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산(高崍山, 543m)-우두산(牛頭山, 473m)

 

산행일 : ‘14. 12. 13()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북내면과 양평군 지평면의 경계

산행코스 : 고달사지주차장고달사지고려석실묘주능선우두산국사령고래산옥녀봉(玉女峰, 419m)창령조씨묘원주차장(산행시간: 4시간)

같이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색 : 고래산은 경기의 곡창지대인 여주 들녘에 우뚝 솟아오른 산이다. 그 생김새가 마치 큰 바다에 떠있는 고래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들녘에 있다 보니 높게 보일 따름이지 사실은 500m가 조금 넘는 나지막한 산이다. 거기다 전형적인 흙산이라서 오르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가족산행지로 추천할만 하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들머리에 고달사지라는 국보급(國寶級) 문화재(文化財)3점이나 거느린 유적지(遺跡地)까지 끼고 있으니 아이들에게 유익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산행들머리는 고달사지 주차장(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영동고속도로 여주 I.C에서 내려와 37번 국도를 타고 양평방면으로 달리면 남한강을 건너 대신면(여주시) 소재지인 율촌리에 닿는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88번 지방도 문막방면으로 들어가면 블루혜린 GC'를 지나 상교리가 나온다. 상교리 조금 못미처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고달사지 주차장이다.

 

 

 

전면에 보이는 고래산 능선을 바라보며 들어서면 수령이 400년이나 된 보호수(保護樹)가 길손을 맞는다. 보호수를 지나면 왼편에 고달사지(高達寺址 : 사적 제382)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리고 빈터에 널려있는 석조물(石造物)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달사지의 석조물들은 매우 빼어난 미학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는 국보급들이다.

 

 

 

본격적인 산행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고달사지부터 들른다. 지금은 비록 그 흔적만 남아있지만 국보급 문화재를 4점이나 갖고 있는 유적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곳 사지(寺址)에 있었다는 고달사는 764(신라 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 즉 도봉원(道峰院희양원(曦陽院고달원(高達院)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大刹)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전각(殿閣) 하나 없는 빈터에 고달사지부도(국보 4)를 비롯하여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龜趺 螭首 : 보물 6), 원종대사 혜진탑(元宗大師慧眞塔 : 보물 7), 석불좌(石佛座 : 보물 8) 등의 문화재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되새겨 줄 따름이다. 참고로 고달사지 부도 앞에 있던 쌍사자 석등(보물 282)은 현재 서울 경복궁 대조전 뜰에 있다. 

 

 

석불대좌의 위쪽엔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元宗大師慧眞塔碑 龜趺 螭首 : 보물 제6)가 천년의 세월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다. 신라의 부도비 형식을 잘 계승한 이 유적에선 고려 초기의 진취적인 기상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거북의 네 발과 발톱 끝은 사실적이어서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나갈 듯하며, 용머리를 닮은 귀두는 크고 기이해 몸을 얼어붙게 만든다. 마치 고달사지 수호신 같다. 여기에 얹혀 있던 비신(碑身 : 비석의 몸체)은 경복궁 근정전의 회랑에 진열돼 있다.

 

 

절터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유물은 석불대좌(石佛臺座 : 보물 제8)이다. 위에 앉아있던 불상(佛像)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높이 1.57m) 잘생긴 석불대좌로서의 품격을 인정받고 있다. ··하대와 지대석(址臺石)을 모두 갖춘 사각대좌로 연꽃 조각이 장엄하고, 특히 불상이 안치돼 있던 상대의 윗면은 아주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어 짝을 이루던 불상의 아름다움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석조(石槽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 큰 돌을 파서 만든 석기(石器)인데, 큰 절에서 잔치를 하고 나서 그릇 따위를 닦을 때 흔히 쓰는 돌그릇이다. 보통 석조의 크기를 보면 그 절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눈앞의 이 석조가 어른 몇 명이 들어앉아 목욕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크니 당시 고달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달사지를 둘러보고 나오면 고달사 앞이다. 현재의 고달사 절집은 1973년에 지은 양옥(조립식) 법당(法堂)이다. 법당 왼쪽에는 산신각(山神閣)이 자리하고 있다. 산신각도 역시 현대식이다. 고달사 앞 왼편(이정표 : 고래산 5.2Km)으로 산길이 열린다. 그러나 네 점의 국보급 문화재 중에서 나머지 두 개를 보고 싶다면 아까 지나왔던 보호수 방향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다향루, 고달사의 앞에 지어진 정자(亭子)인데 이름만큼이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멋을 팍팍 풍긴다.

 

 

고달사지에서 가장 뛰어난 석조문화재라는 부도(浮屠)는 보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들어가야 만나게 된다. 들머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른쪽 골짜기를 따라 2~3분쯤 들어가면 원종대사의 부도인 원종대사혜진탑((元宗大師慧眞塔 : 보물 제7)이 눈에 들어온다. 고달사지 석조물 중에서 비교적 온전한 유물(遺物)은 두개의 부도(浮屠)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원종대사혜진탑인데, 이 탑은 고려 초기에 제작된 원종대사의 부도이다. 역시 중대석에 새겨진 구름과 용들의 생동감이 돋보여 아름다운 부도로 꼽힌다. 하지만 50m 위쪽 숲속에 자리한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의 조각 수법보다는 한수 아래란 평이다.

 

 

원종대사혜진탑에서 서쪽을 올려다보면 돌계단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高達寺址 浮屠)’가 자리 잡고 있다. 고달사지의 맨 위쪽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부도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부도 중 가장 크면서도 조각수법이 매우 세련되고 균형이 완벽하게 잡혀있어 제일 아름다운 부도로 평가받는다. 참고로 이 부도 앞에 있던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부도탑을 둘러본 뒤, 부도(浮屠) 뒤의 오른쪽 능선을 따라 500m쯤 올라가면 상방하원 석실묘(上方下圓石室墓 :경기도기념물 제198)’가 손님을 맞는다. 이 석실묘는 상감청자(象嵌靑瓷) 조각 등 발굴과정에서 나타난 유물들로 미루어 볼 때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처럼 잘 쌓아올린 돌무덤이다. 무덤 속의 평면은 원형(圓形)이고, 상부는 방형(方形 : 네모반듯한 모양)이어서 묘제(墓制) 구조의 특성을 살려 그렇게 긴 이름을 붙였다. 한편 이 묘()는 고려 묘제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는 있으나, 조금 전에 지나온 고달사지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정도가 지났다. 물론 유물들을 구경하고, 사진까지 촬영하는 데까지 더해진 시간이다.

 

 

 

석실묘(石室墓)에서 등산로는 이 묘의 뒤편 능선으로 열린다. 그러나 산길은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그 흔적이 희미하고, 심지어는 나뭇가지를 헤쳐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것까지는 없다. 신경을 조금만 쓴다면 큰 어려움 없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올라가면 주능선에 합류하게 된다. 이곳 주능선 삼거리에서 아까 고달사 앞에서 헤어졌던 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 물론 뺑치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했을 경우에도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참고로 뺑치고개는 옛날 이 고장으로 시집 온 새댁이 시집살이가 너무 힘들어 견디지 못하고 이 고개를 넘어 뺑소니를 쳤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일단 주능선에 올라서면 산길은 편해진다. 그래도 전형적인 흙산인데다 능선의 경사(傾斜)까지 완만해서 걷기가 여간 편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르막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산길이 완만(緩慢)하고 길게 올랐다가 짧게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기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따름인 것이다. 능선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삼거리(이정표 : 고래산 3.6Km/ 고달사(석불대좌) 900m/ 고달사지 1.6Km)가 나온다. 오른편은 고달사지로 내려가는 길이니 개의치 말고 곧장 직진하면 된다.

 

 

삼거리를 지나서도 산길의 풍경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오르막길의 경사(傾斜)가 조금 더 가팔라질 따름이다. 그리고 길가에 어른의 키로 한 길이 채 안될 정도의 바위들이 나타나는 정도이다. 그 바위들도 산행에는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는다. 산길이 바위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잘 나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삼거리를 지난 지 20분쯤 되면 억새가 무성한 헬기장에 올라서게 된다. 헬기장에서 산길은 두 갈래(이정표 : 고래산 2.1Km/ 우두산 300m/ 고달사지 3.1Km)로 나뉜다. 가야할 고래산은 맞은편 능선을 따르면 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왼편으로 들어서는 게 우선이다. 우두산이 이곳에서 300m쯤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두산을 둘러본 후에는 당연히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소나무와 잡목(雜木)들로 포위된 우두산 정상에는 머리 부분을 깔끔하게 잘라낸 사각뿔 모양의 정상표지석이 지키고 있다. 정상석은 예쁘다. 그러나 아쉽게도 산의 높이를 잘못 표기해 놓았다. ‘국립지리원에서 만든 지도(地圖)에는 ‘473m’인데 정상석에는 ‘489m'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공든 탑이 무너진 꼴이다. 아무튼 우두산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답답한 편이다. 유일하게 시야(視野)가 열리는 서쪽에 남한강이 나타날 따름이다. 동북쪽의 나뭇가지 사이로 살짝 내다보이는 골프장(양평TPC 골프클럽)은 여름철에는 나뭇잎에 가려 사라져버릴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우두산은 옛날 혜목산(慧目山)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다.

 

 

 

다시 헬기장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고래산으로 가는 북동쪽 능선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그러나 다행이도 길가에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아 크게 힘들이지 않고 내려설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6~7분 정도를 가파르게 내려서면 송전탑(送電塔)이 나오고, 이어서 5~6분 정도를 더 걸으면 국사령고갯마루에 내려서게 된다. 옛날 지평면 대평리와 북내면 상교리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였으나 현재는 국사령 서쪽 산골에 골프장(양평TPC 골프클럽)이 들어서면서 대평리로 가던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오른편 상교리로 연결되는 길만 열려있을 따름이다.

 

 

 

 

국사령에서 다시 산을 오르는 듯한 기분으로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10분 정도 후에는 국사봉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435m봉이다. 이곳에서 상교리로 내려가는 길(이정표 : 고래산 1.5Km/ 고달사지 3.7Km)이 오른편으로 나뉜다. 그러나 이정표에는 상교리로 내려가는 방향은 나타나있지 않으니 참조할 일이다.

 

 

 

국사봉을 지난 산길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산길의 풍경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능선에 가득한 나무들로 인해 조망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다만 왼편의 나뭇가지 사이로 골프장(양평TPC 골프클럽)이 언듯언듯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그렇게 한참을 진행하면 길가에 거대하다는 표현을 써도 괜찮을 듯 싶은 바위가 하나 나타난다. 그리고 그 생김새도 썩 괜찮은 편이다. 삼각뿔 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다른 바위 위에 얹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위의 이름도 얹힌바위란다.

 

 

얹힌바위 뒤편의 봉우리를 넘은 후, 다시 맞은편에 보이는 능선을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삼거리(이정표 : 고래산 100m/ 상교리 3Km/ 고달사지 5.1Km)이다. 고래산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100m쯤 더 가야 나온다. 그리고 고달사지로 원점회귀를 하려면 고달산을 둘러보고 난 후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국사봉(435m)에서 이곳까지는 26, 우두산에서는 50분이 걸렸다.

 

 

 

삼거리에서 고래산은 바로 코앞이다. 20평 남짓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고래산 정상에는 양평군산악연맹에서 세운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여주 24/ 1988 재설), 그리고 이정표(고달사지 5.1Km/ 양평 지평/ 양평 지평)와 정상으로 오르는 4개의 코스를 그려놓은 등산안내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참고로 고달산은 '고려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고려장을 하던 산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실제 금동 마을 뒤쪽에 고려장 굴이 있어 옛 고려장 관습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고려장에 얽힌 설화(說話)는 전국 어디에서나 장소를 불문하고 모두 같은 내용이기 때문에 옮기는 것은 생략하겠다.

 

 

 

정상은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남서쪽에는 남한강의 물줄기가 시원스럽고, 강 건너편엔 양자산, 그 오른편에는 추읍산이 날카롭게 솟아있다. 북쪽으로는 대평저수지 뒤로 용문산이 우뚝 솟아오르고,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저 멀리 치악산이 어렴풋이 나타난다. 그리고 남동쪽에는 옥녀봉이 지척이고, 남서쪽에는 방금 지나온 우두산으로 가는 능선이 또렷하다.

 

 

 

하산길은 세 갈래이다. 그중 두 개는 양평군, 대평리로 내려가는 북쪽 길과, 금동마을 방향의 바위가 듬성듬성 섞인 동쪽 길이다. 만일 나머지 하나, 즉 옥녀봉을 거쳐 상교리로 내려가고 싶다면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로 되돌아 나가야 한다. 그런 다음 남쪽을 내려다보면 가파르기 짝이 없는 사면(斜面)으로 난 산길이 보인다. 그 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급경사(急傾斜)이지만 안전로프는 애시 당초 없고, 그렇다고 몸을 의지하기 위해 붙잡을만한 나무조차 마땅히 없기 때문이다. 그저 갈지()자를 그리면서 꿈틀거리고 있는 길을 조심조심 내려서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위험한 길에는 최소한 안전로프라도 매어 놓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안전(安全)이라는 말이 요즘의 대세(大勢)인데, 사고(事故)가 난 뒤에 인재(人災)니 뭐니 하면서 떠들지 말고 미리미리 대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하긴 이제야 겨우 이정표 몇 개 세워놓은 여주시의 능력으로는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도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산길과 싸우며 10분 정도 내려서면 산길은 다시 완만(緩慢)해진다. 그리고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걸으면 안부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안부 근처에서 또 하나의 위험한 곳이 눈에 띈다. 길가에 수직(垂直)으로 뚫린 굴이 아가리를 떡하니 벌리고 있는 것이다. 꽤나 크고 깊은 굴인데도 난간(欄干)은 고사하고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 하나도 눈에 띄지 않으니 한숨부터 나온다. 만일 눈이라도 수북이 쌓일 경우 발을 헛디디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수직굴을 지나면서 산길은 평범해진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능선을 따라 10분쯤 더 걸으면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비록 이정표는 없지만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갈 경우에는 상교리에 이르게 된다. 물론 옥녀봉은 능선을 따라 조금 더 걸어야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바닥에 산악회의 방향표시가 상교리와 옥녀봉 방향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다. 옥녀봉을 오른 후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온 다음에 상교리 방향으로 내려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올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 포인트에서 얘기하도록 하겠다.

 

 

 

삼거리에서 6~7분쯤 더 걸으면 옥녀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옥녀봉 정상은 뭇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름에 비해 보잘 것이 없다. 정상표지석도 보이지 않는데다가 잡목(雜木)들로 인해 시야(視野)까지 딱 막혀있는 것이다. 거기다 우뚝 솟아오른 게 아니라 구릉(丘陵)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능선 상의 한 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옳을 정도이다. 자칫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란 얘기이다. 누군가가 이정표(상교리 1.5Km/ 고래산 1.5Km)의 상단에다 옥녀봉이라고 써놓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그냥 지나쳐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옥녀봉은 요 아래에 있는 고달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고달사에 석공(石工)으로 일하러 온 남편을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죽은 옥녀라는 여인의 애절한 사연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한편 우두산과 옥녀봉의 바위들은 농바위, 장구바위, 거문고줄바위 등의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는 옥녀봉에 잠들어 있는 옥녀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 준 살림도구라고 전해진다.

 

 

옥녀봉 정상에서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로 되돌아가지 않고 능선을 따라 곧장 직진한다. 산악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이유는 사면(斜面)을 따라 난 길보다는 아무래도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 한결 편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내 결정이 옳다는 것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는 이정표가 보증하고 있다. 이정표의 방향표시도 역시 능선을 따라 내려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능선을 따라 난 산길은 의외로 또렷하다. 옥녀봉에서 7분쯤 내려오면 가파른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하지만, 아까 고래산에서 내려올 때에 비하면 애기들 장난의 수준이다. 내리막길이 끝나면 오늘 산행에서 유일한 암릉구간을 만나게 된다. 바위틈에 숨어 있는 벌통을 구경하면서 암릉구간을 내려서면 산속에서 난데없는 논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창녕 조씨문중묘원(門中墓園)의 주차장에 내려서게 된다. 옥녀봉에서 이곳 묘원까지는 2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묘원에서 고달사 주차장으로 나가는 길은 시멘트 포장 임도로 시작된다. 임도를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가면 상교리 마을에 이르게 되고, 고달사지로 가는 길은 마을 앞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계속 임도를 따를 경우에는 88번 지방도를 경유해서 고달사지로 나가게 되는데 한참을 더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은 눈에 띄는 집들마다 텅텅 비어있다시피 빈집투성이이다. 마을을 지나 2영동고속도로공사현장을 지나면 진행방향에 참숯가마 찜질방간판이 보이고, 이어서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더 넘으면 얼마 후에는 고달사지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끝을 맺는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물론 쉬지 않고 걸은 시간이다.

 

 

주차장으로 가다가 왼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논바닥 가운데에 소나무 숲을 뒤집어 쓴 높이가 10m쯤 되는 둔덕이 눈길을 끈다. 마치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한 이 둔덕은 신털이봉이다. 신털이봉은 옛날 고달사 스님들이 외지(外地)를 다녀오던 길에 이곳에 이르러 다리쉼을 했다는 장소다. 그때 이곳에서 짚신을 털어 나오는 흙가루가 쌓여 생긴 봉우리라 신털이봉으로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옛날 고달사가 번창했을 때 스님들이 많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신라 후기인 764(신라 경덕왕 23)에 창건(創建)된 고달사는 신라 선종 구산의 하나인 봉림산파의 선찰(禪刹)로서 고달선원으로도 불렸다. 고려 태조 이후 4대 광종 때까지 왕실의 각별한 보호를 받았고, 원종대사(元宗大師, 868~958)가 주지로 머물면서 나라에서 관장하는 ‘3대 선원(禪院)’의 하나로서 전국 제일의 선찰이 됐다. 그렇지만 언제 폐사가 됐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다만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엔 고달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엔 폐사(廢寺)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이 사이에 무슨 변고를 당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래도 전성기엔 절터 주변 30리가 전부 고달사 땅이었다고 하니 그 권세(權勢)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