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무섬마을
여행일 : ‘22. 2. 6(일)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산행코스 : 주차장→무섬마을→제2외나무다리→산길(전망대)→외나무다리→환학암→주차장(거리/ 소요시간 : 의미 없음)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섬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예천 회룡포’, ‘영월 선암마을’처럼 마을의 3면이 물로 둘러싸인 대표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영주천을 보탠 내성천이 마을의 삼면을 감싸듯 휘감아 돌면서 육지속의 섬을 만들어놓았다. 마을의 삼면을 내성천이, 나머지 한 면은 소백산에서 이어져온 산줄기가 외부와의 접촉을 끊어버린 것이 영락없이 섬(島)인 것이다. 고립이 역설적으로 보존을 낳았다. 문화재로 등록된 집만 해도 만죽재와 해우당 등 아홉 채나 된다. 특히 ‘ㅁ’자형 가옥, 까치구멍 집, 겹집, 남부지방 민가 등 다양한 구조의 가옥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다고 한다. 국가 중요민속문화재(제278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들머리는 무섬마을 외곽주차장(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돗밤실둘레길에 이은 탐방이기에 이산면사무에서 출발한다. ‘이산로’를 이용해 용암교차로(영주시 하망동)까지 온 다음, 좌회전하여 조암교차로(영주시 조암동)로 온다. 이어서 ‘조암교’로 원당천을 건넌 다음 문수로(초입부분은 ‘간운로’란다)로 옮겨 10km쯤 들어가면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다리(수도교)가 보인다. 다리를 건널 수 없는 대형버스를 위해 도로 오른편에 널따란 주차장을 마련해 놓았으니 이를 이용하면 된다.
▼ 탐방로는 마을길(녹색)과 트레킹길(점선)로 나뉜다. 하지만 길이란 길을 모두 걸어도 2시간이 채 안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볼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수도교를 건너가 마을을 둘러본 다음, 제2무섬외나무다리(오른편)를 건너 트레킹길을 따라 원점회귀 하는 것을 추천한다. 집결지로 돌아오는 도중에는 무섬외나무다리(왼편)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춰 ‘인생샷’을 건져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 주차장을 빠져나와 동쪽(왼쪽), 그러니까 내성천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 무섬마을로 들어가려면 ‘수도교’를 건너야 한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콘크리트 다리지만 이 다리는 마을 주민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라고 한다. 30년 전, 이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외나무다리가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였다니 말이다. 장마철만 되면 다른 지역과의 길이 끊기다가 다리가 놓이면서 그게 해소되었으니 어찌 보배롭지 않겠는가.
▼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편(왼편으로 갈려나와 다리 아래를 통과한다) 방향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탐방객들을 위해 내놓은 ‘트레킹 길’로 탐방을 마친 다음 저 길을 이용해 원점회귀하게 된다.
▼ 다리에서 내려다본 내성천(乃城川, 내성은 봉화의 옛 이름이다)의 물 흐름은 고즈넉하다. 소백산 줄기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마을 뒤편에서 서천(영주천)을 만나 무섬마을을 한 바퀴 휘돌아 나간다. 그 물길은 환학정(喚鶴亭) 앞에 이르러 물살을 살짝 죽이고 모든 흐름을 안으로 감춘다. 한없이 고즈넉하게 보이는 이유다.
▼ 다리를 건너자 잡다한 안내판이 길손을 반긴다. 이 가운데 무섬마을에 대한 설명판과 가옥배치도는 꼭 살펴보고 길을 나설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면 개념도 정도는 머릿속에 담아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 무섬마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이라고 한다. ‘반남 박씨’인 ‘박수’가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이후 조선 영조 때 그의 증손녀 사위인 ‘예안 김씨’ ‘김대’가 들어왔으며, 지금까지도 반남 박씨와 예안 김씨 두 집안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단다. 마을은 현재 약 48가구 1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38동이 전통가옥이고, 그중에서도 16동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 이정표는 34.6km나 떨어진 ‘소수서원’까지 표기하고 있었다. 이왕에 왔으니 주변 관광지까지 두루두루 보고 가라는 모양이다. 그래선지 시 단위의 관광안내판도 두엇이나 세워놓았다.
▼ 정보가 더 필요하다면 안내판 뒤에 있는 ‘관광안내소’로 가볼 일이다. 무섬마을뿐만 아니라 영주권역의 자료까지 얻어 볼 수 있다.
▼ 기초 자료를 얻었다면 이제 마을을 둘러볼 차례다. 마을의 왼편 끄트머리에는 ‘아도서숙(亞島書塾)’이 있다. ‘아세아 조선의 섬인 수도리의 서당’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데, 김화진 주도로 1928년 문을 열어 1933년 일제가 강제로 폐쇄할 때까지 무섬마을의 교육기관이자 항일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문맹퇴치와 민족교육, 민족정신 고양 등 농민계몽활동과 독립운동을 동시에 펼쳤다고 한다. 이들은 일제 감시와 탄압으로 검거와 투옥을 되풀이하고도 끝까지 영주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단다.
▼ 김희규 가옥으로 여겨지는 초가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치류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그 뒤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 치류정(峙流亭)은 앞면 2칸 규모의 작은 정자와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서당이었던 아도서숙과 함께 마을사람들이 후학을 양성하고 교류하는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저나 ‘치류정’이 ‘예안 김씨’의 입향조인 ‘김대’의 호라서 문화재가 아닐까 살펴봤지만 그에 대한 안내판이나 기록은 눈에 띄지 않았다.
▼ 마을에는 ‘무섬식당’이란 음식점도 들어서 있었다. 메인 메뉴는 ‘무섬정식’. 하지만 청국장이 더 인기가 높단다. 주인이 직접 재배한 콩으로 메주를 띄우고 청국장을 만들어 식사를 내놓는데, 손님의 대부분은 야외 식탁에서 밥을 먹어야하는 구조이다. 요즘 같은 팬데믹 시대에 딱 맞는 시스템이라 하겠다. 마침 맛까지 훌륭하다니 끼니때라도 되었다면 출출해진 배를 채워볼 일이다.
▼ 무섬마을은 전통을 이어가는 마을이다. 그러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음식 하나쯤 없겠는가. 한옥민박을 겸하고 있는 ‘김갑진 가옥’인데, 메주와 된장, 부석태청국장 등 전통식품을 팔고 있었다.
▼ ‘김영석 가옥’의 옆 공터에는 꽤 많은 장독이 오와 열을 맞추며 늘어서 있었다. 이 마을에서 팔고 있는 제품이 제법 입소문을 탔다는 얘기일 것이다.
▼ 근처에는 주실고택(김한직 가옥)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안내판이 없어 가옥에 대한내력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고택 숙박체험이 가능한 민박집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뿐.
▼ 마을의 맨 안쪽에는 김기현가옥이 들어서 있었다. 백송당(白松堂)이라고도 부르는데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았다는 의미인 듯.
▼ 입구에서 마당까지 공간에는 눈길을 끄는 조형물과 분재 같은 희귀식물들로 꾸며져 있었다. 주인장의 고상한 취미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라 하겠다.
▼ 강변으로 되돌아오면 이번엔 ‘해우당 고택(海愚堂 古宅, 경북 민속문화재 제92호)’이 반긴다. 무섬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 ‘만죽재’라면 가장 큰 집은 ‘해우당’이다. 수도교를 건너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ㅁ’자 형의 집인데, 이는 남녀를 구분하는 유교의 생활 원리를 반영한 구조란다. 개방적인 공간인 사랑채는 남성, 폐쇄적인 공간인 안채는 여성이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 해우당 고택은 1830년 예안김씨 입향조 김대(金臺, 1732-1809)의 셋째 손자 김영각(1809-1876)이 짓고, 1876년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海愚堂) 김낙풍(金樂灃, 1825-1900)이 중수했다. 경북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ㅁ’자 형 기와집으로 중앙에 안마당. 앞쪽에 ‘―’자 모양의 사랑채, 뒤쪽에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다. 해우당이란 편액은 그의 정치적 조언을 받던 흥선대원군이 쓴 것으로 알려진다.
▼ 해우당의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청퇴정(淸退亭)이 나온다. 오헌(吾軒) 박제연(朴齊淵, 1807-1890)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돌로 지은 정자는 무섬마을이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마을로 지정되면서 단청을 입혔는데, 이게 시멘트로 지었다. 중국 냄새가 난다는 등 꽤 구설수를 탔던 모양이다. 그게 억울했던지 처음 지었을 당시의 사진을 대문 앞에 걸어놓고 있었다.
▼ 정자 아래에 세운 시비에는 오헌의 한시 오헌유거(吾軒幽居, 조용한 나의 삶)가 새겨져 있었다. <평온한 시냇가 한 구비 물가에다/ 조용한 나의 살 곳 정했도다/ 초원 모래톱엔 송아지 잠들고/ 맑은 모래밭엔 해오라기 평온하네/ 산 빛은 마땅히 나의 집 비추고/ 물굽이 감기는 곳 난간이 떠 있는 듯/ 어부와 나무꾼 이야기도 끝나기 전/ 어느새 둥근달 누각 위에 떠 있네>
▼ 만운고택(晩雲古宅)으로도 불리는 ‘김뢰진 가옥(金賚鎭 家屋, 경북 민속문화재 제118호)’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 살림집의 변화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라는데 아쉬운 일이다.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다. 입구에 ‘김성규 가옥’이라는 안내판 하나를 더 세워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 것이다. 김성규는 일제강점기 김화진과 함께 아도서숙을 세우고 농촌계몽과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또한 그는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김성규가옥은 현재 무섬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가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꼬불꼬불한 마을길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정도로 고즈넉했다. 고택이라 하여 큰길을 차지하지 않고, 가옥이라 하여 막다른 골목에 있지도 않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자연의 고즈넉함을 닮은 길과 집을 만날 수 있다. 어느 지역신문 기자는 이런 풍경을 ‘고즈넉함의 미학’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무섬의 고즈넉함은 느림의 미학을 넘어선다면서 말이다.
▼ 수춘재(壽春齋)라는 편액을 단 ‘김태길 가옥은 고택 숙박체험이 가능하다.
▼ 수춘재 옆은 비교적 큰 규모인 ‘일계고택(逸溪古宅)’이다. 이 집은 조금 특이하다. 다른 집들과는 다르게 사랑채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툇마루를 넓게 만들어 누마루 같은 느낌을 준다.
▼ 다음은 ‘섬계고택(剡溪古宅)’이다. 섬계는 무섬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히는 박제익(朴齊翼, 1806-1841)의 호이다. 지금은 ‘김동근 가옥’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집에서도 고택 숙박체험이 가능하다.
▼ 섬계고택 안쪽에는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만죽재 고택(晩竹齋 古宅. 경북 민속문화재 제93호)’이 있다. 병자호란 후 출사를 단념한 ‘반남 박씨’ 입향조 박수(朴檖, 1641-1709)가 1666년(헌종 7년)에 지은 집으로 지금도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지을 당시는 섬계초당(剡溪草堂)이었으나, 박수의 8대손 만죽재 박승훈(1865-1924)이 중수하고 당호를 만죽재로 고쳤다. 이 집도 역시 ‘ㅁ’자 형의 구조로 되어있으며, 웅장하지는 않지만 종택답게 간결하면서도 격식을 갖추었다.
▼ 무섬마을은 농지, 우물, 담과 대문, 사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예외가 없겠는가. 아래 사진처럼 예쁜 담이 이웃에 정과 옛집이야기를 실어 나르기도 한다.
▼ 무섬마을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까치구멍집’이다. 지붕 용마루 아래에 까치집처럼 작은 구멍(공기를 통하게 하는 용도)이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경상북도 북부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는 유형인데, 대문만 닫으면 맹수의 공격을 막을 수 있고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혀도 집안에서 모든 생활을 할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앞부분의 봉당(封堂)을 중심으로 좌측에 사랑을 두고, 우측에 부엌을 두었다. 뒷부분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상방을 두고 우측에 안방을 두었다.
▼ ‘박천립 가옥(경북 문화재자료 제364호)’은 카페로 성업 중이었다. 간판은 집의 외형을 담아 ‘초가 카페’라 내걸었다. 우리네 재래 차와 커피를 팔고 있는데, 대부분이 3천원이고 비싸봐야 5천원(대추차)이니 가격도 저렴한 편. 배라도 출출할라치면 사발면(2천원) 한 그릇 비우고 가면 될 일이다.
▼ 다음에 만날 곳은 ‘무송헌 종택(撫松軒 宗宅)’이다. 무송헌이란 당호는 세종 때의 천문학자인 김담(金淡, 1416-1464)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집은 1923년에 지어졌으며, 당호는 문중에서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있는 김담의 아호에서 따왔다. ‘김광호 가옥(金光昊 家屋)’이라고도 부르는데, 오랫동안 빈 채로 있다가 얼마 전 김담의 종손인 주인장 내외가 집을 보수한 뒤 살기 시작했단다.
▼ 마을 안내도는 이집을 ‘종택(宗宅)’이라 적고 있었다. 그래선지 마당 한켠에 사당으로 여겨지는 건물이 별도로 지어져 있었다. 이 또한 무섬마을 사무(四無)의 예외라 할 수 있겠다.
▼ 병조참판을 역임한 박제연(朴齊淵, 1807-1890)의 고택은 그의 호를 따 ‘오헌(吾軒)’이 되었다. 오헌이란 바로 우리 집이란 뜻. 내 집에 내가 산다는 의미인데 원래는 도연명이 ‘새들도 깃들 곳을 기뻐하듯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편액의 글씨는 구한말 개방파 관료인 박규수가 썼다. 현 거주자인 후손의 이름을 따 ‘박정우 가옥’으로도 불린다.
▼ 맨 끄트머리 산자락에는 섬계 박제익이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교류하던 ‘섬계초당(剡溪草堂)’이 있다. 박제익은 영남일대에 널리 알려진 문장가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탓에 후학의 계보는 잇지 못했으나 후대에 미친 글의 영향은 지대했다고 전해진다. 그나저나 건물을 눈앞에 뻔히 두고도 찾아보지는 못했다. ‘만죽재’의 부속 건물인데도 다른 곳에서 접근을 시도했으니 어찌 그게 가능했겠는가.
▼ ‘아석 고택(我石 古宅, 경북 문화재자료 제117호)’은 1885년에 ‘반남 박씨’ 가문에서 지었다고 한다. 1910년대 ‘예안 김씨’인 김낙기(입향조 김대의 증손)가 매입하면서 소유주가 바뀌었다. ‘김덕진 가옥’으로도 불리는데 ‘아석’이란 당호는 김낙기의 손자인 ‘김원규’의 호에서 따왔단다.
▼ ‘김위진 가옥’은 ‘조은 구택(釣隱 舊宅, 경북 문화재자료 제360호)’이라고도 불린다. 1893년 이 집을 지은 김휘윤의 호를 당우의 이름으로 삼았다.
▼ 월미산 초당(月美山 草堂)이라고도 불리는 ‘김규진 가옥(경북 문화재자료 제361호)’은 까치구멍집이다. 원래의 집이 수해로 떠내려가 1930년대에 새로 지은 6칸(앞3×옆2) 집으로, 방을 앞뒤 2열로 배치한 게 특징이라고 한다.
▼ 무섬마을의 집들은 하나같이 장작을 두둑이 쌓아놓고 있었다. 집집마다 겨울에 장작불을 때기 때문이란다.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좋아해서라는데, 하긴 겨울 난방으로 온돌만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
▼ 돌담이 예쁜 ‘금강초당’은 담장 너머로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쁘게 꾸며진 내부가 무척 궁금했지만 주인이 싫어하니 참을 수밖에...
▼ 고색창연한 고택들은 현재 전통을 이어가는 후손들이 기거한다. 그래서 집집마다 오랜 삶의 향기가 배어나고, 동네는 친근한 고향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선지 주말이면 고택에서 하룻밤을 지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조용한 마음의 힐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마을 끄트머리에는 마을의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다. 이중 한옥체험수련관은 무섬마을의 문화체험 프로그램과 행사운영, 단체손님의 숙박을 위한 시설이다. 80-100명이 숙박할 수 있는 공간과 현대식화장실, 샤워시설, 족구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도자기와 염색체험 및 사군자체험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단다.
▼ ‘무섬자료전시관’도 있다. 조선 후기에 반남 박씨와 예안 김씨가 터를 잡고 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온 내력을 설명해 주는 곳이다.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내부에는 마을이 배출한 주요 인물들이 남긴 글, 국가로부터 받은 교지, 집에 걸었던 현판 원본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 전시관 앞에는 조지훈의 시비(詩碑)도 세워져 있었다. 처가 앞 강변을 한없이 거닐며 마음껏 시정 펼쳤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인 모양이다. 시비에는 별리(別離)라는 시를 새겨놓았는데 아내를 무섬에 남기고 서울로 공부하러 떠나는 애틋한 마음을 담았다. 참고로 조지훈이 무섬마을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9년 이곳으로 장가를 오면서부터다. 혜화전문학교 시절 무섬 출신 김위남(필명 김난희)과 결혼한 그는 방학 때마다 내려와 시심(詩心)을 일구었다고 한다.
▼ 자료전시관 앞에서 이번에는 냇가로 내려선다. 이곳 무섬마을을 세상에 알리는데 일조한 ‘외나무다리’를 만나보기 위해서이다. 무섬마을의 가장 큰 볼거리는 단연 외나무다리다. 마을과 강 건너를 잇고 있는데, 시집올 때 가마 타고 한 번, 죽어서 상여 타고 한 번 지나간다는 애환이 서린 다리다.
▼ 저 외나무다리는 콘크리트로 새로운 다리를 놓을 때까지 300년 넘게 바깥세상을 잇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보따리장수나 다른 곳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이기도 했다. 수도교 건설(1983년)과 함께 사라졌던 외나무다리는 최근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단다. 참! 저런 다리는 옛날 3개가 있었다고 한다. 영주시장 갈 때 이용하던 게 하나고, 지금 수도교 쪽에 있던 다리는 학교 갈 때 건너던 길이었단다. 나머지 하나는 들에 일하러 갈 때 주로 이용하던 ‘놀기미다리’라고 한다. ‘놀기미논’으로 가는 다리라는 뜻이란다.
▼ 저렇게 좁은데 오가는 사람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외나무다리 중간마다 마주 오는 이를 피해갈 수 있도록 여분의 짧은 다리인 ‘비껴다리’를 놓았다. 마주 보고 건너던 사람들은 비껴다리에서 서로 길을 양보했단다. 그렇다고 어느 누가 쉽게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마는. 오죽했으면 ‘무섬마을에 시집오면 죽어서야 상여를 타고 나갈 수 있다’는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 다리는 폭이 30센티에 불과하다. 때문에 긴 장대에 의지한 채 건널 수밖에 없었단다. 그마저도 익숙하지 않은 외지인들은 다리를 건너다 심심찮게 빠지곤 했단다. 그래서 무섬을 드나들 때는 마음 수양부터 하고 건너야 한다고 했다나? 그렇다면 함께 투어를 하고 있는 이석암 선생은 양팔을 쫙 벌린 채로 심신수양을 하는 모양이다.
▼ 강 건너에 이르러서는 ‘둘레길’을 따르기로 했다. 내성천 건너의 산줄기를 따라 내놓은 이 둘레길은 ‘문수지맥 트레킹길’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문수지맥(文殊枝脈)이란 백두대간 옥돌봉(1,244m)에서 서남쪽으로 분기하여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을 가르며 문수산·복두산·학가산·보문산·나부산 등을 일구고 내성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대하는 도상거리 약 114.5 km의 산줄기이다. 그러니 무섬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을 지나간다. 그런데도 문수지맥이란 이름표를 달아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 잠시 후 무섬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최고의 조망처를 만났다.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이 만들어내는 멋진 비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하긴 선두를 맡고 있는 윤대장이 ‘둘레길’을 놓치지 말라는 전화연락까지 해왔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과 물이 태극 모양으로 서로 안고 휘감아 돌아가는 멋진 모양새이다. 마을은 파란 물과 하얀 모래밭이 빙 둘러 감싸고 있는 것이 흡사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풍수에서는 저런 지형을 연화부수(蓮花浮水,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 또는 매화낙지(梅花落地,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모습)로 꼽으며 길지 중의 길지로 친단다.
▼ 유연하게, 그것도 상큼한 솔향기까지 맡아가며 걷는 호사스런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과 함께 끝을 맺는다.
▼ 탐방로는 이제 강변을 따른다. 그리고 오른편에 무섬마을을 두고 걷는다. 무섬의 옛 지명은 ‘섬계(剡溪)’다. 마을이 안도라는 선비가 살던 중국의 섬계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고을 이름 섬(剡)’ 자이니 물가에 가깝게 있는 동네가 아니겠는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딱 어울리는 지명이라 하겠다.
▼ 둑에서 내려다보면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모래사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굽은 초승달 모양의 모래사장이 마을을 삼면에서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내성천이 ‘C‘자 모양으로 굽으며 마을 앞을 널찍하게 흘러가면서 만들어낸 현상이라는데, 그 안쪽에서 잠든 듯 조용히 엎드려 있는 게 바로 무섬마을이다.
▼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외나무다리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는 정자와 벤치를 갖춘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무섬마을 가옥배치도와 함께 문수지맥트레킹길 안내도를 세워 이방인들의 길 찾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 쉼터 주변에는 시판(詩板)을 세워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안도현의 ‘우물’과 박노해의 ‘너의 하늘을 보아’, 나희덕의 ‘어느 봄날’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이름과 시도 여럿 보인다. 그 가운데 권서각 시인의 ‘꽃은 피고 물은 흐르고’라는 작품을 올려본다. 술과 안주, 거기에 인심까지 좋다니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 강변으로 내려가면 내성천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황금빛 모래가 흐르는 강. 저 내성천이 휘감아 돌면서 마을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저 강은 무섬마을 사람들에겐 지난한 삶의 현장일 수밖에 없었다. 외부로 나가기 위해 나무다리를 놓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또 물길에 순응하도록 뱀이 움직이는 모양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장마철이면 불어난 물에 다리가 떠내려가는 탓에 해마다 새로 놓기까지 했다.
▼ 다리는 절반으로 쪼갠 통나무를 하천 위에 얹어 만들었다. 통나무를 가로로 잘라 하천 바닥에 깊숙이 박은 게 교각이다. 하지만 폭이 좁아 건너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도 이 다리를 건너 학생들은 학교에 다녔고, 외지로 시집가는 처녀들은 꽃가마를 탔다.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는 딸의 고된 시집살이보다도 가마가 물에 떨어지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했을 것이다. 주민들 생의 마감도 이 다리였다. 평생 섬마을에 살다 눈을 감은 어르신들을 실은 꽃상여도 이 다리를 건너갔단다.
▼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올라가 걸어도 전혀 흔들리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리 곳곳에 교행이 가능하도록 쪼갠 통나무 한쪽을 덧붙여놓아 길이 막히는 일도 없다. 여름철에는 저 대피 공간에 앉아 양말을 벗고 내성천 흐르는 물에 다리를 적실 수도 있겠다.(사진은 허총무님 것을 빌려왔다)
▼ 이번에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되돌아 나온다. 그리고는 둘레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한다. 아까와는 달리 이 구간에는 데크로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길을 내지 못할 정도로 비탈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무섬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는다. 그렇게 잠시 걷자 시야가 툭 트이는 곳에 ‘환학암(喚鶴菴)’이라는 옛집 하나가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이름만 듣고 절집(庵子)으로 판단하지는 마시라. ‘가릴 엄(奄)’자가 ‘풀 초(艹/艸)’를 뒤집어썼으니 ‘우거질 암(菴)’자가 된다. 푸른 숲에 가린 집. 즉 경관 좋은 곳에 들어선 정자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 ‘환학(喚鶴)’은 박경안(朴景顔, 1608-1671)의 아호(雅號)라고 한다. 무섬마을의 입향조인 박수(朴檖)의 아버지인데, 후손들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그를 추모하고 있단다. 자신의 후손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잘못된 점이라도 있을라치면 꾸짖어달라는 바람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 정자 앞에 서자 내성천이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널따란 모래사장이 겨울 햇살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데, 문득 아까 시비에서 보았던 별리의 싯구가 떠오른다.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에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메아리...>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하지만 무섬마을은 1970년대에 쌓았다는 제방이 아랫도리를 잘라먹어버렸다. 사시사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살펴보던 조상의 눈을 가려버렸다고나 할까?
▼ 날머리는 무섬마을 외곽주차장(원점회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잠시 후 수도교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다리 아래를 통과해 도로로 올라서면 무섬마을 탐방은 끝을 맺는다. 모든 일상을 뒤로하고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어진다는 무섬마을을 모두 둘러본 것이다. 결론은 대만족이다. 한껏 여유로운 풍경을 머금은 천혜의 자연경관. 드넓은 모래사장과 그 위를 유유히 흐르는 맑은 내성천의 은은한 풍광을 실컷 눈에 담았으니 이보다 더한 호사가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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