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후기

재약산행기

2005. 12. 1. 14:49

오랜만의 산행...
참으로 오랜만의 산행다운 산행이었습니다.
올 봄(3.20)에 사고를 당했으니, 장장 6개월여를 애타게 그리던 산행이었지요.
그러나 부푼 가슴 한켠에는 제 체력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산에 대한 두려움이 차곡차곡...
‘초심으로 돌아가자!’ ‘중도 탈출을 수치로 여기지 말자!’


산행을 시작한 이래...
백두대간, 한북정맥, 특히 10시간이 넘는 힘든 장거리 산행을 나설 때마다
산행에 대한 두려움이 미리 신체를 접수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출발 당일에는 아무리 오랜 시간을 화장실에 앉아있어도 생리작용이 불가능...
배는 더부룩한데도 일을 보지 못하는 거북함... 산행내내 길섶을 기웃거릴 수 밖에...
그러나, 신통방통하게도 산행을 마치고 나면 언제 배속이 거북했느냐는 듯이 말짱했지요.


6개월여를 쉬었어도 그 버릇은 제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더군요.
‘제약산은 전에 다니던 산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며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었고,
지난 주말의 시험산행인 5시간짜리 청계산도 결코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더부룩한 속에 들어간 컵라면이 기어코 뱃속을 휘져어 버립니다.


진불암으로 오를 요량으로 산행을 출발합니다.
앗불싸! 그러나 그 어디에도 진불암으로 가라는 이정표가 없군요.
그렇다고 돌아설 수도 없고...
가다 못가면 돌아올 샘으로 일행의 뒤를 쫒습니다. 이게 불행의 시작...


‘돈 냈어요?’
이정표도 만들지 않고 입장료를 받는다고 투덜대는 나에게 돌아온 조이님의 충고입니다.
난 그녀가 하는 모든 불평에 맞장구를 쳐주는데... 조금 서운합니다.


금강폭포를 지나자 서서히 무릎에 통증이 오기 시작합니다.
서상암 무렵부터 불편하던 아랫배가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으휴~ 이래저래 말썽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해결, 약간은 시원해졌습니다. ᄒᄒᄒ


서상암을 지나서는 오기... 의외로 제가 승부욕이 강하거든요.
학창시절 2등으로 밀린게 억울해서 다시 찾을 때까지 잠자는 것을 거의 포기했을 정도로...
후미담당 연신내가 간간히 기다리며 호흡을 맞춰주네요.
처음에는 컵라면에 채한 처자 덕분에 조금 덜 미안했지만, 회복된 뒤엔 체면이 영...
거기에 더하여 모든 분들이 천왕봉 어림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무릎이 상한 난 하산길이 지옥입니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내려온 억새밭... 이게 아닙니다.
2년전에 들렀을 때 그 넓고 광활하던 곳이 이렇게 변해버리다니...
조그만 움막이 있던 억새밭엔 규모가 커다란 주막이 이미 여러곳입니다.   불법영업...
그래도 우린 그 주막에서 막걸리 서너병 시켜놓고 아침식사를 합니다.   아이러니...
막걸리 두잔인데 그만 마시라는 조이님의 잔소리...
어? 편해서 인연을 맺었는데???? 내 기대는 이미 빗나간지 오래입니다.


암릉으로 이어진 재약산 정상을 지나 고사리분교까지는 지루한 내리막길입니다.
조이님과 도란도란 얼마전 구입한 홍천 땅에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지었다, 부수었다...
과수원도, 물론 채마밭도 꼭 필요하답니다. 그런데 평수가 자꾸 변하는 것은 ‘여자니까?’
‘아무나 부담 없이 찾아와 쉬었다갈 수 있는 공간’
‘찾아오는 사람은 내 좋아하는 술 한병 들었으면 되었고, 돌아갈 땐 무공해 채소 두어단...’
결국 우리 둘만의 공간이 아닌, 아는 이들이 찾기 쉬운 곳이면 된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천려일실...
층층폭포로 내려가도 곧 원래도로와 만난다는 얘기만 믿고 내려선게 불행의 시작입니다.
경치가 좋으면 뭐합니까? 무릎이 아파 죽겠는데... 그 험한 길이 가도가도 끝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가면 층층폭포입니다. 힘내세요’
숨이 턱에 차서 산을 오르는 여자분들의 애절한 물음엔 이렇게 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려가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다 내려왔습니다’ 일행인 듯한 남자분의 대답...


‘산에서 만난 사람들의 말은 믿지 맙시다’
다 왔다는 하산 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습니다.


쉬엄쉬엄 보조 맞춰준 모든 님들 고맙습니다.
여러분들 덕택에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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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빌딩 숲에 갇혀
늘상 일상에 쫓기는 난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을은 남의 일이었답니다.


오색 단풍으로 타들어가는 산...
빨간 연지처럼 곱게 물들은 감도 기껏 TV 화면 아니면
빛 바랜 앨범을 뒤적여야 만날 수 있었지요 ‘산과 사람들’을 찾기 전 까지는....


나무들이 이파리에 공급하는 수분과
영양분을 비밀리에 줄여가던 어느 날, 난 무심코 창밖을 내다봤습니다.
그리고 마주 보이는 관악산 자락을 보며 부르짖었답니다. "오매 단풍 들었네."


어느 해부터 가을을 잃어버렸을까요.
아니 실제로 잃은 것은 마음의 여유 아닐까요?
곧바로 짐챙겨 ‘산과 사람들’을 찾은게 두해 전 어느 가을날 적상산이었지요.


추억의 적상산을 떠올리며 따라나서 본 설악산행...
가을하면 설악산인데 거기다 공룡능선이라니 그냥 넘길 수 있겠어요?
갑자기 떨어진 일로 일요일 출근이 불가피한데도 ‘배째라’는 식의 막가파로 밀고나갔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죽어라 올라갔고... 목숨걸고 인파를 헤집었지만 그결과는 우중산행...
언제나와 같이 설악은 날 반기지 않더군요. 난생 첨으로 무릎이 아파 죽는줄 알았습니다.
끝내 ‘내 다시는 공룡 안 탄다. 비선대 내리막길이 있는 한’을 내 뱉고야 말았습니다.


그래도 다행이 담소를 나누며 걸을 수 있는 분들이 있어 좋았고,
만화에서만 보던 이마에 도깨비뿔을 단 아가씨를 보는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하산길... 단풍나무가 하나 둘 보이는게 가을이 스쳐간 자리에 단풍이 들어와 있나봅니다.
산허리... 제몸을 태워 산을 밝힌 나무들이 앞다퉈 노랗고 붉은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이파리 끝부분부터 빨갛게 물들어가는 활엽수....
붉은 단풍잎은 때론 꽃보다 곱고 화려합니다. 꽃은 아무리 고와도 산을 물들이진 못하거든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나 거세지는 않습니다
비구름 사이로 칼날 같은 돌봉우리들이 순간순간 비칩니다.
멀리 백두대간이 파도처럼 다가오고, 젖어있기는 하지만 바람은 참으로 깨끗합니다.


그 깨끗한 바람 때문인지 아님 선홍빛 단풍이
빗속 나그네들의 가슴까지 확확 붉은 기운을 댕겨놓았는지 다들 즐겁게 떠들어댑니다
티없이 맑게 웃는 그들의 얼굴에선 한줌의 번뇌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무한한 행복감에 빠져듭니다.


오늘은 월요일...어제 땡땡이 친 여파가 제법 큽니다.
경위서... 참 오랜만에 들어본 단어인데... 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거야 원~ 자판 두드리는 와중에도 이번주 백두 하늘길이 머리를 꽉 채우는 건
아마 난 산에 미쳐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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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모두 잠든 깊은 밤중에는, 또 다른 신비로운 세계가 고독과 적막 속에 눈을 뜬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샘물은 훨씬 더 맑은 소리로 노래 부르고, 못에는 자그마한 불꽃들이 반짝이는 것입니다. 온갖 산신령들이 거침없이 오락가락 노닐며, 대기 속에는 마치 나뭇가지나 풀잎이 부쩍부쩍 자라는 소리라도 들리듯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들, 그 들릴 듯 말 듯한 온갖 소리들이 일어납니다. 낮은 생물들의 세상이지요. 그러나, 밤이 오면 그것은 물건들의 세상이랍니다’


알퐁스 도테의 ‘별’을 읽으며
밤하늘이 주는 낭만에 젖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그런 여유 찾기란...
잠시나마 고개 들어 하늘 쳐다본지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희미합니다.


오늘은 한달에 한번 백두대간을 찾는 날입니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1400㎞의 크고 긴 산줄기...
거기에는 땅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인식하고
언제나 함께 하는 존재로 알며 살아온 조상들의 세계관이 녹아 있다네요


백두의 등줄기... 누군가의 말을 빌면 하늘길이라 했던가요?
그 하늘길을 달려온 지 어느덧 일년반, 거르면 행여 못 이을까봐
결코 돌아보는 않고 아무 생각없이 이어 왔을 따름입니다.


신성한 등줄길 밟는다는 질책이었을까요?
백두의 하늘길은 언제나 비가 우릴 반겼습니다. 심지어는 때아닌 겨울비까지도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별하나 없는 잿빛 하늘이 조금 서운하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군요.


고개를 들어봐야 가로등과 네온사인뿐인 우리가 사는 곳
차라리 밤하늘만 흐리는 빛으로 가득한 도심을 떠나온 보람을 찾아봅니다.


정보에 의하면 만수동엔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렸다고 하셨는데...
행여 覆盆子 눈에 들어올세라 힐긋힐긋 숲쪽으로 눈길을 돌려봅니다.
자연이 주는 마실 거리와 먹을거리를 자연의 상태대로 얻어올 수 있다면
도시의 지친 일상에 적잖은 활력소가 될 수 있을테니까요.


요즘 자연은 일년 중 생명력의 일어남이 가장 왕성한 때여서
무위의 자연에 들수록 자연의 기(氣)가 몸과 마음에 전이돼옵니다.
그 생생한 자연의 생명력을 잘 전달받기 위해서
산딸기 몇 알 찾아 보는거지 결코 복분자가 그리워 그러는건 아니랍니다.


천황석문 지나 奇巖怪石 가슴에 심으니 속리산에 내 들어섰음이 느껴집니다.
신선대에 들러 마시는 한잔 술...코끝을 간지럽히는 당귀 향에 흠뻑 취할 수 밖에요.
문장대를 지나니 통과하니 개구멍이요, 내려보니 절벽인데 로프 끝에 매달린 중생들...
저 로프를 놓는 날이 곧 해탈일지니... 아서라 큰일 날 소리랍니다.


앞뒤의 시차도 줄일겸 널직한 바위에 널부러져봅니다.
금새라도 비가 쏟아질 듯 흐렸던 하늘이 깨어나 건너편 암봉이 눈앞에 서 있네요.
간간히 부는 바람은 물기에 젖어 내 안에 남은 한방울 물기까지도 빼내갑니다.


지루한 바윗길이 식상해질 무렵 우린 어느새 밤티재에 도착합니다.
산을 뒤덮었던 하얀 아카시아꽃이 지고
앙증맞은 찔레꽃마저 그 향기를 지우고 나면 뱀의 혀마냥 길쭉한 밤꽃이 핍니다.


밤꽃이 잘 피면 풍년이 든다는데,
행여 속리산자락을 드나드는 바람이 떠 나르는 연노란 밤꽃의
비릿한 향기을 기대해 보지만 이곳 밤티재 그 어디에도 밤꽃은 찾을 수 없습니다.
이곳 밤티재도 속리산권인지라 밤나무 대신 소나무천지입니다.


산행 내내 같이한 소나무...
어느 틈에 솔잎을 가르는 바람소리가 귓가를 맴돕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짙은 녹색 솔잎과 붉은 껍질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휘고 굽고 늘어진 소나무들이 눈 속으로 파고드는군요.
온몸을 감싸오는 송진냄새 속에서 내 좋아하는 산님들의 냄새를 찾아냅니다.
그들과 또다시 솔숲을 거닐어 볼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아쉬움속에 산행을 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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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배기가 생각나는 장마철입니다.
낙숫물이 마당을 쪼는 장마철이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탁배기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양은 주전자에 받아온 막걸리를 사기 그릇에다 철철 넘치도록 담아
벌컥벌컥 들이켜던 시절. 물꼬 트던 흙손으로 쭉 찢은 김치 한쪽이나
고추장을 풀어넣어 부친 장떡 안주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요.
어디 그런 모습이 벽진 시골뿐이었겠습니까? 검정 책가방을 든 대학생들에게도
대폿집 막걸리와 두부 한 모는 요즈음 라면만큼이나 흔한 저녁거리였습니다.


며칠 째 창을 때리고 있는 장대빗줄기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그리 주고도 무엇이 아쉬운지 주말까지는 햇빛 보실 생각을 마라는군요.
이번 주말산행은 내 가슴속 한켠에 소중히 키워가고 있는 조그마하지만
결코 조그마하지 않은 꿈인 백두대간... 그 하늘길을 걷는 날인데도 말입니다.


우중산행...
그것도 열시간을 넘겨야 하는 우중산행... 지난해 육십령-동엽령구간을
함께 하셨던 분들은 그 처절했던 산행을 결코 잊으실 수 없으실 것입니다.
비몰아 오는 님 모시고 산이고 뭐고 다 잊은채 운치있게 탁배기나 한잔 들이켜 보고 싶네요.
그러다 보면 다른 분들이라도 비 없는 산행을 즐길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나 결코 그리할 수 없음에 상념의 나랠 그만 접습니다.
그리고 부랴부랴 계란 말고, 오뎅 볶아 부리나케 교대로 향해봅니다.
삼겹살에 소주한잔... 버스에 오른가 했더니만 어느새 우린 눌재에 도착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왜 산을 찾느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산이 거기 있어 찾는다’대답합니다. 어디서들 주워들은 풍월이지요.
그러나 난 아직도 왜 산을 찾는지 모릅니다.
혼자 사는 몸인지라 휴일에 할 일이 없어서라면 산속에 작업하러 온게 되겠죠?
그러다 찾아낸게 백두대간 종주... 우리 山河의 등뼈를 밟아보고 싶어서라 말하렵니다.
“그럼 다른 산은?” 끝까지 물고 들어온다면 “그래 젊은이들의 양기 좀 뺏으러 간다 왜”


오늘의 첫 번째 만남인 청화산은 높은건 별개로라도 그 경사가 우릴 기죽입니다.
하늘엔 조각달 떠다니는데 어느 한사람 관심보이지 않는건 아마 산세에 놀라서가 아닐까요?
행여 별똥별 보일새라 고갤들어 보지만 내 행운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가봅니다.


다들 등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턱까지 차 오르는 가쁜 숨 내뿜으며 산을 오릅니다.
그 고통에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을 텐데 그만두지 않음은 무슨 이율까요?
아마 조금만 더 참고 오르면 눈 앞에 나타날 내리막이 떠오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생에서 힘들고 때론 삶을 포기할 만큼 절망적인 순간에 “희망”이란 단어를 떠올리듯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내리막길 산행이 더 힘들답니다.. 인생 또한 이와 같을 거구요.


조항산 못미쳐 부지런한 산새의 문안인사와 함께 아침의 黎明이 찾아옵니다.
렌턴 불빛이 나간 꽃사슴에게 렌턴을 건네주자 마자 찾아온 여명에 조금은 겸연쩍군요.
여명과 함께 발밑에 펼쳐진 운무... 그리 호화롭진 않지만 흔히 볼수 있는건 아니지요.


사위가 밝아오니 원시의 숲이 눈에 차오릅니다.
소나무, 떡갈나무, 그리고 내가 잘아는 싸리나무도 간간히...
누군가 건네는 참나물 한 이파리 가만히 깨물어보니 금새 향이 한입 가득차오릅니다.


숲과 교감을 시작해 봅니다. 이번 산행의 정리와 함께요.
자연과의 감응은 나와 자연이 딴몸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시작합니다.
나무의 날숨을 내가 마시고, 나의 날숨을 나무가 마시니 나무와 내가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삼라만상이 모두 그물망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찾아냅니다.


“나는 곧 나무요, 나무가 곧 나다”에 목을 매다
눈앞에 나타난 대아산의 가파름에 놀라 상념의 나래를 그만 접습니다.
능선을 타고 병풍을 두르듯 즐비하게 늘어선 기암괴석 사이를 지나 정상에 섭니다.
가는 길목 코끼리 바위, 대문바위 이정표 바꿔논 넘 욕도 좀 하고,
너른 바위에선 떡으로 요기도 하고, 피 같은 물까지 얻어 마십니다.
어느 젊은이의 오랜지쥬스 살얼음에 가슴 밑바닥까지 시려오는군요.


하산길... 모처럼 선두에 서봅니다.
초행길이지만 그간의 백두 노하우를 살려 리본을 보며 걸으니 자신이 서는 거지요.
그 威風堂堂이 길 잘못들었다는 산님의 외침으로 깨어진데는 그리 오래가지 않더군요.
나쁜넘들... 백두도 아닌 길에 왜 백두대간 리본을 걸어놓노?


뒤돌아 오르는 길...
턱까지 차오르는 호흡도 뒤따르던 이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돌아온 분을 보며 몰래 미소지음은 내가 불량해서일까요? ᄒᄒᄒ


불란치재 못미쳐 치던 번개가 738봉 넘어갈 즈음에 가는 비를 뿌리기 시작하는군요
그리고 오늘 산행에 비를 부르는 이가 참가했다는 걸 기억해 냄니다.
오뉴월 일기는 심술보 같다고나 할까? 날이 좋다가 후둑후둑 빗방울이 떨어집지다.
심한 경우에는 노처녀의 한이 우박으로 내리기도 한다나요?


배꼽시계를 보니 1시를 조금 넘겼네요.
이미 11시간을 넘게 걸었는데도 힘들지 않음에 고갤 가윳거리다 그 이율 찾아냅니다.
미인과 함께 하는 산행.... 얼굴이 고우면 모든게 용서된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오늘은 대아산부터 산행을 마칠 때까지 이쁜 여자분과 단둘이 산행을 즐겼거든요.


달과 별... 햇빛과 먹구름... 번개에 소나기까지 함께한 참 유별난 산행이었습니다.
그런 악조건 속의 산행에서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마쳤으니 자축할 만하지 않습니까?


‘福’자 박힌 사기그릇만큼이나 정겹던 우리의 막걸리입니다.
이번주에는 막걸리 한잔 나누면서 도란도란 산행얘기를 나눠보면 어떨까요.
장마철에 딱 맞는게 막걸리이니까요. 특히 우리 민족의 정서가 배어있는 술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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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

대관령

2005. 12. 1. 14:07

소슬바람을 앞세워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열기와 습기가 밴 여름의 바람과 달리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소매깃을 파고듭니다.
이 바람은 곧 푸르렀던 여름을 울긋불긋한 가을로 바꿔놓을 것입니다.
코스모스 한들거리던 자리에, 꽃이 지고 나면 어느새 억새가 하얗게 피어나겠지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 지루했던
여름날의 기억도 지워버릴 겸, 남보다 일찍 가을의 향기를 느끼고 싶어 산을 찾습니다.
주말마다 나서는 산행이지만 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월출산 산행을 포기하고
선자령을 찾은 건 지난번 지리산 산행기의 여운에서 못 벗어남이 아닐런지요.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던 선배님의 안내에 따라 향하는 삼양목장 가는 길...
올 여름 수해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길옆 냇가에 단풍이 예쁘게 물들었습니다.
목장이 가까워질수록 단풍의 무더기들이 점점 커지고... 또 붉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워메~  산불 나부렀네, 산불~!"
그래~ 거기엔 온통 타오르는 산만이 존재의 의미를 부여...약간의 과장일까요?.
모든 이들의 눈길이 시내 방향 따라 오른쪽, 왼쪽 바쁘게들 움직이고 있군요


황량하게 비인 축사를 지나자 차는 능선의 등허리가 힘들다고 용트림을 합니다.
언덕에 널린 저 인파는 가을동화의 은서나무 아래서 기념사진이라도 찍으려나봅니다.


줄줄이 늘어선 짚들의 숲을 해치고 전망대에 올라섭니다.
눈앞에 드넓은 삼양목장이 펼쳐집니다. 600여 만평, 서울 여의도의 7.5배...
이 엄청난 삼양목장은 하늘을 가리던 참나무 숲이 한 평 두 평 초지로 바뀌는데 10여 년,
그러고 우사를 짓고 목부들이 머물 아파트가 지어질 때까지 몇 년,  85년에 완성되었다나요?


기념사진 한컷, 선배님의 인도로 산행을 시작합니다.
한낮의 햇살도 매섭지 않은 것이 어느새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는 모양입니다.
가파르지 않은 능선을 따라 올라서니 야트막한 산자락에 보라색 벌개미취가 한창이군요.


오른쪽에 황병산 능선을 이고,
왼쪽으로 눈돌리면 광활한 강릉바다가 가물거리는 능선 백두대간 제25구간이랍니다.
그 앞에 수줍은 듯 웅크리고 있는 강릉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대관령 준령이 강릉 쪽으로 뻗어 내리는 힘찬 기세와 옹기종기 모인 강릉시가지의 풍경...
"동해에 오징어 뒤 다리가 보인다..."  아~ 갑자기 오징어 물회가 먹고 싶어집니다.


1시간쯤 걸었을까? 야트막한 봉우리에 선 이정표... 높이가 1,157m인 선자령입니다.
이곳 계곡이 아름다워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놀다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선자령이라 불린다나?
대관령에 새로운 길이 나기 전까지 많은 길손들이 이곳으로 넘나들었다고 하는군요.
선자령 주위 드문드문 억새가 가을이 왔다며 우릴 반깁니다.


이름 모를 봉우리에서 패러글라이딩 구경하는걸 끝으로, 하산을 시작합니다
길 양편에 늘어선 나무들... 서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비바람에 낮게, 그리고 등져있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타협할 수밖에 없는 인생사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만 같군요.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옵니다.
굳이 대간 종주처럼 능선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 마음 편하게 걷는 하산길이 편합니다.


이윽고 도착한 대관령 정상은 을씨년스럽기 짝이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의 행렬이 있었는데 이젠 비인 휴게소 건물만...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 내려서던 백두대간 길, 그것도 이젠 다 추억 일뿐입니다.


아흔 아홉 굽이 대관령,
비록 보고싶었던 순백 설원과 소나무 가지가 휘어지게 수북히 쌓인 눈은 없었지만,
초록의 능선과 파란 하늘이 그려내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위안을 삼으며 산행을 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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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

백두대간(조령)

2005. 12. 1. 14:05

나이를 먹어도 내게 있어 변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는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 늘 가슴 설렘으로 다가옵니다.
그 설렘이 새벽까지 퍼마신 술의 피로도 잊은 채 또 다시 산을 오르게 만듭니다.


부지런한 이들의 부스럭거림에 눈을 뜨니 벌써 이화령입니다.
더 이상 잠을 청하기 뭐해 차를 나서봅니다.
어~ 추워! 霜降이라 서리라도 내렸나요? 옷깃을 고추세우게 만드는군요.


앗! 이번 구간은 처음부터 급경사입니다.
고개를 들 필요도 없이 밤하늘이 눈 위에 떠 있군요.
눈앞에 다가온 밤하늘엔 총총히 박힌 별이 조각달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눈 속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려올 듯 별빛이 총총한데도 다들 조용한 것은
아마 시작부터 반기는 급경사 오름 길에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조령산을 지나자 동이 터 오는지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어 오네요.
산행 초입에 본 하늘의 별빛이 총총했으니 오늘은 틀림없이 일출을 볼 수 있습니다.
무당의 찢어진 빤스는 빌려 입지 않아도 경험으로 일출을 볼 수 있는지 않은지는
어느 정도 맞출 수 있거든요.


일출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징조는 전날 오후 갑자기 비라도 한차례 퍼부을 듯
하늘이 잔뜩 흐려지는 것입니다. 소낙비를 한차례 뿌리는 것도 괜찮지요.
그렇지 않으면 밤에 오줌 누러 일어났다 하늘을 봤을 때 별빛이 금방이라도 눈
속으로 쏟아져 내릴 듯 총총한 게 흔들려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밤하늘 별빛이 흔들려 보인다는 것은 심하게 바람이 분다는 것이고, 바람이 분다는
것은 아침 기상이 좋지 않다는 징조이거든요.


일출의 장관에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직 갈길이 멀거든요.
부지런히 배낭챙겨 풀숲과 나뭇가지 매달린 아침 이슬을 톡톡 떨구며 조령으로 향합니다.


우리나라 산에는 참으로 바위가 많은가 봅니다.
능선은 병풍을 두르듯 즐비하게 늘어선 기암괴석의 연속입니다.
저 멀리 이름 없는 산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모습도 장엄하기 이를데 없네요.


로프에 매달려도 보고, 바위 틈새를 잡고 용트림도 해보고...
앗뿔사 잠깐의 방심이 끝내 위험지역에서 미끄러지게 만드는군요.
더 미끄러졌으면 낭떠러진데 다행히 바위틈을 잡고 멈춥니다.
다 평소에 착하게 살아온 탓일 것입니다(^-^)


조그만한 부상은 있었지만 큰 사고없이 조령3관문에 도착해 아침상을 폅니다.
사십대들끼리 둘러앉은 아침상... 역시 사십대는 풍요로운 세대가 맞은가 봅니다.
넉넉한 밥에 가지가지 반찬... 거기다 금술에 마가목주, 복분자술 참 다양하게 나오는군요.


후미가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길을 나섭니다.
다시 잇는 산길은 마폐봉 오르는 길만 급경사지 나머진 평탄의 연속입니다.
순탄한 산길에 마음까지 여유로와 주위 경관과 하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군요


하늘이 점점 비취빛으로 변해갑니다.
도심의 가을이야 잿빛 하늘이 걷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높고 신령스런 산봉우리들 사이로 솜덩이 같은 구름을 흘려보내는 가을의 쪽빛 창공은
눈과 마음의 때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넉넉합니다.


눈과 마음의 때 말끔히 씻어낼 즈음 난 하늘재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오겹살 구워 한잔 쭈욱~
또다시 찾아온 사십대의 풍요로움에 취할 즈음 꼬옥 필요한 그 무엇이 떨어져버립니다.
한숨으로 산행을 마감하려는데 누군가 불쑥 내미는 소주 한병... 이뻐 죽겠습니다.


20㎞ 조금 넘는 산길을 11시간에 주파했으니 과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산행에
천m 안팎의 능선 나무들은 이미 앙상한 갈비뼈를 들어냈지만 덕택에 조망은 훌륭하더군요.


이번 산행은 참 마음에 든 산행이었습니다.
일단 날씨가 좋아서 마음에 들었고, 능선이 너무나 시원하고 멋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기암절벽이 마음에 들었고, 특히 능선에서의 조망이 마음에 쏘~옥 들었습니다.


이 맛에 틈날 때마다 백두대간을 찾고 있는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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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벼락같이 만들어낸 이틀간의 휴가...


어디로 갈까?
절정의 여름 뙤약볕이 독수리의 부리만큼이나 맵고 날카롭습니다.
말복이 어제인데 어디 불볕더위를 시원스럽게 씻어버릴 만한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인파로 넘치는 피서지는 싫습니다.
몇시간째 움직이지 않고 앞차 꼬리만 물고 있는 여행이 지겨워서이지요.
자리를 잡은 뒤에도 노심초사하며 남들의 침범을 감시해야 하는 그런 여행은 피곤하니까요.


인적이 없는 산길에서 만나는 건강하게 쭉 뻗은 나무와 풀, 바위들...
그 속에서 산이 되고 물이 되어 살아가길 꿈꾸는 사람들이 그리워 산행을 결심합니다.
공자님의‘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라는 말을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찾아내고 싱겁게 웃으며 “나도 어진 사람이로소이다”
속리산, 관악산, 대모산과 구룡산... 그 끝에 백두대간이 내 휴가가 반갑다 손 흔들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모신 모처럼의 外食까지도 산행 일정을 핑계삼아 일찍 끝낼 수 밖에 없습니다.
힘들게 찾은 교대역엔 내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리운 얼굴들이 날 반기는군요.
오늘은 새내기들보다는 백두로 낮익은 얼굴들이 더 많아 기쁨도 더 큰 것 같습니다.
소리 잘하는 분의 춘향가를 음미하다 슬며시 단잠속으로 빠져듭니다.


두런거리는 소음에 눈을 뜹니다.
두시반에 산행을 시작한다고 했으니 서서히 준비를 해야겠군요
하늘에 별은 없으나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슬함에 가을을 연상시키는 버리미기재의 밤...
낯선 이방인들을 맞이한 것은 어스름하게 보이는 신작로뿐입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미명의 순간, 작지만 세상을 비추는데 모자람이 없는 랜턴에
몸을 맡긴 사람들은 앞사람의 발쿰치만 바라보며 걷는데 분주합니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급한 오르막의 연속입니다.
아무래도 오늘 산행이 힘들다는 안내가 아닐까요? 희양산까지 통과한다니 분명할 것입니다.
악휘봉 못미쳐 부지런한 산새의 문안인사를 뒤따라 서서히 여명이 찾아옵니다


그리도 아름답다는 악휘봉 구경은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후미 때문에 지체되어 그냥 통과해야 한다는군요. 그저 먼발치에서 입맛만 다셔봅니다.
25분이면 다녀올 수 있다는데... 뛰어갔다 와도 안될까? 궁시렁 궁시렁....


산길옆으로 우거진 숲은 원시림을 방불케합니다.
날렵하게 뻗은 낙엽송과 힘차게 뒤틀고 서있는 우람한 적송들이 한데 어우러져있습니다.
첩첩산중. 좌우로 산과 산이 서로 겹쳐지면서 잇닿아 펼쳐지고 능선과 봉우리가 끝간데 없습니다.


가끔 숲사이로 다람쥐가 눈을 맞추다가 재빨리 길을 건너는군요..


주치봉을 지날 즈음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가늘었다 굵어졌다...
대간의 봉우리들은 온통 안개와 구름에 휘감겨 있습니다.
언뜻 언뜻 봉우리들이 안개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가는 곧 사라지는군요.
장쾌하게 가지를 뻗어낸 소나무 둥치에 귀를 대보면 ‘맥박이 뛰는 소리’가 들릴 듯 싶습니다.
사람들의 손길이 거의 닿지않은 건강한 산의 원초적인 모습이란 이런것이 아닐까요?
새로운 풍경들과 만나고 산과 나무와 물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 산을 찾는 이유일 것입니다.


구왕봉에서 내 특기를 살려 길도 잃어보면서.... 운명의 장소인 지름티재에 도착합니다.
산행중에 비와 만나는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장거리 산행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그런데 오늘은 오히려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그 무서운 봉암사 스님들의 모습이 안 보이는 건 다 비 때문일 터이니까요.
다시 한번 비에 고마워하고 또 비의 삼총사에게도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우쒸~ 깔딱고개는 20분 정도라고 했잔여?”
“1시간 20분인데 아마 1시간을 생략했을걸요?”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오르막길...그 끝엔 나무 뿌리를 잡고 올라야하는 낭떠러지가 기다립니다.


정상을 향해 오를수록 안개와 구름의 밀도가 높아집니다.
안개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고사목들. 아름드리 나무둥치가 쓰러져 길을 막네요.
어느분이 가르키는 손가락 끝에 자리잡은 봉암사는 자욱한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습니다.
일행의 정상주 제의에 재빨리 자릴 잡습니다. 그래야 한잔이라도 더 마시니까요.


산행을 끝내고 하산하는 길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예정된 산행을 무사히 마친 성취감에 더하여 우릴 기다리는 푸짐한 먹거리가 있거든요.
계곡 하산길 너럭바위 사이로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립니다.


예로부터 삼복에 산에서 떨어져내리는 물을 맞으면,
땀띠도 쑥 들어가고 일년 내내 부스럼도 안 나는데다 감기도 들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탁족하는 길에 머리까지 감았으니 이 또한 세시풍속중의 하나인 물맞이 행사라 봐도 되겠죠?


계곡에 발 담그고 크게 심호흡을 해봅니다.
새소리 물소리와 더불어 숲속 나무들이 발하는 짙은 향기가 가슴 한가득 밀려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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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이 곧 분수령이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백두대간은
동과 서를 크게 갈라놓은 산줄기임과 동시에
동해안,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역할을 합니다.


태초에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들은
저마다 대간의 저력 을 닮은 모습으로 한반도 구석구석 가지를 쳤고,
그렇게 해서 대간(大幹),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을 일구어 냈습니다.
기둥 줄기인 대간을 중심으로, 10대 강을 경계 짓는 정맥들이 국토의 뼈대가 되고 있습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은 1625여km에 이릅니다.
이중에 남쪽에 있는 지리산에서 미시령까지만 우리가 갈 수 있습니다.
남한의 백두대간은 지도상으로는 640여㎞ 이지만 실제거리는 1천2백여㎞에 이릅니다.
그것도 험한 산길로만 다녀야 하는 대간 종주는 산행에만 꼬박 50일이 걸린답니다.
설악산, 태백산, 속리산, 덕유산, 조령산 등 우리나라의 높은 산은 거의 다 지나간답니다.


산을 타는 이들은 백두대간 종주를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여름엔 뜨거운 태양과 싸워야 하고 겨울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를 견뎌야 하며,
며칠을 가도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할 때도 있는 백두대간 종주...
그야말로 자기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백두대간을 시작한지 어언 3년, 난 함백산의 턱 밑에 도착해 있습니다.
참으로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그만 두어버릴까 생각한 것만도 여러번이었지요.
그러나 하늘길 밟기에 미친 난 또 하나의 고행길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찾아낸게 13정맥중의 하나인 한북정맥...
북한의 추가령에서 시작하여 임진강의 강구에 이르는 한강 북쪽의 산줄기입니다.
백암산-적근산-대성산-수피령-광덕산-백운산-국망봉-강씨봉-청계산-운악산-수원산을 거쳐
국사봉-죽엽산-불곡산-도봉산-노고산-현달산-고봉산을 지나 장명산에서 끝을 맺습니다.


한북정맥을 시작한지도 벌써 일년이 지났습니다.
다음달에 도봉산에 도착하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답니다.
임진강변 장명산까지의 나머지구간은 도시화되어 산맥으로서의 큰 의미를 잃어버렸거든요.


지난 주말에는 한북정맥을 다녀왔습니다.
한북정맥은 백두대간보다는 길이 험하지 않지만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백두대간과는 달리, 처녀지 같은 한북엔 길이 잘 보이지 않지요.
특히 여름에는 수풀이 우거져 아예 길이 보이지 않는 곳도 많답니다.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 선답자의 산행기만 들고 산행을 나서며 빌어봅니다.
산행기의 올바른 기록을요. 달랑 독도법에만 매달리기에는 어딘가 부족해서입니다.
그 기도가 부족했을까요? 엉뚱한 봉우리를 넘어갔다 다시 넘어오는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로프에 매달려야만 산을 오르고 내릴 수 있는 험한 바위산을요.

 

그렇게 두시간 동안 엉뚱한 곳을 헤매고, 가시덩굴을 헤치며 걷기를 열한시간...
지금 제 얼굴과 팔다리는 온통 상처투성이입니다. 가시밭을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 고생을 하고도 난 한북정맥을 마친 후의 산행, 또 다른 고행을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아마 난 산에 미쳤나봅니다"


가슴 설레이는 여름입니다.
모두가 떠나는 꿈을 꾸지요.
그냥 집에 눌러앉아 있기는 너무 아까운 계절이니까요.


연인이나 친구들과 함께
땀 뻘뻘 흘리며 높은 산을 오르거나, 드넓은 바다에서의 해수욕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깊은 산속 삼림욕이라도 한번쯤 시도해 볼만 할거고요.


여름은 장마의 계절이니 언제 빗방울이 거세질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방구석에서 뒹굴며 주말을 보내자니 왠지 억울하고….
비와 어울리는 나드리... 비안개 서린 산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숲길을 가득 덮는 빗소리, 몸을 부풀린 계곡물,
그리고 은은한 독경소리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맑게 해주지 않을까요?
한 주일 켜켜이 쌓인 속진 그산 한 귀퉁이 가만히 내려 놓고파 산을 찾았습니다.
마침 숲 우거지고 물 맑은... 거기다 삼학사란 고찰까지 낀 두타산을 찾았답니다.


얼굴이라도 보고싶다 대전서 올라온 아우님과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산 대신 룸사롱이나 가자는 유혹에도 내가 산을 선택함은 그만큼 산이 좋기 때문입니다.
산이 좋고, 사람이 좋으니... 이밖에 그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나의 해방구...


술에 폭삭 젖어 옆자리 아가씨의 미모도 눈에 들지 않습니다.
채 꿈틀거려보지도 못하다 눈을 뜨니 벌써 댓재에 도착했는 모양입니다.
어두운 하늘에 별자릴 찾을 순 없지만 그래도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으~ 추워... 산중 추위에 떨면서도 두리번거림은 비가 반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소망이 하늘에 닿았을까요?
산행 때마다 비를 몰고 다니는 분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니까요.


밤길 랜턴 불빛 하나에 매달려 걷고 또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목통령 지나 두타산... 박달령 지나 청옥산...
그리고 연칠성령에서 그 긴 능선길을 접고 지루한 하산길로 접어듭니다.


두타산 못미쳐 부지런한 산새가 안내하는 아침도 맞고...
청옥산 밑 칠십줄 할아버지께 오십이라 우김은 산이 주는 풍요가 전이되었음이 아닐까요?
거기다 더하여 어느 분이 주신 오리알이 배낭에 가득하고 또 양귀비 잎이 기다리고 있는데요.


계곡길은 울울창창 숲으로 덮여 있습니다.
수령이 수백년은 됨직한 소나무와 참나무는 서로 키재기를 하며 가지를 치켜들었고
제법 거센 물살이 휘도는 계곡 가장자리엔 수십번 홍수를 이겨냈을 법한 고목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한여름 땡볕이 아무리 기세등등해도
이런 고목이 드리우는 그늘에 들어서면 금방 서늘하게 풀이 죽습니다.
땡볕 가려준 구름에 산행내내 고마워했는데 갑자기 미워짐은 나 또한 평범한 인간이니까요.
고목 그늘이 있는 계곡에선 아무래도 땡볕이 제격 아닐까요?


앞쪽의 벼랑은 날카롭지만 산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습니다.
타박타박 걷기 좋은 코스. 계곡 옆 길이 시종 물길을 곁에 두고 걷게 하는군요.
그러나 그 코스와 궁합 안 맞는 등산화를 신은 난 미끄러움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


큰 나무와 작은 숲은 울창해 원시림을 연상시키고, 산아래 벼랑과 벼랑 사이로
맑은 계곡이 흐르고, 눈을 들면 숲과 숲 사이로 푸른 하늘이 떠있습니다.
무릉계곡에서 바라본 세상은 이처럼 푸르디 푸릅니다


이름 모를 새 노랫소리 울려퍼지는 숲 그늘에서
파아란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은 비록 없지만 초여름의 한가함을 즐기고 싶습니다.
등줄기 서늘한 암반에 가만히 누워봅니다. 그리고 가만히 두눈을 감습니다.


그 고요의 명상은(낮잠?) 발랄한 세 아가씨의 깔깔거림에 끝나버립니다.
그래도 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음은
뼈속까지 시린 물속에 온몸 내 던진 그녀들의 싱그러움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린 두타산...  맑은 계루에 두 발 담그고
하루쯤 원시의 숲 드리워진 자연에 온 몸을 맡기면 바로 그곳이 유토피가 아닐까요?


그래서 이곳이 무릉도원에서 따온 무릉개라 불린답니다.


그 곳 한켠에 喜·怒·哀·樂·愛·惡·欲 내 七情을 가만히 내려놓고 돌아왔답니다.
무릉도원의 신선께 깨끗이 씻어 돌려달라면서요.

아름다웠던 오월이 가버렸습니다.


앞만 보며 달리다 보니
지천이던 개나리와 벚꽃이 어느새 지고
이미 붉은 장미넝쿨이 울창한 울타리를 이루는 줄도 몰랐습니다.


가끔 살아가는 일이 힘겹게 느껴지면
아니 꼭 힘들지만은 않더라도 어딘가 떠나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들이든 산이든, 아니면 바다든 간에...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무엇 하나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이지요.


바다를 찾았다면 넘실 춤추는 파도가 반겼겠지만
이곳 칠보산은 산인지라 상큼한 산들바람이 마중하여주는군요.
그러나 오늘은 비온다는 날... 반기는 산에 고맙다고만 하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그저 시골 완행버스에서 보았던 스티커가 생각날 따름입니다.


눈보다 마음을 여는 것이 더 중요해서일까요?
천년 만년 세월을 버텨온 산중에 드는 산길에선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그리 높지 않고 그리 험하지도 않은 산인지라 호흡한번 헐떡임 없이 올라봅니다.


그래도 속리산 언저리라 가끔은 가파른 암벽이 앞을 막는군요.
모처럼 챙겨온 리지화도 자랑할 겸 부리나케 암벽에 붙어봅니다.
앞서가는 사람의 뒷 모습을 금방 놓치고
행여나 미끄러질까 두려움에 떠는 난 아직은 아마추어랍니다.


오르고 내리고... 그러다 매달려도 보고...
로프 앞에 줄서기 싫어 암벽에 붙어 봅니다.
무서운데... 뒤따라오는 여자분의 여유로움에 질려 티도 못냅니다.
명색이 난 남아대장부이니까요.(비록 무늬만 이지만 ㅎㅎㅎ)


칠보산엔 소나무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기둥은 물론 솔가지 하나 반듯하게 펴진 것이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휘어진 소나무가 모두 한쪽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군요.
아마 바람에 날려올 때 못다 떨친 인연 그쪽에 남아있나 봅니다.


지천에 깔린 솔잎 날카로움에 다쳤을까요?
솔향 듬뿍 안은 바람에선 가냘픈 흐느낌이 실려오는데,
쪽빛 허공에 흘러가는 저 흰구름 한점 어디로 가는지가 궁금한건
몸이야 어디있든 난 중생이기에 사소한 집착하나 선뜻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이 비어있어야 새것을 잡을 수 있고 앞을 보아야 갈 수 있듯이
내가 붙잡고 있는 지난날의 나를 놓아야만 진정한 날 맞이할 수 있을텐데도요.


솔숲에 비록 벤치는 없지만
서너명 족히 쉬어갈 바위가 지천인데 풍진속 기물이 무슨 필요겠습니까.
식혀주는 더위에다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속진의 때까지도 씻어 줄텐데요.
저 바위 위 내 한몸 누이고 더도 덜도말고 한 이틀 푹 쉬었으면 좋겠군요
일상의 번잡함 모두 잊은 채로 말입니다.


바위를 피해 이리저리 휘어진 오솔길을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허파를 씻어주는 맑은 공기...
이런 숲에선 사람도 모든 숨구멍을 열어놓나봅니다.


느릿하게 땅의 촉감을 느끼며 걷다
또 바위난간에 묶인 밧줄에 아무생각 없이 매달리다 보면
진초록으로 덮여가는 숲의 기운은 어느새 이슬처럼 가슴에 내려앉습니다.


여름에 접어든 유월.
세상은 열기로 가득하고 머리는 무겁습니다.
맑은 물과 푸른 숲이 그리워 칠보산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사에 닳고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