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배기가 생각나는 장마철입니다.
낙숫물이 마당을 쪼는 장마철이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탁배기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양은 주전자에 받아온 막걸리를 사기 그릇에다 철철 넘치도록 담아
벌컥벌컥 들이켜던 시절. 물꼬 트던 흙손으로 쭉 찢은 김치 한쪽이나
고추장을 풀어넣어 부친 장떡 안주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요.
어디 그런 모습이 벽진 시골뿐이었겠습니까? 검정 책가방을 든 대학생들에게도
대폿집 막걸리와 두부 한 모는 요즈음 라면만큼이나 흔한 저녁거리였습니다.


며칠 째 창을 때리고 있는 장대빗줄기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그리 주고도 무엇이 아쉬운지 주말까지는 햇빛 보실 생각을 마라는군요.
이번 주말산행은 내 가슴속 한켠에 소중히 키워가고 있는 조그마하지만
결코 조그마하지 않은 꿈인 백두대간... 그 하늘길을 걷는 날인데도 말입니다.


우중산행...
그것도 열시간을 넘겨야 하는 우중산행... 지난해 육십령-동엽령구간을
함께 하셨던 분들은 그 처절했던 산행을 결코 잊으실 수 없으실 것입니다.
비몰아 오는 님 모시고 산이고 뭐고 다 잊은채 운치있게 탁배기나 한잔 들이켜 보고 싶네요.
그러다 보면 다른 분들이라도 비 없는 산행을 즐길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나 결코 그리할 수 없음에 상념의 나랠 그만 접습니다.
그리고 부랴부랴 계란 말고, 오뎅 볶아 부리나케 교대로 향해봅니다.
삼겹살에 소주한잔... 버스에 오른가 했더니만 어느새 우린 눌재에 도착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왜 산을 찾느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산이 거기 있어 찾는다’대답합니다. 어디서들 주워들은 풍월이지요.
그러나 난 아직도 왜 산을 찾는지 모릅니다.
혼자 사는 몸인지라 휴일에 할 일이 없어서라면 산속에 작업하러 온게 되겠죠?
그러다 찾아낸게 백두대간 종주... 우리 山河의 등뼈를 밟아보고 싶어서라 말하렵니다.
“그럼 다른 산은?” 끝까지 물고 들어온다면 “그래 젊은이들의 양기 좀 뺏으러 간다 왜”


오늘의 첫 번째 만남인 청화산은 높은건 별개로라도 그 경사가 우릴 기죽입니다.
하늘엔 조각달 떠다니는데 어느 한사람 관심보이지 않는건 아마 산세에 놀라서가 아닐까요?
행여 별똥별 보일새라 고갤들어 보지만 내 행운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가봅니다.


다들 등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턱까지 차 오르는 가쁜 숨 내뿜으며 산을 오릅니다.
그 고통에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을 텐데 그만두지 않음은 무슨 이율까요?
아마 조금만 더 참고 오르면 눈 앞에 나타날 내리막이 떠오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생에서 힘들고 때론 삶을 포기할 만큼 절망적인 순간에 “희망”이란 단어를 떠올리듯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내리막길 산행이 더 힘들답니다.. 인생 또한 이와 같을 거구요.


조항산 못미쳐 부지런한 산새의 문안인사와 함께 아침의 黎明이 찾아옵니다.
렌턴 불빛이 나간 꽃사슴에게 렌턴을 건네주자 마자 찾아온 여명에 조금은 겸연쩍군요.
여명과 함께 발밑에 펼쳐진 운무... 그리 호화롭진 않지만 흔히 볼수 있는건 아니지요.


사위가 밝아오니 원시의 숲이 눈에 차오릅니다.
소나무, 떡갈나무, 그리고 내가 잘아는 싸리나무도 간간히...
누군가 건네는 참나물 한 이파리 가만히 깨물어보니 금새 향이 한입 가득차오릅니다.


숲과 교감을 시작해 봅니다. 이번 산행의 정리와 함께요.
자연과의 감응은 나와 자연이 딴몸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시작합니다.
나무의 날숨을 내가 마시고, 나의 날숨을 나무가 마시니 나무와 내가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삼라만상이 모두 그물망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찾아냅니다.


“나는 곧 나무요, 나무가 곧 나다”에 목을 매다
눈앞에 나타난 대아산의 가파름에 놀라 상념의 나래를 그만 접습니다.
능선을 타고 병풍을 두르듯 즐비하게 늘어선 기암괴석 사이를 지나 정상에 섭니다.
가는 길목 코끼리 바위, 대문바위 이정표 바꿔논 넘 욕도 좀 하고,
너른 바위에선 떡으로 요기도 하고, 피 같은 물까지 얻어 마십니다.
어느 젊은이의 오랜지쥬스 살얼음에 가슴 밑바닥까지 시려오는군요.


하산길... 모처럼 선두에 서봅니다.
초행길이지만 그간의 백두 노하우를 살려 리본을 보며 걸으니 자신이 서는 거지요.
그 威風堂堂이 길 잘못들었다는 산님의 외침으로 깨어진데는 그리 오래가지 않더군요.
나쁜넘들... 백두도 아닌 길에 왜 백두대간 리본을 걸어놓노?


뒤돌아 오르는 길...
턱까지 차오르는 호흡도 뒤따르던 이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돌아온 분을 보며 몰래 미소지음은 내가 불량해서일까요? ᄒᄒᄒ


불란치재 못미쳐 치던 번개가 738봉 넘어갈 즈음에 가는 비를 뿌리기 시작하는군요
그리고 오늘 산행에 비를 부르는 이가 참가했다는 걸 기억해 냄니다.
오뉴월 일기는 심술보 같다고나 할까? 날이 좋다가 후둑후둑 빗방울이 떨어집지다.
심한 경우에는 노처녀의 한이 우박으로 내리기도 한다나요?


배꼽시계를 보니 1시를 조금 넘겼네요.
이미 11시간을 넘게 걸었는데도 힘들지 않음에 고갤 가윳거리다 그 이율 찾아냅니다.
미인과 함께 하는 산행.... 얼굴이 고우면 모든게 용서된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오늘은 대아산부터 산행을 마칠 때까지 이쁜 여자분과 단둘이 산행을 즐겼거든요.


달과 별... 햇빛과 먹구름... 번개에 소나기까지 함께한 참 유별난 산행이었습니다.
그런 악조건 속의 산행에서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마쳤으니 자축할 만하지 않습니까?


‘福’자 박힌 사기그릇만큼이나 정겹던 우리의 막걸리입니다.
이번주에는 막걸리 한잔 나누면서 도란도란 산행얘기를 나눠보면 어떨까요.
장마철에 딱 맞는게 막걸리이니까요. 특히 우리 민족의 정서가 배어있는 술 아닙니까?

'산행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룡능선 답사기  (0) 2005.12.01
백두대간 속리산  (0) 2005.12.01
대관령  (0) 2005.12.01
백두대간(조령)  (0) 2005.12.01
백두대간(희양산)  (0) 2005.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