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산(修德山, 794.2m)

 

산행일 : ‘19. 3. 9()

소재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산행코스 : 내가둘기 버스정류장’‘숲속나들이 펜션입구남쪽 능선수덕산 정상북쪽 능선애기고개임도도솔천사 앞 버스정류장(산행시간 : 4시간5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경기 최고봉인 화악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마지막에 우뚝 솟은 막내둥이 봉우리로, 명지산과 화악산 등 인근의 유명산들에 가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산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그리운 산이라 하겠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사방에 널려있는 기암괴석들을 눈에 담으며 걷는 재미도 쏠쏠한 편이다. 반면에 단점도 있다. 등산로가 잘 트여져 있지 않아 길 찾기에 애를 먹기도 한다. 거기다 가파르기 짝이 없는 능선에는 활엽수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위험하다는 얘기이다. 초심자들이 단독으로 오르기에는 무리일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상가둘기버스정류장(가평군 북면 제령리 619-5)

모처럼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한 산을 찾았다. 경춘선 전철 가평역에서 내려 군내버스(33-4)를 갈아타고 용수동(종점)으로 들어가다 상가둘기마을에서 내리면 된다. 길 건너에 있는 예쁘장한 외모의 하모니펜션을 기점으로 삼으면 되겠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버스의 배차 간격이 뜸(90)하니 출발 전에 미리 시간표를 체크해봐야 한다.





버스에서 내린 다음 버스가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 나오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100m 남짓 걷자 왼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들머리에 숲속나들이꼬리별‘, ’롯데‘, ’나들이등 펜션의 간판들이 너절하게 걸려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펜션지구를 통과하면 탐방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길은 가평의 상징이랄 수 있는 잣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이어진다. 코끝을 스쳐가는 진한 내음이 상큼하기 짝이 없다. 그 향기 속에는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묻어 있을 것이다. 소나무가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이니까 말이다.



이런 길에서는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걸음은 더디게 그리고 호흡은 크게 하면서 느긋하게 걸어본다. 코끝을 맴돌던 솔향이 온몸으로 펴져나간다. 그리고 심신(心身)은 한없이 맑아진다. 피톤치드의 효과가 아닐까 싶다. 피톤치드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이 각종 병충해(病蟲害)에 저항하기 위해 배출하는 분비물(分泌物)을 말한다. 이 물질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균작용은 물론이고, 장과 심폐기능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스트레스 해소에도 뛰어난 효능이 있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쯤 지나자 능선에 올라선다. 희미하게나마 왼편으로도 길이 나있다. ’한울림펜션입구에서 올라오는 길일 것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이정표를 만난다. 정상까지 2가 남았단다. 그리고 출발지점에서 이곳까지는 800m란다. 하지만 그 출발지점이 어디를 말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이정표가 낡았다는 얘기이다.



능선은 좌우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른편은 밋밋한데 반해 왼편은 수직에 가까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왼편에 아일랜드코쿤 펜션이 내려다보인다. 클럽형의 펜션이라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비큐(barbecue)는 물론이고 수영장과 카페에다 음악까지 갖추었으니 젊은이들이 좋아할만 하겠다.



능선에 올라선지 15분쯤 지나자 산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아니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고도(高度)를 높일 수 있으니 엄청나게 가파르다는 표현이 더 옳을 수도 있겠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기괴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얼핏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닮은 것도 같은데 지도에는 헬기바위라고 적혀있다. 그러고 보니 헬기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마침 바위가 향하고 있는 서쪽 사면(斜面)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날아가기 직전의 헬기라 해도 되겠다.



이후부터는 기암괴석의 연속이다. ’자연이 빚은 조각공원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로 멋진 바위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앞서가던 최군의 아이들이 자신들이 올라선 바위의 이름을 물어온다. 엉겁결에 튀어나온 이름은 너럭바위‘. 열두어 명은 너끈히 올라앉을 정도로 널찍하니 내가 생각해도 잘 지은 이름이다.




다음은 고인돌 바위. 지도를 확인해보지도 않고 이름은 지어내며 작은 굄돌 위에 두꺼운 덮개돌을 올려놓는 남방식 고인돌에 대한 설명까지 덧붙여주니 아이들이 여간 좋아하지 않는다. 지도에도 고인돌 바위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참나무 일색이던 숲이 언제부턴가 낙엽송(일본 이깔나무)로 뒤바뀌어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비견되는 명언들을 떠올려본다.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William Smith Clark)‘가 남긴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아니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리차드 버크의 주장이 더 옳을 수도 있겠다. 결과적으로 뭔가를 이루고 싶다면 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겠다.



바위의 빈도가 점점 짙어간다. 바위를 넘어갈 수 없는 곳에서는 우회를 해가며 진행한다. 자칫 방심하다간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구간도 나온다.




그러다 마주치는 바위가 구멍바위. 바위의 하단에 구멍이 뻥 뚫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입에서는 통천문(通天門)‘이란 단어가 스스럼없이 튀어나온다. 작년엔가 지리산 종주를 마쳤다고 하더니 통천문에 대한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다.




바윗길은 꽤 오래 계속된다. 중간 중간에 흙길이 끼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1시간쯤 진행하자 이정표(애기봉5.40/ 제령리2.90/ 가둘기2.25) 하나가 나타난다. 오른편은 제령리에서 올라오는 또 다른 등산로, 정상은 물론 왼편이나 이정표에는 코앞에 위치한 수덕산을 놓아두고 한참을 더 가야 만날 수 있는 애기봉을 표기해 놓았다.



잠시 후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만이다. 2.3를 오르는데 2시간이 걸렸으니 꽤나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웠던 것은 결코 아니다. 초등학생, 그중에서도 저학년인 최군의 두 아이들과 함께 올라왔음을 감안해야 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삼각점(춘천 315, 2005재설)과 이정표(애기봉 5.27/ 해독 불가)가 설치되어 있다.



정상표지석은 허리가 부러진 것으로도 모자라 상반신은 아예 눈에 띄지도 않는다. 수덕산(修德山)덕을 갈고 닦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후덕한 몸매를 지닌 흙산으로 연상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우리가 오른 수덕산은 경사가 가파른 바윗길이 대부분이었다. 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얘기이다. 여기서 추론(推論)’ 하나. ’()‘으로 여기고 산행을 시작한 어느 산꾼이 이름과는 너무나 다른 산의 생김새에 분통을 터뜨리며 정상석을 파괴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 대신에 ()‘이나 ()‘ 자를 써야 한다면서 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이다. 북으로는 명지산과 화악산, 서쪽으로는 구나무산 운악산 등이 연봉으로 이어지지만 그저 나뭇가지 사이로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여름철에는 그마저도 눈에 담을 수 없을 게 분명하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애기봉 방향의 능선이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낮추어간다. 하지만 개중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음을 알아두어야 한다.




가끔은 길이 끊어지기도 한다. 낭떠러지에 가까운 벼랑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때는 당황하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 보는 게 옳다. 잠시 후 오른편, 또는 왼편으로 나있는 우회로(迂廻路)가 눈에 띌 것이다.




수덕산 능선의 매력은 참나무 숲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나무가 떨어뜨린 낙엽은 장애가 되기도 한다. 가뜩이나 비탈진데다 낙엽까지 수북이 쌓여 미끄럽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내지르는 낙엽의 비명소리는 등산객들에게는 기분 좋은 흥취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





그렇게 1시간쯤 진행했을까 첫 번째 삼거리(이정표 : 애기봉3.92/ 도대리1.96/ 수덕산1.48)가 나타난다. 왼편은 산행을 시작했던 가둘기마을과 하산 예정 지점인 도솔천사와의 중간쯤에 위치한 도대리로 연결된다. 가평으로 나가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니 계속되는 산행이 버거운 사람들은 이곳에서 탈출해도 좋을 것 같다는 얘기이다. 다만 내려가는 길이 경사가 심해서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또한 길이 또렷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능선은 참나무 일색이다. 그것도 대부분이 오래 묵었다. 그만큼 인적이 뜸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6분 후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애기봉3.62/ 신촌3.00/ 수덕산1.78)가 나온다. 신촌방향의 길은 아까 도대리로 내려가는 길보다 더 희미하다. 거리도 3나 되므로 하산지점으로 권장할 일은 아닐 것 같다.



그 귀하다는 연리목(連理木)‘을 만났다. 비록 아랫동이지만 두 나무가 하나로 붙어있는 형상인 것이다. 문득 연리지에 끝없는 사랑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했던 장한가(長恨歌)’가 떠오른다. 백낙천이 쓴 장대한 서사시(敍事詩)로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나눴던 사랑이야기이다. 그리고 집사람에게 그 구구절절(句句節節) 사랑표현을 립 서비스(lip-service)라도 해주고 싶은데 집사람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만큼 멀리 달아나 있다.



능선을 차지한 암석들로 인해 애초부터 길을 우회시키는 구간도 간혹 나타난다. 이런 우회구간은 하나 같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내려서는 게 만만치 않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뭔가를 가리킨다. 카메라에 담을 만한 뭔가가 있다는 표시이다. 물결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는 나뭇결이 생소했던 모양이다.



어떤 곳에서는 엉덩이를 아예 땅바닥에 대고 미끄러져 내려가야만 하는 곳도 나온다. 이곳에서 난 최군의 특이한 교육방식을 발견했다. 상당히 위험한 구간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자신의 힘으로 내려오도록 하는 것이다. 아래쪽에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요즘의 젊은 부모들에게서는 좀체로 볼 수 없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애기고개에 가까워지면서 벙커 등 군의 시설이 자주 눈에 띈다.



하산을 시작한지 2시간 만에 애기고개에 도착했다. 화악리와 익근리를 잇는 고갯마루인데 정상에서 3.7밖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할 때 엄청나게 오래 걸은 셈이다. 그만큼 내려오는 길이 험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널따란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고개에는 좌우로 길이 나뉨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너무 낡은 탓에 거리는 물론이고 지명까지도 해득(解得)이 불가능하다.



애기고개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조금 전에 올랐던 수덕산은 안 보이지만 화악산과 명지산 줄기가 제법 또렷하게 나타난다. 남쪽의 구나무산과 동쪽의 가덕·북배산 줄기도 또렷하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3.4길이의 임도는 왔다갔다 갈 지()’자를 그리며 고도를 낮추어 간다. 거기다 포장까지 되어 있어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기에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그게 싫어선지 딱 한곳이지만 지름길은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단축되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으니 샛길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끈질긴 생명력, 거름기 하나 없는 바위틈새에서도 개의치 않고 꿋꿋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삶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렇게 왕성하게 가지를 뻗어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게 50분쯤 내려서자 오른편 산자락에 자리 잡은 도솔천사가 눈에 들어온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도솔천사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지만 올라가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했다. 미리 주문해놓은 토종닭 백숙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식당이 물론 도솔천사 앞의 도로가에 위치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날머리 근처에서 만나게 되는 사방댐은 아직도 얼음이 꽁꽁 얼어있다.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튀어나온다는 경칩(驚蟄)이 벌써 지났건만 산골에서는 아직도 동장군이 물러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도솔천사 앞 버스정류장

임도로 들어선지 50분쯤 되자 75번 국도로 연결되는 날머리에 이른다. 도솔천사의 진입로를 겸하고 있는지 절의 표지석 말고도 사천왕상으로 보이는 석상이 입구의 양 옆을 지키고 서있다. 그나저나 오늘 산행은 6시간 정도가 걸렸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 50분이 걸린 셈이다.


울업산 신선봉(蔚業山 神仙峯, 380.9m)

 

여 행 일 : ‘18. 11. 10()

소 재 지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산행코스 : 청심빌리지임도돌탑봉전망대정상선촌1리 마을회관설악면버스터미널(소요시간 : 3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선촌리(가평군 설악면)의 동북쪽에 위치한 뒷산으로 청평호를 따라 동서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산이다. 하지만 긴장감을 늦추어서는 결코 안 되는 산이다. 해발이 400m에도 못 미치는 아담한 산이지만 능선의 한쪽 면을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이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산의 특징은 바윗길을 오르내리는 쏠쏠한 재미라 하겠다. 조망 또한 빼어나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청평호가 발아래에 펼쳐지는가 하면 호명산과 뾰루봉, 화야산, 보납산, 봉미산 등 주변의 산들이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글에선가 잘 알려지지 않은 산, 때 묻지 않은 산으로 소개하고 있었는데 정확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 할 산으로 꼽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청심빌리지(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711-1)

오늘도 근교산행이다. 경춘선 전철 청평역에서 내려 근처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군내버스(32-23)로 갈아타고 오가다 청심빌리지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하지만 운행간격이 너무 길다는 단점이 있으니 운행시간을 미리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하겠다. 지하철 잠실역 5번 출구에서 7000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청심국제병원까지 와서 들머리까지 걷는 방법도 있겠다. 참고로 우리 부부는 승용차를 이용했다. 설악면 소재지에 있는 설악골이라는 식당에 차를 주차시킨 다음 택시를 이용해 들머리까지 이동했다. 근처에 있는 산들을 오를 때마다 이용하는 식당인데 산삼백숙과 오리로스, 장작불삼겹살 등 다양한 메뉴를 갖추고 있어 뒤풀이하기에 딱 좋기 때문이다.




청심빌리지를 왼편에 끼고 걸으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전면에 청심국제병원건물이 보인다면 제대로 방향을 잡은 셈이다. 참고로 청심빌리지60세 이상 어르신들이 거주하는 실버타운이다. 호텔과 같은 분위기 속에 의료와 문화, 레저시설은 물론 각종 편의시설 및 서비스 기능을 갖춘 노인전용 복합단지 시설이다. 지하 2, 지상 10층 규모로 총 155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다.



빌리지의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왼편으로 꺾어 들어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임도를 따른다. 청평호로 이어지는 임도이다. 임도를 따르다보면 산책을 즐기는 어르신들이 가끔 눈에 띈다. 호수가 잘 보이는 곳곳에는 벤치도 놓여있다. 빌리지에 입소한 어르신들의 산책코스로 활용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남짓 지났을까 오솔길 하나가 왼편으로 나뉜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지만 일단은 오르고 본다. 우리 뒤를 따라오던 다른 팀도 망설이지 않고 우리 뒤를 쫒는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결정이었다. 100m쯤 더 진행하면 제대로 된 들머리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규 등산로가 아닌데도 길은 또렷하다. 오래지 않아 벌목(伐木)을 하면서 내놓은 듯한 널찍한 길이 끝나지만 이후로도 길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이용하는 등산객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북녘에서 찾아든 가을 손님은 싱그러웠던 잎새들을 빨갛고 노랗게 물들이면서 파스텔톤(pastel tone)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아니 잎새가 다 져버린 나뭇가지 사이로 빈 하늘만이 가득하다는 표현이 더 옳다고 봐야겠다. 가을이 무르익다 못해 어느덧 겨울의 문턱까지 와버린 것이다. 그런 풍경 속에서 가을의 전령이라는 들국화를 만났다. 그리고 그 가을이 아직까지도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7분쯤 오르다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 곧이어 제대로 된 등산로를 만난다. 경사진 곳에는 통나무 계단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밧줄로 난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성급하게 산자락으로 들어서느라 놓쳤던 정규등산로를 만난 것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가파르게 위로 향한다.



10분 조금 못되게 더 오르자 바위벼랑 위에 걸터앉은 전망대가 나타난다. 처마 아래 매달린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데, 데크로 만든 전망대 앞에는 산행안내도와 이정표(신선봉1.3/ 사룡리/ 송산리 실버타운1.1)까지 세워 놓았다. 5년쯤 전인가 이곳 신선봉에 대한 등산로를 정비한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목표대로 정비가 이루어졌던가 보다. 당시 기사는 2.8인 기존 등산로를 정비하는 한편, 정상부근에 조망데크를 설치한다고 했다. 산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지자체에서 글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낡은 산행안내도를 그냥 방치해 둔 것은 아쉽지만 말이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청평호(淸平湖)가 발아래에 널따랗게 펼쳐진다. 청평댐이 건설되면서 생긴 인공호수로 넓고 잔잔하게 펼쳐진 수면이 특징이다. 또한 주위의 산과 호반의 맑은 물이 빚어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항아리 모양으로 뽈록하게 튀어나온 곳에 자리 잡은 시설들은 포세이돈 카라반일 것이다. 쾌적한 공간과 아름다운 자연이 합쳐진다는 카라반(Caravan Camping)’과 수상레저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수상스키와 웨이크보드, 제트스키, 바나나, 땅콩, 플라이피쉬 등 다양한 수상 레저를 갖추고 있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한다.



정상으로 향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왼편 신선봉 방향이다. 이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가에 매어놓은 밧줄난간을 붙들고 오르면 조금은 힘을 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바위지대가 나오면서 이번에는 왼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청평 호반에 자리 잡은 청심국제병원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천연전망대이다. 2003253병상 규모로 개원한 청심국제병원은 통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지역거점 종합병원이다. 2006년에는 국내 최초로 해외 의료시장을 겨냥한 국제병원을 선포, 현재는 전 세계 41개국에서 매년 수천 명의 환자가 찾아온다고 한다.



눈에 담을만한 기암괴석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바위산의 특징일 것이다. 조망 또한 심심찮게 열린다. 청평호의 잔잔한 수면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잔디는 분명히 아니고 그렇다고 이끼도 아닌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길은 가팔라진다. 그러다가 끝내는 동네 뒷산인줄 알았는데 속은 것 같다는 넋두리가 나오고야 말았다. 이때 우문(愚問)에 대한 최군의 현답(賢答)이 넌지시 뒤따른다. ‘세상에 쉬운 산이 어디 있나요?’ 그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네 인생 또한 그럴 것이다.



오른편은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행 내내 안전에 주의가 필요하다 하겠다. 그렇다고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길이 낭떠러지에서 몇 걸음 안쪽으로 나있기 때문이다. 또한 너무 위험하다 싶은 곳에는 가느다란 밧줄로 경계표시를 했는가 하면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위험이라고 적힌 리본까지 매달아 놓았다.





산행을 시작한지 55분 만에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섰다. 조망은 트이지 않으나 셋이나 되는 돌탑이 눈길을 끄는 봉우리이다. 등산객들이 지나가며 올려놓은 돌맹이들이 시간이 흘러 어느덧 돌탑의 모양새를 갖춘 모양이다. 돌맹이 하나하나마다 올려놓은 이들의 간절한 소망을 품고서 말이다.



돌탑봉을 지나자마자 뜬금없는 이정표(신선봉1/ 송산리 실버타운1.4)가 길손을 맞는다. 갈림길이 아닌데도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시간에 여유가 많은 산행인지라 주변을 살펴본다. 역시나 왼편으로 희미하게나마 길의 흔적이 보인다. 맞다. 산행을 준비하면서 살펴본 선답자의 산행기록에는 이정표에 소리고개(700m)로 연결되는 방향표시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이후부터는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하지만 골이 깊은 탓에 만만찮은 구간이 하나도 없다. 골마다 밧줄을 매어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경사가 가파른 것이다. 거기다 바윗길까지 더해지니 속도를 내는 것도 어렵다.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산행이 계속된다. 그런데 이게 하나 둘로 그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 하겠다. 고개 하나 넘어 다 왔나 싶으면 눈앞에 또 다른 언덕이 보이고, 이제 다 왔나 싶어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목적지를 바라보면 정상은 아직 멀기만 하다. 하긴 그 숫자가 일곱 개나 되었으니 오죽했겠는가.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이 있다. 다른 산들에 비해 언덕처럼 낮아보이던 신선봉이 그 매운맛을 톡톡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15분을 걷자 또 다른 데크전망대가 나온다. 이번 것 역시 바위절벽 위에다 위태롭게 걸쳐놓았다. 그러니 어찌 조망이 뛰어나지 않겠는가. ‘가평팔경가운데서도 제1경이라는 청평호반이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이번에는 가평대교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후로도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힘든 산행이 계속된다. 하지만 산행을 하는 재미는 최고라 하겠다. 바윗길을 오르내리는 재미가 제법 쏠쏠할 뿐만 아니라 좌우로 펼쳐지는 조망 또한 일품이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호수를 떠다니는 유람선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그 덕분에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화가 한결 돋보였다. 저 그림은 여름이면 한층 더 아름다워질 게 분명하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달리는 수상스키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 청평호반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화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크고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리기를 1시간, 용도가 알쏭달쏭한 데크시설을 만난다. 모양새는 전망대로 보이는데 조망이 트이지 않는 것이다. 한가운데에 장의자를 배치한 걸로 보아 쉼터용으로 만들었나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정상에 올라선다. 서너 평 남짓한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표지석 외에도 많은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다. 말뚝 모양의 작은 정상석이 하나 더 있을 뿐만 아니라 삼각점(용두 301), 이정표(선촌리1.4/ 사룡리1.2, 금용사 600m/ 송산리 실버타운2.4, 소리고개 1.2), 울업산과 신선봉에 얽힌 이야기를 적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산을 보호해 보겠다며 무인산불감시탑을 세웠는가 하면, 등산객들이 하나둘 쌓아올린 돌맹이들은 사연을 품은 돌탑으로 변신을 했다.



울업산(蔚業山)은 최고봉인 신선봉(神仙峯)이 울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찍이 삼각산과 신선봉이 백두산을 출발하여 조선의 도읍지가 될 만한 곳을 찾아 나섰단다. 그런데 삼각산이 먼저 한양을 발견하고 자리를 잡았던 모양이다. 이 소식을 들은 울업산이 한탄하며 울고 돌아가다가 이곳 설악에 눌러앉았다는 것이다. 이곳도 역시 한 나라의 도읍지가 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란다. 그 이후로 신선봉은 울업산이란 이름을 하나 더 얻게 되었고, 산기슭 마을 또한 한양부라고 부르기 시작했단다.(정상의 안내판에서 발췌)



정상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장기판이 놓여있다. 앉을자리까지 갖추었음은 물론이다. 이곳 신선봉(神仙峯)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탐방객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신선봉은 옛날 이곳에서 신선들이 놀았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오랜 옛날 한 나무꾼이 신선봉에 올라보니 신선들이 장기를 두고 있더란다. 어깨너머로 장기를 구경하던 나무꾼이 어찌어찌 해서 신선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신선들과 장기 한 판을 두고 하산을 해보니 산 아래는 이미 100년이 흐른 뒤더라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옛 이야기인데 신선봉이라는 지명을 인연으로 모티브(motive)를 따온 모양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썩 뛰어난 편은 아니다. 주변의 잡목들이 시야의 아랫도리를 잘라 먹어버리기 때문이다. 잡목들의 방해만 없었더라면 청평호의 수려한 풍광을 실컷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그나마 주변의 산들이라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호명산과 새덕산 등 청평호를 장식하고 있는 산들은 물론이고 반대편에 있는 화야산과 뾰루봉, 곡달산, 유명산, 장락산, 왕터산 등도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선촌리방향이다. 사룡리 방향으로 직진해서 내려갈 수도 있었으나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설악면사무소 소재지인 신천리까지의 접근거리가 짧은 신천리로 하산지점을 잡았다.



하산길은 엄청나게 가파르다. 거기다 참나무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엄청나게 미끄럽다. 그런데도 밧줄난간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집사람이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그리고는 길가에 놓인 돌맹이 하나를 주워들더니 돌탑에 올려놓는다. 뭔가에 의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는 미끄러지지 않았으니 신선봉 신선들의 영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40분 정도를 내려오자 건축공사가 한창인 벌목지가 나오면서 왼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그리고 장락산과 왕터산 일대에 자리 잡은 통일교 왕국의 센터격인 일명 천정궁(天正宮)’이 눈에 들어온다. 장락산으로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고 앞에 북한강을 두었으니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아마추어가 봐도 명당(明堂)이라 하겠다.




절개지 근처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이정표(선촌1리 마을회관600m/ 선촌리300m/ 신선봉900m)가 가리키는 선촌1리 마을회관으로 방향을 잡는다. 능선을 곧장 탈 뿐만 아니라 능선을 꽉 매우고 있는 잣나무 숲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게 이유이다.



솔가리가 수북하게 쌓인 폭신폭신한 산길을 10분 정도 내려오면 또 다른 절개지가 나오고,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마치 갤러리(gallery)처럼 반듯하게 지어진 전원주택을 만난다. 신선봉이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춘 최고의 명당이라서 정·재계 유명 인사들의 별장들이 즐비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가 보다. 소문난 ‘MB 별장도 바로 이곳 선촌리(仙村里)에 있다고 한다. 참고로 풍수가들은 울업산이 대한민국에서 양기(陽氣)가 두 번째로 강한 산으로 꼽는다고 한다. 신선봉에서 내려다보면 3면으로 물이 내려다보이고, 반대로 청평호에서 울업산을 바라보면 거대한 남근처럼 생겨서 그렇단다.



산행날머리는 선촌1리 마을회관

10분 후 선촌1리 마을회관이 나오면서 실질적인 산행은 종료된다. 하지만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는 식당까지는 30분 조금 못되게 더 걸어야만 한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30분이 걸렸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1시간을 쉬었으니 3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주변 경관을 즐기면서 걷다보니 이동거리(3)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던 모양이다.


고산(老姑山, 487m)

 

산행일 : ‘18. 10. 27()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과 양주시 장흥면 일원

 

산행코스 : 흥국사한북정맥 능선삼막골 갈림길정상임도군부대 철조망헬기장장포교(교현리)72사단 앞 버스정류장(산행시간 : 3시간3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경기도 고양시(덕양구 지축동)와 양주시(장흥면)에 걸쳐 있는 노고산(老姑山)한북정맥의 마룻금에 놓여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북한산에서 상장능선을 통해 연결된다. 북한산의 산줄기로 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산세(山勢)는 영 딴판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골산(骨山)으로 이루어진 북한산과는 달리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陸山)인 것이다. 도봉산과 북한산이 한강을 향해 암봉(岩峯)으로 기운차게 달려 왔다면 노고산은 임진강 강구(江口)에 육봉(肉峯)으로 차분하게 내려앉았다고 보면 되겠다. 때문에 산행 내내 걷기 딱 좋은 흙길을 걷게 된다. 보드라운 흙길에는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여간 폭신폭신하지가 않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여 오르내리는데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는다. 여성이나 노약자들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고산의 백미(白眉)는 조망이라 할 수 있겠다. 북한산과 도봉산이 그 속살을 여과 없이 내보여 주기 때문이다. 쉽게 오를 수 있는데다 조망까지 즐길 수 있으니 가족산행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을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흥국사 주차장(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산 40-11)

모처럼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한 산을 찾았다. 아니 하도 가깝다보니 아예 승용차를 이용했다. 통일로(1번 국도)를 타고 서울을 빠져나가다 은평뉴타운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전하여 북한산로를 따른다. 입곡삼거리(은평구 진관동)에서는 왼편이다. 잠시 후 흥국사입구버스정류장이 보이면 좌회전하여 지곡교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흥국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그 끄트머리에 흥국사가 있다. 차량은 절 앞에 만들어놓은 널따란 주차장에 주차시키면 된다. 대중교통은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 환승정류장에서 의정부행 34번 버스를 타고가다 흥국사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 배차간격이 10~15분으로 길지는 않으나 주말에는 번잡하므로 가급적 불광동기점에서 가까운 곳에서 승차하는 것이 자리 잡기에 유리하다. 서울역에서 송추까지 왕복하는 704번 버스도 있으니 참조한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흥국사(興國寺)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이 절은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신라 문무왕 원년인 661년에 원효가 북한산에서 수행하다가 약사여래를 만난 곳에 흥성암(興聖庵)이라는 절을 지은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원효는 본전에 약사여래를 봉안하면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난 곳이라 많은 성인이 배출될 것'이라는 뜻에서 흥성(興聖)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후 오랫동안 사찰의 연혁이 전해지지 않다가 조선 숙종 12년인 1686년에 중창하면서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조가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인 소녕원(昭寧園)에 다녀오던 길에 이 절에 들렀다가, 직접 지은 시를 편액(扁額)으로 만들어 내리고 숙빈 최씨의 원찰(願刹)로 삼으면서 영조와 정조 대에 크게 발전했다. 영조가 하룻밤 머문 후 절 이름이 흥국사로 바뀌었으며, 절이 자리 잡은 산도 원래 이름인 한미산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이 절에는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3)와 괘불(掛佛,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9), 약사전(藥師殿,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7), 나한전(羅漢殿, 향토유적 제34),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4) 등의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불교체험 템플스테이도 진행하고 있다.



일주문(一柱門)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이어서 긴 계단을 오르자 불이문(不二門)이 중생을 맞는다. ‘불이(不二)’란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한다.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가 이 불이문을 통하여 재조명되며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됨을 의미한다. 또한, 불이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불()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여기를 지나면 금당(金堂)이 바로 보일 수 있는 자리에 세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문을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난 지금 불국토(佛國土), 즉 부처님의 이상이 실현되는 세계로 들어가는 셈이다.



불이문을 통과하면 대방(大房)’이 나온다. 흥국사의 대방은 정토 염불 사상이 크게 성행하던 근대기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염불 수행 공간과 누ㆍ승방ㆍ부엌 등의 부속 공간을 함께 갖추고 대웅전을 실제적ㆍ상징적 불단으로 삼아 염불 수행을 하도록 구성된 독특한 형식의 복합 법당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이문이란 명칭이 가능했던가 보다. 불이문을 지나면 곧바로 금당(金堂)으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금당이란 게 본디 가람의 중심으로 본존불을 안치하는 전당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흥국사 대방은 기존의 전통적 방식을 벗어나 복합적이고 기능적인 근대적 건축의 성립을 보여주고 있는 등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독특한 건축 형식과 공간 구성 및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2호로 지정되어 있다. ! 본전(本殿)으로 보이는 약사전(藥師殿)은 대방의 뒤에 위치하고 있으니 참조한다.




종루의 앞은 고양시에서 보호수(고양 32)로 지정한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았다. 수령(樹齡)450년이라니 원효가 지은 천년고찰(千年古刹)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이 절의 역사가 무척 오래 되었다는 사연을 알려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산길은 삼성각(三聖閣)의 왼편에서 열린다. 입구에 북한산 전망대숲 명상 길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이 길은 한북정맥의 마룻금으로 연결되지만 접점(接點)이 윤형철조망으로 막혀있다. 만일 억지로 넘어가는 행위가 미안한 사람들이라면 흥국사 주차장의 오른편에서 들머리를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계단을 오르면 시야를 트기 위해선지 주변의 수목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덕분에 북한산의 우람한 바위봉우리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조금 전에 보았던 북한산 전망대는 이곳을 두고 한 말이었던가 보다.




주변에 가슴에 담아둘만한 내용의 팻말이 매달려 있어 옮겨본다. ‘다투고 싸우면 평생 가도 끝이 없다. 용서만이 모든 다툼과 원한을 끝내게 한다. 내가 타인을 용서할 때 세상도 나를 용서한다.’ 방금 전 이 코스가 숲 명상 길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름에 걸맞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이밖에도 법구경법구 비유경’, ‘불유교경’, ‘숫타니 파타등에서 따온 금과옥조를 적은 팻말들이 심심찮게 나타난다. 명상(冥想)하기 딱 좋은 글귀들이 아닐까 싶다.



마음을 다잡으며 글귀들을 읽어가다 능선으로 향한다. 가끔은 가파른 구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완만한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사색을 즐기며 걷기에 딱 좋은 코스라 하겠다. 그래서 이 길을 명상 길이라고 명명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오르면 능선에 올라선다. 이제부터는 한북정맥 마룻금을 따라 걷게 된다. 아니 한북정맥 도봉지맥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의정부시의 서북쪽에 있는 한강봉에서 능선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남동쪽으로 방향을 트는 주능선을 한북정맥 도봉지맥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챌봉과 사패산을 지나 도봉산에 이른 이 능선은 우이령을 지나 상장봉(효자동계곡을 사이에 두고, 북한산 인수봉과 마주보는 봉)에 이르면 방향을 서쪽으로 튼다. 이어서 솔고개에서 숨을 고르고 359.6m봉을 들어 올린 다음에는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 1.3km 지점에다 노고산(老姑山)을 빚어놓는다. 이후로도 능선은 325m봉에 이르러 방향을 북서쪽으로 튼 다음 현달산과 고봉산, 장명산을 넘어 한강으로 스며든다. 이 가운데 일부(노고산 구간)를 오늘 걷게 되는 것이다.



능선으로 올라서자 군에서 설치한 시설들이 널려있다시피 한다. 길가에 윤형철조망(輪形鐵條網)을 설치해 일반인의 통행을 막고 있는가 하면,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사격훈련 시 도비탄의 위험이 있으므로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의 경고판을 곳곳에 설치해 놓았다. 그렇다. ‘노고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예비군훈련장이다. 북한 정찰국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1968년의 ‘1·21사태때 무장공비들의 침투로 및 도주로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노고산이다. 그해 122일 노고산에서 도주 중인 무장공비 3명을 발견한 뒤 노고산 일대를 포위하고 공비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우리 측에서는 1사단 15연대장이었던 이익수 준장(당시 대령)이 전사하기도 했다. 1·21사태를 계기로 예비군이 창설되었고 서울 북서부지역 예비군 훈련장으로 노고산 일원이 선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길은 일단 곱다. 황톳길만 해도 보드랍기 그지없는데 그 위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이다보니 흡사 폭신폭신한 양탄자 위를 걷는 기분이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완만한 편이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길다보니 서둘러서 고도(高度)를 높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노고산을 일러 남녀노소 누구나 산행하기 좋은 곳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 참고로 이 능선은 북서쪽 양주시 장흥면과 남동쪽인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의 경계를 따른다.



능선을 따라 15분쯤 진행했을까 사거리가 나타난다. 금바위저수지와 심막골이 좌우로 나뉘는데 누군가 이정표(노고산 정상 1.8/ 심막골/ 금바위저수지 1.3)의 심막골 방향에다 흥국사라고 적어놓았다. 우리처럼 흥국사의 경내로 들어서지 않고 주차장 앞에서 들머리를 찾았을 경우 이곳으로 연결된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10분 정도를 더 걷자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기 시작한다. ‘북한산이 가장 잘 바라보이는 곳이라는 노고산의 별명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다. 원효봉에서 염초봉을 지나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북한산의 북서면은 분명 숨을 멎게 할 정도로 대단하다. 북한산의 위용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언젠가 TV에서 저리도 아름다운 산들을 곁에 두고 사는 서울시민이 부럽다는 한국을 처음 찾은 외국인의 인터뷰를 본 일이 있었는데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야 실감이 난다.





잠시 후 또 다른 조망대를 만난다. 이번에는 북한산에서 도봉산을 거쳐 사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시야에 잡힌다. ! 이정표(노고산 정상 1.3/ 금바위저수지 1.8)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부근에서 금바위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 또 하나 나뉠 것이다.




작은 봉우리들(325m·337,7m·425m봉이라고 적는 이들도 있지만 고도를 확인해보지는 않았다)을 오르내리는 이후의 코스는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풍경은 나타나지 않는다. 북한산과 도봉산의 고운 자태가 심심찮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아까 보았던 그림에는 훨씬 못 미친다. 주변의 나무들이 그 일부분을 잘라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가을의 진수라는 단풍이 아까보다 훨씬 더 짙어졌기 때문이다. ‘가을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단풍이니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핏빛에 풍덩 빠져보면 어떨까?





그렇게 35분 정도를 걸으면 드디어 정상이다. 능선에 올라서서 이곳까지 오는 데는 1시간이 걸렸다. 정상은 둥그스름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대개 노고산이나 할미봉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들은 노년기 산의 전형적인 모양새, 즉 저렇게 둥그스름하게 생긴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정상표지석은 정상 아래에 있는 헬기장에 세워져 있다. 뒤에 보이는 본래의 정상을 군부대에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란다. 그나마 사람산 산악회에서 정상표지석이라도 세워놓은 것은 천만 다행이라 하겠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상을 대신할만한 곳조차 찾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노고산은 옛날 이곳에서 노고할머니에게 치성을 드린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노고산은 19세기 초기의 문헌인 동국여도(東國輿圖)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한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는 노고산의 한자를 노고(老姑)가 아닌 노고(老古)로 적고 있다. 또한 노고산은 한미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노고산에 자리한 흥국사와 관련된 기록에는 한미산 흥국사(漢美山 興國寺)라는 내용이 전해진단다.




정상 쪽으로 제법 큰 바위가 보인다. 노고산에서 만난 유일한 바위였을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노고산이 전형적인 육산(肉山)임을 감안할 때 의외라 할 수 있겠다. 헬기장으로 조성된 덕분에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일절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을 군부대에 빼앗긴 것은 서운하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빼어난 조망을 즐길 수 있으니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에 딱 어울리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헬기장에 서면 인수봉과 숨은벽 암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이 밤골계곡 위 원효봉과 함께 우람찬 풍광으로 다가온다. 노적봉 오른쪽으로는 시계방향으로 북한산성계곡과 함께 의상봉 능선, 문수봉, 보현봉, 승가봉, 비봉, 향로봉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그 왼편에는 한강봉에서 사패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 너머 멀리로 운악산 방면 한북정맥이 너울거린다. 사패산의 오른쪽으로는 도봉산 오봉과 상장봉이 하늘금을 이룬다. 상장봉 오른쪽 육모정 고개 너머로는 양평 방면 용문산과 백운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반대편으로는 고양시 일원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곳곳에 시가지가 들어앉은 풍경이 시야 전체를 암봉들로 채우고 있는 오른편과는 천양지차의 모양새이다.



솔고개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에 올라앉은 군부대를 바라보며 잠깐 오르면 산길은 군부대의 철망을 왼편에 끼고 우회(迂廻)를 한다. 하산 길 초입, 가을의 전령(傳令)이라는 억새가 무성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삼아 하늘거리는 억새밭에서 일상의 여유와 가을의 정취를 흠씬 느껴보는 것도 가을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정상을 우회하자 군부대의 정문이 나온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보통 때는 사용하지 않는 시설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는 임도(林道), 아니 군용도로(軍用道路)를 따른다. 사패산과 도봉산을 바라보며 걷게 되는 멋진 코스이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단풍들도 이 구간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붉게 물든 산하를 눈에 담으며 걷기를 30분 여, 길가에 사격장 지역이라서 탐방객의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능선에다 오솔길을 내놓았다. 거리상으로 보아 솔고개로 내려가는 길로 보이는데 군부대가 통행을 가로막고 있는 모양이다.



능선으로 들어서서 5분쯤 진행하자 철조망이 나타난다. 노고산 자락 동쪽 면의 절반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탐방로는 이 군부대에서 쳐놓은 철조망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그물망처럼 생긴 군부대 울타리가 오히려 다정한 길잡이가 돼준다고 보면 되겠다. 철조망만 따르면 되니 길을 잃을 염려 또한 없다.



가끔은 길을 우회시키기도 한다. 그때마다 군부대의 사격장과 인접하여 사고발생의 위험이 있으니 돌아가라는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이는 따르고 보는 것이 좋겠다. 고집을 피워봤자 경사가 너무 심해서 철조망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진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군부대에서 탐방객의 안전뿐만이 아니라 시설의 보호까지를 염두에 두고 길을 돌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은 놀이터로 변하기도 한다.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최군()이 데리고 온 아이들을 끌어주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눈썰매장이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진행하자 ‘U형으로 패인 안부가 나온다.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솔고개·교현리 1.8/ 청룡사 0.4, 일영유원지 1.7/ 노고산 정상 2.1)가 솔고개로 가고 싶으면 맞은편 능선을 타라고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맞은편에는 길이 나있지 않다. 오른편에 보이는 군부대의 문 가까이에서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U형으로 움푹 파이다보니 길을 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하긴 철조망 가까이에서도 난간삼아 설치해 놓은 밧줄에 의지하지 않고는 위로 오를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후로도 산길은 철조망을 따라 이어진다. 중간에 이곳이 한북정맥임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나기고 한다. 바닥에는 노고산이 2남았다는 방향표지판이 떨어져 있다. 이곳이 청룡사 입구라는데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겠다.



5분 후 산길은 철조망과 헤어진다. 이어서 능선길을 따라 12분 정도를 더 걸으면 안부에서 희미하긴 하지만 사거리를 만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솔고개로 내려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아니 아까 철조망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 게 옳았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내려가는 길을 놓친 우리는 꽤나 긴 거리를 더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안부를 지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이어서 10분쯤 후에는 널따란 헬기장에 올라선다. ()의 시설물인데 정비가 잘되어 있는 게 요즘도 활용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곳에는 삼각점(서울 420)도 설치되어 있다. 지적상으로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젠 진짜로 하산이다. 100m 남짓 내려오다가 오른편 지능선으로 내려선다. 교현리(오른쪽)와 부곡리(왼쪽)가 경계를 이루는 능선이다. 산길은 급하게 고도(高度)를 떨어뜨린다. 하지만 길이 또렷한데다 흙길이어서 내려서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그저 곱게 물든 산하를 눈에 담으면서 느긋하게 내려오면 될 일이다. ! 주능선을 계속 따를 경우 어디로 연결되는지가 무척 궁금했는데 집에 돌아와 검색해보니 신흥레저타운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 뒷산에 장인과 장모님이 함께 잠들어 계시므로 성묘도 할 겸해서 계속 직진해도 됐을 것을 그랬다.



이곳에도 역시 벙커나 참호 등 예비군 훈련시설들이 널려있다. 나에게는 아픈 추억들이다. 카투사(KATUSA,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에서 복무를 마친 내가 현역 군인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훈련을 받던 동원예비군에 소집되어서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었다. 군장(軍裝)을 꾸리는 것은 물론이고 총기 수입(총기의 청소 및 점검)‘ 등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은 것이 없었다. 3년 동안 훈련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돌아온 것은 고문관(顧問官). 고문관이란 미군정(美軍政) 때 한국어를 모르는 미군 고문관들이 어수룩하게 행동한데서 유래된 말로서 어수룩한 군인들을 놀릴 때 쓰는 비속어(卑俗語)이다. 요즘으로 치면 관심 사병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같이 소집된 분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버틸 수는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끔찍한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남에게 놀림감이 조금 되면 어떻겠는가. 약간의 부족함 쯤은 금방 채워버릴 수 있는 게 젊음이 아니겠는가.



힘들었던 예비군 생각은 자연스레 현역생활로 연결된다. 낯선 이방인들의 세계로 들어선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영어회화 서적(English 900)을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우는 것 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영문타자기를 자격증 소지자들보다도 더 빨리 칠 수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때 배운 영어가 내 인생에 많은 도움을 주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달콤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걷다보니 어느덧 교현리이다. 높이가 9m에 이르는 거대한 소나무가 터줏대감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는데 1995년에는 보호수(양주 33)로까지 지정되었단다. 헬기장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산행날머리는 72보병사단 앞 버스정류장(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231-7)

탐방로는 보호수 앞에 놓인 장포교를 건너 외곽순환도로 교각 아래를 지난다. ’교현리 마을회관(1.25지점)‘ 방향이다. 이어서 도로변을 따라 200m쯤 걸으면 72보병사단(올림픽부대)‘ 앞에 만들어진 버스정류장이 나타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4시간 30분이 걸렸다. 하지만 준비해간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1시간을 쉬었으니 실제로는 3시간 30분을 걸은 셈이다.


오독산(五得山, 614m)

 

산행일 : ‘18. 9. 29()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과 가평군 상면의 경계

산행코스 : 수동면사무소파위교원적사파위고개헬기장오독산임도생수공장탑거리 버스정류장(산행시간 : 4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축령지맥(祝靈枝脈, 천마축령지맥)에 놓여 있는 산으로 축령산과 은두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의 특징은 원시(原始)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축령산과 운두산 등 주변의 산들에 밀려 아직까지 입소문을 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서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대신 가을철이면 제법 짭짤한 부수입을 올릴 수도 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탓에 다래나 산밤 등이 곳곳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의 뛰어난 조망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맥답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을 필요는 없는 산으로 치고 싶다. 볼거리도 없는데다가 등산로까지 또렷하지 않은 산을 일부러 찾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산행들머리는 수동면사무소(남양주시 수동면 운수리 95-76)

오늘은 모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한 근교 산행이다. 경춘선 전철 마석역에서 내려 1번 출구 앞 버스정류장에서 비금리행 330-1번 버스를 타고가다 수동면사무소앞에서 내리면 된다. ! 배차간격이 20~30분으로 긴 편이니 시간에 맞추어 역에 도착하는 게 중요하다. 또 하나. 나처럼 승용차를 이용해서 올 경우에는 서울-양양고속도로에서 내려와 수레로와 비룡로를 번갈아 타면서 마석 시내로 들어간 다음, ’마석역 신도브래뉴아파트앞에서 387번 지방도로 옮겨 수동·일동 방면으로 들어가면 된다.




면사무소에서 마석 방향으로 100m쯤 진행하다 수동사우나 앞에서 왼편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수동부동산을 왼편에 끼고 돈다고 하는 게 이해가 빠를 수도 있겠다. 골목으로 들어서서 신세계 빌라를 보았다면 제대로 진행한 셈이다.



빌라를 지나 조금 더 들어가다 원적사이정표가 보이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런데 이곳에서 훈훈한 인심을 만났다. 마을 주민께서 대추를 털어주면서 맛이나 보고 가라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산행을 하면서 먹을 만큼 충분히 가져가랜다. 담벼락을 넘어온 과일 하나 따먹다가 한 해 수확량을 몽땅 물어주는 게 요즘 인심인데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곳 수동의 인심이 그만큼 넉넉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마을을 통과하고 나면 파위교()‘가 나온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는 구운천()‘으로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한 수동계곡의 하류이다. 울창한 숲과 바위협곡 등 경관이 빼어난 상류에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물은 맑은 편이다. 하천을 보존하면서 청정지역으로 가꾸려는 지역 주민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실이 아닐까 싶다. 균형적인 생태계 조성과 어종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해마다 빙어알이나 다슬기 등의 방류 행사까지 실시해오고 있을 정도라니 말이다.




다리를 건너면 파위라는 괴상한 이름을 가진 마을이다. 입석리에 속한 단위부락인데 어떤 이유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부근은 전원주택 일색이다. 아니 이곳뿐만이 아니라 수동면 일대가 모두 전원주택단지라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인터넷 검색창에 수동면을 넣어보면 떠오르는 대부분의 글이 전원주택의 매물이나 공매(公賣)에 관한 글이라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파위마을 앞에 반딧불이 서식지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 환경지표종인 반딧불이(개똥벌레)가 살고 있다면서 환경을 보호해 줄 것과 함께 산란기에는 옥외등(屋外燈)의 조도(照度)도 낮추어달라는 당부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 반딧불이라는 게 본디 깨끗한 하천과 습지에 사는 곤충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특히 최근에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대부분의 서식처가 파괴되어 멸종위기에 놓여 있다니 말이다. 아무튼 하천 환경이 개선된 2010년대 이후부터는 간헐적으로 서식지가 발견될 뿐이라니 이곳 또한 소중한 환경자원이라 할 수 있겠다.




길가에 호박꽃이 피어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호박꽃도 꽃이냐는 비아냥거림이 무색하게 본연의 수수함이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긴 세상에 예쁘지 않은 꽃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게 받아들이기 나름이지 않겠는가.



잠시 후 다산길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축령산 입구 5.7/ 장천교 3.5)가 나타난다. 다산길이란 남양주 판 올레길이다. 즉 남양주시에서 만들어 놓은 둘레길이라는 얘기이다. 남양주는 전체 면적의 70%가 산림(山林)이다. 그렇다고 산만 있는 게 아니다. 물길이 있다. 북한강이 남양주를 따라 흘러와 두물머리(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마침내 한강이 된다. 이러한 특수한 지리적 여건을 살려 만들어 놓은 둘레길이 바로 다산길이다. 또한 남양주는 조선말의 위대한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화(1801)에 연루되었던 다산은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 등 500여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태어났고 자라면서 학문을 닦았던 곳이 바로 남양주인 것이다. 그런 인연을 살려 둘레길에다 다산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남양주시 전역에 걸쳐 169.3를 조성했는데 총 13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그 가운데 시점인 장천교(수동면 운수리)’에서 종점인 축령산 입구(수동면 외방리)’까지 이어지는 물골안길(8코스, 9.2)’이 이곳을 지나는 모양이다.





입석2마을안길을 통과하면 저 멀리 오독산과 운두산을 연결시키는 능선이 길다랗게 펼쳐진다. 가운데 움푹 파인 곳이 중간지점인 파위고개일 것이다.



이후부터는 외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중간에 길이 나뉘는 곳이 하나 나오기는 하지만 원적사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되고, 다른 갈림길들은 펜션으로 들어가는 길이라서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이 구간의 또 다른 특징은 펜션이 많다는 점이라 하겠다. 뻐꾸기둥지, 수동쉐르빌, 수동본훼르빌, 황토펜션 등 산뜻하게 지어진 펜션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그렇게 45분 정도를 걷자 원적사(圓的寺)‘가 나온다. 물론 수동면사무소에서 출발한 때부터 걸린 시간이다. 원적사는 남은스님이 1998년에 세운 절이라는데 일천한 역사나 외진 위치를 감안하면 나름대로 틀을 갖춘 절이라 할 수 있겠다. 대웅전의 규모도 제법 클(4)뿐만 아니라 불국사의 다보탑(多寶塔)을 쏙 빼다 닮은 석탑과,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 포대화상(布袋和尙) 등의 조형물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적(圓的)이라는 절의 이름이 품은 뜻이나 소속 종단(宗團) 등은 알 수가 없었다.





절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서 왼편 숲속으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길의 흔적이 또렷하진 않지만 진행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잠시 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낙엽송 아래에 식탁이 놓여있는 게 보인다. 원적사의 표지석 옆으로 얼핏 보이던 펜션에서 만들어놓은 시설이 아닐까 싶다.



그 뒤에는 작은 폭포와 제법 깊은 소()가 들어서 있다. 지금은 비록 수량(水量)이 적지만 여름철에는 멋진 풍경을 연출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의 식탁은 이런 풍광을 느긋하게 즐겨보라는 의미에서 놓아두었던 모양이다.



폭포의 오른편으로 돌아 위로 오른다. 물론 길은 보이지 않는다. 이어서 계곡을 따라 잠시 오르다가 이번에는 계곡을 아예 가로질러 버린다. 대충 오독산이 있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진행해본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대로 된 등산로를 만났다. 그렇다면 본래의 등산로는 아까 원적사의 표지석이 있던 곳에서 찾아보는 게 옳았지 않나 싶다.



이후부터는 계곡을 따른다. ’파위계곡이라는데 아까 지나왔던 마을에서 이름을 따온 모양이다. 아무튼 이 계곡은 심상찮은 경관을 자랑한다. 수많은 바위들이 널려있는 계곡은 다른 유명 계곡들처럼 거대하거나 그 자태가 빼어나지는 않다. 하지만 앉아서 쉴만한 바위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는데다 물소리까지 경쾌해서 여름철 피서지로는 이만한 데도 드물겠다.



가끔 야생동물의 모이통이 보이기도 한다. 동물보호단체에서 만들어 놓은 모양인데 대단한 열정이라 하겠다. 식량이 든 자루를 둘러메고 이곳까지 올라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아직은 입소문을 덜 탄 계곡이선지 주변의 숲은 거의 원시림 수준이다. 그 가운데 비좁은 바위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목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그리고 그 억척스런 삶에서 지혜를 배워본다.



원시(原始)에 가까운 숲에서는 얻어먹을 것도 참 많다. 계곡이 끝날 때까지 곳곳에서 달콤한 다래를 따먹었음은 물론이고, 구워먹기 딱 좋은 산밤도 한 바구니나 주울 수 있었다.




그렇게 즐기면서 50분 정도를 오르자 산길이 가파르게 변한다. 곧장 위로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고도(高度)를 높일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르다.



10분 정도를 헉헉대다 보면 드디어 파위고개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50분 만이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서 산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은두산, 우리가 오르려고 하는 오독산은 물론 왼편이다.



이제부터는 능선을 타면 된다. 그렇다고 경사가 완만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 구간도 역시 갈 지()‘자를 써가며 길을 내놓았을 정도로 상당히 가파른 편이다.



능선은 굵고 오래 묵은 참나무들로 덮여있다. 가끔은 껍질이 벗겨져 너덜거리고 있는 고목(古木)들도 보인다. 원시림(原始林)만이 가질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진행하자 헬기장에 올라선다. 요즘은 사용을 하고 있지 않는지 잡초들이 무성한데 조망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커다란 나무들이 헬기장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만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육산의 특징대로 특별히 눈에 담을 만한 볼거리도 없는데다가 조망까지 트이지 않는다. 그저 앞만 보며 걷는 산행이 이어진다.



가끔은 능선의 한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는 거대한 바위들을 만나기도 한다. 산길은 이 바위들을 피해 왼편으로 우회시킨다.



이 능선은 축령지맥(祝靈枝脈, 천마축령지맥)의 일부 구간이다. 한북정맥 분기점에서 남진하던 천마지맥이 주금산을 지나자 남동방향으로 또 다른 산줄기 하나를 분기시키게 되는데 이 산줄기가 북한강 지류인 조종천(길이:39.3km)의 서쪽 벽을 이루며, 서리산, 축령산을 거쳐 깃대봉 직전에서 청평대교 방향으로 내려서게 되는데 도상거리 약 20km의 축령지맥이다. 이 가운데 일부구간을 오늘 걷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25분을 진행하다보면 이번에는 더 커진 바위덩어리를 만나게 된다. 오독산 정상인데 왼편으로 우회를 하면 반대편에서 위로 오르는 길이 나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산봉우리인데도 불구하고 정상은 너른 편이다. 대여섯 명 정도는 충분히 둘러앉을 정도로 넓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정상표지석은 세워져 있지 않다. 그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J클럽 수도권지부(송림)‘에서 매달아 놓은 팻말(오독산 525.5m)’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오독산이란 이름은 축령산에서 제()를 올린 뒤 이곳에서 멧돼지를 5마리나 잡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오득산(五得山)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오독산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오른편에 뾰족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는 천마산이다. 그 왼편으로는 백봉산을 거쳐 예봉산으로 연결되는 천마지맥이 이어진다. 천마지맥 앞에도 많은 산봉우리들이 솟아올랐다. 맨 앞의 것은 송라산이 분명하고, 그 왼편에 보이는 산은 고래산과 문안산일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산은 운길산이 아닐까 싶다.



왼편(동쪽)으로는 연인산에서 매봉, 대금산, 불기산으로 이어지는 명지지맥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른편에 뾰족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는 아마 청우산일 것이다. 그 뒤의 산은 물론 불기산이다.



맞은편에는 운두산이 자리 잡았다. 그 왼편에 보이는 산은 깃대봉이다.



수레넘이 고개를 향해 하산을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길이 둘로 나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도대체 모르겠는 것이다. 길은 오른편 능선이 또렷한데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보이는 축령산은 왼쪽 능선에 놓여있으니 어찌 헷갈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내린 결론은 왼편, 다행이도 오른편을 주장하던 최군이 선선히 따라준다. 하지만 이 결정은 최악이었다. 이 능선은 수레넘이 고개가 아니라 서낭당고개로 연결되는 능선이었기 때문이다.



또렷하던 산길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진다. 주변 나무에 의지하지 않고는 내려설 수 없을 정도로 경사까지 엄청나게 가팔라진다. 스틱에 의지해보다가 넘어지는 통에 멀쩡하던 스틱까지 못쓰게 되어버렸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길을 찾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젊었을 때 안내산악회의 산행대장까지 역임했던 최군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때 아닌 미아(迷兒) 신세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길의 흔적을 찾았다고 해도 진행까지 수월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도 오래 인적이 끊기다보니 길이 온통 잡목들로 가득 차버린 것이다. 거기다 가시넝쿨과 산초나무가 아예 길을 막아버린 구간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찔리거나 할퀴는 것은 물론이고, 싸대기까지 맞아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더디게 나아갈 수밖에 없는 험로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무려 1시간 15분 동안이나 악전고투를 치른 후에야 우린 임도에 내려설 수 있었다. ‘수레넘이 고개로 내려가는 좋은 길을 놔두고 이런 고생을 자초하게 만든 사람이 나이니 함께 산행을 한 이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다. 특히 여덟 살에 불과한 최군의 둘째 아이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맛있는 걸 사준다는데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겠는가.



잠시 후 숲속에 들어앉은 조립식 건물이 눈에 띈다. 생김새로 보아 서낭당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내려선 곳이 바로 서낭당고개일 것이고 말이다.



심심산골이어선지 양봉(養蜂)을 하는 농가도 보인다. 그만큼 공기가 맑다는 증거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보수사 앞, ‘탑거리 버스정류장’(수동면 입석리 478-7)

임도를 따라 20분 남짓 내려오자 길이 끊겨버린다. 별수 없이 들어선 곳은 산수생수에서 지하수를 채취하는 공장이다. 관계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다른 길이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공장 건물들 사이를 빠져나와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니 ‘387번 지방도가 나오면서 탑거리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산행이 종료된 것이다. 오늘 산행은 5시간 50분이 걸렸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1시간30분을 머물렀으니 실제로는 4시간 20분을 걸은 셈이다. 산의 높이에 비해 진행이 무척 더뎠던 것은 그만큼 산길이 거칠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금암산((金岩山, 321m)-이성산(二聖山, 209.8m)

 

산행일 : ‘17. 11. 19()

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일원(광암동·춘궁동·초이동·강이동·항동)

산행코스 : 이성산성 입구하늘스크린교회이성산성이성산향여고개금암산성불사 갈림길성불사마천동(남한산성입구) 버스종점(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남한산성(南漢山城)’을 품고 있는 남한산(552m)은 여러 개의 산줄기들을 갖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검단지맥(黔丹枝脈)’으로 남서쪽 방향에서 검단산과 망덕산 등을 일구며 올라온 산줄기가 동쪽방향에 있는 은고개를 거쳐 하남 검단산으로 연결된다. 남동쪽으로는 약수산과 약사산, 노적산을 끼고 있는 산줄기가 있다. 북쪽으로도 두 개의 산줄기가 뻗어나간다. 연주옹성에서 시작해 금암산과 이성산을 일구며 정북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능선과, 벌봉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나가며 망바위와 객산을 일구는 능선이다. 하남시에서는 이 북쪽 방향의 두 능선을 위례 둘레길이란 이름으로 조성해 놓았다. 그러니 오늘은 이 둘레길의 일부를 걷게 되는 셈이다. 아무튼 두 산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남한산의 특징이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금암산만은 예외이다.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하기 힘든 남한산 권역에서 유일하게 암봉으로 이루어졌지 않나 싶다. 덕분에 하남과 서울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빼어난 조망(眺望)을 보여준다.


 

산행들머리는 이성산성 입구버스정류장(하남시 춘궁동)

이번에도 역시 대중교통을 이용한 근교산행이다. 산행들머리인 이성산성 입구로 가려면 지하철 2·8호선 잠실역 8번 출구에서 30-5번 버스를 타면 된다. 버스는 올림픽공원과 둔촌동을 지나 하남의 광암동에서 향교고개(향여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으면 낚시터로 유명한 저수지가 있고 다음 정류장이 이성산성 입구이다. 버스정류장 옆에 오늘 걷게 될 하남 위례길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길을 나서기 전에 한번쯤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길 찾기에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골목길로 들어선다. 골목길이라고는 하지만 차량 둘이 비켜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다는 것에 유념한다. 그리고 골목 입구의 가로등 기둥에 이성산성 입구라는 표지판이 매달려 있다는 것도 참조한다. 잠시 후 하늘스크린 교회가 보였다싶으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코너에 이성산성으로 가는 방향과 거리(300m)를 표시해 놓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잘 지어진 전원주택을 지나면서 등산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곳에도 이성산성으로 가는 방향을 표시해놓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갈림길(이정표 : 위례둘레길(덕풍골) 3.0Km, 위례역사길(동문지) 0.4Km/ 위례둘레길(남한산성) 6.2Km/ 위례역사길(동사지) 1.4Km, 광주향교 1.3Km) 하나를 만난다. 이정표에는 하남 위례길둘레길역사길이 함께 나타나지만 아직은 역사길임을 참조한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덕풍골 방향으로 진행한다.



둘레길은 신경 써서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갈림길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고, 그 사이 사이에는 둘레길특유의 리본을 매달아 놓았다. 길 찾기에 신경 쓰지 말고 산행을 즐기라는 배려일 것이다.



잠시 후 등산로에서 왼편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파놓은 직사각형의 연못이 보인다. ‘이성산성에 있었던 두 개의 저수지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안내판에는 성벽에 대한 설명도 해놓았다. 남아 있는 성돌이 마치 옥수수 알 모양으로 아름답게 다듬어져 있다고 한다. 이렇게 다듬은 돌들을 70여도 각도로 비스듬히 쌓았던 성의 특징도 보여 준단다. 비스듬히 쌓았다면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고, ‘옥수수 알처럼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다면 쉽게 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성산성을 축성(築城)했던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에 대한 경계심을 얼마나 강하게 갖고 있었을지 능히 짐작이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저수지를 꽉 메운 갈대 무리에 가려버린 모양이다.



저수지 뒤에 작은 건물이 보이기에 다가가보니 이성산성 약수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하지만 먹는 물로는 이용할 수가 없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하긴 서울 근교의 산에 있는 약수터 가운데 음용(飮用)이 가능한 샘물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다시 길을 나서면 잠시 후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장방형 건물지‘12각 건물지’, 그리고 오른편은 장방형 건물지‘8·9각 건물지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하는 게 옳다. 그래야 두 건물지를 모두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서둘지는 말자. 이곳에 이성산성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산성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과 함께 산성의 지도에다 건물의 위치를 표시해 놓았다. 이성산성(二聖山城)은 삼국시대에 지어진 오래된 성()임에도 불구하고 귀에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옛사람들의 글에서는 심심찮게 나온다. 옛 광주(광주, 하남, 남한산성, 성남)지역의 역사지리를 정리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헌종 때 홍경모 선생 저술) 잉적(賸蹟)조에 이성산성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그는 온조 초에 대화산 남쪽에 도읍을 정하려고 성터를 둘러봤는데 지금 도척면이 그곳이라면서. 이성(二聖)이란 이름이 붙게 된 근원을 온조로 보았다. 아무튼 이성산성은 그 나라의 수도에 두는 게 상례였던 천단(天壇)과 사직단(社稷壇)을 두었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점했었다. 그런 특징 때문이었는지 성벽 또한 견고하게 쌓았다. ’옥수수 알모양으로 다듬은 돌들을 70여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쌓았다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에서, 아니 세계에서도 유일하단다.



천천히 15분 정도를 올랐을까 동문지(東門址)’라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하지만 건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구릉(丘陵)처럼 밋밋한 언덕에 목책을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 동문지에 터로 남아있는 성을 근저로 해서 성벽을 복원해 놓았다고 했는데 저 언덕 아래 부분이 아닐까 싶다.



대신 조망(眺望) 하나는 끝내준다. 하남시 일원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뒤에 검단산과 용마산이 버티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왼편에는 예빈산과 예봉산, 백봉산, 천마산 등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말이다. 아무튼 강 건너에서 넘어 올 적군을 언제라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이다.



동문지는 하남 위례길가운데 위례 둘레길위례 역사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다. 능선에 세워진 이정표(위례둘레길(이성산)0.3Km/ 위례둘레길(덕풍골)2.6Km/ 위례역사길(남문지)0.4Km)가 이를 알려주고 있다. 참고로 위례 둘레길이란 하남 위례길4코스(39.7)로 덕풍골에서 시작해 이성산과 금암산, 벌봉, 객산, 샘재를 거쳐 하남시청에 이르고, 3코스인 위례 역사길(5.8)’은 광주향교에서 시작해 이성산성과 동사지를 거쳐 선법사에 이르는 구간이다. 참고로 하남 위례길의 나머지 두 코스는 1코스(5)위례 사랑길2코스(13.5)위례 강변길이다.



이정표와 리본 외에 또 다른 표시도 보인다. 이곳이 하남 위례길의 제4코스인 위례둘레길임을 알려주는 팻말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이성산으로 향한다. 산책로처럼 잘 다듬어진 길가에 이곳이 사적 제422이성산성(二城山城)’임을 알려주는 빗돌(碑石)이 세워져 있다. 이성산성은 이성산 정상과 남동쪽 골짜기를 감싸 안은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총 둘레 1665m로 삼국시대 성곽 중에서는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특히 성 내부의 경사가 대부분 완만하고 평탄한 땅에 조성돼 있어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이 매우 넓었다. 병사들의 이동 경로도 다른 성곽에 비해 편의성이 돋보인다. 성벽 안쪽에 5m 가량의 회곽도를 두었고 성이 급격하게 굽어지는 부분에는 별도의 치(: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해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를 설치했는데, 너비가 12.5m에 달할 만큼 넓게 축조했다. 이성산성은 최소 15개소 이상의 대형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다른 산성에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다. 그 중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과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있어 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이성산성이 옛 도시의 중심지였던 읍치성으로 축성됐을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성의 주인은 점차 신라로 굳어져 가는 추세이다. 한강 유역에 위치한 산성인 만큼 백제와 고구려, 신라 중 누가 주인일 것이냐를 두고 학계에서 설왕설래했지만, 6세기 중엽 축성돼 9세기 중엽까지 사용된 신라성이라는 게 다수설로 자리 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몇 걸음 더 걷자 건물터(이정표 : 이성산0.2Km/ 먹거리촌1.2Km/ 동사지1.8Km/ 동문지0.1Km)가 나타난다. ‘9각 건물터라는데 하늘에 제사(祭祀) 지내던 천단(天壇)으로 추정된다는 건물터이다. 그 옆에는 장방형의 건물터도 보인다. 산성을 방위하는 이들의 생활공간이나 저장 공간, 혹은 강당(講堂) 등으로 쓰였을 것이다. 참고로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에서는 홀수를 양수(陽數), 짝수를 음수(陰數)로 구분한다. 이때 9는 양수 중에서 가장 높은 극양수(極陽數)이다. 하늘로 해석하는 이유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 8은 음수 중에서 가장 크니 땅을 상징하는 게 자명한 일일 것이다.




천단(天壇) 터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는 ‘8각 건물터가 있다. 땅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이다. 제천의식(祭天儀式)을 위한 장소를 수도 경주 외에 둔 것은 그만큼 이 지역에 대한 중요성을 감안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잠시 후 이성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만이다.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높다란 산불감시초소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성산성이 세워진 원인을 조망이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강 인근의 아차산 일대 보루군과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 여러 성들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이다. 웃자란 주변의 잡목(雜木)들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성산은 조선 후기(18세기)의 지도첩인 해동지도(海東地圖)’에서 나타난다. ‘북쪽 가일주막 아래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9세기 초에 제작된 광여도(廣輿圖)’에는 광주 고읍기(古邑基) 향교 북쪽에 이성산이 표현되어 있다. 동 시대에 제작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이성산은 금암산 북쪽에 있으며, 백제 온조왕의 성지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광주군 서부면 초이동에 이성산(理聖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쁘장하게 생긴 정상표지석은 그 옆에다 세워놓았다. 정상석 옆에 이성산(二聖山)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보인다. 백제의 왕자 두 사람이 거주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남위례성 즉 백제도읍지와 관련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산이란다. 아무튼 전설의 두 왕자는 '비류''온조'라는 설이 유력하니 참조한다.



이성산 정상에서 남쪽 금암산, 남한산성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위례 둘레길‘ 4코스를 본격적으로 탄다고 보면 되겠다. 200m쯤 내려왔을까 남문지 갈림길‘(이정표 : 이정표(남한산성5.6Km/ 남문지0.6Km/ 동문지0.6Km/ 이성산0.2Km)이 나오고, 이어서 100m쯤 더 걸으면 이번엔 동사지 갈림길‘(이정표 : 남한산성5.5Km/ 동사지1.2Km/ 이성산성0.1Km)을 만난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내려서면 향여고개가 나온다. 금암산와 이성산을 잇는 능선안부이며 춘궁동과 광암동을 오가는 고갯마루이다. 이 근처에 향교가 있다고 해서 향교고개라 불이어 오다가 언제부턴가 향여고개로 바꿔 부르게 되었단다. 옛날에는 이곳에 성황당이 있어 오가는 길손들의 쉼터의 역할까지 톡톡히 수행했으나 도로가 확장되면서 없어졌단다.



도로를 내면서 끊어졌던 능선은 동물의 이동통로를 만들면서 다시 연결되었다. 그 양쪽 끝에는 두 개의 아치형 문을 만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남한산성 가는 길입니다여기서부터는 이성산성 가는 길입니다라는 문패까지 달아놓은 걸로 보아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의 경계지점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향여고개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옛날 도로를 만들면서 생겨난 절개지(切開地)인 모양인데 그 경사를 배겨낼 수 없었던지 나무계단을 길게 놓았다. 언젠가 하남 위래길을 조성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이때 만들어진 시설들이 아닐까 싶다. 당시 기사에서는 탐방객들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판과 이정표를 설치하고, 안전사고 방지와 편의제공을 위해 안전로프와 계단. 의자 등을 설치한다고 했다.



계단을 올라서면 시야(視野)가 툭 트인다. 광암동 일원과 서울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이다. 하지만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또 다른 조망처가 나오기 때문이다. 아니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고도(高度)가 높아진 만큼 시야 또한 더 넓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이어지는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거의 느낄 수가 없을 정도로 완만하기 때문이다. 흙산이 갖고 있는 전형적인 특징일 것이다. 대신 눈요깃거리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되겠다. 조망 또한 없다. 이 또한 흙산의 특징일 것이다. 그저 길가에 세워놓은 안내판들을 읽어가며 진행하는 게 전부인 구간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8분쯤 진행하면 광암동정수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정표 : 금암산1.9Km, 남한산성 4.8Km/ 광암정수장0.3Km/ 이성산성0.8Km)가 나오고, 이어서 7분 정도를 더 걸으면 옛무덤을 만난다. 적석분(積石墳)금암산 고분이라고 한다. 이미 발굴을 끝냈는지, 아니면 도굴 때문인지는 몰라도 돌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안내문에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사이의 무덤이라고 적혀있는데, 29기가 주변에 분포되어 있단다. 참고로 광암동이란 지명은 광암동 일대에 고인돌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 고인돌이 넓적하게 생겼다는 것을 한자로 풀어쓴 것이란다. 도로확장 공사를 하며 발견된 고인돌은 지금 하남시청 앞마당으로 이전되어 있다고 한다.



누렇게 단풍이 든 능선은 추색(秋色)이 완연하다. 아니 나뭇잎이 절반 이상이나 떨어져나간 걸로 보아 이미 겨울에 들어섰나 보다. 그러고 보니 수은주가 영하로 내려갔다는 뉴스가 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둘레길 곳곳에는 수많은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다. 주변에 보이는 수목(樹木)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고,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나 지명의 유래 등을 적어 이야깃거리가 있는 둘레길을 만들었다.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는 얘기이다.



지금 걷고 있는 위례 둘레길하남 위례길중 제4코스로 하남시청을 시작점으로 샘재와 남한산성(벌봉), 금암산, 이성산성을 거쳐 덕풍골에 이르는 39.7의 구간이다. ‘하남 위례성()의 내부 지역을 둘러싼 산을 걷는 코스라고 보면 되겠다. 오늘은 이중 일부를 걷는 셈인데, 금암산과 이성산을 지나면서 하남시와 서울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요즘은 서울의 랜드 마크(landmark)라 할 수 있는 롯데월드 타워를 눈에 담으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15분쯤 걸었을까 이번에는 커다랗고 둥그런 바위 하나를 만난다. 바위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큰바위 얼굴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모양새가 만들어지지 않으니 문제이다. 조선 개국초기의 승려인 무학대사는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는 말을 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난 멀었나보다. 하긴 하찮은 중생인 내가 어찌 부처의 마음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몇 걸음 더 걷자 가림막이 쳐져 있는 곳이 나타난다. 가림막의 안은 말끔하게 벌목(伐木)이 되어있다. 문화재조사라도 준비하고 있는가보다 하고 다가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띠지에 하남 역사박물관 문화재조사라고 적혀있다. 어느 글에선가 하남지역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사방에 널려 있는 유적들이 어느 시대에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는지가 정확하게 밝혀진 게 거의 없다는 얘기이다.




잠시 후 고갯길인 덜미재에 내려선다. 옛날 춘궁동에서 감북동으로 넘어 다니던 민초들의 고갯길이었다.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감북동 방향, 그러니까 오른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약수터가 나오는데 그 주변에 약간의 석축이 남아 있다고 적혀있다. 조금 전에 보았던 문화재조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고갯마루에 세워진 이정표(금암산0.8Km/ 덜미재약수터0.1Km/ 황골1.2Km/ 이성산성1.0Km)를 보면 황골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곡식이 영글어가는 경작지에 아침 햇살이 비치면 경사면이 온통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덜미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이어서 봉우리 하나를 넘어 작은 안부까지 떨어지더니 이번에는 엄청나게 가팔라져버린다.



금암산 정상 바로 아래, 그러니까 급경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 가운데 곧장 능선을 타는 길은 쉽게 도전할 일이 아니다. 특히 애인이나 아내, 아이들과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삼갈 일이다. 얼마나 가파른지 네발로 올라가거나 안전로프에 몸을 맡겨야만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르기 때문이다. 조금 편하게 오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오른편으로 난 우회로(迂廻路)를 택하면 된다.



위험구간이 끝나면 엄마새와 아기새 바위라고 적힌 안내판이 나타난다. 눈에 담을 만한 특징이 없는 평범한 바위 앞에다 세워 놓았는데 도대체 어떤 바위를 지칭하는지 모르겠다.



그 옆에는 범바위라고 적힌 또 다른 안내판도 보인다. 안내판 뒤로 조금 더 내려가니 바위절벽이 나타난다. 이 바위절벽 아래에 굴이 있는데 옛날 이 굴에서 호랑이가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 범바위는 하남시 일원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이다.



바위에 오르면 겹겹이 쌓인 산릉들이 빠짐없이 시야에 잡힌다. 벌봉에서 객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맨 앞에 섰고, 그 뒤에는 용마산에서 검단산으로 연결되는 검단지맥, 그리고 그 왼편에는 예빈산에서 예봉산, 백봉산을 거쳐 천마산으로 이어지는 천마지맥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조금 더 오르자 금암산(金岩山) 정상이다. 이성산에서 1시간 30, 산행을 시작한지는 2시간 10분이 지났다. 분지(盆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널따란 정상에는 고상하게 생긴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금암산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산에 바위가 많고, 그 바위가 비단빛깔을 띤다고 해서 금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바위가 얼기설기 얹혀 있는 듯해 얼거산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단다.



금암산 정상은 죽인다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을 정도로 조망이 장쾌하다. 청계산과 관악산이 남쪽으로 장벽을 이루고, 잠실 너머 한강은 도시 속의 호수처럼 바라보인다. 그 오른쪽에는 북한산과 도봉산의 암릉에 이은 수락산이 기운찬 산릉을 이어나가고 있다. 특히 최근 서울의 랜드마크(landmark)로 자리 잡은 롯데월드 타워의 자태는 한마디로 장관이다.




금암산은 육산(肉山)이라기보다는 골산(骨山)에 가깝다. 전형적인 육산의 형태를 띠고 있는 남한산의 줄기임을 감안할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 덕분에 볼거리가 널려있다. 동서로 터지는 조망은 물론이고, 곰의 머리처럼 생긴 바위와 거북이를 닮은 바위 등 기기묘묘(奇奇妙妙)하게 생긴 바위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편이다. 그래선지 정상에는 여러 곳에 벤치를 놓아두었다. 서서히 즐기다 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다시 길을 나선다. 남한산성 방향으로 10분 남짓 더 걷자 참샘골 갈림길’(이정표 : 남한산성 서문2.2Km/ 참샘골1.0Km/ 금암산0.4Km)이 나온다.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참샘골이 나오는데 골짜기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를 마을 주민과 등산객들이 애용하면서 찬샘골이라고 불렸는데 언제부턴가 참샘골로 바뀌었단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널문이고개’(이정표 : 남한산성 2.0Km/ 항동 1.0Km/ 금암산 0.3Km)에 내려선다. ‘널문이는 캐슬렉스골프장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 입구의 참나무 아래에 성황당이 있었으며 그곳에 큰 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 큰문을 가리키던 넓은 문넓은문이넓문이널문이로 변했다는 것이다. 또한 항동(項洞)이란 고골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길가에 연리목(蓮理木)‘이라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연리목이란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기둥을 사이좋게 합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리목을 사랑나무혹은 부부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나무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기도하면 부부의 금슬이 좋아지고, 남녀 간에는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널문이고개에서 10분쯤 더 오르자 골프장갈림길‘(이정표 : 남한산성1.6Km/ 골프장. 쌍바위약수 1.8Km/ 이성산성4.0Km)이 나오고, 이어서 15분 후에는 성불사 갈림길‘(이정표 : 서문0.7Km/ 성불사1.8Km/ 이성산성4.9Km)에 이른다. 이곳에서 오른편 성불사 방향으로 내려서면서 줄곧 함께 해온 위례둘레길과는 이별을 고한다. 이후부터는 검단산·망덕산 산행 때(‘17.4.9) 이용했던 하산로와 겹친다. 자세한 기술을 생략하는 이유이다.



산행날머리는 송파구 마천동(남한산성 입구) 버스종점

잠시 후 연주봉 옹성이 바라보이는 봉우리를 넘었다싶으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데크계단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40분 정도를 내려가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1976년에 창건되었다는 성불사가 나타나고, 골목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오면 마천동 버스종점에 이르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5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시간에 의미를 둘 일은 아닌 것 같다.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걷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백병산(白屛山, 423.5m)

 

산행일 : ‘17. 10. 29()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과 강상면의 경계

산행코스 : 전수1리 버스정류장시실리모텔 맞은편임도송전탑마당바위백병산사거리(송학리 갈림)포장임도비포장임도병산2(산행시간 : 2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양평군의 서쪽 남한강변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으로 제대로 된 바위 하나 만날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때문에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고 보면 된다. 백병산 정상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 또한 보잘 것이 없다. 하지만 산이 원체 나지막하다 보니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산행을 마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거기다 흙산의 특징대로 보드라운 흙길은 차라리 폭신폭신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고, 산길의 경사(傾斜) 또한 완만하기 짝이 없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별 무리 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대중교통의 이용이 편리한 서울 근교의 산이라는 장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산행지로 권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런 볼거리가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산이라서 자칫 어린애들이 투정을 부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전수1(힐하우스) 버스정류장(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모처럼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한 근교산행이다. 2개월 전 바위에서 떨어지면서 다친 발목(인대 파열)에 대한 부담감을 회원들이 배려해준 덕분이다. 아무튼 백병산을 오르고 싶다면 일단은 양평읍까지 와야만 한다. 이때 중앙선 전철을 이용해도 좋고 동서울터미널(2호선 강변역)에서 직행버스를 타도된다. 이어서 양평시외버스터미널에서 4-(5·7·9·10·11)번 버스를 이용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전수1리에 이르게 된다.



아래 지도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했다. 백병산에서 1.5Km쯤 진행하다 성덕리와 송학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사거리에서 송학리 방향으로 내려섰고, 이어서 만나게 되는 포장임도를 따라 왼편으로 내려서다가 잠시 후 왼편으로 나뉘는 비포장 임도를 이용해서 날머리인 병산2리로 연결시켰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버스가 왔던 방향으로 150m 정도를 되돌아나가면 무인텔시실리모텔이 나온다. 이 모텔의 맞은편 포장임도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들머리 오른편에 양자산 등산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도를 따라 100m쯤 올라가면 왼편으로 다른 임도 하나가 나뉜다. 백병산으로 가려면 이 임도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달갑지 않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게 아닌가. 입구를 철제문으로 막아놓은 것이다. 개의치 않고 우회(迂迴)해서 들어가지만 기분은 썩 좋지가 않다. 지자체에서 안내하고 있는 등산로를 개인이 막아버린 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개인만 나무랄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이 생겼는데도 이를 방치하고 있는 지자체의 무관심도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다.




뒤돌아보면 남한강과 양평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잠시 후 이동통신사의 것으로 보이는 시설물 앞에서 첫 번째 이정표(백병산 정상 1.75Km/ 전수리 등산로 입구 0.5Km)를 만난다. 산길은 이곳에서부터 비포장 길로 변한다.




임도를 조금 더 따르다가 이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물론 이정표는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산악회 리본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희미한 길의 흔적을 찾아가며 진행할 따름이다.



산길은 서서히 가팔라진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풍경을 눈요기 삼아 오르면 될 일이다.



산자락으로 접어들어 15분쯤 진행했을까 군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참호(塹壕)가 나타난다. 아니다.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니 무단점용이나 훼손을 금한다는 군부대의 경고판이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아직도 사용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산길은 고도(高度)가 높아질수록 그 경사 또한 심해져간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버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5분 정도를 오르면 거대한 송전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능선에 올라선다. 오른편으로도 길의 흔적이 나있으나 백병산은 왼쪽 방향이다.



이후부터는 능선을 따른다. 그리고 3분 후에는 두 번째 이정표(병산리 등산로 입구0.55Km/ 전수리 등산로 입구1.32Km)를 만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병산리에서 올라오는 길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정표에는 백병산으로 가는 방향표시가 없다. 이정표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능선은 고도(高度)를 높여 감에 따라 가을 풍경 또한 그 농도(濃度)가 짙어져간다. 그러다가 끝내는 전형적인 가을 풍경으로 변해버린다. ’가을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문구가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주변이 온통 붉게 물들어있다. 그래 오매 불 나부렀네!‘라는 말은 이런 때 하는가 보다.






가을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을 감상하며 10분쯤 걷자 백병산 마당바위라는 팻말이 보인다. 하지만 바위는 보이지 않는다. 바닥이 조금 반반한 것을 두고 마당이란 지명까지 붙여놓았나 보다. 하긴 양평 쪽의 사면(斜面)이 날카롭게 각을 세우고 있어 벼랑으로 보이기는 한다.



그 덕분에 나뭇가지 사이로 틈이 벌어지면서 남한강이 신기루처럼 슬그머니 나타난다. 가히 몽환적이 풍경화가 아닐 수 없다.



산길은 급할 것이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거의 평지 수준의 경사를 보인다고 보면 되겠다. 아직까지도 푸름을 자랑하고 있는 나무들도 많이 보인다. 아무래도 바람을 덜 타는 곳이라서 덜 여물었나 보다.



능선은 참나무들이 주종, 그 사이사이에 단풍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는데, 가끔은 낙엽송들도 무리를 지어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있다.



그렇게 15분쯤 걸으니 커다란 바위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바위일 뿐만 아니라 그 생김새 또한 기괴하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그리고 살그머니 장군바위라는 이름 하나를 붙여본다. 바위 하나 없는 능선에 독불장군처럼 오롯이 서있다는 의미로 말이다.




산길은 바위를 지나면서 경사가 급해진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로 가파르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적당히 가파르다고 보면 되겠다. 거기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오르내리라는 배려일 것이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다시 한 번 가을빛 잔치가 열린다. 주변이 온통 단풍나무 일색인 것이다. 능선 전체가 붉게 타오르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한 일행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에 도취한 나 또한 기쁨의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리고 만다. 극한의 슬픔과 극한의 기쁨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진행 속도가 한없이 느려진다. 이것저것 눈에 담다보니 발걸음이 더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자 드디어 백병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 만이다. ‘백병산(白屛山)이란 지명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요 아래에 있는 병산리(屛山里)라는 지명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을 뒤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병산(屛山)‘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이유가 설명되지 않으니 그저 하나의 설()로만 놓아두자.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전수리 등산로입구 2.2Km, 양자산 정상 9Km/ 병산리 등산로입구 1.56Km) 외에도 이곳의 높이가 423.7m임을 보증하는 삼각점(이천 304)이 설치되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뜩이나 비좁은 공간에다 안테나 시설까지 만들어 등산객들이 쉴만한 공간을 아예 없애버렸다.



정상의 한쪽 귀퉁이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솟아올랐다. 서너 명이 한꺼번에 올라설 수 있을 정도로 위가 반반한 바위이다. 어떤 이는 이 바위를 일러 마당바위라고 했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저 전망바위 수준으로 보는 게 옳겠다. 아무튼 바위 위에서의 조망은 시원스럽다. 가섭봉과 백운봉, 장군봉 등 용문산 능선의 많은 봉우리들과 양평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오른편 끄트머리에서는 추읍산이 나도 여기 있다며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산을 시작한다. 물론 양자산 방향이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기 짝이 없다. 뭔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내려설 수 없을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지자체에서 이런 상황을 놓쳤을 리가 없다.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의지할 수 있도록 했다.



안부까지 떨어졌던 산길이 맞은편 산봉우리로 다시 오르더니 이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산행이 수월해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는 구간이다. 마침맞게 단풍철과 겹쳤으니 곱게 물든 산하(山河)를 구경하면서 한껏 여유를 부려본다. 이런 게 행복이 아니겠는가. 행복의 기본은 만족이라고 했다. 지금 난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성덕리 갈림길’(이정표 : 양자산 정상8.5Km/ 성덕리1.7Km/ 백병산 정상0.9Km)을 만난다. 갈림길에 개의치 않고 양자산 방향으로 직진한다.



이후부터 산길은 상당히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리고 15분 후에는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양자산7.9Km/ 성덕리1.7Km/ 백병산 정상1.5Km)를 만난다. 하지만 이곳은 송학리(강상면)로 내려가는 길이 하나 더 있는 사거리이다. 이정표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나타나는 입간판 모양으로 생긴 또 다른 이정표(양자산4.5Km/ 백병봉3Km/ 강상면 송학리/ 강하면 성덕리)가 이를 증명해준다. 길 찾기에 도움이 되는 이정표들이나 표기된 거리는 마음에 새겨두지 않은 게 좋겠다. 실제 거리와는 꽤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젠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할 차례이다. 왼편 송학리 방향이다. 산길은 무척 가파른 편이다. 밧줄 등 안전시설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조심조심 내려서는 게 상책이지 싶다.



급하게 내려선 산길은 산자락을 옆으로 째면서 지능선으로 연결시킨다. 이어서 10분 후에는 시멘트포장 임도에 내려선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포장과 비포장이 뒤섞여 있는 임도이다. 임도를 내면서 벌목(伐木)을 해놓았는지 왼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뾰쪽하게 솟아오른 백운봉이 저 멀리에서 또렷하다.




10분 조금 넘게 임도를 따르다보면 왼편으로 또 다른 임도가 하나 나뉜다. 조금 좁아 보이지만 새로운 임도를 따르기로 한다. 하산지점으로 삼은 병산2리로 내려가는 지름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곳곳에 길이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초반은 길이 잘 닦여 있다. 진행방향에 있는 백운봉의 빼어난 자태를 감상하며 내려가는 기분 좋은 산행이 이어진다.



하지만 얼마 안가 길의 형편이 나빠진다. 사람들의 통행이 뜸한 탓에 잡목과 잡초들이 임도까지 밀고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사진과 같이 억새무리의 아름다운 꽃 잔치를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의 형편은 좋아질 줄을 모른다. 거기다 가끔은 펜스(fence)로 길을 막아 놓기도 했다. 자기 땅이라고 막아놓은 모양이지만 너무 이기적이지 않나 싶다. 시골 인심이 좋다고 하더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양평은 이미 시골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고 말이다.



산행날머리는 병산2(강상면)

그렇게 악전고투를 치루며 내려서길 30여분, 진행방향 저만큼에 잘 지어진 전원주택이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군내버스가 다니는 병산2까지는 아직도 10분 정도를 더 걸어야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17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 40분 정도가 걸린 셈이다.


노적봉(露積峯 또는 구나무산, 859m) 옥녀봉(玉女峰, 507m)

 

산행일 : ‘17. 6. 10()

소재지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과 북면의 경계

산행코스 : 조옥동 구종점옥녀봉헬기장구나무산(노적봉)대원사 갈림길사거리 안부임도계곡75번 국도 이곡리 버스정류장’(산행시간 : 4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오늘 오른 산들은 바위다운 바위 하나 볼 수 없을 정도로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때문에 눈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산세(山勢)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옥녀봉의 정상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 또한 트이지 않는다. 흙산이 갖고 있는 일번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좋은 점도 있다. 우선 흙산의 특징대로 산행이 편하다. 전반적으로 경사가 완만한데다 보드라운 흙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거기다 세상에 덜 알려진 탓에 사람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 호젓한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최적지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보통의 등산객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눈요깃거리는 차지하고라도 가슴에 담아둘만한 역사나 문화가 일절 없는 밋밋한 산이기 때문이다.


 

산행 들머리인 조옥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가평읍까지 와야만 한다. 광역버스(1330-2) 등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경춘선 전철을 이용하는 게 편리하지 않을까 싶다. 역사(驛舍)를 빠져나와 길 건너 버스승강장에서 33-35번 군내버스로 갈아탄다. 이때 출발시간을 미리 알아두어야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배차 간격이 2시간 가까이나 될 정도로 늘어지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조옥동 구종점(경기 가평군 가평읍 승안리 412-3 )

용추폭포 방향으로 20분쯤 달리다가 조옥동(가평읍 승안리)에서 내리면 된다. 이어서 용추폭포 방향으로 10분쯤 더 걸어 들어가면 화장실을 갖춘 널따란 공터가 나온다. 산행들머리인 조옥동 옛() 버스종점이다. 하지만 이곳 구종점에서 내릴 수도 있었지 않나 싶다. 손님이 원하는 곳에 내려주는 게 군내버스의 장점이겠기에 하는 말이다. 참고로 조옥동은 냇물이 너무 맑아서 돌들이 마치 옥처럼 빛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용추구곡은 조선조 때인 1876년 성재 유중교 선생이 이곳의 풍광에 반해 이름을 지었다는 경승지이다. 상류인 칼봉산쉼터 위 구라우골 입구에서 내곡분교터 방면 50m 거리인 농원계를 제9곡으로해서 하류로 내려오며 구라우골 입구 아래 제8곡 귀유연, 칼봉산쉼터 위 인골 초입인 제7곡 청풍협, 칼봉산쉼터 아래인 제6곡 추월담, 물안골 입구 아래 잣창고 주변인 제5곡 일사대, 잣창고와 중산리 사이인 제4곡 고슬탄, 중산리매점 앞 제3곡 탁영뢰, 미륵바위 앞 계류인 제2곡 무송암, 그리고 지금의 용추폭포를 일컫는 제1곡 와룡추 등을 말한다.




화장실 건물 뒤편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옥녀봉1.6Km, 노적봉 4.4Km/ 연인산12Km/ 탐방안내소0.7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정표 외에도 입산시 주의사항을 적어놓은 안내판과 옥녀봉 입양사업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산으로 들어서자마자 잣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울창창한 것이 잣의 본고장에 들어섰음을 실감나게 해준다. 잣나무 숲길을 걷노라면 온몸으로 퍼지는 송진 내음에 황홀함마저 느끼게 된다. 천국이 따로 없다. 세상 시름 다 잊고 잣 향기에 취해 그저 천천히 걷고 또 걷고 싶다. 하지만 여건을 그렇지 못하다. 산길의 경사가 만만찮게 가파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마 잣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효과 덕분일 것이다. 피톤치드는 나무와 식물이 해충이나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스스로 만들어내는 휘발성 물질이다. 잣나무의 피톤치드는 다른 나무에 비해 월등한 효과가 있어 각종 감염 질환이나 아토피 질환 등은 물론 면역력을 좋게 해줄 뿐 아니라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잣나무가 자연의 명의인 셈이다. 참고로 잣나무는 2년에 한 번 열매가 열리는 기다림의 나무다. 사람이건 다람쥐건 급하게 서두른다고 잣을 얻을 수는 없다. 귀한 잣을 얻기 위해서는 꽃이 피고도 꼬박 1년을 넘겨 다음 해 가을이 되어야만 잣을 수확할 수 있다.



이렇게 경사가 가파른 곳에서는 걸음을 재촉해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힘만 더 들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운 채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느긋하게 내딛어본다. 숲에 몸을 맡기다보니 머리로 알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맑은 공기 덕분에 깨어난 온몸의 감각들이 이제 옥녀봉의 숲을 자세히 더듬어 느끼기 시작한다. 언제부턴가 숲은 참나무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하늘을 가릴 듯 쭉쭉 뻗어난 숲길을 따른다. 그러다가 의외의 풍경을 만난다. 끝까지 육산(肉山)일 것만 같았는데 뜬금없이 뾰족뾰족한 바윗길이 나타난 것이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이라 할 수는 없어도 생김새 또한 괜찮은 편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지만 잠깐의 눈요기로는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산길은 계속해서 가파르지만은 않다. 가끔은 완만한 구간도 나타난다는 얘기이다. 그게 비록 아주 잠깐이지만 말이다. 문득 반반한 곳에다 벤치라도 놓아두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어진다.’라는 속담이 딱 맞는 가 보다.



봉우리를 넘기도 한다. 가파르면서도 긴 오르막에 짧은 내리막 구간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두 번에 걸쳐 나타난다. 당연히 봉우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육산의 특징대로 조망(眺望)도 트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갈림길 등의 주요 지점마다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주요 지점들의 사이가 멀 경우에는 중간 중간에까지 세워 두는 배려까지 잊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옥녀봉까지 1.6Km쯤 되는 구간에 4개나 설치되어 있다면 얼마나 촘촘히 세워져 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물론 양쪽 기점의 이정표는 뺀 숫자이다. 들머리의 안내판에서 연인산도립공원이라는 문구를 보았는데, 과연 그에 걸맞은 관리가 아닐까 싶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쯤 되었을까 갑자기 시야(視野)가 열린다. 전형적인 흙산인지라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바닥을 살펴보니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고 보니 올 4월 중순엔가 옥녀봉의 산불소식이 언론 매체를 탄 적이 있었다. 가평읍 경반리에서 시작된 산불이 4ha의 산림을 불태웠는데, 이 산불을 끄기 위한 이틀간의 진화작업에 소방서와 군청, 군부대 등 752명의 인원과 헬기 7대를 포함한 진화장비 30대가 동원되었다고 했다. 아무튼 인근 군부대의 박격포 사격훈련 중 발화된 화재라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숲을 다 태워버린 것은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덕분에 시야가 활짝 열리면서 멋진 조망을 선사하는 것이다. 가평시가지가 거칠 것 없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물안산과 마루산도 보인다. 시가지의 뒤에서는 삼각산과 강선봉, 그리고 검봉산이 파도치듯 넘실거리고 있다.




불타버린 능선의 경사가 가팔라진다 싶더니 산길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희미하지만 능선으로도 길은 나있다. 갈 길 바쁜 산꾼들이 치고 올랐던 흔적일 것이다. 우린 또렷하게 나있는 왼편 길로 향한다. 오뉴월 뙤약볕에 시달리는 고생을 일부러 사서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2~3분쯤 걸었을까 오른편으로 희미하게 난 길의 흔적이 보인다. 이 역시 갈 길 바쁜 산꾼들이 내놓은 흔적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15분쯤 진행하면 능선 안부(이정표 : 옥녀봉0.1Km/ 노적봉3.0Km/ 탐방안내소2.2Km)에 올라선다. 구나무산은 왼쪽 방향의 능선을 타야 한다. 오른편에 있는 옥녀봉에 오른 후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가파른 능선을 5분 조금 못되게 치고 오르면 널따란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옥녀봉 정상(이정표 : 노적봉 3.1Km, 탐방안내소 2.3Km/ 탐방로 아님)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47분만이다. 옥녀봉이란 이 산을 멀리서 바라볼 경우 마치 선녀가 목욕을 하고 머리를 빗는 형국처럼 그 모습이 완연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6·25 사변 전까지만 해도 안개 끼고 날씨 그윽한 날이면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갔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산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시야에 잡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명품 종주코스로 알려진 이다. 몽덕산과 가덕산, 북배산, 계관산이 마치 파도라도 치는 양 넘실대고 있다. 불기봉과 청우산도 보인다. 그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산들은 아마 호명산과 주발봉일 것이다. 가평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옴은 물론이다. 그쪽 방향의 보납산 뒤에 납작 엎드려 있는 덩어리들은 아마 남이섬과 자라섬일 것이다. 용추계곡의 뒤에서 하늘금을 이루는 칼봉산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뒤에는 깃대봉과 대금산이 버티고 있다.




정상은 텅 비어있다. 그렇다고 정상표지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하는 곳에다 세워놓았으니 잘 찾아보라는 얘기이다. 일단은 이정표가 탐방로 아님이라고 표기해 놓은 방향으로 내려서야 한다. 하지 말라는 일을 하는 것 같아 찜찜하기는 해도 어쩌겠는가. 그래야만 정상석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헬기장을 내려서서 너덧 걸음만 더 걸으면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석을 만나게 된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노적봉 방향이다. 구나무 산으로 가야하는데 웬 노적봉이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다. 구나무산과 노적봉은 같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구나무산이었는데 지난 99년에 가평군 지명위원회에서 산 이름을 노적봉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노적봉의 높이가 859m이니 옥녀봉 보다는 350m 정도가 더 높다. 하지만 두 봉우리 사이의 거리가 3Km나 되다보니 서둘러가며 고도를 높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중간에 두 개의 이정표(노적봉까지의 남은 거리가 2.4Km1.7Km를 각각 남겨 놓은 지점)를 만나기도 한다. 걷는 속도를 조절해가며 걸을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45분쯤 진행하면 750m봉 헬기장에 닿는다. 일부 등산객들이 종종 노적봉 정상으로 착각하기도 하는 봉우리이다. 헬기장에 올라서니 희미하게나마 왼편으로 길이 나있는 게 보인다. 이정표(노적봉1.1Km/ 탐방로아님/ 옥녀봉1.9Km)에는 탐방로 아님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으나 용추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이제 노적봉의 정상에 다 왔다고 보면 된다. 헬기장의 높이가 750m이니 고도(高度)100m만 더 높이면 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산길은 완만하기 짝이 없다. 거기다 바닥은 보드라운 흙길이다. 느긋하게 걷기에 딱 좋다고 보면 되겠다. 중간에 갈림길(이정표 : 노적봉0.4Km/ 탐방로 아님/ 노적봉2.6Km) 하나가 보이나 개의치 않기로 한다.



가끔은 이런 괴목(怪木)도 보인다. 그만큼 산이 깊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산줄기는 한북연인구나무(노적)단맥의 일부 구간이다. ‘일대간 일정간 십삼정맥(一大幹一正幹十三正脈)’ 중의 하나인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작은귀목봉에서 동쪽으로 분기(分岐)하여 귀목봉과 연인산(우목봉), 매봉, 대금산, 불기산, 호명산을 일구고 난 후 북한강에서 그 숨을 다하는 산줄기를 한북연인지맥(漢北戀人支脈)’이라고 한다. 이 한북연인지맥의 대표격인 연인산에서 동남방향으로 분기하여 장수봉과 송학봉, 바른골봉, 구나무산(노적봉). 옥녀봉 등으로 이어지다가 가평천으로 잦아드는 약 15km 정도의 산줄기가 한북연인구나무(노적)단맥이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진행하면 노적봉(구나무산) 정상에 올라선다. 옥녀봉을 출발한지 75분 만이다. 밋밋한 구릉(丘陵)처럼 생긴 정상은 아무런 특징도 없다. 눈에 담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이다. 숲으로 둘러싸여 조망까지도 터지지 않는다.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한두 평쯤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오석(烏石)으로 만든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장수고개3.0Km/ 탐방로 아님/ 옥녀봉3.0Km), 그리고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노적봉의 원래 이름은 구나무산이다. 구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구나무는 참나무와 모양이 비슷하지만 껍질이 두꺼워 병마개 재료로 쓰인다. 그러다가 가평군 지명위원회에서 노적봉으로 바꾸어 놓았다. 가평 읍내나 북쪽 목동으로 빠지는 길목인 마장리 일원에서 올려다볼 때 노적가리를 쌓아올린 듯 뾰족하게 생겼다는 게 이유란다.



하산을 시작한다. 장수고개 방향이다. 반대편에서 정상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석인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장수고개나 대원사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인 모양인데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삼거리를 노적봉의 정상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들에게 정상석이 세워진 위치를 알려주고 몇 걸음 더 걸으니 삼거리(이정표 : 대원사3.2Km/ 장수고개3.5Km/ 옥녀봉3.2Km)가 나온다.



대원사로 방향을 잡는다.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경사가 거의 없어 내려서는 게 조금도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대원사까지의 거리가 3.2Km나 남아있다 보니 서둘러서 고도를 떨어뜨릴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삼거리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던 단풍나무가 그 개체수를 많이 늘렸다. 주종인 참나무보다도 오히려 더 밀도(密度)가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아무래도 단풍철에 다시 한 번 찾아와야 하지 않나 싶다. 불타오르는 산하를 즐겨보기 위해서 말이다.



어른 둘이 손을 맞잡아야만 끝이 맞닿을 수 있을 정도로 허리통이 굵은 참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오래 묵은 탓에 그 생김새도 기괴하기 짝이 없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고목(古木)들을 감상하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잠시 후 이번에는 진달래나무들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다. 아니 수달래(물철쭉)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곳 노적봉은 가을철뿐만 아니라 봄나들이에도 어울리는 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저 편안하게 걸으며 숲과 하나가 되는 여정을 만들어나간다. 푸른 숲에만 시선을 고정하다 잠시 잠깐 하늘 한번 올려다보니 강렬한 햇살이 눈부시다. 고개를 돌려 또다시 숲의 너그러운 품으로 돌아오니 이제야 좀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숲의 넉넉하고 푸근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다 보면 이제까지의 힘들었던 산행의 기억쯤은 사라져버린 지 이미 오래이다.



비록 잠깐이지만 바위지대도 나타난다. 그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생김새마저도 보잘 것이 없었지만 하도 바위가 귀한 산이라서 카메라에 담아 봤다.



그렇게 30분쯤 걸으면 이정표(대원사 2.0Km/ 노적봉 1.2Km) 하나가 나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정표를 조금 지난 지점에서 길이 둘로 나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원사로 내려가는 길이 더 희미할 뿐만 아니라 능선을 벗어나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까닥 잘못하다간 오른편 능선, 즉 가평읍과 북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능선을 계속해서 타버리기 십상이라는 얘기이다. 우리 역시 그런 우()를 범해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이름 없는 어느 봉우리에 올라선다. 길은 아직도 또렷하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제껏 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지붕을 씌워놓은 군()의 벙커가 심심찮게 나타나는 것이다. 사후관리를 해오고 있는 듯 아직까지도 외관(外觀)이 멀쩡하다.




얼마쯤 내려섰을까 잣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그 숲길 군데군데 잣송이 들이 떨어져 있다. 마치 숲의 전령들이 길을 찾느라 떨어뜨려 놓은 조약돌 같다. 그 잣송이들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사람들은 잣나무를 늘 푸른 나무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사계절의 변화가 각각 다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푸르름이 절정에 달하는 초여름, 즉 지금이 아닐까 싶다.



가끔은 작은 봉우리들을 넘기도 한다. 그중 어떤 봉우리는 잠깐의 눈요기로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의 경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나무와 바위들이 잘 어우러지며 멋진 풍광을 만들어 낸다.



조금씩 가팔라지던 내리막길이 언제부턴가 엄청나게 심해져 버렸다. 주변 나무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쉽게 내려설 수 없을 정도로 거친 내리막길이다. 길의 흔적 또한 희미해져 버렸다.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이 와버렸기 때문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지 50분쯤 되었을까 십자안부가 나타난다. 좌우로 난 임도가 제법 또렷하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느냐 아니면 이쯤에서 산을 내려갈지를 놓고 고민이 시작된다. 결국에는 후자를 택하기로 한다. 길도 또렷하지 않은 능선을 계속해서 탄다는 게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왼편(북면 방향)으로 내려선다. 제법 너른 임도이지만 수월하지는 않다.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탓에 넝쿨식물들이 길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반바지를 입은 최군의 수난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길을 잘못 들어서버린 것을. 그게 비록 혹독하겠지만 말이다.



10분 남짓 내려섰을까 암벽이 잘 발달된 계곡이 나타난다. 협곡(峽谷)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규모까지도 제법 크다. 충분하게 물이 흐를 경우 쉽게 만날 수 없는 비경(祕境)으로 변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물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간의 가뭄이 심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길은 계곡을 끼고 나있다. 물길을 옆에 끼고 가다가 어떤 때는 물길을 건너기도 한다. 또 바위벼랑이 크고 험한 곳에서는 산자락을 치고 오르기도 한다. 그 암벽들에 물이라도 흐른다면 멋진 폭포를 만들어낼 텐데 아쉽기 짝이 없다.



그렇게 20분쯤 진행하면 집단으로 조성된 듯한 집들이 나타난다. 철조망 안에 갇혀있는 집들이 하나같이 멋지다. 하지만 인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돈 깨나 있는 사람들이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75번 국도 이곡리 버스정류장’(가평군 북면 이곡리)

민가의 아래로 난 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이곡교회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마을이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75번 국도를 만나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이 걸렸다. 준비해간 음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50분을 쉬었으니 실제 걸은 시간은 4시간 10분이 되는 셈이다.


남한산(南漢山, 522.1m)-노적산(露積山, 388.4m)

 

여행일 : ‘17. 6. 6()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 서울시 송파구의 경계

산행코스 : 광지원노적산약사산(藥寺山, 415.9m)약수산(藥水山, 402.3m)한봉(汗峰, 418.1m)은고개갈림길남한산벌봉(蜂巖, 461.9m)은고개갈림길은고개(산행시간 : 4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서울의 북한산성과 함께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중요한 산성이다. 이 남한산성의 주변에 능선으로 연결되는 10여개의 산들이 있는데 서울 근교의 능선산행지로 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선지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이 점차 늘어가는 추세다. 필요한 곳마다 이정표가 잘 세워져 있는 등 등산로의 상태가 전체적으로 양호한데다 대중교통편까지 편리한 것이 그 원인이지 싶다. 오늘은 이 능선들 중에서 동쪽(광주시)으로 연결되는 두 개의 코스를 타본다. 남한산성면사무소에서 시작해 노적산과 약사산, 약수산을 거처 남한산성 외성(外城)까지 올라간 다음 은고개(엄미리)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이때 성내에 위치한 한봉과 벌봉, 그리고 남한산을 함께 둘러봤음은 물론이다. 오늘 산행은 한마디로 행복한 산행이었다. 폭신폭신한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해서 체력적으로 부담이 없었고, 거기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는가. 누구 하나 망설임 없이 웃고 떠들어본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산행들머리는 남한산성면사무소(광주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113)

강변역(지하철 2호선) 1번 출구로 나와 길 건너 버스승강장(테크노파트앞)에서 13(광주터미널강변역테크노마트앞)이나 13-2(명하골강변역테크노파크앞) 버스를 타면 1시간쯤 지난 후에 남한산성면사무소(옛 중부면사무소) (광지원, 남한산성 입구)에서 내리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면사무소 구내에 지어놓은 정자(亭子)에서 산행 채비를 한다. 이때 면사무소의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면사무소 앞 삼거리에서 면사무소를 오른편에 끼고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남한산성으로 연결되는 342번 지방도이다.



300m쯤 걸었을까 오른편 언덕에 해공 신익희 선생 추모비(海公 申翼熙先生 追慕碑)‘가 길손을 맞는다. 등산로는 추모비의 오른편으로 열린다. 들머리에 노적산 등산 안내도와 이정표(한봉 5.0Km, 벌봉 6.0Km, 수어장대 11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1892-1956)선생은 이곳 광주(초월면 서하리)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였으며, 해방 후에는 교육자(국민대학교 설립)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해방 전에는 중국의 군인(육군 중장)이었던 때도 있다. 해방 후 처음에는 이승만을 지지했으나, 이승만의 전제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이후로 반()이승만 노선으로 바뀌었다. 1954년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장면, 박순천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하였으며 1956년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정권과 맞섰지만 호남지역으로 가는 유세 도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안타까운 삶을 마감했다.



급할 것 없는 오르막길을 100m쯤 오르면 능선 안부(이정표 : 한봉4.9Km, 벌봉 5.9Km/ 신익희추모비0.1Km)이다. 오른편에 운동기구 몇 점과 벤치를 놓은 쉼터가 보인다. 그 뒤로도 길이 나있는 걸 보면 면사무소 뒤편에서도 산길이 열리는가 보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을 따른다. 이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가파름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强度)를 높여간다.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나지막한 산이라고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치기 십상이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등산로가 잘 닦여있다는 점이다.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조금이라도 힘이 덜 들도록 배려를 했다. 또한 곳곳에다 벤치를 놓아 힘이 들 경우 쉬어가도록 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멀쩡한 계단을 놓아두고 다들 옆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숫제 계단 옆으로 길이 하나 더 나있을 정도이다. 계단이 촘촘하지 않고 올라서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높다보니 없는 것만도 못해버렸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노적산 정상에 올라선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마치 너덜처럼 널려있는 정상에는 자그마한 정상표지석 외에도 벤치와 평상을 갖춰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잠시 쉬었다 가라는 모양이다. 이렇듯 등산로가 잘 정비된 곳에 이정표(벌봉 5.0Km/ 광지원리 2.0Km)라고 없을 리가 없다. 119의 국가지점표시목(다사 76824052)까지 세워놓았다. 참고로 노적산은 산의 생김새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군량미를 쌓아 놓은 것 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병자호란이라는 아픈 역사가 만들어 낸 이름이지 싶다.



노적산을 지나면서 산길을 아래로 뚝 떨어진다. 함께 걷고 있던 여성들의 표정이 굳어지는 순간이다. 떨어진 만큼 올라가야만 하는 산의 진리를 알고 있음이리라. 어디 산뿐이겠는가. 인생 또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맨날 나쁜 일만 계속될 수도 없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현실을 직시(直視)하고 미래를 대비해 나가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는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일단 노적산에 오르고 난 이후부터는 산길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길까지 폭신폭신한 황톳길이다. 거기다 능선은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다. 마침 오가는 이들도 없으니 호젓한 산행을 즐겨볼 일이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진행하면 이정표(벌봉6.6Km, 수어장대 9.0Km/ 엄미리(은고개)1.5Km)가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그런데 벌봉까지의 거리가 아까 노적산에서보다 오히려 더 멀어졌다. 우리들이 낸 혈세로 만든 시설물들일 진데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잠시 후 약사산 정상에 올라선다. 노적산을 출발한지 27분만이다. 밋밋한 구릉(丘陵) 모양으로 생긴 정상은 119의 국가지점표시목(다사 76294055)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정상표시석이나 이정표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게 안타까웠던지 대구의 산악인 김문암씨가 나무로 만든 정상표지판을 걸어놓았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인증사진까지 찍는 호사를 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약사산의 옛 이름은 밀라봉(密羅峯)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밀양 박씨가 많이 살았던 골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밀양골밀양곡으로, 또다시 밀라동으로 바뀌었고 그 뒷산의 이름이 밀라봉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이름인 약수산은 이 산에 약수가 나오는 샘이 있는 절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그게 어떤 절인지는 모르겠다.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아까와 다름없이 호젓한 산길이 계속된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것 또한 같다. 함께 걷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하나같이 경쾌하다. 그만큼 산길이 편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게 잠시 진행하면 송전탑이 나오고, 이어서 나타나는 내리막길을 조금 더 걸으면 이정표(벌봉 3.7Km/ 노적산 1.4Km)가 있는 십자안부에 내려선다. 119의 국가지점표시목(다사 75644062)은 현재의 위치를 불당리갈림길로 적고 있다. 왼편에 있는 불당리(남한산성면)로 연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은 오전리 오야수마을로도 연결되니 참조할 일이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내려갈 경우에는 엄미리 미라울마을이 나온다.



안부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딱 걷기 좋을 만큼의 경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약수산 정상이다. 약사산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정확히 25분이 걸렸다. 약수산 정상도 텅 비어 있기는 약사산과 매한가지이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뜬다고 봐야겠다. 이곳에는 국가지점표시목 조차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김문암씨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갈림길이 보인다. 왼편은 불당리 아랫말, 그리고 오른편은 미라울마을로 연결되는 길이다.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큰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부드러운 능선길이다. 걷는 게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다는 얘기이다. 산길의 풍경 또한 괜찮은 편이다. 크고 작은 나무들과 고목(古木)이 함께 어우러지다 못해 작달막한 철쭉들까지 끼어들었다.



15분쯤 걸었을까 검복리 갈림길이 있는 안부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갈 경우에는 미라울로 연결되고, 왼편은 검복리 양지말로 내려가게 된다. 이정표(벌봉 2.5Km, 동장대지 2.8Km/ 노적산 3.8Km)와 국가지점표시목(다사 74584091) 외에도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서툴게 쌓아올린 케언(cairn)도 보인다. 성황당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안부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렇다고 산행풍경이 크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높이가 비슷한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연결시키다보니 골을 깊게 만들 필요가 없었나 보다. 울창한 숲길에다 폭신폭신한 황톳길이 계속된다는 것 또한 변함이 없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지 싶다.




그렇게 20분 정도 걸었을까 성벽이 나타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2014)되어 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 : 사적 제57)의 세 개의 외성(外城) 중 하나인 한봉성(漢峰城)이다. 나머지 둘은 봉암성(蜂巖城)과 신남성(新南城)이니 참조한다. 한봉성은 본성(本城)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봉암성의 동남쪽에서 한봉(漢峰)의 정상부까지 쌓은 외성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화포를 쏘아 인조가 머물던 행궁에까지 포탄이 떨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축조되었는데 본성이나 봉암성과는 달리 폐곡선(閉曲線 : 하나의 곡선상에서 한 점이 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곡선)을 이루지 않게 설치한 것이 특징이란다.



성벽을 왼편에 끼고 돌다가 성의 안으로 들어가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벌봉1.3Km/ 노적산2.8Km)로 나뉜다.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한봉은 남서쪽 방향, 쉽게 말해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성벽의 위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4분쯤 걸었을까 이정표(벌봉 1.6Km, 동장대 1.7Km)가 세워진 곳에 이르니 오른편 숲속에 삼각점으로 보이는 구조물과 함께 자연석 하나가 눈에 띈다. 반반하게 생긴 표면에는 한봉 418.1m’이라고 적어 놓았다. 공식적인 정상석은 아니고 누군가가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한봉(汗峰)이란 이름을 얻게 된 연유나 짚어보고 넘어가자. 한봉(汗峰)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을 정복하기 위해 청나라 칸(=)이 이 봉에 올라 남한산성을 엿보았다고 해서 칸의 한자 음역인 ()’과 봉우리의 ()’을 하나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한봉(汗峰)漢峰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으니 참고한다. ‘해동지도(海東地圖)’광여도(廣輿圖)’인데 남한산성 동문 아래 한봉(漢峰)’으로 묘사되어 있다. 1847(헌종 13)에 홍경모(洪敬謨)가 편찬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도 한봉(漢峯)은 남한산성의 동쪽에 있고 옛 이름은 한봉(汗峰)인데 성 안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돈보(墩堡)를 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 이번에는 벌봉방향으로 진행한다. 북쪽으로 보이는 산성길이다. 옛 절터처럼 애잔한 분위기가 넘쳐나는 좋은 길이다.




5분쯤 걸으면 암문(暗門) 하나가 나온다. 누군가 이정표(벌봉1.0Km, 동장대터 1.3Km/ 좌익문(동문)3.0Km/ 한봉0.6Km)에다 16암문이라고 적어 놓았다. 남한산성의 성벽에 만들어진 4대 문()16개의 암문 중 마지막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남한산성의 암문은 모두 16개이다. 본성에 11, 봉암성에 4, 그리고 한봉성에 1개가 있다. 너무 많다보니 이름 붙이기 쉽게 아예 번호로 매겼다.



암문(暗門)이란 성곽에 문루(門樓)를 일부러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을 말한다. 일반인이나 적들이 알지 못하게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만들었으며, 전시(戰時)에는 적이 모르게 물자를 이송하곤 했다.



동문갈림길을 지나면서 길은 오르막으로 변한다. 남한산으로 오르는 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다른 암문을 만난다. 봉암성으로 연결되는 암문이 아닐까 싶다. 작달막한 체구의 집사람에게도 비좁게 느껴지는 것이 과연 암문(暗門)답다. 그래야 적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암문 근처에서 우리가 하산코스로 잡은 엄미리(은고개)로 내려가는 길이 나뉜다. 사람들이 검단지맥이라 부르는 능선길이다. 길이 나뉘는 지점에 이정표(벌봉0.4Km, 동장대터 0.9Km/ 엄미리(은고개)3.9Km/ 한봉1.1Km, 큰골 1.2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은고개까지는 검단지맥의 일부구간이다. 검단지맥은 한남정맥 상의 선장산(350m) 북쪽 1.7km 지점인 향린동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법화산(383.3m)과 영장산(414.2m), 성남 검단산(523.9m), 용마산(595.5m), 하남 검단산(658.4m) 등을 일군 후 팔당대교 남단에서 그 숨을 다하는 길이 약 4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산꾼들은 대개 용인시 기흥구 향린동산에서 이배재까지를 1구간, 이배재에서 은고개를 2구간, 그리고 은고개에서 바깥창모루(팔당대교)까지를 3구간으로 나눈다. 그러니까 오늘은 검단지맥 3구간 중 일부(남한산에서 은고개)를 걷게 되는 셈이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벌봉까지 다녀오기로 한다. 아니 반대편 성남방향에서 올라오고 계신 여성회원님을 접속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곳의 위치를 찾지 못하겠다고 해서 벌봉으로 올라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역시 산성길을 따른다.



2분쯤 걸었을까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계속해서 성벽을 따르는 길과 그렇지 않은 지름길이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인데 오른편의 성벽을 따르는 길보다는 왼편의 길이 훨씬 더 또렷하다는 게 문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웃자란 잡초가 갈 길을 방해하는 오른편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오석(烏石)으로 만든 남한산 정상표지석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옆에는 삼각점(422 재설)도 보인다. 참고로 남한산은 일장산(日長山) 또는 주장산(晝長山)으로도 불린다. 산의 사방이 평지여서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남한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하남시 일원의 아파트 숲들은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검단산과 용마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치 병풍이라도 되는 양 시가지를 감싸고 있다. 그 왼편 한강 너머에서는 예봉산과 적갑산이 나도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그 뒤에 뾰쪽하게 솟아오른 산은 아마 천마산일 것이다.



벌봉으로 연결되는 성벽(城壁)도 보인다. 벼랑 위에 쌓아 올린 것이 아마추어의 눈에도 천혜의 요새로 보인다. 사람들은 남한산성을 일러 우리나라 산성축성술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는 남한산성을 일러 천작지성(天作之城)’이라고 했다.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자연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성()이라는 것이다. 가운데는 평평하고 바깥은 험고하며 형세가 웅장하여 마치 산꼭대기에 관을 쓴 것 같은 형상이라고 했다. ‘택리지(擇里志)’에서도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있고 중심지는 만 길이나 되는 산꼭대기 위에 있다. 옛날 백제 시조 온조왕의 옛 도읍이었던 곳이다. 안쪽은 평평하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청나라 군사가 처음 왔을 때 칼날 하나 대보지 못했고, 병자호란 때도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단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됐기 때문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금 전의 갈림길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왼쪽의 길을 따른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또 다시 길이 나뉜다. 이번에는 이정표(벌봉0.2Km/ 전승문(북문)1.2Km/ 한봉1.2Km)가 가리키고 있는 벌봉 방향이다. 하지만 북문 쪽으로 가더라도 벌봉에 이를 수는 있다. 아니 오히려 더 편하게 갈 수가 있다.



거의 허물어지다시피한 암문 쪽으로 올라선다. 그리고 조금 전 남한산 정상에서 보았던 성벽의 위를 따른다. 성벽은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아니 어떤 곳은 이미 허물어져 있다. 복원이 시급하다는 얘기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화재조사를 하고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곳곳에 붙어있다. 복원을 위한 지표조사를 하고 있음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은 남한산성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인적이 뜸한 길은 순하면서 호젓하고, 길섶 양쪽으로 허물어진 봉암산성이 쓸쓸한 분위기를 돋운다.



잠시 후 외동장대터라고 쓰인 빗돌이 나타난다. 주변에는 축대를 쌓았었던 돌들로 추정되는 돌들이 널브러져 있다. ‘장대(將臺)’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루()로 남한산성에는 다섯 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 외동장대는 동장대와 벌봉 일대가 조망되는 곳에 지어졌다. 이 외동장대는 숙종12(1686) 수어사 윤지선이 수어청 군병을 동원하여 봉암성을 축성할 때 함께 구축한 것으로 추측되며 군사(후영장인 죽산부사와 2천 명의 군사들)들이 진을 치고 훈련하던 곳으로 보인다. 고지도를 보면 서장대와 남장대의 경우에는 누각이 설치된 것으로 나오지만, 외동장대의 경우에는 누각에 관한 기록이나 표시가 전혀 없다. 이로보아 외동장대는 처음부터 누각이 없이 대()만 설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금 더 걷자 거대한 바위봉우리 앞에 벌봉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벌봉이란 암문 밖에서 이 봉우리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정기가 서려있는 벌봉을 깨트려야 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하여 이 바위를 깨트리고 산성을 굴복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 벌봉은 해발512.2m로 수어장대(497m)보다 높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을 청나라 군에 빼앗겨 적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 화포로 성안까지 포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바위를 돌아 위로 오르자 이번에는 봉암산성신축비에 대한 안내판이 나타난다. 숙종 12년 윤41일부터 봉암성을 쌓기 시작하여 같은 해 59일에 마무리했음을 말해주는 비()란다. 자연석 위에 정사각형의 해서채(楷書體) 로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판독 가능한 49자 외에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든 몇 글자가 더 있다고 한다. 비문을 통해 당시 광주유수겸 수어사인 윤지선의 감독아래 봉암신성이 신축되었음을 알 수가 있단다.



몇 걸음만 더 옮기면 벌봉이다. 아니 바위를 돌아 올라왔으니 이미 벌봉에 올라왔다고 봐도 되겠다. 벌봉은 도면에는 없는 이름이다. 벌은 순수한 우리말인데 한문으로 옮길 경우 봉()이 된다. 그래서 벌봉을 봉봉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웃자고 한 이야기겠지만 아무튼 벌봉은 커다란 바위봉우리이다. 참고로 이곳 벌봉은 남한산성 안에 있는 여러 봉우리들보다도 높다. 전략적 요충지라고 볼 수 있다. 병자호란 때에는 그런 이점을 알아차린 청나라 군사들이 이곳에서 산성 안을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을 해야만 했던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숙종 12년에 벌봉 주위에다 산성을 새로 쌓았는데 그게 바로 봉암성이다. 숙종31(1705) 수어사 민진후가 포루를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남한산성의 본성에 대비하여 새로 쌓은 성이라는 의미로 '신성(新城)'으로 불리기도 하며, 동쪽에 위치한 성이라 해서 '동성(東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깊지 않은 굴이 뚫린 커다란 바위에 뭔가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글을 쓴 솜씨도 여간 뛰어난 게 아니다. 뭔가 내력이 있을 것 같기에 유심히 살펴보다 헛웃음을 짓고 만다. ‘金炳陸’... 사람 이름이었던 것이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 엄미리(은고개)갈림길에서 이번에는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른다. 올라올 때 이용했던 노적산-약수산 코스와 마찬가지로 걷기 좋은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울창한 숲속을 걷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자 삼거리(이정표 : 엄미리(은고개)4.3Km/ 엄미리계곡0.5Km/ 벌봉1.0Km)가 나온다. 엄미리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뉘는데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춰간다. 능선의 길이가 5Km에 가깝다보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급한 오르내림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계단을 놓은 것도 모자라 밧줄 난간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가파른 구간도 나타난다. 다만 어쩌다 한두 번, 그것도 그 길이가 아주 짧을 따름이다.




중간에 갈림길도 여러 번 만나게 된다. 30분쯤 후에 만나게 되는 첫 번째 갈림길(이정표 : 엄미리(은고개)3.0Km/ 엄미리계곡0.7Km/ 벌봉1.3Km)은 엄미리계곡으로 연결되는데 잠깐만 다리품을 팔면 의안대군 방석(芳碩, 1382~1398)의 묘역(애기릉)을 다녀올 수 있다. 두 번째도 역시 엄미리계곡으로 연결되는 갈림길(엄미리(은고개)0.9Km/ 엄미리계곡0.4Km/ 벌봉3.4Km)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은 곳에서도 두어 번에 걸쳐 길이 나뉜다. 이럴 때는 대충 길이 또렷한 곳으로 진행하면 될 것 같다. 참고로 의안대군 방석은 태조 이성계가 48세 때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8번째 아들이다. 11세의 나이로 조선 최초의 세자로 책봉되어 조선 2대 왕이 될 운명이었으나 이복형제인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1398) 17세 나이로 죽임을 당했다. 이방원은 둘째 형인 영안군을 2대 왕(정종)으로 앉혔다가 2년 후 그 자신이 조선 3대왕(태종)에 올랐다. 그렇게 방석과 방원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이방원의 무덤인 헌릉이 서울 도심에 으리으리하게 자리해 있는 것에 비하면 남한산 동쪽에 위치한 이방석의 묘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산을 시작한지 80분쯤 지났을까 판독 불가능한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자그마한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기에 그냥 지나치려는데 눈에 익은 팻말 하나가 눈에 띈다. ’라는 아명을 쓰고 있는 최남준씨가 검단지맥 303.1m‘라고 쓴 표지판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았다. 국제신문의 근교산 취재팀산행대장을 지냈던 분인데 검단지맥을 하면서 이곳을 지나갔던 모양이다.



303.1m을 지나면서 산길은 갑자기 가팔라진다. 산길은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밧줄로 난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비록 얼마가지 않아 밋밋한 능선길로 되돌아가지만 말이다.



산행날머리는 은고개(남한산성면 엄미리)

하산지점에 가까워지자 길은 더욱 좋아진다. 시멘트계단까지 만들어져 있을 정도이다. ‘광주 이씨문중에서 자기네 묘역(墓域)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었지 않나 싶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진행하면 43번 국도가 지나가는 은고개(이정표 : 벌봉 4.4Km, 한봉 5.1Km, 좌익문(동문) 7.0Km)에 내려서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은고개란 이름은 엄미리(奄尾里)라는 지명에서 유래됐다. 엄미리의 자를 따서 엄고개(奄峴: 엄현)로 불리다가 발음이 은고개로 변한 것이라 한다. 오늘 산행은 정확히 6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준비해간 음식을 먹느라 80분이나 쉬었으니 실제로 걸은 시간은 4시간 40분으로 보면 되겠다.



산을 내려오니 식당에서 보낸 승용차 두 대가 기다리고 있다. 부지런한 최영철군이 음식주문을 미리 해놓은 모양이다. 엄미리에 있는 음식점이니 걸어봐야 10분이 채 되지 않는 거리지만 음식점에서 서비스 차원으로 태우러 왔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황금옻닭(TEL : 031-761-7477)에서 점심 겸 뒤풀이가 시작되었다. 메뉴는 이 집의 메인요리인 옻닭이다. 나처럼 옻을 타는 사람들에게는 엄닭’, 즉 엄나무를 넣고 끓인 닭백숙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쫄깃쫄깃한 육질은 입에 넣을 때마다 감칠맛이 났고, 원할 때마다 리필을 해주는 진한 국물은 시원하면서도 구수했다. 그 덕분에 우린 과음을 하게 됐지만 말이다.


구름산(雲山, 237m)

 

산행일 : ‘17. 5. 3()

소재지 :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하안동, 노온사동, 소하동, 일직동 일대

산행코스 : 광명시보건소 앞금당광장가리대광장산불감시용 정자구름산군부대후문광명터널 상부광명동굴광명동굴입구 버스정류장(광명시 소하동)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광명시에는 구름산과 가학산, 도덕산, 서독산 등 4개의 산이 연속으로 솟아 있다. 모두 200m 내외의 낮은 산이지만, 시 전체 면적(38.5) 중 산림 지형이 약 40%를 차지할 정도로 광명은 쉽게 자연을 접할 수 있는 도시다. 광명시는 이러한 장점을 부각시켜 최근 4개의 산을 하나의 길로 잇는 숲길을 만들었다. 특히 저 지난해(2015)에는 구름산과 가학산을 크게 한 바퀴 두르는 누리길을 조성해 시민들의 큰 호응을 끌고 있다. 신록의 계절을 맞아 푸름으로 물들어가는 이 산들을 찾았다. 동호회인 산과 하늘회원들과 함께이다. 명맥만이 유지되고 있을 정도로 한가한 산악회인데 어쩐 일인지 박회장이 전화를 주었다. 봄도 무르익었으니 산행을 한 번 나서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네 산의 종주를 염두에 두고 코스를 짜보았다. 하지만 그 계획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산행을 하는 회원들의 체력들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구름산 정상까지 올랐다가 가학산 자락에 있는 광명동굴까지 들러보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해보았다. 초여름에 가까워진 요즘 초록으로 빛나는 광명의 숲길을 여유롭게 걸어보는 것으로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광명시보건소 입구(광명시 하안동 230-1)

모처럼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한 근교산행이다. 우선 7호선을 이용해 철산역까지 온다. 2번 출구를 빠져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안양역 방향으로 가는 2번 버스가 6~9분 간격으로 지나갈 것이다. 먼저 오는 버스를 올라타고 여섯 개 정류장만 지나면 산행들머리인 광명시보건소에 이르게 된다.



산자락으로 놓인 계단을 따라 오르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하지만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산행안내도를 살펴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니까 말이다. 마침맞게 들머리에는 여러 가지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광명시 숲길 안내도‘, ’도구가서(도덕산구름산가학산서독산) 숲길역사유적 숲길‘, ’구름산 전망 숲길‘. ’피톤치드 둘레 숲길등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우리는 오늘 구름산 전망 숲길(광명보건소에서 구름산 정상까지)‘과 도구가서 숲길의 일부구간(구름산에서 광명동굴까지)을 걷게 된다. 또 다른 안내판은 광명누리길안내판이다. ’광명누리길이란 구름산과 가학산의 2부 능선을 따라 조성된 총 길이 11.9Km의 순환형 둘레길이다. 보건소에서 금강정사를 거쳐 광명동굴까지 이어지는 5.91코스와 광명동굴에서 영회원(소현세자의 빈이었던 민회빈 강씨의 묘로 일명 애기능)을 거쳐 보건소로 돌아오는 5.42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길도 역시 일부 구간을 오늘 걷게 된다. 그 외에도 걷는 게 왜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설명판과 빛을 품은 광명여행이라는 홍보판이 세워져 있지만 이건 참고만 하면 되겠다.


몇 걸음 오르지 않았는데도 능선이다. 하긴 동네 뒷산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기껏해야 해발이 100~250m에 불과한 나지막한 봉우리들이 늘어선 능선이니 말이다. 길은 대체로 평평한 흙길이다. 산에서 맡는 흙냄새가 진하다. 새소리도 들리기 시작한다. 오늘 걷고 있는 이 길은 광명숲길로 광명시에서 일대에 조성해놓은 숲길이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라는 말에 어리둥절할 수도 있겠지만 광명시의 철산동과 하안동, 노온사동, 소하동, 일직동 등에 걸쳐 있는 네 개의 산, 즉 도덕산과 구름산, 가학산, 그리고 서독산을 이르는 말이다. 불암산과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 길을 줄여서 이라 하듯이 말이다.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틈만 있으면 벤치를 놓았고 주요 갈림길이나 전망이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亭子)를 세웠다. 또 어떤 곳에는 준비해온 간식이라도 먹고 가라는 듯 평상까지 놓아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정자에서 시야(視野)가 열린다. 가리대마을과 소하동 일대의 아파트촌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산행을 시작한지 12분쯤 지나면 금당광장(또는 금당이광장)에 이른다. 벤치와 운동기구 몇 점을 갖춘 작은 쉼터이다. 이곳에서 길은 셋으로 나뉜다. 광명동굴로 연결되는 광명누리길은 이곳에서 좌(2코스)(1코스)로 나뉘면서 주능선과는 헤어진다. 누리길로 봐서는 주요 포인트인 셈이다. 그래선지 이정표(구름산 정상2.1Km/ 광명누리길(광명동굴 방향)5.7Km/ 광명누리길(광명동굴 방향)5.0Km/ 광명누리길(보건소 방향)0.6Km) 외에도 누리길안내도를 세워놓았다.



직진코스인 능선을 따른다. ’광명누리길과 겹치는 구간을 지나 이제부터는 오롯이 광명숲길을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그것도 세 번째 코스인 구름산 전망 숲길을 말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가팔라진다. 능선길이라는 게 실감이 날 정도로 그 정도가 꽤 심하다. 그렇다면 주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구름산 전망 숲길은 산책코스가 아니라 등산코스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게 10분 남짓 오리니 데크로 만든 전망대가 나타난다. 망원경까지 설치해 놓은 것은 이곳의 조망(眺望)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난간에 기대어 앉을 수 있도록 의자까지 만들어 둔 것은 천천히 조망을 즐겨보라는 배려일 것이고 말이다.



등산객들을 위한 배려로 난간에다 조망도(眺望圖)를 세웠다. 조망도와 비교해가며 조망을 즐겨본다. 광명시의 소하동, 하안동과 서울시 금천구 일대의 시가지들이 흡사 한 폭의 그림처럼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그 뒤에는 이 풍경화의 배경이라도 되는 양 관악산의 암봉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그 오른편에는 청계산과 광교산, 그리고 성채산과 수리산이 또렷하다.



다시 길을 나서면 이번에는 굵직굵직한 바위들이 길손을 맞는다. 첨부된 지도에 돌산으로 표기된 지점인데 세월의 무게를 짐작케 하는 바위가 많은 게 신기하다. 바위들은 나름대로 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거대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도에 돌산이라고 표기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하도 작은 산이다 보니 바위에 올라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제법 보인다. 이곳도 역시 운동기구 몇 점과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구름산으로 향한다. 가리대광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제법 멋지다.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놓았는데 나선형으로 휜 것이 자못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약간만 색상을 가미한다면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꽤나 몰려올 것 같다.



그렇게 잠시 내려서면 구름산터널 상부’(이정표 : 광명누리길(광명동굴방향)4.1Km/ 광명누리길(광명보건소방향)1.5Km/ 돌산전망대0.4Km)‘이다. 쉼터를 겸하고 있는 이곳에서 아까 금당광장에서 헤어졌던 광명누리길1코스와 다시 만난다. 그리고 이 길은 가리대광장까지 함께 겹쳐서 이어진다.




산행을 하다보면 참나무의 아랫부분을 비닐로 감싸 놓은 것을 수없이 볼 수 있다. 참나무시들음병 방제를 위해 광명시 공원녹지과에서 끈끈이롤트랩을 설치한 것이다. 매개충인 광릉긴나무좀이나 등산객들을 괴롭히는 날벌레들을 잡는 데 효과적이란다.



잠시 후 가리대광장 쉼터가 반갑다며 길손을 맞는다. 벤치는 물론이고 초가(草家)로 지어진 정자에다 화장실과 ’119의 구급함까지 갖춘 이곳은 한마디로 번화가다. 인파로 넘친다는 얘기이다. 갈림길이 많은 게 그 이유일 것이다. 우선 이곳은 광명누리길광명 숲길이 만나는 곳이다. 그리고 구름산등산로 3코스(가리대 배드민턴장 방향)4코스(승지골 방향)가 여기서 양쪽으로 나뉜다. 구름산 정상으로 가는 길도 곧장 오르는 길과 우회하는 길로 나뉜다. 길이 하도 많아 헷갈릴 수도 있겠으나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길가에 이정표(구름산 정상1.1Km/ 구름산 정상 우회길1.5Km/ 광명누리길(광명동굴방향)3.9Km/ 가리대0.6Km/ 승지골0.2Km/ 광명누리길(보건소방향)1.7Km)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다면 그 옆에 세워놓은 광명시등산로안내도를 살펴보면 될 일이고 말이다.



앞에 가던 집사람이 뭔가를 가리킨다. 다가가보니 작은 들꽃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다. 한 떨기 들꽃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마는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길바닥에 피어난 것이 신기해서 카메라에 담아 봤다. 오가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피해 다녔기에 저런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구름산으로 향한다. 널따란 길을 따라 잠시 걸으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경사(傾斜) 또한 제법 가파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단을 오르지 않고 왼편으로 가고 있다. 계단의 아래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는 얘기이다. 아까 이정표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둘로 나뉜다더니 이곳이 바로 그곳인 모양이다. 이런 계단은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이번만은 못하지만 또 다른 계단이 연이어 나타난다.



계단은 끝이 없게 느껴진다. 이 구간에서는 모두가 입을 굳게 다문다. 가쁜 호흡 때문이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도 여름 장맛철의 낙숫물 수준이다. 가쁜 호흡은 감출 수 있어도 흘러내리는 땀은 숨길 수가 없다. 이마로 오르내리는 손길이 바빠지는 이유이다. 허벅지 근육이 뻑뻑해지자 계단에 주저앉고 싶어진다. 다행히도 그때쯤 저만큼에 계단의 끝이 나타난다. 그래 구름산 산행은 결코 만만치 않다.



지루한 오르막이 끝나면 이층으로 지어진 정자(亭子)가 길손을 맞는다. 산불감시용으로 지어졌다는데 초소치고는 너무 잘 지어놓았다. 하긴 이렇게 정성들여 가꾼 산에 어느 한 시설물인들 허투루 지을 수 있었겠는가. 정자의 주변은 공원(公園)으로 가꾸어 놓았다. 화단을 만들고 철쭉을 심었다. 여분의 공간에는 사철단풍을 배치했는데 흐드러지게 핀 철쭉꽃과 잘 어우러지며 산상화원(山上花園)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자에 오르면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광명시와 부천시 일원이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관모산과 소래산 그리고 철마산과 계양산, 춘의산 등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어디가 어딘지 모른다고 지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난간에다 조망도를 설치해 놓았으니 지도와 견주어가며 조망을 즐긴다면 그런 걱정은 기우(杞憂)로 변해버릴 테니까 말이다.



정자에서 구름산 정상까지는 굴곡이 거의 없는 평지 수준이다. 거기다 숲이 깊어 햇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다. 여름철 산행에 그만이지 싶다. 아무튼 이런 길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느림보의 미학을 따르지 않더라도 설멍설멍 걸으며 한껏 여유를 부려보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이마를 스쳐가는 청량한 바람결에 내 한 몸 맡겨볼 일이다.



하지만 험상궂게 생긴 큰 바위들도 만난다. 길가에 도열해 있는 바위들이 생각보다는 날카롭다. 바윗길이 생소한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풍취가 있겠다.



가는 길에는 명상의 숲이라고 쓰인 팻말도 보인다. 옆의 팻말에는 쉬어가는 곳이라고 적혀있다. 그 아래에 벤치가 놓여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명상을 할 만한 특별한 분위기는 조성되어 있지 않다. 느낌으로 봐서는 단순히 쉬었다가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맞다. 이런 곳에서는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에 구름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해발 237m인 구름산은 의 네 산 중에서는 가장 높지만 조금 전에 지나왔던 산불감시용 정자가 있었다는 곳보다는 약간 낮아 보인다. 내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아무튼 구름산은 광명시의 주산으로 원래의 이름은 아방산이었다. 아방리에 속해 있는 산이라고 해서 아방봉이라 불리었으나 조선후기에 구름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구름 속까지 산이 솟아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웬만한 헬기장보다도 넓어 보이는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것도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커다랗다. 참고로 구름산은 자그마한 산이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멋은 있다. 산이 어찌 멀고 높고 깊어야만 맛이겠는가. 구름산은 아늑하면서도 푸근하다. 거기다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우리가 산으로 인식하기 전부터 삶의 터전으로 알아온 동네 뒷산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정상석 외에도 이층으로 지어진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이층으로 오르면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2 경인고속도로너머로 시흥시 방향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렇다고 순수한 들녘은 아니다. 산이지만 하도 낮기에 그런 표현을 써봤다.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한다. 마침 준비해 온 음식들을 펼칠만한 평상까지 준비되어 있다. 막걸리에 소주, 그리고 맥주로 목을 축이고 오랫동안 묵혀왔던 얘기들로 회포를 풀어본다. 그리고 우린 무려 1시간 30분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만큼 하고 싶었던 얘기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광명동굴로 향한다. 이정표(가학산 정상 2.3Km, 가학동굴 2.5Km/ 소하근린공원 1.1Km/ 가리대광장 1.1Km, 광명시보건소 2.8Km)에 또렷하게 나와 있으니 길 찾기에 걱정할 일은 없다. 잠시나마 평지와 마찬가지로 이어지던 산길이 갑자기 아래로 내리꽂는다. 그나마 밧줄로 난간을 만들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그리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평평하게 산굽이를 돌고 돈다.



이 구간에서는 꽤 많은 갈림길을 만난다. 그 첫 번째는 천연약수터 갈림길’(이정표 : 광명동굴2.35Km/ 천연약수터150m/ 구름산 정상150m)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군부대 후문 삼거리’(이정표 : 광명동굴1.9Km/ 노은사 저수지1.5Km/ 구름산 정상0.7Km)을 만난다.



산굽이를 돌아드는 산길은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낸다. 그런데다 좁기까지 하다 보니 로맨틱(romantic)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고만고만한 굽이를 수평으로 돌다가 어떤 곳에서는 조금 높이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조금 낮춘다. 평소에 다니던 높고 깊은 산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풍경이 아닐까 싶다. 거기다 인적까지 드물다보니 호젓하기까지 하다. 이 또한 매력만점으로 작용한다.



광명누리길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설치한 이정표도 보인다. ’함께 걸으면 더 행복하다는 부제(副題)까지 첨언(添言)해 놓았다. 하긴 광명시에서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 편한 길을 조성한다는 모토(motto)를 내걸며 만들어 낸 명품 둘레길이니 그 정도 표현이야 당연하다 할 것이다. 아무튼 201510억 원을 들여 조성한 이 길은 여러 갈래로 단절된 등산로를 잇고 토사 유실로 훼손된 기존 등산로를 재정비했다. 등산로 입구와 갈림길 등 주요지점에 안내표지판과 정자(亭子) 등을 설치하여 편의성을 높였음은 물론이다. 그와 더불어 숲 생태계 보호를 위한 다양한 노력도 기울였다고 한다.



잠깐 더 걸으면 이번에는 광명터널의 상부(이정표 : 광명터널1.5Km/ 광명시보건소4.1Km/ 구름산 정상1.4Km)이다. 산길은 이곳에서 광명누리길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소통쉼터(이정표 : 광명동굴 1.0Km/ 광명시보건소 4.6Km)을 지난다. 아무튼 광명터널 윗부분을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해발을 높인다. 하지만 서서히 올리다보니 올라간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광명동굴 조금 못미처에서 왼쪽 사면(斜面)으로 길(이정표 : 광명동굴 0.2Km/ 노루바위 130m/ 광명시보건소 5.4Km)이 하나 나뉜다. 뭔가 있을 것 같아 올라가보니 높이가 대략 20m쯤 되어 보이는 화강암 암괴(巖塊)가 하나 나타난다. 노두바위라는데 등반용 볼트가 몇 개 박혀있는 것으로 봐서 누군가가 줄을 걸고 등반을 했던 모양이다.



잠시 후 진행방향 저만큼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굴뚝이 나타난다. 광명시 자원회수시설의 굴뚝이다. 광명시의 명소로 급부상하고 있는 광명동굴은 자원회수시설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구름산에서 이곳 광명동굴까지는 1시간 15분이 걸렸다. 그만큼 서서히 걸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광명동굴은 수도권에서는 유일한 사람이 만든 인공동굴(人工洞窟)이다. 이곳은 금과 은, , 아연, 구리 등을 채굴하던 광산(鑛山)이었다. 1912년 문을 연 이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는 태평양전쟁에 사용할 무기제작용 광물을 캤으며, 해방 후에는 수도권 최대 금속광산으로 명성을 날리는 등 대한민국 경제 건설의 심장부였다. 홍수로 인해 1972년 폐광되어 40여 년 동안 어둠에 묻혀 있다가 2011년 광명시에서 매입해 문화예술 향유를 위한 창조공간으로 재탄생했다.




▼ 입장권(4천원/인)을 구입한 후 오색불빛으로 치장된 동굴로 들어가면서 동굴투어가 시작된다. 평균 높이가 2.75m인 이 동굴은 길이가 7.8km에 이른단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서늘한 기운이 돌며 더위에 지친 몸을 식혀준다. 갱도에서 나오는 물의 양이 풍부하다고 하더니 그 영향이 아닐까 싶다. 아니 꼭 물이 아니더라도 광산의 특징은 원래부터 시원한 것이다.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은 빛의 공간이다. 동굴의 벽과 어울리게 LED조명을 활용한 여러 가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꽤 너른 공간에 들어서니 빛의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CG)과 자연촬영 영상을 빔 프로젝터를 통해 동굴 암벽에 투사하는 미디어 파사드 쇼인데, 빛의 탄생에서부터 과거,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광명동굴 빛의 연대기를 펼쳐 보인다고 한다. 아무튼 무슨 내용이지는 몰라도 빛으로 만들어내는 기법은 거의 환상적이었다.




동굴은 여러 가지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유리벽 너머로 직접 물고기를 볼 수 있는 동굴 아쿠아 월드와 수경재배를 하고 있는 동굴 식물원이다. 물과 빛이 필요한 시설이기 때문이다. 물이야 광산의 특징과 부합되니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빛은 어떻게 쏘여주는지 못내 궁금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전시공간이 있다. 광명동굴의 역사를 알려주는 공간이 있는가 하면, 관광객들이 구입한 황금패에다 각자의 소원을 적어 매달아 놓는 소망의 초신성과 으스스한 귀신의 집도 보인다. 그리고 황금빛 조명을 튼 황금폭포와 지하호수 등 갖가지 볼거리로 넘친다.




와인(wine) 시음대도 갖추고 있다. 판매용으로 진열되어 있는 와인을 내놓는지는 몰라도 달콤한 것이 맛은 일품이었다. 그래 오래전 성당에서 훔쳐 마셨던 포도주 맛이 바로 이런 맛이었다. 사실 광명시에서는 와인 한 방울 나지 않는다. 와인을 생산하는 전국 27개 지자체와 업무협약을 통해 이 동굴에서 한국산 와인 170여 종을 판매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작년(2016)43000여 병이나 팔렸다고 하니 우리나라 와인 산업의 발전에 나름대로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투어가 끝나고 동굴을 빠져나오면 코끼리차 '아이샤'가 기다린다. 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 주는 버스인데 그렇다고 공짜는 아니다. 하지만 버스정류장까지의 거리가 꽤나 멀기 때문에 이용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더위에 찌들어 터덜터덜 걷는 것보다야 2천원의 요금을 무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일 테니까 말이다.


망덕산(望德山=왕기봉, 500.3m)-검단산(黔丹山, 538.1m)

 

산행일 : ‘17. 4. 9()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와 광주시, 하남시, 그리고 서울시 송파구의 경계

산행코스 : 이배고개망덕산검단산남한산성남문수어장대우익문(서문)5암문(연주봉옹성암문)성불사(산행시간 : 4시간 20)

 

함께한 산악회 : 산과하늘

 

특징 : 검단산과 망덕산은 남한산성과 산줄기로 연결되는 산들이다. 서울 남동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산행대상지를 들라면 다들 남한산성을 꼽는데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오늘 오른 산들 외에도 연주봉과 금암산, 이성산 등 작은 산들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산행을 하면서 산성 돌이를 덤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도심(都心)에서 가까운 탓에 접근성까지 뛰어나다. 그보다 더 뛰어난 장점도 있다. 전체코스가 산책하기에 딱 좋다는 것이다. 폭신폭신한 황톳길에 경사까지 완만한 것이 산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거기다 길이 넓어서 함께 온 일행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을 수 있다는 또 다른 장점도 갖고 있다. 그러다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기라도 할라치면 대상 스토리는 우리네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다. 역사공부가 시작되는 셈이다. 이런 장점들을 고려했을 때 가족 산행지로 최적이지 싶다.


 

산행들머리는 이배(二拜)재 고개(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오랜만에 수도권전철과 시내버스를 이용해서 접근이 가능한 근교산행을 나선다. 분당선(또는 8호선) 모란역 6번 출구에서 31-3 또는 30-2번 시내버스를 타면 쉽게 이배재고개까지 올 수 있다. 성남시(중원구 갈현동)와 광주시(목현동)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300m의 고갯마루인 이배재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과의 인연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퇴계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서 마지막으로 임금을 향해 절을 두 번 했다고 해서 이배(二拜)’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죽지도 않은 임금을 향해 절을 두 번이나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까딱 잘못하다간 역적으로 몰렸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설을 찾기도 한다. 옛날 경상도와 충청도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한양이 보여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하여 한 번 절을 하고, 부모가 계신 고향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절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말이다.(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육교(陸橋)로 연결되는 나무계단을 밟고 오르면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3m에 길이가 30m인 이 육교는 지역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지난 2015년에 새로 설치되었다. 338번 지방도가 지나가면서 성남시와 광주시의 경계능선이 단절되었었는데, 이 육교가 놓임으로써 두 시의 경계능선에 있는 망덕산과 영장산을 굳이 찻길을 건너지 않고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계단을 오른 후에는 무조건 육교를 건너야 한다. 반대방향은 영장산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육교를 건넌 후에는 또 다시 계단을 올라야 한다. 제법 긴 계단이다. 그러고 나서도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 잠시 계속된다. 산길에는 밧줄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경사가 없는 곳에까지 설치한 것이 눈길을 끈다. 그 궁금증은 밧줄에 매달린 안내판이 해소시켜준다. 나무들도 숨을 쉬어야하니 정규등산로 외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망덕산으로 향한다. ‘성남누비길이정표를 따라 능선을 따른다. 성남시에서 지역 주민들이 생활권을 중심으로 만들었다는 등산로이다. 성남시가 명칭 공모를 통해서 만들어 낸 이름인데 더불어 누빌 수 있는 아름다운 숲길을 뜻한단다. 성남은 크게 남한산성과 영장산, 불곡산, 발화산, 청계산 등이 보호막처럼 싸면서 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누비길은 그런 시의 경계에 있는 산들을 연결시키는 산길이니 시계등산로(市界登山路)’라 할 수 있다. 7개 구간(62.1)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오늘 우리는 남한산성 남문에서 검단산과 망덕산을 거쳐 갈마치고개에 이르는 2구간(검단산길, 7.4)의 일부를 걷게 된다. 참고로 나머지는 1구간인 남한산성길(복정동~남한산성 남문 7.5)과 영장산길(3구간, 갈마치고개~태재고개 9.7), 불곡산길(4구간, 태재고개~동원동 8.8), 태봉산길(5구간, 동원동~하오고개 10.7), 청계산길(6구간, 하오고개~옛골 등산로 입구 8.5), 인능산길(7구간, 인능산 등산로 입구~복정동 9.5)로 이루어져 있다.



능선은 온통 참나무들 차지, 아예 군락이라 불러도 되겠다. 언제부턴가 산길은 경사가 사라져버렸다. 다음에 오르게 될 망덕산의 높이가 500m에 불과하다보니 급하게 고도를 높일 이유가 없었던가 보다. 아무튼 산길은 정비가 잘 되어있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계단을 만들고 밧줄난간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질퍽거리는 곳에는 야자나무 잎으로 엮은 멍석을 깔았다. 이 모든 것은 도립공원측에서 심혈을 기울여 가꾸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길가에 돌탑들이 보인다. 제멋대로 생긴 자연석들을 각각의 특성들을 살려 쌓아올렸다. 흡사 돌들이 펼치는 아크로바트(acrobatics)를 보는 것 같다. 오래전 TV에서 별난 사람들이라며 저렇게 돌을 쌓아올리던 기인(奇人)을 소개한 일이 있었는데, 혹시 그가 이곳을 다녀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올랐을까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이어서 13분 후에는 벤치와 식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해놓은 또 다른 봉우리에 올라선다.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저 이정표(망덕산 0.6Km, 보통골 1.7Km, 안말 1.9Km/ 이배재고개 1.9Km) 하나가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긴 이름도 없는 봉우리에 정상석이 세워져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망덕산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이정표에는 이 봉우리의 이름을 형제봉이라고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기관에서 만든 시설물이니 옳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망덕산으로 향한다. 어쩌다 아래와 같이 커다란 바위가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흙길이다. 아니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산길이라고 하는 게 이해가 쉽겠다. 경사 또한 거의 없는 편안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중간에 보통골로 내려가는 길(이정표 : 망덕산0.4Km, 안말 1.5Km/ 보통골1.3Km/ 이배재고개1.3Km)이 왼편으로 나뉘니 참조한다.



산길은 무척 순하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널찍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산악마라톤 행사가 자주 열린다고 한다. ‘산악자전거마니아들로부터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15분쯤 진행하면 망덕산 정상에 올라선다. 왕기봉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봉우리이다. 정상은 식탁과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정상표지석은 그런 시설물들 사이에다 배치했다. 조금 어수선한 풍경이지만 좁은 공간을 활용하다보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망덕산은 둘레길을 걷다가 쉬어가는 중간의 쉼터라고 보면 되겠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말고도 이정표(검단산/ 두리봉1.8Km, 군두레봉)를 세워 놓았다. 하단에 성남누비길의 지도를 그려놓은 이정표이다. 갈마치고개에서 남한산성 남문에 이르는 검단산길의 중요지점들을 표기하고 각 지점들 사이의 거리를 적었다. 성남누비길은 성남시계등산로와 거의 비슷한 구간에 만든 걷기 길이다. 남한산성에서 내려오는 누비길은 이배재고개를 지나고 갈마치고개~태재고개를 지나 청계산 등을 아우르며 성남시를 한 바퀴 두른다. 아무튼 지도에는 조금 전에 올랐던 봉우리를 형제봉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검단산으로 향한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저 산책하듯이 즐기면서 걷기만 하면 된다. 그저 중간에 만나게 되는 갈림길에 신경을 쓰지 말고 곧장 능선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첫 번째 갈림길은 두리봉 갈림길’(이정표 : 검단산2.1Km/ 두리봉2.0Km/ 망덕산0.2Km)이다. 이어서 사기막골 갈림길‘(이정표 : 검단산1.0Km/ 사기막골0.5Km)윗말 갈림길‘(이정표 : 검단산1.1Km/ 윗말1.0Km/ 망덕산1.2Km), ’황송공원 갈림길‘(이정표 : 검단산갈림길0.7Km/ 황송공원2.8Km, 용천약수 0.8Km/ 망덕산1.3Km), ’불당리 갈림길‘(이정표 : 검단산0.7Km/ 불당리, 윗말 1.1Km/ 망덕산1.4Km) 등이 줄줄이 나타난다.



가는 길에 만수천약수터가 보인다. 목이라도 축여볼까 해서 다가가 보지만 물줄기는 메말라 있다.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어쩌다 한 번씩 떨어져 내리는 정도이다. 요즘 봄 가뭄이 심한가 보다.



길가의 얼러지꽃이 꽃대를 올리고 있다. 도심(都心)의 꽃들은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지 이미 오래인데 아직까지도 꽃망울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리 낮더라도 산은 산인가 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검단지맥의 일부구간이다. 검단지맥은 한남정맥 상의 선장산(350m) 북쪽 1.7km 지점인 향린동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법화산(383.3m)과 영장산(414.2m), 성남 검단산(523.9m), 용마산(595.5m), 하남 검단산(658.4m) 등을 일군 후 팔당대교 남단에서 그 숨을 다하는 길이 약 4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산꾼들은 대개 용인시 기흥구 향린동산에서 이배재까지를 1구간, 이배재에서 은고개를 2구간, 그리고 은고개에서 바깥창모루(팔당대교)까지를 3구간으로 나눈다. 그러니까 오늘은 검단지맥 2구간 중 일부(이배재에서 남한산성 제5암문)를 걷게 되는 셈이다.




망덕산을 출발한지 30분 남짓 되었을까 사거리(이정표 : 검단산0.5Km/ 남문2.8Km/ 불당리2.3Km/ 망덕산1.7Km)가 나온다. 만일 맞은편 능선 위에 있는 검단산에 들르지 않고 곧장 남문으로 가고 싶을 때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된다. 검단산으로 향한다. 통나무계단을 잠시 오르니 널따란 공터로 이루어진 검단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만이다. 정상은 헬기장을 겸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바닥에다 철판을 깔아놓았다. 정상표지석은 헬기장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의 나무에 가려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그저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원래의 검단산 정상이 살짝 나타날 뿐이다.



검단산 정상에는 통신시설이 들어서 있어 오를 수가 없다. 대신 맞은편에 있는 이곳 헬기장에 정상표지석을 세웠다. 검단산의 정상 역할을 대신할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참고로 하남에도 검단산이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증이 생기는 게 정상일 것이다. 오늘 걷고 있는 코스가 검단지맥인데 어느 검단산을 갖다 붙인 이름인가로 말이다. 결론은 하남에 있는 검단산이다. 657m로 검단지맥에서 가장 높기 때문이다. ‘높은 게 장땡이라는 말은 꼭 놀음판에서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닌 모양이다.



준비해간 막걸리를 비운 후 산행을 이어간다. 이제부터 임도를 따른다. 잠시 후 공군 8630부대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그러고 보니 검단산 정상에 보이던 시설이 공군의 레이더기지였던 모양이다.



통행이 허용되는 길(남문방향)로 몇 걸음 옮기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남문 2.4Km, 종로 2.7Km/ 이배재 3.0Km/ 검단산 0.1km)가 나온다. 오른편으로 난 데크길은 이배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다시 말해 아까 검단산으로 오르기 직전에 헤어졌던 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는 얘기이다.



임도는 시멘트포장으로 바뀌어 있다. 왼편의 검단산 정상방향으로는 철조망과 지뢰지대 표시판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잠시 후 길이 둘로 나뉜다. 임도 말고도 능선을 따르는 오솔길 하나가 더 늘어난 것이다. 두 길은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니 어느 길을 선택할 지는 걷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 주의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남한산성유원지로 내려가는 길이 가끔 나뉘지만 개의치 말고 남문방향으로 진행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20분 남짓 진행하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남문0.8Km/ 남한산성유원지2.0Km/ 검단산1.8Km)를 만난다. 아니 임도까지 포함시킬 경우에는 사거리가 되겠다. 임도와 헤어져 남문방향의 오솔길로 들어서면 정자와 체력단련기구 몇 점이 있는 쉼터(이정표 : 남문0.6Km/ 남한산성유원지(영도사)1.2Km/ 검단산2.0Km)가 나온다. 이곳에서도 남한산성유원지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지만 개의치 않고 남문으로 향한다.



진행방향에 보이는 봉우리 위에 쌓아올린 성벽(城壁)이 나타난다. 531m봉에 있다는 1 남옹성(南甕城)’일 것이다. 옹성(甕城)이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문 밖에 반원형(半圓形)이나 삼각형으로 축성된 작은 성을 말한다. 월성(月城)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보지만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옹성에 군사를 주둔시키기 위해서는 본성과 성벽으로 연결시키게 되는데, 아직까지 이 연결구간의 복원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참고로 남한산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옹성이 있다. 북쪽과 동쪽에 각각 하나씩이 있고, 나머지 세 개는 남쪽에 배치했다. 그렇다면 왜 남쪽에만 3개의 옹성을 축조했을까? 다른 사면(斜面)에 비해 경사가 완만해서 적의 공격이 용이했기 때문이란다. 검복리와 불당리의 계곡을 통한 직접공격이나 검단산(해발고도 534.7m)을 통한 공격에 대비했다는 것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성벽의 아래를 지난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작은 흠이지만 고풍스런 성벽을 끼고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구간이다. 서울 남동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산행지는 누가 뭐래도 남한산성도립공원이 아닐까 싶다. 검단산과 망덕산, 연주봉, 금암산 등 작은 산들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산행을 하면서 산성 돌이를 덤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벽을 따라 걷길 12분 여, 진행방향 저만큼에 남문(南門)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남한산성의 중심 문으로 동서남북 네 개의 문() 중에서 가장 웅장하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성문 앞은 무척 어수선하다는 느낌이다. 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안내판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 검산단길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검단산에 대한 설명을 나열한 뒤에 그 아래에다 갈마치고개에서 시작해 이배재와 망덕봉, 검단산, 남문, 불망비를 거쳐 산성역에 이르는 검단산길의 각 구간 거리를 표시해 놓았다. 그 옆에는 7구간으로 이루어진 성남누비길의 안내판도 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고 한다. 인조는 이곳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하였다. 하지만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남문의 또 다른 이름은 지화문(至和門)이다. 정조 3년에 성곽을 개보수하면서 새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때문에 사람들의 출입이 가장 빈번하다.



성문 밖에는 350년이나 묵었다는 몇 그루의 거대한 느티나무가 있다.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어 있는 이 느티나무는 성곽 사면의 토양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어떤 나무는 이미 생명을 다한 듯 완전히 헐벗은 모양새이다. 그만큼 이곳 남한산성이 오래 묵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성문이 만들어내는 아치형 액자의 틀 안에 늙은 느티나무가 들어와 있다. 조선 시대에 영험한 당산나무였다는 설이 전해지는 나무이다. 아직까지도 그 효력이 남아있다고 믿었는지 지금도 그 앞을 지나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성안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성벽의 위를 따른다. 남문을 지나면서 등산객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성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대부분 서문으로 향한다. 서문 쪽이 볼거리가 더 많을 뿐만 아니라 조망까지도 툭 트이기 때문이다. 성남에서부터 서울의 잠실에 이르는 도심(都心)이 그 속살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성곽을 따라 걷는 다는 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거의 같은 풍경이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한산성만은 예외이다. 주변의 풍광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특히 눈앞에 펼쳐지는 서울시가지에 대한 조망은 바라보는 장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도(高度)가 높아질수록 시야가 넓어지더니 언제부턴가 잠실의 롯데타워가 눈에 들어와 있다. 유난히도 우뚝 솟아오른 게 서울의 랜드마크(landmark)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겠다.



수어장대로 향하는 길은 다소 가파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오르다보면 힘들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층계를 오르면 성벽 아래로 암문(暗門)이 나타난다. 남한산성의 여섯 번째 암문(暗門)서암문이란다. 암문(暗門)이란 성곽에 문루(門樓)를 일부러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을 말한다. 일반인이나 적들이 알지 못하게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만들었으며, 전시(戰時)에는 적이 모르게 물자를 이송하곤 했다. 남한산성에는 이런 암문이 모두 열여섯 개나 된다. 그만큼 성곽이 컸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런 암문을 숨겨놓을 수 있을 정도로 지형이 험했었을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이 암문은 청군(淸軍)에게 포위돼 있던 1637(인조 15) 123일 공격해 오던 적병을 물리친 승리의 현장이라서 파적지(破敵地)라고도 불린다.



잠시 후 나타나는 오른편 봉우리가 본성 최고봉인 청량산(淸凉山,483m)이다. 수어장대(守禦將臺)가 있는 이곳 청량산(497m)은 남한산의 주봉(主峯)이다. 높이는 동쪽에 있는 남한산(522.1m)이 더 높지만 수어장대가 있다고 해서 그리되었지 않나 싶다. 하지만 주봉이 주변의 봉우리들보다 낮은 대가는 혹독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대가 그곳에다 대포를 놓고 행궁에다 막 쏘아댔기 때문이다. 난공불락의 성 안에서 인조가 항복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벌봉(515m)과 한봉, 검단산(538.1m)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청나라 군대는 홍이포(紅夷砲)를 이 세 봉우리에 놓고 산성 안을 향해 포를 쏘았다. 홍이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지 47일 만에 항복했다. 인조는 서문으로 나가 지금의 잠실 석촌호수 부근인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네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는 사배구고두(四拜九叩頭)’의 굴욕을 당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전략적 요충지인 세 봉우리를 사수하기 위해 숙종 12(1686)에 외성인 봉암성을, 19(1693)에는 한봉성을, 45(1719)에는 신남성을 축성했다. 벌봉 바로 앞의 커다란 바위에는 봉암산성 신축에 관한 비문이 적혀 있기도 하다.



정상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 西將臺)가 자리하고 있다. 동서남북의 4개 장대(將臺)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이다. 이층 누()에는 봉림대군(효종)의 심양 생활과 북벌의 정신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영조(英祖)가 무망루(無忘樓: 잊지 말자는 누각)라는 편액의 글씨를 썼다. 마당 한쪽 귀퉁이엔 守禦將臺라고 각자(刻字)가 되어있는 바위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아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매바위이다. 남한산성 축성 때 동남쪽 부분의 공사가 지지부진한 책임을 물어 담당자였던 이회장군을 참수(斬首)하자 이 바위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수어장대를 둘러봤다면 이젠 서문(西門)으로 갈 차례이다. 이 구간 역시 조망을 즐기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렇다고 너무 서두를 일은 아니다. 수어장대 좌측 아랫단에 있는 청량당(淸凉堂)이라는 사당을 놓치지 말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충신의 넋을 잠시라도 위로해보자. 경기도 유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어 있는 청량당에는 횡수대감(橫數大監)으로 불리는 이회장군과 그의 부인 송씨와 첩실 유씨, 벽암 각성대사를 비롯해 무속신장들인 백마신장, 오방신장, 군웅장군, 별상장군, 대신할머니가 모셔져 있다. 여기서 하나 알아두고 넘어가자. 삼남지방에서 공사비 모금활동을 하다가 돌아온 이회장군의 부인 송씨와 첩실 유씨는 남편이 억울하게 참수를 당한 것을 알고 모금해온 쌀을 모두 송파강에 던지고 물로 뛰어 들어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녀들이 쌀을 던졌던 송파나루 앞은 쌀섬여울이라 불리었는데, 이들이 자결한 한강과 탄천이 만나는 위치 옆 무동도(舞童島) 근처에서는 궂은 날이면 여인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다. 이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잠실동 313-1번지 부근에 부군당(府君堂, 호구부인당, 애기씨당)을 세웠는데 1971년 잠실이 개발되면서 이제는 이야기로만 남았다.



잠시 후 서문(西門), 즉 우익문(右翼門)을 만난다. 163713047일간의 항쟁을 끝내고 인조는 이 문을 통하여 마천동오금동가락본동(故廣州)송파동을 거쳐 석촌호수 남쪽 어딘가에 설치된 수항단(受降檀) 앞에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이 문이 통곡의 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된 이유이다. 아무튼 그 후에 세운 삼전도비(淸太宗功德碑)는 지금도 롯데호텔 남쪽 석촌호수가에 서 있다. 태생이 반갑지 않은 비()였으나 부끄러움도 역사이기에 교훈으로 삼고자 다시 옮겨 세웠단다. 256년간이나 서 있던 이 비는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고종 32(1895)에 강물 속에 수장해버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인양돼 다시 세워졌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조선이 본래부터 남의 지배를 받았던 민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해방이 되자 이 비석은 주민들에 의해 다시 땅 속에 묻혔는데 1963년 큰 홍수가 나자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끈질기게도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서울시가 역사교육을 위해 다시 세웠단다.



죄인이 되어 남색 옷을 입었던 인조의 행태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으며 성문을 나선다. 성문 밖 오른편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에 서면 서울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뒤에는 미세먼지 때문에 조금 희미해졌지만 청계산과 관악산, 그리고 북한산에서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전망대의 입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을 듯 싶다.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투어를 이어간다. 성곽에 설치된 수많은 시설들은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보아 넘길 게 없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만일 산행을 나서기 전에 미리 복습을 해왔다면 산성 걷기는 그만큼 더 재미있을 것이다. 서문 앞쪽의 작은 언덕에 있는 매탄(埋炭)도 그중의 하나가 일 것이다. 산성에는 많은 이들이 주둔하였기에 식량 이외에도 간장, 구운 소금, 숯 등을 비축해야만 되었다. 1847(헌종 13)에 홍경모(洪敬謨)가 편찬한 경기도 광주군의 읍지(邑誌)인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94곳에 24192섬을 묻었다는 내용이 상세히 전해진다. 지금이라도 이곳을 파면 오래 전 묻은 숯이 나올 듯하다.



잠시 후 남한산성의 다섯 번째 암문(暗門)연주봉 옹성(甕城) 암문을 만난다. 이 암문은 연주봉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서쪽에는 성벽에서 2m정도 돌출된 치(: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하여 성벽 밖으로 여기저기 내밀어 쌓아 놓았던 돌출부)가 있고, 북쪽으로는 직선 길이 150m 정도의 연주봉옹성과 연결된다. 문은 개구부 외부는 홍예식(虹霓式)이고 내부는 평거식(平据式)으로 만들어져 있다. 남문으로 들어서서 이곳 암문을 빠져나오기까지는 대략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체되었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암문을 통과하면 길은 오른편에 성벽(城壁)을 끼고 나있다. ‘연주봉 옹성(甕城)’으로 연결되는 통로의 외벽(外壁)이다. 북으로 길게 뻗어나간 성벽이 참 아름답다. 아무튼 옹성(甕城)은 성문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접근하는 적을 삼면(三面)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이다. 적이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옹성을 통과해야만 한다. 참고로 남한산성에는 총 5개소에 옹성이 축조되어 있다. 남쪽에 3, 그리고 동쪽(장경사신지옹성)과 북쪽으로 각각 1개의 옹성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방어에 취약한 지점에 설치되어 있다. 그중 북쪽에 쌓은 옹성이 연주봉옹성이다.



연주봉옹성과 헤어지고 나면 산길은 정북(正北)으로 향한다. 연주봉에서 분기해서 북으로 뻗어나가는 이 능선은 금암산과 이성산으로 이어진다. 하남시에서는 이 능선을 위례둘레길이라는 이름으로 깔끔하게 정비를 해놓았다. ‘위례둘레길은 하남시에서 조성한 걷기 코스하남 위례(河南 慰禮)의 한 구간이다. 하남위례길은 위례사랑길’, ‘위례강변길’, ‘위례역사길’. ‘위례둘레길4개의 코스(64Km)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위례둘레길은 하남시청을 출발해서 샘재와 남한산성(벌봉), 금암산, 이성산을 거쳐 덕풍골에 이르는 총 길이 37.9Km의 코스이다. 이 구간은 위례성의 궁안 지역을 둘러싼 산을 걸으며 하남시의 옛날과 오늘을 돌아볼 수 있음은 물론 남한산성의 성곽과 벌봉, 금암산 등을 지나면서 하남시는 물론 덤으로 서울시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힘들게 지고 올라간 술을 남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없다며 최군이 자리를 잡는다. 그래 마침 시간도 넉넉하니 말끔하게 비워보자. 그래도 양이 차지 않는다면 하산지점에서 뒤풀이를 하면 될 일이고 말이다.



잠시 후 갈림길(이정표 : 성불사1.8Km/ 위례둘레길(이성산성)4.9Km, 푯말삼거리 0.9Km, 궁안갈림길 3.1Km/ 서문0.7Km)이 나타난다. 왼편 성불사 방향으로 내려서면서 서문에서부터 함께 해온 위례둘레길과는 이별을 고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데크계단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이 구간도 역시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꽃망울을 활짝 연 진달래꽃들이 자기를 보아달라며 길손을 유혹한다. 마침 시간까지도 느긋하니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꽃들에 눈 맞추며 조금 더 내려가니 또 다시 갈림길(이정표 : 성불사 0.8Km/ 호국사 0.8Km/ 연주봉옹성 1.3Km)이 길손을 맞는다. 이곳에서도 성불사 방향으로 진행한다.



한마디로 산은 잘 가꾸어져 있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계단이나 밧줄난간을 설치했고,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다. 그리고 조그만 공간이라도 생길라치면 벤치를 놓았다. 심지어는 체력단련장과 배드민턴장까지 만들어 놓았을 정도이다. ‘도립공원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관리라 할 수 있겠다.



산행날머리는 성불사(하남시 학암로9번길 64)

그렇게 40분 정도를 내려가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1976년에 창건되었다는 성불사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물론 연주봉암문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20분이 걸렸다. 하지만 시간에 의미를 둘 일은 아닌 것 같다.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걷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