▼ 갈대습지를 품은 북쪽 지역은 남쪽보다 훨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하도 넓다 보니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도 가지가지다.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마라톤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말을 타고 갈대밭을 누비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 말이 들녘을 누빈다면, 하늘에는 ‘모터 행글라이더’가 창공을 휘젓고 있었다. 가벼운 엔진을 달고, 프로펠러로 추진하는 업그레이드 된 ‘행글라이더’이다.

▼ 갈대숲으로 덮인 갯골 너머로는 그보다도 더 너른 평야가 펼쳐진다. 그 평야도 역시 갈대밭이다. 세상이 온통 갈대로 뒤덮였다고나 할까? 그런 풍경에 도취되어 걷다보면 어느덧 ‘포동빗물펌프장’이다. 하천 범람으로 인한 침수피해 예방을 위한 시설인데 미생의 다리에서 30분쯤 걸리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 펌프장 근처에는 탐조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갯골 방향에 둘러친 판자벽에 작은 구멍 몇 개를 뚫은 다음 그중 서너 곳에다 망원경을 설치했다. 새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과 함께 자주 눈에 띄는 새들의 사진을 게시해놓았음은 물론이다. ‘국가해양습지보호지역’다운 시설이라 하겠다. 맞다. 다양한 생물의 서식처이자, 지형이 희귀한 시흥갯벌은 그 보전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전국에서 12번째로 국가해양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 시흥의 갯골은 아주 특별하다. 밀물 때면 바닷물이 갯골을 따라 육지 안으로 밀려오는 '내만형 갯골'의 특징대로 시흥의 갯골은 생태계의 보물창고가 되었다. 미세한 플랑크톤에서부터 갑갑류와 어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들이 관찰되는가 하면 멸종위기 2등급인 맹꽁이와 금개구리까지 산다는 것이다. 백로와 저어새, 기러기, 오리, 갈매기, 도요새 등 다양한 종류의 물새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일 것이다.

▼ 이후의 갯길은 갯벌 생태계를 관찰하기 가장 좋은 구간으로 알려진다. 과거에 염전이었던 왼쪽으로는 염생식물이 뿌리내리고, 오른쪽으로는 누런 갈대밭이 펼쳐진다. 갯물과 육지 경계에서 자라는 갈대는 갯골길의 얼굴마담이다. 버려진 염전과 습지 곳곳에 자라면서 거대한 갈대 왕국을 이루었다. 특히 이 근처에서 만나는 갈대군락은 그 끝이 어디만큼일지 짐작되지 않을 만큼 총총했다. 그런 장점을 살리려했는지 관찰데크를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안내판까지 세워 시흥갯골 갈대밭의 특징과 역사를 소개하고 있었다.

▼ 포동펌프장을 스치듯 지나친지 30분 남짓. 능수버들 아래 터를 잡은 ‘갯골습지센터’를 만났다. 아까 염전에서 보았던 소금창고를 연상시키는 외관이 눈길을 끄는데, 내부는 시흥갯벌의 생태환경을 주제로 전시 및 교육 공간으로 꾸며졌다. '왜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는지', '갯골의 형성 과정'을 알기 쉽게 정리하면서, 크게 염생식물(塩生植物, 염분이 풍부한 땅에 사는 식물의 총칭)과 저서생물(底棲生物, 바다 밑에 사는 생물들의 총칭), 조류(鳥類) 등으로 나누어 갯골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현미경으로 나문재나 해당화, 퉁퉁마디 등의 씨앗과 약쑥과 갈대, 칠면초 같은 식물의 마디들을 살펴볼 수도 있다. 한마디로 시흥 갯골의 생태계를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해 놓은 공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 센터 앞 습지에는 멸종위기 야생동물(2급)인 금개구리와 맹꽁이의 대체서식지도 조성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맹꽁이는 남양주시에서 이주해 온 것이란다. 다산신도시 건설로 인해 보금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 탐방로는 갯골습지센터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부흥교를 건너 생태공원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직진을 해버렸다. 들머리에 매달려있는 늠내길의 리본만 보고 정규 탐방로라고 오판을 해버린 것이다. 잠시 후 리본이 끊겨버린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다리 하나쯤 더 나올 것 같아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 그런 우리의 판단은 옳았다. 15분이 조금 못되는 지점에서 ‘흥부배수갑문’을 만날 수 있었고, 갑문을 건너 정규 탐방로로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잠시 후 ‘군자갑문’을 다시 만났다.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걸어왔던 곳이 아닌 다른 방향의 길을 따라야하기 때문이다. 갑문에서 합류되는 두 개의 하천 가운데 조금 더 큰 하천의 오른편 둑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 트레킹날머리는 시흥시청역(원점회귀)

탐방로는 동서로 아래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 모서리에는 ‘시흥시 쌀연구회 가공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시흥의 간척지에서 생산된 쌀. 즉 ‘햇토미’라는 브랜드의 쌀을 도정하고 모아두는 곳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동서로에 올라서게 되고, 이후는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면 된다. 오늘 트레킹은 4시간 30분이 걸렸다. 듬내길 지도가 내세우는 거리가 16㎞이니 꽤나 더디게 걸은 셈이다. 이는 볼거리가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도 되겠다.

 

다산길 7코스

 

여행일 : ‘20. 12. 23(수)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일원

산행코스 : GS25 화도묵현점→스타힐 리조트 입구→능선→천마산관리소 연결등산로→깔딱고개→바위능선→GS칼텍스 송라주유소(소요시간 : 2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집사람과 함께

 

특징 : 남양주시는 총면적의 70%가 산림이다. 그러나 산만 높은 게 아니다. 물길도 있다. 북한강이 남양주를 따라 흘러와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마침내 한강이 된다. 이처럼 남양주는 서울 도심에서 지척이지만 산과 강이 어울려 특별한 걷기를 즐길 수 있다. 그런 특징들을 연결시켜 놓은 트레일(trail)이 바로 ‘다산길’이다.

 

▼ 트레킹 들머리는 GS25 화도묵현점(남양주시 화도읍 묵현리 435-4)

코로나19의 신규 확진자가 100명을 넘기자마자 나 스스로가 여행을 중단했었다. 그게 벌써 6주. 그 시간을 이용해 그동안 게으름을 피워오던 여행기까지 마무리 짓고 나니 이젠 소일거리까지 떨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먼 거리의 여행지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거주지 근처의 둘레길(다산길 7코스)을 걸어보기로 했다. 마석역 앞에서 65번 시내버스를 타고가다 ‘스키장입구 사거리’ 정류장에서 내려면 된다.

▼ 다산길은 모두 13개 코스(169.3㎞)로 이루어져 있다. ‘다산’이란 이름은 조선말의 위대한 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호에서 따왔다.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곳이 바로 두물머리(남양주시 조안면)이기 때문이다. 그의 실학정신이 깃든 길을 걸으며 역사의 향기를 음미해보자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남양주시의 초심은 사라져버린 지 이미 오래. 지난번에 찾아봤던 6구간에 이어 이곳 7구간도 관리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었다. 이정표 등의 편의시설도 모조리 제거시켜버렸음은 물론이다. 둘레길 마니아들 대부분이 완주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감안해 볼 때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 7코스인 ‘마치고개길’은 남양주시청에서 시작해 백봉산과 마치고개를 거친 다음 ‘가곡리 은행나무’에서 종료되는 20.3㎞짜리 코스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절반만 걸어보기로 했다. 20.3㎞라는 거리가 다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남양주시청에서 마차고개까지의 등산로는 꽤나 여러 번 걸어봤기 때문이다. 아무튼 7코스는 구간 전체가 산길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때문에 다른 구간들에 비해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 편의점을 왼쪽에 두고 난 길(먹갓로). 그러니까 천마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의 이름인 ‘먹갓로’는 이곳이 ‘먹갓 마을’임을 의미한다. 검은 갓을 만들던 고을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말총갓을 살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선비들이 직접 종이로 갓을 만들고 먹을 갈아 검게 물들여 쓰고 다녔다는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0분쯤이면 ‘천마산 스키장’ 입구에 이른다. 1982년 개장된 국내최초의 ‘4계절 전천후 스키장(비시즌에는 인조 잔디 슬로프 운영)’이라는 명성에 더해 서울 도심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까지 갖추고 있다. 현재는 ‘스타힐 리조트’로 이름이 바뀌었다.

▼ 탐방로는 스키장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향한다. 담벼락에 붙여놓은 ‘산삼마을’이나 ‘사슴농장’의 방향 표시를 보고 진행하면 되겠다. ‘(주)오선 의료기’의 담벼락을 끼고 모퉁이를 돌면 전형적인 시골길이 길손을 맞는다.

▼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갈림길에서는 ‘오선연수원’으로 연결되는 포장길을 버리고 왼편의 비포장 임도를 따른다. ‘산삼마을’의 이정표도 아직 왼편을 향하고 있다.

▼ 작은 개울을 오른편 옆구리에 꿰찬 임도를 따르다보면 ‘고인돌’을 빼다 닮은 멋진 바위를 만나기도 한다.

▼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솟아오른 삼나무 아래에는 체육시설이 자리 잡았다. 기구에 매달려 몸을 풀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저 아래 ‘먹갓 마을’ 주민들인 모양이다.

▼ 바가지까지 놓아둔 약수터도 만날 수 있었다. ‘먹는물 수질검사성적서’는 보이지 않으나 ‘약수터 이용시 주의사항’이 붙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먹을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약수터를 지났다싶으면 또 다시 길이 나뉜다. 오른편은 봉선암으로 가는 길. 산삼마을 이정표도 이곳에서 이별을 고한다. 탐방로는 물론 왼편 임도를 따른다.

▼ 오른편으로 보이는 저 건물이 ‘봉선암’일지도 모르겠다. 여염집을 닮았지만 마당에 돌탑과 석불을 거느리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 ‘봉선암’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탐방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만이다.

▼ 도심에 가까운 산인데도 불구하고 숲은 제법 깊다. 여름철 산행지로 괜찮겠다는 얘기이다.

▼ 오래 묵은 나무 아래에는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들어앉았다. 서낭당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 기도를 드렸던 흔적까지 보이니 여간 범상스럽지가 않다. 하긴 오가는 길손의 수많은 염원들이 알알이 배어있는 돌멩이일지니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으랴.

▼ 봉선암을 지난 지 30분 만에 주능선에 올라섰다. 사거리라서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은데다 천마산으로 오르는 왼쪽 등산로가 훨씬 더 뚜렷하기 때문이다. ‘다산길’은 이곳에서 고개를 넘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 다산길은 이제 천마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능선들을 횡으로 째며 이어진다. 천마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코스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덕분에 한적한 산행을 맘껏 즐길 수 있었다.

▼ 오르내리는 산길이 가파른데다 어설프게 내린 눈까지 더해져 꽤나 미끄럽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보드라운 흙길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였으니 까짓 넘어져봐야 엉덩이 한 번 털어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벤치 두어 개와 평상을 놓아둔 쉼터가 나온다. 울창한 숲속에 들어앉은 게 여름철에는 최상의 휴식처로 부족함이 없겠다.

▼ 쉼터 옆에서 천마산관리소에서 올라오는 주등산로를 만났다. 다산길은 이곳에서 주등산로와 합류해 정상으로 향한다. 주등산로인데도 불구하고 산길은 가파르다. 아니 많이 가파르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之)’를 그리면서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간다.

▼ 고통스런 오름짓이 한동안 계속된다. 그러다가 만나게 되는 ‘약수터’는 목마른 나그네에게는 한줄기 빛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마시기에는 왠지 께름칙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바가지까지 놓아두었지만 물이 고인 형태의 샘인데다 ‘수질검사 성적서’ 도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약수터 위에는 벤치도 놓아두었다. 또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대비해 체력을 비축해두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가파른 오르막길이 또 다시 시작된다. 오늘 트레킹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라 하겠다. 하긴 오죽했으면 ‘깔딱고개’라는 지명까지 붙여놓았을까.

▼ 그렇게 15분쯤 올라섰을까 이번에는 아예 나무계단이다.

▼ 계단이 긴 탓인지 이용하는 사람은 썩 많아 보이지 않는다. 등산객들은 대부분 ‘갈 지(之)’를 그리고 있는 옛길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 계단의 끄트머리. 힘들게 올라선 능선에는 간이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119의 국가지점표시목은 이곳을 ‘깔딱고개’라 적고 있다. 숨을 깔딱깔딱 거려야만 오를 수 있는 힘든 구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이정표(천마산 정상← 1.45㎞/ 관리사무소↓ 1.43㎞)는 두 방향만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른편으로도 길이 또렷하다. ‘너구내 고개’로 연결되는 길이다.

▼ 정상으로 가지 않고 반대방향의 능선을 타기로 했다. 4년 전에 ‘다산길’을 답사했다는 어느 마니아의 후기에 오른쪽으로 내려가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이정표도 세워져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다산길 7코스’의 운영이 중단된 지금은 이마저도 치워버렸다. 오로지 선답자의 후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 능선은 계속해서 오름짓이다. 거기다 바위까지 심심찮게 나타난다. 복사해 온 후기는 가파른 내리막에 흙길이라는데도 말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진행해보기로 했다.

▼ 얼마쯤 걸었을까 능선이 바윗길로 변했다. 기암괴석들이 곳곳에 널린 멋진 구간이다.

▼ 산길은 끝내 암릉으로 변해버린다. 그것도 이력이 붙은 산꾼들이나 다닐 법한 험상궂은 바윗길이다. 위험구간마다 밧줄을 매어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지자체의 시설물이 아니라서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한 곳에 이르자 산길은 바위절벽 아래로 우회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가파르기 이를 데 없는 산비탈을 헤집다보니 길이 제대로 나있을 리가 없다. 길이 좁은데다 떡갈나무 잎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엔 최소한 중상이니 그저 조심할 수밖에 없다.

▼ 산길은 능선의 위와 산비탈을 번갈아가면서 이어진다.

▼ 이곳에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돌탑이 세워져 있다.

▼ 고개를 돌리자 빈 가지 사이로 천마산(天摩山, 812m) 정상이 내다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이성계가 천마산 언저리를 지나다가 산이 매우 높은지라 지나가는 촌부에게 산 이름을 물었다고 한다. 모른다고 하자 ‘가는 곳마다 청산은 많지만 이 산은 매우 높아 푸른 하늘에 홀(忽)을 꽂은 것 같아, 손이 석자만 길었으면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고 혼잣말을 하더란다. 하여 산의 이름이 천마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에는 ‘天馬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 또 다시 나타난 거대한 암릉, 산길은 더 이상 능선을 고집하지 못한다. 이번 것은 전문산악인도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 바위가 험해 넘을 수 없으니 낸들 어쩌겠는가. 절벽 아래서 길을 찾아낼 따름이다.

▼ 조심. 또 조심이다. 발아래 절벽만 조심해서 될 일은 아니다. 자꾸만 배낭을 건드리는 위쪽 바위도 경계 대상이다. 바위에 배낭이 걸려 자칫 중심이라도 잃을 경우에는 큰 사고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 489.1m봉으로 여겨지는 봉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내리막길로 변한다. 드디어 하산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 내려가다 보면 조망이 트이는 곳도 만나게 된다.

▼ 비록 빈 나뭇가지 사이이지만 가곡리 일대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 잠시 후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거기다 떡갈나무 잎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 짝이 없다.

▼ 그래선지 누군가가 밧줄을 매달아 놓았다. 가느다래서 믿음은 가지 않지만 이의 도움 없이는 내려서기 힘든 구간이다.

▼ 춤을 추다시피 하며 내려서는 집사람의 뒷모습이 차라리 애처롭다. 나 역시 이 구간에서 두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고 나서야 통과할 수 있었다.

▼ 계속해서 내리막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이렇게 오르막길도 나타난다.

▼ 얼마쯤 내려섰을까 바닥에 샌드백이 나뒹굴고 있다. 어느 젊은이의 무도 연습장이라도 되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동네에 가까워졌나보다.

▼ 하지만 가파른 내리막길은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속됐다. 그렇다고 지루해 할 틈은 없었다. 하도 미끄럽다보니 주변을 둘러볼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 깔딱고개를 출발한지 1시간10분. 드디어 사람의 손길이 더해진 풍경이 나타난다. 능선을 다듬어 묘역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 너머로 아파트단지까지 고개를 내민다. 선답자의 후기에는 보광사로 연결되는 임도가 나타난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섰던 모양이다. 덕분에 우린 ‘보광사(寶光寺)’를 둘러보지 못했다. 고려 광종 때 혜거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이 절은 고종(조선시대)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이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폐사되다시피 한 것을 1984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이유원은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의 초석을 놓은 이회영 형제의 둘째 이석영의 양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석영은 만석꾼이었던 이유원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처분해 신흥무관학교의 자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 묘역 아래 잣나무 숲은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거기다 안성맞춤으로 반석까지 보이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코끝을 스쳐가는 짙은 솔향을 안주삼아 준비해간 막걸리를 마시기로 했다. 그리고는 내친김에 집까지 걸어버렸다. 얼큰하게 술이 올랐는데 까짓 3킬로쯤 더 걷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 잣나무 숲을 벗어나자마자 도로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게 눈에 익은 풍경이 아닌가. 다산길 7코스의 종점인 ‘가곡리’는 초행길인데도 말이다. 길을 잘못 들었음이 완벽하게 증명되는 순간이다. 덕분에 ‘다산길 7코스’ 답사는 1/4도 채 걷지 못한 셈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2시간 40분이 걸렸다. 오랜만에 길을 나섰고 구간 전체가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힘든 여정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 그렇게 내려선 곳은 ‘GS칼텍스 송라주유소(화도읍 묵현리 159-3)’ 옆. 마석역으로 나가는 시내버스(30번, 330번)는 100m쯤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너구내 고개’에서 타면 된다. 그나저나 날머리가 바뀐 탓에 가곡리(가오실 마을)의 명물인 ‘공손수(公孫樹)’. 즉 수령이 무려 550년이나 되는 은행나무를 구경하지 못했다. 조선 성종의 손자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경기도 제1호 보호수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공손수(公孫樹)란 아버지가 심은 나무(은행나무)가 30년가량 지난 뒤 손자가 태어날 무렵이나 돼야 열매를 맺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성호 수변길

 

여행일 : ‘19. 12. 1(일)

소재지 : 전남 장성군 장성읍

코 스 : 장성호 입구→댐 관리소→출렁다리→장성호 입구(소요시간 : 3km/ 1시간 남짓)

 

함께한 산악회 : 가족나들이

 

특징 : 벌써 1년 전이다. 광주에서 살고 있는 남동생으로부터 딸을 결혼시킨다는 연락이 왔다.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에는 다소 무리인 거리이다. 그래서 하룻밤을 광주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고, 이왕에 내려갔으니 일정을 더 추가해 주변 관광지 몇 곳을 둘러보자는 의견이 여동생들로부터 나왔다. 2박3일의 여행은 그렇게 해서 시작됐다. 하지만 느닷없이 내린 가을비로 인해 일정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고, 그게 마땅찮아 나들이 결과의 정리를 내팽개쳐왔다. 그렇게 방치된 지 벌써 1년, 코로나로 인해 발이 묶여 소일거리가 없어지다 보니 옛 자투리들까지 끄집어내게 됐고, 거기다 당시 다녀왔던 ‘장성호 수변공원’이 그동안 많이 변했다는 지인의 귀띔까지 전해졌다. 그가 찍은 최근의 사진 두어 장을 덧붙여가며 옛 생각들을 끄적거려나가는 이유이다.

 

▼ 결혼식장이 ‘김대중 컨벤션센터’ 근처라기에 결혼식보타 1시간30분 먼저 광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컨벤션센터를 둘러보기로 했다. ‘김대중 컨벤션센터’는 광주광역시(서구 치평동)에 들어서 있는 국제 전시 및 회의용 편의시설로 2005년 9월 6일 문을 열었다. 당시 규모는 지상 4층(지하 1층)에 연면적 11,966평. 2013년 3,000석 규모의 다목적홀과 19개의 중소회의실을 증축한 제2센터를 개관하여 현재는 전시면적 12,027㎡에 회의실면적 4,313㎡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원래 이름은 ‘광주전시컨벤션센터(Gwangju Exhibition and Convention Center, GEXCO)’이었으나 개관이전 국제적인 전시회 또는 컨벤션을 주관·개최하거나 컨벤션을 유치하기 위한 마케팅활동의 파급력을 높이기 위하여 '김대중'이란 인명을 활용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란 판단 아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전허락을 받고, 광주 시민의 여론수렴 절차를 거쳐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 ‘김대중 컨벤션센터’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공공시설이다. 그래선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김대중 홀’이 손님을 맞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온 일생을 어떻게 살았으며 또 어떤 업적들을 남겼는지를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니 우리 부부의 관심도 오로지 이곳뿐이다.

▼ 2006년에 문을 연바있는 이 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애와 흔적을 알려주는 기념공간이다. 그러니 중앙은 오로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몫. 중심에 그의 흉상을 배치했다. ‘인동초(忍冬草)’ 또는 ‘한국의 넬슨 만델라’로도 불리는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한국의 정치가이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99년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2000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 좌우로는 정치가 김대중/ 인간 김대중/ 노벨평화상 및 남북정상회담/ 국민의 정부/ 동영상 및 각종 기록물/ 소장품 및 기념물 등의 관련 자료들을 전시해놓았다. 아래 사진에서 우측 하단에 살짝 보이는 도자기의 ‘관인후덕(寬仁厚德)’이란 글씨는 ‘이희호 여사’가 직접 썼다고 한다. 이는 ‘어질고 너그럽고 온후하며 덕이 두터운 사람이 되자’는 뜻. 가슴에 담아둘만한 사자성어라 하겠다. 예로부터 관인후덕한 군자들에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이 곧 자산인데 그런 이들이 어찌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서울 김대중도서관에서 기증했다는 ‘평화의 나무(높이 3m, 너비 2m)’가 눈길을 끈다. 노벨평화상 메달 홀로그램과 동영상 모니터가 부착된 월계수 모양의 구조물인데, 2002년 8월 스웨덴 노벨재단과 노벨박물관, 한국의 호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노벨상 100주년 기념’의 서울전시회(주제: 창조성의 문화-개인과 환경)에 전시되었던 것을 김대중도서관이 기증받아 전시해오다가 2006년 ‘김대중 컨벤션센터’에 다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 전시품 중에는 ‘IOC 올림픽 금장’도 있었다. 이밖에도 그가 찼던 시계와 남북정상회담 관련 자료, 노벨평화상 증서 및 메달의 복제품, 분노의 메아리 등 서적, 옥중 작사한 시조 CD와 악보, 시사 잡지, 목판 어록, 핸드 프린팅, 친필휘호 등이 진열되어 있다. 특히 1980년 7월 사형선고를 받은 그가 청주 교도소에서 1982년 12월까지 입었다는 수의가 눈길을 끌었다. 수의번호는 ‘9번’이었단다.

▼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사용하던 식기 세트도 전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하얀색 톤. 대통령 휘장을 중심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문양이 담백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인다. 그 오른편에는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강복장(강복을 했다는 증서)도 전시되어 있다.

▼ 예식장에서 피로연 겸 이른 저녁을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혼주 측에서 예약해놓은 숙소는 나주시에 있는 ‘중흥 골드 스파&리조트’. 나주호의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삼은 물놀이장(스파) 겸 리조트이다. 토네이도, 워터롤러코스터를 비롯한 각종 테마 물놀이시설과 수상레포츠, 36홀 규모의 명문 골프클럽을 부대시설로 갖고 있다. 나주시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근 광주광역시 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 이유이다. 리조트의 규모도 크다. ‘스파동’과 ‘골드동’으로 나누어지는데, 19평에서 57평까지 다양한 평수의 방들을 199개나 보유하고 있다.

▼ 물놀이 공간은 텅 비어있다. 워터롤러코스터와 패밀리슬라이드. 아마존리버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름철에만 문을 연다고 한다. 파도풀과 아쿠아플레이어, 토네이도, 레이싱슬라이드 등은 겨울철에도 운영한다고 했는데 들러보지는 않았다. 아니 여행지를 급히 바꾸느라 찾아가 볼만한 여유도 없었다.

▼ 리조트 앞에는 ‘2천년 시간여행, 나주’라는 제목의 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여행지를 나주 읍성권과 영산포 근대문화권, 나주호·다도권역으로 나누었는가 하면, 나주 영상테마파크와 반남 고분군도 따로 표시해 놓았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길을 나서기가 무서울 정도로 늦가을 빗줄기가 거세다. 나주에서의 일정을 포기하고 장성으로 발길을 돌린 이유이다. 조금이라도 더 늦게 투어를 시작해보기 위해서이다. 거기다 ‘방장산 자연휴양림’이라는 멋진 숙소가 여행지를 변경하는데 크게 한 몫 했음은 물론이다.

▼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은 ‘장성호(長城湖)’. 옮기려는 숙소의 예약 등을 챙기느라 출발이 늦어진 덕분인지 빗줄기는 많이 가늘어졌다. 장성호는 1976년 영산강유역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건설된 댐이다. 장성읍 용강리에 높이 36m, 길이 603m의 댐이 건설되면서 넓은 호수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그동안 생활용수와 농업용수, 내수면 양식 등으로 지역민에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왔지만, 지금은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조성된 수변길과 출렁다리가 지역의 새로운 명물이자 장성에 오면 반드시 들러야 할 명소로 자리 잡았다.

▼ 호수 면적만 1만2천㏊로 내륙의 바다로도 불리는 장성호에 수변길이 만들어진 것은 지난 2017년. 폭 1.8m 남짓의 목재 데크가 드넓게 펼쳐진 호수의 풍광과 시원하게 드리운 나무 그늘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아름다운 풍광과 스릴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도록 출렁다리도 두 개나 놓았다. 이 아름다운 수변길은 한국관광공사가 2018년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 걷기 길에 선정되기도 했다.

▼ 수변길 탐방의 시작은 장성호 입구의 주차장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걷기는 장성호의 제방(堤防)으로 올라서면서 부터다. 제방은 긴 계단을 힘들여 오르거나, 에둘러 올라가는 길을 따르거나 해야 한다. 참! 직선으로 된 계단의 왼편에 무장애 탐방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계단이 없는 데크길을 별도로 만들어 휠체어나 유모차를 타고서도 수변길을 돌아볼 수 있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 장성호의 제방 위로도 길이 나있었다. 추가로 건설하고 있다는 ‘황금빛 출렁다리’와 연결시킬 새로운 탐방로이자 기존의 ‘출렁길(제방 좌측의 탐방로)’과 더불어 새로운 명품 길로 탄생하게 될 ‘숲속길(3.7㎞)’이기도 하다. 나무와 물이 조화를 이룬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탐방로에서 바라보는 장성호 풍경이 두 개의 출렁다리와 어우러져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단다.

▼ 탐방로는 ‘장성호 관리소’의 뒤로 열린다. 제방의 왼편, 그러니까 관리소에서 시작해 북이면 수성마을에서 끝나는 이십 리의 이 길은 최근 ‘출렁길’로 이름 붙여졌다. '출렁다리로 향하는 길'을 뜻한단다. 그래선지 들머리의 이정표에도 출렁다리까지의 거리를 표시해 놓았다. 아무튼 이 길은 장성호의 굴곡을 따라 유순하게 흐르는 아주 편안한 길이라서 가족과 함께 걷기에 그만으로 알려져 있다. 음이온이 풍부한 길을 걷다보면 시원한 산바람과 바다를 닮은 광활한 호수 덕에 지루함을 느낄 틈도 없단다.

▼ 제방에 올라서자 ‘영산강유역 농업개발 기념탑’이 위용을 자랑한다. 장성댐은 1973년에 시작돼 1976년에 준공됐다. 백암산과 입암산 계곡을 따라 흘러온 물을 담은 농업용 댐으로 영산강 유역의 홍수 피해를 막고, 농업용 물을 원활하게 공급하는 데 목적을 뒀다.

▼ 농어촌공사의 로고로 보이는 조형물도 세워져 있었다. ‘농어촌과 백년, 물 관리로 천년’이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눈길을 끈다.

▼ 관리소의 뒤. 호수 가장자리에는 ‘취수탑’이 들어섰다. 장성호는 호남의 젓줄인 영산강에서 가장 긴 지류인 황룡강의 물길을 막아 생긴 인공호수이다. 1976년에 완공 되었으니 44년이 되었다. 맑은 물과 지천으로 잡히던 물고기는 옛 이야기가 되었다지만, 대신 생긴 장성호는 수상관광지로 발돋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 관리소를 지나자마자 길은 ‘수변길’과 ‘임도’로 나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중간 중간에서 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제2 출렁다리’가 완공되지 않은 지금 수변길은 편도이다. 장성호 관리소부터 수성마을 버스종점까지는 7.5km. 수변길 보다 조금 안쪽으로 임도와 등산로가 있어서 겹치지 않는 노선으로 왕복할 수도 있지만 임도나 등산로는 수변길 보다 오르내림이 있어 조금 힘이 든다.

▼ 수변길 입구 오른편에는 ‘장성호 선착장’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입구가 막혀있을 뿐만 아니라 정박하고 있는 배도 보이지 않는다. 요트라도 두어 척 정박되어있으면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될 터인데 아쉬운 일이다.

▼ 탐방로는 호수를 둘러싼 산 안쪽 벼랑을 따라 놓여 있다. 산에서 뻗어 기울어진 나무가 데크길 위를 덮어 호수와 함께 수변길 특유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지금은 비록 빈 가지 사이로 하늘이 내다보이지만, 철따라 색깔을 바꾸며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멋진 파노라마를 연출해왔을 것이다. 새싹이 피는 봄은 물론이고, 여름에는 나무들이 데크 길 위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을 게 분명하다. 지금은 겨울의 초입, 잎이 진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햇살이 가득 들어올 텐데 빗줄기가 이를 막고 있다. 집사람의 손길이 옷깃을 여미기에 바쁜 이유이다.

▼ 늦가을에 내리는 비는 기온까지도 크게 떨어뜨렸다. 그래선지 탐방로는 텅 비어있다. 하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씨가 쌀쌀한데 이를 말이겠는가. 하지만 비어있는 길이 우리에겐 오히려 득이 된다. 호젓하게 거닐며 맑은 호수가 빚어내는 잔잔한 물결소리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확 날려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 탐방로 군데군데 쉼터도 만들었다. 벤치 서너 개에다 식탁까지 배치했는데 하나같이 호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또 어떤 곳에는 긴급 구호장비도 비치해 두었다. 참! 두 번째 쉼터는 임도(이정표 : 출렁다리 0.6㎞/ 임도/ 장성호 입구 0.6㎞)와 연결되고 있었다. 초입에서 갈려나가는 임도를 따랐다면 이쯤에서 만나지 않았을까 싶다.

▼ 수변길이 모두 데크로 된 것은 아니다. 맞다. 고즈넉한 숲길로 이루어진 수변길은 댐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오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한동안 사람의 발자취가 사라졌지만 최근 끊겨 있던 길을 나무 데크로 잇고 쉼터를 만들어 걷기 좋은 길로 다듬었다. 그 결과 자연 그대로의 경치를 간직한 아름다운 길로 다시 태어났다.

▼ 호숫가의 가파른 벼랑을 따라 내놓은 데크로드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성호의 경관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다리 한쪽에선 숲의 나뭇잎끼리 스치는 소리를, 다른 한쪽에선 호수의 물이 벼랑을 때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힐링의 최적지이다.

▼ 수변길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장성호를 한바퀴 도는 34km 길이의 ‘장성호 100리길’이 원래 계획. 이 가운데 장성호 제방에서부터 북이면 수성리까지 나무데크길과 기존 임도가 섞인 7.5km 구간이 조성되자 이곳을 관광객에게 먼저 개방했다. 그래선지 탐방로 주변은 아직도 공사 현장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필수시설이라 할 수 있는 매점까지도 시설공사가 절반도 끝나지 않았다.

▼ 아래 사진은 최근에 다녀온 지인이 찍은 매점(편의점)의 사진이다. 공사를 마치고 ‘출렁정’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단다. 비치파라솔을 배치해 경관 좋은 곳에서 음료를 마실 수 있게 했음은 물론이다.

▼ 휴게소에서 우린 ‘옐로우 출렁다리’와 마주하게 된다. 작년 6월에 개통한 옐로우 출렁다리는 장성호 여행의 ‘핫플레이스’로 통한다. 많은 방문객들이 SNS를 통해 사진과 후기를 공유하면서 입소문이 인기를 더했다. 다리 앞에 서면 먼저 두 마리 황룡의 모습을 형상화한 높이 21미터의 주탑부터 보는 이를 압도시킨다. 강물 속에 숨어 살던 용이 마을 사람들을 몰래 도왔다는 황룡강의 전설이 모티브다.

▼ 다리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길이 154미터에 폭은 1.5미터라고 한다. 다리 상판을 들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주탑의 높이도 21미터나 된단다. 참! 명색이 출렁다리인데 주의사항 하나쯤 없겠는가. 뜀박질 금지는 물론이고, 사진을 찍는답시고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말아달란다. 그리곤 강풍이나 강우시에는 통행을 제한할 수도 있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강한 바람에도 끄떡없으며 동시에 1,000명이 통과해도 이상이 없다던 기사는 뭐란 말인가.

▼ 아래는 ‘옐로우 출렁다리’의 전경으로 홍보용 사진을 빌려왔다. 출렁다리는 수변길 시작점에서 1.2km 지점과 2.7km 지점을 연결한 다리다. 다리 양 끝에서 비상하는 황룡(黃龍) 두 마리를 형상화한 21m 높이의 주탑(柱塔)이 우뚝 솟아오르는 모양새의 현수교(懸垂橋)이다. 장성의 젓줄인 황룡강의 설화 속에 등장하는 황룡을 '옐로우시티(Yellow-City)'로 힘차게 도약하는 장성군의 이미지로 잘 표현했다 하겠다.

▼ 호수는 추위가 더해질수록 물빛은 맑고 더 깊어지는 게 특징이다. 또 겨울바람이 일으키는 잔잔한 물결 소리를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어 매력적이다. 하지만 집사람에게는 남의 집 얘기일 따름이다. 늦가을 차가운 비로 인해 기온이 뚝 떨어졌는데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모자까지 푹 뒤집어썼음에도 연신 옷깃을 여미고 있다.

▼ 출렁다리는 수변길에다 걷는 재미를 더했다는 호평을 받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장점은 호수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장성호의 수려한 경관을 바라보고, 호수도 한층 가까이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리 위에 서면 장성호의 수려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름철이면 저 풍경화에는 제트스키 등 수상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덧칠해 질 것이다. 그런 빼어난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한국관광공사로부터 ‘대한민국 대표 걷기길’로 선정되었는가 하면, 최근에는 전라남도가 추천하는 대표 관광지에도 이름을 올렸다.

▼ 아래는 날씨가 좋았을 때 찍은 다른 이의 사진을 빌려왔다. 누군가 그랬다. 극한의 아름다움은 서러움으로까지 연결된다고. 맞다. 눈물 한 방울 떨구어도 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가.

▼ 출렁다리는 수변길에서 느끼는 백미 중 단연 으뜸이다. 다리를 건널 때 위·아래, 옆으로 흔들리는 느낌과 장성군을 상징하는 노란색을 결합해 옐로우 출렁다리로 이름 지었다. 다리의 넓이는 1.5미터, 좁은 듯 보이지만 진행 방향이 다른 두 성인이 겹쳐 지나가더라도 불편하지 않다. 다리 한가운데는 탁 트인 호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최고의 감상 포인트이기도 하다.

▼ 다리의 양쪽. 주탑의 와이어를 고정시키는 핀 역할을 하는 곳에는 작은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앞에는 ‘yellow city 장성’이란 문구가 적혀있다. 수변길, 아니 수변길 말고도 장성 땅 곳곳에서 이 표어는 눈에 띈다. 무슨 뜻인지 무척 궁금했다. ‘노란색 꽃과 나무가 가득하고 물과 사람이 공존하는 자연친화적 도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황색은 황제의 색이기에 최고를 의미하며, 우리의 전통 색인 오방색 중에서 가운데의 색이라서 지리적으로 호남의 중심에 있는 장성을 잘 표현하는 색이고, 부를 상징하며, 장성을 수호하는 황룡(黃龍, 장성은 영산강의 가장 긴 지류인 黃龍江이 흐르는 지역이기도 하다)의 색이기도 하단다.

▼ 출렁다리의 북단도 편의시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매점과 카페, 분식점에 화장실까지 들어설 예정이란다.

▼ 아래 사진은 시설공사가 끝난 후의 북단 풍경이다. 다리 건너의 ‘출렁정’과 함께 이곳 ‘옐로우 출렁다리’를 풍요롭게 만드는 휴게소, 즉 ‘넘실정’이다. 로컬브랜드로 보이는 ‘여우愛김밥’과 라면, 떡복이 등을 파는 곳이니 편의점보다는 간이음식점에 가깝다 하겠다. 그 옆에는 카페도 들어서 있다.

▼ 출렁다리를 지나자 임도와 데크가 나란히 뻗어있다. 데크의 끝 오른쪽으로 수변길이 이어지는데, 걷기에 편한 황토길이 좌우로 꿈틀대며 뻗어 나간다. 이런 풍경은 ‘출렁길’이 끝나는 수성마을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 길가에 매어놓은 밧줄에는 오색의 리본들이 한 가득이다. 이곳을 다녀간 기념으로 매달아놓은 모양인데 흡사 무당집 처마를 연상시킬 정도다. 출렁다리의 개통과 더불어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1년 동안의 방문객수가 30만 명을 넘겼고, 주말이면 5천명 이상 찾는 핫플레이스라는 기사 말이다.

▼ 길가 조그만 공터에는 식탁형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안내도에 이 부근을 ‘피크닉장’으로 표기했었는데 이를 가리키는 모양이다. 아무튼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제2 출렁다리’가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서의 추가 탐방은 무의미하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수변길이 편도형 노선이었으니 종점까지 가지 않을 바에는 그만 출발지로 되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갈 때는 임도를 따라보고 싶었지만 땅이 질어 이 또한 그만두기로 했다. 갈 때와 올 때의 시야가 달라지기에 길은 같아도 새로운 맛이 난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아무튼 우리 일행은 출렁다리를 마지막으로 원점회귀를 했다. 이후의 사진은 지인이 촬영했다는 최근 사진이다. 장성군에서 올해 '황금빛 출렁다리'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 다리는 첫 번째 출렁다리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단다.

▼ 용곡리에 세워진 이 다리의 길이는 154미터. ‘옐로우 출렁다리’와 똑 같은 길이이나 폭은 30센티가 더 넓다. 아니 더 큰 차이점도 있다. 현수교(懸垂橋). 즉 양쪽에 주탑(柱塔)을 세운 뒤 케이블을 이용하여 도로 상판을 지탱하고 있는 첫 번째 다리와는 달리, 다리를 지탱하는 케이블을 주탑 대신 육상 구조물에 연결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중앙부로 갈수록 수면에 닿을 듯 내려가는 짜릿함을 선사한단다.

▼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면 마치 경사가 완만한 내리막길을 걷는 것 같다고 했다. 차이가 있다면 주위가 온통 호수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란다. 하긴 주탑이 없는 저런 ‘U’자 형 다리는 다리 중심부로 향할수록 수면과 가까워지는 게 특징이다. 특히 이곳 ‘황금빛 출렁다리’는 한가운데 도달하면 물 위에서 불과 2∼3m 밖에 떨어지지 않는단다. 중앙부로 다가갈수록 위아래는 물론이고 옆으로도 흔들거리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맛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단지 다리를 건너는 것만으로도 큰 짜릿함을 맛볼 수 있을 게 분명하다.

▼ 다리 끝에는 황룡강의 용(龍) '가온'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빨간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려는 모습이다. 조형물 뒤로는 3층짜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가온은 황용강에서 산다는 용이다. 낮에는 강물 속에서 숨어살다가 밤이 되면 뭍으로 올라와 사람으로 둔갑해 마을 사람들을 몰래 도왔다고 한다.

▼ 다시 돌아온 제방. 댐 아래에는 행사용 몽골텐트가 여러 동 처져있다.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을 위한 간이휴게소 겸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판매하는 직거래 장터이다. 특히 요기를 할 수 있는 포장마차도 들어서있어 가을비의 쌀쌀함으로 인해 가뜩이나 허기졌던 속을 따끈하게 풀어줄 수 있었다. 물론 막걸리와 함께이다. 참! 2020년 7월부터는 수변길의 입장료(3,000원)를 받고 있다는 지인의 얘기를 깜빡 잊을 뻔했다. 하지만 무료나 마찬가지라는 귀띔도 있었다. 주말과 공휴일에 한해서 받는데다, 탐방을 마치고 나면 이마저도 상품권으로 되돌려준다는 것이다.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한 아이디어이지 싶다.

▼ 이왕에 장성에 왔다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필암서원(사적 제242호, 筆巖書院)도 꼭 둘러볼 것을 권해본다. 서원이란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거나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제사하던 곳이다.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곳 ‘필암서원’이니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고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과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 등이다.

▼ 필암서원(筆巖書院)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1590년(선조 23) 김인후의 문인 변성온 등이 주도하여 기산리에 세웠는데, 이 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24년(인조 4) 복원되었다. 1662년(현종 3) '필암'으로 사액(賜額)되었으며 1672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 속에 살아남았던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건축물인 '확연루(아래 사진)'의 현판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의 글씨며, 서원에서 보기 힘든 화려함을 지닌 경장각에는 인종의 묵죽도 판각과 정조의 편액 등 소중한 사료들이 소장돼 있다.

▼ 장성은 풍천장어로 유명한 ‘고창’의 옆 고을이다. 그러니 맛보러가지 않고 어찌 배길 수 있겠는가. 지인에게 연락해서 찾아낸 곳은 고창산 풍천장어만 취급한다는 ‘금단양만’이다. 1층에서 장어를 구입한 뒤 2층으로 올라가 무료로 구워먹는 시스템이다. 이때 2층에서는 불과 석쇠판만 제공해주고 나머지 양념이나 반찬 등은 셀프로 먹을 수 있다. 가격은 1킬로그램에 6만8천원으로 저렴한 편이며, 식사는 공기밥 1개에 1천원으로 된장국과 함께 제공된다.

▼ 저녁은 ‘국립방장산자연휴양림’에서 머물기로 했다. 나주의 숙소를 나서기 전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 때문에 따로 할 일은 없었다. 그저 공실이 없기로 유명한 국립휴양림인데도 불구하고 빈 방이 생겼음에 감사만 하면 된다. 그건 그렇고 1999년에 개장했다는 방장산자연휴양림은 다양한 수종의 활엽수와 편백나무 등이 자생하여 아름다운 경치와 신선한 피톤치드가 넘실대 가족 단위로 휴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최근에는 청·장년층 이상이 즐겨하는‘아로마 천연테라피 체험’과 ‘편백 건강 베개 만들기 체험’, 청소년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에코어드벤처 체험’등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산림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 방장산의 품에 안겼지만 정상을 오르는 것까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12년 전. 이곳 방장산의 자랑거리인 심설 산행 때 찍은 사진을 올려본다. 전라 남·북도의 경계지역에 걸터앉은 방장산(743m)은 주변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신비한 구름속에 가려져 있다해 예부터 지리·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이라 불렸다. 또한 조선 문종(1451년)때 편찬된 '고려사 악지'에 도적떼들에게 잡혀간 한 여인이 남편이 구해주러 오지 않자 이를 애통해하며 부른 노래인 '방등산가'의 유래지기도 하다. 참고로 ‘방장산’이란 지명은 청나라에 멸망한 명나라를 숭상하던 조선조의 선비들이 중국의 삼신산 중의 하나인 방장산과 비슷하게 생겼다며 같은 이름을 붙인데서 유래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모화사상’을 내 고향 근처에서 접하게 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얘기라니 어쩌겠는가.

남해도(南海島) 가족나들이

 

여행일 : ‘19. 3. 31()~4. 2()

여행지 : 경상남도 남해군(독일마을, 가천마을, 보리암, 상족암)

 

함께한 사람들 : 가족여행

 

 

특징 : 일 년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한 형제들 모임. 올해는 남해도를 돌아보기로 했다. 남해의 별명은 일점선도(一點仙島), '한 점 신선의 섬'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경관이 아름답다. 볼거리 많고 먹거리가 넘쳐나서 보물섬이라고도 불린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 한껏 달아오르는 중이다. 사천에서 창선대교를 건너 남해도로 들어선다. 다리 아래 바다색이 다르고,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이 다르다. 참고로 남해는 행정지명이지만 한반도의 남쪽바다를 아우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부르는 산과 섬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췄고, 그 덕분에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넘친다.

 

여행 둘째 날. 느지막이 아침 끼니를 때우고 나서 찾아간 곳은 이웃 고성군에 있는 상족암(床足巖)’. ‘세계 3대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라는 유명세말고도, 바닷가에 넓게 깔린 암반과 암반 위로 솟아오른 기암절벽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여행지로는 이만한 곳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창선대교와 삼천포대교를 건너 대방교차로(사천시 대방동)’까지 나간 다음, 77번 국도의 하일면(고성군) 방면으로 달리다가 월흥사거리(하이면 월흥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잠시 후 상족암군립공원(하이면 덕명리 제전마을)’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이곳 고성군은 미국 콜로라도, 아르헨티나의 서부해안과 함께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꼽힌다. 천연기념물(411)로 지정된 이유이다. 이 공룡화석지는 백악기인 약 1~12천만 년 전의 공룡 흔적들을 보여주는데, 12종의 공룡 발자국과 공룡알, 공룡알 둥지, 새발자국 화석 등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상족암과 주상절리 등 자연이 빚어낸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혹시라도 어린이들과 함께 왔다면 공룡박물관도 꼭 둘러봐야 할 것이다. 단 매주 월요일은 박물관이 문을 닫는 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몇 곳의 민박집과 식당이 들어서 있는 제전마을은 상족암 군립공원의 중심축으로 수성암(水成巖)의 단애가 아련히 먼 시간 속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을이다. 거기다 몽돌과 은빛모래가 어우러지는 마을 앞 해변도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데 톡톡히 한몫을 한다. ‘티라노사우루스(폭군 도마뱀, Tyrannosaurus)’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바닷가에라도 서면 남해의 푸른 바다가 눈에 가득 차오른다. 해양수산부에서 아름다운 어촌으로 선정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하겠다.

 

 

마을 방파제로 가는 길 오른편에 절리로 이루어진 바위벼랑이 보인다. 부안의 적벽에서 보았던 형상, 즉 켜켜이 쌓아올린 시루떡의 모양으로 생긴 절리(節理)’. 절리란 암석에 규칙적으로 생긴 금을 말하는데, 지표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암석에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절리는 화성암(火成岩)에서는 용암이 냉각할 때 생기는 수축으로 인해 생기게 되며, 퇴적암(堆積岩)이나 변성암(變成岩)에서는 지각변동으로 인해 생긴다.

 

 

들머리에는 여러 개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임을 알리면서 공룡이란 무엇인지와 공룡발자국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이 발자국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지에 대해서 적어놓았다. 다시 말해 공룡화석에 대한 교육장인 셈이다. 그 외에도 발자국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놓은 안내판들이 여럿 설치되어 있으니 한번쯤은 꼭 읽어볼 일이다.

 

 

마을방파제를 지나면서 데크로드가 시작된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널따란 암반 위에 공룡의 발자국들이 또렷하다. 이 일대에는 공룡 한 마리가 세 발자국 이상 걸은 보행렬이 250개 이상 있다고 한다. 무리 지어 있는 발자국은 초식 공룡이고, 홀로 찍혀있는 삼지창 모양의 발자국은 육식 공룡의 것일 확률이 높단다. 공룡은 몸집이 크기 때문에 어디를 걸어 다니든 발자국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옳은 추론(推論)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룡 발자국 화석은 흔치 않다. 주로 공룡이 진흙을 밟았을 때만 남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고성은 어땠을까? 과거 이곳은 거대한 호수였다고 한다. 호수나 늪지대의 진흙 위를 공룡이 걸어 다녀 발자국이 남았던 것이다. 진흙에 남겨진 발자국 위에 흙이 쌓이며 돌로 굳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땅속에 있던 돌이 지상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남해의 바닷물이 그 돌 위를 들어오고 나가며 흙을 씻어내자 마침내 공룡 발자국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공룡은 발자국 모양에 따라 세 분류로 나뉘는데, 고성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은 조각류가 60%, 용각류가 35%, 수각류가 5%란다. 또한 죽은 공룡의 골격 화석이 아닌, 살아있을 때 공룡이 걸어 다녔던 발자국이라니 한층 더 소중하다 하겠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공룡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공룡은 골반 모양에 따라 파충류와 비슷한 구조의 용반류, 새와 비슷한 골반을 가진 조반류로 나뉜다. 또한 발자국에 따라 뭉툭한 삼지창 모양의 조각류, 삼지창 모양에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수각류, 뭉툭한 발가락에 타원형의 발자국을 가진 용각류로 분류한다. 참고로 공룡은 중생대 트라이아스기(Triassic Period)에 출연해 중생대 마지막인 백악기(白堊紀)에 그 수가 최대에 달했다. 경남 고성과 전남 해남·화순·여수 등 우리나라 남쪽에서는 백악기 공룡 화석지로 유명하다. 특히 경남 고성은 군 전역에 걸쳐 약 5100여 개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나왔다고 한다.

 

 

길은 잔도(棧道). 험한 벼랑에다 마치 선반처럼 달아냈다. 바다와 바위벼랑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탁 트인 바다풍경과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바위, 그리고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면서 조성된 주상절리 등을 볼 수 있는 멋진 산책로이다.

 

 

거대한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이 바다 건너편으로 펼쳐진다. 이곳 상족암군립공원의 명물 중 하나인 병풍바위이다. 그런데 그 자태가 자못 빼어났다. 비취빛으로 물든 남해바다와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이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관광유람선 한 척이 사량도 사이로 물보라를 가르며 지나가면서 그 그림에 화룡점정을 찍는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모퉁이 두어 개를 돌자 저만큼에 경남 청소년수련원건물이 나타난다. 경남 도내 청소년들의 심신 단련을 위해 설립된 시설로 현재 한국스카우트 경남연맹에서 위탁운영해오고 있다. 수련원은 4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 외에도 대강당과 야외공연장, 캠프파이어장, 운동장, 족구장, 배구장, 모험개척활동장, 수상활동장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청소년 수련원 앞에는 고성 공룡테마파크라고 적힌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청소년수련원에서 갖고 있는 부대시설들을 통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공룡박물관과 공룡공원 등 이곳 상족암군립공원 일대를 아우르는 말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아무튼 수련원 너머로 공룡(恐龍)을 닮은 조형물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게 보인다. 공룡박물관 광장에 만들어놓았다는 브라키오사우루스(brachiosaurus)’ 조형물일 것이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공룡탑으로 높이가 무려 24m에 이르고 길이 34m에 너비도 8.7m나 된단다. 참고로 쥐라기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지금까지 알려진 공룡 중에서 가장 크고 긴 공룡이다.

 

 

수련원 앞의 해수욕장 역시 은빛의 고운 모래로 덮여있다. 그 뒤에 몽돌이 널려있음은 물론이다.

 

 

수련원을 지나면서 또 다시 데크로드가 이어진다. 산책로의 해안 쪽은 평탄하게 층을 이룬 퇴적암에 파도가 넘실거린다. 육지 쪽으로는 수 천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 수성암 해식애(海蝕崖)가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다.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층리(Stratification)’라고 적혀있는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층리(層理)란 퇴적물이 수평하게 쌓여 굳어져서 지층이나 암석이 만들어질 때 나타나는 나란한 줄무늬를 말한다. 퇴적물이 운반되어 퇴적되고 다져져서 단단한 암석으로 변한 것을 지층이라고 하는데, 지층은 각 층마다 퇴적물의 종류와 색깔, 알갱이의 크기, 퇴적 시간 등이 다르기 때문에 줄무늬, 즉 층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벼랑의 아래를 따르던 데크길이 잠시 위로 오른다. 그리고 고개 위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계속해서 오르면 공룡박물관후문을 거쳐 유람선선착장으로 연결된다. 오늘 트레킹의 목적지라 할 수 있는 상족암은 데크계단을 이용해 바닷가로 내려서야 만날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서면 널따란 암반이 나타난다. 이곳이 상족암군립공원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상족암(床足巖), 즉 천연기념물 제411호로 지정된 고성 덕명리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이다. 하지만 아까처럼 또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얼핏 볼 경우 바닷가 바위에 살짝 팬 구덩이에 불과하니 꼼꼼히 살펴봐야만 공룡의 발자국임을 알아 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눈에 익은 모양의 절벽들이 해안으로 펼쳐진다. 아까 데크로드를 따라 오면서 보던 모양들이 훨씬 더 정교해졌다. 그리고 이내 부안의 적벽에서 보았던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있던 그런 모양새들을 찾아낸다. 판상절리(板狀節理)란다. 절리란 암석이나 지층이 갈라지거나 쪼개지는 것을 말하는데 그 모양에 따라 주상절리와 판상절리, 방상절리(方狀節理)로 나뉘게 된다. 이중 수평방향으로 발달된 절리를 판상절리라고 한다. 기둥모양으로 형성된 수직형의 절리를 주상절리, 그리고 두 방향 또는 여러 방향의 절리들이 교차하여 거대한 장방형이나 육면체로 잘리게 되는 것을 방상절리라고 부름은 물론이다.

 

 

그나저나 사람들의 관심은 공룡발자국 보다는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에 쏠려있나 보다. 바닥을 살펴보는 사람들보다는 해벽동굴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이렇게 고운 풍경화가 펼쳐지는데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상족암(床足巖)은 층암단애(층층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로 이루어져 있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여간 범상스러운 게 아니다. 암벽 깊숙이 동서로 되돌아 돌며 암굴이 뚫어져 있는 것이 밥상다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족(床足)’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이다. 또한 여러 개의 다리모양 같다 하여 쌍족또는 쌍발이라고도 불린다.

 

 

높고 낮으며, 넓고 좁은 굴 안에는 기묘한 형태의 돌들이 많은 전설을 담고 있다. 태고에 선녀들이 내려와 석직기를 차려놓고 옥황상제에게 바칠 금의를 짜던 곳이 상족굴이고 선녀들이 목욕하던 곳은 선녀탕이라 불려오고 있다. 지금도 돌 베틀모양의 물형과 욕탕모양의 웅덩이가 굴 안에 존재하고 있다니 관심을 갖고 살펴볼 일이다.

 

 

상족암 해식동굴은 오랜 세월동안 파도에 시달린 흔적이다. 그 흔적이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기기묘묘해서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다. 동굴은 거의 직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동굴이 앞뒤로 뚫려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이 동굴에서는 여느 바다 사진과는 다른 사진을 찍어 볼 수 있으니 한번쯤은 꼭 시도해 볼 일이다. 이왕에 시작한 김에 동굴 촬영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동굴은 우선 빛이 매우 부족하고 장소가 한정되어 있다. 동굴사진은 대체로 입구의 윤곽을 이용한 촬영을 많이 한다. 적당한 위치에서 동굴 외각을 잡고 바깥 경치를 촬영하는 것이다. 이때 노출은 주제에 맞추고 동굴 외곽은 노출 부족을 시켜 어둡거나 검게 처리한다. 동굴 안의 모델은 실루엣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얼굴이 보이게 할 수도 있다. 얼굴을 보이게 할 때는 보조광을 이용해야 한다.

 

 

 

상족암의 앞에는 수백 명이 한꺼번에 앉아 쉴 수 있는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이 평탄한 암반층을 파식대(波蝕臺)라고 부른다. 평탄한 암반위에 손바닥 크기의 구멍 몇 개가 보인다. 공룡발자국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지만 자신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모양이다. 공룡의 발자국보다 물이 빠져나가면서 드러난 해조와 조개류에 더 관심을 갖는 걸 보면 말이다.

 

 

이번 여행의 히어로는 단연 손아래 여동생의 큰 손주다. 의사인 부모가 쌍으로 일본에 취업한 덕분에 할머니 손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길에 모처럼 귀국한 엄마까지 동행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거기다 다섯이나 되는 우리 형제들에게도 유일한 손주였으니 또 얼마나 귀염을 독차지 했겠는가.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공룡박물관으로 향한다. 잠시 후 오른편에 공룡박물관으로 연결되는 후문이 나타난다. 하지만 월요일인 오늘은 전국의 모든 박물관들이 문을 닫는 날이다. 이곳 역시 문이 굳게 닫혀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5개 전시실과 영상실로 구성된 공룡박물관은 중생대 백악기(1억년 전)의 공룡 골격 진품 4, 복제품 10, 일반화석 55점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국내 최초의 공룡전문박물관으로써 공룡화석을 보다 흥미롭게 즐길 수 있도록 오비랩터(Oviraptor)와 프로토케라톱스(Protoceratops) 진품 화석을 비롯하여 클라멜리사우루스 (Klamelisaurus)와 모놀로포사우루스 (Monolophosaurus)와 같은 아시아 공룡, 그리고 세계의 다양한 공룡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 남해도로 되돌아가다가 삼천포 용궁수산시장에 들렀다. 한려수도의 중심지인 삼천포는 1956년에 시로 독립되어 유지되다가 1995년 사천군과 통합되어 현재는 사천시가 되었다. 하지만 시장의 이름은 아직도 삼천포그대로이다. 인근 해역에서 잡히는 해산물이 모이는 중심 어항으로 오랜 세월을 이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곳은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다는 게 매력. 굳이 복잡한 시내를 통과해가면서까지 어시장을 찾아간 이유이다. 이왕에 바닷가에 왔으니 하룻밤 정도는 회 잔치를 해야지 않겠는가.

 

 

평일, 거기다 월요일이선지 몰라도 어시장은 한산했다. 아니 점심 때가 지났는데도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곳도 있었다. 회를 떠주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 횟집의 90% 이상을 여성들이 운영하고 있단다. 다른 어시장의 경우 남성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는데 이곳에서는 남성들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무튼 우린 이곳에서 10만 원 조금 넘는 돈으로 광어와 우럭에 해삼·멍게까지 두둑하게 살 수 있었다. 활어 외에도 선어와 건어물, 어패류 등을 팔고 있었으나 이는 눈요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또한 이곳은 시장 옥상에 주차장이 마련돼 있어 주차장을 찾아 헤매거나 무거운 해산물을 들고 주차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자랑거리다. 주차장으로 나오면 정박해놓은 어선들이 즐비한데 이 또한 소소한 볼거리이다. ! 어시장 주변에 정박해놓은 어선사이로 갈매기가 날아다니는데 생각보다 너무 커서 옥상 주차장에 말려놓은 해산물이 무사할까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5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죽방렴(竹防廉, 명승 제71)’도 남해도의 명품 볼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해안에 돌로 담을 쌓은 뒤 밀물과 썰물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석방렴(石防簾, 또는 독살)’에 대비되는 원시 어로방식이 죽방렴인데 우리가 흔히 아는 죽방멸치역시 죽방렴으로 어획하기에 이름 지어진 것. 이를 보기 위해서는 지족마을로 가야한다. 창선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나오면 지족 어촌체험마을이 나온다. ! 창선대교에서도 죽방렴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다리 아래서 진행되는 원시어업 형태의 죽방렴은 물론이고, 일몰의 아름다움까지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 유명하다.

 

 

좁은() 바다길이라 하여 손도라고도 불리는 지족해협은 하루 두 번씩 밤낮으로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할 때마다 바닷물이 좁은 해역을 빠져나가는 물살이 당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거세다는 이야기다. 그런 조류(潮流)의 특징을 이용한 원시 어로기법이 이곳 죽방렴이다. 물때를 이용하여 고기가 안으로 들어오면 가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건지는 방식으로 이곳에서 잡힌 생선은 최고의 횟감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물살이 빠른 바다에서 사는 고기는 탄력성이 높아 그 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V’자 모양의 대나무 정치망인 죽방렴은 길이 10m 정도의 참나무 말목 300여개를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은 갯벌에 박고 주렴처럼 엮어 만든 그물을 물살 반대방향으로 벌려 놓은 원시어장이다. 물살에 떠내려 오는 고기를 잡는 단순한 방법으로 현재 남해군 지족해협에 유일하게 23통이 남아있어 보존가치가 높은 관광자원으로 관심을 모은다. 아래 사진들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다음 방문지는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금산(錦山)이다. 아니 정확히는 정상 근처에 있는 보리암 菩提庵)’이다.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라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다 요즘은 산책삼아 다녀올 수도 있다는데 말이다. 찾아가는 방법도 간편하다. 남해읍 바로 아래에 있는 무림사거리(이동면 무림리)’에서 19번 국도로 올라타고 상주해수욕장 방향으로 가다보면 금산을 안내하는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보리암로를 따라 들어가면 복곡저수지 상류의 하부주차장(복곡매표소)’을 거쳐 상부주차장(보리암매표소)’에 이르게 된다. ! 하부주차장에서 상부주차장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20년 전 처음으로 찾았을 때의 보리암은 얼굴 보기가 만만찮았다. 가파른 산길을 낑낑대며 올라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동네 마실 나가는 것만큼이나 수월해졌다.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사찰인데도 인접한 곳까지 자동차가 들어가는 까닭이다. 차에서 내린 후 금산의 수려함과 맑은 공기를 느끼며 10여분만 걸으면 보리암이다.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풍광도 빼어나다. 금산의 자랑거리인 기암절벽과, 한려수도의 특징인 다도해의 풍광을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전망대를 지나게 되기 때문이다.

 

 

잘 닦인 탐방로를 따라 10분 남짓 걸었을까 금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갈려나가는 삼거리에 도착했다. 보리암 뒤편에 우뚝 솟은 웅장한 대장봉과 대장봉을 향해 절을 하는 듯한 모습의 형리암의 멋진 절경을 이룬다. 그건 그렇고 절 입구의 안내소에서 보광전까지 100는 가파른 돌계단이다. 손잡이가 있긴 하지만 무릎 관절이 좋지 않다면 조심해야 한다.

 

 

보리암(菩提庵)’에 도착하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절집의 위용에 놀라게 된다. ‘어떻게 이런 곳에 절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절로 드는 광경이다. 이 절이 창건된 이야기는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신문왕 3(683) 운수행각 하던 원효대사가 온 산이 빛나듯 방광한 모습에 홀려 초당을 짓고 수행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한 원효는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하고 절의 이름도 보광사(普光寺)’라 불렀다. 그 뒤 태조 이성계가 100일 기도를 올리며 수행한 뒤 조선을 개국하자 산의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바꾸었고, 현종 때는 보광사 대신 새로 절을 지어 이름을 보리암으로 한 후 왕족의 명복이나 현세를 축원하기 위한 절인 원당으로 삼았다. 1300여년의 긴 역사만큼이나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가 담긴 사찰이다.

 

 

절을 돌아보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역시 관음을 모신 사찰이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보리암은 불당들도 볼 만하지만 역시 관음을 직접 만나러 가야 한다. 사찰의 제일 양지바른 곳, 남해가 한눈에 보이는 장소에 해수관세음보살상(海水觀世音菩薩像)이 우뚝 서 있다. 해수관세음보살상은 연꽃 문양의 상·하 좌대를 서로 마주 보게 포갠 뒤 그 위에 화강석으로 조각됐다. 왼손에는 보병을 들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채 가슴에 두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각각의 팔을 휘감아 흘러내린 옷깃은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실물을 보는 듯하다.

 

 

관음상이 세워진 것은 1970년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리암에서 가장 기()가 강한 곳이라선지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려고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면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만은 꼭 들어 주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인자한 미소를 띤 보살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이들의 소망은 무엇일까.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들은 다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들의 기도가 성취되기를 바라며 함께 고개를 숙여본다.

 

 

해수관음상 바로 옆에는 삼층석탑(菩提庵前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이 자리하고 있다. 가야시대 때 허왕후가 인도에서 올 때 배가 태풍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실었던 돌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683년 개산(開山)을 기념하기 위해 원효대사가 이곳에 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강암으로 만든 이 탑은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인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아무튼 땅에 서린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 지은 탑으로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보리암을 지켜온 것만은 사실이다.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비는 것도 이곳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축대 위에는 각양각색의 꼬맹이 불상들이 한 가득이다. 불심 가득한 신자들이 하나둘 가져다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보리암의 보리(菩提)는 깨달아 도를 이루었다는 뜻, 이곳에서 빌면 뭔가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소문이 난, 영험하고 자비스런 관음기도 도량이다. 그러니 뭔가를 염원하는 불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왔을 것이고, 또 그들은 신심에서 우러나오는 뭔가의 공물(供物)을 바치지 않았겠는가.

 

 

썩 좋지 않은 풍경도 보였다. 석탑 근처 바위면의 각자(刻字)가 바로 그것인데, 자신의 허울 좋은 이름을 드러내려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낙서들이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영험에 기대어보려는 중생의 바람이었는지는 몰라도 또 다른 중생인 내 눈에는 한갓 넋두리로 보일 따름이었다.

 

 

해수관음상 앞은 보리암 최고의 전망대이다. 난간에 서면 발아래 한려수도(閑麗水道)의 시원한 풍광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저 멀리 남해바다의 만경창파가 넘실거리는데, 그 파도위에 자그마한 섬들이 마치 돛단배인양 두둥실 흘러 다니고 있다. ! 저런 아름다움이 있기에 이곳 금산이 산이면서도 유일하게 한려수도에서 포함되어 있나보다. ! 이곳뿐만 아니라, 금산 어느 곳에서나 기암괴석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바다풍경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보리암 주변의 기암괴석들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곳 금산은 남해의 금강산이란 애칭을 갖고 있을 정도로 빼어난 암릉미를 갖고 있는 산이다. 여유를 갖고 시야를 돌려보면 그야말로 절경, 자연이 빚어 놓은 수석 전시장은 눈길이 가는 곳마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난간에서 바다를 등지고 보리암 주변을 둘러보면 가장 높은 대장봉에서부터 왼편으로 형리암·농주암·화엄봉·일월봉·제석봉·상사바위 등이 차례로 보인다. 삼불암은 탑대 오른편으로 건너다보이는 바위이다. 이곳 금산에는 저렇듯 아름다운 경관들, 금산의 38이라는 빼어난 경관을 보유하고 있어 해마다 많은 탐방객들로 붐빈다. 38경에는 망대, 문장암(文章岩), 대장봉, 형리암, 탑대, 천구암, 이태조기단(李太祖祈壇, 이씨기단), 가사굴, 삼불암, 천계암, 천마암, 만장대, 음성굴(音聲窟), 용굴, 쌍홍문(雙虹門), 사선대(四仙臺), 백명굴, 천구봉, 제석봉, 좌선대, 삼사기단(三師祈壇), 저두암, 상사바위(相思巖), 향로봉(香爐峰), 사자암(獅子岩), 팔선대, 촉대봉(燭臺峰), 구정암, 감로수, 농주암, 화엄봉, 일월봉, 흔들바위, 부소암, 상주리석각, 세존도, 노인성, 일출경 등이 꼽힌다.

 

 

저렇듯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지는데도 집사람의 잔뜩 웅크린 몸은 풀릴 줄 모른다. 이곳 보리암은 관음성지로 명성을 떨치는 곳. 어머니 관음이 사는 곳이라선지 엄숙하기보다는 따뜻한 느낌이다. 그런데도 집사람이 느끼는 이른 봄의 쌀쌀함까지 없애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녀로서는 그런 관음사상이 강 건너 불구경일 수도 있겠다. 고향집 같은 포근함 속에서 소원을 빌며 칭얼대고, 한껏 휴식을 취하기도하면서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까지도 남의 집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금산의 정상은 올라가지 않기로 했다. 이미 세 번이나 다녀갔기 때문이다. 대신 9년 전 들렀을 때 사용했던 사진과 글을 올려본다. <정상으로 가려면 보리암 뒷편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서야 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문장암(명필바위)을 지나 정상에 오르면 명승 제39호 금산이라고 적힌 정상석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 금산 제1경인 망대(望臺)가 서있다. 망대는 사방으로 조망이 뛰어나다. 넓고 아름다운 남해바다의 만경창파가 잘 보인다고 해서 망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망대는 또 고려시대 때부터 우리나라 최남단의 봉수대(烽燧臺)로 사용되어 왔는데, 조선시대에는 오장 2명과 봉졸 10명이 교대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높이 3.5m 둘레 56m 8m 되는 장방형의 돌담으로 작지 않은 규모이며,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또 다른 명소도 소개해 본다. 단군성전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수백 길 절벽위에 치솟은 거대한 암봉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웃집 처녀를 짝사랑했던 총각의 전설이 서린 상사바위이다. 상사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다. 보리암 주변의 기암괴석들이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고, 한려수도의 수려한 풍광이 눈앞에 빈틈없이 들어차고 있다.

 

 

상사바위는 보리암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조망의 명소다. 금산의 정상어림 바위절벽 위. 관음성지로 이름을 떨치는 다른 사찰들처럼 보리암도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민중들은 관음보살이 천축국 낙가산 바닷가 굴에 살았다고 믿었다. 친정 같은 편안한 곳에 관음보살을 모시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 기운이 가까운 곳에 관음성지를 지었다. 그 편안함 속에는 삶에 지친 사람들이 들어가 함께 쉴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쌍홍문(雙虹門)’이다. 커다란 바위에 두 개의 구멍이 뻥 뚫린 것이 마치 해골을 보는 듯, 원래는 천양문이었는데 원효대사가 두 개의 구멍이 마치 쌍무지개 같다 하여 쌍홍문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역시 깨우친 현인들 눈에는 같은 사물도 이렇듯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내 눈에는 해골로만 보이는데도 말이다. 쌍홍문을 통과하면서 바라보는 바깥세상은 또 하나의 경이로운 세상이다. 왼편 구멍으로는 계단을 따라 쌍홍문으로 줄지어 오르는 군상들이 늘어서 있고, 오른편 구멍으로는 저 멀리 남해 한려수도의 만경창파가 넘실거린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남도에는 벌써 벚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남도에서도 꽃의 절정은 남해도다. 벚꽃 길을 따르다보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눈부신 쪽빛 바다와 알록달록 꽃들이 만나 즐거운 수다를 떨고 있다. 한마디로 서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 서러움에 겨웠는지 벚꽃은 천지사방에 꽃잎을 흩날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