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산을 보고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나요?
소나무의 '진 초록’과 활엽수의 색‘연 초록’두 가지 초록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진초록의 산에 점점이 박힌 연초록...마치 폭죽을 터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야흐로 ‘신록의 계절’입니다.
신록의 산은 날씨에 관계없이 아름답습니다.
맑으면 눈이 부시고, 비가 오면 머금은 물기가 반짝입니다.
어쩌다 옅은 안개라도 낀다면, 그야말로 수채화를 보는 듯 하겠지요.

 

신록에는 땅에서 솟구치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충만한 에너지가 있습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눈이 맑아지고 머리가 개운해지는 청정의 에너지입니다.
그 기운을 제대로 받기 위해 전 또 산을 찾았습니다. 숲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요.

 

주말이지만 도래기재는 텅 비어 있습니다.
지난달 서너대의 관광버스가 지키던 곳도, 얼굴 씻으며 깔깔대던 동굴도 비어있습니다.
2시30분 출발선상에 섭니다. 헤드랜턴에 비추이는 얼굴 표정들이 다들 밝군요.
비가 안 온다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은근한 미소일 것입니다. 깊은 행복감에서 우러나오는...

 

구룡산을 향합니다. 초반부터 속도들을 내는군요.
헉헉대는 숨결이 턱에 차 오릅니다. 오로지 앞사람의 발뒤축만 보며 달립니다.
하기사 별빛 한점 없는 어두운 밤에 다른 것이 보일리도 없지만 볼 여유도 없습니다.
바람에 휘둘리는 짙은 안개가 발목어림에서 바람결 따라 물결무늬를 연출해 냅니다.
제법 조도가 높은 랜턴의 불빛까지도 흐리게 만들어 갈길 바쁜 산나그네의 발목을 잡는군요

 

두시간쯤 걸었나요? 쉬지도 않고 내빼는 선두가 어딧냐고 외치는 이가 보입니다.
아서라~ 앞선 사람도 뒷선 사람도 힘들기는 매 한가지인걸요.
바람결에 후두둑 떨어지는, 나뭇잎 위에서 잠자던 시원한 빗방울이 그나마 작은 위로입니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숨결들을 안고 도착한 구룡산, 조그만 입석이 지키고 있습니다.
어둠에 쌓인 정상은 볼품이 없습니다. 잠깐의 휴식도 없이 곧바로 출발입니다.

 

곰넘이재를 내려올 즈음해서 여명이 찾아옵니다.
배가 고파 미치겠는데 아직은 이르다지만, 슬그머니 술을 내놓습니다. 안주? 전입니다.
뭔가 들어가니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깁니다. 5시30분, 벌써 세시간을 걸었습니다.
부지런한 산새들의 합창... 누군가 도심의 새소리보다 맑고 밝게 느껴진다고 말하는군요.
또 다른 누군가는 맑은 공기 때문에 음이 잘 전달되어서 그렇다합니다.
날이 밝자 길가의 들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보드라운 들풀에 얼굴 대보고 싶네요.

 

6시20분, 30여분의 힘든 오르막길 끝에 신선봉 정상입니다.
기진맥진한 우리를 경주 손씨들의 묘가 반깁니다. 성묘? 어떻게 할까요? 잡초만 무성합니다.
깃대배기봉, 벌써 8시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펑퍼짐하게 주저앉아 아침상을 차립니다. 뒤에서 서성이는 몇몇은 오는 길에 해치웠을까요?
또다시 두어병의 소줄 내놓습니다. 푸짐한 안주거리에 술이 술술 잘도 넘어갑니다.
추위에 떨던 얼굴들이 소주한잔에 발그레해집니다. "술은 에너지다" 제 주장이랍니다.

 

9시40분, 부소봉을 지날즈음 저멀리 천제단이 보입니다.
납작한 활엽수들로 우거진 능선에 듬성듬성 고사목들이 나도 있다 자태를 뽐냅니다.
밑에 보이는 건 하단? 천왕단, 장군단은 정상부위에 있는데 밑에 있다고 하단인 모양입니다.
그 옆엔 밀양 박씨의 묘가 있군요. 태백산이 영산이어서 일까요? 묘가 꽤 많습니다.
등산복 차림의 행락객일까요? 묘 옆엔 무지하게 많은 음식을 펼쳐 놓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10시, 드디어 천제단에 도착합니다.
저멀리 함백산이 한눈에 들어오는군요. 그리고 다른 이름 모를 군봉들도...
산허리에 운해가 걸려있습니다. 그리고 능선에 지천으로 널린 철쭉의 군락...
화사하지 않은 태백산의 철쭉은 기후변화가 무쌍한 탓인지 꽃 색깔이 연분홍에 가깝습니다.
고산 철쭉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셈이지요.
다음주에 열리는 철쭉제에 맞추느라 이제 막 꽃몽오리를 열고 있습니다.

 

천제단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오렌지 한 알, 찹쌀떡 네 개, 그리고 오이와 방울토마토, 그리고 소주 한 병...
우선 고시래... 절도 해야겠지요? 우쒸~ 절 받는 곳에 웬 도인이 앉아 있습니다.
음복으로 한잔 쭈욱~ 문득 소원을 빌지 않았음을 생각해냅니다.
오랫동안  믿어온 하느님외의 다른 신에 익숙하지 않았나 봅니다.
차라리 같이하는 선남선녀들 시집장가나 빨리 가게 해달라 빌어줄걸 그랬나요?

 

부지런한 몇몇 "이제 내려가죠?"
“뭘 그렇게 서둘러요? 자주 올 수 있는 곳도 아닌데...”
다시 주저앉아 과일 안주에 소주 몇잔 곁들입니다. 철쭉 꽃향 실은 바람이 볼을 건드립니다.
쨍쨍 햇살아래서도 연초록 신록의 미소들이 피어납니다. 이마엔 땀방울 하나 열려있습니다.

 

꽃과 제대로 눈맞춤도 못하고, 가슴 깊숙이 계절의 향기조차 들이켜지 못했는데...
봄꽃의 끝물이며, 여름을 여는 철쭉이 우리를 반기는데 벌써 내려가자니요.
산 정상에 한데 모인 철쭉이 일제히 꽃몽오리를 여는 모습은 하늘을 떠받치는 향로같습니다.
천제단의 향로처럼 신성하기까지 합니다

 

태백산 철쭉제!
이달 하순이면 철쭉은 한꺼번에 꽃잎을 열고 꽃잔치를 벌일 것입니다.
또 얼마나 많은 인파가 태백산을 찾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생물들이 수난을 겪을까요.
길가에 죽어있는 이식한 주목의 시체들과, 골다공증에 걸린 늙은 주목들에 가슴 저려옵니다.

사람을 포함은 모든 생물들, 삶과 죽음은 백지장 한장 차이... 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