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로산(香爐山, 976m)-백마산(白馬山, 776m)

 

산행일 : ‘13. 5. 26(일)

소재지 : 경남 양산시 원동면과 밀양시 단장면의 경계

산행코스 : 고점교→향로봉(香爐峰, 727m)→백마산→달음재→향로산→장선마을(순수 산행시간 : 5시간40분)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특징 : 영남권에서 소문난 영남알프스의 바로 옆에 위치한 산으로서, 재약산에서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향로산 정상어림만 빼 놓고는 전형적인 흙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산세(山勢) 자체만 놓고 볼 때에는 다른 산들에 비해 뛰어나다고 볼 수 없는 산이다. 그러나 영남알프스를 한 발짝 물러서서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올라보고 싶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영남알프스에 대한 조망(眺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고점교(橋 : 양산시 원동면 대리 소재)

부산-대구고속도로 밀양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타고 울산방면으로 달리다가 산외면소재지에서 금곡 I.C(산외면 금곡리)를 빠져나온다. 이어서 1077번 지방도(밀양시 산내면 방향)를 따라 달리다가 이불삼거리(밀양시 단장면 범도리)에서 이번에는 오른편 1051번 지방도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밀양호가 나온다. 1051번 지방도는 밀양호의 호안(湖岸)을 만들고 있는 산등성이를 힘들게 오르내린 후에 배내골휴게소(양산시 원동면 대리)에 이르게 된다. 휴게소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자마자 고점교이고, 고점교를 건너면 곧바로 산행들머리인 성불사입구이다. 양산 I.C에서 내려와 1051번 지방도를 타고 배내골휴게소까지 거꾸로 오는 방법도 있으니 상황에 따라 선택할 일이다.

 

 

고점교 다리를 건너자마자 예쁘장하게 지어진 전원주택(田園住宅)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는 고점마을이다. 길가에 ‘성불사’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산행은 왼편에 보이는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들머리 왼편에 보이는 하천(河川)은 배내천의 하류이자 밀양호의 최상류(最上流)이다. 배내골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밀양댐으로 흘러드는 접점(接點)인 것이다.

 

 

 

 

도로를 따라 100m쯤 들어가면 커다란 금동불상이 건물 위까지 삐져나온 절이 하나 나온다. '부처님 궁전'이라고도 불리는 성불사이다. 미륵바위라고 불리는 2~3층 높이의 거대한 암벽(巖壁)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에 전각(殿閣)들 여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그마한 사찰이다. 전각들의 숫자는 꽤 되지만 그 규모들이 작기 때문에 왜소하다는 느낌부터 드는데, 극락보궁(極樂寶宮) 왼편에 서있는 금동불상은 사찰규모에 비해 어색할 정도로 거대하다. ‘산에서 내려오실 때 절 앞에 있는 수도를 이용해서 씻고 가세요.’ 예쁘장하게 생긴 스님의 말 한마디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산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산행을 마친 후에 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산길은 성불사의 요사(寮舍)채 오른편으로 열린다. 절의 입구에서 보면 한눈에 들어오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기 짝이 없다. 거기다 때 묻지 않은 오솔길은 가뜩이나 좁은데, 잡목(雜木)들과 잡풀들까지 진행을 방행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거리는 짧다. 갈지(之)자로 꿈틀거려야만 겨우 고도(高度)를 높일 수 있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30분 정도 치고 오르면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501봉으로 표기하는 사람들도 있음) 위로 올라서게 된다. 산을 오르다보면 무덤(墓)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 산이 특별히 기(氣)가 세다거나, 명당(明堂)이 숨어 있다는 글을 본적이 없는데도. 생각보다 무덤이 많다는 게 이 산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러한 무덤들은 백마산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보인다.

 

 

 

 

삼각점봉에 이르면서 길은 또렷해진다. 그리고 가파르던 경사(傾斜) 또한 그 기세(氣勢)를 뚝 떨어뜨려 버린다. 한마디로 걷기가 편안해진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편안함은 오래가지를 못한다. 삼각봉과 향로봉의 고도(高度) 차이가 200m이니, 능선이 가팔라지지 않고서는 결코 향로봉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가팔라진 능선을 치고 오르다보면 능선의 끄트머리가 보인다. 저기가 향로봉이겠지 하며 올라서면, 진행방향에 더 높은 봉우리가 다시 나타난다. 부풀었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그런 희망과 실망을 몇 번을 해야만 향로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비록 힘들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능선이 온통 짙은 숲으로 덮여있는 덕분에 오뉴월의 땡볕을 가려준다는 것이다. 능선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일색이다. 두 종류의 나무들은 어떤 때는 따로따로 군락(群落)을 이루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사이좋게 섞여있기도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탓인지 산길은 깨끗하고 호젓하기만 하다. 삼각점봉을 출발한지 1시간 가까이 지나면 향로봉 정상에 이르게 된다. 향로봉 정상은 봉우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약간 뽈록하게 솟아오른 능선상의 한 지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도 없다. 스테인리스(stainless)로 만들어진 이정표(백마산 3.73Km/ 성불암 3.49Km)와 삼각점만이 정상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산지킴이’라는 분이 이정표에 매달아 놓은 자그마한 정상표지판이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향로봉에서 그냥 지나쳐버리지 머물지를 않는다. 경관(景觀)이 볼품도 없을뿐더러 울창한 참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어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기 때문이다.

 

 

 

향로봉으로 올라왔던 길의 반대방향으로 내려서면서 백마산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약간 가파른 길을 10분 정도 내려가면 능선 안부에 이르렀다가,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되지만 경사(傾斜)가 가파르지 않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온통 참나무 일색으로 변해버린 산길을 따라 다시 10분 정도를 걷다보면 송전탑(送電塔) 건설공사 현장을 만나게 된다. 등산객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지점이다. 공사현장에서 산길이 능선으로 향하지 않고 왼편으로 나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공사현장을 통과하여 능선으로 오른다. 왼편으로 난 길이 고래리(밀양시 단장면)로 내려가는 길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길은 공사현장 뒤편 봉우리 너머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참고로 봉우리 위에는 ‘산지킴이’님의 580봉이라고 쓰인 정상팻말이 매달려 있다. 그런데 송전탑 공사현장이 텅 비어있는 것이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TV에서 주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공사 현장에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크레인 한 대만 덩그러니 버려져 있을 따름이다.

 

 

 

 

 

이어지는 능선은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하기 때문에 호젓하면서도 편안한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 가끔 오른편 숲이 열리면서 향로산이 조망(眺望)된다. 다음에 오를 산이 먼저 눈에 들어와야 하지만, 백마산은 진행방향의 능선 뒤에 꼭꼭 숨어있는 것이다. 산길은 몇 군데에서 사면(斜面)을 가로 질러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능선 길을 따른다.

 

 

 

첫 번째 공사현장을 지나 작은 오르내림을 거치면 두 번째 송전탑(送電塔) 공사현장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가파른 능선을 한 번 더 치고 나면 세 번째 송전탑 공사현장이 나온다. 두 곳의 공사현장도 역시 텅 비어 있기는 첫 번째 현장과 마찬가지이다. 세 번째 현장에서 동등재까지는 공사를 하면서 임시로 만든 길로 이어진다. 덕분에 길은 산봉우리를 지나지 않고 사면(斜面)을 가로지르며 편안하게 이어진다. 향로봉에서 이곳 동등재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다.

 

 

 

동등재는 백마산 아래에 있는 안부사거리(이정표 : 백마산 1.13Km/ 바드리마을 2.44Km)이다. 임도에 이르면 아까 지나왔던 공사현장에 왜 사람들이 없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주민들과 한국전력 요원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이다. 아마 공사현장에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서로 대치하고 있는 모양이다. 임도에는 응급차량을 위시한 수많은 차량들이 늘어서 있고, 주민들은 공사현장 방향의 길 위에 드러누워 있다. 아마 공사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의 통행을 막고 있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리에는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그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電氣)를 전국의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송전탑은 필수 시설임이 분명하다. 전력수급을 위해 꼭 필요한 시설이지만, 반대로 주민들에게는 ‘재산권의 침해’라는 손해를 발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공익(公益)과 사익(私益)이 서로 충돌하기보다는 절충되는 상태에서 원만한 타결이 이루어지기를 바래본다. 이곳 동등재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바드리마을, 그리고 오른편은 가산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바드리마을은 해발 550m의 고산지대(高山地帶)에 자리 잡고 있는 산골마을이다. ‘바드리’는 '밭들 마을' 혹은 '바로 달이 밝은 마을(所月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밭’과 ‘달’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에 이 마을은 화전민들이 일군 밭이 많았을 것이고, 높은 곳에 위치한 탓에 유난히도 달이 휘영청 밝았을 것이다.

 

 

 

 

백마산으로 가는 길은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연결된다. 건너편 능선으로 올라붙으면 먼저 널찍한 산길이 마중 나온다. 길가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공사현장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한국전력 측 사람들인 모양이다. 임도를 출발해서 2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하나의 뿌리에서 여러 갈래의 굵은 가지를 만들어 낸 소나무를 만날 수 있고, 또 다시 10분 조금 넘게 오르면 돌담 비슷한 돌무더기가 왼편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피난지(避難地)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백마산성(山城)터이다. 그러나 삼한시대 이전에 축성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인근에서 무문토기(無文土器) 종류가 곧잘 발견되기 때문이다. 비록 높이는 1m도 채 안되지만 길이는 정상 주변을 감싸고 있을 정도로 상당히 길다.

 

 

 

 

 

백마산성을 지나면 ‘평리 녹색농촌체험 팜-스테이(farm stay) 마을’ 이정표(정상0.3km/까치망0.5km/발치산초소0.3km)를 만나게 되고, 곧이어 왼편이 절벽(絶壁)으로 이루어진 멋진 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수십 년 묵은 늙은 소나무 가지 아래로 산골마을들과 밀양댐이 펼쳐지는데, 아쉽게 또렷하지는 않다. 오늘 산행의 별미가 주변 조망(眺望)인데도 하필이면 가스가 자욱한 것이다. 덕분에 주변의 풍광(風光)을 품에 안으며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밀양댐 구경은 다음으로 기약할 수밖에 없다.

 

 

 

 

백마산 정상은 전망대의 바로 이웃이다. 백마산 정상은 왼편이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졌는데, 절벽방향의 나무들을 잘라냈는지 주변의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발아래에는 고래리의 농가(農家)들이 산자락 곳곳에 듬성듬성 앉아있고, 그 왼편에 밀양호(湖)가 펼쳐진다. 그러나 막상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물론 건너편에 보이는 산들도 모두 실루엣(silhouette)으로 처리가 되어 있다. 산하(山河)에 가득 찬 가스 탓이다. 임도에서 백마산까지는 30분, 향로봉에서는 1시간20분 정도가 걸렸다. 열 평 남짓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백마산이라고 쓰인 정상표지석 외에도 ‘향로산 백마봉’이라고 쓰인 정상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세운 이유를 모르겠다. 대부분의 산행지도에도 ‘백마산’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구태여 향로산을 들먹일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정상에는 이정표(향로산 1.96Km/ 향로봉 3.73Km)와 ‘평리 녹색농촌체험 팜-스테이(farm stay) 마을’에서 세운 마을안내판도 보인다.

 

 

 

백마산에서 향로산 방향으로 출발하자마지 이정표(장군미 0.53km/ 산사이 0.59km/ 백마산 0.08km) 하나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왼쪽은 바드리마을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니 향로산으로 가려면 오른편 장군미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능선안부의 사거리인 장군미(달음재)까지는 가파른 내리막길로 이어지는데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장군미(이정표 : 향로산 1.35km/ 삼박골농원 2.77km/ 백마산 0.61km)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삼박골이고,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가산마을을 거쳐 선리에 이르게 된다. 장군미에 내려서니 우리 일행이 아닌 다른 등산객들이 눈에 띈다. 오늘 산행 중에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들이다. 아마 향로산을 오르려는 사람들이 이곳 장군미를 많이 이용하는 모양이다. 참고로 장군미는 달음재라고도 불리는데,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언곡마을(다람쥐골)에서 보면 달그림자가 이 고개에 걸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장군미에서 향로산으로 가는 길은 처음에는 널따란 임도(林道)와 함께 이어진다. 아마 방화를 목적으로 개설한 모양이다. 오르막길은 생각보다는 경사(傾斜)가 가파르지 않다. 쉬엄쉬엄 10분쯤 오르면 진행방향의 능선을 거대한 암벽이 가로막는다. 왼편으로 우회(迂廻)하면 스테인리스(stainless)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절벽 위로 올라설 수 있다. 절벽의 위는 뛰어난 전망대이다. 늘어진 소나무 가지 아래로 시원스럽게 시야(視野)가 트이지만, 주변에 가득 찬 가스 때문에 아쉽게도 조망(眺望)은 별로이다.

 

 

 

 

 

전망대에서부터 정상까지는 가파른 바윗길로 이어진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앞을 가로막는 바위가 거대(巨大)하지도, 그렇다고 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로프를 매달아 놓았다. 경사진 길가의 산죽(山竹)을 붙잡고 올라서면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바위의 경사(傾斜)도 그리 가파르지 않고 크랙(crack)까지도 잘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올라설 수 있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왼편으로 향로산의 정상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산이 전반적으로 흙산인데도 정상어림만 바위로 이루어진 게 특이하다. 이 바위 위에서 또 다시 주변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암릉을 따라 잠깐만 걸으면 정상에 이르게 된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 이정표(사자평/ 향로산 0.05km/ 백마산 1.91km) 하나가 보이니 무심코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장선리로 하산할 경우에는 향로산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 이정표가 가리키는 사자평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은 이정표에서 불과 5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백마산 정상에서 향로산 정상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린다.

 

 

 

▼ 향로산 정상은 좁디좁은 너덜 위에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상은 암릉으로 이루어진 탓에 사방으로 막힘이 없다. 최고의 조망터라는 소문에 걸맞게 사통팔달로 시야(視野)가 탁 트이는 것이다. 날씨만 맑으면 영남알프스의 산군(山群)들뿐만이 아니라 멀리 비슬산과 금정산 신어산은 물론 지리산까지도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뿌연 가스에 뒤덮인 산하(山河)는 그런 호사(豪奢)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가지산과 천황산, 그리고 재약산, 신불산, 영축산, 정각산, 운문산 등 영남알프스의 고산준봉(高山峻峰)들은 그저 마음속에나 그려볼 따름이다.

 

 

 

 

오늘의 산행날머리는 장선마을이다. 하산지점인 장선마을로 가려면 아까 지나왔던 사자평삼거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정상에서 올라왔던 반대편으로 갈 경우에는 표충사로 가는 방향에 있는 섬돌가든으로 내려가게 되기 때문이다. 삼거리에서 사자평 방향의 주능선으로 들어서면 사실상 오르막길은 끝이 난다. 능선을 걷다보면 작은 오르내림을 몇 번 거치게 되지만, 오르막길이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할 정도로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할 뿐더러 오르막의 거리도 짧다. 거기다 능선 상의 봉우리가 조금이라도 높을라치면 산길은 어김없이 사면(斜面)을 가로지르며 이어진다.

 

 

 

울창하게 우거진 참나무 숲길을 따라 40분쯤 걸으면 폐(廢)헬기장 바로 아래에서 표충사갈림길(이정표 : 재약봉 2.8km/ 표충사 5.0km/ 향로산 1.4km)을 만나게 되고, 다시 10분 정도를 더 걸으면 이번에는 이정표가 없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길이 갈린다. 바로 선리마을(양산시 원동면)로 내려가는 길이다.

 

 

 

 

선리마을 갈림길에서 5분 조금 넘게 더 걸으면 이번에는 이정표(재약봉 1.9km/ 표충사4.4km/ 향로산 2.3km)가 있는 4거리에 이르게 된다. 비록 이정표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오른편에도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인다. 그러나 구태여 오른편으로 내려갈 필요는 없다. 거친 길에서 고생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재약봉 방향으로 계속진행하면 20분쯤 후에는 재약봉 바로 아래에 있는 안부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이 칡밭재로 부르는 사거리이다. 비록 이정표는 없지만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갈 경우에는 칡밭골에 이르게 되고, 장선마을로 하산하려면 오른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장선마을로 내려서는 길은 의외로 또렷하다. 내리막길이 비록 가파르기 이를 데가 없지만 조금만 조심한다면 큰 어려움 없이 내려설 수 있다. 흙으로 이루어진 내리막길은 그 가파름을 배겨내지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之)자로 길을 만들면서 아래로 향한다. 내려가다 보면 가끔 길의 흔적이 희미해질 때도 있다. 이럴 때면 골짜기를 따라 내려간다는 기분으로 내려가면 어렵지 않게 계곡에 이를 수가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에는 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그만큼 가물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장선리 마을회관

물기 없는 계곡은 너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내려서기가 쉽지 않다. 거기다가 가파르기까지 한 곳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가끔 폭포를 닮은 바위벽도 보이지만 그 크기나 생김새가 보잘 것이 없기 때문에 눈요깃거리는 되지 못한다. 볼품없는 계곡길이 싫증날 즈음이면 다시 숲길이 나타나면서 진행방향에 장선리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장선리 마을은 의외로 큰 마을이다. 민박집이나 펜션도 자주 눈에 띄고 길가에는 식당가까지 늘어서 있다. 특히 마을 담장에 벽화를 그려 넣는 등 마을을 가꾸는데 심혈을 기울인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참고로 마을 앞의 도로 건너편에 산행 후에 땀을 씻을 수 있는 냇가가 있으니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칡밭재에서 장선마을까지는 45분 정도가 걸린다.

 

 

 

 

수우도(樹牛島) 은박산(189m)

 

산행일 : ‘13. 5. 4(토)

소재지 : 경남 통영시 사량면

산행코스 : 선착장→고래바위→신선봉→백두봉→금강산(180m)→은박산(189m)→동백나무군락지→해안가→선착장(산행시간 : 3시간)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한려수도(閑麗水道)에서 봄이 가장 먼저 온다는 수우도는 최근에야 알려지기 시작한 섬이다. 바로 옆에 있는 사량도의 유명세(有名稅)에 가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수우도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울창하기로 소문난 ‘동백 숲(동백으로 유명한 오동도가 4천 그루인데 수우도는 2만여 그루)’은 수령(樹齡)이 무려 200년에서 500년에 이르고,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잘 발달된 기암괴석(奇巖怪石)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다른 섬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다는 것이 입소문을 탄 탓이다.

 

 

수우도에 가는 방법 : 수우도에 가려면 먼저 삼천포항으로 가야 한다. 삼천포항에서 수우도 가는 배는 하루 두 번(오전 6시30분과 오후 2시30분) 있지만, 단체로 갈 경우에는 유람선(遊覽船)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출항시간에 맞춰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을 뿐더러, 운임(運賃)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수우도 선착장(船着場)

수우도에는 차량(車輛)이 없다.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곤 오로지 선착장부근이 유일해서 도로가 따로 필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다운 길이라곤 선착장을 둘러싸고 있는 방파제(防波堤)와 축대(築臺)의 위가 전부이다. 그 길의 오른쪽 맨 끄트머리가 산행들머리이다. 산행들머리에 가기 위해서는 마을 앞을 지나야 하는데, 마을 앞에 공중화장실이 깔끔하게 지어져 있으니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수우마을은 한마디로 작다. 마치 바위틈의 따개비처럼 은박산의 능선 틈 사이에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주민들의 수는 서른 대여섯 남짓, 스물 한 가구가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단다. 섬사람들은 요즘 바빠졌다. 주말이면 수많은 등산객들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착장에는 주말마다 톳과 말린 홍합을 파는 좌판이 늘어서고, 방파제(防波堤)에 매여 있는 어선(漁船)에서는 싱싱한 회에 결들인 소주까지 팔고 있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길로 시작된다. 산길 주변에는 소사나무와 동백나무가 대부분, 가끔 소나무들이 섞여 있을 따름이다. 산행을 시작해서 20분 정도 오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 길이 더 또렷하지만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진행하는 것이 옳다. 오른편으로 오를 경우 곧장 신선대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바위벼랑에 맞닥뜨리면서 길이 좌우(左右)로 나뉜다. 능선의 갈림길에 서면 왼편으로 고래바위가 잘 조망(眺望)된다. 수우도에서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절경(絶景)이다. 고래바위로 가는 길은 오른쪽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바위 능선의 위가 널따랗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다.

 

 

 

갈림길에서부터 갸웃거리던 고개는 고래바위의 끄트머리에 이르러서도 멈추지를 않는다. 아무리 눈을 부릅떠 봐도 바위의 생김새에서 고래를 그려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글귀가 떠오른다. 배를 타고 봐야 바위의 생김새가 고래로 보인다는 것이다.

 

 

고래바위 위에 서면 저 멀리 지리망산으로 널리 알려진 사량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신선대와 백두봉이 코앞이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매섬이 바닷물에 몸을 맡긴 채로 파도 따라 흔들리고 있다.

 

 

고래바위와 백두봉 사이에 있는 매바위, 키조개를 닮았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어쨌든 공식적인 이름은 매바위이다. 이름을 지었던 유람선 가이드들의 눈에는 키조개보다 매를 더 많이 닮게 보였나 보다. 수우도의 해안(海岸)은 모두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하얀색갈의 바위들이 옥빛 바닷물과 어울리며 그 빼어난 자태(姿態)를 한껏 자랑하고 있다. 매바위나 고래바위, 해골바위 등 수우도의 바위들은 원래부터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이름들은 최근에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삼천포항에서 출항(出港)하는 유람선의 가이드(guide)들이 지어 붙였다는 것이다. 하긴 가이드들이 관광안내를 흥미진진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름이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고래바위를 둘러본 후에는 아까 지나왔던 갈림길까지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 고래바위뿐만이 아니다. 신선대나 백두봉 등 수우도의 비경(秘境)들은 둘러보고 난 후에는 어김없이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수우도가 자랑하는 절경들은 주능선보다는 바다를 향해 가지를 치고 있는 능선들이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다시 10분 정도 오르면 신선대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신선대까지는 100m정도의 바위능선으로 연결된다. 신선대로 가는 길은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양 옆이 수백 길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행여나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세라 가슴을 졸이며 걷다보면 어느새 신선대 위에 올라서게 된다. 무서움을 참은 대가(代價)는 의외로 짭짤하다. 암릉의 끄트머리 뽈록 솟아오른 부분에 올라서자마자 시야(視野)가 탁 트인다. 왼편의 고래바위는 바다를 향해 힘차게 헤엄쳐 나가고 있고, 오른편에 보이는 백두봉에는 개미처럼 작은 사람들이 조심조심 걷고 있다. 물론 바다 건너에 있는 바위투성이의 지리망산도 또렷하다. 수우도의 트레킹 코스에는 다른 섬들이 갖지 못한 독특한 매력이 있다. 수우도 트레킹의 최고 매력이라면 섬을 둘러친 육중한 해벽(海壁) 위를 걷는 맛이다. 한려수도의 풍광(風光)에 취한 채 100m도 넘는 깎아지른 벼랑 위를 걷다보면 발바닥이 간질간질해진다. 그 발바닥 아래에는 청색바다가 아스라이 펼쳐지고 있다.

 

 

바위능선의 끄트머리인 신선대는 3면(三面)이 수직(垂直)의 절벽(絶壁)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우리 위에 서면 발바닥이 간질간질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래도 아래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다. 무섭다고 해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경관을 보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고개를 내밀어보면 까마득한 직벽(直璧)의 해안 아래에 파란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있다. 그 풍광(風光)은 가히 가슴이 뛸 정도로 아름답다.

 

 

신선대에서 바라본 백두봉. 멀리서 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가슴 떨리는 위험구간이다.

 

 

신선대에서 바라본 거북바위, 이곳에서 보면 드디어 고래의 머리 형상이 나타난다.

 

 

신선대에서 되돌아 나와 주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얼마 안 있어 ‘백두봉 갈림길’이 나온다. 백두봉으로 향하는 왼편의 내리막길은 의외로 흙길이다. 아까 신선대에서 본 백두봉의 이미지와는 딴판인 것이다. 그러나 그 흙길은 금방 끝을 맺고 이내 바윗길로 변해버린다.

 

 

 

백두봉으로 가는 능선은 밋밋하게 이어지는 것에 화가 났는지 갑자기 30m 정도나 되는 벼랑을 만들어 낸다. 이곳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능선을 고집할 경우에는 로프에 매달려 벼랑을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위험한 코스이므로 초심자들은 이 코스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오른편에 보이는 사면(斜面)길로 내려서면 된다. 그러나 사면길도 무섭기는 매 한가지이다. 로프의 길이가 조금 짧을 따름이지 로프에 매달려야만 아래로 내려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능선에서 바라본 백두봉

 

능선에서 내려서는 사면길, 시도 때도 없이 밀린다.

 

 

능선에서 내려서는 벼랑길, 가슴 떨리는 구간이다.

 

 

바위벼랑을 내려서면 또 다시 바위 오름길이 기다린다. 오름길은 경사(傾斜)가 조금 전에 내려왔던 벼랑보다는 많이 누그러졌고, 로프까지 매달려 있어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수우도 섬산행의 백미(白眉)는 뭐니 뭐니 해도 백두봉 정상을 오르는 것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는 스릴(thrill)넘치는 릿지(ridge)코스이다. 경사(傾斜)가 대략 60~70도는 족히 되어 보이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바위절벽인데, 다행이도 로프가 매달려 있다. 로프가 없었다면 백두봉 정상은 먼발치에서나 바라봐야 하는 봉우리였을 것이다.

 

 

어렵게 올라온 백두봉은 의외로 평평하고 넓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비좁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20~30명은 족히 앉아서 쉬어도 좋을 만큼 널찍한 것이다. 백두봉에서는 또 다시 시야(視野)가 시원스럽게 트인다. 거북바위와 해골바위가 좌우(座右)에 늘어서있고, 에머럴드(emerald) 색깔로 반짝이는 바다 건너편에는 사량도의 윗섬와 아랫섬이 파도에 몸을 맡길 채로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 마침 고래바위 아래를 배 한 척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배가 바다 위에 그려내는 포말이 예쁜 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여유로움이 한껏 묻어나는 아름다움이다.

 

 

 

백두봉에서 바라본 해골바위, 바위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이 보인다. 뚫린 모양이 해골을 닮았다고 해서 ‘해골바위’라고 불린다. 수우바위라고도 불리는 해골바위는 비, 바람에 씻기고 패여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형상인데, 남해안에서 가장 조형미(造形美)가 뛰어난 바위로 알려져 있다. 금강봉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저곳에 이를 수가 있지만, 구태여 해안(海岸)까지 내려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백두봉에서 카메라에 담는다.

 

 

 

백두봉에서 바라본 신선대와 그 뒤에 보이는 고래바위, 바다 너머에 보이는 섬은 물론 사량도이다. 수우도는 풍우(風雨)로 인한 침식작용(浸蝕作用)으로 인해 바위들이 균열 및 요철이 심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그 덕분에 바위들이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변하면서 뛰어난 눈요깃거리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백두봉에서 바라본 주능선

 

백두봉에서 내려와 아까 지나왔던 벼랑을 다시 오른다.

 

백두봉에서 내려오는 모습

 

금강봉으로 가는 길에 바라본 백두봉, 오른편은 해골바위이다.

 

 

또 다시 백두봉에서 되돌아 나와 10분쯤 더 걸으면 금강봉이다. 오늘 산행 중에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봉우리다운 봉우리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박건석씨가 만들어 붙인 ‘정상 코팅지’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고래바위의 등허리가 나오지만 해안(海岸)까지 내려가는 것이 싫어 그냥 은박산 정상으로 향한다.

 

 

 

금강봉에서 은박산 정상까지는 숲길이 이어진다. 산길은 흙길과 바윗길이 번갈아 나오는데 경사(傾斜)가 급하지도 않을뿐더러 위험하지도 않기 때문에 느긋하게 걷기만 하면 된다. 길가에는 소사나무가 대부분, 내민 지 얼마 안 된 여린 새 잎들은 저마다 연록을 지나 진녹색으로 치닫고 있다. 금강봉에서 은박산 정상까지는 대략 20분 정도,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은박산 정상은 10평 남짓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은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하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 한쪽 귀퉁이의 나무에 매달린 ‘통영 수우도 은박산 189m’라고 쓰인 나무판자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 은박산은 동백꽃이 필 무렵, 어두운 밤에 멀리 삼천포에서 수우도를 바라보면 동백나무가 은박지 같이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상석 하나 없는 외로운 산이지만 주변의 조망(眺望)은 뛰어난 편이다. 우선 남쪽에는 한려수도(閑麗水道)가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다건너에 있는 암봉으로 이루어진 섬 두 개다. 바로 지리망산으로 유명한 사량도 윗섬과 칠현산이 터줏대감으로 있는 아랫섬이다. 두 섬은 얼마 전부터 다리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윗섬의 앞에서 파도를 가르며 달려오고 있는 조그만 섬은 아마 대섬일 것이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돌산반도와 고흥반도를 이루고 있는 산들까지도 잘 조망된다.

 

 

하산길은 정상표시판 뒤로 나있다. 숲이 우거진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다보면 두어 번 절벽을 만나면서 시야(視野)가 트인다. 바다 건너편에는 거제도가 기다랗게 누워있는데, 그 한쪽 귀퉁이에 보리암을 품은 금산이 살짝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상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동백군락지를 만나게 된다. 동백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찬 산길은 햇빛 한 점도 스며들지 못할 정도이다. 수우도의 동백나무는 모두 2만여 그루나 된다고 한다. 동백으로 유명한 오동도가 겨우 4000여 그루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수우도에 들어오면 ‘동백 숲’이 광활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섬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쉽사리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동도의 동백숲이 잘 가꿔진 정원(庭園) 같다면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수우도의 동백숲은 야생(野生)의 화원(花園)처럼 거칠다. 수우도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섬이다.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탓일 것이다. 입소문이 조금만 나더라도 자연환경이 금방 훼손(毁損)되어 버리는 안타까운 요즘의 현실에서 자연 그대로인 숲과 바위를 만나게 되는 것은 행운이다. 자연이 만들어 낸 천혜의 걸작(傑作)들을 본래의 모습대로 만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동백나무 터널을 지나 산허리길 돌면 숲이 열리면서 파란 바다가 고개를 내민다. 몽돌해수욕장에 내려선 것이다. 정상에서 20분 정도 걸렸다. 막상 내려선 몽돌해수욕장은 해수욕을 즐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바닥에 깔린 크고 작은 돌들이 어지럽게 섞여있어 바닥에 앉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인근에 민물이 없다는 것이다. ‘해수욕을 한 후에 육지에 나가서 씻으면 되잖아요.’ 집사람의 실없는 대꾸를 귓가로 흘려버리며 선착장으로 향한다.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걷는 길은 한마디로 낭만의 길이다. 몽돌해수욕장에서 선착장까지는 대략 20분 정도 걸리는데 지루할 틈이 없다. 몽돌 위를 걸으며 묵은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물먹은 바윗길을 걸을 때는 함께 걷는 사람의 손길을 잡아주기도 해야 한다. 거기다 비취빛으로 빛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양식장의 가지런한 부표를 바라보는 재미는 양념이다. 바닷길이 끝나고 마을 앞으로 연결되는 시멘트 포장길에 올라서면 우물이 만나게 된다. 우물에서 하는 두레박질은 꼭 머리를 감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옛 추억을 되살려 보려는 욕심에서일 것이다. 수우도의 은박산을 둘러보는 데는 3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 시간은 큰 의미가 없다. 주변 경관(景觀)을 구경하는 시간과 로프를 타고 오르내릴 때 기다리는 시간이 들쑥날쑥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수우도의 북서쪽부터 남동쪽 해안(海岸)은 온통 해식애(海蝕崖)가 발달된 암석해안이다. 수우도의 능선을 따라 한 바퀴 도는 길은 줄곧 숲과 암석의 경계선에 그어져 있다. 능선의 안쪽은 짙은 동백과 소사나무숲이고, 바깥쪽 바닷가는 온통 은빛 바위다. 어느 누군가는 은박산이란 이름이 동백나무로 인해서 얻어진 이름이라고 했다. 어두운 밤에 멀리서 수우도를 바라볼 때 동백나무 숲이 은빛으로 빛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발아래에 펼쳐지고 있는 하얀 바위들을 보니, 그 가설(假說)이 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동백나무가 하얗게 반짝이는 게 아니라, 어쩌면 암석해안이 ‘은박’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만어산(萬魚山, 670.4m) - 구천산(九天山, 620m)

 

산행일 : ‘13. 4. 28(일)

소재지 :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과 단장면의 경계

산행코스 : 장군당 입구→장군당 갈림길→만어사→만어산→점골고개→감물고개→구천산→영천암 입구(산행시간 : 4시간20분)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특징 : 전국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흙산으로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다만 용왕의 아들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만어사(萬魚寺)와 만어석(萬魚石)으로 인해 등산객들로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미륵바위는 아들 낳기를 원하는 수많은 여성들을 끌어들인다고 한다. 그러나 산행만 놓고 볼 때에는 만어산보다 종주코스에 함께 포함시키는 구천산이 훨씬 낫다. 구천산의 정상어림은 바위구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조망(眺望)도 뛰어날뿐더러 비록 잠깐이지만 스릴까지 선물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장군당입구(우곡리)

신대구-부산고속도로 삼랑진 I.C에서 내려와 1022번 지방도를 따라 양산방향으로 잠시 달리다가 삼랑진역(삼랑진읍 송지리) 조금 못미처에 있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군도(郡道 : 만어로)를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곡리에 이르게 된다. 우곡리 입구의 만어사 안내석 세워진 곳에서 만어사 방향으로 난 아스팔트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장군당’과 ‘선명사’ 안내판이 세워진 갈림길이 산행들머리이다.

 

 

 

 

장군당 또는 선명사 안내판(案內板)이 가리키는 오른쪽 방향으로 들어서면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뒤에는 만어산이 버티고 있다. 산꼭대기에 ‘이동통신 기지국’의 안테나시설이 세워진 것을 보면 아마 이 부근에서 가장 높은 산인 모양이다. 전원주택단지 앞에는 각종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어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목단(牧丹), 여성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의미하는 ‘5월의 꽃’이 목단인데, 5월이 되기도 전에 꽃망울을 활짝 열고 화사함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길가에 방치된 목장승, 남성의 성기(性器) 모양으로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장승은 나무가 썩어서 허리가 동강난 채로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다. 이왕에 내보인 작품이니 관리까지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전원주택단지를 지나서도 임도(林道)는 계속해서 널따랗게 이어진다.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왼편으로 나뉘는 갈림길을 2번 만나게 된다. 목장승을 지나 만나는 갈림길에서는 ‘장군당’이라 적힌 이정표를 따른다. 그리고 재차 만나게 되는 갈림길에서는 왼편의 ‘장군당’을 버리고 곧장 올라가면 된다. 장군당 갈림길을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왼편에 잘 가꾸어진 납골묘역이 나온다. 이곳에서 임도는 폭을 줄이면서 오른편으로 휘면서 산길과 이별을 고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정도가 지났다.

 

 

 

 

납골묘역의 뒤편에서 산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는 탓인지 산길은 뚜렷하지가 않다. 산길에 우거진 잡목(雜木)이 발걸음을 더디게 만드는데, 거기다 경사(傾斜)까지 가파르기 때문에 오르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다. 자연스럽게 숨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산허리길을 왼편으로 돌기도 하면서 20분쯤 오르면 주능선을 만나게 되면서 산길이 뚜렷해진다. 이어지는 가파른 산길을 숨이 턱에 차게 오르다보면, 가끔은 경사(傾斜)가 누그러지면서 가족묘원이 나오기도 한다.

 

 

 

납골묘역에서 40분 가까이 걸으면 이동통신기지국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기지국 방향으로 50m쯤 올라가면 왼편에 오솔길이 나타난다. 만어사로 넘어가는 산길이다. 물론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왼편으로 내려가도 만어사가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곧바로 산을 넘어가는 산길을 택한다. 거리를 단축하는 지름길일뿐더러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한 고개를 하나만 넘으면 되기 때문이다.

 

 

 

기지국으로 가는 임도(林道)에서 산길로 들어서서 10분쯤이면 만어사에 이르게 된다. 그다지 또렷하지 않은 산길을 따라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앞이 시원하게 트이면서 만어석이라고 불리는 너덜겅이 광활(廣闊)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만어사가 오롯이 앉아있다. 만어사 앞의 널따란 계곡을 만어석이라고 불리는 바위들이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너덜겅을 걷는데 쭈그리고 앉아 바위를 두드리고 있는 여성이 보인다. 이유를 물으니 바위에서 종소리가 난다며 또 다시 바위를 두드려 준다. 아니나 다를까 날카로운 쇳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만어석(萬魚石)이라 불리는 이 너덜겅은 옛날 용왕의 아들을 따라왔던 동해의 고기들이 죽어서 변했다는 돌들로 두들기면 종소리가 난다고 해서 종석(鐘石)이라고도 불린다. 만어사 하면 떠오르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길이 300여m, 너비 100여m의 절 앞 계곡에 가득 찬, 어산불영(魚山佛影)이라 불리는 수만 개의 너덜겅이다. 이 너덜겅이 2011년 천연기념물 528호로 지정된 것을 보면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국내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는 비슬산 암괴류(천연기념물 제435호)와 밀양 얼음골 암괴류(천연기념물 334호)가 있다. 한때(조선 세종)는 만어산 경석(磬石)을 채굴해 악기로 만들려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너덜겅을 통과하면 만어사(萬魚寺)이다. 전설(傳說)에 의하면 만어사는 AD46년에 수로왕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수로왕 때 가락국의 옥지(玉池)에서 살고 있던 독룡(毒龍)과 만어산에 살던 나찰녀(羅刹女)가 서로 사귀면서 뇌우(雷雨)와 우박을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하였다. 수로왕은 주술(呪術)로써 이 일을 금하려 하였으나 불가능하였으므로, 예를 갖추고 인도 쪽을 향하여 부처에게 청하였다. 부처가 신통으로 6비구와 1만의 천인(天人)들을 데리고 와서 독룡과 나찰녀의 항복을 받고 설법수계(說法授戒)하여 모든 재앙을 물리쳤다. 이를 기리기 위해서 수로왕이 절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無隻山)의 신승(神僧)을 찾아가서 새로 살 곳을 마련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터라고 일러준 신승의 말에 따라 왕자가 길을 떠나니 수많은 종류의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용왕의 아들이 머물러 쉰 곳이 이 절이었다. 그 뒤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바위로 변하였고 수많은 고기들은 크고 작은 화석으로 굳어 버렸다고 한다. 현재 절의 미륵전(彌勒殿) 안에는 높이 5m 정도의 뾰족한 자연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된 미륵바위라고 하며, 미륵전 아래에는 무수한 돌무덤이 첩첩이 깔려 있는데, 고기들이 변한 것이라고 해서 만어석(萬魚石)이라고 부른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66호로 지정된 ‘3층 석탑’이 있다.

 

 

 

 

만어사 경내에 들자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웬일일까? 그 이유는 경내(境內)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난 다음에 알 수 있었다. 주불전(主佛殿)인 대웅전은 1층짜리 조그만 전각인데, 미륵전은 2층으로 커다랗게 지어졌다.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만어사의 내력을 알고 나면 왜 그렇게 건물이 지어졌는지를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미륵전에 모시고 있는 미륵바위가 이곳 만어사를 대표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미륵바위는 용왕의 아들이 죽으면서 변했다는 높이가 5m 정도 되는 바위이다. 미륵바위 앞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수많은 부녀자(婦女子)들이 찾는다고 한다. 미륵바위는 동전이 들어붙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난해에 KBS의 '스펀지'란 프로그램에 소개가 되었을 정도이다. 그때 방송에서 나온 문제가 '밀양시 만어사란 절에는 □가(이) 있다'라는 문제였고, 그 정답은 '동전이 붙는 바위'였다. 방송을 보고 하도 많은 사람들이 바위에다 동전을 붙이는 통에 요즘에는 절에서 붙이는 못하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고 한다. 또 하나 미륵전의 뒤로 돌아가 보면 커다란 바위가 건물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륵바위를 놓고 건물을 지은 탓에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한 부분이라고 한다.

 

 

 

 

만어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미륵전의 오른편 앞 모서리에서 열린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게 시작된다. 산길은 가파른 경사(傾斜)를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는 지그재그로 방향을 틀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오르기가 버겁지만 길가에 서있는 크고 작은 바위들을 벗 삼아 쉬엄쉬엄 오른다.

 

 

 

 

만어사를 출발한지 20분이 조금 넘으면 이동통신기지국의 중계탑을 지난다. 기지국을 지나면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쌍바위라고 불리며 바위의 위는 전망대의 역할을 한다. 위로 올라가면 발아래에 낙동강의 흐름이 눈에 잡히고, 삼랑진 쪽에 늘어선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위 위로 오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으나 구태여 오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만어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眺望)과 크게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쌍바위에서 정상까지는 50m 정도의 거리이다. 만어산 정상은 열 평 남짓한 분지(盆地), 한가운데에 밀양시에서 만든 예쁘장한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정상에 서면 낙동강과 삼랑진쪽 산들이 시야(視野)에 잡힌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조금 전에 올랐던 쌍바위 전망대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천태산과 재약산, 가지산, 운문산 등의 산군(山群)들에 대한 조망까지 감안한다면 아까보다 더 낫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산은 남동쪽에 있는 구천산 방향으로 내려선다. 구천산으로 향하는 능선의 왼편은 밀양시 단장면, 오른편은 삼랑진읍이다. 진행방향 저 멀리에 보이는 구천산의 왼편에 보이는 산은 금오산일 것이다. 물론 삼랑진 방향에는 무척산과 중리동산이 우뚝하다. 능선을 걷다보면 ‘영축지맥’이라고 쓰인 팻말이 나무에 걸려있는 것이 보인다. 팻말이 알려주듯이 지금 영축지맥(靈鷲枝脈)을 걷고 있는 것이다. 영축지맥은 낙동정맥이 천의봉에서 부산 몰운대로 치닫다가, 그 종점을 좀 못간 양산 영축산에서 가지를 치는 산맥을 말한다. 지맥(枝脈)은 금오산과 구천산 그리고 만어산과 청용산 등을 만든 후에 밀양강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삼랑진에서 그 숨을 다하는데 그 길이는 45.8km에 이른다.

 

 

 

만어산에서 내려서면 오래지 않아 한참 정비(整備)중인 임도(林道)를 만나게 된다. 산길은 먼지가 풀썩거리는 임도를 100m쯤 따르다가 다시 능선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선다. 능선을 가득 매운 소나무들이 보내오는 짙은 솔향에 젖어 걷다보면 이내 점골고개에 이르게 된다. 점골고개는 자동차가 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널따란 고갯마루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누군가가 몰고 올라왔는지 고갯마루에는 승용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우곡마을에 이르게 된다. 만어산을 출발한지 30분 정도가 지났다.

 

 

 

산길의 주변은 온통 소나무 천지, 이곳뿐만 아니라 만어산과 구천산 일대는 온통 소나무군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편백나무 다음으로 피톤치드(phytoncide)를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소나무이니 말이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산행 내내 마음껏 마실 수 있으니 오늘 산행은 분명히 웰빙(Well-being)산행에 휠링(healing)산행을 더한 것이 분명하다.

 

 

 

구천산으로 가려면 점골고개에서 맞은편에 보이는 610봉으로 올라서야 한다. 610봉 근처에서는 가끔 길이 헷갈리는 곳이 나타나기도 한다. 비록 희미하기는 하나 갈림길이 가끔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산악회의 리본을 보고 진행하면 된다. 특히 곳곳에 매어져 있는 부산일보와 국제신문의 리본을 참조한다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이다.

 

 

 

점골고개를 지나 구천산으로 향하다 보면 오른편 나무숲 사이로 우곡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마을 한쪽에 원형으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이 멋스럽다. 그러나 산행 후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망자(亡者)의 유골(遺骨)을 모시는 납골당(納骨堂)이라고 한다.

 

 

점골고개에서 소나무가 울창한 봉우리 몇 개를 넘으면 산길은 안부를 향해 급하게 고도(高度)를 떨어뜨린다. 안부에는 사찰보다는 여염집 민가를 더 닮은 선우사라는 절이 있다. 오늘 무슨 행사가 있는지 절 주변에는 많은 차량들이 늘어서있고, 사찰 안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북적이고 있다. 선우사를 지나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100m쯤 더 걸으면 감물고개이다. 감물고개는 삼랑진 우곡마을에서 단장면 감물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다. 점골고개에서 감물고개까지는 대략 30분 정도 걸린다.

 

 

 

감물고개에서 구천산으로 가려면 우선 도로변의 시멘트옹벽을 올라서야 한다. 어른의 가슴깨나 되는 높이여서 다소 부담스럽지만, 누군가가 중간의 구멍에다 나무공이를 박아 놓아 밟고 오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감물고개를 지나면서는 가파른 오르막길의 연속, 순수한 흙길이던 아까와는 달리 길은 다소 거칠어진다. 가끔가다 바위길이 섞여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주변 소나무들에서 떨어진 솔가리(소나무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푹신푹신 하기는 매 일반이다.

 

 

 

감물고개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힘들게 오르면 산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다시 고도(高度)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경제림(經濟林) 조성을 위해 벌목을 한 개활지(開豁地) 두 곳을 지나게 된다. 개활지 두 곳은 두 개의 봉우리라고 보면 될 것이다. 소나무 등을 베어낸 개활지에는 편백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죽은 나무들이 즐비한 것이 생존율이 50%를 넘지 않는 것 같다.

 

 

 

주의가 필요한 지점, 구천산의 전위봉인 헬기장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금오산으로 가는 길이므로 구천산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방향 찾기가 어려울 경우에는 이곳에서도 부산일보나 국제신문의 리본을 참조하면 된다.

 

 

 

헬기장에서 정상까지는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러나 그 길은 아쉬운 길이다. 왼쪽 사면(斜面)이 아쉽게도 산불의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능선에서 늠름하게 자라던 나무들이 검게 그을린 채로 흉물스럽게 널려있다. 불이 약하게 지나갔던 바위 사이 나무는 밑둥치에 검은 상흔만 지닌 채 그래도 살아남았다. 이렇게 큰 상처를 남기는 산불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산에서의 화기(火器)사용은 자재(禁)해야 할 것이다.

 

 

 

구천산으로 오르는 길은 암릉이다. 암릉구간은 길거나 험하지는 않지만, 중간어림에는 로프를 붙잡아야 오를 수 있는 곳도 있다. 구천산의 정상은 커다랗고 뾰쪽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 위로 오르기가 만만치 않을뿐더러, 서있을 마땅한 공간도 없으니, 조망(眺望)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바위 위로 오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정상석도 세워져 있지 않다. 그저 바위 옆의 나뭇가지에 ‘영축지맥 구천산’이라는 팻말이 매달려 있을 뿐이다. 구천산은 9개의 봉우리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고도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예전에 아홉 마리의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두 얘기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하더라도 결론은 같다. 그만큼 산이 깊다는 얘기인 것이다.

 

 

 

 

두 사람이 서도 불안한 자세뿐이 나올 수밖에 없는 뾰쪽 바위 위의 정상은, 일단 올라서기만 하면 뛰어난 조망(眺望)으로 보답해 준다. 경남 남부(南部)의 모든 산들이 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바로 앞에는 금오산과 천태산 그리고 무척산과 신어산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천황산과 운문산, 영축산 등 영남알프스의 산군(山群)들이 첩첩이 쌓이며 하늘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정상에서 하산지점을 영천암으로 잡고 조금만 나아가면 망(望)바위가 나온다. 누군가 공들여 쌓은 듯한 돌탑이 세워져 있는 망바위에 서면 또 한 번 시야(視野)가 툭 터진다. 남쪽에는 토곡산과 천태산, 금오산이, 그리고 동북쪽에는 가지산과 운문산 등 영남알프스의 준봉(峻峰)들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영천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한마디로 험하다. 하산 길의 초입인 암릉길이 차라리 부담이 없을 정도이다. 암릉이야 바위가 앞을 막으면 우회(迂廻)하면 되겠지만, 경사(傾斜)가 가파른 흙길은 미끄러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경사를 이겨보려고 이리저리 갈지(之)자를 만들 수밖에 없는 비탈길은 20여분이 넘도록 길게 이어진다. 길가에 붙잡을 지지물(支持物)이 없기 때문에 내려서는 속도를 조절하기가 어려운 하산길은 안전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산행날머리는 ‘영천암 입구’

정상에서 날머리인 영천암 입구까지는 1시간이 조금 못 걸린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은 내려오다 보면 가끔 길이 희미해지는 곳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신경을 써서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산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길게 이어지던 가파른 경사(傾斜)가 누그러질 즈음 길가에 시설물(施設物 : 영천암의 집수시설로 추정) 하나가 보이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林道) 위에 내려서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올라가면 영천암이고 우곡마을로 가려면 왼편으로 내려가면 된다. 임도를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우곡리에서 단장면으로 넘어가는 도로와 만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사량도 지리망산(398m)

 

산행일 : ‘13. 1. 1(화)

소재지 : 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면

산행코스 : 내지마을→돈지 갈림길→지리산→불모산(달바위)→가마봉→연지봉→옥녀봉→진촌마을(산행시간 : 4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광동산악회

 

특징 : 사량도는 윗섬인 상박도(上樸島)와 아랫섬 하박도 2개 섬으로 나뉘어 있는데, 지리산은 그중 윗섬에 동서로 뻗어 있는 산줄기다. 조그마한 섬 사량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이유다. 산림청이 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에까지 당당히 이름을 올린 지리망산(智異望山) 때문이다. 따라서 ‘사량도에 간다.’고 하면 그건 곧 ‘지리망산에 오른다.’라는 뜻으로 귀결(歸結)된다. 지리망산은 ‘거기에 서면 지리(智異)산이 보인다.’라는 뜻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그것은 외지(外地)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름일 뿐, 원래는 ‘지리(池里)’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섬 남쪽의 돈지(敦池)마을에서 북쪽의 내지(內池)마을 사이에 솟구쳐 올랐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요즘에는 다시 지리산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고쳐 부른다는 그 이름이 지리(池里)가 아니라 지리(智異)인 게 문제다. 차라리 더 엉뚱한 이름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제일 높은 봉우리인 달바위봉(400m)을 산의 이름으로 삼으면 어떨까? 또 다른 이름인 ‘불모산’으로 말이다.

* 사량도 가는 방법 : 경남 통영은 물론이거니와 사천과 고성에서도 사량도까지 가는 배가 있다. 통영은 가오치항(055-642-6016), 사천은 삼천포항(055-832-5033), 고성은 용암포(055-673-0529)에서 여객선이 출항한다. 그중 가오치항에서 뜨는 배편이 가장 많아 일출 후부터 일몰 무렵까지 2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그리고 삼천포항에서는 ‘세종1호’가 하루 4번, 주말과 휴일에는 6번 운항한다. 어디서 출발하나 40분 정도 걸린다.

 

 

6시경에 삼천포항을 출발한 유람선은 느긋하게 사량도로 향한다. 사량도 옆에 있는 수우도 근처의 해상에서 해돋이(日出)를 보기 위해서이다. 해가 뜨는 예상시간이 7시35분이니 남은 시간은 1시간35분, 사량도까지 제대로 가면 4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으니 구태여 서두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를 안내해 주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선장님은 얼굴만큼이나 말솜씨 또한 뛰어나다. ‘삼천포 대교’와 ‘삼천포 화력’, ‘사량도’ 등 주변 명소(名所)와 관련된 얘기들을 감칠맛 나게 늘어놓는다.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배는 어느새 수우도 근처에 도착해 있다. 선실에서 20분 정도를 기다리는데 얼굴표정들이 밝지를 못하다. 서울을 출발하기 전에, ‘남해안에서는 해 뜨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기상청의 일기예보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7시40분이 되자 동녘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더니 붉은 해가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모습이 티 하나 없이 온전한 모습이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歎聲)이 새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간간히 기상청의 일기예보를 나무라는 지청구와 함께... 바쁘게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와중에도 가슴에 품은 작은 소망(所望)하나 간절히 빌어본다. ‘올 한해도 우리가족 모두의 건강을 지켜 주시고, 집사람을 향한 내 사랑 결코 변하는 일이 없게 해 주소서!’ 문득 ‘만사형통(萬事亨通)’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오른다. 아무래도 생각지도 못한 온전한 해돋이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맞다. 틀림없이 올 한해는 도모하는 일마다 모두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내지마을(浦口)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행 기점을 돈지포구(浦口) 또는 내지포구로 잡는다. 어디서 시작하든지 산행시간은 비슷하나 오늘은 내지포구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지리망산은 찾은 것은 오늘까지 네 차례이다. 앞의 세 차례가 모두 돈지포구를 들머리로 삼았었기 때문에, 내지마을에서 출발하기를 내심으로 빌었는데 참 고마운 일이다. 내지마을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포장도로를 따라 600m쯤 진행하면 금복개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왼편에 보이는 산길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이 시작되면서 잠시 완만(緩慢)하게 이어지던 소나무 숲 능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파르게 변한다. 거기다가 조금 후에 올라서게 되는 능선에서부터는 산길은 아예 바윗길로 변해버린다. 능선의 바윗길은 험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눈이 쌓여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까딱하다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에는 낭패(狼狽)를 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능선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면 바다 건너 삼천포화력에서 내뿜는 연기까지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한려수도의 푸른 바다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사랑도의 지리산 산행에서는 하나도 조심이요 둘도 조심이다. 산을 형성하고 있는 바위 면(面)이 물고기 주둥이마냥 삐죽삐죽 촘촘하게 솟아 있어, 자칫 방심하다가 넘어지기라도 할 경우에는 큰 부상을 당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문득 고개라도 들라치면 환상적(幻想的)인 광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사방으로 쪽빛 바다가 펼쳐지고 있고, 성냥갑 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포구의 풍경은 정겹기 짝이 없다.

 

 

 

숲을 벗어난 바위능선이 점점 더 높고 크게 드러나면서 조망(眺望) 또한 점점 더 넓고 좋아진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정도가 지나면 돈지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지리산 0.64Km/ 돈지 1.66Km/ 금복재 1.10Km, 내지 1.70Km)에 이르게 된다. 두 길이 만나는 능선에 당도하면서부터 ‘눈의 호사(豪奢)’가 시작된다. 푸른 바다와 거기 떠있는 섬, 그리고 딛고 선 능선 아래 아늑한 포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거리에서부터 능선은 완만(緩慢)한 경사(傾斜)가 계속된다. 간혹 날카롭게 선 성벽(城壁)을 닮은 절벽(絶壁)이 앞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김없이 우회로(迂廻路)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위험 구간을 우회(迂廻)하는 코스가 보이지만 날등으로 올라선다. 아무래도 더 빼어난 절경(絶景)을 내려다보려면 이른바 ‘위험 구간’이라는 곳에 들어서야 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위험 구간에 올라서 능선의 칼바위를 붙잡고 발끝으로 온몸의 균형을 유지하다 보면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무서운 와중에도 한편으로는 짜릿한 쾌감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어쩌면 이런 느낌 때문에 굳이 날등으로 올라서는 지도 모르겠다.

 

 

 

 

삼거리에서 흙산(肉山)처럼 부드러운 산길을 따라 30분 정도 걸으면 지리망산 정상이다. 그러나 막상 올라와본 정상은 의외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올라올 때 밟았던 흙길의 이미지를 일거에 바꾸어버린 것이다. 석판(石板)을 닮은 검은 정상표지석 하나가 외롭게 지키고 있는 정상에 서면 바다건너 공룡발자국이 있는 상족암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날씨까지 받쳐준다면 지리산까지 조망(眺望)된다지만, 오늘은 그저 방향만 어림잡을 수 있을 뿐이다.

 

 

 

 

주릉에 올라서면 북쪽의 눈앞으론 쪽빛 바다 너머 사천 와룡산이 가깝다. 그 너머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있다지만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가끔 돌아보면 수우도 너머로 남해도, 창선도가 여전히 뒤따르고 있다. 지리산은 양쪽 사면(斜面)이 급경사 벼랑으로 되어 있어 길은 오로지 외길이다. 하지만, 짤막하게 갈라졌다가 다시 만나곤 하는 우회로(迂廻路)는 무수히 많다. 간혹은 벼랑으로 앞이 막히기도 하는데, 그런 때에는 지체(遲滯) 없이 발길을 되돌려 편한 길을 찾으면 된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위험 구간’이란 팻말이 나붙었다. 아찔한 절벽(絶壁)의 위험 구간이라면 거기서 보는 풍경(風景)이 좋다는 것은 당연하다. 바윗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몰라도, 위험 구간의 들머리까지는 부지런히 들고 나는 게 풍경을 놓치지 않고 즐기는 방법일 것이다.

 

 

 

둥글게 해안선을 이룬 돈지항이 작은 연못처럼 아름답다. 돈지항 남쪽 옆 왕관 모양의 작은 섬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대나무 화살을 얻었다는 대섬(竹島)이다.

 

 

날카로운 암봉을 화관(花冠)처럼 쓰고 있는 지리산은 지세(地勢)부터가 뛰어나다. 그동안 섬 산행에서 보아오던 산은 물론이고, 육지의 내로라하는 산과 견준대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더 뛰어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리망산은 산이 지니고 있는 자체의 아름다움도 나무랄 데 없지만, 산에서 바라보는 조망(眺望)이 더 한층 뛰어나기 때문에 지리망산으로 승화(昇華)된다. 산의 이름에 들어간 ‘망(望)’자가 제 값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지리산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그러나 옅은 연무(煙霧)에 가린 지리산은 그 고운 자태(姿態)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지리산 정상에서 내려서서 말갈기 같은 능선을 따라 걷다가 나무계단을 밟고 길게 내려서면 간이주점이 있는 안부 사거리(이정표 : 가마봉 1.68Km, 옥녀봉 2.54Km/ 내지 1.30Km/ 성자암 0.30Km, 옥동 1.70Km/ 지리산 1.16Km)에 이르게 된다.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탈출하면 된다. 안부를 지나 진행방향에 불모산(달바위)이 보이면 본격적으로 암릉길이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오른편에 조망(眺望)이 확 트이는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 위에 오르면 건너편 하도의 칠현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발아래에는 상도와 하도 사이를 흐르는 동강(桐江)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동강은 그 이름에서 강을 연상시키고 있듯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전망바위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날카롭게 선 바위봉이 진행방향을 가로막고 있다. 바로 달바위봉이라고도 불리는 불모산이다. 나무가 없어서 고려 때부터 ‘불모(不毛)’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불모산(달바위봉) 정상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봉우리로 올라가는 초입(初入)에 붙어있는 위험표지판 쯤이야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눈에 쌓여있는 바윗길을 무작정 치고 오르는 것은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이유는 집사람이 치켜뜨는 눈초리 때문이었다. 그 동안 바윗길에서 쌓아온 나의 이력(履歷)은 인정하겠지만, 눈 덮인 바위능선을 기어오르는 것은 자살행위로 인정할 수밖에 없단다. 별 수 없이 주봉(主峰)은 우회(迂廻)하고, 다음 봉우리부터 다시 능선으로 올라선다.

 

 

 

 

불모산을 내려오는 길에 펼쳐지는 풍경(風景), 산과 바다와 하늘은 물론 그 틈에 깃들어 있는 갯마을도 더불어 아름답다.

 

 

뾰족하고, 혹은 뭉텅하고, 더러는 높고, 더러는 낮지만 나름의 자태(姿態)는 가히 장관(壯觀)이다. 사량도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하늘과 바다, 그리고 바위봉우리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산의 아랫도리에서 바라보면 올망졸망한 바위봉우리들이 어깨를 겯고 하늘금을 그려내고, 봉우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또 다른 광경, 즉 바위봉우리들이 쪽빛 바다와 함께 조화(調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늘이 바다 같고 바다가 하늘같다. 그 여백에다 내가 꿈꿔 온 작은 소망(所望) 하나 채워 넣는다. ‘집사람을 향한 내 사랑 영원히 변치 않게 해 주소서!’

 

 

 

달바위봉에서 가마봉까지는 제법 멀다. 달바위봉 능선의 바윗길에서 로프에 매달리기도 하고 안부를 향해 길게 늘어선 나무계단을 밟으며 조망을 즐기다보면 어느덧 능선 안부 삼거리(이정표 : 가마봉 0.76Km, 옥녀봉 1.72Km/ 대항마을 0.67Km/ 지리산 2.28Km) 에 이르게 된다. 안부에는 남국(南國)에서나 볼 수 있는 난장이야자수(?) 몇 그루가 철을 잊고 푸름을 자랑하고 있다. 안부에서 다시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서면서 산행을 이어간다.

 

 

 

 

아찔할 정도로 현란하게 펼쳐지는 풍광(風光)을 즐기면서 능선을 내려서다보면 맞은편 가마봉으로 오르는 암벽(巖壁)에 두 가닥으로 길게 늘어진 로프가 보인다. 로프의 중간쯤에 두 사람이 매달려 있는데 보기만 해도 아찔할 정도이다. 그러나 막상 이르러보니 생각보다는 많이 수월했다. 경사(傾斜)도 보기보다 완만(緩慢)했을 뿐더러, 잘게 균열이 간 암벽(巖壁)은 신발이 착 달라붙어서 어렵지 않게 봉우리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가마봉 정상은 바위봉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넓은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의 한 가운데에는 정상표지석이 놓여있고, 그 뒤를 오가는 사람들이 쌓아 놓은 돌무더기가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는 사방으로 시원스럽게 시야(視野)가 트인다. 진행방향에는 출렁다리 공사가 한창인 연지봉이 우뚝 솟아있고, 그 오른편에는 동강(桐江), 그리고 아랫섬의 칠현산이 잘 조망(眺望)된다. 그 아래에는 윗섬과 아랫섬 사이의 동강(桐江) 해협이 한 줄기 강처럼 바라보인다.

 

 

 

 

가마봉에서 연지봉으로 가기 위해 내려서는 철계단은 한마디로 말해 공포(恐怖) 그 자체이다. 튼튼한 철(鐵) 구조물로 만들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경사(傾斜)가 너무 가파르기 때문에 내려다보면 아찔하게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아니나 다를까 뒤따라오던 젊은 여자 등산객은 중간에 멈춰 서서, 한 발자국도 더 내려서지를 못하고 애꿎은 고함만 지르고 있다. 담력(膽力)이 조금이라도 약한 사람들에겐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구간인 것이다.

 

 

 

가마봉에서 아찔한 철계단을 내려서면 안부에서 대항 갈림길(이정표 : 옥녀봉/ 대항마을/ 가마봉)을 만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대항포구(浦口)가 나오고 연지봉으로 가려면 맞은편 능선으로 다시 올라서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대항으로 하산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 만나게 되는 암봉이 오늘 산행의 클라이맥스(climax)이다. 봉우리의 이름은 연지봉, 일명 향봉이라고도 불리는데, 고만고만한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가운데 봉우리가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스릴(thrill)이 넘친다는 탄금대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연지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출렁다리 설치공사’ 중이라며 폐쇄(閉鎖)시켜 놓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서 하산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거지로 올라가본 전위봉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출렁다리를 놓기 위한 시설물과 자재(資材)들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가운데 봉우리인 탄금대로 오르내릴 수 있는 로프를 끊어놓았다. 별수 없이 되돌아 내려올 수밖에 없다.

 

 

 

조심! 또 조심! 아무리 지리망산이 황홀하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다. 바위산의 빼어난 절경(絶景)에 반해, 위험 또한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6~7년 전에 왔을 때 보다는 안전시설(安全施設)이 대폭 보강(補强)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도 몇몇 구간은 여전히 불안한 모습이다. 특히 수직으로 떨어지는 철계단은, 혹시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에는 큰 사고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까 길을 막아 놓았던 전위봉 입구에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오른편으로 우회로(迂廻路)가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연지봉의 아래로 우회시키는 길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비스듬히 누어있는 암벽(巖壁)에 쇠파이프를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에, 쇠파이프에 몸을 의지해야만 진행이 가능할 정도이다. 만일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에는 큰 부상이 우려되는 구간이다.

 

 

 

일명 탄금대(彈琴臺)라고도 부르는 연지봉을 우회(迂廻)해서 반대방향으로 가면, 탄금대로 오르는 약 15m정도 되는 높이의 암벽(巖壁)에 줄사다리가 매달려 있다. 겨우 여기까지 온 사람들도 더 이상은 탄금대로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사람이 매달리면 사다리가 출렁거리기 때문에 사람들에 따라선 철계단보다 더한 공포를 주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집사람의 눈치를 모르는 채하며 올라본 연지봉도 아까 전위봉과 마찬가지로 난장판이다. 올라서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와 버린다.

 

 

 

연지봉에서는 진행방향의 봉우리를 왼쪽으로 우회(迂廻)한다. 이 길 역시 직벽(直壁)의 낭떠러지지만 난간이 설치돼 있어 큰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다. 이후 등로는 크게 어렵지 않다. 로프가 설치된 곳도 있지만 경사도(傾斜度)가 낮아 걸어서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이다. 연지봉의 맞은편 암릉에 올라서면 탄금대의 왼편 벼랑이 아찔하게 펼쳐진다.

 

 

 

아버지와 딸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전설이 있는 옥녀봉은 돌무더기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다. 혹시라도 다른 시설물을 설치하면 옥녀의 분노를 산다고 해서, 주민들은 이정표나 정상표지석을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옥녀봉의 진행 방향 정면은 옥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급전직하(急轉直下)의 천길 벼랑이다. 옥녀봉에서의 하산은 돌무더기로 되돌아 나와 오른편의 우회로(迂廻路)를 따른다. 바위 벼랑의 옆면을 따라 내려서는 지점에 나무계단과 철계단이 연속으로 나오나 이 역시 경사(傾斜)가 완만해서 그리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다.

* 옥녀봉이라는 이름은 사량도의 산세(山勢)가 여인이 거문고를 타는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명당이라서 그리 불렀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욕정(欲情)에 눈이 먼 아버지를 피해온 옥녀가 벼랑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안타까운 전설(傳說)도 전해진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옥녀봉의 봉우리 형상이 여인의 젖가슴을 닮았을 뿐만 아니라 향봉이 탄금바위로도 불리고, 아랫마을 지명이 금평(琴坪)이니 인륜(人倫)을 거스르는 전설보다는 옥녀탄금형이라는 풍수설(風水說)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로 통일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사량도(蛇梁島)는 윗섬(上島)과 아랫섬(下島), 두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사량(蛇梁)은 두섬 사이 해협이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주민들은 또 두 섬 사이의 바다에서 ‘강(江)’의 모습을 보았던 모양이다. 해협의 이름을 동강(桐江)이라고 붙인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다면 강에 붙여진 ‘거문고 동(桐)’자는 아마도 두 섬 사이 호수 같은 바다의 모습이 마치 거문고 형상을 빼다 닮았기 때문이리라. 상도와 하도는 2015년이면 연도교(連島橋)로 연결된다고 한다.

 

 

 

 

산행날머리는 대항포구(浦口)

철계단을 내려서면 안부 삼거리(이정표 : 사량면사무소/ 대항마을/ 지리산)이다. 곧바로 맞은편 능선을 타면 면사무소(面事務所)가 있는 금평항으로 가게 되고, 우리를 태우고 갈 유람선(遊覽船)이 기다리고 있는 대항은 왼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대항으로 내려가는 산길은 흙길로서 그리 가파르지도 않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내려설 수 있다. 갈림길에서 15분 정도이면 섬 일주도로에 내려설 수 있고, 이어서 일주도로(一周道路)를 따라 10분 정도 더 걸으면 내항 선착장이다.

 

 

 

 

 

석대산(石岱山, 534m)-수리봉(남가람봉(568m)

 

산행일 : ‘12. 10. 20()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과 산청읍의 경계

산행코스 : 진자마을(경로당)밤나무 밭산길 개척석대산 정상석천원 갈림길산야초농원 갈림길수리봉(옛 남가람봉)청계리 갈림길청계저수지(산행시간 : 3시간 30)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웅석봉 가는 길목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이다. 전형적인 흙산이지만 정상부근과 수리봉 근처는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수리봉 너머에 있는 상투바위가 웅석봉의 달뜨기 능선을 배경삼아 우뚝 서있는 광경은 한마디로 백미(白眉)이다. 도심(都心) 근처에 위치했더라면 어느 정도 대접을 받았겠지만, 지리산의 한쪽 귀퉁이에 다소곳이 숨어있기 때문에 웬만한 산꾼들 조차도 알지 못하는 숨겨진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진자(榛子)마을 경로당(敬老堂)

대전-통영고속도로 단성 I.C를 빠져나와 지리산아래 마지막 마을인 중산리로 들어가는 20번 국도를 타고 들어가다. 입석리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1001번 지방도로 바꾸어 들어가면 얼마 안가서 산행이 시작되는 진자마을에 이르게 된다.

 

 

 

버스정류장 건너편에 있는 경로당(마을회관)의 오른편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계단식(階段式)으로 이루어진 논둑을 따라 들어가면 왼편은 감나무 밭이다. 길게 늘어진 감나무 가지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서는 통과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나뭇가지에 커다란 감이 너무 많이 매달린 탓에, 열매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아래로 축 늘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차창(車窓) 밖으로 보이는 산야(山野)는 온통 감나무 천지 이었었다. ‘어머~ 어머~ 감이다 감!’ ‘너무 예쁘다뒷자리에 앉아있는 여성분들은 아직도 동심(童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새로운 풍경(風景)에 흠뻑 빠져들어 오랫동안 잊어왔던 동심으로 되돌아 왔던지.. 산과 들에 빈틈없이 꽉 들어찬 감나무들은, 맨 마지막 빈 공간인 도로변까지 점령하고 있을 정도다. 온 세상이 감나무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감나무들마다 나뭇가지들이 늘어질 정도로 많은 열매를 매달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세상은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다. ‘오메 불이 나부렀네~~~’ 붉은 색의 아름다움은 결코 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계단식 논두렁이 끝나면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잠깐 올라가다, 이번에는 오른편의 감나무 밭 사이로 난 길로 진행해야 한다. 감나무 밭이 끝나면서 만나게 되는 밤나무 밭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입석리에서 올라오는 주 등산로와 만나기까지 비교적 길은 뚜렷한 편이라고 한다.(산행이 끝난 후 선답자들의 후기에서 인용) 그런데 우린 감나무 밭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놓쳐버리고 잘 닦인 농로(農路)를 따른 덕분에 고난(苦難)의 산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원주택)을 지으려고 농로를 잘 닦아 놓았으니 어떤 선두일지라고 그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감나무 밭으로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던 선두가 길을 놓쳤다고 되돌아 나온다. 그냥 능선까지 치고 오르겠다는 무언의 암시(暗示)일 것이다. 이곳이 두 번째의 잘못 판단했던 지점이다. 오른편으로 계속 진행했더라면 조금 돌더라도 정규 등산로를 만날 수 있었을 테니까. 감나무 밭을 50m 정도 치고 오르면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산을 만나게 된다. 그냥 무작정 치고 오르다가, 잡목(雜木)으로 인해 진행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우회(迂廻), 그러다가 희미한 산길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길이 위로 향하지 않고 산의 사면(斜面)을 따라 옆으로만 이어지고 있다. 길가에 매여진 리본을 확인(確認)해 보니 산악회 것이 아니라 산()일을 하는 사람들이 매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길은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른편으로 진행하던 선두의 흔적이 길을 벗어나 왼편 숲으로 향하고 있다. 이곳이 세 번째로 판단을 잘못한 지점이다. 길이 비록 고도(高度)를 낮추고 있지만 계속해서 진행할 경우 정규 등산로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왼편 숲으로 들어서면 고난(苦難)의 행군(行軍)이 이어진다. 온통 참나무와 잡목(雜木)으로 이루어진 숲은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는데, 곳곳에 휘늘어져 있는 명감나무 넝쿨들까지 발걸음을 옮기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길 아닌 길 위에서 울다이보다 더 나은 표현이 있을까? ‘산행대장을 한명도 배정하지 않은 무책임(無責任)한 산악회를 원망하면서 걷다가 오늘 산행의 최대 복병(伏兵)을 만나게 된다. 말벌무리의 습격을 받게 된 것이다. ’! 따거!‘ 손목 부위가 불에 덴 듯이 따갑기에 내려다보는데 수많은 벌떼들이 덤벼들고 있다. 납작이 엎드렸다가 일시에 뛰쳐나갔지만 이미 다섯 군데나 벌에 쏘인 후였다. 윗도리를 벗으니 시퍼렇게 질린 집사람이 카드로 쏘인 곳을 밀기도 하고, 입으로 빨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다행이도 집사람은 무사하다고 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119에 문의를 하니, 호흡곤란만 아니라면 그리 위험한 상태는 아니니 얼음물로 쏘인 부위를 마사지 해주란다.

 

 

 

 

얼음물 마사지를 해도 통증(痛症)은 가라않지 않고, 그렇다고 무작정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어서 산행을 이어간다. 같은 장소에서 벌에 쏘였다고 해서 응급조치를 해드린 분도 그냥 진행해 보자고 한다(이분 말고도 또 한분이 벌에 쏘였다.) 산행을 이으면서부터 집사람과의 다툼이 시작된다. 난 산행을 완주(完走)하고 싶은데, 마음이 불안한 집사람은 그만 하산(下山)해서 병원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다. 석대산까지만 올라갔다 내려가자고 집사람을 꼬드겨 진행한 것이, 결국에는 산행을 마치고나서야 택시로 산청읍에 있는 병원에 다녀왔다. 벌에 쏘인 곳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능선으로 올라서게 된다. 따라서 길도 조금은 또렷해지고 있다. 능선을 걷다보면 가끔 등산로를 벗어난 곳에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통증이 심해서 만사가 귀찮지만 조망(眺望)을 보려는 욕심에 부득부득 올라서고야 만다. 바위 위는 그런 내 욕심(慾心)을 져버리지 않고 탁 트인 산하(山河)를 눈앞에 펼쳐놓고 있다. 웅석봉과 달뜨기 능선을 길게 늘어서있는 경관(景觀)이 시원스럽다.

 

 

 

 

 

갑자기 커다란 바위들이 능선을 가로막고 있다. 가지런하다면 그냥 통과해볼 만도 하지만 무질서하게 쌓여있기 때문에 우회(迂廻)를 하여 위로 오른다. 바위 위로 오르면 다시 한 번 웅석봉의 조망이 터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어서 흙길로 되돌아온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거대한 바위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있고, 바위를 돌아 오르면 시원스럽게 조망(眺望)이 터지면서 석대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이 지났다.

 

 

 

정상은 서너 평 넓이의 분지(盆地)에 커다란 바위들이 10여개가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모습이다. 한 가운데에 산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커다란 정상표지석(534.5m)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는 입석초등학교 동문들이 만들어 놓은 제단(祭壇)이 지키고 있다. 먼저 도착한 홍주아저씨부부(산행 때마다 진도의 名酒인 홍주를 챙겨 오시는 분이라 우리부부가 붙인 닉네임)가 벌에 쏘인 부위를 걱정하면서 막걸리를 권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양을 한다. 평소에 아무리 술을 좋아한다고 해도, 상체(上體)의 절반(벌에 쏘인 부위)이 불에 덴 듯이 뜨거운데도 냉큼 술을 마실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정상에서는 화장산과 백운산, 그리고 멀리는 한우산과 자굴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석대산 정상에서 남가람봉 방향으로 3분쯤 더 가면 삼각점이 나오는데, 이곳이 지형도(地形圖)534.5m로 표시된 정상이다. 아까 정상석을 보았던 지점은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상표지석이 세워진 봉우리는 높이가 539m로 이 지방 사람들은 그 모양이 사뭇 투구를 닮았다고 해서 투구봉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실제 정상인 535봉은 숲에 가려 있어서 보이는 것이라곤 하늘과 땅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위봉우리에다 조망까지 뛰어난 539봉에다 정상표지석을 세웠나 보다. 그렇다면 산의 높이다 539m로 적어 놓았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아쉽다.

 

 

 

어서 빨리 병원으로 가서 응급처치(應急處置)를 받아야한다는 집사람의 재촉에 쫓겨 사과 몇 조각으로 요기를 하고 남가람봉으로 향한다. 언젠가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라는 글귀(文句)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집사람의 발걸음이 엄청나게 빨라진다. 느림보 산행이 자기의 전매특허(專賣特許)라는 것을 어느새 잊어버렸나보다. 평소에 무릎이 좋지 않기 때문에 걱정이 되지만, 다행이도 산길이 부드러워 마음이 놓인다. 산은 조그마한 봉우리를 쉬지 않고 오르내리지만, 그 높이가 낮기 때문에 야트막한 구릉(丘陵)을 걷는 것 같아 조금도 힘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완만(緩慢)한 경사(傾斜)로 이루어진 능선길은 참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이름 모를 잡목들이 적당하게 섞여 있다. 그러다가 잠시라도 나무들이 뜸하다싶으면 그 틈새에는 어김없이 무성하게 우거진 억새들이 차지한다. 석대산 정상을 떠난지 20분 정도가 흐르면 길가에 세워진 ‘119구조대의 위치 표지말뚝이 보이는데, ‘석대산 입석초교 3Km’라고 적어 놓았다. 아무래도 산 아래에 있는 입석초교에서 여기까지의 거리가 3Km인 모양이다. 능선의 왼편은 밤 밭인데 내려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통증(痛症)이 도무지 가라앉질 아는데도 탈출할 길이 없는 것이다. 집사람이 걱정할까봐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묵묵히 집사람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119표지목을 조금 지나서도 계속되는 밤나무단지를 왼편에 끼고 걷다보면 진행방향에 제법 거대한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바위봉우리(474m) 위는 또 하나의 뛰어난 전망대(展望臺)이다. 가야할 방향에는 수리봉 능선의 봉우리들이 늘어서 있고, 오른편에는 경호강()과 강을 낀 너른 들판이 발아래에 깔려있다. 경호강 너머의 산들은 아마 월명산과 백마산, 그리고 둔철산일 것이다. 물론 왼편에는 웅석봉의 달뜨기 능선이 있다.

 

 

 

 

 

바위지대를 잠시 더 걸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이정표 : 정상 3.5Km/ 석천원/ 청계).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석천원으로 하산할 수 있으나, 계속 직진할 수 밖에 없다. 청계저수지에서 기다리고 있을 산악회 관계자들에게 얘기를 하는 게 먼저 인데, 청계저수지는 산의 왼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대산 정상을 출발한지 50분 가까이 지났다.

 

 

 

삼거리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송신탑이 보이고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권씨들 가족묘에 이르게 된다. ‘묘역(墓域)은 능선의 한 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다. 묘비(墓碑)를 보니 가선대부(嘉善大夫 : 2품의 벼슬아치에게 내리던 품계)라고 적힌 묘()2()이다. 그중의 하나의 벼슬은 참판(參判 : 지금의 次官)이나, 나머지 하나는 엉뚱하게도 현감(縣監)벼슬이다. 이해가 가지 않지만 굳이 따질 일이 아니어서 그냥 발걸음 재촉한다. 묘역(墓域)을 오른편에 끼고 위로 오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청계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인데, ‘흙 속에 바람 속에라는 민박집에서 이정표를 만들어 놓은 탓에 청계저수지라는 지명 대신에 자기들 농원의 이름인 산야초농원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물론 수리봉으로 가려면 곧장 능선을 따라 걸어야 한다.

 

 

 

 

 

 

산야초농원 갈림길에서 3분 가까이 걸으면 넓은 공터가 나온다. 넓이로 보아 예전에는 헬기장으로 사용되었나보다. 헬기장을 지나면 곧바로 수리봉(568.4m)이다. 수리봉은 한마디로 봉우리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할 정도로 야트막하다. 능선 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저 그렇고 그런 구릉(丘陵)의 하나일 따름이다. 흙으로 이루어진 구릉 위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바위 몇 개가 쌓여있고, 그 위에 정상표지석이 놓여있다. 그런데 이 정상석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지형도상에는 남가람봉이라고 적혀있는데도 막상 정상석은 석대산 수리봉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진주의 남가람라이온스에서 세운(1993. 10. 24) 정상표지석이 서 있었다. 아마 당시 라이온스 클럽에서 정상표지석을 세우면서 봉우리에 자기들 클럽의 이름을 갖다 붙였던 모양인데, 누군가가 그릇됨을 알고 본래의 이름을 찾아주었나 보다.

 

 

 

 

정상석 조금 뒤에 삼각점이 보이고, 삼각점 뒤의 언덕에 서면 대진고속도로와 3번 국도, 그리고 경호강이 나란히 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경호강 건너편의 계곡에 앉아있는 다랑이 논들이 살가운 것을 보면, 나의 동심(童心)도 아직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삼각점을 떠나 잠깐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면 왼편에 바위 무더기가 보인다. 바위 위에는 누군가가 뾰쪽한 돌을 이용해 탑()을 만들어 놓았다. 요기도 할 겸해서 들어서니 의외로 뛰어난 전망대(展望臺)가 우릴 맞는다. 오른편에 있는 웅석봉에서 시작되는 달뜨기 능선이 웅장(雄壯)하면서도 너그럽게 펼쳐지고 그 아래에는 청계저수지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전망대의 오른편에 뽈록하니 솟은 바위봉우리 하나가 보인다. 진행방향에 있으므로 봉우리를 넘어야 하지만, 암벽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회(迂廻)하면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위봉우리에 오르면 웅석봉과 십자봉, 그리고 둔철산과 황매봉이 잘 조망(眺望)된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경호강과 건너편 둔철산이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있다.

 

 

 

저 바위가 이곳 석대산의 명물이라는 상투바위일 것이다.

 

 

 

바위봉에서 시작되는 내리막 구간이 오늘 산행에서 제일 빼어난 구간이다. 각양각색(各樣各色)으로 생긴 바위들로 이루어진 바위들을 감상할 수 있는데다가, 스릴(thrill)있는 바윗길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스릴을 위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구태여 우회(迂廻) 필요가 없다. 그리 험하지도 않은 바윗길임에도 불구하고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았기 때문에 초보 등산객들도 별 부담 없이 내려설 수 있다.

 

 

 

 

 

 

 

수리봉 암릉을 내려서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20분이 넘지 않게 더 걸으면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맞은편에 보이는 능선으로 진행하면 웅석봉으로 가게 되므로, 청계리저수지로 하산하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삼거리에서 청계저수지로 방향을 잡으면, 산길이 아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산의 사면(斜面)을 따라 옆으로 길게 이어진다. 10분 이상을 옆으로만 이어지던 산길이 두 갈래로 나뉘면서, 청계리로 향하는 왼편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을 만들고 있다. 조심조심 10분 정도를 내려가면 단성면에서 산청읍으로 넘어가는 1001번 지방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이곳에서도 산행이 종료되는 청계리 주차장까지는 10분 정도를 더 걸어야만 한다. 주차장이 청계저수지 둑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청계저수지 아래 주차장

저수지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웃통을 벗어 제키고 씻고 본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땀 냄새를 풀풀 풍길 수는 없어서이다. 산악회 관계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택시를 불러 산청에 있는 의료원(醫療院)으로 나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통증이 수그러지지 않을뿐더러, 벌에 쏘인 부위에 염증(炎症)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찾아 온 산청의료원에서 난 낯선 풍경(風景)을 만났다. 토요 휴일(休日)임에도 불구하고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이 제법 많은데도, 서울에서 온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내 얘기를 들은 의료진들은 먼저 와 대기하고 있던 환자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를 먼저 진료해 주는 것이다. 무리한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잃지 않고 배려해 주는 예쁘장한 간호사는 물론이고, 나를 먼저 진료(診療)할 수 있도록 양보해준 환자분들에게도 진정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훈훈한 시골의 인심을 가슴으로 가득 담아온 하루였다. 그 인심이 약효(藥效)로 전이되었는지 채 하루도 안 되어 벌에 쏘인 부위가 언제 쏘였냐는 듯이 말끔히 나아있다.

 

 

 

봉명산(鳳鳴山 : 408m, 군립공원)

 

산행일 : ‘12. 5. 12(토)

소재지 :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곤양면과 하동군 북천면, 진교면의 경계

산행코스 : 다솔사→봉명산→보안암 석굴→깨사리고개→이명산(理明山, 570m)→마애불 삼거리→마애석불→계명산(382m)→직전(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송암산악회

 

특징 : 방장산(方丈山) 또는 주산(主山)이라고도 불리며, 풍수리지학(風水地理學)상으로 봉(鳳)이 우는 형국이라 하여 봉명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산이 낮은데다가 숲이 울창하기 때문에 오르는데 별로 부담이 없고, 거기다가 주변에 역사적 유적(遺蹟)들이 많기 때문에 등산객들 외에도 고고학(考古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다솔사 입구 주차장

남해고속도로 곤양 I.C를 빠져나와 58번 지방도를 따라 곤명면소재지(面所在地) 방향으로 달리다가, 곤명면 추천리에서 왼편의 용산마을 방향으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솔사 앞의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에 이르자 웬일인지 다솔사로 들어가는 바리케이드(barricade)를 치워주고 있다. 경내(境內)주차장까지 그냥 올라가도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버스를 타고 숲길을 따라 얼마간 오르다보면 커다란 바위하나가 보이는데, 아마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일 것이다. 조선 고종 임금 때 만든 비석(碑石)으로서 이 지역에다 분묘(墳墓)를 쓰지 말라는 일종의 어명(御命)이다. 이곳이 명당인 것을 안 벼슬아치들이 이곳에 묘를 쓰려하자, 스님이 탄원서(歎願書)를 올려 임금의 허락을 받은 모양이다. 우리나라에는 봉표나 금표가 23개가 있는데, 이곳의 봉표는 한 개인을 위해서 행위(行爲)를 금지(禁止)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自然)을 보존(保存)하기 위한 금지라서 더 유명하다고 한다.

 

 

관광버스와 승용차들로 붐비는 경내주차장은 의외로 널따랗다. 그래서 관광버스까지 안으로 유도했나보다. 너른 주차장을 지나 절 입구에 이르면 먼저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참배객들을 맞는다. 계단과 대양루(大陽樓)의 기와, 봉명산이 적절한 조화(調和)를 이루며 고즈넉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대양루는 우담바라가 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다솔사는 창건 이후 여러 번의 전란(戰亂)을 겪었지만, 이 대양루만은 유일하게 화재를 면했다고 한다.

* 다솔사(多率寺), 신라 지증왕 12년(511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경남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찰(寺刹)이다. 처음에는 영악사(靈嶽寺)라 불렀으나, 선덕여왕 때 다솔사로 이름을 바꿨다. 문무왕 때에는 의상대사가 영봉사(靈鳳寺)로 이름을 바꿨으나, 신라 말 도선국사가 다시 다솔사라는 이름으로 돌려놓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에 한용운이 수도하던 곳이며, 소설가 김동리가 한동안 머물며 ‘등신불’이라는 소설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문화재(文化財)로는 국보(國寶)급은 보유하고 있지 않고, 경상남도유형문화재인 대양루(大陽樓, 83호), 극락전(148호), 응진전(149호)과 보안암(普安庵) 석굴(39호), 석조불상(29호)이 있다. 다솔(多率)이라는 절의 이름에는 '많은 불심을 거느린다.', '좋은 인재를 많이 거느린다.'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대양루(大陽樓)를 지나 마당으로 올라서면 커다란 전각 하나가 눈을 꽉 채운다. 대웅전 역할을 하고 있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1978년 2월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불사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과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때 발견된 사리를 모시기 위해 사리탑(舍利塔)을 지으면서, 대웅전(大雄殿) 대신에 적멸보궁이라는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보편적으로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을 따로 안치하지 않는다. 진신사리가 곧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 다솔사의 적멸보궁은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이(特異)하다. 그것도 누워있는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누워있는 부처님의 위에 유리로 창을 만들어, 건물 밖에 있는 사리탑(舍利塔)이 보이게 만들었다. 사리탑을 보면서 기도를 드리라는 배려(配慮)일 것이다. 건물 밖의 사리탑의 뒤에는 활모양의 차밭이 고즈넉이 앉아있다. 차밭이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는 몰라도, 이곳에서 나는 차는 반야차(般若茶)로 유명하다고 한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中國)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셨다고 인정된 양산의 통도사(通度寺)와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오대산 중대(中臺) 상원사(上院寺),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그리고 태백산 정암사(淨巖寺)를 합쳐서 5대 적멸보궁(五大 寂滅寶宮)이라고 부른다. 이 외에 부처님의 치아(齒牙)사리를 모신 금강산 건봉사나 모악산 금산사 같은 곳에도 적멸보궁 있으며, 근래(近來)에는 꽤 많은 곳에서 적멸보궁을 찾아볼 수 있다. 스리랑카 등으로부터 많은 사리가 들여온 결과라고 하는데, 진위(眞僞) 여부는 절을 찾는 신자들의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것이다.

 

 

 

 

다솔사를 오른편에 끼고 돌면 ‘봉명산군립공원’이라는 팻말을 하늘에 걸어 놓았다. 군립공원 아치를 통과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 들머리에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뿜어낸다는 편백(扁柏)나무 군락(群落)이 잠시 이어진다. 문득 이곳을 찾기 전에 인터넷에서 발견했던 글귀 하나가 떠오른다. ‘다솔사는 다섯 개 멋진 밭을 갖고 있다. 솔밭, 차밭, 대밭, 그리고 항상 일렁이는 바람밭, 마지막으로 다솔사를 찾은 그대 가슴에 안겨주는 생애 대한 그리움의 밭이다.’ 이보다 더 멋진 표현이 있을까? 가던 길 잠깐 멈추고 지은이가 보내는 메시지를 가슴으로 받아들여 본다.

 

 

 

봉명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구불구불한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햇살을 잘 막아준다. 오늘의 산행은 행운(幸運)이 함께하는 모양이다. 울창한 침엽수림(針葉樹林)이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넘치도록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심호흡부터 해보고 본다. 지나는 바람에 실려 온 소나무 향기가 머리를 맑게 정화(淨化)시켜 준다. 봉명산에는 소나무 일색(一色)인 산이다. 그래서 다솔사(多率寺)라는 절 이름도 소나무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려니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다솔(多率)에는 ‘많은 불심을 거느린다.’ ‘많은 인재를 거느린다.’라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우리가 흔하게 보아왔던 시골 뒷산을 올라가는 기분이다. 쉼터삼거리(이정표 : 정상 0.4Km/ 보안암 1.5Km)에서 오른편으로 접어들어도 산길은 계속해서 부드럽기만 하다. 가끔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다. 짙은 소나무 향을 음미하며 20분 정도(쉼터 삼거리에서) 걷다보면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에는 특이하게도 높다란 망루(望樓 : 봉명정)가 세워져 있다. 소나무 숲이 조망(眺望)을 방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모양이다. 소나무 숲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망루에 올라서면, 키가 큰 소나무들은 손에 닿을 듯 가까이서 손을 내밀고 있고, 키가 작은 소나무들은 발아래에서 융단처럼 펼쳐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소나무 가지사이로 남해(南海)바다가 조용히 누워있다. 비록 조망(眺望)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멋진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잠시 머물며 소나무 가지를 휘감으며 달려 온, 솔향 가득한 바람결에 내 몸을 던져 넣는다. 어느새 온 몸이 기(氣)로 충만해 있다. 봉명산 정상표지석은 망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올라왔던 길의 반대편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선다. 길은 처음부터 심한 경사(傾斜)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가파른 지점에는 어김없이 안전로프나 통나무 계단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서 헬기장을 지나면, 오래지 않아 운동기구를 갖춘 쉼터삼거리(이정표 : 보안암 0.6Km/ 약수터 0.Km/ 정상 05Km)를 만나게 된다. 다솔사에서 봉명산 정상을 거치지 않고 곧장 보안암으로 갈 수 있도록 닦아 놓은 길이다. 쉼터에서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엔 사거리(이정표 : 정상 0.6Km/ 보안암 0.5Km/ 서봉암 1.8Km/ 약수터 0.2Km)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보안암으로 가려면 왼편 길로 진행하면 된다.

 

 

 

 

 

사거리에서 숲길을 따라 얼마간 걸으면 돌을 쌓아올린 높다란 축대(築臺)위에 세워진 암자(庵子) 하나가 보인다. 1947년에 세워졌다는 보안암(普安庵)이다. 축대 아래를 돌아 돌계단을 오르면 너덜의 돌을 쌓아 만든 사각형의 돌무더기가 눈에 들어온다. 고려시대에 수행용(修行用)으로 만들었다는 석굴(石窟)이다. 그 좌우(左右)에는 지장전과 요사 역할을 하는 관음전이 자리를 잡고 있다.

* 보안암 석굴(普安庵 石窟), 고려 말에 스님들의 수행을 위한 시설로 만들었다고 하나.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석굴은 뒷산의 경사면을 L자 모양으로 파내고 다진 터에, 널빤지 모양의 돌을 쌓아올렸다. 자연석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분묘형의 석굴로서. 앞면 9m에 옆면 7m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모습이다. 정면에는 돌기둥을 세워 문을 만들었고, 윗면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둥근 모형이다. 석굴 안에는 도깨비의 얼굴이 생동감있게 조각된 ‘향 받침대’가 있고, 그 뒤에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인자함보다는 엄격하게 보이는 부처 좌우는 15나한들이 지키고 있다. 원래는 16나한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사라져 버렸단다.

 

 

 

 

 

보안암에서 이명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까 들어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무작정 되돌아나가기 보다는 오른편의 대나무 숲길로 잠시 들어서 보자. 마치 책(冊)을 쌓아 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루떡바위라는 이름을 떠올리면서 바라보면 시루떡의 옆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 기괴(奇怪)한 생김새의 바위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위는 아니기 때문에 행운(幸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왕에 그 옆에 있는 다른 바위의 위도 올라가 보자. 남해(南海)의 넘실대는 바다와, 그 위를 떠다니는 다도해(多島海)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보안암으로 들어왔던 길로 되돌아나가다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삼거리(이정표가 없다)에서는 왼편 오솔길로 올라서야 이명산으로 가게 된다. 이어서 곧이어 만나게 되는 능선 안부에서는 선택(選擇)이 필요하다. 능선을 통해 봉우리를 넘어 깨사리고개로 가는 방법과 곧바로 능선을 가로지른 후 둘레길을 따라 깨사리고개로 가는 방법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둘레길을 권하고 싶다. 봉우리를 넘는 산길이 잘 나있지 않을뿐더러, 별다른 볼거리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능선을 가로지르며 내려서면 ‘물고뱅이둘레길(3.0Km)’이라고 쓰인 이정표가 보인다. 물고뱅이는 곤양면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이름으로서, ‘물을 가두어 두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물고뱅이마을이 이 부근이라서 둘레길의 이름도 마을 이름을 따른 모양이다. 둘레길은 깔끔히 정비가 되어 있을 뿐더러, 길가에는 정성들여 돌탑(cairn)들을 쌓아 놓는 등 신경을 많이 쓴 흔적(痕迹)이 역역하다.

 

 

 

 

문득 MTB(mountain bike) 동호인(同好人)들이 좋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둘레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임도(林道)가 나타나고, 임도를 따라 얼마간 걷다보면 이내 깨사리고개(이정표 : 이명산 1.5Km)이다. 봉명산과 이명산을 갈라놓은 깨사리고개는 북천에서 곤양으로 넘어가는 2차선 포장도로이다. '깨사리'라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로 '고사리'를 말한다는데, 그래서인지 이명산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고사리가 많이 분포(分布)되어 있었다.

 

 

 

 

이명산으로 오르는 완만(緩慢)한 경사(傾斜)의 산길은 점점 가팔라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로프의 힘을 빌어서야 산을 오를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이명산(理明山) 정상(이정표 : 무고재 1.5Km/ 향토재 6.0Km/ 시루봉 1.9Km)에 오르면, 먼저 ‘이명산 상사봉(想思峯) 해발 570m’라고 새겨진 정상석이 눈에 들어온다. 남쪽 모퉁이에는 팔각정(이명정)이 세워져 있다. 아마 남해(南海)바다의 조망(眺望)이 뛰어나니 실컷 구경하라는 모양이다. 하동의 금오산 뒤로 다도해가 펼쳐지고, 그리고 다른 방향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들은 아마 백운산과 지리산, 황매산, 와룡산일 것이다.

* 전설(傳說)에 의하면 옛날에 동경산(東京山)이라고 불리던 이 산의 정상에 있던 커다란 연못에는 심술궂은 이무기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화가 날 때마다 독(毒)을 내뿜는 이무기로 인해, 장님이 되는 인근주민들이 늘어 갔었던 모양이다. 버티다 못한 주민들이 종내에는 불에 달군 돌로 연못을 매워버리고 이무기를 쫒아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로 이맹산(理盲山)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어젠가부터 이명산(理明山)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명산 정상에서 팔각정의 반대편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오면 삼거리(이정표 : 마애불 0.1Km/ 황토재 5.5Km/ 이명산 0.5Km)에 닿게 된다. 지리산과 연결되는 황토재로 가는 길과 나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오른편 마애불방향으로 내려서면 잠시 뒤에 시루떡을 닮은 바위 세 개가 보인다. 그중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바위의 암벽(巖壁)에 양각(陽刻)기법으로 부처님을 새겨 놓았다. 바로 경남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된 이명산 마애석조여래좌상(理明山磨崖石造如來坐像)이다. 이 마애불이 영험(靈驗)이 있어서인지 무속인(巫俗人)인 듯한 사람들 몇 명이서 치성(致誠)을 드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바위 또한 그 형상(形象)이 자못 기묘(奇妙)하다. 한쪽 면은 거대한 괴물이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고, 옆면은 시루떡을 쏙 빼다 박았다. 세 번째로 만나게 되는 바위는 시루떡을 닮기는 했으나, 닮은 정도나 생김새는 다른 두 개에 비해 많이 뒤떨어진다. 마애불(磨崖佛)이 새겨진 바위에다가 이 2개의 바위를 더해서 ‘삼형제바위’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마애불 이정표 : 쉼터 0.7Km/ 이명산 정상 0.5Km/ 수련원 0.7Km)

 

 

 

 

마애불에서 능선을 따라 얼마간 걸으면 이병주문학관쪽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작은 고개에 닿게 된다. 이정표에는 직전안골(왼쪽)과 마애불 가는 방향만 표시되어 있지만 계명산(382m)으로 가려면 곧바로 직진하면 된다. 사거리에서 조금 더 걸으면 또 하나의 사거리가 보이나 이곳에서도 곧바로 직진하면 된다.

 

 

 

산행날머리는 작전리

고개에서 북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20분 정도를 곧장 오르면 계명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계명산 구간은 길도 뚜렷하지 않을뿐더러, 수명(壽命)이 오래되지 않은 볼품없는 소나무들만 보일뿐,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하나도 없다. 매년 가을 이곳에서 열리는 ‘코스모스 축제(祝祭)’를 위해서 등산로를 정비하고 있는지 주변 나무들을 솎아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거기다가 계명산 정상에는 정상임을 알려주는 어떠한 표시(標示)도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계명산 정상에서 밋밋한 내리막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오면, 농가(農家)의 마당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밤나무단지 사이로 난 농로(農路)를 따라 걷다보면 이내 1005번 지방도(地方道 : 북천면과 곤양면을 잇는다)와 만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사량도(蛇梁島 아랫섬) 칠현산 (七絃山, 349m)

 

산행일 : ‘12. 3. 31(토)

소재지 : 경남 충무시 사량면(사량도 아랫섬)

산행코스 : 덕동항→불광사→안부→칠선대→칠현봉→망봉(마당바위)→용두봉→읍포마을→덕동항(산행시간 : 3시간)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우리나라의 산(山)을 끼고 있는 섬(島)중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 하나만 골라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슴없이 사량도를 꼽는다. 이는 사량도에 있는 지리망산이 그만큼 빼어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를 증명(證明)이라고 하려는 듯, 한 해(一年)에 대략 70만 명 정도가 사량도를 다녀간다고 한다. 그러나 사량도에는 윗섬에 있는 지리망산에 결코 뒤지지 않는 산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아랫섬에 위치한 칠현산이다. 칠현산은 섬 산행의 특성대로 얼마 오르지 않아도 바다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이고, 산행내내 지리망산의 근육질 암릉의 조망과 함께, 사방으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를 눈요기로 실컷 즐길 수 있다. 거기다 더하여 시원한 바닷바람까지 마음껏 들이 마시며 걸을 수 있으니, 최상(最上)의 산행지로 꼽는데 부족함이 없다.

 

 

칠현산에 가려면 우선 가오치에 있는 ‘사량도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이용하여 사량도 아랫섬에 있는 덕동항까지 들어가야 한다. 대전-통영간고속도로 북통영 I.C를 빠져나와 14번 국도(國道/ 고성방향)을 타고 들어가다, 도산면소재지(所在地)에서 왼편에 보이는 77번 지방도(地方道/ 바다 방향)로 바꾸어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량도 여객선터미널에 이르게 된다. 가오치여객터미널(055-647-0147)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터미널에서 오전 7시부터 2시간 간격으로 출발하는 사량호를 타고 사량도 아랫섬(덕동)으로 들어가면 된다. 뱃길로 40~50분가량 걸리며, 요금(料金)은 성인(成人)이 4천500원이다.

 

 

 

가오치항에서 덕동항까지의 뱃길은 대략 40분 정도 소요된다. 충무 근해(近海)의 특징인 짙은 청색의 바다, 그 바다에는 부표(浮漂)들이 가득하다. 부표 아래에는 아마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굴과 미더덕이 매달려 있을 것이다. 부표 근처에 보이는 작업선의 뱃머리에서 수확(收穫)에 한창인 어부들의 기쁨은 당연할 것이고...

 

 

 

산행들머리는 사량도 아랫섬에 있는 덕동항(德洞港)

사량호는 먼저 윗섬에 들른 후에 목적지인 아랫섬에 내려준다. 산행은 덕동(德洞) ‘여객선 대합실’을 정면으로 보고 왼쪽으로 난 신작로(新作路 :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게 새로 낸 길을 이르는 말)를 따라 시작한다. 진행방향에 ‘칠현산 등산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해안(海岸)길을 걸으면 왼편에 사랑도 윗섬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에 펼쳐진다. 금평항 뒤편에 보이는 옥녀봉의 우람한 근육질 암릉을 바라보면서 10분 정도 걸으면 조그만 암자가 보인다. 해수지장보살상(海水地藏菩薩像)과 작은 동자상 2개가 서 있는 불광사이다.

 

 

 

 

불광사 뒤로 난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걷는다. 왼편에 보이는 바다에는 사량도 주민(住民)들의 오랜 숙원이었다는 윗섬과 아랫섬을 연결하는 연륙교(連陸橋) 공사가 한창이다. ‘이제는 등산로 입구가 보일 때가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그러니까 암자에 7분 정도 더 걸으면 오른편에 세워진 철책이 끝나는 지점에서 산 방향으로 소로(小路)가 열려있는 것이 보인다. 입구에 ‘등산로 입구’라고 쓰인 작은 팻말이 세워져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구불구불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 오름길의 거리가 그다지 길지 않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진달래꽃에 눈길을 맞추며 잠시나마 힘듦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산길에 들어서서 10분이 조금 못되게 걸어 오르면 첫 번째 이정표(칠현봉 1.6Km/ 먹방 0.3Km/ 덕동 0.3Km)가 세워져있는 능선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오른쪽 칠현봉 방향의 능선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기저기에 진달래가 무리를 지어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다. 앞에 가는 사람이 진달래꽃을 따서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보인다. 그가 부럽다. 아름다움에 금방 동화(同化)될 수 있는 그의 순수한 동심(童心)이 부러운 것이다. 잠깐 평탄한가 싶었던 길은 다시 가팔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위로 솟구친 암릉이 나타난다. 가파른 오름길에서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봉우리 위에 올라서면 칠현봉을 향해 뻗어있는 능선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말갈기 모양으로 양쪽이 모두 날카롭게 비탈진 능선은 좌우(左右) 모두 탁 트여있다. 오른쪽 혹은 왼쪽,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절경(絶景)이다. 오른편에는 윗섬의 지리망산이 우람한 근육질(筋肉質)을 자랑하고 있고, 왼편에는 잉크빛 바다위에 조그만 섬들이 자는 듯이 누워있다.

 

 

 

 

 

경치가 좋은 곳에서 더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 ‘산행 수칙(守則)’중의 하나이다. 아름다움에 취하거나, 혹은 카메라 앵글(camera angle)을 맞추느라 발걸음을 헛디딜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구간의 조망(眺望)이 뛰어나다는 이야기이다. 아름다움에 취해버렸는지 암릉구간을 지나고 있음에도 조금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20분 정도 걸으면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곳이 보인다. 칠선대로서 옛날에 제사(祭祀)를 지내던 자리라고 한다. 주변에 보이는 흔적을 보아 무슨 푯말이 서있었던 듯하지만, 지금은 그저 상상으로 유추(類推)해 볼 수밖에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다.(어떤 이들은 이곳을 옛 사량만호진이 왜구를 감시한 봉수대라고도 한다,)

 

 

 

 

다시 2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암릉의 오르막 끄트머리에서 두 번째 이정표(칠현봉 0.5Km/ 덕동 1.4Km/ 통포 4.6Km)를 만나게 된다.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의 밧줄이 드리워진 능선을 따라 진행하면 대곡산을 거쳐 통포에 이르게 된다. 읍포로 내려가는 코스가 짧다고 생각한다면 통포 방향으로 진행(進行)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칠현봉을 지나 망봉까지는 다녀오는 것을 빼먹으면 안 될 것이다. 여기서 망봉까지의 구간(區間)이 오늘 산행에서 가장 빼어난 구간이기 때문이다.

* 이곳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지점(地點)이다. 이정표에는 칠현봉이 이곳에서 0.5Km를 더 가야한다고 표시(標示)하고 있지만, 덕동항의 산행안내도에는 이곳을 칠현봉이라고 표기(標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표시석이 이정표에서 나타내고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을 칠현봉이라고 표기한 항구의 산행안내도가 잘못된 모양이다. 그렇다면 칠현봉과 망봉은 동일한 봉우리임이 확실할 것이다.

 

 

 

 

 

 

 

지리망산(智異望山)을 이름 그대로 해석(解釋)해보면 ‘지리산을 바라보는 산’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지리산이 잘 바라보인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리망산이 지리산을 쳐다보는 조망처(眺望處)라면 칠현산은 지리망산의 험난한 암릉을 먼발치서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산이다. 악명(惡名) 높은 지리망산의 근육질 능선이 여기서는 한 폭의 잘 그린 산수화(山水畵)처럼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칠현봉 방향으로 직진해서 30분 정도 암릉에서 스릴을 느끼다보면 이내 칠현봉 정상에 오르게 된다. 정상석(頂上石)이 돌무더기 위에 슬그머니 누운 채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상은 사방(四方)이 시원스레 열리고 있다. 능선 오른쪽으로 윗섬 뿐만이 아니라 다도해의 섬들까지도 슬그머니 눈에 들어온다.(정상 이정표 : 읍포 1.4Km/ 덕동 1.9Km)

 

 

 

 

 

정상에서 10분 정도 더 걸으면 오늘 산행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조망처가 나타난다. 깎아지른 절벽(絶壁) 위가 마당바위처럼 반반하면서도 널따랗다. 바위위에 올라서면 시원스레 바다가 열리는데, 오른편으로 눈을 돌리면 우람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윗섬의 지리산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다. 이곳을 망봉(望峰)이라고 부르면 좋을 것 같지만(이곳을 망봉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이정표에는 이곳에 별다른 이름을 부여하고 있지 않다.

 

 

 

 

망봉에서 절벽(絶壁)을 왼쪽으로 돌아 내려가면 덕동으로 내려가는 탈출로(脫出路)가 있는 안부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읍포에서 덕동으로 가는 도로(道路)와 만나게 되지만, 망설임 없이 맞은 편 능선을 치고 오른다. 이름 없는 봉우리의 맞은편은 절벽, 절벽의 가파름을 이길 수 없었던지 긴 나무계단을 이용해서 아래로 내려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나무계단 아래의 안부에 또 다시 갈림길이 보인다. 이번에는 친절하게 이정표(덕동 0.7Km/ 용두봉 0.4Km/ 망봉 0.4Km)까지 설치해 놓았다.

 

 

 

 

 

‘덕동 갈림길’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용덕봉을 향해 능선을 치고 오른다. 이곳에서 용덕봉을 넘어 읍포마을을 하산지점으로 잡더라도 다른 산에 비하면 짧은 거리이기 때문이다. 용덕봉에 올라서면 다시 한 번 다도해(多島海)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용두봉 정상(이정표 : 읍포 0.6Km/ 칠현봉 0.8Km)에서 읍포마을까지는 오르막이 없는 하산길만 계속된다. 용두봉에서 너덜길이 섞인 산길을 20분 정도 내려서면 바닷가에 조그만 포구(浦口)를 끼고 있는 읍포(邑浦)마을에 이르게 된다. 너무 이른 시간에 산행을 끝마친 집사람, 어느새 주저앉아 나물을 뜯고 있다. 내일 아침 우리 집 밥상에는 봄내음이 가득한 쑥국이 올라올 것이 틀림없다. 옛날의 읍포마을은 ‘읍(邑)’이라 불릴 정도로 번성했기 때문에 읍(邑)자가 들어가는 지명(地名)이 붙었다고 한다. 아마도 칠현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농사짓기에 충분할 정도로 수량(水量)이 많았던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덕동항(原點回歸)

산행이 끝나는 읍포마을에서 덕동 여객선 대합실까지는 2㎞ 남짓 되는 거리, 2시간 간격으로 섬내 버스가 운행된다고는 하지만, 구태여 버스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산행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에 더 걷는데 무리가 없을뿐더러, 왼편에 바라보이는 윗섬의 지리망산을 바라보며 걷는 맛이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과 진달래꽃을 구경하는 재미를 보너스로 얻을 수도 있다. 진달래 꽃밭에 들어가 황홀한 아름다움에 취해 활짝 웃다보면 어느새 덕동항에 도착하게 된다. 여객선(旅客船) 운항(運航)이 2시간 간격이기 때문에, 출항시간을 맞추다보면 자연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다. 덕동항에는 4~5곳의 횟집이 있으니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고 둘러앉으면 된다. 모두 비슷한 메뉴(menu)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키조개, 소라 등 각종 조개류를 뒤섞은 모듬회가 한 접시에 3만원, 3~4명이 둘러앉아 소주 안주로 삼기에 충분한 양이다.

 

 

 

 

 

 

무이산 (武夷山, 548m)-수태산 (秀太山, 571m)-향로봉(香爐峰, 579m)

 

산행일 : ‘12. 3. 17(토)

소재지 : 경남 고성군 하일면과 하이면의 경계

산행코스 : 운흥사→천진암→낙서암→향로봉→학동재→수태재→수태산→문수암주차장→무이산→문수암→문수암주차장→약사전(산행시간 : 4시간30분)

 

함께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징 : 고성에서 다도해(多島海)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 중의 하나이다. 야트막한 산은 오르기도 쉬울뿐더러(무이산을 먼저 오를 경우) 운흥사와 문수암이라는 천년고찰(千年古刹)을 두 개나 품고 있다. 거기에다 신라 화랑들이 수련장(修練場)으로도 사용했을 정도로 정기(精氣)가 넘치는 산이다. 자녀들과 함께 하는 가족 산행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산행들머리는 문수암 주차장

남해고속도로 사천 I.C를 빠져나와 3번국도(國道/ 삼천포방향)와 33번국도(國道/ 고성방향)를 번갈아 달리다가 상리면 고인돌공원(公園)에서 1016번 지방도(地方道/ 삼천포 방향)로 바꾼 후, 이어서 1001번 지방도(하이면 방향)로 옮겨 들어가면 하이면 봉현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접어들면 오른편에 하이저수지(貯水池)라는 크고 청초한 호반(湖畔)을 가진 호수가 보인다. 겨울철은 물빛들이 눈을 부릅뜨는 계절이다. 이곳 하이저수지 또한 호면(湖面)의 물 빛깔이 시퍼렇다. 저수지를 끝날 즈음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접어든 후, 얼마간 더 들어가면 운흥사 입구 주차장(駐車場)에 도달(到達)하게 된다. 주차장 한쪽 귀퉁이에 향로봉 천진암 낙서암과 운흥사를 가리키는 이정표 서있다. 천진암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왼편 다리(불영교)를 건너도록 되어있고, 오른편으로 가면 운흥사이다.

 

 

 

차(車)에서 내리는 순간 청량(淸凉)한 바람 한 줄기가 뺨을 스치며 지나간다. 약간 서늘하지만 맵지는 않다. 아마 이런 것을 보고 봄바람이라고 부르나 보다. 망설임 없이 윈드 스토퍼(wind-stopper)를 벗어 배낭에 갈무리한다. 아침에 떠나온 서울은 가는 겨울이 앙탈을 부리면서 옷깃을 파고들었는데, 이곳은 오히려 두꺼운 외투가 거추장스러울 정도이기 때문이다. 훈훈한 남풍(南風)이 뺨을 가지르고 있다.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이다. 운흥사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아무리 시간에 쫒기는 산행일지라고 결코 천년고찰이라는 운흥사를 들러보지 않을 수는 없다. 오늘 오르게 될 향로봉은 빼어난 암릉미을 자랑하는 산으로 소문나있지만, 그렇다고 운흥사를 빼 놓고 향로봉을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無意味)하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비교적 높다란 계단을 오르면 너른 터가 나오고, 여기에 전각이 들어앉아 있다. 현재 운흥사의 전각(殿閣)은 그다지 많지 않다. 금당(金堂)인 대웅전(大雄殿)이 오른쪽에 치우친 듯이 자리하고, 그 옆에 명부전이 있다. 그리고 대웅전 왼쪽에 보광전(普光殿) 편액이 달린 인법당이 보인다. 세 전각 뒤 높은 곳에는 칠성각(七星閣)이 자리하고 있어, 마치 칠성각이 대웅전과 보광전을 양쪽으로 거느린 듯한 특이한 가람(伽藍)배치를 하고 있다.

* 운흥사(雲興寺),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1350년(고려 충정왕 2)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 때 유정(惟政)이 6천 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왜군과 싸운 진충보국(盡忠報國)의 현장이다. 문화재로는 ‘운흥사 영산회괘불탱 및 궤’(보물 제1317호)와 운흥사소장경판(보물 제184호), 그리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대웅전(제82호)와 영산전(제147호)이 있다.

 

 

 

대웅전과 명부전, 그리고 보광전 사이에 널찍한 공간이 있고, 그 공간 속에 독특한 장독대 하나가 보인다. 투박하면서 토속적(土俗的)인 것이 마치 옛 고향집 뒷마당에서 보았던 장독대와 흡사하다. 원형으로 된 장독대의 담은 납작한 돌과 황토로 층층이 쌓아 올린 후, 그 위에 기와지붕을 예쁘게 둘러 쳤다. 저 장독대는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을 자연(自然)과의 절제(節制)와 조화(調和)를 이루면서 지내왔을까? 화려함이 아니라 자연과 어우러지는 투박함으로 인해 오랜 세월을 버티어냈을 것이다. 장독대 옆에 있는 옥샘에서는 약수(藥水)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냉큼 한 모금 마셔본다. 달고 찬 것이 한마디로 감로수(甘露水)이다. 숲과 나무 그리고 흙이라는 천연(天然) 여과(濾過)시설을 거쳐 솟아오르는 샘물은, 아무리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약수터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인체(人體)에 뛰어난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을 타고 널리 알려져, 인근 사천은 물론 진주에서까지 식수(食水)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운흥사의 왼편 계곡을 따라 난 포장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면 운흥사의 부속암자(附屬庵子)인 천진암(天眞庵)을 만나게 된다. 천진암으로 올라가는 숲길에는 생명(生命)이 숨 쉰다. 숲길 사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에 반짝이는 햇살이 깃들고 숲의 교향악이 울린다. 찾는 이들에게 경외감(敬畏感)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계곡 건너편에 보이는 천진암(天眞庵)은 1692년(숙종 18) 응화선사(應化禪師)가 창건한 암자이다. 그러나 역사에 비해 그 규모는 왜소하기 짝이 없다. 전각(殿閣)이 한 채뿐인 한적한 암자(庵子)인데, 아마 법당(法堂)과 요사(寮舍 : 승려들의 부엌과 식당, 그리고 잠자고 쉬는 공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함께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인기척에 문을 열고 내다보는 보살님께 가벼운 목례(目禮)를 보낸 후, 낙서암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천진암에서 낙서암(樂西庵)까지는 꽤나 암팡지게 경사(傾斜)진 등산로이다. 대부분 바위로 된 계단길인데, 가끔 바위가 없는 곳에는 시멘트로 계단을 만들어 놓아 찾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있다. 흐르는 땀으로 목욕을 하면서 2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낙서암 앞의 쉼터에 이르게 된다. 쉼터의 수도파이프에서 약수(藥水)가 흘러나오고 있다. 약서암에서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약수(藥水)로 보시(布施)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아 샘물을 마신다. 청량(淸凉)하면서도 맛있다. 낙서도인(樂西道人)이 수도(修道)하였다고 해서 낙서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 암자의 물은 기(氣)가 강(强)하기 때문에 이 물로 술을 빚어도 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낙서암을 지나자마자 산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곧바로 향로봉으로 오르는 코스이고,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전망대(展望臺)를 경유해서 정상으로 오르게 된다. 두 길은 정상 못 미쳐 상두바위 언저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만, 비 오는 날이 아니라면 오른편의 전망대 경유코스를 선택(選擇)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코스는 암릉으로 이루어져서 주변 경관(景觀)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오른편의 통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우선 거대한 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바위들은 시루떡을 포개놓은 것처럼 층층이 쌓여 있는 퇴적암(堆積巖)이다. 산길은 거대한 암벽(巖壁)들을 우회(迂廻)하며 길을 이어간다. 너덜지대를 지나 두 벼랑사이의 협곡)峽谷)을 통과하고 나면 벼랑위로 올라서게 된다. 바위 벼랑 위는 뛰어난 전망대(展望臺)로 소문나있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짙게 끼인 해무(海霧) 때문에 조망이 트이지 않고 있다. 벼랑 끝에 앉아있는 명품(名品) 소나무를 보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아본다.

 

전망대(신선대?)

 

 

 

전망바위에서 상두바위까지는 20분 남짓. 가는 길 곳곳이 모두 뛰어난 전망대(展望臺)이다. 향로봉을 향해 걷다보면 오른편 벼랑에 로프가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향로봉 최고의 전망대로 손꼽히는 상두바위 위로 오르는 코스(course)이다. 상두바위는 책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서 납작하게 보이기도 하고, 절벽(絶壁)같이 보이기도 한다. 상두바위 위로 오르면 통영의 미륵산과 벽방산, 그리고 사량도와 우도를 안은 남해 바다가 잘 조망(眺望)된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 같이 짙은 해무(海霧)로 인해 조망이 트이지 않는 날에는, 구태여 바위 위로 오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냥 통과해 버린다.

 

 

 

상두암을 지나서 얼마간 더 진행하면 자그만 바위 계곡을 건너는 빨강색의 작은 철다리(鐵橋)를 만나게 된다. 이곳 하이면 애향회에서 자비를 들여 만들었다는 애향교(愛鄕橋)로서 제법 예쁘장하게 생겼다. 다리를 건너서 계속되는 암릉을 따라 걷다보면 또 하나의 전망대 위로 올라서게 된다. 발아래에 애향교가 내려다보이고, 다리 건너에는 상두암이 우뚝 서있다.

애향교

 

 

 

 

전망대에서 10분 남짓 더 걸으면 고성의 와룡산이라는 향로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향로봉 정상은 비교적 넓은 편이다. 한쪽 귀퉁이의 바위 위에 정상표지석('와룡산 향로봉' 대신 '향로봉'이라고만 적혀 있다)이 서있고 그 옆에 이정표(운흥사 1.8Km/ 수태산 정상 4.2Km, 상리동산 2.2Km)가 보인다. 사방이 대부분 갈대와 나무숲으로 가려진 탓에,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별로이다. 거기다가 짙은 안개로 인해 희미해져버린 사방의 풍경(風景)들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구별해 낼 수가 없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30분이 조금 더 지났다.

* 향로봉의 원래 이름은 ‘와룡산 향로봉’이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향로봉에 올라보면 와룡산이라는 표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하긴 고성군청(郡廳)의 홈페이지에서도 ‘와룡산’이라는 이름을 빼버리고 그냥 향로봉이라고만 표기하고 있다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겨우 운흥사의 간판에서 그 흔적(痕迹)을 찾아볼 수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보통 사찰을 부를 때는 사찰의 이름 앞에 절이 소재하고 있는 산의 이름을 붙인다. 운흥사(雲興寺) 앞에 와룡산(臥龍山)이라는 산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은, 뒷산인 향로봉이 원래는 와룡산이라고 불리었다는 것을 증명(證明)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 고을인 사천 땅에 100대 명산(名山)에 꼽힐 정도로 지명도가 높은 와룡산이 버젓이 버티고 있다. 그 덕분에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향로봉은, 잘난 이웃 덕분에 피해를 본 안타까운 우리네 현실이다.

 

 

 

향로봉에서 이정표가 지시(指示)하는 수태산 방향으로 100m정도 걷다가, 쉼터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후 얼마간 내려오면, 숲길이 끝나면서 오른편 암벽(巖壁)위로 시야(視野)가 활짝 열린다. 어느새 안개가 옅어졌는지 조망이 트이고 있다. 수태산과 무이산, 그리고 가슴이 후련해지는 남해 바다 풍경(風景)이 펼쳐진다. 자란만과 무수한 섬 무리가, 해무(海霧)가 옅게 깔린 바다위에 흩뿌려져 있다. 손을 뻗으면 쉽게 잡힐 것 같다. 무이산과 수태산은 손쉽게 찾아가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산이다. 바다 쪽으로 시야(視野)가 터진 곳이 많기 때문에, 자기가 싫증을 내지 않는 이상 바다는 계속해서 걷는 이와 함께 하게 된다.

 

 

 

 

‘바위들이 다 마당바위이네요.’ 집사람의 말마따나 향로봉에서 만난 바위들은 대부분 널따란 암반(巖盤)으로 되어있다. 적은 것도 수십 명은 넉넉히 둘러앉을 만큼 널따랗다. 그래서 집사람의 입에서 금방 마당바위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을 것이다. 마당바위에 올라서면 오른편의 조망이 시원스럽다.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 높고 낮은 산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해무(海霧)에 휩싸인 섬들이 몽환적(夢幻的)인 분위기를 연출(演出)해내고 있다. 만일 날씨라도 맑다면 쪽빛 남해바다와 그 사이를 오가는 배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절경(絶景)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전망바위에서 내려서서 학동재까지 가는 산길(향로봉에서 학동재까지는 2.2Km)은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능선은 계속해서 고도(高度)를 낮추어가고 있다. 가끔은 오름길도 나오지만 경사(傾斜)도 가파르지 않을뿐더러 거리까지 짧기 때문에 걷기에 부담스럽지가 않다. 걷기 좋은 산길에서 여유롭게 거닐다보면 바윗길 암반(巖盤)에 새겨진 특이한 문양(文樣)이 눈에 띈다. 공룡발자국이라고 한다. 공룡발자국 화석이 많기로 유명한 고성은 ‘공룡엑스포’라는 국제행사(國際行事)까지 열고 있을 정도이다. 그 공룡발자국이 집단(集團)으로 발견되는 곳이 상족암인데, 이곳 향로봉에서도 구경할 수 있으니 행운(幸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공룡발자국 못미처의 이정표 : 향로봉 1.8Km/ 수태산 정상 2.4Km, 상리동산 0.4Km)

공룡발자국

 

 

공룡화석지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학동재 삼거리이다(이정표 : 향로봉 2.2Km/ 동산마을 1.7Km/ 수태산 정상2.0Km, 척번정 4.8Km). 학동재는 하일면소재지(所在地)와 상리면소재지를 잇는 1016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고갯마루에서 문수암주차장으로 가는 임도(林道)가 왼편으로 나있기 때문에 삼거리로 불리는 것이다. 삼거리에서 문수암방향의 임도로 접어들자마자 수태산 정상으로 가는 산길이 열린다. 학동재에서 수태산 밑 수태재까지의 1.4Km구간은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만일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봉우리를 오르면서 헛힘을 쓰기 싫은 사람이라면, 이정표의 방향표시를 무시하고 그냥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수태재에 이르게 된다.

 

 

학동재를 출발해서 봉우리 두어 개를 넘으면 수태재에 도달하게 된다(이정표 : 향로봉 정상 3.6Km/ 수태산 정상 0.6Km, 문수암주차장(임도)). 고갯마루를 지나는 임도(林道)에는 잔자갈이 깔려있고, 임도 우측에는 헬기장이 조성(造成)되어 있다. 도로에 내려선 지점에서 문수암주차장 방향으로 100m 조금 못되게 걷다가 오른편 능선으로 접어들면 수태산 정상으로 오르게 된다. 들머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길을 찾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수태산으로 오르는 산길은 암팡진 경사(傾斜)의 오르막길이다. 아마 오늘 산행 중에서 가장 경사가 가파른 구간일 것이다.

수태재

 

 

수태재에서 가파른 바윗길을 치고 오르면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암반(巖盤)위로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시원스레 조망(眺望)이 트인다. 지나온 향로봉 능선이 눈앞에 다가와 있지만, 안타깝게도 짙은 안개 때문에 흐릿하게 보일 따름이다. 이어서 보이는 커다란 바위무더기를 지나면 드디어 수태산 정상이다. 별로 넓지 않은 공터로 된 수태산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대신에, 오래된 삼각점과 이름표를 머리에 얹고 있는 이정표(里程標)만이 외롭게 정상을 지키고 있다. 조망까지 좋지 않기 때문에 오래 머물 곳은 못된다.(이정표 : 향로봉 4.2Km/ 문수암 주차장 0.7Km, 척번정 2.9Km).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30분이 조금 더 지났다.

 

수태산 정상

 

 

정상에서 무이산으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城)터 같은 돌무더기를 만나게 되는데 주변에는 짙은 녹음을 자랑하는 측백나무가 무리지어 있다. 돌무더기 부근에서 만나게 되는 척번정 갈림길(이졍표 : 문수암 주차장 0.6Km/ 수태산 정상 45m/ 척번정 2.8Km)과, 보현사 갈림길(이정표 : 수태산 정상 0.5Km/ 문수암 1.0Km/ 보현사 2.0Km)에서 문수암 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얼마 안 있어 문수암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내려가는 길가에 무선전화(KT) 중계시설과 문짝이 다 떨어진 폐(廢) 콘크리트 초소(哨所)가 있으니 방향을 잡을 때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문수암 주차장 갈림길(이정표 : 문수암 0.5Km/ 무이산 정상 0.5Km/ 수태산 정상 0.7Km, 향로봉 정상 4.9Km)에서 시멘트포장도로를 버리고 왼편으로 접어들면 짙은 편백 숲이 찾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편백 숲에 들어서면 이마에 부딪히는 청명(淸明)한 바람과, 가슴 깊이 스며드는 맑은 공기에 진한 ‘편백 향’이 잔뜩 실려 있다. 숲의 터널엔 봄을 향해 치닫는 찬연한 햇살이 앞 다투어 스며들면서 숲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사람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로 인해 요즘 부쩍 각광을 받고 있는 편백나무, 오늘 산행은 또 하나의 웰빙(well-being)산행이 되었다. 편백나무는 항균성 물질인 피톤치드를 다량 배출해서 심폐기능을 강화시키고,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아토피 치료 등에 좋은 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편백 숲을 지나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능선을 치고 오르면 드디어 무이산 정상이다. 무이산의 꼭대기는 조그맣다. 조금 아래에는 송신탑(送信塔)까지 있어서 산만(散漫)하가까지 하다.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고, 이정표 머리끝에 매달린 ‘무이산 정상’이라고 쓰인 이름표에서 이곳이 무이산 정상임을 눈치 챈다. 문수암 너머 바다가 마치 커다란 호수(湖水)와 같은데, 해무(海霧)에 잠긴 바다에는 짙은 갈색의 섬들이 희미하게 떠다니고 있다.

* 무이산은 청량산(淸凉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청량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물고 있다는 중국(中國)의 산 이름을 빌려 온 것으로 이곳에 문수신앙(信仰)이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수려한 산세(山勢)를 자랑하여 예로부터 해동(海東)의 명승지로 알려진 곳으로, 신라 화랑들이 이곳에서 심신을 수련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무이산에 정상에서 200m쯤 내려오면 암벽 사이사이에 수많은 전각(殿閣)들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문수암이다. 기암절벽(奇巖絶壁)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암자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한려수도(閑麗水道)에 떠 있는 섬들이 마치 징검다리와 같이 이어져 있다.

* 문수암(文殊庵), 688년(신라 신문왕 8)에 창건한 사찰(寺刹)로서 의상대사와 관련된 전설(傳說)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남해 보광산(금산)으로 가던 의상이 거지를 따라 가보라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계시(啓示)에 따라 무이산 꼭대기에 올랐더니 동행(同行)한 거지가 또 다른 거지와 함께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바위벽 사이로 사라졌다고 한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자연스레 흘러내린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이 암벽에 나타나기에, 여기에다 암자(庵子)를 짓고 문수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문수암은 1959년 태풍 사라호로 건물이 붕괴(崩壞)된 뒤에 현대식(現代式)으로 새로 지은 것이다. 아무튼 청량산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무이산은 불교(佛敎)와 인연(因緣)이 많은 산인 모양이다. 청량산(淸凉山)은 중국의 불가(佛家)에서 아미산(蛾眉山), 보타산(普陀山)과 함께 3대 명산(名山)으로 꼽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문수암은 남해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 청도 운문사(雲門寺) 사리암(舍利庵)과 함께 영남의 3대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문수암의 주(主) 전각(殿閣)은 문수단(文殊壇)이다. 문수단 뒤로 기암절벽(奇巖絶壁)이 암자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의상대사가 보았다는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이 이 석벽에 천연적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보살상(菩薩像)이 내 눈에 들어오지 않음은 아직 내 수양이 부족했던지, 아니면 내 눈에 쌓인 세속(世俗)의 찌꺼기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천불전 맞은편 절벽(絶壁)위에는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정(宗正)을 역임하신 청담스님의 사리탑(舍利塔)이 세워져 있다. 서울의 도선사에 스님의 부도(浮屠)가 있고, 추모제(追慕祭)도 도선사에서 지내고 있지만, 1973년에 이 암자(庵子)에서 수도했던 인연이 있다고 해서, 여기에 또 하나의 사리탑을 세워놓은 모양이다. 참고로 문수암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배지(流配地)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었다.

 

 

문수암에서 다도해(多島海)방향을 바라보면 유연하게 솟아오른 봉우리 위에 금빛으로 빛나는 불상(佛像) 하나가 보인다. 최근에 지어졌다는 약사전(藥師殿)이다. 약사전에는 동양(東洋) 최대의 금불상(金佛像)이 특이하게도 바다가 아닌 산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바깥에서는 약사전 지붕위로 머리 부분만 보인다. 문수암은 많은 대중(大衆)이 기도하거나 정진(精進)할 만큼 넓고 크지 않은 도량(道場)이다. 약사전의 건립은 문수암의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넓고 크게 지은 것 같다. 맞은편의 계단으로 오르면 불상과 눈을 맞출 수 있는 전망대(展望臺)이다. 불상 뒤에는 또다시 다도해의 풍광(風光)이 펼쳐지는데, 안개 속에 잠겨있는 조그만 섬들이 멋진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저렇듯 아름다운 풍광(風光)이기에, 혹시라도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의 불심(佛心)이 흐트러지는 일이라도 생길까봐 바다가 아닌 산 쪽으로 고개를 돌려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약사전>

 

 

약사전에서 바라본 문수암

 

 

산행날머리는 문수암주차장

문수암에서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오면 사실상의 산행은 끝이 난다. 약사전 답사(踏査)는 오늘 산행의 팁(tip)이다. 1천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찾아온 우리들에 대한 산행대장의 배려(配慮) 덕분에 약사전을 둘러볼 수 있는 것이다. 약사전의 전망대에 서면 왼편의 산자락에 제법 큰 사찰(寺刹) 하나가 보인다. 25년 전에 세워졌다는 보현사(普賢寺)이다. 제법 큰 규모의 사찰이지만 시간도 없을뿐더러, 역사 또한 일천(日淺)하기에 답사를 포기하고 귀경(歸京)길에 오른다.

<보현사>

 

 

 

 

 

거류산 (巨流山, 571m)

 

산행일 : ‘12. 3. 1()

소재지 : 경남 고성군 거류면

산행코스 : 월치 엄홍길기념관휴게소거류산성거류산거북바위당동리 (산행시간 : 3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e목요산악회

 

특징 : 고성의 진산(鎭山)인 거류산을 보고 호사가(好事家)들은 고성의 마터호른(Materhorn)이라고도 부른다. 구름 속에 숨었다 나타났다 한다는 피라미드(pyramid)형의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는 마터호른(Materhorn, 4,477m)을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지만 글쎄다. 마터호른에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사진에서 보던 마터호른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거류산에서 보는 당동만과 그 주변 풍경(風景)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킬 정도로 자못 빼어나다 

 

 

산행들머리는 엄홍길전시관(展示館) 주차장

대진-통영고속도로 동고성 I.C를 빠져나와, 거류로(거류면사무소 방향)를 타고 고속도로를 위로 통과하는 송산육교(陸橋)’를 넘으면 곧바로 왼편에 엄홍길전시관이 보인다. 오늘 산행은 엄홍길전시관의 주차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커다란 대형버스가 수십 대가 주차하고도 남을 만큼 널따란 주차장에 내리면, 먼저 현대식(現代式)으로 지어진 커다란 전시관(展示館)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 주차장의 안쪽 귀퉁이에는 아담한 화장실이 깔끔하게 앉아있다. 목요산악회와 단체사진을 찍고 전시관으로 들어선다. ‘산다는 게 모험이라면, 내게 있어서 도전과 모험은 오직 8000m를 오르는 것이었다.’ ‘산이 거기 있어 산을 오른다.’ 그가 남긴 멋진 말들이 적혀있는 전시관에는 엄홍길의 히말라야 16좌 등정(登頂)의 기록들과, 그가 사용했던 각종 등산장비들, 그리고 히말라야 14좌를 완등(完登)12명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중에 자랑스러운 한국인은 3명으로 엄홍길과 박영석 그리고 한왕용, 요즘에는 오은선이라는 한국이 낳은 걸출한 여류산악인의 이름도 당당히 올릴 수 있으리라...

* 고성 영현면이 고향인 엄홍길씨는 히말라야 816개 봉우리를 모두 등정한 세계 최초의 산악인으로 고성군은 그의 업적을 기려 2007년 거류산 자락에 '엄홍길 전시관'을 개관했다. 참고로 엄홍길 전시관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의정부시 호원동(망월사역 근처)에도 있다고 한다. 엄홍길은 이곳 고성군 영현면 봉발리에서 태어나 3살 때까지 살았고, 3살 때에 의정부시 호원동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전시관이 두 곳에 있나보다. 아무튼 입장료가 무료(無料)인 이 전시관에는 엄 대장의 등반 장비와 의류, 그리고 각종 기록(記錄)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산행을 나선다. 산행은 주차장의 오른편 귀퉁이에서 시작된다. 깔끔하게 현대식(現代式)으로 지어진 약수(藥水)터 곁에 커다란 산행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약수터에는 커다란 물통에 물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물이 좋다고 소문이 나있기 때문에 인근(隣近)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 진주에서까지 식수로 길어다 먹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약수터 뒤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돌계단을 올라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이정표 : 거류산 정상 4.3Km). 내 머릿속에 미리 넣어온 정보(情報)에 의하면 거류산은 바위산이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본 거류산은 전형적인 흙산(肉山)이었다. 비 온 후의 산길처럼 등산로는 물기를 머금은 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산길은 초입부터 서서히 고도(高度)를 더해가는 완만(緩慢)한 오르막길이다. 길가는 꽤나 웃자란 소나무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가득하다는 소나무들이 짙은 솔향을 풍기고 있는 것이다. 마침 주어진 하산시간(4시간)이 넉넉하기까지 하니 서두를 이유가 없다. 오늘도 느림보의 미학(美學)’을 추구하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다 싶은 널따란 산길을 따라 10분 조금 넘게 걸으며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장의사를 거쳐서 정상에 이르는 순환코스이고, 곧바로 정상에 이르고 싶다면 왼편의 종주코스를 택하면 된다. 사찰(寺刹)투어(tour)가 아닌 순수한 산행을 나선 사람들은 이곳에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모두 왼편 종주코스를 택한다.(이정표 : 장의사 1.7Km, 거류산 정상 5.0Km/ 휴게소 1.5Km, 정상 3.7Km/ 엄홍길전시관 0.6Km)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곧바로 길을 만들기에는 경사(傾斜)가 너무 버거웠던지 갈지()자를 만들면서 고도(高度)를 높여가고 있다. 이때부터 내 고통이 시작된다. 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에 통증이 오는 것이다. 과천(公職)에 있을 때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과 함께한 술자리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어지다가 자정을 훌쩍 넘겨버렸고, 난 어떻게 집에 왔는지가 도무지 기억이 없다. 다만 산악회 버스 시간에 쫓겨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묵직한 허리통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산행을 포기하라는 집사람의 권유를 뿌리치고 집을 나선 대가(代價)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산행후기를 적고 있는 지금, 난 의사(醫師)의 권유에 따라 주말산행을 포기하고 책상머리에 앉아있다.

 

 

 

가파른 산길을 치고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철()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시야(視野)가 열리기 시작한다. ‘통영 안정공단(工團)’의 앞바다에는 작은 섬들이 떠다니고, 공단의 거대한 유류(油類)저장탱크들이 바둑판 위의 돌들처럼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명품(名品)소나무, 거류산을 걷다보면 거류소나무라고 쓰인 이름표를 달고 있는 소나무들이 가끔 눈에 띈다. 5, 4, 3... 소나무들은 끄트머리에 번호를 달고 있는데, 그 자태(姿態)가 자못 빼어나다. 얼핏 어느 부잣집 정원(庭園)에 있어야 마땅하다 생각될 정도로 저마다 독특한 모양으로 자라고 있었다.

 

 

 

 

 

세 번째 철()계단을 지나면 이번에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쇠()다리가 나온다. 그리 넓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다리이지만 조금 더 예쁜 모양으로 다리를 만들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조그마한 꺼리라도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라도 색다르게 포장해서 사람들이 즐겨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업무(業務) 때문에 들른지라 비록 스치듯이 지나다녔을 따름이지만, 내가 다녔던 외국(外國), 특히 관광국가(觀光國家)로 소문난 다른 나라들은 조그만 꺼리까지도 이야기가 있는 볼거리로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 참고로 오줌싸개 소년동상으로 소문난 브뤼셀(Brussels)에서는 도시의 반대편에 오줌싸개 소녀라는 또 하나의 동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많은 외국관광객(外國觀光客)들로 붐비고 있었다. 거기다 주말을 이용해 소일삼아 다녀왔던 변방의 한적(閑寂)한 도시인 브뤼헤(Brugge)하며...

 

 

 

철다리를 지나면서 부터는 좌우(左右)로 조망(眺望)이 뻥 뚫린다. 오른편 산 아래에 꼬불꼬불한 길이 보이더니 그 끄트머리에 절 하나가 신록(新綠)에 묻혀 있다. 바로 장의사(藏義寺)이다. 지금은 빈 나뭇가지가 앙상한 계절(季節)인데도, 절의 주위는 소나무들로 가득 차 신록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 장의사(藏義寺),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신라 선덕여왕 원년(632)에 원효대사가 절터를 찾아 전국을 순방하다가 거류산에 와서 명당인 이곳에 창건했다는 고찰(古刹)이다.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의 은사이신 효봉스님이 주석(駐錫)했던 사찰로서 유명하다. 사찰 뒤의 웅장하게 치솟은 기암괴석(奇巖怪石)아 울창한 수목과 잘 어우러지고, 진해만의 푸른 바다가 잘 조망되는 등 아름다운 경관(景觀)을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 효봉스님은 판사출신 스님’, ‘엿장수 스님등 다양한 애칭(愛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난 스님이 즐겨 쓰셨다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법어(法語)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말할 때는 웃자는 얘기가 되겠지만, 요즘 같이 어지러운 세태(世態)에서는 우리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화두(話頭)가 아닌지 모르겠다. 남을 헐뜯거나 비방하기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조금 더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문암산에서 거류산으로 향하는 능선은 한마디로 말해 뛰어난 조망(眺望)을 자랑한다. 능선 바위에 서면 우선 당동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색으로 빛나는 남쪽 바다가 내륙(內陸)을 향해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그 당동만이 만들어내는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조각보 같은 다랑논들이 산자락에서 바다 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누런 논이 진청색 바다와 만나면서 실낱같이 긴 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 먼 바다 쪽을 바라보면 당동만 너머로 작은 섬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아마 어의도와 가조도 그리고 칠전도 등일 것이다. 그 너머의 큰 섬은 거제도일 것이고... 당동만이 그려내고 있는 풍경화(風景畵)속에는 풍요와 평화가 고요히 깃들어 있다.

 

 

 

좌우로 펼쳐지는 멋진 풍광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새 돌탑이 있는 문암산이다. 그리 넓지 않은 봉우리에는 돌탑이 하나 서있고, 주변에는 벤치 등 휴게소를 조성해 놓았다. 돌탑의 가운데쯤에 누군가가 서툰 매직(magic)글씨로 문암산이라고 써 놓았다. 사실 25000분의 1 지형도에는 문암산이라 표기돼 있다. 문암산에서는 왼편으로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열리는데, 고요한 바다위에는 동그랗고 조그만 수많은 섬들이 떠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한 시간이 조금 못되었다.

 

 

문암산을 지나서도 능선은 조그만 봉우리들을 오르고 내리며 이어진다. 오른편에는 당동만의 전경(全景)이 각도를 달리하면서 펼쳐진다. 멀리만 보이던 거류산 정상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점점 뾰쪽하게 변하고 있다. 호사가들은 저런 형상(形象)을 보고 고성의 마터호른이라고 부르고 있나 보다. 표현이 조금은 지나친 경향은 있지만 말이다.

 

 

 

문암산 능선을 따라 한참을 걸으면 산세가 바뀌면서 조망이 닫힌 숲길이 나온다. 이곳을 내려서면 안부 삼거리인 당동고개이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당동리에 이르게 된다.(이정표 : 거류산 정상 1Km/ 당동리 2.2Km/ 휴게소 1.9Km) 이곳 안부에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새로 쌓은 지 얼마 안 되는 듯, 아직도 돌 빛이 하얀 성벽(城壁)이 정상을 향해 길게 늘어서있다. 바로 거류산성이다. 산길은 성벽의 아래를 따라 이어지다가 성벽의 위로 오른다.

* 거류산성(巨流山城 : 경남문화재자료 제90)이다. 소가야(小伽倻)가 신라나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수도(首都)였던 고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산성(山城)이라고 한다. 원래는 둘레가 1.4km였다고 전하는데, 대부분 훼손되고 지금은 600m의 성벽만 남아있다.

 

 

 

 

성벽 위로 오른 산길은 이번에는 복원(復元)이 되지 않은 성터를 오른편에 끼고 오르게 만든다. 길가 바위 벼랑위에 신기하게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오래 묵은 소나무(老松) 한그루가 바위틈을 비집으면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중국 황산에서 보았던 파석송(破石松)이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 ‘오악귀래불간산 황산귀래불간악(五嶽歸來不看山, 黃山歸來不看嶽)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다섯 명산(名山)인 오악(五嶽 : 태산, 화산, 숭산, 항산, 형산)을 보고나면 다른 산이 보이지 않고, 황산을 보고 나면 그 오악(五嶽)까지도 시시하게 보인다는 얘기이다. 황산에는 공작송(孔雀松), 단결송(團結松), 몽필생화(夢筆生花) 등 소문난 소나무들이 많은데, 그중에 파석송(破石松)이라 불리는 소나무가 있다. 커다란 바위 한 가운데를 뚫고 우뚝 솟아 있기 때문에 깨뜨릴 (), ()자를 써서 파석송(破石松)이라 부른다. 거류산에서 그 귀한 파석송을 볼 수 있음은 한마디로 행운(幸運)이라고 할 수 있다. ’바람에 날린 소나무 씨앗이 바위틈에 들어가,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리며 끈질긴 생명력(生命力)으로 운명(運命)을 개척해 나가는 과정은 우리들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그러한 교훈(敎訓)이 우리 곁에 있음은 행운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과하지 않다 할 것이다.

 

 

 

 

허물어진 성터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오른편 돌무더기 위에 쌓아놓은 작고 볼품없는 수많은 돌탑들이 보인다. 원래 돌탑이란 사람들이 자기의 염원을 담아 쌓는 것이니, 저 수많은 돌탑들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깃들어 있을까? 나 또한 돌탑위에 돌맹이 하나 얹으면서 자그만 소원 하나를 빌어본다. ‘내 사랑하는 집사람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천만번의 수많은 윤회(輪回) 속에서도 결코 헤어짐이 없는 영원한 인연(因緣)이 되게 해 주소서!’

 

 

성터를 따라 오르다가 전망(展望) 좋은 바위 두어 곳 지나면 이내 거류산 정상이다. 바위봉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산불감시탑과 감시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꼭 필요한 시설이겠지만 정상의 풍광(風光)을 훼손(毁損)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 정상표지석을 세운이가 지리산을 벤치마킹(bench-marking)했는지 표지석 뒤에 적힌 '고성군민의 기상 이곳에서 시작되다.‘라는 문구(文句)가 어쩐지 지리산 천왕봉에서 보았던 韓國人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는 문구와 많이 닮아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정도가 지났다.(이정표 : 엄홍길전시관 4.3Km/ 감서리 2.8Km)

* 거류산(巨流山)에는 이름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說話)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아주 먼 옛날 한 처녀가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다가, 쿵쿵거리는 소리에 밖을 내다봤더니, 커다란 산 하나가 성큼성큼 바다 쪽으로 걸어가고 있더란다. 혼비백산한 처녀가 저기 산이 걸어간다!’라고 세 번을 외쳤더니, 머쓱해진 산이 그 자리에 냉큼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단다. 그런 이유로 '걸아산', '걸어산'이라고 부르던 것이 오랜 세월동안 부침을 거듭하다가 거류산으로 고착(固着)하였다고 전해진다.

 

 

 

정상에 올라서면 지금까지 보다 남해(南海)바다가 더 가까이 다가와 있고, 육지에 둘러싸인 당동만은 바다가 아니고, 아예 호수(湖水)의 느낌을 주고 있다. 그 형상은 마치 한반도(韓半島)를 닮고 있는데, 다만 포항 어림의 토끼 꼬리가 너무 불쑥 튀어난 게 흠()이라면 흠이다.

 

 

 

정상표지석 뒤편에 남해바다의 조망(眺望)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안내도의 뒤편에 안내도에 그려진 대로 당동만이 그림같이 펼쳐지는데, 당동만 방향의 왼편으로 거대한 바위봉우리 두 개가 보인다. 머리와 몸통부위로 나누어진 두 봉우리가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인 거북바위이다. 하산은 거북바위 방향으로 내려서면 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이내 조그만 암봉 앞에 서게 된다. 바로 거북바위의 머리 부분이다. 봉우리 위로 올라가기 전에 왼편으로 우회로가 나 있으나 구태여 우회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봉우리 너머 두 봉우리 사이의 협곡(峽谷)으로 내려서는 바윗길에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그다지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북이의 머리 부분에서 철계단을 밟고 내려서면 거북이의 목 부분인 협곡(峽谷) 사거리이다. 협곡사거리에 내려서면 꼭대기에 거북바위의 사진과 유래가 적혀있는 안내판을 달고 있는 특이한 이정표(거류산 정상 0.9Km/ 감서리 1.9Km)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왼편은 정상으로 가는 우회로(迂廻路), 오른편으로 가면 거북이 몸통부분을 오르지 않고 당동리로 우회(迂廻)하게 된다. 물론 맞은편에 보이는 철()계단을 밟고 오르면 거북바위의 몸통부분이다.

* 거북바위는 바다를 나온 거북이가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모양새란다. 자손이 귀한 집안의 아낙네가 바위에 오르면 자손이 번성하고, 수명도 연장된다는 전설(傳說)이 전해져 내려온다.

 

 

 

거북의 몸통부분에 올라 아기자기한 암릉을 잠시 걸으면 널따란 암반(巖盤)이 나타난다. 바로 덕석바위이다. 덕석이란 멍석을 달리 부르는 말로서, 곡식을 널어 말리는 데 쓰이는 짚을 엮어 만든 널따란 자리이다. 암반이 마치 덕석처럼 널따랗다고 해서 그리 부르는 모양이다. 거북바위의 벼랑에 서면 에메랄드 빛 당동만과 남해가 발아래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육지의 사이에 낀 바다가 그림같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덕석바위에서 암릉 돌아 내려서면 삼거리이다. 이정표에 방금 내려온 방향으로만 전망대(덕석바위)라는 방향표시(方向標示)가 되어있으나 오른편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오르면 아까 지나왔던 협곡(峽谷)이 나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산길은 거북바위의 벼랑 중간을 째면서 흐르다가, 이어서 산의 사면(斜面)을 따르면서 길고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고도(高度)를 낮출지를 모르고 산의 사면(斜面)을 째면서 이어지던 길을 따라 10분 쯤 걸으면 별다른 특징이 없는 곳에서 길은 사거리로 바뀐다(이정표 : 거북바위(경유) 1.1Km/ 거류산 정상 1.3Km/ 엄홍길 기념관 3.6Km/ 당동리 1.8Km).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성벽(城壁)을 거쳐 정상으로 가게 되고, 곧바로 진행하면 엄홍길전시관에 이르게 된다. 당동만이 있는 방향으로 잠시 내려서면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널따란 임도(林道)가 나온다.

 

 

 

하산길은 임도를 가로지르며 계곡으로 내려서게 되어있지만, 잠깐 임도를 따라 걸어 오른다. 30m쯤 되는 지점에 샘터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약수(藥水)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는 호사(豪奢)를 누려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테니까 말이다. 샘물은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원하면서도 달았다. 그러나 앞서 내려가다가 되돌아 올라온 집사람으로부터는 꽤나 심한 지청구를 들었다. 하긴 갑자기 남편이 보이지 않은데도 놀라지 않을 아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산길은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계곡길 답지 않게 유연하게 이어지던 길이 갑자기 온통 칡넝쿨로 우거진 너덜길로 변하기도 하고, 요즘 부쩍 인기 있는 편백나무 숲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다가 진행방향이 툭 트이면서 당동만이 내다보인다. 당동만 바다에는 부표(浮漂)들이 가득하다. 부표 아래에는 아마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굴과 미더덕이 매달려 있을 것이다. 그걸 바라보는 어부의 가슴은 당연히 뿌듯해질 것이고... 길가가 밭으로 바뀐다. 갑자기 집사람이 배낭을 내리더니 호미를 꺼내든다. 밭두렁에 주저앉아 부지런히 놀리는 그녀의 손끝을 따라 냉이와 달래가 딸려 올라오고 있다. 덕분에 이 글을 쓰고 있는 토요일 아침에도 우리 집 밥상에는 김밥에 올릴 달래장과 냉이 된장국이 먹음직스럽게 올라와 있다. 밥상에는 때이른 봄기운이 피어나고, 입안에서는 봄내음이 가득 차오른다. 이게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재미, 아니 산을 찾는 재미가 아닐까?

* 여기는 따뜻한 남쪽나라, 산과 들에는 봄기운이 이미 완연宛然한데, 우리가 내려오는 길가에도 봄의 전령(傳令)인 들꽃들이 하얀 꽃잎들을 화사하게 펼쳐놓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산하(山河)는 온통 개나리와 진달래, 그리고 온갖 봄꽃들로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당동리 노인회관

나물케기 삼매경(三昧境)에 푹 빠져있다가 주어진 하산 시간에 맞춰 발걸음을 옮긴다. 길가에 폐가(廢家)들이 간혹 눈에 띄기도 하지만, 폐가들이 널리다시피 많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생기(生氣)가 남아있는 모습이다. 야자수 나무 등 남국(南國)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정원수(庭園樹)들을 구경하며 걷다보면 이내 당동리 노인회관(老人會館)에 닿게 된다. 회관 앞에는 수백 년은 먹었음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호(保護)를 받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무학산 (舞鶴山, 761m)

 

산행일 : ‘12. 1. 14(토)

소재지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완월동․월영동과 마산회원구 내서읍의 경계

산행코스 : 만날고개(145.7m)대곡산(516m)안개약수터(641m)무학산(761.4m)시루봉마재고개 (산행시간 : 3시간 30분)

함께한 산악회 : 송암산악회

 

특징 : 마치 학(鶴)이 춤추듯 날개를 펴고 막 나는 자세와 흡사하다 해서 무학산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옛 이름은 두척산이다. 밋밋한 흙산(肉山)인 주봉과 서마지기를 중심으로 주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뻗고 있다. 능선(稜線)을 중심으로 서쪽 사면(斜面)은 경사(傾斜)가 급한 반면, 산세(山勢)가 약한 동쪽 사면은 마산일원을 부드럽게 포용하고 있다. 인근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며, 특히 봄철이면 외지(外地)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진달래 군락지로 명성이 높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만날고개

구마고속도로 내서 I.C를 빠져나와 5번국도(國道/ 마산市內 방향)를 따라 달리다가, 현동교차로에서 2번 국도(밤밭고개로/ 시내방향)로 옮겨 조금만 더 진행하면 오른편에 신월초등학교가 보인다. 이곳에서 왼편 무학로를 따라 들어서면 잠시 후에 왼편에 만날고개로 오르는 도로의 입구에 이르게 되고, 왼편으로 조금만 오르면 이내 주차장(駐車場)이다. 주차장에서 내리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팽나무이다. 1982년에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된 수령이 400년도 넘는 나무인데, ‘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이 나무 앞에서 기도를 드렸더니 그 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신령(神靈)스런 얘기까지 전해진 탓에 이 나무에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만날고개는 만남·놀이·축제를 테마로 한 공원으로 산뜻하게 조성(造成)되어 있다. 고갯마루로 오르는 길가에는 그네와 공연장이 보이고, 만날고개의 상징인 모녀(母女)가 부둥켜안고 있는 조형물도 보인다. 물론 이 고장에서 배출한 천상병시인의 시비(詩碑)도 빼 놓을 수 없다. 천시인의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인 ‘새’가 새겨져 있다.

* 산행이 시작되는 만날고개(해발 180m)는 모녀(母女) 상봉의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고개이다. 고려 말 마산포 바닷가에 가난한 양반(李氏)가문의 편모슬하 세 딸과 어머니에 얽힌 이야기다. 맏딸은 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고개 너머에 있는 윤진사댁에 돈을 받고 시집을 갔다고 한다. 신랑이 반신불수(半身不隨)에다 말도 못하는데도 이를 개의치 않았나 보다. 3년 만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후에도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리던 맏딸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친정 소식이라도 들을까 해서 음력 8월17일 살그머니 만날고개로 올라갔다고 한다. 때마침 친정어머니도 같은 생각에서 고개로 나왔다가 서로 만나게 돼 모녀는 얼싸안고 눈물을 쏟았다는 이야기다. 해마다 음력 8월 17일이 되면 그간 소식이 끊겨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숱한 사연들을 가지고 이곳에 모인다. 마산에서는 1983년부터 해마다 추석 즈음에 이곳에서 민속축제로 '만날제(祭)'를 열고 있다.

 

 

 

 

만날고개 제단(祭壇)의 오른편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서 100m정도 올라가면 산행안내도가 서있는 주능선에 이르게 되고, 무학산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이정표 : 대곡산 정상 1.0Km/ 무학산 정상 3.6Km)

 

 

 

만날고개에서 대곡산 정상(517m)까지는 쉼 없는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길가의 나무들은 참나무 일색, 잠깐 편백나무 숲이 보이더니 또다시 참나무들이 주종을 이루어 버린다. 나뭇잎이 다 져버리고 빈 가지만 남은 오른편 숲 사이로 마산 앞바다가 얼핏 내려다보인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남짓 오르면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이고, 그 뒤에 대곡산 정상이 있다.

 

 

 

 

 

정상표지석과 돌무더기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곡산은 주변의 나무들로 인해 조망(眺望)이 트이지도 않을뿐더러, 가슴에 담을 만한 특별한 볼거리도 제공하지 못한다. 대곡산 정상은 낙남정맥과 만나는 지점으로서, 무학산 정상에서 이어오던 낙남정맥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쌀개고개로 연결된다.(이정표 : 무학산 정상 2.6Km/ 안개약수터 2.0Km/ 쌀개고개)

 

 

 

대곡산에서 무학산으로 진행하자마자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전망대(展望臺)가 보인다. 운동기구와 의자를 갖춘 쉼터를 겸하고 있는 전망대에 서면 마산 앞바다가 눈앞에 다가온다. 왼편에 보이는 도심(都心)은 창원, 그리고 발밑과 오른편이 마산시가지이다. 통합창원시의 나머지 한축인 진해구는 창원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산줄기 너머에 있을 것이다.

 

 

 

 

대곡산을 지나면서 길은 부드러워진다. 고운 황토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기에 모처럼 여유를 부려본다. 주어진 산행시간이 넉넉하니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침 오른편의 조망까지도 시원스럽게 열리고 있다. 쾌청(快晴)한 겨울날씨 탓에 마산만의 물빛이 파랗게 빛나고, 그 위에서 떠도는 자그마한 섬들까지도 선명하게 튀어나오고 있다.

 

 

 

능선을 걷다보면 오른편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마산만(灣)이다. 바다는 호수(湖水)처럼 잔잔하고, 그 위에 떠다니는 철선(鐵船)을 낭만으로 안고 있다. 만약에 가슴에서 만들어내는 감동을 화폭(畵幅)에 옮겨낼 수만 있다면, 아마도 화선지(畫宣紙) 위에는 잔잔한 물결이 넘실대는 마산포구에는 돛단배들이 하늬바람 따라 출렁이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정적인 정경이 있기에 많은 문인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을 것이다. 이은상, 이원수, 천상병, 반야월, 방학기, 김해랑, 강제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예술가(藝術家)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문득 길이 둘로 나뉘고 있다. 이정표가 없는 삼거리지만 눈어림으로 이곳이 안개약수터로 가는 길과 나뉘는 삼거리임을 알아낸다. 망설임 끝에 안개약수터를 포기하고 오른편 능선으로 치고 오른다. 조금 험하겠지만 조망(眺望)이 좋은 코스이기 때문이다.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마산시내의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곡산에서 무학산까지 오르락내리락 하며 이어지는 능선은 결코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밋밋한 평지(平地)보다는 굴곡이 있는 산길이 걷기에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이 구간은 유난히도 전망(展望) 좋은 곳이 많다. 길을 가다가 혹시라도 시야(視野)가 열린다싶으면 놓치지 말고 들어가 보는 것이 좋다. 대부분 앞이 시원스럽게 뚫린 바위들이 보이고, 넓은 바위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산만이 시원스럽기 때문이다. 도시(都市)와 잘 어울리는 바다에 떠있는 큰 배가 마치 장난감처럼 보인다.

 

 

 

 

 

학봉갈림길에서 난간까지 갖춘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면 드디어 무학산 정상이다. 무학산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흙으로 이루어진 능선위에다 커다란 바위를 얹어 놓은 형상이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는 깃대 아래에 정상표지석이 서 있고, 그 아래는 널따란 헬기장이다.

* 무학산 정상표지석 뒷면에는 ‘삼월정신의 발원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비석과 옆에서 일년 내내 펄럭이고 있는 태극기는 무학산에 대한 마산시민들의 강한 자부심이 아닐까한다. 알다시피 마산은 1960년대 이승만 정권에 대항했던 ‘4.19혁명’의 촉매제(觸媒劑) 역할을 했던 ‘3.15의거’와 1979년의 ‘부마항쟁(釜馬抗爭)’의 발생지로서 민주화의 성지(聖地)이다. 마산시민들은 그동안 보여줬던 자유·민주·정의를 사랑하는 시민정신이 마산을 감싸 안고 있는 무학산의 기개(氣槪)와 정기(精氣)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산시민들은 저렇게 무학산을 사랑하며 아끼고 있는 것이다.

 

 

 

정상은 자잘한 암릉으로 된 민둥산인 탓에 360도의 조망(眺望)을 선사한다. 마산·창원·진해 시가지(市街地)가 한눈에 들어오고, 시가지 앞의 바다 풍경이 마음을 탁 틔워준다. 나머지 방향은 온통 산들이 차지하고 있다. 남쪽을 대하면 무학산을 통과해 천주산, 정병산을 밟은 낙남정맥이 바다로 향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여항산과 서북산, 광려산 등이 펼쳐져 있다.(이정표 : 중리 5.8Km/ 마녀중 3.9Km, 서원곡 1.9Km/ 만날고개 3.6Km) 무학산은 우선 웅장하고 부드러운 산세(山勢)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발아래에 펼쳐진 평온한 도시와 바다, 보석처럼 올망졸망 떠 있는 크고 작은 섬 등 아름다운 풍경(風景)을 만끽할 수 있다. 만일 여기에다 꽃이라도 덮어 놓는 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닐까? 그렇단다.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위해서인지 봄이 되면 이곳은 진달래꽃이 산을 온통 둘러싸버린다고 한다. 무학산이 붉은 학(紅鶴)으로 변하는 것이다.

 

 

 

 

 

정상에서 학봉방향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365개의 건강계단 아래에 널따란 공터가 보인다. 바로 서마지기이다. 지명(地名)인 마지기는 밭 한 마지기 할 때의 그 마지기인데, 학교 운동장처럼 넓은 공터다. 예전엔 등산객(登山客)들이 이곳에서 축구를 했다고 하니, 그 넓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의 등산 안내도에는 등산로가 표시된 춤추는 학 한 마리가 날고 있다. 무학산을 춤을 추고 있는 학(鶴)으로 그려볼 때, 정상은 학의 중심부(中心部)인 몸통이며, 동쪽의 바위봉우리인 학봉이 정수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리고 정상 바로 아래의 서마지기에서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왼쪽 날개, 그렇다면 오른쪽 날개는 당연히 우리가 올라왔던 대곡산과 만날고개로 이어지는 능선(稜線)일 것이다.

 

 

무학산 정상에서 중리방향으로 내려서는 능선은 온통 진달래나무들이 점령(占領)하고 있다. 봄이면 붉게 타오를 능선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느긋하게 내려선다. 아직도 시간은 여유롭기 때문이다. 이곳 무학산은 부근에 위치한 천주산과 더불어 진달래 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봄이면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인파(人波)들로 홍역을 치른다고 한다. 붉게 핀 진달래들이 온 산을 뒤덮는 장관(壯觀)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찾아든 사람들로 인해서이다.

 

 

 

중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시루봉가는 이정표(里程標 : 시루바위 0.8Km)가 보이기에 들어선다. 산행대장이 한번쯤은 들러봐야 할 곳이라는 안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바위를 구경할 일이 별로 없는 산에서 드물게 만나게 되는 바위 봉우리이기 때문에 권했을 것이다. 시루봉은 시루떡 판처럼 생겼다하여 이름 지어졌다는데, 철(鐵)계단을 올라서면 왜 시루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가 실감이 난다. 대패로 민 듯이 반반한 바위가 널따랗게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뭘 보려고 왔죠?’ 오는 길에 미끄러져 무릎이 깨진 집사람의 질문에 할 말을 잃는다. 실망한 표정이 역역하다. 무릎까지 깨져가며 찾은 시루봉은 가슴에 담아갈만한 특별함은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루봉에서 바라본 무학산 정상

 

 

시루봉에서 되돌아 나오는 길은 아까 왔던 산사면 길을 버리고, 능선을 따라 봉우리 위로 오른다. 삼거리에서 중리방향인 낙남정맥은 왼편으로 흐르고 있다. 능선은 흙산 특유의 부드러움 외에는 별다른 특징은 보여주지 못한다. 공원처럼 잘 가꾸어 놓은 산길을 따라 얼마쯤 내려오면 삼거리가 보이고 마재고개는 오른편 능선으로 내려서면 된다.(이정표 : 마재고개 1.2Km/ 중리입구 2.3Km/ 정상 3.5Km)

 

 

 

 

 

산행날머리는 마재고개

삼거리에서 시작되는 나머지 구간도 그저 그렇고 그런 산길이 이어진다. 솔향이 짙던 숲길은 하산지점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참나무로 바뀌어 가고 있다. 집사람과 내일 떠날 덕유삼봉산의 산행 얘기를 나누다보니 진행방향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리고 이내 널따란 차도(車道)가 보인다. 등산로 초입에는 ‘도시종주 반달투어형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6개 코스를 표시해 놓았다.