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 : ‘14. 8. 12()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산행코스 : 샘골1등산로태실범바위2등산로 갈림길450성산남근석410암봉 삼거리병풍바위동막골유원지(산행시간 : 3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정상 일원의 3면이 높이 20m가 넘는 수직절벽(垂直絶壁)들로 이뤄진 산성(山城)으로 에워싸여 있다고 해서 성산(城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는 이 산성에서 당시 연천 현감 이창조가 주민들과 함께 청나라 군사들을 물리쳤다는 기록도 전한다. 성산 자체는 전형적인 흙산인데 비해 정상 근처는 수십 길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기암절벽(奇巖絶壁)을 구경하는 재미는 없지만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특히 아미천()이 성산의 산자락을 휘감아 돌면서 만들어낸 태극문양(太極文樣)은 일품이다. 반대편 산자락에 있는 재인폭포와 연계해서 한번쯤은 올라볼만한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샘골마을(연천군 연천읍 동막1)

3번 국도를 타고 연천방면으로 달리면 의정부, 동두천, 전곡읍을 지나 동막사거리(연천읍 동막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동막1()가 나온다. 이 다리 바로 못미처에 있는 사거리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만일 소형차량을 이용해서 이곳에 왔다면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는 샘골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참고로 동막리는 조선 초부터 요업(窯業)이 번창했다고 해서 '독막(陶幕, 甕幕)'으로 불리던 곳이다. 그러다가 차츰 어휘가 변하여 '동막'으로 굳어져 '동막리(東幕里)'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샘골(泉谷)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새로 들어선 마을이란다.

 

 

 

사거리에서 샘골마을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동막1(샘골) 0.3Km'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4분쯤 걸으면 오른편에 군부대(軍部隊)가 보이고, 성산으로 가려면 군부대 담벼락의 중간쯤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무심코 지나치려는데 동네 주민이 성산 가는 길은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신다. 이런 주민들이 있는 이상 들머리에 비록 이정표가 없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에 동막1리 문화 복지회관을 만나게 된다. 등산로는 복지회관의 조금 못미처에서 오른편으로 나있다. 들어서야 할 방향에 어린이 놀이터가 보이니 참조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놀이터에 시설이용안내판과 함께 성령산성에 대한 안내도도 세워져 있으니 오늘 걷게 될 산행코스를 한번쯤 챙겨보고 출발하면 될 일이다.

 

 

 

등산로는 어린이놀이터 뒤로 나있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잠깐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산길은 금방 완만(緩慢)하게 변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태실(胎室)에 이르게 된다. 태실은 왕실에서 태어난 아기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묻은 곳이다. 태를 담았다는 둥근 돌 항아리(胎缸) 뒤에는 안내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태실이 도굴된 탓에 누구의 태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내용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쯤 지나면 만나게 된다.

 

 

 

태실을 지나서도 산길은 변함없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연천군에서 등산로 정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답니다.’ 등산로 주변에 산을 파헤친 흔적이 많이 보인다고 했더니 산악회의 허고문님께서 친절하게 알려주신다.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등산로 주변의 묘()들을 이장(移葬)시킨 흔적이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등산로 정비에 쏟아 부은 정성들은 산행을 하는 동안 내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나면 처음으로 이정표(정상 3.0Km, 2/3등산로 1.0/4.7Km/ 1등산로 입구 1.2Km)를 만나게 되고, 곧이어 그저 아무렇게나 생겨먹은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범바위이다. 범바위는 부엉이 집이 있다고 해서 원래는 부엉이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부엉이가 벙으로 변했고, 이것이 다시 범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부엉이가 어쩌다보니 졸지에 호랑이()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이 바위를 보고 범의 형상을 찾아서는 안 될 일이다. 이를 알아차렸는지 맑은 연천 21’에서 바위에다 이에 대한 설명판을 매달아 놓았다. 고마운 일이다.

 

 

 

범바위에서 다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개활지(開豁地)가 나오면서 길 오른편 나무에 매달려 있는 팻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맑은 연천21’에서 매달아 놓은 것인데, ‘건쟁이라는 지명에 대해 설명을 해 놓았다. 지금은 비록 군인들의 탄약고(彈藥庫)가 들어앉아 있지만 6.25전까지만 해도 스물 다섯 가구가 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강릉 김씨 집안에서 여덟 명의 판서(判書)를 배출했을 정도로 터가 좋은 곳이라고 부연(敷衍) 설명을 해 놓았다.

 

 

 

건쟁이안내판에서 짧게 내려서면 안부삼거리(이정표 : 정상 2.5Km, 3등산로 4.2Km/ 2등산로 입구 0.5Km/ 1등산로 입구 1.7Km)에 이르게 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제2등산로로 이곳에서 내려가면 풍혈(風穴)이 나온다. 풍혈은 동막골 남쪽에 있는 전체 깊이 6m에 높이가 2.2m인 천연 바위굴로서, 무더운 여름철에는 얼음이 녹지 않을 정도로 찬 공기가 흘러나오고, 반대로 겨울철에는 그 주위에 얼음이 얼지 않고 따뜻한 김이 솟아오르는 기현상을 보이는 곳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 곳에다 잠종(蠶種)을 저장했었다고 전해진다.

 

 

 

갈림길에서 맞은편 능선을 타고 10분 남짓 올라가면 367.6m(이정표 : 정상 2.1Km, 3등산로 3.8Km/ 1/2등산로 2.1Km/0.9Km)이다. 꼭대기에 ‘CP3 전차대대라는 팻말이 꽂혀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군()의 훈련 시 전차대대의 후방지휘소로 사용되는 자리인 모양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지능선 하나가 갈려나가는데, 어쩌면 오봉고개로 가는 능선일 것이다.

 

 

 

367.6m봉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 산길은 가파르게 떨어졌다가 다음 봉우리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에 거북바위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의 길이 비록 희미하지만 의심하지 말고 그냥 들어서보자. 이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칠 경우에는 거북바위를 구경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저 위에 보이는 바위가 거북바위 아닌가요?’ 나 역시 집사람의 지적을 받고 나서야 왼편 산자락을 거슬러 올라가 거북바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만큼 길가에 보이는 팻말이 이정표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거북바위는 의외로 실망스럽다. 어거지로 이름을 갖다 붙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정도로 그 생김새가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요즘의 대세가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이고,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니까 말이다. 367.6m봉에서 거북바위까지는 12분 정도가 걸렸다.

 

 

 

거북바위를 지나면서 산길은 평지와 다름없이 완만(緩慢)해진다. 걷기가 편한 대신 산길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변화를 주지 못한다. 색다른 볼거리도 눈에 띄지 않을뿐더러, 능선에 가득한 나무들 때문에 조망(眺望)까지도 일절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맑은 연천 21 실천협의회에서 길가에 매달아 놓은 안내판이나 읽으면서 묵묵히 걷다보면 갑자기 가파른 오름길이 나타나고 이어서 거대한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서슬 시퍼런 암벽(巖壁)에 놀랐는지 슬그머니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위로 향한다. 벼랑의 위는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450m(이정표 : 정상 0.9Km, 3등산로 2.6Km/ 1/2등산로 입구 3.3Km/2.1Km)이다. 거북바위에서 이곳까지는 22분이 걸렸다.

 

 

 

 

450m봉에서 짧게 내려섰다가 다시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서려다 보면 거대한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이 벼랑을 피해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하다가 왼편으로 작은 샛길 하나를 만들어 놓는다. ‘전망대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길가 나무기둥에 매달려 있으니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전망대가 오늘 산행에서 백미(白眉)로 꼽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잘생긴 노송(老松) 한그루가 누워있는 전망대에 서면 눈앞에 수태극(水太極)이 펼쳐진다. 아미천()이 성산의 산자락을 휘감아 돌면서 만들어낸 태극문양은 말 그대로 현현(玄玄 : 현묘하고 심오함) 그 자체이다. 네 귀퉁이에 건곤감리(乾坤坎離)를 그려 넣은 우리나라 태극기(太極旗) 모양이 황홀하게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물이 만들어낸 태극문양인 것이다.

 

 

 

 

 

전망바위에서부터 비록 어설프기는 하지만 바윗길을 걷게 된다. 바윗길을 따라 6~7분쯤 걸으면 거대한 바위절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절벽의 아래를 따라 오른편으로 길게 이어지다가 절벽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겨우 위로 향한다. 그러나 그 길도 쉽지는 않다. 얼마나 경사(傾斜)가 심하던지 길가에 매어놓은 안전로프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위로 오르기가 힘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로프에 의지해서 위로 오르면 갑자기 평평한 분지(盆地)가 나타난다(이정표 : 정상 0.2Km). 이어서 3~4분 정도 더 걸으면 나타나는 오르막길을 잠깐 치고 오르면 드디어 성산의 정상이다. 전망대에서 20,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 50분이 지났다.

 

 

정상은 아까 올라올 때의 분위기와는 영 딴판이다. 거대한 바위벼랑 아래를 통과하여 정상으로 올라왔는데도, 정상은 의외로 흙으로 이루어진 널따란 분지(盆地)인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이곳을 자연산성(自然山城)으로 활용했던 모양이다. 바위로 둘러싸여 적의 접근이 어려운 대신에, 정상이 널따란 분지로 이루어져 있어 많은 숫자의 군인들이 주둔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정상에는 검은 오석으로 된 정상석과 이정표(1코스 1시간30/ 2코스 1시간5/ 3코스 35/ 4코스 40) 외에 성산에 대한 안내판 하나가 더 세워져 있다.

 

 

성산(城山)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산성(山城)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돌을 쌓아 놓은 흔적이 보인다. 설마 저게 성터? 혹시 성벽(城璧)이 아닐까 해서 가까이 다가가보니 군인들이 구축해 놓은 참호(塹壕)의 일부분이다. 하긴 참호도 일종의 방어선(防禦線)일지니 성터라고 부른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나저나 성령산성(城嶺山城)은 누가 일부러 쌓은 산성이 아니다.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절벽들이 만들어 낸 천연요새(要塞)를 산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북쪽과 남쪽이 절벽지대로 이뤄진 정상에 서면 뛰어난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북으로는 성산의 모산(母山)인 보개산(지장봉) 능선의 삼형제봉이 멀리 고대산과 함께 내다보인다. 그리고 남쪽의 사면(斜面)으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더 뛰어난 조망이 펼쳐진다. 발아래에는 동막골 계곡이 내려다보이고 그 뒤에는 소요산과 마차산, 감악산 등 수많은 경기도의 산군(山群)들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펼쳐진다.

 

 

하산은 북서릉을 타고 내려간다. 3~4분쯤 내려서면 왼쪽 절벽에 걸쳐있는 남근석(男根石)이 나타난다. 그런데 내 눈에 비치는 남근석은 영 볼품이 없다. ‘왜 이렇게 못생겼죠?’라는 내 농담에 되돌아오는 답변은 한층 더 농도(濃度)가 짙어진다. ‘성능만 좋으면 됐지 생김새가 왜 중요하누?’ 조금 더 농도를 높여볼까도 생각했지만 옆에 있는 집사람에게 눈치가 보여 그냥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아무튼 높이가 10m가 넘을 것 같은 남근석은 생김새는 별로지만 우람한 것을 보면 성능은 뛰어날 것 같다.

 

 

 

남근석에서 능선으로 난 산길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진 410m봉 앞에서 제3등산로와 제4등산로가 나뉜다.(이정표 : 4등산로(자라바위) 1.5Km/ 3등산로 입구(해태의 집) 1.3Km/ 정상 0.4Km, 1/2등산로 4.5Km/3.4Km) 이곳에서는 제4등산로를 택하는 게 바람직하다. 조금이나마 산행시간을 늘릴 수도 있을뿐더러, 능선을 타다보면 쌍둥이바위와 병풍바위 등 볼거리까지도 제공되기 때문이다.

 

 

 

4등산로인 410m봉 부근은 온통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길은 바위를 오르지 않고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키며 나있다. 길을 걸으며 자꾸만 두리번거린다. 지도(地圖)에 나와 있는 쌍둥이바위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바위는 눈에 띄지 않았다. 있기는 있었겠지만 이름표가 붙어있지 않은 탓에 그냥 지나쳤음이 분명하다.

 

 

410m에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거대한 바위벼랑이 나타난다. 바로 병풍(屛風)바위이다. 산길은 병풍바위의 왼편 벼랑 아래로 나있다. 물론 바위 위를 걸을 수도 있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선택하면 될 일이다. 바윗길의 초입을 놓쳐버린 우리부부는 벼랑 아래로 난 길을 따랐다. 만일 초입을 발견했더라면 바윗길로 진행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아랫길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벼랑아래를 걸으면서 왜 병풍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를 실제로 느낄 수도 있었고, 벼랑 아래에 뚫려있는 호랑이 굴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충분할 정도의 굴까지 덤으로 구경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린다.

 

 

 

 

산행날머리는 동막골유원지

병풍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급하게 고도(高度)를 떨어뜨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평탄하게 변한다. 원래부터 성산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이 그 이유일 것이고, 하나 더 든다면 병풍바위까지 길게 내려오면서 꽤나 많이 고도를 낮췄던 덕분일 것이다. 산길이 거의 평지에 이르렀다 싶으면 억새가 우거진 임도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군 훈련장을 통과하면 동막골유원지로 들어가는 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왼편으로 200m 정도 걸으면 동막골 오토캠핑장이 나오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 5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쉰 시간을 감안한다면 3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산행을 마친 후에는 근처에 있는 재인폭포(才人瀑布)에 들렀다. 재인폭포는 평지가 함몰(陷沒)되면서 만들어진 높이 18.5m의 폭포이다. 주상절리(柱狀節理:pillar-shaped joint)의 검은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자못 웅장하고, 폭포가 주변의 울창한 숲과 잘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아름다움에 반해 철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다고 한다. 재인폭포의 재인(才人)은 재주꾼을 이르는 낱말이다. 그 재인이라는 이름과 관련되어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傳說)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한다. 고을 원님의 탐욕으로 인한 재인(才人) 죽음과 그 아내의 강한 정절이 얽힌 이야기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이 고을 원이 한 재인(才人)의 아내가 절색인 것을 보고, 재인으로 하여금 이 폭포에서 줄을 타라고 시킨 후, 떨어져 죽게 하고 아내를 차지하려 하자, 그녀는 자결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재인의 한()이 서린 폭포라고 해서 재인폭포라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 하나가 더 전해져 내려오나 어차지 재인이 관련된 것은 마찬가지이고, 다만 재인을 살해한 사람이 원님이 아니라 동네사람들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니 더 이상 거론을 않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철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자 연천군에서 폭포 일대를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그중의 하나가 투명전망대이다. 낭떠러지 위에다 전망대를 만들었는데 바닥에 투명유리를 깔아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게 해놓은 것이다. 전망대 입구에 이르면 덧신을 넣어 놓은 함이 보인다. 강화유리에 흠집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는 신발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덧신을 신고 전망대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신발을 신은 채로 무작정 정망대로 들어서고 보는 것이다. 맨발로 걷고 있는 내가 더 이상한 모양이다. 희한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전망대를 빠져나오면 계곡 아래를 향해 길게 놓은 철()계단이 나타난다. 폭포의 높이가 18.5m이니 대략 7층 건물의 높이이다. 당연히 계단은 한 번에 바닥까지 이르지를 못하고 갈지()자로 몸부림을 친 후에야 바닥에 이른다. 계곡에 이르면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과 마주친다. 전망대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으로 폭포가 나타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