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덕산(望德山=왕기봉, 500.3m)-검단산(黔丹山, 538.1m)
산행일 : ‘17. 4. 9(일)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와 광주시, 하남시, 그리고 서울시 송파구의 경계
산행코스 : 이배고개→망덕산→검단산→남한산성→남문→수어장대→우익문(서문)→제5암문(연주봉옹성암문)→성불사(산행시간 : 4시간 20분)
함께한 산악회 : 산과하늘
특징 : 검단산과 망덕산은 남한산성과 산줄기로 연결되는 산들이다. 서울 남동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산행대상지를 들라면 다들 ‘남한산성’을 꼽는데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오늘 오른 산들 외에도 연주봉과 금암산, 이성산 등 작은 산들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산행을 하면서 ‘산성 돌이’를 덤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도심(都心)에서 가까운 탓에 접근성까지 뛰어나다. 그보다 더 뛰어난 장점도 있다. 전체코스가 산책하기에 딱 좋다는 것이다. 폭신폭신한 황톳길에 경사까지 완만한 것이 산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거기다 길이 넓어서 함께 온 일행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을 수 있다는 또 다른 장점도 갖고 있다. 그러다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기라도 할라치면 대상 스토리는 우리네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다. 역사공부가 시작되는 셈이다. 이런 장점들을 고려했을 때 가족 산행지로 최적이지 싶다.
▼ 산행들머리는 이배(二拜)재 고개(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오랜만에 수도권전철과 시내버스를 이용해서 접근이 가능한 근교산행을 나선다. 분당선(또는 8호선) 모란역 6번 출구에서 31-3 또는 30-2번 시내버스를 타면 쉽게 ‘이배재고개’까지 올 수 있다. 성남시(중원구 갈현동)와 광주시(목현동)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300m의 고갯마루인 이배재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과의 인연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퇴계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서 마지막으로 임금을 향해 절을 두 번 했다고 해서 ‘이배(二拜)’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죽지도 않은 임금을 향해 절을 두 번이나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까딱 잘못하다간 역적으로 몰렸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설을 찾기도 한다. 옛날 경상도와 충청도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한양이 보여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하여 한 번 절을 하고, 부모가 계신 고향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절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말이다.(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 육교(陸橋)로 연결되는 나무계단을 밟고 오르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폭 3m에 길이가 30m인 이 육교는 지역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지난 2015년에 새로 설치되었다. 338번 지방도가 지나가면서 성남시와 광주시의 경계능선이 단절되었었는데, 이 육교가 놓임으로써 두 시의 경계능선에 있는 망덕산과 영장산을 굳이 찻길을 건너지 않고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계단을 오른 후에는 무조건 육교를 건너야 한다. 반대방향은 영장산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 육교를 건넌 후에는 또 다시 계단을 올라야 한다. 제법 긴 계단이다. 그러고 나서도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 잠시 계속된다. 산길에는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경사가 없는 곳에까지 설치한 것이 눈길을 끈다. 그 궁금증은 밧줄에 매달린 안내판이 해소시켜준다. 나무들도 숨을 쉬어야하니 정규등산로 외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 망덕산으로 향한다. ‘성남누비길’ 이정표를 따라 능선을 따른다. 성남시에서 지역 주민들이 생활권을 중심으로 만들었다는 등산로이다. 성남시가 명칭 공모를 통해서 만들어 낸 이름인데 ‘더불어 누빌 수 있는 아름다운 숲길’을 뜻한단다. 성남은 크게 남한산성과 영장산, 불곡산, 발화산, 청계산 등이 보호막처럼 싸면서 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누비길’은 그런 시의 경계에 있는 산들을 연결시키는 산길이니 ‘시계등산로(市界登山路)’라 할 수 있다. 총 7개 구간(62.1㎞)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오늘 우리는 남한산성 남문에서 검단산과 망덕산을 거쳐 갈마치고개에 이르는 2구간(검단산길, 7.4㎞)의 일부를 걷게 된다. 참고로 나머지는 1구간인 남한산성길(복정동~남한산성 남문 7.5㎞)과 영장산길(3구간, 갈마치고개~태재고개 9.7㎞), 불곡산길(4구간, 태재고개~동원동 8.8㎞), 태봉산길(5구간, 동원동~하오고개 10.7㎞), 청계산길(6구간, 하오고개~옛골 등산로 입구 8.5㎞), 인능산길(7구간, 인능산 등산로 입구~복정동 9.5㎞)로 이루어져 있다.
▼ 능선은 온통 참나무들 차지, 아예 군락이라 불러도 되겠다. 언제부턴가 산길은 경사가 사라져버렸다. 다음에 오르게 될 망덕산의 높이가 500m에 불과하다보니 급하게 고도를 높일 이유가 없었던가 보다. 아무튼 산길은 정비가 잘 되어있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계단을 만들고 밧줄난간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질퍽거리는 곳에는 야자나무 잎으로 엮은 멍석을 깔았다. 이 모든 것은 ‘도립공원’ 측에서 심혈을 기울여 가꾸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길가에 돌탑들이 보인다. 제멋대로 생긴 자연석들을 각각의 특성들을 살려 쌓아올렸다. 흡사 돌들이 펼치는 아크로바트(acrobatics)를 보는 것 같다. 오래전 TV에서 별난 사람들이라며 저렇게 돌을 쌓아올리던 기인(奇人)을 소개한 일이 있었는데, 혹시 그가 이곳을 다녀갔는지도 모르겠다.
▼ 그렇게 10분 정도를 올랐을까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이어서 13분 후에는 벤치와 식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해놓은 또 다른 봉우리에 올라선다.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저 이정표(망덕산 0.6Km, 보통골 1.7Km, 안말 1.9Km/ 이배재고개 1.9Km) 하나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긴 이름도 없는 봉우리에 정상석이 세워져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망덕산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이정표에는 이 봉우리의 이름을 ‘형제봉’이라고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기관에서 만든 시설물이니 옳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 망덕산으로 향한다. 어쩌다 아래와 같이 커다란 바위가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흙길이다. 아니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산길이라고 하는 게 이해가 쉽겠다. 경사 또한 거의 없는 편안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중간에 보통골로 내려가는 길(이정표 : 망덕산↑ 0.4Km, 안말 1.5Km/ 보통골← 1.3Km/ 이배재고개↓ 1.3Km)이 왼편으로 나뉘니 참조한다.
▼ 산길은 무척 순하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널찍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산악마라톤 행사가 자주 열린다고 한다. ‘산악자전거’ 마니아들로부터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 그렇게 15분쯤 진행하면 망덕산 정상에 올라선다. 왕기봉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봉우리이다. 정상은 식탁과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정상표지석은 그런 시설물들 사이에다 배치했다. 조금 어수선한 풍경이지만 좁은 공간을 활용하다보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망덕산은 둘레길을 걷다가 쉬어가는 중간의 쉼터라고 보면 되겠다.
▼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말고도 이정표(검단산↑/ 두리봉→ 1.8Km, 군두레봉)를 세워 놓았다. 하단에 ‘성남누비길’의 지도를 그려놓은 이정표이다. 갈마치고개에서 남한산성 남문에 이르는 ‘검단산길’의 중요지점들을 표기하고 각 지점들 사이의 거리를 적었다. 성남누비길은 성남시계등산로와 거의 비슷한 구간에 만든 걷기 길이다. 남한산성에서 내려오는 누비길은 이배재고개를 지나고 갈마치고개~태재고개를 지나 청계산 등을 아우르며 성남시를 한 바퀴 두른다. 아무튼 지도에는 조금 전에 올랐던 봉우리를 ‘형제봉’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 검단산으로 향한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저 산책하듯이 즐기면서 걷기만 하면 된다. 그저 중간에 만나게 되는 갈림길에 신경을 쓰지 말고 곧장 능선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첫 번째 갈림길은 ‘두리봉 갈림길’(이정표 : 검단산↑ 2.1Km/ 두리봉→ 2.0Km/ 망덕산↓ 0.2Km)이다. 이어서 ‘사기막골 갈림길‘(이정표 : 검단산↑ 1.0Km/ 사기막골← 0.5Km)과 ’윗말 갈림길‘(이정표 : 검단산↑ 1.1Km/ 윗말→ 1.0Km/ 망덕산↓ 1.2Km), ’황송공원 갈림길‘(이정표 : 검단산갈림길↑ 0.7Km/ 황송공원← 2.8Km, 용천약수 0.8Km/ 망덕산↓ 1.3Km), ’불당리 갈림길‘(이정표 : 검단산↑ 0.7Km/ 불당리→, 윗말 1.1Km/ 망덕산↓ 1.4Km) 등이 줄줄이 나타난다.
▼ 가는 길에 ’만수천약수터‘가 보인다. 목이라도 축여볼까 해서 다가가 보지만 물줄기는 메말라 있다.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어쩌다 한 번씩 떨어져 내리는 정도이다. 요즘 봄 가뭄이 심한가 보다.
▼ 길가의 얼러지꽃이 꽃대를 올리고 있다. 도심(都心)의 꽃들은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지 이미 오래인데 아직까지도 꽃망울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리 낮더라도 산은 산인가 보다.
▼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검단지맥의 일부구간이다. 검단지맥은 한남정맥 상의 선장산(350m) 북쪽 1.7km 지점인 향린동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법화산(383.3m)과 영장산(414.2m), 성남 검단산(523.9m), 용마산(595.5m), 하남 검단산(658.4m) 등을 일군 후 팔당대교 남단에서 그 숨을 다하는 길이 약 4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산꾼들은 대개 용인시 기흥구 향린동산에서 이배재까지를 1구간, 이배재에서 은고개를 2구간, 그리고 은고개에서 바깥창모루(팔당대교)까지를 3구간으로 나눈다. 그러니까 오늘은 검단지맥 2구간 중 일부(이배재에서 남한산성 제5암문)를 걷게 되는 셈이다.
▼ 망덕산을 출발한지 30분 남짓 되었을까 사거리(이정표 : 검단산↑ 0.5Km/ 남문↗ 2.8Km/ 불당리→ 2.3Km/ 망덕산↓ 1.7Km)가 나온다. 만일 맞은편 능선 위에 있는 검단산에 들르지 않고 곧장 남문으로 가고 싶을 때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된다. 검단산으로 향한다. 통나무계단을 잠시 오르니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검단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만이다. 정상은 헬기장을 겸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바닥에다 철판을 깔아놓았다. 정상표지석은 헬기장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의 나무에 가려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그저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원래의 검단산 정상이 살짝 나타날 뿐이다.
▼ 검단산 정상에는 통신시설이 들어서 있어 오를 수가 없다. 대신 맞은편에 있는 이곳 헬기장에 정상표지석을 세웠다. 검단산의 정상 역할을 대신할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참고로 하남에도 ‘검단산’이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증이 생기는 게 정상일 것이다. 오늘 걷고 있는 코스가 ‘검단지맥’인데 어느 검단산을 갖다 붙인 이름인가로 말이다. 결론은 하남에 있는 검단산이다. 657m로 검단지맥에서 가장 높기 때문이다. ‘높은 게 장땡’이라는 말은 꼭 놀음판에서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닌 모양이다.
▼ 준비해간 막걸리를 비운 후 산행을 이어간다. 이제부터 임도를 따른다. 잠시 후 ‘공군 8630부대’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그러고 보니 검단산 정상에 보이던 시설이 공군의 레이더기지였던 모양이다.
▼ 통행이 허용되는 길(남문방향)로 몇 걸음 옮기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남문 2.4Km, 종로 2.7Km/ 이배재 3.0Km/ 검단산 0.1km)가 나온다. 오른편으로 난 데크길은 이배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다시 말해 아까 검단산으로 오르기 직전에 헤어졌던 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는 얘기이다.
▼ 임도는 시멘트포장으로 바뀌어 있다. 왼편의 검단산 정상방향으로는 철조망과 지뢰지대 표시판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잠시 후 길이 둘로 나뉜다. 임도 말고도 능선을 따르는 오솔길 하나가 더 늘어난 것이다. 두 길은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니 어느 길을 선택할 지는 걷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 주의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남한산성유원지로 내려가는 길이 가끔 나뉘지만 개의치 말고 남문방향으로 진행하라는 것이다.
▼ 그렇게 20분 남짓 진행하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남문↑ 0.8Km/ 남한산성유원지← 2.0Km/ 검단산↓ 1.8Km)를 만난다. 아니 임도까지 포함시킬 경우에는 사거리가 되겠다. 임도와 헤어져 남문방향의 오솔길로 들어서면 정자와 체력단련기구 몇 점이 있는 쉼터(이정표 : 남문↑ 0.6Km/ 남한산성유원지(영도사)← 1.2Km/ 검단산↓ 2.0Km)가 나온다. 이곳에서도 남한산성유원지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지만 개의치 않고 남문으로 향한다.
▼ 진행방향에 보이는 봉우리 위에 쌓아올린 성벽(城壁)이 나타난다. 531m봉에 있다는 ‘제1 남옹성(南甕城)’일 것이다. 옹성(甕城)이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문 밖에 반원형(半圓形)이나 삼각형으로 축성된 작은 성을 말한다. 월성(月城)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보지만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옹성에 군사를 주둔시키기 위해서는 본성과 성벽으로 연결시키게 되는데, 아직까지 이 연결구간의 복원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참고로 남한산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옹성이 있다. 북쪽과 동쪽에 각각 하나씩이 있고, 나머지 세 개는 남쪽에 배치했다. 그렇다면 왜 남쪽에만 3개의 옹성을 축조했을까? 다른 사면(斜面)에 비해 경사가 완만해서 적의 공격이 용이했기 때문이란다. 검복리와 불당리의 계곡을 통한 직접공격이나 검단산(해발고도 534.7m)을 통한 공격에 대비했다는 것이다.
▼ 이후부터 산길은 성벽의 아래를 지난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작은 흠이지만 고풍스런 성벽을 끼고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서울 남동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산행지는 누가 뭐래도 ‘남한산성도립공원’이 아닐까 싶다. 검단산과 망덕산, 연주봉, 금암산 등 작은 산들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산행을 하면서 ‘산성 돌이’를 덤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성벽을 따라 걷길 12분 여, 진행방향 저만큼에 남문(南門)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남한산성의 중심 문으로 동서남북 네 개의 문(門) 중에서 가장 웅장하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성문 앞은 무척 어수선하다는 느낌이다. 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안내판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 ‘검산단길’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검단산에 대한 설명을 나열한 뒤에 그 아래에다 갈마치고개에서 시작해 이배재와 망덕봉, 검단산, 남문, 불망비를 거쳐 산성역에 이르는 검단산길의 각 구간 거리를 표시해 놓았다. 그 옆에는 7구간으로 이루어진 ‘성남누비길’의 안내판도 보인다.
▼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고 한다. 인조는 이곳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하였다. 하지만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남문의 또 다른 이름은 지화문(至和門)이다. 정조 3년에 성곽을 개보수하면서 새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때문에 사람들의 출입이 가장 빈번하다.
▼ 성문 밖에는 350년이나 묵었다는 몇 그루의 거대한 느티나무가 있다.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어 있는 이 느티나무는 성곽 사면의 토양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어떤 나무는 이미 생명을 다한 듯 완전히 헐벗은 모양새이다. 그만큼 이곳 남한산성이 오래 묵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 성문이 만들어내는 아치형 액자의 틀 안에 늙은 느티나무가 들어와 있다. 조선 시대에 영험한 당산나무였다는 설이 전해지는 나무이다. 아직까지도 그 효력이 남아있다고 믿었는지 지금도 그 앞을 지나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 성안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성벽의 위를 따른다. 남문을 지나면서 등산객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성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대부분 서문으로 향한다. 서문 쪽이 볼거리가 더 많을 뿐만 아니라 조망까지도 툭 트이기 때문이다. 성남에서부터 서울의 잠실에 이르는 도심(都心)이 그 속살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 성곽을 따라 걷는 다는 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거의 같은 풍경이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한산성만은 예외이다. 주변의 풍광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특히 눈앞에 펼쳐지는 서울시가지에 대한 조망은 바라보는 장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 고도(高度)가 높아질수록 시야가 넓어지더니 언제부턴가 잠실의 롯데타워가 눈에 들어와 있다. 유난히도 우뚝 솟아오른 게 서울의 랜드마크(landmark)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겠다.
▼ 수어장대로 향하는 길은 다소 가파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오르다보면 힘들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 층계를 오르면 성벽 아래로 암문(暗門)이 나타난다. 남한산성의 여섯 번째 암문(暗門)인 ‘서암문’이란다. 암문(暗門)이란 성곽에 문루(門樓)를 일부러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을 말한다. 일반인이나 적들이 알지 못하게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만들었으며, 전시(戰時)에는 적이 모르게 물자를 이송하곤 했다. 남한산성에는 이런 암문이 모두 열여섯 개나 된다. 그만큼 성곽이 컸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런 암문을 숨겨놓을 수 있을 정도로 지형이 험했었을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이 암문은 청군(淸軍)에게 포위돼 있던 1637년(인조 15년) 1월 23일 공격해 오던 적병을 물리친 승리의 현장이라서 파적지(破敵地)라고도 불린다.
▼ 잠시 후 나타나는 오른편 봉우리가 본성 최고봉인 청량산(淸凉山,483m)이다. 수어장대(守禦將臺)가 있는 이곳 청량산(497m)은 남한산의 주봉(主峯)이다. 높이는 동쪽에 있는 남한산(522.1m)이 더 높지만 수어장대가 있다고 해서 그리되었지 않나 싶다. 하지만 주봉이 주변의 봉우리들보다 낮은 대가는 혹독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대가 그곳에다 대포를 놓고 행궁에다 막 쏘아댔기 때문이다. 난공불락의 성 안에서 인조가 항복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벌봉(515m)과 한봉, 검단산(538.1m)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청나라 군대는 홍이포(紅夷砲)를 이 세 봉우리에 놓고 산성 안을 향해 포를 쏘았다. 홍이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지 47일 만에 항복했다. 인조는 서문으로 나가 지금의 잠실 석촌호수 부근인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네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는 ‘사배구고두(四拜九叩頭)’의 굴욕을 당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전략적 요충지인 세 봉우리를 사수하기 위해 숙종 12년(1686)에 외성인 봉암성을, 19년(1693)에는 한봉성을, 45년(1719)에는 신남성을 축성했다. 벌봉 바로 앞의 커다란 바위에는 봉암산성 신축에 관한 비문이 적혀 있기도 하다.
▼ 정상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 西將臺)가 자리하고 있다. 동서남북의 4개 장대(將臺)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이다. 이층 누(樓)에는 봉림대군(효종)의 심양 생활과 북벌의 정신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영조(英祖)가 무망루(無忘樓: 잊지 말자는 누각)라는 편액의 글씨를 썼다. 마당 한쪽 귀퉁이엔 ‘守禦將臺’라고 각자(刻字)가 되어있는 바위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아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매바위’이다. 남한산성 축성 때 동남쪽 부분의 공사가 지지부진한 책임을 물어 담당자였던 이회장군을 참수(斬首)하자 이 바위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 수어장대를 둘러봤다면 이젠 서문(西門)으로 갈 차례이다. 이 구간 역시 조망을 즐기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렇다고 너무 서두를 일은 아니다. 수어장대 좌측 아랫단에 있는 청량당(淸凉堂)이라는 사당을 놓치지 말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충신의 넋을 잠시라도 위로해보자. 경기도 유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어 있는 청량당에는 횡수대감(橫數大監)으로 불리는 이회장군과 그의 부인 송씨와 첩실 유씨, 벽암 각성대사를 비롯해 무속신장들인 백마신장, 오방신장, 군웅장군, 별상장군, 대신할머니가 모셔져 있다. 여기서 하나 알아두고 넘어가자. 삼남지방에서 공사비 모금활동을 하다가 돌아온 이회장군의 부인 송씨와 첩실 유씨는 남편이 억울하게 참수를 당한 것을 알고 모금해온 쌀을 모두 송파강에 던지고 물로 뛰어 들어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녀들이 쌀을 던졌던 송파나루 앞은 쌀섬여울이라 불리었는데, 이들이 자결한 한강과 탄천이 만나는 위치 옆 무동도(舞童島) 근처에서는 궂은 날이면 여인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다. 이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잠실동 313-1번지 부근에 부군당(府君堂, 호구부인당, 애기씨당)을 세웠는데 1971년 잠실이 개발되면서 이제는 이야기로만 남았다.
▼ 잠시 후 서문(西門), 즉 우익문(右翼門)을 만난다. 1637년 1월 30일 47일간의 항쟁을 끝내고 인조는 이 문을 통하여 마천동→오금동→가락본동(故廣州)→송파동을 거쳐 석촌호수 남쪽 어딘가에 설치된 수항단(受降檀) 앞에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이 문이 ‘통곡의 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된 이유이다. 아무튼 그 후에 세운 삼전도비(淸太宗功德碑)는 지금도 롯데호텔 남쪽 석촌호수가에 서 있다. 태생이 반갑지 않은 비(碑)였으나 부끄러움도 역사이기에 교훈으로 삼고자 다시 옮겨 세웠단다. 256년간이나 서 있던 이 비는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고종 32년(1895년)에 강물 속에 수장해버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인양돼 다시 세워졌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조선이 본래부터 남의 지배를 받았던 민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해방이 되자 이 비석은 주민들에 의해 다시 땅 속에 묻혔는데 1963년 큰 홍수가 나자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끈질기게도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서울시가 역사교육을 위해 다시 세웠단다.
▼ 죄인이 되어 남색 옷을 입었던 인조의 행태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으며 성문을 나선다. 성문 밖 오른편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에 서면 서울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뒤에는 미세먼지 때문에 조금 희미해졌지만 청계산과 관악산, 그리고 북한산에서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전망대의 입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을 듯 싶다.
▼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투어를 이어간다. 성곽에 설치된 수많은 시설들은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보아 넘길 게 없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만일 산행을 나서기 전에 미리 복습을 해왔다면 ‘산성 걷기’는 그만큼 더 재미있을 것이다. 서문 앞쪽의 작은 언덕에 있는 ‘매탄(埋炭)터’도 그중의 하나가 일 것이다. 산성에는 많은 이들이 주둔하였기에 식량 이외에도 간장, 구운 소금, 숯 등을 비축해야만 되었다. 1847년(헌종 13)에 홍경모(洪敬謨)가 편찬한 경기도 광주군의 읍지(邑誌)인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94곳에 2만4192섬을 묻었다는 내용이 상세히 전해진다. 지금이라도 이곳을 파면 오래 전 묻은 숯이 나올 듯하다.
▼ 잠시 후 남한산성의 다섯 번째 암문(暗門)인 ‘연주봉 옹성(甕城) 암문’을 만난다. 이 암문은 연주봉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서쪽에는 성벽에서 2m정도 돌출된 치(雉 :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하여 성벽 밖으로 여기저기 내밀어 쌓아 놓았던 돌출부)가 있고, 북쪽으로는 직선 길이 150m 정도의 연주봉옹성과 연결된다. 문은 개구부 외부는 홍예식(虹霓式)이고 내부는 평거식(平据式)으로 만들어져 있다. 남문으로 들어서서 이곳 암문을 빠져나오기까지는 대략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체되었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 암문을 통과하면 길은 오른편에 성벽(城壁)을 끼고 나있다. ‘연주봉 옹성(甕城)’으로 연결되는 통로의 외벽(外壁)이다. 북으로 길게 뻗어나간 성벽이 참 아름답다. 아무튼 옹성(甕城)은 성문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접근하는 적을 삼면(三面)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이다. 적이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옹성을 통과해야만 한다. 참고로 남한산성에는 총 5개소에 옹성이 축조되어 있다. 남쪽에 3개, 그리고 동쪽(장경사신지옹성)과 북쪽으로 각각 1개의 옹성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방어에 취약한 지점에 설치되어 있다. 그중 북쪽에 쌓은 옹성이 ‘연주봉옹성’이다.
▼ 연주봉옹성과 헤어지고 나면 산길은 정북(正北)으로 향한다. 연주봉에서 분기해서 북으로 뻗어나가는 이 능선은 금암산과 이성산으로 이어진다. 하남시에서는 이 능선을 ‘위례둘레길’이라는 이름으로 깔끔하게 정비를 해놓았다. ‘위례둘레길’은 하남시에서 조성한 ‘걷기 코스’인 ‘하남 위례(河南 慰禮)길’의 한 구간이다. 하남위례길은 ‘위례사랑길’, ‘위례강변길’, ‘위례역사길’. ‘위례둘레길’ 등 4개의 코스(총 64Km)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위례둘레길은 하남시청을 출발해서 샘재와 남한산성(벌봉), 금암산, 이성산을 거쳐 덕풍골에 이르는 총 길이 37.9Km의 코스이다. 이 구간은 위례성의 궁안 지역을 둘러싼 산을 걸으며 하남시의 옛날과 오늘을 돌아볼 수 있음은 물론 남한산성의 성곽과 벌봉, 금암산 등을 지나면서 하남시는 물론 덤으로 서울시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 힘들게 지고 올라간 술을 남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없다며 최군이 자리를 잡는다. 그래 마침 시간도 넉넉하니 말끔하게 비워보자. 그래도 양이 차지 않는다면 하산지점에서 뒤풀이를 하면 될 일이고 말이다.
▼ 잠시 후 갈림길(이정표 : 성불사↖ 1.8Km/ 위례둘레길(이성산성)↗ 4.9Km, 푯말삼거리 0.9Km, 궁안갈림길 3.1Km/ 서문↓ 0.7Km)이 나타난다. 왼편 성불사 방향으로 내려서면서 서문에서부터 함께 해온 ‘위례둘레길’과는 이별을 고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데크계단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 이 구간도 역시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꽃망울을 활짝 연 진달래꽃들이 자기를 보아달라며 길손을 유혹한다. 마침 시간까지도 느긋하니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꽃들에 눈 맞추며 조금 더 내려가니 또 다시 갈림길(이정표 : 성불사 0.8Km/ 호국사 0.8Km/ 연주봉옹성 1.3Km)이 길손을 맞는다. 이곳에서도 성불사 방향으로 진행한다.
▼ 한마디로 산은 잘 가꾸어져 있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계단이나 밧줄난간을 설치했고,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다. 그리고 조그만 공간이라도 생길라치면 벤치를 놓았다. 심지어는 체력단련장과 배드민턴장까지 만들어 놓았을 정도이다. ‘도립공원’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관리라 할 수 있겠다.
▼ 산행날머리는 성불사(하남시 학암로9번길 64)
그렇게 40분 정도를 내려가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1976년에 창건되었다는 성불사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물론 ‘연주봉암문’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20분이 걸렸다. 하지만 시간에 의미를 둘 일은 아닌 것 같다.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걷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