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白雲山, 904m)-도마치봉(道馬峙峰, 937m)

 

산행일 : ‘15. 2. 21()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과 강원도 철원군 사내면의 경계

산행코스 : 광덕고개백운산삼각봉도마치봉향적봉흥룡봉백운계곡흥룡사주차장(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오늘 산행은 한북정맥(漢北正脈)을 따라 걷게 된다. 백운산과 도마치봉이 한북정맥의 산줄기가 빚어놓은 수많은 산봉우리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광덕고개에서 도마치봉까지 이르는 산줄기에는 이들 외에도 수많은 봉우리들이 있다. 그러나 봉우리 사이의 골이 깊지 않기 때문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이어갈 수 있다. 거기다 광덕고개의 해발(海拔)620m, 백운산을 오르기 위해 높여야 하는 고도(高度)300m가 채 안되니 오늘 산행은 공으로 먹는 산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구간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으로서 볼거리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향적봉에서 흥룡봉 사이의 능선은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어 볼거리에 목마른 등산객들의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수많은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널려있고, 밧줄에 매달려 오르내리는 바윗길은 스릴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산행들머리는 광덕고개(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

서울에서 47번 국도를 따라 김화방면으로 달리다보면 도평교차로(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교차로를 빠져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도평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372번 지방도로 옮겨 들어가면 찻길은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한없이 구불대다가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는 광덕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광덕고개는 캐러멜 고개라고도 불린다. 한국전쟁 당시 험하고 구불구불한 이 고개를 넘던 미군 지프 운전병이 피로에 지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상관이 운전병에게 캐러멜을 건네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름은 카멜고개. 낙타(camel) 등처럼 굴곡이 심해서 카멜고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또한 미군들이 지어낸 이름이 아닐까 싶다. 광덕고개에는 언제부턴가 매일 장이 서기 시작했다. 인근 주민들이 고개 꼭대기까지 올라와 산나물과 약초(藥草)를 팔기 시작하던 것이 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늘어나면서 아예 상설시장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오늘 같이 눈발이 날리는 날에도 문을 닫은 집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얼마나 호황을 누리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상가(商街) 앞을 지나 산자락으로 놓인 철계단을 오르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이어서 나타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짧게 치고 오르면 한북정맥 등산안내도와 이정표(백운산 정상 3.1Km/ 광덕고개 0.1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터에 올라서게 된다.

 

 

 

▼ 산길은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백운산까지의 거리가 3Km가 넘는데도 불구하고 높여야 할 고도(高度)300m가 채 안되니 구태여 서두를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길이가 짧고 나머지 대부분의 구간은 완만하다는 얘기일 따름이다. 산길은 구경거리도 없다. 거기다 능선에 가득한 참나무들 때문에 조망(眺望)도 트이지 않는다.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일 것이다.

 

 

 

강원도와 경기도를 양 옆구리에 끼고 이어지는 능선은 경사(傾斜)가 없는 반면에 산자락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그래도 명색이 **)한북정맥인지라 일반 산줄기들과는 무언가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 한북정맥(漢北正脈)이란 강원과 함남도의 도계를 이루는 평강군에 위치한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哥嶺)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한강과 임진강의 강구(江口)에 이르는 약 170Km의 산줄기 이름이다. 이 산줄기는 동쪽으로 회양·화천·가평·남양주, 서쪽으로 평강·철원·포천·양주 등의 경계를 이루는데 자연히 동쪽은 한강 유역이고 서쪽은 임진강 유역이 된다. 이 산줄기에는 백암산(白巖山), 적근산(赤根山), 대성산(大成山), 광덕산(廣德山), 백운산(白雲山), 국망봉(國望峰), 청계산(淸溪山), 운악산(雲岳山), 도봉산(道峰山), 현달산(峴達山) 등 내로라하는 명산들이 많다.

 

 

백운산 정상까지 약 800m쯤 남겨놓은 지점에서 보기 힘든 귀물(貴物)을 만났다. 나무 두 그루의 중간이 하나로 합쳐져 있는 것이다. 그것도 종() 자체가 다른 소나무와 참나무가 합쳐져 있다.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의 줄기가 맞닿아 한 나무줄기로 합쳐져 자라는 현상을 연리목(連理木)’이라 일컫는다. 그렇다면 이 나무들을 연리목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것도 다문화(多文化)이다. 비록 이 나무들은 중간에 맞닿았다가 다시 헤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광덕고개를 출발한지 1시간쯤 지나면 암릉구간을 만나게 된다. 어찌 보면 암릉이라고 부르기가 낯부끄러울 정도로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 눈요깃거리가 되는 바위들을 만날 수 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밧줄을 붙잡아야만 하는 곳도 있다. 아마 백운산 구간에서는 가장 뛰어난 구간이 아닐까 싶다. 암릉이 끝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왼편으로 난 무학봉 갈림길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백운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광덕고개를 출발한지 1시간2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널따란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백운산 정상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백운산 등산안내도, 그리고 이정표(삼각봉 0.93Km/ 흥룡산 4.14Km/ 광덕고개 3.20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백운산 정상에서 산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흥룡사로 내려가는 길과 계속해서 한북정맥을 타는 길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더라도 오늘 산행의 날머리로 정한 흥룡사로 내려가기는 매한가지이나 난 한북정맥을 조금 더 타다가 도마치봉에서 하산할 것을 권하고 싶다. 향적봉과 흥룡봉이라는 걸출한 봉우리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운산 정상은 조망(眺望)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는 광덕산이, 남쪽으로는 국망봉이, 그리고 동쪽으로는 명지산과 화악산이 뚜렷하게 보인다고 한다. 허나 아쉽게도 오늘은 눈보라 때문에 시계(視界)가 거의 제로(zero)에 가깝다. 조금 전에 걸어온 능선과 다음에 이어갈 능선을 제외하고는 어디가 어디인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기만 하다.

 

 

삼각봉으로 가는 길은 백운산을 오를 때보다 더욱 완만하다. 백운산과 삼각봉의 높이가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볼거리가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그저 부러진 나무들이 만들어낸 아치(arch) 아래에서 포즈(pose)를 잡아보거나, 길가에 만들어 놓은 쉼터에서 한숨을 돌리다가 다시 걷는 평범한 산행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산행이 지루해진다 싶을 즈음이면 삼각봉에 올라서게 된다. 백운산에서 삼각봉까지는 25분 정도가 걸렸다.

 

 

 

 

말뚝모양으로 생긴 작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도마치봉 1.17Km/ 백운산 정상 0.93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각봉 정상은 아무런 특징도 보여주지 못한다. 거기다 주변이 잡목(雜木)들로 둘러싸여 있는 탓에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다들 멈추지 않고 곧장 통과해버리는 이유일 것이다.

 

 

도마치봉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이는 그만큼 다시 올라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산길은 의외로 수월했다. 일단 가파르게 떨어진 다음에는 오르내림이 거의 없이 길고 완만한 오름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 길도 역시 구경거리가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그저 앞만 바라보고 걷다가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면 드디어 도마치봉 정상이다. 삼각봉에서 30분이 조금 못 걸렸다. 도마치봉에 이르니 궁금증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왜 도마치봉이 백운산에 포함된 부속 봉우리 중의 하나로 전락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도마치봉(937m)의 높이가 백운산(904m)보다 오히려 더 높은데도 말이다. 봉우리와 봉우리들을 연결하는 골의 깊이가 얕아서 독립된 산으로 볼 수 없었다면 백운산으로 통칭한 뒤에 두 봉우리를 정상과 주봉으로 구분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때의 정상은 도마치봉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헬기장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널따란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흥룡봉 2.0Km/ 국망봉 6.65Km/ 백운산 정상 2.10Km) 외에도 한북정맥 안내도가 하나 더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 안내도가 문제다. 안내도의 상단에 광덕산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를 본 집사람이 여기가 무슨 산이냐고 물어온다. 생뚱맞은 그녀의 궁금증에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안내도는 현재의 위치를 버젓이 광덕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설명문에다는 광덕산을 아예 광던산이라고까지 적어 놓았다. 이런 것을 보고 없는 것만도 못하다라고 말하는가 보다. 참고로 도마치봉(道馬峙峰)에서 말하는 도마치(道馬峙)란 도마치봉의 남쪽 도마봉에서 한북정맥을 벗어난 화악지맥 상의 고갯마루를 이르는 이름이다. 이 고갯마루는 교통이 발달되기 전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사람들이 강원도 화천 사창리장을 가기 위해 넘나들던 우마차용 고개였다고 한다. 그래서 도()와 도를 왕래하는 고개라는 뜻에서 도마치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궁예와의 관련설을 드는 이들도 있다. 태봉의 궁예가 명성산 전투에서 왕건과 싸우다 패하여 도망할 때 이 산 부근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산길이 너무 험해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서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엉망이다. 눈이 내리고 있어서 시계(視界)가 거의 제로 (zero) 수준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긴 날씨가 도와준다고 해서 조망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다. 정상이 잡목(雜木)에 빙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산행후기를 보면 잡목 위로 볼만한 것은 다 보인다고 적고 있다. 도마치봉에서는 국망봉, 그리고 국망봉에서 가리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눈앞에 보이고, 신로령에서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밋밋한 능선이 의미 있게 손짓한다고 말이다.

 

 

정상에서 산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곧장 능선을 탈 경우 한북정맥을 따라 국망봉으로 이어지므로, 흥룡사로 하산하고자 할 경우에는 오른편의 지능선으로 내려서야 한다. 하산 길은 초입부터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리고 그 길은 산의 사면(斜面)을 따라 이어지기 때문에 한쪽 편이 거의 벼랑 수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구간에서 로프 등 안전시설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안전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곳에다는 철난간(鐵欄杆)을 설치해 놓았다는 점이다. 하긴 철난간이 없었더라면 그 구간을 통과할 수도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남근(男根)바위라는 어설픈 이름을 붙였다가 집사람에게 심미안(審美眼)’이 전무하다는 지청구만 들은 바위

 

 

 

 

 

집사람의 말이 강아지가 먹이를 달라는 형상이란다. 물론 난 아니올시다. 내가 보기엔 그녀의 눈도 심미안을 이야기하기엔 많이 부족하다.

 

 

수북하게 쌓인 눈 때문에 가뜩이나 미끄러운 사면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다 보면 어느덧 안부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정상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채 1Km도 못되는데 35분 정도가 걸렸다. 그만큼 조심스레 내려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저 엉금엉금 긴 것만은 아니다. 내려오는 길 주변에 볼만한 눈요깃거리가 많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 탓에 비록 먼 곳의 조망(眺望)까지 기대할 순 없지만, 길가에 널린 기이(奇異)하게 생긴 바위들과 소나무들과 잘 어울리는 암봉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것이다.

 

 

 

안부삼거리(이정표 : 흥룡사 4.05Km/ 흥룡사 3.46Km/ 도마치봉 0.87Km)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능선을 타는 길과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곳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진행해도 흥룡사에 이르게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짜릿한 스릴(thrill)을 만끽해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능선을 타고 곧장 진행하는 것이 좋다. 이 구간이 도마치봉의 백미(白眉)로서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초심자(初心者)들에게는 계곡으로 내려설 것을 권하고 싶다. 삼거리에서 고민을 하고 있던 선두대장도 계곡으로 내려서는 코스를 선택했다고 한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일절 러셀(russell : 선두에 서서 눈을 쳐내어 길을 다지면서 나아가는 일)이 되어있지 않아 고민하는 그를 보고 헤어졌는데, 일행들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보다는 자기가 조금 더 고생을 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던 모양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제법 암릉산행에 익숙한 집사람까지도 내 도움이 없이는 내려오기 힘든 구간이 몇 곳 있을 정도로 바윗길이 험했기 때문이다.

 

 

안부삼거리에서 그다지 험하지 않은 오르막길을 10분 조금 못되게 치고 오르면 향적봉이다. 좁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향적봉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흥룡봉 1.6Km/ 흥룡사 3.14Km/ 도마치봉 1.19Km)‘119 구호표지목(1-5)’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정상에는 이들 외에도 위험경고판하나가 더 눈에 띈다. 흥룡봉 방향이 매우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초심자(初心者)들은 오른편에 보이는 흥룡사 방향으로 내려서지 않을까 싶다.

 

 

 

흥룡봉으로 가는 산길은 생각보다는 험하지 않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능선에 바윗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다지 험하지도 않은데다가 안전로프 등을 매어놓아 오르내리는데 별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다. 위험경고판이 과장광고였던 모양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쉴 무렵쯤 되면 로프에 온몸을 의지하지 않고는 오를 엄두를 못 낼 정도로 가파른 바윗길이 나타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가파른 내리막 바윗길이 시작된다.

 

 

 

 

위험지역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에 뛰어난 바위 전망대(展望臺)를 만난다. 노송(老松)이 만들어낸 액자(額子) 속에 집사람을 넣어본다. 풍경화가 그려졌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눈 때문에 그러질 못하니 차선책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환하게 웃는 그녀가 오늘따라 더 사랑스럽게 보이는 건 아름다운 풍경화가 만들어낸 조화이리라.

 

 

앞서가던 집사람이 안절부절 못하는 게 보인다. 가슴부위의 높이로 매어진 밧줄이 느슨해서 중심을 못 잡겠다는 것이다. 다가가 보니 그녀의 말이 맞다. 이런 밧줄을 무턱대고 잡았다가는 몸이 중심을 잃고 돌아버리게 된다. 중심을 잃은 몸은 자칫 잘못하다간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말이다. 이후부터 산행은 내가 먼저 안전하게 아래로 내려선 후에 집사람을 도와 아래로 내려설 수 있도록 하면서 진행된다.

 

 

가뜩이나 경사(傾斜)가 가파른 바윗길에 눈까지 쌓여있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그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짜릿한 스릴의 연속이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따라 공포냐 아니면 쾌감이냐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얘기이다. 젊은이들이라면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들에게 이 코스를 권하고 싶다. 남자의 도움 없이는 쉽게 통과할 수 없는 이 코스를 지나려면 잡아주고 밀어주는 스킨십(skinship)‘은 기본이다. 거기다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운동신경도 뛰어나다.’ 등의 립 서비스(lip-service)’까지 적절하게 섞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런 뒤에는 10년 이상을 사귄 연인들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을 테고 말이다.

 

 

위험지역을 내려서면 또 다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바윗길로 연결되는데다가 꽤 길게 이어지기 때문에 봉우리 위에 오르고 난 후에 내려갈 일이 걱정되는 구간이다. 이는 조금 전에 내려섰던 구간이 그만큼 험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오르막의 끄트머리가 바로 흥룡봉이다. 향적봉에서 흥룡봉까지는 50분 가까이 걸렸다. 1.6Km의 거리임을 감안할 때 꽤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이 또한 조심해서 오르내리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음이다.

 

 

 

서너 평 남짓한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흥룡봉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정표(흥룡사 2.44Km/ 도마치봉 1.98Km)와 누군가가 걸어놓은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한북정맥을 종주하는 사람들 사이에 풍광이 멋지다는 입소문을 탄 흥룡봉은 조망 또한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한북정맥이 장벽처럼 눈앞에 우뚝 솟고 그 뒤로 경기 제1봉인 화악산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눈 때문에 방금 전에 지나온 능선만 간신이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흥룡봉에서 50m쯤 내려서면 헬기장이 나오고 이어지는 산길은 큰 어려움 없이 이어진다. 산길이 비록 가파르지만 내려서기 힘들 정도는 아니고, 거기다 길가에 안전로프까지 매어놓아 별 어려움 없이 내려설 수 있다. 아까 흥룡봉에 오를 때 가슴 졸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웃음이 날 정도이다. 그러다가 20분 정도 후에는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649m(이정표 : 흥룡사 1.77Km/ 등산로 아님/ 도마치봉 2.65Km)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에 갈림길이 하나 보이나 이를 무시하고 오른편 능선을 따른다. 포천소방서에서 비닐테이프까지 쳐가면서 길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산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고 나서도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소나무가 간간히 섞여있는 능선에는 아직도 참나무가 대부분이고, 산길은 경사(傾斜)가 조금 더 가팔라졌을 따름이지 여전히 흙길이다. 그러다가 10분쯤 후, 그러니까 흥룡사를 1Km쯤 남겨놓은 지점에서 산길은 다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곳도 역시 포천소방서에서 다른 방향을 막아 놓았다. 이어서 더욱 가팔라진 산길을 따라 4분쯤 더 내려서면 백운계곡이다

 

 

 

 

백운계곡은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 받는 곳이다. 백운계곡을 끼고 있는 주변의 산들이 대부분 흙산이기 때문에 수림(樹林)이 울창하고 계곡이 발달했지만, 한편으론 하얀 화강암들이 여러 곳에서 암반(巖盤)을 이루고 있고,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들을 계곡의 곳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계곡을 건너는데 앞서가던 집사람이 ‘119의 구호지점표시목(1-3)’을 가리킨다. ‘폭포라고 적혀있는 것을 본 모양이다. 계곡으로 내려가니 비스듬하게 누운 암반(巖盤)이 보이고, 그 위로 물이 흐르고 있다. 그저 헛웃음만 날 따름이다. 이 정도가 폭포(瀑布)로 분류된다면 어느 물길 하나 폭포가 아닌 것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이다.

 

 

계곡을 지나면서 산길은 임도(林道)로 변한다. 계곡 옆으로 난 임도는 한마디로 멋지다. 석판(石板)처럼 납작한 돌들이 깔려 있는 고즈넉한 산길이 마치 고궁(古宮)에라도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잘 닦여 있는 것이다. 임도를 따라 걷다보면 잠시 후에는 백운2’(이정표 : 흥룡사 0.26Km/ 백운산 정상 3.68Km/ 향적봉 2.57Km)를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난 산길 하나를 볼 수 있다. 아까 안부삼거리에서 계곡으로 내려섰을 경우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산행날머리는 흥룡사(백운계곡) 주차장

백운2교를 지나면 얼마 후에는 또 다른 다리인 백운1를 건너게 되고, 이어서 오른편에 사찰(寺刹) 하나가 나타난다. 천년고찰(千年古刹)로 알려졌지만 고찰의 냄새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흥룡사이다. 사찰을 둘러보고 난 후 계단을 내려서면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정확히 5시간이 걸렸다. 물론 쉬지 않고 걸은 시간이다. 다만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느라 걷는 속도가 다소 늦어졌음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 흥룡사(興龍寺)는 신라 말 도선(道詵:827898)이 내원사(內院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도선이 절터를 정하려고 나무로 세 마리의 새를 깎아 날려 보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백운산에 앉아 그곳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1786(정조 10)에 태천(泰天)이 중건한 뒤 이름을 백운사(白雲寺)라고 고쳤으며, 1922년 설하(渫河)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흑룡사(黑龍寺)라고 고쳤다가 곧 현재의 이름인 흥룡사로 바꾸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웅전 등 법당이 4동에 이르는 규모 있는 사찰이었으나 전란으로 소진된 뒤 현재는 새로 지은 전각(殿閣)들인 36평의 대웅전과 요사(寮舍)를 겸한 당우(堂宇), 그리고 삼성각 있다.

고래산(高崍山, 543m)-우두산(牛頭山, 473m)

 

산행일 : ‘14. 12. 13()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북내면과 양평군 지평면의 경계

산행코스 : 고달사지주차장고달사지고려석실묘주능선우두산국사령고래산옥녀봉(玉女峰, 419m)창령조씨묘원주차장(산행시간: 4시간)

같이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색 : 고래산은 경기의 곡창지대인 여주 들녘에 우뚝 솟아오른 산이다. 그 생김새가 마치 큰 바다에 떠있는 고래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들녘에 있다 보니 높게 보일 따름이지 사실은 500m가 조금 넘는 나지막한 산이다. 거기다 전형적인 흙산이라서 오르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가족산행지로 추천할만 하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들머리에 고달사지라는 국보급(國寶級) 문화재(文化財)3점이나 거느린 유적지(遺跡地)까지 끼고 있으니 아이들에게 유익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산행들머리는 고달사지 주차장(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영동고속도로 여주 I.C에서 내려와 37번 국도를 타고 양평방면으로 달리면 남한강을 건너 대신면(여주시) 소재지인 율촌리에 닿는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88번 지방도 문막방면으로 들어가면 블루혜린 GC'를 지나 상교리가 나온다. 상교리 조금 못미처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고달사지 주차장이다.

 

 

 

전면에 보이는 고래산 능선을 바라보며 들어서면 수령이 400년이나 된 보호수(保護樹)가 길손을 맞는다. 보호수를 지나면 왼편에 고달사지(高達寺址 : 사적 제382)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리고 빈터에 널려있는 석조물(石造物)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달사지의 석조물들은 매우 빼어난 미학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는 국보급들이다.

 

 

 

본격적인 산행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고달사지부터 들른다. 지금은 비록 그 흔적만 남아있지만 국보급 문화재를 4점이나 갖고 있는 유적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곳 사지(寺址)에 있었다는 고달사는 764(신라 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 즉 도봉원(道峰院희양원(曦陽院고달원(高達院)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大刹)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전각(殿閣) 하나 없는 빈터에 고달사지부도(국보 4)를 비롯하여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龜趺 螭首 : 보물 6), 원종대사 혜진탑(元宗大師慧眞塔 : 보물 7), 석불좌(石佛座 : 보물 8) 등의 문화재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되새겨 줄 따름이다. 참고로 고달사지 부도 앞에 있던 쌍사자 석등(보물 282)은 현재 서울 경복궁 대조전 뜰에 있다. 

 

 

석불대좌의 위쪽엔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元宗大師慧眞塔碑 龜趺 螭首 : 보물 제6)가 천년의 세월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다. 신라의 부도비 형식을 잘 계승한 이 유적에선 고려 초기의 진취적인 기상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거북의 네 발과 발톱 끝은 사실적이어서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나갈 듯하며, 용머리를 닮은 귀두는 크고 기이해 몸을 얼어붙게 만든다. 마치 고달사지 수호신 같다. 여기에 얹혀 있던 비신(碑身 : 비석의 몸체)은 경복궁 근정전의 회랑에 진열돼 있다.

 

 

절터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유물은 석불대좌(石佛臺座 : 보물 제8)이다. 위에 앉아있던 불상(佛像)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높이 1.57m) 잘생긴 석불대좌로서의 품격을 인정받고 있다. ··하대와 지대석(址臺石)을 모두 갖춘 사각대좌로 연꽃 조각이 장엄하고, 특히 불상이 안치돼 있던 상대의 윗면은 아주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어 짝을 이루던 불상의 아름다움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석조(石槽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 큰 돌을 파서 만든 석기(石器)인데, 큰 절에서 잔치를 하고 나서 그릇 따위를 닦을 때 흔히 쓰는 돌그릇이다. 보통 석조의 크기를 보면 그 절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눈앞의 이 석조가 어른 몇 명이 들어앉아 목욕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크니 당시 고달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달사지를 둘러보고 나오면 고달사 앞이다. 현재의 고달사 절집은 1973년에 지은 양옥(조립식) 법당(法堂)이다. 법당 왼쪽에는 산신각(山神閣)이 자리하고 있다. 산신각도 역시 현대식이다. 고달사 앞 왼편(이정표 : 고래산 5.2Km)으로 산길이 열린다. 그러나 네 점의 국보급 문화재 중에서 나머지 두 개를 보고 싶다면 아까 지나왔던 보호수 방향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다향루, 고달사의 앞에 지어진 정자(亭子)인데 이름만큼이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멋을 팍팍 풍긴다.

 

 

고달사지에서 가장 뛰어난 석조문화재라는 부도(浮屠)는 보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들어가야 만나게 된다. 들머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른쪽 골짜기를 따라 2~3분쯤 들어가면 원종대사의 부도인 원종대사혜진탑((元宗大師慧眞塔 : 보물 제7)이 눈에 들어온다. 고달사지 석조물 중에서 비교적 온전한 유물(遺物)은 두개의 부도(浮屠)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원종대사혜진탑인데, 이 탑은 고려 초기에 제작된 원종대사의 부도이다. 역시 중대석에 새겨진 구름과 용들의 생동감이 돋보여 아름다운 부도로 꼽힌다. 하지만 50m 위쪽 숲속에 자리한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의 조각 수법보다는 한수 아래란 평이다.

 

 

원종대사혜진탑에서 서쪽을 올려다보면 돌계단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高達寺址 浮屠)’가 자리 잡고 있다. 고달사지의 맨 위쪽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부도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부도 중 가장 크면서도 조각수법이 매우 세련되고 균형이 완벽하게 잡혀있어 제일 아름다운 부도로 평가받는다. 참고로 이 부도 앞에 있던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부도탑을 둘러본 뒤, 부도(浮屠) 뒤의 오른쪽 능선을 따라 500m쯤 올라가면 상방하원 석실묘(上方下圓石室墓 :경기도기념물 제198)’가 손님을 맞는다. 이 석실묘는 상감청자(象嵌靑瓷) 조각 등 발굴과정에서 나타난 유물들로 미루어 볼 때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처럼 잘 쌓아올린 돌무덤이다. 무덤 속의 평면은 원형(圓形)이고, 상부는 방형(方形 : 네모반듯한 모양)이어서 묘제(墓制) 구조의 특성을 살려 그렇게 긴 이름을 붙였다. 한편 이 묘()는 고려 묘제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는 있으나, 조금 전에 지나온 고달사지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정도가 지났다. 물론 유물들을 구경하고, 사진까지 촬영하는 데까지 더해진 시간이다.

 

 

 

석실묘(石室墓)에서 등산로는 이 묘의 뒤편 능선으로 열린다. 그러나 산길은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그 흔적이 희미하고, 심지어는 나뭇가지를 헤쳐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것까지는 없다. 신경을 조금만 쓴다면 큰 어려움 없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올라가면 주능선에 합류하게 된다. 이곳 주능선 삼거리에서 아까 고달사 앞에서 헤어졌던 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 물론 뺑치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했을 경우에도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참고로 뺑치고개는 옛날 이 고장으로 시집 온 새댁이 시집살이가 너무 힘들어 견디지 못하고 이 고개를 넘어 뺑소니를 쳤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일단 주능선에 올라서면 산길은 편해진다. 그래도 전형적인 흙산인데다 능선의 경사(傾斜)까지 완만해서 걷기가 여간 편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르막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산길이 완만(緩慢)하고 길게 올랐다가 짧게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기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따름인 것이다. 능선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삼거리(이정표 : 고래산 3.6Km/ 고달사(석불대좌) 900m/ 고달사지 1.6Km)가 나온다. 오른편은 고달사지로 내려가는 길이니 개의치 말고 곧장 직진하면 된다.

 

 

삼거리를 지나서도 산길의 풍경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오르막길의 경사(傾斜)가 조금 더 가팔라질 따름이다. 그리고 길가에 어른의 키로 한 길이 채 안될 정도의 바위들이 나타나는 정도이다. 그 바위들도 산행에는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는다. 산길이 바위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잘 나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삼거리를 지난 지 20분쯤 되면 억새가 무성한 헬기장에 올라서게 된다. 헬기장에서 산길은 두 갈래(이정표 : 고래산 2.1Km/ 우두산 300m/ 고달사지 3.1Km)로 나뉜다. 가야할 고래산은 맞은편 능선을 따르면 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왼편으로 들어서는 게 우선이다. 우두산이 이곳에서 300m쯤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두산을 둘러본 후에는 당연히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소나무와 잡목(雜木)들로 포위된 우두산 정상에는 머리 부분을 깔끔하게 잘라낸 사각뿔 모양의 정상표지석이 지키고 있다. 정상석은 예쁘다. 그러나 아쉽게도 산의 높이를 잘못 표기해 놓았다. ‘국립지리원에서 만든 지도(地圖)에는 ‘473m’인데 정상석에는 ‘489m'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공든 탑이 무너진 꼴이다. 아무튼 우두산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답답한 편이다. 유일하게 시야(視野)가 열리는 서쪽에 남한강이 나타날 따름이다. 동북쪽의 나뭇가지 사이로 살짝 내다보이는 골프장(양평TPC 골프클럽)은 여름철에는 나뭇잎에 가려 사라져버릴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우두산은 옛날 혜목산(慧目山)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다.

 

 

 

다시 헬기장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고래산으로 가는 북동쪽 능선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그러나 다행이도 길가에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아 크게 힘들이지 않고 내려설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6~7분 정도를 가파르게 내려서면 송전탑(送電塔)이 나오고, 이어서 5~6분 정도를 더 걸으면 국사령고갯마루에 내려서게 된다. 옛날 지평면 대평리와 북내면 상교리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였으나 현재는 국사령 서쪽 산골에 골프장(양평TPC 골프클럽)이 들어서면서 대평리로 가던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오른편 상교리로 연결되는 길만 열려있을 따름이다.

 

 

 

 

국사령에서 다시 산을 오르는 듯한 기분으로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10분 정도 후에는 국사봉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435m봉이다. 이곳에서 상교리로 내려가는 길(이정표 : 고래산 1.5Km/ 고달사지 3.7Km)이 오른편으로 나뉜다. 그러나 이정표에는 상교리로 내려가는 방향은 나타나있지 않으니 참조할 일이다.

 

 

 

국사봉을 지난 산길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산길의 풍경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능선에 가득한 나무들로 인해 조망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다만 왼편의 나뭇가지 사이로 골프장(양평TPC 골프클럽)이 언듯언듯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그렇게 한참을 진행하면 길가에 거대하다는 표현을 써도 괜찮을 듯 싶은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그리고 그 생김새도 썩 괜찮은 편이다. 삼각뿔 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다른 바위 위에 얹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위의 이름도 얹힌바위란다.

 

 

얹힌바위 뒤편의 봉우리를 넘은 후, 다시 맞은편에 보이는 능선을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삼거리(이정표 : 고래산 100m/ 상교리 3Km/ 고달사지 5.1Km)이다. 고래산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100m쯤 더 가야 나온다. 그리고 고달사지로 원점회귀를 하려면 고달산을 둘러보고 난 후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국사봉(435m)에서 이곳까지는 26, 우두산에서는 50분이 걸렸다.

 

 

 

삼거리에서 고래산은 바로 코앞이다. 20평 남짓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고래산 정상에는 양평군산악연맹에서 세운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여주 24/ 1988 재설), 그리고 이정표(고달사지 5.1Km/ 양평 지평/ 양평 지평)와 정상으로 오르는 4개의 코스를 그려놓은 등산안내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참고로 고달산은 '고려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고려장을 하던 산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실제 금동 마을 뒤쪽에 고려장 굴이 있어 옛 고려장 관습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고려장에 얽힌 설화(說話)는 전국 어디에서나 장소를 불문하고 모두 같은 내용이기 때문에 옮기는 것은 생략하겠다.

 

 

 

정상은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남서쪽에는 남한강의 물줄기가 시원스럽고, 강 건너편엔 양자산, 그 오른편에는 추읍산이 날카롭게 솟아있다. 북쪽으로는 대평저수지 뒤로 용문산이 우뚝 솟아오르고,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저 멀리 치악산이 어렴풋이 나타난다. 그리고 남동쪽에는 옥녀봉이 지척이고, 남서쪽에는 방금 지나온 우두산으로 가는 능선이 또렷하다.

 

 

 

하산길은 세 갈래이다. 그중 두 개는 양평군, 대평리로 내려가는 북쪽 길과, 금동마을 방향의 바위가 듬성듬성 섞인 동쪽 길이다. 만일 나머지 하나, 즉 옥녀봉을 거쳐 상교리로 내려가고 싶다면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로 되돌아 나가야 한다. 그런 다음 남쪽을 내려다보면 가파르기 짝이 없는 사면(斜面)으로 난 산길이 보인다. 그 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급경사(急傾斜)이지만 안전로프는 애시 당초 없고, 그렇다고 몸을 의지하기 위해 붙잡을만한 나무조차 마땅히 없기 때문이다. 그저 갈지()자를 그리면서 꿈틀거리고 있는 길을 조심조심 내려서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위험한 길에는 최소한 안전로프라도 매어 놓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안전(安全)이라는 말이 요즘의 대세(大勢)인데, 사고(事故)가 난 뒤에 인재(人災)니 뭐니 하면서 떠들지 말고 미리미리 대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하긴 이제야 겨우 이정표 몇 개 세워놓은 여주시의 능력으로는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도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산길과 싸우며 10분 정도 내려서면 산길은 다시 완만(緩慢)해진다. 그리고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걸으면 안부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안부 근처에서 또 하나의 위험한 곳이 눈에 띈다. 길가에 수직(垂直)으로 뚫린 굴이 아가리를 떡하니 벌리고 있는 것이다. 꽤나 크고 깊은 굴인데도 난간(欄干)은 고사하고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 하나도 눈에 띄지 않으니 한숨부터 나온다. 만일 눈이라도 수북이 쌓일 경우 발을 헛디디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수직굴을 지나면서 산길은 평범해진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능선을 따라 10분쯤 더 걸으면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비록 이정표는 없지만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갈 경우에는 상교리에 이르게 된다. 물론 옥녀봉은 능선을 따라 조금 더 걸어야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바닥에 산악회의 방향표시가 상교리와 옥녀봉 방향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다. 옥녀봉을 오른 후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온 다음에 상교리 방향으로 내려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올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 포인트에서 얘기하도록 하겠다.

 

 

 

삼거리에서 6~7분쯤 더 걸으면 옥녀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옥녀봉 정상은 뭇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름에 비해 보잘 것이 없다. 정상표지석도 보이지 않는데다가 잡목(雜木)들로 인해 시야(視野)까지 딱 막혀있는 것이다. 거기다 우뚝 솟아오른 게 아니라 구릉(丘陵)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능선 상의 한 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옳을 정도이다. 자칫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란 얘기이다. 누군가가 이정표(상교리 1.5Km/ 고래산 1.5Km)의 상단에다 옥녀봉이라고 써놓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그냥 지나쳐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옥녀봉은 요 아래에 있는 고달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고달사에 석공(石工)으로 일하러 온 남편을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죽은 옥녀라는 여인의 애절한 사연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한편 우두산과 옥녀봉의 바위들은 농바위, 장구바위, 거문고줄바위 등의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는 옥녀봉에 잠들어 있는 옥녀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 준 살림도구라고 전해진다.

 

 

옥녀봉 정상에서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로 되돌아가지 않고 능선을 따라 곧장 직진한다. 산악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이유는 사면(斜面)을 따라 난 길보다는 아무래도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 한결 편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내 결정이 옳다는 것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는 이정표가 보증하고 있다. 이정표의 방향표시도 역시 능선을 따라 내려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능선을 따라 난 산길은 의외로 또렷하다. 옥녀봉에서 7분쯤 내려오면 가파른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하지만, 아까 고래산에서 내려올 때에 비하면 애기들 장난의 수준이다. 내리막길이 끝나면 오늘 산행에서 유일한 암릉구간을 만나게 된다. 바위틈에 숨어 있는 벌통을 구경하면서 암릉구간을 내려서면 산속에서 난데없는 논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창녕 조씨문중묘원(門中墓園)의 주차장에 내려서게 된다. 옥녀봉에서 이곳 묘원까지는 2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묘원에서 고달사 주차장으로 나가는 길은 시멘트 포장 임도로 시작된다. 임도를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가면 상교리 마을에 이르게 되고, 고달사지로 가는 길은 마을 앞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계속 임도를 따를 경우에는 88번 지방도를 경유해서 고달사지로 나가게 되는데 한참을 더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은 눈에 띄는 집들마다 텅텅 비어있다시피 빈집투성이이다. 마을을 지나 2영동고속도로공사현장을 지나면 진행방향에 참숯가마 찜질방간판이 보이고, 이어서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더 넘으면 얼마 후에는 고달사지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끝을 맺는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물론 쉬지 않고 걸은 시간이다.

 

 

주차장으로 가다가 왼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논바닥 가운데에 소나무 숲을 뒤집어 쓴 높이가 10m쯤 되는 둔덕이 눈길을 끈다. 마치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한 이 둔덕은 신털이봉이다. 신털이봉은 옛날 고달사 스님들이 외지(外地)를 다녀오던 길에 이곳에 이르러 다리쉼을 했다는 장소다. 그때 이곳에서 짚신을 털어 나오는 흙가루가 쌓여 생긴 봉우리라 신털이봉으로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옛날 고달사가 번창했을 때 스님들이 많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신라 후기인 764(신라 경덕왕 23)에 창건(創建)된 고달사는 신라 선종 구산의 하나인 봉림산파의 선찰(禪刹)로서 고달선원으로도 불렸다. 고려 태조 이후 4대 광종 때까지 왕실의 각별한 보호를 받았고, 원종대사(元宗大師, 868~958)가 주지로 머물면서 나라에서 관장하는 ‘3대 선원(禪院)’의 하나로서 전국 제일의 선찰이 됐다. 그렇지만 언제 폐사가 됐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다만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엔 고달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엔 폐사(廢寺)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이 사이에 무슨 변고를 당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래도 전성기엔 절터 주변 30리가 전부 고달사 땅이었다고 하니 그 권세(權勢)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은장산(銀藏山, 457)

 

산행일 : ‘14. 9. 9()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산행코스 : 대회산리고개임도은장산바위봉갈림길강변상회비들기낭폭포주차장비들기낭폭포(산행시간 : 1시간 50)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은장산이라고 하면 웬만큼 산에 이골이 난 사람들에게 조차도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는 다 이유가 있다. 산이 작은데다가 산세(山勢) 또한 보잘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걸을 경우 1시간30분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산이 작다보니 은장산만 보고 이곳까지 찾아올 사람들은 아마 없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은장산을 찾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명품폭포(名品瀑布)로 소문난 비들기낭폭포때문이다. 은장산의 산자락 아래에 있는 이 폭포를 찾아온 사람들이 남은 자투리 시간을 쪼개어 은장산을 오른다는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대회산리고개(포천군 영북면 대화산리)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의정부 I.C에서 내려와 43번 국도를 타고 철원방면으로 달리면 의정부, 포천을 지나 운천제2교차로(交叉路 : 포천시 영북면 운암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교차로에서 빠져나와 왼편의 78번 지방도로 옮겨 비들기낭폭포 방향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회산리와 대회산리의 경계인 대회산리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등산로는 고갯마루에서 대회산리 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서 열린다. 들머리에 이정표(은장산 1840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들머리에서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임도는 넓기까지 하다. 차량이 지나다녀도 충분할 것 같다. 하긴 군사용(軍事用)으로 개설되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길바닥에 나있는 자동차 바퀴자국이 제법 또렷하다.

 

 

 

 

자칫 무료해지기 쉬운 이런 길에서는 또 다른 볼거리를 찾아봐야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길가에는 볼거리가 풍성하다. 온갖 야생화(野生花)들이 무리지어 피어나 있는 것이다. 쉬엄쉬엄 걸으며 들꽃들에게 눈이라도 맞추다보면 까짓 단조로움 쯤이야 금방 사라져버린다.

 

 

 

 

 

평지나 다름없는 길은 걷기에 무척 편하다. 그러나 구경거리는 일절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육산(肉山=흙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바위가 일절 없다보니 볼만한 풍경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거기다 길가가 숲으로 가로막혀있어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아니 트이기는 한다. 어쩌다 한차례씩 트이기는 하지만 짙은 연무(煙舞)로 인해 시야(視野)가 차단되어버리는 탓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따름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남짓 지나면 첫 번째 이정표(은장산 1480m/ 등산로입구)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15분 조금 넘게 더 걸으면 절골갈림길(이정표 : 은장산 227m/ 절골/ 등산로입구)이다. 왼편이 절골로 내려가는 길이라는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구태여 이곳에서 탈출할 이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골갈림길 조금 못미처에서 보면 오른편 능선으로 난 산길 하나가 보인다. 마침 하산까지의 시간까지 넉넉해서 일단 올라가고 본다. ()타이어로 만든 계단을 밟으며 2~3분쯤 올라가면 널따란 헬기장이다. 한쪽 귀퉁이에 꽂혀있는 팻말을 보아하니 군사용(軍事用)으로 만들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헬기장에서는 동쪽과 남쪽으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비록 연무(煙舞) 때문에 희미하고 나타날 따름이지만 남쪽에 보이는 산은 어쩌면 불무산일 것이다.

 

 

 

 

일단 절골갈림길을 만났다면 거의 다 올라왔다고 보면 된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금방이기 때문이다. 임도를 따라 몇 걸음 옮기다가 오른편에 보이는 폐()타이어로 만든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5분 후에는 은장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만이다.

 

 

 

 

은장산 정상은 꽤나 너른 헬기장을 겸하고 있다. 정상의 주위에 군인들의 참호(塹壕)와 이동로(移動路)가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는 군()의 막사(幕舍)도 이곳에 지어졌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먼저 올라온 일행들이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가가 보니 나무말뚝 하나가 땅바닥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것이 보인다. 꼿꼿이 세워져 있어야할 정상표지목이 웬일인지 뽑힌 채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것이다. ‘세운 뒤에 붙잡은 채로 사진을 찍으면 되지 않을까요?’ 집사람의 기발한 아이디어(idea)이다. 그 덕분에 난 본의 아니게 모델(model)노릇까지 해야만 했다.

 

 

 

헬기장에 서면 사방으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북쪽 오른편에는 한탄강을 낀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그리고 북쪽 건너편엔 수리봉이 보이고, 그 뒤에는 고남산이 고개를 내민다. 수리봉의 왼편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산은 아마 금확산일 것이다. 그 외에도 불무산과 고대산, 지장산 등도 조망되지만 희미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어느 산이 어는 산이지 구분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정상에서의 하산은 남서쪽 능선을 탄다. 비들기낭폭포가 있는 대회산리로 내려가기 위해서이다. 정상과 거의 같은 높이로 보이는 봉우리를 방향으로 삼고 진행하면 된다. 정상에서 짧게 내려섰다가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서면 갑자기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바위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지도(地圖)에 암봉이라고 표기된 지점으로서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암봉의 위는 바위봉우리의 특징대로 뛰어난 조망(眺望)을 보여준다. 남쪽으로 시야(視野)가 뻥 뚫리는 것이다. 봉우리에 서면 불무산이 바로 코앞이고,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보장산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산군(山群)들이 첩첩이 쌓여있지만 아까보다 더욱 짙어진 연무(煙舞) 때문에 어느 산인지는 구분해낼 수는 없다. 이 암봉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두세 명이 둘러앉을 만한 암반(巖盤)들이 여러 곳에 널려있다는 것이다. 잠깐 쉬면서 간식을 먹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암봉에서부터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꽤나 길게 이어지는 것이 아까 산을 오를 때와는 영 딴판이다. 산행들머리였던 대화산리고개의 해발(海拔)이 의외로 높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들머리가 고개였던 것에 비해 날머리는 강가이다 보니 그만큼 더 많이 고도(高度)를 낮추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가파른 내리막길이 다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길가에 안전로프를 길게 매달아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하산길에도 역시 볼거리라곤 딱히 없다. 그저 어쩌다 딱 한번 열리는 시야(視野)를 쫒다보면 비들기낭폭포 관광지(觀光地)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다이다. 그래도 지루하다면 주위를 돌아보면 된다. 야생화 대신에 가끔 나타나는 야생버섯이 볼만하고, 그래도 심심하다면 길가에 널린 도토리라도 주워볼 일이다. 아니 도토리뿐만이 아니다. 하산길 막판에는 산밤나무 군락(群落)도 만나게 되니 눈을 크게 떠보자. 주위가 온통 밤송이에서 금방 튀어나온 알밤들 천지이다. 부지런한 집사람이 금방 엎드린 것 같았는데 한 되박이나 주었다며 홀짝 웃고 있다.

 

 

 

 

산에서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마을이 대회산리(大回山里)이다. 암봉에서 50분이나 걸린 것을 보면 알밤을 줍느라 지체(遲滯)된 시간이 제법 된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회산리는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화전민(火田民)들의 모여 살던 깡촌 중의 깡촌이었다. 산삼(山蔘)을 찾아 전국을 헤매는 심마니들이 단골로 드나들 정도였다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정부의 화전민 소재(疏開) 사업으로 보상(補償)을 받고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고향을 잊지 못하던 주민들은 하나 둘씩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고, 지금 대회산리의 가구수는 60여호에 이른다고 한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돌아올 회()자에 뫼 산()자를 쓰는 마을 이름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비들기낭폭포 주차장

마을 안길을 통과하면 만나게 되는 강변상회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비들기낭폭포라고 쓰인 커다란 빗돌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부터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만 진행하면 된다. 우선 래프팅(Rafting)교육장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비들기낭 캠핑장이 나오고, 이어서 현재 공사가 한창인 공원지구(公園地區)를 통과하면 주차장을 만나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시간은 총 2시간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1시간50분이 걸린 셈이다.

 

 

 

탐방안내소가 있는 주차장에서 바라보면 길가에 정자(亭子) 하나가 보이는데 비들기낭폭포의 들머리는 정자의 바로 옆에서 열린다. 입구에 폭포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으니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비들기낭폭포는 한탄강 8가운데 제6경이며, 비들기 수백 마리가 겨울을 여기에서 지냈다는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 폭포는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근 군부대(軍部隊) 장교들의 휴양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철조망을 둘러쳐서 인근 주민들의 접근을 막았음은 물론이다. 그 후 서서히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지난 2009년과 2011년에 각각 방영(放映)된바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MBC)추노(KBS2)‘의 촬영지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유명한 관광지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선덕여왕에선 천명공주가 독화살을 맞고 여기서 죽었고. ‘추노에선 태하가 부상당한 혜원과 도망치다 여기서 그녀를 치료했다. 그리고 또 하나 2005년에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신돈에선 주인공 신돈이 피나는 수련을 하던 장소였다.

 

 

폭포의 입구는 울창하게 우거진 숲으로 가려져 있다. 그 숲을 헤치고 아래를 향해 길게 놓인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본격적인 투어(tour)가 시작된다. 말끔하게 정비된 계단은 포천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한탄강 경승지(景勝地) 지정 및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일 것이다. 포천시에서 위 계획을 추진하면서 한탄강 8을 지정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현무암 협곡 명승지로 지정된 비들기낭폭포이기 때문이다. 폭포의 하단까지 길게 놓인 계단은 곳곳에다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위에서 내려다본 폭포는 짙은 쪽빛으로 빛나고 있다. 혹시 저 물에 손이라도 담글 경우에는 나 또한 그 빛에 물들어버릴 것 같다. 아니 꼭 손을 담글 필요도 없다. 물가에 다가기만 해도 쪽빛에 동화되어버릴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상념에 젖다보니 내 마음도 어느새 쪽빛으로 물들어버렸다. 올 여름은 이미 다 갔는데도 내 마음의 여름은 이제야 쪽빛으로 물들어 가는 모양이다.

 

 

 

 

비들기낭폭포는 최근(2012) 천연기념물(537)로 지정된바 있다. 30여 만 년 전 유출된 용암이 굳은 뒤 침식돼 이뤄진 주상절리 협곡과 동굴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포천의 심산유곡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이곳에 이르면 갑자기 땅이 푹 꺼진 현무암(玄武岩, basalt)으로 이루어진 주상절리(柱狀節理:pillar-shaped joint)의 벼랑 이래로 떨어진다. 아래로 떨어진 물줄기는 어둑어둑한 곳에서 소()를 이루고 굽이치며 다시 한탄강을 향해 급류를 이뤄 나가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은 그 웅장한 물보라를 볼 수가 없다. 하긴 장마철이라야 폭포의 제 모습을 만날 수 있는데도 찾아온 시기가 가을의 초입이다 보니 바라는 것 자체부터가 언감생심(焉敢生心)일 것이다. 참고로 비들기낭폭포는 평소에는 말라 있다가 비가 온 뒤에야 폭포의 물줄기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특징을 갖고 있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폭포의 전모(全貌)가 한눈에 들어온다. 비둘기 둥지처럼 둥그런 협곡(峽谷) 양편으로 검은색 현무암(玄武岩, Basalt)이 벼랑을 이루고 있는데, 제주도 지삿개에서나 보던 육각형 모양의 주상절리도 눈에 띈다. 그러나 아쉽게도 높이 10m가 넘는 벼량 위에서 힘차게 떨어져 내리고 있어야 할 물줄기를 멈춘 채 허연 배를 드러내놓고 있다. 만일 절벽아래에 있는 동굴의 천장에서 물웅덩이로 떨어지는 물줄기마저 보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폭포로 분류될 수 있었을까를 갖고 골머리를 썩였을 것이 분명하다. 폭포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길은 문이 굳게 잠겨있다. 이곳이 상수원보호구역(上水源保護區域)이기 때문이란다. 드라마에서 나왔던 풍경, 그러니까 폭포의 안쪽에 있는 동굴에서 밖을 향해 카메라의 앵글(angle)을 맞춰보고 싶었으나 참을 수밖에 없다. 나 하나 문()을 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를 본 사람들이 너나없이 따라할 경우에는 문을 잠가 놓은 취지가 자칫 흐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폭포를 돌아보고 되돌아 나오는 길, 다시 한 번 계곡을 내려다보니 아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양쪽이 검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협곡(峽谷)이다. 아까 폭포로 들어서던 길에 온통 폭포에만 포커스(focus)를 맞추는 바람에 지나쳐버렸던 모양이다. 날카로운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진 협곡은 자못 웅장하면서도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산행일 : ‘14. 8. 12()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산행코스 : 샘골1등산로태실범바위2등산로 갈림길450성산남근석410암봉 삼거리병풍바위동막골유원지(산행시간 : 3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정상 일원의 3면이 높이 20m가 넘는 수직절벽(垂直絶壁)들로 이뤄진 산성(山城)으로 에워싸여 있다고 해서 성산(城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는 이 산성에서 당시 연천 현감 이창조가 주민들과 함께 청나라 군사들을 물리쳤다는 기록도 전한다. 성산 자체는 전형적인 흙산인데 비해 정상 근처는 수십 길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기암절벽(奇巖絶壁)을 구경하는 재미는 없지만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특히 아미천()이 성산의 산자락을 휘감아 돌면서 만들어낸 태극문양(太極文樣)은 일품이다. 반대편 산자락에 있는 재인폭포와 연계해서 한번쯤은 올라볼만한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샘골마을(연천군 연천읍 동막1)

3번 국도를 타고 연천방면으로 달리면 의정부, 동두천, 전곡읍을 지나 동막사거리(연천읍 동막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동막1()가 나온다. 이 다리 바로 못미처에 있는 사거리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만일 소형차량을 이용해서 이곳에 왔다면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는 샘골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참고로 동막리는 조선 초부터 요업(窯業)이 번창했다고 해서 '독막(陶幕, 甕幕)'으로 불리던 곳이다. 그러다가 차츰 어휘가 변하여 '동막'으로 굳어져 '동막리(東幕里)'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샘골(泉谷)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새로 들어선 마을이란다.

 

 

 

사거리에서 샘골마을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동막1(샘골) 0.3Km'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4분쯤 걸으면 오른편에 군부대(軍部隊)가 보이고, 성산으로 가려면 군부대 담벼락의 중간쯤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무심코 지나치려는데 동네 주민이 성산 가는 길은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신다. 이런 주민들이 있는 이상 들머리에 비록 이정표가 없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에 동막1리 문화 복지회관을 만나게 된다. 등산로는 복지회관의 조금 못미처에서 오른편으로 나있다. 들어서야 할 방향에 어린이 놀이터가 보이니 참조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놀이터에 시설이용안내판과 함께 성령산성에 대한 안내도도 세워져 있으니 오늘 걷게 될 산행코스를 한번쯤 챙겨보고 출발하면 될 일이다.

 

 

 

등산로는 어린이놀이터 뒤로 나있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잠깐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산길은 금방 완만(緩慢)하게 변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태실(胎室)에 이르게 된다. 태실은 왕실에서 태어난 아기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묻은 곳이다. 태를 담았다는 둥근 돌 항아리(胎缸) 뒤에는 안내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태실이 도굴된 탓에 누구의 태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내용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쯤 지나면 만나게 된다.

 

 

 

태실을 지나서도 산길은 변함없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연천군에서 등산로 정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답니다.’ 등산로 주변에 산을 파헤친 흔적이 많이 보인다고 했더니 산악회의 허고문님께서 친절하게 알려주신다.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등산로 주변의 묘()들을 이장(移葬)시킨 흔적이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등산로 정비에 쏟아 부은 정성들은 산행을 하는 동안 내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나면 처음으로 이정표(정상 3.0Km, 2/3등산로 1.0/4.7Km/ 1등산로 입구 1.2Km)를 만나게 되고, 곧이어 그저 아무렇게나 생겨먹은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범바위이다. 범바위는 부엉이 집이 있다고 해서 원래는 부엉이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부엉이가 벙으로 변했고, 이것이 다시 범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부엉이가 어쩌다보니 졸지에 호랑이()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이 바위를 보고 범의 형상을 찾아서는 안 될 일이다. 이를 알아차렸는지 맑은 연천 21’에서 바위에다 이에 대한 설명판을 매달아 놓았다. 고마운 일이다.

 

 

 

범바위에서 다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개활지(開豁地)가 나오면서 길 오른편 나무에 매달려 있는 팻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맑은 연천21’에서 매달아 놓은 것인데, ‘건쟁이라는 지명에 대해 설명을 해 놓았다. 지금은 비록 군인들의 탄약고(彈藥庫)가 들어앉아 있지만 6.25전까지만 해도 스물 다섯 가구가 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강릉 김씨 집안에서 여덟 명의 판서(判書)를 배출했을 정도로 터가 좋은 곳이라고 부연(敷衍) 설명을 해 놓았다.

 

 

 

건쟁이안내판에서 짧게 내려서면 안부삼거리(이정표 : 정상 2.5Km, 3등산로 4.2Km/ 2등산로 입구 0.5Km/ 1등산로 입구 1.7Km)에 이르게 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제2등산로로 이곳에서 내려가면 풍혈(風穴)이 나온다. 풍혈은 동막골 남쪽에 있는 전체 깊이 6m에 높이가 2.2m인 천연 바위굴로서, 무더운 여름철에는 얼음이 녹지 않을 정도로 찬 공기가 흘러나오고, 반대로 겨울철에는 그 주위에 얼음이 얼지 않고 따뜻한 김이 솟아오르는 기현상을 보이는 곳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 곳에다 잠종(蠶種)을 저장했었다고 전해진다.

 

 

 

갈림길에서 맞은편 능선을 타고 10분 남짓 올라가면 367.6m(이정표 : 정상 2.1Km, 3등산로 3.8Km/ 1/2등산로 2.1Km/0.9Km)이다. 꼭대기에 ‘CP3 전차대대라는 팻말이 꽂혀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군()의 훈련 시 전차대대의 후방지휘소로 사용되는 자리인 모양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지능선 하나가 갈려나가는데, 어쩌면 오봉고개로 가는 능선일 것이다.

 

 

 

367.6m봉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 산길은 가파르게 떨어졌다가 다음 봉우리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에 거북바위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의 길이 비록 희미하지만 의심하지 말고 그냥 들어서보자. 이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칠 경우에는 거북바위를 구경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저 위에 보이는 바위가 거북바위 아닌가요?’ 나 역시 집사람의 지적을 받고 나서야 왼편 산자락을 거슬러 올라가 거북바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만큼 길가에 보이는 팻말이 이정표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거북바위는 의외로 실망스럽다. 어거지로 이름을 갖다 붙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정도로 그 생김새가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요즘의 대세가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이고,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니까 말이다. 367.6m봉에서 거북바위까지는 12분 정도가 걸렸다.

 

 

 

거북바위를 지나면서 산길은 평지와 다름없이 완만(緩慢)해진다. 걷기가 편한 대신 산길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변화를 주지 못한다. 색다른 볼거리도 눈에 띄지 않을뿐더러, 능선에 가득한 나무들 때문에 조망(眺望)까지도 일절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맑은 연천 21 실천협의회에서 길가에 매달아 놓은 안내판이나 읽으면서 묵묵히 걷다보면 갑자기 가파른 오름길이 나타나고 이어서 거대한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서슬 시퍼런 암벽(巖壁)에 놀랐는지 슬그머니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위로 향한다. 벼랑의 위는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450m(이정표 : 정상 0.9Km, 3등산로 2.6Km/ 1/2등산로 입구 3.3Km/2.1Km)이다. 거북바위에서 이곳까지는 22분이 걸렸다.

 

 

 

 

450m봉에서 짧게 내려섰다가 다시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서려다 보면 거대한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이 벼랑을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하다가 왼편으로 작은 샛길 하나를 만들어 놓는다. ‘전망대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길가 나무기둥에 매달려 있으니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전망대가 오늘 산행에서 백미(白眉)로 꼽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잘생긴 노송(老松) 한그루가 누워있는 전망대에 서면 눈앞에 수태극(水太極)이 펼쳐진다. 아미천()이 성산의 산자락을 휘감아 돌면서 만들어낸 태극문양은 말 그대로 현현(玄玄 : 현묘하고 심오함) 그 자체이다. 네 귀퉁이에 건곤감리(乾坤坎離)를 그려 넣은 우리나라 태극기(太極旗) 모양이 황홀하게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물이 만들어낸 태극문양인 것이다.

 

 

 

 

 

전망바위에서부터 비록 어설프기는 하지만 바윗길을 걷게 된다. 바윗길을 따라 6~7분쯤 걸으면 거대한 바위절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절벽의 아래를 따라 오른편으로 길게 이어지다가 절벽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겨우 위로 향한다. 그러나 그 길도 쉽지는 않다. 얼마나 경사(傾斜)가 심하던지 길가에 매어놓은 안전로프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위로 오르기가 힘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로프에 의지해서 위로 오르면 갑자기 평평한 분지(盆地)가 나타난다(이정표 : 정상 0.2Km). 이어서 3~4분 정도 더 걸으면 나타나는 오르막길을 잠깐 치고 오르면 드디어 성산의 정상이다. 전망대에서 20,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 50분이 지났다.

 

 

정상은 아까 올라올 때의 분위기와는 영 딴판이다. 거대한 바위벼랑 아래를 통과하여 정상으로 올라왔는데도, 정상은 의외로 흙으로 이루어진 널따란 분지(盆地)인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이곳을 자연산성(自然山城)으로 활용했던 모양이다. 바위로 둘러싸여 적의 접근이 어려운 대신에, 정상이 널따란 분지로 이루어져 있어 많은 숫자의 군인들이 주둔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정상에는 검은 오석으로 된 정상석과 이정표(1코스 1시간30/ 2코스 1시간5/ 3코스 35/ 4코스 40) 외에 성산에 대한 안내판 하나가 더 세워져 있다.

 

 

성산(城山)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산성(山城)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돌을 쌓아 놓은 흔적이 보인다. 설마 저게 성터? 혹시 성벽(城璧)이 아닐까 해서 가까이 다가가보니 군인들이 구축해 놓은 참호(塹壕)의 일부분이다. 하긴 참호도 일종의 방어선(防禦線)일지니 성터라고 부른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나저나 성령산성(城嶺山城)은 누가 일부러 쌓은 산성이 아니다.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절벽들이 만들어 낸 천연요새(要塞)를 산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북쪽과 남쪽이 절벽지대로 이뤄진 정상에 서면 뛰어난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북으로는 성산의 모산(母山)인 보개산(지장봉) 능선의 삼형제봉이 멀리 고대산과 함께 내다보인다. 그리고 남쪽의 사면(斜面)으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더 뛰어난 조망이 펼쳐진다. 발아래에는 동막골 계곡이 내려다보이고 그 뒤에는 소요산과 마차산, 감악산 등 수많은 경기도의 산군(山群)들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진다.

 

 

하산은 북서릉을 타고 내려간다. 3~4분쯤 내려서면 왼쪽 절벽에 걸쳐있는 남근석(男根石)이 나타난다. 그런데 내 눈에 비치는 남근석은 영 볼품이 없다. ‘왜 이렇게 못생겼죠?’라는 내 농담에 되돌아오는 답변은 한층 더 농도(濃度)가 짙어진다. ‘성능만 좋으면 됐지 생김새가 왜 중요하누?’ 조금 더 농도를 높여볼까도 생각했지만 옆에 있는 집사람에게 눈치가 보여 그냥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아무튼 높이가 10m가 넘을 것 같은 남근석은 생김새는 별로지만 우람한 것을 보면 성능은 뛰어날 것 같다.

 

 

 

남근석에서 능선으로 난 산길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진 410m봉 앞에서 제3등산로와 제4등산로가 나뉜다.(이정표 : 4등산로(자라바위) 1.5Km/ 3등산로 입구(해태의 집) 1.3Km/ 정상 0.4Km, 1/2등산로 4.5Km/3.4Km) 이곳에서는 제4등산로를 택하는 게 바람직하다. 조금이나마 산행시간을 늘릴 수도 있을뿐더러, 능선을 타다보면 쌍둥이바위와 병풍바위 등 볼거리까지도 제공되기 때문이다.

 

 

 

4등산로인 410m봉 부근은 온통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길은 바위를 오르지 않고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며 나있다. 길을 걸으며 자꾸만 두리번거린다. 지도(地圖)에 나와 있는 쌍둥이바위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바위는 눈에 띄지 않았다. 있기는 있었겠지만 이름표가 붙어있지 않은 탓에 그냥 지나쳤음이 분명하다.

 

 

410m에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거대한 바위벼랑이 나타난다. 바로 병풍(屛風)바위이다. 산길은 병풍바위의 왼편 벼랑 아래로 나있다. 물론 바위 위를 걸을 수도 있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선택하면 될 일이다. 바윗길의 초입을 놓쳐버린 우리부부는 벼랑 아래로 난 길을 따랐다. 만일 초입을 발견했더라면 바윗길로 진행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아랫길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벼랑아래를 걸으면서 왜 병풍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를 실제로 느낄 수도 있었고, 벼랑 아래에 뚫려있는 호랑이 굴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충분할 정도의 굴까지 덤으로 구경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린다.

 

 

 

 

산행날머리는 동막골유원지

병풍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급하게 고도(高度)를 떨어뜨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평탄하게 변한다. 원래부터 성산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이 그 이유일 것이고, 하나 더 든다면 병풍바위까지 길게 내려오면서 꽤나 많이 고도를 낮췄던 덕분일 것이다. 산길이 거의 평지에 이르렀다 싶으면 억새가 우거진 임도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군 훈련장을 통과하면 동막골유원지로 들어가는 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왼편으로 200m 정도 걸으면 동막골 오토캠핑장이 나오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5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쉰 시간을 감안한다면 3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산행을 마친 후에는 근처에 있는 재인폭포(才人瀑布)에 들렀다. 재인폭포는 평지가 함몰(陷沒)되면서 만들어진 높이 18.5m의 폭포이다. 주상절리(柱狀節理:pillar-shaped joint)의 검은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자못 웅장하고, 폭포가 주변의 울창한 숲과 잘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아름다움에 반해 철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다고 한다. 재인폭포의 재인(才人)은 재주꾼을 이르는 낱말이다. 그 재인이라는 이름과 관련되어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傳說)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한다. 고을 원님의 탐욕으로 인한 재인(才人) 죽음과 그 아내의 강한 정절이 얽힌 이야기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이 고을 원이 한 재인(才人)의 아내가 절색인 것을 보고, 재인으로 하여금 이 폭포에서 줄을 타라고 시킨 후, 떨어져 죽게 하고 아내를 차지하려 하자, 그녀는 자결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재인의 한()이 서린 폭포라고 해서 재인폭포라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 하나가 더 전해져 내려오나 어차지 재인이 관련된 것은 마찬가지이고, 다만 재인을 살해한 사람이 원님이 아니라 동네사람들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니 더 이상 거론을 않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철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자 연천군에서 폭포 일대를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그중의 하나가 투명전망대이다. 낭떠러지 위에다 전망대를 만들었는데 바닥에 투명유리를 깔아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게 해놓은 것이다. 전망대 입구에 이르면 덧신을 넣어 놓은 함이 보인다. 강화유리에 흠집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는 신발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덧신을 신고 전망대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신발을 신은 채로 무작정 정망대로 들어서고 보는 것이다. 맨발로 걷고 있는 내가 더 이상한 모양이다. 희한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전망대를 빠져나오면 계곡 아래를 향해 길게 놓은 철()계단이 나타난다. 폭포의 높이가 18.5m이니 대략 7층 건물의 높이이다. 당연히 계단은 한 번에 바닥까지 이르지를 못하고 갈지()자로 몸부림을 친 후에야 바닥에 이른다. 계곡에 이르면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과 마주친다. 전망대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으로 폭포가 나타나는 것이다.

 

용조봉(龍鳥峰, 636m)-신선봉(神仙峰, 635m)

 

산행일 : ‘14. 8.2()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산행코스 : 용문사 주차장신점리 조계골입구도성암용조봉신선봉안부용계골신점리(산행시간 : 3시간 40)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용문산과 폭산, 그리고 중원산에 둘러싸여 있는 자그마한 산이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가능한 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이유는 바로 곁에 위치하고 있는 용문산과 중원산의 유명세(有名稅)에 철저하게 눌려버린 탓이다. 그러나 산세(山勢)만 놓고 볼 때에는 위에서 언급한 두 산보다 오히려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앞의 두 산은 밋밋한 육산(肉山)의 특징대로 볼거리가 없는데 비해, 바위산인 용조봉은 뛰어난 암골미(巖骨美)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행시간이 짧다는 게 약점이 될 수 있으나, 이럴 경우에는 중원산과 연결해서 산행을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걱정할 일이 아니다. 거기다 용계골이라는 멋진 계곡까지 끼고 있으니 한번쯤은 꼭 들러볼만한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용문사주차장(용문면 신점리)

6번 국도(國道/ 홍천방향)의 마룡교차로(交叉路, 용문면 마룡리)에서 내려와 341번 지방도를 이용하여 왼편 용문사방향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용문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중앙선 전철(電鐵)을 타고 용문역까지 온 후, 용문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용문사까지 들어오면 된다. 참고로 동서울터미널에서 용문역까지 35분 간격으로 직행버스가 다니고 있다. 이때는 도보로 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30분마다 운행되는 군내버스를 타고 용문사까지 오면 된다.

 

 

 

주차장에서 용문사로 들어가는 진입로로 빠져나오면 가장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용문사관광지라고 쓰인 커다란 입석(立石), 물론 그 뒤에는 경기도의 명산인 용문산이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이 입석을 가운데에 둔 로터리(rotary)의 오른편으로 난 도로(용문산로 636번 길)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로터리에 중원산 가는 길이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중원산과 용조봉(신선봉)의 들머리가 같기 때문이다. 중원산 방향으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태백산 민박이 보인다. 이 민박집 앞에서 오른편으로 들어서야 한다. 옛날에는 곧장 진행해도 중원산 진입로인 조계골길을 만날 수 있었지만 요즘은 펜션(pension)을 짓느라 길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사유지(私有地)라는 이유로 길을 막아버린 광경은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몇 차례 더 눈에 띄었다. 개인 땅이라니 할 말은 없지만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 서운해 할 것까지는 없다.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 塞翁之馬)라고 길을 막아버려 돌아가느라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 대신 멋들어지게 지어진 한옥(韓屋)을 구경하는 행운도 누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7분쯤 되면 도로(조계골길)을 만나게 된다. 물론 애초부터 이 도로를 따라 들어올 수도 있다. 아까 차에서 내렸던 용문사주차장의 끄트머리에서 이 도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조계골 길을 따라 5분쯤 들어가면 길가에 세워진 중원산 등산안내도와 이정표(중원산 2.8Km/ 신점리 0.7Km)를 만나게 된다. ‘중원산 갈림길인데 이곳에서 중원산 방향으로 진행해도 용조봉에 오를 수 있으나 오늘은 왼편으로 진행한다. 도성암쪽으로 난 산길을 이용해서 정상으로 오르기 위해서이다. 이럴 경우 오른편으로 난 길은 당연히 하산 길이 된다.

 

 

중원산 갈림길에서 계속 직진하면 4분쯤 후에 도성사라고 쓰인 입간판이 보인다. 이곳이 용조봉의 들머리이니 놓쳐서는 안 된다. 계속해서 직진하면 조계골이 나오는데, 이곳은 군부대(軍部隊)에서 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탓에 출입이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갈림길 근처를 잘 살펴보면 이정표(신선봉 1.87Km, 중원산 2.95Km, 도일봉 7.25Km)가 보이니 참조하면 된다. 참고로 조계골은 수림(樹林)이 울창하여 많은 산새들이 떼를 지어 서식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오늘 오르려고 하는 용조봉을 찾아가는 방법이다. 자질구레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그저 무조건 이정표에 나타나있는 신선봉을 따르면 된다. 비록 지도(地圖)에는 용조봉만 표기되어 있지만 이곳 양평군에서는 용조봉 옆에 있는 신선봉을 주봉(主峰)으로 삼고 모든 이정표에다 신선봉만 표기해 놓았기 때문이다.

 

 

 

도성사쪽으로 방향을 틀면 곧바로 철다리이다. 철다리를 건너서 조금 더 진행하면 산비탈에 길게 놓인 시멘트계단(이정표 : 신선봉 1.71Km. 중원산 2.79Km, 도일봉 7.09Km/ 등산로 입구 0.16Km)이 나타난다. 신선(神仙)의 머무는 도성사(道成寺)로 오르는 길인 용마로(龍馬路)란다(계단 아래에 있는 공적비 참조). 오르는 것을 승천(昇天)이라고 표기한 것을 보면 도성사에 신선이 머무른다는 것을 유난히도 강조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무튼 계단의 끄트머리에 이르면 도성사라는 조그만 사찰(寺刹)이 하나 나타난다. 현대식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은 절간이라기보다는 일반 여염집에 더 가까운 외형을 지니고 있다. 이 절은 한국 불교 27개 종단 중의 하나인 대한불교 법화종(大韓佛敎 法華宗) 소속의 사찰이라는데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보면 전국에 널려있는 그렇고 그런 절 가운데 하나인 모양이다. 참고로 법화종은 정각(正覺) 혜일(慧日)1946년 창종(創宗)했으며 소의경전(所依經典)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본존(本尊)은 십계만다라(十界曼多羅)이나 불상은 석가모니불을 봉안(奉安)한다.

 

산길은 도성암의 입구 조금 못미처에서 오른편으로 휜다. 나뉘는 지점에 이정표(신선봉 1.65Km/ 중원산 2.72Km. 도일봉 7.03Km/ 등산로 입구 0.22Km)가 세워져 있으니 헷갈릴 염려는 없을 것이다. 도성사에 들렀다가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나온다. 미륵당(彌勒堂) 앞을 통과해서 반대편으로 나와도 산길을 만날 수 있음을 알지만 절간을 굳게 지키고 있는 견공(犬公)의 앞을 지나칠만한 담력이 나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오른편으로 들어서서 20m만 더 가면 중원산 갈림길’(이정표 : 신선봉 1.68Km/ 중원산 2.7Km, 도일봉 7.0Km)이 나온다. 용조봉으로 가는 길은 갈림길에서 도성암의 담(鐵網)을 끼고 왼편으로 돌면 된다. 중원산갈림길을 지나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600m급의 나지막한 산에 불과한데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처음부터 가파르게 시작되는지 모르겠다. 특히 오늘은 무더위가 한참 기승(氣勝)을 부리고 있는 삼복(三伏)기간,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인데도 말이다. 이런 무더위에 가파른 오르막길이라니 그야말로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헉헉거리며 5분쯤 오르니 벤치(bench) 2개가 놓여있는 쉼터가 나타난다.

 

 

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더욱 가팔라진다. 그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던지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으나 큰 도움은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만큼 가파르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길가에 퍼질러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한다. 무더위에 지친 등산객들이다. 하긴 오늘 같은 무더위에 씩씩하게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이 더 이상하다 할 것이다.

 

 

쉼터를 출발한지 7분쯤 지나면 커다란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이내 커다란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아 버린다.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하여 위로 오르면 처음으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구불구불한 길은 조금 전에 우리가 들어왔던 길이고, 그 너머에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뾰쪽한 산봉우리는 추읍산이 분명하다.

 

 

 

첫 번째 전망대를 지나 잠깐 더 오르면 거대한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는다. 두리번거리며 우회로(迂廻路)를 찾고 있는데 앞서가던 집사람이 냉큼 암벽에 들어붙고 본다. 요즘 들어 부쩍 손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집사람이다 보니 이정도의 슬랩(slab)쯤이야 우습게 보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암벽은 겁이 날 정도로 높다란 것에 비해, 올라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경사(傾斜)가 제법 가파르지만 크랙(crack)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바위를 붙잡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암벽 위로 올라서면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왼편에는 용문봉에서 폭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우람하고, 오른편에는 중원산의 능선이 또렷하다. 거기에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아까 첫 번째 전망대에서 보았던 신점리의 풍경과 추읍산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후부터 능선은 가파르면서도 날카로운 암릉이 연속이다. 슬랩(slab)지대나 침니(chimney)지대 등 세미 록클라이밍(semi-rock-climbing)이 계속되는 것이다, 길은 앞을 가로막는 바위들을 요리조리 피해서 잘도 이어진다. 그러다가 피치 못할 경우에는 바위를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다지 위험하다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니 그저 짜릿한 스릴(thrill)을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다. 만일 우중(雨中)이나 적설(積雪) 산행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산행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능선은 작은 바위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면서 이어진다. 용조봉이려니 하고 암봉 위에 올라서면 건너편에 또 하나의 암봉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잘 그린 수묵화(水墨畵)를 보는 듯하다. 하얀색으로 빛나는 바위지대가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선 푸른 노송(老松)들과 잘 어우러지며 몽환적(夢幻的)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스릴과 조망을 한꺼번에 즐기면서 걷다보면 아래로 길게 늘어진 나무계단이 나온다. 반듯하게 지어진 것을 보면 양평군청에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등산로를 정비하고 있는 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다. 계단을 내려섰다가 다시 맞은편 바윗길을 치고 오르면 용조봉이 잘 내다보이는 전위봉이다. 이곳에서의 조망도 뛰어나다. 아니 이곳뿐만이 아니다. 용조봉과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바윗길은 어느 곳 하나 빼어난 전망대(展望臺)가 아닌 곳이 하나도 없다. 머무르는 곳마다 일류의 전망대인 것이다.

 

 

 

바윗길은 아기자기하면서도 날카롭다. 그 날카로운 바위들을 오르내리다 보면 마치 홍천의 팔봉산에 와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긴 팔봉산이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바위의 생김새가 비슷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할 것이다. 바윗길은 오래내리면 오르내릴수록 그 짜릿한 쾌감을 더해만 간다. 한마디로 흥미로운 산이다. 양평에서도 작은 산에 불과하지만 산세(山勢)는 그 어느 산보다 더 알차다. 이렇게 작은 산에 어쩌면 이리도 뛰어난 암릉을 지닐 수가 있을까.

 

 

 

 

 

 

전위봉에서 다시 한 번 안부로 떨어졌다가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이정표(신선봉 0.35Km/ 등산로 입구 1.52Km) 하나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만 더 오르면 드디어 용조봉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50분이 지났다. 2.6Km의 거리를 오르는데 2시간 가까이나 걸렸으니 무더위 때문에 어지간히도 서서히 걸었던 모양이다. 용조봉 정상은 제법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올라올 때 느꼈던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올라오면서 붙잡았던 바위들이 무색할 정도로 정상은 의외로 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이 용조봉 정상임을 알려주는 시설물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누군가가 매직펜(magic pen)으로 용조봉이라고 쓴 자연석을 정상에 있는 돌탑 위에다 세워 놓은 것이 전부이다.

 

 

 

 

용조봉 정상에서 다시 한 번 조망(眺望)이 터진다. 용문봉에서 폭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중원산에서 폭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용조봉을 에워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점심이나 요기(療飢)를 때우려면 이곳이 최적의 장소이다. 장소가 넓은데다가 마침 나무들이 그늘까지 만들어주니 조망을 즐기면서 쉬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용조봉에서 신선봉으로 가는 길도 암릉의 연속이다. 용조봉 정상에서 가파르게, 그러나 짧게 안부로 내려섰다가 험하기 짝이 없는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신선봉 정상이다. 신선봉 정상은 한마디로 인색하다. 두세 명만 둘러앉아도 빈틈이 없이 꽉차버릴 정도로 정상이 비좁다는 얘기이다. ‘! 정상석이 어디로 도망을 쳤나 봐요.’ 집사람의 말대로 정상에는 좌대(座臺)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따름이고, 당연히 있어야할 정상표지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누군가 매직펜(magic pen)으로 신선봉이라고 쓴 자연석(自然石) 하나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을 따름이다. 용조봉에서 신선봉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렸다.

 

 

 

 

신선봉 정상도 뛰어난 조망(眺望)을 자랑한다. 왼편에는 용문봉이 보이고 그 너머에 있는 백운봉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중원산에서 한강기맥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아까 용조봉에서 본 것 보다 훨씬 더 가까이 다가와 있다.

 

 

신선봉에서 내려가는 길도 역시 암릉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날카로움은 아까보다는 많이 누그러졌다. 암릉을 타고 작은 오르내림을 두어 번 하다보면, 12분 정도 후에 오른쪽으로 오솔길 하나를 분가시키고 있는 안부가 나타난다. 그러나 갈림길을 무시하고 곧장 맞은편 산봉우리로 올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곳에서 용계골로 내려설 경우 내리막길이 너무 가파르기 때문에 고생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맞은편 산봉우리에 오르고 나면 왜 조금 전에 지나왔던 안부에서 하산을 하지 말라고 했는지 금방 이해가 가게 될 것이다. 안부로 떨어지는 능선이 가파르면서도 제법 길기 때문이다. 능선으로 난 길이 이럴 정도이니, 만일 산길이 사면(斜面)으로 났을 경우 위험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신선봉 정상에서 내려선지 25분 정도가 지나면 안부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만일 이쯤에서 산행을 끝내고 싶을 경우에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면 된다. 직진할 경우에는 도일봉이나 중원산으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신점리 조계골 입구 2.57Km/ 신선봉 0.41Km)가 좀 이상하다. 조계골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야 하고,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오른편에는 분명히 용계골이 소재하고 있다. 그런데도 오른편 방향에다 조계골 입구라고 표기해 놓은 것이다. 아마 두 계곡이 만나는 합수(合水)지점을 염두에 두었던 모양이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계골 입구라고 표기하는 것 보다는 용계골 입구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지 않았나 싶다. 위치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안부삼거리에서 용계골로 내려가는 길은 많이 가파르다. 그러나 원래 산이 높지 않은 관계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계곡에 내려서게 된다. 10분이 채 안되어 용계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용계골 계곡에는 상류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다. 요즘 일기예보 때마다 중부지방이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는데, 이곳에는 비가 제법 흡족하게 내렸던 모양이다. 용계골을 만나고 나서 2~3분 더 걸으면 중원산 갈림길’(신점리 조계골 2.17Km/ 중원산 2.25Km/ 신선봉 0.81Km, 싸리재 4.45Km, 도일봉 6.02Km)을 만나게 된다.  

 

 

 

 

용계골을 만난 후부터 산길은 용계골을 따라 내려가게 된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다가 어떤 때는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만일 큰 비라도 내릴 경우에는 이 코스의 이용은 불가능 할 것 같다. 계곡은 예상 외로 빼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용계골은 옛날에 용()이 숨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깊은 협곡(峽谷)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히 용이 숨어 살았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은 협곡이 말이다.

 

 

계곡은 한마디로 말해 작다. 그러다보니 물의 양도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작음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결코 작지만은 않다. 크고 작은 바위들을 타고 넘는 물길은 비록 거창하지는 않지만 크고 작은 소()와 담(), 그리고 폭포(瀑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물길을 따라 걷는 하산 길은 지루해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산행날머리는 신점리 용문사주차장

중원산 갈림길에서 20분 조금 못되게 걸어 내려오면 또 다른 중원산 갈림길’(이정표 : 신점리 조계골 1.38Km/ 중원산 1.95Km. 중원폭포 4.83Km/ 신선봉 1.60Km, 중원산 2.85Km, 도일봉 6.81Km)을 만나게 되고, 얼마 후에 산길은 계곡을 벗어나(이정표 : 등산로 입구 0.8Km/ 신선봉 2.3Km, 중원산 2.1Km) 계곡 위로 난 사면(斜面)길을 따라 이어진다. 이어지는 산길은 제법 지루하다. 울창한 잣나무 숲을 만나는 등 가끔 변화를 주기도 하지만 계곡과 같은 볼거리는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 중원산 갈림길에서 30분 조금 못되게 걸어 내려오면 용계골을 가로지르는 철다리를 건너게 되고, 이어서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아침에 지나갔던 조계골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 산행이 종료되는 용문사 주차장은 이곳에서도 10분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오늘 산행시간은 총 5시간10, 물놀이 등을 하며 보낸 휴식시간 1시간30분을 감안할 경우 3시간40분이 걸렸다. 산행거리(6Km)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것은 날씨가 그만큼 무더웠다는 증거일 것이다.

 

각흘산(角屹山, 838.2m)

 

산행일 : ‘14. 7. 25()

소재지 :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과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의 경계

산행코스 : 자등현헬기장각흘산갈림길765(명성산 갈림길)각흘봉(650m)각흘계곡성서학교수양관(산행시간 : 2시간50)

 

함께한 산악회 : 산두레산악회

 

특징 : 각흘산은 수년 전만해도 지형도(地形圖)에는 고유의 이름이 없이 그저 838.2m라고 높이만 표기되던 산봉우리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이 산의 남쪽에 있는 각흘봉(662m)이라는 바위봉우리의 영향을 받아 각흘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 왠지 부자연스럽다. 큰 범위의 산 이름을 지으면서 그 범주에 소속된 산봉우리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붙이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산 전체의 이름을 각흘산으로 삼고, 그 정상에다 고유(固有)의 이름을 하나 더 지어줬더라면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흘산의 산세(山勢)는 빼어나다. 산의 이름을 만들어낸 장본인답게 각흘봉 근처의 암릉은 짜릿한 손맛을 느끼기에 충분하고, 각흘산 정상에서의 조망(眺望)도 어느 산에 비해 빠지지 않는다. 한번 정도가 아니라 두어 번 오른다고 해도 결코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자등현(自等峴 :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와 철원군 서면 자등리의 경계)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퇴계원 I.C에서 내려와 47번 국도 금화방면으로 달리면 일동면과 이동면을 거쳐 광덕고개로 넘어가는 372번 지방도와 연결되는 도평교차로(交叉路 : 이동면 도평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국도를 따라 계속 직진하면 잠시 후에 자등현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자등현은 포천군과 철원군의 경계(境界)일 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겸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자등현 고갯마루에 내리면 길 양편에 세워진 조형물(造形物)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과 철원이 위치한 방향을 나타내는 이정표를 겸한 좌대(座臺) 위에 각기 곰() 한 마리씩을 앉혀놓았다. 하필이면 왜 곰의 조형물일까? 철원군의 상징동물(象徵動物)은 두루미이고, 포천시의 상징동물은 원앙새인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난데없이 곰을 앉혀놓은 것이다. 가끔 철원지역에서 곰을 보았다는 신문기사(新聞記事)를 접할 수 있었는데, 어쩌면 곰이 출몰할 정도로 깊은 산중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자등현에는 주차장 역할을 하는 꽤나 너른 공터가 있다. 산행들머리는 공터의 뒤편 왼쪽모서리에서 열린다. 공터의 도로건너 맞은편으로 진행할 경우 박달봉 능선을 타고 광덕산으로 갈 수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그리고 참고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공터 앞 도로변에 각흘산 832.8m'라고 쓰인 커다란 빗돌(碑石)이 세워져 있으니 정상정복의 인증(認證)이 필요한 사람들은 인증 샷(shot)‘을 먼저 한 다음에 산행을 나서라는 것이다. 정상에 있는 정상표지판은 너무 왜소해서 정상이라는 실감이 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산으로 들어서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기()부터 죽이고 본다. 그러나 이건 공갈이라고 보면 된다. 2~3분이면 능선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지는 산길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반반한 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르막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작은 오르내림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다. 짧은 내림 뒤에 긴 오르막이 거듭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모양새이다.

 

 

산행을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분단의 상징인 이념(理念)의 현장으로 들어서게 된다. 오른편은 온통 잣나무들의 수림(樹林), 그러나 왼편은 참나무들 천지이다. 두 이념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그 경계를 넘어선 놈들은 뭐라고 해야 할까? 까짓것 그냥 스파이(spy) 정도로 쳐두자. 그것도 아니라면 청개구리파라고 제켜놓던지, 어디나 성질 못된 놈들은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산행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나 흘렀을까 잣나무 숲이 끝나는가 싶더니 산길 왼편에 낡은 초소(哨所) 하나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앞에는 무시무시한 경고판(警告板)이 세워져 있다. 이 지역은 포병사격 포격지역(砲擊地域)이란다. 그러니 살고 싶으면 노란색 바탕에 적색문구 경고판 설치지역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경고판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나타난다.

 

 

산행을 시작한지 25분쯤 지나면 왼편으로 갈림길 하나가 보인다. 아마 각흘계곡에서 올라오는 길일 것이다. 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 오르막길이 부담스러웠던지 길가 나무기둥에다 가냘픈 안전로프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다. 그러나 사실 안전로프에 의지할 정도의 가파름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10분 정도를 숨이 턱에 차게 치고 오르면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그러다가 8분쯤 후에는 헬기장을 만나게 된다. 헬기장은 모처럼 한숨 돌리며 쉴 수 있는 공간, 오른편에 산악회 리본이 몇 개 매달려있는 오솔길이 보이나 어디서 오는 길인지는 모르겠다.

 

 

헬기장에서 빠져나오면 또 하나의 경고판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500m앞이 포탄 낙하지역이니 절대 출입을 하지 말란다. 이런 경고판은 200m마다 세워놓은 탓에 앞으로도 두 개를 더 만나야만 능선에 올라설 수 있다.

 

 

헬기장에서 10분 정도를 더 오르면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소나무가 그냥 소나무가 아니다.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고달픈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척박한 풍토에서도 꿋꿋하게 자라 저리도 굳건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우리의 삶도 저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소나무에서 2~3분만 더 오르면 드디어 하늘에 맞닿는 주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서의 첫 만남은 헬기장이다. 오른편의 자등리에서 올라오는 능선이나 왼편의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 할 것 없이 모두 구름 속에 잠겨 그 형태만 희미하게 나타날 따름이다. 비록 비는 그쳤지만 아직 구름까지 걷힌 것은 아닌 탓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능선

 

정상에서 바라본 헬기장 방향 능선, 구름 속에 잠겨 있는 풍경이 몽환적(夢幻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헬기장에서 정상은 금방이다. 속살을 허옇게 드러낸 정상은 라이온스클럽에서 만들어 세운 스테인리스(stainless) 재질(材質)의 정상표지판과 삼각점(三角點, triangulation point)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 어림은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을 오르면서 바위라곤 거의 보지 못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위지대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 바위들이 또한 등산객들에게 환영을 받을 만하다. 바위마다 위가 반반해서 여러 명이 둘러 앉아 쉬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산행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정상어림에는 범상치 않은 생김새의 고사목(枯死木)이 하나 있다. 줄기가 다 잘려나간 등걸이 그 맨몸을 드러내놓고 있는데 그 생김새가 보는 각도나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마치 새의 머리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네발 달린 짐승의 머리를 닮았다. ‘유관순열사를 닮았네요. 집사람의 말마따나 언젠가 본적이 있는 태극기를 들고 달려 나가는 유관순누나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정상의 한쪽 면은 온통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벼랑의 바위와 오래묵은 적송들이 조화를 이루며 멋진 풍광을 빚어낸다. 마치 잘 그린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정상에서는 일망무제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능선이 온통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는 덕분에 시야를 가로막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북쪽에는 철원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날씨라도 좋을 경우에는 북쪽의 복계산과 동쪽의 광덕산, 백운산, 그리고 남서쪽에 위치한 명성산 등 주위의 고산준령(高山峻嶺)들이 거침없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지금은 비가 온 뒤끝, 사위는 구름 속에 잠겨있다. 그렇다고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다며 원망할 처지는 아니다. 요즘은 장마철, 특히 오늘은 산행을 시작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비가 왔었다. 비를 맞지 않고 산행을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할 처지인 것이다.

 

 

정상에서 명성산 방향을 내려다보면 능선이 참으로 이채롭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산불예방을 위한 방화선(防火線)을 만드느라 나무들을 제거한 모양이지만 허연 속살을 드러낸 것이 예사롭지 않은 풍경(風光)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풍경은 살벌함이 만들어낸 산물이란다. 군부대에서 포사격 훈련을 할 때 저 능선이 낙하지점이 된단다. 수도 없이 많은 포탄이 떨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방화선이 구축되었다는 것이다.

 

 

 

 

 

하산은 정상에서 남서쪽 능선으로 잡는다. 정상에서 보았을 때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던 능선을 따르는 것이다. ‘도라지를 캐면 안 될까요?’ 연한 남색으로 꽃을 피운 도라지를 보고 집사람의 살림꾼 기질이 다시 살아난 모양이다. 도라지꽃뿐만이 아니다. 능선의 주변에는 말나리 등 여름에 피는 야생화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꽃구경뿐만이 아니다. 진행방향으로는 잘생긴 나무 한그루가 언젠가 화랑에서 보았던 산수화를 생각나게 만들고 잠시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조금 전에 지나온 각흘산의 암릉이 멋진 풍광을 자아내고 있다. 한마디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는 산행이다.

 

 

 

능선을 걷다가 바라본 왼편 방향, 구름이 걷혀가는 광경이 장관이다.

 

 

정상을 내려선지 15분쯤 되면 안부에서 왼편으로 길 하나가 나뉜다. 곧장 각흘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우리는 곧장 직진하여 맞은편 능선으로 오른다. 여기서 내려갈 경우에는 그러지 않아도 짧은 산행이 더 짧아져 버리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다시 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나무 한그루가 외롭게 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있는 봉우리에서 산길은 급하게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5분 후에는 765m봉 위에 올라서게 된다. 765m봉은 말라비틀어진 고사목(枯死木)이 지키고 있다. 그 황량한 풍경이 안쓰러웠던지 그 앞에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그게 살벌한 경고판인 것이 안 세워 놓은 것만도 못했지만 말이다.

 

 

 

765m봉을 지나자마자 산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곳에서 명성산으로 가는 길과 나뉘는데,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은 온통 명성산으로 가는 주능선에만 덕지덕지 붙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리본(ribbon)이나 길의 또렷함에 신경 쓰지 말고 왼편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타난다. 분명히 지능선으로 내려서는데도 마치 그냥 산비탈을 타고 하산을 하는 느낌인 것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은 잣나무 숲이 나타나면서 끝나고, 이어지는 산길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이 작은 오르내림만 반복하다가, 765m봉을 출발한지 15분 정도 후에는 작은 바위봉우리(지도에 나타나있는 670m봉이 아닌지 모르겠다)에 올라서게 된다. 이 봉우리에서 왼편으로 갈림길 하나가 희미하게 보인다. 아마 각흘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인 모양이다. 암봉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다시 10분 정도 내려서면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폐()건물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군인들이 거주하던 막사(幕舍)가 아니었을까 싶다. 헬기장과 초소 등 부근에 군인들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시설들이 자주 눈에 띄기 때문이다.

 

 

 

 

()건물 지역이 끝나면 능선은 잠시 가파르게 고도(高度)를 낮추다가 맞은편에 바위봉우리 하나를 빚어놓는다. 바로 각흘봉이다.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을 피해 왼편으로 돌면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오른편이 각흘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높이가 10m정도 되는 암벽(巖壁)이 나타난다. 안전로프가 매달려 있으나 경사(傾斜)가 수직(垂直)에 가깝기 때문에 오르는 게 만만치 않은 벼랑이다. 폐건물지역에서 15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안전로프를 잡고 대롱거리며 위로 오르면 눈이 호사(豪奢)를 누린다. 왜 이 봉우리의 이름이 산 전체의 이름으로 둔갑을 했는지 수긍이 가게 되는 것이다. 시야(視野)가 거칠 것이 터지면서 주변의 경관(景觀)이 한눈에 들어온다. 광덕산과 백운산, 그리고 이동면 일대의 풍경이 장관이다. 바위봉우리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로 각흘봉은 소의 뿔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각흘봉에서 내려와 다시 하산을 계속한다. 이어지는 산길은 온통 바윗길, 곳곳에 안전로프가 매달려있으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그러나 반대로 짜릿한 스릴(thrill)을 맘껏 즐길 수 있으니 까짓 위험 정도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뛰어난 구간일 것이다. 로프에 매달려 대동거리거나 엉덩이로 바닥을 쓸며 바위를 내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기만 하다. 짜릿한 스릴이 무섭다는 생각을 떨쳐버린 탓일 것이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바윗길은 15분 정도 이어진다. 다시 흙길로 변한 산길을 따라 15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산길이 갑자기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능선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길 찾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능선으로는 길이 나있지 않기 때문에 왼편으로 내려서는 길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15분 정도 내려서면 각흘계곡에 이르게 된다. 아마 각흘계곡의 하류쯤이지 않나 싶다. 내려선 곳은 길이 20m정도 되는 와폭(臥瀑), 엊그제 내린 비 덕분인지 수량이 제법 풍부하다. 줄기차게 떨어지는 하얀 포말에 취해 잠시 머무르다가 이내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산길은 이곳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두어 번 계곡을 가로질러야 하는 곳이 나타나기 때문에 여름철 장마 때에는 통행이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각흘계곡은 한마디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비록 15분 정도밖에 걷지 않았지만,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계곡이 보여줄 수 있는 갖가지의 풍경을 다 보여주는 것이다. 폭포(瀑布)와 소(), () 등이 곳곳에 널려있어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은 그것들의 규모가 좀 왜소(矮小)하다는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성서대학교 수양관

빼어난 계곡의 풍광을 카메라에 담으며 걷다보면 검은 가림막으로 길을 막고 놓은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는 약초(藥草)를 재배하는 사유지(私有地)이니 왼편으로 돌아가라는 현수막(懸垂幕)이 걸려있다. 계속해서 계곡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약초재배지를 무작정 들어설 수는 없다. 잘못하면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계곡과의 이별도 준비할 겸 옷을 입은 채로 물속으로 뛰어들고 본다. 비록 물이 차갑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주어진 하산시간에 맞춰 모처럼 망중한(忙中閑)을 즐겨본다. 땀을 씻고 길을 나서면 금방 산행날머리에 이르게 된다. 계곡의 왼편 잣나무 숲으로 오르면 2~3분 후에는 산행날머리인 성서대학교 수양관 앞 47번 국도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산행시간은 총 3시간30분이 걸렸다. 목욕 등 중간에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50분 정도를 걸은 셈이다.

 

 

연인산(戀人山, 1,068.2m)

 

산행일 : ‘14. 6. 4()

소재지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북면, 하면의 경계

산행코스 : 마일리 국수당우정고개우정능선우정봉연인산아재비고개큰드래골귀목마을(산행시간 : 4시간40 )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연인산은 한마디로 편한 산이다. 부드러운 황톳길이 계속되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에다 건강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인 잣나무까지 가득하다. 그러니 등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웰빙(well-being)이나 힐링 (Healing)을 위한 산책 정도로 생각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산 이름 그대로 연인(戀人)들이 찾기 좋은 산이다. 그러나 대신에 눈요깃거리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눈요깃거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아재비고개로 하산 코스를 정할 것을 권하고 싶다. 연인산에서 유일하게 바윗길이 섞인 능선이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마일리 국수당

46번 경춘국도(京春國道/ 춘천방향)를 타고가다 하천 I.C(청평면 하천리)에서 37번 국도로 옮긴 후, 조종천을 끼고 포천방향으로 달리다보면 가평군 상면소재지(面所在地)인 현리에 이르게 된다. 현리에서 마일천을 끼고 이어지는 군도(郡道 : 연인산로)를 따라 들어가면 연인산수련원을 거쳐 산행들머리인 마일리 (**)국수당에 이르게 된다.

(**)국수당, 국사당(國師堂)이라고도 불리며 마을을 수호하는 동신(洞神)을 모시는 마을의 제당(祭堂)이다. 대체로 마을의 뒤쪽 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데, 때로는 무당(巫堂)들의 기도처로 이용되기도 한다. 옛날 이곳에 국가의 안녕(安寧)을 비는 제사를 올리던 성황당(城隍堂_이 있었다고 해서 국수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마일리 국수당(國師堂)의 주차장에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등산안내도이다. 그다지 넓지 않은 주차장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주차장에서 자동차가 들어왔던 도로의 맞은편에 보이는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서며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연인산 정상 6.0km/ 현리)가 세워져 있으니 길을 혼동할 염려는 없을 것이다.

 

 

 

 

국수당을 출발해서 7분 남짓 걸으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 길은 사유지(私有地)로 들어가는 진입로인 듯 철제문(鐵製門)으로 굳게 닫혀있는데, 오른편도 역시 차단기(遮斷機)로 길을 막았다. 다만 차량 진입금지라고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다행이 오른편 길은 사람의 통행이 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차단기를 지나면서 길은 계곡으로 접어든다. 이어서 임도를 따라 12분쯤 오르다가 임도를 벗어나 왼편 오솔길로 접어든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 올라가도 되겠지만 지름길을 놔두고 구태여 돌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솔길은 10분쯤 지나면서 아까 헤어졌던 임도와 다시 만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해발 622m인 우정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우정고개까지 올라오는 산길은 거칠지만 경사(傾斜)가 가파르지 않기 때문에 오르는데 그다지 부담스럽지는 않은 편이다. 마일리 버스 종점에서 우정고개까지는 37분이 걸렸다.

 

 

 

 

우정고개는 원래는 전패고개라고 불리던 가평읍 승안리와 북면 백둔리 사람들이 하면(下面) 마일리를 넘나들 때 이용하던 고갯마루이다. 전패라는 지명(地名)은 후고구려의 궁예가 패전(敗戰) 후 얼마동안 이곳에 군대(軍隊)를 주둔시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다가 1999년 가평군 지명위원회에서 전패라는 지명이 혐오스러운 느낌을 준다는 이유로, 전패봉을 우정봉으로 바꾸면서 이곳 전패고개도 우정고개로 바꾸었다고 한다. 우정고개에서 길은 네 갈래(매봉들머리의 이정표 : 매봉 2.3Km, 칼봉 4.6Km/ 연인산 정상(우정능선)/ 마일리 종점/ 탐방로 아님/ 탐방로 아님)로 나뉜다. 이정표의 화살표는 연인산 정상(우정능선)과 매봉 그리고 마일리만 가리키고 있고 나머지 두 개의 임도는 지정된 등산로가 아니란다. 우정능선 들머리에 또 하나의 이정표(연인산 정상 4.3Km/ 매봉 2.3Km/ 국수당 1.7Km/ 탐방로 아님)도 역시 매봉과 우정능선을 빼 놓고 나머지 길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아마 뭔가를 보호하려는 모양이다. 연인산 정상으로 향하는 산길은 왼편으로 난 방화선을 따라 이어진다  

 

 

 

우정능선으로 들어선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연인산 특유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보드라우면서도 널따란 흙길이 웰빙(well-being)과 힐링(Healing)의 분위기를 물씬 풍겨주는 것이다. 그게 다 산불방화선(防火線)을 만들기 위해 능선의 나무를 베어낸 데서 기인한다. 그 덕분에 오붓한 숲길이 생긴 것이다. 산길이 비록 넓지만 계속해서 그늘이 이어진다. 좌우에 늘어선 키 큰 신갈나무와 잣나무들이 번갈아 가면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숲 가운데로 난 여유로운 흙길은 영화(映畵)의 한 장면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오르내림이 많은 산줄기지만 그늘에다 발 디딤이 푹신한 길이라서 걷는데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다. 우정고개에서 15분쯤 걸으면 이정표(우정봉 1.7Km/ 국수당 2.1Km/ 탐방로 아님)를 만나게 된다. 왼편 마일리 방향으로 희미하게나마 길의 흔적이 나타나는데도 탐방로가 아니라며 길을 막아 놓았다.

 

 

방화선(防火線)을 따라가다 보면 길의 양쪽에 의외로 많은 단풍나무들이 보인다. 비록 조림(造林)을 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가을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해 줄 것 같다. 피톤치드(phytoncide)에 볼거리까지 갖춘 멋진 힐링(Healing)길이 될 것이 분명하다.

 

 

 

널따랗게 뚫린 방화선을 사이에 두고 좌우(左右)가 보여주는 풍경은 사뭇 다르다. 오른편은 순수한 잣나무 숲인데 반해 왼편은 오로지 참나무뿐인 것이다. 나도 몰래 고개가 오른편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일 것이다. 각종 감염 질환이나 아토피(atopic) 질환 등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바로 잣나무이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그 피톤치드는 면역력(免疫力)을 좋게 해줄 뿐 아니라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니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정표가 있는 지점에서 10분쯤 더 걸으면 헬기장(구호지점 표시목 : 연인산 정상 3.2Km/ 마일리 국수당 3.0Km)이 나온다.

 

 

꽤 오랫동안 이어지던 잣나무 숲이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렸다. 대신 참나무들이 소리 소문 없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배낭의 무게가 갈수록 무겁게 느껴져 온다. 아마 배낭 속에 든 막걸리가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영양가로 넘친다는 가평의 잣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잣은 막걸리 안주로 제격이니까. 그러나 그 막걸리는 연인산 정상을 지나고서야 마실 수 있었다. 잣나무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망치려고 하느냐는 집사람의 지청구 때문이었다. 헬기장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또 다른 헬기장(이정표 : 우정봉 0.5Km/ 국수당 3.3Km/ 탐방로 아님)을 만나게 되는데 이번에는 오른편 길을 막아 놓았다.

 

 

두 번째 헬기장에서 5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바윗길이 선을 뵌다. 새로운 기분으로 비탈길을 치고 오르면 10분 후에는 우정봉에 올라서게 된다. 그러나 막상 우정봉에 올라보면 봉우리다운 맛은 없다. 아마 연인산으로 가는 능선이 거의 평지(平地)와 다름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표지석이 없는 것도 한 몫을 했음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거기다 이정표(연인산(우정봉) 2.3Km/ 국수당 3.8Km)까지도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연인산 정상과 우정봉을 같은 봉우리로 표기(表記)해 놓고 거기까지 가려면 2.3Km를 더 가라는 것이다. 명색이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지정된 도립공원(道立公園)’으로 알고 있는데 비록 하찮은 시설물일지라도 조금 더 신경을 써서 만들면 어떨까 싶다. 만일 말뚝 위에서 위태롭게 앉아 있는(바람만 세게 불어도 떨어진다) ‘정상판만 아니었다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우정능선은 오르내림의 연속이다. 완만(緩慢)하지만 긴 오름과 짧은 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것이다. 가끔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거리가 짧아서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 거리는 만만치 않다. 이제는 다 왔는가하면 저만큼 앞에 또 하나의 오름이 나타나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 끝나랴 싶게 오르내림은 계속된다. 지루할 정도로 잦은 오르내림을 35분 정도를 반복한 뒤에야 연인산에서 가장 넓은 전망터라는 1,048m봉 헬기장에 올라서게 된다. 물론 헬기장 조금 못미처에서 의미 없는 갈림길(이정표 : 연인산 정상 9.9Km/ 우정봉 1.4Km, 마일리 국수당 5.2Km/ 탐방로 아님)도 하나 지났다. 헬기장에서 모처럼 시야(視野)가 트인다. 진행방향에 연인산 정상이 보이고, 그 왼편에는 명지산이 거칠게 솟아 있다. 명지산을 좌우에 끼고 있는 산들은 아마 국망봉과 화악산일 것이다.

 

 

 

 

 

 

헬기장에서 잠깐 조망을 즐긴 후에 연인산 정상으로 향한다. 정상으로 가다보면 오른편에 오솔길 하나가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비교적 완만(緩慢)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아홉마지기라고 불리는 너른 터로 내려가는 길이다. ‘아홉마지기 터에는 무인산장 외에도 작은 샘이 하나 있지만 내려가는 것은 생략하고 곧바로 정상으로 향한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오르다보니 준비해 온 물을 아직 뚜껑도 열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홉마지기'의 씨앗을 아홉 말이나 뿌렸을 정도로 터가 완만(緩慢)하면서도 넓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 이름에 얽힌 오래된 얘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숯을 굽는 청년과 참판댁의 여종 사이에 얽힌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종과 결혼을 하게 해달라는 청년에게 참판은 조 100석을 가져오면 결혼 시켜주겠다고 했고, 이에 청년은 연인산 정상 부근의 분지에다 아홉 마지기의 밭을 일궈 조 100석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러나 재물에 욕심이 난 참판은 그를 역적의 아들로 몰아 쫓기게 만들어버린 모양이다. 그 결과 실의에 찬 청년은 아홉 마지기 밭에 불을 지른 후 불에 뛰어들어 죽어버렸고, 처녀도 따라 죽었다고 한다. 사랑과 소망이 이뤄진다는 연인산의 의미와는 달리 아이러니(irony)하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던 한 맺힌 사랑의 이야기가 연인산에 전해지는 것이다.

 

 

 

아홉마지기갈림길에서 키 작은 주목들이 듬성듬성 들어선 능선을 치고 오르면 드디어 연인산 정상이다. 5~6평 남짓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 올라서면 윗돌이 하트()모양으로 생긴 독특한 정상표지석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랫돌에는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적혀 있다. 숯 굽는 청년과 종살이 하던 처녀의 이루어지지 못한 한이 서린 산에다 대고 이곳을 찾는 연인(戀人)들의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진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패러독스(paradox)인가. 정상은 좀 어수선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비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시설물들이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상석과 삼각점(일동 308/ 2006 재설), 방위석(方位石), 그리고 이정표(명지산, 도대리/ 연인능선, 장수봉 2.3Km, 백둔리 4.8Km/ 우정표 2.3Km, 국수당 6.0Km) 등의 시설들이 막상 사람들의 진입을 막고 있는 꼴인 것이다. 연인산도 우정봉과 같이 가평군에서 1999년에 새로 지은 이름이다. 연인산은 본래 국토지리정보원(國土地理情報院)’ 발행 지형도(地形圖)에는 이름도 없이 그저 높이(1,068.2m)만 표기되어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던 것을 가평군에서 공모(公募)를 통해 바꾼 이름이 연인산인 것이다. 참고로 인근 사람들은 연인산의 정상을 우목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조선조 문헌(文獻)에는 월출봉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상판리에서 볼 때 이 산 위로 달이 뜬다고 해서 그리 불렀단다. 어쨌든 가평군에서 으로 바꾼 일은 잘한 것 같다. ‘연인산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바뀐 후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을 보면 말이다. 개명(改名)을 통해 스타(star)가 된 셈이다. 산행들머리에서 연인산 정상까지는 2시간20분이 걸렸다.

 

 

 

정상은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산답게 시야(視野)가 시원스럽게 탁 트인다. 또 사방으로 뻗어 나간 산줄기를 따라 켜켜이 늘어선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북쪽에는 검은 덩치로 거칠게 솟아오른 명지산이 또렷하고, 남쪽에는 올망졸망한 산군(山群)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이곳 연인산보다 더 높은 산들이 없는 덕분에 더 멀리까지 시야가 트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왼편에는 운악산과 원통산 청계산 등이 보인다. 경기도 알프스라고 일컬어지는 가평군 북면 일대에 명산들이 마치 군웅할거(群雄割據)라도 하고 있는 듯하다.

 

 

 

연인산 정상에서 머무는 것을 포기하고 곧바로 하산 길을 서두른다. 요기라도 하고 싶지만 비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앉을 경우, 혹시라도 뒤에 오는 사람들이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 불편을 줄까봐서이다. 그런 내 마음이 가상했던지 몇 발자국 걷지 않아 두셋이 앉기에 안성맞춤인 바위가 나타난다. 마침 맞게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오니 잠깐 쉬면서 가져온 얼음막걸리 한 잔 마시기에는 이보다 더 나은 장소가 없을 것 같다.

 

 

바위에서 내려서면서 본격적으로 하산이 시작된다. 내 개인적으로는 연인산 정상에서 아재비고개까지 이어지는 능선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가 아닐까 싶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길은 걷기에 부담이 없고, 행여 밋밋한 산길이 부담스러울세라 심심찮게 바윗길까지 선을 보이는 것이다. 그것도 보통의 바위가 아니고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할 정도로 생김새도 괜찮은 편이다.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한지 15분쯤 지나면 길 양편에 두 개의 바위가 서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지도에 문바위로 표기된 지점이 아닌가 싶다. 옛말에 자리를 보아서 앉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바위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바위가 드문 곳에 자리 잡은 덕분에 문바위라는 이름까지 얻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무심하게 지나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보잘 것이 없는 생김새이기 때문이다.

 

 

 

 

산길은 대부분 흙길, 심심찮게 나타나는 바윗길도 흙길과 마찬가지이다. 직접 바위의 위로 올라갈 필요가 없이 바위를 피해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그저 주변에 펼쳐지는 풍경을 즐기면서 걷기만 하면 된다. 당연히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도 없다. 주어진 시간까지 넉넉하기 때문이다. 여유가 생긴 집사람이 능선을 헤집기 시작한다. 산나물이라도 있을까봐서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연인산에는 산나물이 많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상에 오른 무침 한 접시가 다였으니 말이다.

 

 

 

다투어 피어난 잎들이 더 이상 돋을 수 없을 때, 숲은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짙어간다. 어느 산이건 아름다움이 가장 절정에 달할 때이다. 때 아닌 고온(高溫)현상에 화르르 피었다 빠르게 져버린 봄꽃들이 지나간 자리를 연초록의 잎새들이 메꾸는가 싶더니 어느새 진초록의 녹음(綠陰)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산길은 바윗길이 아닌 곳에서도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원시림(原始林)에서나 볼 수 있는 괴목이 바로 그것이다. 아까 연인산으로 올라오는 구간들에 비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탓에 아직까지 원시림 형태로 유지될 수 있었을 테고, 그 덕분에 저렇게 괴상하게 생긴 나무들을 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구경거리가 많은 능선길을 즐기다시피 걷다보면 어느덧 아재비고개에 내려서게 된다. 연인산 정상을 출발한지 1시간이 조금 더 지난 지점이다. 아재비고개는 옛날 북면 백둔리 양짓말과 하면 상판리 귀목마을 주민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였으나 지금은 등산객들이나 찾는 한적(閑寂)한 능선의 한 지점으로 남아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한적함이 미안했던지 이정표(명지산 3.3km/ 백둔리 2.3Km/ 연인산 3.3Km)와 식탁을 갖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식탁에 앉아 잠시 쉬다보면 웬 낯선 시설물 하나가 눈에 띈다. ‘강우량 측정기(降雨量 測程器)’가 바로 그것인데 꽤 오랜 세월동안 등산을 해온 나이지만 산에서 저런 시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낯설게 보였던 모양이다. 오늘 우리가 정한 하산지점인 귀목마을로 내려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 막상 이정표에는 귀목마을이 나와 있지 않아 혼란스럽다. 다행히 내려가는 방향을 미리 알았기에 왼편으로 방향을 잡는데 철판으로 만든 이정표(하면 상판리 귀목 4,000m/ 북면 백둔리 양짓말 3,000m)가 목책(木柵)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아재비고개에서 귀목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아까 지나왔던 능선보다도 더 원시림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산길은 또렷한 편이라 내려가는데 어려움은 없다. 마침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니 가끔 나타나는 괴목에 눈길을 주면서 걷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숲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도취해보면 어떨까. 숲이 품고 있는 다양함은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우리는 숲이 주는 다양한 아름다움에 깊은 위로를 받고자 산으로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호사(豪奢)스런 산행은 얼마 가지 않아 끝을 맺고 만다. 아재비고개를 출발한지 13분쯤 되면 물기 한 점 없는 계곡을 만나게 되면서 힘든 산행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계곡이 위험할 정도로 험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덜길이 나타날 따름이다. 그러나 그 너덜길을 내려딛는 일은 힘들기 짝이 없다. 거기다 길기까지 하다. 무려 30분 동안이나 너덜길과의 싸움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연인산은 사랑과 소망을 이루어 주는 산이라고 알려진 것 외에도 깨기산이라는 별칭(別稱)도 갖고 있다. 아무래도 귀목마을로 내려가는 이 하산 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낭만적인 이름만 믿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찾아왔던 연인들이 하산을 하다 길고 긴 너덜길에서 힘들고 지루함에 질리게 되면 말다툼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다가 헤어지는 경우도 간혹 생길 게 뻔하기 때문이다. 사실 귀목마을로 내려가는 계곡길을 제외하면 연인산에서 어려운 코스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더위가 한창 무르익어 가는데도, 길가에는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망초꽃이 만개(滿開)해 있다.

 

 

산행날머리는 귀목마을

길고긴 너덜길과의 싸움이 끝나면 임도(林道)가 나타나면서 또 다시 널널한 산행으로 변한다. 널찍한 흙길은 부드럽기 그지없고, 거기다 짙은 소나무 향까지 더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솔향에 취해 15분쯤 걷다보면 왼편에 귀목마을로 내려가는 지름길이 나타난다. 지름길로 접어들어 5분 조금 넘게 내려서면 귀목마을이 나오고(이정표 : 귀목고개 2.3Km/ 아재비고개 1.6Km), 이어서 조금만 더 걸으면 '입산통제소건물이 나타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전체 산행시간은 4시간40분이 걸렸다. 중간에 막걸리를 마시느라 5분 정도 쉰 것을 감안하더라도 순수하게 걷는데 소요된 시간일 것이다. 참고로 날머리인 귀목마을에는 드레골유원지가 있을 정도로 계곡이 좋으니 산행 후에 몸을 씻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마감산(馬甘山, 388m)-보금산(寶金山, 364m)

 

산행일 : ‘14. 5. 24()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과 북내면의 경계

산행코스 : 주차장능선보금산금마교마감산마귀할멈바위쉼터갈림길주차장(산행시간 : 2시간35)

 

함께한 산악회 : 집사람과 함께

 

특징 : 보금산과 마감산은 400m에도 못 미칠 정도로 나지막하지만, 온통 들녘뿐인 여주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때문에 여주사람들에게는 근교산행지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고 한다. 산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던 모양이다. 그 결과는 산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만나는 사람 모두 더 없이 밝은 표정이었고, 웃음 띤 얼굴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네 왔기 때문이다. 하여튼 산은 두어 곳을 제외하고는 급한 가풀막이 없기 때문에 산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산책하는 느낌이 더 강할 정도이다. 노송(老松)들이 우거진 널따란 길, 거기다 길가 곳곳에 평상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연인들이나 가족들에게 권하고 싶은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학생야영장 못미처의 도로변주차장(여주시 강천면 결은리 산81-1 : 마감로 477)

중부내륙고속도로 서여주 I.C에서 내려와 42번 구()국도를 따라 원주방향으로 10Km쯤 달리면 목아박물관 입구가 나온다. 이곳에서 400~500m쯤 더 나아가면 대순진리회 본부교회로 들어가는 길이 갈라지는 사거리가 나오는데, 대순진리회의 맞은편에 경기도학생 여주야영장 5Km’ 푯말이 보인다. 푯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야영장 주차장에 닿게 된다. 산행들머리는 야영장으로 들어가기 조금 전에 있는 도로변의 주차장이다.

 

 

 

주차장 앞 도로를 건너 맞은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몇 개 매달려 있으니 별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컨테이너(container) 옆 이정표(마감산 삼림욕장 등산로)가 세워진 지점에서 정확히 반대편이라고 생각하면 더 쉬울 것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산길은 평탄하게 시작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능선(支稜線)으로 들어붙으면서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하나 오르기에 힘겨울 정도는 아니다. 길바닥은 번들번들하게 윤이 나고, 또 어떤 곳은 소나무뿌리가 온통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이리라.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곳의 토질(土質)이 마사토라서 소나무들이 뿌리를 깊게 박지 못하는 탓도 있었을 것이다.

 

 

 

나무이름표학생야영장이 있는 산이어선지 산행 내내 예쁘장하게 생긴 나무이름표들을 볼 수 있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 아래로 난 긴 통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어디로 가도 보금산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지만 왼편으로 진행한다. 조금이라도 산행시간을 더 늘려보기 위해서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얼마 안 있어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들머리에서 25분이 걸렸다.

 

 

 

능선에 올라서면 등산로의 오른편에 제법 거창한 암릉이 보인다. 등산로를 벗어난 집사람이 냉큼 바위 위로 오르고 본다. 요즘 부쩍 손맛을 즐기기 시작하는 집사람으로서는 이런 호기(好機)를 결코 놓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위 위는 평지, 스릴은 바위 위로 올라설 때 느끼는 것 한번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고 나면 길은 순해진다. 넓고 반반한 길이 오르내림이 거의 없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능선에 올라선지 7분쯤 후에는 보금산의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까지 오르는데 32분이나 걸린 것을 보면 꽤나 천천히 올라왔던 모양이다.

 

 

 

널따란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보금산 정상은 텅 비어있다. 그 텅 빔이 못내 서운했던지 한쪽 귀퉁이에 말뚝모양으로 생긴 자그마한 정상표지석을 하나 세워 놓았다. 물론 이정표(마감산 1.3Km/ 학생야영장 0.8Km)도 세워 놓았다. 이정표뿐만 아니라 평상까지 만들어 놓았지만 모두 숲속에다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평상은 점심상 차리기에 안성맞춤이나 그냥 발길을 돌리고 만다. 지금은 점심이 아니라 간식을 먹기에도 너무 이른 시간인 것이다. 정상은 잡목(雜木)들로 인해 일절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다.

 

 

 

 

 

보금산에서 마감산으로 가는 길은 거의 오르내림이 없는 순전한 내리막길 이다. 거기다 둘이서 팔짱을 끼고 걸어도 좋을 만큼 길까지 넓으니 이런 길에서는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오랜만에 느림보의 미학을 즐겨볼 일이다. 마침 능선은 온통 늙은 소나무들 천지이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넘쳐날 정도로 내품는다는 소나무들이 꽉 차있는 것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실바람에선 짙은 솔향이 배어 나오는데, 그 탓인지 저절로 몸과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어 가는 느낌이다.

 

 

마감산으로 가는 길은 두 개로 보면 된다. 사면(斜面)을 따라 난 널따란 주 등산로와 또 하나는 능선의 정 중앙으로 난 오솔길이니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선택하면 될 일이다. 물론 우리부부는 오솔길을 따른다. 그것은 거친 길을 좋아하는 평소의 습관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행여 산나물이라도 보일까 하는 집사람의 바람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산행 내내 산나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두 길은 어느 곳으로 가던지 간에 그 결과는 같다. 중간에 합쳐졌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12분쯤 내려오면 멋진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된다. 오늘 산행에서 만나게 되는 포토 존(Photo zone)의 하나이다. 이곳 지자체에서도 이를 알아차린 듯 소나무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해서 사진 촬영이 가능하도록 해놓았다. 소나무 주위에 울타리를 쳐 보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하나 아쉬운 것은 소나무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 고고한 자태가, 이름 하나쯤 가지고 있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데도 말이다. 참고로 얼마 전에 찾았던 전남 고흥의 마복산에서 본 소나무는 마복송(馬伏松)’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산행을 하다보면 간혹 맞은편에서 오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오늘도 10명 가까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서로 마주치면서 빚어내는 풍경은 다른 산들과는 사뭇 다르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안녕하세요?’라며 먼저 인사를 건네 오는 것이다. 사실 나도 산행을 하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에 먼저 인사를 하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나보다 먼저 인사를 건네 오는 있다. 그것도 환한 웃음을 띠면서 말이다. 여주 사람들의 인심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훈훈해진다. 그러다가 문득 나무에 매달려있는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고개가 끄떡여진다. 오늘 마주친 상황과 딱 들어맞는 것이다. ‘우리는 다정한 이웃 만나면 먼저 인사합시다.’ 이 안내판은 이곳 말고도 산행을 하는 내내 여러 곳에서 눈에 띄었다. 안내판을 설치한 여주 녹색성장실천연합에 감사를 드려본다.

 

 

금마교 조금 못미처에서 보면 왼편에서 내려오는 길이 하나 보인다. 아까 내려올 때 갈려나갔던 오솔길이 다시 합쳐지는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성지지맥인 삼각산이나 금물산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오늘 하산하려고 하는 쉼터삼거리까지는 성지지맥을 따라 걷게 된다. 참고로 성지지맥(聖地枝脈)이란 한강기맥이 금물산을 지나자마자 남쪽으로 또 하나의 산줄기를 분기(分岐)시켜 놓은 것으로, 이 산줄기가 도상거리 55Km의 성지지맥다. 이 산줄기는 성지봉과 비봉산, 성주봉을 거친 후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그 숨을 다한다.

 

 

다시 계속되는 평탄한 길에서 여유를 즐기며 걷다보면 18분 후에는 예쁜 구름다리 하나를 만나게(이정표 : 마감산 0.5Km/ 보금산 1.4Km) 된다. 바로 걸은리에서 도전리로 넘어가는 지방도로 위에 걸려있는 금마교(金馬橋)이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산행에 변화를 주고 있는 다리가 예쁘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조금 후에는 다시 합쳐지므로 어디로 갈지를 갖고 고민할 필요는 없지만, 여기서는 절개지(切開地)방향의 왼편 길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급사면(急斜面)에 놓은 긴 통나무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쉼터를 겸한 멋진 조망대(眺望臺)가 나오기 때문이다. 조망대에 놓인 벤치에 앉으면 조금 전에 지나온 보금산이 성큼 다가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망대를 뒤로 하고 다시 마감산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 아까 다리에서 헤어졌던 길과 다시 만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일 것이다. 통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아 조금은 쉽게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길이가 만만치 않게 길기 때문이다. 마침 시간까지 넉넉하니 이런 오르막길에서는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다. 쉬엄쉬엄 오르고 있는데 고맙게도 울창하게 우거진 참나무 숲을 스쳐온 바람이 살갑게 맞아준다. 가파른 계단길을 올라서면 드디어 마감산 정상이다. 금마교에서 30분 조금 못 걸렸다. 물론 서서히 걸어서 말이다.

 

 

 

마감산 정상은 제법 넓다. 그런데 그 널따란 공터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2층짜리 정자(亭子)와 벤치는 물론 무인산불감시탑까지 세워 놓은 걸 보면 말이다. 거기다 정상표지석은 두 개나 세워 놓았다. 차라리 그 돈으로 방향표지판이 절반이나 떨어져나간 이정표나 보수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정자에 오른다. 어느 글에선가 남한강의 물줄기가 눈에 잡힌다고 하였지만, 오늘의 시야(視野)는 답답할 따름이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확인했던 일기예보에서는 미세먼지에 관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안개일까? 아무튼 눈에 들어오는 영상마다 모두 흐릿하게 나타날 뿐이다. 참고로 마감산(馬甘山)은 말감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말은 머리 두()와 수(), 그리고 감은 큰 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는 제일 크다는 뜻으로 사실 마감산이 인근에서 가장 높다. 또 다른 유래도 있다. 북벌(北伐)을 도모했던 이완장군이 영월루에서 말()을 풀어 놓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이 이 산으로 올라갔었던 모양이다. 그런 인연으로 말감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감산을 출발하면서 주변 풍경이 서서히 변해간다. 능선 주변에 바위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거대한 바위벼랑 위에 올라서게 된다. ‘마귀할멈바위가 있는 짧은 암릉구간에 이른 것이다. 암릉에 이르면 위험하니 노약자와 어린이들은 아래로 돌아가라는 경고판이 붙어있다. 그러나 너무 늙었거나 너무 어린 아이들이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철제로 된 다리와 계단 등 안전시설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사 마귀할멈이 나타나 심술을 부린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요즘은 첨단과학이 하도 잘 발달되어 있는 탓에 설사 마귀할멈이라고 해도 함부로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암릉에 놓인 철다리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서쪽으로 멀리 남한강과 여주벌판, 그리고 여주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고 하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방금 지나온 보금산까지도 흐릿하게 나타날 뿐이다.

 

 

암릉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귀할멈바위의 전모(全貌)가 나타난다. 치마를 두른 여인이 앉아서 양 손으로 턱을 괜 채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로댕(Auguste Rodin)생각하는 사람()이 얼핏 떠오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아무튼 옛날에 이 산에 마귀할멈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할멈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심술을 부려 괴롭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람을 해치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당연히 요 아래 살던 사람들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며 이 바위를 찾아와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바위를 유심히 살펴본다. 유난히도 험상궂게 보이는 것은 선입견 때문일까?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는 뭐니 뭐니 해도 마귀할멈바위가 있는 암릉 구간일 것이다. 마귀할멈바위뿐만 아니라 다른 볼거리도 많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조망(眺望)이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뛰어난 전망대(展望臺) 역할을 하는 곳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계(視界)는 제로(zero), 오늘같이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다른 것으로 즐기면 된다. 바위와 낙락장송(落落長松)들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세파(世波)에 시달리느라 온몸을 뒤틀고 있는 소나무들은 마치 노련한 조각가가 심혈을 들여 빚어놓은 작품을 연상시킬 정도로 하나같이 기괴한 자세를 하고 있다.

 

 

 

마귀할멈바위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맞은편 370봉으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길이고, 왼편은 산봉우리를 우회(迂廻)하는 길이다. 물론 편하게 우회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는 오른편의 오름길을 권하고 싶다. 노송(老松)들이 가득한 정상에서의 조망(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도 좋지만 정상에서 내려갈 때의 짜릿한 스릴(thrill)을 즐겨보라는 의미에서다.

 

 

 

370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거기다 일부 구간은 바윗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굵은 안전로프가 그것도 설치한지 얼마 안 되는 새것으로 튼튼하게 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저 스릴(thrill)만 느끼면서 내려오면 된다.

 

 

 

370봉에서 내려오면 얼마 안 있어 능선안부 갈림길(이정표 : 삿갓봉온천 5Km/ 주차장 1.1Km/ 마감산 0.5Km)에 이르게 된다. 마침 평상까지 갖춘 쉼터를 겸하고 있으니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이라도 조금 난다면 평상 옆에 세워진 시비(詩碑)의 글귀라도 읽으며 가슴에 새겨볼 일이다. ‘알싸한 들꽃 향기 종다리 부리를 돌아 앞산 허리춤에 머무르고, 농부의 쟁기질 흙내음에 하..얀 속살을 여미우는 할미꽃 하늘이선재시인의 할미꽃 하늘이란 시()이다.

 

 

 

 

갈림길에서 주차장으로 향한다. 삿갓봉온천으로 가도 되겠지만 이럴 경우에는 차를 회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이곳에서는 삿갓봉온천으로 가는 것이 더 낫다. 그곳에 삿갓봉 건강랜드가 있어 산행 후에 온천욕(溫泉浴)을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傾斜)가 심하지 않아 순한 편이다. 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바닥이 마사토(磨沙土)로 이루어진 탓에 무척 미끄럽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한참을 내려오면 낙엽송(落葉松 : 일봉이깔나무) 군락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나타나는 물기 한 점 없는 개울을 건너서 얼마간 더 걸으면 합수(合水)지점에 이르게 된다. 개울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건너기 전에 이정표(주차장 0.1Km/ 마감산 1.4Km/ 마감산 0.9Km)와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니 이곳에서도 잠시 머물다가도 좋을 것이다. 마침 날머리도 얼마 남지 않았고, 또 시비 옆에 작고 귀여운 애기폭포(瀑布)까지 갖추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곳의 시비에는 아동문학가인 이문현님의 산 속의 산호섬이라는 동시(童詩)가 적혀 있다.

 

 

 

 

 

 

 

산행날머리는 아침에 출발했던 주차장(원점회귀)

나무다리를 건너자마자 산길은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 이어서 쉼터를 겸한 체력단련장(體力鍛鍊場)이 나온다. 이곳이 학생야영장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가끔 군인들 훈련장(訓鍊場)에서나 볼법한 시설들도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시설들이 너무 살벌하다고 느꼈던지 이성선시인의 나무라는 시를 적은 적어 놓는 센스(sense)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것도 지붕까지 얹은 예쁜 시판(詩板)을 말이다. 산행이 종료되는 주차장은 체력단련장의 바로 뒤이다. 갈림길에서 30분이 걸렸다. 오늘의 산행시간은 중간에 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쉰 시간을 뺄 경우에 2시간15분이 걸렸다. 물론 천천히 걸어서이다.

 

 

                                                

 

도락산(道樂山, 440.8m)

 

산행일 : ‘14. 4. 19()

소재지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과 은현면, 회정동, 덕계동의 경계

산행코스 : 가래비주유소세낭골돌탑테마공원시산제 비석도락산정상지장사갈림길지장사덕계저수지회정삼거리(산행시간 : 3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집사람과 함께

 

특징 : 전형적인 육산(肉山)으로 산세(山勢)가 부드럽다. 그러나 산의 규모는 인근의 산들에 비해 제법 큰 편, 때문에 산행코스를 고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코스에 따라 짧게는 3시간에서 길게는 4시간까지 주어진 시간에 따라 다양한 코스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에 의한 접근이 편리한 것은 물론 등산로 또한 완만(緩慢)하고 걷기 좋은 흙 길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가족 산행지로 권할 만 하다. 그러나 도락산의 명물(名物)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4강 진출을 이룩했던 태극 전사 20여명을 기념하는 돌탑들이다.

 

 

산행들머리는 가래비주유소(양주시 광적면 가납1)

도락산에 가려면 먼저 전철(電鐵)1호선을 이용해 양주역까지 와야만 한다. 도락산으로 들어가는 시내버스가 양주역에서 다니기 때문이다. 1번 출구를 빠져나와 도로를 건너면 시내버스승강장이다. 이곳에서 35번이나 51번 또는 133번을 타면 20분 후에는 산행이 시작되는 가래비주유소에서 내릴 수 있다. 주유소(注油所)의 이름이 특이해서 버스가 사람들로 붐빌 경우일지라도 안내 멘트(announcement)가 귀에 쏙 들어올 것이니 어디서 내릴까를 갖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버스는 가래비 주유수의 옆에서 내리게 된다. 주유소를 오른편에 끼고 나와 사거리교차로에 있는 횡단보도(橫斷步道)를 건너면 승리교()이다. 도락산은 이 승리교를 건너서 진행하게 되므로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편에 보이는 가래비 3.1운동 기념비를 참조하면 길 찾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승리교를 건넌 후, 신천(지방하천)을 끼고 난 도로(道路)를 따라 왼편으로 약 200m쯤 걸어가면 맞은편에 편의점(ampm)과 가납리 공용화기사격장이정표가 보인다. 도락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편의점과 이정표의 사이로 열린다. 이어서 왼편에 개울을 끼고 난 도로를 따라 얼마간 들어가면 새낭골2()가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다리를 건너면 된다. 다리 옆에 가납1리 가낭골마을표지석과 도락산 등산로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길을 찾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새낭골 마을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벽화(壁畵)로 단장한 담들이 반겨준다. 아니 벽들뿐만이 아니다. 일반 가옥(家屋)들도 담장이 없을 경우에는 어김없이 그림을 그려 놓았다. 그것도 그 가옥의 생김새와 딱 어울리게 말이다. 그림은 이복규라는 화가가 그렸다는데 그 솜씨 보다는 그의 노력이 돋보였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혼자서 그린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벽화를 감상하며 5분 남짓 걸으면 희망 소망 사랑 도락산 등산로라는 이름표를 단 아치(arch)형 문이 나온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문구이다. 그렇다. ··(··)는 내가 신봉하다시피 하는 문구(文句)이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휘호(揮毫)가 안방의 정면에 붙어있을 정도이니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들머리를 출발한지 15분이 지났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호젓한 산길을 느긋하게 걷다가 자연체험학습장을 지나면 원뿔모양의 돌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2002년 월드컵의 16강을 기원하며 쌓았다는 그 돌탑들이다. 홰 하필이면 기원(祈願)하는 내용이 기껏 16강일까? 우승(優勝)을 기원해도 될 터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 기원이 마냥 소박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당시 우리나라 축구의 눈높이는 예선을 통과, 그러니까 16강 진출을 하는 것조차도 어렵다고 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이운재와 김용대, 2002년 월드컵 당시에 수문장(守門將)으로 뛰었던 선수들이다. 그들을 맨 앞에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도락산을 잘 지키라는 주문일까? 아니면 수문장 역할이 가장 어렵고 힘든 위치인 것을 위로라도 하려는 것일까?

 

 

 

 

뒤를 이어 나타나는 것은 김태형, 이영표, 차두리 박항서 등의 돌탑들이다. 각각의 돌탑들 앞에는 선수의 캐리커처(caricature)와 약력(略歷)을 새겨놓은 안내판이 예쁘장하게 만들어져 있다. 내용을 읽어가다 보면 선수들 사이에 코치가 한 명 섞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박항서이다. 아마 돌탑들을 세울 때 배열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돌탑은 히딩크감독의 돌탑 근처에 세워졌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6명의 돌탑을 지나면 세심정, 얼핏 쉬어가는 정자(亭子)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약수(藥水)터이다. 하긴 한모금의 물로 목을 축이며 잠깐 쉬어간다면 정자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크게 흉이 될 일은 없겠다. 약수터 앞에 붙어있는 수질검사표(水質檢査標)는 적합(適合), 급하게 발길을 재촉하지 말고 한바가지 물로 피로를 풀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주변에 널려있는 돌탑들을 찾아볼 일이다. 혹시라도 월드컵 선수단 중의 일원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주변의 돌탑들은 하나같이 이름 없는 돌탑들이었다. 테마공원 입구에서 세심정까지는 12분 거리이다.

 

 

 

세심정을 지나면 또 다시 태극전사들의 돌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황선홍 돌탑에 이어 ‘8인의 태극전사’(안정환 김남일 이을용 최진철 송종국 박지성 이천수 설기현)를 나타내는 8개의 돌탑들이 너럭바위 위에 무더기로 모여 있다. 이 돌탑들을 쌓은 이는 산 아래 가납리에서 농사를 짓는 김윤준씨로 알려지고 있다. 처음 돌탑 쌓기를 시작한 것은 김윤준씨와 같은 동네에 사는 10세 정도 터울의 후배들이었다고 한다. 차기 월드컵(2006년 독일)16강 진출을 기원하며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가 중단된 것을 김씨가 마무리 지었다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2006년 월드컵을 기원하다보니 지금의 히딩크 탑은 당시에는 아드보카트 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16강 진입에 실패했고 도락산 일원을 테마공원으로 조성(造成)하는 과정에서 2002 월드컵 ‘4강 주역들을 중심으로 탑 이름을 바뀌게 되었단다. 참고로 돌탑의 높이는 평균 4.70m, 둘레 4.80m 정도이며, 돌탑 하나에는 1만여 개의 돌에 무게는 6~7톤 정도로 추정된다.

 

 

 

‘8형제 탑을 지나면 길 한가운데에 로프가 매어진 돌계단이 길게 이어진다. 오늘은 부부산행인지라 시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당연히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도 없다. 연록으로 물들어가는 주변 풍경을 음미(吟味)하며 올라가는데 돌탑 하나가 무너져 있는 것이 보인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공들여 쌓은 탑도 잘 관리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라는 이치를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탑의 원 모습을 상상해볼 수도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다. 그냥 지나치려다 간판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이 보여 다가가 본다. 아뿔싸! 도대체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홍명보 탑이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하필이면 왜 홍명보란 말인가. 그는 현재 ‘2014년 브라질월드컵국가대표 팀의 사령탑(司令塔)을 맡고 있다. 그런데 그의 탑이 그것도 월드컵의 16강 진출을 기원하는 탑이 무너져 내리다니,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올 브라질월드컵의 목표인 ‘8강 진출을 위해서라도 양주시청에 바래본다. 반듯한 복원(復原)이 어려울 경우에는 쓰러진 잔재(殘在)라도 깨끗이 치워주기를 말이다.

 

 

무너져 내린 홍명보탑을 지나면 히딩크 탑이 길손을 맞는다. 당시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그는 지금도 팀을 지휘라도 하고 있는 양 듬직한 모습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히딩크 답을 끝으로 월드컵 기원 탑들의 도열은 끝을 맺는다. 그리고 곧이어 길은 두 갈래(이정표 : 팔각정(불곡산) 0.2Km/ 시산제 비석(정상 가는 길) 0.3Km/ 국군기무사령부)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무조건 팔각정 쪽으로 가야만 한다. 오른쪽에 도락산 제1보루라는 고구려 유적지(遺跡地)가 있기 때문이다. 세심정에서 갈림길까지는 11분 거리이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약수터, 그리고 오르막길 끄트머리에 있는 체육시설의 오른편에 도락산 1보루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보루(堡壘)란 옛 군사들이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전망 좋은 곳에 구축했던 작은 규모의 성벽(城壁)을 말하는데, 이곳 도락산에는 4개의 보루가 있다고 한다. ‘도락산 1보루는 보루(堡壘)라기보다는 차라리 둔덕 같은 작은 봉우리이다. 처음부터 흙으로 쌓았는지 아니면 석축(石築)으로 쌓았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쌓았던 바윗돌들이 모두 유실(流失)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벽(城壁)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래서 둔덕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보루 안내판뒤로 난 길로 들어서면 금방 봉우리 위로 올라서게 된다. 봉우리 위는 널따란 분지(盆地), 그 한쪽 귀퉁이에 팔각정(八角亭)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까 보루 위에다 정자(亭子)를 지어 쉼터로 조성해 놓은 것이다. 이는 유적지(遺跡地)로서 보존(保存)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그 흔적이 희미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팔각정 앞에 서면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서쪽의 광적면 일대가 잘 내려다보이고, 왼편에 숨어있는 불곡산도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갈림길에서 팔각정까지는 6분이 걸렸다.

 

 

 

 

 

팔각정에서 다시 체육공원을 되돌아 나와 체육시설 사이를 지나면 곧이어 삼거리(이정표 : 시산제 비석(정상 가는 길) 0.1Km/ 세심정 0.5Km/ 팔각정 0.2Km)가 나온다. 그런데 이정표가 좀 이상하다. 아까는 무심코 그냥 지나쳤는데 이정표에 또 다시 국군기무사령부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거리표시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 그 방향이 좀 묘하다. 아까는 기무사령부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세심정이었는데, 이번에는 팔각정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기무사령부가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간첩테러신고홍보용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에 보이는 길은 아까 약수터 근처에서 왼편으로 진행했을 경우 올라오게 되는 길이다. 삼거리를 지나면 금방 시산제 비석(始山祭 碑石)’이 나온다. 이 비석은 양주산악회에서 창립 10주년을 기념해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팔각정에서 시산제비석까지는 11분이 걸렸다.

 

 

 

 

시산제 비석을 출발하면 능선은 오른편 방향으로 원()을 그리듯 크게 휜다. 능선이 휘기 시작하자마자 왼편의 나뭇가지 사이로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내다보인다. ‘들어앉은 바위라고 한다. 왜 하필이면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길에서 벗어난 숲속에 숨듯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아래로 내려가 보면 거대한 바위 두 개가 나타난다. 바위들은 2개 모두 아랫돌과 윗돌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같으나, 위에 놓인 돌의 생김새는 천양지차(天壤之差)이다. 하나는 직육면체(直六面體)인 반면 다를 하나는 마치 공처럼 둥글게 생겼다. 요즘 부척 장난이 심해진 집사람이 냉큼 바위로 달려가더니 무턱대고 밀고 본다. 그러나 그녀의 힘으로는 끄떡도 없다. 아니 역발산(力拔山)이 아닌 다음에야 어느 누가 밀더라도 어림없을 것이다.

 

 

 

 

오른편으로 휜 산길은 길게 이어진다. 중간에 대모시 갈림길’(이정표 정상가는 길(은현면) 3Km/ 대모시 1.2Km/ 시산제 비석 0.9Km)광백저수지 갈림길‘(이정표 : 도락산2보루 0.7Km, 도락산 정상 1.0Km/ 광백저수지 1.4Km, 방성리 2.9Km/ 팔각정 1.4Km, 가납리 2.4Km)을 지나는 동안 여러 번의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이 구간에서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 육산(肉山)의 특징대로 밋밋한 능선인지라 특별한 볼거리는 애초부터 포기해야 하고, 주변의 숲 때문에 조망(眺望)까지도 딱 막혀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변 나무들이 온통 연록(軟綠)으로 물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 ’5의 연록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고 했다비록 아직은 4월의 끝자락인지라 아직 꽃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데는 이정도로도 충분하다 할 것이다. 시산제비석에서 광적저수지 갈림길까지는 15분이 걸렸다.

 

 

 

▼ '광백저수지 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리고 곧이어 왼편 숲 사이로 채석장(採石場)이 내려다보인다. 길가는 온통 출입금지경고판 천지,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산길이 2보루에 이를 때까지 왼편에 원형철조망(圓形鐵條網)을 깔아 놓았다. 오늘은 경고판(警告板)과 인연이 있는 날인 모양이다. 산행을 시작할 때 주 등산로를 벗어나지 말라는 플래카드(placard)나 입간판 등의 군부대(軍部隊) 경고판이 수도 없이 많이 세워져 있더니, 이번에는 또 추락위험, 접근금지라는 경고판들이 부지기수로 널려있다. 마치 공원처럼 잘 가꾸어진 도락산에 이렇게 으스스한 경고판이라니 안 어울려도 참 많이 안 어울린다. 하여간 채석장의 규모(規模)는 어마어마했다. 바위를 캐고 난 웅덩이에 물이 채워져 있는데 그 크기가 웬만한 저수지(貯水池)에 못지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채석장 풍경이 사라지면 곧이어 작은 봉우리 하나가 길을 가로막는다. ‘광적저수지 갈림길에서 21분 거리에 있는 도락산 2보루’(이정표 : 도락산 정상 0.3Km/ 도하리 1.6Km, 통신기도원 용암리방면 2.6Km/ 돌탑테마공원 2.6Km)이다. 2보루는 외곽(外廓)을 로프로 금()줄을 쳐 놓았다. 그만큼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느 정도 원형(原型)이 보존되었을까 하는 마음에 금줄을 넘어 위로 올라가본다. 역시 내 짐작대로 성곽(城郭)의 일부구간이 아직까지 무너지지 않은 채로 보존되고 있었는데 그 높이는 2m가량 되었다. 도락산의 보루 4곳 중에서 그나마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 이곳이란다. 자료에 의하면 보루의 생김새는 동에서 서로 긴 형태, 정상 아래를 돌로 쌓아올린 성벽은 전체 둘레가 대략 170m 정도 된단다.

 

 

 

4보루는 2보루의 바로 옆에 있다. 2보루 보다 봉우리가 크지 않기 때문에 마치 2보루의 부속물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북쪽 성벽(城壁)은 사라졌고, 나머지 성벽은 여타 보루와 같이 허술하게 남아있는데, 성벽의 형태는 네모반듯하게 돌로 쌓여있다. 자료에 의하면 전체 둘레가 64m, 높이는 1m 내외란다.

 

 

 

3보루(이정표 : 까치봉 1.7Km/ 돌탑테마공원 3.0Km)4보루에서 300m 정도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면 헬기장이 있는 넓은 평탄지(平坦地) 위에 있다. 자료에 의하면 작은 봉우리를 감싼 3보루의 전체둘레는 20m, 성벽 높이는 3m정도라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곳이 사실은 도락산의 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보호해야할 문화재(文化財)인 제3 보루가 있기 때문에 정상표지석을 다른 곳에 세워 놓았다는 것이다. 무인산불감시탑이 세워진 3보루 위에 오르면 남쪽에는 양주의 명산인 불곡산이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자랑하고 있고, 그 뒤에는 서울시민들로부터 듬뿍 사랑을 받고 있는 도봉산과 북한산의 능선이 펼쳐진다.

 

 

 

 

3보루에서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된다. 정상의 꼭대기에서는 시야(視野)가 트이지 않기 때문에 조망(眺望)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산길이 또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정상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청업굴고개(?)로 내려가는 하산길이다. 정상석이 있는 봉우리로 가려면 3보루를 내려서자마자 왼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야 한다. 그러면 잠시 후에 아까 헬기장에서 넘어오는 길과 만나게 되고,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3보루에서 정상석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다 보면 오른편에 시멘트로 지어진 커다란 구축물(構築物)이 보인다. 비록 지금은 텅 비어있지만 군인들이 진지(陣地)로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같은 장소가 군사요충지(軍事要衝地)로 이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곳 도락산이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3보루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다. 이는 정상이 3보루보다 더 낮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실제 정상이 3보루임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잠깐 내려가다 안부에서 앞에 보이는 나지막한 봉우리 위로 오르면 의자가 놓여있는 쉼터이다. 이곳이l 바로 공식적인 정상(이정표 : 옥천약수터 3.0Km, 리치마트 앞 3.7Km/ 까치봉 1.5Km, 덕계고등학교 4.1Km/ 돌탑테마공원 3.2Km)으로 우람한 정상표지석이 늠름하게 버티고 서있다. 문화재(文化財)에 밀려 제 자리를 빼앗긴 줄도 모르고 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북동쪽 발아래에는 울창한 숲속에 들어앉은 덕계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에는 칠봉산과 천보산의 능선이 펼쳐진다. 2보루에서 정상까지는 18,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가까이 지났다. 도락산에는 이름에 얽힌 재미난 얘기 하나가 전해진다. ‘송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예을 표하는 것 같다고 해서 고려시대에 충신(忠臣)의 산으로 불리던 도락산이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한양을 배반하는 형상이라고 해서 조정에서 이 산의 머리(山頭)를 치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머리가 떨어진 산이라 해서 두락산(頭落山)이 되었고, 이후 이름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도락산(道落山)으로 고쳤다 한다. 그러나 실제 도락산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정상에 있는 바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돌의 산이라는 뜻의 돌산이 한자로 표현되면서 돌악돌악산도락산으로 변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도랍산, 두락산, 노락산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었다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8세기 해동지도(1760)에 돌압산(突壓山)으로 표기된 이 산은 신편조전지지(1924)에서부터 도락산(道落山)으로 고쳐 소개되고 있다.

 

 

 

 

정상에서 작은 고민이 시작된다. 과연 어디로 하산 길을 잡아야 후회가 없을지가 하신코스를 결정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고민 끝에 리치마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쪽으로 가야 내가 들러보고 싶은 지장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리치마트로 향하는 능선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길에 맞은 편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에게 지장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의 위치를 물어보는 것은 선답자(先踏者)들의 산행 후기(後記)에 갈림길을 찾기가 어렵다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올라오던 사람들이 말한 대로 지장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에는 그럴 듯한 이정표(지장사 800m)가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정상을 출발해서 11분 정도가 지나면 지장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날 수 있다.

 

 

 

지장사로 내려가는 길은 의외로 또렷하지만 그러나 경사(傾斜)는 만만치 않다. 그렇다고 내려가는 길이 고약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가파른 내리막길은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나고 이어지는 산길은 포근한 흙길이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길 중간에 옹달샘 갈림길’(이정표 : 지장사 0.1Km/ 덕계저수지 1.2Km/ 옹달샘 쉼터 0.5Km/ 도락산 정상 `1.3Km)을 지나면 지장사에 이르게 된다. 정상에서 지장사까지는 27분이 걸렸다.

 

 

 

지장사(地藏寺)에 들어서면 요상하게 생긴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벽면은 하얀 화강암, 그리고 반구형(半球形)의 돔(dome)형태로 된 지붕은 황금색(黃金色)으로 빛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서 그 이름이 반야보탑(般若寶塔)이라고 한다. 반야(般若)는 밝음과 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 최상의 지혜를 말한다. 여기에 보배스러운 탑()이란 뜻을 합하여 반야보탑(般若寶塔)이라 명명했다는 것이다. 높이가 27m에 달하는 전각(殿閣)이라니, 참 대단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저 황금색 돔에다 300냥의 황금을 녹여 붙였다는 점이다. 아깝다. 아니 욕심이 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참고로 반야보탑은 인도중부 마디아프라데시주에 있는 산치대탑에서 모티브(motive)를 따왔다고 한다. 지장사의 창립자인 대운스님이 인도 성지순례를 하면서 아쇼카왕이 쌓았다는 산치대탑을 보고 영감을 얻은 모양이다. 이 사찰에는 대탑 외에도 모든 법회를 이끌어가는 지장전(地裝殿)과 삼성각 등이 있고, 요사채는 현재 짓고 있는 중이었다.

 

 

 

 

사찰(寺刹)을 빠져나오면 포장된 도로를 따라 걷게 된다. 지장사를 벗어나서 10분 남짓 걸어내려오면 왼편에 산장가든(이정표 : 덕계저수지 0.2Km, 덕계공원 사거리 2.8Km/ 까치봉 0.8Km, 도락산 정상 1.7Km/ 지장사 0.9Km)이 보인다. 산장가든 옆으로 난 산길을 따를 경우 향로봉을 거쳐 도락산 정상으로 올라가게 된다. 산장가든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그러니까 지장사에서 15분쯤 되는 거리에 덕계저수지가 있다.

 

 

 

 

덕계저수지에서 등산로는 도로를 벗어나(이정표 : 덕계고등학교 2.2Km. 덕계공원 사거리 2.6Km/ 지장사 1.1Km) 저수지의 왼편 산자락으로 접어든다. 이정표에 김삿갓 풍류길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아마 양주시에서 조성한 둘레길인 모양이다. 저수지 위로 난 산길은 쉼터와 전망대를 두루 갖추고 있어 제법 길게 이어지지만 조금도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멋진 길이다. 길가에는 심심찮게 의자를 설치에 놓았고, 전망이 좋은 곳에는 쉼터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또 하나 누군가가 쌓아 놓은 돌탑들이 심심찮게 나타나는데, 그 탑들이 참으로 묘하다. 바람만 살짝 불어도 금방 쓰러져버릴 것 같은데도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저수지의 끄트머리가 나올 즈음에 산길은 산등성이 위로 다시 올라간다. 잣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진 산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능선삼거리(이정표 : 덕계고등하교 1.1Km, 덕계공원 사거리 1.5Km/ 까치봉 1.5Km, 도락산 정상 3.2Km/ 덕계저수지 0.2Km)에 이르게 된다. 덕계저수지 이정표에서 이곳까지는 23분이 걸렸다. 이곳 삼거리에서 덕계고등학교 방향으로 100m만 내려오면 또 다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회정삼거리 1.0Km/ 덕계고등학교 1.0Km, 덕계공원 사거리 1.4Km/ 덕계저수지 0.3Km, 까치봉 1.6Km)로 나뉜다.

 

 

 

 

 

산행날머리는 회정삼거리 버스정류장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회정삼거리 쪽으로 내려선다. 아무래도 대중교통 이용이 편할 것 같아서이다. 능선에서 잠깐 내려서면 산길은 시멘트포장 임도로 바뀌고 이어서 밀양박씨 제각(祭閣)을 지나서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얼마간 내려오면 3번 국도의 도로변에 있는 V-Plus라는 쇼핑몰이 나오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능선삼거리에서 이곳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렸다.

 

 

에필로그(epilogue)

도락산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진 공원(公園)이라는 느낌이 드는 산이다. 반듯하게 쌓아진 테마(thema)가 있는 돌탑(石塔), 그리고 잘 정비된 등산로와 이정표들, 거기다 곳곳에 피어나는 야생화들이라니 이건 숫제 공원인 것이다. 그것도 심혈을 들여 가꾼. 이 모든 것은 행정관청(行政官廳)이 아닌 인근 주민(住民)들이 직접 만들고 가꾸어 왔단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아니나 다를까 그런 정성은 행정안전부(行政安全部)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행정안전부가 전국 각 지자체를 통해 추진하고 있는 ‘2009 참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전국 콘테스트(contest)’에서 주민참여형 우수사례로 뽑히게 된 것이다.

 

고래산(528.5m)-문안산(533.1m)

 

산행일 : ‘14. 3. 8()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와부읍과 조안면의 경계

산행코스 : 먹치고개고래산맹골재재재기고개문안산전망대문바위국도45호선(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고래산이나 문안산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사람들이 뻔질나게 찾는 운길산이나 예봉산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음은 물론, 북한강에 대한 조망(眺望) 등 모든 면에서 두 산에 결코 뒤쳐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염두에 두지 않은 이유는 아마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중앙선 전철(電鐵)이 개통되어 접근이 많이 좋아졌다. 거기다가 남양주시에서 등산로까지 말끔하게 정비를 해 놓은 탓에 초보자들도 어렵지 않게 산행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 탓인지 요즘에는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산행들머리는 해발 222m먹치고개(와부읍 월문리)

서울-춘천고속도로 덕소삼패 I.C에서 내려와 86번 지방도 화도방향으로 달리다가 월문삼거리(와부읍 월문리)에서 우회전 고래산로를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먹치고개에 이르게 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에는 중앙선전철(電鐵) 덕소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빠져나오면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사우리행 마을버스(88-3)를 타면 먹치고개에 이를 수 있다. 다만 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다니니 시간을 맞춰야 하는 불편은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먹치고개 버스정류장의 왼편 뒤로 난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진행방향에 보이는 능선을 향해 2~3분 정도 올라갔을까 왼편의 산자락으로 오솔길 하나가 열린다. 들머리에 산악회의 시그널(signal) 몇 개가 매달려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자락에 들어서서 2~3분 정도가 지나면 산길이 서서히 허리를 곧추세우기 시작한다. 경사(傾斜)가 가팔라진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길이는 그다지 길지가 않다. 가파른 비탈길을 20분 조금 못되게 치고 오르면 송전탑(送電塔)을 만나게 되고, 여기서 잠시 숨을 죽인 능선은 또 다시 가파르게 위로 향한다. 오르는 길에 혹시 성도사에서 올라오는 길이 보이나 살펴봤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 두텁게 쌓여있는 참나무 낙엽(落葉)들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송전탑을 지나면 얼마 안 있어 석문(石門)을 만나게 된다. 석문이라고 부르기에 조금 옹색할 수도 있겠지만 워낙 바위가 없는 산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얼른 카메라에 담고 이름을 붙여본 것이다. 이어서 조금 더 올라가면, 그러니까 송전탑에서 10분 정도 올라가면 이정표(고래산 정상 0.44Km/ 백봉산 6.50Km/ 먹치고개 1.0Km)가 있는 삼거리에 이른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이정표인데, 왼편에 보이는 길은 백봉으로 이어진다. 원목(原木)으로 만들어진 깔끔한 이정표에 나무판자 하나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새는 자기 길을 안다. 김용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김용해 시인(詩人)의 시()를 적어 놓았던 모양인데, 아쉽게도 시의 내용은 이미 잘려나가고 없다. 이렇게 아랫도리가 잘려나간 시판(詩板)은 산행을 마칠 때까지 여러 곳에서 눈에 띄었다. 이때마다 숭례문(崇禮門)’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애초에 만들 때부터 신경을 조금 더 썼더라면 이렇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상황을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새는 자기 길을 안다의 전문(全文)을 적어본다. ‘하늘에 길이 있다는 것을 새들이 먼저 안다. 하늘에 길을 내며 날던 새는 길을 또한 지운다. 새들이 하늘 높이 길을 내지 않는 것은 그 위에 별들이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우주(宇宙) 섭리(攝理)의 근간을 그저 무심히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새들의 아량과 배려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시인의 예지(叡智)가 얼마나 신선한가. 시인을 모독하고 있는 것 같아 괜스레 가슴이 찡해온다.

 

 

 

 

일단 삼거리(493?)가 있는 정상부 능선에 올라서고 나면 길은 편해진다. 500m 조금 못되는 높이의 능선이 큰 오르내림이 없이 이어지다가 13분쯤 후에는 고래산 정상에 올려 놓는다. 정상으로 가는 능선이 올망졸망한 3~4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앞서 가던 집사람이 냉큼 소나무 가지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굴참나무 천지인 능선에서 모처럼 만난 소나무가 못내 반가웠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그 모양이 기괴(奇怪)하기까지 하니 동심(童心)으로 돌아갔을 만도 하겠다. 가는 길에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그저 벌거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오른편에 갑산, 그리고 왼편에는 천마산 등이 얼핏얼핏 내다보일 따름이다.

 

 

 

 

열 평 남짓 되는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은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삼각점, 그리고 이정표(문안산 정상 4.36Km/ 백봉산 정상 6.50Km/ 먹치고개 1.48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이곳의 이정표도 역시 시()가 적힌 판자(板子)의 아랫도리가 잘려나갔다. 잡목(雜木)에 포위된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시원치 않다. 아까 능선에서 보았던 조망보다 나아진 게 별로 없는 것이다. 다만 잡목의 웃자람이 덜한 사이사이로 갑산과 운길산 그리고 천마산 등이 시야(視野)에 잡힌다. 참고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는 이 산을 경산(鯨山)이라 불렀다. '경산'이라는 명칭이 조선지지자료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이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곳 토박이들 사이에는 '고래산'으로 불리어왔기에 다시 옛 이름을 되찾게 된 모양이다. 고래산은 골짜기의 산에서 따왔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6Km가까이 된다는 고래산의 골짜기에서 따온 것이 '()의 산', 이것이 '고래뫼'를 거쳐 '고래산'으로 변했을 것이라는 것이다한편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은 온돌로 난방(煖房)을 하였다. 그 온돌의 구들장 아래 불길과 연기가 다니는 통로가 바로 고래또는 방고래이다. 고래산의 골짜기 방고래처렴 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고래산에서 문안산을 향해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기 이를 데가 없다. 겨울철에 눈이라도 올 경우에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기 딱 알맞겠다. 급하게 내려선 산길은 잠시 순하게 이어지다가 안부사거리에 이른다. 고래산에서 20분 조금 못되는 거리에 있는 맹골재이다. 맹골재에는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所望)을 담은 돌무더기와 이정표(문안산 정상 3.64Km/ 자산리 3.20Km/ 고래산 정상 0.72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처음으로 온전한 시판(詩板)을 만난다. 김영랑시인의 오매 단풍들겄네.’라는 시가 적혀있다. 남도 사투리로 읊은 서정성 넘치는 작품, 가만히 눈을 감고 읊어본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붙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 것네.‘> 갑자기 가슴이 싸해오며 나도 몰래 눈물 한 방울 떨구어 버린다.

 

 

 

 

비탈길은 맹골재를 지나면서 끝을 맺고, 이후부터는 경사(競射)가 거의 없이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얼마나 걸었을까 잘 가꾼 묘()가 보이더니 갑자기 오른편이 시원스럽게 열린다. 운길산 등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순한 흙길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걷다보면 15분 후에는 재재기고개에 내려서게 된다. 재재기재에는 익숙한 이정표(이정표 : 문안산 6.0Km/ 고래산 1.40Km/ 재재기마을) 외에 또 하나의 낯선 이정표(문안산길 시점 11.28Km/ 문안산길 종점 6.02Km)가 보인다. 바로 이 지역(남양주시)에서 개발한 둘레길인 다산길의 이정표이다. 문안산 구간은 다산길의 제5코스로 문안산길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런데 이곳의 이정표가 보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고 있다. 문안산까지의 거리가 6.0Km로 적혀있는 것이다. 아까 맹골재에서 약 700m를 걸어왔는데도 문안산까지의 거리는 오히려 2.4Km나 더 늘어나버린 것이다. 이정표를 세우는 목적이 본시 방향과 거리를 미리 알고 거기에 맞춰 산행을 즐기라는 것일 진데,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이정표를 만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재재기 고개를 지나면서 또 다시 오른편이 시원스럽게 열린다. 동쪽산록을 벌목(伐木)한 탓에 시야(視野)가 확 트이는 것이다. 오늘 본 조망 중에서 가장 뛰어난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수많은 산릉들이 중첩(重疊)을 이루면서 잘 그린 산수화(山水畵) 한 폭을 허공에 걸어 놓은 듯하다. <!--[endif]--> 

 

 

 

잠시 조망(眺望)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자그마한 봉우리 하나를 넘으니 웬 경고판(警告板) 하나가 보인다. 남양주 종합촬영소에서 세운 것인데, 등산로도 그렇다고 관람구역도 아니니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멧돼지나 뱀의 출현까지 빈번하다며 겁을 잔뜩 주고 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촬영소에 들어갈 일이 없다. 주목적인 산행을 제대로 하려면 한눈팔 여유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재재기고개에서 10분 거리이다.

 

 

 

종합촬영소 경고판에서 10분쯤 더 걸으면 올라서게 되는 작은 봉우리 위에서 장의자(長椅子) 몇 개가 놓여있는 것이 보인다. 산봉우리에다 쉼터(근처의 이정표 : 문안산 정상 2.0Km/ 고래산 정상 2.36Km)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까 지나왔던 고래산에서는 보지 못한 풍경이다. 이게 바로 남양주에서 바라보는 두 산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안내판이 너무 자주 세워져 있네요.’ ‘다산길 제5코스(문안산길)’ 안내판을 보고 집사람이 하는 말이다. 문득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고사성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렇다. 평소에 자기 의사를 별로 표현하지 않는 집사람이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과유불급이 분명할 것이다. 이곳 문안산에 쏟은 정성을 조금 나눠 고래산에 베풀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나뭇가지 사이로 남양주 해비치 C.C’가 내려다보인다.

 

 

 

쉼터를 지나서도 산길은 역시 큰 오르내림이 없이 순하게 이어진다. 짧고 얕게 내려섰다가 길게 올라서기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것이다. 맹골재에서 문안산 정상까지의 거리는 3.64Km, 구태여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도 고도를 높이기에 충분한 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산길은 곳곳에서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그 첫 번째가 백월리 갈림길(이정표 : 문안산 정상 1.35Km/ 백월리 3.0Km/ 고래산 정상 3.0Km)이고, 이어서 창현리로 내려가는 길을 두 번(이정표 #1 : 문안산 정상 0.7Km/ 창현리 2.3Km/ 고래산 정상 3.98Km, #2 : 문안산 정상 0.38Km/ 창현리 2.3Km/ 고래산 정상 3.98Km) 분가시킨다.

 

 

 

 

 

 

쉼터에서 서서히 그러나 꾸준하게 고도(高度)를 높여가다보면 헬기장이 있는 528봉이다. 이곳까지 오는 길의 특징을 들라면 갈림길이 많다는 것이고, 구태여 하나 더 들라고 한다면 528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바윗길이라는 것이다. 바윗길이라고 해서 암릉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그저 바닥에 바위가 깔려있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전형적인 흙산(肉山)에서 만난 풍경이 이색적인지라 바윗길이라고 표현했을 따름이다.

 

 

 

528봉에서 문안산은 금방으로 6분이면 닿는다. 잠깐 능선 안부로 내려섰다가 맞은편 능선을 조금만 더 치고 오르면 드디어 문안산 정상이다. 들머리에서 2시간45분 정도가 걸렸다. 20평쯤 되는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문안산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표지석과 정상임을 알리는 나무 표지판그리고 장의자 4개와 문안산의 유래(由來)를 기록한 전망 안내도(案內圖)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안내도를 보면 문안산은 '날씨 좋은 날 정상에 오르면 서울의 문안까지 환히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동쪽 기슭에 있는 '문바위(門岩)’에서 문암산(門岩山)이란 이름으로 발전되었다가, 다시 문안산(文案山)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정상은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트여 조망(眺望)이 뛰어나다. 북쪽으로 화도시가지와 천마산, 철마산, 주금산, 동쪽에는 곡달산과 통방산 등이 보인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수도권의 젓줄인 북한강이 또렷이 나타난다. 양수리에서 대성리로 이어지는 한강의 물줄기가 그대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정상에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이곳도 역시 눈이라도 쌓여있을 경우에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기 십상일 것 같다. 바닥이 약간 얼어붙은 정도에도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들이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정상에서 2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이정표(국도 451.76Km/ 문안산 정상 0.80Km) 하나를 만나게 되고 산길은 이곳에서 능선을 벗어나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된다. 비록 이정표에는 방향표시가 없으나 능선을 따라 난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길은 무시해 버리는 것이 좋다. 50m쯤 진행해본 결과 갈수록 길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길은 가파름과 완만함을 번갈아하며 지루하게 이어진다. 가끔 산길이 급하게 방향을 틀 때에는 어김없이 이정표(#1 : 국도 451.52Km/ 문안산 정상 1.0Km, #2 : 국도 450.93Km/ 문안산 정상 1.60Km)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것도 못미더웠던지 남양주시에서 다산길 제5코스라고 적힌 노란색 리본을 곳곳에 매달아 놓았다. 그런데 그 리본이 중구난방이다. 어떤 것은 제5코스, 또 일부는 제6코스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대체 이 구간이 제5코스인지 아니면 제6코스인지 모르겠다. 이왕에 좋은 일을 하는 거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

 

 

 

정상을 출발한지 45~50분 정도, 밋밋한 능선길이 지루하게 느껴질 즈음이면 진행방향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암벽(巖壁)이 눈에 들어온다. 문암산의 새로운 명물인 바위전망대(이정표 : 국도 450.80Km/ 문안산 정상 1.76Km)이다. 이 암벽을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하여 오르면 나무데크로 깔끔하게 만들어진 전망대(展望臺)가 나온다. 누군가 문안산을 일컬어 북한강으로서의 마지막 물길인 청평호와 팔당호의 정 중간 지점 강변에 우뚝 서서 북한강의 마지막을 조용히 지켜보는 산이라고 했다. 이 전망대에 오르면 왜 그런 표현을 썼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만큼 북한강의 강줄기가 발아래까지 다가와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부터 그다지 길지 않은 암릉길이 불거진다. 덕분에 길 찾기가 어려워지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계속 암릉의 날등을 타고 넘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 암릉의 끄트머리에 문안산의 명물(名物)이라는 문바위가 있다. 그러나 막상 문바위를 보고나면 실망부터 하게 된다. 크기만 조금 클 따름이지 그 생김새 등은 다른 산들에서 보아온 여느 바위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문바위를 북한산에 갖다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단언컨대 바위 이름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 어르신들이 자리를 잘 보고 앉으라.’는 말들을 했나보다.

 

 

 

산행날머리는 국도 45호선 ‘SK 그린주유소(화도읍 금남리)

문바위를 지나면 능선은 다시 흙산으로 변한다. 중간에 피아노폭포의 상단부를 이루는 바위봉 앞(이정표 : 국도 450.30Km/ 문안산 정상 2.23Km)에서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고, 이어서 개인소유의 부지라고 길을 막아 놓은 곳을 크게 우회(迂廻)하고 나면 산길은 다시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이정표 : 국도 450.1Km/ 문안산 정상 2.44Km)을 튼다. 그리고 곧 이어 국도 45호선에 내려서면서(이정표 : 문안산 정상 2.5Km) 산행이 끝을 맺는다. 문안산 정상에서 1시간25, 전망대에서 25분 정도 걸렸다.

 

 

 

 

 

산행을 끝내고 들른 피아노폭포

인공폭포(人工瀑布)로 그 높이가 무려 91.7m에 달한다. 그런데 폭포수로 이용하고 있는 물이 좀 특이하다. 남양주시의 하수(下水)를 처리한 물을 폭포수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재활용의 모범사례가 아닐까 싶다. 저 폭포를 보러 한해에 30만 명 이상이 찾고 있다니 광장에 있는 피아노화장실과 더불어 남양주시의 새로운 명물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특히 피아노의 건반 모양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고 이층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는 피아노화장실은 매우 흥미롭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들려오는 각기 다른 음(), 그 아름다운 선율은 오래토록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