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티 가는 길 1구간(돌아보는 길)
여행일 : ‘22. 10. 2(일)
소재지 : 경북 칠곡군 왜관읍 및 지천면 일원
여행코스 : 가실성당㊞→숲길입구(낙산2리)→전망데크㊞→바람쉼터→고사리나무화석단지㊞→연화예술원→도암지㊞→성모상→신나무골성지㊞(10.5km, 실제는 10.33km를 3시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로 유명한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은 누구나 한 번 쯤 걷기를 소망하는 길이다. 최초 순교자 야고보 성인의 전도 행로를 따라 펼쳐지는 이 길은 프랑스 남부의 ‘생장 피데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어진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둘레길이 있다. 조선말 박해를 피해 전국에서 모여든 신앙 선조들이 수없이 오가던 길을 순례길로 조성했다. 길이는 45.6km, 칠곡군 왜관읍의 ‘가실성당’에서 동명면의 한티 순교성지까지 이어진다. 한티에서 살고, 순교하고, 묻힌 순교자들의 정신이 오롯이 남아있는 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오늘은 그중 1구간을 걷는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핍박을 피해 모여든 신자들이 은둔하던 공소(신자들의 생활 공동체)를 출발해 또 다른 공소가 있는 신나무골 성지까지 이어지는 10.5km짜리 구간이다.
▼ 들머리는 가실성당(칠곡군 왜관읍 낙산리)
경부고속도로 왜관 IC에서 내려와 ‘공단로(칠곡·왜관산업단지 통과)’를 이용해 강변대로(67번 지방도)로 올라온다. 2.5km쯤 달리다가 낙산교차로에서 좌회전, 곧이어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우회전하면 가실성당이다. ‘가실’, 얼핏 보면 순우리말 같지만 실상은 ‘아름다운 집’(佳室)이라는 뜻을 지닌 한자어다. 어쨌거나 그 뜻만큼이나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성당이다.
▼ ‘한티 가는 길’은 ‘그대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돌아보는 길(1구간), 비우는 길(2구간), 뉘우치는 길(3구간), 용서의 길(4구간), 사랑의 길(5구간) 등 다섯 구간으로 이뤄졌다. 오늘 걷게 될 1구간(돌아보는 길)은 신유박해 때 서울·경기·충청의 신자들이 핍박을 피해 모여들었던 가실성당(신자들의 생활공동체인 ‘공소’가 모체일 듯도 싶다)에서 시작한다. 또 다른 공소가 있던 신나무골까지 이어지는데 대부분이 산길이다. 험하지는 않지만 잦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보면 숨소리까지 죽이며 산속을 숨어 다녀야만했던 천주교신자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 신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가실성당(경북 유형문화재 348호)’은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1895년 초대 주임신부였던 ‘가밀로 파이아스’신부가 다섯 칸 규모의 기와집을 본당으로 사용한 것이 시초였다. 이후 신자가 늘자 1923년 ‘루느뇌(당시 주임신부)’가 현재의 자리에 새로 지었다. 설계는 명동성당을 지은 ‘빅토르 루이 푸아넬’신부가 맡았다고 한다.
▼ ‘성모 동굴’은 너른 잔디밭 끄트머리에 자리 잡았다. 푸른 숲과 잔디가 주는 싱그러운 풀내음에 성모님이 전하는 평화가 더해지면서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무장해제당하는 느낌이다. ‘십자가의 길’도 광장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잔디밭처럼 보드라운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참!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성모님도 만나볼 수 있다. 주보성인인 성녀 ‘안나’와 함께 모셔져있는데, 마리아의 어머니인 ‘안나상’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단다.
▼ 저 정도의 가족이라면 ‘성(聖)’자를 붙여도 되지 않을까? 맞다.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지로 선정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오월의 청춘(KBS-2TV)’에서 주인공들의 결혼식이 이루어졌는가 하면, 영화 ‘신부수업(권상우·하지원 주연)’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단다.
▼ 스탬프 보관함은 성당 앞에 세워져 있다. 그나저나 함에 들어있는 책자를 꺼내 일단은 스탬프부터 찍고 보자. 둘레길 곳곳에 설치된 20개의 스탬프를 모두 찍어오면 완주 인증서는 물론이고 기념품까지 준다니 말이다.
▼ 길을 나서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게 있다. ‘한티 가는 길’의 특징 중 하나는 중요 포인트마다 세워놓은 빗돌에 구간 지도를 새겨 넣었다는 점이다. 각 구간의 노선을 바탕에 깔고, 주요 지점을 파란색 원으로 표시했다. 현재의 위치는 주황색으로 칠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 성당 후문을 빠져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방향표시가 된 ‘한티 가는 길’ 팻말이 대문에 붙어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당을 나선 길은 곧바로 마을길로 이어진다.
▼ 마을을 빠져나오자 2차선 도로가 맞는다. 그 모서리 잔디밭은 쉼터를 겸하도록 꾸몄다. 위에서 얘기했던 구간 지도를 그려 넣은 빗돌도 보인다. 방향을 꺾어야 하는 지점인데도 지도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게 다소 아쉬웠지만...
▼ 쉼터의 얼굴은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녹슨 철판에 지팡이를 든 순례자의 형체만 도려냈다. ‘그대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과 함께.
▼ 왼편으로 방향을 꺾어 도로를 따른다.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은 신나무골성지까지 10.5km를 걸어야 한다. ‘돌아보는 길’, 순례길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고 생각해보는 구간이다.
▼ 첫 번째 포인트인 ‘3산업단지1길’ 아래 굴다리를 지나는데, 벽면에 배낭을 멘 여행자가 판화처럼 찍혀있었다. ‘한티 가는 길’은 여느 둘레길이 아닌 ‘순례길’을 모티브로 했다. 그렇다면 지팡이를 든 순례자가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싶다.
▼ 굴다리를 통과하자 길이 둘로 나뉜다. 선택이 강요되는 지점이다. 아니 ‘순례자의 길’을 걷고 있으니 하느님의 마음으로 해석해보자. 그러면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보일 것이다.
▼ 오른쪽 방향인 ‘숲길’로 향했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공장 건물들이 보이면 제대로 들어선 셈이다. 공장지대를 향해 가는 초기 구간은 다소 단조롭다.
▼ 현대는 ‘스마트한 삶’으로 대변된다. 그러다보니 길을 찾을 때도 스마트폰부터 꺼내든다. 하지만 ‘한티 가는 길’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길이 나뉠 때마다 이정표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심스럽다면 나무에 걸린 파란, 주황 띠를 따라 걸으면 된다.
▼ 공장지역을 횡단한 다음, ‘(주)세원이루인터내셔널’을 왼편에 끼고 산속으로 들어선다. 이정표가 가실성당에서 1km쯤 걸어왔음을 알려주는데,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낙원2리(보병골)와 함께 ‘칠곡·왜관3산업단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 숲길의 초입에는 ‘한티 가는 길’임을 알리는 빗돌을 세웠다. 이 길은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숨죽이며 걷던 길이다. 대구대교구는 이 길을 1968년부터 도보순례하기 시작했으며, 2016년 칠곡군이 개청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 길을 ‘한티 가는 길’이라는 브랜드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 탐방로는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경사까지 거의 없다. 거기다 바닥에는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있다. 폭신폭신한 게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 숲길 초입, 양지바른 곳에 들어앉은 무덤이 눈에 띈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종이품 문무관)까지 올랐던 망자(亡者)의 품위를 지키려는지 무덤은 크고도 반듯했다. 터도 잘 잡았다. 좌청룡우백호까지는 모르겠지만 무덤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틀을 갖췄다. 하지만 죽어서 명당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는 동안 복 짓고 업 짓는 게 중요하지.
▼ 길을 닦은 칠곡군청의 노고도 엿볼 수 있었다.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고, 곳곳에 벤치나 평상을 놓아 지친 순례자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 아무리 순해도 산은 산이다.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저 돌탑이 그 증거라 하겠다. 오가는 사람들이 안전을 빌며 던져놓았던 돌들이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의젓한 돌탑으로 변했다.
▼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순례길 조성에 쏟아 부은 지자체의 노력은 보잘 것 없는 오르막길까지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변화시켰다.
▼ 아까도 얘기했듯이 1구간의 초반은 임도와 숲길 중 어느 곳을 걸을지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 때문에 숲길과 임도가 여러 곳에서 교차한다. 지금 걷고 있는 산길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임도를 따라 걸으면 그만이라는 얘기다.
▼ 그 자유는 갈림길 초입의 빗돌이 보장하고 있었다.
▼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난 길은 걷기에 딱 좋다.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솔향기까지 코끝을 스쳐 지나가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렇다고 너무 즐거워하지는 말자.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자 수없이 이 길을 다녔던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며 걸어보자.
▼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싶은 사람들도 꽤 되나 보다.
▼ 앗! 우리 집 식단의 귀염둥이 ‘참취나물’이 꽃을 피웠다. ‘이별’이라는 꽃말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저리도 예쁜 꽃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전망데크’로 내려서기 직전에 ‘스탬프보관함’을 만났다. 가실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맞는 스탬프다. ‘스탬프 북’에는 금호임도의 전망대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숲에 가려 조망은 꽝이다.
▼ 계속에서 숲길을 타야지만 일단은 임도로 내려서기로 했다. 스탬프 북에 나타나있는 ‘전망대’를 찾아서다. 명색이 ‘전망대’인데 가슴에 담을 거리는 아니더라도 눈에 담을만한 경관쯤은 보여주지 않겠는가. 거기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맥주잔까지 건네는 데야...
▼ 그런 내 기대는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맥주잔을 받아들고 선 난간은 눈이 아니라 가슴에 담아도 될 만큼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 100m쯤 임도를 따르다가 또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를 수도 있지만 내 선택은 숲길일 수밖에 없었다. 보드라운 흙길을 걸으며 솔향기까지 실컷 맡을 수 있으니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 하지만 썩 바람직하지 않은 풍경과 마주하기도 했다. 1코스의 주제는 ‘돌아보는 길’이다. 순례를 나서면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고 생각해보는 구간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난데없는 오토바이의 굉음이라니... 순례길 초입에 걸어놓은 ‘산악 오토바이 출입금지’라는 현수막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들인 모양이다.
▼ 산악오토바이 라이더들에 대한 내 노여움을 하느님도 눈치 채셨나보다. 사랑은 용서로부터 시작된다며 십자가를 내보여주신다. 이를 본 나는 성호부터 긋고 본다. 칠십 년을 살아오면서 쌓아온 수양이 아직도 멀었음을 느끼면서...
▼ 전망대에서 10분 남짓. 또 다시 내려선 임도에는 데크로 작은 광장을 만들었다. 화장실까지 갖춘 걸 보면 준비해 온 간식이라도 먹고 가라는 모양이다. 맞다. 안내 빗돌도 이곳을 ‘바람쉼터’로 표시하고 있었다. 산들바람을 맞아가며 쉴 수 있는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임도를 따라 짧게 걷자 또 다른 포인트다. ‘임도 종점’, 이후부터는 오롯이 숲길만을 걸어야 한다.
▼ 길 닦기에 쏟아 부은 칠곡군청의 노력은 벤치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가로로 줄을 그음으로써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통나무 자체를 음미할 수 있는 의자도 만날 수 있었다.
▼ 인간의 손길을 거부한 통나무는 연륜까지 묻어난다. 옛날, 박해를 피해 이 길을 오가던 신자들이 잠시 쉬어가면서 걸쳐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 소나무 숲속으로 난 오솔길은 내리막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산속을 걷는데 어찌 내리막만 있겠는가. 조금은 부담스러운 오르막길도 나타난다.
▼ 산속이지만 길은 심심찮게 나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헷갈릴만한 곳에는 이정표를 세웠고, 여의치 않은 곳에는 리본을 매달았다. 그러니 나뭇가지에 매달린 리본만 쫒아가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하지만 선두대장은 그마저도 못 미더웠나 보다. 바닥에 방향표시지를 까느라 여념이 없다.
▼ 얼마쯤 지났을까 제법 깊숙한 계곡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가물어선지 물은 흐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주변은 양치식물(처음엔 고사리인줄 알았다) 천지였다.
▼ 임도 종점에서 산으로 들어선지 15분(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35분). 안내판 하나가 순례자를 맞는다. 이곳이 ‘금무봉 나무고사리화석단지(천연기념물 146호)’라고 적었다. 1억3천만 년 전에 자생하던 식물로, 잎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고사리와 같으나 나무줄기와 가지가 있고 잎이 그 가지에 붙어있기에 ‘나무고사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참! 이곳에도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으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불상사가 없도록 하자.
▼ 조금 더 걸으니 경작지가 나타난다. 산길이 이제 끝나가겠거니 했더니 오산이었다. 오르막길, 그것도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면서 올라가야만 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난 것이다. 1구간(되돌아보는 길)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닐까 싶다.
▼ 능선에서 만난 송전탑은 소중한 만큼이나 용도도 다양했다. 송전은 한전의 몫, 소방서는 구호지점표지판을 내걸었고, 지자체인 칠곡군에서는 순례자길 리본을 묶어 이정표로 활용했다.
▼ 이 부근 두어 곳에서 가족묘역을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숲으로 가려있던 시야가 툭 터지기도 한다.
▼ ‘ㅏ’가 십자가를 닮았다. 맞다. 이곳은 순례길, 이정표마저도 식상한 것을 피했다.
▼ 울창한 솔숲을 걷는다. 호젓하다보니 사색이 나래를 펴는데, 이때 가상의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이 길을 걷고 있는 이유’를... 허공으로 던진 내 대답은 간단했다. 집사람의 불편한 무릎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대리만족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초대하셨고, 내가 응답한 것’이라는 또 다른 이유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난 지금 다양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며 그 길을 걷고 있다.
▼ 도중에 오순도순 걷고 있는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대구에서 온 가톨릭 신자들인데, 이미 완주를 끝냈지만 다시 한 번 걷고 있는 중이란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이제 겨우 두 번째이지만 대여섯 번은 흔하고 개중에는 10번 이상을 순례한 신자들도 있다고 했다. 다섯 구간으로 나눠진 길을 전부 걸으려면 이틀은 족히 걸리는데, 그들은 무슨 매력에 빠져 반복해서 걷는 것일까?
▼ 길을 가다 만난 노송에서 또 하나의 사자성어를 배운다. 보라. 머리를 낮게 하고 마음을 아래로 향하라는 ‘低首下心(저수하심)’의 뜻을 생김새로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 화석단지에서 30분. 순례길은 ‘경부선 철도’ 곁으로 내려선다.
▼ 철로의 아래로 난 터널을 통과한 순례길이 이번에는 칠곡대로(국도 4호선)의 아래(이정표 : 신나무골 성지 2.4㎞)를 지난다.
▼ 잠시지만 국도와 나란히 가는 도로(연화2길)을 따른다. 그러다가 청호산업사 앞에서 이정표(신나물골 성지 1.5㎞)가 가리키는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전통공예 체험교실인 ‘연화예술원(蓮花藝術院)’이다. 도자기 생산업체인 ‘학산도예’에서 폐교가 된 연화초등학교를 고쳐 2001년 문을 열었다. 각종 공예품 체험강좌를 개최하고 있으며, 부채 만들기나 연날리기 같은 계절별 프로그램도 운영한단다.
▼ 연화예술원은 원래 1949년에 개교한 연화초등학교였다고 한다. 1995년 신동초등학교의 분교로 격하되었다가 1997년에 폐교됐다.
▼ 순례길은 이제 도암지로 향한다. 경부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 잠시 후 연꽃잎 가득한 도암지(道岩池)가 얼굴을 내민다. 1구간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곳이다. 한적한 시골마을과 노송, 저수지가 삼박자로 어우러지는 풍경이 아름답다고 소문났다. 참! 세 번째 스탬프보관함은 저수지 둑 초입에 설치되어 있었다.
▼ 도암지는 저수지 둑의 소나무가 호수에 비추이며 만들어내는 반영이 곱기로 소문난 곳이다. 물에 담긴 소나무의 반영이 도암지의 대표사진으로 심심찮게 등장한다. 소나무 뒤로 지는 석양과 벚꽃 흐드러진 봄날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라고 한다.
▼ 저수지에는 아직도 연잎이 푸르게 가득했다. 그 너머에는 ‘도암마을’이 들어앉았다. 한적하고 평화스러운 시골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는 마을이다. 원래 이름은 암동(岩洞), 마을 북쪽의 용소봉 정상이 바위로 되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가 이곳으로 피해 와 도자기를 굽고 살았다고 해서 도암(陶岩)으로 고쳐졌다.
▼ 정자는 지친 순례자들에게 행복한 쉼터가 되어주고 있었다. 시원한 음료가 채워진 양심냉장고를 비치해 자유롭게 꺼내 마실 수 있도록 했다. 물건 값은 양심껏 내면 된다. 순례자들에게는 그게 많이 고마웠던 모양이다. 그들이 느낀 행복감을 칠판에다 빼꼭히 적어놓았다.
▼ 둑 위로 늘어선 소나무도 압권이다. 사철 푸르른 빛으로 마을을 지키는 낙락장송에는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남성을 위한 외줄 그네도 보인다. 집사람이 저걸 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오늘도 교회로 달려갔다.
▼ 도암지의 빗돌(이정표 겸용)은 날머리까지 1.4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덕분에 난 발걸음도 가볍게 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굵직한 노송이 가로수처럼 늘어서있는 임도를 따라 공장지대로 들어선다.
▼ 공장지대가 끝나면 숲길이 시작된다. 그 숲속에 가톨릭의 수련시설로 여겨지는 건물(이정표 : 신나무골성지 0.6㎞)이 들어서있다. 하지만 사용을 않은지 오래인 듯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 건물 옆에는 기도하는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다. 성모님은 모두 뉘우치고 용서하고 사랑하란다. ‘성모송’을 바치며 지나온 삶을 반추해본다. 그러자 지난했던 내 삶이 하나의 길이 된다. 무엇 얻으려 어디로 하염없이 가는 가.
▼ 최종목적지인 ‘신나무골 성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산길인데다 능선을 가로지르며 고개까지 넘어야하지만 가파르지 않아 걷는데 어려움은 없다.
▼ 성모상에서 15분.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신나무골 성지’로 내려선다. ‘신나무골’이란 골짜기 입구에 신나무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가톨릭이 박해받던 시절 교우촌(校友村)이었고, 선교사들이 대구 읍내로 들어가기 위한 전초 기지이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든 것은 을해박해(1815년) 때라고 한다. 당시 노래산(청송)·머루산(진보)·일월산(우련발·곧은정)에 살던 200여 명의 신자들이 체포된다. 이들 중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거나 옥사했고, 나머지 33명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된다. 이때 옥바라지를 위해 온 가족들과 다른 곳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기도 했던 신나무골로 숨어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 ‘이선이 엘리사벳’과 그의 아들 ‘배도령 스테파노’의 초상화가 그려진 대문은 ‘김보록(Achille Paul Robert, 1853-1922)’ 신부님의 흉상이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서 사목활동하며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단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인 그는 1877년 한국에 들어왔다. 1882년 이곳으로 와 189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자 신나무골을 거점으로 삼아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 후 30여 년간 사목활동을 하면서 지역 복음이 확고히 자리 잡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단다.
▼ 2019년에 봉헌되었다는 성당은 한옥이다. 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성당)이 처음으로 지은 십자형 한옥성당(1901년 화재로 소실)을 이곳에 복원해 놓았단다. 대구 천주교회 첫 본당 신부로 임명된 김보록 신부가 이곳(신나무골 초기 신자인 이이전의 집)에서 머물며 대구교회를 설립하고,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사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옥성당 지붕 위 십자가와 창문 등은 옛 사진을 토대로 재현했으며, 막새기와와 담장 등에 있는 십자가도 주교좌계산성당의 초창기 대문 담장에 있던 문양을 본떠 만들었단다.
▼ 성당 오른편에는 당시 모습으로 재현된 사제관이 있다. 김보록신부 등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사목활동 거점이었던 초가 사제관은 그가 머물렀던 새방골 사제관의 사진을 활용해 복원했다. 참고로 이곳 신나무골은 역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포교 활동을 했던 영호남 지방의 선교 요람지이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로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샤스탕 신부와 ‘땀의 증거자’ 가경자 최양업 신부도 신나무골을 찾아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기록이 있다. 1882년부터는 대구와 경상도 지방을 맡은 로베르(한국명 김보록) 신부가 순회 선교를 시작했다.
▼ 순례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도 눈에 띈다. 카페 등 다목적 용도로 사용되는데, 초가의 외벽은 ‘로베르 신부와 계산성당’, ‘보두네 신부와 전동성당’, ‘죠조 신부와 초량성당’, ‘파이야스 신부와 가실성당’ 등의 내용을 담은 타일성화로 꾸몄다. 이밖에도 우물터와 빨래터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신앙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떠올릴 수 있도록 했다.
▼ 양지바른 언덕에는 이곳에서 살다 한티로 피란 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선이 엘리사벳’의 무덤이 들어섰다. 농부의 아내였던 그녀는 죽음 앞에 신앙을 버린 남편과는 달리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날이 시퍼렇게 선 작두에 목을 누이고도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라는 절규를 남기며 처참히 죽었다. 참! 묘역에는 십사처도 조성되어 있었다. 잠깐 짬을 내 ‘십자가의 길’ 기도라도 바쳐보면 어떨까 싶다.
▼ 날머리는 성지주차장(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성지 곳곳을 꼼꼼히 살펴보며 내려오면 어느덧 주차장에 이른다. 그리고 ‘한티 가는 길’ 쉼터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그렇다고 쉼터 옆에 전시해놓은 사진들을 그냥 지나치지는 말자. 순례길의 사계를 담았으니, 한 철에 머물고 있는 당신의 안목을 네 배로 늘려주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오늘은 10.33km를 3시간 10분에 걸었다. 구간의 70%가 산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빨리 걸은 셈이다. 그만큼 산길이 편안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 이곳에도 ‘한티 가는 길’ 특유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번에는 지팡이를 든 순례자가 아닌 십자가 형체로 도려냈다. ‘그대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도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듯한 별 모양으로 대체됐다. 조선 말, 천주교의 전례는 봉건적 유교 도덕과 사회규범에 대항하는 사상적 반항이자 이념적 도전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기본 질서를 부인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신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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